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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4




제2장

유라시아의 멜론 무리의 계보

후지시타 노리유키藤下典之





시작하며


멜론 무리의 형질, 특히 과실 형질의 다양성은 재배식물 중에서도 빼어나다. 야생종을 생각나게 하는 잡초 멜론도 또한 다양하다(그림2-1). 이와 같은 점으로부터 멜론 무리를 폴리모르포스 스피시스Polymorphos species라고도 불러 왔다. 필자가 정년을 맞이한 1992년 봄, 곁에 보존하고 있던 멜론 무리의 유전자원은 44개국에서 모은 2천종류(고정종과 잡종) 이상이었다. 그것에는 아프리카 대륙의 동속이종의 야생식물부터 당시 시장의 가게 앞을 차지한 인기 품종, 거기에 유라시아, 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의 4대륙 18개국에서 모았던 69계통의 잡초 멜론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 장에서는 이들 수집 소재의 재배조사와 생산지와 자생지에서 한 현지조사의 성과를 중심으로 유라시아, 주로 아시아(그림2-2)의 멜론 무리, 특히 잡초 멜론에 주안을 두고 그 계보와 특질에 대해서 기술하겠다.

 

그림2-1 서일본 각지의 외딴 섬에서 채집, 한 번 농사지은 잡초 멜론(1976). 오른쪽 위 모서리의 SS-6은 카가와현香川県 시시지마志々島산, 쓴맛의 발언형 분석종에서 Ⅰ형. 왼쪽 아래 모서리의 알은 달걀 중급. 과실에는 섬 이름의 머릿글자를 적어 넣었다.


  

그림2-2 아시아에서 C.melo의 분화·재배 성립 지역의 추정도(후지시타 2007). Ⅰ형과 Ⅱ형이 겹치는 지역 안의 ●는 간쑤성 란저우蘭州.




멜론의 계보


멜론이라고 하면, 맛있다고 하기보다 우선 고가의 과일이란 인상 쪽이 강했다. 시즈오카의 온실 머스크 멜론은 태평양 전쟁 이전부터 항간에서 이름이 알려져 있었지만, 서민은 범접할 수 없었다. 또한 똑같이 멜론의 이름이붙었어도 칸탈루프 멜론, 윈터 멜론 등의 유럽계 멜론이라면 20세기 후반이 되기까지는 대부분의 일본인은 알지 못했다. 나라와 헤이안 시대의 도시에서 소중히 여겨졌지만, 지금은 하치조지마八丈島(도쿄)와 후쿠에지마福江島(나가사키)에서만 재배된 모모르디카 멜론과 야요이 시대부터 활발히 이용되어 지금도 서일본 각지의 외딴 섬에서자생하는 잡초 멜론은 함께 이 장을 보시기까지 알지 못하셨을 것이다. 한편, 태평양 전쟁 이후 잠깐 동안은 여름의 풍물시로 친숙해진 참외와 아사즈케浅漬け와 검게 절인 나라즈케奈良漬의 월과越瓜는 오리엔탈 멜론으로, 버젓하게 멜론의 무리임을 알고 계셨던 분은 상당히 해박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노파심이지만, 워터 멜론은 수박의 영어 이름으로, 분류하자면 멜론 무리와는 속이 다르다.


다양하고 복잡한 멜론 무리의 유연 관계에 대하여, 혼란이 생기기 전에 분류해 놓자. 인간과 멜론 무리가 교류한 역사는 오래되었다. 지구 규모에서 보면 멜론은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재배되고, 중국에서는 기원전 13세기에 참외의 기록이 있다. 일본에 한정해도 야요이 시대의 49개 유적에서 종자가 높은 빈도로 다수 출토되고 있다. 이와 같이 재배의 역사는 오래되고, 그 지역도 지구 전역에 걸쳐 있으며, 각각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의 문화, 생활(식) 관습의 차이가 다양한 멜론 무리의 분화를 한층 도왔다. 게다가 교류(교통) 수단의 발달로 대륙 안의 더 광역, 때로는 바다를 건너서 멜론은 분포가 확산되었다. 지역의 확산, 분화의 과정에서도 멜론 무리가 서로 교잡하고, 유전자의 교환을 계속해 형질의 다양화는 멈출 줄 몰랐다. 사계절 내내 식탁에 오르는 오이는 재배식물 중에서 멜론 무리에 가장 가까운 동속이종의 관계이지만, 기본염색체 수가 멜론 무리의 12에 대하여 7이기 때문에 두 종 사이에 잡종은 생기지 않는다. 한편 아프리카 대륙에서 야생하는 동속이종의 식물은 염색체는멜론 무리와 동수인 12이지만 최첨단기술을 구사해도 종 사이에 잡종은 간단히는 생기지 않는다. 


멜론 무리의 형질이 너무나도 다양하기 때문에, 20세기 말 무렵까지 장기에 걸쳐서 멜론 무리, 곧 Cucumis melo는 40여 가지 변종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재배식물 중에서 동일한 종을 이만큼 많은 변종으로 분류하고 있는 예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성 분류에는 상당히 무리한 난제가 있었다. 재배하여 계속 살아 있는 현물을 관찰·비교하거나, 잡종을 만들거나 하면 이변종으로 분류되는 이유를 알 수 없게 되는 것이 많았다. 오랫동안 이명동종(Synonym)은 아닐까 하고 의심해 온 것이 있다. 그 전형적 예가 동아시아의 사람들, 특히 2차대전 직후까지 일본인에게 매우 친숙했던 참외로서, 필자는 1 또는 2 변종으로 수습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분류학의 마키노 토미타로우牧野富太郞(1862-1957)와 키타무라 시로우北村四郞(1906-2002)는 두 사람이 합하여 8 변종으로 분류하고 있다. 아무리 보아도 종의 이름에 무리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참외와 유럽계 멜론 무리의 변종 사이의 잡종을 신참외(var. neo-makuwa)라고 명명한 사례가 있다. 필자 자신의 손에 의한 변종 사이의 교배는 몇십 가지 조합을 넘는데, 교잡불화합을 나타낸 예는 전혀 없다(그림2-3, 2-4). 이대로라면 변종은 인위적으로 끝없이 마음껏 만들어지게 된다. 변이의 확대를 목표로 하여 육성되어 온 재배식물은 '잎 표본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식물로 분류해야 한다'고 다양한 멜론 무리를 취급한 체험으로부터 필자는 제창해 왔다.




그림2-3 C.melo의 종 안 변종 사이 잡종의 과실(왼손)과 염색체(아래)(1988). 오른손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일본의 잡초 멜론 MG-16과 왼쪽 어깨에는 가장 긴 아프가니스탄의 뱀 멜론, 왼손은 둘의 F1 잡종의 과실.




그림2-4 그물 멜론(상단)과 잡초 멜론(하단)의 변종 사이 잡종(중단)(1980). 과실의 크기, 모양, 껍질 색, 그물발현은 양친의 중간을 나타내는 것이 많다.





1991년, 멍거Mungar와 로빈슨Robinson은 새로운 분류 체계를 발표했다. 이명동종을 정리 통합하여 간략화하거나, 변종을 집단으로 바꾸거나, 혼합된 밑가지와 잔가지를 잘라 놓은 의의는 크다. 그러나 참외를 월과 집단에 넣고서 '그중에 단 것과 달지 않은 것이 있다'는 기술에는 실망하고 있다. 필자의 지론으로는 '8 변종으로 분류하고있던 참외는 var. makuwa의 1 변종 또는 1 집단으로 정리하고, 월과는 기존처럼 var. conomon(conomon group)의 참외와는 다른 변종이다. 조선반도에서 많이 재배되고, 종자의 모양이 참외, 월과와 약간 다른 성환참외는 C. microspermus(microspermus group)인 채로 둔다. 유럽계의 그물 멜론, 칸달로프 멜론, 윈터 멜론 및 모모르디카 멜론은 기존처럼 별도의 변종으로 취급한다. 잡초형인 C. callosus와 var. trigonus는 이명동종으로서 var. agrestis(agresyis group)에 일괄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상을 정리한 것이 표2-1로서, 필자가 말하는 멜론 무리에 해당하며, 이 글에서 충당해 채용한다. 태평양 전쟁 이후 멜론 무리의 신품종 육성 숫자를 연차별로 보면, 최고는 1975년의 27품종과 1978년의 26품종이 된다. 지금 시장에 나오고 있는 멜론 무리의 품종은 대부분이 F1 잡종으로 변종 사이 잡종에서 유래한 것도 많고, 삼원교배종도 나온다. 그 종류 분류(교통 정리)와 자리매김을 어떻게 해 나아갈지 지혜를 쥐어짜야 한다.



종 species

염색체 수 

2n

변종 variety

영어 이름

일본 이름

Cucumis melo L.

24

24

24

24

24

24

24

24

24

24

reticulatus NAUD.

inodorus NAUD.

contalupensis NAUD.

flexuosus NAUD.

makuwa MAKINO

microspermus KITAM.

conomon MAKINO

momordica DUTHLE&FULLER

dudaim NAUD.

agrestis NAUD.

netted melon

winter melon

rock melon

snake melon

oriental sweet melon


oriental pickling melon


pocket melon

(wild or weedy melon)

그물 멜론

겨울 멜론

가시 멜론

뱀 멜론

참외

성환참외

월과

모모르디카 멜론


야생 또는 잡초 멜론

C. anguria L.

C. figarei Dex. et NAUD.

C. africanus L.

C. heptadactylus NAUD.

C. ficifolius RICH.

24

24

24

48

48

아프리카 대륙의 야생식물 외에 

30여 종이 있음

west india gharkin


C. sativus L.

14

14


hardwickii KITAM.

cucumber

wild cucumber

오이

야생 오이

표2-1 Cucumis속의 분류(후지시타 1983)

주) C. melo의 종 안에는 교잡불화합은 보이지 않는다. C. melo와 다른 종과는 모두 교잡불화합을 보인다.

    C. melo에는 위에 적은 외에 30여 변종이 있고, 변종의 아래에 다수의 원예품종cultivar이 있다.

    최근의 품종에는 변종 사이 잡종에 의한 것이 많다. 예: 프린스, 엘리자베스, 방윤芳潤 

 이전의 8 변종으로 분류하던 참외를 var. makuwa의 1 변종으로 한 것.





잡초 멜론과의 만남


50여 년이나 전의 일인데, 분류학에서 동일 종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듯한 재배 멜론의 다양성을 눈앞에서 보고, 생애의 주제는 '멜론 무리인 Cucumio melo의 계보 연구'로 결정했다. 경로의 탐색은 원생종과 야생종의 조사가 출발점인 기본이며, 1960년대 전반은 멜론 무리와는 동속이종의 관계에 있는 아프리카산의 야생식물 12종의연구에 몰두했다. 이들 중에는 멜론의 야생종으로 보고가 끝난 종류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C. melo와는 교잡불화합이며(표2-1) 특성도 아이소자임형에서도 멜론의 재배종과는 관계가 없었다. 1967년 오사카 부립대학 교수였던 나카오 사스케中尾佐助(1916-1993)의 '아이 무렵, 뽕밭(토요카와시豊川市)에서 작은 박이 뒹굴고 있었다'라는 이야기가 계기가 되어, 1968년 카가와현의 메기女木, 오기男木, 쇼즈小豆의 세 섬으로 박을 채집하러 떠났다. 그 이전에 카가와현 농업시험장의 노로 키시지로우野呂葵巳次郞가 '타카마츠高松 먼바다의 슈우지마雌雄島(현재의 메기, 오기 섬)에서 쟁반에 바친 오쇼로우리オショロウリ가 있다. 육종 소재를 무턱대고 해외에서 구하기 전에, 일본의 풍토에 적응한 재래종을 다시 보고 이용해야 한다'(1925)고 기술하고 있는 점에서도 촉발되었다. 앞에 적은 세 섬에서는 메추라기부터 집오리 알 크기의 박 24종류(계통)이 채집할 수 있었다. 쓰고 단 것은 아니지만, 형질의 다양성에서 박과 식물로는 매우 진귀한 원시형의 양성(全) 꽃그루(花株)도 발견했다. 채집 소재 모두가 그물 멜론과 교잡이 자유롭고, C. melo인 점을 실증할 수 있었다. 자생 양상, 청취 조사에서 야생에서는 없는 밭에 수반하기 때문에, 잡초 멜론이라 명명했다. 이후 서일본 각지의 외딴 섬에서 163계통을 채집하고, 원산지라고 하는 아프리카, 중근동, 중국에서는 꽤 먼 신대륙인 멕시코, 코스타리카, 파나마를 포함한 18개국에서 69계통을 수집할 수 있었다. 각종 수법에 의한 형질의 해석으로부터 형질은 다양하지만 그물 멜론과 자유롭게 교잡할 수 있고, 형질의 지역 분화도 명확하게 할 수 있었다. 다만, C. melo의 야생종은 지금 더 발견되고 있지는 않다. 


잡초 멜론 탐색은 필자의 생업이라 계속하고 있다. 15번째 메기 섬을 방문했을 때, 1년성 식물임에도 불구하고 여느 때의 장소에서 여느 때처럼 살아 있었다. 종자 휴면 깊이의 다양성을 실증하듯이, 발육 단계가 다른 잡초 멜론이 섞여 자라는 모습을 촬영할 수 있었다. 게다가 급속히 절면해 가는 계통과 건강히 계속 살아가는 계통 '양성꽃그루 식물 MG-16'의 실태를 새로운 식견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자생 분포 지역이 신·구 대륙에 걸치는, 형질이 다양한 잡초 멜론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채로 계속 살아간다.멜론 무리의 계보 추적과 육종에 알맞은 소재가 될 것이다.


1979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를 잡초 멜론 탐색으로 방문했을 때, 국립 농업연구기관의 포장에서 잡초 멜론이 자생하는 것을 발견했다. 잡초 멜론을 이야기하려면 야생종의 문제는 피할 수는 없다. 멜론의 야생종은 있는지, 어디에 야생 분포하고 있는지, 특성에 대해서 등 원산지와 야생종에 대해 언급한 기술에는 드 캔들De Candolle(1982), 허친슨Hutchinson(1927), 바빌로프Vavilov(1935) 등이 고전적인 것부터 휘태커Whitaker(1976)과 말릭Mallick(1986) 등 비교적 새로운 것까지 다수이다. 이들 중에서 아프리카 원생의 C. pubescens, C. microcarpus, C. turbinatus 등을 야생종이라 하기도 하지만, 멜론 무리와는 전혀 교잡불화합으로 동위효소 가운데 한 종 에스테라아제의 영동상泳動像도 일치하지 않고, 과피에는 가시 모양의 돌기가 있으며, 멜론 무리와는 관계가 없는야생식물이라 판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멜론 무리와는 다른 종으로 취급되었던 C. callosus, C. trigonus 또는 동종인데 이변종 취급을 받았던 C. melo var. chito, var. dudaim, var. agrest에 대해서 필자를 시작으로 다른 여러연구자는 교잡화합성, 아이소자임, 형태 등으로부터 이명동종으로 보고 있다. 이들의 자생 상태는 서로 매우 비슷하고, 옥수수와 수수, 목화, 박과의 채소밭, 목초지, 하천 부지의 잡초라고 명기했던 것도 있고, 일본의 잡초 멜론 var. agrestis를 빼닮았다. C. melo var. dudaim은 운하를 경유하여, 캘리포니아와 멕시코의 아스파라거스밭에 퍼져 나쁜놈으로 취급되었다. 이와 같은 사정 때문에, 필자는 납득할 수 있는 멜론 무리의 야생종은 만나뵈었던 적이 없다. 이렇게 말하는 필자 자신의 영어 논문 제1호(1956)이 되었던 것은, 나카오가 채집한 야생 오이 C. sativus var. Hardwickii KITAM(네팔에서 부르는 이름은 Khnkuro)에 대한 논문이었는데, 그것은 네팔의 칼리간다키 계곡에 따라서 표고 1300-1700미터의 옥수수밭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지금 생각하면 잡초 오이였을지도 모른다. 


야생과 잡초의 차이, 둘 사이에 명확한 선을 그을 수 있을까? 잡초 멜론의 야생화를 의식하여 시도한 적은 몇 번 있지만, 좀처럼 간단히 되지는 않았다. 반대로 많은 다른 식물의 야생종(식물)이 밭에 침입하여 내가 주인처럼 잡초로 만들고 있다. 




잡초 멜론의 채집 여행


처음으로 한 잡초 멜론 탐색에서는 메기섬 13계통, 이웃한 오기섬 4계통, 근처의 쇼츠섬 1계통을 채집해 왔다. 10여 년에 걸친 138개 섬의 답사행에서 채집 계통 수, 그 일정, 여비 모든 점에서 가장 효율 높은 여행이었다. 그 가운데 채집 계통 중에서 유전자 자원으로 매우 귀중한, 과실이 세계에서 가장 작고 원시적인 양성 꽃그루가 포함되어 있었다.


나중까지 조사 지역을 본토 안이 아니라 외딴 섬으로 압축한 것은 초년도 메기섬의 효율성에 맛을 들인 점, 섬이라면 조사행동의 범위가 한정되어 지도에 위치 관계를 명시하기 쉬운 점, 바다로 격리된 섬마다 고유종(계통)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 최종 단계에서 자생하는 분포 지역의 선을 긋기가 쉽다는 점 등을 고려했다. 


1968년부터 1981년까지 14년 동안(그중 1년은 재외 연구)에 남세이南西 제도부터 이즈伊豆 제도를 포함해 도호쿠 연안에 이르는 일본 열도 주변의 외딴 섬을 방문했다. 13년 동안 답사한 138개 섬 안의 75개 섬에서 밭 안, 근처의 쓰레기더미, 농로에서 자생(과거도 포함)하는 걸 확인하고(그림2-5), 31개 섬에서 163계통을 채집했다.잡초 멜론에 대하여, 더 이로운 기상 환경이라고 생각하던 난세이와 이즈 제도에서는 각각 12개 섬의 312명, 5개 섬의 122명에게서 청취 조사했는데, 과거에도 현재도 이들 남쪽의 섬들에서는 잡초 멜론의 자생은 없어 남방을 경유해 도래했다는 추리는 부정되었다. 자생 분포는 구마모토현 야마쿠사天草 남단의 게스시마下須島가 남 또는서방한계, 츠시마対馬와 이키壱岐를 포함한 키타큐슈 연안, 세토우치瀬戸内, 이세伊勢·아츠미만渥美湾의 섬들을 지나서 아타미시 먼바다의 하츠시마初島를 북 또는 동방한계로 하는 섬들과, 일본해 쪽에서는 및 이키 및 츠시마, 미시마見島, 오키隱岐와 다이콘시마大根島(島根)였다. 서쪽 끝의 게스시마부터 동쪽 끝의 하츠시마에 이르는 분포 지역에서는 잡초 멜론의 전파 도표와 같은 지역 이름(호칭)인 '쿠소우리クソウリ'가 현재도 계속 전승되고 있다. 이 전파 가도에 병주하는 것처럼 큐슈 북변부터 산요우도山陽道, 킨기를 지나 중부와 칸토우에 이르는 각지의 유적에서 잡초 멜론의 종자가 다수 출토되었다(뒤에 기술). 잡초 멜론의 자생지와 그 종자의 출토 유적 둘의 분포가 중첩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칸토우, 토호쿠 이북의 섬들에서 자생이 없는 건 낮은 기온에 의한 것이라 추정되는데, 분포의 북진이 저지되어서 서일본의 잡초 멜론의 형질은 유전자가 날려 모이는 현상 그대로 다양화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진귀한 차를 사용해 3일에 걸쳐서 답사했던 아와지시마淡路島에서는 '들은 게 없다' '본 게 없다' 하는 소리만 들었다.



그림2-5 일본 열도 근해의 외딴 섬에서 잡초 멜론의 자생 분포 지역(1982). 타네가시마種子島부터 이시가키石垣섬에 있는 12개 섬(청취 312명) 및 이즈 제도의 5개 섬(청취 122명)에서는 자생은 확인하지 못했다. 138개 섬을 조사, 17개 섬에서 자생, 31개 섬에서 163계통을 채집.




외딴 섬 이외에서는 히로시마의 후츄시府中市, 미에三重의 시마志摩, 아이치愛知의 토요카와시豊川市와 코와시河和市, 미나미치타南知多의 모든 밭에서 과거에 자생이 있었다는 정보는 얻었지만, 잡초 멜론은 채집할 수 없었다. 오사카 요도가와淀川의 하천 부지(모라구치시守口市), 오사카 부립대 농장(사카이시堺市)의 퇴비장, 오사카 이바라키시茨木市의 파밭, 와카和歌 물가의 담배밭, 가고시마 소오시曽於市의 농도 등에서 각각 1개소 1그루 채집할 수 있었다. 숙주나물 원료, 가축 사료, 면실박, 폐기물 등에 종자가 잘못 섞여서 몇 십 년부터 몇 년 안에 일본으로 침입한 외래식물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외딴 섬에서 채집된 잡초 멜론은 뒤에 기술할 유적 출토의 종자부터, 유사이전 귀화식물의 자손이 아닐까 보고 있다. 외딴 섬의 것이 동아시아계 멜론 무리의 공통 특성인 양성화웅화 동주형이었던 데 반해, 본토의 것은 모두 남아시아계 멜론의 특성인 자웅이화 동주형이었던 점으로부터, 도래한 경로는 아마 남방일 것이라 보고 있다. 그럼 외딴 섬의 잡초 멜론은 어디에서 왔을까? 조몬시대부터 출토되는 종자가 없기 때문에 먼저 일본 원산은 아니다. 조선반도에서의 종자 출토의 보고가 거의 없기 때문에 현상태로는 명확히 말할 수 없지만, 잡초 멜론의 자생 양상(그림2-6)에서 보는 한, 중국 대륙부터 반도에서 키타큐슈로 건너왔을 가능성 쪽이 크다고 보고 있다. 



그림2-6 한국에서 잡초 멜론의 자생지 분포 지역(Lee and Fujishita 1988)




일본 이외에서 모았던 잡초 멜론은 한국 12개 섬에서 28계통, 중국 2, 방글라데시 3, 네팔 4, 부탄 1, 시킴Sikkim 2, 파키스탄 10, 스리랑카 1, 인도 3, 이란 2, 차드 1, 카메룬 1, 수단 3, 세네갈 1, 남아프리카공화국 1, 그리고 멕시코 1, 파나마 1, 코스타리카 4, 합계 18개국에서 69계통이다. 이들에는 필자 자신이 채집한 것 이외에현지의 연구자와 재외 연구자 친구에게서 분여된 것도 포함된다. 한국에서의 채집 수가 많은 건 경북대학 교수인 이우승李愚升과 3년 동안 계속한 공동조사 채집의 성과 덕이다. 


통설의 멜론 원산지라고 이야기되는 아프리카, 중근동, 아시아와는 좀 멀고, 관계가 없는 지역이라 믿어 왔던 신대륙의, 더구나 3개국에서 자생하는 데 놀랐다. 원래 신대륙에도 자생이 있었는지, 아니면 인위적으로 타 지역(다른 대륙)에서 이입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호리병박처럼 신대륙의 옛 시대(페루, 기원전 1만3천-1만1천 년)의 유적에서 종자와 과피가 출토된다면 이야기는 간단하지만. 다만, 적도에 가까운 저위도 지대에 위치한 멕시코와 코스타리카의 잡초 멜론은 장일이란 조건(일본의 여름)에서는 꽃눈, 특히 암꽃 형성이 억제되어 덩굴이 덤불 모양으로 번성한다. 똑같은 저위도 지역에 있는 아프리카 카메룬의 잡초 멜론에서도 똑같은 경향을 볼 수 있다. 이 꽃눈 형성 특성인 단일 적응형에서 본다면, 신대륙에도 옛날부터 재래하고 있었다고도 해석된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는 잡초 멜론의 정보가 없다. 그러나 오이에는 매우 진귀한 양성화웅화 동주형으로, 풋열매의 지름이 1-2cm인 동그란 모양의 재배품종 'Apple Sherbet'가 있었던 대륙이며, 그런 까닭에 잡초 멜론에 대해서는 미지라고 할 수 있는 희망의 신대륙이라 할 수 있겠다.




지역의 이름을 통하여 본 잡초 멜론의 전파(糞婢瓜)와 그 계보


나카오는 인류문화사 연구의 입장에서 '지역에서 부르는 식물의 이름(호칭)을 채집하는 건 발상지, 도래, 전파 경로를 탐색하는 데 중요한 전략이다'라고 기술해(1970), 필자에게는 종자와 동시에 지역 이름의 채집을 권했다. 


서북 규슈에서 세토나이瀨戶內, 키나이畿內, 츄우부中部를 지나 아타미시熱海市 난바다의 하츠시마初島에 이르는 외딴 섬의 자생지에서 공통어처럼 계속 이야기되는 것, 지역성을 엿볼 수 있는 것, 언어의 격리와 어원을 떠올리게 하는 것까지 42종류를 채집할 수 있었다(표2-2). 저렇게 정말 특성을 잘 구체화한 것으로, 당고우리(團子瓜), 하타케우리(畑瓜), 노우리(野瓜), 니가우리(苦瓜), 햐쿠나리(百成), 센나리(千成), 코우리(小瓜)나, 까마귀가 종자를 날라 왔다는 카라스우리(烏瓜) 등이 있었다. 섬에 의한 언어의 격리를 생각하게 하는 것으로, 분도리 대 분도로, 타츠비 대 타츠보 등 어미만 변화하는 것이 있었다. 본텐우리(焚天), 세이레이노우리(精靈), 쇼우진산노마쿠라(精進樣), 오쇼로우리 등 불교 용어 같은 것도 있고, 성숙한 열매를 불단과 감실의 공물로 바치는 습관은 지금도 각지에 남아 있다.



종류                                섬 숫자

종류                               섬 숫자

1. 베우리                             1

2. 본텐우리                           1

3. 분도리                             1

4. 분도로                             1

5. 치고우리                           1

6. 친고우리                           1

7. 친메우리                           1

8. 쵸우친우리                         1

9. 단고우리                           3

10. 훗테                              1

11. 후즈키                            2

12. 가키우리                         1

13. 고리(고리우리)                  3

14. 하타케우리                       1

15. 헨도우리                          1

16. 히메우리                          1

17. 햐쿠나리                          2

18. 이모구리                          1

19. 이모호즈키                        1

20. 카키우리                          1

21. 카라스모모                        1

22. 카라스우리*                     10

23. 코우리                            1

24. 쿠소우리(糞瓜)                  26

25. 마호즈키                          1

26. 나라시구리                        1

27. 니가후즈키                        1

28. 니가우리                          10

29. 니가고우리                        1

30. 노기리                             1

31. 노호즈키                           1

32. 논기우리                           1

33. 노우리                             1

34. 오쇼로우리                         1

35. 세이레이노우리                   1

36. 쇼우진산노마쿠라                 1

37. 센나리                             2

38. 타츠피                             1

39. 타츠포                             1

40. 토오스우리(토우스이)            2

41. 츠우리(츠리)                      2

42. 운바                                1

표2-2 잡초 멜론의 지역 이름(속명, 사투리) 종류와 채집 섬 숫자(1985)

*는 카라스우리속이 아님




잡초 멜론의 지역 이름 가운데 가장 보편적으로 들었던 것이 쿠소우리이다. 자생 서방한계인 후쿠에지마福江島부터 키타큐슈, 세토나이, 이즈·아츠미渥美 만의 외딴 섬을 한 줄로 이어 동방한계인 시즈오카의 하츠시마까지 59개 섬 중 26개 섬에서 마치 잡초 멜론이 지났던 길(고대 박과의 길)의 증거 같다(그림2-7). 잡초 멜론을 사람의 똥오줌이나 노상의 똥, 가축의 똥에서 싹이 터서 자라는 것이라 보는 표현이다. 한국과 부탄에서도 똑같은 용법을 들었다. 동의어로 베우리(便所瓜), 토오스우리(배를 통과한 우리), 토오스(토오스이)란 호칭도 있다.



그림2-7 지역 이름 '쿠소우리'의 분포(藤下 1985)




야요이 전기에 조선반도에서 건너오고, 그 후기에는 키타칸토우까지 퍼졌던 잡초 멜론과 참외, 그 전파의 담당자가 마음에 걸려, 어쩌면 지역의 이름인 쿠소우리가 단서가 되지 않을까 하여 스스로 인체 실험을 시도했다. 참외 '금가마니金俵'(품종명)의 과실을 둘로 나누어, 그 안의 반쪽에서 약 250알을 표준구(무처리)로 채종하여 물로씻는다. 남은 반쪽의 종자를 처리구로서 통째로 삼킨다. 그뒤 15, 30, 39, 52시간째(근무 기타로 시간 설정이 불규칙함)에 자택 화장실에서 비닐덮개에 배변, 종자만 핀셋으로 적출하여 물에 씻음. 소화기관을 통과하지 않았던 무처리구의 종자와 별도로 하여 동시에 페트리 접시 안의 젖은 여과지 위에 파종하고 섭씨 25도로 유지했다. 이상이 쿠소우리를 통째로 삼키는 인체 실험의 재료 및 방법이다. 통째로 삼킨 뒤 52시간 이내에 배출된 모든 종자208알  가운데 발아하지 않은 건 겨우 3알뿐, 발아율 98.6%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표2-3이 그 성과이다. 입구(입)부터 출구(항문)까지 약 9미터(성인 신장의 약 6배)나 되는 긴 터널, 습기를 빨아들인 종자는 너무 높지않은 36도와 아마 적은 효소, 공복시에는 산도 1-2의 강산성인 위액, 지나치게 가혹한 조건을 거치지 않고 발아했다. 똑같이 동물에 의한 종자의 전파 사례로는 프랑스 파리에 보내진 중국 고산대의 야크가 이송된 동물원에서배출한 똥에서는 히말라야의 식물이 나왔다고 한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에 수입된 낙타의 똥에서 아프리카 대륙의 식물의 싹이 텄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다음의 실험으로, 대학의 부속 농장에서 사육하던 7살의 젖소 홀스타인에게 시로우리로 만든 '나가사키 츠케우리長崎漬瓜'의 종자를 먹이에 섞어서 먹였다. 27-91시간 안에 배출된 상정외에 대량의 소똥 덩어리에, 가압된 수돗물을 쏴서 합계 126알을 씻어 냈다. 이빨에 상하지 않은 종자는 모두 발아, 되새김이 발아에 미치는 영향은 볼 수 없었다.




배출에 걸리는 시간


0

15

30

39

52

배출 알 수

파종 알 수

발아 알 수

259

50

50

137

50

48

70

50

50

55

50

49

8

8

8

표2-3 분변에 배출된 삼킨 참외 종자의 발아(藤下 1982) 




같은 해인 1981년, 잡초 멜론을 탐색하러 사가의 가베시마加部島를 방문했다. 섬의 공동방목지에서 일본 소가 싼3개의 반건조된 똥덩어리에서 32개의 멜론 무리와 몇 개의 수박의 어린싹이 자라고 있는 걸 발견했다(그림2-8).이튿날 아침, 등대에 가까운 방목지를 다시 방문하여 똥덩어리를 샅샅이 거둬들여, 대학으로 가지고 돌아와 유리온실에서 역경재배했다. 당시 오사카 부근의 시장에서는 이미 완전히 모습이 사라졌던 참외 6종류(품종명 모름)을 수확할 수 있었다.



그림2-8 방목 고기소의 똥덩어리에서 발아했던 참외의 자람. 사가현 가베시마(1989년 9월8일 촬영). 오사에 가지고 돌아가 온실 역경재배. 6계통의 참외를 수확했다.



잡초 멜론과 참외에서는 인간도 포함해 포유동물의 소화기관을 통하여 배출된 똥 속의 종자는 발아력을 잃지 않고 전파될 수 있다는 사실이 실험과 외딴 섬의 현지에서 확인되었다. 이것으로부터 고대부터 2차대전 이후에 걸쳐서 '분매과糞媒瓜'로서 각지에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보았다(2006). 분매과의 호칭은 전파에 흥미를가지고 있던 친구의 하나인 요리후지 란頼藤蘭 여서의 발안, 제언에 의한 것으로, 국립역사민속박물관 기획전시 "바다를 건넜던 화화華花"(2006)에서 공표한 뒤 채용되고 있다. 


지역 이름의 지역에서의 분화, 종류 수가 많았던 것이 나가사키현의 외딴 섬으로, 그 15종류는 다른 현에서는 들을 수 없는 나가사키 고유의 것이었다. 나가사키현에서 자생하는 잡초 멜론 그것의 형질도 다양했기 때문에, 이 지역에서의 잡초 멜론과 섬 사람들의 관계가 오래되고 길어, 바꾸어 말하면 도래한 시기가 이름을 암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에서는 잡초 멜론은 총칭하는 듯한 "간절과間節瓜" 외에 100개 가까운 호칭이 있고, 중국에서는 야생 참외로서 구과狗瓜나 탁흑차목托黑且木을 해당시키고 있다. 동남아시아에서도 네팔에서는 Madhukurli, Ghurmi, 방글라데시에서는 Ghom, Gurm, 부탄에서는 Chintung, Dinbhu, 파키스탄에서는 Chibar라고 각 나라별로 호칭이 다르다. 세계의 잡초 멜론에 관한 지역 이름을 모으는 여행은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일본에서 모모르디카 멜론은 외딴 섬인 하치죠지마八丈島와 후쿠에지마에서만(1982) 재배되고 있으며, 지금도 건재하다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매우 분질이고 과즙이 적은 과육, 성숙하면 열피, 열과하고, 설탕을 뿌려서 생식,때로는 다꾸앙을 반찬으로 주식 대용으로도 활용했던 멜론이다(그림2-9). 그 한편으로 나라와 헤이안 시대, 큐슈부터 도호쿠까지 일본 각지의 정무의 중심이었던 도시의 궁과 관청터 유적에서 종자가 다수, 집중하여 출토된다. 하치죠지마에서는 이 색다른 모모르디카 멜론(C. melo momordica)을 먹던 할머니가 분질의 과육이 목구멍을 막아 눈을 희번덕거리며 괴로워 했다는 사고에서 '바바고로시婆殺し'라는 위험한 이름으로 불린다. 또 하나의 산지, 나가사키의 후쿠에지마에서는 어원은 명확하지 않지만 '바우리'라고 한다. 이웃한 중국에서는 분질이라 살찐 이가 없는 할머니라도 씹지 않고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로탄포과老太婆瓜'라고 부른다고 허베이 농업대학 유전자자원중심의 교수 馬德偉에게서 설명을 들었다. 또한 장쑤성의 우시無錫에서는 라오타이포과라고 부른다. 똑같은 예는 더 남쪽의 나라에서도 이어진다. 방글라데시에서는 공항에 가까운 바자르의 노점에서 열과하여 부수어져 버리면 상품이 안 되기에 바나나 잎으로 싸서 끈을 묶어 팔고 있었다(그림2-10). 이름을 물으면 멜론과는 연결되지 않는 '반기Bangi'가 돌아왔다. 벵갈어의 방가Banga에서 온 것으로, 그것은 또 영어의 버스트Burst(가루로 터지다)에 해당한다고 한다. 일본어로 옮기면 '가루로 부수어지는 멜론'이다. 문화도 식습관도 다른 유라시아의 나라들에서 모모르디카 멜론의 호칭은 이처럼 미묘하게 다르지만, 원인을 밝히자면 과육이 매우 분질인 것이 공통의 어원, 그것이 멋드러지게 구체화된 것에 감격했다. 또 하나, 우연이겠지만, 모든 호칭에 바란 음이 들어가있다. 모모르디카 멜론의 재배가 많은 동남아시아의 주변 여러 나라와 더욱 서쪽의 인도, 중근동에서의 호칭에 대해서는 앞으로 조사하고 싶다.  



그림2-9 (위)도쿄도 하치죠지마 농협 진열대의 모모르디카 멜론(1981). (아래)온실에서 역경재배하고, 수확한 성숙한 열매. 열피가 심하고, 그뒤 과실은 부수어진다. 아래에 깐 눈금은 한 변이 10cm.




그림2-10 방글라데시 joydbpur의 바자르에서 본 모모르디카 멜론. 열피가 심하고, 산산이 과실이 부수어지는 걸막기 위하여 바나나 잎으로 싸 놓았다(1979년9월17일 촬영).






고고학에서 본 다양한 종자와 잡초 멜론


1970년, 그때까지 전혀라고 할 정도로 고고학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재야의 고고학자 후지모리 에이이치藤森栄一(1911-1973)의 <카모시카미치かもしかみち> <카모시카미치 이후>를 읽고, 깊은 흥미를 느꼈다. 토기의 편년연구도 재미있을 것 같았지만, 이것이 식물유체, 그중에서도 멜론 무리였다면 얼마나 재미있을지 생각했다. 그 화살촉, 당시 오사카 시립대 교수였던 코카와 쇼헤이粉川昭平(고식생학, 1927-2001)에게서 '이즈미和泉의 야요이 중기의 이케가미池上 유적에서 박과의 종자가 1만여 알 출토되고 있다'는 통지를 받았다. 조속히 발굴현장 사무소로 달려가, 유구 별로 분류되었던 페트리 접시 안의 종자를 보았다. 흑갈색의, 취약(탄화)하지만 섞이지 않은 멜론 무리의 종자, 그것도 대부분이 현생 참외보다 소립인 잡초 멜론형의 종자 그것으로 다수였다. 다행히 현장까지는 1시간이 걸리지 않는 거리, 시간을 내서 현장을 오갔다. 0.1mm까지 볼 수 있는 라이트가 달린 루페로 유 구 별로 100알을 무작위로 추출(다른 유적도 같은 방법)하고, 한 알씩 종자의 길이와 너비를 계측했다. 종자가 출토된 것은 마을터를 둘러싼 세 겹의 너비 6미터인 해자로서, 거의 100년 단위로 바깥쪽 만큼 굴삭, 축조가 새롭게 되었다. 계측 종자 수는 7000여 알에 달했다.


멜론 무리의 형질의 다양성은 사사건건 기술해 왔지만, 종자의 크기도 또한 변이가 매우 크다(그림2-11). 보존 중인 종자 가운데 최소는 나가사키의 테라시마寺島의 양성화주형 잡초 멜론 Te-1의 길이 3.8mm, 너비 1.9mm, 최대는 이란의 그물 멜론 KH-506의 16.0mm와 6.5mm였다. 교잡이 자유로운 동일한 종의 종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크기에 차이가 있었다. 이것이 가령 벼의 종자였다면, 그 수량(중량, 용적) 차이는 막대한 것이 되었을 것이라고 쓸데없는 일을 생각하면서 계측했다. 종자 크기의 변이는 멜론 무리 전체에서 보면 광범위하지만, 변종·집단 별로 보면 두서가 있어 그 식별에 도움이 되었다. 일반적으로 동양계의 참외, 월과는 작고, 유럽계의 그물 멜론과 윈터 멜론은 컸다. 잡초 멜론은 국적을 불문하고 소립으로 6.0mm 이하, 그중에서도 양성화형인 종자는 매우 작았다. 길이로 대강 분류하면, 참외와 월과는 6.1-8.0mm, 모모르디카 멜론은 8.1-10.0mm, 그물 멜론에서는 10.1mm 이상이다. 이들의 수치와 출토 종자 한 알마다의 길이 계측치를 조합하면, 출토 종자의 멜론 무리의 종류를 추정할 수 있다. 100알 이상을 출토한 유적을 시대별로 나누어, 종자의 크기와 추정 종류를 정리한 것이 그림2-12이다.


그림2-11 현생 C. melo의 종자 크기의 변이(1976). 교잡이 자유로운 동일한 종의 식물 종자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크기 차이가 있다. 테두리 안은 잡초 멜론. 긴지름 10mm 이상 -유럽계 멜론. 10mm 이하 -참외, 월과 등 동양계 멜론. 6mm 이하 -잡초 멜론.




그림 2-12 시대별로 본 C. melo의 종자 출토 유적의 분포와 종자의 크기 변이(후지시타 1995; 2004)

지도는 출토된 멜론 종자의 크기에서 발견된 역사적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시기: (왼쪽 상단) 기원전 3-기원후 3세기  (오른쪽 상단) 기원후 4-7세기

         (왼쪽 하단) 기원후 8-12세기           (오른쪽 하단) 기원후 13-19세기

 




야요이 시대에는 잡초 멜론형이 압도적으로 많고, 나가사키의 사토타바루里田原 유적(427알)과 오카야마의 시카다鹿田 유적(767알)에서 출토된 종자는 모든 알이 잡초 멜론형, 후쿠오카의 이타츠케板付 유적(471알)에서는 잡초형과 그보다 조금 큰 참외형이 섞여서 출토되었다. 오사카의 이케가미 해자에서 출토된 종자(6740알)은 대부분이 길이 6mm 이하의 잡초 멜론형이었는데, 이타츠케와 마찬가지로 참외형이 섞여 있었다(그림2-13). 이케가미에서 최대의 성과는 해자가 안에서부터 밖으로 새로워지는 만큼 출토 종자가 커지고 알알이 모두 고른 것이 좋아졌단 사실이다(그림2-14). 메론 무리에서는 종자의 크기와 과실의 크기 사이에 정비례의 상관이 있어, 2000년 전인 야요이 사람이 생활 체험과 지혜로부터 더 큰 종자를 남기는, 요즘의 선발 육종을 직접 다루었을 것이다.박과의 채종에 대해서는 하이쿠에 관한 책 <모취초毛吹草>(1638년 간행)에 '맛의 좋음 씨앗이여 모아서 끝은 박'이란 한 구절이 있고, 미야자키 안테이宮崎安貞의 <농업전서>(1697년 간행)에 '참외의 종자를 취하는 건 박을 먹고서 우수한 단맛을 골라…'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보다도 1천 년 이상 전인 야요이 사람은 이미 생활의 지혜로 선발을 알고 있었다. 똑같이 야요이 시대라도 기타칸토우의 신보新保와 히다카日高 유적에서 잡초 멜론형의 종자가 감소하고 참외형이 증가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 전파에 세월이 걸리는 사이 도중에 큰 종자=큰 과실에 대한 선발이 작용했기 때문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림2-13 멜론 무리의 현생 종자(왼쪽 줄)와 유적 출토 종자(오른쪽 줄)

1: 잡초 멜론 var. agrestis Te-1

2: 잡초 멜론 var. agrestis MG-16

3: 참외 var. makuwa '황1호'

4: 월과 var. conomon '흑문'

5: 모모르디카 멜론 var. momordica '바바고로시'

6: 시카다 유적(야요이 중기 후반·오카야마)

7: 사토타바루 유적(야요이 중기·나가사키) 

8: 이케가미 유적(야요이 중기 초엽·오사카)

9: 瓜生堂 유적(야요이 중기·오사카)

10: 다가조多賀城 유적(8-9세기·미야기)




그림2-14 이케가미 유적(오사카) 해자 시대의 전후와 종자의 크기 변이(藤下 1980). 

좌: 溝 SF 075·076(야요이 중기 전반 제Ⅱ 양식), 우:  SF 074(야요이 중기 중반 제Ⅲ 양식 신단계)





시대가 나아가 나라, 헤이안 시대가 되면 종자가 출토되는 장소도 그때까지의 도랑과 우물에 대신해 도시의 궁과관청터가 된다. 출토 유구도 화장실과 화장실 모양의 구덩이, 건물 주변부의 도랑 같이 사람의 일상생활 장소에 접근하고 있다. 종자도 참외보다 큰 현생 그물 멜론에 가까운 큰 알로 변한다. 유적에서 출토된 종자 수도 나니와노미야難破宮의 6552알, 후지와라교藤原京의 499알, 나가오카교長岡京의 952알, 이와테의 야타테矢立 폐사廃寺의 2193알 등 어중간한 것이 아니다. 미야기의 다가조 유적에서 출토된 종자의 크기는 필자가 계측한 85개 유적 중에서 가장 크고, 길이의 평균은 8.4mm였다. 통째로 삼키기에는 너무 큰 나라, 헤이안의 멜론 무리의 종자, 음식쓰레기로 버려졌던 것이라 보고 있는데, 먹은 뒤에 배출(똥)된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1978년 도쿄 하치죠지마로 잡초 멜론을 탐사하러 방문했을 때, 도쿄도 농업시험장 하치죠지마 지장에서 '작은 유형은 섬에 없지만, 럭비공 크기의 박이라면 있다'고 들었다. 섬 안을 찾아다니다 노파에게서 종자를 양도받았다. 크기, 모양은 마치 나라, 헤이안의 '종류 불상'으로 취급해 온 멜론 무리의 종자에 부합했다. 하치죠지마에서는 이 멜론 무리를 '바바고로시'라고 부르고 있었는데, 이 호칭이 앞에 기술했듯이 중국부터 방글라데시까지 이어지는 점 등,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다. 재배하여 형질을 조사해, 과거 문헌의 기재와 대조한 결과, 변종 모모르디카 멜론(var. momordica 일본명 없음)이라 판명되었다. 그뒤, 고토 열도의 후쿠에지마에서 같은 무리의 재배가 있고, '바우리'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 두 섬의 모모르디카 멜론, 성숙한 열매의 과피는 복숭아 껍질처럼 손톱으로 벗기고, 과육은 찐 감자와 꼭 닮은 분질이고, 물기와 단맛이 없다. 식량 사정이 나빴던 전쟁 이전과 전쟁 때는 다꾸앙을 반찬으로 삼아 주식 대신에 모모르디카 멜론을 먹었다고 섬의 노인에게서 들었다. 이 모모르디카 멜론은 동남아시아부터 인도, 근동에서는 보통으로 볼 수 있으며, 때로는 설탕을 뿌려서 그대로 먹기도 한다. 멜론의 이미지와는 동떨어진 이 모모르디카 멜론의 재배가 본토에서 떨어진 두 섬에서만 남아 있었던 사정도 마음에 걸린다. 이즈 방면부터 도시로 가츠오부시와 어장을 운송했다는 기록은 남아 있다. 그러나 하치죠지마에 가까운 미야케지마三宅島와, 더욱 남쪽의 외로운 섬에서 참외의 재배가 발견되는 아오가시마青ヶ島, 나가사키의 후쿠에지마 주변 의 섬들에서는 모모르디카 멜론에 연결되는 듯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다. 하치죠지마로는 다른 나라에서 쿠로시오를 따라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이 가지고 오고 그뒤 도시로 헌상된 것인지, 거꾸로 유배된 죄인과 그 시중을 드는 사람이 도시에서 하치죠로 운반해 온 것인지 잘 알 수 없다. 그뒤에도 섬을 방문했지만 새로운 정보는 얻지 못한다. 


목구멍을 막을 정도로 과육이 매우 분질인 모모르디카 멜론, 점질을 좋아하는 일본인의 기호에 맞지 않아 꺼리어멀리했던 것일까? 아니면 생산이 많은 동남아시아와 근동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설탕을 뿌려서 먹으려면 도시의 벼슬아치라고 하더라도 당시 설탕의 입수는 곤란했기 때문에 꺼리어 멀리했던 것일까? 모모르디카 멜론의 종자는중세 이후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이어진 중세, 에도 시대의 유적에서는 참외형의 출토가 대부분을 점하고, 20세기 전반까지는 일본의 여름 풍물시가 될 만큼 참외를 즐겨 먹게 되었다. 1960년대가 되어 '프린스 멜론'을 처음으로 하는 참외와 유럽계 멜론 등의 대부분의 변종 사이 잡종이 출시되어, 지금은 고급품 미식 지향의 수준에 맞추어 육종하고, 예전에는 궁정원예의 산물이라 경원시하기 십상이던 그물 멜론이 슈퍼의 진열대에 쌓여 있다.


조몬 유적에서는 사가의 나바타케菜畑 유적에서 만기 후반에 1알, 츠시마津島 오카야마岡山 대학 유적에서 4알이 있다. 모두 필자 자신이 관찰했는데 출토 수가 너무나 적고, 매토 중, 발굴과 조정 작업 중에 오염(다른 유구와 유층에서 출토 종자가 혼입됨)도 염려되어, 조몬에서 출토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었다. 한편, 후쿠오카의 이타츠케 유적에서는 절대년대(1950년을 기점으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 년수)로 2880-2810 y.B.P. 사이에서 Cucumis의 꽃가루가 검출되었기에(中村純一 1976) 종자가 출토될 가능성도 있다.


일본의 멜론 무리의 고대사는 유적 출토 종자가 모든 걸 말하고 있다. 종자의 발굴부터 조정, 보존에 대한 고고학관계자가 노력한 보람이 있다(표2-4). 시대에 따른 종류와 양이 뚜렷하게 변천하는 모습이 일본만큼 상세히 조사된 사례는 해외에는 없다.



지방

시대

합계

조몬   야요이   고분   나라·헤이안   중세   에도   복합·모름

출토     계측*

홋카이도

도호쿠

칸토우

중부

킨기

츄고쿠

시코쿠

큐슈

                                1

                    3          8             2                  1

           3       2          2             3       2

          10       6          5            6                  2

          23      16        11            5       2          5

           5        3         2             2

                                                                  1

           8        2         2             2

  1

 14       7

 12       8

 29      16

 62      40

 12       6

  1        1

 14       7

합계 출토

 0       49      32        31            20      4         9

 145     85

합계 계측

          30     14        21            14       3         3  

 85

표2-4 시대 및 지방별로 본 C. melo의 종자 출토 유적 수(藤下 2007; 1996에서 보충)





종자의 휴면성


잡초 멜론을 탐색하기 시작했던 무렵은 흥분의 연속으로, 다음 세대의 싹이 언제쯤 나와줄지, 사람의 손을 빌리지 않고 어떻게 끊임없이 계속 살아 있었는지 등, 식물에게 가장 중요한 생활사를 떠올릴 여유는 없었다. 연구 2년째의 가을, 특성 조사와 기술을 마친 뒤, 다음 세대가 빨리 보고 싶어져, 통상의 재배 멜론과 마찬가지로 페트리 접시 안의 젖은 여과지 위에 종자를 놓고, 25도의 항온기에 넣었다. 재배 멜론이라면 2-3일이면 발아(뿌리)하겠지만, 5일이 되어도 10일, 20일 기다려도 변화가 없다. 어쩌면 종자 휴면(종자 휴면이란 발아에 좋은 조건에서 파종해도 어느 기간, 잠자고 있는 것처럼 발아하지 않는 현상)이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재배종과 야생종의 상이점으로, 벼과에서는 잔이삭 탈립성의 유무가, 다른 식물에서는 종자 휴면의 유무가 자주 언급된다. 외딴 섬의 잡초 멜론, 빠른 것은 8월 중순에 익지만, 이 무렵부터 가을에 걸쳐서 섬에서 새가 쪼아 먹거나 사람과 가축의발에 짓밟히거나 하여 흩어진 종자는 휴면성이 없다면 이 무렵의 온난함과 강우에 발아해 버린다. 만약 순조롭게생육이 진행되면 꽃봉오리가 달리거나, 개화에 이르는 그루도 있다. 그러나 그뒤에 계속 늦가을부터 초겨울의 기온 저하로 덩굴은 말라 죽고, 발아력이 있는 다음 세대의 종자가 등숙하지 못한다. 과장스런 표현이지만 얼어 죽어, 휴면성을 갖지 않은 잡초 멜론은 절멸한다. 잡초 멜론의 연구에서는 해마다 봄여름과 가을겨울 두 번 농사지어, 가을겨울 농사는 8월 하순 심어 온실(가온은 11월부터) 재배하고 수확은 11월 말부터 12월에 한다. 이 시기, 오사카의 노지 재배에서는 저온 때문에 성숙한 열매(종자)의 수확은 불가능하다.


외딴 섬의 잡초 멜론은 어떻게 되는 걸까? 여름부터 가을에 성숙한 열매 속의 종자는 흙속에 묻힌 채로 겨울 동안에 배胚가 더욱 충실(후숙)을 계속하든지, 또는 저온에서 차분히 계속 자며(휴면), 기온이 올라 늦서리의 염려가없어진 초여름에 휴면에서 눈(싹)을 떠 발아한다. 섬의 사람들은 고구마밭에서 두벌매기에 들어갈 무렵 싹이 나온다고 한다. 또 필자 집의 정원에서도 잡초 멜론이 발아하는 것은 수국이 피는 6월이다(그림2-15). 이와 같은 자연스런 생존전술을 오랫동안, 어쩌면 도래한 야요이 시대부터 이어 받았을 것이다.


그림2-15 종자 휴면에서 깨어나 자연 발아한 잡초 멜론 MG-16(2009년 6월26일 촬영). 2008년 11월1일, 성숙 열매를 흙속에 묻었다. 이듬해 수국이 필 무렵에 제각각 발아.




가을에 외딴 섬에서 채집한 잡초 멜론, 이듬해 여름 자연스런 휴면 각성이 실험에서 기대되지 않을 경우, 종자를 젖은 상태의 탈지면으로 감싸서 가정용 냉장고에 20일 정도(휴면의 깊이, 기구의 차이로 기간은 달라짐) 넣은 뒤, 25도의 항온기 안에서 파종하면 발아한다. 이 처리로 1번 농사, 반 년 빨리 실험할 수 있다.


다음에는 잡초 멜론의 종자 휴면의 구조를 알려주고 싶다. 원인과 구조가 종피에 있을까, 씨 안의 배(떡잎, 어린뿌리)에 있을까? 방법으로는 종피에 상처를 내거나 벗기거나 하는 간단한 것이기에, 휴면성이 없는 재배 멜론과의 사이에 정역(상반) 교잡하여 얻은 F1 종자여도 종피는 모친 그것, 배는 잡종이라는 수정·배 발생의 원리를 응용한 것이다. 연구 결과의 일부가 그림 2-16이고, 시료가 된 이 잡초 멜론의 경우는 종피 쪽에 원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거꾸로 배 쪽에 원인이 있는 것도 볼 수 있으며, 또다시 휴면에까지 다양성을 드러내지만, 이것도 살아남기 위한 자연의 전략, 전술이라 본다. 또 한 걸음 더 깊이, 수분과 공기의 투과성과 흡수성의 차이 같은 물리적 요인에 의한 것일까, 또는 조직에 포함된 발아 억제물질 같은 화학적 요인에 의한 것일까? 과학이란 끝이 없는것이다.


그림2-16 잡초 멜론에서 볼 수 있는 발아 지연 현상·휴면(등하 1983). TM-1은 향천현 고견도산. E.F.: 온실 멜론(Earl's Favourite)

 



외딴 섬의 자생지에서는 발아와 생육이 가지런하지 않으며, 겨우 1미터 사방밖에 안 되는 지면에서 이미 황색으로 마른 과실을 달고 있는 그루의 바로 옆에 막 개화를 시작한 그루나, 또는 떡잎이 막 벌어진 어린싹까지 혼재해있는 상태를 자주 볼 수 있다. 그루와 과실과 종자에서 저마다 휴면의 깊이가 달랐기 때문이다. 태풍 같은 재해와병해충이 엄습하더라도 집단 안에 생육 차가 있는 것이 다행으로, 어느 쪽이든 살아남는 구조가 되는 것이다. 휴면의 깊이가 제각각임은 냉장고에서 휴면 타파 처리를 실시한 종자의 발아가 제각각인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인위적으로 잡초화의 성패를 시도하고자, 본잎 몇 장인 모종을 가까운 마을산에 있는 버려진 밭에 한 그루씩 수백 미터 거리로 심어 보았다. 1개월도 지나지 않아 발견하는 일 자체가 어려워지는 외잎벌레, 또 가지과의 해충이었던 28점무당벌레, 게다가 민달팽이에게 집중 공격을 받아(주변의 야생식물에는 피해 없음), 잎은 구멍이 숭숭 나고 말라 죽는다. 한 개체로 살아남는 건 어려운 듯하고, 피해가 분산될 수 있는 개체수(밀도)가 필요한 듯하다.


휴면에 관계하는 문제 가운데 숙제가 있다. 동아시아 일본의 잡초 멜론은 살아남는 전술로 저온(겨울)을 조우하지 않으면 부수어지지 않는 종자 휴면을 가지고 있다. 겨울이 오지 않는 남아시아의 잡초 멜론에서 종자 휴면은 존재할까 안 할까, 있다고 한다면 건기와 우기가 관계된 걸까? 동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는 성표현형, 어린 과실의 쓴맛 발현, 아이소자임 등에 명확한 차이가 있는 점을 기술해 왔지만, 종자 휴면의 유무와 그 구조의 차이도 마음에 걸린다. 필자는 또 휴면성에 차이가 있을 경우 두 지역 사이의 잡종의 반응은 어떠할지, 그 다음이 또 마음에 걸린다.


휴면이 있는 일본의 잡초 멜론을 남아시아의 방글라데시와 라오스로 옮기고, 반대로 그 지역의 것을 일본으로 가지고 왔을 때, 휴면성은 변하지 않을까 변할까? 저온을 만나지 못해 영구히 발아하지 않은 채로 끝나는 걸까, 철이 아닐 때 발아하여 동사하는 걸까? 이 실험에 신경을 써야 했던 건, 본래의 생태계를 혼란시키지 않기 때문에 이입된 식물(유전자)이 빠져나가거나 확산되는 걸 방지한다. 이 실험에 대해서는 멜론으로 유라시아를 전전하고 계신 친구, 지구연의 타나카 카츠노리田中克典 씨에게 앞으로 기대를 하고 있다.





다양한 성표현형의 지역성


대부분의 현화식물은, 1개의 꽃 안에 암술과 수술 둘이 갖추어져 있는 양성(全) 꽃이다. 그런데 박과식물에서는양성화 이외에 암술(암술머리, 암술대, 씨방)만 있고 수술은 없는 암꽃, 수술(오로지 꽃실)만 있고 암술은 없는 수꽃의 세 종류가 있다(그림2-19). 이 세 종류 꽃의 조합에 의하여 성표현형을 분류할 수 있다. 암꽃만 달리는 암그루와 수꽃만 달리는 수그루가 있는 자웅이주형, 암꽃과 수꽃이 동일한 그루에서 따로 달리는 자웅이화동주형, 양성화와 수꽃이 동일한 그루에서 따로 달리는 양성화웅화동주형, 양성화만 달리는 양성화주형, 기타 암꽃양성화동주형과 삼성화동주형을, 박과식물에서 볼 수 있다. ①자웅이주형=쥐참외, 하눌타리, 돌외, 아프리카에서 야생하는 C. heptadactylus 등의 식물에서 볼수 있고, 같지 않은 성표현형 사이의 잡종(육종)과 생장 조절물질 처리에 의하여 수꽃그루와 암꽃그루가 발현하는 것도 있다. ②자웅이화동주형=가시박, 뚜껑덩굴(合器蔓), 새박 등의 야생식물과 재배식물에서는 호박, 동아, 박, 호리병박, 덩굴여지, 여주, 차요테, 피클오이 외에, 본래는 이 형이지만 품종에 따라서 양성화수꽃동주형도 있는 종류에 수박, 멜론 등이 있다. ③양성화수꽃동주형=멜론 무리의 44개국에서 수집한 재배품종 중에서는 양성화수꽃동주형이 80%를 넘는 418품종으로 많고, 자웅이화동주형은 81품종으로 적다. 동양계의 참외, 월과에는 다수의 품종이 있지만, 그 90% 가까이가 전자의 형이다. ④양성화주형=박과식물에서는 매우 드문 형으로, 필자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일본, 한국, 중국의 잡초 멜론 8계통과, 거기에 중국의 참외 8품종(계통)이다.


박과식물 중에서 꽃의 성표현현이 가장 복잡하고 다양한 것이, 또다시 멜론 무리이다(그림2-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에 따라서 표현형에 일정한 차이가 있다(표2-5). 참외, 월과의 주요 산지인 동아시아 지역의 멜론 무리는 잡초 멜론도 포함해 양성화수꽃동주형이 압도적으로 많다. 일본, 중국, 한국에서 수집한 139품종 가운데 128품종이, 잡초 멜론에서는 196계통 가운데 166계통이 양성화수꽃동주형이다. 한편, 그것이 남아시아 지역이면 자웅이화동주형이 많고, 재래종에서는 64품종 가운데 50품종이, 잡초 멜론에서는 12계통 모두가 자웅이화동주형이다. 성표현형에도 동아시아 지역과 남아시아 지역에서, 잡초 멜론도 포함해 차이가 보이며(표2-5), 멜론 무리는 두 지역에서 별도로 분화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림2-17 C. melo의 대표적인 성표현형(藤下 1983에서 보탬). 이후에 양성화주형의 잡초 멜론 계통이 한국에서발견된다(1990).




지역

품종수*

암수, 수

암, 수

암수

동아시아

남아시아

중근동

아프리카

유럽

북미

중남미

태평양

260

14

65

13

47

12

3

4

5

50

13

4

4

4

1

0

8

0

0

0

0

0

0

0

합계

418

81

8

표2-5 지역별로 본 재배 멜론의 성표현형(藤下 2006; 1983을 보탬)

*품종명 알 수 없는 계통도 포함되었다.



하치죠지마의 모모르디카 멜론 안의 '아사누마계浅沼系'와 오키나와의 '하테루마波照間 월과', '오하마大浜 재래 월과'는 남아시아 지역에서는 일반적인 자웅이화동주형이고, 남방을 경유해 도래함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잡초 멜론 가운데 외딴 섬의, 아마 유사 이전의 귀화식물이라 보고 있는 것에는 168계통 중 145까지가 양성화수꽃동주형이었다. 이에 반해 혼슈, 큐슈의 내륙부에서 발견되어 채집한 전후에 도래했다고 추정하고 있는 5계통은모두 자웅이화동주형이고, 역시 남방을 경유해 도래했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그림2-18 잡초 멜론 중에서 가장 원시적인 카가와현 메기지마의 양성화 그루 MG-16(1981) 한 그루에서 768개의 열매가 달린다(온실 역경, 무수분).




양성화형 그루는 잡초 멜론에서는 카가와의 메기지마 1계통, 나가사키 고토 열도 가운데 테라시마의 1계통, 우쿠지마宇久島의 3계통, 한국 거제도의 2계통과 중국 황하 유역(상세한 자생지는 중국 측 채집자가 비공개를 희망했다. 그만큼 귀중한 유전자원)에서만 발견, 채집되지 않는다. 아마 동아시아의 고유종일 것이다. 덩굴의 모든 마디(엽맥)에 양성화가 달리고, 수꽃은 전혀 달리지 않는 완전절성형이다. 유리온실 안에서 역경지를 기어가게 재배하고, 가지고르기도 수분도 일절 행하지 않는 방임 상태에서 한 그루에 768개의 열매(그림2-18)가 맺은 기록이남아 있다. 양성화 그루의 과실은 모두 매우 작고, 메추라기의 알보다 조금 크며, 열매 무게는 5-10그램이다. 노지 재배에서 30cm 화분에 테두리를 만들어 한 그루를 재배(나무나 대나무 지주나 틀에 덩굴을 올리는 재배, 나팔꽃에 이용되는 일이 많음)해도 50-70개의 열매는 보통으로 맺힌다. 멜론 무리도 오이에서도 매우 어린 덩굴에서는 양성화의 형태, 구조를 구비(조직 절편에서 관찰), 꽃눈의 발육에 수반해 그대로 양성화로 발달하든지, 단성의 암꽃이나 수꽃으로 분화하고, 저마다 기능을 갖도록 발달해 간다. 암꽃이어도 루페로 관찰하면, 암술대가 붙어 있는 부분의 주변에는 수술 3개의 흔적, 자취가 있고, 수꽃에는 꽃의 아래 부분에 암술머리의 흔적이 있다(그림2-19). 이들 사정으로부터 성이 분화하지 않는 양성화가 기본형, 원형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잡초 멜론의 양성화주형과 다른 두 형의 성표현형의 잡종에서는 전자가 항상 우성으로 나온다(그림2-10). 이와 같은 유전 양식도 포함하여, 멜론 무리의 안에서는 양성화주형을 원형이라 자리매김하고 싶다. 중국의 양성화주형 참외 '소취과小翠瓜', '완현첨과完縣甛瓜' 외 6계통의 성표현형의 유전양식, 특히 같은 형인 잡초 멜론과의 잡종에 대한 연구는 앞으로의 성과를 기대하고 있다.


그림2-19 멜론의 수꽃(좌), 양성화(가운데), 암꽃(우)(藤下 1959). 꽃잎과 꽃받침을 생략했다.

A: 암술머리, B: 수술, C: 수술의 흔적




그림2-20 양성화주 잡초 멜론 MG-16과 온실 그물 멜론의 F1 잡종(1976). 마디마다 열매가 달리는 성질이 우성으로 나온다.



성표현형의 유전 양식에서는 남아시아에서 많은 자웅이화동주형이, 동아시아의 양성화수꽃동주형에 반해 우성이고, 한 유전자로 결정된다.


멜론 무리도 포함한 박과식물의 암수꽃의 분화 형성은 일장과 온도의 영향을 받기 쉽고, 보통 장일과 고온(밤) 조건은 암꽃 형성을 억제한다. 적도 가까운 저위도 지대의 잡초 멜론이나 재래의 재배품종은 연중, 장일에 쬐이는 일이 없기 때문에, 여름철에 일장이 13-15시간 가까이나 되는 오사카에서 재배하면, 암꽃만이 아니라 수꽃 형성까지 역제되어, 덩굴만 덤불처럼 무성해져 버린다. 카메룬(북위 5도), 멕시코(북위 20도), 코스타리카(북위10도)의 잡초 멜론이 그 전형적인 예이다. 저위도 지대의 것을 농사철을 바꾸어 겨울농사로 온실 재배를 하면, 일조 부족으로 영양생장 그것이 억제된다. 이 기상 조건에 대한 반응으로부터 태어난 고향을 추정할 수 있기도 하다. 




어린 열매의 쓴맛 발현에 대한 유전형의 지역성


1954년까지 필자는 과실이 쓴 멜론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교토 대학 교수인 키하라 히토시木原均(1893-1986)를 대장으로 하는 카라코룸·힌두쿠시 학술탐험대로부터 받았던 멜론 무리의 종자, 31품종 가운데 어린 열매에서 강한 쓴맛인 것이 10품종 발견되었다. 외관만이 아니라 맛까지 다양한 멜론이다. 멜론의 계절이 되면 학생과 실험실에서 점심 식사 때, 절임 대신 개화 1주일 지나 솎아 딴 어린 열매에 소금을 뿌려, 오이보다 아삭함이 좋은 그 맛을 즐겼다. 어느 날, 앞에 기술한 선물 가운데 입에 넣자마자 그 쓴맛으로 엉겁결에 뱉어버린 품종을 만났다. 이 때부터 필자의 과실 특성 조사용지에 어린 열매의 쓴맛 유무를 적는 기입란이 마련되었다. 과실의 안에 쓴 부분은 태좌(멜론 무리에서는 과실의 중앙부를 점하는 종자가 가득 차 있는 부분)와 그 주변부분임을 밝혔지만, 잡초 멜론은 작기 때문에 깨물면 과실 전체가 쓴 느낌이었다. 재배, 잡초 멜론일지라도 쓴맛이 느껴지는 건 개화 이후 20일째 정도까지의 어린 열매로서, 이후 사라진다. 이 개화 이후 20일째의 무렵은 맛있는 것으로, 멜론 무리에서는 종자에 발아력이 갖추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1952). 성숙하더라도 쓴맛이 사라지지 않는 특이한 잡초 멜론이, 아프리카의 카메룬과 한국의 거제도에서 1계통씩 있었다. 


멜론 무리의 과실이 지닌 쓴맛의 성분에 대해서는 식물의 쓴맛 물질에 상세한 칸사이 학원대 교수였던 나야 케이조우納谷惠三에게서 쿠쿠르비타신 A-K 가운데 B(융점 184-186도)가 많다는 교시를 받았다. 


1975년, 봄의 연휴에 카라코롬의 쓰지 않은 멜론과 시즈오카의 쓰지 않은 그물 멜론을 교배하여 받은 F1 종자를여름의 끝부터 시험 재배, 초겨울에 수확하여 맛 시험을 했다. 그 결과 쓰지 않은 같은 종류의 F1임에도 상관없이 강한 쓴맛이 있는 조합이 발견되었다. 교배 실수(신품종 선택의 잘못, 꽃봉오리 일 때 수술의 꽃밥 제거와 교배할 때의 오염)인지, 그렇지 않으면 보족 유전인지 다시 생각하고, 곧바로 같은 조합으로 신중히 다시 교배시켜 이듬해 여름에 재차 맛 시험을 했다. 두 번째도 역시 써서, 보족 유전에 의한 쓴맛 발현이 거의 확실하게 된다. 유전학 관계의 교과서에서 스위트 피의 흰꽃 계통 사이의 교배에서 F1이 자색꽃이 되는 예가 인용되어 있다. 곧한 가지의 표현형(형질, 여기에서는 쓴맛)이 서로 보족하는 비대립 유전자의 조합에 의하여 발현하는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지식과 정보에 정합하지 않는 실험 결과가 나왔을 때의 판단과 대처법이 신발견으로 어어질지 아닐지의 분기점이 되는 것을, 학생과 함께 실감했다. 교배 실수로 결말을 냈다면, 이 뒤의 멜론 무리의 계보 탐색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쓴맛 발현의 유전형 분석 수법은 끝내 손에 넣지 못하고 끝났을 것이다. 무수정 종자 형성의 유도와 이 장에서는 할애하지만 태좌 절편 배양을 통한 식물 유도에서도, 믿기 어려운 실험 결과의 재검토로부터 멜론 무리에 대한 큰 연구 성과가 태어난다. 


재배 멜론 어린 열매의 쓴맛 발현이 보족 유전에 의한 것임이 밝혀진 뒤, 보존하고 있는 유전자원(종자) 중에서 쓴맛 없는 계통의 품종을 골라내고, 다수의 쓴맛 없는 계통 종류 사이의 조합으로 교배를 행해 F1 과실을 시식했다. 그 결과를 정리한 바, 세계의 멜론 무리의 쓴맛 발현에 보족 유전을 하는 3형이 있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3형의 분석종(부모)으로서 모두 쓴맛이 없고, Ⅰ형 대표에는 일본의 잡초 멜론으로 카가와의 시시지마산 SS-6(자식自殖 7대)를, Ⅱ형에는 시즈오카의 그물 멜론의 자식계(자식 12대)를, Ⅲ형에는 방글라데시의 재래 멜론 무리 B-14(자식 3대, 월과에 가깝지만 변종 불명, 아마 요리용)을 해당시켰다. 멜론 무리에서는 자식 내혼 열성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별도 연구로 실증을 마친, 이 3형의 각 대표와 발현형 불명(미분석)과의 사이에서 교배하여 얻은 세 조합의 F1 과실을 시식한다. 그 가운데 두 조합은 쓴맛이 있고, 나머지 한 조합만이 쓴맛이 없다. 이 쓴맛이 없는 F1의 부모 종류가 똑같은 유전자형을 가진 것이 된다. 시간과 노력과 끈기를 필요로 하는 연구였는데, 174품종 522조합의 잡종 분석으로부터 표2-6과 같이, 쓴맛의 발현형도, 동아시아는 Ⅰ형, 남아시아는 Ⅲ형으로 나뉘고, 멜론 무리는 두 지역에서 별도로 분화, 성립되었다는 가설이 한층 확고해졌다. 더구나 유라시아 서부 지역의 그물 멜론, 윈터 멜론, 뱀 멜론 등 이른바 유럽계 멜론은 Ⅱ형이었다. 일본의 잡초 멜론 가운데, 쓴맛이 없는 건 시시지마(카가와), 이키나지마生名島(에히메), 오지카지마小値賀島(나가사키)의 3계통뿐이었지만, 쓴맛의 발현형은 동아시아계의 참외, 월과와 똑같은 Ⅰ형이었다.



지역

품종 수*

품종 수*

쓴맛 없음

쓴맛 있음

발현 유전형




동아시아

남아시아

중근동

아프리카

유럽

북미

중남미

태평양

128

41

39

13

40

6

2

2

122

25

22

7

17

2

0

0

64

0

0

4

0

0

0

-

17

5

19

7

29

6

1

-

0

21

0

1

0

0

0

-

합계

271

195

68

84

22

표2-6 지역별로 본 재배 멜론의 어린 열매 쓴맛 발현(藤下 2006; 1963을 보탬)

*품종명 모르는 계통도 포함됨



이 해석 방법에서 가장 알고 싶은 건 잡초 멜론의 유전형이지만, 수집한 C. melo var. agrestis의 225계통 가운데221계통까지가 쓴맛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활용할 수 없었다.





아이소자임(동위효소)형의 지역성


지금은 개나 소나 신형 바이러스 검사부터 산지 증명, 그리고 범인 수색까지 DNA에 맡기고 있다. 30년 정도 전의 일반적인 연구실에서는 분자생물학적 수법, 화학 분류의 수법이라고 하면 아이소자임 분석(동위효소)이었다. 유연관계의 해석, 잡종 검정, 유용 유전자의 조기 검색 등에 소중하게 여겼다. 필자 들은, 세계 각지로부터 멜론 무리 11변종으로 이루어진 51품종과 잡종 멜론 54계통을 분석했다(1980). 산성 포스파타아제 분석에서 동아시아의 참외, 월과는 국적에 관계 없이 지모그람zymogram(효소영동상)은 동일한 Ⅰ형, 잡초 멜론 가운데 일본의 5계통도 참외와 같은 Ⅰ형이고, 서로 동일한 유전자를 공유하는 관계이며, 일본의 잡초 멜론은 동양계 멜론의 한 선조계라고 추찰되었다. 한편, 파키스탄과 부탄, 시킴, 카메룬, 남아프리카, 멕시코의 잡초 멜론은 모두 Ⅱ형을 나타냈다(그림2-21). 카토加藤, 아카시明石, 타나카田中 등도 일본과 한국의 참외, 월과, 잡초 멜론 사이의 지모그람에 차이는 없었다고 한다(2001-2006). 그 한쪽에서 인도의 잡초 멜론은 소립 종자계 재배 멜론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아프리카 남부의 소립 종자계 멜론이 건너와 선조형 원형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미 기술한 꽃의 성표현형, 어린 열매의 쓴맛 발현 유전형 등과 함께, 멜론 무리는 동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 별도로 분화, 성립했던 것이, 아이소자임 분석의 결과에서도 암시되었다. 


그림2-21 C. melo의 산성 포스파타아제·지모그람(森井·藤下·桃谷 1980). 

Ⅰ: 동아시아의 참외, 월과, 일본의 잡초 멜론

Ⅱ: 일본의 모모르디카 멜론

Ⅲ: 남아시아의 재래 품종, 파키스탄과 시킴, 부탄의 잡초 멜론. 라오스, 미얀마, 네팔의 모모르디카 멜론

Ⅳ: 아프가니스탄의 뱀 멜론






단위결과성單爲結果性으로 보는 지역성


단위결과성이란 수정하지 않고서 씨방이 발달하여, 종자가 없는 과실이 생길 수 있는 성질이다. 초본 식물에서는드물고, 이 성질이 실제로 이용되고 있는 것은 과채 중에서는 멜론 무리의 동속이종에 해당하는 오이 정도일 것이다. 겨울철, 또는 기온이 낮은 초봄, 늦가을의 하우스나 터널재배에서는 곤충이 부재하는 무수분 조건 속에서 오이의 과실은 자꾸 발육한다. 물론 씨는 없다. 대다수의 다른 식물에서는 과실은 수분 이후 수정이 되고서 종자 발육에 따른 씨방 비대의 과정을 거친다. 멜론 무리에서 필자가 이 성질에 강한 관심을 가진 이유는, 과실마다 종자 수의 많고 적음이 품질(당도, 육질), 과실의 크기, 보존성에 미치는 영향을 알고 싶었던 것이 첫째이다. 둘째는 멜론 무리의 온실과 하우스 재배에서는 결실과 가지런한 열매 모양을 확보하기 위하여, 꽃가루의 수명을 고려해 오전에 일찍 인공수분이 필요하다. 수분에 드는 노력, 시간이 대단하기에, 일부에서는 인공수분을 벌을 이용해 대신하게 하지만, 이 수분 조작과 생장 조절물질 처리가 불필요한 자발적 단위결과성이 있는 부담을 던 멜론의 육성이 기대되고 있다.


단위결과성은 암꽃과 개화 전날의 오전 안에 제웅(수술을 핀셋으로 없앰)한 양성화에 곤충에 의한 수분·오염을 방지하기 위해 황산지 봉투를 씌우고, 그 5일 뒤에 제거하여 과실이 발육하는지 어떤지를 조사하고, 이 성질의 유무를 판정한다. 예비 실험에서는 참외와 일본의 잡초 멜론에는 성질이 있고, 그물 멜론에는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시험 재료의 범위를 넓혀서 실험한 바, 그 성질의 유무가 또다시 동아시아와 남아시아에서 차이가 났다(표2-7). 동아시아의 참외, 월과, 또 잡초 멜론의 대부분이 단위결과성을 가진 데 반해, 남아시아의 것에는 없는 것이 많았다. 더구나, 자발적 단위결과를 한 과실은 자가수분에 의해 종자가 있는 과실보다 작고, 열매 무게는 70% 안팎에 머물렀다. 



지역

변종

품종·계통별

단위결과성

종자 없는 열매/처리한 꽃

A

B

동아시아

참외

월과


모모르디카 멜론

잡초 멜론

8

6

3

1

3

0

0

0

0

2

35/68

19/53

7/15

2/13

10/37

35/68

19/53

7/15

2/13

10/50

남아시아

재래 재배종

모모르디카 멜론

잡초 멜론

0

1

0

5

3

1

-

4/13

-

0/18

4/41

0/11

표2-7 동아시아와 남아시아의 지역별로 본 단위결과성(藤下·數野 미발표)

동아시아: 일본, 한국, 중국 동부

남아시아: 인도, 네팔, 부탄, 방글라데시, 미얀마, 태국, 라오스, 말레이시아, 필리핀, 대만

A: 단위결과성 있는 품종

B: 처리 품종 전체






무수정 종자 형성(apomixis)


멜론 무리에 가까운 이종이고 교잡할 수 없는 아프리카 원산의 Cucumis figarei가 바이러스 감염 억지물질의 생합성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1994). 이 유전자를 멜론 무리에 이입하고자 생명공학을 활용한 연구를 시작했을 때, 꽃봉오리·오래된 꽃(지연) 수분, 반복 수분, 2배성 꽃가루의 수분에서는 교잡할 수 없기 때문에, 교량 식물을 구하여 이 야생종과 원형이지만 재배 멜론과는 교잡이 자유로운 잡초 멜론 사이의 교배를 반복했다. 그러나 예상대로 교잡은 불가능했다. 다만 니가타의 니츠시新津市 근교에서 백중맞이에 불단의 공물로 삼는 소형 멜론 무리인코히메우리(제사의례의 항에서 해설)를 모친으로 한 교배의 한 조합에서만 얻을 수 있던 과실에 충실한 종자가 들어 있었다. 재배한 바 모든 그루가 경모傾母 개체(잡종의 특성이 나타나지 않고, 모친을 꼭 닮은 개체), 코히메우리 그것이었다. 그래서 무수정 종자 형성(수정 없이 종자가 생길 수 있음)을 추정, 기대하고, 순계 유도(후대에서 형질이 분리되지 않는 순수 개체의 유도)에 의한 육종 연한의 단축화와 유전적으로 열성을 나타내는 유용형질의 유발을 노리고, 19과 34속 47종의 식물 꽃가루를 코히메우리에 수분했다. 과, 속, 종을 묻지 않고 모든 교배 조합에서 경모 식물을 얻을 수 있다는 전혀 예상도 하지 않았던 결과가 나왔다(그림2-22). 무수정 종자 형성의 설명으로 늘 소개하는 것이 '곰솔의 꽃가루나 고비의 포자가 수분하더라도 종자가 생긴다'이다(1974). 유아용 분유, 밀가루, 분필의 가루에서는 결실하지 않았다. 유도 식물은 반수체를 상정했는데, 118본 가운데 117본이 2배체, 나머지 1본이 3배체였다. 별도의 꽃밥배양으로 얻을 수 있던 식물도 2배체뿐이었다(1991). 멜론 무리에서는 반수성 세포의 꽃가루나 난자로부터의 유도 식물은 반수체가 아니라 2배체(dihaploid)가 되기 쉬운 것 같다.


그림2-22 19과 34속 47종의 꽃가루 수분으로 종자(경모 식물)를 얻은 코히메우리 C.melo(변종 불명)의 열매(1974). 꽃가루 부모의 예를 나타내자면, 가장 아래 왼쪽부터 금어초, 토마토, 딸기, 사프란, 석산(저장 꽃가루) 중앙은 자가수분.





살아 남기 위한 잠재 전술


요즘, 일본의 외딴 섬에서는 현지 주민의 고령화에 따른 다락밭의 방기 때문에, 밭에 수반해 있던 잡초 멜론은 절멸 직전의 상테에 있다. 그와 같은 상황 안에서 2007년 방문했던 카가와현의 메기지마에서도 같은 경향이 급속히 진행되어, 그 지방에서 자란 어르신에게서도 "사라졌다"고 이야기되었다. 그런데, 섬의 1개소에서 발을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메추라기의 알보다 작은 잡초 멜론이 지면에 뒹굴뒹굴 펼쳐져 있었다(그림2-23). 관찰하면, 앞에 기술한 성표현의 항에서 소개했던 양성화 그루가 틀림없는 MG-16계이다. 가장 오래 살기를 바라는 원형 중의 원형인 잡초 멜론이다. 1981년, 유리온실 역경재배에서 가지고르기도 수분도 시키지 않고 덩굴을 자갈 위에 기어다니게 둔 바, 이 잡초 멜론 한 그루에서 768개의 열매가 달렸던(그림2-18), 기네스북에 오른 이력을 가진 주인공이다. 재작년, 재발견하여 채집한 MG-16을, 이듬해 여름 자택의 베란다의 화분에서 재배했다. 베란다의 콘크리트가 뜨거워지기 때문에 차광용 그물을 1미터 정도 높이에 걸고, 그 아래에서 재배한다. 앞에 기술한 유리온실까지는 아니지만, 꿀과 꽃가루를 모으러 꽃을 찾는 곤충이 날아오는 건 노지에 비교해 강하게 억제되어 있다. 멜론 무리는 본래, 풍매화가 아니라 충매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그루에서 50개 남짓의 잡초 멜론 열매가 모두 잎겨드랑이(마디)에 방울처럼 달렸다. 그들 과실에서 한 열매당 8-148알의 충실한 종자를 얻고, 종자가 없는 열매는 전혀 없었다. 폐쇄 또는 그에 가까운 유리온실과 차광 그물의 조건에서의 종자 있는 열매의 결실을, 앞에 기술한 무수정 종자 형성과 연결하는 것은 너무 대담한 것일까? 곤충이 없어도 수분이 없어도 늘어나토종 민들레를 몰아낼 정도의 세력으로 번식하여 자연 파괴와 도시화의 상징으로 꾸며지는 서양민들레를 떠올린다. 무수정 종자 형성의 실증은 매우 어렵고 시간을 필요로 하는데, 잡초 멜론에게는 자손을 남기는 궁극의 생존 전술·대책처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잡초 멜론의 맹렬하기까지 한 생존의 실태가 빈틈이 보이지 않더라도, 여생을 이 해명에 바치려 한다.



그림2-23 메기지마(카가와)에 현생하는 양성화 그루 잡초 멜론 MG-16. 2007년 10월22일 촬영.






멜론의 미각, 단맛과 신맛


달지 않으면 배신을 당한 듯한 기분이 드는 멜론, 시즈오카의 온실 멜론 산지에서는 생산농가별 출하상자부터 검사계가 무작위로 추출해 당도를 계측, 13도 이하가 나오면 출하의 일시정지라는 규제를 행하여, 시장과 소비자의신뢰를 확보해 가고 있다. 단 멜론을 수확하기 위한 생산자의 비배관리에 대한 심려는 이만저만이 아니다. 본래 건조한 공기를 좋아하는 멜론을 병해가 발생하기 쉬운 고온다습한 일본에서 재배하는 것부터 무리가 있다. 대형 하미과의 산지, 중국 신장 위구르의 투루판에서는 연간강수량이 40mm, 1년의 대부분 날마다 맑음, 일교차도 15도로 크다. 그와 같은 기상조건에 적응한 멜론은 과실은 크지만 잎은 작고(잎 그림자가 적음) 두터운 잎, 당의 축적에는 안성맞춤인 조건이 갖추어진다. 현지에서 당도를 측정하면 16도는 보통, 20도 가까운 것도 있다(일본의 온실 멜론은 13-14도가 최고, 이하 참외 9-12도, 월과는 4도가 평균). 멜론의 종자를 채종하여 책상 위에 방치해 놓으면, 일본에서는 2년째에는 발아력이 극도로 떨어지지만, 투루판에서는 16년 지나도 발아했다고 현지 직원은 자랑스럽게 말한다. 이 지역에서 노지 재배하고 있는 멜론에서 채집한 종자를 일본에 가지고 돌아가, 비를 피하기 위하여 유리온실에서 재배하면, 일사량이 적고 무더운 조건 때문에 잎은 거대화하여 잎 그늘이 커지고, 엽록에서 물방울이 불어 나와, 두둑의 사이를 지나가면 윗도리가 젖는다. 광합성이 떨어지고, 당도는 10도 안팎에 머문다. 똑같은 유라시아 대륙이어도 재배환경에 이로운 신장 위구르에서는 심려하지 않아도 당이 뜻대로 고인다. 너무 달지 않은 정도의 투루판 멜론, 만약 육질이 일본인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같은 점질이라면 입 안이 끈적끈적 하여 어느 혹서에는 도리어 불쾌하게 느낄 것이다. 맛있다고 하는 건, 육질은 수박과 같은 밥알 느낌이 나는 샤베트 같은 것이다. 차의 본네트를 건드리지 않을 만큼 뜨거워지는 여름의 이 지역, 차를 세우고 휴식할 때물기 가득한 샤베트 같은 달달한 멜론은 입부터 몸속을 가라앉혀 준다. 지역이 바뀌면 풍속도 바뀌는 법이다. 


한편, 광합성을 높이기 위하여 환경을 정비해 재배해도, 결코 달아지지 않는 멜론 무리도 많다. 친숙한 것으로는 절임용 월과, 학명도 var. conomon(소금에 절인 채소), 성숙시켜도 당도는 오이와 비슷한 4도 정도밖에 안 된다.카레에 넣어 먹는 뱀 멜론도 달지 않다. 참외와 그물 멜론과는 유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들의 당 조성을 비교했던 것이 그림2-24이다. 그 차이는 비환원당의 자당량과 전당량에서 명확히 나온다.


그림2-24 성숙 열매의 당 함량, Brix 수치 및 당 조성(藤下, 竹迫, 土田, 南出 1991). 

R:그물 멜론 M:참외 C:월과 MM:모모르디카 멜론 

 



멜론이라고 하면 일본인의 감각에서는 과일이지만, 동남아시아에서는 채소, 요리용 재료가 많다. 1979년, 방글라데시에서 달달한 과실이 열리는 그루와 달지 않은 그루가, 멜론 무리의 밭 한 뙈기 안에 섞여 있었다. 생산자는둘을 구분하여 수확하고, 각각 시장에 팔러 가고 있었다. 달달한 멜론이 비싸기 때문에, 단 멜론의 선발육성의 초보 단계를 보았다. 


잡초 멜론은 재배 멜론 무리가 지닌 여러 형질의 대부분을 공유하고 있는데, 단 것과 연어 빛깔의 과육인 것은 세계의 어디에도 없는 듯하다. 잎의 광합성으로 생긴 탄수화물이 어디에 어떻게 하여 단 멜론과 달지 않은 멜론으로 나뉘게 하는지, 달콤한 과실의 종자 수에는 영향을 주는지 어떤지 등, 앞으로의 과제이다.


멜론 무리 안에는 성숙과에 신맛이 있는 종류가 있고, 신 멜론(Sour melon, var. acidulus)이라 부르고 있다. 유럽에서는 생햄에 싸서 먹는 일도 있다고 들었다. 원래 단맛이 없는 뱀 멜론의 성숙과도 신맛이 난다. 달 것이라 생각하는 멜론을 입에 넣어 신맛이 나면, 유쾌하지 않은 기분이 된다. 잡초 멜론의 공통 특성인데, 어린 열매의 쓴맛이 사라지는 개화 20일쯤 지나서부터 혀끝에서 신맛이 느껴질 수 있게 되며, 산도가 높다. 반면, 감응 시험에서는 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당도 계시도가 10을 넘는 것은 과즙 안의 당 이외의 구연산, 사과산, 숙신산, 푸마르산 등의 유기산이 시도 수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제사(음식 공헌) 의례


멜론 무리의 과실을 불단에 바치는 풍습은 지금도 각지에서 전승되고 있다. 니가타현의 니츠시와 무라카미시의 선종(조동종)의 집집에서 옛날부터 백중맞이에 사과, 배, 호박의 작은 모형이나 꽈리, 동부 등을 불단에 바쳤는데(매달았는데), 그중에 반드시 멜론 무리인 '코히메우리'가 들어 있다(그림2-25). 탁구공 정도의 크기로 흰껍질, 성숙하면 향이 좋고 달아져 생식할 수 있다. 분류하자면 변종은 var. hime나 var. tamago로 어떻게 기재할지판단이 어려운 종류이지만, 문화사나 따로 적은 무수정 종자의 형성 능력을 가진 육종 소재로도 참으로 귀중한 유전자원이다(1974). 이 과실은 해마다 8월13일의 백중맞이 시장에서 수많은 노점상의 진열대에 놓이는데, 지방에 남아 있던 그리운 풍경 같고, 언제까지나 이대로 계속되면 좋겠다고 도시민은 생각한다. 오카야마현 우시마도시牛窓市의 마에지마前島에서는 베개 모양을 한 잡초 멜론을 선택해, 해난사고를 피하기 위한 염원을 담아 바닷물에 띄워서 바친다. 베개 모양의 과실을 선택한 건 되돌아온 부처님이 잠들기 쉽도록 배려하기 때문이라 한다. 미에현 도바島羽 난바다의 수가시마菅島, 사카테지마坂手島, 마사키지마間崎島에서도 불단에 바치는데, 잡초 멜론의 자생이 사라져 버려 밭에서 채집하기 어려워져, 무엇이든 갖추고 있는 섬의 잡화옥에서 구매하거나, 참외를 대용으로 하거나 하게 되었다. 1974, 1976년 당시의 사정이었기 때문에, 각지의 외딴 섬에서 잡초 멜론이 절멸의 한 길을 가고 있는 시대에 지금쯤은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이다. 하치죠지마의 큰 열매가 달리는 모모르디카 멜론'바바고로시'도 제물로 쓰이고 있었다.


그림2-25 백중맞이에 선종의 집 불단에 바쳐진 코히메우리(1981년 8월13일). 

왼쪽:백중의 전날, 아침시장에 진열된 코히메우리(하얗고 둥근 것). 오른쪽:니가타현 니츠시의 S씨 집, 가운데 동부의 양옆이 코히메우리.




지역 이름(표2-2) 중에서 불교, 더 나아가서는 제사의례에 관련된 듯한 호칭이 몇 가지 있다. 범천과梵天瓜(하츠이시지마櫃石島), 오쇼로우리(메기지마), 정령과精靈瓜, 스님참외(알 수 없음), 쇼우로우리(阿児島) 등.


멜론 무리의 종자가 야요이 이래 전국 각지의 유적에서 높은 빈도로 다수 출토되고 있는데, 출토 유구의 대부분이 도랑과 해자(129개 유적), 거기에 우물(21개 유적)이었다. 제사에 관련된 장소에서 탄화미(이케가미 유적에서는 유구의 41구획 가운데 28구획)이나 제사용 남근, 새 모양의 목기, 관련 토기가 함께 나오고 있었다. 신령의진혼, 무병장수, 농작물의 풍년 등을 기원하기 위한 행사였던 것이 아닐까? 오늘날 백중에 제물을 강이나 바다에 띄우는 행사, 칠석의 행사로 이어지는 풍습, 음식 공헌 의례의 원형 같은 생각도 든다. 과실, 종자일지라도 이용(식용)가치가 부족한 잡초 멜론은 아직도 고대의 이용법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음식 공헌 의례에 수반하여 전해져, 그 종자가 유적에서 다수 출토된 것이라 필자는 추리하고 있다.





마치며


수집 유전자원 중에는 박류의 여러 바이러스 병에 대한 감염 억지물질을 생합성할 수 있는, 아프리카의 같은 속의 야생식물 C. figarei나 멜론의 신형 덩굴마름병균을 접종해도 전혀 발병하지 않는 잡초 멜론이 19계통(농수성 1996)이나 확인되고 있다. 둘은 이미 실제 육종에 이용되기 시작하고 있다. 수집 자원 가운데 농수성으로 489, 아이치 종합농연으로 326, 국립역사민속학박물관으로 87, 오카야마 대학 농학부로 48(품종 또는 계통)을 기증했다. 모두 계통 발생의 연구나 육종의 부문에서 활용되고 있다.


필자가 이 책에서 밝혀 온 멜론 무리의 계보 해석 가운데 매우 유효한 역할을 담당했던 건 (1)성표현형, (2)단위결과성, (3)쓴맛 발현형, (4)아이소자임형, 그리고 매우 유효하다고 생각되는 (5)종자의 휴면성이다. 무엇이든지 지금까지 육종에 유용한 형질(소재)로서, 별로 또는 전혀 중요시되지 않았다. 바꾸어 말하면 인위적 선발, 도채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형질이다. 과거에 사람의 손에 오염되지 않았던 것만으로 해석의 형질로서는 유효했다고 생각한다. 이 해석의 결과, 동양 멜론계라고 불러 온 박들은 일본과 중국, 한국으로 구성되는 동아시아와 태국, 네팔, 방글라데시, 라오스, 미얀마, 인도 등으로 구성되는 남아시아의 두 지역에서 별도로 분화, 성립된 것이라생각할 수 있었다. 또한 두 지역에 자생하는 원형의 잡초 멜론이 지역마다 참외, 월과, 또는 재래종과 똑같은 형질, 유전자형을 공유하고 있었던 사실의 실증은 최대의 성과일 것이다. 잡초 멜론이야말로 고문화재이며, 살아 있는 증인이다. 그림2-2는 아시아에서 멜론 무리의 분화, 재배 성립지의 추정도인데, 쓴맛 발현형 Ⅰ의 지역과 Ⅲ의 지역에는 앞서 기술한 다른 세 형질(형)에도 차이가 있었다. 1985년, 박류 학술교류단 단장으로 간쑤성 란주(그림2-2의 ● 표시)를 방문했을 때, 농업과학원의 주문홍 여사가 '참외는 란주의 동쪽부터 서진하고, 유럽계 멜론은 서쪽에서 동진해 여기에는 둘의 중간형도 많다'를 열띠게 말했다. <중국의 수박과 참외>(2000년, 중국농업출판사, 676쪽)에서는 참외의 산지로 허난, 산시, 허베이, 장쑤, 산시성으로 이루어진 화북 재배도와 흑룡강, 요녕성으로 이루이진 동북 재배도를 들고 있는데, 필자가 생각하는 참외의 분화 성립지이기도 하다. 이들의 지역과 조선반도의 유적에서의 종자, 특히 모모르디카 멜론의 종자 출토의 보고가 기대된다. 


유전자원이 살았던 상태로의 보존은 자생지가 최적이라 하고, 특히 멸종위기종에게는 필수일 것이다. 필자가 잡초 멜론 탐색으로 최초로 상륙(1968), 중국과 한국의 대학 연구 동료의 교수도 안내하고, 인연이 있어 18회나 방문했던 카가와의 메기지마, 그곳에서는 원형 중의 원형이라 필자가 사로잡힌 양성화형의 잡초 멜론이 2009년차에도 계속 살아 있다. 현지보존을 제창해 온 보람이 있어, 섬의 관광협회 회장 카와이 요시키요川井芳淸 씨와 주민센터장 柳信三 씨가 작년부터 열심히 움직여 주어, 전국에서 선구적인 실례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올해 5월23일 양성화 그루 MG-16의 꽃이 피기 시작했다. 7월에 들어서면 곤충이 침입할 수 없는 우리집의 일광욕실에서 무수정 종자 형성의 새로운 실험이 시작된다. 당장의 실험에서는 제웅 무수분 구역, 제웅 인공수분 구역, 인공수분 구역, 방임 구역, 이종(오이) 꽃가루의 수분 구역을 설정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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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쇼유 라멘



일본이 2차대전에서 항복했을 때 폐허가 되었다. 미국의 폭격으로 200만 채의 건물이 파괴되거나 부수어지며 굶주린 일본인들은 식량을 점점 암시장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러한 거대한 도시의 암시장에서 라멘은 일본 요리의 중요한 부분으로 떠올랐다.  

Japan Quarterly에 의하면 라멘은 중국 이민자들이 19세기 들어 일본에 처음으로 소개했는데, 원래는 중국식으로 구운 돼지고기를 얹은 국수였다. 1945년 12월, 일본은 42년 만에 최악의 벼 수확량을 기록했다. 조선(원문엔 중국인데, 중국은 일본의 식량생산기지의 역할을 한 적이 없기에 글쓴이의 오류라 생각하여 조선으로 고쳤음)과 타이완의 전시 식민지에서 발생한 농업 손실로 인해 쌀 생산량이 급감했다. 이는 일본의 쌀에 기반한 식문화에서 밀 국수가 중요해진 요인이었다.

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한 뒤, 미군은 1945-1952년까지 이곳을 점령했따. 식량난에 직면하여 미국인들은 엄청난 양의 밀을 일본으로 수입하기 시작했다. 1948-1951년까지 일본에서 빵 소비는 26만2121톤에서 61만1784톤으로 증가했다. 그런데 밀은 대부분의 일본인이 암거래 음식 노점상에게서 먹었던 라멘으로 흘러갔다. 일본에서 암시장은 전쟁통에 존재해 왔다. 그러나 전쟁의 마지막 몇 년 동안과 점령 기간 동안 점차 매우 중요해졌다. 정부의 식량배급 체계가 예정보다 20일 늦게 운영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암시장에 의존했다. 


도쿄 신바시의 암시장, 1946년


1945년 10월까지, 도쿄에는 약 4만5천 개의 암시장 매대가 존재했다고 추산된다. 또한 도쿄는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암시장인 아메요코쵸Ameyokocho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도시 중심의 철로 아래에 위치한 이곳은 사탕부터 라멘과 옷까지 모든 걸 파는 노천의 진열대로 가득 찼다. 이런번잡한 환경에서 노점상은 특유의 차르멜라라는 피리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국물과 물을 끓이는 냄비와 함께 국수가 담긴 서랍을 지닌 바퀴 달린 음식 카트인 야타이에서 라멘을 팔았다. 미국산 밀과 돼지기름이 풍부하여 가격도 저렴했다. 

그 당시, 점령 기간 동안 식당에서 음식을 사고파는 건 불법이었다. 이는 배급을 통제하려고 일본 정부가 전시에 시행하던 야외의 음식 노점 금지를 미국인들이 계속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멘을 만드는 밀가루는 제분업체에서부터  노점상에게서 보호비를 강탈하던 야쿠자가 길거리 매대의 약 90%를 통제하던 암시장으로 비밀리에 보내졌다. 점령 기간 동안 수천 명의 라멘 노점상이 체포되었다. 


상품을 몰수하는 경찰, 1949년.


하지만 1950년, 정부는 음식 노점상에 대한 규제를 완화하고 밀가루의 거래에 대한 통제를 없애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라멘 노점의 수는 더욱 증가했다. 기업들은 국수와 고명, 그릇, 젓가락까지 갖추어진 야타이 완점품을 노점상에게 임대하기까지 했다.  

오늘날 팔리고 있는 수많은 종류의 라멘과 달리, 당시의 라면은 간단했다.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오사카나Osakana에서 라멘 요리를 강습하는 Jonathan Garcia에 의하면, 이 시기에 라멘은 쇼유(간장)에 기반한 국물에 돼지고기, 닭고기, 니보시niboshi (말린 정어리)를 조합하여 만들었다.  양념을 하는 건 국물 냄비에 섞었고, 노점상은 하루종일 그걸 보충했다. 요즘 라멘은 국물을 붓기 전에 쇼유나 다른 재료와 함께 개별적으로 양념을 한다. 

지방과 강한 풍미가 풍부한 음식은 “보양식”으로 알려지게 되었다고 <라멘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역사(Untold History of Ramen)>의 저자인 교수 George Solt 씨는 말한다. 라멘은 전통적인 일본 요리인 해초에 기반한 자극적이지 않은 국수 국물과 아주 달랐다.  코베 야마테 대학에서 일본의 전통 식문화 교수이자 일본 음식에 대한 글을 쓰는 오쿠무라 아야오Okumura Ayao 씨는 예전 1953년 처음으로 라면을 먹고 충격을 받았는데,  “이 국물을 먹고는 더 커지고 강해지는 것 같았다”고 회상한다.


일본 후쿠오카에서 라면을 파는 야타이


미국인들도 밀과 동물성 단백질의 영양학적 우수성을 적극 홍보했고, 라멘은 영양가가 높다는 신망을 얻으며, 배급에 지친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불경기에 라멘 야타이를 운영하는 일은 소규모 창업이 아직 가능했던 몇 안 되는 기회 가운데 하나였다. 폭격을 당한 도시에서 노동자 계급이 야타이 주변에 모여 라멘을 먹으면서, 점차 라멘은 도시의 생활과 연관이 되었다. 

라멘은 아마 오늘날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식일 것이다. 도쿄에만 약 5천 곳의 라멘 가게가 있다. 그러나 경제적 필요성, 미국의 밀, 중국 요리의 영향이란 과거의 조합이 라멘을 주류로 나아가게 했으며, 이후 일본이 먹는 방식을 영원히 바꾸어 놓았다. 


https://www.atlasobscura.com/articles/how-did-ramen-become-popul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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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4




기고1

미조로가이케深泥池에서 보는 교토의 옛 문화

미츠타 시게유키光田重幸




시작하며


교토에서 산 지 40년 이상이지만, 아직도 교토는 불가사의한 곳이라 생각한다. 천년의 수도라는 겉옷의 너머에 있는 옛 문화, 곧 헤이안 천도보다 훨씬 예전의 이 땅은 '점착질의 어둠'이라 해도 좋을 만큼 필터에 숨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화려한 수도 문화를 연출하기 위하여 그 이전의 문화를 표면에서는 의도적으로 없애 버렸다고 생각하는 쪽이 좋을지도 모른다.


버블 무렵, 교토의 번화가인 시조가와라마치四条河原町 주변에서 땅투기가 있었다. 건물이 무너지기 직전에 근처의부인이 현장감독에게 "이곳의 미이사마(뱀신) 어떻게 하나요"라고 사납게 대들었다고 한다. 내가 사는 후난부府南部에서는 뱀신 신앙이 아직 살아 있어, 이것도 반드시 꾸며낸 이야기라 생각하지 않는다. 기온 마츠리의 주신이지만 소머리를 한 신인 점이 평소 얼마만큼 의식되고 있는 것일까? 어떤 번화가일지라도 생각치도 않은 곳에서 옛 문화가 얼굴을 슬쩍 비치는 것이 교토답다. 


'쿠라마鞍馬의 히마츠리火祭'로 대표되는 교토의 불 신앙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이 많다. 예전부터 나는 '아오이마츠리葵祭'의 근저에 '불의 풍요 의례'가 잠재해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곧 '산성국 풍토기 일문逸文'에 있는 화뢰신火雷神에 의한 다마요리비메玉依姫의 임신 이야기는 <고사기>가 전하는 카무야마토이와레히코노미코토カムヤマトイワレヒコノミコト의 황후 선정의 단계의 에피소드와 다른 듯하나 대체로 같다는 점, 거기에 등장하는 타타라히메라는 신격은 헤이안 시대에 타타라메라고 불렀던 식물이 제비꽃이라는 점으로부터 제비꽃에 관련된 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 다마요리비메가 '제비꽃을 나를 대신하는 것으로 여기세요'라고 꿈에서 이야기했다는 전승이 있는 점. 제비꽃의 꽃은 다갈색 병 모양이고, 두 갈래로 나뉜 잎자루 아랫 부분에 위치한다는 점으로부터,여성의 신격으로서의 필연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 그 제비꽃을 화전 적합지의 지표식물로 가정한다면 '쿠라마의 히마츠리'에서 제창되는 "사이레, 사이료우'라는 성원하는 소리가 순순히 "자, 넣자, 자, 넣겠다(표면적으로는 불을 넣는 것이지만, 별도의 육체적 의미도 있음)"라고 이해되어, '아오이마츠리'와 '쿠라마의 히마츠리'의 수수께끼가 동시에 해결된다는 것을 논했다.


그것은 교토의 원주민이라고도 할 만한 카모賀茂 씨에 관련된 교토의 옛 문화가 지닌 한 요소일 것이다. 다만, 그것을 문헌으로 입증하는 것은 곤란했다. 제비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증한 연구는 과거에 한번도 실시되지 않았는지, 제비꽃의 의미를 언급했던 고문헌조차 전혀 없다. 그러한 중, 카모 씨의 거점에서 그리 멀지 않은 미조로가이케의 이탄층에서 출토된 메밀 꽃가루에 대해서는 가모 씨와 화전을 연결시키는 유일한 '물적 증거'가 아닐까하고 당시의 나는 생각이 들었다. 메밀속은 원래 일본에서는 자생하지 않은 식물로서, 바람에 의하여 날아가는 일이 거의 없는 충매 꽃가루를 가진다. 그 꽃가루가 뒤에 기술하듯이 미립탄과 함께 연못의 퇴적물에서 촐토된다는 건 2000년 이상 옛날에 연못을 둘러싼 산의 비탈이 불태워져, 그와 관련해 메밀속 식물이 재배되었던 유력한증거인 까닭이다.




미조로가이케의 출토품이 말하고 있는 건?


교토시 키타구北区와 사쿄구左京区에 걸쳐 있는 미조로가이케는 평지에 있으면서 빙하시대의 생물상이 짙게 남아 있는 장소로서, 국가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1977년-1980년에 행해진 종합학술조사에 의하여 연못의 바닥에 퇴적된 이탄층에 약 10만 년 분량의 역사가 새겨져 있고,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 그에 포함되어 있는 화산재와 꽃가루 분석의 성과는 <미조로가이케의 자연과 사람>(교토시 문화관광국 1981)에 정리되어 있다.


그 개략은 이러하다. 꽃가루 분석을 담당했던 나카호리 켄지中堀謙二 씨에 의하면, 연못의 주변에서는 몇 번인지한랭한 기후와 온논한 기후가 반복되어, 최종 빙하기인 약 1만 년 전에는 낙엽광엽수림이 퍼져 있었다. 그뒤 '조몬 해진海進'이라 부르는 온난기를 맞이해, 7000년 정도 전에 난지성 조엽수림(상록광엽수림)으로 뒤덮였다. 조몬 만기부터 야요이 시대에 걸쳐서, 틀림없이 땔감과 주거재료로 숲에서 대규모 수탈이 시작되어, 소나무를 중심으로 하는 2차림으로 변했다. 즉, 이미 그 무렵에 196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마을산의 원래 풍경이 시작된 것이다.


이 분석은 킨기 지방 그밖의 사례와도 큰 모순은 아니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다만, 이들의 역동적인 변화의 사이에서 기묘한 변동이 틈으로 살짝 엿보이는 건 최근까지 간과되어 왔다. 그 하나는 1만 년 이상 전부터 증가해 최종 빙하기 무렵에 정점에 이르고, 조몬 만기 무렵까지 계속된 다량의 숯(미립탄)이 퇴적된 것이다. 또 하나는, 꽃가루 분석의 결과로부터 극상림인 조엽수림과는 공존하지 않을 2차림과 초지 식생에 속하는 초목이각각의 시대의 특징을 나타내면서 어느 시기에는 상당히 다량으로 출현하는 점이다(그림1).


그림1 오구라 준이치椋純一(2002)에 일부 추가




전자에 대해서는 교토 세이카精華 대학의 오구라 준이치 씨의 연구에 의해, 그 양적 변화가 상세하게 보고되었다.기존에 산불에 의한 것이라 이야기되어 온 숯의 양이 한랭기에 오히려 급증하는 점, 그 양에는 확실히 시대적 변화 경향이 있고, 본래 확률적으로는 거의 일정, 혹은 온난기에 증가할 산불에 의한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점.즉, 숯의 증감은 단순한 자연현상에 의한 것이란 해석은 곤란하며, 아마 무언가 인위적 요인이 짐작되었다.


또 하나의 2차림과 초지 식생 구성원의 꽃가루 양이 변동하는 것은 지금까지 거의 중시되지 않았다. 오구라 씨는이 문제를 미립탄과 관련지어 처음으로 논한 점에서, 역시 특필할 만하다. 그 연구에서 남겨 둔 최대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그가 이 의미에서는 별로 중시하지 않았던 오리나무속일 것이다. 앞에 적은 교토시의 보고서에서 나카호리 씨는 "산지성 오리나무 종류는 2차림의 구성원이며, 극상림과는 공존하지 않기 때문에 여기에서 볼 수 있는오리나무속은 습지성의 종류이다"라고 했다. 같은 시기에 2차림의 대표적인 구성원인 소나무속의 꽃가루가 조금밖에 출현하지 않는 점으로부터, 나카호리 씨의 견해는 언뜻 보아 올바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리나무속 식물이 산지성인지 습지성인지를 논하는 과정에서,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는 2차림의 구성원인 물푸레나무속이 오리나무속의 증감과 거의 똑같이 행동을 하고 있는 점에서, 나카호리 씨는 언급하지 않았다(오리나무속에 비하여 꽃가루의 양이 적은 것은 물푸레나무속은 충매화이고 꽃가루의 절대량이 원래 적기 때문임). 이 물푸레나무속의 종이 나카호리 씨가 오리나무 종류에서 생각했듯이 역시 습지성 종류라면, 일본에서는 유일한 습지성 종인 들메나무가 된다. 현재 일본 열도에서 들메나무의 분포는 중부지방 이북이며, 1만 년 이전의 한랭기는 별도로, 온난화가 진행된 조몬 해진 이후의 조엽수림 시대의 미조로가이케와 그 주변에서 들메나무가 대량으로 살고 있었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물푸레나무속의 식물은 현재도 미조로가이케 부근에서 예사롭게 있고, 온대 지역부터 난대 지역까지 널리 분포하고 있는 산지성 물푸레나무 종류, 게다가 골똘히 생각해 말하자면 쇠물푸레나무가 중심이라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그림2).


그림2 교토의 쇠물푸레나무. 교토 대학, 花明山 식물원 표본

 

 



밤나무속 꽃가루는 거의 1만 년 전부터 많이 나오기 시작하여 조몬 해진 이후는 오히려 증가하고, 메밀속의 꽃가루가 출현하는 것과 거의 같은 시기 이후 다시 적어진다. 밤나무는 전형적으로 양지에서 잘 자라는 나무로, 너도밤나무와 물참나무의 숲과는 공존할 수 있지만, 조엽수림과는 공존할 수 없다. 조엽수림대에서는 밤나무도 또한 산지성 2차림의 지표식물이다. 충매화이고 꽃가루의 절대량이 적은 밤나무가 조몬 해진 이후의 온난기에 이만큼 나왔다는 건 소나무속 이외의 구성원을 중심으로 하는 2차림이 퍼져 있었다고 생각할 만한 것이다. 소나무속은 부식토 등의 유기물 층이 거의 사라진 토지에서 우점하기 때문에, 조엽수림의 파괴가 곧바로 소나무숲의 성립으로 직결될 리도 없다. 대량의 밤나무속 식물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계속해서 보였다는 것은 유기질을 일정량 이상 포함하도록 2차림을 유지관리했던 사람들이 있었단 것을 의미한다.


이상의 점을 고려하면, 나카호리 씨가 생각한 '오리나무속→습지성 오리나무'라는 전제 그것이 매우 부자연스러워진다.


그럼, 이 오리나무속 식물은 무엇일까? 미조로가이케 주변에는 현재 습지성 오리나무가 약간 있어, 완전히 그것을 배제하기란 어렵다. 그러나 물푸레나무 종류 등과 마찬가지로 산지성 오리나무 종류를 먼저 고려할 만하다. 조몬 해진 이후에도 꽃가루는 계속해서 출현하고 있기 때문에, 난대에서도 온대에서도 생육할 수 있는 종류가 먼저 그 후보가 된다.  곧, 물오리나무와 좀잎산오리나무, 넓은잎오리나무(Alnus sieboldiana), 좀사방오리나무(Alnus pendula) 가운데 어떤 것인지, 또는 23종이 타당할 것이다.


여기에 한 가지 문제가 있다. 산지성 오리나무속 식물은 뿌리에 질소고정능력이 풍부한 방선균을 공생시키기 때문에, 척박한 땅에서도 잘 생육한다. 그 때문에 메이지 이후 사방용으로 식재되어, 현재의 분포에서 과거의 분포를 추정하기가 어렵다. 정확히는, 이들 오리나무속의 꽃가루 형태와 DNA로부터, 어느 종인지 특정할 수 있도록 연구가 진행되길 기다릴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미립탄微粒炭과 여러 꽃가루의 연동적 변화는, 무엇을 의미할까?


미조로가이케의 보링 코어에서는 연대의 지표가 되는 화산재 층이 몇 개나 끼워져 있다. 그 가운데 깊이 360-363cm에 있는 건 아카호야アカホヤ 화산재라고 부르는 약 7300년 전(보정한 뒤의 수치)의 것이다. 깊이 567-568cm에 있는 것은 울릉 오키隱岐 화산이라 부르는 약 1만7백 년 전(같음)의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층상에 퇴적되어 있고, 산상産狀으로부터 1차 퇴적이라 볼 수 있기 때문에 특히 중요하다. 이것보다 깊은 곳에 있는 화산재는 산재하는 경향으로 퇴적되어 있어 2차 퇴적일 가능성이 높다.


미립탄의 양과 반비례하듯이 변동하고 있는 수목은 오리나무속과 물푸레나무속이다. 한편 정비례하듯이 변동하고 있는 것은 사초과와 벼과, 포자식물 같은 풀이다(깊이 800cm보다 얕은 부분에 한함). 오리나무속과 물푸레나무속의 식물은 이미 논했듯이 산지성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변동으로부터 순순히 결론지을 수있는 것은, 1. 오리나무속과 물푸레나무속 식물이 많이 살고 있던 산의 비탈은 반복해서 불탔다. 2. 그 빈땅에 양지를 좋아하는 벼과, 사초과, 포자식물이 번성했다, 는 점일 것이다.


아카호야 화산재보다도 얕은 층에 한정하면, 조엽수림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밤나무속의 꽃가루가 분명히 늘어나기 시작하는 점, 소나무속의 꽃가루(현대에 연결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적송이라 판단해도 좋을 것임)가 점차 증가하는 점으로부터, 밤나무의 선택적 벌채 회피 또는 그 반재배가 행해지고, 병행하여 토지에서 유기물의 수탈이 진행되었다고 보아도 좋다. 곧, 화전 같은 산지의 농경이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앞에 기술했듯이, 밤나무속의 꽃가루는 약 1만 년 전부터 많이 나오기 시작한다. 같은 시기에 칠엽수도 증가하고있기 때문에, 그 무렵부터 두 종의 선택적 벌채 회피 또는 반재배가 행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똑같은 시기에 미립탄의 출현량이 두 번째 정점을 맞이하기 때문에 어떠한 산지 농경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그렇다면, 1만 년 전 이후부터 메밀속 꽃가루의 출현까지 계속된 오리나무속 식물의 꽃가루는 야마나시현 나라다奈良田에서 최근까지 행해졌듯이, 지력 회복을 목적으로 의도적으로 심어졌을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에 비하여 깊이 680cm 부근에서 정점에 이르는 미립탄의 대량 출현은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낙엽성 졸참나무종류가 전성기를 맞이하는 이 시기는, 대륙형 건조 기후가 퍼졌다고 생각하는 견해도 있고, 산불도 고려에 넣어야 할지도 모른다. 중위 화산재라고 부르는 것의 퇴적이 확인되는 시기가 있지만 산재해 있으며, 2차 퇴적의 가능성을 완전히 버릴 수 없기 때문에, 연대를 짐작하기 어렵다. 분명한 건, 아이라 화산보다는 상위이기 때문에, 2만 년보다는 가까운 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 건조 기후라 하더라도 바람에 휘는 일이 적고 불을 붙이기도 나쁜 졸참나무 종류의 숲에서, 이만큼의 산불이 자연적으로 일어났던 것일까? 오구라 씨의 연구에 의하면, 이 시대에도 출토되는 미립탄의 대부분은 초본성이라고 한다. 그러나 '화전의 시작'이라 생각하기도 현재의 자료로는 너무 무모하다. 한 가지 가능성으로 생각할 수 있는 건 '수렵을 위해 의도적으로 일으켰던 산불'이다. 빈땅에 자라던 어린 나무와 참마 종류, 풍부한 풀은 사슴과 멧돼지 등의 동물을 불러모은다. 즉 '잠복하고 기다리는 사냥의 장'으로서 중요하다. 사누키암과 규질암 같은 딱딱하지만 깨지기 쉬운 석기로 큰 나무를 베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만, 형성층 부분까지를 고리 모양으로 자르는 '고리 모양 껍질 벗기기'를 한다면 수목은 말라 죽는다. 그뒤 불을 놓으면 숲을 태우는 건 어렵지 않다. 이만하면 구·신석기시대에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와 같은 '잠복하고 기다리는 사낭의 장'을 정기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반복해서 초원에 불을 놓았던 것이 아닐까?


최근 들어서 미조로가이케의 남서쪽에 펼쳐진 식물원 북쪽 유적군 출토품의 분석이 진행되어, 구석기시대의 석기와 조몬 중기 후반의 토기, 조몬 만기의 옹관묘, 야요이 시대 전기의 토기, 고분 시대 중기의 수혈주거터 등이 발견되고 있다. 현재의 교토시 지역에서 가장 풍부하고 연속된 유적을 볼 수 있는 것이 이 지역이다. 그곳은 또, 카미카모上賀茂 신사와 오카게御蔭 신사(함께 '아오이마츠리'의 거점 신사)를 연결하는 선 위에 있으며, 카모 씨의 거점이었던 지역이기도 하다. 생태학적인 지식을 사용해, 불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 문화를 전하던 카모 씨의모습이 어슴푸레하면서 눈앞에 선연히 떠오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건 나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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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4



제1장

농경과 문화의 전파

타카미야 히로토高宮広土/ 야마다 고로우山田悟郞/ 츠바키사카 야스요椿坂恭代






Ⅰ 남南의 농경(다카미야 히로토)



시작하며


영국의 유명한 고고학자 고든·V·차일드(Childe 1935)는 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 변천한 것을 인류사의 '산업혁명'에 필적할 정도의 대혁명이라 상정하고, '신석기 혁명'이라고 표현했다. 차일드에 의하면, 농경이 시작된 결과, 인구가 증가하고 도시가 생기며, 또한 문명이 발흥했다. 즉, 농경 없이 문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실제로 세계6대문명의 생산기반은 모두 농경이었다. 한편 <총·균·쇠>(다이아몬드 2000) 등의 밀리언셀러 저자 제라드 다이아몬드 씨는 농경의 기원에 관하여 차일드와 180도 다른 견해를 지닌다. 그에 의하면, 농경의 시작은 "인류 역사에서 최악의 실수(The worst mistake in the history of the human race)"이다(Diamond 1987). 교과서적으로 '농경의 시작'은 '진보'처럼 표현되고 있지만, 여기 40년 정도의 인류학자에 의한 수렵채집민에 대한 조사는 다이아몬드의 견해에 기초가 되고 있다. 이 시리즈 감수자인 사토 요우이치로 씨도 제1권에서 "왜, 농경 등이란 '성가신' 일을 시작한 것인가"라고 의문을 던지고 있다(佐藤 2008 5쪽). 노동시간(또는 여가시간), 칼로리를 포함한 영양상태, 위생상태와 건강상태, 사회적인 스트레스 및 식량의 안정성 등의 점을 비교하면 모든 점에서 농경민 쪽이 수렵채집민보다 고생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농경에 따른 장점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단위면적에서 얻을 수 있는 식량이 수렵채집민과 비교하여 뚜렷하게 많다는 점이다(Lee 1968; Diamond 1987). 예를 들면, 농경의 시작에서 중요한 유적인 아브 후레이라Abu Hureyra(시리아)에서는 농경이 시작된 뒤 여성에 대한 신체적 스트레스가 급증했단 점이 판명되었다(Moore, Hilman and Legge 2000). 게다가 농경의 시작은 환경파괴의 시작으로,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환경문제의 근원은 '신석기 혁명'에 있었다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왜, 인류는 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 가는 길을 선택한 걸까? 이 주제는 인류학만이 아니라, 많은 관련 분야에서 대단히 의의가 있는 연구주제가 되고 있다.


적어도 세계 7개소에서 독자적으로 농경이 시작되었단 점이 이해되고 있지만(다이아몬드 2000), 최근의 인류학과 관련 분야에서 '농경의 시작'에 더하여 '농경의 확산'도 가장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다. 간결히 서술하자면 '왜 수렵채집민은 아주 귀찮은 농경을 받아들였을까?'라는 것이다. 농경은 일본 열도의 남쪽에까지 퍼졌다. 이 장에서 대상으로 삼는 '남'이란 큐슈 섬과 타이완 사이에 이어진 류큐 열도의 섬들을 목표로 한다. <조선왕조>에 의하면, 15세기에 여나국與那國에 표류한 조선인은 이 무렵에는 여나국 섬부터 오키나와 본섬의 섬들에서 조와 벼가재배되고 있었단 것을 보고한다(李 1972). 당연히 이들 재배식물은 류큐 열도에서 재배화된 것이 아니다. 곧, '농경의 확산' 결과 가져온 것이다. 여기에서 류큐 열도에서 농경사가 갑자기 중요해진다. 곧, 류큐 열도는 섬들로성립되어 있다. '섬은 자연의 실험실'이라 하듯이, 대륙과 큰 섬과 비교하여 과거에 있던 현상을 이해하기 쉬운 경우가 있다. 본론에서는 아마미奄美·오키나와 제도를 중심으로 류큐 열도에서 있었던 농경의 시작 시기 및 그 요인에 대하여 검토한다. 그렇지만 먼저 배경으로서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의 편년과 식물유체를 회수하는 방법 -부유선별법-에 대하여 소개하겠다.




배경


(a) 편년

일반적으로 오키나와 제도의 선사·원사 시대의 편년은 구석기시대에 시작하여, 구스쿠 시대에 그 막을 연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표1-1). 문제는 그 사이의 시대 명칭으로, 오키나와 제도의 선사시대의 독자성을 나타내는 것을 목적으로 '패총시대'를 이용하는 연구자(金武正紀·当真嗣一 1986: Scheme 2)와 오키나와 제도의 토기문화가 본토의 조몬문화에서 파생된 것을 중시하여 '조몬시대, 야요이-헤이안 병행시대'라고 호칭하는 연구자가 존재한다(高宮廣衛 1992: Scheme 1). 이 글에서는 본토의 여러분이 자주 듣는다고 생각하는 Scheme 1을 사용한다. 또한 아마미 제도의 선사·원사 시대의 문화의 흐름도 대략적으로는 오키나와 제도와 똑같은 흐름이기에, Scheme 1을 사용함으로써 아마미 제도의 선사·원사 시대도 본토와 비교할 수 있다.




오키나와 제도

일본 본토

(홋카이도 이외)

Scheme 1

Scheme 2





구스쿠 시대


야요이-헤이안 병행시대

후반

전반


조몬시대

만기

후기

중기

전기

조기


구석기

구스쿠 시대


패총시대

후기 후반

후기 전반


패총시대

중기

전기

조기

조기

조기


구석기

가마쿠라 시대


고분-헤이안 시대



야요이 시대

만기

후기

중기

전기

조기

초창기


구석기

표1-1 오키나와 제도 원사 시대의 편년




(b) 부유선별법

그리고 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의 변천 또는 과거에 있었던 식물 식이용을 해명하기 위하여 많은 방법이 개발되어왔다. 그중에서도 1960년대 후반에 개발되어 발굴조사에 도입된 부유선별법이라 부르는 방법은 선사학/고고학에 '혁명'을 가져왔다고 이야기된다(Cowan and Watson 2006). 일본에서는 부유선별법으로 알려지고(椿坂 1992), 1970년 전후부터 발굴조사에 도입되었다. 즉 일본 열도에서도 약 40년의 역사가 있는 셈인데, 부유선별법에 관해서는 아직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또는 오해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부유선별법에 대하여 간단히설명하려 한다.


부유선별이란 콜라 플로트나 커피 플로트에 아이스크림이 떠 있듯이 영어의 Float, 즉 '뜨게 하다'에서 온 말이다. 무엇을 뜨게 할까? 주요 목적은 유적에서 샘플로 얻은 토양에서 식물유체를 뜨게하여 회수하는 것이다. 그림1-1은 부유선별 장치의 한 예이다. 이 장치는 바깥쪽의 통과 안쪽의 용기 두 종의 구조이다. 안쪽의 용기 바닥은 1밀리미터의 그물망이 펼쳐져 있다. 안쪽의 용기에 있는 어느 정도 건조된 토양 샘플을 옮기면, 1밀리미터 이상의동물유체와 토기 등은 침전되어 회수되는 것이다. 한편 탄화 종자 등의 가벼운 건 토양에서 떠오르고, 1밀리미터와 0.425밀리미터의 체에서 회수된다(그림1-1의 왼쪽에 이들 체를 겹치게 함). 앞에 기술했듯이, 부유선별법은주로 탄화 식물유체를 회수하기 위하여 개발된 장치인데, 이 방법에 의해 가느다란 탄화 식물 종자를 회수할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1밀리미터 이상의 동물유체와 토기, 석기 또는 옥류 등의 미소한 인공유물도 회수할 수 있어, 일석이조의 유물 회수법이다.


부유선별법은 분명히 체질 방법(Dry Screening)과는 다르다. 후자는 미소한 인공 유물과 동물유체를 회수하는 데에는 적당한 방법이지만, 식물유체를 회수하는 데에는 적절한 방법이 아니다. 실제로 미국의 사례에서 1/4인치(약 6밀리미터)의 체에서 얻은 식물유체와 체를 통과시킨 토양 샘플을 다시 부유선별 처리하여 식물유체를 회수한 바, 후자에서 전자의 50배 이상의 식물유체를 얻을 수 있었다는 보고가 있다(Munson, Parmalee and Yoarnell 1971). 즉, 체질 방법으로는 대부분의 식물유체가 약 6밀리미터의 그물망을 통과해 버리는 것이다. 또한 토양 샘플을 체질함으로써 원래 약한 탄화 종자(또는 식물유체)가 토기나 석기 또는 돌 등에 의하여 파괴될 확률이 매우 높아진다. 체질 방법에 의하여 식물유체를 회수하는 것은 빗나간 셈이다.


다음으로, 부유선별법과 자주 혼동되는 방법으로 워터 세퍼레이션이 있다. 이쪽은 일본에서는 수세별법으로 소개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체로 토양 샘플을 옮기고, 그 토양 샘플에 호스 등으로 물을 끼얹어 토양을 씻어내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수압에 의해 인공유물 등을 깨끗이 한다는 점에서 편리하며, 인공유물과 동물유체의 회수에는적당하다. 그러나 식물유체의 회수에 관해서는 체질 방법과 실질적으로는 다르지 않다. 즉, 식물유체는 그물망을빠져나가 버리는 것이다. 또한 수압을 올린다는 점에서는 식물유체의 파괴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또, 양동이에 토양 샘플을 담아, 그곳에 물을 부어 가라앉는 것을 회수한다는 워터 세퍼레이션 방법도 있다. 이 경우는 떠오른 탄화물을 회수하면 부유선별법이 되지만, 일반적으로는 가라앉은 인공유물이나 동물유체를 토양 샘플에서 회수하기 위하여 행한다. 워터 세퍼레이션 방법은 물을 이용하기에 부유선별법과 착각하는 일이 많지만, 그목적은 체질 방법과 마찬가지로 미소한 인공유물과 동물유체를 회수하는 것으로, 이 목적을 위해서는 적당한 방법이다. 그렇지만 식물유체의 회수에는 적당하지 않다. 자주 '부유선별법을 하고 있다'고 연락을 받아 현장으로 가면, 워터 세퍼레이션이었던 경험이 있다. 이들의 현장에서 워터 세퍼레이션에 의해 회수된 것을 보면, 대부분의 경우 미소한 인공유물과 물고기뼈 등의 소형 동물의 뼈였다.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점은 식물유체를 회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면, 부유선별법이 가장 효율이 좋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오키나와 제도에서 '농경의 시작에 관한 연구를 하고 싶다'고 관게자에게 상담한 바, '오키나와에서는 식물유체는 없다/ 생기기 어렵다'고 들었던 것을 어제의 일처럼 기억한다. 이 시점까지 오키나와 제도에서는 체질 방법과 워터 세퍼레이션 방법은 자주 이용되고 있었지만, 부유선별법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럼 남南에서는 언제쯤 농경이 시작되었던 것일까? 우선 본격적인 부유선별법이 도입되기 이전에 회수된 식물유체로부터 어떠한 해석이 있었는지를 소개하고, 다음으로 부유선별법 도입 이후에 판명된 것을 기술하겠다.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에서 선사·원사 시대의 식물 이용


(a) 식물유체 -부유선별법 도입 이전(1990년대 무렵까지)

부유선별법이 발굴조사에 도입되기 전, 아마미와 오키나와 제도에서는 발굴조사 기간에 우연히, 또는 실시한 예는 적지만 체질과 워터 세퍼레이션 방법에 의하여 식물유체가 회수되었다. 여기에서는 구스쿠 시대 이전과 구스쿠 시대에 대하여 간단히 기술하겠다. 구스쿠 시대 이전의 몇몇 유적에서 식물유체가 검출되어 보고되었다. 예를들면, 니가마시바루苦増原 유적(조몬시대 만기에 해당, 宮城 1977)에서 졸참나무속과 녹나무과(?) 등의 식물유체가 검출된다. 타카미네高嶺 유적과 누바타키 유적(조몬시대 만기에 해당, 渡辺 1989; 1991)에서도 후박나무가 저장구덩이 같은 유구에서 회수된다. 선사시대의 유적에서 보고되고 있는 식물유체는 모두 야생식물에 속하는 것이었다. 한편, 구스쿠 시대가 되면 20곳 이상의 유적에서 식물유체가 보고되었다(松元 2007). 그렇지만 그 보고내용은 "○○구스쿠에서 벼와 보리가 회수되었다"라는 한 줄부터 몇 줄의 보고가 많고, 재배식물이 출토된 것은 알겠지만 구스쿠 시대의 농경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는 수준의 자료는 없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현 오키나와 현립 매장문화재센터 킨죠 카메노부金城亀信 씨의 시도는 특별히 적을 가치가 있다. 1986-1987년에 걸쳐서 토미시로豊見城 마을(현 토미시로시)에 소재하는 타이라平良 구스쿠의 시굴조사에서 킨죠 씨(1989)는 약 24킬로그램의 토양을 샘플로 하여, 5밀리미터와 1밀리미터짜리 그물망의 체로 처리했다. 그 결과, 조(2747알/처리), 보리(503알/처리) 및 벼(165알/처리)를 회수했다. 보리와 벼 등의 조금 대형의재배식물에 더하여, 그는 오키나와 본섬에서 처음으로 조의 검출 및 동정에 성공한 것이다. 게다가 1989-1990년에 걸쳐서 킨죠 씨(1991)는 이토카즈糸数 구스쿠의 발굴조사에서 다시 토양을 샘플로 하여 이번회는 양동이를이용한 부유선별법에 따라 처리했다. 그 결과, 벼(154알/처리), 조(96알/처리), 보리(2837알/처리) 및 콩류(134알/처리)를 얻었다. 킨죠 씨의 시도에 의해 처음으로 구스쿠 시대의 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안타깝게도 그의시도를 계승한 조사는 당장은 실시되지 않았다.


여기에서 부유선별법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전에 회수된 식물유체에서 생각할 수 있는 식물의 이용 및 문제점을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우연/체질 방법/ 워터 세퍼레이션 방법에 의하여 회수된 식물유체에서, 구스쿠 시대에는 보리와 벼 등의 재배식물이 주로 이용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킨죠 씨(1991)의 시도에 의해 벼와 보리 같이 조금 대형의 재배식물에 더하여, 조도 이용되었단 점이 밝혀졌다. 또한 구스쿠 시대 이전은 수렵채집의 시대였을 가능성이 시사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이해된 아마미와 오키나와 제도의 선사·원사 시대의 생업(특히 식물 이용)은 이 정도이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점이 많았다. 예를 들면, 선사시대의 유적에서는 야생의 식물유체만 알려졌는데, 재배식물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일까? 아마미와 오키나와 제도의 선사시대인이 수렵채집민이었다고 한다면, 매우 의의가 깊은 주제를 제공하게 된다. 곧, 세계 대부분의 섬은 농경민에 의하여 식민하게 된다. 그것은 섬의 면적이 수렵채집으로 생존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은 점이 많기 때문이다(Cherry 1981). 아마미와오키나와 제도 같은 섬에서, 선사시대에 수렵채집민이 존재했던 섬은 내가 아는 한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Takamiya 2006). 또한 구스쿠 시대의 농경에 관해서도 다음과 같은 의문이 든다. 구스쿠 시대의 유적에서는 재배식물이 회수되고 있지만, 그 체계는 어떠한 체계였던 것일까? 일반적으로 본토의 야요이 시대의 농경은 벼 중심이라 생각되는데, 구스쿠 시대의 농경도 똑같이 벼가 중심이었던 것일까?



(b) 식물유체 -부유선별법 도입 이후(1990년대- :그림1-2)

앞서 기술했듯이, 킨죠 카메노부 씨에 의하여 시행착오의 과정에서 도입된 부유선별법은, 그 이후의 조사에서 곧바로 채용된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1992년부터 본격적인 부유선별법에 의해 체계적으로 식물유체를 회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조사가 몇 곳의 유적에서 실시되었다. '오키나와(아마미) 제도에서는 식물유체가 생기기 어렵다'는 건 확실했다. 예를 들면, 나자키바루那崎原 유적에서는 약 1600리터의 토양을 샘플링한 것에 반해, 회수된 부유물은 약 120그램뿐이었다. 곧, 평균하여 1리터의 토양에서 약 0.07그램의 부유물뿐이었다(高宮 1996). 다른 유적에서도 부유물의 회수율은 많지 않다. 확실히 식물유체는 오키나와의 유적에서는 '회수하기 어렵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식물유체를 회수하는 일이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점도 분명해졌다. 아래에 부유선별법에 의하여 회수되어 계속 이해되고 있는 '남의 농경'에 대하여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그림1-2 오키나와 제도의 선사·원사 시대 출토 식물유체. 

상단 1-9: 타카치쿠치바루高知口原 패총 출토, 하단 1-14: 나자키바루 유적 출토




먼저, 구스쿠 시대의 농경에 대해서이다. 구스쿠 시대의 유적에서 본격적인 부유선별법이 채용된 유적은 기노완시宜野灣市에 소재하는 모리카와바루森川原 유적이다. 이 유적은 중산왕 삿토察渡의 출생지라고 하는 유적(14-15세기)이다. 도중 경과이지만, 약 1870(알/처리)의 탄화 종자가 회수되었다. 가장 많았던 건 밀로서 약 500(알/처리), 다음으로 조가 약 360(알/처리)였다. 벼는 합계 50(알/처리)였다(高宮 1994). 또한 기노완시의 북쪽 읍인 챠탄마치北谷町에 소재하는 대형 구스쿠의 하나인 챠탄 구스쿠에서는 이것도 도중 경과이지만 약 2만(알/처리)의 식물유체가 회수되었다. 챠탄 구스쿠의 경우는 밀이 가장 많아 1만1천(알/처리) 정도이고, 다음으로조(약 1200알/처리) 및 벼(약 930알/처리)였다(高宮 인쇄중 a). 킨죠 카메노부 씨 외의 결과 등에서 구스쿠 시대의 농경은 잡곡이 중심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렇지만 2002년에 아마미오오시마奄美大島 카사리쵸笠利町(현 아마미시)에 소재하는 아카키나赤木名 구스쿠에서 행한 조사결과에서는 2점,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12-13세기의 산성이라고 하는 구스쿠에서 대규모인 구스쿠의 하나이다. 첫 번째 점은 토양의 샘플 양으로서, 6.6리터라는 매우 소량의 토양에서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치고는 상당한 식물유체가 회수되었던 것이다. 합계 237(알/처리) 회수되어, 그 밀도는 1리터당 34.4(알/처리)나 포함되어 있었다. 두 번째 점은 회수된 식물유체 가운데 대부분이 벼였다는 점이다. 곧, 227(알/처리) 가운데 188(알/처리)는 벼였다. 기타는 조(26알/처리)과 기장(7알/처리) 등이 회수되었다(高宮 2003a). 1980년대에 발굴조사되었던 나키진今歸仁 구스쿠城에서는 보고서에 의하면 주곽主郭에서 대량의 벼가 검출되었다고 한다(金武 1983). 안타깝게도 부유선별법은 실시되지 않았는데, 이들 결과로부터 오키나와 본도 중남부는 잡곡 중심, 북부 및 아마미 제도는 벼 중심인가 하고 생각되었다. 나키진 마을에 소재한 시이나 구스쿠(高宮 2004) 및 요미탄讀谷 마을에 소재한 우간히라 북방 유적(高宮 인쇄중b)에서 회수된 식물유체는 이 가설을 암시하는 것이지만 강하게 긍정하는 것은 아니었다.


2004년부터 2008년에 걸쳐서 나키진 구스쿠에 수반한 마을에서 회수된 식물유체가 분석되었다(宮城·与那嶺 2005; 高宮 2007; 赤嶺·喜名 2008). 그 결과, 마을의 사람들은 잡곡이 주요 식량원이었던 것이 드러났다. 여기에서 상정된 것이 나키진 구스쿠 안의 지배층은 벼, 마을의 서민은 잡곡이란 가설이었다. 지난해의 센다 히로유키千田寬之 씨에 의한 주곽 유래의 토양 샘플 분석 결과는 구스쿠 안의 사람들도 잡곡을 주로 먹었던 듯하다(千田 2009). 현시점에서 구스쿠 시대의 농경은 어느쪽이냐면 잡곡이 중심이었던 것 같다.




농경의 시작 1 -조몬시대


그럼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에서는 언제쯤부터 농경이 시작되었을까? 세계의 많은 섬이 농경민에 의하여 식민된 사실을 바탕으로,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에 처음으로 적응한 사람들은 농경민이었다는 가설을 1993년에 제창했다(高宮 1993). 유적 수를 바탕으로 과거의 인구를 복원한 바, 사람의 집단이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에 적응한 건 구석기시대가 아니라 조몬시대 중기의 끝부터 후기에 걸쳐서라는 결과를 얻었다(高宮 1997a). 이 시기를 <조몬시대 후기>라고 가칭한다. <조몬시대 후기>의 사람들은 농경을 생활의 근원으로 했을까? 위에 기술했듯이, 우연히 검출된 식물유체는 야생식물로 구성되어 있었다. 


부유선별법을 실시했던 주요 조몬 후기 이후의 유적은 아래의 유적이다. 먼저 기노자宜野座 마을에 소재하는 메바루前原 유적(조몬시대 후기)이다. 유구로서 20기 정도의 저장구덩이가 확인되었다. 이들의 유적에서 회수된 식물유체를 동정한 츠지·오마츠大松 두 사람(1999)은 오키나와우라지오가시(Quercus miyagii)가 다수 출토했다고 보고하는데, 재배식물은 검출되지 않았다. 또한 필자(1999)는 물구덩이 유구라고 일컫는 식물 등을 던져 버렸다고 해석된 유구의 식물유체를 분석했다. 저장구덩이 유구와 비교하면 견과류는 적었지만, 역시 모두 야생식물이었다.


다음으로 조몬시대 만기에 해당하는 오키노에라부沖永良部 섬 치나마치知名町에 소재하는 스미요시住吉 패총이다. 이 유적에서는 14동의 수혈주거가 확인되어, 조몬시대 만기가 되면 더욱 정주적인 생활이 영위되었단 점이 이해되었다. 여기에서는 주로 수혈주거로부터 토양을 샘플링했다. 주요 식물유체는 구실잣밤나무 등의 견과류였다. 역시 재배식물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高宮 2006a).


최근 이토 신지伊藤愼二(2006)는 토기의 연속성으로부터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에서 사람의 집단이 처음으로 적응한 시대는 <조몬시대 후기>가 아니라 조몬시대 조·전기라는 가설을 제창하고 있다. 그럼 그 무렵의 식물 이용은 어떠했을까? 기노완시의 미군기지 안에 소재한 아라쿠즈쿠시챠바루新城下原 제2유적은 이 시기의 유적인데, 여기에서도 회수된 식물유체는 야생식물에 속했다(고궁 2006a).




농경의 시작 2 -야요이-헤이안 병행시대

그럼 후속하는 야요이-헤이안 병행기는 어떠할까? 오키나와현 요미탄촌에 소재하는 타카치쿠치바루 패총은 야요이-헤이안 병행기 전반의 유적이다(3-5세기). 류큐 열도에서 최초로 본격적인 부유선별법이 실시된 유적이었다.'부유선별법에 의해 오키나와에서도 식물유체를 회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약 2600리터라는 다량의 토양을 샘플링했다. 결과는 견과류와 후박나무 등의 식물유체로 구성되며, 재배식물은 포함되지 않았다(高宮 1998a). 한편, 8-9세기부터 10세기의 유적인 나하시에 소재한 나자키바루 유적은 타카치쿠치바루 패총 다음으로 부유선별법이 실시된 유적이다. 약 1600리터의 토양 샘플을 회수한 결과, 소량이지만 벼와 조, 밀 및 보리 등이 확인되었다. 게다가 견과류는 포함되지 않았고 마디풀과와 사초과 등의 탄화 종자가 검출되었다. 또한 205기 이상의 뽕나무속 터와 농경에 관련되었다고 해석된 고랑 흔적이 2줄 검출된다. 이들의 자료를 바탕으로 아마 나자키바루 유적의 사람들은 재배식물을 주요 식량원으로 했다고 생각되었다(高宮 1996). 이 두 유적의 분석 결과에의해, 타카치쿠치바루 패총과 나자키바루 유적 사이의 시기에 농경이 시작되었단 것이 시사되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전반에 걸쳐서 이 기간에 속하는 유적에서 토양 샘플이 가능해졌다. 아마미오오시마 카사리쵸(현 아마미시)에 소재한 요우미사키用見崎 유적(高宮 1997b), 마츠노토 유적(高宮 2006c), 아라고安良川 유적(高宮 2005) 및 오키나와현 이에촌伊江村에 소재하는 나가라바루 동패총이었다(高宮 1998b, 2000, 2001, 2002a, 2002b, 2003b, 2006c). 모두 네 유적에서 얻은 토양 샘플을 부유선별 처리했는데, 검출된식물유체는 적었다. 결과적으로는 견과류와 후박나무 등의 야생식물의 유체만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결과로부터,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에서는 나자키바루 유적의 시기에 농경이 시작되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시작은 '돌연'이었다. 여기에서 두 가지 의문이 든다. 우선, 왜 '돌연' 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 변천했을까? 다음으로 나자키바루 유적의 농경이 구스쿠 시대의 농경의 토대가 되었을까? 나자키바루 유적에서 얻은 식물 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던 무렵에는 아마 그러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농경이 받아들여졌을 경우, 그 뒤의 인구 급증이 예측되는데, 실제로 10세기부터 12세기에 인구가 증가했다는 자료가 없다. 즉, 자료의 해석이 올바르다면, 나자키바루 유적의 농경은 일시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마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에서 농경의 시작은 10세기부터 12세기 사이, 또는 구스쿠 시대 직전이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요 몇 년, 아마미오오시마의 북동에 위치한 키카이섬喜界島에서의 발굴조사가 류큐 열도에서는 큰 화제가 된다. 구스쿠 유적군으로 알려진 유적군이다. 키카이섬은 면적 약 55평방킬로미터의 섬이다. 유적군의 면적은 약 10만평방미터 이상으로, 8개의 유적이 확인되고 있다. 9세기부터 14세기 무렵까지 이영되었던 유적으로, 100동 이상의 건물터(그중에는 넓은 주거지도 포함됨), 본토산 토기와 중국 도자기, 활석제 돌냄비, 카뮈야키カムィ焼 등이 보고된다. 다자이후太宰府와의 관련이 지적되고 있는 유적이다(澄田· 2007).


여덟 유적 가운데 야마다나카니시山田中西 유적에서, 2007년에 시도하여 약 80리터의 토양 샘플을 토갱묘에서 회수했다. 그 결과, 보리와 벼가 함께 4(알/처리) 검출되었다. 또한 밀(2알/처리) 및 조(1알)이 회수된다. 재배식물(또는 식물유체)의 검출수는 적었지만, 이 시도로부터 야마다나카니시 유적에서는 농경이 생업이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高宮 2008). 다만, 유적은 키카이섬 안에서도 표고가 높은 곳에 소재하고, 오늘날 사탕수수밭으로 둘러싸여 있다. 아마 오키나와 본섬의 구스쿠 시대처럼, 잡곡이 주요 생업이라 생각되었다. 이듬해 2008년에약 400리터의 토양을 구스쿠 유적군의 하나인 야마다한다山田半田 유적의 토갱묘 등의 유구에서 샘플링하여, 구스쿠 유적군의 생업을 해명하는 데 몰입했다. 먼저, 지난해의 결과에서 이끌어냈듯이, 출토된 식물유체는 재배식물이 주였다. 구스쿠 유적군의 입지 특징에서 예측했던 생업과는 달리, 재배식물 안에는 벼(96알/처리)가 가장 많았다(高宮 인쇄중c). 재배식물 중에서는 다음으로 조(18알/처리), 보리(8알/처리) 및 밀(2알/처리)이었다. 구스쿠 유적군의 생업은 농경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게다가 지난해 센다千田 씨에 의하여 오키나와현 나고시名護市에 소재한 야베메다屋部前田 유적에서 출토된 식물유체가 분류되었다. 역시 11세기 중반의 유적이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식물유체도 주로 재배식물이었다. 다만, 구스쿠 유적군의 두 유적과는 달리, 잡곡 쪽이 많았다(千田 2009). 최신 자료에 의하면, 11세기 무렵에 역시 '돌연히' 수렵채집에서 농경으로 변천했던 것 같다.




농경의 시작 -요인


아마 중부 류큐권에서 농경이 시작되었던 건, 10세기부터 11세기 중반일 것이다. 그럼 왜 농경이 도입되었던 것일까? '농경의 화산'은 인류학, 선사학, 고고학 및 관련 과학에서 '농경의 기원'과 똑같이 가장 관심이 있는 주제이다. 농경의 시작이 '최악의 선택'이었다면, 농경민 근처의 수렵채집민은 왜 이 새로운, 그리고 '최악의' 생업을선택했던 것일까? 세계적인(또는 대륙의) 차원에서는 환경이 복잡한 점, 명확한 경계선이 존재하지 않는 점 때문에 이 요인을 이해하는 일이 곤란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아마미·오키나와 제도는 섬들로 구성되어 있기에, 더 쉽게 요인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에서 농경민과 접촉함으로써 농경이 시작되었다(이른바 문화전파 가설)고 한다면, 농경의시작되었을 가능성은 조개의 길을 통하여 본토의 야요이 문화와 교류했던 시기, 또는 야광패의 교역이 존재했다고 한다면 고분 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타카치구치바루 패총, 나가라바루 동패총, 요우미사키유적, 아라고 유적 및 마츠노토 유적의 식물유체 분석에서 보았듯이, 본토 야요이 문화의 사람들과 접촉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의 사람들은 농경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굳이 말하자면 '돌연' 농경이 시작되었다. 남에서 있던 농경의 시작을 이해할 때, '돌연'이 핵심어가 된다고 생각했다. 1990년대 이후, 오키나와 제도에서 옛 인골의 연구가 두드러지게 진전된다. 일련의 연구 중에서 아래의 3점은 매우 중요한 점이다. 먼저 토이 나오미土肥直美 씨에 의한 선사시대 사람과 구스쿠 시대 사람 및 근세 사람의 비교이다. 근세의 사람들은 현대 오키나와 사람의 직접적 선조이고, 또 구스쿠 시대 사람의 직접적 자손이다. 토이 씨에 의하면 선사시대 사람은 '작은 신장, 연약함, 단두短頭(거의 원에 가까운 모양)'라 특징지을 수 있다고 한다. 한편, 구스쿠 시대 및 근세 사람은 '큰 신장, 튼튼함, 장두長頭'라는 특징을 가진다(安里·土肥 1999). 다음으로 토도 유키오百々幸雄 씨(1992)에 의해 형태 소변이小變異의 연구이다(그림1-3). 이 연구 이전은 일반적으로 아이누, 조몬 및 오키나와 사람들이 하나의 집단을 이루고, 도래계 야요이 사람과 그 자손 및 조선반도의 사람들이 또 하나의 집단에 속한다고 생각했다. 토도 씨(1992)의 연구에 의해, 근세 오키나와 사람은 아이누 및 조몬 사람들의 집단이 아니라 도래계 야요이 사람과 그 자손의 집단에 속한다는 것이 명시되었다. 게다가 Pietrusewsky(1997)은 인본인과 아시아인의 고인골의 계측적인 분석을 실시했다. 이 결과도 종래의 인류학에서는 믿기 어려운 것이었다. 곧, 토도 씨 등의 연구를 지지하는 결과였다(그림1-4). 최근의 형질인류학적 자료에더하여, 언어학자는 약 1세기 전부터 류큐 사투리가 일본 고어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주장해 오고 있다(服部 1959; 外間 1977, Hudson 1994). 호카마外間에 의하면, 류큐 사투리와 본토 사투리의 어휘와 문법 등을 검증한 결과, 둘은 형재자매어라고 생각해도 좋다.


그림1-3 형태 소변이에 의한 집단 관계(토도 1999에서 고침)



그림1-4 계측적 자료에 의한 집단 관계(Pietrusewsky 1999)



형질인류학과 언어학적 자료가 시사하는 바는 무얼까? 필자는 '돌연' 농경이 시작되었단 점에 대한 힌트가 된다고 추측했다. 곧,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에서 농경이 '돌연' 시작되었던 요인은 '장신, 튼튼함, 장두' 및 일본 고어를 모어로 하고, 농경을 가졌던 사람들의 식민이었던 것은 아닐까(高宮 1998c; 2005; 安里·土肥 1999)? 그들은 농경이란 생업으로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에서 적응에 성공하고, 그뒤 단기간에 사카시마先島 제도에도 확산했다. 그러므로 구스쿠 시대가 되어서 처음으로 중부 류큐권과 남부 류큐권이 동일한 문화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가설에 관한 최대의 문제점은 농경민의 식민 시점이다. 식물유체의 분석으로부터 식민의 시점은 10세기부터 12세기 사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언어학자에 의하면 그 시점은 2/3세기부터 8세기 사이라고 한다(部 1959; 外間 1977). 졸저 안에서는 고어는 변경에 남아 있다는 언어지리학적 가설로 설명을 시도했다(高宮 2005). 최근의 <오모로사우시おもろさうし>의 연구에 의하면, <오모로사우시>에는 무로마치 시대의 단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듯하다(阿部 2009). 또한 언어학적으로 일본어의 하행 자음에 대한 류큐 사투리의 p음에 대하여, 전자가 오래되고 후자가 새로운 것이라는 가설을 바탕으로 두 사투리의 분기 년이 나라 시대 이전이라 생각되었는데, 최근의 연구에서는 류큐 사투리의 p음은 사실은 새롭게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中本 2009). 곧 최신 언어학 연구에 의하면 류큐 사투리의 성립은 나라 시대보다 새로울 가능성도 있다. 이 '북쪽으로부터의 식민'을 고고학적으로 검증했던 타카나시高梨(2009)에 의하면 고고학적으로도 지지된다는 결과를 보고한다. 류큐 열도에서 농경의 시작은 북쪽으로부터의 농경민의 식민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마치며


1980년대까지 우연에 의하여 발견된 식물유체로부터 선사시대는 수렵채집의 시대, 그리고 구스쿠 시대는 농경의 시대라고 생각되었다. 1990년대부터 부유선별법이 도입되어, 체계적으로 식물유체가 회수되었다. 이제 십 몇년 동안 계속 이해된 남방 여러 섬 중부권의 생업은, 우선 구스쿠 시대는 확실히 농경이 생업의 기반이었지만, 밀과 조를 중심으로 하는 잡곡이 주로 이용되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오키나와 제도 중북부 및 아마미 제도에서 얻은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 구스쿠 시대의 농경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이들 지역의 자료가 필요하다. 또한 이른바 지배층과 서민의 재배식물 이용도 이후의 흥미로운 주제이다. 


다음으로 우연에 의하여 발견된 식물유체에서 시사된 선사시대의 생업은 수렵채집이란 것이었다. 부유선별법 도입 결과, 이 해석을 강하게 지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점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보면 매우 중요한 점이다. 곧, 아마미·오키나와 제도 같은 섬에서 선사시대에 수렵채집민이 존재했던 섬은 따로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필자(1997)의 해석에 의하면 적어도 약 3000년, 이토伊藤(2006)의 해석에 의하면 5000년 이상 섬의 환경에서 수렵채집민이 존재했던 것이 된다. 그들이 어떻게 섬의 환경에 적응했는지, 더 상세한 분석이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에서 수렵채집으로부터 농경으로 변천하는 일이 일어났던 건 10세기부터 12세기 사이였을 가능성이 계속 밝혀지고 있다. 선사시대에는 본토 야요이 사람/문화라는 농경민과의 접촉이 있었지만 농경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왜 이 약 2세기 사이에 농경이 시작되었을까? 이 요인을 이해하는 핵심어는 '돌연'이었던 것이다. 언어학, 형질인류학 및 최근의 고고학적 자료에 의해 '돌연' 농경이 시작된 요인은 북쪽으로부터 농경민이 섬으로 식민하고, 이 새로운 생업으로 적응했기 때문일 것이다. 


'시작하며'에도 기술했듯이 자주 '섬은 자연의 실험실'이라고 예를 드는 곳이다. 이과계의 실험실에서 얻은 결과가 현실세계에서 채용될 수 있듯이, 섬에서 얻은 결과는 모델로 다른 지역의 과거를 이해하는 지침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농경의 확산'은 '농경의 기원'에 버금가는 가장 중요한 연구 주제이다. 아마미·오키나와 제도에서 농경의 확산이 '농경민의 식민'이었다고 한다면, 일본 열도를 포함한 다른 지역에서 농경의 확산도 이 관점에서 검증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Ⅱ 북北의 농경(야마다 고로우/ 츠바키사카 야스요)




시작하며

1981년부터 1982년에 걸쳐서 삿포로시의 홋카이도 대학 구내에서 사츠몬擦文 문화기(9세기 중엽-10세기)의 사쿠슈코토니강 유적의 발굴조사가 행해졌다. 그들 유구에서 다량의 토양을 채취하여 부유선별 작업이 행해지고,부유물 중에서는 조와 기장 등 다량의 탄화 작물종자가, 침전물에서는 연어의 뼈와 유리치遊離齒를 얻고, 하천에서 연어잡이를 행하는 조금 높은 곳에서 조와 기장 등 잡곡 농경을 행했던 것이 밝혀졌다. 


그때까지도 사츠몬 문화기의 유 적에서 보리, 기장, 자소속 등의 종자가 겨우 출토되어, 사츠몬 문화의 집단이 재배식물을 이용했다는 것이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뒤를 이어 근세 아이누 문화기의 농경이 조방적인 것이라 하고있었기 때문에, 사츠몬 문화의 생업은 하천에서 연어와 송어잡이이고, 텃밭 수준의 작물 재배가 이루어졌던 정도라고 간주되었다.


사쿠슈코토니강 유적에서 다량의 작물 종자가 출토된 것을 계기로 홋카이도 안 각지에서의 발굴조사에서 부유선별 작업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어, 탄화 작물 종자와 연어류의 뼈와 이빨의 출토 보고가 잇따랐다. 사츠몬 문화기에는 하천에서 연어와 송어잡이를 행함과 함께 조와 기장 등을 재배하던 잡곡 농경을 행했던 점, 뒤를 이어 중세부터 근세 전반기(14-18세기 전기)의 아이누 문화기에도 잡곡 농경이 계속 받아들여졌다는 점 등이 밝혀졌다. 


본격적으로 잡곡 농경이 행해진 건 사츠몬 문화기에 들어서부터이지만, 그 이전의 조몬문화와 조쿠조몬문화続縄文의 단계에도 삼과 우엉 같은 대륙 동북부의 졸참나무숲 지대를 분포역으로 하는 재배식물이나 자소속, 메밀 같은조엽수림대를 분포역으로 하는 재배식물을 이용했다. 조몬시대 조기부터 피속을 길들이기 시작해, 조몬시대부터 조쿠조몬시대에 걸쳐서 둥그스름함과 두툼함이 증가해 재배 피에 가까운 형태를 보이는 것도 나타나기 시작했다.또한 사츠몬 문화와 병행하여 오호츠크해 연안에서 전개된 오호츠크 문화의 집단도 보리와 조, 기장을 이용했단 것도 밝혀지게 된다. 작물 종자의 출토 사례 증가에 의해, 대형 보리의 종자에 대해서는 형태의 비교가 가능해지고, 장립과 단립 두 종류의 보리가 존재했음이 밝혀졌다. 게다가 오호츠크 문화의 유적에서도 단립 보리 등이 출토되기 시작한 점으로부터 남의 혼슈 쪽에서 받은 영향만이 아니라, 북의 대륙 동북부와의 교역활동이 있었던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그림1-5 皮性 보리 삿포로시 사쿠슈코토니강 유적(a등쪽 b배쪽)




유적명

시기

보리

기장

수수

網走市

모요로 패총


網走市

ニッ岩 유적


湧別町

川西 유적


常呂町

常呂川 하구 유적


雄武町

雄武 수혈군 유적


枝幸町

目梨泊 유적

刻文期



貼付文



貼付文期



貼付文期



貼付文期



貼付文期

















































































표1-2 오호츠크 문화기의 유적에서 출토된 작물 종자





그림1-6 裸性 보리 아바시리시網走市 모요로 패총(a등쪽 b배쪽)





오호츠크 문화기의 작물 종자


5세기부터 9세기 말에 걸쳐서 홋카이도의 오호츠크해 연안부를 주요 활동범위로 하여 바다에서 수렵과 어로활동을 생업으로 하며, 대륙 동북부와의 교역으로 금속제품과 유리제품 등을 입수했던 오호츠크 문화가 전개되었다. 탄화 작물 종자의 출토는 이 가운데 7세기부터 9세기 말의 각문기刻文期, 첩부문기貼付文의 유적으로 한정된다. 오호츠크 문화의 주거터는 긴지름이 10미터 안팎, 짧은지름이 9미터 안팎의 육각형 내지 오각형이고, 긴지름의 산 쪽에는 큰곰의 머리뼈 등 짐승의 뼈를 신으로 모신 뼈무덤이, 바다 쪽에는 물고기의 뼈와 조개류를 신으로 모신 뼈무덤이 남아 있는 예가 보이며, 탄화된 작물 종자는 주거터 바닥면과 짐승을 신으로 모신 뼈무덤에서 출토된다. 


아바시리시 모요로 패총은 오호츠크 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으로, 2003년부터 6년 동안 사적 정비를 목적으로 한 발굴조사가 행해져, 각문기의 8호, 9호 주거터와 19기의 토광묘, 패총 등이 발굴되었다. 8호와 9호 주거터 바닥면에서는 군데군데에서, 9호 주거터의 큰곰의 머리뼈를 신으로 모신 뼈무덤에서는 집중하여, 여러 종의 야생식물종자와 단립이고 이삭이 유착되어 있지 않은 나성 보리, 조, 기장, 수수, 삼 등의 종자가 출토된 외에, 토광묘의 위에 엎어 놓았던 항아리에서는 부장된 기장의 종자가 출토되었다. 에사시쵸枝幸町, 오무초雄武町, 유베츠초湧別町, 도코로초常呂町, 아바시리시에서 발굴된 각문기에 이은 첩부문기(8-9세기)에 속하는 다섯 유적의 주거터 바닥면·뼈무덤에서도 나성 보리, 조, 기장이 출토되어, 각문기에 쭉 계속해 식량으로 이용되었다는 것 외에, 뼈무덤에서도 의식에 이용되었던 모습을 나타낸다. 




사츠몬 문화란


사츠몬 문화란 토기의 전면에 나무주걱으로 문질러서 귀얄로 바른 자국 같은 흔적이 남은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데에서 연관을 지어 이름을 붙인 토기 문화 이름이다. 그 성립에 대해서는 혼슈에 중심이 있는 하지키土師器 문화가 지방화된 것으로, 홋카이도와 도호쿠 지방 북부 등 율령제의 영향이 희박한 지역에서 7세기부터 11, 12세기 무렵에 걸쳐서 분포했고, 4세기부터 6, 7세기 무렵까지 혼슈의 농경문화와의 오랜 밀접한 교류를 통하여 조쿠조몬문화의 토대 위에서 점차 그 기초가 형성되어 성립했다. 도호쿠 지방의 주거구조나 생업의 변화에 대응하여, 홋카이도의 문화도 똑같이 보조를 맞추어 변화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야요이 시대 전기에는 아오모리현에까지 이르렀던 논벼농사는 츠가루 해협을 넘어서 홋카이도까지 확대된 건 아니었다. 


사츠몬 문화기의 마을 대부분은 충적 저지대를 흐르는 중소 하천을 따라 약간 고지 위에 분포하고, 주거의 구조도 그때까지 원형이나 타원형 수혈 주거에서 4개의 기둥으로 만든 화덕을 지닌 사각형의 주거로 변한다. 수천 년동안 장식되어 온 조몬이 토기에서 사라지고, 또 귀얄로 바른 자국이 남은 토기를 사용하며, 석기를 만들지 않고 금속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풀무의 풍구나 방추차도 출토되는 점으로부터 대장일이나 베짜기 기술이 도입된 것을 알 수 있다. 벼농사가 행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밭에서 조와 기장 등을 주로 재배한 잡곡 농경이 본격적으로 개시되어, 하천에서 행하는 연어와 송어잡이와 함께 생업의 기반이 되는 등 그때까지의 문화와는 내용이 크게 변혁된 시기였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사용하는 철기 등의 금속제품을 혼슈와의 교역으로 입수하지 않으면 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자기완결경제의 일부가 붕괴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했다.


사용된 사츠몬  토기의 형태·문양의 차이를 바탕으로 전기(7세기 후반-9세기 전반), 중기(9세기 후반-11세기), 후기(11세기-13세기)의 세 시기로 구분된다. 




사츠몬 문화기의 잡곡 농경


지금까지 사츠몬 문화 전기부터 후가까지의 50곳의 유적에서 조, 기장, 피, 피속, 수수, 피성·나성 보리, 밀, 쌀, 메밀, 팥, 자소속, 삼, 홍화, 십자화과, 박과, 호리병박 등 16종류의 작물 종자가 출토되고 있다.


시기가 중시되는 유적도 있지만, 마을 유적의 분포가 홋카이도 중앙에서 서쪽으로 한정되는 전기의 17개 유적에서 조, 기장, 피, 피속, 장립이고 과실에 이삭이 붙어 있는 피성 보리, 메밀, 팥, 자소속, 삼, 쌀, 십자화과 등 12종류의 작물 종자가 출토되고 있는데, 쌀은 혼슈에서 가지고 들어온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작물 종자가 출토된 유적도 홋카이도 가운데로 한정된다. 다만 7세기대에는 오타루시 란시마蘭島 D 유적에서 쌀이 출토된 정도이고, 본격적으로 작물 종자가 출토된 것은 8세기에 들어서부터이다. 전기의 단계에서는 조와 기장이 주가 되고 나머지몇 종류의 작물이 공반되는데, 피성 보리와 밀은 겨우 출토되는 정도이다. 


전기의 에니와시惠庭市 가시와기栢木 11 유적의 불에 탄 가옥에서는 바닥면 전역에서 조와 기장의 종자가 약 1만 알 검출되는데, 다른 종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마을 유적의 분포가 홋카이도 가운데에 집중되는 경향을 보이긴 하지만, 그곳을 넘어 이시카리石狩 평야 안의 깊숙한 부분과 아사히카와시旭川市, 일본해 쪽의 오비라초小平町와 도마마에초苫前町 등 홋카이도 북쪽과 동쪽에도 마을을 형성했던 중기에는 앞의 시기에 출토된 작물 외에 홍화, 박과, 호리병박이 더해져 15종류의 종자가 출토되는데, 주가 되는 건 역시 조와 기장이고 피와 피속, 피성·나성 보리, 밀 등을 수반한다. 피와 피속의 출토는 홋카이도 중앙에 한정되고, 밀의 출토는 홋카이도 중앙 및 그 서쪽으로 한정되고, 양성 보리와 짝이 되어 출토되는 예가 많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것이 삿포로시 사쿠슈코토니강 유적으로, 9세기 중엽부터 10세기의 다섯 채의 주거터와 토광, 탄화물의 집적 지점 등에서 기장 5만 알 이상, 조 8만 알 이상, 피성 보리 2만 알 이상, 밀 5천 알 이상이 출토되었다. 또한 쌀을 포함한 11종류의 작물 종자가 출토되고, 농작물의 이용이 활발해진 외에 홋카이도에서는 재배할 수 없었던 쌀도 혼슈에서 가지고 들어와 이용되었단 것을 보여주고 있다. 유적의 옆을 흐르고 있던 옛 하천 터에서는 하천을 횡단하는 모양으로 말뚝이 박아놓은 '어살 모양 유구'와 연어과의 유리된 이빨과 척추뼈도 다량으로 발굴되어, 잡곡 농경과 연어잡이가 행해졌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일본해 연안의 도마마에초 카가와香川 삼선三線 유적과 카가와 6 유적에서는 강치와 물개 등의 바다짐승의 뼈와 고래의 뼈 등과 함께 조와 기장, 나성 보리, 자소속의 종자가 출토되어, 홋카이도 중앙을 넘어서 북으로 진출한 사츠몬 문화의 집단은 바다짐승 수렵을 행함과 함께 잡곡 농경을 행했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홋카이도 중앙의 유적에서는 피성 보리와 밀이 짝을 이루어 출토되는데, 홋카이도 북쪽의 유적에서는 나성 보리가 출토되기는 하지만 밀을 수반하지는 않는다.


후기에는 사츠몬 문화의 집단은 거의 모든 홋카이도 일원에 진출하여 마을을 형성하고, 홋카이도 남쪽부터 동쪽까지의 유적에서 홍ㅎ화를 포함한 15종류의 작물 종자의 출토가 보고되고 있다. 역시 주로 재배된 것은 조와 기장, 피성·나성 보리로서, 유적에 따라서 메밀, 수수, 팥, 자소속, 삼, 홍화 등의 몇 가지가 함께 수반되는 외에, 홋카이도 중앙 및 그 서쪽의 유적에서는 밀, 피, 피속과 혼슈에서 가져온 쌀이 함께 수반된다.


표1-3 사츠몬 문화의 유적에서 출토된 작물 종자




홋카이도 동쪽의 우라호로초浦幌町 十勝太若月 유적에서는 불에 탄 주거터의 화덕 앞에서 항아리에 담긴 상태로 나성 보리가 출토되고, 주거터 중앙의 탄화재 위에서 기장과 자소속, 북서쪽 모퉁이에서 기장이 출토된다. 주거 한가운데에 깔린 판재 위에서 자소속과 기장의 선별을 행하면서 식사를 위해 토기에 담은 보리를 끓이려 하는 떼에 화재가 발생한 것이라 추정된다.


사츠몬 문화기의 작물 종자가 출토되는 상황은 7세기 말부터 9세기 중반까지는 홋카이도 중앙 및 그 서쪽의 유적에 한정되고, 홋카이도 북쪽과 동쪽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것은 9세기 후반 이후부터이다. 유적에 따라서 한 종류의 작물 종자만 출토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몇 종류에서 11종류가 조합되어 작물 종자가 출토되며, 유적에 따라서 재배되었던 작물 구성이 다르다.


지금까지 철제의 괭이날이 14점, 낫이 34점 출토되어 철제의 농기구를 사용하여 조와 기장 등의 작물을 경작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밭터는 확인되지 않는다.


잡곡 농경의 기본 작물이 되었던 것은 조와 기장이고, 나성·피성 보리, 자소속, 삼, 팥 등을 수반하고, 홋카이도중앙에서는 밀과 피, 홋카이도 중앙의 서쪽에서는 밀도 함께 수반되지만, 홋카이도 북쪽과 동쪽에서는 밀과 피가출토되지는 않는다. 또한 재배형 피는 삿포로시, 지토세시千歳市, 아츠마초厚真町 등의 여덟 유적에 한정되고, 피와돌피의 중간 형태를 보이는 피속 종자가 삿포로시, 에니와시, 지토세시, 엔가루초遠輕町의 열 곳의 유적에서 출토된다. 피와 피속은 홋카이도 중앙의 한정된 지역에서 재배되고, 예외적으로 동쪽의 엔가루초에서도 피속이 재배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22개 유적에서 출토된 대형 보리에 주목하자면, 피성 보리는 칸토우에서 도후쿠 지방의 헤이안 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는 것과 똑같은 형태로, 8세기부터 13세기까지의 홋카이도 중앙에서 남쪽에 걸친 일본해 쪽의 사츠몬 문화 유적에서 출토된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태평양 쪽의 유적에서의 출토 사례는 없다. 나성 보리는 7세기부터 9세기의 오호츠크 문화의 다섯 유적에서와, 10세기 이후의 홋카이도 동쪽과 북쪽의 사츠몬 문화의 유적 및11세기 이후의 홋카이도 중앙의 유적에서 출토되고, 홋카이도 중앙을 경계로 하여 서쪽에는 피성 보리가 분포하고, 동쪽에는 나성 보리가 분포하는데, 홋카이도 중앙에서는 11세기 이후 양자가 혼재했던 모습을 보인다. 피성 보리의 계통은 도호쿠 지방에서, 뒤에 기술하는 나성 보리의 게통은 대륙 연해 지방에서 찾을 수 있다.




연해 지방의 보리


대륙 연해 지방의 유적에서 출토된 작물 종자에 대한 보고가 있는데, 그중에서 홋카이도 북쪽과 동쪽의 유적에서 출토된 나성 보리의 계측치에 유사한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것으로부터 1993년에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극동지부 극동제민족역사·고고·민족학 연구소가 보유하는, 연해 지방의 초기 철기시대 전기(기원전 7세기 무렵)부터 금나라 시대(12-13세기)까지의 열일곱 유적에서 출토된 작물 종자 조사를 행했다.


열일곱 유적에서 출토된 작물 종자는 보리, 밀, 호밀, 기장, 조, 피, 수수, 메밀, 팥, 완두콩, 들깨, 삼, 홍화이고, 호밀과 완두콩을 제외하면 사츠몬 문화의 집단이 홋카이도에서 재배했던 작물과 거의 유사한 작물 구성이다.


러시아 연해 지방에서는 초기 철기시대 전기(기원전 7세기 무렵)의 마라야 바드셰스카 유적에서 나성 보리와 기장이 출토되기 시작해, 초기 철기시대 후기(기원전 5-기원 무렵)의 유적에서 나성 보리, 밀, 기장, 조, 팥, 완두콩, 들꺠가, 오리가 물화기(1-8세기)의 유적에서 나성 보리, 기장, 조가 출토되는 등 기원전 7세기부터 8세기까지의 여섯 유적과 발해 시대의 유적에서 나성 보리가 출토되고, 금나라 시대가 되어 처음으로 피성 보리가 더해져 나성·피성 두 보리가 재배되었다는 것을 밝히게 되었다. 연해 지방의 유적에서 출토된 식물 유체의 보고 사례가 증가한 최근에는 발해 시대의 코르바트카 성터 유적에서도 피성 보리, 피가 출토되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고한다. 


오호츠크 문화의 집단이 대륙과의 교역을 행하고, 대륙에서 만든 금속제품 등을 입수했던 7세기부터 9세기 무렵,연해 지방에서는 나성 보리, 조, 기장 등이 재배되고, 금속제픔 둥과 함께 이들의 작물 종자가 홋카이도에 들어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림1-7 나성 보리. 러시아 연해 지방 마라야 바드셰스카 유적(a등쪽 b배쪽)




오호츠크 문화를 흡수했던 사츠몬 문화


오호츠크 문화의 집단이 7세기 무렵부터 9세기에 걸쳐서 나성 보리, 조, 기장 등의 곡물을 이용했단 것은 앞에 기술한 대로이다. 그 무렵 홋카이도 중앙에서 하천에서의 연어, 송어잡이와 함께 잡곡 농경을 행했던 사츠몬 문화의 집단은 조와 기장 등을 재배·이용했는데,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전반의 유적에서는 지금으로서는 피성 보리를 이용했던 흔적은 발견되지 않는다. 홋카이도 중앙의 사츠몬 문화의 집단이 피성 보리의 재배·이용을 시작한 것은 8세기 후반이 되어서부터로, 보리의 이용은 오호츠크 문화의 집단 쪽이 빨랐다. 


오호츠크 문화의 집단이 보리와 기장, 조 등을 재배했던 흔적은 지금으로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대륙과의교역 활동이 활발히 행해진 것은 7세기의 일로, 이후는 별로 활발히 행해졌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있어, 7세기 무렵에 가지고 들어왔던 보리와 기장 등의 작물이 재배되고, 발아할 수 있는 상태로 계속하여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홋카이도 동쪽과 북쪽에 진출했던 사츠몬 문화의 집단은 9세기 후반에는 오호츠크 문화의 집단과 접촉하여 융합을 시작해, 10세기에는 사츠몬 문화가 오호츠크 문화를 흡수하고 두 문화요소가 혼합된 토비니타이トビニタイ 문화가 형성된다. 그 과정에서 진출했던 사츠몬 문화의 집단에 나성 보리 등의 작물 종자가 발아할 수 있는 상태로 계속 받아들여짐에 따라, 10세기 이후가 되어 홋카이도 동쪽과 북쪽에서, 11세기가 되어 홋카이도 중앙의 사츠몬 문화의 집단에 의하여 이와 같은 작물의 재배가 개시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츠몬 문화가 성립할 무렵에 도호쿠 지방 북부에 진출했던 농경문화와의 교류를 통하여 그 기초가 만들어진 것으로부터 농경기술과 작물은 남쪽에서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대륙과의 교역 활동을 행했던 오호츠크 문화의 집단이 더 옛날 시기부터 단립의 나성 보리 등을 이용했단 점이 밝혀졌다. 또한 북쪽으로부터 작물이 도래한 경로도 있고, 7세기부터 8세기에 걸쳐 홋카이도에서는 남과 북으로부터 작물 세트가 도래한 경로가 존재하며, 계통이 다른 작물이 재배되고 있었다. 


이처럼 오호츠크 문화기와 사츠몬 문화기에 보리를 시작으로 한 작물 종자가 남의 혼슈에서, 북의 대륙 연해 지방에서 홋카이도로 건너와, 유적마다 작물 종자의 취사선택이 행해져, 몇 가지의 작물이 묶음이 되어 재배되었던것이다. 두 종류의 보리 분포역에서 밀을 수반하는지 아닌지의 차이는 생육환경을 반영했던 것인지, 작물 이용에문화적 제약이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현시점에서는 알 수 없다.


아이누 민족이 재배했던 기장 중에서 극조생이고 키가 작으며, 받침껍질(護穎)의 색이 자색이고 가장 끝에 털이 난 것이 있는데, 그들의 형질은 중앙아시아와 유럽의 기장에 보이는 특징으로 북방 경로로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을 가진 기장도 오호츠크 문화의 집단이 가지고 들어온 기장이 사츠몬 문화의 집단을 경유하여 아이누 문화에서 사람들에게 전해졌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나성 보리도 홋카이도 중앙의 아츠마초 앗포로厚幌 1 유적의 근세 전반기의 아이누 문화기의 유물 포함층에서 출토되어, 아이누 민족에게 계속 받아들여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기까지 야마다 집필)




콩류의 동정에 대하여 


저습지 유적처럼 특별한 보존 상태를 보이는 유적에서는 당시 이용되었던 식물 유체가 양호한 상태로 출토되고, 인간이 직접 관여했음이 분명한 식물 유체를 검출할 수 있다면 당시의 생활과 환경의 복원이 쉬워진다. 그러나 저습지 유적 같은 특별한 보존 상태의 유적에서 얻은 식물 유체의 정보만으로는 당시의 이용 상태를 명확히 하기에 충분하지 않고, 구릉과 단구段丘 등의 건조한 유적에서 출토되는 식물 유체의 정보 수집이 필수적이다.


홋카이도에서는 1974년부터 오시마渡島 관내 시카베초芽部町(현 하코다테시)에서 초의 교육위원회와 캐나다 토론토 대학 인류학부의 직원이 공동으로 조몬시대 전·중기의 수혈주거터 들의 발굴조사가 몇 년 동안에 걸쳐서 행해졌다. 발굴작업에 일관하여 부유선별 작업이 도입되고, 건조한 유적에서 채취된 토양에서 동정할 수 있는 탄화된 벼과 종자와 견과류, 과실 종자 등의 출토가 알려지게 되어 그 수법이 홋카이도 각지에서 행해졌던 발굴조사들로 급속히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홋카이도에서는 구석기시대부터 근세의 아이누 문화기까지, 약 1만2천 유적의 분포가 알려져 있는데, 그 대부분이 구릉과 주위보다 높고 평탄한 땅, 약간 높은 땅 위에 입지했고, 식물 유체의 보존에 적합한 저습지 유적의 수는 매우 조금이었다. 야생·재배 식물 유체의 출토가 보고되는 유적 수를 보면 분명해지듯이, 약 2백 몇 십 유적에서 식물 유체의 출토가 보고되는데, 이른바 저습지 유적에서의 보고 사례는 십 몇 곳의 유적에 한정되며, 그 대부분이 구릉과 주위보다 높고 평탄한 땅, 자연 제방 위 같은 약간 높은 곳에 입지했던 건조한 유적에서이다. 이와같이 조몬시대부터 근세 아이누 문화기에 걸친 유적에서의 식물 이용과 생활 환경의 복원을 행하기 위해서는 건조한 유적에서 채취한 토양 속에 포함된 탄화 식물 유체를 추출하는, 부유선별 작업이 중시되기 시작했다.


이 절에서는 부유선별법을 사용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하고, 특히 콩과 종자의 동정 결과에 대하여 고찰하며, 앞으로의 과제를 제시해 보려 한다.




콩과 종자의 동정에 대하여


콩과 종자의 동정에 대한 의론은 후쿠이현 미카타초三方町 토리하마鳥浜 패총의 조몬시대 전기의 층준에서 출토된 콩과 종자를 둘러싼 고찰로부터 시작되었다. 토리하마 유적에서는 호리병박의 종자와 함께 탄화된 콩과 종자가 아홉 알 검출되어, 이 아홉 알 가운데 몇 가지가 그 알의 모양과 배꼽의 형태에 의하여 소립의 팥일 가능성을 남기면서 녹두라고 동정되었다. 그뒤 주사형 전자현미경으로 관찰된 종피의 그물 모양 구조 유무 등으로부터 녹두만이 아니라 검은녹두(black gram)의 무리도 포함된다고 한다.


녹두는 말할 것도 없이 인도 원산이라 생각되는 것으로, 일본에서 보면 남방 기원의 식물이다. 이 견해는 토리하마 패총의 호리병박의 존재와 더불어 고고학의 영역에서 이렇다 할 의문도 품지 않고 받아들여지고 있었는데, 작물학의 입장에서 콩과 종자를 연구하고 있는 옛 고치高知 대학 농학부의 마에다 카즈미前田和美 씨는 이 견해에 의문을 나타냈다. 필자는 출토되는 재배식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토리하마 패총에서 얻은 콩과 종자의종피 표면 구조가 녹두라고 동정하는 근거가 된다는 견해에 관심을 가져, 마에다 카즈미 씨가 제공한 현생 녹두 등을 탄화시켜서 주사형 전자현미경으로 관찰했다.


필자가 사용한 현생 녹두는 종피의 표면이 약간 매끄럽고 윤기가 나는 것이었는데, 그중에 그물 모양 구조가 발달하고 흰빛을 띠며 광택이 없는 꺼칠한 표면인 것이 소량 섞여 있었다. 그것이 한 품종의 변이인지 어떤지 알 수없지만, 중국에서 입수한 자료도 똑같은 외견을 보이고 있었다. 이와 같은 두 종류의 유형이 혼재하는 것이 보통이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실험을 진행해 보면, 문제의 종피인 그물 모양 구조는 가열되면 상당한 부분이 판별하기어려워지는 걸 알게 되었다. 가열하는 온도에 따라서는 그물 모양의 구조가 거의 소실되는 예도 있었다.


앞에 기술했듯이, 현생 녹두에는 종피에 광택이 있는 유형과 꺼칠한 표면의 것이 혼재해 있어, 그물 모양 구조를 보이는 건 후자뿐이다. 그에 더해, 매몰 종자의 경우에는 열이 가해져 표피가 박리되어 있는 상태의 것이 많은 점도 고려하면, 출토 콩과 종자에 대해서는 그물 모양 구조를 단서로 삼는 동정 방법은 이용할 수 있는 범위가 매우한정된다. 또한 마에다 카즈미 씨가 시사한 주사형 전자현미경 관찰에 의한 울타리 모양 세포의 형태 차이도 필자의 관찰 능력이 낮기 때문인지 동정의 단서로는 이용할 수 없었다. 




현생 콩과 종자와 비교


출토 콩과 종자의 동정에 대하여, 간편한 방법이 발견된 건 호시카와 키요치카星川淸親 씨가 제창한 작물학의 텍스트에도 그려서 보여주고 있는 형태적 특징의 분류 방법을 적용해, 현생 콩과 종자를 해부하여 비교관찰이 진행되고 나서부터의 일이었다. 


콩과 종자에서는 배를 구성하는 떡잎 안에 있는 첫잎의 위치와 형상에서 종류에 따른 차이가 발견되는 것으로부터, 현생·출토 종자의 양쪽에 대하여, 이 수법으로 동정을 실시해 보면, 동정의 효율은 매우 높아짐이 밝혀졌다.다만 이 방법으로 분류할 수 있는 건 ①팥의 무리, ②녹두의 무리, ③대두의 무리라는 큰 식별이며, 그보다 미세한 종의 판정은 곤란하다. 또한 보존 상황에 따라서 배축과 첫잎이 소실되어 있는 사례도 있어 만능이 아니지만, 종자의 크기와 표면의 형태로 할 수 없었던 식별이 가능해졌다.


여기에서 현생 콩과 종자를 바탕으로 분류 기준을 보여준다(그림1-8, 그림1-9).


그림1-8 현생 콩과의 자료



그림 1-9 팥, 녹두, 대두의 첫잎 비교와 부위의 명칭(星川 1980에 의함)

1: 녹두(일본에서 재배되었던 재래품종)   

2: 팥의 씨앗 -a발아구 b배꼽 c돌기(種瘤) d떡잎 h배축 i첫잎 r어린뿌리

3: 대두의 씨앗 -a발아구 b배꼽 c배꼽줄 r어린뿌리 h배축 i첫잎 d떡잎 db떡잎이 붙은 부분




(A) 팥 Vigna angularis(야생) Ohwi et Ohashi,  새팥 Vigna angularis var. nippoonensis,  풀팥(草アズキ)

[알 모양] 세 종류이지만 기본적으로는 타원형, 긴타원형

[알의 크기] 새팥, 풀팥은 생육하고 있는 환경에 따라서 크기에 차이가 있지만, 중·근세 이후의 재배형 팥은 앞에 기술한 두 종류보다 확실히 크다. 다만, 이러한 크기가 언제부터 출현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 없다.

[종피의 색 등] 새팥, 풀팥은 얼룩무늬가 주이다. 재배 팥에는 얼룩무늬가 적고 주로 적색이 많으며, 흑색과 황색 그중에는 녹색과 황색에 붉은 얼룩무늬가 섞인 것이 있다.

[배꼽의 형태] 세 종류 모두 네모에 가까운 타원형.

[첫잎의 형태] 첫잎은 짧고, 잎끝이 모가 나고, 배꼽의 선에 대하여 비스듬히 위치한다. 첫잎은 떡잎에 대하여 작다(그림1-8-1·2, 그림1-9-2). 


(B) 녹두 V. radiata R. Wilczek, 검은녹두 V. mungo Hepper

[알 모양] 녹두는 약간 사각형에 가까운 타원형이고, 검은녹두는 원형에 가까운 타원형. 생육 환경에 따른 변이의 폭이 넓은 듯하다.

[종피의 색 등] 녹두는 녹색이 많고, 얼룩무늬가 없다. 광택이 있는 것에 거친 표면인 것이 소량 섞여 있다. 검은녹두에는 얼룩무늬가 많다. 녹두와 마찬가지로 광택이 있는 것에 거친 표면인 것이 소량 섞여 있다.

[배꼽의 형태] 녹두는 짧은 타원형이며 오목한 모양. 검은녹두는 긴 타원형이며 볼록한 모양. 

[첫잎의 형태] 첫잎의 끝이 떡잎 중앙부까지 아래로 늘어지는 경향이 있다. 첫잎은 떡잎에 대하여 대형(그림1-8-3·4, 그림1-9-1).


(C) 대두 Glycine max (L.) Merr., 돌콩 Glycine max subsp. soja, 잡초대두(풀)

[알 모양] 돌콩은 긴 타원형, 잡초대두는 타원형이나 원형. 재배 대두는 품종에 따른 변이가 많다. 편평, 타원형,구형인 것이 있다.

[크기] 돌콩은 생육 환경에 따라 크기에 변이가 있는 듯하다. 재배 대두는 품종에 따라서 크기와 형태에 변이가 보이지만 대개 균질하다.

[종피의 색 등] 돌콩은 적갈색이고 흑색 바탕에 갈색의 얼룩무늬에 얇은 껍질이며 광택이 없다. 잡초대두는 흑색. 재배 대두는 흑색, 연갈색 또는 황색, 얼룩무늬.

[배꼽의 형태] 돌콩은 평탄하고 긴 타원형. 잡초대두와 대두는 구형, 타원형.

[첫잎의 형태] 어린뿌리와 배축이 다른 종류에 비하여 좁고 길며 종피를 따라서 구부러지고 끝에 작은 첫잎이 달려 있다. 떡잎으로 축 늘어지는 건 없다(그림1-8-5·6, 그림1-9-3)

 

(D) 동부 Vigna sinensis (L.) ENDL.

[알 모양] 품종에 따라서 크기와 형태에 변이가 있지만 균질하다.

[종피의 색 등] 적색, 흑색, 백색, 갈색, 얼룩무늬.

[배꼽의 형태] 역삼각형이고 약간 볼록함. 종자의 장축에 대하여 하부에 위치한다. 

[첫잎의 형태] 배축은 두껍고, 쑥 내민 끝에 큰 첫잎(그림1-8-7).


(E) 강낭콩 Phaseolus vulgaris L.

[알 모양] 긴 구형, 신장 모양.

[크기] 품종에 따라서 크기와 형태에 변이가 있지만 균질하다.

[종피의 색 등] 백색, 주황색, 진자주색, 얼룩무늬.

[배꼽의 형태] 짧은 타원형. 종자의 장축에 대하여 중앙부에 위치한다.

[첫잎의 형태] 배축은 중간 정도로 두껍고, 쑥 내민 끝에 약간 작은 첫잎(그림1-8-8).




출토 콩과 종자의 동정


다음으로 직접 관찰할 수 있었던 출토 탄화 종자를 소개한다(그림1-10).



그림1-10 출토 콩과 자료. 

팥의 무리- 1 토야마현 오야베마치 사쿠라마치 유적, 조몬시대 중기 말엽; (未), 후쿠오카현 아사쿠라마치朝倉町 카네바金場 유적, 야요이시대 중기 초; (未), 3·4 홋카이도 삿포로시 H519 유적, 사츠몬 문화(서기 9세기 후반-10세기 전반); 2006년 5월, 5 홋카이도 유후츠군勇払郡 앗포로厚幌 1유적, 중세(서기 15세기 전후); 2004년 

대두의 무리- 6 토야마현 오야베마치 사쿠라마치 유적, 조몬시대 중기 말엽; (未), 7 후쿠오카현 아사쿠라마치 카네바 유적, 야요이시대 중기 초; (未), 8 아오모리현 카미키타군上北郡 도호쿠마치東北町 아키비라赤平 3유적, 헤이안시대(서기 10세기 후반-11세기 전반); 2007년 9월, 9 아오모리현 카미키타군 도호쿠마치 아키비라 3유적, 헤이안시대(서기10세기 후반-11세기 전반); 2007년 10월, 10 홋카이도 유후츠군 앗포로 1유적, 중세(서기 15세기 전후); 2004년




(A) 팥(그림1-10-1)

오야베마치小矢部町 사쿠라마치櫻町 유적(조몬 중기 말엽)의 쓰레기장 유적에서 80알 출토. 종자의 형태와 간신히 남아 있는 배꼽의 특징, 첫잎이 작고, 배꼽의 선에 대하여 비슴듬히 위치하는 점으로부터 팥의 무리라고 생각된다. 야노 아즈사矢野梓 씨(전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매장DNA 실험실)는 팥 그것의 연대측정을 3알에서 실시해, SA1:4155±140, SA2:4130±120, SA3: 4130±70B.P.y의 연대측정치를 얻었다.


(B) 대두(그림1-10-6)

사쿠라마치 유적의 쓰레기장 유적에서 1알 출토된 것으로 종자는 편평. 종피와 배꼽은 박리되어 있지만, 종피를 따라서 구부러진 타원형을 한 배꼽의 박리흔과, 종자의 크기로부터 대두라고 판단했다. 대두는 다른 종류에 비하여 첫잎은 극단적으로 작기 때문에, 열이 가해져 거의 남지 않고 알 모양은 끓이면 구형에서 타원형으로 변형되는 특징이 있다. 출토된 것이 한 알이라서 연대측정은 실시하지 않았다.


(C) 팥(그림1-10-2)

아사쿠라마치 카네바 유적(야요이 중기 초)의 37호 흙구덩이에서 한 덩어리로 200알 정도 출도. 종자의 형태는 타원형. 종피와 배꼽이 박리되어 있는 점으로부터 완전한 형태의 종자를 반으로 쪼개서 첫잎을 확인하고, 첫잎이작고 배꼽의 선에 대하여 비슴듬히 위치하는 점으로부터 팥의 무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D) 대두(그림1-10-7)

카네바 유적의 팥이 출토된 것과 똑같은 유적에서 한 덩어리로 출토. 알 모양과 타원형을 한 배꼽 형태의 특징, 크기로부터 대두라고 판단된다. 대두 그것의 연대측정을 행한 결과, 2160±40 B.P.y.의 연대측정치를 얻었다.


(E) 팥(그림1-10-3)

삿포로시 H519유적의 사츠몬 문화(서기 9세기 후반-10세기 후반)의 수혈주거 안의 생활면에서 출토. 종자의 형태는 타원형. 종피와 배꼽이 박리되어 있기 때문에, 종자를 반으로 쪼개서 첫잎의 확인을 행한 결과, 첫잎이 작고 배꼽의 선에 대하여 비스듬히 위치하는 점으로부터 팥이라 판단된다.


(F) 팥(그림1-10-4)

그림1-10-3에 보이는 팥과 마찬가지 유적에서 출토. 알 모양과 배꼽 형태의 특징으로부터 팥이라 판단된다. 종자의 보존상태가 좋으면 첫잎의 확인을 하더라도 동정할 수 있다.


(G) 대두(그림1-10-8)

도호쿠마치 아카히라 3유적의 헤이안 시대(서기 10세기 후반-11세기 전반)의 수로터에서 출토. 알 모양, 종자의크기, 타원형의 배꼽 형태의 특징으로부터 대두라고 판단된다.


(H) 돌콩(그림1-10-9)

그림1-10-9의 대두와 같은 유구에서 출토. 종자는 편평한 타원형이고 종자의 장축에 대하여 약간 하부에 긴 타원형의 배꼽이 있다. 이와 같은 특징은 대두의 선조종인 돌콩의 형태를 나타내는데, 형태에서 상세한 분류는 곤란하다.


(I) 팥(그림1-10-5)

아츠마정 앗포로 1유적의 중세(서기 15세기 전후)의 탄화물 집중구에서 출토. 종자는 타원형이고 반으로 쪼개진상태로 출토. 떡잎 부분에 첫잎이 잔존하고, 첫잎이 작고, 배꼽의 선에 대하여 비스듬히 위치하는 점으로부터 팥이라 판단된다.


(J) 대두(그림 1-10-10)

그림 1-10-10의 팥과 같은 유구에서 출토. 종자는 편평하고, 종자의 장축에 대하여 약간 중앙부 아래에 타원형의 배꼽이 있다. 표피에는 대두 특유의 작은 구멍 모양의 조직을 관찰할 수 있었다. 이들 특징으로부터 대두라고 판단된다.


이상의 동정에서, 혼슈에는 새팥이 분포하고 있는 점, 출토된 팥의 계측치에서 현재의 팥과 비교하여 알의 지름 차이가 크다는 점 등으로부터 새팥, 풀팥일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기 때문에 팥의 무리라고 분류했다.


팥이라 분류했던 것은 조몬시대의 자료와 비교하면 전체에서 알 모양이 커지고 있는 점, 홋카이도에는 새팥이 분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혼슈에서 재배 팥으로 반입되었을 가능성이 고려되는 점으로부터 팥이라 분류했다. 


콩과 종자의 출현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직접적으로 관찰할 수 있었던 콩과 종자는 팥의무리와 대두에서는 조몬 중기의 사쿠라마치 유적에서이며, 홋카이도에서는 사츠몬 문화기(혼슈의 헤이안 시대에 상당)에서이다. 녹두에 대해서는 후쿠이현 토리하마 패총 유적에서 출토된 콩과 종자는 녹두가 아니라, 팥의 야생종 또는 풀팥이라 수정되고 있기에, 지금으로서는 녹두의 보고는 확인되지 않는다.




DNA에 기반한 형태적 동정의 검증


콩과 종자에 대해서는 토야마현 오야베마치 교육위원회에서 제공한 사쿠라마치 유적에서 출토된 조몬시대 중기의 출토라고 하는 탄화 콩과 종자에 대하여 형태와 첫잎을 활용한 동정 결과가, 당시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 매장DNA 실험실의 야노 아즈사 씨가 실시했던 동일 자료의 DNA 감정의 결과와 일치했다. 형태 관찰에 DNA 분석을더함에 의하여 녹두의 무리와 팥의 무리는 종의 구분이 가능해졌다.


야노 아즈사 씨에 의하면, 첫잎 관찰을 위하여 반으로 쪼갠 콩 떡잎의 자료에서, 첫잎이 부착되어 있지 않은 쪽에서는 DNA를 추출하기 어려운데, 첫잎이 포함되어 있는 쪽에서는 높은 빈도로 추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DNA 분석에서 판명된 야노 아즈사 씨의 결론을 그림1-11에 나타내 놓는다.



그림1-11 팥, 녹두와 그 근연종의 계통도. 야노 외 2001에 의함.




앞으로의 전망


부유선별법에 의한 형태적인 관찰에서 팥의 무리, 녹두의 무리, 대두의 무리 같은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고고식물학의 입장에서는 출토된 팥, 대두, 녹두가 재배화의 어느 단계에 있는 것인지, 또는 어떠한 형상을 보이느냐는 점에서 재배종이라 말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지만, 그들에 대해서는 판단 기준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에 탄화 종자에서도 DNA 등을 추출할 수 있게 되었기에, 분자 수준에서의 확인 작업을 실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를 위해서는 부유선별법으로 얻은 재배종자, 견과류 그것의 연대측정을 실시하고, 확실한 연대를 파악하는 일이 필수적이며, 또한 일본 전토의 토기 편년체계에 따른 고고식물에 관한 자료를 축적해 나아가야 할 강한 필요성이 있다. 


최근에는 복제법의 발달에 의하여 토기 바탕흙에 대한 부착 압흔에서 식물 종자 등의 분석이 가능해져, 큐슈에서는 조몬시대 후·만기, 야요이시대의 토기 조각에서 콩과 등의 압흔이 보고되고 있는 외에, 야마자키현에서도 조몬시대 중기의 토기 조각에서 대두와 팥의 무리가 보고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일본에서 재배식물이 언제까지 거슬러 올라가느냐 하는 문제는 예상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복제법의 연구성과에 의하여 재배식물의 출현 시기가 예측되기 시작했다. 앞으로 DNA 고고학의 발달과 복제법과 부유선별법의 새로운 자료의 증가가 기대된다. (이 절까지 츠바키사카 야스요)





마치며


13세기에는 계속 직접 만들어 온 끓이는 도구로 쓰이는 토기가 만들어져, 혼슈에서 입수된 철냄비를 사용하기 시작한 아이누 문화기를 맞이한다. 지금으로서는 홋카이도 중앙 및 남쪽에 집중되는데, 14세기부터 18세기까지의 25개 유적에서 쌀, 야생 보리, 밀, 조, 피, 기장, 수수, 메밀, 팥, 십자화과, 자소속, 삼, 참깨속, 박과 등 14종류의 작물 종자가 출토되고 있다. 사츠몬 문화기의 유적에서 출토된 작물 종자와 비교해도 홍화, 호리병박만 없고, 사츠몬 문화의 집단이 재배했던 작물 구성과 거의 동일한 구성이었던 것을 보여준다. 다만 사츠몬 문화기와 크게다른 것은 사츠몬 문화기에는 피가 비주류 작물이고 조와 기장이 주로 재배된 데 반하여, 아이누 문화기에 주로 재배된 것은 피와 조이고 기장은 비주류 작물이었단 점이다. 주요 작물 교대의 요인은 알 수 없지만, 14세기부터18세기에 걸쳐서 기후가 서서히 악화되었던 점이 하나의 요인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밭에 대해서는 곤도 쥬조近藤重蔵(1771-1829)의 <곤도 쥬조 에조치蝦夷地 관계사료>(1798년 간)에는 "특히 미개인이라 농법이 없고, 나무의 가지, 아이누의 짧은 칼 등을 써서 흙을 평평히 하고, 전체에 씨를 뿌리고, 두둑도 짓지 않고, 거름도 쓰지 않고, 김을 매지도 않는다. 물론 괭이와 낫도 없다."라고 18세기 말경에는 괭이와 쟁기 같은 철제 농기구 없이 나무의 가지나 특유의 단도로 쟁기질하고 두둑도 없는 밭을 만들었던 일이 기록되어 있어, 이들의 기술을 바탕으로 아이누 민족의 농경은 두둑을 짓지 않는 밭을 만들고 제초도 하지 않는 매우 조방한 것이었다고 이야기되었다.


그러나 약 10년 전쯤부터 17세기 중엽에 내린 화산재와 부석에 뒤덮여, 괭이와 쟁기 등의 농기구가 없으면 만들지 못하는 두둑을 지닌 밭터가 17개 유적에서 발굴되는 외에, 숫자는 적지만 철제 괭이와 쟁기가 출토되어 규모는 작지만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여 두둑이 있는 밭을 만들었단 점이 계속 밝혀지고 있다. 농기구를 사용하지 않는 점에서 조방적이라 이야기된 근세 아이누 민족의 농경 활동이 재검토되는 시기가 되고 있다. (이 절, 야마다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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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4




서장

농경의 장에서 생물다양성

사토 요우이치로佐藤洋一郞




시작하며


인간이 재배화한 식물은 참으로 여러 가지이다. 재배화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떠한 형태로 이용했던 것을 포함하면그 수는 아마 몇 만이란 숫자가 될 것이다(堀田 외(편) 1989). 재배화된 식물 중에서는 그뒤 원산지를 떠나 세계의 각지로 운반되어 신천지에 정착한 것도 있다. 이 책에서는 그들 가운데 박과에 속하는 식물, 게다가 잡곡이라 총칭되는 벼과식물 등을 문제삼는다.


매우 흥미로운 점으로 이들 재배식물은 총칭으로 전 세계에 퍼졌지만, 종의 수준에서 보면 분포 지역이 한정되어있다. 몇 안 되는 예외는 박과 안의 호리병박과 잡곡 안의 기장 정도일까? 그들 예외를 제외하면, 저들은 세계의 다양한 풍토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종을 산출하는 전략을 취했다. 한편 벼와 밀 등은 1개 또는 소수의 종 안에 다양한 품종을 분화시켜서 세계에 퍼졌다. 밀 안에서 마카로니밀은 분포가 지중해 연안의 유럽 일대에 한정되지만, 빵밀은 전 세계에 분포한다. 벼도 인디카와 자포니카라는 두 가지 아종(실질적으로는 종이라 불러도 지장이 없음)이 분포의 범위를 비키어 퍼져 있다. 벼, 밀과 이 책에서 다루는 다른 재배식물은 세계에 퍼질 때에 서로 다른 전략을 취했다.


이번 권에서는 이러한 농경의 장에 있는 종과 품종의 다양성을 다루면서, 이들 다양한 재배식물들의 여러 가지 적응의 모습을 조망하려 한다.




일본 열도에서 농경의 기원 


이 권에서는 특히 일본 열도에 관점의 중심을 놓고서 의론을 진행하고자 한다. 일본 열도에서 농경의 기원은 오래 의론되어 왔던 문제의 하나이다. 특히 신석기시대의 전반에 상당하는 조몬시대에 농경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야마노우치 스가우山內淸男(1902-1970) 이래 논쟁적이기도 했다. 일본의 고고학계가 오랫동안 조몬시대의 농경을 인정하지 않아 온 배경에는 논벼농사의 흔적이 조몬시대에는 확인되지 않는다는 경험칙이 있다. 벼농사의 시작=농경의 기원이란 그때까지의 도식에서 보면, 논벼농사가 없다는 사실은 농경 그것이 없었다는 판단으로 이어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1996년, 나는 공동연구자와 함께 밤나무 재배화의 가능성을 지적했다(山中愼介 외, 1999). 유적에서 출토된 밤DNA의 다양성이 현존하는 야생의 밤 집단의 그것에 비교하여 작다는 관찰에 기반한 것으로, 많은 의론을 불렀다. 밤 재배화의 가능성을 지적한 것은 우리들이 최초는 아니다. 이미 사카즈메 나가오酒詰仲男(1902-1965)는 밤재배화의 가능성을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지적하고 있었다(酒詰 1957). 우리가 발견한 것은 출토된 밤의 열매 집단의 DNA 표지의 유전적 다양성이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밤에 한하지 않고 식물이 어떤 DNA 표지를 가졌는지는 외견상 구별은 되지 않는다. 집단 유전학의 이론에 의하면, DNA표지의 유전적 다양성이 저하된 사실은 무의식적인, 그런 강한 선발이 작용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본래는 다양한 DNA 표지를 가지고 있었던 야생 집단 안에서 '열매가 크다' '생산성이 높다' '병에 강하다' 등의 개체를 연속적, 계통적으로 계속 선발한 결과가 DNA 표지의 다양성도 저하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람에 의한 설발이 DNA 표지 등의 다양성을 저하시켰다고 생각할 수 있는 사례는 그밖에도 있다. 벼에서는 Kuroda 외.(2002)와 Muto 외.(인쇄중) 등이 잘 알려진 예이다. 


서일본에서는 벼잎의 세포화석이 30곳 가까운 조몬시대의 유적에서 검출되어, 조몬시대에 벼농사가 있었다는 생각도 받아들여지게 된다(外山 2000). 다만 벼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벼농사가 현재의 그것처럼 사람들의 칼로리를 지탱하는 주곡이었을리도 없고, 더구나 평지 전체에 논이 펼쳐져 있었을리도 없다. '조몬 벼농사'의 모습을 복원하는 것은 상당히 곤란하지만, 논벼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야요이 시대에도 사람들의 먹을거리를 지탱했던 최대의 자원이 도토리였다는 테라사와 카오루寺澤薫 씨(1981)의 지적은 큰 힌트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매우 많은 양의 조몬 토기 등으로 상징되듯이, 조몬시대의, 특히 중기 이후에 사람들은 정주의 정도가 강한 생활을 지내고 있었다는 건 확실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거주 지역의 가까운 토지는 개간하고 교란을 받아, 지금으로 말하자면 '마을'이 되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교란을 받은 생태계에 적응할 수 있는 동식물은 작물과 가축, 또는 그들에 수반하는 잡초와 수반동물에 한정된다. 나는 마을이 생겼던 시점에서 이미 원초적인 농업이 시작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마을의 경관이 그 토지의 원식생과 기후 등에 의해 여러 가지 달랐을 것이란 점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또한 이 주변의 일에 대해서는 5권에서 다시 상세하게 논하겠다.




일본 열도에서 '벼농사 이전'


일본 열도의 원초적 농경을 생각할 때 간과할 수 없는 존재의 하나가 피이다. 피에 대해서는 본래라면 츠바키자카 야스요椿坂恭代 씨에게 집필을 부탁해야겠지만, 지면의 형편과 이 책의 간행 직전에 피의 논고(細谷·佐藤 2009)가 나오게 된 것도 있어 여기에서는 할애했다. 


돌피(Echinocloa drus-galli)의 원산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결정적 증거가 없었다. 야나기타 쿠니오柳田國男가 "피의 역사는 누구나 모두 전혀 지식이 없다"고 할 만큼 연구가 더디었다. 내가 아는 한에서는 유일하게 사카모토 사다오阪本寧男 씨가 '피 일본 열도 원산지 설'라고도 할 만한 설을 내놓은 것이 최초이자 최후이다.


그럼 그 피의 재배화의 시기는 언제일까? 이에 대해서는 크로포드Crawford 외에 의한 종자 크기의 변화 연구에 의하면, 조몬시대 중기 무렵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1983). 종자 크기의 변화는, 곡류에서는 종종, 재배화의 과정에서 일어났던 변화라고 이야기된다. 그것은 크게는 틀리지는 않을 테지만, 엄밀히 말하면 재배화의 이후에 일어났던 과정이란 것이 좀 더 올바를 것이다(Fuller 외. 2009).


그런데 최근, 현존하는 피의 계통의 분석에서도 '돌피 일본 원산설'을 지지하는 연구가 나오고 있다. 노자와 시게키野澤樹 씨는 열도의 각지에 점재하는 돌피의 게통을 다수 모아 그들의 DNA 표지의 다형多型에서 재배형의 돌피가 일본 열도에서 자생하는 야생형 돌피의 계통으로부터 생겼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열도의 북부가 재배화가 일어났던 장소일 가능성을 논한다(Nozawa 외. 2006). 노자와 씨의 연구에서는 대륙부의 연안에서는 피의 DNA 다형이 조사되지 않았기에, 피의 기원지로서 대륙 연안부를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본 열도가 일찍이 피의 재배화의 무대였을 가능성은 충분히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두도 또한 '일본 원산'의 재배식물이다. 아베 쥰阿部純 씨는 대두의 품종이 재배형인 종래의 품종과 그 토지에 있던 야생형 돌콩의 교잡을 반복하여 성립해 왔다고 생각한다(Xu- 외. 2002). 대두는 좁은 일본 열도의 안에서도 여러 가지 지방 품종으로 분화되어 있다. 단바丹波 지방의 검은콩, 검은콩과 일반 품종의 중간형이라 생각되는차콩(茶豆), 야마가타현 쇼나이庄内 지방에 있는 독특한 향을 지닌 '다다차콩' 등은 그 한 예이다. 대두만이 아니라 콩류는 주곡에 버금갈 만큼 중요한 작물로, 이 책 제4장의 카시와기柏木 씨에 의하면, 인류가 식용으로 재배하는 콩과식물은 80가지 정도 있다고 한다. 또한 그 재배의 역사도 곡류에 필적할 만큼 오래된 것이 많다(前田 1987). 일본 열도에서도 이 책의 츠바키자카 야스요 씨나 오바타 히로키小畑弘己 씨의 논고에 있듯이, 대두 외에 팥과 녹두의 무리가 조몬시대부터 이용되어 왔다. 다만 콩과의 작물들은 왜인지 강한 지역고유성을 가진 것이 많고, 지금은 전 세계에 퍼진 대두도 아주 최근까지는 동아시아의 고유종이었다. 


피와 대두가 일본 열도에서 재배화되었을 가능성을 고려하면, 조몬시대의 일본 열도에서도 이미 서서히 재배화가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조문시대의 농경을 완고하게 부정하는 것은 일본 열도만이 특수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과 똑같다. 도대체 어디에서 그러한 사고방식이 나온 것일까?




건너온 농경의 요소


그렇다고 해도, 일본 열도에서 농경의 요소 대부분은 외부에서 건너온 것이다. 곡류에서도 앞에 적었던 피 이외의 대부분, 예를 들면 벼와 밀, 보리, 조, 기장 등은 모두 건너온 산물이다. 뿌리작물인 토란, 고구마 등도 마찬가지이다. 


여러 가지 재배식물이 일본열도에 건너온 걸 최초로 계통적으로 논한 것은 아마 아다치 이와오安達巌 씨일 것이다. 그 저서 <日本食物文化의 起源>(1981)에는 조몬시대부터 근대에 이르는 각 시대에 일본 열도에 건너왔던 재배식물이 열기되어 있다. 이 초판은 1981년으로 30년 가까이 전의 것으로 정보가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보아 정당성을 잃지는 않았다. 시대마다의, 건너온 재배식물의 수를 아다치 씨에 기반을 두고 정리하면 표1과같다. 여기에서도 밝히듯이 나중의 시대에 운반되어 온 것이지만, 건너온 시기로는 7-8세기(아스카·나라 시대)와 18-19세기(에도 후기·메이지 시대)로 크게 두 시대가 있었다. 


시대구분(주석)

건너온 동식물 수

%

조몬시대

야요이시대(기원전 3-기원후 3세기)

고분시대(기원후 4-6세기)

아스카, 나라 시대(기원후 7-8세기)

헤이안 시대(794-1184)

가마쿠라, 무로마치 시대(1185-1543)

남만 무역시대(1544-1602)

전기 도쿠가와 시대(1603-1745)

도쿠가와 후기, 메이지 시대 전기(1746-1900)

현대

24

20

21

48

22

12

16

88

159

46

5.3

4.4

4.6

10.5

4.8

2.6

3.5

19.3

34.9

10.1

총수

456

100

표1 일본 열도에 건너온 재배동식물의 시대별 수(아다치, 1982). 

주석: 시대구분은 연대치를 포함해 아다치의 기술을 그대로 이용. 또한 아다치 이후에 건너온 것은 포함되지 않음.



이렇게 보면, 농경의 도래, 전파에는 세계화의 경향이 이미 아스카 시대부터 밀어닥치고 있었던 것이 재확인된다.



농경에서 북쪽의 요소와 남쪽의 요소 -유전적 다양성의 중요성-


일본 열도에서 농경의 요소를 볼 때, 또 하나 언급해야 할 건 그것이 크게 말하여 남북 두 가지 요소군으로 나뉜다는 점이다. 그 전체상은 이 책에서는 타카미야 히로토高宮広土 씨와 야마다 고로山田悟郞 씨·츠바키자카 씨의 논고에 기술되어 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세 사람의 논고는, 한쪽은 류큐 열도를, 다른쪽은 홋코이도를 중심으로 한 것으로, 그들 양극을 빼면 일본 열도의 농경문화는 일원적이란 견해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래도 나는 일본 열도의 농경의 요소는 남북 두 가지로 나눈다고 생각한다.


한 가지 예는 한 종에 속하는 작물 안에 남북 두 가지의 요소를 가진 작물이 있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예가 오오바 타카시靑葉高(1916-1999)에 의하여 상세한 연구가 행해진 순무, 파 등의 채소들이다. 순무는 전 세계에 널리 분포하는데, 일본 열도를 중심으로 고려하면 서양종 순무와 일본 순무의 계통으로 나눌 수 있다. 양자는 형태적으로도 분화되어 있는 외에, 용도도 다르다. 일본 순무는 찌개와 절임의 재료로 일본 요리에서는 널리 사용된다. 특히 교토의 '센마이즈케'는 일본 순무의 절임으로 유명하다. 한편 서양종 순무는 주로 일본해 쪽부터 동일본의 각지에서 재배되는, 굳이 말하자면 소형이고 추위에 강한 품종군이다. 잎에 '잔털'이라 부르는 가느다란 털이 나는 것도 특징의 하나이다(靑葉 2003). 


두 가지 계통의 경로를 더듬어 찾으면, 일본 순무의 계통은 중국 대륙에서 겨우 도달한 것에 반하여, 서양종 순무는 중국 동북부에서 시베리아를 경유해 유럽에까지 이른다고 생각한다. 즉 두 가지 순무의 계통은 그 계보도, 도래한 경로도 크게 다르다고 생각할 수 있다.


파에 대해서도 비슷한 점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일본에서 재배되는 파의 품종에는 크게 휴면형(겨울철에는 성장을멈춤)의 품종군과 겨울에도 생육을 계속하는 품종군이 있다. 전자는 추운 겨울의 기후에 적응해 뿌리에 흙을 수북히 덮어 재배한다. 이렇게 하여 동해로부터 식물체를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흙을 덮은 부분은 하얘지고, 그곳에 당이 모여 달아진다. 이 계통의 파는 가하군加賀群이라 부르며, 칸토우 이북의 지역에 많다. 한편 녹색의 잎 부분이 많은 계통은 구조군九条群이라 부르며, 서일본을 중심으로 재배된다. 구조 파의 계통은 희고 단 부분이 적다.칸사이 지방에서 스키야키에 흰 파 없이 양파를 넣는 건 구조 파가 흰 파처럼 달지 않기 때문이라고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들 두 가지 계통은 중국 대륙에서도 마찬가지로 위도대에 평행하게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순무와 파의 사례에서는 남북으로 다른 분포를 나타내는 것은 품종이었다. 즉, 종으로서는 일본 열도 전체에 퍼져 있다. 여기에서 소개한 것 같은 남북차를 보존한다고 하는 건 유전적 다양성, 즉 종 안의 다양성을 보존하는 것이기도 하다. 순무와 파 외에도 무가 비슷한 남북 분화를 보이는 것을 이 책 기고4에서 야마기시 히로시山岸博 씨가 기술하여 흥미롭다. 


'남북 분화'는 이미 이 시리즈 제3권 제3장에서 타케다 카즈요시武田和義 씨에게 해설을 부탁한 보리에서도 볼 수 있다. 보리는 곡류로서 세계 제4위의 생산량을 올리고, 거의 전 세계에서 옛날부터 재배되어 온 곡물의 하나이다. 보리 연구의 대가였던 타카하시 류헤이高橋隆平(1910-1999)는 일본 열도의 재래 보리 품종의 지리적인 분포를조사해, 일본해 쪽의 지역에서는 겉보리라 부르는 품종군이 많은 데 반해 태평양 쪽과 세토나이瀨戶內에서는 쌀보리라 부르는 품종군이 많다는 것을 밝혔다(Takahashi 1955 이 시리즈 제1권 지도 참조).


일본 열도의 보리 품종의 분포에 관하여 다카하시의 원칙에는 포함되지 않는 예외가 하나 존재한다. 그것은 야마다 고로 씨가 언급하고 있는, 쌀보리의 존재이다(山田 2009 이 책 52쪽). 쌀보리는 보리의 한 품종 집단으로, 혼슈우 부근에서는 칸토우의 남부부터, 큐슈 남부를 제외한 태평양 쪽에 분포하는 품종군이다. 그런데 어쩐지 이품종군이 기원전 5세기 무렵부터 홋카이도 하고도 동쪽 부분에 있다고 하는 것이다. 게다가 그 기원을 더듬어 가면, 러시아의 연해주에 다다른다고 한다. 라성裸性의 보리가 왜 이 땅에 있는지,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룰 문제의 하나로 기억해 놓고자 한다. 


그럼, 남북차를 볼 수 있는 건 어떤 작물이나 가축만이 아니다. 대저 일본 열도의 잠재식생은 북(동)으로 낙엽광엽수림, 남(서)로 상롭광엽수림이란 식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지금은 숲의 이 분포를 보기 어려워졌지만, 그래도사람이 드문 지역 등에서 방치된 토지의 식생은 원식생에 비슷하다. 게다가 작물과 가축에 수반하는 동식물에도 유사한 남북차를 확인할 수 있다. 요네카와 히로미치米川博通 씨와 모리와키 카즈오森脇和郞 씨는 일본 열도에서생식하는 생쥐의 두 가지 아종에 대하여, 그들의 지리적 분포를 조사했다. 생쥐(M. musclus)에는 무스클러스musclus와 카스타네우스castaneus의 두 가지 아종이 알려져 있다. 일본 열도에서는 1990년대 당시 대략 모리오카시盛岡市 부근을 경계로 그북쪽에는 카스타네우스가, 그리고 남쪽에는 아종 무스클러스가 분포하고 있었다. 다만 재밌는 점으로 중국에서는 분포의 남북 패턴이 달라서, 카스타네우스는 남부에 분포하고 있다. 이 일본과 중국에서 남북의 역전이 왜 일어났는지는 아직 수수께끼이지만, 어쨌든 이와 같은 남북 분포를 볼 수 있다(米川·森脇 1993).




요소

동(북)의 요소

서(남)의 요소

경계선

생태계

산림식생

식재 벚나무


낙엽광염수림(졸참나무)

왕벚나무·많음


상록광엽수림(조엽수림)

산벚나무

피안벚나무·많음


재배식물

순무

보리


벼(주2)

서양종 순무가 존재

밑동에 흰 부분이 많은 파

'서쪽형(전 세계 수준에서:주1)이 있음

겉보리·많음(사츠몬擦文 시대의 홋카이도)

두터운 흙덮기에 저항성 품종·적음

타입1·많음(주3)

주로 일본 순무

잎파

주로 동아시아형

쌀보리·많음

많음

타입4(주3)


동물

연어(주4)

많음

적음


수반종

카스타네우스

무스클러스


표2 남북(동서)로 분화된 일본 열도의 동식물 요소의 예

주1. Takahashi(1955)에 의함

주2. 벼의 종자에 10cm 두께로 흙을 덮었을 때의 출아율(싹이 지상으로 나오는 비율), 佐藤(1993)

주3. 野沢樹(2006)에 의함

주4. 산란하는 하천의 하구





표2에 지금까지 기술한 남북의 경계를 ①부터 ④의 번호로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똑같은 남북이라고 하더라도 그 경계는 물정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다르다. 더구나 이 경계선은 보리 품종에서 '서쪽형' '동쪽형'을 나누는 경계선에 대체로 일치한다. 보리에서 이 경게선은 조선반도 남부를 지나, 중국 대륙에서는 회하와 진령산맥을 지나고 더 서쪽으로 뻗고, 히말라야의 남쪽 산기슭을 지나 인도 북부에 이르고 있다. 나는 이 선을 타카하시의 업적을기리며 '류헤이 라인'이라 부르고 싶다. 


또한 일본 열도의 남의 요소는 전 아시아적인 시야에서 보면 조엽수립 문화의 요소와 겹친다. 북의 요소는 사사키 타카아키 씨에 의하면 '졸참나무숲 문화'의 요소이고(1993) 또한 조엽수림 문화의 남쪽에는 '우기에 잎이 나오는 숲 문화'라고도 말할 수 있는 문화가 펼쳐져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교토의 먹을거리와 農의 특수성 -시론 


그런데 교토는 '남북 두 가지의 일본론'이라고도 할 수 있는 여기에서의 의론 가운데 어느 위치에 있는 것일까? 교토는 우리의 연구소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기에 조금 야릇한 마음이 없지 않지만 여기에서 시론이란 형태로 문제점을 정리하고자 한다. 


교토는 도쿄(에도)나 오사카에 비해 바다에서는 비교적 먼 지역이다. 쇼와 초 무렵까지는 교토시의 남부에 오구라이케巨椋池라는 거대한 연못이 있어 근대까지는 요도가와강을 오르던 배는 지금의 후시미伏見 근처에 배를 댈 수 있었는데, 그래도 오사카만에서 잡힌 물고기 가운데 산 채로 교토로 운반된 건 갯장어 정도였다고 할 수 있다.한편 교토에서는 고등어, 청어, 대구 등을 건조, 또는 염장하여 운반하는 보존식의 문화가 있었다. 그들은 각각 고등어 초밥, 거두절미해 발기어 말린 청어, 대구포 등으로 교토 요리의 식재료로 사용되고 있다. 이들 식재료는 모두 일본해에서 잡은 것으로, 지금의 후쿠이현 츠루가敦賀에서 뱃짐을 풀어 비와호를 경우해 교토로 전해졌다. 요컨대, 교토에는 물고기에 대하여 동(북)의 요소와 서(남)의 요소가 혼재해 온 것이다.


또한 교토를 시작으로 오사카 등 칸사이에서 국믈을 내는 데 사용되는 다시마도 홋카이도 등 북일본에서 수확되어 똑같이 일본해 쪽을 경유해 운반되었다. 한편, 앞에 적었던 순무, 파 등의 채소에 대해 말하면, 이른바 교토 채소라고 할 수 있는 '쇼고인聖護院 순무'도 서쪽형 품종이다. 다만 교토시 북부의 타카가미네鷹峯 마을에서는 흰 파의 계통에 속하는 품종이 옛날부터 재배되었다고 한다. 식물성 식재료에 대해서도 교토는 동서(남북)가 뒤섞였던 토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교토는 과거 1000년 이상에 걸쳐서 천황이 계속 소재하여 각지에서 문화 요소를 쭉 흡수해 왔다. 물론 그 구심력이 쇠퇴했던 시대도 있었지만, 그래도 전체로는 높은 구심력을 유지해 왔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교토가 표2의 경계선 가운데 어디에나 가깝고, 결국은 기후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동서(남북) 두 가지 요소의접점 가까이에 있어 늘 그들을 융합시켜 왔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곧 숲을 시작으로 하는 생물상과 그것에 지탱된 문화의 다양성이 교토의 구심력의 기원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 대표인 두 가지 숲(낙엽광엽수림과 상록광엽수림)의 쌍방을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것도 교토의 큰 특색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더구나 교토 분지의 숲의 변천에 대하여 이 책 기고1에서 코다 시게유키光田重幸 씨가 종래의 해석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코다 씨의 해석이 맞다면, 교토는 태고에는 지금보다 훨씬 강하게 북의 요소에 지배되고 있었을 것이다.


교토에는 고대부터 도래인인 진씨秦氏가 있었다고 하며, 교토시 우쿄구右京区에 있는 태진太秦이 그 땅이라고도 이야기한다. 도래인은 조선반도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말하지만, 그 생물학적인 출신에 대해 상세한 건 알려지지 않았다. '도래인'은 사실은 지금의 유럽의 사람들에 가까웠을 가능성을 검토해도 좋다.




지구 환경문제에 미치는 눈길


그래서 이 책은 "유라시아 농경사"라고 제목을 지은 시리즈의 네 번째인데, 이 시리즈는 지구연에서 연구 프로젝트 '농업이 환경을 파괴할 때'의 성과를 모체로 하고 있다. 지구연의 연구 프로젝트 가운데 하나로서 이 프로젝트도 지구 환경문제 해결에 기울이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프로젝트의 문제의식 전체상은 이 시리즈 마지막 권의 ㅈ베5장에서 소개하고, 여기에서는 '여러 재배식물과 농경문화'라고 제목을 붙인 이 권에 요점을 펴 보이고자한다.


이 책에서 핵심어 가운데 하나는 '생물다양성'이다. 농경의 분야에서 고려하면, 생물다양성은 재배식물의 종류의숫자와 각각의 재배식물에서 품종의 숫자 등으로 이해된다. 고시히카리 일변도의 벼농사 사정은 품종의 다양성 상실이다(이것은 유전적 다양성이라 할 수 있음). 채소에서 제철의 상실, 한 지역에서 행해지는 대규모 재배 등은 종의 다양성 상실의 전형적 사레이다. 오랜 시간에 걸쳐서 생물다양성이 사라지면 작물과 품종의 이름이 사회에서 사라진다. 그에 의하여 전통 요리법과 재배법이 사라진다. 농경에 수반한 의례가 사라진다. 그리고 이들 과정을 통하여 문화의 다양성이 사라져 간다.


1만 년에 걸친 농경의 역사 속에서 인류가 일관하여 행하여 온 것은 농경의 무대인 '마을'에서 서비스를 구하는 행위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생산성 향상을 위한 말하자면 부산물로서 여러 차원에서의 다양성을 필연적으로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인간의 이 행위는 사회집단으로서의 행위일 뿐만 아니라,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국가 권력에 의한 강력한 후원이 있었다. 일본 열도에서는 '논벼농사' 수용의 강제와 그에 대한 사람들의 저항이란 구도도 있어서 이야기는 복잡하고, 단위면적당 수확도 별로 증가하지 않았다(佐藤 2005).이 양상이 일변하는 건 메이지 시대에 들어오면서부터로, 단위면적당 수확량은 그뒤 130년 동안 3배가 되는 대신에 재배되는 품종의 숫자(유전적 다양성)은 대폭 후퇴했다.


그러나 이 130년 동안 다양성의 상실에 의하여 발생할지도 모르는 여러 가지 문제, 예를 들면 병과 해충의 유행에는 두드러진 것이 없었다. 다만 1993년에 북일본을 중심으로 심대한 피해를 발생시킨 냉해에 의한 흉작은 유전적 다양성의 감소가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 해의 냉해는 여름철 날씨가 좋지 않고 벼의 생육이 늦어서 생산이 떨어지는 '지연형 냉해'와 개화 등 생산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돌발적인 저온 등이 내습하여 일어나는 지연형 냉해가 있다. 이 해의 냉해는 지연형의 양상으로 정확히 벼가 개화하는 시기에 '높새바람'(오호츠크 고기압에서 부는 차가운 북동풍)이 불었던 것이 큰 원인이 된다. 재배되는 품종이 다양하고, 또 파종 등의농사에도 다양성이 유지되고 있다면 이 정도의 피해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병과 해충의 큰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 데에는 농약의 개발이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농약은 가령 그 독성이 낮더라도 다량의 에너지를 생태계로 가지고 들어간다는 관점에서는 문제가 남는다. 화학비료의 대량 시용에 의한 환경파괴의 대가로 손에 넣은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이 고려하면 농경, 또는 그에 의한 생산성의 추구는 아직도 환경에 부하를 계속 주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큰 기후변화가 예상되고 있는 현재, 품종의 다양성만이 아니라 작물의 다양성을 일정 정도로 계속 유지하는 농업정책이 매우 중요하다. 다양성의 유지는 생산성에 영향을 주는데,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의 실현에는 그것을 수용하는 사회와 개인의 합의가 그 전제라는 점은 말할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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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3



기고6

풍토에 대한 방황 

-스벤 헤딘과 오오타니 코우즈이大谷光瑞

쿠라타 타카시鞍田崇




"저것은 다른쪽에서… 무의식적인 탐색이었던 것이 아닐런지 생각하고 있다고" -<두 가지의 동시대사>



메이지 41년(1908) 11월 9일 오후 6시, 달빛이 비추는 와중에 일본 최초의 1만 톤이 넘는 호화 여객선으로 같은 해 봄에 준공된 덴요우마루天洋丸가 고베항에 입항했다.


선상에는 스웨덴의 탐험가 스벤 헤딘(1865-1952)의 모습이 있었다(그림1). 명저 <트랜스히말라야>로 알려진 3번의 중앙아시아 탐험을 마치고 3년 남짓한 귀국길에 오르는 참에, 도쿄 지학협회의 초빙을 받아 상하이에서 3일의 항해 끝에 요코하마까지 향하는 도중 잠시 들렀다.


그림1 티베트 민족의상을 입은 헤딘. "오늘 고베에 도착한 스벤 헤딘 박사"로서 메이지 41년, 11월 9일 신문 지면에 게재된 사진(게재지 불명). 헤딘 재단 소장 스크랩북.




도중 기항이라 하지만, 고베에서는 불세출의 대탐험가 헤딘에게 이 날은 일본에서 보내는 최초의 밤이기에, 옛 거류지의 미카도Mikado 호텔에서 환영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같은 호텔에 모였던 고베 측의 유지와 함께 그 도착을 기다렸던 건 '교토에서 온'(<오사카 아사히 신문>, 메이지 41년 11월 10일) 니시혼간지西本願寺 제22세 법주 오오타니 코우즈이(1876-1948)이었다.


헤딘과 코우즈이, 유라시아 내륙에서 수차례에 걸친 탐험을 기도했던 두 사람의 대면. 미카도 호텔에서 그들은 어떤 회담을 나누었을까?


당시 고우즈이는 신장과 몽골을 주요 대상으로 파견된 제2차 오오타니 탐험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이 이듬해인 1909년, 대원인 타치바나 즈이쵸우橘瑞超는 헤딘이 발견했던 누란 고성에 도달해, 저 이백문서李柏文書(중요문화재 <이백척독고李柏尺牘稿>, 그림2)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일본에 왔던 헤딘이 고우즈이에게 보여준 누란의 위치 정보에 의한 것이라 이야기된다. 


그림2 이백척독고. 중국의 정사 <진서晉書> 장준전張駿傳에 기재되어 있는 전량前凉의 서역 장리長吏 이백이 서역 여러 나라의 왕에게 보낸 편지의 초고라고 한다. 함화咸和 3년(328), 중요문화재, 류코큐龍谷 대학 학술자료센터 소장.




헤딘을 마중하려고 고우즈이가 교토에서 고베로 급히 달려간 것도 그러한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무언가 그 이상의, 굳이 말하자면 정신의 친환성 같은 것이 있었던 것처럼 생각된다.


도대체 그들을 중앙유라시아의 탐험을 하도록 자극을 주어 움직인 건 무엇이었을까?


예를 들면, 소년 시절에 눈앞에서 직접 보았던 노르덴시욀드Nordenskiöld의 웅대한 모습이 불러 일으켰던 '이상할 정도의 흥분'(헤딘 <탐험가로서의 나의 생애>)에 대한 기억, 또는 불교가 점점 동쪽으로 세력을 넓힌 경로를 해명할 만한 '불자이면서 아시아인'(德富蘇峰 <史傳大谷光瑞師>)이라는 자각.


탐험으로 두 사람을 휘몬 정신적 배경을 사전史傳은 그처럼 말해 왔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할 의도는 없지만, 그것만으로는 죄다 말하지 못하는 집요함을 가지고 그들은 인적미답의 땅을 지향했다. 명확한 목적의식을 넘어무언가가 그들을 사로잡아, 마치 열에 들뜬 듯이 두 사람의 혼은 익숙한 모국을 멀리 떠나 다른 풍토에 있는 유라시아의 오지를 계속 방황했다.


그리하여 탐험이란 용맹한 단어의 맞은편에서, 정처없이 방황하는 그들의 혼은 만났다. 그런 생각이 든다.


고베에서 시작해, 그뒤 1개월에 걸쳐서 일본에 머문 헤딘에게는 직접적 교류는 아니지만 늘 고우즈이의 그림자가붙어 다녔다.


아니, 일본에 도착하기 전부터 그러했다.


앞서 기술했듯이 공식적으로 헤딘이 일본에 온 이유는 됴코 지학협회에 의한 초빙이었는데, 같은 협회의 대표로서 대륙에서부터 그에 수행한 니시혼간지 출장원 호리 켄유堀賢雄는 고우즈이와 함께 유럽에 유학하고, 그 귀로에 감행한 제1차 오오타니 탐험대(1902-1905)에서 와타나베 텟신渡辺哲信과 함께 타클라마칸 사막을 종단한 인물이었다. 호리는 일본에 머물 때에도 통역으로 헤딘의 행선지에 동행한다.


헤딘의 체재 일정은 이동과 단기간의 방문지를 제외하면, 도교 지학협회 주최의 강연회와 저녁만찬 등 공식행사가 거듭되었던 도쿄에서의 2주일과 니시혼간지를 시작으로 교토 시내 및 킨기 각소를 방문한 교토에서의 1주일, 크게 이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고우즈이와의 관계에서 말하면 물론 후자가 중요해지지만, 그것은 다음으로 기약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도쿄에 체재할 때에 연관된 에피소드를 적어 보겠다.





일본 옷을 입은 탐험 박사


미카도 호텔에서의 환영회 이후 덴요우마루에서 하룻밤을 보낸 헤딘은 다음날인 10일 저녁에 고베항을 출발, 12일 요코하마항에 입항했다. 공식적으로 도쿄에 들어간 건 15일이 되어서지만, 그 전날인 14일 숙소로 잡았던 요코하마 스웨덴 공사관에서 상경하여 니혼바시日本橋의 미츠코시三越 고후쿠텐吳服店을 방문한다.


"대탐험가 헤딘 박사는 이미 기록한 것처럼 14일 오전 9시 30분, 스웨덴 공사 및 부인과 동반하여 상경, 바로 마차를 타고서 미츠코시 고후쿠텐으로 향했다. 그 가게에서는 전날 미리 준비하도록 해, 접대계인 점원 타카야나기高柳 및 이즈미야泉谷 부부(아내는 독일인)가 현관에 마중하여 3층 사이로 청해, 대저 내빈 오오모리大森 박사 부부, 츠보이坪井 박사, 야마사키山崎 이학사 부부, 오가와小川와 야마가미山上 두 이학사, 호리 켄유 씨 등과 함께 가게 안을 안내했다."(<시사신보時事新報>, 메이지 41년 11월 15일 *읽기 좋게 적당한 구절점을 보완했다. 이하 신문에서 인용한 내용도 마찬가지)


동행했던 건 스웨덴 공사 부부 외에 지진학자인 오오모리 후사키치大森房吉 부부를 시작으로 인류학자 츠보이 쇼우고로坪井正五郞, 지리학자 야마사키 나오마사山崎直方 부부, 오가와 타쿠小川琢治, 야마가미 만지로山上萬次郞 등 도쿄 지학협회 소속의 각원, 그리고 호리 켄유였다. 가게 안을 순람한 일행은 그 가게의 사진실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오찬 자리에 도착했는데, 일본 요리에 흥이 났는지 식사 이후 헤딘은 새삼스럽게 사진실에 들어가 오가와의 하오리를 빌려 가게 안에 마련된 일본 옷을 입고, 부채를 한 손에 쥐고서 홀로 기념촬영을 했다(그림3). 오오모리, 야마자키의 두 부인을 독촉해 다시 함께 촬영할 정도로 신명이 났던 듯하다.


그림3 일본 옷을 입은 헤딘 씨. 메이지 41년 11월 14일, 도쿄 미츠코시 오후쿠텐에서 가게에 비치된 일본 옷은 입고 촬영, 다음날 15일의 <시사신보>에 게재되었다. 하오리는 동행했던 오가와 타쿠지의 것이라 한다. 헤딘 재단 소장 스크랩북.





"당일, 혼간지 호리 켄유 스님은 박사에게 줄 만한 일본 옷 한 벌을 그 가게에 주문했는데, 하오리는 검은 비단 이중에 다섯 개의 무늬, 검은 비단 이중의 상의, 금실과 은실로 무늬를 짠 띠, 센다이 특산 견직물로 만든 하의로 매우 공을 들인 것이며, 하오리의 무늬는 박사가 기사 작위를 받았을 때 황제에게 받은 문양을 기본으로 하여 도안한 것으로, 약간 긴 모양의 방패 모양으로 상부에 지구를 그리고, 중앙에 은색 띠를 비스듬히 긋고, 띠의 아래에 3개의 조개 모양을 늘어놓아서 자못 재밌는 고안이다." (<중외일보中外日報>, 메이지 41년 11월 17일)


헤딘은 예전부터 일본의 의복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고, 미츠코시를 방문했을 때 호리의 주선으로 일본 옷 한 벌을 맞추게 되었는데, 위의 인용에도 있듯이 학계에 공헌한 공으로 1902년 귀족의 반열에 들었을 때 스웨덴 황제 오스칼 2세에게 수여받은 휘장을 바탕으로(그림4) 일부러 특별주문한 가문의 문양을 고안할 만큼 심혈을 기울인 듯했다. 고등문관의 초임 봉급이 50엔 정도된 당시의 금액으로 '가격 300엔'(<京都日出新聞>, 메이지 41년 12월 3일)이었다고 한다. 


그림4 헤딘 씨의 일본 의상의 문양. 왼쪽 아래의 그림은 미츠코시에서 지었던 일본 옷에 들어간 가문 문양의 당초 도안. 미츠코시 점원과 상담한 결과, 새 모양의 투구 부분을 생략하고, 아래쪽의 방패만 흰색 원의 안에 나타내게 되었다. <時事新報>, 메이지 41년 11월 15일. 헤딘 재단 소장 스크랩북



고우즈이가 기증한 물품이었다(그림5).


그림5 일본 옷을 입은 헤딘. 일본에 체재한 기념으로 교토 기온祇園 마루야마円山의 나루이成井 사진관에서 촬영했다. 몸에 걸치고 있는 일본 옷은 도쿄 미츠코시 오후쿠텐에서 지었고, 고우즈이에게 선물을 받은 것. 메이지 41년 12월 6일. 스벤 헤딘 재단




츠키지니시혼간지築地西本願寺에서


다음날 15일 오후에 헤딘은 공식적으로 도쿄에 들어갔다. 그 이후 도쿄에 체재한 일정에서 주목되는 것을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15일 환영식(도쿄 지학협회 회관), 환영만찬회(華族會館)

16일 코우쥰샤交詢社 오찬회(동 회사), 도쿄 제국대학 강의, 외무상 만찬회(외무상 관저)

17일 시가 시게타카志賀重昻 오찬회(동 관저), 와세다稻田 대학 방문, 영국 대사 만찬회(영국대사관)

18일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대학 방문, 도쿠가와 요리미치德川賴倫 후작 오찬회(동 관저), 만찬회(요코하마 스웨덴 공사관)

19일 오찬회(오코하마 스웨덴 공사관), 도쿄 지학협회 강연회(청년회관)

20일 닛코日光 방문 

21일 위와 같음

22일 칸인노미야閑院宮 오찬회(동 궁저), 만찬회(요코하마 스웨덴 공사관)

23일 제국교육회 환영회(동회 회관), 문부성 차관 초대회(제국 호텔)

24일 도쿄 제국대학 오찬회(코이시카와小石川 식물원), 고등사범 방문, 다과회(精養軒), 송별회(紅葉館)

25일 미츠이 하치로우에몬三井 八郎右衞門 오찬회(미츠이 집회소), 송별 만찬회(화족회관)

26일 궁궐에 가서 메이지 천황 알현, 노기乃木·도고東鄕 두 대장 오찬회(제국호텔)


닛코 방문을 제외하면 연일 강연과 파티로 헤딘은 몹시 바빴다.


그런 나날이 시작되자마자 16일 교바시京橋 코우쥰샤에서의 오찬회에서 돌아오는 길, 헤딘은 오가와 타쿠지, 야마사키 나오마사 등 지학협회의 동행들과 함께 호리 켄유의 안내로 '츠쿠지나루 니시혼간지'(<시사신보>, 메이지 41년 11월 17일), 곧 츠키지니시혼간지를 방문한다.


"이 절은 지난 11일부터 종조宗祖의 보은강으로 16일은 그 마지막 날에 해당하고, 특히 15일의 기일 전날 밤부터는 법주 오오타니 고우즈이 스님의 대리로 그의 형제인 적덕원 오오타니 손유우大谷尊由 스님, 교토에서 왔다. 근식勤式 중이어서 박사는 그 모습도 보고, 또 참배를 드렸다." (<시사신보> 게재)


츠키지혼간지에 도착했던 헤딘은 고우즈이의 동생 손유우가 다수의 승려와 함께 수행하는 근행의 진행을 지켜보면서 광대한 본당 내부가 일반 신도로 가득찬 모습에 압도된 듯하다. 보은강에 참여하는 사람들 속에 그도 구면인 후쿠시마 야스마사福嶋安正의 아내도 있다는 것을 호리에게서 듣고서 '그런가, 그런가'라고 더욱 감동한 모습을보였다고 한다. 후쿠시마는 육군 정보장교로 인도 시찰을 정리한 <인도기행>을 쓴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또 본당 내부 오른쪽에 책상을 놓고서, 신자가 내는 쌀과 돈 등을 거두고 있는 곁에 다가가, 시물로 금화를 끄집어 내려 하였는데, 야마사키 박사 등께서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고 말렸다. 이리하여 박사는 그 건축의 장대함을 칭찬하고, 이 본당은 메이지 이후 3번 화재가 나서 세번째 신축한 것이라는 설명을 호리 스님에게 듣고서, 종교의 힘이 크다는 걸 느끼며, 또 여기저기 구경하면서 그동안 옆을 지나가는 소아의 머리를 누르고 턱을 쓰다듬는 등 애교를 부리며, 다시 휴게소에서 휴식한 뒤, 이날 밤 강연회를 열어야 하는 도쿄 제국대학으로 향했다." (같은곳에 게재)


헤딘이 방문했던 츠키지혼간지는 관동 대지진을 화재가 일어난 뒤에 고우즈이의 지도를 받으며 재건된 현재의 그것과는 물론 다르다.


하지만 이 당시 고우즈이는 츠키지혼간지 재건 때에도 계승되는 디자인을 충분히 포함시켜, '이 나라에 둘도 없는 진귀한 건물'(이토 주타伊東忠太)이라 평가된 새 별장, 니라쿠소二樂莊(그림6)를 로코산六甲山 기슭에 계속 건설했다. 굳이 마음대로 상상하여 말한다면, 츠키지혼간지의 '장대'함을 칭찬했던 헤딘의 뇌리에는 그 전모를 드러냈던 니라쿠소를 고베의 먼바다에서 우러러 보았던 기억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림6 니라쿠소 본관. 고우즈이의 새 별장으로 메이지 41년 3월 17일 기공, 헤딘이 귀국한 뒤인 이듬해 메이지 42년 9월 20일에 준공했다. <니라쿠소와 오오타니 탐험대 Ⅱ>(아시야芦屋 시립미술박물관)에서


잠깐이지만, 보은강을 할 때 츠키지혼간지를 방문했던 일은 도쿄 체재 이후에 교토에서 재회할 고우즈이의 경력을 아는 절호의 기화가 되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헤딘은 도쿄를 떠나 철도로 교토를 향하는 길에 나고야에서 하차해, "혼파혼간지本派本願寺(니시혼간지)의 전도대회에 출석하여 그 자리의 강연을 하는"(<시사신보>, 메이지 41년 11월 24일) 준비도 갖추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고우즈이 자신도 지학협회 회원이다. <일본풍경론>으로 알려진 시가 시게타카가 강조하듯이, 확실히 헤딘은 '도쿄를 떠나서도 일본에 체재하면서는 지학협회의 초빙객'(<大阪每日新聞>, 메이지 41년 11월 27일)이었다.


하지만 일본에 체재할 때 그의 마음을 사라잡았던 건 어디까지나 오오타니 고우즈이 그 사람은 아니었을까? 교토에서 고우즈이를 방문할 때 헤딘의 모습을, 어느 신문은 이렇게 전한다. "탐험 박사 헤딘 씨는, 일본에 와 앞서서혼파혼간지의 법주에게 향하여, 고승을 알현하기 위해 도선하고 타전이 오는 사이, 어제 아침은 그 기다리고 기다린 법주와 면회하는 날이 되어, 특히 기쁜듯이 보였다"(<京都日出新聞>, 메이지 41년 12월 3일)라고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츠키지혼간지에서 도쿄 지학협회의 야마사키가 불전을 만류했다는 에피소드는 매우 상징적인 이야기처럼 생각할 수 있다. 


츠키지혼간지 방문으로부터 10일 뒤, 드디어 도쿄를 떠나기 전, 시바芝의 코우요우칸紅葉館에서 개최된 도쿄 지학협회 주최의 송별만찬회 자리에서 헤딘은 앞서 미츠코시에서 지었던 고우즈이가 기증한 일본 옷을 입고 나타났다.


이때 공표된 옷을 교토에 머물며 헤딘은 반복해 착용한다. 니시혼간지에서 고우즈이를 방문했을 때에도 몸에 걸치고, 그 가족과 함께 기념촬영했다(그림7). 그곳에서는 고우즈이의 분신처럼, 일본에 머물던 헤딘에게 붙어 다니던 호리 켄유의 모습도 있었다.


그림7 니시혼간지를 방문했던 헤딘. 앞줄 왼쪽부터 고우즈이의 누이동생 타케코武子, 헤딘, 고우즈이의 아내 카즈코籌子, 고우즈이. 뒷줄 오른쪽 끝은 호리 켄유. 메이지 41년 12월 2일. 스벤 헤딘 재단




(후기)

이 기고는 스톡홀름의 스벤 헤딘 재단이 소장하는 헤딘의 일본 방문 당시의 신문기사(1908년 11월 6일-12월 18일)의 스크랩북을 주요 참고자료로 했다.


전부 382건으로 이루어진 수록기사의 대부분은 일본의 신문이지만, 영자 신문의 스크랩도 적지만 있고(9건), 일본어 기사에 수기의 영어로 주석을 기록한 곳도 있다. 일본의 신문 중에서는 스크랩하지 않고 본지를 통째로 붙인 것도 있다(6건).


스크랩북의 표지는 통가죽으로 만들고, 뒷표지에 "Sven Hedin Japan"이라 수기로 적은 종이가 붙여져 있다. 권두에는 '헤딘 박사에 관한 여러 신문 스크랩'이라고 붓글씨로 적어 놓고(그림8), 수록기사에 첨부된 게재지 등의주석 기록에는 같은 글씨라고 생각되는 것도 있다. 헤딘 재단 이사인 호간 볼퀴스트Håkan Wahlquist 씨에 의하면, 이 스크랩북은 헤딘 생존시의 것인데, 편찬 경위 등의 상세함은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그림8 헤딘이 일본에 방문했을 당시의 신문기사 스크랩북. 권두에 붓글씨로 '헤딘 박사에 관한 여러 신문 스크랩'이라고 있다(필자 불명). 스벤 헤딘 재단 소장 2009년 촬영




또한 이 재단에서는 고우즈이로부터 헤딘에게 보낸 합계 8통의 서간과 전보도 소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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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3




기고5

낟알 문양의 유라시아

-'고대 유럽'과 '고대 중국'의 토기 장식에 들어간 법칙

츠루오카 마유미鶴岡眞弓






한자의 '穀'은 '단단한 껍질을 붙인 낱알 모양의 열매'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르다'의 뜻, 또한 '(무엇을 먹으며) 살아가다'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살아서는 집을 달리하나, 죽어서는 무덤을 같이한다(穀則異室, 死則同穴)'(<시경>)고 노래도 하여, '穀'은 '死'와 대조되었다. 서양 기독교에서 '한 알의 밀'(요한복음 12장)은 중생을 구하기 위해 몸소 몸을 바친 '희생'을 상징했다.


이처럼 인간은 동서를 막론하고 작은 곡물의 알에 생명과 죽음과 희망을 겹쳐 응시해 왔다. 신석기시대부터 농경민이 왕겨의 곁에서 만들어낸 조형/표상을 방문하면, 그 관념은 농경의 시작할 때부터 명료하게 표현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고에서는 농경이 시작하기 전 7000년 무렵의 '고대 유럽'의 여신상에 나타났던 '낟알 문양'을 방문하려 한다. 또한 그에 대응하는 여러 토기 문양을 만든 '고대 중국'의 양식과 유사한 점도 이어서 소개하고,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자연/시간의 '율동'에 달라붙어 있는 의식에 관계해 왔는지를 찾아보려 한다.


그러면 가장 처음으로, 유럽 제일의 '농민 화가'의 눈을 머리글로 시작하겠다.




농부가 새긴 율동


지금으로부터 500년 전의 북방 유럽. 플랑드르 지방에 '농민의 화가'로 알려진 피터 브뤼헐Pieter Brueghel이 있었다. 상업도시 안트베르펜의 화가조합원이었지만, 깊은 친밀감을 보듬으며 '농목의 모습'을 그렸다. '춤추는 농민'의 그림이 잘 알려져 있지만, '자연의 시간과 인간' '식량과 인간'의 관계까지를 투시하는 작품을 많이 남겼다. 


'게으름뱅이의 천국'(1567년)에서는 아무렇게나 드러누운 뚱뚱한 남자들(서기와 전사와 농민)의 머리 위에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사라센 가루의 파테와 돼지 통구이를 그려 결핌과 풍요의 사이를 줄타기하는 인간을 풍자했다. '농민의 결혼식'(1565년)의 잔치에서는 인간보다 호밀빵과 요리를 주역으로 하면서 먹을거리가 텅 빈 그릇의 산도 암시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설교풍과는 거리가 멀며 시선을 낮추어 농목의 시공관을 실감적으로 전하여, 현대인의 눈도 끌어당겨 마지않는다. 그러고 보니, 저 타르코프스키 감독도 '혹성 솔라리스'에서 유일하게 체온이 통하는 '지구'를 기억시키는 '그림'으로 브뤼헐을 등장시킬 정도이다. 


브뤼헐의 작품은 만연히 농업과 농민, 농촌의 풍경을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에 사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작음을 비웃는 풍자화와도 분명히 구별을 지어 호소하는 것이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한편으로는 생명의 론도를 연주하는 '시간'으로 '자연'을 파악하여 그 '시간=율동'에 대한 의식을 농민화에 담았기 때문은 아닐까?


그 의미에서 '이카루스가 추락하는 풍경'(1556-1558년 무렵)은 전형적이다. 소에게 쟁기를 끌게 하고, 묵묵히 쟁기질하는 농부가 앞에 크게 그려져 있다. 배경의 푸른 바다에는 날개를 달고 너무 높이 날다가 태양의 열을 많이 받아 추락하는 그리스 신화의 '공인' 이카루스가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해변에는 세계를 연결하는 훌륭한 '상선'이 바야흐로 출항한다. 그러나 '농부'는 그들의 일을 신경쓰지 않고 담담히 농지에 쟁기를 넣는다. 옆의 벼랑에는 눈에 띄지 않지만 양떼와 '목동'도 있다.





이 그림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목동(양치기)와 농업(농부), 상업(배)와 공업(공인, 이카루스)를 둥근 지구의 수평선을 도는 시계처럼 배치하고, 인류문명을 내려다본(공인=인공기술을 사용하는 사람의 낙하라고 함) 예언의경구로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의 주인공은 농부, 농업이고, 단순한 경구 이상의 의미가 숨겨져 있는 듯하다. 


'농부'는 이카루스의 비약적인 기술 같은 곡예를 행할 수 없으며, 행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인간의 곁에서 다양하게 궁리는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인간이 '우주와 자연의 시간'에 '참가하는, 보조를 맞추는' 노동이다. 미래를 과도하게 조종하기 위해 교묘한 기술을 구사하여 자연/시간을 앞질러 '극복하는' 행위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시간'은 어디까지나 자연의 곁에 있고, 인간이 직접 손을 댈 수 없는 성스러운 것, 경이에 속한다는 것을 브뤼헐의 농부는 무언으로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가 새겨둔 쟁기의 자국은 우주와 자연이 산출한 '율동'을 대지에 전사하는 몸짓을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율동이 곡물의 생명을 태동시켜 성장의 리듬으로 끌어올린다는 기도가 농부에게는 있다. 그가 과묵한 건 그 율동을 듣고, 지상에서 몸소 그 리듬을 타야 하기 때문이다. 


애당초 왜 브뤼헐은 르네상스 시대에 '농업'을 그렸을까? 그야말로 근대의 경제 체계가 뛰어나가는 도시에서 인간의 르네상스에 입회해 있었다. 그는 지금 기술한 농경적인 시간 의식을 인가노가 자연이 맞서 싸우는 팽팽한 이 역사적 지점에서 전하려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그림 속에서 밀랍으로 고정시킨 날개에 의하여 인공의 법칙을 만들어내고, 시간을 빠르게 하려 했던 사람이 화려하게 추락한다. 그러나 그 모양과는 반대로, 옆에서 수천 년에 걸친 농경의 리듬을 담담하게 새기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앞의 풍경으로 강조되어 있다. 그와 쟁기를 끄는 소의 걸음은 자연에 속하는 시간을 듣고 있는 모방일 것이다.


그럼, 선사 농경사회에 태어난 갖가지 조형 표현이야말로 그러한 생명과 자연/시간의 의식을 표시하려 한 예술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의 농경문화 관념을 가장 잘 전하는 토기에 묘사된 '조형 언어' '문양'이 그것이다.




고대 유럽의 여신상과 '낟알 문양'


유라시아 세계의 동서에 그 가장 오래된 작품의 예를 찾으면, 분명히 서쪽에서는 '고대 유럽'의 여신상 토기이며 그곳에서 뚜렷한 '낟알'의 장식을 알아차릴 수 있다.


대저 '고대 유럽'이란 리투아니아 출신의 고고학자이자 신화학자인 고 마리야 김부타스Marija Gimbutas가 이름을 붙여 친숙해진 신석기시대 최초 시기의 유럽 농경문명이다. 기원전 7000-6500년 무렵에 시작되어 인도=유럽어족의 문명이 '침입'한 3500년 무렵까지 이어지고, 그뒤에도 크레타·뮤케나이 문화에 저녁놀을 비추었다. 범위는 남동 유럽, 곧 도나우강이 가로질러 흐르는 발칸 반도를 중심으로, 남쪽은 에게해, 북쪽은 우크라이나 서부 드네스트르강에까지 걸친다(김부타스 1989). 


상세한 소개는 다음 기회로 넘기고, 이 문명은 이른바 4대문명보다 오래된 점이 주목된다. 최초 시기의 농경사회의 흔적은 에게해 연안과 발칸 반도에 잘 남아 있으며, 몇몇 지역의 명칭으로 불리고 있는 점에서도 그 유물의 변화가 풍부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에게해 연안의 그리스에서는 테살리아 지방의 볼로스에 가까운 세스클로의 마을 터에 연관을 시켜 '원세스클로 문화', 옛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베오그라드 동쪽의 표준 유적에 연관을 시켜 '스타체보Starčevo 문화', 또 남동부에서는 '케레스 문화'(루마니아 서부에서는 크리시 문화)라고 불렀다. 이들을 포함하는 문화 복합은 마케도니아, 옛 유고슬라비아 남부와 중앙부, 루마니아 동부의 몰도바에까지 미치며, 도나우강 중류 지역의 남쪽을가로질러 흐르는 바르다르강과 라바강의 유역에까지 미친다. 따라서 이 한 덩어리의 문화를 '에게해와 중앙 발칸의 신석기 문화'라고 부른다. 


이 에게해와 중앙 발칸에서는 밀과 보리, 렌즈콩, 살갈퀴가 재배되고, 양과 산양이 가축으로 가장 많이 사육되었다. 이것은 온난하고 건조한 에게해와 동지중해 지방의 특색이며, 이 농경 문명의 기본 패턴이 도나우강 중류 지역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이러한 고고학적으로 증명된 곡물의 귀중함이 토기의 문양에 나타난다.


그중에서도 주목되는 것이 고대 유럽 전체의 풍부한 토기상 가운데 김부타스가 '다산 여신'과 '식물 여신'이라 이름을 붙인 기원전 5000-4000년대의 작품 예이다. 여신의 가슴과 복부, 하반신에 집중적으로 '낟알'을 누른 상이 수없이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뱀' -동아시아에서도 '논의 신'인데 옛 유럽에서도 '물'에 관계되는 신- 을 표현한 뱀 모양의 소용돌이 문양과 '농지'를 암시하는 사각, 삼각, 격자, 줄무늬 등의 기하학 형태의 안팎으로 실물의 낟알과 씨앗을 강하게 꽉 누른 흔적이 아름다운 점 문양을 이루고 있다(그림2).


그림2 고대 유럽 여신상의 '낟알 문양'(김부타스 1989에 의함). 몰도바, 원 쿠쿠테니 문화, 기원전 4000년대




여신의 복부와 하반신을 식물과 먹을거리가 산출되는 '대지'와 '농지'라고 간주하고, 낟알을 '파종하여' 접촉과 끼워넣기를 행하는, 곧 풍년 기원의 형상화를 한 표현일 것이란 점은 의심할 수 없다. 


또한 이 매우 오래된 문양 중에서는 예를 들어 한자의 '米'의 형상을 꼭 닮은 문양도 있다. 말할 것도 없이 '米'의상형은 대지를 田이란 글자로 본뜨고, 사방에 작은 쌀알이나 씨앗을 배치한 모양인데, 고대 유럽, 기원전 5000년대의 테라코타 여신상(전 유고슬라비아, 빈차Vinča 문화의 작은 상)에도 똑같은 모양을 볼 수 있다. 작은 한 알에 의미를 빌려 나타내는 행위는 고대 유럽부터 동아시아까지 널리 퍼졌다. 농업의 시작과 함께 기르던 곡물의 종류는 달라도 유라시아를 종횡으로 전도하듯이 멋진 공진을 보여주고 있다(그림3).


그림3 고대 유럽 여신상의 '십자와 낟알 문양' '소용돌이 문양'(김부타스 1989에 의함) 드네스트르강 상류 지역, 원 쿠쿠테니 문하, 기원전 5000년대 후반




이 시점에서 이번에는 유라시아 세계의 동쪽을 살펴보면, 선사 중국의 앙소문화의 장식 토기(기원전 3100-2000년)에도 원의 안에 田 자를 새기고, 거기에 한 알씩 점을 장식한 문양을 볼 수 있다(그림4). 다시 돌아와 고대 유럽을 보면, 이 문양을 지닌 원이나 소용돌이의 연속 문양이 김부타스가 발견했던 토기의 표면에서도 풍부하게 볼 수 있다. 이 고대 유럽 토기의 문양에 대조되는 중국 신석기시대의 토기 문양은 헨체 들에게 더 주목되어 왔지만, 일본에서는 비교연구가 아직 착수 단계이다(앞에서 든 김부타스 1989 권말, 대조도상군 참조).


그림4 채문 토기 선회문 전개도(張 1990에 의함) 마가요 문화층·앙소문화, 기원전 3100-2000년




이 비교는 문양에만 그치지 않는다. 초기 유라시아 농경사회의 곡물 재배를 지탱했던 '생명의 시간'이란 관념에서도, 동서 지역의 공통성은 나타난다. 어떻게든 중국에서는 -예를 들면 마가요 문화에서는- '낟알문양 토기'라고부르는 것이 있다. 씨앗과 새싹의 도상을 매개로 '인간'과 '작물'의 생명을 동체/동태적으로 표현한 문양이 나타나고 있다. 


고대 유럽에서도 '낟알 문양'과 토기 여신상은 일체였다. 그리고 저장과 요리와 제사를 위한 그릇과 그 형태는 대지에서 태어난 곡물을 비축하는 풍요로운 곳간으로 관념되었다. 그와 동시에 토기는 켈트 신화의 '다그다Dagda의 커다란 솥'이 잇따라 죽을 보내듯이, 무한의 먹을거리를 '낳는' 풍요다산 여신의 '모태'라고 간주되었다. 유라시아 동서의 농경과 토기의 문화는 이러한 오래된 조형 표현에 의하여 울리어,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낟알 문양이 있는 여신상이었다.


또한 '고대 유럽'과 '고대 중국'의 토기에는 조응하는 도상이 있다. '뱀' '개구리' '농지' 외에 '물' '빗물' '비구름'의 문양으로, 이들은 모두 '태어나는 것' '기르는 것' '재생하는 것'에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두 문명은 놀랄만큼 비슷한 모양으로 이들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경제형태는 다르지만 '고대 유럽'과 시간적으로 병행하는, '고대 일본'의 조몬 토기도 장식과 모태관념에서 비교할 수 있는 요소가 있다. 이 세 문명의 풍부한 토기와 그 장식 표현을 서로 대조하면, 수천 년의 기간 동안 영위된 '문양의 유라시아'라고 할 만한 표상체계가 새겨지는 게 틀림없다. 


여신의 모태, 곧 대지 위에 '곡물의 알과 씨앗을 장식하는' 행위가 오래전 유라시아의 동서에 있었다. 그것은 '생명 시간'의 한계가 없는 지속을 염원하는 똑같은 인간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성장과 증식의 '시간'이 고갈되지않도록 바라며, 그릇 안에 저장된 곡물과 공진하듯이 낟알 문양을 장식했다. 즉 문양이란 시각적 '비유'가 아니라, 생사와 맞서 싸우는 나날을 이기며 살아가는 사람의 생의 실감이자 실천이었던 것이다.





눌러진 율동


한편 '문양'은 농경자가 염원하는 그러한 생명 시간의 '율동'의 표현에 관계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양의 모양에 '규칙성'이 인지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고대 유럽의 토기에서도 표현된 낟알 문양과 기하학 문양은 그 시작부터 그래픽하게 시각적으로 '묘사된' 것이 아니라, 토기에 직접적으로 '누르는' 방법으로 '표시된', 플라스틱하게 촉각적으로 조형된 것이었다. 이것은 조몬토기 문양의 복원에서 뚜렷하게 확인되는 가식加飾 기법이기도 하다. 새끼줄 매듭의 문양은 토기 표면에 꽉 누르면서 회전시켜서 얻을 수 있었다. 인간의 손이 점토에 압력을 가하고, 그렇게 가해진 문양을 주시하고 있던 시간이 일본 열도에서 수천 년 이어졌다. 그것은 그뒤의 역사 시간이 매우 미치지 못하는, 농후한 '누름과 율동'의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브뤼헐이 묘사한 농부의 쟁기처럼, 자연에 대하여 무언가를 표시하는 그러한 압력을 요한다. 이 경험은 생명적 신체에 받는 느낌을 가져올 것이다. 곧 얼핏 일체 사물의 주변에서 잉여로 발생한다고 간주되기 쉬운 '장식'이야말로, 세계와의 접촉을 최초로 표시하는 가장 중요한 표현이었다. 


표의문자이든 상형문자이든, 기호와 문자와 문양은 세계를 '누르는=표시하는' 손발을 가지고 가능해진다. 고대 유럽의 낟알의 점 문양은 곡물과 씨앗을 '여신의 몸'인 '토기', 곧 '대지'에 꽉 눌러 그 느낌의 한가운데에 성장이란 생명의 '법칙'도 표상할 수 있었다. 그 느낌을 확실히 하고자 농경사회는 수천 년에 걸쳐 변하지 않는 '문양'을 계속 눌러 곡물의 한 알 한 알을 표현해 왔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농경사회'와 '문양 표현'의 관계는 구석기와 신석기의 여신상을 비교하면 더욱 분명하다. 구석기시대의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상도, 신석기시대의 고대 유럽의 다산여신상도 가슴과 엉덩이의 통통함에서는 언뜻 보기에 똑같은조형으로 보인다. 그러나 전자에서는 대자연의 다산이 관념화되어 있어도 세세한 장식성은 띠고 있지 않다. 장식성은 대지를 밟고, 쟁기질하고, 새기고, 괭이질하여 생명을 기르는 일부터 추리는 행위를 반복하는 단계가 되어서 단숨에 풍부해진다. 농경사회에서 여신상 몸의 낟알 문양은 자연과 인간의 사이에 세세한 친화성을 가져왔다.그것은 농경자의 귀에 속삭이는 더욱 명료한 '여신의 언어'(Gimbutas 1989)가 탄생하는 것이기도 했다.


고대 유럽의 토기는 씨앗부터 '싹을 불기 시작하는' 과정을 더듬는 듯한 '소용돌이 문양'을 여신의 몸에 두르고 있다. 이것에 호응하여 신석기시대의 중국에서는 '곡종아각채문穀種芽角彩文'이라 부르는 토기가 있다. 씨앗을 뚫고 얼굴을 내민 아기의 도상이 식물과 일체가 되어 있는 표현으로, 아기의 얼굴은 모태=대지에서 태어나는 것처럼 보인다(그림5). 고대 유럽의 여신상에 표시된 문양에도 통하는 관념이다. 


그림5 인면 돋을새김, 곡종아각채문 토기(陸 2001에 의함) 마가요 문화층·앙소문화





이처럼 유럽부터 중국에 이르는 선사 농경문명의 '문양'을 관찰하면, 거기에는 씨앗과 싹부터 수확의 낟알까지를세심히 주시했던 농경민의 눈이 있으며, 또 생명 시간의 리듬을 들으려고 한 그들의 귀, 청각이 있다.  수천 년이나 들려 왔던 그 자연의 리듬은, 그러나 어느 사이에 인간의 시간으로 전환되어 나아가게 되었다. 근대 경제 체계가 자연에 속하는 시간을 앞지르고, 인간의 율동이 도시를 번성하게 하는 시대, 르네상스가 찾아온다. 사람은 대지=생명으로부터 생명을 산출하는 농업이 아니라, 근대의 증식생명인 통화가 돈을 낳는 체계로 매진해 나아간다. 


브뤼헐이야말로 상업과 금융업의 도시 안트베르펜의 화가조합에서 활용한 도시인이었다. 그러니까 농부의 쟁깃날로부터 각인되는 율동에 매료되었다. 그 증거로 서두의 그림(그림1) 안에서는 '공업, 공인 이카루스'가 화려하게 바다로 추락해도 아무도 그것을 보고 있지 않다. 놀라지 않는다. 다만 언덕 위에서 농업의 율동이 묵묵히 '문양'처럼 누르며 가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이 그림에서는 근대인의 손바닥에서 잃어버린 촉감과 정적静寂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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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3





제3장

맥류 풍토의 주역들

                                       -타케다 카즈요시武田和義 / 카토우 켄지加藤鎌司







Ⅰ 보리 아라비안나이트(타케다 카즈요시)



물과 식물


물은 훌륭한 용매로서, 참으로 다양한 물질을 녹일 수 있다. 그 때문에 식물은 물을 용매로 많은 영양성분과 대사물을 체내로 흐름을 바꾸게 해 살아간다(동물과 미생물도 기본적으로 똑같음). 또한 식물은 뙤약볕에서도 '데침'이 되지 않기 위하여, 기공에서 물을 증산시킬 때 발생하는 기화열에 의하여 체온을 조절한다. 육상식물의 신체 가운데 약 80%는 물이며, 물이 마르는 식물은 말라죽을 운명에 처한다. 


지구는 물의 혹성이라고도 부르는데, 지구의 물 대부분은 바닷물이고 민물의 대부분은 눈과 얼음으로 양극과 고산에 있으며, 육상의 식물이 이용할 수 있는 건 빗물과 땅속에 축적된 약간의 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지구의 식물이 존재하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물 환경이다.


식물의 성장과 생육에 또 하나 중요한 조건은 온도이며, 물과 온도 두 가지를 축으로 하여 사막부터 열대우림, 툰드라, 초원, 광엽수림 등 식물상에 의한 구분이 정해진다.


본격적인 사막은 물이 없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가 되고, 대극적으로 고온다습한 열대림에서는 연중 생장이 계속되어 나이테가 없는 거목이 생육하며, 툰드라에서는 짧은 여름에 작은 식물이 일생을 마치고, 건조한 경향의 초원에서는 건조함에 강한 벼과식물 등이 우기에 맞추어 생육하고 건기는 씨앗과 지하줄기의 형태로 살아 남는다. 그리고 광엽수림대의 나무는 낙엽으로 한랭한 겨울을 넘기는 것 같은 훌륭한 적응 형태를 볼 수 있다.


작물의 분포도 주로 물과 온도로 결정되며, 세계의 주요한 농업지대는 본래 광엽수림의 식생구분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발전해 왔다. 약간 건조한 초원지대도 작물의 재배 시기에 맞추어 관개하면 수확량은 높지만, 수자원의 고갈, 토양의 염류집적 등의 문제가 있어서 농업의 장래는 낙관적이지 않다. 일반적으로 곡물 1톤을 생산하는 데에는 1000톤의 물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데, 외국에서 밀과 옥수수를 수입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현지의 물을 빼앗는 것이 된다. 


습도와 고온으로 거대한 양치식물과 겉씨식물이 번성했다고 할 수 있는 석탄기 이후 지구는 건조, 한랭으로 향하고, 진화의 최후에 나타났다고 할 수 있는 벼과식물은 작은 식물체, 가느다른 잎, 사나운 뿌리 등의 건조에 적응한 형질을 갖춘다. 보리는 벼과작물 중에서도 건조와 염류집적에 대한 내성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림3-1 보리의 수확(티베트)





보리의 동료


보리(Hordeum)속은 약 30종으로 이루어지고, 염색체의 기본수가 7개이며, 2배체와 4배체, 6배체가 있고, 여러해살이(그루가 이듬해까지 살아 남음)가 많다. 야생종은 오스트레일리아 이외의 여러 대륙에 분포하며, 기원은 상당히 오래되었다고 생각한다. 재배종은 한해살이의 2배체이다.


밀과는 유전적으로 근연이고, 특수한 처리를 하면 교잡도 가능하며, 밀에 보리의 염색체를 하나씩 넣은 계통이 실험적으로 만들어지고 있다.


보리의 재배종(H. vulgare ssp. vulgare)는 지금으로부터 9000년 정도 전에 작물 대부분의 기원지로 유명한 비옥한 초승달 지대(티그리스, 유프라테스강의 상류)에서 선조 야생종(H. vulgare ssp. spontaneumu)에서 재배화되었다고 생각된다. 이후 ssp. spontaneumu을 다른 야생 보리와 구별하기 위하여 선조 야생종이라 부른다. 


페르시아어에서 보리를 가리키는 조jo는 '먹는다'를 뜻하는 단어이고, 보리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지탱한 주식이었단 것을 엿볼 수 있다. 


벼와 대두, 옥수수 등에서는 재배종과 선조 야생종을 별종으로 다루고 있는 데 반하여, 보리의 재배종은 선조 야생종과 완전히 교잡화합하여 둘은 아종이라 알려져 있다. 그러면 선조 야생종과 재배종은 어디가 다른 걸까? 그 주요한 걸 들자면, 

(1) 씨앗의 탈립성. 야생식물은 스스로 씨앗을 뿌려서 퍼뜨려야 하기에 씨앗이 영글면 홀로 떨어지는 장치(떨켜)를 가지고 있다. 한편, 재배식물에서는 영근 씨앗이 수확 전에 떨어져 버리는 방식은 나쁘기에 일반적으로 탈립성이 없다.

(2) 씨앗의 휴면성. 열대우림 등과 같이 연중 고온다습한 장소를 제외하면, 식물에게는 발아의 적기가 있다. 예를 들면 건기의 처음과 겨울의 처음 등에 발아하면 좋지 않다. 그 때문에 야생식물은 씨앗이 완성되어도 일정 시기가 오기까지는 발아하지 않는 장치(씨앗의 휴면성)를 가지고 있다. 한편, 재배종의 경우는 재배자가 발는 때에언제라도 일제히 발아해야 하기 때문에 깊은 휴면성은 제거되어야 한다. 다만, 수확 전의 장마에 의한 수발아(씨앗이 이삭에 붙은 채로 발아하는 현상)을 막기 위해서는 얕은 휴면성을 가지게 하는 편이 낫다.

(3) 씨앗의 크기. 생물에게 가장 중요한 일은 자손을 남기는 것으로, 그에 의하여 38억 년이라고 하는 생명지가 철해져 왔다. 고등생물에서는 소수의 자식을 크게 키워서 생존률을 높이려 하는 K 전략(예를 들면 고래와 코끼리)와 작은 다수의 자손을 낳아서 생존수를 늘리려 하는 R 전략(예를 들면 대구와 청어)이 있다. 벼과의 야생식물은 길가의 강아지풀과 바랭이 등에서 발견되듯이 작은 씨앗을 많이 다는 R 전략을 채용하고 있는데, 작물로서는 씨앗이 너무 작은 건 좋지 않기에 재배종의 씨앗은 거의 예외없이 인위 선발에 의하여 대형화되어 있다. 보리의 경우는 재배화에 수반하여 씨앗의 수는 별로 늘지 않고, 한 알의 씨앗 무게가 몇 배로 불어났다.

(4) 씨앗의 색과 성분. 재배식물의 씨앗은 옅은색임에 반하여, 야생식물의 씨앗은 검거나 자색인 것이 적지 않다. 야생종의 색이 짙은 건 균과 새 등에 대한 방어물질인 경우가 알려져 있다.

(5) 까락의 유무. 벼과식물의 야생종에는 씨앗의 끝에 긴 까락이 발달해 있어, 새 등의 동물에게 먹히는 걸 막음과 함께 씨앗의 확산에도 도음이 된다고 생각된다. 한편, 보리의 재배종에서 까락은 탈곡할 때 방해가 된다고 생각함에도 불구하고 까락이 있는 품종이 많다. 이는 까락이 광합성과 증산 등의 작용에 의하여 등숙(씨앗이 비대하는 일)에 좋은 효과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6) 각종 스트레스 내성. 야생종은 인간에게 보호되지 않기 때문에 벌레와 병해, 환경 스트레스 등에 대하여 강하다고 생각된다. 한편, 재배종은 육종에 의하여 특정 병해와 환경 스트레스에 대하여 내성이 부여된 것이 있다. 


그밖에도 많은 형질에서 야생종과 재배종은 다르지만, 그들은 모두 자생하든지(야생종) 인간이 사정이 좋게 바꾸어 오든지(재배종) 하는 차이가 있다.





인간과 보리의 우연한 만남


앞서 기술했듯이, 보리의 재배화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9000년 전이라 보고 있는데, 오스트레일리아 이외의 여러대륙에서는 보리의 여러 가지 야생종이 분포되어 있고, 유라시아 대륙의 중앙부에는 보리의 선조 야생종인 ssp. spontaneum이 분포해 있다.


채집과 수렵에 의하여 생활하던 농경 이전의 사람들에게 선조 야생종은 매력적인 전분 공급원이었음이 틀림없다.선조 야생종은 던져 놓아도 해마다 생육하고, 다 익으면 탈립하는 건 조금 귀찮지만 푸를 때 채집해 버리면 문제가 없다. 당시 이미 가축화되어 있던 산양과 양, 말 등에 의해서도 귀중한 농후사료(풀 등의 영양가가 낮은 조사료에 반해 곡물 등의 영양가가 높은 사료를 농후사료라 한다. 임신, 수유할 때와 일을 부릴 때에 준다)였을 것이다. 해마다 선조 야생종이 잘 자란 장소는 각각의 가족과 부족 등이 소유화하고, 방해가 되는 잡초와 잡목을 없애거나, 자연의 돌연변이로 나타나는 색과 형태의 괴짜를 따로 나누려 하는 인간의 작용이 있었다고 해도 이상하지않다. 재배화의 앞뒤는 단절하여 짜맞추지 않고, 연속적이었을 것이다.


일본에서 보리의 전래는 벼와 전후하여 조몬시대 만기로 보이며, 사가현 카라츠시唐津市의 채소밭 유적에서도 출토된다. 나중에도 기술하듯이, 일본 보리의 특징은 조선반도와 중국 장강 하류 유역의 것과 유사하여 그 내력이 시사된다.


보리는 논을 만들 수 없는 경사지의 주요한 작물이고, 또 서남의 따뜻한 곳에서는 겨울에 재배할 수 있는 특성을 살려서 논의 그루갈이로 재배해 가장 전성기에는 200만 톤 이상이나 생산되었다. 현재는 가축의 사료와 맥주의 원료로 약 200만 톤 소비되고 있는데, 국내 생산은 10% 정도이다. 알곡과는 따로 약 100톤의 보리싹이 맥주의 원료로 수입되고 있다. 자급률을 높이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농장의 규모 차이 등 때문에 국제적으로 경쟁하는 건 어렵다. 덧붙여서 세계 전체의 보리 생산량은 약 1억5천만 톤이다. 맥주보리는 메이지유신 이후 맥주 양조기술과 함께 유럽에서 도입된 새로운 작물이며, 맥주의 원료로 특별한 형질을 갖추고 있다. 또한 일본에 들여오고 나서의 계보 등은 잘 기록되어 있다.





비탈립성 개체의 출현, 최초의 육종


앞에 기술했듯이, 일반적으로 야생의 식물은 스스로 씨앗을 확산시키는 장치를 가지고 있다. 야생의 벼과식물에서는 씨앗의 밑부분에 떨켜라고 부르는 특수한 조직이 형성되어, 씨앗이 익으면 홀로 탈립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림3-2 탈립형(오른쪽)과 비탈립형(왼쪽)




야생의 벼와 귀리의 경우는 지탱하는 줄기(이삭의 가지)의 끝에서 탈립하기 때문에 이삭의 가운데 축과 지탱하는 줄기는 식물체 쪽에 남지만, 야생의 보리와 밀에서는 이삭의 가운데 축이 한 마디씩 꺾이기(보다는 떨어진다고 하는 편이 어울림) 때문에, 이삭의 가운데 축은 아랫 부분의 2-3마디만 남기게 된다. 이 떨켜를 만드는 유전자가파손되어 기능을 잃으면 씨앗은 익어도 이삭에서 떨어지지 않는 비탈립성이 된다. 유적 등에서 나온 보리의 씨앗밑부분에 이삭의 가운데 축이 붙어 있다면 탈립형(야생종), 붙어 있지 않다면 비탈립형(재배종)임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유전자의 자연적 돌연변이률은 1/1만에서 1/10만이라 하고, 게다가 비탈립성은 탈립성에 대하여 열성이기에 선조 야생종의 집단 가운데 비탈립 개체가 나타나는 빈도는 수십만분의 일로 낮다. 따라서 선조 야생종의 집단 안에서 비탈립성의 변이체가 발견된다는 건 수십만 개체 이상으로 상당히 큰 선조 야생종의 집단을 매우 주의깊게 관찰했던 '최초의 육종가'가 있었다는 걸 의미한다.


비탈립성 개체의 출현은 당시 사람들에게 대사건이었음이 틀림없지만, 그것이 광범위하게 퍼져서 완전히 탈립성의 선조 야생종과 바뀌는 데에는 씨앗의 증식률과 선발의 엄밀함 등에서 보아 오랜 세월이 필요했다고 생각한다.




비탈립성 유전자의 동아시아형과 서역형


앞에 기술했듯이, 보리에서는 완숙 이후 이삭의 가운데 축에 떨켜가 만들어짐에 따라 씨앗이 탈립하고, 이것을 일으키는 유전자가 파손되면 비탈립성이 된다. 이 비탈립성 유전자에 대해서 가장 집중적인 연구를 전개했던 건 현재 오카아먀 대학 자원생물과학연구소의 전신인 대원大原농업연구소의 타카하시 류헤이高橋隆平(1910-1999)와 그 일문의 연구자이다.


타카하시는 세계에서 수천 가지 보리 품종을 모아, 그 유연관계를 조사하기 위하여 다수의 품종 사이에서 교잡실험을 행했다. 그 결과, 교잡 조합시킴에 따라 비탈립형 품종의 동지로 교잡했던 잡종 제1대가 탈립형이 되고, 잡종 제2대에서는 탈립형과 비탈립형이 반반으로 나타나는 이상한 유전을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뒤 상세한 교잡 실험에 의하여 보리의 탈립성은 두 가지 우성 유전자에 의하여 지배되며, 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가지면 탈립형이 되고, 어느 쪽이든 한쪽 또는 두쪽이 없으면 비탈립형이 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와 같은 유전자는 보족유전자라고 부르며, 잡종 제2대에서는 9대7의 분리비율이 기대되는데, 탈립성 유전자(현재는 Btr1과 Btr2라고 부름)의 경우는 양자가 매우 밀접히 연쇄되어 있기 때문에 재편성형이 나타나지 않고, 잡종 제2대에서는 1대1로 분리하는 것이 밝혀졌다. 이 유전자는 염색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한 위치가 알려져 있어, 염기배열이 해독되는 일도 시간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럼 타카하시 등은 이들 두 가지 탈립성 유전자 가운데 한쪽은 동아시아의 품종에 많고, 다른쪽은 유럽 등 서쪽의 품종이 많다는 걸 알아채고, 이것을 동아시아형(E형)과 서역형(W형)이라 이름을 붙였다. 재배화의 계기가 되는 비탈립성 유전자가 두 종류라는 것은 재배화가 일원적이 아니라 재배종의 선조가 두 가지라는 점을 의미하는 것이다. E형과 W형의 분화는 탈립성 이외의 많은 형질(유전자)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타카하시 등의 발견은 재배 보리의 계통진화를 생각하는 데에 매우 귀중한 것이라 하겠다.


조금 상세히 기술하자면, 일본과 조선반도, 중국의 품종은 80% 이상이 탈립성 유전자에 관하여 E형이고, 터키와유럽, 에티오피아의 품종은 거꾸로 80% 이상이 W형이었기 때문에, 서남아시아에서 기원한 재배 보리 가운데 E형은 동쪽에 분포를 넓히고, W형은 서와 남으로 분포를 넓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집트와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등의 북아프리카 품종에서는 W형이 아니라 E형이 90%를 넘었다. 북아프리카의 품종은 다른 형질에서도 E형과 공통의 패턴을 보이는 경우가 있어, 이들 지역이 중앙아시아와 무언가 관계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시사된다. 곧 품종의 분포는 지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역사적인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두줄과 여섯줄


보리속 식물에는 그림3-3처럼 이삭의 가운데 축 위의 각 마디에 3개의 잔이삭이 횡렬로 붙어 자라고, 각각의 잔이삭에는 1개의 낱꽃이 형성된다. 3개의 낱꽃 가운데 중앙의 열을 주열, 좌우를 측렬이라 부른다. 세 낱꽃이 모두 영글어 위에서 보면 여섯줄로 보이는 것이 여섯줄보리, 세 낱꽃의 두 측렬이 유전적으로 영글지 않고 주열만영글어 위에서 보면 두줄로 보이는 것이 두줄보리이다.


그림3-3 보리의 조성條性. 타케다 1993에서 전재.




조성의 진화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최근 조성 유전자가 측렬의 발달을 억제하여 두줄형이 되고, 그 기능을 잃었던 돌연변이에서는 측렬이 발달해 여섯줄형이 되는 것이 밝혀졌다. 게다가 똑같아 보이는 여섯줄형에도 유전자의 염기배열에서 보면 적어도 네 가지 유형이 있으며, 여섯줄보리의 선조는 한 가지가 아니었음이 밝혀져 그 지리적 분포에 대해서도 정보가 계속 모이고 있다.


두줄보리와 여섯줄보리는 동일한 '식물'이지만 농림수산성의 기준에 의하면 별도의 '작물'이며, 유통과정에서도 구별된다. 일반적으로 측렬의 알곡 크기(무게)는 주열 알곡의 60% 정도이기에, 여섯줄보리에서는 큰 주열의 알곡과 작은 측렬의 알곡이 섞여 있다. 한편, 두줄보리에서는 큰 주열의 알곡만 있어서 알곡의 질이 좋다. 따라서 유럽과 일본의 맥주보리에는 두줄보리가 사용되고 있다. 두줄보리의 이삭은 여섯줄보리보다 통풍이 잘 되고, 이슬과 비에 젖기 어렵기 때문에, 붉은곰팡이병이란 이삭의 병에 잘 걸리지 않는 장점이 있다.


여물지 않는 측렬이 영글어 여섯줄이 되기 때문에 두줄형보다 여섯줄형 쪽이 수확량이 늘어날 것이란 기대가 있다. 확실히 한 이삭의 무게는 여섯줄형 쪽이 무겁지만, 한 그루당 또는 토지의 면적당 이삭 수는 두줄형 쪽이 많아져서 어느쪽의 수확량이 많은지는 일괄적으로 말할 수 없다. 결국 알곡과 이삭을 크게 해도 그것만으로는 수확량이 늘어나지 않고, 태양 에너지를 효율 좋게 전분으로 변환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겉보리와 쌀보리


겉보리와 쌀보리도 유전자가 1개만 다르지만 다른 작물로 취급된다. 둘의 차이는 껍질과 알맹이가 풀 물질로 달라붙어 있는지 어떤지에 있다. 쌀보리에서는 벼와 밀과 마찬가지로 껍질로 덮여 있기만 한 데 반하여, 겉보리에서는 수정된 뒤 2주일쯤 무렵에 풀 물질이 나와서 완숙하면 완전히 굳어 껍질과 알맹이가 쉽게 떨어지지 않게 된다. 선조 야생종은 피성皮性이고 재배종에서도 피성이 우성이기에, 나성裸性 쪽이 나중에 생긴 돌연변이체로 볼 수 있다. 최근에는 이 피성과 나성을 결정하는 유전자가 에틸렌 반응성의 조절인자이고, 쌀보리에서는 이 부분이 결손되어 있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세계의 쌀보리가 동일한 염기배열을 가진 점, 곧 1회의 자연적 돌연변이에서 유래한다는 점이 밝혀졌다. 쌀보리는 탈곡과 그 뒤의 작업에 용이해서 보리를 주식으로 하는 티베트와 히말라야 지역에서는 대부분의 품종이 쌀보리이다. 한편 맥주보리의 경우는 맥아의 제조와 보리즙의 여과 과정에서 껍질이있었던 쪽이 좋기 때문에 겉보리가 사용된다. 최근 인위적인 쌀보리의 돌연변이를 만들어, 이것은 재래의 쌀보리와 달리 한 염기의 변이에 의한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림3-4 겉보리(오른쪽)과 쌀보리(왼쪽)



일본 전국에서 활발히 보리가 재배되었던 1933년 당시의 농림성의 통계에 의하면, 홋카이도, 킨키, 산요, 시코쿠, 큐슈에서는 쌀보리를, 도호쿠, 호쿠리쿠, 산인에서는 반대로 겉보리가 주체이고, 봄파종 지대의 홋카이도를 제외하면 한랭하고 눈이 많은 지대에서는 겉보리, 서남의 온난한 지역에서는 쌀보리가 재배되었단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겉보리 쪽이 쌀보리보다 한랭한 환경에 적응한 것을 보여주는 바일 것이다.


또한, 앞에 기술한 두줄과 여섯줄 성질과 피성·나성은 관계 없는 형질이기에, 둘은 자유롭게 짝을 짓기 좋지만, 오카야마 대학 자원생물과학연구소에 보존되어 있는 약 1만 품종 가운데 두줄, 나성인 건 70품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피성부터 나성으로의 돌연변이는 두줄 품종이 아니라 여섯줄 품종에서 일어났고, 그 뒤 변이형인 여섯줄, 나성 유형이 두줄, 피성 유형과 자연교잡하여 새로운 두줄, 나성 유형이 생겼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 해도 두줄, 나성 유형은 왜 이렇게 적은 것일까?




보리의 감광성


식물이 일장의 변화에 반응하여 꽃눈을 만드는 성질을 감광성이라 한다. 


사계절의 구별이 확실하지 않은 저위도 지방과 달리, 물과 온도의 조건이 계절에 따라서 크게 다른 중위도 지방, 특히 그중에서도 우기와 건기의 차이가 분명한 지방에서는 생애주기를 계절에 잘 맞추지 않으면 식물은 생존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계절의 변화를 무엇으로 느낄까? 꽃의 색, 벌레 소리 등의 풍경에서부터 기온의 변화, 햇빛의 강도등 다양한 신호 가운데 가장 확실히 계절의 변화를 보여주는 건 낮의 길이이다. 보리는 겨울비가 내리는 반건조지에 적응하여 진화했기 때문에, 일장이 길어지는 봄부터 초여름에 꽃눈을 형성하는 장일성 식물이다. 이와 관련하여 여름의 우기에 생육하고, 가을에 영그는 벼는 반대로 단일성 식물이다.


최근 꽃눈 형성의 유전생리학 연구가 급속히 진전되어, 일장에 감응하여 꽃눈이 유도되는 메카니즘이 해명되었다. 그에 의하면 장일성 식물에서도 단일성 식물에서도 꽃눈 형성의 메카니즘은 기본적으로 공통으로, 장일인지 단일인지 작물의 성질에 의하여 일장에 대한 감응 방식이 다른 듯하다. 같은 길이의 일장에서도 각 작물이 각각의 생육 형편에 맞춘 방법으로 이용의 장치를 선택한다니 얼마나 정교한 전략인 것일까?


이처럼 보리는 다른 겨울작물과 마찬가지로 장일성 식물인데, 일장에 대하여 매우 민감하기에, 거의 느끼지 못하는 것까지, 감광성에는 품종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 일장이 길어지지 않으면 꽃눈이 안 생기는 감광성이 강한 품종은 필연적으로 만생이고, 일장이 아직 짧은 초봄에 이삭이 패는 극조생종에서는 감광성을 잃어 버렸다. 예를 들면 단일성 식물인 벼에서도 호캇이도의 조생종 등은 일장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 알려져 있으며, 보리에서도 북유럽의 고위도 지방과 동아시아의 이모작 지대 등에서 재배되는 극조생종에서는 감광성을 잃어 버린 것이다.





가을 파종과 봄 파종


앞에서도 기술했듯이 본래 보리는 가을에 심어서 이듬해 초여름에 수확하는 가을 파종의 겨울작물인데, 봄에 심어서 여름에 수확하는 봄 파종 품종도 있다.


봄 파종과 가을 파종의 본질적 차이는 툭하면 꽃눈의 형성에 저온의 자극이 필요한지 어떤지라고 이야기한다. 곧, 가을 파종 보리는 발아 이후 일정 기간 섭씨 5도 안팎의 저온에 두지 않으면 일장 등의 다른 조건이 충족되어도꽃눈을 만들지 않는다. 이것을 저온요구성이라 한다. 또한 저온 처리에 의한 꽃눈 유도를 춘화, 저온요구성을 만족시키는 걸 춘화처리라고 부른다. 온도는 너무 낮아도 효과가 적고, 춘화처리 직후에 고온에 노출시키면 효과가감소하기에, 춘화가 어느 종의 생화학 반응임을 알 수 있다. 저온처리에 필요한 기간은 품종에 따라서 10일 정도로 끝나는 가을 파종의 낮은 것부터 1개월 이상 걸리는 가을 파종의 높은 것까지 있고, 저온 요구가 없는 Ⅰ(봄 파종)부터 1개월 정도의 Ⅴ까지 수치화되어 있다.


품종의 파종기 차이의 정도는 재배지역과 대응하여, 겨울이 매우 추워 가을 파종 재배를 할 수 없는 고위도 지방과 겨울이 온나하여 춘화가 충분히 일어나지 ㅇ낳는 에티오피아 등의 저위도 지방에서는 당연히 봄 파종 품종이 재배되며, 겨울의 추위가 매서운 지역에서는 가을 파종의 높은 품종이 재배된다. 일본에서는 홋카이도 등의 봄 파종 지대에서 재배되는 품종과 유럽에서 도입된 맥주보리 품종에서 유래한 맥주보리 등을 제외하면 가을 파종 품종이 대부분이다. 선조 야생종 약 160계통의 파종기 차이를 조사한 바, 대부분은 Ⅲ으로 그만큼 높은 특성은 없었다. 만약 선조 야생종의 성질이 Ⅰ이나 Ⅴ였다면 그 생육지역은 훨씬 한정되어 재배 보리를 만들어낼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장일성이라 봄이 아니면 꽃눈이 생길 리 없는 보리가 더욱이 저온요구성을 가지고 있는 건 왜일까? 이것은 보리가 일정 이상의 저온에 노출되어 겨울이 끝났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저온요구성은 겨울작물의 중요한 형질이기에, 밀에서도 본격적으로 연구되고 있으며, 원인 유전자도 계속 단리되고 있다.




내습성


앞서 기술했듯이 보리는 지금으로부터 9000년 정도 전에 서아시아에서 재배화되어, 인간 활동에 수반해 동서남북으로 분포를 넓혔다. 그들의 새로운 분포 지역은 기온, 강수량 등의 식물에게 중요한 생육조건이 원산지와는 다르며, 위도가 다르면 일장의 변화도 차이가 난다. 따라서 보리가 분포 지역을 넓히는 데에는 이들 새로운 환경조건에 적응해야 했다.


보리의 기원지는 겨울비가 내리는 반건조지대인데, 일본은 여름비가 내리는 습윤지대이며, 보리가 동쪽으로 분포를 넓혀 이 간격을 넘는 데에는 환경조건, 특히 물 조건에 대한 적응성에서 큰 장해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림3-5 내습성의 품종별 차이. 왼쪽은 매우 약함, 오른쪽은 매우 강함.




그 가장 큰 요인은 내습성, 곧 습해에 대한 저항성이다. 습해란 좁은 의미로는 토양의 과습 조건에 의한 식물의 생육에 대한 장해를 말하며, 넓은 의미론는 비와 이슬 등에 의한 붉은곰팡이병의 발생과 씨앗과 이삭에 붙은 채 발아해 버리는 수발아 등이 있다. 


일본에서는 가을에 보리를 파종한 뒤 비가 많이 내리는 경우가 많고, 발아 전의 씨앗은 물 과잉의 스트레스에 노출된다. 또 봄장마라고 부르며 유채꽃이 필 무렵, 곧 맥류가 이삭이 패는 시기에 비가 많다. 맥류의 수확기는 장마철 초입에 해당하고, 붉은곰팡이병과 수발아가 일어나기 쉽다. 게다가 눈이 많은 지대에서는 초붐에 눈 녹은 물이 밭에 고여서 습해가 일어나기 쉬운 조건이다. 게다가 이들은 논 그루갈이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평평하고 물빠짐이 좋지 않은 논에서는 상습적으로 습해가 일어나고, 이것을 피하기 위해 큰 노력을 들여서 높은 두둑을 만드는 재배가 행해졌다.


여기에서는 습해의 요인을 ①씨앗이 발아하기 전의 내습성, ②식물체의 내습성, ③넓은 의미의 내습성으로 붉은곰팡이병 저항성, ④마찬가지로 수발아 내성으로 나누어 다루려 한다.


①의 '씨앗이 발아하기 전의 내습성'이란 파종한 뒤 많은 비 등으로 씨앗이 발아하지 않고 죽어 버리는 사태를 상정한다. 옐르 들면, 벼의 경우 등은 씨앗을 물에 담겨도 죽지 않지만, 밭작물의 씨앗은 상온에서 물에 담그면 썩어 버리는 것이 보통이다. 게다가 온도가 높은 만큼 단기간에 죽어 버린다.


섭씨 2도에서 4일 동안 물에 담근 뒤에 통상의 발아 시험을 행하는 방법으로 보리 약 3400품종의 씨앗이 지닌 내습성을 평가한 바, 발아율이 제로(전멸)부터 100%(피해 없음)로 품종별 차이가 있으며, 그리고 네팔 동쪽의 품종은 강한 것이 많고 인도 서쪽의 품종은 약한 것이 많다는 경향이 확인되었다. 이것은 네팔 동쪽의 동아시아 품종이 오랜 진화의 과정으로 습윤한 환경에 적응해 왔다는 것을 시사한다.


 ②의 '식물체의 내습성'은 세 잎 시기까지 밭 상태에서 자란 보리를 3-4주일 동안 섭씨 2도에서 물에 담가, 처리한 뒤에 뽑아서 지하부와 뿌리의 생육을 다섯 단계로 평가하는 방법으로 약 4000품종을 평가했다. 식물체의 내습성은 보통인 품종이 많고, 매우 강하거나 또는 매우 약한 품종은 적었다. 품종의 분포 지역에 의한 내습성의 차이는 분명하진 않았지만, 매우 강한 품종은 앞으로, 내습성 육종의 유전자원으로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③의 '붉은곰팡이병'이란 것은 개화기 전후 이삭에 푸사리움속의 균이 감염되어 일으킨다. 심할 경우 영글지 않게 되고, 또 니발레놀과 트리코테센 등의 인축에게 유해한 곰팡이독을 만드는 중요 병해이다. 예전부터 면역적인저항성 유전자는 없고, 성가신 병해였다. 저자는 개화기의 이삭을 잘라서 온도와 습도, 빛의 조건 등을 일정하게 하여 대량검정을 가능하게 하는 '자른 이삭 검정법'이란 방법을 개발해 약 4200품종의 붉은곰팡이병 저항성을 검정한 바, 두줄 품종은 여섯줄 품종보다 붉은곰팡이병에 강한 경향이 나타났다. 대부분의 품종은 저항성이 매우약했는데, 수십 번 반복 시험으로 안정되어 저항성을 보이는 23품종을 찾아냈다. 이들은 모두 두줄 품종이었다. QTL 해석이란, 원인이 되는 유전자가 염색체 어디에 해당하는지를 찾는 수법으로 조사한 바, 보리의 붉은곰팡이병 저항성은 조성, 개폐화성, 이삭의 알곡 착밀도 등의 형태적 요인과 관련되어 있음이 시사되어, 면역적인 저항성이 없다는 기존의 정설이 뒤집어졌다. 


④의 '수발아 내성'은 실용적으로는 씨앗의 휴면성을 뒤집은 것이다. 곧, 휴면 중인 씨앗은 수발아하지 않는다. 씨앗의 휴면성은 완숙 이후, 일정 기간마다 발아율을 조사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씨앗의 휴면은 씨앗의 완성시에 가장 깊고, 시간과 함께 깨어난다. 온도 충격, 지베렐린과 과산화수소수에 의한 처리 등으로 강제로 깨울 수도 있다. 품종별 차이는 수확 직후가 가장 크다. 재배품종의 품종별 휴면성의 차이는 매우 커서, 예를 들면 에티오피아의 품종은 거의 모두 휴면이 없고, 수확 직후에도 100% 발아하는 데 반하여, 일본의 품종은 일부의 맥주보리 등을 제외하면 수확 직후의 발아율은 매우 낮다. 이것은 아마 건조한 에티오피아의 환경에서는 수발아가 문제가 되지 않는 데 반하여, 수확기가 장마와 겹치는 일본에서는 어느 정도의 휴면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수발아를 멈출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선조 야생종의 휴면은 깊고, 섭씨 25도에서 10주 동안 저장해도 전혀 발아하지 않는 것이 많다. 이것은 탈립된 씨앗이 다음 생육철까지 발아하지 않고 지내기 위한 안전장치일 것이다. 씨앗 휴면성의  QLT 해석의 결과, 작용가가 큰 몇 개의 유전자가 발견되어 수발아 내성의 개량에 사용할 만하다.




반왜성 '소용돌이' 보리 


2차대전 이후 세계의 인구는 급증하여 식량 위기의 두려움이 나왔기 때문에, 농업생산의 확대·안정을 목표로 하여 필리핀 국제쌀연구소(IRRI), 멕시코의 국제 옥수수·밀 개량센터(CIMMYT) 등의 국제 농업연구기관이 설립되었다. 이들의 큰 연구성과로 이른바 멕시코 밀과 기적의 쌀 등의 다수확 품종이 개발되어, 멕시코 밀의 육성자인 노만 볼로그 씨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일은 유명하다.


이들 다수확 품종에 공통된 특징은 키를 낮추는 '반왜성 유전자'를 넣어서 비료를 많이 주어도 키가 지나치게 크지 않아 쓰러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 반왜성 유전자는 생장호르몬에 대한 반응이 변화하여 풀 길이가 길어지지 않도록 한다. 


그림3-7 소용돌이 보리. Saisho 외. 2004에서 전재.




보리의 경우도 '소용돌이'라고 부르는 반왜성 품종이 에도시대 또는 그 이전부터 재배된 듯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 '소용돌이'라는 색다른 이름은 에도시대부터 재배되어 왔던 키가 작은 왜성 아사가오アサガオ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소용돌이 성질(渦性)의 보리는 왜성 유전자를 가지지 않은 정상형에 비하여 길이는 약 80%, 알곡의 크기는 약 70%, 잎의 색은 짙고 직립하며, 쉽게 분별할 수 있따.


일본 전국에서 활발히 보리가 재배되던 1933년 당시의 자료에 의하면, 약 76만 헥타르의 재배면적 가운데 75%가 소용돌이 보리이고, 쌀보리에 한하여 보면 약 90%였다고 한다. 곧 현재 일본에서 재배되는 쌀보리는 대부분 모두 와성이며, 줄기가 약하여 쓰러지기 쉬운 쌀보리에 왜성 유전자를 넣어 잘 쓰러지지 않게 하는 전략이라 생각할 수 있다.


마루야마 요코圓山応挙의 조카인 마루야마 오우신圓山応震(1790-1838)이 에도시대 말기에 묘사한 보리와 벼 병풍(프라이스 콜렉션 소장)의 초여름 풍경에는 소용돌이 보리로 보이는 직립한 보리와 종다리, 가을의 풍경에는 쓰러진 벼와 참새가 그려져 있어, 당시의 벼는 쓰러지는 것이 보통이었던 데 반하여 와성 보리는 쓰러지지 않았음을 고증한다. 


1730년대에 8대장군 요시무네吉宗의 명으로 정리된 <향보享保·원문제국산물장元文諸國産物帳>에는 현존하는 소용돌이 보리와 똑같은 '귀나鬼裸'라는 품종명이 있다.


조선반도에서는 일본으로 쌀을 이출하는 양이 급증한 1920년대 이후 식용 쌀의 부족을 보충하고자 소용돌이 보리의 재배가 급증했다. 중국에서는 1960-1970년대에 연안 지방을 중심으로 100만 헥타르 이상의 소용돌이 보리가 재배되었다. 이들은 중국에서 개발된 품종도 있고, 그 원품종은 외래의 것도 있는데, 상세한 건 밝혀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상황증거에서 와성 보리는 에도시대 또는 그 이전에 일본에서 기원하고, 대륙으로 퍼졌단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최근에 소용돌이 유전자의 염기배열이 해독되어, 기능(브라시놀라이드라는 식물호르몬에 대한 반응이상)도 밝혀졌다.


소용돌이 보리의 공통된 특징으로 봄 파종의 한랭한 지대와 건조 지대에서는 수확량이 낮고, 동아시아 계절풍 지대에서만 적응한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사실은 멕시코 밀과 기적의 쌀도 비료와 물이 충분하지 않으면 다수확이가능하지 않기에, 반왜성 유전자를 사용했던 다수확 기술이란 건 자원소비형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동아시아에 특유한 찰보리

 

식물은 광합성에 의하여 물과 이산화탄소에서 탄수화물을 합성해, 이것을 주로 전분의 형태로 열매와 덩이 등에 저장한다. 전분은 포도당이 축합된 거대한 분자이며, 사슬처럼 연결된 아밀로오스와 일부가 갈라져 그물처럼 된 아밀로펙틴으로 된다. 쌀의 경우는 20% 안팎의 아밀로오스를 함유한 것이 멥쌀, 아밀로오스가 없고 아밀로펙틴 100%인 것이 찹쌀이며, 찹쌀을 쪄서 찧으면 떡이 된다. 멥쌀의 경우는 아밀로오스가 적은 만큼 밥의 점성이 강해지고, 좋은 밥맛의 품종으로 알려진 고시히카리 등은 아밀로오스 함유율이 20% 이하이다.

  


그림3-8 찰(옅은색)과 메(짙은색)의 꽃가루




오카야마 대학 보리·야생식물자원 연구센터에 보존되어 있는 일본의 재래종 중에는 찰보리, 당밀(だんこむぎ) 등의 찰기 품종이 포함되어 있다. 이상한 점으로 이들 찰보리는 몇 퍼센트의 아밀로오스를 함유하여 찰벼처럼 아밀로오스가 전혀 없지는 않다.


보리의 찰·메를 결정하는 유전자는 15의 엑손, 약 5000염기대에서 이루어지고, 염기배열의 차이에 의하여 네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유형Ⅰ은 H. vulgare 이외의 종에도 있기 때문에 이것이 선조형이라 생각되며, 전분은 메 성질이다. 유형Ⅱ는 유형Ⅰ에 비하여 191염기대의 결손을 가지고 있는데, 전분은 역시 메 성질이다. 메 성질의 재배 보리 499품종의 염기배열을 조사한 바, 결손형의 유형Ⅱ는 218품종으로 전체의 40%를 넘었다. 따라서 유형Ⅰ과  유형Ⅱ의 분화는 상당히 이전, 어쩌면 재배화 이전에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유형Ⅰ과 유형Ⅱ의 지리적 분포를 보면 유형Ⅰ은 중근동에서는 68%, 중국에서는 74%, 조선반도에서는 57%, 일본에서는 75%인 데 반하여유럽에서는 25%, 에티오피아에서는 3%(염기배열을 조사한 36품종 가운데 1품종)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유형Ⅱ의 변이체는 주로 남과 서에 분포를 넓혔음을 알 수 있다. 선조 야생종 ssp. spontaneum에서도 유형Ⅰ과 Ⅱ의 비율은 57대125로 결손형 쪽이 오히려 많았기에 유형Ⅱ의 변이체는 재배화 이전에 선조 야생종 중에서 모두일어나고, 유형Ⅱ의 재배 보리는 유형Ⅱ의 선조 야생종에서 재배화되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곧, 탈립성 유전자의 항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보리의 재배화는 일원적이 아니란 것을 강하게 시사한다.


유형Ⅲ은 재래의 찰 품종이며, 유형Ⅰ에서 418염기대가 결손되어 있다. 전분은 몇 퍼센트의 아밀로오스를 포함한, 이른바 리키 유형의 불완전 찰 성질이다. 유형Ⅳ는 유형Ⅰ의 염기배열에서 단 1개의 염기가 변화함에 의하여아미노산을 지정하는 단위인 코돈이 유전정보의 번역정지를 지시하는 스톱 코돈이 되어, 아밀로오스를 전혀 만들지 못하는 완전 찰이 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덧붙여서 이 유형Ⅳ는 아지드화나트륨이란 화학물질의 처리에 의하여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이처럼 보리의 찰·메 성질 유전자는 야생형(선조형)이라 볼 수 있는 유형Ⅰ(메)로부터 결손에 의하여 유형Ⅱ(메)와 Ⅲ(반찰)이 생기고, 하나의 염기변이에 의하여 유형Ⅳ(완전찰)이 생겼다는 계보가 밝혀졌다. 이 유형ⅠⅢ의 자연적 돌연변이를 '떡을 좋아하는' 누군가가 선출했다는 재미난 사례이다.




마치며


이와 같이 유라시아 대륙의 중앙에서 기원하여 밀에 선행해 동서남북으로 분포를 넓혔던 보리는 초기 농경문화의매우 중요한 요소였음이 틀림없다. 또한 건조, 저온, 염류집적 등에 의한 스트레스에 내성을 가짐에 따라 앞으로 지구 환경문제와 식량문제의 비장의 카드가 될 것이 기대된다. 또 자식성 2배체이기 때문에, 밀속에 대한 유전 해석의 모델식물로도 유용하다. 


아라비아에서 기원했던 보리를 아라비안나이트 식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면, 아직 그 서두를 이야기했을 뿐이지만보리학의 첫머리로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면 다행이다.








Ⅱ 유라시아를 동쪽으로 전파했던 밀 -고고학과 유전학의 접점(카토우 켄지)




밀은 벼, 옥수수와 나란히 세계의 3대 곡물이며, 우동과 빵 등의 원료로 우리 일본인의 식생활 또는 일본의 식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이들 곡물은 모두 씨앗을 식용으로 하기 때문에, 벼와 옥수수의 씨앗을 본 적이없는 독자는 거의 없을 거라 생각한다. 그런데 밀에 대해서는 씨앗을 본 적이 없다는 분이 다수일 거라 생각한다.이것은 밀이 오로지 분식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식재료로서는 압도적인 존재감이 있는 데 반해, 식물로서는 친숙함이 덜하다는 독특한 존재가 밀이다.


그럼 세계의 밀은 어떠할까? 밀의 생산량은 6.8억 톤(2008, 2009년)으로 옥수수(7.8억 톤)에 이어 2위이고, 경작면적은 2.2억 헥타르로 당당히 1위이다(USDA <세계의 농업생산, 세계의 무역>). 일본의 밀 자급률이 14%(2005년)로 낮고, 부족분을 미국과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 수입에 의존하고 있기에, 밀은 구미의 작물이라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산량이 많은 지역은 유럽연합 27개국, 중국, 인도, 미국, 러시아 등이고, 아시아에서도 널리 재배되고 있다. 이와 같은 밀 재배의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 그림3-9이며, 지리적, 기후적으로 다양한 유라시아 대륙의 각지에서 여러 농경민족이 재배해 왔음이 일목요연하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유라시아 농경사를 이해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 작물인 밀에 대하여, 고고학과 유전학의 연구성과를 정리해 소개하겠다.


그림3-9 세계 전체에서 행해지는 밀 생산과 밀의 기원지. Dubcovsky and Duorah 2007에서.




복수의 식물종으로 이루어진 밀이란 작물


밀이란 작물은 식물학적으로는 단일 종이 아니고, 몇 가지 종의 총칭이다. 한 예를 들면, 우동 용으로 사용되는 밀의 종은 Triticum aestivum(빵밀), 스파게티 등의 파스타 용은 Triticum durum(마카로니밀)이라 이름이 붙여져 있고, 식물학적으로는 엄밀하게 구별된다. 둘의 결정적 차이는 염색체의 수로, 빵밀의 체세포에서는 42개, 마카로니밀에서는 28개이다. 이밖에도 염색체 수가 14개인 Triticum monococcum(재배 일립밀)이란 밀도 재배 밀의 동료이다. 밀속의 식물에서는 염색체 수의 기본수가 7이기 때문에, 이들 세 종의 밀은 각각 6배성, 4배성, 2배성이다. 2배성 밀 중에서도 몇 가지의 종이 있지만, 이들을 통합해 일립밀이라 부르고 있다. 4배성과 6배성 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며, 각각 이립밀, 보통밀이라 총칭하고 있다. 염색체 수가 다른 밀의 사이에서 교배하면, 교배 종자는 간단히 결실하고 파종하면 힘차게 자라지만, 통상은 꽃가루의 대부분이 불임이 되어 종자를 맺는 일이 없다. 




염색체 수의 배가에 의해 진화한 밀


다양한 밀의 진화를 해명하기 위하여 '게놈 분석'이란 수법을 확린한 것이 기하라 히토시木原均(1893-1986)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게놈'이란 '생물이 살아 가면서 최저한 필요한 염색체의 짝'이며, 밀의 경우에는 7종류의 염색체로 이루어진 짝(상동염색체가 있기에 실제로는 14개)가 이에 상당한다. 갖가지 밀의 사이에서 염색체의 상동성(게놈의 동일성)을 비교한 기하라는 이립밀과 보통밀의 염색체 가운데 14개가 일립밀의 14개의 염색체와 상동하다는 것을 밝히고, 이 14개의 염색체 짝을 AA게놈이라 이름을 지었다. 이와 같은 분석이 거듭 쌓이면서 일립밀, 이립밀 및 보통밀의 게놈이 AA, AABB, AABBDD임이 밝혀졌다(그림3-10).


그림3-10 밀의 배수성 진화. 사각으로 두른 4종은  세포질형(모계)가 같은 것임.




AA게놈을 가진 일립밀과 BB게놈을 가진 2배성 종이 자연적으로 교잡하여, 또 염색체 수의 자연배가라는 우연이거듭되어 이립밀이 성립했다. 게다가 이립밀에 야생종(팔레스타인 밀, Triticum dicoccoides)이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A, B 두 게놈의 제공 부모가 함께 야생종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세계의 연구자가 B 게놈 제공 부모를찾았지만, BB 게놈을 가진 2배성 종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래서 주목된 것이 B 게놈과 가장 많이 닮은 S 게놈을 가진 쿠사비 밀(Aegilops speltoides)이다. 그리고 우랄츠 밀(Triticum urartu)와 쿠사비 밀의 사이에서 교잡,염색체 수의 배가에 의해 AASS 게놈의 4배성 밀이 성립했는데, 이 4배성 밀에서 S 게놈이 변질되어 어느 게놈과도 상동하지 않은 B 게놈으로 바뀌어 AABB 게놈의 팔레스타인 밀이 성립했다고 생각한다. 


이와 같이 하여 이루어진 이립밀(AABB)이 DD 게놈을 가진 타루호 밀(Aegilops tauschii)과 자연교잡하여, 염색체 수의 배가에 의해 성립한 것이 보통밀(AABBDD)이다. 다만, 보통밀에는 야생종이 존재하지 않는 점 때문에 이 진화는 재배 이립밀(엠머밀, Triticum dicoccum)의 밭에서 일어났던 듯하다. 즉, 엠머밀밭에서 작물과 잡초가 자연교잡하여 새로운 밀이 성립한 것이다. 그러므로 보통밀의 성립은 농경이란 인류의 행위가 시작된 이후의 일이며, 재배종의 존재가 빠질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밀의 진화에 관해서는 모리森(2009)가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상의 결론은 밀 세포의 핵 안에 존재하는 염색체의 분석에 의해 도출된 것이며, 기하라는 '지구의 역사는 지층에, 생물의 역사는 염색체에 기록되어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다만, 유전자는 핵만이 아니라 세포질(엽록체와 미토콘드리아'에도 있고, 게다가 이들의 유전자는 모계유전한다. 팔레스타인 밀, 엠머밀 및 보통밀의 세포질 게놈형이 쿠사비 밀의 그것과 일치하는 점에서, 밀의 배수성 진화에서 팔레스타인 밀의 세포질이 면면히 계승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한 2번의 자연교잡에서 모친이 되었던 건 첫번째는 쿠사비 밀, 두번째는 엠머밀이었다는 점도 알았다.




서남아시아 태생의 밀


밀의 고향, 배수성 진화의 무대는 어디였을까? 지금으로서는 특정할 수 없지만, 추정할 수는 있다. 배수성 진화의계기가 되었던 교잡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종이 근접해 살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밀 각 종의 분포를 지도에서 겹쳐서 보면, 이른바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우랄츠 밀과 쿠사비 밀의 분포가 겹치기 때문에, 여기에서 야생식물인 팔레스타인 밀이 성립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엠머밀의 성립에 대해서는 농경의 개사라는 중대한 문제도 관련되기 때문에, 수많은 연구보고가 있다. 그중에서도 유력한 증거를 제시한 것이 엽록체 DNA의 해석결과이다. Mori 외.(2003)에 의하면, 야생종인 팔레스타인 밀은 유전적으로 다양하고 갖가지 세포질형(모계)으로 나뉘는데, 재배종인 엠머밀에서는 두 무리의 세포질형밖에 없다. 이 결과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 널리 자생하던 팔레스타인 밀의 매우 일부만이 재배화되었단 점, 그리고 아마 재배화가 적어도 두 곳에서 행해졌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엠머밀에서 볼 수 있던 두 무리의 세포질형 가운데 한 종류에 대해서는, 완전히 똑같은 유형의 세포질형이 팔레스타인 밀에서도 발견되었다. 이 유형의 팔레스타인 밀이 터키 남부의 구릉 지대에만 분포한다는 점에서, 이 지역에서 엠머밀이 성립했다고 결론을 내렸다. 재배화의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제안되어 있는데, 대략 1만 년 전이라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농경의 전파에 동반되어 재배지역이 확대되었던 엠머밀이 타루호 밀과 우연히 만났던 건 어디일까? 우선, 타루호밀이 현재 자생하고 있는 지역은 트랜스 코카서스(카프카스 산맥 남쪽 기슭과 아나톨리아 고원 사이의 지역으로,조지아,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세 공화국을 포함)부터 이란, 아프가니스탄, 중국 북서부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이들 지역의 타루호 밀 가운데 카스피해의 남동안 지역(Nishikawa 외. 1980) 또는 트랜스 코카서스부터 카스피해 남서안에 이르는 지역(Dvorak 외. 1998)에 보통밀과 똑같은 또는 매우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것이 분포해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 그러므로 아직 특정되지는 않지만, 트랜스 코카서스부터 카스피해 남안에 이르는 지중해성 기후의 지역에서 보통밀이 성립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유라시아의 다양한 밀


농경의 전파에 동반하여 빵밀의 재배지역도 확대되었는데, 재배환경이 다른 지역에 도입되는 과정에서 자연도태나 인위선발을 받아 그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는 밀만 선발되어 정책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도입과 선발이란 과정은 한 번만이 아니라 몇 번이나 반복했을 것이며, 그 과정에서 더 우수한 밀이 선택되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각 지역에서 성립하고, 오랜 세월에 거쳐 재배된 것이 재래종이다. 개량종의 보급에의하여 일본에서는 거의 볼 수 없게 된 재래종이지만, 필자들이 현지조사를 행한 중국 윈난성, 쓰촨성과 네팔에서는 지금도 재배가 계속되고 있는 지역이 남아 있다. 이들 지역에서는 같은 마을에서도 농가마다 다른 재래종을재배하고 있거나, 도대체 품종명이 붙여져 있지 않은 경우도 많으며, 한 뙈기의 밭 안에 이삭의 형태 등이 다른 수십 종류의 밀이 섞여 있는 일도 있다(그림3-11). 이러한 것을 통틀어서 재래종이라 부른다.


그림3-11 중국 윈난성의 밀밭에서 채집한 갖가지 유형의 밀. 2005년 필자 촬영.





이란의 재래 밀에는 57종류의 변종이 알려져 있는데(細野 1954), 밀의 변종 분류는 주로 이삭의 형태에 기반을 하여 행해지기에 이삭의 유형만으로도 57종이 있다는 것이 된다. 이 결과는 '작물의 기원은 유전적 변이의 다양성에서 풍부한 지역을 그 중심으로 한다'고 했던 바빌로프(1980)의 유전자 중심설을 지지하는 것이다. 한편, 중국 남부에서는 17변종, 일본에서는 4변종으로, 전파에 의해 다양성이 사라졌단 것이 밝혀진다.


다만, 밀이 전파되어 새로운 환경에 조우하면 기존의 품종에서는 적응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이와 같은 경우에 농민은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면서 풍년을 기원하며 재배를 시도했다고 생각되는데, 이럭저럭 하는 동안 집단 안에 조금만 혼재해 있던 적응 유전자를 가진 개체의 빈도가 급격히 증가했거나, 또는 새로운 돌연변이가 생겨서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기원지에는 없지만 전파된 지역에는 있다는 유전변이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예가 일본의 농림10호라는 품종이 가지고 있던 왜성 유전자(키를 낮추는 유전자)이다(藤卷·飼 1985). 필자의 연구실에는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채집된 재래 밀 품종이 4000점 이상 있는데, 같은 것은 한 가지도 없고 모두 다른 품종이다.





중국으로의 전파에 관한 여러 설


먼저 앞에 나온 그림3-9를 보길 바란다. 밀의 기원지인 트랜스 코카서스 지방과 중국 사이를 연결하는 밀 재배지역의 벨트가 세 가지임을 볼 수 있다. 시베리아를 서쪽부터 동쪽으로 횡단하는 벨트, 실크로드를 따르는 벨트, 그리고 히말라야 남쪽 기슭을 동쪽으로 나아가는 벨트이다. '과연 이 세 가지 길을 통하여 밀이 중국에 찾아왔을까?'라고 지레짐작하는 독자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벨트도 중국의 서역 등지에서 밀도가 낮아져 경솔히 결론을내리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다. '밀이 중앙아시아, 서남아시아에서 기원했다'고 기하라 히토시가 제창한 뒤 공동연구자인 호소노 시게오細野重雄(1907-1958)이 세계 각지에 있는 밀 변종의 분포를 조사해 밀의 전파경로를 밝혔다(그림3-12). 엤날부터 동서의 교역로로 (1)실크로드=투르키스탄부터 신장 위구르 자치구, 내몽골 자치구를 거쳐 화북에 통하는 경로, (2)미얀미, 윈난 경로=카이바르 고개를 거쳐서 파키스탄의 평야로 나와, 인도를 횡단하여 미얀마로 들어가, 윈난성과 쓰촨성을 거쳐 화중으로 나가는 경로, (3)티베트 경로=인도에서 파미르, 또는네팔을 통하여 티베트로 나와, 산시성 또는 쓰촨성으로 나가는 경로, (4)바닷길=인도에서 말레이 반도의 남단을 돌아서 광둥성으로 나가는 바닷길 등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밀 변종의 지리적 분포를 해석한 결과, 중국으로 전파된 경로로 ①실크로드 및 ②미얀마, 윈난 경로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단 것이 지적되었다(그림3-12). 또한 그뒤 ③러시아, 몽골 고원에서 중국 동북부를 거치는 시베리아 경로와 ④네팔, 부탄에서 티베트 고원을 경유해 중국에 이르는 티베트 경로도 제창된다(中尾 1983; Zeven 1980).


그림3-12 호시노(1954)에 의한 밀의 전파경로. 숫자는 각 지역의 변종 숫자. 사선으로 나타낸 지역은 밀의 기원지(현재의 설에서는 이 가운데 서쪽 절반이 유력하다고 함).





전파 경로 해명에 대한 유전학적 접근


작물의 전파 경로를 해명하는 연구수법으로 적응적으로 중립인(적응에 관계하지 않는) 유전자의 지리적 분포 해석도 유효하다. 교배한 잡종이 고사하는 괴사(necrosis)라는 현상의 원인이 되는 보족유전자(Ne1, Ne2)를 해석한 Tsunewaki and Nakai(1967)은 간토우 서쪽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Ne2가 도호쿠 일본에 많이 분포한다는 흥미로운 결과를 보고한다. 한편, Ne1의 복대립유전자 Ne1w Ne1m을 해석한 Zeven(1980)도 일본 국내에서의 지역별 차이를 확인하고, 기원지에서 동아시아로 밀이 전파된 경로로 아래와 같이 두 가지를 제안했다. (1)Ne1w형의 경로=아프가니스탄→인도히말라야 남쪽 기슭을 거쳐, 중국 남부, 일본 서남부에 이르는 경로, (2)Ne1m형의 경로=중앙아시아에서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 북부, 일본 동북부에 이르는 경로.



그림3-13 유라시아 대륙의 재래 밀 품종에서 보이는 D2 유전자의 지리적 분포




그뒤 잡종 왜성유전자(D1-D4), 잡종 꽃가루 불임유전자(Ki1-Ki4)와 교잡 친화성유전자(배우자 치사유전자 Igc1, 호밀과의 교잡 친화성 유전자 Kr1)의 지리적 분포가 해석되었다. 그 결과의 한 에가 그림3-13이다. "IL 171"이란 이라크의 밀 품종(D1 유전자를 가짐)을 시험적으로 교배하면, D2 유전자를 가진 품종과의 교잡이 극단적으로 왜화하여 이삭이 패지 않고 고사해 버린다. 이 현상이 잡종왜성이며, 그림3-13에 나타난 것은 D2의 지리별빈도라고 할 수 있다. 밀의 기원지에서 중국 서역에 이르는 지역(점선으로 구별된 중앙 부분)에서는 D2의 빈도가 어디에서나 30% 정도인 데 반하여, 중국 동부-일본에서는 거의 없다. 잡종 꽃가루 불임유전자, 배우자 치사유전자(Tsujimoto 외. 1998) 및 호밀과의 교잡 친화성 유전자에서도 똑같은 지역별 차이가 확인되었기 때문에, 중국의 서역과 동부에서는 밀의 유형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역시 그림3-9의 지도에서 경솔히 결론을 내지 않는게 나았다.


다음으로 소개하는 건 네팔인 유학생(오카야마 대학)의 기미레 씨가 행한 동위효소(아이소자임)의 연구이다. 동위효소란 분자구조는 다르지만 같은 화학반응을 촉매하는 한 무리의 효소로서, 분자구조가 서로 다른 걸 적응적으로 중립인 변이라고 생각하여 집단 사이의 근연관계를 추정할 수 있다. 분석 결과, 그림3-14에 나타나듯이 터키-일본의 밀 재래종이 세 가지 집단으로 나뉘었다(Ghimire 외. 2005). 첫번째 집단에는 터키부터 중국 쓰촨성에 이르는 지역의 밀(그림3-14 ◎)이, 두번째 집단에는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중국 북부 및 일본(그림3-14 ▲)이, 또 세번째 집단에는 중국 연안부(그림3-14 ◇)가 각각 포함되었다. 이 결과에 의해, 서아시아에서 기원한 밀이 (1)미얀마, 윈난 경로 또는 티베트 경로에 따라 중국 쓰촨성으로(그림3-14 ◎), 또는 (2)실크로드에 따라 전파된 밀이 중국 북부에서 정착하고, 일본에 도입되었단 점(그림3-14 ▲)이 밝혀져, 호시노(1954)의 전파 경로를 지지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림3-14 아이소자임 분석에 의한 세 가지 집단(◎▲◇)으로 나뉜 유라시아 대륙의 밀. 똑같은 심볼의 지역을 선으로 이으면 전파 경로를 알 수 있다. Ghimire 외.(2005)에서 개변.




그뒤 연구에 의해 중국 평야부에서도 북부(황하보다 북쪽)과 중남부(황하보다 남쪽)에서 유전적으로 다르다는 점, 그리고 두 지역의 밀이 각각 일본의 동북부와 서남부의 밀과 유전적으로 근연이란 점이 나타났다(Ghimire 외. 2006). 따라서 일본으로 도입된 밀도 단순하지 않은 듯하다. 또한 두 집단과 신장 위구르 자치구, 닝하 회족 자치구와의 직접적인 관계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실크로드에 의한 전파에 즈음하여 강력한 선발이 작용했음을엿볼 수 있다. 한편, 표고 3000미터 이상의 고지에서 티베트족이 밀을 봄 파종 재배하고 있는 티베트 자치구, 윈난성(서북부), 쓰촨성(서부)의 밀이 근연이었다는 점으로부터, 티베트 경로에 의한 전파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들 지역의 밀은 또한 동쪽으로는 전파(정착)되지 않았던 듯하다.




유적에서 출토된 밀 유물


현생 밀을 상세히 해석하면, 먼 옛날에 밀이 거쳤을 경로를 추측할 수 있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하나 있다. 유라시아 대륙을 무대로 하여 여러 민족이 성쇠를 반복하며 서로 동으로 이동했듯이, 밀의 전파도 몇 번에 걸쳐서 되풀이되었을 것이고, 그 방향도 한 방향이 아니었을 것이다. 전파 경로도 몇 번이나 바뀌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므로 현생 밀의 해석에 의하여 밝혀진 것은 몇 번이나 바뀌었을 전파 경로의 마지막 버전으로서 초기의 전파 경로와는 완전히 다를지도 모른다. 


먼 옛날의 밀이 어떠한 유형의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유적에서 출토된 밀 유물의 분석을 빼놓을 수 없다. 다만 밀 유물의 대부분은 탄화되어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그런데 분자유전학적 해석수법의 비약적인 발전에 의해 탄화 씨앗에서도 유전정보를 읽어 들이는 일이 가능해져, DNA고고학이 각광을 받게 되었다(佐藤 2002). 식물 중에서도 상당히 초기부터 인류와 관계해 왔던 호리병박에 대해서는 멕시코에서 발굴된 약 9000년 전의 과피 조각에서 DNA를 추출하는 데 성공하여 엽록체 DNA의 분석에 의해 아시아에서 도입된 것이란 사실이 확인된다(Erickson 외. 2005). 따라서 적당한 밀 유물이 있다면 매우 초기의 전파 경로를 해명하는 일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실크로드의 고대 밀


농학부에 소속되어 식물세포유전학 연구실이란 간판을 달고 있는 필자로서는 밀 유물과 만날 기회는 거의 없고, 더구나 분쇄하여 DNA 분석해도 좋다는 유물과 만난 적은 전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따라서 밀 유물의 DNA 해석에 흥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현생의 밀을 실험재료로 유전연구를 계속했다. 그런데 종합지구환경학연구소의 사토 요우이치로 씨의 연구 프로젝트에 이끌려 상황이 일변했다. 실크로드의 중계지로 중요한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발굴조사하다 소하묘 유적에서 3000-4000년 전의 밀 씨앗이 다수 출토된다. 게다가 탄화되어 있지 않았다. 당장은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지만, 탄화되지 않은 것이 있다면 DNA 분석에 의해 당시의 밀을 복원할 수있을지도 모른다. 



그림3-15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재발견된 소하묘 유적. 왼쪽 위: 주변 지도(<NHK 스페셜> 2005에서 전재). 오른쪽 위: 소하묘 유적의 전경. 왼쪽 아래: 관에 들어가 있던 풀로 짠 바구니. 왼쪽 아래: 관에 걸쳐 있던 소가죽.




소하묘 유적은 세계 제2위의 면적을 자랑하는 광대한 타클라마칸 사막의 동북쪽 가장자리 근처에 있으며, 유라시아 대륙을 동서로 연결하는 교역로의 하나인 실크로드의 천산남로가 지나고 있었다. 동으로 약 100킬로미터 정도 가면 천산남로와 서역남도가 합류하는 누란 고성이 있다(그림3-15). 소하묘 유적은 스벤 헤딘 탐험대의 대원인 폴케 베리만Folke Bergman이 1934년에 발견한 분묘의 유적으로, 2000년에 신장 문물고고연구소 소장 이디리스 압둘라술 씨에 의해 '재발견'된 것이다. 이 주변에는 그밖에도 철판하 유적, 고묘구 유적이란 4000년 가까이 전의 집단묘의 유적이 발견되어, 인간의 동서 교류에 동반한 밀의 이동을 밝히는 데에 매우 흥미로운 지역이다.


중국으로 밀이 도입된 시기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면 대체로 아래와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신장 로프노르의 서북 약 70킬로미터인 곳에 있는 공작하 하류의 유적에서 발굴된 약 4000년 전의 밀 탄화 씨앗이 현재로선 가장오래된 듯하다(Baoqi 외. 2001). 그리고 상나라 때에 갑골문자에 적혀 있던 자료에 의하면, 모두 기원전 1238-1180년의 시대에 허난성 북부에서 밀이 주요한 작물로 재배되었다. 또한 밀의 기술이 시경에 자주 나오는 점에서, 기원전 6세기까지에는 황하 중하류 지역에서 밀의 재배가 정착되어 있었단 것이 밝혀진다. 한편, 중국 서역에서 밀 재배가 발전했던 건 기원전 500년 이후의 일로서, 아마 봄에 파종하여 여름의 끝자락에 수확하는 봄 파종 재배라는 기술과 그에 적응한 품종이 도입되었던 것에 의한 듯하다(Zeven 1980).





고대의 밀과 만나다


중국 서역에서 밀이 처음으로 도입되었을 무렵의 밀 씨앗이 탄화되지 않고 보존되어 있다는 것은 경탄할 만한 사실이며, 무엇보다도 DNA 분석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안고서 2005년 4월에 사토 요우이치로 씨, 이노우에 타카시井上隆史 씨와 함께 신장을 방문했다(상세한 건 佐藤 2006, 西田 2009를 참조하길 바람). 


사막 안에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소하묘 유적은 약간 높은 언덕이 되어 있으며, 여러 개의 각기둥(묘표)가 세워져 있었다(그림3-15). 묘표 아래에는 관이 각각 1개씩 매장되어 있었다. 관은 호양(버드나무의 일종)의 큰 나무를 잘라서 만든 배 모양으로 아래 판이 없고, 모래 위에 가로놓여진 유체 위에 씌운 것처럼 놓여 있으며, 또 소의 털가죽으로 덮여 있었다. 유체의 대부분은 미이라화되어 보존상태도 좋았는데, 그 원인의 하나는 낮밤의 온도차로 유체가 얼고 녹기를 반복해 동결건조와 마찬가지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한편, 미이라의 얼굴에는 하얗게 칠해져 있어 이것이 보호 코팅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인지 얼굴의 특징도 잘 보존되어 있다. 주름이 깊은 생김새이고, 신장도 큰 점에서 유럽계 인종처럼 보인다. 관의 하나에는 20대로 추정되는 젊은 여성의 미이라가 들어 있어, 그 단정한 생김새 때문에 '소하묘의 미녀'라고 불린다. 2005년에 방영된 NHK의 "새로운 실크로드"라는 방송에서 보았던 독자도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풀로 짠 바구니(그림3-15)에 담겨 미이라의 머리맡에 부장되어 있던 밀의 씨앗과 대면한 건 소하묘 유적에서 돌아와 방문했던 신장 문물고고연구소에서였다. 발굴된 밀 씨앗은 역시 탄화되지 않고, 색도 선명하며, 조금 과장해 말하면 현생의 밀과 착각할 법한 것이었다(그림3-16).


그림3-16 풀로 짠 바구니에 들어가 있던 밀 씨앗. 왼쪽: 매우 충실한 자색의 씨앗(M25). 중간: 빈약한 자색의 씨앗(M11). 오른쪽: 매우 충실한 적색의 씨앗(자색의 밀과 기장이 섞인 걸 볼 수 있음, M33)





소하묘 유적 근처에서 농경을 행했을 가능성


미이라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해석한 길림대학의 연구자에 의하면, 매장되어 있던 건 유럽계의 인종이라 한다. 또 부장품의 방사성동위원소 C14에 의한 연대측정에 의해 3000-4000년 전의 것이란 점도 확인되었다. 그러나 이것뿐이라면 유럽계의 인종이 소하묘에 정주했다는 증거는 안 된다. 그런데 관은 몇 층으로 겹쳐 있고, 약 1000년에 걸쳐서 매장이 행혀졌다고 생각된다. 또한 관을 덮고 있던 소의 털가죽에 대해서는 그 모양(그림3-15)으로부터 야생이 아닌 점(만넨 히데유키万年英之 씨 <고베 대학>의 개인적인 편지에 의함), 또 선지피가 관에도 묻어있는 점에서 매장할 때 그곳에서 처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사실은 목축 및 그를 지탱하는 광대한 초원의 존재를 보여준다. 



이들 사실로부터 적어도 약 4000년 전에는 유럽계의 사람들이 이 지역에 이주해 와서 풍부한 물을 이용하여 목축과 밀 재배를 행하고 있었다는 걸 상상할 수 있다. 소하묘 유적의 주변에서 주거터와 경작지 터가 발견된다면 이 가설이 실증되지만, 사막의 아래에 잠자고 있는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연과학적 접근으로 실증하자고 사토 요우이치로 씨의 연구 프로젝트 안에서 팀이 결성되었다. 당시의 소하묘 유적 주변 지역에서 행하던농경의 존재를 밝히기 위하여, ①밀의 내력조사, 특성의 복원 ②소의 내력조사 ③주변 지역의 꽃가루 분석에 의한 고환경의 복원 등을 연구 목표로 한다.





소하묘 유적의 고대 밀


필자는 2007년 6월에 우르무치에 있는 신장 문물고고연구소를 다시 방문했는데, 이때는 밀 씨앗 20알을 분쇄하여 DNA 해석을 해도 좋고, 그리고 20알의 선발은 일본 쪽에 맡긴다는 합의를 할 수 있다. 그래서 20알을 선발하기 위하여 정리가 끝난 관에서 꺼낸 밀 씨앗을 모두 볼 수 있었다. 밀 샘플에 붙였던 표를 보면 대부분은 풀로짠 바구니에 들어 있었지만, 관에 따라서는 미이라의 위와 아래에 뿌려져 있던 밀도 있었던 듯하다. 풀로 짠 바구니의 샘플에는 밀과 기장의 씨앗 외에 종을 알 수 없는 식물의 가느다란 줄기 같은 것이 섞여 있었다. 한편 뿌려져 있던 샘플에는 미이라 아래의 모래 등도 함께 들어 있었다.


일부 관에서는 탄화 씨앗이 섞여 있었지만, 대부분의 밀 씨앗이 탄화되지 않았다(그림3-16). 씨앗 껍질의 색이 당시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M33이란 관의 밀은 씨앗의 대부분이, 또 BM17-12라는 관의 밀(약3400년 전)에서는 일부의 씨앗이 각각 붉은 알임이 확인되었다. 그밖의 관에서는 2005년 4월에 보았던 밀과 똑같은 색의 씨앗만 있었다. 그때는 조금 맑지만 붉은 알일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M33의 그것과는 분명하게 다르며 실은 자색 알임이 판명되었다. 그래서 알의 색, 씨앗의 크기 등에 기반하여 20알을 선발하고, 사진 촬영과 계측을 한 뒤, 나카무라 이쿠오中村郁郞 씨(치바 대학), 니시다 히데타카西田英隆 씨(오카야마 대학)가 신장 농업과학원의 연구소에 이동하여 DNA 분석을 행했다(나중에 기술).





고대 밀의 형태 분석


필자는 문물고고연구소에 남아 모든 샘플을 시간을 들여 정밀조사를 했다. 정리를 끝낸 17개의 관에서 꺼냈던 밀씨앗의 수는 몇 알부터 몇 만 알(584g)으로 크게 달랐다. 그래서 합계 634알을 골라서 씨앗의 길이와 너비를 계측하고 그 분산(측정치의 불규칙한 분포)를 계산함과 함께, 관마다 씨앗 전부 또는 일부의 무게를 게측하여 한 알의 무게를 구했다(전자저울의 정밀도라는 제한요인 때문에 한 알씩 계측하는 건 포기했다). 또한 귀국한 뒤 비교를 위하여 유전적으로 균일한 개량종 및 잡박한 재래종(중국 윈난성)에 대해서도 똑같이 계측했다.



관별로 계산했던 종자 길이의 분산은 재래종과 동등 또는 2배 이상이며, 당시의 밀이 유전적으로 다양했단 것을 실제로 확인했다(표3-1). 특히 씨앗 길이 4mm 이하의 작은 알 밀(현대의 밀은 대략 5-7mm)의 혼입이 대부분의 관에서 발견되었는데, 이와 같은 작은 알의 밀은 홋카이도 대학 구내의 사쿠슈코토니강 유적(9세기 중엽-10세기)에서도 발굴되며(Crawford and Yoshizaka 1987), 또 인도 주변 지역의 현생 고유종인 인도 왜성 밀(T. aestivum L. subsp. sphaerococcum)도 작은 알인 점에서 그들과의 관계가 마음에 걸리는 바이다. 



관 번호

알 색

조사 씨앗수

씨앗 길이(mm)

한알 무게(mg)

평균

평균

분산

최대

최소

M2:18:1

자색

80

5.60

0.320

6.70

3.90

23.3

M11:22

자색

80

4.26

0.296

5.60

3.35

6.0

M13

자색

50

5.56

0.563

6.65

3.70

28.5

M13:28

자색

20

5.56

0.491

6.65

4.45

21.0

BM23:16

자색

8

4.69

0.089

5.35

4.30

2.0

M25 좌하부 배

자색

100

5.33

0.385

6.55

3.55

20.5

M27

자색

50

5.86

0.287

6.60

4.40

29.1

M29 몸 위

자색

50

5.40

0.386

6.30

3.60

17.0

M33 몸 아래

적색

50

4.95

0.281

6.15

3.60

21.5

윈난성 재래종

윈난9-11-6

적색

100

6.98

0.275

8.10

5.70

37.2

윈난9-11-7

적색

100

6.14

0.279

7.25

4.90

30.6

표3-1 소하묘 유적에서 발굴된 고대 밀에 대한 씨앗 길이와 무게의 분산




다수의 밀 씨앗을 분석할 수 있던 8개의 관 가운데 M13, M27에서는 매우 충실하여 한 알의 무게가 30mg이었다. 윈난성의 재래종(현생)이 30-37mg이었기 때문에, 두 관의 밀이 충분히 충실하다는 게 확인되었다. 기타 다섯 샘플에서도 17-23mg이면서 매우 충술한 씨앗의 외관을 띠고 있었다(그림3-16). 이 결과는 순조롭게 등숙했던 점, 즉 기온이 상승하는 등숙 후기에 충분한 물이 있었단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다만 '소하묘의 미녀'가 있던 관(M11)의 밀은 한 알의 무게가 6mg으로 작고, 편평한 주름의 씨앗이었다(그림3-16). 등숙의 전반이 순조롭게 진행되면서 중반 이후에 어떠한 이유에 의해 정지되어 바짝 마르면 경량의 주름 씨앗이 된다. 따라서 등숙 중기 이후 돌연한 기후불순(고온과 건조 등)에 의한 흉년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자색 알을 둘러싼 의문


발굴된 씨앗이 밀이고 그 대부분이 자색인 점을 알아차렸을 때, 밀의 전문가로서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보리에서는 자색이 진귀하지 않은데, 일본의 재래종에서도 찰기 품종의 대부분이 자색이다. 찰기를 지닌 보리를 구별하기 위한 표지형질로, 의도적으로 자색 알의 찰기 성질의 보리 품종을 선발해 왔던 듯하다. 그런데 밀에서는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밀의 씨앗 색에 대해서는 이립밀에서는 대부분이 적색 알 또는 백색 알인데, 에티오피아 및 주변 지역에서는 자색 알의 존재가 알려져 있다. 한편, 보통밀에서는 자색 알의 이립밀과의 교배에 의해 자색 알의 계통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는데, 원래 적색 알과 백색 알의 두 종류만 알려져 있었다. 소하묘의 자색 밀이 이립밀이라고 하면 중국 서역과 에티오피아라는 지리적 틈이 문제가 되고, 보통밀이라면 '일찍이 존재했는데, 절멸되어 버렸다'는 것을 가정해야 한다. 어느쪽이든 그 파장은 크다.


또 하나 이상한 점이 있다. 씨앗의 형태조사에 의해 유전적으로 다양한 것이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씨앗 색은 대부분이 자섹으로 매우 고르게 되어 있었다. 이 결과는 종자 색에 관해서는 적극적으로 선발했단 것을 시사하며, 자색에 어떠한 의미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고대 밀의 DNA 분석


소하묘 유적에서 발굴된 밀의 보존상태가 놀라울 만큼 좋았어도, 역시 몇 천 년이나 경과한 씨앗이기에 발아할 리도 없고(시험하지는 않았지만), DNA의 분석도 진행하여 짧은 DNA 단편이 약간 남아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극미량의 DNA라도 해석할 수 있는 PCR(Polymerase Chain Reaction)이란 방법을 사용하여 분석하기로 했다. 이방법은 올봄에 멕시코에서 발생했던 신형 인플루엔자의 감정법으로 언론에서 자주 등장했기에, 기억에 새로운 독자도 많을 것이다.


분석한 유전자는 여러 가지 농업형질(출수기, 파종기, 풀 길이, 품질)을 결정하는 유전자와 종에 고유한 DNA 배열 등이다. 고대 밀의 종을 동정하는 것과 농업 특성의 추정을 시도하여, 그 결과에 기반을 해 당시의 밀 재배에 필요한 물의 양, 토양의 비옥도, 재배시간, 밀의 용도 등을 앞으로 연구해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2005년에는 다섯 알의 씨앗, 그리고 2007년에는 20알의 씨앗을 분석했다. DNA를 추출하기 위하여 고대 밀의 씨앗을 갈아서 으깬 나카무라 이쿠오, 니시다 히데타카 씨에 의하면, 탄화 밀의 경우에 무르지 않고 단단한 씨앗이었다고 한다. 분석 결과, 엽록체 DNA의 PS-ID 배열과 리보솜 DNA의 ITS 배열에 대해서는 고대 밀의 몇 개로부터 DNA를 증폭할 수 있었다(그림3-17). 이 가운데 한 샘플에 대하여 ITS 배열을 상세하게 해석한 바, 보통밀에 고유한 DNA 배열이란 것이 확인되었다. 아까 자색 알의 일도 있기에, 1회의 실험으로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기대된다. 


그림3-17 소하묘 유적에서 발굴된 고대 밀의 PCR 분석(엽록체 DNA의 PS-ID 배열) M33의 5알과 M29의 1알 가운데 전자의 2알에서 DNA가 증폭되었다. M=크기 표지




다만 농업 형질(출수기, 파종기, 풀 길이, 품질)을 결정하는 유전자에 대해서는 그 DNA 배열을 증폭할 수 없었다. 아까의 PS-ID 배열과 ITS 배열이 세포 안에 여러 복제가 존재하는 데 반하여, 이들의 유전자는 핵 안에 하나만 존재한다는 것이 결정적 차이이며, 이 때문에 파괴되지 않은 DNA 배열이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라 생각한다.DNA의 분해와 과학기술의 진보 사이의 경쟁이지만, 이 연구는 지금도 진행중이며 우리가 품어 왔던 실크로드관을 뒤엎어 버릴 만한 새로운 발견을 기대하고 있는 바이다.





농경사의 장래 -밀의 다양성이 가능하게 했던 내염성 육종


지금까지는 유라시아에서 행하던 밀 재배의 역사를 소개했는데, 마지막으로 장래의 식량생산에 연결되는 금자탑 같은 일로 밀의 다양성을 활용했던 농경의 모습을 소개하겠다.


밀의 재배 지역이 확대되는 데에는 농민의 노력과 기술 혁신도 필요했지만, 역시 각각의 지역에 적응할 수 있는 밀(엄밀한 의미에서는 유전자)의 존재가 빠질 수 없었다. '빠질 수 없었다'고 과거형으로 표현했지만, 지구환경의 변화와 인위적 요인에 의한 재배 지역의 감소와 확대는 끊임없이 반복되며, 매우 현대적인 과제라 할 수 있다.이 문제에 하나의 방향성을 보여주는 것이 이번 장의 공동 집필자인 타케다 카즈요시 씨가 중국 허베이성에서 성공시켰던 프로젝트일 것이다.


중구 ㄱ허베이성의 남피南皮에서는 지하수에 약 3%의 염분을 함유하고, 연간 강수량도 약 500mm(그중 200mm가 7월에 집중)로 적다. 이 지방에서는 밀을 건기에 가을 파종으로 재배(10월 파종, 6월 수확)하고 있기에, 토양의 건조함과 염해가 문제가 되었다(그림3-18). '첨단 과학기술을 도입하여'라고 하면 유전자변형 작물이 되지만, 타케다 씨가 발상한 건 다양성의 이용이었다. 오카야마 대학 자원생물과학연구소에 보존되어 있는 세계의 보리약 8500품종 및 밀 약 1700품종의 씨앗 각 5알씩을 혼합하여 현지의 실험밭에 파종했다. 보통의 재배시험이라면 각 품종을 확실히 구별하여 재배하고 그 수확량 등을 조사하겠지만, 1만 품종 이상을 중국에 가지고 들어가기위해 자루에 채우는 일과 식물검역 비용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목적은 품종 비교가 아니라, 염류집적 토양에서도 보통으로 자라는 밀을 찾는 일이다. 게다가 시험용으로 정확히 정비된 염류집적 토양이 아니라, 염류집적의 정도가 매우 불균일한 현지에서 하는 시험이다. 그렇다면 혼합하여 뿌려 버리는 것이다.


그림3-18 중국 허베이성의 염류집적 토양에서 다수확을 가능하게 했던 밀 신품종 A115. 

왼쪽 위: 염분이 석출된 밭. 오른쪽 위: 불균일한 실험밭을 몇 개의 구획으로 분할했다(토양조건은 C>B>A). 왼쪽아래: 재배조사의 풍경. 오른쪽 아래: 현지 농가의 밭에서 대규모로 재배되는 신품종 A115.




물론 '나중은 어떻게 되겠지...'는 아니다. 불균일한 토양에서의 선발을 확실히 하기 위해 구획별 선발이란 발상을 도입했다. 실험밭 전체에서 우수한 그루를 선발하면, 염류집적이 적은 곳에서 자랐던 그루를 선발할 수도 있어 결과적으로 염분에 강한 그루를 간과해 버릴 위험성이 높다. 그래서 실험밭을 몇 평방미터의 구획으로 나누고(그림3-18), 그 안에서 상대적으로 우수한 개체를 선발했다. 먼저 첫해의 겨울에 보리의 약 60%, 밀의 약 25%가 고사하여 내한성 선발이 행해졌다. 그리고 왕성히 성장했던 밀 150개체, 보리 133개체를 선발하여 시험을 거듭한 결과, 밀 A115라고 이름을 붙인 계통이 염류집적 토양에서도 보통으로 자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 품종은허베이성의 품종인정시험을 통과해, 2000년부터 보급되어 최근 5년 동안에 합계 7000헥타르에서 재배되고 있다. 


덧붙여서, A115는 내염성, 내건성에서 뛰어나지만, 오카야마 대학의 스트레스 없는 조건에서 재배해 보면 조금 풀 길이가 긴 것을 제외하면 보통의 품종이다. 또한 A115와 똑같은 밀이 오카야마 대학의 종자저장고에 잠들어 있긴 하지만, 1700품종 안에서 찾아내는 건 힘들고 그 의미도 없다.


어디에나 있는 것 같은 보통의 밀이 지닌 숨겨진 소질이 '떄와 장소에 따라서는' 세계 인류를 구할 것이다. 유전적으로 다양한 식물 유전자원은 아직 누구도 인식하지 못한 숨겨진 소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인류가 이용하고있는 건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재배시험에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숨겨진 소질을 찾아내기 위해서 1만 품종의 재배시험을 하려고 생각한 사람은 아직 없다. 그러면 5만 알의 씨앗을 뿌려서 구획별 선발법에 의해 일부 우량 그루만을 선발한다는 시험은 어떠할까? 이거면 될 것 같다. 5만 알(1만 품종x5알)의 씨앗을 맥류 유전자원 키트로서 세계 각지의 문제 토양과 좋지 않은 환경에서 뿌려 보면, 숨겨졌던 소질을 많이 발견할 것이다. '유전자원의 유효이용', '써야 할 유전자원'을 재인식시킬 수 있었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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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3




기고 4

누란의 농업과 염해     -이토 토시오伊藤敏雄





누란은 염해로 멸망했다?


누란 왕국은 돈황 서쪽 최초의 오아시스 도시국가이고, 실크로드의 요충에 해당하며, 동서 교역으로 번영했는데,어느 사이에 역사에서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이 누란 왕국 멸망의 요인에 대하여 최근 염해를 그 요인의 하나로 드는 견해가 제출되었다. 인구 증가에 수반하여 식량이 부족해지고, 이모작을 행하게 되었기 때문에 관개에 의하여 염분이 집적되어 농업 생산이 가능한 약간의 토양도 황폐해져 버렸다고 한다(山田 2005).


흥미로운 지적으로, 메소포타미아처럼 건조지역에서 관개농업을 전개하면, 지나친 관개에 의하여 염해가 발생하는 것은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사료적인 근거는 보이지 않고, 억측에 지나지 않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문헌 사료와 고고학적 성과에 의하여 누란의 농업 사정과 염해의 가능성에 대하여 검토하려 한다.



그림1 누란 주변의 유적 분포도. 누란 고성은 스테인의 편호로 LA. 신장 문물고고연구소 <2002년 소하묘지 고고조사와 발굴보고>([신장문물] 2003-2)의 그림1을 바탕으로 작성.





누란의 농경과 목축의 개시


1979년에 고묘구古墓溝에서 발견된 '누란의 미소녀' 미이라는 모직물로 감싸고, 새의 깃털을 꽂은 펠트 모자와 소가죽 신발을 몸에 착용하고, 머리가 있는 곳에 식롱食籠(밀 씨앗 등을 담은 풀로 짠 바구니)이 놓여 있었다. 그 곁에는 유아의 미이라가 작은 관에 장사지내지고, 모직물로 감싸여 앞가슴에 식롱이 놓여 있었다. 고묘구에서는 이외에도 모직물로 감싼 백골 사체와 펠트 모자, 식롱 등이 여럿 출토된다. 1980년에 철판하鐵板河 고묘에서 발견된 '누란의 미녀' 미이라는 머리에서 가슴에 걸쳐서 풀로 짠 키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얼굴은 양가죽으로 덮여 있으며, 상반신은 모직물로 감싸고 하반신은 양가죽으로 덮여 있었다. 또 새의 깃털을 꽂은 펠트 모자와 소가죽 신발을 몸에 착용하고, 머리의 왼쪽에 식롱이 놓여 있었다. 고묘구는 3800년 전 무렵의 묘이며, '누란의 미녀' 미이라도 거의 같은 무렵의 것이다. 


또 1934년에 스웨덴의 헤딘이 조사했던 소하묘(5호묘)가 2000년에 재발견되어, 2002년부터 신장 문물고고연구소에서 재조사해 '새로운 미녀' 미이라 등이 발굴되었다. 동서 약 74미터, 남북 35미터의 모래언덕 위에 약 140그루의 호양나무(뒤에 기술) 그루가 서 있고, 그 아래에서 호양의 옆널과 뚜껑을 짜맞춘 관이 여럿 발굴되고, 관의 대부분은 선지피가 묻은 소가죽으로 덮여 있었다. 관 속에서는 모직물로 감싼 미이라와 밀 씨앗 등을 담은 식롱 등이 발견되었다. 이 소하묘는 4000-3000년 전 무렵의 묘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림2 소하묘




2006년부터 종합지구환경학연구소의 프로젝트(대표 사사키 요우이치로)에서 소하묘에 관한 중국과의 공동연구를 진행해, 출토된 소가죽, 소머리와 밀 등의 조사를 행하여 소는 가축종, 밀은 재배종임이 밝혀진다. 


그러므로 4000-3000년 전 무렵 공작하와 그 지류인 소하의 수량은 풍부하고, 소하묘 주변에서는 근처에 호양(포플러과의 나무이지만 포플라와 모습이 다르고, 버드나무 모양의 잎과 손바닥 모양의 잎 등 여러 잎이 달리며, 큰 나무가 되는 경우도 많음)의 숲이 있으며, 초지에서 소와 양을 사육하고, 농사지을 수 있는 땅에서 밀 등을 재배하며, 농경과 목축이 개시되었다고 상정된다.




누란 왕국의 환경과 농업


주지하듯이, 누란의 이름이 중국의 역사서 <사기>에 처음으로 나타나는 건 기원전 176년의 일로, 그 이전부터 왕국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역사는 알 수 없다. 한의 무제 시대부터 한의 세력이 서역에 미치게 되면, 흉노와 한에 끼어서 농락을 당하여 기원전 77년에는 한에 의해 왕이 살해되고, 국명도 선선이라 고쳐졌다. 


이 누란(선선)에 대하여 가장 정리된 기술이 <한서> 서역전 선선국조에 보이며, 거기에서 누란의 환경과 생활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선선국, 본래는 누란이라고 이름을 짓다. 왕은 한택성扞澤城에서 다스린다. 양관으로부터 1600리, 장안으로부터 6100리, 가구 1570호, 인구 1만4100명, 병사 2912명이다. (중략) 땅은 모래소금으로 농지가 적고, 이웃나라에게 농지를 부치고 곡식을 얻는다. 나라는 옥을 생산하고, 갈대·능수버들·호동胡桐·백초가많다. 백성은 목축에 따라 물과 풀을 좇는다. 당나귀가 있고, 낙타가 많다. 병기를 잘 만들고, 뤄창婼羌과 같다.


곧 선선국은 원래 이름이 누란이고, 한택성을 국도로 하며, 염분이 있는 건조지(모래소금)이어서 농지가 적었기 때문에, 이웃나라에서 농지를 빌리거나, 이웃나라에서 곡물을 구입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갈대'는 갈대, 능수버들은 새양버들, 호동은 호양을 가리키며, 백초는 대남풀로 추측되며, 호양과 새양버들, 갈대 등이 번성하는 풍요로운 오아시스였던 것도 알 수 있다. 그와 같은 환경에서 사람들은 목축에 종사하고, 물과 풀을 뒤좇아서 생활했는데, 약간이나마 농지가 있었기에 반농반목의 생활을 행했다고 생각된다. 가축으로는 당나귀와 낙타를 들고 있는데, 소와 양, 말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상과 같이 건조에 강한 호양과 새양버들, 갈대로 이루어진 풍부한 식생이었는데, 농경의 측면에서는 염분이 있는 토지가 많아 농지는 적었다고 할 수 있다.




누란 고성은 누란의 국도인가?


누란의 가장 대표적인 유적은 누란 고성이다. 고성은 1980년의 새로운 표정標定에 의하면 동경 89도 55분 22초, 북위 40도 29분 55초에 위치하고, 공작하 남서의 지류가 분기하고서 합류하기까지의 사이에 있으며, 로프노르호숫가에서 약 28킬로미터 떨어진 눈에 들어오는 야르당(바람과 물에 깎인 불규칙한 지형)의 안에 있다.


고성은 서북으로 기울어진 한 변이 약 330미터인 정돈되지 않은 모양의 네모꼴(동 333.5미터, 남 329미터, 서와 북 327미터)의 평면도를 가지는데, 성벽은 조금만 남아 있고, 특히 동북풍의 영향으로 북서의 성벽은 심하게 파괴되어 있다. 성 안도 모래바람에 토막토막 사라져 있는데, 햇볕에 말린 벽돌로 쌓은 불탑(봉수대라는 설도 있음)과 '세 칸 방'(헤딘이 관공서라고 부른 곳으로, 중앙의 방 셋이 잘 남아 있기에 중국에서 이렇게 통칭) 외에, 옛 수로의 흔적과 호양의 목재 등을 사용한 주거터가 남아 있다. '모래에 묻힌 도시'라고 형용되는데, 오히려 '모래바람에 깎인 도시'라고 부르는 게 낫다.


그림3 누란 고성의 항공사진 <시비로운 로프 호수 중국과학원 신장분원 로프노르 종합과학고찰대>(과학출판사, 1985년에서)





이 누란 고성이 일본에서는 누란(선선)의 국도라고 이야기된다. 그러나 국도에 대해서 예전부터 여러 설이 있어,대략 다음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1. 줄곧 누란 고성의 위치에 있었다(북방설).

2. 처음에는 누란 지구에 있었지만, 기원전 77년에 개명할 때 뤄창若羌(차크크릭) 또는 미란米欄으로 남천했다(남천설).

3. 줄곧 남방의 뤄창과 미란에 있었다(남방설).


이 가운데 북방설이 가장 성립하기 어렵다. 고성 및 그 주변에서 옛 돈을 제하면 전한 시대의 유물이 출토되지 않아 고성 안팎에서 얻은 탄소 14법에 의한 절대년대도 전한 만기부터 후한 시대의 수치를 나타내기 때문에, 고성은 전한 시대의 유적이 아니라 전한 만기부터 후한시대에 건설되어 위진 시기에 서역 장사부의 소재지로 기능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3-4세기의 카로슈티Kharoṣṭhī 문서에서 보는 역전驛傳 경로에서 국도를 가리키는 쿠바니Kuvani도 뤄창에 상당한다고 생각된다.


한편, 남천설도 기원전 77년의 천도는 생각하기 어렵고, 남방설도 로프노르와의 관계와 돈황에서 로프노르 북방을 경유하는 경로를 설명하기 어려워, 현재 발견되어 있는 뤄창의 유적도 전한 시대의 유적은 아니다. 현시점에서는 전한의 서역도호 설치(기원전 60년) 전후인지 전한 전기에 누란 지구에서 뤄창으로 남천했다고 생각해야 할 듯하다. 아무튼 누란(선선)의 멸망에 대해서는 국도가 남방의 뤄창에 있었다고 상정하고 검토해야 한다. 




위진 시기 둔전의 수리개발


3-4세기에는 위진에 의한 서역 경영의 거점으로 누란 고성에 서역 장사부가 설치되고, 누란 지구에서 주둔군에 의한 둔전이 행해졌다.


누란은 자칫하면 사막이란 인상을 주기 쉽지만, 누란에서 출토된 문자 자료에는 물이 풍부했다고 이야기하는 기재가 있다. 


물이 큰 파도로 깊고 반드시 넘칠 것이라는 기록이나, 부대장인 장충張忠이 병사인 노평세魯平世를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평세가 물에 빠져 죽어서 그 책임을 묻고 처벌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보이며, 수량이 늘어나거나, 물에 빠져 죽지 않을 정도의 상황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반대로 물이 말라 물 부족인 때도 있었던 듯하고, 잠깐 물이 오는 걸 바랐지만 절대 이르지 않았다는 기록과 흘러오는 물이 적다는 기록도 발견된다.


이상과 같이 갈수기를 제하면 물도 풍부했다고 생각되는데, 이와 같은 상태의 물을 저수지와 수로, 제방을 쌓아서 확보하고 이용했다. 우선 '수제병守堤兵'과 '진군제鎭軍堤'란 단어가 보여 제방이 쌓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제방에 관련하여 '큰물 때문에 동방에서 6개소가 터져 무너지고, 물이 제방을 넘어서 이미 큰 홍수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제방이 크게 터져 무너진 상황과 제방 보수의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사순史順이 병사를 모아서 동방에 깊고 큰 대탁지大涿池(저수지)를 만들었는데, 흘러 오는 물은 적어 추계하면 월말 전후에 누란에 도달할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강물을 둑으로 막아 저수지를 축조해 일단 모은 물을 수로를 통해 누란 방면으로 흐르게 했음이 상정된다.


이와 같은 수리개발에 관련하여 <수경주水經注> 하수河水의 주에 다음처럼 고사가 전해지고 있다.


행이사行貳師 장군으로 대표된 돈황의 색려索勵가 주천과 돈황의 병사 천 명을 이끌고 누란에서 둔전을 하려 하여, 백 채의 집을 짓고, 선선과 언기焉耆, 구자龜玆 삼국의 병사 각 천 명을 소집하여 주빈하注濱河(공작하)에 둑과 제방(댐)을 쌓으려 했는데, 둑과 제방이 완성되는 날 큰물이 밀어닥쳐 둑과 제방을 부수어 버렸다. 색려는 왕존王尊(한대의 사람)과 왕패王覇(후한대의 사람)의 고사를 들어서 물의 신에게 기도했지만 기세는 쇠하지 않았다. 그래서 군진을 짜서 무기를 갖추고 큰북을 울려 우렁찬 소리를 일으키고, 검으로 베거나 활을 쏘거나 하며 3일 동안 강의 흐름과 맞서 싸운 결과, 물의 기세는 쇠하고 비옥한 들을 관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3년 동안 많이 경작해 조 백만 섬을 비축하고, 외국을 위복시키게 되었다.


이 고사는 언제쯤의 일인지, 사실인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한인의 누란 진출과 둔전, 수리개발을 반영하고 있다. 이 고사에서 둑과 제방을 쌓아서 강물을 가로막고 관개하여 둔전을 개발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음과 함께, 홍수에 대처하는 것이 어떻게 큰일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위진 시기의 둔전에서는 저수지와 수로, 제방 등의 수리시설을 건설하고, 수세의 상황을 감시하면서물을 확보해 이용하며, 농지를 관개하여 농경을 행했을 것이다.




위진 시기 둔전의 농업활동


위진 시기 누란의 둔전에서는 '將……'이란 부대장에 통솔되어 '……部'라고 불리는 각각 20-30명 안팎의 부대로 편성되어서, 평시에는 수리개발과 농경에 종사했다. 관개와 농경의 실태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다음의 기록이 있다.


장將 장첨張僉이 통솔하는 부대는 현재 병사 21인이 있고, 보리밭 2경頃(약 3만 평) 가운데 모두 20무畝(약 3000평)를 쟁기질하고, 밀밭 37무 가운데 모두 29무를 쟁기질하며, 조밭 1경85무 가운데 20무를 관개하고 90무를 사이갈이하며, 기장밭 90무 가운데 70무를 관개했다. 장將 양양梁襄이 통솔한 부대는 현재 병사 26인이 있고, 보리밭 66무 가운데 모두 50무를 쟁기질하고, 밀밭 63무 가운데 모두 50무를 관개하며, 조밭 1경70무 가운데50무를 사이갈이하고 50무를 관개하며, 기장밭 80무 가운데 70무를 관개했다.


월별 작업기록이라 생각되는데, 이에 의하면 장수 장첨의 부대는 병사 21인으로 총계 512무, 1인당 24.4무를 경작하고, 장수 양양의 부대는 병사 26인으로 총계 379무, 1인당 14.6무를 경작한 것이 된다. 20-30명 안팎의규모인 부대가 누란 지역에 산재한 농경지에서 보리와 밀, 조, 기장 등을 재배하고, 관개와 쟁기질을 행하거나 사이갈이하거나 했음을 알 수 있다. 농기구로는 '가래(胡臿)'를 다수 보관한 기록이 있기에 서역에서 만든 철제 가래도 사용했는데, 쟁기와 소를 함께 검사하는 기록도 보여 소쟁기질도 도입하고 있었던 듯하다.


관개에 관련해서는 장수 윤의尹宜가 통솔한 부대가 북하의 밭 1경을 관개했단 것을 6월26일에 보고한 기록이 있어, 북하의 강물을 이용하여 관개했음과 함께 북하의 유역에 농사땅이 개척되어 있었음을 이야기한다. 북하는 누란 고성 북쪽에 있는 공작하나 그 지류를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또한 '참으로 성안의 밭에서는 내일 이후 토지를 갈아서 씨를 뿌리라'는 기록도 있어, 누란 고성 안 등에도 농사땅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1980년 조사에 의하면, 고성의 동북과 남서 교외의 야르당 안에 부식토와 교란된 토양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누란 지구의 주요한 농경지는 주로 관개에 적합한 고성 북쪽부터 공작하 지류 유역에 걸쳐서 산재하여 분포했는데, 누란 고성 주변에도 농경지가 있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이처럼 산재한 농경지에서 쟁기질, 써레질, 파종, 사이갈이라는 공정과 관개, 특히 사이갈이 과정에서 관개 작업을 확인할 수 있다. 농산물의 명칭으로는 조, 기장, 보리, 밀 등의 곡물과 채소 등을 확인할 수 있는데, 1980년의 조사에 의하면 대량의 기장 씨앗 외에 보리의 씨앗과 밀의 이삭, 복숭아 씨앗 등이 발견되어 보리와 밀, 기장에 대해서는 그 재배가 고고학적으로도 확인된다.


이상과 같이 누란의 둔전에서는 저수지와 수로, 제방 등의 수리시설을 건설해 수세의 상황을 감시하면서 물을 확보해 이용했다. 병사는 '장수'라고 부르는 부대장이 통솔하고, 각각 20-30명 안팎의 부대로 편성되어 평시에는 수리개발과 농경에 종사했다. 누란 지역의 주요한 농경지는 주로 관개에 적합한 고성 북쪽부터 공작하 지류 유역에 걸쳐서 산재하여 분포했는데, 누란 고성 주변에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농경지에서 관개를 행하고, 쟁기질과 써레질, 파종, 사이갈이 등을 행하거나 하여, 보리와 밀, 기장 조 등의 곡물 외에 채소도 재배했다.




누란에 염해는 있었을까?


원래 염분이 있는 건조지에서 이상과 같은 관개에 의한 농업 활동을 전개한다면, 염류집적을 일으킨다고 추측할 수 있다. 3-4세기의 농경이 누란 지구의 염해를 불러와, 누란 지구의 폐기에 박차를 가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는 문헌과 출토된 문자 자료를 보는 한, 논증할 수는 없다. 또한 누란 지구에서 관개와 농경을 추진했던 건 누란(선선)의 사람들이 아니라 위진 시기 둔전의 병사들이다.


더구나 누란(선선) 왕국은 남방의 뤄창으로 남천했기 때문에, 그 멸망과 연결시킬 수는 없다. 뤄창 방면에서는 미란의 한과 당 시기라고 하는 관개수로망을 제외하면, 수리와 농경의 관계는 문헌적으로도 고고학적으로도 알 수 없다. 미란의 관개수로망도 막연히 한과 당 시기라고 하여 시기와 이용자가 특정되지 않기에, 누란(선선) 왕국의 멸망과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없다. 


그러므로 누란 지구에서 행하던 3-4세기의 둔전에 의한 염해의 가능성은 있지만, 누란(선선) 왕국 멸망의 요인이라 연결시키기는 어렵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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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3




기고3

황토 고원의 농경과 환경의 역사     

                                                               -무라마츠 코우이치村松弘一





2000년 전의 황토 고원 -문헌사료와 화상석


지금으로부터 대략 2000년 전의 중국 후한 시대, 영락 4년(129)의 일. 서방의 강족의 반발로 애먹고 있던 후한왕조가 자주 침공을 받았던 박방의 군현을 방기한 것에 대하여, 상서尙書 복사僕射의 직에 있던 우후虞詡라는 인물이 아래와 같은 상소를 올렸다.


옹주雍州(현재의 산시성)는 비옥한 들이 천리인 땅이며, 그곳의 곡물 수확량은 매우 많습니다. 또한, 북방의 구자龜玆(현재의 위린시楡林市 북쪽)에는 소금못이 있어, 그것은 백성에게 이익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물과 풀은 풍부하고, 그 토지는 목축에 적합합니다. 소와 말은 앞뒤로 대열을 이룰 만큼이고, 양떼도 길을 가로막을 정도로 많습니다. 북쪽은 산하로 막히고, 지형이 좁고 험한 토지입니다. 거수渠水 관개, 물레방아와 조운漕運에 의하여 적은 노력으로 군량이 풍족합니다. 그 때문에 전한의 무제와 후한의 광무제는 북쪽의 황하를 따라서 삭방군朔方郡을 세우고, 서하군西河郡을 개척하며, 상군上郡을 설치했습니다. (<후한서> 서강전西羌傳)


글 속의 전한 시대의 삭방군이란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의 임하臨河부터 우라터기烏拉特旗 부근까지의 지구, 서하군이란 내몽골의 오르도스Ordos시부터 황하 양안을 남하하여 후커우壶口 폭포에 이르기까지의 지역, 상군이란 북쪽은 신목현神木縣부터 남은 연안延安, 황릉黃陵에 이르는 지역이다. 즉, 삭방군, 서하군, 상군은 황하 고원 북부에 해당한다. 상소문에서는 그 땅에는 목축에 적합한 정도의 풀과 물이 풍부하게 있으며, 또 거수 관개에 의하여 농경도 가능하다고 한다. 즉, 이 땅은 목축과 농경 모두에 적합한 토지였다. 목축민과 농경민의 다툼이 이 땅의 역사를 형성했다고 말해도 좋다.


그림1 황토 고원 관계 지도(전선의 범위 안=황토 고원)




산시성 북부(산북 지역)을 흘러, 황하로 흘러 들어가는 하천은 그 수량이 적기 때문에 흐름이 정해져 있지 않은 강, 곧 '무정하無定河'라고 이름을 붙였다. 우후가 상소한 2000년 전, 이 무정하 유역에서는 화상석묘(묘 안이 돋을새김으로 장식된 묘)가 다수 조영되었다. 화상석묘는 후한 시대에 유행하여, 산둥과 허난, 장쑤, 쓰촨과 산북등에서 발견된다. 돋을새김의 디자인에는 서왕모 등의 신화와 거마 출행도, 시황제 암살 미수 사건 등의 역사 고사 외에, 대저택의 주방과 정원, 연회 등의 풍경이다. 예를 들면, 한 마리의 소가 짧은 성에의 쟁기를 끌고 있는 그림(그림2-①), 두 마리의 소가 쟁기를 끌고 있는 그림(그림2-②), 퇴비로 만들기 위하여 말의 똥을 모으는 그림(그림2-③) 등이 발견된다. 소쟁기질 그림의 위아래에 조의 이삭이 늘어져 있는 그림이 배치된 디자인도 있다(그림2-④). 그밖에 투우, 닭, 양, 사슴, 말 등의 목축과 활로 조수를 뒤쫓는 수렵의 광경도 볼 수 있다. 정말로 농경과 목축이 혼재된 산북 지역의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이 묘의 주인은 남쪽에서 입식한 한인이다. 한왕조에 의하여 산북 지역은 유목민, 흉노와 싸우는 최전선에 위치했다. 전한 시대에는 곽거병霍去病과 위청衛靑이 흉노와 격심한 공방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후한 시대가 되면 흉노가 남북으로 분열되어, 남흉노는 한에 귀순하고 북흉노는서쪽으로 옮겨, 북방 변경은 안정화되었다. 화상석묘가 건설된 시기는 기원후 90년부터 139년까지의 대략 50년동안으로 제한된다. 140년에 흉노는 남쪽으로 침공해, 무정하 유역에 거주하던 한인은 남쪽의 관중 지역또는 황하 동안의 리석離石으로 도망갔다. 리석에서 무정하를 따라 같은 디자인의 화상석묘가 발견되고 있는 건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나라의 백성이 떠난 뒤, 그 땅은 다시 목축의 장이 되었다. 정말로 황토 고원은 농경과 목축의 쌍방에 적합한 토지였다.


그림2 위부터 ①왕득원王得元 묘(수덕현綏德縣 출토), ②수덕현 백가산白家山 출토, ③수덕현 하가만賀家灣 출토, ④수덕현 손가차孫家 출토(모두 <수덕 한대 화상석> 산시 인민미술출판사, 2001년에서 인용) 




황토 고원 -황사의 발생원


황토 고원이란 서쪽은 칭하이성의 오초령烏梢嶺, 동쪽은 태행산맥太行山脈, 남쪽은 진령산맥秦嶺山脈에 이르는 60만 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황색 대지를 가리킨다. 이 황색 대지의 흙은 2백 몇 십만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국서북부의 사막부터 감기어 올라간 모래가 태행산맥과 진령산맥에 가로막혀, 퇴적된 것이라 생각해 왔다(최근에는주변 토지 표층의 미세한 표토가 집적된 것이란 생각도 있음). 황토의 두깨는 50미터에서 80미터, 가장 깊은 곳에서 200미터에 이른다. 황토 고원 북부는 연간 강수량이 400mm 선상에 위치하고, 그보다 북쪽은 건조지대에 들어가 농경에는 적합하지 않다. 산북 지역은 사막화의 최전선에 위치해, 북쪽에서는 마오우쓰 모래땅이 펼쳐져 있다. 황토 고원이라 말하면, 횡혈식 야오통窰洞 주거에 살고, 사막화 속에서 괴로운 생활을 계속하는 빈곤 지역이란 이미지가 있다. 그 한편에서 20세기 초 무렵의 독일 리히트호펜Richthofen이 '황토는 비옥하다'라고 기록을 남기고 있듯이, 황토 고원에는 농업에 적합한 풍부한 토지라는 인상도 있다. 이처럼 다양한 이미지를 가진 황토 고원은 토양이란 관점에서 보면 역시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황토'를 토양 모재로 형성된 '황색 대지'는 토양학적으로 황면토黃綿土, 흑로토黑爐土 및 루토塿土로 크게 분류된다. 지금 <중국 토양도>(그림3)에서 그 위치를 확인하면, 황면토는 북부의 산북 지역부터 산시성 북부, 흑로토는 징허涇河 상류의 류판산六盤山 일대, 루토는 황토 고원 남단부의 곧 관중평원과 산시성 펀허汾河 유역에 분포한다. 이 가운데 황면토는 입자가 가늘고 점질이 없는 보슬보슬한 토양으로, 비에 의하여 무너지기 쉽고, 물과 흙 유출의 원인이 된다. 게다가 초봄에 감기어 올라간 흙은 일본에까지 날아와, '황사'로 보도된다. 흑로토는 숲과 초원이 존재하는 것을 가리키는 토양인데, 그 분포는 매우좁은 범위에 한정된다. 그리고 루토는 '비옥한 흙'의 바탕이다. 함유하는 점토광물과 부식이 양분이 되는 양이온을 끌어당기고, 또 흙에 보수력을 갖게 하는 떼알구조를 만드는 작용을 한다. 그 때문에 '황토'는 물만 있으면 농작물이 자라는 토양이라 이해되었다. 그러나 그 전제에는 계속적인 시비가 빠질 수 없었다. 곧, 이 토양의 존재는그곳에 거주했던 사람들이 오랫동안에 걸쳐서, 게다가 계속적으로 농경을 행해 왔던 것을 보여준다. 그에 반하여북부의 황면토는 루토가 되지 않았다. 황면토의 지하 토양을 보면 흑로토 등이 층을 이루고 있는 장소도 있다. 그것은 이 토지에서 토지이용이 오랜 시간 속에서 숲과 초원, 농경 등 다양하게 변화했단 것을 보여준다.때로는 숲과 초원으로 사람의 손이 미치지 않고, 때로는 농경을 하며, 때로는 목축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처럼 생각한다면,황토 고원의 농경과 목축의 역사를 보면서 농경이 계속 행해졌던 관중평원과, 농경과 목축이 복잡하게 교체되어 행해졌던 황토 고원 북부 지역에 걸쳐서 살펴야 할 것이다. 


그림3 중국 토양도(황토 고원 지역) <중국 토양>(제2판)의 지도를 바탕으로 작성




황토 고원 북부의 농목 경계지역


황토 고원 북부 특히 산시성陝西省 북부(산북)에서 산시성 대동에 걸친 지역은 농업과 목축의 경계선, 곧 '농목 분계선'이라 부른다. 역사지리학의 시점에서 황토 고원의 자연환경 역사를 연구했던 사념해史念海 교수의 연구에서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의 진한시대와 300년 전의 명청시대의 숲 분포는 그림4처럼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진한시대에는 산북과 오르도스에도 숲이 발견되고, 동쪽의 뤼량산맥呂梁山脈도 녹색으로 뒤덮여 있었는데, 2000년 가까이에 걸친 농지 개발의 결과, 명청시대가 되면 숲은 소멸했다고 생각한다. 


그림4 황토 고원 숲 변천도. 위부터 ①진한시대 ②명청시대




황토 고원 북부의 토지이용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던 큰 원인은 농경을 주요한 업으로 삼는 인구의 증가에 의한 북방으로의 입식과 지구 규묘의 기후변화에 의한 유목민의 남하이다. 사념해 씨의 연구에 의하면, 한대와 당대 그리고 명대의 시기에 한족의 입식에 의한 황토 고원의 농지화가 적극적으로 권장되었다. 한의 무제 시대에는 70만 명이 황토 고원 북부 및 오르도스로 이주되었다. 당대에는 확대된 땅에서 말 방목이 행해졌는데, 이주자의 증가에 의해 새롭게 설치된 주州의 수도 많고, 농지화가 진전되었다. 명대에는 왕성히 장성선長城線에 둔전이 시행되었다. 특히 소금 상인이 변경을 지키는 군에 곡물을 보냄에 따라 소금의 판매권을 얻을 수 있는 개중법開中法이 시행되면서 서북 변경에 해당하는 황토 고원의 농지화는 진행되었다. 이들 시기에 농지화된 토지에서는 조방적인 경영이 행해져, 현지의 식량을 조달할 수 있는 정도의 생산력이고, 인구 증가와 재해 발생시에는 더욱 세찬 농지 개발이 권장되었다. 그 과정에서 숲과 초원은 파괴되어, 토양의 침식도 진행되었다고 한다. 기후변화에 관해서는 축가정竺可禎 씨의 연구가 잘 알려져 있다. 그의 문헌사료 등에 기반한 분석에 의하면, 기원전 3-1세기의전한시대는 현재보다 2도 정도 기온이 높았는데, 기원후 1세기, 곧 후한시대 이후는 한랭화가 시작되어 7-8세기의 당대에 이르러 겨우 온난해졌다고 한다. 한랭화의 시대는 흉노의 남하 또는 북방 유목민이 화북을 지배한 오호십육국, 북조 시대와 합치한다. 한랭화가 산북과 오르도스 지역의 목축화를 불렀다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12세기의 남송 시대, 13세기의 원, 17세기의 청대 초기에 한랭화의 경향이 나타나, 그 시기는 요, 금, 몽골, 청 등의 북방 유목민의 남하 시기와 일치한다. 이처럼 기후변화의 영향을 직접 받은 것이 농경과 목축에 적합했던 황토 고원 북부의 지역이었다.


그러나 토지이용의 상태는 '농목 분계선'이란 형식에서 단순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복잡하게 뒤얽혀 있었다. 장성선의 북쪽에서 농경이 행해지기도 했다면, 남쪽에서 목축이 행해진 경우도 있으며, 확실하게 농·목의 선이 그어질 리 없다. 이 지역의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물이다. 전술한 1-2세기 후한시대의 무정하 유역에서 농경이 행해졌던 건 물을 얻기 쉬운 하천 옆의 평지이고, 하천 양안의 구릉지에서는 수렵이 행해졌다고 생각한다. 4세기 오호십육국 시대가 되면, 유목민이 남하하고 흉노의 혁련발발赫連勃勃이 처음으로 산북을 방문했을 때, '이 언덕은 아름답고 넓은 호수에 접해 청류를 품고 있다. 나는 여러 곳에 갔지만, 여기만큼 아름다운 곳은 못 보았다"라고 말했다 한다. 풍부한 물을 상상시키는 기재이다. 또한 최근 통만성統萬城 동남의 홍돈계에서는 6세기부터 10세기에 걸친 묘지墓誌 47건의 발견이 보고된다. 이 가운데 당시의 환경을 엿볼 수 있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수나라의 질노연휘叱奴延輝 묘지에 '모래땅의 남쪽 산 양陽(남)에 매장한다'와 당의 양현도王玄度 묘지에 '모래톱 만 리'라는 것에서 매장지의 주변은 모두 모래 안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에 반하여 안민安旻의 묘지에는 '험하고 이어진 모래언덕에 면하다'라고 하는 한편, '물가와 육지가 복잡하고'라고 하여 모래땅과 물, 초원이 복잡하게 분포하고 있었단 것도 상정할 수 있다. 현재, 통만성을 방문하면 남으로 흐르는 무정하는 많은물을 채우고, 그 양안에는 모래언덕이 형성되어 있는 광경을 눈으로 볼 수 있다. 물의 존재가 이 지역에서는 생업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산북 및 그보다 북쪽의 지역이어도 충분한 물을 확보할 수 있다면 관개농업을 행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황토 고원의 서쪽 끝에 해당하는 닝샤 寧夏 회족 자치구의 은천銀川에서는 황하 본류에서 무수한 관개도랑을 끌어와, 진거秦渠와 한거漢渠라고 이름을 붙인 도랑 용수도 있다. 황토 고원 북부의 정변현靖邊縣에서도 황하의 지류인 무정하 상류의 물을 이용한 관개농지가 현재도 행해지고 있는 것을 위성사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내몽골 자치구의 포두包頭 부근의 황하 유역에서도 관개가 행해지고 있다. 풍부한 물을 얻을 수 있다면(물론 계속적인 시비는 빼놓을 수 없지만), 농경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대규모 관개의 뒤에는 염해가 발생한다. 이 점에 배려한 농업을 빠뜨릴 수 없다.




관중평원의 농경과 관개


황토 고원의 남단은 진령산맥의 북쪽 기슭에 해당한다. 이 진령산맥의 북쪽에 펼쳐진 위하渭河의 남북 양안에 펼쳐진 하곡평원(강에 침식되어 발생한 골짜기의 평원)이 관중평원關中平原이다. 동쪽의 함곡관, 서쪽의 롱관隴關·대산관大散關, 북쪽의 소관簫關, 남쪽의 무관武關이란 관에 사방을 둘러싸였기 때문에, '관중평원'이라 부른다. 이 평원에는 서주의 주원, 진의 함양, 한의 장안, 그리고 당의 장안이 위치하여 2000년 동안 중국 고대 문명의중심지였다. 그것은 이 땅이 곡창지대였다는 것에 기인한다. 현재의 토양도에서 루토가 양성되어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땅에서는 2000년 이상에 거쳐 계속적으로 농경이 행해져 왔다. 소규모 농업생산이라면 천수 농법(빗물에만 의지하는 경작방법)으로도 충분하지만, 고대 문명의 중심인 이 지역에서 생산력의 향상은 빼놓을 수 없으며 자연히 관개가 행해졌다. 그러나 위하는 분지의 저부를 흘러 남북 양안은 단계적으로 넓은 평지가 넓어지는 높은 들이 되어 위하에서 물을 끌어오기 어렵다. 그에 반하여 관중평원을 서북에서 동남으로 흘러 위하로 흘러 들어가는 경하는 관중평원 동부를 관개하는 수원으로 지리적으로 적합했다. 이 경하를 이용한 관개 체계는 '인경관개공정引涇灌漑工程'이라 부르며, 기원전 3세기에 진나라가 정국거鄭國渠를 축조한 이래 2000년 이상을 거친 현재도 경혜거涇惠渠라고 부르는 관개 체계가 기능하고 있다.  




표1 역대의 주요한 경하 관개 공정


         3세기      진나라   정국거

기원전 2-1세기    전한     육보거六輔渠 백거

기원후 4세기       전진     경수 상원을 열다(정·백거의 보수)

         5세기      서위      백거  부평언富平堰

         7세기       당       정백거

     10-12세기     송       삼백거 정백거 풍리거豊利渠

         14세기      원       왕어사거

         15세기      명       광혜거

         16세기      명       통제거

         18세기      청       용동거

         20세기   중화민국   경혜거




그림5 관중평원 관개도(정국거와 백거)  사선 부분은 원생염함지(소금땅)




정국거는 기원전 246년, 진의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기 이전 한의 스파이로서 파견된 수공水工 정국이 진의 국력을 피폐시키기 위하여 거의 건설을 제안한 데에서 시작된다. 건설 중에 정국이 스파이임이 발각되지만, 시황제는 그대로 건설을 속행시켜 완성했다. 경하에서 취수하여 석천하石川河를 지나 낙하洛河에까지 이르는, 약 150킬로미터의 수로였다. 그 관개 효과에 의하여 생산력이 상승하고, 그것을 원동력으로 진은 통일에 이르렀다. 정국거에서 시작되는 경하의 물을 이용하는 관개사업은 표1에 보이듯이, 그 뒤 한대의 백거白渠, 당대의 정백거鄭白渠, 송의 삼백거三白渠와 풍리거豊利渠, 명의 광혜거廣惠渠와 통제거通濟渠, 그리고 청의 용동거龍洞渠로 계속되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건, 북방 유목민이 관중평원을 지배했던 시대여도 그때까지 한족의 토지이용 전통으로하고 있던 관개거의 보수와 개착이 행해졌다는 것이다. 오호십육국 시대·씨족의 전진, 북조·선비족의 서위에서는 백거가 보수되고, 몽골의 원나라에서는 왕어사거王御史渠가 개착되었다. 그러므로 2000년에 걸친 계속적인 농경이 이 땅에서 행해져, 그 결과로 루토가 형성된 것이다.


경하를 이용하는 것에 의해 관개용수가 확보되고, 또 강의 물에 포함된 진흙을 거름으로 이용할 수 있으며, 또 그진흙과 물에 의하여 토양 염분을 흘러가게 할 수 있다. 한대의 백거에 관한 기재에는 '경수 한 섬, 그 진흙은 몇 말. 농지를 적시고 비료를 주어 내가 조와 기장은 많이 기르고, 경사京師(수도권) 억만 인구의 의식을 지원한다(<한서> 구혁지溝志).'라고 한다. 이 진흙이 고이는 일로 정기적인 준설이 필요하지만, 한편으로 그 진흙에는 많은 영양소가 함유되어 그것이 비료가 된다. 경하의 상류는 육반산의 자락에 위치하고, 그 땅은 흑로토층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숲과 초원이 펼쳐진 지역이다. 그 토양 및 목축을 할 때 동물의 똥을 포함한 진흙이 경하를 통하여 관중평원으로 흘러 백거 등의 관개거를 통하고, 그 결과 시비가 행해지게 된다. 


경하를 이용하여 행해졌던 또 하나의 효과가 지표 염분의 제거였다. 정국거에 관한 <사기> 하거서의 기재에는 그도랑물이 '소금땅'을 물로 씻는다고 한다. 염류집적지에는 원래 지하수의 염분이 축적하기 쉬운 움푹 팬 땅의 원생염함지와 대규모 관개를 행한 뒤에 지하수위가 상승해 땅속의 염분이 지표면으로 드러난 재생염함화(재생알칼리화)로 분별할 수 있다. 이 <사기>의 '소금땅'은 정국거에 의한 대규모 관개가 행해지기 이전이었기 때문에 원래소금땅, 곧 원생염함지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지표에 존재하던 염분을 물과 진흙으로 흘러가게 해, 그땅을 농지화했던 것이다. 그것은 위에서 기술한 진흙에 함유된 영양분과 합쳐져 해당 땅의 농업생산력을 향상시켰다. 다만정국거 이후의 관개 체계에서는 원생염함지의 염분을 흘러가게 하는 기능은 없었다. 한의 무제 시기에 축조된 백거 이후, 그 관개 대상구역은 경하-석천하 사이, 곧 정국거의 관개구역 가운데 서부에 한정되었다. 석천하-낙하 사이의 움푹 팬 땅에서는 현재도 염류집적이 심하고, 일부에서는 제염공장이 되어 있는 곳도 있다. 즉, 백거 이후의 관개거는 정국거의 관개 대상구역 가운데 염류집적이 심한 동부는 방기하고, 비교적 관개의 효과를 높이기 쉬운 서부만을 그 대상으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관개를 계속하는 이상, 경하-석천하 사이에서도 재생염함화가 일어날 수 있다. 재생염함화를 막기 위해서는 지하수위를 7미터 이하로 유지해야 하며, 그를 위해서는 배수 도랑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성립보다 전에는 배구 도랑을 만든다는 대처법이 취해지지 않고, 도랑을 서서히 남쪽으로 비키어 가는 것으로 염류의 집적을 어떻게든 막고 있었다. 또한 도랑의 최상위는 물의 흐름에 의하여 깎일 수 있기 때문에, 서서히 상류로 이동시켜야 했다. 그래서 경하의 물을 끌어온다는 기본적인 물을 끌어오는 방법은 불변하더라도, 왕조마다 새로운 관개시설을 건설해야 했다.


그래서, 관개거에 의하여 농사지었던 곡물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기술하고자 한다. 한대는 조를 주로 한 양식이 주류였다. 보리 가루를 가공한 가루식이 보급된 건 3세기의 위진 시기 이후의 일로, 8세기의 당대가 되면 겨울밀은 조를 대신해 주식이 되었다. 그 원인의 하나로는 당대의 온난화가 있다. 당대에는 정백거가 건설되어, 수로의 주변에 연애碾磑라고 부르는 맷돌 방앗간이 건설되어 제분이 행해졌다. 이 밀의 생산이 당나라의 수도 장안의 사람들에게 먹을거리를 지원하고,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화북 지역에서 많이 먹고 있는 만두나 찐방을 보급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며


이상과 같이, 황토 고원 북부에서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서 농업과 목축이 뒤섞였던 여러 토지이용이 행해졌다. 그에 대하여 관중평원에서는 2000년 동안에 걸쳐서 경하를 이용한 도랑물에 의한 관개농경이 계속 행해졌다. 이와 같은 토지이용의 역사적 차이가 황면토와 루토라는 토양의 차이로 나타났던 것이다. 황토 고원의 농경과 환경의 역사는 현재 우리의 눈앞에 펼쳐진 자연환경과 이어져 있는 것이다.


현재, 사막화가 진전되는 산북 지역과 내몽골에서는 방목 금지 정책과 '농사를 그만두고 숲으로 되돌리는' 정책, 생태이민(농경민과 목축민의 도시로의 집단이주) 정책 등이 권장되고 있다. 실제 그와 같은 정책에 의하여 사막화의 진전은 억제되고 있다고 보고되며, 또한 인간이 들어가지 않고 개발을 방기하면 아주 간단히 자연이 회복했다는 사례도 있다. 한편, 루토의 형성 과정을 고려하면 황토를 재료로 하고 있는 점에서는 황면토도 공통되어 있기 때문에 장기간에 걸친 적당한 정도의 유기시비를 행하는 일로 황면토의 루토화를 기대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만 수자원의 확보라는 점을 해결해야 하겠지만.


지금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농경=환경파괴와 목축(방목)=환경파괴라는 고정적인 구도가 아니라 새로운 견해가 필요한 시기에 와 있다는 점이다. 정책이 아니라, 그때까지의 현지 사람들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그에 기반을 하여 새로운 사회의 형성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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