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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엄청나게 400가지 이상의 수많은 토종 토마토가 있었는데, 잡종강세를 이용한 신품종 토마토가 출시된 이후 그 90% 이상이 더 이상 재배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토마토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산업사회의 성공 뒷면에는 다양성 상실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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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이라 하면 온주温州 밀감을 가리키는데, 메이지 무렵까지 "밀감"이라 하면 소밀감小蜜柑을 가리켰습니다. 이 소밀감은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온주 밀감도 소밀감도 모두 똑같은 '밀감'을 부르는 이름인데, 일반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역사가 있어 적어 봅니다. 먼저, 소밀감은 정식으로는 기주紀州 밀감이라 부르고 학명도 Citrus kinokuni라고 합니다만,  여기에서는 소밀감이라 부르겠습니다.

 

 

밀감은 소밀감

 

에도 시대 초기 무렵, 와카야마의 상인 키노쿠니야 분자에몬紀伊国屋文이 폭풍우를 무릅쓰고 배로 밀감을 에도로 옮겨 에도 사람들의 갈채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폭풍 때문에 운송선이 움직이지 못해 에도에서는 대장장이의 신을 기리는 "풀무 마츠리"에 바칠 귤이 부족하여 가격이 폭등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카미가타上方에서는 에도로 보낼 밀감 화물이 정체되어 시중에 넘쳐 값을 후려 때려 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때 옮기던 귤이 소밀감으로, 지금의 온주 밀감이 아닙니다.  소밀감은 정월의 공물로 쓰는, 잎이 붙어 있는 작은 밀감을 생각하시면 됩니다. 씨가 있고, 단맛이 나는 작은 밀감입니다. 크기는 30g 정도, 온주 밀감의 1/4 정도입니다. 혼本 밀감, 신眞 밀감, 3월三月 밀감, 기노쿠니紀の国 밀감, 야츠시로八代 밀감, 사쿠라지마桜島 밀감 등도 모두 소밀감입니다.   

 

소밀감 나무(이마바리시今治市 오미시마大三島)

 

 

온주 밀감은 이부인李夫人

밀감이 소밀감이라면 온주 밀감은 무엇이라 불렀을까 하면, 이것은 이부인이라는 왠지 요염한 이름을 붙였습니다. 왜 중국 여성의 이름일지 신경쓰이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상세한 기술은 없어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이부인이라 하면 고대 중국의 한무제가 사랑했던 여성에 그 이름이 있고, 백거이의 시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절세의 미녀였던 것 같습니다. 온주 밀감이 뛰어나게 좋은 성품을 지녀서 붙여진 이름일지도 모릅니다. 작물에 여성의 이름을 붙인 건 귤에 상수부인이 있고, 밀감에 클레오파트라의 이름이 있듯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닙니다.

 

 

이부인은 일본에서 태어났다

이부인(=온주 밀감)이란 이름 때문에 중국에서 전해진 과일 같지만, 사실은 일본 원산 감귤입니다. 가고시마현 이즈미군出水郡에 있는 나가시마長島라는 야마쿠사天草 섬에 면한 섬이 발상지로, 씨앗에서 태어난 변이종으로 생각됩니다.  나가시마에서는 온주 밀감을 이부인이라 부르고, 에히메愛媛현에서도 온주 밀감이 최초로 다치마立間에 들어왔을 때 역시 이부인이라 불렀습니다.

 

 

귤 연구소에 있는 이부인(온주 밀감) 기념비와 다치마에 전해진 원목의 후계 나무(오른쪽 구석)

  

이밖에 이부인李婦人, 쥬쿠진じゅくじん, 용신 등의 호칭도 있고, 오쿠라 나가츠네大蔵永常가 저술한 <広益国産考>(1859)에는 다음과 같은 기술이 있습니다.

 

"이부인이란, 서쪽 지방에서 씨 없는 밀감이라 부르는 것과 약간의 차이도 없는데, 씨 없는 밀감 쪽이 이부인보다 맛이 좋고 전혀 씨가 없다. 이부인도 맛있지만, 약간 신맛이 있고, 씨가 하나나 둘 들어 있다."

 

씨 없는 밀감은 이부인에서 생긴 것처럼 생각되는데, 소밀감에도 씨 없는 게 있어 어느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부인, 즉 온주 밀감은 영어로 사츠마 만다린(satsuma mandarin)이라 부릅니다. 메이지 9년(1876), 미국 플로리다로 도입되었을 때 묘목이 원산지인 가고시마현에서 운반되었기 때문에 사츠마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또한 그 뒤 묘목의 대부분이 오와리尾張의 종묘 산지에서 미국으로 보내졌기 때문에 오와리 사츠마(Owari satsuma)라고도 불렀습니다. (이와마사 마사오 씨)   

 

 

이부인의 탄생

<규원귤보桂園橘譜>(1828)에는 "치쿠고筑後 야나가와柳川에 귤이 있는데, 타이코우太閤(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한 조선 출병시 야나가와 후柳川候가 가져온 것으로, 이부인 귤이라 한다."라고 나옵니다.  또, <본초도보本草図譜>(1830)에도 똑같은 기술이 있어, 조선에서 가져왔는지 어떤지는 별개로 치쿠고에는 임진왜란이 있었던 1600년 전후에 온주 밀감이 전해졌던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1936년 가고시마현 이즈미군, 나가시마의 타카노스鷹巣에서 발견된 이부인의 고목은 발견 당시 나무 나이 300년 정도로, 그 내력은 1600년 무렵. 게다가 고목은 접목으로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원래 부모 나무는 앞서 야나가와에 전래된 시기보다 오래되어, 야나가와의 이부인 귤은 나가시마에서 전해진 것으로 생각됩니다. 

 

나가시마는 무역선이 왕래하던 야츠시로해八代海에 면한 섬으로 전에는 아마쿠사 영역이었던 나카지마仲島의 것. 히고肥後와 히젠肥前에서는 온주 밀감을 "오오나카지마大仲島"나 "나카지마中島"라고도 부르고 있었다고 하여(이와마사 마사오 씨), 이부인은 전국시대인 1500년대에는 재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만, 후쿠오카번福岡藩의 미야자키 야스사다宮崎安貞가  저술한 <농업전서農業全書>(1697)에는 귤橘과 감柑이란 이름은 있어도 이부인이란 이름은 없습니다. 메이지 무렵까지 귤은 주로 선물이나 증답용 물품으로서, 맛있는 과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씨가 없거나 적은 것이 선호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부인이 확산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던 것처럼 보입니다. 

 

 

온주 밀감으로 개명하다

이부인이 일본 원산의 귤인데 왜 온주 밀감이라 부르는 것입니까? 온주라고 하면 중국 저장성 원저우부温州府를 가리킵니다. 남송의 한언직韓彦直이 저술한 <귤록橘録>(1178)에는 "감귤은 소주蘇州, 태주台州에서 나지 않는다. 서쪽으로는 형주荊州에서 나오고, 남쪽으로는 민閩・광広・무주撫州에서 나오지 않는다. 모두 온주의 것이 으뜸으로 그에 미치지 못한다"라고 하여 밀감은 온주부의 것을 최상이라 칭찬했습니다.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図絵>(1712)에서도 "온주 귤은 밀감이다. 온주란 절강의 남쪽에 있어 감귤의 명산지이다"라 하고, <규원귤보>(1848)에서도 감귤의 종류로 온주귤을 들며 그 맛좋음이 밀감 중에서 뛰어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온주라는 이름은 맛있는 밀감의 대명사인 것입니다.

 

메이지가 되어 국가에서는 통계상 이름이 제각각인 귤을 정리해야 했지요. 소밀감을 보통 밀감으로 하고, 이부인을 온주 밀감으로 했습니다. 전고에 뛰어난 사람이 있어 온주부의 밀감에 뒤지지 않는 맛이기 때문에 온주 밀감이라 이름을 붙였겠지만, 온주부에서 전해진 밀감은 아닌 것입니다.

 

온주 밀감

 

 

소밀감의 전래

그럼, 소밀감으로 이야기를 돌려 그 발상을 더듬어 봅시다.

 

소밀감에는 게이코景行 천황이 구마모토로 행차했을 때 씨앗을 하사해 오아마小天 마을 미즈시마水島에 심었다는 전승이 남아 있습니다. 또한 <일본서기>에는 게이코 천황의 1대 전에 해당하는 스이닌垂仁 천황의 명을 받은 다지마모리田道間守라는 사람이  불로불사의 나라에서 토키지쿠노카구노미非時香菓를 구하러 떠나서 10년의 세월이 걸려 가지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토키지쿠노카구노미는 겨울에도 과실이 달리는 감귤 또는 엄동설한에도 바로 옆에 있는 과실이란 의미일까요? 돌아온 다지마모리는 바로 전에 스이닌 천황이 붕어한 것을 알고 황제의 신령에 의지해 무사히 돌아왔는데 만날 수 없게 되자 비탄에 빠져 자살을 합니다. 다음 황제인 게이코 천황은 다지마모리의 충성을 어여삐 여겨 스이닌 천황의 능묘 옆에 매장하도록 명했다 하고, 가지고 돌아온 토키지쿠노카구노미가 귤이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지마모리 초상화(귤 연구소 소장)

 

 

귤은 일본 원산의 감귤이고, 일부러 다지마모리가 해외까지 찾으러 갈 필요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귤을 감귤류의 통칭이라 하면, 토키지쿠노카구노미는 일본으로 전래된 시기를 알 수 없는 소밀감이나 등자(橙)가 아니었을까 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게다가 전승처럼 게이코 천황이 다지마모리가 귀국한 뒤 소밀감의 씨를 구마모토에 심도록 했다면, 토키지쿠노카구노미가 소밀감이었을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러나 소밀감이 그 당시에 전해졌다면, 그 달콤한 맛 때문에 각지에서 재배가 확산되었을 테고 쿠카이空海가 812년에 사가嵯峨 천황에게 헌상한 과실은 감자柑子가 아니라 소밀감이어도 괜찮았을 터. 소밀감 설에는 조금 무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해, 감자는 일본에 오래전부터 있던 추위에 강한 감귤로서 과실은 짙은 황색의 얇은 껍질, 크기는 40g 정도의 작은 열매이다. 쇼무聖武 천황 시대(725)에 당나라에서 전해진 것이 <속일본서기続日本書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토키지쿠노카구노미에는 그밖에 등자나 귤이었다고 하는 설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모두 근거가 없습니다. 덧붙여서, 소밀감이 심어진 장소도 구마모투현 이외에 다지마모리를 신사에 신으로 모시는 와카야마현和歌山県의 키츠모토橘本 신사와 사가현佐賀県에도 전승이 있는데 토키지쿠노카구노미의 씨를 하사했던 게이코 천황이 야마토타케루노미코토日本武尊의 아버지라는 신화에 가까운 시대의 이야기인 만큼 전승을 뒷받침할 방법은 없을 겁니다.

 

 

에히메의 소밀감 점묘点描

에히메의 소밀감에 대해서는 오미시마大三島에 있는 오야마즈미大山祇 신사의 大祝오호오리 직職인 미시마三島 씨가 음력 11월에 소밀감을 영주의 고노 미치나오河野通直에게 헌상해 미치나오에게서 "밀감(みつかん) 매우 매우 경사스럽다"라고 감사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밀감은 "みつかん"이라고 부르고 그 가운데 "つ"가 생략되어 "みかん"이 되는데, 미시마 씨에게는 또 한 통의 고노 미치나오에게 온 감사 편지가 있으니 거기에는 "みかん"이라 적혀 있습니다. 이 문서는 마침 "みつかん"에서 "みかん"으로 변하는 과도기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밀감은 환자의 입에 맞는 귀중한 과실인 듯하여, "아이들이 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는데 고맙습니다"라고 나옵니다. 문서가 작성된 시대는 무로마치 시대 후기인 1540년 무렵이 아닐까 합니다만, 특별한 과일이라 하는 만큼 소밀감이 재배되기 시작한지 그다지 긴 세월이 지나지 않은 듯합니다.

 

에히메현 이마바리시今治市 카미우라쵸上浦町의 소밀감 
위 설명의 소밀감

 

세토우치瀬戸内의 오미지마나 오시마大島에는 지금도 당시를 떠올리기 하는 소밀감의 고목이 남아 있어, 항해가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시대에 세토우치의 섬들을 거점으로 한 왜구와 수군이 가지고 돌아갔거나, 교역선이 순풍을 기다리며 들르는 등을 통해 소밀감 등의 감귤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 때문에 도서 지역에는 자연히 교배되어 생긴 감귤이 많고,  안세이감安政柑이나 핫사쿠八朔 등도 그 종류입니다. 인노시마因島에 들어간 여러  종류가 자연교잡으로 생긴 것이라 알려져 있습니다. 

 

핫사쿠의 실물

 

미시마 씨의 문서로부터 50년 정도 뒤인 키타우와군北宇和郡 미마三間 지방에서 저술된 <친민감월집親民鑑月集>(1564)에는 감귤의 종류로 "감자柑子, 구년보九年甫, 밀감樒柑, 유柚, 등橙" 등 8종을 들고, 그밖에도 종류가 많다고 적혀 있습니다. 밀감은 소밀감이며, 호칭도 "미츠캉みつかん"이 아니라 "미캉みかん"으로 되어 있습니다. 

 

"감귤류는 무가와 사원 등에서 심어도 좋지만, 농가는 유자와 등자 외에는 재배할 필요가 없다"고 하며, "다만, 판매하여 팔린다면 이야기는 다르다"라고도 합니다. 유자와 등자는 식초용으로 삼고, 집 주변에 자가용으로 심어도 괜찮았던 겁니다. 이외의 감귤은 유통하면 상품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에도 시대에 시기는 알 수 없지만, 기타군喜多郡이나 이요군伊予郡의 일부를 영역으로 한 오즈大洲 번주에게 촌장(庄屋)들이 소밀감을 헌상했습니다. 시모카라카와下唐川나 시모스카이下須戒, 마츠오松尾, 지세이知清가 있던 산간 지역에서 소밀감이 헌상된 것입니다. 밀감 재배는 해안선의 따뜻한 지역이 적합한데, 내륙부에서도 남향의 해가 잘 드는 좋은 토지를 선택해 재배했던 것이죠.

 

메이지 21년(1888)에 작성된 에히메현의 감귤 통계에서는 현 내의 밀감 생산량 3504섬 가운데 기타우와군北宇和郡이 1930섬, 기타군이 1097섬으로 두 군에서 80% 이상을 차지합니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오스 번 영역의 기타군은 현 내에서도 유수의 소밀감 산지였던 겁니다.

 

에도 시대의 백과사전인 <화한삼재도회和漢三才図絵>(1712)에는 밀감의 산지로 "기주紀州 아리타有田, 살주薩州 사쿠리지마桜島, 예주豫州 마츠야마松山, 준주駿州, 히고肥後 야츠시로八代를 들고, 예주 마츠야마 산물은 준주 산물보다 맛있다"고 적혀 있습니다.

 

에히메의 밀감이 유명해진 건 메이지 17년(1884)에 다치마立間의 이부인(온주 밀감)이 도쿄의 전국 중요 물산 공진회에서 1등상을 받고, 이듬해 1885년에도 대일본 농회의 전국 농산물 품평회에서 1등상을 받아 호평을 받기 이전 이미 에도 시대부터 맛있는 밀감 산지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소밀감은 구마모토부터 가고시마, 오이타, 에히메, 히로시마, 와카야마, 시즈오카로 항로를 따라 확산되고, 게다가 대부분이 현재의 온주 밀감    산지와 겹쳐 있어 소밀감의 역사가 현재를 떠받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역사에 등장한 소밀감

메이지 중반 무렵까지 소밀감은 밀감이라 부르고 있었는데, 도대체 밀감이란 단어는 언제쯤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을까요? 꿀에 절인 듯한 달콤한 것으로부터 밀감이라 부른 것 같습니다만, 밀귤蜜橘이나 밀감樒柑 등 다양한 글자가 충당되어 최초로 사료에 나타난 것은 1418년, 고스코우잉後崇光院이 상황의 거처로 밀감 2홉을 바친 기술입니다. 이어지는 사료에는 "병중인 무로마치室町 도노殿가 밀감을 바라시어 조우코우잉蔵光院의 밀감을 100개 받아 헌상하고, 부족분은 감자柑子를 더했다."라고 해, 밀감은 무로마치 도노(장군)가 바라는 귀중한 과일이었습니다. 시기적으로는 대명 무역을 활발히 하던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의 다음 장군 시대이고, 소밀감 같은 달달한 과실이 재배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뒤 얼마 동안 밀감이란 글자는 사료에서 사라지고, 앞에 기술한 미지마 씨의 문서가 쓰여진 1540년 무럽까지 공백기가 이어집니다. 그리고 미지마 문서의 다음, 즉 1500년대 중기부터 빈번하게 사료에 등장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 소밀감이 밀감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가 쇠퇴하고, 이요국伊予国에서는 고노 미치나오河野通直(1509년 영주)가 활약하며, 인노시마因島와 노지마能島, 쿠루시마来島의 무라카미村上 씨 등의 미지마 수군이 큐슈와 해외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시대와 부합해 적어도 지금으로부터 500년 이상 전이라 생각됩니다. .

 

 

 

참고자료

安部熊之輔(1904): 日本の蜜柑. 明治農学全集 果樹

愛媛県果樹園芸史(1968): 愛媛県青果農業協同組合連合会

村上節太郎(1967): 柑橘栽培地域の研究
岩政正男
(1979): 作物品種名雑考・柑橘. 農業技術 34(9)409-413 

古事類苑国際・日本文化研究センタ- 大

蔵永常(1859): 広益国産考.日本農学全集,()農山漁村文化協会

宮崎安貞(1697): 農業全書卷六~巻十一日本農学全集, ()農山漁村文化協会 郷土誌資料第 1 集の 1 産業編 吉田町立間公民館

菅 菊太郎(大正 4 ): 伊予における古き蜜柑の栽培地伊予史談第 1  4 

大洲藩領史料要録村々庄屋旧家献上物覚:伊予史談会
親民鑑月集 和名類聚楽抄 和漢三才図会 魏志倭人伝 古事記 日本書紀

 

 

 

 

 

 

원문 https://www.pref.ehime.jp/h35118/1707/siteas/11_chishiki/documents/kankiturekisi.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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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는 발뿌리를 뻗는다. 그 큰 키를 유지하며 쓰러지지 않기 위해서 고안한 생존수단이다.
중남미 어느 지역의 옥수수는 이 뿌리에서 즙액이 나와 질소를 고정하는 균류와 공생한다고도 하더라. 그것도 하나의 생존수단이다.

식물은 이렇게 세상 속에서 버티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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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는 사랑입니다. 제철을 맞은 감자를 많이 드세요.
지난번 강원도의 감자 소동 같은 일이 또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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Чёрный хлеб. 러시아 하면 떠오르는 검은 빛깔의 빵을 가리키는 말이라 한다.

 

러시아나 북유럽, 동유럽, 그리고 독일 북부 지방 같은 경우 겨울이 너무 추워서 -그렇다고 한국처럼 살을 에이는 듯한 추위와는 다를 테지만- 다른 유럽 지역과 달리 밀 농사가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선택하는 것이 바로 호밀 농사, 그리고 그로 만든 빵이 검은 빛깔의 빵이다.

 

호밀로 만든 이 흑빵의 경우 현미와 비슷한 특성이 있다고 보면 된다. 흰쌀은 입에서 사르르르 녹고 부드럽게 씹히는 점을 내세울 수 있다면, 쓿지 않은 쌀인 현미는 섬유질 등이 많아 좀 거칠고 뻑뻑한 식감인 반면 흰쌀이 갖지 못한 여러 양분을 공급할 수 있단 특성이 있지 않은가. 밀과 호밀의 차이도 그와 비슷하다고 한다. 밀은 부드러운 식감의 고운 빵을 만들 수 있는 반면, 호밀은 거칠거칠한 식감의 검은 빵을 만들게 된다.

 

그런데 최근 유전공학을 이용한 육종 기술이 발달하면서 다음과 같은 소식도 들려온다. 최첨단기술인 유전자 편집 기술을 이용해 내한성이 강한 밀을 개발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자연의 한계를 뛰어넘는 과학기술의 힘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겠지. 또 한편으로는 자연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인위적 행위라고 정의할 수도 있겠다. 무엇이 되었든 참 재미난 일이 아닐 수 없네.

 

 

https://www.abc.net.au/news/rural/2020-06-24/gene-editing-technology-to-create-frost-tolerant-wheat/123855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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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cityfarmer.seoul.go.kr/brd/view.do?nttSn=3342&key=1905228807693&pageIndex=1&sc=&sw=

 

서울시 서울농부포털

서울시 서울농부포털

cityfarmer.seoul.go.kr

 

얼마 있으면 햇감자를 캐기 시작하겠네요. 3월에 심어 석 달 동안 고생 많으셨습니다. 한국에서는 언제 처음으로 감자 농사를 지었을까요? 여러 설이 있는데 대략 조선의 순조 시대인 1824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당시 북간도 지역에 어떤 품종인지는 모르겠으나 처음으로 감자가 재배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누구는 함경도 무산에 사는 이형재라는 사람이 청나라에서 씨감자를 구해와 재배했다 하고, 누구는 산삼을 캐러 온 청나라 사람들이 먹기 위해 재배한 감자가 전해진 것이라 하고, 또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명천에 사는 김 씨가 들여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느 설이 맞는지 검증하기는 어렵지만, 1800년대 초반에 감자가 처음 조선으로 들어온 것이 사실인가 봅니다. 아무튼 감자의 원산지는 서늘하고 강우량이 적은 안데스의 고산 지대인데, 그곳의 기후 조건과 북간도 쪽이 서로 비슷했나 봅니다.

그렇게 100년이 흐른 1920년대 초,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일본 아이치 산업주식회사는 나고야에 있던 포로수용소의 수감자 가운데 농업을 전공한 독일인들을 선발해 조선에 난곡농장이란 곳을 설립합니다. 그 사람들이 원산 지역에서 그 지방의 토종 감자를 수집해 선발한 난곡 1호, 2호, 3호, 4호, 5호라는 감자가 있었다는 기록에 등장합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 최초의 감자 품종에 대한 기록이라 합니다. 여기서 잠깐, 당시 조선에 설치되었던 난곡 기계농장이란 곳을 살펴보죠.

 

 

 

 

다시 감자로 돌아오지요. 1928년 무렵, 한국 감자의 역사에 엄청난 일이 일어납니다. 바로 일본 홋카이도(北海道)에서 남작(男爵, 영어명 Irish Cobbler)이란 품종이 건너오는 것입니다. 이 감자는 아직도 재배되는, 그러니까 100년의 역사를 지닌 감자이지요. 당시에도 맛이 너무 좋아서 세계 곳곳에서 널리 재배되었다고 합니다. 남작이란 감자는 원래 미국에서 육종된 품종입니다. ‘아니, 영어 이름이 Irish Cobbler라면서 왜 아일랜드가 아니라 미국인가?’ 의아하겠지만, 당시 아일랜드에서 감자 대기근으로 미국 땅으로 피난을 온 아일랜드 사람들이 많았단 사실을 떠올리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아마 아일랜드(irish) 출신 구두장이(cobbler)가 먹으려고 선발육종한 감자인 것 같습니다.

남작이란 감자가 조선에 건너온 배경에는 일본인 료키치 카와다란 사람이 있습니다. 홋카이도 출신인 그는 영국으로 유학을 다녀왔는데, 그곳에서 당시 유행하던 irish cobbler란 감자를 먹고는 그 맛에 반해 자기 고향에 가져온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일본 정부에서 남작이란 작위를 받은 인물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작위명이 그대로 품종명이 되어 조선으로 건너와 널리 퍼진 것이죠. 마치 조선의 조동지라는 토종 벼와 비슷한 사례입니다. 이 감자가 얼마나 맛있길래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잡았을까요? 지금도 재배해서 판매하는 농가가 있으니 수소문해서 잡숴 보십시오. 포슬포슬하니 입 안에서 사르르 설탕처럼 녹아버립니다. 그리고 또,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누구는 1920년대 말이라 하고, 누구는 1940년이라 하는데, 아무튼 충남 농사시험장에서 그 지역의 토종 감자 중에서 선발한 두마 2호라는 감자 품종을 지역의 농가에 보급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네요.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조선은 다들 알다시피 격변의 시대로 들어갑니다. 일본의 패망과 해방, 이념 갈등과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강산이 폐허가 되어 버립니다. 당장 먹을거리도 없는 판국에 무슨 품종을 따지며, 육종은 무슨 육종이란 말입니까. 당장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농사지어 닥치는 대로 먹을 뿐이었겠죠. 그러한 폐허를 정리하며 나라의 기틀과 체계를 잡아가며 국가의 가장 근간이 되는 농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한 건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당시에는 지금과 달리 가장 유망한 직종이 농업 관련한 것이었죠.

그리하여 1961년 고령지 시험장이 설치되며 다시 감자 품종을 육종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기술이 있습니까? 무슨 자원이 있습니까? 그냥 편하게 외국에서, 특히 일본에서 좋다고 하는 품종을 서둘러 도입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를 받던 당시의 인사들이 그대로 관직을 유지하겠다, 일본은 우리보다 훨씬 앞선 나라라는 인식이 뇌리에 박혀 있었던 결과이지요. 또 일본은 일본 나름대로 한국을 이용해 먹기 좋았고요. 모든 조건이 맞아떨어진 결과입니다. 그래서 1960년대에도 일본에서 남작을 비롯해 사쵸, 시마바나, 타치바나 등 20여 가지의 감자 품종이 도입됩니다.

 

그걸 기반으로 해서 여러 가지 감자 장려품종이 육종되다가, 1970년대 중후반 또 하나의 굵직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바로 수미(Superior) 감자가 미국에서 들어온 것입니다! 이후 한국의 감자 시장은 수미가 석권했다는 사실은 입 아프게 이야기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1960년대 미국 위스콘신 대학에서 육종했다는 이 수미 감자는 대표적인 점질 감자이다. 감자에는 분질과 점질이 있다는 건 다 아시죠? 점질 감자는 쪄먹기보단 튀겼을 때가 제 맛입니다. 그래서 감자튀김 같은 요리에 제격이지요. 즉, 감자를 쪄서 먹고, 삶아 먹고, 끓여서 먹는 우리의 식문화와는 좀 어울리지 않긴 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특징의 수미 감자가 한국의 농지를 장악했을까요? 그건 농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감자의 고향은 어디다? 네, 바로 안데스의 고산 지대입니다. 여긴 기후 조건이 어떻다? 네, 고산 지대라서 서늘합니다. 그래서 조선에 처음으로 감자가 도입될 때도 이북 지역이나 산간 지역을 중심으로, 즉 다른 농사를 짓기 어려운 곳에 급속히 퍼졌지요. 그래서 지금도 강원도 하면 대뜸 감자를 이야기합니다. 이런 걸 남쪽의 평야 지대에서 농사 지으려고 서늘한 이른 봄에 심지요. 그런데 한국의 봄은 얼마나 기후가 변화무쌍합니까. 올해처럼 냉해가 심할 때도 있고, 또 아주 가물 때도 있으며, 반대로 너무 푹하고 비가 자주 올 때도 있습니다. 한마디로 어느 장단에 춤춰야 할지 모르는 날씨가 펼쳐집니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처럼 각종 농자재도 충분치 않은 채 감자 농사를 지어야 했습니다.

 

감자 농사에서는 그 무엇보다 특히 기온이 중요합니다. 감자는 더위에 취약합니다. 더우면 제대로 자라지 않습니다. 아니, 잎은 무성하게 자라도 우리가 식용하는 덩이줄기가 비대해지지 않습니다. 감자란 작물은 섭씨 14~23도에서 가장 잘 자라고, 감자알은 섭씨 14~18도 사이에서 굵어집니다. 딱 한국의 봄철 날씨가 적당한 것이지요. 아무튼 날씨가 더워지면 감자 수확도 시원치 않아집니다. 하지만 이 수미라는 품종은 더위에 강합니다. 어려운 말로 내서성(耐暑性)이라 하지요. 날씨가 더워져도 다른 감자 품종과 달리 잘 버티고 알이 큼지막하게 굵어지는데, 그걸 보고 사람들 입이 쩍 벌어지고, 가뜩이나 배도 고픈데 애기 머리통만 한 감자가 땅에서 막 나오니……. 그렇게 한국의 농지를 다 장악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에서 재배되는 감자의 80%인가 90%가 다 수미 품종이라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이상하죠? 한국은 분단국가라 그런가요? 한국인은 통일을 좋아합니다. 식당에 가서도 주문을 하나로 통일해야 직성이 풀리고, 튀어나온 못은 망치로 얻어맞는다고 그럽니다. 개별성보단 통일성을 좋아하지만 정작 통일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수미 말고도 대지(出島), 장원(russets burbank), 세풍(shepody), 대서(atlantic) 등의 품종이 외국에서 그대로 도입되다가, 80년대 말부터 비로소 국내에서 자체적으로 육종한 조풍, 남서, 추백, 조심, 가원, 자원, 조서, 추동, 자영, 홍영 등의 품종이 개발되어 나옵니다. 이는 아마 농산물 시장 개방과 함께 대두된 로열티 문제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채소 종자의 경우에도, 해방 이후 주로 일본에서 수입하거나 훔쳐다 쓰다가 1980년대 세계화의 압력으로 개방 농업정책이 펼쳐지며 부랴부랴 종자산업을 육성한다느니 하는 난리가 일어나죠. 여담이지만, 과거에 종자 관련한 연구나 사업에 종사한 사람들은 반은 씨도둑이라 해도 될 정도일 겁니다. 그게 어디 한국만 그렇습니까. 선진국이란 나라들의 과거를 까보면 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생물 해적질(Bio-Piracy)”이란 용어까지 만들어졌겠습니까. 생물다양성 협약, 다른 말로 나고야 의정서 때문에 이제 생물자원국과 이익을 공유해야 한다는 인식이 막 생겨난 상태입니다. 아무튼, 선진국이라는 산업국가들은 전직이 다 도둑이라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이야기가 잠깐 삼천포로 빠졌는데, 한국 감자 품종의 변천사라고 정의해도 될까 하는 저의 이번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제 주린 배를 움켜잡고 힘들어하는 세상은 아니니, 좀 더 다양한 감자 품종이 재배되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여러 감자 품종을 구입해 맛있게 요리해 먹는 사람들이 많아져야겠지요. 생산량 일변도의 분위기가 확 바뀌어 다시는 착한 감자, 반값 감자 소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일회성 행사는 당장 발등의 불은 끌 수 있을지 몰라도,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 이제 모두 잊고 감자를 맛있게 먹으러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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