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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서 만난 이웃

 

 

2008년 11월 28일 아침 7시, 코로 들어오는 공기가 차다. 하지만 영하로 떨어지진 않았으니 그럭저럭 시간이 지나면 따뜻해질 것이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하고 길을 나섰다.

9시 30분쯤 드디어 일행을 모두 만났다. 이번 출장에는 안완식, 박문웅, 안철환 선생님이 함께했다.

명동의 중앙우체국에 들러 일을 보고, 수첩이며 필기도구를 사러 명동 한복판을 뒤졌다. 이건 뭐 환율이 급등하면서 찾아오는 관광객을 상대하는 가게만 보이지 문방구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헤매다 마침내 찾은 것이 "Kosney"라는 곳. 그런데 이곳은 뭐가 그리도 비싼지 수첩 몇 개와 필기도구를 사니 8만 원이 넘는 돈이 들었다. 그래도 어쩌랴, 어디에서 또 문방구를 만날지도 모르고 그냥 11시 30분 강화도로 향했다.

가는 길에 김포의 연호정이란 칼국수 집에서 점심을 먹고, 드디어 13시 50분 강화대교를 건너 강화도에 이르렀다.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에 난 해안도로로 방향을 틀어 용정리 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도착한 범우리라는 마을. 여기서 조사의 가장 처음으로 강화군 강화읍 용정리에서 7대째 살고 계신 최대식(77), 심옥순(75) 어르신을 만났다. 우리의 농촌 어디나 그렇듯 만날 수 있는 건 거의 노인뿐이다. 어쩌다 40~50대의 젊은 사람(?)을 만날 수는 있어도 아이를 만나기란 무척 어렵다. 이제 한 10년 남은 것일까? 노인들마저 자리를 비우면 농촌은 텅 빈 공간이 될 것이다. 그 공간에서 살던 사람이 사라지면 그만큼 그들이 누리고 전하던 우리의 뿌리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문화는 오랜 세월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일구며 쌓아온 삶의 방식이다. 가깝게는 몇 년 전, 멀게는 몇 백, 몇 천 년 전의 삶과 노래, 노동, 이야기 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런 우리의 문화가 사라지는 날 우리는 어디에 뿌리를 내릴 것인가?

새로운 도구와 문물은 새로운 문화를 몰고 왔다. 모두 그에 압도되었고, 그를 추종하며 맹신했다. 그 결과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노마디즘', 다른 말로 광고 문구를 따르자면 '디지털 유목민'이다. 이걸 까뒤집어 보면 무엇인가? 뿌리 없는 부평초 인생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나 그것이 몰고온 결과가 모두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정보를 얻고 나누기 쉬워지고, 사회적 약자에게 좋은 효과도 가져오고, 획일과 통일이 아닌 개개인의 다양함과 개성을 표현하는 마당을 마련하기도 했다. 모든 것에는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이 아닌가. 도구와 문물을 탓하기 전에 그를 활용하는 사람을 탓할 노릇이다. 사람, 그 사람의 마음, 생각 들이 우리의 사회와 문화를 몰고간다.

 

최대식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라고 늙은, 말 그대로 촌로다. 그 얼굴의 주름에, 두텁고 메마르며 거친 그 손에 강화도 용정리 범우리 마을의 시간과 공간, 역사와 문화가 스며 있다.

최대식 할아버지. 대문간 옆의 광과 농기구 앞에 서서. 청테이프로 붙인 키는 10년쯤 쓴다고 한다.

 

토종 조사를 설명하고 요청하니 심옥순 할머니가 대문 옆에 있는 곳간 문을 따고 하나씩 꺼내 보여준다. 이제는 옛날과 달리 시장에서 사다가 심는 것이 많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맛과 같은 이유로 그 씨를 밑지지 계속 받아서 쓴다고 한다.

 

마당질을 끝낸 콩대와 참깨대를 짚으로 묶어 잘 쌓아두었다. 강화와 교동의 농가에서는 대부분 짚으로 부산물을 잘 묶어 놓았다.

 

 

집 앞에는 텃밭이 있고, 그 너머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옛날에는 거기에서 팔뚝만한 고기도 많이 잡았단다. 아직도 집에는 투망 같은 고기잡이 도구가 있어 지금도 쓰냐고 물으니, 아들이 오면 한 번씩 가서 잡는다고 한다. 그 큰아들이 군대 갈 무렵인 30년 전까지는 고기가 넘치도록 많았으나, 이후 농약을 많이 치고 그러면서 확 줄었다고 회상하신다.

 

다음 집을 찾아 나섰다. 얕으막한 고개를 넘으니 바로 새말로 이어졌다. 새말은 말 그대로 새로운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의 어느 농가에서 나무에 호박꼬지를 걸어 말리는 모습을 보았다. 이곳이 강화군 강화읍 용정리 새말에 사시는 안인분(73) 할머니의 집이다. 안인분 할머니는 새말을 "샛말"이라고 부르셨다. 아마 발음과 뜻 구분의 편의 때문에 사이시옷 현상이 일어났나 보다. 다니며 보니 이런 일은 어디에나 무척 많았다. 사투리를 연구하는 국어학자는 참 머리 아프겠다. 한 명 한 명 만나서 하나하나 발음을 다 듣고 분류하고 정리하려면... 토종 조사를 나온 안완식 선생님은 그런 맥락에서 참 대단하시다. 이제는 씨앗만 보면 이것이 토종인지 아닌지 가늠하신다. 어떻게 이런 경지까지 오르셨는지 놀랍다.

 나무에 호박꼬지를 걸어 말리는 모습.

 

안인분 할머니는 농사를 많이 짓지는 않는다고 하셨는데, 씨앗을 잘 모아두셨다. 할머니만의 공간에 가서 이것저것 구경했다. 첫 번째 집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그렇고, 할머니만 아는 할머니만의 공간에 가면 꼭 뭐라도 하나씩 있다.

 

안인분 할머니 댁의 돌절구. 강화와 교동도에는 돌절구가 거의 집집마다 하나씩 있다. 지금은 쓰지 않지만... 

 

안인분 할머니의 뿔시금치. 요즘 시금치는 둥글고 맛대가리 없지만, 옛날 것은 씨가 뾰족하게 뿔이 있어 다루기 어렵지만 아주 맛나다고 하신다. 

 

동네의 어느 집 텃밭에 자라고 있는 파. 조선파라고 하시며 보여주신 것 모두 시장에 나온 파보다 키가 작고 색이 옅었다. 아, 정말 난 아무것도 모르고 맛도 모른 채 아무거나 주워 먹고 살았구나.

 

 

안인분 할머니의 집은 좋은 목재로 지은 집이다. 한때 한옥에 휘어진 목재를 쓴 것이 자연친화적인 모습이 반영된 것이란 착각을 한 적이 있다. 나중에서야 그건 제대로 된 목재를 쓸 수 없기에 그런 것임을 알았다. 이 집은 수원에서도 와서 취재해 갔다며, 요즘 시세로 이렇게 짓자면 5억은 든다고 하신다. 집의 틀이며 모양을 보면 그 말이 거짓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반듯반듯한 목재로 잘 지은 집 

 

 

이후 같은 마을에서 3대째 살고 계신 강천희(66) 할아버지와 안병균 할아버지를 만났다. 강천희란 분은 할아버지란 말을 붙이기가 송구스러울 정도로 살갗도 팽팽하고 젊어 보이신다. 이제 우리도 확실히 오래사는 나라다. 어느 새 환갑 잔치는 슬며시 사라지고 고희나 되어야 잔치 좀 한다. 두 분 모두 집도 새로 깔끔하게 짓고 사시는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이후 사람을 찾아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다가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평상 겸 연장통으로 쓰는 재미난 걸 보고 살짝 사진에 담아왔다.

 

 

수집 조사 첫날.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일머리도 모르고, 어떻게 정리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기록도 부실하고, 사진도 별로 없다. 물론 시간이 없기도 했다. 음력 11월, 5시면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간다. 해가 넘어갈 무렵이면 빛과 따스함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사라진다. 서둘러 밖의 일을 정리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 다가오는 밤을 기다린다. 낮밤을 가리지 않는 도시인만 도깨비처럼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활개칠 뿐. 왜 올빼미족도 있지 않은가? 밤은 달과 함께 공진하는 감성의 시간. 작은 자극에도 피부는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예술을 하는 사람은 밤을 사랑하지 않는가! 하지만 땀 흘리는 사람의 밤은 이튿날의 기운을 챙기는 기다림의 시간. 농촌의 밤은 바로 그런 기다림의 시간이다. 심지어 창밖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마저도.

 

이후 두 곳의 농가를 더 방문하고, 강화읍 인삼센터 앞의 풍물시장에서 할머니 네 분에게 콩 종류를 샀다. 뭔가 차이가 있으니 수집하셨을 텐데, 솔직히 난 아직 아무리 들여다봐도 잘 모르겠다. 이것이 바로 경험과 공부의 차이다! 열심히 좇아다니며 부지런히 배워야지.

 

 

마지막 농가에서 수집 조사를 하는데, 기러기 떼가 날아갔다. 한강 하구 쪽으로 오면서 보니 기러기가 참 많았다. 그러고 보니 가까이에서 기러기를 본 것도 처음이 아닌가. 저들은 무엇을 좇아 대열을 지어 하늘을 날아다닐까? 아래로 양능들(陽陵坪)을 두고 날아오른 기러기. 평坪은 우리말의 들이나 벌을 한자로 옮긴 말이다. 지금도 땅이름에 보면 평이란 말이 많다. 평坪이 아닌 평平이 많은데, 혹시 평坪을 잘못 적은 것이 아닐까? 

 

17시 30분 첫날의 조사를 마치고 숙소를 잡은 뒤 저녁을 먹고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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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를 보며 찾은 곳은 한림읍 명월리. 마을회관 앞에 차를 세우고는 또 동네 조사에 들어갔다. 마을회관 바로 앞에 있는 집에서 한 할망을 만났으나, 뭍에 살다가 섬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며 자신의 집에는 토종이 없단다. 집에 들어오는 길에도 시멘트를 깔끔히 발라 놓으신 걸 보니 그렇기도 하겠다.

그렇다고 아무 성과도 없이 이 동네를 뜨기가 뭐하여 다시 이 집 저 집 기웃거렸다. 돌담을 따라 들어선 골목에서 검은 동부가 자라다 말라비틀어진 것을 발견했다. 다시 한 번 채집에 들어갔다. 검은 동부를 한참 따다 보니 이건 동부만 있는 게 아니다. 새팥으로 의심되는 것과 돌동부도 자라고 있었다. 오늘은 특별한 성과도 없으니 이것 모두 채집 대상이 되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돌담을 따라 집으로도 찾아들어갔다. 마당에 서서 사람을 찾으니 문이 왈칵 열린다. 할머니께서 쪽파를 다듬어 장에 내려고 일하고 계셨다.

 

 한림읍 명월리 양귀순(80) 할머니의 쪽파밭 한 귀퉁이에 있는 바위에 캐다 만 고구마와 골갱이가 놓여 있다. 제주에서는 호미를 골갱이라 부르고, 낫을 호미라 한다. 골갱이는 골을 파는 괭이라는 뜻이 아닐까? 돌이 많은 제주의 밭에서 귀가 넓은 호미를 쓰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할머니께 토종을 찾으러 다닌다고 바쁘시더라도 잠깐 씨앗 좀 보여주실 수 없냐고 부탁드렸다. 흙 묻은 손을 탁탁 털며 일어나시더니 굽은 허리로 우리를 창고로 이끄신다. 이것저것 꺼내서 주셨는데 오래 묵어 못 쓰는 것이 많았다. 이제 기력도 딸리시고 농사일도 많아 세심하게 챙기시기 어려우신가 보다. 하루방도 없는 듯한데 혼자서 고생이 많으신 듯하여 마음이 짠하다. 동네 할머니한테 빌어 왔다는 3년 심은 청상추를 하나 얻은 뒤 이거라도 먹으라고 주시는 곶감으로 허기를 달래며 헤어졌다.

 

꽁꽁 싸매 놓은 씨앗을 꺼내고 계신 양귀순 할머니. 소쿠리에 담겨 있는 곶감은 잠시 뒤 우리의 입속으로 낼름 들어갔다. 

 

 

다시 차에 올라 명월리의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가는 길에 채집하는 일을 잊지 않고 새콩과 나물콩을 챙겼다. 제주에서는 눈에 띄면 일단 모은다. 토종을 찾기가 강화도보다 어렵다. 땅은 넓지만 사람도 마을도 드물고, 게다가 자연조건 탓인지 씨앗도 잘 챙겨 두지 않으셔서 더 그렇다.

 

 여기저기 헤매다 만나 나무에 달린 열매. 뭐라고 일러주셨건만 또 까먹어 버렸다. 열매가 너무 예뻐서 한 장 찍었는데... 

 

 

명월리 상동이란 곳에 사시는 고지옥(76) 할망을 찾은 건 해가 기울어가는 때였다. 이제 오늘 하루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할망은 안 그래도 저녁을 준비하시는 듯하다. 잠시 다른 데 정신 팔려 늦게 온 사이에 안완식 박사님이 고추며 방아풀 씨를 얻으셨다. 고추는 계속 받아서 심고 있다고 하시는데, 정말 작다.

 

고지옥 할머니 댁의 고추. 크기가 아주 작고, 작은 대신인지 아주 맵다. 입에서 불이 날 정도로. 그나저나 12월 말에 이런 고추를 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고지옥 할머니. 어두워지고 있던 때라 사진도 어둡기만 하다. 우리가 느끼기에는 별로 춥지 않았으나, 연세도 있으시고 하여 추위를 막으려고 두텁게 입으셨다.

 

보틀브러쉬나무의 꽃. 우리말로는 그대로 병솔나무란다. 이건 하도 특이해서 까먹지 않았다.

 

 

잠시도 지체할 틈 없이 다시 상명리로 날아갔다. 시간이 천금이다. 상명리 872번지에 사시는 강순옥(71) 할머니 댁에서 기름 짜 먹는 유채와 속이 안 차고 국거리나 김치로 먹는다는 호배추를 얻었다. 할머니는 낮잠을 주무셨는지 한참을 불러서 만날 수 있었다. 끈덕지고 큰 소리로 부르지 않았으면 못 만날 뻔했다. 생판 모르는 사람과 만나야 하느니 만큼 일단 뻔뻔해야 한다. 또 친근하게 다가가야 한다.

 

강순옥 할머니의 옆집에는 양공표, 조유선 어르신이 사신다. 양공표는 강순옥 할머니의 남편의 동생이라고 하신다. 강순옥 할머니 댁에 들어가며 두 집 문패의 이름이 비슷해 혹시나 하고 물었더니 역시나 형제 사이란다.  

 

 강순옥 할머니 댁에서 만난 의자. 무릎이 안 좋아서 이걸 허리에 차고 밭에 철푸덕 퍼질러 앉아서 일하신다. 안에는 스티로폼이 들었다.

 

 

상명리는 오늘의 최종 목적지다. 다른 데를 가고 싶어도 이제 해가 지기에 그럴 수도 없다. 마지막 힘을 내 이 동네를 샅샅이 뒤진다. 그렇게 1771번지에 사시는 강계춘(77) 할망 댁에 들어갔다.

강계춘 할머니 댁 마당 한켠에 쌓여 있는 짚가리. 이걸 소를 먹인다고 한다. 

 

 

해질녘에 만나는 분들은 늘 그렇듯 일단 마음의 문을 좀 닫고 계신다. 날씨에 따라서도 그렇지만 시간에 따라서도 사람을 반기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하긴 한밤중에 누가 찾아오면 나라도 문부터 닫아 걸겠다. 그것이 인지상정. 할머니께 여기까지 찾아온 사정을 말씀드리고 옛날부터 심던 씨앗이 있냐고 여쭈었다. 그러니 보리콩이 하나 나왔다. 여타의 것은 더 묻지 않고 이 정도로 마치고 나왔다. 나와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네를 더 둘러보다가 담벼락에서 지름콩(콩나물콩)을 찾았다. 콩을 털고 쌓아 놓은 콩가리에서 떨어진 것들이다. 그래서 이번에도 다시 한 번 채집 활동에 들어갔다.

 

오늘 하루는 채집의 연속. 

 

이것으로 오늘의 일을 마치고 대정여성농민회의 김정임 선생님을 기다렸다. 오늘은 잠깐 만나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기 때문이다. 이삼십 분 뒤에 만나 한림읍으로 나갔다. 숙소를 잡기 전 저녁을 먹으며 그동안 지나온 사정과 수집한 토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주도에서는 원래 푸른콩으로 장을 담그고, 노란콩은 소를 먹였다고 한다.

대문에 걸쳐 놓는 나무는 정낭이라고 하는데, 쭉쭉 뻗은 숫대나무(편백)나 삼나무로 만든다고 한다. 이걸 세 개 다 걸쳐 놓으면 멀리 갔다는 뜻이고, 셋 다 내려놓으면 집에 있음, 하나만 내려 놓으면 옆집이나 근처에 있으니 좀 기다리든가 하라는 뜻, 두 개만 내려놓으면 마을 어딘가에 있으니 찾아오든지 하라는 뜻이란다. 도둑이 생겨도 목숨 걸고 섬을 빠져나가지 않는 이상 어디서든 잡을 수 있을 테니 이렇게 경계가 허술(?)했겠지. 요즘처럼 몇 개씩 보안장치를 하고도 불안해 하는 세상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풍속이다. 과연 세상이 살기 좋아진 건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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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2월 20일 토요일. 날씨는 흐리고 바람에는 물기가 물씬 묻어 있다. 그러나 날은 따뜻하다. 간밤에 잔 모텔에서 나와 아침을 먹었다. 제주도에는 모텔이 여관 수준인 것에 놀랐다. 다니면서 알았는데 여기는 관광지라서 그런지 극과 극이다. 좀 괜찮아 보인다 싶은 곳은 어김없이 관광단지이며 값이 무척 비싸다. 그렇지 않은 곳은 시골 같은 분위기... 제주도라고 하면 신혼여행 같은 것만 떠올라서 그런지 시설이 좋을지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아침을 먹고 제주도 이틀째 조사에 나섰다. 여기는 밭도 참 다르다. 밭마다 돌담을 낮게나마 둘러친 모습이 이색적이다. 이것도 다 바람 때문일까?

 

 제주도의 마늘밭. 스프링쿨러로 마늘에 아침밥을 주고 있다.

 

 

차를 타고 지나다 큰 창고에 사람들이 모여 있어 무슨 정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가보았다. 이야기를 나누니 이곳이 바로 대정읍 친환경농업연구회라고 한다. 헌데 친환경농업연구회라고 이름을 걸었지만 속사정은 그렇지 않아 보였다. 그분들이 그동안 고민한 문제가 양파, 마늘, 감자의 무름병이었는데, 광어 양식장에서 항생제로 쓰는 Dapsone이란 약이 거기에 잘 듣는다며 이게 어떤 효과와 부작용이 있는지 연구 좀 해달라고 부탁하신다. 그러면서 토종만 찾을 것이 아니라 농민들이 재배해서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걸 꼭 찾아달라고 거듭 당부하신다. 이야기를 들으며 맞는 말이긴 한데 웬지 씁쓸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다.

그래도 기왕 찾아온 곳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왜 제주도의 무덤에는 돌을 둘러 놓았는지... 대답은 이러했다. 무덤을 쓰려고 땅을 파면 돌이 많이 나오기도 하고, 또 마소를 놓아기르다 보니 무덤을 해할 수도 있어 일부러 돌을 둘러 놓았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마치고 어제 조사를 하던 곳으로 차를 향했다. 동네를 돌다가 사람이 있다고 표시된 대문을 찾아들어갔다.

 

대문이 이러면 멀리 나갔으니 다음에 오라는 뜻. 참 편하다. 도둑이 없어서 이런 것도 가능했겠지.

 

 

들어가 누가 계신지 소리 높여 불렀다. 인기척이 들리더니 할머니 한 분이 문을 열고 내다보신다. 그러고는 홀로 집을 지키고 계신 할머니가 한 분 나오셨다. 올해 87살이 되셨다는 할머니는 틀니가 아니면 말도 제대로 못한다며 몸을 가누는 것조차 힘겨워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식을 11명이나 나으셨다고 한다. 자식 하나만 낳아도 폭삭 늙는 것이 느껴질 텐데 이 척박한 곳에서 자식을 건사하려고 얼마나 뼛골 빠지게 일하셨을지 생각만 해도 대단하시다. 할머니는 귀도 좀 어두우셔서 말소리를 잘 못 알아들으셨다. 근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귀가 어두우신 만큼 표준어에 오염이 덜 되셔서 도무지 하시는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냥 인사만 드리고 돌아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거동도 불편하신 할머니. 하지만 할머니 뒤로 보이는 반들반들한 마루바닥이며 깔끔히 정리된 집 안에서 할머니가 살아오신 삶을 짐작할 수 있다. 묵호가 외가였던 내 기억 속의 할머니도 이러하셨다.

 

 

다시 다음 집을 찾아나섰다. 입구부터 예쁘게 정리된 집을 찾아서 무턱대고 들어갔다. 그동안 경험한 바에 따르면 이런 곳이 뭐가 있어도 있다. 무턱대고 들어가 사람부터 찾았다. "할머니~. 누구 계세요~" 그렇게 이곳에서 이인옥(70)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여기 대정읍 무릉리 인향동으로 시집을 와 지금까지 살고 계신다. 시대가 바뀜에 따라 집도 많이 손을 보았지만 그거야 사람 사는 곳은 다 그런 것. 옛날 방식대로 고집하며 사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핸드폰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없으면 난 편하지만 다른 사람이 불편해 한다는 사실.

 

이인옥 할머니. 첫 집에서 생각치도 않은 성과에 안완식 박사님은 정말 좋아하셨다. 정말 이럴지는 몰랐다. 

 

 

찾아온 연유를 말씀드리고 대뜸 텃밭에 보이는 배추부터 여쭈었다. "할머니 텃밭에 배추는 옛날부터 심던 게 아닌가요?" 역시나 그건 통이 앉는 토종이란다. 어제 나쁜 걸 뿌렸다며 그래도 잘 자라 다행이란다. 여기서는 5월에 씨를 걷는다고 하신다.

 

 이인옥 할머니 댁의 토종 배추. 이것들도 크게 두세 가지 종류로 갈리었다. 할머니는 따로 구분하지 않고 씨를 받아 그대로 뿌려 걷어 먹는다고 하신다.

 

 

배추 말고도 30대부터 심으셨다는 팥도 얻었다. 이건 알이 굵고, 6월에 심어 10월에 거두는 중생종이다. 또 늦깨(참깨)도 있었는데, 키가 크고 10월에 거둔단다. 드물면 가지가 많이 뻗고, 너무 배면 바짝 올라간다. 6개씩 달리는 육모깨라 수확이 많다. 원래 제때 심으면 흰색인데 늦게 갈아서 연갈색으로 보인다.

 

 이인옥 할머니 댁 마당에 자라던 동백의 하나. 안완식 박사님께서 제주에 있는 동안 몇 번이나 알려주셨지만 까먹었다.

 

 

 동네 말미에서 우영을 둘러보는 할망을 보았다. 보리콩이 자라고 있어 씨 남은 거 없냐고 여쭈니 씨가 왜 남냐며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신다. 제주는 날씨가 따뜻해서 그럴까? 씨를 남겨 놓지 않는다. 갓 같은 건 그냥 한 번 뿌리면 그 자리에서 계속 자라기에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씨를 받아야 할 필요를 못 느끼니 씨를 받는 일도, 씨를 남겨 놓지도 않는가 보다. 남으면 남 주거나 버린다는 여든넷 되신 할망의 말에 그런 걸 느꼈다. 이건 토종과 상관 없지만 제주도에서는 진자리콩 깍(꼬투리)이나 쫄멩이(쭉정이)는 멀먹이(말)라고 하신다. 제주에서는 말이 밭갈이, 물건 나르기, 밭 밟기에 중요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심고 남으면 남 주거나 버린다는 할망. 거동이 불편하셨지만 부지런히 밭을 돌보신다. 보리콩 밭에 깔아 놓은 짚풀이 눈에 띈다. 왜 이렇게 깔아 놓으셨는지 묻는 걸 씨에 정신이 팔려 놓쳤다는 걸 다시 사진을 보니 알겠다. 

 

 

제주의 특산 콩 준지리(준자리, 진자리)콩. 이 콩의 이름은 알이 잘다는 뜻인 듯하다. 제주 사람들과 함께 웃고 울며 그 긴 세월을 함께 해 왔다.

 

동네를 나와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차를 타고 가다 어지간한 집이 보이면 무조건 내려서 하나하나 찾아갔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그런데 다니면서 보니 한 나무 종류가 유난히 눈에 띈다. 무슨 나무일까? 지나가는 할망에게 물었다.

"할머니, 저게 무슨 나무예요?"

"잉?"

"저 나무요, 나무 이름이요."

"저기 폭낭이지."

아, 저 나무가 바로 제주도의 정자수 폭낭이구나. 뭍의 말로 옮기면 팽나무다. 제주도에는 뭍의 느티나무만큼 팽나무가 많다. 오히려 느티나무는 별로 눈에 띄지 않을 정도다. 팽나무가 따뜻한 곳에서 더 잘 자라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폭낭, 곧 팽나무의 존재를 처음으로 깨닫게 한 나무. 여름에 얼마나 시원할까? 이번 여름에 다시 제주도에 가 팽나무의 그늘에서 시원하게 바람을 쐬고 싶다. 

 

제주의 겨울이 얼마나 따뜻한지 여기서는 10도 이하로만 떨어지면 춥다고 난리가 난단다. 영하로 떨어지는 것도 아닌데 그 정도만 되어도 내복을 입고 한다는 사실이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열대 지방에서는 그 정도로 기온이 떨어지면 얼어죽는 사람도 있다니, 인간의 기온적응력이 그렇게 뛰어나지는 않은가 보다. 아무튼 따뜻한 날씨 덕에 예쁜 수선화 한송이를 보았다. 이 겨울에 꽃을 볼 수 있다는 데, 또 수선화의 예쁜 모습에 '이야~'라는 감탄사가 절로 튀어나왔다.   

 

이 겨울에 비닐하우스도 아니고 무슨 조화일까? 제주 사람은 사시사철 꽃을 보고 산다. 그래서 도둑이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제주는 식수 때문에 바닷가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연못이나 샘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땅은 넓지만 마을은 드문드문하다. 처음 제주도 지도를 펼쳐보고는 이 넓은 땅을 2주 만에 돌아다닐 수나 있을까 막막했는데, 막상 와서 하루 지내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닷가 쪽으로는 한 작물만 싸그리 심는 농사가 대부분이니 빼고, 중산간이라는 곳으로 다녀야 하는데 이곳에는 마을이 드문드문 모여 있으니 찾아갈 곳도 그리 많지 않을 뿐더러 거기만 가면 쉽게 돌아다닐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게 다음으로 찾은 마을은 한경면의 조수리라는 곳이다. 특히 불그못이라 부른다는 동네다. 불그못, '불그'가 붉다는 뜻인지 무엇인지는 몰라도 '못'은 확실히 물이 있다는 뜻이다. 전형적인 제주의 마을이니 옛날부터 심던 무엇인가 있을지도 모른다.

마을을 한참 뒤지고 다니다가 가장 안쪽에 있는 집을 찾았다. 이계욱(80), 강정팔(81) 어르신께서 사시는 집이다. 할머니는 성함만큼 성격이 할아버지보다 괄괄하시다. 집안의 주도권을 할머니가 쥐고 있는 듯한 목소리로 우리를 영 달가워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할아버지께서 꼼꼼하고 세심하게 우리를 맞아주신다. 남녀의 역할이 바뀐 듯한 모습 또한 새롭다. 이것도 제주도의 특징일까?

 

이계욱 할아버지. 집 구석구석에서 씨를 꺼내와 하나하나 보여주시며 나눠주기까지 하셨다.

 

 

들깨는 5월쯤 심는다는데, 오래 한 80년 됐단다. 그러니까 아버지에게 물려받아 계속 심는 것이다. 너물이라 부르는 배추는 20년이나 되었고, 참깨도 80년 넘어 90년이나 되어 간다고 한다. 그 순간 우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하시던 할망이 한마디를 날리신다. "새로 나온 씨가 좋은 거지." 케케 묵은 걸 뭐하러 찾아다니는지 이상하신가 보다. 또 까망콩과 팥도 얻었다.

무 씨는 없냐는 물음에 할아버지께서는 "봄 나면 무, 배추 씨 세워야지"라고 답하셨다. 다음에 와서 또 씨를 얻을 수 있도록 두 분께서 건강히 잘 계셨으면 좋겠다.

 

이제 다시 차에 올라 다음 마을로 향했다. 이번에 갈 곳은 낙천리다. 낙천리의 중심부, 관청이 있는 곳에 차를 세웠다. 여기는 널찍한 못이 하나 있었다. 제주에서는 다음과 같은 공식이 성립하겠다. "물이 있는 곳 = 사람이 모이는 곳 = 짐승도 모이는 곳" 연못 주변에는 멧돼지 석상을 가져다 놓았다. 연못 옆에 있는 설명문을 읽어보니 멧돼지들도 와서 물을 먹고 돌아가던 곳이란다. 지금은 상수도 시설이 놓여 별 쓸모가 없지만, 그렇지 않던 시절에는 정말 뭇 생명을 떠받쳐주는 생명수였으리라. 요즘은 정말 물 귀한 줄 모르고 펑펑 쓰는 경향이 있다. 특히 위생 관념이 철저해질수록 더욱 그렇다. 젊은 사람들은 아무 생각 없이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오는 줄 아는데, "물 귀한 줄 알아 이것들아!"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멧돼지의 모습이, 뭇 생명을 품에 안고 길렀을 이 연못의 역사를 대변하는 듯하다. 저 왼쪽 뒤로는 마을 나무로 서 있는 폭낭이 보인다.

 

 

이곳 낙천리 1805번지 사시는 문대숙(87) 할머니 댁에 들렀다. 연세가 있으신 만큼 뒤란에 조그만 우영이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옛날부터 심던 콩 같은 거 없는지 여쭈었다. 그러니 약콩이라며 콩 봉지를 하나 가지고 나오신다. 큰 알고 작은 알 두 가지가 섞인 듯했는데, 오라방 네에서 얻어온 것으로 속이 누렇다고 한다. 오라방 네에서는 20년 이상 심던 것이라니 일단 조금이지만 얻었다. 다른 건 별 거 없으니 여기 아랫집에 가보라고, 거기도 내가 나눠줘서 있을 테니 한 번 가보라고 하신다. 얼른 인사를 드리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약콩을 설명해 주고 계신 문대숙 할머니. 

 

 

아랫집에는 김을선(76) 할머니가 한창 메주를 쑤려고 콩을 삶고 계셨다. 콩 삶는 냄새에 군침이 돌았지만 염치없이 얻어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김을선 할머니에게 콩 이야기를 꺼냈다. 할머니의 며느리는 충북 음성 사람인데, 한번은 사돈댁에 가니 검은콩이 비싼 걸 보고 1홉 1만 원이나 주고 사왔다고 하신다. 그 콩은 뭍에서도 구할 수 있으니 일단 지나가고, 다른 콩이 더 있는지 여쭈었다.

윗집 할머니 말씀처럼 역시 이 집에도 약콩이 있었다. 작은 알은 아주 빠르다는 특징이 있고, 큰 알은 또 동그란 것이 있고 납짝한 게 있다. 동그란 건 속이 파랗고 늦은 반면, 납짝한 건 속이 노랗고 한 10일 빠르단다. 콩만 보고도 쪽집게처럼 딱딱 알아내시며 그 특성을 읊으시는데, 농민에게 묻고 배워야 한다는 말이 새삼 떠올랐다. 이것 말고도 중간 크기의 참팥을 얻고, 마당에서는 요즘 제초제 때문에 보기 힘들다는 댑싸리도 씨를 받았다.  

 

김을선 할머니. 우리를 상대하랴 메주에 신경을 쓰랴 정신없이 바쁘셨다. 귀한 시간을 쪼개 주셔서 참 고맙다. 

 

 

아, 배가 고프다. 밥 때를 놓치면 한도 끝도 없기에 어디 마땅한 식당이 있으면 들어가기로 했다. 여기서는 밥집을 찾는 일도 쉽지 않다. 관광지에 가면 음식점이 끝도 없지만 관광지만 벗어나면 어쩌다 하나씩 볼 수 있을 뿐이다. 어찌어찌 뱅뱅 돌다가 저청초등학교 앞에 있는 칼국수 집에서 맛나게 먹었다.

배를 불리니 나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잠시 소화도 시킬 겸 초등학교를 둘러보았다. 입구 쪽에서는 연자방아를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이 이것만 보고 무엇인지 알까 싶었지만 그래도 이런 걸 가져다 놓은 게 어디랴. 혹시 원래 여기가 방앗간 자리인지는 사람이 없어 물어보지 못했다. 아이들이 다칠까봐 그랬겠지만 시멘트로 움직이지 않게 꽁꽁 발라 놓은 모습이 꼭 우리 옛 문화의 현주소를 반영하는 듯하다. 박물관이나 체험학습에서 겪는 우리 문화는 모두 죽어 있다.

 

 저청초등학교의 연자방아. 이 앞에는 역대 교장선생님 공덕비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제주도는 기념비가 참 많다.

 

 

차에 올라 한참을 다녔지만 별 성과가 없다. 몸은 나른하고, 성과는 없어 기운 빠지고, 중간에 조수교회에 들러 마당에서 부용 씨를 채집한 것이 다다. 그리고 조수1리의 어느 길가에서 까만동부, 지나가는 아주머니께 물으니 깜장돔비콩이라 부른다는 동부를 채집했다. 이건 알이 아주 작았다. 그리고 한림읍 동명리 202번지에 사시는 오씨 할머니(94) 댁 담장에서 자라고 있던 부추의 씨를 채집했다.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만나도 씨가 없다보니 어쩔 수 없이 채집에 나섰다. 이거 토종 수집단이 아니라 토종 채집단으로 이름을 바꿔야겠다.

 

계속

 

 

 지나는 길에 어느 밭에서 찍은 브로콜리 꽃. 제주도가 따뜻하기에 볼 수 있는 귀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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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국의 땅, 제주도 

 

 

2008년 12월 19일, 이틀의 휴식 뒤에 다시 제주도를 향하다. 8시 30분 공항으로 출발하여 9시 50분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는 11시 30분이 이륙할 예정이다. 김포공항은 태어나서 세 번째 와 보았다. 비행기는 가까이에서 볼 때마다 참 신기하다. 어떻게 저런 쇳덩어리가 하늘을 날 수 있는지 경이롭다.

 

간단하게 제주에 도착해 렌트카를 알아보았다. 비용은 어디나 정가제라 더 깎거나 할 수 없다. 유명한 관광지답다. 에누리가 없는 게 아쉽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정가제가 더 편할 수도 있다. 최소한 바가지 썼다는 후회는 하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다.

 

렌트카를 타고 먼저 대정읍으로 이동해 대정 여성농민회 분들을 만나기로 했다. 조사에 앞서 제주도의 사정을 미리 파악하고자 해서이다. 도로를 타고 달리는 데 기분이 이상하다. 늘 보던 풍경이 아닌 어딘가 다른 곳에 왔다는 느낌 때문이다. 제주도는 참으로 다르다. 이 묘한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여성농민회에서 두 분이 나오셨다. 김정임, 원정순 선생님이 그분들이다. 늦은 점심을 먹으며 제주도의 농업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듣고, 어떻게 다니는 것이 좋을지 상의했다. 그분들의 말에 따르면, 제주도는 해안으로는 대부분 돈벌이를 위해 홑짓기를 한다고 한다. 토종은 아마 중산간에 아직 살고 계신 할머니들에게 있을 것이란다.

대정읍은 주로 감자와 마늘, 조생 양파가 많고, 안덕면은 감자, 서귀포시 중문에서는 지난 여름에 독새기콩을 찾았다고 한다. 남원읍과 효선면, 성산읍은 밀감 과수원이 많고, 구좌읍은 당근과 만생 양파, 조천읍은 감자와 마늘이 많다. 제주시와 애월읍, 한림읍은 양파와 양배추, 마지막으로 한경면. 이러한 식으로 다니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라는 조언을 들었다. 계획은 이렇지만 돌아다니다 보면 어떻게 바뀔지 모른다.

다음으로 그럼 어느 지역의 어느 곳을 볼지 대충 정했다.

한경면 - 청수, 저지, 낙천, 산양, 조수

한림읍 - 상명, 명월, 상대, 동명

애월읍 - 낙읍, 상가, 어음, 장전, 고성

조천읍 - 와음, 선흘

성산읍 - 수산, 난산

효선면 - 가시, 성읍

남원읍 - 수망, 의귀, 한남

구좌읍 - 덕천 송당

 

이렇게 전체적인 계획을 짜고 남는 시간을 이용해 서귀포시 대정읍 무릉리로 향했다.

 

김정임 선생님의 안내로 도착한 곳은 무릉2리 좌기동이라는 곳이다. 햇살이 따땃하니 참 좋다. 겨울에도 이렇게 춥지 않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그래도 바닷가니 추울 거라 생각하며 내복까지 껴 입었는데 오늘 일정이 끝나면 당장 벗어야겠다.

 

 

좌기동에서 본 제주도의 전통 대문. 빗장을 다 열어 놓으면 집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말로만 듣던 대문을 보고 재미있었는데, 요즘은 이런 대문도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있다고 한다. 제주도의 말도 점차 사라지고 있듯이 문화도 급속하게 변하고 있다.

 

 

이곳에 사시는 박성은(70) 할머니를 가장 먼저 만났다. 이제 몸이 불편해서 농사고 물질이고 암것도 못하고 집에 드러누워 있으시단다. 그래도 제주도에서 가장 먼저 만난 분이라 따로 적어 놓았다. 부추를 '세우리', 앵두를 '은냉', 메밀을 '모물', 서로는 '삼촌'이라고 부른다.

 

 

박성은 할머니. 지금은 지팡이에 의존하며 다니시지만, 젊은 시절에는 누구 못지않는 한 집의 기둥이셨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이 동네에 있는 정미소를 찾았다. 이 정미소는 서귀포 지역에서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이를 자부하며 벽에는 현판까지 내걸어 놓았다. 산남이라고 하는 말이 서귀포 지역을 뜻하고, 제남은 제주도 남쪽을 가리킨다고 한다. 정미소를 운영한 지는 50년 이상 되었는데, 이 근방의 다른 정미소는 대부분 그 맥이 끊어졌다고 한다.

 

인근에서 온갖 종류의 곡식류가 모이는 곳. 덕분에 헤매지 않고 다양한 곡식을 보고 수집할 수 있었다.

 

 

정미소는 좌기동 1156-3번지에 자리하고 있는데, 주인 할아버지는 마침 외출중이셔서 김기선(75) 할머니를 만났다. 

 

정미소 안의 김기선 할머니. 아직도 건강하시다. 정미소 곳곳에 쌓여 있는 곡식 먼지와 그 특유의 눅은내가 이곳의 역사를 대변하는 듯하다.

 

 

이곳에서는 모두 여섯 가지를 수집했다. 덕수에서 사왔다는 메밀, 영락리에서 온 차지고 맛있다는 검은흐린조(검은 개발시리), 이것을 옛날에는 육지조라고 불렀다고 한다.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는데, 낭댕이(줄기)가 벌겋고 끝에 가닥이 세 개란다. 이 의문은 이후의 조사 과정에서 확실하게 풀린다.

다음은 주냉이(지네) 보리(두줄보리, 호주맥), 이건 낭댕이가 빨갛고 이삭이 길딱한데, 수확이 적다. 키가 커서 박한 데 심는다고 한다. 보성, 서광, 신평에서 사온다고 한다. 또 신도에서 사온 굵은 메주콩, 조수에서 사온 된장 담그는 푸린독새기콩과 원래 제주도 것인 노란 개발시리조를 구했다. 이 노란 개발시리조는 키가 크고 가닥이 세 개가 아니라고 한다. 낭댕이도 노랗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말이 마구 튀어나온다. 들리는 대로 받아서 적기는 적지만 뭐가 뭔지 모르겠다. 김정임 선생님이 옆에서 열심히 통역(?)을 해주신 덕분에 그래도 어느 정도 알아들었지, 내일부터는 우리만 다녀야 하는데 걱정이다. 제주말은 외국어에 버금간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정미소 안에 걸린 칠판. 거래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연락처가 빼곡히 적혀 있다. 주인만이 알아볼 수 있는 개성 있는 칠판.

 

푸린독새기콩. 달걀처럼 생긴 푸른 콩이란 뜻이다. 제주도에서는 이걸로 메주를 쑤어 된장을 담가 먹는다고 한다. 그렇게 맛있나? 아니면 다른 콩이 없어서?

 

이건 굵은 메주콩이다. 하지만 육지의 그것에 비하면 그리 굵은 편은 아니다.

 

 

이제 수고하신 김정임 선생님과 헤어져 우리끼리만 제주도를 돌아다닐 시간이 되었다. 바쁜 농사일로 함께하지 못하는 걸 미안해 하시는 걸 보내드리고 차에 올랐다. 멀리 가지는 않고 일단 좌기동 일대를 다 돌아볼 참이다.

한참을 다녀도 사람을 볼 수가 없다. 여기서도 사람 만나기가 귀한 일이로구나. 그도 그럴 것이 제주도는 아직 날이 따뜻해서 날만 좋으면 지금도 밭으로 일을 나가거나 남의 밭에 놉으로 나간다니 더 그렇다. 따뜻한 것도 이럴 때는 좋지 않구나.

 

한참을 다니다가 어느 집의 마당에서 만난 고구마 절간. 다카하시 노보루의 기록에도 제주도와 관련하여 이 고구마 절간이 많이 나온다. 이걸 뭐라고 부르는지 나중에 꼭 확인해 봐야지. 처음 기록에서 이걸 보고 고구마 잘라 말린 것이라 번역을 했는데, 더 적당한 말이 있을 것이다. 

 

 

겨우 한 집에 들어가 할머니를 만났다. 좌기동 변정자(67) 할머니 댁에 들어가 토종을 찾는다고 설명을 드리고 한참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이제 그런 건 없다고 하신다. 마당 한쪽에 놓여 있던 호박만 하나 얻어서 나왔다. 할머니 얘기를 들으니 예전에는 밀감 한 그루면 자식을 대학까지 보냈다고 한다. 참 귀한 과일이었는데 이제는 겨울이면 지천에 널린 것이 밀감이니 격세지감을 느낄 만하다.

 

 변정자 할머니 댁에서 얻은 호박. 제주도의 호박은 대체로 납짝하고 골이 깊은 것이 특징이었다.

 

 

어느덧 시간은 5시를 훌쩍 넘었다. 5시를 넘으면서부터는 날이 많이 쌀쌀해지기 시작한다. 아무리 남쪽이라고 해도 해가 넘어가면 추워지는 건 어쩔 수 없구나. 오늘은 제주도의 이색적인 풍광에 얼떨떨하다. 현대를 사는 내가 이 정도인데, 교통이 불편한 시절에 살던 사람들은 오죽했으랴. 제주도가 인기 있는 신혼여행지였던 까닭을 알겠다. 요즘은 다들 외국으로 나가지만, 몇 십 년 전만 해도 참 신기했을 거다.

 

이렇게 하루를 끝마치나 했는데 좌기동 임춘후(69) 할머니 댁에서 많은 걸 얻었다. 검은 덩굴콩, 검은 돔비(동부), 준저리콩, 제비콩, 까만콩, 기침에 좋고 씨를 갈아 막걸리에 타 먹으면 관절에도 좋다는 하늘타리, 결명자, 유채를 얻었다. 날도 춥고 낯선 풍광과 말씨와 사람에 얼이 빠져 있어 제대로 기록을 하지 못했다. 물론 날이 어두워져 사진도 제대로 된 것이 하나 없다. 아쉬울 뿐이다. 내일은 좀 더 정신 바짝 차리고 제주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해야겠다.

 

5시 40분 조사를 마치고 숙소를 잡고 저녁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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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흑조였나? 이름을 적지 않았더니 벌써 가물가물합니다.

이삭이 시커멓게 생긴 게 일단 눈길을 팍 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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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키는 어찌나 큰지... 한 어림잡아도 150cm는 너끈할 것 같습니다.

옆에 자라고 있는 것이 중생은방조인데, 그것과 비교하면 완전 꺽다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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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더 특이한 것은 마디까지 까맣다는 것입니다.

마디와 마디가 튼실하게 이어져 있습니다.

키도 크니 볏짚으로 짚공예를 하기에 딱 좋겠네요. 쌀보다 볏짚이 더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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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 구술취재팀은 지난 6월 20일 강원도 평창 약물산 토종농장에서 서리태, 쥐눈이콩, 찰기장 등 잡곡류 80종류를 재배하고 있는 이기철(57세) 선생을 만났다. 이 분은 평창에서 태어나 농사를 짓다가 5년 정도 사업을 하기 위해 상경, 80년부터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농사를 짓고 있다. 농사를 짓기 시작했을 때부터 토종종자 보존과 교육․홍보에 뜻을 두고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97년에 농어업인대상을 받았고 신지식농업인상도 받았으며 한국농업전문학교 현장교수도 역임했다. 주요 생산품은 찰기장, 찰현미, 찹쌀, 흑미, 자광미, 오리쌀, 맛쌀, 찰옥수수, 서리태, 붉은팥, 쥐눈이콩, 메주콩 등이다.




- 먼저 반갑습니다. 저희는 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 구술취재팀입니다.

= 멀리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네요.


- 전통농법 취재에 선생님을 추천받았습니다. 토종종자를 많이 가지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 예, 몇 가지 있어요. 지난해에는 서산에 수수를 공급했지요. 수수 중에 키가 작은 종자가 있는데 그것이 가을이 되니 빨갛게 익으면서 새도 오고 해서 보기 좋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올해는 청주에도 수수를 공급해주고, 문경에는 조를 공급했어요.

 수수가 종자만 해도 80~90 여 가지가 있어요. 빗자루 만드는 수수도 따로 있구요. 빗자루 만드는 수수는 모양은 좋은데 수확은 별로래요. 어떤 종자는 달리면서 꼬부라져요.


- 재미난 것이 많네요. 그럼 수확은 어떻게 합니까?

= 이게 꼬부라지면서 거리가 생겨요. 그걸 베서 걸어요. 그리고 일반 먹는 건 장목수수라고 해서 중국에도 있는데 이게 맛이 제일 좋아요. 그런데 키가 커서 바람에 넘어지고 해서 그걸 많이 안 심고, 현재 우리가 먹는 것은 단목수수를 많이 심어요.


- 단목수수는 키가 얼마나 작습니까?

= 한 키가 안 돼요.

 그리고 호랑당콩 이라고 해서 중국에서 나오는 알록달록 한 것이 있어요. 이거를 울타리 에 쭉 심어요. 콩이 크고, 꽃이 빨간데 껍질이 호랑이처럼 알록달록 하다고 해서 호랑당콩 이라고 해요.

 울타리콩 이라는 건 과거에 울타리에 넝쿨이 뻗어 올라가는 걸 몽땅 울타리콩 이라고 했어요. 그 중에 알록알록 한 것도 있고, 빨간 것도 있고, 자주색도 있고, 약간 긴 것도 있고, 한 30 여 가지 있는데 여러 가지가 있죠. 지금 까치콩 같은 것은 우리나라에서 없어졌어요. 아주 옛날부터 있던 것인데 그게 소득이 안 돼서 그렇죠.


- 왜 그런가요. 소출이 적은가요?

= 소출이 적은 것보다 한 사람이 몇 만 평해서 쫙 해야지 그건 울타리에서 하나 영글면 따고 하나 영글면 따고 그래서 안 하죠. 울타리콩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콩은 영글면 껍칠 채로 따요. 그래서 껍질을 까면 심이 나오는데 그걸 마늘쫑처럼 그냥 기름에 볶아서 양념해 가지고 껍질 채로 먹어요. 그걸 까치콩이라고 해요.

 그 다음에 조개콩 이라고 해서 조개처럼 납작해가지고 조개가 혓바닥 내미는 것처럼 나오는 것이 있어요. 그게 조개콩 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껍질 채로 먹을 수 있어서 여러 가지 요리가 나와요.


- 지금도 재배하나요?

= 재배하는데 외국에 가도 찾아보기 어려워요. 국내와 중국에만 있는 것 같아요. 조개콩은 자주색이 나고 모양도 예쁜데 한군데에 50 ~ 60개가 열려요. 달린 다음 한꺼번에 여무는데 꽃도 자주색, 줄기도 자주색, 열매도 자주색, 알맹이도 자주색인데 관상용으로 좋죠. 하나를 심으면 담 하나를 다 덮을 정도로 왕성해요. 그런데 이 지역에서는 잘 여물지가 않고 계속 잎사귀만 뻗어가고 꽃만 피지 여무는 시기가 늦어요. 그래 그게 작년까지 있었는데 작년에 열매를 늦어서 못 따서 없어졌어요.


- 그럼 종자은행에도 없나요?

= 네. 그래서 그거를 중국이나 그 쪽에 가면 있지 않을까 해요. 옛날에도 이 지역 1개 군에 한 두 군데 있을까 말까 했어요.


- 다른 지방에도 없나요?

= 다른 지방은 다녀보지 않아서 모르죠. 외국에는 없어요.


- 외국에는 자주 다니시나요?

= 일 년에 두 달 정도는 종자도 구하고, 일도 볼 겸 나가죠.


- 그럼 일 년에 한 번씩 선생님 찾아뵈면 좋은 얘기 듣겠네요. 얘기를 들으니 할아버님 영향을 많이 받으신 것 같은데, 할아버님 얘기 좀 해주실 수 있나요?

= 할아버지는 이조 말에 벼슬하다가 일정 때 수배가 내려서 진안 용담군에 숨어 사시다가 만주로 가셔서 독립운동 하면서 한약방을 차리셨어요. 약방을 차리시니까 거기가 독립군 운동 본거지가 된 거래요. 그러다가 해방이 돼서 들어오시니까 땅이 있나 집이 있나 해먹을게 없어서 떠돌이 한의원으로 전국을 다니시다가 여기서 자리 잡은 거래요. 여기 오시니까 그때부터 전국에서 손님이 오는 거래요. 저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심부름을 했어요. 약을 만들어 봉투에 담고, 약을 썰으라면 썰고, 산에 약을 캐러 가시면 따라가서 약을 캤지요. 할아버지께서는 평생을 그렇게 사셨어요.

 할아버지께서 뭐라고 하셨냐 하면 곡식으로 약이 되는게, 예를 들어서 수수는 칼슘이 풍부하기 때문에 옛날에 애기 백일 때 수수떡을 해주잖아요. 돌 때도 해주고. 붉은 색은 액을 물리친다고 해서 그렇다는데 그게 수수는 칼슘이 풍부해서 애들 뼈가 자라는데 최고 필수 보약인 원리래요. 애들 이유식에 반드시 수수가 들어가잖아요. 그래서 수수는 그런 식으로 작용한다는 걸 어렸을 때부터 안 거죠.

 그 다음 검은색은 노화를 방지하고, 붉은 색은 또 심장을 건강하게 한다고 하시고. 그러다 보니까 할아버지가 설명하신 대로 심은 거지요. 그렇게 조금조금씩 심어가지고 온 몸은 힘들어도, 도시민들 견학오고 이런 식으로 운영했어요. 지금은 집사람도 나가있고 혼자 운영하기 힘들어서 회원제로 몇몇 나눠주고 해요.


- 그럼 회원들이 종자 보존회 식으로 있는 건가요?

= 예, 우리가 봄에 종자를 나눠줘서 심고 가을에 수매를 해요. 그래서 그거를 가공하고 포장해서 판매를 해요. 이건 하나의 보존차원에서 하기 때문에 큰 영리가 안 되니까 국가에서 지원해주고 지자체에서 지원을 해줘요.


- 현재 농장에 주력이 있고 보조가 있겠지만 몇 종류나 하시나요?

= 곡식류는 한 100여 가지 하고, 풀․약초류를 100여 가지 하고, 나무를 한 300여 가지 해요. 한 두 그루만 심어서 보존하는 거래요.

 그리고 귀리 있잖아요. 현재 식용 귀리는 남한에서 재배를 안 하고 있어요. 사료용만 재배하지.


- 식용과 사료용이 종자가 다른가요?

= 다르죠. 식용 귀리는 이북 함경도 쪽에 있을 거예요.


- 운영하고 계신 농장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 제가 한 4만평 정도 농사를 짓고, 임야는 7만평 정도 됩니다. 주 작목은 흑미, 자황미 이고, 보라밸리 라는 감자와 야콘, 옥수수 농사를 짓고 있죠.


- 보라밸리는 일반 감자와 특별한 차이점이 있나요?

=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좋다는데 저희는 녹즙용으로 써요. 자주감자로 개량한 건데 자주감자랑 다르게 속까지 보라색 이래요.


- 보라밸리는 특징이 무엇인가요? 수확이 특별히 많은가요?

= 수확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 옥수수는 어떤 종류가 있나요?

= 옛날 재래 찰옥수수 하고, 두메 찰이라고 해서 강원도에서 개발한 찰옥 2호가 있고, 그 다음에 알록알록한 것이 있어요. 보라색 나고 빨간색 나고 하얀색이 섞인 게 있고, 그 다음에 빨간색이 있어요.


- 이 옥수수들은 선생님이 다 개량하신건가요, 아니면 원래 있는 종자인가요?

= 아니요. 옥수수는 교배를 잘 이뤄서 돌연변이가 나와요. 자기가 원하는 걸 다 만들 수 있어요.


- 옥수수 종자는 어떻게 유지합니까?

= 어떻게 하냐면 예전에는 가리왕산에 차를 가지고 올라갔어요. 봄에 콩이나 옥수수를 가지고 깊숙한 곳에 가서 개간해서 풀 뽑고, 가지고 간 헌비닐 덮어 놓고 옥수수를 심는다고, 그럼 가을에 가면 짐승이 따먹고 사람이 따먹고 해도 종자보존이 되는거죠. 지금도 그렇게 하는데 원체 입산을 못하게 하니까 격리를 못해요. 그래서 봄에 산나물 뜯으러 가서 하는 경우도 있고 허가를 받아서 가는 경우도 있고 해요.

 그리고 자광미도 돌연변이래요. 이게 종자가 개량돼서 나온 게 아니고 아무 논이나 외국도 마찬가지고 자생을 해요. 이게 원원종이거든. 벼를 베거나 차를 끌고 다니다 보면 똑같은 벼 중에 이삭이 크다든지 색깔이 다르면 그걸 채취를 해요. 그걸 가지고 와서 스티로폼 상자에 재배를 해요. 한 이삼년 재배해서 종자가 고정이 되면 논에다 심는 거죠. 이걸 좀 더 깎으면 흑미와 마찬가지로 흰쌀이 나와요.


- 기장은 어떻게 농사를 지으십니까?

= 기장은 모종으로 해도 잘 살고 농사짓기도 쉬운데, 가장 어려운 게 새가 잘 먹어요. 새를 쫓을 수 있는 방법만 있으면 기장은 성공해요. 그래서 우리 같은 경우는 만 평 정도를 하늘에 1미터 간격으로 줄을 매가지고 깡통을 달아서 사람이 지키죠. 허수아비도 필요 없고 총을 쏴도 필요 없고 다 필요 없어요. 직접 쫓아도 사람이 와서 쫓을 때 뿐 이래요. 콩새라고 해서 요래 작은 그 새가 기장을 전문으로 먹는데 덤불 밑에 살아요. 옛날에는 찔레 열매를 먹고 살았는데 요즘은 찔레 열매가 얼마 없잖아요. 이 새가 없어졌는데 기장만 심으면 어디서 나타나는지 몇 백리 밖에서 날아와요. 이 새가 쫙 날아오면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날아와요. 그래서 못 심어요.


- 기장하고 조는 어떻게 다릅니까?

= 기장은 이삭이 벼이삭 같은데 조는 완전히 틀리죠. 색깔은 둘이 똑같은데, 알이 기장이 좀 굵어요.


- 깡통을 매달면 새피해는 어느 정도 막나요?

= 그래도 한 50% 정도래요.

 기장이 그렇고 그 다음에 곡식 중에 메조가 지금은 귀해요. 왜 그런가 하면 찰진 것은 소화도 잘 되고 해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데 메곡식은 안 그래요. 그런데 소화가 잘 된다는 건 빨리 분해된다는 얘기래요. 그럼 별 기능을 못한다는 거예요. 그래 약으로 쓰는 건 메옥수수, 메조, 메기장 이죠. 근데 지금 메기장은 세계적으로 없어요. 중국 쪽에 있다고 해서 알아봤는데 없어요. 종자은행에 수십 번을 드나들어도 메기장을 못 구했어요. 메수수는 제가 종자은행에서 얻어다 심었는데 10알 주더라구요. 10알을 심으니까 3알갱이 나와요. 이게 오래 묵어서 그런 거래요.


- 그럼 지금 메수수는 얼마나 퍼트리셨나요?

= 우리만 보존 하고 있어요.


- 판매는 하고 있습니까?

= 판매는 안 하죠. 대학교 연구하시는 분들이 가끔 연락이 돼서 오면 파는 경우는 있어요.


- 선생님 그럼 종자 얘기 좀 더 해주시죠. 어떤 종자를 어떻게 보존하고 보급하시는지요.

= 붉은 팥을 동지에 액운을 물리친다고 죽을 쑤어 먹잖아요. 그런데 점쟁이들이 점을 칠 때도 이거로 쳐요. 그런데 원래는 용의 눈알 이라고 하는 팥으로 점을 치는 거래요. 용의 눈알이 알록달록 하답니다. 그래서 이걸 용의 눈알이라고 하는데, 이걸 던져서 하얀 알하고 빨간 알 중 많이 나오는 걸 보고 점을 한답니다. 그리고 팥으로 점을 하는 건 장래를 보는 게 아니고 귀신하고 관계되는 점을 할 때만 팥으로 하는 거래요. 그런데 아무거나 다 붉은팥으로 하는 건 다 가짜래요. 그런 데로 무지하니까 그래요. 그런데 용의 눈알이 시중에서 인기가 없는 이유는 붉은팥으로 음식을 하면 붉어져야 하는데 흰 게 섞여서 붉어지지가 않아서 그래요. 실질적으로는 유래도 깊고 토종이고 좋은데 먹는 사람 선호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


- 맛도 더 좋은가요?

= 맛도 더 좋아요. 거뭇거뭇한 것도 있는데 그걸 용의 눈알 재팥 이라고 해요.

 그리고 그루팥이라고 있어요. 보리를 심고 나서 후작으로 심는 팥이래요. 늦게 심는다는 거죠. 그루팥은 하지 지나서 심어요.

 그 다음 이팥이 있어요. 이건 몸이 붓거나 신장하고 관계있는 병에 특효약 이예요.


- 이팥의 이가 무슨 뜻인가요?

= 글쎄요. 옛날부터 이팥 이라고 해서 잘 모르겠는데 쌀 같이 생겨서 이팥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이게 하얀 게 있고 빨간 게 있는데, 빨간 게 약이 된대요.

 그 다음에 약콩․쥐눈이콩․서목태 라고 하는 게 있는데, 이걸 가장 흡수하기 좋은 법은 현미식초에 삼 사일 정도 담가뒀다가 냉장고에 넣어놓고 하루 20알 씩 먹으면 콜레스테롤이 내려간다고 하죠.

그 다음 대표적인 울타리콩은 약간 갈색이래요. 그리고 그보다 진한 색을 밤콩이라 하죠.

또 푸른색이라서 청태라 하는 콩가루를 내서 먹는 콩이 있어요. 토종 찰콩은 떡에 넣거나 엿 해먹을 때 쓰는 거구요. 그 다음에 아주까리콩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건 강정해서 먹어요. 콩도 이렇게 용도가 다 틀려요. 그 외에도 수십 가지가 있어요.


- 콩 종자만 몇 종류를 가지고 계신가요?

= 콩이 한 47가지 정도 돼요.


- 모두 토종인가요?

= 다는 아니래요.


- 다양한 종자를 보존하는 일이나 교육사업을 하시는 일이 힘들지는 않으신가요?

= 그래서 항상 차에 가지고 다니고, 이전에 살림집 보면 천장에 달아놔요. 왜 그렇게 하냐면 과거에는 종자를 처마에 달아놨어요. 종다래끼라고 하죠. 종자를 담는 다래끼라고 해서 종다래끼라고 했는데 거기에 담아서 사방에 매달아 뒀죠,

 그리고 예전부터 내려오는 말에 씨앗을 뿌릴 때 넙적한 그릇에 담아서 뿌리면 안 된대요. 그래 오목한 그릇에 담아서 뿌려야 결실이 잘 된다 해서 꼭 종다래끼에 건사를 했어요. 거기에 건사를 하면 통풍이 잘 되잖아요. 메주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짚을 가지고 이용했어요. 감자도 보면 짚에서 균이 나와서 감자가 더 잘 돼요. 그래 농업에서는 짚을 이용하는 게 많아요.

 그리고 아까 옥수수 얘기했는데 옥수수를 하짓날 아침에 심으면 결실이 되고, 오후에 심은 것은 결실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절기를 중요시 했잖아요.

 그리고 입하가 지나서 낱알을 뿌리는 건 비렁뱅이 팔자라고 해요. 입하 전에 모든 곡식이 땅 속에 다 들어가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요즘은 온실이니 뭐니 해서 많이 바뀌었지만 실질적으로 그래요. 이게 그렇게 심는 시기도 틀리고 거두는 시기도 다 틀리죠.

 나는 이걸 돈을 목적으로 하는 건 아니고, 하나의 취미하고 사명감, 그러니까 자부심이지. 내가 토종잡곡으로다가 신지식인농업상을 받았거든요. 그게 토종잡곡으로 우리나라에 제일 유명한 사람이다 하는 건데 내가 저걸 받아놓고 지금은 안 한다고 하면 하나의 사명감을 잃어버리는 거죠. 이걸 하면서 지금 뭘 느끼냐면, 지금 옆에 하우스 작업을 하는 곳에 전통 농기구를 전시할거래요. 여기서 학생들을 데려다 체험학습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체험할 수 있는 시설이 몇 개 안 돼서 나머지는 구경만 해요. 그래서 몇 명이 체험하는 동안 나머지는 전시관을 보고, 돌아가면서 체험할 수 있게 하려는 거죠. 요즘 체험학습이라고 해서 박물관을 가는데, 다 유리관 속에 진열만 해놓고 만지지도 못하게 하고 그냥 노천에 놔두고도 만지지 말라고 하죠. 그게 무슨 체험학습 이예요. 그건 견학이지.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실제 학생들이 해봐야 하는 거죠.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해 볼 수 있게 자꾸 준비하는 거예요.

 종자 같은 경우 원칙적으로는 완전히 말려서 진공포장 해서 냉동실에 보관해야 하는데 이거는 그냥 샘플로 학생들 오면 보게 하죠. 학생들이 연수를 들어오면 큰 마루에 한 삼 백 가지 진열을 해놓고 내가 가운데 서서 짚으면서 설명을 해줘요.


- 선친께 농사를 많이 배우셨다고 하셨는데 전통농사법을 쓰고 있는 게 있다면 어떤 것이 있나요?

= 저희는 유기농을 하기 위해서 차광막을 풀이 나온 다음에 헛골에다 깔아요. 남들은 제초제를 써서 죽이는데 우리는 제초제를 안 쳐요. 그런 쪽으로 하기 위해서 풀 잡는데 저걸 쓰는 거래요. 저게 돈이 많이 들어서 도하고 군하고 농림부에 얘기를 해서 보조를 받아가지고 우리가 평창군 전체에 나눠줘요.


- 차광막은 폭이 얼마나 되고 어떻게 사용하시는 건가요?

= 55센치 정도 되는데 그걸 고랑에 깔면 나온 풀은 죽고, 풀이 나오지 않죠. 한 10년 정도 쓸 수 있어요.


- 보온덮개는 어떤가요?

= 보온덮개는 무겁고 말아서 보관하기 어렵고, 비가 오면 무게가 많이 나가잖아요. 차광막은 그런게 없어요. 가벼워서 풀이 안 눌릴 것 같지만 나일론이라 열을 받아서 저절로 풀이 삭아요.


- 전통농법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건가요?

= 전통농법은 김을 매야 하잖아요. 그런데 지금 시골에 김을 맬 사람이 없잖아요. 그래서 제초제를 친다 이거예요. 제초제를 치면 토양 버리죠, 농산물 버리죠, 몸 버리잖아요. 그러니까 그 대용으로 저걸 쓰는 거죠. 전통농법으로 농사짓는 것은 다 개량됐다고 봐야죠.

그래도 우리는 옛날처럼 소로 가는 건 아예 못 하지만 파종하는 건 종다래끼에 씨앗 넣어서 하는 경우는 더러 있어요. 그거하고 괭이로 묻는 건 마찬가지로 해요. 그리고 수확은 도리깨로 떠는 것도 마찬가지로 하죠. 다만 과거에는 산에서 풀을 베어서 퇴비를 만들어서 썼는데 현재는 사다가 쓰는 건 달라졌지요.


- 잡곡 농사를 지을 때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 채소는 기계화가 됐는데 잡곡은 손으로 해야 하는 것이 어렵죠.


- 잡곡을 심을 때는 비닐을 깝니까?

= 비닐을 안 깔죠. 뭐 전통적으로 비닐을 안 깔고 심었으니까 전통방식으로 하는 거죠. 예를 들면 배추 같은 걸 비닐을 안 하고 했을 때는 병충해도 많고 잘 자라지 않는다구요. 상품가치는 떨어지는데 비닐을 깔고 화학비료 주면 배추가 맛이 없듯이 그래요.


- 그럼 어떤 식으로 농사를 지으시나요?

= 콩농사 같은 경우 먼저 콩을 골에다가 심고 풀이 첫 번에 나오면 비가 온 다음에 인걸이로 끌어서 그 흙을 양쪽 가로 넘겨요. 콩이나 옥수수는 반드시 복토를 해줘야 돼요. 그렇게 흙이 넘어가면 골이 반대로 되잖아요. 그 다음에 아이김을 맨다고. 왜냐하면 콩씨를 7~8개 씩 들어간 걸 세 개씩 남겨놓으려면 솎아야 되고 없는 데는 모종을 하고. 그렇게 하고 나서 풀이 약간 날 때 차광막을 깔아요. 골 넓이가 보통 70센치 정도 되는데 55센치 깔거든요. 그럼 한 10센치가 남잖아요. 남는 곳이 콩이 있는 자리예요. 포기 사이에서 풀이 나긴 더러 나지만 그때는 콩이 이기죠. 콩은 그늘을 많이 지기 때문에 금방 풀이 자라지 못해요.


- 처음부터 고랑에다 차광막을 깔고 심는지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요. 그럼 인걸로 골을 먼저 치고 애벌 김매기 하고 솎아 줄 거 솎아 주고 저걸 까는 거군요. 수확할 때는 도리깨로 하고요.

= 예, 그렇죠.


- 콩농사에 대해서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 콩은 파종 적기가 제일 중요해요. 5월 10일에서 25일 사이에 심어야 하죠. 이건 전국이 거의 비슷한데 남쪽 같은 경우는 5일 정도 늦어도 괜찮지요. 콩을 이때 심는 이유는 너무 일찍 심으면 냉해를 입고 장마 지나서 꽃을 피게 해야 돼서 그래요. 장마 때 꽃이 피면 수분이 안 돼요. 완두콩은 냉해 피해가 없어서 일찍 심어도 괜찮아요. 올콩과 늦콩은 심는 것은 같은데 일찍 거두냐 늦게 거두냐 하는 수확 시기에만 차이가 있어요.

 다음으로는 순지르기가 중요해요. 보통 본잎이 6잎 나올 때 순지르기를 해주는데 많이 심으면 일일이 셀 수가 없으니 그냥 파종하고 2달 지나서 무조건 낫으로 대가리를 치죠.

 그리고 콩에는 밑거름으로 유기질 퇴비를 줘요. 축분은 질소질이 너무 많아서 안 돼요. 보통 300 평당 2톤 정도 주고 거기에다 콩 전용 복합비료를 주는데 이건 300 평당 6포를 줘요. 복합비료를 주면 무농약 인증은 되는데 유기농 인증은 받을 수 없어요. 거름은 전년도에 고추나 배추를 키워서 거름을 많이 준 밭이면 유기질 퇴비는 안 주고 복합비료만 줘요.

 콩은 되도록 육묘를 하는 게 좋아요. 육묘를 하면 인건비도 줄이고 김도 덜 맬 수 있어요. 여기서는 35일 동안 육묘를 하는데 직파를 하면 35일 지나서 김을 매야 하는데 육묘를 하면 그 수고를 안 해도 되니까 인건비도 줄고 좋죠. 그리고 모든 곡식은 비닐 멀칭을 하면 두둑에 심고 안 하면 골에 심어요.


- 토종종자들을 수집이나 보관은 어떻게 하셨나요? 조부님께 받은 것이 많은가요?

= 그렇죠. 거의 다 받은 거죠. 어머니 계실 때는 옥수수만 해도 한 50가지 심었는데 지금은 많이 없어졌죠.


- 이 일을 하시면서 귀찮게 여러 가지를 하냐, 크게 하나만 하면 돈 벌텐데 하시지는 않나요?

= 왜요. 지금도 다 그러죠. 식구들이 반대를 하지만 지금은 많이 따라와요. 그리고 학생들이 와서 신기해하는 걸 보면 기분 좋아요.


- 지금 이 일을 거의 혼자 하시다시피 하는데 뜻있는 사람이나 뜻있는 단체와 같이 종자를 보존하는 일을 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혹시 그렇게 하고 계신 분이 있나요?

= 현재는 두메농산물 생산자 협회라고 해서 조직이 있어요. 한 52농가가 있어서 그 분들이 우리가 종자를 팔고 그 사람들이 사다가 심어가지고 여기서 수매해서 포장해서 팔아요. 그러다 보니까 한 사람이 여러 가지를 가지고 있지 않고 몇 가지씩 다 가지고 있죠.


- 다른 지역에도 종자를 보존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 그쪽에는 없어요.


- 이 지역에서 농사가 안 되는 종자도 가지고 계신가요?

= 농사가 안 되는데 가지고 있을 수가 없죠. 곡식류는 안 되는 데가 없어요. 채소류가 안 되는 게 많아요.


- 작물 외에 가지고 계신 것 중에서 소개해 주실 만한 것이 있나요?

= 골담초 라고 있는데 그게 신경통에 좋은 약초래요. 

 자작나무는 나무를 삶아서 먹어도 좋고, 잎사귀를 나물로 먹어도 위에 좋고, 물을 받아먹는게 위장병에 특효죠. 특히 곡우날 받는게 좋아요.

 산마늘은 뿌리가 아니라 잎을 먹어요. 항암 작용이 있다고 하죠. 이게 몇 백 년이고 크는데 뭐가 문제냐면 한 알 심으면 2~3년 있다가 새끼를 피는데 그럼 잎사귀 3개 중에 하나를 따야지 그 이상 따면 열매가 안 달려요. 이걸 심기 위해서는 8년 정도는 농약이나 비료를 주면 안돼요. 그래서 산 같은 데서는 된다는 거죠.

 질경이 있잖아요. 질경이 씨가 약명으로는 차전자 거든요. 세계적인 보약 중에 최고 보약이래요. 질경이씨를 장복으로 하루 한 스푼 정도 가루를 내서 먹으면 무병장수 한다잖아요. 가장 좋은 약품인데 지금은 가장 천대를 받고 있어요. 사람이 연명하던 음식인데 너무 먹어서 이제는 지겹다는 거죠. 요즘 사람들은 좋다하면 먹잖아요. 지금 내가 그걸로 개발해서 이게 좋다하면 너도 나도 먹을 거래요. 요즘은 모든 게 유행이잖아요. 병도 유행, 음식도 유행, 약도 유행.


- 마지막으로 할아버님에게 배웠다는 내용을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할아버님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먹는 것으로 고쳐야한다 하셔서 종자를 보존하셨던 이야기 좀 해주십시오.

= 옛날에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는 맥을 본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절대 맥을 짚지 않아요. 왜 맥을 안 짚냐고 하니 당시는 버스가 없어서 걸어오잖아요. 걸어오고 긴장한 상태에서 맥을 보면 맥이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않아서 오진을 할 수 있다는 거죠. 그 다음에 환자 얼굴을 봐요. 흰색이냐 검은 색이냐. 그 다음에 손가락이 기냐 짧으냐 그게 체질상 뭐다 하시면서 그걸로 판단을 다 해요.

 그리고 항시 할아버지는 걷는 걸 강조하셨어요. 그 다음에 약을 주면 먹지 말라는 것이 있어요. 콩이나 메밀음식이 그래요. 메밀은 보약이 되는 게 아니라 독약 이래요 메밀이 속을 훑어 내려서 그렇다고 해요. 또 술은 알콜기가 피가 흐르는 양을 조절하지 못하게 한대요. 소고기는 괜찮은데 돼지고기, 닭고기는 절대 먹지 말라고 하시고, 담배 태우지 말고 우유 마시지 말고 이러면 무병장수 한다는 거예요. 이 다섯 가지만 가려도 굉장히 도움이 된다는 거예요. 단백질이 풍부한 걸 먹지 말라는 건 단백질은 모든 병의 먹이가 된대요.

 메밀음식을 먹을 때는 반드시 무를 먹으라고 하셨죠. 왜냐하면 메밀의 독을 해독하는 건  무래요. 호박의 독을 해독하는 건 새우젓이고요.

 건강한 사람이 먹을 때는 괜찮은데 안 좋은 사람은 먹지 말라고 하셨어요. 병이 있는 사람이 이런 음식을 먹으면 몸에 부작용이 있으니까 약을 먹을 때 먹지 말라고 하신 거죠..

 그리고 이팥이 독을 해소시켜요. 상처가 나거나 하면 옛날에 약이 없을 때는 이팥을 짓찧어서 바르잖아요. 그럼 독을 빼냈어요. 잣나무 송진을 따서 상처난 데 하면 새나지 않고 금방 나아요.

 녹두도 같은 류래요. 수술환자 퇴원하면 녹두죽이 최고인 원리래요.


- 이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언제부터 농사를 시작하신 겁니까?

= 여기서 농사짓다가 서울서 한 5년 살고 80년에 다시 왔어요. 살다가 나갔다가 결혼해서 다시 들어왔죠.


- 유기농은 언제부터 하셨고, 계기가 있으신가요?

= 80년부터 시작했어요. 74년에 농사를 지었는데 그때는 제초제를 쳤어요. 그때는 앞서 가는 농민들이 제초제를 쳤어요. 제초제를 치는데 덩치가 커서 방제복을 입기가 어려웠어요.  그래 운동화를 신고 제초제를 치는데 이거를 몇 만평 농사를 지니까 몇 일을 두고 했지요. 그랬더니 손톱, 발톱이 이상해지는 거래요. 그러면서 아프기 시작했는데 그냥 피곤하고 늘 그래요. 처음에는 이게 제초제 독인줄 몰랐지. 한 2~3년 하고 나서 자꾸 심해져 가지고 뭘 생각했냐면 미군이 베트공 소탕작전 할 때 치던 제초제를 그때 생각한 거요. 제초제가 독이로구나 환경농업을 해야겠다 해서 유기농업 창설할 때 82년도에 창립멤버로 들어가서 시작한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오래됐고 전문가가 되다 보니까 평창군 전체에 유기농 자재를 공급하고 유기농에 대한 교육도 하고 하게 됐지요.


-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화학 농약이 아니고 유기농 농약을 팔고 있는데 실제로 몸에 해롭지 않은 농약이 효과가 있나요?

= 글쎄요. 우리도 그걸 공급은 하는데 저는 그걸 안 써요. 왜냐하면 벌레가 죽잖아요. 그럼  생명체가 죽으면 독약이지. 단지 생물에서 추출했다 뿐이지 어차피 독약은 독약이라고 생각해요.


- 그럼 오랜 시간 동안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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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에게 진상하던 자광미, 맛은 최고예요







 

너른 김포 들판 사이로 난 좁은 농로를 따라 하성면 석탄리에 사시는 권유옥(67)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곳에서 나 지금까지 사는 ‘토백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지금도 삼형제가 한 마을에 모여 살며 모두 5만7천 평의 논을 경작하고 계신답니다. 그 가운데 본인은 1만2천 평 농사를 짓는데, 자광미는 500평 정도만 심으셨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1000평을 지었는데, 올해는 판로 문제나 이런저런 까닭으로 500평만 짓는다고 하십니다. 동네에서도 혼자만 자광미 농사를 짓는다고 하십니다. 선생님의 논은 경지정리를 하면서 한쪽에 몰아서 환지를 받아 1만평 정도는 한곳에 있고, 자광미는 따로 500평 되는 논에다 심었다고 하십니다. 이 논에 4월 26일에 모내기를 했는데, 그보다 일찍 모를 낸 논은 서리를 맞아 싹 죽어서 다시 심은 것이라 합니다. 그래 선생님 논의 모는 벌써 위로 쭉쭉 자라서 다른 논과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광미(紫光米)는 말 그대로 자줏빛 쌀입니다. 쌀이 허옇거나 누렇지 어떻게 자줏빛이냐고 생각하신다면, 이 쌀을 한 번 보면 생각이 확 달라질 겁니다. 이 벼는 250~300년 전 중국에 사신으로 간 벼슬아치가 자줏빛 밥을 대접받았는데, 그걸 먹고는 너무 맛있어서 돌아올 때 가져온 씨를 김포에 심어 임금님께 진상한 것이 처음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유래라고 합니다.


- 선생님께 자광미 농사를 짓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두 달 동안 수소문 끝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자광미에 대한 이야기 좀 부탁드립니다.

= 자광미는 옛날부터 임금님께 진상하던 쌀입니다. 그만큼 밥맛이 좋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게 재배하기 아주 까다로워서, 그전에는 양반 집안에서나 자기들 먹으려고 재배했습니다. 재배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쓰러지기 쉬워서 많이 심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마음먹고 자라면 사람키보다 더 크게 자랍니다. 그러니 태풍만 왔다하면 죄 쓰러져 버리지요. 이걸 쓰러지지 말라고 규산액을 때려 부어야 그나마 괜찮습니다. 비료는 아예 줄 생각도 못하지요. 비료만 줬다하면 엄청나게 자라서 쓰러질까 봐 그렇습니다.

거름으로는 영양제만 줍니다. 밑거름을 하면 너무 자라서 쓰러지기 때문에 절대 하면 안 됩니다. 따로 비료를 주지 않아도 지 뿌리에서 자기가 먹을 영양은 다 나옵니다.


- 재배하기는 어렵지만 수확량은 좀 많은가요?

= 수확은 잘나면 양석(兩石) 납니다. 지금 말로 하자면 200평에 2가마 정도 나요. 알이 좀 갸름한 모양인데, 다른 벼에 비해서 잘고 달리는 양도 적은 편입니다. 하지만 맛으로 따지자면 이걸 따라올 것이 없습니다. 이 쌀로 밥을 지으면, 밥을 지을 때 김이 나잖아요. 그럼 집안이 구수한 냄새로 핑 돕니다. 백미로 깎으면 아주 맛이 좋은데, 그럼 색이 없어져서 소비자가 믿지를 못해요. 그래서 7분도 정도로 깎습니다. 백미로 깎는 것보다는 맛이 떨어지지만 어쩝니까. 집에서 먹을 때는 아예 백미로 깎아 버립니다.

요즘 시중에 빨간 쌀이 나오는데 그건 수원에서 연구원들이 육종한 홍미가 대부분입니다. 색은 거의 비슷하지만 그걸로 내가 밥을 해 먹어보니 맛은 아주 떨어져요. 그건 대도 짧아서 도복이 안 됩니다. 수확도 아주 많이 나는데 맛이 없어요. 이제 FTA하는데 수확으로는 절대 못 이깁니다. 맛으로 이겨야 해요.


- 그렇게 재배하기도 어렵고 수확도 적은 것을 왜 심으시나요?

= 첫째는 선조 할아버지 때부터 심던 것이라 그렇지요. 저 김포 들미라고 있어요. 거기 동네사람들은 밀다리라고 하는 들미다리가 있는데, 중국에서 가져다가 처음으로 그 옆에다 심었다고 해요. 이걸 이승만 대통령한테도 진상했습니다. 유신 때도 경기도 지사가 선물하려고 해마다 꼭 대여섯 가마씩 가져가곤 했습니다.

키우기도 힘들고 까다롭고, 또 판로도 좋지 않아서 지금은 딱 혼자 남았습니다. 그래 언제는 이걸 그만 두려고 했는데 김포 농정과에서 이게 김포 명물인데 어떻게 없애냐고 하면서 보조금을 조금 줍니다.


- 판매는 어떤 방식으로 하시나요?

= 예전에는 16㎏들이 가마니를 한 장에 2만원 주고 사다 썼습니다. 그걸 일 년에 60장 정도 쓰거든요. 그것만 해도 120만원이라 이제는 아예 가마니틀을 만들어서 겨울에 집에서 짭니다. 이렇게 직접 안하면 다 농협 가서 대출받아 빚지고 살아야 해요.

그럼 거기에 쌀을 담아서 도에 한 20~30가마, 여의도에 20가마, 강남에 사는 돈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연락이 와서 가끔 택배로 보내고, 나머지는 양재동으로 나갑니다.


- 저희가 취재를 하면서 보존 차원에서 씨앗을 몇 알씩 얻어다가 냉동고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자광미도 조금 얻어갈 수 없을까요?

= 예전에 아랫녘에서 농진청 통해서 소개받고 와서 하도 졸라서 준 적이 있었는데, 아주 김포 농정과에서 경을 쳤습니다. 우리 김포 명물을 타지로 보내면 어떻게 하냐고요. 지금은 고향에서 아예 상표로 만들려고 유출을 못하게 합니다. 쌀로는 어디든지 나가지만.


- 모는 언제 내고 관리는 어떻게 하셨나요?

= 여기는 4월 26일에 모를 냈어요. 이게 모일 때부터 정신없이 올라와서 다른 것보다 키가 커요. 요즘 상토가 나오잖아요. 거기 거름이 들어 있어서 막 나오는 겁니다. 이건 거름을 주지 않아도 워낙 키가 큰데, 파는 상토에다 넣으니 다른 벼는 작아도 이건 정신없이 자라요. 너무 길어서 기계로 심기 힘들어 가위로 자른 다음 심은 겁니다.

이 동네에 늦서리가 한 번 왔는데, 동네 사람들은 일찍 심어서 다 죽었어요. 이건 물이 있으니까 서리가 와도 녹아 버린 거야. 지금 다른 논보다 제일 볼 만해요. 일찍도 심었지만 자광은 비료를 안줘도 신나게 자라요. 그것만 봐도 아주 재밌죠. 주변과 비교해도 따라올 놈이 없잖아요.


- 언제쯤 수확하나요?

= 이건 추석 무렵이면 바로 벱니다. 중만생종쯤 될 거야. 그때도 막 자라요. 가지도 곧잘 치죠.


- 분얼도 많이 하는데 수확량은 왜 적지요?

= 도복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규산질을 많이 줘요. 다른 비료는 영양제 빼고는 안 줍니다. 그랬다가는 너무 커서 싹 쓰러져 버려요. 약도 치지 않아요. 고품질로 파는데 약을 치면 내가 거짓뿌렁하는 나쁜 놈이지. 나는 여기 토백인데, 딴 사람한테 거짓뿌렁 못하고 죽으나 사나 내 땅에서 부지런히 농사지어서 아들딸 공부시키고 이렇게 사는 거지.

딱 하나. 제초제는 칩니다. 이제 논에 들어가 김을 맬 수 있는 힘도 없고, 일이 많다 보니까 그거 하나는 합니다.


- 씨 할 것은 따로 심으시나요?

= 그렇지는 않고, 이걸 수확해서 종자로 씁니다. 베기 전에 콤바인을 싹 청소해서 거두는데, 그래도 기계가 크다 보니 어느 틈엔가 다른 것이 조금 끼기는 합니다. 그러고 15일쯤 햇볕에다 말립니다. 수분측정기가 있어서 수분 15% 될 때까지 말려서 보관해 놓습니다.


- 옛날에는 어떤 식으로 자광미 농사를 지었나요?

= 옛날에 어른들은 2알 넣어야지 3알만 들어가도 뽑으라고 했어요. 많이 넣어 봐야 이삭이 잘아지니까. 손으로 내고, 낫으로 베고, 발틀 밟아서 떨고. 볏단이 조금만 축축하면 거기 잘 앵기는 거야. 통일벼는 귀가 여리잖아(이삭이 잘 떨어진다는 뜻), 자광미도 귀가 여려요. 이상기온이 와서 우박이라도 오면 1/5은 떨어져 버려서 날짐승들이 다 주워 먹지. 지금 그렇게 손으로 하라면 나부텀도 못해요.


- 이건 몇 포기씩 심으신 건가요?

= 이앙기로 해서 4~5대씩 꽂았어요. 가장 좋은 건 2대씩 꽂는 겁니다. 이앙기로 하려니 그런 거지. 그렇게 꽂아 놓으면 15~17대로 분얼해요. 물을 말리면 분얼을 멈추죠. 분얼이 다 됐다 싶으면 그냥 내 맘대로 말리는 거예요. 이 논은 한 6월 10일쯤 물을 뗍니다. 계속 물을 대 놓으면 키만 커요. 그렇게 보름쯤 말렸다가, 물을 안 주면 말라죽으니까 다시 열흘은 물을 대주고, 또 보름쯤 말렸다가 대주고를 반복해요. 여기 물을 말리면 갯논이라 운동화 신고 뛰어다녀도 되는 정도로 마릅니다. 일주일쯤 지나면 티도 안 나게 말라요.


- 병충해나 피 같은 건 어떤가요?

= 여기는 들판이라 피가 많아요. 도아리(까마중)하고. 그리고 중국에서 혹명나방이 많이 날라 옵니다. 그래서 약을 쳐야 하는데 그럼 안 되잖아. 한 4년 전쯤에는 잎을 죄 먹어서 다 쭉정이만 나왔어요. 그해는 농민도 그렇고 농협도 무지 피해를 봤지. 중국하고 가까워서 혹명나방이 해마다 있어요. 자광미는 다른 벼보다 혹명나방이나 병충해에 좀 강합니다.


- 자제분에게 농사를 물려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 모두 4남매인데 도시에 나가 살아요. 각자 자기 자리 잡고 사니까 땅 준다고 오라고 해도 안 온다고 하죠. 힘들어서 싫대요. 우리는 삼형제가 다 농사지으며 한 마을에 모여 삽니다. 서로 일을 나눠 맡아요. 바로 위에 형님은 이앙만 하시고, 큰 형님은 나이가 여든이 넘으셨으니까 모판 껍데기만 모아 놓고, 나머지 모든 일은 제가 다 합니다. 젊은 내가 해야죠.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건 일이 많고 뭐하고 해도 불평불만이 안 나오는 거야.

처음 1,800평으로 시작해서 부지런히 일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도 새벽 3시면 일어나는데, 깜깜해서 못 나가는 것이지 훤해지면 바로 나가서 일합니다. 그래도 새벽부터 집 가까이서 장비 쓰면 동네 사람들이 유난 떤다고 할까 봐 멀리 방죽 있는 데부터 가서 일합니다. 이 일은 정년퇴임이 없지 않습니까. 이건 뭐 땅속에 들어가면 그때가 퇴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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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군 단북면 효제리에 있는 경상북도 원종장 의성분장에서

2007.7.23

 

붉은찰벼는 잎이 붉어서 붉은찰벼라는 이름이 붙었다.

찰벼이니 물론 찰기가 강한 벼이다.

쌀의 색은 일반 벼와 다를 바 없다.

아래 사진에서 일반 논과 눈에 띄게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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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농업에서 배우자(32)-의성 오세석 선생

“토종 종자 수집하려고 시골장이란 장은 다 뒤졌지요”


대서라는 절기답게 후덥지근한 날, 경상북도 의성군 단북면에 있는 경북농산물원종장 의성분장을 찾았다. 이곳에서 15년 이상 토종을 찾아 보존하며 경제성 있는 토종은 적극적으로 농가에 보급해 온 오세석(54) 분장장을 만났다. 그저 할 일을 했을 뿐 내세울 것도 없다며 환히 웃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운 분이다.


- 이곳 원종장이 어떤 곳인지 소개해 주세요?

= 원종장은 기본적으로 종자를 채종해서 농가에 보급하는 일을 하는 곳입니다. 이런 원종장은 각 도마다 다 있습니다. 이곳 경북 원종장은 원래 경상북도에 소속된 기관이었는데, 5년 전부터 농업기술원 소속으로 이관됐습니다. 이곳에서 하는 일은 주로 보리, 콩, 참깨, 고구마 같은 식량작물을 채종해서 농가에 보급하는 것입니다. 특히 대구에 있는 원종장에서는 벼를 담당하고, 이곳 의성분장에서는 밭작물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옥수수와 감자는 강원도에 있는 원종장에서 담당합니다. 여기 의성분장은 모두 10만 2천 평에 직원이 11명 있습니다. 보리, 콩, 팥, 녹두, 땅콩, 참깨, 들깨를 주로 심습니다. 이렇게 기른 작물에서 씨를 받아 경상북도 모든 농가에 보급하고, 농가에서는 보통 4년을 주기로 종자갱신을 합니다.

채소나 원예, 과수와 관련된 육종이나 채종은 모두 업자가 할 수 있게 관련법이 정비되어 있습니다. 종묘법에 따르면 채소, 원예, 과수와 관련한 종자는 종묘 회사에서만 할 수 있습니다. 개인이 하면 품종 등록이 되지 않을 겁니다. 종묘 회사처럼 어디 팔고 그러면 소송을 당하겠죠. 엄격히 따지면 지금 여기 원종장에서 제가 토종을 심는 일도 걸릴 겁니다. 품종 이름도 내가 지었고, 몇 단계 검사를 거쳐야 하는데 그러지도 않았고, 법에 안 걸리려면 아마 품종 등록을 해야 할 겁니다.


- 토종에는 어떻게 관심을 가지셨나요?

= 부모님은 영천에서 과수 농사를 지었습니다. 저는 농업고등학교를 나와 젊어서부터 기술원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지금까지 33년 동안 공무원을 하고 있는데, 농업 분야가 제 적성에 맞고 재밌습디다. 이곳 분장장에서 일한 지는 24년 됐습니다. 이곳에서 종자를 보급하는 일을 하면서 90년부터 토종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토종 종자를 수집하려고 시골 장이란 장은 다 다녔지요. 옛날 기록도 뒤져서 주산지가 어디라고 나오면 그곳까지 따라가서 뒤졌습니다.

그러다 십 몇 년 전에는 안동장에 갔다가 아무 것도 찾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는데, 여기까지 온 김에 관광이나 하자고 해서 하회 마을을 찾았습니다. 거기에서 우연히 한 농가에 자주감자꽃이 핀 것을 보고는 주인한테 부탁해서 다섯 알을 얻어 왔지요. 그걸 심어서 첫해 10kg으로 늘리고, 이듬해에는 250kg까지 늘렸습니다. 98년에는 중국에도 한 일주일 가서 몇 가지 종자를 몰래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모은 토종이 예전에는 300가지쯤 있었습니다. 헌데 이곳은 진흥청 산하 종자은행처럼 보관 시설이 좋은 것도 아니고, 계속 재배하기도 힘들고 감당하기 어려운 점이 있어 지금은 35가지만 심고 있습니다. 특히 이곳은 원종장이라는 특성이 있는 만큼 농가에서 찾는 것을 중심으로 보존하는 현실입니다. 아니면 보기에 좋거나 특이한 것을 위주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많은 양은 아니고 15평, 30평씩 종자라도 보존하자는 생각으로 심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심고 있는 35가지 토종 가운데 농가에는 15가지 정도 보급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속청, 검정콩, 율무, 메밀은 농가에서 많이들 생산하고 있습니다. 다른 원종장에서는 주로 종자 생산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토종을 찾아서 보존하고 농가에 보급하는 일은 여기서만 진행하는 일입니다.


- 자주감자는 어떤 건가요?

= 자주감자는 50~60년 전부터 내려오던 것입니다. 이건 춘천 지역에서 많이 심었다고 해서 이름을 춘천재래라고 합니다. 자주감자는 겉은 자줏빛이 나고 속은 흰데, 이걸 날로 먹으면 맛이 아립니다. 북한에서 나온 동의보감을 찾아보니 자주감자는 간에 좋다고 나옵디다. 그래서인지 가끔씩 한방 쪽에서 찾는 전화가 옵니다. 이런 것은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율무는 이뇨 작용에 좋고, 목화는 변비에 좋고, 메밀은 동맥경화에 좋고 이런 것들을 자세하게 연구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자주감자 말고 붉은감자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건 처음에 예천의 한 백화점에 가서 구했는데, 종자로는 못쓰게 했습니다. 자신들만의 특산물이라며 지키려고 그런 거죠. 지금 10년 넘게 심고 있는데 퇴화되지 않습니다. 퇴화되면 토종이 아니죠.

토종은 해마다 심어도 퇴화되거나 그러지 않습니다. 또 토종은 극심한 가뭄에도 잘 견뎌서 수확량도 괜찮고, 병충해도 잘 타지 않고 적응력도 높아 산간지나 텃밭이나 어디에든 재배할 수 있습니다. 앞에도 말했듯이 몸에도 아주 좋지요. 그런데 보통 토종이라고 하면 몇 백 년 전 것만 찾는 경향이 있습니다. 저는 어디서 왔든지 우리 땅에 토착화했으면 토종이라고 생각합니다.


- 씨감자 보관은 어떻게 하시나요?

= 감자는 일반 창고에 2~3℃를 유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고구마는 11℃를 유지해야 좋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감자를 보관하려고 땅속에 묻었는데, 봄에 싹이 많이 납디다. 지금은 종이상자에 넣고 신문지 같은 종이 뭉치를 넣어서 그냥 창고 구석에 보관합니다.


- 토종 감자는 수확량이 어떠나요?

= 올해는 봄에 많이 가물어서 좀 못합니다. 땅만 좋으면 한 포기에 대여섯 개도 더 달리지요. 열개까지도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첫째 퇴비를 많이 넣어야 합니다. 저는 퇴비는 많이 넣을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이곳 땅은 검사하니 유기물 함량이 2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도 많이 좋아진 것이 그렇습니다. 95년도에 경지정리를 하면서 싹 뒤집어서 밑에 안 좋은 흙이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처음 4~5년 동안은 농사가 되지도 않았습니다. 이곳이 단북면인데 붉을 단자를 씁니다. 여기 말로는 쪼대흙이라고 하는데, 황토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비가 오면 질고, 마르면 돌덩이가 됩니다. 수평 배수는 어느 정도 되는데, 수직 배수가 잘 안 되지요. 모래와 퇴비를 넣어서 그나마 좋아졌습니다.


- 옥광을 심고 있는데, 맛은 좋지만 웃자라고 익으면 터집니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 여기서 많이 보급하고 있는 토종 콩인 속청은 보통 5월 초에 심습니다. 지금 다 순지르기를 끝냈죠. 모든 콩이 보통 요즘이 개화기입니다. 이렇게 꽃이 필 때 순지르기를 하면 늦습니다. 웃자란다 싶으면 조금 일찍 심거나 순지르기를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합니다. 콩은 처음에 웃자라면 수확량이 적습니다. 익으면 탈립하는 건 그 콩의 특성입니다.

정부 차원에서 경제성이 보장된다고 하여 여기서 재배해서 보급하는 콩은 5가지입니다. 그것은 대원콩, 태광콩, 장원콩처럼 굵은 건 메주콩으로 쓰고, 보석콩처럼 잘면 콩나물콩으로 씁니다. 또 청자콩 2호는 검정콩의 하나입니다.


- 콩에 질소질은 얼마나 주나요?

= 여기는 보통 4에 맞춥니다. 농고를 나오면 다 아는 얘기인데, 요소비료 같으면 질소비율이 46%입니다. 이걸 계산하면 300평에 8.7kg를 줘야 질소질 4kg을 주게 됩니다. 유안 같으면 질소비율이 20%이니 더 줘야 하지요.


- 붉은 찰벼라는 종자가 있던데 자광미와 다른 것인가요?

= 여기서 15년 넘게 심고 있는 찰벼입니다. 보통 벼보다는 분명히 수확량은 떨어집니다. 하지만 먹어 본 분들은 자기가 먹어 본 찰벼 가운데 가장 맛있다고 합니다. 자광미는 이야기만 듣고 직접 해보지는 않았는데, 이건 쌀이 아니라 잎이 붉은색입니다. 쌀은 일반 벼와 똑같이 현미는 누런색이고, 도정하면 흰색입니다. 그러니 붉은 찰벼라는 건 잎이 붉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경상도에서는 올보리를 많이 심습니다. 이걸 찾는 이유는 알이 굵어서 그렇습니다. 알이 굵어서 농사만 잘 지으면 쉽게 1등급을 받습니다. 그 재미로 수확량은 조금 떨어지지만 농민들이 올보리를 많이 심습니다.


- 마지막으로 한 말씀만 해주세요.

=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벼, 보리, 감자, 옥수수, 콩 이렇게 다섯 가지만 나라에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점점 농업은 어려워지니까 정부에서는 그 다섯 가지 말고는 관리를 못하는 실정이지요. 막상 토종을 해보니 요즘은 괜히 힘만 들지 괜히 시작했나 하는 생각도 듭디다. 그래도 종자은행의 냉동고에 있는 것보다 살아 있는 싱싱한 종자를 보존하고 보급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먹을 정도면 몰라도 농민 입장에서 어디 내다 팔고 하려면 경제성을 무시할 수 없는데, 토종은 아직 그런 면에서 힘듭니다. 예전에 흑미가 값이 좋을 때는 한 가마에 40~50만원도 했습니다. 그런데 참 농산물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5%만 과잉 생산되면 폭락하고, 5%만 모자라면 폭등합니다. 요즘은 어떤 농산물 값이 비싸다고 하면 바로 수입해서 그 폭이 덜하긴 하지요. 채소는 생물이라서 그렇게까지는 못합니다만, 값이 떨어지면 외면을 받습니다.

저는 사택에 따로 30평쯤 텃밭을 하는데, 거기 케일을 심었습니다. 거름은 깻묵 썩은 걸 주고 벌레 때문에 모기장을 덮어 놓았지요. 하루는 백화점 가서 깨끗한 케일을 보면서 ‘이게 이렇게 깨끗하게 안 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970년 이전 농업통계를 보면 쌀만 생산량이 2000만석 전후였습니다. 그 이후에는 웬만하면 4000만석 이상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경작률은 줄었지만 오히려 수확률은 늘었다는 건 다수확 품종을 심고, 비료를 많이 주고, 그러다 보니 병이 많아져 농약을 많이 했다는 뜻입니다. 비료를 적게 주면 도열병이 오지도 않습니다. 비료를 많이 주면 대번 도열병에 다 걸리지요. 퇴비를 보약이라고 한다면 화학비료는 영양제입니다. 한약은 많이 먹어도 나쁘지 않고 좋은 것처럼 퇴비를 줘서 강하게 자라도록 해야 합니다. 땅이 좋아야 안 좋은 종자도 좋아집니다. 땅이 나쁘면 종자도 제대로 되기 어렵습니다. 종자가 좋으면 좋은데, 종자가 나쁘면 땅이라도 좋아야 합니다. 여기는 땅이 넓어 감당하기 어려워 퇴비를 많이 쓰지 못합니다. 그래도 생산량보다 종자로 쓰려고 하는 것이기에 될 수 있으면 비료를 적게 줍니다. 그래야 강한 종자를 받을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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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 고추는 개량종과 달리 뭉툭하고 굵다.

맛은 더 아삭하고 단맛과 물이 많고, 나중에 입안을 감도는 매운맛이 알싸하게 퍼진다.

올해 나도 6년째 받은 씨로 고추를 심었는데 4가지 종류가 나왔다.

그 가운데 하나가 이 토종 고추처럼 생겼다.

그걸 잘 선별해서 내년에 또 심어야지.

 

2007.8.23 장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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