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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서 토종 벼를 보전하기 위한 운동을 참고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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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료를 보면, 일본은 기본에 충실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일본 전국에는 총 17만 개소의 저수지와 둠벙이 있는데, 효고현兵庫県에만 2만4천 개소가 있어 일본에서도 첫째라고 한다.
그 효고현에서도 으뜸은 바로 아와지시淡路市로 5600개소에 저수지와 둠벙이 있고, 다음은 스모토시洲本市로 4000개소이다. 그 다음은 미키시三木市로서 3000개소의 저수지와 둠벙이 존재한다. 이들 지역은 강수량이 적은 세토우치瀬戸内 기후의 영향권으로서, 최대한 물을 확보하여 농사짓기 위한 지역민의 노력이 이런 결과로 이어졌다.

한국에도 이런 지형을 찾이보기란 어렵지 않지만, 그를 바탕으로 작성된 이런 자료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기본에 소홀하다고 할 수밖에. 아니, 내가 못 찾아서 이런 한심한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참고로 효고현 및 각각의 시는 아래의 지도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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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난 지도를 보았다.

기후변화에 따른 연도별 벼 불임률 지도.



 
지도를 보면, 그러니까 2060년 정도 되면 지금과 똑같은 벼 품종으로는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다. 농사가 되긴 되는데 평균 20% 정도는 이삭이 제대로 맺히지 않는다는 뜻이다. 저 북쪽이나 현재의 고랭지에서는 괜찮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절망에 빠질 이유는 없다. 

인간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으니 말이다. 

아마 이러한 기후 조건에 알맞은 새로운 품종을 육종하든지, 아니면 새로운 농법 등으로 난관을 타개하려 노력하겠지. 가만히 앉아서 위기를 맞아하지는 않으리라 예상한다. 

그도 아니면, 지금 품종으로 더 북쪽에서 농사지을 수도 있겠다. 물론 통일이든 남북 경제협력이든 하는 형태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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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먹는 것은 우리의 건강만이 아니라, 지구 자체에도 해를 끼칠 수 있다. 해마다 인간이 생성하는 온실가스 배출의 약 1/4은 우리가 세계를 먹여살리는 데에서 비롯된다. 그 대부분은 소가 방출하는 메탄, 화학비료의 질소산화물, 작물의 재배나 가축의 사육을 위한 산림 파괴 등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가스는 지구의 대기권에 열을 가두어 놓게 한다. 온난화된 세계에서 홍수나 가뭄 같은 극한의 기상이 빈번해지고 심해져, 작물을 파괴하고 농사철을 방해한다. 그 결과 기후위기는 이미 먹을거리 공급을 불안정하게 만들어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농업의 과제는 광대하며, 세계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늘어날 것이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간 협의체(IPCC)의  새로운 기후와 토지에 대한 특별보고서는 세계의 토지 이용, 농업 및 인간 식단의 급격한 변화 없이는 지구의 온도 상승을  1.5°C 미만으로 유지하려는 목표를 지닌 온실가스 배출 억제 노력은 실패할 것이라 경고한다.

환경이나 복지의 다른 측면을 해치지 않으며 영양가 있는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먹을거리 체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 하지만 생물다양성 상실과 오염을 반전시키면서 수십억의 사람들을 부양할 충분한 먹을거리를 생산할 수 있을까

여기에 고고학자와 인류학자가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World Archaeology에 실린최근 논문은 과거의 농업 체계를 탐구하여 그것이 오늘의 농업을 더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는다. 


남아메리카의 운하와 옥수수

세계에는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방식을 실험한 오랜 역사를 지닌 사회들이 있다. 이러한 과거의 성공과 실패는 인간이농업을 통해 어떻게 지역의 환경을 변형시켰으며, 수천 년 동안 토양의 특성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관점을 제시한다. 

고대의 농법이 늘 자연과 균형을 이룬 것은 아니었다. – 초기의 먹을거리 재배자들이 과도한 방목이나 관개를 잘못 관리해 토양 염분을 높여 자신의 환경을 손상시켰다는  증거들이 있다. 하지만 과거의 먹을거리 재배 체계가 토양의 질을 개선하고, 작물의 수확량을 증가시키며, 홍수와 가뭄으로부터 작물을 보호한 사례도 많다. 

한 사례가 잉카 이전의 남아메리카에서 기원하여, 기원전 300년-기원후 1400년 사이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와루와루Waru Waru라 알려진 그 체계는 수로로 둘러싸인 높이 2미터, 너비 6미터의 높임 두둑들로 이루어졌다. 티티카카 호수 주변에서 1960년대에 연구자들이 처음으로 발견한 이 높임 두둑 체계는 이후 수십 년 동안 볼리비아와 페루의 습지와 고원 지역에 도입되었다. 


와루와루에서 이용되는 운하는 기후변화에 더 탄력적으로 먹을거리를 생산할 수 있게 돕는다.



어떤 프로젝트는 실패했지만, 대부분은 지역의 농민들이 화학물질을 이용하지 않고도 작물의 생산성과 토양비옥도를 개선하도록 해주었다. 지역의 다른 농법과 비교하여, 높임 두둑은 가뭄 기간에 물을 포획하고 비가 너무많이 오면 물을 배출한다. 이렇게 연중 작물에 관개를 한다. 운하의 물은 열을 보유하여 두둑 주변의 기온을  1°C 정도 높여 서리로부터 작물을 보호한다. 수로를 서식지로 삼는 물고기가 먹을거리를 추가로 제공한다. 

아직 연구가 진행중이지만, 오늘날 이러한 와루와루 체계는 세계에서 가장 큰 습지 가운데 하나인 볼리비아의 야노스 데 목소스Llanos de Moxos를 포함한 남아메리카 전역의 농민들이 자주 활용하고 있다. 기후변화로 예상되는 홍수와 가뭄의 증가에 와루와루 농업이 더 탄력적일 수 있다. 또한 한때 작물 재배에 부적합하다고 여겨진 열악한 서식지에서 먹을거리를 재배할 수 있어, 열대우림을 벌채하는 압박을 완화시킬 수도 있다. 


해충을 방제하는 아시아의 물고기

대규모 단작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훨씬 친숙한 농법이다.  이는 광대한 농지에 더 쉽게 관리하며 많은 수확량을 보장하기 위해 한 가지 유형의 작물만 재배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토양비옥도를 떨어뜨리고, 자연서식지를 손상시키며, 생물다양성을 감소시킬 수도 있다. 이런 농장에서 사용되는 화학비료는 하천과 바다로 침출되고, 농약은 야생생물을 죽이고 내성을 지닌 해충을 만든다. 

여러 작물을 재배하고, 다양한 가축을 사육하며, 보존을 위해 여러 서식지를 남겨두면 앞으로 있을 날씨의 충격에 먹을거리 생산을 더 영양가 있고 탄력적으로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많은 생계를 창출하고 생물다양성을 재생할 수도 있다. 

고려할 것이 많은 것 같지만, 여러 고대의 농법이 단순한 수단으로 이러한 균형을 이루었다. 그 가운데 일부는 오늘날에도 이용된다. 중국 남부에서, 농민들은 한나라 후기로 거슬러올라가는 방식으로 자신의 논에 물고기를 추가한다.  

물고기는 단백질 공급원을 추가하기에, 이러한 체계는 일반적인 벼농사보다 더 많은 먹을거리를 생산한다. 일반적인 벼의 대규모 단작과 비교해 또 다른 장점은 농민들이 비싼 화학비료와 농약을 절약한다는 점이다.  – 물고기가 잡초와 벼멸구 같은 해로운 해충을 잡아먹어 천연 해충 방제를 제공한다. 


벼논양어의 논은 더 많은 먹을거리를 생산하고, 화학 농약을 더 적게 사용한다. 


아시아 전역의 연구에 의하면, 벼만 재배하는 논에 비교해 벼논양어의 논은  벼 수확량이 최대 20% 정도 증가하여, 가족이 자급하며 잉여 농산물을 시장에 판매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벼논양어 논은 소농의 공동체에 필수적인데, 오늘날 대규모 단작의 벼 또는 양식업을 확장하려는 대기업에 밀려나고 있다. 

벼논양어 농법은 물을 오염시키고 온실가스를 생성하는 농화학물질을 덜 쓰면서 현행 대규모 단작보다 더 많은 사람을 부양할 수 있다.  

이들 고대의 농법이 거둔 지속적인 성공은 우리가 전체 먹을거리 체계를 재구성하여 100억 명의 사람을 부양하는 한편, 야생생물이 다시 활기를 되찾고 탄소를 격리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이미 있는 걸 다시 만드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과거에 효과적이었던 걸 찾아 미래에 적용시켜야 한다.  


https://theconversation.com/feeding-the-world-archaeology-can-help-us-learn-from-history-to-build-a-sustainable-future-for-food-117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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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nde van Andel 씨가 수리남의 Paramaribo에 있는 시장에서 도정하지 않은 쌀 한 봉지를 구매했을 때만 해도 그녀는 노예제의 가거를 새롭게 검토하게 될지 전혀 알지 못했다. 현재 네덜란드 Leiden에 있는 Naturalis Biodiversity Center의 민족학자는 2006년 수리남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약용 및 제례용 식물을 조사했다. 그녀는 쌀을 포함한 약초와 제례용 식물을 판매하는 수백 명의 마룬Maroon 여성들로 붐비는 수도의 시장을 발견했다.

수리남의 마룬은 그 국가의 내륙에 있는 열대우림을 피난처로 정하며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도주 노예들의 후손이다. 이질적인 경관 속에서 생존하기 위한 초기의 투쟁에도 불구하고, 마룬들은 살아남아 그 문화를 지속해 올 수 있었다. 오늘날 20만 이상의 마룬들이 있고, 대부분은 수리남과 프랑스령 기아나에 살고 있으며 네덜란드에도 적은 수가 있다.  

역사가들은 350년이란 대서양 횡단 무역 기간 동안 1200만 명 이상의 아프리카 대륙의 사람들이 강제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야 했다고 추정한다. 이 항해에서 살아남은 1070만 명 가운데 약 30만 명의 노예들이 1668년부터 1823년 사이에 라틴아메리카 북동부에 있는 수리남의 네덜란드 식민지로 이송되었다. 거기에서 그들은 급증하는 커피와 설탕 플랜테이션에서 강제로 노동해야 했다.  

수리남에서 van Andel 씨는 노예사를 연구하는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론 -쌀을 포함하여- 이 논의되고 있는 걸 알지 못했다. 아프리카인 노예가 북미의 수익성 좋은 쌀 플랜테이션을 도왔던 벼와 농사법을 가져왔는가? 기존 이론의 대부분은 노예는 주인이 시킨 일을 수행한 무지한 노동자일 뿐이라고 했다.  


아프리카 대륙의 "벼 해안"에 있는 국가에서 잡혀온 노예들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작물에 대한 지식을 가져왔다. Wageningen University


그 논쟁은 사우스캐롤라이나의 번서아는 벼 경제를 책임지고 있던 아프리카인 노예의 사례를 제시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의 벼 역사학자이지 지리학 교수인 Judith Carney 씨가 2002년 저술한 책 Black Rice에 의해 촉발되었다. 벼는 식민지 시대 초기의 아메리카 지역에서 가장 수익성 높은 작물의 하나였으며, 최대 25%의 수익을 올렸다. 아프리카의 쌀은 짙은색의 겉껍질이고,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3개월의 항해 동안 배에 가득 실린 노예들을 먹이기 위해 사용된 단단한 곡물로 제공되었다. 다수확의 아시아의 벼가 결국 플랜테이션을 장악하였지만, 아프리카의 쌀 가장 열악한 조건에서도 안정적으로 재배되었다. 그리고 아프리카인들은 신세계에서 탄탄히 뿌리내리기 위해 필요한 경작술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들이 오랫동안 활용하던 전통적 벼 농사법을 문서화하며 서아프리카에서 시간을 보낸 Carney 씨는 신세계에서 벼농사의 과정을 분석할 수 있는 객관적 방법이 있음을 깨달았다. 아메리카 대륙의 노예들이 파종, 도정, 요리하던 방법만이 아니라 벼를 경작한 미소환경을 아프리카 여성들의 그것과 비교함으로써, 그녀는 노예 소유주들의희소하고 편향된 역사적 기록에 의존하지 않고서 신세계와 구세계 사이의 흥미로운 유사점을 공들여 짜맞추었다."미국 혁명까지 노예들은 아프리카의 농촌 지역처럼 절구와 절구공이로 도정을 했다."고 그녀는 지적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전해 내려온 전설에서는, 배를 타기 전에 여성들이 머리카락 속에 아직 도정하지 않아 씨앗으로 쓸 수 있던 볍씨를 어떻게 숨겼는지 알려준다. 그녀의 연구는 "아프리카 대리인(African agency)"이라는 개념 -노예들이 적어도 그들의 행동에 대한 언어 구사력을 가졌다는 개념- 을 뒷받침했다. 

Carney 씨의 조사는 최초로 노예들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농업의 성공을 위해 더 많은 인정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주장한 듀크 대학의 노예사학자 Peter Wood 씨의 연구에 기초한다. "1974년에 그것은 진보적 개념이었고, 수십 년 동안 열띤 반응이 나타났다."고 Carney 씨는 이야기한다.

Carney 씨 역시 학술적 비판에 시달렸다.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증거가 없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노예 소유주는 아무도 자신의 노예가 벼를 재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고 인정하는 사람이 없었다."라고 그녀는 덧붙인다.

그러다 van Andel 씨의 연구에 관한 말이 나왔다. 2006년 그녀의 수리남 여행에 관한 강연을 한 이후에 van Andel 씨는 Black Rice를 읽은 대학원생 청중에게 그곳에서 벼를 수집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녀가 잠시 생각해 보니, 사실 어딘가에서 제례용 쌀 봉지를 가지고 온 것이 있었다. "여기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는 그 샘플이 아프리카의 쌀이라고 결정되었을 때 나중에 외쳤다. 명백한 증거가 아니더라도, 적어도 추적이 가능한 총알이었다. 


마론으로 알려진 도주 노예들은 수리남의 열대우림에 숨어서 독립을 유지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공동체와 문화를 확립했다. Tinde van Andel


van Andel 씨를 비롯한 학자들은 북아메리카 사람들에게 친숙한 흰쌀인 아시아의 벼가 미국의 플랜테이션에서 재배되고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널리 믿었다.  Van Andel 씨는 아프리카의 벼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 식물 자체가 수리남에서 재배되었으며 쌀이 수입되지 않았다는 걸 문서화해야 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그녀는 수리남의 약용식물에 대한 현지조사를 끝마쳤다. 

운이 좋았는지, 그녀는 2008년 Paramaribo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석할 계획이었다. 표본을 찾기 위해 하루 만에 그녀는 약용식물 목록을 조사한 마을인 Mundje Kreek에 사는 친구 Berto Poeketie 씨에게 연락을 했다. 그는 지역에서 검은쌀을 재배한다고 알려진 여성인 Emelina Koese 씨와 연결해 주었다. Koese 씨는 —그 지방에서 가장 널리 믿는 Winti 같은 종교를 지닌 여러 마을 주민들처럼— 외부인을 의심했고, 따라서 그녀의 지식을 낯선 이와공유하길 주저했다. 숲에서 오랫동안 산책하면서 Koese 씨의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했다고 van Andel 씨는 이야기한다. 

농지로 가는 길에“나무에 걸어 놓고 도난 방지용으로 쓰이는 약초, 뼈, 천조각 같은 것들이 있었다."고 van Andel 씨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논 밖에서 큰삼각머리독사와 맞닥뜨리면 백인은 들여보내서는 안 된다는 신호라고 Koese 씨는 해석했다. 결국 van Andel 씨는 식물체 하나와 사진 한 장만 원하며 댓가를 지불하겠다고 하면서 그녀를 안심시켰다. 

"그곳은 내가 모든 중요한 제례용 식물이 뿌리째 뽑혔다고 생각했던 똑같은 마을의 바깥에 있었다."고 van Andel 씨는 회상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 쌀의 활용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녀는 소량의 아프리카 쌀이 조상에게 제물로 쓰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것이 '마법' 식물과 어떻게 작용하는지. 당신이 특별하게 하나에 관해 묻는다면 사람들이 자신의 지식을 기꺼이 나누고 싶어한다."고 그녀는 설명한다. "그들이 당신도 무언가 알고 싶어 한다고 생각하면 당신과 대화하는 걸 가치 있다고 결정한다." 

van Andel 씨가 수리남에서 현재 아프리카 벼를 재배한다는 걸 확인했을 때, 아프리카의 벼가 노예 무역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했고 그와 관련된 쌀 농사법이 아프리카인에 의해 도입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 Carney 씨의 이론이 지지를 받았다고 2010년 그 발견에 대해 발표한 Economic Botany의 편집장 Robert Voeks 씨는말한다. 

그러나 그 발견은 시작에 불과했다. 벼가 어떻게 수리남에 이르렀는지 탐험하고자 했던 van Andel 씨는 언어학과 벼 유전학에 관심을 기울였고,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한 노예들의 이동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창이 열렸다.

van Andel 씨가 수리남에 있으면서 떨칠 수 없던 한 가지 질문이 있었다. 왜 마룬들은 인근의 토착민들과 비교하여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식물을 이용했을까? 그녀는 다른 이름과 응용법 및 준비는 아프리카의 유산과 혼합되었을 가능성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고 추측했다. 2010-2012년, 그녀는 가나와 베냉, 가봉을 방문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보았다. 수백 만 명의 노예가 강제 이주된 350년 동안 식물학적 이해에는 무엇이 일어났는가? 그들은 무엇을 잊었으며, 무엇을 기억했고, 어떤 적응이 필요했는가?


Tinde van Ande 씨의 수리남의 벼에 대한 연구는 그녀를 서아프리카의 해안으로 데리고 갔고, 수리남에서 아직도 사용되는 식물의 이름과 비슷한 이름들을 발견하게 만들었다. Christiaan van der Hoeven


서아프리카의 국가들을 다니면서 van Andel 씨는 수리남의 식물 이름을 일상적으로 들었다. "수리남의 수많은 식물명은 아프리카에 기반하고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전체적으로 그녀는 수리남의 식물명 2350개를 서아프리카의 그것과 비교했다. 마룬의 토착어 가운데 40% 이상이 소리, 구조, 의미에서 아프리카의 식물명과 닮았다. Van Andel 씨는 "아프리카인의 눈을 통해" 식물군을 보았다고 한다. 학술 문헌을 활용해 그녀는 다른 나라의 식물명과도 비교했다. 가장 이목을 끄는 유사함은 네덜란드가 노예를 구매한 주요 지역인 가봉과 앙골라의 식물명에서 발견되었다. 2014년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에 발표된 그녀의 논문은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들이 아메리카 식물군의 상당 부분을 인지했다는 증거를 제시했다.

"노예가 신세계에 왔고 아무 역사가 없으며 텅빈 석판이었다는 건 구식의 사고방식이다. 그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van Andel 씨는 말한다. 당신이 기억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가져올 수 없다면, 그것이 당신의 정체성이 된다. 열대의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는 매우 다르지만, 식물 군집에는 겹치는 부분이 조금 있다. "열대우림의 종에 대한 아프리카인의 지식이 마룬이 생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van Andel 씨는 말한다. Voeks 씨도 동의한다. "아프리카 노예들은 그들 자신의 전통을 가져와서 남아 있는 종이나 속과 유사한 것들을 이에 겹치게 했다."고 그는 말한다. "그들은 생태학적 변화의 중요한 대리인이었다."

Van Andel 씨는 마룬의 벼가 유전자만 얻을 수 있다면 아프리카에서 기원했다는 걸 추적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2015년 남아프리카 Western Cape에서 열린 회이에서 van Andel 씨는 뉴욕대학의 박사후 연구원 Rachel Meyer 씨를 만나 마룬과 아프리카의 토종 벼의 게놈의 염기서열이 일치하는지 함께 확인하기로 약속했다. 2016년 10월,  Carney 씨를 포함한 연구진은 마룬 벼의 기원이 기니아 고원의 국가들, 특히 코트디부아르 서부에 있다고 제시하는 연구결과를  Nature Plants에 발표했다. 네덜란드는 가나와 베냉, 중앙 아프리카에서 노예의 대부분을 잡아들였다. 그리고 노예선의 기록에 의하면, 서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항해하면서 식료품을 확보했다고 나온다.

"우리의 연구는 인구 이동에 대한 이해를 얻기 위해 식물의 염기서열을 이용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그녀는말한다.

마룬 벼의 기원에 대한 발견은 싹트기 시작한 새로운 분야 -역사학에 빛을 비추기 위해 식물을 활용- 의 흥미로운 사례이다. 영국 맨체스터 대학의 생물분자 고고학자 Terry Brown 씨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노예의 작물의 기원을 정확히 찾아내고자 유전학이 사용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인간 이주에 대한 대용물로 식물이 사용된 건 처음은 아니라고 한다. 


마룬이 재배하는 수리남의 여러 벼 품종은 서아프리카에 유전적 뿌리를 두고 있다. Tinde van Andel


인간의 이주를 추적하고자 식물의 유전학을 활용하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식물의 재생산은 인간의 그것보다 덜 복잡하며, 경작의 흔적은 인간에게 식물의 가치에 대한 증거를 제공한다. "인간은 '토요일 밤의 효과'가 있다. 수컷은 짧은 거리를 가서 이주하지 않고도 자신의 유전자를 퍼뜨릴 수 있다."고 그는 덧붙인다. 그러나 식물은 땅에 붙어 있어 식물을 기반으로 하는 경제가 어떻게 확산되는지 보여준다. 

노예가 경작한 신세계의 벼와 아프리카에 있는 그 기원 사이의 연결고리를 밝히는 일 외에도, 새로운 유전적 기술들은 비옥한 초생달 지역에서 농업의 기원이 갑자기 발명도었다는 개념을 뒤집었다. "우리는 이제 농업의 기원이 초기의 수렵채집민이 야생 식물을 더 생산적으로 만들기 위해 다루기 시작하면서 농업이 확립되기까지 8000-9000년이 걸린 오래 계속된 과정이라고 믿는다."고  Brown 씨는 말한다. 그와 다른 사람들은 작물화된 보리와 밀의 게놈을 이용하여 그것이 단일한 근원의 개체군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그 지방의 서로 다른 부분에서 교잡된 것임을 증명한다. 

van Andel 씨에게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노예제의 이야기가 더 많이 있다. 그녀는 오크라부터 얌과 바나나에 이르기까지 더 노력하여 다른 작물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수리남의 마룬들은) 자신의 조상에 대하여 정말로 알고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이제 우리는 그들에게 더 많이 물어봐야 할 때이다." 그리고 그 보답으로 그녀는 마룬이 자신의 문화유산을 보호하는 일을 돕길 희망한다. 

이를 위하여 van Andel 씨는 최근 프랑스 국립 자연사박물관의 민족식물학자 Marie Fleury 씨와 함께 수리남 동부에 이웃한 프랑스령 기아나의 마룬 공동체를 탐사하기 위한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과학 및 탐사 프로그램 기금을 지원받았다. 이 연구진은 올해 여름 벼가 익었을 때 현지조사를 시작할 계획이다.  

마룬의 문화는 그녀가 연구를 시작할 무렵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수리남 마룬의 작은 집단이 네덜란드에서 그녀 근처에 살고 있다. 사실, 제례에 사용된 신성한 식물은 두 나라 사이에서 활발히 교역되었다. 예를 들어 Winti가 1971년까지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 관습이 살아 있는 건 놀라운 일이라고 그녀는 말한다. 

"수리남의 마룬들은 차별을 당했고, 때로는 숲에 살고 있는 퇴보된 사람으로 취급되었다."고 van Andel 씨는 이야기한다. 그녀의 노력이 한 가지 사실을 명확히 밝혀준다면, 마룬은 식물에 대해 세대를 뛰어넘는 특별한 지식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더구나 이들 간과된 작물 품종은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마룬의 경우, 벼 재배는 전통 종교 뿐만 아니라 역사도 살아 있어 사람들이 역사가 없다고 생각하는 노예 국가에서 특히 중요하다"고 그녀는 말한다.  


https://www.sapiens.org/culture/african-rice-new-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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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재래 벼 품종의 맛 평가>라는 논문

https://www.jstage.jst.go.jp/article/hokurikucs/52/0/52_6/_pdf



일본 재래벼 품종군 맛 평가.pdf


일본 재래벼 품종군 맛 평가.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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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시히카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시대와 함께 품종의 흥망성쇠가 반복되는 가운데, 탄생부터 60년 이상 지난 지금까지도 도호쿠東北 지방에서 큐슈九州 지방까지 널리 재배되고 있는 보기 드문 품종으로서, 오랜 세월에 걸쳐 '맛있는 쌀'의 대명사가 되어 왔다. 고시히카리란 도대체 누구인가? 고시히카리는 왜 인기가 있는가? 벼에 대해 잘 아는 농학자 사토 요우이치로佐藤洋一郎 씨에게 들었다.




쌀 업계의 역사를 바꾼 고시히카리

고시히카리가 태어난 건 지금으로부터 60년 이상 전인 1956년. 당시 후쿠이福井 현립농사시험장県立農事試験場에서 개발되었다. 

뜻밖에도 탄생 직후에는 재배가 확산되지 않았는데, 1979년 쌀 재배면적 1위로 올라서서는 40년 가까이 그 자리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쌀의 재배에는 지역에 따라 적합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있지만, 도호쿠 지방부터 큐슈 지방까지 널리 재배되고 있는 품종은 현재 고시히카리 말고는 없다. 최근에는 해외에도 그 이름이 알려져, 이제는 가장 유명한 일본 쌀이 되었다. 국내외에서 '맛있는 쌀'이란 이미지가 강하다. 말하자면, 쌀의 슈퍼스타 같은 존재이다.  

게다가 고시히카리는 쌀 업계의 역사를 바꾼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쌀을 살 때 '고시히카리'나 '히토메보레ひとめぼれ'나 '아키타 코마치あきたこまち' 등의 '품종명'을 따지는데, 이러한 정보를 알 수 있게 된 것은 고시히카리가 계기가 되었다고 사토 요우이치로 씨는 이야기한다. 


사토 요우이치로 씨. 교토부립대학 일본 식문화 연구센터 특임교수, 종합지구환경연구소 명예교수. 교토대학 대학원 농학연구과 수료. 국립 유전학 연구소 연구원, 시즈오카대학 농학부 조교수, 종합지구환경학 연구소 교수 및 부소장. 대학 공동이용기관 법인 인간문화연구기구 이사를 거쳐 현직. 전문은 식물유전학. 30년 이상에 걸쳐 아시아 각지를 현지조사하고, 벼의 기원을 찾아 왔다. 



"소비자가 '품종명'을 알게 된 것은 1995년 식량관리법이 폐지되고 식량법이 제정되어 자주유통미自主流通米(※1)가 출현한 일이 시작이다. 그때까지 소비자는 '일등 쌀' '이등 쌀'이란 등급과 '하리마(播磨) 쌀' '오우미(近江) 쌀' '이세(伊勢) 쌀' 같은 산지의 정보만 알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니이가타현新潟県이 '고시히카리'의이름을 전면에 내걸고 판매를 시작하면서부터 품종명의 정보가 제공되었다." (사토 씨) 품종은 농민만이 아는 '벼의 품종'에서 소비자도 아는 '쌀의 품종'으로 자리매김이 변하였다. 

※1 정부를 통하지 않고 집하업자와 판매업자 등을 통하여 유통되는 쌀

“세 방면이 좋아한”쌀로 인기를

게다가 고시히카리는 '많이 생산되는 쌀'에서 '맛있는 쌀'로 사람들의 가치관과 수요를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이후부터 국가 전략으로 한 알이라도 많은 쌀을 취급하려는 시대가 계속되었지만, 1960년대에 쌀의 생산성은 포화상태에 도달했다. 아무리 기술혁신을 하려 하고, 품종개량을 하려 하고, 비료를 많이 쓰려 했지만 수확량은 별로 늘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양'에서 '질'로 최초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 니이가타현이었다. 맛있는 쌀을 만들려고 생각한 것이다." (사토 씨)


'양'에서 '질'로 쌀의 역사를 바꾼 고시히카리 


자주유통미가 된 쌀의 가격을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게 되어, '수확량=수입'이 사라졌다. 예를 들어, 20% 비싸게팔면 수확량이 10% 줄어도 벼 농민의 수입은 약 10% 증가한다. 또 고시히카리는 도열병에 걸리기 쉬웠기 때문에, 병을 막기 위하여 질소비료를 즐이니 맛이 좋아졌다. 각 현의 시험장이 극진하게 고시히카리의 재배 지도를 다는 일도 전국으로 확대되는 데에 뒷받침이 되었고, 정미 수율이 좋았던 점 때문에 쌀가게도 좋아했다. 게다가 고도경제성장에 의하여 소비자가 쌀에 대하여 양보다 질을 추구하게 되는 등 시대와도 잘 맞았다.   

고시히카리는 농민, 쌀가게, 소비자에 의하여 "세 방면이 좋아하는" 쌀로 환영을 받았다.  

동과 서에서 선호하는 "전 일본"

2018년 산지 품종 목록을 보면, 홋카이도北海道와 도쿄도東京都와 오키나와현沖縄県을 제외한 총 44부현府県에서 재배되고 있는 고시히카리. 그러나 고시히카리가 퍼지기 전에는 "오사카大阪 시장에 반입되는 쌀은 대립이고 미질이 단단하며, 도쿄 시장에 반입되는 쌀은 소립이고 미질이 부드럽다"(사토 씨)라는 식으로 동일본과 서일본에서 쌀의 선호가 달랐다고 한다. 

그럼 왜 고시히카리의 맛은 동일본에서도, 서일본에서도 받아들여진 것일까? 

고시히카리는 농림農林 1호'와 '농림 22호'를 교배시켜 탄생했다. 

'농림 2호'는 동일본에서 맛있는 쌀로 퍼졌던 리쿠陸羽 132호와 카메노오亀ノ尾 같은 계통의 품종. 그리고 '농림 22호'는 서일본에서 맛있는 쌀로 퍼졌던 '아사히旭' 계통의 품종이다. 


위 사진의 출처 http://www.ken-ohashi.jp/contents/2b/dagakki/2008/132.html



그때까지 동과 서의 품종을 교배시킨 예는 별로 없었는데, "동쪽의 천하장사" 계통과 "서쪽의 천하장사" 계통이 교배된 고시히카리의 탄생은 일본인의 쌀 선호에 변화를 가져왔다. 


고시히카리의 아버지 농림 1호. (이시카와현石川県 하쿠이시羽咋市의 코시다 히데토시・나오코奈央子 씨 부부가 재배)


"일본 전국 거의 어디서나 농사지을 수 있는 '전 일본'이 태어나, 동쪽에서 먹고 익숙한 맛과 서쪽에서 먹고 익숙한 맛이 합체함으로써 양자에서 받아들여지는 맛이 탄생했다. 그래서 고시히카리가 퍼졌다고 생각한다."고 사토 씨는 이야기한다. 

그렇게 말하더라도, 고시히카리가 탄생한 뒤 재배면적 1위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23년의 세월이 걸렸다. 사토 씨에 의하면, 당초는 고시히카리의 평가가 간사이関西를 중심으로 높고 간토우関東에서는 고시히카리보다 '사사니시키ササニシキ'가 인기였다.

그런데 여기에도 또 니이가타현의 움직임이 영향을 주었다. 

'깨끗한 물과 비옥한 대지에서 재배된 니이가타 고시히카리' '밤낮의 일교차가 크기에 맛있게 자란 우오누마魚沼 고시히카리' 이라는 이미지 전략에 의하여 간토우에도 고시히카리가 퍼져 나갔다. 그리고 재차 타격을 주듯이, 1993년 헤이세이平成의 대냉해로 인해 사사니시키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어 "고시히카리 일족"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동서에서 선호하는 고시히카리의 탄생을 계기로, 일본인의 쌀에 대한 미각은 균일화되는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고시히카리 논


고시히카리 덕에 잃어버린 것


고시히카리 탄생 후에는 고시히카리를 기반으로 품종개량이 반복되어 현재는 전국에서 재배되는 품종의 80%가 고시히카리계 품종(고시히카리를 편부모로 하는 근연 품종)이란 '고시히카리 최강 시대". '농림 100호'란 농림 번호(※2)로 1956년에 고시히카리가 탄생하고나서 2015년 시점에서 논벼의 농림번호는 '농림 474호'까지 나왔다(농림수산기술회의 <2016년 농림번호 부여 품종>).

"약 60년 동안에 국가에서 만든 품종만도 300계통 이상이고, 각 도도부현에서 만들고 있는 품종은 더 많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특정 품종만 시장에 남아 있다. 각 농업시험장의 육종가들 입장에선 '좋은 걸 만들어도 고시히카리를 이길 수 없다'는 불행한 상황이다"라고 사토 씨는 말한다. 판매하는 측에서도 구매하는 측에서도 '고시히카리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맛있다'는 풍조가 있어, '육종은 마케팅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라고도 한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맛있다'고 느끼는 품종도 있을지 모르지만, 고시히카리 일변도의 상황으로 잃어버리고 있는 것도큰일이다.

사토 씨는 고시히카리가 이렇게까지 확산됨에 따라 "확실히 다양성이 사라졌다"고 지적한다. 다음회 나만의 벼 품종을 만들자에서는 다양성이 사라짐에 따라 생기는 문제와, 다양성을 창출하기 위한 이야기를 살펴본다. 

※2 농림성 소속의 연구기관과 각 현에 산재해 있는 국가 지정 시험지에서 육성된 농작물 품종에 붙여진 등록번호. 


https://agri.mynavi.jp/2019_01_15_55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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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시히카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전회는 전국에서 재배되고 있는 품종의 80%가 고시히카리계 품종(고시히카리를 편부모로 하는 근연 품종)이라는 "고시히카리 최강 시대"가 된 경위를 농학자인 사토 요우이치로佐藤洋一郎 씨에게 들었다. 한편, 사토 씨는 고시히카리 일변도의 상황에 의해 잃어버린 '쌀의 다양성'이 중요함을 지적하고 있다. 



먹을 수 있는 쌀은 대략 20품종

쌀의 다양성이 사라진 이유로, 사토 씨는 '군사물자로 쌀의 품질을 통일시키려는 국가정책을 취한 점' '특히 소화시대 이후에 다수확을 목적으로 키가 작은 특정 품종만 품종개량에 사용한 점'을 들지만, 역시 엄청난 충격이었던 것은 '고시히카리의 등장'이었다고 지적한다. 

현재 산지 품종 내역을 보면, 멥쌀, 찹쌀, 술쌀을 합계하여 약 480품종(2018년, 농림수산성 <농산물 규격규정>을 바탕으로 산출). 이 가운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고 있는 멥쌀은 재배 비율 상위 20품종이 84.1%를 차지하고있다(2017년산, 미곡 안정공급확보 지원기구 공표). 

※일정한 산지(도도부현 단위)에서 생산된 품종이 다른 산지에서 생산된 동일한 품종과의 사이에서 일정한 품질차를 나타내기 때문에, 농산물의 거래 등에서 해당 산지와 품종을 농산물 검사로 특정할 필요가 있음. 1년 1회, 도도부현마다 내역 설정의 신청이나 폐지 등의 의견을 청취하는 장이 설정되고, 학식 경험자, 생산단체, 실수요단체, 행정관계자에 의한 협의를 통해 농림수산성 국장에게 전달. 내역의 설정 등을 행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된 경우, 농림수산부 장관이 행하는 농산물 규격규정의 개정 절차가 진행됨.



각 현에는 여러 가지 대표 품종이 있지만, 전체 비율에서 보면 재배면적은 적다(Panasonic'쌀 이야기 박물관OKOME STORY MUSEUM'의 전시에서)




한편, "메이지 시대는 4000가지 품종이 있었다. 이명 동종, 동명 이종이라 생각되는 것을 정리하더라도 600종이 남아 있는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고 사토 씨가 말한다. "메이지 시대에 여러 가지 품종이 보전된 것은 사람들이품종을 식별하여 목적에 따라 구별하여 쓰거나, 지역 사이의 교류가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시히카리의 등장 이후, 전국에서 비슷한 품종이 나왔기 때문에 현재는 다른 품종을 식별할 힘이 사라지고 있다"고 우려한다. 



에도 시대에 농사지었다고 보이는 품종 '愛亀'. 역주; 이 품종은 일제강점기 조선반도에도 도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린 붉은 물감과 초록 물감만 가지고 있다. 섞으면 자주색이 된다. 다양한 자주색이 되겠지만, 결국은 자주색이란 점에는 변함이 없다. 아무것도 늘어나지 않으며, 아무것도 줄어들지 않는다. 그것이 최근의 품종개량이다. 어떻게 기호라는 게 균일화되는 것인가 한다." 



에도 시대에 카가번의 헌상미였다고 이야기되는 품종 '킨챠쿠巾着'



한때 '가짜 고시히카리'의 유통이 문제가 되었다. "유통되고 있는 고시히카리 가운데 30%가 가짜일 때조차 우린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었다. 품종의 차이가 적어지고 있는 것도 있지만, 다른 품종이 들어 있는지 간파하지 못하니, 즉 맛의 차이를 모르면서 비싼 고시히카리를 구매하는 데에도 한 원인이 있다. 가짜 고시히카리 문제는 유전적 다양성이 줄어들면서 쌀의 맛이란 문화의 다양성을 잃어버리며 발생한 비극이었다." (사토 씨)


문화의 다양성과 품종의 다양성이 지닌 관계 

다양성이 적다는 건 어떤 문제로 이어질까? 

사토 씨는 "품종의 다양성을 없애는 건 문화의 다양성을 없애는 것"이라 딱 잘라 이야기한다. "어느 지역이라도 각각의 식문화가 있고, 그에 따른 품종이 있었을 것이다. 식문화의 배경에는 잔치 음식도 있었다. 예를 들어 어떤잔치 음식이라도 특정 품종으로 대체되어 버린다면, 그 쌀의 특징을 살린 식문화는 사라져 버린다. 잔치가 사라지면 그때 사용된 품종도 사라져 버린다. 문화의 다양성이 품종의 다양성을 유지하고, 품종의 다양성이 문화의 다양성을 유지하고 있다. 하나의 다양성이 여위어 버리면, 다른 한편의 다양성도 여위어 버린다."

실제로, 짚 세공용 벼 품종도 짚을 쓰는 문화가 사라져서 소멸되어 버렸다. 현재의 산지 품종 내역을 보면, 우리가 평소 먹고 있는 멥쌀은 약 290품종, 찹쌀은 약 70품종, 술쌀은 약 120품종이다(2018년 농림수산성 <농산물규격규정>을 바탕으로 산출). 밥을 먹고, 잔치 음식으로 떡을 만들고, 일본술을 마신다. "적어도 경사스런 날만이라도 품종을 구별해 쓰면 어떨까요?"라고 사토 씨는 말한다. 우리의 "경사스런 날"과 "잔치"의 밥상이 문화와 품종을 유지해 나아갈 것이다. 



이시카와현石川県 하쿠이시羽咋市의 코시다 히데토시越田秀俊 씨와 나오코奈央子 씨 부부가 재배한 '은방주銀坊主'라는 멥쌀 품종. 역주; 은방주는 일제강점기 조선반도에도 도입되어 현재까지 남아 있는 품종이다.



고시히카리보다 맛있는 쌀을 만들다 

사토 씨는 <고시히카리보다 맛있는 쌀>(朝日新書)이란 저서가 있다. 이 제목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고시히카리보다 맛있는 쌀은 있다?' '고시히카리보다 맛있는 쌀을 찾자?' 그 진의를 묻자, "생산자만이 아니라 소비자도 맛있는 쌀을 스스로 만든다는 것이다'라고 사토 씨가 답한다.

그러면, 소비자가 '고시히카리보다 맛있는 쌀을 만든다'는 건 어떤 뜻일까? 

사토 씨가 제안하는 건 '나의 품종'을 만드는 일. '나의 품종이란, 소비자와 생산자가 손을 맞잡고 만드는 품종이다. 맛있는 쌀을 만드는 책임은 생산자만이 아니라 소비자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서로 어떤 품종을 만들고 싶다고 대화하고, 자신들이 직접 인공교배하고 선발을 한다. 소비자는 모내기와 제초, 벼베기 등 1년에 몇 번은 농작업을 도우러 가고, 생산된 쌀은 구매한다. 그 토지에서 농사지은 쌀은 확실히 그 땅에 적응하고 있다. 다양한품종을 만드는 일을 통해 그 토지의 유전적 다양성이 높아지고, 예를 들어 냉해 등의 재해가 있어도 전멸이란 최악의 사태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자가채종을 반복하는 것으로 종묘법에 규정된 '품종'에서는 사라져 가겠지만, 이해하는 소비자와 함께 품종을 만들어 먹는 분량만큼은 문제가 없다는 것이 사토 씨의 생각이다. 



수확한 벼는 씨앗이 된다 



장애물이 높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품종개량은 그다지 새로운 기술은 아니다"라고 사토 씨는 이야기한다.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초기 무렵의 품종은 개인의 노력에 의하여 탄생하고, 농민들이 품질을 유지해 왔다. 품종의 관리를 민간에 맡기는 일은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 

문화의 다양성은 생물다양성을 담보한다 文化的多様性は生物多様性を担保する

2018년 4월, 장려품종에 대해 규정된 <주요 농작물 종자법>이 폐지되었다. 현재는 도도부현이 독자적으로 장려품종을 계속 다루고 있지만, 만약 앞으로 장려품종이 사라진다면 식량관리법 시대처럼 '니이가타 쌀(新潟米)' '후쿠시마 쌀(福島米)' '일등 쌀(一等米)' '이등 쌀(二等米)' 같은 산지나 등급의 정보만 얻을 수 있게 되어 버리겠다는 우려도 든다. 

그러나 사토 씨는 "다양성에게는 하나의 기회"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품종을 스스로 만든다면, 지적재산권도 경제적 소유권도 자신의 것. 거대한 농생명 기업에 얽매이지 않는다. 지금 시대는 옛날에 비하여 많은 사람들이 여러 지식을 가지고 있다. 지식을 총동원해 나의 품종이 지닌 형질을 제대로 제어할 수 있다면, 다양하지만 잡박하지 않은 품종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토 씨가 "문화적 다양성은 생물다양성을 담보한다"고 강조하듯이, 사람들이 단일 품종을 먹고 있다면 단일 품종만 재배되어 버린다. 그러나 다양한 쌀을 맛봄으로써 다양한 품종의 재배가 퍼져 나갈 것이다. 쌀 품종의 다양함은 문화의 다양성과 동일하다. 

나의 품종을 만들어 메이지 시대 같은 품종의 다양함이 현대에 소생되면 일본의 밥상은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벼 오타쿠에게 듣다!『나의 품종』 만드는 법」에서도 소개했듯이, 농민이 육종가가 되는 시대가 오고 있는지도모른다. 


https://agri.mynavi.jp/2019_01_22_56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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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노오亀の尾라는 일본의 토종 벼.

이 벼는 일본의 개인 육종가인 아베 카메지阿部亀治가 육종한 품종이다.



당시 일본만이 아니라 조선과 타이완에서도 널리 재배되었다. 

나는 이름만 보고는 거북이 꼬리를 닮아서 그런 이름인가 했더니, 개인 이름에서 따온 품종명이었나 보다.


검색하니 이 쌀을 이용해 주조한 일본 전통주가 많이 보인다. 

토종 벼를 살려서 전통주를 담근다. 역시 일본답다.

한국도 토종 벼를 살려 이런 시도를 많이 하면 좋겠다.


아예 양조회사에서 술을 담그기 위해 토종 벼를 재배하는 논도 꽤 많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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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2


서장 

벼농사 문화가 나아갈 바   사토 요이치로佐藤洋一郞





시작하며


일본인의 쌀 소비량은 2008년 현재 연간 약 60kg 정도이다. 하루 소비량으로 환산하면 160g 남짓이다. 예전의 도량형으로 말하면 이는 딱 한 홉에 해당한다. 1965년의 수치는 114kg이었기에, 이 45년 정도 사이에 소비량은반감한 셈이다. 총생산량도 1970년대 중반 무렵까지 연간 1200만 톤을 넘었지만, 2000년을 넘어서부터 900만톤 이하가 되었다. 논의 면적도 1970년대 초반 300만 헥타르를 넘었는데, 지금은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벼를 재배하지 않는 토지 가운데 다른 작물로 전환한 토지도 있다면, 농업 그것을 그만둔 곳도 많다. 경작방기지가 경작면적의 20%를 넘은 현도 있다. 일본인은 이대로 쌀을 먹지 않게 될 것인가? 일본에서 논은 사라질 것인가? 


이 물음에 '과학적으로' 답을 내는 건 어렵다. 그러나 나는 일본인은 쌀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일본에서 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를 아래에 서술하려 한다.




쌀과 목숨을 둘러싸고 -생태학적으로 본 쌀의 위치


인류를 포함한 동물의 대부분은 자신의 손으로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를 생산할 수 없다.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는 식물이 만드는 당분이 사용된다. 전분과 지방은 당분의 대체물로 사용된다. 신체를 만드는 단백질에는 동식물의 단백질이 사용된다. 수렵채집 경제에서 이들은 다른 장소에서 획득되었는데,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면 그들의 생산은 점점 한곳에서 이루어졌다. 계절풍 아시아에서 쌀은 저습지에서 재배되었는데, 그 재배 장소에는 쌀(벼) 이외에 물고기와 패류, 곤충 등이 잡혔다. 이른바 '쌀과 물고기'의 한묶음이다(佐藤 편집 2008). 마찬가지로 유라시아 서쪽에서는 '맥류(또는 감자)와 젖(또는 고기)'라는 한묶음이 있었다. 그 무대가 되는 곳은 말할 것도 없이 '삼포식 농업'이라 부르는, 여름 작물+겨울 작물과 가축을 활용하는 형식이다. 현대 인도에서는 육식을 금기하는 사람들에 의해 콩과작물+벼과작물이란 한묶음도 있다(佐藤, 이 시리즈 제1권).


쌀과 물고기의 한묶음은 근현대 일본 열도에서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 대강은 아마 이 책의 우네 유타카宇根豊씨와 후지이 신지藤井伸二 씨의 논고에서 그리고 있다. 우네 씨도 후지이 씨도 '물고기'에는 직접 언급하고는 있지 않지만, 그 마음은 논의 다양한 존재에 있다. '논 학교'라는 NPO를 운영하고 있는 우네 씨는 벼농사의 실천가의 입장에서 논에 사는 생물들을 보아 왔다. 우네 씨 등에 의하면, 300평의 논 안에는 벼가 2000그루 자라고 있는 외에 올챙이가 2만3000마리, 우렁이(둥근논우렁이)가 300마리, 물방개가 50마리, 거미류가 7000마리 정도서식하고 있다. 이들의 숫자는 어림수이지만, 2001년에 우네 씨 등이 전국 조사를 행한 평균치라고 한다. 


우네 씨의 추론 같이, 필시 구조 개선 사업 이전의 논 경관에 섞여 있었던 일정하지 않은 모양의 논과 수로에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일부는, 그리고 '쌀과 물고기'의 한묶음 가운데 쌀 이외의 부분으로 사람들의 생명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논이란 장치가 오로지 벼만의 장치가 된 건 틀림없이 고도경제성장기 이후의 불과 50년 정도의 일이라 생각한다. 고도경제성장기, 일본에서는 다량의 인구가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했다. 그러한 것도 있고, 농업의 세계에서도 기계화가 이야기됐다. 좁고, 고도차가 있는 논을 부수고는 대규모 논으로 바꾸어 버리는 작업이 전국적으로 행해졌다. 그것은 분명히 '노동력 절감'을 가져왔지만, 그 대가가 다량의 석유를 소비하여 행하는 농업의 도입이었다. 




농업의 생태적 의미


우네 씨의 논고는 이 50년 동안의 이후에 생산성만 강조하는 농업에 대한 농사짓는 쪽에서 예리하게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것은 생산성이야말로 목숨과도 같다고 하는 사회 풍조에서 주목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생산성의 한계, 지구환경문제의 분출 등에 의하여 주목을 받게 된다. 특히 환경문제의 하나로 생물다양성의 의미를 고려할때 그 의미는 더욱더 명확해진다.


생물다양성이 지닌 '생태계 서비스'의 가치 가운데 하나는 먹이사슬의 안정적인 유지에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먹이사슬의 안정적 유지'란 생태계를 구성하는 종의 개체수와 관계성이 환경에 의지하지 않고 너무 많이 변화하는 일 없이 유지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예를 들어 제초제와 살균제 등의 사용으로 '잡초'와 '해충'을 구제하려는 시도는 먹이사슬의 안정적인 유지와는 상반되는 일이 된다. 


생태계의 안정성 유지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비료와 물 등의 '물질'을 대량으로 가지고 들어오거나, 또는 가지고나가지 않는 것이다. 즉, '무엇도 더하지 않고, 무엇도 빼지 않는' 것이 생태계의 안정에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을 포함한 선진국의 현대 농업에서는 다량의 자원을 가지고 들어오고 있다. 그것은 물, 비료와 농약부터 온실재배와 농기계용 석유 등을 포함하여 고려하면 방대한 양이 된다. 가지고 나가는 양도 다량이다. 무엇보다 농산물은 생태계 내에서 소비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을 생태계 밖으로 가지고 나간다. 즉, 현대 농업의 본질은 '고투입, 고수익'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농업의 형식은 고작 50년 된 것이고, 또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1960년대의 '녹색혁명' 이후의 일이라 생각한다. 이래서는 '논벼농사'가 가져오는 생태계의 지속성은 기대할 수 없다.


생태계의 유지에 중점을 두는 이러한 의론에 대해 세계의 인구 증가와 식량 공급의 균형을 고려하는 입장에 선 쪽의 비판이 많다. 분명히 저투입형 농업에서는 단위면적당 생산성이 저하된다. 선진국이 선진국의 이유만으로 생산성을 저하시켜 세계의 식량 생산에 부하를 더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개발도상국의 지지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이 하고 있는 일은 다음에 기술하듯이 자국의 토지는 놀리고 가지고 있는 돈으로 위력을 발휘해 세계의 식량을  여기저기 다니며 사 모으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적어도 사용할 수 있는 토지는 유효하게 사용해야 한다. 이 사태를 조금이라도 완화하는 것이 환경에 대한 부하를 줄이는 데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농업 생산과 생산비


농업은 산업 가운데 유일하게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태양광을 사용해 물과 이산화탄소에서 전분이란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기타 산업은 모두 석유와 석탄 등의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또 유한한 자원을 사용하여 물질을 만들어 왔다. 또한 여기에서는 농업이란 말을 넓게 해석하여 임업과 수산업, 축산업을 포함하여쓰기로 한다. 그런데 이제는 그 농업까지 석유를 사용한 소비형 산업으로 전환된 듯하다. 이제 농업은 농약과 화학비료 등 석유 제품이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수산업은 종래 수렵경제의 연장으로 '잡다'에 무게를 두었는데, 요즘 몇 십 년은 기르는 어업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기르는 어업이라 해도 과도하게 집약적인 양식은 협의의 집약농업과 마찬가지로 다량의 에너지를 소비한다. 또 종래부터 자원의 고갈을 불러온다는 비판이 강했던대규모 원양어업도 에너지 소비형 산업으로 전환해 버렸다. 물론 지금 바로 이러한 형식의 농업을 전환할 수는 없지만 농업의 의미를 고려한, 장기적 시각에 입각한 시나리오가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의 교역권이 확장됨에 따라 먹을거리도 장거리를 운송하게 되었다. 교역권의 확대는 원래 그 토지에 없는 자원의 융합과 다른 문화의 교류를 통하여 큰 부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지금처럼 다량의 먹을거리를 몇 천 킬로미터, 몇 만 킬로미터나 운송되면, 그 수송 에너지도 막대해질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캔의 니기리 초밥을 생각해 보자. 일본의 어느 어항 근처의 초밥가게에서 먹었던 '도미의 니기리'와 뉴욕의 '초밥 바'에서 먹은 그것과는 운반에 사용된 에너지는 극단적으로 다르다. 생산에 사용된 에너지는 대부분 똑같다. 전자에서는 현지의 농가에서 생산된 쌀과 근해의 어장에서 잡은 물고기를 사용하기에 수송에 들어간 에너지는 매우 적다. 그런데 후자는 쌀도물고기도 천 킬로미터의 단위를 운송된다. 게다가 물고기는 수송되면서 냉동이 빠질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정량적인 비교는 아직 행해지지 않았지만, '밭에서 위장까지' 가는 사이에 사용된 에너지를 단순히 비교하면 그 차이는 수백 배에 이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초밥의 가격차는 아마 몇 백 배가 안 될 것이다. 그건 전적으로 대량생산, 대량수송의 혜택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 이 대량생산의 은혜를 입어 온 것은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대량생산이 먹을거리의 안정화를 불러온다는 건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환상 같은 것이 아닐 수없다.


생산활동이 환경에 미치는 부하를 수치화한 생태학적 발자국의 발상은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생긴 것이다. 인류가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당분과 단백질의 한 묶음을 어떻게 에너지를 들이지 않고 생산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 인류와 그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할 큰 요소이다. 계절풍 지대에서 '쌀과 물고기' 및 맥류 지대에서 '맥류와 젖' 같은 한 묶음은 생태학적 발자국의 측면에서는 이상적인 농업 생산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대로 옛날로돌아자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먹을거리는 되도록 운송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결정적으로 식량이 충분하지 않은 지역이 있다. 아랍 사회 등이 그렇다. 그러한 지역에서까지 식량을 운송하지 말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막 한가운데에서 지금 당장 농업을 하는 건 에너지 측면에서는 분명하게 손실이 크다. 그러나 그래도 무엇을 얼마나 어디에서 운송할지에 대해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고려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잡초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 계절풍 지대의 농업에서 가장 위협이 되는 건 잡초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근세 이전의 논벼농사에서 휴경의 큰 이유는 잡초가 번성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각지에서 볼 수 있는 화전은 불을 사용하여 밭을 개간하는 농업의 방식인데, 같은 밭은 3년 경작하면 다음 해 이후 몇 년쯤은 휴경한다. 그 이유는 땅심의 저하와 잡초의 피해가 증가하는 데 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휴경은 적어도 고분 시대에는 시작되었다고 생각되며, 그것을 보여주는 상황증거도 몇 가지 알려져 있다. 그 정도까지 잡초의 해는 막대했던 것이다.


근세에 들어서면, 더 많은 노동력이 제초에 쓰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무렵부터 토지의 소유제는 명확해지고, 휴경하거나 새로운 토지를 개척하는 여지도 점점 사라졌다. 사람들은 항상 농지로 쓰게 된 논에 달라붙어 쌀을 재배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근대에 들어서도 똑같았는데, 도시 노동력의 수요가 확대됨에 따라 김을 매는 인구가 줄어들었다. 제초제는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개발되었다. 


제초제에 의하여 인류는 잡초를 박멸할 수 있었을까? 후지이藤井 씨의 논고를 보는 한, 그건 단정하기 곤란하다. 왜냐하면 가령 강력한 제초제를 써서 어느 잡초를 제거해도 이번엔 그 약제에 내성을 가진 새로운 잡초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새로운 잡초'가 같은 종에 속하는 다른 유형인 경우도 적지 않다.


도대체 작물과 잡초는 생태학적으로는 매우 '유사한' 관계이다. 일본처럼 비가 많고 식물의 생육이 빠른 장소에서 생태계는 방치하면 천이를 진행해 숲이 되어 간다. 경지는 경작이란 교란에 의하여 천이를 억누르는 장소이고, 또 거름기가 많은 토양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토지에 적응할 수 있는 건 작물과 잡초뿐이다. 둘은 비슷한 생태적 특성을 가지지만, 한쪽은 인간의 비호를 받고 다른 한쪽은 배제되는 정반대의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잡초가 세운 전략은 철저하게 작물의 모습을 본따는 것이었다. 이런 본땀으로 인해 잡초의 방제는 곤란해진다. 


또한 잡초라고 인식되는 종은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농학 관계자 안에서는 유명한 일화인데, '밀밭 안의 보리는 잡초'라는 것이다. 그건 혹은 빵밀(일본에서 보통 재배하고 있는 밀은 보통밀임)은 에머 밀이라 부르고 있는 재배종이 당시 그 밭에서 자라고 있던 잡초인 '야생 염소풀(Aegilops tauschii)'과의 사이에서 자연교배를 일으켜서 생겼다. 빵밀이 지닌 유전정보의 적어도 1배분은 잡초에서 기원한다. 더욱이 호밀이라 부르는재배종(검은 빵의 원료 등으로 쓰임)은 원래 밀밭의 잡초였는데, 조건이 나쁜 토지 등에서 재배식물로 진화해 온것이라 할 수 있다(辻本 2009).


반대로 이전 재배종이었던 식물이 잡초로 전환된 사례도 많다. 일본에서도 잡초 벼라고 하여 문제가 된 '붉은쌀(赤米)'은 중세에 도입된 품종이 근대에 들어서 잡초화된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잡초란 인간이 농경이란 행위를 통하여 저절로 산출한 존재이다. 잡초는 강하고 몹시 거친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그 강하고 거칠음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인류는 '녹색혁명' 이후 제초의 결정적인 수단으로 제초제를 개발하여 문자 그대로 '제초 방제'를 얻은 듯하지만,앞에서도 적었듯이 현재 상황에서는 그 시도가 반드시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뿐인가, 제초제를 지나치게 사용하여 물과 토양을 오염시키고, 희소종을 절멸로 몰았다. 즉, 환경을 악화시켰다. 현대 일본의 논벼농사도 기본은 그노선을 답습하고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현재 상황 대로 논벼농사의 행방은 결코 밝다고 할 수 없다.




논벼농사의 우위성


일본 열도의 논벼농사에서는 그래도 아직 다른 작물의 경작에 비하면 우위성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가 연작 장해를 일으키지 않는 점이다. 많은 작물은 같은 토지에서 반복하여 재배하면 '연작 장해' 또는 '그루타기'라 부르는 지장을 발생시킨다. 장해의 구체적인 내용은 작물에 따라 다르지만, 수확이 감소하고 질병에 걸리기 쉬워지는등 몇 가지 공통 사항도 발견된다. 그런데 논벼농사의 경우에는 이 연작 장해가 거의 없다고 알려져 있다. 벼도 밭에서 재배하면 연작 장해가 일어나기에 '논'에서 재배하는 것이 연작 장해를 일으키지 않는 원인이라 생각된다. 

논벼농사의 또 한 가지 우위성은 논이 댐으로 기능하는 것이다(富山 1993). 태풍과 장마철의 집중호우 등으로 한번에 많은 비가 내릴 경우, 쏟아진 물을 잠시 머물게 하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논에 통상은 물이 잠겨 있기에 여름에는 논에서 일어나는 기화열이 기온을 떨어뜨리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사실, 논을 건너오는 바람에서 서늘함을 느낀 경험을 가지고 있는 분도 많을 것이다. 몇몇 자치체에서는 휴경논 등에 물을 담아서 기온을 떨어뜨리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고 한다. 다만 논에 물을 담는 것만으로는 기온을 떨어뜨리는 효과는 작다고 생각한다. 기화열의 효과는 그곳에 식물을 심어 놓아야 한층 뚜렷해진다. 그 식물이 호흡한 물을 증산하기 위하여 많은 기화열을 빼앗기 때문이다. 흙을 넣은 양동이에 벼를 심은 것과 아무것도 심지 않은 것을 준비하여 물을 담아, 물이 줄어드는 상태를 날마다 관찰하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벼를 심은 양동이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해 훨씬 일찍 물이 사라져 버린다.




일본인은 쌀을 먹어 왔을까


그런데 일본인은 쌀을 먹어 왔던 것일까? 테라사와 카오루寺澤薫 씨는 야요이 시대의 몇몇 유적에서 출토된 식물 유체를 꼼꼼히 조사해, 도토리 등 자연식생에서 채집한 것이 가장 많았다고 기술한다. 즉, 논벼농사가 보급되었다고 하는 야요이 시대조차 '농경'의 요소보다 '채집'의 요소 쪽이 컸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고대에 들어오면 식문화는 시대의 권력자와 서민 사이에 큰 차이가 나게 된다. 문서 등에 남은 귀족들의 먹을거리는 현대 우리들의 눈에도 상당히 호화로우며, 밥 등 그릇에 수북하게 대접했다. 헤이안 시대의 '왕조 요리'를 재현한 교京 요리 '로쿠세이六盛' 주인 호리바 히로유키堀場弘之 씨에 의하면, 당시 귀족의 공식적인 식사에서 밥은 원통형으로 높여서 대접했다고 한다. 다만 대접한 전부를 한번에 먹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정도의 밥이 나왔다는 건 사실이라 생각한다. 또, 후지와라 도장은 당뇨병이었단 이야기는 당시 귀족들의 미식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나라 시대의 야마토 지방에서는 제, 소 등이라 부르는 유제품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5세기의 오사카 평야에서는 밀의 씨앗과 말의 골격이 출토되어서 목축의 존재가 엿보이기도 있다. 그리고 에가미 나미오江上波男(1906-2002)는 '기마민족 도래설'을 전개하여 큰 논쟁을 일으켰는데, 이들 사실은 기마민족도래설의 재래를 방불케 한다. 


중세부터 근세에 걸쳐서는 어떨까? 이에 대해서는 키무라 에미木村栄美 씨가 참고가 된다. 키무라는 회화 자료에 표현된 식사의 풍경을 읽고 해석하는 수법으로 중세 사람들의 식생활을 밝히고자 했다. 키무라는 귀족, 승려, 일반 서민 각각에 대하여 그 먹을거리를 해석했는데, 밥은 그 어디에도 등장하는 것 같아 그 한에서는 '밥'이 주식의 지위를 획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밥'이 쌀밥인지, 또는 현미인지 흰쌀인지, 찹쌀인지 멥쌀인지등 상세한 건 분명하지 않다. 회화에 한하지 않고, 문서가 어디까지 정확히 사실을 전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일반 서민'에서도 그것은 당시의 선진지였던 교토 주변의 일반 서민이고, 지방을 포함한 서민의 생활을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지적도 할 수 있다. 다만, 키무라도 말하듯이, 묘사된 세계가 화가의 시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근세의 기근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 점에 대해서 근세에 빈발한 '기근'을 생각해 보고 싶다. 근세의, 특히 동일본에서는 기근이 빈발하여, 테이메이天明 연간을 포함한 몇 십 년 사이에 인구가 격감할 정도의 재해가 되었다. 이 일련의 기근에 대해서는 이 시기의 저온(소빙하기라는 말을 하는 연구자도 있음)에서 원인을 찾는 의론이 많다. 그러나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저온이란 기후변화는 일종의 방아쇠였으며 그것이 원인의 전부는 아니라는 견해도 가질 수 있다. 이미 몇몇 연구자가 고려하고 있듯이, 중세 이전의 동북일본은 근세만큼 벼농사에 특화된 농엽 경영이 진전되지 않았다. 


원래 근세 이전 일본 열도의 북쪽에서는 쌀보다 잡곡을 주곡으로 하는 문화가 오래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근세란극단적으로 논하면,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 열도의 정치적 통일에 맞추어서 논벼농사를 인위적 생태계의 중심에 놓고, 쌀을 주곡으로 하며, 쌀을 화폐로 삼고, 벼농사와 쌀 음식에 관한 문화를 정통으로 하는 문화의 시대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 이전의 기층문화가 송두리째 뽑혔을 리는 없다. 지금도 '산나물 캐기' '버섯 따기' 등의관습은 동(북)이 많고 서는 적은 경향이 있지만, 그것도 당시의 자취가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아오모리시 역사민속전시관(2006년 개관) 계고관에 있는 다나카 츄자부로田中忠三郞 씨는 '숲은 시모키타下北의 백화점'이란 말로 이를 표현했다. 즉, 쌀을 재배하지 못한 때에도 숲에 가면 먹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을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벼농사에 지나친 에너지를 주입한 나머지 숲의 관리가 허술해져 '숲의 은혜'를 얻을 수 없게 된 것이 기근의 직접적 원인이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앞으로 증명이 필요하겠지만, 하나의 가설로 기억에 남겨 놓고 싶다. 




쌀과 물고기


논이라 하면 현대 일본 열도에 살고 있는 일본인 대부분이 녹색의 융단 같은 광경을 상상한다. 즉, 논이란 현대 일본인에게는 쌀을 농사짓는 장소이다. 그러나 앞의 잡초란 소제목에서도 기술했듯이, 논에서 벼 이외의 식물이 살지 않는 상황은 다량의 에너지를 그곳에 들이부은 결과이다. 우네宇根 씨가 말하듯이, 엄밀하게 말하면 논에는 벼 이외에도 많은 식물이 생식하는 것이 보통이다. 


또 -이것도 우네 씨가 말하듯이- 논에는 다양한 동식물이 생식한다. 그리고 그것이 안정된 생태계이다. 그들은 지금은 '잡초'와 '해충' 등 벼의 생산을 저해하는 존재로 취급되는 경향이 강하지만, 역사를 돌이키면 그러한 인식은 완전히 현대적이며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포유류인 인간은 그 생존을 위해 에너지로 전분과 신체를 만들기 위해 단백질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들 논에 있던 생물들은 전분의 공급원으로, 또는 단백질의 공급원으로 이용되어 왔다. 나는 이러한 생산양식을상징적인 의미로 '쌀과 물고기'라고 표현했다(佐藤 2008). 이것은 쌀과 물고기가 한 묶음으로 먹을거리를 떠받쳐 왔다는 것을 말한다. 쌀과 물고기의 한 묶음은 역사적으로 보아도 벼농사 개시 이후의 계절풍 지대에서 널리 인정되는 한 묶음이다. 비슷한 한 묶음은 1권에서 전개한 의론에 쭉 이어서 말하면 '맥류의 풍토'에서는 '맥류(또는 감자)와 젖', 인도 아대륙에서는 '잡곡과 콩' 등으로 모양을 바꾸어 존재한다(佐藤 2008b). 이러한 한 묶음은 그 토지와 그 풍토에 뿌리를 내린, 말하자면 '환경의' 한 묶음이 된다. 


현대 일본인의 먹을거리를 여기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약 50년 전의인 1965년의 통계와 비교하면, 쌀의 소비는 최초에 기록되었듯이 110kg대에서 60kg대 전반으로 반감한다. 물고기의 소비라면 14kg이 12kg쯤이 되어 큰 변화가 없다. 한편 유제품을 포함한 축산품의 소비량은 2배 반으로 증가한다. 채소와 과일 등의 소비에도 큰 변화가 있지는 않는다. 이처럼 쌀과 물고기의 한 묶음에 대해서 통계로는 쌀의 감소라는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전 시대에 대해서는 통계자료가 마땅하지 않기에 정확히는 말할 수 없는데, 나의 어린시절이었던 1955년 무렵을 떠올려 보면,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걸 먹었다는 기억이 있다. 대충 꼽아 보아도 논우렁이, 미꾸라지, 물가의 조개류, 벌의 애벌레 등의 동물질과 쑥, 수영, 여러 산나물 등의 식물질 등을 들 수 있다. 나의 기억에는 없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다양한 곤충과 그 유충, 사슴, 토끼, 멧돼지, 오리 등의 동물도 예사로 먹었다. 지금 일본에서 '고기'라 하면 소와 돼지, 닭 세 종류밖에 없지만, 이것이야말로 이상하다고 할 만한지도 모른다. 


중근세의 먹을거리에 대해서는 하라다 노부오原田信男 씨의 논고가 상세하다. 그것은 논을 포함한 생태계에 생식하는 동식물이 총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곳에서 틈으로 살짝 볼 수 있는 건 참으로 다양한 식재료의 존재인데, 그것에서도 한층 더 흥미로운 건 이른바 '주식'이었던 전분 공급원에 대해서도 피 등의 잡곡과 토란 등의 덩이뿌리류가 쓰이고 있었던 지역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다는 사실이다(坪井 1979). 이들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도 또 언급한다.




쌀과 마음


이처럼 논의 주인공으로 취급되어 온 것은 쌀뿐이었다. 아니, 쌀은 계속 논의 주인공으로 취급되어 온 것처럼 이야기되어 왔다고 쓰는 편이 정확할지 모른다. 하라다原田(2005)가 말하듯이, 논벼농사 사회에 귀속됨은 고대 이후 일본의 지배층이 일관적으로 취해 온 정책이며, 그러한 정책이 반복하여 채택된 배경에는 생산의 실태로서 논벼농사에만 의지할 수 없는 역사와 다양성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와 생산의 갈등은 중세에도 계속되었다고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1928-2004)는 보고 있다(網野 1997).


그러나 정치와 권력의 예상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무언가'란 대체 무엇일까?벼농사는 그 무대(어떤 장소에서 벼가 재배되고 있는지)의 다양성에 관계 없이 지속적인 생산방법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나도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이야기에 찬성한다. '부분적으로'라고 자른 건 특히 고도성장기 이후의 이른바 '고투입 고수익', 즉 다비다수의 벼농사가 전혀 지속적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본 열도의 광범위함 지역에서 쌀은 계속 생산의 중심이 되어 왔다. 한편, 예를 들면 유럽에서 맥류는 감자 이전에는 '주식'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맥류라도 밀, 보리, 귀리, 호밀 등 다양하다. 같은 밀이라도 보통밀 외에 파스타용 마카로니밀이 있다. 콜럼버스 이후의 유럽에서는 특히 북부를 중심으로 감자가 전분 공급원의 주력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특정 종이 무언가 특별한 곡류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구조는 생기기 어려울것이다. 


쌀의 우위성을 '신찬神饌', '의례' 등의 측면에서 본 것이 칸자키 노리타케神崎宣武 씨의 논고이다. 이들은 지금은 경사스런 자리에서조차 잊혀져 버린 존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일본인은 신년의 첫 참배(詣)는 거르지 않는다. 그리고 떡을 먹고, 도소주屠蘇酒를 마시고 신년을 축하한다. 이러한 정신구조는 -그것이 누군가가 의도하여 만든 것이라 해도- 일본인과 쌀, 벼농사와의 강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일찍이 츠보이 히로후미坪井洋文(1929-1988)가 <덩이뿌리와 일본인(イモと日本人)> 안에서 언급한 '떡 없이 정월'의 민속 사례가 보여주듯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보편적으로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동(북)일본과 서일본은 재배되는 작물과 그 품종, 수반된 동식물, 숲의 식생 등에서 이질적이다(靑葉 1980, 佐藤 2009). 아카사카赤坂(1999)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 '몇 개의 일본'이란 단어를 고안했다. 몇 개의 일본을 기층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일본이 쌀과 벼농사 문화에 수렴했던 과정에서는 각각의 시대에 지배층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유는 다른 데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쌀이 가진 영양가를 들 수 있다. 쌀은 인류에게는 주로 전분의 공급원이지만, 약간의 단백질도 포함한다. 단백질은 20개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지는데, 쌀의 단백질은 이 아미노산의 대부분을 모조리 포함한다. 그래서 가령 동물성 단백질 없이 쌀만 먹어도 기아 상태가 되기 어려워진다. 한편 또 다른 곡류의 왕인 밀은 단백질의 총량은 쌀보다 많은데 아미노산의 균형이 나빠, 그것만 먹으면 언젠가는 기아 상태에 빠진다. 성서에도자주 나오는 '빵과 포도주'의 조합은 빵의 그러한 결점을 포도주가 보완하기 때문이란 설명도 있다. 



브랜드 지향과 가짜 고시히카리 소동


쌀을 특별시하는 일본인의 사고 경향은 때로는 삐뚤어진 모습으로 발현하기도 한다. 몇 년 전에 사회 문제가 되었던 가짜 고시히카리 문제도 그 하나이다. 이는 그 뒤 연속하여 일어났던 일련의 '먹을거리 속임'의 발단이 되었던 문제로, '속임'의 본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짜 고시히카리의 상세한 내막은 이 책에 실려 있는 하나모리 쿠니코花森功仁子 씨의 기고문에 양보하려 하고, 이 문제의 저류에 있는 것이 '브랜드 지향'이라고도 할 만한 사고 경향에는 없을까 생각한다.


브랜드 지향의 사고 경향은 다양성의 저하, 특히 품종의 다양성의 상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일본의 벼 품종의 다양성 저하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이전에 기술한 바이지만, 그렇다면 고시히카리 이후 벼의 품종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냐고 하면 그렇지 않다. 고시히카리란 품종의 농림등록번호는 '농림 100호'이다(등록년도는 1956년). 2008년 현재 등록번호는 431번에 이르고 있기에, 나라가 관여한 것만 고시히카리 이후 약 50년 동안 3000을 넘는 품종이 세상에 나온 셈이다. 등록번호를 부여하지 않았던 품종의 예비군은 이보다 훨씬 많다. 그런데도 벼농사 농가도 소비자도 그 존재의 극소수밖에 모른다. 현실에서 재배된 일이 있는 품종, 현재 재배되고 있는 품종도 200가지 정도를 밑돌고 있다.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지는 간단한 작업이 아니지만, 적어도 소비자의 '브랜드 지향'이 관계되어 있는 것은 확실할 것이고, 그 심리를 교묘하게 조종하는 시장의 존재도 또한 눈감아 줄 수 없을 것이다. 기술과 사회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는 어느 사회가 뛰어난 기술력(사람)과 에너지(물질)를 투입하여 새로운 부를 생산하는데 그것을 이용하는 체계가 없다고 모조리 수포로 돌아갈 우려가 있다는 점을 웅변하고 있다. 고시히카리 일변도의 책임은 품종개량의 전문가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기술을 살리지 못했던 사회와 정치의 책임이라고 말해야 한다. 


반성하건데, 일본에는 메이지 초기에 400가지를 넘는 품종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현재 재배되고 있는 품종은 200가지 안팎인데, 품종의 수를 다양성의 지표로 삼으면 이 100년 동안에 다양성의 정도는 20분의 1까지 저하된 것이다. 또한 메이지 시대 중반의 품종과 지금 품종의 큰 차이는 품종이란 하나의 집단 안의 다양성에도 있다.품종 안의 다양성이란 개념은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사실 벼의 품종은 어떤 품종도 완전한 클론은 없다. 고시히카리조차 엄밀하게 비교하면 현마다 다른 유전자형을 나타낼 터이다. 그리고 같은 현에서 생산한 고시히카리 안에도 몇 가지 유전자형이 섞어 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다형성은 옛 시대의 품종에서는 훨씬 크고, 같은 품종의 개체를 많이 심어서 비교하면 키와 개화일, 쌀알의 크기 및 모양 등 다양한 성질에서 차이가 발견되었다. 메이지 시기부터 쇼와 초기까지 행한 품종개량의 주요한 방법이었던 '순계분리'법은 재래종 안에서 우수한 성질을 가진 그루를 골라내어 그 종자를 증식하는 원시적인 것인데, 이러한 방법이 유효했을 정도로 당시의 품종은 한 가지 품종 안에 다양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메이지 시기까지 일본 열도에서 벼의 품종이 유전적으로 얼마나 다양한 존재였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벼농사 문화와 일본의 장래


일찍이 야나기다柳田의 시대와는 달리, 일본이 단일민족국가이며 단일한 문화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연구자는 과연 이제 없다(赤坂 1999). 농경 문화만 보아도 일본 열도에 건너온 것은 조선반도를 경유하여 온 것 외에, 북쪽에서 또는 남쪽에서 건너온 문화가 뒤섞인 복합적인 문화를 형성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벼농사 문화는 그러한 문화 복합의 안에서 생성되어 온 문화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佐藤 2009).


그렇게 하면 쌀을 먹음과 벼농사의 문화가 언제부터 일본 열도 전체를 뒤덮듯이 된 것인지는 역사학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앞에서도 적었듯이, 일본인이 상고 시대부터 쌀을 주식으로 먹어 왔다는 사실은 없다. 일본 열도가 그 무렵부터 온통 논으로 덮여 있었다고 하는 것도 또한 아닐 것이다.


다만 그래도 쌀농사와 쌀밥은 -적어도 서일본에서는- 사람들의 동경이었다는 점은 틀림이 없다. 회화 자료에 나타난 쌀밥의 그림이 이야기하는 건 그러한 점일 것이다. 


근세에 쌀은 통화의 역할을 짊어질 만큼 중요한 물자로 여겨졌다. '고쿠다카(石高)'라는 일본의 독특한 단어는 그걸 잘 보여주고 있다. 한 섬(약 150kg)은 성인 남자가 1년을 사는 데 필요한 쌀의 양이다. 그것은 또한 무사와 한이 몇 명을 먹여살릴 수 있는지를 실제 수량으로 보여주는 잣대이기도 하다. 그것이 경제력을 보여주는 도량형으로 통용된 것이 쌀의 지위를 잘 보여주고 있다. 


현 시대에 사는 일본인에게도 쌀은 특수한 존재이다. 고베神戸  아와지淡路 지진의 부흥에 들어갔던 자원봉사 사람들과 지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아침밥으로 모닝빵을 배포받은 쪽은 힘이 나지 않았지만, 주먹밥을 받은 순간 의기가 올랐다고 한다. 역시 쌀에는 무언가 힘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걸 쓰는 게 연구자로서 어떤 말을 들을지 모르지만, '정신의 힘'은 물질만능주의인 현재의 일본인이 돌아볼 만한 것의 하나가 아닐까? 그렇게 표명하고 <유라시아 농경사> 제2권의 서장을 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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