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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생태학: 지속가능한 먹을거리 체계의 생태학





1부 농생태학으로 초대




농업은 위기에 처해 있다. 비록 세계의 농경지가 적어도 과거보다 많은 식량을 계속 생산하고 있지만, 그 생산성의 토대가 위험에 처했다는 많은 신호가 나오고 있다.


이 부의 첫 장은 오늘날 농업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를 묘사하고, 현대농업의 농법에 그 근원이 있음을 설명한다. 어떻게 생태학적 개념과 원리를 식량 생산 체계의 설계와 관리에 적용하는 것 -농생태학의 본질- 이 더욱 지속가능하게 식량을 생산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를 설명하며 결론을 짓는다. 2장은 원고의 나머지 부분에서 식량생산 체계(농업생태계)를 연구하고 분석하는 데 활용될 농생태학의 기본 개념적, 이론적 틀에 대한 개요를 서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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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생태학: 지속가능한 먹을거리 체계의 생태학




이 책의 활용법


생태학의 순수과학 분야와 농학의 응용 분야 모두에서 농생태학의 기원을 심사숙고하는 일은 이 원고가 이중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농업의 맥락에서 생태학을 가르치기 위해 설계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생태학의 관점에서 농업에 관해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먹을거리를 재배하는 방식에 집중함에도 불구하고, 농법에 관한 책은 아니다. 농사는 세계 각 지역의 특정 조건에 적응시켜야 하는 활동이고, 이 원고의 임무는 보편적 적용 가능성에 대한 개념을 이해시키는 것이다. 


원고는 생태학과 농업 모두의 경험과 지식 수준에 맞추어 작성되었다. 1부와 2부는 생태학과 생물학의 기본 지식에 관해서만 다루어, 성실하다면 대학 수준의 과학 교육을 받은 학생조차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거의 없을 것이다. 1장부터 12장의 집중 학습은 더 복잡한 3부와 4부의 장들에 대한 준비가 될 것이다.


생태학에 대한 폭넓은 배경지식을 지닌 독자는 대부분 뒤의 두 부가 유익할 것이다. 그런 사람은 앞의 2장을 건너뛰고 3장부터 12장까지 3부와 4부의 관심 주제로 가기 전에 골라서 보면 된다. 학부생을 포함하여 생태학과 농업에 조예가 깊은 독자는 이런 전략을 추구하고자 할 뿐만 아니라, 더 광범위한 참고문헌과 보고서 등을 원할 것이다. 


이 원고는 학기의 1/4이나 한 학기에 활용될 수 있지만, 그건 강사와 학생, 커리큘럼에 달린 일이다. 이상적으로, 농업에 생태학적 개념의 시험하고, 생태학의 도구를 농업생태계의 연구에 적용될 수 있는 방법을 시연하려고 하는 실험실 부문은 이 교재를 활용하는 어떤 과정의 강의 부문이라도 보완할 것이다. 첨부된 실험 매뉴얼 <Field and Laboratory Investigation in Agroecology>는 이런 역할을 충족시키도록 설계되었다. 그 조사는 이 원고의 장들에 대한 핵심이 되며, 통합 과정을 창출하는 데 함께 작동한다. 


각 장 말미의 권장도서와 인터넷 출처 목록은 호기심 많은 독자를 위한 심화 자료를 제공한다. 각 장에 나오는 질문은 제약이 없고, 지속가능성에 대한 더 넓은 맥락에서 아이디어와 개념을 고려하고자 하는 독자를 북돋고자 설계되었다.


이 원고에서 개념과 원리는 세계 어느 곳의 농업생태계에도 적용될 수 있다. 농민이 지역과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해야 하는 것처럼, 이 책의 독자들은 자신의 상황에 맞게 그 개념을 적용하려 시도해야 할 과제가 있다. 연구 문헌에서 적절한 사례를 찾아서 지역의 농민들과 실제 농법에 원리를 연결하기 위하여 협력하라. 







목차



1부: 농생태학의 소개


1장  농업의 근본적 변화를 위한 사례

2장  농생태학과 농업생태계의 개념



2부: 식물과 환경의 비생물적 요인


3장  식물

4장  빛

5장  온도

6장  습도와 강우

7장  바람

8장  토양

9장  토양의 물

10장  불



3부: 더 완전한 개체 생태학의 관점


11장  생물적 요인

12장  환경의 복합

13장  종속 영양 유기체



4부: 체계 차원의 상호작용


14장  농업생태계의 개체군 생태학

15장  농업생태계의 유전자원 

16장  작물 군집에서 종들의 상호작용

17장  농업생태계 다양성

18장  교란, 천이, 그리고 농업생태계 관리

19장  농업생태계의 동물

20장  농업생태계의 에너지학 

21장  경관 다양성



5부: 지속가능성으로 이행하기


22장  생태학에 기반한 관리로 전환하기 

23장  지속가능성의 지표



6부: 지속가능한 세계의 먹을거리 체계로 전환하기


24장  농업, 사회, 그리고 농생태학

25장   먹을거리 체계의 재구성에서 지역사회와 문화 

26장   지속가능한 농업생태계에서 지속가능한 먹을거리 체계




참고문헌

용어 해설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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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5




제4장

'農'의 지속가능성

사토 타다시佐藤雅志






시작하며


영국에서 태어난 식물병리학자 알버트 하워드(Sir Albert Haward, 1873-1947)는 1940년에 출판된 저서 <농업성전(An Agricultural Testament)>의 서두에서 "산업혁명 이래 인간과 공장에게 필요해진 식량과 원료를 생산하기 위하여, 작물의 성장은 촉진되고, 재배의 과정이 단축되어 왔다. 그러나 이 작물과 축산물의 뚜렷한 증가에 의하여 생긴 지력의 감퇴를 보완하기 위한 효과적인 대책은 무엇도 강구되지 않았다. 그 결과는 비참하다. 농업은 균형을 잃어 버렸다. 즉, 농지에서는 인간의 상상을 뛰어넘는 온갖 종류의 병이 증가하고, 세계 대부분의 땅에서는 '자연'의 침식작용에 의하여 피폐해진 토양이 유실되고 있다."고 기술하여 근대 유럽과 미국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걱정하며 두려워하고 있다. 유럽과 미국의 산업혁명에 시초를 일으킨 농업의 근대화는 2차대전 이후 아시아에서도 급속히 퍼졌다. 이러한 농업의 근대화는 '녹색혁명'이라 부르며 높은 생산성을 가져온 반면, 지력의 저하에 국한되지 않고 하천의 부영양화, 농지의 염해화와 환경오염 등을 불러일으키며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는 유럽과 미국과는 달리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지속성을 유지한 농경이 전통적으로 영위되어 왔다. 이 장에서는 산업혁명 이후에 보이는 농업의 극격한 변화에 대하여 개설하고,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오늘날에도 영위되고 있는 전통적 농업에 관한 조사결과에 기초하면서 식량 생산 곧 농업의 지속가능성에 대하여논하겠다.





농업의 근대화


산업혁명과 농업


18세기 중엽에 유럽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농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산업 구조의 변화에 따라 농촌부에서 공장이 있는 도시부로 사람들이 이동한 결과, 그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농촌부에서 도시부로 농산물의 대부분을 이동시켜야 할 필요가 생겼다. 그에 더하여, 인구의 증가에 대응한 유례 없는 식량의 증산이 필요해졌다. 산업혁명 이전까지는 농지의 비옥도를 회복하기 위하여 휴한 기간을 설정하는 삼포식 농업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산업혁명 이후는 식량 증산에 대응하기 위하여, 휴한 기간을 설정하지 않고 가축이 배출하는 분뇨와 작물잔여물을 바탕으로 하여 만든 퇴비를 사용하는 사포식 농업과 돌려짓기식 농업이 주류가 되었다.




테어의 부식설腐植說


독일의 괴팅겐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의사가 된 알브렉트 테어(Albrecht Danirl Thaer, 1752-1828)는 나중에 농업인이 되어 <합리적 농업의 원리(Grundsätze der rationellen Landwirtschaft)>를 1809년부터 1812년 사이에출판한다. 그 저서 안에서 그는 앞에 기술한 돌려짓기식 농법을 모범으로 하여 지속적으로 최대의 수익을 올리는합리적 농업 경영의 상태를 정리한다. 그 기본에 있는 것은 "식물의 본질적으로 불가결한 영양분은 식물질 및 동물질의 비료, 또는 적당한 분해 상태의 부폐물이다"라는 생각이었다. 무기태로 불타지도 않고 분해되지도 않는 흙은 식물을 지탱하는 것에 기여할 뿐이고, 식물의 영양소는 안 된다고 기술한다. 더구나 식물 잔여물과 가축의 분뇨 등으로 만들어진 유기태의 '부식'만이 작물이 거두어들일 수 있는 영양소라고 기술한다. 이 사고방식은 '부식설'이라 부르고 있다. 


테어가 제창한 부식설에 대하여 독일의 농예화학자 리비히(Justus von Liebig, 1803-1873)는 녹색 식물의 영양이 무기태인 것이고, 무기물질이 식물의 체내에서 그 성분을 만드는 담당으로 변화한다는 생각을 저서 <화학의 농업 및 생리학에 대한 적용(Die Chemie in ihrer Anwendung auf Agricultur und Physiologie)>에 써서 1840년에 발표한다. 무기원소로부터 식물체의 온갖 성분이 만들어진다는 리비히의 설은 '무기영양설'이라 부르고 있다. 




리비히의 무기영양설


리비히는 작물의 생산성을 유지하는 구체적인 법칙으로 '최소 양분율의 법칙'과 '보충의 법칙'을 제창한다. 각각의 경지에는 작물이 수확량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칼슘, 칼륨, 질소, 인산, 마그네슘, 기타 양분이 어느것이나 있더라도 수확량은 각각의 작물이 필요로 하는 최소량인 것으로 규정된다고 기술한다. 이것이 최소 양분율의 법칙이다.


다음으로 보충의 법칙은 농경지에서 가지고 나온 토양 성분, 곧 양분은 보충하지 않으면 수확량은 저하된다고 기술한다. 곡물과 축산물 등의 형태로 판매되는 농업생산물은 일정한 밭의 토양 성분을 포함하며, 잃어버린 성분을비료로 보충하지 않으면 가령 현재 높은 수확량을 얻을 수 있더라도 밭은 해마다 소모되어 수확량이 저하된다. 


이와 같은 리비히의 '무기영양설'은 질산 광석과 인 광석 등의 무기비료를 수입하고 다용하는 근대 농업을 만들어낸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틀림없다.




'녹색혁명'과 아시아의 농업 근대화


2차대전 이후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함에 따라 식량 부족이 예측되어 무기비료를 다용하는 근대 농업은 선진국만이 아니라 개발도상국에도 퍼졌다. 필요가 없어진 폭약 공장을 이용한 질산의 증산에 대응하여 질소비료를 다용하여 수확량이 증대되는 쌀과 밀 등의 곡물 품종이 국제연구기관 등에서 차례로 개발되었다. 개발된 곡물 품종은이삭이 휘도록 맺혀도 쓰러지지 않도록 줄기가 짧아지도록 육종된다. 토종 곡물 품종은 비료를 많이 투입하면 이삭이 맺힐 무렵에 쓰러져 버려 수확량 저하를 불러왔다. 그 수확량 저하를 개량한 근대 품종은 수확성이 좋아서 '녹색혁명'의 품종이라 불렸다. 


'녹색혁명' 품종은 곡물의 판매 가격과 비료의 구입 가격의 채산이 맞는 선진농업국에서 당초 활용되었는데, 나중에 곡물 가격의 상승과 지역의 인구 증가에 따라 개발도상국에서도 활용되게 되었다. 벼를 주로 자급 곡물로 재배하고, 인구의 증가가 뚜렷한 동남아시아에서도 관개시설의 정비, 화학비료와 농약과 함께 '녹색혁명' 벼 품종이 도입되어 벼의 수확량은 증가했다. 국제 벼연구소의 자료에 의하면, 2000년 시점에 근대 품종의 재배면적은 라오스에서는 2%, 캄보디아에서는 11%로 적지만, 태국에서는 68%, 베트남에서는 80%로 확대된다.




아시아의 농업 근대화에 의한 환경문제


반다나 시바는 저서 <녹색혁명과 그 폭력>에서 녹색혁명은 상업 곡물의 높은 수확량을 가져왔지만, "생태계 수준에서 새로운 결핍을 불러와 그것이 새로운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근대 품종의 재배면적 확대는 남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지역의 국가들에서도 화학비료의 다용에 의한 지하수와 하천, 호수의 부영양화 등 환경오염과 건강 피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메콩강 삼각주 지대에서는 황산암모니아의 다용에 의해 논의 황산 산성화가 일어나고 있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게다가 방글라데시에서는 건기의 벼 재배에 사용하는 관개용수를 지하수에 의존하기 때문에 지하수에 포함된 비소가 주민의 건강 피해를 일으키고 있다. 또한 대규모 재배에 따라 발생한 병충해의 방제에 사용되는 농약은 새로운 건강 피해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우려되고 있다. 


더구나 질소와 인산 비료 등의 화학비료와 농약의 생산 및 운송에 사용되는 화석연료의 소비는 이산화탄소의 방출을 증가시키고 있다. 농업의 근대화가 가져온 환경문제는 지역 환경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지구의 환경문제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다. 또한 화학비료의 다용은 농경지의 비옥도 저하와 겉흙의 감소를, 건기에 일어나는 관개용수의 다용은 농경지의 염해를 부르고 있다. 태국 동북부에서는 건기 재배의 확대에 의해 염해가 발생하고 있다. 아시아의 벼농사 지역에서는 근대 품종 재배면적의 확대는 수확량 증대를 가져온 반면, 사람들의 건강을 포함한 지역의 환경오염, 농경지의 비옥도 소모 및 겉흙의 감소 등을 부르고, 식량 생산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고 있다. 





라오스 북부·산간지의 화전



찹쌀 재배지


여기에서는 내가 참가한 현지조사에서 관찰한 결과와 입수한 자료를 소개하여 동남아시아의 전통적 농업에서 보이는 지속가능성에 대하여 논하고자 한다. 


중국과 미얀마와 국경을 접하는 라오스의 북부 지역 산간지에 퍼져 있는 화전을 1990년대부터 계속하여 조사해 왔다. 전통적인 '화전'에서는 주로 밭벼가 재배되고 있다. 이 지역은 북쪽은 중국 윈난, 서쪽은 인도 아삼 및 미얀마부터 라오스, 태국 북부 및 북동부, 베트남의 서쪽 산간지역, 그리고 남쪽의 캄보디아에까지 펼쳐진 동남아시아의 찹쌀 재배지역이다. 산 표면의 경사면에 펼쳐진 화전에서 재배되고 있는 밭벼는 찰벼 품종이다. 그 수확량은 화전의 비옥토, 지형과 휴한기간에 따라서 다르지만, 헥타르당 1.5톤에서 2.5톤이라 이야기된다(그림4-1).


그림4-1 라오스 북부 산간지의 산 표면에 개간된 화전에서는 큰 이삭이 달리는 밭벼가 재배되고 있었다.




불 놓기와 휴한


전통적인 화전 농업은 산 표면에 우거진 수목의 벌채 및 풀의 벌초부터 시작된다.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에 벌채된 수목과 벌초된 풀은 건기가 끝나기까지 충분히 건조된다. 건조된 수목과 풀은 우기 직전에 불 놓기로 태워진다(그림4-2). 이러한 소각에 의한 개간은 '불 놓기'라고 부르고 있다. 불 놓기에 의해 소각된 수목과 풀의 재는 산 표면에 펼쳐져 찹쌀 재배의 거름이 된다.


그림4-2 라오스 북부의 산간지 화전에서는 베어낸 나무와 풀은 모아서 소각되고 있었다.




개간된 화전에서는 1년만이 아니라 2, 3년 동안 찹쌀이 재배된다. 개간부터 3년이 경과하면, 화전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찹쌀의 재배에는 적합하지 않게 되어 수확량이 저하된다. 농민은 수확량이 저하된 화전을 방기하고, 새로운 화전땅을 구하러 이동한다. 이와 같이 이동하는 일에서 화전은 별명 '이동 밭'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방기된 화전에서는 풀과 나무가 다시 우거지고, 산림이 재생된다. 산림이 재생되기까지의 기간이 휴한기가 되는 것이다. 휴한 기간은 산 표면의 경사 각도와 지형, 토질과 방위, 강우와 기온 등의 기후 등에 의해 다르지만, 라오스 북부 산간지에서는 짧아도 7년에서 12년이라 이야기되었다(그림4-3).


그림4-3 화전의 옆에는 7, 8년 동안 휴한 기간으로 산림이 회복되고 있었다.




여러 작물의 재배


이 전통적인 화전에서는 찹쌀 품종만이 아니라 호박, 오이, 가지, 바나나, 콩 등도 밭의 한 귀퉁이에서 재배되고 있다(그림4-4). 또한 화전에 인접하여 지어진 농막의 주변에는 염주, 레몬그라스, 적색과 황색의 맨드라미가 심어져 있다. 아카족은 레몬그라스를 의례로서 농막의 근처에 심는다. 캄족은 찹쌀의 신으로서 현미가 새카만 찹쌀과 울금을 심는다. 라오스 북부 산간지역에서 화전은 부엌텃밭도 겸하고 있으며, 그곳에는 찹쌀만이 아니라 채소류와 잡곡 등 다양한 작물이 재배되어 왔다.


그림4-4 화전의 귀퉁이에는 호박이 재배되고 있었다.





인구 증가에 따라 단축된 휴한기


불 놓기에 의해 개간된 화전의 휴한 기간이 인구의 증가에 따라 짧아지고 있다. 전통적인 화전의 휴한 기간은 짧아도 7년에서 12년이라 앞에 기술했는데, 최근에는 3년으로 더욱 짧아졌다. 3년의 휴한 기간에서는 충분한 수목의 생육이 인정되지 않고, 키가 작은 어린 나무와 그 주변에 난 풀을 베어내고 불 놓기를 행하고 있는 것이 현상이다. 그 결과, 산 표면의 토양에는 낙엽과 가느다란 마른 가지 등에 의해 형성되는 부엽토층이 집적되지 않고, 찹쌀 등의 재배에 충분한 지력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부엽토층의 소실에 의해 산 표면의 보수력이 저하되고 있다. 그 보수력의 저하는 산 표면의 토양이 빗물에 의해 깎이게 만들고, 유실을 불러오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 





화전의 금지와 환금작물로의 전환


국제적인 비난을 받고 있는 '화전에 의한 토양의 유실'을 막기 위하여, 불 놓기에 의한 개간, 곧 화전을 삼가도록하는 일이 현재 지도되고 있다. 그 지도에 의해 개간하고 방기되는 화전에는 전통적 화전에서는 재배되지 않았던옥수수와 고무나무, 커피 등 신흥 작물의 재배가 확대되어 가고 있다(그림4-5). 이들 신흥 작물의 재배 확대에 따라 화전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던 화학농약과 화학비료의 이용이 도입되고 있다. 고무나무 주변의 풀을 제거하는데에 사용한 제초제가 습지에 펼쳐진 논두렁의 제초에도 사용되고 있는 것을 조사에서는 자주 목격하고 있다. 


그림4-5 화전에는 신흥 작물의 재배가 시작되고 있었다.




또한 북부 라오스의 산간지역에 남아 있던 전통적 화전 지역에서는 환금작물 재배로 전환해 가고 있다. 이 지역을 포함해 동남아시아의 찹쌀 재배지역에서 영위되어 온 전통적 화전은 충분한 휴한 기간을 설정함으로써 지속가능한 농업으로 성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환금작물의 재배 확대에 따라 농업에서 화학비료와 농약의 다용이 화전을 경영해 온 사람들에게 새로운 수입을 가져온 반면, 건강 피해의 문제를 불러오고, 더구나 식량 생산의 지속가능성을 위협하고 있다.






라오스 북부 벵강 유역의 천수답


화전과 천수답


화전 조사 이후에 라오스 북부의 산간을 흐르는 메콩강의 지류 벵강 유역의 습지에 펼쳐진 논을 조사할 기회를 얻었다. 우돔싸이에서 남서 방향으로 메콩강 지류를 따라 차로 2시간 정도 들어가면, 수목으로 뒤덮인 산들과 산 표면에는 화전이 행해진 흔적이 패치 모양으로 눈에 들어온다(그림4-6). 조금 높은 산에 둘러싸인 벵강을 따라 펼쳐진 습지에 논이 연이어 있다. 이 지역의 논은 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강의 물과 빗물에 의존한 논, 곧 천수답이다. 이 천수답에서는 논에 물을 댈 수 있는 우기에 키가 큰 토종 벼 품종이 재배되고 있었다.


그림4-6 벵강 유역의 천수답을 둘러싼 산에는 화전이 펼쳐져 있었다.




양분의 반출과 공급


이 지역의 벼 수확량을 교토대학의 마토 교수의 연구실 대학원생이었던 마츠다松田 씨가 조사하고 있다. 그 결과에 의하면, 평균 수확량은 헥타르당 찹쌀이 3.1톤이라 산출된다. 조사한 해에는 화학농약과 비료는 사용되지 않았다고 들었다. 이 지역의 벼베기는 이삭 부분만 잘라서 단으로 묶고 수확하는 '이삭 베기'가 행해지고 있다(그림4-7). 따라서 이삭에 포함되어 있는 질소, 인산, 칼륨 등의 양분 원소만이 논에서 해마다 반출되고 있는 셈이다. 지속적으로 쌀 생산을 계속해 온 이 지역의 논에서는 지금까지 천연공급에 의해 이들 양분이 함양되어 왔던 것이다. 


그림4-7 벵강 유역의 천수답에서는 이삭만 베어 거두고 있었다.




이 지역의 논에서 질소의 동태를 마츠다 씨 등이 산출한다. 그 산출 결과에 의하면, 재배되고 있는 토종 품종의 볏짚에 포함되는 질소량은 헥타르당 33킬로그램, 찹쌀에 포함되는 질소량은 헥타르당 32킬로그램이다. 따라서 이 지역의 논에서 이삭 베기에 의해 반출되는 질소량은 찹쌀만 따지면 헥타르당 1년에 32킬로그램이다. 논에 질소를 공급하는 체계로는 빗물, 관개용수, 논 표면과 토양 안에서 일어나는 대기 질소고정에 의한 공급 등을 고려할 수 있다. 발표되고 있는 연구결과에서는 빗물로부터의 공급은 헥타르당 연간 0.2톤 정도에 그쳐 별로 많지 않다.


이 지역의 논 토양 안의 전체 질소량은 마츠다 외의 조사에 의하면 0.3%였다. 헥타르당 10센티미터 깊이의 겉흙은 1000입방미터, 비중을 1이라 하면 1000톤에 상당한다. 전체 질소량을 0.2%라고 적게 어림잡으면, 헥타르당2000킬로그램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전체 질소 가운데 5%를 벼가 흡수·이용할 수 있는 가급태 질소량이라고 한다면, 100킬로그램의 가급태 질소가 토양 안에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화학비료를 시비하지 않는 이 지역의 논에서 3톤을 넘는 찹쌀 수확량을 가능하게 하는, 토양 안에 저장된 가급태 질소의 동태를 조사할 필요가 있다. 질소의 동태만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쌀 생산을 가능하게 한 인과 칼륨의 동태도 흥미로운 과제이다.




천수답이 설치된 환경


북부 라오스 산간부에는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전통적 논벼농사에 의해 세계 평균 수확량의 80%에 가까운 1헥타르당 3톤을 넘는 수확량을 올리고 있는 지역이 앞에 기술한 남벵강NamBeng 유역 이외에서도 볼 수있다. 그들 지역에서 공통되는 점은 (1)화전이 행해지고 왔던 산으로 둘러싸인 점, (2)석회암 지역이라는 점, (3)논보다도 조금 높은 곳에 인가와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 점, (4)가족과 마을 단위로 재배하고 있는 벼 품종 수가많다는 점, (5)하나의 논에 똑같은 품종을 여러 해에 걸쳐 재배하는 걸 피하고 있다는 점, (6)하나의 논에 여러 벼 품종을 섞어서 심고 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신흥 작물 재배의 확대


벵강 유역의 습지에도 환금할 수 있는 작물로 옥수수 재배가 급속히 확대되고 있다. 또한 지금까지 화전이 경영되어 왔던 습지를 둘러싼 산들의 표면에서는 등고선 모양으로 대규모 고무나무의 플랜테이션이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있다(그림4-8). 화학비료와 농약도 사용하지 않는 전통적 농업으로 헥타르당 3톤을 넘는 수확량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조만간 옛이야기가 될 것이다.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의 다락논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술라웨시섬


인도네시아는 인도차이나 반도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사이에 위치하는 1만3천 개 이상의 섬들로 이루어진 섬나라이다. 술라웨시섬은 그 인도네시아 도서의 동쪽, 칼리만탄섬과 뉴기니아섬에 끼여 있는 K 자 모양을 한, 면적은 약 19만 평방킬로미터인 인도네시아의 네 번째로 큰 섬이다. 남술라웨시, 중앙술라웨시, 북술라웨시 및 동남술라웨시의 네 지역으로 이루어진 이 섬은 지형 및 기후의 변화가 풍부하며 다양한 민족이 주변의 대륙에서 이주하여 왔기 때문에 민족 구성도 복잡하다. 게다가 칼리만탄섬과 술라웨시섬의 사이에는 월리스선이 뻗어 지구상에서 가장 풍부한 생물다양성을 유지해 온 지역이다. 더구나 작물 근연종의 다양성도 풍부하다는 점에서 작물 유전자원의 보고로도 평가되고 있다. 이 섬의 주변은 바다로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근대까지 물자의 수송과 사람의 이동은 제한되고, 사회생활에서는 자원의 순환적 이용이 이루어져 왔다고 상상된다. 


술라웨시의 중심 도시 마카사르는 남술라웨시 지역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이 마카사르에 있는 하사누딘Hasanuddin 대학의 연구자와 이 지역의 전통적 농법을 조사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남술라웨시 지역의 마카사르 주변및 100킬로미터 북쪽에 있는 파레파레의 주변까지는 비옥한 논이 이어져 있었다. 이 지역은 쌀을 1년에 2.5회 심어 수확하는 풍요로운 벼농사 지대이다. 키가 작은 근대 품종을 화학비료와 농약도 사용하여 재배되고 있다.




산간지에 펼쳐진 다락논


파레파레에서 차로 북쪽을 향하여 하루 걸려 산길을 오르면 토라자에 도착한다. 그 토라자에서 산을 사이에 두고서쪽으로 약 100킬로미터인 곳이 마마사이다. 토라자 및 마마사는 해발 약 1000미터의 산간지역이다. 이들 지역에서는 좁은 산간을 이용하여 다락논이 만들어져 있다(그림4-9). 이들 다락논에는 오늘날에도 화학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키가 큰 토종 품종이 많이 재배되고 있다.


그림4-9 토라자의 산간지에는 다락논이 펼쳐져 있었다.



논두렁으로 구분된 하나하나의 다락논 안에는 지름 2미터 정도의 둥근 두렁이 만들어져 있다. 그 두렁의 일부는 째서 논에 저장된 물이 둥글게 만들어진 두렁의 안으로 흘러 들어간다. 논의 안에 파 놓은 물고기의 연못 주변을 논두렁이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그림4-10). 이들 지역의 다락논에서는 벼의 재배와 물고기의 양식이 동시에 행해지고 있다. 벼를 수확하는 시기에는 논의 물을 빼고, 물고기를 그 연못으로 몰아넣어 포획한다. 다락논에서 양식되는 물고기는 투입된 퇴비, 잡초의 싹, 모여드는 곤충을 먹고 자란다. 물고기는 잡초를 먹어서 제초를, 많이 늘어나면 해충이 되는 곤충을 먹어서 해충 방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게다가 물고기가 배출하는 분뇨는 벼의거름이 된다. 


그림4-10 토라자의 논 한가운데에는 지름 2미터 정도의 물고기 연못이 만들어져 있었다.




또한 토라자와 마마사의 산 표면에 만들어진 다락논을 조망하면, 벼가 심어져 있지 않은 논이 몇 곳 눈에 띈다. 가까이 가서 보면, 그들은 논이 아니라 저수지이다(그림4-11). 저수지는 인가의 주변에 만들어져 있었다. 마마사에서는 높은 곳에 농민의 인가가 있고, 그 인가의 주변에 수로가 만들어져 있었다. 인가에서 배출되는 생활하수는 수로를 통하여 저수지로 이동하고 있었다. 저수지에는 물고기만이 아니라 오리가 사육되고 있다. 물고기와 오리는 물풀만이 아니라 생활하수로 섞여 들어온 먹을거리의 잔여물과 가축의 분뇨에 포함된 유기물을 먹고 자라는 것이다. 물고기와 오리에서 방출된 분뇨도 포함되는 저수지의 물은 높은 곳에 있는 다락논부터 낮은 곳으로 흘러 내려가는 사이에 벼에 흡수된다. 다락논에서 여문 쌀은 수확되어 다시 높은 곳에 있는 인가의 곳간으로 운반되어 식량이 된다. 또한 볏짚은 가축의 먹이가 된다. 이 지역의 다락논 벼농사에서는 벼의 양분이 되는 물질의 순환이 지속적으로 행해져 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림4-11 다락논의 처음에 만들어진 저수지에는 볏짚 등의 잔여물이 떠 있었다.





다양한 벼 품종


이들 지역에서는 붉은색의 왕겨와 검은색의 왕겨, 찹쌀과 멥쌀 등 다양한 품종이 재배되고 있었다. 다양한 품종은 똑같은 논에서 이어짓기하면 안 되는 것처럼 품종은 순서를 짜서 재배되고 있었다. 마마사에서는 볍씨가 되는이삭의 단은 다다미 세 장 정도의 나무로 만든 상토의 안에 넣어 두고 있었다. 토라자에서는 독특한 배 모양을 한지붕의 고상식 곳간 안에 넣어 두고 있었다. 어느 지역이라도 곳간 안의 볍씨는 품종별로 이삭을 단으로 묶어 보관하고 있었다. 볍씨의 보관은 여성의 일이고, 남성은 들어가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하나의 곳간 안에 10가지 품종 정도가 보관되어 있었다.(그림4-12).


그림4-12 마마사의 볍씨 곳간에는 10가지 품종 정도의 벼가 보관되어 있었다.





중국 윈난의 다락논


윈난의 다락논


서쪽은 미얀마, 남쪽은 베트남과 라오스에 접하고, 중국의 서남단에 위치하는 윈난성에서는 한족 이외에 25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우리가 방문한 것은 소수민족의 하나인 하니족이 적어도 1300년 전부터 벼농사를 행해 왔다고 하는 지역이다.


우리는 윈난성의 성도 곤명昆明에서 고속도로를 차로 약 4시간 달려 원양현元陽縣으로 들어갔다. 원양현에는 베트남의 호치민을 경유해 통킹만으로 흘러 들어가는 홍강이 있다. 홍강을 따라 표고 300미터부터 산길을 약 1시간 걸려서 해발 1700미터까지 오르면 원양현 신가진新街鎭 소수정小水井에 도착했다. 


해발 300미터부터 1500미터까지의 다락논에서는 새롭게 육종된 수확량이 많은 하이브리드 벼가 도입되어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한 재배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재배 시기의 기온이 낮기 때문에 하이브리드 벼의 재배에 적합하지 않은 1500미터 이상의 표고에 위치하는 다락논에서는 자포니카 토종 품종이 재배되고 있었다(그림4-13). 이들 품종의 종자는 자가채종되고, 그 재배 방법은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통적인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벼의 수확량은 헥타르당 3.7톤으로 놀라운 수치이다. 이 수치는 일본의 평균 쌀 수확량의 60%에 달한다. 이 지역에서는 17가지 품종이 주로 재배되며, 똑같은 논에서 이어짓기 장해를 피하기 위하여 3년에 한 번 정도의 빈도로 품종을 교환하고 있다. 그러나 1970년도의 조사에서는 76가지 품종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오늘날 확인할 수 있는 품종의 수는 30가지로 감소하고 있다. 또한 이 지역에서 자가채종된 토종 벼 품종의 종자는 유전적으로 다양하다고도 들었다. 


그림4-13 해발 1500미터를 넘는 다락논에서는 다양한 토종 품종이 재배되고 있었다.




수로, 저수지, 그리고 다락논


이 다락논은 건조에 의한 누수를 막기 위해 1년 내내 물을 댄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 담수로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논의 겉흙 두께는 깊고, 모내기와 수확의 때에는 땅이 질퍽거린다. 담수 상태로 유지된 다락논의 수면에는 붉은 개구리밥이 번성하고 있었다.


또한 둘러싼 산에서 샘솟아 오는 물과 마을의 가정 하수를 잠시 모아 놓기 위한 '저수지'가 다락논과 마을 사이에몇 개 만들어져 있었다. 그 저수지에는 물속에 물풀이 번식하고, 수면을 물새가 헤엄치며 다니고 있었다(그림4-14).


그림4-14 다락논 옆에는 저수지가 군데군데 있었다.




게다가 너비 50센티미터, 깊이가 30센티미터 정도의 수로가 마을 안의 도로 옆으로 둘러쳐져, 그 끝은 저수지와다락논으로 통해 있었다. 마을의 집들이 늘어서 있는 곳에서 어느 정도 낮은 곳에 있는 광장에는 외양간두엄과 퇴비, 겨를 훈증하여 만든 훈탄이 쌓여 있었다. 산에서 솟아 나온 물이 수로에 유입되고, 그 물의 힘을 이용하여 쌓아올린 외양간두엄과 겨의 훈탄을 흘러가게 하고 있었다(그림4-15). 흘러간 외양간두엄과 훈탄은 저수지와 다락논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림4-15 인가를 따라 난 통로 옆의 수로에는 외양간두엄과 소각되어 탄화된 겨가 흘러가고 있었다.




둘러싼 깊은 산에서 샘솟아 나오는 물을 이용하여 연중 내내 담수 상태로 유지될 수 있는 논은 벼가 생육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양분을 낭비 없이 계속 유지해 놓을 수 있다. 논 토양이 건조한 일이 없기에 암모니아가 질소화세균의 작용에 의해 질산을 거쳐 대기 질소로 방출되는 일을 막고 있다. 외양간두엄과 가정 하수에 포함되어 있던 암모니아, 유기물의 분해에 의해 생긴 암모니아, 그리고 인산과 칼륨을 다락논의 논 토양은 다음 벼 재배가 시작되기까지 함양하고 있다.






동남아시아의 전통적 농업에 남아 있는 지속가능성의 장치


여러 종목의 작물을 재배


근대 농업에서는 생산성을 올리기 위하여 한 가지 작물을 대규모로 재배하는 홑짓기 재배가 행해지고 있다. 이에반하여 전통적 농업에서는 논과 밭에는 바나나와 그 끝에는 가지, 호박, 콩, 레몬그라스 등의 허브류 등  다양한 작물이 섞어짓기되고 있다. 또한 우기에 벼를 심은 논에는 건기에 그루갈이로 콩이 심어지는 일이 많다.


다락논의 좁은 논두렁에 정연하고 비좁게 콩이 심어져 있다. 그중에는 화전의 가장 높은 곳에 심어진 콩밭도 눈에 띄었다. 근립균에 의해 고정된 질소 양분을, 높은 곳이라 영양소 함량이 적은 화전 토양으로 빗물이 나르는 장치인가 하고 감탄한 일이 있다.


이처럼 여러 종목의 재배는 작물의 이어짓기에 의한 장해를 회피함과 질소 양분의 공급을 가져오는 중요한 장치라고 해석된다.




벼 품종의 종자 교환


일본의 농가에서는 농협 등의 조직이 제공하는 도장이 찍힌 벼 품종의 종자 또는 모를 구입하여 재배하는 일이 많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의 전통적 벼농사를 경영해 온 농가에서는 자가채종한 여러 품종을 보관하여 재배에 이용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마을 안의 다른 농가와 다른 마을의 농가와 빈번하게 벼 품종을 교환하고 있다는 회답이 돌아왔다. 농민이 보여준 이삭의 단을 가리키며 다른 마을에서 시집을 온 며느리가 가지고 왔던 벼 품종이라고 설명을 들은 적도 많다. 또한 "어느 마을의 찰벼 품종'이라든지 하는 품종명도 자주 들었다. 여러 기회를 이용하여 동남아시아의 전통적인 벼농사를 경영해 온 농민은 벼 품종을 빈번히 교환해 왔던 것이다. 교환함으로써 한 농가가 보관하는 품종의 수는 많아진다. 북부 라오스의 화전을 영위하던 50채 정도의 마을에서는 20가지 가까운품종을 보관하고 재배하고 있었다. 그들 품종은 수확 시기와 용도가 각각 달랐다. 농민이 수확 시기를 다르게 함으로써 가뭄 등의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 한 농가가 자가채종하고 재배에 이용하는 여러 품종을 게속 유지하고 있는 것은 라오스 북부만이 아니라, 윈난과 술라웨시의 전통적 농업을 경영하고 있는 곳에서는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적은 품종 수에 구애되지 않고 때로는 교환하여 여러 품종을 보유하며 재배해 왔던 것은 병충해의 발생과 기후의 변동에 의한 피해를 최소한도로 그치게 하는 '장치'라고 해석된다.




재배 벼 품종의 교체와 섞어심기


이미 기술했듯이 일본에서는 한 농가가 재배하는 벼 품종은 농협 등이 장려하는 한 품종 뿐인 경우가 많다. 게다가 지역과 현 단위에서도 장려되고 있는 소수의 제한된 품종을 재배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 농업을 경영하는 농가는 여러 해, 길어도 3년 이상 똑같은 품종을 똑같은 논에서 재배하는 일은 적으며, 2-3년마다 품종을 교체한다. 밭과 달리 논에서는 이어짓기에 의해 증가하는 토양선충 등의 발생과 생육 억제물질의 집적 등이 관개용수에의해 방지된다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전통적 벼농사를 경영하는 농민에게서는 "똑같은 벼 품종을 여러 해 똑같은 논에서 재배하면 수확량이 저하된다"는 화답이 자주 돌아왔다. 그들은 똑같은 벼 품종을 똑같은 논에 2년이나 3년 계속하여 심는 일은 하지 않는다. 더구나 한 배미의 논에 여러 벼 품종을 재배하는 일도 행하고 있었다. 라오스 북부의 천수답에서는 맛이 좋지만 볏짚이 약하여 쓰러지기 쉬운 벼 품종과 맛은 별로지만 볏짚이 강하여 쓰러지지 않는 벼 품종을 섞어심어서 수확량을 확보할 수 있다고 농민이 섞어심기의 이유를 이야기했다. 하나의 벼 품종에 구애되지 않고 논에 재배하는 품종을 교체하여 재배하며, 때로는 여러 품종을 한 논에서 섞어심기해 온 것은 이어짓기에 의한 병충해의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고, 수확량의 저하를 방지하는 '장치'라고 해석된다.




저수지는 양분의 저장고


일본에서는 도시화가 진행된 점, 관개설비가 정비된 점, 수난 사고 방지 등의 이유로 '저수지'가 뚜렷이 감소하고있다. 전통적 농업이 경영되는 천수답과 산 표면에 정연하게 만들어진 다락논에서는 저수지가 곳곳에 있다. 저수지는 인가가 늘어서 있는 마을과 논의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 많다. 이 저수지에는 휴경 기간에 산에서 흘러나온 물과 가정 하수에 포함되어 있는 양분이 잠시 저장된다. 저수지에서 자라는 물풀, 그 물폴에 모이는 물벼록과 저수지에 모이는 곤충 등의 소동물을 먹이로 삼는 물고기, 그 물고기를 찾아 모이는 새가 저수지에 흘러오는 양분의 저장 역할을 떠맡고 있다.


저수지에는 산림에 내리 쏟아진 빗물에 의해 부엽토의 양분이 용출되고, 양분을 머금은 빗물은 골짜기 물이 되어흘러 들어온다. 인가에서 나오는 가정 하수도 저수지에 흘러 들어온다. 저수지를 덮은 붉은 개구리밥과 물풀에는질소고정력을 가진 미생물이 공생하여 질소 양분이 되는 암모니아를 산출한다. 또 조류에 물벼룩 등의 소동물이 모이고, 그들을 먹는 작은 물고기가 헤엄쳐 다닌다. 게다가 저수지에 날아오는 곤충의 사체와 작은 물고기를 찾아 날아오는 새들이 배출하는 분뇨는 인과 질소 등의 양분을 포함하며 저수지에 저장된다. 그처럼 여러 가지 모양으로 저장된 양분을 함유한 저수지의 물은 필요에 응하여 관개용수로 논에 공급된다. 동남아시아의 전통적 농업이 경영되는 지역의 저수지는 단순히 관개용수의 공급만이 아니라 논으로 양분을 공급하기 위한 '장치'라고 해석된다. 




제초도 담당하는 논의 물고기 양식


일본에서는 화학 제초제를 사용하지 않는 방법으로 잡종 오리를 논에 풀어놓는 방법이 환경에 좋은 농법으로 주목받고 있다. 앞에 기술한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의 토라자와 마마사의 다락논에서는 농민이 논에서 벼의 재배와 동시에 물고기를 양식한다. 이 물고기는 논의 제초 역할도 담당하고 있다. 논에서 하는 물고기의 양식은 논의 제초와 양분의 공급을 담당하는 '장치'라고 해석된다.




낭비가 없는 양분의 순환


근대 농업에서는 수확한 작물의 먹을 수 있는 부분 이외에 포함되는 질소 양분은 소각에 의하여 대기 질소가 되어 방출한다. 먹을 수 있는 부분에 포함되는 질소 양분도 체내에서 소화되어 분뇨로 된 뒤, 하수와 그곳에 집적된 오니의 소각에 의하여 대기 질소가 되어 방출된다. 방출된 대기 질소에서는 전기 방전에 의해 질소비료 성분인 암모니아를 제조하여 농경에 사용하고 있다. 인에 관해서도 오수 처리를 거쳐 하천과 바다에 방출된다. 사용한 인 비료는 고대의 동식물과 미생물이 기원인 인 광석으로 만들어 공급하고 있다. 근대 농업에서는 농경에 쓰이는작물의 양분을 농경지 밖에서 가지고 들어와 사용하고 있다. 비료의 제조와 수송에 석유 등의 화석연료가 사용된다.


전통적 농업에서는 수확한 작물의 먹을 수 있는 부분 이외의 잔여물은 소와 돼지와 닭 등의 먹이나, 그들의 분뇨를 이용하여 만드는 외양간두엄으로 돌린다. 농경지에 남았던 작물 잔여물도 소와 돼지 등의 먹이가 되고, 농경지에 배출된 분뇨에 포함된 양분은 다음 작물의 재배에 이용된다. 더구나 사람들이 먹은 먹을 수 있는 부분에 포함되는 양분도 배출된 분뇨를 '거름통'에서 일정 기간 숙성하고, 거름으로 작물 재배에 이용한다. 작물 잔여물과 가축과 인간의 분뇨를 이용하는 건 작물의 수확량을 유지하기 위하여 필수인 양분을 화석연료에 의존하지 않고 농경지를 포함한 생활권 안에서 낭비 없이 순환시킬 수 있는 '장치'라고 해석된다.




산림이 작물을 키운다


전통적 농업에서는 농경지를 둘러싼 산림을 뺴놓을 수 없다. 굴 양식 등의 연안 어업은 연안에 흘러 들어오는 하천의 유역을 둘러싼 산림이 건강히 보전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된다. 그 중요성으로부터 연안 어업을 함양하는 산림은 '어부림'이라 부른다. 지속가능한 전통적인 농경을 함양하는 숲은 '농경림'이라고도 부르는 것이 적당하겠다. 농경림은 농경지에서 가지고 나온 양분의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수목은 작물이 흡수할수 없는 땅속의 인산조차도 균근균 등의 작용을 얻어 흡수한다. 게다가 숲에 모이는 작은 새와 동물이 배출하는 분뇨에 포함되는 질소와 인은 수목의 가지와 잎에 집적된다. 그리고 말라 떨어진 가지와 잎은 동물과 작은 새의 분뇨도 포함하며 부엽토가 된다. 부엽토에 집적된 양분은 농경지에 운반되어 작물 재배에 이용된다.


곧, 작물 재배에 빠질 수 없는 인과 질소 등의 양분을 공급하는 근원인 '농경림'은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전통적인 농업의 '장치'라고 해석된다.




農과 食을 통하여 물질순환을 인식하다 


전통적 농업에서 행하는 작물 재배의 양분이 되는 질소와 인산과 칼륨 등의 원소 대부분은 농경지 및 재배된 작물을 먹고 있는 사람들의 마을을 둘러싼 산림을 포함시킨 범위 안에서 순환하고 있다. 또한 그 양분 원소의 순환에 걸리는 시간은 작물을 먹는 사람들의 생존 기간보다도 짧다. 전통적 농업에 비교하여 근대 농업에서는 화학비료에 포함되는 대부분의 양분 원소의 순환은 농민과 소비자의 생활권 밖에까지 미치고, 순환에 걸리는 시간은 사람들의 생존 기간을 넘어 버린다. 그리고 우리 인간이 다른 지구의 생물과 마찬가지로, 양분이 되는 원소의 순환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의식 안에서부터 없애 버리고 있다.


그와 같은 시대인 만큼, 인간도 포함하여 우리 생물의 생존을 위하여 빼놓을 수 없는 양분 원소의 순환을 인식할 수 있는 범위에 멈추어 두는 일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지역에서 산출한 농산물을 지역에서 소비하는, 이른바 '지산지소'는 인간 자신이 생물이며, 생물로서 원소의 순환 안에 존재하며 살아간다는 것까지 인식시켜주는, 계기가되지는 않을까? 농경지의 순환을 보전하고, 산림을 보호하는 일로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 먹을거리를 소중히 여기고 먹고 남기는 것까지 꺼리는 전통적 농업의 '장치'라고 해석된다.






아시아의 전통적 농업에서 본 지속가능성


리비히가 본 인본 농업의 지속가능성


'무기영양설'을 제창하고 오늘날의 근대 농업을 키운 리비히가 그 저서 <화학의 농업 및 생리학에 대한 응용>에서 일본의 농업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산이 많고, 최대 국토의 절반밖에 경작할 수 없지만, 주민수는 대영제국보다도 많은 섬 제국 일본은 초지도, 구아노와 골분, 칠레 초석의 수입도 없이 주민의 온갖 영양을 완전히 생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국 이후 매년 적지 않은 양의 생산물자까지 수출하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농업은 경험과 관찰에 인도되어 토지를 영구히 비옥하게 유지하고, 그 수확성을 인구의 증가에 맞추어 높여 가는데에 적합한, 비길 데 없는 농법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 농업의 기본은 토양으로부터 수확물로 가지고 나온 모든 식물 양분을 완전히 상환하는 데에 있다. 일본의 농민은 돌려짓기의 강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가장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농사지을 뿐이다. 그 토지의 수확물은 지력의 이자인 것이고, 이 이자를 산출하는 자본에 손을 대는 일은 결코 없다."고 기술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자란 농경지의 예금인 비옥도의 이자이다. 곧, 19세기 초의 일본과 중국에서는 농경지의 비옥도를 지속할 수 있는 농법이 영위되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더구나 비옥도를 계속 보전하는 규범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며 놀라움을 나타낸다. "가장 경탄할 만한 건 이들 나라에서 오랜 번영 상태가 주로 제사 및 강한 종교적 형률과의 결합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인의 '신'은 본래의 의미로는 '가래'이다."


리비히가 170년이나 전에 농경지의 비옥도를 지속적으로 계속 보전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경제와 노동의 효율이 아니라 농업과 결합된 정신문화의 확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점이다.




킹이 본 동아시아 농업의 지속가능성


미국의 토양수와 지하수의 유동, 관개 및 배수 공학 등의 토양물리학 분야의 권위자였던 토양학자 프랭클린 히람킹은 100년 전인 1909년에 6개월에 걸쳐 중국과 조선, 일본의 농업을 시찰한다. 킹 박사는 귀국한 뒤 1911년 <동아시아 4천년의 영속 농업>(한국에선 4천년의 농부로 번역 출간)이라 제목을 붙인 책을 쓴다. 그 저서 안에서자신의 나라인 미국에서 전개된 신대륙형 농업이 토양의 비옥도를 소모만 시켜 지속가능성이 사라진다는 것을 100년 전에 이미 지적한다. 그리고 12장 '동양의 벼농사에 대하여'에서 그는 "벼를 주작물로 선택해 풍부한 빗물이 가져오는 관개, 배수의 통합 체계를 정비하고, 그것을 유지하여 다모작의 체계를 구축하며, 콩과작물을 널리 또 장기에 걸쳐서 게속 이용하고, 토양 부식과 퇴비의 공급원으로 녹비를 돌리짓기 안에 포함시키며, 온갖 폐기물을 경건할 정도로 충실하게 농지에 돌려주고, 작물이 가지고 나온 양분을 보급한다. 이런 일은 동아시아의 농민이 지속가능한 농업의 필수조건과 기본원리를 파악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유럽과 미국의 여러 나라의 국민들이 재고하게 만든다."라고 논술한다. 


킹이 100년 전에 미국 농업의 지속가능성의 상실을 우려하고, 아시아의 벼농사를 중심으로 한 농경의 지속가능성을 양분 원소 순환의 '장치'라는 측면에서 평가하는 것은 흥미로운 점이다.




하워드가 본 아시아의 전통적 농업


하워드는 저서 <농업성전>에서 농업의 생산 체계를 (1)원시시대의 산림과 대초원, 해양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궁극의 생산자인 자연에 의한 생산, (2)멸망한 민족의 농업, (3)서양과학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동양(아시아)의 전통적인 농업, (4)이 100년 동안 많은 과학의 힘이 주입된 유럽과 북아메리카 같은 지역에서 일반화되어 있는 농법이란 네 가지로 분류한다. 


그들 중에서 아시아의 전통적 농업의 특징으로, 안정적인 소농 형태인 점, 식용과 사료용 작물의 재배가 압도적인 점, 섞어짓기가 일반 원칙인 점, 가축과 농작물의 균형이 늘 유지되고 있는 점, 밭농사에서 콩과작물 재배가 일반적인 점, 끝이 쇠인 목제의 괭이로 얕이갈이하는 점, 쌀은 어떠한 때라도 가능하면 재배하는 점, 충분한 노동력이 공급되는 점을 열거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인도와 중국의 전통적 농업은 몇 세기 전부터 행해져 왔으며, 중국의 농경지는 4000년이 지났어도 지력을 잃지 않았다고도 기술한다. 


아시아의 전통적 농업을 조사한 그는 "농경에서도 생명의 순환, 곧 생장(통합)과 부식(분해)라는 두 가지 과정의균형이 중요하다"고 논술한다. 게다가 "생산에 따라 부식의 소모와 폐기물 환원의 균형이 잡힌 지역에서는 농업 생산 체계는 안정화되고, 지력은 저하되지 않았다."라고 기술한다. 그리고 "지력이란 수확량, 양질, 내병성 등 생장 작용을 민첩, 원활, 효율적으로 촉진하는 부식으로 풍부한 토양의 상태이다"라고도 기술한다. 1938년에 발표된 왁스먼Waksman의 논문을 인용하여 "부식이란 토양, 퇴비, 웅덩이 등의 호기성, 혐기성 조건에서 미생물에 의한 동식물성 잔재의 분해 중에 생성된 갈색 또는 어두운 색의 비결정성 복합물질이다. 부식은 식물, 동물, 미생물의 요소로 이루어진 복합체이다."라고 기록한다. 하워드가 아시아의 농업을 시찰한 뒤에 병충해 저항성의 '장치'에 대하여 고찰하고 있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위에 기술한 유럽과 미국의 연구자들의 논술은 지속가능한 농업을 구축하는 데에 높은 생산성을 유지해 온 아시아의 전통적 농업을 경지 생태계에서 이루어지는 물질 순환 및 생물다양성,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란 측면에서 재검증하는 일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일본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철이 없어진 농작물이 식량 생산의 지속가능성을 위태롭게 한다


한여름에 감귤을 먹을 때마다 떠올리는 '천냥千兩 감귤'이란 제목의 만담이 있다. 에도 시대의 어느 여름에 병에 걸린 큰 상점의 도련님이 "감귤을 먹고 싶다"고 말한다. 아낌없이 돈을 쓰는 주인은 지배인을 심부름 보내어 한  감귤 도매상의 창고 안에서 겨우 하나의 썩지 않은 감귤을 천냥을 주고 구한다. 도련님에게서 사례를 건네받은 한 알의 감귤을 손에 든 지배인은 생각했다. "천냥의 감귤, 이 알이 백냥인가, 일생 일해도 나에게 백냥은 무리다, 이것만 있으면, 평생 즐기며 살 수 있다." 지배인은 한 알의 감귤을 쥐고서 가게를 떠나 버렸다. 이 만담, 우리에게 과연 웃긴가? 우리도 도련님과 주인과 지배인과 마찬가지로 환경부하라는 큰 대가를 치르며 계절에 관계 없이 먹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무렵, 여름에는 역의 홈에서 '냉동 감귤'을 팔고 있었다. 그 냉동 감귤을 차가움을 참고서 껍질을 벗기고, 입에 넣고 먹는 것이 '여름 여행의 추억'이기도 했다. '냉동 감귤'은 여름이 감귤의 계절이 아닌 점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 무렵은 딸기와 배 등의 과일만이 아니라, 오이와 토마토 등 채소에도 각각의 계절이 있었다. 그리고 먹을거리의 기억은 자연의 은혜로서 각각 제철과 함께 추억으로 남아 있다. 


이 추억은 우리들이 인간으로서 게절을 순환하는 자연계 안에 안겨 있으며, 계절의 은혜를 먹고 살아간다는 것을 인식시켜 준다. 먹을거리는 자연계에서 온 계절의 은혜라는 인식이,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의 지속가능성을 유지하는 '장치'로서 필요하지는 않을까?




농작물의 상표화가 식량 생산의 지속가능성을 위태롭게 한다


쌀에서도, 고기에서도, 과일에서도, 최근에는 상표가 유행이다. 요즘 농산물의 상표화는 농업의 활성화를 도모하는 방법으로 퍼지고 있다. 상표의 기준은 주로 맛있다는 보증에 있다. 맛있는 것만이 아니라, 상자 포장하여 운반하기 쉬운 것, 모양이 가지런한 것, 악취가 없는 것 등이 상표화를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때로는 가짜 상표가 나돌면 DNA 감정서의 보증이 위세를 떨친다.


그러나 상표화의 추진은 농업의 지속가능성을 위태롭게 하는 것이 아닐까? DNA 감정서의 보증에 의해 상표가 된 농산물은 혈통서가 딸린 반려동물과 마찬가지로 잡종, 곧 유전적 다양성이 풍부한 반려동물에 비교하여 병에 약한 것은 아닐까? 작물의 병충해는 대규모 단작에서 발생하기 쉽다고 알려져 있다. 몇 백 년 또는 몇 천 년에 걸쳐 전통적 농업이 경영해 온 논에서는 용도와 수확기를 다르게 하는 다수의 벼 품종이 재배되고, 수확량이 떨어진 품종은 다른 품종으로 바꾸어 놓아 유전적 다양성이 확보된다. 화학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풍부한 유전적 다양성을 계속 유지하는 농업이야말로 병충해에 의한 막대한 피해 없이 지속적인 수확이 가능하게 했던 '장치'는 아니었을까?






마치며

 

21세기 중반에 세계 인구는 100억 명이 이를 것이라 추산되고 있다. 인구 증가의 대부분은 열대지역, 특히 아시아의 개발도상국에서 뚜렷하다. 아시아 지역에서 경영되어 온 전통적 농업을 단순히 회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시점에서 증가하는 인구를 부양하는 농경의 지속가능성을 다시 돌아보기 위한 대상으로 다루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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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5




기고5

현대에 화전의 의의를 생각한다

에가시라 히로마사江頭宏昌






시작하며


화전은 경작과 휴한을 반복하고, 휴한에서 경작으로 이행할 때 불놓기를 수반하는 순환적인 농법이다. 현재는 동남아시아, 남미 아마존 지역,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지만, 예전에는 열대에 국한하지 않고 광범위한 지역에서 행해졌다. 휴한의 형태로는 산림이 기본이지만, 지역에 따라 떨기나무, 사바나, 초지인 경우도 있다.


불놓기 이후는 1년에서 몇 년의 기간에 똑같은 밭에서 해마다 다른 작물을 재배하는 '돌려짓기'를 행하고, 휴한에 수반하여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이 특징이다. 더구나 휴한할 때 지력의 회복을 위해서는 비료를 넣거나 하지 않고, 기본적으로는 자연의 천이에 의존하는 것도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휴한할 때는 단지 지력의 회복을 기다리는 것만이 아니라, 아시아에서는 휴한지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예가 많다. 예를 들면, 중국 윈난 지방과 일본(尹 2000, 川野 2004)에서는 산나물, 버섯, 과일 등의 풍부한 식물자원을채집하는 장으로 이용되어 왔다. 또한 지력 회복을 축진할 목적으로 질소고정을 행하는 빵나무를 심거나(上山 외1996), 라오스에서는 화전 이후의 2차림으로 생육하는 안식향나무(Styrax tonkinense)에서 안식향을 채집하거나, 베트남 북부에서는 같은 수종을 펄프용으로 심거나 하고 있다(竹田 2001). 현대와 근대의 일본에서도 경제적 가치가 높은 삼나무, 오동나무, 삼지닥나무, 뽕나무, 차나무, 또 숯용으로 너도밤나무, 주목, 벚나무 등을 심어 이용해 왔다(野本 1984). 이처럼 화전 농법은 경작지만이 아니라, 휴한지에서도 사람들에게 풍부한 헤택을 가져왔던 것이다.




화전은 산림 파괴의 원흉인가?


최근 화전은 산림 파괴와 지구온난화의 원흉이라고 이야기되는 일이 있다. 세계 각지에서 일어난 최근 10년의 산림 감소 면적을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자료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1에 나타내 보았다. 세계의 산림 면적은 2007년 현재, 약 39억4000만 헥타르인데, 최근 10년 약 8000만 헥타르가 감소했다. 연평균으로 따지면 800만 헥타르 이하이며, 일본의 전 산림 면적의 3배 이상이 해마다 소실되고 있는 것이다. 그 감소의 대부분은 남미,아프리카, 동남아시아에서 기인하고, 화전이 활발히 행해지고 있는 지역과 일치한다.


그림1 세계 각지에서 최근 10년(1997-2007) 산림 감소 면적(FAO의 자료에서 저자가 작성).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동남아시아의 그래프 합계값이 세계의 합계값을 넘어 버리는 것은 통계 자료에 추정값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으로, 그 쌓는 방법에서 생긴 오차일 것이다.





이러한 산림 감소의 원인은 무엇인가? 산림종합연구소(2009)에 의하면, 산림 벌채 뒤의 토지이용 전환이 주된 원인이라고 하고, 그중에서도 화전이 전환 용도 전체의 45%를 차지한다고 한다. 화전이 대규모로 산림을 감소시키고 있는 결과를 부르고 있는 것은 왜일까?


히로세廣瀨(1997)는 산림 파괴의 원흉이 되고 있는 화전의 유형이 있다고 설명한다. 곧, 큐마久馬(1989)가 분류하고 있는 화전의 유형으로, ①단기 작부-장기 휴한, ②단기 작부-단기 휴한, ③장기 작부-초장기 휴한 또는 방기의 세 가지가 있다고 기술하고, "①은 경작 집약도의 R값이 30% 이하의 산림 휴한형으로 습윤열대의 자연에 잘 적응한 안정적인 농경 형태이다. 그러나 이 조건에서 인구가 증가하면 작부 기간이 장기화하는데, 휴한 기간이 단축되어 R값이 상승하고, 토양의 열화가 일어난다. ③의 방식은 산림 파괴의 원흉이라고 이야기되는 것으로, 화전 이동 경작과는 무관한 것이며, 방기지에서는 이미 산림은 재생하지 않는다."라고 한다. 즉, 인구 증가에서 기인하여 ③의 화전이 산림 파괴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요코야마橫山(2004) 및 아라하타荒畑(1993)도 이에 대하여똑같은 지적을 하고 있다.


요코야마(2004)는 인구 증가에 더하여 빈곤도 산림을 파괴하는 원인이 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인간이 살아 가는데에는 식량을 생산해야 하는데, 빈곤층은 토지소유가 명확한 평지에 농지를 구할 수 없어 소유가 불명료한 산림지대, 대부분은 원생림에 들어가 농지를 개척한다. 그들의 농법은 토지가 열화하면 새로운 다른 산림으로 이동하게 되는 '무질서 개간'이며, 장기 휴한을 가진 전통적인 화전과는 전혀 달라 주의를 요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즉,히로세(1997)의 ③장기 작부-초장기 휴한 또는 방기의 화전이 이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산림 재생을 전제로 하지 않고 산림을 사용하고 버리는 상황이 발생하면, 빈곤층에 국한되지 않고 지금까지 전통적인 화전을 경영해 왔던 농민들도 앞으로 행할 가능성이 있다. 산림종합연구소(2009)도 기술하듯이, 산림 파괴는 화전에 의하여 일어나는 단순한 일이 아니라, 근본적인 요인으로 빈곤과 인구 증가, 분쟁 등과 같은 사회적, 경제적 요인, 나아가 이상기후와 같은 자연적 요인도 포함하여 복합적으로 관여하여 일어나고 있다.





화전이 그곳에서 영위되어 왔다는 의미


타카하시(1984)는 예를 들면 동남아시아의 화전을 상전화常畑化하려고 할 때에는 스콜성 강한 비에 대한 토양침식의 방지대책이 빠질 수 없으며, 화전의 과정에는 토양침식을 저지하는 여러 가지 지혜가 발견된다고 한다. 화전에서는 일반적으로 쟁기질을 행하지 않고, 구멍에 파종하는 것이 겉흙의 파괴를 줄이는 일로 이어진다. 또한 수목을 베어낸 그루나 지표를 그물눈처럼 기는 뿌리가 토양의 유실을 방해하는 효과를 지닌다. 게다가 화전에서 작물을 재배할 때에는 여러 종의 작물을 사이짓기·섞어짓기하는 일이 많은데, 이것도 땅을 덮는 조건을 확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이처럼 동남아시아에서는 화전의 전통적인 관행이 토양침식을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되고, 단순히 상전화를 진행하면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다만 인도네시아의 서수마트라에서 행한 조사(上堂 외 2002)에서는 '화전(라단)은 침식을 일부 가속하지만, 동시에 논으로 토양이 퇴적되도록 촉진하기에 필요'하다는 인식을 주민이 가지고 있는 사례도 있다.


요코야마(2004)는 "열대, 아열대 지역에서는 양분의 대부분은 지상의 식물(주로 수목)에 의하여 쌓이고, 토양 자체의 양분은 매우 적다. 따라서 토양에 환원하기 위해서 숲에 불을 놓는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큐마(1989)에 의하면, 아프리카 대부분의 지역은 반건조 조건에 있기 때문에 휴한기는 산림이 재생하지 않고, 사바나와 초원이 된다. 또한 대부분의 토양은 비옥도가 낮은 좋지 않은 토양이다. 이와 같이 아프리카는 다른대륙에 비하여 몹시 조건이 열악한데, "비옥도가 낮고 구조가 불안정한 열대의 토양을 생태적으로 큰 충격을 주지 않고 이용하기 위한 거의 유일한 방법이 화전밖에 없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열대 지역에서 화전이 계속되고 있는 이유의 하나로, 화전 농법밖에 선택할 수 없다는 자연제약의 이유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전통적인 화전의 지혜


(1) 화전 적합지를 선택

전통적인 화전을 행해 온 사람들에게 화전 적합지란 어떤 것일까? 화전에서 작물을 재배하는 일을 전제로 하는 이상, 작물의 생육이 좋아지는 장소라는 것이 전제일 것이다. 지형과 일조 조건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조건은 지력이다. 지력에 관계하는 것은 흙속에서 물, 미생물과 그것을 기르는 유기물, 작물이 직접 이용할 수 있는 양분이다.


먼저 산지 경사면에서 왜 풀 베는 장소, 화전, 계단밭, 다락논의 사용 분류가 생겼는지에 대하여 지질과 물 조건의 관계를 고찰한 흥미로운 논고(早川 1981)이 있다. 결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다락논, 계단밭으로 이용되는 것은 약간이지만 물이 있는 장소로서, 물의 공급은 지력의 향상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다락논의 성립에는 상부에서의 물 공급이 필수조건으로, 단층 파쇄대 등의 샘을 이용할 수 있고, 토양의 하층에 불투수층(점판암과 이판암)이 있는 장소가 필요하다. 계단밭은 다락논 적합지의 주변으로 습도가 높고 지력이풍부하다. 


화전과 풀 베는 장소는 계단밭보다도 습도가 낮지만, 화전은 풀 베는 장소 적합지보다도 조금 습도가 높은 산림 적합지가 사용된다. 풀 베는 장소는 투수성이 높은 석회암 대지와 화산 경사면에 발달하고, 비가 많이 내리면서 유효한 물이 부족하고 수목 생육이 곤란한 장소에 해당된다. 예를 들면 아소와 코코노에九重의 풀 베는 장소는 투수성이 큰 지대에서 밭으로서의 지력을 갖지 못한다. 2차대전 이후 들어가서 그 경지화를 시도했지만, 그 대부분은 다시 초원이 되었다고 하야카와는 기술하고 있다. 요컨대, 화전으로 사용된 장소는 산간지 경사면에서 논으로도 계단밭으로도 적합하지 않지만, 약간 건조한 산림 적합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산림 적합지라고 하더라도 꼼꼼하게 비옥도를 확인하는 일은 역시 어렵다. 일본에서는 예전부터 식생의 종류로 비옥도를 판단해 왔다. 예를 들면 오리나무, 전나무, 조릿대, 엉겅퀴 등이 생육하고 있는 장소는 토지가 비옥하다고 하며, 그러한 장소는 적극적으로 화전으로 이용되어 왔다.



(2) 불 놓기의 효용

화전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은 불 놓기이다. 불 놓기의 효용에는 밭으로 삼는 공간을 여는 일, 비료를 만들어내는 일, 잡초와 병충해를 방제하는 일, 일부 작물에서는 불 놓기의 남은 열을 이용하여 발아를 촉진하는 일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작물의 성장에 필요한 비료를 생성한다는 의미가 가장 크다(그림2).


그림2 순무의 생육에 미치는 불 놓기의 효과(츠루오카시鶴岡市 후지사와藤沢에서 필자 등이 실험을 행한 촬영). 밭의 오른쪽 절반은 불을 놓고, 왼쪽 절반은 불을 놓지 않은 재배실험구. 2008년 8월9일에 불을 놓고, 같은 달 12일에 전면에 똑같은 종자를 심어, 9월29일에 촬영했다. 불 놓기가 순무의 생육을 촉진하는 것은 일목요연하다.




작물을 재배하는 데에 비료가 되는 질소, 인산, 칼륨이라는 3대 영양소는 빼놓을 수 없다. 통상 사용되는 질소화학비료는 공기 중의 질소에서 화학적으로 합성하여 만들어서, 그때 화석연료와 전기 에너지가 대량으로 소비된다. 또한 인산 화학비료는 인광석으로 만들고 있는데, 일본에 인 광석 자원은 없기 때문에 전면적으로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인 광석 자원은 세계적으로 고갈되어 가고 있어, 2009년 5월의 가격이 2006년 1월의 가격보다 2배 이상 급등함과 함께, 가까운 장래 수입할 수 없게 될 우려가 있다. 현재의 일본 농업의 기반은 이와같은 불안정한 해외의 자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은 산림에 있는 수목과 풀은 물론, 지표를 덮고 있는 부엽토 등의 유기물 안에는 이 질소, 인산, 칼륨이 대량으로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대로는 작물이 직접 이용할 수 없는 것이다. 보통은 곤충과 지렁이 등 작은 동물, 곰팡이와 박테리아 등의 미생물이 이러한 유기물을 먹고서 질소, 인산, 칼륨을 이온 형태로 변화시킨 것(무기화)이 물에 녹아 식물이 뿌리에서 흡수하여 비로소 영양으로 이용된다. 따라서 산림의 이러한 질소, 인산, 칼륨을 할 수 있는 한 빠르게 식물의 영양으로 바꾸고 싶다고 생각하면, 미생물 등의 힘을 빌려 퇴비로 만들든지, 불 놓기를 행하게 된다. 가장 속효성이 있는 건 후자이다.


그런데 화전에서는 "재가 유일한 거름이 된다"와 같은 말이 자주 이야기되는데, 그것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재의 주성분은 칼슘, 칼륨, 마그네슘 등의 미네랄이다. 그들은 모두 식물에 필수 영양소이지만, 3대 영양소 중에서 재로는 칼륨만 공급할 수 있다.


그럼 나머지 질소와 인산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일찍이 필자 등이 2004, 2005년에 행한 실험에서 삼나무의 줄기잎을 태운 화전땅에서 채취한 겉흙에는 불 놓기 전에 비교하여 암모니아태 질소가 10배, 인산이 3배, 칼륨은 6배가 되어 있었다. 질소와 인산은 흙의 유기물이 불꽃의 열로 분해되어 생성되는 것이다.


식물이 이용할 수 있는 질소의 형태에는 암모니아태와 질산태가 있는데, 불 놓기 이후에 그 둘이 증가하는 것이 여러 연구자에 의하여 보고되고 있다. 다만 필자가 관찰한 바로는 화력의 세기에 따르기도 할 텐데, 보통은 먼저 암모니아태 질소가 생성된다. 질산태 질소는 유기물 안의 질소가 화력이 센 불꽃으로 직접 산화되어 생기는 일도있지만, 대부분은 대기 중으로 날아가 버린다. 그 증거로 야마자키현의 화전을 행하는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흙이너무 불탄 장소는 작물의 생육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불 놓기 이후에 늘어나는 질산태 질소의 대부분은 질산균이 불 놓기로 생긴 암모니아태 질소를 사용하고 나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론 화력이 너무 강하면 질소, 인산, 칼륨의 생성이 부족해진다. 너무 강하지 않고, 너무 약하지 않으며, 알맞은정도의 불 조절이 좋은 것이다.


또한 우주왕복선의 기체에 붙어 있는 세라믹이 대기권에 돌입할 대의 열을 차단하듯이 화전의 불 놓기에서도 겉흙이 열을 차단하여 지표에서 불과 몇 센티미터 아래는 상온이 유지되며, 미생물과 곤충도 생존할 수 있다. 한편,불 놓기에 의하여 병해충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다고 하는 것은 아마 대부분의 병해충 생식 영역이 겉흙 부근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불 놓기에 의하여 생성된 재는 물에 녹으면 강알칼리성을 나타내기에, 알칼리성에 강한 누룩균 같은 것은 예외로 하고, 대부분의 미생물은 사멸한다. 그러나 살아남은 미생물은 불 놓기로 대량으로 생성된 무기영양분을 집어먹고 불 놓기 전보다 늘어나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도 알려져 있다.


블 놓기의 효용으로 또 하나, 작물의 발아 촉진이 있다는 것을 소개하려 한다. 야마가타현 츠루오카시의 토종 순무의 하나인 '아츠미溫海 순무'는 적어도 330년 이상 전통적으로 화전에서 재배되어 온 순무이다. 그 재배자들의 구전에 "재가 뜨끈한 동안에 씨를 심는다"고 하는 것이 있다. 재가 뜨끈한 동안에 씨앗을 심는 쪽이 발아가 잘되고 모가 잘 산다고 한다. 그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씨앗에 일정 시간, 일정 온도를 가하여 축축한 종이를 깐 샬레에서 발아시키는 실험을 야마가타현 안팎의 순무를 몇 종류 사용해 행했다. 그 결과, '아츠미 순무'에서만 흥미로운 결과를 볼 수 있었다. 가열하지 않은 대조구의 씨앗은 50% 정도만 발아했는데, 70-80도로 10분 동안 가열하여 심으면 90% 이상 발아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휴면성이 있다고 이야기되는 순무의 씨앗 중에서도 아츠미 순무의 휴면성은 비교적 깊고, 채종 이후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휴면이 깨어나지 않지만 불 놓기의 잔열을 이용하면 휴면이 풀려 기세 좋게 발아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으로, 카와노 카즈아키川野和昭 씨(2001)는 에도 시대의 카에이嘉永 연간(1841-1853)에 아마미오시마奄美大島에서 행해지고 있던 대나무 화전의 일을 기록한 <남도잡화南島雜話>에, 불타는 대나무에 조의 씨앗을 뿌리는 남자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것을 소개하고 있다. 불 놓기의 열을 이용한 씨뿌리기는 순무와 조 이외에도 있을지도 모른다.


(3) 쟁기질할까, 하지 않을까

야마가타현의 화전에서는 첫해에 순무의 씨를 심는다. 그 직후, 쟁기질의 유무에 대하여 현의 지역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 츠루오카시 토종 '아츠미 순무'는 종자를 재 위에 흩뿌리기만 하고 전혀 쟁기질은 하지 않는다. 한편,같은 시 안의 '호야宝谷 순무'와 오바나자와시尾花沢市의 '고보노牛房野 순무'는 파종 이후에 괭이로 씨앗과 재를 함께 갈아서 뒤섞는 일을 한다. 어째서 이와 같은 차이가 있는 것일까? 


동남아시아의 화전처럼 스콜성 비가 내리기 쉬운 곳에서는 겉흙의 유실이 우려되기에 겉흙은 할 수 있는 한 교란시키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이 철칙이다. '아츠미 순무'의 재배법도 그 흐름을 이어받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대체 '아츠미 순무'의 파종이 행해지는 곳은 흙에 모래와 자갈이 포함된 장소가 많기(그림3) 때문에, 겉흙의 유실을 방지하는 일이 주된 목적은 아닐 것 같다. 도대체 갈고 싶어도 괭이의 날이 지면에 들어가지 않는다.무 같은 긴 순무라면 생육조차 어려울 테지만, '아츠미 순무'는 둥근 순무이기에 꽁무니에서 뻗어나온 수염뿌리로 모래와 자갈 아래의 양분을 흡수하면서 묵직하게 모래와 자갈 위에 앉은 모양으로 생육한다. 토양의 종류에 따라서 재배되는 순무의 모양도 선택되어 왔을 것이다.


그림3 자갈을 포함한 화전의 토양에서 생육하는 '아츠미 순무'의 싹이 틈



'고보노 순무'의 재배자에게 이야기를 들으면, "가뭄이 드는 해 만큼 깊게 갈아라"라고 할아버지에게 배웠다고 한다. 밭을 조금 파 보면 알겠지만, 건조한 해라도 5센티미터만 파면 대부분 조금은 습기를 머금고 있다. 순무는 이약간의 습기에도 싹이 틀 수 있다. 어느 정도 깊게 갈지를 잘 관찰하면, 괭이의 날은 10센티미터 이상 지하로 들어간다. 순무 씨앗의 지름은 기껏 1밀리미터이기에, 씨앗 지름의 100배 깊이에 잠기는 셈이다. 그래서 정말로 발아할 수 있을지 하고 생각한다면, 발아는 물론 그해도 예년처럼 완전한 순무를 수확할 수 있다.


그래서 생각한 건, 순무는 깊이 심어도 견디고 발아하는 성질, 즉 심파(깊이 파종) 저항성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야마가타현 안의 화전에서 재배되어 온 토종 순무 몇 종류의 심파 저항성을 조사한 바, 대부분의 순무는 10센티미터 정도의 깊은 파종에 견디는데, 아츠미 순무만 깊이 파종에 견디지 못한다는 걸 알아냈다. 즉, 쟁기질할지 하지 않을지는 가뭄의 정도와 순무 자체의 깊이 파종 저항성의 세기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4) 일본의 화전에서 보는 돌려짓기의 지혜

야마가타현에서는 츠루오카시 아츠미, 타가와田川, 후지사와藤沢, 호야 지구, 오바나자와시 고보노 지구에서 현재도 화전이 행해지고 있다. 8월마다 불 놓기를 행한 뒤, 첫해는 그곳에서 토종 순무를 재배한다. 예전에는 돌려짓기를 행하여, 지금도 타가와와 후지사와 지구의 일부에서는 팥 등의 돌려짓기가 행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현재 대개의 장소에서는 둘째 해 이후의 밭은 방기되고 있다. 일부러 애써 노력해 불 놓기를 하더라도 1년으로 밭을 방기해 버리는 이유는, 순무는 이어짓기 장해가 쉽게 발생하기에 2년 연속하여 심지 않는다는 것도 있지만, 둘째해 이후 잡초가 늘어나 제초의 수고가 커지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일본에서는 이와 같은 돌려짓기에서 돌려짓기를 하지 않는 것으로 변화함이 일반적인 데 반해, 시라사카白坂(2004)는 중국 윈난성에서 1960년대 이후 일본과는 거꾸로 돌려짓기 하지 않는 것에서 돌려짓기로 변화해 왔다고 기술한다. 일본과 윈난에서 변화가 다른 건 아마 살아가기 위한 식량을 어느 만큼 화전에 의존하여 자급할 수밖에 없는지 하는 차이에서 기인할 것이다.


그런데 그림4는 필자 등이 2006년에 불 놓기를 행한 야마가타 대학 농학부 연습림의 화전땅의 2년 뒤의 사진이다. 사진에는 불을 놓고 1년 뒤에 심어진 삼나무의 사이에 죽사초竹似草와 삼백초만이 우점하여 자라고 있는 모습이 찍혀 있다. 특히 죽사초는 여기만이 아니라 츠루오카시 안의 불을 놓고 2년이 지난 화전땅에서 이상할 만큼 잘 자라는 잡초이다.


그림4 불 놓고 2년 뒤의 화전땅. 심어진 삼나무 사이는 죽사초와 삼백초로 덮였다. 2008년 8월 야마가타 대학 농학부 연습림(야마가타 츠루오카시)에서.




사사키(1972)는 태평양 전쟁 이전과 이후를 통해 일본의 화전에서 가장 널리 재배되어 온 작물은 메밀, 피, 조, 대두, 팥의 다섯 종류이고, 이들이 우리나라의 화전에서 기간작물이라고 한다. 게다가 그들의 돌려짓기 방법을 보면, 전국적으로는 화전 첫해에 메밀(태평양 전쟁 이전은 그에 버금가게 피도), 둘째 해에 조, 대두, 팥, 셋째 해에 대두, 팥이 가장 많이 재배되었다고 기술한다.


스가와라菅原(1979)는 돌려짓기의 순서가 작물의 수확량과 잡초가 나는 방식에 어떻게 영향을 주는지에 대하여흥미로운 연구를 행한다. 그 연구에 의하면, 피와 조(모두 벼과 작물)를 화전 토양의 영양분이 가장 풍부하고 잡초가 적은 첫해에 농사지을 경우, 4년 돌려짓기 체계의 총수확량이 가장 높아지는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다만 첫해의 농사에 한하지 않고, 피와 조를 재배한 이듬해는 잡초의 번성(풀의 종, 풀의 양일지라도)이 뚜렷해진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염기류(칼슘, 마그네슘, 칼륨 등)의 대부분을 흡수하여 그들의 잔존량이 줄어들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토양산도가 높아지고, 토양산도에 적응한 잡초가 번성하기 쉬워질 것이라 기술한다. 덧붙여서 그(1973)는 토양산도의 강도에 따라서 우점하기 쉬운 잡초를 다섯 집단으로 분류했다. 필자가 연습림에서 본 죽사초와 삼백초는 토양산도가 두번째로 강한(PH가 4.4 안팎) 집단에 속하고, 그들이 우연히 자라고 있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스가와라(1979)는 일반적인 작부체계가 메밀→피·조→팥→대두와 같이 메밀을 첫해에 농사짓는 이유는 전국적으로 여름의 불 놓기가 많고 재배 기간이 짧게 끝나는 작물이라는 점만이 아니라, 주식인 피와 조의 수확량 확보와 잡초 회피의 양자를 절충한 모양일 것이라 기술한다. 덧붙여서 메밀은 피와 조에 비하면 흡비성은 약하고, 팥과 대두는 질소고정력을 가져 지력의 저하된 밭에서도 생육할 수 있기에 토양의 악화를 불러오지 않는 성질이 있다. 또한 메밀과 팥, 게다가 들깨는 잡초에 강한 성질이 있는 점도 알려져 있다. 옛사람은 경험적으로 이러한 의미가 있는 순번으로 작물을 재배하는 돌려짓기 체계를 만들어냈다. 돌려짓기 체계는 작물과 그것을 둘러싼 토양과 잡초의 성질을 종합적으로 인지하여 만들어낸 지혜의 결정이라 할 수 있다.





마치며 -현대에 화전을 고려하는 의의


인간은 식량을 구하여 들과 숲을 째고 열어 논밭을 개간해 왔다. 그곳에서 재배된 작물의 대부분은 그때까지 자연생태계의 식생에는 없었던 식물로서, 기존의 식물과 곤충, 미생물 등과의 사이에 새로운 생태계, 즉 농업생태계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런데 농업생태계는 반드시 안정된 계는 아니다. 그 증거로 작물의 종자가 그 논밭에 흘러 떨어지더라도 똑같은 작물의 논밭이 이듬해에 복원되는 것은 아니다. 논밭에서 작물의 생육을 촉진하기 위해서는 부족한 거름을 보충하고, 자연식생 안에서 경합하는 잡초를 뽑아내는 등 반드시 계속적으로 사람의 손이 가지 않으면 농업생태계는 안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이 작물을 재배할 때에는 사람의 손이 미치는 경작 기간을 가능하면 짧게 하고 경작 이후에는 휴한하여 자연의 생태계로 돌리는 화전과 같은 방법이라든지, 또는 인위적인 통제와 자재의 투입을 영속적으로 계속하면서 논밭을 유지하는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나 화전이라 하더라도 인구 증가를 비롯한 여러 가지 사회 상황의 변화 속에서 산림과 환경 파괴의 원형인 '소모형 화전'으로 상징되는 것처럼, 지속적인 식량 생산의 수단은 아니라는 사례도 발생하기 시작하고 있다. 전통적인 화전이 그와 같은 '소모형 화전'의 피해자라고 하는 측면도 있는 한편, 당장 전통적 화전에서도 인구 증가와 시장주의 경제의 침투와 함께 토지이용의 집약화가 진행되어 '소모형 화전'과의 경계가 모호해져 가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도 화전을 존속시켜야 할 의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의의는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화전은 자연생태계와 공생하는 수단으로 오랜 세월 계승되어 온 필연성이 있어 무시할 수 없다는 점이다.즉 '소모형 화전'을 금지시킬 필요는 있지만 전통적인 화전 농법까지 버리게 하는 일은 화전이 아니면 지속적인 식량 생산이 불가능한 경작지(또는 휴한하고 있는 경작 후보지)를 방기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새로운 지속적인 농업 기술의 구축으로 유용한, 화전의 과정 안에서 전해져 온 지혜를 계승하기 위해서도전통적인 화전을 계승할 의미가 있다. 이러한 지혜는 화전이 사라지면 소멸되기 때문이다.


최근 세계적으로 추진되어 가는 유기농법은 근대농법이 잉태한 문제를 완화시키는 역할이 기대된다. 전통적인 화전의 지혜와 기술은 더욱 안정된 유기농법의 구축에도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유기농법에서도 영양분을 풍부하게 포함한 축분퇴비를 대량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전제이고, 유기질의 분해가 쉽게 진행되는 온도와 습도가 확보되는 환경이 보증되어야 한다. 아프리카 같은 건조한 사바나와 초지에서 과연 유기농업이 가능할까? 그와 같은 지역에서는 화전 그것을 없애기보다 부의 분배 상태와 빈곤층의 생활 구제를 고려하는 쪽이 선결과제는 아닐까?


더 중요한 것은 세계 각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이 각 지역의 자연생태계와 공존할 수 있는 지속적인 농업을모색하고, 재구축하는 것이다. 그를 위한 힌트가 되는 지혜가 전통적인 화전 안에 있다. 그 손실을 막을 만한 지혜의 수집과 검증을 실행하는 것이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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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5




기고4

맥류의 재배화와 잡초

츠지모토 히사시本壽




잡초는 골칫거리라는 인상이 있지만, 정말로 그럴까? 이 기고에서는 인간과 잡초의 관계를 생각할 때 중요한 맥류의 재배화 역사와 전망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그런데, 우리는 ㄷ여러 가지 식물을 이용하여 생활하고 있다. 곡물, 콩, 채소, 과일 등과 같은 식량으로서, 설탕과 차, 담배 같은 조미료와 기호품으로서, 게다가 목화와 삼나무처럼 의료와 건자재로서 다양한 형태로 이용하고있다. 그러나 지구에서 생존하는 30만 종의 고등식물에서 보자면, 우리가 이용하고 있는 재배식물은 만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다. 


재배식물 중에서 특히 중요하고 대량으로 재배되고 있는 것은 곡물이다.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의 통계 자료에의하면, 2007년 현재 옥수수의 생산은 7.9억 톤, 벼 6.6억 톤, 밀 6.1억 톤이라 집계되어 있다. 이들 식물은 고도로 재배화되어 야생 상태에 있는 것과는 크게 성질이 변화되어 있다. 우리는 이들 재배식물 없이는 문명을 유지할 수 없지만, 재배식물 쪽에서 보더라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돌봄이 없다면 스스로 생활주기를 다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다. 또한 지금은 야생 상태의 것이 절멸된 것, 애초 존재하지 않은 것도 있으며, 이와 같은 경우 인간과 재배식물의 사이에는 절대적이라고도 할 만큼 공생관계가 성립되어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고 있는 빵밀도 야생 상태의 것이 없는 재배식물이다. 이 종은 남극 이외의 전 대륙에서 재배되고 다양한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데, 인간의 관리 없이는 자립할 수 없는 종이다. 또한 빵과 술의 원료가 되는 호밀에도 야생종이 없다. 이들 맥류의 재배화 과정에서 잡초가 크게 관여했는데, 이들에 대하여 해설하면서 잡초가 앞으로 세계의 구세주가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소개하려 한다.





빵밀은 재배 밀과 잡초의 잡종에서 기원한다


밀은 빵밀, 마카로니밀, 엠머밀 등 몇 종의 맥류를 총칭한 것이다. 이들은 일립계, 이립계, 보통계 및 티모피비계라고 하는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되고 있다. 밀의 진화와 전파에 대해서는 이 시리즈 3권 "사막·목장의 농경과 풍토"에서 가토 켄지加藤鎌司 씨가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다른 관점에서 적으면 다음과 같다.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 터키의 남동부에서 야생 이립계 밀인 팔레스티나 밀을 채집하여 식량으로 이용하고 있다가 재배화되어, 재배형 엠머밀이 되었다(Mori 외. 2003, 그림1의 ① 지점). 유적에서 출토된 탄화물 조사에 의해 재배화는 약 3000년을 걸쳐서 서서히 일어났다고 생각되고 있다(Tanno and Willcox 2006). 작물에 된 엠머밀은 인간의 손에 의해 운반되고, 그 야생종인 팔레스티나 밀의 분포 지역 밖으로 퍼졌다.


그림1 팔레티나 밀, 야생 염소풀, 호밀의 분포 지역과 기후 구분




엠머밀이 카스피해 남안으로 전파되었을 때, 야생 염소풀이라는 이름의 야생종이 잡초가 되었다(Nishikawa 외. 1980, 그림1-②의 지점). 야생 염소풀은 이 지역부터 동쪽으로 죽국 황하 유역까지 분포 지역을 가진 식물이다.이 종은 종자가 작고 이삭이 단단하기 때문에 결코 식용이 된 것 같지는 않다.


식물에는 군락을 이루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는데, 야생 염소풀은 군락을 이루는 식물종이다. 필자는 2009년에 타지키스탄의 식물을 조사했는데, 그곳에서 야생 염소풀의 대군락을 관찰했다(그림2) 군락을 조사하면서 인간은 예전, 이와 같은 장소에서 엠머밀의 종자를 심고, 그 재배지를 확대해 갔을 것이라 느꼈다. 한편, 다른 지역에서는 밀밭 부근에 야생 염소풀을 발견했지만, 이쪽은 길가에 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밭에 혼재하더라도 밀에 비교하여 훨씬 빈약했다. 엠머밀의 재배가 확대되면서 엠머밀과 야생 염소풀이 같은 공간에 존재하는 기간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두 종 사이에서 경쟁이 일어나, 엠머밀이 야생 염소풀의 생태적 적소를 점점 빼앗고 최후에는 밀밭이 되었을 것이다. 엠머밀은 종자가 크고 초기 생육이 빠르다. 그 때문에 야생 염소풀의 군락에 뿌려지면, 자연히 엠머밀이 우위가 된다고 생각한다. 한편, 쫓겨나 버린 야생 염소풀은 이번은 길가의 잡초로 새로운 생태적 적소에 적응하기 위한 진화를 계속할지도 모른다. 또는 밀밭에 섞여서 밀처럼 키를 키우며 의태한 것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다음에 기술하듯이, 밀과 교잡하는 것에 의해 재배 밀로 유전자를 자손에게 전한 것도 있다.


그림2 야생 염소풀의 군락(타지키스탄)




약 7500년 전, 카스피해의 남안 지역에서 재배되고 있던 엠머밀에 야생 염소풀이 교잡하여 잡종이 생겼다. 엠머밀의 출현이 약 1만 년 전이며 터키 남동부라고 생각하면, 그곳에서부터 엠머밀이 카스피해 남부에 도달하기까지상당한 시간이 걸렸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야생 염소풀과의 교잡이 일어났던 것은 엠머밀이 도입되었기때문에 야생 염소풀과의 사이에서 생태적 적소 쟁탈전이 일어났을 무렵은 아니었을까? 이 다툼에서 두 종은 생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이며, 지금보다 훨씬 높은 빈도로 잡종이 생겼다고 생각된다. 잡종은 곧바로 염색체 수를 2배로 증가시키고, 빵밀의 선조형인 보통계 밀이 되었다. 빵밀은 세포 안에 42개의 염색체를 가지는데, 이 가운데28개는 엠머밀, 14개는 야생 염소풀에서 유래한다. 앞에 기술했듯이, 야생 염소풀의 분포 지역은 팔레스티나 밀보다 넓어, 동으로는 중국에까지 이른다. 야생 염소풀이 자신 있어 하는 환경은 쾨펜의 기후 구분에서 말하는 스텝 기후이다. 이에 반해 팔레스티나 밀은 이라크 북부, 터키 남동부, 시리아, 팔레스타인의 이른바 비옥한 초생달지대로서, 여기는 지중해성 기후이다(그림1). 그 때문에 팔레스티나 밀에서 유래하는 엠머밀도 지중해성 기후를 좋아한다. 애초 기후 구분이 식생에 바탕하여 정해진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어느 식물이 기후 구분을 넘어서 분포를 넓히는 일은 상당히 어렵다. 따라서 엠머밀은 카스피해 남안부터 동쪽으로 나아가지 않았지만, 여기에서 야생염소풀의 교잡에 의하여 생긴 빵밀은 훨씬 동쪽으로 펼쳐지는 스텝으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최초의 '혁명'이라고도 부를 만한 사건과 현상이 지중해성 기후와 스텝 기후 구분의 경계에서 일어났던 것이다(그림1의 ②).


현재 빵밀은 세계의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여 재배되고 있으며, 그 과정에서 몇 가지 '혁명'을 일으켜 왔다. 스텝부터 다시 동아시아 계절풍 지대에 들어갈 때, 북진하여 냉대에 들어갈 때, 그리고 새로운 곳에서는 기계화·다비에 의한 근대 농업으로 전환할 때가 각각 '혁명'의 방아쇠가 되었던 시기이다. 이 가운데 특히 최후의 '혁명'은'녹색혁명'이라 부르고 있다. 




호밀은 잡초였다


호밀은 밀과 보리와 마찬가지로 밀 패거리(Triticeae)라고 부르는 분류학적 집단에 속하는 재배식물이다. 그러나 세계의 호밀 생산량은 겨우 1400만 톤이며(2007년, FAO 통계 자료), 밀의 약 1/40, 보리(1억3000만 톤)의 1/9밖에 안 된다. 그러나 한랭지와 척박한 땅에서 적응하는 성질이 있고, 가루는 영양학적으로도 우수하며, 독특한 향이 나기 때문에 러시아, 폴란드, 독일 등 주로 유럽에서 좋아하고, 호밀빵(검은빵)과 맥주나 보드카의 재료로 이용되고 있다. 일본에 도입된 것은 메이지 이후이다. 이것은 그 이름을 보아도 분명하여, 일본어 라이밀의 '라이'는 영어로 라이밀을 의미하는 rye이다. 일본에서도 풋거름으로 휴경논에서 재배되고 있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다. 필자가 살고 있는 돗토리鳥取에서는 겨울부터 초봄에 걸쳐서 바람이 강한 해변에서 모래가 날아오는데, 그것을 막기 위하여 밭의 주변에 호밀을 심어 울타리를 만들고 있다(그림3). 이처럼 일본에서 호밀의 이용은 곡물로서가 아니라, 왕성한 생육과 짚(벼과 식물의 줄기)이 강하다고 하는 성질을 능숙하게 사용한다. 중국에서도 드물게 호밀의 재배를 볼 수 있는데, 가축의 깔짚과 수확한 밀을 엮는 데 쓴다고 한다(가토 켄지 씨, 다나카 히로유키田中裕之 씨 사담).


그림3 날아오는 모래를 막기 위해 심어 놓은 호밀(돗토리시)




이 호밀은 잡초에서 기원한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 가면 빵밀의 밭에 잡초로 호밀이 혼입되어 있는 걸 자주 볼 수 있다. 2008년 필자 등은 트랜스 코카서스의 산악지대에 위치하는 아르메니아의 밀밭을 조사했다. 아르메니아는 가장 오래된 기독교 국가로, 노아의 방주가 표착했다는 아라라트산이 아주 가까이 보이는 나라이다. 이 나라의 밀밭에는 잡초 호밀이 빈번히 섞여 있다. 장소에 따라서는 혼입률이 높아, 얼핏 호밀을 재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밭도 있었다(그림4). 러시아의 식물학자 바빌로프(1926)는 재배 호밀이 이와 같은 잡초 호밀에서 기원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밀처럼 야생 식물을 직접 재배화하는 일에 의해 성립한 작물을1차 작물, 1차 작물에 수반하여 생육하는 잡초의 재배화에 의한 작물을 2차 작물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림4 밀밭에서 자라는 잡초 호밀(아르메니아). 옅은색으로 긴 이삭은 모두 호밀. 얼핏 호밀밭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밀밭이다.




재배식물과 잡초의 큰 차이는 스스로 번식할 수 있느냐 하는 점에 있다. 맥류의 무리 가운데 야생 식물은 종자가 성숙하면 이삭에 떨켜라 부르는 부분이 생겨, 이 부분이 부러져 뿔뿔이 지면으로 떨어진다. 떨켜가 생기는 부분에 의하여 부러진 이삭의 형태가 달라 쐐기형, 통형, 삿갓형의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앞에서 밀의 진화에서 기술한 야생 염소풀의 일본어 '타루호タルホ'는 한자로 쓰면 ''이고, 부러진 이삭의 형태가 통과 비슷한 데에서 온 것이다. 부러져 탈락한 종자는 잠깐 동안 휴면하고 있는데, 발아에 적합한 기후가 되면 발아한다. 한편, 재배식물에서는 이삭이 부러지는 일이 없고, 수확을 하지 않으면 종자는 언제까지나 이삭에 달려 있다.이 상태로 비가 내리면 지면에서가 아니라 이삭에서 발아하고, 죽어 버린다. 이와 같이 재배식물은 인간에 의하여 수확과 파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번식할 수 없는 식물이다.


그런데 아르메니아의 잡초 호밀의 조사에서는 이삭의 길이, 이삭의 색(갈색, 흰색), 종자의 색(갈색, 자색) 등의 형질이 참으로 다양했다. 더구나 종자의 색만이 아니라 이삭의 부러지기 쉬움에 대해서도 다양하여, 어느 개체는뿔뿔이 부러지고, 다른 개체는 끝의 반절만 부러지며, 또한 재배 호밀과 같이 완전히 부러지지 않는 것까지 섞여 있었다. 수확 시기에 부러지지 않고 있으면, 잡초 호밀의 이삭은 밀과 함께 수확될 것이다. 잡초라고 말하지만, 충분히 큰 종자를 달고 있기에, 이 호밀은 밀에 섞여서 함께 제분되어 사람의 입으로 들어간다. 또한 다음 농사철에는 밀과 함께 파종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잡초 호밀은 반은 재배식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재배 호밀도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진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호밀에는 잡초형과 재배형은 있지만 야생형은 없다. 따라서 재배형 호밀의 기원지는 호밀속의 근연 야생종이 많이 존재하는 현재의 아르메니아 주변 지역이었다고 추측된다(그림1의 ③ 지점). 이 지역은 표고가 높기 때문에, 비교적 저위도임에도 불구하고 기후 구분에서는 냉대의 냉량습윤기후에 들어간다. 만약 이 지역에서 재배형 호밀이 기원한다면, 이 주변의 유적에서 호밀의 종자가 출토될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선사시대의 유럽과메소포타미아의 유적에서는 호밀은 전혀 나오지 않고, 가장 오래된 출토물의 보고는 5000년 전 북유럽의 유적에서이다. 그래서 현재의 재배형 호밀은 아직 밀밭의 비주류의 잡초로 중앙아시아(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에 해당)까지 전파되고, 그곳에서 북진할 때 냉량 기후에 강한 잡초형 호밀의 비율이 점점 늘어나 급기야 밀을 물리치고 호밀이 주역이 되어 재배식물로 진화했다는 설이 제안되고 있다(Helbeak 1971). 즉, 스텝 기후에서 냉량습윤기후로 전파된 결과, 당시의 빵밀은 생존하기 어려워지고, 원래 냉량습윤기후에서 기원한 호밀이 번영했던 것이다.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호밀로도 충분히 식용이 되기에 밀을 재배하기 어려운 환경에서는 호밀 쪽이 식량 확보의 확실성이 있는 작물이었음이 틀림없다. 또한 호밀의 입장에서 보아도, 잡초형에서 재배형이 되어 번식을 완전히 인간의 손에 맡기는 편이 자손 번영의 확실성이 높고 안성맞춤이었을 것이다. 여기에서의 '혁명'은 밀에서 호밀로 재배식물이 이동한 것이다. 이와 같이 밀은 세계에 전파되어 기후 구분을 넘을 때마다 대사건을 일으켜 왔다.


그런데 이 이동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호밀의 경우 중앙아시아에서 북유럽으로 전파되는 과정에서, 오랫동안 밀과의 섞어짓기 상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작물의 전파는 인간의 손에 의한 것이지만, 주거와 의복을 지녀 다양한 기후 구분에 적응할 수 있는 인간과 함께 작물은 이와 같이 수많은 고난을 극복하며 여러 '혁명'을 일으키면서 진화한 것이다.




앞으로 발휘될 이종식물의 진가


표1은 세계의 인구와 곡물 생산량의 추이를 아울러 표시한 것이다. 인구는 서기 1960년부터 50년 동안 2배 이상으로 증가했는데, 다행히 세계의 곡물 생산량이 순조로웠기 때문에 1인당 환산하면 최근까지 증가 경향이 계속되었다. 이것이 이 기간에 식량 문제가 그다지 중요한 지구적 과제로 문제되지 않았던 이유이다. 그러나 10년마다 식량 증가량은 20세기 말부터 마이너스 성장이 되고 있다. 2008년, 밀 부족이 방아쇠가 되어 세계 동시 식량위기가 발생했다. 이 원인으로는 오스트레일리아의 가뭄, 바이오에탄올의 생산을 위해 밀에서 옥수수로의 전작 및 투기를 들 수 있는데, 간과할 수 없는 건 인구 증가와 신흥국의 육식 증가에 의해 곡물 수요가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균형이 맞게 곡물의 생산이 늘어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앞으로 1인당 곡물의 할당량은 더욱 감소해 갈 것이라 예상된다. 지금 이산화탄소 양의 삭감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선진국에서 식량의 삭감도 고려해야 할 시대가 되었단 것을 의식해야 한다.



(년)

1960

1970

1980

1990

2000

2010


2050

인구(억 명)

곡물생산량(억톤)

1인당 곡물양(kg)

10년 동안의 성장(kg)

30.3

8.8*

290

-

37.0

11.9

322

32

44.5

15.5

348

26

53.0

19.5

368

20

61.2

20.6

337

-31

69.1

23.5**

340

3





91.9

?

?

?

표1 세계의 인구, 곡물생산의 추이(FAO 자료, 총무성 통계국 통계 자료에서 계산)

*1961년의 자료  **2007년의 자료



21세기 후반에는 지구의 인구가 100억 명에 육박한다고 계산하고 있다. 그럼 그와 같은 인구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여 식량을 생산해 나아가면 좋을 것인가? 지구의 환경 문제를 생각하면, 더욱 경지 면적을 늘리는 일은 할 수 없고, 따라서 단위면적당 수확량을 늘리는 수밖에 해결책이 없다. 또한 최근에는 강수량과 기온의 변동이 심해지고 있는데, 가령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더라도 안정적으로 수확량을 올릴 수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열쇠는 육종, 즉 재배식물을 유전적으로 개변시키는 일이다. 여기에서 다시 '혁명'이 필요해진다. 


다행히도 벼와 옥수수 등 주요 작물에서 게놈에 포함되는 DNA 배열이 차례로 해독되어, 효율이 좋은 육종의 방법이 고안되고 있다. 또한 외래 유전자를 인공적으로 재배식물에 도입하는 유전자변형 방법도 획기적인 방법으로이미 유지용 대두와 사료용 옥수수 등에서 대규모 생산이 시작되고 있다. 다만, 직접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주식 작물에 대해서는 사회적 용인을 충분히 얻을 수 없어 밀에 적용되기까지 조금 더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게는 비상사태에 돌입하고 있다.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때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농경의 역사 속에서 혁명을 일으켰던 야생 염소풀과 호밀 등 이종식물의 힘을 이용하여 다시 '혁명'을 일으킬 수 없을까 하는 것이다. 밀에 대해서 말하자면, 야생 염소풀과 호밀 이외에도 밀과 교잡할 수 있는 야생종은 300종 이상이고, 이 가운데에는 반건조지와 염성 토양 등 현재의 빵밀 품종이 생육할 수 없는 지역에서 자생하고 있는 것도 있다. 만약 그 유전자를 잘 육종에 이용할 수 있다면, 현재의 빵밀을 크게 바꿀 수 있을 것이다.


필자 등은 해변에서 자생하는 대형의 해변 식물 갯그령(Leymus mollis)이 밀의 다음 혁명을 위하여 사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연구를 개시했다(그림5). 그 결과, 갯그령의 염색체를 도입한 밀 중에서 토양 속의 질소화 세균의 발생을 억제하는 질소비료를 효율 좋게 이용할 수 있는 계통(Subbaroa 외 2007), 적은 인산 비료로도 왕성하게 자라는 계통(Wang 외 미발표), 빵의 성질이 뚜렷하게 개선된 계통(Garg 외 2009)를 찾아냈다. 이처럼 지금까지 농경의 역사 속에서 한번도 등장하지 않고, 아직 이용되지 않은 채로 있던 근연의 이종식물에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유전자가 다수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작물의 육종에서는 적극적인 개발과 이용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그림5 해안에서 사는 갯그령(돗토리시). 이 식물은 밀과 교배할 수 있다.




인간이 범지구 규모로 분포한 드문 동물종인 것처럼, 인간에 수반한 밀도 또한 범지구적 식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신종 인플루엔자가 세계에서 맹위를 떨치듯이, 밀에서도 갑자기 병이 나타나 팬더믹이 되는 일은 없을까? 현재 경계하고 있는 밀의 병으로, Ug99 균계에 의한 검은녹병이 있다. 줄기에 검은 포자가 출현하고, 녹슨 금속처럼 되어 말라 죽는 병이다. 1999년 우간다에서 별안간 발생하여(그래서 Ug99라고 부름) 케냐, 에티오피아로 북상하고, 게다가 아시아로 건너와 현재는 이란 및 파키스탄에까지 퍼졌다. 지금까지의 저항성 유전자가 유효하지 않아 잠시 관계자 사이에서 패닉에 빠졌지만, 세계의 밀을 탐색한 결과 어느 품종에 저항성이 있는 것이 밝혀져 우선 안심하게 되었다. 다만, 더욱 저항성의 너비를 넓히고자 야생 염소풀과 갯그령 등 근연 이종식물 안에서 저항성 유전자를 탐색하기 시작하고 있다. 


이상 기술했듯이, 밀에 가까운 관계인 잡초와 야생 식물은 인간과 관련을 맺으면서, 때때로 인간에게 매우 큰 은혜를 가져왔다. 물론 잡초는 대국적으로는 농업의 적임이 틀림없지만, 아무래도 완전히 나쁜놈이라고 할 수는 없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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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5





제3장

농업과 잡초

토미나가 토오루富永達






잡초란 어떤 식물인가


잡초는 광의에서는 마을 식물과 거의 동의이고, 인가의 주변과 길가, 공원, 공터 등 인간의 영향을 받는 모든 입지를 생활의 장으로 삼는 우리 인간에게 가장 친숙한 식물이다. 또한 조성지나 토사 붕괴지 등 식생이 완전히 파괴된어 일시적으로 출현한 나지에 생육하는 초본 식물도 이에 포함된다. 잡초 가운데 농경지와 그 주변에 생육하는 초본 식물은 농경에 수반하여 여러 인간 활동의 영향을 늘 받고 있기에, 다른 잡초와는 다른 고유의 생활사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이들 잡초를 특히 경지 잡초(협의의 잡초)라고 부르고 있다. 이 장에서는 협의의 잡초, 곧 경지 잡초와 농업의 관계를 잡초의 생활사 특성의 진화라는 관점에서 문제 삼는다.





농경이라고 하는 교란


부모 식물로부터 흩뿌려진 종자가 싹이 트고, 영양생장을 거쳐 생식생장으로 전환해, 개화·결실하고, 고사에 이르기까지의 일련의 생활 활동을 그 식물의 생활사라고 부른다(그림3-1). 식물은 생활사의 여러 가지 단계에서 각각의 생활사 특성에 대한 선택을 받고 있다. 영국의 생태학자 그라임Grime은 식물의 생활사 특성의 진화를 지배하고 있는 주요한 선택압을 경쟁, 스트레스, 그리고 교란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경쟁이란 빛과 영양분, 공간 등의 이용을 둘러싼 이웃 개체 사이의 경쟁을 의미하고, 스트레스란 식물의 물질 생산을 억제하는 광 부족과 양분 부족 등의 요인을 가리킨다. 또한 교란이란 식물체의 일부 또는 전부를 파괴하는 듯한 인간 활동과 강풍, 토사 붕괴, 산불 등의 외부에서의 힘을 가리킨다. 그라임은 스트레스와 교란의 정도가 조합하여 양자의 정도가 함께 낮은 입지에서는 경쟁형의 식물이, 스트레스의 정도는 높지만 교란의 정도가 낮은 입지에서는 스트레스 내성형의 식물이, 스트레스의 정도가 낮지만 교란의 정도가 높은 입지에서는 교란 의존형의 식물이, 각각 진화한다고제창했다(그림3-2).


그림3-1 식물의 생활사 개요(Kawano 1975를 바탕으로 그림)

*아포미식스Apomixis = 수정을 하지 않고 종자를 만드는 무성 종자 번식



그림3-2 스트레스 및 교란의 정도와 식물의 세 적응전략형(Grime 1977에서 그림). 스트레스의 정도도 교란의 정도도 함께 높은 입지에서 식물은 생존할 수 없다.





농경지에서 행하는 여러 가지 경종 조작은 식물에게 교란 그것으로서, 농경지는 교란이 늘 더해지는 불안정한 생태적 입지이다. 그곳에 생활의 장이 있는 잡초는 그 종자가 부모 식물로부터 흘뿌려지고, 싹이 트고나서 말라 죽기까지 모든 단게에서 경운과 제초, 짓밟힘 등의 인위적 교란에 노출되어 있다. 이 때문에 잡초는 인간에 의하여 파종, 수확되는 작물과 인간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생태적 입지에서 생활하는 야생 식물과는 다른 고유의 생활사특성을 가지며, 다른 분류군에 속하는 종이더라도 표3-1에 보이는 것처럼 가지런하지 않게 한번에 발아함과 조숙성, 작은 종자를 다수 생산하는 등의 공통된 생활사 특성의 몇 가지를 포함하고 있다. 잡초는 참으로 그라임이 말하는 교란의존형의 식물이고, 교란도 스트레스도 없는 생태적 입지에서는 잡초의 종자가 설사 산포되어 그곳에서 싹이 트더라도 경쟁력이 우수한 종에 의하여 배제된다. 잡초는 농경지와 그 주변에서만 그 집단을 유지할 수 있는 농경지에 전문화된 것이다. 


발아를 위한 요건은, 대부분의 환경에서 만족시킨다.

내적으로 억제된 불연속 발아를 한다. 종자의 수명이 매우 길다.

싹이 나서 자라는 생장이 빠르고, 영양생장에서 생식생장으로 재빠르게 전환한다.

자가화합성이다. 그러나 완전한 자식自殖은 아니고, 타식他殖도 한다.

타식하는 경우, 특별한 꽃개루 매개자를 필요로 하지 않든지 풍매이다.

생육조건이 좋으면, 계속하여 매우 다수의 종자를 생산한다.

넓은 환경에 대한 내성과 가소성을 지니며, 생육조건이 나쁘더라도 얼마간의 종자를 생산한다.

장거리 산포와 단거리 산포에 적응한 산포체를 가진다.

여러해살이의 경우 왕성한 영양생식을 행하고, 단편에서도 재생한다. 또한 끊기어 떨어지기 쉽고, 토양에서 뽑아 내는 일은 쉽지 않다.

로제트 형성, 다른 개체를 단단히 죄는 듯한 생장 또는 알레로파시 등의 특별한 방법으로 다른 종과 경쟁한다.

표3-1 잡초의 일반적 생활사 특성(Baker 1974를 바탕으로 작성)





그럼 인간이 농경이 시작하기 이전, 잡초는 어떠한 입지에서 생활하고 있었던 것일까? 농경 개시 이전의 식물에 대한 가장 큰 규모의 교란은 플라이스토세에 일어난 빙하의 전진·후퇴에 의한 침식작용으로,  온대에 생육하는 잡초의 대부분은 이 빙하의 침식작용에 의하여 생긴 나지에 침입한 종에서 기원한다고 생각된다. 아마 교란이 빈번하게 발생해 볕이 잘 들고, 다른 대형 식물종과의 경쟁이 적은 큰 하천의 범람원과 야생 식물이 물 마시는 곳의주변, 토사 붕괴지 또는 들불이 자주 발생하는 듯한 장소도 그와 같은 종의 생활의 장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인간이 정주생활을 시작함과 함께, 그와 같은 입지에서 생활하고 있던 종이 인간의 정주지와 그 주변에 침입·정착하고, 또 농경의 개시와 함께 그들의 일부가 농경지에 침입하여 현재의 잡초로서의 생태적 지위를 구축했다고 추정된다. 또한, 명아주와 돼지감자 등과 같이 일찍이 재배화된 작물이 유기되거나, 빠져 나와 현재는 잡초로서 생육하고 있는 예나 잡초 벼와 잡초 수수 같이 작물과 그 근연야생종 사이의 잡종이 농경지에 정착하여 이른바 작물-잡초 복합을 형성하고 있는 예도 있다.





작물-잡초 복합


잡초는 논과 밭에서 빛과 영양분, 공간을 둘러싸고 작물과 경쟁하기에, 작물의 생육과 품질에 마이너스 영향을 미친다. 또한 병해충의 중간숙주와 생식장소가 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잡초는 농업의 장에서 눈엣가시가 되고 있다. 잡초가 작물 생산에게 마이너스 요인이란 점은 확실한 사실이지만, 잡초 모두가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다. 잡초의 몇 가지는 작물의 성립에 깊이 관여해 왔다. 벼와 밀, 보리, 재배 콩류 등의 성립에 관해서는 이 시리즈의각각의 권에서 상세히 기술되어 있기에 그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또한 호밀과 귀리가 밀과 보리에 수반하여 있던잡초에서 각각 기원한 점은 이 권의 기고3에 있는 대로이다. 여기에서는 일부 중복되지만, 작물의 성립에 잡초가깊이 관여해 온 예를 들면서, 유전자원으로서 잡초의 중요성을 지적함과 함께, 작물과 그 근연야생종이 상호의 유전적 교류를 통하여 유지하고 있는 작물-잡초 복합에 대하여 소개하겠다.



현재 재배되고 있는 작물의 대부분은 야생식물에서 직접 재배화된 것은 아니다. 야생식물 가운데 교란에 적응하고, 잡초성을 획득한 식물군이 인간의 거주지 주변에 정착하여 그들 중에서 식용과 그외의 용도에 적합한 식물이발견되고, 또 그들 가운데 몇 가지가 재배화되었다고 생각된다. 


아메리카의 유전학자 하란Harlan은 터키 남동부의 구릉지에서 야생 일립계 밀이 우점하는 집단을 대상으로 도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서 직접 그 익은 종자(영과穎果)를 모아 보았다. 야생 일립계 밀은 재배 일립계 밀의 직접적 선조 야생종으로, 현재도 서아시아에서 자생하고 있다.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서 종자를 모으는 작업은 그에게 익숙하지 않은 작업이고 손의 피부가 금세 벗겨져 버렸지만, 30분의 채집작업을 5번 반복한 결과 1시간당 환산하여 한 사람이 평균 2.05킬로그램의 종자를 모을 수 있었다. 다음으로 석기를 붙인 낫을 사용해 채집하면 1시간에 평균 2.45킬로그램의 종자를 모을 수 있었다. 게다가 모은 종자의 영양성분을 분석하면, 현재 재배되고 있는 빵밀과 비교하여 한 알당 조단백질 함유율은 야생 일립계 밀 쪽이 오히려 높고, 전분의 비율은 빵밀보다 조금 낮지만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여기에서는 야생 일립계 밀의 성숙기에 맞추어 구릉의 기슭에서 서서히 정상을 향하여 3주일 이상에 걸쳐서 종자를 채집한 수 있고, 열심히 종자를 채집하지 않더라도 1년에 소비하는 양 이상의 종자를 채집하는 일이 아마 가능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와 같은 종자의 채집 행위의 반복이 재배 일립계 밀 성립의 시작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평소 먹고 있는 빵과 우동은 빵밀로부터, 마카로니와 스파게티는 마카로니 밀로부터 만든다. 이 빵밀의 성립에도 잡초가 깊이 관여하고 있다. 빵밀은 서아시아에서 마카로니 밀과 같은 무리의 재배 이립계 밀과, 그것이 재배되고 있는 밭에서 생육하는 잡초인 야생 염소풀과의 사이에서 잡초가 형성되고, 또 그 잡초의 염색체가 배가됨에 따라 성립했다. 야생 염소풀은 광역 적응성과 제빵성에 적합한 분질을 가지고 있다. 만약 잡초인 야생 염소풀이 재배 이립계 밀밭에서 자라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맛있는 빵과 우동을 먹을 수 없을 것이다. 더구나 야생 염소풀에는 녹병에 대한 저항성을 가진 계통이 존재한다. 빵밀의 성숙기가 장마에 해당하는 일본에서는 녹병에 대한 저항성은 중요한 형질로서, 그 저항성을 빵밀에 부여하기 위한 유전자원으로도 야생 염소풀은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작물의 근연 야생종이 농경지와 그 주변에 생육하고 있는 지역에서는 작물과 그 근연 야생종은 늘 유전적으로 교류하고, 작물과 그 근연 야생종 그들 사이의 잡종, 그 잡종과 작물 또는 그 근연 야생종과의 사이의 되돌이 교잡 개체가 유전적으로 혼연일체가 된 작물-잡초 복합을 형성하고 있다. 벼와 야생 벼, 옥수수와 테오신트, 향모와 그선조 야생종인 Eleusine africana 등 많은 작물-잡초 복합이 알려지고, 작물-잡초 복합에서는 새로운 작물과 잡초의 진화, 의태잡초의 진화, 뒤에 기술하는 조작 작물에서의 유전자 유동 등 농업과 잡초에 관계된 여러 가지 진화적 사건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벼과의 잡곡에서 서아프리카와 인도, 파키스탄 등에서 널리 재배되고 있는 진주조에서는, 진주조밭에서만 출현하는 잡초 진주조가 알려져 있다. 이 잡초 진주조는 작물인 진주조와는 달리 탈립성이 매우 높고, 종자가 작은 점, 가지가 많은 점 등에서 작물 진주조와는 명료하게 구별된다. 말리의 사헬 지대에서는 탈립 종자에서 자연히 싹이튼 잡초 진주조가 진주조밭에서 생육하여, 보조적으로 작물 진주조와 함께 이용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진주조를 재배하는 농가가 잡초 진주조를 파종하는 일은 전혀 없고, 오히려 탈립 종자에서 싹이 튼 잡초 진주조는 해초로 제초되고 있다. 그럼 잡초 진주조는 진주조밭에서 어떻게 집단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말리에서 채집된 잡초 진주조를 파종하여 길러 보면, 잡초 진주조 외에 작물인 진주조와 똑같은 형태와 특성을 가진 진주조가 출현했다. 더구나 이 잡초 진주조를 자식시켜 생긴 종자를 파종하면, 작물 진주조와 잡초 진주조에 더하여 이삭이 작은 불임의 잡초 진주조가 출현했다. 그리고 작물형, 잡초형 및 불임잡초형의 출현 비율은 대략 1대2대1이었다. 작물형에서는 늘 작물형이 출현하고, 잡초형의 자식 종자에서는 이 세 가지 형 각각의 중간형이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작물형, 잡초형 및 불임잡초형이 늘 대략 1대2대1의 비율로 출현했다. 게다가 분자 표지를 이용한 유전학적 해석의 결과, 재배형 형질을 지배하는 유전자를 C, 잡초형 형질을 지배하는 유전자를 W라고 하면, 작물형의 유전자형은 CC, 잡초형은 CW, 불임잡초형은 WW, 라고 표현할 수 있으며, 탈립성과 종자의 크기, 가지 수 등을 지배하고 있는 유전자가 동일 염색체 위의 매우 가까이 위치하고 있으며, 이들이 마치 1개의 유전자처럼 움직이는 초유전자로 기능하고 있는 것이 추정되었다. 진주조는 타식성이다. 말리 사헬 지대의 진주조밭에서는 작물 진주조와 제초로부터 도망간 잡초 진주조가 유전적으로 자유롭게 교류한 결과, 잡초형 형질을 지배하고 있는 W 유전자가 작물-잡초 복합의 체계 안에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잡초의 농경에 대한 적응 양식


농경지에서는 작물이 재배되고, 재배에 수반한 거름주기, 쟁기질, 씨뿌리기, 사이갈이, 김매기, 수확 등 일련의 경종 조작이 반복되고 있다. 농경지를 생활의 장으로 삼는 잡초는 그곳에서 재배되는 작물과 빛과 양분, 수분, 공간을 둘러싸고 경쟁한다. 이 때문에 인간은 재배하고 있는 작물을 그 경쟁상대인 잡초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늘제초에 힘쓴다. 그러나 이 끊임없는 제초 노력에도 불구하고 농경지에서 잡초가 사라지는 일은 없다. 그것은 농경지에서 현재 번영하고 있는 잡초가 쟁기질과 김매기 작업의 체를 빠져나가, 다음 세대를 남길 수 있는 여러 가지 특성(제초 회피전략)을 획득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림3-3). 예를 들면, 잡초의 대부분은 종자의 휴면성을 가지고 있고, 온도와 수분 조건이 그 발아조건을 충분히 만족시켜도 발아하지 않는 일이 많다. 이 때문에 논과 밭의토양 속에는 방대한 양의 잡초 종자가 축적되어 있다. 이것을 토양 종자은행이라고 부른다. 몇 번의 김매기로도 잡초가 사라지는 일이 없으며, 계속하여 출현하는 것은 잡초의 종자가 휴면성을 가지고, 큰 토양 종자은행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잡초는 싹이 트고나서 개화하기까지의 기간이 짧은 조숙성인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싹이 트고나서 쟁기질과 사이갈이, 김매기 작업이 행해지기 전에 신속히 개화·결실하고, 토양 속에 종자은행을 형성한다. 이와 같은 잡초의 교묘한 제초 회피전략은 인간이 의도하여 선택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련의 경종 조작에 의하여 진화시켜 온 특성이라는 의미에서는 인간이 쌓아 올려 온 것이다.


그림3-3 농업생태계에서 인간, 작물 및 잡초의 상호관계(개념도). 인간과 작물은 공생관계에 있다. 인간은 작물의 경쟁상대인 잡초를 제거하고자 노력하고 있지만, 잡초는 제초를 회피하기 위한 특성을 진화시켜 농경지에서 번영하고 있다.





논 잡초의 생활주기


일본의 논벼농사의 기원은 수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논에 현재 살고 있는 잡초의 대부분은 논벼의 전래에 수반하여 논벼와 함께 일본에 건너온 역사 이전 귀화식물(유사 이전에 일본에 침입한 식물)이다. 실제로 동남아시아와 중국의 논 잡초와 일본의 논 잡초에는 공통의 종이 많다. 논벼가 일본에 전해지고나서 봄에 모내기, 가을에 벼베기라는 재배 체계가 끝없이 반복되어, 이 논벼의 재배 체계에 생활주기를 동조시킨 종이 논 잡초로 현재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여름에 생기는 대부분의 논 한해살이 잡초의 종자는 봄이 되기 전에 휴면에서 깨어나, 써레질 뒤에 싹이 튼다. 발아한 개체는 여름 동안 충분히 생육하고, 벼베기를 위해 물떼기를 하고나서 벼베기 전후까지 개화와 결실을 마친다. 또는 일부 잡초는 벼베기 이후에 개화하고, 가을갈이 전에 종자를 형성한다. 형성된 종자는 휴면상태로 겨울을 나고, 봄에 발아한다. 또한 겨울에 생기는 대부분의 한해살이 잡초는 여름 동안에 종자 휴면에서 깨어나, 벼베기를 위해 물떼기를 하면 발아한다. 발아된 개체는 그대로 겨울을 나고, 이듬해 봄의 써레질 전에 개화·결실하는 생활주기를 획득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논벼가 일본에 전해지고나서 끝없이 반복되어 온 논벼 재배의 경종 조작의 계절 주기에 잡초가 그 생활주기를 동조시켜 온 결과이다. 





둑새풀의 논형과 밭형


농경지에서 여러 가지 경종 조작은 잡초에 대한 교란으로 작동하고, 잡초의 다양한 생활사 특성을 진화시킨다. 그 교란의 정도와 빈도는 다양하고, 또 교란이 부정기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면, 정기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면 채소가 재배되고 있는 비교적 소규모의 밭에서는 1년 사이에 다종다양한 채소의파종(옮겨심기)와 수확이 반복되기 때문에, 그때마다 쟁기질과 사이갈이 김매기가 행해진다. 또한 재배되는 채소의 종류와 품종은 해에 따라서 다르며, 그에 수반한 경종 조작의 시기도 변동한다. 여기에서는 교란은 부정기적이고 예측할 수 없으며, 그 빈도가 높다. 다른 한편, 벼와 밀, 보리 등이 비교적 대규모로 재배되는 논과 밭에서는 재배에 수반한 교란은 채소밭과 비교하여 더 정기적이고, 그 빈도는 낮다. 특히 논에서는 오직 논벼가 재배되고, 모내기의 준비를 위한 쟁기질, 써레질은 해마다 봄에 정기적으로 행해진다. 또한 벼베기를 위한 물떼기도 매년 일정한 시기에 행해진다. 농경지에서는 반복되는 경종 조작(교란)에 각각 적응한 생활사 특성을 지닌 잡초가 살아남아 왔다.


가을에 발아하고, 봄에 개화·결실하는 두해살이 잡초 중에는 밭과 벼베기 이후의 논 양쪽에서 생육하는 종이 존재한다. 논과 밭은 수분조건만이 아니라 앞에 기술한 것처럼 교란의 양상이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르다. 이와 같은 재배 체계와 환경조건의 차이는 잡초의 생활사 특성에 다른 선택압으로 작용한다. 


벼과의 한해살이 잡초 둑새풀은 일본 각지의 논과 밭에 널리 분포하고 있다. 이 둑새풀에는 논에서 생육하는 논형과 밭에서 생육하는 밭형이 존재하고, 둘은 다른 생활사 특성을 가지고 있다. 둘의 생활사 특성의 차이는 밭과 논에서 일어나는 교란의 주기성과 예측성의 유모, 정도 및 여름의 수분 조건 차이에 따라서 생긴 것이다. 


둑새풀의 논형 종자는 비교적 크기가 크고, 무겁다. 종자의 휴면성은 고온과 저산소분압에 일정 기간 노출되면 해소되어 발아한다. 또한 이삭이 패는 일장반응성은 중성이다. 반대로 밭형은 더 작은 종자를 다수 생산한다. 이 종자의 휴면성은 깊고, 휴면 각성 조건은 명확하지 않다. 또한 이삭 패는 일장반응성은 장일이다(표3-2). 논에서는 일정 기간의 물떼기와 벼베기가 매년 반복된다. 논형의 휴면 종자는 여름 논의 담수 조건(고온과 저산소분압)을 감지하고, 벼베기 전의 물떼기가 행해지는 시기에 일제히 발아한다. 다른 한편, 채소밭에서는 여러 가지 채소가 잇달아 재배되고, 또 그 종류도 해에 따라서 다르며, 재배시기와 기간도 일정하지 않다. 이 때문에 교란의 주기성과 예측성이 매우 낮고, 보험으로 더욱 다수의 종자를 형성하며, 쉽게 발아하지 않는 유전자형이 남아 왔다고 생각된다. 



형질

밭형

논형

염색체 수

생육지

종자 길이(mm)

100알 무게(mg)

일장 반응

생식 양식

종자 생산수(1이삭)

종자 휴면성

휴면성의 변이

휴면 해소 요인

발아조건의 너비

2n=14

밭과 길가

2.32±0.026

18.4±0.35

장일성

타식적

약 500

깊음

크다

불명

좁음

2n=14

무논(마른논)

2.99±0.166

42.5±6.63

중성

자식적

약 270

얕음

작다

고온, 저산소분압

넓음

표3-2 뚝새풀의 밭형과 논형의 생활사 특성(松村 1967을 고침)





논은 교란의 주기성·예측성이 높은 생육지로서, 교란의 빈도는 밭과 비교하면 그만큼 높지 않다. 다른 한편, 밭은 교란의 주기성·예측성이 낮고, 빈도가 높다. 이와 같은 교란의 주기성·예측성이 대칭적인 생육지에서 각각 적응한 개체가 선택되어 남아 왔던 것이다. 둑새풀의 논형과 밭형의 분화는 경종 조작의 주기성·예측성의 유무와 교란 빈도의 많고 적음이 개개의 잡초의 생활사 특성에 선택압으로 작용한 뚜렷한 예이다.





손 김매기에 의하여 탄생한 잡초의 의태


동물 또는 식물이 다른 동식물과 무생물(모델)에 비슷한 형태나 색채를 가지는 것을 의태라고 부른다. 의태에 관해서는 곤충이 천적에게 포식되는 일을 회피하기 위하여 주위의 환경(모델)에 유사해지는 은폐적 의태와, 독과 냄새를 가진 다른 종(모델)에 비슷해지도록 적색과 황색 등의 눈에 띄는 경고색을 가지는 것에 의하여 포식자에게서 도망가는 표식적 의태가 잘 알려져 있다. 


식물에서는 꽃을 찾아오는 곤충을 끌이들이기 위하여 꿀과 꽃가루 등의 보수가 많은 꽃을 모델로 의태하는 예가 있다. 특히 잡초에서는 작물(모델)에 대한 식물체와 종자의 의태가 발견된다. 잡초의 의태는 제초 작업과 종자 선별이 선택압으로 작동해, 인간이 의도하지 않게 진화시킨 잡초의 정교한 제초 회피전략이다. 논벼와 잡초 벼 또는 수수와 잡초 수수 같이 똑같은 또는 근연종 사이에서의 유전적 교류를 통하여 외부 형태가 모델이 되는 작물에 유사해지는 예도 있는데, 다음에 소개하는 잡초 피의 의태 예에서는 모델이 되는 작물인 벼와의 사에에서 유전적교류는 전혀 없다. 


일본의 논에 있는 논벼에 대한 잡초 피(강피와 밭피, 돌피 등의 잡초 피류의 총칭)의 의태는 손 김매기에 의하여 발생한 잡초의 의태 가운데 가장 뚜렷한 예이다. <만엽집>에는 "갈아엎는 논에도 피는 무수히 있지만 골라내야 밤에 한 사람은 잔다"고 잡초 피를 노래한 시가 수록되어, 나라 시대에도 잡초 피가 논벼의 대표적인 수반 잡초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에도 시대 전기의 농학자 미야자키 야스사다宮崎安貞는 그 저서 <농업전서>(1697) 권1의 "제5, 서운鋤芸·사이갈이 제초"에서 논 잡초의 방제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미 종자를 심고 싹이 난 뒤, 농부의 일은 논밭의 풀을 제거하고, 그 뿌리를 없애야 한다. 강아지풀(잡초 피)라고 하여 모와 매우 비슷한 풀이다. 이 풀은 모에 앞장서 무성히 번성하여, 잠시라도 제거하지 않으면 곧 만연하고, 토지의 기를 빼앗고 훔치기에, 모를 방해하기 그지없다. 방심하지 않고 제거해야 한다. 비유하면 풀은 주인과 같다. 처음부터 그곳에서 유래한 것이다. 모는 손님과 같아 나중에 들어와 큰 힘을 써서 모두 제거해 없애는 것이 도움이 된다. …중략…. 이 때문에 상농부는 풀이 아직 보이지 않아도 사이갈이하고, 중농부는 보인 이후에 갈아엎는다. 보인 뒤에도 갈아엎지 않음을 하농부라고 한다. 이것이 토지의 죄인이다." 미야자키 야스사다는 앞 문단에서 잡초 피의 특성을 적확하게 표현하고, 뒷 문단에서 논벼의 재배 기간에 제초를 철저히 하라고 기술하고 있다. 에도 시대에는 논벼의 재배 기간에 6번 정도 철저한 피사리가 행해졌던 듯하다. 발 디딜 곳이 나쁜 논 안에서 납죽 엎드린 자세로 행하는 손 제초는 중노동이다. 철제 날을 붙인 원통을 회전시켜서 제초하는 손으로 미는 논 제초기가 1892년에 고안되고 나서도 논벼의 그루 사이에 남은 잡초의 제거는 손으로 뽑는 것에 의지해야 하고, 논에서 하는 손 김매기는 제초제가 널리 일반에 보급되는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논벼의 재배 농가는 못자리 단계부터 논벼와 잡초 피를 그 형태에 의하여 식별하여 피사리를 행한다. 이 결과, 논벼와 형태가 분명히 다른 잡초 피는 제거되고, 논벼에 매우 유사한 잡초 피만 남아 왔다. 다른 한편, 잡초 피의 이삭은 분명히 논벼의 이삭과 형태가 다르지만, 재배 농가는 논벼의 이삭이 패기 전후에는 논벼의 결실율이 저하되지 않도록 논에 들어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이때에 이삭이 팬 잡초 피는 논에 남는다. 논벼의 이삭이 성숙하고, 재배 농가가 피사리를 위하여 다시 논에 들어갈 무렵에는 잡초 피의 종자도 성숙하여 재배 농가가 잡초 피를 조금만 건드려도 뿔뿔이 종자가 떨어진다. 각지에서 재배되고 있는 논벼의 출수기와 그 지역의 잡초 피의 출수기가 동조하고 있는 사실도, 논벼와 같은 시기에 이삭이 패는 잡초 피가 결과적으로 제초되지 않고 남아 왔던 것을 보여준다. 이렇게 하여 잡초 피는 철저한 피사리에 의하여 논벼에 대한 식물체의 의태를 획득하고, 집단을 유지해 왔다. 철저한 피사리가 논벼에 대한 의태를 진화시켜 온 것이다.





종자 선별이 진화시킨 종자의 의태


논벼에 대한 잡초 피의 식물체 의태에 대하여, 종자(과실, 영과)가 작물의 그것에 의태하는 경우를 종자의 의태라고 부른다. 이것은 수확할 때 또는 수확한 뒤의 종자 선별에도 불구하고 작물 종자에 혼입된 채로 잡초의 종자가 작물의 종자와 함께 이듬해 농사철에 파종되는 것이 반복된 결과 발생한다. 여기에서는 내가 조사한 에티오피아에서 밀에 대한 독보리의 종자 의태 사례를 소개하겠다.




독보리는 어떤 식물인가


독보리는 벼과의 한해살이 초본으로, 밀과 보리의 대표적인 수반 잡초이다. 독보리는 밀과 보리와는 다른 분류군(Lolium속)에 속하고, 이들과 자연교잡하는 일은 없다. 독보리의 이름은 그 종자(영과)가 혼입된 밀로 만든 빵과그 종자가 대량으로 혼입된 사료로 인간과 가축이 중독되거나, 사망하는 일이 있다는 데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이 독성은 독보리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독보리가 실 모양 균의 일종인 Endoconidium temulentum과 Chaetomium kunzeanum에 감염되면 테물렌temulen과 로린이 생산되고, 이들이 인간과 가축에게 유해한 것이다.


벼과 식물의 이삭꽃을 구성하는 두 장의 화영花穎 가운데 바깥쪽의 1장을 받침껍질(護穎)이라 한다. 벼과의 식물에는 이 받침껍질에 뻣뻣한 털 모양의 긴 돌기인 까락이 발달한 종이 많다. 이 까락은 새 등에 의해 먹히는 피해의 회피와 종자의 산포·정착을 위한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다. 독보리에는 받침껍질에 길이 1.5cm 정도의 까락이 발달한 유망형과 까락이 존재하지 않는 무망형이 있다(그림3-4). 까락의 유무는 핵의 한 유전자에 의하여 지배되며, 유망이 무망에 대하여 우성이다. 독보리는 2배성으로 거의 완전히 자가수정하기에, 유망에서 무망으로의돌연변이는 다음세대에서 동종 접합되어 표현형으로 나타나, 선택의 체에 걸린다. 


그림3-4 독보리의 유망 종자(좌)와 무망 종자(우) 






에티오피아에서 행한 조사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남서로 약 400킬로미터에 위치한 화전 농경민족 마로의 마을 가이차(그림3-5)에서는 받침껍질과 안쪽껍질(內穎)이 부드럽고 쉽게 탈곡할 수 있는 밀(이탈곡성易脫穀性, 마카로니 밀, 듀럼밀 및 빵밀)이 15품종, 세계적으로 재배면적이 매우 적었던 어렵게 탈곡(난탈곡성難脫穀性)하는 엠머밀이 2품종 재배되고 있다.


그림3-5 가이차 원경(희게 보이는 부분이 수확기의 밀밭)




여기에서는 이탈곡성 마카로니밀, 듀럼밀 및 빵밀은 구별되지 않고, 하나의 토종으로 인식되어 기스테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난탈곡성인 엠머밀은 칸바라라고 불러 전자와는 다른 종으로 명확히 구별하고 있다. 이탈곡성 밀은 다른 지역과 달리 볶거나, 데치거나 하는 등으로 왕성히 낟알 그대로 먹고 있다. 다른 한편, 엠머밀은 가루로 갈아서 죽으로 먹고, 특히 산후의 여성과 병자에 대한 자양식으로 이용되고 있다. 가이차에서 행하는 밀 종자의 선별은 탈곡한 뒤에 종자를 키에 모아 집밖에서 날려고르기하고(그림3-6), 밀짚의 검불과 작은 돌 또는 잡곡 종자 등의 불순물을 골라 없애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이때 독보리의 종자도 골라내지만, 종자의 형상과 크기가 밀의 그것에 유사(종자의 의태)하기 때문에, 완전히 제거되는 일은 없고 밀의 종자 안에 남는 확률이 높다(그림3-7).


그림3-6 밀의 날려고르기. 날려고르기와 눈으로 확인하여 작물의 검불과 잡초 종자 등의 이물질을 골라 없앤다.




그림3-7 시장에서 구입한 이탈곡성 밀(왼쪽)과 엠머밀(오른쪽)의 종자 샘플에 혼입된 독보리의 종자(화살표)





가이차의 시장에서 구입한 밀의 종자 샘플에는 독보리가 전혀 혼입되지 않은 샘플도 있다면, 혼입률이 9.1%에나달하는 특이한 샘플도 있었다. 이 특이한 한 샘플을 제거하고 평균을 낸 독보리의 혼입률은 이탈곡성 밀의 종자 샘플에서 0.6%, 엠머밀의 종자 샘플에서 4.6%였다. 또한 이 종자 샘플에는 독보리의 유망 종자와 무망 종자가 샘플마다 여러 가지 비율로 혼입되어 있었다. 





밀의 탈곡성과 독보리의 까락


조사한 밭마다, 또한 구입한 종자 샘플마다 혼입되어 있는 독보리의 유망형과 무망형의 상대비율을 산출하면, 이탈립성 밀밭에서 임의로 채집한 독보리의 유망형 상대비율은 8.5%이고, 종자 샘플에서는 3.6%였다. 이에 반해 엠머밀밭에서 임의로 채집한 독보리의 유망형 상대비율은 70.5%이고, 종자 샘플에서는 75.2%였다(그림3-8).


그림3-8 독보리의 유망형 이탈립성 밀 및 엠머밀에 대한 상대혼입률(Tominaga and Fujimoto 2004에서 그림)




독보리의 유망 종자는 난탈립성이고 껍질이 떨어지기 어려운 엠머밀의 종자(영과)에 매우 비슷하며(의태), 엠머밀의 종자에 혼입된 독보리의 유망 종자는 눈으로 식별하는 선별에서 도망가기 쉽다. 다른 한편, 독보리의 무망 종자는 껍질이 매우 쉽게 떨어지는 이탈립성 밀의 종자에 유사(의태)하며, 이탈립성 밀의 종자에 혼입된 독보리의 무망 종자는 눈으로 식별하는 선별에서 도망가기 쉽다. 이 종자 선별을 빠져 나가서 종자(영과)의 형태가 매우 비슷하게 짝을 지어서 독보리의 유망 종자 및 무망 종자가 엠머밀 및 이탈립성 밀의 종자에 각각 혼입하여 있는 것이다. 유망형 엠머밀의 수반관계에 의해 무망형·이탈립성 밀의 그것이 더욱 밀접한 것은, 이탈립성 밀이 낟알 그대로 먹는 기회가 많고, 종자 선별이 그만큼 더 엄밀하게 행해짐에 따른다고 생각된다.


한편, 혼입되어 있던 독보리의 유망형의 상대비율을 밭에서 채집한 샘플과 시장에서 구입한 종자 샘플에서 비교하면, 이탈립성 밀에서는 종자 샘플에서, 엠머밀에서는 밭에서 채집한 샘플에서 낮았다(그림3-8). 그것은 밀 수확 이후 일련의 선별작업에서 각각의 밀 종자와 형태가 더 유사한 독보리의 무망형 또는 유망형이 제거되지 않고남는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독보리의 다양성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가?


그럼 왜 이탈립성 밀에 유망형 독보리가, 엠머밀에 무망형 독보리가 낮은 빈도이지만 혼입되어 있는 것일까?


가이차의 이탈립성 밀밭 및 엠머밀밭에서 각각 개별 번호를 붙이고, 각각의 밭에서 개체 식별하여 채집한 독보리에 대하여 유전학적 해석을 행하면, 엠머밀에 수반하고 있던 무망형 독보리의 몇 가지는 경계를 접하는 이탈립성밀밭에서 채집한 무망형 독보리와 완전히 똑같은 유전자형이었다. 마찬가지로, 이탈립성 밀에 수반하고 있던 유망형 독보리의 몇 가지는 인접한 엠머밀밭에서 채집한 유망형 독보리와 완전히 똑같은 유전자형이었다. 이 결과에서, 각각 한 개체의 종자에서 유래한 독보리가 엠머밀밭과 이탈립성 밀밭에서 생육하고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가이차에서는 엠머밀이 똑같은 한 뙈기의 이탈립성 밀밭의 주변부에서 함께 재배되고, 한 뙈기의 밭 안에서 둘의재배 경계선이 불명료하여 그 경계선 부근에서는 둘이 혼재하고(그림3-9), 각각에 수반하고 있는 독보리의 유망형과 무망형도 혼재하며, 수확할 때 경계선 부근의 개체가 이탈립성 밀 또는 엠머밀과 함께 각각 혼입하여 수확된다. 그 때문에 이탈립성 밀에 유망형 독보리가, 엠머밀에 무망형 독보리가 낮은 빈도로 혼입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림3-9 이탈립성 밀의 주변부에서 재배되는 엠머밀(Senda and Tominaga 2004를 고침)





게다가 가이차의 똑같은 지구의 떨어진 밭 또는 다른 지구의 밭에서 채집한 독보리가 동일 개체의 유래라고 추정되는 결과를 얻었다. 또한 마을 안의 다른 지구에서 채집한 독보리의 지구 사이의 유전적 분화 정도는 낮고, 한 지구 안의 유전적 다양성은 높다는 것이 밝혀졌다. 가이차에서는 두 사람이 공동으로, 한쪽이 소유하는 토지에서일련의 농작업에 필요한 노동을 동등하게 행하고 그 토지의 수확물을 엄밀하게 절반으로 나누는 콧체라고 부르는분익소작제도에 의하여 밀이 재배된다. 절반으로 나눈 이탈립성 밀 또는 엠머밀의 종자 일부가 이듬해 농사철에 종자로 사용된다. 이 종자에도 독보리의 종자가 혼입되며, 밀의 종자와 함께 분익소작의 상대방이 소유하는 밭에심어진다. 밀의 종자가 이와 같은 분배와 파종이 매년 반복된다. 분익소작의 상대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몇 년마다 교체되기 때문에, 밀의 종자가 소유자가 다른 밭에 차례로 심어지고, 그것과 함께 한 개체에서 유래된 독보리의 종자가 여기저기에 산포되는 것이다. 가이차에서 보이는 독보리의 다양성은 엠머밀이 이탈립성 밀밭의 주변부에서 함께 재배되는 일과 그 분익소작제도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벼과의 야생 식물의 받침껍질에 있는 까락은 포식의 회피와 종자의 산포, 정착을 위한 장치이다. 가이차에서는 눈으로 확인하는 종자 선별이 독보리 까락의 유무에 대한 선택압으로 작동하고, 밀 탈립성의 난이에 의하여 그것에 수반하는 독보리 까락의 유무가 결정되며, 엠머밀에 대한 유망형 독보리, 이탈립성 밀에 대한 무망형 독보리의 의태 수반관계가 성립하고 있다. 독보리의 종자는 밀의 종자와 함께 운반되기에, 독보리의 까락은 이탈립성 밀에 수반하는 독보리가 무망인 점도 포함하여, 종자 산포 장치로서 기능하고 있다. 종자 선별의 결과, 밀에 대한독보리의 의태가 진화하고, 그 결과로 인간이 독보리의 산포 알선업자로서 기능해 왔던 것이다.






농경 양식의 변화와 잡초의 존망


재배작물과 그 작부체계, 경종 조작, 작물의 이용방법은 시대와 함께 변화한다. 잡초는 이들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해 왔지만, 그것이 너무나도 지나치게 급격하면 잡초의 진화가 따라잡지 못하고 절멸하거나, 절멸의 위기에 처하는 상황이 된 잡초가 적지 않게 존재한다. 다른 한편, 이들의 변화에 몹시 대응하는 잡초도 존재한다. 다음 절에서는 농경 양식의 변화와 잡초의 존망에 대하여 일본의 논 잡초를 중심으로 해설하겠다.





절멸에 처한 일본의 논 잡초


일본의 논농사에 고도로 적응해 온 논 잡초이지만, 일부의 논 잡초는 최근 벼농사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절멸의 위기에 처하고 있다. 2001년에 발행된 <개정 킨기 지방의 보호상 중요한 식물>에는 논 잡초가 28종거론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을 가져온 원인으로 제초제의 사용을 머리에 떠올리는 독자도 많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논벼의 재배 양식의 급격한 변화가 원인이 되는 경우도 많다. 최근, 논벼농사를 둘러싼 사회 정세의 변화, 생산비 삭감과 노동력 절감 등의 이유로 모내기와 벼베기의 시기가 1개월에서 1개월 반 빨라졌다. 논 잡초는 매년 끝없이 반복되어 온 모내기, 벼베기 등 논벼 재배에 수반한 주기적인 경종 조작에 그 생활주기를 동조시키고, 다양한 생활사 특성을 고도로 적응시켜 왔다. 논벼의 재배 양식의 급격한 변화는 논 잡초의 진화 속도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라풀과의 여름에 자라는 한해살이 잡초인 올챙이풀과 올챙이솔, 물질경이는 여름의끝 무렵에 개화, 결실한다. 지금까지라면 이 시기의 논은 아직 담수 상태였다. 그러나 현재 이 시기의 논은 이미 물떼기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 종은 건조에 의하여 말라 죽고, 종자를 형성할 수 없으며, 다음 세대를 남길 수 없다. 다른 한편 두해살이 논 잡초에서는 이들이 개화·결실하기 전에 모내기 준비를 위하여 논이 쟁기질, 써레질되어 종자를 형성하기 전에 흙속에 갈아엎어져 다음 세대를 남길 수 없다. 예를 들면, 벼과의 Elymus humidus는 장일성이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이 종이 이삭이 패어 개화·결실한 뒤에 쟁기질, 써레질이 행해져 왔는데, 현재는 이 종의 이삭이 패기 전에 쟁기질, 써레질이 행해져 식물체가 흙속에 갈아엎어져 버린다(그림3-10).


그림3-10 논벼 재배의 경종 조작과 잡초의 생활주기(판본 1978에 올챙이풀을 추가)





앞에 소개한 벼의 재배 체계에 고도로 적응한 둑새풀의 논형은 벼베기 시기가 빨라짐에 따라 물떼기의 시기도 빨라져, 지금까지보다도 빨리 발아하기 때문에 연내에 식물체가 커지고, 일장반응성이 중성이기 때문에 겨울에 이삭이 패어 개화하고 겨울의 추위로 이삭이 장해를 입어 종자를 생산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있다. 게다가 일본 농가의 매우 꼼꼼한 손 김매기에 고도로 적응하여 논벼에 대한 의태를 획득한 강피는 손 김매기가 행해지지 않고 제초제를 사용하게 된 현재는 그 개체 수가 급감하고 있다. 다른 한편, 유전적 변이가 큰 돌피는 강피와는 반대로논에서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 또한 휴경 논과 방기 논에서는 교란이 없기 때문에 갈대 등 대형의 경쟁적인 종이침입하여 경쟁력에서 밀리는 논 잡초가 생존할 수 없는 상황이 되고 있다. 


이른바 전통적인 벼농사에 고도로 적응해 온 이들 논 잡초는 논벼의 재배 양식에 급격한 변화로 그 진화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절멸의 위기에 처하고 있는 것이다. 논 잡초의 자연지에 관해서는 이 시리즈 제2권 <일본인과 쌀>에 상세하다.





제초제 저항성 잡초의 진화


1947년에 세계에서 최초의 제초제 2,4-D가 개발되었다. 그뒤 여러 작용기작을 가진 제초제가 연이어 등장하고,농가는 제초를 위한 중노동에서 마침내 해방되었다.


제초제의 작용기작은 매우 다양하다. 주요 작용기작은 광합성 저해, 광합성에 관여하는 색소의 형성 저해, 식물 호르몬 작용 교란, 호흡 저해, 아미노산·단백질 생합성 저해, 지질 생합성 저해, 세포분열 저해 또는 과산화물 생선 등이다. 이들 작용기작을 가진 제초제 가운데 동물에는 없고 식물만이 가진 광합성과 특정 아미노산 생합성, 식물 호르몬 활성 등의 기능을 저해하는 화합물을 이용한 제초제는 인축 독성과 물고기 독성이 낮다. 최근은 더욱 미량으로 효과가 높고, 안전한 화합물이 개발되어 그들 복수의 화합물을 조합시킨 혼합제가 제초제로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농경지에서는 그 제초제에 대한 작물과 잡초 사이에 있는 생리·생화학적인 반응, 곧 감수성의 차를 이용하여 작물에는 해를 주지 않지만 잡초에 대해서는 그 생육을 억제할 수 있는 선택성 제초제가 사용되는 일이 많다. 제초제는 살균제와 살충제와는 달리 대상이 되는 잡초가 작물과 똑같은 고등식물이며, 또 양자가 똑같은 과와 속으로근연인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작물에는 해를 주지 않지만 잡초만 말라 죽이는 선택성을 제초제에 부여하는 일은 어려움을 수반한다. 그러나 양자의 생육 단계와 발아 심도, 제초제의 흡수·이행·대사 등의 차를 이용한 선택성 제초제가 개발되어 널리 사용되고 있다.


농경지에서 제초제를 연달아 사용하면 그곳에 출현하는 잡초의 종 조성에 변화가 나타난다. 예를 들면 대두밭에서 벼과 잡초에 대하여 효과가 있는 선택성 제초제를 연용하면, 벼과 이외의 잡초가 잔존하고 우점하게 된다. 이와 같은 잡초상의 변화를 weed shift라고 부른다. 현재 여러 가지 종류의 제초제가 시판되고 있기에, 제초제를 잘이용하면 특정 잡초를 우점시키는 일도 가능하고, 이 weed shift를 이용하여 관리가 더욱 용이한 잡초로 이루어진군락으로 잡초상을 인위적으로 이행시킬 수 있다. 


잡초는 이 제초제의 사용에 대해서도 강하게 적응한다. 특정 제초제의 연용에 의하여 그 제초제에 대하여 종래 감수성이 높았던 잡초인 개체가 통상 말라 죽는 농도의 제초제에 노출된 뒤에도 생존하고, 우점하는 사레가 끝없이 보고되기 시작했다. 잡초의 제초제 저항성 생물형의 표면화이다. 앞에 기술한 제초제에 대한 작물과 잡초 사이의 선택성이 양자의 종 수준 이상의 감수성 차를 이용하고 있는 데 반해 이 제초제 저항성의 획득은 종 안 개체사이의 감수성 차에 관계한다. 잡초의 제초제 저항성 생물형이 세게에서 최초로 인지된 것은 1968년으로, 미국 워싱턴주의 묘목밭에 출현한 광합성 저해제인 트리아진계 제초제에 대하여 저항성을 보이는 국화과 한해살이 잡초 개쑥갓에서였다. 일본에서는 사이타마현의 뽕나무밭에서 파라코트에 저항성을 가진 국화과의 여러해살이 잡초 봄망초의 생물형이 1980년에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그뒤 2009년 9월 말까지 189종의 잡초에서 332 저항성생물형이 보고되고 있다(그림3-11). 잡초의 제초제 저항성 생물형은 저항성의 정도가 높은 경우는 그 제초제의 표준 사용양의 수십 배부터 수백 배의 농도에서도 말라 죽지 않고(그림3-12), 번식한다. 



그림3-11 잡초의 제초제 저항성 생물형의 출현 수 추이(Heap 2009를 바탕으로 그림)




그림3-12 큰망초의 파라코트 감수성 생물형(■)과 저항성 생물형(▲)의 고사율(1989)


 


제초제의 사용은 잡초 집단에 대하여 강한 선택압으로 작용해, 제초제를 사용하면 통상 그 집단의 90%에서 99%의 개체가 사망한다. 잡초의 제초제 저항성 생물형은 제초제의 사용에 의하여 새롭게 출현한 것이 아니라, 집단 안에서 매우 낮은 빈도로 원래 존재하고 있던 저항성 생물형이 특정 제초제의 연용에 의하여 감수성 생물형(야생형)이 집단에서 제거되는 결과, 단기간에 우점하는 것에 의한다(그림3-13). 뒤에 기술하는 설포닐유레아계 제초제에 관해서는 이 제초제를 5년 연용하는 동안에 국화과의 한해살이 초본인 가시상치에서 이 제초제에 대한 저항성 생물형이 표현화한 것이 보고되고 있다. 



그림3-13 임의 교배하는 잡초 집단에서 발생하는 특정 제초제의 연용에 따른 제초제 저항성 개체의 상대비율 변화(Jasieniuk 외. 1996을 일부 고침). 저항성이 1개의 완전우성 핵유전자에 지배되고, 해당 제초제의 사용에 의하여 잡초 집단 안의 99%의 개체가 사멸한다고 가정.



더구나 잡초의 제초제 저항성에는 복수의 기구에 의하여 저항성을 발현하는 복합저항성이 알려져 있다. 농업의 장에서 유의해야 할 것은 잡초가 이 복합저항성을 획득하고, 다른 작용기작을 가진 복수의 제초제에 대하여 동시에 저항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글리포세이트 내성(저항성) 작물이 널리 재배되고 있는 미국에서는 오하이오주와 미시시피주에서 글리포세이트와 아세트 젖산 합성효소(ALS) 저해제 또는 글리포세이트와 파라코트에 동시에 저항성을 보이는 국화과의 망초 복합저항성 생물형이 이미 표현화된 것이 보고되고 있다. 타식성 잡초에서는 어느 제초제에 대하여 저항성을 가졌던 개체와 그것과는 다른 제초제에 대하여 저항성을 가졌던 개체가 각각의 적응도에 뚜렷한 저하가 생기지 않으면 교잡하는 일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그 경우, 복수의 제초제에 대하여 동시에 저항성을 지닌 복합저항성 개체가 출현할 가능성이 높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ALS 저해제와 아세틸-Coa 카르복실라제(ACCase) 저해제 등 작용점이 다른 7종류의 제초제에 대하여 동시에 저항성을 가진 이탈리안 라이그라스(Lolium rigidum)의 집단이 보고되고 있다. 이와 같은 복합저항성 생물형이 우점하면, 제초제에 의한 방제는 곤란해진다. 잡초의 제초제 저항성 생물형의 출현을 피하기 위해서 똑같은 작용점을 가진 제초제의 연용을 피하거나, 제초제의 사용 이외의 잡초 방제 수단을 강구하는 등의 방책이 필요하다. 





물달개비와 설포닐유레아계 제초제 저항성 생물형


1975년에 개발된 설포닐유레아계 제초제(SU제)는 식물의 분기쇄아미노산(발린, 류신 및 이소류신)의 생합성에 관여하는 아세트젖산 합성효소(ALS)의 작용을 저해하는 제초제이다(그림3-14). SU제가 살포된 식물에서는 이들의 아미노산이 생합성되지 않고 세포분열이 저해된 결과, 식물체의 생육이 정지하고 말라 죽기에 이른다.동물은 이들을 생합성하는 경로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동물에 대한 SU제의 독성은 낮다. SU제의 일종인 벤설프론메틸은 벼의 체내에서 신속히 대사·무독화되는 한편, 벼과 이외의 식물에서는 대사가 매우 완만하기 때문에 그들 식물의 ALS 활성을 뚜렷하게 저해한다. 이 차를 이용한 SU제와 잡초 피 종류에 유효한 성분을 혼합한 제초제는 미량으로 폭넓은 풀 종류에 높은 효율을 나타내고, 또 풀을 억제하는 기간이 긴다는 뛰어난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이와 같은 SU 혼합제가 1980년대 후반부터 일본의 논에서 널리 사용하게 되고, 2003년에는 일본의 논 60% 이상에서 사용되었다. 다른 한편, 이 SU제에 대하여 저항성을 보이는 논 잡초의 생물형이 일본에서는 1996년에 홋카이도의 물옥잠에서 보고된 이래, 2009년 9월 말 현재로 밭둑외풀 종류, 논둑외풀, 물별, 구와말, 올챙이고랭이, 물달개비, 벗풀 등 적어도 17종으로 각지에서 연이어 보고되고 있다.


그림3-14 발린, 류신 및 이소류신의 생합성 경로(武田 외 1989를 고침). SU제는 그림 안의 ALS의 작용을 저해한다.




트리아진계 제초제와 파라코트 등의 제초제에 대한 잡초의 저항성 생물형은 이들 제초제가 살포되지 않는 환경에서는 우점하는 일이 없다. 그것은 저항성을 부여하는 돌연변이가 동시에 광합성계 Ⅱ의 효율도 저하시키고, 건물생산량(개체량)이 감소한 결과 경쟁력이 감수성 생물형보다 떨어져 다음세대에 남는 자손의 수로 평가되는 적응도가 저하되기 때문이다. 비름과의 한해살이 잡초 털비름의 SU제 저항성 생물형에서는 트리아진계 제초제와 파라코트 등의 제초제에 대한 저항성 생물형으로 보고되고 있을 정도의 건물생산량 감소는 확인되지 않았다(그림3-15). 그 이유는 지금까지 보고되고 있는 ALS 유전자좌에서 생긴 SU제 저항성을 부여하는 돌연변이가 ALS 그것의 활성 저하를 가져오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명아주과의 한해살이 초본 댑싸리와 벼과의 한해살이 초본 털빕새귀리 등에서는 SU제 저항성 생물형의 종자가 감수성 생물형의 종자와 비교하여 더욱 저온에서 발아하는 일이 밝혀지고 있다. 이 이유는 댑싸리의 저항성 생물형의 종자에는 발린, 류신 및 이소류신이 감수성 생물형 종자의 2배 이상 포함되고, 이에 의하여 발아에 이르는 세포분열과 생장이 저온에서도 더욱 촉진되기 때문이라고 추정되었다. 모델 식물인 애기장대의 돌연변이 계통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는 SU제 저항성 생물형의 종자 생산 수가 SU제 감수성 생물형보다 감소하는 일이 보고되고 있다. 잡초의 제초제 저항성 생물형의 적응도를 평가하는 일은저항성 유전자의 환경 안으로의 확산속도의 추정과 제초제 저항성 생물형의 방제 계획을 책정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적응도의 평가에는 대상이 되는 개체의 유전적 배경과 유전자의 다면발현 유무 등 고려해야 할 요인이 많고, 어려움을 수반한다. SU제 저항성 생물형의 적응도에 관해서는 아직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많지만, SU제 저항성을 획득함으로써 저항성 생물형에게 그 정도는 다르지만, 적응도의 저하가 생기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림3-15 아트라진*(좌)과 설포닐유레아(우)에 대한 털비름의 감수성 생물형(■) 및 저항성 생물형(▲)을 다양한 비율로 섞어 심었을 때 각각의 생물형의 건물생산량(Conard & Radosevich 1979 및 Sibony & Rubin 2003을바탕으로 그림).

*아트라진=광합성 저해제 트리아진계 제초제의 일종





SU제는 일본의 논벼농사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논 잡초의 SU제에 대한 저항성 생물형의 출현에 의하여 이 제초제를 기본으로 한 논벼의 잡초 방제체계의 변경이 필요해지고 있다. 특히 논벼의 담수 직파재배에서는재배 초기의 잡초 방제가 매우 중요하고, 또 사용할 수 있는 제초제의 종류가 적은 점도 있어 이 저항성 생물형에대한 대응이 긴급하고 중요한 과제이다. 여기에서는 잡초 피 종류와 아울러 일본의 논벼농사의 주요 잡초인 물달개비에 관하여, SU제 저항성을 부여하는 유전자의 돌연변이 부위 해명과 이 저항성 유전자의 기원, 확산 등에 관한 우리의 연구를 소개하겠다.


물달개비는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분포하는 물옥잠과의 수생 한해살이 초본으로, 가는물달개비(2n=24)와 물옥잠Monochoria valida(2n=28)의 교잡으로 생긴 이질4배체라고 추정되고 있다. 이 종은 옛 시대에 논벼에 수반하여 일본으로 건너온 역사 이전 귀화식물의 하나이다. 


일본에서 물달개비의 SU제 저항성 생물형(그림3-16, 3-17)에 관해서는 2004년 8월의 조사에서 19부현에서 그 출현의 보고가 있었는데, 현재는 거의 전국적으로 표현화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우리는 아키타현부터 후쿠오카현의 15개소 논에서 출현한 물달개비의 SU제 저항성 집단에 대하여 ALS 유전자좌의 염기배열을 결정하고, SU제 감수성 개체의 그것과 비교했다. 물달개비는 6개의 ALS 유전자좌 ALS1, ALS2, ALS3, ALS4, ALS5, ALS6(ALS4는 이미 기능을 잃은 가짜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비교를 위하여 시료가 된 각지의 SU제 감수성 개체에서는 ALS 유전자좌에서 염기 치환은 전혀 확인되지 않았지만, 아키타현 센보쿠시仙北市, 시즈오카현 후지에다시藤枝市, 간나미정函南町, 이즈노쿠니시伊豆の国市, 교토부 교탄고시京丹後市 및 효고현 가사이시加西市의 SU제 저항성 집단에서는 ALS1에서 나머지 대부분의 잡초에서 SU제 저항성을 부여한다고 이미 보고되고 있는 프롤린 잔기 Pro197(애기장대 ALS의 197번째 아미노산 잔기)에 대응하는 코돈에서 이것을 각각 세린, 트레오닌, 또는류신으로 변화시키는 한 1염기치환(점돌연변이)가 확인되었다. 또한 후쿠시마현 아이즈반게정会津坂下町, 이바라키현 우시쿠시牛久市, 시즈오카현 카케가와시掛川市와 모리정森町 및 교토부 교탄고시의 다른 SU제 저항성 집단에서는 ALS3에서 각각 류신, 세린 또는 히스티딘으로 변화시키는 1염기치환이 확인되었다. 게다가 후쿠오카현 미야와카시宮若市의 SU제 저항성 집단에서는 Asp376에 대응하는 코돈에서 글루타민산으로 변화시키는 1염기치환이 확인되었다(표3-3). 그러나 나머지 ALS 유전자좌에서는 염기치환은 확인되지 않았다. 또한 교토부 마이즈루시舞鶴市의 SU제 저항성 집단에 관해서는 SU제 저항성을 부여한다고 생각되고 있는 염기치환이 확인되지 않았다. 각각의 SU제 저항성 집단에서는 저항성을 부여하는 1염기치환은 집단 안의 모든 개체에서 똑같았다. 물달개비는 개방화와 폐쇄화를 달고, 개방화도 거의 자식하기 때문에 자연 돌연변이로 생긴 한 개체에서 유래하는 SU제 저항성 유전자가 종자를 통하여 그 집단 안으로 확산되었다고 추정된다. 



그림3-16 SU제 살포 이후에도 잔존하고, 논벼의 그루 사이를 온통 덮은 물달개비(교토부)



그림3-17 물달개비의 SU제 저항성 생물형(좌)와 감수성 생물형(우)의 SU제에 대한 반응. 통상 사용하는 농도의 SU제 용액 안에서 10일 동안 수경재배한 결과.





SU제 저항성을 부여한다고 생각되는 염기치환이 ALS 유전자좌에서 확인되지 않았던 교토부 마이즈루시의 집단을 제외하고, 조사한 SU제 저항성 집단에서는 SU제의 작용점인 ALS의 아미노산 배열이 ALS 유전자의 돌연변이에 의하여 감수성 생물형과 다른 것이 밝혀졌다. 이 아미노산 배열의 변화는 이 효소의 입체구조의 변화를 가져온다. Lin 외는 질경이과 구와말의 SU제 저항성 생물형과 감수성 생물형의 ALS 2차구조를 비교한 결과, SU제 저항성 생물형에서는 ALS의 2차구조 변화에 의하여 SU제의 결합 부위 구조가 변화했기 때문에 SU제가 결합할 수 없게 되었던 것에 의하여, 또는 결합 부위 그것이 사라져 버렸던 것에 의하여 SU제 저항성이 부여되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또한 저항성을 부여한다고 생각되는 염기치환이 확인되지 않았던 교토부 마이즈루시의 집단에 관해서는 현재, 그 저항성의 기구는 알 수 없다. 


조사한 SU제 저항성 개체의 ALS 유전자좌에서 일어난 염기치환과 그에 수반한 아미노산의 변이를 보면, 아키타현 센보쿠시, 시즈오카현 후지에다시와 간나미정 및 교토부 교탄고시의 SU제 저항성 집단과 이바리키현 우시쿠시, 시즈오카현 카케가와시와 간나미정 및 교토부 교탄고시의 다른 SU제 저항성 집단에서는 각각 ALS 유전자좌의 똑같은 부위에서 똑같은 1염기치환이 발생하고 있었는데, 그외의 SU제 저항성 집단에서는 저항성을 부여했다고 생각되는 ALS 유전자좌의 1염기치환, 곧 아미노산 변이의 패턴이 각각 모두 달랐다(표3-3). 똑같은 1염기치환이 확인된 각각의 3부현의 저항성 집단의 자생지는 직선거리로 서로 약 24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고, 이 거리를 물달개비의 꽃가루나 씨앗이 자연적으로 이동한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또한 시즈오카현 간나미정 안의 반경 3킬로미터 이내에서 채집된 세 저항성 집단에 관해서도 각각 다른 1염기치환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들로부터 조사 개체의 SU제 저항성은 최초로 SU제 저항성을 획득한 한 개체로부터 일본 각지로 저항성 유전자가 확산된 것이 아니라, SU제 저항성을 부여하는 돌연변이가 각각 독립적으로 일으켰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생물형

유전자좌

Als1

Als3

코돈

아미노산

코돈 

아미노산

감수성 생물형


저항성 생물형

  아키타현 센보쿠시

  후쿠시마현 아이즈반게정

  이바라키현 우시쿠시

  시즈오카현 모리정

  시즈오카현 카케가와시

  시즈오카현 후지에다시

  시즈오카현 간나미정A

  시즈오카현 간나미정B

  시즈오카현 간나미정C

  시즈오카현 이즈노쿠니시

  교토부 교탄고시A

  교토부 교탄고시B

  교토부 마이즈루시

  효고현 가사이시

  후쿠오카현 미야와카시

CCT



T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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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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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

표3-3 물달개비의 ALS 유전자좌에서 일어나는 염기치환(Ohsako and Tominaga 2007, Imaizumi 외. 2008, 稻 외 2008에서 작성)





물달개비에서 SU제 저항성을 부여하는 1염기치환의 출현이 유전자좌에 따라서 달라지고 있었던 것은 해당 유전자좌에서 1염기치환이 생기는 빈도의 차에서 유래하는지도 모른다. 물달개비에서는 ALS2에서 일어나는 염기치환이 생기는 빈도는 ALS1 또는 ALS3의 1/2에서 1/5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마찬가지의 경향이 미국에서 출현한 해바라기 잡초형의 SU제 저항성 생물형에서도 보고되고 있다. 제초제의 작용점이 되는 효소의 생합성에 관계된 유전자좌에서 일어나는 1염기치환의 출현 빈도 차이를 제초제 저항성 생물형의 출현 예측에 응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에 관한 자료의 집적과 그 해석이 기대된다.





제초제 내성 작물과 잡초


유전자변형 기술에 의하여 만들어낸 제초제 내성(저항성) 작물의 상업 재배가 1996년에 개시되어, 2008년에는남북 아메리카를 중심으로 세계의 약 7900만 헥타르의 밭에서 제초제 내성 대두, 옥수수, 유채, 목화 및 사탕무가 재배되고 있다. 이들 제초제 내성 작물은 제초제 글리포세이트, 글루포시네이트 또는 브로목시닐 어느 하나에대한 내성(저항성)을 가지고 있으며, 해당 제초제가 살포되어도 그 생육에 영향은 없고 말라 죽지 않는다. 이들 제초제 내성 작물의 재배에 수반하여 잡초의 세계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들 제초제 내성 작물의 대부분은비선택성 제초제 글리포세이트에 대한 내성(저항성)이 부여되어 있어, 이들이 재배되는 밭에서는 글리포세이트가 연용된다. 이 때문에 원래 글리포세이트가 살포되어도 말라 죽기 어려운 닭의장풀 종류나 쇠뜨기 종류 등의 잡초가 우점하는 경향이 발견된다. 또한 미국에서는 대두-옥수수 또는 대두-목화-옥수수의 돌려짓기가 행해지는 일이 많아, 어느 작물이라도 글리포세이트 내성 품종이 재배되기 때문에 글리포세이트 내성 대두를 재배할 때 앞그루인 글리포세이트 내성 옥수수의 떨어진 종자에서 싹이 튼 개체(자원활동 작물=앞그루의 작물이 뒷그루에서 해초가 됨)가 글리포세이트 살포 뒤에도 잔존하여 대두와 경쟁하는 일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에 더하여 글리포세이트의 연용에 의하여 글리포세이트 내성 작물의 밭 이외에서 출현하는 사례도 포함하면, 16종의 잡초로서 이 제초제에 대한 저항성 생물형의 출현이 확인되고 있다. 이들 생물형의 저항성 획득 기구는 알 수 없는 점이 많지만, 밝혀진 예로서 글리포세이트의 목표점인 시킴산 경로에 관여하는 효소 유전자좌에서 일어나는 1염기치환, 잎에서의 글리포세이트 흡수 저해 또는 글리포세이트 흡수 이후의 전류轉流 저해를 들고 있다. 잡초의 글리포세이트 저항성 생물형의 출현은 내성(저항성) 작물에서 잡초로 내성(저항성) 유전자가 확산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독립적으로 자연돌연변이로 생긴 잡초의 글리포세이트 저항성 개체의 빈도가 글리포세이트 연용에 의하여 증가하여 표면화된 것이다. 따라서 글리포세이트 내성 작물과는 그 내성(저항성)의 기구가 다르다.


제초제 저항성 유전자의 확산은 저항성을 획득한 개체의 적응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저항성 개체의 적응도를 평가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잡초의 글리포세이트 저항성 생물형이 지금까지 표면화되지 않았던 이유의 하나로, 저항성을 획득한 개체의 적응도 저하를 들 수 있다. 벼과의 이탈리안 라이그라스에서는 글리포세이트 저항성 개체의 적응도 저하가 보고되고 있지만, 아직 알 수 없는 점이 많다. 저항성 생물형의 적응도는 농경지와 자연 집단 안에 있는 저항성 개체의 빈도 변화에 직접 관계되는 형질이기 때문에, 앞으로 한층 더 자료의 축적이 요구된다.


제초제 내성 작물의 재배에 관해서는 해당 작물부터 근연 야생종에 대한 제초제 저항성 유전자의 유동도 유의해야 할 과제이다. 일반적으로 작물이 인간의 손을 빌리지 않고 자연상태에서 오랜 세월에 걸쳐 생육하며 번식을 반복하는 일은 어렵다. 또한 작물과 그 근연 야생종의 사이에서 잡종이 형성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잡종은 작물의특성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기에 자연상태에서는 적응도가 낮고, 그 때문에 자연환경 안에서 저항성 유전자가 확산될 가능성은 낮다고 추정된다. 예를 들면, 일본에는 대두의 근연 야생종인 돌콩이 생육하고 있다. 대두와 돌콩 사이에는 드물게 잡종이 형성되지만, 그 잡종이 형성하는 종자 수는 적고, 그 종자의 월동률은 매우 낮은 등, 그 적응도는 자연상태에서는 낮은 점이 시사되고 있다. 대두에서 돌콩으로 제초제 저항성 유전자가 확산되는 것에 관해서는 아직도 해명해야 할 과제가 남아 있지만, 현재로선 대두의 제초제 저항성 유전자가 자연환경 안에서 확산할 가능성은 높지 않은 듯하다. 다른 한편, 몇 가지 작물에서는 그 근연 야생종과의 사이에서 유전적 교류가 자유롭게 이루어져 작물-잡초 복합을 형성하고 있다. 이 경우 잡종의 적응도는 낮지 않고, 되돌이 교잡도 빈번하게 발생하기에 저항성 유전자가 자연 집단에 잔존하여 확산될 가능성이 높다. 유채와 십자화과의 잡초, 옥수수와 테오신트 등 작물-잡초 복합에서 일어나는 제초제 저항성 유전자의 확산에 관해서는 앞으로도 계속하여 관찰해야 한다.


잡초는 농경에 수반하는 여러 가지 경종 조작에 고도로 적응하며 농경지에서 번영해 왔다. 잡초는 농경지와 그 주변에서만 그 집단을 유지할 수 있는 농경지의 전문가인 것이다. 그러나 농업의 형태가 급격히 변화하면, 잡초의 진화 속도가 그 급격한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일부의 잡초는 절멸하거나, 절멸위기에 처하게 된다. 다른 한편, 제초제에 대한 저항성을 획득한 잡초처럼 새로운 농업의 형태에 세차게 적응하는 잡초도 있다. 잡초라고 하는 식물은 농업의 변화와 함께 앞으로도 모습을 바꾸며 세차게 살아남아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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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5




기고3

인간의 행위와 자연의 경계선

앤 맥도널드






자연이 그린 구역


안개에 쌓인 다락논. 그것은 고뇌의 빛을 띤 풍경이었다. 그 고뇌의 표정 아래에 있는 것은 슬픔, 절망, 그리고 뱃속까지 울리는 공포 …… 눈앞에 펼쳐진 안개에 앞을 내딛는 발을 멈추었다. 안개의 막이 그 건너쪽과 이쪽을 구획짓는 경계선처럼 느껴져, 그것을 밟고 넘어보자고 생각하는 내가 있는 동시에 발을 내디디지 않는 나도 있었다. 그 "자연이 그린 경계선"을 밟을까 밟지 말까 망설이면서 안개를 내려다보았다.


처음으로 다락논을 보고 체험한 "산간지형 벼농사 풍경".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처음 일본에 왔을 때의 기억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이 1982년 늦봄의 일. 뼛속까지 시린 보슬비 속, 나라의 농촌을 여행한 뒤, 와카야마현으로 향하고 있던 나는 굽은 등뼈 같은 좁은 길을 빙글빙글 돌아 산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검은 그림 같은 풍경의 안으로, 깊숙이 빠져 가는 느낌이 들고, 빛이 닿지 않는 숲을 뒤덮은 안개가 응축되어 서서히 무겁고 짙어졌다.


북미 대륙의 평원 지대를 떠나 동양의 섬나라로 날아와 얼마 안 된 즈음이었다. 동양의 산길을 걸으면 끝없이 펼쳐진 360도의 평원 지대의 하늘에서 온 나는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평선까지 대지를 뒤덮은 것처럼 보이는 보리, 밀, 채종밭의 경치는 매우 개방적이었다. 또는, 그 개방감은 자연에 대하여 인간이 우위에 있다는 착각에서 오는, 대륙에서 태어나 자란 나의 신체에 물들어 있던 자연관일지도 모른다. 대륙의 자연은 평탄하게 펼쳐지고, 하늘이 낮게 떠 있는 듯이 느껴진다. 


한편, 산림 지대가 많은 섬나라 열도에 그려져 있는 공간은 다양하다. 또, 그 공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연을 받아들이는 방식도 여러 가지이다. 자연계가 그린 선, 그에 대하여 인간이 여러 개의 선을 더하는 것이다. 





환경역사학에서 보는 인간과 자연의 경계

 

때로는 내부 자연관이 경관에 대한 공감을 어렵게 만든다. 안개에 싸인 다락논을 여행했을 때의 일이다. 일본인은 그 아름다움에 감동하지만, 그 풍경에 아름다음을 느끼지 못하는 내가 있었다. 여운이 있는 공포 -급경사에 매달려 있는 것 같은 한 배미 한 배미의 논 뒤쪽으로, 세월을 느끼게 하는 돌담이 비틀비틀하게 있다. 왜인지 그 경관이, 뒤따라 붙은 과거를 등에 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농산촌의 여행을 나와 함께 한 일본인은 생사의 애달픔을 자연에 비유했다 -찾아오자마자 가버린 봄, 비와 바람을 맞으면서 고요하게 춤추며 흩어지는 벚꽃. 자연에 대한 감동과 감명에는 보편성이 있는 반면, 가지고 태어난 자연관의 차이가 드러나는 일도 있다고 느꼈던 어느 날.


자연이 만들어낸 풍경과 풍토와, 그 안에 있는 인간의 행위가 거미줄처럼 느껴진다. 자연과 인위 -교차되는 실이 이중성의 모자이크를 만든다. 자연계가 인간의 행위를 만들고, 그리고 인간의 행위에 의해 변하는 자연도 있다. 


인류가 등장한 이래 이것은 인간의 역사에서 되풀이되는 이야기이다. 예전에는 인류 문명의 시작이라고 이야기되는, 길가메시 전설의 무대이기도 한 현재 이라크의 수메르에서는 '숲의 원정'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산림 파괴라고까지 말하는 목소리도 있음- 이야기가 있다. 수메르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문명이 흥하여, 정착형 인간사회로 차츰 흙에서 떠나게 된 인간들. 그들 도시주민의 생활기반을 지탱해 가기 위해, 시계로부터 멀리 있던 자연계가 아무 말없이 변하여 간다. 그리고 비농업자의 식량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농업의 산업화가 진행되고, 그 변화가 다시 도시화에 박차를 가한다. 직접적인 반응(다이렉트 피드백)이 존재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 즉 인위적활동이 자연계에 미친 영향이 직접적으로 인간 자신에게 돌아오는 관계와 비교하면, 도시형 사회에서는 자연과의  인연이 희박해지고, 어느 의미에서 잘려 버린다. 도시화와 농업화에 의하여 인간과 자연계의 사이에서 이중의 선이 그어진다. 사람들에게 식량의 안정적 공급. 물론이지만,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그들의 생명을 지탱해 가기 위한 식량 획득은 환경이나 정치경제 등 여러 영역에서 중요한 과제이다. 기술혁신이 촉진되어, 식량의 생산량과 생산지는 확대된다. 멈추지 않고 계속 늘어나는 인간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하여, 인간이라는 생물은 꽤 만만치않았다고 인류사를 바라보면 생각하는 것. 다습한 초원을 변신시킨 간척사업, 하천의 흐름을 바꾸는 관개용수와 댐 조성사업 등 자연의 모습을 착착 바지런하게 바꾸어 왔던, 그것이 "인간자연사人間自然史"이다.




토쿠가와德川 시대


과거를 더듬어, 토쿠가와 시대를 예로 들어 보겠다. 1600년부터 1720년, 120년 동안 개간에 의해 농지가 대략 배가 되었다. 면적으로 말하면, 150만 헥타르에서 297만 헥타르로 늘었다. 쇼나이圧内 평야에서는 당시의 수공학 기술을 최대로 활용해 아카가와赤川의 흐름이 바뀌었다. 면적으로 보면, 1650년까지 5000헥타르의 다습한 초원이 논으로 변하고, 더구나 그 증가 면적은 1750년에는 8000헥타르, 1870년에는 9600헥타르까지 이르렀다. 쇄국 시대 일본은 순환형 사회라고 이야기되는데, 열도의 국민에 대한 식량 공급을 위해 자연이 그때까지 그렸던 선을 새롭게 다시 그은 것이 확실하다. 


논은 아시아의 원풍경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언제부터 원풍경인 것인지 때때로 생각하곤 한다. 쇄국이었던 토쿠가와 시대. 지정학적인, 사회적인 등과 같은 경계를 만들고, 다차원적으로 안과 밖의 선을 그었다. 국내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와의 사이에도 선을 긋고, 출도出島라는 문에 다른 나라와의 교차점이 정해졌다. 누구라도 인식하고 있는 일본의 과거. 잠깐 보아 사람과 사물의 흐름을 제한한 것 같은데, 그러나 저류에서는 사물의 움직임도 있었다.


간척사업이 성행한 토쿠가와 시대와 동시기에 타이완에서도 사람의 손에 의한 자연 변신이 실행되었다. 이들은 타이완의 선주민에 의한 것이 아니라, 네덜란드인, 중국인, 그리고 일본인의 손이 뒤얽혀서 일어난 자연 변신이었다. 향신료 무역경쟁에서 출발이 늦었던 네덜란드가 타이완에서 요새를 열다섯 조각의 인도 천으로 "구입"한 거래가 시작이었다. 그뒤 네덜란드인은 타이완의 자원을 무역재로 쓰고, 그리고 요새를 지키는 군사들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집약적 농법을 도입했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존재하고 있던 자기완결적인 생계가 대규모 단작으로 변화한다. 이것은 밭농사를 중심으로 한 집약적 농법이었기 때문에, 주식이 되는 쌀은 일본에서 구입했다(타이완에서는 그때까지 보리와 토란을 주식으로 삼고 있었는데, 쌀을 주식으로 삼았다는 것은 흥미롭다). 그러나네덜란드인은 거래의 달인이었기 때문에, 타이완의 사슴가죽과의 물물교환에 의하여 일본으로부터 쌀을 손에 넣었다. 당시 타이완산 사슴가죽은 일본에서 유행하고 있었다. 부드럽고 사용하기 편하며, 젖어도 줄어들지 않는 점 때문에 무사와 상인 사이에서 인기였다. 


타이완에서 네덜란드 요새의 시대는 1662년에 막을 내리고, 37년 동안의 통치 기간에 대략 9800헥타르의 원생림을 시작으로 하는 타이완의 원풍경이 집약적 농법 때문에 밭과 논으로 변했다. 그리고 식량 공급을 비롯해 무역을 위하여 163만8000매 이상의 사슴가죽이 타이완에서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토쿠가와 시대의 막이 내리려 할 때, 타이완의 사슴은 절멸의 위기에 빠지고 개간 면적은 60만 헥타르가 되었다. 


쇄국을 하던 토쿠가와 시대는 순환형 사회였다고 이야기된다. 세계에서 영토를 확대해 각지의 자원을 착취하던 제국 시대의 유럽과 국경 없는 지구적 시대라고 이야기되는 헤이세이의 일본과 비교하면, 확실히 순환형 사회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쇄국 순환형의 토쿠가와 시대"와 "식량을 비롯해 사물의 자급률이 낮은 국경 없는 지구화의 헤이세이 시대"로 명확히 대립시켜 버리는 것에 나는 위화감이 있다. 국내에서는 간척과 관개 사업이 행해지고, 또 쇄국이라고는 말하지만 간접적으로 타이완의 사슴을 절멸의 위기로 몰아넣었다. 나타데코코, 새우 등의 식량 소비가 다른 나라의 환경을 파괴하고 있는 현상이라는 의미에서는 차이가 없으며, 토쿠가와 시대가국경 없는 지구적 시대의 선두에 있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문자에서 보는 안개


더욱 과거를 더듬어, 다락논을 우리들의 손으로 만든 키이紀伊 반도의 사람들은, 다락논을 떠도는 안개를 어떻게 보았을까? 그 답은 자연계를 표현하는 기상, 계절, 그 고찰을 언어로 한 고전문학 안에서 살피고 있다.


안개와 일본문학. "계절과 연정은 일본 고전문학의 요점이다"라는 한 문장으로 막을 올리는 <문예기상학>에 대한타카하시 카즈오高橋和夫 <일본 문학과 기상>(중앙공론사, 1978)은 안개란 단순한 대기의 운동으로 인한 여러 현상의 기상 가운데 일부가 아니라, '인간이 토하는 숨'이라고 말을 걸고 있다. 게다가 <문예기상학>에 대하여 타카하시는 "기상이 인간의 물질생활이란 면만이 아니라, 인문적 생활의 면에서도 과거부터 현대까지 풍부한 문화를 탄생시킨 중요한 대상이자 계기가 되었단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고전 작가들은 바람의 움직임, 구름의 흐름, 초목의 성장에도 예민하게 느끼고, 그것에서도 인생의 의미를 찾아냈다. 그 과거 사람들의 마음을, 현대 기상학의 기초적 분야의 성과에 근거하여 지금의 우리들이 놓치고 있는 "자연 안의 인간"을 재발견하고, 문예창작의 비밀을 밝혀 나아가는 것은 큰 의의가 있다"고 말한다. 


문학이 남겨준, 자연 안에 있는 인간의 모습. 자연관, 자연의 자리매김, 인간의 자리매김도 포함하여 자연과의 선이 어떻게 그어졌던 것인가? 그 힌트가 만엽집 안에 있다. 야마가미 노쿠라山上憶良는 기상현상의 하나인 안개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오노야마大野山 안개 자욱히 낀다 내가 한숨지은 숨결의 바람에 안개 자욱히 낀다"(799)


기상 단어와 생명의 표현이라는 이중의 의미를 지닌 만엽의 '안개'. 이누카이 타카시犬養孝의 <만엽의 풍토>(塙書房, 1971)의 대략 수를 참고로 하면, 만엽에는 '안개'가 80단어 포함되고, 노래 수로 하면 77수. 그들을 지역별로 보면, 동일본은 없고 모두 서일본의 노래이다. 70년대의 기상 기록과 비교하여 보면, 만엽가의 무대가 되는 '나라'는 현대의 일본에서도 안개가 발생하기 쉬운 곳이다. 단순한 가인의 공상이 아닌 듯하다.


만엽 가인이 자연현상에 오감을 기울였다고 상상하는 것은 나의 상상일 뿐일까? 자연이 드러낸 자연현상을 어떻게 느끼고, 받아들일 것인가? 그들은 주관적이고, 또한 헤아리기 어려운 무형의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자연과 인간의 접촉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개개의 내부 자연관의 기초를 만들어 내고 있다. 자연의 일부로 나를 놓을 것인가, 아니면 자연계의 위에 나를 놓을 것인가? 그것이 바로 자연자원 이용의 방식을 결정하는 근본이라고 생각한다.





육지와 바다의 경계


사람들과 자연계의 경계선 -사람들이 자연계와 선을 긋는 일도 있다면, 때로는 자연계가 인간과 선을 긋는다. 홋카이도부터 큐슈까지 다이하츠사의 미제트에 타고 흔들흔들, 하늘하늘 하며 해안을 따라 돌기 시작한 지 11년이 지났다. 육지와 바다의 경계에 살고 있는 "바닷사람"이 어떻게 해양이라는 자연계를 보는지, 내륙에서 살고 있는 "육지사람"과 다른 자연관을 가지는지 어떤지, 그 탐구를 위하여 제멋대로 여행(현지조사)을 위해 작가이자 카메라맨인 故 이소가이 히로시礒貝浩와 나갔다. 2009년에는 일본이라는 네 개의 섬의 80%까지 돌았다. 그 여행을 되돌아보면, 떠오르는 것은 태풍의 계절이다. 자연이 그린 선, 경계에 민감한 바닷사람. 비바람으로 거칠어진 난바다, 폭풍과 폭우의 난바다, 푸른 하늘 아래에서 맹위를 떨치는 강대한 파도. 자연계가 '이 이상은 출입금지'라고 선언하고 있는 듯하다. 숨을 곳을 육지에서 구하는 성질이 있는 인간은, 이러한 때에는 자연의 경고에 순순히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늘 그런 건 아니다. 자연계가 그은 선을 무시하는 사람의 행위도 있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과학기술. 기술개발, 그 획기적인 최신 기술 도입에 의하여 '생태적 혁명'이 일어나면 환경역사학자인 머천트Merchant 씨는 경종을 울린다. 즉, 과학기술혁신이 일으킨 인간 사회와 자연계의 관계 붕괴. 자연계가 그은 경계를 넘은 영역까지 인간의 행위가 걸음을 내디디고, 보전형 자원 이용에서 멀어져 감으로써 인간과 자연계의 관계에 새로운 선이그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홋카이도 시레토코知床 반도 라우스羅臼에서 잿빛으로 물든 해질녘이었다. 영하 19도 속에서 난바다로 가는 명태 어선에 탔다. 흘러오는 유빙을 부수면서 명태잡이가 행해진다. 예전부터 유빙의 계절에는 자연이 바닷사람에게 '육지에서 잠깐 쉬어라' 하고 말했다고 목선 시대를 살았던 노인이 중얼거렸다. 플랑크톤을 비롯한 영양을 날라오는 유빙은 그 바다에 영양을 주고, 일종의 해양 충전기, 해양생명에게 필요한 보식의 시기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선과 어구, 어업기술의 혁신이 그 잠깐 쉼을 없앤다. 맑아도, 흐려도, 눈이 오더라도 충전하고 있는 유빙을 부수고 난바다로 나간다.


맑은 날에는 쿠나시리国後가 보이는 시레토코 반도 라우스인데, 그날은 드라이아이스의 흰연기처럼 안개의 벽이 세워져 섬의 모습이 감추어졌다. 그 안개 속을 가는 어선이 인간이 그은 바다 안의 지정학선, 즉 국경을 허가 없이 넘어서는 일은 간혹 있는 듯하다. 기름값조차 나오지 않는 고기잡이가 계속되면, 이 "불혹의 국경 넘음"은 어부를 유혹한다고, 고요한 목소리가 말했다. 목표로 한 물고기와, 인간이 그은 선과. 다른 자연의 선이 교착하는 안을 간다. 


국가들이 그은 선, 개개의 어장을 정하는 선, 어종과 고기잡이철을 정하는 선, 육지의 위에서 정해진 여러 선이 바다 위에서 교착한다. 인간에 의한 국경선, 자연계가 정하는 국경선, 그들의 선 안에서 살아가는 지구이지만, 국경 없는 시대, 즉 선이 없는 시대를 이념으로 하는 지구도 있다. 


국경을 없애자는 움직임과 평행하게, 국경을 재구축해 가는 지구 사회. 현대만의 경향인 것 같다고도 생각할 수 있고, 인간사에서 반복되는 경향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이 자연의 선 긋기에 여운이 남는 파도를 일으킨다. 그러한 인간의 행위를 이해하기 위한 학제적인 학문을 지향하는 보더 스터디즈border studies가 80년대에구미의 국경 지역에서 생겼다. 국경 없는 시대이기 때문에, 인간이 그리고 싶어 하는 유형의 국경(visible borders, 예를 들면 지정학선)과 무형의 국경(invisible borders, 예를 들면 정신적 선과 의식적 선), 또한 경제적 선, 문화사회적 선이 거미집처럼 실을 뽑는다. 그리하여 여러 가지 국경을 인식하는 일이 필요한 시대이기도 하다. 인간의 행위, 특히 그 노동과 타인, 타국, 그밖에 여러 생물과의 관계에 대하여 인식을 깊게 하기 위한 학문 추구가필요해지고 있다. 


태풍 18호가 지나간 직후, 이토 반도의 해안을 걸었다. 태풍에 의해 육지와 바다의 선이 새롭게 그어진 것처럼, 해안을 따라 난 길은 모래와 해조로 뒤덮였다. 태풍을 비롯한 이상기후 현상의 빈도가 확실히 높아졌다고 하는 의론은 차치하고, 2009년 아시아를 통과한 태풍이 할퀸 자국은 심하게 느껴진다. 산업혁명 이후 인간의 행위가 선을 자근자근 그어 가고 있다. 이것이 인간과 자연계 사이의 선을 요동치게 하고 있다. 예전부터 자연현상이라고 생각하던 기후변화는 인간의 행위에 의해 달갑지 않은 현상이라 간주하게 되었다. 빙하가 녹음으로써 육지에 그어진 지정학적 선에 대한 영향이 일어나고, 해수면 상승을 일으키며, 바다와 육지의 선도 변하고 있다. 앞으로 인간의 손에 의해 가져오게 될 자연 변모는 어떠한 선 긋기를 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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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5




제2장

논벼농사의 원풍경과 다양성 

-중국 고대의 출토 문물에서

와타베 타케시渡部武






시작하며


1987년, 우리는 안식년을 이용하여 반년 동안 정도 중국 상하이의 푸단復旦 대학에 체재했던 일이 있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중국 각지의 대학과 박물관을 방문하고, 편지로만 연구 교류하던 농업사 연구자와 고고학자들과 의견 교환을 행했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멀리서 온 우리를 크게 환경해 주어 사료 열람과 농업 유물 견학의 편의를 조처해 주었다. 


그때, 우리는 쓰촨성의 청두시 박물관과 광둥성 광저우시의 광둥성 박물관에서 매우 흥미로운 농업고고자료를 자세히 살펴볼 기회를 얻었다. 그것은 한나라대의 논벼농사에 관한 출토 문물로, 중국 고고학자들은 통상 이 출토 문물을 '피당도전陂塘稻田 모형' 또는 '수전水田 모형' 등이라 부른다. 어느쪽이라도 묘실 안에서 거두어들인 부장품(명기明器)으로, 손바닥에 올려진 작은 것부터 양손을 사용해도 힘에 겨울 듯한 큰 것까지 있다. 그곳에는 사람들의 농작업 모습과 동식물이 생식번무하는 비오톱 같은 저수지가 갖추어지고, 그것은 놀고 싶은 마음을 가득 실은 현대의 철도 모형에도 필적할 만큼 흥미로운 것이었다.


이 유형의 명기는 진령 이남의 중국 서남 지방 및 광둥을 중심으로 한 영남 지방에 분포가 제한되며, 게다가 그 무덤 주인들의 대부분은 입식入植 한인 또는 그 후예이라 추측되고 있다. 그들이 이와 같은 명기를 굳이 묘실에 부장한 것은 사후 세계에서 식량의 보장, 또 자기의 자산 과시 등과 같은 이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러한 이유와는 달리 그들의 정신 구조에 관한 까닭도 가졌던 것은 아닐까? 즉, 많은 이민족이 살고 있는 신천지에서 그들자신이 들고 왔던 수리 관개와 작물 재배의 기술을 바탕으로 땀 흘려 생활의 기반을 구축해 온, 말하자면 그들 자신의 내력과 기억을 구체적 형상으로 표현한 것이 이 모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1987년의 여행 경험을 살려서 우리는 1989년 이후 대략 10여 년에 걸쳐서 중국 서남 여러 민족의 전통적 농기구의 조사에 종사하게 되는데, 이 조사 여행에서도 쓰촨, 윈난성 각지의 박물관과 문물관리소에 수집된 피당도전 모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고대 중국의 벼농사 실태에 대해서는 문헌사료 안에 단편적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그들은 도상 자료는 아니기에 어휘와 문맥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해석과 논쟁이 전개되어 공통의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 어렵다. 이 장에서는 한나라대의 부장품인 피당도전 모형 및 묘실을 장식한 화상전과 화상석 등의 눈으로 보아 누구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재료를 문제삼아, 그것에 문헌사료와 현지조사의 성과를 병용하여 중국 고대의 벼농사 실태와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해설하고자 한다.





고대 중국 서남에 있던 한인 이주자들



진나라의 중국 통일과 사민徙民 정책


기원전 403년 춘추시대의 실력 제후국인 진晉이 한韓과 위魏, 조趙 세 나라로 분열하자 이후 중국은 동란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이른바 전국시대의 도래이다. 당시 주 왕실의 권위는 실추되고, 제후는 각각 왕을 칭하며, 한·위·조 외에 산동의 제齊, 하북의 연燕, 섬서의 진秦, 장강 중류의 초楚를 더한 합계 7개국(이를 '전국 칠웅'이라 부름)의 사이에서 패권을 다투어 갔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승리를 거둔 것은 진나라로, 그 패업을 달성한 인물이 영정嬴政(미래의 진시항)이었다. 진이 6국 병합 과정에서 가장 애쓴 것은 첫째는 병력의 확보와 치중輜重(군사 물자의 조달과 그 수송)의 충실, 그리고 둘째는 정복지의 토착 세력 해체를 철저하게 하는 일이었다. 


첫째의 문제 해결에 큰 공헌한 인물은 시황제보다도 100년 정도 전의 효공孝公(재위 기원전 361-338년)의 치세에서 임용된 상앙商鞅(?-기원전 338년 무렵)이었다. 그는 법률 전문가로서 효공을 위하여 2차에 걸친 국정개혁을 제안하고, 법률·가족·토지·부세·병역 등 여러 제도를 서로 연동시키는 것으로 진나라를 부국강병으로 이끌었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상앙의 변법'이다. 이때 농업 생산과 전투를 부담하게 된 것은 평시는 농업에 종사하고, 전쟁이라는 때에는 무기를 가지고 싸우는 '경전지사耕戰之士'였다. 그것은 마치 우리나라 근세의 도사土佐 쵸소카베長曽我部 씨 아래에서 행한 '일령구족一領具足'의 제도를 방불케하지만, 진나라의 경전지사는 일령구족보다 훨씬 엄격한 상벌과 연좌제의 관리에 놓여 있었다. 그것이 <한비자> 화씨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상앙은 진의 효공에게 가르쳐서 '십오什伍의 제도'(십헌조什軒組·오헌조伍軒의 인보隣保 제도)를 행하도록 해, 범죄를 밀고하게 하는 '고좌告坐의 벌칙'을 정하고, 유교의 경전인 <시경>과 <서경>을 소각하고, 법령을 분명히 하며, 권세가가 개인적인 이익을 군주에게 요구하는 걸 금지시키고, 국가를 위한 공로를 추상推賞했다. 또한 그것을 실행하여 군주의 지위는 존엄하며 평안하고 무사해져 진나라는 부강해졌다.


이처럼 상앙의 변법은 진나라에 반석의 기초를 가져왔지만, 효공의 사후 변법에 불만을 품고 있던 종실귀족의 고발에 의해 상앙은 거열형에 처해져 그 생애를 마감했다.


둘째 과제, 곧 정복지에 있는 토착세력의 해체는 계속 확장하는 진의 영토를 원활히 통치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서라도 필요했다. 그래서 진은 새롭게 정복한 토지에 군사·민정 거점인 '현縣'을 설치하고 중앙으로부터 행정장관을 파견하여 직할통치를 추진함과 함께, 종래의 씨족제의 질서를 해체하고 거주민의 재편을 도모했다. 이 현제는 춘추시대부터 여러 나라에서 채용되어 왔는데, 중앙집권적 통치기구로서 최초로 정비된 것은 전국 시기의 진이며, 진은 그 지배영역을 확대하고 현의 수를 증가하여 갈수록 몇 개의 현마다 구역으로 나누어 그곳에 상급통치기관인 '군郡'을 설치하고, 이윽고 진시황 때에 36군을 가지고 전토를 통치하는 '군현제도'가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이 군현제는 전토를 일률로 면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은 군과 현의 치소 사이를 간선교통로로 연결한, 점과 선의 지배였다. 게다가 이민족이 많이 거주하던 중국 서남 지방에서는 그들의 전통적 생활 풍속과 군장 지배를 허용하여, 군 대신 '속방屬邦'(한나라대는 속국이라 부름)을, 현 대신에 '도道'를 각각 설치하고,중앙에서 파견된 행정관은 이민족에 둘러싸여서 집무 생활을 보냈던 것이다. 


진은 정복한 토지의 주민을, 지금 기술한 서남 지방 등의 벽지에까지 강제이주(사민)시킨다. 전쟁의 승리자인 진나라에게 패전국에서 대량의 난민을 내보내는 일은 유리한 계책이 아니라, 그들을 전쟁 포로의 신분에서 진나라의 '편호編戶의 백성'(호적에 평민으로 등록)이 될 수 있도록 신천지에 입식시켜 자활의 길을 모색하게 했다. 이리하여 진나라는 대규모 사민 정책을 전개해 나아갔다.




촉蜀으로 들어가는 길과 이주자의 무리 


진이 식민 개척의 후보지로 쓰촨 분지를 중심으로 한 파촉 지방을 고집한 이유는, 이 토지가 '옥야천리沃野千里'라든지 '천부天府'라고 자주 형용되어 왔듯이, 문자 그대로 대단한 농업 개발의 가능성을 감춘 비옥한 토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식자를 받아들이기 전에 군치와 현치의 거점이 되는 성읍의 건설과 교통로의 정비를 해야 했다. 진나라의 본거지인 섬서성 관중부터 파촉 지방에 이르는 데에는 우뚝 치솟은 진령 산맥(주봉인 태백산은 표고 3767미터)의 산등성이와 계곡을 타고 길을 조성해야 했다. 암반을 뚫고, 또는 측벽을 잇는 다리 같은 벼랑길을 설치하는 것과 같은 험한 길이었다. 당나라대의 시인 이백은 '촉도난蜀道難'이란 시에서 "아아! 위태롭도다, 높도다, 촉도의 험난함은 푸른 하늘에 오르는 것보다도 어렵다"고 탄식한다. 어쨌든 진한 시대에 아래의 네 가지 입촉로가 개착되었다.


자오도子午道  지금의 산시성 시안시西安市의 남쪽에서, 진령 산맥을 넘어 자오하子午河를 따라서 한수漢水 상류에 이르러, 다시 서쪽 방향으로 전환하여 성고城固·한중漢中에 이른다. 

사도褒斜道  지금의 산시성 바오지시寶鷄市의 남쪽에서, 진령 산맥을 넘어 포수褒水를 따라서 한중에 이른다.

고도故道  지금의 산시성 바오지시의 서남에서, 진령의 가장 서쪽 끝을 넘어 가릉강嘉陵江 상류의 안하安河를 따라서 간쑤성 양당현兩當縣을 지나 악양略陽에 이른다. 

음평도陰平道  지금의 간쑤성 톈수이시天水市의 남쪽에서, 흑욕하黑峪河를 따라 성현成縣을 지나 악양에 이른다. 


이중에서 가장 옛날에 개착된 것은 포사도와 고도였다. 기원전 4세기 말 진의 혜문왕惠文王 때, 장군 사마착司馬錯이 병사를 이끌고 파촉을 평정하는데, 그때 이용했던 것은 그림2-1의 포사도-석우도였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진의 파촉 지방에 대한 입식의 준비는 정비되어 갔다.


그림2-1 한나라대의 중국 서남 주요 교통로(羅二虎 2000에서)




그러면 진의 사민 정책의 실태는 어떠했던 것일까? 그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사마천의 <사기> 화식열전貨殖列傳이다. 거기에서 제철업으로 재산을 쌓은 탁씨卓氏와 정정程鄭의 성공담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촉 탁씨의 선조는 조趙(지금의 산서성 북부부터 하북성 동남부의 나라)의 사람이었다. 제철업으로 재산을 이루었다. 진이 조를 정복하자, 탁씨는 강제이주되었다. 탁씨는 포로가 되었는데, 부부만 수레를 밀고서 이주지로 향했다. 강제이주된 포로는 소지하고 있는 약간의 재산을 관리에게 뇌물로 바치고, 근처의 가맹葭萌에 거주했다. 그러나 탁씨만은 "가맹은 토지가 좁고 메마르다. 들은 바에 의하면, 문산汶山의 기슭은 비옥한 평야이며, 큰 토란()을 취해 일생 굶주리는 일이 없다. 또한 주민은 장사를 잘하고, 교역도 하기 쉽다"고 말하고, 굳이 원격지로 이주를 요구해 임공臨邛(지금의 쓰촨성 치옹라이시邛崍市)로 데리고 가서,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획책하여 전(지금의 윈난)·촉의 주민을 고용해 철산에서 제철을 행하여 가내 노예 천명을 거느린 부호가 되어, 소유하는 넓은 연못과 사냥터에서 대규모 사냥을 하는 즐거움은 제후에 필적할 정도였다.


정정은 산동(지금의 산시성 태행산맥 동부 지역)에서 강제이주된 포로(의 자손)이었다. 역시 주조업을 경영해 추결椎髻을 묶은 만족蠻族과 교역을 해서 그 부는 탁씨에 동등하며, 함께 임공에 살았다.



이 탁씨와 정정의 성공담에서 흥미로운 것은 진에 의하여 정복되어 강제이주 대상이 되었던 포로의 동향이 아무렇지 ㅇ낳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포로를 '천로遷虜'라고 불렀다. 대부분의 천로들은 진의 이주 담당관리에게 유도되어, 마치 개미떼처럼 입식지로 할당되어 갔다. 


그들이 입식을 희망한 근처의 가맹은 한중 분지의 남쪽, 가릉강 상류의 강기슭 단구에 위치하고, 한편 임공은 성도의 서남 60킬로미터에 위치한다. 오늘날 성도는 쓰촨성의 성도로서 번영하여 임공도 그 번영의 그늘 아래 들어가 있지만, 전국시대에 진이 성도에 촉군의 군치소를 설치했던 당초에는 그 주변부에 펼쳐진 넓은 평야는 민강岷江의 어지러운 흐름과 홍수의 재난으로 시달려 개발이 진행되지 않았다. 성도 분지의 본격적인 개발은 기원전 3세기 중반, 촉군의 태수로 부임한 이빙에 의한 일대 관개시설 도강언都江堰의 완성을 기다려 처음으로 가능해진다. 이 도강언은 민강의 흐름을 외강과 내강으로 분류시켜 유세에 의하여 제방 바닥에 퇴적하는 사석을 외강으로 배출하고, 내강에서 유도한 용수를 써서 평야부를 관개하는 것으로, 그 둑의 돌쌓기 공법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활용되고 있다(그림2-2).


그림2-2 성도 평야의 농업 관개를 담당하는 도강언. 가까운 쪽이 내강, 먼 쪽이 외강(2006년 와타베 촬영)




그런데, 탁씨와 정정의 선조는 제철 및 그 가공기술에 의하여 단신으로 이민족 지대로 들어가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것은 철의 제련가공이 매우 숙련을 요하는 특수기술이며, 철제의 생산공구가 토착의 이민족에 의하여 크게 환영받았기 때문이다. 그에 대하여 농업 이주자들의 그 이후의 소식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고, 아마 이민족의 생활권을 침범하지 않는 완충지대에서 개척으로 생활의 기반을 쌓아 갔다고 생각한다.





중국 서남의 호족과 피당도전 모형


호족의 대두와 성대한 장례의 유행


중국 고고학자의 연구에 의하면, 중국 서남으로 향했던 고대 개척이민의 파도는 전후 3차에 이르는 고조기가 있었다고 지적된다(羅 2000). 제1차는 앞에 기술한 진의 파촉 정복부터 진 왕조의 멸명까지. 제2차는 전한 중기의무제 치세(기원전 141-87년)에 있던 서남 리도夷道(인도[身毒]로 가는 길) 건설의 시기로, 이것은 중국 서남의 간선도로의 정비에는 공헌했지만 현지에는 경비 부담이 과중하여 실질적으로는 실패했다. 그러나 <사기> 평준서平準書에 "작자(공사 노동자) 수만 명"을 투입했다고 하기 때문에, 그뒤의 농업 입식에도 영향이 있었을 터이다. 그리고 제3차는 후한 말(2세기 말) 이후의 중원 지방의 거듭되는 전란과 경제의 쇠퇴 시기. 이 시기의 중국 서남지방은 비교적 안녕했기 때문에, 중원 지방에서의 입식자가 많이 유입되어 이민의 파도는 최고조에 달했다.


이렇게 하여 진이 파촉을 멸하고 나서 후한 시대의 말년에 이르기까지(기원전 316-기원후 220년), 중국 서남 각지의 입식 한인 및 그 자손들은 황무지를 개척하여 농지를 확대하고, 또 약간은 상업 활동을 늘리면서 순조롭게 중소 장원 지주로 성장해 갔다(宇都宮 1955). 그와 같은 호족을 대성大姓·사성四姓·호豪·대호大豪·수족首族·관족冠族 등이라 불렀다. 동진 시대의 상거常璩(291-361년 무렵)이 저술한 지지 <화양국지華陽國志>에는 파옥 지방의 대성이 145성 정도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는 전한부터 호한 말의 수백 년에 걸쳐서 관리를 배출한 일족도 있는데, 대강은 후한 시대에 성장한 자들이다. 게다가 수리 관개의 편의와 소금·철의 이익(임공에서는 제철 외에 천영 가스 이용에 의한 제염이 행해졌음)에 혜택을 받은 토지에서는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복수의 대성이 사회적 지위를 경쟁했다. 또 토착의 이민족도 입식자들의 문화적 영향을 받아서, 대성의 한패가 되는 자도 출현했다.


중국인은 고래부터 사람의 '죽음'을 매우 중요시하여, 유체를 넣는 관과 분묘에 다액의 비용을 들이는 습관이 있다. 옛 예의 서적 <예기>에 "혼은 하늘로 돌아가고,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라고 하듯이, 사람의 죽음은 혼魂(정신)과 백魄(육체)의 분리라고 생각하여, 영혼이 돌아갈 장소인 유체를 정중히 다루었다. 그리고 장묘에 금전을 소비하는 방식 나름으로 그 일족의 사회적 지위가 평정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중국에서 민속을 조사할 때, 생전에 이미 훌륭한 목관을 준비했던 노인을 만난 적이 있다. 중국의 속담에 "먹을거리는 광저우에 있다"(맛있는 걸 먹으려면 광저우)라고 하는 것은 인본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데, 그 대구에 "죽음은 류저우柳州에 있다"(납관에는 광시 류저우의 목관을 이용하는 것이 최고이다)라는 명문구가 있는 것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상표의 목관을 보통 사람의 눈에 띄도록 하는 것으로 죽음을 소중히 한다는 걸 보여줌과 동시에, 지역사회를 향하여 자기 가문의 격을 공언하는 것이다. 


서력 1-2세기의 후한 시대에는 장의와 묘장에 자산을 투여하는 일이 크게 유행했다. 이와 같은 풍조를 '후장厚葬의 풍風'이라 부르고, 중국 서남에서는 두 가지 형식의 묘가 활발히 조성되었다. 하나는 벽돌의 일종인 전으로 구축한 전실묘(석재를 혼용한 전석실묘도 있음)로, 특히 이 지방의 전실묘에는 묘문과 묘실을 잇는 연도羨道의 요벽腰壁에 사각형의 화상전을 끼워 넣는 형식의 화상전묘가 많다(그림2-3). 또 하나는 바위산에 굴을 깊게 굴착하고, 묘실과 이실耳室(측실)을 조성하는 애묘崖墓의 형식으로, 입구의 대문, 그 틀인 문틀, 또 그 주변에 각종 도상이 돋을새김된다(그림2-4). 화상전묘와 돋을새김을 가진 애묘도, 함께 화상묘의 범주로 묶을 수 있다. 또 전실묘의 영역塋域(묘역)에 설치된 '대궐문'과 묘실에 넣는 석관에도 여러 가지 신화적 도상이 돋을새김되며, 이들도 화상묘를 장식하는 중요한 조연이었다.


그림2-3 성도시 소각사昭覺寺에서 발견된 후한 시대 화상전묘의 구조(羅二虎 2002에서)


그림2-4 쓰촨성 낙산시樂山市 교외에 있는 후한 시대의 애묘 '만자동蠻子洞'의 입구. 남북조 시대에 재이용된 흔적이 있다(1999년 와타베 촬영)



 

매장된 묘주 신분에서 검토하면, 전실묘와 애묘의 성질은 확연하게 구별할 수 있다. 전실묘의 묘주에는 군 태수, 주 자사刺史, 도위都尉, 현의 장관, 주현의 속리를 경력한 자가 많고, 애묘에는 그러한 경력을 가진 자는 매우 적다. 또한 전실묘의 묘주 대부분은 중원에서 이민한 후예이고, 그에 반해 애묘의 묘주 대부분은 토착민으로, 애묘의 출현은 토착민이 외래의 중원 문화에 동화되어 갔던 구체적 발로이기도 했다(羅 2002). 애묘에서 화상전은 발견되지 않지만, 피당도전 모형은 전실묘와 애묘 쌍방에서 출토된다. 농업에 관한 화상전과 피당도전 모형의 사이에는 공통된 모티브가 발견되기 때문에, 후한 시대의 중소규모 호족의 농지 경영의 표준은 이와 같은 것이라 상정해도 좋을 것이다.





농경 화상과 피당도전 모형


화상묘의 각종 도상에는 독특한 생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그 주조는 곤륜산 승선昇仙과 서왕모 신앙에서 발견되듯이, 당시 사람들의 '불사'에 대한 갈망이었다(渡部 1991). 따라서 호족들은 현세의 유복한 생활을 내세에까지 가지고 가서 안락하게 사는 것을 갈망했다. 그 발로가 장원과 농경의 도상이다. 성도시 증가포曾家包 1호 후한 화상전 석묘에서 발견된 '장원·쌍양가화雙羊嘉禾 화상석'은 그 알맞은 사례이다(그림2-5).


그림2-5 성도시 증가포 1호 후한 전석실묘 안의 장원·쌍양가화 화상석의 모사(羅二虎 2002에서)

 



이 화상석은 부부 합장묘의 묘실 오벽奧壁에 장식되어 있는 '장원백업莊園百業·산림사렵山林射獵 화상석'과 한 쌍을 이루고, 3단의화상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단에 두 마리의 양과 식물(가화=경사스런 곡물)은 상서로움을 표현한다. 양의 도상은 '양'='상祥'과 통하고, 일종의 상서로움을 상징하는 진단 그림의 표현이 된다. 산동 지방의 화상석묘에는 양의 머리 부분을 표현한 사례가 몇 가지 있고, 상서로움을 표현하는 한화상의 상투적 표현법이되고 있다. 중단에는 두 채의 가옥(창고와 누각)이 묘사되고, 그 중앙의 종려나무 그루에는 한 사람의 노인이 끝에 새가 장식되어 있는 지팡이를 쥐고 앉아 있으며, 그 왼쪽에 또 한 사람의 인물이 용기를 받들고 노인 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한나라대에는 80, 90세에 달한 고령자에 대하여 나라에서 비둘기가 장식된 지팡이(구장鳩杖 또는 옥장玉杖이라 부름)와 죽이 지급되는 규정이 있었기에, 이것은 양로養老의 그림이라고 하는 것이다. 오른쪽 건물의 계단 아래에는 반쯤 열린 문에서 몸을 내보이는 인물이 있다. 이것은 쓰촨의 화상에 자주 보이는 '선인仙人 반개문'의 모티브로서, 이것이 선계로 가는 입구를 상징하기에, 중단의 도상은 전체가 사자의 안녕한 생활이 보장된 사후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단의 도상인데, 이것이 장원 그림이다. 왼쪽 위에 두렁으로 구획되고 벼가 심어져 있는 논이 있고, 그 바로 아래에 피당(저수지)가 묘사되어 있다. 피당의 가운데에는 제방이 있고, 그 중간쯤에 봇둑이 설치되어 있다. 오른쪽의 수면에는 물고기, 거북이, 물새에다 작은 배를 조종하는인물이, 또한 오른쪽의 수면에는 연과 물고기가 각각 표현되어 있다. 피당도전의 오른쪽에는 토란(?)밭을 괭이로가는 농부가 있다. 또 그 오른쪽에는 쥐를 막는 장치를 갖춘 기와지붕의 고상식 곡물창이 있고, 그 옆에서 두 사람의 농부가 디딜방아를 써서 방아찧기 작업을 행하고 있다.


이와 같은 피당도전의 경관은 오늘날에도 쓰촨 분지의 주변 및 석회암 지질의 용식溶食 분지 같은 오목한 부분에 개간한 농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그림2-6의 사진을 보길 바란다. 이것은 의빈시宜賓市 공현珙縣에서 촬영한 것인데, 산기슭의 움푹 팬 땅의 낮은 부분에 저수지와 논이 조성되어, 물을 대기가 좋지 않은 곳에는 밭을 개간한다. 그리고 몇 가족의 가옥이 여기저기 있다. 바로 한나라대의 화상 안의 경관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진한 시대의 입식자들에 의한 개척 정주의 방식은 몇몇 가족이 협력하여 수해를 입지 않는 토지를 선정하고, 다음으로 수리 관개시설을 조성하며,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경지를 넓혀 갔던 것이 아닐까? 물론, 이 저수지는 단순한 관개용수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단백질원인 물고기와 거북이의 양식에도 활용되었던 것이다.


그림2-6 쓰초나 분지 안에서는 한나라대의 피당도전 모형과 아주 비슷한 경관을 볼 수 있다(쓰촨성 공현, 1996년 와타베 촬영)





피당도전 모형의 분포와 그 유형


그림2-5의 장원 화상석 안의 피당도전 부분만을 빼낸 듯한 명기의 모형은 중국 서남 각지에서 출토된다. 그 분포를 나타낸 것이 그림2-7의 '한나라대 피당도전 모형·화상 출토 분포도'이다. 이 분포도에는 명기의 모형만이 아니라, 약간의 관계 화상석과 화상전도 포함되어 있다. 분포도를 개관하여 먼저 알아차리는 건 가장 분포가 집중되어 있는 것은 성도시 주변이며, 그에 다음가는 것이 산시성 한중 분지, 쓰촨성 서창 분지, 중경직할시 충현忠縣이라는 것이다. 또한 윈난성 곤명시의 전지滇池 주변과 광둥 삼각주 및 그 주변에서도 출토되고 있는데, 광둥 삼각주 지방 및 그 주변에서 출토되는 논 모형에 대해서는 중국 서남과는 약간 다른 역사적 배경과 시간차가 있어 그 점에 대해서는 뒤에 기술하겠다.


그림2-7 한나라대 피당도전 모형·화상 출토 분포도(古川久雄·渡部武 1993에서). 이 분포도는 15년 정도 전의 자료로서, 위진 시대의 논 모형도 약간 포함된다. 그뒤 몇 가지 관계 문물이 발견되었는데, 그 출토지 분포에 관해서는 이 영역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A-C 지구의 구분선은 아래의 출토 명기군의 특색을 나타내는 것으로, 사사키 쇼지佐々木正治의 연구에 의하여 덧붙여졌다.  A지구: 기본조성, B지구: 기본조성+돼지우리, C지구: 기본조성+피당도전 모형. 기본조성이란 창고, 우물, 부엌, 가옥류로 구성되는 명기를 나타낸다(사사키 쇼지 2004).


성도, 한중, 서창, 전지 호숫가에는 각각 한나라대의 촉군, 한중군, 월수군越嶲郡, 익주군의 군치가, 또 충현에는 파군 임강현의 현치를 두었다. 즉, 어느 토지도 군현 통치를 강력하게 진행하기 위한 가장 요긴한 땅이었던 것만이 아니라, 입식자들이 논을 개간하기에 안성맞춤인 분지와 호숫가 같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림2-8의 '중국 서남 출토의 후한 시대 피당도전 모형'에서 볼 수 있듯이, 각각의 토지에서 출토된 명기 모형의유형도 참으로 다양하다. 


그림2-8 중국 서남 출토의 후한 시대 피당도전 모형(渡部武 1991에서).  

①도자기로 만든 피당도전 모형(섬서성 한중현 출토), ②녹색 유약 도자기로 만든 겨울의 논 모형(사천성 면현勉縣 출토), ③도자기로 만든 논 모형(사천성 신진현新津縣 출토), ④돌로 만든 피당도전 모형(사천성 아미현 출토), ⑤도자기로 만든 피당도전 모형(운남성 정공현呈貢縣 출토), ⑥도자기로 만든 피당도전 모형(사천성 의빈시 출토), ⑦도자기로 만든 피당도전 모형(귀주성 흥의현 출토), ⑧도자기로 만든 피당도전 모형(사천성 면양시 출토)





성도 분지가 수리시설 도강언의 은혜를 입었단 것은 이미 기술했는데, 똑같이 전국시대의 진은 성도성을 건설할 때 축성을 위한 채토지의 뒤를 이용하여 만세지萬歲池·용파지壩池·천정지天井池·천추지千秋池 등의 양어지를 겸한 큰 저수지를 조성하고, 군의 치소 주변의 농업 개발을 진행한다(<화양국지> 촉지). 따라서 성도에는 일찍부터 호족 세력이 성장해 갔던 것이다. 성도 지방의 벼농사 모습을 보여주는 화상전은 몇 종류나 발견되며, 특히 유명한 것으로 그림2-9의 '익사弋射·수확 화상전'을 들 수 있다.



그림2-9 성도시 교외의 후한 시대 전실묘에서 출토된 익사·수확 화상전. 이 유형의 화상전은 성도 지방 각지의 전실묘에서 발견된다. 같은 주형으로 만든 것이 많기 때문에, 당시 이와 같은 명기가 장례용품점에서 팔렸을 것이다. 화상의 상단에는 피당에서 수렵 도구인 주살을 이용해 오리 사냥(익사)를 행하고 있는 두 명의 인물이 있고, 피당에는 연이 심어지고 큰 물고기가 여유롭게 헤엄치고 있다. 하단에는 벼의 수확이 묘사되어 있다. 중앙의 3명은 이삭을 따는 도구로 벼이삭을 베어 거두고, 오른쪽 2명은 큰낫을 휘둘러 그루를 베어 쓰러뜨리고 있다. 왼쪽의 인물은 베어낸 벼이삭을 단으로 묶어 천칭으로 지고 있다.




이와 같은 장원 농지의 경작을 담당한 것은 '가동家'이라 부르는 일종의 가내 노예였다. 호족의 재산 표시에는 자주 가동의 수로 나타내는 일이 있으며, 그들이 장원 안에서 담당했던 노동에 대해서는 자중현資中縣(지금의 자양시資陽市, 성도의 동남 약 80킬로미터) 출신의 호족 왕포王褒(기원전 90-51년 무렵)에 의하여 저술된 일종의희문戯文 작품 <동약僮約>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宇都宮 1955). 또한 고농雇農도 많았다. <화양국지>에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기사가 보인다. 문산군汶山郡(강족羌族 지대. 지금의 무현茂縣, 2008년 쓰촨 대지진의 진원지)에 사는 이민족은 그 토지가 고랭지라서 쌀보리(보리의 품종군인 쌀보리 '청과靑稞')밖에 지을 수 없고, 그 때문에 겨울철에는 추위를 피하여 성도 지방으로 나가서 농작업에 종사하고 여름철이 되면 고향으로 돌아오는 생활을보내고 있었다. 그와 같은 타관벌이 관행에 의하여 성도 사람은 그들에게 '작오백석자作五百石子'(오백 석의 곡물을 재배하는 사람이란 뜻)라는 별명을 붙였다고 한다. 


그림2-8에는 한중 분지에서 출토된 2점의 피당도전 모형(①과 ②)를 문제 삼는다. 이 한중 분지야말로 중원에서온 이민이 중국 서남 개척의 첫걸음을 내디딘 땅이다. 한중은 진령의 남쪽 한수 상류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기후는 매우 온난하고, 중화 미후도瀰猴桃(키위)의 원품종 자생지는 이 지방이라 생각되고 있다. 한중시의 연간 평균 기온은 약 14도, 평균 강우량은 약 900밀리미터로, 성도시에 비교하여 약간 밑도는 정도이다. 따라서 논을 개간하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을 터이다. 


①의 피당도전 모형은 작은 하천이 골짜기 분지로 흘러들어오는 장소에 제방을 쌓아 물을 모으고, 갑문을 개폐하여 아래의 논으로 적당히 관개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또 ②의 모형은 1984년 아사히 신문사의 후원을 받은 '중국 도용陶俑의 미'전에서 전시된 것이며, 그때 해설에는 '겨울 논 모형'이라고 설명되어 있었다. 이 겨울 논이란 것은 쓰촨 지방의 산간 지방에 있는 다락논에서 널리 행해 왔던 농사 관행으로, 가을 논의 추수 뒤에 이듬해의봄가뭄(봄철의 물 부족)을 고려해서 저수지 근처의 논에 물을 대 놓고, 그것을 못자리용으로 쓰는 것이다. 이 겨울 논에 대해서는 우리 자신, 중경직할시 수산토가족秀山土家族 묘족苗族 자치현의 오지에서 본 적이 있다(그림2-10). 다만 그 기원이 한나라대에까지 거슬러 오르는지는 의문이다. 통상 쓰촨 지방에서 겨울 논의 보급이 시도되었던 것은 청나라대의 가경 연간(1796-1820년)이기에(彭·王 2001), ②의 모형은 겨울 논이 아니라 단순한 산지의 완만한 비탈에 조성된 논을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구나 이 겨울 논에 대해서는 논과 수로의 생물다양성을 보전하기 위하여 유효한 점에서, 일본에도 그것을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림2-10 저수지 옆에 설치된 겨울 논. 겨울철에도 물을 대어 놓고 봄철에 못자리로 사용한다(중경직할시 수산토가족 묘족 자치현 관년촌關年村에서, 1999년 5월 와타베 촬영)





그런데 각종 피당도전 모형의 유형을 잘 보면, 그것이 어떤 지세인 곳에서 조성되었는지를 알 수도 있다. 그림2-8의 ④와 ⑧의 모형은 평야부에 조성된 피당도전을 표현하고 있다. 이 ④와 유사한 돌로 만든 피당도전 모형이 도강언의 복룡관에 전시되어 있고(그림2-11), 두 모형에는 모내기 작업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인물상이 조각되어 있어 흥미롭다. 또한 ⑧ 유형의 피당도전 모형은 쓰촨 분지에서 많이 출토되고, 이처럼 얕은 쟁반 모양의 직사각형 유형과 원형 유형의 두 유형이 있으며, 그 대부분이 양어지를 겸한 저수지만 표현하고 있다(그림2-12,13). 다만 귀주성과 윈난성에서 출토된 원형 쟁반 모양의 모형은 피당과 도전이 함께 편입된 유형이 많다(그림2-8 ⑦,14).



그림2-11 후한 시대의 돌로 만든 피당도전 모형. 제방에 의하여 3곳으로 구분되어 있고, 오른쪽 위에 물새와 연,오른쪽 아래에 메기·거북이··연, 왼쪽에 나무 아래의 논에서 모내기를 행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인물이 표현되어 있다(쓰촨성의 도강언 복룡관에서, 2006년 와타베 촬영)



그림2-12 후한 시대의 피당 모형. 제방에는 물꼬가 있고, 피당 안에는 도룡농과 개구리, 거북이, 물고기 등이 배치되어 있다(쓰촨성 면양시 박물관에서, 1999년 촬영)



그림 2-13 쓰촨성 충현에서 출토된 촉한 시대의 피당 모형. 둥근 쟁반 모양의 피당 안에 연과 우렁이, 물고기가 배치되어 있다(성도시 무후사의 전시관에서, 2006년 와타베 촬영)



그림2-14 윈난성 대리시大理市 대전둔大展屯 2호 후한 묘에서 출토된 피당도전 모형. 피당 안에는 물고기와 개구리, 물새, 연등이 표현되어 있다(윈난성 대리 백족白族 자치주 박물관에서, 1992년 와타베 촬영)





또한 산지의 완만한 비탈에 개간된 피당도전 모형도 있다. 우리는 그 사례를 2점 기록했던 게 있다. 첫번째 사례는 그림2-15의 피당도전 모형으로, 현재 이것은 남경 농업대학에 신설된 중화 농업문명 박물관(남경 박물원 남경농대 분원)에 전시되어 있다. 출토지는 명기되어 있지 않았지만, 해방 전인 1940년대에 고고학자 오금정吳金鼎, 풍한기馮, 이제李濟, 하내 등의 쟁쟁한 구성원으로 구성된 '천강고적川康 고찰단'에 의하여 쓰촨성 팽산현彭山縣(성도시와 악산시의 중간에 위치함)의 애묘에서 발견된 것이다. 오른쪽 위의 1단 높아진 곳이 피당으로, 그곳에서 드렁허리와 수생동물이 표현되어 있다. 그 왼쪽에는 두렁으로 구분된 불규칙한 논이 있고, 각 논의 안에는 벼가 심어져 있는 것을 나타내는 작은 구멍이 구석구석 뚫려 있다. 이와 같은 경관을 현실에 재현한다면, 그림 2-16의 사진 같이 될 것이다. 


그림2-15 쓰촨성 팽산현 후한 시대 애묘에서 출토된 피당도전 모형. 다락논을 표현한 귀중한 고고자료이다(남경대학 중화 농업문명 박물관에서, 2004년 와타베 촬영)



그림2-16 완만한 비탈에 개간된 다락논과 저수지. 팽산현의 애묘에서 출토된 피당도전 모형과 꼭 닮은 경관을 볼 수 있다. 두렁에 심은 것은 옥수수(부릉涪陵과 중경의 중간에서, 1995년 5월 와타베 촬영)




두번째 사례는 그림2-17·18의 후한 시대 다락논 모형으로, 이것은 쓰촨성 악산시의 애묘에서 출토되어 현재 악산시 마호麻浩 애묘崖墓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모형에는 피당은 없고, 잘 보면 불규칙한 각 논의 두렁에는 모두 물꼬가 트여 있으며, 무넘이식 천수답임을 보여준다. 각 논의 안에는 역시 벼가 심어진 구멍이 구석구석 뚫려 있다. 우리는 이 마호 애묘 박물관을 3번 정도 참관한 적이 있다. 아마 두번째 방문했을 때라고 기억하는데, 쓰촨 대학의 고고학자 라이호 씨(현 상하이 대학 예술연구원 교수)가 동행해 주어, 흥미로운 점을 배웠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화양국지>에 기록되어 있는 '산원전山原田'이란, 이와 같은 다락논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이다. '산원전'의 어휘는 <화양국지> 촉지의 자·광한廣漢·덕양德陽이란 세 현의 조에 언급되고 있으며, 이 책의 상세한 주석서를 저술한 임내강任乃强은 "이용률이 낮았던 산원山原(백악기에 속한 자토紫土 구릉지)에 다락논을 조성하고, 벼와 보리를 재배하여 그 이용률을 높였기 때문에 산원전이 특기되었을 것이다"(任 1987)라고 기술한다. 경청할 만한 이야기이다.


그림2-17 쓰촨성 악산시 마호 애묘 박물관에 소장된 후한 시대 다락논 모형. 불규칙한 각 논의 두렁에는 물꼬가 트여 있다(2006년 와타베 촬영).



그림2-18 쓰촨성 악산시 마호 애묘 박물관에 소장된 후한 시대 다락논 모형의 실측도(사사키 쇼지 씨 제공)




그 다음에 그림2-8의 ⑤, 윈난성 정공현에서 출토된 피당도전 모형에 관련하여, 조금 언급하고 싶은 게 있다. 정공현은 윈난성 최대의 호수인 전지의 동안에 위치하고 있다. 호수의 남단 보령현保寧縣에 금도장 '전왕지인王之印'의 출토로 유명한 전국滇國의 왕묘 석채산石寨山 유적이 있다. 전지는 큰 폭 치고는 수심이 얕아 최고 깊이가 약 10미터이고, 평균 수심이 4.4미터이다. 그 때문에 호숫가에서는 옛날부터 벼농사가 행해져 왔다. 이와 같은 호숫가에 논을 조성하는 건, 우리나라의 사가현 비와호 주변 다이나카大中의 코미나미湖南 야요이 논터를 머릿속에 떠올린다면 비교적 쉬웠을 것이다. 그와 같은 논을 개간해 갔던 모습을 방불케 하는 원풍경은 아마 그림2-19의 사진 같지 않았을까? 다만 이와 같은 논은 우기 때의 수위 상승에 의하여 자연 관개가 이루어지더라도, 가뭄 때에는 수확에 큰 타격을 입는 일을 피할 수 없다. 그것을 보완한 것이 피당 관개였을 것이다.


그림2-19 논 개척의 원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로고호瀘沽湖 호숫가의 못자리. 못자리에는 벼와 피가 재배되고, 그뒤에 '수요지澆地'라고 부르는 본논으로 옮겨심는다. 우기가 되면 호수의 수위가 올라 자연 관개된다. 비 부족으로 수위가 오르지 않는 경우는, 벼에 피해가 나더라도 피는 수확할 수 있다. 이 땅에서는 벼의 재배보다도 피의 재배 쪽이 오래되었다고 이야기되는 것도 수긍할 수 있다(쓰촨성 노고호 진산鎭山 남촌南村에서, 1996년 4월 와타베 촬영)






화상전과 피당도전 모형에서 발견되는 벼농사 기술


지금까지 기술해 온 바에서, 중국 서남에서 찾아온 입식자가 가져온 문화 가운데 관개 기술이 특별한 의의를 가지고 있단 점이 밝혀졌다. 중원 지대에서 와 입식한 사람들의 정착생활을 지탱했던 건 밭농사 지대에서 배워 익혔던 관개 기술의 노하우였다. 전한 시대까지 중원 지대와 강회江淮 지방에서 조성된 중소규모의 피당 수는 많고, 그 조성에 의하여 주변의 개발이 진행되어 대부분의 농민이 그 은혜를 입게 되었다. 한나라대에는 원칙적으로 '강해江海·피호陂湖·원지園池는 소부少府에 속한다'(<한서漢書> 원제기元帝紀)라고 생각되어, 피당은 제실帝室의 재정을 담당하는 소부의 관할을 받고, 인민에게 임대해 주어서 제실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또한 주군의 피관陂官과 호관湖官 같은 관리가 피당·호소湖沼에서 거두는 천산물에 대한 징세를 시행했다. 그러나 중국 서남에서 했던 농업 개발은 관의 규제가 느슨했기 때문에, 상당한 부분이 입식자들의 자발적 지휘에 맡겨져 그들은 자력으로 피당을 조성해 갔던 것이다. 그것과 그들이 화북의 밭농사 지대에서 습득했던, 단위면적당 수확을 높이는 '정경세작精耕細作' 기술을 벼농사에 응용하여 개발의 방식이 정형화되어 갔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화상전과 피당도전 모형에서 어떠한 벼농사 기술을 관찰할 수 있는지 몇 가지 자료에 대하여 해설해 보기로 하자. 


먼저 경작 농기구에 대해서인데, 중국 서남의 화상과 모형 자료 중에는 쟁기에 관한 자료는 전혀 없다. 또한 철제보습의 출토와 문헌사료 중의 관계 기사도 매우 드물어서, 한나라대에 중국 서남에서 쟁기질은 아직 발달하지않았다고 판단할 수 있다. 아직 발달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지세와의 관계에서 필요성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 대신쟁기질용 농기구로 일종의 따비인 철제 '가래'라는 농기구가 보급되어 있었다. 그림2-8 ⑧의 피당 모형 안에 가래를 쥔 인물용이 있다. 이와 같은 손가래 용은 전실묘와 애묘 안에서도 자주 발견된다. 또한 한나라대의 촉군에는 관영 공방인 '철관鐵官'이 설치되어, 그곳에서 공방의 주조명을 넣은 철가래가 제조되었다. 그 유통 범위는 쓰촨만이 아니라, 멀리 윈난 지방에까지 미쳤다. 현재, 성도 시내의 두보초당 근처의 청공靑空 골동품 시장에서 자주 도굴품인 철가래가 팔리고 있는 걸 볼 수 있기에, 생산량은 많았을 것이다. 이것은 풍려 괭이(風呂鍬) 식으로 목제의 자루를 장착한 것으로, 괭이로도 쓸 수 있었다(그림2-20). 이 철가래가 쟁기질 농기구의 주류였다.


그림2-20 철가래와 손가래 용. 한나라대의 중국 서남에서는 철가래가 자주 사용되었다. 촉군 철관의 표시가 들어간 철가래가 쓰촨과 윈난 각지에서 출토되고 있다(와타베 모사).




그림2-21은 쓰촨성 덕양현에서 출토된 농사일 화상전이다. 두렁으로 구분된 경지에서 선두의 네 인물은 큰 낫(한나라대에는 '발'이라고 불렀음)을 가지고 골프채를 휘두르는 것처럼 몸짓을 하고, 그 배후의 성인과 아이 각 1인이 파종을 실행하고 있다. 이 화상의 해석은 두 가지 설로 나뉜다. 하나는 선두의 네 사람은 벼를 베어 거두고있는 것이 아니라, 흙 부근의 잡초를 베어 넘기고 뒤이어 뒷쪽의 두 사람의 인물이 종자를 흩뿌림하고 있다는 설.또 하나는 영성靈星을 비는 제사 의례의 무용이란 설. 이처럼 의견이 나뉘는 것은 선두의 네 사람의 몸짓이 후반의 파종 작업과 어떤 관계를 맺으면 좋을지 판단에 미혹이 생기기 때문이다. 사실은 이와 같은 골프채와 비슷한 큰 낫을 휘둘러 논 잡초의 금방동사니 등을 베어 쓰러뜨리고, 쟁기질을 하지 않고 논의 마무리를 하는 농법은 말레이 세계의 저습지에서 널리 볼 수 있다(古川 1987). 이와 같은 동남아시아의 농법도 시야에 넣어 도상을 해석하면, 화상 안의 농작업은 더욱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림2-21 쓰촨성 덕양현에서 출토된 후한 시대 농작업 화상전





그림2-22는 쓰촨성 신도현新都縣에서 출토된 피당·각운脚耘 화상전이다. 이 화상전은 한나라대에 모내기가 행해졌는지 어떤지를 판정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발로 논 잡초를 밟아 넣는 '각운' 작업은 현재도 중국에서널리 행해지고 있으며(그림2-23), 우리 자신도 광둥 삼각주와 강서성 남창시南昌市 교외의 농촌 지대에서 본 적이 있다. 또한 문헌에서는 명나라 말의 산업기술서 <천공개물>(송응성宋應星 저)에 명확한 삽화가 게재되어 있다.이 작업은 지팡이에 의지해 신체를 앞뒤로 천천히 흔들면서 발로 논 잡초를 밟아 넣는 것이다. 그 동작은 곤충인 대벌레를 연상시킨다. 각운 작업은 벼모를 똑바르게 심고 벼 그루의 줄 사이에 사람이 들어갈 여지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하다. 즉 모내기가 행해졌다는 것이다. 각운 작업에 의하여 흙속에 밟아 넣은 잡초는 거름이 되고, 벼모의 가지치기를 촉진한다고 한다. 이 각운 화상전은 앞에 기술한 그림2-8 ④와 그림2-11의 두 가지 석제 피당도전 모형 안의 엎드려서 농작업을 행하는 인물상과 함께, 한나라대에 행하던 모내기 자료로 귀중하다. 


그림2-22 쓰촨성 신도현에서 출토된 후한 시대 피당·각운 화상전. 오른쪽 두 사람은 피당에서 연근 등을 캐내고 있으며, 왼쪽의 두 사람은 지팡이에 의지하면서 논 잡초를 발로 밟아 넣는 작업을 행하고 있다.




그림2-23 1950년대 쓰촨성 양산凉山 이족彝族 자치주에서 이족의 각운 작업. 후한 시대의 화상전에서 발견되는 농작업이 계속되고 있다(쓰촨 대학 부속 박물관 제공).


 


위에 적은 이외에도 농업에 관한 화상전은 매우 많고, 그에 대해서는 일찍이 졸저 <화상이 말하는 중국의 고대> 안에 해설한 것이 있기 때문에, 그를 참조해 주시기 바란다.






영남 지방의 벼농사와 리전犁田·파전耙田 모형


진한 시대의 영남 경로와 남월南越 왕국


명기의 도전 모형이 출토되는 다른 하나의 분포도로 광둥 삼각주와 그 주변 지역을 들 수 있다. 중국 서남 지역과구별하여 문제 삼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광둥 삼각주를 중심으로 한 영남 지방은 기원전 221년에 진의 시황제가 전국의 6국을 평정한 뒤에도 월족의 세력이 강하고, 기원전 219년부터 5년 동안을 소비한 영남 통일전쟁에 의하여 마침내 진의 산하에 편입된 것이다. 이때 진은 장강 지류의 상강湘江과 주강珠江 지류의 리강灕江을 연결한 파나마 식의 대운하를 뚫고, 치중輜重 부대를 보냈다. 이 운하는 도강언에 필적할 정도의 대공사였는데, 물자 수송을 위한 시설이고 농업 개발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시황제의 사후 초(항우)와 한(유방)의 항쟁 시기, 남해군의 위尉(군정장관) 임효任의 유탁遺託을 받았던 용천현령龍川縣令 조타趙 영남 전역을 병합하여 남월왕국을 세우고 번옹에 도성을 쌓아 스스로 남월국의 무왕武王이라 칭했다. 사마천의 <사기> 남월열전에 의하면, 조타는 진정眞定(지금의 하북성) 출신으로, 진의 영남 통일 이후에 월족 사회에 섞여 살게 한 유배자와 어떠한 관계가 있으며, 그곳에서 두각을 나타내 현령에 발탁된 인물인 듯하다.


한의 전토 통일 이후에도 남월국은 벽원의 땅에 있기 때문에 한 왕조는 정치적으로 개입할 수 없고, 오히려 남방의 안정을 꾀하기 위하여 조타를 남월왕에 봉하여 그 위세를 용인할 수밖에 없었다. 조타는 장수한 인물로 100세 정도까지 생존하고, 재위는 67년이란 긴 세월에 이르렀다. 이 사이에 남월왕국은 주변의 여러 민족을 통솔하고, 한 왕조에 따라서 제도를 정비하며, 왕은 스스로 제호를 참칭하여 마치 작은 한 제국의 양상을 보였다. 1983년 광저우 시내 상강산崗山에서 남월왕 묘(제2대인 문제文帝 조호趙胡의 묘. 출토된 봉니封泥에는 '조매趙昧'라고 표기)가 발견되어, 그 부장품의 호화로움은 많은 사람을 경탄시켰다. 그 재력의 근원은 남해 무역에 있었다.남월(현재의 광저우시)의 땅은 남해를 향한 현관 입구이기도 하여, <사기> 화식열전에 "번옹도 또한 한 도회로서, 진주·코뿔소 뿔·대모 및 남방의 과일과 천이 폭주해 오는 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최근 광저우 시내에서 진나라대의 조선소터가 발견되어, 그곳에서는 300명 이상의 사람을 태우는 대형 배가 건조되었단 점에서 그것을 입증한다. 


남월 왕국이 완전히 한 왕조의 지배화에 들어간 것은 전한 무제의 원정元鼎 6년(기원전 111년)의 때이다. 무제는 남월 평정 이후, 이 지방부터 인도차이나 반도에 걸쳐서 9개의 군을 설치하여 직할통치를 강화했다. 북방에서오는 입식자에 의한 영남 지방 개발은 이 이후에 시동하게 되지만, 그 전에 강남 지방의 개발이 있다. 본격적으로영남 지방에 입식자가 증가한 것은 다음 두 가지 시기이다. 첫째 시기는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의 동란기(2세기 후반-3세기 전반), 그리고 두번째 시기는 서진 왕조가 북방의 색외塞外 민족인 오호(흉노, 갈, 선비, 저, 강羌)의 침입에 의하여 요란해져 영가永嘉의 난(311년) 등의 병란을 겪고 동천하여 강남에 동진 왕조를 건설한 시기이다(3세기 말-4세기 전반). 입식자들에 의한 영남 지방의 농업 개발은 중국 서남 지방과 비교하여 시간차가 있을 뿐만 아니라, 문헌사료에 호족과 대성의 성장을 보여주는 기사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두 가지 입식자의 최고조 시기에 각각 특색이 있는 논 모형이 출현한다. 아래는 거기에 표현되어 있는 벼농사의 실태를 해설하려 한다.





후한 시대의 두 가지 논 경작 모형


광둥성의 광둥 삼각주 지대에서 후한 시대의 논 모형이 몇 점 출토되는데, 농작업을 행하는 인물용을 수반한 것이 2점 있다. 그 하나는 1961년에 불산시佛山市 란석瀾石의 후한 시대 전실묘에서 발견된 논 쟁기질 모형이다. 우리가 촬영한 사진(그림2-24)에 입각하여 발굴보고의 기사를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徐恒彬 1964).


그림2-24 광둥성 불산시 란석에서 출토된 후한 시대의 논 쟁기질 모형과 작은 배. 모형의 크기는 39x29x1.2cm(광둥성 박물관 소장, 2005년 와타베 촬영)




논은 두렁에 의하여 여섯 개로 구획되고, 각 논에는 하나의 농작업 인물용이 있다. 오른쪽 위와 바로 앞 한가운데에 삿갓을 쓴 인물의 앞쪽 논에는 각각 V자 모양의 보습이 있다. 두 사람은 쟁기의 자루를 쥐고서 조작하고 있는듯하다. 바로 앞 오른쪽의 인물은 낫을 들고서 수확 작업을 하고, 중앙의 두렁에 올라가 있는 인물은 낫을 갈고 있다. 왼쪽 위의 인물은 모내기 작업을 잠깐 쉬고 있다. 그 아래 왼쪽에는 탈곡 작업을 행하는 한 사람의 아이가 있으며, 아이의 옆에는 탈곡을 끝낸 곡물의 무더기가 셋 있다.


이 발굴보고가 계기가 되어, 후한 시대에는 광둥 삼각주에서 논농사에 쟁기가 도입되었다는 설이 정설화된다. 게다가 부리는 소의 모형이 수반되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소쟁기질'의 확실한 증거라고까지 이야기하게 되었다. 우리 자신도 이 설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이 모형의 실물을 광둥성 박물관에서 자세히 살펴보기에 이르러, 쟁기질도 소쟁기질도 모두 아니라고 확신했다. 그 이유는 세 가지이다. 첫째는 보습의 앞에 있어야 할 쟁기술의 흔적을 빼놓고 있는 점. 둘째는 앞에서도 기술했듯이, 이 모형에는 부리는 짐승을 빼놓고 있는 점. 그리고 셋째는쟁기를 조작해야 할 삿갓을 쓴 옆을 향한 인물의 두 손이 가리키고 있는 연장선상에 보습이 합치하고, 이 인물용은 자루가 긴 수동식 농기구를 조작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는 점. 즉, 이 두 사람의 인물용은 자루가 긴 따비,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정창원에 전하는 '자일수신서子日手辛鋤' 같은 따비를 조작하고 있다고 우리는 판단했다. 이 추정을 확증하는 데에는 유사한 예의 출토를 기다려야 했다.


그 기회는 2005년 3월에 찾아왔다. 화남 농업대학 농업사연구실의 구면인 예근금倪根金 주임과 팽세장彭世奬 씨의 안내로 광저우시 번옹구의 번옹 박물관을 방문해, 드디어 그림2-25의 새로 출토된 논 쟁기질 모형과 대면할 수 있었다. 이 박물관의 부지 안에는 후한 시대부터 명나라대까지의 묘가 있고, 해당 모형은 그 안의 후한 시대 전실묘 안에서 1994년에 출토된 것으로, 파손이 심했기에 복제품을 제조하여 전시했다. 이 논 모형은 두렁에 의하여 십자로 사등분되고, 그중 삼면의 논에 비스듬한 두렁이 설치되어 있다. 왼쪽 아래의 두 사람의 인물 앞쪽의 논에 각각 보습 모양의 것이 있다. 이것은 분명히 소에게 끌게 하는 쟁기의 보습이 아니라, 손으로 조작하는 따비의 날이다. 또한 그 위의 두 사람의 인물은 모내기를 행하고 있으며, 배후의 두렁 위에는 벼모의 단이 늘어서 있다. 두렁의 십자가 교차하는 지점에는 낫을 갈고 있는 인물이 있다. 불산시와 번옹은 서로 인접한 행정구이고, 두지구에서 출토된 이들 논 쟁기질 모형은 공통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제작된 명기일 것이다.


그림2-25 광둥성 광저우시 번옹구에서 출토된 후한 시대의 논 쟁기질 모형(번옹 박물관 소장, 복제품, 2005년 와타베 촬영)





이들 두 점의 논 쟁기질 모형을 서로 비교하여, 해당 모형 안의 농작업이 쟁기질이란 설은 부정되었다. 그러나 광저우 지방의 같은 시기의 전실묘에서 대부분의 동물용, 예를 들면 돼지, 개, 소, 양, 닭, 거위, 집오리 등의 명기가 출토되고 있기에, 일소의 이용법을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 왜 북방의 가축인 양의 명기가 이와 같은 아열대의 광저우 지방에서 출토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후한 시대의 광둥 삼각주에 쟁기질이 존재했다는 설은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북방 건조지 농법의 기술 이전과 리전·파전 모형의 탄생


4세기 초두의 영가의 난에 의하여 서진 왕조가 멸망하고 강남의 건강建康(지금의 남경)에 동진 왕조가 건설되는데, 그때에 대량의 난민이 발생했다. 당시의 참상을 <진서晉書> 식화지食貨志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일이 많고, 기근과 역병이 만연하여 열 사람 가운데 여덟 아홉 사람의 관리가 유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유민의 무리는 대거로 화북에서 강남으로 향하고, 연쇄 현상처럼 그 지방의 사람들을 휩쓸리게 하면서 영남 지방으로의 인구이동을 촉진해 갔다. 영남 지방은 비교적 평화로웠다고 보이며, 광저우시의 전실묘 등에서 발견된 명문전銘文에 다음과 같은 문구가 발견된다.


"永嘉世, 九州荒, 如廣州, 平且康" "永嘉世, 九州凶, 如廣州, 平且豊" 

"永嘉世, 天下荒, 余廣州, 皆平康" "永嘉世, 九州空, 余吳王, 盛且豊"


네 점의 명문 내용은 모두 유사하며, "영가 연간(307-313년) 천하는 크게 혼란하지만 이 광주 지방(이 경우의 광주는 광둥·광시를 포함한 영남 지방을 가리킴)은 평화롭고 풍요롭다"라고 찬양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소에게 끌게 한 쟁기로 논을 갈아엎고, 파(정확히는 초파라고 부른다. 써레임)로 흙덩이를 부수는 농작업을 한 묶음으로 한 명기가 출현한다. 이것을 '리전·파전 모형'이라 부른다. 광둥성 박물관에는 란석에서 출토된 모형과 아울러 광둥성 연현連縣에서 출토된 서진 시대의 리전·파전 모형(그림2-26)이 전시되어 있으며, 이 모형은 참으로 다양한 농경 정보를 가르쳐준다. 이 유형의 모형은 광둥 삼각주 지대 및 그 주변 지역에서 몇 가지 발견되며, 예전에 발견된 것을 그려놓은 것이 그림2-27이다.


그림2-26 광둥성 연현에서 출토된 서진 시대의 리전·파전 모형(광둥성 박물관 소장, 2005년 와타베 촬영)



그림2-27 영남 지방에서 출토된 서진-남조 시대의 리전·파전 쟁기질 모형(와타베 모사)

①남조 시대의 도자기로 만든 파전 모형(광시 장족 자치구 오주시梧州市 출토) ②서진 시대의 도자기로 만든 리전·파전 모형(광둥성 소관시韶關市 서하西河 출토) ③서진 시대의 도자기로 만든 리전·파전 모형(광둥성 광저우시 황포구埔區 출토) ④서진 시대의 도자기로 만든 논 쟁기질 모형(광둥성 광저우시 황포구 출토) ⑤서진 시대의 도자기로 만든 논 모형(광둥성 광저우시 황포구 출토) ⑥동진 시대의 도자기로 만든 논 쟁기질 모형(광둥성조경시肇慶市 황강진崗鎭 출토)




이들 리전·파전 모형에는 중국 서남에서 발견된 피당도전 모형과 다른 점이 많이 발견된다. 첫째는 피당이 표현되어 있지 않은 점. 이것은 아열대에 속한 영남 지방의 기후와 크게 관계가 있다. 이 지방에서는 우기에 강우량이많기에, 수로만 정비 관리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와 관련하여 광저우시의 연간 평균 기온은 21.8도, 강수량은 약 1700밀리미터로, 이 수치는 한중과 성도와 비교하여 훨씬 높다. 따라서 한나라대의 광둥 삼각주에서는 벼의 완숙 재배가 충분히 가능했다. 그것은 란석(광둥성 불산시)에서 출토된 모형에서 수확·탈곡·모내기가 동시 진행으로 표현되어 있는 점에서도 엿보아 알 수 있다. 


둘째는 논에는 어구인 통발이 장치되어 있는 점. 이것은 삼각주 지대의 수로와 논 사이의 접속이 좋기 때문에 많은 어류가 자연히 진입해 온다. 그것을 장치된 통발로 가만히 앉아서 잡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경관은 윈난성의 논벼농사에 종사하는 타이족의 마을에서 일상다반사로 볼 수 있다. 어구가 다채로운 점으로는 타이족을 그 필두에 자리매김할 수 있겠다(그림2-28). 중국에는 옛날부터 풍요로운 수향 지대를 '어도지향魚稻之鄕'이라든지 '어미지향魚米之鄕'이라고 형용하는 표현이 있다. 벼농사와 어로는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으며, 특히 해안선에 비하여 내륙의 수계가 잘 발달된 중국에서는 담수산의 어획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그 때문에 후한 시대에는 이미 <양어경養魚經>이란 매뉴얼이 저술되고, 또 6세기 전반의 농서 <제민요술>(가사협賈思勰 저)에도 양리養鯉의 기사가 보인다. 더구나 현재 쓰촨과 광둥에서는 벼논양어를 위한 어묘魚苗(치어)를 제공하는 업자가 윈난의 타이족 농촌에서 성공을 거둔 예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림2-28 타이족 농가의 헛간에 보관되어 있던 각종 어구(윈난성 덕굉德宏 태족傣族 경파족景颇族 자치주 망시芒市 망핵촌芒核村에서, 1997년 와타베 촬영)




셋째는 가장 중요한 쟁기질에 관한 문제인데, 이 시기에 중국 서남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던 쟁기와 써레를 조합한논 쟁기질 모형의 명기가 출현한다. 그림2-26의 연현에서 출토된 사례에서는 논의 네 귀퉁이에는 어구인 통발이장치되고, 논은 한가운데의 두렁으로 둘로 분할되어 있다. 건너편의 인물은 한 마리의 황소(그림2-27 ①··⑤에는 물소가 등장하고 있는 것에 주의)에게 쟁기를 끌게 하고 있다. 모형은 점토를 손으로 빚은 관계로, 쟁기와멍에 등의 조작은 매우 조잡하다. 그러나 쟁기의 모양은 L자형을 나타내고 있기에 선쟁기이며, 소의 등 부분에 있는 두 개의 봉 모양의 것을 끌채라고 한다면, 이것은 겨리쟁기가 된다. 또한 가까운 쪽의 인물은 똑같은 방법으로 소에게 써레를 매어 끌게 하고 있다.


쟁기로 갈아엎고, 써레로 흙덩이를 부수며, 또한 번지나 끌개로 토양을 진압하는 농기구 체계는 북방의 밭농사 지대에서 고안된 건조지 농법(dry farming)의 일대 특색이다(그림2-29). 또한 건조지 농법에서 사용되는 쟁기는일반적으로 얕이갈이 유형의 눕쟁기이다. 그 건조지 농법에 있는 농기구 체계의 주요 부분이 4세기 초두의 영남 지방의 논 쟁기질에 도입되었던 것이다. 이 기술 이전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는 상세히 논한 적이 있다(渡部 2002, 2005). 다만 반복하여 지적해 두고 싶은 것은 북방 밭농사 지대에서의 써레는 그림2-29에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사람이 그 위에 타서 체중을 실어 조작하는 써레(踩耙, 레발이 달림)인데 그것이 논 지대에 도입되면 그림2-30의 사진처럼 상부에 손잡이가 달린 써레(耖耙)로 변하며, 그 고안은 아마 장강 중하류 지역에서 이루어져동란기의 세찬 인구 이동에 의하여 영남 지방으로 가져간 것이 아닐까?


그림2-29 간쑤성 주천시酒泉市 정가갑丁家 5호묘 전벽화 안의 건조지 농법을 보여주는 쟁기질, 써레질 작업(오호십육국 시대)




그림2-30 두 마리의 물소로 써레를 끌게 한다. 논에 물을 대어 작업은 훨씬 경감된다(윈난성 강천현江川縣에서, 1995년 5월 와타베 촬영)






끝맺음


이상 중국 서남 지방과 광둥 삼각주 지대의 묘장에서 출토된 한나라대부터 육조 시대에 걸친 '피당도전 모형'과 '논 모형'으로부터 당시 벼농사의 실태가 어떠했는지를 해설해 보았다. 이와 같은 출토 명기에 대하여 최초로 주목한 것은 고고학자 오카자키 타카시岡崎敬(1923-1990)였다. 그는 1950년대에 남경 박물원에서 쓰촨성 팽산현에서 출토된 몇 점의 논 모형을 보고, 이와 같은 문물은 계속 발견되어 머지않아 우리나라의 고대 벼농사를 생각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고 예언했다(岡崎 1958). 예언은 적중하여 1970년대 말부터 시작된 개혁개방 경제정책에 의한 건설 러쉬로, 많은 논 모형의 새 자료가 발견되었다. 이들 문물은 출토 상태가 좋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은 각 지방의 박물관과 문물관리소의 창고에 보관되어 공개되는 일은 거의 없다. 오랜 세월을 소비하여, 현지의 많은 지인의 도움을 얻어 관계자료를 자세히 살펴본 결과를 여기에서 정리해 보았다. 우리 자신이 중국사 분야의 출신이기에, 약간 역사적 배경에 무게를 너무 둔 경향이 있지만, 이것도 이 종류의 모형을 이해하기 위하여 필요할 것이다. 전문 고고연구자가 본다면 더욱 많은 발견이 있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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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5





기고2

농서에서 보는 농업의 모습

사사키 타케오佐々木長生






농서란


농서란 근대의 서양 농업 도입 이전의 농업기술서를 가리키며, 근세 농서라고도 부른다. 그에 대하여 근대의 서양 농업을 도입한 이후의 것을 메이지 농서라고 부른다. 


농서, 곧 근세 농서는 촌장(쇼야庄屋)과 마을공무인(무라야쿠닌村役人) 등의 상층 농민과 하급 무사·학자 등에 의해 저술되어 왔다. 지방 농서라고도 부르는 농민에 의하여 저술된 것은 그 토지의 기후와 토양 등의 자연환경에 맞춘 자급 농법에 대하여 경험과 관습을 바탕으로 저술된 것이 많다. 그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농서로서, 아이즈会津 지방의 자연에 맞추어 저술된 죠쿄貞亨 원년(1684)의 <아이즈 농서>나 덴와天和 2년(1682) 성립된 토카이東海 지방의 <백성전기百姓傳記>와 호에이宝永 4년(1707) 성립된 카가加賀 지방의 <경가춘추耕稼春秋> 등이 있다. 한편, 학자와 무사가 저술한 대표라고도 할 수 있는 미야자키 야스사다宮埼安貞의 겐로쿠元禄 10년(1697) 간행된 <농업전서農業全書>가 있다. <농업전서>의 저술 이후는 이것을  본으로 하여 각지에서 많은 농서가 출현한다. 농서의 저술 방법도 시대의 추이와 함께 변천하여, 에도 후기에는 음양오행 사상의 보급과 함께 그 영향을 받은 농서도 출현한다. 분세이文政 11년(1828) 간행된 고니시 아츠요시小西篤好의 <농업여화農業余話> 등은 그 한 예이다. 또한 농서 중에는 그림으로 농업의 모습을 표현한 그림 농서라고도 부르는 것이 있다. <경가춘추>의 그림 농서판이라고도 할 수 있는 <농업도회農業図絵>나, 액자와 사계절 경작도 병풍 등도 있다. 


농서는 근세의 농업 기술과 농민의 생활, 마을 형태 등을 반영한 시대의 거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기고에서는<아이즈 농서>를 중심으로 근세 농업의 모습을 조망해 보고자 한다.




농서 출현의 배경


통설에서는 약 2500년 전에 우리나라에 벼농사가 이입된 이래, 겐로쿠 시대(1688-1703)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는 농서라고 부르는 농업기술서는 저술되지 않았다. 근세에 이르러 바쿠한幕藩 체제의 쌀 녹봉제(石高制)를 기축으로 한 정책이 확립되어 갔다. 쌀을 중심으로 한 농업생산체제에서 연공年貢의 쌀을 세금으로 안정된 형태로 징수하는 것이 정책의 기반이었다. 이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근세 마을의 탄생이 농서 출현의 배경에 있다. 그 특징은이른바 핵가족을 중심으로 한 일부일처 소가족에 의한 농업경영에 있다. 지금까지의 중세적 마을의 복합 대가족제에서 소농민 경영에 의한 농업기술로의 전환이다. 


소농민, 곧 백성들은 노동력과 농기구의 부족, 농업기술의 늦음 등 불안정한 상황에 있었다. 이들 불안정한 소농민들이 안정하여 농업을 경영하고, 규칙적으로 쌀과 잡곡·공예작물 등의 연공을 공출하는 것이 한의 정책으로 요구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농작물의 재배방법을 기술한 메뉴얼 서적인 농서가 출현하고, 예를 들면 초기의 농서에는 안정된 연공 확보를 위한 자급 농법에 대하여 기술되었다.


에도·오사카 등 삼도三都만이 아니라, 지방의 성시(城下)에서도 인구 증가에 수반한 도시의 발달에 의해 채소와 목면, 담배, 과수 등 농산물을 도시로 공급하는 근교 농촌이 출현한다. 도시의 발전과 함께 농촌도 상업작물을 재배하는 마을로 변용해 간다. 이러한 농업의 발전과 함께, 농서도 특산물의 기술서라는 성격을 가지게 된다. 오쿠라 나가츠네大藏永常의 덴포天保 13년(1842) 간행한 <광익국산고広益国産考> 등은 그 대표라고 할 수 있다.


농서는 시대의 추이와 함께 그 내용과 저술 형태도 변용하고, 농업이 경영되고 있는 지역의 자연조건에 관련하여그 지역성과 민속성도 다분히 저술되게 된다. 농서는 단순히 농업기술만이 아니라, 당시 농민의 살림살이, 사상, 사회질서 등 근세의 농민 생활을 오늘날에 전하고 있는 문화유산이다.




<아이즈 농서>와 마을 풍경


다음으로 <아이즈 농서>를 한 예로 농서에서 나오는 근세 농업의 모습을 보려고 한다.


<아이즈 농서>는 죠쿄 원년(1684)에 현재의 후쿠시마현 아이즈와카마츠시会津若松市 코자시무라神指町 마쿠노우幕內, 당시의 마쿠노우치촌幕內村의 키모이리肝煎(촌장)인 사제 요지佐瀨与次 에몬右衛門에 의하여 저술되었다. 요지 에몬은 겐로쿠 4년(1691)의 분한장分限帳을 바탕으로 가족수, 논밭의 보유수, 말의 수를 비롯하여 마을 산과 제방 등 마을 공유재산과 이웃마을과의 교류의 상황 등 당시의 마쿠노우치촌의 모습을 기재한 <아이즈 막지내지幕之內誌>를 저술한다. 곧, <아이즈 농서> 출현 당시의 마쿠노우치촌의 모습을 지지풍으로 남기고 있다. 또한 사제 집안에는 아이즈번에서 마쿠노우치촌으로 전달하는 문서를 편집한 기록, <사제가佐瀨家 기록>(현재는 1, 4, 10권)이 있으며, 번과 마을의 관계, 정책 상황 등 칸분寬文 시기(1661-1672)부터 쇼토쿠正徳 시기(1711-1715) 기간의 것이 있어 농서 출현의 시대 배경을 볼 수 있다.


이들 요지 에몬이 저술한 저서는 <아이즈 농서>의 농업기술과 더불어 마쿠노우치촌을 비롯한 아이즈 지방의 근세마을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이즈번에서는 엔포 8년(1680)의 <아이즈 농서> 저술 직전에 번령 전역의 검지検地를 행하고 있다. 지금까지 한 집에 거주하고 있던 둘째아들, 셋째아들 등의 자식들에게 각각 균등하게 논밭을 주어 분가 상속시키는 정책을 실행했다. 이 단게에서 현재의 마을의 원형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마쿠노우치는 앞에 적은 <아이즈 막지내지>에 의하면, 칸분 시기 이전(1661년 이전)부터 칸분 시기이후(1672년 이후)까지에 11호에서 32호로 호수가 증가하고 있다. 분가 상속은 그뒤에도 계속되어, 에도 말기에는 헤이세이平成 21년 현재와 거의 동수인 60호 정도가 된다. 마쿠노우치는 사제·하세가와長谷川·키무라木村·호즈미穂積 등의 성을 가진 일족에서 분가 상속하여 그 본가 일대에 있는 집에서는 '하세가와 미노슈美濃守' 등 무사의 신분을 나타내는 호칭이 있었던 것을 <아이즈 막지내지>에서 볼 수 있다.


<아이즈 농서>의 저술에서도 당시의 농업 실태가 <아이즈 막지내지>에서 보는 것처럼 일부일처 소가족에 의한 농업경영으로 변용했단 것을 알 수 있다. 벼농사를 중심으로 밭작물, 목면, 쪽, 담배 등의 공예작물을 계절마다 계획적으로 재배하는, 이른바 복합 경영에 의한 농업이 정식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아이즈 농서> 중권에 나오는 작부체계의 확립과 식량 채소의 채취 등에 의한 쌀 보충 등은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근세 마을의 형성 배경이 되었던 농업 기술에 대하여 <아이즈 농서>는 다음의 여러 점을 들고 있다. 이 농업 기술의 향상은 아이즈 지방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발견될 것이다. 


(1) 모내기를 앞당기면서 수확량이 많은 늦벼의 재배 촉진, 품종 개량. 

(2) 다종다양한 밭작물의 재배화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작부체계의 확립.

(3) 도시 발달에 수반한 근교 농촌화와 상품작물의 재배화.

(4) 목화, 쪽, 홍화 등의 특용작물의 재배화.

(5) 밑거름, 외양간거름, 풋거름 등의 자급 거름과 소주 지게미, 깻묵, 말린 정어리, (콩이나 생선의) 찌끼 등의 금비(구입 비료)의 보급.

(6) 농업용수 보와 하천 등의 토목 기술 발달.

(7) 새로운 논 개발에 수반한 경작지의 확대 등.




<아이즈 농서>의 농업


<아이즈 농서>는 상권의 벼농사, 중권의 밭농사, 하권의 농가사익부農家事益部, 즉 영농의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내용으로는 저자 사제 요지 에몬의 체험과 '향담鄕談'이라 부르는 옛 관습·구전에 따른 농업 기술의 실험·검증 결과 등이 기술되어 있다. 아이즈 영내는 광대한 면적을 가지기 때문에, 평탄부의 '리향'과 산간부의 '산향'으로 나누어 기술한다. 또한 초목의 싹틈과 개화, 잔설의 출현 상황, 곤충의 움직임 등으로 계절을 판별하고, 농경의 시기를 파악하는 일 등 자연에 의거한 농업의 방법을 설명한다. 경험과학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내용이다. 또 한편으로 논밭의 토양 분류와 그 무게·색·맛·양분의 함유량이나, 쌀과 밭작물의 파종량, 수확량, 노동력의 투하인수, 재배 기간의 수치에 따른 기술 등 실증과학적인 기재를 많이 볼 수 있다. 곧 경험과학적인 측면과 근대 과학의 방법도 받아들인 실증과학적인 측면의 양방을 겸비한 내용이라 할 수 있다.


요지 에몬은 마쿠노우치라는 리향의 농민이기 때문에, 산향의 기술에 대해서는 각지의 노농이라 부르는 정농가에게서 정보를 수집하여 <아이즈 농서>를 저술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와 같은 사업이 가능해진 데에는 아이즈번의 관여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요지 에몬은 말하자면 편집국장으로서, 각지의 정보를 편집하여 <아이즈 농서>를 집필했을 것이다. 아이즈번에서는 번령의 지지로서 역할을 담당했던 <아이즈 풍토기>가 칸분 6년(1666)에 성립하고, 그 완성된 칸분의 풍속장風俗帳이 각지에 남아 있다. 번에서는 풍속장의 완성은 <아이즈 농서> 저술의 이듬해 죠쿄 2년(1685)에도 행해지고, 각지의 농업을 비롯하여 의식주, 연중행사, 관혼상제 등에 대하여 기재되어 있으며, 근세의 아이즈 민속을 보여주는 유력한 자료가 되고 있다. 마쿠노우치 부근에서는 나카아라이조中荒井組(현재의 아이즈와카마츠시 키타아이즈무라 나카아라이 주변)의 민속을 기술한 죠쿄 2년의 <나카아라이조 풍속장>이 있으며, <아이즈 농서> 저술 당시의 농민 살림살이도 볼 수 있다.


이처럼 배경의 바탕에 <아이즈 농서>가 저술된 뒤, 당시 식자력이 높지 않았던 농민들이 더 배우기 쉽고 알기 쉽도록 하자는 요망이 있었기 때문에, 요지 에몬은 <아이즈 농서>의 내용을 1669수의 노래로 지은 <아이즈 노래 농서>를 호에이宝永 원년(1704)에 저술한다. 리듬을 붙여 흥얼거리며 배우도록 한 것이다. 당시의 농민들에게 이러한 노래로 흥얼거리는 풍습이 존재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중에는 옛 관습이나 구전에서 취재한 '옛 노래'도 덧붙여져 있다. 또한 원래는 여기저기에 그림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베끼는 단계에서 몇 개의 그림이 생략되지만, 일부 메뚜기 등 곤충과 새의 그림이 있으며, 그림 농서로서의 성격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아이즈 농서>의 내용을 시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1 사제 요지 에몬 저 <아이즈 노래 농서>. 호에이 원년(1704), 사제 데츠하루哲治 씨 소장.




또한 요지 에몬은 노농(요지 에몬)과 농민의 문답 형식으로 당시의 농업 어휘와 농경 의례, 전설, 작물 금기 등에대하여 상세하게 해설한 <아이즈 농서 부록> 8권(현존은 2, 4, 6, 8권)을 저술한다. 예를 들면, 제4권은 겐로쿠 4년(1691)부터 호에이 6년(1709)의 19년 동안에 걸친 날씨와 작황에 대하여 기술한 것으로, 당시의 기상 정보를 알 수 있다. 특히 서리, 가뭄, 냉해, 병충해 등의 기술로부터 기상과 농업에 대한 실증적인 자료를 제공한다. 


요지 에몬이 철저히 한 농민들 지도는 사위인 하야시 에몬에게 계승되어 간다. 하야시 에몬은 쇼토쿠正徳 3년(1713)에 마쿠노우치에서 농업기술서인 <마쿠노우치 농업기農業記>를 저술한다. 친자식 2대에 걸친 농서의 저술이다. 요지 에몬의 <아이즈 농서>부터 하야시 에몬의 <마쿠노우치 농업기>까지 30년 동안 마을 형태는 뚜렷하게 발전을 이룬다. 마쿠노우치는 한 예를 들면, 요지 에몬의 시대에 자급을 목적으로 했던 농업에서 하에시 에몬의 '엽원장葉園場'이라고 부르는 근교 농촌의 상품작물 재배로 변화해 갔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증명하듯이, 마쿠노우치라는 한 마을에서 새로운 일련의 농서가 저술되어 간다. 이 겐로쿠 시기에 일어난 마을의 변용은 분카文化 시기(1804-1817)가 되어 더욱 가속하여, 마쿠노우치는 와카마츠 성시에 채소를 공급하는 '채원장'이라는 마을로, 분카 6년(1809)의 <신편新編 아이즈 풍토기>에 기재되게 된다.





<아이즈 농서>와 마을사람


<아이즈 농서> 저술로부터 20여 년이 경과하여 성립한 <아이즈 노래 농서>와 <아이즈 농서 부록> 안에는 가뭄과 된서리의 피해가 연대와 함께 기재되어 있으며, 당시 마을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그 하나로 '도천稻泉'이란 쌀을 둘러싼 에피소드가 있다. '도천'은 수확량이 많고 맛도 우수했기 때문에, 죠쿄 무렵부터 재배되게 되었다. 사람 좋은 요지 에몬은 마을사람이 청하여 '도천'의 볍씨를 모두 마을사람에게 주고, 자신이 재배할 볍씨가 없어 아내에게 야단을 맞는다. 그러나 겐로쿠 5년(1692)은 늦은 된서리에 의해 '도천'은 전멸해 버린다. '도천'의 볍씨가 수중에서 없어졌기에 할 수 없이 중도中稻와 조도早란 다른 품종을 심은 요지 에몬은, 다행스럽게도 수확을 할 수 있었다. 요지 에몬은 이 실화를 <아이즈 농서>에서 기술하고, 벼의 한 품종 농사 등 치우친 재배를 경계하며 많은 품종을 논에 심어 모내기의 기일을 달리 행하도록 지도하고 있다. 자연 재해로부터 절멸을 회피하는 방책이다. <아이즈 농서>의 전체를 관철하고 있는 것은 바로 자연과 맞서는 농법이 아니며, 자연에 거스르지 않고 자연을 살리는 농법이다. 현대의 농업은 이 가르침을 잊은 듯이, 고시히카리와 히토메보레 등 상표 쌀의 한 품종 재배 경향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요지 에몬과 마을사람의 관계를 보여준 기술은 <아이즈 농서 부록>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 하나로 도열병의 기재가 있다. 도열병의 기재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마쿠노우치 주변에서는 '이리모치(도열병)'이 생기면 조릿대를 찌르면 좋다는 옛날부터 전해오는 구전이 있으며, 이것은 최근까지 전승되어 왔다. 요지 에몬의동생 한 에몬은 미신이라고 말하며 조릿대를 꽂지 않았다. 동생의 벼는 전멸하고, 조릿대를 세운 요지 에몬의 벼는 반쯤 피해를 보고 끝났다. 마찬가지의 기술은 카가加賀의 농서 <농사유서>에도 있고, 카가에서는 상수리나무를 찌르면 좋다고 한다. 니시아이즈마치西会津町의 호자카宝坂에서는 밤나무 가지를 찌르면 좋다고 하며, 1945년 무렵까지 실행해 왔다.


<아이즈 농서>에는 농업 기술을 통하여 마을사람의 생활방식이 많이 이야기되어 와, 아이즈의 민속 연구에 다대한 가치를 주고 있다. 예를 들면 '하야시다拍子田'라고 부르는 모내기와 덴가쿠田楽의 습속이 이 시대의 아이즈 지방에 존재하고 있다. 이것은 중세 동일본에서 덴가쿠의 습속이 거의 모습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매우 주목할 만하다. 


또한 칸엔寬延 원년(1748) 사본인 <아이즈 농서>에는 백여 점의 농기구가 기재되어 있다. 당시 아이즈 지방의 농기구 존재 상황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풍구의 사용에 대해서는 <아이즈 농서>의 기술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유리오케汰桶'에서 '유리이타汰板'로 발달하는 과정과 목매의 변천 과정 등 근세 농기구의 발달 과정에 대하여 구체적인 연대와 작업능률이 아울러 기재되어 있어, 우리나라의 농기구 역사를 생각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이다. 


그림2 <아이즈 농서> 저술 당시의 농기구. <저묘대천동조만풍속개장猪苗代川東組萬風俗改帳>(부분) 죠쿄 2년(1685), 오카베 코스케岡部孝助 씨소장



유리오케




<아이즈 농서>는 현대의 생활에서 소멸된 민속과 어휘를 소생시켜 준다. 그 한 예로, '화경火耕'이 있다. 화전을 가리키고 있는 단어이다. 아이즈 지방에서는 화전은 카노라고 부르고 있는데, 근세에는 '화경(카코)'라는 단어가있었다. 사이타마현埼玉県 지치秩父 지방에도 '화경'이란 단어가 존재했던 것은 <신편 무사시武藏 풍토기고風土記稿>에 의하여 알 수 있다. '화경'이란 어휘는 각지에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화경'을 구실 삼아, <아이즈 농서>의 저자 사제 요지 에몬으로부터 현대의 우리에게로 전하는 메시지라고 보고 싶다. 그곳에는 현대의 농업이 직면한 물음에 대하여, 요지 에몬의 답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물어 이르길, 농가에서 밭을 갈 때 화경으로 한다고 하는 건 무엇입니까?

답하여 말하길, 가령 풀이 많이 자라는 밭을 늦게 메밀을 심으면 그 풀이 전혀 썩지 않고, 그것을 메밀 중간을 자를 때 불태워 버린다. 그리하면 풀뿌리도 끊어지는 데다가 재는 양분이 된다. 이를 화경이라 한다. 또한 저 밭 태우기도 모시풀이 많이 자라고 있을 때 태워도 곧 화경이다.


또 묻기를 ……. 농가에서 밭을 가는 데에 '화경으로 한다'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것입니까? 

답하여 말하기를 ……. 예를 들면 풀의 뿌리가 많이 만연해 버린 밭에서, 황급하여 메밀을 심으면, 그 밭은 좀처럼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파종 전의 중간 자르기를 할 때 괭이로 캐내고 불태워 버린다. 그렇게 하면 풀뿌리가 끊어지고, 더구나 재는 비료가 된다. 이것을 '화경'이라고 한다. 또한 밭 태우기도 모시풀이 많이 너무 자랐을 때 밭을 태우는 것도 화경이다. (일본 농서 전집 제19권 <아이즈 농서·아이즈 농서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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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5




기고1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농경 

-이케시마池島·후쿠만지福万寺 유적의 조사에서

이노우에 토모히로井上智博





이케시마·후쿠만지 유적의 발굴조사


여기에서 문제삼는 이케시마·후쿠만지 유적은 오사카부 카와치河内 평야의 남동부에 위치하는 유적으로, 행정적으로 말하면 히가시오사카시와 야오시八尾市에 걸쳐 있다. 이 유적에서는 수해 대책을 위한 유수지인 '온치가와恩智川 치수 녹지' 건설에 수반하여 약 40헥타르의 범위가 발굴조사되었다. 발굴조사는 1980년에 개시되어,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이 유적은 충적평야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하천 활동에 의하여 모래와 진흙이 빈번하게 퇴적된 결과, 과거의 지표면과 토양이 쌓여서 유구와 유물이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야요이 시대 이후의 경작지터이다.발굴조사에서는 야요이 시대의 논터, 아스카 시대 이후의 논과 밭터 등이 발견되고 있다. 그들 중에는 하천 활동에 의하여 운반되어 온 모래와 진흙에 의하여 매몰되어 보존되었던 것도 적지 않고, 경작지 경관의 변천을 밝히는 데에 중요한 자료가 축적되고 있다.


논과 밭의 지층 위에 하천 활동에 의하여 운반되어 온 모래와 진흙이 퇴적되고, 또 그 위에 논과 밭의 지층이 존재한다는 상황도 이 유적에서는 자주 확인할 수 있다. 이것에 관해서는 경작지가 홍수에 의하여 폐기하고 없애고 홍수 이후에 복구했다고 생각되어, '홍수와 싸우면서' 경작이 계속되어 갔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해석되는 일이 적지 않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설명은 너무 단순하고, 농경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충분하지 않다. 하천의 상태와 하천 퇴적 체계와 인간 활동의 관계는 시대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그 실상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각 시대의 하천 활동 실태와 지형 형성 과정을 밝히고, 그들과 토지이용 변천의 관게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와같은 검토를 진행해 가는 과정에서 경작지의 유지에 관계된 사람들을 둘러싼 사회적·경제적 정세와의 관계도 알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는 이 유적의 조사 성과 중에서 야요이 시대와 중세 말의 15-16세기에 있던 논과 밭을 문제삼아, 발굴조사에서 밝혀졌던 과거의 농업 실태에 대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야요이 시대 논의 실태


이 유적에서 농경이 시작된 것은 야요이 시대 전기 중엽의 일이다. 이 시대, 카와치 평야는 현재의 상황과는 크게달랐으며, 중앙부부터 북부에 걸쳐서 '카와치호'라고 부루는 호수가 펼쳐져 있었다(그림1). 이 호수는 조몬 시대조기 후반-전기에 형성된 내만인 '카와치만'의 흔적이고, 개펄이 발달한 '카와치 개펄'로 변화한 뒤 조몬 시대 만기 이후 담수 지역인 '카와치호'가 되었다. 이 유적은 호숫가에서 약간 내륙으로 들어간 장소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림1 논벼농사가 전혀졌던 무렵의 카와치 평야. 이노우에井上(2007)에 수록된 그림을 수정.




이 유적에서는 야요이 시대 전기 중엽(2400년 전 무렵)·전기 말-중기 초(2300년 전 무렵)·중기 중엽(2200-2100년 전 무렵)·중기 후반(2000년 전 무렵)·후기(1900년 전 무렵)의 크게 다섯 시기의 논이 검출되고 있다. 각 시기일지라도 논두렁만이 아니라 수로와 둠벙 등의 수리시설도 발견되며, 관개 체계의 모습이 밝혀지고 있다. 


논두렁이 조성되어 논으로 이용된 장소에는 야요이 시대를 통틀어 일관된 특징이 있다. 충적 평야에서는 하천이 범람하여 모래와 자갈, 진흙이 퇴적되는데 퇴적물의 두께는 일정하지 않고, 부분적으로 두텁게 퇴적하는 장소가 있다. 그와 같은 장소는 홍수 이후에 지형이 높아져 지표면에 기복이 생기게 한다. 이와 같이 높아짐으로써 자연제방, 틈상 퇴적체(crevasse splay) 등이 포함되는데, 그들을 일괄하여 '충적 리지ridge'라고 부른다. 논두렁은 충적 리지의 가장자리 부분에 분포하는 경향이 있으며, 충적 리지 가장자리의 완만한 경사지가 논으로 이용되었단 것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여러 충적 리지가 분포하고, 기복이 복잡한 장소에서는 논을 조성하기 쉬운 장소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일이 많다. 이와 같은 지형에 대응하여 논 구획 조성의 기본적 단위를 인식할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논 블록'이라 부르고 있다. 논 블록의 모습은 지형에 따라서 다르며, 기복이 적은 완만한 경사지에서는 면적이 넓고, 사각형의 논 구획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늘어선 듯한 논 블록이 되는데, 충적 리지에 둘러싸여 기복이 비교적 큰 장소에서는 면적이 작고 불규칙한 논 구획이 눈에 띈다. 


논 구역의 모습을 모형화한 형식으로 나타낸 것이 그림2이다. 논 구역의 최소 단위는 논 블록이지만, 수리시설과의 관계에 주목하면 동일한 둠벙에 의하여 물을 얻는 논 블록의 통합을 추출할 수 있다. 이들 논 불록은 수로에 의하여 서로 연계를 가지고 있으며, 관개의 기본적인 단위가 되는 점에서 '관개 유닛'이라 부른다. 논 구역은 복수의 관개 유닛의 집합체로서 구성되어 있다.



그림2 야요이 시대의 논 구역 조성. A는 야요이 시대 전기-중기, B는 야요이 시대 후기의 이미지.




논 구역의 구성을 시기별로 보면, 야요이 시대 전기 중엽의 논에서는 기존의 논 블록을 분단하는 모양으로 새롭게 너비 10미터 가까운 수로가 굴착되고, 당초 설정된 관개 유닛의 북쪽에 다른 관개 유닛이 설정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것은 논이 경영되기 시작한 시기에는 관개 유닛이 증설되는 모양으로 논 구역이 확대되어 갔던 것을 시사한다. 야요이 시대 전기 말부터 중기에 걸쳐서 논도 기본적으로 관개 유닛의 집합체로서 논 구역이 구성되어있는데(그림2의 A), 차츰 논의 면적이 넓어지고 다른 관개 유닛에 속한 논 블록끼리 접하는 일도 많아진다. 이 때문에 관개 유닛 사이에서 물의 교환도 자주 확인되게 된다. 또한 하나의 관개 유닛 내부에 몇 개의 논 블록으로구성된 서브 유닛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단위가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이처럼 관개 유닛의 모습이 복잡해져 가는 것이 야요이 시대 중기의 특징이다. 


야요이 시대 후기의 논에서는 논 구획이 광범위로 연속하여 넓어지지만, 큰 논두렁에 의하여 구획되거나, '구획 작은 논두렁'이라고 부르는 논두렁을 경계로 하여 작은 논두렁이 접합하는 방식이 변화하거나 하여, 논 블록을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 주목되는 것은 논 블록의 크기가 비교적 고르게 되어 있는 점이다. 논 블록의 설정에서때로는 충적 리지의 일부를 깎아내 논 블록의 모양을 정비하거나, 논 블록의 범위를 넓히거나 하는 일이 많다. 이와 같은 일은 그 이전에도 확인할 수 있지만, 이 시기에는 빈번하게 실시하게 된다. 또 주목되는 것은 복잡한 수리 계통을 설정하고, 논 블록 3-4개에 의하여 구성되는 관개 유닛을 일정 공간 안에 가지런하게 배치하고 있는 점이다(그림2의 B). 이와 같은 관개 유닛의 배치는 하천 유로와 비교적 큰 충적 리지에 둘러싸인 공간 안에 설정되어 있으며, 그와 같은 지형적 통합을 단위로 복잡한 수리 게통을 설정하고 관개 유닛·논 블록을 계획적으로 배치한다고 하는 상황이 명확화된다. 이 개발 단위를 '논 지대(zone)'라고 부른다.


둠벙과 수로 등의 수리시설, 논 구획을 형성하는 논두렁과 같은 개개의 기술은 야요이 시대 전기부터 존재하고, 논 블록·관개 유닛을 기본 단위로 하는 논 구역의 구성 자체도 야요이 시대를 통틀어 공통된다. 또, 지형적인 통합이 개발의 단위가 되는 점도 야요이 시대 후기에 시작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야요이 시대 후기의 논 구역 구성에는 그때까지와는 달리 비교적 크기가 고르게 된 경작 단위를 설정하고, 그 단위를 복잡한 수리 계통에 기초를 두어 가지런하게 배치한다는 구상이 명확히 읽을 수 있다. 이와 같은 논 구역 구성은 야오시 규호지久宝寺 유적의 야요이 시대 중기 후반(-후기 초?)의 논에서도 확인되며, 카와치 평야에서는 야요이 시대 중기 후반부터 후기에 걸처서 발달한 듯하다. 더 말하자면, 이와 같은 상태는 고분 시대의 논 구역 구성에도 계승된다. 


이처럼 생각하면, 야요이 시대의 논벼농사는 수리 계통의 정비에 의하여 순조롭게 발달했다고도 볼 수 있는데, 한편으로 논 경영의 불안정함을 시사하는 상황도 밝혀지고 있다. 먼저, 모든 논 블록에서 해마다 경작이 실시되었는지 어떤지 하는 문제이다. 야요이 시대 후기의 논 블록 중에는 취수 때문에 물꼬가 인위적으로 묻힌 상태로 검출된 것도 있었다. 이것은 논 블록의 안에 휴경 또는 방기된 것이 존재했단 것을 시사한다. 또한 휴경 또는 방기는 관개 유닛 단위에서도 실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야요이 시대 중기 중엽과 중기 후반의 논 구역을 비교하면, 전자는 유적 동부의 이케시마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데 반해 후자는 유적 서부의 후쿠만지 지구를 중심으로 한다. 더구나 후자의 시기에서는 이케시마 지구에서도 둠벙과 수로가 검출되어 조사 범위보다도 북쪽에 논이 펼쳐져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러한 논 구역의 위치 변화는 하천의 매몰이나 이동, 새로운 충적 리지의 형성 등과 관계된다. 곧, 지형 변화에 대응하여 물을 얻기 쉽고, 논을 조성하기 쉬운 장소에 논 구역을 이동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처럼 야요이 시대의 논벼농사에서는 고도한 관개·논 조성 기술을 사용하여 발전해 갔다고 하는 측면과 관개용수의 양과 지형 변화 등에 좌우되어 휴경과 방기, 이동을 반복했다는 불안정한 측면을 확인할 수 있다. 얼핏 모순되는 듯한 둘의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하천 활동에 의하여 유로의 위치가 변화하거나, 충적 리지가 형성되어 지형이 변화하거나 하는 일은 야요이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고 생각하며, 또 그것을 당시의 기술로 제어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그와 같은 지형 변화에 대응하여 유연하게 논 경영을 실시해 갈 필요가 있었다. 홍수에 의하여 논이 매몰되거나, 하천의 매몰·이동에 의하여 취수가 곤란해지거나 한다면, 논 구역을 이동시켜 할 수 있는 한 조속히 새로운 논 구역을 형성하는 일이 요구된다. 그 경우, 복수의 관개 유닛을 단기간 안에 정비하는 것이기 때문에 더욱 합리적인 수리 계통의 설정과 논 구역 구성의 실현이 목표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것은 논을 경작하는 경작 집단의 노동 편성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케시마·후쿠만지 유적의 야요이 시대 후기 논에서 볼 수 있는논 구역 구성의 변화는 경작 집단의 노동 편성의 변화와 연동된 움직임이었다고 상정된다. 




15·16세기에 발달한 섬밭(시마바타島畠)과 그 배경


다음으로 중세 말인 15-16세기의 상황을 문제삼겠다. 이 시기의 특징은 '섬밭'의 발달이다. 섬밭이란 논 구역의 안에 흙을 쌓아 올려 가늘고 긴 두덩을 만들어 그 위를 밭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경작지는 아이치현 이치노미야시一宮市, 교토부 조요시城陽市, 나라현 야마토코리야마시大和郡山市 등에서 현재도 발견된다(그림3).


그림3 현대의 섬밭(좌)와 발굴된 섬밭(우). 왼쪽은 나라현 야마토코리야마시에서 촬영. 오른쪽은 이케시마·후쿠만지 유적에서 발굴된 15-16세기의 섬밭.




이케시마·후쿠만지 유적에서 바둑판 모양의 토지 분할에 기초를 둔 논 구역의 안에서 가늘고 긴 두덩이 조성되게 된 것은 제7층이라고 호칭하는 지층의 단계(11세기 후반-12세기)이다. 이 층 두덩의 특징으로는 약간 높은 부분을 논으로 쓰기 위하여 평평한 면을 조성할 때, 깎아낸 흙을 일정한 장소에 쌓아 올려 조성되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이 층의 두덩이 매몰된 뒤, 뒤에 기술하는 홍수 복구형 섬밭과 똑같은 방법으로 복구된다는 점이나, 이 층보다 상위의 층에서 차례차례 똑같은 두덩이 조성되어 있는 점도 주목된다. 이러한 점들에서 보아, 제7층의 두덩은 나중의 '섬밭'과 계보적으로 연결된다고 보아도 좋다. 꽃가루 분석의 결과를 보면, 제7층에서 메밀속의 꽃가루가 소량이지만 검출되기 시작하고, 그것보다 상위의 층에서도 연속하여 마찬가지의 상황이 확인된다. 메밀 등의 재배가 실시되었던 장소는 섬밭이고, 제7층의 단게부터 논 안의 두덩이 밭으로 이용되었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셋츠국 다르미즈 서목 에사카고우 전전취상摂津国垂水西牧榎坂鄕田畠取狀>(1189년) 등에서는 '롱'이란 표현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논 안에 있는 두덩을 나타내고 황무지에 준하는 취급을 받고 있던 장소라고 추정된다(金田 1999). 이것도 참고로 하여 추측하면, 이와 같은 두덩은 황무지로서 방치되거나, 수목이 심어지거나, 밭으로 이용되거나 하는 등 용도가 정해져 있지 않았는데, 차츰 밭으로 이용되는 일이 많아져 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섬밭은 제3층이라고 홍칭하는 지층의 단계(15세기 중엽-16세기 후반)에 발달한다. 그 조성 과정은 아래와 같다(그림4). 먼저 홍수에 의하여 논 구역에 모래가 퇴적된 뒤, 그 모래를 심으로 삼아 주변의 모래와 진흙을 쌓아 올려 섬밭을 조성한다. 또, 섬밭의 주변은 논으로 이용한다. 그뒤 홍수에 의하여 섬밭이 매몰된 뒤, 섬밭이 있던 부분에 모래와 진흙을 수북히 올려 논과 섬밭을 복구하는데, 그때 섬밭 위쪽 부분에 퇴적된 모래를 남기고 섬밭을 한 바퀴 돌며 크게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홍수 복구형 섬밭). 이와 같은 섬밭은 논 구역에서 구석구석까지 존재한 것은 아니고, 유적의 서쪽을 흐르는 타마쿠시카와玉串川의 제방이 무너지며 형성된 충적 리지나 동쪽의 이코마산生駒山 서쪽 기슭에 발달한 선상지를 구성하는 두덩(선상지 로브lobe)에 치우쳐서 분포하고 있다.


그림4 홍수 복구형 섬밭의 조성 과정




15-16세기에는 홍수에 의하여 퇴적된 토사를 이용하여 활발히 섬밭을 조성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여러 지점에서 행한 꽃가루 분석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섬밭이 발달한 제3층에서 소나무속의 꽃가루가 급증하여 우점하게 되는 것과 함께, 붉가시나무 아속, 졸참나무 아속 등이 급감하여 수목 꽃가루의 조성이 단순하게 변화하는 경향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이것과 똑같은 자료는 히가시오사카시 신카미코사카新上小阪 유적에서도 확인되어, 카와치 평야 남동부에서 공통적으로 확인되는 현상인 것 같다. 소나무는 트이고 밝은 장소에서 자라는 양수이며, 광엽수림이 벌채되면 그곳으로 진출하여 2차림을 형성한다. 이 때문에 야요이 시대 이후에 관해서는 소나무속 꽃가루의 증가는 인간에 의한 산림파괴의 지표 중 하나로 주목되고 있다. 따라서 이코마산에서도 개발이 진행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산지가 개발되고 나지가 펼쳐지면, 강우 때에 유출되는 토사의 양이 증가한다. 이것이 평야부에 있는 충적 리지의 발달과 관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17세기의 문헌사료에는 카와치 평야의 동쪽에 있는 이코마산에는 민둥산과 풀이 난 산이 펼쳐져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논에 풀과 잎 등을 넣어 거름으로 삼는 '베어 깔기(카리시키刈敷)'를 위한 초목 채취를 생각하고 있다(水本 2003). 또한 나무 뿌리의 채취가 토사 유출의 원인이라고 지적하는 사료도 존재하는데, 그에 대해서는 등불의 연료로 소나무의 뿌리 채취, 또는 약과 식용이 되는 초목의 뿌리 채취가 상정되고 있다(村田 2009). 이들 문헌사료는 15-16세기보다도 뒤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꽃가루 분석 결과에서 보아 이와 같은 인간 활동에 수반한 산림파괴는 15세기 중엽 이후에 대규모화되었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전국시대의 토고쿠東国에서는 축성에 필요한 재목과 울타리의 재료 등을 얻는 걸 목적으로 산림이 대규모로 벌채되어, 토사 유출양이 증가했단 것이 지적되고 있다(盛本 2008). 15세기 중엽 이후 대규모화하는 이코마산에서의 인간 활동에는 건축용 자재를 얻기 위한 수목의 벌채 등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어떻든, 이 시기에 일어난 섬밭의 발달은 산지에서 인간 활동이 야기한 평야부의 퇴적 환경 변화에 대한 대응책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그림5). 더구나 이와 같은 중세 말-근세 초에 일어난 토사 유출양의 증가에 수반한 섬밭의 발달에 관해서는 네야가와시寝屋川市 사사라군讃良郡 바둑판 구획 유적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며, 카와치 평야부부터 동부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일어났던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그림5 섬밭의 발달을 둘러싼 인간 활동과 자연환경의 관계




다만 형성된 충적 리지를 모두 밭으로 만들지 않고, 인위적인 가공을 행하여 밭과 논이 번갈아 분포하도록 만든 이유에 대해서는 지형 변화에 대한 대응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당시 사회에서 쌀의 가치와 밭작물의 유통 상태 등 농촌을 둘러싼 사회적·경제적 정세와의 관련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유적의 정보에서 농경사를 해독하기 위하여


논과 밭터에서 농경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구의 배치를 정태적으로 조망하는 것이 아니라, 형성 과정을 상세하게 검토하고 그 변천을 파악해야 한다. 그 방법에 대해서는 아직도 충분하지 않은 점도 많지만, 이케시마·후쿠만지 유적에서 행한 발굴조사 성과를 검토한 결과, 농경은 하천 활동에 의한 모래와 진흙의 퇴적·지형 변화 등에 의하여 계속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지만, 관개 기술과 농지 조성 기술·토지 조건의 변화에 대응한 작물 재배기술을 구사하여 계속하여 나아갔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인간 활동이 원인이 되어서 자연환경이 변화하고, 그것이 경작 형태를 변화시켰던 일도 있었다. 다만, 농경의 형태는 자연환경만으로 결정될 리는 없고, 하나의 형태를 선택하는 데에 당시의 사람들을 에워싼 사회 정세도 중요한 요소였다는 것은 명확하다. 즉, 경작지 경관은 자연환경과 인간 활동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형성되고, 변화해 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논과 밭터의 발굴조사 자료는 과거의 농경 상태를 생각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한 자료는 전국 각지에서축적되어 왔으며, 그 검토를 통하여 농경사를 복원해 가기 위한 전제는 게속 정리된다고 생각한다. 검토할 때에는 종래의 고고학적 방법만이 아니라, 자연과학의 수법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활용해야 한다. 고고학 연구자만이 아니라, 여러 분야의 연구자가 함께 유적에 서서, 각각의 입장에서 검토를 행한다. 그리고 검토 결과를 단순히 그러모으는 것이 아니라, 층을 이룬 순서에 기초하여 유적 형성 과정 안에 적절하게 자리매김하고, 유적을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이와 같은 종합적 연구야말로 과거의 경작지 경관을 상세하게 복원하고, 그 배경에 있는 자연환경과 인간 활동의 관계를 해명하는 일로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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