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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도 우렁이를 이용한 벼농사가 실시되고 있습니다.

 

https://m.yna.co.kr/view/AKR201911141711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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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연기구農研機構(츠쿠바시)는 유기 재배와 저농약 재배를 행하고 있는 논에서는 기존의 재배법보다 동식물이 더 많이 확인될 수 있다는 걸 이 현을 포함한 전국의 현지조사에서 밝혔다. 생물다양성을 배려한 벼농사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줄인다는 걸 처음으로 과학적으로 증명. 농산물의 상품화와 부가가치에 공헌할 것으로 기대된다.


농연기구는 친환경 보전형 농업의 생물다양성 효과를 검증하기 위하여, 무농약, 무화학비료의 유기재배와 농약, 화학비료를 50% 이상 줄인 특별 재배를 행하는 논 및 행하지 않는 기존의 논에서 모두 생물의 종류와 수를 조사,평가 지침에 따라서 전국 규모로 실시했다. 조사는 2013-2015년 3년 동안 이 현의 약 100개소를 포함해 전국 1074개소의 논에서 조사했다.


그 결과, 조류藻類인 차축조(Chara braunii)와 양치류인 큰물개구리밥(Azolla japonica) 등 멸종위기에 있는 식물과 해충의 천적인 갈거미속의 거미가 관행재배에 비해 저농약 재배에서는 1.5배, 유기 재배에서는 2배 많았다. 참개구리속의 개구리는 유기 재배에서 2.5배였다. 고추좀잠자리(Sympetrum frequens) 등 좀잠자리속의 잠자리, 왜가리를 포함한 물새의 개체수도 유기, 저농약 재배에서 많은 것이 확인되었다.


청개구리와 미꾸리과는 화학비료와 농약을 줄이기보다는 논두렁 식생의 풍부함과 돌려짓기 같은 개별 관리법이 개체수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논두렁의 식물에 제초제를 사용하기보다 풀을 베어 식물이 남아 있는 쪽이 개구리류가 서식하기 좋고, 겨울에도 주변의 도랑에 물을 남겨두면 생존하게 된다. 


조류는 유기 재배의 논 면적 약 1평방킬로미터의 넓은 장소에서 왜가리를 포함한 물새가 많았다.


농수성은 환경보전형 농업에 종사하는 농가에 직접지불하는 제도를 실시. 반면, 일본의 유기 재배 비율은 1% 미만이라고 한다. 수확량이 줄거나 제초의 노력이 드는 일 등이 이유.


농연기구의 카타야마 나오키片山直樹 연구원은 "유기재배와 농약 절감 재배에 종사하는 농가가 '생물친환적'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환경을 배려한 농업을 호소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https://ibarakinews.jp/news/newsdetail.php?f_jun=15677797685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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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이영훈 씨의 "반일 종족주의"로 시끄러운데, 그분 원래 그런 분이긴 했다. 조선의 농업 생산성이 17-18세기를 거치며 급락하다가 20세기에 들어와 다시 상승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외국에 의한 개항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그에 대한 여러 반론이 제기된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아무튼 조선 말기의 생산성 급락의 주원인은 조선 왕조의 실정에 의해 산림이 황폐화되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난 그게 왜 개항과 함께 회복되어 농업생산성도 높이게 되었는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숫자에 빠진 것인지, 내 능력의 한계인지 모르겠다. 


이영훈 씨가 그래도 경제사학 쪽에서는 거장이라 할 수 있는데 어쩌다가 이상한 논리에 빠지게 된 것인지, 그것도 나는 잘 모르겠다.


여러분, 이 논문 재밌습니다. 시간을 내서 한번 읽어 볼만합니다. 연구자들이 이렇게 재미난 걸 많이 생산하고 있다구요. 


우대형, <조선후기 미곡생산성의 장기 추이에 관한 재검토, 1660-1910>

조선후기_미곡_생산성의_장기_추이에_관한_재검토.pdf



조선후기_미곡_생산성의_장기_추이에_관한_재검토.pdf
0.63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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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마침 근처에 황새 복원센터가 있어 잠시 들렀다.


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지 큰 나무가 별로 없어서 뙤약볕에 휘청했다. 

그래도 날씨는 좋네.





건물 안에는 황새에 대해 간략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전 세계 곳곳에 황새의 친척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일단 기본적으로 습지가 있는 곳이라면 황새가 살 수 있나 보다.




논도 하나의 습지이기에 황새들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 가운데 하나이겠다. 물론 과거 농약과 비료가 과다하게 사용되지 않고, 농수로와 둠벙이 살아 있던 조건이었다면 더욱 좋았겠다. 


왜 벼농사의 사람들은 황새를 길조로 여겼을까? 제비와 같은 존재였던 것일까?





황새는 서해 쪽 여기저기에서 활동하지만, 번식은 특정 지역에서만 했다는 걸 볼 수 있다. 주로 경기-충청 접경지와 황해도, 그리고 함경도의 동해 쪽이다. 왜일까? 궁금하다. 언제 연구자를 만나면 묻고 싶다. 





황새의 비행 원리를 설명해주고 있다. 낮에 햇빛에 뜨거워진 기류가 상승하면 그걸 타고 하늘로 날아오른다고 한다. 그리고 바람을 타고 멀리 가는 것이다. 그 큰 덩치를 온전히 날개의 힘만으로 날아가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될 테니 바람을 이용하는 것이겠지?





황새의 생활주기는 아래와 같다. 모내기가 끝나고 벼가 자랄 무렵에 새끼를 키우는 걸 알 수 있다. 그래 벼농사의주기와 황새의 번식 주기가 묘하게 일치한다. 





황새는 철새이다. 예전엔 사계절 머물러 있는 텃새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해외에서 날아오는 철새이다. 그래서 황새를 복원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겠다. 





복원센터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사육장에서 황새를 직접 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런 황새랑 쌀을 사서 더 좋았다. 자연과 공존하며 생산되는 농산물이다. 이런 농산물을 자꾸 소비해 주어야 황새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우리와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생산에 방해가 된다고 배제하고 없앨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들과 공생하며 살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거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이러한 소비 행위이다. 





마지막으로 인터넷에서 사진 하나를 보았다. 

여긴 어디? 또 저 황새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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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대전에서 왜 둠벙을 이용해 메기를 활용하는 벼농사를 짓고 있는 것이죠?

 

누구의 발상이고, 얼마나 되었으며, 어떤 방식으로 관리되는지 궁금합니다. 한 번 가 봐야겠어요.

 

http://www.dailycc.net/news/articleView.html?idxno=54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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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유명한 희귀 씨앗을 판매하는 사이트에 "두보르스키안 벼"라는 게 올라와 있다. 스키안? 러시아 쪽인가 싶어서 설명을 보니 러시아인가 우크라이나인가 그쪽에서 재배하던 벼로서, 헝가리 사람이 밭벼로 재배하던 것이라 한다. 

https://www.rareseeds.com/duborskian-rice/reviews/?fbclid=IwAR1E2wHvb6l5H-O1AZPhX4mIfTz2tQL9dZsrG0zWby7cy5mmJSKk2ooTi-o


어떻게 거기까지 흘러갔을까? 과거 일제강점기 연해주 지방으로 이주한 조선 농민들의 짐보따리에는 볍씨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만주 지방으로 이주한 사람들은 물론, 연해주 지방으로 이주한 조선인들도 그곳에서 적당한 땅을 찾아 논으로 풀어서 벼농사를 지었다는 것이다. 그들 덕에 세계 농업사에서 벼 재배의 북방한계선을 가장 위쪽까지 끌어올린 일이 일어났다. 말이야 쉽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연해주에서 벼농사를 짓던 고려인들은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으로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태워져 중앙아시아 쪽으로 옮겨 갔다고 한다. 그때에도 그들의 짐보따리에는 볍씨가 들어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추위와 배고품에 시달리면서도 볍씨만은 절대 까먹지 않고 그대로 지켰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렇게 강제 이주된 곳에서 고려인들은 또, 적당한 땅을 찾아 벼농사를 지었다. 그들의 근면한 농사는 중앙아시아에서 명성을 크게 떨쳤고, 소련 정부에게서 많은 상도 받았다는 이야기를 텔레비전에서 본 기억이 난다. 

혹시, 우크라이나에서 헝가리로 건너온 것 같다는 이 볍씨가 당시 고려인들이 소중하게 가지고 갔던 그 볍씨에서 온 것은 아닐까? 그런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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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기록문화연구원의 2019 옛 사진공모전에 나온 사진이라고 한다.

기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놓았다. "2019 옛 사진공모전에서 은상을 받은 ‘1942년 서후면 천수답 모내기’. 농부들이 모를 심는 모습이 보이고, 앞쪽에서 줄을 당기면서 물을 끌어올리는 모습이 이채롭다."


그런데, 모내기는 이미 끝난 것처럼 보이니 모내기가 아니라 김매기 모습 같다. 사진 설명에 지하수를 퍼올리는 공동작업이라 써 있는 걸로 보아, 물이 부족한 천둥지기에 맞두레질로 물을 퍼올리는 모습 때문에 찍은 사진 같다. 그런데 저렇게 물을 퍼서 어디로 넣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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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법의 차이가 미꾸라지 개체군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이 2010년에 발표된 적 있다. 


이에 의하면, 관행농업의 논보다 유기농업의 논에서 2-2.5배 정도 많은 미꾸라지가 발견되며, 또한 논이 위치한 환경에 따라서도 달라진다고 한다. 




매우 흥미롭다. 역시 농약과 화학비료가 생태계의 생물다양성에는 악영향을 미치는가 보다.


http://210.101.116.28/W_files/kiss3/09404963_pv.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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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2


기고1


중세에서 보는 쌀과 고기   -하라다 노부오原田信男






중세라는 시대

일본의 중세는 국가 지배가 성립을 보았던 고대와 그 체계가 완성을 보았던 근세의 사이에 끼어 있던 시대이며, 고대와 근세가 통일집권적인 정치 체계를 가지고 있는 데 반해 지방분권적인 성격이 짙은 사회였다. 즉 중세 전기에는 공지공민제公地公民制라는 율령제의 토지 소유와 사적 대토지 소유인 장원제가 병존하여, 율령법 이외에도 장원법이란 이중 규범이 존재했다. 또한, 그 이후 시기에는 수호守護 다이묘1와 전국戰國 다이묘2가 이른바 다이묘 영국제領國制3를 시행하여, 그것이 이윽고 분국법分國法을 가지는 데에 이르는 등 통일적인 확고한 정치체계가 존속하지는 않았다.

이것을 지극히 대략적인 개념 규정에 따라 정리해 보면, 정치적으로는 권문체제라는 지배양식이 채택되고, 경제적으로는 장원공령제莊園公領制라는 사회 체계가 중세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즉 쿠게公家, 부케武家, 지샤케寺社家가 각각 국가 의식儀式, 군사경찰, 종교행사를 담당하여 분담하는 것과 동시에 각각이 상호보완적으로 정치체제를 지탱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부케가 돌출해 나온 시대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상급 부케를 지배하는 사무라이들이 장원과 국아령國衙領4 등의 단위에서 재지영주제라는 지역 지배를 행하는 것과 함께, 그들을 통할하는 형태로 쿠게, 부케, 지샤케가 정점에 위치했다.

그러므로 중세란 각지에 독자적 정권이 존재할 수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다양한 가치관이 충돌했던 시대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방분권적이라고 하여 중세 일본에서 국가 그것이 분열되어 있었다고 볼 수는 없으며, 또몇 가지 우여곡절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회적 가치관의 방향성이라는 점에서는 일관성을 찾을 수 있다. 즉 쌀에 대한 고집과 고기의 배제였는데, 그것은 꽤나 오랜 시간을 거쳐 서서히 진행되었다. 오히려 중세라는 시대를 거치며 신성한 쌀과 불결한 고기라는 대항관계가 계속되어, 최종적으로는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벼농사와 일본의 특수성

동남아시아의 벼농사 지대에서는 쌀과 고기는 모순 없이 공존한다. 쌀은 습윤온난한 기후를 좋아하기 때문에, 상당한 물을 필요로 한다. 논에는 물을 담을 수 있는 외에, 비탈의 화전 벼농사 지대에서도 우기에 내리는 방대한 비가 중요하여, 골짜기의 저지에는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하천과 호수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물고기가 있어, 이들은 쌀과 한 묶음이 되어 벼농사 지대에서 식생활의 기본을 이루어 왔다.

게다가 한 시기에 대량으로 확보된 어류는 이것을 소금에 절여 발효시켜 어장이란 맛있는 조미료를 만들어내고, 이것을 사용하여 맛을 내는 것이 조리의 주류를 이룬다. 이 어장이 대두의 발상지라고 생각되는 중국의 강남을 통과할 때 어쩌면 물고기 대신에 대두를 사용한 곡장을 만들어내, 이것이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어장과 함께 널리쓰이는 조미료가 되었다. 중국 및 조선반도에서는 곡장, 어장은 활발히 사용되어, 예를 들면 조선반도의 김치 담그기에서는 젓갈이란 어장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다만 일본에서는 이미 고대에 어장에서 곡장으로 전환이 진행되었는데, 그래도 노토 반도의 이시루아키타의 숏츠루 등으로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다.

즉 동남아시아의 벼농사 사회에서는 쌀과 물고기가 주요한 식량인데, 그밖에도 중요한 동물성 단백질원이 존재했다. 그것은 돼지로, 논벼농사와 함께 쉽게 사육할 수 있는 동물이었다. 중국 등의 희생 공물에는 돼지가 쓰이는 일이 적지 않아, 돼지고기를 함께 섞어 지은 밥은 중요한 의례 음식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일본의 벼농사 사회에서는 이 돼지가 빠지는 매우 진귀한 현상이 발견된다. 이 의미에서 일본의 쌀 문화는 상당히 색다른 모양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최근 동물고고학의 성과에 의하면, 일본의 야요이 시대에도 돼지가 사육되었다고 생각되고 있으며, 야요이 유적에서는 멧돼지가 아닌 돼지의 유골이 적지 않게 출토되고 있다. 즉 논벼농사의 수용에 따라, 틀림없이 돼지의 사육법도 이입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야요이 사람들은 논벼농사를 행하며, 물고기와 함께 돼지도 식용으로 제공했다고 생각되는데, 어느 시대부터인가 육식의 금기가 재앙을 피하기 위한 조건이 되었다. <위지魏志 왜인전>에는 왜인은 금기와 재계 등을 할 때 고기를 멀리한다는 취지의 기술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고분 시대 이후에 더욱 일반으로 침투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돼지뼈의 출토 사례가 감소하는 일이지적된다. 어쨌든 논벼농사를 행하면서 간단하게 사육할 수 있는 돼지의 식용이 서서히 감소했던 걸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고, 다이카大化 전대의 관제에는 저사부猪飼部 같은 부민제도가 보이며, 저사야猪飼野라는 지명 등이 남아 있는 바로부터 정치 체계의 일부에서나 돼지의 사육이 여전히 행해졌다는 데에는 주목할 만하다.


고대에 이루어진 쌀의 추진과 고기의 부정

문헌 사료에서 육식의 부정이 명확해진 건 고대 율령국가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덴무天武 천황 4년(675) 이른바 육식금지의 조칙이 나와 소, 말, 개, 닭, 원숭이에 대해서는 4월부터 9월까지 죽이거나 먹거나 하지 말라는 성지가 명령으로 내려진다. 그러나 일본인이 가장 먹어 왔던 동물은 사슴과 멧돼지였다. 니쿠는 육肉의 음독이며 그 뜻은 고기인 점에 유의하면, 이것은 그 자리에서 납득되는 듯하지만 이들을 포함하지 않는 이 법령을 엄밀하게는 육식금지령이라 부르는 데에 무리가 있다.

소와 말은 물자의 운반과 노동력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개와 닭은 가까운 가축이다. 또 원숭이는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동물로, 사냥꾼들도 원숭이를 공격하는 일에는 저항감이 있다고 한다. 모두 식용과는 관계가 먼 동물들이다. 게다가 금지 기간이 4-9월이란 것도 주목해야 할 점으로, 이것은 논벼농사의 농경 기간에 해당한다. 또한 이 조칙과 동시에 덴무 천황은 앞으로 풍해로부터 벼를 지키기 위한 타츠타龍田 풍신風神과 농업용수를 관장하는 히로세広瀬 수신水神의 제사를 매년 행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더욱이 이 조칙의 2년 전에는 농사지을 때는 논농사에 열심히 일하고 '미물美物'(고기를 포함한 요리)과 술을 삼가하도록 하며, 그 16년 뒤에도 장마가 이어졌기 때문에 관리에게 '술과 고기(酒宍)'를 끊게 하고 승려에게 경을 읽도록 명령을 내린다. 그렇게 하여 비가 그치고 벼가 열매를 맺는다고 믿고 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덴무 천황 4년의 조칙은 육식금지령이라기보다는 정확히는 살생금단령이라 할 만한 것으로, 동물의 살생을 경계함으로써 논벼농사가 원활히 추진되는 걸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고대 율령국가는 반전수수법班田收受法을 채용하고 밭을 고려하지 않고 논만 조세의 대상으로 하는 정책을 채택해,쌀을 그 사회적 생산기반으로 자리잡도록 했다. 그 때문에 100만 헥타르의 논 개간 계획을 세우거나, 삼세일신三世一身5의 법과 개간한 농지의 영세사재법永世私財法을 정하여 쌀 중심의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국가의 정점에 선 천황은 최고의 벼농사 제사자로서 쌀을 천계에서 지상계로 전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황조신으로 삼고 그 신에게 감사하며 쌀의 풍작을 기원하기 위한 신상제新嘗祭를 해마다 집행하는 존재가 되어, 쌀은 신성한 먹을거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에 반해 고기는 벼농사의 장해가 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불결한 존재로 차츰 부정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물론 육식 그것을 부정하는 법령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대에도 실제로는 육식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육식이 불결함을 불러일으킨다고 여겨진 것도 사실로서, 관리라면 궁중으로 입궐할 때는 육식을 금하고, 일반 사람들도 신사에 참배할 경우에는 일정 기간만 육식을 행하지 않았다. 다만 그 이외의 장소에서는 관청에서도 고기를 먹을 수 있고, <연희식延喜式>6부터는 육장도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고대 율령국가는 겉으로는 고기를 금지했는데, 그 배경에는 논벼농사의 추진이란 사정이 있어 신성한 쌀과 불결한 고기라는 도식이 성립한 것이다.


중세의 쌀과 고기의 상극

신성한 쌀에 의한 불결한 고기의 부정은 중세라는 오랜 시대를 거치며 서서히 사회적으로 침투했다. 후지와라노 사다이에藤原定家의 <명월기明月記>에는 사무라이들이 열심히 육식을 하고 있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 외에, 귀족에서도 고기를 먹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그들은 기본적으로 천하게 간주되고 있다. 물론 에외는 있는데, 장원 영주인 귀족과 승려는 연공으로 쌀을 입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쌀을 좋아하고 고기를 싫어하는 경향이 강하다. 일반적으로 상층계급 정도는 쌀을 먹고, 하층계급 정도는 고기를 식용으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중세를 거치며 논 개간은 진행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흉작과 기근도 드물지 않았다. 쌀의 생산을 위해서는 한해와 수해에 강하고 일찍 익으며 거름이 적게 필요했던 적미赤米(점성미, 대당미, 당법사)가 도입되어 재배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들은 연공미가 되지는 않았고, 흰쌀만을 상납하고 적미는 농민의 식용으로 쓰였다. 또한 장원 영주와 재지 영주들은 장거리 용수로를 뚫거나 하여 농업생산력의 확대를 도모했는데, 농민들 대부분은 밭작물에 의지하거나 산과 들, 강과 바다에서 동식물 등을 식재료로 구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카마쿠라 시기에는 쌀을 수탈하는 입장에 있는 장원 영주들은 남도불교南都仏教와 천태·진언의 옛 불교에 의지했는데, 반대의 입장에 있는 농민은 법연法然과 신란親鸞 등이 주도했던 새로운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법연은 신자가 고기를 먹는 일은 나쁜 것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방법이 없는 일이라고 답한다. 또 신란의 정토진종 문도에는 장사꾼과 사냥꾼 등 논벼농사 이외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고, 제자인 유이엔唯円이 이야기했던 악인정기설惡人正機說은 어쩔 수 없는 살생을 계속하는 사냥꾼들조차 성불할 수 있다는 사상으로 일관되어 있다. 신성한 쌀과 불결한 고기는 그대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식생활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고기에 의한 불결함 의식은 중세에 뚜렷하게 사회적으로 침투했다. 물론 불결함은 육식만이 아니라 죽음과 태어남 등에도 관계되는 것인데, 고대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꺼리고 혐오하게 되었다. 중세에는 신사 등에서 물기령物忌令이라 부르는 규정이 정해지게 된다. 예를 들면, 육식의 경우에는 사슴고기를 먹으면 100일 동안 불결하다고 하여, 그동안은 신사에 참배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더구나 이 불결함은 전염되는 것이라 생각해 A가 사슴고기를 먹으면 물론 100일 동안 불결한데, 그 지인 B가 불결한 동안에 마찬가지로 불로 조리한 것을 먹는다고 하면 B는 21일 동안 불결하게 된다. 게다가 A와는 전혀 관계 없는 C가 B가 불결한 동안에 마찬가지로 함께 식사하게 되면 C까지 7일 동안 불결하게 된다.

앞에서도 기술했듯이 고대에도 불결함은 의식되었지만, <연희식>에서 사슴고기의 육식은 3일 동안 불결한 데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중세에는 100일까지 확대된 것만이 아니라, 인간에게까지 불결함이 전염된다고 간주된 건 육식에 대한 기피가 급속히 진행되었다는 사정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중세라는 시대를 거치며 신성한 쌀이 불결한 고기를 쫓아낸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중세에는 논의 양적 확대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벼농사 기술도 진보하여 질적 향상이 뚜렷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고기를 얻기 위한 수렵은 점점 쇠퇴의 길을 가고, 사회적인 규모에서 육식의 금기의식이 높아졌다. 


근세의 쌀 사회의 성립

고대 율령국가가 지향했던 쌀을 사회의 생산적 기반으로 삼는 이상은 다양한 가치관이 혼재했던 중세 사회를 빠져 나가서 근세 막번幕藩 체제에 의하여 실현되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서 천하통일을 실현했던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이른바 타이코우太閤 검지檢地 정책을 실시하여 병농분리에 의한 사무라이와 농민의 거주지 분리에 성공했다. 즉 정치의 지배거점인 도시=성시에는 사무라이가 살고, 농업생산의 현장인 각지의 마을들에는 농민만 거주하는 정치적 행정촌이 되었다. 검지 실시에 의하여 마을마다 생산력을 파악하고, 논만이 아니라 밭도 대지도쌀을 기준으로 한 수확량으로 표시하도록 하며, 모든 것을 쌀의 견적생산력으로 치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쌀의 수확량을 기준으로 원칙을 세워 쌀로 연공을 납입하도록 의무화되었다. 마을의 수확량만이 아니라, 다이묘의 경제력도 모두 쌀의 계량 단위인 섬으로 환산하게 되었다. 이른바 석고제石高制라는 경제 체계가 완성되었는데,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고대 국가의 이상 실현이라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히데요시 사후, 패권을 장악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치적으로는 막번 체제라는 막부와 번에 의한 지배 체계를 구축하여 안정적인 국가 체제를 쌓아 올렸는데,  그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것이 바로 신성한 쌀이었다. 

막부는 강대한 권력을 배경으로 새로운 논 개발 정책을 실시하고, 대규모 개발사업을 실행했다. 논과 밭이 맞버티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중세와는 달리, 근세 중기에는 논이 밭을 상회하게 되었다. 중세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적미는 17세기 무렵에는 어지간히 쫓겨나고, 논 생산력은 중세에도 증가하여 향상했다. 근세의 말기에는 일찍이 벼농사를 전해 주었던 조선반도보다 재배기술이 뛰어나 파종량은 동시기의 조선보다 훨씬 적어도 완료되는 상황이었다. 그 배경에는 마을마다 농민들이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업기술의 향상에 노력하고, 그 토지마다 적합한 농업생산의 이상적 방식을 연구하여 방대한 농서를 남기는 등, 마을 수준에서 열심히 쌀농사에 힘쓴 사실이 있다. 

이 때문에 육식에 대한 금기는 최고조에 이르러, 마을마다 고기를 먹으면 눈이 보이지 않고 입이 돌아간다는 등 미신이 퍼졌다. 또한 동물의 처리에 관련된 사람들을 백정으로 차별하는 불합리한 신분제도가 엄격해졌다. 그 대신 쌀은 불사리에 비유될 정도로 사람들 사이에서 중시되어, 쌀밥이 무엇보다 맛있는 요리가 되었다. 중세란 이러한 쌀 사회를 준비하는 오랜 기간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1. 가마쿠라, 무로마치 시대의 직책 이름인 수호는 원래 각 지방의 치안과 경비 등을 담당했으나, 이후 강대해지며 영주화되었다. [본문으로]
  2. 100년 동안 전국시대가 계속되면서 수호 다이묘를 쓰러뜨리고 스스로 다이묘가 되어 새로운 영국의 지배자가 된 전국시대의 다이묘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3. 제후가 영토를 소유하는 제도. [본문으로]
  4. 장원이 아닌 정부 소유의 땅. [본문으로]
  5. 새로 관개 시설을 만들어 경지를 개척한 자에게는 본인·아들·손자의 3대 동안, 기존의 관개 시설을 이용한 자에게는 본인 1대에 한하여 그 경지의 보유(사유)를 인정한 것. 이는 한정된 기간이기는 하였으나 공지공민제의 원칙이 무너진 것을 의미했다. [본문으로]
  6. 헤이안(平安) 시대의 율령 시행 세칙.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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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농약, 무화학비료 쌀농사에 몰두하는 도쿠시마현徳島県 아난시阿南市의 무라카미 히로카즈村上弘和 씨.




자연환경과 인체에 큰 영향을 미칠 우려 때문에 세계적으로 사용금지와 규제강화가 진행되는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 일본에서는 해충 구제에 꼭 필요하다는 이유로 지금도 전국의 논밭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지역의 농가와 소비자, NPO 등과 협력하여 과감하게 '탈 네오니코티노이드'에 몰두하여, 성과를 올리고 있는 농협이 있다. 현지를 방문했다.


수확량도 늘고, 맛도 좋아지다


"쌀농사는 즐거워요. 그 덕에 충실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모내기가 막 끝난 논에서 검게 그을린 얼굴에 미소를 띠며 반겨준 건 기이紀伊 수도水道에 면한 도쿠시마현 아난시에서 농업을 경영하는 무라카미 히로카즈 씨(66)이다.


시스템 엔지니어였던 무라카미 씨가 회사를 정년퇴직하고 고향의 쌀농사를 계승한 건 6년 전. 소유한 4500평의 논 가운데 1/3은 농약도 화학비료도 일체 사용하지 않는 논. 다른 1/3은 화학비료의 사용량을 반 이하로 줄이고, 농약은 제초제만 1번 사용하는'특별재배 쌀'을 농사짓는 논이다.


무라카미 씨는 예전부터 유기농업에 관심이 있어, 쌀농사를 시작하는 동시에 농약과 화학비료를 줄이는 노력을 시작했다. 성과는 예상 이상으로 "수확량도 늘고, 맛에 관해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들뜬 목소리를 낸다. 


논의 위치가 흩어져 있는 것도 있고, 농약과 화학비료의 절감은 단게적이지만, "언젠가는 모든 논에서 무농약·무화학비료의 맛있는 쌀을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다. 


그런 무라카미 씨의 강력한 응원군이 아난시와 고마쓰시마시 등 두 시와 두 마치에 걸친 '동 도쿠시마 농업협동조합(JA동도쿠시마)'이다. 


JA동도쿠시마는 정조합원 수가 약 8천 명인 얼핏 보면 아주 평범한 농협인데, 다른 농협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지역의 농가와 NPO, 생협 등과 협력하여 농약과 화학비료를 가능하면 쓰지 않는 농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농협계의 이단아


농협에서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생산자재라고 부르고, 생산자재를 업체에서 매입해 농가에 판매하는 일이 중요한 수익원이 된다. 농림수산성에 의하면, 농가가 구입하는 농약의 약 60%는 농협에서 나온다. 생산자재의 취급량을 줄이는 일은 농협의 수익에 직접 영향을 주는 만큼 어느 농협이라도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JA동도쿠시마는 10년 전쯤부터 농약과 화학비료를 최대한 사용하지 않는 쌀농사를 과감하게 추진해 왔다. 그 중심 인물이 현재 JA동도쿠시마 카노坂野 출장소의 고문을 맡고 있는, 동료들에게 '농협계의 이단아'라고도 불리는 니시다 타카시西田聖 씨(60)이다. 



JA동도쿠시마의 니시다 타카시 씨.





자신도 쌀농가인 니시다 씨는 어느 날, 젊은 시절에는 논에 가득했던 백로의 모습이 어느새 거의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야생 조류가 사라졌다는 건 우렁이 등 먹이가 되는 논의 생물이 줄어들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당시는 농작업의 간소화와 작물의 수확량 증가를 목적으로 농약이 당연히 사용되던 시대.  "자연환경의 변화는 농약이 원인임에 틀림없다." 니시다 씨는 그렇게 직감했다고 한다.


그동안 쌀농가의 경영은 외국산 쌀에 대한 시장개방과 소비자의 쌀 이탈 등으로 급속히 악화. "이대로는 쌀농가가 생활할 수 없다"고 위기감을 느낀 니시다 씨의 머리에 떠오른 것이 잃어버린 자연환경의 회복과 쌀의 고부가가치화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무농약·무화학비료 쌀농사였다. 지금의 말로는 '지속가능한 농업'이다.


니시다 씨는 우선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작물을 기르는 유기농업의 이론을 공부하고, 스스로 유기농업에 가까운 쌀농사를 실천. 이론을 실증한 바, 농협 안에 '특별재배 쌀 위원회'를 설립하고 동료 쌀농가에게 참여를 호소했다. 


무농약을 추진하기로 결정했을 때 '가장 먼저 배제한' 농약이 네오니코티노이드계 살충제였다. 당시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이 원인으로 의심되는 농업의 피해가 잇따라 보고되기 시작했던 것이 이유였다. 



해외는 니코티노이드를 퇴출시키는 흐름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은 1990년대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비교적 새로운 유형의 살충제로, 현재 세계에서 사용되는 살충제의 주력을 차지한다. 그러나 식물의 수분에 필수인 꿀벌의 군집붕괴와 떼죽음, 다양한 야생생물의 감소에 원인이 된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아이의 발달장애와도 관련성이 있다고 지적하는 전문가도 있다. 그 때문에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의 사용중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네오니코티노이드 퇴출 운동도 확산되고 있다. 유럽연합은 4월,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 가운데 클로로아닐린, 이미다클로프리드,티아메톡삼이란 주요 세 종류의 사용을 거의 전면적으로 금지하기로 결정. 미국과 캐나다. 브라질, 한국, 대만 등도 사용금지와 규제강화를 단행하고 있다. 


한편 원래 농약 사용량이 많은 일본에서는 네오니코티노이드 농약도 다른 농약과 마찬가지로 전국의 논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저농약을 강조한 특별재비 쌀에서도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을 사용하고 있는 게 적지 않다.  

 

니시타 씨가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 때는 농협 안에서 신중한 목소리도 많았다. 농약과 화학비료의 사용을 줄이면 그만큼 생산자재의 매출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농가에서도 수확량이 줄어들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해 보면, 살충제의 사용을 중지해도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고, 호학비료를 줄이는 대신 닭똥과 지렁이의 똥으로 만든유기비료를 늘리면 벼가 튼튼해져 오히려 수확량도 증가. 맛도 분명히 좋아졌다. 


처음에는 관망하던 농가도 성공 사례를 보고 잇따라 참여를 결정해, 몇 명으로 시작한 특별재배 쌀 위원회는 현재 약 150명으로 늘어났다. 또 JA동도쿠시마가 취급하는 유기비료는 평판이 다른 지역 농가의 귀에도 들어가 화학비료 매출의 감소분을 보완해 거스름돈이 올 정도로 매출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니시다 씨는 "우선은 참여 농가를 늘리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쌀농사의 가장 중노동인 제초작업은 아직 제초제에 의지하고 있지만, 유기비료를 늘리면 토양이 개선되어 잡초가 자라기 어려워졌다. 이대로 계속하면 몇 년 뒤에는 아마 제초제도 필요없어질 것이다"라고 완전 무농약에 자신을 보였다. 실제로 무라카미 씨처럼 한 발 앞서 완전 무농약을 달성한 농가도 있다. 


  

꿀벌을 지키는 쌀



쿱Coop 자연파自然派의 '꿀벌을 지키는 산지직송 쌀'




JA동도쿠시마의 네오니코티노이드 퇴출 노력이 성공하고 있는 건 지역의 생협과 NPO의 협력도 크다.


간사이와 시코쿠에서 사업을 전개하는 생활협동조합연합회 쿱Coop 자연파 사업연합(쿱 자연파)는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이 문제시되기 시작한 약 10년 전부터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도쿠시마의 쌀을 취급하기 시작했다. '꿀벌을 지키는 산지직송 쌀' '두루미를 부르는 쌀' 등의 이름으로 판매하고 있다.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을 쓰지 않고 농사짓는 쌀은 바구미가 노린재가 갉은 흔적이 검게 남은 '반점 쌀'이 생기기 쉽다. 반점 쌀은 안전성과 맛에는 문제가 없지만, 볼품이 없기 때문에 거래 가격이 싸진다. 또 기온이 올라가면 보관하던 쌀에 바구미가 꼬이기도한다. 쿱 자연파의 자회사 쌀 사업을 담당하는 쿱 유기의 사에키 마사아키佐伯昌昭 전무는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을 쓴 쌀에 벌레가 나지 않는 건 수확한 뒤에도 쌀에 농약 성분이 잔류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반점 쌀과 보관의 위험을 없애고자 쿱 자연파는 3년 전 쌀을 저온에서 연중 보관할 수 있는 창고를 도쿠시마 시내에 건립하는 동시에, 반점미를 자동으로 골라낼 수 있는 광학식 선별기를 구입했다. 


특별재배 쌀과 무농약·무화학비료의 쌀은 농가에서 매입하는 가격이 높기 때문에 소매가도 비싼 경향이 있다. 하지만 농가에게서 터무니 없이 헐값에 사들이면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운동은 확산되지 않는다. 그래서 쿱 자연파는 중간유통업자를 끼우지 않고 직접, 조합원에게 판매하여 판매가격을 슈퍼에서 판매되는 쌀 수준 또는 그 이하로 억제했다. '안전하고 맛있고 저렴한 쌀'이 소비자의 요구에 부합하는지, 쿱 자연파의 회원수는 매년 10%의 비율로 늘어나고 있단다. 


유기농업이야말로 일본 농업의 미래


JA동도쿠시마의 몇몇 지역에서는 2012년 이후 해마다 유기농업의 관계자와 소비자들이 교류하는 '유기농업 에코 축제'를 열고 있다. 


매년 규모가 확대되어 현재는 도쿠시마 시내에서 개최. 실행위원회에는 JA동도쿠시마, 쿱 자연파, NPO법인 도쿠시마 유기농업 지원센터 등이 이름을 올리고, JA동도쿠시마의 아라이 요시유키荒井義之 조합장이 실행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부정하는 유기농업의 행사 상위에 농약과 화학비료를 판매하는 농협의 조합장이 취임한 건 이례적이다.  


그 아라이 회장은 올해 유기농업 에코 축제의 책자에서 JA동도쿠시마의 노력이 지닌 의의를 이렇게 강조한다. 


"JA의 조합장이란 입장인 제가 유기농업의 깃발을 흔드는 데에 의문을 품은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JA그룹의 가장 큰 목적은 농업인의 소득증대, 농업생산의 확대, 그리고 지역의 활성화이며, 저는 이들의 실현에는 유기농업의 실천이 최적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출처 https://news.yahoo.co.jp/byline/inosehijiri/20180514-00085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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