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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렇겠지만, 사람은 먼저 꽃에 눈과 맘을 빼앗기기가 쉽다. 그렇게 꽃을 바라보다가 어떤 사람은 꽃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궁금증이 일어나게 된다. 그렇게 공부를 시작하다 보면 그 뿌리가 되는 씨앗에까지 가서 닿는다. 물론 그 반대의 방향으로 진행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시각에 가장 크게 의존하는 것이 사람이기에 먼저 꽃에 눈을 빼앗기는 일이 더 빈번하다.


농업에서 생산량을 높이려는 노력은 어찌 보면 전혀 농업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한 목적의 농업은 농업 그 자체보다 오히려 상공업에 더 큰 혜택을 주었다. 미국의 경우 1840년에는 인구의 70%가 농민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1950년에는 12%의 농민만 남고, 2002년에는 인구의 2% 미만의 농민만 남았다. 이러한 현상은 어느 선진국이나 다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1960년대 70%에 가깝던 농민이 점점 줄어들어 현재 300만 명도 안 되는 사람만 남아서 농사를 짓는다. 그리고 그 중에서 60% 이상은 60대 이상의 고령층이다. 이렇듯 다수확 농업은 농민을 도와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소농을 깨끗이 청소해 버렸다.


종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잡종강세를 이용한 주로 다수확을 목적으로 하는 하이브리드 품종이 개발되면서 다양한 토종종자는 급속도로 사라졌다. 그 결과 1900~2000년 사이 세계의 작물 다양성은 75%나 감소했다고 한다. 역시나 한국에서도 이 현상은 동일하게 일어났다. 작물다양성은 결국 식량안보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토종종자는 오랜 세월 동안 농민과 함께 살아오면서 여러 병해충과 기후변화에 적응해 왔다. 즉 그러한 과정을 통해 유적적으로 단련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헌데 다수확을 목적으로 하는 신품종은 계속 새로 사다가 심을 수밖에 없다. 지금도 농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종묘상에서 종자를 구매해서 농사를 짓는다.


아직도 토종종자를 재배하는 농민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 한결같이 이렇게 말한다. 


"토종이 신품종보다 훨씬 맛나지." 





그렇다, 근대의 농업은 맛 대신 수확량을 택했다. 아마 옛 문헌에 나오는 음식들의 맛은 지금의 농산물을 사용하면 그대로 재현할 수 없을 것이다.


성장, 발전이란 근대의 이념은 농업에서도 다수확이란 목표를 통해 달성되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종자는 개량되고 선택되고 일부는 버려졌다. 그것은 비단 종자에서만 벌어진 일이 아니다. 농민 역시 개량되고 선택되고 일부는 버려져 도시로 흘러들어갔다. 그러한 희생과 발전을 바탕으로 인류는 역사에서 본 적이 없는 번영과 풍요를 이루었다. 우리는 그러한 풍요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누리고 있다. 평생 배고픈 적이 없고, 온갖 산해진미가 넘치며, 거리에는 맛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꽃에 정신이 팔리고 눈이 팔려도 좋다. 탐미적인 눈길을 사랑의 눈길로 바꿀 수만 있으면 된다. 꽃을 사랑하고 알고자 노력하자. 그러면 결국에는 씨앗에까지 가서 닿을 것이다. 아니면 씨앗을 사랑해도 된다. 이 씨앗이 어떤 싹을 내밀고 어떻게 자라 아름다운 꽃을 피울지 상상하라. 꽃과 씨앗은 결국에는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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