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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의 전통농업 - 저수지 관개

 

 

 

밀림 깊숙이 잠든 공학 기술 유적

 

1848년 어느 아침, 영국의 역사가로서 작가 겸 여행가이기도 한 제임스 에머슨 테넨트James Emerson Tennent 경卿은 횃불을 들고서 스리랑카 북부의 밀림지대를 여행하고 있었다. 그는 깊은 밀림 안에는 고대의 경이적인 공학 구축물이 잠들어 있다고 들었다. 원시림은 인간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여, 가시나무가 무성하고 길은 좁고 가팔라 일행은 16㎞나 되는 길을 거의 말에서 내려 걸어야 했다. 그리고 가까스로 목적지에 도착한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제방의 유적이었다.

 

제임스 에머슨 테넨트 경.

 

 

파다위야 저수지(Padawiya Tank)로 알려진 이 경이적인 공학 구축물은 1500년 이상 전의 것이다. 일행은 거대한 저수지와 제방을 말을 타고 가는 데에만 2시간이나 걸렸다.

 

“호수는 20~22㎞ 넓이일 것이다. 좁은 골짜기도 18㎞이다. 거대한 제방이 수복되어 적어도 상류 24㎞까지는 물이 고여 있었을 것이다. 제방 자체가 거대한 사업으로 길이는 약 18㎞. 제방의 높이는 20m 이상이고, 끝에서도 9m, 바닥에서는 60m의 너비이다.”

 

파다위야 저수지는 1~12세기에 걸쳐 구축된 몇 천 개의 저수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가장 큰 인공 호수 파락-라마 호수(Parak-rama Sea)는 24평방킬로미터인데, 그것 말고도 포루투칼어의 ‘tanque’와 연관되어 ‘저수지’라고 불리는 몇 천 개의 인공 호수와 제방의 연결망이 마을마다 물을 보내고자 설계되어 연결되었다. 구조와 설계는 놀라울 만큼 고도의 것이기에, 테넨트 경은 초보적인 도구만을 써서 단단한 화강암을 깎았을 그 일을 절찬했다.

 

스리랑카의 인공 호수.

 

 

온 국토에 묻힌 관개망

 

벼를 기르는 데에는 물이 꼭 필요한데, 스리랑카 국토의 2/3는 대부분 비가 내리지 않는 건조 지대이다. 이런 기후 조건 때문에 고대 신할라Sinhalese 왕조의 왕들은 관개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몬순으로 내리는 비를 붙들기 위한 제방과 운하를 건설했다. 어떤 한 왕은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에는 약간의 빗물도 소중해,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서 바다로 흘러가게 하면 안 된다.”

 

각 왕의 업적은 기록으로 남았다. 바사바Vasabha(65~109)는 12개의 저수지와 12개의 운하를 건설했고, 마하세나Mahasena(274~302)는 1890㏊에 이르는 미네리Minneri 호수를 포함해 16개의 저수지를 건설했다. 다투세나Dhatusena의 치세(460~478)에는 너비 12m, 길이 1900㎞의 운하가 왕도王都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 급수를 했다. 수리 사업에 가장 열을 올린 사람은 파라크라마 바후Parakrama Bahu 1세(1153~1186)로, 770개의 저수지와 534개의 운하를 건설하고, 2300개의 저수지와 3621개의 운하를 수복했다. 풍족한 작물의 수확과 그것이 가져오는 부富는 사원에 집중되고, 꽃밭에는 분수가, 도시에는 궁전이 건축되었다.

 

미네리 호수의 수문.

 

스리랑카의 옛 왕도 아누라다푸라의 현재 지도. 

 

파라크라마 바후 1세의 부조상. 

 

테넨트 경에게 감명을 준 저수지의 대부분은 현재 완전히 진흙으로 차 있다. 하지만 수많은 소규모 저수지는 지금도 건재하고, 일부는 침니가 차 있지만 건조 지대 관개농업의 기반이 되고 있다. 스리랑카 쌀의 약 40%는 지금도 3개월 동안만 비가 집중되는 건조 지대에서 생산되고 있는데, 그 대부분이 기원전 300년부터 서기 1200년에 걸쳐서 건설된 고대의 관개 체계에 의존하고 있다. 저수지의 32%는 쿠루네갈라Kurunegala, 23%는 아누라다푸라 지역에 있는데, 그 밀도는 놀라울 정도로 건조 지대의 약 4만㎞ 이내에 약 3만 개의 저수지가 구축되어 있다. 대략 1정방킬로미터마다 저수지가 있다는 계산으로, 약 33만 호의 농가가 이러한 저수지의 혜택을 받으며 마을을 이루어 살며 약 14,8000㏊의 농사땅을 관개하고 있다.

 

 

현지 주민이 자발적으로 유지 관리

 

그럼 대부분의 저수지는 왜 흙에 묻혀 방기되어 버렸을까? 비트포겔Wittfogel은 대규모이건 소규모이건, 저수지는 중앙집권적인 국가관료제도에 의해 구축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수지가 방기된 까닭도 왕조의 붕괴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케임브리지대학의 인류학 교수이자 스리랑카 관개농업의 일인자이기도 한 에드문드 리치Edmund Leach 경은 거대한 저수지는 관료 제도의 업적일지도 모르지만, 마을에 있는 소규모 저수지는 그렇지 않다고 반론했다. 경이 이렇게 생각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거대 저수지가 소농이 관개를 할 목적으로 구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연 거대 저수지는 거대한 두 옛 도시 아누라다푸라와 그 뒤에 천도한 폴로나루와Pollonaruwa에서 소비되는 작물을 생산하는 근교농업의 관개에 쓰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직접적인 수익은 농민이 아니라 주로 분수 등 장식용의 급수에 쓰이고 있었다. 폴로나루와를 1164~1197년에 걸쳐 통치한 파라크라마 바후 1세는 101곳의 사원과 불상을 건설하고, 수많은 저수지도 건설했다. 그런데 리치 경은 말한다.

 

“그것들은 실용적인 구조물이 아니라 기념비였다.”

 

경에 따르면, 이러한 저수지는 왕의 권력을 과시하고자 구축된 것이지 식량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둘째는 이와도 겹치는 것이지만, 거대 저수지의 목적이 체질적으로 장식용이며 스리랑카의 농촌은 이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앙 정권이 혼란스러워지고 거대 저수지가 황폐해진 시기에도 농촌의 삶은 아무 문제없이 적절하게 지속되었다. 각 마을에는 마을 사람들 스스로 유지·관리하는 소규모 관개 체계가 있었다.”

 

그리고 경은 또한 관개 사업을 행하려는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도가 존재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고대 스리랑카의 사회 체계는 중세 유럽과 다른 세계의 봉건시대와는 꽤 달랐다. 역사학의 연구를 통해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도에 의해서 공사가 이루어졌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저수지를 유지·관리하는 작업의 대부분은 라자카리야Rajakariya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라자카리야란 모든 마을 사람이 농한기의 40일을 왕을 위하여 무료로 일하던 풍습이다. 나중에 영국은 유쾌하지 않은 봉건체제의 유물이라며 이 제도를 폐지했는데, 이 제도는 나라가 강제한 것도 아니고 마을 사람들이 나라에 고용된 것도 아닌, 그 노동은 어디까지나 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캔디 왕조의 궁전 밖에 인공 호수를 구축하려던 계획을 마을 사람들이 거부한 일도 있다. 그것은 장식용 전시품은 라자카리야의 노무에 의해서 구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은 이렇게 썼다.

 

“그러기는커녕 왕의 연대기를 보면, 선선히 마을의 저수지를 잘 수리해주는 군주가 칭찬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작업이 국가 규모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고대부터 마을 저수지의 수리는 일반 서민의 일이었다.”

 

마을의 저수지의 유지·관리는 마을 사람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대규모 수복과 새로운 저수지를 건설하는 데에는 타밀족 카스트제도의 육체노동자 쿨란카티Kulankatti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들도 국가의 고용인이 아닌 마을 사람들과 직접 계약을 맺어 일하고, 관개 체계는 지역사회의 손으로 운영되어 왔다.

 

 

마을의 생활과 일체였던 관개

 

전통적인 스리랑카의 농촌을 특징지어 왔던 것은 사원, 불사리탑(다고바dagoba), 저수지(웨와wewa), 논(케타ketha)이었다. 고대 스리랑카에서 벼농사는 직업이 아닌 여타의 사회활동과 밀접하게 연결된 생존 방식이었다. 김매기, 쟁기질, 모내기, 수확의 각 단계에는 노래, 음악, 춤의 특별한 의식이 따르고, 지금도 남아 있는 전통 춤은 이러한 의식에 기원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수확, 쟁기질 등을 상징하는 율동 같은 노동에 바탕을 둔다. 캔디언 댄싱Kandyan dancing은 수확한 뒤 마을에서 실행한 코호마 칸카리야Kohomha Kankariya라는 의식이 기원이다. 중요한 것은 고비야goviya, 곧 마을의 스님이었다. 중요한 농사일은 스님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쟁기질하기 좋은 날을 골라 사원의 종이 울리면 마을 사람 모두가 들에 나갔다. 스님은 논에 들어가 쟁기질하는 물소에 맞추어 노래했다. 오Ohoooo~ 암마amma, 오~ 아뽀appo 오~, ‘오’는 바다의 소리이고, 암마는 어머니, 아뽀는 아버지이다. 성가는 모든 고비야가 불렀다. 그리고 수도 근교에서 이루어진 쟁기질 의식에는 왕이 참가했다.

 

스리랑카의 쟁기질(위)과 캔디언 댄싱(아래) 

 

 

 

어느 소농 사회에서라도 마찬가지이듯 농업은 가족의 일이며, 아이들을 포함해 가족의 각 구성원에게는 특정한 일이 있었다. 논에서 원숭이를 쫓고 소와 물소를 돌보며 논에서 아버지를 거드는 것은 남자아이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땔감을 모으는 일과 식사 준비를 돕고, 소와 물소의 젖을 짜는 일을 돕는 것은 여자아이들이었다. 여자아이는 어머니나 이모와 함께 이불을 만들었다. 어머니는 아궁이를 따뜻하게 유지하고, 난로가 집의 중심이었다. 이 때문에 스리랑카에서는 어머니의 지위가 가장 높았다. 마을에서는 서로 돕는 ‘아타마attama’와 ‘카이야kaiya’란 전통이 있어, 언제라도 이웃에게 도움을 구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농촌 지역사회는 친척으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어른들이 논밭에서 일하거나 관개시설의 유지로 바쁠 때에는 한 사람의 여성이 모든 아이를 돌보았다.

 

더하여 스리랑카의 전통 사회는 다른 어느 소농 사회에서도 그러했듯이, 수확량을 최대로 하기보다도 위험을 최소로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가뭄, 홍수, 병해충 등의 위험을 벗어나고자 농민들은 다양한 품종을 심었다.

 

 

자연과 조화된 평등한 농경사회

 

상류의 저수지에서 흘러나온 물은 하류의 저수지에 모여 논으로 흘러가고, 서로 이어져 있던 물의 흐름이 거대한 저수지와 운하로 연결되어 나아갔다. 저수지와 농업용수와 논은 하나로 어우러지고, 또 대부분이 천 년 이상 존재해 온 것부터 인간의 구축물로 특정된 것들은 복잡할 만큼 지역의 환경과 자연 생태계와 일체가 되었다. 논, 거주지 등의 거시적인 토지이용에만 주의를 기울인 것이 아니고, 상류의 침전지(고다 왈라goda wala), 보호 제방(이스웨티야iswetiya), 상류의 바람막이(가스곰마나gasgommana), 하류의 바람막이(카타카두와(kattakaduwa) 등의 미시적인 토지이용도 생태계의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하류의 바람막이숲, 카타카두와

. 

 

저수지의 물은 농사 기간을 늘리고, 건기에 벼를 재배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저수지가 가져온 장점은 그것만이 아니다. 농작물에 영향을 미치는 쾌적하고 시원한 기후를 유지하고, 농업 생물다양성도 보전해 왔다. 사실 저수지는 습지 생물다양성의 가장 풍족한 원천의 하나이다. 저수지 둘레의 동식물은 다양하고, 건기에는 저수지의 물이 소나 야생 동물의 유일한 수원이 되었다. 주요 저수지로 들어가기 전에 진흙을 퇴적하려고 설계된 모래막이 저수지(포타 웨티예pota wetiye)와 한쪽에 물을 대는 기간에 사용하는 ‘쌍둥이 저수지’ 등 다양한 형태의 저수지가 만들어졌는데, 그 모두가 관개에 쓰려는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마을 위쪽의 산에 저수지를 만드는 전통도 있었는데, 그 저수지는 야생 동물이 물을 구하러 논에 내려와 벼를 망치는 것을 막고자 그들에게 물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또 지금은 비판되고 있는 부대밭 방식의 농업 체나chena를 위하여 급수하는 산의 저수지조차 있었다.

 

하지만 부대밭 농업을 행한다고 그들이 숲을 파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는커녕 고대 스리랑카의 문명은 숲 보호에 열심이었다. 16세기 해적 로버트 녹스Robert Knox는 배가 난파되어 캔디 왕의 포로로 15년을 지냈는데, 녹스에 따르면 숲의 파괴를 막은 것은 법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이었다고 한다. 신할라족은 선조가 스리랑카에 침입했을 때 선주민의 정령이 고지대의 열대 밀림으로 도망쳐 들어갔다고 믿어 숲에는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진실이 무엇이든, 고지대의 숲이 보호된 것은 건조 지대의 농업이 확실히 지속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천 년 전에도 섬 가운데에 치솟은 산들이 몬순을 가로막아, 숲은 그 비를 머금고 하천의 흐름을 지속하여 왔다.

 

이처럼 전통 지역사회는 흙, 물, 자연 생태계를 보전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식량 안전 보장은 그 문화의 틀 안에 짜여 들어가 있었다. 벼농사는 10~3월까지의 마하maha와 4~9월까지의 얄라yala라고 2번 이루어졌는데, 수자원을 보전하고자 지하수를 농업용수로 쓰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마을의 집들은 근접하여 세워져 최소한의 땅만 낭비되도록 했다. 또 주요한 농사땅에 항구적인 건축물을 세우는 것을 금하는 풍습도 있었다. 벽돌을 만들 권리가 있었던 것은 왕과 성직자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흙으로 지은 작은 집에서 살았다. 하지만 벽돌과 흙집은 모두 흙으로 돌아가, 그 결과 유기물을 농사땅에 제공했다. 그 관습은 건전한 생태학의 원칙에 따라 성립되어 있었다.

 

건조 지대의 많은 마을에는 마을의 저수지와 똑같은 이름이 붙여졌는데, 이처럼 저수지에 따른 관개 체계가 건조 지대의 사회조직과 전통문화의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저수지를 통해 이룬 각 마을의 자립은 독특한 분산 사회 체제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자원을 평등하게 나누고, 공평한 소유권, 이것이 바로 고대 스리랑카 문화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이고, 그것이 평화가 이어지는 농촌 사회의 확립으로 이어졌다.

 

왕조는 번영하든지 아니면 쇠퇴하지만, 마을과 그 저수지는 몇 천 년이나 쭉 이어졌다. 리치 경은 마을과 그 관개 체계의 우수한 지속성을 지적한다.

 

“마을과 관개 저수지가 한 번 건설되면, 건조 지대에서도 관개 지역을 일정한 규모로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마을의 인구 변동은 매우 적었다.”

 

그리고 다른 전통 사회와 마찬가지로, 신할라족도 ‘태양과 달이 거기에 있는 한’이란 비문을 남기고 그들의 기관을 영구적이라고 보아 왔다.

 

 

근대화에 따른 지역사회 파괴

 

하지만 영국인이 건너온 뒤, 그들은 처음에는 커피, 나중에는 홍차 플랜테이션 농장을 개간하려고 숲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독립할 때 스리랑카 국토의 40%는 아직 숲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목재를 팔아 외화를 벌고자 숲 전체가 파괴되어, 지금은 국토의 겨우 4~5%밖에 안 된다. 숲을 파괴한 결과는 비참했다. 토양침식의 영향이 모든 유역에서 일어났다.

 

식민지 정부가 벌인 대규모 관개 프로젝트도 건조 지대에서 대폭적인 숲의 파괴로 이어졌다. 식물도, 비옥한 들도 사라지고, 마을의 생태계는 파괴되어 가뭄의 위험성이 증가했다. 가장 심각한 영향을 받은 것은 마을의 지역사회였는데, 지역사회가 파괴된 결과도 결정적이었다. 리치 경은 이렇게 지적한다.

 

“중앙집권화된 관개 기관이 마을 저수지의 유지와 사용에 간섭할 권한을 가진 것은 1860년 이후이다.”

 

영국 식민지 당국이 가장 먼저 행한 것은 1860년대에 관개 기관을 세우고, 마을 사람들에게서 저수지를 유지하는 책무를 빼앗아 중앙의 관개 기관에 위임한 일이다. 그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서로 돕는 전통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많은 주요 농사일, 특히 김매기는 이제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스리랑카에서 전통적인 관개를 연구한 거의 모든 연구자가 지역사회의 연관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전문적인 일이 돈에 좌우되지 않고 이루어졌던 것은 상호 권리와 의무에 따라 엮인 지역사회의 유대(cohesive community)가 있었기 때문이다. 테넨트 경은 말한다.

 

“저수지의 파괴와 최종적인 방기는 사회 부패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특히 그것을 오래도록 유지해 온 지역사회가 해체된 데 원인이 있다. 그 결과 붕괴의 과정이 타국에서는 완만히 진행된 것과는 달리 실론에서는 갑자기 일어났다.”

 

이 때문에 현재 건조 지대의 거의 모든 관개 체계는 일찍이 고대에 존재하던 것보다 훨씬 조잡해졌다. 1874년의 C. 라이트Wright의 “실론 견문(Glimpses of Ceylon)”에 따르면, 300~400품종의 벼가 재배되고 있었고, 에드워드 골드스미스가 1882년 현지의 농민을 만났을 때에도 그 농민이 젊었을 무렵에는 보통 280종 이상의 벼를 심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15품종밖에 남지 않았다.

 

지역사회의 변화에 맞춰 행정당국도 치밀한 유지·관리를 행하지 않았다. 관개 기관에게 소규모 저수지는 과거의 쓸모없는 유산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의 경제 비용·편익 분석에 기초하면 야생 동물의 이익을 위하여 여분의 저수지를 유지하고, 하물며 수리하는 일은 정당화될 수 없다. 전통적인 관개는 경제 편익을 위하여 희생되었다.

 

고대의 체계는 근대 제방과는 달리 지역의 수리학적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용수로는 등고선을 따르고, 물의 흐름을 늦추며, 물의 손실도 적었다. 하지만 20세기의 대규모 관개 개발 프로젝트는 고대의 저수지 체계가 달성한 기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라 고대의 저수지 체계를 무시하거나 파괴했다.

 

 

 

전통문화의 재평가

 

스리랑카의 1인당 쌀 소비량은 현재 약 150㎏/년이고, 수입 쌀은 10% 미만일 뿐이다. 쌀을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일은 나라의 발전과 빈곤·기아를 줄이는 데 빠뜨릴 수 없는 일이다. 건조 지역의 농촌에 만연한 빈곤을 줄이는 데에도 안정된 용수의 확보가 특히 중요하며, 건조 지대에 팽개쳐진 고대의 저수지는 말라리아 기생충의 발생원이 되고 있다. 마을의 저수지를 회복하는 일은 말라리아의 소멸을 위해서도 빠뜨릴 수 없다. 이를 위해 스리랑카 정부는 2004년 마을에 있는 1000개의 저수지를 수복하는 프로젝트를 수립했다.

관개 계획의 전통은 지금도 스리랑카에 존속하고 있다. 19세기의 탐험가 테넨트 경이 다시 발견한 저수지의 대부분이 회복되고, 마하웰리 계획(Mahaweli Diversion Scheme) 등 새로운 사업도 진행되고 있다. 그것은 건조 지대의 몇 십만㏊의 땅을 관개하고, 나라의 발전력을 배로 늘리고 있다. 불도저와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고대의 왕들이 착수한 스리랑카의 포괄적인 관개 체계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written by 吉田太郞, translated by 김서방

 

 

인용문헌

 (1) Wewe Irrigation System (Sri Lanka) GIAHS, FAO. 

 (2) Edward Goldsmith and Nicholas Hildyard,Traditional irrigation in the dry zone of Sri Lanka, The Social and Environmental Effects of Large Dams, 1984.

 (3) Mr Ghaz, A Scheme That Holds Water: An Irrigation System That Goes Back to Ancient Times, March 4, 2010.

 (4) Manik Sandrasagra, Life in the Village: on the Origins of Lanka, Serendib magazine Vol. 10 No. 1 Jan-Feb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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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곡이 인기는 인기인가 봅니다.

정말 다양한 잡곡을 팔고 있더군요.

 

 

메밀도 벗겨서 쌀로 팔고...

 

검은보리쌀도 있더군요.

 

 

수수와 조는 전부터 있던 거지만 검정쌀도 현미로 팔고,

 

 

통밀에 귀리까지 팝니다.

 

 

마지막으로 콩나물콩도 두 종류를 팔고 있네요.

 

모두 함양농협에서 생산한 것인데, 한 번 함양에 가볼 만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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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우 무렵 종이컵에 모종을 만들어 6월 5일 옮겨심은 밭벼 산도입니다.

벌써 누렇게 익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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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20일, 이틀 전 다 돌아보지 못한 연풍면을 끝내러 온 날. 7시 40분 화성 봉담을 출발해 영동고속도로 덕평휴게소에서 잠시 요기를 하고, 괴산으로 나와 수안보를 거쳐 연풍면으로 접어드니 10시 20분이다. 오늘은 연풍면의 새재 3관문으로 넘어가는 고사리부터 시작이다. 이곳은 휴양림과 수련원, 호텔, 민박집 등 관광객을 상대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고사리를 뒤지고 다니는 수집단. 이 동네는 농사짓는 사람이 없고 아랫동네로 내려가라는 말만 들었다.

 

 

이날 어제에 이어 무시무시한 폭염이 수집단을 괴롭혔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온몸에선 땀이 줄줄줄...

 

 

쉬는 김에 모두 함께 단체사진이나 한 장 찍었다. 언젠가 써 먹어도 써 먹겠지.

 

 

다시 차를 타고 아랫동네인 수옥정 마을로 향했다. 이곳은 그 유명한 수옥폭포가 있는 곳이다. 귀농본부에는 수옥이란 이름을 지닌 사람들이 꽤 있는데 다들 이 동네로 귀농하면 되겠다. 하하.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시원한 수옥폭포. 

 

 

이 좋은 곳에 이름을 새기는 일은 옛사람이나 요즘 사람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수옥폭포가 있는 마을에는 한지 체험 공예장이 자리하고 있다. 그 안에 들어가 한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내친 김에 닥나무를 보러 신풍한지를 찾아가기로 했다. 

 

 

수옥 마을의 감나무. 대략 70여 년 정도 된 걸로 추정. 아래는 그 열매.

 

 

 

 

장에서 사다 심으셨다는 중국오이.

 

 

더덕꽃도 한 장 남긴다.

 

 

수옥 마을을 한참 돌아다니다가 한 집에서 할머니를 발견. 얼른 좇아가서 이것저것 여쭙고, 완두를 얻어서 나왔다.

 

 

 

이제 차는 신풍으로 내달린다. 한지 공장으로 출발! 6~7분을 달리니 마을이 나온다. 장사가 될 지 궁금한 모텔 2동이 함께 서 있는 걸로 보아서, 옛날 지금과 같은 새로운 길이 뚫리기 전에는 꽤 많은 사람이 이 길로 오갔을 것이라 짐작이 된다. 신풍 마을 안에서 길을 헤메고 헤메다 한지 공장을 찾았다. 대표 분은 군청에 일이 있어 나갔고 직원 분만 있어 말씀을 드리고 닥나무 밭으로 안내를 부탁했다. 

 

한지의 원료. 닥나무 껍질을 잘 이겨서 만든다. 

 

종이를 뜨는 곳. 방법은 이미 다들 아시리라 ...

 

 

한지의 원료 닥나무 껍질에 닥풀을 섞고 거기에 물을 부은 재료. 

 

 

직원 분과 대화 중인 안완식 박사님. 그 뒤쪽으로 "한장의 종이에도 정성을..."이란 문구가 보인다. 

 

 

떠 놓은 한지. 이게 마르면 그 귀하다는 한지가 된다. 

 

 

한지에서 정말 중요한 접착제 역할을 하는 닥풀. 뿌리를 캐서 잘 씻은 뒤 그걸 날로 이기면 접착 물질이 나온다고 한다. 

 

 

공장을 나와 한참을 달리는 연풍면 소재지가 있는 부근에 닥나무 밭이 마련되어 있었다. 닥나무는 농약 성분이 닿으면 죽는 특성이 있어 농약은 줄 수 없다고. 그래서 닥나무 밭은 두둑에는 비닐이, 고랑에는 부직포가 깔려 있었다. 거름은 밑거름으로 퇴비만 준다고 한다. 이렇게 닥나무를 한 번 심으면 십 몇 년은 계속 베어서 쓸 수 있단다. 잎은 먹고, 껍질은 한지로, 뿌리는 미백 효과가 좋아 화장품으로,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고 자랑이다. 그래서 괴산군에서도 관심 집중! 

 

 

 

 

다시 신풍 마을로 돌아와 동네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한지 공장만 보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 얼마나 날이 더운지 아이들은 마을 광장에 모여 함께 멱을 감으러 가려고 했다. 어찌나 부럽던지... 연풍면은 전반적으로 물이 참 좋은 곳이다. 개울도 깨끗하고, 샘도 많고... 그 시원한 물 속으로 그냥 풍덩 뛰어들고 싶은 충동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아이들이 건강히 살아 있는 마을. 이런 마을을 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신풍 마을을 돌고 돌다가 장연에서 보았던 백오이를 다시 발견했다. 주인 할머니께 물으니 충주에서 씨를 얻어오셨다고 한다. 아삭아삭하니 맛있다고...

 

  

 

 

 

다시 동네를 돌다가 지붕에서 커다란 호박 하나를 발견. 집 안으로 찾아가니 마침 에어컨을 틀고 쉬고 계셨다. 우리 일행을 반기며 잠시 들어와 쉬라고 하시길래 실례를 무릅쓰고 들어가서 땀을 식혔다. 아이고 되다.

 

 지붕 위에서 자라고 있어 더 이상 깨끗하게 찍을 수 없었다.

 

호박을 본 집 옆에서 발견한 댕댕이덩굴. 사진에 보이는 열매는 약으로 쓰고, 덩굴은 질겨서 망태 같은 농기구를 만들어 썼다. 

 

 

닥나무를 보고 신풍 마을로 돌아오기 전, 율전이란 마을에 들러 동네를 뒤졌다. 율전은 밤나무밭이란 뜻일 텐데 밤나무보다 감나무가 훨씬 많았다.

 

율전 마을에서 본 감나무와 그 열매(아래). 주인을 만나지는 못해 다음 기회에 다시 찾기로 했다. 

 

 

 

신풍 마을과 그 바로 옆에 있는 절골까지 돌아보니 시간은 벌써 2시를 훌쩍 넘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는데 토종 수집 조사에서는 일하느라 점심 끼니도 제때 먹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어쩌랴 점심을 먹자고 다시 여기를 떴다가 돌아오면 그만큼 시간이 지체되니...

 

점심을 먹고 나오며... 하늘은 멋지다만 어찌나 뜨겁던지...

 

 

그래도 이제 연풍면의 3/5은 끝냈다. 두 골짜기만 더 돌면 연풍면을 다 볼 수 있다. 너무 더워 점심을 먹고 잠시 쉰 다음 3시가 넘어서 다시 수집 조사에 나섰다.

 

이번에 찾아간 곳은 은티 마을. 희양산이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곳으로, 이곳을 넘어가면 환경보호로 유명한 봉암사가 나온다. 또 그곳은 귀농자가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가운데 바위가 보이는 산이 희양산. 그 오른쪽 골로 넘어가 예전에는 가은장을 보러 다녔다고 한다. 

 

 

안철환 선생님이 급한 일정이 있어 먼저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연풍면으로 다시 나간 사이 동네를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다니다 발견한 부추. 할머니께서 씨를 받아주신다고 했다. 예약해 놓았으니 나중에 찾으러 가야지.

 

 

동네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집. 하지만 할머니 혼자 사시면서 돈을 벌러 한 번씩 나갔다 오신다고 하여 토종은 없었다. 집은 정말 옛날에 지은 것이었다.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집의 부엌.

 

 

이곳저곳을 기웃기웃 거렸지만 별 다른 수확은 없었다. 그러다 어느 집에서 강낭콩을 발견. 그런데 주인이 없어 할 수 없이 채집에 나섰다.

 

주인이 비운 집에서 발견한 강낭콩. 나중에 찾아와서 더 조사해야 할 일이 생겼다. 아래는 이 강낭콩의 생물.

 

 

 

은티 마을 주막집. 이곳에서 희양산으로 오르는 사람이 꽤 많은가 보다.

 

 

은티 마을을 나와 바로 아래에 있는 마을을 찾아갔다. 마보라는 마을이다. 하지만 축사만 잔뜩이고 별 특이한 것은 발견하지 못했다.

 

이제 마지막 골짜기 하나가 남았다. 서둘러 그리로 향했다. 중부내륙고속도로가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는 논길을 지나 화성, 매바위를 찾아갔다. 하지만 이곳도 마보와 마찬가지로 축사가 대부분, 일부는 과수, 나머지는 논뿐이다.

 

 

콩밭에 서 있는 허수아비가 재밌어 한 장 찍었다. 아래는 비탈밭에서 고추를 따서 지게로 나르고 있는 마을 어르신. 

 

 

 

 

평지에서는 별 걸 찾을 수 없으니 골짜기 깊숙히 들어갈 수밖에. 마지막 골짜기의 가장 깊숙한 곳인 안말까지 그대로 달려가려는데, 기름이 다 떨어졌다. 할 수 없이 연풍면으로 나가 기름을 넣으려고 주유소를 찾았으나 면 안에는 없어 주유소를 찾아 한참을 달려갔다. 다시 기름을 채우고 돌아오는 길에 낭비하는 시간이 아까울 뿐.

 

다시 안말까지 달려갔다. 지도에는 안말 위로도 마을이 더 있었으나 사람들에게 물으니 그 위로는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단다. 안말의 가장 위에 자리하고 있는 집에 도착했다. 이 집,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안말의 가장 깊숙히 자리한 집에 도착하자마자 재피를 말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집 구석구석에 자라고 있는 작물들이 심상치 않다. 

 

 

마침 주인 할머니께서는 산에 있는 들깨밭에서 일하고 계셨다. 할머니를 찾아 한참을 올라가 겨우 사정해서 모시고 내려왔다. "할머니"라고 크게 부른 것이 주효했다. 자신의 손자가 와서 자기를 부르나 해서 얼른 돌아나오셨다고... 16에 이곳으로 시집을 와 이제 여든이 다 되어가는 채임순 할머니는 이곳에서의 삶을 이렇게 정의하신다. "산지옥이라요." 더 놀라운 것은 안말로 이사온 것은 10년 남짓 정도고, 원래는 저 위에 있었다는 힌디미에 사셨단다. 힌디미는 지도에는 힌드뫼라고도 나온다. 할머니 말에 따르면 이 옆으로 유명한 백화산이 있어서 힌디미라고 했단다. 아마 해가 잘 드는 곳이라 밝은 언덕, 밝은 곳이란 뜻으로 힌디미, 힌드뫼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할머니의 말씀에서도 이곳 안말보다 힌디미가 훨씬 농토도 넓고 농사짓기 좋았다고 한다. 단 한 가지, 차가 들어오지 않아서 그게 힘들었다고... 여건이 허락한다면 할머니의 삶은 다시 한 번 찾아가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힌디미에 살았던, 그리고 지금도 살고 있는 마지막 증인인 셈이다.  

 

안말에서 바라본 힌디미. 장정의 잰걸음으로 걸어가면 20~30분쯤 걸린다고 한다. 정확한 위치는 가운데 골짜기의 왼쪽으로 나무들이 약간 갈색으로 변한 그곳 너머라고 하신다. 거기까지 갔다와 보면 재밌겠다. 지금 아들이 찾아와 옛날 살던 곳에 가서 재피를 따고 있다고...

 

 

할머니 댁에서 발견한 토종 오이. 맛이 무척 달다. 

 

 

 

 

산이 깊어 이곳에서는 자연히 씨를 받아서 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장에 나갈 일은 생필품을 구하거나 수확한 농작물을 매상하러 갈 때뿐. 아니면 제사를 준비하느라 흰쌀을 구하러 나갈 때 말고는 그냥 여기서 주구장창 땅만 파고 살았어야 했을 게다. 그래서 할머니 입에서는 자연스레 여기가 산지옥이란 말이 나왔겠지. 사진은 할머니가 상시 씨를 받아 심는다는 근대.

 

 

안말에 있는 다른 2~3가구를 더 찾아가 보았다. 하지만 첫 번째 집만큼 특별한 것은 쉬이 찾아볼 수 없었다.

 

안말의 다른 집에서 기르는 옥수수밭. 옥수수 하나만 자라는 법이 없다. 꼭 사이에 무언가 자라고 있어도 있다. 

 

 

 

몸이 아픈 할아버지와 함께 들어와 살다가 할아버지는 먼저 떠났지만 할머니는 그냥 이곳에 남았다고... 그 사연 많은 이야기를 처음부터 듣자면 하루 낮밤으로도 부족할 게다.

 

 

산에서 캐다가 옮겨심었다는 취에는 꽃이 피었다. 할머니 인생에도 활짝 꽃이 피었던 때가 있었을까?

 

 

안말에서 나와 내려오면서 들른 두 마을에서는 이렇다 할 수확이 없다. 그냥 확인했다는 데 만족한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연풍이 슬픈 것일까? 갑자기 폭우가 쏟아져 눈앞이 보이지 않는다. 연풍을 벗어나니 신기하게도 언제 비가 왔나 싶게 말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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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18일. 아침 7시 30분에 나가면 된다고 생각하며 밥을 먹다가 걸려온 전화에 화들짝 놀라 얼른 나갔다. 7시에는 만나야 시간 안에 갈 수 있던 걸 착각하고 있었다.

8시 넘어 괴산으로 출발. 먼저 지난번에 찾은 청참외를 확안하고자 상리로 향했다.

마을 입구에서 마을 이름과 유래가 적힌 비석을 촬영.

 

 

 

 

윗시몇의 시몇은 수미터라는 말이 변형된 것이라는데, 도무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동네 어르신의 말씀에 따르면, 수밑, 숨밑과 비슷한 발음을 하시던데 혹시 숲밑은 아닐지?

 

 

 

 

마을 유래비에서 바라본 윗시몇 마을 전경. 마을 유래비 내용을 보면 어느 도인이 좋은 수맥을 찾아주어 마음 편히 논농사를 지을 수 있어 끼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과연 그 유래비처럼 이 마을은 물이 좋다.

 

 

지난번 찾은 참외로 연출한 사진. 꽃과 잎과 줄기와 열매까지 모두 한자리에 나온다.

 

 

우리에게 줄 참외를 찾고 계신 이종윤 어르신. 

 

 

지난번에 본 대한이란 벼의 교잡종. 빨간 까락이 보인다. 연풍 지역의 논에서는 이러한 교잡종을 흔하게 볼 수 있다. 너무 많아서 지저분해 보일 정도다. 볍씨 갱신할 때가 다 되어서 그런가?

 

 

산에서 끊임없이 찬물이 흘러 내려온다.  

 

 

'대한'이란 벼를 심은 논. 찬물이 흘러 들어오기에 뒷도구(물을 돌려서 수온을 올린 다음 논에 물을 대기 위한 도랑)를 쳤다.

 

 

논 바로 옆에 있는 우물. '우물 안에 내가 있소. 하늘이 들어 있소.'

 

 

다음으로 드디어 연풍면으로 넘어갔다. 처음 찾은 곳은 갈길 마을. 하지만 별 다른 것은 찾지 못하고 다음 금대 마을로 넘어갔다.

 

 

 

 

갈길 마을과 금대 마을. 이 두 마을을 합하여 갈금리라고 한다. 칡 갈 자에 가야금 금 자. 그걸 그대로 풀어 칡덩굴이 가야금의 현과 같다고 하는 해석도 있다. 헌데 우리나라에 '갈'이란 지명이 여기저기 있는 걸 보아서는, '갈'이란 고어의 뜻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닐까? 

 

 

금대 마을의 모습. 다리 난간은 참깨 말리는 곳으로 전환되었다.  

 

 

금대 마을 입구에 자리한 수수밭. 온갖 종류가 뒤섞여 있는 좋은 학습장이라고 한다. 키가 큰 놈, 작은 놈부터 이삭의 모양도 제각각이다.

 

 

 

 

키 작은 수수와 키 큰 수수의 차이. 

 

 

금대 마을에 들어가 정자에서 쉬고 계시던 분들께 정보를 얻어 18대째 살고 있다는 집을 찾았다. 

 

 

고추 말리기가 한창이다.

 

 

이 집에 사시는 할머니께서는 지난해까지 옛날 자주감자를 심다가 매상도 안 해주고 힘도 들어 그만 없애셨단다. 지난해에만 왔어도 괴산 토종 자주감자를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대신 완두와 엇그루팥을 얻었다. 엇그루팥은 그루팥의 일종인데, 알이 좀 더 굵은 느낌이다. 이것 말고 잔그루팥이라고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진짜 오래된 것인데 그것도 사라졌다고. 잔그루팥은 말 그대로 자잘하다는 뜻이겠지.

 

 

동네에서 얻어다 심는다는 완두콩.

 

 

엇그루팥.

 

 

엇그루팥이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려고 밭을 찾아 나섰다.  

 

 

밭으로 가다가 죽어 있는 새끼 뱀을 보았다. 개미의 먹이가 되고 있는 중. 자연은 감정이 없다. 그저 돌고 도는 순환의 고리일 뿐. 

 

 

호랑나비 한 마리가 나무에 날아와 쉬고 있다. 

 

 

엇그루팥을 찾다가 이상한 동부를 발견했다. 이 동부의 주인을 찾으려 동네를 뒤진 결과 다시 그 18대째 살고 있다는 집으로 돌아갔다. 역시 토종의 법칙을 확인할 수 있다. 있는 집에는 이것저것 많이 있다. 

 

 

강가 귀퉁이 땅에는 부추도 계속 심어 오고 있다. 이 부추도 상시 심는 것. 거름을 많이 하면 넓적해진다고 한다.

 

 

 

 

금대 마을을 나와 적석리 쪽으로 달렸다.

 

 

후동을 찾아가려고 잠시 차를 세워 더위를 피하고 계신 어르신 두 분께 길을 물었다. 이 소나무는 200년 가량되었다. 

 

 

 

 

원래는 길 쪽으로도 가지가 뻗었으나, 썩어 부러져 가지를 쳤다고. 이 나무를 살리려 주사도 많이 줬단다.

 

 

후동과 양지 마을에서는 별 다른 것을 찾지 못했다. 사과 과수원만 가득. 연풍이 사과로 유명한 곳임을 실감했다.

다음은 양지 마을 건너편에 있는 음지 마을로 향했다. 음지 마을은 마을 위로 34번 국도가 지나가고 있다. 지나다니는 차가 많지 않아서 다행이다. 교통량이 많은 곳이라면 모두들 떠났을 것이다.

이 마을의 위쪽에는 사방댐이 있는데, 군에서 등산로를 개발하면서 외지 사람들이 와서 마을의 식수가 되는 그곳에서 목욕까지 하는 파렴치한 행동을 한다고 불만이 대단했다. 모르는 곳에 가서 함부로 서리하지 말지어다. 함부로 행동하지 말지어다. 그곳도 모두 사람이 살고 있는 곳, 그곳만의 법이 있다.

 

 

음지 마을에서 멋진 댑싸리 하나를 발견. 

 

 

간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내린 큰비로 개울물이 무섭게 불었다. 

 

 

길이 뚫리며 생긴 변화의 하나. 외지인이 산에 들어와 함부로 산나물과 약초를 훔쳐간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오래된 나무 전신주 하나가...

 

 

음지 마을에서 나와 종산 마을로 향했다. 34번 도로를 타고 적석터널을 지나 종산 마을로.

 

 

종산 마을의 어느 집. 장독대며 집 안이 정갈하다. 담장 위에서 자라는 호박이 정겨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할머니 혼자 사시며 집을 깔끔히 유지하고 계셨다.

 

 

할머니 댁의 마늘. 연풍 지역의 마늘은 유난히 알이 잘다. 추운 겨울과 관련이 있을까? 

 

 

할머니 댁에서 키 작은 자주빛 강낭콩을 발견했다. 색이 참 곱다.

 

 

종산 마을에서 발견한 대파. 내력과 유래를 찾고자 했으나 집에 주인이 없었다. 들에 일하러 가신 듯... 마당에서 주운 1만 원은 다음에 오면 깜짝선물로 찾아주겠다며 안완식 박사님이 처마 쪽에 몰래 숨겨 놓으셨다.

 

 

가지를 많이 치는 종산 마을의 대파. 

 

 

개량종 대파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슈퍼에 가서 사는 대파와 비교해 보시길... 

 

 

종산 마을에서 본 4륜 구동 트럭 세렉스. 대학 시절 강원도로 농활을 가면 흔하게 보던 트럭이다. 이곳도 산간 지대라 이런 트럭이 필요하다.

 

 

종산 마을까지 보고 연풍면 쪽으로 향하다가 2시가 넘어 늦은 점심을 먹었다.

 

 

주인 아저씨의 취미 생활로 맛뿐이 아닌 재미를 더하고 있는 연풍가든. 우리집 개의 이름이 연풍이인데, 이곳은 어디를 가든 연풍이다. 심지어 연풍 성지까지 있다.

 

 

점심을 먹고 유하리로 향했다. 버드나무와 관련된 한자말이다. 아마 이 골짜기를 흐르는 내의 주변에 버드나무가 많았나 보다. 1914년 일제는 우리나라의 지명을 자신들이 알아볼 수 있는 한자로 전면 제정한다. 그 이후 우리의 지명은 한자에 오염이 되어 버렸다. 오전에 갔던 후동後洞만 해도 그렇다. 마을 안쪽 깊숙한 곳에 있다는 뜻으로 부르던 이름을 한자로 바꾸면서 후동이라 했을 것이다.

유하리 오수물에서는 별 다른 것을 찾지 못했다. 대신 그 위쪽에 자리한 내응 마을에서는 무언가 나왔다.

 

 

내응 마을에서 찾아간 집. 앞마당에서 유월두를 말리고 있었다. 마침 할머니가 그늘에 앉아 계시길래 다가가 말을 걸었다. 

 

 

 

 

할머니 댁 안의 예전 외양간 같아 보이는 곳에는 할머니가 달아 놓은 씨앗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솜씨 좋은 실력으로 지은 듯한 이 외양간은 이제 사용하지 않는다. 할아버지께서는 치매가 와 아무 일도 하지 못하신다고...

 

 

 

할머니 댁에서 얻은 흰동부. 첫날 괴산 장에서 샀던 그 동부와 비슷하다. 여기도 있구만 장터 할머니도 참...

 

 

검은깨. 알이 참 굵다.

 

 

밭에서 자라고 있는 흰동부를 찾고 싶어 길을 나섰다. 흰동부는 늦게 심을수록 좋다고 한다. 6~7월이 적당한 때. 일찍 심으면 덩굴이 너무 많이 져서 좋지 않다고. 앞으로 동부는 조금 늦게 심자. 덩굴이 뻗는 것일수록 그게 좋겠다.

 

 

내응 마을의 댑싸리. 쪼로록 함께 자라니 참 예쁘다.  

 

 

내응 마을 새마을 창고. '새벽 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 나도 일어나.' 어디선가 이런 노래가 흘러나올 듯한 분위기. 이곳이 바로 유럽 식으로 말하자면 마을 광장이다. 마을회관도 보건소도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동네 할머니들도 이곳에 모여 더위를 피하고 있었다. 바로 여기서 흰동부를 심으신 분과 검은깨를 심으신 분을 찾았다.

 

 

할머니를 모시고 밭을 찾아왔다. 바로 눈앞으로는 중부내륙고소도로가 뻗어 있다. 인간의 위대한 역사다! 

 

 

안완식 박사님은 꽃이 핀 모습을 찾고자 분주하시고, 할머니는 동부의 순을 질러주느라 바쁘시다. 농사일이 다 그런가 보다. 할머니는 연신 눈에 보이는 풀을 잡고, 순을 지르고... 일이 눈에 보이자 손이 잠시도 쉬지 않으신다. 

 

 

흰동부가 자라고 있는 모습. 아쉽게도 분홍빛 꽃은 아직 피지 않았다. 

 

 

논두렁에 심은 흰동부. 덩굴이 그리 심하게 뻗지 않으니 이렇게 키울 수 있는 거겠지.

 

 

할머니를 다시 광장으로 모셔다 드리고 다른 할머니와 함께 검은깨를 찾아나섰다. 

 

 

아직 수확하지 않은 검은깨. 앞으로 며칠 뒤면 베어 말려야 하겠다. 검은깨는 키가 2m 가까이 자란다. 가지도 좀 치는 편이고. 

 

 

검은깨의 꽃. 검은깨라고 꽃까지 검지는 않았다. 자주감자는 자주꽃, 흰감자는 흰꽃이란 노랫말과는 다르다. 

 

 

내응 마을의 안쪽으로 더 들어가자 이런 광경이 나왔다. 

 

옥수수와 참깨를 말리고 있었는데, 참깨 중 하나가 갈색이 나길래 얼른 들어가 보았다. 헍데 할머니가 계시지 않아 찾으러 가려고 차를 돌리는 사이에 도랑에 앞바퀴 하나가 빠졌다. 이런, 다행히 차가 망가지거나 사람이 다치지는 않았지만 어걸 어쩐다... 할 수 없이 힘을 합쳐 차를 들어올리기로 했다. 하나, 둘, 셋! 영차! 다행이다. 작은 차라서 그런가 쉽게 들 수 있었다. 

 

 

할머니 댁 마당에는 도꼬마리가 하나 자라고 있다. 보통 도꼬마리는 키가 작은데 이건 키가 엄청 크다. 이것도 토종의 하나라고. 며느리가 처음 시집을 왔을 때 머리에 피부병이 생겨 고생했는데, 창포처럼 이 잎을 뜯어 삶은 다음 감았더니 싹 나았다고. 머리에 비듬이나 진물이 나는 등 문제가 생기신 분은 도꼬마리잎을 삶아 그 물로 머리를 감아 보시라. 우리네 민간요법이 효능이 있을지도 모른다. 또 차조기는 파뿌리와 대추 등을 함께 넣고 푹 고아 마시면 감기에 효과가 좋다고 한다.

 

 

할머니 집의 대문 앞에는 백일홍이 자라고 있다. 안완식 박사님께서는 이것도 개량종이 아닌 독특한 것이라고 하신다. 할머니도 이게 참 예뻐서 동네는 물론 멀리 시집을 간 딸에게도 씨를 줬다고 하신다.

 

 

 

 

내응 마을을 나와 송오와 방화 마을을 뒤졌다. 날씨가 저기압이라 그런지 무척 힘이 든다. 방화 마을을 뒤지고는 잠시 숨도 돌릴 겸 자리에 앉아 쉬었다.

다시 기운을 차리고 차에 올라 쇠잿말로 향했다.

 

 

쇠잿말 길가의 어느 집에서 자라고 있는 황기. 진딧물에 개미들이 찾아와 단물을 빨고 있다. 

 

 

꽃마다 흔하게 찾아오는 곤충이 따로 있다고 한다. 황기에는 뒤엉벌이 그런 관계인가 보다. 

 

 

황기를 심으신 분을 찾다가 한 동네 할머니를 따라 그 집을 찾아갔다. 할머니는 친절하게 이것저것 꺼내서 보여주신다. 

 

 

괴산의 특징은 집에 이런 상자텃밭을 많이 키운다는 점이다. 밭의 활용도도 무척 높다. 도무지 놀리는 땅이 없을 만큼 촘촘하게 자투리 땅도 활용한다. 이 지역의 농사법을 조사하는 것도 무척 재밌는 일이 되겠다. 

 

 

할머니가 보여주신 덤불양대. 인천에서 맛있다고 얻어온 종류는 금방 상해 버리는 데 반하여, 이 덤불양대는 가을에 수확을 못해 겨우내 달려 있어도 전혀 상하지 않는다고. 그뿐이 아니라 맛까지 좋다고 하니 금상첨화이다.

 

 

냉장고에서 적두팥을 꺼내와 보여주시는 할머니. 농민은 가장 알맞은 보관법을 찾아낸다.

 

 

할머니 마당 한켠에 자라고 있던 조선오이. 그물망이 쫙쫙 퍼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오이꽃. 

 

 

다 쓴 물건이라도 허투루 버리는 법이 없다. 닳아서 못 쓰게 된 댑싸리 비는 이렇게 다시 묶어서 계단 등을 쓰는 빗자루로 활용한다.

 

 

대문 입구 쪽에서 자라고 있는 덤불양대. 

 

 

쇠잿말에서 오늘의 마지막 마을인 요동으로 가기 전, 길가에 특이한 수수가 눈길을 잡아 끈다. 도로 공사를 하고 있는 마을 주민분께 물으니 옛날에는 방맹이 수수라는 것이 있었다고. 이건 신품종이란다. 실제로 송오 마을에 살고 있는 주인 할아버지를 찾아가서 물으니 장연 쪽에서 얻어다 심은 것이라고 한다.

 

 

 

 

토종이 아닌 것으로 밝혀진 수수. 그렇지만 재밌게 생겼다.

 

 

이 분들에게 더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이 왜 쇠잿말인가? 그 까닭은 아무도 모르셨지만 이 분들의 말을 듣고 유추하면 이렇다. 옛날에는 수안보에서 장이 크게 섰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는 방앗간이 없어서 곡식을 가지고 전부 수안보로 가서 찧어 왔다. 그런데 그곳에 바로 우시장도 섰다고. 그러니까 여기는 소를 사거나 팔아서 끌고 넘나들던 옛 고갯길인 셈이다. 그래서 쇠재라는 이름이 붙었다. 재미난 것은 쇠잿말이 이곳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고개 하나 넘으면 장연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수안보 쪽으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도 쇠잿말이다. 궁금하신 분은 3차 수집 조사 편을 참고하시라. 장연면 면사무소가 있는 곳 근처에 1000년이 된 느티나무 2그루가 있는데, 그곳 바로 위가 쇠잿말이다. 장연에서는 그쪽 고개를 넘어 수안보로 소를 사거나 팔러 다녔을 게다. 마지막으로 더 재미난 사실은 장연의 쇠잿말도 그렇고 이곳의 쇠잿말도 그렇고 큰 도로가 이어져 뚫려 있다는 사실.

 

 

가운데 보이는 산을 중심으로 오른쪽 골로는 수안보로 넘어가고, 왼쪽  골로는 장연으로 넘어갔다. 동네 주민의 말에 따르면 30분이면 수안보까지 갔다는데, 그건 뻥 같고 1시간 반에서 2시간쯤 걸리지 않았을까 한다. 방앗간이 없어 수안보로 다닐 때 버스에 곡식을 실어서 보내고 사람은 이 고개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렇게 가면 당시에는 길이 좋지 않아서 버스보다 사람이 더 먼저 도착했다고. 사람이 많이 다닐 때는 지금처럼 수풀이 무성하지도 않고 길도 잘 닦여 있어서 말 그대로 대로였단다. 지금은 이리로 아무도 넘나들지 않는다.

 

 

쇠잿말에서 흙살림의 윤성희 이사님이 합류했다.  시간은 6시가 다 되었을 무렵. 마지막 마을인 요동으로 함께 향했다.

 

 

요동 입구에서 발견한 배나무. 안민동에서 이야기를 들은 청배의 특징과 비슷한 모습이다. 혹시 이것이 청배가 아닐까 하여 동네를 뒤졌지만 찾은 답은... 지난해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할아버지도 나가셨다고 한다. 이 배의 유래는 알 수 없는 것일까? 다음에 다시 찾기로 기약했다.

 

 

 

 

청배의 주인을 찾고자 산골짜기까지 올랐으나 끝까지 갈 수 없었다. 괜히 갔다가 옴짝달싹 못하게 될 수도 있기에...

 

 

돌아 내려오는  차 안에서 찍은 사진. 산비탈이 모두 밭으로 개간이 되어 있다. 옛날에는 사람이 많이 살았다는 증거.

 

 

하늘에는 달이 빛나고, 이제는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요동을 나와 점심을 먹었던 곳에서 7시가 넘어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집에 도착하니 11시. 피곤하다. 오늘은 유난히 피곤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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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13일 8시. 안산을 출발해 사리면사무소를 목적지로 설정하니 2시간 5분쯤 걸린다고 한다. 지금까지 갔던 곳 가운데 가장 짧은 시간이 걸리는 거리. 부지런히 달리다 안성맞춤 휴게소에서 또 한 번 쉬는 시간을 가졌다.

 

휴게소에서 조금 쉬고 다시 차로...

 

 

증평 교차로로 빠져나와 새로 뚫린 34번 국도, 고속도로와 같은 그 길을 따라가다가 다시 옛 34번 국도로 내려왔다. 옛날 길이 사람냄새가 나고 좋다. 새 길은 너무 쭉쭉 넓게 뚫어놓아서 경치도 사람도 집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산을 깎아 무식하게 일직선으로만 뚫려 있을 뿐이다. 하지만 옛 길은 원래 사람이 밟고 다니던 길 위에 포장을 한 곳이 많아 여기서는 사람 냄새가 난다.

 

처음 들른 곳은 사리 농공단지 근처의 방축골. 이 마을은 괜히 들어왔다 싶을 정도로 공장들이 많이 자리하고 있었다. 끝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차를 돌려 나와 송명골이란 곳으로 향했다.

 

송명골은 작은 마을이었다. 4~5가구 정도가 살고 있는 듯한 모습. 길로 들어서니 오래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우리를 맞이한다.

 

 

 

작은 마을이지만 오래된 노거수가 여기저기 여러 그루 서 있다. 바로 눈 앞에 보이는 34번 국도만 아니면 더 근사한 곳이었으리라. 걔 중에 한 집이 눈에 띄어 찾아갔다. 곳곳에 오이를 심어 놓으신 것이 뭔가 있을 듯. 송명골길 41-6에서 만난 연춘자(69) 할머니께 먼저 오이에 대해 물었다. 이건 시집와서부터 심던 것인데, 늦게까지 달리고 맛이 좋다고 한다. 지금은 씨가 없으니 나중에 와서 받아가겠다고 씨 좀 밑지지 말고 꼭 받아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아욱도 있었는데, 그건 따로 씨를 받지 않고 떨어져 나는대로 먹는다고...

 

 

 

다음은 부석이란 마을에 들어갔는데, 축사에 새로 지은 집들이 대세다. 그래도 확인하는 셈 한 바퀴 둘러보고 돌아 나왔다.

 

그리고 들른 불당골. 옛날에는 절이 있었던지 불상이 있었던지 아무튼 불교와 관련이 있는 곳이 아닐까? 괴산 지역을 다니며 보니 마을 입구에 꼭 유래비를 세워 놓던데, 시간이 허락하면 그것도 한 번씩 읽고 다니면 더 재밌겠다.

불당골에 들어와 어느 집에 딸린 텃밭에 콩이 익어간다. 유월두가 아닌가 하며 확인하려고 들어갔는데 사람이 없다. 비가 오려고 꾸물거리는 날씨에도 어디 들에 나가셨나 보다.

 

혹시 유월두가 아닌지? 주인에게 물어보고 싶었으나 없기에 나중에 들를 곳으로 남겨 두었다.

 

 

 

주인은 없고 강아지만 팔자 좋게 늘어져 자고 있다.

 

그리고 좀 더 들어가니 또 다른 집에 울타리콩과 아욱이 예사롭지 않다. 뭔가 있겠다 싶어 물어보려고 찾아들어갔으나 역시 아무도 없다. 천상 불당골은 나중에 한 번 다시 와야겠다. 사진 좀 찍으려고 사진기를 꺼내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는다. 어라... 오늘 이렇게 비가 오면 아무것도 못하고 올라가야 하는 건 아닌지 슬슬 걱정이 된다. 안 그래도 날씨가 꾸물거려 불안했는데...

 

아무튼 비를 뚫고 그대로 강행! 다행스럽게 비는 확 쏟아지고 지나가더니 잠잠해지는 기미다. 고래울이란 마을에 들어서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논길을 한참이나 후진으로 나왔다. 운전도 참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살짝 증평 쪽으로 다시 빠졌다가 진지바위란 마을을 지나 도화동으로 이어졌다. 차를 타고 지나는데 어느 집에 대학찰이 아닌 다른 옥수수가 걸려 있는 걸 보았다.  

 

사람은 살지 않고 농막으로 쓰는 듯한... 

 

 

주인을 찾으러 동네를 돌아다닌 결과, 증평 사는 50대가 이곳을 오가며 농사를 짓는다고... 

 

 

잠긴 대문을 열고 들어가 뭔가 없나 한참을 찾으니, 옥수수 말고 수세미와 여주, 호박이 볼 만하다. 오늘은 그냥 확인만 하고 나중에 한 번 들러보든지 해야겠다.

 

호박의 무게를 버티도록 끈으로 묶어 주었다. 

 

 

도화동을 지나 칠성바위, 증말, 노동이란 마을을 들렀다. 칠성바위란 마을에 들어가는 어귀에 동부가 자라고 있다. 그 꽃이 너무 예뻐서 사진에 한 장 담았다. 아무튼 증말이란 마을에는 정말 없고, 노동은 전원주택들이 꽤 들어서거나 부유해 보이는 듯한 집이 많았다. 

 

 

 

 

다음 송오란 마을은 있을 법한 집에는 사람이 없어 일단 기록만 남기고 뒤돌아섰다.

 

주인은 없고 수확물만 우리를 맞아 주었다. 다 익은 울타리콩 꼬투리(위)와 자라고 있는 모습(아래)

 

 

참깨도 있는데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느 집에는 아래와 같은 커다락 호박이  놓여 있었다.

 

 

송오 마을 입구에는 수수가 자라고 있었다. 정체를 알고 싶어 잠시 내렸을 때, 한 아주머니가 사륜오토바이를 타고 오시길래 여쭈니, 자신이 지난해 신품종을 가져다 심었는데 이게 좋아서 동네에 모두 퍼졌다고 한다. 씨앗은 이렇게 돌고 도나 보다.

 

 

 

 

시간은 12시를 넘겼지만, 아직 점심을 먹기에는 이르다. 몇 군데 더 둘러보고 점심을 먹을 계획. 소매저수지 부근 응암(매바위)라는 곳은 축사가 많은 곳이었는데, 이곳도 그럴싸한 집이 많아 느낌이 오는 곳이 없었다. 그리고 큰길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 큰터(대기)라는 곳도 별로 볼 것이 없는...

 

이제 점심을 먹기 전 마지막 마을이 남았다. 둔터라는 곳이다. 마을 유래비를 보면 둔터가 군대의 둔전과 상관이 있는 뜻인지 알 수 있었겠으나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둔터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갓끈동부를 발견했다. 오호, 이런 곳에 갓끈동부가? 어느 집 것인지 마을을 멀리서 쓱 바라보았다.

 

괴산에서 발견한 갓끈동부. 그 유래는?

 

 

어느 한 집이 느낌이 온다. 그 집에 가서 무엇 좀 물어보자. 마을로 들어가 그 집 앞에 이르니 어디 나가셨다가 이제 막 돌아오신 모양이다. 얼른 다가가 인사를 드렸다. 윤재노(74) 할아버지는 집안 분위기도 그렇고 무척 안정적으로 보이셨다. 자세한 건 알 수 없지만 이런 분위기의 집에는 무엇이 많긴 하다. 갓끈동부는 증평 쑥고개라는 곳에서 7~8년 전에 가져다가 심은 것이라고 하신다. 젊은 사람들이 갓끈동부를 알아보자 짐짓 놀라신 듯하다. 그리고 그것만이 아니라 작두콩을 몇 년 전 호평에서 얻어다 심는데, 담북장(청국장)을 쑬 때 조금 넣으면 냄새가 덜 나서 심는다고 하신다. 또 아주까리도 2종류를 심으시고, 차조기도 밭 한켠에 기르며, 파와 가지도 옛날부터 그대로 씨를 받아서 심고 있단다. 가지는 꼭지 부근에 몇 군데 있는 가시가 아주 따갑고 다 큰 것이 15cm쯤 되는데, 맛이 정말 좋다. 다음에 다시 찾아올 테니 꼭 씨 좀 받아 달라고 부탁드리자 할머니가 농을 건네시며 알았다고 약속하셨다.

 

차조기.

 

 

가지꽃과 가지. 

 

 

 

두 종류의 아주까리. 

 

 

논 옆의 가로수에 갓끈동부가 타고 올라가도록 심으셨다. 저 멀리 왼쪽에 보이는 집이 윤재노 할아버지 댁이다.

 

논에서는 벼가 수정을 하느라 바빴다. 암꽃은 어떻게 생겼을까?

 

 

이제 점심을 먹으러 사리면 소재지로 가는 길. 괴산 지역은 이제 참깨 수확기에 들어가 가드레일마다 다리의 난간마다 참깨를 베어다 세워 말리느라 꽉 찼다. 가을이면 아스팔트는 벼를 말리는 곳이 되니 농촌에서 아스팔트 길은 이래저래 쓰임새가 많은 곳이다.

 

 

 

사리면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으니 상권이 많이 죽어 문을 닫은 가게가 태반이다. 할 수 없이 그 가운데 가장 번쩍이는 식당에 들어가 점심을 해결했다.

 

 

 

점심을 먹고 사리면 소재지를 잠시 어슬러거리며 다니다가 옛날 약방을 발견했다. 언제부터 이 자리에서 약방을 하셨을까?

 

 

 

점심을 먹고는 모래못으로 찾아갔다. 모래못은 부자 동네 티가 확 나는 곳이었다. 역시나 그렇게 찾아볼 만한 것은 없어 돌아서 나와 하도 마을로 향했다. 하도 마을은 축사가 많은 마을이라 특이한 것이 없었고, 시동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다음으로 수암이란 곳을 찾아갔다. 이곳에서 율무가 집 마당 한켠에 자라고 있는 걸 발견했다. 왜, 어떻게, 무엇을 심었는지 알아보고 싶었으나 이곳도 여느 집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없었다. 도대체 다들 어디를 가신 것인지? 날이 궂어서 마을회관에 모여 먹을 거 해 먹으시나? 

 

 

 

 

 

수암 마을을 돌고 있는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이 보인다. 밭에 일부러 차풀로 보이는 풀을 심어 놓은 곳이 드문드문 보인다. 그냥 풀이 자란 걸 놔둔 듯하지는 않고 일부러 기르는 티가 난다. 말뚝에 줄까지 띄워 놓았으니 말이다. 아무튼 다음에 수암 마을을 다시 찾아오기로 기약하고 이만 돌아섰다.

 

 

 

 

다음 들른 곳은 산정(산우물)이라는 곳이다. 아, 이제와 돌아보니 사리면의 산간 지대에는 유난히 물이 나는 곳이 많았다. 밑으로 큰 지하수맥이 흐르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 마을은 고추와 배추를 특화시킨 곳이었다. 마을 입구에 장승으로 배추와 고추를 새겨 세워 놓은 것이 너무 특색있었다. 하지만 토종은... 배추와 고추에 밀려서인지 찾아보기 힘들었다.

 

 

 

 

산정을 나와 석촌을 찾아갔다. 석촌 마을은 심한 비탈면에 자리한 6~7가구가 전부였다. 비탈이 심한 만큼 텃밭도 별로 보이지 않고 했지만, 비탈의 끝까지 올라갔다가 차를 돌리느라 애를 먹었다.

 

바로 맞은편에는 황산 마을이란 곳이 자리하고 있다. 길을 따라 그곳으로 쭈욱 들어갔다. 안쪽에는 내황산이란 곳이 지도에 표기되어 있어 그곳을 보고 내려오면서 또 보려고 했다. 내황산은 1가구가 살며 인삼 농사를 크게 짓고 있었다. 더 볼 것도 없이 차를 타고 내려왔다.

 

내황산에서 내려오면서 보이는 경치.

 

 

차를 타고 내려오는데 길가에 조 비스무리한 것이 보인다. 얼른 차를 세우고 그곳으로 가 보았다. 이건 강아지풀이라고 하기에는 크고, 조라고 하기에는 조금 모자란 뭔가 모를 것이 자라고 있다. 일단 사진을 찍고 기록을 남긴 다음 두어 개를 표본으로 뽑아서 가지고 내려왔다. 동네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혹시라도 뭔가 아는 게 나올지도 모른다.

 

강아지풀보다는 크고 조보다는 작은... 그런데 끝이 조처럼 갈라져 있는... 

 

 

 

황산 마을에 내려와 어느 집을 찾아갈까 하다가 마을회관 옆집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한창 옥수수를 따서 손질해 포장하고 계셨다. 은근슬쩍 다가가 조인지 모를 풀을 꺼내 보이며 말을 걸었다. 일단 조로 시작해 다른 작물 이야기가 나오면서 아주머니께서 집으로 들어가신다. 그러면서 하나둘 씨앗을 꺼내오시는데 도라지, 강낭콩, 개팔이동부, 울콩, 어금니동부, 만삼, 상추, 아욱이 줄줄이 나온다. 몇몇 씨앗은 당장은 없어 나중에 다시 오기로 기약하고 이러저런 씨앗만 얻어서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씨앗을 나눠주시는 정현복(65) 아주머니.

 

 

거름을 많이 주지 않아 볼품없다던 아욱. 

 

 

황산 마을을 나와 커다란 저수지 안쪽에 자리한 배실 마을로 향했다. 배실, 혹시 배나무와 어떤 연관은 없을까? 이곳에서도 토종 배를 볼 수는 없을까 하는 마음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끝에는 축사, 한 집에서 고추 씻는 일이 한창이다. 시끄러운 기계 소음 사이로 소리소리치며 대화를 이어갔다. 이 집을 택하여 들어온 것은 집 앞에 있는 꽈리 때문이었다. 김태우(60) 아저씨께 물으니 10여 년 전에 산에서 씨앗을 구해다 심은 것이라고 한다. 이것도 혹시 모르니 일단 기록을 남기고 돌아나왔다.

 

 

 

돌아나오는 길 배실 마을의 어느 집. 염소와 토종닭이 어울려 살고 있다. 병아리가 너무 귀여워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고자 했으나 가까이 가면 도망가는 통에 그러지 못했다.

 

 

다음으로는 점말이란 곳으로 찾아갔다. 점말의 가장 끝에 자리하고 있는 집까지 들어갔다가 돌아나오려는데 오이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찾아가 사람을 찾았다. 방에서는 할머니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던 중이었다. 찾아온 이유를 말씀드리고 씨앗 이야기를 꺼내니 이런저런 반응을 보이신다. 내친 김에 씨앗 있는 것 좀 보여달라고 말씀을 드렸다.

할머니는 지금 81세이신 허채봉 할머니이다. 평생 이곳에서 농사짓고 살며 증평장과 괴산장으로 씨앗 장사를 다니셨다고. 할머니의 표현에 따르면 씨앗은 씨갑시라고 한다. 참, 앞서 황산 마을에서 보았던 조는 돌조가 아닐까 하셨다. 괴산에서 조는 조이라고 부른다.

아무튼 허채봉 할머니께는 대파, 상추, 갓, 조선아욱, 도라지, 쥐눈이콩, 붉은팥, 파란팥(그루팥) 등 여러 작물의 씨앗이 있었다. "할머니 이거 할머니 몇 살 때부터 심던 거예요?"라고 말을 하면 "아, 평상 하는 거지"라고 답하신다. 웬만한 것은 할머니가 이곳에 산 6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데, 나중에는 농으로 "할머니 이건 몇 년이나 된 거예요?" 하고 물으니 "그건 얼마 안 됐어. 50년!"이라고 답을 주신다. 더 자세한 내력은 나중에 안완식 박사님과 함께 왔을 때 추적할 수 있다. 아무래도 지식이 얕다 보니 필요한 사항을 딱딱 맞게 캐물을 수가 없다.

 

다리가 성할 때만 해도 장으로 씨갑시 장사를 다녔다는 허채봉 할머니. 씨앗을 얼마나 꼼꼼하게 쟁여 놓으셨는지 모른다.

 

필요할 때는 이렇게 냉장고 안에 보관하시는 감각을... 

 

허채봉 할머니 댁의 상추. 

 

60년 됐다는 대파. 할머니는 해마다 씨를 받아서 내다팔고 또 심어서 씨를 받고를 60여 년 동안 반복하셨다. 

 

할머니 집 텃밭에 자라고 있는 실부추. 이건 씨가 없고 뿌리로 번식한다고... 그래서 씨를 받지 않는단다.

 

허채봉 할머니 댁의 오이. 씨를 꼭 받아 놓아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허채봉 할머니 댁의 모습.

 

 

 

점말을 나와 포동을 뒤졌는데, 큰길 옆이라 그런지 별 것이 없다. 통뫼(덕고개)도 그렇고, 쇠편이라는 마을도 그렇고 34번 국도가 새로 뚫리면서 마을을 가운데에서 쫘악 나눠 놓았다. 너무 폭력적이지 않은가? 나라의 사업이라 반대도 하지 않았는가?

 

하는 수 없이 더 깊숙한 안쪽에 있는 마을로 향했다. 월현(달고개) 마을이 그곳이다. 고개라는 지명처럼 이곳의 고개를 넘으면 괴산에서 다른 지역으로 경계가 바뀐다. 월현 마을에 도착하니 할머니 네 분이 모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별 소득이 없을 줄 알았지만 그냥 지나치기 어려워 들어가 인사를 건넸다. 역시나 할머니들이 우리를 가지고 장난을 치시며 짖궂게 구신다. 더 길게 이야기해야 별 거 없을 듯하여 나오다가 커다란 호박을 발견하고 나중에 이 씨앗을 받으러 오겠다며 기약만 남겼다. 나중에 할머니 혼자 계실 때 다시 찾아와야지...

 

달고개 마을의 호박. 나중에 다시 찾아가야겠다.

 

 

 

달고개 마을을 나오며 마전 마을을 거쳤는데, 이곳도 신작로의 영향 탓인지 자세히 볼 것이 없었다.

다음은 마전 마을 건너편에 있는 점말과 오룡동이란 곳을 찾아갔다. 그다지 눈에 띄는 것은 없었는데, 마을 분위기가 나중에도 이렇게 그냥 지나치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다. 이 마을은 가을에 다시 한 번 찾아가야겠다. 마을과 마을 사이의 고개를 넘는데 이동 슈퍼 트럭이 마주쳤다. 가끔 인간극장이나 그런 프로그램을 보면 이런 트럭이 있던데 여기도 다니고 있었다. 깊숙한 곳은 깊숙한 곳인가 보다.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길로, 이리로 가면 분명 우리가 가고 싶어 하는 곳이 나올 듯하여 그냥 내질렀다. 고개를 넘어 좁다란 산길을 아슬아슬하게 지나 바위에 긁히지 않게 조심조심 돌아서 나오니 역시나 우리가 가려던 대촌 마을이 나왔다. 마을회관 주변에 있는 집에서 차조기와 수세미를 발견. 할머니들은 집에 계시지 않고 역시나 마을회관에서 왁자지껄 이야기를 나누고 계신다. 거기는 들어가 봐야 별 수확이 없을 테고, 나중에 다시 들러야겠다는 기록만 남기도 돌아나왔다. 이 마을도 뭔가 있을 듯하다.

 

대촌 마을 우물터. 아직도 이곳에서 빨래를 하실까? 비오는 날이라 물이 뿌옇다. 세수를 했는데 물은 참 차가웠다.

 

대촌 마을에서 본 수세미. 평소에 보던 것보다 더 길쭉하고 생김새도 특이하다. 할아버지 혼자 사는 집이었는데, 눈빛이 흐릿한 것이 좀 어디가 안 좋으신 듯했다. 나중에 씨앗 좀 얻겠다며 꼭 씨앗 밑지지 말고 받아 놓으시라고 부탁드렸다.

 

 

이제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마을 상리(윗시몇)가 남았다. 솔직히 처음 들어가면서 이 마을에 그리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마지막이라 긴장이 좀 풀린 탓도 있겠지만 마을 입구에는 무슨 세라믹 공장인가 뭔가가 커다란 공장이 자리하고 있는데다가 시골집답지 않은 그런 전원주택들도 보이고 해서이다. 그런데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이곳도 나중에 안완식 박사님과 오면 다시금 들러야 할 곳이었다.

마을을 돌다가 다른 벼보다 키가 크고 이상한 벼가 있어 마침 동네 할아버지들이 모여 계시길래 물어보았다. 이 벼는 토종은 아니라고 하시는데, 4~5년 전쯤에 보급종으로 도열병에 강하다고 하여 받아다가 계속 심는다고 하신다. 그래서 이 논을 자세히 바라보니 산에서 내려오는 물이 우물로 고였다가 논으로 바로 흘러들어간다. 이것이 바로 논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뚝을 박고 슬레이트판을 꽂아 물이 바로 들어가는 걸 막았다. 대신 고랑을 내서 한바퀴 둘러서 논에 들어가도록 했다. 아마도 우물물이 그대로 흘러들어간다면 엄청 차가울 것이다. 우물물을 길어서 만져보니 실제로 엄청 찼다. 그 물을 이용해 농사를 짓다보니 '대한'이라고 하는 이 도열병에 강한 벼를 택하신 것이 아닐까? 그리고 또 고랑을 이렇게 내서 물을 돌리시는 것일 게다. 그도 그럴 것이 물이 돌아가는 길목 중간중간에 논으로 들어가는 물꼬를 터 놓으셨다.

 

논물의 활용. 찬 물이 직접 닿지 않게 하려고  막아 놓은 슬레이트판. 

 

 

그건 그렇고 토종에 대해서는 모르실까? 할아버지들이 모여 있을 때 얘기해 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면서 여쭈었다. 돌아온 답은 역시나 그런 게 어디 있냐고... 요즘은 다 사서 한다고 그러신다. 이야기를 하다가 뒤에 있는 조그만 하우스에는 뭐가 있냐고 하니 참외란다. 참외? 근데 이게 좀 다르다. 보통 시장에서 파는 노란 참외가 아니라 푸르다. 할아버지는 이걸 청참외라고 부르신단다. 토종 참외 종류는 대개가 푸른 빛이 나는 게 많은 듯하다. 얼마 전 먹어본 사과참외나 개구리참외가 그랬다. 

이 참외의 특성은 무르다는 것이다. 할아버지께서 이가 좋지 않아 과일을 잘 못 먹는데, 이 참외는 물러서 숟가락으로 파 먹기 좋단다. 당도는 어떠냐고 하니 별로라고 하신다. 할아버지께 부탁하여 하나만 먹어봐도 되겠냐니 허락하셔 하나 가져왔다. 

 

이종윤(75) 할어버지의 청참외.

 

 

확실히 무르다. 물렁물렁한데 그렇다고 흐물흐물거리지는 않고 아삭함이 살아 있다. 무르면서 씹는 맛이 있다니. 또 말씀처럼 그리 달지 않은 게 아닐 달았다. 개구리참외보다는 훨씬 달고, 사과참외보다는 좀 덜 달다. 이 참외가 어디서 왔는지는 기억하시지 못하는데, 10여 년도 전에 어디서 얻어다 심었다고 하신다.

 

청참외의 속. 

 

상리 마을에서 내려다본 모습.

 

우물 옆에 앉아 담소를 나누시다가 우리를 만나신 어르신들. 

 

 

이로써 오늘의 사전조사는 이대로 마치기로 했다. 시간은 6시 가까이 되었다. 그래도 평소보다는 조금 일찍 끝난 편이다. 사리면이 농공단지가 자리하고 있어 그렇기도 하고, 면을 관통하는 34번 국도 신작로 때문이기도 한 듯하다. 길이 뚫리면 문물이 들어온다. 문물이 들어오면 당연히 그를 따라 문화가 들어오고, 문화가 들어오고나면 사람이 들고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어디는 흥하고, 어디는 망하는 일이 벌어지는 게 당연할까. 흐음, 아무튼 길이 잘 뚫려 있으니 오가는 시간은 평소보다도 팍 줄어 2시간쯤 걸리더라. 그 덕분에 오늘 일찍 끝나기도 했다. 다음주는 연풍과 칠성면을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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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초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 형태는 아래 사진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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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전통농업 - 농장에서 씨앗을 보전한다

 

 

 

20만 종의 벼가 있는 보물창고

 

인도는 야생 식물은 물론 작물에서도 생물다양성의 보고이다. 저명한 벼 연구자 리차리아Richharia 박사에 따르면, 베다 시대(기원전 1500~600년 무렵)에는 40만 종의 벼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보다 줄었다고는 해도 박사에 따르면 아직도 20만 종이 존재하고, 실제로 그는 마디야 프라데쉬주Madhya Pradesh州의 차티스가르 지역에서만 2만 종의 벼를 수집했다.

 

하지만 지금 이러한 품종은 격감하고 있다. 그 까닭은 녹색혁명 때문이다. 녹색혁명에서는 수확량만 중요시하여, 화학비료에 반응하여 많은 수확량이 나오는 극소수 품종만 선발된다. 결과적으로 광대한 영역에서 높은 수확량을 올리는 품종만 재배되어 유전자가 획일화되어 버린다.

 

그런데 유전자의 획일화에는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획일화된 작물은 병해충에 위약해져, 어느 작물에 영향을 주는 병해충이 비슷한 작물 모두에 확 퍼진다. 1970년대에 벼 생육 저해 바이러스(Rice grassy stunt virus)가 인도부터 인도네시아에 걸친 광대한 논에서 확 퍼졌던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병의 해결책은 토종에 있었다. 1,7000종 이상의 재배 벼 품종과 원종 표본을 4년에 걸쳐서 선별 검사한 결과, 인도의 우타르-프라데쉬주Uttar-Pradesh州의 곤다Gonda 근교에서 재배되는 오리자 니바라Oryza nivara라고 불리는 한 품종만이 이 병에 저항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밝혀졌다. 지금 이 인도 야생 벼의 유전자를 가진 교배 품종이 아시아의 11만㎢의 논에서 재배되고 있다. 곧 앞으로 있을 품종 개량의 기초가 되는 유전자를 공급하는 것이 바로 토종이다. 이를 통해 유전자의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농민들은 왜 20만 점의 토종을 보존해 왔을까? 그 까닭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먼저 토종은 수확량만이 아니라, 짚으로 소의 먹이도 주고 집을 짓는 재료로 활용하는 등 다양하게 농민들의 수요를 만족시켜 왔다. 그리고 대개의 토종은 튼튼하고 병해충에 내성이 있는데다가 화학비료나 농약 등의 투입 자재를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점은 환경조건에 따라서 다수확품종보다 토종이 알맞은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타밀-나두주의 알칼리성 토양에서는 칼라르팔라이Kalarpalai라고 하는 토종 벼만 재배할 수 있고, 바단 삼바Vadan Samba와 같은 가뭄에 내성이 매우 강한 품종도 있다. 한편 호수에 인접하여 물에 잠기는 지역에서 자라는 삼바 모사남Samba Mosanam은 물에 잠김에 강하다. 원래 삼바 모사남은 호수에서 배를 타고 거둔다고 할 만큼 다수확품종을 기를 수 없는 1.4m나 물에 잠긴 조건에서도 전혀 해를 입지 않는다. 이처럼 인도의 어느 지역에서도 농민은 자신들이 가진 벼 품종의 이러한 환경적·영양적 특성과 독특한 특징에 대해 깊은 지식이 있다. 혹독한 환경에서도 작물을 기를 수 있었던 것은 이 다양성 때문이었다.

 

비자야라크쉬미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토종을 기르면 많은 장점이 있습니다. 가장 놀라운 점은 토종에는 그것이 버텨 온 지역의 생태 특성에 바탕을 둔 고유한 성질을 지녀, 결과적으로 사람에게 필요한 영양을 훨씬 잘 확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 말고도 토종 유전자원을 보호하여 변경에 사는 소농들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토종 보전을 시작하다

 

지금도 수많은 토종 벼가 보존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보전하고 있는 것은 단지 농민들뿐이고, 계속해서 엄청난 비율로 사라지고 있다. 이 때문에 인도 지식 센터는 타밀-나두주 안의 각지에서 종자 보존에 나섰다. 그 계기는 전통농법으로 병해충을 방제하면서부터였다.

 

1993~1994년에 걸쳐 센터는 티루반나말라이현Tiruvannamalai縣, 센감 탈루카Chengam Taluka의 발라얌팟투Valayampattu 마을에서 식물을 활용한 해충 방제에 나섰다. 농민이 참여하는 실험 프로그램은 꽤 성공을 거둬, 농민들은 식물의 생성물을 화학 농약 대신 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농민과 모여서 이야기하면서 녹색혁명 이전에 재배하던 토종이 있다면 더 유익할 거라고 하던 농민이 있었다.

 

인도에는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 박사가 이끄는 인도 전역에서 토종 보존에 나선 NGO인 나브단야Navdanya가 있다. 센터는 1995년 나브단야와 접촉하여, 그 지원을 받아 1995년 발라얌팟투 마을에 있는 농장에서 씨앗을 보전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먼저 한 일은 타밀-나두주 안에 있는 여러 지역 NGO와 협동하는 것이었다. 그 활동은 지역사회에 종자은행을 설립한 ‘동쪽 산맥 운동(Eastern Ghats’ Movement)’과 협력하며 이루어졌다. 이듬해에는 좀 더 아래와 같은 활동을 펼쳐 나아갔다.

 

1) ‘그람미야 무네트라 산감Grammiya Munnetra Sangam’의 지원으로 칸치푸람Kanchipuram 지역의 티루포루르Tiruporur 마을

2) ‘불리한 인간의 개발 센터(Centre for Development of Disadvantaged Peoples)’의 지원으로 티루타니Tiruttani 지역의 네둠바람Nedumbaram 마을

3) ‘비자 평화 센터(VISA Peace Centre)’의 지원으로 반다바시Vandavasi 지역의 모사바디Mosavadi 마을

4) ‘여성의 복지 개발 협회(Women’s Welfare Development Association)‘의 지원으로 우티라메루르Uthiramerur 지역의 마남파티Manampathy 마을

 

1998년에는 ‘인간 활동과 농촌 기술의 진전을 위한 위원회(Council for Advancement of People’s Action and Rural Technology)’의 지원으로 칸치푸람 지역(당시 센갈팟투Chengalpattu 지역)의 캇탄칼라투르Kattankalathu 구역에서 일을 시작하고, 그 뒤 이 활동은 칸치푸람, 티루발루르Tiruvallur, 티루반나말라이Tiruvannamalai, 나가팟티남Nagapattinam의 125개 이상의 마을로 퍼졌다. IDRA, UNDP, 포드 재단 등 다양한 기관도 센터의 활동을 지원했다.

 

 

 

130종 이상의 토종 벼를 수확

 

센터가 먼저 한 일은 토종을 구하는 것이었다. 토종 벼를 찾고자 센터의 현장 일꾼들이 상세히 조사를 했다. 그리고 몇몇 농민이 집에서 먹으려고 보전하고 있던 품종을 얻거나 구입했다. 또 센터는 앞으로 농부가 될 마을의 학생들에게 토종 보존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자 어린 학생들을 참가시키는 생물다양성 대회 ‘비야 야트라Bija Yatra’를 열고, 자발적인 도움으로 토종과 그 정보를 수집했다. 게다가 정기적으로 농업 박람회나 축제에 참가하여 품종을 전시하는 것으로 농민들과 품종 교환을 전개했다.

 

다수확품종의 도입으로 토종은 사라지게 되었는데, 센터에서 토종이 재배되고 있는 지역을 찾아내고 그 쓰임새를 늘리는 일에 약 10년 동안 노력한 결과, 센터는 타밀-나두주에 알맞은 130점의 벼 품종과 50종 이상의 채소를 수집했다. 비자야라크쉬미 박사는 만족하여 말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벼 125품종, 그리고 약 60종의 토종 채소를 간신히 되찾았습니다.”

 

 

토종을 제공받는 농민.

 

 

종자은행의 설립

 

센터의 생물다양성 보전 활동에는 수많은 마을에 ‘지역사회 종자은행’을 설립한 일도 포함된다. 그 방식은 이렇다. 먼저 센터는 각지의 마을에서 토종의 중요성을 알리는 모임을 개최한다. 센터는 자신의 실험농장과 센터에서 선택한 농민들의 밭에 ‘생식영역 보전 센터’를 설치한다. 이러한 생식영역 보전 센터에는 50종 이상의 품종을 재배한다. 거기에 관심을 가진 농민들은 실제 작물을 보고, 토양과 관개조건, 자신의 농업 기후에 알맞은 한두 품종을 재배할지 결정한다. 결정한 농민은 센터를 통해 지역이나 인접 지역에서 이미 재배하고 있는 농민에게 씨앗을 받아, 자신의 농지 일부를 토종 보전용으로 확보한다. 수확한 다음에는 ‘종자은행’에 제공받은 종자의 2배로 돌려주는 것이 씨앗을 받는 조건이다. 이 종자은행 덕에 시장에 내는 다수확품종을 재배하는 농민들이 현재 집에서 먹으려고 보유했던 토종을 위상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유기농업 집단 산감Sangam 결성

 

다시 토종 보전 프로그램을 약 10년 실시한 뒤, 센터에서는 이 방법을 유지·지속하기 위한 본보기를 고안했다. 그것은 센터의 관여가 끝난 뒤에도 농민들이 스스로 그 활동의 계속하도록 모든 마을에 유기재배 농민 집단인 산감을 결성하도록 한 것이다. 농민들에게 실천을 보이고, 이후에도 활동을 지속하도록 한 것이다. 지역사회의 종자은행은 이러한 산감을 통해 추진되어, 농민들은 다양한 토종을 재배하며 그 양을 늘리는 기회도 얻을 수 있다. 산감에서는 지도자를 뽑는데, 그는 활동의 수익을 내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도록 장려된다. 이 때문에 몇몇 산감에서는 수입원으로 생물농약을 생산하는데, 그 기본 지식이나 인프라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센터이다.

 

 

기술 지도에 나선 비자야라크쉬미 박사.

 

 

센터는 외양간두엄과 지렁이두엄을 활용하는 비법, 바이오 거름(Acetobacter Azospirillum 등), 님Neem 씨앗 등의 자재를 제공하고, 토종을 유기재배로 기르는 비법, 식물에서 추출한 자재로 생물농약을 만들고 자연스레 병해충을 방제하는 기술, 두엄을 만드는 기술을 훈련시킨다. 또 다양한 품종의 특성과 수확량 및 상세한 정보도 여러 언어로 교재, 정기 간행물, 서적, 포스터, 필름 형태로 제공한다. 농민, NGO, 학생, 교사, 일반 시민 등 다양한 집단을 대상으로 수많은 훈련 프로그램도 실시한다. 학교에서는 글짓기나 웅변대회도 열고 있다.

 

유기농업을 하고, 농장에 투입되는 자재를 자급하는 일은 경비 절감으로도 이어진다. 이 때문에 활동은 지금 약 125개 마을에서 약 3000명의 농민들에게 퍼졌고, 유기재배로 집에서 먹을 채소밭을 가꾸는 세대도 800가구 이상이 되었으며, 유기농가로 이루어진 37개 산감이 설립되었다. 그것은 각 가정에 먹을거리의 안전·안심을 가져왔다. 그리고 센터는 이 활동을 주 전체, 나아가 인도 전역에 퍼뜨리려고 한다.

 

개개의 농민은 잃었던 토종을 부활시켜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는 충분한 양의 품종이 제공되어야 한다. 농업 생물다양성은 지역사회가 생물다양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필요를 확신하고, 지역사회의 안에서 다른 곳이 아닌 농민의 밭에서 보전되어야 한다. 곧 센터가 토종을 보전하고자 선택한 방법은, 의식이 유발된 농민들의 연결망을 통해 그들의 농지에서 종자를 보전하는 것이다.

 

 

written by 吉田太郞, translated by 김서방

 

 

인용문헌

 (1) Fehmida Zakeer, Indian farmers learn from old ways, People & the Planet,23 Mar,2007.

 (2) Centre for Indian Knowledge Systems, Organic Farming and Indigenous Seed Conservation, Experiences from Tamil Nadu, 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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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8월 7일 소농학교.

풀 이야기를 나누던 날.

 

 

풀 이야기 강사 김희수 선생님. 

 

모두 경청하고 있습니다. 

 

 

 

차풀의 꽃과 꼬투리. 자신이 콩과인 걸 티내고 있죠. 

 

 

닭의장풀, 달개비풀 ... 이름이 참 다양하지만, 아무튼 닭과 관련이 있습니다.

 

 

요즘 골치라는 미국 새삼. 신기한 생존방식을 가진 식물입니다. 

 

 

작두콩 꽃.

 

 

중국에서 날아왔다는 꽃매미. 언젠가 천적이 생기겠죠? 

 

 

무슨 나비 애벌레. 그러고 보니 4년 전인가 청산도에 갔을 때 그곳에서도 본 기억이 납니다. 

 

 

논에서 풀을 잡는 일꾼 우렁이의 알. 

 

 

건답직파한 논. 확실히 모내기에 비해서는 ...

왜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그렇게 모내기를 금지해도 농민들은 기를 쓰고 했는지 잘 알게 되었습니다. 

 

 

잠자리 번데기.

 

 

열심히 김을 맸습니다. 이맘때 마지막으로 논에서 김을 매는 걸 '만물'이라 하고, '만물'을 끝내는 걸 '만물낸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면 백중 때 호미씻이를 하지요. 

 

 

논일을 마치고 나니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가 내리더군요. 

 

 

옥수수를 타고 올라가길 바라며 심은 동부와 오이가 예상대로 옥수수를 지주로 삼아 올라갔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잘 자란 산도. 풀도 얼마 나지 않네요. ㅋ 

 

 

청산도 검은 수수입니다. 봄에 밭을 만들며 거름을 좀 잘 줬더니 무지하게 크게 자라네요.

 

 

그날 저녁 전 하늘에서 용 구름을 보았습니다. 로또를 사는 건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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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주요 농작물의 품종명에 대하여

 

 

 

서선지장 다카하시 노보루

 

 

1. 머리말

 

 

작물의 품종명은 본래 다른 형태와 성질을 지닌 많은 품종을 서로 구별하려고 편의에 따라 붙인 이름이다. 그래서 똑같은 이름으로 다른 두 개 이상의 품종을 부르거나 또는 동일한 성질을 지닌 품종을, 지방에 따라 사람에 따라서 다른 이름으로 부른다면, 동일 품종이 다른 품종으로 취급되거나 또는 다른 품종이 동일 품종처럼 고려되어 기술적으로 정확한 인식을 어지럽히기에 농사를 지도할 때 기술자와 보조를 맞출 수 없다.

또 당 업자가 다른 품종을 똑같은 품종으로 오해해 그것을 혼동한다면, 생산물의 품질은 뚜렷하게 좋지 않아져, 상품으로의 가치가 실추될 것이기에, 상거래에서도 손실을 불러올 것이고, 따라서 농작물의 품종명은 농업에서만이 아니라 상거래에서 보아도 그것을 정리·통일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미국 등에서는 주요 작물에 품종 명명 규정이 협정되어 있어 작물 품종, 특히 신품종에 대해서는 적당한 이름을 부여하여 등록하도록 되어 있고, 최근에는 신품종의 특허권을 인증하는 법률을 제정해 이미 몇 종의 작물 신품종이 등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품종명을 정리·통일할 필요가 있는 것은 여러 번 역설한 바이며, 논벼 등에는 육성 신품종의 명명 등에 대한 협정이 있지만 아직 신품종의 특허권을 인증하는 법률 등은 제정되어 있지 않다.

조선에서는 이전에 1915년 각 도 기술관 회의에서 ‘작물 품종명을 하나로 정하는 건’이 협정되고, 요즘은 1927년 각 도 농사시험장 주임 토론회에서 ‘품종명 통일에 관한 건’이 제의·협정을 거쳤다. 앞에서는 논벼 두 품종, 목초 2품종, 사과, 배, 귀라 각 1품종의 이름을 하나로 정하고, 뒤에서는 장려품종의 이름을 함부로 바꿀 수 없다는 것 및 순계선택 또는 인공교배로 육성한 신품종의 명명에 대해 협정을 했는데, 일반 재래종에 대해서는 단순히 지방 농사시험장에서 동종 이명, 이종 동명을 정리하는 것을 합의하는 수준에 그쳤다.

재래종 이름의 정리·통일은 품종의 특성 조사 또는 품종의 분류와 서로 맞추어 행해야 하기에, 조선 재래 작물 품종과 같이 종마다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고, 또 현존 품종의 수도 꽤 많은 것은 매우 곤란한 사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농가나 농업기술자 들이 품종의 이름을 바르게 정할 수 있을 정도의 실제적 품종 분류 방식이 확실해지는 한편 품종명 명명의 표준이 규정되었다면, 일반에 이바지하게 처결할 것이다.

종래 본부 또는 지방 농사시험장에서 발표한 재래 작물 품종의 조사나 품종명 통일 등에 관한 보고서는 꽤 많은데, 한두 개를 제외하고는 단순하게 품종의 특성을 기재하는 데 그쳤고, 나아가서 품종명의 정리·통일을 시도한 것은 없으며, 조사의 범위가 대개는 한 도로만 좁히고 있기에 조사 품종 수가 비교적 적다.

필자는 지금까지보다 더 조선 재래 작물 품종의 조사를 행했는데, 아직 완료하지는 못했지만 여기에서는 단순히 조선 재래 작물 품종의 이름이 과거 및 현재에 어떻게 불리고 있는지 그것을 정리·통일을 행하려 하는데, 괜찮다면 채택할 수 있는 적당한 품종명은 어떤 것일지 등에 대하여 대강 서술하고, 끝에 작물 품종 명명 규정에 대한 내 견해를 들어서 학문이 높은 분들의 비판을 얻고자 한다.

 

 

 

2. 조선 고농서 안의 주요 작물 품종명과 그 해설

 

 

조선의 옛 농서 안에 작물의 품종명 또는 특성을 기재하고 있는 것은, 필자가 조사한 범위에서는 ‘농사직설’ ‘금양잡록’ ‘산림경제’ ‘해동농서’ ‘임원경제지’의 다섯 종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농서의 편저자나 발행 연대 등에 대해서는 사람에 따라 의견의 차이가 있는데, ‘농사직설’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 조선의 세종 때 관찬된 것으로, ‘금양잡록’은 약 450년 전 곧 조선 성종 24년 경상남도 진주 사람 강희맹이 지었다고, 산림경제의 편자는 박세당(현종 14년 지금으로 따지면 약 250년 전)이라고 한다.

‘해동농서’는 편자 연대 불명인데, 그 내용 특히 작물 품종의 해설 등에서 보면 ‘산림경제’ 이후에 나왔다고 보인다. ‘임원경제지’는 앞에 적은 서적에 비교하면 매우 근대의 것이 틀림없다. 작물 품종명도 현재 일반에서 부르는 것이 여러 개 기재되어 있고, 또 중국의 농서에서 인용하여 조선에 소개된 벼의 품종만도 약 100종을 들고 있는 점 등에서 볼 때 아마 조선 말기에 작물의 품종 개량이란 면에서 지금으로부터 약 80년 전후에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농사직설’에는 벼, 보리, 콩 등의 품종명은 아직 기재되지 않고, 겨우 조의 품종명이 2종 열거되었을 뿐이다. ‘금양잡록’에는 벼, 조, 콩, 팥, 밀, 보리 등 여러 품종이 기재되어 있다. 그 뒤에 나왔다고 생각하는 ‘산림경제’나 ‘해동농서’ 등에는 모두 여러 품종을 기재하고 있는데, 대개는 ‘금양잡록’의 품종명이나 그 해설과 완전히 똑같은 것이 많은데. 연대가 얼마 되지 않은 농서인만큼 기재된 품종 수가 많아 옛날 농서에 기재된 품종 이외에 신품종이 추가되어 있다.

지금 이러한 농서에 기재되엉 있는 벼, 조, 콩, 밀, 보리의 품종 수와 다른 이름 수를 들면 다음과 같다.

 

밀·보리

농사직설

0

2

0

0

2

금양잡록

27

15

9

5

56

산림경제

34

14

8

4

60

해동농서

37

15

9

4

65

임원경제지

68

조사 못함

조사 못함

조사 못함

68

다른 이름 수

92

24

14

5

135

 

곧 다른 이름은 모두 135종이고, 그 가운데 벼 92종, 조 24종, 콩 14종, 밀·보리 5종이다. 그것들의 품종에는 모두 하나하나 해설이 붙어서, 그 특성 기재 항목도 제법 상세하고, 현대에 있는 작물 품종의 특성 조사 항목에 필적한다. 곧 작물별로 특성 기재 항목을 예거하면 다음과 같다.

 

1. 벼 : 논벼·밭벼. 찰벼·메벼. 까락이 있는지 없는지, 긴지 짧은지. 덜 익었을 때의 까락과 껍질 색깔. 껍질의 두께. 마디의 색. 이삭에 붙은 낟알의 밀도. 쌀알의 크기, 모양. 쓿지 않은 쌀의 속껍질 두께. 미질. 쌀의 색과 향, 빛깔. 맛, 쓰는 데. 도정수율. 심는 때. 익음때. 짚의 강약. 내풍성. 모내기, 곧뿌림, 건답에 대한 알맞음. 산지 등

 

2. 조 : 차조·메조. 이삭 수염의 길이, 있는지 없는지. 줄기 색. 껍질 색. 알곡 색. 이삭 길이. 이삭 모양. 심는 때. 익음때. 알맞은 땅 등

 

3. 콩 : 알 색. 알의 크기. 꼬투리 색. 잔털의 색과 많고 적음. 맛, 쓰는 데. 심는 때. 기르는 법. 알맞은 땅 등

 

4. 밀·보리 : 생육 습성 곧 가을 뿌림, 겨울 뿌림, 중간 성질(두 계절)을 구별. 까락의 길이. 심는 때.

 

이상으로 보면 옛적부터 가장 중요시한 작물인 만큼 다른 이름도 많고 그 특성도 주의 깊게 관찰했는데, 그렇지 않은 것은 다른 이름도 적고 특성의 관찰도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농사직설’ ‘산림경제’ 이외의 농서는 모두 사본으로서, 일반에서 입수하기가 어렵기에 여기에서 각 농서 가운데 중복된 것을 정리하여 다른 품종명과 그 해설을 열거했다.

농서에 따라서는 해설의 문구 등이 적거나 다르거나 오자가 있는데, 앞에 적은 다섯 종류의 농서의 해설을 비교·대조하여 할 수 있는 한 원본의 기술에 따랐다.

조선 고농서 안의 주요 농작물 품종

괄호 안에 기재 농서명을 들어서 출처를 확실히 해 놓았다.

(농직)…농사직설 (금잡)…금양잡록 (산경)…산림경제 (동농)…해동농서 (임경)…임원경제지

 

 

이후의 내용은 우리의 옛 농서에 그대로 나오는 내용을 정리한 것이기에 뺐습니다(- 역자).

 

 

앞에 적은 품종명의 대부분은 현재도 재래종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노인도老人稻, 정근도精根稻, 생동점속生動粘粟, 무건나속茂件羅粟, 조비형속鳥鼻衡粟, 흑태黑太, 황태黃太, 유월태六月太 등과 같은 이름은 벼, 조, 콩의 품종명으로서 보통 통용하고 있다. 그런데 그 품종의 특성이 과연 적혀 있는 해설과 일치하는지 아닌지를 조사하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로, 특히 재래종을 조사하여 품종명을 정리·통일하려는 지금 이러한 점도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다.

 

 

 

3. 현재의 작물 품종명

 

 

1) 조사한 수와 다른 이름 수

여기에서 현재의 품종명이란, 조선을 병합한 이후 현재에 이르는 기간에 불리는 재래 작물 품종명을 가리키고, 그 조사에서는 할 수 있는 한 여러 다른 이름을 망라하기 위해, 지금까지 본부 및 지방 농사시험장 등에서 발표한 벼, 조, 콩, 밀·보리의 재래종 조사에다, 필자가 1921년 이후 여러 번에 걸쳐서 조선 각지에서 수집한 작물 품종명을 더한 것으로, 조사한 모든 수는 실로 1,3770종에 이른다.

이러한 품종명의 대부분은 한자를 써서 표시되어 있는데, 그 안에는 지방의 사투리라 생각되는 한글 또는 가명 문자로 써서 뜻을 알 수 없어 한자로 바꿀 수 없는 것도 꽤 있었다. 이 조사는 한자 또는 한자로 번역할 수 있는 것만 행하고, 한글 또는 가명 문자라 한자로 번역할 수 없었던 것은 모조리 생략했다. 그렇게 하면 한자 품종명에서도 동의어가 꽤 많아 실제로는 동의어와 다른 이름을 구별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예를 들면 달조達租와 월조月租, 화대두火大豆와 불대두佛大豆와 같이 한글로는 똑같이 발음하기에 보통 동의어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것에서도 한자를 주로 하며 그것을 다른 이름으로 간주하여 취급하는 적대두赤大豆와 홍대두紅大豆와 같은, 문자는 다른데 뜻은 똑같이 붉은 콩을 뜻하는 말들은 동의어라고 간주하도록 한다.

각 작물별로 조사한 수 및 다른 이름 수를 들면 다음과 같다.

 

작물별

조사한 수

다른 이름 수

논벼

5623

991

밭벼

501

167

3279

1085

2657

447

보리

1101

103

610

90

총계

13770

2883

 

곧 조사한 모든 개수 1,3770에 대한 다른 이름의 수는 2883이다.

앞의 표에서 논벼·밭벼, 조에는 각각 찰·메 종류가 있어 동일한 품종명을 양쪽에서 헤아린 것이 있다. 또 각 작물에 공통된 품종명이 각 작물별로 다른 이름으로 열거되어서 만약 찰·메별 또는 작물을 구별하지 않고 전반적으로 다른 이름만 든다면, 다른 이름의 수는 오히려 감소한다. 더욱이 한글로 똑같이 발음하는 품종명을 동의어로 정리하면, 다른 이름의 수는 뚜렷하게 적어진다. 이와 같은 것은 이후의 연구로 넘기도록 한다.

그러하면 이상의 조사 결과에서 보면, 작물에 따라 뚜렷하게 다른 이름의 수에 여러 개가 있다는 것이 판명된다. 곧 벼, 조에서는 각 1000종 이상의 다른 이름이 있고, 콩에 다음가는 밀·보리는 겨우 100종을 헤아릴 수 있는 데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 옛적부터 중요시한 벼, 조, 콩 등에는 실제로는 여러 다른 품종이 존재하여 그 특성 등도 일반적으로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것에 반하여, 밀·보리 등의 경우는 전자에 비하면 다른 품종의 수도 적고 농가에서는 그 품종의 특성에 대해 비교적 무관심하다고 상상할 수 있다.

 

2) 품종명의 구성 요소

앞에 서술한 여러 다른 이름의 각개에 대해서 보면, 언뜻 거의 멋대로 부르고 있는 듯하지만 이를 상세히 조사하면 일관된 몇 개의 요소가 성립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조선의 농작물 품종명의 구성 요소를 벼, 조, 보리에서는 12개로, 콩에서는 13개로 구별하고, 모든 다른 이름을 그들의 각 요소에 따라 분류하여 보았다. 지금 각 작물별로 품종명의 구성 요소와 그에 속한 다른 이름 및 다른 이름의 실례를 들면 다음과 같다.

품종명 구성 요소와 다른 이름 수 및 그 실례

 

(1) 벼(논벼)

구별

품종명 구성 요소

다른 이름 수

실례

1

식물체 부분의 색을 표시

80

흑, 백, 적, 황, 청, 은, 금, 갈, 자.

2

까락의 유무, 길이, 기타

29

털, 긴털, 긴목, 수염, 없음.

3

짚의 길이, 분얼, 기타

37

커다람, 길고 강함. 여러 줄기, 키 작음, 많은 가지, 이삭 하나, 세 이삭, 다섯 이삭, 짧은 목.

4

익음때의 늦고 빠름, 심는 때, 방법, 기타

46

올, 가온, 늦. 6월, 소서, 7월, 봄, 겨울, 백로, 사시, 모내기

5

수확량, 기타

26

많음, 밀다리密多利, 一千, 九萬, 다섯 되, 일곱 되, 네 섬, 여덟 섬

6

인명, 관직명

38

노인, 조동지趙同知, 장사, 장군, 정씨鄭氏, 중, 선달, 박, 강태공

7

지명

135

대구, 여산, 거창, 무주, 왜, 충청, 경상, 전라, 해남, 남해, 수원

8

식물명

58

보리, 조, 쌀, 콩, 녹두, 버들, 팥, 대추

9

조수, 물고기

76

소머리, 돼지(豚, 猪), 소꼬리, 꿩, 닭, 까치, 참새, 기러기, 용의 눈알

10

산천, 풍월, 하해, 옥석, 기타

56

돌, 산머리, 물위, 바람, 달, 이슬, 칠성, 모래, 바다, 못, 옥, 얼음

11

이상에 속하지 않는 것

333

精根, 대궐, 戊戌, 野充, 呂實, 구황, 愛達, 德不知, 普德, 京, 남, 북, 서, 辨, 眞

12

이상이 2개 이상 연결된 것

244

多毛白, 毛租赤, 적색조생, 黑目早, 赤多多, 백다다, 은다다, 홍장군, 백장군, 老人白

1158

 

(2) 조

구별

품종명 구성 요소

다른 이름 수

실례

1

식물체 부분의 색

55

흑, 백, 적, 황, 청, 자, 은, 금, 朱

2

수염의 유무, 다소, 이삭 모양, 기타

43

털, 없음, 사각, 2척, 긴목, 짧은목

3

짚의 길이, 분얼, 기타

15

3잎, 아홉 줄기, 긴 짚, 두 이삭, 무성함

4

심는 때, 방법, 익음때, 기타

29

올, 가온, 늦, 50일, 6월, 7월, 봄, 여름, 뿌리, 100일, 화전, 그늘

5

수확량, 기타

16

1섬여, 50섬, 곳간 늘림, 흉년 모름, 만섬, 5만섬, 가마니 넘침

6

인명, 관직명

44

형제, 자매, 노인, 이선달, 정선달, 현감, 장수, 각시, 중

7

지명

91

당나라, 바다, 왜, 장단, 평양, 맹산, 함종, 용강, 함흥, 곽산, 박천

8

식물명

47

박달, 싸리, 몽둥이, 버들, 대나무, 과꽃, 부들, 기장, 들깨, 순무, 쌀

9

조수, 물고기

82

새, 닭, 꿩, 새부리, 저울, 고양이발, 쥐꼬리, 호랑이꼬리, 개꼬리, 소머리

10

산천, 풍월, 하해, 옥석, 기타

22

산천, 풍월, 옥, 돌, 모래, 물, 바위, 청풍

11

이상에 속하지 않는 것

379

荒, 생동, 茂件羅, 隣不知

12

이상이 2개 이상 연결된 것

262

赤稈黃, 白莖靑, 靑長, 芒赤, 赤莖早, 赤莖50섬, 白稈, 白莖豚

1085

 

(3) 콩

구별

품종명 구성 요소

다른 이름 수

실례

1

단순히 특색을 표시한 것

59

흑, 백, 황, 적, 청, 갈, 반점

2

알의 크기, 기타

7

왕, 큰알, 중간, 작은알

3

눈의 색, 크기, 기타

7

검은눈, 차색눈, 붉은눈, 흰눈, 큰눈

4

줄기, 잎, 꼬투리, 콩대의 길이, 기타

20

버들잎, 큰꼬투리, 검은 꼬투리, 붉은 알

5

심는 때, 방법, 익음때, 기타

30

올, 가온, 늦, 조밭, 가을, 장마철, 뿌리, 좁음, 元頭

6

수확량, 기타

12

많음, 빽빽함, 1000알

7

맛, 조리, 쓰는 데, 기타

19

나물, 밥, 찰, 大同, 말린 콩나물

8

인명, 관직명, 기타

6

이감관, 포수, 儒執, 朴

9

지명

66

왜, 洋, 평양, 장단, 평북, 울산, 익산

10

각종 식물 이름

15

피마자, 대추, 조, 밤, 기장, 棒子

11

조수, 물고기, 기타

62

소, 말, 豚, 猪, 호랑이, 쥐, 꿩, 오리알, 매의 눈

12

이상에 속하지 않는 것

36

五前, 流無, 안개, 孟, 삿갓고개

13

이상의 이름이 2개 이상 결합된 것

208

중립백태, 대목황태, 백목청태, 대추태, 차색피마자, 조생적, 白菜, 端川黃

447

 

(4) 보리

구별

품종명 구성 요소

다른 이름 수

실례

1

식물체 부분의 색

7

적, 청, 황, 백, 붉은 줄기, 흰 줄기

2

낟알의 특성

4

껍질, 쌀보리, 찰

3

까락 길이, 유무, 기타

12

털, 수염 없음

4

이삭 모양 또는 이삭의 길이 등

10

이각, 사각, 육각, 십각, 긴 이삭

5

심는 때, 방법, 익음때, 기타

10

봄, 가을, 장마, 올, 가온, 늦, 50일, 줄뿌림, 점뿌림

6

수확량, 기타

8

5畝 4섬(일본 종자?)

7

인명, 관직명, 기타

10

노인, 중, 갓, 양반, 아이, 李

8

지명

13

왜, 동아, 영남, 경남, 수안, 목포

9

식물명

6

대두, 참깨

10

조수, 물고기

6

개꼬리, 큰 거북, 돼지, 제비꼬리, 매미

11

이상에 속하지 않는 것

6

鄭乃, 洞, 藥

12

이상이 2개 이상 연결된 것

11

豚裸, 春裸, 童皮, 백사각, 흑육각, 육각조생, 중육각, 긴까락육각, 燕童, 사각춘, 육각춘

103

 

(5) 밀

구별

품종명 구성 요소

다른 이름 수

실례

1

식물체 부분의 색

9

적, 청, 백, 자, 흰 줄기

2

낟알의 특성

9

메, 찰, 껍질, 裸

3

까락 길이, 유무, 기타

8

긴까락, 긴수염, 털, 까락, 많은 까락

4

이삭 모양 또는 이삭의 길이 등

3

긴 이삭, 짧은 이삭, 어지러이 김

5

심는 때, 방법, 익음때, 기타

10

봄, 가을, 올, 가온, 늦, 7월

6

수확량, 기타

0

-

7

인명, 관직명

6

8

지명

12

왜, 胡, 고려, 간도

9

식물명

5

대추, 콩, 차

10

조수, 물고기

5

豚, 猪, 까치, 장어

11

이상에 속하지 않는 것

2

우산, 부채, 달, 화살대, 荒, 眞

12

이상이 2개 이상 연결된 것

21

有芒白, 早熟短穗, 赤僧

90

 

이상에 따라서 명확해졌듯이, 조선 재래 작물 품종명의 구성 요소는 각 작물 대부분 공통이고, 품종의 형태·성질이나, 심는 때·방법, 수확량의 많고 적음 등을 표현하는 이른바 실질적인 이름이나, 인명·지명·동물명 등에서 인용한 것이 매우 많다. 또는 이들의 이름이 2개나 3개가 연결되어 성립한 것도 있어, 고유명사라 부르기보다도 오히려 보통명사와 같다.

따라서 하나의 품종명이 각 작물 공통으로 쓰이고 있는 것이 꽤 많아, 예를 들면 식물체 부분의 색을 표시한 흑·백·적·청·황 등의 문자는 벼·조·콩·밀·보리의 품종명에 공통으로 사용된다. 또 익음때의 이르고 늦음·수확량의 많고 적음·기타 각 요소에 속한 품종명에서도 각 작물 공통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매우 많아, 올·가온·늦·빽빽히 많음·많음·왜·洋·버들·꿩·돼지·호랑이·소 등과 같은 것이 그 적합한 예이다.

그 재래 작물 품종을 놀랍도록 여러 다른 이름으로 교묘히 부르는 데에 구애되지 않는 농가의 품종에 대한 개념은 유감스러우면서, 그것과 상반되지 않으며 매우 막연하다고 할 수 있다.

 

3) 품종명의 지방 분포

각 작물에 공통으로 쓰이는 품종명은 또 지방적으로 보아도 그 사용 범위가 넓어, 대개는 온 조선에 분포하고 있다.

지금 여러 종의 품종명에 대해 그 분포의 실례를 들면 다음 표와 같다.

그러나 표 안의 숫자는 조사한 수를 나타내는 것으로, 동일한 품종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작물 품종명의 지방 분포

(1) 벼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황해

평남

평북

강원

함북

함남

1

흰벼

6

10

13

1

4

8

2

7

0

8

4

9

1

73

2

검은벼

11

0

0

5

2

0

6

2

10

21

0

11

10

78

3

올벼

6

2

6

4

2

2

2

6

8

5

6

5

1

55

4

多多租

25

10

21

21

25

19

22

3

4

0

21

8

7

186

5

노인도

30

8

14

6

6

38

11

11

2

0

17

4

0

147

6

麥租

31

14

15

5

7

4

1

26

27

14

14

0

0

158

 

(2) 조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황해

평남

평북

강원

함북

함남

1

붉은조

2

1

0

2

2

3

5

4

1

2

1

2

2

27

2

노란조

1

0

2

1

5

7

9

3

0

1

3

2

3

37

3

올조

3

2

1

1

1

6

4

8

1

5

3

7

0

42

4

고양이발 조

7

2

8

5

5

8

2

3

2

3

7

5

2

59

 

(3) 콩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황해

평남

평북

강원

함북

함남

1

흰콩

33

14

22

14

40

54

20

10

9

17

14

7

1

255

2

청콩

36

16

17

3

15

50

15

12

17

34

22

4

9

260

3

검은콩

36

7

29

17

29

29

21

10

19

16

20

4

6

243

4

왕콩

11

4

7

4

7

3

2

31

3

6

2

1

0

216

5

아주까리콩

13

3

5

0

2

5

2

7

2

0

4

0

0

43

6

쥐눈이콩

8

3

9

4

7

18

7

19

7

8

11

1

1

103

 

(4) 보리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황해

평남

평북

강원

함북

함남

1

껍질보리

11

9

14

5

19

25

16

18

6

4

6

2

0

135

2

쌀보리

11

6

9

2

2

15

8

7

0

2

8

1

1

73

3

봄보리

8

5

5

5

5

13

7

18

10

1

10

5

0

92

4

童麥

6

12

5

18

17

26

3

0

0

0

5

0

0

91

 

(5) 밀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황해

평남

평북

강원

함북

함남

1

중 밀

14

6

7

6

6

6

3

12

4

0

17

4

0

85

2

올밀

5

8

3

1

0

9

12

1

2

1

4

0

0

46

 

앞 표에 같은 품종명으로 모아 놓은 품종이 모조리 같은 품종인지 또는 여러 종류의 다른 품종인지는 정밀한 실지 관찰의 결과에 의하지 않으면 확언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가령 흰벼라는 1종의 벼 품종이 함경북도의 북단부터 전라남도의 남단에 이르기까지 재배할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조·콩·밀·보리의 품종에 대해서도 각각 적응력에 차이는 있어도 한 품종을 가지고 온 조선에서 재배한다는 것은 기후와 풍토의 차이에 따라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래서 함경북도의 흰벼와 전라남도의 흰벼는 같은 품종이라 간주할 수 없는 것이 확실하다.

곧 조·콩·밀·보리 안에도 다른 종이나 같은 이름인 것이 매우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거기에 반하여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어도 사실 같은 품종인 것, 곧 다른 이름이나 같은 종도 매우 많다는 것은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품종명으로는 매우 불편하고, 하나의 품종명은 하나의 품종에만 붙이는 쪽으로 정리·통일해야 한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4. 작물 품종명으로서 적당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조선 재래종에는 다른 이름 같은 종이거나 같은 이름 다른 종 등이 매우 많고, 각 작물 사이에 공통으로 쓰이거나 또는 동일한 이름이 각 지방의 다른 품종의 품종명으로 쓰이고 있는 현상이 있기에, 이들의 품종명은 시비를 가려 정리·통일해야 한다.

그러나 품종명의 정리·통일은 이미 서술했듯이 품종의 특성 조사의 결과와 맞추어 완료할 수 있는 것이기에, 여기에서는 단순히 품종의 특성 조사가 완료될 경우에 채택할 수 있는 적당한 품종명과, 그 채택 방법 등에 대해 한마디 하고자 한다.

작물의 품종명에 한하지 않고 대개 작물의 이름은 하나의 작물을 다른 것과 구별하고자 편의에 따라 부르는 것이기에, 판연히 구별되는 이름이 첫째 조건이 아닐 수 없다. 예를 들면 단순히 군선이라 불러도 군선에는 전투함도 있다면 순양함, 잠수함도 있기에 어떤 배의 종류를 가리키는 것인지 판연하지 않다. 더욱이 전투함이라 불러도 그 안에는 여러 다른 것이 있기에 어느 전투함을 가리키는 것인지 명료하지 않다. 그래서 ‘陸奧’라든지 ‘長門’이라든지 부르는 고유명사를 써서 각각의 전투함을 구별한다.

작물의 품종명도 그것과 같아, 하나의 작물 안의 어느 한 품종과 다른 품종을 구별하기 위해서는서로 헷갈리지 않도록 고유명사를 써서 불러야 한다. 하나의 품종명에 두 개 이상의 품종이 포함되거나, 또는 두 개 이상의 품종명이 하나의 품종을 가리키면 완전히 품종명 본래의 임무에 반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벼의 한 품종을 단순히 우량종, 재래종 또는 메벼, 찰벼라고 부르거나, 또는 보리의 품종명으로 단순히 껍질보리라든지 쌀보리라든지 부르는 것은 ‘육오’나 ‘장문’을 단순히 군선이라 부르는 것과 같은 것이기에, 이와 같은 보통명사는 품종의 명칭으로 가장 적당하지 않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누런콩, 청콩 등의 명칭도 또한 품종 분류에서 보면, 하나의 이름에 여러 품종이 포함될 수 있기에 한 품종의 이름으로는 적당하다 할 수 없다. 그러한 이름이 옛날부터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경우에는 비교적 재배 범위가 넓은 어느 한 품종의 이름으로 한정할 수밖에 없다.

품종명은 또 일반 농업 관련 업자들이 쓰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에, 가능하면 쉬운 단어로 읽기 쉬도록 하는 것이 좋다. 또 품종명에 따라서 그 품종의 특성을 연상할 수 있는 이름이 좋지만, 국화나 나팔꽃 같은 변화종의 이름처럼 실질적·분해적으로 한 점에 붙인 이름은 보통 작물의 품종명으로는 쓸데없이 길어서 일반적으로 적당하다고 할 수 없다. 재래 품종명에 여러 번 보이는 개똥조라든지 돼지똥조 등이라 부르는 것은 조의 형질을 연상시키기보다는 오히려 불쾌한 느낌을 불러일으켜서 품종명으로는 적당하지 않다. 필자는 일찍이 수원에서 논벼의 성육으로 만든 신품종, 고천수高千穗×석백石白을 ‘千石’으로, 다마금多摩錦×군익郡益을 ‘多益’으로, 조신력早神力×곡량도穀良稻를 ‘神穀’이라 명명했던 일이 있다. 그러나 품종명에 따라서 특별히 그 품종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기에 너무 과장하는 것도 마땅하지 않다.

조선 작물의 품종명에는 앞에 기술했듯 각종 식물의 이름이나 조수·물고기의 이름을 활발히 인용하고 있다. 거기에는 麥稻, 米稻, 米麥이라 부르는 것조차 있다. 품종명이 되거나 작물명이 되거나 아주 명백히 어려운 것도 있다. 그러한 것은 품종명으로는 물론 적당하지 않지만, 대추콩, 밤콩 등처럼 오랫동안 일반적으로 통용하고 있던 것을 무리하게 말살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러한 것은 이른바 재래종 안의 어느 한 품종에 한정하여 쓰고, 다른 품종명으로 쓰지 않도록 하는 편이 좋다.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에서 볼 때는 각 작물의 다른 품종 수는 다른 이름 수에 비하여 훨씬 적기 때문에, 다른 품종에 대한 다른 이름의 안배에 맞추어 꽤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안배 방법은 여기에서 확정적으로 서술할 수는 없지만, 또는 나팔꽃 품종명을 붙이는 방법처럼, 어떠한 약속을 해 놓는다면 매우 편리하지 않을까 한다.

예를 들면 재래 품종명의 구성 요소의 하나하나를 품종 분류의 적당한 항목으로 안배하여, 콩을 본다면 황색 종피인 것에는 식물명, 녹색 종피인 것에는 지명을, 갈색 종피인 것에는 동물명을, 흑색 종피인 것에는 인명을 부여하거나, 또는 대립종에는 두 개의 구성요소를 연결한 이름을 쓰든지, 소립종에는 하나의 구성요소를 쓰자고 약속하 놓는다면, 그 이름에 따라서 품종의 특성을 어느 정도까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복잡하지 않은 재래 품종의 이름도 그런 방법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품종 대장을 만들고, 그 뒤에 발견하거나 이입되거나 또는 육성된 신품종은 그 대장에 등록한다면, 거의 완전히 품종 및 품종명의 통일을 이루어, 기술자는 물론 관련 업자에게도 표준이 확실해질 것이다. 식물분류학에서 보듯이, 작물의 품종도 또한 그 완전한 초목과 종자의 표본을 적당한 곳에 보존해 놓는다면 품종을 동일하게 정하는 데에 매우 편리하며, 작물 품종 개량의 효과를 한층 높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5. 작물 품종 명명 규정”은 크게 의미가 없는 듯하여 생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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