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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쟁기

 

1.  쟁기의 기원

 

 

 

쟁기의 기원에 대해서는 괭이가 기원인지 가래가 기원인지 세계적으로 논의되어 왔습니다. 가래 안에는 (그림1-A)①처럼 가래에 부착한 끈을 도우미가 당겨서 경운을 돕는 것이 있고, 그것을 ②처럼 사람이 앞쪽으로 끌어서 인걸이가 생기며, ③처럼 소에 멍에를 지워 소갈이 쟁기가 발생한다는 설도 제기되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보습의 변화에 주목하면, B그림처럼 괭이는 콱 찍어 넣어 흙을 일으키고 찍어 넣어 일으키는 걸 반복하고, 가래도 밟아 넣어 흙을 일으키고 밟아 넣어 일으키는 걸 반복하여, 날끝은 공중-땅속을 왕복하는 "간헐 경운"인데 반해 쟁기의 보습은 C그림처럼 소가 끌어서 땅속을 잠수함처럼 잠항하는 "연속 경운"이라 기술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계통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쟁기는 괭이나 가래와는 전혀 관계없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림2 쟁기의 기원

 

 

"인걸이 쟁기 → 소갈이 쟁기"라는 전개에는 한 가지 큰 오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걸이 쟁기는 그림2의 AB와 같이 일본을 포함해 세계 각지에 점재해 있는데, 그것들은 호리쟁기를 사용하고 있던 사람들이 무언가 사정이 생겨 소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에 빠져 할 수 없이 사람이 끌기 시작했다고 생각되며, 이는 소가 끄는 쟁기의 '파생형'으로 '원형'은 아닙니다.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라는 발전 패턴이 예상되지만, 간단한 것에는 퇴행적인 파생형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합니다.

최초의 형은 D그림 같이 겨리쟁기로 긴 성에를 2마리 소의 머리에 걸쳐놓은 멍에에 묶어서 당기게 했습니다. 그런데 2마리 소의 머리에 걸친 멍에와 긴 성에는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달구지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달구지는 C그림처럼 큰 바퀴를 갖춘 이륜차로서, 이 달구지가 주행하는 걸 바라보던 사람들 가운데 차체 대신 철제 날을 부착한 자루를 부착하면 소의 힘으로 연속해 경운할 수 있겠다는 발상을 떠올려 D그림 같은 겨리쟁기가 탄생했다고 생각됩니다.  

 

 

2. 겨리쟁기에서 호리쟁기로

 

 

 

<그림3>처럼 서아시아, 인도 서북부에서 발생한 겨리쟁기는 서쪽으로 나아가 이집트와 로마 등 지중해 주변으로 퍼졌습니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쪽으로 들어간 쟁기는 게르만 민족의 손에 의해 중후한 바퀴쟁기로 개량되어 4마리가 끄는 쟁기도 나타나며 중세 유럽 사회를 뒷받침했습니다. 

중앙아시아부터 실크로드를 경유해 중국 화북지방으로 들어간 겨리쟁기는 진과 한의 중국 통일을 생산력 면에서 뒷받침하고, 또 동쪽으로 나아가 조선 북부의 고구려가 발전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유라시아, 북아프리카는 겨리쟁기권이 되었습니다.

중국에서는 한나라 무렵부터 호리쟁기가 출현했습니다. 3세기 초에 황하 유역은 유목민에게 점령되어 진晉나라가 멸망하고, 화북에서 쫓겨난 한족은 장강 유역으로 달아나 남조를 건설하는데, 이 과정에서 화북의 밭농사 용구는 강남 지방의 논에서 논농사용으로 개조되어 호리쟁기의 굽은성에긴바닥(曲轅長床) 쟁기가 태어났습니다. 조선반도에서는 고구려에서 남쪽의 백제와 신라로 전해지는 과정에 호리쟁기의 곧은성에삼각틀바닥없는(直轅三角枠無床) 쟁기가 태어났습니다. 이리하여 동아시아는 호리쟁기권이 되고, 여기에서 일본으로 호리쟁기가 전해졌습니다. 

 

 

3. 쟁기의 형태와 분류

 

호펜의 다섯 분류

 

그림4 호펜의 다섯 분류

 

 

H. J. 호펜은 FAO(유엔 식량농업기구)에서발행한 책에서 쟁기의 골격구조를 기준으로 다섯 분류를 제시했습니다. 별로 알려져 있지 않기에 <그림4>에서 소개해보겠습니다.

(A) 성에 쟁기는 소를 향해 쭉 뻗은 성에(beam)가 기본 골격=본체가 되고, 거기에 쟁기날을 붙인 쟁기술이 끼워진 쟁기.

(B) 술 쟁기는 쟁기날을 붙인 쟁기술(body)가 본체가 되고, 거기에 성에가 끼워진 쟁기.

(C) 바닥 쟁기는 쟁기바닥(sole)이 본체가 되고, 성에와 쟁기날이 붙은 쟁기술이 따로따로 끼워진 쟁기. 바닥은 신발바닥의 sole과 동어로 일본에서는 쟁기바닥이라 부르는데, '바닥(床)'은 원래 사각의 침상을 가리키는 한자이기에 '쟁기바닥'이라고 했습니다. 중국 농학에서도 쟁기바닥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세 형태는 인도, 서아시아, 중앙아시아, 북아프리카, 지중해 지역 등에서 쓰여 왔던 겨리쟁기입니다.

(D) 사각틀 쟁기는 성에, 쟁기바닥, 한마루, 자부지라는 네 부재가 사각틀을 구성하는 쟁기.

(E) 삼각틀 쟁기는 한마루와 쟁기자루가 교차하여 삼각틀을 만드는 유형으로, 모두 중국에서 발생한 호리쟁기입니다. 다만 삼각틀 쟁기는 동아시아에서는 F에 나오는 역삼각틀을 갖춘 조선반도의 삼각틀바닥없는 쟁기(三角枠無床犁)가 주류로 E 유형은 소수파입니다.

일본에서는 조선반도에서 F의 삼각틀 쟁기를 5세기 후반 이후에 도래인이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또한 타이카大化 개신改新 정부는 견당사遣唐使에게서 D의 사각틀 쟁기를 손에 넣어 전국에 모형을 배포해 재래 쟁기가 되었습니다.  

 

 

 

4. 유전자의 발견

일본의 농기구가 각지에서 모양이 다른 건 예전부터 알려져 있어, 대대로 농민들이 그 토지의 지형이나 토질에 맞추어 개량한 결과 다양한 형태로 부화했다는 "지형, 토질 결정론"이 믿어져 왔습니다. 쟁기의 기원에 대해서도 농학자들은 "도구는 간단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진화한다"는 생각에 바탕하여 <그림 5A> <그림 5B>와 같이 일본 국내의 발달계통도가 몇 가지 만들어졌습니다. 다만 이들은 현지조사를 행하지 않고 그린 계통도로서 근거가 희박하고, 거의 상상의 산물입니다.

그림5 농학자에 의한 쟁기의 일본 국내 발달계통도

 

그런데 쟁기는 "카라스키からすき"라는 호칭으로 보아도 일본의 발명이 아니라 카라(당나라, 한국), 즉 중국이나 한반도에서 전해진 것이며, 일본 국내에서 간단한 것에서부터 복잡한 것으로 진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각지의 재래 쟁기를 조사해 보면, <그림6>에서 보는 것처럼 후쿠오카현의 안아 쥐고 조종하는 쟁기(抱持立犁)는 조선계의 삼각틀바닥없는 쟁기, 간사이 지방의 굽은술긴바닥 쟁기는 중국계의 사각틀긴바닥 쟁기로, 전래의 계보에 의하여 각지의 재래 쟁기의 모양이 결정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림6 후쿠오카현 쟁기는 조선계, 나라현 쟁기는 중국계

  

 

전통적인 농촌사회에서 농기구는 파손되는 것과 똑같은 형태로 복사됩니다. 가령 쟁기의 내용년수를 20년이라 한다면 100년에 5번, 1000년에 50번 갱신되는데, 똑같은 형태로 복사된 결과 개체는 교체되어도 형태는 1000년을 넘어서 계승되기 때문에, 그 땅에 조선계 도래인이 와 있었는지 어떤지 등을 알 수 있습니다. 민간의 도구에도 유전자가 있던 것입니다. <고사기> <일본서기>에는 지방 서민의 사정은 써 있지 않지만, 재래 쟁기의 전국 조사를 하면 발굴하지 않아도 시정촌들의 고대사가 복원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민간의 도구를 통한 역사학"이라 명명하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5. 민간의 도구 조사에서 본 쟁기의 일본 전래

민간 도구의 조사로부터 일본으로 쟁기가 전래된 것을 알아봤습니다. <그림7>을 보러 가지요.

 

삼각틀 쟁기는 도래인이 가지고 옴 ; 조선반도에서 온 도래인은 4세기 말-5세기 초의 제1기, 5세기 후바부터 6세기에 걸쳐 제2기, 7세기 후반의 제3기로 분류되는데, 조선반도 남부의 호리쟁기의 성립이 늦었기 때문에 소와 쟁기를 가지고 온 것은 제2기 이후의 도래인이라 생각됩니다.

타이카大化 개신 정부가 중국계 긴바닥 쟁기를 도입함 ; 중국계 긴바닥쟁기는 큐슈부터 간토우까지 확인할 수 있고, <와묘루이쥬쇼和名類聚抄>에 인용된 8세기 초두의 "양씨楊氏 한어초漢語抄"라는 고사서에는 쟁기바닥의 기술이 있기에 7세기에는 전해졌단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당시는 아직 중국과 일본 사이의 민간 교류가 없어 견수사, 견당사의 외교 시대이기에 정부에 의한 기술 도입이라 생각됩니다. 일본의 긴바닥쟁기는 쟁기들의 형태로 보아 강남계이고, 7세기 후반에 강남 지방에 갔던 견당사는 661년 하카다에 되돌아왔던 제4차 견당사뿐이라 이때 중국계 긴바닥쟁기를 가지고 돌아와 그것을 기본으로 다이카 개신 정부는 500대 정도의 정부 모델 쟁기를 만들어 각지의 코오리노카미評督(이후의 군지郡司)에게 보내 복제하게 하여 보급을 시도했다고 생각됩니다.

혼혈형 쟁기의 탄생 ; 이미 쟁기를 사용하고 있던 마을에서는 중국계 긴바닥쟁기가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왔기에 손에 익은 조선계 쟁기와의 혼혈이 일어납니다. 조선-중국 혼혈형 쟁기는 각지에서 검출되고 있습니다. 

조선계 그대로인 난민 쟁기 ; 663년의 백제 멸망, 669년의 고구려 멸망 시기에는 많은 난민이 일본으로 왔습니다. 정부의 모델 쟁기 배부는 이미 끝났기 때문에, 난민들이 제작한 쟁기는 혼혈형이 되지 않고 조선계 그대로입니다. 난민의 쟁기는 키타큐슈나 시가현滋賀県, 야마나시현山梨県에서 검출되고 있습니다. 

7세기 후반에 성립된 다양한 쟁기는 망가져도 동일한 형태로 갱신되어 민간 도구에까지 계승되었습니다. 

 

그림7 민간 도구의 조사를 바탕으로 한 쟁기의 전래 연표

 

 

6. 쟁기 농학자의 3분법과 지역사를 읽고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3분법

일본의 농학에서는 메이지 이래 <그림8A>처럼 쟁기바닥의 유무, 장단에 의하여 "바닥없는쟁기(無床犁)" "짧은바닥쟁기(短床犁)" "긴바닥쟁기(長床犁)"라는 3분법이 널리 쓰여 왔습니다. 안아 쥐고 조종하는 쟁기로 대표되는 바닥없는쟁기는 안정성이 나쁘고 다루기 어렵지만 깊이갈이가 가능한 데 반해, 긴바닥쟁기는 안정성은 좋지만 얕이갈이밖에 할 수 없는 단점을 가짐. 이 양자의 장단을 취합한 것이 근대 짧은바닥 쟁기라는 분류입니다. 이 분류법에서는 깊이갈이가 가능한지 어떤지를 결정짓는 것은 소와 말의 견인력이라는 중요한 점이 누락되어 있는데, 농업의 생산력 향상에서 근대 일본을 뒷받침했던 농학계의 불타는 의욕을 반영한 분류법으로 이제는 문화재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쟁기는 1950년대 중엽부터 경운기로 교체가 진행되어, 지금은 박물관이나 자료관의 수장고에 잠들어 있습니다. 이들 제1선을 은퇴한 도구류는 '민간 도구'라 부르고 있으며, 민간 도구가 된 쟁기의 역할은 토지를 경운하는 것이 아니라 지역의 역사를 후세에게 전하는 이야기꾼으로 보관되어 있는 것입니다. 쟁기의 역할이 지역 역사의 이야기꾼이라면 그것에 상응하는 분류법이 있을 터입니다. 그리 생각해 제기한 것이 <그림8B>에 나오는 '조선계 삼각틀 쟁기' '중국계 사각틀 쟁기' '조선, 중국 혼혈형 쟁기'라는 "새로운 3분법"입니다. 이들은 6-7세기 역사의 흐름 속에서 탄생한 것이기에 재래 쟁기의 형태를 알 수 있다면 그 지역의 6-7세기 역사를 복원할 수 있고, 다음과 같은 "쟁기 형태로부터 지역 고대사를 복원하는 공식"을 도입할 수 있습니다. 

 

조선계 삼각틀 쟁기가 사용되고 있던 지역 ...... 백제, 고구려 난민이 건너와 개척한 땅과 그 주변

중국계 사각틀 쟁기가 사용되고 있던 지역 ...... 정권을 지지하는 지역 또는 도래인이 오지 않았던 지역

한중 혼혈형 쟁기가 사용되고 있던 지역 ...... 5-6세기 제2기 도래인이 건너와 개척한 땅과 그 주변

 

그림8 쟁기의 3분법

 

다음 장에서는 이 공식을 단서로 도쿄 농업대학이 수집한 쟁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7. 도쿄 농업대학이 수집한 쟁기

도쿄 농업대학의 민간 도구는 이른 시기에 전국 규모로 수집했기 때문에 좋은 자료가 모여 있습니다. 그 뒤 시정촌 합병이 진행되었는데, 수집지를 세밀하게 한정할 수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옛 시정촌으로 표기하겠습니다.

 

● 나라, 교토, 와가야마의 중국계 사각틀 쟁기

 <그림9>에 게재된 나라, 교토, 와가야마의 쟁기는 성에, 한마루, 자부지, 쟁기바닥의 4부재로 구성된 사각틀긴바닥 쟁기로 E의 강남 쟁기가 모델입니다. 강남 쟁기의 특징인 무지개 같이 구부러진 굽은성에는 F그림처럼 소의 목과 쟁기 끝을 연결한 힘의 작용선까지 견인점을 낮추어 안정된 자세로 주행할 수 있도록 한 고안입니다. 

나라현 쟁기의 성에, 손잡이의 교점에 4개의 쐐기가 겹쳐 보이는 건 D그림의 경운 깊이의 조절장치로, 현상에서 4개의 쐐기는 성에의 윗쪽에 박아 넣기 떄문에 성에 끝쪽의 견인점은 올라가 소가 끌게 하면 쟁기 끝은 내려가서 깊이갈이하는 경향이 되고, 그 반대로 쐐기를 아랫쪽에 박아 바꾸면 얕이갈이하는 경향이 되는 이치입니다. 

나라, 교토, 와가야마의 쟁기에서 서로 다른 것이 손잡이의 모양. 나라현 쟁기는 T자형 손잡이로 타카이 개신 정부가 보급한 키나이畿内의 정부 모델 쟁기의 충실한 복제로서, 정권 측근의 정권 지지율이 높았던 걸 반영합니다. 교토 쟁기의 손잡이가 위로 늘어난 것은 조선계 삼각틀 쟁기의 자부지를 모방한 것. 아마 이 주변에는 도래인이 와 있어서 삼각틀바닥없는쟁기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손에 익은 조선계 손잡이를 남긴 것으로, 중국계 90%, 조선계 10%의 혼혈형입니다. 와가야마현 쟁기는 별도의 자재로 손잡이를 붙였는데, 이것도 자부지의 뒤에서 잡는 방식이 남아 있는 것으로 중국계 90%, 조선계 10%의 혼혈형입니다.

90%가 중국계, 즉 정부 모델 쟁기 계통이란 것은 정권 지지율이 높다는 반영으로, 탄바丹波도 키이紀伊도 키나이 주변 지역으로 7세기 아스카飛鳥 정권의 지지자들이 있었던 흔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9 나라, 교토, 와가야마의 중국계 사각틀 쟁기

 

 

● 가고시마현 도쿠노시마徳之島의 사각틀긴바닥쟁기

<그림10A>은 가고시마현 도쿠노시마의 쟁기로, 사탕수수밭의 사이갈이 김매기용으로 1950년 무렵까지 사용되던 것. 전장 131cm의 작은 것으로, 위의 나라현 쟁기의 전장은 281.5cm와 비교해 절반 이하로 작습니다. 이 유형의 쟁기는 아마미오시마奄美大島부터 오키나와沖縄 본섬, 사키시마先島 제도까지 널리 쓰였으며 "남쪽 섬(南島) 쟁기"라고 불렸습니다. 그럼 이 쟁기는 어떤 사정으로 생겼던 것일까?

남도 쟁기는 성에, 한마루, 자부지, 쟁기바닥의 네 부재로 구성된 사각틀 쟁기로서, 이것은 중국계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남도의 사람들이 중국에 나갔다면 보았을 쟁기가 <그림10B>의 강남 쟁기로 똑같은 쟁기가 가고시마현의 일부에서 사용되고 있었는데, 남도 쟁기와는 상당히 형태가 다릅니다. 중국 쟁기는 무지개 같이 구부러진 성에를 가지고 있는데 남도 쟁기는 비스듬히 상향한 곧은성에입니다. 상향한 곧은성에는 C그림처럼 소의 멍에를 겨냥한 각도로, 남도 쟁기의 제작자는 중국 쟁기의 실물 견본이 수중에 없이 막연한 이미지에 바탕해 재현 제작한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상향한 곧은쟁기를 소에게 끌게 하면 C그림 같이 쟁기 몸체는 앞으로 젖혀지게 되고, 자세를 바로잡기 위해 자부지를 앞으로 당겨야 하며, 그에 적응한 자부지가 ②의 앞으로 기운 자부지입니다. B그림의 강남 쟁기에서는 흙덩이를 오른쪽으로 넘기는 볏이 달려 있는데, 남도 쟁기에는 볏이 없습니다. 

⑥은 펜촉형 보습으로 중국 쟁기는 주물의 껍질이 붙은 삼각판이지만, 남도 쟁기는 단조품으로 모양도 다릅니다. 쟁기 제작제가 중국 보습의 견본을 보지 않고 대장간에서 두드렸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상을 종합하면, 남도에서는 소가 먼저 부려졌다. 그러던 중 "중국에서는 소로 논밭을 갈고 있으니 이것에 쟁기를 끌게 하자"라고 생각해, 어슴푸레한 기억에 기반하여 재현 제작한 쟁기가 이 남도 쟁기로서, 그것이 아마미오시마부터 오키나와 본섬과 사키시마 제도까지 퍼졌던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림10 가고시마 도쿠노지마의 사각틀 쟁기

 

 

카가와현香川県의 외다리바닥있는쟁기

<그림11A>는 카가와현 미토요군三豊郡 오노하라쵸大野原町(현 칸논지시観音寺市)에서 사용되던 쟁기로 호칭은 소괭이. 이 쟁기는 윗부분은 성에, 자부지, 한마루의 삼각틀로서 조선계 삼각틀 쟁기 그것입니다. 그런데 아랫부분에는 길이 93.7cm의 완전한 쟁기바닥이 붙어 있어, 이 쟁기바닥은 중국계 사각틀 쟁기의 기본적인 부품입니다. 즉 오노하라 쟁기는 C그림에서 보듯이 조선계 삼각틀 쟁기의 구조에 중국계 쟁기바닥을 붙여준 전형적인 혼혈형입니다. 중국계 사각틀 쟁기는 한마루와 자부지가 쟁기바닥과 접합되어 사각틀을 구성하고 있는데 반하여, 이 외다리바닥있는 쟁기가 가진 정보로부터 카가와현의 6-7세기 역사를 복원해 보겠습니다. 

5세기 말부터 6세기 무렵, 카가와현의 평야부에 조선반도에서 온 도래인이 정착했습니다. 야마토 정권 아래 조선반도로 출병했던 현지 호족들이 초빙한 것이겠죠. 그들은 소와 삼각틀바닥없는 쟁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미 말로 말괭이를 끌게 하던 현지 사람들은 처음 본 쟁기를 '소괭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200년 가까이 지난 7세기 후반, 타이카 개신 정부는 반전수수班田収授를 실행하기 위하여 관련 정책으로 중국계 사각틀 쟁기의 실물 모형=정부 모델 쟁기를 각지의 코오리노카미(이후의 군지)에게 보내 보급을 명했습니다. 정부 모델의 긴 쟁기바닥은 보기에도 안정감이 좋을 듯하여, 사람들은 손에 익은 삼각틀바닥없는 쟁기에 쟁기바닥을 붙였다. 혼혈형 외다리바닥있는 쟁기의 탄생입니다. 평야부의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한 헤이안 시대 무렵, 분가해 이주함에 따라 산간부의 개척이 왕성해졌습니다. 도쿠시마현, 에히메현과 접한 산간의 오노하라 마을에는 이 시기에 가지고 들어온 것이겠지요.

B그림의 코토히라쵸琴平町 쟁기도 같은 형태의 외다리바닥있는 쟁기로, 이쪽은 한마루가 철제 볼트인 개량형입니다.

 

그림11 카가와현 외다리바닥있는쟁기

   

 

사이타마현埼玉県과 도치키현今市市의 널판지 볏 부착 삼각틀 쟁기

<그림12A>의 사이타마현 가조시加須市의 쟁기는 전장 281cm인 장대한 몸체로, 구조를 보면 조선계 삼각틀이지만 쟁기날의 뒷면 부근은 길이 54cm의 쟁기바닥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조선계 삼각틀 쟁기에 쟁기바닥을 더한 혼혈형입니다. 또한 경운되는 흙덩이를 왼쪽으로 뒤집는 널판지 볏이 붙어 있는데, 이 목제 볏도 정부 모델 쟁기인 일목一木 볏의 각색으로 조선계 70%, 중국계 30%의 혼혈형입니다.

 

가조시 쟁기는 삼각틀 쟁기로 조선계이지만, 쟁기 몸체는 장대하며 그 원인을 D그림으로 보러 가겠습니다. 조선반도의 삼각틀바닥없는쟁기는 자부지가 서 있어 보습은 급한 각도로 지면에 닿아 있습니다. 이 조선반도 쟁기의 보습은 주조품으로 뒷면은 껍질로 되어 있어, 나무 부분인 자부지를 꽂아 쐐기로 고정하기 때문에 급한 각도로 지면에 닿아도 경운할 수 있습니다. 자부지가 서 있기에 쟁기 몸체는 짧은 쟁기가 됩니다. 짧은몸체 쟁기에 익숙한 도래인은 일본에 와서 보니 고도의 기술을 요하는 주조 보습이 없고, 단조 보습만 손에 넣을 수 없어서 당황했습니다. 단조 보습은 목요공 괭이처럼 나무 부분의 가장자리를 따라서 끼워넣기 때문에 급한 각도로 지면에 닿으면 떨어져나갑니다. 그래서 얕은 각도로 지면에 닿도록 한 결과, 쟁기 몸체가 길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긴몸체삼각틀 쟁기는 조선반도에는 없는 모양으로, 도래 제1세대의 노고가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림12B>의 도치키현 이마이치시今市市의 쟁기는 조선계 삼각틀 쟁기로 쟁기 몸체는 그리 길지 않지만 몸체가 누워 보습은 얕은 각도로 지면에 닿아 있으며, 도래 당시의 단조 보습에 맞춘 것입니다. 

A의 가조시 쟁기도 B의 이마이치시 쟁기도 현재는 C그림처럼 주조 보습이 붙어 있습니다. 이거슨 14-15세기 무렵에 주조꾼이 농촌을 영업하며 돌아다녀 주조 보습으로 교체된 것으로, 단조 보습의 모양이 남아서 큰 표지가 되었습니다. 중국과 조선반도의 주조 보습에는 큰 목덜미 선이 없습니다.  

 

그림12 사이타마현과 도치키현의 삼각틀바닥있는쟁기

 

 

 

군마현群馬県 다카사키시高崎市의 카이형甲斐型 쟁기

<그림13>의 AB 모두 다카사키시 카미나미에上並榎의 쟁기이고, 어느쪽이든 조선계 삼각틀 쟁기로 정부 모델인 사각틀긴바닥쟁기의 영향은 전혀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일회성인 정부 모델 쟁기의 배포가 끝난 뒤에 도래했기 때문이라 생각되며, 마지막 도래의 파도인 백제, 고구려 멸망에 따라 난민이 가지고 들어왔다고 생각됩니다.

다카사키시의 쟁기는 2대 모두 큼직하고, 키타큐슈의 안아 쥐고 서는 쟁기의 자부지 높이가 100cm 안팎인데 반하여 A쟁기의 자부지 높이는 128cm로 이상한 크기입니다. 사실 이것과 흡사한 쟁기가 C그림처럼 야마나시현에서 많이 보입니다. 유사점은 ①순수 조선계 삼각틀 쟁기이고, ②자부지의 높이가 120-130cm에 이른다는 점, ③성에와 자부지의 교차점의 약간 아래에 짧은 좌우 손잡이가 있는 점, ④자부지의 하부는 귀이개 모양 보습인 점 등으로부터 다카사키 쟁기 AB는 카이국에서 온 이주민이 가지고 들어온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야마나시현에서 이 큼직한 삼각틀 쟁기는 '부부 쟁기'라 부르며, 아내가 소 대신 어깨끈으로 끌고 남편은 자부지를 감싸안듯이 어깨에 걸치고 좌우 손잡이를 쥐고서 쟁기를 조종하면서 앞으로 기운 자세로 넘어질듯이 쟁기를 밀며 쟁기질했습니다. 남편이 자부지를 감싸안기 때문에 자부지는 길고 높아졌습니다. 이로부터 카이국에서의 개척은 당초 소와 말을 구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는 말로도 끌게 했지만, 큰 쟁기 몸체는 그대로 20세기까지 계승되었습니다. 

야마나시현에 분포된 중심은 남알프스 산록으로 고마군巨麻郡(고려군高麗郡)이라 불렀던 지역입니다. 고대에 고려라고 하면 고구려로서, 고구려 난민이 소와 말을 구하지 못한 와중에 개발한 것이 야마나시현의 큼직한 부부 쟁기입니다. 전국시대에 반농반무半農半武의 지방 토착 무사는 무장을 따라서 각지를 옮겨다니며 싸웠습니다. 다카사키시의 카이형 쟁기는 그러한 전국시대 무사가 이동한 흔적일지도 모릅니다. 

그림13 군마현 다카사키시의 카이형 쟁기

 

 

키타큐슈의 안아 쥐고 서는 쟁기와 그 전파

<그림14>는 안아 쥐고 서는 쟁기라 부르는 키타큐슈계의 쟁기이고, <그림13>의 카이형 쟁기와 똑같이 조선계 삼각틀 쟁기로 정부 모델인 사각형긴바닥쟁기의 영향은 전혀 볼 수 없는,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에 따라 난민이 가지고 왔다고 생각됩니다. A는 나가사키현의 쓰시마에서 사용되던 재래 쟁기로 작은 조선계 삼각틀 쟁기입니다. 이 삼각틀바닥없는쟁기는 후쿠오카 평야에도 널리 분포하고 있어 '안아 쥐고 서는 쟁기'라 불러 왔습니다. 지리적 위치로 미루어보면, 663년에 멸망한 백제의 난민이 가지고 왔다고 생각됩니다.

메이지 초기의 일본에서 소와 말 쟁기질의 보급율은 서고동저로, 도호쿠 지방에서는 소와 말 쟁기질을 행하지 않고 츄우부中部와 칸토우関東 지방에서도 소와 말 쟁기질의 보급율은 낮았으며, 또 쟁기를 쓰지 않는 습논도 많은 상황이었습니다. 후쿠오카현 독농가 하나시온리林遠里는 현지에서 사용해 왔던 안아 쥐고 서는 쟁기가 깊이갈이에 뛰어나다는 점 때문에 이를 보급해 근대 일본을 지탱하고자 사설 칸노우샤(勸農社)를 결성, 젊은이를 모아 말 쟁기질 교사를 육성하고 '마른논 말 쟁기질'이란 구호 아래 말 쟁기질 교사를 전구으로 파견해 쟁기질의 보급에 힘썼습니다. 안아 쥐고 서는 쟁기는 쟁기질이 없던 도호쿠 지방이나 보급율이 낮았던 츄우부와 칸토우 지방에서 환영받아 소와 말 쟁기질이 침투해 나아갔습니다. 

도쿄 농업대학에서는 이 시기에 동일본에 퍼졌던 안아 쥐고 서는 쟁기가 수집되어 있습니다. B는 아키타현 유리군由利郡의 것, C는 이바라키현茨城県 미토시水戸市, D는 니이가타현新潟県 사도군佐渡郡의 것입니다. 근대 일본을 짊어지고 각지로 향한 말 쟁기질 교사의 활동 흔적을 수집된 쟁기로 더듬어 볼 수 있다는 것이 도쿄 농대 수집품의 훌륭한 점입니다. 

D의 배경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안아 쥐고 서는 쟁기에는 긴 수평 막대가 좌우로 튀어나와 있고, 좌우의 손을 바꿔 쥐며 흙덩이를 좌우로 뒤집었습니다. 안아 쥐고 서는 쟁기는 미흡하지만 양손용 쟁기였습니다. 또한 안아 쥐고 서는 쟁기는 바닥없는쟁기의 대표처럼 이야기되지만, 짧은바닥 쟁기 유형도 있었던 점을 수집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림14 키타큐슈의 안아 쥐고 서는 쟁기와 그 전파

 

 

 

근대 짧은바닥쟁기

<그림15>에는 안아 쥐고 서는 쟁기를 대신해 근대 쟁기질의 주역이 된 근대 짧은바닥쟁기를 모아 보겠습니다. 큐슈에서는 고대 이래 바닥없이 안아 쥐고 서는 쟁기 외에 짧은바닥 쟁기 유형의 쟁기도 사용되어 왔습니다. 1900년 쿠마모토현 오쓰 스에지로大津末次郎가 짧은바닥 쟁기 유형의 재래 쟁기를 기반으로 D그림 같이 한마루를 철제 볼트로 만들고 나사를 조여 깊이갈이와 얕이갈이의 조절이 가능하도록 하며, 성에와 자부지의 접합부는 철제 접합부로 만들어 나사로 쟁기질 너비를 조절할 수 있도록 한 근대 짧은바닥 쟁기를 개발, 특허를 받았습니다. 

볼트 한마루의 나사를 조이면 성에 끝의 봇줄걸이가 내려가고, 소와 말이 끌면 성에의 끝은 끌어올려져 그와 연동해 보습이 올라가 얕이갈이하게 된다. 그 반대로 나사를 풀면 깊이갈이하게 됩니다. 철제 접합부의 나사를 움직여 성에의 근원을 중심위치로부터 벗어나게 하면, 성에의 끝이 좌우로 틀어지기 때문에 소와 말이 끌면 보습은 약간 좌우로 벗어나게 되어 쟁기질 너비가 넓어집니다. 

오쓰의 특허는 A유형의 왼쪽 뒤집기 전용 고정형 쟁기였는데, 이듬해에는 나가노현의 마츠야마 하라조松山原造가 지렛대를 움직여 좌우 어느쪽으로도 뒤집을 수 있는 B와 같은 전환형 쟁기의 특허를 받았습니다. 근대 짧은바닥쟁기는 안아 쥐고 서는 쟁기를 대신하는 근대 쟁기가 되어, 다이쇼大正와 쇼와昭和 시기에 서서히 안아 쥐고 서는 쟁기나 재래 쟁기를 대신해 나아갔습니다. 

E의 사진에서 보면, 고정형 쟁기에서는 쟁기꾼이 왼손으로 자부지 상단을 쥐고 오른손으로 비스듬한 손잡이를 아래에서 잡고 들어올리는 듯이 하여 쟁기 몸체를 왼쪽으로 기울이면서 주행해 흙덩이를 왼쪽으로 뒤집어 나아갑니다. 전환형 쟁기에서는 안아 쥐고 서는 쟁기로부터 계승한 수평 손잡이가 있어 쟁기꾼은 지렛대로 볏을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기울이고, 자부지 상단과 수평 손잡이를 쥐고서 자부지를 기울여 좌우 어느쪽으로도 뒤집을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C는 깊이갈이를 목표로 한 3단 갈이 쟁기. 일반적으로는 2단 갈이 쟁기이지만 이것은 3단으로, 근대 짧은바닥 쟁기의 궁극적인 형태입니다. 

 

그림15 근대 짧은바닥쟁기

 

 

● 개량 재래 쟁기

메이지 말기에 개발되어 다이쇼, 쇼와 시기에 보급된 근대 짧은바닥 쟁기는 재래 쟁기에 비해 작고 회전 반경이 작으며 다소 경운 깊이가 깊어지는 이점이 있는 반면, 안정성에서는 재래 쟁기 특히 사각틀긴바닥쟁기에는 미치지 못하고 맥류의 두둑짓기도 재래 긴바닥쟁기처럼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없었습니다. 학계에서는 근대 짧은바닥쟁기의 등장으로 재래 쟁기가 일제히 모습을 감추었던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경운기가 출현할 때까지 근대 짧은바닥쟁기와 재래 쟁기를 구별해 사용하던 지역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재래 쟁기에는 근대 짧은바닥쟁기에 없는 장점도 있었기에, 근대 짧은바닥쟁기의 장단을 취하는 형태로 개량된 개량 재래 쟁기가 각지에서 제작되었습니다.

<그림16>의 A는 도야마현에서 제작된 미치즈카三塚 쟁기로, 보습을 앞뒤 반대로 장착하여 볏으로 만든 건 안아 쥐고 서는 쟁기의 아이디어입니다. B는 후쿠이현에서 사용되던 쟁기로, 성에를 굽은성에로 바꾸기만 한 미치즈카 쟁기의 모방 쟁기. 평판이 좋았던 미치즈카 쟁기의 복제 쟁기입니다.

D그림에서는 고삐걸이를 비교해 보겠습니다. 호쿠리쿠北陸 지방은 말쟁기 지대로 에도시대부터 말에게 재갈을 물리고 2개의 고삐로 조종했습니다. 고삐가 늘어지면 말의 다리에 걸려 위험하기에 한마루를 꿰는 나무못을 직사각형 널의 고삐걸이로 삼고, 왼쪽 고삐는 구멍을 통과시키고 오른쪽 고삐는 벗어나는 걸 방지하는 갈고리가 달린 가로대로 받치고 있었는데, 귀여운 물고기 모양도 나타났습니다. 물고기 모양은 이로리囲炉裏의 냄비 갈고리에 자주 사용되는 디자인으로, B의 후쿠이 쟁기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C는 다카사키의 개량 재래 쟁기로 수수한 쟁기이지만 판자 볏으로 바꾸어 철제 곡면의 볏을 일으켜세운 점과 2.5m를 넘었던 재래 쟁기의 전장을 1.7m 안파의 크기로 줄인 점이 개량점이겠지요.

이외에도 효고현兵庫県 이타미시伊丹市에는 재래 긴바닥쟁기에 철제 접합부를 붙인 개량 긴바닥쟁기가 있고, 시가현 고토湖東의 좀 작은 가을갈이 쟁기 등 각지에서 개량 쟁기가 제작되어 현지의 경제를 뒷받침했습니다. 

 

그림16 개량 재래 쟁기

 

 

 

8. 민간 도구는 역사자료

지금까지 재래 쟁기와 근대 짧은바닥쟁기, 개량 재래 쟁기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도쿄 농업대학 수집자료의 훌륭함은 전국 각지의 쟁기를 모은 것이기에 도쿄 농업대학 자료만으로도 고대부터 근대까지 일본 각지의 쟁기질 역사, 농업기술사, 나아가서는 지역 고대사나 전국시대의 흔적을 더듬어 볼 수 있습니다. 

재래 쟁기로부터 지역마다의 개성 있는 고대사를 복원할 수 있었던 건 "민간 도구를 통한 역사학"입니다. 지금까지 일본의 농기구가 각지에서 모양이 다른 건 그 토지의 지형이나 토질에 맞추어 개량을 거듭한 결과라는 "지형, 토질 결정론"이 믿어져 왔습니다. 그것이 실수라는 걸 깨달은 각지의 자료관 수장고를 조사해 역학적으로 불합리한 쟁기를 개량하지도 않고 사용해 왔다는 사실을 보고나서입니다. 왜 개량하지 않은 걸까, 그것은 전통적 농촌사회에서는 농기구가 망가지면 동일한 모양으로 갱신한다는 원리가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민간 도구 유전자의 발견으로 이어졌습니다.

전국적인 재래 쟁기 조사로부터 타이카 개신 정부의 긴바닥쟁기 도입 정책을 복원할 수 있었습니다. 타이카 개신 정부는 견당사에게 입수한 쟁기를 바탕으로 중국계 사각틀 정부 모델 쟁기를 만들어 각지의 코오리노카미(이후의 군지)에게 보내서 보급을 도모했습니다. 그 때문에 쟁기질의 처녀지에서는 정부 모델 쟁기가 계승되어 도래인이 조선계 삼각틀 쟁기를 쓰고 있던 지역에서는 혼혈형이 탄생하고, 정책 시행 뒤에 도래한 백제와 고구려 난민이 정착한 곳에서는 정부 모델의 영향을 받지 않아서 조선계 삼각틀 쟁기가 그대로 남았습니다. 민간 도구는 지금까지 유형민속문화재로 취급되어 조부모 시대의 삶을 전하는 민속자료로 여겨져 왔는데, "민간 도구를 통한 역사학"에서 재래 쟁기의 형태로부터 시정촌별 개성 있는 고대사가 복원될 수 있었습니다. 민간 도구는 역사자료입니다. 지역 유산으로서 모두의 손으로 지켜 나아갑시다. 

 

 

 

코우노 미치아키河野通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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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중국은 세계 최대의 밀 소비자로서, 국수와 만두, 빵 및 여러 반죽을 만드는 데 밀을 이용한다. 하지만 늘 그랬던 건 아니다.

밀은 신석기 시대가 끝날 무렵인 약 4600년 전 중국 북부 지역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나의 연구에 의하면그 당시에는 맛이 별로 없었다. 초기에 밀은 기아를 막기 위해 재배한 작물로서, 요리의 기쁨보단 절망의 작물로 취급되었을 것이다. 

중국 북부의 최초 농민들은 주로 조를 재배했다. 가뭄에 강한 이 작은 씨앗의 곡물은 1만1500년 전부터 재배되기 시작해 오늘날 동아시아에서 주로 재배되며, 미국에선 새의 모이로 이용되었다. 역사 기록과 초기 요리법에 기반하여, 연구자들은 수천 년 뒤인 당나라(618-907년) 시대에 밀이 조를 대체하여 이 지역의 주요 작물이 되었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이러한 변화가 왜, 어떻게 발생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오늘날 밀의 장점은 명백하다. 요리의 다양성 말고도, 밀은 더 빨리 자라며 조보다 꾸준히 더 많은 수확량을 올린다. 하지만 고대의 농민들은 처음부터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다. 역사 기록에서 보면, 적어도 당나라 때까지 밀은 일반적으로 조와 똑같은 방식인 죽으로 소비되었다. 그 곡물은 찌거나 통밀로 조리되어 거칠고 입맛에 안 맞는 요리로 만들어졌다. 여러 초기의 저술가들이 밀죽은 "야만인과 농민을 위한" 음식이라고 언급했는데, 아마 극단적인 시기에만 소비되었을 것이다. 


중국 북부의 농민들은 왜 밀을 재배하기 시작했을까? 

그 답을 추적하기 위하여, 나는 2014년 박사 학위논문을 쓰면서 중국 북부의 여러 지역에서 이 작물을 재배하기 시작했을 무렵의 여러 정보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고고학자는 발굴현장에서 곡물의 유물을 찾아 이를 추론했는데, 얼마나 많이 먹었는지가 아니라 실제로 소비할 수 있었는지만을 밝혀냈다. 최근 연구자들은 이를 해결하는 더 직접적인 방법을 알아냈다.인간 유골의 동위원소를 조사하는 것이다. (동위원소는 탄소처럼 원자량이 약간 다른 요소이다. 어떤 동위원소는 방사성이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붕괴되지만, 다른 동위원소는 안정적이다.) 뼈부터 치아의 발견되는 모든 탄소와 질소의 여러 안정된 동위원소의 비율은 고대인의 식단에 대한  강력한 정보를 전달한다.  

조와 밀 같은 다양한 식물은 서로 다른 화학 경로를 이용해 자라기에, 토양에서 독특한 비율의 안정적인 탄소 동위원소를 포함하고 있다. (이 차이점은 이른바 C3와 C4 식물로 구별된다.) 우리가 먹는 것이기에, 그것들의 특정한 비율의 탄소가 인간의 유골에 통합되어 몇 세기가 지난 뒤에도 검파될 수 있다.

 특히 조는 중국 북부에서 재배된 유일한 주요 C4 작물이라서, 사람들이 주로 조를 먹다가 C3 작물인 밀 같은 다른 걸로 주식을 바꾸면 상대적으로 쉽게 알아낼 수 있다. 

발표된 보고서들을 조사하여 나는 약 9000년 전인 신석기 시대 중반부터 서기 220년 동한 왕조가 망한 뒤까지 약 1200개의 데이터 포인트를 수집했다. 장소는 북서부인 간쑤성부터 동부인 산둥성에 이르는 현대의 8개의 성에 흩어져 있었다.  

나와 동료들은 이 거대한 데이터 세트에서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다. 이들 광대한 연구 지역에 걸쳐 있는 집단이 모두 동시에 독점적이던 조 기반의 식단에서 더 혼합된 식단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는 매우 놀라운 이야기이다. 이처럼 광대한 지리적 구역에서 요리법이 갑자기, 그리고 거의 동시에 바뀌려면 단순히 새로운 음식을 갈망했다는 것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다. 


이 영상은 고대 세계의 가장 중요한 작물화된 곡식이 7000년에서 3500년 전 어떤 경로로 확산되었는지 보여준다. Javier Ventura/Washington University


한 가지 가능한 설명은 약 4200년 전 발생했던 완신세 사건 3이라 부르는 주요한 기후변화이다. 당시 대륙들의 기후는 춥고 건조해졌다. 예를 들어 지중해 동부와 서아시아 전역에 걸쳐서 강우량이 1/3에서 절반으로 감소하여 사해의 수위가 45m 감소했다. 이러한 "대가뭄"이 전 세계 작물 생산에 혼란을 야기해 메소포타미아부터 인더스 계곡까지 정치적 격변을 불러왔고, 중국의 중앙 평원에서는 신석기 문화가 붕괴되었다. 

이에 더해, 신석기 말기는 전 세계적으로 인구가 빠르게 증가한 시기였다. 인구가 계속 증가하고 작물 수확량이 변동됨에 따라, 중국 북부의 신석기 농민들은 어려움에 빠졌을 것이라 가정하는 건 합리적이다.

밀은 실제로는 조보다 더 많은 물을 필요로 하기에 역사의 건조한 시기에는 좋지 않은 선택으로 보인다. 하지만 밀은 조와 다른 계절에 교대로 파종할 수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밀은 조를 수확한 뒤에 파종할 수있다. 그해에 조 농사가 망해도 농민들은 아직 구황을 위해 밀을 재배할 수 있었다. 이것이 중국 북부의 사람들이 밀을 재배하기 시작한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이 이야기에는 많은 교훈이 있다. 기후변화는 극단적 날씨부터 해안선 변화까지 항상 예기치 않은 사회의 변화를 불러왔다. 이 사례에서, 중국 북부에서 일어난 완신세 사건 3의 여파는 결국 맛이었다. 오늘날 중국 북부의 사람들은 국수와 만두, 빵 등을 즐긴다. 하지만 그리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늘 그런 건 아니다. 

단 하나의 작물에만 주로 의존하는 대규모 단작은 늘 끔찍한 발상이었다. 예를 들어, 아일랜드의 감자 대기근을 생각해보라. 19세기 중반 감자의 치명적 역병이 발생해, 감자에만 의존하던 이 나라에서 약 100만 명이 사망했다. 



1840년대 감자 기근 시기의 아일랜드처럼 먹을거리 공급 문제는 기아와 폭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 British Library/Flickr


그러나 과학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미국과 세계 여러 지역의 많은 대규모 농장들은 그들이 의존하는 작물의 숫자가 위험할 정도로 제한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러 식물 종 -아마 수십에서 수백만 종- 을 식용할 수 있지만, 오늘날에는 약 200종만 재배되며 단 3가지(옥수수, 밀, 벼)가 인류의 열량 대부분을 구성한다. 유엔 식량농업기구에 의하면, 100년 전에 재배되던 작물의 75%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 일부 지역에서는 조를 포함한 토종 작물을 되살려 지역의 농업을 더 지속가능하게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고대 중국에서 농민들은 더 다양한 농업 체계로 나아가고자 했으며, 이것이 파괴적이었던 사건을 탐색하는 데 도움을 주게 되었다. 고고학과 역사 자료에 의하면, 밀과 벼, 콩, 귀리, 메밀 및 보리도 재배했는데 밀이 더 선호되었다. 

한 가지 완벽한 작물은 없다. 다양성을 높이는 일이 기후가 요동치는 시기에 살아남기 위한 열쇠이다. 우리는 여전히 인위적인 기후변화에 맞서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한편, 실용적으로 불확실한 미래에 대비하는 게 현명하다. 기후변화로 인한 장래의 먹을거리 스트레스를 막기 위하여, 더 많은 농민들이 편안한곳을 벗어나 요리의 기반을 확장해 갈 수 있는 좋은 시기이다. 


https://www.sapiens.org/archaeology/chinese-farm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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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도 우렁이를 이용한 벼농사가 실시되고 있습니다.

 

https://m.yna.co.kr/view/AKR201911141711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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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phne Miller 씨가 2장의 팬티를 들고 있다. 왼쪽의 것은 오래 사용한 정원의 통로에 묻었다. 오른쪽의 것은 미생물이 풍부한 퍼머컬쳐 정원의 토양에 묻었다. 미생물이 팬티의 섬유질을 부수었는데, 비옥하지 않은 흙은 그러지 못했다.  (사진: Philip B Stark)



아칸소 대학의 토양학자 Bill Robertson 씨가 농지가 건강한지 확인하려 할 때, 그는 첨단기계장치에 손을 뻗지 않았다. 그는 100% 면으로 된 남자 팬티 2장을 쥐었다. 

“난 그걸 ‘팬티 파묻기’ 실험이라 부르죠.” 라며 허리띠가 보이게 5-10cm 깊이로 묻고 5주 뒤에 캐내는 것이라 설명한다. 

“토양 생물 —박테리아, 균류, 선충류— 들이 섬유소를 먹는데, 그 팬티들은 기본적으로 섬유소입니다.”라고 Robertson 씨는 설명했다. “그 토양이 살아 있다면, 5주 뒤에 (속옷들은) 젖은 신문지처럼 갈갈이 떨어져야 합니다.” 반면, 토양이 비옥하지 않으면 팬티가 더러워지긴 하지만 훼손되지는 않는다. 

Robertson 씨는 최근까지도 대부분의 농업 전문가들은 토양을 식물과 무기질을 보유하기 위한 모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우리는 미생물 군집을 구성하는 박테리아와 균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한 똑같은 기술들 덕에 토양학 분야에서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보여주는 바는 그 속옷을 우적우적 먹는 미생물들이 토양침식을 방지하고, 물을 보존하며, 환경 오염물질을 분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기후변화와 맞서는 데 도움이 되도록 대기의 탄소를 포획하고 저장한다. 

이것이 모두 토양 미생물이 하는 일이라면, 그들은 분명 이 지구에서 우리의 복지와 생존의 핵심이 될 것이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의하면, 토양 미생물 군집은 우리의 세포와 직접적으로 소통하고, 우리 먹을거리의 양분 함량을 높여서 우리의 건강에 더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고 한다.  

샌디에고의 캘리포니아 대학 미생물학자 Rob Knight 씨는 “오랫동안 (과학자들은) 토양에 우리를 죽이려 하는 것들이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라고 한다. 그는 일반적으로 토양에 사는 미생물과 우리 몸에 서식하는 미생물을 포함한 미생물 군집을 연구하고 있다.  그는 파상풍을 포함해 토양이 위험한 장소라는 증거로 제시되곤 하는 여러 질병을 유발하는 토양 서식자들을 언급했다. 


하지만 Knight 씨에 의하면, 최근 과학자들은  “전쟁 비유”를 폐기하기 시작했다.  그 대신 토양의 미생물이 우리를 보호할 수 있는 방식을 탐구하고 있다.  

그는 1970년대 우간다의 키오가 호숫가에서 처음 발견된 양성의 토양 서식 박테리아인 마이코박테리움 박케Mycobacterium vaccae의 예를 들었다. 콜로라도 대학 볼더 캠퍼스의 연구진은 열로 죽인 마이코박테리움 박케가 실험용 쥐에 주입되면 면역 조절 및 기분 조절의 특성을 갖는다는 걸 관찰했다. 이 연구는 아직 인간에게 적용되지 않았지만, 마이코박테리움 박케가 토양과 자연 환경에 사는 다른 미생물들과 함께 인간과 공진화해 우리의 세포와 소통할 힘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올바른 미생물'을 찾아서 


애리조나 대학의 세포와 분자 의학 교수 Donata Vercelli 씨도 이러한 고대의 미생물들이어떻게 우리의 건강에 영향을 미치는지 연구한다. 


그녀는 독일의 농장의 아이들이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알러지와 천식 비율이 낮다는사실을 알게 된 약 10년 전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이 현상의 원인을 알아내고자 다국적 연구진에 합류했다. 

Vercelli  씨는 “우리가 발견한 건 이러한 전통적인 농업 환경에서 생활한다는 사실은 미생물이 매우 풍부한 곳 —올바른 미생물이 우리의 면역계와 함께 진화하고 살아가는— 에 산다는 걸 의미한다는 점입니다.”라고 한다. 

그녀는 토양과 농장의 동물들에서 발견된 유기체들의 배치가 아이의 일생 동안 알러지 항원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설명했다. 이러한 일은 아마 자궁에서부터 시작되어 처음 몇 년 동안 계속 면역계를 형성할 것이다.  

토양 미생물은 우리의 감정과 면역 반응을 조절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먹을거리의 양분 함량을 조정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코넬 대학 식물학자 Jenny Kao-Kniffin 씨는 “몇 백 년 동안 사람들은 '좋은 흙'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죠.”라고 한다. 그녀는 토양 미생물과 식물의 뿌리 사이에 발생하는 지하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데, 그녀는 그 구역을 피토바이옴phytobiome이라 지칭한다.

Kao-Kniffin 씨는 식물이 어떻게 주변의 미생물을 부양하기 위해 화합물을 분비하고, 미생물은 식물이 필수 양분(질소 등)을 포획하고 식물영양소(phytonutrients) 또는 항산화제라고 부르는 일련의 화학물질을 제조할 수 있게 하는지 설명하면서 “이것이 영양학의 차세대 분야가 될 수 있어요.”라고 한다.  

이런 화학물질은 해충 및 기타 스트레스 요인으로부터 식물을 보호한다. 또한 과일과 채소에 빛깔과 향 및 독특한 맛을 갖게 한다. 연구에 의하면, 이러한 동일한 화학물질이 면역계를 자국하고 호르몬을 조절해 인간의 암 세포가 성장하는 걸 늦추어 우리에게 직접적인 이익이 된다고 한다. 


Kao-Kniffin 씨가 가장 최근에 발견한 건 다양한 미생물 군집이 있는 토양은 식물의 성장을 촉진하는 반면, 균일한 미생물로 구성된 토양은 그 성장을 억제한다는 사실이다. 

Robert Beelman 씨는 자신의 경력 대부분 동안 식물의 항산화 성분을 정량화하고, 이런 양분이 어떻게 우리의 세포에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하는 연구에 집중했다.  하지만 펜실베니아 주립대학의 식품학 명예교수인 Beelman 씨는 최근 토양까지 포함되도록 자신의 연구를 확장함으로써 영양 연구자로서는 특이한 단계를 밟고 있다. 

Beelman 씨는 “우린 모두 건강한 토양과 건강한 사람이 똑같다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우린 여전히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이 아이디어를 조사하기 위해선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겁니다.”라고 한다.  

“난 궁금했어요.”라고 덧붙인다. “현대의 농법이 우리 먹을거리에 있는 (영양소의) 양에 누가 될 정도로 토양에 있는 균류와 박테리아 개체군을 망치고 있는 걸까?”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Beelman 씨는 항산화제의 하나인  l-에르고티오네인ergothioneine에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이를 “에르고Ergo”라 부른다. 

이것은 토양 균류와 특정한 토양 매개 박테리아에 의해서만 생성되기에 흥미로운 영양소이다. 한편, 에르고가 인간에게 중요한 영양소라는 몇 가지 증거가 있다. 에르고가 결핍되면 염증과 조기 노화를 유발할 수 있다. 균류의 열매인 버섯은 지금까지 최고의 에르고 공급원인데, 귀리를 포함한 여러 식물에서도 발견된다. 


경운으로 생기는 골칫거리


Beelman 씨는 펜실베니아 커츠 타운에 있는 농업 연구센터인 로데일 연구소와 손을 잡고, 농지부터 식탁까지 에르고를 추적했다. 먼저, 그들은 여러 밭에다 귀리를 심고, 각각의 밭은 여러 실험적인 농법으로 관리했다. 그런 다음 곡물을 수확해 Beelman 씨의 실험실로 보내 에르고의 수준을 측정했다. 


“경운이 가장 큰 차이를 만들었습니다.”라고 Beelman 씨는 강조한다.  경운은 본질적으로 토양을 뒤집지 않는 쟁기질이다. 수천 년 동안 농민들은 잡초를 제거하고, 이전 작물의잔여물을 묻으며, 파종할 땅을 마련하느라 경운을 해 왔다. 하지만 최신 연구에 의하면, 토양의 최상층을 교란시키면 미생물 개체군이 파괴되고 토양침식에 기여한다.  

실제로, "무경운"으로 재배한 귀리는 경운한 토양에서 재배한 것보다 에르고가 약 25% 더 많았고, 무경운 토양에도 에르고가 더 많았다.  Beelman 씨는 경운이 박테리아와 균류의 연결망을 훼방하기 때문이라 믿는다. 

로데일의 수석 과학자 Andrew Smith 씨는 에르고 연구가 겉흙을 보호하는 농법이 토양 미생물의 다양성과 밀도를 증가시키며 항상화제의 농도가 높은 식물을 생산하게 한다는 다른 연구결과와도 일치한다고 이야기한다. 


“일리가 있죠.”라고 덧붙이며,  식물이 미생물과 함께 이러한 화합물을 생성한다는 Kao-Kniffin 씨의 연구결과를 상기시킨다. 

“건강”과 토양 미생물을 연결시키는 유망한 연구에 반응하여, 예상대로 토양에서 영감을 얻은 프로바이오틱스가 시장에넘쳐나고 있다. 이들 제품은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성장과 발달을 향상시킬 수 있는 토양의 유기체를 함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Vercelli 씨는 인간의 건강을 위한 제품을 선전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고 믿는다. 우린 이 무척추동물들이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떻게 환경과 상호작용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한 단계이다. 게다가 그녀는 교향곡에서 다른 연주자들보다 더 중요한 건지 궁금하다. 

“이런 것이나 저런 것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개별 미생물을 찾아내려 합니다.”고 그녀는 말한다.  “난 이게 현실적인 방법이라 생각하지는 않아요. 미생물은 군집들과 함께 활동하며 작용합니다.”

식물 건강이란 영역에서, Kao-Kniffin 씨도 특정 미생물의 영향보다 군집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업계가 식물 특성에 대한 단일한 미생물의 효과를 분리해 조사하는 데 중점을 두는데,  여러 참가자가 참여하는 복잡한 상호작용에 더 초점을 맞추는 쪽으로 대체될 것입니다. ”

그에 따라, Knight 씨는 고대의 토양을 저장해 놓으려  —고대의 씨앗을 저장하듯이— 애쓰고 있다. 이러한 미생물들의 조합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더 잘 이해할 수있는 미래의 어느날을 위해 보호하려는 것이다. 

그는 그동안 “토양에 나쁜 농법을 멈추고, 겉흙을 보존하며, 무척추동물의 생물다양성을 보전한다고 알려진 모든 걸 시작합시다.”라고 한다. 

Knight 씨는 Smith 씨가로데일 연구소에서 연구하고 있는 “유기농”이라 표시된 농법인 토양 보존형 농법을 목록화했는데, 더 정확하게는  “재생형(regenerative)” 또는 “유기농 너머(beyond organic)”라고 표현되어야 한다. 유기농에 대한 농무부의 정의(항생제, 합성 살충제, 제초제를 쓰지 않음)를 준수하는 데다가 작물 돌려짓기와 동물의 방목 및 덮개작물 -휴한기에 토양을 덮도록 재배- 을 통한 토양 비옥화 및 퇴비, 물 보존, 경운 최소화까지 포함하기 때문이다. 

Robertson 씨는 “토양의 건강은 공중 보건입니다.”라고 적확하게 요약한다. 

그는 소비자와 정책입안자들이 토양 보존형 농법을 지원하고, 농민들은 이러한 관행을 채택하길 바란다. 그는 토양 건강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개선의 여지가 많다고 한다.  (예를 들어, 내 고향 캘리포니아에서는 4% 미만의 농지만 덮개작물과 함께 관리된다.)

“변화를 주려고 할 때, 미주리 출신인 우리 대부분은 '나한테 보여줘야 한다'고 한다”며 Robertson 씨는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때 “팬티 파묻기” 실험이 시작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의 생물들이 몇 주 안에 팬티를 분해한다는 걸 보게 되면 아마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영감을 얻을 것이다. 



https://www.washingtonpost.com/science/uncovering-how-microbes-in-the-soil-influence-our-health-and-our-food/2019/09/27/81634f54-a4ba-11e9-bd56-eac6bb02d01d_story.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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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질중에 세계에서 유일하게 줄어들지 않고 어디에서나 손쉽게 사용 가 능한 천연자원이다. 또한 75여종 이상의 무기성분들이 함유되어 있어 작물이 필요로 하는 각종 양분 공급은 물론 병해충 방제에도 효과를 가지고 있어 친환경 농산물 생산에 유용한 유기농자재중의 하 나이다. 그러나 바닷물은 염분 함량이 높아 고농도로 사용하면 토양에 염류가 집적되고, 작물에 피해 가 발생될 수 있으므로 사용에 주의가 요구된다. 따라서 바닷물을 올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작물별 안전사용농도와 효과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유기농기술지 10호 - 바닷물의 농업적 활용기술.pdf



유기농기술지 10호 - 바닷물의 농업적 활용기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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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바람들이 농장에서 농사짓던 시절, 안철환 선생님께 ‘헛골’ 농사법이란 말을 처음 배웠습니다. 헛골, 다시 말해 ‘가짜 골’에다 씨앗을 심는 농사법이란 뜻입니다.

왜 '가짜 골(헛골)'일까요? 처음에는 두둑 위에다 골을 탄 다음 거기에 씨앗을 심기에 골처럼 보이지만, 나중에는 사이갈이 김매기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북주기를 통해 예전과는 다른 새로운 두둑으로 변모하기에 가짜 골이라 합니다. <임원경제지>로 유명한 조선 후기의 서유구 선생이 조선에 더 널리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견종법畎種法이 이와 같은 방식입니다.


 

<그림 서유구 선생이 제시한 두둑 만드는 방법. 정명현, 2012, <조선시대 견종법 보급론의 확대>, 한국농업사학회, 11권2호에서.>

 

이 농법은 이후 일제강점기 다카하시 노보루란 농학자의 조사 자료에도 자주 등장할 정도로 널리 퍼졌던 농법입니다. 그런데 이런 방식이 지금은 거의 사라져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지요. 시대의 변화와 함께 농법도 변한 겁니다.

각설하고, 먼저 이 헛골 농법의 장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봄 가뭄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1. 여름의 강한 비바람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된다.

 

    1. 작물의 수확량을 증가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

 

    1. 노동력 절감에 도움이 된다.크게 이렇게 네 가지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왜 그럴까요? 먼저, 골을 타서 씨앗을 심기에 파종한 곳이 주변부보다 움푹하게 밑에 있게 됩니다. 그런데 한국의 봄철은 바람이 강하게 부는 시기이죠. 바람이 토양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요? 바로 수분을 날려 버리게 됩니다. 그러니 씨앗은 바람의 영향을 덜 받아서 수분 상실에서 보호되고, 또 아침저녁으로 맺히는 이슬 등으로 수분을 보충할 수 있기도 하여 찔레꽃 필 무렵이면 찾아오는 봄 가뭄의 부족한 강우량에도 싹이 잘 터서 자라는 이점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그렇게 하여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점점 비바람이 거세어지게 됩니다. 그럴 때 사이갈이 김매기 작업을 하며 작물에 북을 준 흙무더기로 보호를 받아, 그러한 조건에서도 작물이 잘 버티며 성장하게 되지요. 여기서 한 가지 더 재미난 사실은, 작물에 북을 주면 새로 흙에 묻힌 곳에서 막뿌리가 나오는 작물들이 있습니다. 모든 작물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헛골 농법으로 재배하는 작물 가운데 그런 게 많지요. 이 막뿌리가 흙에 있는 양분과 수분을 흡수하는 역할을 수행해, 작물이 더 잘 성장하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북을 주면서 잡초까지 잡는 건 이 농법의 덤입니다.

마지막으로, 고랑과 두둑의 풀을 잡기 위하여 북을 주면서 흙의 모세관을 끊어져 뜨거워지는 여름 날씨에도 지표면에서 수분의 증발이 덜 되도록 도와 작물이 충분히 수분을 흡수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합니다. 잡초와의 경쟁도 줄어들기에 작물의 성장에 더 이로운 환경이 조성되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효과를 가져오는 작업을 북주기라는 단 하나의 작업으로 해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작업을 통해 김매기+수분 확보+막뿌리의 발달+작물의 성장+수확량 증가 등의 효과가 나타나게 됩니다.


 

<그림 멕시코의 전통 농법에서 옥수수를 재배할 때 활용하는 헛골 농법. 바람이 강한 지역이라 옥수수가 쓰러지는 걸 줄이기 위해 이와 같은 농법이 발달했다고 한다. 스티븐 글리스만, <농생태학>, 2015, 86쪽에서>

 

그런데 이렇게 유용한 농법이 왜 사라지게 되었을까요? 앞서 언급했듯이, 시대가 변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무엇보다 새로운 농자재가 도입된 영향이 가장 클 것 같습니다. 바로 한국의 농업에 백색혁명을 일으켰다고 평가되는 농업용 비닐 말이지요. 비닐을 덮으면, 작물이 자라고 있는 곳의 흙은 더 이상 손을 댈 필요도 없고 손을 대기도 힘듭니다. 그래서 비닐을 쓰는 곳에선 처음부터 높은 두둑을 지어서 비닐을 덮고 아예 수확할 때까지 그대로 농사가 끝날 때까지 가는 걸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작물이 자라고 있는 중간에 비닐을 벗겨내는 일은 거의 없지요. 물론 비닐이 가져온 효과는 엄청납니다. 괜히 백색혁명이라 부르는 게 아니지요. 하지만 자연의 현상을 이용해 농사에 여러 이로운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점을 따져본다면 헛골 농법이 여전히 장점이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작은 규모로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안성맞춤인 농법이 아닐까 합니다. 주말농장이 우후죽순 생기던 시절이 떠오릅니다. 그 작은 텃밭을 분양받아 다들 검은 비닐을 두둑에 덮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5평, 10평 정도면 한 30분 쪼물락거리면 금방 풀을 잡을 수 있는 규모인데 말이죠. 비닐 없이도 재미나게 잘 농사지을 수 있는 방법을 몰라서 그랬을까요? 어떤 방식을 택하느냐, 그 선택은 우리의 몫일 겁니다.

 

[농사잡록]은 김석기 선생님의 연재코너입니다. 강희맹 선생의 [금양잡록]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농사와 관련된 잡다한 기록'이란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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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먹는 것은 우리의 건강만이 아니라, 지구 자체에도 해를 끼칠 수 있다. 해마다 인간이 생성하는 온실가스 배출의 약 1/4은 우리가 세계를 먹여살리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 대부분은 소가 방출하는 메탄, 화학비료의 질소산화물, 작물의 재배나 가축의 사육을 위한 산림 파괴 등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가스는 지구의 대기권에 열을 가두어 놓게 한다. 온난화된 세계에서 홍수나 가뭄 같은 극한의 기상이 빈번해지고 심해져, 작물을 파괴하고 농사철을 방해한다. 그 결과 기후위기는 이미 먹을거리 공급을 불안정하게 만들어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농업의 과제는 광대하며, 세계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늘어날 것이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의  새로운 기후와 토지에 대한 특별보고서는 세계의 토지 이용, 농업 및 인간 식단의 급격한 변화 없이는 지구의 온도 상승을  1.5°C 미만으로 유지하려는 목표를 지닌 온실가스 배출 억제 노력은 실패할 것이라 경고한다.

환경이나 복지의 다른 측면을 해치지 않으며 영양가 있는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먹을거리 체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하지만 생물다양성 상실과 오염을 반전시키면서 수십억의 사람들을 부양할 충분한 먹을거리를 생산할 수 있을까

여기에 고고학자와 인류학자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World Archaeology에 실린최근 논문은 과거의 농업 체계를 탐구하여 그것이 오늘의 농업을 더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남아메리카의 운하와 옥수수

세계에는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방식을 실험한 오랜 역사를 지닌 사회들이 있다. 이러한 과거의 성공과 실패는 인간이농업을 통해 어떻게 지역의 환경을 변형시켰으며, 수천 년 동안 토양의 특성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관점을 제시한다. 

고대의 농법이 늘 자연과 균형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 초기의 먹을거리 재배자들이 과도한 방목이나 관개를 잘못 관리해 토양 염분을 높여 자신의 환경을 손상시켰다는  증거들이 있다. 하지만 과거의 먹을거리 재배 체계가 토양의 질을 개선하고, 작물의 수확량을 증가시키며, 홍수와 가뭄으로부터 작물을 보호한 사례도 많다. 

한 사례가 잉카 이전의 남아메리카에서 기원하여, 기원전 300년-기원후 1400년 사이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와루와루Waru Waru라 알려진 그 체계는 수로로 둘러싸인 높이 2미터, 너비 6미터의 높임 두둑들로 이루어졌다. 티티카카 호수 주변에서 1960년대에 연구자들이 처음으로 발견한 이 높임 두둑 체계는 이후 수십 년 동안 볼리비아와 페루의 습지와 고원 지역에 도입되었다. 


와루와루에서 이용되는 운하는 기후변화에 더 탄력적으로 먹을거리를 생산할 수 있게 돕는다.



어떤 프로젝트는 실패했지만, 대부분은 지역의 농민들이 화학물질을 이용하지 않고도 작물의 생산성과 토양비옥도를 개선하도록 해주었다. 지역의 다른 농법과 비교하여, 높임 두둑은 가뭄 기간에 물을 포획하고 비가 너무많이 오면 물을 배출한다. 이렇게 연중 작물에 관개를 한다. 운하의 물은 열을 보유하여 두둑 주변의 기온을  1°C 정도 높여 서리로부터 작물을 보호한다. 수로를 서식지로 삼는 물고기가 먹을거리를 추가로 제공한다. 

아직 연구가 진행중이지만, 오늘날 이러한 와루와루 체계는 세계에서 가장 큰 습지 가운데 하나인 볼리비아의 야노스 데 목소스Llanos de Moxos를 포함한 남아메리카 전역의 농민들이 자주 활용하고 있다. 기후변화로 예상되는 홍수와 가뭄의 증가에 와루와루 농업이 더 탄력적일 수 있다. 또한 한때 작물 재배에 부적합하다고 여겨진 열악한 서식지에서 먹을거리를 재배할 수 있어, 열대우림을 벌채하는 압박을 완화시킬 수도 있다. 


해충을 방제하는 아시아의 물고기

대규모 단작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훨씬 친숙한 농법이다.  이는 광대한 농지에 더 쉽게 관리하며 많은 수확량을 보장하기 위해 한 가지 유형의 작물만 재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토양비옥도를 떨어뜨리고, 자연서식지를 손상시키며, 생물다양성을 감소시킬 수도 있다. 이런 농장에서 사용되는 화학비료는 하천과 바다로 침출되고, 농약은 야생생물을 죽이고 내성을 지닌 해충을 만든다. 

여러 작물을 재배하고, 다양한 가축을 사육하며, 보존을 위해 여러 서식지를 남겨두면 앞으로 있을 날씨의 충격에 먹을거리 생산을 더 영양가 있고 탄력적으로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생계를 창출하고 생물다양성을 재생할 수도 있다. 

고려할 것이 많은 것 같지만, 여러 고대의 농법이 단순한 수단으로 이러한 균형을 이루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오늘날에도 이용된다. 중국 남부에서, 농민들은 한나라 후기로 거슬러올라가는 방식으로 자신의 논에 물고기를 추가한다.  

물고기는 단백질 공급원을 추가하기에, 이러한 체계는 일반적인 벼농사보다 더 많은 먹을거리를 생산한다. 일반적인 벼의 대규모 단작과 비교해 또 다른 장점은 농민들이 비싼 화학비료와 농약을 절약한다는 점이다.  – 물고기가 잡초와 벼멸구 같은 해로운 해충을 잡아먹어 천연 해충 방제를 제공한다. 


벼논양어의 논은 더 많은 먹을거리를 생산하고, 화학 농약을 더 적게 사용한다. 


아시아 전역의 연구에 의하면, 벼만 재배하는 논에 비교해 벼논양어의 논은  벼 수확량이 최대 20% 정도 증가하여, 가족이 자급하며 잉여 농산물을 시장에 판매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벼논양어 논은 소농의 공동체에 필수적인데, 오늘날 대규모 단작의 벼 또는 양식업을 확장하려는 대기업에 밀려나고 있다. 

벼논양어 농법은 물을 오염시키고 온실가스를 생성하는 농화학물질을 덜 쓰면서 현행 대규모 단작보다 더 많은 사람을 부양할 수 있다.  

이들 고대의 농법이 거둔 지속적인 성공은 우리가 전체 먹을거리 체계를 재구성하여 100억 명의 사람을 부양하는 한편, 야생생물이 다시 활기를 되찾고 탄소를 격리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미 있는 걸 다시 만드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과거에 효과적이었던 걸 찾아 미래에 적용시켜야 한다.  


https://theconversation.com/feeding-the-world-archaeology-can-help-us-learn-from-history-to-build-a-sustainable-future-for-food-117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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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연구한 건 아니지만, 참고할 만할 것 같다.

통합해충관리라고 하여 화학 농약을 쓰지 않고 해충을 방제할 수 있는 방법을 이용하는 것이다.

한국의 블루베리들은 사정이 어떤지 모르겠다. 일단 블루베리 자체가 외래종이니 아직은 병해충에서 자유로울 수도 있겠는데, 그렇지만 언젠가는 그를 찾아오는 병해충이 생기긴 할 것이다. 그게 자연이니까.

현장의 사정은 모르지만, 이런 방식이 언젠가 도움이 될지도.


https://www.annualreviews.org/doi/abs/10.1146/annurev-ento-011118-112147?journalCode=ento&fbclid=IwAR0I4KLx3qgXe7lzlA77eqrtSGUL-GYw0ytSv-x4Nh0f3X4ySijoWO-z1k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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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에서 확산되고 있는 사이짓기 농법.

밀-대두의 2년 3작식이다. 




최근 미국에서 밀-대두 사이짓기를 가장 열심히 실천하고 있는 농민의 강의 동영상을 찾았다. 참고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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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대전에서 왜 둠벙을 이용해 메기를 활용하는 벼농사를 짓고 있는 것이죠?

 

누구의 발상이고, 얼마나 되었으며, 어떤 방식으로 관리되는지 궁금합니다. 한 번 가 봐야겠어요.

 

http://www.dailycc.net/news/articleView.html?idxno=54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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