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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 동광원


저희는 ‘전통농법에서 배우자.’ 라는 취지로 취재를 다니고 있습니다. 여기는 무척 넓어 보이는데 지금 농사짓는 평수가 얼마나 되나요?

처음에는 저 위하고 여기하고 8천 평 됐어요. 그러다 저 위 4천 평은 나라 땅이라고 해서 다 나무 심어서 돌려주고, 몇 년 전에 1500평 팔고 지금은 한 3000평 될라나.


아직 토종종자가 많이 있나요?

-옛날에는 다 있었는데 지금은 힘에 부쳐서 많이 못 가지고 있어요.


지난 번 이곳에서 우엉을 얻었는데 토종인가요?

-아니요. 그건 사다 했지요. 옛날 우엉은 참 맛있었는데, 잎도 먹으면 맛있어요, 먹는 뿌리가 색깔이 새카매요. 속은 별로 안 검은데 겉이 까맣고, 키도 더 작아요. 지금 심는 건 샀어요. 전에는 자꾸 받아서 했는데 지금은 씨를 못 받아요. 그래서 씨를 잊어버리고. 그런데 보리, 밀은 씨나 안 잊어버리려고 조금씩 심어요. 점점 힘에 부쳐서 하지를 못해요.

옛날에는 씨앗가게를 가도 태백이라는 토종무가 있었어요. 무씨도 옛날에는 우리가 다 받아서 심었지. 무를 가을에 추수해서 대가리를 잘라서 묻어두면 싹이 나잖아요. 그걸 봄에 다시 통째로 밭에다 심으면 무장다리가 나와요. 거기서 꼬투리가 맺으면 그걸 비벼서 심어먹어요. 그렇게 받아서 쓰다가 80년도부터는 그냥 사다가 했어요.

그런데 올해는 봉지를 보니까 전부 이태리 어디서 오고, 내가 기막혀 죽겠네. 이제 씨앗까지 남의 나라 것을 쓰니 우리나라 토종은 다 없어지네. 그런데 그 무를 심어서 김치를 담아 먹어보니 맛이 없어요.


총각무도 씨를 받으셨나요?

-총각무는 내가 안 해봤는데, 아마 총각무도 무니까 그렇게 받으면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배추씨도 옛날에는 그렇게 했지요.


배추는 어떻게 하나요?

-배추씨는 옛날에 내가 전라도에 많이 살았는데, 겨우살이를 놔두면 봄에 꽃이 피잖아요. 전라도는 따뜻해서 안 죽으니까. 여기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렵죠.


고추는 어떻게 농사지으셨나요?

-고추는 재래종 씨를 내 받아서 심다가 아마 80년대부터는 안 한 것 같아. 씨를 받아서 그냥 밭에다 뿌리면 한 달 만에 매운물이 빠져야 난다고 해요. 고추씨가 맵잖아. 땅에 들어가서 매운물이 빠져야 난다고 해요. 그렇게 직파해서 먹고 살았어요.


직파를 언제 하셨나요?

-고추씨는 한 3월말 경에 한 것 같아요. 얼음 녹고 싹이 나도 안 죽을 만하면 뿌렸어요.


직파할 때 수확량은 얼마나 됐나요?

-몇 백 평 심으면 그때 여기에 한 4~50명이 살았는데 그 식구가 다 먹고 살았죠. 지금하고 비교하면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직파할 때 어떤 식으로 뿌리나요?

-밭에다 할 때 고랑치고 뿌렸죠. 뿌렸다가 배면 솎아야지. 그때는 간격이 지금처럼 드물게 안 하고 한 뼘 정도된 것 같아요. 그렇게 작게 기르면 지주는 안 해도 괜찮아요. 어쩌다 쓰러지면 산에서 막가지 해다가 해줘요. 요즘은 일만 많아지고 공이 얼마나 많이 들어요.


고추에 병은 없었나요?

-네, 직파할 때는 병을 몰랐어요. 연작해도 병을 몰랐어요.


그럼 그때 배추도 병이 없었나요?

-배추가 하도 커서 한 포기 뽑아 저울에 달면 3Kg에요. 그때는 병도 없고, 벌레도 별로 없었어요. 지금은 벌레 때문에 못해요. 우리 배추가 지금 엉망이에요. 커피찌꺼기가 좋다고 해서 해보니 조금 효과는 있대요.


고추를 직파할 때 거름을 지금처럼 많이 줬나요?

-퇴비만 했죠. 옛날에는 돈이 없으니까 비료도 못 사고 순 산에서 풀을 베어다가 거름을 만들었어요. 7~8월 되면 풀을 베어서, 식구가 많으니까 지게로 져다가, 작두로 두 치 정도로 썰어서, 인분 받아서, 재면 퇴비가 아주 시커멓게 잘 되죠. 일주일에 한 번, 많이 뒤집으면 일주일에 한 네 번씩 퇴비를 뒤집어요. 그러면 아주 거름이 몽글몽글해요. 어쩌다가 비료를 좀 구하면 약이라고 조금씩 줬는데, 지금은 유기농한다고 아무것도 안 써요.


산에서 어떤 풀을 해오나요?

-갈잎이나 풀은 무슨 풀이든지 다 베지. 저런 논둑, 밭도 다 베요. 요즘 같은 때는 잘잘하게 썰어야 완숙퇴비가 되죠. 그럼 몽글몽글해서 헛칠 정도예요. 인분이 적으면 물을 뿌리고, 몇 번 뒤집어서 새카맣게 썩으면 쟁여놨다가 가을추수하고 보리 갈 때 써요. 그렇게 해두면 내년 봄에 고추, 감자 심을 때도 전부 쓰죠.


퇴비는 그냥 노지에 만드셨나요?

-옛날에 무슨 집이 있어요. 그냥 노지에다 했지요.

그리고 논거름도 갈잎으로 했어요. 4월에 갈잎이 부드럽게 나오잖아요. 옛날에는 나무가 크지 않았어요. 그럼 봄에 못자리 해놓고는 갈잎을 갖다가 논에 깔아요. 그래가지고 쟁기질 한 번 해놨다가 심으려고 할 때 쟁기질해서 써레질 한 다음 심어요. 논 거름은 그것만 했는데 그게 무척 걸어서 그것만 해도 잘 돼요.


지금은 거름을 사다가 쓰시나요?

-지금도 만들어서 써요.

작년에 저기 만들어 놓았는데 마늘 심을 것까지는 있어요. 마늘 심을 때도 다른 사람들은 약 뿌리고 비료 주는데, 마늘은 비료주면 보관할 때 잘 썩어요. 우리 마늘은 내년까지 먹어도 안 썩어요. 우리는 마늘밭에 퇴비를 땅이 안 보이게 두둑하게 깔고 갈아서 마늘을 심는데 마늘이 단단해요.

마늘도 재래종이에요. 옛날부터 지금까지 육쪽마늘이라고 쭉 심어요.


지금 농사짓는 것 중에서 채종하는 씨앗은 얼마나 되나요?

-이제는 별로 없어요. 보리, 밀은 씨앗 보존한다고 해서 문경에 좀 보냈어요.

밭벼도 오래 됐는데, 60년도에 농촌지도소 작물계장이 귀한 씨라고 심어보라고 요만큼 가지고 왔어요. 그걸 계속 심어서 내려왔어요. 이게 찰벼인데, 아무리 다른 데서 찰벼를 가져와도 그렇게 찰지지 않아요. 그걸 안 잃어버리려고 올해도 좀 심었어요.

그러고 들깨도 쭉 심고 조, 수수도 그런데, 기장만 내가 잃어버렸어요. 지난 98년에 수해가 나서 전부 떠내려갔어요. 창고가 여기 크게 있었는데 홀랑 가버렸어요.


콩 종류는 없나요?

-콩은 옛날에 옥광을 많이 심었는데, 그것도 지도소에서 갖다 줘서 심었어요. 옥광을 계속 심다가 어디 가고 지금은 어디서 들어오는 걸 심어요.

그건 크지도 작지도 않고, 벌레도 잘 안 먹고 잘 됐어요. 옛날에는 콩을 25가마니를 했는데 콩이 얼마나 좋은지 벌레 먹은 것도 없어요. 요즘도 콩은 받아서 하는데 그게 재래종인지는 몰라요.


그럼 콩은 몇 종류나 되나요?

-지금은 힘들어서 다 없애고 메주콩만 해요. 그런데 벌레가 얼마나 먹는지 몰라. 작년에도 한 2가마니 나왔는데 겨우 서 말만 메주해서 장 담갔죠.

옛날에는 콩나물콩, 서리태 같은 것도 다 심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메주콩만 간장, 된장은 먹어야 하니까 해요.


쟁기질은 어떻게 하셨나요?

-소 기르기 전에는 손으로 하다가, 한 60년도부터 93년도까지는 소로 했어요. 저 위에 4천평, 아래도 4천평을 다 손으로 파다가 소를 기르고 나서는 남반들이 와서 쟁기질을 했어요.


지금은 그냥 기계로 하시나요?

-90년도부터는 남원에서 불러다 쟁기질을 하다가 식구들도 점점 줄고, 일도 힘이 없으니 못해서 자꾸 부르려니 번거로워서 끊고, 그냥 풀밭에서 야채만 길러서 심어먹자고 해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주말 농장을 하게 되면서 관리기 작은 걸 하나 샀어요. 그래서 왔다 갔다 하는 분들이 다 갈아주죠.


소쟁기와 관리기를 비교하면 농사짓기가 어떤가요?

-쟁기질 할 때는 힘든데, 관리기로 하니까 일하기는 쉽죠. 그래도 쟁기질을 할 때가 더 좋기는 한 것 같아요. 관리기는 대신 곱게 되니까 심기는 수월해요.


탈곡은 다 손으로 하시나요?

-손으로 할 것은 손으로 하고, 밭벼는 탈곡기계가 있어요. 옛날에는 발로 돌렸는데 지금은  발로 하던 거에 모터를 달았어요.


여기서 사신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올 해로 만 48년이네요. 여기서 처음에는 초대 원장님하고 기관 어머님하고, 산속에 셋이 들어가서 풀막을 지어놓고 살았어요.


동광원에 대해서 듣고 싶은데, 왜 농사를 지으면서 사시나요?

-수도정신을 가지려면 첫째, 자기가 자립정신을 가져야 해요. 자기 먹을 것, 입을 것을 남한테 미루지 말고 자기가 해야죠. 종교는 희생의 종교잖아요. 자기희생이 없이는 이렇게 살 수가 없어요. 또 이웃을 내 몸같이 여기라고 했는데, 일평생을 살아도 힘들어요. 이웃을 내 몸같이 여기고, 남을 섬기라고 했는데 인간이라 그러지를 못하고 살아요. 그러니까 우리 이현필 선생님이, 당신이 못 먹고 못 입어도 다른 사람은 먹게 하셨어요. 그런 선생님 밑에서 살았는데 사람이 못 되서 부끄럽죠. 그런 정신으로 이곳을 세웠어요. 가난하고 남만 사랑하고 남을 위해서 사셨어요.

농사는 자립정신을 세워주시려고 하신 거죠. 선생님은 항상 씨앗 하나라도 아끼고, 연장을 쓰고 아무데나 던지는 건 자기를 던지는 것하고 같다고 하셨어요. 지금은 농사지으면서 다 던지고 다니는데 그런 것부터 정리를 해야 돼요. 그런 걸 내 몸같이 아끼는 정신이 작은 것부터 실천을 해야 해요. 작은 걸 실천하기가 더 어려워요. 그런 걸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산다는 것이 보통 정신이 아니에요.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요?

-칠십 다섯이요. 옛날 같으면 저 세상 사람이죠.


마지막으로 가르쳐주실 것은 없나요?

-글쎄요. 사람이 전통으로 농사를 지으려면 정신이 똑바로 서야 해요. 식물도 사랑으로 가꿔야지 그냥 하면 뭐가 됩니까. 못 지어도 꾸준하게 사랑으로 가꿔야지.

우리 선생님이 농사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어야 한다고도 하셨어요. 땅 한 평이라도 내가 관심을 가지고 가꾸고 해야지, 뭐든 내가 못 할 바에는 안 하는 게 나아요.




안산 부곡동


‘전통농업에서 배우자’고 해서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옛날 농사얘기를 듣고 있습니다. 오늘은 농사 일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데, 먼저 채종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채종을 하기는 했는데, 그랬다고 해서 집에서 다 종자를 받은 건 아니야. 더러 사서 하는 경우도 있고, 김장 같은 건 받는 사람만 받고 대부분 사서 해요.

무하고 배추는 씨를 받으려면 가을에 심은 것을 뿌리 채로 놔둬. 배추 같은 경우는 바싹 끊지 말고 잎만 따. 어느 정도 순이 남도록 해야 싹이 나니까. 그럼 위는 먹고 나머지 뿌리는 땅에 박힌 채로 놔뒀다가 보온을 해줘. 짚 같은 걸 덮어서 얼지 않게 해놨다가 봄에 날이 따뜻해지면 벗겨줘요. 그럼 제일 먼저 움이 나와.


짚 대신 요즘 쓰는 비닐을 덮어도 되나요?

-옛날에는 비닐 같은 게 없었으니까 그렇지, 비닐을 덮으면 더 빨리 싹이 나지. 그런데 싹이 날 때 짚을 너무 수북하게 덮어두면 싹이 부러질 수 있어. 그 싹을 장다리라고 해요. 거기서 꽃이 피어서 씨가 맺는 거야. 그것을 5월초 정도에 완전히 베어서 털면 씨가 나와.

이건 어느 배추든지 다 되는 거야. 조선배추도 되고, 호배추도 되는 거야. 결구되는 걸 옛날에는 호배추라고 했지. 조선배추는 통이 작아.


무는 어떻게 채종하나요?

-똑같은 방법으로 해요. 무는 자를 필요 없이 놔두면 되지. 그것도 짚을 푹 덮어주니까. 그런데 무가 추위에 약해서 더 까다롭지. 그런데 무는 봄에 일찍 심어도 여름에 씨가 생겨요. 배추도 이렇게 할 수 있는데 겨울을 안 넘기면 잘 안 크더라고. 무는 괜찮아요.


고추는 씨를 어떻게 받나요?

-고추는 그냥 심은 걸로 받는데, 보통 끝물은 씨로 사용하지 않고 처음에 맏물 좋은 것 중에 가장 잘 생긴 놈을 골라서 받고, 그게 없을 경우에는 중간물까지도 씨를 받아요. 끝물은 절대 안 써.


고추 심을 때 직파는 어떻게 하셨나요?

-지금은 온상에서 키우니 키가 크고 한 자 이상 벌려 심어서 바람에 잘 넘어가고 하는데, 지금처럼 비닐을 쓴다거나 하지도 않고 옛날에는 간격이 더 좁았어요. 대신 지주가 없어. 서로서로 의지하면서 자랐지. 그냥 나무도 크지 않으니까 바람에 넘어가지도 않고. 수확량은 더 적었지.


수확량은 얼마나 적었나요?

-지금보다 한 6~70%정도 밖에 안 나는 것 같아.


그럼 심을 때는 줄뿌림을 했나요?

-뿌릴 때 고추를 심을 수 있는 간격 정도로 골을 타고, 골에다가 심는 경우보다 두둑에다 많이 심었는데 그거야 밭에 따라서 밭이 습하면 두둑에 심고 건하면 골에다 심는 거지. 골에다 심을 때는 골을 판판하게 고르고 재를 뿌린 다음 씨를 흩뿌려.


재는 왜 뿌렸나요?

-감자 심을 때도 재를 많이 쓰고, 고추에도 많이 쓰지. 그런데 그냥 재가 아니라 오줌하고 섞은 재야. 옛날에는 오줌독에다 인분하고 같이 썩혀서 재에다가 재면 거름이 기가 막히게 좋아요. 오줌이 있다고 해서 푹 젖지 않아요. 그렇게 질은 게 아니야. 수분은 증발하고 거름 성분만 남아. 그렇게 하면 아주 농사가 잘 되지.


병해충은 없었나요?

-벌레가 더러 먹는 건 있는데 지금마냥 이런 건 없었어. 그때는 농약도 없으니까 뿌리지도 않았는데도 고추는 괜찮았어. 더러 이상한 게 나오긴 하지만 지금처럼 버릴 정도는 아니야. 탄저병 같은 건 있지도 않았어.


-희나리 진다는 것은 어떤 걸 말하나요?

희나리라는 것은 고추가 자라다가 벌레가 구멍을 뚫어놓으면 대부분 희나리가 되고, 그리고 보통 붉다가 말은 것, 병이 없더라도 제대로 여물어서 붉은 것이 아니라 약간 붉으려고 할 때 서리가 온다던지 하면 대를 뽑아놨다가 따는 걸 몰아서 희나리라고 그래. 그래도 귀하니까 그걸 모아서 빻아서 썼지. 그걸 찌개 하는데 넣어먹거나 아니면 뒀다가 봄에 들에 나는 나물 종류를 뜯어서 물김치 담글 때 넣으면, 그 고추가 맵긴 또 맵더라고 그래 얼큰하고 시원한 맛이 나요. 그래서 노인네들이 하나 안 버려요.


고추에 거름은 얼마나 했나요?

-그렇게 엄청 집어넣지 않더라고. 오히려 지금이 더 많이 주는 것 같아. 소똥도 뭐 옛날은 풀 먹고 싼 똥이지만 지금은 사료를 먹어서 그런지 더 독해. 옛날에는 소똥거름이 그다지 거름이 되거나 독하지 않아요. 오히려 돼지거름이 좋았어요.


옛날에는 돼지 키우는 집이 많지 않았는데요?

-아니지. 시골에서는 집집마다 거의 있던 것이 돼지야. 일부러 거름도 밟히고 설이나 명절 되면 잡아서 먹는 거야. 소고기가 비싸서 못 먹는 집은 돼지고기라도 먹었지. 그리고 먹는 것보다 기르면 목외돈 쓰는 맛에 키우지. 시골에 뭐 돈이 있어.


그럼 돼지 먹이는 무엇을 줬나요?

-먹이는 쌀뜨물을 받아서 겨를 한 움큼 같이 던져주면 그거 먹고 사는 거야. 그래도 살찌고 자라는 거 보면 우습지. 어렸을 때 ‘저 큰 돼지가 어떻게 저런 겨 한 움큼만 먹고 사나?’ 했지. 쌀겨도 있고, 밀기울도 주고, 또 호박․고구마 같은 건 속은 사람이 먹고 돼지는 그 껍질 같은 것, 참외껍질, 오이껍질 같은 걸 하나도 안 버리고 줘요.

돼지가 풀도 먹어요. 아주 풀만 먹는 건 아니지만 풀도 좋아해. 그리고 돼지한테 일부러 흙도 먹이고, 숯가루도 먹이고 또 해변에 가면 굴, 조개껍질을 주워서 빻아 먹이고 했어. 그래야 뼈가 튼튼해서 새끼도 잘 낳고, 새끼를 낳으면 돼지는 뼈가 잘 부러져요.

돼지가 둔해서 새끼를 잘 깔아 죽여서 처음에는 사람이 새끼를 관리해야 돼. 어미돼지는 좁은 공간에서 깔아 죽이는 것도 몰라. 그러니까 아주 어려서 한 일주일 동안은 젖먹일 때만 새끼를 들여보내 주는 거야. 어미가 젖을 먹이려면 드러눕는데, 그럴 때 새끼를 좁은 구멍으로 넣어줬다가 다 먹으면 다시 몰아내. 처음에는 그렇게 줬다 뺐었다 하는 거야. 그래서 새끼 소리가 밖에서 나면 성질 급한 돼지는 뛰어오르다가 다리가 잘 부러져. 그래서 굴껍질을 먹이는 거야.


돼지는 청소용이면서 거름용이네요.

-그래서 돼지는 일부러 거름도 밟고 목외돈 쓰고 그러는 맛에 키우는 거야. 돼지새끼가 옛날에 2~3천원 하면, 송아지는 보통 5만원 했지.


돼지로 거름 만드는 것은 어떻게 하나요?

-돼지한테 깃을 넣어주잖아. 그럼 거기서 오줌도 싸고 똥도 싸고 밟는다고, 자꾸 그러니까 거름이 떠요. 그렇게 깃을 넣어 주다보면 자꾸 높아지잖아. 그러면 돼지를 몰아내놓고 싹 치운 다음 또 깔아주는 거야. 그럼 자연히 거름이 생기지. 또 깃이 없으면 풀을 베다 주기도 해. 그런데 긴 볏짚을 넣으면 호구로 뜰 때 볏짚이 삭지 않았으면 뜨기 힘들잖아. 그래서 썰어 넣어주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넣어주면 더 좋지.

그래서 집집마다 농사는 다 하니까 돼지를 키웠어. 소농, 중농, 대농이라면 대농인 사람들은 농사가 많고 그런 사람들은 대개 잘 사니까 소가 한 마리씩 다 있어요. 그런데 5마지기 정도 하는 사람들도 볏짚은 있으니까 돼지는 다 키웠어.

 

소 없는 사람들은 쟁기질을 빌려서 했나요?

-그렇지. 소 한 마리 얻어오면 일로 갚아주지. 그런데 소 한 마리가 일해주면 친한 사이에는 하루 가서 일하는 경우도 있는데, 보통 둘이 가서 일해 줬어. 거저 해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소 쟁기질은 어떻게 하나요?

-쟁기질은 먼저 소에다 쟁기를 걸어야 하는데, 그것도 아무나 못 걸지. 그걸 걸려면 먼저 목에 멍에를 걸고, 꽉 조이는 게 있어요. 그걸 매야 멍에가 안 빠져. 그리고 뒤로 줄이 있는데 그걸 매서 쟁기에 걸어.

쟁기가 예전에는 나무로 만들었지. 지금은 쇠로 만든 쟁기가 나왔지만 똑같은 방법이지. 다만 다른 건, 나무로 깎아서 보습이라는 게 있어서 그걸 끼워서 쓰는 거야. 그러다 날이 다 닳으면 새로 갈아 끼고.

그런데 쟁기질은 조정을 잘 해야 해. 쟁기를 눌러주면 얕게 갈리고, 들면 깊이 갈리는 거야. 그걸로 조정하는 거야. 돌 때는 소를 ‘워’ 하면 서, 그때 쟁기날을 살짝 얕게 갈다가 들면 빠진다고. 그럼 다시 소를 모는데 끈이 달려 있어. 그걸로 그 자리에서 방향만 바꾸면 되는 거야.


쟁기밥은 한쪽으로 넘어가지요?

-그렇지. 쟁기밥은 왼쪽으로 넘어가지. 흙밥을 떠서 넘어가도록 볏을 만들어 놨지. 그 자체가 흙을 감아서 넘어가게 만들어진 거야.


경사진 곳을 쟁기질 할 때는 쟁기밥이 낮은 쪽으로 넘어가게 한다고 하던데요?

-그건 상관없어요. 이런 경우는 있어. 논이고 밭이고 가운데를 째서(나눠서) 이쪽은 여기서부터 갈고, 저쪽은 반대편에서부터 가는 방법도 있어.

그리고 경사진 곳에서는 올라갈 때는 자연스럽게 잘 갈리는데, 내려올 때는 잘 안 갈려. 내려올 때는 쟁기를 꼽기가 힘들거든 그래서 올라갈 때는 그대로 올라가고 내려올 때는 빙 돌아 내려와서 다시 올라가. 어쨌든 소 모는 사람은 밭을 어떻게 만들어 달라고 하면 다 알아서 해요.

길게 심는 보리 같은 경우는 한 번씩만 갈고, 밭을 다 가는 것은 싹 간다고 해. 두둑을 넓게 만들려면 서너 번 넘기면 될거야. 수수나 콩을 그루갈 때는 보통 양쪽에서 한번 씩만 넘기면 한 두둑은 나와.


소 모는 방법은 어떤가요?

-지역마다 다 조금씩 차이가 나겠지만 설 때는 ‘워’, 방향 바꿀 때는 툭툭 치면서 ‘어뎌어뎌어뎌’, 소는 말하고 달리 끌어서 조정하지 않고 끈이 오른쪽에 있어서 보통 왼쪽으로만 돌아. 곧장 갈 때는 ‘이랴’.


소한테 쟁기질 훈련은 어떻게 시키나요?

-일은 보통 코뚜레를 뚫은 어스럭송아지를 가르치는데 끌개라고 있어요. 보통 썰매 모양으로 만들어. 잘 안 닳는 통나무를 썰매발처럼 놓고, 못 같은 걸로 단단하게 한 다음에 돌 같은 무거운 걸 올려놔. 그 다음 소에다가 멍에를 걸머지고 맨 다음 그걸 끌고 다니게 하지. 이건 힘만 기르는 게 아니라 말귀를 듣게 하는 거야. 어스럭송아지를 가르치려니까 이게 말을 잘 안 듣고 왜머리 친다 이거야. 그러니까 천방지축이지.

그렇게 일을 가르쳐서 말을 잘 듣는 놈은 쟁기를 한 번 매서 시범적으로 빈 밭에 들어가서 갈아본다고. 몇 번 해봐서 쓸 만하면 어설퍼도 자꾸 쓰다보면 일을 배우지. 그런데 수소보다 암소가 일을 더 잘해. 수소는 잘못하면 받아버려서 부려먹기가 힘들어. 사람도 눈이 작으면 독하다고 하듯이 눈이 작은 소가 독해. 눈이 큰 소는 안 받아. 그래서 수소는 잘 안 쓰고, 보통 새끼 낳더라도 암소를 쓰지.


소먹이는 무엇을 주나요?

-풀도 먹이고, 볏짚도 넣어주지. 그냥 먹이는 것을 생식이라고 하고, 불 때서 쑤어주는 걸 화식이라고 하지 아마. 쒀줄 때 쌀겨를 물바가지로 큰 소는 하나, 작은 소는 반 정도 넣어서 쇠물주걱으로 막 휘젓고 뒤집다보면 짚이 여물이 완전히 익은 게 나와. 그때 콩깍지를 넣어줘. 그걸 소가 잘 먹어. 또 그걸 먹어야 소가 살이 찐다는 거야. 그거 먹는 소는 아주 잘 먹는 소야. 또 벌레 먹은 콩 같은 것도 하나 안 버리고 같이 넣어줘. 콩대는 지가 먹을 때도 골라내지만 사람이 골라줘.


아이들한테 소를 데리고 다니면서 풀을 먹이게 하는 건 왜 그런가요?

-농촌은 바쁘니까 매일 꼴지게만 매고 다닐 수 없잖아. 소를 풀밭에 메어두면 지가 알아서 뜯어먹어요. 줄이 있으면 빙 돌면서 거기 풀을 다 뜯어먹어. 그러면 다른데다 메어두면 또 뜯어먹어요. 하루에 그 정도만 먹이면 돼.

암소 같은 경우는 젖먹이가 옆에 앉아 놀아도 절대 밟지를 않아. 순한 소는 애들이 끌고 다녀도 말을 들어요. 그리고 혼자 집에 찾아오는 소들도 있어요. 소낙비가 가끔 올 경우가 있는데, 자기가 못 참으면 알아서 줄을 끊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어요.


소로는 거름을 어떻게 만드나요?

-외양간에도 깃을 넣어주지. 소가 돼지보다 더 보송보송해야 돼. 그래서 소가 더 신사라고. 돼지는 깃이 모자라서 질척질척하게 키우는 집도 있어.


소나 돼지 말고 닭은 어떤 목적으로 키웠나요?

-닭은 보통 계란을 먹으려고 키웠지. 그리고 나중에 고기도 먹고. 지금은 닭을 기계로 부화시키는데 옛날에는 자연부화를 시켜서 닭이 더 건강하고 맛도 좋았어. 또 놓아서 먹이니까 풀도 먹고 돌도 먹어서 더 건강했지. 그렇게 키우니까 알도 껍질이 더 단단한데 지금 양계닭 계란은 툭하면 깨지잖아.


그럼 닭은 집마다 몇 마리나 키웠나요?

-아무리 없어도 대여섯 마리는 있었지. 그래서 옛날에는 배추 심으면 각자 울타리를 쳤어요. 집집마다 닭이 있으니 먹는다고 뭐라 할 수도 없잖아.

울타리는 산에 있는 싸리 말고 왜싸리라고 그걸 베다가 울타리를 쳤지. 옛날에는 뭐든지 귀해서 그물도 없어서 수수단으로 치는 경우도 있고, 닭장도 특별히 집을 지어주는 것보다 외양간 위에다가 횃대만 두 줄 내지 세 줄만 놔주는 거야. 그러면 거기서 닭이 잔다고. 둥우리도 그 위에다 놔두면 지가 올라가서 알 낳고 신호를 해주고 내려가. 알을 낳으면 꼬꼬댁 꼭꼭꼬 몇 번 외친다고. 알 낳았을 때는 암탉이 울고, 날이 밝을 때는 수탉이 울어.


알은 보통 얼마에 한 번씩 낳나요?

-닭이 7~8개월 정도 지나면 알을 낳기 시작하는데, 잘 낳는 닭은 매일 낳다가 사흘 정도에 한 번씩 거르고, 보통은 이틀에 한 번은 낳아. 그런데 알은 이틀에 한 번 낳는 게 더 맛있지.


토끼도 키우셨다고 들었는데 토끼는 어떻게 키우나요?

-토끼는 습하면 잘 죽어요. 그래서 토끼장은 보통 1m이상 올라가야 좋지. 토끼를 풀어놓으면 돌아다니다가 마루 구멍에 들어가서 죽어요. 거기가 습하거든.

토끼는 씀바귀를 좋아하는데 그걸 먹이면 눈이 더 새빨개져요. 독초는 자기가 알아서 안 먹어요.


겨울에는 뭘 먹이나요?

-겨울에 지금은 사료가 있으니까 먹이지만 옛날에는 콩깍지, 엿밥 그런 걸 먹여요. 시래기가 많으면 그걸 주는 사람도 있고. 쇠죽 쑬 때 여물을 좀 주는 사람도 있고. 나 같은 경우는 산에 가면 자귀나무라고 있어요. 그걸 토끼가 좋아해서 나무도 갉아먹는데 그걸 잘라다가 넣어주기도 하고 그랬어요.


옛날에 귀마개를 토끼로 만들었는데 어떻게 만드나요?

-그걸 토끼 가죽으로 만드는 법이 있어요. 토끼 가죽을 벗겨서 그냥 말리면 단단해서 못 써요. 그 속에 기름이 굳어버려서 단단해져요.

그래서 가죽을 벗기면 그 안에 쌀겨를 하나 가득 채워서 묶어서 몇 개월 매달아둬요. 그러면 기름이 쏙 빠져. 그럼 가죽이 그대로 남으면서 부들부들해서 좋아요. 그럼 그걸로 귀마개도 만들고, 토시도 만들고, 목도리도 하고, 발에다 넣으면 따뜻하고 좋지.


옛날 농사방법 중에서 되살려서 쓰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있으신가요?

-농약 안 쓰고, 비료 덜 쓰고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다 같이 농약을 안 써야 하는데 일부는 쓰고, 일부는 안 쓰고 하는 게 문제지요. 다 같이 농약을 안 쓰면 몇 년간은 피해를 보더라도 되살아나겠지요.

또 농약을 안 쓰고 농사짓는 방법을 자연에서 방법을 찾는 걸 사람이 연구해야 돼요. 내가 생각할 때는 나뭇잎 중에서 벌레가 안 먹는 것이 있어요. 그걸 이용하면 되지 않을까 해요. 벌레가 안 먹는 나뭇잎 중에 중풍에도 쓰는 약인데 두충나무가 있어요. 또 소태나무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과수원 중간에 소태나무를 심어서 벌레가 덜 붙는다고 해요. 그러니까 그런 것을 이용하면 분명히 효과가 있을 거라고 봐요.

또 밤나무는 보를 만들 때 쓰면 그곳을 거쳐 내려오는 물은 논에 좋다고 했어요. 벌레가 덜 생기게 한다고 해요. 그래서 밤나무는 숯은 화롯불에는 담지 않았어요. 또 옛날에 못자리를 하면 이끼 같은 게 생겨서 벼 싹이 자라는 걸 방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옛날 어른들이 밤나무 회초리를 꽂았는데 그러면 그게 싹없어져요. 이런 방법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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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 구술취재팀은 지난 6월 20일 강원도 평창 약물산 토종농장에서 서리태, 쥐눈이콩, 찰기장 등 잡곡류 80종류를 재배하고 있는 이기철(57세) 선생을 만났다. 이 분은 평창에서 태어나 농사를 짓다가 5년 정도 사업을 하기 위해 상경, 80년부터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 농사를 짓고 있다. 농사를 짓기 시작했을 때부터 토종종자 보존과 교육․홍보에 뜻을 두고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97년에 농어업인대상을 받았고 신지식농업인상도 받았으며 한국농업전문학교 현장교수도 역임했다. 주요 생산품은 찰기장, 찰현미, 찹쌀, 흑미, 자광미, 오리쌀, 맛쌀, 찰옥수수, 서리태, 붉은팥, 쥐눈이콩, 메주콩 등이다.




- 먼저 반갑습니다. 저희는 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 구술취재팀입니다.

= 멀리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네요.


- 전통농법 취재에 선생님을 추천받았습니다. 토종종자를 많이 가지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 예, 몇 가지 있어요. 지난해에는 서산에 수수를 공급했지요. 수수 중에 키가 작은 종자가 있는데 그것이 가을이 되니 빨갛게 익으면서 새도 오고 해서 보기 좋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올해는 청주에도 수수를 공급해주고, 문경에는 조를 공급했어요.

 수수가 종자만 해도 80~90 여 가지가 있어요. 빗자루 만드는 수수도 따로 있구요. 빗자루 만드는 수수는 모양은 좋은데 수확은 별로래요. 어떤 종자는 달리면서 꼬부라져요.


- 재미난 것이 많네요. 그럼 수확은 어떻게 합니까?

= 이게 꼬부라지면서 거리가 생겨요. 그걸 베서 걸어요. 그리고 일반 먹는 건 장목수수라고 해서 중국에도 있는데 이게 맛이 제일 좋아요. 그런데 키가 커서 바람에 넘어지고 해서 그걸 많이 안 심고, 현재 우리가 먹는 것은 단목수수를 많이 심어요.


- 단목수수는 키가 얼마나 작습니까?

= 한 키가 안 돼요.

 그리고 호랑당콩 이라고 해서 중국에서 나오는 알록달록 한 것이 있어요. 이거를 울타리 에 쭉 심어요. 콩이 크고, 꽃이 빨간데 껍질이 호랑이처럼 알록달록 하다고 해서 호랑당콩 이라고 해요.

 울타리콩 이라는 건 과거에 울타리에 넝쿨이 뻗어 올라가는 걸 몽땅 울타리콩 이라고 했어요. 그 중에 알록알록 한 것도 있고, 빨간 것도 있고, 자주색도 있고, 약간 긴 것도 있고, 한 30 여 가지 있는데 여러 가지가 있죠. 지금 까치콩 같은 것은 우리나라에서 없어졌어요. 아주 옛날부터 있던 것인데 그게 소득이 안 돼서 그렇죠.


- 왜 그런가요. 소출이 적은가요?

= 소출이 적은 것보다 한 사람이 몇 만 평해서 쫙 해야지 그건 울타리에서 하나 영글면 따고 하나 영글면 따고 그래서 안 하죠. 울타리콩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콩은 영글면 껍칠 채로 따요. 그래서 껍질을 까면 심이 나오는데 그걸 마늘쫑처럼 그냥 기름에 볶아서 양념해 가지고 껍질 채로 먹어요. 그걸 까치콩이라고 해요.

 그 다음에 조개콩 이라고 해서 조개처럼 납작해가지고 조개가 혓바닥 내미는 것처럼 나오는 것이 있어요. 그게 조개콩 이라고 하는데 그것도 껍질 채로 먹을 수 있어서 여러 가지 요리가 나와요.


- 지금도 재배하나요?

= 재배하는데 외국에 가도 찾아보기 어려워요. 국내와 중국에만 있는 것 같아요. 조개콩은 자주색이 나고 모양도 예쁜데 한군데에 50 ~ 60개가 열려요. 달린 다음 한꺼번에 여무는데 꽃도 자주색, 줄기도 자주색, 열매도 자주색, 알맹이도 자주색인데 관상용으로 좋죠. 하나를 심으면 담 하나를 다 덮을 정도로 왕성해요. 그런데 이 지역에서는 잘 여물지가 않고 계속 잎사귀만 뻗어가고 꽃만 피지 여무는 시기가 늦어요. 그래 그게 작년까지 있었는데 작년에 열매를 늦어서 못 따서 없어졌어요.


- 그럼 종자은행에도 없나요?

= 네. 그래서 그거를 중국이나 그 쪽에 가면 있지 않을까 해요. 옛날에도 이 지역 1개 군에 한 두 군데 있을까 말까 했어요.


- 다른 지방에도 없나요?

= 다른 지방은 다녀보지 않아서 모르죠. 외국에는 없어요.


- 외국에는 자주 다니시나요?

= 일 년에 두 달 정도는 종자도 구하고, 일도 볼 겸 나가죠.


- 그럼 일 년에 한 번씩 선생님 찾아뵈면 좋은 얘기 듣겠네요. 얘기를 들으니 할아버님 영향을 많이 받으신 것 같은데, 할아버님 얘기 좀 해주실 수 있나요?

= 할아버지는 이조 말에 벼슬하다가 일정 때 수배가 내려서 진안 용담군에 숨어 사시다가 만주로 가셔서 독립운동 하면서 한약방을 차리셨어요. 약방을 차리시니까 거기가 독립군 운동 본거지가 된 거래요. 그러다가 해방이 돼서 들어오시니까 땅이 있나 집이 있나 해먹을게 없어서 떠돌이 한의원으로 전국을 다니시다가 여기서 자리 잡은 거래요. 여기 오시니까 그때부터 전국에서 손님이 오는 거래요. 저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심부름을 했어요. 약을 만들어 봉투에 담고, 약을 썰으라면 썰고, 산에 약을 캐러 가시면 따라가서 약을 캤지요. 할아버지께서는 평생을 그렇게 사셨어요.

 할아버지께서 뭐라고 하셨냐 하면 곡식으로 약이 되는게, 예를 들어서 수수는 칼슘이 풍부하기 때문에 옛날에 애기 백일 때 수수떡을 해주잖아요. 돌 때도 해주고. 붉은 색은 액을 물리친다고 해서 그렇다는데 그게 수수는 칼슘이 풍부해서 애들 뼈가 자라는데 최고 필수 보약인 원리래요. 애들 이유식에 반드시 수수가 들어가잖아요. 그래서 수수는 그런 식으로 작용한다는 걸 어렸을 때부터 안 거죠.

 그 다음 검은색은 노화를 방지하고, 붉은 색은 또 심장을 건강하게 한다고 하시고. 그러다 보니까 할아버지가 설명하신 대로 심은 거지요. 그렇게 조금조금씩 심어가지고 온 몸은 힘들어도, 도시민들 견학오고 이런 식으로 운영했어요. 지금은 집사람도 나가있고 혼자 운영하기 힘들어서 회원제로 몇몇 나눠주고 해요.


- 그럼 회원들이 종자 보존회 식으로 있는 건가요?

= 예, 우리가 봄에 종자를 나눠줘서 심고 가을에 수매를 해요. 그래서 그거를 가공하고 포장해서 판매를 해요. 이건 하나의 보존차원에서 하기 때문에 큰 영리가 안 되니까 국가에서 지원해주고 지자체에서 지원을 해줘요.


- 현재 농장에 주력이 있고 보조가 있겠지만 몇 종류나 하시나요?

= 곡식류는 한 100여 가지 하고, 풀․약초류를 100여 가지 하고, 나무를 한 300여 가지 해요. 한 두 그루만 심어서 보존하는 거래요.

 그리고 귀리 있잖아요. 현재 식용 귀리는 남한에서 재배를 안 하고 있어요. 사료용만 재배하지.


- 식용과 사료용이 종자가 다른가요?

= 다르죠. 식용 귀리는 이북 함경도 쪽에 있을 거예요.


- 운영하고 계신 농장 소개 좀 부탁드립니다.

= 제가 한 4만평 정도 농사를 짓고, 임야는 7만평 정도 됩니다. 주 작목은 흑미, 자황미 이고, 보라밸리 라는 감자와 야콘, 옥수수 농사를 짓고 있죠.


- 보라밸리는 일반 감자와 특별한 차이점이 있나요?

=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좋다는데 저희는 녹즙용으로 써요. 자주감자로 개량한 건데 자주감자랑 다르게 속까지 보라색 이래요.


- 보라밸리는 특징이 무엇인가요? 수확이 특별히 많은가요?

= 수확은 그렇게 많지 않아요.


- 옥수수는 어떤 종류가 있나요?

= 옛날 재래 찰옥수수 하고, 두메 찰이라고 해서 강원도에서 개발한 찰옥 2호가 있고, 그 다음에 알록알록한 것이 있어요. 보라색 나고 빨간색 나고 하얀색이 섞인 게 있고, 그 다음에 빨간색이 있어요.


- 이 옥수수들은 선생님이 다 개량하신건가요, 아니면 원래 있는 종자인가요?

= 아니요. 옥수수는 교배를 잘 이뤄서 돌연변이가 나와요. 자기가 원하는 걸 다 만들 수 있어요.


- 옥수수 종자는 어떻게 유지합니까?

= 어떻게 하냐면 예전에는 가리왕산에 차를 가지고 올라갔어요. 봄에 콩이나 옥수수를 가지고 깊숙한 곳에 가서 개간해서 풀 뽑고, 가지고 간 헌비닐 덮어 놓고 옥수수를 심는다고, 그럼 가을에 가면 짐승이 따먹고 사람이 따먹고 해도 종자보존이 되는거죠. 지금도 그렇게 하는데 원체 입산을 못하게 하니까 격리를 못해요. 그래서 봄에 산나물 뜯으러 가서 하는 경우도 있고 허가를 받아서 가는 경우도 있고 해요.

 그리고 자광미도 돌연변이래요. 이게 종자가 개량돼서 나온 게 아니고 아무 논이나 외국도 마찬가지고 자생을 해요. 이게 원원종이거든. 벼를 베거나 차를 끌고 다니다 보면 똑같은 벼 중에 이삭이 크다든지 색깔이 다르면 그걸 채취를 해요. 그걸 가지고 와서 스티로폼 상자에 재배를 해요. 한 이삼년 재배해서 종자가 고정이 되면 논에다 심는 거죠. 이걸 좀 더 깎으면 흑미와 마찬가지로 흰쌀이 나와요.


- 기장은 어떻게 농사를 지으십니까?

= 기장은 모종으로 해도 잘 살고 농사짓기도 쉬운데, 가장 어려운 게 새가 잘 먹어요. 새를 쫓을 수 있는 방법만 있으면 기장은 성공해요. 그래서 우리 같은 경우는 만 평 정도를 하늘에 1미터 간격으로 줄을 매가지고 깡통을 달아서 사람이 지키죠. 허수아비도 필요 없고 총을 쏴도 필요 없고 다 필요 없어요. 직접 쫓아도 사람이 와서 쫓을 때 뿐 이래요. 콩새라고 해서 요래 작은 그 새가 기장을 전문으로 먹는데 덤불 밑에 살아요. 옛날에는 찔레 열매를 먹고 살았는데 요즘은 찔레 열매가 얼마 없잖아요. 이 새가 없어졌는데 기장만 심으면 어디서 나타나는지 몇 백리 밖에서 날아와요. 이 새가 쫙 날아오면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날아와요. 그래서 못 심어요.


- 기장하고 조는 어떻게 다릅니까?

= 기장은 이삭이 벼이삭 같은데 조는 완전히 틀리죠. 색깔은 둘이 똑같은데, 알이 기장이 좀 굵어요.


- 깡통을 매달면 새피해는 어느 정도 막나요?

= 그래도 한 50% 정도래요.

 기장이 그렇고 그 다음에 곡식 중에 메조가 지금은 귀해요. 왜 그런가 하면 찰진 것은 소화도 잘 되고 해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데 메곡식은 안 그래요. 그런데 소화가 잘 된다는 건 빨리 분해된다는 얘기래요. 그럼 별 기능을 못한다는 거예요. 그래 약으로 쓰는 건 메옥수수, 메조, 메기장 이죠. 근데 지금 메기장은 세계적으로 없어요. 중국 쪽에 있다고 해서 알아봤는데 없어요. 종자은행에 수십 번을 드나들어도 메기장을 못 구했어요. 메수수는 제가 종자은행에서 얻어다 심었는데 10알 주더라구요. 10알을 심으니까 3알갱이 나와요. 이게 오래 묵어서 그런 거래요.


- 그럼 지금 메수수는 얼마나 퍼트리셨나요?

= 우리만 보존 하고 있어요.


- 판매는 하고 있습니까?

= 판매는 안 하죠. 대학교 연구하시는 분들이 가끔 연락이 돼서 오면 파는 경우는 있어요.


- 선생님 그럼 종자 얘기 좀 더 해주시죠. 어떤 종자를 어떻게 보존하고 보급하시는지요.

= 붉은 팥을 동지에 액운을 물리친다고 죽을 쑤어 먹잖아요. 그런데 점쟁이들이 점을 칠 때도 이거로 쳐요. 그런데 원래는 용의 눈알 이라고 하는 팥으로 점을 치는 거래요. 용의 눈알이 알록달록 하답니다. 그래서 이걸 용의 눈알이라고 하는데, 이걸 던져서 하얀 알하고 빨간 알 중 많이 나오는 걸 보고 점을 한답니다. 그리고 팥으로 점을 하는 건 장래를 보는 게 아니고 귀신하고 관계되는 점을 할 때만 팥으로 하는 거래요. 그런데 아무거나 다 붉은팥으로 하는 건 다 가짜래요. 그런 데로 무지하니까 그래요. 그런데 용의 눈알이 시중에서 인기가 없는 이유는 붉은팥으로 음식을 하면 붉어져야 하는데 흰 게 섞여서 붉어지지가 않아서 그래요. 실질적으로는 유래도 깊고 토종이고 좋은데 먹는 사람 선호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지.


- 맛도 더 좋은가요?

= 맛도 더 좋아요. 거뭇거뭇한 것도 있는데 그걸 용의 눈알 재팥 이라고 해요.

 그리고 그루팥이라고 있어요. 보리를 심고 나서 후작으로 심는 팥이래요. 늦게 심는다는 거죠. 그루팥은 하지 지나서 심어요.

 그 다음 이팥이 있어요. 이건 몸이 붓거나 신장하고 관계있는 병에 특효약 이예요.


- 이팥의 이가 무슨 뜻인가요?

= 글쎄요. 옛날부터 이팥 이라고 해서 잘 모르겠는데 쌀 같이 생겨서 이팥이라고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런데 이게 하얀 게 있고 빨간 게 있는데, 빨간 게 약이 된대요.

 그 다음에 약콩․쥐눈이콩․서목태 라고 하는 게 있는데, 이걸 가장 흡수하기 좋은 법은 현미식초에 삼 사일 정도 담가뒀다가 냉장고에 넣어놓고 하루 20알 씩 먹으면 콜레스테롤이 내려간다고 하죠.

그 다음 대표적인 울타리콩은 약간 갈색이래요. 그리고 그보다 진한 색을 밤콩이라 하죠.

또 푸른색이라서 청태라 하는 콩가루를 내서 먹는 콩이 있어요. 토종 찰콩은 떡에 넣거나 엿 해먹을 때 쓰는 거구요. 그 다음에 아주까리콩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건 강정해서 먹어요. 콩도 이렇게 용도가 다 틀려요. 그 외에도 수십 가지가 있어요.


- 콩 종자만 몇 종류를 가지고 계신가요?

= 콩이 한 47가지 정도 돼요.


- 모두 토종인가요?

= 다는 아니래요.


- 다양한 종자를 보존하는 일이나 교육사업을 하시는 일이 힘들지는 않으신가요?

= 그래서 항상 차에 가지고 다니고, 이전에 살림집 보면 천장에 달아놔요. 왜 그렇게 하냐면 과거에는 종자를 처마에 달아놨어요. 종다래끼라고 하죠. 종자를 담는 다래끼라고 해서 종다래끼라고 했는데 거기에 담아서 사방에 매달아 뒀죠,

 그리고 예전부터 내려오는 말에 씨앗을 뿌릴 때 넙적한 그릇에 담아서 뿌리면 안 된대요. 그래 오목한 그릇에 담아서 뿌려야 결실이 잘 된다 해서 꼭 종다래끼에 건사를 했어요. 거기에 건사를 하면 통풍이 잘 되잖아요. 메주도 마찬가지고 모든 것이 짚을 가지고 이용했어요. 감자도 보면 짚에서 균이 나와서 감자가 더 잘 돼요. 그래 농업에서는 짚을 이용하는 게 많아요.

 그리고 아까 옥수수 얘기했는데 옥수수를 하짓날 아침에 심으면 결실이 되고, 오후에 심은 것은 결실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절기를 중요시 했잖아요.

 그리고 입하가 지나서 낱알을 뿌리는 건 비렁뱅이 팔자라고 해요. 입하 전에 모든 곡식이 땅 속에 다 들어가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요즘은 온실이니 뭐니 해서 많이 바뀌었지만 실질적으로 그래요. 이게 그렇게 심는 시기도 틀리고 거두는 시기도 다 틀리죠.

 나는 이걸 돈을 목적으로 하는 건 아니고, 하나의 취미하고 사명감, 그러니까 자부심이지. 내가 토종잡곡으로다가 신지식인농업상을 받았거든요. 그게 토종잡곡으로 우리나라에 제일 유명한 사람이다 하는 건데 내가 저걸 받아놓고 지금은 안 한다고 하면 하나의 사명감을 잃어버리는 거죠. 이걸 하면서 지금 뭘 느끼냐면, 지금 옆에 하우스 작업을 하는 곳에 전통 농기구를 전시할거래요. 여기서 학생들을 데려다 체험학습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체험할 수 있는 시설이 몇 개 안 돼서 나머지는 구경만 해요. 그래서 몇 명이 체험하는 동안 나머지는 전시관을 보고, 돌아가면서 체험할 수 있게 하려는 거죠. 요즘 체험학습이라고 해서 박물관을 가는데, 다 유리관 속에 진열만 해놓고 만지지도 못하게 하고 그냥 노천에 놔두고도 만지지 말라고 하죠. 그게 무슨 체험학습 이예요. 그건 견학이지.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실제 학생들이 해봐야 하는 거죠. 그래서 여러 사람들이 해 볼 수 있게 자꾸 준비하는 거예요.

 종자 같은 경우 원칙적으로는 완전히 말려서 진공포장 해서 냉동실에 보관해야 하는데 이거는 그냥 샘플로 학생들 오면 보게 하죠. 학생들이 연수를 들어오면 큰 마루에 한 삼 백 가지 진열을 해놓고 내가 가운데 서서 짚으면서 설명을 해줘요.


- 선친께 농사를 많이 배우셨다고 하셨는데 전통농사법을 쓰고 있는 게 있다면 어떤 것이 있나요?

= 저희는 유기농을 하기 위해서 차광막을 풀이 나온 다음에 헛골에다 깔아요. 남들은 제초제를 써서 죽이는데 우리는 제초제를 안 쳐요. 그런 쪽으로 하기 위해서 풀 잡는데 저걸 쓰는 거래요. 저게 돈이 많이 들어서 도하고 군하고 농림부에 얘기를 해서 보조를 받아가지고 우리가 평창군 전체에 나눠줘요.


- 차광막은 폭이 얼마나 되고 어떻게 사용하시는 건가요?

= 55센치 정도 되는데 그걸 고랑에 깔면 나온 풀은 죽고, 풀이 나오지 않죠. 한 10년 정도 쓸 수 있어요.


- 보온덮개는 어떤가요?

= 보온덮개는 무겁고 말아서 보관하기 어렵고, 비가 오면 무게가 많이 나가잖아요. 차광막은 그런게 없어요. 가벼워서 풀이 안 눌릴 것 같지만 나일론이라 열을 받아서 저절로 풀이 삭아요.


- 전통농법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건가요?

= 전통농법은 김을 매야 하잖아요. 그런데 지금 시골에 김을 맬 사람이 없잖아요. 그래서 제초제를 친다 이거예요. 제초제를 치면 토양 버리죠, 농산물 버리죠, 몸 버리잖아요. 그러니까 그 대용으로 저걸 쓰는 거죠. 전통농법으로 농사짓는 것은 다 개량됐다고 봐야죠.

그래도 우리는 옛날처럼 소로 가는 건 아예 못 하지만 파종하는 건 종다래끼에 씨앗 넣어서 하는 경우는 더러 있어요. 그거하고 괭이로 묻는 건 마찬가지로 해요. 그리고 수확은 도리깨로 떠는 것도 마찬가지로 하죠. 다만 과거에는 산에서 풀을 베어서 퇴비를 만들어서 썼는데 현재는 사다가 쓰는 건 달라졌지요.


- 잡곡 농사를 지을 때 어려운 점은 무엇인가요?

= 채소는 기계화가 됐는데 잡곡은 손으로 해야 하는 것이 어렵죠.


- 잡곡을 심을 때는 비닐을 깝니까?

= 비닐을 안 깔죠. 뭐 전통적으로 비닐을 안 깔고 심었으니까 전통방식으로 하는 거죠. 예를 들면 배추 같은 걸 비닐을 안 하고 했을 때는 병충해도 많고 잘 자라지 않는다구요. 상품가치는 떨어지는데 비닐을 깔고 화학비료 주면 배추가 맛이 없듯이 그래요.


- 그럼 어떤 식으로 농사를 지으시나요?

= 콩농사 같은 경우 먼저 콩을 골에다가 심고 풀이 첫 번에 나오면 비가 온 다음에 인걸이로 끌어서 그 흙을 양쪽 가로 넘겨요. 콩이나 옥수수는 반드시 복토를 해줘야 돼요. 그렇게 흙이 넘어가면 골이 반대로 되잖아요. 그 다음에 아이김을 맨다고. 왜냐하면 콩씨를 7~8개 씩 들어간 걸 세 개씩 남겨놓으려면 솎아야 되고 없는 데는 모종을 하고. 그렇게 하고 나서 풀이 약간 날 때 차광막을 깔아요. 골 넓이가 보통 70센치 정도 되는데 55센치 깔거든요. 그럼 한 10센치가 남잖아요. 남는 곳이 콩이 있는 자리예요. 포기 사이에서 풀이 나긴 더러 나지만 그때는 콩이 이기죠. 콩은 그늘을 많이 지기 때문에 금방 풀이 자라지 못해요.


- 처음부터 고랑에다 차광막을 깔고 심는지 알았는데 그게 아니네요. 그럼 인걸로 골을 먼저 치고 애벌 김매기 하고 솎아 줄 거 솎아 주고 저걸 까는 거군요. 수확할 때는 도리깨로 하고요.

= 예, 그렇죠.


- 콩농사에 대해서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 콩은 파종 적기가 제일 중요해요. 5월 10일에서 25일 사이에 심어야 하죠. 이건 전국이 거의 비슷한데 남쪽 같은 경우는 5일 정도 늦어도 괜찮지요. 콩을 이때 심는 이유는 너무 일찍 심으면 냉해를 입고 장마 지나서 꽃을 피게 해야 돼서 그래요. 장마 때 꽃이 피면 수분이 안 돼요. 완두콩은 냉해 피해가 없어서 일찍 심어도 괜찮아요. 올콩과 늦콩은 심는 것은 같은데 일찍 거두냐 늦게 거두냐 하는 수확 시기에만 차이가 있어요.

 다음으로는 순지르기가 중요해요. 보통 본잎이 6잎 나올 때 순지르기를 해주는데 많이 심으면 일일이 셀 수가 없으니 그냥 파종하고 2달 지나서 무조건 낫으로 대가리를 치죠.

 그리고 콩에는 밑거름으로 유기질 퇴비를 줘요. 축분은 질소질이 너무 많아서 안 돼요. 보통 300 평당 2톤 정도 주고 거기에다 콩 전용 복합비료를 주는데 이건 300 평당 6포를 줘요. 복합비료를 주면 무농약 인증은 되는데 유기농 인증은 받을 수 없어요. 거름은 전년도에 고추나 배추를 키워서 거름을 많이 준 밭이면 유기질 퇴비는 안 주고 복합비료만 줘요.

 콩은 되도록 육묘를 하는 게 좋아요. 육묘를 하면 인건비도 줄이고 김도 덜 맬 수 있어요. 여기서는 35일 동안 육묘를 하는데 직파를 하면 35일 지나서 김을 매야 하는데 육묘를 하면 그 수고를 안 해도 되니까 인건비도 줄고 좋죠. 그리고 모든 곡식은 비닐 멀칭을 하면 두둑에 심고 안 하면 골에 심어요.


- 토종종자들을 수집이나 보관은 어떻게 하셨나요? 조부님께 받은 것이 많은가요?

= 그렇죠. 거의 다 받은 거죠. 어머니 계실 때는 옥수수만 해도 한 50가지 심었는데 지금은 많이 없어졌죠.


- 이 일을 하시면서 귀찮게 여러 가지를 하냐, 크게 하나만 하면 돈 벌텐데 하시지는 않나요?

= 왜요. 지금도 다 그러죠. 식구들이 반대를 하지만 지금은 많이 따라와요. 그리고 학생들이 와서 신기해하는 걸 보면 기분 좋아요.


- 지금 이 일을 거의 혼자 하시다시피 하는데 뜻있는 사람이나 뜻있는 단체와 같이 종자를 보존하는 일을 하실 생각이 있으신가요? 혹시 그렇게 하고 계신 분이 있나요?

= 현재는 두메농산물 생산자 협회라고 해서 조직이 있어요. 한 52농가가 있어서 그 분들이 우리가 종자를 팔고 그 사람들이 사다가 심어가지고 여기서 수매해서 포장해서 팔아요. 그러다 보니까 한 사람이 여러 가지를 가지고 있지 않고 몇 가지씩 다 가지고 있죠.


- 다른 지역에도 종자를 보존하는 분들이 계신가요?

= 그쪽에는 없어요.


- 이 지역에서 농사가 안 되는 종자도 가지고 계신가요?

= 농사가 안 되는데 가지고 있을 수가 없죠. 곡식류는 안 되는 데가 없어요. 채소류가 안 되는 게 많아요.


- 작물 외에 가지고 계신 것 중에서 소개해 주실 만한 것이 있나요?

= 골담초 라고 있는데 그게 신경통에 좋은 약초래요. 

 자작나무는 나무를 삶아서 먹어도 좋고, 잎사귀를 나물로 먹어도 위에 좋고, 물을 받아먹는게 위장병에 특효죠. 특히 곡우날 받는게 좋아요.

 산마늘은 뿌리가 아니라 잎을 먹어요. 항암 작용이 있다고 하죠. 이게 몇 백 년이고 크는데 뭐가 문제냐면 한 알 심으면 2~3년 있다가 새끼를 피는데 그럼 잎사귀 3개 중에 하나를 따야지 그 이상 따면 열매가 안 달려요. 이걸 심기 위해서는 8년 정도는 농약이나 비료를 주면 안돼요. 그래서 산 같은 데서는 된다는 거죠.

 질경이 있잖아요. 질경이 씨가 약명으로는 차전자 거든요. 세계적인 보약 중에 최고 보약이래요. 질경이씨를 장복으로 하루 한 스푼 정도 가루를 내서 먹으면 무병장수 한다잖아요. 가장 좋은 약품인데 지금은 가장 천대를 받고 있어요. 사람이 연명하던 음식인데 너무 먹어서 이제는 지겹다는 거죠. 요즘 사람들은 좋다하면 먹잖아요. 지금 내가 그걸로 개발해서 이게 좋다하면 너도 나도 먹을 거래요. 요즘은 모든 게 유행이잖아요. 병도 유행, 음식도 유행, 약도 유행.


- 마지막으로 할아버님에게 배웠다는 내용을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할아버님이 병을 고치기 위해서는 먹는 것으로 고쳐야한다 하셔서 종자를 보존하셨던 이야기 좀 해주십시오.

= 옛날에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는 맥을 본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할아버지는 절대 맥을 짚지 않아요. 왜 맥을 안 짚냐고 하니 당시는 버스가 없어서 걸어오잖아요. 걸어오고 긴장한 상태에서 맥을 보면 맥이 정상적으로 움직이지 않아서 오진을 할 수 있다는 거죠. 그 다음에 환자 얼굴을 봐요. 흰색이냐 검은 색이냐. 그 다음에 손가락이 기냐 짧으냐 그게 체질상 뭐다 하시면서 그걸로 판단을 다 해요.

 그리고 항시 할아버지는 걷는 걸 강조하셨어요. 그 다음에 약을 주면 먹지 말라는 것이 있어요. 콩이나 메밀음식이 그래요. 메밀은 보약이 되는 게 아니라 독약 이래요 메밀이 속을 훑어 내려서 그렇다고 해요. 또 술은 알콜기가 피가 흐르는 양을 조절하지 못하게 한대요. 소고기는 괜찮은데 돼지고기, 닭고기는 절대 먹지 말라고 하시고, 담배 태우지 말고 우유 마시지 말고 이러면 무병장수 한다는 거예요. 이 다섯 가지만 가려도 굉장히 도움이 된다는 거예요. 단백질이 풍부한 걸 먹지 말라는 건 단백질은 모든 병의 먹이가 된대요.

 메밀음식을 먹을 때는 반드시 무를 먹으라고 하셨죠. 왜냐하면 메밀의 독을 해독하는 건  무래요. 호박의 독을 해독하는 건 새우젓이고요.

 건강한 사람이 먹을 때는 괜찮은데 안 좋은 사람은 먹지 말라고 하셨어요. 병이 있는 사람이 이런 음식을 먹으면 몸에 부작용이 있으니까 약을 먹을 때 먹지 말라고 하신 거죠..

 그리고 이팥이 독을 해소시켜요. 상처가 나거나 하면 옛날에 약이 없을 때는 이팥을 짓찧어서 바르잖아요. 그럼 독을 빼냈어요. 잣나무 송진을 따서 상처난 데 하면 새나지 않고 금방 나아요.

 녹두도 같은 류래요. 수술환자 퇴원하면 녹두죽이 최고인 원리래요.


- 이제 마무리를 하겠습니다. 언제부터 농사를 시작하신 겁니까?

= 여기서 농사짓다가 서울서 한 5년 살고 80년에 다시 왔어요. 살다가 나갔다가 결혼해서 다시 들어왔죠.


- 유기농은 언제부터 하셨고, 계기가 있으신가요?

= 80년부터 시작했어요. 74년에 농사를 지었는데 그때는 제초제를 쳤어요. 그때는 앞서 가는 농민들이 제초제를 쳤어요. 제초제를 치는데 덩치가 커서 방제복을 입기가 어려웠어요.  그래 운동화를 신고 제초제를 치는데 이거를 몇 만평 농사를 지니까 몇 일을 두고 했지요. 그랬더니 손톱, 발톱이 이상해지는 거래요. 그러면서 아프기 시작했는데 그냥 피곤하고 늘 그래요. 처음에는 이게 제초제 독인줄 몰랐지. 한 2~3년 하고 나서 자꾸 심해져 가지고 뭘 생각했냐면 미군이 베트공 소탕작전 할 때 치던 제초제를 그때 생각한 거요. 제초제가 독이로구나 환경농업을 해야겠다 해서 유기농업 창설할 때 82년도에 창립멤버로 들어가서 시작한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오래됐고 전문가가 되다 보니까 평창군 전체에 유기농 자재를 공급하고 유기농에 대한 교육도 하고 하게 됐지요.


-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화학 농약이 아니고 유기농 농약을 팔고 있는데 실제로 몸에 해롭지 않은 농약이 효과가 있나요?

= 글쎄요. 우리도 그걸 공급은 하는데 저는 그걸 안 써요. 왜냐하면 벌레가 죽잖아요. 그럼  생명체가 죽으면 독약이지. 단지 생물에서 추출했다 뿐이지 어차피 독약은 독약이라고 생각해요.


- 그럼 오랜 시간 동안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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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종 종자에 대해서 두 번의 취재 후에 종합 정리하는 의미로 선생님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찾아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토종에 어떻게 관심을 갖게 되셨나요?


내가 10살 때 6.25가 났는데 그때 인천 살다가 신갈로 피난을 갔어요. 그때 거기서도 학교를 다녔어. 5리 넘게 걸어 다니는데 어느 집을 보니까 장독대 옆에 뭐가 나온 게 예쁘단 말이야. 그걸 학교 갔다 오다가 싹 캐서 집에다 심어놨어. 거기서 꽃이 핀 게 백합이라. 참 향기도 좋고 했는데 어려서 몰랐어. 그때부터 ‘내가 식물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됐지.

그 후에 고등학교 때는 원예반을 했는데 여름방학 때 변산반도를 가게 됐어. 그때는 변산에 가면 배롱나무가 많아요. 그걸 보니까 꽃이 만발을 했는데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세상천지에 처음본거야. 나무가 아주 잘 생겼는데, 그 밑에 보니까 둥치가 있고 그 옆에 가지가 나오길래 적당히 파서 가지고 와서 깡통에다 심었지. 그때는 화분 같은 것도 없었어. 그랬더니 다시 살아나서 나무가 예쁘게 되는데 정말 기분이 좋더라고. 그렇게 식물을 좋아하는걸 알게 됐고, 그래서 농대를 다니게 된 것 같아.

농대를 졸업하고 일반 임시직으로 농진청 실험실에 가서 도와주다가 헌병으로 군대를 갔어요. 뭐야 보충대를 갔는데 차가 와서 여기 나무 만질 줄 아는 놈 손들라고 해서 손을 들었더니 차에 타래. 가니까 사단사령부 앞에 사단장이 가위로 소나무를 자르고 있더라고. 군기가 바짝 들어서 신고했더니 ‘너, 이런 거 할 줄 알아?’ 하더라고 그날부터 거기 가서 20사단사령부 조경을 전부 만들었어. 거기 가서 헌병대에서는 욕도 많이 먹었지. 헌병이라는 놈이 거기서 그거나 하고 있다고 말이야. 그래도 내가 좋은걸 어떻게 해. 그렇게 지내다가 석 달 남기고 마지막 휴가를 나왔는데, 선배가 농진청 시험이나 보고 가라 해서 한 열흘 공부해서 시험보고 들어갔어. 그러고 합격했어요. 그래서 제대하고 나서 한 보름 있다가 일을 시작을 했어요. 그렇게 진흥청에 들어온 것이 69년도야.

일을 시작해서 뭘 했냐면 밀․보리 육종을 했어요. 그걸 한 15년 정도를 했어요. 멕시코에 국제맥류연구소라는 곳에서 한 일 년 정도 있다가 와서 밀 육종을 했는데, 여기 진흥청에는 종자은행이란 곳이 따로 없었어요. 종자를 현장별로 다 가지고 있었어요. 그걸 74년도에  함께 모을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76년도에 진흥청 입구에다 저장시설을 조그맣게 만들어서 전부 모았어. 85년까지는 그런 식으로 갖다 저장만 해놨는데, 1985년도에 와서 유전자원이라는 걸 해야겠다고 하면서 저장시설도 관리할 겸 유전자원을 관리할 사람을 찾는 거야. 내가 그 전에 맥류연구소에 있었고, 83년도에는 일본에 가서 유전자원을 연수를 했거든 그래서 내가 적당하다 싶어서 날 거기다 앉혀놨어. 그때 당시에는 나 하나하고, 직원 하나하고 갖다 놓고 관리를 하라고 하니 뭔 수로 해.

그래 거기서 일을 시작하게 되는데, 내가 어떻게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가장 중요한 게 무얼까?’, ‘무슨 일부터 해야 할까?’ 생각을 하다가 ‘토종이다. 우리나라 종자부터 수집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야. 그때 진흥청에 농촌지도국, 시험국, 기술보급국이 있었는데, 지도국에 전국적으로 지도원이 8천명이 있었어요. 지금은 얼마 안 남고, 기능도 안 되는데 그때 당시는 그것이 굉장히 중요했어요. 그래서 내가 뭘 생각했냐면 ‘이걸 내 발로 뛰어서는 안 되니까. 이 사람들을 동원해야겠다.’ 생각한 거야. 지금 생각해도 그걸 참 잘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유전자원을 어떻게 수집하는지, 뭘 수집하는지 이런 수집요령 책자도 몇 천부를 만들고, 수집하는 봉투도 한 2만 5천장 만들어서 전국적으로 돌린 거야. 그때 그렇게 10000여점 정도를 수집했어요. 그런데 당시에는 뭐가 토종인지 잘 모르지. 교육시킬 때는 들었지만 실제로 수집해올 때는 옛날부터 한 집에서 심던 것을 모아서 봉투에다 보낸 거야. 그걸 갖다 저장을 하고 지금까지도 평가를 하고 있는 거지.

그걸 85, 86년 두 해에 걸쳐서 하고, 그 후에도 조금씩 계속 들어왔어. 그때 수집한 것이 지금 가지고 있는 토종의 대부분이에요. 그러고 나서 8년 후 93년에 그때 수집했던 똑같은 동네에 가서 똑같이 수집을 해봤어. 그렇게 보니까 24% 정도만 남았더라고. 8년 동안 76%가 없어진 거야. 그러니까 얼마나 빨리 없어졌다는 거야. 사회상도 전부 서울로, 서울로 하니까 시골에는 노인들 밖에 없고, 노동력도 부족하고 하니까 안 심고 없어진 거야. 그 후에도 또 해봤는데, 그때만큼 급격하진 않지만 또 그만큼이 없어졌어. 지금은 가봐야 많지 않아요.


- 그래도 다행이네요. 그런데 그때만 해도 토종에 대한 인식이 없었을 때인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셨나요?

그래서 그때 그 일한 걸 잘했다 생각하고, 이 일을 평생해 왔다는 것이 참 고마워요.


- 원래 토종에 대한 생각이 있으셨던 것이 아니라 어떤 영감 때문에 하셨던 건가요?

그렇다고 봐야지요. 그때 내가 육종을 했지만, 토종이 중요하다 생각해서 수집할 생각을 못했어요.


- 그때는 정책방향이 다수확 신품종 위주였나요?

그렇죠. 그것 때문에 토종이 다 없어진 건데.


- 그럼 선생님이 모으기 전에도 없어졌겠네요?

그렇게 봐야지. 사실은 왜 그 전에 생각을 못했는지 후회가 돼요. 60년대만 해도 대부분 남아 있었을 텐데. 뭐 후회해도 소용없지. 그래도 그 당시에 한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하지.


- 육종 일을 하실 때 토종을 바탕으로 하시지는 않았나요?

내가 밀․보리를 육종했는데, 원래 밀․보리는 우리나라 것이 아니잖아요. 그래서 밀․보리는 토종으로 한 것이 없었지. 주로 바탕이 외래종 이예요.


- 우리밀은 없어졌을 때인가 보죠?

그 당시 우리밀이라는 건 1900년대 초에 육종한 품종들이 있어요. 그것들은 대부분이 일본에서 육종한 품종들을 기본 바탕으로 해서 우리가 한 거예요. 그런 것들이었지 재래종으로 한 건 없어요. 우리 토종을 기본 바탕으로 육종을 하는 일은 상당히 제한되어 있어요. 왜냐하면 우리나라 원산지인 작물이 많지 않거든요.

우리나라가 원산지인 것은 콩․팥․녹두 그런 것이 있고, 참깨․들깨는 100% 우리 것이지. 들깨를 먹는 나라가 우리나라하고 중국․일본의 극히 일부밖에 없어요.


- 토종을 복원하고 살린다는 현대적 의미는 무엇일까요?

토종을 살려서 농민이 토종으로 재배하고 품종을 만든다는 것은 사실 경제적 가치는 높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토종이란 것이 병에 걸려도 많이 걸리지 않고 잘 죽지 않는 것이지 수량이 엄청 나는 것은 아니거든.

그렇지만 신품종이라는 것은 수량이 엄청나고 내병성도 강하지만, 어떤 상황에 따라서 왕창 망하는 경우가 생길 수도 있어요. 옛날에 노풍․내경이란 품종이 있었는데, 그게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육종하는 사람을 우대해주기 위해서 품종에 자기 이름을 붙인 거야. 그래서 박노풍, 박내경 두 사람이 만든 품종이야. 그런데 그 당시에는 좋았는데 몇 해 지나서는 병이 들어서 완전 망했어.

그게 이렇게 생각을 해야 돼요. 토종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내려오면서 우리나라에 있는 병충해 같은 것들과 저항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저항성이 있지만, 병충해에 아주 안 걸리는 것도 아니고 다만 걸리면서 저항이 있는 거야. 이런 것을 수평저항성이라고 해.

그런데 신품종은 수평저항성이 아니라 수직저항성이라고 해. 이건 금년도에 나타나는 어떤 race 때문에 작물이 싹 망하는데, 그 race에 강한 인자만 뽑아서 집어넣는 거야. 그러니까 그런 race 몇 가지에만 강하게 선발되니까 당시에는 수량도 잘 나데, 몇 해 지나면 race라는 건 독감처럼 금방 변해요. 그렇게 되면 이게 왕창 망하는 거야. 토종은 그렇게 왕창 안 망하거든.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 신품종의 문제점이 있는 거야.


그래서 토종이라는 건 그런 의미에서 여러 가지 어떤 우리나라 기후풍토와 또 어떤 병충해 같은 이런 모든 것과 같이 살아온 것이지. ‘농민들이 육종가’거든. 그게 뭐냐면 지금은 안 그런데, 지금은 고추를 심어도 다 사다가 심잖아. 그런데 옛날 농부들은 고추를 심으면 그 중에 제일 크고 좋은 건 따다가 놔두고 내년에 종자로 쓴다고. 그게 뭐냐면 그 환경에서 제일 잘 된 것, 즉 그 환경에 적응이 잘 된 것을 심는 것이지. 그게 바로 육종이야. 그렇게 육종을 해온 것들이 토종으로 남아있는 거야.

그러니까 이런 특성들을 기본바탕으로 해서 이것을 외국에서 들어온 좋은 특성들, 맛이나 질, 수량 같은 특성들을 집어넣어서 새로운 품종을 만드는 거예요. 그게 육종인데, 그렇게 보면 토종이라는 것은 육종하는데 기본 바탕이 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게 농민들한테 직접 보급하는 것은 수량이 떨어지니까 문제가 있는 건데, 그러나 지금 토종을 농민들이 재배하고 유지하게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있어요. 그게 몇 년 안 됐는데 “토종의 농가보전”이라고 있어요.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토종이라는 것을 내가 85년도에 수집해서 저장고에 넣어놨단 말이야. 그러면 그 종자는 잠을 자고 있는 거예요. 앞으로 100년도 가는 게 있겠지. 그걸 100년 후에 꺼내면 100년 전 상태하고 똑같은 거야. 그러니까 같은 식물이란 말이야. 그런데 그때는 기후환경도 바뀌고 race나 병해충도 다 바뀐다고. 그러면 100년 전에 있던 것과 맞아 들어가지 않잖아. 그러니까 농민이 현지에서 보전을 한다는 건 100년 동안 기후환경이나 풍토에 적응한 것을 자꾸 선별할 수 있다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중요한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 100년 전에 저장해 놓은 것 자체도 상당히 큰 가치가 있어요. 왜냐하면 race는 자꾸 변하잖아. race가 자꾸 변하는데 100년 전에 있던 race는 지금 것하고는 완전히 다른 게 될 수 가 있어. 그런데 그때 당시에는 아주 저항성이 없어서 전부 죽었는데, 100년 후에 와보니까 그것이 강한 저항성이 될 수 있어요. 그럴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대로 중요하다는 거지. 그래서 지금 국제식물자원연구소에서도 그런 것을 상당히 가치 있게 보고 강조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도 농민에게 꼭 그렇게 하라고 강요는 못하지만 많은 농민들이 재배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그걸 농민들이 손해 보면서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함으로써 손해 불 수 있는 문제점들을 정부나 지자체에서 어떤 토종마을 식으로 지정한다던지 해서 그 마을에 가면 이런저런 토종들도 볼 수 있고, 방학 동안 학습이나 학자들이 공부도 할 수 있게 하면서 일정한 지원도 하면 상당히 가능성이 있지 않겠는가 생각을 해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한 번 생각해보면 어떻겠느냐 하고 있어요.


- 그런데 토종은 근본적으로 수확량이 적나요? 옛날에는 다수확을 목적으로 육종한 것이 아닌가요?

꼭 그렇지는 않아. 그리고 육종은 자기가 원하는 방향대로 하는 거지. 어떤 사람은 다수확이고, 어떤 사람은 맛 같은 품질이고.


- 토종을 농가에 보급한다고 할 때 농가에 경제적인 도움이 될 수는 없을까요?

내가 생각하는 것은 뭐냐면, 근래에 와서 웰빙 바람 때문에 토종이 떴잖아요. 이걸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을 거예요. 우리나라 사람 자체가 토종이니까 한반도에서 옛날부터 있었던 토종을 먹고 사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 예를 들면 콩만 해도 옛날에 우리가 원산지니까 토종을 먹었는데, 지금은 전부 미국에서 신품종으로 육종을 하고 그것만 하면 좋은데 유전자 변이 콩이 엄청 많잖아. 그럼 유전자 변이 콩을 먹어서 좋을지 나쁠지 아무도 모르는 거야. 요즘 유전자 변이 옥수수를 먹었더니 어떻게 됐더라 하는 얘기가 많은데, 우리같이 농업을 연구한 사람들 중에는 유전자 변이 농산물이 우리 몸에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을 안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건 모르거든. 그렇기 때문에 우리 토종을 먹는 것이 해로울 건 없을 것이고 좋지 않겠냐. 그리고 요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인식을 하니까 농민들은 그런 토종을 재배를 해서 그 토종을 많은 사람들이 먹게 하면, 소비자도 좋고 농민도 좋다고 보는 거야. 그렇게 하면 우리는 우리대로 토종을 현지에서 보전할 수 있으니까 좋은 거지.


- 그러면 토종과 토종 아닌 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나요?

그래서 그것 때문에 토종연구회에서 전부터 토종인증제를 하나 만들자고 했어요. 그런데 이게 생각은 좋은데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또 있어요. 우리가 인증제를 해서 그냥 인증해주면 너도 나도 다 해달라고 할 거 아니야. 그럼 그것보다는 일정 액수를 받아서 사용은 연구에 쓰던지 정부에 줬다가 받아서 쓰던지 아무튼 그건 나중 얘기고, 돈이 왔다 갔다 하면 거기에서 어떤 문제가 있을 것이고, 인증하는 자체도 누가 어떻게 인증을 해주냐는 문제가 있어요. 토종과 육종된 것이 어떻게 다른가 구별하는 것은 전문가가 아니면 찾기가 쉽지 않아.

그래서 내가 책을 만든 것도 그런 이유가 있어요. 지금 보전되는 토종이 4~500가지가 되는데 워낙 많아서 사진을 다 못 찍었어요. 그런데 그걸 전부 사진을 찍고 책을 만들어서 ‘이런 것이 우리 토종이다.’ 하는 걸 보여주고 남기기 위해서 하는 거야. 이제 자꾸 세대가 지나가면 앞으로 사람들은 모르지. 시골에 가본 적도 없고, 시골에도 없어졌는데 어떻게 알아.

그러니까 그런 문제를 책을 만들고, 또 보전된 것을 유전자 지문을 만들어야해. 이건 유전자를 감식하는 방법이 있잖아요. 어떤 토종의 DNA는 그 내용이 어떻다는 걸 품종마다 전부 만들어 놓는 거야. 그래서 비교해보기만 하면 돼. 이것이 우리 것이라는 걸 만들어놔야 외국에 나갔을 때 우리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거지. 이건 지금 농진청 종자연구소에서 하고 있어요.


- 그럼 그런 내용은 세계 어느 기관에 등록해서 저작권처럼 사용하는 건가요?

그것은 아니고, 일단 우리 걸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주장할 수 있지. 그렇다고 지금 세계 여러 나라에 있는 어떤 품종들을 우리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지금 검증할 수 있는 건 신품종 보호법이 있어서, 신품종에 대해서는 전세계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어요. 종자관리소에서 신품종을 만들면 ‘이 품종은 내가 만든 것이니 쓰는 사람은 로얄티를 내라.’ 뭐 이런 것이지.

그건 이런 거야. 나는 돌아다니면서 식물을 많이 훔쳐오는데 내가 어디에서 장미를 가져왔다고 하면, 내가 잘라다가 심어서 내가 보는 건 문제가 없어. 내가 잘라서 심다가 아는 사람한테 주는 것도 상관없지. 상업적이 아니면 괜찮다고. 그런데 이걸 갖다가 많이 만들어서 시장에서 팔면 그때는 로얄티를 내야하는 거야. 그리고 국내에서 하면 큰 문제가 없는데, 외국으로 수출하면 문제가 되는 거야. 이게 장미전쟁이니 하는 그 얘기야.

그런데 그것을 육종에 이용하는 것은 문제가 안 돼. 그걸 이용해서 신품종을 만들어서 등록하면 돼지.


- 토종이 그렇게 이용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토종의 정확한 정의가 무엇인가요?

토종의 정의가 지금은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데 토종연구회 홈페이지에 있어요. 말하자면 토종은 한반도에서 대대로 재배되거나 또 사양되거나 또는 자연생태계에서 대대로 살아온 생물을 얘기하는 거야. 식물, 동물, 미생물을 다 포함한다고 정의가 되어 있어.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대로’라는 의미가 몇 년이냐는 거야. 딱 잘라서 100년 이상이라고 하는 것이 참 어렵더라고. 그래서 대대로라고 표시해놓았지. 왜 그렇게 했냐면 가급적이면 많은 걸 우리 토종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좋지, 이걸 300백 년 전부터 내려온 것이 토종이라고 하면 제한이 되잖아. 그래서 그렇게 했지. 그러니까 어떤 동네에서 할아버지 때부터 심어서 내려왔다고 하면 그건 토종이지 그걸 어떻게 해.

아까도 얘기했지만 우리는 많은 작물의 원산지가 아니기 때문에 거의 대부분의 작물이 외국에서 들어왔다고. 어떤 작물은 1000년 전에 들어온 것도 있고, 100년도 안 된 것들도 있다고. 예를 들면 산삼은 원래 우리가 원산지야. 그런데 근래 들어온 담배 같은 것도 그렇고, 고추, 고구마도 그렇고. 양파, 당근, 딸기 이런 것들은 토종이 거의 없어.


- 토종은 작물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군요.

그렇지. 토종은 우리나라 사람도 토종이지.


- 만약 육종된 품목을 계속해서 씨를 받아서 사용했다면 그것도 토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엄밀하게 얘기하면 토종은 아니에요. 그런 게 있어요. 벼는 자가수분을 해서 한 가지만 심으면 대대로 똑같은 것만 나와야 원칙인데, 육종을 하다보면 순도가 99.9%라도 0.1%가 변형이 돼요. 논에 가보면 삐죽 나온 것들이 더러 있어요.

그런 것들도 있을 수 있고, A라는 품종 옆에 B라는 품종이 있으면 0.1%니 이런 정도는 꽃가루 수분이 돼요. 벼는 자가수분 작물이지만 몇 년이 지나면 잡종이 많이 생겨요.

그래서 농진청에서 육종할 때는 이렇게 했어요. 제일 먼저 육종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품종을 기본식물이라고 하는데, 내가 A라는 품종을 육종하면 그 특성이 있잖아요. 그에 따라서 해마다 이삭으로 심어요. 그러고 보면 엉뚱한 것이 나올 수가 있어요. 그럼 그건 밟아버리고 나머지만 채종을 해서 원원종이라고 해서 도진흥원으로 보내던가 해요. 그럼 거기에서 증식을 해서 농가에 보급을 했어요. 그럼 벼 같은 것은 4년에 한 번 새로 심는다던지 하여튼 몇 년에 한 번씩 바꿔줘야 돼. 그렇지 않으면 잡종이 생기고 그래요.

그래서 아까 얘기하신대로 오래 전에 어떤 품종이 있었는데 계속해서 농민이 심었다고 하면 잡종으로 생각을 해야 돼요. 왜냐하면 벼나 콩은 우리가 눈으로 보이는데도 그런데, 옥수수 같은 것은 더 심하잖아요.


- 그럼 지역마다 수비초니 하는 작물들은 순도가 유지가 된 건가요?

유지가 된다고 봐야지. 유지가 되면서 좋은 방향으로 계속 육종이 된 거야. 영양에 가면 수비초가 있잖아. 거기는 수비초가 잘 되는데 다른 곳에 가면 잘 안 돼. 농민들이 수확을 할 때 거기서 제일 좋고 잘 된 거를 따서 모아 그것만 씨를 받아서 다음에 또 심은 것이지.  그게 농민이 육종가라는 말이지.


- 토종은 전국 어디서나 다 되나요?

아니지. 지역마다 다르지. 그래서 벼 같은 경우 육종을 하면 일단 각 지역마다 다 심어봐. 그걸 지방적응연락시험이라고 해요. 처음에 품종을 육종하기 전에 계통을 육종해서 제일 처음에는 어떤 병해에 강한가 먹을 만한가 생산력 검증시험을 해요. 거기서 통과하면 지방적응연락시험을 해. 목포에도 심어보고, 강릉에도 심어보고, 이리에도 심어보고, 태백에도 심어보고. 각 작물마다 그 시험지가 따로 있어요. 그 작물이 중요시 되는 그 지역에서 2~3년의 시험을 거쳐서 그 지방에 좋다고 하면 그 지방의 작물로 되는 거예요.


- 토종으로 농사를 짓는 농가는 얼마나 되나요?

거의 없다고 봐야 해요. 아주 일부 토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고, 신림 같은 경우는 아주 특별한 경우지.


- 아까 선생님 말씀 중에 토종마을은 괜찮은 생각 같습니다.

그게 앞으로 이뤄져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게 밖에 지금 토종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없어요. 또 근래에 와서 생각하는 것인데 옛날부터 심던 토종을 귀농해서 사는 분들이 몇 가지씩이라도 심으면 상당히 좋지 않을까 해요.

아침에 지리산에 스님과 통화를 했는데, 이 분이 서점에서 우연히 우리종자 책을 보고 나한테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내가 종자를 구해서 보냈었어요. 그 양반은 토종을 엄청 좋아하는데 자기가 있는 곳은 산 중간이라서 덜 되는 것 같아서 여기저기 아는데 좀 보내서 그 사람들이 심게 해야겠다고 하면서 자기도 토종 때문에 다른 데로 옮겨야겠대요. 그래서 그런 사람들한테 내가 가지고 있거나 구할 수 있는 것을 자꾸 주면 꼭 필요한 사람들한테 가니 그게 좋은 거죠.


- 지금까지 토종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토종이 갖고 있는 단점은 없나요?

단점은 경제적인 거예요. 수량이 떨어지는 것.


- 토종 잡곡의 경우 몇 군데에서 하는데 토종 과수나 채소류를 하는 곳은 없나요?

과수는 거의 있을 수가 없을 것 같아요. 하더라도 소규모겠지. 과수는 근래에 나온 과수들이 워낙 좋으니까. 채소는 하더라도 텃밭 정도겠지. 약초는 거의 토종일거예요. 우리가 잘 몰라서 그렇지 약초재배는 많이 한다고 해요.


- 토종 잡곡의 경우 경쟁력이 있을 것 같은데 토종 채소나 원예 작물들은 어떨까요?

글쎄요. 하나하나 다른데 얘기하자면, 상추 같은 것은 봄에 심으면 일찍 추대를 해서 못 먹잖아요. 그런데 작년에 심었던 것은 산청에서 가져왔는데 추대가 굉장히 늦어요. 그런데 충청도에서 나왔던 새꽂이 상추라고 있어요. 그건 굉장히 추대가 늦어서 우리나라 상추 육종하는데 많이 썼다고 그래요. 본래 빨리 추대하는 문제점을 고친 거죠. 그런 옛날 토종상추 같은 것도 될 수 있겠고.

토종오이 같은 것도 재배해서 먹어보면 맛있잖아. 그런데 요새 나오는 것은 오이 하나에 크지만 실제로 먹어보면 맛이 없거든. 그러니까 비싸더라도 작고 맛있고 옛날 우리 것을 찾는 사람들을 찾아서 어떻게 토종마을 같이 생산하는 곳과 도시에 아파트나 어디가 됐든 소비하는 곳을 맞춰서 공급을 하는 걸 연결하면 좋은 방법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요.


- 선생님 오랜 시간 말씀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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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농업구술취재팀은 지난 16일 전라남도 화순의 동광원을 방문했습니다. 그곳에서 20대부터 동광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신 한 장로님(77세)을 만나 뵈었습니다. 한 장로님은 주로 율무와 고구마 농사를 지으시고, 자급용으로 논농사와 채소, 잡곡류를 짓고 계십니다. 그리고 몇 해 전부터는 전통방식으로 엿을 만들어서 판매도 하고 계십니다.




실례지만 언제 동광원에 들어와서 농사를 지으셨나요?

- 동광원에는 6.25 직전에 들어왔어요. 그래도 농사는 어려서부터 했어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3살 때 어머니가 나를 두고 가버렸어요. 그래서 어려서부터 일을 했어요. 공부라는 건 생각도 못했는데 어디 가면 배운 사람으로 알아요.


예전에도 지금처럼 농약이나 비료는 사용 안 하고 농사를 지으셨나요?

- 중간에는 농약도 좀 했었어요. 그러다가 땅 살리기 운동한다고 안 하게 됐지요.

제가 6.25나고 한 사오 년 후에는 서울에 가서 인생공부 하려고 리어카 끌면서 고물장사도 했어요. 이현필 선생님이 의인은 교회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장돌뱅이 사이에도 있다고 하셔서 가본 거예요. 그렇게 서울에서 있다가 ‘자연식을 먹고 살려면 시골로 가야겠다’고 생각해서 60이 안 돼서 남원으로 왔어요. 그런데 거기서 자연식을 먹다보니까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나와서 ‘가공식품을 먹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딱 끊었지.


기장농사가 어렵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시나요?

- 어려운 것은 별로 없는데, 시기가 잘 안 맞으면 키가 커서 쓰러지기도 하고 죽어버리기도 하는 곤란한 점이 있어요. 기장은 6월쯤에 심는 것이 알맞은데, 그게 항상 같지 않아요. 그때그때 그해의 일기관계도 있고 우주적인 것도 있어요.

작년에는 그 시기를 맞추려고 늦게 심었는데 비가 통 오지 않아서 크지를 않았어요. 옛날 어른들이 ‘부스럼이 커야 고름이 많이 나온다’고 했는데 그러니 열매가 나올 것도 없었죠. 기장이 너무 키가 커서 잘 쓰러지길래 시기를 맞춘다고 늦게 심었는데 비가 안 오니까 크지를 않았으니 뭐 나올 것이 있어.

그래서 시기를 잘 맞춰야 하는데, 가물 때는 일찍 심어서 커버리는 것이 낫고 비가 자주 오면 늦게 심어서 어느 정도 패게 하는 것이 좋지. 우리가 마음대로 하기가 어려워요.


다른 농사는 안 하시나요?

- 다른 사람들이 안 하는 율무 농사를 하지. 한 20년은 된 것 같아. 율무는 거름이 많이 들어가요. 옥수수하고 비슷하게 해야 해. 적으면 열매가 잘 안 맺어요. 5월 달에 보리 심어 먹고 거기에 로타리 쳐서 골을 타고 모종을 심어요. 이건 습기가 좀 있어야지 너무 건조하면 죽어버려서 논에서도 잘 돼요.

모종을 심는 간격은 자기 마음이야. 두 자 심을 사람은 그렇게 심고, 한 자 심을 사람은 한 자 심고. 자기가 경험을 하다보면 요령이 생기지.

제초는 그냥 김을 매는데 어떻게 하냐면 처음에 골에다 심어서 어릴 때는 그냥 괭이로 긁어주다가 조금 더 크면 관리기로 그냥 콱 파서 북주면서 덮어줘 버려요. 그러면 훨씬 쉬워요.

율무는 목도열병도 잘 생기고 벌레 때문에 잘 죽어서 살충제를 좀 해줘야 한다고 하는데 나는 안 해줘요.

탈곡은 도리깨로도 하고, 차로 밟기도 하는데 그렇게 하면 좀 깨지더라고. 그러고 나서 정미소에 가져가서 현미로 만들어요. 요즈음은 정미소라도 해주는 데가 별로 없어요. 여기도 처음에는 못 한다고 했는데 내가 밀어붙였지. 율무를 찧으려면 쌀보다 힘도 더 들고, 돈도  더 비싸요. 옛날 �방에 찧듯이 찧는데 그러면 먼지가 엄청나요. 쌀은 마를수록 부수어지는데 율무는 마를수록 좋아. 수수는 방아를 안 찧어도 먹지만 이건 안 돼요.


고구마는 어떤 건가요?

- 호박고구마를 심는데, 이것이 소출은 적어도 맛이 좋더라고. 처음에는 먹으려고만 했는데 하다보니까 판로만 되면 더 낫겠다 싶어서 요즘에는 팔기도 하지. 일반 고구마보다 잘하면 만 원 정도 더 비싸게 팔아요.

몇 년 전에는 굼벵이가 다 먹어서 적자가 나버렸어. 굼벵이는 애초부터 흙 관리를 잘 해야 되요. 토비가 많으면 굼벵이가 많아지고 고구마도 맛이 없어요. 고구마는 한 곳에 계속 심어도 괜찮은데, 그러면 땅이 뼈 마른다고 그래요.


고구마 순은 어떻게 틔워서 심으시나요?

- 추운 지방에서는 조금 어려운데 이거는 굉장히 뜨거워도 죽지 않아서 하우스가 있으면 거기서 기르면 돼요. 고구마는 따뜻할수록 순이 잘 나고 70℃가 되도 피해를 안 받아요. 하우스가 없으면 활대로 터널을 만들고 보온덮개를 덮어서 낮에는 벗겨주고 밤에는 덮어줘. 비가 올 때는 벗겨주고, 안 그러면 가끔 물을 줘야 돼요.

심는 건 관리할 수 있다면 일찍 심을수록 좋아요. 여기는 날만 따뜻하면 해동이 되니까 구정 지나서 심어도 돼요. 해남 이쪽은 모종을 배게 꽂는데 그래도 고구마가 다 달려요. 배게 심으면 조금 작게 되고, 너무 일찍 심으면 적게 달리는 대신 크게 되고 그런 것이 있어요. 그래서 이쪽은 고구마가 6월이면 나와요.

우리는 매듭에서 고구마가 생기니까 비스듬히 심어왔는데, 심을 때 너무 깊게 하면 캐기가 나빠요. 고구마 덩굴이 너무 길면 낫으로 잘라줘요. 일반 농가는 제초제를 쳐서 못 자라게 해요. 그리 안 하면 고랑으로 뻗은 놈을 뽑아서 엮어주면 되요. 거름이 너무 많으면 덩굴만 잘 되니까 문제가 있어요.


퇴비는 어떻게 만드시나요?

- 옛날에는 다 만들어 썼는데 이제 힘이 없으니까 사서 써요. 옛날에 퇴비 만들 때는 퇴비간이 크게 있어서 거기에 풀을 막 베다가 작두로 썰어서 쟁여놓고 요리 조리 뒤집어서 썩히는 거야. 한 세 번 뒤집으면 잘 떠요. 뒤집는 시기는 논매는 거랑 같아요. 모내고 20일 만에 초벌 매고, 다음에는 15일 만에 매는데 그런 식으로 거름도 뒤집는 거야. 대충 계산해보면 35일은 더 걸려요. 소가 밟은 것을 섞으면 더 빨리 되는데, 그것만 가지고는 그래요.

그리고 거름이 말라 있으면 똥오줌이나 물을 뿌려서 습기가 있도록 만들어줘야 잘 떠. 마른 상태에서는 안 뜨고 너무 질어도 안 떠요. 그것도 죽이 맞아야해. 이건 자기가 경험을 해 봐야지 알아.


병해충은 방제는 어떻게 하시나요?

- 그냥 보고 있는 거지 뭐. ‘나 이거 못해도 원망 안 할랍니다’ 하면서 해. 내가 바가지 긁는 사람이 없거든.

옛날에는 병해충이 많지도 않았어요. 토비만 먹고 사니까 건강하고, 땅이 살아있으니까 힘을 쓰고. 그런데 지금은 비료 줘서 키만 커지게 하니까 땅이 힘이 없어져버렸어. 토비만 할 때는 뿌리가 강하거든. 그렇게 건강하게 커서 병해충이 별로 안 걸렸어.


지금도 섞어 심기를 하시나요?

- 무엇을 하냐면 수수하고 콩을 같이 심어요. 수수는 위로 커버리고 콩은 아래에서 자라니까 적당하게만 심으면 수수가 쑥 커버려요. 모종으로 해도 괜찮고 씨를 뿌려도 괜찮아요. 자기가 기술적으로 다문다문하게 뿌리면 되요.

또 여기는 뭘 하냐면 참깨를 심어놓고 그 사이에다 들깨를 심어서 그렇게 두 번을 해 먹어요. 참깨 베기 전에 들깨 모종을 옮겨 심어놔요. 아니면 거기에 콩이나 팥을 심던지 해요. 참깨는 두 달이면 되니까. 들깨도 이른 것이 있고 늦은 것이 있어요. 참깨가 꽃 피기 시작하면 늦은 들깨는 그때 모종을 심어요. 그런데 이른 것이 하얗게 보기는 좋은데 기름은 적게 나와요. 들깨가 사람 키보다 더 커버리면 제대로 수확이 안 나와요. 그래서 옛말에 키 크면 속없다는 거야.

그리고 들깨는 콩밭에다 넣으면 좋다고 그래요. 들깨향이 콩에 벌레를 덜 끼게 한다고 해요. 그런데 나는 추수할 때 귀찮아서 그렇게는 안 해요. 또 옛날에는 참깨하고 목화를 같이 심었어요. 그렇게 하면 참깨가 잘 열어요.


옛날에 과일농사는 많이 했나요?

- 그런 것은 없었지. 일본사람들이 와서 심었지 어디 배나 사과가 있었어요. 돌배나 감은 많았지. 제사상에도 사과나 배는 없고 밤, 대추, 감, 살구, 유자 이런 것이나 있었지.


보리 뒷그루는 어떤 작물을 하나요?

- 율무도 심고, 콩, 아무튼 전부 그때가 시기예요.


콩은 어떻게 키우나요?

- 콩은 너무 박토면 토비를 조금 해야 되고, 어지간하면 안 해도 돼. 심을 때는 콩에 따라서 작은 것은 배게 심고, 메주콩 같은 것은 한 자 정도 심어요. 콩이 잘 되는 곳이면 두 자 정도 심어야 해.

그리고 콩은 연작해도 되는데 그것도 계속 심으면 안 된다는 결론이 나와. 또 옛날 어른들이 콩은 습기가 있는 것을 좋아하고, 팥은 습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이런 건 자기가 자꾸 해보면 돼요. 안 해보고 하는 사람은 말쟁이고 학문쟁이지.


논농사 이야기 좀 해주세요?

- 제초제 대신 쌀겨를 한두 번 뿌려요. 모를 내고 일주일 이내로 한 번 뿌리고, 모 내고 나서 20일 안에 두 번째 뿌려주고서 그래도 풀이 나면 한 번 매줘요.

옛날에는 싹 손으로 맸는데 동네사람들끼리 품앗이를 했지. 오늘은 내 것, 내일은 네 것 하면서 순서를 정해서 맸어요. 모내고 나서 20일 안에 초벌을 매고, 풀이 많이 나면 도사리 짓는다고 호미로 파서 뒤집어엎어. 그러고 15일 만에 손으로 그 덩어리를 주물러. 그 다음 또 15일 만에 손으로 다 뽑아줘요. 그래도 풀이 많이 나면 네 번째는 다니면서 큰 풀을 뽑아주는데 그때는 벼가 크고 더우니까 힘들어서 시원할 때만 일하지.

옛날에는 하지 전 닷새, 후 닷새가 모내기 적기라고 했어요. 그때는 쌀은 일본사람들이 다 뺏어가서 가난하니까 다 보리를 심어먹어서 하지가 적기였어. 보리 때문에도 그렇고, 손으로 매니까 너무 일찍 내면 김이 나서 여러 번 매야하는 것 때문에 그랬지. 그런데 지금은 농약을 하니까 빨리 해서 먹잖아. 지금은 보리 망종이 중심이야. 옛날에는 하지 중심으로 농사를 했지.

모도 지금하고 비교하면 훨씬 크지. 손으로 심으니까 그렇고, 또 천수답이라서 그래요. 기계가 없으니 물을 퍼서 댈 수도 없고 언제 마를지 모르니까. 하지 때는 비가 많이 오니까 그때 심는데, 그럼 모가 커야 물을 많이 담아놓을 수 있어. 모가 작으면 녹아버리는데 모가 실하고 단단한 것은 물을 많이 담아도 녹지 않거든.

그리고 토질에 따라서 새끼를 많이 치는 논이 있고, 안 그런 논이 있어요. 새끼를 많이 치는 논은 적게 심어도 많이 쳐요, 그래서 어떤 분은 한두 개만 잡아서 심어요. 그래가지고 한 자 세치, 자가웃으로 심어요. 그렇게 해도 새끼가 많이 쳐버려. 새끼를 칠 때는 물을 넣어야 잘 쳐요. 어느 정도 자라면 물을 한 번씩 빼는데 그것은 경험에 따라서 조금씩 달라요

그때는 벼가 키도 별로 안 커서 잘 쓰러지지도 않았어. 돼지거름이나 소거름 많이 쓰는 사람이나 간혹 쓰러졌지.


예전에는 모를 40일 이상 키웠다고 하던데, 어떤 종자인가요?

- 우리 어렸을 때는 은방조, 아곡도라고 있었어요. 그리고 잊어먹어서 몰라. 그런 것들을 많이 심었어요.


논에 퇴비는 어떻게 했나요?

- 보리를 심어먹었으니까 이미 토비가 많이 들어간 셈이야. 그러니까 자연적으로 논이 거름지지. 그리고 보리를 수확하고 갈면 밑둥이 썩으면서 자연히 거름이 되는데, 그래도 거름을 해야 돼. 산에서 풀을 베어다가 보리 벤 것하고 같이 깔아놓고 써레질하는 것이지. 그것만 했지 추가로 주는 것은 없었어. 그러니까 수확이 적었지. 200평에 한 섬, 옛날에는 100근 두가마가 한 섬이여. 지금으로 하면 60㎏ 두가마지.

일제시대에는 거름이 나와서 좀 더 나왔고, 그래도 많이 나온 데가 어디냐면. 마을 앞에 고샅 논이라고 해. 마을 앞에 개똥이니 뭐시니 같은 것이 흐르는 곳이 더 나왔어. 지금은 이런 데를 별로 안 쳐주는데 그때는 마을 앞이 좋았지. 땅이 좋은 데는 밥맛이 꼭 찰밥 같았어요.


병충해에 대한 대책은 없었나요?

- 과거에는 그랬죠. 되는대로 쳐다만 보고 살았지. 그때는 깜부기병 같은 것도 있었고, 멸구가 심했어. 멸구는 석유를 모래에 섞어서 뿌려놓고 막가지로 벼를 쳐서 기름에 떨어뜨려서 죽으라고 했지. 대나무 같은 것으로 쓸고 가는 거야. 아니면 물로 그냥 흘러가게 하기도 했지. 제대로 된 것은 아닌데 그런 식으로 했지.

멸구는 벼가 익어가면서 오니까 빨리 되는 종자는 추석 안에 멸구가 없을 때 추수해버리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데 그것이 풍이 올 때 모가지가 나오니까 잘못하면 바람 맞는다고 해요. 바람 맞아버리면 이삭이 패면서 시큼시큼 해지는 폐단이 있어요.


엿은 어떻게 만드나요?

- 엿은 밀이니 보리로 엿기름을 길러요. 그런데 보리보다 밀이 더 달아. 보리로 많이 하는 건 색깔을 내려고 하는 거야. 보리는 하얗고 밀은 더 빨갛거든. 엿기름에다 쌀, 수수, 옥수수, 고구마 같은 것을 넣어서 삭히는데 그것이 잘 삭아야 엿이 잘 돼.

그걸로 감주를 만들어서 보자기에 짜서 찌꺼기를 싹 빼고 솥에다 넣고 불을 때는 거야. 그렇게 불을 때면 쫄면서 엿이 되는 거야. 불 때는 것을 잘 하면 금방 만들고, 못 하면 하루라도 못 끝내지. 어느 정도 불을 맞춰가면서 넘지 않도록 때야해. 그러면서 긴 주걱으로 계속 저어주지.

그렇게 하면 갱엿이 되는데, 조청보다 더 되게 만들어야 해. 그 도수를 잘 맞춰야 기술자여. 너무 되면 치기 힘들고 너무 눅어버려도 그렇지. 둘이 줬다 뺐었다 하면서 치는데, 기술자들은 나무 기둥에다 혼자 하기도 해요. 자꾸 치면 엿이 하얘지고, 바람이 들어가니까 사근사근해져. 빨간 갱엿은 먹기가 힘들어서 하얘질 때까지 쳐야 돼.

이렇게 엿을 만들려 하루를 더 잡아야 되요. 오늘 밤에 감주를 해서 놔두면, 내일 새벽부터 그걸 짜서 솥에 넣고 달여서 쳐야 돼. 이것도 몇 번 실패를 해보고 자기가 익혀야지 암만 방식을 듣는다고 해도 어렵지.


마지막으로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없으신가요?

옛날에는 우리나라 풍속이 재미있었어. 정월달에 마을 사람들이 마당에 다 모여서 풍물을 놀면 등에 업힌 애기도 같이 춤추며 놀아요. 북치고 장구치고 소고치고, 덕구놀이라고 그걸 보면서 온 동네 사람들이 다 춤추고 논다고. 1월 한 달이 쉬는 기간이여. 설 쇠고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마당돌기를 하는데 농사가 잘 되라고 빌어주는 것이 하나고, 농사지은 걸 얼마씩 내놓으면 기금으로 만들어요. 그런 것들이 즐거웠지.

가다가 더우면 세수하고 바로 그 물을 먹고 그랬어. 그런데 지금은 과학이 발달해서 농약하면서 편히 살려고만 하니까 그런 것들이 다 없어졌어. 이런 것이 아쉬운 것이야. 좋은 것이라고 따라가다가 우리가 다 망하는 것이야. 그래서 물러가라 해야 하는 것이야.

나는 우리 조상들이 굉장히 지혜롭다고 생각해요. 김치 담가 먹는 것이나 농사짓는 것이나 만사가 다. 지금 방송에 나오는 건강식품이 다 우리 조상들이 먹고 살았던 것이잖아.

기독교도 우리 것을 알고 받아들여야 정상인데,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정신없는 사람이여. 내 것을 알고 다른 것을 받아들여야 해요. 다른 나라 말을 해도 내 나라 정신으로 내 것 위에다 해야 자기 정신이다 이거지.  지금 우리 기독교인은 너무 종교의식 때문에 문제가 많아요. 동광원은 문턱이 없어요. 예수님이 문턱이 없었거든. 그걸 우리 기독교인들이 앞장서서 해야 되는데 그러지 않으니까 안 돼요. 안 믿어도 기본 양심은 다 타고 나온 거예요. 자식이 안 믿는다고 부모가 내 자식 아니라고 할 수 있겠어요. 하나님도 그렇게 생각하실 거예요.

그런 것을 직접 몸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지 의식이나 말로는 안 돼요. 여기 가끔 목사님들이 오시면 ‘네가 농사지어서 주면서 살아도 문제인데, 남한테 얻어먹고 살려면 교인 중에 제일 가난한 사람하고 똑같이 살면 목회를 잘 하는 것이다’라고 얘기해요. 예수님이 그랬어요. 그렇게 마음 다해서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사랑도 그에 못지않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살 수 있으면 옛날처럼 살 수 있다는 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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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농업에서 배우자(30)-권유옥 선생(김포)


임금에게 진상하던 자광미, 맛은 최고예요







 

너른 김포 들판 사이로 난 좁은 농로를 따라 하성면 석탄리에 사시는 권유옥(67)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곳에서 나 지금까지 사는 ‘토백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지금도 삼형제가 한 마을에 모여 살며 모두 5만7천 평의 논을 경작하고 계신답니다. 그 가운데 본인은 1만2천 평 농사를 짓는데, 자광미는 500평 정도만 심으셨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1000평을 지었는데, 올해는 판로 문제나 이런저런 까닭으로 500평만 짓는다고 하십니다. 동네에서도 혼자만 자광미 농사를 짓는다고 하십니다. 선생님의 논은 경지정리를 하면서 한쪽에 몰아서 환지를 받아 1만평 정도는 한곳에 있고, 자광미는 따로 500평 되는 논에다 심었다고 하십니다. 이 논에 4월 26일에 모내기를 했는데, 그보다 일찍 모를 낸 논은 서리를 맞아 싹 죽어서 다시 심은 것이라 합니다. 그래 선생님 논의 모는 벌써 위로 쭉쭉 자라서 다른 논과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광미(紫光米)는 말 그대로 자줏빛 쌀입니다. 쌀이 허옇거나 누렇지 어떻게 자줏빛이냐고 생각하신다면, 이 쌀을 한 번 보면 생각이 확 달라질 겁니다. 이 벼는 250~300년 전 중국에 사신으로 간 벼슬아치가 자줏빛 밥을 대접받았는데, 그걸 먹고는 너무 맛있어서 돌아올 때 가져온 씨를 김포에 심어 임금님께 진상한 것이 처음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유래라고 합니다.


- 선생님께 자광미 농사를 짓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두 달 동안 수소문 끝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자광미에 대한 이야기 좀 부탁드립니다.

= 자광미는 옛날부터 임금님께 진상하던 쌀입니다. 그만큼 밥맛이 좋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게 재배하기 아주 까다로워서, 그전에는 양반 집안에서나 자기들 먹으려고 재배했습니다. 재배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쓰러지기 쉬워서 많이 심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마음먹고 자라면 사람키보다 더 크게 자랍니다. 그러니 태풍만 왔다하면 죄 쓰러져 버리지요. 이걸 쓰러지지 말라고 규산액을 때려 부어야 그나마 괜찮습니다. 비료는 아예 줄 생각도 못하지요. 비료만 줬다하면 엄청나게 자라서 쓰러질까 봐 그렇습니다.

거름으로는 영양제만 줍니다. 밑거름을 하면 너무 자라서 쓰러지기 때문에 절대 하면 안 됩니다. 따로 비료를 주지 않아도 지 뿌리에서 자기가 먹을 영양은 다 나옵니다.


- 재배하기는 어렵지만 수확량은 좀 많은가요?

= 수확은 잘나면 양석(兩石) 납니다. 지금 말로 하자면 200평에 2가마 정도 나요. 알이 좀 갸름한 모양인데, 다른 벼에 비해서 잘고 달리는 양도 적은 편입니다. 하지만 맛으로 따지자면 이걸 따라올 것이 없습니다. 이 쌀로 밥을 지으면, 밥을 지을 때 김이 나잖아요. 그럼 집안이 구수한 냄새로 핑 돕니다. 백미로 깎으면 아주 맛이 좋은데, 그럼 색이 없어져서 소비자가 믿지를 못해요. 그래서 7분도 정도로 깎습니다. 백미로 깎는 것보다는 맛이 떨어지지만 어쩝니까. 집에서 먹을 때는 아예 백미로 깎아 버립니다.

요즘 시중에 빨간 쌀이 나오는데 그건 수원에서 연구원들이 육종한 홍미가 대부분입니다. 색은 거의 비슷하지만 그걸로 내가 밥을 해 먹어보니 맛은 아주 떨어져요. 그건 대도 짧아서 도복이 안 됩니다. 수확도 아주 많이 나는데 맛이 없어요. 이제 FTA하는데 수확으로는 절대 못 이깁니다. 맛으로 이겨야 해요.


- 그렇게 재배하기도 어렵고 수확도 적은 것을 왜 심으시나요?

= 첫째는 선조 할아버지 때부터 심던 것이라 그렇지요. 저 김포 들미라고 있어요. 거기 동네사람들은 밀다리라고 하는 들미다리가 있는데, 중국에서 가져다가 처음으로 그 옆에다 심었다고 해요. 이걸 이승만 대통령한테도 진상했습니다. 유신 때도 경기도 지사가 선물하려고 해마다 꼭 대여섯 가마씩 가져가곤 했습니다.

키우기도 힘들고 까다롭고, 또 판로도 좋지 않아서 지금은 딱 혼자 남았습니다. 그래 언제는 이걸 그만 두려고 했는데 김포 농정과에서 이게 김포 명물인데 어떻게 없애냐고 하면서 보조금을 조금 줍니다.


- 판매는 어떤 방식으로 하시나요?

= 예전에는 16㎏들이 가마니를 한 장에 2만원 주고 사다 썼습니다. 그걸 일 년에 60장 정도 쓰거든요. 그것만 해도 120만원이라 이제는 아예 가마니틀을 만들어서 겨울에 집에서 짭니다. 이렇게 직접 안하면 다 농협 가서 대출받아 빚지고 살아야 해요.

그럼 거기에 쌀을 담아서 도에 한 20~30가마, 여의도에 20가마, 강남에 사는 돈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연락이 와서 가끔 택배로 보내고, 나머지는 양재동으로 나갑니다.


- 저희가 취재를 하면서 보존 차원에서 씨앗을 몇 알씩 얻어다가 냉동고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자광미도 조금 얻어갈 수 없을까요?

= 예전에 아랫녘에서 농진청 통해서 소개받고 와서 하도 졸라서 준 적이 있었는데, 아주 김포 농정과에서 경을 쳤습니다. 우리 김포 명물을 타지로 보내면 어떻게 하냐고요. 지금은 고향에서 아예 상표로 만들려고 유출을 못하게 합니다. 쌀로는 어디든지 나가지만.


- 모는 언제 내고 관리는 어떻게 하셨나요?

= 여기는 4월 26일에 모를 냈어요. 이게 모일 때부터 정신없이 올라와서 다른 것보다 키가 커요. 요즘 상토가 나오잖아요. 거기 거름이 들어 있어서 막 나오는 겁니다. 이건 거름을 주지 않아도 워낙 키가 큰데, 파는 상토에다 넣으니 다른 벼는 작아도 이건 정신없이 자라요. 너무 길어서 기계로 심기 힘들어 가위로 자른 다음 심은 겁니다.

이 동네에 늦서리가 한 번 왔는데, 동네 사람들은 일찍 심어서 다 죽었어요. 이건 물이 있으니까 서리가 와도 녹아 버린 거야. 지금 다른 논보다 제일 볼 만해요. 일찍도 심었지만 자광은 비료를 안줘도 신나게 자라요. 그것만 봐도 아주 재밌죠. 주변과 비교해도 따라올 놈이 없잖아요.


- 언제쯤 수확하나요?

= 이건 추석 무렵이면 바로 벱니다. 중만생종쯤 될 거야. 그때도 막 자라요. 가지도 곧잘 치죠.


- 분얼도 많이 하는데 수확량은 왜 적지요?

= 도복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규산질을 많이 줘요. 다른 비료는 영양제 빼고는 안 줍니다. 그랬다가는 너무 커서 싹 쓰러져 버려요. 약도 치지 않아요. 고품질로 파는데 약을 치면 내가 거짓뿌렁하는 나쁜 놈이지. 나는 여기 토백인데, 딴 사람한테 거짓뿌렁 못하고 죽으나 사나 내 땅에서 부지런히 농사지어서 아들딸 공부시키고 이렇게 사는 거지.

딱 하나. 제초제는 칩니다. 이제 논에 들어가 김을 맬 수 있는 힘도 없고, 일이 많다 보니까 그거 하나는 합니다.


- 씨 할 것은 따로 심으시나요?

= 그렇지는 않고, 이걸 수확해서 종자로 씁니다. 베기 전에 콤바인을 싹 청소해서 거두는데, 그래도 기계가 크다 보니 어느 틈엔가 다른 것이 조금 끼기는 합니다. 그러고 15일쯤 햇볕에다 말립니다. 수분측정기가 있어서 수분 15% 될 때까지 말려서 보관해 놓습니다.


- 옛날에는 어떤 식으로 자광미 농사를 지었나요?

= 옛날에 어른들은 2알 넣어야지 3알만 들어가도 뽑으라고 했어요. 많이 넣어 봐야 이삭이 잘아지니까. 손으로 내고, 낫으로 베고, 발틀 밟아서 떨고. 볏단이 조금만 축축하면 거기 잘 앵기는 거야. 통일벼는 귀가 여리잖아(이삭이 잘 떨어진다는 뜻), 자광미도 귀가 여려요. 이상기온이 와서 우박이라도 오면 1/5은 떨어져 버려서 날짐승들이 다 주워 먹지. 지금 그렇게 손으로 하라면 나부텀도 못해요.


- 이건 몇 포기씩 심으신 건가요?

= 이앙기로 해서 4~5대씩 꽂았어요. 가장 좋은 건 2대씩 꽂는 겁니다. 이앙기로 하려니 그런 거지. 그렇게 꽂아 놓으면 15~17대로 분얼해요. 물을 말리면 분얼을 멈추죠. 분얼이 다 됐다 싶으면 그냥 내 맘대로 말리는 거예요. 이 논은 한 6월 10일쯤 물을 뗍니다. 계속 물을 대 놓으면 키만 커요. 그렇게 보름쯤 말렸다가, 물을 안 주면 말라죽으니까 다시 열흘은 물을 대주고, 또 보름쯤 말렸다가 대주고를 반복해요. 여기 물을 말리면 갯논이라 운동화 신고 뛰어다녀도 되는 정도로 마릅니다. 일주일쯤 지나면 티도 안 나게 말라요.


- 병충해나 피 같은 건 어떤가요?

= 여기는 들판이라 피가 많아요. 도아리(까마중)하고. 그리고 중국에서 혹명나방이 많이 날라 옵니다. 그래서 약을 쳐야 하는데 그럼 안 되잖아. 한 4년 전쯤에는 잎을 죄 먹어서 다 쭉정이만 나왔어요. 그해는 농민도 그렇고 농협도 무지 피해를 봤지. 중국하고 가까워서 혹명나방이 해마다 있어요. 자광미는 다른 벼보다 혹명나방이나 병충해에 좀 강합니다.


- 자제분에게 농사를 물려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 모두 4남매인데 도시에 나가 살아요. 각자 자기 자리 잡고 사니까 땅 준다고 오라고 해도 안 온다고 하죠. 힘들어서 싫대요. 우리는 삼형제가 다 농사지으며 한 마을에 모여 삽니다. 서로 일을 나눠 맡아요. 바로 위에 형님은 이앙만 하시고, 큰 형님은 나이가 여든이 넘으셨으니까 모판 껍데기만 모아 놓고, 나머지 모든 일은 제가 다 합니다. 젊은 내가 해야죠.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건 일이 많고 뭐하고 해도 불평불만이 안 나오는 거야.

처음 1,800평으로 시작해서 부지런히 일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도 새벽 3시면 일어나는데, 깜깜해서 못 나가는 것이지 훤해지면 바로 나가서 일합니다. 그래도 새벽부터 집 가까이서 장비 쓰면 동네 사람들이 유난 떤다고 할까 봐 멀리 방죽 있는 데부터 가서 일합니다. 이 일은 정년퇴임이 없지 않습니까. 이건 뭐 땅속에 들어가면 그때가 퇴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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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제주도에서는 소와 말을 놓아기르는 경우가 많아 작물에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돌담을 둘렀다.

이 모습도 바로 돌담을 두른 밭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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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제주도에서는 씨를 심지 않고 뿌렸다.

그래서 소와 말 대여섯 마리를 데리고 밭을 밟아 흙에 들어가도록 하고 물기를 잡아 주었다.

그렇지 않으면 뿌린 씨에서 싹이 트기 힘들기 때문이다. 

이 사진은 2004년 8월 말을 이용해 밭밟기를 재현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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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농업에서 배우자(35)-화순 김규환 님
산을 가꾸는 산채원지기, 백아산에서 보물을 만들다

 

전라남도 화순군 북면의 해발 300m에 자리 잡은 산채원을 다녀왔습니다. 해발은 높지만 따뜻해서 이 동네를 양지라 한다고 합니다. 집 앞에는 백아산이 우뚝 서 있고,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곳입니다. 이런 천혜의 자연을 바탕으로 산채원에서는 200가지 이상의 산나물이며 산야초, 산양삼 등 산과 관련된 먹을거리를 보존, 보급하고 있습니다.

 

- 정말 좋은 곳인데, 어떻게 이곳에 정착하셨나요?
= 결혼하기 전에는 잠시 가평에서 민박집을 하며 농사를 지은 적이 있습니다. 결혼하면서부터는 사회생활을 했지요. 제가 담양 창평에 있는 고등학교를 나왔는데, 7년 전쯤 창평으로 내려왔다가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다시 올라갔습니다. 2003년부터 고향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고향에 가서 사회에 필요한 농사를 짓자고 마음먹었죠. 가만히 생각하니 유기농은 기본이겠고, 무엇보다 종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생각에 부지런히 전국으로 산나물 씨앗을 모으러 다녔습니다. 솔직히 산에 다니면서 뿌리도 캐오고 했습니다. 요즘은 사람이 안 다녀서 숲이 너무 많이 찼습니다. 가만히 놔두면 산나물은 자연스럽게 없어집니다. 그러니 사람이 그 상태에 가장 가깝게 보존해 주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모은 씨앗이 한 200여 가지 됩니다.
그리고 이곳에 본격적으로 내려온 것은 지난 2006년 11월입니다. 내려와서 창고 같은 집을 조금 손봐서 살고 있습니다. 이제 슬슬 집을 지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그럼 귀농을 하신 셈이네요?
= 저는 귀농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도시 사람들이나 고향 사람들에게 귀농이라고 하면 꼭 실패한 사람이라고 인식합니다. 그래서 저는 귀농이라는 말보다는 귀향이라고 합니다.
제가 내려오면서 세운 원칙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처음 1년 동안에 초기 자본을 많이 투자하면 대부분 금방 실패하고 다시 도시로 돌아가더군요. 그래서 첫째, 집을 짓지 않는다. 둘째, 처음 1년 동안은 땅을 사지 않는다. 셋째, 농협 조합원에 가입하지 않는다. 이런 원칙을 세웠습니다.
농협 조합원에 가입하면 이자도 싸고, 돈을 끌어다 쓰기도 쉽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면 금방 망가집니다. 그래서 지금 만 1년째 다 되어 가는데 아직 조합원에 가입하지도 않았습니다. 주변 분들은 돈도 싸게 빌릴 수 있고 하니 얼른 가입하라고 합니다. 하지만 가만히 보니 다들 농협에서 쉽게 돈을 끌어다 썼다가 힘들어 하더군요.

 

- 산채원을 만들 생각은 어떻게 하셨는지요?
= 제가 80년대 말 대학을 다니며 생활도서관 운동을 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정보 관련 운동을 해서 정보력에는 어느 정도 자신 있어요. 그래서 FTA 이후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농사가 무엇일지 2003년부터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축산, 원예, 주곡 같이 여러 농사가 있지만 그 시대는 이제 거의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에 승부를 걸면 답이 안 나와요.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산과 관련된 이 분야만이 FTA와 상관이 없더군요. 아직 그네들이 산은 모르는 거지요. 우리나라는 국토의 70%가 산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무한한 자원이 널려 있다는 걸 그네도 모르고 우리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산에 FTA에서 살아남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제가 어릴 때부터 나물을 잘 알았습니다. 어렸을 때 나물을 먹고 싶으면 소죽 쒀 놓고 호미나 칼 들고 나물 뜯으러 다녔습니다. 그러면서 많이 배웠죠. 지금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풀이나 나무가 모두 나물이고 약입니다. 옛말에 소가 먹는 건 다 나물이라고 했지요.

 

- 산채원을 만들면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 고향에 내려와서는 마을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처음에는 고생도 많았습니다. 마을에서 호응도 안 해주고, 배운 놈이 여기서 뭐하냐고 형과도 사이가 틀어질 정도였습니다. 계속 노력해야 하는 문제지요. 저는 영농조합법인 사람들에게 소비자가의 95%를 책임져 주려고 합니다. 나머지 5%는 영농조합법인 운영비로 쓰고요. 그 정도 보장해 주지 않으면 절대 안 따라옵니다.
요즘 농촌은 저희 마을도 마을 분들 몇 분과 함께 같이 뭘 하려고 해도 모두 노인들뿐입니다. 예전에는 세 마을 합쳐서 150호가 넘었습니다. 저쪽 송단 1리는 조릿대가 많아서 예전에 국내의 복조리를 모두 만들던 곳입니다. 저도 어릴 때 무지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다 합쳐서 20호가 안 됩니다. 그나마 독거노인이 많아서 사람은 27명쯤 됩니다.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골짜기마다 있던 논밭이 다 묵었어요. 그래서 이곳 산골은 25~30년은 다 묵은 논밭입니다. 하지만 그게 자원입니다. 그런 땅은 비닐도 쓰지 않고, 농약도 치지 않고, 화학비료도 주지 않은 곳이지 않습니까. 말 그대로 청정 지역입니다. 더군다나 여기는 강원도처럼 골프장이니 스키장도 없습니다. 그게 얼마나 망쳐 놓습니까.
여기는 겹겹이 산이 둘러 있는데, 바로 옆은 곡성이고, 이쪽으로 넘어가면 담양, 저쪽으로 넘어가면 순천입니다. 이곳이 그 중간 지점이라는 것이지요. 그만큼 여기는 종이 다양합니다. 옛날부터 백아산에는 없는 게 없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살아 있는 동네입니다. 특히 이곳이 고려삼의 시배지이기도 합니다.
제가 이곳에 산양삼(山養蔘)을 많이 심었습니다. 예전에 장뇌삼이라고 아시지요. 그 이름의 어감이 좋지 않다고 이제 공식 명칭으로 산양삼이라고 바뀌었습니다. 삼씨가 1kg에 150만원입니다. 이걸 지금 이곳에 5ha를 심어 놓았습니다. 내년에는 정부 보조를 좀 받아서 20ha까지 늘릴 예정입니다.

 

- 산나물은 어떻게 기르시나요?
= 저는 웬만한 씨앗이나 나무는 다 산에 심습니다. 저희 집 뒤를 ‘가는골’이라고 합니다. 골짜기가 가늘게 길다고 가는골이지요. 길이가 한 1km 이상 될 겁니다. 지금 이곳을 정리해서 구석구석에 그동안 모은 산나물이며 산양삼을 잔뜩 심어 놓았습니다.
보통 밭에 산나물을 심으면 퇴비도 주고 어떻게 해봐야 금방 쇠서 뻣뻣해집니다. 하지만 이걸 산에 넣으면 베고 또 베고, 어떤 것은 5~7번까지 거둘 수 있습니다. 그만큼 시설을 하건 어떻게 하건 이런 곳보다 산에 들어가는 것이 좋다는 것이지요. 또 산에는 굳이 퇴비를 안 줘도 그 자체로 영양이 많아서 걱정 없습니다. 산흙 자체가 부엽토 아닙니까. 오히려 산에서 그걸 긁어다 밭에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요즘 왕겨나 톱밥으로 퇴비를 만드는데, 저는 그걸 믿지 않습니다. 왕겨는 다 농약치고, 톱밥에는 윤활유가 섞여 있으니까요. 그래서 삼을 심으려고 나무를 벨 때도 기계톱은 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직접 하는 게 좋습니다. 진짜배기로 농사지어서 대통령도 쉽게 먹을 수 없는 명품을 만들려고 한다면 그렇게 하는 거지요.

 

- 경운 같은 것도 필요 없나요?
= 경운은 따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처음에 한 번만 갈아주면 그대로 심고 끝입니다. 대신 풀을 매야 하니까 호미질은 해야지요. 사람들은 경운해야 하니 트랙터를 사라고 하지만 저는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산이 우거지지 않도록 관리도 해줘야 합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손대지 않으면 산이 우거져서 나물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런 문제는 솎아베기를 해서 자연스레 해결합니다. 이제 산도 우리가 가꿔 줘야 합니다.
중요한 건 나물의 특성을 알고 그에 맞는 조건을 갖춰 줘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서는 딱주라고 하는 잔대는 양지쪽에서 잘 자라서 정상 부분에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산나물은 황토는 별로 좋지 않습니다. 물빠짐이 좋은 사질양토가 가장 좋습니다.
풀이 많아 어떻게 하나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걱정 없습니다. 오히려 밭보다 관리하기가 더 쉽습니다. 밭 같은 경우 10번이고 20번이고 매려고 맘먹으면 매 줘야 합니다. 하지만 산은 1~2번만 매면 끝납니다. 그러니 면적이 넓어도 걱정 없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이 마을의 골짜기가 500ha 정도 되는데 그걸 제가 다 일구려고 합니다. 또 재 넘어 관음사 들어가는 곳의 땅은 절땅입니다. 그곳이 450ha인데, 그곳도 임대하려고 합니다. 그곳은 지금 우리 법인하고 다른 법인하고 함께 운영하기로 합의하고 계획을 세워 놨습니다.
또 정선 쪽에 사는 사람과 얘기해서 그곳에 산사랑 산채원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아무래도 기후에 차이가 있으니 여기는 빨리 나와서 빨리 사라지지만, 강원도 쪽은 이곳과 다른 때 나오지 않습니까. 또 장흥 쪽에도 얘기를 하고 있습니다. 겨울에 산채가 먹고 싶으면 장흥에서 해결할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1년 내내 도시 소비자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원칙은 제철 음식입니다. 제철이 아닌 때 억지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되는 시기가 다른 곳을 확보해 제철로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지금 산채원은 도시 사람들도 이걸 먹을 수 있도록 규모를 늘리고, 함께 할 수 있는 농가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 텃밭에 배추가 잘 자랐던데 비법이 있으십니까?
= 옛날에 농사짓던 방법을 따랐습니다. 옛날에 배추에 벌레가 끼면 불 때고 나온 재를 물에 섞어서 재운 다음, 위에 뜬 맑은 물을 배추에 줬습니다. 우리 배추에는 그래서 벌레가 하나도 없습니다. 또 벌레가 다 갉아먹었어도 이슬이 내렸을 때 재를 가지고 가 살살 뿌려 주면 한 일주일 정도면 다시 살아납니다. 지금은 일본이나 유럽에서 다 들여오지만, 이렇게 세계에서 유기농을 가장 잘한 것이 우리나라였습니다.
저는 고추를 기를 때 비닐을 치지 않습니다. 비닐을 치면 처음에는 잘 크지요. 수분도 잡아 주고, 햇볕을 받으면 더 따뜻해서 금방 크고 수확도 많습니다. 문제는 장마철에 비가 많이 오면 생깁니다. 꽉 막힌 상태이니까 온갖 병균이 그곳에 생깁니다. 그것 말고 저는 일체 화학제품을 쓰지 않습니다. 그런 원칙을 지키면 우리 옛맛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동네에서 고기를 잡을 때는 때죽나무 열매를 찧어서 물에 뿌립니다. 그럼 고기가 기절해서 둥둥 뜨지요. 그만큼 때죽나무는 좋은 살충제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그걸로 천연살충제를 만들어 보려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초피, 인진쑥, 때죽나무 열매, 소주를 섞으면 괜찮은 농약이 되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이런 걸 개인이 아니라 흙살림 같은 곳에서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리 : 김석기(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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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농업에서 배우자(33)-장흥 이영동 선생
토종 작물 육종하는 재미, 안 해본 사람은 모르지요



 

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는 전남 장흥군 용산면 쇠똥구리마을에 사는 이영동(56) 선생을 찾아뵙고 왔다. 선생께서는 약다산 자락에 자리한 농장에서 토종을 보존하는 일은 물론 ‘야생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란 단체도 이끌고, 쇠똥구리마을 추진위원장도 맡으며 바쁘게 살고 있다. “농민이 가장 훌륭한 육종가”라는 말을 몸소 실천해 여러 가지 실험과 도전을 하며 열성적으로 토종을 보존하여 토종농사의 귀감이 되고 있다.

 



 

- 토종 종자를 얼마나 보존하고 있으신가요?
= 모두 22작물 60여 품종을 재배하고 있습니다. 씨를 보존하려고 하는 정도라서 조금씩밖에 못합니다. 경제적으로 보탬은 안 되지만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죠. 옛날 고구마나 옥수수 같은 것만 봐도 맛이 좋습니다. 그런 뜻에서 보존하지 다른 뜻은 없습니다.

 

- ‘야생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은 어떤 모임인가요?
= 어릴 때부터 보던 논둑, 밭둑의 풀들이 없어지는 걸 보면서 이걸 재배해서 자원으로 이용할 수 없을까 해서 만든 모임입니다. 회원은 모두 16명이지요. 요즘 삭막해져 가는 정서를 야생화로 순화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 매년 전시회도 하고, 취미 삼아 그냥 합니다. 또 야생화는 다 약초가 됩니다. 이걸 재배하는 실험도 하고 있습니다. 이 지방에는 난대 식물부터 냉대 식물도 있습니다. 지역은 남쪽이지만 산이 800고지가 넘어서 그렇습니다. 야생화가 있다고 함부로 채취하지 않고 씨를 받아서 증식시킵니다.

 

- 보존하고 있는 토종 종자 가운데 특이한 것 좀 소개해 주세요?
= 먼저 적토미가 있습니다. 일본에도 붉은쌀이 있는데, 확실하진 않지만 고려 때 우리나라에서 적미가 일본으로 갔다고 합니다. 이 벼는 알이 작은데, 너무 끈적거리는 찰벼라서 꼭 다른 것과 섞어서 먹어야 합니다. 또 키가 아주 커서 가슴까지 자라서 잘 쓰러져요. 그래서 일반적으로 비료로 재배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맛이 아주 좋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성남 농협과 결연해서 모두 팔았는데, 일본에서 홍미가 들어오면서 올해는 취소됐습니다. 홍미보다 맛이 더 좋지만 홍미가 싸게 들어오면서 소비자들이 외면했지요. 이 일을 겪으면서 소비자에게 값으로 접근하기보다는 맛과 질로 홍보해야 팔린다는 걸 알았습니다.
또 다마금이 있습니다. 이건 1920년대부터 심던 것인데 아마 일본에서 왔을 겁니다. 상남 밭벼는 찰벼인데, 옛날에 결혼하는 날 이걸로 주먹밥을 해서 줬습니다. 이 쌀로 주먹밥을 하면 며칠 뒤에도 굳지 않습니다. 녹토미라는 것도 있습니다. 이건 극만생종이라 빨리 심어도 이모작보다 늦게 서리 맞고 벱니다. 껍질을 까면 쌀이 푸른색이지요. 흑미도 있는데 이 흑미는 일반 흑미보다 알이 작습니다. 그래서 모르는 사람은 까만깨인 줄 압니다. 이것도 아주 맛이 좋습니다. 속까지 다 검진 않지만 도정해도 조금 검은빛이 납니다. 이것 말고도 벼는 모두 10여 가지가 있고, 새로 육종하고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밖에 보리와 밀이 1종씩 있고, 콩 종류는 10가지 이상 있습니다. 콩 중에는 제비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건 한약재로도 쓰고, 옛날에는 주로 콩나물로 많이 먹었습니다. 1950년대부터 내려오는 노란 옥수수, 단단하고 바람이 잘 안 드는 조선무, 잘 타고 올라가 수확량도 많은 울타리콩 등도 있습니다. 요즘 중국에서 팥이 많이 들어오는데, 여기 있는 우리 것은 좀 어두운 붉은 색이지만 중국 팥은 선명하게 빨갛습니다. 제가 재배하는 토종 감자는 맛은 좋은데 좀 씁니다.
고추도 옛날부터 심던 것을 그대로 심습니다. 껍질이 얇아서 햇볕에 조금만 내놔도 잘 마릅니다. 먹으면 처음에는 사근사근하다가 나중에는 좀 매운 맛이 납니다. 이조는 어디서든 잘 크고 재배하기도 쉽습니다. 보통 조의 반 정도 크기밖에 안 합니다. 이건 방아를 안 찧고 그냥 먹을 수 있습니다. 토종 가지도 있는데 가지가 굵고 크지만 수량이 많지 않습니다. 개량종은 지금 그냥 먹으면 맛이 없지만 이건 지금도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개량종에 비해 토종이 줄기도 굵고 잎도 더 큰 편입니다.

 

- 특이한 벼가 많은데 논농사는 어떻게 짓나요?
= 요즘 벼는 다 농약과 화학비료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옛날에는 거름도 별로 없을 때라서 산풀을 베다가 넣었습니다. 그건 땅을 실하게 하지요. 봄에 모내기 전에 넣기도 하고, 보리를 베기 전에 그냥 갖다 놨다가 보리를 베고 물을 대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는 갈잎도 넣고 여러 풀도 넣었는데, 거기에는 무수한 성분이 들어있지요.
지금은 로터리로 위만 부드럽게 하는데, 그러면 밑에는 딱딱한 형성층이 생깁니다. 지금 논들은 조금만 파면 아래에 딱딱한 형성층이 있습니다. 이 층을 깨야 산소와 뿌리가 깊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지금 논의 구조를 보면 거대한 화분처럼 밑이 막혀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거기에다가 키 큰 벼를 심으면 다 쓰러져 버리죠. 그러니까 옛날처럼 깊이 쟁기질하고, 넓게 심으면 되겠지요. 토종은 토종 농법으로 해야 합니다. 형성층이 생기지 않게 깊이 쟁기질하면 뿌리가 깊게 뻗을 수 있습니다. 또 요즘은 지나치게 배게 심습니다. 그래서 통풍도 안 되고, 웃자라다 보니 쓰러짐에 약합니다.
제가 처음 트랙터를 배웠을 때인데, 솜씨가 서툴다보니 쟁기가 깊이 들어가 갈았습니다. 그러니 키가 커도 잘 쓰러지지 않고 수확도 많은 것을 경험했습니다. 솜씨가 좋아지면서 얕게 갈다보니 오히려 잘 쓰러지더군요. 그걸 보고 맛 좋고 질 좋은 토종 종자와 그에 알맞은 농법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지금 나온 신품종 농작물은 사람에게 길들여져 있고, 농약과 화학비료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논밭 구조도 현 신품종에 맞게 쭉 길들여져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 우리나라 농민들까지도 다 길들여져 있습니다. 그렇다고 신품종이 다 안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좋은 신품종도 많이 있습니다. 교배를 하면 할수록 야생성은 없어지고,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데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나의 고민도 거기 있고, 여러분의 고민도 거기 있는 것 아닙니까?

 

- 토종이 좋은 점은 무엇입니까?
= 앞에서 말한 것 말고도 토종은 키가 커서 자라기만 하면 얼른 주위를 장악해서 제초하는 노력이 덜 듭니다. 크게 잘 자라니 풀들이 힘을 못 쓰는 것이지요. 그래서 더 멀리 심어야 합니다. 개량호박이나 오이를 보면 넝쿨이 많이 안 뻗지만 조선 호박이나 오이는 엄청 뻗습니다. 또 토종은 씨가 많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 종자 보관은 어떻게 하시나요?
= 냉동고에 보관해보니 4~5년이면 잘 나지 않습니다. 나더라도 발아율이 엄청 떨어집니다. 저 같은 개인은 종자은행도 없으니 해마다 재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많이는 못하고 조금조금씩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해마다 심습니다. 예전에 잠깐 다른 데 나갔다 왔는데 철을 놓쳐서 한 20여 종을 잃어버린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한 번 잃어버리면 얼마나 안타깝고 서운한지 모릅니다. 진짜 맘이 아픕니다. 어디 가서 씨앗 하나만 구하면 참 재미가 있어요.
논을 다닐 때도 특이하게 자란 것이 있으면 눈여겨보며 지나다닙니다. 이것저것 가져다가 육종하면서 제가 생각한대로 나오면 참 재밌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뭐하냐고 해도 저는 너무 재밌어서 그것만 쳐다보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이걸 욕심 같아서는 다른 것도 더 많이 하고 싶지만 여건상 힘들어서 참습니다.

 

- 마지막으로 저희에게 하고 싶은 말씀은 없으신가요?
= 농촌 현실이 어려워 지금은 빚 없는 집이 없습니다. 기회만 되면 땅이라도 팔아서 빚 갚으려고 하는 실정입니다. 그러다 보니 농심은 어디 가고 돈이 되면 무슨 짓이든 다 하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농심이 변했지요. 그게 제일 어렵습니다. 토종이 아직은 현실에 맞지 않지만 이제부터는 슬슬 기회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맛을 우선시하는데 토종의 맛은 신품종이 따라올 수 없습니다.
60~70년대 산업화되면서 도시로 나간 사람이 많아요. 저도 친구 따라서 서울에 갔지만 6개월 살고 내려와 버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옥수수, 고구마 맛 때문인 것 같아요.
토종 농작물은 우리 조상들과 함께 해온 식물이고, 우리 조상들이 먹고 살아온 작물입니다. 그중에 희로애락도 있을 것이고, 많은 토종 농작물에 대한 사연도 있고, 문화도 농심도 있습니다. 몇 천 몇 백 년 내려온 씨앗들이 60~70년대 산업화되면서, 농사도 돈벌이로 전락하면서 수확을 많게 개발하다 보니까 맛은 없어져 버리고, 땅은 땅대로 버렸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옛날 맛과 땅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토종 농작물의 장점은 너무나 많습니다. 이 땅에 알맞기 때문에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야생성이 강하고 원종에 가깝기 때문에 병충해에 강하고 어느 토양이나 기후에도 적응성이 강해서 농약이나 화학비료가 필요 없습니다. 또 키가 크고 무성하게 자라기 때문에 잡초도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도 새로운 신품종들이 수없이 많이 나오지만 맛은 토종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단점은 현실 농업에 맞지 않습니다. 키가 크기 때문에 쓰러짐에 약합니다. 또 수확량이 적습니다. 수확량이 적고 현실 농업에 맞지 않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 때문이 아닐까요?
토종 농작물은 미래의 농업 유전자원으로 보존되어야 하고, 재배도 많이 해야 합니다. 덧붙여 자연의 문제는 자연을 이용해서 자연적으로 해결하는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아무튼 흙살림에서 이런 운동을 한다니 정말 반갑고, 더운 날씨에 이곳 먼 구석까지 찾아 준 여러분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정리 : 김석기(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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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농업에서 배우자-횡성 송래준 선생

 

“말로는 소용없어요. 직접 몸으로 깨우쳐야지요”


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 구술취재팀은 강원도 횡성군 어답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는 ‘토종왕국’의 송래준(84) 선생님을 찾아뵙고 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이곳에 들어와서 토종종자를 가구며 보급하고 지금은 산을 일궈 나무와 산나물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젊은 사람 못지않게 미래를 내다보며 정력적으로 농사지으며 살고 계십니다.


- 지난번 자운 스님을 통해 선생님께서 토종 종자를 많이 가지고 계신다고 하여 말씀을 들으러 찾아왔습니다. 주로 어떤 농사를 지으시나요?

= 지금 농촌 현실이 아주 어렵습니다. 정부에서 운영하는 농협에 평균 4~5천만 원 정도 부채가 있지 않을까 해요. 사정이 어려워서 땅을 내놓고 싶어도 노 대통령이 거래를 막아서 팔려고 내놓아도 거래가 없어요. 이제 농촌에서 쌀이나 고추 농사지어서 빚을 탕감하기 힘들어요. 나는 그래도 우리가 살 수 있는 구멍은 있지 않을까 합니다. 내가 그런 것을 종종 자문해 주고 하지요.

지금 토종은 내가 나눠 준 곳이 전국에 100여 농가에서 그 이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라남북도부터 경상남북도까지 다 줬어요. 원래는 여기 밭이 다 곡식으로 꽉 찰 정도였지요. 지금은 다 나눠주고 나는 그걸 안 합니다. 내가 보급한 종자가 이미 나한테는 끝이 난 겁니다. 이제 그건 내가 안 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난 새로운 것을 찾아서 보급해야지요. 나는 항상 내가 안 하던 거, 새로운 거를 연구합니다.

내가 내일 죽더라도 몸을 움직여서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할 겁니다. 내가 부지런만 떨면 열 명이 먹고 살 수 있는데 게을리 있을 수 없지요. 내가 지금 바라는 것은 딱 하나 있어요. 여기에 연구소를 하나 만들려고 해요. 토종부터 산채까지 모든 것을 연구하는 거지요. 자연에서 나서 자연에서 큰 것을 가지고 사람이 식생하는 방법이며 모든 것을 연구하려고 합니다. 혼자 앉아 있으면 못할 일도 너댓만 앉아 있으면 호랑이 데리고 못된 놈들 다 때려잡을 수 있습니다. 서로 머리를 맞대면 못할 일이 없어요.


- 지금은 농사짓지 않으신다면 산나물 같은 것은 채집하시는 건가요?

= 아니지요, 농사를 짓습니다. 그걸 나는 산에다가 하는 거지요. 왜 농사지으면서 누구는 비료를 넣고, 누구는 퇴비를 넣고 그러잖아요. 나는 산에서 부엽토로 하면 돈분보다 낫지 않을까 생각해서 그렇게 한 것이지요. 산에다 장뇌삼도 하는데, 확실히 사람 손을 덜 탄 것이 맛이 달라요.

지금 산에 집중적으로 하는 것은 30여 가지입니다. 엄나무, 오갈피, 오미자, 더덕, 헛개나무, 당귀, 산작약 같은 것이 있지요.


- 장뇌삼을 재배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으신가요?

= 나는 여러 가지 실험을 많이 합니다. 장뇌삼 씨를 바위 밑에도 뿌리고 나무 밑에도 뿌리고, 수분 있는 데에도 뿌리고 건조한 데에도 뿌려 봅니다. 그렇게 여기저기 심어 놓고 관찰하는 거지요. 그래서 특별나게 잘 나는 곳에는 집중적으로 심고, 그런 곳이 아니면 그냥 더덕을 심던지 하지요. 더 자세한 것은 여기서 말로 설명 드릴 수는 없습니다.

아무튼 나는 여기 저기 심어보고 1년 뒤에 뽑아서 살펴보고 잘되는 곳에다만 합니다. 덮어놓고 아무 데나 막 심으면 안돼요. 그렇게 하다가는 앞서 가는 사람한테 항상 떨어져요. 남보다 앞서는 것을 만드는 것이 농민이 할 일입니다.


- 여기서 평생 농사만 지으며 사신 건가요?

= 내가 열서너 살에 조실부모하고 어려운 시절을 살았지요. 여기서 농사지은 것으로 누가 먹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합니다. 저번에 텔레비전에서 보니까 애들이 빨리 개학해서 급식을 타 먹으면 좋겠다는 뉴스가 나오더군요. 그런 일이 없어야 합니다. 내가 조금만 더 노력하면 열 사람은 굶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으로 여기서 농사지으며 산 지가 19년째입니다. 그전에는 남도 속여 먹기도 하고, 참 나쁜 짓도 많이 했지요.


- 입구에 벌통이 많던데 통마다 돌을 쌓아서 막아 놓은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 내가 여기에 들어올 때 처음에 벌을 조금 가지고 들어왔어요. 그게 늘어나서 지금은 한 250개 됩니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벌을 키워 보니 그래요. 벌 한 통을 아끼고 소중히 생각하고 돌을 쌓아 주며 애를 쓰니, 지들도 그걸 아는지 잘 자라요. 처음에는 그렇게 돌을 쌓아 준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이게 바람도 막고 편안하게 만드는 효과도 있는 것 같습디다. 또 이걸 저기로 차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고는 여기는 뭐 특별한 것이 있나 하면서 옵니다. 그렇게 와서 꿀도 많이들 사갑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만 그걸 보면 남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올해는 나무를 파서 옛날 재래통을 더 만들고, 위에는 짚으로 지붕을 씌우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지금은 대충 설계만 하는 식으로 하는 이야기고, 제대로 들으려면 2주는 있어야 해요.


- 아까 산에 30여 가지를 한다고 하셨는데 그중에서 소득이 되는 것이 있나요?

= 소득이란 것은 이렇습니다. 30여 가지를 하면 어디선 손해를 보는 때도 있고, 어디선 이득을 보는 때도 있는 겁니다. 그렇게 균형을 맞추는 것이지요. 아무리 못하더라도 열이면 열 식구가 먹고 살 것은 나옵니다.

나는 이렇게 여러 가지를 하기 때문에 그런데, 한 가지만 밀고 나가면 그렇게 할 수 없어요. 한 가지만 하면 안 되고 수십 종류를 하면 먹고 살 것은 나옵니다. 이런 곳에서 어디 기대지 않고 열심히 살면 올바른 사람이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며 살지요.


- 이제 토종 곡식은 가지고 계신 것이 하나도 없나요?

= 자주 감자가 있어요. 이건 내가 하동에서 장에 가니 하나에 200원에 쪄서 팔아요. 그걸 사서 먹어보니 팍신팍신한 것이 참 맛있어요. 그래서 이걸 5천원어치 샀어요. 올해 이걸로 농사지으면 내년에는 열 가구가 심을 수 있을 겁니다. 감자는 눈이 하나인 것만 골라서 하나를 서너 개로 잘라서 심고, 눈이 여러 개 붙어 있는 건 파 버립니다.

다른 인상적인 것은 없어요. 이미 다 내 손에서 떠났어요. 나는 옛날 선조가 하던 건 무조건 보존해야 하지 않느냐고 생각합니다. 그걸 보존할 때는 절대 비료를 주던 곳에는 하지 말라고 합니다. 만약에 그런 곳이면 최소한 3~4년은 묵혀야 합니다. 비료, 농약기가 있으면 헛고생만 하는 겁니다.

토종은 산에서 3년만 지나면 토종이 됩니다. 나는 산에다가 퇴비도 안 주고 그대로 심어요. 이런저런 실험을 해서 작년에는 고추도 산에 심고, 그전에는 콩도 심어보고 이것저것 심어 봤습니다. 올해는 더덕을 한 자짜리를 만들려고 합니다.

한번은 산에 상자를 가져다가 박아 놓고 거기에 감자를 심으니 아주 좋아요. 그건 비가 와도 쓸려 내려가지도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요. 관리하기도 편하고.


- 하동이면 여기보다 남쪽인데 거기서 가져온 감자가 여기와 기후가 맞을까요?

= 기후는 크게 상관없습니다. 나는 장날 다니다가 특별한 것만 보이면 사다가 심어 봅니다.


- 산나물 가운데 특별히 아끼는 것이 있으신가요?

= 열 손가락 가운데 버릴 것이 하나 없습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서로가 균형을 맞춥니다. 전체가 다 남으면 팔자 고치지요. 여러 가지를 하는 게 좋습니다. 나는 할 수 있으면 많은 면적에 다양하게 심으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땅에는 욕심을 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 가지 심을 수 있지요.

어떤 분이 나한테 취 씨를 보내주셨는데, 올해 이걸 심어서 3년 뒤에는 취 밭을 만들 겁니다. 이걸 3자 간격으로 심으면 3년이면 취 밭이 됩니다. 산에 가서 풀이 없는 곳에 뿌려 놓으면 2년이 지나면 씨가 앉아서 그게 떨어져 저절로 자랍니다. 그럼 밭이 되는 거지요. 최대한 노임을 안 쓰고 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남의 집 일하고 쌀 한 말 받기도 어려웠는데, 지금은 먼저 차가 있냐고 물어봐요. 돈은 얼마냐 6시 땡 치면 차로 집에 데려다 줄 수 있느냐. 그만큼 사람이 없어서 그런 겁니다. 그러니 최대한 노임을 안 쓰고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지요.

또 낙엽을 긁어내고 거기 더덕 씨를 넣어요. 이것도 3자 간격으로 또 낙엽을 긁어내고 심습니다. 그럼 낙엽을 모아 놓은 곳에도 더덕이 자라서 더덕 밭이 됩니다. 오히려 낙엽을 긁어모아 놓은 곳이 그것이 썩으면서 거름이 되어 더 잘되지요.

지난번에는 어떤 아주머니가 와서 질경이 좀 없냐고 찾아서 내가 좋은 놈만 가져다가 쭉 심어 놨어요. 이제 조금 있으면 거기는 아예 질경이 밭이 될 겁니다.


- 마지막으로 저희에게 해주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 부모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식들한테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여기에 이렇게 자리를 잡으니 큰며느리가 아버님은 몇 십 년 앞을 내다보는 사람이라고 합디다. 자기들이 나를 챙겨야 하는데 거꾸로 내가 자식들 노후 대책을 만들어 줬다고요.

나는 어디에서 강의해 달라고 하면 절대 안 합니다. 대신 경험담을 이야기해 달라고 하면 하지요. 강의는 교수님이나 전문가가 하는 것이고, 나는 내가 경험한 것만 이야기합니다. 책도 소용없고 내 말도 소용없어요. 직접 자기가 몸으로 해서 깨우쳐야 합니다. 말로 하면 없는 떡도 만들어서 전체가 먹고 살 수 있게요. 그러니까 직접 하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덮어 놓고 말로 벌을 이렇게 하쇼, 농사를 이렇게 하쇼 하는 건 다 소용없어요.

그동안 미친놈 소리도 들으며 참 외롭게 살았지요. 여러분처럼 주변에서 같은 뜻을 가지고 있는 분이 있으면 외롭지 않을 겁니다.

<정리 : 김석기(흙살림 전통농업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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