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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운동이 되어 가는 생태농업 2

 

 

 

쿠바는 생태농업의 세계 모델

 

2010년 5월 11~14일에 걸쳐 쿠바 농림기술협회(ACTAF = Asociacion de Tecnicos Agricolas y Forestales-Cuba)의 주최로 아바나에서 제8회 유기농업·지속가능한 농업 국제회의가 내셔날호텔에서 개최되었다. 국제회의는 생태농업에 기반을 둔 지속가능한 농업을 개발하고자 쿠바 및 라틴아메리카·카리브해의 여러 나라가 교류하는 장으로서, 농업기술자·가공업자·교육자·연구자·농업정책 담당자들의 사회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의제는 아래와 같다.

 

1. 도시와 그 근교의 농업

2. 무니시피오(시·읍·면)의 농업 개발

3. 농업에서 젊은이와 여성의 역할

4. 시장, 무역과 유기농산물 인증

5. 식량 안전보장과 연대

6. 지속가능한 농업을 위한 기술

7. 생태농업을 추진하기 위한 소통 방법

8. 지구의 기후 변동 문제

9. 에너지와 대안 기술의 사용 방법

10. 생태농업의 교육, 연구, 보급

11. 생태농업 체계의 경영과 평가

 

회의에 앞서 5월 6~9일에는 피날 델 리오주Pinar del Rio州, 아바나주, 아바나시, 마탄사스주, 산타클라라주, 상티 스필투스 등의 각 주에서 현장 시찰도 이루어졌다. 또 회의 뒤인 5월 15~19일에도 열대농업기초연구소(INIFAT)에서는 도시농업을, 도시 근교농업과 쿠바 소농협회(ANAP)에서는 생태농업 연수회도 열었다.

 

국제회의에는 22개국이 참가했는데, 의장을 맡은 것은 소농협회의 올란도 루고 폰테Orlando Lugo Fonte와 후안 페레즈 라마스Juan Pérez Lamas 농업 차관이다.

루고 폰테는 쿠바에서 농업 분야 증산에 생태농업 기술을 활용한 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고, 토양과 환경 보존에도 도움이 되며 화학비료가 부족한 쿠바에서는 생태적 기술을 써서 만드는 유기비료를 빠뜨릴 수 없다고 했다.

쿠바의 국제회의는 라틴아메리카 생태농업 학회(SOCLA= Sociedad Cientifica LatinoAmericana de Agroecologia), 라틴아메리카 생태농업 운동(MAELA = Movimiento Agroecologico de America Latina y El Caribe)과 함께 주최한 것으로, ‘제6회 라틴아메리카 생태농업 지역운동회의’도 겸하고 있었다.

 

그래서 개최식에서는 라틴아메리카 생태농업 학회의 미구엘 알티에리Miguel Altigri 대표가 이렇게 말했다.

 

“온 세계의 금융위기, 에너지, 사회 위기는 세계의 몇 백만 명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가뭄, 홍수, 허리케인과 기후변동도 국제적인 과학화에 대한 도전입니다. 이 현상에 대응하는 새로운 농업 모델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쿠바는 자원의 합리적인 이용과 환경 보전의 세계 모델입니다.”

 

알티에리는 생태농업에 기반을 둔 지속적 농법을 개발한 쿠바의 농민들을 높이 평가했다. 미구엘 알티에리 대표는 운동의 일환으로 생태농업이 왜 필요한지, 그리고 학회가 탄생한 경위를 웹사이트에 적어 놓았다. 내용의 요지를 소개하겠다.

 

 

운동으로서 발전해 온 생태농업

 

중국, 유럽, 미국 등은 소의 먹이로 수출용 유전자조작 콩을 공업적으로 생산한다. 선진국의 바이오연료 수요에 응하여 사탕수수, 옥수수, 콩, 팜유, 유칼립투스 등을 생산한다. 이러한 지구 규모의 수요가 라틴아메리카 농업의 모습을 변모시켜 나아갔다. 그리고 아직도 경험하지 못한 경제, 사회, 그리고 생태적인 위험을 가져오고 있다. 공업형 농업은 비싼 가격의 석유에 의존한다. 생태계와 생물다양성의 보전에 위협이 된다는 것에 더해, 대규모 단작은 기후변동에도 취약하다. 수출형 농업과 바이오연료 모델을 추진하여 소농들의 지역 자급력도 빼앗아 갔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응하여 그 20년 동안 식량주권과 생태농업이란 개념이 꽤 주목받아 왔다. 근대 농학과 선주민의 지식 체계를 접목한다. 이 새로운 농업기술은 몇 천 명의 농민들 사이에 보급되고 있으며, 농업 생물다양성과 토양과 물을 보전하면서 농촌 지역사회의 식량안전 보장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 NGO·정부·학술기관에 의해서 실증되고 있다. 지속형 농업을 촉진시키고자 몇 백 개의 NGO가 생태농업을 활용하고, 여러 대학에서도 생태농업 학과와 석사 과정을 개설하고, 브라질·쿠바·베네수엘라·볼리비아·페루 정부는 농업 개발전략의 일부에 생태농업을 넣고 있다. 농민운동 비아 캄페시나, 브라질의 소농운동(MPA=Movimento dos Pequenos Agricultores), 토지 없는 농민운동(MST =Movimiento de Trabajadores sin Tierra) 등도 식량주권을 촉진하고자 생태농업을 제창하고 있다.

 

 

생태농업 학회 탄생

 

생태농업에서는 복잡한 농업 체계를 중시한다. 생태계의 생태적인 상호작용과 시너지에 의해서 최소한의 에너지 투입량으로 땅심을 유지하고, 생산성을 확보하며, 농약에도 거의 의존하지 않고서 작물을 보호해 나아간다. 또 생태농업은 단순한 농법에 머무르지 않는다. 풀의 뿌리를 연구하고, 농민에게서 농민으로 보급되는 수단을 통해 농민들 자신이 기술을 혁신·평가하고 적합하게 만드는 지역사회의 능력도 중시한다. 또 환경보전과 생물다양성은 지역 문화와도 깊이 관계한다. 그래서 지역사회의 참가를 중시하고, 문화를 지키며, 소농의 다면적 기능도 발휘해 나아간다. 인적자원을 개발하는 것으로 농촌 주민, 특히 자원이 부족한 농민을 위한 선택지를 늘려 나아간다. 이와 같이 지속가능하게 농업 생태계를 관리·설계하기 위해, 생태학의 개념과 원칙에 기반을 두고 복잡한 농업 생태계를 평가하기 위한 과학의 틀과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생태농업 과학’이다. 연구·교육·보급 사업에 걸친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이 새로운 농업을 설계해야 한다는 인식이 높아지면서 라틴아메리카 생태농업 학회가 탄생했다.

 

학회의 첫 회의는 2007년 8월 13~15일에 콜롬비아 북서부의 안티오퀴아주 메델린Medellin에서 안티오퀴아대학(Universidad de Antioquia) 등 콜롬비아의 학술기관과 공동으로 개최되었다. 비아 캄페시나, 브라질 등의 주요 농민조직 대표, 그리고 라틴아메리카 카리브 지역 생태농업 운동(MAELA), 라틴아메리카 대안 탈 농약 네트워크RAPAL= Red de Accion en Plaguicidas y Sus Alternativas para America Latina), IFOAM 등 생태농업을 추진하는 주요한 NGO의 대표 500명이 참가하여, 농약·환경·사회 등 다양한 과제를 논의했다. 생태적인 병해충 방제, 토양 관리, 민족생태학(ethnoecology), 생태경제학 등 여러 갈래에 걸친 생태농업 기술의 분석이 이루어졌다.

 

또 라틴아메리카에 영향을 미치는 긴급 과제, 기후변동·생명공학과 바이오연료 작물·세계화와 자유무역협정, 기업형 유기농장의 식량주권 등에 대한 논의도 이루어졌다. 또 각 단체는 자신들이 직면한 과제와 활동을 설명하는 동시에,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교육·연구·보급의 수요를 학회 멤버에게도 설명했다. 이 때문에 학회는 지역의 소농들이 갈망하는 요구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있었다.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공업형 농업을 전화하고, 기후변동에 강한 농업을 개발하며, 식량주권과 농촌 지역사회의 삶을 확고히 하는 지역 농업을 촉진하는 것이 그 긴급 과제이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지속가능한 농업 개발전략의 과학적 근거로서 생태농업학을 개발하고, 식량·환경·에너지 위기의 구조적인 원인에 대처하고, 공업형 농업 모델에 의해서 확산된 파괴적인 경향을 뒤집어엎는다. 이 목적을 위해 첫 회의에서는 이러한 과제에 대한 생태농업 기술을 분석·교육·보급하기 위한 워킹 그룹도 만들고, 전략 계획도 정했다.

 

 

농민과 협동하여 실천과학을 추구

 

학회는 라틴아메리카 14개국의 연구자, 교수, 보급원 등 260명의 구성원으로 구성된다. 학회의 강점은 수많은 대학과 NGO, 라틴아메리카·카리브 지역 생태농업 운동, 라틴아메리카 대안 탈 농약 네트워크, GALCI 등 브라질 생태농업협회(ABA= Brazilian Agroecological Society), 생태농업 스페인협회(SEAE= Sociedad Espanola de Agricultura Ecologica), 비아 캄페시나, 브라질의 소농운동, 쿠바, 페루 등과 협력하고 있다.

 

예를 들면 다량의 농사땅에서 바이오연료 작물을 생산할 경우, 식량안전 보장과 생물다양성 등에 어떠한 영향이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 분석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농업생산성에 기후변동이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예측하는 모델은 개발되어 있지만, 가뭄과 불안정한 강우에 강한 생태농업 체계에 대한 연구는 크게 누락되어 있다. 그래서 학회는 3년마다 과학 회의를 여는 것과 함께, 각 나라에 단기 훈련 과정을 개설하고 있다. 또 지속가능한 농업에 유용한 대안기술, 공정한 시장, 지역 농업 개발전략, 정책 개혁의 정보를 농촌사회와 시민운동에 제공하고 있다. 생태농업 스페인협회와 무르시아대학(Universidad de Murcia)과 협동하여 일련의 백서로 워킹 그룹의 성과도 널리 발표되어 있다. 또 학회는 라틴아메리카의 대학 네트워크와도 연대하여 콜롬비아대학(Univeridad Nacional deColombia)과 안티오퀴아대학과 협동하고, 학회는 고도의 이론과 실천 수준을 가진 전문가를 양성하고자 생태농업의 유일한 박사 과정도 개설했다.

 

제2회 라틴아메리카 학회는 2009년 11월 9~12일에 브라질의 쿠리치바에서 브라질 생태농업 협회의 협력을 받아 개최되었다. 의제는 ‘농민과 가족농업 : 지속가능한 미래를 구축하기 위한 과거·현재의 경험’이다. 학생, 농민, 연구자, 교수 등 3000명 이상이 참석하고, 미래가 없는 공업형 농업 모델에 대응하여 참으로 지속가능한 대안으로서 생태농업을 추진하기로 했다. 쿠바에서 국제회의가 열린 사전 움직임으로는 이러한 일들이 있었다.

 

 

written by 吉田太郞, translated by 김서방

 

 

 

인용문헌

(1) The Latin American Scientific Society of Agroecology ( Sociedad Cientifica LatinoAmericana de Agroecologia-SOCLA) launched

(2) Miguel A. Altieri, The Latin AmericanScientific Society of Agroecology (SOCLA): a network of researchers, professors, extentionists and other professionals to promote agroecological alternatives to confront the crisis of industrial agriculture in the region

(3) Cuba: An Example in Using Agroecology, Aldia.cu, May12,2010.

(4) Cuba is an Example of Agro-ecology, says expert, Cuban Daily News,May15,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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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되살아나는 제국의 농법

 

 

 

 

 

 

빈곤, 게릴라, 알코올중독의 악순환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잉카제국 시대의 인구는 1000~1500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럽에서 들어온 천연두와 홍역 등에 면역이 없던 선주민들은 잠시도 버틸 수 없었다. 약 100년 동안 인구는 20%로 격감하고, 페루의 인구가 잉카 시대 수준으로 회복한 것은 겨우 1960년대에 들어서부터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안데스의 마을들은 고립과 심각한 사회적 소외에 계속 시달린다. 농촌에는 근대적인 설비가 부족하고, 전통적인 유산 제도에 따라 형제들끼리 토지를 분할하기에 수확량이 낮은 영세 농업은 더욱 소규모화 되어갔다. 게다가 1980년대 전반에 걸쳐서는 테러와 폭력의 바람이 불어왔다. 페루의 가장 가난한 지역의 하나인 팜파치리Pampachiri의 농민 후안 길렌Juan Guillen 씨는 이렇게 말한다.

 

 

“생존이 최우선 과제이고, 농업은 그 다음 두 번째였습니다.”

 

 

게릴라 조직인 ‘빛나는 길’과 페루 군 사이의 전투에 휘말리는 것을 두려워해 많은 가족이 도시로 떠났다. 지역사회는 부서지고 젊은이들도 더 나은 삶을 구하러 리마나 다른 도시로 나가고, 많은 농촌에서는 농사땅이 버려졌다. 지역사회의 조직과 제도 체제도 약화되었는데, 정부는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고 쭉 무시해 왔다.

 

 

그런데 지금 미미하지만 안데스에 다시 희망의 불씨가 켜지고 있다. 젊은이들이 계속 도시로 나가고 있지만, 이 10년 동안 몇 가족이 도시에서 산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도시에서 돌아와 농사를 시작한 사람도 있다. 이런 움직임의 발단은 한 사람의 여성 앤 켄달 박사가 잉카 시대의 고대 계단밭을 재건하는 데에 정열을 태워, 1977년 쿠시차카 트러스트Cusichaca Trust를 설립하면서 시작된다.

 

 

 

 

사람들을 먹이는 100만㏊의 농지와 관개 체계

 

 

아직 대학원생이던 켄달 박사가 페루에 처음 방문한 때는 1968년이다. 잉카의 건축을 주제로 박사논문을 쓴 그녀가 처음에 흥미가 있던 분야는 고고학이었다. 하지만 학위논문으로 잉카의 농촌 계획을 연구한 뒤, 농촌 개발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1974년 이후에는 해마다 페루에서 여름을 보내게 되었다.

 

 

원래 트러스트는 마추픽추 유적과 가까운 쿠시차카Cusichaca 계곡에서 고고학 조사를 하려고 설립된 것이다. 쿠시차카 계곡의 발굴 조사를 통해 잉카가 생기기 전부터 골짜기에 많은 사람이 살며 농사를 지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게다가 초기의 계단밭과 관개수로도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페루에서 가장 처음으로 위라Wira 또는 와리족Huari族이 계단밭과 초기의 관개시설을 구축한 것은 서기 600년 무렵이다. 계단밭을 만든 처음 목적은 토양침식을 막고자 해서였다. 하지만 계단밭과 관개 체계는 잉카 시대에 더욱 세련되게 발전했다. 예를 들면 쿠시차카 계곡에 계단밭을 만든 주목적은 잉카 시대 가장 신성한 작물이던 옥수수를 마추픽추에 공급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 쿠시차카 계곡에는 겨우 15세대만 자급 농사를 짓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토양학자와 식물학자, 환경학자의 조사를 통해 관개용수와 계단밭이 온전히 기능하던 잉카 시대에는 5000명을 먹여 살렸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쿠시차카 계곡의 농경지.

 

 

스페인 사람들이 건너오기 이전 잉카제국의 농업 생산성은 매우 높았다. 페루의 안데스 산지에서 고고학 조사를 통해 예전에는 100만㏊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단 사실도 밝혀졌다. 그리고 안데스 전역에 만들어놓은 수로가 본래대로라면 불모의 급경사인 계단밭에 물을 대어 몇 십만 명에게나 식량을 제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쿠스코 주변의 수로 대부분은 몇 세기나 방기되어 무너져 있다. 계단밭의 75%나 버려지고, 쿠시차카 계곡에서도 계단밭의 대부분은 무너지고 방치되어 유적이 되었다. 사람들이 과밀화된 도시로 나가고 있는 것도 안데스의 농사땅이 인구를 부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은 계단밭이 기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선주민들이 강제로 이주를 당해 괴멸하다시피 인구가 감소하여 계단밭을 유지할 노동력을 확보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회경제적인 변화 때문이다.

 

 

 

 

되살아난 고대의 계단밭

 

 

그렇다면 고대의 기반 시설을 다시 쓰면 어떨까? 고대에 계단밭에 물을 대는 데에 쓰였던 7㎞ 길이의 퀴슈아르파타Quishuarpata 수로를 수복하는 시범사업이 선정되어, 잉카의 유적을 고쳤던 경험이 많은 석공들의 지도로 현지 주민들도 이 일을 함께했다. 수복 작업은 1983년에 끝났고, 쿠스코대학 농업연구소 KAYRA와 협동하여 계단밭도 다시 손보았다. 그 성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용수를 끌어오는 것으로 몇 세기나 불모지였던 약 45㏊의 농경지를 되살리고, 전통적인 안데스의 곡류인 퀴노아quinoa와 키위차kiwicha, 옥수수, 콩 등을 생산해 자급만 하던 현지 주민들이 과잉 생산된 농산물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수로를 고치고 있는 현지 주민들. 

 

 

 

우루밤바Urubamba 계곡의 농민들도 쿠시차카 계곡의 성공에 감동하여, 1987년 쿠스코에서 80㎞ 떨어진 파타칸차 계곡 근교의 오얀따이땀보Ollantaytambo에서도 트러스트에 지원을 요청했다. 오얀따이땀보에서도 낮은 생산성이 지역사회의 정체와 인구 유출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영국 국제개발성(Departmen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으로부터 자금 원조를 얻어 여기에서도 수로의 재건이 시작된다. 농민들은 현지의 교사 겸 석공의 지도를 받으며 일했고, 석공은 젊은이들을 훈련시켜 나아갔다. 재건에는 4년의 세월이 걸렸는데, 1994년 6.4㎞의 푸마마르카Pumamarca 수로가 부활하고, 약 160㏊의 계단밭에 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계단밭을 온전히 경작하면 건기에도 350가족의 2000명 이상이 풍족히 감자를 생산할 수 있다.

 

 

 

키위차. 이름 모를 서양 여성 분께는 죄송. 

 

 

고고학과 전통 기술

 

 

켄달 박사는 말한다.

 

 

“수로는 크고 복잡하고, 서로 경사도 조금씩 다르고 배수구도 달리 있습니다. 적당히 물을 대려면 전통적인 방식으로 재건해야 합니다.”

 

 

현지 주민이 잉카 시대의 전통 기술로 수로를 수복할 수 있었던 것은, 켄달 박사가 건축과 고고학에 깊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잉카의 관개와 계단밭을 만드는 기술은 세련되었고, 그 건설에 투입된 노력에도 놀랄 만한 것이 있다. 예를 들면 약간 경사진 산중턱의 돌담은 농지를 안정시킨다. 강한 햇살로 낮에 달구어졌다가 밤에 열을 방출한다. 그것이 미기후를 만들어 작물을 서리 피해로부터 지킨다.

 

 

계단밭을 재건하는 과정.

 

 

전형적인 건설 방법은 점토질 흙바닥에 현장에 있는 큰 돌을 앉히고, 그 위에 작은 돌과 흙을 겹쳐서 쌓아 나아간다. 그리고 가장 위의 1m는 특별히 잘 고른 좋은 흙을 쌓는다. 그것은 계단밭이 있는 곳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노동자들이 등에 지고 일부러 운반해온 것까지 있다. 이 구조 덕에 계단밭에는 빗물이 천천히 스며들고, 배수성도 좋은 동시에 토양의 보수성과 온도를 높이고 미생물 활동도 촉진한다. 그 결과 싹이 빨리 잘 트고 작물의 생육을 자극하여 수확량을 높일 수 있다.

 

 

“습윤한 환경에서 유기물은 서서히 분해되어 순환합니다. 화학비료는 전혀 쓰지 않으며, 농약은 자연스러운 생물자원 체계를 파괴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은 본래의 유기농법입니다.”

 

켄달 박사는 말한다. 잘 만든 계단밭은 거의 완전한 생물자원 체계로서, 관개를 통해 토지 생산성을 배로 늘릴 수 있다.

 

 

수로의 재건에는 일반적인 다른 개발 프로젝트에서 쓰는 시멘트가 아니라, 점토·모래·돌·선인장과 현지에서 이용할 수 있는 재료만 썼다. 재건에 참여했던 오얀따이땀보의 사람들은 처음에는 왜 근대적인 시멘트가 아니라 전통적인 점토를 쓰는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켄달 박사는 말한다.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이 지역에서는 전통 기술이 바람직합니다. 점토는 시멘트보다 훨씬 물을 잘 머금고, 습도와 점성을 유지합니다. 시멘트는 지진이 나면 깨져서 산산이 부서져 버립니다.”

 

 

지금은 주민들도 전통 기술을 신뢰하고 있다. 수로 재건 프로젝트를 감독한 현지의 데이비드 카날David Canal 씨는 말한다.

 

 

“우리는 선조의 기술을 재발견했습니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고, 보전할 만한 가치가 있는 많은 기술이 있습니다. 근대적인 진보를 거절하지는 않지만, 고대의 방법이 더 알맞다면 우리는 그것을 써야 합니다.”

 

 

앞글에 나온 팜파치리는 약 2500명이 거주하며 목축업이 기간산업인 지역인데, 여기에서도 점토·돌·모래·선인장과 전통 기술을 사용해 수로와 계단밭을 재건하여 농민들의 수입을 획기적으로 높이고 있다. 프로젝트의 기술자 톰 니칼스Tom Nickalls 씨는 말한다.

 

 

“관개용수 덕에 농업 생산은 급증하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하늘바라기(天水) 농업에서는 어느 지역에 농사를 3년 지으면 다음에 약 7년은 묵혀야 합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물이 부족해서입니다. 그렇지만 계단밭에 관개를 하면 적어도 해마다 한그루짓기는 할 수 있고, 때로는 두그루짓기까지 할 수 있는 곳도 있습니다. 곧 10년 동안 3번 농사짓는 대신 10~15번이나 농사를 지을 수 있습니다.”

 

 

트러스트의 더글라스 월쉬Douglas Walsh 씨는 말한다.

 

 

“우리는 농민들이 계단밭에 관개하는 것을 지원하고자 외부에서 가져오는 시멘트와 다른 자재가 아니라 현지에서 이용할 수 있는 자재를 활용합니다.”

 

 

시멘트는 몇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실어 와야 하고, 값도 비싸 자급 농민들의 수입을 넘어선다. 하지만 고대의 기술을 쓰면 아무것도 들여올 필요가 없다. 프로젝트에 관여한 앞에 나온 농민 후안 길렌 씨도 고대 기술을 이렇게 평가한다.

 

 

“잉카 사람들은 우수한 농학자였습니다. 그들은 지속적인 농업을 이해하고 있었죠. 스페인에게 정복당하면서 이것은 후퇴했습니다. 스페인 사람들은 농업보다 광업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지역사회를 활성화시키다

 

 

가장 처음 계단밭이 재건된 쿠시차카 계곡에서는 지역사회 전체가 활성화되면서 주민들이 큰 성취감을 맛보았다. 그런데 이런 성과는 지속될까? 10년 뒤 이에 대해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러자 현지의 학교는 커졌고, 최초의 예배당이 건설되었으며, 인구도 늘어나 있었다. 젊은이들이 마을에 머물도록 할 유인책도 만들고 있었다. 이 시범사업의 실험을 통해 지역을 개발하기 위한 간단하지만 참신한 개념이 등장했다. 오랫동안 무시되어 왔던 지역의 잠재력을 활용하고, 최소한도의 기술을 지원하여 가난한 농촌 지역사회도 과제의 대부분을 자기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관개 수로의 재건 및 연구와 함께 트러스트는 실천적인 농촌 개발에도 착수해 왔다. 예를 들면 오얀따이땀보에서는 오랜 세월 토지를 적절히 관리하지 않아 환경이 나빠지고 있었다. 혹사된 토양은 심하게 침식되어 고대에 있었던 숲마저 사라졌다. 그래서 프로젝트의 농학자와 현장 기술자들은 현지 농민을 대상으로 토양보전 교육을 마련하고, 재래종 나무를 심는 대규모 계획도 세웠다. 1991년에는 처음으로 환경문제에 대한 공동 연수와 토론회가 개최되었다. 현지 주민들은 마을 근처를 흐르는 강에서 물을 길어오고 있었는데, 그 물이 오염되어 아이들이 전염병에 걸렸고 감자 중심의 식사도 빈약하여서 영양불량 상태였다. 프로젝트에서는 샘과 상류에서 오염되지 않은 물을 파이프로 끌어오는 값싼 비용의 상수도 계획을 지원하고, 이전에는 재배되지 않았던 양배추와 양상치, 양파를 생산하는 채소 텃밭도 장려했다. 채소 텃밭은 주로 여성들이 행하고 있는데, 식사의 질을 개선하고 생산물을 판매할 기회를 가져왔다.

 

 

 

 

 

또 오얀따이땀보 주변의 고립된 고지대의 지역사회는 관개용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 그래서 온실과 환금용 채소밭이 도입되었다. 온실에서는 지금까지는 친숙하지 않은 고추, 토마토, 시금치, 래디시Radish 등의 채소를 재배할 수 있는데, 찾아온 사람들은 온실 안의 기온이 정글처럼 따뜻하다는 데에 놀란다. 다른 지역사회의 마을 사람들이 지원과 조언을 구하고자 오얀따이땀보로 발길을 옮기게 되었다. 그들도 수로를 재건하고 온실을 만드는 기술을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트러스트는 공동 연수를 통하여 몇몇 곳의 인근 마을 대표들을 훈련시켰다.

 

 

“우리는 우리가 한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도울 준비도 되어 있습니다”라고 데이비드 카날 씨는 말한다. 오얀따이땀보의 토지에는 새로이 도시에서 돌아오는 사람을 흡수할 수 있는 여유가 있다. 그런데 쿠시차카 근교의 차마나Chamana에서는 평균수명이 늘어난 결과 새로운 가족은 늘어나지 않고 있다. 계곡의 외부 세계와 닿아, 의료와 가족계획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어서 인구는 안정화되고 있다.

 

 

“우리는 이 곤란한 승리의 은혜를 너무나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쿠시차카에서 재건된 계단밭에서 농사짓는 빅토르 파체코Victor Pacheco 씨와 그의 아내는 말한다.

 

 

켄달 박사의 쿠시차카 트러스트 프로젝트는 우루밤바 계곡에 있는 오얀따이땀보의 상류인 빠따깐차Patacancha에서 거의 10년을 활동해 왔다. 페루 농업성의 혼농임업 활동부국 프로나마체크스Pronamachecs와 협력하고, 농민과 농업 기술자 사이의 토론회를 통하여 계단밭을 재건하는 기술을 보급해 왔다. 또 대규모 선행 연구와 완전한 주민 참여에 바탕을 두고 개개의 가족·교사·지역사회의 대표와도 긴밀히 협동하고, 지방의 기관 및 마을부터 주 정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관과도 관계하며, 성별·건강·영양·환경보호·여성의 권한 위양과 폭넓은 프로젝트에 종사해 왔다. 통합 프로젝트는 1997년에 종료되었는데, 이후에는 현지에 NGO가 만들어져 각 지역에서 많은 국제개발기관으로부터 자금지원을 받아 활동하고 있다. 켄달 박사는 말한다.

 

 

“지역 개발에는 엄청난 자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안데스의 생활을 조사하고 이해를 바탕으로 찾아낸 가장 잘 익은 영역입니다.”

 

 

 

쿠시차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현지 주민들. 

 

 

과거의 실패에서 배우다

 

 

하지만 켄달 박사는 과거의 전통을 존중하더라도 감상적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고 한다. 또 트러스트도 시계 바늘을 거꾸로 돌리려고 하지는 않는다.

 

 

“2000년 전의 사람들에게 분별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아주 적은 선택지밖에 없었고, 잘못도 저질렀습니다. 우리는 그를 통해 진보적으로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박사의 고고학 연구는 현재의 환경 문제에도 빛을 던져준다. 예를 들면, 오얀따이땀보의 북동부에는 4000년이나 연속해서 농업이 이루어졌다는 증거가 있다. 그런데 켄달 박사는 부대밭 농업으로 인한 난개발이 약 1000년에 걸쳐 그 지역을 황폐하게 만들고 사막화했다고 지적한다. 꽃가루 연구를 통해 토양의 회복에 몇 세기나 걸렸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것이 보여주는 바는 당시와 지금의 문제가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은 개발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고고학 연구는 미래에 귀중한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박사는 사회경제적 인자와 마찬가지로, 기후 변동도 초기의 농업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알아냈다. 예를 들면 와리와 잉카가 관개 체계를 개발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당시의 가뭄이었다.

 

 

고대 잉카제국의 기초를 형성한 것은 농업의 혁신과 그 성공이었다. 그리고 선주민들의 농촌 지역사회가 시간을 들여 어떻게 환경과 대화해 왔는지를 분석하여 우리는 많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이는 남미만이 아니라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통하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확립된 기술은 현대를 아우르는 문제에도 간단하고 지속가능한 해결책을 제공할 수 있다.

 

 

 

 

 

 

written by 吉田太郞, translated by 김서방

 

 

 

 

인용문헌

(1) Sally Bowen, Bringing the Inca Canals back to life, People & the Planet,18 Apr,2001.

(2) Peruvian farmers learn from history, BBC World Service's Discovery programme, 22 May, 2003.

(3) Andean Farming Communities, Cusichaca Trust Website.

(4) Cusichaca Rural Development Projects, Cusichaca Trust Website.

(5) The Potential of Traditional Andean Technology-Using the Past to Serve the Present, Cusichaca Trust Website.

(6) Beginnings at Cusichaca, Cusichaca Trust Website.

(7) From Archaeology to 'Integrated Rural Development': The Patacancha Project 1987-1997, Cusichaca Trust Website.

(8) Agricultural Terraces and Irrigation Canals, Cusichaca Trust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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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농사법

 

 

 

 

 

 

고대의 선주민은 자연과 조화롭게 살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러한 낭만적인 생각은 1990년대에 부수어졌다. 연구를 통하여 수많은 문명이 농업으로 흙과 환경을 파괴해 왔다는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단밭을 만들어 토양침식을 막고, 나무를 심어서 황패해진 흙을 회복시킨 고대 문명도 있다. 바로 잉카이다.

 

 

페루 남부의 쿠스코에서 북쪽으로 12㎞, 해발 3300m의 빠따깐차Patacancha 계곡은 성스러운 계곡의 지류로서 현재도 그러한데, 잉카 시대에도 이 성스러운 계곡은 옥수수 산지로 가장 중요한 지역의 하나였다. 여기에 마르카코차Marcacocha라고 하는 지름 40m 정도의 작은 호수가 있다. 규모가 작아서 넓은 내만보다 지역에 살고 있는 육상식물의 변화가 민감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호수 바닥의 코어에 있는 꽃가루를 분석하여 4000년 이상에 걸친 환경의 변화를 알게 되었다.

 

 

  

빠따깐차 지역의 위성지도. 

 

 

잉카의 혼농임업

 

 

잉카에는 문자가 없다. 환경에 관한 문자 정보는 1530년 이후의 것만 얻을 수 있는데, 원주민이나 스페인 사람이 기록한 스페인어뿐이다. 잉카에 건너온 스페인 사람은 대부분 나무가 자라지 않는 민둥산을 보았다. 그러는 동시에 몇 천 개나 있는 잉카의 콜카qollqa(곡물 창고)에 대해서도 보고하고 있다.

 

 

곡물창고인 콜카와 그 옆으로 이어진 계단밭의 모습.

 

 

잉카는 스페인에 의해서 1533년 멸망한다. 하지만 스페인 사람이 건너오기 전까지 제국은 콜롬비아 남부에서 칠레 중앙부까지 퍼져 있으며, 인구는 3000만 명이나 되었다. 또한 잉카는 70종의 작물을 재배하고, 곡물 창고에는 10년이나 사람들을 먹일 수 있을 정도의 공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10년 분량의 연료용 땔감(lena rajada)도 있었다고 한다.

 

 

그 정도의 땔감이 있었던 것은 어째서일까?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도 나무가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무엇인가를 했다는 의미입니다.”

 

 

영국의 벨브로우톤Bellbroughton에 있는 고대 농법의 부활 농촌개발 프로젝트 쿠시차카 트러스트Cusichaca Trust(http://www.cusichaca.org/)의 대표이자 고고학자인 앤 켄달Ann Kendall은 말한다. 연구자들은 잉카에 숲을 보전하는 체계가 틀림없이 있었고, 그것이 급경사의 흙을 안정시켰다고 생각하고 있다. 리마에 있는 프랑스의 안데스 연구기관의 알렉스 쳅스토우-러스티Alex Chepstow-Lusty는 목재를 생산하고 흙을 안정시키는 수단으로 혼농임업을 행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 연료나 목재 수요를 충족하고자 숲을 중시하고, 토양이 침식된 땅에서도 잘 자라서 질소를 고정하는 오리나무(Alnus acuminate)를 산중턱에 심어 혼농임업(Alnus cultivation)가 시도되고 있었다고 말한다.

 

쿠시차카 트러스트의 스태프. 뒷줄 빨간 모자를 쓴 여인이 앤 켄달.

  

오리나무(Alnus acuminate)의 잎과 꽃.

 

 

나무를 심는 전통이 있었던 것은 케추아어의 천연림(sacha)과는 달리 재배되는 나무를 뜻하는 말키mallqui라는 단어가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말키는 죽은 선조를 뜻하는데, 그것은 숲을 지켜온 선조를 숭경한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잉카의 사람들은 나무를 높이 평가했다. 잉카 문화에서 땔감은 부의 상징으로 여겨져, 고관의 결혼식에서는 순금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는 도금된 땔감이 사용되었다. 서민의 결혼식에서는 고기와 코카가 신부의 선물이었는데, 그 이외에 우루트네Urutne라고 부르는 뿌리의 땔감이나 그것이 없으면 재목이 되는 토종 오리나무인 아리소aliso(Alnus acuminata)가 주어졌다.

 

아리소. 

 

 

 

잉카에서 숲은 국유지였다. 혼농임업은 황제 스스로 감시하였고, 위법으로 나무를 벌채하거나 불태우는 행위는 위대한 권위를 상징하는 말키 카마요크mallki kamayoc 앞에 데리고 간 다음 판결을 내려 죽음으로 처벌했다고 한다.

 

 

잉카인들이 산림자원을 높이 평가하고 나무 심기를 행했다는 것을 실증하는 증거는 뜻밖에도 역사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꽃가루이다. 잉카가 등장하기 이전의 코어에는 함유되어 있지 않았던 토종 오리나무인 아리소의 꽃가루가 서기 1100년부터 갑자기 나타난다. 아리소는 침식된 흙에서 잘 자라는 질소고정종이다. 물론 꽃가루 기록이 있다고 하여 당시에 존재하고 있던 나무를 모두 아는 것은 아니다.

 

 

꽃가루 기록을 통해 당시 존재하고 있었던 나무를 모두 알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많은 자생종 나무는 충매화라서 그 꽃가루가 호수의 침전물에 쌓일 확률이 낮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리소는 풍매화이다. 그래서 당시 그것이 존재했고, 날아다니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서기 1100년의 마르카코차Marcacocha 호수 퇴적물을 보면, 계단밭과 나무 심기 등의 기술이 중요시되었다는 사실과 토양침식이 격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교란의 지표인 돼지풀(Ambrosia)도 일반적으로 없다. 또다른 증거도 있다. 만타로Mantaro 계곡에서 조금 북쪽에 있는 판칸Pancan 유적의 발굴 현장 근처에 위치한 표고 3600m에 있는 작은 호수 라구나 빠카Laguna Paca이다. 여기에서도 약 7.5m의 완전한 호수 바닥의 코어를 얻을 수 있었는데, 약 1000년 전부터 아리소가 급증했단 것을 보여준다. 꽃가루는 인구가 급증하고 목재 소비량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리소의 밀도가 비교적 일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라구나 빠카. 

 

 

 

잉카는 그 토지 관리 계획에 따라 일관적으로 나무 심기를 시작한다. 이 조기 관리는 식량과 연료용 나무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실용적인 것이었지 생물다양성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잉카는 수많은 수종을 심고 수많은 작물을 재배했다. 그리고 나무 심기는 산지 구릉의 흙을 안정시키는 데에도 쓰였다.

 

 

 

 

숲을 파괴한 스페인 사람

 

 

이와 같이 혼농임업은 안데스에서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530년대 스페인 사람이 건너오면서 토지이용은 아주 달라지고, 산림자원은 지나치게 개발되어 스페인이 잉카를 정복한 뒤에는 계단식 농법도 나빠졌다.

 

 

산림자원이 급감한 것은 역사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1460년 잉카에게 정복된 완카족Wanka族은 그 뒤 스페인과 동맹을 맺는다. 이때 공급과 관련된 일이 결승문자로 기록되어 있고, 이것을 스페인어로도 베껴 적었다. 만타로Mantaro 계곡, 잉카의 행정 단위로는 라구나 빠카 근교의 아턴 과사Hatun Xauxa의 북단으로부터 1533년에 20,0071짐(fardo)의 쪼갠 땔감이 스페인 사람들에게 제공되고 있었다. 이 짐의 단위는 인간이 등으로 나를 수 있는 양으로 12~15㎏에 달한다. 스페인 사람이 건너오기 이전에도 완카족은 자신들의 수요를 채우면서 공물로서 대량의 목재를 잉카에게 제공했다. 그런데 1537년 이 짐의 양이 1,7000으로 뚝 떨어진다. 이는 일정 영역에서 급속히 벌채가 이루어져 산림자원이 급감한 것을 나타낸다.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겨우 2년 만에 아턴 과사를 떠나 1535년 리마로 이주한 이유의 하나도 계곡에 땔감이 부족해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목재의 종류는 결승문자를 통해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오리나무의 일종인 아리소가 땔감의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을까? 사실 이 지역에 심어져 있었던 아리소가 잉카가 정복하고 50년 뒤에는 감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예를 들면 좋은 숯의 원료였기 때문에 쿠스코에 가까스로 도착해 얼마 되지 않는 기간에 스페인 사람들은 페루후추나무(molle=Schinus molle)를 거의 베어 버렸다. 물론 그들도 나무를 심어야 한다는 필요성은 자각하여, 1590년 쿠스코 근교의 계곡에 다시 나무를 심을 계획을 세워 스페인 사람이 감독하여 2400그루를 심게 한다. 하지만 제련, 벽돌, 석회 제조, 제빵, 지중해 식의 난로와 대량의 목재 수요를 고려하면 이 정도로는 언 발에 오줌 누기였다.

 

페루후추나무. 

 

 

 

스페인이 정복하고 100년 뒤인 1639년, 파드레 코보Padre Cobo는 인디안 한 세대가 1개월 동안에 쓸 연료를 스페인 사람의 가정에서는 하루에 다 써 버린다고 기술하고 있다.

 

 

스페인 사람들은 전략적인 나무 심기로 관리되었던 잉카의 경관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가장 비옥한 토지는 스페인 사람에게 돌아갔다. 선주민들은 이전의 땅을 사용할 수 없어 생산성이 낮은 고지대로 쫓겨났다. 스페인 사람들의 정복으로 토지 관리의 기반이 파괴되고, 새로운 병으로 급속히 인구가 줄어들었다.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고 1세기가 되지 않아 페루의 원주민은 900만에서 60만으로 감소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도입된 가축과 작물로 인해 생물다양성은 사라지고, 토양침식이 진행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연료용으로 급속히 나무를 베어냈기에 아리소도 줄어들었다. 지금 마르카코차Marcacocha 근교에는 완전히 사라졌고, 빠따깐차Patacancha 계곡처럼 몇몇 멀리 떨어진 계곡에만 드문드문 남았다.

 

 

 

 

자연을 파괴하고 있었던 고대 농업

 

 

스페인 사람들과 달리 잉카는 환경 관리에는 성공했다. 인공의 계단밭, 관개 체계, 그리고 인구를 관리하여 토양침식을 일으키지 않고 성공적으로 식량을 생산했다. 그런데 스페인 사람만 혹평하는 것은 가혹할지도 모른다. 잉카 이전에 안데스에 살던 사람들도 똑같은 실패를 범해 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코어의 최하층은 방사선탄소를 통해 1900~4000년 전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채프스토우-러스티 등은 이 코어로부터 교란된 토양에 사는 잡초, 목초와 고대인의 주식이었던 퀴노아Quinoa의 꽃가루를 대량으로 찾아냈다. 프레잉카보다 400년이나 전부터 안데스에서는 농업이 성행했던 것이다. 그런데 1000년 전까지의 코어에는 주변의 산에서 암석이나 모래가 반복해서 호수로 흘러들어왔다. 산에서 홍수로 산사가 흘러온 것이다. 이 기록으로부터 당시의 농민들은 초보적인 계단밭밖에 건설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00년 전에는 한랭화와 토양이 나빠져서 계곡의 농업은 쇠퇴한다. 기후가 냉각된 것은 마르카코차에 농업의 흔적이 보이지 않고, 안데스 산지의 빙하가 확대된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퀴노아를 지고 가는 페루의 여인(출처: 연합뉴스).

 

 

 

“그렇지만 토양침식은 계속되었습니다”라고 채프스토우-러스티는 말한다. 명아주과(Chenopodiaceae)의 퀴노아quinoa(Chenopodium quinoa)와 같은 작물의 꽃가루는 발견되어도 나무의 꽃가루는 매우 드물고, 1300~1000년 전의 코어에서는 대량의 무기침전물을 볼 수 있다. 이것도 식생이 모자란 위약한 환경에서 방목압으로 토양침식이 일어난 결과이다. 곧 안데스에서는 쭉 숲이 파괴되어 심각한 토양침식이 문제가 되었고, 토지도 별로 생산력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뒤 서서히 기온이 높아지기 시작하고, 그와 함께 티와나쿠Tiwanaku/와리Huari 문화가 계곡에 퍼지기 시작했다.

 

 

 

 

자연 파괴형 농업에서 계단밭 만들기로

 

 

서기 1470~1532년에 걸쳐 잉카제국은 혜성처럼 번영한다. 하지만 잉카가 이렇게 갑자기 발전한 이유가 그 우수한 사회조직과 기술에 있다는 설명은 충분히 않은 채 남아 왔다. 그런데 알렉스 채프스토우-러스티는 그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가 기후변동에 있다고 지적한다. 호수의 코어를 통해 서기 1100년 무렵부터 호수 주변의 경관이 크게 변하고 농업이 갑자기 발전한 것을 볼 수 있다. 초식동물의 똥을 먹이로 하는 절족동물 날개응애(oribatid mites)도 출현한다.

 

 

“날개응애는 라마의 똥을 먹었습니다.”

 

 

채프스토우-러스티는 응애는 호수 근처에 라마가 방목되었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토양침식이 급감하고, 옥수수와 다른 작물의 꽃가루나 씨앗도 나타난다.

 

 

“이때가 확실히 토양을 보전하는 기술에 의해 이 지역에서 농업을 행한 조직적인 노동이 시작된 때입니다.”

 

 

잉카는 높은 표고의 지역에 있는 하천과 호수에서 끝없이 물을 끌어들이고자 5.8㎞의 운하를 만들었다고 고고학자인 앤 켄달는 말한다. 그리고 무수한 계단밭도 갖추었다. 서기 1100년의 마르카코차 호수의 퇴적물을 보면 계단밭과 나무 심기 등의 기술이 중요시되었던 것과 토양침식이 격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역의 거주지 발굴을 통해서는 계단밭이 건설된 것과 계곡의 인구가 현대의 약 4000명보다 4배로 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토양의 손실이 적어지고, 많은 사람을 먹였기 때문이라고 켄달 씨는 말한다.

 

 

“계단밭을 만들려고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계곡 바닥과 강바닥에 무너져 내려와 있던 흙을 구릉지로 되돌리고자 옮겼을지도 모릅니다.”

 

 

켄달 씨는 “몇 천 개의 계단밭을 만들자고 틀림없이 사람들이 얘기했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리고 계단밭이 기능하는 것을 알았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계속 발전시켰습니다.” 채프스토우-러스티도 그렇게 말한다.

 

 

잉카의 발전을 뒷바라지한 중세 온난기(Medieval Warm Epoch))라고 부르는 세계적으로 온난한 기후는 그 뒤 약 400년이나 이어진다. 그때까지 몇 천 년이나 이어져 왔던 차가운 기후에서는 농사지을 수 없었던 고지대에서도 작물을 재배하게 되고, 산중턱에 계단밭을 만드는 일도 가능해졌다. 안데스의 빙하가 녹아 흘러 관개용수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갑자기 안데스에서는 새로운 곳에서 농사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농업용으로 계단밭이 마련되고 빙하가 녹은 많은 물로 새로운 관개 체계도 시작했습니다. 모두 기온의 상승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죠.”

 

 

옥수수와 감자가 증산되어 잉카는 광대한 도로망을 정비하는 활동에 종사할 여유가 생기고, 과잉 생산된 식량으로 군의 정비도 가능했다. 1400년 무렵부터 잉카가 에콰도르부터 칠레에 이르는 영토를 급속히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아리소는 이 온난화 기간에 자연히 늘어났을지도 모른다. 연구자들 가운데에는 잉카가 의식적으로 혼농임업에 임하지 않았다고 의심스러워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의 코어는 적극적인 경영관리의 사례가 될 수는 없다”고 시카고대학 라틴아메리카연구센터의 알란 콜라타Alan Kolata 소장은 말한다. 그렇지만 콜라타도 계단밭 등의 고대 농업이 흙을 보전하고 작물 생산을 높였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나무 심기가 시작된 것도 기후가 차가웠던 서기 1000년 이전은 아니었을 것이다. 마르카코차 호수 근처에는 서기 1000~1460년의 전형적인 유적이 수없이 많다. 그리고 아리소의 꽃가루가 늘어나는 것과 발맞추어 빠따깐차 계곡에서 인구가 급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잉카는 나무 심기와 같은 보전 활동을 시작하여 나빠진 농토를 복구한 것이다.

 

 

 

 

돌려짓기와 묵히기로 감자의 병을 막다

 

 

그리고 잉카제국에서 행하던 농업도 합리적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건너오기 이전에 제국의 농민들은 토지를 묵히고, 감자를 돌려짓기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산악 지역 우추크마르칸Uchucmarcan의 농민들이 행하던 것은 이런 방식이다. 먼저 농지에서 1~3년 농사를 지은 뒤에 8년 이상 휴한지로 놔둔다. 그리고 감자를 재배할 경우에도 그와 함께 안데스의 덩이줄기 종류인 오카oca(Oxalis tuberosa)나 마슈아mashua(Tropaeolum tuberosum)를 재배하고, 다음 1~2년은 울루크ullucu(tuberosum)를 재배하는 것이다(Brush 1977).

 

오카, 마슈아, 울루크.

 

마슈아.

 

 

 

하지만 감자에는 감자 시스트 선충(potato cyst nematode=Globodera rostochiensis)이란 성가신 문제가 있다. 선충은 땅속에서 늘어나는데, 예를 들면 마른흙 1g에 알이 100개나 존재하는 고밀도 상태가 되면 수확량을 60%나 떨어뜨려 버린다. 게다가 숙주인 감자가 없는 상태에서도 시스트라고 하는 알 상태가 되어 길면 10년 이상이나 남아 있다. 시스트 상태가 되면 농약에도 강하고, 근절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중요하게 해온 것이 농토를 묵히기와 비숙주식물(nonhost)이다. 영국의 로탐스테드Rothamsted 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7년 동안 묵히면 시스트 선충을 경제적 허용한계까지 줄일 수 있다고 한다(Jones 1970, Jones1972). 또 비숙주식물을 재배해도 흙속의 선충 밀도가 30~50%나 줄어든다(Brodie 1984). 또 마슈아를 심는 것도 효과가 있다. 마슈아의 뿌리에서 시스트 선충을 쫓는 분비물을 내뿜는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잉카와 프레잉카의 농민들은 몇 세기에 걸친 시행착오를 통해 농토를 오래 묵히는 것이 감자 재배에 필요한 일임을 배웠을 것이다. 잉카의 묵히기와 돌려짓기는 토양침식을 줄이는 것만이 아니라 건전한 병해 관리 체계에도 그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가뭄으로 줄어든 티와나크Tiwanaku 문명

 

 

나중에 잉카제국을 건설한 사람들은 제국이 발전하기 몇 세기 전부터 쿠스코 지역에 살던 수많은 부족 안에 있었음이 그릇의 양식을 통해 판명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제국이 채용한 것이 그들의 토지 경영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기의 나무 심기와 자연 재생의 증거와 관련이 있는 서기 1100년에 관심이 있습니다.”

 

 

채프스토우-러스티는 말한다. 그리고 잉카가 2대 라이벌인 와리Wari와 티와나크 문명을 제패할 수 있었던 것도 기후의 온난화와 건조화에 의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 온난기에 따르는 기후변화로 티티카카 호수 지역에서는 가뭄이 심해졌다. 티티카카 호수의 퇴적물도 변하여 호수의 깊이가 낮아졌다는 명백한 증거가 되고 있으며, 마르카코차 호수의 남동으로 200㎞인 퀠카야Quelccaya의 만년설에서 추출된 빙하 코어의 기후 자료도 이 시기에 얼음이 녹고 강수량이 뚜렷하게 줄었던 사실을 보여준다. 이 가뭄이 티와나크 문명이 붕괴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티와나크 문명을 떠받치고 있었던 것은 높은 두둑의 밭 체계였다. 서기 1100년에 이 높은 두둑 밭이 대규모로 버려졌다. 사람들은 토지를 구하러 북쪽으로 이주했을 것이다. 북쪽의 쿠스코 지역에는 아직 계절에 따른 비가 내리고 빙하가 녹은 물로 보충하며 농사를 지을 수 있었 때문이다.

 

 

그리고 지구의 배꼽을 뜻하는 ‘쿠스코’의 설립과 관련된 잉카의 신화도 어떠한 사실에 근거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전설에 따르면 잉카의 초대 황제는 도시를 설립할 장소를 찾고자 대지를 시험하려고 타팍 야우리Tapac Yauri라고 부르는 황금지팡이를 손에 들고 티티카카 호수에서 북쪽으로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이 지팡이가 대지에 꽂히는 곳이 있을 때 바로 그것이 도시를 설립할 장소라는 상징이었다.

 

쿠스코를 설립한 잉카의 초대 황제 만코 카팍Manco Cápac. 

 

 

 

 

고대 농업을 부활시키다

 

 

영국 국제개발성(Departmen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이 발표한 숫자에 따르면, 페루의 2400만 명 가운데 49%가 빈곤하다. 그 가운데 가장 가난한 사람은 안데스에 사는 선주민으로, 약 66%의 세대가 빈곤하다고 분류되어 있다. 그 주요 원인은 산림 파괴, 토양침식, 충분하지 않은 물 관리와 땅심의 약해짐이다. 그리고 화폐경제가 자원을 서로 나누어 가지는 생활 방식을 바꾸어 놓아 농촌 지역사회나 도시와 농촌을 분극화시키고 있다.

 

 

“고대 잉카는 이상적인 고지대 농업 체계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똑같은 전략이 현재 페루의 농민을 돕는 데에 유효할지도 모릅니다”라고 쳅스토우-러스티는 말한다. 이러한 고대의 전략은 지금도 실용적일지도 모른다. 쳅스토우-러스티에 따르면, 스페인 사람이 건너온 뒤에는 응애가 눈에 띄게 줄어 잉카 문명의 대부분이 파괴된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고 한다. 1600년 무렵에는 소, 양, 염소, 말을 스페인 사람들이 가지고 들어온 뒤부터 응애는 다시 늘어난다.

 

 

하지만 스페인 사람들에게는 이 잉카의 묵히기와 돌려짓기는 무의미한 관습처럼 생각되었다. 6~8년에 걸친 오랜 묵힘과 돌려짓기 농법은 팽개쳐지고, 안데스 산중의 고립된 지역사회에서만 행했다. 이후 페루에서는 감자 시스트 선충으로 큰 피해가 생겨 버렸다.

 

 

쳅스토우-러스티의 해결책은 아마존으로부터 동쪽으로 부는 습한 바람을 붙잡도록 오리나무 등과 같은 자생종 나무를 대규모로 ‘다시 심는 것’이다. 쳅스토우-러스티는 다시금 농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잉카의 운하와 계단밭을 수리해야 한다고 추천한다.

 

 

쿠시차카 트러스트Cusichaca Trust는 빠따깐차Patacancha 계곡에서 고대의 방법으로 계단밭을 굴삭하고 그것들을 재건하는 계획에 자금을 대고 있다. 1995년 이후 현지의 농민들은 운하를 재건하고, 160㏊의 고대 계단밭에서 감자, 옥수수, 밀을 재배하고 있다. 그렇지 않은 토지에서보다도 계단밭은 수확량이 좋고, 비료도 적게 든다고 그들은 말한다.

 

 

“이 사람들은 무엇이 기능하고 무엇이 기능하지 않는지를 몇 백 년이나 배워 왔습니다.”

 

 

플로리다대학의 지리학자 마이클 빈포드Michael Binford 는 말한다.

 

 

“만약 그들이 해온 일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도 무언인가를 배우겠죠.”

 

 

 

written by 吉田太郞, translated by 김서방

 

 

 

 

인용문헌

 

(1) Thurston, H. David, Plant disease management practices oftraditional farmers, Plant Disease 74:96-102, 1990.

(2) Kevin Krajick, Ancestors of Science:Green Farming by the Incas?, Science Magazine, 17 July 1998.

(3) Alex Chepstow-Lusty and Per Jonsson, Inca Agroforestry:Lessons from the Past, AMBIO: A Journal of the Human Environment, pp. 322–328, March 15, 2000.

(4) Andy Coghlan, Hotter weather fed growth of Incan empire July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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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농업의 방법 - 잡초 관리

 

 

 

 

 

 

풀 투성이 옥수수밭

 

 

멕시코 푸에블라주Puebla州의 농민들은 7000년이나 옥수수를 재배하며 다양한 경험을 축적해 왔다. 그들이 재배하는 옥수수는 토종인데, 국제 옥수수·밀 개선 센터와 정부에서 제공하는 품종보다 뛰어나 남아 있다. 호박과 콩을 섞어짓기하여 대규모 단작보다 수확량이나 영양도 좋으며, 반 리넨Van Rheenen(l981) 등에 따르면 옥수수와 섞어짓기하여 콩에 병해가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토종 옥수수는 이삭이 아래로 구부러지며(doblando la mazorca) 늘어진다. 웨더왁스Weatherwax(1954)는 이 품종을 썼던 16세기 아즈텍 농업의 기록을 찾아냈다. 1529년 멕시코를 방문한 수사 사하곤Sahagun은 아즈텍족 농민들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옥수수를 심은 구멍에 흙을 덮고, 어린 싹의 둘레에 북을 주며 풀을 뽑거나 솎는다. 잘 자라도록 작은 이삭은 따 버린다. 그리고 줄기가 성숙하여 말랐을 때 옥수수를 수확하여, 이삭을 묶든지 줄기와 이삭을 함께 모아 집으로 가지고 돌아와 보존한다. 그리고 이삭이 없는 줄기는 부수어 바람으로 말끔히 한다.”

 

아래를 향한 옥수수는 기묘하게 생각된다. 아래를 향하여 옥수수의 알곡은 비에 젖지 않고, 이삭에 붙은 채 햇빛에 말리는 것이 격납하는 쪽보다 쥐나 새에 먹히는 일이 적으며, 수분의 양도 줄이기에 보관하면서 질이 나빠지는 것도 막을 수 있다. 게다가 몬토야Montoya와 쉬버Schieber(1970)는 과테말라에서 아래로 구부러지는 옥수수를 견본·추출하여, 보통 옥수수의 균류 피해가 평균 14.5%인 데 비해 알곡의 피해가 1.0%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밝혔다.

 

 

그런데 이 농민들이 일하는 옥수수밭의 수확철의 모습은 온대의 옥수수 산지와는 좀 다르다. 밭이 잡초 투성이다. 멕시코의 과학자들에 따르면, 농민들은 약 90일 동안이나 밭에 풀이 자라게 놔두는데, 김을 매도 수확량 차이가 별로 없고 또 풀을 건기에 가축의 먹이로 쓰기에 그렇다고 한다. 농민들은 “밭에 풀이 있으면 바람과 물로 토양이 침식되는 것도 줄어든다”고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에프라임 에르난데스Efraim Hernandez X.는 멕시코의 옥수수밭에 있는 약 40종의 풀은 약향초(Herb)로 농민들이 먹기도 한다고도 지적한다. 사실 그 가운데에는 일부러 씨를 뿌린 풀조차 있다.

 

 

 

 

섞어짓기로 생긴 그늘로 풀을 막는다

 

 

물론 전통적인 농민들도 풀을 관리하고 있다. 쓰는 방법은 갈아엎기와 불지르기, 덮기 등이다(Altieri and Whitcomb 1978). 예를 들면 태국 동부에서는 건기의 끝자락에 몇 번이나 밭을 갈아엎어서 땅콩의 잡초를 줄이고 있다. 표면이 마르면 풀의 발아와 성장이 멈춘다. 마늘의 잡초는 볏짚으로 덮어서 막고 있다. 농사짓기 전에 불을 지르는 곳도 있다. 예를 들면 태국 북동부에서는 밭의 풀을 볏짚을 태워서 관리하고 있다. 코스타리카의 부대밭 농업에서도 겉흙의 풀 씨앗을 50% 이상 줄인다는 사실이 관찰되었다(Ewel et al. 1981).

 

 

손으로 김을 매는 것도 전통농법에서는 일반적인데, 노동력과 조정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예를 들면 태국 북동부의 카사바 재배에서는 건기가 시작될 때 괭이(호미)로 풀을 뽑고서 덮개식물로서 그대로 놔둔다. 같은 시기에 벼농사를 준비하기 시작하기에 카사바의 김을 매는 데 많은 노동력을 투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건기에는 물이 적기 때문에 풀이 늦게 자란다. 그리고 풀이 자라는 우기에는 카사바가 자라서 생긴 그늘이 풀이 자라는 것을 억제해 버린다.

 

 

섞어짓기에서는 연속하여 작물을 기르기 때문에 풀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옥수수, 콩, 카사바를 섞어짓기하는 전통적인 라틴아메리카의 농법도 풀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Hart 1975). 섞어짓기로 인해 빛이 닿지 않으면 풀은 자라지 않는다. 차폐 실험을 통해 빛을 50%로 하면 풀의 양이 75% 줄고, 20%로 하면 96%나 줄어든다고 한다(Bantilan et al. 1974).

 

 

나이지리아에서도 동부를 수수나 조와 섞어짓기하여 풀이 자라는 것을 억제한다(Summerfield et al. 1974). 콩고에서는 오이를 옥수수와 섞어짓기하는데, 이것도 풀을 억제하려고 해서이다(Miracle 1967). 탄자니아의 우삼바라Usambara 산지의 농민들도 묵히기, 섞어짓기, 그리고 특정한 김만 내는 방법으로 복합농업 체계를 개발해 왔다. 작물이 작을 때는 풀을 덮지 못한다. 그러나 풀이 늘어나도록 놔두면 지표를 덮어서 땅거죽이 뜨거워져 마르는 것을 막는다. 비가 올 때에는 토양침식을 줄이고, 작물과 경합하여 작물도 잘 자란다. 농민들은 그것을 잘 이해하여 작물이 자라는 데 방해가 된다고 판단될 때에만 살짝 갈아버린다. 양분이 순환하고, 박테리아가 질소 동화할 수 있도록 덮개식물로 흙 표면에 풀을 놔둔다. 건기가 되면 밭은 많은 풀로 덮이는데, 흙은 부식으로 기름지게 되고 수분도 많고 부드러워 다음 농사철에도 좋다.

 

그러나 그 뒤 풀 없는 농지라는 원칙이 도입되면서 이전에 잡초를 남기는 작부체계가 무너지고, 풋거름이 되는 풀을 대체하려고 화학비료가 필요해졌다(Egger 1987).

 

탄자니아의 우삼바라 지역.

 

 

 

 

잡초 따위라고 하는 풀은 없다

 

 

서양의 개념에서는 들풀, 작물, 잡초로 명쾌하게 식물을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멕시코 타바스코주의 전통적인 농민들에게는 ‘잡초’라는 말이 없다. ‘좋은 식물’ ‘나쁜 식물’이라는 개념은 있지만, 언제 그리고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서 똑같은 식물이 잡초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Chacon and Gliessman 1982).

 

 

멕시코 북동부의 바닷가 지역에 살고 있는 와스텍Huastec 인디언의 개념도 똑같다. 와스텍족은 자급 농업·수렵채집과 함께 환금작물의 생산과 임금노동으로 번 돈으로 필요한 것을 사면서 생활하고 있다(Alcorn1981). 부대밭 농업의 밀파Milpa와 채소 텃밭으로 재배하는 옥수수와 타피오카 등이 주식인데, 주어진 상황이나 계절에 따라서 똑같은 식물이 ‘잡초’가 되거나 그렇지 않거나 한다. 더욱이 지역의 숲 생태계와 오랜 세월 밀접하게 연관되어 온 와스텍족은 식물을 그 자체의 단독으로 인식하지 않고, 생태계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의 하나로 인식한다. 당연히 식물에 대한 태도도 달라진다. 그리고 몇 세기에 걸쳐 생태계 전체에 손을 대면서 열대림의 식생을 바꾸어 왔다. 람보Rambo(1982)에 따르면 말레이시아의 숲에 사는 선주민이나 동남아시아의 숲에 사는 농민들도 일반적으로 그들과 비슷하게 식생을 관리해 왔다고 한다.

 

전통적인 농민의 세계에 잡초라는 이름의 풀은 없다.

 

옛 와즈텍족의 생활을 담은 그림.

 

 

 

written by 吉田太郞, translated by 김서방.

 

 

 

 

인용문헌

(1) Gerald G. Marten, Traditional Agriculture in Southeast Asia: Peter Brosius, George W Lovelace, and Gerald G. Marten,Ethnoecology: An Approach to Understanding Traditional Agricultural Knowledge, Westview Press, 1986.

(2) Gerald G. Marten, Traditional Agriculture in Southeast Asia: Becky. Brown and Gerald G. Marten, The Ecology of Traditional Pest Management in Southeast Asia, Westview Press, 1986.

(3) Thurston, H. David, Plant disease management practices oftraditional farmers, Plant Disease 74:96-102, 1990.

(4) Reijntjes, C., B. Haverkort, and A. Waters-Bayer. Farming for the future: An introduction to low-external input and sustainable agriculture, 3.2 Indigenous farming systems, practices and knowledge: some examples, London: Macmillan,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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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농업의 방법 - 부대밭 농업       세계 각지에서는 땅심을 유지하고자 지금도 부대밭 농업(Shifting cultivation, swidden,slash and burn agriculture)이 행해지고 있다. 특히 열대 농업에서는 인구밀도가 낮고 척박한 토지에서 알맞은 농법이라고 할 수 있다. 숲을 베고 불을 지르면 숲의 생물체로 있던 양분이 무기질인 재의 모습으로 흙에 공급된다. 가장 처음 몇 해에는 수확량이 높지만, 농사를 계속하면 양분이 줄고 잡초와 해충도 침입하기 시작하여 작물을 재배할 수 없게 되어 간다. 최대 5번 정도 농사지은 뒤 밭은 버려지고, 다른 숲을 개간한다. 버려진 밭은 몇 년에서 몇 십 년이나 묵힌다. 충분히 묵혀 두면 땅심이 되살아나고, 이 주기는 거의 무한히 반복할 수 있다.   그러나 재배하던 지역은 완전히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바나나, 아보카도, 커피, 코코넛 등 유용한 여러해살이 식물이 그대로 남아서 그 뒤에도 수확할 수 있다. 잡초나 해충에 대한 작물의 반응과 필요로 하는 양분이 서로 다른 작물을 차례차례로 재배해 나아간다. 예를 들면 필리핀의 하누노족Hanuno族은 나무를 벤 뒤 첫해에는 벼와 옥수수, 다음에는 고구마·참마·카사바 등의 뿌리채소를 심고, 가장 마지막에 바나나·아바카(abaca= Musa textilis)·대나무·과실나무를 심는다(Conklin 1957).   대개의 부대밭 농업에서는 8~10년의 휴한기를 두어서 토양침식을 발생시키지 않는다(Kalpage 1976, Lai 1982, Sanchez 1976). 또 대부분의 전통적인 부대밭 농업은 갈아엎지 않고 작물을 재배하여 기계로 개간하는 곳보다 토양침식이 적다(Sanchez 1979, Seubert et al. 1977). 숲을 태운 뒤에는 흙의 투수성이 높아지기에 오히려 흘러가 버리는 물이 줄어들기도 한다(Suarez de Castro 1957). 더욱이 흙이 노출되는 기간도 몇 주일에 지나지 않고 나무의 잔해와 숯 조각, 재 등이 흙을 침식으로부터 막고(Sanchez 1976), 큰 나무는 밭에 남아서 살아 있는 뿌리가 겉흙을 붙들어 토양침식을 막는다(Nwoboshi 1981, Eckholm 1976).   전통적인 부대밭은 지역사회의 자급적인 생존 방식과 조화를 이루고, 인구압이 그 지역의 환경 용량을 넘지 않는 선에서 인간과 좋은 균형을 이룬다. 그러나 1957년에는 약 2억 명이 부대밭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1987년에는 3억 명으로 늘어났다(Russell 1988). 인구 증가와 이용할 수 있는 토지가 줄어들며 묵히는 기간이 짧아지고, 그것이 토양침식과 생물다양성의 감소로 이어졌다. 예를 들면 타이 북부에서는 숲을 베어낸 급경사에서 농사를 지어서 토양침식이 일어났다(Sheng 1982). 대만, 엘살바도르, 자메이카의 급경사 지역에서 행해지는 전통농업에서는 100~200t/㏊·年의 토양이 유실되고 있다(Sheng and Michaelson 1973, Hsu et al. 1977, Sheng 1982). 현재 짧은 기간에 행해지는 부대밭 농업은 지속가능한 농업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인용 문헌  (1) Gerald G. Marten, Traditional Agriculture in Southeast Asia: A Human Ecology Perspective, Gerald G. Marten and Patma Vityakon, Soil Management in Traditional Agriculture, Westview Press, 1986.   (2) Reijntjes, C., B. Haverkort, and A. Waters-Bayer. Farming for the future: An introduction to low-external input and sustainable agriculture, 3.2 Indigenous farming systems, practices and knowledge: some examples, London: Macmillan, 1992.   (3) Traditional Agriculture, Dalhousie University over the period 1998 to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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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바의 혼농임업

 

 

대개의 열대우림에서 선주민들은 삼림원예(silvihorticulture)를 발전시켜 왔다. 예를 들면 서西자바에서는 혼농임업의 존재가 10세기에 처음으로 기재되었는데, 지금도 각 마을의 농사땅 가운데 15~50%를 점하고 있다. 0.1㏊의 작은 넓이라도 영양가 높은 과일, 채소, 고기, 알에 더하여 땔감용, 목재용, 약용, 장식용과 70종 이상이 섞어짓기로 재배되고 있다. 한해살이풀, 여러해살이풀, 덩굴, 땅으로 기는 식물이 있고, 나무는 10~35m까지 자라고, 최대 250종의 작물을 심는다고 보고된 마을도 있다.

 

 

혼농임업의 원예에서는 가축, 특히 가금류가 중요하여 방목되거나 밭의 울타리 안에서 사육되고, 농사 부산물이나 모아 놓은 식물이 먹이로 활용된다. 가축은 양분의 순환에 중요하고, 가축의 폐기물도 원예의 양분 순환에 기여한다. 또 양식 연못도 있어, 물고기는 가축과 인간의 배설물과 채소를 먹는다. 농사에서는 낙엽과 가지가 분해되고 부식되어 양분이 순환한다. 또 두엄, 양어 연못의 진흙과 녹지도 농사에 일반적으로 쓰인다. 유기물의 순환이 유지되는 것으로 화학비료 없이 땅심을 유지하는 데 충분하다(Michon et al. 1983).

 

각 식물의 수평·수직적 배치는 세련되어, 그늘에 강한 식물은 아래쪽에서 햇빛에 강한 식물은 위쪽에서 이용되고, 햇빛과 온도의 수직적 변화에 응하여 다양한 종이 알맞은 ‘위치’에서 길러진다. 전통적인 농민들에게는 각각의 식물에 어울리는 장소를 골라 기르는 적합한 생태학 지식이 있다고 Michon 등은 보고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체계 안에 동식물의 기능과 활력을 조정하고 개변하여, 그 결과 인구밀도가 높은 자바에서 사람들을 먹이고 있다.

 

 

 

 

탄자니아의 혼농임업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에 사는 반투족Bantu族에 속한 차가족Chagga族도 우수한 전통적인 농민으로서, 약 1200명/㎢의 인구밀도를 떠받치고자 다층 원예를 활용한다(Fernandes et al. 1984). 원예에는 가축, 식용작물과 환금작물이 모두 있고, 100종 이상의 식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나나만도 식용, 맥주 제조, 사료용으로 15종이 재배되고 있다. 원예는 수직적으로 5층을 이룬다. 최하층(0~1m)은 다양한 식용작물과 허브, 풀로, 2층(1~2.5m)은 커피와 떨기나무로 되어 있고, 3층(2.5~5m)은 바나나가 자라는 지역이다. 여기에는 과일과 사료용 나무도 포함된다. 4층(5~20m)은 땔감과 사료용 나무이고, 5층(15~30m)은 귀중한 목재, 땔감, 사료용 나무의 잎이 우거진 부분이 된다.

 

 

이러한 체계는 몇 세기나 지나도 심각한 병충해 문제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또 농약을 쓰는 일은 전혀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것은 혼농임업의 원예 체계가 그 지역의 안정된 열대 생태계를 모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게 이루어져 있는 종들이 원예의 병해충 관리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작물이 다양하기에 약간의 해충은 고립되어 버려 파괴적인 수까지 늘어나지는 않는다. 또 사이짓기도 식물 병원균을 억제한다. 그늘은 습도와 이슬, 온도에 영향을 주고, 그것이 몇몇 병원체를 줄인다. 더욱이 전통적인 농민들은 몇 세기에 걸쳐 그 조건에서 적응하고 번영한 품종을 선발해 왔다. 그 재배 상태에 최적인 품종이 있는 것이다.

 

 

인용문헌

 (1) Thurston, H. David, Plant disease management practices oftraditional farmers, Plant Disease 74:96-102, 1990. 

 (2) Reijntjes, C., B. Haverkort, and A. Waters-Bayer. Farming for the future: An introduction to low-external input and sustainable agriculture, 3.2 Indigenous farming systems, practices and knowledge: some examples, London: Macmillan,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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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인도의 식물 과학 2 - 브르크쉬 아유르베다Vrksh ayurveda

 

 

 

아유르베다와 만나다

 

인도 지식체계 센터(Centre for Indian Knowledge Systems)를 설립한 비자야락시미Vijayalakshmi 박사는 브르크쉬 아유르베다와 처음 만났던 때를 이렇게 기억한다.

 

비자야락시미 박사.

 

 

“어렸을 때부터 저는 원예를 매우 좋아해서 집에 작은 텃밭이 있었어요. 그래서 많은 꽃이 피곤 했는데, 어느 날 동아(ash gourd)가 하나도 여물지 않고 꽃도 시들어 버렸지요. 원예를 도와주던 한 노인이 이렇게 말했어요. ‘아, 이걸 살리는 건 매우 간단하지.’ 그는 뿌리 근처에 구멍을 파고 갈바눔(Ferula gummosa, 건조지에서 자라는 미나리과 식물)을 넣었어요. 그러자 2주일쯤 되어 꽃이 되살아나고 작은 열매를 맺었지요. 더 놀라운 건 그해에는 한 포기의 덩굴에서 동아가 100개나 달렸다는 점이에다. 이 일의 원리를 이해한 건, 15년이나 지나 브르크쉬 아유르베다의 문헌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예요. 갈바눔은 산스크리트어로 힌구hingu라고 하는데, 도샤dosha의 균형을 맞추는 데에 도움이 됩니다. 꽃이 과실이 되는 과정에서는 바타Vaatha가 지배합니다. 바타란 높고, 가늘고 길며, 경량이고, 표면이 엉성하고, 약간의 태양열로도 시들어 버리는 잎을 가진 식물에 할당될 수 있는 분류로, 이 바타의 균형이 무너지면 꽃은 시들어 버리지요. 그렇지만 뿌리에 갈바눔을 적용하면 이 불균형이 줄어서 체계가 정상으로 기능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대풍작을 가져왔어요.”

 

그리고 비자야락시미 박사는 이렇게 주장한다. 농약의 가격은 계속 오르고 있으며, 환경에도 문제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하지만 브르크쉬 아유르베다의 연구는 생태학의 원칙에 바탕을 둔 건강한 해충 방제의 정보를 준다. 화학비료도 비싼데, 브르크쉬 아유르베다는 그 대체 수단으로 쓸 수 있다. 우리는 화학비료와 농약으로 토양·물·공기를 오염시키고 있다. 인도의 전통농법을 공부하는 일은 그러한 일을 저지르지 않고도 높은 수확량을 올리는 농업을 실시하는 방책을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근대농업의 기술이 지속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 입증되고 있는 지금, 이 점은 특히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다. 고대 농업의 전통을 공부해 내용을 풍부하게 하면 우리는 세계를 풍족하게 만들 수 있다.

 

 

과학이라 할 수 있는 아유르베다

 

도샤와 바타라는 개념은 근대 과학과는 너무 괴리되어 있다. 브르크쉬 아유르베다가 정말로 효과가 있을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비자야락시미 박사는 과거, 현재, 미래에도 한결같이 유효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브르크쉬 아유르베다가 과학이기 때문이다. 인도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고대 문헌이 파묻혀 있어 정확한 수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최대 3억 개의 문헌이 있다고 한다. 게다가 인도에서는 고대부터 지식과 경험을 종합시켜 왔다. 고대의 경전 냐야 사스트라Nyaya Sastra에는 의미 있는 지식을 얻는 방법이 명확히 설명되어 있다. 사스트라는 지식에는 3개의 근원이 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직접 관찰하고 경험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문헌에 있는 축적된 지식이고, 세 번째는 관찰과 경험을 통해 타당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의료로 유명한 아유르베다도 이러한 합리적인 원칙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고 고대 인도의 문헌은 의료와 철학과 종교만이 아닌 농축산업과 강우에도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식물 과학 브르크쉬 아유르베다는 높이 평가되며, 내용도 상세하고 폭넓고, 씨앗의 수집과 선발법, 발아와 파종, 심는 법, 육묘, 경작, 토양과 거름, 농업기상, 병충해 방제 등 근대 농학이 다루는 주제의 대부분을 망라하고 있다.

 

 

연구를 시작하다

 

1980년대 인도에서는 발라수브라마니안A. V. Balasubramanian 박사에 의해서 인도의 전통 과학기술을 탐구하는 ‘애국과 인민을 지향하는 과학기술(Patriotic and People Oriented Science and Technology)’ 운동이 전개되었다. 운동의 배경에는 인도 농업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크나큰 문제를 남긴 ‘녹색혁명’이 있다. 센터가 브르크쉬 아유르베다에 주목한 것도 이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86년 이후 센터는 민간에 남아 있는 속담과 전승으로부터 전통농법을 연구하고, 고전 문헌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이 일을 그다지 중요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센터에서 직접 남새밭에서 초기 실험을 시작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발라수브라마니안 박사. 

 

 

그 계기가 된 것은 신지학 협회(Theosophical Society) 첸나이 본부에 있는 50그루 이상의 망고가 망고잎 가루이에게 큰 피해를 입은 일이었다. 신지학 협회는 화학 농약을 쓰고 싶지 않아 센터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래서 센터는 브르크쉬 아유르베다에 기초하여 피해가 큰 부분은 없애고 가벼운 부분에는 님Neem과 폰그람pongam(Pongamia pinnata) 기름, 카란쟈Karanja(Derris indica)를 2.5% 섞은 비눗물을 10일 간격으로 3번 뿌리고, 다음으로 비당가Vidanga(Embelia ribes)와 울금(Kasturi manjal= Curcuma aromatica)의 씨앗 가루를 4:1로 섞어서 훈증했다. 그 결과 새로운 잎이 움트고, 그해에 꽤 괜찮은 수확을 올렸다. 이 방법이 성공한 덕분에 센터는 신용을 얻었다. 또 이와 함께 센터는 브르크쉬 아유르베다를 소개하는 논문을 발표했다. 간행물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실제로 브르크쉬 아유르베다를 시험하든지 센터에 조언을 구하는 사람도 생겼다.

 

님 나무의 꽃, 잎, 열매. 

 

 

폰그람 나무. 

 

 

카란쟈. 

 

 

현지의 주요 농작물은 벼이다. 그래서 센터는 1997년부터 발아의 개선, 병해충 내성, 자람새를 자극하는 효과를 확인하고자 논에서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에 쓰인 것은 토종 벼 품종인 쿨라카르Kullakar로 브르크쉬 아유르베다에 바탕을 두고 4가지 발아 시험이 행해졌다. ① 24시간 물에 담근다. ② 소의 오줌과 창포의 가루를 섞은 데에 24시간 담근다. ③ 24시간 우유에 담그고, 그 뒤 물에 씻어 소똥을 겉에다 바른다. ④ 24시간, 물과 섞은 소똥에 담근다. 그리고 7일 뒤 아무 처리를 하지 않은 대조 구역과 발아율 및 자람새를 비교·측정했다.

 

성장 촉진 실험도 행해졌다. 토양, 외양간두엄, 나무재를 섞어 넣은 포트에 모종을 기르고, 아주심기를 하기 전에 ① 물에 희석한 소의 오줌, ② 소의 오줌, ③ 우유와 빤짜가브야panchagavya라고 불리는 성장 촉진제에 담근다. ④ 물과 기Ghee를 섞어서 거기에 담근다. 그리고 45일 뒤에 다시 산양 고기의 추출물, 검은녹두의 가루, 그리고 참깨로 만든 성장 촉진제를 전체에 흩뿌리고 그 7일 뒤에 모종의 길이와 잎의 수를 측정했다. 또 수확한 뒤의 알곡의 무게와 병의 발생 상황도 조사했다. 이 실험으로 종자를 물에 담그면 발아율이 높아진다는 점, 성장 촉진제를 적용하면 쌀의 수확량이 거의 배나 늘어난다는 점을 알았다. 타밀-나두 농과대학이 1986년에 육종한 폰니벼(ponni rice)에 성장 촉진 물질을 쓰는 실험도 진행되었다.

 

인도에서는 성스러운 동물로 여겨지는 암소의 다섯 가지 생산물인 젖, 다히Dahi, 기Ghee, 똥, 오줌을 빤짜가브야라고 한다. 이 가운데 우리에게 생소한 다히는 인도식 요구르트이고, 기는 인도의 정제 버터이다. 위의 사진은 빤짜가브야를 상징하는 신의 모습이다.

 

 

파종하기 전에 희석한 소의 오줌에 볍씨를 담그면, 반점병이나 도열병의 발생이 훨씬 줄어든다는 점도 알았다. 볍씨를 우유에 담그면 바이러스, 특히 퉁그로tungro 바이러스병, 그라시 스턴트 바이러스grassy stunt virus에 대한 저항성이 높아진다는 점을 알았다. 가까이에 있는 논이 병에 걸렸을 때조차 이런 처리를 한 볍씨에는 내병성이 있었다.

센터는 채소에도 내병성, 병해충 방제, 식물 성장에 효과가 있는지를 조사했다. 그렇게 개발된 농법은 오크라, 아프리카 가지, 고추, 토마토의 수확량 개선과 병해충 방제에 효과가 있었고, 허브 가루를 활용한 종자 소독법도 개발되었다.

 

 

농민과 힘을 모아 연구하여 만든 농법

 

그런데 동시에 문제점도 깨달았다. 고대의 인도 문헌은 찬가, 기도, 만트라와 같은 고대의 처방전을 포함하고 있다. 브르크쉬 아유르베다의 처방전도 일반적이라 사용 비율을 알 수 없었다. 현지의 대학에서 식물학을 전공하던 학생들이 파종 전에 씨앗을 우유에 담그는 실험을 행한 적이 있다. 브르크쉬 아유르베다에 발아와 성장 촉진의 효과가 있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험한 결과는 발아율이 높아진 경우도 있지만, 그런 효과가 없는 사례도 있었다. 우유에 담근다고 해도 어느 가축의 젖인지, 얼마나 희석하는지, 담그는 시간은 어느 정도인지 전혀 몰랐다. 전통 의료의 분야에는 수많은 전문의가 있는데, 전통농업에는 도무지 실천자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농민들이 방법을 알고 있었다. 예를 들면 농민들은 피해 방제를 위하여 칼로트로피스 기간테아Calotropis gigantea가 만드는 라텍스Latex를 쓰고 있었다. 고대 문헌에는 그저 언어로만 언급되어 있는데, 농민들은 실제로 이 식물의 살충 효과를 활용하는 실용적인 방법을 알고 있었다. 푸른 잎을 포대에 담아서 물꼬에다 가라앉혀 놓으면, 잡초나 진디가 방제되었다. 또 잎을 하루 정도 물에 담그고 필터로 거른 뒤 흰개미가 창궐한 흙에 뿌리면 흰개미가 사라진다.

대개 농민들의 행동은 서양의 과학기술에 의해 분석된다. 하지만 이러한 것이 전통농법을 강화하는 데에는 이어지지 않는다. 서양 과학이 유효하다고 선언하기까지는 대체로 무시되고, 과학의 하나로 편입시키는 경우에도 전통적인 실천은 따로 격리되어 단편화되어 버린다. 이 때문에 센터는 브르크쉬 아유르베다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농민들의 실천을 이해하려고 시도했다. 농민의 실천과 고대 경전의 지혜를 결합하는 것으로 농업을 되살릴 수 있었다.

 

칼로트로피스 기간테아. 

 

 

인용문헌

 (1) K. Vijayalakshmi, First Encounters with Vrkshayurveda, Centre for Indian Knowledge Systems

 (2) Vegetable Vrkshayurveda, Centre for Indian Knowledge Systems

 (3) Successful Vrkshayurveda Experiments at CIKS, Centre for Indian Knowledge Systems

 (4) A.V. Balasubramanian, K. Vijayalakshmi, Subhashini Sridhar and S. Arumugasamy,Vrkshayurveda experiments, Linking ancient texts and farmers’ practices, COMPAS magazine,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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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 농법, 천 년을 사막에서 살아남은 방법

 

 

 

관개에서 홍수로

 

미국 아리조나주부터 멕시코의 소노라주에는 일본의 혼슈本州가 쏙 들어가 버릴 만큼 광대한 소로라 사막Sonoran Desert이 펼쳐져 있다. 코요테와 방울뱀, 붉은머리 독수리, 미국 독도마뱀 등이 서식하는데, 한낮의 기온이 40℃에 달하고 평균 강수량은 150~350㎜밖에 안 된다. 하지만 이런 가혹한 사막에서 세리족Seri, 피마족Pima, 파파고족Papago(콩의 사람들) 등의 선주민은 천 년이나 살아왔다. 게다가 파파고족은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여 누구나 먹을 만한 식량을 생산하고, 일이 끝나면 여가나 놀이, 대화를 즐길 여유가 있었다. 그 비밀은 도저히 농업이 행해질 수 없는 사막지대에서 그것을 가능케 하는 ‘농법’을 개발한 데에 있다.

 

소로라 사막.

 

 

그들은 홍수 농법, 홍수 수확, 마른 골짜기 농법, ‘악친akchin’ 농법 등 불리는 이름은 다양하지만, 강가나 마른 골짜기의 하류에서 ‘홍수 범람원 관개’라고도 할 수 있는 농법을 완성했다. 홍수 농법이란 일시적으로 넘친 홍수를 활용하고자 손으로 만든 운하나 계단밭, 구덩이, 웅덩이를 통해 범람원의 지형을 바꾸어 농업에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든 농법이다. 사막이라 해도 1년에 3~15회는 비가 내린다. 특히 5~6번은 식물이 자랄 만큼 많이 온다.

 

예를 들면 7월의 어느 날, 사막의 강바닥을 거세게 쓸며 물이 내려온다. 그때 하천에는 물이 흐르는데 그것은 일시적인 것으로, 곧바로 땅속으로 침투되든지 연못이 된다. 파파고족은 이 물을 활용했다. 먼저 물의 속도를 미루나무, 버드나무, 덤불숲이 늦춘다. 이러한 나무의 일부도 일부러 심은 것이다. 그리고는 드넓은 평탄한 대지 위에 진흙이 모인다. 폭풍우는 고지대에서 콩과 식물의 질소를 함유한 기름진 흙, 설치동물의 배설물, 기타 분해된 바위 부스러기를 실어온다. 그래서 이 홍수 뒤에 남은 진흙에다 씨앗을 뿌리고, 다시 대지가 단단해지기 전에 수확을 한다다. 어느 파파고족의 사회는 100가족으로 구성되었는데, 240㎞의 유역으로부터 폭풍우가 실어온 물, 유기물, 양분을 활용하여 355㏊의 농장을 유지했다.

 

 

올씨를 선발

 

건조 지대에서 행해진 농업의 대부분은 지하수에 의존한다. 하지만 파파고족의 전통농업을 활용한 식량 생산 전략은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아주 조금, 또 불규칙하게 얻을 수 있는 물을 이용하고자 빨리 자라는 옥수수, 호박, 콩 등의 작물을 선발했다. 불안정한 강우가 갑자기 내를 이루면, 다시 흙이 마를 때까지 2~3개월의 짧은 생육 기간에 빨리 자라는 품종이 있어야 한다. 옥수수는 50일 만에 자라고, 더위와 가뭄에 강한 덩굴강낭콩(tepary bean)도 파파고족에 의해 가장 중요한 단백질과 미네랄원이 되었다.

 

사와로 선인장.

 

 

또 파파고족은 4~9월까지는 사와로 선인장(Saguaro)과 가시배선인장의 열매나 야생 풀을 모았다. 코요테 호박(coyote gourd), 사막 아마란스, 악마의 발톱(devil’s claw) 등 半건조 상태에 알맞은 다양한 다즙 식물이나 선인장, 여러해살이풀 등을 찾아서 보호하고 수확하는 것으로 야생의 식물상도 조정해 왔다. 그리고 부족한 단백질은 큰뿔야생양, 뮬사슴, 페커리, 토끼를 잡아먹었다.

 

코요테 호박.

 

악마의 발톱.

 

 

사막의 연대 경제

 

파파고족의 관개 밭은 대개 1~1.6㏊이며, 작은 밭이 불규칙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이것도 홍수의 불규칙한 공간 분포에 대응한 것이다. 파파고족은 농가를 집약하거나, 단 1종류의 식물 자원에만 힘을 쏟거나, 단 한곳의 밭에서 많은 생산을 올리려고 하지 않았다. 모자란 수분으로도 수확량을 올릴 수 있는 씨앗은 구하더라도 토지는 구하지 않았다. 사막에서는 토지보다도 물이 한정인자이기에 이 전략에는 의미가 있다.

그렇지만 단 한 사람만의 힘으로는 홍수의 급류를 막을 수 없었다. 파파고족은 홍수의 물을 유도하기 위하여 공동의 노력을 필요로 했다. 1895년 이 체계에 주목한 백인 W. J. 맥기McGee는 어떠한 인간이나 생물이건 사막에서는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이러한 체계를 ‘연대의 경제’라 부르며 칭찬했다. 그리고 파파고족은 사막의 생태계와 수리학, 농학에 대한 상세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자연을 기술적으로 정복하려는 과학이 아닌 오히려 더욱 조심스럽게 자연과 접하고, 또 안전하게 번영할 수 있는 자급의 달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지금 파파고족의 농법은 다시 평가를 받고 있다. 예를 들면 각 식물의 단백질 종류와 종자에 따른 수확량은 근대적인 관개로 재배하는 작물보다 파파고족의 홍수 농법의 그것이 더 많았다. 현재 전통적인 파파고족의 홍수 농업은 절멸한 상태다. 하지만 미국인이 파파고족의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엉망진창으로 파괴하기 전까지는 훌륭한 성과를 올려왔다.

 

 

 

인용문헌

 (1) Worster, Donald, 1985. "Rivers of Empire: Water, and Aridity and the Growth of the American West, Pantheon Books, New York, pp. 33-35.

 (2) Miguel A Altieri and Parviz Koohafkan, Enduring Farms: Climate Change, Smallholders and Traditional Farming Communities, Third World Network,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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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을 사막에서 살아남은 방법

 

 

 

북미에는 지금도 인디언들이 살고 있다. 파파고족Papago族과 피마족Pima族이 사막에 찾아오기 전, ‘떠나간 사람들’이란 뜻의 이름을 가진 그들의 선조 호호캄족Hohokum族이 있었다.

 

호호캄족은 서기 1450년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갔는지는 지금도 수수께끼다. 최근의 고고학 자료에서 그들의 삶을 추적하여 어떻게 건조 지대에서 지속가능하게 살았는지를 밝혔다.

 

힐러 벨리에 호호캄족이 세운 구조물 유적.

 

 

고대의 거대한 관개수로

 

솔트 벨리Salt Valley와 힐러 벨리Gila Valley에서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스도와 비슷한 때부터다. 솔트강(Salt River) 기슭의 계단식 지형에 최초로 작은 마을을 이룬 사람들의 일은 조금밖에 모른다. 하지만 아마 그들의 농업은 홍수에 의존했을 것이다. 초봄에 물이 불어 범람원이 된 뒤 거기에 작물을 심었을 것이다.

 

그런데 서기 50년 호호캄족은 신기술인 관개 수로를 받아들인다. 관개농업은 멕시코의 하천 주변에서 사는 선주민들도 이미 쓰고 있었는데, 호호캄족의 관개는 규모나 기술적인 면에서 그것을 훨씬 능가했다. 가장 초기의 관개 수로는 하천 근처에 설치된 소규모의 것이라 하천이 범람하며 파괴되었다는 것도 밝혀졌다.

 

호호캄족이 만든 수로. 

 

 

하지만 서기 600~700년에 호호캄족의 기술자는 최초로 대규모 수로를 설계하고, 서기 700~900년에 걸쳐서는 대량의 물을 솔트강의 비탈진 농사땅까지 끌어오는 두 번째 수로를 건설했다. 초봄의 강물을 완전히 끌어와 농사땅까지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1930년대부터 시작된 발굴조사로 아리조나주의 챈들러Chandler 부근 힐러강(Gila River)을 따라 솔트강부터 템피Tempe, 피닉스까지 꿰맨 듯한 거미줄 같은 관개망의 존재가 밝혀져 나아갔다.

 

힐러 벨리에 호호캄족이 구축한 관개수로망.

 

 

이러한 수로의 건설은 몇 세기에 걸쳐서 사람의 어깨에 가죽이나 바구니로 진흙을 실어 날라서 이루어졌는데, 공업화 이전의 기술을 쓴 것 가운데 가장 거대하고 또 정교한 체계의 하나였다.

 

호호캄족의 기술자는 지형과 비탈, 배수성, 토양의 성질을 정확히 의식하고 있었다. 수로의 흐름에 가장 맞는 지식을 찾아 밭에 물을 보내는 일련의 기술을 개발했다. 평탄한 강기슭의 계단식 지형과 비탈면 등 특정한 지형에 대응하는 각각의 기술이 있어, 필요와 환경 특성을 배려해 수로를 건설했다. 예를 들면 하천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입구는 우두머리 기술자가 구축했는데, 웅덩이는 하천을 차지하는 것이 아닌 하천의 수위를 올려 수로에 물을 흘려 넣었다. 수로 안에는 수량을 조정하기 위하여 수문도 구축되었다. 또 중심 수로의 취수구는 종말점으로 향할수록 크기가 점점 작아졌다는 것도 연구로 판명되었다. 수로를 흐르는 수량이 지하 침투나 증발 등으로 줄어들었다. 유속이 떨어지면 흙 알갱이가 수로에 고이고, 용수로는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흐름이 너무 빠르면 흙으로 만든 수로는 침식된다. 이 균형을 고려해 수로를 작게 하여 운하를 흐르는 유속을 일정하게 유지한 것이다.

 

거대한 수로망은 하천의 남북 양쪽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규모와 범위는 터무니없이 거대했다. 수로의 대부분은 길이가 20㎞ 이상이고, 가장 긴 것은 32㎞나 되었다. 수로의 너비도 18~26m, 깊이는 약 6.1m나 되었다. 거대한 솔트강에 있는 체계 2는 아마 4000㏊ 이상을 관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용수에 따라온 양분이 풍부한 침전물은 양분을 더하는 것만이 아니라, 토양의 보수력과 양분을 붙드는 능력도 높였다. 침전물은 관개용수와 함께 밭에 흩뿌리고, 용수로를 정기적으로 청소하는 사이에 손으로 밭에 펼 수 있었다.

 

 

야생의 땅과 공생하는 생활 방식

 

하지만 관개농업은 호호캄족의 복잡한 농업 체계의 일부일 뿐이다. 호호캄족은 증가하는 인구를 먹이고, 식량·섬유·땔감·건축 자재를 얻고자, 자신들의 환경 조건에 그 토지이용이나 물을 사용하는 전략을 알맞게 짰다. 예를 들면 옥수수, 목화, 덩굴강낭콩(tepary bean) 등의 작물을 재배하는 것에 더해, 주변의 사막에서 다양한 식물을 모았다. 작물과 야생 식물의 경계는 애매모호했다. 명아주chenopod, 아마란스를 포함한 풀들도 농지에 무성히 있었다. 농지의 토양수분 상태가 개량되었기 때문인데, 아마 호호캄족이 그것을 보호하여 씨를 심거나 옮겨심었을 것이다. 이러한 식물이나 그 씨앗은 다른 작물을 수확할 수 없을 때 대체 식량원이 되었다. 관개농업에서 야생 재래종 식물을 재배·보호하는 것은 주변의 야생 영역에서 그것을 수확해야 하는 수고를 줄이고 그것을 보전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덩굴강낭콩. 

 

 다양한 덩굴강낭콩 씨앗.

 

 

호호캄족은 밭의 경계나 휴한지, 주변 농지에 출야cholla이나 가시배선인장(prickly pear cacti)도 옮겨심었다. 거의 물이 없는 농지에는 가뭄에 강한 용설란(agave)을 재배했다. 그것은 야생의 사막 식물로 식량, 섬유, 건축 자재가 되었다. 호호캄족은 가축을 기르지 않고, 대신 밭에서 소형 포유류를 사냥했다. 그것이 방목으로부터 야생지를 보호하도록 했다. 또 호호캄족은 나무의 가치도 인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농지의 나무를 보호하고, 관개지에서는 생울타리가 자라도록 했다. 그리고 위를 막은 구덩이 안에서 돌을 가열해 그 돌을 나누어 가져가 조리하는 데에 써서 땔감의 소비량을 줄여 나무를 보호했다.

 

사막에서 자라는 선인장, 출야. 

 

 지금도 요리 재료로 쓰이는 가시배선인장.

 

 

곧 호호캄족은 농민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자급 전략을 특정 환경 조건에 적합하도록 만들었다. 식물 자원을 보호하고, 미묘한 환경에 대응해 파괴적인 영향을 최소화하는 농법을 써서 그들이 의존하는 생태계에 대한 충격을 최소로 만들었다.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여 다양한 작물을 생산하고 수확하는 전략이 예측할 수 없는 환경 변화에 맞서 살아 나아가며 위험을 줄이는 기초가 되었다. 범람으로 밭이 파괴된다거나 가뭄으로 작물이 결실을 맺지 않아도 호호캄족은 다른 것을 먹을 수 있었다. 그들은 땅심을 유지하는 체계를 지켜서 천 년 이상이나 변경에서 그들의 문명을 유지했다.

 

그런데 지속가능하게 살아오던 호호캄족도 어느 시기엔가 자신들이 큰 잘못을 범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아챘다. 그들이 구축했던 집약적인 관개가 표토에 염분을 축적시켜 관개가 미치는 장소에 있는 농지에 피해를 입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호호캄족은 어느 날, 그 농업을 완전히 멈추었다. 사막에서 자연에 부담을 주지 않고 또 어떻게 지낼지를 배워야 했던 것은 그들의 자손이었다.

 

 

인용문헌

 (1) Worster, Donald, 1985. "Rivers of Empire: Water, and Aridity and the Growth of the American West, Pantheon Books, New York, pp. 33-35.

 (2) International Ag-Sieve, Hohokam Farming Systems: How to survive 1,000 years in the desert, Rodale Institute, Ancient Farming, Volume V, Number 3, 1993.

 (3) Jerry B. Howard, Hohokam Legacy: Desert Canals Pueblo Grande Museum Profiles No.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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