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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29일, 괴산 지역 3차 사전 조사에 나섰다. 이번부터는 방침을 달리해, 간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수집할 수 있으면 하면서 본격적으로 다니기로 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30분 동안 준비하고 집을 나섰다. 6시 화성 봉담에 사시는 안완식 박사님 댁에서 모두 모여 10분 뒤 출발!

차가 밀리기 전에 출발한 작전이 주효했다. 하나도 막히는 일 없이 괴산까지 달렸다. 다들 아침 전이라 휴게소에 잠시 들러 아침을 먹고 괴산에 도착하니 9시 30분. 오늘은 일찍 나섰으나 괴산 IC로 내려가 조사하려고 하여 네비게이션을 설정해 따라가다가 길이 어긋나면서 한참을 돌았다. 덕분에 충주에서 괴산 불정면으로 넘어오는 대간치라는 곳을 지나왔다. 참으로 깊고 깊은 산골이다.

 

가장 먼저 지난 조사 때 들른 하소를 기점으로 지문마을 찾아갔다. 이곳은 몇 가구 살지 않았는데, 특이 사항이 없어 그냥 훑어보기만 하고 돌아나왔다.

 

강 건너에서 바라본 사실(새말). 

 

 

다음은 지문 마을 건너에 있는 사실이란 마을을 찾아갔다. 이곳에 오니 무슨 파리가 이렇게 많은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다. 할머니께 들으니 언덕 너머에 계사가 생기면서 여름마다 이 난리라고 한다. 마을에 축사가 생긴다고 하면 크게 반대한다고 하더니 다 그 이유가 있어 그렇구나. 집에 들어서 할머니를 만난 김에 조사를 시작했다. 먼저 텃밭에 심어 놓은 아욱에 대해서부터 물었다. 아욱은 옛날부터 계속 받아서 심는 것인데 장에서 파는 씨앗은 이 맛이 나지 않는다며 맛이 참 좋다고 하신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조사 때 보았던 그 아욱과 비슷하다.

 

사실 마을에서 만난 괴산 지역 토종 아욱(위), 아래는 그 꽃. 

 

 

 

 

아욱 씨를 받아주시는 임삼례(78) 할머니. 할아버지도 돌아가시고 몸이 불편하여 이제 농사를 못 짓는다고 하신다.

 

 

사실 마을 댑싸리. 이것도 특성이 다르다며 나중에 받을 씨 목록에 추가되었다. 

 

 

다음은 광진리 방향으로 중리 마을을 찾았다. 들어서서 마을회관 바로 옆에 있는 집의 텃밭에서 특이한 오이를 발견했다. 하지만 집에 사람이 없어 내력을 알 수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 옆집에 찾아가 연락처를 물었으나 이상한 외판원 취급이다. 자신들은 시골집으로 놀러와서 아무것도 모른다며 문전박대... 흐음 이럴 때는 참 기운이 빠진다. 도시물을 먹은 사람이라 그런지 의심부터 하기는. 집에 누가 찾아오면 반갑지 않은 도시의 문화이기에 그렇겠지. 인간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

할 수 없이 기록만 하고 차에 올라타 돌아서려는데 경운기를 탄 할머니, 할아버지가 마을 어귀로 들어오신다. 혹시? 나 하는 마음이 역시나였다! 얼른 따라 들어가 텃밭으로 할머니부터 모시고 왔다. 오이는 누구한테 얻어 심었다는데 미국 오이라고 하신다. 이게 조선 오이보다 맛이 좋아 본인은 이걸 즐겨 먹는다고 하셨다.

 

미국에서 왔다고 하신 백오이.

 

 

백오이의 어릴 때 모습. 

 

 

조선 오이가 어릴 때(우)와 이렇게 다르다.

 

 

백오이를 조사하시는 안완식 박사님과 씻지도 못하고 조사에 응해 주신 홍애희(64) 할머니.

 

 

이 집의 이상하게 생긴 차조기. 이후 다른 차조기들은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이와 달랐다. 홍애희 할머니는 차조기에 밤, 대추, 박속, 인동덩굴을 넣고 함께 달여서 감기약으로 쓴다고 하신다.

 

 

댑싸리로 만든 비. 헛간에 이런 댑싸리 비가 엄청 많았다. 할아버지의 솜씨. 

 

 

오늘의 수집 씨앗. 황기장. 

 

 

문전박대 당한 바로 옆집에 자라고 있는 차조기.

 

 

이후 바로 옆에 있는 상리를 지나면서 보니 과수 단지가 크게 자리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1사 1촌 맺기로 뭔가 협약을 맺었는지 여기저기 홍보하는 현수막이 잔뜩 걸려 있다. 또 신원터와 잿골도 몇 가구 살지 않으며 과수가 많아 그대로 통과했다.

다음 광진리의 진대라는 곳에 도착했다. 이곳에 왔을 때 전화가 오는 바람에 조사에 적극적으로 함께하지 못해서 아쉬운데, 이 마을에서도 백오이를 발견했다. 이런 걸 보면 안완식 박사님 말씀이 딱 맞다. 그 마을에서 가장 토종이 많은 집을 보면 다른 집은 보지 않아도 거기서 거기다. 또 이 마을에 이런 것들이 있으면 옆 마을에도 이런 것들이 대개 있다. 많은 경험에서 나온 말씀이실 텐데 다니면서 그 말이 꼭 맞음을 실감한다. 백오이 말고도 여러 가지 묻고 싶은 것들이 잔뜩이었으나 집이 비어서 일단 그냥 나왔다.

 

 

진대 마을에서 본 콩. 아스팔트를 깔기 전에 심었다가 길이 깔리면서 겨우 자라고 있다. 웬지 토종의 운명을 상징하는 듯하여 사진으로 남겼다.

 

 

진대 마을에서 만난 조선호박. 이것 말고도 긴호박도 심고 계셨다.

 

 

다시 차에 올라 광진리 샘골로 향했다. 마을이 어수선한 것이 어쩐지 토종도 떠난 듯하다. 길가에서 조를 만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갔으나 어디서 가져다 심은 것인데 혼자 떨어져 저절로 자란 것이란다. 마을 분위기가 어수선하면 토종도 찾기가 어렵다. 이 마을은 좀 더 살펴보다가 그냥 지나갔다. 광진교를 지나 작담 마을에 들어갔으나 이곳도 ...

 

텃밭에 그냥 떨어져 절로 자란 조.

 

 

옆 마을인 광석 마을에 들어갔다. 소담한 집에서 구지뽕을 심어 놓았다. 구지뽕은 왜 구지뽕일까? 뭘 굳이 뽕이라고 하겠습니까? 라는 뜻에서 구지뽕인가?

 

구지뽕나무. 주인이 없어 내력은 알 수 없었다.

 

 

이 구지뽕은 어디서 온 것인지 알아보려고 주인을 찾았으나 대문이 걸려 있다. 옆집에 가사 낮잠을 주무시는 할머니를 깨워 여쭈니 충주 사는 사람인데 한 번씩 찾아온단다. 그래서 대신 할머니 댁에 무엇이 없는지 여쭈었다. 그래서 발견한 것이 마늘이다. 시집 와서부터 계속 심는 것인데, 알이 좋은 건 장에 내다 팔고 씨를 할 것만 처마 밑에 달아 놓았다.

 

광석 마을에서 만난 마늘.

 

 

이제 추점리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운평이란 마을에 들어갔는데 거대한 대학찰옥수수 집하장이 서 있다. 더 볼 것도 없이 그대로 돌아나왔다. 이 일대를 다니며 안완식 박사님은 "대학찰이 토종을 다 몰아냈구나"라고 읖조리신다. 흐음... 농가 수익을 생각하면 대규모 단작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다 보면 농촌 공동체는 물론 종의 다양성도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니 어느 정도 선에서 균형을 맞춰야 하는 것인지 어려운 문제이다.

 

다음으로 가래울 마을에 들어갔다. 훤칠하게 구릿빛 지붕을 만들어 놓은 집이 눈에 확 들어온다. 마을을 한참 빙빙 돌다가 추점교회에서 신기한 자두나무를 발견했다. 목사님 왈, '누가 갖다가 심었는데 처음 몇 년 동안은 매실인 줄 알았는데 자두더라'하신다. 알이 그렇게 굵지는 않은데 무지 달고 색이 노랗다. 이런 자두는 잘 육종해서 상품성만 갖추면 정말 좋겠다.

 

추점교회에서 발견한 자두. 한낮의 땡볕에 헉헉 대다가 이걸 먹고 기운 좀 차렸다. 물론 목사님께 얻어 마신 커피도 한몫하고... 커피를 마시고 나와서 자두를 먹었는데 그래도 달더라.

 

 

추점교회 자두나무. 

 

추점교회. 이런저런 사회복지 서비스에 충실한 모습이었다. 목사님이 무지 바쁘시겠다. 이날도 강남 쪽에서 아이들 50명이 농촌봉사활동을 와 정신 없었다.

 

 

가래울에서 장연면 방향으로 뒷골이란 마을이 있는데 이곳은 축사 단지. 들어갈 것도 없이 그냥 지나갔다. 또 지도에 나온 주정골이란 곳으로 산길을 따라 올라갔다. 예전에는 화전민이 꽤 살았던 듯한데 지금은 농원 하나가 과수원을 하고 있다. 

다음은 바로 옆의 석산 마을에 들어갔다. 이 마을은 나와도 개인적으로 관계가 있어 오랫만에 참 반가웠다. 이 마을에 사시는 김제건 할아버지와 조인숙 할머니 댁에서 이것저것 많이 볼 수 있었다. 먼저 이 댁을 찾은 동기는 차조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것이 거창으로 시집을 간 딸이 맛있다고 준 상추로 번지고, 다시 어금니동부, 개팔이동부, 덩굴강낭콩, 대국콩(강낭콩), 덤불콩에 완두콩으로까지 건너가 조금씩 얻기도 하고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도 했다. 강낭콩을 대국콩이라고 부르는 점이 재밌다. 원래 우리 콩이 아니라 중국에서 건너왔을까? 배추 가운데 호배추니 호콩이니 하는 것도 바로 중국을 가리키는 말이다. 2008년 울릉도에 갔을 때 그곳에서는 강낭콩을 호콩이라 한 기억이 떠올랐다. 강낭콩의 유래는 중국일지도 모르겠구나.

 

거창으로 시집을 간 딸이 주었다는 상추. 끝내 그 내력을 알 수 없어 안완식 박사님이 내내 아쉬워하셨다. 한눈에 좋은 상추라고 평하셨는데 무슨 차이인지 알 수 없는 나에게는 그저 상추일 뿐...

 

 

조인숙 할머니를 만나게 해 준 차조기.

 

 

이런 저런 동부는 한 봉지에 모았다가 심으신다.

 

 

대국콩.

 

 

석산 마을을 돌다가 만난 재밌는 외양간. 어미소와 다 큰 송아지인 듯한 놈들이 새로운 사람을 보고 신기한 듯 쳐다본다. 이 집은 왜 담배 말리는 곳을 이렇게 개조했을까? 

 

 

벌써 시간은 2시가 다 되었다. 늦은 점심을 먹으러 산골식당이란 곳을 찾았다. 괴산휴게소에 바로 붙어 있어 입소문을 타고 기사들도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많이 찾아오나 보다. 실제로 먹으니 정말 깔끔하고 음식이 괜찮았다. 이곳에서 확인도 할 겸, 분지골이란 곳에 아직도 사람이 사는지 물었다. 돌아온 답은 이제 사람은 살지 않는단다.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바로 건너편의 새말에 갔으나 별다른 건 찾지 못하고, 다락골은 3~4가구가 있다고 하는데 외지에서 들어와 산다고 하여 올라가지 않았다. 

 

지도에 쇠잿말이라 표기된 곳을 찾아 들어서는데, 입구에 엄청 오래된 느티나무가 두 그루나 서 있다. 아직도 당산목으로 역할을 하는지 나무 밑둥에는 금줄이 쳐 있다. 나중에 들어서 알았는데 무려 1000살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정도면 나무가 아니라 정말 신神이다. 솔직히 신이라 불러도 문제가 없을 정도가 아닌가! 내려서 사진이라도 박을 걸 시간도 없고 그냥 눈으로만 보고 지나친 게 아쉽다. 아무튼 쇠잿말은 중부내륙고속도로로 마을이 두쪽이 나 버렸다. 안으로 깊숙히 들어가 보았는데 기도원만 자리하고 있고 사는 사람은 별로 없다. 풍수지리를 좋은 명당 자리 찾는 데만 쓰는 게 아니라 이렇게 지형의 모습, 강과 산이 이어져 생태계가 온전히 유지되는지 등으로 과학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마련되면 좋겠다. 한쪽에서 그런 작업을 하는 듯한데 아직 미흡하다.

 

쇠잿말을 나와서 장연면 면사무소 소재지의 양지말을 찾았다. 이곳은 뭔가 있을 법한데 지금은 잘 알 수 없었다. 일단 담장에 커다란 호박이 달린 집을 찾아서 들어갔다.

 

다 크면 20kg은 될 거라는 거대한 호박. 어릴 때 모습(아래)

 

 

 

 

집 안으로 들어서니 어디서도 보기 힘든 제비가 이곳에 둥지를 틀고 살고 있다. 그것도 두 곳이나. 이런 집은 뭔가 되어도 되는 집안이 아닐까? 예상이 맞았다. 옆집 아저씨가 그러는데 이 집에 사시는 할머니가 이번 괴산군수의 누님이라고 한다. 괴산에서 의뢰를 받아 일하는데 이런 우연이 있나. 재밌다.

 

오랫만에 만난 제비. 반갑다, 제비야! 제비만 보면 왜이리 반가운지 모르겠다. 둥지 안에는 새끼들이 자라고 있었다.

 

 

이 마을은 웬지 뭔가 있어 보여 한참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또 상추 하나를 발견. 이 상추도 내력을 찾고자 열심히 다녔는데 주인을 만날 수 없었다. 

 

 

 

그렇게 상추 임자를 찾다가 만난 박영희 할머니 댁으로 따라가서 대신 울타리콩과 아욱을 찾았다. 아욱이 자라고 있는 모습이 궁금해 지금 밭에 자라고 있는 건 없냐고 여쭈니 저쪽 집에 가면 똑같은 게 자라고 있다고 하여 거기까지 다시 찾아가 사진을 찍었다.

 

두 종류의 울타리콩(위와 아래) 

 

 

 

박영희 할머니 댁의 아욱과 비슷하다는 그것. 그러고 보니 괴산은 아욱을 참 많이 심는다. 이것도 괴산 지역만의 특징.

 

 

이제 점점 더 심심 산골로 들어가게 된다. 먼저 거문동으로 갔다. 이름도 깊은 산골임을 알려준다. 거문동. 거문, 검은, 검다 ... 이런 말이 간혹 한자로 이름을 표기하면서 현玄이니 거문巨門이니 하는 식으로 변하기도 했는데, 그 뜻은 단군왕검과 통한다. 검, 감, 곰은 '신'이나 '크다'를 뜻하는 순수한 우리말이다. 그러니 이곳 거문동은 신의 마을 또는 큰 마을이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잠깐 더 나아가면 일본어가 우리말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일본어에서 곰을 뜻하는 웅熊을 '쿠마'라고 읽는다. 쿠마는 곧, 곰의 일본식 발음인 셈이다.

마을에 들어가자마자 할머니 한 분을 만나 토종 씨앗에 대해 여쭈었다. 본인은 아파서 농사를 못 짓고 다른 농사짓는 할머니들은 모두 한의원에 침 맞으러 나가셨단다. 이런 허탈한 순간이... 나중에 다시 찾아올 생각을 하며 밭에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파악이라도 하고자 돌아다녔다.

 

율무 암꽃과 수꽃이 함께 핀 모습(위와 아래).

 

 

 

 

율무 밭.

 

 

한창 사진을 찍으며 다니고 있는데 노란 봉고차 한 대가 들어온다. 가만히 지켜보고 서 있으니 할머니들이 잔뜩 타 계신다. 얼른 차에 올라 부리나케 좇았다. 

 

거문동에서 할머니들을 찾지 못해 절터골이란 곳까지 들어갔다. 그곳에는 1가구만 살고 있는데, 농사지을 때만 잠이나 잔다고 하여 더 들어가지 않았다. 위는 그곳에서 만난 잠자리. 

 

 

 

노란 봉고차는 바로 교회의 차였는데, 목사님이 할머니들 모시고 침 맞으러 갔다오시는 길이었다. 그 차에서 내리신 김태숙(78), 정경순(70) 두 할머니에게 토종 씨앗에 대한 여러 정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마을은 괴산잡곡과 계약 재배하여 율무와 기장을 많이 심는다고 한다. 할머니들은 이제 다들 몸이 망가져 쉬셔야 하는데도 그래도 하던 일이라 일을 손에서 놓치 않고 계신다. 그런다고 쉬신다고 뭐가 달라질 것도 아니고 오히려 병만 더 생기실 수 있으니, 그저 농사꾼은 끝까지 땅을 파다가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이 숙명인가 보다. 아무튼 이 마을에서 일단 비수수, 참깨, 들깨, 율무, 차조기를 확인하고 씨를 얻을 수 있는 건 조금씩 얻었다.

 

비수수(위)와 참깨(아래)

 

 

 

 

 

참깨가 자라고 있는 모습.

 

 

차조기. 

 

 

산자락을 개간해 심은 들깨밭. 

 

 

들깨. 

 

 

김태숙 할머니의 곳간. 할머니 댁은 아직 소를 부려 쟁기질을 하며 농사를 짓고 계신다. 언제 농법과 관련해 취재를 오면 좋겠다.

 

 

율무. 

 

 

 

김태숙 할머니 댁의 곳간 문에는 이런 장부가 적혀 있다. 이 문을 보니 2008년 강화도에서 찾아간 한 농가가 생각난다. 그곳에서도 문에 어느 논에서 얼마의 수확이 났는지 적어 놓았다. 

 

 

거문동을 나와 송티를 넘었다. 송티, 송치, 솔티... 모두 소나무와 관련이 있는 지명이다. 우리말로 바꾸자면 솔고개랄까. 이곳에도 마을이 하나 있었는데 가구 수도 얼마 되지 않고, 별 볼 일이 없었다. 대신 고개를 넘어 샘이 있어 잠시 더운 몸을 식혔다.

 

 

끊임없이 맑은 찬 물이 샘솟는다. 물이 얼마나 많이 나는지 큰 정수기 물통에 금세 물을 채울 수 있다.

 

 

목을 축인 다음 바로 양우실 마을로 향했다. 소가 송아지에게 젖을 먹이는 형상의 지형이라고 하는데 확인하지 못해 모르겠다. 이곳에 오르니 재미난 모습이 보인다. 아마 이 근처 어디에 골프장이 들어오나 보다. 앞서 거문동에서 할머니 한 분이 골프장이 들어오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이곳은 직접적인 피해가 있는지 결사반대를 외치고 있었다.

 

양우실의 어느 집. 요즘 생태계를 교란하고 있다는 가시박꽃과 함께.

 

 

양우실 마을에서 별 소득 없이 돌아나오는 수집단의 모습.

 

 

다시 아랫마을로 내려왔다. 이곳은 송덕이라 한다. 이 마을의 특징은 한마디로 신품종이 많다는 것이다. 토종은 눈을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신품종으로 보이는 참깨. 위의 거문동의 참깨와 비교해 보시면 좋겠다.

 

 

송덕부터 장암까지 마을길이 쭉 이어졌다. 큰길로 나가지 않고 마을길을 따라서만 무엇이 없을까 노려보며 나아갔다. 결론은 말짱 꽝. 얼른 신대라는 새터 마을로 방향을 돌렸다.

이곳에서는 100년 가까이 된 돌배나무를 발견했다. 엄청 크다. 키가 지금은 끝부분이 부러져서 그런데 14~15m 정도 되었을 법하고, 흉고도 145cm나 된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아주 옛날부터 있었다고만 기억할 뿐, 언제 누가 어떻게 이 자리에 자리를 잡았는지는 몰랐다. 대신 원래는 2그루였는데, 하나가 밑동이 썩으며 쓰러지고 지금 남은 나무도 몇 년 전 비바람이 심할 때 끝이 부러졌다는 기억만 전해주셨다. 역시나 옛날에는 즐겨 먹었는데 요즘은 아무도 별 관심이 없다고...  

 

100년이 넘은 듯한 돌배나무.

 

 

 

 

시간은 어느새 6시가 가까웠다. 이제 조사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 원래 연풍까지 돌아볼까 계획했는데, 꼼꼼하게 조사하고 돌아다니니 하루에 1개 면이면 족하다. 그래도 이렇게 다니니 그냥 훑고 지나다니는 것보다 훨씬 좋았다. 오늘 탈락된 곳은 나중에 다시 들를 일이 없으니 지금 고생하면 나중에 더 편하겠다. 또 하나하나 확인하며 지나니 더 자세히 많은 걸 볼 수 있어 조사하기도 더 재밌다.

신대를 나와 이제 장암리 점말이란 곳을 찾았다. 이곳에서도 역시 상추가 눈에 띄었다. 주인이 집에 없어 확인할 길이 없어 일단 누구네인지만 파악해 놓았다. 나중에 꼭 들러서 확인해야 한다. 이후 마을의 다른 집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점말에서 만난 결명자와 헛개나무 열매(아래) 

 

 

 

헛개나무.

 

 

이제 장연면의 마지막 마을 교동이 남았다. 마을에 들어서니 꽤나 큰 마을이었다. 버스도 다니고 가구 수도 꽤 많다. 차를 타고 지나다 안완식 박사님의 눈이 흰덩굴콩을 발견했다. 허투루 지나는 법이 없으시다. 저녁을 먹고 있는데 문을 두드리고 불러 이것저것 물었다. 이 콩은 여기서는 납짝해서 빈대콩이라 부르는데 밥에 넣어 먹는단다. 이게 참 맛있어서 다른 건 넣지 않는다고... 4월에 심어 8월부터 익은 거 따 먹다가 나중에 남은 것에서 씨를 받는단다.

 

빈대콩이라 불리는 흰덩굴강낭콩.

 

 

 

또 여기서도 아욱을 찾았다. 이놈의 아욱은 괴산 여기저기 참 많기도 하다. 근데 이 아욱은 왜 그런지 키가 엄청 크다. 3m 가까이 되는 듯하다. 거름간 옆에 있는 건 거름을 많이 먹어서 그렇겠고, 도랑에 있는 건 개숫물을 많이 먹서 그렇겠지. 거름을 많이 하면 엄청 크는구나.

 

거름간 옆의 아욱(위)과 도랑의 아욱(아래). 

 

 

 

이 마을에서 오늘의 마지막으로 피마자를 수집 목록에 올리고 돌아섰다. 피마자는 따로 심으시는 건 아니고 그냥 떨어져 울타리 삼아 그대로 키우신단다. 나중에 씨를 꼭 받아 놓으시면 얻으러 오겠다고 말씀드리고 차에 탔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하니 오늘은 중복이 아닌가. 음성 읍내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집으로 향했다. 현관에 들어서니 어느덧 11시가 넘었다. 오늘은 일단 자고 정리는 나중에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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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22일, 괴산 지역 토종 수집에 앞서 두 번째 조사에 나섰다. 오늘은 감물면이 그 대상 지역이다. 아침 7시에 출발했는데 도로에는 출근하는 차량으로 가득하다. 다음에는 더 일찍 나서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되면 연풍이 자식 산책시키는 게 더 힘들어지는데 걱정이다.

 

화성 봉담에 사시는 안완식 박사님을 태우고자 달렸다. 이쪽은 출근하는 차량이 더욱 많아 길이 막힌다. 지체하게 생겼구나. 도로를 달리는데 옆으로 아파트 공사가 한창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출신 때문인가, 온 나라 안이 공사장이다. 이 아파트 공사 때문에 안완식 박사님도 이사를 가게 생기셨다. 요즘 미분양이 넘친다는데 왜 그리 기를 쓰고 공사를 벌이는지 모르겠다. 혹시 최후의 발악?

 

 

10시 조금 넘어 괴산에 도착하여 변현단 선생님을 기다린다. 오는 길에 지난 1차 때 미처 다 보지 못한 불정면의 일부 지역을 둘러보고 왔다. 역시 안완식 박사님이 계셔서 그런가 사전조사에도 안정감이 생겼다. 안철환 선생님이 변현단 선생님을 부르는 호칭이 참 재밌다. "변 선생" 또는 "변 대표"라고 부르신다. "변"이란 성씨 때문에 그런가 보다. 흙살림 교육장 마당에서 10여 분 정도 기다리니 변 선생님이 단양에서 달려와 마치 카레이서처럼 부앙~ 하며 들어선다.

 

 

 

오늘은 감물면의 계담 서원이 자리한 계담이란 동네부터 시작한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자마자 첫 집부터 깔끔하니 맘에 들었다. 차에서 내려 확인 작업에 들어갔다. 지난 번에는 그냥 차 안에서 둘러보기만 했는데 이렇게 해야 하는 것이었구나.

 

몇 가지 토종 작물이 자라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주인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을에 씨를 받으면 그때 다시 오기로 약속하고 밭에서 자라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주소를 적었다.

 

아래는 토종 땅콩이다.

 

 

배추처럼 속이 찬다는 배추상추.

 

 

텃밭의 어느 한 곳도 그냥 허투루 놀리는 법이 없다. 이 밭은 땅콩밭인데, 먼저 마늘을 심어 수확한 뒤에 땅콩을 심었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 옆으로는 옥수수를 심어 한 번 거두어 먹고, 다시 베어낸 옥수수 옆에는 녹두를 심었다. 도대체 몇 가지 작물을 돌리시는 것인지 모르겠다. 이 농사법도 꼼꼼하게 물어 기록하면 좋겠다. 다음에는 놓치지 말고 묻도록 하자.

 

 

텃밭의 전경. 서로 다른 작물이 제자리를 차지하며 어우러져 함께 자란다.

 

 

계담을 나오는 길에 하늘이 너무 아름다워서 카메라를 들었다. 밑으로는 괴산의 주요 농작물인 담배밭이 펼쳐져 있다.

 

 

이후 차를 타고 열심히 이 마을 저 마을 돌았다. 햇살은 따가울 정도로 뜨겁고, 차 안에서 에어컨을 틀어도 시원하지도 않고, 이런 날은 그냥 그늘에 앉아 바람이나 기다리는 게 상책일 터. 하지만 쉴 수 없다. 부지런히 돌아야 오늘 안으로 감물면의 사전조사를 마칠 수 있다.

이담리를 지나 오창리로, 다시 백양리와 구월리로, 또 살짝 걸쳐 있는 장연면 방곡리 일부까지, 자리하고 있는 마을마다 쑤시고 다녔지만 특별히 사진으로 남길 만한 것은 찾지 못했다. 처음에는 괴산은 산골짜기가 많으니 그곳에 살고 있는 분들이 토종을 꽤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지도에 산골짜기에 마을이 있다고 표시되어 있으면 그곳에는 이제 사람이 살지 않는다. 아니면 한두 집이 남아 돈벌이작물만 아주 넓게 심어 먹고 살았다. 또 그리고 큰길이 나면서 집들도 싹 새로 뜯어고치거나 새로운 문물이 들어가면서 옛것은 설 자리를 잃었다. 처음 생각보다 수집 품목이 적을지도 모르겠다.

어느덧 시간은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잠시 땀도 식히고 배도 채울 겸 식당으로 들어섰다. 오늘 수고한 차는 그냥 햇볕 아래에 놓았다.

 

 

변현단 선생님과...

 

 

안철환 선생님... 둘 다 얼마나 입심이 센지 모른다. 조사하는 내내 심심하지 않게 다니고 있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농업기술센터로 찾아가 황용하 소장님을 만났다. 이제 정년이 1년 남으셨다는데 퇴직 이후에는 토종을 키우고 널리 알리려는 일을 하시려 한단다. 지금도 꽤 많은 종류의 토종을 농장에 심고 있으시다. 소장님께 가지고 계신 토종 목록과 기억하고 있는 괴산만의 토종이 있으면 내용을 정리해 나중에 전해달라 부탁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괴산읍을 가로질러 칠성면 쪽을 통해 다시 감물면으로 들어섰다. 맹이재를 넘는데 여기에도 골짜기에 마을 표시가 있었으나 실제 마을은 찾을 수 없었다. 

다음은 매전리로 향했다. 매전리는 예전 토종 수집단 발대식 때 감물면 신리에 사시는 강영식 님이 매전의 안민동에는 뭐가 많을지 모른다고 언급했던 곳이기도 하다. 지도로도 엄청 산골짜기이다. 그 끝에는 무심사라는 절도 하나 있어 겸사겸사 그곳으로 향했다.

양산목이란 곳에 도착하니 이런 곳에도 논이 있다. 산골이지만 들이 꽤 있어 농사짓고 사는 집이 아직도 많다. 몇몇 집을 keep해 놓고 다시 위로 올랐다.

 

 

 

드디어 길의 끝에 이르렀다. 이곳에 자리한 무심사. 주변으로는 화전민들의 집이었던 곳이 꽤 보인다. 예전에는 농사땅으로 썼을 법한 곳도 여러 곳 눈에 띈다. 무심사는 "인간극장"이란 프로그램에 나온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에 사연 많은 동자승들이 있다는데 오늘은 그들을 보러 온 것이 아니니 땀만 식히고 목을 축인 다음 서둘러 길을 나섰다.

 

 

땀을 식히는 사이.

 

 

 

무심사 뒷편으로 펼쳐진 파란 하늘.

 

 

 

다음은 안민동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처음 보이는 집에서 한 할머니가 누가 이런 골짜기에 들어오나 쳐다보고 계신다. 슬그머니 다가가 이런저런 것을 묻고 확인한 다음 사진에 가지깨를 담았다. 다음에 오면 수집 대상이다.

 

 

조금 위로 오르니 마을회관이 있다. 그 앞에 어울리지 않게 소화전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까지 마을의 누군가가 텃밭으로 쓰고 있었다. 이 땅의 농민들은 땅 한 조각도 그냥 놔두는 법이 없다. 참으로 부지런하다.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 서너 명의 할머니와 할아버지 한 분. 그 가운데 한 할머니가 집으로 향하시길래 따라나섰다. 그 집에서 아래와 같은 배추상추를 보았다. 

 

 

또 토종 아욱도 있었다. 이건 잎이 작고, 잎의 모양도 시장에서 보던 아욱과는 달랐다. 이것도 나중에 수집 대상.

 

 

그리고 할아버지와 이야기하다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청배에 대해 슬쩍 물었다. 그랬더니 이 동네에 그 나무가 있다며 우리를 이끄셨다. 지금은 방치되어 과실도 잘 달리지 않고 다른 나무에 치이고 있었다. 100년쯤 되었을 거라는데, 어릴 때는 그렇게 맛있게 먹었다며 기억을 떠올리신다. 귀한 나무인 줄 알았으니 앞으로 손보고 관리하시겠다는데 다음에 올 때는 어떤 모습일지 자뭇 궁금하다.

 

 

청배는 청실리라고 한다. 한자로는 靑實梨 푸른 열매의 배나무라는 말이다. 간혹 청실배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무튼 익어도 이건 누렇게 되지 않고 푸릇푸릇하며, 오히려 누렇게 되면 껍질이 두꺼워져 맛이 떨어진단다. 예전에 먹었을 때 당도가 무지 높았다고 하는데, 기억은 상대적인 것이라 요즘처럼 단 것이 많은 세상에서는 어떤 맛일지 모르겠다.

 

 

과실이 제대로 달리지 못하고 많이 떨어졌는데, 그래도 몇 개가 달린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안완식 박사님이 알려주신 좋은 구도로 사진에 담았다.

 

 

이곳도 대부분의 땅은 외지인이 소유하고 있단다. 전원주택으로 개발하려나? 땅은 땅의 가치로 그냥 놔두면 좋겠다. 소유와 매매의 가치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아는 사람 중에 감평사로 일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 바람대로 될려면 그 사람의 직업이 사라져야 하겠구나.

청실리가 서 있는 집은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 폐가이다. 그래서 이 나무를 따로 관리하는 사람이 없었다. 동네 할머니께 들으니 이 마을의 대부분이 70~80대라고 한다. 가장 젊은 사람이 60대라니 말 다했다. 초고령 마을이다. 앞으로 10년 뒤, 아니 5년 뒤만 되어도 많은 분들이 이곳에서 떠나시겠지...

 

 

 

청실리 조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목에서...

 

 

 

안민동을 떠나 광지실로 나갔다. 너른 땅의 마을이란 뜻일 게다. 실제로 지도로 보면 주변 산들 사이의 너른 땅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그곳에 자리한 마을이 광지실이다. 허나 이런 너른 땅은 축사 등을 많이 한다. 괴산 지역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다지 볼 게 많지 않았지만, 댑싸리 한 장 찍고 다음 마을로 넘어갔다.

 

 

배나무여울이란 곳을 마지막으로 둘러보았다. 예전에는 뱃사공이 마을사람과 길손을 건너다 주었겠지만, 지금은 다리가 놓여져 배나무여울이란 이름만 남았다. 제대로 관광지를 만들려면 그 다리부터 부숴야 한다. 찾아가기 어렵게, 또 찾아갔으면 하루 이상은 머물게 만들어야 관광지가 뜬다. 그런데 사람들의 생각은 그 반대다. 찾아가기 쉽게 길부터 잘 닦고, 음식점이나 마구 난립하게 만들어 아무 특색도 맛도 없는 곳으로 만들어 버린다. 전통이 살아 숨쉬는 곳에 사람이 붐비는 법이다. 그런 맥락에서 토종도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이제 돌아가는 길에 진짜 마지막으로 오창리의 유창이란 곳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박과 조롱박을 발견하고 기록에 남겼다. 주인 할머니를 찾아가 이것저것 묻고 싶었으나, 옥수수 출하로 정신 없이 바빠 욕만 바가지로 먹었다. 하도 귀찮게 파리처럼 딴 데 가지도 않고 서 있으니 그제야 몇 가지 일러주신다. 지금이 한창 바쁠 때라 그럴 게다. 그렇게 보면 수집조사는 겨울이 가장 좋지 않은가 한다. 여름에는 이렇게 사전조사 다니며 살아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겨울에는 수확도 끝났겠다 본격적으로 수집에 나서는 방법이 좋겠다. 허나 예산을 지원하는 곳에서는 예산을 결산하기 전까지 결과를 보길 원하니 맞추기가 어렵다. 이번 수집의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그 기간 조정이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아래는 박의 수꽃이다. 

 

 

그리고 암꽃에는 이렇게 작게나마 박이 달려 있다.

 

 

유창 3리에서 가지깨.

 

 

유창 3리에서 해질 무렵에 바라본 마을 앞 논. 논두렁에는 콩이 자라고 있다. 

 

 

 

마지막 조사지를 나오고 있는 안완식 박사님.

 

 

시간은 6시가 넘었다. 간단히 저녁을 먹고 출발하자는 의견에 목도 다리 부근의 매운탕집에서 밥을 먹었다. 집에 돌아오니 11시가 다 되었다. 피곤한 몸을 누이고 잠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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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26일, 소나기를 뚫고 밭에 다녀왔습니다.

지난 주말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을 것이 분명하기에 둘러보려고요.

 

대화초가 몇 번의 폭우를 맞고도 든든히 서 있더군요.  

물론 몇 그루는 쓰러진 놈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하늘을 향해 오르고 있습니다.

발로 꾹 밟아 세워줘야 했으나 그냥 통과!

 

대파와 함께 심은 건, 병에는 좋을지 몰라도 서로 거름 경쟁을 합니다.

그건 문제가 아닐 수 없지요.

 

 

 

그래도 전에 한 번 풀을 잡아주어 그다지 풀이 많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수시로 김매기해야 합니다. 이번 주말에는 땀 좀 흘리시겠습니다.

 

 

 

벼룩기장은 벌써 이삭이 팼습니다. 이 맘 때가 가장 예쁜 모습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안완식 박사님은 벼가 가장 이쁠 때가 세 시기가 있다고 하십니다.

싹이 나와 자랄 때, 이삭이 팰 때, 익을 때가 그것이지요.

 

 

 

 

 

 

공동밭의 전경을 찍어 보았습니다.

이게 무슨 밭인지 정신 없을 정도로 다양한 작물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사진만 보고 어떤 작물들이 자라고 있는지 맞추신다면! 졸업하셔야겠습니다. ^^

 

 

 

한 두둑 건너와서 다시 한 장!

어떤가요? 풀이 엄청 많지요. 이번주는 반드시 김매기를 확실히 해주십시오.

기장과 조 사이사이에는 피도 엄청 자라고 있더군요.

이제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니까 조와 기장을 조심하며 뽑아주세요.

 

 

 

 

참, 우리가 심은 조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무엇이 무엇인지 보시겠습니까.

 

 

 

위의 것이 노란조입니다. 이삭일 때부터 벌써 뚜렷하게 차이가 나네요.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노란조가 가지런히 자라고 있는 모습을 찍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날 방문의 핵심이었던 상추꽃은 아직도 예쁘게 피어 있습니다.

얼른 씨를 맺어야 할 텐데... 이번 주말에는 그냥 베어서 말려야겠습니다.

 

 

 

 

 

또한 참깨도 무럭무럭 자라고 있습니다.

모두 두 가지 종류를 심었는데 자라고 있는 모습부터가 다릅니다.

 

 

이것이 바로 가지깨입니다. 가지를 닮아 가지깨가 아니고, 가지를 많이 친다고 가지깨입니다.

가지를 치는지 어떤지 모르시겠다면 아래의 40일깨를 한번 보세요.

왜 가지깨인지 단박에 깨달으실 겁니다.

사실 저도 이번에 괴산으로 토종 수집 사전답사를 다니며 안완식 박사님 어깨 너머로 배운 바입니다.

 

 

자, 위의 40일깨는 그냥 줄기가 하나로 쭉 뻗지요. 바로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오면서, 지난 봄에 심은 해바라기가 소나기가 지나간 뒤의 맑은 하늘과 그림처럼 어우러져 있더군요.

이 어찌 눈에 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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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의 전통농법 밀파Milpa1)·솔라solar 농법




세계에서 가장 앞선 농업 체계


‘세계에서 가장 발전한 농업 체계’라고 FAO가 절찬한 것이 바로 밀파Milpa라는 농법이다. 아마도 밀파는 지금까지 인류가 창조한 것 가운데에서도 가장 성공한 발명품의 하나일 것이다.2)


스페인 사람이 라틴아메리카에 새로운 식물이나 닭고기, 돼지, 양, 소 등의 가축을 들여왔는데, 밀파는 그 이전부터 멕시코나 중앙아메리카에서 행하던 전통농법이다. 캠퍼시노Campesino란 라틴아메리카의 자원이 모자란 농민을 표현하는 단어인데, 그 문화나 농업의 특성은 다양한 가축과 채소를 솔라solar라 불리는 텃밭과 함께 유지해 왔다는 점이다.3)


지금도 마야족의 농민은 좁은 밭에서 부대밭 농업을 행하면서, 이 밀파 농법으로 필요한 식량을 자급한다.4) 높은이랑이나 둑 위에서 사이짓기하는 작물의 김매기나 수확을 손으로 하기에 그런 면만 보면 원시적이다. 하지만 농약과 화학비료 없이도 수확량이 높다. 밀파의 옥수수밭에 필적할 만큼 생산적이고, 또 지속가능한 유기농업은 세계의 어느 곳에서도 거의 볼 수 없다.



지속가능한 생태계 관리로 농촌이 필요한 물자를 제공


그럼 밀파는 생태농업적으로 보아 어떤 점이 우수할까?


첫째는 옥수수의 단작 재배와 비교하여 2ha 이하의 좁은 면적으로도 다양한 식용작물을 재배하여 전체의 생산성을 높인다는 점이다. 밀파는 ‘세 자매’라고도 불리는 옥수수·리마콩·호박을 사이짓기하는 특징이 있다. 리마콩은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연유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흰 강낭콩이다. 그리고 피망 등의 채소나 색비름(amaranth), 약초, 퀘리테스(명아주과)라고 불리는 식용 풀을 함께 기른다.


옥수수, 콩, 호박을 사이짓기하여 콩과 식물의 질소 고정 능력으로 자연히 땅심이 개선되기에 화학비료는 넣지 않는다. 게다가 부대밭 농법의 돌려짓기는 식생이 자연스레 갱신되듯이, 2년 재배에 8년을 묵히는 기간이나 식생의 2차 재생을 고려한다. 묵히는 기간을 짧게 줄이지 않고 이 돌려짓기가 이어지는 한, 이 체계는 꾸준히 지속될 수 있다.


둘째는 병충해에 강한 점이다. 다양한 작물을 사이짓기하는 것으로 병충해의 생물적 방제력을 높여, 농약은 최저한도만 쓴다.


셋째는 지구온난화의 방지에 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밀파에서 생산된 옥수수의 부산물이나 풀을 가금류나 소에게 먹이는데, 이를 사료로 주기에 제초제가 쓸데없다. 그런데 근대적인 사육우에서는 지구온난화의 원인이 되는 이산화탄소나 메탄가스가 발생한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Drymaria laxiflora Benth와 같은 풀은 소의 세포내강 안에서 사료의 발효 효율을 높여 이산화탄소나 메탄가스의 발생을 줄인다는 것이 밝혀졌다.


넷째는 양질의 식재료를 자급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가축류는 싼값으로 고품질의 단백질인 달걀이나 우유를 제공하고, 밀파로 재배한 작물은 영양학으로 보아도 균형 잡힌 좋은 음식이다. 단백질이나 니아신을 합성하는 데에는 아미노산의 리신이나 트로톱판을 빠뜨릴 수 없는데, 옥수수는 이를 결핍하고 있다. 그런데 콩에는 리신이나 트로톱판이 함유되어 있고, 호박은 비타민을 제공한다.


다섯째는 밀파가 자급용 식량이나 사료작물만이 아니라, 건설자재, 땔감, 양봉용 2차 식생이나 수렵하는 동물과, 농촌 사회가 필요로 하는 자재를 종합적으로 제공한다는 점이다. 밀파에서는 긴 휴한기가 있는데, 그 휴한지가 들새나 작은 포유류의 서식지가 되어 생물다양성을 보전함과 동시에 전통적인 숲 관리와 함께 자급용 수렵에 좋은 생태계를 만든다.



2만 종의 옥수수를 보전


생태계만이 아니다. 밀파 농법은 작물의 유전적 다양성에서도 농약이나 화학비료, 개량 품종을 쓰는 근대농업의 농지와 비교하여 매우 풍부하다. 예를 들면, 대개 옥수수는 15품종, 콩은 5품종, 호박은 3품종, 그리고 피망도 6품종 이상을 재배한다.


멕시코나 중앙아메리카에서는 옥수수의 품종이 2만 이상이며, 멕시코 남부와 중앙부에서만도 약 5000종이 특정되어 있다. 오악사카Oaxaca의 어느 마을에서 연구자들은 17개의 다른 미환경微環境을 특정했는데, 거기에서는 26종의 옥수수가 재배되고 있었다.


캠퍼시노는 그 텃밭인 밀파·솔라가 자신의 생활을 성립시키는 자원이며, 민족의 정체성의 일부이기 때문에 신에게 기원하며 감사해 왔다. 하지만 솔라는 생활의 장인 동시에 재미와 품종의 원산지, 실험의 장이었다. 캠퍼시노는 오랜 시간에 걸쳐 종자 선발이나 교환을 통해 고원의 저온 조건에서도 농업이 행해지는 품종을 포함하여, 고도나 토양 유형과 강우와 같은 환경의 차이에 대응하고자 근대적인 하이브리드 품종이나 GMO보다도 훨씬 건강하고 병충해에 강한 다양한 토종을 육종해 왔다.


옥수수의 고대 원종이라 하는 것은 멕시코부터 과테말라에 걸쳐서 자생하던 테오신트Teosinte인데, 이것도 몇 세기나 밀파를 통하여 캠퍼시노가 보전하여 왔다. 근대농업에서는 유전자원의 다양성을 잃어버렸지만, 밀파에서는 그것을 지키고 있다. 곧 멕시코는 인종에서도, 식물 유전자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보고인데, 밀파는 세계에서 귀중한 유전자원을 보존하여 온 농법임을 알 수 있다.



근대농업으로 위기에 직면한 밀파 농법


하지만 지금 밀파 농법은 위기에 방치되어 있다. 멕시코 정부는 과거 30년에 걸쳐 화학비료나 농약, 개량 품종 등 녹색혁명 기술에 따른 옥수수의 단작과 푸에블라 계획(Plan Puebla)을 추진했다. 멕시코 정부의 농업보조금(PROCAMPO)은 충분하지 않지만, 그것조차도 옥수수를 단작으로 재배하는 농민에게만 준다. 그뿐만 아니라 멕시코에 도입된 근대농업이 가져온 결과는 참담하다.


화학비료를 지나치게 주어 토양이 산성화되고, 지하수가 오염되었다. 제초제를 뿌려 콩이나 호박이 영향을 받고, 식용 풀도 말라 버렸다. 농약의 뿌려서 이전에는 풍부했던 매쿼이maguey 벌레, 물고기나 민물새우 등의 식용 곤충도 죽어 버렸다. 그리고 부시, 클린턴, 오바마 정권이 몬산토 사의 유전자조작 옥수수를 멕시코가 활용하도록 압력을 넣어, 토종 옥수수를 오염시키고 있다.


현지의 환경 조건에 맞지 않는 다수확 옥수수 품종의 단작이 진행된 결과, 작물의 수확량이 떨어져 생산비가 폭등하여 수입이 줄었다. 그리고 지구화에 따른 옥수수 값의 하락이나 보조금 삭감도 농민에게는 큰 상처가 되었다. 지금 멕시코의 농촌에 사는 1200만의 선주민들의 93%가 빈곤 상태에 놓여 있다. 남성은 농가외소득을 구하러 돈을 벌러 나가야만 하여 몇 백 만의 멕시코인이 미국으로 이주했다. 농촌에 남은 사람은 여성이나 아이, 노인뿐이고, 지금은 그들이 농사짓고 있다. 하지만 노동력이 줄면 전통 기술도 유지할 수 없다. 밀파 농법과 관련한 식물 품종의 지식도 잃어 가고 있다. 지금 멕시코는 옥수수를 자급할 수 없어 때로는 대량의 옥수수를 필요 이상으로 미국에서 수입해야만 한다. 밀파의 다양함으로 풍족하면서 영양적으로도 균형 잡힌 식사를 하던 것도 수입 옥수수나 정크푸드를 기본으로 하는 것으로 변했다.



전통농법의 부활과 지역 재생


그러나 밀파 농법을 다시 도입하여 옥수수의 단작으로 고갈된 토양을 수복하고, 더욱이 지속가능하게 환경에 우수한 농업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있다. 밀파에서는 홍수의 위험을 줄이고, 수질을 개선하며, 토양침식을 막고, 기후를 제어하는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똑같은 상황에 놓인 세계의 다른 지역의 사례도 된다. 그리고 밀파 농법으로 얻은 교훈은 현지의 입지조건에 알맞은 기술이 개발될 경우에만 캠퍼시노가 농업을 계속할 유인책을 갖고, 토종의 유전적인 다양성을 지속할 수 있다는 점이다. 현지의 전통적인 지혜를 보전하고, 캠퍼시노가 자신의 유전자원을 관리하고, 지역 자급을 해 나가기 위해서도 전통적인 밀파를 부활시키는 데에 희망이 있다.

 

 

written by Yoshida Taro, translated by 김서방

 


1) 중앙아메리카에서 쓰던 작부체계. 유카탄반도 지역의 멕시코에서 가장 널리 형성되었다. 그 단어 밀파milpa는 멕시코어로 ‘들판’이란 뜻이고, 나와틀어의 ‘들판으로(milli<field>+pa<towards>)’라는 구에서 유래했다. 고대 마야인과 중앙아메리카인들의 경작 방법에 기반한 밀파 농사는 옥수수, 콩, 리마콩, 호박(squash)을 생산했다. 밀파의 주기는 농사를 짓는 2년과 묵히는 8년이다.

2)  Alexis Baden-Mayer & Ronnie Cummins, Thank Indigenous People for the Food We Eat, The Milpa Agroecosystem and Its 20,000 Varieties of Corn, Organic Consumers Association, Nov26, 2009.

3) Milpa-Solar Systems (Mexico), GIAHS, FAO.

4) "Milpa" Agroecosystems in Yucatan, Mexico, Agroec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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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과 토종농사 강의안


1. 농사의 알파에서 오메가, 흙 ― 로타리와 쟁기질

① 건강한 흙이란?

② 흙의 떼알구조를 파괴하는 로타리

③ 토종농사에선 쟁기질, 괭이질, 호미질로 밭을 만든다


2. 흙을 살찌우는 방법 ― 화학비료와 거름

① 화학비료를 사용하면…

② 거름은 무엇인가?

③ 토종농사에선 거름을 어떻게 주었을까?


3. 생명의 보고, 씨앗 ― 모종과 씨앗

① 모종을 하는 이유?

② 옛날에 모종을 했던 작물은?

③ 모종보다 곧뿌림(직파)이 좋은 이유? 토종의 특징과 중요성!


4. 무엇을 지을 것인가 ― 작부체계

① 현대 농업의 특징 단작과 광작

② 토종농사는 다양한 농작물이 함께 자란다(사이짓기, 섞어짓기, 돌려짓기).


5. 제대로 농사짓기 ― 제철과 제자리 찾기

① 현대 농업은 철을 잃어버린 농사

② 제철에 맞는 농사를 짓던 토종농사

③ 농지정리의 폭력성 - 자연조건을 고려해야 한다

④ 그 흙에 알맞은 농작물을 선택


6. 석유에서 자유로워지자

① 농기계, 농약, 화학비료, 비닐에서 벗어나는 농사

② 시작은 작은 텃밭에서, 마무리는 국민 모두가 농부로

③ 건강한 생산이 건강한 소비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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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청상추가 잘 자라고 있다. 얼른 옮겨 심을 때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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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흥 연두농장에서 자라고 있는 토종병아리들.

부화기도 손수 만들어 키우고 있다. 다 큰 놈들은 밖에서 열심히 돌아다니며 먹을거리를 찾으러 다니고, 알에서 막 깬 병아리들은 이렇게 따뜻하게 보호를 받으며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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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30일, 날씨는 맑지만 바람이 강해 춥다. 먼저 어제 날이 저물어 보지 못한 성읍 2리쪽을 돌아보기로 했다. 여기도 중산간이니 기대할 만하다. 차를 타고 오르는 길은 좋은 드라이브 코스다. 이 길도 곧 확장공사를 한다고 하니, 이런 경치를 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아기자기한 맛이 있어 참 좋은데...

 

성읍 2리는 올라가보니 목장 지대였다. 농사는 그리 많이 짓지 않고 말을 키우는 곳이 많았다. 경치가 좋아서 그런지 별장 식으로 지은 듯한 집도 꽤 보였다. 그래도 차에서 내려 이 마을을 한참 돌다가 다시 표선 쪽으로 내려갔다. 다음 목적지는 제주민속촌마을을 가보기로 했다. 관광객들이 아침부터 참 많이 왔다.   

제주의 전통 뗏목, 테우. 보기에는 위험해 보이지만, 이런 배가 오히려 뒤집히는 일이 없다고 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물이 귀한 제주에서는 빗물도 허투루 버리지 않고 이렇게 받아서 썼다.

 

 

눌. 뭍에서 낟가리라 부르는 것과 같다. 바람이 많은 곳답게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돌로 매달아 놓았다. 

 

 

제주의 옛 민가. 옥수수를 주루룩 달아놓았는데, 제주에서 옥수수를 이렇게 많이 심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는데... 

 

 조 같은 씨앗을 심은 뒤에는 이 섬피를 끌고 다니며 흙으로 덮었다.

 

제주의 장독대. 제주의 장독은 그 색도 독특하다. 흙이 다르기 때문이겠지. 

 

 

제주의 부엌. 역시 굴뚝이 따로 없다. 벽은 그을음으로 검게 그을렸다. 메주를 저렇게 달아놓으면 그건 괜찮았을려나? 

 

 

세간이 참 단촐하다는 느낌이 들어 한 장 찍었다.  

 

 

아이들이 돌릴 수 있도록 마련해 놓은 맷돌. 

 

 

김칫독을 묻어 놓은 곳도 아닐 테고, 정확히 뭔지  잘 모르겠다.

 

 

그 옛날 라이터나 성냥이 없을 때 썼다는 불씨를 보관하는 도구.

 

 

이것도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죽은자의 집, 상여. 

 

 

벼를 훑어서 털던 그네. 

 

제주의 보습. 밭에 돌이 많아서 그런가 뭍의 것보다 좁다. 

 

남태. 씨앗을 심고 흙을 다지는 용도로 쓰던 것.

 

 

표선 민속촌을 구경하고 세화1리 쪽으로 향했다. 이곳은 지난 여름 제주에서 토종 조사 사업을 하면서 만났던 고옥화(76) 할머니께서 살고 계신다 한다. 일단 집 앞 담장에 있던 나팔꽃의 씨앗을 채집했다. 고옥화 할머니께는 제주의 옛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아래는 그 내용이다.

지금은 피를 가는 사람이 있을까 모르는데, 옛날에는 피쌀이라 하여 송당이나 성읍에서 많이 했다. 피쌀은 3번을 방아 찧어서 체로 고르는데, 맛이 좋다. 포근하니 입에 넣으면 보드라운데, 먹고 나면 배가 일찍 꺼진다. '송당 목장'에서 아직도 피를 가는 것 같다. 습기가 많은 데는 피, 어느 정도 있는 데는 산듸, 없는 데는 조나 고구마를 심었다. 여름에는 한 달에 한 번 돗거름(돼지거름)을 냈다. 보리에 돗거름을 섞어서 뿌리고, 말이나 소로 밟는다. 사람이 있냐 없냐, 거름이 있냐 없냐에 따라 씨를 심는 법이 달라졌다. 거름이 없으면 그냥 쫙쫙 뿌리고, 있으면 하나로 섞어서 들고 뿌렸다.

그 아들 분께서 같이 자리하여 말씀하시기를, 내가 42세인데도 어렸을 적에 하루 두 끼 먹은 적이 거의 없었다. 형편이 좀 나은 편이었는데도 그랬다. 제사 때나 쌀밥을 먹을 정도였고, 겨울에는 보리범벅이나 메밀범벅을 자주 먹었다. 좋은 메밀쌀은 제사 때 쓰고, 후진 것으로 두 번 세 번 갈아서 고구마범벅에 넣는데, 그러면 색이 거무티티해진다. 고구마절간은 뱃때기라고 불렀다.

따뜻한 커피를 얻어 마시며 이야기를 듣고 인사를 드리고 나와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냥 기사식당 같은 곳이었는데 다른 어느 곳보다 인심도 후하고 맛있으며 값도 쌌다. 나중에 제주를 다시 찾으면 꼭 다시 들르고 싶은 곳이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계속 표선면 일대를 누비고 다녔으나 별로 소득은 없었다. 아니 전혀 없다. 그래서 아까 들은 송당 목장으로 피를 찾으러 가기로 했다. 송당 목장을 지도에서 찾아 산으로 올랐다. 조금 헤매다가 송당 목장에 도착하니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려고 한다.

 

송당 목장 사무실로 들어가는 길.

 

목장 사무실을 찾아가 관계자 분을 만났다. 피는 사료로 쓰려고 심고 있는데, 현재 반장님이 집에 씨를 보관하고 있어 이곳에는 없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 찾아오기는 어렵고 하여, 우리가 피를 찾는 목적을 말씀드리고 주소와 발송비 명목으로 비용을 드리고 왔다. 이 피는 이후 집으로 돌아갔을 때  틀림없이 배달되었다.

이제 어느덧 마지막 날이 되었다. 내일은 비행기 시간도 있고 하여 여기저기 많이 다니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한 달에 걸친 기간이 마지막이라니 지난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 참 시간이 빠르기도 하다.

 

 송당 목장은 전체 넓이가 여의도의 몇 배나 된다고 한다. 이 드넓은 초지에서 말과 소가 다니며 한가로이 노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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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6일. 집에서 하루를 보내고 다시 비행기로 제주에 왔다. 이번 조사에는 안철환 선생님이 합류해 모두 4명이 되었다. 공항에 내려 차를 빌리고, 시내에서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으며 시간을 아끼고자 앞으로 어디를 돌지 미리 지도를 통해 둘러보았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다시 황사평에 단지 무를 찾으러 갔다. 전화 연결이 되는 듯하였으나 갑자기 끊어졌다. 이로써 두 번째 실패. 도대체 언제쯤 만날 수 있는 걸까?

어쩌랴, 할 수 없이 다음으로 미루고 이번 일정 안에만 만나기로 작정하고 길을 나섰다. 오늘은 저 남쪽, 제주시의 반대편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여 서귀포시 안덕면 화순리로 이동했다.

 

 안덕면으로 가는 길에 만난 햇살. 구름을 뚫고 나오는 모습이 뭔가 앞날에 서광을 비추는듯...

 

 

모텔에 들어서니 이미 날이 어둑해지고 있다. 오늘은 여기서 그만두고 쉬기로 했다. 비행기를 타고 건너온 첫날이기도 하고, 이미 1차에서 열심히 수집한 탓이기도 하다. 근처의 중앙식당을 소개받아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아침도 이 식당에서 먹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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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1일. 날씨가 흐리고 공기가 차갑다. 바람도 좀 분다. 남쪽나라 제주도라고 우습게 봤다가는 안 되겠다. 일단 옷부터 단단히 챙겨 입어야지.

 

8시 40분 어음리에 도착했다. 이곳에 오기 전 봉성리를 지났으나 거기는 별 거 없었다. 봉성리는 다들 큰 읍내로 출퇴근을 하시는가 보다.

 

결국은 찾은 어음리... 어음 2리 3129번지에서 일단 보리콩을 구했다. 뭍과 다르게 보리콩이란, 보리를 거둘 때 거두는 콩인지, 보리를 심을 때 심는 콩인지 잠시 헷갈린다. 뭐였더라???

 

 

 

이렇게 보리콩만 얻고 끝날 줄 알았다. 집이 워낙 정결하고, 뭐 알아볼 수도 없어서 더 그랬다. 하지만 이렇게 끝날 수 없는 곳이란 걸 금방 깨달았다. 집 구석구석에서 발견한 수확의 흔적들... 아래에 보이는 콩가리도 그렇다. 높이 쌓지는 않았지만, 두 분이 사시면서 이런 콩가리를 쌓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할머니에게 더 달라붙어 말을 걸었다. 역시나 할머니에게서는 이것저것 있는 곳이 있으니 가자며 곳간으로 이끄셨다.누가 알았을까? 이곳에서 제주도에서 볼 수 있는 종자의 거의 절반을 다 보았다.

 

 

씨앗을 꺼내 보여주시는 양혜옥(74) 할머니. 평생 농사만 지으신 할머니이신지라 사람이 찾아오는 일도, 사진을 찍는 일도 어색하시기만 하다. 그냥 할머니... 그냥 할머니시다.

그렇다고 할머니만 이런저런 씨앗을 보여주신 건 아니다. 할아버지께서도 낯을 가리지 않고 자기의 농사를 다 보여주셨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낯선 사람... 이상한 사람이 찾아와 씨앗을 보여달라고 채근하는 것이라 느낄 만도 한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보여주시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고마운지 이번 일을 통해서 새삼 절실히 깨닫는다.

 

 

계속 농사짓는 씨앗을 꺼내 보여주시는 강형준(74) 할아버지. 늦더라도 꼭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집에 들어오면서 본 오이의 모습도 심상치 않다. 할머니에게 물어보니 이것도 토종이라고 하신다. 물론 꼭 집어 토종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지만, 여름에 더울 때 생채를 해 먹는다며 짤막한 것이 외이고, 길쭉한 것이 오이라며 우리에게 차이를 꼭 집어서 설명해 주신다. 아, 그래도 이렇게 봐서는 아무리 봐도 모르겠는걸 어쩌랴? 일단 사진에 한 방 남겼다.

 

 

다음 더 재밌는 일이 남았다. 이건 제주도를 돌아다니며 내 평생 처음 갔지만 정말 큰 배움이라고 생각하는 한 사건이다.

정말이지 난 이걸 통해 제주도의 반은 다 돌아봤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이 집에서 개발시리를 배운 일이다.

농사짓는 이야기를 하다보니 자연스레 할아버지 할머니가 농사짓는 이야기로 넘어갔고, 곳간에 보관하고 있는 곡식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조 이야기를 했는데, 검은흐린조를 심고 거두어서 먹는다고...

그래서 묻다 보니 답답하다 하시며 씨를 하려고 남긴 이삭을 들고 나오신다.

아~! 그래서 검은흐린조구나! 이게 검은개발시리조구나~!

 

 

시리는 ~처럼, ~같다는 뜻의 우리말이란다. 요즘은 이런 말도 안 쓰고 그런데 안완식 박사님이 넌지시 일러주셨다. 그러면 개발 닮은 조라는 뜻이라고 풀 수 있지 않을까? 정말 개발이다. 개발 닮았다. 우리네 조상은 풀이름을 그 생김이나 특성을 닮은 한마디로 지었다는 것이 새삼 생각난다. 뭐 다른 나라도 그렇겠지만...

 

 

 어음리에서 만난 토종 농가. 결국은 맛과 습관으로 계속 토종 농사를 짓는다는 말을 들었다.

 

 

 

제주도에서 이렇게 많은 토종으로 농사짓는 집을 만나 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농사지으시는 모습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씨앗을 받아 놓으신 거며, 농기구며, 집짐승으로 보면 정말 제대로 찾아온 듯하다. 어디를 가서 이렇게 좋은 분을 만날지 모르겠다.

여기서 그동안 보지도 못했던 대파니, 산두(밭벼)의 메벼와 찰벼니, 두줄보리(맥주보리), 메밀, 들깨, 시불콩(세벌콩) 두 가지, 백편두, 제비콩을 얻었다.

 

 

 

 

오늘은 씨를 조사하고 얻는 것을 그쳤지만, 앞으로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농사짓는 법을 하나하나 꼼꼼히 듣고 싶다. 그날이 올까? 굳이 내가 아니여도 좋은데... 꼭 다시 찾아가 뵙고 싶다.

 

 

다음 집을 찾으러 나가다 배추를 씻는 아주머니가 계신 걸 보고 차에서 내려 언제나 그렇듯 반갑게 다가가 인사를 했다. 마침 아저씨도 계셔 슥 나오셔서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기네 집에 아쉽게 토종은 없으니, 혹시 모르니까 저쪽 할머니 집으로 가보자며 우리를 이끄신다. 오고 보니 아까 바로 그 집 바로 밑에 집이다.

이곳은 어음리 3039번지 이문자(84) 할머니 댁이다. 이제 홀로 집을 지키고 계신 듯하셨는데, 집 안은 깔끔하지만 집 밖은 미처 손이 다 가지 못한 느낌이다. 

 

이문자 할머니. 얼굴과 달리 고운 손을 보며 젊으셨을 땐 참 곱지 않으셨을까 생각했다. 

 

 

할머니는 시집 와서 계속 심었다는 고추를 꺼내 보여주셨다. 크기가 무척 작다. 이제와서 고추를 보니 맵지는 않을까 궁금하다. 더운 나라 고추일수록 크기가 작던데 크기는 작으면서 무지 매울 걸 보면 매운 정도가 응축이라도 되는 걸까? 할머니는 고추를 음력 3월이면 심는다고 하신다. 나는 씨로 심으면서 곡우 무렵에 심으니 그럼 음력 5월쯤일 텐데, 따뜻한 곳이어서 그런지 빠르긴 참 빠르다.

 

할머니는 이곳에서 오래사신 만큼 집 안에도 오래된 물건들이 꽤 눈에 띄었다.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화로다. 변택호라고 써 놓은 화로는 내 기억 속의 그것과 달리 옹기 종류였다. 겉에는 페인트를 칠한 것인지, 아님 제주의 옹기가 원래 이런 색인 것인지 참 오묘했다. 아직도 불을 담아 쓰셔서 그런지 반질반질하게 보존상태가 참 좋다. 뭐든지 사람 손을 타지 않으면 뽀얗게 먼지가 앉다가 스러져 사라지는 법.

 

예전에 제주 허벅 전시회에 갔을 때 느꼈던 제주 특유의 옹기가 생각났다. 제주는 흙이 달라 그런지 옹기도 참 별나다. 

 

 

이제 어음리를 뜰 시간이 왔다. 또 다른 곳에 있을 토종을 만나러 가야 한다. 안완식 박사님은 못내 아쉬우신지 나중이라도 여기를 꼭 다시 한 번 들르고 싶다고 하신다. 박사님의 그 바람을 일단 뒤로하고 새로운 곳을 찾아나섰다. 아니 근데 나가다 보니 나중에 또 오더라도 이곳은 한 번 들러야겠다는 곳이 보였다. 다시 차에서 내려 그 집으로 찾아들어갔다.

 

어음리 2963번지 부창(70) 할아버지 댁. 더 많은 걸 기대했으나 할아버지께서 알고 계신 것만 꺼내서 보여주었다. 검은콩(쥐눈이콩)은 보통 것보다 크고 눈도 검다. 올해는 드물게 심었는데, 아무튼 많이 달린다고 하신다. 밥에 섞어 먹기도 하고, 그냥 갈아 콩국도 먹고 하는데, 콩나물은 안 된다. 6~7월쯤 늦게 심어도 빨리 익어서 좋다고 한다. 그 다음 백천이란 콩이다. 주남에 있던 것인데, 이건 그렇게 많지 않다. 이걸로 콩나물을 길러 먹는단다. 마지막으로 열 몇 살 때부터 심던 줄콩까지 얻었다.

 

부창 할아버지 댁의 맞은편 집. 형식은 제주의 옛날 집인데, 사람은 살지 않았다. 농막 정도로 쓰고 있었는데, 태극기를 꽂아 놓은 모습이 신기해 한 장 찍었다. 제주의 아픈 역사를 반영하는 것일까?

 

 

이제는 진짜 어음리를 떴다. 토종이 엄청났던 그 집. 아마 지금까지 제주도에서 최고가 아닐까 한다. 역시 두 내외분이 함께 농사를 지으시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남자나 여자 혼자 살면 그렇게까지 가지고 있기 어렵다는 걸 새삼 느꼈다.

 

다음으로 찾은 동네는 애월읍 납읍리라는 곳이다. 요즘 제주 올레길 걷는 것이 사람들에게 유행이라고 한다. 우리는 그 올레길을 제대로된 동네 골목길을 참 많이도 걸었다.

 

옛 올레. 사실 제주에서도 이제 이런 곳은 흔하지 않다. 차가 드나들기 좋게 시멘트로 바른 길이 더 많고 이런 길은 어쩌다 마주칠 뿐이다. 이 골목에 들어섰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떠오른다. 좁고 긴 구불거리는 골목, 그 옆으로 늘어선 낮은 담장. 이 길의 반대편에 있던 막다른 집에 차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 살았다면 이 길은 사라졌을 게다.

 

 

그 올레의 한쪽에 있는 집에 들어갔다. 할머니가 얼마나 마당을 예쁘게 가꾸셨는지 모른다. 문 앞에 다가가 조심스레 사람을 찾으니 한 아주머니께서 나오신다. 이야기를 들으니 원래 이 집 주인은 방 안에 계신 할머니인데, 이제 나이가 많으셔서 거동이 편하지 않으시단다. 그도 그럴 것이 할머니가 100세나 되셨다고 한다. 대신 아주머니께 양해를 구하고 집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양계생(96) 할머니만큼 나이를 먹었을 집. 자식들은 다 뭍으로 나가 살고 할머니 혼자 집을 지키고 계셨다. 할머니마저 이곳을 떠나시면 집도 스러질 날이 오겠다. 앞에 분홍색 바가지를 올려놓은 곳이 물구덕에 물을 길어와 등에 져 나른 뒤 올려 놓는 곳이다. 땅에 내려놓다가 깨질 우려도 있고 힘도 더 드니 이런 구조가 나오지 않았을까 한다. 이곳을 물팡이라고 한다. 그리고 부엌에는 큰 물항아리를 두고 일상용수로 썼다.

 

언뜻 보기에도 여기저기 씨앗이 널려 있었다. 당뇨에 달여 먹으면 좋다고 하는 염주, 강낭 또는 태주부루기라고 불렀다는 옥수수, 차나룩(찰벼)이라 부르는 산디, 강낭깨라는 제주식 이름의 해바라기, 보리, 결명자 씨앗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세한 내력이나 설명은 할머니께서 방 안에 누워계셔 듣지 못했다. 그건 아쉽지만 할 수 없다. 그렇다고 방 안으로 남자 셋이 불쑥 들어가 휘저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몸조리 잘하시라 밖에서 이야기만 드리고 집을 나왔다.

 

다음으로 간 집은 납읍리 1825번지의 양찬기(81) 할아버지 댁이다. 이 집에 오기 전 바로 앞집을 들렀는데 사람이 없었다. 그 집도 참 오래되어 보이는 번듯한 집이었다. 대문 바로 옆에 창고에 옛 물건들이 한가득 쌓여 있어 들어가 보지는 못하고 사진만 한 장 찍었다.

 

멍석이 엄청 많은 걸 보니 농사 규모가 꽤 크지 않았을까 짐작만 해 보았다. 천장에는 쟁기도 보인다. 꺼내 내려놓고 싶었지만 이것도 주인이 계시지 않아 구경만 하고 말았다.

 

 

아무튼 그래서 찾은 집이 양찬기 할아버지 댁이다. 안완식 박사님께서는 이곳에 와서도 예의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셨다. "혹시 옛날부터 심던 배추 없어요?" 아니 그랬더니 여기서도 그게 있다며 따라오라신다. 할아버지를 따라 광으로 들어가니 선반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할아버지께서는 얼마 전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이제 홀로 남으셨다고 하신다. 그래서 씨앗은 자기 소관이 아니라 뭐가 어디 있는지 잘 모르지만, 할머니가 보통 이 부근에 씨를 놓고 썼다며 뒤적이신다. 안타깝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대가 끊길지 모를 씨앗을 가져가 보존하고 퍼트릴 테니 다행이다.

이 배추는 옛날에는 국도 끓여 먹고 김장도 해 먹던 것이란다. 100년쯤 됐을 것이라 기억하시는데, 자기 할아버지 때부터 심었던 기억이 난다고 그러셨다. 그러면서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심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시는데, 그건 정확하지 않으니 일단 할아버지 때부터 내려온 것으로 기록. 그것 말고 시금치와 무 씨앗도 얻었다. 사람은 가도 씨앗은 남았다. 이 씨앗도 지금에서 시간이 더 가면 사라지겠지만, 오늘은 우리가 가져가 보존할 수 있을 게다.

 

양찬기 할아버지 댁의 광에 있는 곳. 할머니가 살아 계셨으면 이곳에서 이런저런 씨앗이 많이도 나왔을 텐데...

 

 

이제 차를 타고 납읍리를 떠나 상가리로 향했다. 상가리에 들어서니 커다란 폭낭 한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제주도에서도 보호수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었다. 한참 뒤로 물러나 찍었는데도 카메라에 다 담기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나무다. 이 나이의 나이는 놀라지 마시라. 무려 1000살을 추정하고 있단다. 1000살. 이 어마어마한 시간을 한자리에서 보냈다니! 말이 나오지 않는다. 이 자체로 신이라 할 수밖에...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나무가 1000년을...

 

 

 

이 나무를 감상하고 앉아 있을 시간은 없어 사진에만 담고 동네를 돌기 시작했다. 이곳 1768번지 김창생(80) 할아버지 댁에 들어가 호박 하나를 얻고, 그 집 골목에 있던 피마자의 씨를 채집하고, 돌고 돌았으나 별 다른 것은 더 없었다. 상가리에서는 나무 구경 하나 잘했다. 1000년.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지...

 

상가리에서 장전리로 가는 길에 허름한 집에 들렀다. 할머니께서 마침 어딜 다녀오셔 만날 수 있었다. 보관하고 계신 많은 씨를 보여주셨는데 특이한 것은 없어 수집하지는 않았다. 이곳을 나와 거문덕이라는 곳에 올라가다 피마자 하나를 수집했을 뿐.

 

 

상가리를 떠나 장전리로 접어들었다. 꾸물거리던 날씨는 부슬비로 바뀌었다. 날씨도 꾸물거리고 어음리 이후에는 마땅한 곳도 없고 지친다. 일단 차를 세우고 오줌이나 싸면서 쉬려고 내렸다. 그런데 밭에 무가 자라고 있는데, 이게 또 심상치 않은 것인가 보다. 안완식 박사님이 얼른 이 무밭 주인이 누구인지 주변 좀 수소문해 보라고 하신다. 박사님께서 기다리던 것을 만났나 보다.

 

 심상치 않은 크기의 무. 옛날 제주의 단지무라는 것이 있었다. 오강단지처럼 짧고 불룩한 생김인데, 제주 사람은 그걸 먹었단다. 지금은 사라져 복원작업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다니다 그걸 만나면 그 복원작업을 한결 손쉽고 빠르게 해결할 수 있을 게다.

 

그렇게 찾은 집이 장전리 전 이장을 하셨던 양성진 아저씨의 집이다. 농진청에도 몇 번 오간 적이 있다며 일행을 반갑게 맞아주신다. 커피까지 한 잔 얻어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직접 수소문해 주셨다. 장전 197번지에 사는 강창하란 사람을 찾으라고, 어떻게 가야 하는지 일러주셨다.

인사를 드리고 나와서 찾아갔는데, 길을 잘못 들어섰다. 인간 네비게이션의 실수. 그래서 유수암리라는 곳까지 올라갈 뻔했다. 유수암리는 이따 들르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왜 벌써 왔을까나. 다시 내려가 처음부터 짚어 나갔다.

근사하게 지은 양옥집을 가지신 강창하 씨 댁에 도착해 말씀드리니, 단지무는 아니고 장에서 사다가 심은 것인데 남은 씨가 감귤밭에 있다며 함께 가자신다. 감귤밭에 도착해 씨를 찾아오시는 동안 피마자와 들깨 씨를 채집했다. 이 들깨는 키가 2~2.5m는 되는 것이 뭘 먹고 이리 큰지 모르겠다. 율무도 있길래 얼른 씨를 챙겼다.

남은 무 씨를 들고 나오셨는데, 영광무라는 종류였다. 영광무... 이후 일정에서 자꾸 만날 이름인지 이때는 몰랐다. 이 무가 사진에 있는 것보다 더 불룩해져서 자꾸 우리를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장전리에서 볼일을 다 마치고, 아까 가려고 했던 유수암리로 향했다. 부슬비는 계속 내리고 사기는 떨어지고 해가 넘어갈 시간도 다가오고... 이제 오늘도 얼마 남지 않았다.

유수암리는 생각보다 작은 동네였다. 중산간이라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사람은 별로 살지 않았다. 그나마 감귤이 집하장이 많아 더 그랬을지 모른다. 이곳에는 제주에서는 흔하지 않은 샘이 콸콸 나오는 곳이었다. 날이 을씨년스러워 그런가 맑은 날 보면 예쁘고 시원했을 샘이, 시커멓고 속을 알 수 없는 것이 무섭다. 물은 참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뭐든 다 그렇지만 물이 성을 낼 때 보면 엄청 무섭다.

유수암리에서는 1939번지에서 강인자(67) 할머니를 만나 집 앞에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던 수수와 꼭두서니를 얻었다. 이것 말고는 다른 건 다 사다 먹거나 심는다고 하신다. 이 일대만 해도 감귤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

 

이후 소길리로 갔다가 더 이상 다니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시고 차를 돌렸다. 소길리에 가서도 별 게 없었다. 비만 내리고... 해안 쪽으로 내려가 숙소를 잡고 하루를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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