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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5




제1장

이로운 도구가 되는 불 -수렵채집부터 화전 농경까지

코야마 슈죠小山修三







들어가며


타오르는 횃불을 치켜 올리고 사냥꾼들이 초원을 걸어간다. 큰 덤불과 숲이 가로막고 있으면 횃불의 불을 놓아서길을 열어 나아간다. 밤이 되면 모닥불을 피우고, 사냥과 채집으로 얻은 획물을 조리하고, 신체를 따뜻하게 해 잠든다. 그들의 지나간 뒤에는 불로 교란된 자연이 남는다. 그들의 길은 차례차례 거듭되면서 지상에 새겨진다.


사람과 불의 교제는 오래되었다. 불을 자유롭게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했다. 아프리카 남부에서나타났던 우리들의 직접적 선조 호모 사피엔스는 20만 년이란 짧은 기간 안에 지구의 전역으로 확산을 이루고, 가까운 장래에는 인구가 100억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것이 가능했던 건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먹을거리의 조달은 자연 안에 산재하는 먹을거리를 구하는 수렵과 채집의 단계부터 시작해, 자연을 개변하여 동식물을 관리육성하는 농경과 목축으로 이행해 갔다. 본론에서는 그 과정에서 '불'이 어떤 역할으 수행했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수렵채집민과 불


수렵채집민의 확산


최근 놀랍게 늘어난 인간 화석의 발견과 과학연대법, 고환경 복원, DNA 분석 등의 성과에 의하여 우리들의 직접적 선조인 호모 사피엔스의 활동이 점차 밝혀져 왔다. 그래도 정보는 점으로만 보이지만, 그 점과 점 사이의 직선을 인간이 걸었다고 가정하고, 시간과 속도를 계산한 것이 표1-1이다.



출발점

도달점

거리(km)*

시간(만 년)

속도(km/년)

아디스아바바(에티오피아)

카멀(이스라엘)

본(독일)

바이칼호(러시아)

페어뱅크스(미국)

텍사스(미국)

카멀(이스라엘)

류강(중국)

-카멀(이스라엘)

-본(독일)

-바이칼호(러시아)

-페어뱅크스(미국)

-텍사스(미국)

-몬테베르데(칠레)

-류강(중국)

-다윈(오스트레일리아)**

2660

3202

6309

5431

5132

8328

7190

5575

10

6

1.5

1

0.3

0.1

3

2

0.03

0.05

0.42

0.54

1.71

8.33

0.24

0.28

표1-1 호모 사피엔스의 이동

*직선거리   **수라바야(인도네시아) 경유




아래는 네 가지 경로에 대하여 자연환경과 사용한 도구를 감안하면서 개황을 기술하겠다.



(1)아프리카 안에서

20만 년 전 무렵에 아프리카 남부에 나타났다고 하는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를 나와 서아시아로 진출한 것은 약 10만 년 전이었다. 그것은 카프제 유적(이스라엘)의 연대로부터 파악할 수 있다. 인구론적으로 말하면, 아프리카를 가득 채우고 다음 땅으로 밀어내는 압력을 가지기까지에 10만 년이란 시간이 걸린 셈이 된다. 그 속도를 계산하면 1년에 30미터라는 매우 느린 것이었다.


고고학 유적에서 그들의 생활방식을 보면, 큰 마을을 경영한 흔적은 없고, 도구는 석기밖에 없다. 석기는 150만 년 전에 나타나 7만 년 전까지 사용된 손도끼와 약 20만 년 전부터 나타났다고 하는 찌르개가 교차하는 단계에 있었다. 그러나 10만 년 전쯤부터 발달했던 석기 문화가 나타났다고 하는 보고가 있다(Stringer 외. 2005). 이들의 석기는 짐승의 사체를 찾아 다니는 상태부터 살아 있는 동물을 노리는 수렵으로 진화해 갔던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식물성 먹을거리의 처리에 대해서는 별로 효과적인 도구는 눈에 띄지 않는다. 육식 지향의 소집단이 시간을 걸려서 차츰 생활역을 넓혀 갔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2) 북쪽의 경로

아프리카를 나온 집단은 확산을 계속한다. 그중 가장 명확한 것은 북쪽으로 향한 길이다. 그 발자국은 먼저 서아시아에서 북으로 향하고, 스페인과 프랑스, 영국에 도달하여 유럽에서 하나의 문화를 완성시켰다. 그 속도는 조금 올라 1년에 50미터였다.


그들의 석기는 소형으로 날카롭고, 그것을 이용한 복합도구, 뼈와 뿔을 가공한 창날, 게다가 투창기와 자루 달린 도구 등 수렵에 특화된 효과가 높은 도구가 있다. 그밖에 장식용 구슬과 목걸이는 장신구로서, 그리고 비너스상, 의례용 봉, 알타미라와 라스코 동굴로 대표되는 벽면은 제사 때문이라 생각되며, 정신세계가 확장되어 갔던 모습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맘모스, 들소, 순록 등의 대형 짐승에 목표를 정한 수렵사회를 만들고, 그안에서 집단의 통합과 계급제의 맹아가 있었던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재봉 바늘이 있었던 점으로부터 의복을 만드는 등 한랭지에 적응했던 것 같다. 대형 짐승을 쫓아서 동으로 이동해 갔던 길은 북극의 빙상과 타이가 사이에 있는 초원(툰드라)의 회랑을 시베리아로 향하고, 또 해수면 강하에 의하여 육지화되었던 베링 해협을 건너서 북아메리카 중앙부에 이른다. 시베리아까지 1년에 540미터, 그곳에서 아메리카 중앙부까지 1년에 1710미터로 가속하였으니 놀랄 만한 속도이다.



(3)남쪽의 경로

또 하나, 서아시아에서 북인도를 지나서 동남아시아, 남중국에 확산한 집단이 있다. 7만 년 전에는 중국 남부에 나타났다. 1년 속도는 280미터이다.


이것은 북쪽 경로와는 달리, 초원의 환경에서 출발하여 광엽혼교림, 열대우림에까지 뻗어 있다. 다양한 자연환경안에서 먹을거리의 목표는 동물뿐이 아니라, 식물에도 향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음의 농업 단게에서 오늘날의 주요 작물의 대부분이 나타났던 경로라는 점에 주목할 만할 것이다. 그렇지만 도구류는 간소하여 북인도까지는 손도끼계의 석기 복합, 거기부터는 찍개 복합으로 옮겨지는데, 식물에 특화된 도구는 발견되지 않는다.



(4)바다의 경로

동아시아, 동남아시아에서 5만 년 전에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이르렀던 집단의 길이 있다. 빙하기의 해수면 강하를 계산에 넣더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바다를 건너야 했던 길이다. 지금까지의 구석기시대 연구는 육지의 이동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는데, 이미 이 단게에서도 바다의 자원 입수와 수상 이동의 수단이 진행되어 있었던 것을 나타낸다. 그러나 길의 도달점인 오스트레일리아의 석기류는 찍개계이고, 어획구와 식물식에 적합한 도구는없는 듯하다.




불이라는 도구


확산의 대강은 이상과 같지만, 집단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나아갔을 리 없다. 전진의 준비와 자손을 만들고 늘리기 위한 기지가 필요하다. 그들은 기지를 반영구적인 거점으로 삼았다. 그 결과, 고유의 영역이 생기고 중·소 짐승과 야생 식물 등의 먹을거리 자원을 개발해 갔을 터이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한 도구는 매우 간소한 것으로, 그작업을 충분히 수행한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럼 그 개발을 가능하게 한 방법이란 무엇이었는가.


(1) 환경의 통제

자연은 인간을 안정되게 살게 하는 어슬픈 것이 아니다. 특히 기본이 되는 식생은 극상을 만들어 식물 중심의 세계를 형성하기 때문에, 인간을 접근시키지 않을 정도의 힘을 지닌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환경을 개변하여 인구를 늘려 갔다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고고학 유물을 보는 한, 각 지역의 맹렬한 식물의 힘을 억누르는 효과적인 도구는 눈에 띄지 않는다. 진정 도구는 없었던 것일까?


그 도구는 불이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불의 이용은 80만 년 전의 호모 에렉투스의 단계부터 시작된 것이 확인되고 있다. 화로가 주거의 중심에 놓여 있기 때문에 조리와 조명, 난방에 쓰였을 것이다. 그 전통은 호모 사피엔스의 시대에도 계속되어, 불을 지피는 도구나 램프가 나타나, 불의 취급이 교묘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불이 가장 큰 힘을 발휘한 것은 환경(식생)을 바꾸는 일이었다. 그 실증이 고고학적으로 어려운 것은 발굴이 거주 구역에 한정되어 있으며, 그밖에 불태운 흔적이 발견되더라도 인위적인지 자연적인지 판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이 환경을 바꾸는 도구였단 것을 증명하는 수단은 과연 있을 것인가?


(2) 자연이 하는 일에서 배우다

인간은 불의 효용을 자연이 하는 일에서 배웠음이 틀림없다. 자연의 산불은 화산 활동과 낙뢰 등에 의하여 발생하고, 때에 따라서는 그 지역의 식생이 파괴되어 경관이 확 바뀐다. 불태운 흔적은 확 트인 초원의 환경이 되며(물론 부분적으로는 숲도 남음), 식생은 다시 활성화된다. 그에 따라 동물의 상태도 바뀐다. 인간에게는 바람직한 환경이 출현하는 것이다.


미국에는 아이다호, 몬타나, 와이오밍 주에 걸쳐서 옐로스톤 국립공원이 있다. 록키 산맥의 북부 동쪽의 매우 건조한 고원(프레리)이다. 일찍부터 공원으로 에워싸서 '자연 그대로'라는 이상에 따라 운영되고 있기 때문에, 손대지 않은 자연에 가까운 온대성 낙엽혼교림과 초원이 남아 그곳에서 들소, 사슴, 늑대, 곰 등 야생 동물이 여럿 서식하고 있다. 프레리는 산불이 가장 발생하기 쉬운 환경의 하나로, 통계에 의하면 10-100년에 한 번이란 빈도로 대규모 산불이 일어난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1988년에 큰 산불이 있었다. 이 해는 100-200년에 한 번이란 이상기후로 바싹 마른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화재는 7월에 낙뢰에 의하여 발생, 그뒤 9월까지 3개월에 걸쳐서 계속 불타고, 45만 헥타르의 초원, 산림 및 주변 시설이 불탔다. 피해의 크기에 소화 활동을 진행해야 한다는 비난도 나왔지만, 공원 당국은 "산불은자연의 주기 가운데 일부, 자연적 화재는 자연 진화를 기다린다"는 태도를 일관했다. 화학약제나 대량의 물 투입은 그뒤의 자연에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과는 어떠했는지, 아직 산불의 흔적은 보이지만 식생은 순조롭게 회복하여 야생 동물에 대한 영향도 거의 없고, 도리어 활발해졌다.


이와 같은 산불의 효과를 인간은 경험적으로 배웠을 것이다. 그것은 숲과 초원의 화재는 긴 주기에서 보면 생태를 활성화시킨다는 지혜이며, 그 때문에 불을 인위적으로 사용하는 기술을 배운 것이 아니었을까?





숲에 놓은 불


(1) 애버리지니의 불지르기

수렵채집민이 불을 환경의 통제 '도구'로 사용하는 체계가 현존하고 있는 것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이다. 이 대륙에는 5만 년 전에 사람이 건너와, 그 이후 수렵채집 생활을 계속해 왔다. 그런데 18세기 말에 영국의 식민지가되면서부터 대부분의 사회가 사라져 갔다. 그러나 현재도 북해안의 아넘랜드와 중앙 사막의 엣 보호령에서는 30명 전후의 친족을 바탕으로 한 부족 집단이 이합집산하는 유동성이 높은 사회를 만들고, 반정주적인 캠프를 중심으로 식량을 구하며 영역 안의 지점을 선택해 이동하는 생활을 보내고 있다. 몰려드는 현대화의 파도에 저항하면서 전통을 지키고 있다.


그들이 불을 사용하여 환경을 통제하고 있다는 가설을 낸 것은 R. 존스(1941-2001)였다. 그는 1969년에 태즈매니아의 도시 호바트에서 일어난 큰불에서 발상을 얻어, 18-19세기 식민 시대에 적었던 일기, 회화 등의 기록을 샅샅이 조사했다. 그 결과,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는 애버리지니가 놓은 불에 의하여 확 트인 숲이 펼쳐져 있었단 것이 시사되었다. 그리고 현재의 태즈매니아의 동반부가 극상의 유칼립투스 숲이 되어 대부분 이용할 수 없게 된 것은 백인이 애버리지니를 멸망시킨 결과, 숲에 불을 지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의 도시가 산불에 의하여 큰 피해를 받는 것은 정부의 환경 관리 사고방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며, 이땅의 환경문제는 애버리지니에게 배워야 한다는 현대 사회를 향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Jones 1969).


존스의 가설은 격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최대의 반론은 정통 식물학자에게서 나왔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식생은몇 백만 년에 걸친 건조한 환경에 적응한 것으로, 불과 몇 만 년 동안 인간의 간섭에 의하여 그렇게 큰 변화가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근저에는 숲에 불을 놓는다는, 역전의 발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북반구 유럽인의 산림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고 본다. 그런데 젊은 세대의 민족학·민족식물학·생태학 분야의 연구자들이 실제로 현장에 나가 애버리지니에게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사를 시작했다. 다행히 중앙 사막과 북해안부 아넘랜드의 애버리지니령(옛 보호구)에서는 불지르기를 실천하고 있는 사람들이 건재했다. 그 결과, 그때까지 야만의 증거라고 했던 불지르기는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기능하고 있단 것이 밝혀졌던 것이다.


(2) 불지르기의 조사

내가 조사했던 매닝그리다 지구는 아넘랜드의 중앙부에 있다. 산불의 조사는 존스와 그 동료들에 의하여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1976년에 실시된 보고가 기초적인 게량 자료가 되었다(Haynes 1985). 


이 조사는 구나이족의 영역 안에서 9059헥타르의 직사각형 구획을 설정하고, 불이 발생한 장소의 연소 범위와 불탄 흔적의 상태를 애버리지니와 함께 걸어서 관찰하고, 의견을 들으면서 실시된 것이다. 구획 안의 5562헥타르가 소개림(wood land), 나머지 3497헥타르가 초원이었다. 이 해에 불에 붙은 것은 전역의 약 70%, 식생별로 보면 소개림 80%, 초원 60%였다.


불지르기가 체계화되어 있다는 것의 첫째 증거는 그 계절성이다.


이 땅의 기후는 열대 게절풍의 영향으로, 건기(3-11월)와 우기(12-3월)에 걸쳐 있다. 구나이족은 1년을 6개의 시기로 나누고 있는데, 그 단락이 되는 것은 바람 ,태풍, 비, 새가 날아옴, 식물의 개화 등 자연의 변화이다(그림1-1). 다만, 이 달력은 디지털의 시간 구분이 아니고 해마다, 그리고 다른 지역과도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그림1-1 구나이족의 달력. 오스트레일리아 북해안은 열대 계절풍 기후로서, 우기와 건기로 나뉜다. 또한 애버리지니는 서늘한 바람, 꽃의 향기 등 체감적으로 나누고 있다. 사낭꾼들의 광역에 걸친 활발한 활동은 건기에 전개된다.




계절에 흐름에 따라서 불지르기의 경과를 보면,

①시작은 3월-5월 초순(카니리간 시기). 우기가 끝나고, 가끔 세찬 태풍이 오는 무렵이다. 먼저, 불을 지르는 건다습한 초원과 숲의 경계로, 우기 동안 왕성하게 번성한 풀이 마르기 시작한 장소부터, 조금씩 태워 간다. 작은 태운 흔적의 부분은 연결되고, 나중에 방화대의 역할을 수행한다. 불 넣기로 싹이 나기 시작한 초원은 캥거루를 시작으로 하는 동물들의 먹이장이 된다고 한다.  

②5월 초-6월 중순(예겔 시기)가 되면 기온이 내려가고, 약간 서늘해진다. 사람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유칼립투스 숲에 불을 지르기 시작한다. 시작은 가장자리를 소규모로 신중히 태우는데, 이것은 볕이 잘 들게 하고, 나무의 딸기류를 달게 만든다고 한다. 건기가 진행됨에 따라서 불지르기의 범위는 넓어지고, 숲이 환해지고, 숲의 지표면이 트여 수렵과 포획이나 채집 활동을 하기 쉬워진다.

③6월 말부터 8월(우레겐 시기)는 기온과 습도가 떨어져 살아가기 쉬워진다. 본격적인 산불의 계절로, 도처에서 연기가 오르는 것을 볼 수 있다. 불은 하루에 꺼지는 것이 이상적이라 하는데, 며칠 동안, 때로는 몇 주 동안에 걸쳐서 계속 타는 일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실패 사례라고 한다.

④8월 중순(와릴 시기)는 기온이 상승하여 사람들의 활동이 둔하고, 유칼립투스 숲에는 불을 지르지 않게 되며, 초원의 불지르기도 점차 하지 않는다. 

⑤11월 말(도르도르 시기)가 되면, 습도가 올라 때때로 세찬 비가 내리는 우기가 도래하여 불지르기도 끝난다. 

⑥우기(가샤단 시기)에는 불은 놓지 않는다. 


이상과 같이 구나이족은 습도, 온도, 동물의 움직임을 보면서 우기에 번성하여 건기에 말라 죽는 풀과 나무를 달력에 따라서 불을 놓아 최적의 환경을 만들어내고 있는 걸 알 수 있다.


불지르기가 체계화된 것이라고 하는 두번째 증거는 장소에 대한 엄격한 규제가 있다는 점이다. 


불은 소개림에 빈번하게 놓는 한편, 불에 약한 식물을 지키기 위하여 맹그로브 숲과 열대우림에는 절대로 불을 지르지 않는다.


또한 소개림 안에 성지로서 불을 붙이지 않는 장소가 있다. 나무 아래 풀이 무성한데, 여기에 일단 불이 미치면 큰불이 된다. 큰불에 의하여 숲이 무너지면 초지가 되는데, 이것은 식생을 재구성하여 새로운 자원의 장을 만드는 효과를 노리고 있는 듯하다.


불지르기 장소에 대한 제한은 신화와 금기의 형식으로 남아 있다. 열대우림 안에서 들었던 것은 불을 사용하면 '악령이 눈에 날아들어와 눈을 찌부러뜨린다"는 것이었다. 악어의 등이 까칠까칠해진 것은 불을 소홀히 다루었기 때문이라는 신화도 있다. 그들은 노래가 되어서 의례의 춤을 출 때 반복하여 부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박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 증거는 불꽃을 분류하여 때와 장소에 따라 처리한다는 점이다. 건기의 최성기의 화재를 관찰하고 있으면, 태우는 방향과 태운 흔적에 명확한 차이가 있다.




소개림疎開林


아래는 내가 1999년에 매닝그리다에서 본 우레겐 시기의 유칼립투스 숲의 산불 관찰이다.


①쿨 파이어(1) (그림1-2)


그림1-2 쿨 파이어 (1) 거듭되는 불지르기에 의해 불꽃이 낮게 통제된다.

불꽃 이 낮게 통제된 화재를 쿨 파이어라고 부른다.




화재는 매닝그리다의 거리에 가까운 차도를 따라 있는 유칼립투스 숲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그해 이미 1번 불을 넣은 장소에서, 숲의 지표면에는 유칼립투스의 잎이 얇게 흩어져 여기저기에 지난번의 화재 뒤, 이미 싹을 틔운 유칼립투스, 아카시아, 목마황 등의 어린 나무가 있으며 가운데 층에는 타고 남은 야자나무가 있었다.


불은 선상으로 뻗어서 천천히 나아갔다. 불꽃의 높이는 20-30센티미터, 불의 세력은 관찰하려고 여기저기 걸어다녀도 위험하지 않은 정도로 약하다. 서 있는 나무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고, 뿌리 주변이 조금 그슬리는 정도이지만, 불꽃이 높이 올랐기 때문에 줄기 위의 가지 부분이 일부 변색되어 있는 것도 있었다. 불꽃이 어린 나무가 우거진 곳에 이르면, 잣 하는 소리를 내며 타오른다. 쓰러진 나무나 흰개미에게 먹힌 그루터기는 숯이 되어 불을 유지하고, 그을려서 연기를 내고 있다.


태운 흔적은 검은 융단 같고, 밟으면 사박사박 소리가 난다. 그 아래는 부식토가 전혀 없이 새하얀 생땅이 되어 있다. 풍향의 변화인지, 태우지 않고 남았던 낙엽이나 우거진 지역도 있었다. 주변에 유칼립투스의 휘발성 좋은 냄새가 나고, 언제나 항상 따라다니는 모기가 오지 않는다. 불꽃은 숲의 깊숙한 곳을 향하고 있었는데, 이튿날 보면 불은 꺼져 있으며, 불탄 면적은 매우 작았다. 고요한 불로, 애버리지니가 불은 청소에 쓴다고 하는 의미를 알 수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②쿨 파이어(2) (그림1-3)


그림1-3 쿨 파이어(2) 숲속을 걸을 정도로 불의 기세가 약하다.




다음으로 불꽃이 높게 올라 나무줄기에 이르는 것을 핫 파이어라고 부른다.


매닝그리다에서 훨씬 떨어진 (약 30킬로미터) 지점, 역시 도로에 면한 장소에서 보았다. 적어도 올해는 아직 불이 붙지 않은 숲으로, 풀과 떨기나무가 많은 장소였다. 불지르기 직후답게 불은 따뜻한 북동풍을 타고 번지고 있었다. 3시간 뒤에 측정해 보면 250미터 불길이 번져 타고 있으며, 아직 숲의 깊숙한 곳으로 기세 좋게 계속 번지고 있었다.


다음날, 24시간 뒤에 불은 숲의 깊숙한 곳으로 약 1킬로미터 뻗어, 깊은 계곡의 초지에 미치고 있었다. 상류 쪽에 야자나무의 군락이 있고, 그곳으로 불꽃이 이동하여 드득드득 소리를 내며 타올라, 검은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아직 불은 계속 번지고 있었다.


3일째의 같은 시각, 계곡에 들어간 불은 습한 나무 아래쪽 풀이 있는 곳으로 번져 타는 것이 멈추고 있었다. 숲속에 들어가면 불탄 흔적이 계속해서 있었는데, 숲의 지표면 모습에서 보아, 조금 전에 있었던 다른 화재의 흔적과 엇갈려서 멈춘 듯하다. 쿨 파이어와 비교해 불꽃이 높게 나무줄기 위의 가지에까지 이른 것이 많았다.


③핫 파이어(2) (그림1-4)


그림1-4 핫 파이어. 불꽃이 높이 나무줄기에 이르고 있다.




매닝그리다에서 애버리지니령의 서쪽 경계까지 200킬로미터, 그곳에서 카카두 국립공원을 지나 다윈 거리까지 또 300킬로미터의 거리가 있다. 돌아오는 길에 카카두 국립공원의 숲에 들어가자 나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다.먼저, 숲 지표면의 잎과 가지의 퇴적이 두텁고, 가운데 층 식물이 많으며, 겉보기에 추접스럽다. 그렇게 느낀 것은 나의 머리가 몽땅 애버리지니가 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앞길에 거대한 연기가 오르고 있었다. 현장에 가자 숲이 완전히 소멸해 있었다. 공원 안은 불지르기가 금지되어 있기에, 마른 가지와 낙엽이 모여, 불꽃이 나무줄기의 가지까지 이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정도의 화재는 애버리지니령에서는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통제를 잃은 핫 파이어라고 부를 만할까?





초원


저지대의 초원은 조금 모습이 다르다.


①파이어 드라이브

아넘랜드의 저지대는 우기에는 침수된다. 건기에 물이 물러나면 초원이 되고, 풀의 키가 큰 곳에서는 불의 기세가 제법 맹렬하다. 우기의 끝부터 불을 넣는 것은 연못-초원-숲의 이행대 초지 부분인데, 조금씩 태운 흔적이 패치 모양으로 이어지고, 방화대의 역할을 완수하는 것은 이미 기술한 대로이다.


초원의 대규모 불지르기는 파이어 드라이브를 위하여 행한다. 몇몇 마을의 사낭꾼이 협력하여 실행하는 사냥에서, 대량으로 포획한 획득물을 즐기는 포틀래치 같은 잔치가 있다. 획득물은 까치기러기이다. 내가 본 것은 젊은이 2명을 한 단위로 하는 조를 꾸려서, 두 조로 나뉘어서 역방향으로 돌면서 말발굽 모양으로 불을 붙여 간다. 놀라서 날아오른 까치기러기를 매복해 기다리고 있는 무리의 쪽으로 몰아넣는다. 불은 풍향과 미미한 지형을 잘 보고다루기 때문에, 예정한 범위 이상으로 불타는 일은 없다. 그것이 우리들 솜씨라고 그들은 말한다(그림1-5).


그림1-5 파이어 드라이브. 연못 주변의 풀에 불을 붙이고, 까치기러기를 쫓는다.




②환경을 정비한다

키가 낮은 말라죽은 풀의 땅을 불태운 흔적이 있었다. 불은 한순간에 번져서 꺼진 듯하고, 새카만 지표면이 어디까지나 펼쳐져 있었다. 사륜구동에 탄 젊은이들이 환성을 지르면서 달려갔다. 우기에는 연못이 되는 곳으로, 건기에는 지름길이 되지만 함정처럼 습지가 남아 있는 것이 있기에 안전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태운 듯했다. 조금 높은 장소에 판다누스의 그루가 있고, 불을 받았음에도 피해는 없는 듯하다. 판다누스는 열매를 먹을 수 있고, 잎은 바구니의 소재가 되는 유용식물이다. 이것도 일종의 환경정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③중앙사막(그림1-6)


그림1-6 중앙 사막. 불지르기 실험이 행해진 흔적




초원과 똑같은 불의 이용은 중앙 사막에서도 시험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사막의 풀 본체는 지하 조직에 있고, 표면에 드러난 것은 매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지표면을 제거하지 않는 한 가지와 잎은 언제까지나 남아 있으며, 집단이 쇠약해져 버린다. 그리고 불을 태운 뒤, 비가 풍족하면 가지와 잎은 급속히 무성해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사막의 식물은 반복하여 불을 태우는 상황에 적응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사막의 강, 수맥, 호수 등 물이 있는 쪽의 미묘한 변화에 따라, 식물은 패치 모양이 되어 번성한다. 애버리지니는 그것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불을 놓고, 식생의 다양성을 살리는 것으로 식량, 생활재를 풍부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아카시아속의 멀가, 노이티직ノイチヂク, 콘던コンドン 등 불에 약하지만 식품으로 중요한 나무는 역시 신화와 의례에 관련시켜 주변에서 불을 사용하는 걸 엄하게 제한하고 있다. 이처럼 중앙 사막의 식물성 식량의 대부분은 불에 적응한 풀에서 유래한 것이며, 그들은 정기적으로 불을 태워서 생산이 확보되고 있는것이다. 


불에 관계되는 지식과 수법은 아넘랜드와 공통되며, 고고학 자료에서 보면 적어도 2만 년 전부터는 전대륙에 퍼져 있으며, 현재의 사막 같은 환경도 사람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Latz 1995).


1982년 중앙 사막에서 첫 접촉(문명에 처음으로 접함) 집단이 있다는 뉴스가 돌아다녀, 인류학자가 활기를 띤 일이 있다. 결국은 일종의 일행과 떨어진 집단임이 밝혀졌는데, 그들을 발견하는 계기가 된 것은 작은 불태운 흔적이 군데군데 퍼져 있는 항공사진이었다는 것을 상기한다.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정착한 불지르기는 석기 등의 도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대륙에서는 건조가 심한 기후와 그에 적응한 식물이 있었던 점과 문화가 수렵채집민의 단계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다행히도 불지르기의 체계가 남아 있던 것이다. 만약 고고학에서 말하는 도구를 유형문화재라고 한다면, 불을 도구로 사용하는 이 체게는 무형문화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화전 농경

 


채집에서 농경으로


인류의 확산이 일단 끝난 것은 약 1만2000년 전이었다. 그 무렵 최종 빙하기가 끝나고, 기후온난화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큰 환경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해수면이 올라 유라시아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 동남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을 비롯하여, 일본 열도 등도 지리적으로 고립되었다. 한편, 식물이 활성화하여 자연이 풍요로워졌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대형 짐승이 모습을 감춘 뒤, 폭발적인 지역 문화의 다양화가 일어난다. 그 한 예가 남미 대륙의 남단에까지 인간이 도달하는 데에 2000년도 걸리지 않았다는 점, 그뒤 이 땅에서는 탄탄한 농경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있다. 이것을 대분화(Great diversity)의 시대라고 부를 만하다고 파건 씨는 기술하고 있다(Fagun 2003). 그러나 아메리카에 머물지 않는 세계적인(ustatic) 사건이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시간적으로는 지역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6000-4000년 전이 정점이 되는 것 같다.


이미 기술했듯이, 확산 이후 인간은 각지에서 독자의 영역을 만들어 살아가게 되고, 그래서 불을 이로운 도구로 사용해 각각의 생활양식을 완성시키며, 그 과정 속에서 유용한 동식물의 관리와 육성 체계가 만들어져 갔다.


야마모토 노리오山本紀夫 씨는 '가축화와 작물화'를 주제로 세계 각지의 사례를 문제삼아 동식물의 사육과 재배의 기원을밝히고자 하는 흥미로운 공동연구를 실시하고 있다(山本 2009).


그 안에서 사카모토 사다오坂本寧男 씨는 중요하다고 하는 재배식물을 문제삼아, 그 기원지로 일곱 지역(①지중해와 서남아시아, ②아프리카, ③중앙아시아와 인도, ④동아시아, ⑤동남아시아, ⑥메소아메리카, ⑦남아메리카라고 함)를 들고 있다(그림1-7).


그림1-7 재배식물의 7대 기원중심지역(坂本 2000)




재배식물은 곡물을 비롯하여 콩, 덩이뿌리, 채소, 뿌리채소, 유지, 과일, 너츠, 향신료, 섬유, 약용, 음료, 기타로목록에 올려진 것만으로도 200종 가까운 방대한 수이다. 그밖에 재배화가 시도되었지만 결과적으로 농경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도 많다. 인간이 식량 획득을 위하여 어느 정도의 노력을 거듭해 왔는지에 놀라울 뿐이다. 


사카모토 씨에 의하면, 수렵채집 단계에서 산림파괴, trail(밟는 길)의 확대, 배설물과 쓰레기의 흩어짐에 의하여 인간, 동식물의 사이가 가까워지고, 공생관계가 생긴다. 다음 '반재배'의 단계가 되면 환경 교란이 증대되고, 채집법과 이용법이 확립되며, 최후로 경작지의 조성과 파종부터 수확까지의 작업 주기가 확립되었을 때 '농경'이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坂本 2009).


'반재배'부터 '농경'까지의 과정과 시기는 단순하지 않지만, 어느 의미에서는 인간이 식물을 유용하다고 주목한 순간, 즉 수렵채집의 단계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간주해도 좋지 않을까? 이미 보았듯이,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는 불지르기에 의하여 식생을 구분하고, 유용식물의 생산을 올리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소철, 벼, 베리, 사이프레스 파인 등은 재배화 직전의 상태에까지 와 있었다. 그래서 불을 사용한다는 점에 주목하여, 화전 농경의 상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일본의 화전


화전은 현재도 열대우림과 사바나를 중심으로 열대 아프리카의 대부분, 인도차이나 반도, 보르네오, 뉴기니의 산악지대, 중남미의 열대에서 행해지고 있는데, 예전에는 한대와 온대에서도 성행했던 것 같다. 화전에서 재배되는작물의 대부분은 교란에 의하여 생긴 잡초성 식물이 바탕인 점과 현재의 화전 지역 대부분이 (사카모토 씨가 말하는) 7대 기원지와 겹치고 있는 점으로부터 불을 사용하는 것에 의하여 선출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화전은 1935년의 조사에 의하면, 면적 768만 평방킬로미터, 15.2만 호가 경영하고 있었다. 1950년의 세계농림업 센서스에서는 대폭 감소하지만, 그럼에도 95만 평방킬로미터, 11만 호라는 큰 수였다. 그러나 1960년대가 되면 급속히 쇠퇴하여 간다. 


화전은 주로 산악지대에서 실시되고, 평야부의 논벼농사와는 대칭적인 경사지 농경이고, 주작물은 피, 조, 메밀, 콩류(콩과 팥), 채소(무) 등이었다. 그 기원에 대해서는 중세의 급격한 인구 증가에 대응하기 위하여 평지 농업이 산간부로 진출했다고 간주되는 것이 있는 한편, 더욱 빠른 조몬시대로까지 거술러 올라간다는 의견도 있다.


후지모리 에이이치藤森栄一(1911-1973)는 약 4500년 전에 중부 지방에서 번영했던 조몬 중기 사회가 화전 농경에 의하여 지탱되었다는 가설을 제기했다. 그렇다면, 화전은 일본에서 발생했다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藤森 1970). 이에 대하여, 사사키 타카아키 씨는 3000년 전의 조몬 후·만기에 서일본에서 화전이 대륙에서 도입되었다고 생각한다(佐々木 1972).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화전은 논벼농사와 거의 동시기에 대륙에서 들어온 것이 된다. 


조몬 시대에 농경이 있었다고 한다면, 먼저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작물이 있었는지이다. 최근에는 밤, 호리병박,콩, 들깨, 삼, 명아주, 우엉, 쌀, 메밀, 피 등의 존재가 확실해지고 있다(佐藤·石川 2004). 조몬의 재배식물 목록은 뜻밖에 풍부하다. 그중에서도 피는 '반재배'와 '재배' 사이를 오가는 미묘한 상태로, 조몬 전기부터 홋카이도·도호쿠 지방에서 이영되었단 것이 밝혀져 왔다(山田 2007). 피가 일본의 화전 작물의 주역이었단 것을 생각하면, 조몬과 화전 농경은 간단히 이어질 테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는 것은 화전이 밭과 논 같은 항구적인 시설을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동일본에는 따비로 사용된 듯한 뗀석기의 돌도끼가 여럿 나오는 점이랑 불의 체계적인 이용을 적극적으로 채용한다면 가까운 장래에 둘의 관계는 반드시 증명된다고 예언해 두고 싶다.


그밖에, 주목하고 싶은 것은 화전에 수렵채집 단계의 요소가 짙게 남아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 사례로서 가고시마현의 '대나무 화전'에서 행하던 아토치跡地 이용을 들겠다(川野 2003).  이 땅에서는 작물을 재배하는 걸 그만둔 뒤에도 아토치를 몇 번이고 찾아가 죽순, 차, 땅두릅, 두릅, 고비, 고사리, 털머위, 호장, 누리장나무 등의 산나물을 채집하고, 때로는 그들을 옮겨심는 일도 있다고 한다. 화전을 그만둔 이후의 식생 천이를 활용하여 야생 먹을거리를 중심으로 반관리의 상태로 두고 있는데, 이것은 애버리지니가 불지르기를 한 흔적을 이용하는 방법과매우 가까운 것이다.


또 하나는 짐승류와의 관계이다. 자연림이 많은 산악지대에서 들었던 화전의 아토치는 멧돼지, 사슴, 원숭이가 서식하는 장소가 된다. 특히 회복기의 덤불은 짐승류에게 절호의 먹이장이 되기에(동물에게도 극상의 숲은 살기 어려움), 짐승과 접촉하는 기회가 늘어나는 것이다. 작물에 중점을 둔다면 해로운 짐승일 수밖에 없는 동물이라도, 육식원이라 생각하면 그 가치는 높다. 이와 같은 예는 일본 이외에서도 많은데 예를 들면, 보르네오섬에서는 밭을 돼지와 공유하는 상태의 마을도 있을 정도이다. 이와 같은 수렵채집과 농경의 흔들림이라고도 하는 상태는 각지의 민족지에서도 보이는 대로이다. 즉 그것은 세계 각지에서 수렵채집민의 불지르기 전통이 화전농경민에게 견실히 인계되었단 것을 보여준다.





마치며 


우리는 요즘 불을 다룰 기회가 뚜렷하게 적어졌다. 현대 사회, 특히 인구가 조밀한 도시에서 불은 위험한 것으로,화재를 일으킨다면 인명과 재산에 큰 피해를 입힌다. 최근 텔레비전에서 캘리포니아, 오스트레일리아, 유럽 등 외국의 산불이 자주 보도되었다. 높이 오르는 연기, 불타오르는 불꽃, 맞서는 소방수, 하늘에 날아다니는 헬리콥터, 불타버린 가옥 등의 영상이 방송된다. 그리고 산림 화재는 인명과 건물만이 아니라 자연까지 파괴하는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란 자막이 그에 더해진다. 


산림 화재라는 단어에 불안을 느끼는 것은 우리 인본인이 숲의 나라에 살아 그 푸름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일까? 아니, 그것은 다이옥신 오염이라든지 염소 가스의 증가에 의한 지구온난화라는 현대적인 문제에까지 관련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현대에 시작된 현상이다. 어느 국제학회에서 애버리지니의 불지르기와 일본의 화전에 대하여 발표했을 때, 외국인 연구자로부터 환경에 나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받았다. 그에 대하여 "애버리지니는 5만 년에 걸쳐서 오스트레일리아 전토에서 숲을 계속 태우고 있었고, 일본에서 화전이 실시되었던 것은 1960년대까지인데, 780만 평방킬로미터의 면적이 매년 성대히 타고 있었지만 대기 오염이나 온난화의 문제는 전혀 없었습니다"라고 답한 기억이 있다. 현대의 문제는 오로지 화석연료의 과잉 소비와 그것을 사용한 기계로 식물을 벗겨내고, 지형을 개변하며, 주택과 농지를 만드는 행위에 기인한다. 확실히 생활은 편리하고 쾌적해졌지만, 더욱 환경에 꼭 맞춘 생활이 있지는 않은지, 바꾸어 말하면 선조가 부지런히 쌓아 왔던 자연과 부합하는 기술과 지혜를 완전히 버려도 좋은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본론에서는 20만 년의 시간을 소비하여 우리의 선조가 지구에서 확산되어 정주했던 과정을 생각했다. 그를 위해서는 생존에 적합한 환경을 만드는 일, 또 인구를 늘리고 지탱하기 위하여 식량을 확보하는 일이 필요하며, 그것에는 불이란 도구가 오랜 시간 동안 수렵채집 단계와 농경 단계의 양방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기술했다. 


우리는 1980년대에 오스트레일리아 북해안에서 애버리지니 사회를 조사하러 갔는데, 그곳에서 마을사람들과 살고 있는 동안에 불은 생활에 빠질 수 없는 것이며, 바르게 사용하면 결코 두려워할 만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박혀버린 것 같다. 불은 그들의 생활에 밀착되어 있다. 밤의 마을에서는 여기저기에 횃불이 피우고 있다. 어둠 속에서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따뜻한 불꽃의 색과 생나무를 태우는 은은한 향기가 감돌아, 참으로 그리운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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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5




서장

농경과 환경의 관계 1만년의 역사

사토 요이치로佐藤洋一郞






농경의 현대적 문제


현재 세계의 인구는 대부분 옥수수, 벼, 밀 세 가지 작물로 지탱되고 있다. 이 가운데 옥수수의 상당 부분은 가축의 사료로 소비되고 있기에, 인간의 입에 들어가는 식량이란 관점에서 말하면 쌀이 첫번째, 밀이 두번째이다. 어느쪽이라 하더라도 세계 인구의 식량은 겨우 몇 종의 식물로 지탱되고 있다. 대략 1만년 전, 인류가 처음으로 농업을 개시했을 때에는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종이 전분의 공급원으로 쓰이고 있었다고 생각되기에, 종 수의 감퇴에는 두드러진 것이 있다.


각각의 종에 있는 품종의 수도 또한 계속하여 크게 감소해 왔다. 특히 1960년대의 '녹색혁명' 이후 품종 수의 감소는 매우 두드러진다. 그 이유는 '녹색혁명' 이후 특히 곡물 재배에서 비료(특히 화학비료)를 다용하여서 생산성을 높이는 품종의 개발이 맹렬히 이루어졌다. 다비 조건에서 벼와 밀은 키가 자라서 수확 전에 쓰러져 버리는 일이 많다(이를 도복이라 함). 도복이 일어나면 생산성이 떨어지거나 품질이 떨어지거나 하기에, 키를 줄이는 품종 개량이 행해졌던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곡물에서 키가 작은 재래품종이 선택되어 그것을 교배에 이용하여 도복이 잘 되지 않는 품종 -이들은 반왜성 품종이라 부름- 이 등장했다.


이때 쓰였던 반왜성 품종은 밀에서는 일반산 품종인 '다르마達磨'였다. 벼에서는 타이완 품종 '저각오첨低脚烏尖'이었다. 일본에선, 예를 들면 교토부 무코시向日市에서 발견된 품종 '아사히旭'와 큐슈의 재래품종 '십석十石'이 반복하여 교배에 이용되었다. 게다가 '아사히' '십석' '저각오첨'의 반왜성은 어느 것이나 똑같은 유전자에 의한 것이다. 이처럼 어느 특정 품종이나 그 품종의 자손이 반복하여 교배친으로 사용되어서, 그 작물 전체의 유전적 다양성은 두드러지게 저하되었다. 게다가 이와 같은 반왜성 품종은 국제연구기관에서 육성되어, 유전적 다양성의저하는 세게적으로 퍼졌다. 어쩌면 이만큼 유전적 다양성이 낮은 농업을, 인류는 이때까지 경험한 적이 없다.


유전적 다양성의 상실과 함께 문제가 된 것이 농약과 화학비료 등의 화학물질을 다용하는 것이다. 앞에서 적었듯이, 반왜성 품종이 찬양되었던 것은 화학비료의 다용으로 인한 도복의 방지가 긴급한 과제였기 때문이다. 화학비료의 다용에 의해, 식물의 신체는 부드러워졌다. 또한 풍부한 비료분은 잡초의 생육도 촉진시켰다. 얄궂은 일이지만, 화학비료는 잡초의 해를 크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제초제 도입의 견인역 가운데 하나가 되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또한 나중에 상세히 쓸 텐데, 작물과 그 품종의 수가 감소하여 특정 병이나 해충이 유행하게 되었다. 그에 대한 대책으로 여러 가지 살균제와 살충제가 개발되었는데, 그 다용에 의해 해충이 아닌 곤충과 거미류, 또는 미생물이 배제되었다. 이것으로 논밭 안의 다양성은 제거되었다. 더욱이 이들 화학물질은 토양과 수질을 오염시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것이 농업의 지속성을, 더 나아가서는 생태계의 지속성을 위협하게되었단 것은 널리 인정되고 있다. 





유전적 다양성의 감소가 가져온 것


지구 환경문제의 큰 기둥 가운데 하나로 생물다양성의 저하를 들 수 있다. 지금까지는 특히 자연의 생태계에서 인간이 받고 있는 은혜 -이른바 생태계 서비스- 의 저하만이 부각되어 왔지만, 똑같이 심각한 영향을 준다고 하는 것이 종 안의 다양성인 유전적 다양성의 상실이다. 유전적 다양성이 저하되어서 돌발적인 추위와 따뜻함 등의기후변화에 작물이나 기술이 적응할 수 없고, 결국 생산이 감소하는 이른바 '흉작'이나, 그것이 심하여 기근이 발생하는 등의 사례가 상세하게 연구되어 왔다.


그중에서도 잘 알려진 것이 19세기 중반의 아일랜드에서 일어난 대기근이다. 이것은 '역병'이라 부르는 감자의 역병에 의한 생산의 대타격에 원인이 있었기에 '감자 기근' 등이라 부른다(Salaman 1985, 山本 2008). 감자 기근에는 그 200년 정도 전에 아일랜드에 전해진 감자 재배가 다른 작물을 쇠퇴시켰기 때문에, 감자 일색의 농업 생산이 되었던 것이 원인이라 이야기된다. 더하여 그 감자가 가진 유전적 다양성도 필시 매우 적었다고 생각된다. 만약 감자의 품종이 다양하여 역병에 대한 저항성에 차이가 있다면, 이 정도의 대타격은 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농업 생산은 이 1만년 사이에 여러 번 붕괴를 되풀이해 왔다. 다행스럽게 모든 인류 집단이 모두 다 붕괴를 맞이하지는 않았지만, 집단의 규모에 한하여 본다면 붕괴는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 붕괴의 빈도는 집단의 규모와 반비례하는 듯하다(佐藤 2008).


그러면 유전적 다양성이 높다면 흉작과 그에 이어지는 기근은 방지될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오랜 의론이 있었는데, 몇 년 전 많은 품종을 섞은 재배가 병과 해충의 해를 감소시킨다는 것을 실증한 신뢰성 높은 연구결과가 나왔다(Zhu 외. 2000). 이 결과의 보편성은 아직 잘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앞으로의 연구 동향에는 주목할 가치가 있다.


곡류에 한하지 않고 유전적 다양성의 상실은 온갖 작물에 미친다. 채소류에서는 F1 품종의 보급이 그 방아쇠를 당겼다. F1이란 잡종 제1대를 의미하는 유전학의 용어로서, 파종에 사용되는 종자는 세대마다 F1 세대의 종자가사용된다. 이들 종자는 전문 기업 등에 의하여 해마다 다량으로 제공되어야 하는데, 품종 육성에는 많은 비용과 노동력이 요구되기에 품종의 수는 필연적으로 적어진다. 따라서 유전적 다양성은 필연적으로 뚜렷하게 저하된다.가축도 또한 마찬가지 원리로 F1이 이용되는데, 유전적 다양성의 저하는 채소 이상으로 심각하다고 이야기된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유전적 다양성이 저하된다고 반드시 흉작이 되거나 기근이 일어나거나 할 리는 없다. 유전적다양성의 저하는 기후변화와 병원균의 출현 같은 자연현상과 인간 사회의 움직임 등과 함께 복잡한 상호작용 환경을 이루고, 그 상호작용 환경은 마치 하나의 체계와 같이 복잡한 움직임을 나타낸다. 기근이나 사회의 붕괴는 그와 같은 복잡한 움직임의 결과이며, 무언가 하나, 또는 소수의 인자만이 원인이 되어 초래되는 것이 아니다.





농경과 물


현대 농업의 높은 생산성을 지탱하고 있는 것으로 화학비료와 농약, 품종 외에 물을 들 수 있다. 물은 인류의 생존에 필수의 물질이며, 그 확보가 고대 문명의 도시에 있던 여러 가지 장치를 만들어 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물 수요라고 하면 바로 앞에서 언급한 생물로서의 수요를 생각하기 쉽지만, 산업으로서 고려하면 농업에서의 수요가 가장 많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정은 태고부터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를 펼쳐 읽으면, 인류는 '물 부족'과 '물 잉여'의 양방으로 고뇌해 왔다. 그들에 대응해 온 것이 관개의 기술이다(관개라고 하면 물 부족만을 생각하기 쉽지만, 결코 그렇지 않음). 관개의 가장 원시적인 형태는 이미 중국 장강 유역의 유적(6000년 전)에 등장하고, 그뒤에도 여러 가지로 진화를 성취해 왔다. 메소포타미아의 우르 제3왕조 시기에는 관개의 상황이 문서에 묘사되어 있다고 하는데(Maekawa 1984), 그 뒤에도 건조지대나 반건조지대에서는 여러 가지 유형의 관개시설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관개는 여러 가지 마이너스의 측면을 인류에게 가져왔다. 토양의 염성화가 그 하나이다. 이에 대해서는 최근 와타나베 츠기히로渡邉紹裕 씨와 공저로 출간한 <소금의 문명지>(일본방송출판협회 2009)에 상세히 적어 놓았으니 여기를 참조해 주시기 바란다.


이 책에도 적었지만, 건조지나 반건조지에서는 시기와 장소를 묻지 않고 염해가 발생했던 것 같다. 물론 염해가 어떻게 인식되었는지, 또 그 피해의 정도는 어떠했는지, 회피의 수단이 강구되었는지 등 여러 가지 차이점은 있지만, 그럼에도 토양 표면에 모인 염류가 농업 생산에 마이너스의 영향을 주었던 것에 변함은 없었다. 


관개는 또 주변 지역의 수자원에 무언가 부하를 지워 왔다. 예를 들면, 어느 하천의 상류에서 누군가가 계속하여 물을 끌어가면, 그 하류에서는 그 분량의 물이 흐르지 않게 되어 가뭄을 일으키거나, 또는 생태계에 변화가 발생하거나 한다. 물을 끌어가는 일이 대규모로 이루어지면 질수록 그 영향은 커진다. 나카오(2006)는 중국의 서북부, 지금의 내몽골부터 간쑤성에 걸친 흑하에서 과거 천 몇백 년 동안 상류에서 있었던 취수로 인한 하류의 영향을 조사했다. 그에 의하면 상류부에서의 농지 개발에 수반한 취수는 하류부의 유목민의 삶을 혼란시키고, 또 가장 하류에 있던 거연택居延澤이라 부르는 호수를 소실시켰다. 물 부족에 의한 초원의 축소, 풀의 양 감소는 유목민의 생활만 압박한 것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지나친 방목을 불러와 초원의 교배와 사막화를 촉진시켰을 수도 있다. 


건조지대에 있는 내륙하천에서 하천의 유량은 자주 상류부에서 많고 하류부에서는 적다. 하천은 그 가장 하류에서는 사막 안으로 흡수되듯이 사라져 간다. 일본 등 계절풍 지대의 하천에서 하천의 유량은 하류 근처가 많은 것이 보통이라 조금 뜻밖이란 생각도 들지만, 이와 같은 사정 때문에 상류에서의 취수는 하류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케시마池島 후쿠만지福万寺 유적의 사람과 자연


계절풍 지대에서도 물은 농업 생산의 열쇠를 쥐어 왔다. 게절풍 지대에서 물은 은혜를 가져오는 동시에 홍수를 불러왔다. 이 책에서는 이노우에 토모히로井上智博 씨가 홍수를 시작으로 하는 물과 인간의 관계에 대하여 오사카부의 이케시마 후쿠만지 유적을 사례로 적고 있다. 상세한 건 그에 양보하고, 여기에서는 유적이 빈번하게 경험해 왔던 홍수 가운데, 중·근세에 발생한 것에 대하여, 그 전후의 농업 생산과 사람들의 생활에 대하여 밝혀 온 일을 적어 두겠다.


그 유적은 오사카 평야의 동부, 이코마산生駒山부터 시기산信貴山의 산기슭에 있다. 여기는 18세기 초 무렵까지 야마토강大和川이 북서로 흐르고 있던 곳으로, 홍수가 빈발하여 사람들을 괴롭혔다. 홍수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는 다분히 이코마산의 산림 벌채와 그에 수반한 토사 붕괴에 있었을 것이다. 이코마산은 지금은 숲으로 덮인 푸른 산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민둥산이었던 시대가 오래되었고, 그 민둥산의 모습은 근세의 그림 등에도 묘사되어 있다(木村栄美, 편지). 다만 숲이 사라진 이유는 시대에 따라서 같지는 않고, 개발 외에 방목의 전개 등도 생각할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어쨌든 가파르고 험한 이코마산 자락의 서쪽 산기슭이 열려 버리면, 큰비가 내릴 때마다 산이 무너져 큰 홍수를 발생시켰을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홍수는 산림의 벌채 그것에 원인이 있다기보다는 토사 붕괴와 토사 붕괴가 가져오는 산사태에 원인이 있다. 또는 급격한 토사의 퇴적에 의한 하천 바닥의 상승 -토사가 차서 강바닥이 주변 지형보다 높은 하천인 천정천- 에 원인이 있다고 한다. 옛 야마토강은 유명한 천정천으로 이름이 나고, 제방이 터져 무너지는 일이 피해를 크게 만들었다.


홍수의 또 한 원인은 인간에게 있다. 중세 말부터 근세 초 무렵의 이 땅은 군사적 요충으로, 자주 전투의 무대가 되었다. 때로는 전략적 이유에서 제방을 무너뜨려, 말하자면 인위적 홍수가 지역을 엄습하기도 했다. 또는 성채의 건설을 위해, 또는 전후 부흥을 위해, 일시적으로 다량의 나무가 벌채되기도 했다.


이 땅의 홍수가 얼마나 심했는지는 유적에 퇴적된 토양의 깊이에서도 엿보아 알 수 있다. 장소에 따라 다르지만, 현대부터 야요이 시대 중기까지의 대략 2000년 사이에 5센티미터를 넘는 토사가 퇴적되어 있다. 단순히 계산하면, 토사 퇴적의 속도는 1년에 2.5밀리미터에 이른다. 


홍수는 고대에도 일어났다. 10세기에 일어난 대홍수는 근방의 식생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것이었던 듯하다. 게다가 이때 몇 십 년이란 매우 단기간에 몇 번의 홍수가 잇달아 일어났던 듯하다. 


홍수의 전후에는 무엇이 변화했을까? 전모는 아직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특징적인 것을 들자면 품종의 교대를 들수 있다(자료는 미발표). 이 자료는 유적에 있는 각각의 지층에서 출토된 플랜트 오팔(宇多津 2008)의 형상으로부터 밝혀진 것으로, 논벼농사에 잘 적응하는 온대 자포니카의 계통에서 열대의 밭벼 지대 등에 적응하는 열대 자포니카의 계통으로 변화한 것이 나타나고 있다. 열대 자포니카는 일본에서도 재배되었다(佐藤 1992).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의 <초본草本 육부경종법六部耕種法>(1834)에서는 일본의 근세에 고지古志, 입봉笠縫, 출운出雲, 일향日向이라는 네 가지 생태형의 품종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인 고지 종은 그 형태도, 또 적응하는 환경도 열대 자포니카의 그것에 유사한 듯하다. 


홍수 이후 그 유적 부근의 사람들이 열대 자포니카를 수용한 배경에 대하여, 생각할 수 있는 점은 몇 가지 있다. 하나는 볍씨를 잃은 사람들이 어딘지 다른 곳에서 새로운 볍씨를 양도받았을 가능성이다. 이것은 상식적으로는 가장 자연스런 생각이지만, 약간 달랐을 가능성도 있다. 그것은 일련의 홍수 이후, 사람들이 그곳을 버렸지만, 그뒤에 다른 집단이 들어와 정주했다는 것이다. 이 어느쪽이 올바른지를 결정할 자료는 아직 없지만, 어느쪽이더라도 홍수가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엿볼 수 있다. 


홍수는 사람들에게 어쩔 수 없이 벼농사를 중단하도록 만들었다. 앞에도 적었듯이 홍수는 한 번이 아니라,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여러 번 일어났다. 게다가 홍수와 홍수의 사이에는 적지만 경작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다. 결국은홍수가 빈발하는 와중에 벼농사가 반복해 행해져 왔다는 것이다. 플랜트 오팔의 분석 결과에서도 유적 주변에서 단위년수당 벼의 생산량은 중세기에는 근세의 약 1/4, 고대기의 약 1/2에 지나지 않는다.


이 생산성의 저하를 모두 홍수 탓으로 돌릴 수는 없지만, 홍수에 의한 휴경을 엿볼 수 있는 상황 증거의 하나로 홍수 직후 잡초의 종이 증가한 것이 있다. 벼농사가 닫힌 공간 안에서 끊임없이 계속 행해지면 잡초 종의 수가 증가할 리는 없다. 홍수 직후의 잡초 종의 증가는 밖으로부터 새로운 잡초 종을 가지고 들어왔음을 시사한다. 즉, 홍수의 토사에 포함되어 다른 곳에서 운반되어 왔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중세 후기에서 근세로 들어오면, 홍수에 의한 토사를 이용한 '시마바타(섬밭, 島畠)'가 성행하여 축조된다. 이것은 문헌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근세에는 섬밭을 이용한 목화의 재배가 활발히 행해졌다고 알려져 있다. 카와치河內 목면木綿의 등장이다. 섬밭은 그 '밭'의 기능만이 중요시되지만, 밭과 밭 사이는 아마 홍수 전 밭의 높이까지 파낸 이른바 파 올린 논이 생기고, 그곳에서는 벼농사가 영위되었을 것이다. 즉, 섬밭은 홍수 뒤에 논벼농사를 부흥하기 위한 방책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섬밭이란 장치를 지음으로써 논·밭에서 한결같이 농업을 촉진시켰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홍수가 단지 사람들에게 재해를 가져오기만 하는 존재는 아니었다고 새삼스레 이해할 수 있다. 분명히 홍수를 당한 사람들은 목숨을 빼앗기고, 재산을 잃고, 병으로도 고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급성시기'를 넘긴 사람들의 사회는 홍수와 그것이 가져온 변화에 적응하고, 새로운 생존방식과 사회를 모책했다. 그 의미에서 '홍수'는 완전히 마이너스의 재산은 아니다. 동시에 그것은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다. 아니, 사람들은 홍수도 기회로 바꾸어 살아 남은 것이다. 다음에 그 적응의 모습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적응의 두 가지 기술


홍수 등 여러 가지 재해에 대한 인간과 그 사회의 적응 방법 -나는 이를 '견딤의 기술'이라 부름- 은 농학적 적응과 공학적 적응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古川 1997). 두 가지 대응 방법에는 일장일단이 있어 어느쪽이 어떻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앞에 기술한 품종의 고대 등은 전형적인 농학적 적응의 사례이다. 한편, 공학적 적응에 포함되는 적응 방법도 있다.


앞에도 기술했듯이, 중세 말 무렵에 이 땅에서는 홍수 이후에 섬밭이란 특수한 장치가 만들어져, 그 위에는 밭작물을, 그리고 섬밭과 섬밭 사이의 낮은 곳에는 벼를 심었다. 중세에 들어와 섬밭의 밭작물 종류는 잘 알 수 없지만, 앞에 기술했듯이 근세가 되면 그곳에는 목화가 재배되었다. 즉, 홍수가 엄습한 뒤 사람들은 퇴적된 모르랠 섬밭이란 모양으로 쌓아서 논을 회복해 왔던 것이다. 훌륭한 '견딤의 기술'이라 할 만한데, 이것 등 공학적 적응의 선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사카 평야에서는 수해가 너무 심하여 에도 막부가 야마토강의 흐름을 바꾸어서 이 토지를 홍수에서 구제하려 했다. 이는 나카 진베中甚兵衛 등이 열심히 탄원을 했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내실은 마을에 따라 하천의 물길 전환에는 찬반이 있어, 막부도 물길 전환의 가부에 대하여 판단하기 어려웠던 것 같다(야마토강 수계 뮤지엄네트워크 2007). 그러나 찬반으로 나뉜 것은 당연하여, 새로이 물길을 끌어온 토지의 농민은 농지를 잃게 된다. 게다가 공사에 걸리는 노동력의 제공 등의 부담도 짓누른다.


야마토강의 물길 전환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300년 전의 공공공사이다. 우리들은 300년 전의 공공공사의 사후평가를 하는 입장에 있지만, 조금 조사해 보더라도 공사에는 음과 양 두 측면이 있었던 것 같다. 야마토강 전환 이후 이 땅에서는 토사의 퇴적은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즉, 홍수에 의한 토사의 퇴적은 급격히 감퇴한 것이다. 그와 함께 주변에서는 우물터가 출토된다. 즉, 일부의 토지에서는 지하수를 퍼올려야 하기까지 건조화가 진행된 것이다. 하천의 전환 이후, 하천의 유량이 감소했던 것은 틀림없다. 그 증거로 야마토강을 전환시킨 다량의 물은 다량의 토사를 운반하여 하구에 있던 국제적 항구였던 사카이항堺港을 황폐하게 몰아넣었던 것이다.




환경결정론


그런데 벼의 생산성과 기후의 관계에 대하여 흥미로운 점이 밝혀졌다. 여기에서는 한 꼭지를 두어서 이에 대해 적어 보고자 한다. 


그림1에는 고이즈미小泉(2007)에 의해 여기 2000년 사이의 기온 추정치를 그리고 있다. 그림에서 밝히듯이 플랜트 오팔의 생산량으로부터 추정한 벼의 생산성과 해당 시기의 기온 및 기온의 변화 사이에는 명확한 경향은 확인할 수 없다. 즉, 그림에 나타난 비교적 장기의 기온 변동과 벼의 생산성 사이에는 명확한 관계성은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림1 과거 2000년 사이의 기후(추정치)와 플랜트 오팔의 양에서 본 벼의 생산성. 추정 기온은 고이즈미(2007)에 의함.




에도 시대의 기근에 대하여, 그 원인을 이 시대가 '소빙기'에 있었던 점에서 구하는 논고가 자주 보인다. 이 시대가 '소빙기'라고 부르는 시기였던 점도, 또 이 시대에 기근이 빈발했던 점도, 어느쪽도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기근의 원인을 '소빙기'의 기후에서 구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또한 둘 사이에 소빙기라는 저온→흉작이란 인과관계가 있더라도, 그 관계의 강도는 잘 연구되어 있을 리 없다. 실제, 기근 가운데 최대의 규모였다고 하는 덴메이天明의 기근에서는 그 직접 원인을 아사마산浅間山의 분화와 그에 의한 토석류가 토네강利根川 유역을 엄습했기 때문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게다가 '소빙기'와 '흉작' 사이에는 몇 가지 요인이 관계하고 있다. 앞으로는 그들 요인을 포함한 포괄적인 인관관계의 해명을 진행시켜야 한다. 


기근이 심각화한 것에 대하여, 에도 시대 '쌀 본위제'라는 말에 나타나는 벼농사 일변도의 농업정책에 그 원인을 구하는 의견도 있다. 본래 벼농사 지대가 아니었던 도호쿠·칸토우의 땅에 반강제로 벼농사를 도입한 정책의 실패라는 것이다. 아사마산의 분화에 대해서는 분화 이후의 몇 년 사이 저온이 계속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것이 기근을 가져왔던 직접적 원인이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기후변화라는 자연현상과 기근이란 사회적 사건은 모두 '사람과 자연의 상호작용 환경'에 포함되며, 다른 사건과의 사이에서 복잡하게 관계되어 왔다고 보아야 한다. 


근세에 기록한 벼의 생산성에 대해서는 예를 들면 사토(1980)에게서 상세하다. 사토(1980)는 근세 후반의 코슈甲州 10개 마을에 있었던 단위면적당 수확량에 대하여 상세하게 검토한다. 이것을 보면, 벼의 생산성은 예를 들면 헤미逸見 일대 아사오浅尾 마을에서는 단위면적당 수확량(되/평)은 1770년부터 1872년까지 100년 사이에 매우 완만하게 증가하고 있는데, 마을에 따라서는 감소하고 있는 곳도 있다. 즉, 코슈 전체에서는 단위면적당 수확량은 정체되어 있었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향은 시즈오카현 등 다른 지역에 대해서도 대체로 똑같다. 또한 이미 사토(2005)에 의해 밝혀졌듯이, 이 시기의 단위면적당 수확량은 그 전후의 시기와 비교해도 큰 증감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점을 생각하면, 역시 '근세의 소빙기'가 벼의 생산성을 낮추었다고 하는 건 명확한 사실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단 생산성의 연차 변동은 컸던 것 같다. 사토의 자료를 보더라도 연차 사이의 생산성 변동은 실로 크다. 또한 1853년 같은 특정 연도에는 어느 마을이라도 큰 수확의 감소를 기록하며, 이와 같은 해에 이른바 냉해가 발생했을 가능성은 지적할 수 있다. 소빙기라는 짧은 기간의 기후변화는 이와 같은 생산성의 불안정함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근세의 특질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앞으로 연구할 주제이다.





잡초·해충·병원균


1만년에 이르는 농업 생산의 장에서, 인간을 괴롭혀 온 것이 잡초와 병해충이다. 일상생활의 장에서도 병해충은 인간 생활에 해를 미치고, 여러 번 인구를 격감시켜 사회를 혼란에 빠뜨려 왔다. 인류의 역사는 이들과의 싸움의 역사였다고도 할 수 있다. 나는 그들을 '마을에서 불러온 손님'이라고 부른다. 이들 불러온 손님들과의 싸움은 과학기술이 진보해도 결말을 내지 못한다. 


역사를 돌아보고 생각하면, 이들 불러온 손님들은 그 대부분이 농경의 시작과 함께 인간의 생존권인 '마을'에 출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인간이 농경이란 행위에 수반하여 자연히 생겨난 존재라고도 할 수 있다. 그들의전략은, 물론 식물인 잡초와 곤충인 해충, 미생물인 병원균에 따라서 다르다. 잡초에서는 그 생활 환경과 외형을 작물과 비슷하게 하는 '의태'의 전략이다.


잡초라고 부르는 식물 가운데에는 오늘날 지구적 지위를 쌓아 올린 작물의 오늘을 떠받친 역할을 수행한 것도 있다. 예를 들면, 빵밀(T. aestivum)은 서아시아에서 생긴 뒤 고대 이집트 등에서도 재배되었던 엠머밀(2립계 밀)과 그 밭에 잡초로 생겼던 야생 염소풀(Aegilops tauschii)과의 자연교잡에 의하여 발생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8500년 정도 전, 카스피해 남안의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한다.


벼에서도 똑같은 시나리오가 써졌다는 것이 알려져 왔다. 벼에는 인디카, 자포니카라는 두 가지 큰 유형이 있고, 자포니카의 벼는 1만년쯤 전에 장강 유역에서 생겼다는 것이 거의 확실하다(佐藤 2008, Fuller & Sato 2008). 인디카는 중국 출신 자포니카가 열대에서 저지로 운반되고, 그곳에 있던 야생 벼와의 사이에서 자연교배를 일으켜 발생했다는 가설이 유력하다.


생산량 세계 제8위의 대두에 대해서도, 최근 그 재배화의 과정에 빵밀과 인디카 벼와 같은 자연뵤개의 과정이 지적되어 왔다. 대두는 연속강좌 <유라시아 농경사>에서 아베 쥰阿部純 씨가 기술하듯이, 동아시아의 여러 장소에서재배화되었다고 생각된다. 어딘가 다른 곳에서 재배화된 재배형이 다른 환경에 운반되고, 그 땅에 있던 야생종 또는 수반하는 잡초와 교배를 반복하면서 새로운 재배형을 만들어내 왔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잡초를 배제하려 하고자 생각하지만, 잡초에는 중요한 작물을 만들어내 왔던 역사가 있다. 장래의 환경 변화를 생각하면, 잡초는 일면으로는 귀중한 자원으로 보호되어도 좋은 존재이다. 


해충과 병원균은 가축과 작물의 신체에 매달려 영양을 빼앗거나, 독소를 내어 그 건강을 해치거나 한다. 


해충도 병원균도 잡초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농경이란 활동에 의하여 등장한 것이다. 원래 작물과 가축(숙주)의 원종(선조가 된 야생종)은 여러 가지 곤충과 미생물과 공존해 왔다. 물론 공존의 관계는 다양하여 단순한 기생도 있다면, 공존공영 같은 공생의 관계도 있다. 농경이 시작되더라도 숙주와 기생자의 관계는 기본적으로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농경의 확대에 의해 작물과 가축의 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해충과 병원균도 그 수를 늘려 왔다. 그들이 작물과 가축에 기생해 왔던 존재인 점을 생각하면, 그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이다.


숙주와 기생자의 관계는 농경의 진전과 함께 차차 변화한다. 숙주의 종류가 줄고, 특정 종만이 돌출하게 되면, 그소수의 숙주에 매달린 기생자만이 늘어나고 다른 건 자꾸 줄어 간다. 또는 그들도 유력 숙주에 매달리듯이 진화해 나아갈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생자의 다양성도 저하되고, 대수롭지 않은 일로 격증하거나 격감하거나 하기 쉬워진다. 이 사태는 숙주의 쪽에서 보면 유행이 일어나기 쉬워진다고 하는 것이다. 숙주의 종 안에서도 다양성이 저하되어 있기 때문에, 유행의 위험성은 한층 증대된다. 이리하여 벼에 있는 도열병과 멸구 등의 심각한 병해와 해충이 등장했다. 소의 BSE도(원인물질 프리온은 미생물도 없으면 해충이 매개하는 것도 아니지만) 유전적 다양성의 상실에 수반하는 유행이라는 의미에서는 유사한 현상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녹색혁명' 이후는 이들 '불러온 손님'들을 근절시키고자 하는 농약이 차례로 개발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약제가 개발될 때마다 그들은 그에 대한 저항성을 획득해 왔다. 결국 인류는 불러온 손님에게 아직까지도 이혼을 요청하지 못하고 있다. 그것뿐인가, 그들은 한층 사납게 계속 숙주를 습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나움은 인간이 그들을 구제하려고 하면 할수록 날이 서 인간의 기술과 함께 공진화를 이루어 왔다. 


미래의 사회에서 인류는 이들 '불러온 손님'과 어떻게 사귀면 좋을 것인가? 그들은 어느 의미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것들이다. 일본에서는 옛날부터 만물에 인간과 똑같이 '불성'이 있어 그 생명을 존중한다는 사상이 있다. 우메하라 타케시梅原猛 씨에 의하면 그것은 헤이안 시대 말기에 등장한 불교의 사상인 본각사상과 깊은 연관이 있다. 본각사상은 '초목국토실개성불草木國土悉皆成佛' 또는 '산천초목실개성불' 등이라는 말에 그 내용이 나타나는데, 요컨데 그것은 불러온 손님이더라도 그들도 공존하도록 해야 한다는 사상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또는 그들은 존재에 대한 그림자 같은 것은 아닐까? 즉, 그림자를 사라지게 하려면 존재를 사라지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불러온 손님들의 역사를 생각하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불러온 손님들을 제멋대로 하게 두면 생산은 크게 감소해 버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근절시키려 하는 노력은 말하자면 쓸데없는 일은 아닐까? 그러한 반성도 가까운 장래에 필요하지 않을지 생각하게 된다.





농경에서 불의 역할


농경의 역사는 농지 개발의 역사였다. 특히 계절풍 지대를 비롯해 산림이 탁월했던 지역에서는 산림을 개간하는 일이 농지의 개발이었다. 어쩌면 건조지대의 산림이 없던 지역을 별도로 하면, 세계의 도처에서 산림이 농지로 개간되어 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산림을 개간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불을 사용하는 것이다. 불을 놓아서, 도구가 없는 시대에도 개간은 대단히 쉽게 행해지게 되었다. 아니, 불태운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도구의 하나였던 것이다. 더욱이 불태우는 것으로 산림의 식물체가 가지고 있던 또는 토양 안의 여러 가지 미네랄 성분은 흡수할 수 있는 형태로 변하여 작물의 영양이 되었다. 재가 비료로 사용되는 이유이다. 불을 사용하지 않으면, 베어낸 식물체가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오랜 시간이 걸리면 모처럼 개간한 토지에는 잡초들이 침입하여 토지를 점유해 버린다.


불태운 직후의 대지에 작물의 종자를 심으면, 남은 불의 열에 의하여 종자의 휴면성이 풀리고 발아가 잘 된다. 작물을 해롭게 하는 곤충과 미생물도 잠깐 동안은 있지만 피난한다. 


불을 사용한 개간이라고 하면 '화전'을 맨 먼저 떠올린다. 물론 현대의 화전과 태고의 개간을 동렬로 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국 고대의 전승인 '상경조전象耕鳥田'이나 <제민요술>의 '화경수누火耕'에 등장하는 농지를 준비하는 방법은 불과 물을 사용한 생태계의 교란이 옛 시대의 벼농사 개시의 경작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던 것을 웅변하여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화전은 국제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확실히 지구적 경제의 진전 안에서 플랜테이션 농업을 위하여 열대의 산림은 벌채되고 불태워져, 재생이 안 되는 산림 파괴가 진행되어 왔다. 산림 파괴는 그자체가 환경 파괴라고 인식한다면, 이러한 대규모 화전은 환경 파괴의 행위 그에 다름이 없다. 그러나 화전 자체는 어쩌면 농경의 매우 초기 단계부터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던 농법의 하나이다. 이와 같은 화전(여기에서는 그들을 '전통적 화전'이라 부르기로 한다)은 이 시리즈 제2권 제3장에서 카와노 카즈아키川野和昭 씨가 상세히 논하고 있듯이, 지속성이 높은 농법이다. 이것은 우리의 프로젝트에서도 '화경반火耕班'의 연구활동을 통하여 자세히 논해 왔던 바이기도 하다. 


전통적 화전에서 숲은 늘 재생되어, 그 재생된 숲을 불태워서 미네랄 등을 순환시켜 성립해 왔던 농업의 형태이다. 그것은 요즘 언어를 사용하면, 정말로 '순환'과 '재생'의 농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전이 가진 이와 같은 좋은 측면을 보지 않고 한때의 '산림 파괴'란 측면만을 보아 그것을 금지하거나 비난하는 태도는 농업의 지속성과 더 나아가서는 지속성에 오히려 반하는 것이다. 일찍이 동남아시아 어느 나라의 정부가 농가의 전통적 화전을 실질적으로 금한 일이 있다. 화전을 그만두고, 저지에서 논벼농사를 경영하면 나라도 사회도 풍요로워진다는 설명이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저지에서 하는 논벼농사에서는 확실히 산림은 불태워지지 않았지만, 그 대신 화학비료와 농약의 사용을 증가시키게 되었다. 이들의 제조, 사용은 화석연료를 소비하고, 온실가스인 이산화탄소의 배출로 이어진다. 환경문제를 생각할 때 언제나 고려해야 할 것은 어느 행동이 나중의 시대에 예기하지 않던 무언가 반작용을 가져온다는 점이다. 불의 사용에 대한 일면적 이해가 더욱 나쁜 결과를 만들 가능성도 있다. 우리들은 불에 대해서도, 종합적으로 생각해 판단하는 것이 요구된다고 생각한다. 




마치며


농약과 환경을 하나의 체계로 생각하면, 이 체계를 장기에 걸쳐서 유지하는 데에는 '투입'과 '산출'의 수지가 유지되어야 한다. 이 체계 안에서 작물과 가축의 생산을 '산출'이라고 하면, '투입'은 태양열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내부에서 보급되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물과 이른바 화석연료나 금속원소 등이다. 하지만 '산출'이 '투입'보다 큰상태가 오래 계속되지 않는다는 원리는 -영구기관이 결코 성립하지 않는다는 원리와 같이- 매우 보편성이 높은 원리이다.


'투입'을 크게 하는 것은 태양광 에너지의 이용효율을 최대로 하는 것이지만, 이것도 그렇게 간단한 일은 아니다.태양광 패널 등이 주목을 받고 있지만, 패널의 생산과 그 내구년수를 생각하면 그만큼 효율적인 방법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패널을 바다나 육지에 부설하거나 하면, 그 토지의 기후가 변화하는 위험성이 있다. 이처럼 생각하면, 지구에서 수억 년의 역사를 가진 식물에 의한 광합성이란 체계가 얼마나 우수한 것인지 이해하게 된다. 결국 인류는 식물의 광합성에 의지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실제로 태양 에너지를 이용하는 농업에 의해 현생인류는 지금까지 그 수를 증가시켜 지구를 '지배'해 왔다. 인구의 급속한 증가는 곡물이 유아의 사망률을 대폭 낮춘 것에 의한 것인지, 여성의 출산부터 다음 임신까지의 기간을 대폭으로 단축시킨 것에 의한 것인지 상세한 것은 검토해야 할 연구과제이지만, 농업에 의한 식량 생산이 인구를 크게 확대시키고 불어난 인구는 한층 더 식량 증산을 요구했다. 그리고 이 '악순환'의 괄과가 모두에 적었던유전적 다양성의 상실이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생산을 늘리는 방책만을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농업과 환경의 관계사를 펴서 읽었을때, 또 하나의 선택지 -소비를 줄이는- 것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려할 때가 온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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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4




기고6

동서 안의 동양의 끽다 문화

키무라 에미 木村





시작하며


일본은 16세기가 끝날 무렵, 다도라는 독자의 끽다 양식을 확립하여 오늘날까지 전통 예술로 그 모습을 남기고 있다. 그것은 당초의 모습은 물론 아니고 시대의 변천 안에서 잔치를 베풀고 놀며 끽다, 다례, 다도라고 다양한 모양과 요소를 포함시켜 왔다.


이 기고에서는 끽다 문화가 중국에서 일본으로 수용되는 과정과 중세의 그 전개부터 근세에 일어난 서양과의 교류 속에서 동양의 끽다 문화는 서양인의 눈에 어떻게 비추었는지, 게다가 서양에 있는 끽다의 자리매김이 어떠한것이었는지를 고찰하면서, 동양 문화, 동서 문화의 안에 있는 끽다의 다양성에 대하여 찾아 보고자 한다.




중국 끽다 문화와 당나라풍 끽다의 수용


차의 신 육우陸羽(?-804년 무렵)는 차를 남방의 가목嘉木이라 불렀다. 남방이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 중국의 장강 하남 유역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끽다가 더없이 융성한 8세기 후반에 명차는 양자강 유역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차의 재배, 끽다의 기원이 언제쯤인지를 엄밀하게 해명하는 일은 아직 곤란하지만, 차의 산지는 쌀과 공통이며, 그 기원을 더듬어 찾으면 차는 벼농사와 함께 전개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차는 중국에서 당초 약으로 이용되었을 것이지만, 6세기 중엽 북위의 양현지楊衒之가 저술한 <낙양가람기>에는 북쪽에 있는 음료 낙장酪漿과 그 북쪽에 수액水厄이라 멸칭되었던 차에 대한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남제 제2대 황제 무제(440-493, 재위 482-493)를 섬긴 왕숙王肅(464-501)은 부형제를 무제가 죽였기 때문에 북위 제6대 황제효문제(467-499, 재위 471-499)를 섬겼다. 그때 왕숙은 북위의 양고기, 낙장 등은 먹지 않고, 즉어鯽魚(붕어)의 국을 먹고, 명즙茗汁(차)을 마셨다. 여기에서 중국의 북방에서는 유제품과 목축이란 조합에 반하여, 남방에서는 물고기와 차의 조합이란 음식생활이었던 것이 주목된다. 당시 북방에서는 차의 쓴맛이 재앙이고, 낙노(유제품의 노예) 또는 수액(단 남조에서는 수액은 물의 재앙이며, 차라는 뜻은 전하지 않았음)으로 취급되었다. 몇 년 뒤, 왕숙은 궁정에서 효문제와 회식할 때 양고기와 낙죽(우유가 들어간 죽)을 많이 먹었다. 효문제는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해 "중국의 먹을거리 가운데 양의 고기는 물고기의 국과 비교해 어떤가, 명음은 낙장과 비교하여 어떤가?"라고 물은 바, 왕숙은 양고기는 육산, 물고기는 수산으로 모두 최고이지만 양은 춘추 때의 제와 노와 같은 대국에서, 물고기는 주와 거와 같은 소국에서 비교해 추정했다고 평하였다. 그러나 명에 대해서는 낙의 노예라고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답했다. 명이 낙의 노예에 적합하지 않다는 건 왕숙이 당초 북방의 낙에 친숙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명, 곧 차는 남방에서 북방의 낙에 필적하는 음료로 자리매김되어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육우가 저술한 차 책 <다경茶經>(760년 무렵 성립)에는 남방에서 차는 3세기 무렵부터 관료의 검소한 향응에 사용되고 있었단 것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8세기 후반 이후 끽다는 서민에게도 보급된다. 동시에 궁정과 사원을 중심으로 향응 안에 차와 술은 병용되어 받아들여 쓰고, 선사품으로도 이용되게 되었다. 더욱이 차에 세금이 부과되게 되어, 궁정은 전용 차 정원을 후저우湖州의 고저산顧渚山에 설치한 일로부터 차는 정치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이렇게 중국에서 전개된 끽다 문화는 9세기 초 무렵에 영충永忠, 공해空海, 최징最澄 등 유학승이 당나라 문화를가져옴에 따라 일본에도 이미 받아들여졌다고 추측된다. 특히 사가嵯峨 천황(786-823, 재위 809-823)을 중심으로 한 궁정 사교모임에서는 <경국집經國集> <문화수려집文華秀麗集> 등 시가에서 차를 읊고 있는 점으로부터 당나라풍 문화에 대한 동경으로 끽다를 즐긴 것 같다. 그러던 중, 홍인弘仁 6년(815) 사가 천황이 오우미近江 가라사키唐崎로 행차했을 때, 범석사梵釋寺 주지 영충(742-816)이 유연 중에 자신의 차를 헌상한 일은 사가 천황의 당나라풍에 대한 생각을 더욱 강하게 한 것이 아닐까? 그 1개월 뒤에는 키나이畿内·오우미·탄바丹波·하리마播磨 등에 차를 심도록 칙명을 내리는 것이 사가 천황의 차에 대한 깊은 생각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영충은 약 30년이란 오랫동안 당나라에 머물며 끽다 융성의 상황을 눈으로 보았을 텐데, 그것을 전하는 문헌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영충이 체재하던 장안의 서명사西明寺에서는 석제 차 맷돌(그림1을 참조)이 출토되고 있는점으로부터 당나라에 체재할 때도 차를 마시고 있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 진언종의 개조 공해(774-835)는 유학 당초, 영충이 있던 서명사에 머물고, 귀국 후에도 영충과 친교가 있었다. 사가 천황이 지은 시에는 공해와 차를 마시며 교제했다고 생각되는 시가가 있고, 또한 공해 자신도 시가 안에서 차를 노래하며, 당나라에 있는 끽다를 귀국한 뒤에도 개인적으로 즐겼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림1 차 맷돌. 대덕사大德寺 소장 '오백나한도' 부분




한편 일본 천태종의 개조 최징(767-822)는 수제자인 태범泰範(778-?)이 공해의 밀교에 심취해 최징의 수하로 돌아오지 않았을 때, 자신의 수하로 돌아오도록 차를 10근 편지에 넣어 보낸다. 이것으로부터 차가 선사품으로도중시되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사가 천황 이후 끽다의 풍조는 쇠퇴한 것처럼 보이지만, 10세기 즈음 다이리內裏의 '토노모료主殿寮 동東'(東北角)에는 차 정원이 설치되었다. 그곳에서 재배된 차는 봄가을 두 계절에 행해지는 계어독경季御讀經에 쓰였다고 추측된다. 또한 우다宇多 법황法皇(867-931, 재위 887-897)의 50세 축하에는 술 대신 차를 음용했던 일이 <서궁기西宮記> 등에서 볼 수 있는 점에서 향응에는 술이 빠지지 않았던 것과 함께 차도 점차 술과 동격의 중요한 음료로향응 안에 자리매김되어 갔다고 추측한다. 그뒤 축하에 쓰는 차에 대해서는 문헌에서는 찾아볼 수 없지만,시라카와인白河院(1053-1129, 재위 1072-1086), 고시라카와인後白河院(1127-1192, 재위 1155-1158)의 50세 축하에서 다시 차를 준비하게 되어, 고시라카와인 때에는 우다 법황의 다기를 이용하게 되었다. 다만 이와 같은 고대에 있던 당나라풍 끽다는 아직 문화라고 부르기에는 단편적이며, 일본 독자의 끽다 문화를 형성하는 데에는 중세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중세 끽다 문화가 크게 개화한 것은 고대에 있던 당나라풍 끽다가 기반이 되었단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중세 끽다 문화의 전개


중세에 끽다는 일반에도 보급되었지만, 그 과정은 중국에서 있었던 8세기 후반의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에이사이栄西(1141-1215)는 <끽다양생기喫茶養生記>(1211년 성립, 1214년 수정)를 저술하고, 차의 효용, 끽다법이 어떠한 것인지 하는 점을 중국의 차 자료를 바탕으로 명확히 전하고 있다. 이것은 육우가 <다경>을 저술하여 차에 관한 온갖 문헌을 활용해 차란 어떠한 것인지 그 효용과 음용법을 밝히려 한 것과 유사하다. 에이사이가 <끽다양생기>의 전반에 문제삼고 있는 차의 자료는 송나라대 초기의 비슷한 책 <태평어람太平御覽>의 내용을 참고한 것이라 하며, <다경>을 실제로 보았는지 어떤지 명확하진 않다. 그러나 그가 일본 끽다 문화 안에서 수행한 역할은 송나라대의 끽다법과 묘에明惠 대사의 일화에서 문제삼고 있는 차의 종을 전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끽다양생기>를 저술함에 따라 차의 실용성을 널리 전하여 끽다 보급의 원동력이 되었던 점을 크게 평가하고 싶다. 사카이堺의 카이에지海会寺(임제종 동복사東福寺파) 주지였던 계홍대서季弘大叙(1421-1487)가 <자헌일록蔗軒日錄>에서 <끽다양생기>를 '차상경茶桑經'이라 칭하고 있는 것에서도 에이사이는 일본에서 육우와 같은 존재로 자리매김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중세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선종이 끽다 문화에 큰 영향을 준 점이다. 물론 차의 생산에서는 아마 선종보다도 현교와 밀교 사원에서 하던 재배가 중시된다. 그러나 선종에는 '청규清規'라고 부르는 규범이 있어, 연간 중요한 행사에는 끽다가 자리매김되고 다례로 확립되어 있었다. 그와 같은 선종의 영향을 받아, 끽다는 공식을 중심으로급속히 보급되고, 공식의 다례로서 전개된다. 또한 혼간지本願寺 3세 카쿠뇨覚如(1270-1351)의 생애를 묘사한 '모귀회사慕歸繪詞'에는 승속 사이에 행하는 연가連歌의 모임에서 다양한 향응 요리 안에 차를 준비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또는 <태평기> 등에는 공식 잔치에서 차 산지의 몇 종류인지를 마시고 비교하여 맞추며 경쟁하는 투차鬪茶가 행해졌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그 한편에서 사원과 신사의 문앞에서는 <칠십일번직인가합七十一番職人歌合>에서 볼 수 있듯이 '끓임 행상' '차 한 번 마시고 1전' 등도 나타나, 참배하는 서민에게도 차를 마실 기회가 늘어난다. 근세 초두에 확립된 다도는 이와 같이 중세에 있던 관민의 끽다가 융합해 만들어진 형식이 아닐까 하고 추측한다.


중세 이후 차와 쌀은 일상적으로 빠질 수 없는 것이 되었는데, 차는 식문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선원을 중심으로 사원에서 먹을거리는 쌀만이 아니라, 우동·만두·소멘·키시멘·권병·온병粉物 등 밀을 중심으로 한 분식도 더해진다. 이와 같은 경향은 <끽다왕래> <정훈왕래> 같은 문헌, 또는 '모귀회사' '주반론회권酒飯論繪卷' 등의 회화 자료에 나오는 향연 요리에도 묘사되어 있는 점으로부터 공식·사원에서 밀을 이용한 요리가 보급되기 시작했단 것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일본에서 차를 분말로 만들어 마시는 방법은 당나라대에 있던 음용법을 수용했다. 그 기원은 명확하지 않지만, 차를 분말로 만든 것은 제차법이 엽차가 아니라 고형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차를 억지로 고형으로 만든 이유는 장기보존이 가능했단 점, 또 하나는 가지고 다니기 편리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차를 분말로 만들기 위해서 당초는 무엇을 사용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아마 절구 같은 도구일 것임). 당나라대 이후는 차 맷돌(일본에서는 다련茶硏이라 부름)을 쓰고, 유송년劉松年(12세기 무렵)의 '연차도攆茶圖'(타이페이 고궁박물원)에도 묘사되어 있듯이, 나중에 맷돌도 사용하게 된다. 둘의 사용용도에 따른 구별은 명확하지 않지만, 일본에서 차는 세련된 차 맷돌(그림2)로 갈던 것과 달리, 중국에서는 잡곡용이 아닐까 생각되는 큰 맷돌을 사용한다.



그림2 차 맷돌. 오사카 텐만天滿 죠센보定專坊 소장 '신란親鸞 성인聖人 전회傳繪' 부분





차는 설령 고형이더라도 그냥 갈아서 뜨거운 물을 부으면 잎에 수분을 머금은 진액은 추출되어 충분히 마실 수 있다고 생각되지만, 왜 굳이 분말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물론 약이란 요소도 있지만, 더 추측하자면 차와 밀의관계도 고려했던 것이 아닐까? 밀은 날로 먹을 수 없고, 맷돌로 갈아 가루로 내 조리한다. 그와 같이 가루로 만든다는 점에서 힌트를 얻어, 쓴 차도 분말로 만드는 쪽이 마시기 쉬워진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추측의 영역을 아직 넘을 수는 없지만, 역사를 되돌아보면 차는 밀과 쌀의 가교였을지도 모른다. 





서양인이 본 동양의 끽다 문화


서양에 있는 끽다 풍습의 보급은 중국, 일본에 비하면 훨씬 늦은 17세기 무렵이다. 


16세기 예수회는 카톨릭 포교를 위해 동양에 진출해, 동양의 습관·문화 등 전반을 이해하고자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선교사들은 동양의 끽다를 어떻게 보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포르투갈 사람 조앙 로드리게스(1561-1633)의 <일본교회사> 또는 마테오 리치(1552-1610)의 <중국 카톨릭교 포교사>에서 엿볼 수 있다.


16세기 후반에 일본에 온 선교사 로드리게스는 다도에 대하여 "이 왕국의 우아한 습관 중에서도 주요하고, 일본인이 가장 존증하고 전력을 기울이는 것은 차를 마시는 일에 초대하는 것일 테지만, 그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또한 손님에게 차를 내오는 장소를 꾸미는 것에 대해서도 특수한 건물, 그 건물로 가는 통로와 입구, 또 이런 장소의 목적에 적합한 기타 여러 가지 것에 정성을 다한다"고 묘사되어 있다. 다도 및 그 공간이 되는 다실, 또는 다도구라는 것이 얼마나 서구인의 눈에 기이하게 비추었는지 짐작되고, 그것은 그들의 문화에는 없는 동양 안의,가장 일본의 독자적인 대접이며 문화였다. 


한편 리치는 한자 이름 리마두利瑪竇라 부르고, 중국에 뼈를 묻었다. 그는 중국에서 포교활동을 하면서 차의 존재에 대하여 "우리들 나라의 산야에도 이 종의 나무가 있을지 모른다"고 기록한 점으로부터, 아직 서구에서 차는 별로 일반적이지 않았고, 혹은 그 존재조차 아직 별로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다. 리치는 중국인에 대하여 차도 술도 여름이더라도 뜨겁게 하여 마신다고 하며, 유럽인이 차가운 것만 마셔 결석이나 요사병尿砂病에 걸리는 것과 달리, 건강하게 장생한다고 하는 점은 주목된다. 


그런데 중국의 끽다 풍습에 대해서는 리치 이전에 중국에 체재했던 가스파르 다 크루스(?-1570)도 <16세기 화남 사물지>에 기록하고 있다. 그가 본 끽다 풍습이란 "신분 있는 사람은 집을 방문하는 사람, 또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누구라도 화려한 쟁반 위에 올린, 1개 또는 사람 수의 자기에 차라고 부르는 미지근한 물을 담아서 바치는 것이 그들의 습관이다. 차는 약간 쓴맛이 있는 약초를 달여주는 것으로, 다소 붉은 빛을 띠고, 매우 약효가 좋으며, 그들은 이것을 늘 마셔 지인이든 아니든 가리지 않고 조금이라도 존중할 만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이 차로 대접한다."는 것이었다. 


리치는 또한 중국과 일본에 있는 차의 음용법에 대해서도 비교한다. 일본에서는 차의 잎을 가루로 갈아서 찻잔에넣어 거기에 뜨거운 물을 붓는 데 반하여, 중국에서는 그 잎을 용기에 넣고 거기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잎을 남기고마신다고 그 차이를 기술한다. 그들은 아직 차에 친숙해질 수는 없었지만, 중국과 일본이란 동양의 차에 대단히 흥미를 돋우었을 것이다. 


리치가 본 끽다의 시대는 명나라이다. 그 이전은 고급 또한 차는 고형으로 만든 것을 가루로 만들어 마셨는데, 명나라대에는 고형으로 만드는 제차법을 폐지했다. 리치가 기록한 엽차를 뜨거운 물에 담그어 잎을 남기고 마시는 방법은 포차泡茶라고 부른다. 그것은 일본에서 말하는 지금의 전차법에 유사한 것이기에, 이 명나라대의 포차는 이윽고 일본의 전차법 도입의 열쇠가 될 것이다. 


다만 명나라대의 회화 자료 안에는 맷돌이나 차 맷돌로 차를 가는 모습도 많이 묘사되어 있는 점으로부터(그림3), 또는 엽차를 사용해 가루로 만든다는 습관도 남아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림3 명나라대의 차 맷돌.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 당인唐寅 '품차도品茶圖'





서양의 끽다 문화


앞에 기술한 대로 서양에서 차가 보급된 것은 17세기부터로, 애프터눈 티의 본고장 영국에서는 18세기 말에 드디어 차는 일상생활의 필수품이 되었다. 서양에서 차가 도입되었던 당초, 그것은 매우 고가이고 약효를 가진 것이란 의식은 중국, 일본과 공통된다. 중국에서는 육우를 기준으로 차가 지닌 속세를 초월한 신성성을 경애하여 기호품으로 삼고, 일본은 그 영향을 받아 차를 수용했다. 이에 반하여 서양, 특히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한 유럽인은 당초 동양의 신비라는 호기심에서 차에 흥미를 보이며 수용했다. 그러나 그들, 특히 영국에서는 의학적 논쟁과 차의 수입에 얽힌 사회적 경제 논쟁을 일으키고, 차를 둘러싼 찬반 양론을 되풀이한 끝에 드디어 서양의 문화로 끽다가 정착되었다는 경위는 다르다. 


동양, 곧 중국과 일본에서는 갈색을 띤 녹색의 액체에 그 산뜻한 향과 쓴맛 안의 달달함, 곧 감로甘露를 음미하며 마신다. 서양에서는 최초 그와 같은 녹차를 받아들였다. 차를 즐기는 식기도 중국에서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서양, 특히 영국에서는 점점 우롱차를 좋아하게 되고, 더구나 우롱차를 완전발효시킨 홍차를 즐겼다. 홍차를 좋아한 이유는 홍차란 마실거리가 서양인의 식생활, 풍토에 적합한 맛과 향이며, 그때까지 익숙하게 마시던 커피, 코코아에 더 가까운 색조였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서양의 차 마시는 방법은 차에 설탕과 우유를 넣는 것이다. 차에 설탕과 우유를 넣는다는 발상은 서양인 특유의, 홍차이니까 그럴 것이다. 




마치며


동서의 끽다 문화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하게는 논하지 못하고 있지만, 차는 정치·경제·문화에서 동서에 다양한영향을 주었다.


일본인에게 '일상다반'이란 단어가 보여주듯이, 차는 쌀과 함께 하루하루 빠질 수 없는 먹을거리가 되었다. 그 한편에서 밀을 재료로 한 요리가 충실해지자 식문화의 너비도 넓어지고, 거기에도 차가 개재해 있었던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서양에서는 불과 200년 정도 사이에 서양 나름의 끽다 문화를 구축해 왔다. 밀크티는 그 상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서양과 동양 융합의 결정이기도 하다. 동서의 기호는 다르지만, 하나의 잎에서부터 제차법을 변화시킴에 따라 차는 다양화되어 유라시아 풍토에 뿌리를 내리고 대륙을 하나로 연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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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4





제5장

조엽수림 문화론 재고

야마구치 사토시山口聰






시작하며


민족식물학의 관점에서 가장 분명한, 말하자면 정리라고도 할 만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사람은 주어진 환경에서최대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 있는 곳에서 안정적으로 손에 넣는 것으로 생활의 기반을 구축해 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자연환경이 우선, 그 사람, 더 나아가서는 일족의 무리들, 확대하여 말하면 '민족'의 생활을규정하고 있다. 우리들은 거기에 없는 것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그 환경에서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 생활에 필요한 것은 그 환경에서 입수하고, 이용해 가는 것이다. 주위가 바위 투성이라면 생활의 기반은 바위와 돌이며, 주거는 돌로 만들 수 있다. 또한 산림이 풍부하여 목재를 자유롭게 입수할 수 있다면, 판자와 기둥으로 주거를 만들것이다. 뻘밖에 없다면 벽돌을 만들게 될 것이다. 대나무가 풍부하다면, 대나무로 주거를 만들게 된다. 무엇이 고도하고, 무엇이 원시적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해도 쓸데없다. 환경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이용하는지가 민족의 지혜이며, 세계 각지의 다양한 민족이 오랜 옛날부터 끊임없이 계승해 온 '민족의 지혜'가 들어간 '문화'가 각각의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존재한다. 환경이 민족의 역사, 민족의 문화, 민족 특유의 생활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정을 고찰해 가는 학문 분야를 민족학이라 부르고, 식물의 이용이란 관점에서 연구하는 분야를 민족식물학이라 부른다. 


어떠한 민족이라도 주변의 환경에서 유용한 성분이라든지, 특별히 이용가치가 있는 식물이 있다면 반드시 그와 같은 식물을 알아차리며, 그 식물을 생활에 끌어들일 터이다. 반대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유용한 식물은 반드시 주변의 민족에게 발견되어, 어떠한 형태로 반드시 이용된다. 그러한 관계의 식물을 많이 알고 있지 않다면 민족은 생존할 수 없다. 민족식물학에서의 정리가 의미하는 바이다. 물론 단순히 환경결정론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지구환경 문제를 진전시키고 싶지 않는, 인간활동과 자연환경의 관계를 재검토하길 강요 받는 현재, 새삼스럽게 민족식물학적인 지식의 의의를 확인해 놓는 것은 쓸데없지 않을 것이다. 조엽수림 문화론은 바로 그와 같은 시점에 섰을 때, 아직도 많은 것을 우리에게 시사해 준다. 조엽수림이란 어떠한 환경이며,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어떠한 생활을 하고, 어떻게 식물을 이용해 왔을까? 그리고 주변의 다른 자연환경에서 생활하는, 다른 민족과는 어떠한 차이가 있을까? 우리의 부족한 경험이지만, 감히 지금까지의 조엽수림 문화론에 대하여 변변찮은 견해를 더해 가며, 그 현대적 의의를 재고해 보겠다.





조엽수림의 특징


조엽수림이란 온난대라는 식생 구분에서 생육하는, 온난대라는 것은 상록성의 수목이 우선하는 환경의 산림대이다. 열대부터 온대로의 이행대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열대는 수종이 다양하고, 토양은 세찬 강우 때문에 영양분의 유망이 심하다. 계절의 변화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식물의 개화 시기가 가지런하기 어렵다. 한편 열대보다도 북쪽으로 올라간 온대 지역에서는 계절의 변화가 뚜렷하고, 낙엽성 수종도 늘어나며, 나무 그늘의 풀도 풍부하다. 강우량도 열대보다는 연간으로는 적고, 건조한 계절이 길어지며, 무엇보다도 저온 기간이 뚜렷해져 식물은 휴면기를 가지는 것, 낙업성인 것이 많아진다. 이 어느쪽의 성질도 아우른 식생대가 조엽수림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기온은 열대에 가깝고, 매우 숨막힐 듯 덥다. 또한 습도는 매우 높고, 숲속에서의 생활은 고통이기도 하다. 습도가 있기에 균류의 생활에는 유리하다. 


이와 같은 환경에서 사람들은 굳이 숲속에서 생활하는 것일까? 고온다습하기 때문에 거머리 등의 귀찮은 생물이많이 생활하고 있으며, 해도 비추지 않을 만큼 울창한 조엽수림 숲속에서 생활 때문에 스스로 들어간 사람들이 있는 것일까? 먹을거리가 되는 식물, 동물은 확실히 숲속에도 많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축축한 환경으로 굳이 들어간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른 민족에게 압박을 받아 피난할 수밖에 없는, 그와 같은 소수민족뿐일 것이다. 도대체 아프리카 대륙의 숲에서 초원으로 내려선 인류는, 트인 밝은 곳에서 진화하면서 동쪽으로 확산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고, 히말라야 산맥의 서쪽 끝에 다다른 시점에 북쪽의 건조한 고원 지대로 나아가든지, 남쪽의 열대우림을 통과하든지 하는 갈림길에 섰을 터이다. 그래서 일부러 깜깜한 수림대에, 그대로 들어가는 일은 하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숲과 평원의 경계를 생활의 장으로 삼는 것이 조엽수림에서 살아가는 민족의 원칙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생태학적으로는 조엽수림 문화란, 조엽수림의 내부가 아니라 조엽수림 주변의 언덕 군락을 생활의 장으로 삼은 문화이다. 밝은 환경을 인위적으로 형성하는 기술을 가진 문화, 곧 화전 문화이다. 숲은 "Food Bank" 자연의 먹을거리 은행이며, 능숙하게 운용하면 영속적으로 '이자'로 먹을거리를 손에 넣는 장소이다. 게다가 일 년 내내이다. 이것이 계절성이 뚜렷한 낙엽수림의 문화와의 차이이다.





조엽수림 문화론이 온 길


그렇다 하더라도 조엽수림이란 단어는 매우 매력적이다. 생태학적으로 보아 아시아의 독특한 식생 구분이기도 하고, 누구나 쉽게 상상하기 쉽고, 익숙한 자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거기에 함정이 있다. 사실은 지금까지 조엽수림에 대한 여러 논자의 이미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어긋나는 점이 있으며, 게다가 그 어긋나는 점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고도 생각한다. 필자가 가깝게 느꼈던 기억을 상기하자면, 조엽수림 문화론의 제창자 가운데 한 사람, 나카오 사스케의 제언에서는 사물의 본질을 푹 찌르고는 있지만, 그 경계가 희미한,어딘지 모르게 기준점이 없는, 이른바 '분위기'적인 것이 있었다.


조엽수림이란 중국 서남부(히말라야 동부도 포함하여)부터 일본에 걸쳐서 넓은 온대의 상록광엽수림이지만, 인위적 교란이 많은 식생대이고, 현재의 상황은 편향 식생이며, 마을에도 연결된 낙엽광엽수림인 것도 많다. 잠재적으로는 상록광엽수림대이지만, 겉보기는 낙엽수가 우점하고 있다. 그 때문에 한마디로 '조엽수림'이라고 하더라도, 지역별로 상당히 다른 경관의 색생대이다. 우리들이 태어나 자란 지역의 식생 경관을 박아 넣은 채, 그것을'조엽수림'으로 일반화하여 그곳에서의 생활을 '조엽수림 문화'라고 파악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점에 대하여 나카오는 지극히 자각적이었다. 그는 지역에 따른 식생의 차이, 그에 수반한 지역별 식물과 사람들이 생활 속에서 그를 대하는 방식, 즉 이용과 재배화의 동이를 경험적으로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한 바탕에서 조엽수림을 생활의 기반으로 삼는 사람들의 사이에는 다양한 관점에서 공통성이 발견되는 점, 게다가 일본인의 생활, 특히 농경 생활의 기반이 되는 다양한 습관에 높은 공통성이 있으며, 어느 정도의 변이를 인정하면서도 현재까지 끊임없이 각지의 민족별로 상호관계를 지키면서 유지되어 온 문화가 있는 점을 하나의 이야기로 그려내었다. 


많은 서적이 기록하고 있듯이, 조엽수림 문화론이 등장했던 것은 1966년 전후이다. 조엽수림 문화론을 제창하기시작한 무렵 나카오는 재배식물의 기원을 논하는 동시에, 세계의 농경문화를 지중해 지역으로 대표되는 '맥류 농경문화', 사바나에서 기원한 '잡곡 농경문화', 그리고 동남아시아 열대지역에서 퍼진 '뿌리작물 농경문화'라고 셋으로 구분한다. 농업기술적으로는 종자번식 농경과 영양번식 농경이란 둘로 나누는 쪽이 깔끔할지도 모른다. 즉, 맥류 농경과 잡곡 농경을 포괄하는 곡물 이용 문화와, 뿌리작물 농경에 기인하는 토란 이용 문화라는 식으로 단순화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조엽수림 문화는 이들 두 가지 농경문화의 복합체라고 할 수 있다. 조엽수림 지대에서 널리 발견되는 '화전'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토란 이용 문화에서 또 하나의 농업 형태인 '화전' 농경이 파생되었든지, 또는 다른 곳에서 잡곡 주체의 농경기술이 전해졌든지 어느쪽인지는 정할 수 없지만, 조엽수림 안에서 행해졌던 '화전' 농경은 토란 이용 문화를 기반으로 하면서 그것과 혼연일체가 되어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앞에도 언급했듯이, 조엽수림 문화란 조엽수림의 주변을 생활권으로 하고, 내부는 생활의 양식을 얻으러 가기 위한 장소로 성립하는 문화이다. 자연을 조금만 할퀴어 딱지가 생기기까지의 단기간에 농업을 하여 식량을 생산하고, 조엽수림의 주변, 때로는 내부에 '마을' 같은 공간을 형성하여 성립한 문화인 것이다. 조엽수림의 안은 참으로 어두워 산림을 베어내지 않고는 생활할 수 없다. 유일하게 밝은 곳은 산지의 산등선이 줄기나 능선이다. 이와 같은 장소는 건조하기 쉽고, 바람도 강하고, 수목이 자라기 어렵다. 그 때문에 밝고 전망도 양호하기에 자신의 위치관계를 파악하기 쉽다. 또한 불놓기를 한다면 밝은 환경을 확보할 수 있다. 밝은 환경은 사람들의 마음을 밝고 명랑하게 한다. 광장이 생겨서 사람이 모이고, 노래가 울린다. 노래를 주고받는다. 불을 사용하는 농업, 즉 화전은 인위적으로 사바나 초원 같은 환경을 만들어내는 것이며, 재배하는 작물도 밭작물이다. 잡곡의 재배를 받아들여 불에 강한 숙근성 식물, 알뿌리 식물이 아울러 이용된다. 종자번식성 곡물과 영양번식성 작물과 신개지에 적합한 선구적 식물 같은 수목성 작물의 조합으로 생활의 기반을 만든 것이 조엽수림대에 계속 살아온 사람들이다.이하 간략히 기술한 바를 정리하면, 조엽수림 문화란 열대, 난대, 온대, 사바나, 스텝의 틈새에서 태어나, 자연의회복력을 바탕으로 하여 언덕 군락과 마을의 공통성을 이용하면서 잡곡과 뿌리작물 농경의 융합을 이루어낸 아시아의 독특한 농경문화 복합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엽수림 문화론은 최종적으로는 크게 내용이 강화되어 여러 가지 재배식물의 이용 체계가 정리되면서 오늘날에이르고 있는 것인데, 기본적으로는 식물과 민족이 공존하는 상태의 계보를 해명하면서 농경문화의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라 한다. 조엽수림부터 평원으로 생활권을 확대하면서 화전·수렵·이주부터 정주·농경의 생활로 화전 기술을 계승하면서 발전시킨 민족은 연료로서의 목재, 먹을거리로서의 수목, 먹을거리로서의 풀, 무기로서의 식물 등등과 같이 세련한 작물로 성공해 왔을까? 여기에서 중요한 도구가 민족식물학이란 연구 분야의 지식이다.




민족식물학의 중요성


자연의 식생은 기후조건을 시작으로 하는 다양한 환경에 의하여 결정된다. 가장 중요한 항목은 온도와 물이다. 겨울의 추위, 여름의 더위, 그리고 1년을 통틀어 강수 패턴과 그 양이 생육하는 식물의 종류를 정하고, 그에 의존하는 동물들의 생활을 규정한다. 각각의 지역에서 정주하는, 또는 긴 거리로 이주하는 민족에게는 이용할 수 있는 식물의 종류에 각각 독특한 양상이 생길 것이다. 그들의 이용 형태를 체게적으로 민족별로 조사하고, 비교하면서 각 민족 사이의 관계성을 밝히려 하는 것이 민족식물학이다. 


이 경우 실례를 드는 것이 이해를 쉽게 해줄 것이다. 예를 들면, 인생의 윤활제로서 세계의 모든 민족이 개발하고있는 알콜 음료, 간단히 말하면 술이다. 누룩균을 사용한 2단계의 제주법은 이 조엽수림이 분포하는 지역에 특징적이라고 이야기된다. 식물 원료는 쌀이 주체이다. 그러나 향모 등의 잡곡을 사용하는 지역도 있다. 양자가 공통하는 바는 화전에서 재배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의류를 만드는 바에서는 명주를 재료로 이용하는 경우, 누에의 사료가 전제된다. 이러한 곤충의 고치를 이용한 실과 베의 개발도 조엽수림 지대 특유의 것인데, 벌레의 종류나 먹이가 되는 식물의 종류에 대해서는 민족·지역별로 조금씩 다르다. 어떤 이용 형태가 원형인지, 어느쪽이 파생계인지 세세한 비교조사를 바라지만, 그와 같은 조사에 재료를 제공해 주는 것이 민족식물학이다.


또 하나, 민족 사이의 비교에서 흥미로운 점으로 산초의 이용이 있다. 네팔에서는 평지의 네팔 사람은 별로 민물고기를 먹지 않지만, 고지의 셰르파족 등은 즐겨 먹었다. 그 조미료로 산초의 일종이 쓰이고 있다. 중국에서도 산초가 쓰이는 때는 물고기 요리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민물고기의 요리에는 으레 산초가 쓰인다. 한국에서는 그뒤 김치의 조미료로 유명해진 것처럼, 고추가 주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물고기에는 산초가 빠지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는 민물고기의 전형적인 요리는 장어의 꼬치구이이며, 반드시 나무의 싹(산초)을 곁들이거나, 산초의 가루를 곁들이는 것이 상식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식물 이용으로부터 각지의 문화 공통성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에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럼 민족식물학적 시점에서 본 조엽수림 문화의 특징은 어떠한 것일까? 지금까지 별로 적지 않은 것인데, 필자가 나카오에게서 들어서 인상에 남았던 것으로 식기의 이용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날마다 이용하는 젓가락이라든지 밥그릇에 대하여, 예를 들면 일본인에게 아직까지도 특히 강하게 남아 있는 것처럼, 개인개인의 소유가 강하게 강조되는 민족이 있다. 일찍이 일본은 밥상까지 각자였다. 가족 안에 있어도 식기에는 개인성을 인정한다는 생활감각은, 사실은 일본 이외에도 있다. 네팔, 부탄 등에서 일하는 짐꾼들에게 보이는 것인데, 각자가 식사용밥그릇을 몸에 지니고 행동한다. 그 한편으로, 그렇지 않은 민족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식기를 가공할 때 이용되는 중요한 식물에 대하여, 조금 기술해 놓고자 한다. 식품을 가공할 때에는 갈이장이가 쓰는 녹로가 독특하며, 또한 밥그릇이 되는 수목의 종류도 민족별로 편향된 데다, 마감법, 칠기로 가공할 때 나무진의 재료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 그 대표 사례가 옻이다. 일본의 옻은 귀화식물이며 원산이 아니었다. 조몬시대의 옻은 안남安南 옻(베트남)이라고 생각되는데, 우리나라에는 광역에서 전해지고 있다. 옻은 선구적 식물이라고도 생각될 만큼, 탁 트인 곳에 쉽게 정착하는 화전에 안성맞춤인 식물이다. 옻의 이용도 조엽수림에서 특유의 사정이다. 


이 책의 기고5에서 사카모토 이사무 씨가 논하고 있듯이, 종이의 문제도 흥미롭다. 나카오에 의하면, 본래의 종이는 식물의 나무껍질을 두드려 얇게 편 것이 시작이다. 당초는 의류를 만들거나, 신 등의 공물로서 세공되었는데, 그뒤 섬유를 풀어서 뜬다는 행정이 더해져서 견고한 종이 만들기 기술이 조엽수림대를 회랑으로 널리 각지로퍼졌던 것이다. 


또한 식물의 새싹과 잎을 먹는 문화도 조엽수림 문화론을 의론하려면 간과할 수 없다. 아까 문제삼았던 산초도 새싹을 먹는 때가 있기에, 이와 같은 '나무 나물'로 구분될 것이다. 그 의미에서 산초는, 사실은 남방의 뿌리작물농경문화와의 접점을 보여주는 식문화이다. 나무 나물은 바꾸어 말하면 잎을 쓰는 식물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한무리의 식물이다. 그 가장 전형적인 것이 차이다. 차 이용 문화도 조엽수림대에서 육성된 것이다. 네팔에서는 차가 자리기 어려운 고지(한해로 자라지 않음)에서는 근연종인 카멜리아 키시도 이용된다. 발효성이 약하지만 떫음은 충분하고, 이 조엽수림대에 사는 사람들의 기호에는 어긋나지 않는다. 다만, 차 이용의 문화는 조엽수림대에 특유이긴 하지만, 자신들도 음용하는 민족과, 재배와 차 만들기만 하고 음용하지 않는 환금작물로 재배만 하는 민족도 있기에 조사할 때에는 제대로 된 식물학적 기초지식이 요구된다.


잎을 이용하는 문화에서 또 하나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 자소이다. 식물학적으로는 들깨와 차조기이다. 본래는 기름을 짜기 위해 재배했는데, 종자를 먹거나, 잎을 먹거나 하는 것은 이것도 또한 아시아 특유이다. 더욱이 일본에서는 꽃이삭까지도 이용하는 지역도 있다. 문화의 물결 모양 전파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을지, 오래된 유형이 중심부터 멀어지는 방향으로 남겨져 있다. 우리 주위에 있는 식물을 이용하려 할 때, 이용할 수 있는 식물은 모두 이용하고 있는 느낌을 부정할 수 없지만, 가장 감탄하는 것은 카페인 식물인 차를 제대로 발견하여 식문화 안에 정착시켰다. 


이상 하나하나 세기에는 예가 너무 많을 만큼, 조엽수림대에서 식물 이용의 독자성은 두드러진다. 여기에서는 아래에서 조엽수림 문화를 특징지을 수 있다. 식물 이용의 하나인 차에 대한 탐색 및 정원수의 일부인 꽃나무의 고향인 중국이나 네팔, 베트남에서의 실제 탐색(탐험)에 대하여 기술하는 것으로 더욱 상세한 조엽수림 문화의 실태, 그 현재의 모습을 좇아 보고자 한다. 또한 이상 문제 삼았던 내용에 대한 나카오 사스케의 논고는 <나카오 사스케 저작집>(전6권, 홋카이도 대학 출판회)에 거의 모두 망라되어 있다. 이를 계기로 새삼스럽게 참조해 주신다면 고맙겠다.




조엽수림 문화론의 지표작물 -차


조엽수림 문화 복합이란 관점에서 농경의 기원을 설명했던 나카오는 조엽수림 농경의 지표식물 가운데 하나로, 차를 문제삼았다. 아래에서 차가 조엽수림에서 살고 있는 민족 안에서 어떻게 이용되며, 그 이용 문화가 어떻게 전파되었는지, 북부 베트남 오지의 조사를 주로 고찰해 보겠다.


차는 중국 남부에 분화의 중심을 가지고(Yu 1986), 그곳에서부터 주변 지역으로 분포를 넓혔다. 일본의 차는 중국 중남부에서 도입된 계통이 주를 점하고 있다. 또, 중국 중남부는 sinensis와 assamica의 분포가 겹쳐 있는 지역이며(Ming 1992), 오랫동안 기후변화로 서로의 분포지역이 남북으로 몇 번이나 이동했다는 점도 고려하면, 침투성 교잡이 발생해 복잡한 유전자 구성의 계통이 여럿 존재하게 된다. 이 지역에서 도입된 계통은 품질 성분 등에서도 다양성이 풍부하고, 차 재배화의 기원지라고 지목되는 지역이다.


차 식물, 기호음료 식물의 특징은 카페인을 성분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Kihlman 1977). 세계의 민족이 각각 독립적으로 이와 같은 카페인 식물을 발견하고, 재배화해 왔다. 차가 지닌, 또 하나의 중요한 특성은 카테킨(탄닌)을 다량으로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다. 카테킨은 최근 의학계에서는 충치의 예방, 구취 제거, 혈압 강하, 콜레스테롤 감소에 대한 이용이 주목된다(津志田 1990, 中林 외 1991, 村松 1991).


어쨌든 차는 각지의 민족이 그 생육 분포권에서 생활한다고 하면 반드시 주목하고 이용하는 것이 분명한 식물이다(中尾 1976, 松下 1998).


각지의 민족이 식물을 이용하는 경우, 특히 음용, 식용으로 이용하는 경우에 조리법, 보존법이 개발된다. 먼저 신선한 채로 이용하는 생식의 단계가 상당히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1년 중 식물을 이용할 수 없는 환경조건에서 생활하고 있다면, 특히 기후성이 강한 식물(먹을거리)에 대해서는 보존을 궁구할 것이다. 이 시점에서 조리·가공·보존의 수법이 개발되고, 또 식품으로서의 이용가치도 향상된다. 차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용법이 있고, 가장세련된 이용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음용이라고 하는 차의 이용에는 녹차, 반발효차, 홍차로 가공된다. 가공 순서는 날것, 말리기, 찌기, 데치기, 덖기, 발효시키기 등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수법이 응용되고 있다. 차에는 씹는 용품으로 먹는 이용도 있으며, 거기에는 찌기, 절이기, 발효시키기 수법이 조합된다. 그뒤에 건조시켜서 또 음용하는 경우도 있다(Le Bar 1967). 더 남쪽의 윈난과 동남아시아에서 차는 발효식품으로도 이용된다.


나카오는 조엽수림대에 사는 민족 특유의 기호로서, 끈적끈적한 식품이라고 점성 식품을 지적한다. 차는 이와 같은 특성이 있다. 또한 똑같이 쓴맛을 기호하는 경향이 강한 것도 지적한다. 차는 탄닌이 많아 상당히 쓰다. 차는 확실히 나카오가 지적하는 대로 끈적끈적한 식품, 곧 점성 식품으로서 조엽수림을 지표하는 농작물의 하나이다. 조엽수림 지대에서 특유의 식물 이용으로서 목본 식물을 주로 한 새싹과 잎을 식용으로 삼는 형태이다. 목본 식물을 식용으로 이용하는 형태의 전형이 차이며, 가장 오래된 시대의 이용법이다. 그것이 조엽수림대 남쪽의 끝에서는 미엔 등으로 남아 있고, 동쪽의 끝에서는 일본의 코이시차碁石茶로 남아 있다. 차는 많은 조엽수림 문화의 요소를 아우르는 흥미로운 식물인 것이다.





차를 찾아서 중국으로, 베트남의 산골로


중국부터 베트남에 걸쳐서 차를 기르는 민족으로는 다음의 네 어족, 여섯 민족을 들 수 있다(松下 1998). 즉, 먀오야오어족의 먀오족(苗 Miao, Hmong, Meo, Myao)와 야오족(瑤 Yao, Dao, IuMien, Youmien, YiuMien, Mien, Myen), 통·타이어족의 타이족(秦 Dai, Thai), 티베트·버마어족의 하니족(哈尼 Hani, HaNhi), 징포족(景颇 JingPo, Jingpho, Jingpaw, Chingpaw, Chingpo, Singfo, Kachin), 그리고 몽·크메르어족의 파라웅족(Palaung)이다. 그들은 본래는 쓰촨성에서 후난성에 걸쳐서 살고 있던 소수민족으로, 산에 사는 민족이며 생활의 장은 표고가 1500미터를 넘는 한랭한 지대에 한정되어 있다. 차의 나무는 열대 저지대에서는 흰개미의 해가 심하여 곧바로 말라죽어 버린다. 차를 기르면서 생활하는 데에도 흰개미가 서식하지 않는 고지대를 생활의 장으로 삼지 않으면 안 된다. 화전을 하면서 주거지를 이동할 때 차나무의 묘목을 등에 지는 소쿠리에 담아서 이동한다는 이야기였다. 도대체 차를 재배·이용하게 된 것도 산속을 이동할 때 목이 말라서 옆의 나뭇잎을 씹으면 기분이 상쾌하고 기운이 회복되었던 일에서 유래한다고 한다.베트남에서는 지금도 평지의 농민 사이에서 "생차" 이용이 있다(Huard and Durand 1954). 생잎을 손으로 비벼서 뜨거운 물을 부어 차로 마시는 것만이 아니라, 걸쭉한 푸른 즙의 국물 모양으로 아침에 일하러 가기 전에 매일 마신다. 기운이 난다고 한다.


필자는 일찍이 차의 문화 진흥에 몰두하고 있는 풍명회豊茗会(나고야시)의 현지조사에 동행하여, 북부 베트남의 소수민족을 방문했다. 현지에서는 Century Giant Tea Tree라고 부르고 있는 큰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는 것이 보고되었다(Tien 1993).


하노이에서 베트남의 차 수출공사의 이사장과 협의한 뒤, 빌린 랜드 크루저에 나누어 타고 출발. 목적지는 하노이에서 북쪽으로 향한 수웨이 양Suoi Giang, 표고 1400미터의 산악지대이다. 현지에 살고 있는 사람은 "몽족"이라 통역을 설명했는데, 미야오족이다. 수웨이 양이란 하늘의 개천이란 의미, 즉 '하늘의 강'이다. 수웨이양에 자생하는 차나무는 샨차였다. 잎은 조금 얇고, 대부분 잎 끝이 꼬리 모양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잎 가장자리의 톱니가 자잘하게 많다. 관계자의 이야기에 의하면 8만4500그루의 큰 차나무가 1000미터를 넘는 산 위에서 생육하고 있다고 함. 여기에서 하는 찻잎 따기는 나무 위에 올라가서 한다고 하여 유명하다. 현지에서는 수웨이 양의 차는 특별하게 높은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었다.


수웨이 양의 차에는 흰털이 촘촘히 나 있다. 털은 어느 쪽이냐면, sinensis의 특징이다. 따라서 여기의 샨형 차는 assamica와 sinensis가 분화하기 전의 미분화의 선조계이다. 여기에서 하는 제차법은 옛날부터 이른바 덖기이다.


두번째의 베트남 조사는 하장성의 오지에서 중국 국경까지 겨우 몇 십 킬로미터의 장소인 까오 보라는 마을이다. 이 지역의 샨은 탄베 샨으로 구별되고, 최고급 차가 생산되며, 반발효차 또는 홍차를 만들고 있다. 이 홍차는 매우 향도 좋고, 맛도 우등이며, 다르질링을 능가한다. 


우리들은 우선 마을까지 걸었는데, 점심을 휴대하지 않았다. 가는 길에 한 집에 들어가 점심을 부탁했다. 나온 밥은 쌀알이 가늘고 긴 찰밥이었다. 색은 흰색이 많았는데 그중에는 붉인색이라기보다는 팥색인 쌀알도 섞여 있다. 반찬은 양배추를 소금에 데친 것뿐. 식사가 한창인데 작은 소쿠리를 등에 진 30대 정도의남성이 이 '즉석 식당' 앞을 지나갔다. 소쿠리 안에서 시커먼 동물이 움직인다. 잘 보면 강아지이다. 반년 정도 길러서 먹는 것이라고 한다. 개를 먹는 문화권인 것이다. 베트남의 산골에서도 역시 개는 귀중한 단백질원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점심을 마치고서 또 산길을 가면 갑자기 여러 부인들이 모여 길 양쪽에 몇 십 명이나 늘어서 있다. 모두 멜대를 들고 있다. 카오 보 마을의 여성 대부분이 모여서, 마을에서 결혼한 젊은 부부의 집을 신축하기 위하여 지붕을 이는 재료를 여럿이서 나르는 중이라 한다. 한 단이 20-30킬로그램 남짓인 듯하고, 앞뒤로 한 단씩, 합계 두 단을 짊어지기 때문에 합계 50-60킬로그램이라고 하는 바일까?


약간 공기도 서늘해지고, 저녁 때라고 생각될 무렵에 카오 보 마을에 도착했다. 집은 고상식이며, 2층이 마루방이다. 구석에 침대가 놓여 있고, 정면은 신을 모시는 선반을 모신다. 주의하여 보면 좁은 통로가 있다. 그 속에 공간을 두었다. 딸 방이다. 밤에는 이 방의 출입을 가장이 감시할 수 있는 체계인 듯하다. 이 집에는 작지만 전구가 비추고 있다. 개천의 흐름을 이용한 초소형 수력발전기가 그 전원이 된다. 이 마을의 주변은 큰 차나무가 번식하고 있다. 차나무 사이의 도처에 흙무덤이 발견된다. 묘이다. 이 마을사람의 생활 기반을 지탱해 온 차나무를 이번엔 죽은 마을사람이 지탱하는 유기질이 된다. 


촌장은 아직 30대 중반으로, 화롯불을 쬐면서 떡고치 모양인 것을 불에 굽고 있다. 이곳은 떡 문화권인 것이다. 집 안에 신을 모신 선반이 있었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금줄이 가로로 쳐져 있고 좌우에 금줄 장식이 달려 있다. 어슷하게 베어낸 자국을 넣고, 그곳을 다시 접어 또 아래로 베어낸 자국을 넣고…… 하듯이 3번 되풀이한다. 신을 모신 선반에 부족의 유래를 적어 넣은 옛날 식으로 매어 놓은 책이 있었다. 한자로 써 있기에 이 젊은 촌장은 읽지 못한다고 한다. 자신의 숙부들이라면 읽을 수 있다고 한다. 외떨어진 곳에있는 차산은 부인회가 관리한다.


그리고 식사의 준비이다. 닭을 두 마리, 큰 솥에 삶고, 다음으로 깃털을 잡아 뽑았다. 더욱 놀라운 점으로는 닭을 삶은 솥의 물이 그대로 국물이 되었다. 채소를 아무렇게나 넣고 완성이다. 닭고기의 잘게 찢은 것이 주요리, 그 주위에 잘 우린 국물, 또 그 주변에 색색의 채소라기보단 들풀의 나물, 콩을 넣은 현미죽, 그 다음에 찐 지에밥, 뒤따라 구운 요리도 나왔다. 조미료는 소금이 주이다.


다음날 산까지 올라가 차나무를 조사하고, 그날 안에 또 하장의 읍내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해돋이 전에 마을을 출발해 가는 길에 아침밥을 먹으면서 가고, 점심 전에는 산을 내려가기 시작해야 마을에서 4-5시간은 걸리는 것이다. 표고차로 1000미터 이상을 가야 한다.


이 집의 어른이 다음날 새벽 차산으로 향하는 우리들을 위하여 도시락을 준비해 주었다(그림5-1). 쌓여 있는 벼이삭을 배 모양의 절구에 찧어서 절구공이로 탈곡한다. 역시 낟알 색은 붉다. 찹쌀이다. 나이 먹은여성은 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검게 물들어 있다. 빈랑이다. 그러나 눈썹도 얇다기보다는 뽑은 듯한 느낌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관점에서의 조사가 필요할 것 같다.


그림5-1 베트남 산골에서 도시락 만들기




이튿날도 새백에 출발했다. 집의 현관을 나올 때 각자 한 잔의 술을 대접받았다.


조금 평평해진 장소를 통과한다. 저 앞에 한 그루의 귤나무가 있다. 일본의 기주밀감이다. 여기부터 급경사가 1시간, 산꼭대기의 차 원생림에 도착한다(그림5-2). 돌아갈 시간을 계산하면 30분 정도밖에 시간 여유가 없다. 먼저 종자를 찾아서 채집하고, 다음으로 꽃을 찾아서 암술의 휴대를 조사하여 기록했다. 또 유달리 눈에 띄는 나무의 사진도 촬영했다(그림5-3).


그림5-2 베트남의 큰 차나무



그림5-3 베트남 큰 차나무의 꽃, 옅은 분홍색




동행한 베트남 국립 차 시험장의 육종연구실장 트앙 박사는 안내하면서 3년 전에 그의 학위논문 연구를 위해 나무마다 조사를 행했다고 설명한다. 그 때문에 어느 나무에나 페인트로 번호가 적혀 있다. 34번 나무가 가장 품질이 좋은 정예 나무로서 하장시 근처의 비 슈엥Vi Xuyen에 있는 증식시험지에서 대량으로 삽목 번식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카오 보 마을의 탄베 마을의 사람들도 차를 제조하고 있지만, 새싹의 가지치기를 할 즈음에 가지마다 베어 놓고나서 잎을 잡아 뜯는 것이 찻잎 따는 방법이며, 이때 찻잎 따는 노래를 부른다. 잎을 딴 가지는 태우게 된다. 이와 같은 가지마다 베는 일부터 잎을 잡아 뜯어 수확하는 일은 오래된 유형의 차 제조법이라 생각한다. 일본에서 에도 시대 이전의 가을철 차 만드는 법과 공통된다. 일본의 시코쿠 지방에 전하는 흑차 등도 가지마다 수확한 뒤 끓는 물을 부어 잎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제차(이 경우는 절임 차이지만)를 행한다. 나뭇잎을 '먹고' 있었을 무렵부터의 차 이용 형태의 자취일지도 모른다. 산에 거주하는 사람들 특유의 이용법이라 생각한다면, 일본부터 중국, 그리고 베트남과 차의 이용 방법 가운데 하나는 매우 유사한 것이다. 


하장의 차는 다른 베트남의 녹차와 달리 탄닌 함량이 비교적 낮고(17.7-19.9%) 전체적으로 발효성도 중간 정도(10단계로 구분하면 4-6)와 변종 앗사미카assamica 중에서는 더욱 변종 시넨시스sinensis에 가까운 것이 특징이다. 암술의 암술머리 유형도 깊게 갈라지고, 게다가 끝이 직각 모양에는 굴국 없는 것이 섞여 다양성이 풍부하다. 이번에 조사한 차나무는 여러 가지 특성이 다양하게 조합되어 확실히 유전적 다양성이 높다. 이중에서 시네시스 같은 특성이 강해지는 방향으로 변화하면서 동쪽으로 분포를 넓히는 진화와 아사미카 같은 특성이 강해지는 방향으로 변화하면서 서쪽 및 남쪽으로 분포를 넓히는 진화가 일어났다고 하는 이야기를 그릴 수 있다. 그리고 그 무대는 조엽수림의 안이었다. 소수민족이 작물로 길러내 중국, 일본, 인도에서 차업茶業이 흥하여 차 문화가 발전했다(그림5-4).


그림5-4 베트남의 차 만들기





네팔의 산골에서


그리고 다음으로, 화훼 식물을 둘러싼 네팔 유전자원 300만 걸음의 여정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다. 첫번째 꽃의 유전자원 해외 탐색은 철쭉과 백합으로 결정되어 내가 리더로 네팔의 원생림을 걷게 되었다. 네팔 원산의 식물로서, 특히 목표가 된 것은 Rhododendron arboreum와 Lilium nepalense이다. 유전자원 탐색이란 것은 생물이 가지고 있는 유전적인 특성으로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특성만이 아니라, 언젠가는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특성까지 포함하여 많은 농작물의 품종을, 장래를 위해 수집보존하고자 하는 사업이다. 나 자신은 철쭉 이외에 동백나무나 차에 대해서도 연구를 하고 있으며, 나카오가 걸었던 길을 30년 가까이 지났기 때문에 다시 더듬어 가는 일에 감격하고 있다. 출발까지에는 여러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어 준비에는 3개월 정도 걸렸다. 이번 회의 목적인 석남화·철쭉과 백합의 채집은, 다른 탐색 팀과 달리, 완전히 야생종의 수집이다. 


비행기는 나리타에서 방콕, 방콕에서 카투만두 행으로 갈아탄다. 지금까지의 다른 탐색대가 방콕에서 큰 실패를 하고 있다는 것은 슬며시 들었다. 그들은 공무원의 습성 때문인지 세금으로 출장가는 것을 좋은 기회로 틈타, 돌아오는 길에 조금은 관광을 하기 때문에 돌아가려고 일찌감치 탐색을 종료시키고 다른 데 들러서 놀다가 돌아오려고 할 터이다. 방콕은 그와 같은 목적에서 일시 기항하여 2-3일 시간을 보내는 데에 매력적인 도시이다. 그러나 일시 기항이라도 2-3일 체재하는 경우, 수하물을 가지고 공항에서 나가려고 한다면 채집품인 살아 있는 식물은 태국 국내에는 가지고 들어가는 게 금지되기 때문에 세관에 맡기게 된다. 맡긴 사이에 온도가 너무 오르거나, 무덥거나, 여러 가지 일로 소중한 재료가 말라 죽어 버린다.


방콕을 떠난 제트기가 고도를 낮추어 몹시 거칠게 착륙하면, 그곳은 카투만두의 공항이다. 트랩에서 내리지만 버스는 없다. 에이프런 자체도 없는, 일본의 지방 공항과 같다. 네팔의 탐험은 걷는 것이 기본으로 셰르파의 확보가 중요하고, 홀연히 네팔에서 으뜸가는 유능한 셰르파의 한 사람, 안젤첸 셰르파에게 전화를 걸어 이튿날 면회를 예약했다. 


다음날 빨리, 일본대사관에 인사차 찾아뵙고, 네팔에서의 편의 제공이라든지, 만일의 사태에 주의점 등 서로 이야기했다. 다음으로 일단 JICA 사무소에 가서, 다시 소장인 오노小野 씨를 시작으로 현지 직원 모두에게 인사했다. 여기에서 입수가 곤란했던 현지의 상세한 지도를 받을 수 있었다. 대사관의 다음은 네팔 당국, 즉 약초국 식물연구소 국장인 마라 박사와의 교섭에 나섰다. 면회는 마라 박사와 배양연구실장인 라지반타리 박사 두 사람이 상대였다. 그럭저럭 이번회의 탐색계획의 승낙을 받고, 채집의 성과는 반분하기로 결정했다. 


그뒤 약초국의 연구실과 식물원을 안내받았다. 이 약초국은 고다와리에 있고, 카투만두의 교외에 있는 경치 같은곳이며 관광객도 방문하는 곳이다. 이 건물 입구의 기둥에 휘감겨 있는 덩굴풀에 파이프 모양의 갈색이 나는 꽃이 피어 있었다. 안내를 맡은 마라 박사가 무언가 이야기하려고 하기 전에 즉각, 이것은 아리스토로키아(쥐방울덩굴속)이라고 내가 말하자, 곁에 있던 로이 씨가 아리스토로키아 나카오이라고 설명했다. 그 나카오이는 사스케나카오이라는 교수이다. 나는 교수 나카오의 마지막 제자이다. 그의 제자 가운데 꽃을 특별히 연구하고 있는 건 현역에서는 나뿐이다. 이런 상태에서 이야기가 활발해지고 모두 마음을 터놓을 수 있었다.


힘든 첫날의 오후는 셰르파의 확보이다. 안젤첸의 사무소까지 갔다. 셰르파 3명과 요리사 3명이 필요, 비용은 이정도라고 조건을 제시해 주었다. 안내하는 손님 1명, 하루에 30달러, 즉 4명이 16일 동안 합계 1920달러. 예산보다 130달러 초과이지만, 계약이 성립되었다.


이튿날 아침, 호텔의 로비가 왁자지껄했다. 아직 어둑어둑하다. 랜드크루저가 오고 있다. 이제 출발하고, 포카라까지는 열대를 통과하게 된다. 네팔 유전자원 300만 걸음이란 여정의 시작이다. 셰르파 선두는 안니마 셰르파, 보조는 린지 셰르파이다. 후미는 텐진 셰르파가 포카라에서 합류하는 것으로 셰르파는 3명이다.


가는 길에 찻집에서 휴식. 간신히 발을 뻗는다. 카레 맛의 콩과자와 달콤한 홍차, 이것이 짜이이다. 유리잔에는 몇 마리의 파리가 머물고 있다. 


민물고기를 굽고 있기에, 주문하여 먹어 보자 이것도 맛있다. 양념으로 산초를 쓰고 있다. 네팔에서 민물고기를 먹는 건 산의 민족이 보통이고, 평지의 부족은 원래는 먹지 않는다고 한다. 이번 장의 모두에서 언급했듯이 물고기 요리와 산초의 조화는 히말라야부터 일본까지 조엽수림대에 전해지는 식문화이다. 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민물고기에는 산초를 많이 쓴다. 일본에서는 장어와 산초가 조화가 되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포카라에는 3시 넘어 도착. 광장에 도착하자마자 마을사람이 여럿 모여 들었다. 안니마가 여러 가지 지휘하고 있다. 짐꾼을 고용하고 있는 바일 것이다. 23명을 고용했다. 곧바로 걷기 시작한다.


드디어 본격적인 탐색이다. 7시 15분에는 출발이다.


네팔의 산에 들어가 감탄하는 것은 밤하늘의 별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렇게나 많은 별이 있는 건지 불가사의할뿐이었다. 카시오페아는 현지 이름으로 초타라, 북극성은 프루바, 묘성은 스그로이다. 별이 총총한 하늘을 관찰하는 건, 그렇지만 발 밑에 충분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 근처가 화장실이며, 밤중이나 새벽녘, 심할 때는 낮의 분실물이 여기저기에 그대로 놓여 있기 때문에, 밟으면 나중이 매우 성가시다.


오늘도 7시 반에는 출발한다. 예정은 비레탄티까지이다. 길가에는 만수국아재비가 피어 있다. 꽃은 확 눈을 끌지않는다. 풀 전체가 유별나게 구린내가 난다. 여기저기의 신에게 이 꽃이 바쳐지기 때문에, 로이 씨에게 들으니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풀이라 우선 신에게 바쳐지는 꽃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사고방식이다.


이 부근부터 주변의 숲속에 카멜리아 키시가 여기저기 조금씩 보이게 되었다.(그림5-5). 히말라야에서 잘 알려져 있는 차 식물이다. 흰꽃이 예쁘다. 원래가 내한성이 있는 식물이며 고도는 1600미터 부근부터 출현한다. 차(카멜리아 시넨시스)의 대표로서 귀중한 존재이다. 사람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차를 마시고자 하는 것이다. 네팔의 홍차는 다르질링에 버금가게 풍미가 굉장하다. 중국에서 오래전 시대에 도입된 영향으로, 생산고가 적어서 세간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림5-5 네팔의 울창한 석남화 숲




오늘날 볼만한 곳은 유명한 울레리 고개로서, 이곳은 히말라야 벚나무의 꽃구경을 할 수 있는 곳으로 히말라야 도로에서는 유명한 곳이다. 그렇지만 고도차가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 험한 곳이기도 하다. 도로 연변의 민가 지붕에는 오이 같은 덩굴풀이 우거져 있다. 잘 보면, 소형 여주 같은 열매가 달려 있다. 주변을 둘러보면, 이 과실을 잘게 잘라 말리고 있는 곳도 있다. 채소인 것이다. 게다가 건조하여 보존식도 되는 편리한 것이다. 현지 이름은 카라리. 이 채소만은 정체를 알 수 없다. 아마, 쥐참외의 무리일까?


이제부터가 공포스런 울레리의 가파른 언덕이다. 비스타레로서, 천천히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곳의 벚나무는 프루너스 세라소이데스Prunus cerasoides, 히말라야 벚나무로 유명하다. 벚나무 중에서는 비교적 진귀하게 10월부터 꽃이 핀다. 길가의 논은 벼베기가 끝나, 축제의 준비를 하고 있다. 긴 대나무를 3개 조합하여 교차되는 아래의 한가운데에 그네를 단다. 현지인은 핑이라 부른다. 여기에 타서 힘껏 발을 굴러 가능한 한 높이 오른다. 높이 오르면 오르는 만큼 신에게 축복을 받고, 수확의 감사를 표하는 것이기도 하며, 내년도 풍년이 든다고 한다(그림5-6).


그림5-6 네팔, 그네에서 노는 셰르파



네팔 나리 쪽도 정부 수집을 시작했다. 차집 등으로 슬며시 찾으러 간다. 사전에 조사해 놓은 지식으로는 현지 이름은 키로우레였다. 그러면 알고 있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살고 있는 곳을 알고 있다고 하여 보러 가면, 안타깝게도 그것은 둥글레였다. 키로우레는 백합을 가리키거나, 네팔 나리를 가리키거나 두 의미가 있다. 또 하나의 현지 이름은 라순이다. 이것에 '숲의'라는 의미의 단어 반을 붙여서 반 라순이라 부르면 키로우레가 된다. 그러나 백합인지, 둥글레인지는 구별할 수 없다. 귀찮은 것에, 비슷한 단어로 반 라숨이 있다. 우리들에게는 이 미묘한 발음의 차이가 들리지 않았다. 반 라숨은 마늘이다. 숲의 마늘이다. 네팔에서는 고지가 되면 고지계의 주민, 셰르파족과 타카리족의 세력 범위이며, 셰르파어가 된다. 네팔어와는 다르기 때문에 이 점도 성가시다. 


목적지인 고레파니(푼힐)가 다가옴에 따라, 바르바텀barbatum 석남이 나타났다. 꽃자루에 털이 많은 것이 특징인데, 개체변이가 심하다. 여기에서는 수목원과의 사이에서 자연교잡이 일어난 것이다. 이와 같은 잡종 집단은 신이 육종해 준 것이기에 신중히 조사하면 재미있는 것이 발견된다. 되도록 흰꽃 개체와 붉은꽃 개체로 구별하여 종자를 모았다.


고레파니는 교통의 요지이다. 많은 산막이 시끌벅적하고, 도보여행자가 끊임없이 오고간다. 산악자전거로 통과하는 용사도 있다.


고레파니의 푼힐 언덕은 민둥산이 되어 있다. 예전에는 울창했던 정글이었다. 원인은 여럿이 캠핑하여 땔감으로 석남을 베어버린 것, 숙박객이 고기를 먹고 싶어하는 백인이 주였기에 가축을 방목하여 초지를 없앤 것, 여러 사람이 자연을 마구 짓밟은 것, 산막을 더욱더 세운 것, 여러 가지가 뒤얽혀 아름다운 숲과 초원이 헐벗게 되어 버렸다. 혹독한 환경의 토지에서는 자연의 복원은 곤란하다. 숲의 자연이 빈약해지면 그것을 이용하는 자연의 은혜도 사라진다는 건 뻔하다. 맛있는 꿀도 언젠가는 귀중품이 되어 버릴 것이다(그림5-7).


그림5-7 네팔의 꿀 따기, 꿀벌의 집




베어내어 곧바로 태우는 건 석남화뿐인 듯하다. 1밀리미터의 간격 사이에 30개 이상의 나이테가 새겨져 있다. 이런 귀중한 석남화의 큰 나무가 완전히 사라지고 있다. 이 부근부터, 또 다른 석남화, 레피도텀lepidotum 석남이 발견된다. 고도는 3000미터였다. 미끄러져 떨어지면 700미터 아래의 강까지 멈추지 않고 떨어질 수밖에 없는 급경사의 벼랑에서 전전하며 생육하고 있는 것이 레피도텀이다.


지금까지 그럭저럭 석남은 채집할 수 있었는데, 네팔 나리의 알뿌리를 찾아야 한다. 또한 돌아갈 일자를 생각하면 슬슬 한계일지도 모른다. 귀국까지 채집품의 조정 일수를 고려해도 빠듯하다. 11월 19일이 항공권의 예약일이다. 네팔 나리에 대해서는 카투만두 근교에 산지가 있으며, 그곳에서의 채집도 몰래 예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타토파니에서 되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이 부근의 밭은 향모의 밭이다(현지 이름 코도). 옆에는 실파 같은 것(현지 이름 피에투), 마늘(현지 이름 라숨)이 심어져 있다. 이번회는 채집하지 않았지만, 실파는 일본 특산인데 이것은 무엇일까?


점심까지 타토파니의 캠프로 돌아가자, 로이 씨와 텐진이 네팔 나리의 알뿌리를 펼쳐서 구르와 오쿠다 씨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알뿌리는 26알이었다. 또한 네팔 나리는 타칼리어로 '푸나' 또는 '푼'(모두 꽃이라는 의미)이라 부르고 있단 것도 알았다. 


이 네팔 나리를 발견한 데에는 지혜를 발휘했다. 네팔 나리는 생으로도 먹을 수 있을 정도, 새싹도 알뿌리도 맛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꽃이 피기까지 크게 자란 것은 드물다. 로이 씨와 텐진은 아이들에게 어느 부근에서 언제나이 나리의 새싹을 땄는지 생각해 보라고 하여 여기저기 파내어 이만큼의 알뿌리를 찾아내 돌아왔다. 보고서에 쓸사진을 찍고, 소중히 포장해 가지고 돌아오게 했다.


네팔 나리의 알뿌리는 채집할 수 있었기에 이번회의 임무는 거의 완전히 목적을 달성했다.


오늘이 최후의 트렉킹으로, 포카라까지 가는 도정은 신바람이 났다. 텐트 생활도, 캠핑 요리도 드디어 마지막이다. 아침밥은 차파티, 달걀 푸딩, 죽. 조금, 더워진 숲속의 길을 나아가자, 갑자기 눈앞에 예쁜 호수가 보였다. 포카라의 페와 호수이다. 호수의 주변은 논이 되어 있고, 마침 수확기라 이삭의 물결이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페와 호수는 동양 제일의 아름다운 호수라고 칭송되는 일이 많다. 참으로 그렇게 생각되는 아름다움이다. 마차푸차레 꼭대기가 옮긴 호면은 정말 아름답다. 


카투만두에 돌아와 이튿날은 JICA 사무소에 인사차 들렀다. 내일은 로이 씨에게 부탁했던 네팔 나리의 자생지, 푸루초키산으로 안내를 받을 것이다. 


고다와리의 약초국에 들러, 마라 박사와 라지반다리 실장에게 이번회의 탐색이 순조롭게 이루어진 일, 채집품은 반분하여 나누고 로이 씨에게 부탁한 일, 앞으로의 보고논문에 대해서는 공동으로 발표하는 일에 대하여 다시 확인을 했다. 차량의 수배를 하는 사이에 식물원 안을 천천히 견학했다. 높이 5미터 정도의 달리아에는 놀랐다. 이것은 나무 달리아로서 상당히 뒤늦게 일본에 붐을 일으킨 꽃이다. 랜드크루저의 준비가 되어, 푸루초키로 출발했다.


정상에는 시바신을 모신 사당이 있고, 그 뒤쪽에서 많은 네팔 나리가 발견되었다. 종자를 달고 있다. 대량의 종자를 채집할 수 있었다. 알뿌리도 캐냈다. 





중국의 산골로 차를 찾아다니다


조엽수림 문화 복합이란 관전에서 보았을 경우 차는 조엽수림 지대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에 매우 밀착된 다양한특성이 있으며, 지표성이 높은 식물로 받아들일 것이 많다. 조엽수림에 거주하는 민족 안에서 차는 어떻게 이용되기 시작하고, 그 이용 문화가 어떻게 하여 주변으로 전해지면서 세련되어 갔을지 그 매력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차라는 식물의 특징으로 대형 잎이 달리는 차나무가 알려져 있고 코로라고 부른다. 유전학적으로 코로의 형질은 열성 형질이고, 호모 접합체가 이와 같은 특징을 나타낸다. 흥미로운 점으로, 일본의 엘리트 품종 '야부키타'가 이 코로 유전자를 이형 접합의 상태로 보유하고 있다. 멘델의 법칙으로부터 '야부키타'를 편친으로 하여 여러 가지로 교배하여 자식으로 코로 개체가 출현한다면, 또 하나의 품종(개체)도 코로 유전자에 대하여 이형 접합체인 것이 판정될 수 있다. 일본, 한국, 중국의 어디에 이 '코로' 유전자가 분포하고 있는지 각지에서의 유전자원 수집 계통과 '야부키타'와의 교배 시험을 진행하는 것과 병행하여, 나의 코로 차나무 탐색의 편력을 시작했던 것이다.


중국의 국립 농업과학원 차엽 연구소가 소유하는 녹차 유전자원의 보존원에는 여러 가지 코로 차나무가 존재한다. 중국 이외에 자생하는 코로형 차나무는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코로는 중국 남부에서 생긴 돌연변이 유전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차는 각지의 민족이 반드시 주목하여 이용하는 것이 분명한 식물이며, 조엽수림을 본거지로 하는 민족 모두에게 이용되고 있던 식물이라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가장 단순한 차의 이용법은 생잎을 그대로 먹거나 마시거나 하는 것이다. 베트남 최북단의 지역에 조사하러 갔을때, '생차'의 두 가지 이용법을 보았다. 하나는 생잎을 부비거나, 또는 비벼서 뭉개고 나서 뜨거운 물을 부어 걸쭉걸쭉한 스프처럼 만들어 그대로 그릇에서 마시는 이용법과 손으로 생잎을 부벼서 갈아 차주전자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붓고 나서 찻잔에 따라서 마시는 유형이다. 


다음으로 보존의 일이다. 그대로 말리면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차는 그대로는 성분의 분해가 일어나기 때문에 간단한 가열의 공정이 더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철기를 이용할 수 없는 시대는 조리기구는 토기이며, 이때에는 데치든지(삶든지), 찔 수밖에 없다. 몇 가지 패턴이 나온다. 하나는 대나무통에 꾹 담아서 흙속에 묻거나, 또는 나무통 같은 큰 용기에 담아서 일정 기간 밀폐해 놓는 것이다. 앞의 것이 죽통차, 뒤의 것이 미엔(레페토)이다. 어느쪽이든 보존 기간에 발효되어, 약간 시큼한 풍미가 있다. 또한 탄닌도 남아 있고, 쓴맛도 있다. 나는 이와 같은 절임으로 먹는 이용법이 비교적 오래된 유형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의 물결 모양 전파의 법칙으로부터, 먹는 차의 분포권은 차 문화 중심의 주변부이기 때문이다. 반대쪽, 동쪽의 주변부에는 가루로 내어 마신다는 말차 형태의 이용법이 남아 있다.


다음으로 본래의 차 이용 문화의 중심지인 중국에서는 세게 쳐서 굳히고 나서 건조시킨 고형 차(단차団茶, 경차餅茶)의 이용이 있다. 고형 차는 이용할 때에는 깎고, 갈아서 약연으로 가루로 내고 나서 뜨거운 물에 넣고 뒤섞어서 마신다. 잎 전체를 이용하는 것으로는 먹는 차와 똑같은 범주에 포함될지도 모른다. 


뜨거운 물에 데치거나, 찌거나 한 뒤, 그대로 말리고, 가루로 내고 나서 앞의 고형차와 마찬가지로 하여 마시는 것이 일본에만 남아 있는 '말차'이다. 일본에서는 그뒤에 찐 잎을 손으로 부벼서 말리고 나서 뜨거운 물을 부어 추출한 성분만 즐기는 전차가 발달했다.  중국에서는 솥에 덖는 제법이 개발되어, 중국 녹차로 진화해 갔던 것이다. 


아시아에서는 조엽수림 안에 거주하는 민족에 발효 기술이 있으며, 차도 발효식품으로 이용하는 형태가 있었던 것이다. 차는 이와 같은 특성이 있기 때문에 끈적끈적 식품, 또 점성 식품으로 조엽수림을 지표하는 농작물의 하나로 생각할 수도 있다. 차의 이용 문화가 조엽수림을 나와서 한민족의 차 문화, 즉 마시는 차의 문화로 성숙을 시작해 그것이 또한 새롭게 주변의 여러 나라로 전파되어 갔다. 


조엽수림 지대에는 열대 지방으로부터의 연속성이 있는 목본식물을 주체로 한 새싹과 잎을 식용으로 삼는 나무나물 이용의 형태가 있다. 예를 들면, 산초(나무의 싹), 으름덩굴, 오갈피나무, 두릅나무(두릅나무의 싹) 등이며, 차도 잎을 먹는 형태가 있기 때문에 이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차는 많은 조엽수림 문화의 요소를 겸비하고 있는흥미로운 유용식물인 것이다. 


아주 최근의 새로운 발견에 대해서도 기술해 두고 싶다. 벼농사 기원의 유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중국 저장성허무두河姆渡 유적에서 탄화된 차나무라고 생각되는 나무의 그루터기가 발굴된 것이다(그림5-8). 6000년 전의 것이라 동정되기 때문에, 재배화된 벼를 기르면서 차를 마시고 있는 고대인이 생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상다반사'의 기원이 거기에 있었던 것일까? 조엽수림에 가려진 배후의 구릉지를 조망하며 천천히 차를 즐기는 사람들가운데, 일본까지 건너온 사람들이 있었던 것일까? 나카오 사스케가 외쳤던 조엽수림 문화론은 장대한 낭만을 북돋우면서 계속 발전한다.


그림5-8 전라산 유적 출토의 차나무 같은 그루터기





마치며


사람들이 살아가려면 주변의 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자원이 민족의 존속을 규정하는 기본이다. 그렇지만 각 민족은 각각 독특한 대처 방법, 즉 계승하고 있는 생활문화의 틀 안에서 이 주변의 환경을 어느 정도는 개변할 수 있다. 또한 민족이 생활하는 주변의 환경은 고정적인 것이 아니다. 생태학에서 익숙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만, 주변의 환경은 시간과 함께 생물적인 이유(예를 들면, 종 사이의 경쟁 그외의 요인)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이와 같은 환경과 민족의 진보, 문화적인 내용의 발전에 대하여 동적인 상호관계를 이해하려면 시간축을 정확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눈앞에 있는 다양한 민족과 환경의 상호관계는 역사적인 산물이며, 식생 천이의 영향도 받으면서 민족의 활동에 의한 변화, 그에 수반한 한층 더한 변화의 복합산물이며, 어느한쪽에서의 고찰로는 민족 문화의 계보를 해명할 수 없다. 


조엽수림 문화론을 만들어 낸 나카오 사스케의 학문 체계의 배후에는 자연을 시간축, 생물 사이의 상호작용, 그리고 민족과의 상호작용을 충분히 염두에 둔 치밀한 해석이 있으며, 더욱이 민족 사이의 문화, 특히 농경문화를 비교할 때에는 매우 대담하게 공통적인 요소를 통찰하면서 유사성과 비유사성의 진폭을 실로 면밀하게 분류한다.분류란 서로의 계통 관계를 분명히 하는 작업이며, 이 과정에서 민족 각각의 계통, 농경 기술의 계통 등이 밝혀진다. 이와 같은 비교 작업을 할 때, 특히 유효한 수법이 식물 등의 이용, 즉 재배화해 온 것인지를 비교하는 일이다. 


민족에게 특유의 문화는 의·식·주로 표현되는데, 민족의 독자성은 언어와 신앙(종교관)에 강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신앙에 얽힌 다양한 관습, 행사에는 식물이 밀접하게 관계되는 일이 많다. 게다가 그 관계성은 매우 보수적이다. 식물의 생육은 기후적, 토양적, 다양한 환경 요인으로 규제된다. 큰 폭의 기후변화가 있었을 경우, 또는 대규모로 먼 곳으로 이주했을 경우에는 민족의 생활에 밀접하게 관계되는 식물의 종류 조성도 변화한다. 그경우에 어떻게 대체가 되는 소재를 찾아서 타협을 해 가는 걸까? 또는 어디까지 원래 이용했던 식물종에 구애되고, 조금은 재배적인 수법을 찾는지, 교역으로 먼 곳에서라도 가져오는 걸까? 또는 다른 환경으로 이주하는, 그와같은 일을 거듭하면서 민족이 이용하는 식물의 종류, 이용 수법이 변화해 간다. 어느 경우가 본질적인 것이며, 어떠한 경우가 편향된 것인지 각 민족 사이의 비교, 역사적인 변천의 고찰을 식물과 인간의 생활의 관계를 밝히면서 행해야 한다. 조엽수림 문화론은 정말로 그러한 검토의 의의를 현대의 우리에게 아직도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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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4

 

 

 

기고5

나카오 사스케中尾佐助 '종이의 타파tapa 기원설' 재고

사카모토 이사무坂本勇

 

 

 

 

 

나카오 사스케의 '종이의 타파 기원설'

 

조엽수림 문화론을 제창하고, 조엽수림대에 있는 옻나무, 차와 나란히 꾸지나무에 관심을 쏟았던 나카오 사스케(1916-1993)은 <조엽수림 문화와 일본>(1992년 출간)에서 '종이의 타파 기원설'을 외쳤다. 하지만 종이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고, 큰 화제가 되지 않은 채 현재에 이르렀다. 오날늘 읽으면, 그 미래를 쏘는 듯한 통찰력에는 감복한다. 

 

나카오는 현지조사를 거듭해 왔던 체험 속에서 "중국인의 한대에 있던 종이의 발명은 중국 서남부의 소수민족 타파를 모방하여 낡은 의복을 폐물 이용했다고 본다면 모두 잘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종이의 기원을 타파 기원이라고 하는 새로운 설이다. …… 종이는 조엽수림 문화가 그 뿌리에 해당한다"고 그 책에서 기술하고 있다. 그뒤 최근 몇 년의 일이지만, 인류에서 최초로 바다로 배를 저어 나갔던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조사연구가 세계적으로 성행하여, 목표는 멀지만 가까스로 나카오의 새로운 설이 빛을 되찾는 물적 자료가 나오기 시작했다.

 

확실히 타이완이나 중국 남부를 연고지로 하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사람들이 신석기시대에 최초로 만들었던 것은 종이가 아니라 '나무껍질 베'였다고 생각하는 게 올바를 것이다. 그러나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제사의식용으로 '베'라든지 '종이'라든지가 혼연일체가 되었던 사용법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뒤에 기술하듯이, 조금 전까지 인도네시아 발리섬의 힌두교 성직자 집단에서는 나무껍질의 사용법은 베라고 보든지 종이라고 보든지,어느쪽이든 명백하지 않은 고대의 모습이 남아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일본의 <고사기>에서 뽕나무과의 꾸지나무나 닥나무를 원료로 한 '시로니기테白和幣'(원형은 아마 짜지 않는 타파와 같은 것이라 생각됨), 뽕나무과의 아마떼를 원료로 한 마야, 아스텍의 '방혈 의식용 코덱스' '제사용 의상'이나 인도네시아, 태평양 제도의 '장신구'로 간주되듯이, 현대의 감상에서 본다면 '나무껍질 종이 Beaten Bark Paper'로서 취급할 수 있는 형태의 것이 각지에 존재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제작용 도구의 측면에서, 또는 각지의 사용 사례에서 보아 '나무껍질 베용'도 '나무껍질 종이용'도 마찬가지이든지 매우 닮은 경우가 많으며, 기법적으로도 큰 차이가 없었다.

 

지금까지 나카오와 마찬가지로 '종이의 타파 기원설'을 발상했던 연구자는 그밖에도 있으며, 타이완 중앙연구원 민족학연구소의 초대 소장을 지냈던 능순성凌純聲(1902-1981)과 딸인 능만립凌曼立 씨, 그리고 W. 에버하드Eberhard(1909-1989), P. 톨스토이 씨, 사카모토를 여기에서는 들어 놓는다. 

 

 

 

'종이'는 어떠한 기술적 변천을 했을까?

 

지금까지 '종이의 타파 기원설'은 묻혀 왔다. 그것은 이 설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극도로 적었던 점과, 최근의 화학 섬유를 사용한 종이가 등장하기 전에는 '종이는 물에 원료 섬유를 분산시켜 떠서 올리는 것'이란 정의가 있어,물에 섬유를 분산시키지 않는 파피루스, 양피지, 타파 등은 종이의 종류에 포함하지 않고 별개로 취급하는 사정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일본 공업 규격 JIS에서 '종이란 식물섬유 그외의 섬유를 서로 엉키게 해 교착시켜 만든것'이라 하여, 타파에도 새로운 정의에 따라 종이로서의 문호가 열렸다. 

 

지금까지 세계적으로 설명되어 왔던 종이의 기술적 변천에 대하여, 아직 원시적 제지법이라고 자리매김된 '종이 붓기 방법(pouring method)'는 지금도 네팔과 태국 북부, 중국에서 행하며, 또한 현재는 끊어져 버렸지만 베트남중부의 라그라이족 등에게서도 발견된 제지법이다. 이 방법에서는 나무틀에 베를 펴서 준비한, 뜨는 도구의 매수만큼 하루에 종이를 뜰 수 있다.

 

발전적 제지법이라 자리매김된 '종이 뜨기 방법(dipping method)'에서는 원시적 제지법에 가까운 정적인 <모아 뜨는 법>과 닥풀의 뿌리, 나무수국의 나무껍질 등에서 추출한 반죽(중국에서는 활수滑水)를 더하여 점성을 활용하는 약동적인 <흘려 뜨는 법>이 있다. 이 종이 뜨기 방법으로는 하루에 희망하는 수백 장을 뜰 수 있다. 

 

종이 뜨기 그것은 원료 식물, 물, 간단한 제지 기술이 있다면 어디에서나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종이의 기술적 변천, 전파 지도를 구축할 때 필수라고 하는 건 고고학과 역사학 등과 마찬가지로 유물이나 역사적 기록이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세계적인 종이의 역사 연구자였던 다드 헌터(1883-1966) 등의 종이의 기원과 전파 지도작성 작업에서는 종이의 유물이 잇달아 발견되었던 북쪽의 실크로드에 연한 건조지대에 치우친 구상이 되어 버렸다. 유기물인 종이의 유물이 썩어서 발견될 기회가 거의 없었던 동남아시아 지역에서의 구상은 결과적으로 공백 상태가 된 채 방치되어 버렸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원시적 제지법 이전에 존재했던 나무껍질 베·나무껍질 종이와의 관계를 더듬어 찾을 수 없었다. 최근이 되어서 서서히 동남아시아 연구와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새로운 조사 연구 자료가 더해져, 이 미완성인 상태로 방치되어 왔던 '종이의 기원과 전파' 지도에 새로운 구상을 가필하게된다. 남쪽의, 틀림없이 조엽수림대의 재평가가 될 것이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과 나무껍질 베·나무껍질 종이

 

고대 이래 나무껍질 베와 나무껍질 종이(이후 나무껍질 베와 나무껍질 종이를 합쳐서 편의적으로 타파라고 함)가혼연일체가 되어서 사용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타파의 분포는 적도를 사이에 두고 약간 북위남위 각 25도 이내를 띠 모양으로 지구를 빙 일주한 지대로 굳어진다(그림1). 세계에 퍼졌던 타파의 기술·문화이지만, 지금까지지역별로 분단된 조사연구보고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타파의 기원이 되는 장소와 시기, 전파 경로 등 전체상에 대하여 현시점에서는 판명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큰 하나의 높은 파도로, 신석기시대부터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연고지라고 하는 타이완이나 중국 남부부터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지나 태평양 제도, 마다가스카르 섬 등으로 수천 년을 걸친 항해에 의한 이동에 수반하여, 타파가 세계에 확산시킨 게 확실할 것이다. 남쪽으로부터의 쿠로시오 문화를 받았던 일본에서도 나무껍질 베 기술을 지녔던 사람들이 도래했을 것이지만, 그 주요 이동 경로에는 위치하지 않고 직물 문화로 사라져 버렸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림1 세게에서 보는 나무껍질 베·나무껍질 종이의 확산 지도

 

 

 

타파라는 말에서는 뻣뻣함이라 한 미개의 지역에서 만들어진 거친 나무껍질 제품을 떠올리는 분들도 많다. 타파는 뽕나무과 나무의 껍질을 벗겨 표피를 제거하여 생껍질인 채 그림2, 3과 같은 몽둥이(두드리는 도구)로 두드려서 펴고, 건조시킨 널판지 모양의 것이다. 거칠고 뻣뻣한 마무리의 나무껍질 제품은 니아스섬 등 각지에 존재하지만, 대체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이동 지역에서 만들어진 타파는 하와이나 술라웨시에서 대표되는 것처럼 일본 종이라고 잘못 볼 만큼 균질하고, 0.05mm 정도의 두께인 것도 있으며, 뛰어난 만듦새의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더구나 타파의 어원은 타이완 원주민 어휘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림2 타이완 대분갱大坌坑 유적 출토의 배턴 모양 석기 몽둥이(5500년 전 무렵)

 

 

 

 

 

 

 

 

 

 

 

 

그림3 라켓 모양 석기 몽둥이(현재도 술라웨시에서 사용)

 

 

 

유물로서 세계 각지에 남아 있는 타파 제작용 도구의 출토 또는 잔존 상황의 전체상을 밝히려 했던 조사연구는 아직 없지만,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언어적 연고지라고 하는 타이완에서 개관하여 보자. 또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이동 경로나 시기 등의 연구성과는 <오세아니아 바다의 인류 대이동>(2007, 국립민족학박물관 개관 30주년 기념특별전 도록), 그 기획의 시작이 되었던 <Vaka Moana-Voyages of the Ancestors>(2006 Auckland Museum 특별전 도록)에 상세하다. 술라웨시 지역에 관해서는 인도네시아에서 출판된 두 책이 있다.

 

오랜 시기의 타파용 석기 몽둥이로서는 타이페이 교외의 대분갱 유적에서 5500년 정도 전의 것이 출토된다(그림2). 유조有槽 석봉이라고 부르는데, 손잡이도 일체였던 배턴 모양 유형이다. 타이완에서 100개 이상 출토되는 석기 몽둥이는 지금으로서는 거의 모두 이 유형이다ㅣ. 세계의 몽둥이 형상은 다종다양하지만,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경향에서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번째는 앞에 기술한 배턴 모양 유형의 것으로 재질은 석제와 목제가 있다. 두번째는 라켓 모양 유형(그림3)이다. 손잡이 부분은 등나무나 덩굴 등으로 별도로 붙인 것으로, 두드리는 부분은 석제인데 예외적으로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는 청동제가 있다. 라켓 모양은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이동 경로에서 고려해, 배턴 모양 유형이 기술 혁신된 모양이라 생각된다. 조각된 줄은 타파 제작의 작업순서에 응하여 최초의 단계는 폭넓은 것을, 최종 단게에서는 좁은 것을 사용하고, 줄 사이의 간격이 다른 몇 개를 세트로보유하고 사용한 사례가 많다. 세번째는 사슴의 뿔이나 목제의 잡다한 형태를 한 몽둥이의 유형이다. 대부분 어느 몽둥이에나 두드리는 면에 평행 또는 격자 모양의 줄이 새겨져 있으며, 나무껍질을 효율적으로 두드려 펴기 쉽게 하는 구조가 된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이동에 수반하여 세계에 확산된 타파 문화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뒤에 기술하듯이 3500년 이상의 역사가 이어진 인도네시아의 술라웨시섬이다. 또한 격동의 파도를 받아 왔던 아프리카 대륙과 신대륙의 타파 제작에 대해서는 앞으로 지구적 규모에서 각 지역을 연결해 조사연구를 시작하면, 수수께끼가 서서히 해명되리라 기대된다. 언젠가는 마다가스카르섬으로 서기 500년 무렵에 도달했다고 하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 우간다 등에서 나무껍질 베 문화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그리고 멕시코의 유적에서 출토된 석기 몽둥이가 고고학자들이 보아 술라웨시섬에서 출토된 것과 '빼다 박은 것'이란 점 등을 검증해야 한다. 

 

또한 앞으로 조사 과제로 상정되는 점은 타파용 몽둥이에는 '평소용'과 '특권계급·의식용' 두 종류가 존재(그림4)했을 공산이 높고, 타파 자체의 용도에서도 '평소용'과 '특권계급·의식용'의 구별이 있었을 것이다. 2008년 8월에 필자 등이 행한 일본·인도네시아 합동 현지조사에서 중부 술라웨시에서 발견된 '숨은무늬 모양 가공용 석기 몽둥이'(그림5)를 보유한 일족의 설명에서는 이 숨은무늬 모양은 샤먼용 모자 등에 한정해 쓰였다. 타파 만들기에 쏟은 그들의 에너지와 심오함은 타파를 제작할 때 몽둥이로 나무껍질을 두드리는 소리가 '음악을 연주한다'는 술라웨시의 마을사람 이야기와 연구자의 보고에서 추찰할 수 있다. 장인이 석기를 만드는 단계에서 두드릴 때 나오는소리의 울림을 고려했을 것이다. 

 

 

그림4 왼쪽: 모양을 새기지 않은 청동제 몽둥이(자바), 오른쪽: 모양을 새긴 청동제 몽둥이(동자바)

 

 

 

그림5 숨은무늬 모양 가공용 석기 몽둥이를 든 할머니(중부 술라웨시)

 

 

 

 

하얀 나무껍질의 꾸지나무

 

타파의 원료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서는 뽕나무과의 꾸지나무를 가장 중시해 왔다. 이것은 인도네시아 중부 술라웨시, 타이완 원주민 및 태평양 제도에서 행한 민족학적 조사에서 '흰색' '부드럽고 상질인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 꾸지나무를 최고의 타파 원료로 선택한 이유라고 하는 점에서도 추정할 수 있다. 이 '흰색'이란 특징은 신성함의 상징과 같으며, 종교의식과 제사에서 빠질 수 없는 게 되어 갔던 것이 아닐까? 이러한 점들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한 해명이 되지 않고 있다. 

 

국내에서도 꾸지나무를 특별시하는 흔적은 몇 가지 있다. 특히 궁정 문화를 키운 교토에서는 많이 보인다. 헤이안 시대의 정원으로서 산조三条의 후지와라 사네요시藤原實能(1096-1157) 주택터의 물을 끌어들이는 정원 유구에서 꾸지나무의 열매가 발견된 일이 현지 발굴보고회에서 설명되고, 또 천황의 거처가 있는 교토 어원에는 궁가와 공가의 저택이 늘어서 있었단 점에서 곳곳에 꾸지나무의 식생이 보였을 것이다. 공()의 수호신을 기리는 카미교구上京区의 시라미네白峯 신궁 경내에는 수그루, 고노카와高野川에 걸린 키타조노北園 다리의 옆에는 암그루 꾸지나무 고목을 볼 수 있다. 레이제이케冷泉家에서는 나라 시대부터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칠석 행사의 걸교전乞巧奠에서 꾸지나무가 곳곳에서 사용되며, 의식 중에 행해지는 축국은 '꾸지국(梶鞠)'이라 전한다. 에도 시대의 <습유도명소도회拾遺名所図会>(1787 간행) 제1을 보면, 거리를 연이어 걷는 사람들의 선두에는 칠석의 조릿대 가지에 큰 꾸지나무의 잎이 장식되어 있었다. 

 

집안의 문장에도 꾸지나무의 잎이 보이는데, 전국에서 1만 남짓한 스와타이샤諏訪大社의 상사上社, 하사下社의 문장은 꾸지나무의 잎이다. 유래로 <아즈마카가미五妻鏡>의 지쇼治承 4년(1180) 9월 10일 조에 "꾸지나무 잎 문장의 예복(直垂)을 입고, 흰 바탕에 얼룩 빛깔의 말에 올라탄 용사 하나, 겐지源氏 씨의 편이라 부르고, 서쪽을 가리켜 채찍을 높이 들었다. 이쪽 편에 대명신大明神의 계시가 내리는 곳이니 어찌 의지하지 않으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뒤에 기술하겠지만 옛 자바 문학 안에 힌두교 성직자가 꾸지나무를 점유하고 재배하며, 꾸지나무로 만든 나무껍질 옷(Daluwang)을 입었던 일 등이, 연대를 불문하고 여기저기에 기술되어 있는 것을 자바어 연구자 피죠는기술했다. 

 

꾸지나무 나무껍질의 흰색을 신성시하고, 특별히 다루는 가치관과 전승은 이 나무가 뿌리를 내렸던 세계 각지에 널리 존재한다고 상상된다.

 

 

 

인도네시아의 타파

 

 

 

인도네시아의 타파가 세계적으로 보아 매우 중요한 것은 신석기시대부터 현재까지 연속적인 사용 흔적이 더듬어지는 '살아 있는 화석'인 것만이 아니라, 나무껍질 베 및 나무껍질 종이로 이용하는 것이 모두 매우 활발했단 점에 있다. 또한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사람들이 지녀 왔던 나무껍질 베 문화는 술라웨시에서 기술적, 정신적으로 크게 비약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기능적인 라켓 모양 석기 몽둥이(양면에 줄이 새겨져 있음)를 세트로 사용하는 양식이나, 빛에 비추어 보지 않으면 판연히 보이지 않는 '숨은무늬 모양 투명 무늬'를 나무껍질 베에 가공하는고도의 발상 등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나중에 하와이의 나무껍질 베에 가장 멋지게 개화하는 복잡한 '숨은무늬 모양'이나 '날염'의 뿌리는 술라웨시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때로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이 지녀 왔던 타파의 기법은 섬에서 섬으로 옮겨가는 기술적 흔적이 연속되지 않고, 수천 킬로미터를 뛰어넘어 전파되었다고 생각되는 경우가 발견된다. 이것은 우연히 한 척의 작은 카누가 표착했다고 하기보다, 여러 집단이 의식적으로 목적지에 다다랐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한다면, 작은 카누로 수십 일 걸려서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했던 고대의 항해기술과 그들이 사납게 놀치는 바다에서 미치고 굶어죽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과 생명력을 지녔단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한편, 힌두교 문화에 의거하는 동자바의 마자파힛 시기의 유적에서는 다양한 사슴뿔로 만든, 또는 아름다운 장식이 조각된 청동제 몽둥이가 발견되고 있다. 당시 그곳에서는 타파 제작이 매우 성행하여 중히 여겼다는 것을 살필 수 있다. 이 흐름은 자바의 와양 베베르wayang beber 등 와양 제작 집단에 계승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술라웨시의 기능적인 석기 몽둥이와는 완전히 모양과 소재가 달라 다른 경로의 영향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조금 전까지 발리섬의 힌두교 성직자의 두건(케투), 어깨띠(슬른당), 허리띠(이깟 삥강) 등의 의복과 종교 달력(그림6), 또는장례(응아븐)할 때 사자를 감싸는 천(카장)용으로 울랑타가라고 부르는 나무껍질 베·나무껍질 종이가 전통적으로 쓰이며, 발리섬에 남겨진 힌두교 문화 가운데 마자파힛 시기 등에서 발견된 타파 전성시대의 유풍에 다다를지도 모른다. 앞에 기술했던 자바어 사전 등을 편찬했던 네덜란드 사람 피죠(Theodoor Gautier Thomas Pigeaud, 1899-1988)는 자바의 9세기 무렵의 서사시 <카카윈 라마야나>, 12세기의 <보마 카우야> <수마나산타카>, 다루왕의 원료가 되는 나무(꾸지나무)는 성직자의 집 주변에 심었다는 기술이 보이는 13세기의 <살마 다루와>, 다루왕의 생산, 판매, 사용은 독점적으로 성직자가 행하고, 판매의 세금은 성직자를 위하여 사용되었다는 기술이 있는 14세기의 <라자파티군다라>, 15-16세기의 <단투 판게라랑>을 나무껍질 베·나무껍질 종이(다루왕)에 관한 기술이 발견되는 자료라고 한다. 

 

 

그림6 힌두교 성직자가 쓰는 나무껍질 종이 달력(발리섬)

 

 

 

하지만 인도네시아에 힌두교를 전했던 인도에서는 나무껍질 베 문화가 존재했던 흔적은 보고되지 않는다. 이들은자바어 문헌 안에서만 이해해야 할까?

 

그뒤, 인도네시아에서는 힌두교에서 이슬람교로 대전환을 했는데, 나무껍질 종이 제작 기술 집단은 계승되어 매우 발전을 이루었다고 생각된다. 오늘날, 인도네시아 국립도서관과 네덜란드 라이덴 대학에 남아 있던 수백 권의나무껍질 종이 문서는 모두 이슬람교의 성전과 교의에 관한 내용인 점으로부터, 엄청난 나무껍질 종이가 이슬람교 문화의 영향에서 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렇지만 인도네시아에 있는 나무껍질 종이 제조는 1970년대에 종언하고, 현재는 반둥 근교의 가룻에 한 가족만이 그 전통을 남기고 있다.

 

당시의 꾸지나무 소비량을 생각하면, 인도네시아에서는 아마 한 권이 200쪽인 나무껍질 종이 문서를 제작하는 데에 뿌리 근처가 지름 20cm 정도의 어린 나무 25그루 정도가 쓰였을 것이라 추정된다. 1개소에서 연간 100권을 만들었다고 가정하면 2500그루의 꾸지나무가 필요하게 된다. 전국적으로 퍼져 있던 이슬람 종교 집단의 세력을 생각하면, 나라 전체에서는 연간 수만 그루의 꾸지나무를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런데 기묘한 점으로, 현재 인도네시아에서 일하는 임업과 식물의 일본인 전문가에게 들으면, 꾸지나무를 본 사람은 전혀 없는 데 가깝다. 나 자신도 각지를 돌아다닐 때 집요하게 조사했던 경험으로부터, 꾸지나무를 발견한 건 가룻 주변과 중부 술라웨시뿐이었다. 또한 인도네시아에서는 타파 제작자나 보고르 식물원의 사람들에게 들어도, 꾸지나무에 꽃이 피어 있는 것을 본 사람을 확인할 수 없다. 일본이나 타이완에서는 꾸지나무의 수그루, 암그루 어느쪽이나 꽃의 개화는 왕성하고, 많이 결실한다. 놔두면 쭉쭉 자손을 늘려 빈땅을 점거할 만큼 생명력이 강한 나무라고 생각되는 것과 비교하면, 매우 위화감이 들고 이해하기 어렵다. 이것은 꾸지나무는 암수딴그루 나무이면서 태평양 제도에서는 수그루밖에 확인되지 않는다는 보고와 관계가 있는 것일까? 또는 단순히 풍토의 문제일까? 

 

나카오 등에 의한 조엽수림의 대표적인 나무라고 이야기된 꾸지나무이지만, 아직 해명되지 않는 것이 많다. 

 

 

 

이 나무 무슨 나무?

 

정창원의 일본 종이를 조사연구한 쥬가쿠 분쇼寿岳文章(1900-1992)는 <정창원의 종이>에서 똑같은 뽕나무과의 꾸지나무와 닥나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식물학적으로 꾸지나무와 닥나무는 다음의 여러 점, 곧 전자는 암수딴그루, 턱잎은 대형이고, 수꽃 이삭이 길게 늘어지는 데 반해, 후자는 암수한그루, 턱잎은 작고, 수꽃 이삭은 구형인 점에서 구별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부터 혼동되어, 정확히는 꾸지나무를 의미하는 한자인 楮나 穀이 닥나무에 해당되는 것처럼 된 것은 잎의 모양이 비슷한 점과 열매를 맺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질긴 껍질이 제지의 원료가 되는 점 때문일 것이다. 정창원 문서의 사경용지 그밖의 항에 자주 나타나는 곡지穀紙는 이미 닥나무와 꾸지나무가 혼동되어 버린 뒤의 용어이며, 엄밀하게는 닥나무의 종이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정창원 문서가 형성된 나라 시대에 꾸지나무와 닥나무의 혼동은 이미 일어났다고 쥬가쿠는 지적하고 있다. 동아시아의 교류가 깊어지면서, 이 혼동은 한자 문화권 전역의 문제로 확산되어 갔다.

 

켐벨, 시볼트 등에 의해 일본에서 채집되어 학명이 명명된 뽕나무과의 꾸지나무나 잡종 닥나무, 덩굴 닥나무, 닥나무. 꾸지나무에는 Broussonetia papyrifera Vent., 잡종 닥나무에는 Broussonetia kazinoki Siebold, 덩굴 닥나무에는Broussonetia kaempferi Sieb.라고 학명을 붙이고, 그리고 혼란한 와중에 다가오는 것이 닥나무이다. 예를 들면, 2004년 1월에 발행된 <식물 레퍼런스 사전>(일외日外 어소시에이트)에서는 닥나무를 덩굴 닥나무의 별명으로 다루고, 1997년에 발행된 <원색 목야식물 대도감>(북륙관北陸館)에서는 잡종 닥나무의 항은 없고 닥나무를 Broussonetia kazinoki Siebold라 하고 있다. 2004년에 개정판으로 출판된 <일본 식물종자도감>(도호쿠 대학 출판회)에서는 닥나무라고 하여 Broussonetia kazinoki x B. papyrifera를 들고, 꾸지나무와 잡종 닥나무의 교잡종으로 게재하게 되어 최근의 식물사전, 연구서는 이 학명을 사용하는 것이 증가하고 있다. 고육책인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식물학이란 좁은 영역에서의 독주는 아닐런가?

 

왜냐하면, 닥나무의 지방 이름으로 <일본 식물방언집성>(야사카쇼보八坂書房)에서는 다른 단어에 비하여 매우 많은 110개의 단어가 채집되어 있는데, 이것은 닥나무의 폭넓고 깊은 역사가 반영되어 있다고 간파할 수 있다. 닥나무가 외래의 꾸지나무와 일본 고유의 잡종 닥나무의 교잡종이라 하는 설을 검증하려고 고고학의 분야에 눈을 돌리면, 꾸지나무의 열매라고 동정된 보고사례가 조몬 만기의 야하타자키八幡崎 유적(아오모리현 히라카와시平川市) 등에서 나오고 있다. 꾸지나무가 일본으로 이입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4500-3300년 정도 전인 조몬시대 후기인 것일까?

 

슬슬 나라 시대에 이미 혼동이 시작되었던 뽕나무과의 꾸지나무, 닥나무 등에서의 혼란을 해결하고자 관계된 전문가들이 계책을 강구하기를 바라는데, 주목되는 시행도 있다. 지금까지 베와 종이의 식물섬유를 분석, 동정하는데에는 현미경 관찰을 행하고, 시약으로 섬유를 염색하여 판별하는 등의 방법을 채용해 왔다. 일본의 국보나 중요문화재의 종이 분석도 이와 같이 행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 방법은 관찰자의 경험과 주관적 판단에 강하게 좌우되는 경향이 보인다. 몇십 년 뒤에 다른 관찰자가 다른 판단을 내리는 일이 흔히 일어날 수 있다. 특히 나무껍질 베·나무껍질 종이에 널리 이용되어 왔던 뽕나무과 식물 가운데 속 수준의 판별은 매우 어렵다고 한다. 예를 들면, 꾸지나무와 닥나무의 구별은 신의 조화라고 한다. 그 어려움에 광명을 비추는 것이 DNA 추출 분석법이다.이미 몇 가지 나무껍질 베와 고문서에서 DNA의 추출과 핵석이 행해지고, 지금으로부터 천년 이상 전인 헤이안 시대의 고문서에서도 유전자 정보가 추출·해석되어 속 수준의 객관적인 판별에 길을 열 것이다. 반드시 혼란을 극복하는 유력한 수법으로, 간편하게 사용하도록 이 분야에서의 조사연구가 높아져 가기를 바란다.

 

 

 

 

종이와 풍토

 

나카오의 '종이의 타파 기원설'을 재고하는 데에 중요한 지적이, 종이에 사용되는 식물원료의 지역 구분에 대해서이다. 나카오의 논고에 있듯이, 중국의 전한시대 등에 출토된 종이 유물의 원료가 '초본성 질긴 껍질 섬유'의 대마, 모시이며, 그 초본성 질긴 껍질 섬유를 사용하는 추세는 아라비아부터 유럽으로 퍼져 갔다. 다른 한편, 히말라야부터 일본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꾸지나무, 닥나무 등 '목본성 질긴 껍질 섬유'를 종이의 원료로 삼아 왔는데, 더 우수한 팥꽃나무과의 서향, 삼지닥나무, 안피나무 등의 '관목성 질긴 껍질 섬유'가 선출되어 갔다고 한다.지역, 풍토에 따라 수확할 수 있는 식물에 차이가 있으며, 이와 같은 구분이 이루어졌다. 

 

종이를 사용하는 쪽에서 생각하면, 이 각각의 '종이'로서의 차이는 어떻게 드러나는 것일까? 제지 이후에 경전용 등으로 가공이 이루어진 '두드린 종이(打ち紙)' 공정 등, 원료만의 차이로는 생각할 수 없는 바도 있어 어렵다. 가장 오래된 일본의 종이 수집품인 정창원의 '일본 종이' 중에는 삼을 원료로 하는 것, 닥나무를 원료로 하는 것, 안피나무를 원료로 하는 것 등이 혼재되어 있다. 또한 927년에 찬수된 <정희식廷喜式>에 관영조지소인 지옥원紙屋院에서 하는 제지 공정이 상술되는데, 그 안에서도 삼(대마, 모시를 가리킨다고 생각하고 있음)은 닥나무, 안피나무와 나란히 당시의 주요 원료의 하나라고 되어 있었다. 원료식물의 차이에 의한, 재단을 짧게 하고 길게 하는 등의 제지 공정에서 처리법의 차이는 명확하게 있었다. 나카오의 논고 가운데 기둥이 되는 바이지만, 그 긴요함이 되는 조엽수림 지역의, 묻혀 있던 오래된 문화층과도 관계되는 정보는, 앞에 기술한 다드 헌터 등 선인들의 조사연구에서 결여되어 미완성의 부분이 되었다. 초본성, 목본성 또는 관목성 질긴 껍질 섬유라는 풍토와 사람에기인한 원료의 차이에 의하여, 그것을 받아들여 누렸던 지역의 문화와 감성에 어떠한 변화가 생겨 갔을까? 새로운, 조엽수림대에서의, 종이 문명의 기원에 빛을 비추는 옛 문화층의 탐색도 포함된 조사연구를 계속해 가야 한다는 것이 현상이다. 

 

제지법과 크게 관계되는 것이 필기구일 것이다. 털붓을 사용하고, 펜을 사용는 등의 차이에 의하여 종이의 마감법은 크게 변한다. 옛날부터 '쓰는 것'과 '쓰여지는 것'의 상성은 중요하여, 필기구는 문화를 반영해 왔다.

 

오스트로네시아어족의 신대륙 도달이 부정적으로 다루어져 온 상황에서, 마야 시기의 조각이나 상에 새겨졌던 '털붓'(그림7)은 동양에서 발견되는 것과 꼭 닮았기에 놀랍다. 마야 시기에 사용되었던 종이는 나무껍질 종이(아마테 종이)이며, 돌의 돋을새김이나 부장품에 '종이'의 사용을 보여주는 흔적이 점점 발견되고 있다. 이것으로부터 조엽수림대에서 '종이의 타파 기원설'을 탐구하려면, 3500년 정도의 시간축을 더듬어 찾아가는 술라웨시섬과함께 그리스도 탄생 무렵으로까지 '나무껍질 종이'의 제작, 또는 사용 흔적을 더듬어 찾아갈 확률이 높은 메소아메리카 지역의 정보는 힌트로 참고가 된다. 왜냐하면 습윤 기후의 조엽수림 지역에서 2000년 이상 전의 묻혔던 옛 문화층의 유물을 발견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림7 마야의 티칼 유적에서 출토된 뼈조각에 새겨진 털붓을 쥔 손(후고전기). Michael D. Coe, 2001 The MAYA 124쪽. 도판 68 Thames&Hadson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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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4




제4장

아시아의 콩   아시아의 잡곡

카시와기 쥰이치柏木純一, 야마다 고로우小畑弘己, 타케이 미에코竹井惠美子







Ⅰ-1 아시아의 콩(카시와기 쥰이치)


콩과식물은 세계에 대략 2만 종 있으며, 지구에서 가장 번영하고 있는 식물종의 하나로 꼽힐 수 있다. 이 가운데 식용작물로 인류가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약 80종류 정도인데, 이중 몇 가지 중요한 콩은 아시아를 기원으로 한다.일본에서도 친숙한 대두는 동아시아에서 기원한 것이고, 완두나 누에콩은 서아시아가 기원지이다. 이들 '저명'한콩들에 대해서는 많은 전문서와 일반서가 출판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 새삼스레 그 상세함에 대하여 해설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절에서는 필자가 2000년부터 8년 남짓 동안 인도, 특히 남인도에서의 콩 사정에 대하여 소개하려고 한다.


인도에서는 다양한 종류의 식용 콩과작물의 재배가, 지금도 매우 활발하다. 그 이유로는 인도에서는 종교적 제약에 의해 육식을 하지 않는 채식주의자 사상이 아직도 사람들의 근간에 있는 것을 우선 생각할 수 있다. 최근, 경제 발전이 뚜렷한 이 나라에서는 2008년 10억2700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외무성 각국·지역 정세), 숫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그 가운데 20%는 매우 엄격한 채식주의자라고 이야기된다. 여기에 더하여, 경제적인 이유로 육식을 하지 않는(정확히는 할 수 없는) 사람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즉, 대략적으로 이야기해도 적어도 일본 인구의 거의 1.5배에 상당하는 인도인들은 생애를 통하여 육식을 하지 않는다고 추정된다. 콩은 이들 사람들에게 귀중한 단백질원이 되고 있는 것이, 인도에서 식용 콩과작물의 재배가 매우 활발한 이유일 것이다. 


인도에 살고 있으면 농가의 밭, 노천 시장(바자르), 슈퍼마켓, 식당, 그리고 각 가정의 식탁에서 콩과 콩 요리를 보지 못하는 날이 없다. 그러나 인도에서 자주 눈에 띄는 콩들은 일본에서는 친숙하지 않은 것도 있다. 우선은 인도에서 친숙한 몇몇 콩을 소개하고자 한다. 





콩의 종류와 그 성질


나무콩(학명 Cajanus cajan L.)(그림4-1)은 인도가 기원지라고 하는 여러해살이 식물이다. 식물체는 일반적으로대형이고, 길이는 2-4미터에 이르는 것도 있다. '나무콩'이란 일본 이름이 보여주듯이, 목질화된 매우 단단한 줄기를 지닌다. 줄기의 지름은 3센티미터 정도에 이르는 것도 있다. 식용으로 이용하는 알곡의 종피는 갈색이고, 100알 무게는 10그램 정도로, 30그램 정도인 일본의 대두와 비교하여 상당히 작다. 알곡은 남인도에서 가장 일상적인 콩 요리인 달로 먹는 일이 많다. 달이란 갈아 만든 콩 스프이다. 갈아서 만든 나무콩의 배유 색은 몇 가지가있지만, 누런색이 일반적이다. 나무콩 달은 잘게 썬 양파 등의 채소를 마늘, 생강과 볶은 것에 울금, 아위, 고추 등의 향신료, 그리고 소금, 후추로 맛을 낸 재료에, 물에 담갔던 나무콩을 걸쭉한 풀이 되기까지 끓인 것을 더하여, 더 끓여서 만든다. 밥을 지은 쌀과 밀가루로 만든 발효하지 않은 빵(차파티) 등과 합하여 먹는다(그림4-2).


그림4-1 나무콩. 떨기나무 같은 큰 식물체의 끝에 완숙한(갈색의) 꼬투리가 보인다.




그림4-2 남인도의 전형적인 식사. 각각의 그릇에는 다른 달이 담겨 있다.




나무콩은 세계의 470만 헥타르의 토지에서 재배되며, 연간 330만 톤의 알곡을 수확한다. 이 가운데 70%(재배면적 기반. 수확량 기반이라면 76%)는 인도에서 재배되고 있으며, 대두가 일본의 주요한 콩과작물이라고 한다면나무콩은 인도의 주요 콩과작물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알곡은 사람들의 먹을거리가 되는 데다가, 굵은 목질화된나무콩의 줄기는 땔감으로도 이용된다. 게다가 나무 같이 완강한 뿌리 부분은 겉흙을 단단히 붙들면서 질소고정(뿌리에 공생하는 세균이 식물의 생장에 필요한 질소화합물을 생산하는 일)을 행하기 때문에, 나무콩은 산간 지역에서 토양침식에 의해 방기된 경작지의 회북에도 이용되고 있다. 나무콩의 육종은 인도의 안드라 프라데시주에 있는 국제반건조열대작물연구소(International Crops Reserch Institude for the Semi-Arid Tropics, 약칭 ICRISAT) 및 우타르 프라데시주에 있는 인도 국립콩류연구소(Indian Institude for Pulses Research, 약칭 IIPR)에서 주로행하고 있다. 파종 시기는 6월 무렵이고, 수확은 만생인 것은 이듬해 2월 무렵이기 때문에, 생육 기간에 여러 차례 가뭄 피해를 입을 위험성이 높고, 가문 환경에서 수확량의 확보가 하나의 큰 육종 목표가 된다. 이를 위해 생육 기간이 짧고, 가뭄 피해의 위험성을 회피할 수 있는 조생 품종이 권장되고 있다. 또한 2-3미터에 달하는 것도있는 대형 식물체는 알곡의 수확을 어렵게 만들고, 식용 부위가 아닌 줄기와 잎에 많은 광합성 산물을 분배하는 점은 대조적으로 알곡 수확량을 감소시키는 일이 되기에, 키가 작은 왜성 품종의 육성이 목표가 되고 있다. 나무콩은 특정 교배조합으로 교배 부모보다도 왕성한 생장을 나타내는 잡종강세라는 성질을 지닌 것이 발견되어, ICRISAT에서는 이 성질을 이용한 내병성과 수확량의 개선에 대한 연구를 행하고 있다.


병아리콩(학명 Cicer arietinum L.)(그림 4-3)은 세계의 1200만 헥타르의 토지에서 재배되며, 연간 970만 톤의알곡을 수확하고(FAO 2007), 세계의 3대 콩과 식용작물의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최근의 발견에 의하면, 병아리콩의 야생 선조종은 시리아 북서 지역에서 기원전 1만 년 후반 무렵에 존재했다고 생각된다. 인도가 주요 생산국이며, 세계 생산의 65%(재배면적, 수확량 기반 함께)를 재배하고 있다. 병아리콩의 힌디어 이름인 그람gram이콩류의 총칭으로 쓰이고 있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병아리콩은 단순히 단백질원만이 아니라 인도의 채식주의자에게 가장 중요한 콩이라 여겨진다. 인도의 고대 문헌에는 기원전 800년 무렵에 병아리콩에 관한 기술이 나타나고, 서기 3-8세기 무렵에는 현재와 같이 인도에서 널리 먹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병아리콩은 알곡을 달로 먹는 외에도, 미숙 종자를 날것으로 채소 스낵으로 먹는 일도 일반적이다. 필자의 인도 체재중에도 밑동부터 뽑은 병아리콩 식물체의 단이 포장마차에서 팔리고 있으며, 사람들이 그 단을 한손에 들고 걸어가면서 꼬투리에서 아직 푸른 알곡을 까서 먹는 광경을 자주 목격했다. 또한 알곡을 가루로 갈아서 그것을 튀김(파코라)의 옷이나 과자의 재료로 이용하는 일도 일반적이다. 필자는 병아리콩의 '유바'를 먹은 적도 있다. 또한 일본의 숙주나물처럼 물을 주어 뿌리가 난 종자에 향신료를 끼얹어 샐러드처럼 먹는 일도 일반적이다. 병아리콩의 육종은 ICRISAT 및IIPR에서 행하고 있다. 파종 시기는 10월-11월 상순 무렵이고, 수확은 만생인 것은 이듬해 2월 무렵이다. 이 병아리콩의 생육 시기는 남인도 내륙부에서는 건기에 해당하기 때문에 생육 기간에는 맑은 날씨가 이어지고 비는 거의 기대할 수 없다. 병아리콩은 관개설비가 없는 영세한 농가에서 재배되는 일이 많기 때문에, 그들의 밭에서는 병아리콩의 수확량에 가장 영향을 주는 개화기 무렵에 토양이 말라 버려서 수확량에 심각한 피해를 주는 일이많다. 그 때문에 가문 환경에서 수확량을 확보하는 것이 병아리콩 육종의 한 가지 큰 과제가 되며, 생육기간이 짧고 가뭄 피해의 위험성을 회피할 수 있는 조생 품종이 권장되고 있다. 또한 인도에서는 100알 무게가 25그램 정도이고, 종피색이 진갈색인 '데시'라고 부르는 병아리콩 계통이 일반적으로 재배되고 먹어 왔는데, 최근에는 100알 무게가 50그램으로 대형이고 종피색이 유백색인 '카브리'(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 주변에서 분화된 것이라 생각되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었음)라고 부르는 계통의 밝은 겉모습과 식감, 맛이 인도인들에게 호감을 얻어 인기이다. ICRISAT와 IIPR에서는 인도 사람들의 요망에 부응하도록 카브리 계통의 병아리콩 수확량을 증가시키기 위하여, 그 가뭄 저항성과 병해 저항성을 개선하기 위한 연구를 행하고 있다.



그림4-3 병아리콩. 범종 모양의 꼬투리에 알곡이 들어 있다.





녹두(학명 Vigna radiata)는 인도 아대륙의 히말라야 남부, 고츠 산지의 주변에서 기원했다고 생각된다. 고대 인도의 문헌(서기 75-300년)에는 녹두(또는 검은녹두)의 야생종이 약으로 이용되거나, 식용으로 제공되었다는 기록이 확인되어, 인도에서는 옛날부터 재배되고 이용되었던 것을 엿불 수 있다(前田 1987). 오늘날 인도에서도 녹두는 형태가 매우 닮은 검은녹두(학명 Vigna mungo L.)와 일반에서는 엄밀히 구별되지 않고, 일상적으로 널리이용되고 있는 것 같다. 달로 먹거나, 요리용 콩가루로 이용된다. 도사라는 남인도에서 일반적인 간편식은 녹두(또는 검은녹두)를 간 가루와 콩가루, 밀가루를 섞은 가루를 이용해 만든다. 또한, 병아리콩처럼 뿌리를 낸 녹두에향신료를 묻혀서 먹는 일도 일반적이다. 녹두나 검은녹두의 육종은 주로 IIPR에서 행하고 있다. 파종 시기는 10월 무렵이고, 수확은 만생인 경우 이듬해 2월 무렵이다. 또, 2월에 파종하여 6월에 수확하는 재배 체계도 있다. 수확량이 낮고, 100알 무게도 3-4그램 정도로 작은 녹두나 검은녹두는 인도에서는 나무콩과 병아리콩에 비교하여 육종에는 힘을 쏟지 않는다. IIPR에서는 주로 내병성의 개선을 중심으로 수확량 개선의 연구가 행해지고 있다. 


땅콩(학명 Arachis hypogaea L.)은 세계 2300만 헥타르의 토지에서 재배되며, 연간 3700만 톤의 껍질 땅콩을 수확한다(FAO 2007). rㅣ원지는 남미의 아르헨티나 북서부부터 볼리비아 남부라고 생각되며, 콜럼버스의 대항해시대 이후 세계로 퍼졌다. 아시아에서는 포르투갈 사람이 15세기 말에 인도네시아로, 스페인 사람이 16세기 초쯤에 필리핀에도 가져왔다. 인도에는 그뒤 18세기 무렵에 전해져, 19세기부터 재배가 본격화되었다. 인도에서는 주로 착유용으로 재배되며, 인도의 식용유 시장 가운데 대략 25%를 차지한다고 이야기된다. 그 때문에 땅콩은 식용 콩과작물의 연구를 담당하고 있는 IIPR의 연구대상 작물이 되지 않고 있다. 최근에는 제약용 등 직접적 식용 수요도 늘어나고 있어, ICRISAT에서는 제약용 대립 품종에 대하여 연구를 행해 몇 가지 유망 품종이 육성되고 있다. 


과르(학명 Cyamopsis tetragonoloba)는 인도가 기원지라고 생각되는데, 그 야생종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남인도에서는 미숙한 푸른 꼬투리를 잘게 썰어 다른 채소와 함께 볶고 향신료로 맛을 내 먹는 일이 많으며, 말린 알곡을 식재료로 이용하는 일은 없는 듯하다. 과르는 배유에 포함된 갈락토만난이란 매우 점착성 강한 고분자물질이 식용만이 아니라 의료용, 공업용 검이나 증점제, 안정제로 널리 이용될 수 있기에, 식용작물이라기보다 오히려 공예작물로 이용하는 일이 많다.


인도에서는 이들 외에도 강낭콩(중미 기원), 완두콩(남서아시아 기원), 동부(아프리카 기원), 렌즈콩(남서아시아원산), 말콩(인도 아대륙 기원), 그라스콩(남서아시아 원산) 등 일본에서는 낯선 다종다양한 콩도 식용으로 재배하여 먹고 있다. 무역과 전쟁에 의하여 이동한 사람들을 통하여 아프리카나 서아시아에서 인도 아대륙으로도 가져온 외래 콩류도, 다양한 기후를 포함한 인도 아대륙 안에서 비교적 쉽게 자신의 생존 장소를 찾아내고, 그리고 때로는 사람들의 농경 체계 안에서 더욱 적응해 갔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속한 습윤한 동아시아에서는 건조함을 좋아하는 종류의 콩은 생존 적지를 찾아내기가 어려워 일본에는 도달했지만 재배에는 이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필자는 병아리콩의 재배 시험을 일본에서 행했는데, 노지 재배에서는 곰팡이 병해에 의한 피해가 막대하여 알곡 수확은 매우 낮았다.


일본에서 일반적인 대두에 대해서 보면, 인도에서의 재배면적은 890만 헥타르, 알곡 수확으로는 1100만 톤으로각각 세계 생산의 10%, 5%를 차지한다. 이것은 각각 일본의 64배, 48배의 양에 상당한다. 동아시아 원산인 대두가 인도에 전해진 것은 비교적 최근인 18세기 또는 19세기 초두 무렵인데, 인도의 사람들에게는 대두 특유의 '아린맛'이 좋아하지 않는 느낌이었는지 식용으로가 아니라 착유용으로 발전시켜 왔다. 요즘은 채식주의 사람들 사이에서 '100% 채식주의자의 우유'로 대두 두유나 '100% 채식주의자의 요구르트'로 두부가 주목되기 시작한 것 같다. 필자가 체재학 ㅗ있던 남인도 마을의 슈퍼마켓에서도 2007년 무렵부터 종이팩 두유나 방수종이팩에 밀폐된 두부를 발견하게 되었다. 똑같은 콩이라도 인도와 일본에서는 좋아하는 풍미와 맛이 달라 이용법이 크게 다르게 발전해 온 건 재밌는 점이라 생각한다. 




콩이 가진 의미, 콩과 신앙 제사


기원전 2000년 무렵에 성립되었다고 하는 베다라고 부르는 여러 가지 고대 인도의 문헌에는 기원전 1200년쯤부터 콩 섭취에 관한 기술이 확인된다. 이것으로부터 인도에서는 상당히 오래전부터 콩을 먹었다는 것이 확실한 듯하다. 그러나 고대(기원전 300년부터 기원후 75년 무렵)의 인도에서는 콩은 가난한 사람들의 식사라고 이야기하며, 소화가 안 되는 먹을거리라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몇 가지 콩이 포함한 유독성분에 대해서도 당시부터 알려져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현대의 인도 사람들에게는 다종다양한 콩은 각각 익숙한 식재료이며, 특히 가난한 사람을 위한 것이란 업신여기는 감정은 없는 것 같다. 필자가 체재한 남인도에서는 나바단야Navadhanya라는 단어가 있었다. 이것은 인도의 고전인 산스크리스트어로 나바는 9를 의미하고 단야는 알곡(종자)를 의미한다. 이단어는 적어도 남인도에서는 일반적이고, 안드라 프라데시주의 공용어인 텔루구어에서는 나바단야물루Navadhanyamulu라고 부르고 있었고, 이웃인 타밀나두주에서는 나바단얌Navadhanyam이라 부르고 있었다. 나바단야의 아홉 종류의 알곡이란 벼, 밀, 참깨, 병아리콩, 비둘기콩, 검은녹두, 녹두, 말콩, 동부이다. 지역에 따라서 여기에 나무콩이 대신 들어가기도 한다. 어느쪽이든 아홉 가지 알곡 가운데 여섯 가지가 콩과의 작물이며, 이들의 알곡 사이에 순위 매김은 없고, 모두 동등하고 성스러운 아이템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남인도에서는 이들 작물은 모든 것이 친근하며 중요한 식량이란 것에 더하여, 사람들은 식물의 종자가 가진 '발아(발근)'이란 식물에 독특한 현상을 성장과 재생을 상징하는 현상으로 매우 신성시하기 때문이다. 안드라 프라데시주의 결혼식에서는 2주 정도나 이어지는 결혼식 기간 가운데 나바단야를 매우 아릅답게 장식한 항아리에 보존하여 싹을 틔우고, 식이 끝나면그것을 길흉을 가리는 먹을거리로 신랑신부에게 선물하는 풍습이 있다. 또한 나바단야는 집의 기공식에서 기초를만드는 장소에 뿌려서 무사히 완공됨과 가족의 행복을 빌거나, 큰 제사 등에서 공동체 구성원(이웃이나 마을사람 등)의 행복을 기념하여 나누어준다. 이처럼 경사스런 자리에서 남인도에서는 주식이 되는 벼과의 작물과 함께 콩과작물에도 풍양과 번영의 마음을 나타내는 듯하다. 일본에서도 오곡에는 콩이 포함되며, 태고부터 콩은 친근하고 중요한 식량이며, 대두나 팥에 대해서는 각각의 '알곡 그것'에서 일종의 신성한 힘을 발견하고 특정 의식이나 경사스런 자라에서 사용해 왔다. 이에 반하여 인도에서는 그들의 먹을거리를 지탱하는 모든 작물의 '종자 발아'에 신성함을 발견하고 있는 것은 재미있는 점이라 생각한다. 


이처럼 재배되고 있는 콩의 종류와 콩을 둘러싼 문화는 인도 아대륙과 일본에서 꼭 동일하지는 않다. 그리고 이것에 두 지역에 특유의 기후와 지리적 요인이 어떻게 영향을 주어 왔는지를 앞으로 더욱 연구·고찰해 가는 일은 매우 흥미로운 분야라고 느낀다. 






Ⅰ-2 일본 선사시대의 콩류와 재배화(야마다 고로우)



들어가며


현재 일본에서 우리가 이용하고 있는 재배 콩류는 10종류 정도인데, 그 가운데 동아시아에 기원지를 가진 것은 대두(Glycine max)와 팥(Vigna angularis var. angularis), 녹두(Vigna radiata)이다. 고고학 유적에서 출토된 조몬시대-중세의 콩이라 생각되는 것은 대두와 팥, 동부(Vigna unguiculata), 녹두에 한정되고, 그밖의 콩은 근세 말 이후에 일본에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동부는 아프리카 기원이고, 고대(9세기) 이후에 녹두는 인도 중북부 기원이고, 중세(14세기) 이후에 가져왔을 가능성이 높은 점으로부터, 조몬시대-고분시대의 재배 콩은 대두와 팥만고려하면 좋다. 이 두 종은 일본 열도에서도 야생종이 자생하고 있는 점으로부터, 유적에서 출토된 콩류에는 야생종인 돌콩(Glycine soja)과 새팥(Vigna angularis var. nipponensis)이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들을 구별하는 일은 일본 열도에서의 재배화 또는 재배종의 유입 시기를 결정하는 중요한 단서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얻은 고민족식물학 조사의 성과는 이 두 종의 콩이 일본에서 조몬시대에 재배화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이들 콩이 야요이 시대에 대륙에서 조선반도를 통하여 유입되어 왔다는 지금까지의 통설을 부정하는 것으로, 새로운 견해라 할 수 있다. 




유적에서 출토되는 콩류와 동정법


(1) 조몬-야요이 시대의 콩류


유적 출토의 콩류는 탄화되지 않은 종자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매우 출토량이 한정되어 있다. 특히 대두에 관해서는 야요이 시대가 되면 약간 출토 사례가 늘어나지만, 조몬 시대의 탄화 자료는 세 유적으로 매우 적다. 그 대부분이 최근 조사 사례가 증가하고 있는 토기 압흔 자료이다. 현재, 토기 압흔 자료는 16개 유적 사례가 알려져 있다. 조몬 시대의 대두속(재배·야생종을 포함) 종자는 야마나시현의 전기 사례(약 6000년 전)를 처음으로,칸토우 지방과 큐슈 지방의 조몬 시대 후·만기에 집중되어 있다. 현황으로는 이 야마나시현이 북쪽 한계라고 할수 있다. 


이에 반하여 팥 및 그 선조종인 새팥(팥 아속 종자)은 조몬 조기부터 출현하여, 조몬 전기에는 주거터 등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일이 증가하는 경향이며, 이 시기 사람과의 관련이 밀접해졌음이 예상된다. 조몬 전·중기에는 동·동북 일본에 주로 분포되어 있는데, 야요이 시대에는 북부 큐슈를 중심으로 한 서일본으로 이동한다. 탄화 종자가 대부분(34개 유적)인데, 토기 압흔 자료도 요즘 증가하는 경향이며, 현재 7개 유적 사례가 알려져 있다(그림4-4).


그림4-4 구마모토시 카미나베上南部 유적에서 출토된 팥 압흔(조몬 후기 말). 길이가 6mm 이상이며, 배꼽의 특징에서 재배 팥이라 생각된다.




(2) 콩류의 동정법


탄화된 종자는 콩과에 한정되지 않고 동정이 매우 어렵다. 그 단서는 꼬투리의 주병珠柄에 붙은 부분인 배꼽의 형태와 크기, 위치가 결정적 근거가 된다. 이외에 떡잎의 사이에 있는 첫잎과 어린뿌리의 형태와 그 위치도 종의 동정에 참고가 된다. 배꼽의 형태는 대두속과 그밖의 속에서는 크게 차이가 나, 대두속이 두툼한 막(epihilum)을 가지지 않는 '노출 유형'인 데 반해, 다른 속은 두툼한 막이 배꼽의 위를 덮어 배꼽 자체가 우묵하게 들어간 '후막 유형'이다. 이 노출 유형의 배꼽은 예전부터 '와쿠도이시ワクド石 유형 압흔'이라 불렸던 종을 알 수 없는 종자 압흔과 똑같은 형태이며, 이것이 대두속 종자의 배꼽이란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그림4-5, 그림4-6). 또한 '후막 유형'의 배꼽의 우묵함은 떡잎 측면에도 미치고 있어, 팥과 녹두를 그 우묵함의 위치로부터 동정하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그림4-5 돗파라시鳥原市 오노하라大野原 유적에서 출토된 대두 압흔 '쿠마다이'(조몬 후기 중엽)




 그림4-6 구마모토시 카미나베에서 출토된 와쿠도이시 대두 압흔(조몬 후기 말). 예전에는 무언가의 종자라고 생각해 왔는데, 타원형을 나타내고 한가운데에 한 줄의 가는 골이 있다(길이 4.6mm, 너비 1.8mm). 이것은 위 그림의 조만 대두 '쿠마다이'의 배꼽과 완전히 똑같은 크기와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대두의 배꼽인 것이 판명되었다.



탄화 종자와 토기 압흥 종자는 고고학 자료이기 때문에, 반드시 변형이 된다. 탄화 종자는 불에 타서 전체가 축소되고, 그 비율은 길이(긴 축)와 너비(짧은 축)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길이의 경우 10-20% 축소되고, 너비는 10% 정도 축소된다. 또한 종자 압흔도 토기 내부의 수분을 머금어 확장되고, 토기의 건조·소성에 의한 축소라는 복잡한 변형 과정을 지난 것이다. 게다가 이 수분에 의한 팽창도 콩의 종류에 따라서 길이와 너비의 변형 비율이 다르고, 대두는 길이가 너비에 비하여 20% 정도 확장되는 경향이 있어 다른 종의 콩 종자와 차이를 보인다. 


재배화의 징후인 종자의 대형화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재배종이나 야생종과 비교하기 위해 '탄화'나 '토기압흔' 등의 자료의 질을 넘어서 콩 종자 자체의 형태와 크기를 복원할 필요가 있다. 위에 적은 변형률은 그 복원에 매우 중요한 지수이다.




종자에서 보는 재배의 흔적


인간에 의한 식량 생산 때문에 식물에 관여하는 행위를 'Cultivation(재배 행위)'이라 하고, 그에 대응한 식물 쪽의 유전적 변화를 'Domestication(재배화)'라고 한다. 또한 이 재배화에 의하여 식물에게 나타나는 성질과 형질은'재배화 징후군(Domestication syndromes)'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내용은 식물별로 다르지만, 주가 되는 건 아래와 같은 종류가 있다.


① Elimination or reduction of natural seed dispersal(종자의 자연 산포의 상실 또는 감소)

② Loss of seed dormancy(휴면성의 상실)

③ Increasing of seed size(종자의 비대화)


①은 벼과 종자의 경우 종자가 이삭축에서 떨어지기 어려운 성질(non-shattering)이며, 콩과 종자의 경우 꼬투리가 자연적으로 터지지 않는 성질이다. 그러나 이 징후는 대부분은 고고학적 자료에서는 눈으로 보기 어려운 것이며, 녹두와 나무콩에서는 꼬투리가 자연적으로 터지는 경우가 있어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이와 같은 특징을 보이는 꼬투리 자체가 유적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는 결점이 있다. ②의 '휴면성의 상실'은 종피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으며, 종피의 두께가 감소하면 재배화의 단서가 되지만, 토기 압흔 종자에서는 계측할 수 없고, 탄화 종자의 경우에도 종피는 매우 남아 있기 어렵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③의 '종자의 비대화'만이 고고학적으로 볼 수 있는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조몬시대 대두는 편평한 형상이 특징적이고, 조몬시대 중기(약 5000년 전)에는 선조종인 돌콩의 크기를 넘는다. 게다가 이와 같은 형태의 대두는 중국과 조선반도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황하 중하류 지역의 신석기-청동기 시대의 대두와 조선반도의 청동기 시대 대두, 그리고 야요이 시대의 대두도 형태적으로 다르다(그림4-7). 이것은 북위 30-40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대두의 재배화가 발생하고, 그 기원지의 하나가 일본 열도였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팥 모양 종자의 경우도 대략 동시기에 종자의 비대화가 발견된다. 


그림4-7 동아시아의 대두 크기 비교 그래프(小畑 2008c에서). 중국, 한국, 일본의 대두속 종자(점 표시)의 크기와 현생 대두와 돌콩(원)의 크기(위:길이와 너비, 아래:길이와 두께)를 표시한 것이다. 이에 의하면 조몬 대두 쿠마다이는 매우 얇은 것, 중국의 대두는 매우 소형인 것, 야요이 대두와 한국 청동기 대두는 모두 타원형의 형태를가지고, 각각 형태적 특징이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조몬시대에 일어난 콩류 재배화의 과정


종의 유전적·형태적 변이를 야기하는 재배식물에 작용한 선택에는 자연선택과 인위적 선택 두 가지가 있으며, 후자는 종자를 선택해 심는 등의 행위에 의하여 가져오게 된 '방법적 선택'과 행위에 의하여 의도하는 방향과는 관계 없이 선택이 작용하는 '무의식적 선택'이 있다. 재배식물의 성립에 관한 선택의 주역은 '무의식적 선택'이라생각되고 있다. 


최근의 유전자 연구에 기반한 농학과 식물학적 연구는 팥과 대두에 재배형과 야생형의 중간형(잡초형)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혔다. 교란 환경에서 발아한 이팥은 생육 초기는 풀 모양이지만, 나중에 환경이 덤불로 변화하면 덩굴성으로 성장형을 변화시킨다. 이것은 재배형이 단기에 종자에 영양을 집중하는 전략을 취하는 데 반해, 환경의변화에 따라 덩굴에 영양을 보내 장기간에 걸쳐서 종자를 생산한다는 전략으로 변화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와 같은 중간형의 존재는 인간의 기호성에 기인한 선택적인 종자의 보존과 파종 행위라는 농경의 개념과는 다르며, 그와 같은 의도적 행위가 없어도 일단 교란 환경이 발생하고, 그 환경 안에서 선택적으로 사람에 의하여 채집이 계속된다면 재배화(종자의 비대화·탈립성의 상실)은 일어날 수 있다는 설의 근거가 된다. 이것은 말하자면 무의식적 선택에 의한 재배화의 발생론이다.


그러나 최근의 고민족식물학의 연구에 의하면, 재배화는 오히려 인위적인 종자의 선택·파종에 의하여 진행되었다고 생각된다. 콩류의 자연적인 꼬투리 터짐 성질의 상실에는 수확법이 크게 관련되어 있다. 수확을 위해, 꼬투리를 따거나, 뿌리채 뽑는 행위는 꼬투리가 터지지 않는 성질의 개체(유전자)가 높은 비율로 회수되는 일로 이어져, 그들을 저장하여 다음해에 심는 행위는 야생의 꼬투리 터짐 성질을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이들 행위는 여전히 무의식적인 선택의 범주에 포함된다. 그러나 종자의 배대화에는 가공작업에 의한 선택(체질, 키질),경작에 의한 경합종의 배제(쟁기에 의한 깊이갈이, 경작지의 조성·야생종과의 격리), 파종에 의한 발아의 촉진 등의 행위가 크게 영향을 준다고 한다. 이것은 이미 방법적 선택이다.


이와 같은 종자의 휴면성과 꼬투리 터짐성의 결여라는 재배화의 특징은 이론적으로는 자연돌연변이율 10^-5 - 10^-6 정도의 변이가 있다면, 파종과 수확이란 반복에서 십 몇 대-20세대의 안에 집단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된다고 한다. 또한 실험적으로 벼과 종자를 새로운 토지에 파종하고, 야생종에서 분리하여 낫을 사용해 익은 종자를 수확하면, 비탈립성의 유전자형은 20-100년 만에 집단 안에서 우점한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실제의 고고학적인 증거에서 보면, 그 진화의 과정은 매우 더딘 것을 알 수 있다. 서남아시아의 맥류와 중국 남부의 벼에서는 먼저 종자의 비대화가 일어나고, 그 다음에 비탈립성 이삭축이 증가했다. 그리고 탄화 종자의 관찰에 의하면, 초기 종자의 비대화는 재배 행위의 최초 몇 세기(500-1000년 동안)에 발생하는데, 비탈립성의 성립은 1000-2000년 정도가 결린다는 것이 증명된다. 콩류의 경우 꼬투리 터짐성의 상실은 고고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종자 비대화에 관해서는 남인도에 있는 녹두의 경우 최초의 재배 행위에서 1000-2000년 늦은 기원전 2000년대 말부터 기원전 1000년대의 철기시대 개시 이후라고 한다. 이것은 경작법의 차이를 반영하고 있으며, 쟁기에 의한 깊이갈이의 개시와 함께 종자는 비대화한다고 한다. 또한, 근동의 렌즈콩과 완두의 경우도 종자의 비대화는 쟁기가출현하는 청동기시대 후기 이후이며, 재배 행위의 개시로부터 3000-4000년 늦는다. 이와 같은 비대화 이전의 단게는 완전한 재배화에 이르지 않는(재배화 증후군이 나타나지 않는) 재배 행위(Pre-domestication cultivation) 단계라고 개념화된다. 즉 유적에서 출토된 종자 샘플 가운데 경지 잡초의 종자가 존재함(재배는 행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자의 크기와 이삭축의 형상은 야생종과 다르지 않은 단게이다. 이 단계의 경작 행위에서는 돌낫 등의 수확도구와 돌절구 등의 가공도구라는 고고학적 자료는 연동되지 않으며, 이들 유물을 가지고 경작 행위의 유무를 의론할 수 없다는 것에는 주의를 요한다.


조몬시대의 대두와 팥의 경우, 종자의 비대화는 중기에는 확인할 수 있는 점으로부터 이 이전에 이미 의도적인 경작 행위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조몬 대두 '쿠마다이'는 지금까지 유전학에서 상정되었던 일본 기원의 대두의 존재를 고고학적으로 증명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팥에 관해서는 조선반도에서 확실하게 출현한 시기가 청동기시대 후기(기원전 1000년대 후반)이며, 중국의 황하와 장강 유역에서는 전한부터 출현하기 때문에, 그 기원지로서 조선반도 혹은 일본 열도 두 곳의 후보지가 상정되어 왔다. 그러나 중국의 실제 오랜 재배 팥은 황하 하류 지역인 산둥 룽산문화(기원전 2600-기원전 1900년)의 양성진兩城鎭 유적에서 2점 출토되어, 우리나라보다 2000년 정도 연대적으로 새롭다. 또한 유전학의 연구에 의하면, 팥의 재배는 조엽수림 동부부터 온대로 퍼졌던 새팥 가운데 극동의 집단에서 재배화되었다고 상정되어, 그중에서도 유전학 및 고고학적 자료로부터 일본이 그 후보지로 좁혀지고 있다. 최근의 야마나시현을 중심으로 한 토기 압흔 자료의 발견은 이 설을 강하게 지지하는 순풍이 되고 있다. 


이상으로부터, 선사시대의 극동 지역에서 일어난 대두와 팥의 재배화 기원지의 한 곳이 일본 열도였다는 것은 거의 틀림없다. 앞에 기술한 고민족식물학의 이론적 진화는 그 재배화 시기의 소급, 즉 종자의 비대화 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이전에 이미 재배 행위가 개시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는 종자만이 아니라, 경작 잡초 등의 검출에 노력해 이 Pre-domestication cultivation의 단계가 조몬 전기 이전에 존재했단 점, 그리고 그것이 어디까지 소급되는지를 고민족식물학적 방법에 의하여 입증, 추궁할 필요가 있다.








Ⅱ 계절풍 아시아 도서부의 잡곡

-카노 타다오鹿野忠雄 <인도네시아의 잡곡>(1946) 재고-

(타케이 미에코)




시작하며


벼과 곡류를 둘러싼 농경을 이야기할 때, 먼저 관심의 중심이 되는 것은 벼와 밀, 보리, 옥수수 같은 현대의 주요곡류이다. 그 이외의 곡류는 뭉뚱그려 잡곡이라 총칭하고, 오늘날 세계의 식량 생산의 관점에서는 이제는 거의 돌아보는 일이 없지만, 각지의 농경 체계와 식생활에서 저마다 특색 있는 역사를 새겨 왔다. 이 글에서는 작물로서 주변부에 위치한 잡곡을 주제로, 지리적으로는 유라시아 동쪽 끝에 있는 게절풍 아시아 도서부부터 다루려고 한다. 


그림4-8 이 글에서 검증하는 카노(1948)의 '인도네시아에서 곡류의 동방 분포 한계선 약도'




'인도네시아의 곡류 동방 분포 한계 약도'(이후 '곡류 분포약도'라고 약칭)라고 이름을 붙인 그것은, 이 지역의 농경과 재배 식물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이 그림은 카노 타다오(1906-1945)의 <인도네시아의 곡류 -특히 벼, 조 경작의 선후 문제->라는 제목이 붙은 논문 안에서 인도네시아(동남아시아 도서부)에서 벼의 재배에 앞서는 곡류가 있다고 한다면 무엇이었는지를 밝힐 수 있도록 조, 수수, 피, 기장, 향모, 염주 여섯 종의 잡곡 분포를 그린 것이다. 섬들 사이를 등고선처럼 그려 놓은 분포한계선은,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곡류는 무엇인지, 그 분포로부터 어떤 역사를 간파할 수 있는지 상상을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적어도 이 지역의 농경과 작물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딘지 기묘하게 느껴지는 바가 있는 그림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민족학자 내지 언어학자의 문헌을 일단 도외시하고' '곡류의 분포와 현지 이름을 식물학자의 저서 논문'에 구하여 그렸다는 점에서, 식물학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사카모토阪本, 사사키佐々木, 이시게石毛 등에 의하여 인용되어 왔는데, 사사키 타카아키佐々木高明 씨와 이시게 나오미치石毛直道 씨는 피의 분포를 나타내는 선에 대해 의문을 표명하고 있다.


필자도 이 그림의 의의를 인정하지만, 위화감을 가져 온 한 사람이다. 그뒤 인도네시아와 대만에서 잡곡의 조사를 행하게 되어 이들 지역의 식물지를 대충 훑어 보거나, 식물의 표본을 접하거나 하면서 점점 이 분포도에 대한 흥미와 의문은 깊어져만 갔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섬들의 잡곡에는 어떤 종이 포함되고, 각각 어떠한 분포 지역을 가지는지, 이것을 한번 밝혀 보자는 것이 이 글의 목적 가운데 하나이다. 방법으로는 카노가 의거했다고 생각되는 문헌으로 소급하여 인용의 타당성을 확인함과 함께, 그외의 현장 자료와 문헌, 식물 표본자료에 의한 정보를 보완하기로 한다.




일본의 잡곡

 

우선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도서부에서 재배되어 온 잡곡은 어떠한 것인지, 그 소개를 겸하여 일본의 잡곡 종류와 분포를 기술하겠다. 일본은 카노 논문의 대상 지역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그 지역에 인접하며 또 밀접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도서부, 곧 일본,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에서 재배되어 온 잡곡은 표4-1에 든 7종이다. 일본에서는 이 가운데 타이완 산고량을 제외한 6종이 재배되고 있다.



일본 이름

학명

염색체 수

지리적 기원

*조

Setaria (L.) P. Beauv.

2n=18(2X)

중앙아시아-인도, 중국

일본 피

Echinochloa esculenta (A.Braun)H.Scholz

2n=54(6X)

동아시아

*기장

Panicum miliaceum L.

2n=36(4X)

중앙아시아-인도

*수수

Sorghum bicolor Moench

2n=20(2X)

아프리카

향모

Eleusine coracana Gaertn.

2n=36(4X)

동아프리카

*율무

Coix lacryma-jobi var. ma-yuen(Roman.) Stapf.

2n=40(2X)

동남아시아

타이완 산고량

Spodiopogon formosanus Rendle

2n=40

타이완

표4-1 동아시아·동남아시아의 재배 잡곡 이름, 염색체 수와 지리적 기원




조는 일본에서 가장 재배량이 많았던 잡곡으로, 홋카이도부터 남세이南西 제도에 이르기까지 널리 재배되어 왔다.일본의 재래 조에는 대부분의 생리학적, 유전학적 형질의 변이가 알려져, 이들 변이의 분포로부터 조가 일본으로전파된 경로가 몇 가지였음이 시사된다. 


피도 또한 조와 함께 옛날부터 화전에서 재배되어, 벼를 대신하는 주곡이 되어 왔던 잡곡이다. 피의 재배 지역도 넓어, 홋카이도의 아이누에서도 주요한 재배 곡류가 되는 등 동북일본에서 재배가 성행했는데, 큐슈보다도 남쪽의 난세이 제도에서는 재배된 적이 없었다. 더구나 재배 피에는 이 종 이외에 인도에서 재배화되었던 별종인 인도피(E. frumentacea Link)도 있는 점으로부터 그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일본 피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장은 조와 아울러 유라시아의 동서에서 옛날부터 재배의 역사를 지닌다. 일반적으로 조보다도 생육기간이 짧다. 조와 피처럼 화전에서 대량으로 재배되는 곡류는 아니었지만, 찰 품종의 재배가 많고 쌀밥에 섞거나, 떡을 했을때 식감과 선명한 황색을 즐긴다. 재배 지역은 홋카이도부터 난세이 제도에 달한다. 기장은 북쪽에서 전파된 경로의 가능성이 시사된다.


수수와 향모는 아프리카에 기원을 가진다. 수수는 조와 마찬가지로 일본 국내에 널리 분포하고, 찰 품종이 당고 등으로 이용된다. 향모의 재배지는 혼슈의 중부 지방 산간부에 집중되어 있으며, 그외에는 북칸토, 킨기, 시코쿠,큐슈의 일부에 겨우 점재한다.


율무는 동남아시아 원산으로, 동남아시아에서 널리 식용으로 이용되는데, 일본에서는 오랫동안 약용식물로 알려져 식용으로 이용하게 되었던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생각된다. 율무의 선조 야생종인 염주는 야생화하여 광범위하게 자생하며, 종자가 목걸이 등으로 이용되어 왔다.


난세이 제도는 여름작물 곡류가 겨울작물의 재배력으로 재배되는 등 큐슈 이북과는 다른 농경 문화의 특색을 가지고 있으며, 조와 기장, 수수의 세 종만이 재배되어 왔다. 그중에서도 조의 중요성이 높고, 미야코宮古·야에야마八重山 제도에서는 조에 관한 농경 의례가 행해져 왔다. 의례에 빠지지 않는 먹을거리로 차조로는 떡과 비슷한 먹을거리를 만들고, 메조로는 조의 제주를 빚었다.




타이완의 잡곡


카노는 '곡류 분포 약도'를 작성하면서 '식물학자의 원저 논문이나 저서'에서 그 분포와 현지 이름을 구했다고 하지만, 타이완에 관한 1차 자료는 카노 자신에 의하여 수집된 것인 듯하다. 6종의 학명 뒤에 민족별 호칭(현지 이름)이 로마자로 표시되어, 이 현지 이름의 존재로부터 타이완에는 6종 모두가 어디인지의 민족에 의하여 재배되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타이완의 선주민족에게 조가 벼보다 높은 중요성을 가진 것은 2차대전 이전의 각종 보고서에도 반복해 기술되어 있으며, 북부에서는 조와 기장, 중부와 남부에서는 조와 피가 농경 의례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928년부터 1939년에 걸쳐서 타이완에서 식물 조사와 농업 지도를 행했던 세가와 코키치瀬川孝吉(1906-1998)는 타이완에서 피의 재배는 없고, 이들 보고에 등장하는 피는 향모가 틀림없다고 하는 판단을 보이고 있다. 루카이족의 화전 조사를 행한 사사키 타카아키 씨도 보고서에서 '피'의 취급에는 고심하고 있다. 그러나 피와 향모를 다른 작물로 취급하고 있는 보고도 있고, 일괄적으로 이 두 종이 혼동되었다고도 단언할 수 없다. 


필자도 1980년대에 타이완을 처음으로 방문한 이래, 보고서에 있는 피의 기술에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향모에 대하여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있었지만 이미 재배를 볼 수 없을 만큼 쇠퇴해 있으며, 피에 대한 정보를 얻는 건 더욱 어려웠다. 그런데 2007년에 타이완 남부 산지를 방문했을 때,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미지의 잡곡과 조우하고 경악하게 된다. 귀국한 뒤, 그 식물은 산고량속의 타이완 산고량(Spodiopogon formosanus Rendl.)이라는 타이완 고유의 식물임이 밝혀졌다(그림4-9). 이 종은 잡곡으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아 왔던 식물인데, 1904년에 새로운종으로 기재되었을 때 이미 '원주민이 재배하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었다.


그림4-9 타이완 산고량의 이삭. 타이완 핑둥현屏東 우타이향霧台郷




타이완 산고량이란 새로운 잡곡의 존재를 알게 되었던 일로, 타이완에서 '피'에 관한 기술의 의혹이 풀려 나아갔다. 타이완 산고량을 현재도 재배하고 있는 루카이족, 파이완족의 호칭이 일찍이 일본어 '피'에 대한 현지어로 수집되어 왔던 단어와 일치했던 것이다. 카노가 '피'의 현지 이름으로 들고 있는 단어 가운데, 쩌우족과 파이완족의호칭은 타이완 산고량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뒤, 부눙족과 쩌우족 사람들에게도 실물 표본을 보여주고 청취 조사를 계속해, 각지의 보고서에 '피'라고 기록되어 있던 식물이 타이완 산고량이었단 것이 거의 확실해졌다. 또한 주요한 식물 표본관 7관에 타이완산 재배 피의 표본이 1점도 없었던 점에서도 재배 피의 부재가 뒷받침되었다. 


카노가 수집한 현지 이름에는 피 이외에도 의심스러운 것이 있으며, 곡류의 분포를 나타내는 자료로는 문제가 있지만 피 이외의 잡곡은 다른 조사자가 남긴 사진과 잎을 눌러 만든 표본이 있는 점으로부터 타이완에 존재했던 것은 의심되지 않는다. 세가와가 촬영한 사진집에는 쩌우족의 재배식물로 조와 수수, 율무, 향모의 사진이 게재되어 있다. 그러나 기장이란 설명이 달린 사진 가운데 1장은 산개형 이삭을 가진 수수, 다른 한 장은 타이완 산고량이었다. 피의 부재를 갈파했던 세가와에게조차 타이완 산고량의 인지는 어려웠을 것이며, 식물 분류에 밝지 않은 조사자에 의한 잡곡의 동정은 미루어 알 만하다. 일본 통치시대의 보고서 가운데 잡곡 이름의 취급에는 주의가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마다 야이치島田彌市(1884-1971)와 야마다 킨지山田金治에 의한 타얄족과 파이완족의 <유용식물목록>은 식물을분류·동정하면서 학명과 현지의 호칭을 병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민족식물학적 자료로서 신뢰성이 높은 것이다. 야마다는 파이완족이 조와 남만 피(타이완 산고량의 어느 유형이 주어졌던 당시의 일본 이름. 현재는 분류학적으로 타이완 산고량에 통합되어 있음)을 식용으로 재배하는 일을 기록하고 있다. 시마다는 각판산角板山의 타얄족이 조와 기장, 수수를 재배하고, 화롄현花蓮의 산지에 사는 민족(부눙족이라 생각되는)이 염주(율무)를 식용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다.


조는 지금도 남부의 산지를 중심으로 재배가 행해지고 있다. 루카이족과 파이완족에서는 대부분의 품종이 보전되어 있으며, 풍년제와 결혼식 같은 경사스런 날의 식사에는 차조를 이용한 술과 대나무잎 떡이 빠지지 않는다(그림4-10). 또한 란위蘭嶼의 타오(야미)족에게서도 조는 의례에서 중요한 작물이 되며, 타이완 산지와는 다른 품종인식으로 다수의 품종이 재배되고 있다. 필자는 2008년 여름에 파이완족의 풍년제를 참여 관찰할 기회가 있었는데, 삶은 토란, 토란 가루의 대나무잎 떡과 함께 조로 만든 술, 돼지고기를 넣은 조의 대나무잎 떡, 조 당고를 넣은 조니 같은 국으로, 조를 사용한 먹을거리의 대행진이었다. 과거의 복잡한 농경 의례는 사라진 지 오래이지만, 조는 지금도 경사스런 날의 상징적인 존재이다.



그림4-10 풍년제의 조 술을 위해 모아 놓은 루카이족의 조. 타이완 핑둥현 우타이향



기장의 재배는 북부의 타얄족에 의하여 지금도 조금만 계속 재배되는데, 남부에는 드물다. 현재 도정한 대립의 찰기장이 식용, 주조원료용으로 시장에 유통되고 있는데, 그 대부분이 수입(중국에서?)이라 생각된다. 


수수와 율무는 텃밭이나 밭 가장자리에 조금만 재배되는 듯한 모양으로 남아 있는 일이 많다. 율무는 한족 사이에서도 율무쌀로 일반적으로 식용되고 있으며, 도정한 종자를 팔 뿐만 아니라 달콤하게 익혀 차가운 디저트의 토핑으로도 이용되고 있다. 


향모는 현재는 절멸에 가까운 상태라고 생각된다.


타이완 산고량은 예전에는 산지부의 거의 전역에서 재배되었는데, 현재도 재배가 남아 있는 건 남부 산지와 난터우현南投의 일부로 한정된다.  이 식물은 여러해살이이며, 조보다도 개화 결실까지의 기간이 긴 만생의 성질을 가진다. 메 품종만 있으며, 죽으로 이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필리핀의 잡곡


 필리핀에 있는 잡곡의 소재에 대하여 카노가 의거한 것은 메릴(1876-1956)의 <필리핀 식물지(An Enumeration of Philippine Flowering Plants)>일 것이다. 여기에는 조, 수수, 율무(염주), 기장에 대한 기재가 있으며, 영어 이름과 함께 필리핀 여러 민족의 지방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조는 필리핀 전역의 여기저기에서 재배되고, 자주 특출해 있다고 한다. 수수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는데, 재배는 그만큼 많지 않다. 염주는 거의 모든 지방, 섬, 저지대부터 중간 정도 표고의 사람이 살고 있는 지역 전역에 걸쳐서 분포해 있고, 식용 율무에 대해서는 루손섬 리살, 민다나오섬 삼보앙가와 조로에서 채집되며 자주 그 낟알 때문에, 또 발효 음료 때문에 재배된다고 한다. 기장에 대해서는 필리핀에서 매우 드물게 재배되는데, 자생은 어디에도 없다 하고, 지방 이름으로 cabug을 들고 있다. 메릴은 기장의 표본이 1904년에 네다로스섬에서 채집된 일을 기재하고, 브랑코(1778-1845)가 1837년 <식물지>에서 세부섬에서 재배되는 잡곡(지방 이름 dava)를 기장이라 하는 것은 조의 잘못이라고 한다. 


카노가 '피'의 분포 근거로 인용했던 것은 돌피(Panicum crus-galli L. = 현재의 Echinochloa crus-galli L.) 항목의 지역 이름이다. 일찍이 피는 Panicum속으로 분류되어, 재배 피에 Panicum crus-galli var. frumentacea라는 학명이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Panicum crus-gall을 재배 피를 표현하는 것이라 해석한 듯하다. 그러나 기재 내용을 읽으면, 이 식물이 재배 피는 아니고 잡초로 자생하는 돌피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재배 피에 대한 기술은 인도 피, 일본 피 가운데 어느쪽에 대해서도 없다. 향모의 기재도 없다. 


브라운(1884-1939)의 <필리핀의 유용식물>에는 잡곡으로서 수수와 율무의 기재밖에 없다. 수수에 대해서는 설탕을 취하는 품종, 잎을 사료로 쓰는 품종, 종자를 먹는 품종, 빗자루 매기 적합한 품종 등이 있다고 한다. 또한 염주 가운데 adlay, Ilas로 알려진 것이 식용 품종인 율무라고 하며, 구릉부에 사는 사람들에 의하여 조금만 재배되고, 먹을거리로 또 발효 음료로 이용되는 일을 기술하고 있다. 또한 브랑코는 중국인이 라구나 및 팡가시난 주에서 대량으로 종자를 모아, 신체가 약한 사람에게 효과가 있다는 평판으로 일종의 가루를 만든다고도 적고 있다.


이들 기술로부터 필리핀에서 널리 재배되어 왔던 것은 조, 수수, 율무 세 종이며, 기장은 매우 제한된 재배(1개소)밖에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카노는 이 1개소의 정보로부터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의 국경을 기장의 분포 경계선으로 삼았다.


그런데, 최근 복각되어 영어 번역이 간행된 17세기 스페인 통치시대의 잡곡 재배를 전하는 귀중한 기록이 있다.


아래에 인용한 것은 예수회의 선교사로 40년에 걸쳐서 필리핀에서 전도를 행한 이그나시오 프란시스코 알시나(1610-1674)에 의한 기록 <Historia de las islas e indios de Bisayas...>(1668)의 영어 번역 제7장의 일부이다. (1)-(4)는 필자가 부가했다.


(1) 쌀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borona 또는 dawa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일종의 곡류이다. 이것은 조금 작고, 색이 누르스름한데, 일종의 밀렛이다. 그들은 쌀과 마찬가지로 쓰이고, 오히려 더 빈약하고 작물을 심어도 생산성이 낮은 듯한 토지에 농사짓는다. 아무튼 이 조는 겨자의 씨보다 조금만 큰 정도로 작은 낟알이기에 대량으로 농사짓는다. 20부터 그 이상의 이삭을 매단다(macollas). 하나의 이삭에 3000개 이상의 종자를 매단다. 그 수확량은 경이적이고, 벼보다 성장이 빠르다. 벼가 잘 되는 곳에서는 벼의 경작지 가장자리를 따라서 심으며, 그곳에서 종자를 매달고 성숙하여 벼보다도 먼저 수확한다. 벼가 별로 잘 되지 않는 섬들에서는 이 borona는 일상의 주식이다. 쌀처럼 이것도 물만으로 밥을 짓고, 쌀이 없는 때 다른 어느 곡류보다도 좋은 대체물이다. 다른 섬들에서는 그것이 있는 한 최선으로 가장 보통의 먹을거리라고 간주한다. 여러 재료를 푹 끓이는 요리의 국물과 함께 끓였을 때는 특히 맛있어서, 스페인의 보리를 넣은 진한 스프 같다.


(2) borona 이외에 여기에서 재배되는 다른 곡물이 있는데, 벼에 필적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batad와 adlay, 옥수수(가 아니라고 한다면 그 일종)이다. batad는 스페인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검은 것과 붉은 것이 있다. 그러나 매우 단단하고, 가루로 만들거나 타거나 하기가 어렵다. 부드럽게 하여 먹을 수 있도록 요리하는 일조차 어렵다.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도 쌀과는 비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3) adlay는 허연 색을 하고 있으며, 조금 길고, 약간 부드럽다. 대부분 알맹이가 없고, 별로 영양이 없다. 물론 "배고픈 데에는 나쁜 먹을거리가 없다"라는 격언처럼 아무것도 없는 때에는 배를 채우게 된다.


(4) 옥수수에 대해서는 이미 기술했듯이 외래에 기원을 가진 것임에도 불구하고, 쌀의 대체물로 이용되고 있다. 그들은 쌀과 마찬가지로 물만으로 밥을 지어 먹는다. 마치 재래의 것인 듯이 잘 자란다. 원주민들은 이 옥수수를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지, 농사짓더라도 조금밖에 심지 않는다. 재배하더라도 쌀 사이에 조금씩 심는다. 옥수수는재빨리 성숙한다. 그것을 가루로 만들거나 갈아 으깨거나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들은 아직 푸를 때 불에 굽거나 삶거나 하여 먹는 걸 즐긴다. 옥수수는 1년에 2번 수확할 수 있다. 마음에 들면 더 농사지을 수 있어, 어느 때는 1년에 3번 수확할 수도 있었다.


현대의 필리핀 식물의 지방 이름과 대조하여 (1)에서 기술되고 있는 borona는 조, (2)의 batad는 수수를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3)의 adlay는 염주의 호칭이라고 생각되는데, adlay의 주석에 "밭의 가장자리에 심고, 식용한다. 건조시켜서 큰꽃싸개를 취한다"고 하는 점으로부터 율무일 것이라 생각한다. 이 기술로부터 17세기 비사야제도에서 조가 쌀이 없는 섬에서 첫 번째 곡류라고 하며, 그밖에 수수와 율무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2차대전 이후 몇 가지 인류학적 조사에서도 필리핀 제도에서 화전에 부차적으로 재배되는 식물로서 조와 수수, 율무를 들고 있다. 알시나의 보고에서는 쌀을 농사지을 수 없는 섬에서는 조가 식량으로 상당히 중요성이 높았다고 생각되는데, 밭벼의 도입 이후 이윽고 빠른 시기에 소멸해 갔을 것이다. 기장에 관해서는 그 존재가 국한되는 점에서 비교적 최근에 도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인도네시아의 잡곡


인도네시아 잡곡의 분포에 대하여 카노가 의거한 것은 헤이네Heyne(1877-1947)의 <인도네시아 식물지>이다. 여기에는 조, 수수, 염주 및 율무의 기재와 지방 이름이 적혀 있으며, 이들 식물의 존재에 대하여 의심스러운 점은 없다. 문제는 피의 취급으로, 카노는 여기에서도 Panicum crus-galli L.의 지방 이름을 재배 피의 지역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책에서 Panicum crus-galli는 잡초의 돌피로 기재되어 있으며, 재배 피라고 해석할 수는 없다. 오크세Ochse(1892-1970)는 돌피의 항목에서 인도에서 재배되는 변종 var.frumetaceum(Panicum frumentaceum Roxb.,)로 언급하고 있지만, 이 변종은 자바에는 없다고 한다. 


기장에는 지방 이름이 없고, 플로레스섬에서 1919년 무렵에 사료작물로 시험적으로 재배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도입 작물이다.


향모에 대하여 데클레르크De Clercq(1842-1906)는 수마트라섬, 자바섬, 암본섬의 말레이어 가운데 향모의 지방 이름을 들고 있다. 또한 오크세는 향모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서자바의 낮은 산지에 드물게 재배되고, 성숙하면 상당히 큰 종자를 대량으로 달고, 도정하면 조와 비슷한 낟알을 얻을 수 있다. 야자사탕과 함께 끓여서 맛이 좋은 죽을 만든다. 도정과 날려고르기에는 큰 노력을 필요로 한다. 또한 헤이네를 인용하여, 수마트라섬의 바탁Batak 지방에서는 완숙하기 전에 수확하는 습관이 있고, 향모의 가루는 옥수수가루와 섞거나 또는 단독으로 죽이나 팬케이크로 먹을 수 있는 것을 언급한다.


1996년에 보고르의 식물표본관에 소장되어 있던 표본을 조사했던 바, 수수와 염주(및 율무)는 광범위하거나, 다수의 포본이 채집되어 있었다. 조는 수마트라섬, 자바섬, 보르네오섬, 플로레스섬, 티모르섬, 타님바르Tanimbar섬,할마헤라섬 등의 각지에서 채집되어 있었다. 또한 향모의 표본도 자바섬과 수마트라섬에서 채집되어 있었다. 향모는 자바섬의 보고르 주변에도 지천에 있던 작물이었던 듯하다. 기장은 타님바르섬에서 채집된 것이 1점만 있었다. 피의 표본은 없었다.


필자가 1990년대에 행했던 술라웨시섬과 그 주변의 외딴섬 살라야르섬과 무나섬에서는 조와 수수의 재배가 발견되었다. 술라웨시섬에서는 우중판당부터 토라자 고원으로 향하는 길의 구릉지 화전에서 조가 재배되고,조로 만든 과자가 토산물로 길거리에서 팔리며, 조의 이삭이 장식되어 있었다(그림4-11). 살라야르섬에서는 화전에 밭벼, 옥수수, 조, 카사바 등이 재배되고, 약간만 수수가 심어져 있었다. 조의 품종에는 찰 성질과 메 성질 양쪽이 있고, 찰 성질에 대한 기호가 강하고, 차조를 사용해 대나무 잎으로 말아 찐 떡이 만들어져 있었다. 또한 티모르섬에서도 각지에서 적지만 조와 수수, 율무의 재배가 있었는데, 조는 모두 메 성질이었다. 또한 발리섬에서 향모의 재배가 확인되었다. 


그림4-11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의 조



1970년대에 할마헤라섬에서 행했던 조사의 보고에 의하면, 할마헤라섬에서는 조, 수수, 율무가 재배되고 있었다. 조와 수수는 와지라는 달달한 먹을거리의 원료가 되며, 이것은 의례를 할 때 식사로 빠지지 않는 것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이상과 같이 인도네시아에서는 광범위하게 조와 수수, 율무가 재배되어 왔다. 카노는 분포 약도에서는 염주와 율무가 구별되지 않지만, 카노가 의거했던 헤이네에 기반하여 그 두 가지 변종을 나눈다면 율무의 분포 동방 한계는 조와 수수의 그것과 겹친다. 향모의 재배는 수마트라섬만이 아니라 자바섬, 발리섬에서도 알려져 있었다. 기장은 필리핀의 경우와 같이, 특정 장소에 도입된 기록이 있는데, 인도네시아의 전통적인 작물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카노는 마부치 토이치馬淵東一의 논고를 인용하여 인도네시아의 몇몇 섬에서 조의 농경의례가 있었다고 언급한다.1960년대에 동인도네시아의 케이 제도에서 사회인류학적 조사를 행했던 바로barraud는 타님바르·쿠칠섬에서 조가 의례의 장소에서 중요한 작물로 취급되고 있던 일을 보고한다. 아래에 그 간략한 번역을 인용한다.


케이 제도 가운데 조의 재배가 행해지고 있는 것은 타님바르·쿠칠섬(타네발·에바브)뿐이다. 여기에서 밭은 두 종류로 나뉘어 있다. 하나는 돌담과 울타리 등으로 항구적으로 둘러싸 보호된 개인 소유의 밭이며, 여기에는 사카사, 고구마, 토란 등의 주식이 되는 덩이류와 채소나 두류를 농사짓는다. 또 하나는 개방된 밭으로, 의레에 쓰이는 조만 공동으로 재배한다. 해마다 각 가정이 분담하는 구역이 정해진다. 나뭇가지나 쓰러진 나무로 조잡하게둘러싸기만 하고, 각 가정이 소유하는 구획의 경계에는 돌이나 베어낸 나무를 두거나, 색이 다른 조(붉음, 검음)을 심거나 한다. 또한 조수해, 충해에 주의한다. 큰 동물을 몰아내 그 땅에서 떼어 놓고, 수확할 때는 오두막에 머무르고 종자를 먹으러 오는 새를 쫓아낸다. 조는 단순히 먹을거리가 아니라 의례용 음식의 일부이며, 봉납물로쓰인다. 조는 부와 풍요의 상징이고, 그 풍년은 마을의 자랑이며, 선조가 승인하는 표시이다. 


주식이 덩이류이면서 조를 의례에서 높은 위치에 두는 건 타이완 란위의 사례와 공통된다. 곡류 분포의 동방 한게에 있는 이 섬에서 과거에는 조가 먹을거리로서 중요성이 더욱 높았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잡곡류의 분포와 전파


지금까지의 요약으로, 일본도 포함한 이 지역의 잡곡 재배의 유무를 표4-2에 표시했다. 하나의 지역에서 재배되는 잡곡의 묶음이 북쪽부터 남쪽으로 조금씩 다르며, 그 분포 동방 한계를 그려도 단순한 동심원 구조가 되지 않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미 지적했듯이, 카노가 피라고 기술했던 것은 타이완에서는 타이완 산고량이란 다른 재배식물이며,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서는 잡초인 돌피였다. 피가 있는 것은 일본의 큐슈 이북에 한정되고, 만일 피의 분포 경계선을 그린다고 한다면, 이 그림에는 등장하지 않는 일본의 큐슈 이북을 삥 둘러싸고 대륙으로 이어지는 모양이 될 것이다. 기장의 전통적인 재배지의 남방 한게는 타이완이라 생각되며, 필리핀과 인도네시아에 점재하는 기록은 특이한 사례로서 자리매김될 듯하다. 향모는 일본 본토와 타이완 사이의 난세이 제도, 타이완과인도네시아 사이의 보르네오섬, 필리핀 제도에서 분포가 중단되는 점에서 대륙으로부터 조선반도를 지나서 일본으로 전해졌던 경로, 푸젠성으로부터 타이완으로 전해졌던 경로, 말레이 반도를 경유해 순다 열도로 전해졌던 경로를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카노의 원래 그림 가운데 절반은 고쳐 적을 것이라고는 하여, 비식용 염주의 동방 한계가 가장 동쪽까지 늘어나고, 식용 곡류의 분포가 조와 수수의 동방 한계(염주도 여기에 겹침)라고 하여 뉴기니아의 서쪽에 있다는 것을 표시했단 의의는 크다. 그가 이 그림과 함께 제기한 문제는 확실히 현재도 논의되고 있는 오스트로네시아 민족의확산과 농경의 전파에 대한 관심과 겹친다. 


카노는 타이완 및 인도네시아의 토착 농경에 있는 조의 우월성부터, 조가 벼보다도 오래된 작물일 가능성을 상정했지만, 벨우드에 의하면 타이완의 가장 오래된 농경의 증거를 보여주는 기원전 3500년의 유적에서는 벼와 조 양쪽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벼와의 앞뒤 문제는 차치하고, 조의 재배가 옛날부터 있었단 것은 틀림없다. 또한 유라시아에서 조와 마찬가지로옛날부터 중요한 곡류였던 기장은 동남아시아에서는 거의 재배가 발견되지 않는다. 기장은 일장 반응성이나 온도, 건습의 조건에 대한 적응이 조와는 꽤 다른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조 정도의 중요성은 가지지 않지만, 동남아시아의 조 재배지에는 수수와 율무를 수반하는 예가 많다. 아프리카 기원의 수수는 조와 율무에 가까운 용도를 지는 곡류로 신속히 수용되었을까? 똑같이 아프리카 기원의 곡류이면서 향모의 분포는 한정되어 있으며, 재배지의 감소도 뚜렷하다. 재배의 문제만이 아니라, 탈곡 조정의 어려움에 의한 일도 생각할 수 있다.


조와 기장, 율무, 수수와 향모는 각각 유라시아 대륙 또는 아프리카 대륙의 어딘가에서 재배화되어, 이 계절풍 아시아 도서부에 가져오게 된 것인데, 이 지역의 잡곡으로 예외라고 할 수 있는 것이 타이완에서만 재배가 발견되는 타이완 산고량이다. 이 식물의 재배화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알 수 없는 것이 많지만, 타이완에 자생하는 산고량속 식물을 선조로 하고, 타이완에서 독자적으로 재배화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타이완 산고량의 재배화가 조의 재배 이전부터 있었던 것인지, 조나 벼와 같은 이미 재배화된 곡류를 외부에서 가져온 이후에 일어난 것인지, 잡곡을 둘러싼 계절풍 아시아의 농경사에 덧붙여진 새로운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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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4




기고4

일본 열도에 있는 순무와 무의 내력

야마기시 히로시山岸博

 



들어가며


순무와 무는 <고사기>나 <일본서기>에 기재가 있는 뿌리채소이고, 함께 우리나라에서 재배의 역사가 오래된 작물이다. 어느쪽도 삶아 먹는 걸 중심으로 이용되는데, 보존성이 높기 때문에 주요 곡물이 흉년일 경우의 식량 부족을 보완하는 것으로서 준주식의 위치를 점해 왔다. 우리나라의 긴 역사 속에서 순무와 무 어느쪽이라도 전국 각지에 지역 재래품종이 만들어져 왔다. 그에 의하여 다른 나라에는 예를 볼 수 없는 다양한 품종 분화가 관찰되게 되었다. 그러나 특히 제2차대전 뒤부터 근년에 이르는 시기에 두 작물의 재래품종 재배는 급속히 감소하고, 그중에서는 소멸된 품종도 발견되게 되었다. 이것은 순무와 무를 포함한 모든 채소의 유통에서 대량 생산, 대량 소비의 유형이 확립되고, 품질과 규격의 통일화가 강하게 요구되도록 된 점 및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육종 체계(잡종강세 육종)이 발달한 점에 의한다. 이와 같은 경제적, 기술적 이유를 받아서, 우리나라에서 재배되는 순무와 무의품종은 특정한 일대잡종 품종에 집중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이와 같은 대규모 유통에 대한 반성 및 지산지소 운동의 고조 및 특산 작물로 만든 지역 과자의 기운이 진전되는 등에 의하여 최근 새삼스럽게 각지의 재래품종이재발견되어, 재배의 진흥이 도모되고 있다. 이와 같은 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 순무와 무의 재래품종이다. 이들 재래품종을 사용한 농업의 부활 및 미래를 향한 육종의 방향성을 올바르게 응시하기 위해서는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두 작물의 유전적 내력을 파악해 놓는 일이 필요하다. 순무와 무에는 우리나라에서 오랜역사를 가진다는 공통성이 있는데, 품종 분화라는 점에서는 서로 다른 특징을 갖는다. 아래에 두 작물에 대하여, 관련된 식물과의 관계, 일본 열도에서 유전적 변이를 관찰하여 순무와 무의 전래 및 동서 문화와의 관련 유무를 고려하는 데 일조하고 싶다.




순무, 무와 그 주변의 식물


순무는 브라시카 라파에 속하는 다양한 식물의 일원이다. 이 종은 유지작물, 채소, 사료작물로 이용되고 있으며, 유지작물로는 브라운 사순 및 옐로 사순이 주로 남아시아에서 재배되고 있다. 한편, 사료작물로는 순무의 재배가유럽에서 발달했다. 이에 반하여 동아시아에서는 채소로 이용하는 일이 활발하며, 이용 부위는 식물체의 모든 영양기관, 생식기관에 걸쳐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채소로서 식용되는 브라시카 라파가 세 종류의 작물로 나뉘어 취급된다. 곧 배추(결구 잎), 순무(비대 뿌리) 및 단배추(비결구 잎 및 꽃대)이다. 이에 반해 중국에서는 북부에서 배추의 재배가, 또 남부에서 바이차이(청경채)의 재배가 성행하는데, 순무는 거의 재배하지 않는다. 또한 유럽과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하는 아시아와의 사이에서는 순무의 용도로 사료용과 식용이란 큰 차이가 존재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절임으로 겨울철 보존식이라는 이용방법이 각지에서 발달해 왔다. 브라시카 라파의 야생식물은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잡초로서 자생한다고 하며, 최근의 연구에서는 이 종에 속하는 갖가지 작물은 브라시카 라파의 야생식물에서 다원적으로 성립했을 가능성이 드러나고 있다. 또한 다양한 형태적 변이에도 불구하고, 종 안의교잡이 쉽기 때문에, 뿌리채소인 순무의 유전적 기반도 다원적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브라시카 라파가 종 안에 다양한 작물을 포함하는 데 반하여, 라파너스 사티버스Raphanus sativus는는 기본적으로 비대한 뿌리를 식용으로 하는, 무라는 한 종류의 작물로 이루어진다. 예외적으로 동남아시아의 일부 지역에서 종자를 감싸는 꼬투리가 두드러지게 길어지고, 그 꼬투리를 미성숙한 단계에서 식용으로 하는 '꼬투리 무'가 있으며(그림1), 또 중국 남부에 종자에서 기름을 짜서 이용하는 '기름 무'가 재배되기만 한다. 뿌리를 식용으로 하는 점은 유럽도 아시아도 공통되는데, 유럽에서는 샐러드 등의 생식을 주체로 하는 품종군이 발달하고, 중국에서도 특히 북부에서 전분 함량이 높은 생식용 품종군이 발달했다. 이에 반하여 우리나라에서는 끓여 먹는 용도의 품종군이 발달해 있다. 또한 수확한 뒤 일단 건조시키고 절임으로 만드는 이용 방법과, 뿌리를 잘게 자른 뒤에 건조하여 보존식으로 삼는 '잘라 말린 무'와 '베어 말린 무'로 이용하는 방법이 발달했다. 라파너스속에는 몇 종의 야생종이 존재한다고 이야기되며, 그 가운데 서양 무는 동아시아를 제외한 세계 각지에 널리 분포한다. 우리나라의 해안부와 아시아 대륙의 동해안부에는 '갯무'라고 부르는 야생 무가 자생하고 있다. 필자 등에 의해 최근의 엽록체 게놈 및 미토콘드리아 게놈을 활용한 계통 해석에 따라, 갯무는 서양 무가 분포역을 넓혀서 동아시아에 적응한 것이란 점, 세계의 재배 무는 서양 무가 유라시아 대륙의 여기저기에서 다원적으로 재배화되어 성립한 것이란점이 밝혀졌다.


그림1 꼬투리 무의 꼬투리(길게 뻗은 미성숙한 꼬투리를 식용으로 한다)





일본 열도의 순무에 나타나는 동과 서


앞에 기술했듯이, 순무의 용도는 유럽에서는 사료용, 우리나라에서는 식용으로 동서양으로 크게 분화되어 있다. 그러나 용도만이 아니라 형태적으로도 많은 점에서 차이가 관찰되며, 그 차이가 우리나라로 순무가 전래된 경로 및 농경 기술을 포함한 동일본과 서일본의 문화 차이와의 관련된다고 옛날부터 많은 연구자가 주목해 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럽계 순무를 양종계洋種系, 일본 재래품종을 화종계和種系라고 부르는데, 시부타니 시게루渋谷茂·오카무라 토모마사岡村知政(1952)는 이들 품종군을 비교하여 양종계의 순무는 잎면에 털이 많고, 또 모습이 넓게 펴지는 성질이고 전체적으로 거칠고 강한 인상을 주는 데 반하여, 화종계 순무는 잎면에 전혀 털이 없고, 모습은 꼿꼿하게 서는 성질이든지 반 정도 넓게 펴지는 성질이고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을 주는 것을 관찰했다.또한 꽃종서기의 이르고 늦음에 대해서도 조사하여, 화종계 품종은 꽃종서기가 이른 데 반하여 양종계 품종은 모두 꽃종서기가 매우 늦다고 하는 점도 발견했다.


더욱이 두 사람은 순무의 종자를 해부학적으로 관찰하여, 물이 담근 종자의 표피세포의 형태에 따라서 A형과 B형의 두 무리로 구별할 수 있다는 걸 발견했다. A형은 종자를 물에 담갔을 때 표피세포가 흡수하면 얇은 막이 물을 머금어 수포 모양으로 팽창하는 유형이다. 이에 반하여 B형은 표피세포가 흡수해도 세포는 편평한 얇은 막 모양인 채로 수포 모양을 이루지 않는다. 그에 더해 화종계 품종의 종자는 A형의 표피를 가지고, 양종계의 품종은 B형의 표피를 가지는 것으로 명료하게 구별된다고 하는 관계를 밝혔다. 두 사람은 이들 특성 가운데 순무의 모습과 꽃종서기 시기에 관해서는 품종 안 변이가 있는 것에 반해, 종자의 표피세포 유형은 매우 정성적이며, 품종 분류에서 징표로 편리하다고 생각하여, 주로 이 형질에 기반해 우리나라의 순무 품종을 서구계 품종군(양종계에 해당하며, 종피형은 B형), 중간계 품종군(종피형은 B형), 및 일본 재래품종군(화종계에 해당하며, 종피형은 A형) 세 가지로 분류했다. 


이와 같은 종피형의 분화에 관한 식견에 기반하여, 오오바 타카시靑葉高(1916-1999)는 우리나라의 순무 재래품종에서 종피형의 지역별 분포를 대규모로 조사했다. 그 결과, 서일본에서는 A형의 종피를 가진 화종계 품종이 분포하고, 동일본에는 B형의 종피를 가진 양종계 품종이 재배되고 있다는, 명확한 구분을 발견했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중부지방 북서부, 곧 교토부부터 나가노현에 이르는 각 부현의 재래품종 특성, 특히 잎면의 털 유무 및 종피형을 상세하게 조사했다. 그 결과, 교토부·후쿠이현부터 사가현·기후현에 이르는 혼슈 중부 지역에서 화종계 순무와 양종계 순무의 교잡이 일어났단 것을 확인했다. 그에 더해 오오바는 이와 같은 두 가지 유형의 교잡은 서일본의 화종계 품종이 양종계 품종의 분포 지역으로 침입하는 모양으로 일어났다고 추정했다. 오오바가 발견한, 와카사만과 이세만을 연결한 이 순무의 동서 분화의 경계선에 대하여, 나카오 사스케中尾佐助(1916-1993)는 '순무 라인'이라 이름을 붙였다. 오오바는 이 경계선이 상당한 너비를 가지면서도 화양 두 품종군이 거의 섞이지 않고서 동서일본으로 나뉘어 분포하고 있는 이유를 고찰했다. 그 결과, 순무와 마찬가지로 갓, 오이, 우엉 등의 경우 시베리아, 유럽계의 품종과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다고 생각되는 품종이, 호쿠리쿠北陸와 도호쿠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는 점으로부터 이들 품종은 유라시아 대륙 북부에서 우리나라의 일본해 연안으로 건너오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은 일본의 농경 문화 일부가 북회 경로로 건너왔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이것을 '시베리아 경로'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와 같은 북방에서 오는 길로 들어온 작물 가운데, 양종계 순무는 마찬가지로 북회로 전해졌다고 이야기되는 화전 재배라는 옛 농법과 연결되며, 현재까지 잔조해 있다(그림2). 오오바는 '시베리아 경로'에 의해 전래된 동일본의 양종계 순무에 반하여, 화종계 순무는 외국에서 전래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조사한 중국의 순무, 단배추 종류의 종피형은 모두 B형이며, 또 구미의 순무도 모두 B형이었다. 한편, 우리나라의 단배추 종류 가운데 '미즈나水菜, 미부나壬生菜'가 속하는 '교나京菜'군이 A형 종피를 가지고 있다.이것으로부터 오오바는 우리나라의 '교나'군의 단배추에 돌연변이로 발생한 A형 종피 유전자가 순무와의 교잡에의하여 순무에 도입되어, 서일본 일대의 품종으로 분포를 넓혔다고 생각했다.


그림2 사가현 북부의 산간부에 남아 있는 화전에서 양종계 순무의 재배




이상으로 소개한, 시부타니와 오카무라 및 오오바의 종피형을 중요한 지표로 한 순무의 품종 분류 및 분포 지역의 조사는 이 형질이 인위선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고, 또 순무의 환경적응성에 영향을 주어 자연선택의 대상이 되는 형질도 아니라는 것을 전제로 하여 이루어졌다. 이에 대하여 야자와 스스무矢澤進 씨는 종피형이 자연선택에서 의미가 있는 형질인 점을 실험적으로 증명했다. 그는 A형 종피와 B형 종피 사이에 종자의 저장 기간에 대한 반응이 다르다는 점을 발견했다. 곧 A형의 종자는 장기간 보존하더라도 높은 발아율을 유지하고 있는 데에 반하여, B형 종자에서는 장기간 저장함에 따라 발아율이 저하되는 일이 확인되었다. 또한 야자와 씨는 발아할때 발아상에서 수분 함량과 발아율의 관계를 조사했다. 그 결과, A형의 종자는 B형 종자에 비하여 적은 수분 조건에서도 높은 발아율을 가진 점을 발견하고, 그 원인은 A형 종자의 표피세포가 흡수하여 수포 모양을 이루기 때문에, B형 종자에 비교하여 흡수율이 높은 점에 있다고 생각했다. 곧, A형 종자는 강수가 불안정한 고온건조 지역에서 나타나는 순무와 단배추의 생존전략으로서, 자연선택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형질인 것이다. 이들 일련의 실험적 검증에 기반하여, 야자와 씨는 A형 품종은 우리나라에서 생긴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몇몇 채소와 마찬가지로 남회 경로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이 아닐까 하고 추정한다. 또한 이것을 확인하기 위하여, 중국 남부와 티베트의 순무와 단배추를 조사해야 한다. 


이처럼 일본 열도에 있는 순무의 분포에 대해서는 50년 이상에 걸친 우리나라 연구자들의 실험과 조사에 의하여 동일본과 서일본에서 재래품종이 크게 분화되어 있다는 점이 밝혀졌다. 그리고 이 분화는 일본 열도로 들어온 농경 문화의 전래 경로가 북쪽과 남쪽 두 가지 흐름으로 크게 나뉘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원성은 선학들의 착실한 실험과 조사에 의하여 떠오르게 된 것이다. 그들의, 풍부한 자료에 기반하면서도 겸허하게 가설을 제시하는 연구 자세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일본의 무가 지닌 유전적 다양성


일본의 순무가 명료한 동서 분화를 보이는 데 반하여, 우리나라의 무는 이보다 복잡한 유전적 내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전적 다양성의 기간을 이루고 있는 것은 역시 이원성이다. 세리자와 마사카즈芹澤正和 씨는 우리나라의 무에 대해서 예전에는 지역별로 독특한 품종이 발달해 있었지만, 산지의 대형화 등에 수반하여 현재의 주요 품종군은 '미노みの 조생' '궁중宮重' '네리마練馬' 3대 무리를 이루고, 여기에 '아와阿波 만생' '성호원聖護院' '이년자二年子·사철' 무리를 더한 여섯 무리로 무의 수요를 조달하고 있다고 한다. 필자 등은 이들 오늘날 우리나라의 주요 품종과 전국 각지의 지역 재래품종을 포함하여, 우리나라의 무에 대하여 세포질 게놈(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의 게놈)의 분화를 조사해 왔다. 그 결과, 일본 무의 세포질 유형은 크게 두 가지 집단으로 분류되는 것이 밝혀졌다. 두 가지 가운데 하나의 집단에는 위에 적은 주요 품종 가운데 '미노 조생'을 제하고 모든 품종이 속하며,또 하나의 집단에는 각지의 재래품종과 '미노 조생'이 속해 있었다. 이 가운데 후자의 집단에는 '센다이지 무(仙台地大根)'와 '신슈지 무(信州地大根)' 등 동일본의 재래품종만이 아니라, 오키나와 재래인 '와인챠ワインチャー', 가고시마의 '사쿠라지마桜島', 교토의 '매운맛 무' 등 서일본의 재래품종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이 집단에는 중국, 특히 중국 북부의 재배품종 및 한국의 재배품종이 거의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주요 품종이 포함되는 전자의 세포질 유형에 대해서는 중국의 재배품종 중에서 정리된 형태로 찾아낼 수 없었다. 이와 같이 세포질 게놈의 해석으로부터 밝혀지게 된 우리나라의 무 품종의 두 분화는 순무와 같은 동서 분화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각지에 남은 재래품종 대 전국적으로 재배되고 있는 주요 품종이란 형태로 관찰되었다. 이러한 두 작물에서 보이는 두 분화의 양식 차이에는 동서의 식문화와 우리나라로 전래된 경로의 차이를 넘는, 품종의 전국적인 보급 유무가 관계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에도 시대 이후에 일어난 우리나라 각지의 무 품종 형성과정에 대해서는 앞으로 한층 조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편, 대륙의 품종과의 관계에서는 두 가지 유형 가운데 하나는, 아시아 대륙 북부의 품종과 관계가 깊고, 순무와 마찬가지로 북회 경로를 따라 전래되었다고 상정된다. 또 다른 하나는 중국 남부의 품종과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데, 그것이 반드시 굵은 경로로 관찰되고 있지는 않다는 점도 순무와 공통된다. 


우리나라의 무에 유전적 다양성을 부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요인으로 갯무의 존재가 있다. 우리나라의 해안부 및아시아 대륙 동부 연안에 자생하고 있는 갯무에는 재배 무의 세포질 분류에 쓰인 위에 적은 두 가지 유형만이 아니라, 이것과는 다른 세포질을 가진 개체가 빈번히 포함되어 있다. 이 세포질 유형은 무의 꽃가루 형성을 저해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종자 생산에 유해한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재배품종에서는 거의 발견할 수 없다.그런데 신중히 재래품종을 조사함에 의하여, 이 세포질을 가진 재배품종이 발견되었다. 게다가 그들 품종은 일본의 특정 지역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키나와와 교토, 미야기와, 우리나라의 다른 지역 여기저기에서 발견되었다. 그와 같은 품종의 한 예가 도호쿠 지방의 '코제나小瀬菜' 무이다(그림3). 이 품종은 무로는 특이하게 뿌리의비대는 별로 나타나지 않고, 왕성하게 생육하는 잎을 식용으로 한다. 이들 갯무 특유의 세포질을 가진 품종이 있다는 점은 일본의 일부 지역에서 야생 갯무가 재배화되어 성립한 재래품종이 존재하며, 현재도 재배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갯무에는 이 세포질만이 아니라, 위에 적은 우리나라의 재배 무에 보이는 주요한 두 유형의 세포질도 분포해 있다. 이 때문에 이들 두 유형의 재래품종 중에도 우리나라의 갯무가 재배화된 것이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앞으로 세포질 유형의 분류를 포함하여, 무의 유전적 특성을 더욱 자세하게 분석하는 지표가 발견된다면, 우리나라 및 세계 무의 내력에 대하여 한층 상세한 분류가 가능할 것이다. 


그림3 도호쿠 지방의 재래품종 '코제나 무'(세포질 게놈을 해석한 결과 갯무가 재배화되어 성립되었다고 추정됨)





마치며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위치한 일본에서는 대륙에서 성립된 작물이 다양한 경로로 전래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소개한 우리나라의 순무와 무는 모두 이원적인 전래 경로를 추정하게 하는 유전적 내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순무는 오늘날에도 명확한 동서 분화를 가지는 데 반하여, 무는 전국적인 주요 품종과 각지의 재래품종이란형태로 이원성을 유지하고 있는 점이 다르다. 또한 두 작물과 중국 남부 등의 품종의 관계가 아직 충분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 한편으로, 무에서는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야생 무의 유전적 기여가 관찰되고 있다. 이와 같이 기본적 성격을 공통으로 가지면서도, 각각 특유의 진화를 거쳐 온 일본 열도의 순무와 무에게 최근 재래품종의 재배 부흥 운동이 진행되고 있는 점은 기쁜 일이다. 바라건대, 각각의 품종이 지닌 유전적 특성을 고려하여, 그것을 살려 온 재배기술이나 보존·가공 방법 등, 각지에서 북돋아 온 농경 문화의 요소가 전승되길 기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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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4





제3장

화전의 생업 주기와 뿌리작물 종류의 저장 체계

-파푸아뉴기니의 사례에서 보는 '농경 사회'의 다양성

호소야 아오이細谷葵









시작하며


이 장에서 사례연구로 다루는 파푸아뉴기니의 밀른베이Milne Bay주와 동東하이랜드의 사회는 뿌리작물을 중심으로 한 화전 경작을 영위하는 농경 사회인데, 수렵과 어로, 채집도 동시에 중요한 생업이며, 그들을 적절히 조합하여 나날의 식량을 얻고 있다. 이러한 뿌리작물 농경사회는 과거에는 그다지 농경사의 연구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것은 '농경만으로 생활'하지 않는 사회의 상태가 '전업의 농경사회'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탓이라 말할 수 있다. 단계론적인 역사관 가운데 '수렵채집사회'와 '농경사회'의 연구 틈새에서 누락되어 버렸는데, 이와 같은 유형의 농경사회가 아닐까? 그러나 다각적인 자원이용의 일환으로 농경이 있다고 하는 상태는 사실 농경사회의 기본적인 모습임과 함께, 농경사회의 발전 가운데 한 유형이기도 하다. 생업 속에서 농경의 비율을 늘려 갔던 사회만이 농경사회가 아니라, 곧 농경사회에는 다양한 모습이 있다고 하는 것을 인식하는 데에 더하여, 본래 농경이란 어떠한 것인지를 이해하고 뿌리 깊은 '혁명'적 농경관에서 탈각하기 위해서도 화전과 뿌리작물 농경사회의 연구는 앞으로 중요성을 더해 갈 것이다. 


이 장에서는 그 관점을 가지고, 나날의 생업 주기와 저장 형태의 특징이란 문제에 중점을 두면서, 화전 농경을 포함한 다각적인 자원 이용을 행하는 파푸아뉴기니 농경사회에 대하여 논해 나아가고자 한다.





농경사 연구의 현상과 과제


'농경의 기원'에 관한 연구의 과거와 현상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그 배경이 되는 농경사 연구의 현상과, 그곳에서 어떤 새로운 관점이 요구되는지에 대하여 정리하고자 한다. '농경의 기원'은 세기를 넘어서 학식자, 연구자의 흥미를 모아 온 문제이다. 그 흥미의 근원은 어디에 있을지 생각하면, '농경'이란 것을 시작함에 의하여 인간 사회가 크게 변화하는, 그것도 문명으로 발전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감각이, 자명한 이치처럼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겠다.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고고학자 고든 차일드(1892-1957)의 잘 알려진 '신석기 혁명'론(Childe 1981[1956])은 마르크스주의 사관의관점에 기반을 두고, 인간은 선사시대부터 단계적으로 진보해 왔다는 사고방식을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농경의 개시는 목축의 개시나 토기와 직물의 발명과 함께 일어났던, '물건을 직접 만들어 내는' 단계로 혁신적으로 도약했다고 생각하여, '혁명'이라고 정의를 내렸다. 그뒤 각국에서 조직적인 고고학 연구가 진행됨에 따라서, 토기의 제작과 농경의 기원은 필연적인 관련을 갖지 않는다는 등 사실관계로서 차일드의 이론이 성립하지 않는 점이 많이 판명되어 왔다. 그러나 그래도 농경의 개시가 인류사에서 어느 종의 혁명적인 사건이며, 그것을 계기로 인간 사회는 크게 발전했다고 하는 무의식의 개념은 뿌리 깊게 남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기존의 것보다 적어도 오래된 재배식물의 유존체가 발견되면, '재배의 기원이 거슬러 올라갔다'고 신문 등에서 크게 다루는 것도 재배 활동이 존재했는지 아닌지로 그 사회의 평가, 발전 단계의 인식이 크게 바뀐다는 사고방식이 유포되어있는 표시일 것이다. 일본의 조몬시대에 대한 인식에서도, 이 시대는 수렵채집 단계이며 농경 단계가 아니기 때문에 식물 재배가 있을 리 없다는 반쪽짜리 믿음 같은 선입관이 석권하고 있던 시기가 오래 이어졌다. 이러한 선입관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조몬 농경론'이 나타난(藤森 1970) 터인데, 식물 이용의 실태가 여러 식물 유존체자료로부터 파악되어 온 현재까지도 조몬 시대에 확인할 수 있는 흔적은 '조몬 농경'이란 이름의 무언가 특이한 것처럼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최신의 식물고고학 연구의 성과는 이러한 '혁명'적 농경관에 반하여, 근본적인 다시 보기를 계속 강요하고 있다. '혁명'적 농경관에서는 재배기술을 받아들인 사회집단은 그것에 의하여 생업형태를 곧 크게 바꾼다는 인상이, 웬일인지 공유되고 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런 건 없었다는 사실이 세계의 주요 곡물 가운데 두 가지인 밀과 쌀의 기원지 모두에서 지적되고 있다. 탄노丹野·윌콕스(Tanno&Willcox 2006)는 밀의 재배 기원지인 터키동남부 및 시리아 북부에 대하여, 밀의 재배 활동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재배형 밀이 태어나기까지 1000년 이상이나 걸렸다는 것을 식물 유존체 자료에 기반하여 논하고 있다. 그리고 재배화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던 이유의 하나로, 재배 활동이 시작되어도 야생 밀의 이용도 적절히 계속되었을 가능성을 들고 있다. 또한 풀러 외(Fuller rt al. 2009)는 쌀의 재배 기원지인 중국 장강 유역에 있는 절강성 전라산 유적의 자료 분석에 의하면, 쌀의 재배 활동이 곧바로 시작되는 기원전 4900년부터 4600년의 300년에 걸쳐서 식물 유존체의 전체에서 점하는쌀의 비율은 8%에서 24%로 완만한 증가밖에 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유존체의 태반을 점하는 것은 마름이나 도토리 등 야생의 식용식물이다. 이들의 연구 성과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재배 활동을 개시한 뒤에도 상당히 오랫동안 인간은 생업 기반이 수렵채집어로뿐이었던 시대가 계속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다각적인 자원 이용을 이어 왔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고고학 이외의 관련 분야에서도 최근 제시되고 있다(々木 2007, 佐藤 2008). 이 점에 대하여, 더욱 의론을 진행하고자 한다.




농경사회에서 '다각적인 자원 이용'


다각적인 자원 이용의 개념이라고 말하면, 일본의 선사 연구에서는 '조몬 달력'이란 사고방식이 있다(小林 1996)(그림3-1). 조몬 사람이 사계절의 변화에 맞추어 얼마나 잘 다양한 자원을 이용했는지를 도시한 것으로, 현재로서는 조몬시대의 생업을 이야기하는 데 빠질 수 없는 개념이라 받아들여져 여기저기에서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야요이 시대 등 확실히 농경을 받아들였다고 하는 사회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자원 이용에 관한 '달력'을 보는 건 거의 없다. 이것 자체가 농경을 받아들인 사회는 그렇지 않은 사회와 완전히 별개라는 '전제'의 존재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 '농경을 받아들인 사회의 자원 이용 달력'의 희한한 예로서 그림3-2(甲元 2004)가 있다. 두 가지 달력을 비교해 보면, 농경의 도입이 생업 형태의 모든 걸 바꾸는 필연성 등이 없는 것이 명백하다. '농경'은 말하자면, 다각적인 자원 이용의 일환으로 덧붙이는 것이라 말해도 좋다. 게다가 이 달력 안에 농경이 점하는 비율이 그뒤 자연히 늘어 가야 할 필연성도 발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각적인 자원 이용의 상태 그대로 잘 작동하는 사회라면, 그대로 역사를 거듭해 가더라도 이상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상태라면, 만약 여러 가지 조건이 변하여 농경을 계속하는 것이 어려워진다면, 비교적 간단히 '농경이 없는 상태'로도 변할 수 있을 것이다. 한번 농경을 시작한 사회집단이 농경을 그만두고 수렵채집을 기반으로 한 생활을 하는 일은 마치 '역사 역행'적인 특이한 현상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농경이 단순히 다각적 자원 이용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매우 자연스런 일이다.



그림3-1 조몬 달력. 삽화 木村政司, 小林 1996, 111쪽



그림3-2 농경을 수반한 다각적 자원 달력. 甲元 2004, 167쪽




다만 실제의 역사에서는 대부분의 사회가 '농경'을 달력의 면적 대부분을 점하는 데까지 늘어나고, 그 결과로서 어느새 '농경이 없는 상태'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유형인 '농경사회'를 구축해 왔다. '농경'의 비율이 늘어난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일찍이 '농경이 기원한 이유'로서 의론되어 온, 환경 변화나 인구압 등은 물론 '농경'의 비율이 늘어난 이유로서 생각하는 쪽이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중요한 건 어떤 직접적 계기가 있었던 것으로 생업 달력 안에 '농경'의 비율을 증가시킨 것이 '필연'은 아닌 이상, 최종적인 '이유'는 모든 사회적 사정에 기여하는 것이었단 점이다. 재배는 본래 다른 여러 가지 자원 이용과 균형을 잡으면서 비롯된 것임에 틀림없다. 만일 환경이나 인구 상황이 자원을 부족하게 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면, 물론 더 한층 잘 균형을 잡는 일을 고려할 것이다. 그러하면 농경 부분을 '부자연스럽게' 성장시키는 선택은 사회조직으로서의 무언가 목적성을 가지고 행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여기에서 '농경사'를 참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중요한 점을 두 가지 들 수 있다. 하나는, 왜 대부분의 사회에서 '농경'의 비율이 증가해 갔는지 하는 문제는 농경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느냐는 문제에서는 완전히 독립된 별개의 이야기로 고찰되어야 한다. 또 하나는, '농경의 비율이 증가해 갔던' 이유를 생각하기 위해서 과거의 환경 변화를 복원하거나 인구의 변동을 추측하거나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그들의 자료도 당시의 사회 사정의 문제와 맞추어 의론되지 않는 한 별로 의미는 없다.


이와 같은 새로운 관점에서 농경사의 연구를 진행해 가기 위해서는 농경 '이전' '이후'라는 선입관에 구애되지 않는 선사 생업 형태의 복원을 해 나아갈 필요가 있다. 곧, 농경을 받아들인 사회이기 때문이라고 하여 야생식물의 이용 등을 '부차적인 것'이라 경시하지는 않으며, 농경도 채집도 동렬에 서 있는 '자원 이용 달력'을 만들어 가는것이다. 앞에 나온 풀러 외(Fuller et al. 2009)에도 볼 수 있듯이, 특히 중국 등 농경 기원지에서의 초기 농경 시기의 연구에서는 그것이 요구되고 있다. '자원 이용 달력'이 올바로 복원되는 것에 의하여, 처음으로, 그뒤 왜 농경의 비율이 증가해 갔는지 하는 문제의 고찰로도 논의를 진행시킬 수 있다. 이 '농경을 받아들인 사회의 자원 이용 달력'을 복원해 가는 데에는 현재도 생업 주기의 안에서 비교적 '농경'의 비율을 늘리지 않고 다각적인 자원이용을 행하고 있는 사회의 생활 방식이나 특성을 관찰·분석하는 일이 큰 도움이 된다. 이 장의 주안점은 그곳에 있다.





파푸아뉴기니, 야밤yabam 섬의 생업과 화전

 

조사지에 대하여


우선은 필자가 와세대 대학 선사고고학 연구소 조사단의 일원으로 2005-2006년에 조사(高橋 외 2007, 2008)했던 파푸아뉴기니 밀른베이 주에 있는 야밤 섬에서의 생활과 화전 농사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그 생업 주기와 사회에 대하여 고찰하겠다.


파푸아뉴기니는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의 북쪽, 적도의 바로 남쪽에 위치하는, 뉴기니 섬의 동반부 및 주변의 섬들을 포함한 나라이다(그림3-3). 전체의 면적은 46만2천 평방미터, 인구는 577만 명(2004년 현재)을 센다(山口· 2006). 인구의 95%가 멜라네시아계인데, 지역 집단마다 문화적 독립성이 높고 언어도 800가지 이상 존재한다(Burke et al. 2005). 전반적으로 열대우림 기후이고, 12월부터 3월 무렵이 우기, 5월부터 10월 무렵이 건기이다(Burke et al. 2005). 다만 이 장에서 주요 대상으로 하는 동부의 밀른베이 주에서는 우기와 건기의 시기가 역전되어 있다(高橋 외 2007).


그림3-3 파푸아뉴기니의 위치




밀른베이 주는 알로타우를 주도로 하고, 뉴기니 본섬 동부의 밀른만을 낀 두 개의 반도와, 약 600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주이다(高橋 외 2007). 주민의 대부분은 화전 경작을 중심으로 한 자급자족의 생활을 영위하는데, 작물 중에서도 특히 얌이 중요시되며, 일반적으로 '얌 하우스'라 부르는 마루를 높게 쌓은 고상식 저장시설을 가진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야밤 섬은 밀른베이 주의 해안에 따라 주요 도시인 이스트 케이프에서 남동으로 약 9km 바다를 건넌 곳에 위치한, 지름 약 55미터의 찌그러진  사각형을 한 작은 섬이다(高橋 외 2007). 인구는 30-40명 정도인데, 섬 사이의 이동이 많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다(高橋 외 2007).


조사진은 2005년 8월에 1주일, 2006년 8월에 2주일, 야밤 섬에 머물며 민족조사를 행했다. 필자는 특히 해당 지역에서 생업과 나날의 일정, 저장 형태 등에 초점을 두고서 청취 조사와 동행 조사를 실시했다. 그리고 필자의 2005년 조사에 대해서는 문과성 과학연구비 보조금, 장려연구(조사번호 17904030) <일본 식물고고학의 기초 만들기 -조몬·야요이 문화의 고고식물 자료 집상과 민족조사를 중심으로>에 의하여 행했다.




야밤 섬의 생업


야밤 섬에서 어느 부부의 전형적인 하루 생활은, 청취 조사에 의하면 아래와 같다.


아내

오전     집 앞 비질→우물에서 물긷기→아침 밥짓기→가족과 함께 아침 식사→화전에서 수확, 김매기, 씨뿌리기→점심 밥짓기

오후     점심 이후, 휴식→저녁 밥짓기


남편

오전     집 앞 비질→땔감, 코코넛 모으기→코코넛 과육을 갈아서 잘게 만들기, 불 피우기 등, 아침 밥짓기의 준비→카누로 물고기 잡기→아침 식사→화전에서 나무를 베는 등의 일

오후     점심 식사→(필요가 있는 경우) 집을 짓는 등의 일→ 저녁 식사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화전(그림3-4)은 생업의 중심으로서, 섬사람이 기본적으로 매일 나가는 장소이다. 이 청취 사정에서는 아내와 남편이 함께 오전 안에 화전에 간다고 이야기하는데, 실제로 동행 조사를 행해 보면 화전에 가는 시간은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고, 적당한 작업을 하는 듯하다.


그림3-4 비탈면에 만든 화전(야밤 섬)




화전의 역할은 말하자면 슈퍼마켓과 식량창고를 겸하는 것이라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화전에는 늘, 뿌리작물 종류를 중심으로 한 작물이 10종류 정도 심어져 있다(표3-1). 한 집의 주부는 매일 화전에 가서, 그날 가족이 먹을분량의 작물을 이것저것 선택해 수확한다. 그것과 동시에 수확물의 일부를 '씨앗'으로 밭에 심는다. 영양번식이 가능한 뿌리작물 종류가 작물의 대부분이기 때문에 쓰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야밤 섬의 화전 농경에서는 수확과 파종이 동시에 진행되어, 그날마다 행하는 것이 최대의 특징이다. 밭 그것이 식량의 저장 장소와 같기 때문에, 하루분 이상의 작물을 수확하여 어딘가에 저장해 놓는 일은 없다. 씨앗으로 보관하지도 않는다. 나중에 상세히 기술할 얌에 대해서만, 파종과 수확의 시기가 1년에 한 번씩이라 결정되어 있고, '1년'이란 주기로 재배와 저장을 하고 있지만 일상적으로 소비되는 식량에 대해서는 이 '1일' 주기의 농경이 기본이 된다. 이러한 1년 동안 이용된 화전은 휴경하고, 새로운 화전을 만들어 재차 '1일' 주기의 수확과 파종이 시작된다.



장소

소유주

작물

야밤 섬

M1

얌 2종, 파인애플, 바나나, 타로, 사탕수수, 콩, 닥풀

B

바나나, 닥풀, [네타과], 고추, 호박, 타로 3종, 파파야, 얌 

S

고구마, 바나나, 타피오카, 사탕수수, 닥풀, 타로, 얌

M2

양배추, 땅콩, 바나나, 닥풀, 타피오카, 감자, 타로, 파인애플, 얌

N

바나나, 타로, 파파야, 파인애플, 닥풀, 고추, 양배추, 얌

D

얌, 바나나, 타로, 파파야, 파인애플, 닥풀, 호박, 사탕수수

신부

얌, 바나나, 타피오카, 사탕수수, 닥풀, 감자, 호박

파히레레 섬

W

타로콩콩, 사탕수수, 타피오카, 파파야, 얌, 토마토, 아스파라거스, 게마히, 콩, 파인애플, 옥수수

R

자이언트 타로, 타피오카, 사탕수수, 파파야, 바나나, 닥풀, 게마히, 감자, 얌, 파인애플

B

닥풀, 타피오카, 바나나, 타로, 자이언트 타로, 파인애플, 고구마, 얌

표3-1 화전에서 재배되는 작물




'1일' 주기의 유형은 생업활동의 전체에 공통이다. 야밤 섬 사람들의 중요한 단백질원은 어패류인데, 그 정기적인 공급원은 주부, 아이들이 날마다 행하는 소규모 고기잡이이다. 야밤 섬은 산호초로 둘러싸여 주위의 바다는 멀리까지 물이 얕기 때문에, 특히 정오가 조금 지난 무렵의 썰물 시간에는 어느 정도의 난바다까지 걸어서 들어간다. 주부와 아이들은 그 시간을 노려서 바다에 들어가, 낚시줄에 바늘과 미끼(바닷가에 생식하는 소형 육산패陸産貝 종류)만 매다는 간단한 도구를 사용해, 던질낚시를 한다(그림3-5). 그날 먹을 분량인 몇 마리를 낚으면, 고기잡이는 끝난다. 문어나 대왕조개 등도 바닷가 근처에서 간단히 포획할 수 있고, 날에 따라서 이용한다. 남성이 가끔 반쯤 여가로 행하는 고기잡이에서는, 카누로 난바다에 나가서 작살을 가지고 바닷속에 잠수하는 등 조금 커지고, 잡는 물고기의 양도 늘어난다. 그래도 기껏해야 이틀 먹을 만한 정도의 양이다. 하루에 먹을 수 없는 분량은 불 위에서 훈증해 보존하는데, 이튿날에 먹어 버리지 않으면 부패해 버린다고 한다. 곧, 어로활동도 또한 '1일' 단위를 기본으로 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림3-5 던질낚시 도구와 어획물(야밤 섬)



화전의 작물에 더하여 야생의 식물도 일상적으로 이용되는데, 이것도 그날마다 적당히 채집된다. 야밤 섬의 식사에서 기본은 뿌리작물 종류, 어개류, 잎채소이며, 이들을 각각 코코넛 밀크로 끓여, 소금이나 재배하고 있는 고추등으로 조미한다. 잎채소로는 화전에서 재배하는 '닥풀'이란 작물이 쓰이거나, 산에 자생하는 '네타과'라 부르는 나무(학명 Gnetum gnemon L.)의 어린잎이나 꽃차례를 사용하거나 하고, 재배·야생의 구별 없이 날마다 골라서이용된다. 날마다 하는 요리에서 빠지지 않는 코코넛을 비롯한 과실류도 필요에 따라 채집된다. '오카리 넛츠'라고 부르는 야생의 나무 열매는 언제나 과자 대신에 캐서는 먹고 있다. 


이렇게 하여 밭, 바다, 산에서 그날 그날 채집된 식재료가, 식탁을 형성하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재배, 어로, 채집이란 서로 다른 생업활동이 매우 자연스럽게 녹아서 하나가 되어 있다. 이것은 각 활동의 비중을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마음대로 바꾼다는 것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날씨가 나빠서 고기잡이를 할 수 없는 날은 물고기를 먹지 않는 만큼의 식량을 늘리거나, 밭의 작물 수확이 시원치 않을 때는 산에서 채집하는 것을 늘리거나 하는 대응을 할 수 있겠다. 또한, 이 섬에는 전기가 없기 때문에 요리는 돌을 늘어세운 간단한 화로에서 불을 붙여서 하며, 거기에서 태우는 땔감도 주워다 말린 코코넛의 껍질, 나뭇가지 등 주거와 화전의 주변에서 모을 수 있는 것이다. 조리도구도 요즘은 '일찍 익힌다'고 하는 이유로 금속제의 냄비가 쓰이고 있지만, 예전에는 여성들이 직접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여 그 기술은 지금도 계속 내려오고 있다(高橋 외 2007, 2008). 기본적으로 이입품 없이 식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자급자족의 생활 태도를 여기에서 발견할 수 있다.




화전 만들기


야밤 섬의 복합적인 생업 가운데 화전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 것일까? 청취 조사, 동행 조사를 통하여 조사해 보았다. 


화전은 기본적으로 한 세대가 하나씩 소유한다. 아이가 결혼하여 독립하면, 먼저 자신의 밭을 준비하게 된다. 화전의 위치는 사용할 수 있는 토지 중에서 흙의 상태가 좋은 장소를 골라서 정한다. 산비탈인 일이 많다. 크기는 심을 수 있는 '씨앗'의 양에 따라서 결정한다. 화전은 1년마다 장소를 이동하고, 대략 3-4년 주기로 원래의 장소를 다시 사용할 수 있다. 


화전 만들기는 풀베기부터 시작한다. 남녀가 협력하여 행하고, 베어낸 풀은 그 장소에서 2주일 정도 건조시킨다.풀이 충분히 마른 곳에서 불놓기를 행한다. 불놓기는 하루만 하고, 불을 태우는 실질 시간은 30분에서 1시간 정도이다. 불놓기는 밭으로 만드는 부분만 잘 타도록 하는데, 실패하여 상당히 불이 번져 버린 예도 보았다. 밭터에자라고 있는 나무는 기본적으로 그대로 남긴다. 그러나 말라 죽어서 쓰지 못하는 나무의 경우는 며칠 걸려서 서 있는 채로 태워 버리기도 한다. 불놓기 다음은 타버린 등의 폐기물을 제거하는 데 2-3일 걸린다. 흙의 표면이 깔끔해지면, 통나무를 비탈에 대해 가로로 늘어 놓는다. 이것은 흙이 쓸려 내려가지 않도록 막는 목적인데, 가족의 각 구성원이 지닌 구획을 표시하는 역할을 겸하는 경우도 있을 것 같다.


밭의 준비가 마무리되면, 우선은 남성이 흙을 갈아엎는다. 이어서 여성이 흙속에 남은 뿌리를 제거하면, 파종을 행한다. 파종은 여성의 일인데, 타로를 심는 경우만 남성이 심지 않으면 잘 자라지 않는다는 전승이 있다. 파종에는 구멍을 파는 막대기를 쓴다(그림3-6). 가족 이외의 혈연자 등이 작업을 도운 경우에는 보답으로 작물을 나누어준다.


그림3-6 구멍 뚫는 막대를 사용한 파종(야밤 섬)




재배하는 식물은 10종류 안팎으로, 소유주가 그때마다 판단하여 결정한다. 따라서 내용은 각기 다르지만,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의 먹을거리로 빠지지 않는 얌에 대해서는 어느 세대나 반드시 재배한다. 야밤 섬의 남쪽 약 2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하는 같은 규모의 작은 섬 파히레레 섬(高橋 외 2007)에서도 화전 작물에 대하여 조사했다(표3-1). 야밤 섬과 파히레레 섬은 친족 관계로도 깊은 관련을 가지며, 주민도 빈번히 왕래하고 있다. 파히레레 섬에서는 야밤 섬보다 흙이 양질인 듯하여 밭도 더 넓고, 작물의 종류도 많다. 야밤 섬에서는 수분 부족으로 농사가 어려운 타로 등도 많이 농사짓고 있다. 다만, 얌이 빠지지 않는 점과 생업 형태, 화전 관련된 작업 방식 등은 야밤 섬과 마찬가지이다. 


작물 중에서 가장 내성이 있는 것은 타피오카 같으며, 휴경하고 있는 밭이나 폐기된 밭에서도 자연적으로 자라고있는 걸 여러 번 발견했다. 야밤 섬과 파히레레 섬의 주민에 의하면, 얌은 충분한 양분이 있는 흙이 아니면 잘 자라지 않지만, 타피오카는 기후가 안 좋아 다른 작물이 자라지 않는 때에도 수확할 수 있다고 하여, 구황식의 역할을 하기도 한단다. 주민들에게 작물 중에서도 '중요한 먹을거리'는 무언인지 들어본 바, 야밤 섬에서는 의례에서 먹는 얌이라는 답이 많았는데, 파히레레 섬에서는 '어떤 때라도 수확할 수 있는' 타피오카라는 답이 많았다. 타피오카 이외에도 호박 등이 휴경하고 있는 밭에서 계속 자라고 있는 걸 본 적이 있었는데, 그들도 적당히 식용으로 쓰는 등, 유연하게 밭을 이용하고 있는 듯하다. 




야밤 섬의 토지 소유 관념과 생업 주기


또한, 화전 만들기의 기반이 되는 토지 이용의 체게에 대하여 청취를 중심으로 조사했다.


야밤 섬에서는 토지를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주민은 4명뿐이다. 야밤 섬의 토지 모두가 기본적으로 이 4명에게 속한다. 이 4명은 최초로 야밤 섬에 이주해 온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세 딸의 직계 자손 및 2세대 전에 이스트 케이프에서 표착하여 섬사람의 허가를 얻어 정착한 사람의 자손이라 구전되고 있다. 토지 소유자는 이 네 가계에 고정되어 있으며, 매매 등으로 변화하는 일은 없는 듯하다. 밀른베이 주는 모계사회이기에 딸과 자매 등의 여성, 또는 여계의 조카가 토지를 상속한다. 예외적으로 지주 가운데 한 사람은 본인은 여성이지만 지주의 가계에 같은핏줄인 건 부친이라는 남계의 혈연관계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가 노인이고 가까운 친척을 갖지 않기 때문에 섬사람의 재량으로 변칙적으로 허가된 것이며, 그다지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는 이야기라고 한다.다만 그녀의 사후는 그 모친의 출신지인 이스트 케이프에 매장되어야 한다. 야밤 섬의 토지는 그녀의 친척인 여성에게 상속된다. 만약 그녀가 야밤 섬에 매장되기를 강하게 바라거나, 기후의 관계로 이스트 케이프로 유체를 옮기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야밤 섬에 매장한 경우는 그 보답으로 토지는 야밤 섬의 다른 지주의 것이 된다고 한다. 


지주는 아닌 사람이 토지를 사용하는 권리로는 토지 영세사용권 같은 것이 있다. 어느 여성은 부친이 야밤 섬 출신이라는 남계의 혈연관계로 섬에 살고 있으며 지주도 아니지만, 부친이 이미 '보상(compensation)'을 해결하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자손들이 대대로 그 토지에 계속 살 수 있다고 한다. 다만 그녀가 매장될 때는 자기 모친의 출신지인 이스트 케이프에 매장되어야 하는데, 이것도 지주와의 교섭에 따라 바뀔 수 있다. 그리고, '보상'에는 5만-6만 키나, 경우에 따라서는 10만 키나 이상의 현금 및 전통적인 음식에 의한 지불이 필요하다. 그 액수는 토지 사정사가 결정한다.


화전으로 토지를 사용하는 건 이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토지의 권리를 가지지 않아도 지주 누군가와 교섭하여 일정한 구획을 사용해도 좋다고 허가를 받으면, 화전을 만들 수 있다. 특히 지불도 필요없다. 그 대신 이 허가는 유동적으로, 지주의 사정으로 급히 토지사용을 중단시키는 일도 있다. 또, 가장 양질의 토지는 지주가 사용하기에, 그 이외의 부분에서 장소를 골라야 한다. 사용권은 본인 뿐이며 상속도 할 수 없고, 따라서 자손에게 넘겨주는 것은 화전 만들기의 노하우와 씨앗(뿌리작물의 씨앗, 바나나의 접목 등) 뿐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야밤 섬의 토지 소유에 대해서는, 매장되는 장소가 어디가 되는지 하는 점이 가장 큰 문제인 듯하며, 화전이란 생산 단위에는 별로 토지재산으로서의 중요성을 두지 않는다. 논과 밭을 경영하는 대규모 단작 사회와는 크게 다른 토지 관념이라 말할 수 있겠다. 토지 소유는 좋은 토지를 화전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으로 이어지지만, 그것은 토지를 가진 특권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 자체가 사회적 지위나 신분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야밤 섬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심을 수 있는 작물이나 그 효과적 방법에 대한 지식이다. 심을 수 있는 장소인 화전의 위치는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 더욱이 농경이 생업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토지와 생업의 고정화되지 않는 관계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화전이란 유연성이 높은 농경 형태, 그리고 그것을 핵심으로 하여 다각적으로 자원을 이용하는 '1일' 기반의 생활 주기가 토지의 사용방법, 상속의 방식 같은  사회제도면에도 반영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화전 생업 주기 속의 '1일' 기반의 자원 이용 형태에서는 작물이든 어획이든 '저장'이 행해지지 않는 점이 특징적이었다. 그러나 그 한편에서 얌에 대해서만은 야밤 섬만이 아니라 밀른베이 주의 여러 섬을 비롯해 몇몇 지역에서 '얌 하우스'라는 저장시설이 만들어져 있다. 얌 하우스에 하는 저장은 '1일' 기반의 화전 생업 주기에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 것일까? 다음 절에서는 이 문제를 통하여 화전 생업 주기의 특성을 더욱 생각해 보고자 한다.





뿌리작물 종류의 저장 체계 -얌 하우스의 역할


얌 하우스에 대하여


'얌 하우스'란 그 이름과 같이 얌을 넣어 놓기 위한 집, 곧 독립된 저장시설이다. 고상식으로, 대부분은 맞배지붕을 가진 작은 오두막 형태를 하고 있다(그림3-7). 파푸아뉴기니에서는 밀른베이 주의 섬들에서 특히 일반적인 시설이며, 지역 문화의 특징으로 이야기되고 있는데, 다른 지역에서도 볼 수 있다.



그림3-7 얌 하우스(야밤 섬)




얌 하우스에는 반드시 얌만 수납한다. '1일' 기반의 생업이 영위되는 화전 생업 주기의 생활 속에서 얌은 유일하게 '1년' 기반으로 재배·수확되는 작물이다. 필자가 조사한 선에서는 얌의 파종, 수확의 시기는 지역에 따라서 다르지만, 각각이 1년에 1회의 정해진 시기에 행해진다는 유형 자체는 어디에서나 공통되었다. 단순히 생각하면,기본적으로 작물을 저장하지 않는 '1일' 기반의 생활에서, 얌만이 '1년' 기반의 주기에 놓여 있기 때문에, 대규모단작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저장'이 행해지는 것이라고 해석하기 쉽다. 그렇지 않으면, 역시 '1일' 기반의 사회이기에 독특한 성질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 절에서는 몇몇 얌 하우스를 지닌 지역의 사례로부터 이 문제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작물 중에서도 얌을 중시하고, 얌 하우스를 가진 문화라고 말하면 밀른베이 주가 대표적이다. 이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행하고 있던 독특한 형태를 지닌 교역인 '쿨라 교역'(말리노프스키 1980[1922])에 관련된 교환 물자로도 얌이 등장한다(後藤 2002). 그중에서도 트로브리안드 제도의 키리위나 섬에 대해서는, 파푸아뉴기니의 다른 지역에는 존재하지 않는 '파라마운트 치프Paramount chief'라는 권력자가 존재하는데, 대량의 얌을 수확하여 얌 하우스에 수납하는 '얌 축제'가 그 권력의 표상이 되고 있는 점으로부터, 얌 하우스에 관련하여 이 땅에서 대부분의인류학적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淺川 1991, Wilson 1988 등). 그 때문에 일반적으로, 키리위나 섬의 사례가 얌하우스의 대명사처럼 받아드려지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서 얌 하우스를 대규모 단작 사회의 저장시설과 같은 예라고 생각해, 나날의 식량을 보증하는 시설로서 그 풍요로움이 권력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각지의 얌 하우스 사례를 보면, 그 모습은 지역에 따라서 여러 가지이며, 키리위나 섬의 사례는 오히려 특수한 한 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굳이 키리위나 섬 이외의 얌 하우스 사례를 중심으로 비교검토해 보는 것으로, 저정시설이란 본래의 얌 하우스의 의미를 검토하고자 한다.




야밤 섬·파히레레 섬의 얌 하우스


2005년 야밤 섬 조사 및 2006년 야밤 섬과 파히레레 섬 조사에서는 얌 하우스의 이용 방식에 관한 여러 점에 대해서도 조사를 행했다. 


두 섬이라도 얌 하우스는 맞배지붕의 고상식 건물이다. 마루 아래의 공간은 토기용 흙 등이 두기도 하는데, 원칙적으로는 통풍을 좋게 하기 위하여 물건은 두지 않는 곳이었다. 얌밭의 소유에 따라서 만들기 때문에, 대략 한 세대에 한 채를 소유한다. 밭의 소유에 수반한 것이기 때문에, 섬사람의 친족으로 섬에 살고 있지는 않지만 섬 안에얌밭은 소유하고 있어서 얌 하우스를 가지고 있다고 하는 예도 야밤 섬에 3채 있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파종과수확의 시기에만 야밤 섬으로 온다. 제초 등 밭의 관리는 섬에 사는 친족이 행한다.


야밤 섬에서는 2005년 조사에서 사용되고 있는 얌 하우스 6채와 폐기되어 있는 1채를 확인했다. 2006년 조사할 때에는 사용되고 있는 것이 5채로 줄었다. 그 이유는 2005년에는 야밤 섬 교회에 부임 목사가 없었기 때문에, 파히레레 섬에서 교회의 사무장 부부가 파견되어 와 야밤 섬에 살아, 얌 하우스도 소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6년에는 목사 부부가 왔기 때문에 사무장 부부는 파히레레 섬으로 돌아가고, 얌 하우스도 흔적 없이 정리되었기때문이다. 새롭게 부임한 목사 부부는 아직 얌 하우스를 만들지 않았다. 주거, 부엌의 건물은 그대로 사무장 부부에게서 목사 부부에게 인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얌 하우스는 인계되지 않았던 점에서 일시적인 건조물로 취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얌 하우스의 크기는 소유하는 얌밭의 크기 및 수확량에 대응한다. 건조는 기본적으로 그 세대의 남성이 한다. 한 채 만드는 데에 1-2주일 걸린다고 한다. 건축재에 대하여 특별히 정해진 바는 없고, 산속에서 입수할 수 있는 목재를 적당히 사용한다. 지붕을 이는 재료는 코코넛 또는 사고야자의 잎이다. 코코넛 잎으로 이은 지붕은 1년 정도밖에 견디지 못하지만, 사고야자의 잎이라면 4-5년이나 견딘다고 한다. 그러나 섬 안에는 사고야자가 생육하지 않고, 이스트 케이프에서 가져오는 수고가 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코코넛 잎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몇 채 있었다. 지붕이 못 쓰게 되면 지붕을 다시 이는 등은 하지 않고, 얌 하우스 그것을 폐기해 버린다. 앞에 기술한 야밤 섬을 떠난 교회 사무장 부부는 얌 하우스를 완전히 정리하고 떠났는데, 그대로 방치하여 삭게 하는 예도 많은 듯하다.


얌 하우스를 만드는 위치는 주거의 근처, 또는 산속의 밭 근처라는 두 유형이 있다. 대부분은 주거 근처에 세우며, 밭 근처에 세운 것은 야밤 섬과 파히레레 섬에서 각 1채씩 뿐이었다. 그러나 청취 조사를 해보면, 주거 근처에 얌 하우스를 가진 사람들이라도 사실은 밭 근처에 세우고 싶었다고 하는 의견이 많다. 얌의 운반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거 근처에 세운 것은 얌의 도난을 우려하기 때문이라 한다. 


또한, 주거 근처에 세운 얌 하우스는 대부분이 길에서 보아 침소나 부엌의 건물에 가려지는 듯한 위치에 놓여 있다. 그 이유는 얌 하우스를 남이 볼 수 있게 하면, 얌밭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으로 시샘을 받아 주술을 걸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얌 하우스에 넣는 얌은 용도별로 구분한다. 큰 것은 제사용, 작은 것은 씨앗용이고, 그 중간 것이나 상처가 있는 건 일상 식용이다. 식용인 것은 수확한 뒤 2-4개월이면 다 먹어 버린다. 곧 저장 대상으로서 가장 오래 보관되어있는 건 씨앗용과 제사가 있을 때를 대비하여 두는 얌 뿐인 것이다.


야밤 섬과 파히레레 섬의 사례를 보면, 얌 하우스는 저장시설이지만, 대규모 단작 사회에서 일반적인 '곳간'의 인상과는 상당히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큰 차이는 대규모 단작 사회에서는 나날의 식량을 보관하고, 보증하기위하여 저장시설이 존재하지만, 야밤 섬과 파히레레 섬의 얌 하우스에는 그 역할이 매우 희박하다. 저장되는 주체는 씨앗과 제사용 얌의 비축이며, 일생생활 속에서 정기적으로 저장물을 꺼내 먹는다는 생활 유형은 아니다. 야밤 섬에서 살고 있지 않아도 얌밭만 소유하기에 얌 하우스를 소유한다는 사람들의 사례가 있다거나, 본래는 얌하우스를 밭 근처에 짓고 싶다고 하는 것이 사람들 대부분의 의지라는 등 얌 하우스가 오히려 주거보다 밭에 수반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것이 일상생활의 일부를 이루는 저장시설이 아니라는 점을 반영하고 있다. 항상적인 건조물로서 만들지 않지만, 화전 그것과 똑같은 일시성, 유연성의 개념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얌 하우스가 지닌 저장시설이란 특성이 화전 생업 주기의 사회에 공통되는 것인지, 더욱 시야를 넓혀서 밀른베이 주 섬들의 사례를 보고자 한다.  




밀른베이 주의 얌 하우스


이미 언급했듯이, 밀른베이 주에는 600개 이상의 섬이 포함된다. 필자는 2008년 2월에 약 2주일 동안, 과학연구비 보조금, 젊은 연구 스타트업(과제번호 19820059) <일본 열도 선사 사회의 생업 형태 재고 -민족지 조사에의한 식물고고학 연구의 기반 형성을 위하여>에 의해, 파푸아뉴기니 대학, 파푸아뉴기니 국립박물관의 연구자들의 협력을 얻어 밀른베이 주의 여러 섬들에서 얌 하우스에 대하여 민족조사를 행했다. 조사 대상은 누아카타 섬, 노르만비 섬, 도부 섬이다. 이들 섬들에서도 얌이 사회적으로 중요시되어, 일반적으로 얌 하우스를 소유한다.


누아카타 섬은 야밤 섬의 동쪽 약 7.5킬로미터의 장소에 위치하는 지름 약 5킬로미터의 섬이다. 노르만비 섬은 길이 약 70킬로미터의 큰 섬으로, 누아카타 섬의 북쪽 약 17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이 두 섬은 야밤 섬, 파히레레 섬과의 교류가 비교적 빈번하고, 야밤 섬 노인의 이야기로는 두 섬에 토기를 이출하고 보답으로 얌을 얻었던 일도 있다고 한다. 도부 섬은 노르만비 섬의 북단 근처 3킬로미터 미만 떨어진 위치에 있다. 지름 약 3킬로미터로 작은 섬이지만, 사실은 이 섬을 중심으로 한 도부 사람들의 지구는 쿨라 교역의 중추였다고도 이야기되는 장소로서, 말리노프스키(1980[1922])에 의하면 "쿨라의 연계 안에서 가장 중요한 고리의 하나를 이루고 …… 교역, 산업, 그리고 전반적인 문화적 영향력의 중심지"(107-108쪽)이다. 인구도 밀집하고, 역시 쿨라 교역의 중추로서 알려진 키리위나 섬보다도 예전에는 사회적으로 상위에 있었다고 한다(말리노프스키 1980[1922]). 이들 세 섬에서 얌 하우스에 관련된 청취 조사를 행했다. 노르만비 섬은 크기 때문에 장소에 따라서 관습 등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남쪽의 부나마 마을 및 서쪽의 세와 에디 마을 두 곳에서 조사했다. 또한 후자에는 토지의권력자인 '빅맨'이 있어, 그 본인에게서 청취를 행했다. 이 조사의 결과, 야밤 섬이나 파히레레 섬과의 공통점, 상이점에 대하여 흥미로운 유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야밤 섬, 파히레레 섬과 이 세 섬 사이에 공통되는 것은 얌 하우스 그것의 성격이다. 첫째로, 얌 하우스가 수명이 짧은, 일시적인 시설로서 만들어지는 점이다. 도부 섬에서 행한 청취에 의하면, 재료에 따르지만 얌 하우스의 수명은 대략 1-2년이고, 길어도 10년이라고 한다. 형상은 야밤 섬과 파히레레 섬의 것과 똑같고, 맞배지붕의 고상식 건조물이다. 둘째로, 얌 하우스는 역시 기본적으로 타인의 눈에서 숨기는 듯한 위치에 지어진다. 타인에게 보이지 않는 건 질투를 받아 주술을 걸어 생명을 단축시키는 일을 피하고자 함이란 이유를 드는 것도 공통된다. 다만 세우는 장소는 미묘하게 다르다(표3-2). 누아카타 섬에서는 야밤 섬에 많았던 것처럼, 주거의 배후에해당하는 위치였다ㅣ. 도부 섬은 그 변형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마을의 배후에 있는 숲속에 각 사람의 얌하우스가 여기저기 세워져 있었다. 한편, 노르만비 섬 부나마 마을에서는 오로지 밭 근처에 세운다고 한다. 같은 섬 세와 에디 마을의 빅맨 집에서는 씨앗용 얌 하우스는 밭 근처, 수확물을 넣는 얌 하우스는 주거의 뒤라는 구별을 하고 있었다.


장소

얌의 구분

얌을 먹는 시기

얌 하우스 위치

매일 먹는 것

누아카타 섬

식용, 제사용

수확 때에, 떨어진 것만 먹음

집 뒤

타피오카

노르만비 섬(부나마 마을)

남과 나누어 먹기 좋은 것,가족용, 제사용 등

수확철만

밭 근처에만

타피오카

고구마

노르만비 섬(세와 에디 마을, 빅맨 집)

제사용, 씨앗용

매일 먹음

집 뒤(식용)

밭 근처(씨앗용)

얌, 바나나, 고구마, 타피오카, 호박 등

도부 섬

일상식, 손님 및 제사용, 씨앗용

매일 빠짐없이 식탁에 있어야 함

마을 배후의 숲속

주거에서 떨어짐

밭의 근처에 만드는 경우도있음

얌, 고구마, 

타피오카, 바나나

표3-2 밀른베이 주 세 섬에서 얌을 둘러싼 습관




한편, 안에 넣는 얌의 취급과 이용 방식에 관한 것에는, 장소마다 차이가 보인다(표3-2). 수확한 얌을 제사용과 일상 식용, 그리고 씨앗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공통된다. 그러나 구분을 누가 하느냐에 대해서는, 예를 들면 누아카타 섬과 도부 섬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전자에서는 남성이 주가 되어 하고 여성은 씨앗만 관리하지만, 얌 하우스에 접근하는 건 남녀 함께 할 수 있다. 그러나 후자에서는 용도의 구분부터 얌 하우스의 관리까지 완전히 여성만의 일이며, 남성이 얌 하우스에 접촉하는 일은 허락되지 않는다. 아내가 숙박할 예정으로 떠나거나 하면, 그동안 남편이나 아이는 얌을 먹지 못하고 참아야 한다고 한다. 말리노프스키(1980[1922])에 의하면, 도부 섬에서는 여성이 높은 지위를 점하고, 주술 등의 특권도 가지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 관습이 현재도 살아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얌의 먹을거리로서의 지위에서도 차이가 있다. 누아카타 섬이나 노르만비 섬 부나마 마을에서는 얌을 평소의 식사로 먹는 것은 수확의 시기 즈음뿐으로 일상식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것은 야밤 섬, 파히레레 섬과 마찬가지이다. 누아카타 섬에 이르러서는 일상식으로는 수확할 때 넘쳐흘러 떨어진 얌만 먹는다고 한다. 그러나 노르만비 섬 세와 에디 마을의 빅맨 집과 도부 섬에서는 비록 단 한 조각이라도 날마다 식탁에 반드시 얌이 있어야 한다. 도부 섬에서는 1년 가운데 저장된 얌이 점점 줄어들어 소량밖에 먹을 수 없게 되는 시기를 '기아 시기(starvation period)'라고 부른다. 다른 작물이 아무리 풍부하더라도 '기아'이다. 얌을 충분히 갖지 못한 가정은 '먹을거리가 없는 집'이라 업신여겨진다고도 들었다. 앞에 기술했듯이 도부 섬에서 얌 하우스의 관리는 여성의 일이기에, 얌을 1년 동안 먹을 수 있도록 견딜 수 있는지 어떤지로 그 여성이 지혜로운지 아닌지 결정된다고 한다.


밀른베이 주 세 섬의 사례를 보면, 일시적인 건조물인 점 등 얌 하우스 그것의 성질은 공통되는데, 나날의 식량을보관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지 아닌지 하는 저장시설로서의 성질에 대해서는 고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곧, 도부 섬 및 노르만비 섬의 빅맨 집에서는 저장된 얌을 1년 동안 계속 먹는 일이 매우 중요시되고 있다. 대규모 단작 사회의 저장과 가까운 감각이라 말해도 좋다. 하지만 한편으로, 벼농사 등의 대규모 단작 사회에서는 저장 대상으로 한정된 종류의 작물 이외에는 사실상 '주식'이 아니지만, 도부 섬과 빅맨 집의 사례에서는 얌 이외의 다종의 화전 작물 외에 다양한 자원이 이용되는 생업의 방식은 다른 밀른베이 주의 사례와 똑같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말하자면, 얌을 매일 먹는 일은 '필수'가 아니라는 사실이 있다. 도부 섬에서 얌의 재고가 줄어드는 시기를 '기아기'라고 부르지만, 이는비유적인 표현이며 실제로 먹을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여기에서 도부 섬은 쿨라 교역에서 높은 지위에 있는 섬인 점, 또 빅맨도 사회적 지위가 높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들이 매일 먹는 얌은 오히려 일종의 신분을 나타내는 음식이라 파악해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곧 다른 섬들에서 얌 하우스의 주요한 내용물이 되고 있는 제사용 재고를 매일 먹고 있는 것이라 말해도 좋으며, 대규모 단작 사회의 식량 저장과는 언뜻 비슷하나 다른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밀른베이 주 섬들의 사례를 정리하면, '1일' 기반의 화전 생업 주기에서 얌 하우스라는 저장시설은 존재하긴 하지만 저장 식량의 이용이 나날의 생업 주기에 필수적인 일부로서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기본 유형은 공통된다. 그것은 얌 하우스가 일시적인 건조물인 점, 주거보다 밭과의 연계가 강한 점이라는 일관된 유형에 반영되어 있다. 얌 하우스에서의 저장은 오히려 밭에서 하는 재배 활동에 수반된 것이다. 그것과 함께 사회적 수요에 응하기 위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사회적 수요의 정도 차이에 따라서 일상생활 속에서 얌 하우스와의 관계 방식에 차이가 발생하며, 생업의 일환으로서의 물리적인 수요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1일' 기반의 화전 생업 주기의 사회에서 독자적으로 완성된 저장 문화라고 말해도 좋으며, 대규모 단작 사회의 저장 문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체계로 생각할 만하다. 이 점에 대하여 고찰을 깊게 해야 하며, 밀른베이 주 이외의 얌하우스 사례도 보고자 한다.




동하이랜드의 얌 하우스


파푸아뉴기니 본섬의 3000미터 급의 고산이 동서로 이어진 지역은 '하이랜드 지방'이라 부른다. 그 동부에 위치한 코코다 계곡 주변의 지역에 대하여 2008년 7월에 1개월의 조사를 행했다. 종합지구환경학연구소 <농업이 환경을 파괴할 때> 프로젝트 연구 활동의 일환이며 주체는 고고학 조사였는데, 필자 외 몇 명은 인근 마을들에서 청취 조사·동행 조사에 의한 민족조사도 실시했다. 


이들 마을에서는 산간부이기에 단백질원은 밀른베이 주처럼 어개류 중심이 아니라, 수럽으로 얻는 작은 동물이 중심이다. 그러나 수렵은 어로만큼 확실성이 없기 때문에, 평균적으로 단백질을 뺀 식사가 대부분이다. 또한 뉴기니 본섬에 위치하고, 큰 마을과 육지가 이어져 있어 물자가 이입되기 쉽기 때문에, 구입 먹을거리의 비율도 비교적 늘어난다. 이러한 차이는 있지만, 화전을 핵심으로 한 '1일' 기반의 생업 주기이고, 다각적인 자원 이용을 하고 있다는 기본은 밀른베이 주와 똑같으며, 또한 대부분의 세대가 얌 하우스를 가진다. 그래서 밀른베이 주와의 비교 사례로서 고찰하고자 한다.


조사한 코코다 계곡 주변의 마을들에서는 대부분이 얌 하우스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밀른베이 주만큼 확실하고 사회적으로 얌이 중요시되고 있지는 않다. 인근에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을에 따른 습관 차이가 크고, 제사에서 얌이 중요시되는 마을, 타로가 중요시되는 마을, 그 두 가지가 동등한 마을 등 여러 가지이다. 이와 같이 얌에 대한 서로 다른 사회적 가치관과 얌 하우스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조사 사례 가운데 얌의 사회적 가치 상태가 가장 밀른베이 주에 가까웠던 것은 사바야 마을로, 얌은 의례의 음식과 결혼, 교환재 외에 프로포즈의 선물 등으로도 중요시된다. '훌륭한 얌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한 사람 몫의 남자'라고도 하며, 얌밭을 가장 잘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 마을의 주도권을 획득한다는 사실도 있는 듯하다. 다만 의례의 음식과 결혼에는 타로나 바나나도 아울러 사용되고, 밀른베이 주만큼 얌만 돌출되고 있지는 않다. 이 마을에 있는 얌 하우스는 대부분 밭의 근처에 만들어지는데, 도난이 특히 걱정되는 경우는 집 근처에 만든다. 안에 있는 얌에 대해서는 일상 식용의 것은 빨리빨리 다 먹어 버리고, 씨앗과 제사용 얌만 오래 저장되고 있다는 상황도 야밤 섬과 누아카타 섬 등의 사례와 똑같다.


얌과 타로가 동등하게 중요시되고 있는 예로는 카만다라 마을이 있다. 여기에서는 역시 일상식으로서의 얌은 수확기에만 먹으며, 씨앗과 제사용으로 간직하는 얌을 주로 얌 하우스에 보관한다. 얌 하우스의 위치는 밭의 근처이다. 한편 동등하게 중요한 타로에는 그와 같은 저장시설은 없고, 말하자면 밭에 심은 채로 '보관'하고 있다. 타로에는 번식의 중심이 되는 어미 타로와 그 주변에 생기는 아이 타로가 있는데, 일상식으로는 아이 타로를 먹고, 제사에는 어미 타로를 캔다고 한다. 


타로 쪽이 중요시되는 마을로는 에베이 마을, 한제리 사우니 마을, 사가 마을, 코코다 마을이 있다. 이 가운데 전자의 두 마을은 의례 음식과 결혼에 얌도 함께 제공되는데, 후자 두 마을은 오직 타로를 제공하고 얌은 없어도 괜찮다고 한다. 그리고 이 후자의 두 마을 가운데 사가 마을에서는 얌 하우스를 볼 수는 없었다. 코코다 마을에서도얌 수확이 특히 많을 때만 얌 하우스를 만들고, 씨앗은 나무 아래에 두고서 덮개를 덮어 놓기만 한다고 했다. 의례 음식에 얌도 제공되는 두 마을은 얌 하우스를 소유하는데, 에베이 마을에서는 수납하는 건 씨앗뿐이다. 얌 하우스는 밭 근처에 만들고, 식용 얌은 모두 집으로 가지고 돌아온다. 한제리 사우니 마을에서는 씨앗 외에 제사용 얌도 수확한 뒤 1년 동안 얌 하우스에 보관하는데, 얌 하우스는 수확할 때마다 새로 만든다고 하며, 건조물로서의 일시성이 유난히 높다. 일상식으로 먹는 얌은 수확기부터 1-2개월 이내에 먹어 치워 버린다. 이들 네 마을 함께 가장 중요시되는 타로에 대해서는 저장시설은 없고, 카만다라 마을과 똑같이, 제사에는 밭에 보관했던 어미 타로를 사용한다. 


동하이랜드의 마을들에서는 밀른베이 주와 비교하여, 얌 하우스는 전체적으로 간이한 것이다. 의례 음식으로서 얌이 가장 중요시되는 마을에서도 타로 등 다른 작물이 아울러 사용된다고 하여, 얌의 사회적 돌출성이 희박한 것이 반영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저장의 주체가 씨앗과 제사용 얌인 점은 밀른베이 주와 공통된다. 그리고 의례 음식으로 얌이 중요시되지 않고, 따라서 제사용 비축의 필요가 없는 경우에는 얌 하우스를 만들지 않는 방향으로향한다. 여기에서도 또한 얌 하우스라는 저장시설은 생업 주기에 필수인 것으로 존재하지는 않으며, 사회적 수요의 산물로서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타로에 대해서는 의례 음식으로 중요시되고 있는 사례에서도 저장시설이만들어지지 않는 건 캐 버리면 보존이 안 된다고 하는 뿌리작물 종류의 성질 때문일 것이다. 곧 얌 하우스는 보존이 되는 얌의 뿌리작물 종류로는 특이한 성질과 특이한 사회적 수요가 합해져 완성된, 화전 생업 주기 사회에서 발생한 독자적 저장 문화의 형태라는 것을, 동하이랜드의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트로브리안드로 -얌 하우스란?


논벼농사 등 '1년' 기반으로 움직이는 대규모 단작의 생업 주기에서는 1년 1-몇 회라는 한정된 횟수의 수확 작업에 따라서 1년 동안 계속 먹을 식량을 확보한다. 그러므로 그 식량을 저장해 놓는 저장시설은 생업 주기의 일환을 짊어진 빼놓을 수 없는 일부임과 함께, 나날의 생활 속에서 정기적으로 관계를 지녀야 하는 시설이기도 하다(細谷 2009). 그러나 '1일' 기반의 생업 주기에 따른 사회에서는 수확물을 저장한다는 과정은 그 일환을 이루지 않는다. 그리고 이 사회에 있는 저장시설인 얌 하우스는 대규모 단작의 저장시설과는 전혀 이질적인, 독자의 저장 문화로 완성되어 있는 것이라는 점을 지금까지 보아 온 사례를 통하여 이해할 수 있다. 얌 하우스에 행하는 얌의 저장은 생업 주기의 일환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적 수요에 응하여 행해진다. 말하자면 '사회적인 저장'이어서 '1년' 기반 사회의 저장시설처럼 나날의 식량을 보증하거나, 또는 그 풍요를 상징하거나 하는 역할은 담당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조사 성과를 근거로 하여, 얌 하우스의 '대표'로서 다루어져 온 트로브리안드 키리위나 섬의 사례를 다시 생각해 보고자 한다. 앞에 기술했듯이, 키리위나 섬의 얌 하우스는 타인에게 보여주어 권위를 나타내는 역할을 가지며, 얌 하우스를 오히려 남의 눈에 보이지 않게 하던 다른 밀른베이 주의 사례와는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보인다. 키리위나 섬에서 얌 하우스로 상징되는 권위란, 무엇에 기반한 것일까?


앞에 기술한 2008년 7월에 실시한 동하이랜드의 조사에서, 필자는 키리위나 섬도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 4일이란 짧은 방문이었지만, 인류학 관계 논문에서 자주 본 얌 하우스의 실제 모습을, 파라마운트 치프의 그것을 비롯한 여러 마을에서 관찰할 수 있었다. '얌 하우스'라고 한 마디로 불리기 쉬운 키리위나 섬의 얌 하우스이지만, 실은 두 종류가 한 묶음으로 되어 있다. 야고구라고 부르는 씨앗용 하우스와 부웨나라고 부르는 먹을거리용 하우스이다. 얌의 수확이 적은 세대에서는 이 두 가지 기능을 똑같은 얌 하우스의 위와 아래의 부분으로 해결해 버리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의 세대, 그리고 치프들의 세대에서는 반드시 두 종류의 하우스가 만들어져 있다. 하지만 마을의 중앙광장 등에 세워 '과시하는' 것은 먹을거리용 부웨나뿐이며(그림3-8), 씨앗용 야고구는 눈에 띄지 않는 장소에 세워진다. 현실적으로 장래의 풍요로운 생산에 결부되며 중요한 것은 씨앗이지만, 그것과 권위의 문제와는 관계가 없는 듯하다. 그렇다면 역시, 식량의 풍요로움이란 쪽이 강조되는 것일까? 


그림3-8 중앙광장에 세운, 치프의 부웨나(키리위나 섬).




그러나 권위의 최고봉인 파라마운트 치프 세대의 사례를 보더라도, 얌 하우스에 저장하는 건 사실 그다지 식량의확보와 연결되지는 않는다. 파라마운트 치프를 위한 얌은 여러 명의 아내들의 형제, 남자 친척이 재배하여 헌상한다. 모계인 트로브리안드 사회에서는 치프의 친아들은 지위를 계승하지 않고 자매의 아들이 계승하기 때문에, 여러 아내를 가진 것은 후계자의 확보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헌상되는 얌의 양이 증가하는 데 이어진다. 선대의 파라마운트 치프에게는 22명의 아내가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확실히 입수할 수 있는 식용 얌의 양은 일반인보다 훨씬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1년 동안의 식량이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파라마운트 치프라면 부양해야 할 인간도 많고, 또 쿨라 교역의 파트너 접대용이나 제사용 얌은 쓰지 않고 확보해 놓아야 한다. 일상식용 얌의 비축은 제한적일 테고, 필자가 방문한 해에는 수확 상황도 나빴던 듯하며, 먹을거리용 얌 하우스인 부웨나는 수확한 다음 달이라고 하는데 일찍 텅 비었다. 얌 하우스의 건물 그것에 대해서도, 밀른베이 주와 동하이랜드의 얌 하우스에 비교하면 튼실한 만듦새이고, 특히 부웨나는 파라마운트 치프의 상징 등으로 화려하게 디자인되어 있는데, 길게는 20년, 보통은 5-6년에 다시 짓는, 역시 일시적이라 해도 좋은 건조물이다. 주거와 동등하든지, 경우에 따라서는 더욱 견고하게 짓는 대규모 단작 사회의 저장시설(細谷 2009)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필자가 관찰한 파라마운트 치프의 부웨나는 이미 내용물을 소진한 것도 있었던지, 반쯤 무너져 있었다. 곧, 일상식용 얌이라 하든, 얌 하우스라 하든 그닥 '유지'에는 구애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럼 구애되는 물건은 어디에 있느냐 하면, 수확 시점에 가능하면 많은 얌을 부웨나에 넣어 보이는 데에만 있다. 얌을 헌상하는 아내들의 남자 친척은 전원이 거의 같은 날에 수확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식량으로서의 유지를 고려하면, 오히려 날을 달리하여 수확하는 쪽이 좋을 테지만, 그보다도 가능한 한 많은 얌을 한꺼번에 보여주는 쪽이 선택된다. 그 수확과 부웨나에 넣는 행위가 이른바 '얌 축제'이다. 곧, 여기에서 권위의 상징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풍요로운 식량'이 아니다. 부웨나에 넣은 얌은 안정된 식량원이 되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렇게 하겠다는 강한 의향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보여주고 있는 건 많은 얌을 헌상시킬 수 있는 사회적 지위 및 그것을 지지하는 인맥이며, 얌은 그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에서 부웨나가 텅 비게 된다고 해도 치프가 굶주리는 일은 없다. '1일' 기반의 생업 사회에서는 식량은 하루하루 얻을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계속 공급해 주는 인맥을 치프는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먹고 살기 위해 중요한 것도 저장 얌이 아니라 인맥 쪽이다. 


이와 같이 본다면, 키리위나 섬의 얌 하우스는 얼핏 밀른베이 주나 동하이랜드의 그것과는 다른 듯하지만, 기본적인 체계는 공통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밀른베이 주, 동하이랜드의 사례에서는 얌 하우스의 기본적 기능은 '사회적 저장'이었다. 그리고 키리위나 섬의 얌 하우스도 부웨나에 있는 식용 얌의 저장은 생업 주기의 빼놓을 수 없는일환이라고는 말하지 않고, 오히려 소유주의 사회적 지위, 인맥을 권위로 과시하는 도구인 셈이다. 곧, '사회적 저장'이 유난히 비대한 것이 키리위나 섬의 부웨나인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 있다.


웨이너(Weiner 1987)는 트로브리안드 사회에서 중요시되는 얌이 일상식으로서는 그만큼 이용되지 않는다는 상황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얌의 재배와 그에 이어진 교환에, 이렇게나 사람들의 주의가 쏟아지고 있는것에 관게없이, 왜 매일 먹는 것은 타로 등 다른 작물이냐며 이상하게 생각하는 경향도 있을 것이다. 그 물음에 답하려면, 얌은 먹을거리가 아닌 재화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84쪽, 필자 번역). 또한 얌 하우스는 말하자면 은행 구좌, 얌은 예금이며, 오히려 가능한 한 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라고도 논하고 있다. 곧, 얌 하우스는 저장문화로서 대규모 단작 사회의 그것과는 이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저장되어 있는 얌 그것도 사실은 대규모 단작 사회의 기준에서 말하는 '식량'조차 아닌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수요를 위하여 사용되는 '재화'인 것이다.


파푸아뉴기니에서 볼 수 있는 '1일' 기반에서 다각적인 자원을 이용하는 화전 농경 사회는 기본적인 농경 사회의모습임과 함께, 농경 사회 발전의 한 유형으로 생각할 만한 것이기도 하다고 모두에서 기술했다. 그리고 얌 하우스라는 저장 문화의 고찰을 통하여, 지금까지 '고육한 농경 사회'라고 생각해 왔던 사회와는 완전히 이질적인 농경 문화가, 그곳에서는 발전해 왔다는 점이 이해되었다. 농경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논과 화전 같은 표면적인 기술만의 차이가 아니라 생업 체계의 차이까지 깊이 파고드는, '다양성'의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과거에 대해서도, 다른 문화에 대해서도 '우리의 기준'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많은 기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마치며 -'농경 사회'의 다양성


모두에서도 기술했듯이, 차일드(Childe 1981[1956])의 '신석기혁명'론에서 기술되고 있는 내용에는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무의식적으로 공유되고 있는 '농경 사회'의 이미지에 연결되는 것이 많다. 예를 들면, 농경을 시작하여 인간 사회가 훨씬 '진보'했는지에 대하여, 차일드는 이처럼 기술하고 있다. "(농경의 개시에 의하여) 사람은 교역에 의지하지 않고 모든 필수품을 직접 만드는, 완전한 자급자족의 사회를 형성했다." "아무리 단순한 농경이라도, 잉여 작물을 생산하여 1년 동안의 식량과 씨앗에 해당한다는 계획성을 가지게 되었다. … 그 저장시설은 주거보다도 손을 대어 지을 수 있다"(Childe 1981[1956]), 78쪽, 필자 번역). 지금까지 기술해 온 파푸아뉴기니의 사례를 보면, 이와 같은 개념이 꼭 들어맞지 않는 농경 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명백하다. 화전 농경을 경영하는 밀른베이 주와 동하이랜드의 사회에서는 확실히 기본적으로 자급자족의 생활이지만, 그것은 농경 그것의 힘이라기보다 농경만이 아닌 다각적인 자원 이용이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농경에만 의존하는 대규모 단작 사회일 정도로, 자급자족성은 사라져 갈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뿌리작물 종류를 주대상으로 하는 '1일' 기반의 화전 생업 주기에서는, 식량의 저장이 빼놓을 수 없는 일환은 아니다. 그 대신, 얌 하우스 같은 '사회적 저장'이라고도 이야기할 법한 독자적 저장 형태가 생기기도 한다. 세계의 농경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농경 사회의 유형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점, 그것도 표면적인 농경 기술의 다양성만이 아니라 근본적인 생업 체계의 다양성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파푸아뉴기니 화전 사회의 사레는 시사하고 있다.


그럼 우리가 사는 일본의 농경사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경우, 이 문제는 어떻게 바뀌어 왔을까? 일본의 농경사에서는 야요이 문화의 개시를 알리는 논벼농사의 도입이, 이미 완성된 그것을 대륙에서 받아들인 점도 있고, 문화의 중추가 되는 지역에서는 비교적 급속히 대규모 단작화를 촉구하여 사회조직 상태에도 영향을 미친 점을 생각할 수 있다(細谷 2009). 그러나 그와 같은 면만이 일본의 농경사가 아니다. 노모토 켄이치野本寬一 씨(1994)는 일본 문화의 중추에는 없었던 지역에서 행한 생업의 모습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화전을 계속 운영해 온 산골짜기에서는 …… 상수리나무·졸참나무·떡갈나무·밤나무 등의견과류, 도코로마·호도·칡뿌리 등의 근경류를 적극적으로 채집하고, 산천어·곤들메기 등의 민물고기를 잡고, 토끼·산새·비둘기 등의 소형 짐승과 조류를 포획하여 식생활에 편입하여 가을, 화전 작물의 결실에 앞서 행하고, 작물을 망치는 맷돼지를 포획하기 위한 공동 수렵을 행하는 곳이 많았다. …… 정말로 '수렵채집'과 '농경'의문화 복합이다."(野本 1994 6쪽)


이것은 확실히 다각적인 자원 이용을 경영하는 화전 생업 주기 사회의 모습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모양의 생업은 일본의 농경사 안에서 대상 외가 되어 왔다. 그 이유는 문화의 중추 지역이 아닌 곳에서 영위되고 있었다는 점 때문에, 문헌사료가 적다는 점도 크지만(原田 2007), 근본적으로 이러한 생업의 태도가 '고유한 농경 사회'의 그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단 점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곧, 농경 사회에는 다양한 생업 체계에 기반한 그것이 있다는 사실이 인식되지 않았던 것에 다르지 않다. 이 생업 체계로서의 다양성이란 시점이 불충분하다면, 일본의 역사에 있는 다양한 농경을 논하는 경우에도 주식이 쌀이었는지 아닌지 같은 측면에 이야기가 집중되기 쉽다. 


그러나 비록 주작물과 농경 기술이 똑같은 사례라도, 생업 체계에 대해서는 다양할 수 있다. 더욱이 주작물과 농경 기술은 변화가 없는 채, 생업 체계만이 역사 속에서 변화해 간다는 가능성도 충분히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화전 농경에 관한 근대화에 대하여, 노모토 씨(1994)는 이렇게 논하고 있다.


"화전은 본래, 화전 농민이 자신들의 식량을 확보하기 위하여, 자급자족형, 식량확보형 돌려짓기였다. 그와 같은 화전 농업의 안으로, 근세 이후 차츰 환금작물인 차, 양잠을 위한 뽕나무, 삼지닥나무 등이 도입되기 시작해, 근대에 들어와 현금 수입의 필요성이 높아짐에 따라 그들은 더욱더 적극적으로 재배되게 되었다. …… 말하자면, 근대적인 화전 돌려짓기이며, 화전의 근대화이기도 했다." (野本 1994 615쪽)


곧 근대화 속에서 화전을 중심으로 한 다각적인 자원 이용으로부터 환금 수단으로서의 부업적인 화전으로, 생업 체계 및 화전 그것의 성질이 변천되었던 점이 여기에서 기술되고 있다. 농경사에서는 화전이란 농경 기술의 존부이상으로 이와 같은 생업 체계로서의 변화 문제가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생업 체계의 다양성과 변천을 농경사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에 의하여, 서로 다른 생업 체게를 가진 사회들의 상호관계의 태도 문제 등, 더욱 증층적인 농경사를 복원해 나아갈 수 있다. 많은 농경 사회에서 왜 '농경' 부분이늘어나는 데에 이르렀는지 하는, 모두에서 기술한 문제에 대해서도 여기에서부터 고찰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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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4




기고3

호리병박 -실용과 상징의 문화지

유아사 히로시 湯淺浩史






호리병박은 잘록한 부분이 있는 독특한 모양의 과실로서, 널리 알려지고, 관상용으로 재배, 또 가공하여 장식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호리병박의 일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면, 호리병박은 가장 오래된 재배식물 가운데 하나로 토기에 앞서 1만 년을 넘는 역사를 지니고, 더욱이 인류의 이동에 관여하며, 선조의 탄생과 농작물 기원의 신화에 얼굴을 내밀고, 200가지 이상의 여러 가지 용도로 깊게 생활에 밀착되어 있던 중요한 식물이다.




호리병박의 기원과 전파


호리병박은 아프리카가 원산지이다. 그 근거로서 호리병박속 Lagenavia의 현존하는 야생종 3종은 모두 아프리카와 마다가스카르에 분포한다(표1).



종 이름

분포

草性

암수

개화

과실

L. sieraria

L. sphaerica

L. brevifolia

L. abyssinica

사헬 원산?

동아프리카/마다가스카르

동아프리카 산간

동아프리카 산간

한해살이

여러해살이

여러해살이

여러해살이

異花

異株

異株

異株

밤-아침

여러 모양

공 모양

공 모양

공 모양

표1 호리병박(Lagenaria)속의 분포와 형질




또한 종자의 다양성에서도, 아프리카의 재배 호리병박 중에 플라나리아 모양의 아시아계, 또 색이 짙고 돌기를 결여한 남미계 등 세계 각지에 종자의 유형이 모두 존재하여 아프리카 원산설을 뒷받침하고 있다(湯淺 1979).


더욱이 재배 호리병박의 야성종에 대해서는 짐바브웨에서 발견되었다고 하는 보고도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아프리카를 기원으로 함에도 불구하고 호리병박은 조몬시대 조기에 일본에까지 도달했다. 그 가장 오래된 기록은비와호琵琶湖의 아와즈코테粟津湖유적에서 출토된 종자의 9600±110y.B.P.이다(辻誠一郞他 1992). 다음으로 후지이현 와카사쵸若狹町 미카타고호三方五湖의 토리하마鳥浜 패총에서 발견된 과피의 8500y.B.P.이다. 


또한 놀라운 점으로는 멕시코의 동굴 유적에서 9920±50y.B.P.의 종자가 출토되고 있다. 에릭슨 외(2005)가 그 DNA를 해석한 바, 가장 오래된 종자에서의 검출은 할 수 없었지만, 8685±60y.B.P.의 종자에서 얻었던 3개소의 DNA 표지는 모두 아시아계였다.


아메리카 호리병박의 유래에 대하여 휘태커는 아프리카에서 과실이 흘러 왔다는 설을 1973년에 제시하고, 그것이 널리 받아들여져 왔다. 그에 반해 나는 아시아에서 배로 이주하여, 그때 물의 용기로 가지고 갔다고 보았다(湯淺 1979, 1999). 


미지의 장소로 이주를 적극적으로 하든, 어쩔 수 없이 하든 단행하며 최소한 필요한 휴대품의 하나는 물일 것이다. 특히 바다로 타고 나갈 때는 물이 보증되지 않으면 안정된 항해는 바랄 수 없다. 물의 용기로는 토기도 생각할 수 있지만, 무겁고 질그릇에서는 누수가 일어날 것이고, 첫째, 1만 년을 넘는 이전에 토기를 가지고 있던 지역은 일본 이외는 드물다. 


폴리네시아의 섬들에 널리 호리병박이 분포하는 것도, 그 증거이다. 




호리병박의 모양과 이름의 변천


일본으로 호리병박이 도래한 건 고고학자는 해류에 의한 표착설로 기울어지지만, 아메리카로 1만 년 전에 전파된걸 보더라도, 사람이 의도적으로 가지고 들어왔음이 틀림없다. 그럼 어디에서 가져왔을까? 적어도 류큐 열도에서는 남쪽으로부터 도입되었음이 부르는 이름에서 생각될 수 있지만, 그 전에 먼저 호리병박의 어원을 기술하겠다.


호리병박의 이름은 오해에서 생겼다. 논어에서 공자가 애제자인 안회(안연)의 청빈을 칭찬하는 "一簞之食瓢之飮"이나 도잠의 한시 '五柳先生'의 '簞瓢'를 헤이안 시대, 타치바나 나오모토橘直幹가 나오모토 갑문甲文의 1절(954년)에서 '瓢簞屡空'이라 인용하면서 퍼졌다. 본래 瓢와 簞은 다른 물건으로, 단은 부수인 죽에서도 알 수 있듯이대나무 제품으로 얇게 쪼갠 대나무를 짠 도시락통을 말한다. 안회는 가난하여, 식사와 음료가 결여되어도 학문에힘쓴다는 예로 표현된 것인데, 그것을 표와 단으로 호리병박이라 해석해 버린 것이다.


일본어로서 본래의 호리병박의 이름에는 몇 가지 기원이 있다. 하나는 히사고ひさご로서, 이것은 덩굴(히사ヒサ)을이루는 과실(고)을 의미하며, 그것을 가공한 '히사쿠ひさく'에서 히샤쿠ヒシャク(국자)가 생겼다. 일본의 전통 노래에서 습관적으로 일정한 말 앞에 놓는 수식어 침사枕詞인 '히사카타ひさかた'는 히샤쿠 모양을 한 북두칠성의 모양, 또는 그것을 가리키는 방향에서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예로부터 내려온 호리병박의 이름에는 또한 바가지도 있다. 이것은 잘록한 부분이 없는 둥근 모양이나 단지 모양을 가리키며, 부푼 '단지'에서 유래한다. 애초 단지 그것도 본래는 호리병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호리병박의 과실은 여러 모양으로, 크게 일곱 가지 모양으로 분류할 수 있다(湯淺 1983, 鄭·湯淺 1990). 


야생종은 모두 공 모양만 있지만, 그 과실 자루의 부근이 조금 길어지는 전구의 모양에 가까운 단지 모양으로, 아프리카를 처음으로 세계의 호리병박은 이 모양이 적지 않다. 오래된 토기의 대부분이 단지 모양인 것도 호리병박을 모델로 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일본의 조몬시대에 출토 호리병박도 이른바 잘록한 부분이 있는 호리병박은 볼 수 없고 단지 모양이다.


이시가키지마石垣島, 오키나와, 아마미오오시마奄美大島 등에서는 호리병박을 츠부루ツブル라고 한다. 옛날에는 츠부르란 이름도 기록되어 있다(슈리首里 왕부 <혼효험집混效驗集>). 대만의 츠오우족이 부르는 이름은 다부,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에서는 라부라고 부르며, '츠보'와의 관련이 시사된다(그림1).


그림1 이시가키시마. 단지 모양의 연적.



일본어에서 호리병박의 또 하나의 이름은 유우가오ユウガオ(박)이다. 호리병박의 꽃은 저녁 무렵에 피어 이것으로부터 '저녁 얼굴(夕顔)'이란 이름이 생기고, <원씨물어源氏物語>와 함께 그 우아한 이름은 보급되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유우가오는 잘록한 부분이 없고, 공 모양의 둥근박과 수세미 모양의 긴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박고지는 박으로 만들고, 호리병박과 달리 쓴맛이 없다. 쓴맛은 쿠쿠르비타신 계통으로, 우성으로 유전한다. 


또한 박도, 호리병박도 자유로이 잡종이 생기고, 그 첫 대는 단지 모양이고, 2대 이후 분잡한다. 여러 가지 모양이어도 재배 호리병박은 격리 없이 잡종이 생겨, 동일 종의 기원을 증명한다. 




호리병박의 신화와 표징성


호리병박은 성숙하면 텅 비고, 그곳엣 수백, 큰 과실에서는 천 개나 되는 종자가 맺힌다. 공간의 생성과 종자의 다산, 그 두 가지 면에서 호리병박은 상징화되어 수많은 신화가 생겼다. 동아시아에서 그것이 짙게 남은 것은 중국 남부의 소수민족과 대만의 선주민족이다.


운남성과 귀주성에서는 사로잡힌 번개신이 물을 원하여 그 희망을 들어준 남매에게, 물을 마시고 힘을 회복한 번개신이 하늘로 떠나면서 치아를 뽑아 주고, 그 치아를 시키는 대로 땅에 묻은 바, 금세 자라 큰 공 모양의 호리병박이 이루어져 번개신이 대홍수로 복수할 때 남매만 호리병박에 타서 구조되어 나중에 결혼, 조상이 되었다는 홍수 신화가 널리 전해진다(聞一多 1989).


호리병박의 종자는 확실히 치아를 생각나게 하는 것이 그 재배, 또 물을 가져옴과 함께 물에 뜨는 특성 등 호리병박의 특징과 깊게 연결된 신화이다. 


호리병박의 빈 공간은 자궁을 연상시켜, 대만의 부눈족에서는 호리병박에서 선조가 탄생했다고 한다. 또한 종자가 많은 건 곡물의 다산으로 연결되어, 주식인 조를 가져온다. 츠오우족은 덩굴을 전하러 하늘에 오른 아이가 양조를 시작으로 다양한 기술을 전한다는 전설이 있다. 힘차게 뻗는 덩굴과 하늘을 연결시킨 우의전설적인 민화도 한국과 오키나와에 전한다.


<금석물어今昔物語>에 실린 은혜 갚은 참새에는 할머니의 도움을 받은 참새가 호리병박의 종자를 물고 와서 그것을 심은 바, 다 자란 과실에서 쌀이 계속 나온다. 이것도 호리병박에서 작물을 얻는 신화의 변형이라 볼 수 있다.


중국 도교의 팔선의 한 사람 철괘鐵枴 선인은 선약이 든 호리병박을 지니며, 그곳에서 만들어진 영기로 불로불사를 유지한다. 이것으로부터 중국에서는 호리병박은 한방의의 상징으로 현호懸壺란 이름의 간판으로도 취급되었다. 이 전설은 대만에 남아, 현재도 개업 광고에 쓰이거나 한다.


또한 중국에서는 예로부터 호리병박 내부의 공간에 이차원의 별세계가 있다고 생각했다.일본의 속담인 '호리병박에 말'이나 술이 떨어지지 않는 양노 전설도 똑같이 다른 차원이 기층에 있다.


이상과 같이 호리병박은 선조 파생, 곡물 기원, 참새 이야기 등 신화나 전승으로 각지에 결부된다.




인류의 기준이 되는 기물


호리병박은 정신세계의 표징만이 아니라, 생활에 바탕한 실용성도 풍부하다. 그 세계적인 용도는 여러 가지 악기를 제하고도 2백 몇십에 이르며, 식물로서는 가장 범용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 가장 다양하게 옛날부터 이용되어 온 용도는 용기이다. 동물은 물을 마시는 곳에 가지 않으면 물을 마실 수 없다. 사람은 그 물을 운반 또는 저장하는 것으로 조절하고, 생활권을 넓혀 왔다. 


물을 마시는 경우에, 사람은 동물처럼 직접 입을 수면에 대지 않는다. 떠서 입으로 나른다. 그것은 손으로도 가능하다. 교토의 미시마三嶋 신사에서는 '쿠보테くぼて'라는 얕은 용기가 있다. 틀림없이 '窪手'로서, 손의 오목한 곳에 물을 따라 마신다는 자취이다. 다만 그렇게 하여 물을 떠 마셔도 멀리 운반하는 일은 할 수 없다. 물을 뜸과 동시에 나르는 용기로는 가볍고, 게다가 밀폐성이 좋은 호리병박이 최적이며, 큰 호리병박은 물을 저장하는 데에도 뛰어나다. 일본의 뾰족바닥 토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지역에서 최초의 토기가 단지 모양인 것도 호리병박이선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속이 빈 공간인 식물에는 이외에 야자나무와 대나무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야자나무는 열대지역만, 대나무도 분포가 온난하고 다습한 지역에 한정되는 데다가 단단한 대나무를 가로로 잘 자르는 데에는 석기로는 어렵고 금속 칼날의 출현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한다.


호리병박으로 만든 용기는 수통과 저수 등의 물 용기 이외에, 술과 기름, 우유, 벌꿀 등 다양한 생활잡기로 쓰일 수 있다. 또한 일본에서는 생화의 화병으로도 쓰이며, 리큐利休가 안회라고 이름을 지은 한 물건은 현재도 호소카와 에이세이細川永靑 문고로 전한다.


액체 이외에도 차를 담고, 필리핀의 육포와 과일 등의 용기나 쌀궤, 한국의 밥통, 일본의 과자통, 양념 용기, 중국의 약통과 비연호鼻煙壷, 또 귀뚜라미 싸움의 귀뚜라미통, 인도네시아부터 대만에 걸쳐서 빈랑을 씹을 때의 석탄통, 부탄의 산초통 등이 지금도, 또는 최근까지 사용되었던 용기이다.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중세 중국에 표착한 류큐의 배에는 둥근박 모양의 용기에 의상이 들어 있었다. 현대에도 아프리카의 카메룬 북부에서는 신부의 의상함으로 지참되고 있다. 게다가 천성호리병박千成瓢簞을 화승총의 화약통으로, 중국 운남성에서는 화약을 담는 무기로 사용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보석을 상감한 아름다운 여성용 화장품통이나 비연호가 있었다. 전란으로 현재는 끊어져 버린 게 아닐까? 파리의 인류박물관에는 그 수집품이 남아 있다. 중국 청나라대의 코담배통의 비연호에도 묘기를 장식한 세공이 적지 않았다. 대만의 고궁박물관에 그 우수한 작품이 모여 있다. 청나라의 강희제는 호리병박(둥근박)으로 식기인 완, 맹, 분, 합을 만들었다고 한다.




생활 잡기


용기 이외에도 여러 가지 호리병박으로 만든 생활 잡기가 있다. 중화요리의 '숟가락'은 일본에서는 '렌게蓮華'라든지 '치리렌게散り蓮華'라고 부르며 연꽃의 꽃잎 이미지인데, 중국에서는 파오, 즉 瓢로서 작은 단지 모양의 호리병을 반으로 잘라 사용한 흔적임을 알 수 있다. 대만의 부룬족은 술잔으로 이용, 일본에서도 무사의 마상잔으로 쓰였다. 


전차도煎茶道의 일부에서는 머리가 긴 호리병박의 머리끝을 잘라내고 둥근 부분을 조금 깎아 그곳에 뜨거운 물을 떠내, 머리로부터 쏟는 국자가 사용된다. 이외에 베트남의 쌀 저울, 중국의 기름 저울, 한국의 등잔이나 전기 스탠드, 필리핀의 큰 둥근박 모자, 태국 아카족의 술병 등 독특한 이용을 각지에서 볼 수 있다(그림2). 호리병박으로 만든 담뱃대는 아프리카에 많지만, 유라시아에서는 방글라데시에서 물담뱃대를 볼 수 있다.


그림2 필리핀의 호리병박 모자




어구


한국의 제주도 해녀는 물질할 때 부표로 테왁이란 지름 30cm 정도의 공 모양 호리병박을 사용했다. 태평양 전쟁이전에는 츠시마로 돈벌이를 다녀온 해녀는 반드시 그 호리병박을 껴안고 왔다. 목숨을 맡기는 중요한 용구였던 것이다. 그것이 최근은 발포 스티로폼 제품으로 바뀌어 버렸다. 


필리핀의 바탄 제도에서는 소프트볼 크기의 호리병박을 그대로 건조해서, 대형 물고기를 낚는 찌로 썼다. 


오키나와에서는 일찍이 사바니(어선)용 물 퍼내는 용기를 호리병박으로 만들었다. 한국에서도 똑같은 사용법이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단지 모양의 호리병박에 여러 구멍을 뚫어, 물고기를 잡는 통발로 삼았다.




농기구


중국에서는 옛날엔 종자 파종기로 이용했다. 공 모양의 둥근박의 가로에 구멍을 뚫고, 그곳으로 콩이나 곡물의 종자를 담아 관통시킨 가느다란 대나무 관으로 종자를 점뿌림했다. 이것은 점호로点胡籚라고 부르며, 6세기의 <제민요술>에 파의 파종기로서 규호竅瓠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 예를 들면, 한 예로서 하북성에서 원나라대의 점호로가 1980년에 출토된다.


인도에서는 일찍이 탈립하기 쉬운 곡류를 받아서 수확하기 위한 시드비타라는 호리병박을 반으로 잘라 만든 용기가 사용되었다.


이시가키시마에서는 단지 모양의 호리병박을 반으로 잘라서, 조를 날려고르기할 때 키로 사용했다.


종자의 보존 용기로도 일본과 한국 등 사용했다. 화로가 있는 실내에 매달면, 그을음 때문에 벌레가 달라붙기 어려운 데다가 습기를 막고, 둥그스름하기에 쥐에게 갉아먹히는 일도 없다. 벼의 씨앗 등을 저장하는 데 이용되었다. 




가면


가면을 뒤집어쓰면 다른 성격, 이질적 세계로 뛰어들어 연기하게 되며, 자기를 떠난 존재로 승화할 수 있다. 이상한 공간을 가진 호리병박으로 만든 가면 효과는 더욱 높다. 호리병박의 가면은 아프리카, 뉴기니아, 남미 등으로 사이를 두고 존재하는 것도 그것을 뒷받침한다.


유라시아에서 호리병박 가면은 한국의 가면극이 유명하다. 한국 농촌의 가면극은 전통적인 민족예술로서, 지역에따라서 독자적으로 발달했다(그림3). 양주 별산대극, 송파 산대극, 통영 오광대극, 가산 오광대극, 동래 야유, 수영 야유 등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과 동물의 가면은 바가지라고 부르는 둥근박을 가공하고, 코에는 작은 단지 호리병박이 쓰이는 가면도 있었다. 다만 최근은 플라스틱 제품으로 교체된 가면도 적지 않다.


그림3 양주 별산대극(한국) 가면





제사기, 주술 도구와 상징


한국의 가면은 방상씨의 벽사 가면과 무속의 신성 가면에서 기원한다고 한다. 호리병박에 특별한 힘이 존재하여서 이것을 성스런 제기나 또 주술 도구에 이용하는 예는 세계 각지에서 볼 수 있다.


대만의 파이완족 주술사는 호리병박 점술 도구의 위에 무환자나무의 종자를 떨어뜨려 점을 치거나, 어깨에 호리병박을 얹고 병의 치료를 행한다. 루카이족은 흙으로 만든 작은 신이 들어간 신기를 가지고 있었다. 츠오우족은 조의 첫 이삭을 유부누라고 하는 호리병박 제기에 담아서 제사를 지냈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변소신이라 하던 자고신紫姑神의 신체에 호리병박이 사용된 예도 있다. 


대만의 사당 경내에는 금로金爐라고 부르는 건조물이 있어, 그곳에서 사자에게 돈으로 가정한 금지와 은지를 태워 보내주는 습속을 널리 볼 수 있는데, 금로의 꼭대기는 호리병박을 본딴다. 이것은 호리병박에 영력이 있다고 하는 신선사상으로, 똑같은 생각에서 중국에서는 지붕의 가운데나 탑에도 자주 호리병박으로 만든 물건이 장식된다. 卍은 호리병박의 덩굴이 얽힌 것에서 생긴 자손 번영의 표지라고 하는 중국에서의 견해가 있다.


일본에서는 물의 상징으로 기후현 히다이치노미야飛騨一宮 미나시水無 신사는 여섯 가지 호리병박을 조합해 신사의문양으로 삼고 있다. 헤이안 시대의 조정 의식인 스모의 절회節会에서는 오른쪽의 역사는 박의 꽃을 머리에 꽂고,가뭄일 때에는 왼쪽의 강한 햇살을 상징하는 접시꽃을 머리에 꽂은 역사에게 이기게 했다.




악기


호리병박의 공동성은 음을 높이는 것만이 아니라, 내부의 부드러운 복잡한 작은 무수한 융기가 잡음을 흡수하는 우수한 효과가 있다. 그 때문에 현대에는 순한 음이 들을 만하다고 스피커로 활용될 정도이다.


민족 악기로 이용되는 일도 여러 갈래로 알고 있다. 활과 호리병박의 조합이 현악기의 뿌리라고 하며, 그 가장 현의 수가 많은 악기의 하나는 인도의 시타르Sitar이다. 한편, 인도에서는 호리병박으로 된 한 현을 길게 한 엑타라Ektara도 있으며, 그 사이에 여러 가지 줄 수의 호리병박 공명기를 지닌 트위터(tweeter)계의 현악기가 알려져 있다. 캄보디아에서도 한 현의 호금瓠琴인 핀 남 타오가 있다. 베트남의 돈코는 호궁胡弓에 유사한 류트계 악기이다.


리드가 달린 기명 악기 중에서 아시아의 대표는 생황(笙)으로, 중국에서는 호로생胡蘆笙으로 여러 가지 유형이 존재한다. 그 흐름은 동남아시아 산악민족에도 널리 전해져, 태국 리스족의 생황은 T자형의 긴 대나무로 만든 관을 갖는다. 이 흐름에는 보르네오섬의 다야크족의 겔팃토와 카리만탄의 게레디 등도 있다.


인도의 코푸라 피리는 스리랑카나 방글라데시, 파키스탄에서도 볼 수 있다. 또한 인도에는 리드가 달린 진귀한 코 피리도 있다.




호리병박 예술


호리병박은 부드럽고 세공하기 쉽다. 그 때문에 자르고, 새기고, 뚫고, 벗기고, 갈고, 메우고, 태우고, 그슬리고, 그리고, 칠하고, 뿜어 칠하고, 물들이고, 씌우고, 붙이는 등 여러 가지 기법을 구사한 예술작품을 만들어 낸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틀에 끼우면, 변형과 상처에 의한 켈로이드 모양의 새김, 오목한 모양의 문자나 그림이 성장한 과실에 꽉 눌려서 나타나는 돋을새김 등 참으로 다채로운 용법이 구사될 수 있다. 또한 크고 작은 여러 가지 모양에 기반하여, 용도에 맞는 장식품을 만들게 된다.


한국의 벽 장식을 처음으로, 터키의 선각과 중국, 일본에서는 장식용으로 호리병박 세공이 발달했다. 동남아시아의 석회통, 태국 산악민족의 목걸이 등 실용품에서도 미적 감각이 발휘되고 있다. 


호리병박 그것의 가공이 아니라 섬유 지스러기나 대나무 등의 소재로 모양에 따라서 엮어, 호리병박의 보호와 함께 아름다움을 다투는 용기는 동남아시아의 산지, 인도네시아, 필리핀, 대만 등 도서의 여러 민족에게 우수한 민예품이 많다. 




식용

 

이른바 잘록한 부분이 있는 일본의 호리병박은 쓴맛이 있지만, 이 우성의 쓴맛을 없앤 호리병박이 교토, 토야마, 카나가와神奈川 등에서 스구키酸茎 절임이나 나라 절임 등의 장아찌에 이용되고 있다. 홍콩이나 필리핀에서는 역시쓴맛이 없는 호리병박이 생선 채소로 팔리고 있다.


둥근박, 긴박, 단지 모양 호리병박 등은 인도부터 동남아시아, 중국 남부나 대만에 이르는 광범위에서 서민의 일상 채소로 국의 재료, 찜, 또 카레의 재료, 구이 등에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미얀마에서는 튀김으로도 쓰이고 있었다.


다만 박고지로 먹는 건 예전에는 중국에서도 존재했는데, 현대는 일본에 거의 한정되어 있다. 그 대신 일본에서는 생선 채소로 이용하는 건 오키나와를 제외하고 유통되지 않는다.




호리병박 문화의 쇠퇴


지금까지 다방면에서 유라시아의 호리병박 문화의 여러 예를 기술했는데, 식용, 민족 악기의 일부를 제외하고, 전체에서 호리병박 문화는 쇠퇴의 일로에 있다. 그것은 1만 년의 오랜 세월에 걸쳐 가벼움과 밀폐성으로 목제품,토기, 청동기, 철기, 유리 등의 용재를 견디어 냈던 호리병박이 20세기 후반의 플라스틱, 비닐 제품의 보급에 의해 쓰임의 아름다움을 고려하지 않는 저렴한 대량생산, 일회용품의 파도에 삼켜져 버렸기 때문이다.


석유 제품의 범람에 의한 생활문화의 파괴는 안타깝지만, 직접 키워 수확해 세공하는 작품 활동은 새로운 호리병박 문화를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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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4



기고2

나와 멜론 -멜론이 말하는 농경사

타나카 카츠노리田中克典





시작하며


멜론이라고 들으면 그물이 들어간 상자에 담긴 과일을 먼저 상상하리라 생각한다. 실제 필자도 오카야마 대학 대학원의 연구실에서 멜론을 연구재료로 하기까지 그물 멜론이 멜론의 대표사로 머릿속에 있었다. 이 책, 제2장에서 후지시타 노리유키 씨가 소개했을지도 모르지만, 멜론은 그물 멜론만이 아니다. 과실의 형질만 보아도 멜론은 다양한 종류가 있다. 다양한 종류의 멜론이 재배되고 있지만, 이 배경에는 사람이 시간을 들여서 선발해 온 과정이 있다. 그러므로 개개의 멜론에는 개개의 역사가 새겨져 있다고 말해도 좋다.




멜론의 전파 경로와 추찰하는 의의 


대충 나누어 멜론은 어느 정도의 유형이 있는 것일까? 요즘 DNA 분석은 멜론의 분류에 활발히 도입되어, 일정의성과를 거두어 왔다. 이 성과와 과실, 꽃, 잎의 형태 분석, 생리학적 분석에 기반하여 유형을 분류하면, 멜론은 일곱 가지 집단으로 나눌 수 있다(Munger and Robbinson 1991). Agrestis(잡초 멜론) 집단, Cantalupensis(그물 멜론) 집단, Inodorus(윈터 멜론) 집단, Flexuosus(뱀 멜론) 집단, Momordica(모모르디카 멜론) 집단, Acidurus&Dudaim(신맛 멜론) 집단, Conomon(월과) 집단이다(그림1). 기타로 서아시아-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이 분류 집단에 속하지 않는 멜론이 있다. 앞에 기술한 멜론은 그물 멜론 집단에 포함된다. 각 멜론 집단을 원래 재배하던 지역을 바탕으로 세계 각지의 멜론이 지닌 특징을 기술하자면, 구미의 멜론(그물 멜론 집단, 윈터 멜론 집단)은 당도가 높아 달고, 디저트로 먹는다. 이들 멜론 집단은 그물을 가진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다. 이들에 반해 중앙아시아부터 동아시아에 분포하는 멜론(뱀 멜론 집단, 모모르디카 멜론 집단, 신맛 멜론 집단, 월과 집단)은 그물이 발생하지 않는 멜론으로, 구미의 멜론과 비교하여 당도가 낮고, 참외와 모모르디카 멜론 집단을 제외하면 모두 채소로 이용되고 있다. 더욱이, 동아시아의 멜론은 당도가 낮다고 기술했지만, 일본에서는 단 그물 멜론이 재배되고 있는데 하는 의문이 일어난다. 그러나 일본의 그물 멜론은 메이지 시대에 미국에서 도입된 멜론으로, 그 바탕을 더듬어 찾으면 영국에서 성립한 그물 멜론에서 유래한다(瀬古 1989). 비꼬는 말로, 현재 그물 멜론의 재배는 일본에서 계속되고 있지만 태어난 고향인 영국에서는 전혀 없다.


그림1 세계에서 재배되고 있는 다양한 멜론 무리의 한 예(加藤鎌司 씨 촬영). 

a:잡초 멜론(잡초 멜론 집단), b:아르스계 그물 멜론(그물 멜론 집단), c: 허니듀(윈터 멜론 집단), d:하미과(윈터 멜론 집단), e:뱀 멜론(뱀 멜론 집단), f:모모르디카 멜론(모모르디카 멜론 집단), g:위의 하나는 참외, 아래의 두개는 월과. 사진은 한 예로서, 멜론 무리에는 60cm 이상이 되는 뱀 멜론부터 3cm 정도인 잡초 멜론까지 과실 형질이 다양하다. 사진의 척도는 똑같으며, 사진의 아랫선은 10cm이다.




이들 멜론 집단(후지시타 씨는 '멜론 무리'하고 한다)은 고고학 조사, 문서에 기반하면 아프리카 기원이라 이야기한다(Robinson&Deker-Walters 1997). 현상황에서는 아프리카에 남은 유적과 문서가 오래되었다는 것으로부터 도출된 결과이다. 멜론은 아프리카부터 중동을 경유해, 구미와 아시아로 가는 곳마다 선발되어 재배 지역이 넓어져 갔다. 건조지인 아프리카부터, 강우량이 많은 계절풍 아시아까지 분포지역을 넓히고 있기 때문에, 멜론으로 생각해 보면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적응해 온 것이다. 당연히 멜론이 전파된 가장 동단의 동아시에 겨우 다다르기까지 오랜 역사를 지나고 있다(Walters 1989). 즉, 여기에서부터 멜론의 길을 더듬어 가면, 인류와 함께 걸어온 농경사가 멜론을 끼고서 끈이 풀린다고 생각할 수 있다.




동아시아의 참외와 월과


동아시아에서는 월과 집단이 재배되고 있다. 이 멜론은 일본에서는 참외, 월과라고 부르고 있다. 앞에 기술한 참외는 달기 때문에 중국과 한국, 일본에서는 과일로 먹고 있다. 한편, 월과는 중국과 일본에서는 볶음요리, 절임 같은 채소로 이용되고 있다. 또한 성숙한 과실은 길이에 차이가 있어, 참외가 10-20cm 정도인 데에 반해 월과는30cm 이상으로 장대하다. 그럼, 이 두 종류의 멜론에 대해서 일본에서의 역사를 푼다면 참외는 <만엽집>(8세기 무렵 성립)에 호조치熟瓜로서 소개되어 있고, <왜명류취초倭名類聚抄>(10세기 무렵 성립)에는 여러 가지 품종명이 기재되어 있다. 품종으로서 이름을 붙일 정도이기 때문에, 아마 고대의 무렵부터 참외는 사람들에게 친숙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월과는 <농업전서>(1697년 간행)에는 흡물吸物, 나마스なます, 아에모노和え物, 호시우리ほし瓜,  절임으로 다양한 이용이 소개되어 있고, 다양한 품종이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安井 1989), 고대 중국의 월나라에서 일본으로 전해져 사람의 손을 보태면서 각지에 토착해 갔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참외(熟瓜)와 월과로 따로 호칭되고 있지만 중국에서는 그 특장을 따서 참외를 첨과甛瓜와 향과香瓜, 월과를 채과菜瓜라고 부르고 있다. 각각의 작물로서 옛날부터 사람들에게 친숙해져 왔다.


다만 일본에서 옛날부터 친숙했던 것은 참외, 월과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후지시타 씨도 적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일본의 야요이 시대부터 에도 시대에 걸쳐서 멜론의 종자 유존체가 변소 유구, 주거터에서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다(藤下 1992). 이들 종자의 길이를 측정하면, 현대의 참외나 월과와 비교하여 야요이 시대에는 참외와 월과와 똑같은 형상의 종자가 이외에 6mm 이하의 작은 종자, 고분 시대에는 8.1mm 이하의 큰 종자가 출토되고 있다. 전자가 현대의 잡초 멜론 집단, 후자가 모모르디카 집단의 종자 크기와 부합한다. 다양한 멜론 집단이 똑같은또는 다른 시대에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아무튼 일본에서 받아들여 선발되어 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럼, 이 손톱 자국이라 말할 법한 유적에서 출토된 멜론이, 일본의 농경사에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정확히 답할 수 있는 방법은 없지만, 현존하는 멜론의 분석 결과로부터 한 가지 가설을 보여주고 싶다.




참외와 월과의 전파 경로 해석


제가 대학의 연구실에 소속되자마자, 카토 켄지 씨(오카야마 대학 교수)에게서 중국과 한국의 참외와 월과를 재배할 기회를 얻었다. 이들의 과실을 수확하여 늘어놓았을 때, 다양한 크기의 멜론이 있다는 것을 꺠달았다. 그런데 이 참외와 월과는 종자의 길이를 재면 6-8mm의 범위에 머물렀다. 또, 일본의 참외와 월과도 이 범위에 머물렀다. 한편, 구미에서 재배되고 있는 멜론(유럽계 캔탈로프 집단, 윈터 멜론 집단)은 종자의 길이가 9.0mm 이상으로, 참외와 월과와는 종자의 크기가 다르다. 동아시아의 멜론과 구미의 멜론에서 종자 크기가 다르지만, 두 지역 사이에 위치하는 남아시아의 멜론으로 말하면 광범위한 종자 크기를 나타낸다. 그래서 후지시타 씨(1983)는 구미의 멜론을 대립계 멜론, 동아시아의 멜론을 소립계 멜론으로 분류하고, 남아시아를 대립계 멜론과 소립계 멜론이 재배되고 있는 다양한 지역이라고 한다. 그리고 동아시아의 멜론과 구미의 멜론에서 종자 유형이 다른데, DNA 분석으로도 똑같은 결과가 나타나고 있다(Stepansky 외. 1999). 구미의 멜론과 아시아의 멜론을 DNA 분석의 한 수법인 RAPD 분석으로 분류하면, 참외·월과와 구미의 멜론은 각각의 집단을 형성한다. 두 지역의 멜론은종자 크기만이 아니라, 유전학적으로도 나뉘고 있다. 앞서 기술했지만 참외와 월과는 작물로서는 각각으로 취급되고 있다. 또한 내력도 다르다고 이야기되기 때문에(星川 1978), DNA 분석에 의하여 참외와 월과는 각각의 집단으로 분류된다고 생각되고 있었다. 그런데, 앞의 DNA 분석에서 두 멜론은 각각의 집단을 형성하지 않고, 집단 안에 혼재하고 있었다. 이 결과로부터 가설로서 참외와 월과는 똑같은 전파 경로를 거쳐 왔다고 추찰된다.


여기에서 참외·월과의 과실이 지닌 형질을 살펴보면, 참외·월과는 소립계 멜론으로, 과실의 표면에 그물은 발생하지 않는 멜론이다. 이 특징을 구비한 멜론이 재배되고 있는 지역이 남아시아이다. 남아시아에는 뱀 멜론 집단, 모모르다키 멜론 집단, 신맛 멜론 집단과 분류군으로 분류할 수 없는 다양한 멜론이 재배되고 있다. 이들 멜론은 그물이 없는 멜론으로 종자 크기가 소립계부터 대립계까지 광번위한 변이를 보인다. 아이소자임이라 부르는효소군을 활용하여 남아시아의 멜론과 동아시아의 멜론을 분류하면, 남아시아부터 동쪽으로 이행함에 따라 다양성이 감소하고 있으며, 동아시아로 멜론이 전파된 과정에서 선발이 더해지는 것이 나타나고 있다(Akashi 외 2007). 그래서 동아시아부터 남아시아에 이르는 지역의 멜론에 대하여 앞서 기술한 RAPD 분석을 하면, 남아시아의대립계 멜론, 소립계 멜론과 참외·월과의 집단으로 나눌 수 있었다(Tanaka 외. 2007). 이 결과에 따라 참외·월과와 남아시아의 멜론은 유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이 나타났지만, 참외·월과의 집단을 상세히 보면, 인도 동부(인도·메갈라야주)의 소립계 멜론, 동남아시아의 소립계 멜론이 포함되었다. 이들의 과실은 당도가 참외 또는 월과와 비슷한 정도로, 과실 크기가 참외와 유사하며, 참외와 월과의 특징을 구비하고 있었다. 이 결과로부터 인도 동부에 참외·월과의 원형이 있고, 여기에서부터 중국과 일본으로 전해졌단 것이 추찰되었다. 다만, 인도 동부와동아시아에서 재배환경이 똑같은 것인지 의문이었다.




기원지의 재배환경은?


참외·월과는 노지에서 재배되는 멜론으로, 오카야마에서 재배했을 때는 5월 초순에 종자를 심어서, 8월 무렵에 수확했다. 장마의 시기에 영양적 또는 생식적으로 생장한다. 습도가 높은 시기에 생존하여 더욱 생장할 수 있는 점에서 보면, 참외와 월과는 습도에 강한 멜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한 예를 소개한다. 어느 때, 멜론의 종자를 물에 담그고 그 상태에서 발아의 유무를 조사했다. 추기하면 물과 종자에는 약간의 공기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이들은 힘껏 제거하여 시험을 실시했다. 당초, 멜론의 종자는 수중에서는 발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참외·월과, 남아시아의 소립계 멜론은 대부분의 종자가 발아했다. 이에 반하여 남아시아의 대립계 멜론은 발아율이 낮고, 구미의 멜론에서는 대부분 발아하지 않았다. 놀라운 일이었다. 발아에 필요한 세 요소로 물, 습도와 산소가 있다. 물의 산소농도가 낮은 점에서 보면, 수중에서의 발아 시험은 산소농도가 낮은 조건에서 어떻게 발아할 수 있는지를 조사하는 것이다. 적어도 참외나 월과는 종자발아에서 습도 내성이 있어, 습도가 높은 조건에서도 발아가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직, 밭에서의 발아 시험이나 식물체의 내습성에 대해서는행해지지 않았지만, 참외나 월과는 습도에 대하여 강할 가능성이 높다. 참외·월과의 재배조건과 비교하여 인도 동부의 환경은 어떠할까? 인도 동부는 계절풍의 영향으로 세계에서도 유수의 다우 지대이(畠山 1964). 세계 최고의 연간강수량을 기록했던 체라푼지(메갈라야주)도 이 지역에 있다. 우기는 3월부터 시작해 11월까지 이어진다. 이 기간은 정확히 멜론의 재배시기와 겹친다. 이 정보만으로 생각하면, 인도 동부의 멜론은 내습성이 강하고,동아시아의 멜론과 재배조건이 비슷하다. 또한 인도 동부는 참외·월과의 기원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참외·월과의 기원지를 추찰할 수 있도록 다방면의 선생님의 협력을 받아서 인도 동부, 운남성 남부, 라오스로 조사하러 찾아갔다. 또, 미얀마, 베트남은 조사할 수 없었지만, 카토 켄지 씨로부터 조사보고를 받는 것으로 대응했다.





참외·월과의 기원지를 방문하여


인도 동부에는 8월의 비가 많은 시기에 미조람주와 메갈라야주에 방문했다. 미조람주는 산악지대에 있는 데 반해, 메갈라야주는 고원과 평지였다. 산악지대나 고원에서는 화전의 흔적(현재 화전은 법칙에 반하기에 행하지 않음)에서 밭벼와 함께 대두, 토란, 수수, 가지, 차조기, 호박, 여주, 수세미, 오이, 멜론이 섞어짓기로 재배되고 있었다(그림2). 한편 메갈라야주의 평지에서는 예를 들면, 지붕이 없는 폐허에서 멜론이 재배되고 있었다. 재배되고 있던 멜론 집단은 그물 멜론 집단, 모모르디카 멜론 집단, 신맛 멜론 집단, 미동정의 멜론이었다. 각 멜론 집단이재배되고 있던 표고를 보면, 300미터 이하의 평지에서는 모모르디카 멜론 집단, 신맛 멜론 집단, 고지의 화전터에서는 분류가 미동정인 멜론이 재배되고 있었다. 모모르디카 멜론 집단은 어느쪽이냐 하면 건기에 재배되고, 고지의 비가 많은 조건에서는 재배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미동정의 멜론은 과실의 크기가 참외보다 한층 크지만, 소립계 멜론이고, 과즙의 당도가 낮고, 비가 많고 질척거리는 토양에서도 과실을 달고 있었다. 이 멜론과 똑같은 유형이 운남성 남부, 라오스, 베트남의 화전에서 우기에 밭벼나 다른 작물과 섞어짓기로 재배되고 있었다. 이것으로 보면, 변종 미동정의 멜론에서 참외가 기원하여 고지에서 비가 많은 화전으로부터 중국, 일본으로 전파되어 왔을지도 모른다.



그림2 인도 동부 미조람주의 밭벼밭(필자 촬영). 사진은 조사단이 이동하고 있는 장면으로, 구름이 걸치는 고지에 밭이 있다. 밭벼와 함께 다양한 작물이 재배되고 있으며, 밭에 따라서는 통로 옆에 토란, 대두, 차조기가 심어져 있다.





현생하는 멜론과 유적에서 출토된 멜론이 말하는 농경사


위에 기술한 조사에서는 화전에서 미동정의 멜론이 재배되고 있었다. 이 멜론은 향이 있는 멜론이 달아서 선호되는 것이었다. 실제로 먹어 보면, 향이 있고 은은하게 달았다. 목을 적시는 데에는 알맞게 좋고, 중국에서 참외의 호칭인 '첨과'와 '향과'를 연상시키는 맛과 향이었다. 한편, 평지에서는 모모르디카 멜론 집단이 재배되고, 그 제철은 건기인 것이었다. 이 멜론은 성숙하면 과실이 갈라진다. 육질은 가루 같아, 입에 머금은 모습이 분질 감자로 만든 요리의 가루와 비슷하다.후지시타도 소개했지만, 할머니가 먹으면 목이 막히기 때문에 일본의 하치죠지마에서는 별명 '바바고로시'라고 부르고 있다(藤下 1994). 인도 동부에서는 이들 두 가지 멜론은 별도의 작물로 취급하고 있으며, 재배되고 있는 장소도 시기도 다르다. 여기에서는 멜론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인도 동부는 우기와 건기에 이외에도 다른 작물을 재배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며, 각각의 풍토에 맞춘 농경 유형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앞에 기술했지만 일본의 유적에서는 야요이부터 에도 시대의 유적, 시코쿠·츄고쿠 지방부터 도호쿠 지방의 유적에서, 변소 유구, 주거터에서 멜론의 종자 유존체가 출토되고 있다(藤下 1992). 그 종자의 길이를 계측하면, 시대 경과에 따라서 종자가 대형이 되고 있다. 더욱이, 일본의 이웃, 중국 장강 하류 유역의 6개소 유적에서도 멜론의 종자 유존체가 6300년 전부터 3900년 전의 지층에서 연속하여 출토되고 있으며, 유존체의 종자 크기는 시대 경과와 함께 대형화하고 있다. 일본의 멜론 종자 유존체에 대하여 만일 종자 크기를 바탕으로 멜론 종자 유존체를 현생 멜론으로 옮겨놓으면, 잡초 멜론 집단이 야요이 시대, 참외·월과가 야요이 시대부터 근세, 모모르디카 멜론 집단이 고분 시대부터 에도 시대에 걸쳐서 인정될 수 있다. 참외·월과와 모모르디카 멜론 집단은 인도 동부에서는 재배환경이 다르지만, 멜론을 재배할 수 있는 온도를 고려하면, 일본에서는 5월-10월 무렵에 재배할 필요가 있다. 그 생장시기에는 장마에 해당되어, 습도가 높은 조건에서 모모르디카 멜론 집단이 재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같은 곳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모모르디카 멜론 집단은 다습에 강한 멜론이 아니다.모모르디카 멜론 집단이 고분 시대부터 에도 시대에 걸쳐서 일본에서 계속 농사지어 왔다면, 어디에선가 일본의 풍토에 적응한 형질을 획득할 필요가 있다. 참외·월과와 모모르디카 멜론 집단이 같은 곳, 또 서로 가까이에서 재배되었다면 자연히 교잡에 의한 다양한 잡종이 생겨 일본의 풍토에 적응한 모모르디카 멜론 집단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때문에 다양한 종자 크기가 중세부터 에도 시대에 걸쳐서 출토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교잡과 선발이 행해진 지역은, 아무튼 일본에서는 참외·월과와 모모르디카 멜론 집단이 장마의 시기에 재배되고있었다. 그와 같은 농경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존하는 멜론, 유적에서 출토된 종자 유존체를 활용해, 형태 관찰, 생리학적 분석, 또는 DNA 분석으로 멜론의 전파 경로를 파헤쳐, 일본의 농경 유형에 대하여 추찰해 보았다. 하지만, 일본이 어떠한 농경 유형을 계속해 왔을까, 이 물음에 답하는 데에는 더욱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 인도 동부부터 동남아시아는 태국과 중국 자본이 투입되어 플랜테이션이 개발되고, 지금까지 가꾸어 왔던 농경 유형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일본의 농경유형의 연속성을 추찰하는 데에 이들 지역의 현재의 농경 유형을 참고할 수 있는 허다하다. 이것이 사라지면 일본의 농경 유형을 추찰하는 일에 궁해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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