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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3




제2장

중앙 유라시아의 기후·수자원과 그 변천          

                                                                 -쿠보타 쥰페이窪田順平







중앙 유라시아의 기후와 사람들의 생계


유라시아 대륙의 중앙부를 보면, 동쪽은 몽골로 시작되는 중국의 내몽골자치구, 신장 위구르 자치구, 가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 그리고 또 이란과 이라크, 아라비아 반도로 이어지는 광대한 건조·반건조 지역이 펼쳐져 있다. 이 지역은 유라시아 대륙의 중앙부에 있어서 강수의 기원인 해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며, 바다에서 다가오는 수증기는 도중에 산들에 가로막혀 도달하지 않고,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다. 원래 중앙 유라시아란 유라시아 대륙의 중앙 부분에 펼쳐진 우랄 알타이계의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여러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을 널리 가리키는 문화적인 개념이다. 1960년대에 헝가리 출신의 알타이 학자 데니스 사이너Denis Sinor가 사용한 이래, 일본에서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小松 2000). 지리적으로 동쪽은 동북아시아, 서쪽은 동유럽, 북쪽은 북극해까지 펼쳐지고, 남쪽은 황하와 곤륜산맥, 파미르 고원, 힌두쿠시산맥, 이란 고원, 카프카스산맥으로 구분된 광대한 지역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장에서는 인간 활동과 자연환경의 역동적인 상관성을 밝힌다는 관점에서 기후와 수자원 같은 지리적인 요소의 강한 화제를 논하기 위해, 그것보다도 좁은 현재의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와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를 중심으로 한 지역을 다루려 한다.


중앙 유라시아는 일본인에게는 '실크로드'로 매우 친숙하다. 많은 일본인이 방문해 일본에서는 실제로 볼 수 없는 사막과 초원이란 경관에 눈을 크게 뜨고, 여러 유적을 찾아서는 일찍이 이 땅에 전개되었던 인간의 생업에 대해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가 현재 실제로 볼 수 있는 경관은 과거에도 그대로 있었을 리 없다. 지구온난화가 큰 환경문제가 되고 있지만, 과거에도 인류는 여러 가지 기후변화를 경험했다. 건조·반건조 지역인 중앙 유라시아에서는 작은 기후의 변화도 물이란 사람들의 생계에 빠질 수 없는 자원의 변동으로, 여러 영향을 줄 것이란 점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과거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기후 안에서 사람들의 생활이 이루어졌다고 해석하면, 올바른 이해를 방해하는 경우도 생긴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중앙 유라시아를 세 가지의 단면에서 그려내고자 시도한다. 우선 현재 우리가 실제로 보는 경관과 그것을 만들고 있는 기후의 구조를 기술하는 것과 함께,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업, 특히 물과의 관계를 개관한다. 다음으로 중앙 유라시아의 과거 기후변화를, 그 결과로 나타난 수자원의 변동이 어떻게 인간의 생계에 영향을 주었는지 하는 시점에서 검증한다. 더욱이 20세기 이후 이 지역에서 전개된 근대적 개발, 특히 대규모 관개농업이 가져온 환경문제와 사회의 변용 실태를 상세하게 살펴본다. 매우 현대적인 문제를 다루게 되지만, 그것을 통하여 과거의 사람과 환경의 관계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빙하, 오아시스, 사막 -중앙 유라시아의 경관과 기후


중앙 유라시아의 광대한 건조·반건조 지역에는 결코 평탄한 사막과 초원이 펼쳐져 있는 것만이 아니다. 남쪽으로 티베트 고원의 북쪽 가장자리가 되는 기련산맥, 곤륜산맥이 있고, 또 그 중앙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잇는 천산산맥 등이 존재한다. 또한 서쪽으로는 히말라야와 카라코람의 높은 산봉우리에서 계속되는 파미르의 산들이 우뚝솟아 있다. 이들 산들에는 표고가 7000미터를 넘는 높은 산봉우리도 있고, 여름에도 눈에 뒤덮이고 빙하가 많이존재한다. 수증기를 함유한 기류는 산악 지역에 부딪치면 지형을 따라서 상승하지만, 그 결과 기온이 떨어져 대기에 함유될 수 없어진 수증기는 강수가 되어 지상으로 내리쏟아진다. 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산악지에서는 표고가 높아짐에 따라 강수량이 증가한다. 건조·반건조 지역처럼 강수량이 적은 장소에서도 이러한 산악지형의 효과에 의하여 저지대에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큰 강수량이 산악 지역에 가져와 빙하를 형성한다. 최근의 기후변화에 의하여 빙하가 축소되고 있다고 하는데, 이들 산들에서 눈과 빙하가 녹은 물(그림2-1)은 지금도 산기슭에서 흘러 나가 이 물이 결핍된 지역에서 예외적으로 물이 풍족한 오아시스를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림2-1 카자흐스탄 자일리스키Zailiyskiy 알라타우산맥의 빙하와 그 해빙수(2006년)




수천 년 전부터 이러한 오아시스 주변에서는 농업이 행해져 왔다. 특히 중앙 유라시아의 더욱 그 중앙에 크게 펼쳐진 타클라마칸 사막(타림 분지)의 남쪽 가장자리, 북쪽 가장자리의 산록부 선상지에는 각각 북쪽의 천산산맥, 남쪽의 곤륜산맥에서 흘러나온 하천이 오아시스를 만들어내고 있다. 오아시스 주변을 적신 물은 다시 하류로 흘러 내려가 사막 속으로 사라져 간다. 이처럼 바다로 가는 출구를 갖지 못한 하천을 내륙하천이라 부른다. 내륙하천은 장소에 따라서는 사막 속에 호수를 형성하는 곳도 많다. 중국과 파키스탄의 국경지대를 원류로 하고,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 가장자리, 천산산맥을 따라서 흐르는 타림강은 중국 최대의 내륙하천이다. 중앙 유라시아의 지리학, 역사학, 고고학 등 다양한 분야에 큰 영향을 주는 스벤 헤딘과 스타인Stein이 그 소재와 원인을 둘러싸고논쟁을 벌였던 방황의 호수 로프노르도 예전에는 타림강에 연결되어 그 말단의 호수였다.


그림2-2는 중앙 유라시아 각지의 강수량의 계절 변화 패턴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앙 유라시아의 기후는 특히 북쪽의 천산산맥 주변 지역은 겨울철에 발달한 시베리아 고기압과 편서풍에 의한 저기압 요란에 지배되는 것과 함께, 산맥의 배열에 의한 지형의 영향을 받은 지역성을 가지고 있다(奈良間 2002). 천산산맥의 강수 기원이 되는 수증기는 서쪽의 대서양, 지중해에서 편서풍에 따라서 공급된다. 천산산맥의 북쪽(그림2-2의 지점 1-3)에서는 겨울형으로 12월 무렵과 초봄 3월부터 4월에 걸쳐서 비가 많다. 연강수량은 서쪽에서 많고,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에서는 700mm 정도인데, 동쪽으로 감에 따라 감소한다.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수도인 우르무치까지 오면 겨울의 강수량이 적어지고 초봄과 9월 무렵에 비교적 비가 많은 여름형이 되는데, 연간 강수량은 270mm 정도에지나지 않는다. 카라코룸, 히말라야산맥의 남면 지역(그림2-2의 지점 7, 8)은 인도양의 계절풍에 의하여 수증기가 공급되어, 여름철에 다량의 강수가 있다. 히말라야산맥, 티베트 고원을 넘어, 또한 곤륜산맥에 이르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수증기는 강수로 변한다. 북쪽의 천산산맥, 남쪽의 곤륜산맥, 또 서쪽의 파미르 고원에 둘러싸인 타클라마칸 사막(그림2-2의 지점 4-6)은 어느 방향에서나 수증기의 공급이 제한되어 중앙 유라시아에서 가장 강수량이 적은 지역이며, 연강수량도 100mm를 채우지 못하는 장소가 많다. 



그림2-2 중앙 유라시아의 기후. 나라마 치유키奈良間千之 씨 작성(2002)





이 지역은 동아시아에서 중앙 아시아, 중근동을 거쳐 아프리카 대륙으로 이어지는 광대한 건조·반건조 지역 가운데 빙하를 가진 산악지역을 하천의 원류로 삼는 유일한 지역이다. 빙하는 지상에 쏟아진 물을 고체로 잠시 저장한다. 이것이 햇빛과 기온에 의하여 녹아서 강의 물이 된다. 일반적으로 건조·반건조 지역에서는 해에 따라서강수량이 크게 변동하는 일이 많지만, 중앙 유라시아의 그것에서는 빙하가 존재함에 따라 강수량이 적은 때에도 녹은 물이 공급된다. 이 때문에 빙하가 없는 지역에 비하면 유량의 변동도 완만해진다. 빙하는 말하자면 천연의 댐 같은 역할을 수행하며, 빙하가 많은 중앙 유라시아는 다른 곳에 비해 안정된 수자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사막은 왜 생길까?


그건 그렇다 치고, 도대체 건조함이란 어떤 지역의 일을 말하는 것일까?

우리가 사는 지구에서는 물은 그 97%를 점하는 바다 등을 시작으로, 호수와 강, 지하수처럼 대부분은 액체의 형태로 존재한다. 또 물은 섭씨 0도 이하에서는 얼어서 고체가 되기에, 기온이 낮은 히말라야나 알프스의 빙하, 남극과 그린란드의 방상 등에는 눈, 또는 얼음이란 고체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또한 대기중에는 기체, 즉 수증기로 존재하고 있다. 태양계의 혹성 가운데 물이 고체, 액체, 기체라는 모든 형태로 존재하는 건 지구뿐이며, 지구는 '물 혹성'이라고도 이야기된다. 또한 지구에 존재하는 물은 고체와 액체, 기체로 모양을 바꾸면서 순환하고 있는 것이 큰 특징이다. 대기중의 수증기는 비와 눈으로 지상에 쏟아진다. 비와 눈 등을 포함하여 강수라고 부른다.강수의 일부는 지면 속으로 침투하여 지하수로 천천히 이동해 나아간다. 땅속에 침투되지 않은 물은 지표를 흘러지형에 따라 모이고, 마침내 하천을 형성한다. 지하수와 하천에 따라서 물이 흐르는 것을 흘러 간다고 부른다. 게다가 하천과 호수 등의 수면과 지면, 또는 식물체를 통하여 물은 증발하고, 수중기가 되어 대기로 돌아간다. 하천을 흘러 해양에 도달한 물도 해면에서 증발하여 대기로 돌아간다. 강수, 침투, 흘러 감, 증발의 과정에 의하여 물은 지구에서 순환하며, 이것을 물 순환이라 부르고 있다. 우리 인간만이 아니라, 지구의 생물은 늘 다양한 형태로물을 이용하고 있는데,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도 이러한 물의 순환성에 의하는 바가 크다. 


그런데 지구에 있는 물은 어디에서도 똑같이 있을 리는 없다. 지구에서는 장소에 따라서 비의 양과 기온이 크게 달라진다. 우리가 사는 계절풍 아시아를 시작으로, 남미의 아마존 등은 비가 많아서 숲이 발달한다. 이에 반하여 비가 적거나 거의 내리지 않는 곳이 사막이 되는데, 이러한 차이는 왜 생기는 것일까?


지구는 태양에서 빛에너지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 한편으로 지구에서도 대기권 밖으로 열에너지를 방출하고 있다. 지구 전체의 에너지 수지는 대략 균형이 잡혀 있지만, 적도 부근의 저위도 지역에서는 받아들이는 에너지 쪽이 크고, 반대로 남극과 북국 같은 고위도 지역에서는 방출하느 ㄴ에너지가 크다. 장소에 따른 에너지의 출입 차이는 해양과 대기의 흐름에 따라서 열에너지가 운반되어 지구 전체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대기의 흐름을 남북 방향으로 보면, 적도부터 남극, 또는 북극으로 향하여 세 가지 순환이 병행하여 해들리 순환,패럴 순환, 극 순환이라 부른다. 적도 부근에서 따뜻해진 대기는 상승하고, 북위 15-30도, 남위 30-45도에서 하강하는 해들리 순환을 형성한다. 이 해들리 순환의 하강대는 그 바깥쪽에서 패럴 순환의 하강대와 접하여, 건조한 대기를 형성하고 있다. 여기에 육지가 있다면 건조지대가 되고, 광대한 사막이 형성되는 이치이다. 북아프리카의 사하라 사막, 아리비아 반도의 룹알할리 사막, 캘리포니아의 모하비 사막, 남아프리카의 칼라하리 사막 등이 이렇게 형성된 사막으로, 아열대 사막이라 부르고 있다. 또한 이 아열대 사막의 조금 고위도 쪽에 내륙지대에도 큰 사막이 형성된다. 이것은 강수의 기원이 되는 바다에서 오는 수증기가 미치지 않는 지역에서, 이 장에서 대상으로 다루는 중국의 타클라마칸 사막은 그 대표이다.


이처럼 사막은 대부분 비가 내리지 않는 지역인데, 비가 내리지 않는 건 사막만이 아니라 주변에도 비가 적은 지역이 존재한다. 일반적으로는 그들을 총칭하여 건조지라고 부른다. 건조지는 지구의 전체 육지 면적의 약 47%에해당한다고 이야기한다. 또 건조지는 강수량이 적은 것만이 아니라, 강수량의 변동이 큰, 즉 어느 해는 비교적 강수량이 많은데 다음해에는 완전히 비가 내리지 않거나, 비가 내리지 않는 해가 이어지는 등의 변동이 격심한 것도 특징이다. 따라서 식물의 생육에는 매우 엄혹한 조건이며, 건조에 강한 식물 또는 땅속에서 씨앗 등의 형태로 건조를 지나가게 기다리고, 비가 내렸을 때 생장하는 식물만이 생존할 수 있다. 사막에서는 인간 활동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 한편에서 사막 주변의 건조·반건조 지역에는 관개농지가 펼쳐져 있거나, 초원에서 목축이 경영되거나 하며 건조지에서 행하는 인간 활동의 최전선이 되고 있다.


건조지가 성립하는 배경을 현재의 대기 순환에 기반을 하여 설명했지만, 이른바 기후변화라는 현실은 이러한 대기와 해양의 에너지와 물의 순환에 변화가 생긴 결과이다. 기후는 늘 변화하여, 예를 들면 강수량이 변화하는 것에 의하여 사막의 범위도 확대되거나 축소되거나 한다. 약 7천 년 전에서 5천 년 전에 출현한 기후의 최적기라고부르는 온난한 시기에, 현재 건조지인 중동부터 북아프리카가 습윤화하여 사하라 사막에는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고 한다. 앞에 기술했듯이 사하라 사막 등 중위도의 사막은 적도 부근에서 따뜻해져 상승한 대기가 하강하는 장소에 생긴다. 대기가 상승하는 지역은 적도수렴대라고 부르며, 비가 많다. 당시는 이 적도수렴대가 현재보다 북상하여, 사하라 사막 남부에 강수를 가져오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한편, 인간이 관개를 행하여 사막이 농지로 변하는 경우도 있다. 그 의미에서는, 건조지에서 행하는 인간 활동의 최전선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기후변화와 인위적 요인에 응하여 때와 함께 동적으로 변화해 왔다고 파악해야 한다. 인간과 자연이 맞서 싸움을 반복해 온 건조지에서는 기후변화를 시작으로 하는 환경 변화에 대한 인간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 현재진행중인 지구환경문제의 하나인 사막화도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다.




중앙 유라시아 -생업과 물의 관계


중앙 유라시아의 건조·반건조 지역에 대해서 말하면, 예외적으로 수자원이 풍부한 오아시스에서 밀을 주작물로 삼는 농경 활동을 제외하면 비교적 강수량이 많은 북쪽의 초원지대를 중심으로 유목이 인간들의 생업이었다. 특히 몽골부터 카자흐스탄, 또는 코카서스를 지나서 헝가리에 이르는 지역에는 대초원이 펼쳐져 있어 유목민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집단이 이동하면서 흥망을 거듭했다(그림2-3).



그림2-3 발하쉬 호수 북쪽 카자흐 스텝의 초원지대





이러한 유목민들은 건조, 반건조 지역의 제한된 수자원에 지탱되는 생태계를 지속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이동을 반복함으로써 인간 활동의 영향이 특정 장소에 집중되어 환경을 파괴하지 않도록 했다고 볼 수 있다. 앞에 기술했듯이, 건조와 반건조 지역은 강수량 그것이 적은 것만이 아니라 그 변동이 큰 것도 특징이다. 이 때문에 어느해에는 강수량이 풍부하여 초원이 풍요로워질 때도 있다면, 전혀 비가 내리지 않아 풀이 자라지 않는 해도 출현한다. 인간들의 이동은 이러한 강수량의 변동에 따른 가뭄과, 또는 기온이 떨어져 생각지도 않은 눈으로 괴로워지는 일 같은 기상재해에 대처하는 수단이기도 했다. 근대가 되어 청나라와 러시아에 의하여 중앙 유라시아의 광대한 영역 안에 국경선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장벽이 생기기까지, 인간들이 이동함에 의하여 지속성을 가진 자원 이용이 행해지고 있었다.


한편 오아시스 지역에서 경영되었던 농업에서는 이러한 이동을 전제로 하는 유목과는 달리, 제한된 몰을 유효하게 이용하기 위한 관개시설의 건설이 행해졌다. 시대에 따라서 그 양식과 규모는 달랐지만, 대체로 시대와 함께 차츰 그 면적은 넓어졌다. 그것과 관련되어 무시할 수 없는 건 염해라는 큰 문제이다. 


건조·반건조 지역에서는 여름에는 매우 기온이 높아지고 공기가 극단적으로 건조해지기에, 활발한 증발이 지면에서 발생한다. 이 때문에 관개에 의하여 공급된 물은 지하의 깊은 곳으로부터 지면으로 빨아 올려진다. 특히 지하수위가 높고 지표면에 가까운 곳에서는 이러한 물의 이동이 발생하기 쉽다. 그때, 땅속에 있는 다양한 물질이 물에 녹아들어 지표면 근처로 이동한다. 물은 최종적으로는 증발하고, 물이 땅속에서 운반해 온 물질만이 남아 시간과 함께 집적되어 간다. 이것이 염류집적이라 이야기하는 현상이다. 염류집적이 계속되면 토양의 염분 농도가 상승해 보통의 작물은 자라지 못하게 된다. 건조지에 가면 근처 일대의 소금이 모여 새하얗게 된 염해지를 볼 수 있다. 염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다량의 물을 부어 씻어내는 외에 유효한 수단은 없다. 특히 지하수위가 높은 지역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물을 빼, 지하수위를 내려 염해의 발생을 방지해야 한다.


옛날 4대문명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쇠퇴할 때, 주변의 산림 파괴와 함께 염해에 의한 농업 생산의 감소가 큰 이요의 하나였다고도 이야기한다. 이처럼 중앙 유라시아의 농업은 물 그것의 제한과 함께 염해 등 건조지 특유의 문제도 있어서 급격한 확대는 일어나지 않고, 조건이 좋은 선상지에 조재하는 오아시스 주변에서 제한적으로 성립하는 생산활동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더구나 역사적으로 보면, 이러한 오아시스(도시)와 초원, 농업과 유목이란 구도는 대립관계가 아니라 공존하는 관계였다.





중앙 유라시아의 환경사를 살피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두르고 있는 오아시스들


중앙 유라시아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것이 타클라마칸 사막이다. 북쪽은 천산산맥, 남쪽은 곤륜산맥으로 구획되어있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주요한 하천인 타림강은 파미르 고원과 카라코룸·힌두쿠시 산맥을 원류로 하고, 천산산맥의 남쪽 기슭을 동으로 흘러 말단은 로프노루에 이른다. 한편 남쪽의 곤륜산맥 쪽에는 동서로 흐르는 하천은없고, 곤륜산맥에서 흘러 나오는 대부분의 하천은 사막으로 사라진다. 유일한 예외는 옥으로 유명한 호탄(和田)을흐르는 호탄강이다. 호탄강은 초봄의 빙하와 눈이 녹은 물이 증가하면서 타클라마칸 사막 안을 차차 북으로 흐름을 늘리고, 마침내 아쿠스 근처에서 타림강의 본류에 도달한다. 이 사막을 지나는 아득한 물의 여행이 예전에는 초봄의 하천 유량이 자연스럽게 증가하며 일어났지만, 현재는 호탄 근처의 댐에서 물의 흐름을 조절하며 농지의 관개에 필요한 취수가 우선시되고 있다고 한다.


호탄 등의 곤륜산맥 북쪽 기슭의 오아시스군을 관찰하면 스웨덴의 탐험가 헤딘이 1896년에 발견하고, 1900년에 영국의 탐험가인 스타인이 발굴조사를 행했던 호탄 북쪽의 단단 위리크Dandan Oilik와 그 동쪽에 있는 니야Niya의 유적 등 하류 쪽의 사막 안에 유적이 있는 반면, 현재는 그와는 대조적으로 더욱 상류 쪽에 위치하고 있는 오아시스 도시가 많이 발견된다(그림2-4). 


그림2-4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현재의 오아시스와 유적의 위치 관계




각각의 하천에 공통적으로 과거의 오아시스 도시의 유적은 하류 쪽에 있고 현재의 오아시스 도시가 상류에 위치하는 건, 도시 기능을 지탱하는 수자원의 변동이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즉, 과거에는 하천의 수량이 풍부하여 하류 쪽이 물을 이용하기 쉬웠지만, 하천의 수량이 감소하며 하류에 물이 이르기 어려워지며 도시자체가 이동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문제가 되는 건 왜 수량의 변동이 일어났을까 하는 점이다. 예전에는 현재보다 강수량이 많으며 강수량의 감소에 따라 하천의 수량이 감소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지만, 20세기 후반에 일어났던 관개농지 개발에 수반한 아랄해의 호수 면적이 급격히 감소했듯이, 무엇인가 인간활동이 하천의 수량과 지하수 등 지역의 수자원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 아닐까?


타클라마칸 사막의 유적과 현재의 도시 위치 관계를 언뜻 보기만 해도 인간 활동이 자연환경과 상관되며 역사적으로 변천해 온 것을 엿볼 수 있다. 환경의 역사, 곧 환경사적인 시선이 요구되는 까닭이다.




환경사란



지구의 탄생부터 역사를 펼쳐 읽을 필요도 없이, 인류의 탄생 이후라고 생각되는 과거 10만 년 정도를 살펴보아도 지구의 기후는 크게 변동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생활은 강하게 그 변동의 영향을 받아 왔다. 굳이 말하자면인류의 역사 그것이 기후변화에 대한 '적응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구온난화에 대한 대응이 인류에게 큰 과제라고 인식하게 된 현재, 앞으로의 기후 예측을 행하면서 과거의 기후변화를 밝히는 일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단순히 과거의 기후변화를 밝히는 것만이 아니라, 기후의 변화에 대하여 어떻게 인간이 적응했는지를 아는 일은 미래의 인류가 가져야 할 자세를 생각하면 빼놓을 수 없다. 기후변화를 포함한 자연환경의 변화에 대하여 인간 사회는 어떻게 적응해 왔을까, 그 역사적인 변천을 더듬어 찾는 것이 환경사이다.


타클라마칸 사막을 시작으로 중앙 유라시아의 건조·반건조 지역에서는 수자원이 인간의 생존을 크게 좌우하는 요인이며, 기후변화에 연동한 수자원의 변화에 의하여 사람들의 생활의 장과 생업의 형태가 역사적으로 크게 변화해 왔다. 원래 강수량이 적은 건조·반건조 지역에서는 강수량이 조금만 변화해도 광범위하게 건조에서 반건조로, 또는 그 반대로 변화한다. 또한 강수량이 적기 때문에 기후변화와 인간 활동의 변화 흔적이 남기 쉬워, 환경사를 탐구하는 데 안성맞춤인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과거의 기후변화를 복원할까 


그런데 현재 우리가 손에 넣을 수 있는 온도계와 우량계를 사용하여 직접 관측한 기상 자료는 오래된 장소라고 고작 200년에 불과하다. 중앙 유라시아에 대해서 말하면, 타슈켄트 등 기상기록을 남기는 데 뛰어났던 러시아의지배를 받았던 지역 등에서도 1800년대 후반부터의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곳에서 최근에는 과거의 기후변화를 붉히기 위하여 주로 바다와 호수 바닥의 퇴적물, 빙하와 빙상의 아이스코어, 수목의 나이테 같은 이른바 '프록시 데이터(간접지표)'를 다루는 자연과학적인 수법과 고고학적인 자료, 고문서 등도 부려 써서 각 시대의 환경 복원이 시도되고 있다. 


바다의 바닥과 호수의 바닥에 퇴적되어 있는 물질은 기본적으로는 새로운 것부터 옛날 것의 순으로 쌓여 있다. 이 때문에 각 층을 구성하는 흙 입자와 여러 가지 화학성분, 규조, 꽃가루를 시작으로 하는 동식물의 유체, 게다가 그에 포함된 질소와 수소의 동위체비 등에서 과거의 환경을 복원할 수 있다. 연대 결정에는 동식물 유체 등의 탄소에 의하여 추정한다. 호수에 따라서는 계절적인 퇴적 속도의 변화와 물질의 차이에 의하여 해마다 생기는 무늬(연층)가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호수의 퇴적 환경에 따라서는 1년에 한 층이 아니라 여러 층이 형성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지만, 연대 결정의 좋은 지표가 된다. 


빙하에서는 해마다 수십 센티미터부터 장소에 따라서는 몇 미터의 강설이 내려 쌓인다. 함양역涵養域이라 부르는 빙하 상부의 장소에서는 얼음이 거의 녹지 않고, 빙하의 표면에 새로 쌓은 눈부터 순서대로 깊은 곳에 옛날 눈이 켜켜이 쌓여 있다. 이것을 표면에서 특별한 드릴로 원기둥 모양으로 시료로 채취하면, 시대별 눈을 끄집어낼 수 있다. 이러한 시료를 설빙 코어, 또는 아이스코어라고 부른다(그림2-5, 그림2-6). 아이스코어에서 산출된 연도별 함양량(강수량)은 직접 과거의 강수량 기록을 복원할 수 있는 유일하다고 해도 좋은 수법이다. 또 눈을 구성하는 물에 포함된 질소, 수소의 안정동위체비는 눈이 대기 중에서 생길 때의 기온에 상관관계가 있기 때문에, 기온의 복원이 가능해진다. 남극과 그린란드의 빙상에서 채취된 아이스코어는 장기간의 눈이 잘 보존되어 있어, 그해석에 의하여 과거의 기후변화를 해명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최근에는 중앙 유라시아의 산악 빙하에서 아이스코어를 채취해 해석하여 기후변화를 복원하기도 한다. 남극과 그린란드에 비하면, 중앙 유라시아 같은 저위도 지역에서는 방하가 녹으면서 교란도 일어나 기온과의 상관관계가 약하다는 지적도 있는데, 장기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상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림2-5 키르기스탄 그리고리예프 빙하에서 아이스코어를 채취하는 풍경



그림2-6 키르기스탄 그리고리예프 빙하에서 채최한 아이스코어




온대와 한대 등 계절이 명료한 지역에서 생육하는 수목은 해마다 나이테를 형성한다. 나이테의 너비는 수목의 성장량을 보여주고, 기후 등의 환경 요인으로 크게 변화한다. 이 때문에 수목에 새겨진 나이테의 너비 변동은 그 수목이 생육했던 시대의 환경 변동을 반영하고 있다. 물론 개개의 수목이 생육했던 장소의 특성과 다른 수목과의 경합 등의 영향도 있으며, 또 수종에 따라서 성장의 특성도 다르기 때문에 많은 시료를 채취함으로써 그 지역의 대표적인 특성과 기온이나 강수량과의 상관을 밝혀야 한다. 혀재 생육하고 있는 수목만이 아니라, 건축물에 사용되고 있는 것과 재해 등으로 무너져 파묻혀 있던 것 등에서도 벌채한 연도가 명확하다면 해석하는 일이 가능하다.


더구나 고고학의 유적도 당시의 인간 활동 그것을 아는 단서가 되는 것만이 아니라, 주변의 환경에 관한 여러 정보를 제공해준다. 또한 역사 문서에 기록된 날씨에 관한 기재와 재해의 기록, 농작물의 수확량 등도 기후의 변화를 복원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된다. 중앙 유라시아 안에서도 청나라 세력의 지배를 받았던 지역에서는 강수량과 곡물의 수확량 등에 관하여 지방에서 중앙정부로 정기적인 보고가 행해졌던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자료적인 가치가 높다. 자료의 정리가 끝나지 않은 부분도 많고, 간단히 열람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지만, 앞으로 해석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 정보를 복원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


최근 산악 빙하의 아이스코어, 호수 바닥 퇴적물 등 주로 자연과학적인 수법을 사용한 연구가 활발해져, 특히 과거 2000년 정도 중앙 유라시아의 기후변화 양상이 계속 밝혀지고 있다(예를 들면, Yang 외. 2008). 이러한 연구 동향을 근거로 하여, 게다가 종합지구환경학연구소(지구연)에서 필자가 관여한 프로젝트 <수자원 변동 부하에대한 오아시스 지역의 적응력 평가와 그 역사적 변천>(약칭=오아시스 프로젝트, 책임자 나카오 마사요시中尾正義)과 현재 수행중인 프로젝트 <민족/국가의 교착과 생업 변화를 축으로 한 환경사의 해명 -중앙 유라시아 반건조 지역의 변천>(약칭=이리 프로젝트, 책임자 쿠보타 쥰페이)에서 얻은 성과를 맞추어, 중앙 유라시아의 과거 기후변화가 어디까지 판명되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제4기의 장기적인 기후변화


지구의 역사 중에서 180만 년 전부터 현재까지를 제4기라고 부른다. 지질학적인 눈으로 보면 가장 최근이라고도할 수 있는 이 제4기에 인류는 급속히 진화하여, 그 활동 범위를 지구 전체로 확대했다. 이윽고 인류는 농경과 목축의 방법을 획득하고, 문명을 구축한다. 그 활동은 차차 자연에 대한 영향을 강하게 하고, 대규모로 자연의 개변을 행하여 현재의 지구온난화를 시작으로 하는 환경문제를 만들어내게 된다. 다만, 개개의 지역과 집단을 보면 그 활동은 계속적으로 확대되어 온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 성쇠를 반복해 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농경과 목축을 개시한 뒤에도 그 생산력은 자연환경에 크게 의존하고, 기후의 변동에 좌우되었다.


제4기에는 약 10만 년 주기로 한랭하여 빙하게 널리 발달하는 빙하기와 온난하여 빙하게 축소된 간빙기가 반복되었다. 최근 4회의 빙하기에 관해서는 유럽, 북아메리카의 지명을 딴 이름이 붙여졌으며, 유럽의 호칭으로 가장 최근의 빙하기는 뷔름Würm 빙하기(최종 빙하기)라고 부르고 있다. 뷔름 빙하기는 대략 7만 년 전에 시작하여 1만 년 전에 종료되었다. 뷔름 빙하기 시기에 가장 빙상이 확대된 대략 2만 년 전을 최종 빙하기의 최한랭기(최종 빙하기 최성기, Last Glacial Maximim, LGM)이라 부르고 있다. 북미 대륙과 유럽 대륙에서는 큰 빙하게 확대되어, 현재의 식생 분포 등에도 그 영향이 남아 있다. 이 시기, 건조 지역은 현재보다 더욱 건조했던 상태였다고 생각된다. 다만, 이 최종 빙하기도 계속 추웠던 것이 아니라 2000년 정도의 짧은 주기로 기후가 격렬하게 변동하고 있었던 것이 최근의 그린란드와 남극의 아이스코어 해석에 의하여 밝혀지고, 그 변동의 과정을 단스가드 오슈가 주기(Dansgaard-Oeschger cycle)라고 부르고 있다. 빙하기-간빙기의 주기 안에서 일반적으로 한랭화가 진행되는 속도에 비하여 온난화가 급격히 진행된 경향이 있다. 단스가드 오슈가 주기에 있었던 온난화 시기의 변화 속도는섭씨 7도 이상의 기온 상승이 불과 200-300년 정도의 사이에 일어났던 경우도 있다(多田 1998).


뷔름 빙하기가 끝난 이후 기온은 온난해지고, 현재는 간빙기에 있다. 현재의 기후로 이행할 때 큰 추위가 되돌아와 일시적으로 빙하기 같은 한랭한 기후가 되었던 시기가 몇 번쯤 있다. 그 대표적인 시기는 영거 드러이아스기(지금으로부터 대략 1만3천 년 전)이라 부른다. 영거 드라이아스기가 끝나고 온난화할 때에도 약 10년 동안에 기온이 약 7.7도 이상 상승했다. 단스가드 오슈가 주기의 온난화 시기도 그러하지만, 이러한 급격한 기후의 변화를인류는 경험하고 있다. 오히려 그뒤는 이 정도의 급격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데에 주의한다.


영거 드라이아스기 이후 7000년 전에 걸쳐서 기후는 온난화했다. 이 온난화는 인류의 생계에 큰 영향을 주어, 농경과 목축, 정주는 이 시기에 시작된다. 이때에도 일시적인 한랭화 시기가 있어, 특히 8500-8200년 전 한랭기의 존재는 농경과 목축, 정주에 크게 관여했을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7000년 전부터 5000년 전에 이 온난화는 정점을 맞이해, 기후최적기(힙시서멀hypsithermal)라 부른다. 아프리카 대륙의 사하라 사막에서는 이 시기에 습윤한 환경이어서 식생이 확대되어 녹색의 사하라라고 부르는 상황이 출현했다. 그뒤 전과 같이 한랭-온난을 반복하면서 전체로서는 기온이 서서히 저하되어 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중앙 유라시아에서는 호수 바닥 퇴적물의 해석 결과로부터, 약 8000년 전 이후 급격하게 습윤해지고, 가장 습윤한 기간은 약 6000-1500년 전이었다는 지적이 있다(Fahu 외. 2008). 또한 엔도遠藤 외(1997)는 로프노르의 호수 바닥 퇴적물 코어에서 꽃가루를 분석하여 갱신세 전기에는 호수 주변에 침엽수가 존재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지적함과 동시에, 그뒤 건조화가 진행되어 특히 최근 1600년 동안은 매우 건조해졌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약간 시대는 뒤이지만, 타클라마칸 사막에서도 기온의 복원 결과와 오아시스의 유적조사로부터 오아시스의 형성 시기가 약2200년 전 한나라 시대와 약 1400-1200년 전의 당나라 시대에 집중되며, 그것이 기온이 고온이었던 시기와 일치한다는 점, 또한 16세기의 한랭으로 건조했던 시기에 오아시스 도시가 쇠퇴했다는 지적이 있다(Takamura 2005). 이와 같이 오아시스 도시의 성쇠와 수자원의 변동 사이의 관게에 대해서는 아직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많아, 앞으로 실증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과거 2000년, 중앙 유라시아에서 무엇이 일어났을까


세계에서 네 번째의 크기를 가지고 있었던 아랄해는 1960년대 이후 상류에서 행해진 농업 개발에 의하여 유입하는 하천의 수량이 감소했기 때문에, 2007년에는 호수 면적이 1960년대와 비교하여 약 10%까지 격감했다. 그 결과, 아랄해에서 행하던 어업은 붕괴되고, 노출된 호수 바닥에서 말려 올라간 먼지에 의한 건강피해를 발생시키는 등 20세기 최대의 환경 문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른바 '아랄해의 비극'이다. 그런데 공교롭게 그 덕에 호수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마을의 유적이 발견되거나, 과거 호수면의 변화를 보여주는 지형을 관찰할 수 있게 되거나, 또는 호수 바닥의 퇴적물 채취가 쉬워지거나 하여 아랄해의 과거 환경 변동을 해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럽과 중앙아시아의 연구자에 의한 고고학과 지질학을 중심으로 한 학제간 연구프로젝트 'CLIMAN'은 호수 바닥 퇴적물의 보링 코어의 해석, 호수 바닥의 유적 조사, 호숫가 지형의 상세한 조사 등을 행하여 과거 2000년 정도의 아랄해의  환경 변동을 상세하게 밝혔다(예를 들면 Boomer 외. 2009). 그 결과, 과거 2000년을 돌아 보아도 아랄해의 면적은 크게 변동했으며, 약 800년 전 무렵에 아랠해는 거의 현재와같은 정도까지 호수가 축소되었던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그 원인으로는 (1)아랄해로 유입되는 하천인 아무다리야강, 시르다니야강 가운데 아무다리야강이 이 시기 흐름을 바꾸어 카스피해로 흘러 들어갔다. (2) 기후의 변화에 의하여 강수량이 적어지고, 그 결과 유입되는 하천의 수량이 감소했다. (3) 아무다리야강, 시르다니야강의 중류 지역의 오아시스 도시에서 관개농지가 개발되어, 그 물 소비에 의하여 유입되는 하천의 수량이 감소했다. 이상을 들고 있다. 아랄해 축소는 이들이 복합된 결괴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동시기에 주변의 호수에서도 수위의 저하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지구연·이리 프로젝트가 카자흐스탄 지질연구소와 공동으로 행했던 아랄해의 동쪽에 있는 발하시호의 호수 바닥 퇴적물의 해석에서 아랄해의 수위 저하가 일어났던 시기와 거의 동시기에 발하시호에서도 수위 저하가 있었을가능성이 있단 점이 밝혀졌다(遠藤 외. 2009). 또 키르기스에 있는 이식쿨호에서 행한 해석에서도 약간 시기는 다르지만, 13세기에 수위의 저하가 있었단 것이 지적된다(Girlat 외. 2002). 아랄해의 수위 저하에 관해서는 유입되는 하천의 유로가 변했던 영향이 지적되었지만, 발하시호와 이식쿨호의 예를 보면 중앙 유라시아의 비교적 넓은 범위에서 호수 면적의 감소를 일으킬 수 있는 일이 있었음을 시사하여, 강수량이 감소했을 가능성이 높다고생각한다. 


그럼, 이러한 호수 바닥 퇴적물에 기록된 호수 수위의 변화는 나이테와 아이스코어 등에서 복원된 기온과 강수량에 의하여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을까? Esper 외.(2002), Solomina and Alverson(2004) 등의 나이테 해석 결과 및 Thompson(1995)에 의한 그리야 아이스캡의 아이스코어 해석 결과 등에서 중앙 유라시아의 과거 2000년 동안의 기후 복원을 정리한 Yang 외.(2008)에 의하면, 습윤기는 기원후 0-410년, 650-890년, 1500-1820년이고, 건조했던 시기는 420-660년과 900-1510년 무렵이었다. 또한 기온을 보면 유럽과 마찬가지로 중세 온난기(9-12세기)와 한랭한 소빙하기(15-18세기)가 존재하고, 중세 온난기인 10세기 이후는 건조화가 뚜렷하게 나타나, 소빙하기는 오히려 습윤했다고 지적한다. 이 결과와 호수의 수위 변동을 합하여 고려하면, 중세 온난기인 10세기 이후의 건조화, 즉 온난하면서 또 건조화가 진행된 시기에 아랄해와 발하시호의 수위 저하가 일어났던 것을 시사한다. 또 소빙하기에는 한랭 또 습윤한 기후화로 일단 축소된 호수 면적이 회복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랭한 시기는 건조하고, 온난한 시기에는 습윤해진다고 이해하지만, 특히 건조·반건조 지역에서는 이에 꼭 들어맞지 않는 사례가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현시점에서는 이와 같은 기후변화가 어느 정도 사람들의 생계에 영향을 주었을지 구체적인 증거를 가지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례는 중앙 유라시아에 많지 않다. 물론 시대가 나아감에 따라 자연환경에 의한 제약을 기술적으로 완화시킨 부분이 많고, 오아시스 도시가 성쇠한 원인은 기후변화보다 오히려 국가 또는 집단 사이의 대립, 교역이나 이동의 수단과 그 경로의 변천 등 사회적인 요소가 지배적이 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한편으로 물의 이용이 고도화, 집약화함에 따라서 '아랄해의 비극' 같이 이미 기술적으로 대처할 수 없을 만큼의 환경파괴를 일으킨 일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기존의 의론에서는 일반적으로 기온의 복원에 비하여 건습(강수량 변동)의 복원이 곤란한 일도 있고, 한랭화와 온난화가 쓸데없이 중시되어 보고 있다. 아까의 사례처럼 상사헤가 보면 일반적으로 말하는 한랭-건조, 온난-습윤이란 도식이 성립하지 않는 경우도 있고, 특히 수자원의 제약을 받기 쉬운 건조·반건조 지역에서는 건조냐 습윤이냐의 차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최근 중앙 유라시아의 기후변화의 복원에 관한 연구는 정보가 축적되고 있다. DNA 등 새로운 분석수법도 받아들여진 고고학 연구도 진행되고 있는 현재, 이 점에 관한 연구가 심화되기를 기대한다.





20세기 후반에 중앙 유라시아에서 일어난 일


대규모 관개농지 개발 -그 공과  


지금까지 보았듯이, 중앙 유라시아 사람들의 생계에 기후와 수자원의 변동이 큰 영향을 주었다는 건 틀림이 없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대응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모든 것이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최근의 농업 개발 등 인간 활동이 일으킨 물 부족 등의 환경문제를 상세히 검토하는 것으로부터 일찍이 무엇이 일어났는지 이해하기 위한 단서를 찾아보자.


20세기 초 무렵 또는 20세기 중반까지, 중앙 유라시아는 오아시스 지역을 제외하고는 광대한 토지가 농업에는 이용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곧 원래 이들 지역은 햇빛, 기온 등 농업 생산에 관한 기상조건에 혜택이 있어 잠재적인 농업 생산 적합지이면서, 물 조건의 제약으로 아직 손을 대지 않은 상태였다. 이 때문에 근대가 되어 대규모토목공사가 가능해지고, 또 인구 증가에 의한 식량 증산의 필요성이 높이지면서 북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등과 마찬가지로 20세기 후반에는 중앙 유라시아에서도 대규모 관개농지의 개발이 행해지게 되었다. 특히 소비에트 연방에 속해 있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서는 아랄해로 흘러 들어가는 아무다리야강, 시르다리야강의 수자원과 그 주변의 광대한 토지가 주목되어, 소비에트 연방에서 추진하는 면화의 재배기지로 대규모 관개농지가개발되었다. 그 결과, 특히 우즈베키스탄은 현재 생산량에서 세계 5위, 수출량에서는 톱 3에 들어가는 면화 생산국이 되었다. 중국에서도 신장 위구르 자치구, 감숙성, 청해성 등에서 산악지역부터 오아시스 지역을 거쳐 사막으로 흘러가는 하천의 물을 이용하여, 옛날부터 존재하는 오아시스를 대규모로 확대하는 모양으로 농업 개발이 진행된다.


대규모 관개농지의 개발은 확실히 식량과 면화 등 농산물의 증산에 기여하고 있다. 현재 세계적으로 보아도 곡물생산의 약 40%는 면적으로 보아 전 농지의 17%에 지나지 않는 관개농지에 의존하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한편에서 '아랄해의 비극'으로 대표되듯이, 심각한 물 부족과 염해 등 다양한 환경문제를 일으키는 원인도 되고 있으며, 반건조·건조 지역에서 관개농업은 그 지속성이란 의미에서는 큰 문제를 품고 있는 현상이다.




건조지의 농업 개발은 왜 문제인가


물은 순환성이 있는 자원이다. 지구의 물은 상태는 다르더라도 그 총량은 거의 변하지 않으며, 매년 거의 같은 양이 순환한다. 매년 순환하는 양을 넘지 않게 이용하는 한, 물은 무한의 자원이다. 이 물과 태양 에너지를 이용하는 생물 생산인 농업은 매년의 생산량에는 한계가 있지만, 원래 지속적인 생산 형태이다. 한편 석유로 대표되는  광물자원의 대부분은 지구의 역사 속 시기에 축적된 유한의 것을 인류가 사용하고 있으며, 소비할수록 언젠가는 고갈되는 때가 온다. 


지상에 내리는 강수는 숲과 초원, 또는 관개되지 않는 농지(천둥지기 농지)를 적시고, 일부는 그곳에 있는 식물에 의하여 사용되며, 증발하여 대기로 돌아간다. 사용되지 않고 하천으로 흘러 가거나, 지하수가 된 물을 인간은 자원으로 이용하고, 물이 부족한 농지에 관개하거나(관개농지), 공업용수나 가정용수로 이용한다. 이용하지 못한물은 최종적으로 바다로 흐른다. 일반적으로 매년 반복하여 자원으로 쓰일 수 있는 물의 양을 '재생가능한 수자원량'이라 한다. 이것은 하천에 흘러 가거나, 지하수가 되어 사용할 수 있는 물의 양을 가리킨다.


매년 반복하여 식물 생산과 농업 생산에 사용되고 있는 수자원이더라도 숲과 초원, 천둥지기 농지에 내린 물은 '재생가능한 수자원량'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이러한 물을 '그린 워터'라고 부르며, 하천에 흘러 간 뒤의 이른바 '재생가능한 수자원량'을 '블루 워터'라고 부른다. 농업 생산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농지 개발을 행하려 고려할 때,숲과 초원 등을 농지로 전환하고 천수(강수)로 충당할 수 있는 범위에서 농업 생산을 행한 경우에는 증발산량으로 대기로 사라지는 양은 크게 변화하지 않기 때문에, 블루 워터를 사용하지 않는 지속적인 물 이용이라 말할 수 있다. 한편, 천수만으로는 농업 생산을 행하지 않는 지역, 예를 들면 건조지 등에서 관개농지를 개발한 경우에는 새롭게 블루 워터를 이용하게 되기 때문에, 블루 워터를 공유하는 다른 자원 이용(예를 들면 하류의 다른 관개농지와 가정용수, 공업용수 등)에 크게 영향을 준다. 물론 농지 개발을 행한 하류 지역의 블루 워터에 의하여 유지되는 호수의 수량 그것에도 큰 영향을 준다. '아랄해의 비극'도 원래 호수에 흘러 들어가 호수를 형성하고 있던 블루 워터를 농업용수로 이용한 결과라고 이해하면 알기 쉽다. 최종적으로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물의 양도 블루워터에 포함되어 있다는 걸 생각하면, 블루 워터의 새로운 이용은 하루 쪽의 물 순환과 그에 관련된 생태계에 반드시 무엇인가 영향을 주며, 생태계가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기능(생태계 서비스)와 문제를 일으키면서 실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어디까지 허용될지 여부는 자연과학적으로 적정한 양을 정하기보다, 오히려 유역 사회의 판단에 맡겨져 있다.




헤어허黑河 유역의 물 순환과 최근의 물 부족


중앙 유라시아의 건조·반건조 지역을 흐르는 하천은 이미 보았듯이, 원류에서 강수량이 많은 빙하가 존재하는 고산 산악으로 이루어진 상류역, 산기슭에 펼쳐진 선상지에서 하천의 물을 이용하여 관개농지가 만들어진 중류 오아시스 지역, 광대한 사막으로 이루어진 하류역의 세 가지로 구분된다. 여기에서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동쪽에 있고, 중국 본토와 서역을 잇는 교통의 요충이었던 하서 회랑에 있는 헤이허를 예로 들어서, 농업 개발에 의한 물순환에 대한 영향, 순환 문제(물 부족)의 대두, 또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이 어떻게 기능했는지, 무엇을 가져왔는지를 지구연의 오아시스 프로젝트 성과를 기반으로 상세히 고찰한다.


헤이허는 청해성과 감숙성에 걸치고, 티베트 고원의 북쪽 가장자리를 형성하는 치롄 산맥을 수원으로 하며, 옛날부터 관개농업의 성행한 장예張掖, 주취안酒泉 등의 오아시스 도시가 존재하는 중류부를 거쳐 내몽고 자치구의 사막 지대에 들어가 소멸하는 내륙하천이다(그림2-7). 전체 길이 약 400킬로미터, 유역 면적은 13만 평방킬로미터이고, 일본 면적의 약 1/3에 상당하는 광대한 유역이다. 상류부의 기롄 산맥에는 빙하가 존재하고, 연강수량은600mm 정도이다. 기롄 산맥은 북서-남동의 방향으로 늘어지는 산맥이다. 그 중앙에서 남동쪽으로 흘러 도중에 북으로 방향을 바꾸어 중류의 장예로 흐르는 본류에 반해, 북서쪽으로 흘러 주취안을 통과하는 큰 지천이 있어 북대하라고 부른다. 현재 북대하의 물은 주취안과 그 하류의 진타金塔라는 오아시스에서 대부분 농업용수로 사용해 버려 본류에 이르는 것이 없고 흐름이 끊어진다. 


그림2-7 헤어허 지역의 위치와 지형




중류의 오아시스 지역의 연강수량은 100-200mm 정도, 하류의  사막 지대에서는 50mm 이하에 지나지 않는다.중류의 오아시스 지역은 하천수와 지하수를 이용하는 관개농지가 널리 존재하고 있다. 하류 지역에서는 지하수를주로 이용하는 농업이 경영되는 한편, 오아시스와 하천의 주변, 또는 사막 안에 존재하는 제한된 식생을 이용한 유목이 경영되어 왔다. 


헤이허에서는 특히 1950년대 이후 하천의 단류, 하류 지역의 지하수위 저하, 식생의 쇠퇴, 말단 호수의 소멸 같은 물 부족이 심각해졌다. 먼저 앞에 기술한 북대하의 단류만이 아니라, 여러 지류가 본류와 분리되어 버렸다. 그결과 하류의 하천 주변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던 호양胡楊 나무가 물 부족 때문에 가지가 말라 버렸다. 호양의 숲은헤이허 하류 지역을 대표하는 경관인데, 1990년 이후 쇠퇴가 격심해졌다고 이야기된다. 또한 헤이허 하류 지역은 헤이허가 형성하는 삼각주가 펼쳐져 있고, 자주 유로를 바꾸면서 강이 흐르고 있었다. 1940년대 후반에 하류는 동쪽의 강(어지나강), 서쪽의 강(무렌강)으로 나뉘어서 흐르며, 각각 소고노르, 가순노르Gaxun nur라고 말하는 말단 호수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에는 300평방킬로미터 이하의 총면적을 가지고 있던 말단 호수지만, 1961년에 먼저 서쪽 강의 가순노르가 말라서 약 30평방킬로미터 정도로 급격하게 면적이 줄어들고, 1992년에는 남았던 동쪽 강의 소고노르가 말라 버렸다(Wang and Cheng 1999).




수자원에 산악의 강수와 빙하가 녹은 물의 중요성


이 장의 모두에서 기술했듯이, 중앙 유라시아 건조·반건조 지역의 수자원은 산악 지역의 강수량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표고가 높은 곳에서는 기온이 낮기 때문에 강수는 눈의 모양으로 쏟아진다. 일 년 동안에 내린 양과 녹은 양은 기온과 햇빛, 풍속 등에 의하여 변하지만, 표고가 높아져 기온이 낮아지면 내린 양 쪽이 많아지고, 내린 눈이 해를 넘겨 남게 된다. 이리하여 해를 넘긴 눈이 이윽고 양이 많아지면, 서서히 마치 액체처럼 유동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하여 생긴 것이 빙하이다. 빙하는 한랭한 시기가 계속되어 얼음이 녹은 양이 감소하면, 차츰 쌓이는양이 많아져 확대된다. 거꾸로 온난한 시기에는 녹은 양이 증가하여, 빙하는 축소한다. 여기에서 주의할 점은 빙하가 확대되는 건 기온이 낮아서 녹은 양이 적은 시기이고, 반대로 빙하가 축소되는 건 녹은 양이 많은 시기라는 것이다. 현재 헤이허에 존재하는 빙하를 시작으로, 중앙 유라시아에 있는 빙하의 대부분은 축소를 계속하고 있는데, 하천수의 양을 고려하면 물이 더욱 많이 흐르고 있다. 우리는 걸핏하면 빙하가 확대하는 시기에 빙하의 수원으로서의 역할이 커지는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현재처럼 축소의 시기야말로 하천으로 유입되는 빙하의 녹은 물이 기여하는 바가 커진다.


빙하가 얼마나 녹을지는 이미 기술한 기온과 햇빛, 풍속 등 외에 빙하 표면의 상태가 크게 관계한다. 이들 요소를포함하여 생각하면, 빙하는 오히려 비가 적어져서 하천수가 감소하는 시기에 그것을 보완하는 형태로 많은 녹은 물을 공급한다는 것이 밝혀져, 건조·반건조 지역의 수자원을 생각하면 중요한 요소이다.




하천수와 지하수의 상호작용


헤이허 유역을 포함한 중앙 유라시아의 하천에서는 상류 지역에 가져온 강수, 눈과 빙하의 녹은 물이 수원이 되어 하천이 형성되고, 중류 산기슭의 선상지에 흘러 간다. 선상지는 하천이 운반한 토사가 퇴적하여 만들어진 무넘기가 좋은 장소이기에, 물골에서 지하로 물이 침투해 가서 지하수가 된다. 또한 상류의 산악지역에서도 양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산의 암반 안에 물이 깊이 스며들어 오랜 시간을 걸려 중류 선상지의 지하로 흘러들어간다. 게다가 관개로 농지에 공급되는 물 가운데 대기 중으로 증발과 발산으로 돌아가는 분량을 제한 것은 서서히 지면속을 침투하여 지하수가 된다. 어느 쪽이든 지하수는 오랜 시간이 걸려 저장된 수자원이다. 이리하여 지하에 축적된 물의 일부는 선상지의 말단에서 샘으로 유출된다. 헤이허의 경우 장예의 마을 북쪽을 달리는 철도의 선로 부근이 선상지 말단에 해당되어, 이 근처에 많은 샘이 솟아 나온다. 이 근처에서는 풍부한 지하수를 이용한 논(벼농사)가 옛날부터 개간되어, 절수 정책이 진행되는 현재도 유일하게 논벼의 재배가 인정되고 있다(그림2-8).


그림2-8 장예 오아시스의 선상지 말단부의 논 지대. 현재는 일본의 품종이 도입되어 있다(2002년).




헤이허의 중류와 하류의 경계가 되는 정의협正義峽에 있는 유량관측소에서는 여름의 관개가 행해지고 있는 기간은홍수 때를 제외하고 물이 흐르고 있지 않고, 대부분이 관개용수로 사용되고 있다. 유량관측이 시작된 1950년 당시의 기록을 보아도, 여름 동안 정의협의 유량은 홍수 때를 제하고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옛날부터 이러한 물 이용 형태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반대로 간개를 행하지 않는 겨울 동안은 상류와 중류의 경계에 있는 앵락협鶯落峽 관측소의 유량보다 하류 쪽의 정의협 유량이 많아진다. 이것은 여름 동안에 관개지에 공급된 물이 지하수대를 경우하여 겨울에 유출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과 함께, 또 지하수의 형성에 관개지에 공급된 물의 기여가 크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질로 본 오아시스의 지속성


헤이허의 중류 지역에 있는 장예 지구는 옛날부터 밀과 잡곡을 주작물로 한 오아시스 농업 지역으로 발전해 왔으며, 그 풍부한 생산력 때문에 '금 장예(부유한 장예)'라고 불렸다. 현재 장예의 관개수로는 이미 명나라부터 청나라 시대에 현재의 위치와 똑같은 장소에 존재했다(井上 2007). 그 번영의 역사를 뒷받침한 원동력은 어디에 있었을까?


그림 2-4에서 보았듯이, 타클라마칸 사막의 주변에 현재의 오아시스 도시와 예전부터 오아시스가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유적의 위치 관계를 보면, 현재의 오아시스는 하천의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즉 옛 시대의 오아시스는 더 하류 쪽에 있고, 예전에는 지금보다 하천의 수량이 많았단 것을 시사한다. 그뒤 기후의 변화 등에 의하여 하천의 유량이 감소하고, 사람들은 더 안정된 수량을 찾으러 상류로 이주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일반적으로 경사가 완만한 곳에서는 지하수위가 높아져, 염해가 발생하기 쉬운 경향이 있다. 그것도 하나의 요인이었을 가능성도있다. 


그렇다면 장예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이러한 예전의 오아시스와 비교하여 무엇이 달랐을까? 장예의 하류 쪽, 곧 정의협 주변에는 지하수를 통과하기 어려운 암반을 가진 산지가 존재한다. 이 산지의 존재는 지하의 댐 같은 역할을 수행하여, 중류의 지하수가 하류로 흘러 가는 것을 막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선상지의 말단인 장예의 북쪽부터 임택臨澤과 고태高台에 걸친 헤이허 주변의 낮은 평지는 지하수가 모이기 쉽고, 말하자면 물동이 같은장소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선상지 상부에서 관개한 물의 일부는 당연히 대기 중으로 증발되어 돌아가지만, 나머지는 지하수가 되어 선상지의 말단으로 유출된다. 선상지보다 하류의 낮은 평지에서는 이 한 번 사용된 물을 다시 이용하여 관개가 행해지고, 농업이 경영되었던 것이다. 하천의 물은 최종적으로 정의협을 거쳐 하류로 나아가기까지 몇 번이나 반복해 이용된다. 단순히 헤이허의 유량이 안정되어 있었던 것만이 아니라, 이 반복해 이용할 수 있는 구조가 장예를 뒷받침한 하나의 요인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 이와 같은 낮은 평지는 어느 쪽이냐 하면 염분 농도가 높아지기 쉬우며, 염해가 발생하는 일도 많다. 이에 반해 경사가 비교적 급한 선상지의 상부에서는 지하수위는 지표에서 꽤 깊은 곳에 있기 때문에 염해는 일어나기 어렵다. 근대적인 토목공사가 행해지기 이전, 곧 늦어도 명나라부터 청나라 시대에는 이 선상지에 물을 잡아끄는 시설을 건설하고, 염해가 발생하지 않는 관개농지를 널리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이 장예 오아시스의 오랜 번영을 뒷받침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장예는 물과 토지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유리한 조건을 가진 오아시스였다고생각한다.


그런데 장예 오아시스의 번영은 당연히 물 이용의 증가를 불러, 결과적으로 하류로 흐르는 수량을 감소시키게 된다. 하류 지역에서도 기원전후에는 이미 관개농지가 만들어져 있었다(籾山 2000). 그뒤의 원나라와 서하 시대의 관개수로와 농경지 터 등도 발견되고 있다(森谷 2007)(그림2-9). 또한 현재의 관개수로의 원형이 만들어진 청나라 시대에도 벌써 중류와 하류 사이에 물다툼이 일어났다고 한다(井上 2007). 즉 일찍이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 가장자리의 오아시스에서 기후의 변화에 의하여 발생한 물 부족이 헤이허의 하류에서도 그토록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인간 활동이 확대된 결과로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림2-9 헤이허 하류 지역의 서하 시대 관개수로 터(2002년)




최근 물 이용의 실태


그림2-10은 헤이허가 상류 상악 지역부터 중류의 오아시스 지역으로 흘러들어가는 지점에 있는 앵락협과 중류 오아시스 지역의 하단에 해당하는 정의협에서 1954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연간 유량의 장기간 변화를 보여준다. 먼저 오아시스로 상류의 수원 지역에서 흘러 들어오는 앵락협의 유량을 보면, 대략 연간 16억 톤이고, 해마다 변동은 크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거의 변화하지 않든지, 약간 증가하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최근의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헤이허 유역에서는 기온의 상승과 강수량의 감소가 관측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기온의 상승은 증발산량을 증가시켜 하천 유량을 감소시키는 작용이 있고, 강수량의 감소도 당연히 유량을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빙하가 녹은 물이 증가하여 강수량의 감소와 증발산량의 증가로 사라진 분량을 보완하여, 상류 지역에서의 하천 유량은 크게 변동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헤이허에서 물 부족의 요인으로, 상류 지역에서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쳐서 성행했던 산림 벌채(シンジルト 2005)와 방목의 영향도 들고 있었다. 그러나 산림 벌채는 유역에서의 증발산량을 감소시켜 오히려 유량을 증가시킨다고 잘 알려져 있다(예를 들면 窪田 2004). 또한 상류 지역에서도 수원 영역의 보호를 목적으로 유목민에 대한 생태이민이 행해지고 있지만(中村 2005), 상류에서의 유량은 생태이민이 행해지기 이전부터 거의 변화하지 않았고 최근 헤이허의 하류 지역에서 일어난 물 부족의 원인은 수원 지역에는 없음이 확연히 드러난다.


그림2-10 헤이허 유역의 앵락협, 정의협에서 연간 유량과 중류 지역의 물 소비량 변화.  窪田 2007에 의함





한편, 앵락협과 정의협에서 하천 유량의 차는 장예 등 중류 오아시스 지역에서 관개를 함으로 인한 물 소비의 지표라고 볼 수 있다. 정의협의 유량이 1950년대에는 연간 10억 톤 이상었는데, 1990년대에는 8억 톤 정도, 적은해에는 6.5억 톤 정도까지 감소했다. 이 때문에 앵략협과 정의협에서 하천 유량의 차는 이 사이 증가 경향에 있으며, 특히 1970년 이후 그 증가는 두드러진다. 이것은 중류 지역에서 물 소비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하류 지역에서 심각한 물 부족을 불러온 주요한 원인임을 알 수 있다.



이 사이 중류 지역에서는 인구는 약 2배가 되고, 관개 면적은 약 3배로 증가했다(Wang anf Cheng 1999). 이러한 인간 활동의 증대, 농업 개발이 물 소비를 증대시킨 것이다. 다양한 농지에서 물 소비를 측정함과 함께, 이 사이의 토지이용, 특히 농작물의 작부면적 변천으로부터 중류의 물 소비량을 분석한 山埼(2006)는 1970년대부터1980년대에 걸쳐서 농지의 확대, 특히 밀의 작부면적 증대가 주요한 원인이며, 1980년대 이후에 대해서는 옥수수의 도입 및 옥수수와 밀의 사이짓기 면적의 증가가 물 소비량 확대의 주요한 원인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1990년대에는 도시 주변의 채소와 다양한 환금작물로의 전환이 오히려 물 소비를 증가시켰다고 지적한다.


또한 헤이허의 중류 오아시스 지역에서는 풍부한 하천수를 이용한 관개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물 수요가 핍박해지는 1980년대 후반 이후, 지하수 이용이 급격히 증가하여 2003년에는 관개용수량의 약 25%를 점하게 되었다. 이것은 전동 펌프의 보급에 의하여 지하수 이용이 쉬워진 외에, 중류의 물 수요가 증가하여 하류의 물 부족이심각해지면서 정부가 지하수 이용을 추진한 일도 영향을 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지하수위의 저하는 특히 채소 등의 재배가 증가하여 지하수의 이용이 성행한 선상지의 하부에서 1990년 이후 1년에 1미터 가까이 급격하게 저하되었다. 




하류 지역의 물 부족


지금까지 헤이허 중류 지역에서 물 이용의 실태와 그 변천을 밝혀 보았다. 그럼 그것을 근거로 하여 하류 지역의 물 부족이 어떠한 변천을 겪었을지 더욱 상세하게 살펴보자.


그림2-11은 중류와 하류 지역의 경계에 해당하는 정의협에서 있었던 1950년대 이후의 유량 변화를 관개기(4-9월)과 비관개기(10-3월)에 걸쳐서 나타낸 것이다. 이것을 보면 비관개기에는 중류 지역에서 하류 지역으로 거의일정하게 안정된 유량이 공급되고 있는 데 반해, 관개기의 유량은 해에 따라서 크게 변동한다. 특히 1990년대에는 관개기의 유량이 크게 감소하고, 거의 유량이 없는 해도 많다. 이것이 1990년대에 들어서 뚜렷해진 호양 숲의 쇠퇴와 최종적으로 말단 호수가 말라버린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음이 틀림없다.



그림2-11 정의협에서 하류 지역으로 유입되는 관개기, 비관개기의 유량 변화. 窪田 2007에 의함





그러면 앞에 기술했던 195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쳐서 하류에 두 개의 말단 호수 가운데 서쪽 강의 가순노르가 소멸하고, 전체 호수 면적이 크게 감소했던 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정의협의 유량을 보는 한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걸쳐서 유량이 적은 해도 있지만, 큰 변화는 확인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생각할 수 있는 원인의 하나는 정의협보다 하류 쪽에서 합류하던 북대하의 단류이다. 북대하에서는 1949년에 헤이허 유역으로서는 처음으로 주취안의 하류, 진타의 상류에 저수용 댐이 건설되어, 그 이후 이른바 대약진의 시대에 관개농지가 개발되었다. 북대하로부터 1930년대에는 연간 9억 톤의 유량이 흐르고 있었다(Wang and Cheng 1999). 1950년대 정의협의 유량(연간 약 10억 톤)에 필적하는 유량이다. 북대하가 언제 헤이허에 도달하지 않게 되었는지 안타깝지만 확실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데, 이 정도의 유량 공급이 비스듬히 잘린 영향은 컸을 것이다. 아울러 정의협의 하류에 있는 정신鼎新 및 에치Eji Nai에서도 대약진 때 새로운 농지가 개발되는데, 면적을 생각하면 그 영향은 한정적이었다고 생각한다. 1958년에는 어지나기旗 의 행정시설이 서쪽 강, 곧 무렌강 근처의 새한도래賽漢桃來로부터 현재의 어지나기 중심으로 이주되었다. 이 때문에 서쪽 강의 유량을 동쪽 강, 곧 어지나강으로도입하려는 시책이 행해졌다고 들었다. 북대하에서 유입이 안 되어 크게 감소했던 하류 지역의 물을 행정부가 있는 동쪽의 강으로 집중시켜려던 것이다. 북대하의 유량 감소, 단류, 그리고 동쪽 강으로의 전류가 서쪽 강과 그 말단의 가순노르호를 말라 버리게 하고, 호수 면적을 크게 감소시키게 된 것이 아니었을까? 이 시점에서 하류 지역의 물 부족은 심각한 문제가 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더욱이 장예 주변의 농업 개발에 의한 헤이허 본류의 유량 감소가 진행되어 최종적으로는 1990년대 관개기의 극단적인 유량 감소가 큰 피해가 되어, 식생의 쇠퇴와 말단 호수의 완전한 소멸 등이 일어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절수 정책의 영향


1950년대 이후 진행된 헤이허 하류 지역의 물 부족은 특히 1990년대에 들어서 한층 심각해졌다. 이 때문에 중국 정부는 2001년부터 5년 동안 국가 프로젝트로 하류로의 배분을 단계적으로 늘리는 중류와 하류의 물 분배에 관한 규정을 정하고, 절수에 몰두하게 되었다.


절수 정책으로 중류 지역에서는 환금작물과 물의 소비가 적은 작물의 전환, 소로의 개수에 의한 송수 효율의 개선, 하천수에서 지하수로 수원의 전환 등이 행해졌다. 가장 주요한 것은 중류 지역 물의 총사용량을 줄이고, 또 수원을 하천수에서 지하수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류 지역에서 물의 총사용량을 크게 줄이기는어렵고, 하천수를 줄이는 대신에 쓸데없이 지하수의 사용량을 늘리게 되었다. 이미 1990년대에 저하되기 시작한중류 지역의 지하수는 이 시책에 의하여 더욱 빠르게 수위가 저하되는 것이 우려되었다. 또한 앞 절에서 보여준 그림2-11에 의하면, 비관개기 중류에서 하류로 가는 유량, 곧 지하수에서 샘솟는 수량은 1990년대 이후 감소 경향이며, 절수 정책이 개시되었던 2001년 이후도 똑같은 경향이다. 지하수위 저하의 이차적 영향으로 무시할 수 없는 가능성도 있다. 지하수 이용이 증가했기 때문에 지하수위가 저하되어 지하의 물의 양은 감소하고, 그 결과 하류로 흐르는 물의 양 가운데 지하수를 기원으로 하는 물은 감소했던 것이다. 즉, 하류로 흘러가는 물은 실제로는 상류 지역에서 가져온 하천수인데, 수지로 생각했을 경우 중류 지역의 지하수 자원을 줄이면서 하류에서의 물이 확보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1년 이후에 추진된 절수 정책에 의하여 말단 호수는 그 수량을 회복했다. 그러나 그 물은 실은 중류 지역의 지하수를 줄인 것에 의하여 가져온 것이라 말할 수 있다.


또한 물 부족에 의한 식생의 쇠퇴와 말단 호수가 소멸된 하류 지역과 수원인 상류 지역에서는 초원의 보호를 목적으로 한 생태이민 정책이 실시되었다. 이미 보았듯이 하류 지역에서의 식생의 쇠퇴도 유목의 영향이라기보다는중류 지역에서의 물 이용이 증대함에 의한 하류 지역의 물 부족이 원이다. 따라서 수자원의 측면에서 보면, 생태이민 정책으로 행해진 유목에서 축사 사육으로의 전환 및 그로 인한 사료 생산, 또는 농업으로의 생업 변경은 오히려 역효과가 발생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더욱이 하류 지역에서는 송수 효율을 올려서 말단 호수를 부활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원래의 자연스런 강에 평행하도록 거의 하류 지역 모두에 콘크리트로 만든 수로가 건설되었다. 이것은 강가 지역의 지하수의 저하, 강가 식생의 쇠퇴 등 새로운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도 있다.




크림 반도 하류 지역의 사례


헤이허의 사례를 상세히 살펴보았는데, 크림 반도 하류 지역에서도 똑같은 오아시스 농업 지역에서 신규 관개농지 개발에 수반한 하류의 하천수량 감소가 일어나, 강가 식생의 쇠퇴 등 여러 환경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카라코롬, 힌두쿠시 산맥을 원류로 하는 야르칸드강yarkand river에 남쪽부터 타클라마칸 사막을 종단하여 합류하는 호탄강Khōtan과, 북쪽부터 천산산맥의 물을 모아서 합류하는 아쿠스강이란 세 가지 지류가 아쿠스 근처에서 합류하고, 타림강이 되어 동쪽으로 흘러 간다. 어느 하천에서도 옛날부터 산기슭 선상지에서 오아시스 농업이 행해졌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본격적인 근대농업 개발은 이 지역 독특한 국경방위와 농업 개발이란 두 역할을 담당하는 생산건설병단이 1954년에 건설되어, 그 이후 급속히 추진되었다. 야르칸드강, 아쿠스강, 타림강도 각각 원류 지역에서의 유량은 1950년대 이후 해마다 변동이 컸지만, 장기적으로는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그런데 각 하천의 산기슭 선상지에서 관개농지가 대략 2배가 되었다. 이들 신규 개척농지는 옛날부터 경작이 행해졌던 농지에 비하여 토양의 염분 농도가 높고, 경작에 부적합한 장소로 남겨두었던 장소였다. 이러한 농지에서의 생산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기존의 관개농지보다 염분을 씻어 내기 위해 다량의 관개수가 사용되었다. 이 결과, 아쿠스의 합류점 바로 아래의 유량관측소에서 측정한 유량을 보면, 1950년대에 비하여 1990년대에는 30%의 유량이 감소했다. 아쿠스의 합류점보다 하류 쪽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물은 크게 감소하여, 헤이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가장 하류의 물 부족을 불러오고 호양 숲의 고사, 농지의 황폐 및 방기, 사막화 등의 환경문제가 나타났다(Jiang 외. 2005). 그리고 헤이허와 마찬가지로 타림강 하류 지역의 환경문제는 중국 정부의 중점 정책의 하나가 되어, 환경의 회복을 도모하게 되었다(陳·中尾 2009). 


아랄해, 헤이허, 그리고 타림강에서 저마다의 상황은 다소 다르지만, 농업 개발에 의한 물의 과잉 이용과 그 결과로서 물 부족이 일어났다. 이것은 중앙 유라시아에 공통된 현대의 환경문제이다.





물과 인간의 관계사에서 보여주는 것


건조·반건조 지역의 생태환경은 미묘한 균형을 이루며 성립해 있다. 종래 사람들은 생태환경에 대한 부하를 이동이라 하는 수단으로 경감하는 유목이란 생업형태로 그 위약한 생태환경과의 공존을 수행해 왔다. 최근 인간활동의 증대에 의하여 그 관계는 크게 변모하여, 다양한 환경문제가 발생했다. 게다가 헤이허의 사례에서 보면 환경문제에 대한 대책(정책)은 말단 호수가 부활하고 하류 지역에서의 식생이 회복하는 등 효과를 올리고 있는 부분도 있지만, 한편으로 중류 지역에서의 지하수 저하 같이 새로운 문제를 발생시켜, 말하자면 부하의 악순환에 빠져 버린 상황도 출현했다.


물이란 자원에 제약된 건조·반건조 지역에서 물과 인간의 관계가 변천하는 걸 보여주면, 기후변화로 발생하는 물 부족에 대해서도, 인구증가 등 농지 개발의 필요성이 발생한 경우에도, 인류는 관개수로의 개설, 지하수 개발,또는 절수 같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여 그때마다 대응하여 위기에 적응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물 부족의 결과로 오아시스를 방기하고 다른 장소로 이주하는 일도 새로운 적지를 찾아 개발한다는, 적응의 한 형태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적응의 역사는 오아시스의 방기도 포함하여 기본적으로는 인간 활동을 확대하여 가는 것이 전제였다. 그러나 현재의 지구환경문제에서 보여주는 건, 지구라는 체계의 안에는 새로운 개발의 여지가 계속 사라져 가고 있다는 것이라 생각한다. 앞으로 지구환경문제에 대한 적응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발상이 필요해지는 것이 아닐까? 그 의미에서 과거의 인간과 환경의 관계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일이 지금이야말로 요구된다. 중앙 유라시아의 농경과 풍토의 역사적 변천은 무엇보다도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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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3





기고2

인더스 문명 지역의 농경사     -우에스기 아키노리上杉彰紀






인더스 문명 개관


인더스 문명이란 기원전 2600-기원전 1800년 무렵에 걸쳐서  인도 아대륙 북서부에 넓게 전개한 문명사회이다.모헨조다로 유적과 하라파 유적이 대표적인 도시 유적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외에도 크고 작은 여러 유적이 발견, 발굴되어 인더스 문명사회는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광대한 지역에 펼쳐져 있으며, 그리고 필연적으로 사회, 문화적으로 다양성을 내포하고 있었단 점이 계속 밝혀지고 있다. 


세계 4대 문명의 하나라고 가르치는 인더스 문명은 다른 문명과 마찬가지로 도시와 문자를 가지고 있다. 도시의 존재는 인더스 문명사회가 도시를 거점으로 사회, 문화적으로 통합된 사회인 것을 보여주고, 문자의 존재는 공통의 의사소통 체계의 존재를 시사하고 있다. 이외에도 문명사회 각지에 편재하는 자원을 이용, 가공하여 광범위한 유통을 가능하게 하는 문명권 내의 네트워크가 고도로 발달해 있었다는 점도 알고 있다.


게다가 인더스 문명도 포함한 기원전 3000년대의 서남아시아 문명 세계를 생각할 때 중요한 것이 인더스 문명과서방의 메소포타미아 문명 또는 이란 문명과의 교류관계이다. 메소포타미아의 설형문자 문서에는 인더스 문명을 가리킨다고 추정되는 멜루하Meluhha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또한 메소포타미아의 유적에서도 인더스 문명 특유의 인장이 출토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란 고원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고고학적 증거도 있다.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은 인더스 지역의 각지에 문명 시기 이전부터 저마다 자연환경에 적응한 사회, 문화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 지역사회, 문화가 네트워크에 의하여 연결되어 있었다. 문명 시기 이전의 지역사회, 문화군은 농경, 목축을 생업기반으로 하며, 인더스 문명 시기로 계승되는 기술전통을 키워 왔다. 


인더스 지역 내부에서 축적되어 있던 생활기술의 전통과 네트워크에 의하여 유입해 온 새로운 정보, 기술이 혼재했던 것이 인더스 문명사회이다. 따라서 인더스 문명사회를 이해하고자 할 때, 시간축과 공간축을 서로 횡단시켜야 한다. 이것은 인더스 지역의 농경사를 고려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다양한 자연환경


앞에서 기술했듯이, 인더스 문명은 광대한 지역이 교류 네트워크에 의하여 연결됨으로써 성립했는데, 그곳에는 다양한 자연환경이 포섭되어 있다. 


인더스강 유역은 사방으로 뻗어 가는 건조지대의 동쪽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거꾸로 말하면 동쪽에서 뻗어 오는 습윤지대의 서쪽 가장자리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인도의 수도 델리 부근을 1000mm 안팎의 연간강수량의 경계로 하여, 서쪽으로 갈수록 강수량은 감소해 간다. 그것은 당연히 식생의 차이로도 나타나 동쪽은 녹색이 풍부한 숲이 펼쳐지고, 서쪽으로 향하면 모래언덕을 포함한 떨기나무가 군데군데 있는 경관이 일반적이 된다.



그림1 인더스 문명 시기의 대표적인 유적과 강수량의 분포




또 하나 주목되는 건, 다양한 지형 환경의 존재이다. 문명사회를 말할 때 높은 농업생산력을 수용하는 충적평야, 곧 큰강의 존재를 강조하는 것이 통설인데, 실제로는 충적평야의 주변에 펼쳐진 고원지대와 산간지대도 문명사회의 안에 짜 넣어 있다.


충적평야와 고원, 산간지대의 관계는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란 점에서 상호보완적이며, 어느 것 하나를 빠뜨리면문명사회는 성립할 수 없다. 인더스 문명사회란 그러한 다양한 자원을 수용하는 여러 가지 자연, 지형 환경에 의하여 성립한 것이다.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또는 라키가리Rakhigarhi 같은 인더스 문명을 대표하는 도시 유적은 모두 평원부에 위치하고있기에 평원부가 문명사회의 중심적 열할을 수행했다는 것은 확실하겠지만, 크고 작은 여러 읍과 마을을 연결하여 펼쳐지는 네트워크 없이는 도시가 존재할 수 없다는 걸 고려하면, 일률적으로 평원부의 중요성만을 강조해 보아도 문명사회의 구조를 잘못 보게 될 것이다.


강수량, 지형의 다양성은 당연히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자연환경이 생활양식의 짜임새를 형성하며, 다양한 자연환경은 생활양식, 즉 문화의 다양성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현재의 남아시아 세계에서 보면, 사람들의 생활양식에서 중요한 건 동과 서 사이에 나타나는 주식의 차이이다. 델리보다도 서쪽의 건조도가 강해지는 지역에서는 필연적으로 밀이 주력 작물이며 주식으로 삼는다. 거꾸로 동쪽의 강수량이 많은 지역에서는 쌀에 대한 의존률이 높아진다.


현지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델리의 서쪽에 펼쳐진 하리아나주에서는 쌀보다도 밀로 만든 로티라고 부르는 빵 모양의 먹을거리 쪽을 좋아한다고 한다. 한편, 동쪽의 우타르 프라데시주에서는 로티도 먹지만 쌀을 먹지 않으면 식사를 하지 않은 것 같다고 한다. 우리 일본인과 공통되어서 흥미로운 말이다.


그림2 밀로 만든 로티




또한 주거 건축에서 보면, 목재 자원이 부족한 평원부에서는 벽돌을 쌓는 건축이, 목재와 점토가 부족한 고원부에서는 돌을 쌓는 건축이, 또 산간부의 목재 자원이 풍부한 곳에서는 목조 건축을 한다.


이와 같은 자연환경의 차이에 의하여 형성된 생활양식, 문화의 차이를 들자면 셀 수 없지만, 남아시아 세계가 얼마나 자연환경 및 문화란 점에서 다양성으로 채색되어 있는지, 그것은 남아시아의 역사를 고려할 때 중요한 관점이다.




남아시아의 재배식물


앞에 델리를 경계로 하여 서쪽은 밀을, 동쪽은 쌀을 먹는 비중이 높아진다는 걸 기술했다. 현대의 남아시아에서는 이 두 작물이 주식이 되고 있지만, 이외에도 다양한 식용 식물이 재배되어 온 역사가 있다. 특히 콩류와 조(잡곡)은 밀과 쌀을 보완하거나, 또는 그들을 대신해 주식이 되어 왔다.


남아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여름과 겨울의 두 계절에 다른 식용 식물이 재배되고 있다. 여름작물을 카리후라 하고, 쌀과 조가 포함된다. 이들은 7-8월을 중심으로 하는 계절풍이 불러오는 강우를 이용하여 재배된다. 한편, 겨울의 건기에는 밀, 보리, 각종 콩류가 재배된다. 이들 겨울작물을 라비라고 부른다. 라비의 생육은 겨울의 한정된강우에 의존한다. 이 여름과 겨울의 이모작이 남아시아의 농경을 특징짓는다고 말해도 좋다. 



그림3 우타르 프라데시주의 모내기 풍경




농촌 지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은 이들 곡물의 경작을 바탕으로 구성되어 있다. 계절의 변화가 논의 쟁기질, 파종과 모내기, 수확과 연동되고, 계절의 변화에 대응하여 여러 제례가 생활 속에 반영되어 있다. 또한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계절이 바뀌는 때는 중요하여, 도시와 농촌의 차이에 상관없이 공통된 제례가 발달해있다. 정말로 계절의 변화가 남아시아 문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런데 이들 재배식물의 배경에는 여러 가지 역사가 숨어 있다. 서아시아 방면에서 남아시아로 이입된 것, 아프리카 방면에서 전파된 것, 남아시아 북동부의 동쪽에서 퍼진 것, 또한 남아시아 각지에 원생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역사적 경위의 바탕에서 재배식물의 이동과 치환이 축적되어 오늘날의 남아시아 농경의 전통과 문화적 경관을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인더스 지역에서 농경의 역사적 전개


이 절에서는 위와 같은 남아시아의 환경과 역사의 특성을 근거로 하여, 인더스 문명이 전개된 지역에서 농경의 역사적 전개에 대하여 개관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연구의 현상은 인더스 지역의 농경사를 복원하기에는 아직 먼 상황이다. 남아시아에서도 1940년대부터 유적에서 출토된 탄화 식물의 동정이 행해지고 있지만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종과 속의 동정에 그쳐, 각각의 식물이 유적 안에서 어떻게 이용되며 지역의 경관을 형성했는지 평가하는 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식물고고학은 단순히 출토 식물 유존체의 동정만이 아니라, 유적 또는 지역이란 공간 안에서 어떤 식물이 분포했는지, 그것이 인류에 의하여 어떻게 이용되었는지, 정성적이고 정량적으로 분석하는 학문 분야이다. 유적에서는 다양한 현태로 식물 유존체가 채집되는데, 그 출토 상황은 저장용 토기와 조리에 사용된 화로 흔적 또는 폐기된 시설 같은 사람들의 여러 생활행위와 관계되어 있다. 당연히 그 상황에 따라서 출토되는 식물 유존체의 종류와 조합, 유존의 정도 및 상태는 달라진다. 그러한 특정 상황에서 얻은 유존체의 분석 자료를 겹겹이 쌓고, 생활 공간(유적과 지역) 안에서 출토되는 다른 생활 흔적과 관련짓는 것으로 식물 이용 또는 식량 소비의 동태를 복원하는 것이 식물고고학의 최대 목적이다.


몇 곳의 유적에서는 식물 유존체의 상세한 분석 결과가 축적되어 있으며, 국지적으로 식물 이용의 역사적 전개를추측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인더스 지역 전체에서 이루어진 식물 이용의 동향을 복원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이와 같은 전제를 근거로 하면서 인더스 지역의 농경사를 개관하고, 앞으로 기대되는 연구의 방향성에 대하여 언뜻 살펴보겠다.





(1) 서아시아에서 이입된 재배 식물

인더스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농경에 의한 식물 이용의 증거가 발견되는 건 파키스탄 서부에 펼쳐진 발루치스탄 고원이다. 특히 그 동쪽 가장자리 부분, 곧 고원부에서 인더스강이 형성하는 충적평야로 변천하는 곳에 위치하는메르가Mehrgarh 유적이 중요하다.


이 유적에서는 기원전 6500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문화층에서 보리, 밀이 발견되고 있다. 그와 함께 염소, 양을 주체로 하는 가축 동물을 수반하여, 서아시아 형의 농경과 목축이 경영되었던 걸 말해주고 있다. 


이들 맥류는 콩류와 조합되어 겨울의 강우를 바탕으로 재배된다. 발로치스탄 고원에서 인더스 평원에 걸쳐 있는 지역은 건조지대에 해당하지만, 겨울에 비교적 한번에 내리는 강우가 있어 그것이 라비, 즉 겨울작물의 재배를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겨울작물은 대략 4000년을 지난 인더스 문명의 시대에도 발로치스탄 고원부터 인더스 평원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을 지탱했다. 하라파 유적에서는 기원전 3500년 무렵의 거주 개시 이후, 기원전 2000년 무렵까지밀과 보리를 주체로 하는 식물 유존체가 발견되고 있다. 현재도 파키스탄 서쪽의 건조지역에서는 밀을 주로 하는곡물의 재배, 이용이 눈에 띄는데, 그것은 이 지역의 기후환경 안에서 역사적으로 계승되어 온 식량 생산의 기술 전통인 것이다.




(2) 여름작물의 확산

그 한쪽에서, 하라파 유적에서는 카리후, 즉 여름작물도 확인되고 있다. 쌀과 조가 그것이다. 그들은 수량적으로는 결코 많지 않고, 맥류 주체의 식량을 매우 일부 보완하는 정도이다. 그러나 겨울작물만이 아니라 여름작물도 재배, 이용하고 있었단 것은 다양한 작물을 다각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식량 공급을 안정시키려고 고안했다고 생각한다(Weber 1999, 2003). 거대한 인구를 수용하는 도시를 지탱하기 위하여 식량 생산의 다각화가 행해졌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름작물의 생육은 그 이름이 보여주는 대로, 여름의 남서 계절풍이 불러오는 집중적인 강우에 의거하고 있다. 풍부한 물이 필요하여, 건조지역에서는 국지적으로 풍부한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을 제외하고는 재배가 곤란하다.앞에 기술했듯이 델리부터 동쪽으로 이동하면 강수량이 증가하는데, 이 지역이 쌀을 먹는 걸 지향하는 지역인 것은 그러한 기후조건이 배경이 되고 있다.


남아시아의 쌀의 기원에 대해서는 동아시아만큼 활발하게 의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남아시아 북동부의 아삼 지방이 벼농사의 기원 후보지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도 했지만, 남아시아의 쌀 기원과 전개를 검토할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부족함 점이 그 이유이다.


그런데 최근 인도 북부에 펼쳐진 우타르 프라데시주의 중앙부에 위치하는 라후라데와 유적에서 기원전 6500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을 가진 쌀의 유존체가 발견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Tewari 외. 2003). 최종보고서는 현재 준비단계라고 들었는데, 출토된 쌀이 재배종인지 야생종인지 하는 판단을 차치하고라도, 인더스 지역 동쪽의 강가 평원에서 있었던 식물 이용의 역사가 새로이 칠해진다는 건 확실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강가 평원에서 기원전 6500년 무렵에는 벌써 벼농사의 역사가 전개되고 있었다고 한다면 인더스 문명 시기의 식물 이용의 이해에도 큰 변경이 뒤따르게 될 것이다.


무릇 인더스 지역에서는 지금까지 인더스 문명의 종말에 가까운 무렵, 즉 기원전 2000년 무렵의 유적에서 쌀이 발견된다고 보고되고 있었다. 발로치스탄 고원 동쪽 가장자리 부근의 유적에서도 보고 사례가 있기 때문에, 막연히 동쪽에서 쌀이 반입 또는 벼농사가 이입되었다고 추정되었지만, 강가 평원에서 행하던 벼농사의 역사가 밝혀진다면 인더스 문명 사회와 강가 평원의 관계라는 새로운 연구 주제가 떠오르게 된다.


인더스 지역 북동부, 가가르Ghaggar 평원에 위치하는 쿠날Kunal 유적에서는 인더스 문명 직전의 시기부터 쌀의 유존체가 보고되고 있다(Saraswat and Pokharia 2003). 이 동정에 의문을 나타내는 연구자도 있지만, 강가 평원에 인접한 가가르 평원에서 다른 지역보다도 일찍부터 쌀이 이용되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는 없다. 앞으로 조사에 의하여 인더스 문명 동쪽 가장자리 또는 동쪽의 자료가 축적된다면, 문명기에 있었던 식량 이용의 다양성과 재배 식물의 전파에 대한 짜임새가 밝혀지게 될 것이다.




(3) 조의 도입


쌀에 아울러 중요한 여름작물이 조이다. 조는 전반적으로 건조함에 강하고, 맥류와 쌀에 비하여 적은 물로 생육할 수 있다. 인더스 지역에서는 향모, 수수, 진주조 등이 대표적인 조로서 확인되고 있는데, 서인도의 사우라슈트라Saurashtra 반도 중앙부에 위치한 로지디 유적에서는 출토된 식물 유존체의 대부분을 조가 점하고 있었다(Weber1991, 1999). 이것은 조가 단순히 맥류와 쌀의 보완작물로서만이 아니라 주력 작물로서 재배된 지역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가가르 평원에서는 지금은 무수한 관개수로에 의하여 히말라야 산맥에서 기원하는 풍부한 물이 널리 퍼져 관대한맥류의 밭이 전개되어 있지만, 현지의 사람들 이야기에 따르면 50년 전만 해도 진주조가 주요한 작물임과 함께 식량이었다고 한다. 로지디 유적의 출토 자료와 함께, 인더스 문명의 시대에도 조가 주식이었던 지역이 적지 않게 존재하고 있었단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림4 진주조로 만든 로티




조에 관련되어 하나 더 주목되는 건 진주조, 수수, 향모 같은 품종은 남아시아에서 야생종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수의 재배화 기원은 아프리카 대륙 동부에서 찾고 있으며(Zohary and Hopf 2000), 인더스 문명 시기에 수수의 존재는 문명기에 아프리카 대륙에서 이입된 것일 가능성을 강하게 보여준다. 사실, 인더스 문명 시기에는 아라비아 반도와 교류했음이 다른 고고자료에 의하여 밝혀져 있어, 수수가 아프리카 동부에서 아라비아 반도를 경유하여 남아시아에 가져왔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명사회의 교류 네트워크와 재배 식물


인더스 문명이 만개한 기원전 3000년대는 이집트부터 인더스까지, 중앙아시아부터 아라비아 반도까지를 포함한넓은 의미에서 서남아시아 세계의 각지에 문명사회가 탄생한 시대이다. 세계 4대문명 가운데 3곳이 서남아시아 세계에 포함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서남아시아 각지가 사람의 이동과 접촉을 수반한 교류 네트워크에 의하여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임이 틀림없다. 


앞에 기술했듯이 발로치스탄 고원 동쪽 가장자리의 메르가르 유적에서는 기원전 6500년 무렵에 서아시아 식의 농경이 존재했음이 확인되고 있는데,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이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서 교류 네트워크가 존재했음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맹아 상태였을지도 모르지만, 그뒤 역사적 전개를 펴서 읽으면 서남아시아 각지를 연결하는 교류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그를 통해 문명사회가 탄생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여러 정보와 각지에 편재하는 희소 자원이 교류 네크워크에 실려 왕래하고 있었는데, 재배 식물도 또 그러한 네트워크를 통해 이동해 온 것이다. 인더스 지역은 서아시아의 맥류 농사, 강가 평원 동쪽의 벼농사, 아프리카 대륙의 조 재배가 교차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들이 조합되어 농경의 체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인더스 지역 전체에서 등질적인 농경 체계가 존재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서두에서 기술했듯이, 다양한 자연환경에 의하여 채색된 남아시아에서는 특정의 식량 자원만으로는 인류의 생활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한정된 지역 안에서도 미시적 지형과 기후 환경에 따라서 식량 자원은 다양화되며, 거시적으로 인더스 지역 전체를 파악하더라도 등질성, 균질성보다 오히려 다양성, 혼재성이 인더스 지역의 특질로 부각될 것이다.


이 다양성은 인더스 문명사회만이 아니라 남아시아 역사의 토대가 되고 있다. 다양한 사회, 문화가 그때그때의 역사적 배경에 의하여 하나의 사회 체계에 통합되어, 새로운 지역의 역사를 만들어내며 나아간다. 그들이 시간축에 퇴적하여 중층화된 결과, 남아시아의 역사로서 우리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남아시아의 역사를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전체를 내다보면, 때로는 얼핏 관계없어 보이는 것이 혼재되어 번잡하고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있지만, 대체적 판국을 위에서 내려다보면 무수한 역사적 사상이 시간축과 공간축 위에서 서로 뒤얽히면서 전체가 구성되어 있는 것을 깨닫는다.


인더스 문명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선사시대 이래 다양한 자연환경 안에서 축적되어 왔던 사회의 짜임새와 문화의전통이 기원전 3000년대의 서남아시아 세계를 배경으로 하나의 문명사회 체계로서 통합된 결과, 우리가 인더스 문명이라 부르는 역사적 산물이 태어났던 것이다.


인더스 지역의 농경사도 또한 그러한 중층화된 지역의 역사성과 문화전통에 의하여 연결되어 있다. 인더스 지역에서 주력 작물로서 사람들의 생활을 지탱한 맥류, 동쪽 지역에서 가져온 쌀, 멀리 아프리카 대륙에서 일부러 들여온 품종을 포함한 조. 본래 그 재배화의 기원은 인더스 지역에 없었지만 그들을 지역의 농경 체계 안에 짜 넣어 남아시아의 농경 전통이 형성되었단 것은 올바르게 평가되어야 한다.


도대체 국경이 없던 시대에 사람들의 이동을 방해한 장벽은 현대사회 같은 모양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각 시대의역사적 배경과 그 중층성의 바탕에 형성된 문화 전통이 여러 요소로 구성한 역사성은 남아시아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라 해도 결과는 다르더라도 그 과정은 근본 부분에서 서로 공통성을 가지고 있다.


농경의 역사는 단적으로 말해서 인류의 역사이다. 인더스 지역의 농경사를 묘사하려면 앞으로 한층 더 연구가 추진되어야 하지만, 그 연구를 통해서 인더스 지역이 가진 자연과 인류 사회·문화의 다양성이 창출하는 역사의 역동성을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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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3




기고1

메소포타미아의 종교와 농경    -와타나베 치카코 渡千香子





우르크의 항아리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 직후에 발생한 바그다드 박물관 약탈로 '우르크(와르카)의 항아리'(그림1)라고 부르는 익숙했던 작품이 사라졌다. 이 단지는 기원전 4000년대 후반에 설화석고로 만들어진 단지로서,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예술작품이라 간주된다. 바그다드 박물관에서는 몇 개의 파편으로 발굴된 것을 정성껏 수복하여 전시 상자 안에 가느다란 실을 펴서 지탱하게 하여 전시했다. 파손을 우려하여 굳이 소개하지 않고 전시관에 그냥 놔둔 것이었다. 그러나 부시 정권의 미군에 의한 바그다드 침공의 혼란 속에서 폭도들이 박물관을 습격하고, 유리상자는 파괴되어 안에 있던 항아리를 가지고 도망가 버렸다. 이후 사라진 이라크의 문화유산 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으로 다루어져, 이라크 안팎에서 약탈된 문화재의 반환을 큰소리로 호소했다. 잠시 뒤, 항아리는 산산조각난 상태로 박물관에 반환되었다. 원래 부분적으로 결손되어 파손되기 쉬운 상태였던 항아리가 약탈의 혼란으로 뒤섞인 데다가, 돌아온 파편도 단편적일 수밖에 없었다. 파손에 의하여 영원히 사라져 버린 부분도 많다고 생각하는데, 현재 이탈리아가 협력하여 그 수복이 진행되고 있다.


그림1 우르크의 항아리. 기원전 4000년대 후반 우르크 출토. 설화석고로 만든 높이 92cm. 이라크 박물관 수장(Strommenger 1964: plate 19에서 찍음)




'우르크의 단지'는 초기 메소포타미아의 농업과 종교를 고려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높이 약 1미터의 항아리는 입구 가장자리 부분부터 몸통 중앙부에 걸쳐서 약간 잘록하게 굽어 있고, 하반부의 몸통 부분은 폭이 좁아지는 원통형을 보이며, 그 아래에 원뿔대의 바닥 부분을 지닌다. 고대 그리스의 원기둥에 사용된 배흘림의 부풂과 정확히 반대방향으로 굽어서, 이 약간의 잘록함이 항아리 전체에 섬세하고 빼어난 아름다움을 부여한다. 정교하고 치밀한 돋을새김이 장식된 길쭉한 몸통과 그것을 지탱하는 바닥 부분의 대가 이루는 구성은 절묘하며, 그시대 권력자가 특별한 기회에 이용한 용기로서 당시의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작품이라 생각한다.


돋을새김은 크게 위아래 3단으로 나뉘고, 가장 위에는 수확물인 공물을 받는 여신(또는 여신의 대리를 종사하는 여사제)가 묘사되고, 그 앞에는 여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나체의 종자가 있다. 이 종자의 뒤쪽에 봉납주인 왕의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고 생각되는데, 안타깝게도 이 부분은 발굴할 때부터 결손되어 있다. 왕의 뒤쪽에는 주인의 의장 일부로 보이는 큰 술 장식을 손에 든 시종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공물을 받아든 여성이 우르크의 주신 이난나 여신을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면, 메소포타미아에서 신을 도상으로 표현한 가장 오래된 작품이 된다. 여신의뒤쪽에는 이난나 여신의 상징이라 하는 '기드림'이 2개 서 있고, 그 배후에는 암컷 염소의 위에 설치된 대좌에 '기드림'과 여신관 2명이 묘사되어 있다. 그에 이어서 봉납된 공물이 늘어서 표현되어 있다. 


돋을새김의 중간 단에는 나체의 남성들이 공물이 든 바구니를 받쳐 들고서 행진하는 모습이 표현된다. 가장 아랫단은 다시 상하 두 층으로 나뉘어 윗단에는 2종류의 가축의 행렬이 묘사되고, 아랫단에는 2종류의 식물이 엇갈리게 심어져 있으며, 가장 아랫단에는 2개의 물결선으로 물이 흐르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가축의 행렬에 묘사된동물의 한쪽은 정수리 부분에서 좌우로 자라는 큰 뿔(아래쪽으로 굽음)과 긴 턱수염을 가지며, 수컷 염소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수컷 양일 가능성도 있다. 다른쪽은 둥그스름한 느낌을 띠는 체형으로 뿔도 턱수염도 수반하지 않는다. 이쪽은 아마 양(암컷 양)을 묘사한 듯하다. 염소와 양은 아카드어 문헌에서도 항상 '작은 동물들'이라 통합하여 표현되며, 이들 2종류의 동물은 가축으로 함께 사육되었다고 생각한다.


아랫단에 묘사된 식물의 한쪽은 수직으로 자라는 줄기에서 좌우로 잎이 펼쳐지고, 줄기의 맨끝에는 이삭이 형성되어 그곳에서 위쪽으로 자라는 5-6개의 까락을 묘사한다. 도상으로서 상당히 추상화되어 있지만, 이 식물은 맥류를 묘사한 것이라 해석된다. 다른 한쪽의 식물은 수직으로 자란 줄기가 꼭대기 부분에서 셋으로 나뉘고, 포크 같은 형상을 나타낸다. 줄기와 가지의 각각 세 개씩을 다발처럼 표현하고, 바깥쪽 부분은 촘촘한 잎 같은 것을 표현한 것처럼도 보인다. 오랫동안 이 식물이 무엇을 묘사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크로포드는 이것을 아마亞麻를 양식화한 것이라고 해석했다(Crawford 1985).


이들 가축과 식물은 수메르의 대표적인 산업을 보여주는 것이다. 양털로 만드는 모직물은 수메르의 대표적인 교역품이고, 양과 염소는 일상의 유제품과 식용 고기의 공급원이었다. 맥류의 품종 중에서는 보리의 생산이 어느 시대에나 압도적으로 많았던 점이 문헌과 고고조사에서 밝혀지고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주식인 빵과 맥주의 제조에 빼놓을 수 없는 존재였던 것만이 아니라, 가축의 사료로도 사용되었다. 아마에 대해서는 줄기를 길게 강조해 묘사하고 있는 바로부터, 아마유가 아니라 줄기에서 얻는 섬유를 이용할 목적으로 재배했다고 생각한다. 여름의 기온이 50도 가까이 오른다는 이라크 남부에서는 린넨 의복은 필수품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우르크의 항아리'는 수메르인들의 일상에 빠질 수 없는 대표적인 농업생산물과 목축을 밝히면서, 농경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사명이며 그 수확은 일차적으로 신에게 바쳐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단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메소포타미아 신화에서 인간은 신들을 대신하여 농경과 운하의 유지 등의 중노동을 담당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고 이야기하는 세계관에 연결되어 있다.



맥류와 소의 모티브


'우르크의 항아리'와 비슷한 무렵, 정확히 도시문화가 형성되어 가고 있던 시기의 메소포타미아에서 '농경'을 강하게 의식한 도상 모티브가 등장한다. 이라크 남부의 유적 우르에서 출토된 동석(Steatite)으로 만든 주발에는 '소'와 '맥류의 이삭'이란 모트브가 반복하여 돋을새김으로 표현된다(그림2). 소의 몸통은 측면에서 보는 모습으로 파악되고, 머리 부분은 거의 정면에서 보는 것에 가깝게 묘사되어 있다. 소의 머리 뒤쪽부터 등에 걸쳐서 거대한 맥류의 이삭이 크게 휘듯이 묘사되어 있다. 이삭은 4줄로 나뉘어 있고, 그 각각에 5-6개의 알곡이 묘사되며, 그 끝에는 각각 2개씩 합께 8개의 긴 까락이 자라 있다. 이 이삭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이라 가정하여 도상에는 보이지 않는 이면에 또 2줄의 알곡이 있다고 상정한다면, 이것은 6줄 맥류를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고대의 도상 표현에서는 사물을 반드시 보이는 대로 묘사하지는 않기 때문에, 알곡이 모두 4줄이라고 이해한 묘사일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소'와 '맥류의 이삭' 같은 모티브는 기원전 4000년대 후반의비슷한 무렵에 제작된 원통 인장의 무늬에도 등장한다(그림3). 측면에서 본 것으로 묘사된 소의 발굽 앞쪽에서 맥류의 줄기가 길게 자라고, 그 이삭은 높게 소의 등 상부까지 자라 있다. 알곡은 합계 7개, 엇갈리게 2줄로 배열하고 각각의 알곡에서 까락이 자라 있다. 어느 쪽의 도상에서도 소의 크기에 비하여 맥류가 현실보다 꽤 크게 묘사되어 있는데, 이것은 이 도상에 표현된 맥류의 존재가 소에 뒤떨어지지 않고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일 것이다. 메소포타미아의 농업에서는 거세된 수소 외에 당나귀도 농작업에 부려서, 그들은 밭을 쟁기질이나 써레질하거나, 또 파종할 때에 활약했다(Heimpel 1995).


그림2 동석으로 만든 주발(소와 맥류의 모티브). 기원전 4000년대 후반. 우르 출토. 동석으로 만든 높이 5.5cm. 이라크 박물관 수장(Strommenger 1964: plate 28에서 찍음)



그림3 원통 인장의 인발(소와 맥류의 모티브). 기원전 4000년대 후반. 출토지 불명. 돌로 만든 높이 3.8cm. 루브르 미술관 수장(Strommernger 1964: plate 16, 셋째 줄 오른쪽에서 찍음)




문헌에 언급된 곡물


고대의 경제생활과 물질문화의 기본적 '사전'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어휘집 HAR-ra=hubullu의 곡물 부문은 콩류(gu)에 이어서 엠머밀, 밀, 보리로 분류되어 있다. HAR-ra=hubullu는 종의 목록은 아니지만, 재배되고 있던 대부분의 종을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SE는 보통 보리를 의미하지만, 더욱 일반적인 '곡류(grain)'나 영어의 corn(곡물)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수메르의 초기 왕조시대 이후 메소포타미아의 문헌에 언급된 주요한 곡물은 보리(se), 엠머밀(ziz), 밀(GIG) 세 종류이다. 그중에서도 보리가 언급된 빈도가 압도적으로 많고, 이어서 엠머밀, 가장 적은 것이 밀이다. 이 빈도는매우 초기의 파라(고대 이름 슈르팍Shuruppak)이나 아브 짜라비크アブ・ツァラビク에서 출토된 문서의 시기(대략 기원전 3000년대 중반 무렵)부터 변하지 않는다. 보리, 엠머밀, 밀은 가을의 거의 비슷한 무렵에 심는다. 그외에 비주류인 곡물 5종류가 언급되는데, 그것이 무엇인지는 특정되지 않는다. 기원전 3000년대에는 1종 내지 그 이상의 잡곡이 재배되었을지도 모르지만, 이것도 종을 특정하지는 않는다. 문헌에서 보는 한, 보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으뜸인' 곡물이었다고 할 수 있다(Powell 1984). 


보리(se/SE.BAR/uttetu)는 어느 시대에나 가장 많이 언급되는 곡물로서, 나머지 일반적인 곡물보다도 가격이 싸고, 가축의 먹이로도 사용되었다. 내염성이 뛰어난 것만이 아니라 건조함에도 강하기에, 이라크 남부의 기후 조건에 적응한 작물이었다는 건 의심할 수 없다.


엠머밀은 '가공되어 있지 않은'(탈곡하여 세정된 잔이삭) 상태로 있다면 보리와 거의 비슷한 정도의 가격으로, 그것은 밀 가격의 약 반값이었다. 엠머밀이 가축의 먹이로 사용되었단 증거는 없다. '기본적인 가공을 행한 상태'의 엠머밀(ziz-an)은 낟알이 왕겨에서 분리된 속껍질이 있는 엠머밀로서 맥주의 양조에 사용되는 외에, 다른 식용 목적으로 쓰였다. 그로츠라고 부르는 맷돌질(mun-du)을 한 엠머밀은 초기 왕조시대에 신들의 아침밥으로 봉납되었다. 그로츠란 가루와 낟알 사이의 단계로서, 알곡이 바수어지고, 찧어 바수고, 맷돌질한 상태가 된 것을 가리킨다(Postgate 1984b). 우르 제3왕조 시대와 옛 바빌로니아 시대의 봉납물인 그로츠에도 아마 속껍질이 있는 엠머밀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엠머밀은 '달달한 맥주'에도, 또 달지 않은 맥주에도 사용되었다. 달달한 맥주는 대추야자의 열매에 의하여 단맛이 더해졌다. 가공된 상태의 엠머밀은 bututtu라고 부르며, 정확히 독일어로 Grünkern이라 부르고 있는 스펠트밀의 푸른 낟알에 상당한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엠머밀을 분쇄하여 가공한 bututtu를 스프로 먹었다.


엠머은 밝은 흰색부터 짙은색을 나타내는 것까지 있는데, 메소포타미아의 엠머밀은 색에 따라 3종류로 나뉘었다.'흰 엠머(ziz babbar)'와 '구니다 엠머(ziz gu-nida)'은 매우 일반적인 종이고, 맷돌로 갈아도 거의 똑같으며, 모두 똑같은 시기에 똑같은 밭에 심을 수 있었다. 둘은 파라 문서에서도 가까운 관계이며, 구니다 엠머는 '자연탈곡 엠머'라고 오역되는 일이 있다. 한편 '적갈색 엠머'는 매우 드물게 언급된다.


통상 '밀'이라 번역되는 곡물은 탈곡을 필요로 하지 않는 유형의 밀을 의미한다고 생각되는데, 언급되는 빈도는 주요한 세 가지의 곡물 가운데 가장 적다. 파라 문서의 시기까지 기록된 문헌에서 보리는 60회 이상, 엠머밀이 15회 언급되는 데 반하여, 밀은 2회밖에 언급되지 않는다. 밀은 수메르어부터 신바빌로니아 시대에 이르기까지 GIG로 표기된다. 그러나 GIG/Kibtu의 언급은 모든 시대에서 몹시 적고, 종의 특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식물 유존체에서 본 곡물


메소포타미아에서 재배되었던 곡물을 고고조사에서 확인된 식물 유존체에서 더듬어 가는 연구가 렌프루에 의하여 정리되어 있다(J. M. Renfrew 1984). 다루고 있는 시대는 기원전 6000-기원전 2000년으로 폭넓고, 그 대부분은 195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 걸쳐서 출판된 헬백H. Helbaek의 일립밀은 그 잔존 사례의 적음으로부터 말하더라도, 메소포타미아에서 별로 성공한 곡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마 이라크 남부의 충적평원과 관개를 통한 재배에 별로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사마라 시기(기원전 7000년대 말-기원전 6000년대 전반), 우바이드 시기(기원전 6000-기원전 5000년대) 등 초기의 유적(자르모, 초가 마미)에서는 야생의 일립밀(Triticum boeoticum)이 발견되고 있다. 재배종인 일립밀(Triticum monococcum L.)은 자르모, 움 다바기야,텔 에스 소완, 초가 마미, 젬데트 나스르, 텔 하르말 등의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엠머밀(Triticum diccocum)은 고대 이라크의 유적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밀이다. 자르모에서는 재배종 엠머밀이 야생종 엠머밀의 잔이삭이나 낟알과 함께 출토되고, 텔 에스 소완에서는 엠머밀이 보리나 일립밀과 함께 출토되고 있다. 이신 라르사 시대(기원전 2004-기원전 1763년 무렵)나 후리 시대(기원전 2000년대)의 엠머밀 사례는 이라크 북동부 쿠르디스탄의 유적 텔 바즈모시안, 바그다드 근교에 위치한 이신 라르사 시대의 유적텔 하르말에서 출토되고 있다. 우르에서는 우바이드 시기에서만 엠머밀이 발견된다. 바그다드 근교의 카파제 하루에 위치한 유적 이쉬차리에서 엠머밀은 이신 라르사 시기의 토기에서 확인되는 곡물의 모양틀 중 10%를 점하고, 옛 바빌로니아 시대(기원전 1894-기원전 1595년 무렵)의 카파제에서는 곡물의 모양틀 가운데 40%가 엠머밀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엠머밀은 초기 메소포타미아의 농민에게 밀의 중요한 작물이었는데, 지역에 따라서는 점점 보리로 대체된다고 생각한다. 우르에서는 우바이드 시기에는 엠머밀, 아마, 보리가 발견되는데, 그 이후는 보리로 대체되고 있다. 보리의 내염성 때문에, 관개에 의한 토양 염화의 영향을 지적하는 견해가 있다. 이신 라르사 시기의 우르에서는 보리만이 재배되고 있었던 데 반하여, 듀칸 계곡의 텔 바즈모시안에서는 양질의 밀이 재배되어, 그것은후리 시대까지 계속된다. 엠머밀은 앗시리아 시대(기워전 1000년대 전반)이 되면 예전만큼 중요한 작물은 아니게 되었다. 


이라크 북서의 야림 테페와 기원전 7000년대 중반 무렵의 중앙 아나톨리아의 엘바바에서는 스펠트밀(Triticum spelta L.)의 잔이삭이 발견되고 있다. 가장 초기의 자연탈곡 밀은 기원전 6000년 무렵의 텔 에스 소완에서 확인된다. 그뒤 초가 마미, 젬테트 나스르, 우르 왕묘 등에서도 발견되었다. 님루드의 샬마네사르 3세 요새터에서 발견된 밀의 대부분은 자연탈곡 빵밀이다. 기원전 3000년대의 유적 텔 타야Tell Taya(이라크 북서)에서는 보리 다음으로 두번째로 일반적인 것이 빵밀이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농업이 시작된 초기의 시대부터 탈곡이 필요 없는 밀이 알려져 있었는데, 더 간단히 가공할 수 있는 종이 아니라 오히려 겉껍질이 붙은 밀(엠머밀, 일립밀)을 계속 재배한 데에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야생 보리(Hordeum spontaneum)에 대해서는 자르모에서 발견된 것이 야생종인 두줄보리에 가깝고, 모두 재배화가 시작되었다는 특징을 나타낸다. 이외의 야생종은 자르모, 움 다바기야, 초가 마미에서만 출토되고 있다. 재배화된 두줄겉보리(Hordeum distichum)에 대해서는 기원전 5000년대의 마타Matarrah(쿠르디스탄 대지)나 초가 마미, 텔 차가에서 발견되고 있다. 텔 에스 소완에서 나온 보리의 대다수는 겉껍질이 붙은 두줄겉보리이다. 


고대 이라크에서 재배된 보리에는 이삭에 여섯줄의 낟알이 달리는 것이 있고(Hordeum vulgare), 그것은 두 가지품종으로 나뉜다. 하나는 겉껍질을 쓴 것으로, 탈곡한 뒤 씨앗과 왕겨가 분리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쌀보리로서, 이것은 초기의 유적에서만 발견되었다. 쌀보리는 움 다바기야, 텔 에스 소완, 초가 마미, 야림 테페에서 발견되었는데, 초가 마미에서는 쌀보리의 양은 시간이 흐르며 감소했다. 한편, 겉껍질을 쓴 여섯줄겉보리는 이라크의 초기 농경에서는 별로 널리 재배되고 있지 않았다. 텔 에스 소완과 초가 마미에서는 여섯줄쌀보리가 압도적으로 많으며, 여섯줄겉보리가 매우 조금 발견되었다. 우르크 시기의 와르카Warka에서는 여섯줄겉보리의 존재가 알려져있다. 우루에서는 왕묘에서 여섯줄겉보리가 발견되고 있다. 겉보리와 쌀보리 유형의 여섯줄보리는 이라크에서 농경이 시작되고 얼마되지 않아 야생종의 두줄보리에서 발달하여, 어느 지역에서는 재배 보리의 주요한 품종이 되었다. 그 한켠에 두줄겉보리도 일반적인 품종으로 남아 있다. 그외에 잡곡으로 드물게 장목수수의 재배가 행해졌지만, 귀리의 재배에 대해서는 증거가 없다.




설형 문서에 나오는 수확량에 관한 문제


수메르 농업의 가장 주목할 만한 달성은 수확량 비율이라 말할 수 있다. 수확량 비율이란 어느 일정한 토지에 심은 종자의 양과 그 토지에서 수확된 곡물의 양 비율을 가리킨다. 마에카와 카즈야前川和也 씨의 논문(Maekawa 1984)에서 의론된 우르 제3왕조 시기의 기르수girsu에서 출토된 문서에서 보리의 수확량 비율은 1대30을 달성하고,엠머밀에 이르서는 더욱 높다. 그 이전의 초기 왕조시대에서는 어느 일정한 구획의 파종량과 수확량을 기록한 문서가 없지만, 마에카와의 설(Maekawa 1974)과 야곱센의 설(Jaconsen 1982)은 함께 1대76이란 매우 높은 수확량 비율이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버츠는 이 해석에 의문을 나타내고, 이만큼의 수확량 비율은 현실에서다른 고대도시와 현대의 수확량에 비추어도 너무 높다고 한다(Butz 1984). 메소포타미아에서 사용된 혁신적인 '파종기'가 이 높은 수확량 비율에 공헌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똑같은 기술을 현대에 적용하더라도 그에 필적할 듯한 수치는 나오기 어려울 것이다(Postgate 1984a). 이 비율을 역사의 사실로 확인하기 위해서 앞으로 더욱 많은 연구와 비교 자료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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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3

 

 

 

제1장

서아시아에서 탄생한 농경 문화       아리무라 마코토有村誠

 

 

 

 

 

서아시아에 있는 농경 문화의 기원

 

인류는 그 탄생부터 수백만 년의 오랜 세월이 지나서 야생의 동식물을 이용하며 생존해 왔다. 그동안 동식물 이용에 관한 다양한 기술혁신과 지식의 누적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초기 단계에서는 민첩하게 움직이는 동물을 잡지는 못하고 죽은 동물의 고기를 찾아다니던 인류는 마침내 동물을 몰아넣는 기술을 깨우치고, 게다가 창과 화살같은 수렵용구를 마련해 뛰어난 수렵민이 되었다. 시행착오의 마지막, 신변에 자생하는 유용식물의 수를 확장하여 다종다양한 식물을 활용하는 지식을 축적해 나아갔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1만 년 전을 경계로, 인류는 농경과 목축에 의하여 자신의 식량을 생산하는 생계로 생활의 기반을 바꾸어 나아갔다. 일찍이 G. 차일드가 '신석기혁명'이라 부르며 그 중요성을 강조했듯이, 이 식량 획득양식의 변화에 의하여 사람들의 생활은 온갖 방면에서 영향을 받았다. 고고학에서는 수렵채집 사회에서 농경목축 사회로 변천한 것을 신석기화(Neolithisation)라고 부르며 그것이 언제, 어떠한 상황에서 진행되어 갔는지에 주목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최초에 신석기화가 시작된 지역이 서아시아이다. 이 장에서는 서아시아에서 일어난 신석기화, 즉 농경 문화의 시초에 대하여 개관하려고 한다.

 

 

 

그림1-1 서아시아의 지도

 

 

 

서아시아는 유라시아 대륙 서부의 중위도 지방에 위치하고, 그 지형은 매우 기복이 많다(그림1-1). 레반트 지방(지중해 연안)에는 아프리카 대륙의 대지구대에 이어진 사해 지구대라고 부르는 깊은 골짜기 지형을 볼 수 있다. 이 지구대를 따라서 레바논 산맥 등의 1000-3000미터급의 산들이 남북으로 이어진다. 북부로 눈을 돌리면 아나톨리아부터 이란에 걸쳐서 3000미터급의 산들을 거느리는 타우로스 산맥과 자그로스 산맥이 우뚝 솟는다. 이들 산맥의 앞은 아나톨리아 고원, 아르메니아 고원, 이란 고원 같은 표고 1000미터 안팎의 고원지대가 펼쳐진다. 아나톨리아 남동부를 수원으로 하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라는 두 개의 큰강이 페르시아만으로 흘러간다. 이 두 큰강에 의하여 형성된 충적평야가 메소포타미아라고 부르는 지역이다. 그리고 서아시아의 내륙부, 아라비아 반도의 대부분에는 광대한 사막이 펼쳐진다.

 

이러한 기복이 많은 지형은 다양한 기후를 만들어낸다. 레반트 지방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가 적은 온난한 지중해성 기후이고, 강우량도 연평균 600밀리미터 안팎에 이른다. 이에 반하여 내륙부는 기온의일교차가 크고, 강우량도 매우 적은 사막 기후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양한 경관이 다채로운 동식물상을 만들어내는 바탕이 되었다. 서아시아에는 사람들이 재배화, 가축화하게 되는 동식물이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이 장에서 다루는 서아시아의 시대 호칭과 배경에 대해서 간단히 서술하겠다(그림1-2, 그림1-3). 여기에서 관련되는 건 고고학의 용어에서 말하는 구석기시대의 말기부터 신석기시대에 걸친 기간으로, 대략 기원전 12000년부터 기원전 6000년 무렵까지의 기간이다. 이것은 지질학에서 말하는 갱신세의 말부터 완신세의 초 무렵에 상당한다.

 

 

그림1-2 서아시아, 레반트 지방의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신석기시대의 편년

 

 

 

 

그림1-3 본문에서 언급한 신석기시대 유적의 위치

 

 

 

구석기시대 말기(기원전 12500-10000년)의 서아시아에는 레반트 지방의 나투프 문화로 대표되는 정주하는 수렵채집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구석기시대 말기의 사람들은 그 이전의 수렵채집민보다도 정주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이해된다. 그것은 이 문화의 고고학적인 증거, 예를 들면 초석을 사용한 견고한 주거, 식량을 저장하는 구덩이, 주거에 비치된 무거운 석기류의 존재 등으로부터 유추된다. 인구의 증가가 있었다고 생각하며, 떡갈나무와피스타치오로 이루어진 레반트 지방의 산림지대에서는 그때까지는 없는 규모(1000평방킬로미터를 넘는다)의 마을이 출현했다.

 

서아시아 고고학에서는 기원전 1만 년 무렵부터 신석기시대라고 부르는 시대가 된다. 차일드는 신석기시대의 특징으로, 재배식물과 가축의 출현, 마을의 출현, 직업의 시작, 간석기의 사용, 토기의 사용 등을 드는데, 서아시아의 신석기 문화는 토기를 가지지 않는 문화로 발생했다. 토기가 보급된 건, 신석기시대가 시작하고 수천 년 지난 대략 기원전 7000년 무렵의 일이다. 일반적으로 서아시아의 신석기시대는 토기의 유무를 기준으로 토기 이전 신석기시대와 토기 신석기시대로 구분된다. 또한 레반트 지방의 토기 이전 신석기시대는 다시 몇 개의 시기로 세분된다. 오래된 순으로, PPNA기, PPNB전기, PPNB중기, PPNB후기 같은 방식이다(그림1-2).

 

그리고 현재는 신석기시대라고 이야기하면 농경과 목축을 기반으로 하여 식량 생산을 시작한 시대라고 하는 정의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부터 언급하듯이, 농경목축이 탄생한 서아시아에서는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곧바로 농경목축에 의존한 사회가 출현한 것은 아니었다. 

 

신석기시대의 유적 대부분은 매우 정주적인 마을로 이루어진다. 그 주거는 흙반죽 또는 햇볕에 말린 벽돌을 사용하여 지었다. 신석기시대도 후반이 되면 광장과 도로, 공동시설 등을 갖춘 마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마을의 시설을 만들 때 동네 구획이 행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대부분의 유적은 구석기시대의 유적보다 훨씬 크다. 그중에서도 3만 평을 넘는 것은 메가 사이트라고 부르고, 후대의 유적과 비교해도 두드러지게 크다. 만약 유적 전체에 마을이 펼쳐지고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메가 사이트는 읍이라 할 만한 규모의 마을이었다고 할 수있다. 이러한 유적 규모의 대형화는 인구 증가와 특정 마을로 인구가 집중되었다는 걸 나타낼 것이다. 이 시대에는 제사와 의례, 공예, 교역 등 사회의 다방면에 걸친 활동에서 그때까지와는 다른 전개가 발견된다. 이들의 고고학 정보에서 신석기시대에 사회의 복잡화가 급격히 진전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재배식물이 나타나다

 

서아시아는 실로 다양한 식물이 재배화된 지역이다. 밀, 보리, 호밀 등의 맥류를 시작으로, 누에콩, 렌즈콩, 병아리콩 등의 콩류, 포도, 올리브, 아몬드 등 우리에게 친근한 채소와 과일이 이 땅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 최초로 재배화된 식물로 맥류와 콩류가 있다.

 

농경의 기원을 찾으려면 물론 유적에서 출토되는 식물 유존체(탄화물이 많음)의 연구가 가장 중요한 정보원이다.이러한 식물 유존체를 대상으로 하는 고고식물학의 연구에 의하여 재배 맥류의 기원지와 맥류 농경의 기원에 대해서 최근 눈부신 성과를 올리고 있다. 재배 맥류의 기원지가 서아시아에 있다는 건 오랫동안 알려져 있었지만, 언제, 어디에서라는 물음에 대하여 최근의 연구는 더욱 상세하게 답하고 있다(丹野 2008).

 

서아시아에서 맥류의 재배화는 언제쯤 시작되었을까? 예전에는 신석기시대의 개시와 함께 농경이 사작되었다고 하여, PPNA기의 유적에서 재배 맥류가 출토된다고 이야기되었다. 그러나 PPNA기의 맥류를 정성껏 조사해 보면, 재배 맥류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게 밝혀졌다. 재배 맥류가 출토되기 시작한 건 신석기시대가 되고 1000년 이상 경과한 기원전 8500년 무렵(PPNB 전기)의 유적에서이다.

 

다음으로 맥류가 재배화된 지역을 살펴보자. 지금까지 행한 연구에서 레반트 지방이 그 유력한 후보지라고 알려져 왔다. 이 지방에서 신석기시대에 재배화된 맥류에는 일립밀, 엠머밀(그림1-4), 보리 등이 있다. 서아시아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된 맥류를 분석한 연구에 의하면, 출토된 맥류의 종류는 지역에 따라서 다른 경향이 있으며, 각각의 종류가 각지에서 재배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Willcox 2005). 즉, 재배 맥류의 기원지는 단일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립밀은 레반트 지방에서도 북부(터키 남동부와 시리아 북부)의 유적에서 많이 출토되는데, 남부(요르단과 팔레스타인)에서 출토된 건 거의 없다. 이것은 이 맥류 본래의 자연분포가 레반트 북부에 있었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일립밀은 터키 남동부에 자생하고 있다(그림1-5). 최근의 DNA 연구에 의해서도 고고학적 자료를 증명하듯이, 일립밀의 기원지는 터키 남동부에 있다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림1-4 시리아 북서부 케르크Kerkh  유적(토기 신석기 시기) 출토의 엠머밀

 

 

 

그림1-5 터키 남동부에 자생하는 야생 일립밀

 

 

 

 

언제, 어디에서 맥류가 재배화되었는지 하는 기원지의 문제와 함께, 어떻게 맥류 농경이 정착되어 갔는지 하는 문제도 중요하다. 단노丹野와 윌콕스는 신석기시대의 다른 시기의 유적을 대상으로 출토된 맥류의 야생형과 재배형의 비율을 검토했다(Tanno and Willcox 2006a). 그에 의하면, 신석기시대의 전반(기원전 8500년 무렵)에 나타난 재배 맥류는 곧바로 야생 맥류를 대신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재배형이 야생형보다 우세해지는 데 3000년이란 긴 시간이 걸렸다는 것이 밝혀졌다. 지금까지 비교적 단기간(수십 년부터 수백 년)에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있던 야생형에서 재배형으로의 치환이 매우 서서히 진행되었다는 견해는 흥미롭다.

 

콩류의 재배화에 대해서는 맥류만큼 분명하지는 않다. 적어도 PPNB전기에는 시리아와 터키에서 이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시리아 북서부에 위치한 케르크 유적에서는 병아리콩과 누에콩이 대량으로 출토되어, 이 종의 콩에 대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례의 하나가 되었다(Tanno and Willcox 2006b). 또한 터키 남동부의 네발리 코리Nevalı Çori 유적에서는 출토된 인골에 포함된 탄소와 질소의 안정동위체를 조사한 바, 질소안정동위대비(δ15N)이 매우 낮고, 렌즈콩 등의 콩류를 상당히 소비했다는 것이 추측되다(Lösch 외. 2006).

 

 

 

 

도구에서 본 농경의 시작
서아시아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는 맥류의 재배와 가공에 관련된 도구(유물)와 설비(유구)가 자주 발견된다. 이와 같은 맥류 농경에 관련된 유물과 유구에서도 맥류 농경의 정착 과정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을 앞에서 기술한 식물 유존체의 연구와 비교함으로써 농경의 시초가 어떠했는지 그 실상에 더욱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맥류 농경에 관련된 도구로는 토지를 갈아엎는 경기용과 수확용 도구 등이 있다. 경기용 도구에 대해서는 우리가그것을 알 법한 유물은 서아시아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것은 드물고, 존재했는지 어떤지 불분명하다. 수확용 도구에는 서아시아의 선사시대의 유적에서 출토되는 낫날이라 불리는 석기가 있다(그림1-6). 이 석기는 벼과 등의 식물을 베는 데 사용하고, 날 부분에 벼과 식물을 자를 때 붙는 규소 성분에 의한 광택을 볼 수 있다. 통상은 목제와 골제의 자루에 하나 내지 여러 개를 장착해 사용했다. 낫날과 자루의 장착에는 비튜멘(천연 아스팔트)과 나뭇진 등이 접착제로 사용되었다. 

그림1-6 서아시아 신석기시대의 낫날.
① 와디 헤메

Wadi 27호 유적 출토(Edwards 1991: Fig. 12에서)

② 할룰라

Halula 유적 출토(Ferran Borrell 씨 제공)

③ 무레이베트

Mureybet 유적 출토의 석회암제 낫의 자루(Anderson-Gefaud 외. 1991: Fig. 6에서)

④ 복제된 플린트로 만든 낫날을 장착한 석회암제 자루(

Anderson-Gefaud 외. 1991: Fig. 6에서)






수확된 맥류 이삭에서 씨앗을 얻을 때는 이삭에서 잔이삭을 분리하는 탈곡과 각각의 잔이삭에서 알곡을 골라내 씨앗을 얻는 매조미 같은 작업이 필요하다. 특히, 서아시아 신석기시대에 이용된 일립밀과 엠머밀 등 옛 유형의 밀은 탈곡이 어려운 성질이라 씨앗을 골라내기까지 탈곡과 매조미라는 작업에 수고를 들여야 한다. 탈곡과 매조미에 사용되었다고 생각되는 도구에 절구가 있다. 절구는 바리 모양의 돌절구와 돌공이의 묶음으로 이루어지고, 공이를 위아래로 움직여서 사용한다(그림1-7-①, 그림1-7-②).

그림1-7 서아시아 신석기시대의 돌절구① ② 나투프

Natuf 문화의 돌절구와 돌공이(BarYosef 1983: Fig. 5에서)

③ ④ 신석기 문화의 갈판과 갈돌(아부 고쉬Abu Ghosh 유적 출토, Khalaily and Marder 2003: Fig. 6. 1.에서)

⑤ ⑥ 신석기 문화의 안장형 갈판(saddle quern)과 갈돌(케르크 유적 출토, Yoshizawa 2003: Fig. 43에서)

 

 

 

그리고 이러한 씨앗을 골라내 결국 먹을 수 있게 되는데, 서아시아의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맥류를먹었는지 증거는 많지 않다. 그러나 서아시아의 역사시대와 현대의 사례에서 생각하면, 아마 신석기시대에 빵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빵 이외의 먹는 법으로 볶은밀이나 죽으로 먹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지만, 서아시아에서는 증거가 없다. 밀을 가루로 내려면 돌절구가 필요하다. 서아시아에서 사용된 돌절구에는 앞에 기술한 절구에 더하여 맷돌도 있었다. 맷돌은 평평한 면을 가진 갈판과 그 위에 얹는 갈돌의 묶음으로 이루어져, 갈돌을 갈판 위에서 전후좌우로 움직여서 사용한다(그림1-7-③, 그림1-7-④). 이렇게 만든 밀가루에서 빵을 만들 수 있는데, 서아시아 신석기시대의 유적에서는 빵 그것의 출토 사례는 거의 없다. 상상하기에, 현재의 서아시아에서 먹고 있는 것 같은, 얇은 무발효 빵이었지 않을까? 빵을 굽는다고 한다면 달군 돌이나 가마 같은 설비가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도구와 설비가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신석기시대에 걸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아래에 그 발달사를 개관해보자.


구석기시대 말기
우선 맥류 농경 관련 도구의 발달사에서 중요하고 새로운 기원을 여는 시기가 되는 건 구석기시대 말기(기원전 12500-10000년)이다. 맥류의 수확을 보여주는 낫날, 매조미와 제분에 사용된 돌절구와 갈판 등이 사용되기 시작한다. 낫날은 구석기시대 말기의 나투프 문화에서 증가한다. 낫날의 대부분은 길이 2-3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돌조각을, 동물의 뼈와 뿔을 이용한 자루에 여러 개, 한 줄 드물게 두 줄로 줄지어 장착했다(그림1-6-①). 나투프 문화의 유적에서는 낫의 자루가 비교적 많이 출토되고, 그 대부분은 길이 30센티미터 정도의 직선 낫이다. 구석기시대 말기의 유적에서는 아직 맥류의 재배종은 출토되지 않았기에, 이들 낫은 야생종의 수확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낫날에 남은 사용흔의 분석에서도 추측되고 있다. 
절구(돌절구, 돌공이)도 낫날과 똑같이, 나투프 문화에서 많이 만들어졌다(그림1-7-①, 그림1-7-②). 절구는 나투프 문화에서 제작된 간석기 중에서 주류의 도구이며, 깊이 몇십 센티미터나 되는 거대한 돌절구가 자주 제작되었다. 이러한 절구는 맥류의 탈곡, 매조미, 제분에 사용된다. 절구에 비하여 수는 많지 않지만, 맷돌(갈판, 갈돌)도 구석기시대 말기에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들 절구와 맷돌은 용도가 달랐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석기를 제작하여 사용한 실험에 의하면, 절구의 장점은 제분 작업보다 매조미이며 제분 작업에 더 적합한 도구는 맷돌 쪽인 것 같다. 물론 맷돌이 언제나 맥류의 제분에 사용되었을 리는 없고, 콩류를 시작으로 다른 식물의 제분, 그리고 안료의 제작에도 종종 사용되었음은 틀림이 없지만, 구석기시대 말기의 맷돌의 사용흔과 잔재를 분석해 보면,이 시대에 맷돌을 사용한 맥류의 제분이 시작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Dubreuil 2004). 구석기시대 말기에 곧바로 맥류의 탈곡, 매조미와 제분 작업이 절구와 맷돌 같은 도구로 분화되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구석기시대 말기에 나타난 낫날과 돌절구의 존재는 이 시기에 그때까지와 비교하여 훨씬 맥류 이용이 활발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 일은 뒤따르는 신석기시대에 맥류 농경이 시작된 점을 생각하면, 맥류 농경 개시 직전의 모습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생각된다. 그러나 식물 유존체의 분석 결과에 의하면,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신석기시대 초 무렵에 걸쳐서 맥류 이용이 활발해졌다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Savard 외. 2006). 오히려 맥류는 이 시기 대부분의 유적에서 양적으로 제한되며, 콩류와 견과류 등 다양한 식물을 이용하는 상태가 일반적인 듯하다. 이처럼 도구와 식물 유존체의 정보를 맞추면 맥류는 구석기시대 말기에 먹을거리의 한 날개를 담당하고는 있었지만, 아직 중요한 식량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에 들어가면 맥류 농경과 관련된 도구에 변화가 보이고, 또 새로운 유형의 도구가 나타난다.
먼저 눈에 띄는 변화로, 맥류의 수확을 보여주는 낫날의 증가를 들 수 있다(그림1-8). 앞에 기술했듯이, 낫날은 구석기시대 말기에는 곧바로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석기 가운데 점하는 비율은 약 2-3%로 높지 않다. 신석기시대 초 무렵에는 점점 증가하는 경향이 있지만 큰 변화는 아니다. 뚜렷한 변화가 발견되는 건 PPNB중기부터이다.석기 가운데 10-20%를 점하는 데까지 증가한다.

그림1-8 레반트 지방의 유적에서 낫날의 수량 변화와 낫의 형태 변화. Sayej 2004 등에서.


낫의 형태 변화에 대해서 통시적으로 검토해 보면, 신석기시대 전반(PPNA기-PPNB전기)에서는 구석기시대 말기와 마찬가지로, 낫날이 여러 개 장착된 직선 낫이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큰 돌조각을 한 개체로 활용하여 칼처럼 사용한 것도 있었다. 석기를 그대로 손에 쥐든지, 또는 석기에 손잡이를 붙이든지 하여 사용했던 듯하다. 드문 사례이지만, 유프라테스 강가의 무레이베트 유적에서는 수확 칼의 자루라고 생각되는 석회암제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그림1-6-③, 그림1-6-④). PPNB중기가 되면 활처럼 굽은 낫이 사용되기 시작한다(그림1-6-②).
이 직선에서 활처럼 굽은 모양으로 낫의 형태가 변화한 건 중요하며(그림1-8), 아마 수확 작업의 효율화에 연결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직선 낫은 한 손으로 이삭을 모아 이삭 다발을 비벼서 자르는, 또는 낫을 대는 도구로 삼아 꺾어 거두는 식으로 사용한다. 한편, 활처럼 굽은 낫은 이삭을 모아서 베어 거둘 수 있고, 직선 낫에 비하여 수확 속도가 높아 짧은 시간에 더 많이 수확할 수 있다. 현대의 철제 낫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활처럼 굽은 낫은 베어 거두는 작업에 매우 적당한 형태이다. 또한 활처럼 굽은 낫이 출현한 배경에, 당시의 석기 제작기술의 발달이 있었음도 간과할 수 없다. 신석기시대에 들어와 원석에서 길이 10센티미터 정도의 규격성이 높은 돌날을 연속하여 벗겨내는 기술이 발달했다. 이리하여 제작된 돌날을 그대로든지, 또는 적당한 길이로 정돈하여 분할한 것(그림1-9)을 장착하여 더 간단하게 칼날의 길이가 긴 활처럼 굽은 낫을 만드는 일이 가능해졌다. 

그림1-9 시리아 케르크 유적(PPNB 후기) 출토의 낫날



그 한쪽에서 탈곡의 도구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새로운 유형의 도구가 발달되고 있다. 하나는 염소와 양의견갑골을 이용한 도구이다(그림1-10). 견갑골의 얇고 평평한 부분을 깎아서 두 갈래로 가공하고, 그 안쪽에 몇 개의 홈을 새긴다. 한 다발의 이삭을 두 갈래의 사이에 통과시키면 잔이삭이 홈에 걸려 탈곡되는 구조이다. 이 홈과 그 주변에 광택과 선상흔 등 이삭 다발을 통과시킬 때 닿았다고 생각되는 흔적이 관찰되었다. 유례는 적지만, 재미난 발명품이다.

그림1-10 골제 탈곡 도구. Stordeur and AndersonGerfaud 1985: Fig 2, 4, 8에서.
간즈 다르흐

Ganj Dareh 유적 출토 유물(좌)와 추정되는 그 사용방법(우)

 

 

 

또 하나, 탈곡 썰매라는 도구가 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지중해 세계의 각지에서 사용되고 있는 도구이다. 보통 길이 1.5미터 안팎의 목제 썰매이고, 그 뒷면에 돌과 철제 날이 박혀 있다(그림1-11). 이 썰매를 수확한 맥류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서 동물에게 끌게 하면, 썰매의 무게(썰매 위에 사람이나 무거운 걸 올림)도 더해져 상당한 마찰이 썰매와 이삭 사이에 일어나 탈곡이 이루어진다. 또 이 방법에서는 탈곡만이 아니라 동시에 맥류의 짚을 대량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도 특별히 적는다. 맥류의 짚은 가축의 먹이와 햇볕에 말리는 벽돌을 만들 때 혼합물 등에 사용된다. 똑같은 도구는 고대의 서아시아에서도 사용되었다. P. 앤더슨Anderson 씨의 일련의 연구에 의하면, 탈곡 썰매의 이용은 확실히 청동기시대 전기(기원전 30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듯하다(Anderson 2000 등).이 시대의 유적에서 탈곡 썰매에 장착된 석기가 자주 발견된다. 앤더슨에 의하면, 이런 유의 탈곡 썰매에 장착된 석기는 신석기시대의 유적(기원전 8000년대 후반부터 7000년대 전반의 유적)에서도 출토되며, 탈곡 썰매의 사용은 신석기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신석기시대가 되어 대규모로 탈곡 작업하는 듯한 규모의농경이나, 또는 건축재와 토기의 바탕흙에 끈지게 하는 재료로 섞는 등 맥류 짚의 적극적인 이용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하면, 탈곡 썰매가 신석기시대에 곧바로 등장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림1-11 현재 튀니지에서 사용되고 있는 탈곡 썰매. Patricia Anderson 씨 제공.

 

 

그리고 탈곡, 매조미, 제분의 도구인 돌절구에서 변화는 발견할 수 있을까? 이미 많은 연구자가 지적하듯이, 신석기시대가 되면 절구(돌절구, 돌공이)가 감소하고, 대신에 맷돌(갈판, 갈돌)이 증가한다(그림1-7-③, ④). 맷돌은제분에 적합한 도구이기에, 신석기시대가 되어 맥류의 제분이 활발해졌음을 상정할 수 있다. 다만, 여전히 안료의 제작에 사용되었다고 생각되는 갈판도 많이 발견되기에, PPNB전기까지의 맷돌은 다목적 제분 도구로 이용된것이 많았을 것이다. 맥류의 제분에 특화된 도구라고 생각되는 건 안장형 갈판이다. 갈판에 비교하여 대형이고, 가늘고 긴 윗돌(갈돌)을 두 손으로 잡고 체중을 실어서 앞뒤로 움직여 효율적인 제분을 행한다. 그 가장 오래된 건 구석기시대 말기에 출현하고, PPNA기에 이미 대부분의 유적에서 발견된다(그림1-12). PPNA기에는 아직 재배 맥류가 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시기의 안장형 갈판은 야생 맥류의 제분에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PPNB중기부터 후기에 걸쳐서 대부분의 유적에서 일반적이게 된다(그림1-7-⑤, 그림1-7-⑥). 이 뒤, 안장형 갈판은 회전 갈판이 출현하기까지 오랫동안 제분 도구의 주역이었다. 신석기시대에 보급된 안장형 갈판이 얼마나 제분 도구로서 완성도가 높았는지 알 수 있다. 
그림1-12 시리아 와디 툼바크(PPNA기) 출토의 안장형 갈판과 갈돌(화살표). 

Frédéric Abbès 씨 제공.





빵을 굽는 설비는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까? 빵 굽는 가마라고 보이는 유구가 나타난 건 PPNB 중기이며(舟田 1998, 藤本 2007), 유례가 늘어나는 건 토기 신석기시대가 되고 나서로 더욱 늦다. 이들의 대부분은 돔 모양의 상부구조를 가진 가마로서 현대의 서아시아에서 사용하고 있는 것과 유사하며, 아마 지금과 마찬가지로 가마의 내벽에 빵을 붙여서 구웠을 것이다. 또, 빵을 굽는 다른 방법으로 숯불을 이용한 땅을 옴폭 판 화로가 사용되었을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田 1998, 藤本 2006). 이와 같은 땅을 판 화로는 구석기시대 말기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의견도 있다. 빵을 먹는다고 하는 문화 그것은, 오랜 옛날 맥류 이용의 개시와 함께 시작되었을지도 모른다.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신석기시대에 걸쳐서, 맥류 농경에 관련된 도구와 설비의 변천을 좇아 왔다. 낫날과 돌절구는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출현하며, 맥류 이용이 조금씩이지만 이 무렵부터 활발해졌단 것을 보여준다. 
맥류의 재배와 이용에 관한 다양한 도구, 설비가 시대의 추이와 함께 증가, 출현 또는 충실해지는 걸 생각하면, PPNB 중기부터 후기(기원전 8000-7000년) 즈음을 맥류 농경이 정착한 시기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도구와 설비의 발달사에서 얻을 수 있는 견해는 앞에 기술한 야생 맥류에서 재배 맥류로 이행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단노와 윌콕스의 설에 긍정적이다.


동물의 가축화
서아시아에서 탄생한 농경문화의 다른 하나의 중요한 측면에 동물 사육의 시작이 있다. 서아시아 원산의 동물에는 양, 염소, 말, 돼지, 낙타(단봉)이 있다. 낙타를 제외한 다른 4종의 우제류는 모두 신석기시대에 가축화되었다. 오늘날 주위를 둘러보면, 얼마나 우리의 생활이 이들 가축이 생산해 내는 자원에 의존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들 동물이 서아시아 신석기시대에 가축화된 의의는 크다.
위에 4종의 우제류보다 전에 가축화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동물에 개와 고양이가 있다. 개는 구석기시대 말기의 나투프 문화에서 몇 가지 사례가 알려져 있다. 모두 사람의 매장에 동반하여 발견된 것으로, 사람과 개의 특별한 관계를 엿볼 수 있다. 고양이의 사례는 최근 고양이의 기원을 새롭게 하는 발견으로 화제가 되었던, 신석기시대 초 무렵의 키프로스섬에 있다(Vigne 외. 2004). 이 섬의 실로로캄보스

Shillourokambos 유적에서 기원전 8천 년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고양이의 매장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가장 오래된 반려동물 고양이의 사례이며, 고양이의 사육이 신석기시대의 서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이기도 하다. 또한 최근의 DNA 연구에 의해서도 고양이의 기원이 서아시아에 있다고 한다.

 

서아시아에서 우제류를 가축화한 기원은 재배식물의 기원에 비교해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일반적으로는 우제류에서 최초로 가축화된 것이 염소, 양이며, 그것은 터키와 이라크의 산간지대에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그리고 이것에 조금 뒤늦게 소와 돼지가 가축화되었다고 생각해 왔다. 또한 동물의 가축화는 시간적으로 식물의 재배화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석기시대의 후반(기원전 7500-6000년 무렵)에 걸쳐서 일어났던 일이라 이해해 왔다. 그러나 이러한 통설은 최근의 키프로스섬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 유적에 의해 재고하게 되었다(Peltenbeurg and Wasse 2004 등). 지중해에 떠 있는 이 섬에서는 기원전 8500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유적(실로로캄보스, 미로크티아 등)이 발견되어, 그곳에서 원래부터 섬에 생식하지 않는 소, 염소, 양, 돼지, 사슴 등의 동물뼈가 출토되었다. 이들은 분명히 육지(레반트나 아나톨리아)에서 가지고 들어온 것이며, 가축화된 동물이 일거에 섬으로 데려왔다는 신석기시대판 '노아의 방주'로 평가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러나 발견된 동물에 명료한 가축화의 증거가 발견되지 않은 점, 사슴 등 끝까지 가축화되지 않았던 동물이 포함되어 있는 점 등에서, 키프로스섬에 데려온 동물은 야생동물이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하고 있다. 왜 야생동물을 섬에 데려왔을까 하는 물음에 답하는 건 어렵지만, 섬을 방문한 사람들이 식량원 또는 상징적 의미로 동물을 섬에 풀어놓고, 그것을 수렵했다는 해석이 제시되고 있다.
키프로스섬에서 발견된 동물군이 야생이었는지 가축이었는지 하는 문제를 일단 차치하더라도, 이들 동물이 육지에서 데려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이 시대의 사람과 동물의 관계를 나타내고도 있다. 기존의 생각과 달리, 신석기시대의 전반에 벌써 동물의 가축화가 시작되었을 가능성도 검토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레반트 북부의 PPNB전기의 동물뼈를 상세하게 분석해 보면, 몇 곳의 유적에서 크기의 축소화, 성별의 편중 등이 확인된다고한다(Peters 외. 1999). 최근에는 터키 남동부에서 양과 염소의 가축화, 시리아와 유프라테스강 중류 지역에서 소의 가축화 등, 최초로 우제류를 가축화한 것은 PPNB 전기의 레반트 북부에서 일어났다고 하는 견해가 계속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면 가축화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가축화의 과정을 검토하려면 유적에서 출토된 동물 조성의 변화를 보는 게 유효하다. 그림1-13은 레반트 남부의 구석기시대 말기부터 PPNB기에 걸친 동물 조성의 변천이다.  이것을 보면, 구석기시대 말기(나투프 시기)부터 신석기시대 초 무렵(PPNA기)에 걸쳐서 압도적으로 많은 건 야생동물인 가젤이다. 그러나 PPNB기가 되면 이 상황은 아주 달라진다. 양과 염소가 점하는 비율이 급증하는 것이다.
그림1-13 레반트 남부의 나투프 시기부터 PPNB기까지 동물상의 변천. Bar-Yosef 1998: Fig. 8에서


PPNB기에 동물상의 변화는 어떠했을까? 그림1-14는 레반트 북부와 키프로스섬의 PPNB기에 동물상의 변천을 정리한 그래프이다. 이 그래프에 의하면, PPNB전기 10-20% 정도였던 가축이 서서히 증가해, PPNB 후기에는 그 점하는 비율이 80-90%에 이르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림1-14 PPNB기의 야생종과 가축종의 비율 변천. 

야생; 가젤, 사슴, 야생 염소 등. 가축; 염소, 양, 소, 돼지Machecoul 외 2008: 그림5에서

 

 

 

터키 남동부에 위치하는 차요누

Çayönü 유적에서는 가축화의 과정에 관한 중요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本鄕 2002). 이 유적은 PPNA기부터 토기 신석기에 이르는 오랜 기간 거주한 유적으로, 한 유적에서 통시적으로 가축화의 과정을 검토할 수 있다. 여기에서도 동물 조성의 변화가 관찰되었다. 가축화되는 염소, 양, 소, 돼지 4종이 거주 기간을 거치며 서서히 증가해 나아가는 경향이 발견되고, 특히 염소와 양은 PPNB 후반부터 PN이 되면 출토되는동물뼈의 절반을 넘을 정도로 늘어난다. 가축화의 지표가 되는 크기의 축소화, 사망연령 구성의 변화에 대해서는먼저 PPNB 중기 무렵에 그 특징이 보이기 시작해, PPNB기가 끝날 무렵에는 뚜렷해진다. 차요누 유적의 성과로중요한 건 가축화가 단기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수백 년에서 1천 년 가까운 세월에 걸쳐서 천천히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현재, 레반트 지방의 동물뼈 분석에서는 이하와 같은 가축화의 시나리오가 그려질 것이다. 먼저 PPNB 전기까지 어느 정도 염소와 양, 소 등의 우제류의 관리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이 시기의 몇 곳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동물뼈크기의 축소화와 성비 편중에서 추측된다. 그러나 가축종은 급속히 늘어나지는 않았다. 출토된 동물뼈의 조성에 나타나듯이(그림1-14), PPNB 중기까지 가젤 등의 야생동물이 점하는 비율은 여전히 높고, 염소와 양을 중심으로 하는 가축의 비율이 높아진 건 PPNB 후기부터이다. 차요누 유적에서 분명해지듯이, 야생종에서 가축종으로 이행한 것도 맥류의 재배화와 똑같이 오랜 시간이 걸린 완만한 변화이며, 가축을 사양하는 일이 주요한 생업이 된 것은 PPNB 후기 이후의 일이라 생각한다.



유물이 말하는 가축화
맥류의 재배와 이용이 다양한 도구, 설비를 필요로 하며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유물과 유구가 비교적 풍부한 데비하여, 가축 사육에 관련된 유물과 유구는 거의 없다. 그 때문에 동물뼈 이외에서 가축화의 과정을 탐색하는 건 어렵지만 그 시도를 두 가지 정도 들어보겠다.


찌르개(尖頭器)의 변천


하나는 수렵 도구인 찌르개(창날, 화살촉)의 변천에서 간접적으로 가축화를 검토하는 시도이다. 서아시아의 신석기시대에는 다양한 형태의 찌르개가 제작되었다. 이들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서 형태와 제작방법에 차이가 발견되기 때문에 편년을 위한 시기 구분과 지역 문화를 설정할 때 지표가 되고 있다. 
신석기시대를 거치며 찌르개의 중요한 변화로 대형화가 있다. 그림1-15는 시리아 북서부 케르크 유적의 사례이다. PPNB전기(그림1-15-①)의 것은 길이 5센티미터, 너비 1.5센티미터 정도의 것이 많고, 아마 화살촉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라 상정된다. 이것이 토기 신석기 시기(그림1-15-②)가 되면 길이 10센티미터, 너비 2센터미터 정도의 것이 주류를 이루고, 두께도 1센티미터 정도의 두꺼운 것이 많다. 그 크기로부터 창날로서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림1-15 시리아 케르크 유적 출토의 찌르개
①PPNB 전기 ②토기 신석기 시기


크기의 변화 이외에도 가공(수정)의 방식에도 변화가 발견된다. PPNB 전기의 찌르개는 끝, 가장자리, 밑 부분으로 한정된 부분에 가공이 이루어진다(그림1-15-①). 끝은 튀어나와 찌르는 부분이기에 날카롭도록 가공한다. 가장자리 부분의 가공은 멀리서 공격하는 무기로서 빼놓을 수 없는 석기의 모양을 좌우대칭으로 모양을 가지런히 할 목적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밑 부분의 가공은 자루 부분과 장착하는 것에 관련된다. 이와 같은 가공의 방식은 찌르개의 기능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에 반하여 토기 신석기 시기의 찌르개는 가공된 부분이 매우 많다. 그림1-15-②에서는 찌르개 하반분의 전면에 가공이 이루어진다. 그림1-16은 거의 같은 시기의 시리아 크데일 유적에서 발견된 찌르개이다. 압압떼기(

押壓剝離)라는 기법으로 행해진 가공은 석기의 한 면 전체를 뒤덮고 있다. 가공의 의미가 기능적인 것에서 장식적인 것으로 변화한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림1-16 시리아 크데일 유적(PPNB 종말기) 출토의 찌르개. Frédéric Abbès 씨 제공.

 




한편 그 수량에 대해서도 변화가 발견된다. 유적에서 제작된 찌르개의 수량이 감소하는 것이다. 그러나 찌르개가감소하기 시작하는 시기는 유적(또는 지역)에 따라서 차이를 보인다. 이 현상은 빠른 유적에서는 PPNB 후기부터 시작되지만, 시리아 북서부 등에서는 토기 신석기 시기의 중반부터 후반(기원전 7000년대)으로 상당히 늦다.그 시초에 대해서는 유적에 따라서 시기차가 발견되기는 하지만, 대체로 찌르개의 감소는 PPNB 후기부터 토기 신석기 시기(기원전 8000년대 후반부터 기원전 7000년대)에 걸쳐서 레반트 지방 전역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신석기시대를 거치며 일어난 찌르개의 변화는 대형화, 가공도의 증가, 수량의 감소라는 세 가지로 정리할수 있다. 대형화에 대해서는 PPNA기부터 PPNB기에 걸쳐서 서서히 진행되는 경향을 볼 수 있고, PPNB 중기에 돌날 제작기술의 발전을 배경으로 그때까지 없던 너비가 넓고 두꺼운 대형 찌르개가 등장한다. 가공에 대해서는 PPNB 후기 이후 그 정도가 늘어난다. 그리고 수량의 감소는 PPNB 후기부터 토기 신석기 시기에 걸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이상의 찌르개에서 볼 수 있는 변화를 통시적으로 정리하면, PPNB 중기까지 대형화되고 있던 찌르개가 PPNB 후기 이후 차츰 만들지 못하게 됨에 따라 기능적인 이유를 넘어서 과도하게 가공되는 것처럼 된다는 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찌르개의 변화 상태는 수렵도구인 찌르개의 상징적, 경제적인 사정이 변화했다는 것을 추측하게 한다. 시기적으로 보아도 PPNB 후기 이후의 야생동물의 수렵에서 가축 사육으로 동물 자원의 비중이 이동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동물 표현
유물에서 가축화의 추이를 탐색하는 다른 하나의 시도는 조각과 조형에서 보는 동물 표현의 변천에 주목한 연구이다(Helmer 외. 2004). 

그림1-17 토기 이전 신석기시대에 동물 표현의 변천. Helmer 외. 2004:tableau 2에서.

 

 

 

 

그림1-17은 토기 이전 신석기시대에 표현되어 있는 동물의 변천에 대하여 정리한 것이다. 신석기시대 전반(PPNA기-PPNB전기)에는 표현되는 동물은 소, 고양이과의 동물, 새, 뱀 등 변화가 풍부하다. 이 시대, 동물 표현으로서 석제의 우상과 돌에 묘사한 선각화 등이 있는데, 그와 같은 조형물이 수없이 발견된 유적에 터키 남동부의 괴베클리

Göbekli 유적이 있다. 이 유적에서는 원형 또는 직사각형의 제사용이라 생각되는 건물이 한데 모여 발견되었는데, 이들 건물에는 몇 개의 T자 모양 기둥이 우뚝 솟아 있었다. 기둥은 바위 하나를 가공하여 만들었고, 그 크기는 큰것은 높이 5미터, 무게 10톤이나 된다. 팔레스티나의 예리코에서 발견된 '타와'와 비교되는, 서아시아의 초기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거석 기념물이다. 인식된 동물은 10종류에 이르고, 특히 뱀과 여우, 멧돼지 등이빈번하게 묘사된다(Peters and Schmidt 2004). 그림1-18은 T자 모양 돌기둥의 한 예로, 측면에 소, 여우, 학 세마리가 표현되어 있다. 또한 다른 면에는 소의 머리라고 생각되는 표현도 있다. 중요한 건 이와 같은 T자 모양 돌기둥에 표현된 동물종의 대부분이 유적에서 출토된 동물뼈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이다. 식량 또는 상징적인 의미에서 획득된 동물이 T자 모양 돌기둥에 묘사되어 있었던 셈이다. 

 

 

그림1-18 터키 괴베클리 유적에서 발견된 T자 모양 돌기둥. Cauvin 2000: Fig. 70에서.

 

 

 

이처럼 신석기시대 전반에 발견된 동물 표현의 다양성은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사라져 간다. PPNB 중기 이후 염소, 양 등의 가축을 표현했다고 생각되는 포유동물의 조형이 많아진다. 특히 늘어난 건 이들 동물을 표현한 토우이다. 그림1-19는 터키 아칼차이 테페アカルチャイ・テペ 유적(PPNB 중기)에서 출토된 양 모양 토우인데, 이것에서 볼 수 있듯이 손바닥에 들어갈 듯한 크기로 만들었다.

 

 

그림1-19 터키 아칼차이 테페 유적 출토의 양 모양 토우

 

 

 

이와 같이 통시적으로 보면, PPNB 중기 무렵부터 표현의 대상이 되는 동물이 사람들이 포획했던 다양한 야생동물에서 가축으로 옮겨가는 걸 알 수 있다. 이러한 동물 표현의 변화에서 간파할 수 있는 건 신석기시대 후반이 되면 가축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는 점이다. 역시 PPNB 후기 이후에 가축 사육이 본격화되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농경목축 문화의 정착과 그 이후

 


여기까지 최근의 동식물 유존체의 성과와 그에 관련된 고고유물을 다루어서 식물의 재배화와 동물의 가축화 과정에 대하여 생각했다. 재배화와 가축화는 모두, 신석기시대 최초의 무렵이 아니라, 조금 시간이 경과한 PPNB 전기에 레반트 북부에서 그 최초의 징후가 발견된다. 그러나 농경목축에 강하게 의존하는 듯한 사회가 탄생한 건 PPNB 후기 이후의 일이며, 최초의 재배화와 가축화가 일어나고 나서 1000년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재배화와 가축화의 실태란, '신석기 혁명'이라는 명칭에서 상상되는 것처럼 급격한 변화가 아니라 완만한 이행이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그림1-20). 이것은 오랫동안 계속해 왔던 수렵채집생활을 그만두고 전례가 없는 생활양식을 시작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랄 일은 아니며, 신석기화의 과정은 다양한 시행착오의 반복이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림1-20 서아시아의 신석기화 개념도



요동치는 영거 드라이아스 시기라는 설
재배화와 가축화에 관한 의문 가운데 가장 답하기가 어려운 건 '왜'라는 물음일 것이다. 농경의 기원에 대하여 요새 20년 정도 받아들여지고 있는 설은 이 책 제2장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영거 드라이아스기(기원전 1만1000-기원전 1만 년 무렵)에 일어났던 기후가 다시 한랭해진 영향을 주요한 요인이라 하는 것이다. 이 설에서는 구석기시대 말기에 원래 맥류의 이용을 시작했던 나투프 문화의 사람들이 영거 드라이아스기의 한랭화가 원인이 되어식물자원의 감소에 직면하고, 그에 대처하는 방법으로서 맥류로 확 기울어져, 그것이 재배화로 이어졌다고 한다.그러나 앞에 언급했듯이 맥류의 재배화는 매우 천천히 진행되었고, 또 가장 오래된 재배종이 출토된 것도 영거 드라이아스기에 상당하는 구석기시대 말기는 커녕 신석기시대 초반(PPNA기)도 아닌PPNB전기이기 때문이다. 영거 드라이아스기라는 설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점이 많다. 
동물의 가축화에 대해서는 동물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여 가축화된 것이냐는 문제에 직결된다. 적어도 육식만을 목적으로 가축화가 행해졌을 리는 없다고 대부분의 연구자가 지적해 왔다. 그 대신 젖 이용이 그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三宅 1999)과 동물을 소유하는 것에 사회적 의미가 있었다는 설(本鄕 2002, 

Machecoul 외. 2008) 등이 제안되고 있다. 

 

그렇다 치더라도, 왜 농경목축은 구석기시대(갱신세)가 아니라, 신석기시대(완신세)가 되어서부터 시작되었을까? 왜 서아시아처럼 독자적으로 농경목축이 시작된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이 있을까? 이 오래되고 새로운 문제는 항상 흥미가 떨어지지 않는 '수수께끼'(

Diamond 2000)이다.

 

 

 

서아시아 초기 농경문화의 그 이후 -기원전 7000년대의 변화
PPNB 후기에 이어진 기원전 7000년대는 마을의 재편기에 해당한다. 그 대표적인 것이 'PPNB 문화의 붕괴'라고 표현되는 대형 마을의 방기이다. 'PPNB 문화의 붕괴'설에서는 자주 레반트 남부에서 PPNB 후기에 성립된 대형 마을이, 주변 환경의 악화에 의하여 파탄되었다고 이야기된다.
이 설이 최초로 주장된 건 요르단의 아인 가잘 유적의 사례였다(Rollefson and 

Köhler-Rollefson 1989). 이 유적에서는 PPNB 중기부터 후기에 걸쳐서 마을의 대형화가 발견된다. PPNB 후기까지 3만 평을 넘는 규모로까지 확대된다. PPNB 후기에는 양과 염소의 사육과 보리의 재배 등에 중점을 둔 생업이 행해지고, 이에 더하여 주변의 다양한 야생 동식물도 소비하고 있었던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다음 시기(PPNC기=기원전 7000년대 전반)가 되면 마을 규모가 축소되고, 주거 형태와 석기 제작, 매장 등 여러 방면에서 변화가 발견된다.

 

이러한 변화를 가져온 요인으로 PPNB 후기의 인구 증가에 수반한 농지 확대, 염소의 방목, 연료 획득을 목적으로 한 산림벌채 등 마을 주변의 환경에 계속 주었던 압박이 불러온 주변 자원의 고갈이 지적되었다. 아인 가잘 유적과 때를 같이하여 레반트 남부에서는 PPNB 후기의 몇몇 대형 마을(메가 사이트)가 방기되는 것으로부터 'PPNB 문화의 붕괴'가 일어났다고 알려졌다.  'PPNB 문화의 붕괴'는 레반트 지방 일대에서 확인되는 현상인 것처럼 이야기되는 일이 적지 않지만, PPNB 후기부터 토기 신석기 시기에 걸쳐서 존속했던 유적은 수없이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레반트에서 일어난 현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대저 신석기시대에 한하지 않고 고대 서아시아에서 수천 년에 걸쳐서 영속되었던 마을과 읍은 대부분이 없다. 다양한 요인으로 수십 년이나 수백 년으로 마을이 방기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마을 방기를 문화 붕괴라고 간주해도 좋을지에도 의문이 남는다. PPNB 후기에 발견되는 마을 방기를 새삼스레 크게 평가할 만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기존의 인류사에 없는 규모로 발달한 PPNB기의 몇몇 대형 마을에서는 그때까지의 수렵채집을 기반으로 하여 농경목축을 도입했던 것으로, 마을 주변의 자연환경을 크게 손상시키는 난개발이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주변 자원의 고갈에 대응하여 너무 크게 구성된 마을을 해체하고, 더 소규모 마을로 나누는 형태로 마을 재편이 행해졌을 것이다. 이 기원전 7000년대의 마을 재편도 신석기화의 과정에서 겪은 인간의 시행착오, 환경에 적응하기의 하나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외에 기원전 7000년대에 발견되는 중요한 유적 동태의 변화에 농경목축이 주변 지역으로 확산된 것이 있다.
확산의 방향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서아시아 내륙부의 반건조지대로 확산된 것이다. 기원전 7000년대 전반에 가축인 양과 염소를 동반한 야영지라고 생각되는 유적이 반건조지대에서 출현하기 시작한다. 가축을 동반한 유목민이 등장했던 증거라고 한다. 시리아 내륙부의 크데일 유적은 그러한 최초의 유목민이 남긴 야영지의 하나이다. 동물뼈와 함께 플린트 석기의 제작터가 발견되었다. 건물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지만, 석기와 동물뼈의 면적인 확장을 꼼꼼히 살펴보면 천막이 설치되었다고 생각되는 장소가 추정되었다(그림1-21). 이 유적에서 발견된 동물뼈의 분석에 의하면, 크데일의 사람들은 가축 양을 소유하고, 내륙 초원 지대에서 생식하는가젤 등의 야생동물을 수렵하면서 살아갔다. 매우 조금이지만, 낫날과 곡물이 출토되기 때문에, 맥류의 재배도 행했다고 생각한다. 유목민의 출현은 PPNB 후기에 성립한 초기의 농경 마을에서 탄생한 새로운 과실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림1-21 시리아 크데일 유적(PPNB 종말기)에서 유물의 출토 상황도(위)와 크데일 유적에서 사람들의 활동 복원도(아래). 

Frédéric Abbès 씨 제공.

 

 

 


또 하나는 서아시아에 인접한 지역으로 확산된 것이다. 기원전 7000년대를 경계로, 맥류 재배와 염소, 양, 소를 사육하는 생업은 동으로는 유럽으로, 서로는 중앙아시아와 인더스 방면이라는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로 퍼져 나갔다. 이 농경목축이 확산되는 실태란 대규모 농민의 이주였거나, 농민과 접촉한 현지의 수렵채집민이 농경목축이란 신기술을 받아들이거나 하는 등 지역에 따라 다양했을 것이라 생각한다(벨우드 2008). 그것은 또한 서아시아에서 탄생한 농경문화가 각지의 풍토에 걸맞게 변용되어 나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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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3




서장

맥류 풍토의 양성     佐藤洋一郞사토 요우이치로






시작하며


이 시리즈 세번째 권에서는 '맥류의 풍토'를 다룬다. 밀을 중심으로 하는 맥류는 대략 1만 년 가까이 전에 서아시아의 '비옥한 초승달' 한 구석에서 태어났다고 이야기된다. 그것이 '목장'의 풍토인 유럽을 시작으로 전 세계로 전해져, 현대 문명의 물질적 기초를 형성하고 있다. 


철학자였던 와츠지 데츠로는 유라시아를 '계절풍' '사막' 그리고 '목장'의 세 가지 풍토로 나누었다(和辻 1979). 그러나 이 세 가지 풍토의 역사에 대해서, 와츠지는 거의 아무것도 써 놓지 않았다. 세 가지 풍토는 도대체 언제부터 지금 같은 모습이 되었을까?


와츠지의 <풍토>에 이어서 역시 풍토를 논한 우메사오 타다오梅棹忠夫도 왜인지 그 역사에 대해서는 별로 상세한 의론을 전개하지 않는다(梅棹 1998). 이 시리즈 첫번째 권의 서장에서도 기술한 대로 '사막'의 풍토는 수천 년 전부터 사막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이것도 여러 군데에서 소개하고 있듯이,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소하묘 유적(기원전 1000년 무렵)에서는 밀의 씨앗과 소의 머리뼈 등 농업과 목축업의 존재를 엿볼 수 있는 유물이 여럿 출토되고 있다. 또 다른 상황증거에서도 타클라마칸 사막을 중심으로 하는 지금과 같은 '사막'의 풍토가 지금보다는 훨씬 습윤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 규모가, 예를 들면 오아시스에서 행하는 농업이라고 정확히 한정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전체적으로 퍼졌던 본격적인 것이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불분명하지만, 만약 후자였다고 한다면 그 시대의 이 지역을 '사막'의 풍토라고 부르는 건 아마 적당하지 않다. '사막'의 풍토는 시대와함께 움직였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현재 사막이 되어 있는 지역은 수천 년 전에는 푸른 대지가 펼쳐져 있던 건 아니었을까? 즉, '사막'의 풍토는 최근 수천 년 사이에 급속히 확대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 가설을 지지하듯이 '사막'의 풍토에서 사막화의 진행은 어쩌면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우즈베키스탄 남부의 달베르진 테페Dalverzin-Tepe에서는 중세(기원후 몇백 년 무렵)의 유구에서 벼, 조 등의 씨앗이 목재와 함께 다량으로 출토되어, 지금은 사막으로 뒤덮인 이 땅에 숲과 벼의 생산지가 있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이 시기는 당나라의 승려 현장 삼장이 인도로 가는 여행을 감행한 그 직전의 시기에 해당하는데, 현장의 여행기를 보아도 당시의 중앙아시아 일대는 지금보다 훨씬 습윤했단 것을 보여주는 여러 가지 기술이 발견된다. 한 예를 들면,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 가장자리에 있던 고창국이란 나라의 존재가 그러하다. 현장의 일기에는 그가이 땅을 여행할 때, 고창국의 국왕은 현장을 오랫동안 나라에 머무르도록 여러 모략을 두루 생각해내지만 그렇게안 되고, 결국 현장에게 인도로 여행을 가도록 허락하는 일이 적혀 있다. 당시의 고창국에는 4천 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그는 기록하고 있는데, 만일 그 숫자에 과정이 있었다고 해도 국가가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을 지탱하기 위한 생산이 있었다는 건 사실일 것이다. 만약 그 인구를 1만이라 하고, 또 그들의 에너지가 밀로만 조달되었다고 한다. 사람 1명의 연평균 소비량을 150킬로그램, 밀의 단위면적당 수확량을 3000평당 1톤이라 한다면, 필요한 최저한의 밭 면적은 450만 평(약 4킬로미터 사방)이 된다(주; 야마타 카츠히사山田勝久의 추정으로는 8킬로미터 사방). 그런데 지금, 예전의 고창국은 완전한 폐허이며, 그 주위도 가장 최근 개방된 관개수로가 함양하는 포도밭을 제하면 온통 사막 지대이다. 


게다가 다섯 번에 걸쳐 중앙 유라시아를 탐험한 스벤 헤딘의 <떠돌아다니는 호수>에 의하면,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쪽 가장자리를 동으로 흐르는 타림강의 유역에는 19세기 말까지 벵골 호랑이가 생식하고 있었다고 한다. 더구나 최근의 발굴 성과에서는 예를 들면 앞에 기술한 소하묘 유적에서 스라소니의 것이라 생각되는 동물의 털도 나오고 있다. 호랑이와 스라소니는 숲에 서식하는 동물이고 또 먹이사슬의 정점에 자리하기에, 그 생식은 광대한 숲의 존재를 시사한다. 3000년 전의 옛날부터 100년 전까지 2900년 사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며 상당한 면적의 숲이 그곳에 성립되어 있엇을 가능성이 높다. 타클라마칸의 건조화, 숲의 후퇴는 이 1세기 사이에 진행된 것이다. 추측하면 현재의 실크로드 일대는 지금도 아직 건조가 진행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막'의 풍토는 지금 '목장'의 풍토와 같았을까? 이것은 또한 이 3천 년 사이의 '목장'의 풍토가 어떠했는가 하는 물음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목장'의 풍토


그래서 우선 유럽의 풍토인 '목장'의 풍토에 대하여 의론을 진행하겠다.


유럽의 풍토를 그 농경에 비추어서 기술한다면, 남유럽은 '맥류와 가축'의 풍토, 북유럽은 '감자와 가축'의 풍토가 될 것이다(佐藤 2009). 여기에서 농경의 핵심을 이루는 건 가축인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특히 가축의 젖이 사람들의 단백질 공급원으로 유용했다. 또한 대서양에 면한 해안 지역에서는 '감자와 물고기'라는 풍토도 전개한다. 목축에 쓰이는 가축이란 무리를 이루는 대형 포유류로서 소, 말, 양, 염소, 낙타 등을 가리킨다. 대형 포유류에서도 돼지와 물소는 무리를 이루지 않기에 그 사육은 목축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이러한 정리를 하면, '계절풍'의 풍토에는 원칙으로 목축이 없었다고 해도 좋다. 물론 예외는 있다. 인도부터 동남아시아에 걸쳐서 있는 인도소는 그 한 예이다. 또한 일본 열도에서도 말의 목축은 특히 열도의 북반부를 중심으로 왕성히 행해졌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시 이 시리즈의 네번째 권에서 다루기로 한다.


목장의 풍토에서 일어난 농경사에 관해서도 많은 연구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P. 벨우드의 <농경기원의 인류사>(長田, 佐藤(번역) 2008)을 바탕으로 소개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유럽으로 농경이 확산된 건 목축을 수반하여 매우 오랜 과정을 거쳤다. 서아시아에 있는 농경의 기원지에 가까운 지역에서는 이른 시기부터 환경의 변화가 일어나고,숲이 파괴된 토지에서는 토사가 흘러 평야에 퇴적되기도 했다. 농경은 북유럽과 대서양 연안의 지역에는 수천년의 시간을 거쳐 전해졌다. 재미있는 점으로 그것은 유럽 전체를 구석구석 퍼진 건 아니었던 것 같다. 오히려 농경을 받아들인 지역은 멀리 떨어진 것처럼 분산되며, 그 사이에는 농경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지역이 있었다. 이와 같은 지역에서는 상당히 이후인 중세까지 '유목'이라 부를 수 있는 비농경민이 있었다. 동아시아와 마찬가지로 유럽에서도 농경민과 수렵채집민은 최근까지 동거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가축을 지탱하던 것이 중세의 삼포식 농업과 그것에 이어진 돌려짓기 농업으로, 이들이 현재의 이른바 혼합식 농업이 되었다. 삼포식 농업에서 가축은 작물 이후의 휴경지에 방목되어 지력의 회복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아무튼 유럽의 풍토는 가축의 세계였다고 할 수 있다.


'목장'의 풍토에서 전분 공급원으로 쓰였던 건 밀, 보리를 중심으로 하는 맥류, 감자, 순무 등의 뿌리채소류, 게다가 메밀 등일 것이다. 이 가운데 맥류에 대해서는 <맥류의 자연사>(佐藤, 加藤 편집 2009)에 상세하기에 그에양보하려 한다. 새삼스럽게 하나만 지적하고 싶은 건 '맥류'라고 일본어와 중국어가 총칭할 정도로 유럽의 문화는 그들을 일괄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다른 경로, 다른 경위로 지금의 유럽에 전해지고, 그리고 정착했을 것이다. 또한 감자에 대해서도 <감자가 온 길 -문명, 기근, 전쟁>(山本 2008)나 <감자의 세계사 -역사를 움직인 '빈자의 빵'>(伊藤 2008)라는 훌륭한 저서가 있기에 여기에서는 상세한 건 생략하겠지만, 매우 개략적으로 적으면 감자는 16세기에 전해졌을 때부터 주로 유럽의 북부에 침투했다. 밀레의 '만종'(1855-1857년 무렵)은 감자를 수확하는 가난한 부부가 기도를 드리는 풍경을 묘사한 그림으로, 이 시기의 프랑스에서는 모든 감자가 서민의 식량으로 침투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메밀은 러시아,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의 나라에서 일본 이상 생산된다(FAO의 통계에 의함). 또 리투아니아도 국토 면적이 6만5200평방킬로미터(일본의 1/6)로 작으면서 생산은 일본의 2/3 정도나 된다. 메밀의 기원지는 중국이라 하는데, 언제 어떻게 유럽에 전해졌는지 연구의 여지가 남아 있다.


'목장'이란 이름은 물론 와츠지에 의한 것인데, 이 시리즈 첫번째 권에서 사사키 다카아키 씨와의 대담에서도 화제가 되었듯이 와츠지는 유럽의 풍토를 운운할 수 있을 만큼 유럽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1927년 3월, 마르세이유에 상륙한 뒤 조금 여행만 한 뒤에는 독일의 베를린에 체류했다. 확실히 여러 번 채류한 파리나 추위를 피할 겸 이탈리아 각처를 돌아다니는 등 유학 시절의 와츠지는 독일 이외의 유럽 각지를 방문하지만, 남유럽이나 북유럽, 동유럽 등은 거의 아무것도 몰랐던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풍토를 '목장'의 풍토라고 일별한 바는 와츠지가 천재인 이유도 있고, 또 육식 사회인 유럽이란 인식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사막' 풍토의 목축 


현재 '사막'의 풍토는 그 생업에 비추어 말하면 '유목의 풍토'라고 부르는 것도 가능한 풍토이다. 물론 건조한 정도가 가장 심한 토지에서는 가축의 먹이가 되는 약간의 풀도 없고, 온갖 종류의 생업을 거절하는 환경도 존재한다. 와츠지의 '사막'이란 이와 같은 인상의 풍토였다고도 할 수 있다.


사막이라고 한마디로 이야기하지만, 사막에는 흐름모래의 사막도 있다면 '고비' 같이 자갈의 사막도 있다. 또한 그곳은 물이 없기 때문에 식물이 살지 못한다고만 말할 수 없고, 1년에 한 번 또는 몇 년에 한 번 대량의 눈 녹은물이 홍수를 일으켜 근처를 물에 잠기게 하기도 한다. 식물의 생육이 보이지 않는 건 토양에 포함된 염 탓이다(佐藤, 渡邉 2009). 이 책 제2장에서 쿠보타 쥰페이窪田順平 씨가 상론하고 있듯이, 사막의 실태는 우리 일본인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복잡하다. 


유목이란 여러 가족이 단위가 되어 소, 말, 양, 염소 등의 유제류의 무리를 이동하면서 관리하는 생업을 말한다. 유목민들은 가축의 무리를 관리할 때 갓 태어난 새끼를 '인질'로 삼거나, 무리를 통제한다. 새끼를 '인질'로 삼는것으로 어미의 젖을 수탈하는 일도 가능하다. 흔히 유목민은 가축의 고기를 얻는다고 생각하지만, 고기를 얻는 행위는 가축을 죽여 버리는 것이기에 그들은 가축을 많이 죽이는 일은 하지 않는다. 다만 수컷은 거세하여 고기용으로 사용하는 기술이 등장한다.


유목의 기원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의 대립된 견해가 있다. 마츠바라 마사키松原正毅 씨는 "(인류가) 야생의 유제류 무리를 뒤쫓으면서 무리에서 떨어진 개체를 수렵의 대상으로 삼았을 것이다"([유라시아에서 유목민의 역사적 역할] 2005년 3월 18일, 국립민족학박물관)라고 서술하며, 수렵이라는 바탕에 거세와 착유라는 기술을 실어서 유목이 성립했다고 한다. 한편 후지이 스미오藤井純夫 씨와 혼고 히토미本郷一美 씨는 유목은 이동 목축의 발전형태이며, 그 기초에는 원시농경이 있었다고 생각한다(예를 들면 혼고 [가축화의 초기 과정과 유목의 시작], 일본인류학회 진화인류학분과회 제18회 심포지엄, 2007년 6월 16일, 교토대학). 대립하는 이들 두 가지 견해는 당연히 농경과 목축 어느 쪽이 일찍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도 대립된 견해를 보여준다. 전자는 유목을 수렵의 계속이라 보기에 유목이 일찍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한편 후자는 논리적이고 필연적으로 농경이 유목보다 먼저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가축화와 초기 농경에 대해서는 이 책 제1장에서 아리무라 마코토有村誠 씨도 상론하고 있기에 그쪽도 참조해 주시기 바란다.


농경민과 유목민은 단순히 기후의 차이에 의하여 그 생활역을 달리하고 있는 건 아니다. 유목민들은 가축의 무리를 재산으로 가진다. 한편, 농경민의 재산은 토지이다. 두 가지 생업은 근본적으로 다른 논리를 가지고 있다. 토지를 농경민이 점유하고, 목초에 대신하여 작물을 심어 버리면, 유목민의 가축 무리는 살아갈 수 없게 된다. 반대로 유목민의 가축 무리가 작물의 밭을 불시에 덮치면, 몇개월 걸린 노력은 일순간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유목민과 농경민은 몇천 년 동안 항상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양자의 관계가 완전히 적대적인 관계였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양자는 교역을 통하여 생존에 필수인 것을 서로 얻어 왔다. 유목민이 제공한 건 소금, 젖 등의 산품, 농경민이 제공한 것은 곡류, 일용품 등이었다. 농경민과 유목민은 이처럼 서로 대립하면서도 보완하는 복잡한 관계에 있었다.


근현대 국가의 탄생은 지구에 모든 토지를 국경이라는 선으로 분단하고, 사람과 사물의 왕래를 관리하는 제도를 완성시켰다. 이것은 유목민의 생존 기반을 근저에서 빼앗는 것이었다. 토지를 관리하여 모든 자원을 둘러싸 가둔다는 논리가 승리한 것이다. 그것은 일본 열도에서 논이란 장치에 자본을 투입하는 논벼농사가, 조몬시대 이후의 수렵과 채집에 기초를 둔 자원관리에, 1500년 이상의 시간을 들여서 '승리'한 것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맥류의 풍토


이 책 제3장 Ⅱ에서 가토 켄지加藤鎌司 씨가 상세하게 적고 있듯이,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소하묘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그 근방에 사람이 살며, 목축을 수반한 농업을 경영하고 있었단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곳에는 지금보다 훨씬 많은 물이 있어 숲이 전개되고, 풍부한 생태계가 있었단 것도 필시 사실일 것이다. 이러한 대량의 물의 존재, 숲의 존재는 우즈베키스탄 남부의 달베르진 테페 유적(기원후 2세기 무렵부터 몇 세기 동안)에서도 시사된다. 그 중세의 유구에서는 과일의 씨앗 등에 섞인 다량의 벼 종자가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모두에서도 언급했듯이 그 시기는 정확히 현장 삼장의 인도 여행 무렵에 해당한다. 현장이 이 땅을 여행했을 때, 쌀을 먹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천년의 단위에서 그 과거를 돌아볼 때, '사막'의 풍토는 지금의 그것과 같이, '목장'의 풍토와 엄격히 구별할 수 있는 건조, 반건조의 풍토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쩌면 와츠지가 말한 '목장'과 '사막'의 풍토를 보충하는 광대한 '맥류의 풍토'라고도 부를 만한 풍토가 전개되어 있었을 것이다. 요컨대, 유라시아의 풍토가 이 시대에는 세 가지로 나뉘어 있던 것이 아니라, '벼의 풍토'라고도 부를 만한 계절풍의 풍토와 '맥류의 풍토' 두가지로 나누어 있었다고 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맥류의 풍토'가 지닌 역사적 변천에 대해서는 많은 검토 과제가 남아 있다. 그들의 농업이 어떠한 농업이었을까, 특히 목축에 대한 의존도가 어느 정도였을까, 또 그 목축은 지금의 유목과 같았던 것일까? 그 주변의 숲의 규모는 어느 정도의 것이었을까? 또한 물 수지가 어떠했을까? 이러한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자료를 우리는 아직 준비하고 있지 않다. 




맥류라는 식물


그런데 '맥류의 풍토'라고 했을 때 그 '맥류'란 어떤 것일까? 율무나 메밀을 별도로 하면, 맥류(작물과 식물로서 의론하는 경우, 이 책에서는 '맥류'라고 표기한다)란 보통 '가을에 심어서 다음 해의 봄에 수확하는 두해살이 벼과의 곡물'을 두고 말한다. 다만 기후가 매우 한랭한 지역에서는 '춘파형'이란 특수한 품종을 사용하는, 봄에 씨앗을 심어서 그 가을에 수확하는 봄파종의 재배법을 취하는 일도 있다. 식물이란 면에서 맥류에 대하여 말한다면, <맥류의 자연사> 안에서 카와하라 타이하치河原太八 씨가 상세하게 적고 있듯이, 맥류는 벼과 안의 여러 계나 속에 걸치는 곡류의 총칭이다.


다만, 이들 맥류 사이에는 그 중요성에서 서열이 존재한다. 예를 들면 생산량이란 관점에서 보면, 밀의 지위는 다른 것에 비하여 압도적으로 높다. 더욱이 같은 밀에서도 6배성의 빵밀의 지위는 다른 듀람밀이나 일립밀(Einkorn wheat)보다도 뚜렷하게 높다. 그렇다고 하지만 보리의 두줄보리처럼 양조용으로 특화되어 다른 걸로 대신할 수 없는 지위를 구축한 것도 있다. 또 현대에 들어오면 종을 넘은 교배에 의하여 완전히 새로운 종이 만들어지는 사례도 나온다. 예를 들면, 밀과 호밀의 교배에서는 라이밀(triticale)이 만들어져 일부 실용적으로 쓰이고 있다. 또한실험적으로는 보리와 밀의 잡종도 만들어져, 가까운 장래에 이러한 종 사이의 서열에 변경이 더해질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이러한 서열에는 각각의 종의 역사가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빵밀의 압도적 우위의 이면에는 그 높은 적응성이 있다. 빵밀은 지금으로부터 7500-8000년 정도 전에 지금의 아나토리아부터 카스피해의 남안 지대에서 엠머밀이라 불리는 4배성 품종과 그 밭에서 잡초로 자라던 야생 염소풀이 자연교배하여 탄생했다고 한다. 즉, 거리가먼 두 가지 종의 유전자를 가지는 것으로, 밀은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는 높은 적응성을 획득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라이밀은 츠지모토 히사시辻本壽 씨에 의하면 그것 자신이 잡초였던 것이 한랭지에서 작물로 '승격'된 것이라고 한다(츠지모토 [밀밭의 수반 잡초 라이밀의 진화], <맥류의 자연지>). 아마 밀밭의 잡초로서 수반되었던 라이밀이지만 조건이 나쁜 토지로 전파되었을 때, 곡물인 밀이 원래의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사이에 라이밀의 생산성이 상대적으로 높아져 이윽고 사람들은 라이밀 가운데 뛰어난 종을 선발하여 작물의 모습을 잡아 나간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고 하면, 라이밀에는 본래 '잡초'였다는 의미에서 그늘에 사는 사람의 인상이 따라다녔기에, 이것도 서열화에 영향을 드리우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작물과 잡초의 관계는 벼에도 꼭 들어맞아 흥미롭다. 벼에는 인디카, 자포니카라는 두 가지 아종 수준의 품종군이 존재하는데, 인디카는 최근의 연구에서는 온대 태생의 자포니카를 열대에 가지고 들어갔을 때 그곳에 있던 미지의 야생종과 교배를 일으켜 성립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佐藤 1996).


또한 '맥류의 풍토'에서도 유럽에서는 16세기 이후 감자를 가지고 들어가, 식사에 혁명이 일어났다. 특히 밀의 생산이 어려웠던 북유럽으로 침투한 데에는 놀라운 것이 있었다. 이 감자의 급전개에는 19세기 중반의 아일랜드를 중심으로 한 '감자 기근' 등의 부산물도 수반되는데, 그런데도 전체를 보면 감자의 공헌은 지극히 크다고 할 만하다.




'계절풍' 풍토의 맥류들


그런데 맥류의 어느 종은 꽤 이른 시기부터 '계절풍'의 풍토에도 침입한다. 특히 보리는 조몬시대에 일본 열도까지 이르러, '계절풍'의 풍토로 건너온 것이 상당히 일렀다고 미루어 생각된다. 이 책 제3장 Ⅰ에서 타케다 카즈요시武田和義 씨도 지적하고 있지만, 매우 흥미로운 것으로 계절풍 지대에서 재배되는 보리는 그 유전자형에서 상당히 특수하다(Takahashi 1955). 즉 그들은 전 세계에 분포하는 보리 품종 가운데 특수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그 성질이란 껍질이 잘 떨어지는 성질, 찰기의 성질, 키와 이삭의 길이가 줄어드는 성질 등으로 모두 단지 하나의 열성 유전자의 지배를 받고 있다. 더구나 최근의 연구에서는 '여섯줄 성질'이란 열성 유전자를 상세하게 조사한 바, 세 가지 다른 유전자가 발견되어 계절풍 지대의 보리 품종은 거의 예외 없이 어느 특정 유전자를 가진다고 한다. 


밀의 경우는 보리의 경우만큼 두드러진 사례는 눈에 띄지 않지만, 그래도 동질효소, 몇 개의 DNA 표지 등에서 계절풍 지역에 특이한 유전자형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다만 마카로니밀에 대해서는 인도와 중국 신장 위구르자치구의 일부 지역에서 매우 소수의 품종이 알려졌을 뿐, 계절풍 지대에서 재배의 역사는 대부분 없다. 바꾸어 말하면, 계절풍의 밀 품종은 강한 '병목 효과'에 의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즉 맥류는 매우 작은 집단으로계절풍 지대에 가지고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건너온 경로는 여러 가지였을 것이다. 보통밀에 대해서는 <맥류의 자연지>에서 가토加藤 씨는 이른바 실크로드와 히말라야 남쪽 기슭의 경로라는 적어도 두 가지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보리에 대해서도 일찍이 코니시小西(1986)는 두 가지 이상의 도래 경로를 보여준 적이 있다.


계절풍의 풍토에 도달한 맥류는 그곳에서 특수한 식품을 탄생시켰다. 기울은 그 전형적인 것이다. 기울은 밀가루 그것도 단백질 함량이 높은 강력분으로 만들 수 있다. 그것을 물로 개어 완자로 만들어, 잘 반죽하고서 그 전분을 정성껏 씻어 없애면 뒤에 글루텐을 주성분으로 하는 단백질이 남는다.  이것이 이른바 '생기울'이다. 


계절풍 풍토로 건너온 건 강한 병목 효과에 의한 특수한 품종군을 성립시켰다. 그것과 함께 특수한 맥류 농경 문화와 식문화도 완성시켰다.





풍토와 고대 문명


풍토는 고대 문명의 성립과 쇠망과 깊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교과서에서는 세계의 고대 문명으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네 곳이 소개되는 일이 많다. 최근에는 이것에 장강의 문명을 더하여 5대문명 등으로 하기도 한다. 이 다섯 가지 문명을 지도 위에 기재하고 새삼스럽게 조망해 보자. 우선 이들은 모두 온대지역의큰강 어귀에서 발달한 문명이다. 자주 지적하듯이, 장강 문명을 제외한 네 곳의 문명이 번영한 지역은 지금은 모두 건조하고, 인구 지지력을 잃었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사막'의 풍토와 '목장'의 풍토가 접한 토지에성립한 문명이다. 또한 인더스 문명과 황하 문명은 '계절풍'과 '사막'의 풍토에 접한 토지에서 탄생한 문명이다. 요컨대, 네 곳의 고대 문명은 모두 '맥류의 풍토' 남과 동의 가장자리 부분, 그것도 와츠지가 말한 '사막'의 풍토 가장자리 부분에 있다. 고대의 문명이 시작부터 메마른 토지에서 성립되었을 리는 없다. 그러하면 '사막'의 풍토는, 적어도 그 일부에 대해서는 고대 문명이 파탄된 뒤에 등장했던 풍토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도대체 '사막'의 풍토를 만들어 냈던 주체는 누구였을까?


이 물음에, 예를 들어 기후학자라면 수천 년의 기간으로 생기는 건조화를 그 원인으로 들 것이다. 또한 야스다 요시노리安田喜憲 씨(Yasuda 2005)처럼 연료의 확보와 밭의 개발을 위하여 숲을 베어버린 일이 기후변화를 야기하고, 그것이 문명을 쇠퇴시켰다는 설을 취하는 연구자도 있다. '기후변화'라든지 '인간 활동' 같은 단일한 요인이 그것만으로 건조화, 사막화를 야기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고, 여러 가지 요인이 서로 원인이 되어 결과를발생시키면서 복잡한 계를 이루고, 그 계가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과정에서 사막의 풍토가 생기고, 또 문명이 명말한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싶다.


다섯 곳의 문명이 있던 지역 가운데 장강 문명이 있던 장강 유역만이 아직도 높은 인구밀도를 가지며, 높은 토지생산성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이것에 대해서는 '벼농사가 맥류 농사보다 환경에 조화롭기 때문이다'라는 지적도있지만, 나는 이 지적에는 신중하다. 왜냐하면 벼농사에 대해서도 보리농사에 대해서도, 현시점에서 그것은 어느쪽이라도 환경에 조화롭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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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2



기고5

찹쌀에서 멥쌀로 

-태국 동북 지역에서 전통 벼농사의 전환     미야가와 슈이치宮川修一





태국 동북의 쌀


인도차이나 반도의 중앙부, 구체적으로는 태국 동북부 및 태국 북부, 라오스, 미얀마 동북부, 베트남 서북부, 그리고 중국 남부에서는 찹쌀을 일상의 먹을거리로 삼는 문화이며 찹쌀의 생산이 널리 행해진다. 와타나베 타다요渡部忠世 씨는 이것을 '찰벼 재배권'이라 이름을 지었다. 태국 동북은 코라트 고원이라고도 부르며, 표고 100-200미터의 완만한 기복이 있는 평원이다. 내륙부에 위치하기 때문에 강우량도 적고, 관개수원이 되는 하천도 적기 때문에 재배에 필요한 물을 빗물에 의존하는 천둥지기 벼농사가 널리 행해지고 있다. 태국 동북의 중부 이북은 타이라오계의 사람들이 많고, 납부에는 타이코라토 및 크메르계의 사람들이 많다. 마치 이 민족 구성에 대응하듯이, 전자는 찹쌀 지대, 후자는 멥쌀 지대로 나뉜다. 즉 태국 동부에는 찹살과 멥쌀 어느 쪽이 주요한 재배품종인지, 또 소비량이 많은지를 나눌 수 있는 경계선을 그을 수 있다는 것이다. 


태국 동북의 중앙에서 약간 서쪽으로 콘깬이란 행정지역이 있는데, 여기도 전형적인 찹쌀 지대이다. 그 지역의 어느 마을을 1980년대 초반에 조사한 바, 20가지 이상의 논벼 품종이 있고 밭벼 품종도 포함하면 30가지 정도의 품종이 마을 전체에서 재배되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찹쌀 품종이고, 멥쌀 품종은 다섯 가지에 지나지 않았다. 밭벼는 모두 찹쌀 품종이었다. 또한 찹쌀의 재배면적은 논벼 전체의 약 90%를 점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태국 동북 전체의 논벼 품종 구성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찹쌀 재배 지대에서는 이 마을과 비슷한 품종 구성이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 마을의 논도 천둥지기로서, 가뭄이나 때로는 근처 하천의 범람으로 홍수 피해를 입어 수확량은 안정되지 않았다. 토양은 모래땅인데 1970년대까지는 비료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확량도 매우 낮았다. 필연적으로 생산된 쌀도 자급용뿐이고, 농가는 3년 분의 소비량을 조달하는 저장량을 가진 쌀창고를 가지고 흉년에 대비하고 있었다. 농가는 어지간히 쌀이 남지 않는 한 파는 일은 없고, 당연히 판매를 목적으로 쌀을 농사짓는다는 건 있을 수 없었다. 이것이 1980년대 중반까지 태국 동북의 찹쌀 지대의 전형적인 벼농사의 모습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이 되면 태국 전체가 눈부신 경제성장을 하여, 태국 동북의 농촌에도 그 영향이 미치게 되었다. 콘깬의 마을에서는 경운기가 보급되고, 화학비료의 사용이 시작되며, 강우 부족일 때는 가솔린 펌프로 하천이나 호수에서 물을 보급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으로 생산량은 증가했지만, 그러했어도 역시 찹쌀을 주체로 한 재배는 변함이 없었다. 안심할 수 있는 자급 벼농사가 되었다. 그런데 똑같은 찹쌀 지대의 마을에서도 멥쌀의 재배가 성행하여, 이 쌀을 왕성하게 판매하는 마을이 동부에서 중부에 걸쳐서 나타났다. 즉 태국 동북의 중앙에 그어져 있던 찹쌀 멥쌀 경계선이 북으로 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찹쌀의 품종 교대


태국 동북에서 일반적인 찹쌀의 조리법은 쪄서 지에밥으로 먹는 것이다. 전날 밤 또는 몇 시간 전부터 물에 불려놓은 찹쌀을 대나무 찜소쿠리에 넣고, 물을 담았던 알루미늄 단지에 집어넣는다. 이것을 불에 걸치고 40-50분 찐다(그림1). 대나무로 만든 뚜껑과 알루미늄 냄비 뚜껑 등을 덮어 놓는다. 잘 찐 지에밥은 일본의 것보다 딱딱하다. 이것은 만들어진 지에밥이 원래 쌀에 대해 1.46배의 무게인데, 일본의 1.6-1.9배에 비해 수분함량이 적기때문이다. 지에밥은 나무 그릇에 쏟아서 식히고, 밥소쿠리에 담는다. 보통은 아침과 저녁 때에 찌고, 아침밥과 점심밥 남은 건 저녁 때 또 다시 쪄서 먹는다(그림1).


그림1 찹쌀을 쪄서 밥소쿠리에 담는다.




예전에는 많은 품종이 있긴 했지만, 쌀창고 안에는 이듬해에 쓸 볍씨 이외는 섞어 버리고, 특히 맛있는 품종 같은건 존재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에는 많은 품종은 모습을 감추고, 대신 개량품종 고코홋크(RD6)가 거의 독점적으로 재배되게 되었다. 마을사람에게 다른 품종을 버리고 이 품종을 택한 이유를 조사한 바, 부드럽고 맛있기 때문에, 아침에 밥을 지으면 저녁까지 부드러워 다시 찔 필요가 없기 때문에 같은 답이 돌아왔다. 마을에 따라서는 수확량이 많기 때문에, 라는 답을 첫째로 든 경우도 있다. 이 품종의 교대 시기는 정확히 찹쌀 멥쌀 경계선이 이동을 개시한 시기에 상당하고 있다. RD6 자체는 197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품종으로 1980년대 초반에는 이미 각 마을에도 조금씩은 재배되었는데, 대규모로 재배된 적은 없었다. RD6가 폭발적으로 증가한 배경은 시대적으로 보아 멥쌀 지대에서 일어났던 멥쌀로의 전환과 공통되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찹쌀 지대에서 멥쌀이 확장되다


1980년대 후반에는 위에서 기술하듯이 전통적인 찹쌀 생산지대의 일부에서 멥쌀 품종의 농사가 확대되는 것이 발견되었다. 


필자가 1991년부터 1994년에 걸쳐서 조사한 태국 동북의 334개 마을의 멥쌀 품종 농사비율과 KKU-Ford 프로젝트가 조사한 1970년대의 행정구역별 멥쌀 품종 농사비율을 비교한 바, 로이엣트, 무크다한, 얀톤 및 본라챠타니 같은 중동부의 여러 지역에서는 그때까지 없었던 40% 이상의 논에 멥쌀 품종을 농사짓는 마을이 발견되고 있음이 밝혀졌다. 북부 여러 지역에서는 대부분이 20% 이하인 한편, 남부의 여러 지역에서는 80% 이상의 마을이며, 이들 지역에서는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었다. 또한 이 조사에서는 완전히 멥쌀을 농사짓고 있지 않은 마을이 6개 마을, 반대로 완전히 찹쌀을 농사짓고 있지 않는 마을이 29개 마을이었다. 이 시점에서는 찹쌀은 RD6가, 또 멥쌀은 카오드크마리 또는 카오차오마리, 카오홈마리 같은 소수의 품종이 태국 동북의 논을 뒤덮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우량해진 카오드크마리 105(KDML105)는 1950년대 말에 나타난 품종인데, 맛이 좋은 데다 물 부족에도 강하여서 천둥지기가 많은 태국 동북에서 일찍부터 퍼졌다.


동부에 있는 얀톤의 마을에서 한 조사에 의하면, 1970년대 말까지는 찹쌀을 자급용으로 재배하기만 했지만, 1980년대에 찹쌀인 RD6가 화학비료와 함께 도입이 되면서 논벼 생산량은 크게 상승했다. 그 결과 소비량도 웃도는 잉여가 생겼지만, 이들은 저장으로 돌리지 않고 자가소비분을 제하고 대부분을 판매하게 되었다.


이처럼 기술 개량은 많은 찹쌀 재배 마을에서 진행되었는데, 콘깬의 마을에서는 자급의 강화를 선택해 어지간히 남을 때가 아니면 판매는 하지 않는다는 방침이 변하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차이의 이유는 천둥지기 특유의 재배 입지조건, 즉 강우의 안정성에 차이가 있다. 태국 동북의 동부부터 북부에 걸쳐서는 남부와 서부보다 강우량이 많아 해마다 안정적인 생산을 기대할 수 있다. 얀톤의 조사 마을에서는 1980년대 말에는 찹쌀에 대신하여 멥쌀의 재배가 증가한 결과, 자가의 식용 찹쌀도 부족해져 찹쌀을 구입하는 농가도 나타났다. 이 역전 현상은 쌀의 가격차에 의한다. 나카타 요시아키中田義昭 씨에 의하면, 1990년대 초반 같은 마을에서 나락의 판매가격은 찹쌀이 12킬로그램당 40바트 안팎이었는데 반해, 멥쌀은 50바트 안팎이라 약 10바트 높았다. 어차피 판다면 농가는가격이 높은 멥쌀을 선택한다. 이것에서 비싼 멥쌀을 팔아서 싼 찹쌀을 산다는 경영도 성립할 수 있었다. 이 가격차는 태국 국내에서는 일반적이다. 특히 방콕을 중심으로 하여 많은 인구를 감싸안는 태국 중부는 멥쌀 지대이며, 멥쌀의 수요는 매우 많다. 게다가 세계 최대의 쌀 수출국으로서, 멥쌀에 큰 '흡인력'을 주고 있다. 태국 홈마리 쌀의 상품명은 세계에 울려 퍼지고 있다.


쌀의 안정적 다수확은 화학비료의 투입 증가와도 연결되어 있다. 1990년대 초에는 얀톤의 한 마을의 화학비료 투입량은 콘깬의 마을에 비하여 거의 3배에 달했다. 기존 천둥지기에서는 가뭄에 의하여 투입이 쓸데없어지는 일이 많기에 화학비료의 적극적인 투입을 행하지 않는 일이 많지만, 강우량이 많은 지대에서는 이 우려가 적다.


그와 같은 대량의 비료를 투입하는 자금의 조달에 대해서도, 마을의 입지가 관계되어 있다. 얀톤의 경우 토양의 질에 대한 관계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활발해졌던 카사바 같은 상품작물 재배가 곤란했다. 자연히 농가외수입을 찾아 방콕으로 돈을 벌러 대량으로 이주가 행해졌다. 공장 상점 등이 많은 콘깬과는 달리, 통근할 수 있는 사무소가 적은 얀톤에서는 마을사람의 거의 반이 돈을 벌러 떠나, 가계의 현금 수입의 거의 절반은 돈벌이 이주에 의하여 산출되었다. 이 돈이 화학비료 등의 투자를 촉진한 것이다. 한편 쌀 판매에 의한 수입은 13%로, 돈벌이 이주 이외의 고용노동인 20%보다 적었다. 벼농사 경비는 분명히 판매에 의한 소득을 상회했다. 상품작물로서의 멥쌀은 그런대로 수입을 가져오고는 있지만, 실제로 멥쌀 생산은 돈벌이 이주에 의하여 지탱되어 왔다고 말하는 편이얀톤의 벼농사 구조이다. 


높은 가격의 멥쌀 판매를 목적으로 하는 농가는 많다. 예전부터 멥쌀을 재배하던 지대에서도 화학비료 등의 투입으로 생산은 높아져, 현재 태국 동북 전체에서는 찹쌀의 생산량을 멥쌀이 뛰어넘었다고 이야기된다. 그럼에도 농가 생산지의 가격차는 2배 정도까지 벌어져 있다.


이처럼 원래는 찹쌀 주체의 생산이었던 농촌이 멥쌀 생산으로 전환했지만, 마을 안에서 멥쌀의 용도는 판매와 약간의 면 가공에 제한되어 있다. 찹쌀은 밥쌀 외에 가금류의 사료, 돼지의 사료, 승려에게 시주, 행사 의례, 물물교환과 다방면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농촌 사회에서는 높은 가치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멥쌀 소비자의 증가와 전기밥솥


그런데 찹쌀 지대인 태국 동북에서도 도시의 식당에서는 멥쌀밥이 보통이며, 태국 동북 요리전문점에 가지 않는 한 찹쌀의 지에밥은 나오지 않는다. 농촌 출신자가 도시에 살면 집에서도 멥쌀을 먹게 된다고 한다. 


태국 동북의 전통적인 멥쌀 취사는 이른바 끓인 뒤 물을 버리고 찌는 방법으로 분류되는, 물을 미리 많이 붓고서 밥을 짓고 도중에 뜨거운 물을 버리고 다시 가열하는 것이다. 콘깬에 주재하는 시라이 유우코白井祐子 씨에 의하면, 예전에는 아래와 같은 세 가지 방법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가장 오래된 방식은 구이 요리의 단지(모딘)를 사용하는 것이다. 이 단지는 몸통의 아래쪽이 크고, 주동이가 점점 오므라진 , 주둥이가 넓은 삼각 플라스크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 수순은 다음과 같다. 


  1. 쌀을 씻는다. 일본의 쌀로 밥을 짓듯이, 전날 밤부터 물에 불려 놓는 건 하지 않는다. 쌀로 밥을 짓기 직전에대충 더러운 걸 건지는 정도로 쓱 씻는다.

  2. 씻은 쌀을 모딘에 바로 넣는다. 쌀과 물의 비율은 햅쌀의 경우는 쌀 1에 대해 물이 3. 묵은 쌀의 경우는 쌀의 상태에 따라서 물의 가감을 많이 한다. 쌀과 물을 넣으면 냄비를 불에 올린다.

  3. 가끔씩 뒤섞어서 쌀이 모딘에 들러붙지 않게 한다. 뒤섞으면서 쌀밥이 다 되었는지를 확인한다.

  4. 쌀이 부드러워지면 물을 덜어낸다. 덜어낸 물은 버리지 않고 소금을 쳐서 마신다. 이것은 가장 맛있다.

  5. 물을 따라낸 뒤, 불을 약불로 줄여 다시 15분 정도 끓인다.

  6. 쌀의 맛있는 향기가 나고, 손을 대 쌀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러운 상태가 되고, 쌀의 색이 밥을 짓기 전과 달리 흰색이 되고, 쌀이 터졌는지를 본다. 불에서 내리고 완성된다.


또한 식힌 밥은 그대로 모딘에 남겨 놓기에, 또 불에 올려 다시 데워 먹는다. 또한 누룽지(카오탄)이 생기는데,이것도 또한 맛있다.


이 흙으로 만든 단지를 대신해 알루미늄 냄비를 사용하는 방법이 퍼졌다. 이 방법에서 쌀밥을 짓는 수순은 흙으로 만든 단지와 완전히 똑같은 경우 외에 뜨거운 물을 덜어내지 않고 밥을 짓는 방식도 행해졌다. 그 경우에는 최초에 넣은 물의 양을 적게 한다. 그 수순은 모딘의 경우와 3단계까지는 똑같은데, 물의 양이 줄어들면 불을 약불로 줄인다. 약불로 줄인 뒤에는 모딘과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밥을 짓는다. 이 경우도 누룽지가 생기고, 맛있게먹을 수 있다.


게다가 그뒤 알루미늄 찜기를 사용하는 방법도 행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수순은 다음과 같다.


  1. 쌀을 씻는다. 여기는 모딘과 똑같다.

  2. 찜기의 가장 아래 단에 물을 절반 분량보다 좀 적은 듯하게 넣는다. 씻은 쌀을 작은 차 공기에 몇 개 담아서 찜기의 2단째에 넣는다. 미리 차 공기에 담아서 밥을 지으면, 뒤엎어서 예쁜 모양으로 그릇에 담을 수 있다.

  3. 쌀의 맛있는 향기가 나고, 손을 대 쌀이 부드러운 상태이며, 쌀의 색이 밥을 짓기 전과 달라지고, 쌀이 터졌는지 등의 모습에서 쌀밥이 다 되었는지 보고 불에서 내린다. 


다만 이 밥짓는 법에서는 누룽지도 생기지 않고, 쌀의 미음도 마시지 못하게 된다.


현재 태국 동북의 가정에서 멥쌀로 밥을 짓는 건 대부분이 전기밥솥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찹쌀 지대의 마을에 있는 집에서도 부엌에서 전기밥솥을 보는 일도 많아졌다. 1991년 무렵, 콘깬의 마을에 구면의 집에서 전기밥솥을 보고서 이유를 들으면 자식이 돈을 벌러 가서 있던 태국 중부에서 며느리를 데리고 돌아왔다고, 며느리는익숙한 멥쌀을 먹기 위하여 전기밥솥도 가지고 왔다고 했다. 전기밥솥이 없어도 화덕에 걸었던 냄비로 멥쌀밥을 지어도 괜찮기는 하지만, 스위치를 누르면 알아서 밥을 지어주는 점이 마을에서 읍의 사무소로 통근하는 등으로 바빠진 마을의 청년층에게 선호되는 것이다. 이제는 찹쌀도 가스렌지 위에서 끓이고 찜소쿠리를 놓고서 찌고 있는 시대이다. 땔감을 모으는 수고와 숯불을 피우는 수고도 아까운 것이다. 후쿠이는 읍내에 살게 되면, 찹쌀을 찌는 수고와 연료의 입수가 곤란하기 때문에 멥쌀을 먹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림2는 태국 동북과 똑같은 멥쌀을일상적으로 먹고 있는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의 가전제품 상점의 판매대인데, 실로 다종다양한 밥솥이 팔리고 있다. 게다가 전기 찜기도 늘어서 있다. 점원은 이것으로 지에밥도 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사용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상 기술했듯이, 전통적인 '찰벼재배권'이라 볼 수 있었던 태국 동북에서도 찹쌀을 대신하여 멥쌀의 재배가 진행되고 있다. 그 큰 원동력은 전기밥솥으로 상징되는 듯한 근대적인 소비형태의 확대와 화학비료로 상징되는 듯한 근대적인 재배기술의 보급에 있었다. 거기에다가 쌀의 가격차를 만들어 내고 있는 국내 도시 및 세계의 거대한 멥쌀 수요가 이 움직임을 강하게 추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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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2



3장

화전과 벼농사 

-다양하고 지속가능한 벼농사를 추구하며     카와노 카즈아키川野和昭




시작하며


'화전과 벼농사'의 조합을 제시한 찰나에, 일종의 위화감을 느껴 버리는 것이 자연스런 감정일 것이다. 그건 일본열도의 '화전'이 '잡곡과 뿌리작물'의 농경이고, '벼농사'는 '논벼농사'의 농경이라 상식적으로 이해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상식은 '벼농사 문화권'이라고도 불리는 공간적인 퍼짐새 안에서 이해한다면 '일본 열도'라는 한정적이고 매우 지역적인 상식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즉, '벼농사'를 '작물인 벼의 재배농법'이라 생각한다면, '논에서 하는 재배'만이 아니라 '화전에서 하는 재배'나, 더 나아가 '밭에서 하는 재배' 또는 '화전 같은 논과 천둥지기에서 하는 재배' 같은 다양한 재배를 시야에 넣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 열도에서 그러한 '벼농사'에 대한 비극적인 오해가 생긴 건, '논벼농사'로 획일화되어 온 정치적, 역사적 경위가 있다. 그와 동시에, 역사학을 시작으로 민속학이나 고고학 등 인문과학 분야의 연구도 오랫동안 '논벼농사 사관'이라고도 부르는 시점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온 점과 관계가 없지 않다. 


다만, 그러한 안에서도 일본 열도의 '벼농사'에 관해서 '논벼농사'를 넘어 화전과 밭농사, 천둥지기논의 벼농사도 논의되어 왔다. 예를 들면, 조엽수림 문화를 계속 제창해 온 사사키 타카아키 씨는 조몬문화 안에서 화전 내지는 두둑과 고랑을 수반하지 않는 천둥지기논에서 하는 벼농사가 존재했을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민속학의 츠보이 히로후미坪井洋文(1929-1988)는 화전과 덩이뿌리와 붉은쌀을 핵심어로 삼아 '논벼농사 문화' 외에 '화전, 밭농사 문화'의 존재를 설명하고, 다양한 일본 문화의 모양을 주장했다. 그리고 사토 요이치로 씨는 농학의 입장에서 휴경을 수반한 밭농사의 요소가 강한 벼농사의 존재를 계속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러한 다양한 의론을 근거로 하면서 '일본 열도의 화전과 벼농사', '라오스 북부의 화전과 벼농사'를비교하는 형식으로 '논벼농사'를 상대화하고, 다양한 '벼농사'의 모양을 살펴보겠다.





일본의 화전과 벼농사


일본 열도에서 화전 벼농사에 대한 사례 보고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좋다. 겨우 화전 기술로 재배하는 밭벼에 대한 기술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건 19세기 초 무렵에 사츠마번이 편찬한 농업전서의 성격을 지닌 <성형도설成形圖說>의 다음 기록이다. 즉, 이 책 권16의 '밭벼(畠稻)'에 올밭벼에 대한 해설에 보이는 "츠치카라地道는 첫째 숙토를 좋아하고 새땅을 좋아지도록 황야의 실풀을 베어 뒤집어 흙과 함께 쌓아서 불을 태워 재로 만들어 심는데 12년은 훌륭히 거두고 그 뒤는 땅을 묵혀서 바꾸어 놓는다"라는 서술에서 나타나는 건 황야, 땔감용 풀, 불태우기, 재, 휴경이란 화전의 기술적 요소를 모두 갖춘 벼의 경작이다. 이건 틀림없는 화전의 연장선에 있는 '화전 벼농사'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논벼농사와는 별도의 밭벼 재배가 가고시마 지역에서 행해졌다. 


또한 민속 전승에서도 '화전 벼농사'를 확인할 수 있다. 2008년에 방문했던 미야자키현 사이토시西都市 카미아게上揚의 하마사 리쿠키濱砂陸紀 씨(1931년생)가 체험했다는 다음의 전승은 틀림없는 화전 벼농사였다.


카미아게에서 화전은 코바라 부르고, 가을에 나뭇잎이 낙엽이 되기 시작하기 전에 벌채하여 겨울을 나고 이듬해 5월에 태우는 아키코바와 모내기가 끝날 무렵에 벌채하여 음력 7월 보름 전후에 태우는 나츠코바라는 두 방식이 있었다. 아키코바는 니이코바(새로운 코바)라고도 부르며, 밭벼라든지 피라든지 조를 심었다. 코바에서 재배한 밭벼에는 메벼와 찰벼 두 종류가 있으며, 5월 초순에 불이 날리지 않도록 주변을 청소하고, 욧카시라(경사면 위쪽의 가장자리)의 바람이 불어가는 쪽에서 불을 붙이고, 요코지리(경사면 아래쪽의 가장자리)로 향하여 불태워 내려간다. 태우면 곧바로 두둑을 지어서 골을 타고, 거기에 볍씨를 곧바로 파종했다. 풀베기 작업은 메벼는 풀 길이가 30cm 정도로 성장할 무렵에 한 번 한다. 찰벼인 붉은찰은 제초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수확은 10월 무렵에 낫으로 밑동 베기를 하고, 걸어서 말렸다. 멧돼지가 뛰어올라 먹기 때문에, 상당히 높게 걸어서 오랫동안 코바에 놔두고, 집에 가지고 돌아와서 탈곡기로 탈곡했다.


찰벼인 '붉은찰'이라 부르는 알곡이 붉고 쌀이 흰 벼는 코바에서도 논에서도 재배할 수 있는 벼로서, 키가 크고 볏짚 세공에 편리했다. 현재에도 시로미銀鏡(사이토시)의 나카타케 에츠코中武悅子 씨는 볏짚을 시로미 신사에 금줄 용도로 봉납하기 위해 논에서 붉은찰을 재배하고 있다. 또한 카미아게의 나스 토시타카那須利隆 씨도 아직 논에서 붉은찰을 재배하고 있다. 이러한 코바는 1972년 무렵까지 행하였다.


또, 이러한 밭벼의 화전 재배에 대해서는 인근 마을인 니시모로카타군西諸県郡 수키촌須木村(현 고바야시시小林市) 토리타에서도 행했던 것이 벼잎 세포화석의 분석에서 벼농사의 기원을 연구하고 있는 농학자 후지와라 히로시藤原宏志 씨에 의하여 보고되었다. 후지와라 씨는 평균 경사도 30도인 소나무숲의 흙속에서 벼잎 세포화석이 검출된것에 의문을 가지고, 마을의 노인에게서 화전에서 밭벼를 재배했던 일을 캐물어 알아내고 재현을 시도했다. 그 품종명은 메라고메라고 부르며, "화전 같이 물이 적은 조건에서도 농사지을 수 있고, 과습한 저습지 논에서도 재배할 수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그 고장 사람에게는 화전 벼농사와 밭벼농사(밭에서 하는 밭벼 재배)를 구별할 필요 등이 없음을 깨달았다"(괄호는 필자가 보충, 이하동문)라고 기술한다.


1864년에 기록된 <오오스미국大隅國 다카야마高山 향수옥가郷守屋家 경작 일기>에는 "하나  붉은볍씨는 콩밭과 아울러 심어 벼농사에 들어간다. 단 4월 16일 소만부터 5월 2일 망종까지"라는 기사가 있으며, 현재의 가고시마현 키모츠키군肝付郡 키모츠키정肝付町 다카야마高山에서는 붉은벼를 논에 곧뿌림하는 것과 동시에, 콩밭 안에서 농사짓는 걸 살필 수 있다. 또한 가고시마현 히오키시日置市 긴포우정金峰町 일대에서는 밭에 재배되는 밭벼가 '메라'라고 불리고 있다. 이들은 미야자키현 사이토시 카미아게의 사례와 후지와라 씨의 지적, 게다가 <성형도설>이 보여주었던 수륙양용 밭벼의 기사와 합하여 매우 다양한 벼농사의 존재를 가르쳐 준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츠보이 히로후미는 화전과 덩이뿌리와 붉은쌀을 핵심어로 삼아 일본 문화의 다양성에 다가갔다. 특히 만년의 저작 <벼농사 문화의 다원성 -붉은쌀의 민속과 의례->에서는 그 요약으로 '농경문화 연구의 과제'라는 항목을 마련해, "민속 문화를 다원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시점을 더욱 진전시켜, 벼농사 농경문화의 다원성까지도 문제 삼는 것이 새로운 문제이다."라고 지적한다. 그 문제 삼을 만한 요점의 하나로 '일본의 벼농사 사회(논벼농사 사회) 체제의 틀에 꼭 들어맞지 않는 농경사회가 존재해 왔다. 화전, 밭농사 사회이다. (중략) 화전, 밭농사 사회의 사람들 사이에는 흰쌀과 (붉은쌀이) 대등한 가치를 가진 것이라 인식되고 있었다'는 것을 들어, 농학과 고고학을 포함한 '학제적 연구'를 진행할 것을 제언한다. 그러나 츠보이가 제기한 문제는 2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진전하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렵다. 일본의 벼농사 문화 또는 일본 문화 그것의 다양성을 분명하게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일본 열도에서 행한 화전 연구의 성과를 기반으로, 지금까지 수집된 자료를 조금 더 주의 깊게 다시 읽는 작업과, 새로운 청취자료의 발굴에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하는 일이 츠보이가 유언처럼 남겼던 "동남아시아의 여러 지역 (중략) 의 민족과 비교하는 일'이란 기초적 자료를 정돈해, 비교하는 작업을 가능하게 하는 길이란 점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다음으로, 동남아시아 대륙부의 북부 산악지대에 속한 라오스 북부의 화전과 벼농사에 대하여 서술하겠다.





라오스 북부의 화전과 벼농사


라오스 북부의 산악부에 사는 캄, 타이, 라오, 몽, 야오, 아카 등 다양한 소수민족은 논을 전혀 만들지 않고 화전에서만 벼농사를 짓고 있는 곳, 화전 벼농사에 논벼농사를 도입하고 있는 곳, 찰벼를 중심으로 재배하는 곳, 메벼를 중심으로 재배하는 곳 등 다양한 벼농사를 짓고 있다. 여기에서는 그 다양한 벼농사의 상태를 화전 벼농사를 중심으로 그 재배기술, 의례, 신화를 언급하면서 기술해 보도록 한다. 



'새로운 해'의 개시와 풍년 기원

 

'새로운 해'를 맞이한다는 것은 화전 벼농사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예를 들면, 캄족의 사례를 보자. 루앙남타주 남타군 프랑 마을은 루앙남타와 태국 국경의 보케오주 호이사이를 연결하는 국도 3호선에 따라서 있는 캄쿠엔족이 사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서는 12월의 초승달이 나오는 날, 즉 12월 초하루부터 3일 사이에 묵은 해에서 새로운 해로 바뀌는 '옷'이라고 부르는 축제를 한다. 이것은 '푸쿤'이라 부르는 선조의 혼에게 덩이뿌리를 바치는 제사이다. 마을의 모든 가족이 밭의 벼를 마을의 곳간으로 옮겨 들이면, 그해 밭에 심어 놓았던 덩이뿌리 종류를 수확한다. 벼의 수확이 끝나기 전에 스로(토란)과 쿠와이(다이죠우)를 수확하여 먹으면 푸쿤이 노하여 가족을 병에 걸리게 하거나 죽게 하거나, 로이 라왕(정령, 우레)을 밭에 떨어뜨려 벼의 수확을 나쁘게 한다고 한다.


'옷'을 행하기 전날 밭에 가서 밭을 태운 직후의 폿크 카통(태우다·알)이라는 덩이뿌리를 심는 의례로 심은 스로(토란)을 수확하여 밭의 곳간에 보관한다. 그뒤 밭의 덩이뿌리 종류를 수확하고 ('옷'에 쓰일 분량만이라도 좋음) 집으로 운반해 돌아온다. 밤이 되어 수확해 온 덩이뿌리 종류를 쪄 놓는다. 


다음날 아침, 푸쿤 앞에 식탁을 놓고서 그 위에 찐 덩이뿌리 종류나 라오하이(검은쌀의 양조주) 등을 바치고, "새해가 되었습니다. 덩이뿌리를 드십시오. 올해도 가족이 병에 걸리지 않고, 수확도 풍성하게 해주십시오"라고 기원하고, 그뒤 가족 전원이 덩이뿌리를 먹는다. 이때 바친 덩이뿌리 종류 중에서도 스로(토란)과 쿠와이(다이죠우)가 공물의 중심이다.


이것은 스로(토란)과 쿠와이(다이죠우)를 선조의 혼이 드시게 하여 가족의 안녕과 화전에 심는 작물의 풍년을 기원하는 것을 나타낸다. '옷'에는 온갖 작물 중에서 덩이뿌리가 우선한다. 이것은 츠보이가 일본 열도에서 벼의 떡을 중심으로 하는 '떡 정월(餅正月)'과 대립되면서, 다양한 벼농사 문화의 상징으로 지적한 '덩이뿌리 정월'에 상당한다.


또한, 몽족은 파종 의례부터 수확 의례에 이르는 벼농사 의례를 대부분 행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루안프라방 비엔캄 마을의 몽족에게 벼농사 의례를 하지 않는 이유를 들으면 벼의 수확 이후 12월의 새해에 행하는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제사 때 선조의 혼에게 기원하기에 특별히 의례를 하지 않아도 아무렇지 않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루앙 프라방의 파방군 롱라오 마을의 몽족은 웅티쿠왕이란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의례를 할 때 공물로 바친 닭의 다리가 똑바로 펴져 있는지, 머리뼈와 아래의 부리에 피가 묻어 있지 않은지, 혀를 빼서 한가운데의 근육이 나와 있지 않은지를 보고서 그해 가족의 안녕과 함께 화전에 심는 작물의 형편을 점친다.


게다가 아카족이 사는 루앙남다의 푸카군 통랏토 마을에서는 벌채한 화전지를 불태우기 전(4월 말부터 5월 초순)에 잘 타도록 각 집에서 '호즈 다(새롭다·오르다)'라는 의례를 행한다. 참깨를 묻힌 쟈레레라는 둥근떡을 치고,삶은 달걀 한 개를 만들고, 닭을 한 마리 죽여서 요리를 만든다. 대나무 고치에 작고 둥글게 뭉친 쟈레레 3개, 삶은 달걀 세 토막, 닭고기 세 토막을 꽂은 쟈레 쟈다(떡·새해에 오르다)를 만들어, 집의 입구 두 군데의 바깥쪽 위의 들보에 붙인다. 나쁜 혼령이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라 한다. 그뒤 아피포로(집의 혼령)에게 쟈레레, 삶은 달걀, 닭의 머리, 간과 장기, 고기를 조금씩 바치고, 다음으로 아궁이에 바치며, 그뒤 가족도 똑같은 걸 먹는다. 호즈다의 3일 동안은 마을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 호즈다가 끝나면 밭을 태워도 좋다. 즉, 여기에서도 새로운 해에 선조의 혼령을 제사지내는 일이 밭이 잘 태워지는 일로 이어지는 것이다. 즉, 벌채는 문제가 아니고 태우는 작업이야말로 선조의 혼령이 지배하는 화전 작업의 개시라는 의식을 명확히 알아챌 수 있다. 이것은 '최적의 숲은'이란 필자의 질문에 대한 '흙이 좋아도, 숲이 좋아도, 태우지 않으면 거름이 되는 재가 생기지 않기 때문에 좋지 않다'라는 답변을 반영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같은 지역 뭉싱군 파이야로앙 마을에서는 호스 아표로이(새로운 해의 제사)의 이틀째에 청년들이 집단으로 수렵을 행하고, 이것도 밭을 태우기 전 의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민족에 따라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시기와 의례의 내용은 저마다 다른데, 화전의 풍작을 기원하고, 점을 치고, 잘 타길 기원하는 등 화전 벼농사와 깊이 연관된 의례로 자리매김되어 있다는 걸 이해할 수 있다. 


다음으로 그 벌채하여 개척하는 화전지를 선정하는 자세를 살펴보자.



화전지의 선정 기술과 의례


(1) 화전지 선정의 기준 -대나무의 화전-


필자는 라오스 북부의 화전민이 어떠한 기준으로 화전지를 선정하는지에 대하여 "화전에는 어떤 숲이 적합합니까? 대나무만 있는 숲인지, 나무만 있는 숲인지, 대나무와 나무가 섞인 숲입니까? 그 이유를 가르쳐 주세요." "화전에 적합한 대나무에는 어떤 종류가 있습니까? 좋은 순서대로 이름을 들고, 그 이유를 가르쳐 주세요." "대나무와 나무의 조합에서 화전에 적합한 숲은 어떤 조합이 있습니까? 그 비율은 어떻게 됩니까?"라는 청취 조사를 했다. 이들 질문은 토카라 열도부터 오오스미 반도, 큐슈 산지에서 나무의 숲보다 대나무숲을 화전으로 하는 쪽이 좋다고 하는 '대나무 화전'이라 부를 만한 사례와 비교하는 시점에 뿌리를 둔 것이다. 그러한 청취 조사에서 얻었던 결과를 보면, 일본 열도에서는 매우 지역적인 존재인 '대나무 화전'이 라오스 북부에서는 매우 보편적인 화전이란 점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캄족이 사는 루앙남다의 뭉고이군 핫캄 마을에서는 다음처럼 말한다. 화전에 가장 적합한 숲은 돗츗과 돗보이라는 대나무가 섞여 있는 숲이다. 그 가운데 돗츗은 한 포기에서 여러 갈래로 자라는 대나무이고, 돗보이는 땅속 줄기에서 자라는 대나무이다. 이 숲은 대나무의 뿌리에 수분이 있어, 흙에 수분이 지켜지기에 벼농사에 적합하다. 얏걈이란 땅속 줄기에서 자라는 대나무도 돗보이와 마찬가지로 뿌리에 수분이 있어 흙에 수분이 지켜지기에 벼농사에 적합하다. 그밖의 타라와 쵸이라는 대나무는 보통이다.


두번째로 적합한 건 나무와 대나무가 섞인 숲으로, 대나무가 2/3, 나무가 1/3 정도로 섞인 비율이 좋다. 나무만 있는 숲은 흙이 건조하여 후끈후끈하기에 비가 내리지 않으면 곧바로 말라 벼가 죽기에 좋지 않다.


그리고 '대나무 화전'과 관련하여, 캄족이 대나무와 작물의 연계를 표현하는 속담을 가지고 있는 건 매우 흥미롭다.


핫캄 마을에서는,


  부루앙       부릿     타넷크               룻             야

 벌채하다      숲     대나무 이름    잘 할 수 있다      담배


 부루앙        부릿          타라             부리야           핏

 벌채하다       숲       대나무 이름      잘 할 수 있다    고추


라고 한다. 또한 캄족이 사는 루앙파르방의 남바크군 호이징 마을에서는


   푸리       푸라이           부리아           고

    숲     대나무 이름    잘 할 수 있다       벼   

  푸리      타넷크             부리아         푸리

    숲     대나무 이름    잘 할 수 있다     고추

  푸리       라항             부리아          야

   숲    대나무 이름     잘 할 수 있다     담배


라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호이징 마을에서 화전에 적합한 대나무의 순위는 푸라이(라오어 이름으로 마이라이), 타넷크(라오어 이름으로 마이홋크), 라항(라오어 이름으로 마이상)이라고 순위를 매긴다. 그 이유로 수분이 많고, 잘 타며, 거름이 되는 재가 많은 등의 점을 들어 핫캄 마을의 경우와 공통된다. 이러한 속담의 존재는 캄족 사람들이 화전과 대나무와 작물을 한 묶음으로 인식한다는 점을 여실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캄족의 마을에서는 인간의 악행에 의하여 벼의 씨앗이 대나무의 마디 안으로 도망가 숨어, 그것을 발견했다는 것을 실화라고 이야기한다. 핫캄 마을에서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말하고 있다. 우옹 씨(62세)의 아내 통 씨(57세)는 4년 전 어느 날, 박쥐를 잡으러 숲에 갔다. 끝이 부러지고 없어져 버린 쵸이의 네 번째 마디에 박쥐가 살고 있는 듯한 구멍이 있었다. 그곳에서 통 씨는 그 대나무를 잘라 보았다. 그러나 박쥐는 살고 있지 않았는데, 예쁜 쵸이이구나 밭에서 옷을 말리는 대나무로 쓰자고 생각하여 여덟 번째 마디를 잘랐다. 그때 그 마디 안에서 28알의 볍씨가 나왔다. 그 볍씨를 집에 가지고 돌아와서, 반은 프라넷고(벼의 보물)로 삼고 나머지 반은 볍씨로 썼다. 그 벼의 이름은 곳 담 당고롯크(벼·흰색·가지)라는 벼로서, 원래 마을에 있었던 벼였다. 이 종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저 세상에 가지고 가셔서 지금은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점은 벼가 도망가는 곳으로 대나무를 선택한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대나무는 물이 있고, 벼는 물과 함께 있다는 캄족의 관념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타일족이 사는 루앙프라방의 남바크군 코크남 마을에서는 화전에 적합한 대나무에 대하여 더욱 세세하게 인식하고 있다. 그 순서와 이유를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가장 적합한 건 마이히야라는 대나무이다. 이 대나무는 껍질이 얇야서 전부 타 버린다. 거름이 되는 재가 많이 나오기에, 벼의 줄기가 굵게 자라고 이삭도 잘 패지만, 하천이나 골짜기에 있어서 그늘이 지고 이삭이 굵어지지 않는다. 두번째는 마이라이라는 대나무이다. 이 대나무는 뿌리가 깊고, 여기저기에 작은 덩어리로 퍼져 있기에 수분을 가지기 좋고, 산등성이 일대나 가파른 경사면에 생육하고 있기 때문에 주변에 볕도 잘 든다. 가지치기는 적지만 이삭도 크고 쌀도 맛있다. 세번째는 마이홋크라는 대나무이다. 이 대나무는 뿌리 그루가 커서 그 주변이 잘 타고, 거름이 많고 벼도 이삭이 잘 패고 잘 자란다. 그러나 뿌리 그루와 뿌리 그루 사이가 너무 떨어져 있어 잘 타지 않기에 거름이 적어 밭 전체적으로는 벼의 생장이 좋지 않다. 네번째는 마이상이란 대나무이다. 이 대나무는 흙이 건조하기에 그다지 좋지 않지만, 비가 많을 때는 좋다. 즉, 대나무는 수분을 가지고 있는, 대나무가 자라고 있는 토지는 수분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화전에 적합한 대나무의 선정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화전지로 대나무에 그만큼 관심을 보이지 않는 민족도 없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 몽족이 사는 루앙프라방의 비엔캄군  옹브링 마을은 표고 940미터의 고지에 위치한 마을로서, 화전만 행하는 마을이다. 여기에서는 숲의 나무들 형성보다 흙의 좋고 나쁨이 화전지 선정의 기준이 된다. 테이(화전)에 적합한 숲으로는 부드럽고, 흙에 습기가 있는 곳이 좋다. 딱딱한 흙은 통수성이 나쁘기에 좋지 않다. 붉은 돌이 들어 있지 않은 흙이 좋다. 모래가 들어간 흙은 좋지 않다. 또, 냐카라는 풀이나 곳카(야생 모란)이 나오는 흙도 좋지 않다. 마이츄라는 가시나무가 있고, 유액이 나오는 큰 나무가 있는 곳도 좋지 않다. 마이퐁이란 대나무만있는 숲이라도, 마이칭(나무)만 있는 숲이라도 흙이 좋으면 좋다. 그러나 마이퐁은 높은 산에는 별로 없다. 마이솟이란 대나무숲은 흙이 건조하기에 벼를 심어도 별로 여물지 않는다. 이와 같이 표고가 높은 곳에 사는 몽족이나 아카족의 경우는 그다지 구애되지 않고, 오히려 나무의 숲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발견된다.



(2) 점유 표시


그럼, 이러한 기준으로 숲을 선정한 다음 그곳에 가서 자신이 선정한 숲에 다른 사람이 들어오지 않도록 점유의 표시를 한다. 그 표시 방법에는 몇 가지의 패턴이 인정된다. 먼저,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건 예정지의 경계에 타레오, 타레라고 부르는 여섯 개의 대나무로 짠 걸 거는 방법이다. 이것이 걸리면 다른 사람은 그 범위를 침범하여화전지를 만들 수 없다. 걸려 있는 여섯 개의 대나무로 짠 것은 침입을 거절하는 표시로서 다양한 장면에서 활용되는 표식이다. 예를 들어, 의례의 기간 중에 마을의 출입구에 걸어 외부에서 마을에 출입하는 것을 거절하는 표식으로 삼거나, 벼농사 의례에서도 악령이나 다른 사람이 밭 안에 들어오는 걸 거부하는 표식으로 화전의 가장자리에 걸 수 있다.


또한 후아팡의 삼타이군에 사는 타이담족의 마을에서는 대나무 장대의 상부를 쪼개 가느다란 깃발 장식물처럼 바깥쪽으로 열어서 지면에 세우고, 끝을 지면에 찔러 꽂은 '마이타크나이'라는 표지를 세운다. 이 표지도 다른 사람의 침입을 거절하는 표지이다. 같은 지역 비엔통군에 사는 캄족의 마을에서도 똑같은 표식을 발견할 수 있다. 라오스 북부의 화전민 사이에는 이러한 표식이 불가침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공통적으로 인식되며, 혼령의 존재와의 사이에서 관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화전 예정지를 표시하는 마이타크나이(후아팡의 삼타이군)



대나무 장대의 끝을 쪼갠 깃발 같은 장식은 큐슈 산지인 미야자키현 시바椎葉 마을의 작은 정월에 밭에 세우는 것이나, 가고시마현 사츠마센다이시薩摩川内市 신덴新田 신사 모내기 제의의 모내기 장소를 청정하게 하려고 신사의 논에 세워서 휘휘 돌리거나 하는 것이다. 이외에도 칼집을 넣어서 섶나무를 끼우거나 나무의 줄기를 깎거나 하기만 한 것도 볼 수 있다. 그곳에는 라오스 북부와 공통성이 인정된다. 



(3) 영혼의 배제 의례와 사전 축하 의례


캄족은 점유를 표시하는 일보다도 그 숲에 있는 영혼의 존재를 경외하여 퇴거하도록 하는 의례를 중시하는 경향을 인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캄족이 사는 우돔사이의 뭉훈군 푸랏토 마을에서는 퐁케이라고 부르는 의례를 행한다. 이 마을에서는좋은 날을 골라 밭에 간다. 이때 반드시 새로운 손도끼를 만들든지, 옛날 것은 날을 벼려서 가지고 간다. 밭으로 삼을 장소에 가서 퐁케이를 행한다. 


먼저 지면에 아래 그림과 같은 모양을 손도끼로 찍는다. A·B·C의 지점에 지난해 베어 처음으로 거두어 곳간 안쪽의 벽에 꽃아 놓았던 벼의 이삭을 가지고 와서, A에는 이삭의 아래 부분, B에는 이삭의 한가운데, C에는 이삭 끝을 꽂는다. 마찬가지로 바나나 나무, 사탕수수의 상중하를 각각 C·B·A에 찌른다. 이것은 풍년의 전조를 나타내는 것으로, 지난해에 벤 이삭과 같이 벼의 줄기가 사탕수수처럼 강해지고, 벼의 이삭이 바나나처럼 많이 달리라는 것을 기원하는 사전 축하 의례이다. 




다음으로 퐁케이를 마친 뒤, 모닥불을 피워서 고추, 개각충의 둥지를 태우고 "지금부터 나무를 벨 것이니, 여기에 있는 영혼과 벌, 야생동물은 밖으로(어딘가로) 가(도망가) 주십시오. 여기는 나의 밭이 될 겁니다."라고 외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그 숲에 있는 영혼이 고추와 개각충 둥지를 태울 때 나는 강한 냄새에 의해 피하여 달아난다고 한다. 


또한 라멧토족이 사는 루앙남다의 나레군 사리앙팡 마을에서는 가족에게 좋은 날을 골라 숲에 가서 밭으로 만들려고 생각하는 장소를 결정한다. 자신이 마음에 든 장소를 정하고, 사방 5미터 정도 나무를 벌채해 개간하고, 와옷 켓 마(가다·점하다·밭)라는 밭으로 만들어도 좋은지 아닌지 점을 친다. 먼저 가는 대나무나 나무를 자르고, 그것에 타레오를 만들어 붙이며, 벌채해 개간한 장소로 통하는 길에 세워 다른 사람이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다음으로 벌채해 개간한 장소의 한가운데 지면에 여성의 성기를 의미하는 삼각형을 그린다. 여성의 성기를 그리는 건 숲에 있는 영혼이 그것을 보고 더럽다고 생각해 싫어하여 가까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나무 실을 2개 준비하여 각각을 10번 꺾어 구부려서 밑변이 곧은 삼각형을 2개 만들고, 지면에 그렸던여성의 성기를 나타내는 삼각형의 안에 날카롭고 뾰족한 쪽의 정점을 꽂아서 역삼각형 모양으로 찔러 세운다. 이때 "이제부터 이 숲을 벌채하여 밭으로 만듭니다. 여기에 있는 영혼들은 어디든 밖으로 도망가 주세요."라고 외치면서 찔러 세운다. 지면에 그렸던 삼각이 밭을, 대나무 실로 만든 삼각이 인간(남성기)를 나타낸다. 이것은 여성기와 남성기의 꿈을 꾸면 다치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하여 미리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 게다가 여성기를 나타내는 삼각형의 한가운데에 세계를 어둡게 하여 쥐나 다람쥐, 해충의 눈이 보이지 않도록 카잉압프라는 우콩(울금)과, 영혼이 두려워하는 카쿠로이라는 우콩, 어떠한 일이 있어도 벼를 응원해 주는 카잉돗이란 우콩을 세 종류와, 카잉압프와 같은 목적으로 라앗이란 풀을, 카쿠로이와 같은 목적으로 랏쿠로이라는 풀을 두 종류 심는다. 이때 찔러 세운 삼각형은 가능하면 밑변이 짧으며 높이가 높은 삼각형이 좋고, 밑변이 곧아지면 벼가 병 없이 풍년이 되거나 사람도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한다. 즉, 이 의례는 모의 생식과 우콩의 수호에 의한 벼의 사전 축하, 게다가 벼의 수호를 위한 여성 성기와 우콩에 의한 영혼의 배제, 해로운 짐승, 해충의 배제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 의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돌이나 흙, 나무의 구멍에 나뭇잎을 채워 넣고 그 구멍을 막는다. 이것의 벼를 파종할 때 쥐나 다름쥐, 해충 등이 나와서 파종한 씨앗을 먹지 않도록 막는 것이라 한다. 


또한 타일족이 사는 루앙프라방의 남바크군 곳크낭 마을에서는 일찍이 다른 사람이 밭으로 만들려다 병에 걸리거나 죽거나 한 큰 숲이나, 파케(나이를 먹은 숲)을 화전으로 만들 경우는 승려에게 카타 피 부아(작은 돌에 쓴 부적·영혼·싫증나다·싫어하다)를 받아서 숲에 가지고 가, "이제부터 이 장소를 밭으로 만들 테니, 여기에 사는 나쁜 영혼이나 뱀들은 밖으로 나가 여기를 서로 나눕시다."라고 외치면서 벌채하여 없애려는 범위의 네 귀퉁이에놓는다. 화전지를 선정할 때 이러한 영혼의 배제와 벼의 사전 축하 의례를 행하는 건 타이족계와 캄족계 민족의 특징이라 생각한다. 다만 모든 마을에서 볼 수 있는 건 아니고, 각 민족 안에서도 마을마다 다양한 변형이 발견된다. 즉, 민족 내부에서도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다.



(4) 꿈에 의한 벌채 허가·금지의 계시


화전지의 선정이 끝나 집으로 돌아오고 그날 밤의 꿈을 본다. 숲에 있는 영혼이 그 꿈을 통해서 선정한 숲을 벌채하여 화전으로 해도 좋은지 어떤지를 계시해준다. 현재도 금지의 꿈을 꾸면 가족이 병에 걸리거나 죽거나 하기에 절대로 벌채를 하지 않는다. 이것은 숲의 난벌을 억제하는 중요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이 꿈에 의한 계시는 대부분의 민족에 공통적으로 보이는데, 몽족과 캄족에게는 매우 희박하다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면, 앞의 프랏토 마을에서는 큰돌, 탁한 물이나 탁한 하천의 꿈을 꾸면 숲을 벌채해도 괜찮다. 큰돌은 벼의 혼이고, 탁한 물이나 탁한 하천도 벼의 혼이기 때문이다.


이 마을 이외에도 홍수, 탁한 하천의 물, 물놀이 같은 물에 관련된 꿈은 벼의 풍작을 가져오는 꿈으로 이야기된다. 이들 외에도 높은 벼랑에 오르는 꿈도 벌채 허가의 꿈이라고 자주 이야기된다. 이것은 수확한 쌀이 높은 산처럼수북히 쌓여 풍작이 된다는 징조라고 의미를 매긴다. 


이에 반하여, 누군가가 찾아와 물소를 달라며 찾고 있는 꿈은 벌채 금지의 계시이다. 그것은 물소가 밭을 벌채해 개척하려는 사람을 나타내고 물소를 찾고 있는 사람은 영혼을 대신하기에, 밭을 벌채해 개척하면 그 사람은 죽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 또는 누군가가 큰 나무를 벌채하고 있는 꿈도 벌채 금지의 계시이다. 그것은 관을 만들기 위한 나무를 벌채하고 있는 것으로, 사람이 죽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라든지 비행기에 타고 있는 꿈은 좋지 않다. 그것은 관에 타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죽게 되기 때문이다. 이 마을에서는 1986년에 세 곳의 깨끗한 훈롯(연못)이 있어서 물이 매우 깨끗해지는 장소가 있었기 때문에 나쁜 꿈을 꾸었지만 상관없이 화전을 했는데, 그해 마을사람이 16명 죽었다고 한다. 즉, 벌채 금지의 꿈은 장례식이 행해지는 징조로 이야기되며, 가족의 죽음이나 병으로 이어진다고 믿고 있다.


앞에서 들었던 콧크남 마을에서도 홍수가 난 하천의 꿈이나 하천에서 수영하는 꿈, 특히 홍수가 난 하천에서 수영하는 꿈을 꾸면 벌채해도 괜찮다. 하천이 홍수로 갈색이 되는 꿈은 벼가 황금색으로 여무는 것과 같은 색으로, 많은 벼를 수확할 수 있다는 징조이기에 가장 좋은 꿈이다. 또한 홍수가 난 하천에서 필사적으로 고생하며 수영하는 꿈은 벼농사 작업에 정성을 들이고 있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많은 벼를 수확한다고 말한다. 


이에 반해 물소에 부딪치거나, 뿔에 찔리거나, 물소를 사로잡거나 하는 꿈을 꾸면 벌채는 안 된다. 물소는 숲에 있는 영혼의 대표로서, 벌채는 안 된다는 걸 계시하러 왔기 때문이다. 또한 구멍에 떨어지거나, 무서운 꿈을 꾸었을 때는 벌채는 안 된다.



(5) 야생 동물에 의한 벌채 금지


이러한 꿈에 의한 벌채 허가와 금지의 계시 외에, 야생동물의 출현으로 영혼이 전하는 계시가 있다. 


예를 들면, 캄족이 사는 루앙프라방의 뭉고이군 도잉 마을에서는 벌채하려고 하는 범위를 정하고 숲에 갔을 때, 벌집을 보거나 황이라 부르는 야생 사슴의 모습을 보거나 울음소리를 듣거나 하면, 곧바로 화전을 만드는 일을 중지한다. 벌집이 내려가는 모양은 장례식에서 관을 메고 있는 모양이고, 황은 숲의 영혼이 부려서 '여기를 밭으로 하면 안 된다'는 걸 계시하러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무시하고 밭으로 만들면 병에 걸리거나, 죽음에 이른다. 황은 사체를 본 경우에도 즉시 벌채를 중지해야 한다는 전승을 널리 믿고 있다. 숲에 사는 영혼이 부리는 황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6) 수원에 의한 금기


이에 반하여 아카족은 그것들과는 좀 다른 전승을 갖는다. 루앙남다의 야루 마을의 사례를 들어보자.


물이 샘솟아 그 앞으로 땅속에 사라져 물이 땅속으로 흐르고 있는 곳은 네(영혼)가 있기에 벌채하면 사람이 죽는다. 그러한 곳은 염분이 있어서 야생동물들이 물을 마시러 오는 곳이라 벌채 장소에서 제외한다. 일반적으로 물이 흐르고 있는 수원인 곳은 나쁜 꿈을 꿀 경우에는 벌채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벌채해도 상관없다. 또한 그 물이 땅속으로 흐르는 하천의 상류도 벌채하면 수원에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영혼이 노하여 벌채해서는 안 된다.


또한 물의 영혼인 개에게 물리는 꿈을 꾸면, 숲에 물의 영혼이 있다는 것이기에 벌채해서는 안 된다. 개의 꿈을 꾸어도 물리지 않으면 인간이 물의 영혼에게 이기는 것이기에 벌채하여 밭으로 삼아도 괜찮다. 또한 승려도 물의영혼이며, 승려의 꿈을 꾸면 숲에는 물의 영혼이 있기에 벌채해서는 안 된다. 


또, 큰 나무에 큰 구멍이 열려 있고 그곳에 물이 괴어 있다면, 보테라호(뱀)가 그 물을 마시러 오기에 벌채해서는안 된다. 그 나무 자체에도 네(영혼)이 있어 벌채하면 네도 보테라호도 모두 노하기에 벌채해서는 안 된다.


또한 숲속에 관을 만들기 위하여 벌채한 나무의 그루터기가 있는 경우는 의례를 하지 않으면 벌채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자신의 가족이 과거 만들었던 밭과 올해의 밭이 근접해 있다면 사람이 죽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밭을 만들어야 할 때는 양쪽의 밭 사이에 길을 만들어 연결하고, 그곳에 볍씨를 뿌린다. 그 벼는 자라든 자라지 않든 관계가 없다. 양쪽의 밭 사이에 다른 가족이 밭을 만든다면 그런 건 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러나 양쪽 밭 사이에 하천이 흐르고 있어 물고기가 헤엄치고 있다면 양쪽을 연결하는 길을 만드는 일도 볍씨를 뿌리는 일도 하지 않아도괜찮다.


이상과 같이 선택하는 장소를 화전지로 만들 수 있는지 어떤지 의례적으로 판단하는 경우는 '물'이 큰 기준이 되며, 그것은 대나무숲을 선택하는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곧, 화전의 벼농사는 '물'을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화전 예정지를 벌채해 개간하는 것이 가능해지면 벌채 작업에 들어간다.





화전의 벌채 기술과 의례


(1) 벌채 의례


2월 초순이 되어 벌채 작업을 시작한다. 이때는 거의 의례를 볼 수 없다. 아마 예정지 선정의 단계에서 영혼의 배제 의례나 꿈에 의한 점을 행하는 일과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면, 캄족이 사는 루앙프라방의 비엔캄군 산통 마을에서는 캄족 달력의 2월 상순(서기 1월 상순) 벌채를 시작한다. 그때 베기 전에 봉 콩 하렛(장소·의례·화전)이란 의례를 행한다. 아침, 브릿(고추), 랑타렝(숫돌), 스크루(레몬그라스), 하라우엣(생강), 마루(소금)을 집에서 지참하고 부부가 벌채 예정의 숲으로 간다. 예정지의 한가운데를 2미터 사방 정도 베어낸다. 여주인이 불을 붙이고, 남주인은 숫돌의 대를 만들어 타랑우엣크(나무꾼 칼)를 벼린다. 


다음 남주인은 타라(라오어 이름 마이히야)와 쵸이(라오어 이름 마이솟)의 대나무 꼬치에 브릿(고추), 스크루(레몬그라스), 하라우엣(생강)을 끼우고 불로 태우면서, "여기가 좋은 흙으로, 좋은 밭이 되도록 산의 영혼과 숲의 영혼에게 나쁜 일을 당하지 않도록"이라고 외친다. 이것은 벌채 예정지 안에 있는 로이(영혼)을 그 냄새로 쫓아내고 오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행하는 의례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집의 가족이 병에 걸리거나 죽게 된다. 이것을마치고 잠깐 쉬고나서 본격적으로 벌채를 시작한다. 이와 같이 본격적으로 벌채를 시작하기 직전에 영혼의 배제 의례를 행하는 사례도 있다.


또한 타이푸앙족이 사는 후아팡의 비엔통군 탐라뉴아 마을에서는 벌채 허가의 꿈을 꾸면 코 피 푸(부탁한다·영혼·숲, 산)이란 의례를 하고 벌채를 시작한다. 양초를 다섯 개 가지고 가, 두 개씩 두 조를 바나나잎으로 꽃과 함께 감싸고, 나무 작대기의 양끝에 붙인다. 남은 하나는 그 한가운데에 붙여 지면에 세우고, "여기를 밭으로 벌채합니다. 여기에 있는 영혼은 벌채하지 않는 곳으로 이동해 주세요. 그리고 무사히 벌채하도록 해주세요"라고 외치고, 피 푸에게 부탁을 한다. 그런데도 벌채의 한창인 사람이 쓰러지는 나무에 깔리면 그 주변 전부의 벌채를 중지한다. 이것은 피 푸가 그 숲을 벌채해서는 안 된다, 벌채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라 한다. 다만 하천과 산에서 떨어져 있는 장소는 벌채해도 상관이 없다. 여기에서도 영혼의 배제와 허가를 얻기 위하여 의례를 행하는 사례가확인된다. 


그러나 야오족이 사는 후아팡의 비엔통군 호아이통 마을에서는 벌채하기 시작할 때는 특별한 의례는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12월 30일에 새해의 챠히양 제사(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제사)를 지낼 때 선조에게 '화전을 벌채할 때는 안전하게 해 주세요."라고 기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벌채 작업 도중에 츙(사슴)이 울 때나 로(두더지)가 낮에 걷고 있는 모습을 볼 때는 벌채하는 것을 즉시 그만둔다. 그것은 퍄오미엥(가신)이 벌채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사람이 병에 걸리고, 사람이 죽고, 쌀을 수확하지 못하게 된다는 등 나쁜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사전에 알려 주는 것이다. 야오족과 몽족의 사이에는 화전의 의례가 적은 이유로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제사를 지낼 때 선조에게 부탁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드는데, 벌채 도중에 생기는 일을 선조의 영혼이 의사표시를 하는것으로 여겨 벌채를 중지하는 일이 있다. 이것은 숲의 영혼이 의사표시를 있다고 하는 캄족의 설명과는 두드러진차이를 보인다.



(2) 재생을 촉구하는 벌채


라오스 북부의 화전 풍경을 보고 느낀 점의 하나로, 벌채가 그루채 파는 게 아니라 중간부터 베어 그 그루터기에서 새싹이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어째서인지 들으면, 대개의 경우는 작업을 서 있는 자세로 행하기 때문에 그게 더 편하다는 답이 돌아온다. 


그러나 캄족이 사는 루앙프라방의 뭉고이군 동 마을에서 조사한 다음의 전승은 주목해도 좋다. 그것은 수확 작업의 점심을 준비할 때 밭에 남아 있던 가슴 높이 정도의 그루터기 상부를 도마로 쓰기 위하여 선 채로 깎을 때의 일이다. 그 남성은 이 정도 잘라내도 이 나무가 죽지 않는다고 말한다. 게다가 이 정도의 높이로 베어 쓰러뜨리면그 부분까지는 죽어도 뿌리는 살아서 곧바로 새로운 싹이 나오는데, 뿌리 가까이 베어 넘기면 전부가 죽어 버린다고 설명한다.


또한 캄족이 사는 루앙남다의 프카군 프렛토 마을에서도 넓적다리 정도의 크기보다 큰 나무는 가슴 높이 정도인 곳에서 베어 넘긴다. 그 이유의 하나는, 그 나무가 죽지 않기에 또 그 벌목한 데에게 새로운 싹이 나와 재생되고,지면에 수분이 남기 때문이라고 한다. 반대로, 뿌리 부근에서 베면 그 나무가 죽어 버리고, 밭에 수분이 남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캄크엥족이 사는 루앙남다의 남타군 챠룽슷토 마을에서도 완전히 똑같은 것을 전승하고 있다.


즉, 뿌리채 캐지 않고 중간에서 벌목한 것은 화전터의 재생을 배려한 벌채 기술이라는 것이다. 벌채한 그루에서 새싹이 나오고 있는 화전터의 풍경은 그러한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벌채가 끝나면, 다음은 불태우는 작업으로 나아간다.




화전의 연소 기술과 의례


(1) 태우기 시작하는 의례


태우기 시작하며 영혼을 재베하는 의례도 벌채를 시작하는 의례와 마찬가지로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약간의 사례가 확인된다.


예를 들면, 앞의 타이프앙족이 사는 팟토타이 마을에서는 벌채하고 1개월 정도 건조하고서 태운다. 옛날 숲이 깊을 때는 파이피 파이테바다(말을 하는 피와·말을 하는 테바다와)라는 의례를 행했다. 테바다라는 건 피보다 지위가 높고, 사람을 지켜주는 좋은 영혼이다. 집에서 라오하이(쌀의 발효주) 병을 두 개 밭으로 가지고 가서, 한 병에 4개의 대나무 빨대를 꽂고 물을 긷는 물건과 카오라오(뿔잔)을 놓고서 "이제부터 밭을 태웁니다. 여기에 있는 피와 테바다들, 이 라오하이를 마시고 떠나 주세요."라고 외치고, 그뒤 사람이 라오하이를 마시고 불을 놓기 시작한다. 현재는 숲이 젊기 때문에 피와 테바다가 있지 않아서 이러한 의례는 행하지 않는다. 또한 캄족이 사는 후아팡의 비엥통군 피엥동 마을에서도 특별한 의례는 하지 않지만, 불을 넣기 전에 로이캉(영혼·집), 로이용(영혼·남자), 로이마(영혼·여자) 등 집의 선조에게 "오늘은 이제부터 밭을 태웁니다. 깨끗하게 탈 수 있도록 여기에 있는 영혼들을 떠나게 해 주세요."라고 부탁하는 말을 한다. 


이들 의례의 특징은 영혼을 술로 정중하게 대접하거나, 부탁을 하여 떠나 달라고 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는 점으로, 캄족과 같이 싫어하는 냄새를 풍겨서 강제로 배제하는 것과는 다르다. 



(2) 태우는 기술


라오스 북부에서 태우는 방법에 대한 기술을 들으면, 대부분이 주변에는 방화대를 만들지 않고 경사면 아래쪽, 바람이 불어오는 쪽에서 불을 놓고, 경사면 위쪽으로 향하여 타 오르게 한다고 답한다. 일본 열도에서 '반대로 태운다(사카모에逆燃え)'라고 하여 경사면 위쪽의 바람이 불어 가는 쪽에서 불을 놓아, 아래쪽을 향하여 태워 내려가도록 하는 방법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큰 충격이다. 


그러나 주의 깊게 청취 조사를 진행하면 반드시 그렇게 태우는 방법만이 아닌 사례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캄크엥족이 사는 루앙남타의 남타군 챠룽슷토 마을에서는 태우기 전에 사웻이라 부르는 방화대를 경사면 위쪽은 6-7미터, 옆과 아래쪽은 2-3미터 너비로 만들고, 불이 날아가도록 한다. 그것이 끝나면 경사면 위쪽의 가장자리 한가운데부터 좌우로 불을 따라다니고, 아래쪽으로 조금 태워 내려간다. 이렇게 하면 불의 세력도 약해지고서서히 타며, 위쪽의 숲으로 불이 날아가지 않는다. 어느 정도 위쪽이 태워지면 경사면 아래쪽으로 불을 따라다니며 단숨에 태워 버린다. 이것은 캄크엥족의 부모나 그 조상들부터 행해 오던 전통적인 태우기 방법으로, 농림사무소 등에서 지도를 받거나 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또한 이 마을 사람들은 "몽족이나 아카족은 사웻도 만들지 않고 그대로 태우고 있어서 주변의 숲이 사라져 버린다"고 말하여 다른 민족과의 차이와 함께 숲의 보호도 시야에 넣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러한 화전의 경사면 위쪽에서 태우는 사례는 라오크족이 사는 퐁사리의 우타이군 마이송황 마을에서도 볼 수 있다. 이 마을에서는 통상 경사면의 아래쪽에서 불을 붙여 태워 올라가지만, 화전지의 위나 옆에 영혼이 있는 숲이 있는 경우는 미페페라고 부르는 방화대를 만들어 경사면 위쪽부터 반절 정도를 태우고, 그뒤 아래쪽의 가장자리에 불을 따라다니며 단숨에 태워 올라간다고 한다. 이 경우는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이 주위의 숲에 영혼이 있는지 아닌지이며, 영혼의 존재를 인식하는 것에 의하여 연소를 억제하는 체계가 작동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파종까지의 작업


태운 뒤, 파종하기까지 행하는 작업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오두막을 만드는 것이다. 그걸 세우는 위치가 문제가 된다. 가장 많은 사례가 화전지의 거의 한가운데에 약간 평탄한 곳을 선택해 세우는 것이다. 그밖에는 물이 있는 곳에 가까운 화전지의 아래 부분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다. 이 오두막 짓기는 파종이나 제초 등의 농작업을 하는 기간에는 휴식이나 비를 피하는 곳, 식사 등을 할 때 활용하고, 이삭을 거두는 수확 작업이라면 성스러운 밭의 곳간으로 그 성격이 변한다.


또 하나의 작업이 불태운 뒤에 태우고 남은 걸 몇 군데에 모아서 태우는 작업이다. 이 태운 곳에는 재가 많이 모여 거름이 많다고 하며, 특별한 씨앗을 파종하는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캄족의 경우는 벼의 장로라는 지위에 자리매김할 수 있는 곳 히양이란 검은쌀을 심거나, 토란 등의 덩이뿌리 종류를 심거나 하는 장소로 선택하여 일종의 특별한 장소로 인식된다. 


태운 직후에 행하는 의례로서 특히 주목하고 싶은 건, 루앙프라방이나 루앙남타, 보케오에 사는 캄족의 몇몇 마을에서 볍씨를 파종하기 전에 스로라고 부르는 토란을 심지 않으면 선조의 영혼이 화가 나 벼의 수확을 없애거나, 가족을 죽게 하거나 병에 걸린다는 전승이 존재하고, 그에 기반하여 덩이뿌리 심기 의례가 행해진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캄크엥족이 사는 루앙남타의 남타군 프랑 마을에서는 화전을 태우면 그날이나 다음날에 챠오 하렛(오두막·화전)을 세울 예정지 근처에 폿크 카통(태우다·알)이란 스로를 심는 의례를 행한다. 


먼저 1.8미터 정도 길이의 대나무 막대기를 지면에 놓고, 집에서 가져온 달걀을 바나나잎으로 감싸 불로 태워서 굳히고, 밥을 조금 더하여 대나무 막대기의 위쪽에 놓는다.


다음으로, 대나무 막대기의 아래쪽 좌우에 하나씩 스로를 심고, 그 사이에 톳캴(울금)을 심는다. 그리고 그 주위에 라가(참깨)를 심는다. 이때 스로를 심는 건 로이 라왕(영혼·우레)가 밭에 떨어지지 않도록, 또 숲의 정령이 벼를 빼앗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이 의례가 끝난 뒤, 밭의 벌채한 그루터기 뒤 등에 덩이뿌리 종류를 심는다.


이것은 분명히 벼의 파종 의례에 선행하는 토란 심기 의례로 평가할 수 있다. 사례가 많지 않은 현시점에는 단정적인 것은 유보할 수밖에 없지만, 이것은 라오스 북부 캄족의 사이에서 화전 농경으로서 벼에 선행하여 덩이뿌리의 재배가 행해졌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 의례가 새로운 해의 시작으로 선조에게 덩이뿌리를 드시게 하는 '옷'이란 '덩이뿌리 정월'과 조합되는 점을 감안하면, 그 가능성은 크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태우는 작업이 끝나면 다음은 드디어 파종 작업으로 넘어간다.




파종 기술과 의례


파종 작업부터는 그 작업의 하나하나에 '벼의 혼'이란 존재가 크게 반영된다. 즉 '벼의 혼'이 밭에서 도망가지 않도록 의례를 행하고, 작업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먼저 밭에 씨앗을 파종하는 단계부터 살펴 나아가도록 하자.


(1) 파종 의례와 벼의 혼 계승


라오스 북부의 화전 벼농사를 행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밭 전체의 파종에 앞서서, 성스러운 밭을 설치해 의례의 성격을 갖는 파종을 행하는 사례가 많이 발견된다. 그들 의례의 과정을 살펴보면, 화전 벼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벼에 대한 관념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캄족이 사는 루앙프라방의 뭉고이군 핫사프이 마을에서는 아렛크 하렛(시작하다·밭)이란 파종 의례를 행한다. 태운 뒤, 밭 한가운데에 챠오하렛이란 오두막을 세운다. 이것은 화전에서 일할 때 휴식 등의 생활을 위한 오두막임과 함께, 수확할 때는 밭의 곳간이 된다. 챠오하렛 근처의 오른쪽에 물을 넣지 않은 대나무 물통을 기울여 세운다. 그 대나무통 근처에 집에 가지고 있던 우콩(울금)을 심는다. 이 우콩은 선조의 시대부터 이 의례로 쭉 심어 온 것으로, 선조의 영혼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밭을 지켜 준다고 한다. 물통과 우콩 주위에 곳 히양(쌀·검다)의 씨앗을 심는다. 몇 포기 심는지는 정해진 게 없다. 이 의례가 끝나면 오두막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중생종을 심고, 다시 오른쪽 아래에 심고서 내려온다. 시계 방향으로 돌고서 늦벼를 왼쪽 위까지 심고서 올라가고, 마지막으로 챠오하렛까지 내려오면서 심는다. 올벼는 중생종, 늦벼와는 달리, 밭의 네 귀퉁이에 심는다. 하루의 작업이 끝나면 손을 씻고 그 물을 대나무 물통 안에 부어 넣는다. 이것은 파종 작업이 끝나기까지 매일 반복한다.밭 전체의 파종이 끝나면, 대나무 물통에 모은 물을 우콩 주위에 뿌린다. 이것은 밭에 파종한 씨앗이 확실히 싹이터 수확하도록 하는 기원이다. 


이 의례의 특징은 의례를 하면서 활용하는 볍씨가 검은쌀이란 점이다. 검은쌀은 캄족 사이에서 '벼의 장로'라든지 '마 곳(어머니·벼)'라고 불리며, 벼 중에서 가장 높은 지위로 평가를 받는 벼로서, 이 벼가 밭 전체의 수확을많아지게 한다고 생각환다. 또한 우콩은 밭의 벼를 지키는 존재라고 믿고 있으며, 하나의 종을 계속하여 심고 있는 것이 특징이고, '우콩의 혼을 계승한다'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또한 타일족이 사는 루앙프라방의 남바크군 곳크낭 마을에서는 홍 카오 헷(집·쌀·최초로 하다)라는 파종 의례를 행한다. 씨앗을 심는 날의 오전 중에 밭에 가서 오두막 근처에 홍카오헷이란 제단을 만든다. 1미터 사방으로 구획하고, 네 귀통이에 대나무를 세워 각각의 꼭대기에 타레오(여섯 개의 대나무로 짠 것)를 붙인다. 그 아래쪽에 대나무통을 세우고 각각에 물을 넣는다. 그 구획의 가운데에 대나무 하나를 세우고, 그 꼭대기에 대나무로 짠 홍(작은 집)을 설치하고, 대나무의 중간쯤에 큰 타레오를 설치하고, 밑에다 대나무통을 세워 물을 넣는다. 네 귀통이의 타레오 사이에 쪼갠 대나무를 활 모양으로 붙이고, 밖에서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다만 중간에 의례의 성격을 지닌 파종이 끝나기까지는 네 면 가운데 한 방향은 열어 놓는다. 홍에서 대나무로 짠 작은 물고기 모형의 바퀴를 한 줄로 늘어뜨리고, 가장 아래에 있는 대나무로 짠 큰 물고기의 모형을 내려뜨린다. 홍의 안에 꽃, 붉은사탕수수, 바나나를 바친다. 홍을 지탱하는 한가운데 대나무의 지면 쪽에 볍씨와 도크다이(쌀의 혼에게 은혜를 돌려주는 꽃, 통상 맨드라미)의 씨를 심는다. 간단히 하는 사람은 세 포기나 다섯 포기나 일곱 포기 정도만 심지만,착실한 사람은 30포기나 심는다. 이때 씨앗을 심는 사람은 성급한 사람은 안 되고, 차분하게 심어야 한다. 올해 주인이 심어서 결실이 잘 없으면, 다음해는 부인이 심거나 아이가 심거나 한다. 이 파종이 끝나면 전에 개방해 놓았던 입구를 쪼갠 대나무로 닫는다. 이렇게 하면 안에 나쁜 것은 들어가지 못한다. 이 파종을 한 사람은 그날은 불을 다루는 일은 할 수 없다. 또한 밭 전체의 싹이 나오기까지는 머리카락을 잘라서도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벼의 이삭이 잘 패지 않기 때문이다. 이 파종이 끝나면 밭 전체의 파종을 행한다. 



성스러운 밭, 홍카오헷(루앙프라방의 남바크군 곳크낭 마을 타일족)




이와 같이 의례의 성격으로 파종하는 구획을 타레오를 단 기둥과 쪼갠 대나무로 둘러싸거나 하는 건 악령의 침입을 막아서 벼의 혼이 안녕하도록 할 목적을 띤다. 또한 불을 다루는 것이나 머리카락을 자르는 것의 금지 등, 벼의 풍성한 결실을 강하게 의식한 금기도 확인할 수 있다. 즉 이 의례는 성스러운 밭에서 성스러운 벼농사를 행하고, 벼의 혼이 안녕하도록 함을 꾀하는 벼의 풍요를 기원하는 의례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례는 타이족계와 라오족 등의 사이에서 널리 확인할 수 있는 파종 의례이다.


또, 아카족 사이에는 '벼 혼의 계승'을 벼농사의 중요한 일로 의식한 파종 의례가 확인된다. 예를 들면, 아카아그이족이 사는 보케오의 뭉군 퐁사왕 마을에서는 밭 전체의 파종을 하기 전에 '야카카도'라는 파종 의례를 행한다. 어느 한 채의 집을 마을의 대표로 선발하고, 그 집의 남주인이 오두막 위쪽의 한 면에 '코피야츙(밭 정령의 조각 이엉을 지닌 오두막)'라고 부르는, 높이와 너비 30센티미터 정도의 조각 이엉을 지닌 오두막을 세운다. 그 뒤쪽에 아홉 포기의 볍씨를 심는다. 이때의 볍씨는 지난해의 '호도 고(벼의 꽃·따다)'라는 수확을 시작하는 의례로 아홉 포기 중에서 따서 아피포로(집의 선조의 영혼)의 위에 꽂았던 세 이삭의 알곡과 수확 작업의 마지막에 남겨놓았던 아홉 포기에서 딴 체지 샤마우웅(볍씨의 곳간)에 넣어 놓았던 세 이삭의 알곡을 올해의 화전에 심을 예정인 볍씨에 섞은 것이다.


이 의례에서는 명확하게 '벼 혼의 계승'이 확인된다. 성스러운 밭에 재배된 알곡이 이듬해의 성스러운 밭의 볍씨에는 물론이고, 일반 밭의 볍씨 안에도 섞여서 계승해 가는 것이다. 또한 아카족의 사이에서는 '9'라는 숫자는 성스러운 숫자로 악령을 접근시키지 않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여, 아홉 포기라는 포기 수만으로 그 공간의 성스러움이 유지되어 벼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민족의 차이에 따라 다른 모습이 있는데, 성스러운 밭의 벼농사를 밭 전체의 벼농사의 상징으로 삼는다는 의미에서는 공통된 사고방식이 있다. 



(2) 파종의 방법과 도구


파종의 방법은 민족의 차이를 넘어서 거의 공통된다. 즉 남자가 뾰족한 막대기를 가지고 지면에 구멍을 뚫고, 여성이 그 구멍에 몇 알의 볍씨를 손가락으로 집어서 넣는 방법으로, 밭의 경사면 아래쪽부터 경사면 위쪽으로 향하여 심어 올라간다.


구멍을 뚫는 막대기의 현재 쓰이고 있는 대부분은 원뿔형 쇠꼬챙이를 대나무나 나무의 자루 끝에 붙인 것이다. 특수한 형태로는 루앙남타나 보케오 등 라오스 북부의 서쪽에 사는 캄족계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톳츗크'라고 부르는 파종용 막대기를 들 수 있다. 이것은 마이크왕이란 나무를 길이 62센티미터, 두께 3.2센티미터, 너비 9센티미터로 깎아 전체를 산 모양으로 형성하고 그 끝을 뾰족하게 한 것으로, 그것에 길이 3미터, 지름 3센티미터 정도의 대나무 자루를 붙인 것이다. 


또한 여성들이 볍씨를 담아서 허리에 차는 바구니도 중요한 파종 도구이다. 캄유앙족이 사는 루앙남타의 푸카군 푸렛토 마을에서는 파종의 마지막에 오두막 위쪽에 곳 시리(쌀·먹으면 안 된다)라고 부르는 곳 히양(쌀·검다)과 곳 앙타앙프랑이란 두 종류의 볍씨를 몇 포기 심는데, 그 파종 도구로는 벵큿이란 어살처럼 짠 작은 원통형 바구니를 쓴다. 또한 일반 밭에 파종하는 도구로는 벵켓이라는 마름모 네 눈 짜기로 짠 주둥이가 오므라진 바구니를 쓴다. 바구니 외에는 직물로 만든 어깨에 거는 자루 등을 쓰는 사례 등이 있다.



화전의 파종(루앙남타의 몽싱군)




(3) 파종의 다양성


라오스의 벼농사에서 매우 충격적인 건 재배하는 품종의 다양함이다. 특히 화전 벼농사에서 그것이 뚜렷하다. 2005년에 방문한 루앙프라방의 남밧크군 국도 13호선에 연이은 화전에서 한 체험은 강렬한 것이었다. 사토 씨가 양손으로 꽉 쥔 벼이삭을 보면 그곳에는 아홉 종류나 되는 벼의 종류가 섞여 있었다. 그뒤 방문한 마을마다 벼의 종류를 물어서 조사했다. 현재 타케후지 치아키武藤千秋 씨 및 카웅타파토에 있는 라오스 국립농림업연구소의 비엥퐁 씨와 함께 조사하는 마을에서 가능하면 최대한 많은 볍씨를 수집하려 애쓰고 있다. 그 결과를 보면, 가장 많은 마을에서는 22종류나 되고, 평균적으로 10종류를 넘는다. 


예를 들어, 2008년 12월에 방문했던 베트남 북부 국경에 가까운 퐁사리의 마이군 옴카넹 마을의 사례를 들어보겠다. 이 마을은 표고 507미터이고, 가구수 37호, 인구 230명이며, 전통적으로는 화전 벼농사를 행해 온 캄크엥족이 사는 마을이다. 이 가은데 17호는 화전만 경작하고, 나머지 20호는 논도 경작하고 있다. 논벼농사는 1995-1996년 무렵부터 개시했다. 경지면적은 화전이 각 호당 약 3000평, 논이 전체가 4만2000평이다. 이 마을에서수집한 22종류의 볍씨를 살펴보면, 화전에서 재배하는 씨앗은 올벼 4종(메벼 1종, 찰벼 3종), 중생종 9종(전부 찰벼), 늦벼 7종(메벼 1종, 찰벼 6종), 중만생종 1종(찰벼)이고, 올벼와 중생종, 늦벼에는 저마다 여러 종류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점, 찰벼가 중심이지만 올벼와 늦벼에 메벼가 한 종류씩 포함되어 있는 점을 알 수 있다. 그에 반하여 논에서 재배하는 볍씨는 올벼와 늦벼는 하나도 없고 중생종 1종(찰벼만)이며, 게다가 그것은 TDK1이란 교잡종이었다. 이것을 비교하면 화전 재배용 씨앗의 다양함에 비교하여 논 재배용 씨앗은 단순하고 획일적이며, 양자 사이에는 또렷한 차이가 발견된다. 


또한 2007년 1월에 방문했던 퐁사리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역시 베트남 북부 국경에 가까운 후아팡의 솟프바오군 퐁바오 마을은 전통적으로는 논벼재배를 중심으로 행해 온 타이뎅족이 사는 마을이다. 이 마을은 표고 260미터, 가구수 52호, 인구 280명이고, 경지면적은 논이 4만8000평, 화전이 2만4000평으로 논이 우위를 점한 상황이다. 이 마을에서 청취 조사한 전통적인 벼의 씨앗을 보면, 그 가운데 화전에서 재배하는 종자는 올벼 3종(전부 찰벼), 중생종 4종(전부 찰벼), 늦벼 6종이다. 그에 반해 논에서 재배하는 씨앗은 올벼와 중생종은 하나도 없고 늦벼 5종으로, 화전 재배용 씨앗 쪽이 다양함을 가진다. 논 재배용 씨앗은 중생종을 빠뜨린 종류가 적은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앞에 기술한 옴카넹 마을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사정은 라오스 북부의 화전 벼농사 재배를 행하고 있는 마을에서는 민족의 차이를 넘어서 거의 똑같은 경향을 보인다.



다양한 작물을 섞어 심은 화전의 밭벼밭(퐁사리의 분타이군 핑아렛 마을, 캄족)




이 화전 벼농사와 논벼농사의 차이는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그 이유를 화전 벼농사를 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들으면, 먼저 '물·비'와의 관련을 든다. 그것은 그해가 비가 많은 해인지, 햇빛이 많은 해인지, 벌채해 개간한 화전지의 토양이 수분을 포함한 땅인지, 건조한 땅인지에 따라서 그에 적합한 종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앞의 퐁바오 마을에서는 1호당 화전에는 1년에 4종류 정도를 심지만, 논에는 1종류만을 심는다고 한다. 화전에 많은 종류의 씨앗을 심는 이유를 들으면, 씨를 심기만 하여 작업이 간단한 점, 각각(올벼, 중생종, 늦벼)의 익음때가 조금씩 차이가 있기에 수확 작업이 분산될 수 있는 점, 하나의 품종이 잘 되지 않아도 다른 품종이 되기에 안심하는 점을 든다. 이것은 화전 벼농사가 기상조건, 밭의 토양 조건에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행해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다양한 대응의 수단이 그대로 볍씨의 다양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벼의 이름에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민족과는 다른 민족의 이름을 붙이고 있는 사례가 확인되어, 민족의 테두리를 넘어서 볍씨의 교환도 활발히 행해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것도 볍씨의 다양성을 높이는 한 요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논은 많은 종류를 농사지으면 못자리를 많이 만들어야 하는 점, 한 종류여도 관개하기 때문에 비가 내리지 않아도 안심하고, 매년 잘 된다는 걸 알고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든다.



(4) 벼와 다양한 작물의 섞어짓기


그러나 화전 벼농사의 다양성은 벼의 씨앗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다음으로, 똑같은 화전에 벼 이외에 어떤작물을 섞어 뿌리는지, 또는 섞어 심는지를 언급하면서 그 다양성에 대하여 서술해 보겠다. 라오스 북부의 화전 벼농사에서는 벼만을 재배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1996년 5월에 본, 벼가 싹이 튼 직후의 한 뙈기의 화전은 인상적이었다. 오두막 주변의 맨드라미꽃과 가지, 벌채한 그루의 둘레에 자라는 오이와 수세미, 벼 포기 사이의 토란, 수박과 호박, 카사바 등의 풍경은 그때까지 미나미큐슈의 화전과 밭에서 몇 가지 섞어심기와 섞어짓기를 보았던 필자라도 그 다양성에 깜짝 놀랐다.


그뒤 섞어심기와 섞어짓기의 모습을 주의 깊게 살펴보니, 볍씨와 섞어서 심는 방법과 볍씨와는 섞지 않지만 같은밭에 심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을 소개하겠다. 


① 파종과 섞어서 심는 종

표3-1은 2008년 2월부터 3월에 걸쳐서 방문했던 후아팡의 삼타이군 및 비엥통군과 루앙프라방의 비엥캄군의 타이뎅족, 타이프앙족, 캄족, 몽족, 야오족의 마을에서 청취 조사한 결과를 정리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민족의 범위를 넘어서 예외 없이 볍씨와 함께 섞어서 심고 있는 것은 오이이다. 그리고 야오족을 제외하고는 동아도 똑같은 결과이다. 이 두 종류의 작물은 모두 덩굴이 지면을 기면서 성장하여 벼 포기를 감고 올라가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이를 심는 건 여름에 풀을 벨 무렵에 목이 마를 때 물 대신 먹으려고 하기 때문이라 한다. 캄족이 사는 우돔사이의 사이군 사낭피 마을에서도 승캴(오이)는 풀 베기 등 목이 마를 때 물 대신에 먹는 것으로, 반드시 길게 잘라야지 둥글게 자르면 안 된다고 한다. 


오이와 동아는 화전과 홍수를 이야기하는 전승인 아마미奄美 제도의 천인여방역天人女房에서도 중요한 요소를 점한다. 그것은 하늘의 세계로 돌아온 천인여방을 뒤쫓아서 하늘에 올라왔던 남자가 천인여방의 아버지가 부과한 화전 작업에 관한 난제를 여방의 가르침에 의거해 차례차례 해결해 가는데, 그곳에 심은 씨가 오이와 동아라는 박이며 수확한 박을 자를 때 아버지가 이야기한대로 둥글게 잘랐기 때문에 홍수가 일어나 남자는 떠내려가 버려 여방과는 1년에 한 번 칠석날 밤에만 만나게 되었다는 칠석 기원을 말한다. 또한 구마모토현 이츠키 마을五木村과 미야자키현 시바 마을椎葉村 등 큐슈 산지의 화전 지대에서도 박(특히 오이)이 화전민의 목을 축이는 물이라는 인식이 있으며, 라오스 북부에서도 큐슈 산지부터 난세이南西 제도에서도, 화전에 섞어 심는 작물로 중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라오스족이 사는 퐁사리의 우타이군 마이송황 마을에서는 로리라고 부르는 알곡이 흰색과 검은색인 피를 벼와 섞어서 심는다고 한다. 라오스 북부에서도 벼 이외의 곡물을 섞어 심는 것을 알 수 있다.


1

2

3

4

5

6

 7

10 

11

12 

13 

14 

 15

수세미

(긴것)

수세미

(짧은것)

동아

호박

호리병박

토란

덩이뿌리 가지 강낭콩옥수수 생강 고추 레몬그라스 참깨 율무 

이족

밧토타이 마을

타이텡족

Ο






 Ο Ο    Ο Ο  

렝 마을

타이텡족

Ο

Ο




Ο

Ο Ο        

탐라뉴아 마을

타이프앙족

Ο


Ο

Ο

Ο

Ο

   Ο Ο  Ο  Ο 

캄족

풍시앙 마을

캄족

Ο



Ο



 Ο  Ο  Ο  Ο  

비엥통 마을

캄족

Ο



Ο


Ο

 Ο Ο   

Ο

   

상통 마을

캄족







  Ο Ο     Ο 

몽족

옴브링 마을

몽족







         

야오족

호아이통 마을

야오족







  Ο Ο     Ο 

표3-1 볍씨와는 섞지 않지만, 같은 밭에 심는 작물




② 볍씨와는 섞지 않지만 같은 밭에 섞어심기, 섞어짓기하는 종

표3-2는 표3-1과 같은 마을에서 청취 조사하여 얻은 볍씨와는 섞지 않지만 같은 밭에 섞어심기, 섞어짓기하는 종의 종류를 정리한 것이다. 종의 종류는 합계 15종류에 이른다. 그중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가지이고, 수세미이다. 이들은 제초와 수확을 할 때 밭의 오두막에서 국 등의 요리를 하여 밥과 함께 먹거나 하는 데 이용된다. 특히 수세미는 성숙한 열매의 섬유질 부분을 찜기의 바닥에 까는 깔개로도 활용하고, 찜의 식습관에도 중요한 지위를 점하고 있다. 또한 이 표에는 나오지 않지만, 호리병박 종류도 또한 섞어심는 작물 가운데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그것은 식용으로 이용되는 것, 물건을 넣는 용기류로 이용되는 것이 있다. 호리병박을 사용한 용기류에는 물을 담아 나르거나 저장하기 위한 물통과 물을 긷는 국자, 씨앗을 보존하는 통, 찐밥을 담는 밥통, 국을 뜨는 숟가락 등 다양한 물건을 볼 수 있다.



1

2

3

4

5

6

오이

동아

참깨

강낭콩

사탕수수

수박

이족

밧토타이 마을

타이텡족

Ο

Ο





렝 마을

타이텡족

Ο


Ο




탐라뉴아 마을

타이프앙족

Ο

Ο

Ο




캄족

풍시앙 마을

캄족

Ο

Ο


Ο

Ο


비엥통 마을

캄족

Ο

Ο

Ο


Ο


상통 마을

캄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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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족

옴브링 마을

몽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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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오족

호아이통 마을

야오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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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3-2 볍씨와 섞어서 심는 작물



즉, 파종과 섞어서 심는지 어떤지는 차치하고, 화전에다 섞어심기, 섞어짓기하는 기술은 그 양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그 작물이 화전민의 먹을거리와 생활도구를 포함하여 생활문화 전체의 체계 안에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화전작물임을 알 수 있다.


화전 벼농사에서 중요한 작업의 하나는 제초 작업이다.




제초


(1) 제초의 방법과 도구


라오스 북부에서는 제초 작업은 3번 행하는 것이 통례이고, 처음 2번은 작은 손괭이, 세 번째는 낫으로 베거나 손으로 뽑거나 한다. 예를 들면, 캄족이 사는 루앙프라방의 비엥캄군 상통 마을에서는 제초 작업을 요우헹 하렛(풀을 없애다·화전)이라고 부른다. 올벼의 경우는 2번 행하여, 첫번째는 벼의 길이가 15-20센티미터 정도로 자란 시기에 큰 우엣크(제초용 작은 괭이)로 흙을 일구듯이 하여 풀을 없앤다. 두번째는 벼의 길이가 허리 높이 정도로 자라서 이삭이 패려고 할 즈음에 작은 우엣크로 흙을 긁듯이 하여 풀을 없앤다. 중생종과 늦벼는 3번 제초를 행하여, 첫번째는 벼의 길이가 15-20센티미터 정도로 자란 시기에 큰 우엣크로 흙을 일구듯이 하여 풀을 없앤다. 두번째는 벼의 길이가 가슴 높이 정도로 자라고 아직 이삭이 나오지 않을 무렵에 작은 우엣크로 흙을 긁듯이 하여 풀을 없앤다. 세번째는 이삭이 팼을 때 풀을 손으로 뽑는다. 



(2) 말하는/ 도움이 되는 잡초


라오스 북부의 화전 지대에서는 민족의 차이를 넘어서 닭의장풀이 인간을 위협하고 속이는 전승을 듣는다. 예를 들면, 캄족이 사는 루앙프라방의 비엥캄군 상통 마을에서는 화전 벼농사에서 가장 곤란한 잡초는 닭의장풀의 일종인 칫타공(라오어 이름 냐캇피)라고 부르는 풀이라고 한다. 화전 한가득 자라서 벼에 좋지 않은 풀로서, 인간이 뽑으면 "(나를 뽑아서) 그루터기의 머리에 놓으면 열매가 된다. (나를 뽑아서) 쓰러진 나무 위에 두면 꽃이 핀다. (나를 뽑아서) 흙 위에 놓으면 썩어서 죽는다."라고 말하며 인간을 협박하고 속인다. 캄족의 사이에서는 이 상통 마을의 사례 이외에도 뽑아낸 풀을 '흙(지면)'에 폐기하면 '죽는다'라고 말하며 속인다고 이야기하는 사례가 있다. 


또한 다이뎅족이 사는 호아팡의 삼타이군 남크앙 마을에서도 화전에서 가장 곤란한 풀은 역시 닭의장풀의 일종인냐캇프라는 풀이다. 이 풀은 제초하는 인간에 대하여 "(나를 뽑아서) 쓰러진 나무 위에 버리면 말의 등에 타고 있는 것(처럼 기분이 좋다). (나를 뽑아서) 태우고 남은 나무 위에 버리면 겨울에 추울 때 햇빛이 드는 것(처럼 따뜻하여 기분이 좋다)."라고 말하며 인간을 속인다. 타이족계와 라오족 사이에는 뽑아낸 풀의 폐기 장소로 '하천에흘려 보낸다' '불속(태운다)' 등의 사례가 있어 캄족과의 차이가 뚜렷하다. 이들 전승은 말할 수 있는 요소는 민족의 차이가 확인되지만, 모두 닭의장풀이 지닌 강한 가뭄 저항성과 번식력에 주목하며 인간을 속이고 우롱하며 협박하는 풀로 공통되게 이야기하는 점에 특징이 있다.



(3) 제초 작업의 기원 이야기


캄족 사이에는 제초 작업의 기원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다. 예를 들면, 루앙남타의 나레군 통통 마을에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옛날, 와루(제초용 작은 괭이)는 자기 혼자서 풀을 없애고 있었다. 그 대신, 와루가 물을 마시고 싶을 때는 인간이 물을 나르러 가야 했다. 그런데 어느 여성이 물을 가지고 가는 것이 늦어졌다. 와루는 벌채한 그루터기 위에 허리를 기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여성은 "와루야, 너는 어디에 있니'라고 부르짖어, 와루는 놀라서 그루터기에서 떨어져 버린 채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그 여성은 떨어진 와루를 자신의 집으로 가지고 돌아왔다. 그 이후 와루는 스스로 풀을 없애지 못하게 되어 버렸다. 그러니까 인간이 풀을 없애야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인간의 악행에 의하여 스스로 제초 작업을 해야 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건 캄족에게 특징적으로 확인되는 전승이다.




생육을 촉진하는 의례


첫번째 제초가 끝나고 벼가 어느 정도 성장했을 시기에, 더욱 성장을 촉진하여 풍작을 기원하는 의례가 행해진다. 


예를 들면, 타일족이 사는 루앙남타의 남바크군 곳크낭 마을에서는 씨를 심고서 2개월 지나, 벼의 길이가 넓적다리 높이 정도가 될 무렵 홍카오헷이라는 의례를 행한다. 성스러운 밭의 벼 앞에 집에서 가져온 가이 메이 웅 카오(닭·암컷·감싸다·벼)라고 부르는, 가족으로 기른 가운데 자주 알을 낳고 자주 병아리를 키운 닭과 파슈우(수컷)이란 살아 있는 물고기 2마리를 홍(제물용 작은 오두막) 안에 산 채로 바친다. 그리고 그 집의 여성이 사용하고 있는 목걸이와 비녀, 치마 등을 홍에 걸고, 그 위에 우산을 건다. 다음으로 홍을 지탱하고 있는 대나무 기둥과오두막을 흰 무명실로 연결하고, 승려에게 부탁해 쌀의 혼이 모이도록 염불을 외워 기도를 드린다. 승려의 기도가 끝나면 물고기를 건지는 데 쓰는 삼각그물을 가지고 밭 전체를 건져 올리면서 그 사람이 밭 안에서 예쁘다고 생각하는 돌과 그외의 것을 넣고서 홍을 지탱하고 있는 대나무 기둥의 아래에 놓는다. 그뒤 파슈우, 파캉이란 두 마리 물고기를 하천에 돌려 보낸다. 이 의례에 닭과 물고기를 바치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전승이 있다.


옛날, 타일족은 벼농사는 하지 않았다. 파마이 히마팡(숲·풍부한 야성)이란 산속에 지름이 주먹 일곱 개 크기의알이 큰 벼 이삭이 있어서, 수확 시기가 되면 라오카오(곳간)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종을 퐁이라고 두드리면, 알곡이 날아와서 저절로 가득차게 되었단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죽은 메마이(과부)의 할머니가 라오카오를 다시 만들었다. 그런데 혼자 작업하기 때문에시간이 걸려 완성하기 전에 손에 가지고 있던 막대기가 종에 닿아 버렸다. 다른 집의 라오카오는 알곡을 맞이할 준비가 끝났기에 날아온 알곡으로 가득찼다. 그러나 할머니의 라오카오는 준비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날아온 알곡은 밖에 머물렀다. 할머니는 분하고 너무 화가 나서 막대기로 그 알곡을 쳤던 바, 현재처럼 작은 알곡으로 쪼개져서 마을 전부의 알곡이 하천과 숲으로 날아가 버렸다.


숲으로 도망간 알곡은 카이파(야생 새)가 보관하고, 하천으로 도망간 알곡은 파슈우라는 종류의 낭타로타랑이란 이름의 암컷 물고기가 보관했다. 그 이후 10만 년 동안 타일족은 알곡이 없애져 버렸다. 그런데 10만 년 뒤, 어느 부유한 여성이 힝(삼각그물)을 가지고 하천에 고기잡이하러 갔던 바, 파캉이란 종류의 수컷 물고기를 사로잡았다. 그는 낭타로타랑의 연인이었기에 그녀는 '연인을 잡으면 곤란하니 파캉을 살려 주세요."라고 부탁을 했다. 여성이 파캉을 돌려주니 낭타로타랑은 벼를 주었다. 그때부터 타일족은 다시 벼를 손에 넣어 벼농사를 시작할 수있었다. 그래서 홍카오헷의 의식에 가이 메이 웅 카오와 파캉, 파슈우라는 살아 있는 두 마리의 물고기를 바친다.


즉, 이 성장을 촉진하고 풍작을 기원하는 의례는 이러한 날아오는 거대한 쌀, 도망간 벼, 야생 새(암컷)와 물고기(암컷)에 의한 보관, 벼의 부활, 벼농사의 기원을 이야기하는 신화에 뒷받침되는 의례인 것을 알 수 있다. 의례에초청된 벼의 혼은 닭(암컷)과 물고기(암컷)를 바치는 것으로 안녕하게 되고, 벼의 부활을 건져올린 삼각그물로 밭의 보물을 건져올려 바치는 것으로 벼의 풍요가 약속되는 것이다.


또한 캄족의 사이에서는 닭과 돼지, 물소 등을 제물로 삼아 벼의 혼을 대접하고 벼의 풍요를 기도하는 의례를 행한다. 예를 들면, 루앙남타의 나레군 삼송 마을에서는 벼가 영글기 전, 아직 알곡이 푸를 무렵에 벼의 수확이 많아지도록 라망 곳(혼·벼)라는 의례를 행한다. 밭의 오두막 근처에 춋(마이봉의 대나무)를 한 개(의례를 행하는 사람에 따라서 숫자는 바뀌며, 많은 사람은 12개를 세우기도 함) 세운다. 춋에는 각 마디마다 폿쵸(얇게 깎아 술처럼 만든 장식물)을 장식하고, 그 대나무 끝에서 슈로이(대나무의 테를 연결한 것)를 늘어뜨리고, 그 끝에다 싱(새), 카(물고기), 호이(매미)의 대나무로 짠 모형을 붙인다. 춋의 아래에 원형 밥상을 놓고, 그 둘레를 대나무 고치의 울타리로 에워싼다. 밥상 위에 알, 꽃, 빙로스(여성이 씹는 베텔야자의 열매로 만든 기호품), 돈(동전)을 바친다. 다음으로 춋의 아래에서 돼지를 죽여서 그 생피를 춋의 지면에 뿌리면서 "여기에서 돼지 한 마리를 죽여서 바쳤습니다. 라망곳(벼의 혼)들은 여기에 와서 드세요. 드시면 벼가 잘 영글게 해주세요."라고 외친다. 돼지를요리하면 간장과 폐, 머리, 꼬리, 뒷다리 하나(이것만은 날로)를 앞과 똑같은 말을 외치면서 밥상 위에 바친다. 그뒤 모두 돼지의 요리를 먹는다.


여기에서도 새와 물고기의 모습이 보이고, 벼의 혼을 안녕하게 하는 장치인 것이 틀림없다. 또 매미는 서늘함을 가져오고, 돼지고기를 대접하는 것도 벼의 혼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민족마다 의례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양하지만, 벼의 혼에 대한 경외와 공경의 마음이 의례의 중심인 것은 공통된 관념이라 말할 수 있다.


이들 외에도 병의 배제와 낙뢰 방지 등 벼의 성장을 촉진하는 의례가 다양하게 발견된다. 이러한 단계를 거쳐서 결실의 시기를 맞이하고, 수확 작업이 시작된다.




다중 구조를 가진 수확 의례


수확 작업에 수반한 의례도 다양하다. 민족에 따라서 덜 익은 벼를 수확하여 볶은 햅쌀로 먹는 수확 시작 의례, 본격적인 수확 작업의 개시기에 행하는 의례, 탈곡 의례, 마을의 곳간에 옮겨 들이는 때의 의례 등 민족에 따라서다양하다. 여기에서는 아카족이 사는 루앙남타의 뭉싱군 야루 마을의 사례를 증심으로 살펴보겠다.



(1) 수확 시작과 햅쌀을 먹기 시작하는 의례


우선 오도 고(벼·따다)라는 의례를 행한다. 벼의 이삭이 반쯤 누렇게 되고 반은 푸르게 남아 있는 무렵에 행한다. 이것은 최초로 햅쌀을 먹는 의례이다. 


먼저 밭에 가는 건 남성(집의 장남 또는 차남이라도 상관없다. 자식이 없을 때는 사위도 상관없음)과 여성(여주인 또는 딸 중에서)이 한 조이다. 남주인은 가서는 안 된다. 만약 남주인이 나가다가 도중에 뱀이 길을 가로지르는 걸 우연히 만나면 그 이후 아피포로(집의 선조 영혼)에게 관련된 의례를 행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집을 나올 때는 페통(어깨에 거는 검은 베로 만든 자루)을 어깨에 걸고, 남성은 좌우의 손에 화로의 재를 한 움큼씩 쥐고집을 나선다. 마을의 로콩(마을 출입구의 수호문)을 나와 잠깐 간다면, 먼저 오른손의 재를 뿌리고 다음으로 왼손의 재를 뿌린다. 이것은 길의 좌우에서 뱀이 횡단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행한다. 


밭에 도착하면 포페춍(성스런 밭의 조각 이엉을 한 오두막)의 뒤쪽에 파종했던 벼 포기 중에서 잘 영근 세 개의 이삭을 가장 이삭 끝에 가까운 잎의 부근부터 따서 거두어 페통에 넣는다. 그리고 보통 밭의 메벼와 찰벼를 각각 양손으로 한 그릇 분량을 훑어 거두어 페통에 담는다. 포페춍의 뒤쪽에 심었던 벼 포기를 베어 거두어 포페춍의 지붕 위에 올리고 집에 돌아온다.


집에 돌아오면 아피포로호니라는 아피포로의 기둥에 페통을 그대로 걸어둔다. 시에퓨(볶은 쌀)을 만든다. 보통의밭에서 훑어 거두어 온 메벼와 찰벼를 따로 분류하여 냄비로 볶는다. 조금 식혀서 작은 절구로 찧고, 왕겨와 쌀겨를 날려서 정미하고, 바나나잎에 넣어 로코(수원지)에서 길어 온 물을 조금 붓고 감싼다. 이 의례는 중요한 의례이기에, 깨끗한 붉은 수탉을 죽인다. 대나무로 짠 밥상 위에 멥쌀과 찹쌀의 시에퓨, 조리한 닭의 머리, 발, 간장의 고기, 시파(술), 로보(차)를 올린다.


다음으로 포페춍의 뒤쪽에서 따서 거둔 세 개의 이삭을 페통에서 꺼내고 로코의 물로 씻어서 밥상 위에 훑어 떨어뜨린다. 세 이삭의 줄기는 아피포로의 카테(시렁)에 걸려 있는 오도체누라는 고리에 걸어 놓는다. 남주인은 그밥상을 아피포로 앞에 옮기고, 아피포로카테에 조금씩 바친다. 남주인은 아피포로카테에서 공물을 내려서 고기를조금 먹고, 여주인과 자식, 딸의 순서로 먹게 한다. 그뒤 볶은 쌀을 가족이 먹는다.



화전 밭벼밭의 포페춍(루앙남타의 몽싱군 아카족)




세 개의 이삭에서 밥상 위에 훑어 떨어뜨린 알곡은 파종할 때 남은 볍씨의 자루에 함께 담아서 아피포로의 아래(여주인이 잘 때의 머리 부근)에 보관한다. 이 자루의 알곡을 세유다마라 말하고, 이듬해의 볍씨에 섞을 수 있다.


다만 밥쌀이 부족하다면 오도고의 의례를 서둘러 행한다. 그것은 이 의례를 하지 않으면 햅쌀을 먹는 게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카아게이족이 사는 보케오의 뭉군 퐁사왕 마을에서도 먹는 쌀이 부족하면 '호도 고(벼의 꽃·따다)'를 서둘러 행한다. 아직 푸른 알곡을 훑어서 냄비로 볶고, 햇빛에 말리고 정미하여 '호 스(쌀·새롭다)'라고 부르는 볶은 쌀을 만들어 아피포로에 먹게 하고 자신들도 먹는다. 이것을 끝마친 뒤에는 볶은 쌀을 만들어 먹어도 괜찮다.


또한 캄족이나 타이족계, 라오족의 사람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밥쌀 부족을 보완하기 위하여, 볶은 쌀 만들기를 행하고 있다. 캄족이 사는 우돔사이의 사이군 남렝 마을에서 옛날에는 밥쌀이 부족해질 때 곳프라웃프라는 볶은 쌀을 만들어 먹었다. 루잇(도둑질)을 하러 간다고 하며 밭에 가서, 정식 밭의 입구가 아닌 곳으로 들어가 올벼가 아직 어중간하게 푸른 쌀을 수확해 온다. 집에 돌아와서도 집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지 않고, 집 밖에 둔다. 선조들의 영혼에게 보이지 않도록 집 밖에서 탈곡하고, 볶아서 햇빛에 말리고 정미한다. 먹을 때는 집 안에서 먹는다.고파라웃프는 소량씩 몇 번이나 만들고, 해에 따라서는 올벼의 벼를 모조리 먹어 치우는 일도 있다.


이 오도고라는 의례가 끝나면 일반 밭의 벼를 수확하기 시작한다. 벼를 베어 거두면 서서히 체풍 바우(낟가리 쌓기·나르다)를 한다.



(2) 마을의 곳간으로 운반해 들이는 의례


밭의 벼베가가 전부 끝나면 체풍 마(낟가리 쌓기·크다)라는 의례를 행한다. 포페춍 뒤쪽의 성스러운 밭에 심었던 벼를 베어 거두고, 이삭을 토란 위에 올리는 체풍 마를 두 개 만들어 포페춍 앞에 바치고, 밭 안 각각의 체풍 바우 알곡을 탈곡한다. 옛날에는 발로 비벼서 탈곡했다. 그것이 모두 끝나면, 마지막으로 체풍 마의 알곡을 발로 비벼서 탈곡한다. 체풍 마 하나의 알곡은 집의 곳간에 최초로 운반해 들여 한가운데에 놓고, 그것에 작은 돌을 넣는다. 그뒤 밭의 탈곡한 알곡을 전부 날라 들인다. 여기에는 성스러운 밭의 벼의 혼을 일반 밭의 알곡에도 이전시킨다는 주술감염적인 의의를 읽을 수 있다.



(3) 볍씨를 곳간에 수납하는 의례


집의 곳간에 알곡을 날라다 넣는 일이 끝나면 '포유풰'라는 의례를 행한다. 다음날 오전 7시부터 8시쯤에 아피포로의 아래(여성이 잘 때의 머리 부근)에 보관하고 있던 셰유다마라고 부르는 알곡과 체풍 마의 의례에서 남았던 또 하나의 알곡을 섞어서, 치지마공(볍씨의 곳간)에 가지고 가 수납한다. 그때 치지마공 안의 가치가우(달걀)이 쪼개져 있으면 교환하고, 쪼개져 있지 않으면 그대로 놔둔다.


다음으로 시마와 포하라는 두 종류의 나뭇잎을 준비한다. 그리고 호챠챠페(찹쌀죽), 지파(소주), 로포(차)를 각각 바나나잎으로 감싼 걸 두 묶음 , 바나나잎으로 감싼 삶은 달걀을 1개, 포하잎에 감싼 호챠챠페를 2개를 준비한다. 그들과 키요(벼를 베는 낫), 대나무 끈 3개를 사이카토(바구니)에 넣어서 밭으로 향한다. 로콩(마을 입구의 문)을 나와 잠시 하는 바로, 포하잎에 감싼 호챠챠페 2개를 길의 오른쪽과 왼쪽에 던져 버린다. 이것은 뱀이 길을 가로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밭에 도착하면 포페춍 주변을 키요로 청소하고, 지면에 구덩이를 만들고 시마잎을 깐다. 그 위에 집에서 가져온 삶은 달걀을 놓고, 다시 그 위에다 시마잎으로 덮는다.


다음으로 성스러운 밭에 남아 있는 벼 포기의 줄기 위쪽과 아래쪽에 바나나잎으로 감싼 호챠챠페, 지파, 로포를 위쪽에는 아래로 향하게, 아래쪽에는 위를 향하게 붙인다. 


그리고 줄기의 위쪽과 아래쪽 사이를 키요로 잘라 버리고, 위쪽 줄기는 사이카토에 담아 집으로 가지고 돌아온다. 아래쪽의 물건은 밭을 지키는 포페춍의 영혼이 먹을거리로 그대로 남겨 놓는다. 숨겨 놓았던 삶은 달걀을 몰래 훔쳐 나오듯이 꺼내고, 사이카토에 담아서 집으로 가지고 돌아온다.


포페춍을 해체하여 집으로 가져오고, 키요로 잘랐던 위쪽 줄기와 물건은 아래로 향하게 하고, 치지마공에 단다. 이 의례를 하면, 올해의 벼농사 작업이 모두 끝나게 된다. 이 의례를 하지 않아 포페춍을 헐지 않고 그대로 놔두고 밭 안에 물소가 들어온다면, 돼지를 죽여서 의례를 하지 않으면 사람이 병에 걸리고 죽어 버린다고 한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매우 복잡한 정중하고 신중한 의례이다. 특히 어느 단계에서도 포페춍 뒤쪽의 성스러운 밭에의례적으로 심었던 벼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것을 알 수 있다. 파종 의례의 절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벼를 해마다 볍씨로 계속하여 쭉 파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벼 혼의 계승'이며, 이것이 벼농사 또는 벼농사 의례의 주제인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파종 의례에서 심은 볍씨를 계속하여 심는 '벼 혼의 계승'은 캄족과 타이족계사이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벼의 수확 기술에 대해 언급하겠다.




(4) 수확 작업과 수확 도구


벼의 수확 기술은 민족에 따라서 큰 차이가 있으며, 역사적으로도 변천을 확인할 수 있다.


① 알곡을 맨손으로 훑어 거두는 수확 방법

캄족은 이삭 끝부터 알곡을 훑어 거두는 방법으로 수확한다. 벵홋토라고 부르는 작은 바구니를 배 앞에 안고서, 한손으로 벼이삭을 끌어당기고 다른 한쪽 손으로 훑어 넣는다. 벵홋토가 가득차면 양홋토라는 큰 운반용 바구니에 옮기고, 밭의 곳간으로 운반해 들인다. 캄족이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 맨손으로 수확하는 것에 대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벼쌀 신화를 보면 벼의 혼은 인간이 의례를 하지 않았거나 두드리는 등 난폭하게 훑으면 도망가서 숨어 버린다고 믿고 있으며, 맨손으로 훑는 것이 벼의 혼을 공손하게 훑는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손으로 훑어 거두는 밭벼의 수확(루앙프라방의 몽싱군 동 마을 캄족)



②이삭 따는 도구를 사용하는 수확 방법

캄족이 맨손으로 훑어 거두는 것에 반하여, 몽족과 야오족, 타일족, 타이뎅족, 타이담족, 라오족 등의 사이에서는 이삭의 머리를 따는 도구로 따서 거두는 방법으로 수확한다. 이 이삭 따는 도구는 민족에 따라서 형태에 큰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몽족은 '비오'라고 부르는 이삭 따는 도구를 사용한다. 반월판 모양의 배 부분에 날을 설치하고, 판에뚫린 구멍에 끈을 꿰어 그 끈을 손등에 걸고 손바닥으로 감싸듯이 하여 쥔다. 벼의 이삭 머리에 날을 대고 중지와 약지로 이삭 머리를 끌어들여 따서 거두는 것이다. 따서 거둔 이삭은 한쪽 손으로 들고, 꽉 차면 묶는다. 


야오족의 이삭 따는 도구는 '짓푸'라고 부르며, 몽족의 반월판 모양에 직각이 되도록 대롱의 손잡이를 붙인 것이다. 손잡이를 다는 방법은 판의 뒤쪽 꼭대기에 가까운 부분에 구멍을 뚫고, 속이 빈 대롱의 측면에 홈을 넣어 판의 구멍 부분과 대롱의 빈 공간을 맞추어서 대나무 꼬치를 꿰어 고정하는 방법이다. 대롱의 손잡이는 판을 가운데에 두고 한쪽이 길고 한쪽은 짧다. 긴쪽은 비스듬하게 깎아서 뾰족하게 하고, 그쪽을 위로 하여 세워서 쥐고 중지와 약지로 이삭 머리를 끌어들여 따서 거두는 것이다. 따서 거둔 이삭은 한쪽 손으로 들고 꽉 차면 단으로 묶는다. 손잡이의 뾰족한 부분은 따서 거둔 벼이삭을 단으로 묶을 때 머리카락에 꽂거나 잎에 물거나 한다.


이에 반하여 타이족계의 이삭 따는 도구는 '헤얏푸'라고 부르며, 판의 모양이 새나 물고기, 곤충 등 다양한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손잡이의 부착법, 사용방법은 야오족과 변함 없지만, 손잡이의 길이는 손의 너비이고, 양끝이 횡단면으로 잘려 있다. 특히 후아팡과 솅크왕에 사는 타이뎅족과 타이무이족 등의 타이족계 사람들 사이에는 새와 물고기 모양의 것을 볼 수 있는 게 특징이다. 예를 들면, 타이무이족이 사는 솅크왕 캄군 포시 마을에서는 인간의 악행에 의하여 숲과 하천에 숨은 벼를 새와 물고기가 보관하고 있었는데, 인간의 소원으로 다시인간의 곁에 가져다 주었다고 이야기하는 신화를 가진다. 그래서 파종 의례에서는 새의 모형을 만들어 바치고, 이삭 따는 도구를 새나 물고기 모양으로 만든다고 한다. 이것은 루앙프라방의 남바크군 곳크낭 마을의 타일족이 말하는 숲으로 도망간 벼는 붉은 야생 암탉이, 물가로 도망간 벼는 물고기 암컷이 보관하고, 10만 년 뒤에 인간의 곁에 돌아왔다는 볍씨 부활 신화와 같은 뿌리이다. 모두 벼(또는 벼의 혼)와 새와 물고기의 친근성을 강하게 이야기하는 신화이다. 새와 물고기 모양의 이삭 다는 도구의 배 부분에 날이 있어, 그곳으로 벼를 끌어들여서 따서 거두는 건 그곳이야말로 벼 또는 벼의 혼이 가장 안심할 수 있다는 상징적 장소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타이뎅족이 사는 후아팡의 삼타이군 나라 마을에서는 새 모양의 헤얏푸로 수확하면 하늘을 날듯이 수확이 진행된다고말한다. 이것도 또한 벼농사 신화를 배경으로 하여 구체화된 수확 기술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③이삭 따는 도구에서 벼를 베는 낫으로

그러나 이러한 이삭 따는 도구가 서서히 벼를 베는 낫으로 변화해 간다. 그 계기는 탈립성이 큰 품종이 도입된 점과 논벼농사의 도입이다. 예를 들면, 앞의 타이뎅족이 사는 나라 마을에서는 키요라고 부르는 벼를 베는 낫이 도입된 건 1990년부터이다. 그것은 이삭을 세게 내리쳐서 탈곡할 수 있게 되어, 그때 아래에 까는 대나무 깔개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받아들였다. 현재는 비닐시트를 구하게 되어서, 키요에 의한 수확이 많아졌다. 또한 사회의 변화로 일찍 베어 거두는 일을 요구하게 된 점도 키요를 사용하게 된 이유이다.


그러나 카오탕이란 품종만은 이삭 끝을 배 모양으로 만든 절구에 넣어 절굿공이로 찧어서 탈곡하지 않으면 왕겨가 떨어지지 않아서 이삭 끝부터 따서 거둘 필요 때문에 이삭 따는 도구를 사용한다. 키요로는 이삭 끝부터 잘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전통적인 탈립성이 낮은 품종이 남아 있는 한, 이삭 따는 도구는 계속 남아 있을 것이고, 새와 물고기에 의한 볍씨 부활 신화와 벼의 혼에 대한 관념도 계속 이야기될 것이다.




새 모양의 헤얏푸 사용법(후아팡의 삼타이군 나라 마을 타이뎅족)


 



화전터에 대한 시선 -숲을 먹고, 숲은 기르는 화전 농경


지금까지 화전의 연구는 작물 재배가 종료하기까지를 그 대상으로 하고, 그 화전터에 대해서는 휴한지라고 하며 결말을 냈다. 그러나 라오스 북부의 화전민에게는 재배가 끝난 뒤에도 그 화전터는 중요한 식량의 채집지이자, 대나무 세공은 물론 자재의 채집지라는 것이 밝혀졌다. 예를 들면, 캄크엥족이 사는 루앙남타의 남타군 챠룽슷 마을은 1년 동안 벼를 재배하면 그 이후는 대부분 작물은 심지 않는다. 3년째부터 9년째까지 렝카뇽(젊은 숲)이라 부르고, 재생과정의 숲이라 평가한다. 10년째부터 14년째까지를 렝케(늙은 숲)이라 부른다. 15년 이상인 숲을 카챠라고 부르고, 다시 화전을 할 수 있는 재생된 숲이라 평가한다. 재생 과정인 렝카뇽에서는 대나무의 아이를 시작으로, 5-7월의 시기에는 티모이, 티타왕, 티토룽, 티톳크, 티카 등의 티(버섯) 종류와 랏쿵파이, 쿵팡, 랏쿠링, 라뇨네, 라캉타토 등의 버섯 종류도 채취한다. 그외에는 라(야생 나물)로서 라타우에이, 라풍펫, 라왕 등이채취된다고 하며, 재배 정지 이후 3년째부터 9년째의 숲에서 다양한 먹을거리를 채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곳에는 그들을 먹이로 하는 멧돼지와 사슴 등의 야생동물이 모이고, 인간에 의하여 수렵장이 되기도 한다. 이것은 정말로 화전터를 채소의 밭, 수렵장으로 반자연, 반재배의 상태로 관리한다고 해도 좋다.


게다가 화전터의 대나무에 대해서는 '냥눙 풋 포 마(젊을 때·먹는다·함께·밥), 냥타오 싯 포 요(늙었을 때·잔다·함께·사람)이란 속담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재생 과정에서 나오는 대나무의 아이는 먹을거리로 이용한다는 걸 나타내고 있다. 또 젊은 숲만이 아니라 렝케(늙은 숲)에서도 집의 건축자재가 되는 대나무를 채취하는 일도 볼 수 있다. 더구나 퐁사리의 마이송황 마을(라오크족)의 '히야포 시아(벌집은 7일), 야포 시누(밭의 둥지는 7년)'이란 속담은 벌집은 7일 지나면 벌꿀을 채취하고, 야포(3년째의 화전터)는 더 많은 7년이 경과하면, 즉 재배 정지부터 10년 지나면 다시 밭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말하며, 화전을 위하여 필요한 휴한 기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숲도 대나무가 섞인 숲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이들 속담은 대나무의 이용 방법을 설명함과 동시에,재생 과정의 숲에 대한 화전민의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수확 4개월 뒤의 화전터에서 재생되는 대나무(후아팡의 삼타이군 도앙두 마을 타이뎅족)





이것이야말로 대나무의 강한 재생력을 인식한 '대나무의 화전' 그 자체이다. 이러한 대나무에 대한 인식은 1년째는 아와야마(조의 화전), 2년째는 대나무의 자식밭, 3년 되면 원래의 버섯의 화전, 10년 되면 또 조의 화전이란 전승과 깊이 연결된다. 


즉 작물 재배만이아니라, 화전터에 대한 반관리, 반재배, 반채집이란 화전민의 시선까지 포함하여 '화전'이라 파악하여 이해하는 것으로, 화전이 숲을 먹고, 숲을 길러 재생시키는 지속가능한 농경임을 이해할 수 있다.





마치며


이상 라오스 북부에서 행하는 화전 벼농사의 여러 모습을 서술했다. 여기에서는 상세하게 언급할 여유가 없었지만, 그래도 그들의 화전에서 행하는 벼농사 의례와 벼농사 기술이 민족마다 풍부한 변이를 가지고 전승되고 있는거대한 쌀과 하늘을 나는 벼, 도망가 숨고 부활하는 벼, 사체에서 생기는 형태의 볍씨 기원, 도둑질하는 형태의 볍씨 기원, 이삭이 떨어지는 형태의 볍씨 기원 등 벼의 혼과 볍씨의 기원 및 부활을 이야기하는 신화에 지배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즉, 화전지 선정에 하는 의례, 성스러운 밭에서 하는 파종 의례, 생육 촉진 의례, 다중 구조를 지닌 수확 의례와 섞어짓기를 포함한 파종, 제초, 수확 등의 다양한 장면에서 숲의 영혼과 선조의 영혼, 벼의 혼들에 대한 배려로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신화에 지배된 벼농사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 결과 숲의 난벌을 억제하고, 숲의 재생을 촉진하며, 다양한 볍씨를 유지하고, 지속가능하며, 민족마다 풍부한 다양성을 가진 벼농사를 성립시킨 것이다.


또한 라오스 북부의 캄족 사이에서는 벼의 씨를 심기 전에 스로라고 부르는 토란을 심어 모두 벼의 수확 이후에 토란을 수확하여 새로운 해를 맞이할 때 선조에게 토란을 드시게 하지 않으면 선조의 영혼이 노하여 벼의 수확을사라지게 하거나, 가족을 죽게 하거나 병에 걸리게 한다는 전승이 존재한다. 그에 기반을 한 덩이뿌리 심기 의례,덩이뿌리의 수확 의례, 덩이뿌리 정월이 행히지고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것은 화전 벼농사에 선행하여 화전 덩이뿌리 농사가 행해졌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게다가 사사키 씨 등이 제창해 온 '조엽수림 문화론'이나 츠보이가 주장한 일본 열도의 '덩이뿌리 정월' 등의 의론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전개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이러한 동남아시아의 화전 벼농사 민족의 시점에서 지금까지 축적된 일본 열도의 '벼농사 문화'를 다시 검토함으로써 경직화된 '논벼농사 민족사관'에서 벗어나 다양한 민족문화가 혼재하는 다문화적인 일본 열도의 모습을그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만, 이 글에서 여러 번 기술한 라오스 북부의 화전 벼농사가 지금에 이르러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까지 재생 과정의 화전터가 모조로 고무나무 숲이 되었다는 문제이다. 그곳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은 '젊은 숲'이라 부르는 재생 과정의 숲과는 관계 없는, 숲 속 그늘의 풀이 모조리 배제되고, 고무나무만이 생육하는 모습이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을 억제하는 영혼이나 신화의 존재 등과 멀리 떨어진 세계이다. 이미 그곳에서는 재생하지 못하는 화전터가 제한도 없이 전개되어 간다.그 앞에 보이는 건 '물 환경의 파괴'이다. 이야말로 '농업이 환경을 파괴하는 때'의 최전선의 현장이다. 그러나 그렇기에 그 현상을 앞에 두고 지금까지 '화전 벼농사 농민'이 축적해 온 지혜의 총체를 배우고, 새롭게 그 다양한 본연의 상태와 지속가능한 환경의 관계하는 방식을 확인하며, 그 유효성을 제시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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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2



기고4

맛있는 쌀을 찾는 일본인     -하나모리 쿠니코花森功仁子




품종의 등장


일찍이 벼에는 대체로, 몇 가지 품종이 있었을까? 품종이란 개념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헤이안 시대에 건립된 교토 사가노嵯峨野의 '세료지淸凉寺'에서는 교토 3대 진화제鎭火祭 하나인 열반회의 횃불 의식이 매년 3월에 행해진다. 이 열반회에서는 세 개의 큰 횃불에 불을 붙이고, 각각의 횃불은 올벼, 가온벼, 늦벼를 나타내며, 그 불타는 모습으로 그해의 풍흉을 점친다. 언제부터 불을 붙였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에도 시대에는 이미 행해졌다고 한다. 


올벼, 가온벼, 늦벼의 구별은 언제부터 했을까? 율령 시대의 <영집해令集解>에는 야마토국大和国의 사례로 소후노시모코오리添下郡와 헤구리노코오리平羣郡 등은 4월에 씨앗을 싹틔워 7월에 베어, 카츠라기노카미葛上와 카츠라기노시모葛下나 내內 등의 코오리는 5-6월에 씨앗을 싹틔워 8-9월에 베어 거둔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농번기가 코오리에 따라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요시다 아키라吉田晶 씨와 히라카와 미나미平川南 씨는 당시 올벼, 가온벼, 늦벼의 분류가 있으며, 코오리마다 대개 통일되어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른바 헤이안 시대 초기 무렵에는 벌써 벼농사의 관리와 통제가 행해져, 쌀은 정치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만엽집에는 올벼의 이삭으로 만든 머리에 쓰는 관을 받은 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家持가 "내 누이가   업을 짓는다 가을 논의 올벼 이삭의 관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을지도"라고 노래한다. 헤이안 시대 말기의 호충집好忠集에는 "올벼 모를   머무는 사람에게   맡겨 놓고   나는 꽃놀이 갈   채비를 한다"라고 하여, 올벼의 모를 심어야 할 시기인데 남에게 맡기고 꽃놀이 채비를 서두르는 모습이 나타난다. 7월 중순 무렵에는 "내가 지키는   가온벼의 벼도   처마는 떨어져   여기저기 이삭   나오는구나"라고 노래한다. 또한 헤이안 시대 중기의 36가선歌仙의한 사람 오시코우치 미츠네凡河內躬恒는 가을 들판으로 매사냥을 나갔을 때, "깊은 산 논   늦벼의 벼를   베어 말리고   지키는 오두막에   며칠 밤이나 지났는가"라고 노래한다. 이들 노래에서도 헤이안 시대에는 벼의 품종이 이미 올벼, 가온벼, 늦벼로 분류되었단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만엽집에는 '갈식조도葛飾早稻'나 '문전조도門田早稻'라는 품종이 나온다. 8세기 전반의 <정창원正倉院 문서文書>에는 덴표호우지天平寶字 5년(761) 8월 27일 부에 '도의자稻依子' '지특자持特子'라는 품종을 오늘 내일 베어 거둔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대부터 중세에 걸쳐서 유적에서 출토된 목간과 에도 시대의 농서에는 붉은올벼(赤わせ), 흰까락(白ひげ), 아제코시あぜこし 같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벼의 품종명이 기재되어 있다. 히라카와 미나미 씨에 의하면, 2005년 나라현 시모다下田東 유적에서 출토된 9세기 초 무렵의 목간에는 '파종일(種蒔日)' '화세和世 심음(種) 3월 6일' '소수류녀(小須流女) 11일 심음(蒔)'과 올벼 두 가지 품종을 날을 바꾸어 심었던 일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뒷면에는 '7월 12일 14일 17일' '논 베기(田苅) 5일 부림(役)'이라고 베벼기 한 날이 기록되어 있고, 파종부터 베기까지 대략 120일이 걸렸다. 이것은 에도 시대의 재배기간과 거의 일치하며, 현재의 품종에서는 성숙기간이 짧은 히노히카리와 고가네바레黃金晴보다 조금 짧은 일수이다. 히라카와 씨는 헤이안 시대에는 품종에 적합한 재배방법이 확립되어 국가에서 통제, 관리하여 벼는 생산량과 품질이 안정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농서라고 전해지는 에도 시대 초기의 <청량기淸良記 -친민감월집親民鑑月集>에는 올벼 12종, 가온벼 24종, 늦벼 24종, 찰벼 16종, 밭벼 20종 전부 96종의 이름이 실려 있다. 게다가 가온벼와 늦벼는 절반인 12종으로 나누어 심는 시기를 앞뒤로 해서, 각각 12종은 올벼부터 늦벼의 후반까지 파종시기를 5회로 나누었다. 또한 밭벼의 골타기와 거름주기도 언급하고, 각각의 모내기와 베는 시기와 마음가짐이 기재되어 있다. 벼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는 바이다.


에도시대 중기에 편찬된 <제국산물장諸國産物帳>에는 전국 각지의 식물과 수산물, 광물 등과 함께 106종의 농산물이 정리되어 있다. 내가 사는 시즈오카현의 <이즈국伊豆國 산물장>과 <토오토우미국遠江國 겐가료懸河領 산물장>에는 벼에 대한 상세한 기술이 나오고, 이즈반도 서해안의 토이촌土肥村에서는 '유키노시타ゆきのした'라는 새로운 쌀이 음력 5월 하순부터 6월 상순까지 수확되어 에도로 헌상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대의 달력에 비추어도 7월 초쯤에 베려면 눈 아래에서 싹이 나올 만큼 춘분 전의 극조생종 벼이다.유감스럽게도 이 품종은 오늘날 남아 있지 않다. 산물장에서 벼는 올벼, 가온벼, 늦벼, 찰벼, 밭벼의 다섯 가지로 분류하고, 토오토우미국 겐가료(현재의 카게가와시掛川市 부근)에서는 77종, 키미사와군君沢郡(현재의 이즈시 슈젠지쵸修善寺町 주변, 이즈반도 중부)와 타카타군田方郡(이즈반도 동부)에서는 56종, 가모군賀茂郡(이즈반도 남부)에서는 61종의 이름을 들고 있다. 시즈오카현에서는 2009년 고시히카리와 아이치노카오리 등 상위 6품종이 생산량의 90%를 넘는다. 효율화된 현대에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한 지방에 품종 수가 많음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볍씨의 관리는 신중하게 행한 듯하다. 오와리국尾張國 아스카 마을飛鳥村의 <농가록農稼錄>에는 볍씨는 가마니마다 종자 푯말에 품종을 기록하고, 잘못해서 바뀌지 않도록 가마니 안과 밖에 푯말을 놓으며, 꽉 묶어 쥐가 먹지 않고 습기가 없는 곳에 수납한다고 기재되어 있다. 종자의 선발법에 대해서도 <농업전서農業全書>나 <농업여화農業余話>에서 상세한 기술을 볼 수 있다. 어떤 농서라도 얼마나 안정적으로 많은 수확을 할 수 있을지에 여름이 할애되고 있다.


앞에서 기술한 산물장에 의하면, 현재의 카케가와나 이즈반도 남부 같은 따뜻한 지역에서는 올벼의 비율이 비교적 많고, 산골짜기의 이즈 중부에서는 늦벼가 많다. 또한 당시 사람들은 벼의 재배에 지역의 기후풍토가 깊이 관계되어 있음을 인식했다. 예를 들면, 엔슈 야로쿠遠州弥六, 코시요세こしよせ, 후쿠지로福次郞 등은 늦벼로 모내기하는 지구와 가온벼로 하는 지구가 있었다. 흉년부지(흉년을 모름), 시시쿠와(멧돼지가 먹지 않음), 빚 없는 올벼라는 농민의 바람을 나타내는 품종명에 섞이어서 아마카타あまかた(天方)이나 쿠라미くらみ(倉眞)라는 마을 이름이 붙은 품종도 있다. 아마카타 지구와 쿠라미 지구는 남알프스의 남단에 위치하고, 산을 등지고 완만한 경사를 지닌 중산간지역이다. 현재는 두 지구라도 성터에서 멀리 바라다보는 풍경은 일부의 벼논을 제하고 차밭이나 잡목림이 되어 있다. 그러나 산물장의 상세한 기술에서 에도 시대에는 각지의 풍토에 맞추어 마을마다 적합한 벼를 선별하며 관리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품종의 개념


산물장에 의하면, 찰벼의 비율은 가모군에서는 61종 가운데 21종이고, 그 나머지 지역에서도 20% 가까이가 찰벼였다. 찰벼는 메벼와 비교하여 알곡이나 줄기 등에 색이 있는 경향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붉은찰이나 검은찰 등 색에서 유래한 이름을 붙인 품종이 많다. 또한 이세伊勢 찰, 미즈구치水口 찰, 죠우시로우城四郞 등 장소에서 유래하는 이름과 개인의 이름이 붙여진 것도 있다.



계통번호

품종의 표기

(채취 장소)

이삭패는

일수

가지치기 

갯수

줄기 

길이

이삭

길이

지상부

길이

이삭 하나당

알곡 수

까락

왕겨털

유무

찰/메

J21검은찰

(아키타)

84.2

4.7

75.5

25.4

100.9

143.7

0

J33검은찰

(아키타)

84.5

4.8

72.6

24.4

97.0

126.3

0


J34검은찰

(아키타)

83.4

4.6

76.5

24.1

100.6

134.7

0



J45검은찰

(아키타)

81.2

6.2

77.8

24.1

101.9

141.7

2



J125검은나

(이시카와)

85.0

6.1

79.4

21.5

100.9

116.0

0



J128검은나

(이시카와)

98.9

9.7

88.0

20.4

108.4

72.7

0



J152검은찰

(시가)

101.7

4.8

97.6

25.2

122.8

132.7

0



J197검은찰

(시마네)

95.3

11.8

73.2

19.8

93.0

75.3

0



J198검은찰

(시마네)

120.3

10.5

92.5

21.0

113.5

103.7

2



J400검은찰
(와카야마)

 102.38.6 

84.0

22.8

106.8

100.3 

0

 유

표1 검은찰의 형질   *품종은 보관의 표기에 의함  **까락 길이는 1-4로 분류. 0은 없음을 나타냄  




2002년부터 2003년에 걸쳐서 시즈오카 대학 농학부 부속 농장(현재 지역필드과학교육연구센터)에서 300가지 가까운 벼의 계통을 재배했을 때의 이야기이다. 그들 계통 안에 '검은찰'이라 부르는 품종이 여럿 있었다. 검은찰은 에도시대에는 각지의 농서에 기재되어, 앞에 서술한 <토오토미국 겐가료 산물장>에도 기록이 남아 있다. 오늘날에도 향기가 많고 씹는 맛이 좋은 계통으로 일부 지역에서 재배되고 있다. 당시 시즈오카 대학의 육종학 연구실에서는 '검은찰'이라 알려진 품종이 10계통 보관되어 있는데, 그들은 표1처럼 와카야마나 시마네, 아키타 등에서 채집된 품종이었다. 이 10계통을 재배한 바, 표와 같이 형질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표에서 이삭 패는 일수란 모내기부터 이삭이 패기까지 걸리는 일수이다. 아키타의 검은찰은 이삭 패는 일수가 짧고, 시가와 와카야마나시마네의 계통에서는 비교적 길었다. 알곡의 끝에 생기는 '왕겨털'은 어떤 계통에서도 확인되는데, 그 가운데 아키타와 시마네의 두 계통에는 까락도 확인되었다(그림1). 까락은 야생종의 특징이며 재배화 과정에서 짧아지는 경향이 있는데, 일부 품종에는 잔존한다. 또한 찰벼인지 메벼인지를 판별하기 위한 아이오딘화칼륨 반응을 조사한 결과, 당연하게 모든 계통에서 찰기를 나타냈다.



그림1 왕겨털(위)과 까락(아래)



다음으로 수확한 현미에서 DNA를 추출하여 유전적 경향을 조사했다. 표2와 같이 아키타에서 채집된 검은찰 4계통 가운데 3계통은 유전적인 패턴이 일치하고, 이 3계통은 앞에 기술한 형질에 거의 같은 경향을 나타냈다. 그러나 그외의 계통에 대해서는 같은 현 안에서 채집된 계통임에도 일부에 패턴의 차이가 있었다. 오늘날의 품종에 대한 개념에서 이들은 모두 다른 품종으로 분류된다. 재배 품종, 예를 들면 아키타코마치와 히토메보레 같은 가게 앞에 늘어선 품종은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재배되어도 유전적인 패턴은 어느 것이나 똑같으며, 집약농업에 적합하다. 예외적으로, 최근 산지를 특정하기 위해 도열병 저항성을 가지도록 개량된 니가타현과 토야마현의 고시히카리 BL, 아이치노카오리 BL 등은 그 일부에 다른 패턴이 확인되며, 산지를 특정하는 지표로도 쓰이고 있다. 이처럼 품종이란 지금은 이름의 차이에 따르지 않고, 똑같은 유전적 배경을 가진 계통을 말한다.



계통번호,

품종의 표기

(채취지)

프 라 이 머

6P

17P

26P

29P

33P

34P

RM

OSR

1

224

253

19

22

J21검은찰

(아키타)

1

0

0

0

1

0

c

a

a

a

b

J33검은찰

(아키타)

1

0

0

0

1

0

c

a

a

a

b

J34검은찰

(아키타)

1

0

0

0

1

0

c

a

a

a

b

J45검은찰

(아키타)

0

0

0

1

1

1

d

a

a

a

b

J125검은나

(이시카와)

0

0

0

0

0

1

d

a

d

a

b

J128검은나

(이시카와)

0

0

0

0

0

0

c

a

a

a

b

J152검은찰

(시가)

0

0

0

1

0

1

a

a

a

c

j

J197검은찰

(시마네)

1

0

0

1

0

1

d

a

a

a

b

J198검은찰

(시마네)

1

0

0

0

0

1

b

a

c

a

c

J400검은찰
(와카야마)

 1

표2 DNA 분석에 의한 '검은찰'의 유전자형

0: 밴드 없음  1: 밴드 있음

회색칸: J21과 같은 유전자형을 가진 것

a-j: 각 프라이머에서 DNA 단편을 증폭했을 때, 밴드의 위치가 같은 것은 같은 문자로 표기




그런데, 품종이란 단어는 도쿄 농대 초대학장 요코이 토키요시橫井時敬 메이지 중기에 쓴 <농업범론農業汎論>에처음 나온다. 여기에서는 '변종 이하 다음 변종, 다음 아종 등 일체를 포괄하는 한자가 결합된 말'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메이지 시대에 들어와, 토지세 개정에 의해 화폐경제로 말려 들어간 농민은 조금이라도 많이 수확하여 화폐로 바꿔야 하기 때문에 다수확 품종을 재배했다. 그를 위해 대부분의 지방에서 질이 저하되고, 특히 소작미가 뚜렷하게 조악해졌다고 한다. 새 정부는 메이지 7년에 미국에서, 11년에는 인도네시아의 자바섬에서, 19년에는 이탈리아에서 볍씨를 가져오게 하고, 각지에서 재배시험을 행한다. 대부분의 시험구에서 재래종보다 수확이 줄었지만, 기후풍토에 익숙해지면 수확도 늘어날 것이라고 보고된다. 한편, 민간에서는 메이지 초기에 시마네현 아키시安藝市에서 '카메지龜治'가 선발되고, 오오야마大山에 참배하러 가는 길에 '오마치雄町'가 발견되었다. 중기에 야마가타현 쇼나이庄内 평야의 민간 육종가 아베 카메지阿部亀治가 '카메노오亀の尾'를 육성했다. 이 '카메노오'는 당시 육성된 '진리키神力' '아이코쿠愛国'와 함께 다이쇼 시대 말기에는 대륙에서도 재배되어, 당시 3대 품종이되었다. 이 시기 '아사히'와 '긴보우즈銀坊主' 등도 육성되었다. 이들 좋은 맛의 '긴보우즈' '아사히' '아이코쿠' '카메노오'는 고시히카리의 선조이다. 또, 한랭지인 홋카이도에서도 열심인 민간 육종가에 의해 벼의 재배가 가능해져 홋카이도에 널리 퍼졌다. 따라서 메이지 시기에 맛좋은 쌀의 뒤를 따름과 개량이 왕성하게 행해져, 오늘날 같은 품종의 개념이 확립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고시히카리와 DNA 감정


쌀의 DNA 감정을 시작하고 10년이 되었는데, 당초에는 자주 고시히카리의 샘플에 다른 품종의 쌀이 혼입되거나, 100알 가운데 100알이 서로 다른 품종이었던 일도 있었다. DNA 감정은 생산된 현미와 백미에서 DNA를 추출해, 그림2의 사진처럼 가시화해 판별하는 방법이다. 고시히카리의 종자 몇 알에서 DNA를 추출해, 어떤 영역을 증폭시켜 전기영동이란 방법으로 시각화하면 화살표 A의 위치에 밴드가 나타난다. 샘플 1부터 5는 고시히카리 특유의 밴드를 가진다. 그러나 6과 7번 레인처럼 다른 위치에도 밴드가 나타난 경우 그것은 DNA의 배열이 다른 것을 의미하고, 그 종자는 고시히카리의 그것이 아니다. 그림의 경우 샘플 6과 7은 화살표 A의 고시히카리 말고 히노히카리와 똑같은 화살표 B의 위치에도 밴드가 나타나, 다른 품종이 혼입되었음을 나타냈다. 복수의 DNA 영역을 조사하여 어느 영역에서도 고시히카리와 똑같은 위치에 밴드가 나타난 경우, 그 종자는 '고시히카리라고 생각해도 모순이 없는 종자'라고 판정된다. 반대로 한 군데라도 다른 위치에 밴드가 나타난 종자는 고시히카리가 아니라고 판정된다. 


그림2 DNA의 특정 영역을 증폭시킨 영동 사진

(1-7: 검사 샘플, 8: 고시히카리, 9:히노히카리, 10: 네거티브 콘트롤)




당초 혼입의 원인은 볍씨를 잘못해 다른 것과 바꾸거나, 다른 품종에 계속해서 똑같은 콤바인 등을 사용했기 때문에 서로 다른 품종의 종자가 섞이거나 하는 악의 없는 실수가 대부분을 점하고 있었다. 당시는 아직 DNA 감정이라 말해도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경연과 설명을 함으로써 그 위력을 많은 사람이 알게 된 것과 함께 제지 효과가 작용해, 현재는 생산장소에서 이와 같은 실수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유통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부 실수는 별개의 문제로서, 이쪽은 악의를 띤 가짜 고시히카리가 많다. 비식용 쌀이 식용 쌀과 술쌀의 원료가 되는 건 국가의 관리 소홀이나 기업윤리를 문제삼아야 한다. 


한편, 고시히카리 신화는 계속되고 있다. 고시히카리의 생산량은 전체 생산량의 36.2%를 점하여 단연 선두인 1위를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품종의 단일화는 작업의 집중, 병충해의 발생,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기 쉬운 등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다. 또한 농림수산 통계를 바탕으로 수확량이 많은 상위의 품종과 고시히카리의 계보를 조사해 보았다. 표3의 오른쪽 칸 G1은 사람을 예로 들면 고시히카리의 자식, G2는 손주, G3은 증손주임을 나타낸다. 표에 나타나듯이, 2007년산의 수확량 상위의 15위까지 모두 고시히카리의 일족이 점하고 있으며, 그 일족이 점한 비율은 실제로 83.5% 이상이다. 그림3에 나오는 유메츠쿠시夢つくし처럼 양친 모두 고시히카리의 피를 이어받은 계통도 있다. 고시히카리가 얼마나 균형이 좋은 품종으로 상품화되어 있는지가 선명하다. 유엔 식량농업기구에 의하면, 1950년대 수천 이상의 품종을 재배하고 있던 필리핀에서는 2006년 생산량의 98%를 다수확의 두 품종만 점하여 유전자원의 상실이 문제가 되었다. 마찬가지의 경향은 효율화를 추구하는 개발도상국의 대부분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벼가 원래 생물이란 점과 환경과의 조화라는 점에서 이 단일화에는 위화감을 느낀다. 남북 3000킬로미터에 이르는 일본 열도의 각각 다른 풍토 안에서, 그 풍토에 맞는 쌀의 맛이란 무엇일까? 홋카이도, 아이치, 미에, 미야자키 등 각지에서 새로운 품종의 개발, 또는 술쌀, 초밥쌀, 카레라이스용 쌀 등 이용 목적에 맞춘 쌀의 다양화가 도모되고 있다. 



순위

품종명

수확량(t)

비율(%)

고시히카리와의 관계

전국


8,705,000

100.0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고시히카리

히토메보레

히노히카리

아키타코마치

하에누키

키누히카리

키라라397

츠가루로만

나나츠보시

호시노유메

맛시구라

아사히노유메

아이치노카오리

유메츠쿠시

코시이부키

3,148,000

857,100

839,300

750,900

290,100

272,400

229,000

165,800

154,200

139,900

111,600

95,600

84,000

69,800

64,400

36.2

9.8

9.6

8.6

3.3

3.1

2.6

1.9

1.8

1.6

1.3

1.1

1.0

0.8

0.7

-

G1

G1

G1

G2

G2*

G3

G2

G2

G3

G3

G3*

G2*

G1

G2

찹쌀

-

309,700

3.6


표3 품종별 수확량과 고시히카리와의 관계

2007년도 농림수산 통계(농림수산성)을 참조.

(*는 코발트60을 조사한 고시히카리를 홑어버이로 가진 품종)


                                                              -IR8

                                                        -F1-

                                                              -후지미노리

                                                  -F1-

                                      -收2800-      -코시히카리

                                -F1-

                                      -北陸100호……고시히카리에 코발트 조사

                -키누히카리-

유메츠쿠시 -                             -토도로키와세

                               -北陸96호-

                             (나고유타카) -긴마사리


                                            -近畿15호(농림8호)

                               -농림22호-

                -고시히카리-             -近畿9호(농림6호)


                                          -모리타森田 조생

                               -농림1호-

                                          -陸羽 132호


그림3 유메츠쿠시의 계보





가짜 고시히카리 사건은 일본의 벼 품종이 유전적으로 얼마나 균일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아무튼 혼합물에 사용된 쌀조차도 고시히카리 패밀리의 쌀이었던 것이다. 품종의 다양화는 위조품을 만들기 어렵게 하는 좋은 체계의 하나이기도 하다. 가짜 고시히카리 사건은 또 일본인의 강한 '상표 지향'을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했다. 그 배경에는 '싼 게 비지떡'이란 과거의 체험이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지금의 쌀 품종은 '좋음'도 '나쁨'도 아닐 만큼 균일하다. 품종의 다양화는 또한 풍토에 알맞은 쌀농사와 함께 일본인에게 쌀의 미각을 일깨울 것이다. 그 결과 위조품을 사회에서 없애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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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2



기고3


논 잡초의 자연지自然誌     -후지이 신지藤井伸二





논과 잡초


논은 논벼 재배를 위한 공간이다. 그 목적에서 생각하면, 논벼 이외의 생물군은 필요없는 존재이다. 논을 주거지로 삼고 있는 생물군의 일부에는 수확의 방해나 장해가 되거나, 또는 쌀의 품질이나 수확량을 저하시키거나 하는것도 포함되어 있으며, 그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구제와 방제가 행해지기도 한다. 한편, 논은 다수확을 목적으로 관개와 시비가 행해지기에, 토양 양분이 풍부한 습지환경인 점이 특징이다. 수분과 토양 양분의 측면에서 보면, 논은 논벼 이외의 식물에게도 사정이 좋은 환경이며, 다수의 수생, 습지성 식물이 번성한다. 이와 같은 논에 번성하는 식물군에 대하여 종종 '논 잡초'라는 단어를 붙인다. 그럼 '논 잡초'라는 단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까? 논에서 생육하는 식물 전반을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고, 논벼 재배에 무엇인가 악영향을 미치는 식물(=해초)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한편, 논과 논두렁 모두에서 생육하는 식물을 '논 잡초'라고 부르냐고 하는 의문과 게다가 '절멸이 걱정되는 논 잡초'라는 표현에 대한 곤혹은 없는 것일까? 이러한 애매함과 막연함이 논 잡초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로막는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논 잡초=배제해야 할 악한 것'이란 선입관에는 그 나름대로 올바른 부분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것 이외의 부분을 돌아보지 않겠다는 결심을 이끄는 일도 있다. 여기에서는 논 잡초의 생활사 특성과 논 환경의 관계를 고려하여, 실상과 그 이해에 다가서고자 한다. 


'잡초'를 정확하게 정의하는 건 어렵다. 이것은 잡초라는 개념이 인간 활동 속에서 인식된 것이며, 잡초의 인식에도 인간 활동의 다양성에 응한 다양성이 있는 데에 기인한다. W. Holzner 씨의 "인위적 환경에서 잘 생육하고, 또 인간 활동에 간섭하는 식물군"이란 포괄적인 정의는 다양한 잡초의 실상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잡초'를 인간 활동과의 관련을 중심으로 파악할 경우에는 '바라지 않는 장소에서 인간의 도움(재배와 파종 등) 없이 생육하고,도움이 되지 않으며, 미움을 받는, 인축과 작물에 해를 준다" 같은 특성을 들 수 있다. 한편, 생물학적인 특징을 중심으로 파악할 경우에는 '개화까지 생장 기간이 짧고, 자가화합성(self-compatibility), 높은 종자 생산력, 높은 종자 산포능력, 발아 특성의 다양화, 여러해살이풀은 높은 영양번식 능력' 등의 특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들 특성은 잡초와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명료한 기준은 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작물에 해를 준다'고 말해도 어느 정도의 해를 주어야 잡초로 인식되는지 불명확하고, 수확과 농경노동에 주는 피해와 장해의 인식 정도는 사람에 따라 다른 경우도 많다. '생장기간이 짧다'는 생물적 특성을 보아도, 어느 정도 짧아야 잡초라 할 만한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은 설정되어 있지 않다. 또한 위에 든 여러 특성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가지고 있다면 잡초라 인식되기에 충분한 것도 많다. 이러한 예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잡초'를 일의적으로 정의하는 일은 곤란하지만 Holzner 씨의 포괄적인 정의에 따라서 다른 야생식물과 재배식물로부터 잡초를 구별해야 한다는 야마구치 히로후미山口裕文 씨의 주장에는 그 나름의 설득력이 있다.


위의 내용을 근거로 하면, '논 잡초란 논에서 잘 생육하고, 또 논벼 재배에 어느 정도 간섭을 하는 식물군'이라 표현할 수 있다. 표현으로는 단순하지만, 그 내용은 매우 성가시다. 양분의 수탈 등으로 벼의 생장에 영향을 주는가래나 물달개비, 그리고 수확할 때 혼입되어서 쌀의 품질을 저하시키는 물피 등은 비교적 알기 쉬운 유해잡초이다. 그러나 큰물개구리밥은 그 공중의 질소를 고정시키는 능력을 이용해 풋거름으로 이용되는 한편, 논 이면에 번성하여 논벼의 생육을 저해하는 일도 있어 유용식물과 유해식물의 이면성을 지닌다. 게다가 농경 방법의 차이와 그 변화에 의해서도 간섭의 정도가 크게 변화한다. 소와 말에 의한 써레질과 트랙터 경운에서는 써레와 로타리에 얽혀 작업능률을 저하시키는 식물종에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고, 인력으로 베어 거두는 수확과 콤바인 수확에서는 혼입 종자의 식물종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논벼 재배만의 경우에는 그다지 문제가 안 되는 벼룩나물이나새포아풀 같은 겨울에도 푸른 식물도 그루갈이를 행할 경우에는 큰 문제가 된다. 또 외래식물인 미국좀부처꽃, 미국여뀌바늘, 미국외풀 등은 새로운 논 잡초로서 인식되고 있다. 이처럼 논에 생육하는 식물이 논벼 재배에 주는 간섭의 정도는 영농 방법과 그 역사에 의존하여 크게 변화한다.


그럼 논 잡초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식물일까? 아사이 모토아키浅井元朗 씨는 '주요한 일본의 논 잡초와 그 구분'으로 합계 70가지 분류군(조류를 제외한 수치)을 들고 있다. 이 예에서는 침수성 민나자스말속 식물이 빠져 있지만 논벼의 생육기간 중에 논에서 생육하는 식물종을 많이 들고 있으며, 더욱이 논에서 번성하는 성질이 강한 식물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잡초라는 개념이 인간활동에 대한 간섭인 이상, '번성'이란 특질이 중시되는 것은 필연적 결과일 것이다. 그럼 논에서 생육하는 식물 중에서 번성하기 쉬운 식물을 추출할 수 있냐고 한다면, 이것이 간단한 일은 아니다. 영농 방법에는 지역차가 있는 것만이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변화하여 그에 따라서 번성하기 쉬운 식물도 다르다. 지금은 번성하지 않아도 예전에는 큰 피해를 주는 잡초였을지도 모르고, 앞으로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다. 결국 '논에서 잘 생육하는 식물 모두'를 잠재적인 논 잡초라고 파악하는 것이 가장 무난할 것이다. 또 '희소하더라도 논 환경에 대한 의존성이 높은 식물'은 논 잡초로서 파악하는 편이 좋다. 이것은 뒤에 기술할 생이가래처럼 예전의 논 잡초가 현재는 멸종위기종이 되어 있다고 고려할 수 있는 예가 있기 때문이다.




교란 환경에 대한 적응 전략


논은 습지 환경의 일종이다. 이것은 논벼가 수초의 일종이라는 점에서도 자명하다. 습지 환경으로 볼 때 논의 일반적 특징으로 얕은 수역(습지), 진흙 바닥, 부영양, 농경에 의한 강한 인위적 교란, 논벼의 우점 번성 등을 들 수 있다. 처음 세 가지 특징은 범람원이나 그 배후습지에서도 보편적인 환경조건인데, 뒤의 두 가지는 논벼 재배에 기인하는 것이다. 현행 논벼 경작에서는 모내기 직전의 쟁기질과 써레질, 모내기, 모내기 이후-수확기의 제초(여름철에 일시적 물떼기를 행하기도 함), 벼베기(수확) 등이 주요한 농작업이고, 이들 일련의 주기에 따라서 논환경은 계절적으로 크게 변화한다. 써레질은 물에 잠긴 논과 그 토양에 대규모 교란을 일으키고, 그때까지 생육하고 있던 잡초가 일소되어 맨땅 같은 천수역 환경이 형성된다. 모내기 이후-수확기에는 벼가 우점 번성하는 것과 제초제 살포에 의한 화학적 교란이 두드러진다. 벼베기 이후에는 우점 식물인 벼가 일소되어 맨땅 같은 습성 환경이 출현한다. 이러한 큰 환경 변동이 해마다 반드시 반복되는 것이 논의 특징이며, 일반적인 자연조건에서는그와 같은 환경 변동의 주기적 반복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환경이 단시간에 크게 변화하려면 대규모 교란이 필요하고, 논에서는 정해진 시기에 써레질이나 벼베기 같은 대규모 교란이 일어나는데, 자연환경에서는 물이 불거나 홍수가 나는 등의 대규모 교란이 매년 정해진 시기에 일어나는 법이 없다.  또한 논에서는 항상 제초에 의한교란이 있어 인력에 의한 제초는 논 잡초에게 소규모 교란(노동력의 투자량에 의해서는 대규모 교란이 될 수 있음)이지만, 제초제 살포는 상당히 큰 교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논 잡초를 고려할 경우, 습지로서의 일반적인 특징에 더하여 이와 같은 써레질, 벼베기, 제초 등의 인위적 교란은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교란 환경이 가지는 특징의 하나로, 불안정하게 변동하는 환경의 미래 예측이 곤란한 점을 들 수 있다. 논 잡초에게 쟁기질이나 제초 같은 인위적 교란의 시기와 그 규모를 예측하는 일은 어려울 것이다. 거꾸로, 안정적인 환경에서는 변동성이 작든지, 또는 예측할 수 있는 정기적인 변동이 존재하여, 예를 들면 원생림에서는 사계절에 대응한 예측성에 풍부하고 관대한 환경변동을 제하면 눈에 띄는 변동은 없다. 그럼 교란 환경에서 적응하는 생활사 전략이란 어떠한 것일까? 수리 모델의 예측에 의하면, 예측성이 낮은 교란 환경에서는 개체의 경쟁력을 희생하여번식력을 높이는 생활형으로 적응하며, 거꾸로 예측성이 높은 안정적인 환경에서는 번식력을 희생하여 개체의 경쟁력을 높이는 생활형으로 적응한다. 번식력을 높이려면, 영양번식능력(식물 단편에서 재생하고, 헛가지Turion 형성하는 등)의 발달, 영양생장 기간(발아부터 개화까지의 생장 기간)의 단축, 대량의 종자 생산(종자에 대량의 투자), 확실한 결실(제꽃가루받이 등) 같은 방법이 있다. 논 잡초의 영양번식 사례로 네가래, 만강홍 종류, 벗풀,올미, 개구리밥 종류, 올방개 등, 개화까지의 생장 기간이 짧은 사례로 가는마디꽃, 등에풀, 진땅고추풀, 곡정초,알방동사니 등, 대량의 종자 생산을 행하는 사례로 한 그루당 5-6천을 생산한 기록이 있는 물피, 알방동사니, 2천 알 이상의 기록이 있는 마디꽃, 등에풀, 물달개비, 강피 등, 확실한 결실을 행하는 사례로 닫힌꽃에 의한 제꽃가루받이 기구를 가진 둥근잎고추풀, 등에풀, 밭뚝외풀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교란의 강약은 한해살이와 여러해살이라는 식물의 기본적인 생활형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한해살이 식물은 모든 광합성 생산물을 한 생장기 안의 번식에 투자하여 종자를 생산하고, 결실 뒤에 그 개체는 죽는 단명의 생활형이다. 한편, 여러해살이 식물은 종자 생산에 분배하는 자원을 제한하고, 일부 자원을 이듬해 이후의 번식에 대비하여 개체의 생존과 유지에 분배하는 생활형이다. 이러한 생활형의 차이는 종자 생산 효율에 큰 영향을 주고, 개체당 종자 생산에 대한 자원 분배비율은 여러해살이 풀보다 한해살이 풀에서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앞서 기술했듯이 교란되는 환경에서는 대량의 종자를 생산하는 것이 적응적이며, 종자에 대한 자원 분배비율이 높은 한해살이 식물 쪽이 여러해살이 식물보다 유리하다. 


미우라 레이이치三浦励一 씨는 한해살이 잡초의 생활사 전략의 진화에 대하여 독특한 논고를 행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교란에 의한 위험을 회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세 가지 방향성이 있다고 한다(그림1).


첫 번째는 다른 식물이 생육하지 않는 빈땅을 이용하는 식물에 상정된 생활방식으로, 새로운 생육 장소에 효율적으로 도달하는 수단(바람에 의한 종자 산포 등)이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종자를 광범위하게 산포하는 것으로 공간적으로 위험을 분산시키는 전략이다. 두 번째는 제초 등의 고란이 계절적인 주기성을 가질 경우로, 제초 주기를 회피한 생장 기간과 그를 위한 발아 시기가 중요해지며, 게다가 돌려짓기와 묵히기, 제초 시기 등의 교란 주기가 변경된 경우의 보증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 이 경우 흙에 묻힌 종자 집단을 형성하여 종자의 발아 시기를 분산시키는 적이 적응적이다. 발아 시기를 분산시킴으로써 시간적으로 위험을 분산시키는 전략이다. 세 번째는 제초 등의 교란 빈도가 높아서 주기성이 적은 채소밭 같은 환경에서 발견되는 유형으로, 식물체가 작은 크기로 개화, 결실을 시작해 그대로 어찌어찌 생장과 결실을 계속해 나아가는 생활방식이다. 이와 같은 번식을 행하면, 갑작스런 제초에 맞닥뜨렸을 경우에도 어느 정도의 종자 생산량을 확보할 수 있으며, 제초되지 않은 경우에는 다수의 종자를 남길 수가 있다. 효율은 조금 나쁠지 모르지만, 항구적인 종자 생산이란 무한번식에 의하여 종자 생산을 못하는 위험을 회피하는 전략이다. 


위험 분산 전략


공간적 분산


 시간적 분산


무한번식

주요 형질


바람에 산포되는 종자


장기 휴면 종자


무한번식








대표적인 종


망초


명아주


별꽃








서식지 유형


빈땅


보통 밭


채소밭

서식지 존속년수


짧음



 교란 빈도 

 낮음

 

중간 

 

높음 

 교란의 계절적 주기성 

 부정기

 

높음 

 

낮음 

그림1 한해살이 잡초의 위험 분산 전략의 개념도(미우라 2007)




위의 미우라 씨가 제안한 이들 세 유형의 생활사 전략은 한해살이의 황무지 식물과 농경지 식물의 비교연구에서 탄생한 것인데, 그대로 논 잡초에 적응하려면 문제가 있다. 그러나 세 가지 방향성을 논 잡초에서 검토하는 건 유익할 것이다. 물살에 의해 식물체가 분산될 수 있는 개구리밥 종류나 만강홍 종류 등은 공간적 위험 분산 전략의 성질을 가진다고 예상된다. 또 민나자스말 종류에서는 새에 의한 산포가 상정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시점에서 다시 보는 것도 흥미롭다. 헛가지의 발아 시기가 분산되는 올방개나 종자가 2차 휴면을 하는 강피는 시간적 위험분산 전략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옥잠나 물달개비 같이 흙에 묻힌 종자를 형성한다고 생각되는 논 잡초도 이 전략을 가진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편, 무한번식 전략을 지닌 식물을 논 잡초에서 찾아내는 일은 지금으로서는 곤란하다. 더구나 헛가지를 가진 논 잡초의 대부분은 일장 반응에 의하여 헛가지 형성 개시의 시기가 제어되는데, 올미는 일장과 관계없이 싹이 나온 뒤 50-60일 뒤에 헛가지 형성을 개시하기 때문에, 무한번식 전략의 성질을 가진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건, 논 환경의 일반적인 특성이 시간적 위험 분산 전략을 이끌어내기 쉬운 계절적 주기성을 가지는 교란 환경이란 점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 생활사 전략에 대해서는 각종 논 잡초가 지닌 성질의 적응적 방향성 지표로 이해하는 게 좋을 것이다.





논 잡초의 다양한 생활사


앞의 절에서 기술했듯이 논 잡초의 생활사 전략에는 몇 가지 방향성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생활사 유형은 반드시 하나만 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활사 유형을 정하는 것도 있다면 상반된 생활사 유형의 중용을 택하는 것, 양랍할 수 없는 몇 가지 생활사 유형의 조합을 시행하는 것, 또는 양쪽에 내기하는 전략을 취하는 것 등 각각의 종에 따라 다양한 변형이 있어서 좋다. 여기에서는 몇 가지 구체적 사례를 보여주면서 논 환경에서 생존하는 전략을 생각해 보려 한다.


가장 첫 절에서도 기술했듯이, 논은 식물의 생장에 수분 조건과 토양양분 조건이 양호한 환경이다. 가령 제초 등의 인위적 교란이 없다면, 다양한 종류의 논 잡초가 왕성하게 번성할 것이 명백하다. 이때 논 잡초는 서로 심한 경합관계를 가지게 된다. 생장이 조금이라도 더디면 다른 개체에 의해 그늘이 져서 금세 일조 부족에 빠져 고사할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생장에 양호한 환경이란 그처럼 경쟁이 심한 세계라도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논에서 최대의 경쟁상대는 논벼이다. 그럼 논벼를 능가하는 생장이 유리한가 하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논벼보다 두드러지게 크게 자라 눈에 띄게 되면 금세 제초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논벼 속에 살그머니몸을 감추는 쪽이 제초의 위험이 적을 것이다. 그러나 논벼에 의해 그늘이 지는 건 사활 문제이다. 이것을 해결하려면 논벼로 가장해 논벼와 마찬가지로 자라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다. 논벼로 의태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활방식을 하는 대표격이 물피와 강피이고, 뭉쳐서 나는 유형인 드렁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의태라고까지는 말하지 않지만, 벗풀이나 올방개 등도 논벼와 보조를 맞추어 생장하는 식물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논벼가 우점하는 논 환경에서 미소한 식물은 생육할 수 있을까? 논벼 재배기법의 하나로 어린 모를 아주심기하는 모내기가 있다. 이 모내기에 앞서 토양의 쟁기질, 물대기, 써레질이 행해진다. 써레질 직후의 논은 그때까지 자라던 잡초가 일소되어 맨땅 같은 얕은물 환경이 된다. 아주심기된 논벼의 어린 모가 수면을 덮을 만큼 자라려면 1개월 정도 생장기간이 걸리기 때문에, 그때까지의 기간은 논 잡초에게 양호한 일조 조건이 계속된다(그림2a). 이 짧은 기간의 일조를 이용하여 왕성하게 번성하는 식물이 개구리밥 종류나 만강홍 종류이다. 이들 논 잡초는 하나하나의 개체는 겨우 몇 센치미터의 크기인데, 때로는 모내기 직후의 수면 전체를 뒤덮을 만큼 일시적으로 크게 번성하는 모습도 보인다. 이 경우 아까 물피 같은 의태가 필요하지 않고, 논벼보다 훨씬 빠르게 생장하는지가 문제가 된다. 써레질 직후의 일시적 환경을 이용하는 생활사를 유지하고 있는 건 소형의 식물체를 맹렬한속도로 증식시킬 수 있는 높은 영양번식 능력이다. 다만 작은 식물체이기에 논벼가 번성해 그늘이 지면 모습이 사라질 운명에 처한다. 이것은 미우라 씨가 보여준 공간적 위험 분산 전략에 해당할 것이다.



그림2a 모내기한 뒤 맨땅 상태의 논(바로 앞)과 논벼가 번성하여 수면이 뒤덮인 상태의 논(왼쪽 뒤).



그림2b 수확 전 벼로 뒤덮힌 논과 벼를 베어 맨땅 상태로 변화한 논(뒤).




논벼가 그늘을 드리우는 것에서 벗어나 생육하려면, 써레질 직후에 번성하는 방법 외에 벼베기 직후(그림2b)의 시기를 이용하는 방법이 있다. 이들 두 가지 시기는 다음에 이야기하듯이 각각 다른 이유에 의하여 매우 잠깐의 시기밖에 잡초가 이용할 수 없다. 써레질 직후 잡초의 번성기는 논벼의 생장에 따르는 그늘짐에 의하여 종료된다. 한편, 벼베기 이후의 경우에는 겨울철의 저온에 돌입하게 되어 잡초의 번성기가 종결된다. 위도에 따른 기후의 차이, 농작업 일정의 지역적 차이, 더군다나 논벼 품종의 차이에도 의하지만, 잡초의 번성이 가능한 건 길어야 겨우 2개월 정도의 기간일 것이다. 이 기간 안에 할 수 있는 한 멀리 생장을 하여 번식을 종료하는 일이 관건이다. 벼베기 직후에 번성하는 논 잡초(그림3a)에는 마디꽃, 둥근잎고추풀(그림3c), 등에풀, 곡정초(그림3b) 같은 미소한 것이 많다. 또 물고사리, 알방동사니, 올챙이고랭이, 바늘골 등은 조건이 맞으면 크게 자라지만, 그 한편에서 10센티미터가 안 되는 크기로도 개화와 결실을 할 수 있는 가망성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벼베기 이후-늦가을에 걸친 기간에 번성하는 논 잡초 무리를 논의 가을 식물이라 부른다. 이들 식물은 반드시 가을에만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여름 잡초의 생활사를 쭉 가지면서 가을 잡초로도 짧은 생활사를 완결시키는 능력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논의 가을 식물로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발아부터 개화까지의 생장기간의 단축과 늦가을 저온기의 확실한 종자 생산이 빠질 수 없다고 생각하며, 미소한 식물체 크기에 닫힌꽃을 형성하는 등에풀이나 둥근잎고추풀은 그 대표 사례라고 생각한다. 흥미로운 점으로, 논의 가을 식물은 최근 논에서 증가하는 추세이다. 이것은 논벼의 조생종 도입에 따라 벼베기가 빨라지며 벼베기 이후의 잡초 생장기간이 보장되었다는 점, 그리고 분해성, 저잔류성제초제로 전환하며 가을에는 제초 효과가 희박해진다는 점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림3a 벼베기 이후 논에서 번성하는 마디꽃과 밭뚝외풀 종류



그림3b 곡정초




그림3c 둥근잎고추풀





동일 종이어도 논 환경에서 생육하는 것과 논 이외의 환경에서 생육하는 것에는 미묘한 차이가 발견된다. 때로는다른 분류군임에도 불구하고, 논 유형과 비논 유형의 차이에서 공통성이 인정되는 경우가 있다. 그 하나의 사례로, 여러해살이풀이 한해살이풀처럼 되는 걸 들 수 있다. 바늘골, 올챙이고랭이, 고랭이는 논 이외의 환경에서는 여러해살이풀 같은 행동거지를 나타내는 데 반하여, 논에서는 소형화하는 것과 함께 한해살이풀 같은 행동거지를보여주는 일이 많다. 이들 식물은 한해살이와 여러해살이 가운데 어느쪽으로도 생활할 수 있는 가망성을 가지고 있는데, 논 환경에서는 대부분 한해살이로 생활하는 듯하다. 생활 기간의 단축화는 교란 환경에서 진화 방향의 하나라고 이해되기에, 논에서 이루어지는 인위적 교란이 이러한 식물군에게 계속 선택압으로 작용할지도 모른다.대부분의 경우 논 유형과 비논 유형은 동일 종 안의 생태형이라 이해될 만한 것이지만, 앞으로의 연구성과에 의해서는 다른 종으로 구별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제로 뚝새풀에서는 논 유형과 밭 유형에 상당히 명료한 형태 차이가 있고, 게다가 지리적인 분포 패턴도 다르다고 알려져 있다. 북반구 전역에 분포하는 밭 유형은 기본 변종 들뚝새풀(Alopecurus aequalis var. aequalis), 아시아 동북부에 분포하는 논 유형은 변종 뚝새풀(Alopecurus aequalis var. amurensis)로 각각 구별되고, 일본에서는 둘이 생태적으로 나뉘어 서식하며 생육한다고 한다. 



논 잡초의 변천을 펼쳐 읽다


논은 인위적 교란 환경이기에, 영농법의 변화에 의하여 교란의 질과 빈도가 크게 달라진다. 근대 농업기술의 도입에 의한 물 관리방법의 변화와 기계화는 논 환경을 크게 변모시키고, 그 결과 논 잡초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여기에서는 농업의 근대화에 따라서 논 잡초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약 50여 년 전까지 가축과 인력에 의지했던 쟁기질, 써레질, 모내기, 벼베기가 지금은 기계로 행해지는 게 예사가 되었다. 또한 종래의 관개설비는 아주 새로워져, 논에는 할 수 있는 한 일정한 물이 유지되도록 토지개량과 경지정리가 행해진다. 매설관의 밸브를 돌리면 각 논에 농업용수가 공급되며(그림4a, 4b)、남는 물은 수로를 통하여 배수된다. 그 결과, 어느 논에도 균질한 물 환경이 실현되고 있다. 기존의 논에서는 미지형과 배수불량에 의한물 조건의 불균일함(과습 등)이 보편적으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그러한 논은 오지나 산간지역의 소규모 미정비 논에서 겨우 잔존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논 환경의 변모는 습한 논이 건조한 논으로 바뀐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근대 농업에서 그루갈이의 보급과 농작업의 효율화 및 대형 기계의 도입에는 논의 과습 환경을 개선하는 일이 빠질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배수불량에 의하여 겨울철에도 물을 댄 상태가 유지되는 습한 논(그림5a)은 배수할 수 있는 건조한 논(그림5b)으로 바뀌었다. 건조한 논에서는 모내기부터 수확기까지 논벼의 생장기간에는 물을 대지만, 가을의 벼베기 시기에 물떼기를 한 채로 이듬해 봄의 써레질 시기까지 물을 뗀 상태가 유지된다. 이것은 논 잡초에에게는 생육 환경의 격변이었다. 물을 댄 조건과 과습 조건이 일년 내내 유지되는 일이 생육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식물은 건조한 논으로 바뀜으로써 논에서 사라져 가게 된다. 논 잡초의 감소에는 제초제 사용도 얽혀 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논할 수는 없지만, 생이가래(그림6a), 네가래, 만강홍 종류, 물질경이, 나자스말 종류 같은 물풀류, 그리고 미즈타카모지(ミズタカモジ)와 곡정초 종류 같은 과습 환경을 좋아하는 식물이 격감한 이유의 하나로 전국적인 토지개량과 경지정리에 의해 건조한 논이 된 것이 관계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림5 벼를 벤 뒤의 논 풍경: a 습한 논(와카야마현 기이타하라紀伊田原), b 건조한 논(교토시 이와쿠라무라마츠岩倉村松). 습한 논에서는 겨울철에도 물을 댄 상태가 계속 유지된다.




이토 미사코伊藤操子 씨는 재배 체계와 제초법의 전국적인 동향에 대응한 논 잡초의 변화를 기술한다. 그에 의하면, 사이갈이와 손으로 하는 제초가 중심이었던 시대에는 야생피(물피, 강피)와 물달개비 등의 한해살이 잡초가 중심이고, 여러해살이 잡초로는 쇠털골이 눈에 띄는 정도였다. 1950-1965년 무렵에 보급된 농약의 하나인 2·4-D 제초제의 사용에 따라 농약 저항성(=제초제에 대한 저항성이 있어, 일반적 농약 살포 농도로는 죽지 않는 성질)을 가진 야생피가 문제가 되었다. 농약 저항성 야생피에 대한 대처로 PCP 제초제와 CNP 제초제 등이 도입된 결과, 이 다음은 이들 농약에 저항성을 가진 쇠털골의 문재가 드러났다. 잇따라 이들 농약과는 다른 제초제(티오벤캅·시메트린)의 도입에 의하여 쇠털골은 조용해졌지만, 대신하여 올미, 너도방동사니, 올챙이고랭이 종류 등의 여러해살이 잡초가 증가했다. 이처럼 주요한 논 잡초만을 들어도 50년 정도 사이에 큰 변화가 있다. 제초제와 농약 저항성 잡초가 공방하는 역사는 논 잡초가 논벼 재배에 주는 간섭의 정도가 크게 변화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영농방법에 대한 다채로운 반응과 그 결과로 나타나는 간섭 정도의 변화가 논 잡초를 일의적인 개념으로 다루는 걸 곤란하게 만드는 원인의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림6 생이가래




부유성 물풀인 생이가래는 예전에는 매우 흔하게 보이던 논 잡초이다.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뚜렷하게 감소하여, 오사카부에서는 멸종위기종으로 목록에 올라갈 정도로 희소해져 버렸다. 그림7은 표본 기록을 바탕으로, 오사카부에서 생이가래의 변천을 나타낸 것이다. 전쟁 중에 대해서는 자료가 충분하지 않지만, 1950년 이후의 감소 경향, 1970년대의 극단적인 감소, 그리고 1980년대 이후의 논 환경에서 소실됨 같은 대강의 변화를 간파할 수 있다. 놀라운 점으로, 오사카부의 생이가래는 단순히 감소한 것만이 아니라 논에서 저수지나 수로로 생육환경을 극적으로 전환했단 것이다. 현재 오사카부에 한정하여 보면, 생이가래는 벌써 논 잡초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가설의 하나로, '건조한 논이 됨에 따라 생육환경의 악화와 제초제 사용에 의한 타격으로 논에서 소멸되고, 저수지나 수로로 도피하여 간신히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를 생각할 수 있다. 검증에서는 아직 자료를 모을 필요가 있지만, 논 잡초의 이러한 증감이나 생육환경의 전환 요인이 영농법의 변화에 기인한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림7 표본 기록에 바탕한 오사카부 생이가래의 변천(후지이藤井 2002)




마지막으로 널리 사용하게 된 설포닐유레아계 제초제와 논 잡초의 최근 공방에 대한 연구 사례를 소개하겠다. 설포닐유레아계 제초제는 식물의 생존에 필수인 아미노산의 생합성을 저해하여 식물체를 죽이는 작용을 지닌 농약이다. 이 설포닐유레아계 제초제의 사용에 따라 논 잡초인 밭뚝외풀 종류에서 농약 저항성 개체가 일본 각지에서출현하고 있다. 이들 저항성 개체에서는 아미노산의 생합성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아주 조금 변화하여, 그로 인해제초제는 효과를 보이지 못한다. 12곳의 논에서 모은 논뚝외풀(그림8)에 대한 연구에서는 저항성 개체에 다섯 가지 유전자 유형이 발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논에서는 단일한 유전자 유형밖에 찾지 못했다. 이것으로부터 저항성 개체는 각 논에서 독립적으로 성립하여, 단일한 유전자 유형의 저항성 개체가 하나의 논을 완전히 채우기까지 번성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제초제 살포를 개시했을 때에는 저항성 개체는 매우 소수였든지, 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초제 살포에 의하여 그때까지 논에서 번성하던 논뚝외풀의 감수성 개체(약제 살포에 의하여 죽은 개체)는 일소되었음이 틀림없다. 또한 제초제 살포는 논뚝외풀 이외의 다른 잡초도 죽이게 된다. 그 결과, 논은 논뚝외풀 저항성 개체만이 번성하는 공간이 되어 버렸을 것이다. 어쩌면 그저 하나의 저항성 개체가 출발점이 되어 논 전체에 퍼졌을지도 모른다. 이 연구는 제초제의 사용이 논뚝외풀 집단의 유전자 구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걸 시사하며, 제초제라는 인위적 교란이 논 잡초에 미치는 영향의 중대함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논벼 재배의 역사는 논 잡초와의 싸움이기도 했다.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큰 해를 주는 잡초의 효율적 억제'이다. 그러나 여기까지 기술한 논 잡초의 모든 현상에서는 영농방법과 함께 논 잡초 자신도 크게 변화하는 실태를 보여준다. 사람도 잡초도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둘의 동적인 간섭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이 다음에도 논 잡초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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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2




제2장 

논에서 살다

-논의 마음과 벼의 마음, 그것을 느끼는 농민의 마음   우네 유타카宇根豊





벼와 자연의 재정의



벼의 위치


논이 주는 은혜는 '쌀'로 대표되어 왔다. 애초 벼를 재배하기 위하여 논을 조성했기 때문에 그건 당연하다고 대부분의 일본인은 생각한다. 그러나 논이 주는 은혜는 논의 자연에게서 받은 것이다. 그 논의 자연이란 물론 햇빛과 물과 공기와 흙도 포함되지만, 벼 이외의 생물도 포함된다. 그것을 연구하고 표현하는 농학이 없었던 것이 신기할 뿐이다. 그만큼 논의 자연은 당연한 것처럼, 태고의 옛날부터 그곳에 있었던 것처럼,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해마다 변함없이 삶을 반복해 왔다. 그것을 '자연'이라고 의식할 필요도 없으니 생산의 토대로서 연구할 일도 없었다.



그림2-1 논의 자연(돌이 있는 논)



그런데 논의 자연을 의식해야 하게 된 건, 주어진 것이며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자연이 농업의 근대화로 변화하고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1) 논의 자연을 대표하는 생물이 뚜렷하게 감소해 버린 것, (2) 쌀을 논의 자연이 주는 '은혜'라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농업기술로 '생산'하는 것이라 생각하게 된 점이 원인이다. 이 두 가지는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이 두 가지 이유가 함께 논의 자연을 인간으로부터, 그리고 벼로부터 소외시켰다. 이것은 벼에게도, 인간에게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래서 벼에게 자연을, 인간에게 자연을 연결하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벼와 자연


벼는 벼만 자라지 않는다. '벼는 벼만 자라면 좋으련만, 쓸모없는 것까지 함께 자라 버린다'는 불평은 근대화된 벼농사 기술의 특징이다. 그러나 벼는 벼만 자라지 않기 때문에 논이 '자연'이 되는 것이며, 그 자연으로부터 영속하는 은혜를 농민이 끌어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그 때문에 논은 근대화되지 않는 가치를 미래에 남기고 있으며, 현대사회는 거기에서 이제야 의미를 찾으려 하고 있다. 후쿠오카현에서는 멸종위기종의 약 30%가 논의 생물이다(이는 앞에서 이야기한 현상(1)에 해당). 이들 생물을 지키기 위해서는 농민이 발 벗고 나서야 된다. 그를 위해서는 벼와 멸종위기종의 관계를 분명하게 해야 한다. 그런데 자신의 논에 이들 생물이 있는지 없는지를 주시하고 확인하는 기술이 현재의 벼농사 기술에서는 보이지 않는다(이는 앞에서 이야기한 현상(2)에 해당). 


물론 결코 멸종위기종만이 자연을 대표하는 건 아니다. 아직까지도 도처에 살고 있는 생물 역시, 똑같이 이웃해 있는 환경에 놓여 있다는 점을 잊고 싶지 않다. 이 (1)과 (2)를 어떻게 연결하고, 극복할지가 과제이다. 조금 더 샘솟도록 구체적 사례를 들어 보자. 서일본에서는 참개구리가 급감하고 있다. 이는 이앙기의 보급에 의하여, 모를 앞마당이나 밭에서 모판에 마련하기 때문에 참개구리의 산란장소였던 5월의 물못자리가 소멸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참개구리의 감소가 벼에 의하여 어떤 악영향을 받는지 등을 생각하는 일도 없으며,그것보다 참개구리의 감소를 알아차리는 일도 나날이 희박해지고 있다. 여기에는 (1)과 (2)에 대한 문제의식이 형성되어 있지 않다. 그것을 환기하는 '벼농사 세계'를 근대화 기술은 마침 마련하고 있지 않았다. 물론 후회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늦었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지금부터라도 연결하면 좋다. 그 방법을 고민해 보자.



재생산에 대한 의심


농업경영과 농업기술에서는 '재생산'할 수 있는지 어떤지가 계속 문제가 되어 왔다. 다만 이 경우의 '재생산'은 경제적으로 비용을 보전補塡할 수 있는지 어떤지를 문제 삼을 수밖에 없었다. 이 비용은 쌀의 판매로 마련하는 것이기에, 쌀값이 '생산원가'를 밑돌면 재상산할 수 없게 된다고 비판을 받았다. 그런데 원가를 밑돌아도 대부분의 농민은 계속 재배하고 있다. 그건 어째서일까? 쌀만 생산물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쌀과 동시에 돈이 안 되는 많은 '자연의 은혜'를 끌어내고, 가져오기 때문이다. 가령 쌀의 생산비용을 보전하지 않아도 그것이 가족의 즐거움이라면, 사는 곳의 자연과 풍경을 지킨다면, 서로 이웃한 논에 필요하다면, 계속 논농사를 짓는 게 당연하다. 이것을 농업정책과 농학은 정당하게, 농農 안에 자리매김하도록 하지 못했다.


재생산이란 벼만이 아니라 논 안의 생물이 삶을 반복하는 일도 포함한다. 이러한 세계야말로 진정한 '벼의 생산'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미 20년 전부터 농업생산의 재정의를 주장했는데, 드디어 그것이 지방의 농업정책에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즉 넓고 풍부한 '벼의 생산'을 쌀의 판매액만이 아니라 주민의 자연환경에 대한 지출(세금, 행정 예산)로도 보전하는 정책이다.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하면, 쌀은 400kg밖에 거두지 못하지만 고추잠자리는 5천 마리나 살 수 있는 논이 있다고 하자. 논은 쌀의 판매가 적지만 자연이 풍요롭기에, 고추잠자리의 가치를 정책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이 경우 (1)쌀의 수확량이 적은 만큼 보전하든지, (2)고추잠자리의 가치를 지불하든지 하는 식으로 발상을 달리한다. 유감스럽게도 일본에서는 어느 쪽도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런 정책을 제시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농민에게도 말할 수 있다. 돈이 되는 생산을 위한 조성금, 보조금 정책만 요구했던 건 근대화 도중의 어쩔 수 없는 체질이었다. 


나중에도 이야기하겠지만, 후쿠오카현에서는 2006년부터 (1)이나 (2)가 아닌 '생물 조사'에 몰두하는 농민에게, 일본 최초로 '환경지불'이란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생물 조사를 하면서 고추잠자리를 기르고 있는 농사를 평가하는 이치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이 논은 쌀만 재배하는 장소라는 농업관을 전환하는 일로 이어질 것이다.



'생기다'에서 '만들다'론으로 재고하기 


그런데 현대 일본인은 농민도 포함하여 '쌀을 만든다'고 표현하는데, '쌀이 생긴다'에서 '쌀을 만든다'로 전환된 건 언제 시작되었을까? 예를 들어 '안전성'을 요구하는 심정은 당연히 '생산이력(traceability)'이란 관리 체제에 이를 것이다. 그것도 끊임없는 현장검사와 내부고발이 없으면 부패한다. 이러한 체제가 10년 뒤에도, 20년 뒤에도 계속될까? 애초 근대화의 무엇이 이러한 사태를 불러왔을까?


몇 년 전 이웃의 할머니에게 토마토를 받았다. "당신 밭의 토마토는 올해 일찌감치 시들었네요. 우리 건 아직 달리니까, 가지고 가요."라고 한다. 여기에서 나는 "농약은 언제 살포하고 분석해 보았나요?" 등이라며 안전성의 생산이력을 파악하려는 정신을 발휘하려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 토마토가 달리지 않는 걸 걱정하여 가지고 온 할머니의 염려에 감사하며 고맙게 받는다. 


이 경우의 '받는' 대상은 물론 토마토이지만, 거기에는 할머니의 애정도 있고 천지의 은혜도 있다. 할머니는 토마토를 길러서 토마토가 생긴 것이다, 할머니가 '만든' 것은 아니다 하고 단언할 수 있을까? 만약 할머니가 '만든' 것이라면 안전성의 책임은 할머니에게 있다. 한편 토마토가 '생긴' 것이라면 책임은 자연에게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할머니가 농약을 사용하고 있는 건 결정적인 분수령이 아니지만, 분명히 '생긴다'에서 '만든다'로 이행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농약'과 '화학비료'의 사용은 결정적으로 '생긴다'에서 '만든다'로 이행하도록 한 게 아닐까? 그러니까 유기농업은 '만든다'에 대한 위화감을 계속 가지고 있던 게 아닐까? 물론 유기농업이 모두 '생긴다'는 감각으로 영위되고 있는 건 아니지만, '생긴다'라는 입장을 견지하지 않으면 '천지, 자연의 은혜'에서 소원해지고, 천지와 자연이란 '세계 인식'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만든다'는 건 골치 아픈 일이다.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손길이 미치지 않고, 눈길이 미치지 않으며, '자연환경에 대한 영향 파악'이 소홀해졌다. 안전성의 확보도 어려워졌다. 결국 농민은 '제조이력과 유통과정의 파악'을 위한 서류 작성에 전념해야 했다. '서류'와 '수치'로 안전을 확실하게 해야 하는 건 근대화 농업의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그런데도 왜 유기농업까지 '서류'와 '수치'를 요구받아야 하는 것일까? 


소비하는 쪽이 대부분 근대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먹을거리는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이 좁고 갑갑한 자연관, 농업관을 전환할 수 있을까?



'자연'의 재정의


사람들에게 여러 번 "논은 자연일까요?"라고 물어 본다. '자연 그것이다'라고 답하는 사람은 눈에 띄지 않는다. 모두 머리를 갸우뚱하며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래서 그림2-2를 보고서 번호로 답하라 하면 대부분의 농민은 "4"라고 답하고, 대부분의 도시민은 "2"라고 답한다. 하는 김에 소개하자면, '가장 가치 있는 자연은 어디입니까?"라는 물음에는 "1"이라는 답이 농촌에서도 도시에서도 대부분이다.



그림2-2 현대의 자연관을 그림으로 표현.





[1]

[2]

[3]

[4]

[5]

합계

이상적인 자연이란어떤 형태인지

92명

1명

0명

0명

0명

93명

당신이 지킬 수 있는 자연은 어떤 것인지

2명

18명

42명

31명

0명

93명

논은 어떤 자연인지(비농가)

0명

28명

41명

19명

4명

92명

논은 어떤 자연인지(농민만)

0명

61명

98명

131명

16명

306명

표2-1

 



이러한 자연관은 과연 일본인의 전통적인 자연관일까? 난제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연을 생각하거나 물을 때 '자연'이란 단어와 개념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는 데에서 기인하는 올가미(자연에 대한 선입관을 주는 것)를 대부분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림2-2는 당연한 것처럼 자연과 인간을 나누고 있다. 나누고 있기 때문에 '자연'이란 개념이 성립한다는 것을 일본인은 의식하지 않는다. 물론 이것은 유럽에서 수입된 사상이어서, 일본인의 전통적인 자연관(자칫 이러한 표현이 자가당착에 빠지지만, '자연관'이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태는 심각하다)이란 전혀 다르다. 그것을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유럽의 자연관에 물들고, 받아들여 버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사태는 뜻밖에도 간단히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현대의 일본인이라도, 특히 연배가 있는 사람은 이러한 이분법에 어딘가 위화감을 품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앞에 기술한 질문에 간단히 답할 수 없는 사람도 많다. 


다음 난제는 더욱 뿌리가 깊다. 그림2-2 같은 '세계 인식'은 자연에서 작용하는 농업의 구조를 오인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1"의 원생자연이 가장 가치 있는 자연이라는 가치관은 (1)서양에서는 '신이 만든 그대로의 자연'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기 쉽지만, (2)한편 농업이란 인간이 그 자연을 파괴해 나아가는 형태라는 이해도 낳게 되었다(무엇보다 그 때문에 유럽에서는 농업과 환경의 관계도 일찍부터 추궁해 왔다는 데에는 경의를 표하고 싶지만). (3)그것을 과연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지는 간단하지 않다. (4)게다가 일본에서는 자연과 인간을 대립적으로 취급해 오지 않았던 전통이 있기에, 이러한 도식에서는 자연의 풍요는 표현할 수 없다. 즉 '자연'이란 개념을 산출한 적이 없었던 일과 생활이란 평가는 할 수 없게 된다. 


이처럼 우리 일본인에게 '자연이란 무엇인가'라는 명제는 메이지 이후(물론 그 이전도) 본격적으로 문제 삼았던 적이 없었던 건 아닐까? 더군다나 농업에서는 자연은 '농업생산의 제한요인'으로 연구대상이 되어 왔지만, 농업에 의하여 풍요로워지거나 일본인이 좋아하는 자연이 된 적은, 즉 일본인의 '자연관'을 형성해 왔던 것에는 연구나 고찰이 거의 없었던 것이 아닐까?



자연에서 천지로


나는 '2차적 자연'이란 표현이 싫다. '몸에 가까운 자연'이란 표현이 좋다. '2차적 자연'이란 개념은 '원생자연'과 구별하기 위하여 고안한 것이 틀림없다. 게다가 '원생자연' 쪽이 원래의 자연이고, 원래의 가치가 있으며, 그 본래의 자연을 개조한 것이 '2차적 자연'이라는 가치판단이 포함되어 있는 것도 틀림없다. 여기에는 원래의 자연은 '신'이 창조한 것이며, 신의 의지가 '자연의 섭리'로서 보존되어 있고, 2차적 자연에는 그것이 숨겨져 있다는 서양 기원의 '자연관'이 짙게 투영되어 있다. 그건 유럽에서는 정당한 견해일지도 모르지만, 일본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들은 '원생자연'을 알지 못하고, 이 두 가지를 1차와 2차로 나눌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확실히 '인위'와 '자연'을 나누는 그림2-2 같은 자연의 구조를 어느 새인가 대부분의 일본인은 상상하게 되었다.그러나 그림2-2 같은 자연의 인상은 일찍이 '자연환경'을 지시하는 단어인 '자연'을 가지지 않았던 일본인에게는완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과 자연은 나눌 수 없었다. 그래서 자연이란 개념도 생기지 않았다. 즉 자연을 자연의 바깥에서 보는 일 등이 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말하면, 인위와 자연이 융합된 형태야말로 예전의 자연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자연은 인위의 밖에 있다. 그것이 농과 자연을 대립시킨 원흉일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우리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현대적인, 농에 뿌리를 내린 자연관을 다시 한번 만들어야 한다. 인위와 자연을 나누지 않는, 나누어서 생각하더라도 그 관계를 지탱하며 떠받치고 있는 관계를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다시 한번 자연관을 백지로 돌려서 '2차적 자연'이란 단어를 쓰지 않고서 신변의 자연을 응시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우리 자신도 그 일부인 자연(천지)야말로 가장 중요하고 몸에 가까운 자연(천지)이다. 그것은 바깥쪽에서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원생이라든지 2차적이라는 밖에서 보는 견해와는 관계가 없다. 게다가 그 자연(천지)는 어디에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특별한 가치는 없어도 매우 소중하고 대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 자연(천지)의 안에 벼도 생물로 자리하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연이 아니라 '천지'라고 부르고 싶다. 자연을 바깥쪽에서볼 때 '자연'이라 명명되듯이, 자연을 안쪽에서만 느낄 때 그것이 자신도 포함된 '천지유정'이라 느끼는 것이다. 이 바깥쪽에서 보는 자연관과 안쪽에서 보는 천지관이 어떻게 대립하고, 어떻게 융합하는지는 다음 장에서 이야기하겠다.




기술이 아닌 일을


일에 있고 기술에 없는 것


일에 있고 기술에 없는 건 무엇일까? 많이 있을 것이다. '벼' '전통' '정념' '애정' '경험' '인간관계' '자연관계' '천지유정' '신' '전승' 아이' '제사' '민속' 등등. 거꾸로 기술에 있고 일에 없는 건 무엇일까? 만약 기술이 일에서추출된 것이라면, 모든 일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런데 농업기술 안에는 농사일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 그건 '벼' '국가와 국민' '근대화' '과학' '생산성' 등이다. 이건 농을 '기술'이란 체로 쳐서 체 위에 남은 것을 '기술'이라 명명한 게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다. 새롭게 덧붙인 속성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즉 '기술'은 일에 비하면 보편성을 가지고, 과학적이며, 국민과 국가에게도 유용한 것이라는 인상은 당연한 것이며, 그러한 것으로 형성되어 고쳐지고 있다. '아니, 새로운 기술도 그때까지의 경험과 모순되지 않는 것이 많은 건 농사일의 합리성을 흡수하고 살리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호의적인 수용은 대부분의 농민에게서 발견되는 것인데, 그렇게 단언할 수 있을까? 풍작과 다수확은 다르다. '일이 순조롭게 되다'와 '생산성이 높다'는 건 별개의 사상이다. 제초와 김매기는 언뜻 비슷하나 다른 것이다. 농사일과 농업노동도 서로 겹치지 않는 부분이 많다. 또 가정의 자급이란 연장선 위에는국가의 식량자급률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 가지 상징적인 예를 들어 보자. 논두렁의 풀베기를 할 때 개구리가 앞을 횡단한다. 그때마다 나는 풀베기를 주저하며 멈추어 서게 된다. 이러한 일이 가을이 되면 몇 미터마다 계속된다. 이 주저하여 일이 정체되는 시간을 누계하면, 한나절에 10분이 된다. 과연 이 10분은 나에게, 일본 농업에게, 일본 농정에게, 일본 국민에게, 국가에게 쓸데없는 시간일까? 


현대의 농학에서는 아주 간단히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이 시간은 쌀의 경제가치에 따라서는 어떤 공헌도 하지 않는 시간이고, 생산효율을 떨어뜨리는 원인이라고. 또한 생태학자에게 개구리라는 생물을 지키는 시간이라고 변호해 달라고 사정해도 '주저하지 않아도 300평당 1천 마리 있는 늪개구리를 2-3마리 참살하는 정도라면 개구리의밀도에는 영향이 별로 없다'고 냉정한 답변이 돌아올 것이다. 


내가 주저하는 행위는 학문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행위라는 것이다. 그건 국민에게도, 국가에게도 그렇게 될 것이다. 근대화된 사회에서는 이러한 농사일 속의 애정을 옹호하고, 가치를 매기는 기술론(사상)은 쇠퇴해 왔다.


그러나 다른 시선이 있어도 좋다. 그래서 내가 만약 개구리에 주저하지 않고서 논두렁 풀베기를 하게 된다면, 나는 무엇을 잃어버리게 될까? 틀림없이 나의 농민으로서 생물의 정감에 반응하는 힘은 옅어져, 생물에 에워싸여 사는 정념은 죽을 것이라고. 그렇게 되면 벼 주변에 미치는 천지유정의 세계와 벼의 관계가 보이지 않게 된다. 그리고 이 관계를 이야기하는 일도 사라진다. 벼의 마음은 농업기술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일 속에서 기술은 추출할 수 있을까?


그런데 '기술'은 일 속에서 빼낸다고 대부분의 사람은 생각하고 있다. 공업에서는 확실히 그렇게 하여 기술은 장인의 솜씨에서 매뉴얼화되어 눈부실 만큼 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현재 산업계에서 평가가 높은 '셀 방식'의 생산방법이어도 오히려 노동생산성을 높일 목적이 강한 만큼, 노동시간이 끝나면 일찍 공장을 등지고 싶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일이 끝나고 '막상 돌아가게 되지만, 한번 더 벼의 얼굴을 보고 귀로에 오르자'라는 농사일의 세계는 어느 새인가 이러한 매뉴얼로부터 사라졌다. 아니 나는 공업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빨리 벼의 얼굴을 보고 싶다.'라는 생각은 일의 핵심에 버티고 앉은 정감인데, 근대적인 농업기술 안에는 모습도형태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건 기술의 주변에 어른거리고 있는 단순한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감정이 있었기에 근대화 기술에 대한 위화와 혐오를 유기농업으로 전환하도록 이끈 것이 아닐까?


'그것은 일 안에 놔둔 곳을 잊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 분실물을 가지러 돌아간다는 이상이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만 현실의 농업기술은 그렇지 않다. 그러한 농민의 생각을 공업처럼 잘라 버렸기에 성립한 것이다. 나는 이것을 비난할 의도는 없다. 잘라 버렸다는 자각이 있으면 괜찮다. 그러한 자각이 있다면, 버린 것을 '분실물'로 상기하고, 가지로 돌아가는 길을 갈 인간을 바보 취급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발견은 그 분실물 안에 농사일의 핵심이 있고, 근대적인 농업기술 안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 핵심을 일단 여기에서는 '애정'이라 부르자.


그렇게 말하면, 일찍이 나는 나이 든 농민에게 혼난 적이 있었다. 


"지금 젊은 농민은 김매기가 끝나고 기대가 된다든지, 수확량이 줄지 않는다든지, 어째서 자기 일만 이야기하는가? 어째서 벼가 기뻐한다고 느끼지 않는가?"


근대화 정신에서는 제초는 벼가 잘 자라게 하려고 하는 작업이지만, 그 근거를 인간의 이익인 '경제'에서만 찾는다. 벼가 잘 자라는 건 벼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에 의하여 수익을 얻는 인간을 위한 것이라는 변질이 어디선가 생기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인간을 위해서라고 훈계하는 힘이 벼를 위해서라고 타이르는 힘을 이기게 되었다. 분명히 이러면 벼에 대한 애정은 죽어 갈 것이다.



유기농업 안에 남아 있는 일


나는 이미 20년 정도 '유기농업'을 하고 있다. 특별히 안전한 먹을거리를 생산하고 싶기 때문이 아니다. 근대화된 농업에서는 중요한 것이 소멸되어 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년부터 국가가 유기농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법률도 제정되었다. 이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유기농업도 '근대화 정신'으로 해석되어 지도를 하게 될 것이다. 그것에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려고 한다. 나의 제안은 두 가지이다.


(1)자연 파악 기술(생물 기술)을 형성한다

근대화 기술이 버려 온 것을 건져 올리려면, 그 건져 올린 것을 측정하는 척도가 필요해지는 게 당연하다. 가장 좋은 건 '자연환경 파악 기술'일 것이다. 그래서 유기농업 기술이어도 환경 파악 기술이 부수되지 않는 건 어째서일까 하고 생각해 보고 싶다. '유기농업은 환경에 우수한 농법입니다'라는 언설이 정착하고 있는데도 왜 유기농업에는 '환경을 파악하는 기술'을 형성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건 유기농업 기술을 일 안에서 추출할 때 놔둔 채 잊고 온 것이다. 또는 일 안에서 추출한 것이 아니라, '무농약, 무화학비료'라는 정의에서 발안했기 때문이다. 일 안에 놔두고 가버린 최대의 것은 자연(생물, 유정, 풍경)에 대한 "눈길"이다. 이 "눈길"을 기술 안에 한번 더 뜯어서 다시 꿰매는 공부를 '자연환경 파악'이라 부르는 것이다('영향평가'가 아님).


먼저 유기농업 기술의 자연환경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과학적으로 파악하는 일을 창조하고 싶다. 그 중심은 '생물 조사'가 될 것이다. 우리가 생물 목록 만들기와 생물 지표 만들기에 기를 쓰고 있는 건 그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농민이 중심이 되어서 경험이나 전통 및 애정을 동원해, 반드시 종래의 '과학'적인 것으로부터 일탈하는 부분도 많아질 것이다. 이 일탈이야말로 중요하다.


"30년 만에 물장군을 보았다"고 얼굴을 빛내며 이야기하는 농민이 있다. 생물 조사를 끝낸 뒤의 일이다. 특별히 물장군이 있다고 그 논의 생산력에는 어떤 변화도 없을지 모르지만(사실은 생겼는지도 모르지만 알 수 없음) 백성의 눈길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기에 새로운 단어가 생겼다. 생물 조사의 목적은 확실히 (A)우리집(우리 마을) 논의 자연환경 실태를 파악하기 위하여, 농약 감소와 유기농업의 성과를 확인하기 위하여, 논의 생물을 지키기 위하여 등이라는 밖으로 열린 의의와 (B)생물의 이름을 배우기 위하여, 아이와 손주에게 가르쳐주기 위하여, 자신의 즐거움을 위하여 등이라는 자기 내부를 향한다는, 말하자면 '자기 만족'적인 목적이 있다.


(A)는 자료를 요구하고, 자료가 말한다. 성과도 계산하기 쉽고, 이것을 공적으로 지원할 이유도 설명하기 쉽다. 한편 (B)는 확실히 그 사람의 풍부한 경험과 새로운 애정을 가져올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정신적인 충실함이나 성과는 남에게는 알리기 어렵고, 평가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지금 전국에 퍼지고 있는 '생물 조사'는 (A)의 동기로 시작된 경우가 많지만, 그것을 지속시키고 깊게 만드는 힘은 (B)에 의하여 생성되고 있다고 말해도 좋다. 그러나 '과학'이나 '학문'이나 '정치'는 (A)에만 주목한다. 나는 진정한 성과는 참가자의 눈길에 가져온 풍부함으로 측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환경 파악 기술이란 (A)와 (B)의 공존에 의하여,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일'이 된다.


(2)기술을 일 안에 채워 넣다


반복해서 말한다면, '기술'을 '일' 안에 채워 넣고, 한번 더 인간의 '애정'으로 감싸 안는 것이다. 그를 위한 방법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① 기술의 성과를 일이 끝난 뒤의 '달성감'이나 '경제효과'와 '노동시간'으로 측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근대화 척도에 맡기고 있음) 일 한가운데의 '충실'과 '생물이 보이는 방법'과 '작물의 소리'와 '시간이 흐르는 것도 잊어버리는 즐거움' 등으로 측정한다. 그러나 그것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기준이 아니라고 곤혹스러워 할지도 모른다. 단어가 있지 않을까? 그러한 단어가 부족했기에 근대화의 군문에 투항하게 되었을 것이다.

② 근대적인 시간을 한번 더 생물의 시간에 맞추어 '노동시간 단축'에서 구출하는 것이다. 노동시간은 짧은 쪽이 좋다는 공업의 노동 가치가 농사일과 농업기술에서 풍부함을 빼앗은 최대의 원인이다. 생물(작물이나 동반 생물)의 자람새에 맞추기 때문에 "눈길"도 생물에게 미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청개구리 올챙이의 다리는 부화한 지 30일 만에 나온다'는 과학적 식견은 부화하고 30일 동안은 물을 빼서는 안 된다는 생물기술에 의하여, 생물의 삶의 시간을 기술에 짜 넣어서 노동시간 단축이란 근대화 정신에 대항하는 일로 성장할 수 있다.  

③ 근대적인 척도를 적용시키는 대상을 한정하는 것이다. 육아나 제사에 효율을 요구하지 않듯이, 일에도 효율을 요구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사상과 '정치' '체제'를 구상하고 싶다. 돈으로 대표되는 '적극적인 가치'가 아니라, 실은 인생이란 돈으로 안 된다는 '소극적인 가치'로 떠받쳐지는 것을 이론화함으로써 달성하고 싶다.

④ 생물에 대한 애정을 키우는 방법을 개발하고 싶다. 곤충과 풀과 벼와 채소에 대한 애정을 다채롭게 표현하고 싶다. 일의 성과를 '벼가 기뻐하고 있다'라고 표현해 버리는 전통을 이론화할 수는 없을까? 풀에서 자욱한 정감을느끼면서, 즉 풀의 이름을 부르면서 풀베기를 하는 것과 풀의 이름도 모르면서 풀베기를 하는 것은 왜 일의 충실감이 다른지, 애정의 존재 장소를 일 안에서 찾아내고 기술을 감싸고 싶다.



근대화의 척도가 아닌 것


나는 '논두렁 풀베기'는 다분히 가까운 미래에 유기농업의 범주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관행농업에서도 행하고 있기 때문에, 유기농업이 아니다'라는 반론은 (1)관행농업이 논두렁에 모조리 제초제를 사용하게 되면, 이것도 유기농업이 되기를 용인하게 되고, (2)관행농업에서도 근대화 농업에 대한 저항이 존재하며, 즉 나름대로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하는 농민의 정념에 둔감하다는 증거일 것이고, (3)유기농업이 탈근대화 농업이란 점을 시야에 넣지 않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나는 '무농약, 무화학비료' 이외의 다양한 탈근대화 시도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것, 즉 유기농업적 세계를 풍요롭게 확장시키는 것이 농업 근대화에 제동을 걸고, 유기농업의 세계를 넓혀 간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사고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무농약, 무화학비료'라는 부분에만 주목한다면, 다른 부분의 근대화는 더욱 가속되어 유기농업과 유기농업적 삶은 계속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무농약, 무화학비료'라는 이 정의도 재검토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다른 탈근대화의 경계 구분이 풍부함에 있다면, 무농약이 아니어도 유기농업에 불러들여도 좋지 않을까?


유기농업을 진척시킨다는 건 '무농약, 무화학비료'라는 부분을 보급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화 농업에 대한 제동장치를 공유하는 농업을 늘린다는 것이 아닐까? 몹시 오해를 불러오는 표현이기 때문에 강조해 놓고 싶은 건 '무농약, 무화학비료'라는 척도를 존중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러한 기술적이고 자연과학적인, 더구나 지극히 부분적인 척도만으로 유기농업의 정신은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 예를 들면 "전쟁 이전에는 모두 무농약이었다."라는 발언은 옳지만 "전쟁 이전에는 대부분이 유기농업이었다."는 언설은 성립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유기농업은 탈근대화의 개념이지만 무농약, 무화학비료는 근대화되기 이전의 상태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정의'를 떠나, 한 사람 한 사람의 유기농업 농민의 '삶의 보람'으로부터 공통성이 조금이라도 보이는 '비근대화 척도'를 추출하자. 그리고 그 척도로 모든 농업기술, 농업경영, 농민의 생계, 농사일, 농업정책을 분석하고 다시 해석하며 다시 조직할 수 있다면 맑고 산뜻한 방법이 생긴다.


유기농업을 '탈근대화'의 다채로운 시도를 하는 농업을 전개하는 것이라 다시 정의하고 싶다. 그것은 먼저 (1)근대화 기술을, (2)근대적인 노동관을, (3)근대적인 생활양식을, (4)근대적인 자연관을, (5)근대적인 농업경영관을, (6)근대적인 가치에 지나치게 기울어진 농업정책을, (7)근대적인 농업지도 방식을 되묻게 된다. 그를 위하여'비근대화 척도'를 제시해야 한다. 그 한 예를 다음에 나타낸다.


예를 들면 '안전성'을 찾는 소비자의 요구가 어느 새인가 농약의 잔류분석이나 생산이력 관리 강화라는 방향으로나아가, 행정의 통제에 따라 해결되어 간 것은 체계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러한 체계에 흡수되어 버릴 정도의 안전성 확보라는 '척도'만 제공할 수밖에 없었던 사상이 아니었을까? 거기에는 근대적인 인간의 욕망 달성을 위한 '안전성'만 비대해져 버렸다. 탈근대화의 사상은 희박해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나의 역량 부족은 충분히 알면서, 몇 가지 분석의 실례를 간단하게 묘사해 두고자 한다. 


(1) [자연] 농업의 토대에 있으면서 그것 때문에 주어진 것(전제)이라 간주되며, 방법론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자연'에 깊숙히 들어간다. '자연'이란 단어는 이미 '세계인식'이란 관점을 가질 수 있지만, 논밭의 자연환경을 '세계인식'을 목표로 재구축하는 것이 새로운 과학이며, 생물의 전모 파악과 관계성 파악은 그 단면이 될 수 있다. 한편, 일본의 전통적인 '천지유정'관에는 그러한 전체적인 관점은 없으며, 다만 그 한가운데에 몰입하여 동화되어 가려는 자세가 강하다. 이것을 '학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정념'론의 형성이 빠질 수 없다.

(2) [정념] 마찬가지로, 학문의 토대에 있는 것으로, 학문의 대상이 되지 않았던 생물에게서 느끼는 정감과 그에응하는 인간의 정념에도 깊숙히 들어간다. 그를 위해서는 근대화 정신에 의하여(종래의 일본 농학에 의하여) 일 안에서 노동이 추출되는 동시에 기술이 추출되는 순간에, 일 안의 많은 풍부함이 '학문'으로부터 누락된 것을 재검토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먼저 ①일의 충실, 기쁨, 자랑을 반영하고 싶다. ②다음으로 일의 대상이 되는 것과 교류하고, 애정을 다시 표현하고 싶다. 나아가 ③기술과 생활이, 경제보다도 그러한 정념에 의하여 떠받쳐지는 구조를 분명하게 하고 싶다.

(3) [생활 방식] 예를 들어, 자신의 논밭에는 어떤 조건이 빠져 있다고 한다(산의 그늘로 일조가 적은, 화산재 토양으로 인산이 충분하지 않은, 아내와 사별하여 혼자 일하고 있는 등). 그것을 보완하든지, 그것을 보완하기보다 떠맡아 살아가든지 한다고 생각해 보자. 근대화는 예외 없이 보완하는 방법론이 융성하게 되었다. 그러한 사상이기 때문이다. 한편, 떠맡는 방법론이 있어도 좋을 것이다. 떠맡는다면 그러한 결함의 아름다움도 눈에 들어오게 된다. 그것을 건져 올린다. 


이처럼 생각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분석과 함께 '표현'의 방법론이 형성되어야 한다는 걸 볼 수 있다. '학문'은 표현의 체계에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근대화 척도

새로운 해석

탈근대화 척도

그 근거 및 내실

노동시간

길어도 좋다

생물

함께 일하는 것이 있는 게 좋다

소득

낮아도 좋다

풍경

풍경을 망가뜨리지 않는다

수확량

낮아도 좋다

삶의 보람

돈이 되지 않는 근거

생산비용

많아도 좋다

에너지 수지

투입 에너지가 적음

노임

낮아도 좋다

생계

자연, 인간과 관계성이 깊음

안전성

생물의 관계에 대한 안정과 안전

생물다양성

어떠한 관계인지

이윤의 사용법

자연으로 환원

가족의 참가

노인과 아이가 역할을 분담할 수 있는지

노동강도

즐거우면 좋다

소비자와 연결하기

농을 지지하는 존재

경영확대

지속한다면 좋다

자급

돈이 안 되는 것도 자급한다

환경보전

경영의 중요한 일부

자연

지키는 일

보조금

돈이 안 되는 것에 대한 지원

애정의 근원

표2-2 근대화 척도와 비근대화 척도





세계인식의 문


과학적인 세계인식

 

세계인식 등은 전혀 문제로 삼지도 않고 다만 오로지 좁은 '생산'에 힘쓰는 기술이었기 때문에, 생물이 줄어든 것만이 아니라 자연에 대한 안쪽으로부터의 눈길이 쇠퇴했다.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면, 자연이 중요하지는 않고 자연에 대한 눈길이 중요하다.


아이들에게도 논의 생물 조사가 퍼지고 있다. 참으로 기쁘다. 생물 조사를 한다면, 대부분의 아이가 궁금해 하는 것이 있다. '이 생물은 여기에 있는 걸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돌아갈까?' '물이 없어지면 어떻게 될까?' '쟁기질하면 어떻게 될까?' '겨울이 되면 어떻게 될까?' 생물에 대한 눈길이 애정으로 깊어져 간다는 증거이다.


다만, 항상 이러한 수준에 머무르고, 여기에서 앞으로는 나아가지 않는다. 이것은 전혀 나쁜 것이 아니고, 오히려여기에서부터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그런데 생물 조사를 한 아이들 가운데 '논에는 얼마나 많은 종류의 생물이 있을까?'라고 질문하는 아이가 있다. 이 물음은 '이 논의 세계 전체는 어떻게 되고 있을까?'라는 세계인식의문을 지금 바로 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어른은 과학자를 포함해도 거의 없다. 그것은 그렇겠고, 신이라도 아닌 한 세계의 모든 생물을 인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신을 대신하여 그것을 행하는 것이 '과학'이 아니었을까?


'논에서 살고 있는 모든 생물의 전체 목록을 만들어 봅시다. 그렇게 하면 논이란 어떤 세계인지가 분명해질 겁니다.'라고 '과학'이라면 생각하고 싶겠다. 그런데 농학조차 이 문을 활짝 열어놓지 않았다. 가장 잘 연구되고 있는논에서도 생물 전체 종의 목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수단이 없었던 것이라고도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 이유는, (1) 너무나 종류가 많고, 전문성으로 세분화된 연구자가 힘에 겨웠기 때문에. (2)전체 종을 밝히기보다 해충과 날씨 등을 명확히 하는 쪽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3)애초 전체 종을 밝히는 일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슬슬 이것에 착수해도 좋지 않을까? 왜냐하면 생물 조사 등이라는 세계인식에 대한 접근을 지닌 운동이 퍼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우리 농과 자연의 연구소에서는 '논의 생물 전체 종 목록'을 작성하고 있다. 그림2-3은 5년 전쯤에 내가 발표했던 그림이다. 이 그림은 '보통 벌레'라는 일본다운 개념인데, 서양의 '생물다양성'과 만나서 세계인식에 눈을 뜬 순간에 발안되었다. 즉 '보통 벌레'라는 개념이 없으면 농민의 눈길은 해충과 익충으로 머물러, '세계인식'으로 확장되지는 않았다. 



그림2-3 논의 세계인식(당초 '보통 벌레'는 약 700종이라 상정했는데, 현시점에서는 약 1800종이 된다).




이 해충과 익충의 생산관계를 논의 전체로 넓혀 '세계인식'으로 가져 간 것이 '보통 벌레'라는 개념이었다. 



보통 벌레의 발견


'보통 벌레'라는 개념은 1989년에 필자와 히다카 카즈마사日鷹一雅 씨가 제창하여 무엇을 위해 그곳에 있을까 하는 감격을 이끌어내고, 히다카 씨가 '심상치 않은 벌레'라는 것, 즉 관계성의 확대를 발견하고 필자에 의하여 대개의 보통 벌레가 이른바 '자연의 생물'이라는 점 때문에 농업에서 '자연'을 재발견했다. 그러나 '생물다양성'이란 개념이 1992년에 제시되기 전에는 그것이 농학적인 세계인식이란 점은 의식되지 않았던 느낌이 든다. 그림2-3에서 보고서야 '보통 벌레' 없이는, 적어도 생물을 통한 세계인식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점을 알았다. 즉, 그림2-3은 두드러지게 바깥쪽에서 이루어지는, 곧 과학적인 세계인식의 접근이었다.


사실 그림2-3을 제시하는 전제로, 논의 생물 '전체 종 목록'이 필요하다. 그림2-3은 2003년에 필자가 묘사한 것인데, 당시 확실한 '전체 종 목록'이 있었을 리는 없다. 따라서 이 표의 수치는 크게 고치려고 한다. 농과 자연의 연고수는 현재 '전체 종 목록'의 작성을 진행하고 있으며 조만간 완성된다.


표2-3에는 이 '전체 종 목록'의 개략적인 수를 표시해 놓았다. 여기에서 '과학'은 큰 난제에 직면하게 된다. "과연 이 전체 종을 누가 인식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답해야 한다. 한 가지 대답은 "이건 특정한 인간이 인식하지는 못한다. 과학이 인식하는 것이다."라는 답이다. 그것으로 끝내려고 한다면 "그런 건 농민과는 관계가 없다."고 잘라 버릴 것이다. 



동물

곤충

거미

양서류

물고기, 조개

새우, 게, 물벼룩 등

지렁이, 선충 등

조류

포유류

1364종

121종

55종

186종

159종

83종

243종

37종

합계 2248종

총합계 3901종

식물

쌍떡잎식물

외떡잎식물

양치류, 이끼

물풀류

균류

971종

401종

85종

148종

48종

합계 1653종

표2-3 기타 원생생물 832종이 있다.




지금까지 일본의 농학에서는 세계인식의 관점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①자연이 주어진 것으로 자리매김되어, 세계도 또한 당연하다는듯이 그곳에 있으며 농민은 당연히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서돌이켜 볼 동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반은 옳고, 반은 분명히 틀렸다. 확실히 농민에게는 세계인식과 비슷한 건이 있지만, 그건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과학적인 세계인식이 아니라 '천지관'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②농학은 세계인식에서 출발할 필요도 없고, 또한 세계인식에 도달할 필요도 없었다는 점이다.그건 일본 농학이 국가의 학문으로, 근대화의 학문으로, 처음부터 지닌 성격이었다. 즉 '천지관'이란 한 사람 한 사람 다른 것으로서 국가가 개입할 필요도 없고, 근대화에 의해서 '천지관'은 오히려 방해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농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천지관'과 맺는 관계는 그러할지도 모르지만, '세계인식'은 어땠을까? 자연에 작용하는 인간의 학문이라는 농학에 의하여 세계인식에 대한 지향은 전혀 없었을 리 없고, 산업화의 학문으로강하게 자리매김이 됨으로써 사그라든 것이 아닐까?



새로운 농사일


'생물 조사'가 확실하게 퍼져 나가고 있다. 이것으로 우리 농과 자연의 연구소도 걱정 없이 해산할 수 있다. 그런데 '생물 조사'는 과학적인 세계인식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농민이 조사하고 있는 건 논에서도 겨우 150종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정도 종의 실태를 파악하고 어떻게 세계인식으로 가지고 가려고 하는 것일까? 


논의 생물 조사는 생물의 목록 작성(은혜 원부 작성)을 위한 수단인데, 뜻밖의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① '농민의 풍부한 눈길'이 부활했다. 그건 농사일이 불러오는 원래의 능력이었을지도 모른다. "물장군을 30년 만에 보았다"고 말했던 농민의 말은 물장군의 존재와 함께 30년 동안 부재했던 눈길을 그의 눈에서 열고 있다. 즉, 자연과 함께 일에 대한 눈길이 부활하고 있다.

② '논의 생물 목록'이 자동적으로 생겼다. 그건 종이의 현장수첩이나 보고용지 안에도 있지만, 최고의 소장고는 농민의 가슴 속일 것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보물(생물 목록, 즉 세계인식의 장부)을 앞으로는 끌어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③ 논의 "은혜"(다면적 기능)에 대하여 '환경지불'을 본격적으로 하려고 생각하면, 당연히 '지불 근거'를 분명히 해야 한다. 다음으로 어느 정도 이상의 수준에 이르면 지불한다는 '기준'이 필요해진다. 더구나 그 '수준'을 한 사람 한 사람의 농민이 확인하는(조사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그 농민의 신청이 타당한지를 점검하는방법이 필요해진다. 



생물 조사의 목적


후쿠오카현에서는 논의 생물 조사에 조성금을 지불하는 정책을 시작했다. 게다가 이 환경 지불에 '주민과 육성하는 농의 은혜 사업"이라고 명명했다. 말할 것도 없이 "농의 은혜"란 돈이 되지 않는 '생산물'인 것이다. 이와 같이일본에서 '환경정책'은 반드시 가치 전환의 준비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벼를 떠받쳐 왔던 벼 이외의 '생물'에 대하여 정책의 눈이 닿은 것을 나는 만감의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게다가 이 생물 조사에 대한 환경 지불은 뜻밖으로 전개되고 있다. 표2-4는 생물 조사를 무엇을 위해 하고 있는지 참가자인 농민에게 2년이 지난 뒤에 조사한 결과이다. 참고로 2007년 1월에 미야기현에서 생물 조사를 하고 있는 농민에게 행한 설문조사 결과도 올린다. (다만 후쿠오카현에서는 한 가지만 회답을 받았는데, 미야기현에서는 두 가지를 선택했다.)




후쿠오카현 농의 은혜 지구

미야기현의 모임

숫자(명)    비율(%)

숫자(명)    비율(%)

1. 생물의 이름과 생태를 알기 위해

2. 저농약, 유기농업의 효과를 확인하기 위해

3. 농산물에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4. 지역의 보물찾기

5. 자신의 줄거움과 공부를 위해

6. 가족과 지역의 아이들을 위해

7. 미래를 위해

8. 환경을 지키기 위해

9. 환경 지불의 지원금을 받기 위해

10. 농업에 대한 견해와 농정을 바꾸기 위해

11. 기타

무효 회답

     15        8.9

     50      29.6

       4        2.4

       5        3.0

       6        3.6

       1        0.6

       6        3.6

     43       25.4

       7        4.1

     11        6.5

       5        3.0

     16        9.5

    12        13.0

    19        20.7

    15        16.3

     -

    11        12.0

     7          7.6

    14        15.2

     -

     2          2.2

    12        13.0

     -

     -

소계

     169     100.0

    92        100.0

표2-4  당신에게 논의 생물 조사를 실시하는 의의는 무엇입니까?


 


(1) 기술에 돌아가는 농민의 본성

확실히 자신의 기술 성과를 생물을 통해 확인하고 싶다는 마음이 두 현의 농민이라도 많다. 즉 농업기술의 연장이라고 취급하고 있다. 기존은 생산성(수확량이나 소득)이란 근대화 척도로 취급해 왔는데, 새로운 확인법과 표현방법을 발견하려 한다. 농약의 잔류분석조사 등의 자료가 아니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지표와 표현을 탐색하려 하고 있다. 이 지표의 최대 특징은 농약잔류나 쌀의 성분 등 같이 쌀의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쌀의 외부에우아하게 퍼져 있는 것이다. 


(2) 외부에 대한 눈길

그러니까, 생물의 실태가 '환경을 지키기 위해'라는 지표도 된다. '지역의 보물'이라는 인식도 생기고 있다. 그리고 자연과 행동을 같이하는 일의 본질로서 더욱 생물의 이름을 알고 싶어 하고, 좀더 상세하게 생물을 관찰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나와서, 자기만의 것으로 가두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지역의 아이들과 '미래를 위해'서도 하려고 한다.


(3) 목적의 확산과 개발

중요한 건 이들 생물 조사는 기존의 조사처럼 미리 결정된 '목적'을 위해서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조사하면서 목적도 탐색하고, 널리 퍼뜨리는 것이다. 당초의 목적이었던 '환경 지불의 지원금을 받기 위해'라는 목적이 희박해지고, '농업에 대한 견해와 농정을 바꾸기 위해'라는 목적도 생긴다. 


(4) 생물 인증의 문

주목할 만한 하나의 획기적인 점은 '농산물에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라는 회답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무농약, 저농약'을 증명하는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그 생물 자체를 가치로 표현하고 전하고 싶다는 마음도 포함하고 있다. 여기에서 '생물 인증'이란 새로운 양식이 생기는 중이다. 쌀의 내부 성분표시(농약잔류도 포함하여)가 아니라, 쌀의 외부 세계를 쌀에 연결한다는 발상이 탄생하고 있다.


(5) 자신을 응시하는 계기

그건 그렇다 치고 '자신의 즐거움과 공부를 위해'라는 농민도 적지 않은 건, 내부에 갇혀 있는 듯한 인상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야말로 생물 조사의 최대 의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생물을 응시한다는 일의 의미가 이만큼 분명해졌던 일은 없을 것이다. 농민은 생물을 이용하려 하기 전에 생물과 마주보고, 주시하며, 교류한다. 물론이처럼 명백하게 의식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영혼의 교류'라고 부를 수밖에 없을 듯한 시간을 보냈다. 이체험이 농민에게는 신선하게 느껴졌다고 말한다는 것이 의아하게 생각될 것이다. 농민이라면 자연을 응시하는 건당연한 게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벼가 벼만 자라도록 하는 세계를 추구해 온 '근대화 벼농사'에 푹 잠겨 왔던 몸에서는 발견의 연속이었다. 여기에서부터 연달아 단어가 생기고 있다. 가족에게, 지역의 주민에게, 소비자에게, 그 단어는 도달한다. 단어 역시 논의 생산물일지도 모른다.



생물에 대한 눈길을 가지고 있는 것 


사실 '세계인식'의 문은 이렇게 과학적인(자연과 인간을 나누는 견해를 토대로 한 세계인식) 입구만이 아니다. 더욱 매력적이고 심오한 방법도 있다. 농민은 모든 종을 알지 못해도, 논의 일은 잘 알고 있다. 한정된 생물과 단단하고 깊이 행동을 같이하여, 그 생물과 자신의 관계를 토대로 하여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다.


일찍이 농민은 식물이라면 약 400종, 동물도 300종의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생물과의 관계는 깊고 넓었다. 그만큼 세계도 넓고 풍부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는 식물 100종, 동물도 80종 정도밖에 알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다. 생물과 행동을 같이하는, 만나는 시간과 장소가 결정적으로 줄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것이 농촌의 아이들에게도 직접 영향을 주고 있다.


이대로라면 논밭에는 '이름 없는' 곤충과 풀이 늘어난다. 생물들은 소리를 맞추어 말할 것이다. "이름이 있는데 인간은 불러주지 않네?"라고. 생물과 마주보며, 일과 생계 안에서, 즉 일상 속에서 이름을 부르는 것이 또 하나의세계인식이었다. 물론 그 이름은 '사투리'였으며, 이름을 부르는 건 그 생물도 자신도 같은 생물, 같은 종류라는 똑같은 세계에서 살고 있다는 실감의 표명이기도 했다.


이 두 가지 세계인식을 중개하는 목적으로 '생물 조사'가 시작된 것도, 마음에 새겼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러한 내발적이고 전통적인 세계인식과 바깥쪽에서 보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전체 종 목록'이 어떻게 만날지를 생각해 보자. 한번 더 표2-3을 보자. 곤충이 1364종, 거미가 121종, 식물이 1653종이 논에서 살고 있다. 이외에도 합계하면 4733종이었다. 


먼저 이 목록을 넘기는 곳에서 시작하고 싶다. 때때로 알고 있는 이름을 만나면 안심하며 기뻐할 것이다. 모든 생물에게 이름을 붙이려고 하는 건 분류학자만이 아니다. 농민 또한 필연적으로 이름을 붙여서 불러 왔다. 이름이 없는 생물들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인지할 수 없는 생물은 '생물'이라고 불리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이름을부르는 것만이 생물이란 말이다. 


이 목록은 아마 내발적인 세계인식을 돕는 외부의 도구가 될 것이다.



고추잠자리를 과학을 통해 볼까, 정감을 통해 볼까


올여름도 갑자원 야구장에서는 고교 야구 소년과 함께 고추잠자리가 춤추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이 잠자리는 서일본에서는 정령 잠자리라고 부르는 된장잠자리이다). 이 풍경은 해마다 반복된다. 어디에나 있던 '자연현상'이다. 관객도, 고추잠자리가 어느 논에서 태어나 갑자원까지 날아 왔는지 등은 의식하지도 않을 것이다. 일본에서 한여름에 태어나는 고추잠자리는 약 200억 마리라고 생각한다(농과 자연의 연구소 조사에 의함). 이것은 상당한수가 아닐까? 일본인의 대부분이 고추잠자리를 좋아하는 이유의 하나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 고추잠자리의 99%가 논에서 성충이 된다는 걸 알고 있는 일본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농민도 예외가 아니다. 마을 안을 무리지어 나는 고추잠자리를 보고 논에서 태어난다든지, 300평에 1천 마리가 태어난다든지, 모내기 이후 산란하여 35일 걸려 성충이 된다든지, 처음에 어느 고추잠자리는 모내기할 때 해마다 동남아시아에서 날아온다든지 하는 등 분석적으로 파악하는 일은 없다. 그저 무리지어 나는 풍경을 만끽하기만 한다.그것이 자연과 일본인이 교제하는 방법이며, 그렇지 않으면 고추잠자리는 '자연의 생물'이 되지도 않았다. 


한편 '생물다양성'이란 과학의 냄새가 나는 개념으로 고추잠자리를 파악하는 일은 필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히 논에 특화되어 숫자가 많다는 것만이 아니라, (많은 논에서는 1평방미터에 10마리를 넘는다) 잠자리의 유충이 꽤 많은 생물을 먹지 않으면 자라지 않는다는 점, 성충이 된 뒤에도 광범위하게 출몰하며 많은 곤충을 먹으면서 3개월 이상 산다는 점 등이 이유이다. 그러나 그 실태는 아직 잘 파악되지 않았다. 최근 동일본의 논에서 태어나고 있는 고추잠자리(주로 고추좀잠자리임)가 격감하고 있는 이유는 어떤 종류의 농약이 의심되고 있지만, 잘알 수 없다. 


여기에서 두 가지 중요한 과제가 발견된다. (1)일본인은 고추잠자리를 과학적으로 파악하지 못한다. 즉 '고추잠자리'와 '생물다양성'을 연결하는 이론은 일본에서는 형성되어 있지 않다. (각각을 따로따로 파악하고 있다.) (2)농업은 고추잠자리의 대부분이 논에서 태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업의 가치라고 자리매김해 놓지 않는다. (자연현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고추잠자리를 절취선으로 농업에 생물다양성의 논리를 가지고 오는 건 쉽지가 않다. (물론 나는 고추잠자리로 상징하여 이야기하는 것이고, 고추잠자리를 다른 생물로 치환하여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일본에서 '생물다양성'이란 단어가 이 정도로 급속하게 보급된 것은 어째서일까? 확실히 1992년 리오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유엔 환경회의'에서 생물 전반의 보전에 관한 포괄적인 협약인 '생물다양성 조약'이 채택되어, 일본도 '생물다양성 국가전략'을 책정했기 때문이라고 정부는 설명하고 있다. 역사적인 경과는 그렇지만, 일본인은 이 생물다양성을 '자연현상'의 대명사로 받아들여 온 것이 아닐까? 자연은 생물의 생명으로 가득 차 있고,살아 있는 온갖 것 전부를 애지중지해 온 일본인의 전통적인 정감이 생물다양성이란 근대적인 개념을 수용한 토대였던 것이 아닐까?


하지만 의심도 남는다. 이러한 새로운 과학적인 개념과 전통적인 전근대적인 애정이 참으로 융합하여 만날 수 있을까? 또한 서로를 자극하고, 깊게 만들 수 있을까? 일본인의 자연관을 현대적으로 재건하기 위해서도 '농업이 다시 만든 자연에 농업은 자부심을 갖는 동시에 책임도 지닌다.'라는 새로운 절취선을 비과학과 과학은 협동하여절개해 가고 싶은 것이다.




벼와 자연과 밥의 관계 지표


우리는 논의 생물 조사 결과를 그림2-4처럼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올챙이에 한정했는데, 후쿠오카현의 '환경 지불'에서는 지역마다 수십 종의 생물을 어와 같은 포스터로 만들었다. 나는 이 포스터를 초등학생들에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물어보고 있다. "모두들 누구를 위해 밥을 먹고 있니?" 하면 "나를 위해서" "내 몸을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래도, 때로는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올챙이를 키우기 위해서 밥을 먹는다고 생각해 본다면?"이라고 말하면 웃음이 교실 안에 퍼진다. "믿을 수 없어요!" "거짓말!" "바보 같아!"라고 소리를 높인다.



그림2-4 인간과 밥과 생물의 관계(2006년 후쿠오카현 농의 은혜 사업 자료에서)



"그렇네. 어른들은 더 믿어주지 않을지도 모르겠네. 더 상상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네. 그래도 논에 나갔을 때 벼주변에서 올챙이가 자라고 있었죠."라고 나는 말을 건다. 어느 새인가 벼는 인간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한 착각을 현대인은 하고 있다. 벼 자신도 자연의 은혜를 받아서 자라고 있다. 이 벼와 자연의 생물과의 관계를 떠받치기위해서 농민만의 힘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예를 들면, 이 벼와 올챙이와의 관계를 떠받치기 위해서는 이 벼를 해마다 따박따박 소비해 주는 인간이 필요하다. 벼는 '밥'이 되고, 인간을 자연과 연결해 준다. 이 관계가 사라졌기에 농과 자연의 관계도 사라졌다. 쌀을 먹는 건 농의 중요한 일부를 이루고 있다. 이것을 '소비'가 아니라, '자연보호'라고 부를 수도 있고 '식농교육' '자연관의 도야'라고 불러도 좋다. "만약 너희들이 한 그릇의 밥을 먹지 않는다면, 올챙이 35마리가 죽어 버리지."라고 이야기하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 인간은 행복하다.


벼와 자연의 재정의란 이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이다. 소비자도 포함하여, 인간이 자연과 깊이 행동을 같이하기 때문에 자연은 빛나고, 그곳에서는 돈이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포함하여 헤아릴 수 없는 은혜가 생겨난다. 그 은혜의 총량을 계량하는 과학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만들기 위하여 인간은 생물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올해도 벼 한 그루의 주변에서 꼬마물방개가 헤엄칠 것이다. 이 꼬마물방개와 벼의 생산이란 인과관계는 현대의 과학으로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볼 수 있는 것이다. 후쿠오카현의 많은 논에서는 벼 세 포기와 함께 꼬마물방개 1-3마리가 자라고 있다. 이 관계를 떠받치기 위하여 밥을 먹는 인간이 자라는 것이 논과 벼와 자연을 지키는 일이다.   





논은 천지유정


기능과 서비스가 아니라, 천지의 은혜


(1) 이삭줍기


이삭줍기 풍경을 죄다 보지 못하게 되었다. 물론 콤바인으로 수확하여 떨어진 이삭을 줍기 어려워진 것도 이유이겠지만, 그보다도 그렇게까지 하여 쌀을 거두지 않아도 된다는 정신이 이삭줍기를 그만두게 했다. 그러나 더 깊은 이유가 요즘 들어 생각이 났다. 


예전의 농민은 쌀이 많이 수확된다면 '천지의 은혜가 컸기 때문이다'라고 자연(천지)에 감사를 드렸다. 현대에는'자신의 보살핌이, 자신이 채용한 기술이 뛰어나기 때문이다'라고 자신을 칭찬하는 경우가 많다.


쌀을 천지에게 받은 '은혜'라고 생각하면, 은혜를 등한시하는 일은 부끄럽다. '황송하다'라고 느낄 것이다. 아이들에게 이삭줍기를 체험하게 하는 건 이것이 목적이다. 


한편, 쌀의 생산을 자기 행위의 결과라고 생각한다면, 떨어진 이삭을 주울지 줍지 않을지는 자신이 정하는 것이다. '황송하다'든지 어떤지는 이삭줍기의 품삯과 수익을 저울질하여 정하게 된다. 2평방미터에 하나의 이삭이 떨어져 있다면, 300평에 500개로 약 1킬로그램이 된다. 쌀의 가격으로 치면, 약 300엔. 이 수확을 위해서 30분 걸린다면, 시급 600엔. (게다가 도정하는 일도 필요하다.) 이것으로는 할 맘이 나지 않는다는 판단이 합리적이겠지만, 중요한 세계를 잃어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최근 놀라운 일을 지역의 93세 농민에게서 들었다. 지금까지 자신의 어리석음을 부끄러워했다. "떨어진 이삭은 농민 이외의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워도 좋다는 관습이었다." 농민은 전혀 줍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는 대단한 일이었던 것이 아닐까? "벼베기가 끝나면, 자루를 가진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논에서 이삭줍기에 힘쓰고 있었다."며 그리워하고 있었다. 


'소비자와의 교류'인 것이 아니다. 천지의 '은혜'를 서로 나누는 사상이 건재했던 시대가 있었던 것이다. 결코 농민이 소비자에게 주는 인심이 아니었다. 


현재의 콤바인 수확에서는 떨어진 알곡이 1평방미터에 약 1000알, 즉 쭉정이나 덜 익은 알이 많기 때문에 약 10그램이니 300평당 약 10킬로그램 정도 된다. 상당한 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은혜'를 기러기나 백조, 학 등의 겨울 철새가 받고 있는 의미와 가치를 한번 더 생각해 보고 싶다. 한 마리의 기러기가 먹는 알곡은 하루에 약 100그램이라 하면, 하루에 약 10평방미터의 논이 필요하다. 300평에서 약 100일분의 먹을거리가 기러기를 위하여, 은혜로 제공되고 있다. 


농이 현지에 당연하게 존재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농이 있었기에 가져오는 '은혜'가 인간 이외에게도 미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알기 쉬운 '떨어진 이삭' '떨어진 알곡'을 예로 들었지만, 그것 말고도 '은혜'는 무진장 많다. 이와 같은 세계의 구조를 이 나라의 농민은 만들어 왔다. (이렇게 하여 생물다양성도 지탱해 왔다.)


어떨까? 안쪽에서 나오는 '세계인식'은 천지의 은혜에 이른다. 그러나 이 '천지'란 '자연'과는 크게 다르다. 근대화된 '생산'에서 이러한 '은혜'가 흘러 떨어지는 것에서 눈길을 돌리지 않고, 이 '은혜'를 주워 올려 한번 더 세계로 돌려주는 학문은 없는 것일까?


(2) 다면적 기능을 뛰어넘는 '은혜'


농민에게 '다면적 기능'은 외부에서 찾아온 단어와 개념이다. 자신들의 실감과는 상당히 어긋나 있다. 평소에는 의식하지 않는 것을 '기능'으로 의식하도록 강요를 당한 것이다. '논에는 홍수방지 기능이 있다.' '논에는 생물 육성 기능이 있다.'라고 말하더라도 그러한 것을 목적으로 '벼농사'를 짓고 있지는 않으며, 그러한 것이 자기 농사일의 결과로 생기고 있다고 실감하지도 않는다. 여기가 '농'의 대단한 바이나, 이것을 농민이 실감하고 당장 단어로 표현하지 않으면 이 가치는 누구에게도 전할 수 없을 것이다.


'물을 뗄 때 생물이 걱정됩니까?'라는 설문조사에 대하여 '논의 생물 조사'를 한 적이 있는 농민 태반은 '그렇다'고 답하고 있다(걱정되지 않는다는 건 10%였다). 이것은 생물의 '생명, 목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 생명과 자신의 물떼기라는 농사일이 농밀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걸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생물 육성 기능'은 물떼기라는 농사일과 연결되어서 '기능'이 아니라 '실감'이 되어 의식된다. 여기에서 남에게 전할 수 있는 말이 생긴다면, 그것은 '은혜'가 되어 가족과 지역의 사람이나 국민과 공유할 수 있다.


(3) '표현' '단어'가 가장 중요


각지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건 '아직 이렇게 생물이 살아가고 있었나'라며 놀라는 말이다. '참으로 반갑다'라는 말도 들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무엇을 보고 있었나'라는 깊은 반성을 동반하고 있는데, 감동이 과거의 경험과 연결된다는 점에 가장 큰 특징이 있다. 시류 속에서 농민도 생물도 살아왔는데, 둘의 관계는 점점 옅어졌다. 그것은일본 사호의 근대화의 흐름 속에서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흐름 속에서 어느 새인가 모습을 감춘 생물도 적지않았지만, 아직 살아 남아 이렇게 수십 년 만에 얼굴을 내민 생물이 있다. 


이 순간에 감동이 살아난 것이다. 그리고 이 감동과 감개를 단어로 바꾼 것이 '전승하고 싶다'는 농민의 전통일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도 생물과의 관계를, 체험을 통해 계승해 왔기 때문이다. 생물에 대한 '눈길'은 시류를 넘어서 전해져 온 농의 문화이다. 이것도 '은혜'의 일종일지 모른다. 


자, 여기에서 생기는 '단어'가 가장 중요하다. 단어야말로 '농의 은혜'를 전할 수 있다. 가족을, 주민을, 소비자를, 논으로 이끌 수 있다. 이것을 기존의 '농정'은 거의 중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생산'이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와서 '먹을거리'나 '자연환경'이나 '생물'이 화제에 오르게 되면, 새로운 현재의, 지역에 맞는 표현이 아니면 실감을 말할 수 없었다. 그 이야기를 꺼내고, 단련하는 장을 제공하는 '농업정책'이 겨우 지방에서 생겼단 건 이미 기술했다.


아마 '생물 조사'의 최대 성과는 농민과 지역주민의 몸속에서 생긴 '실감'과 '단어'일 것이라 생각한다. 바꾸어 말하면, 농민의 원래 풍부한 "시선=세계인식"이었을 것이다. 




생물의 이름을 부르다


(1) 이름이란


벼가 기뻐하고 있을 때, 벼가 괴로워하고 있을 때, 농민은 벼를 부른다. 물론 "벼야!" 등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정념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건 이불 속에 누워 있어도 들려 오는 소리이다. 절대로 이름도 모르는 풀과의 사이에서는 이러한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농민은 어떤 농민이라도 일생 동안 수백의 생물에게 이름을 붙인다. 이것의 의미는 매우 크다.


불가사의하지만, 일본에서는 지금까지 논에서조차 생물 전체 종의 목록이 존재하지 않았다. 농과 자연의 연구소 프로젝트에서 표2-3 같은 개요가 밝혀졌는데, 곤충과 동물이 약 2300종, 식물이 1700종 정도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농민으로서 이만큼의 생물 이름도 알지 못하고 죽어 가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미야자키현 시바椎葉에서 화전을 하고 있던 농민은 실제로 500종류 남짓의 식물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풀이 언제 싹이 트고, 언제 열매를 맺으며, 어떤 성질인지까지 잘 알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이때의 이름은 시바의 언어(사투리)인데, 훨씬 예전의 농민이 생물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단 증명이라 가슴이 뜨거워진다. 또한 "옛날 사람은 그랬다"고 회피하기만 해도 좋은 것일까?


딱 잘라 말하면, 메이지 이후의 일본 농학에 도입된 '근대화 농업'에서는 생물의 이름을 새롭게 익힐 필요성이 없었다. 오히려 생물과 농민의 관계는 아주 차가워져 버렸다. (그에 대하여 '벌레 보는 판'은 최후의 싸움을 거는 듯한 의도가 있다. 그것을 아이들은 좋아하고, 즐겁게 사용하고 있다. 아이들에게 이름을 찾아보는 경험은 농민에게도 자신과 생물의 관계를 문제삼는 일이다. 자신의 기술을 되돌아볼 좋은 기회라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계속 퍼지고 있다.)



"현재의 농민 역시 벼의 품종명과 도입된 천적의 이름은 곧바로 압니다"라고 반론하는데, 그것은 비료와 농약과 기계의 이름과 똑같은 차원의 것일 뿐이다. 대상이 아니라 수단이기 때문에,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동기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토 시즈오伊東靜雄(1906-1953)의 단가를 떠올린다.


"우거진 풀숲 그늘의     이름도 없는 꽃에     이름을 부른,      처음 사람의     마음을 생각한다"


확실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런 기분은 린네 학자의 후예인 일본의 농학자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으로, 논의 생물에게 이름을 불렀던 농민의 불가사의에 놀란 것은 아닐까? 그러나 모든 농민은 이 감상을체험하고 있다. 


예를 들면, 논의 물속을 1밀리미터 정도의 물방개로 보이는 벌레가 한창 헤엄치고 있다. 한 그루에 몇 마리는 있을까? 나에게는 이름을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건 나에게 '알고 싶다'는 욕망이 조금은 생기고 있다는 증거이다. 나라면 머지않아 물방개 전문가를 만나, 이름을 가르쳐 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통농민이라면 그러한 기회를 만나지 못한 채로 일생을 마칠 것이다.


그보다도 이 작은 물방개를 알아채지 못하는 농민이 대부분이고, 알아채는 농민은 전국에 50명이나 있을까? 아니다, 알아채는 농민이 훨씬 많이 있겠지만 "무엇일까"라고 마음에 두지 않는다. 이러한 장면에서 '생물다양성'은농민의 등을 떠밀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농민의 등을 떠밀어서 '아, 이것이 꼬마물방개라고 하는 걸까? 정말로 많네. 한 그루에 다섯 마리는 있어."라고 깊이 파고드는 건 농업기술의 역할이다. 그러나 근대화 기술에서는 이러한 동기를 만들어내는 일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까 새로운 '환경기술'은 그것을 제공해야 한다. 


(2) 두 가지 이름 붙이는 방법


그래서 다시 한번 돌아보자. 이름을 배운다(개인적인 이름 짓기)는 건 자연의 전모를 인식하는 '과학'(A라고 부름)과 생계와 일 안에서 자연에서(경우에 따라서는 필요에 강요되어) 배운다(이름 붙이기)는(B라고 부름)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만한 건 A와 B의 관계이다. 우리 현대인은 A 쪽이 압도적으로 상세하고정확하며 기재하는 종도 많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앞에 기술한 미야자키현 시바 지방의 농민처럼 '과학'이 등장하기 전에는, 아니 등장했어도 B가 A보다 깊고 상세하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현대에는 B의 경험자에게서 이름을 익히는 것이 아니라, A로서 교육으로 책과 도감에서 이름을 배운다. B의 대부분은 '사투리'이기 때문에, 좀처럼 전국 공통의 '교육'과 '학문'의 표준이 되지는 않는다. 이러면 B는 

'민속학'이나 '사투리 사전' 등의 안에 보존되어 쇠퇴하게 된다. 


그러나 가능성이 없는 건 아니다. 나의 경험으로 말하겠다. 나는 논에서 군무하는 '고추잠자리'의 표준 일본 이름을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아이 무렵에도 붙잡고 놀았던 고추잠자리의 통칭은 '정령 잠자리'였다. 지금 사는 곳에서 농민이 되었지만, 이 지역에서 부르는 통칭은 '익잠자리(益トンボ)"이다. 이 잠자리가 도감에는 '된장잠자리'라고 표기되어 있다고 가르침을 받았을 때는 꽤나 감동했다. 왜냐하면 '동일본의 고추좀잠자리에는 없는 걸 인식할수 있고, 이제부터는 일본 전국에서 큐슈의 고추잠자리의 독자성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코 정령 잠자리라는 호칭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소생시키는 길이다. A는 B를 없애지 못하기 때문에, 사용할 수도 있다. 따라서 조금 번거롭게 느낄 수도 있지만, 도감은 A와 B가 병기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어느 풀이 자라고 있다. 그 풀을 뽑아, 그 제초라는 행위의 전체를 정념을 담아서 남에게 말할 때 '이름'이 생긴다. '어느 작은 풀'로는 해결되지 않을 정도로 신중한 표현이 필요해질 때, '이름'이 필요하다. 이러한 토양이 있기에 B가 전해져 왔다. 그러나 제초제가 보급되면 풀의 이름을 배울 여유가 있다면 새롭고 효과 좋은 제초제의 이름을 배우는 쪽이 유효하다. 더구나 그 제초제의 효과로 풀이 적어지면, 이제 풀 이름을 배울 필요성도 멀어진다.


실은 논 안의 잡초 가운데 80%는 벼와 경합하지 않는다. 즉 '해초'가 아니다. 제초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제초제로 죽이고 있다. 그것을 의식하는 일도 없다. 알아채지도 못하고, 일생을 마치는 농민도 많을 것이다. 그것으로 '아무 관계도 없다'고 잘라 말할 것인가?


머지않아 논에서 제초제의 효과가 없는 풀이 생기기 시작한다. 풀에도 저항성이 발달하는 일이 분명해져 왔다. 그 풀에 푸르고 큰 가로줄무늬가 들어간 박가시나방 애벌레가 달라붙어 잎을 갉아먹고 있는 걸 청년 농민이 발견했다고 한다. 그는 흥미를 가지고 '화려한 청벌레'라고 자기 나름의 이름을 붙여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어느 날, '논에서는 노란나비도 생기고 있다'는 책을 읽는다. 그리고 그 애벌레의 사진을 보았을 때, '앗, 저 화려한청벌레는 노란나비의 애벌레였을까?'라고 알아챈다. '노란나비'라는 새로운 이름 쪽이 전하기 쉽다. 그건 그것이 A이기 때문이다. 이윽고 그는 노란나비를 자신이 '화려한 청벌레'라고 불렀던 것도 잊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름을 지어 붙였다. 게다가 그는 두 번이나 이름을 지어 붙였다. 한 번은 B를. 그리고 또 한 번은 A를.


나는 A도 B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름은 자신이 자연과 행동을 같이할 때의 기호이다. 이름의 정확성과 공통성보다 그 이름을 써서 그 대상과의 거리가 줄어들면 좋은 것이다. 그 생물에 대한 정념도 A에 넣어서 생기기 때문이다. 


나는 한번 더 B의 세계를 복권할 수 없을까 몽상한다. 어느 정도 A가 학회에서 축적되어 가더라도 B의 세계가 쇠퇴한다면 생물과 행동을 같이하는, 생물을 지키는 일은 할 수 없게 되지는 않을까?  실은 A는 B를 떠받치기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닐까?



유용성을 극복하다


그렇다 치더라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인가? 벼는 벼만 자라면 좋다는 것을 일부러 벼를 먹는 해충까지 거느리고 있다. 그리고 해충은 천적을 거느리고 있다. 더욱이 '보통 벌레'까지 미치고 있다. 그래서 논밭은 생물다양성으로 가득 차 있다. 자연은 생물의 관계망으로 성립되어 있다고 해도 좋다. 나는 젊은 시절, 퇴거되어 마을을 떠나 논이 사라지면 맨먼저 사라지는 게 참새라고 듣고서 감동했던 일이 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러한 일은 당연한 것으로서, 해충 등은 동시에 사라진다. 독립하여 고립되어 있는 생물 등은 한 종도 없다. 그런데도 해충을구제하고, 배제하며, 방제한다고 하는 생각이 새삼스레 비대화된 것은 마음의 병일지도 모른다. 근대가 생기게 한 정신이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농학은 전면적으로 긍정해 왔다.


그것은 벼를 먹는 인간은 전면적으로 긍정되어, 똑같이 벼를 먹는 해충은 그 생존조차 허락되지 않는다는 정신구조를 기반으로 한다. 우리들이 '공존'이라 말하려면 먼저 해충과의 공생을 익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본디부터 농업은 지향해 온 것이 아니었을까? 결코 인간만이 안전한 먹을거리를 먹는 것을 지향해 왔을 리가 없다. 


이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해충의 비애는 우리 인간의 슬픔과 뿌리가 같은 것이 아닐까? 이러한 슬픔을 품을 때, 또 생물끼리의 기쁨도 볼 수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여기에서 나는 '농'의 풍부한 가능성을 본다. 인간이 생물로서, 자연 안에서 인간답게 살아 가기 위하여 어떠한 "눈길"이 유효할지를 함께 생각하는 시간이 농민에게서는 사라지지 않았다.


인간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다고 가르친다. 도움이 되는지 어떤지는 부차적이다. 그런데 근대화된 사회에서는 도움이 되지 않으면, 사랑을 받지 못하면 존재 가치가 없는 듯한 분위기이고, 인간으로 살기 힘든 사회가 되고 있다. 벌레를 보는 한에서도 그것은 자주 나타나고 있다. '보통 벌레' 등 전혀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필사적으로 그 존재 가치를 그래서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대부분은 증명하지 못해도 살아 있어서 좋다.


근대화되기 전 옛날 사람은 그점에서는 달랐다. 모든 생물에게는(식물과 산이나 강, 바람에도) 영혼이 잠들어 있다고 생각해, 인간과 동등하게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비과학적이라고 하여 잘라 버리는 건 간단하다. 그렇지 않고, 그러한 천지유정의 세계에 과학의 정밀한 지식을 '거듭 칠하면' 과학도 거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12월이라는데 논두렁에는 놀라울 만큼 붉은빛의 광대나물이 무성히 피고, 하늘에는 깔따구떼가 이상한 모양을 만들며 춤추고 있다. 이러한 세계에 우리 농민은 살고 있다. 천지는 쭈욱 유정했고, 계속 유정할 것이다. 


전날도 젊은 농민이 쑥도 몰라서 놀라고 있으니 "쑥은 몰라도 농업경영은 할 수 있습니다"라고 역습하여, 이것을 논파하느라 땀 깨나 흘렸다. 쑥은 아직 유용성이 조금은 남아 있는데, 이것을 뱀딸기나 곡정초나 꼬마물방개에 바꾸어 놓아 보면 농학 안의 커다란 빈 굴을 알아차릴 것이다.


기존의 농학처럼 경제적 측면에서 유용성의 세계만으로 이 대상과 인간의 관계를 해명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 유용성도 교환가치 범주에만 한정되어 있었던 것이 농학의 역사였다. 그래서 농학이 꽉 속박된 채로 되어 있는 유용성에 대치하고, 이것을 넘어가는 방법을 생각해 본다. 


즉, 정념을 토대로 하면서, 거기에 비경제, 사용가치, 내재적인 가치, 본질적인 가치라는 영역을 중첩해 보는 것이다. 


상징적인 문제를 제출해 보자. 300평당 600킬로그램의 쌀이 나오는데, 고추잠자리는 10마리밖에 없는 논(또는 그러한 사태를 불러온 농사일)과 400킬로그램의 쌀만 나오지만 고추잠자리는 5천 마리나 살고 있는 논(그러한 농사일)에서는 어느 쪽이 가치가 있을까? 교환가치(경제가치)로 판단한다면, 전자 쪽이 훨씬 가치가 있다. 그러나 고추잠자리 한 마리당 10엔의 환경지불이 실시되게 되면, 경제가치에서조차 역전된다. 그것은 지금까지 유용성이 인정되지 않았던 고추잠자리에게 환경지불을 실시해야 할 정도로 유용성이 인정되었기 때문이라고 정말로 말할 수 있을까?


원래 유용성(내재적 가치)은 있었지만, 경제가치만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닐까? 그러면 고추잠자리의 유용성이란 어떤 것일까? 그것을 계량하는 지표는 과학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쌀이라면 600킬로그램이라 계량할 수 있다. 확실히 고추잠자리도 5천 마리라고 계량할 수 있다. 계량하는 척도가 없을 리 없지만, 계산하는 의미가 일반화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고추잠자리가 몇 마리 살고 있는지를 조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쌀의 수확량을 계량하는 건 그 경제가치를 계산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오히려 생산기술을 평가하기 위함이다. 가지치기 숫자나 이삭 숫자와 알곡의 수나 맛을 측정하는 연장에 있다. 이처럼 농학이 유용하다고 인정하고, 경제가치가 뒷받침하는 세계는 치밀한 지표화가 행해져 왔다. 이런 면에 대한 농학의 공헌은 헤아릴 수 없다.


만약 고추잠자리 한 마리가 10엔이라면, 지표화가 진행될까? 큰 망설임과 혼란이 농학을 덮칠지도 모른다. 즉, 유용성을 인식하는 감성이 경제가치의 비대에 따라서 쇠퇴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보완하는 공부(사상이나정책)가 부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유용성 등보다 광대한 세계


그럼,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이외에도 유용성에 구애되지 않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것이다. 그것은 '선'이나 '사랑'이나 '정념'이라 부르거나, '영혼'이라 이름을 붙이거나, '외치는 소리'라고 부르거나 하는 것과 마주보는 인생이다. 무심코 예초기로 잘라 버렸던 유혈목이를 위하여, 집에 돌아가 그 장소에 향을 피운 농민을 단지 종교심이 깊은 사람됨이라고 정리하는 것으로 '삶'과 '시간'의 본질에 다가가는 걸 잊고 있지는 않은가? 빗발이 강해졌던 밤에 벼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논에 달려가는 정념을 수확량 감소를 염려한 것이라 오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산업의 하나인 농의 토대에 아직 '생업'인 농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걸 다양한 국면에서 재발견해 나아가지는 않는가?


그래서 또 하나의 대책을 발견할 것이다. 유용성이 없는 걸 풍부하게 표현하는 일이다. 또는 유용성이 없는 것의 풍부함을 표현한다고 해도 좋다. 


그것은 현재는 얼마나 많은 '비근대화 척도'를 제안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 유창한 한 예를 후쿠오카현의 '생물 목록 작성'에 대한 '환경 지불' 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지방의 정책이 주목되고 있는 건 단순히 저농약이나 저화학비료의 기술에 지불되는 것이 아니라, 농민 스스로가 생물을 조사해 생물의 목록을 작성하고 은혜 대장으로 표현하는 이 일련의 행위 전체를 지불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비근대화 척도로 가장 유효한 '생물지표'가 태어나 자라고 있다. 


물론 시도 노래도 음악도 모든 예술은 쉽사리 유용성의 족쇄에서 해방되어 있다. 언제부터 농학과 예술은 소원해졌을까? 어째서 공학에는 있는데 농학에는 미학이 없는 것일까? 나는 특별히 예술이 아니어도 한층 농민의 개인적인 표현 방법을 제안하는 농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루하루의 농사일 속에서, 생계 안에서 발견하거나, 놀라거나, 깨닫거나, 이야기하거나 하는 것을 입으로도, 문장으로도 표현하는 일의 의미를 찬양하는 것이 아닐까?



보통의 가치


인생의 감촉과 실질은 경제가 아니라, 자신의 안에 흐르는 정념과 생물(인간도 포함)과의 교감에 있는 것이 아닐까? 확실히 지난해의 수확량과 소득은 기억에 확 남아 있다. 그것은 수치화할 수 있으며, 기록으로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여 지난해 7월 20일에 왕잠자리가 우화할 때의 윤이 나고 싱싱함이나, 8월 10일의 시원한 논의 바람은 이미 기억에 남아 있지 않는다. "아, 농민이어서 좋다"라고 왕잠자리를 보면서, 바람에 몸을 맡기면서 그때는 느끼고 있었는데 말이다. 


인생이란 그러한 것이다. 그러한 무수히 작은 충실함과 감동의 집적으로 지탱되며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소득이나 명예와 자존심 같은 건 이러한 하루하루의 실감 위에 구축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그 증거로, 일에 몰입하고 있을 때는 모든 걸 잊어먹고 있지 않은가?


'생물로부터 자욱이 끼어 오는 "정념"이 있다'라고 발언하면 으레 '그건 생물에 대한 당신의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생물에 정념 등이 있어서 쌓이는 것인가?'라고 반론한다. 즉, 정념이란 인간의 감정이며 어디까지나 내가 대상에 대하여 느끼는 것, 곧 나의 주관이라고 단정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과 일체가 되었던 적이 없는 현대인의 망언이다. 생물과 함께 살고 있는 것을 실감한 적이 없는 인간의 믿음이다. 논 위로 잠자리의 날개가 빛나 그만 시간을 잊고, 나를 잊고 넋을 잃고 보는 수십 초는 생물과 인간이 교감하는 시간과 장소이다. 이때에 나의 존재는 주관과 객관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감성으로 받아들이고, 이성이 정리하지는 않는다. 대상에서 나온 빛을 나의 눈이 포착하고, 느끼고, 감정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확실히 고추잠자리로부터 자욱이 끼어 오는 정념이 있어, 나는 몸 전체로 그것을 받아들인다.


좀처럼 이것은 설명하기 어렵기에 실제 체험으로 보여주게 된다. 중학생에게 수업을 한 적이 있었다. 여름 오후 2시 무렵, 창으로 교실 한가득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창에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선풍기의 바람은 어느 쪽이 기분이 좋다고 생각하니?"


그러자 80%의 아이들이 "자연의 바람 쪽이 기분 좋아요."라고 답했다.


"어째서 창에서 들어오는 바람이 기분이 좋지?"라고 물으면 우리 성인은 감성으로 차이를 알기 때문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자연의 바람과 똑같은 향기, 똑같은 초록빛 성분, 똑같은 미묘한 흔들림을 가진 바람을 선풍기에서 불어 나오게 하면, 자연과 똑같은 바람이 되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즉, 완전히과학적으로는 똑같은 바람이라도 자연의 바람에는 정념이 풍부하여 선풍기의 바람에는 그것이 없다. 


"그렇게 어리석은. 어느 정도 성분이 세기가 같아도 선풍기의 바람은 자연의 바람과는 다르다는 선입관이 작용하기 때문이다"라고 당신은 반론할 것이 틀림없다. 그대로이다. 선풍기의 바람은 인간이 조절할 수 있는 바람이다. 늘 인간의 주관이 느끼고, 객관적으로 표현할수 있는 세계의 것이다. 주관과 객관이 분리된, 근대적인, 과학적인 인식방법의 세계에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자연의 바람은 자신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다. 그래서 몸을 맡겨 버리는 것이다. 자신을 잊고서 바람 속에 안겨 벼린다. 그러한 상태에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바람을 무심하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바람과 일체가 될 수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기분 좋은 것이다. 바람을 인식하는 방법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우리는 어느 새인지 자연현상을 과학적으로, 객관적으로 분석하려고 하게 되었다. 그 경향이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우리 자신은 비대화되어 간다. 그리고 인간의 힘에 의하여 분석, 파악할 수 있다는 자부심이 강해지는 만큼, 바람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는 반대로 쇠퇴해 왔다. 


우리는 과학적으로 생각해,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할 때는 오히려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할 것이다. 객관과 주관을 나누어 생각하는 일을 그만두고, 몸을 맡기고 통째로 느끼며 받아들이는 힘을 되찾으면 생물로부터 자욱이 끼어 오는 정감의 풍부함에 몸을 흠뻑 적실 수 있다.


바람과 일체가 되어 바람에 안길 때, 바람이 기분이 좋은지, 자신이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 등을 생각하지 않는다.바람으로부터 자욱이 끼는 정감에 자신의 바람에 대한 정념이 반응하고, 혼연일체가 된다. 


그래서 바람을 생물로 바꾸어 놓고 싶다. (예전에는 바람도 생물이었다.) 벼라 해도 좋다. 강의 흐름도 좋다. 하늘을 흐르는 구름이라 해도 좋다. "아, 농민이어서 좋다"고 느끼는 감동에 종종 우리는 휩싸인다. 그러한 감동의 폭풍 안에서 나는 인간이라기보다 생물의 일원으로 완전히 변모한다. 우리 현대인도 아직 완전히 근대화되지 않은 것이다. 특히 농민은.


자, 내가 무엇을 주장하려고 하는지, 진짜 목표는 보여주었을까? 생물 조사는 생물과 행동을 같이하는 일을 어떻게든 해서 복권하기 위한 방책이다. 그것은 근대화의 폭주에 제동을 거는 최후의 수단인 것이다. 인생에서 생물과 행동을 같이함을 잃는다면, 농은 농이 아니게 된다. 논에서 살아가는 일이란 그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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