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728x90
728x90

지난 9월 4일 농촌진흥청 벼 연구소를 방문하여 실험 논을 보았습니다.

8만 5천 평의 면적에 10만 종의 벼가 있다고 하더군요.

아래의 사진을 보시면 대략 그 규모가 짐작이 되실려나요?

 

 

원래는 11만 평에 가까운 넓이였다는데 도시가 개발되면서 길로 잘리고 뭐하고 하다가 이렇게 줄었다고 합니다.

과연 1906년 일본이 주도하여 건립된 권업모범장다운 규모입니다.

농진청에서는 2006년 설립 100주년 기념식을 거행했는데... 모르겠습니다. 엄밀히 말하여 정통성을 따지자면 해방 이후부터 따져야 하는 것이 아닌지...

아무튼 이곳에서 다양한 벼를 볼 수 있어 재밌었습니다. 토종 벼도 꽤 있는 듯했으나, 그건 내일(9월 13일) 다시 한 번 찾아가서 더 보도록 하고(그나저나 비가 오지 않아야 할 텐데요...) 먼저 새로 육종한 신품종을 중심으로 살펴보지요.

 

먼저 동진1호입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동진강 근처의 시험장에서 육종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직파에 알맞다고 하니 건답직파를 원하시면 이 벼를 이용해 보시는 것도 좋겠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추청(아끼바리)입니다. 도열병에 약하다는 단점이 있었네요.

 

 

 

다음 남평. 이것도 전라도 쪽의 지명에서 따왔네요.

 

 

 

 

 

일미는 맛이 좋다는 뜻에서 붙였다고 합니다.

 

 

 

일품도 '정말 일품이네'라는 말에서 왔지요.

 

 

 

동진을 더 개량한 신동진입니다.

 

 

 

이 화영이란 벼는 이삭이 정말 탐스러웠습니다. 화영華榮일지 무엇일지 모르겠는데, 이삭만 보면 정말 화려합니다.

 

 

 

철원 오대쌀로 잘 알려진 오대벼입니다. 조생이라더니 이날 벌써 가장 먼저 누렇게 익어가고 있더군요. 어제 김성훈 전 농림부장관 님의 말씀을 들으니, 2년 전 이 오대벼의 쌀겨가 캐나다 밴쿠버에 수출되어 100g에 5달러에 팔리고 있었답니다.

 

 

 

다음은 칠보입니다. 최고품질이란 글자가 보이시나요? 가장 뛰어난 맛을 보여주는 벼에게만 주어지는 최고품질을 획득한 품종입니다.

 

 

 

호품. '품질이 좋다'는 뜻일까요? 이 벼는 수확량이 엄청나서 300평에 600kg까지 나온다고 합니다. 참으로 엄청난 육종 기술입니다. 더구나 밥맛도 최고품질이라고 하니 말 다했지요. 앞으로 이 벼가 우리나라의 들녘을 차지할 날이 머지 않았습니다. 안 그래도 벌써 추청 대신 호품이 서서히 그 재배면적을 넓혀 가고 있다고 하네요. 일본에서 들어온 고시히카리, 아키바리 등등의 벼가 이제 우리 기술로 육종한 벼로 바뀔 날이 왔네요.

이건 여담인데, 이곳에서 연구하고 있는 분들은 이명박 대통령의 녹색 정책을 별로 달가워하지 않더군요. MB라고 부르며 호품처럼 좋은 벼를 육종해도 걱정이랍니다. '아니 이렇게 수확량이 많은 벼를 개발하면, 안 그래도 쌀이 남아 도는데 어쩌란 말이냐!'고 한 소리 듣고 있답니다. 농업정책이 산으로 가나 봅니다. 머릿속에 "돈"만 들어 있는 사람들이 어찌 국가의 요직에 앉을 수 있는지... 국민의 먹을거리와 교육, 의료는 적어도 100년은 내다보며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몇 년 앞만, 코 앞의 돈만 생각하는 인물들을 가려서 뽑아야겠습니다.

 

 

 

오대벼에 이어 운광이란 품종이 육종되었습니다. 오대와 같이 조생에 추위에 강한데다가 최고품질의 맛을 보장합니다. 서서히 철원 오대쌀도 철원 운광쌀로 바뀌지 않을까 예측해 봅니다.

 

 

 

다음은 미광입니다. 이건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어서 설명을 잘 듣지 못했습니다.

 

 

 

다산 정약용의 다산이 아니라, 多産입니다. 얼마나 벼가 많이 나는지 특성도 초다수라고 적혀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한달 뒤(6월 25일)에 심은 똑같은 다산인데, 곤파스란 태풍에 스르륵 쓰러져 버렸습니다. 참, 농진청에서 그러는데 벼를 심는 가장 좋은 시기를 5월 25일 무렵이라고 하더군요. 옛날 농사에서는 6월 25일쯤이었지요. 그때는 밀보리 이모작도 해야 하고, 지하수를 뚫어서 쓰는 게 아니라 빗물을 기다렸다가 모를 내야 하니 장마가 찾아오는 무렵인 그때가 가장 적기였습니다.

 

 

 

다음은 한마음입니다. 이 벼도 '초다수'입니다.

 

 

 

가만히 벼에 대한 설명을 듣다 보니 이런 노란 줄이 눈에 띄었습니다. 바로 벼를 심는 줄 간격입니다. 못줄을 하나만 띄워도 두 개를 쓰는 효과를 낼 수 있겠네요. 그만큼 더 반듯하게 더 빨리 모내기를 마칠 수 있겠습니다. 이곳은 실험 논이다보니 모든 벼를 손모로 심는다고 합니다.

 

 

 

현미 전용으로 나온 백진주입니다. 껍질을 벗기기 쉽겠네요.

 

 

 

설명을 들으며 나아가다가 발견한 거미입니다. 실험 논에는 농약도 거의 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검은 껍질의 흑설입니다. 검은 눈이란 뜻이겠지요. 이름을 재밌게 잘 지었네요.

 

 

독특한 색이라 한 장 더 찍어 보았습니다.

 

 

 

다음은 쌀에서 향이 난다는 미향입니다. 향기나는 쌀을 처음 맛본 건 김포의 자광미로 지은 밥을 먹을 때였습니다. 그곳에 취재를 갔을 때였는데, 마침 밥이 있다며 주셨지요. 한 입 먹어보고 얼마나 맛있었는지 그냥 몇 숟갈 정신없이 퍼먹었습니다. 그때의 맛이 각인되어 지금 다시 떠올려도 입안에 침이 고입니다. 이 벼도 한 번 먹어보고 싶네요.

 

 

 

마지막으로 목우입니다. 소를 키우는 벼라는 뜻입니다. 과연 키가 엄청납니다. 저보다 조금 더 크니 2m나 되더군요. 만생인데 이제 이삭이 조금씩 패고 있었습니다. 이삭은 잎의 중간쯤 되는 곳에서 패고 있었습니다. 참 독특한 벼를 육종했네요. 앞으로 벼 수확량이 너무 많다고 난리치면 그냥 논에다 이 벼를 심어서 사료용으로 수확하고, 그걸로 먹여서 살찌운 소나 먹어야 할까요?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어지러운 세상입니다.

 

 

 

나오는 입구에 마침 몇 종류의 옛날 벼가 있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그걸 마저 보고 마치겠습니다.

 

먼저 다마금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에서 많이 심던 벼입니다.

흔히들 이 벼가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토종으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본이 새로 육종한 품종입니다.

일본 도쿄 근처에 보면 多摩川이 있는데 그곳 어딘가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만, 정확한 건 아직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일본식으로 부르면 '다마니시키'라고 합니다.

옛날 벼의 특징이라면, 첫째 까락이 있는 것들이 많다. 둘째 잘 쓰러진다. 이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 첫째는 새의 피해를 막기 위함이 아닐까 합니다. 또 둘째는 화학비료가 없던 시절, 그에 적응한 벼가 화학비료의 맛을 보고 쭈욱 엄청 자라버리기에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다마금의 이삭이 잘 보이시죠? 저 까락이 수확하고 관리하는 데에는 불편하지만 새들을 막는 좋은 무기가 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이번에 기장과 조를 심었는데, 기장은 참새에게 거의 먹혔지만 조는 그렇지 않더군요. 둘의 차이는 바로 수염이 있냐 없냐였습니다. 거기에서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 까락은 괜히 있는게 아니구나... 새에게 먹히는 걸 막고자 생긴 거구나... 옛날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관리하기 어려운 까락을 괜시리 두었을까? 바로 새 때문일 수도 있겠다...

 

 

 

다음은 은방주입니다. 긴보즈銀坊主도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에 도입된 품종입니다. 아무튼 이것도 옛날 벼인 만큼 화학비료 냄새만 맡아도 엄청 자라기에 잘 쓰러진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거꾸로... 화학비료를 주지 않는 곳이라면 오히려 더 좋지 않을까요.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무조건 좋은 것도, 무조건 나쁜 것도 없습니다. 벼의 특성을 알면 그걸 이용해서 그에 맞는 조건에다 활용하면 될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조동지입니다. 이 벼야말로 진정한 토종이라 할 수 있지요. 일제강점기 농사시험장에서 우리나라의 토종 벼를 싸그리 조사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조선 중부 이하의 전역에 걸쳐 가장 많이 심던 벼가 바로 이 조동지였습니다. 동지란 벼슬을 가진 조씨가 누구였는지 몰라도, 그 사람이 소유한 논에서 육종이 된 것일까요? 그 기원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이 벼는 일제가 들여온 은방주, 다마금과 달리 조선사람들이 가장 널리 심던 벼입니다.

 

728x90
728x90

인도의 전통 축산업 - 코란가두

 

 

 

몇 백 년 전에 탄생한 인공 꼴밭

 

서인도해에서 발생한 남서 계절풍은, 서西가트산맥의 서쪽에 많은 비를 뿌린다. 하지만 산맥에 가로막힌 동쪽의 타밀-나두주는 연간 강수량이 600~675㎜밖에 안 된다. 홍토紅土와 모래 토양으로 보수력도 떨어지고, 1㎢에 평균 인구밀도는 256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지역에서도 사람들은 지속가능한 농업을 발생시켜 왔다. ‘코란가두Korangadu’라고 부르는 전통적인 목축업 체계가 그것이다.

 

 

타밀-나두주. 

 

타밀-나두주州는 30개 현縣으로 이루어졌는데, 카룰현Karur縣, 이로데현Erode縣, 코임바토레현縣, 딘디굴현Dindigul縣 등 500개 이상의 마을에 꼴밭이 있고, 모든 면적은 약 5,0000㏊에 이른다. 코란가두는 현지 타밀어로 ‘식생이 자연 발생하는 농사땅을 갈아엎지 않고 남겨 놓는 것’을 뜻한다. 몇 세기 이전부터 다라푸람Dharapuram과 칸가얌Kangayam 지역의 농민들은 건조한 기후 조건에 알맞은 작물을 재배해 왔다. 그리고 식생이 자연히 재생되도록 농사땅의 일부를 묵혔다. 묵히는 땅에는 비가 내리면 자연히 식생이 자라고 콜루카타이Kolukattai란 풀이 우선종優先種이 되었다. 농민들은 이 묵히는 땅에만 가축을 들이고 농사땅에는 들이지 않았다. 그 뒤 이 농사짓지 않는 땅이 집짐승을 놓아먹이기에 아주 알맞은 곳으로 바뀐다. 그래서 다른 가축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시가 있는 떨기나무를 키워 울을 삼고, 물루 킬루바이Mullu Kiluvai(Commiphora berry)로 꼴밭을 구분했다. 이와 같이 한해살이풀과 여러해살이풀을 포함해 풀과 콩과식물 및 나무로 된 3층 구조의 인공 생태계가 탄생했다.

 

 

콜루카타이. 이삭가시풀 종류이다.

 

 

화학비료 없이 방목지를 유지

 

먼저 코란가두의 꼴밭이 지역의 기상 조건을 얼마나 잘 활용한 것인지를 살펴보자. 이 지역에서는 비에 따라 크게 세 계절로 구분된다. 연간 강우량의 20%가 내리는 더운 여름(2~5월), 그리고 남서 계절풍(6~9월, 30%)과 북동 계절풍(10~1월, 50%)의 시기이다.

 

코란가두 꼴밭을 개발하는 일은 여름철에 땅을 갈아엎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푸라타시Purattasi(9월)~입파시Iypassi(10월)에 콜루카타이풀을 심는다. 씨앗은 약 37㎏/㏊면 충분하고, 이미 완성되어 있는 꼴밭에서 타이Thai(1~2월)의 시기에 수확한 것을 쓴다. 풀의 밀도는 18~25포기/㎡이다. 땅심을 더 늘리고자 앞서가는 농가는 영양가가 높은 콩과식물 나리파야루Naripayaru(Phaseolus trilobus)과 콜루Kollu(Dolichos biflorus)의 씨앗을 각각 약 25㎏/㏊의 비율로 섞어서 흩뿌린다. 풀을 파종하고 나서 1년은 방목하지 않고, 2년째부터 방목한다. 그리고 2~3년이 지나면 흙의 통기성과 습도를 보전하고자 다시 갈아엎는다. 2~3년 이상이나 가뭄이 계속되고 풀의 상태가 나빠지면, 농민들은 콜루카타이의 씨를 다시 뿌린다. 그리고 5월과 9월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면 풀은 싹을 틔운다. 하지만 일정 키로 자라기까지 약 1개월은 꼴밭에 가축을 들이지 않는다. 그 뒤 6월 중순~9월 중순까지, 그리고 북동 계절풍으로 풀이 자라는 10~1월은 목초만으로 가축을 기른다.

  

나리파야루 표본. 

 

 

콜루.

 

곧 적어도 8~10개월은 목초만으로 가축을 기르는 것이다. 게다가 먹이의 씨앗은 가축의 똥을 통해 자연히 파종되고, 가축 똥의 양분이 재활용되기 때문에 꼴밭은 화학비료를 주지 않아도 자연히 유지된다. 다음의 3~6월에 걸쳐서는 꼴밭에 풀이 없다. 여름철에도 예외적인 비가 내릴 경우를 제외하고 풀은 거의 자라지 않는다. 이 때문에 농민 가운데는 12~1월에 자란 풀이 아직 푸를 때 베어서 제철이 아닐 때 먹이로 주는 사람도 있다.

 

상층에는 현지에서 벨벨 마람Velvel maram이라 부르는 아카시아(Acacia leucophloea) 등의 나무가 산다. 아카시아는 6~7년으로 열매를 맺고, 7~8년이면 다 자란 나무가 되고, 여름철에는 해마다 40~50㎏의 씨를 맺는다. 꼬투리는 조단백질을 14.86% 함유하여 이것도 가축의 좋은 먹이가 된다.

 

 벨벨 마람이 제공하는 그늘 아래 모인 가축들.

 

소와 양은 꼬투리를 먹는데, 이 씨앗은 소화되지 않아 똥으로 나와 퍼진다. 또 꼬투리는 2~4월에는 땅으로 떨어지는데, 이 꼬투리를 방목지에서 모아 제철이 아닐 때 먹이로 쓴다. 알비지아 아마라Albizia amara(우실라이Usilai) 등의 다른 사료 나무가 자라는 경우도 있다. 어린 양을 먹이려고 수수씨를 섞은 것도 있는데, 양은 아침마다 이러한 혼합물을 0.5㎏ 먹는다.

 

알비지아 아마라 꼬투리. 

 

코란가두의 꼴밭이 있는 기상 조건에서 자연 식생은 아카시아로서, 낮에는 가축이 쉬는 그늘도 제공한다. 하지만 꼴밭 안의 아카시아 수는 30~35그루/㏊밖에 없다. 이것도 목초의 생육을 방해하지 않도록 농민의 지혜로 산출한 최적의 수로, 인공적으로 만든 식생이다. 인공 방목장에 풀이 있는 시기에 방목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행해진다. 그리고 각 방목지에 설치한 돌과 시멘트로 만든 통에 마을에서 자전거와 달구지로 가져온 물을 준다. 하지만 가축은 자유롭게 돌아다니지는 않는다. 너른 꼴밭도 있지만, 대개의 꼴밭은 생울타리와 가축이 들어가는 작은 대나무 문에 의해서 1~2㏊ 넓이의 방목장으로 나뉘어 있다.

 

이 울타리를 만드는 데에 쓰이는 것이 가시나무인데, 가뭄에 내성이 있는 물루 킬루바이Mullu Kiluvai(Commiphora berry)이다. 생울타리는 1.5m 높이, 0.6~0.75m 너비인데, 대부분의 방목장에서는 습기를 보존하고 생울타리의 활력을 유지하려고 울타리를 따라서 얕은 도랑을 파 놓았다. 또 생울타리의 지지대로서 아자디라츠타 인디카Azadirachta indica와 알비지아 아마라Albizia amara가 심어져 있는 곳도 있다. 이 생울타리도 아니Ani(6월)~아디Adi(7월)에 길이 120㎝, 두깨 3㎝의 물루 킬루바이의 그루터기를 30㎝ 정도 구덩이를 파고 심어서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다. 생울타리를 만드는 데에는 약 75명/㏊의 노동력이 든다. 꺾꽂이한 것이 생존하여 활착하는 것은 계절풍이 시작되는 9~10월인데, 해마다 말랐던 곳에 새롭게 묻어서 심어야 한다. 하지만 생울타리에 쓰인 식물도 약용 식물로 쓰여 민간요법에 도움이 되고, 알비지아 아마라Albizia amara의 잎과 꼬투리는 천연의 머리카락 영양제가 되어 농민이 추가 수입을 올린다. 또 때로는 민나마람Minnamaram(Premna serratifolia)과 같은 식물종도 자생하는데, 이 가지는 잘라서 현지에서 아투파티Attupatti라고 부르는 양의 축사를 만드는 데 쓴다.

 

민나마람.

 

 

토종 가축을 보전

 

전통적인 꼴밭에서는 농민들에 의해서 다양한 토종 가축이 보존되어 왔다. 소로는 ‘칸게얌Kangeyam’ ‘풀리쿨람Pulikulam’ ‘말라이마두Malaimadu’, 양으로는 ‘쿠룸바이Kurumbai’ ‘마일람바디Mayilambadi’, 거기에 토종 물소와 염소도 계승되어 왔다. 그중에서도 특징적인 것은 ‘칸게얌’이란 종일 것이다. 이 소는 1900년대에 나타카다유르Nathakadayur 마을의 칸게얌에서 팔라얌코타이Palayamkottai(Nallathambi Sarkarai Mandradiar)의 파타가르Pattagar 일족이 마이소르Mysore의 ‘암리트마할Amrithmahal’과 ‘힐라리Hilari’란 종을 교배하여 육종했다. 이 소는 가뭄에 강하여 우물에서 물을 긷거나 건조한 땅을 갈아엎는 일에 활용되고, 타밀-나두주의 칸게얌, 다라푸람, 벨라코일Vellakoil, 칸게얌 티루푸루Thirupur, 팔라니Palani, 카룰Karur, 페룬투라이Perunthurai, 아라바쿠리치Aravakurichi의 각지에서 농민들이 사육해 왔다.

 

칸게얌.

 

 암리트마할.

 

누구나 떠받치는 토지제도

 

코란가두 꼴밭은 각 농가의 사유지이고, 소유하는 농민은 5만 명 이상에 달한다. 또 방목장의 규모는 각 개인의 경제 상태에 따라 1.5~10㏊의 넓이다. 평균하면 3㏊에 2~3마리의 소, 1마리의 물소, 12~15마리의 양을 사육하고 있다. 4㏊의 코란가두 꼴밭은 2마리의 다 자란 소와 2마리의 송아지, 또는 40마리의 양이나, 5마리의 물소, 20마리의 염소를 유지하는 데에 충분하다. 농민들은 다른 지역처럼 배합사료로 기르는 가축에서 보이는 영양불량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가축에게 좋은 영양이 되는 많은 자연 사료가 있기 때문이다. 젖은 수입원이 되고, 거세우로 팔기도 한다. 숫양도 팔고, 암양은 2년에 3마리의 새끼양을 낳기에 이것도 수입원이 된다. 2㏊의 꼴밭에서 1마리의 소, 1마리의 물소, 20마리의 양을 사육한다면, 10년에 10,2000루피(4000달러)의 순익을 올릴 수 있다.

 

또 너른 방목장을 소유하고 있어도 가축은 몇 마리밖에 없다. 또는 은퇴하거나 경작지를 줄이고 도시에 사는 유복한 농민은 토지가 없는 농민에게 1년에 5000루피/2㏊를 받고 빌려준다. 또 5,0000루피로 ‘오티Othi'라고 부르는 축사에 장기 방목 계약을 할 수 있기도 하다. 토지가 없어 땅을 빌리는 농민이 양과 같은 가축을 기를 때 소유자에게 종신토록 빌리는 경우도 있다. 이것도 2㏊의 방목장에 5,0000루피(약 1120달러)를 지불하고, 계약을 맺어 2~5년에 무이자로 갚아 나아간다. 이 때문에 토지가 없는 농민과 농업노동자도 소, 물소, 양, 염소를 사육할 수 있고, 농지가 없는 가족도 꼴밭을 써서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

 

 

바람직한 전통의 부활

 

이처럼 코란가두는 어느 마을 사람에게나 인정받는 우수한 체계다. 하지만 지금은 위기에 직면해 있다. 현재는 전통적 꼴밭 체계를 정부의 유역 개발계획에서도 취급하지 않는다. 칸게얌 소를 늘리기 위한 보조금도 이전에는 있었지만, 축산 당국은 이 사업을 폐지해 버렸다. 칸게얌 소가 생산하는 우유의 양은 적다. 또 낙농업이 확대되어 더 많은 젖을 얻을 수 있는 저지jersey 소와 교배되고 있다. 젊은이들 가운데에는 양과 교배한 젖소를 기르려고 꼴밭을 쓰는 사람도 있는데, 순수종 소를 유지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칸게얌 소의 거세우는 달구지로 농산물을 수송하는 데 쓰이고 있는데, 트렉터가 도입되어 지금은 놀라운 비율로 줄어들고 있다. 순혈종은 약 60마리뿐이다. 1950년대에는 2000마리의 수소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 남은 소는 겨우 2%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모든 소의 수는 약 47만 마리로 어림하고 있다.

 

또 대다수의 농민은 지하수가 부족하여 위약한 생태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300m 이상의 깊은 우물을 파거나, 꼴밭을 목화·옥수수·원예작물을 재배하는 대규모 단작 재배로 전환하고 있다. 계절풍이 불안정해지거나 건조화가 진행되어 가뭄이 빈번해지는 일도 우려스럽다. 가축은 다른 곳에서 사오는 수수와 짚, 건초로 기를 수밖에 없기에 경비가 늘어나는 일로 이어진다. 콜루카타이 씨앗을 다시 뿌려야 하고, 물루 킬루바이를 꺾꽂이해도 새롭게 묶은 것에서 싹이 잘 자라지 않는다. 탄가코디Thangakodi라고 부르는 기생풀 스트리가 루테아Striga lutea도 귀찮은 문제이다. 스트리가는 풀과 콩과식물의 성장을 방해하여 크나큰 손실을 가져온다.

 

하지만 코란가두는 오랜 세월을 거치며 검증·확립된 체계이다. 700㎜ 이하의 비가 불안정하게 내리는 전형적인 건조 지대이지만, 다음과 같은 장점이 있다.

 

첫째, 독특하고 귀중한 토종 가축을 보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풀, 콩과식물 및 나무를 조합하여 저투입으로 가축 생산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둘째, 농지를 갖지 않은 가족도 가축을 방목할 수 있고, 가난한 가족의 생활도 이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새롭게 코란가두의 초원을 개발하는 데에는 1,8500루피/㏊, 나빠진 기존의 꼴밭을 개량하는 데에는 1,2000루피/㏊의 경비가 든다. 하지만 코란가두란 체계가 추진된다면 가난한 가족에게도 소득을 가져올 것이다. 실제 농민과 토지를 빌리고 있는 농업노동자, 합계 2564가족이 자신의 토지와 빌린 땅에서 코란가두를 개발하고 싶어 한다.

셋째, 코란가두란 생태농업에서는 토양 수분이 유지되어, 건조 지대의 지하수를 풍부하게 만들고 있다. 화학비료 없이도 토종 사료작물과 콩과식물에 의해서 토양 부식과 양분이 유지되고, 거기에 가축이 싸는 똥과 오줌으로 토양 생물도 풍족해진다. 곧 지역의 생태 환경, 지역 문화와 생활양식도 보존해 왔다. 코란가두 체계가 가뭄의 위험에 강하다는 점도 분석되어 있다. 곧 초원 관리의 전통 지식은 과학적으로 기록·분석하고, 보전·확대할 가치가 있는 귀중한 유산인 셈이다.

 

 

written by 吉田太郞, translated by 김서방

 

 

인용문헌

 (1) Korangadu Silvo-Pastoral Management System, GIAHS, FAO.

 (2) Korangadu:A centuries-old system of private pastureland management,Drynet.

728x90
728x90

스리랑카의 전통농업 - 저수지 관개

 

 

 

밀림 깊숙이 잠든 공학 기술 유적

 

1848년 어느 아침, 영국의 역사가로서 작가 겸 여행가이기도 한 제임스 에머슨 테넨트James Emerson Tennent 경卿은 횃불을 들고서 스리랑카 북부의 밀림지대를 여행하고 있었다. 그는 깊은 밀림 안에는 고대의 경이적인 공학 구축물이 잠들어 있다고 들었다. 원시림은 인간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여, 가시나무가 무성하고 길은 좁고 가팔라 일행은 16㎞나 되는 길을 거의 말에서 내려 걸어야 했다. 그리고 가까스로 목적지에 도착한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거대한 제방의 유적이었다.

 

제임스 에머슨 테넨트 경.

 

 

파다위야 저수지(Padawiya Tank)로 알려진 이 경이적인 공학 구축물은 1500년 이상 전의 것이다. 일행은 거대한 저수지와 제방을 말을 타고 가는 데에만 2시간이나 걸렸다.

 

“호수는 20~22㎞ 넓이일 것이다. 좁은 골짜기도 18㎞이다. 거대한 제방이 수복되어 적어도 상류 24㎞까지는 물이 고여 있었을 것이다. 제방 자체가 거대한 사업으로 길이는 약 18㎞. 제방의 높이는 20m 이상이고, 끝에서도 9m, 바닥에서는 60m의 너비이다.”

 

파다위야 저수지는 1~12세기에 걸쳐 구축된 몇 천 개의 저수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가장 큰 인공 호수 파락-라마 호수(Parak-rama Sea)는 24평방킬로미터인데, 그것 말고도 포루투칼어의 ‘tanque’와 연관되어 ‘저수지’라고 불리는 몇 천 개의 인공 호수와 제방의 연결망이 마을마다 물을 보내고자 설계되어 연결되었다. 구조와 설계는 놀라울 만큼 고도의 것이기에, 테넨트 경은 초보적인 도구만을 써서 단단한 화강암을 깎았을 그 일을 절찬했다.

 

스리랑카의 인공 호수.

 

 

온 국토에 묻힌 관개망

 

벼를 기르는 데에는 물이 꼭 필요한데, 스리랑카 국토의 2/3는 대부분 비가 내리지 않는 건조 지대이다. 이런 기후 조건 때문에 고대 신할라Sinhalese 왕조의 왕들은 관개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몬순으로 내리는 비를 붙들기 위한 제방과 운하를 건설했다. 어떤 한 왕은 이렇게 말했다.

 

“이 나라에는 약간의 빗물도 소중해,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고서 바다로 흘러가게 하면 안 된다.”

 

각 왕의 업적은 기록으로 남았다. 바사바Vasabha(65~109)는 12개의 저수지와 12개의 운하를 건설했고, 마하세나Mahasena(274~302)는 1890㏊에 이르는 미네리Minneri 호수를 포함해 16개의 저수지를 건설했다. 다투세나Dhatusena의 치세(460~478)에는 너비 12m, 길이 1900㎞의 운하가 왕도王都 아누라다푸라Anuradhapura에 급수를 했다. 수리 사업에 가장 열을 올린 사람은 파라크라마 바후Parakrama Bahu 1세(1153~1186)로, 770개의 저수지와 534개의 운하를 건설하고, 2300개의 저수지와 3621개의 운하를 수복했다. 풍족한 작물의 수확과 그것이 가져오는 부富는 사원에 집중되고, 꽃밭에는 분수가, 도시에는 궁전이 건축되었다.

 

미네리 호수의 수문.

 

스리랑카의 옛 왕도 아누라다푸라의 현재 지도. 

 

파라크라마 바후 1세의 부조상. 

 

테넨트 경에게 감명을 준 저수지의 대부분은 현재 완전히 진흙으로 차 있다. 하지만 수많은 소규모 저수지는 지금도 건재하고, 일부는 침니가 차 있지만 건조 지대 관개농업의 기반이 되고 있다. 스리랑카 쌀의 약 40%는 지금도 3개월 동안만 비가 집중되는 건조 지대에서 생산되고 있는데, 그 대부분이 기원전 300년부터 서기 1200년에 걸쳐서 건설된 고대의 관개 체계에 의존하고 있다. 저수지의 32%는 쿠루네갈라Kurunegala, 23%는 아누라다푸라 지역에 있는데, 그 밀도는 놀라울 정도로 건조 지대의 약 4만㎞ 이내에 약 3만 개의 저수지가 구축되어 있다. 대략 1정방킬로미터마다 저수지가 있다는 계산으로, 약 33만 호의 농가가 이러한 저수지의 혜택을 받으며 마을을 이루어 살며 약 14,8000㏊의 농사땅을 관개하고 있다.

 

 

현지 주민이 자발적으로 유지 관리

 

그럼 대부분의 저수지는 왜 흙에 묻혀 방기되어 버렸을까? 비트포겔Wittfogel은 대규모이건 소규모이건, 저수지는 중앙집권적인 국가관료제도에 의해 구축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수지가 방기된 까닭도 왕조의 붕괴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케임브리지대학의 인류학 교수이자 스리랑카 관개농업의 일인자이기도 한 에드문드 리치Edmund Leach 경은 거대한 저수지는 관료 제도의 업적일지도 모르지만, 마을에 있는 소규모 저수지는 그렇지 않다고 반론했다. 경이 이렇게 생각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거대 저수지가 소농이 관개를 할 목적으로 구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과연 거대 저수지는 거대한 두 옛 도시 아누라다푸라와 그 뒤에 천도한 폴로나루와Pollonaruwa에서 소비되는 작물을 생산하는 근교농업의 관개에 쓰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 직접적인 수익은 농민이 아니라 주로 분수 등 장식용의 급수에 쓰이고 있었다. 폴로나루와를 1164~1197년에 걸쳐 통치한 파라크라마 바후 1세는 101곳의 사원과 불상을 건설하고, 수많은 저수지도 건설했다. 그런데 리치 경은 말한다.

 

“그것들은 실용적인 구조물이 아니라 기념비였다.”

 

경에 따르면, 이러한 저수지는 왕의 권력을 과시하고자 구축된 것이지 식량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둘째는 이와도 겹치는 것이지만, 거대 저수지의 목적이 체질적으로 장식용이며 스리랑카의 농촌은 이에 의존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중앙 정권이 혼란스러워지고 거대 저수지가 황폐해진 시기에도 농촌의 삶은 아무 문제없이 적절하게 지속되었다. 각 마을에는 마을 사람들 스스로 유지·관리하는 소규모 관개 체계가 있었다.”

 

그리고 경은 또한 관개 사업을 행하려는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도가 존재했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고 지적한다. 고대 스리랑카의 사회 체계는 중세 유럽과 다른 세계의 봉건시대와는 꽤 달랐다. 역사학의 연구를 통해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도에 의해서 공사가 이루어졌다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저수지를 유지·관리하는 작업의 대부분은 라자카리야Rajakariya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라자카리야란 모든 마을 사람이 농한기의 40일을 왕을 위하여 무료로 일하던 풍습이다. 나중에 영국은 유쾌하지 않은 봉건체제의 유물이라며 이 제도를 폐지했는데, 이 제도는 나라가 강제한 것도 아니고 마을 사람들이 나라에 고용된 것도 아닌, 그 노동은 어디까지나 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캔디 왕조의 궁전 밖에 인공 호수를 구축하려던 계획을 마을 사람들이 거부한 일도 있다. 그것은 장식용 전시품은 라자카리야의 노무에 의해서 구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은 이렇게 썼다.

 

“그러기는커녕 왕의 연대기를 보면, 선선히 마을의 저수지를 잘 수리해주는 군주가 칭찬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러한 작업이 국가 규모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고대부터 마을 저수지의 수리는 일반 서민의 일이었다.”

 

마을의 저수지의 유지·관리는 마을 사람 자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대규모 수복과 새로운 저수지를 건설하는 데에는 타밀족 카스트제도의 육체노동자 쿨란카티Kulankatti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그들도 국가의 고용인이 아닌 마을 사람들과 직접 계약을 맺어 일하고, 관개 체계는 지역사회의 손으로 운영되어 왔다.

 

 

마을의 생활과 일체였던 관개

 

전통적인 스리랑카의 농촌을 특징지어 왔던 것은 사원, 불사리탑(다고바dagoba), 저수지(웨와wewa), 논(케타ketha)이었다. 고대 스리랑카에서 벼농사는 직업이 아닌 여타의 사회활동과 밀접하게 연결된 생존 방식이었다. 김매기, 쟁기질, 모내기, 수확의 각 단계에는 노래, 음악, 춤의 특별한 의식이 따르고, 지금도 남아 있는 전통 춤은 이러한 의식에 기원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수확, 쟁기질 등을 상징하는 율동 같은 노동에 바탕을 둔다. 캔디언 댄싱Kandyan dancing은 수확한 뒤 마을에서 실행한 코호마 칸카리야Kohomha Kankariya라는 의식이 기원이다. 중요한 것은 고비야goviya, 곧 마을의 스님이었다. 중요한 농사일은 스님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쟁기질하기 좋은 날을 골라 사원의 종이 울리면 마을 사람 모두가 들에 나갔다. 스님은 논에 들어가 쟁기질하는 물소에 맞추어 노래했다. 오Ohoooo~ 암마amma, 오~ 아뽀appo 오~, ‘오’는 바다의 소리이고, 암마는 어머니, 아뽀는 아버지이다. 성가는 모든 고비야가 불렀다. 그리고 수도 근교에서 이루어진 쟁기질 의식에는 왕이 참가했다.

 

스리랑카의 쟁기질(위)과 캔디언 댄싱(아래) 

 

 

 

어느 소농 사회에서라도 마찬가지이듯 농업은 가족의 일이며, 아이들을 포함해 가족의 각 구성원에게는 특정한 일이 있었다. 논에서 원숭이를 쫓고 소와 물소를 돌보며 논에서 아버지를 거드는 것은 남자아이의 일이었다. 어머니가 땔감을 모으는 일과 식사 준비를 돕고, 소와 물소의 젖을 짜는 일을 돕는 것은 여자아이들이었다. 여자아이는 어머니나 이모와 함께 이불을 만들었다. 어머니는 아궁이를 따뜻하게 유지하고, 난로가 집의 중심이었다. 이 때문에 스리랑카에서는 어머니의 지위가 가장 높았다. 마을에서는 서로 돕는 ‘아타마attama’와 ‘카이야kaiya’란 전통이 있어, 언제라도 이웃에게 도움을 구할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농촌 지역사회는 친척으로 구성되어 있었기에, 어른들이 논밭에서 일하거나 관개시설의 유지로 바쁠 때에는 한 사람의 여성이 모든 아이를 돌보았다.

 

더하여 스리랑카의 전통 사회는 다른 어느 소농 사회에서도 그러했듯이, 수확량을 최대로 하기보다도 위험을 최소로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가뭄, 홍수, 병해충 등의 위험을 벗어나고자 농민들은 다양한 품종을 심었다.

 

 

자연과 조화된 평등한 농경사회

 

상류의 저수지에서 흘러나온 물은 하류의 저수지에 모여 논으로 흘러가고, 서로 이어져 있던 물의 흐름이 거대한 저수지와 운하로 연결되어 나아갔다. 저수지와 농업용수와 논은 하나로 어우러지고, 또 대부분이 천 년 이상 존재해 온 것부터 인간의 구축물로 특정된 것들은 복잡할 만큼 지역의 환경과 자연 생태계와 일체가 되었다. 논, 거주지 등의 거시적인 토지이용에만 주의를 기울인 것이 아니고, 상류의 침전지(고다 왈라goda wala), 보호 제방(이스웨티야iswetiya), 상류의 바람막이(가스곰마나gasgommana), 하류의 바람막이(카타카두와(kattakaduwa) 등의 미시적인 토지이용도 생태계의 중요한 요소로 보았다.

 

하류의 바람막이숲, 카타카두와

. 

 

저수지의 물은 농사 기간을 늘리고, 건기에 벼를 재배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저수지가 가져온 장점은 그것만이 아니다. 농작물에 영향을 미치는 쾌적하고 시원한 기후를 유지하고, 농업 생물다양성도 보전해 왔다. 사실 저수지는 습지 생물다양성의 가장 풍족한 원천의 하나이다. 저수지 둘레의 동식물은 다양하고, 건기에는 저수지의 물이 소나 야생 동물의 유일한 수원이 되었다. 주요 저수지로 들어가기 전에 진흙을 퇴적하려고 설계된 모래막이 저수지(포타 웨티예pota wetiye)와 한쪽에 물을 대는 기간에 사용하는 ‘쌍둥이 저수지’ 등 다양한 형태의 저수지가 만들어졌는데, 그 모두가 관개에 쓰려는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마을 위쪽의 산에 저수지를 만드는 전통도 있었는데, 그 저수지는 야생 동물이 물을 구하러 논에 내려와 벼를 망치는 것을 막고자 그들에게 물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또 지금은 비판되고 있는 부대밭 방식의 농업 체나chena를 위하여 급수하는 산의 저수지조차 있었다.

 

하지만 부대밭 농업을 행한다고 그들이 숲을 파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기는커녕 고대 스리랑카의 문명은 숲 보호에 열심이었다. 16세기 해적 로버트 녹스Robert Knox는 배가 난파되어 캔디 왕의 포로로 15년을 지냈는데, 녹스에 따르면 숲의 파괴를 막은 것은 법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이었다고 한다. 신할라족은 선조가 스리랑카에 침입했을 때 선주민의 정령이 고지대의 열대 밀림으로 도망쳐 들어갔다고 믿어 숲에는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무튼 진실이 무엇이든, 고지대의 숲이 보호된 것은 건조 지대의 농업이 확실히 지속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천 년 전에도 섬 가운데에 치솟은 산들이 몬순을 가로막아, 숲은 그 비를 머금고 하천의 흐름을 지속하여 왔다.

 

이처럼 전통 지역사회는 흙, 물, 자연 생태계를 보전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왔다. 식량 안전 보장은 그 문화의 틀 안에 짜여 들어가 있었다. 벼농사는 10~3월까지의 마하maha와 4~9월까지의 얄라yala라고 2번 이루어졌는데, 수자원을 보전하고자 지하수를 농업용수로 쓰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다.

 

마을의 집들은 근접하여 세워져 최소한의 땅만 낭비되도록 했다. 또 주요한 농사땅에 항구적인 건축물을 세우는 것을 금하는 풍습도 있었다. 벽돌을 만들 권리가 있었던 것은 왕과 성직자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흙으로 지은 작은 집에서 살았다. 하지만 벽돌과 흙집은 모두 흙으로 돌아가, 그 결과 유기물을 농사땅에 제공했다. 그 관습은 건전한 생태학의 원칙에 따라 성립되어 있었다.

 

건조 지대의 많은 마을에는 마을의 저수지와 똑같은 이름이 붙여졌는데, 이처럼 저수지에 따른 관개 체계가 건조 지대의 사회조직과 전통문화의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저수지를 통해 이룬 각 마을의 자립은 독특한 분산 사회 체제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었다. 자원을 평등하게 나누고, 공평한 소유권, 이것이 바로 고대 스리랑카 문화의 가장 결정적인 특징이고, 그것이 평화가 이어지는 농촌 사회의 확립으로 이어졌다.

 

왕조는 번영하든지 아니면 쇠퇴하지만, 마을과 그 저수지는 몇 천 년이나 쭉 이어졌다. 리치 경은 마을과 그 관개 체계의 우수한 지속성을 지적한다.

 

“마을과 관개 저수지가 한 번 건설되면, 건조 지대에서도 관개 지역을 일정한 규모로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마을의 인구 변동은 매우 적었다.”

 

그리고 다른 전통 사회와 마찬가지로, 신할라족도 ‘태양과 달이 거기에 있는 한’이란 비문을 남기고 그들의 기관을 영구적이라고 보아 왔다.

 

 

근대화에 따른 지역사회 파괴

 

하지만 영국인이 건너온 뒤, 그들은 처음에는 커피, 나중에는 홍차 플랜테이션 농장을 개간하려고 숲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독립할 때 스리랑카 국토의 40%는 아직 숲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 목재를 팔아 외화를 벌고자 숲 전체가 파괴되어, 지금은 국토의 겨우 4~5%밖에 안 된다. 숲을 파괴한 결과는 비참했다. 토양침식의 영향이 모든 유역에서 일어났다.

 

식민지 정부가 벌인 대규모 관개 프로젝트도 건조 지대에서 대폭적인 숲의 파괴로 이어졌다. 식물도, 비옥한 들도 사라지고, 마을의 생태계는 파괴되어 가뭄의 위험성이 증가했다. 가장 심각한 영향을 받은 것은 마을의 지역사회였는데, 지역사회가 파괴된 결과도 결정적이었다. 리치 경은 이렇게 지적한다.

 

“중앙집권화된 관개 기관이 마을 저수지의 유지와 사용에 간섭할 권한을 가진 것은 1860년 이후이다.”

 

영국 식민지 당국이 가장 먼저 행한 것은 1860년대에 관개 기관을 세우고, 마을 사람들에게서 저수지를 유지하는 책무를 빼앗아 중앙의 관개 기관에 위임한 일이다. 그 결과는 파멸적이었다. 서로 돕는 전통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많은 주요 농사일, 특히 김매기는 이제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스리랑카에서 전통적인 관개를 연구한 거의 모든 연구자가 지역사회의 연관이 갖는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데, 전문적인 일이 돈에 좌우되지 않고 이루어졌던 것은 상호 권리와 의무에 따라 엮인 지역사회의 유대(cohesive community)가 있었기 때문이다. 테넨트 경은 말한다.

 

“저수지의 파괴와 최종적인 방기는 사회 부패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특히 그것을 오래도록 유지해 온 지역사회가 해체된 데 원인이 있다. 그 결과 붕괴의 과정이 타국에서는 완만히 진행된 것과는 달리 실론에서는 갑자기 일어났다.”

 

이 때문에 현재 건조 지대의 거의 모든 관개 체계는 일찍이 고대에 존재하던 것보다 훨씬 조잡해졌다. 1874년의 C. 라이트Wright의 “실론 견문(Glimpses of Ceylon)”에 따르면, 300~400품종의 벼가 재배되고 있었고, 에드워드 골드스미스가 1882년 현지의 농민을 만났을 때에도 그 농민이 젊었을 무렵에는 보통 280종 이상의 벼를 심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15품종밖에 남지 않았다.

 

지역사회의 변화에 맞춰 행정당국도 치밀한 유지·관리를 행하지 않았다. 관개 기관에게 소규모 저수지는 과거의 쓸모없는 유산에 지나지 않는다. 근대의 경제 비용·편익 분석에 기초하면 야생 동물의 이익을 위하여 여분의 저수지를 유지하고, 하물며 수리하는 일은 정당화될 수 없다. 전통적인 관개는 경제 편익을 위하여 희생되었다.

 

고대의 체계는 근대 제방과는 달리 지역의 수리학적 특성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용수로는 등고선을 따르고, 물의 흐름을 늦추며, 물의 손실도 적었다. 하지만 20세기의 대규모 관개 개발 프로젝트는 고대의 저수지 체계가 달성한 기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라 고대의 저수지 체계를 무시하거나 파괴했다.

 

 

 

전통문화의 재평가

 

스리랑카의 1인당 쌀 소비량은 현재 약 150㎏/년이고, 수입 쌀은 10% 미만일 뿐이다. 쌀을 안정적으로 생산하는 일은 나라의 발전과 빈곤·기아를 줄이는 데 빠뜨릴 수 없는 일이다. 건조 지역의 농촌에 만연한 빈곤을 줄이는 데에도 안정된 용수의 확보가 특히 중요하며, 건조 지대에 팽개쳐진 고대의 저수지는 말라리아 기생충의 발생원이 되고 있다. 마을의 저수지를 회복하는 일은 말라리아의 소멸을 위해서도 빠뜨릴 수 없다. 이를 위해 스리랑카 정부는 2004년 마을에 있는 1000개의 저수지를 수복하는 프로젝트를 수립했다.

관개 계획의 전통은 지금도 스리랑카에 존속하고 있다. 19세기의 탐험가 테넨트 경이 다시 발견한 저수지의 대부분이 회복되고, 마하웰리 계획(Mahaweli Diversion Scheme) 등 새로운 사업도 진행되고 있다. 그것은 건조 지대의 몇 십만㏊의 땅을 관개하고, 나라의 발전력을 배로 늘리고 있다. 불도저와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고대의 왕들이 착수한 스리랑카의 포괄적인 관개 체계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written by 吉田太郞, translated by 김서방

 

 

인용문헌

 (1) Wewe Irrigation System (Sri Lanka) GIAHS, FAO. 

 (2) Edward Goldsmith and Nicholas Hildyard,Traditional irrigation in the dry zone of Sri Lanka, The Social and Environmental Effects of Large Dams, 1984.

 (3) Mr Ghaz, A Scheme That Holds Water: An Irrigation System That Goes Back to Ancient Times, March 4, 2010.

 (4) Manik Sandrasagra, Life in the Village: on the Origins of Lanka, Serendib magazine Vol. 10 No. 1 Jan-Feb 1991.

728x90

'농담 > 농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멕시코의 전통농업 - 카헤테  (0) 2010.09.06
인도의 전통 축산업 - 코란가두  (0) 2010.09.03
사헬Sahel의 전통농업 - 자이Zai  (0) 2010.08.25
아마존의 전통농업 - 테라 프레타  (0) 2010.08.12
일본의 논농사  (0) 2010.08.12
728x90

사헬Sahel의 전통농업 - 자이Zai

 

 

 

절망의 사헬

 

사헬이란 사하라사막과 아프리카 중부의 열대림 사이에 낀 반半건조지대인데, 1970년대부터 기근과 빈곤, 환경 파괴를 상징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1975년의 가뭄과 더 심각했던 1985년의 가뭄으로 대서양 연안의 모리타니Mautitania부터 내륙의 차드까지 기아에 허덕이며 10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다. 하지만 실제 사망자는 더 많았을 것이다. 대다수의 농민이 비가 오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야 했고, 특히 이런 현상은 사헬의 중심에 있는 부르키나파소의 중앙 지역인 야텡가주Yatenga州에서 두드러졌다.

 

“아무것도 남은 게 없고, 떠날 수조차 없는 사람만 남았습니다. 만약 이곳을 빠져나갈 수단만 있다면 누구라도 떠났을 겁니다.”

 

부르키나파소 출신의 개발전문가 마티유 웨드라오고Mathieu Ouédraogo는 말한다. 해수면 온도의 변화와 대기오염으로 구름 형성이 억제되고, 지구온난화 등으로 사헬이 황폐해진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학설이 있다. 그러나 어떠한 원인이든 결과는 명백했다. 강렬한 햇빛과 무더위와 사납게 부는 바람 때문에 땅거죽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고, 식물의 뿌리조차 뻗지 못하며 빗물도 스며들지 않는 불모의 땅이 되어 버렸다.

 

 

사헬 지역.

 

 

1950년대까지 사하라는 인구밀도도 낮고 대부분 유목민이어서 토지의 부담도 적었다. 하지만 그 뒤에 인구가 늘어나 정주와 집약농업이 시작된다. 예를 들면 부르키나파소 야텡가주의 인구는 1930년 25만에서 1975년 53만으로 늘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하던 대로 땅심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농사땅을 묵힐 만한 여유가 사라졌다.

 

1970년대에는 야텡가의 중앙 고지대에 있는 농사땅의 80%에서 수수와 조를 이어짓기했다. 면적으로 보면 마을의 70~85%가 농사땅이 되었고, 그 가운데 약 40%가 무리하게 경작하는 한계지였다.

 

다행스럽게 그때까지는 여느 해와 달리 강우량이 많은 해가 오랫동안 이어져 왔기에 이 문제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는데, 가뭄이 들자 단번에 표면화되었다. 땅심의 저하, 토양침식, 농업 생산성의 저하. 중앙 고지대의 평원에서도 인구가 많은 북부는 심각한 환경 위기에 직면했다. 되풀이되는 가뭄으로 고지대와 비탈땅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었고, 비탈면의 아래쪽과 골짜기에 자리한 펀펀한 농사땅에 농사가 집중되어 나갔다. 그것이 더욱 부담을 더해 불모의 토지가 확 번져 나갔다. 여성들은 땔감을 모으려고 더욱더 멀리 걸어다녀야 했고, 땔감만이 아니라 농사땅을 넓히려고도 식생을 파괴했다. 식생율의 감소는 북부에서는 엄청난 비율에 달하여 토양은 바람과 물에 침식된 채로 남고, 1980년 이 지역은 부르키나파소에서도 가장 조건이 나빠진 지역이라 불리게 되었다.

 

중앙 고지대의 지하수 높이도 1980넌대 전반 약 50~100㎝/년으로 낮아졌다. 우기가 끝나면 대개의 우물이 말라 버렸다. 예를 들면 밤주Bam州의 리시암Rissiam과 존도마주Zondoma州의 라나와Ranawa 마을에서도 모든 우물이 말라붙어, 물을 긷는 일이 일상인 여성들은 물이 나오는 우물과 호수가 있는 곳까지 5~6㎞나 걸어가야 했다.

 

 

사막 녹화의 세계 모델

 

아카시 등의 중요한 종도 자취를 감추고, 난개발과 자연 갱신이 잘 되지 않아 바오밥나무도 노령화되어 갔다. 1980년 중반에 부르키나파소의 중앙 고지대에서 일하던 임업과 천연자원 관리의 전문가들은 절망적인 미래를 예상했다. 하지만 지금 부르키나파소의 야텡가 지역의 마을에서는 왜인지 농사땅에 나무가 급증하고 있다. 1980년부터 나무가 늘어나, 부르키나파소 전체에서 심각하게 나빠지고 있던 땅의 약 10만㏊가 과거 10년 동안 수복되었다. 30년 이상 사헬에서 일한 지리학자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의 크리스 레이Chris Reij 씨는 말한다.

 

“농민들이 자력으로 드넓은 지역에서 사막화를 막은 사헬의 녹화는 아프리카에서도 최대급에 속하는 생태적인 업적입니다. 그것은 여타 세계의 모델입니다.”

 

그 성과에 국외에서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부르키나파소에서는 농민협동행동 당국(Ministry for Peasant Co-operative Action)을 통하여 정부에서 유기농업 정책을 지원하고, 수많은 NGO와 여성 조직 및 농민조직도 환경과 식량 안전 보장이란 이유로 유기농업의 추진에 관계하고 있다. 2002년에는 유기식품 가공기술 훈련을 위한 센터가 ‘IFOAM 유기농업 2002 프로그램’의 원조를 통해 설치되었다. IFOAM의 국제과학회의는 2년에 한 번 개최되는데, 아프리카에서는 부르키나파소가 최초의 개최국이 되어 ‘개발도상국의 유기농업은 사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식량 안전 보장을 이루기 위한 전제조건이다’라고 기술한 와가두구Ouagadougou 선언도 발표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사막에서 식량을 자급하다 - 농민개혁가 사와도고의 등장

 

새롭게 농사땅을 넓힐 수 있는 가능성이 한정되었기에 나빠진 땅을 수복하는 것이 생산을 늘리려는 농민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부르키나파소에서는 웨드라오고가 옥스팜의 프로젝트를 통해 현지 농민들을 모아, 1981년 흙을 회복하기 위한 실험을 시작했다. 거기에는 웨드라오고가 알고 있던 전통농법도 있었다. 프랑스어로 ‘코르돈 피에르cordons pierreux’, 곧 ‘돌의 줄’을 뜻하는 농법이다. 방법은 참으로 간단하여 주먹 정도 크기의 짱돌을 줄지어 늘어세울 뿐이다. 그럼 땅위를 흐르던 빗물이 이 돌에 고인다. 그리고 그렇게 고인 진창에 섞여 있던 식물의 씨앗이 싹튼다. 이러한 돌의 줄은 서서히 푸른 식물의 줄로 바뀌고, 또 빗물의 흐름도 늦추며 싹이 트는 씨앗도 늘린다. 가장 처음에 자라던 풀은 뒤이어 떨기나무나 나무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낙엽이 토양을 기름지게 하며, 몇 년이 지나면 단지 돌의 줄이 대지를 되살린다.

 

코르돈 피에르를 만드는 농민(위)과 그 결과(아래). 아래의 사진은 자이 농법이 적용된 결과이기도 하다.

 

 

 

웨드라오고와 함께 활동하며 자이 농법의 개혁과 보급에 크나큰 역할을 완수한 농민으로 야쿠바 사와도고Yacouba Savadogo라는 인물이 있다. 사와도고는 부르키나파소 야텡가주 구르마Gourma 마을의 농민으로 세 아내와 31명의 아이를 두었는데, 창의적인 연구에 관심이 많고 자립심도 강한 사람이다. 그래서 옥스팜의 프로그램을 통해 말리에 견학을 가서 이 기술을 쓰고 있는 것을 본 뒤, 1979년 자신의 나빠진 땅에서 수수와 조를 생산하려고 자기 나름의 생각도 더하여 실험을 시작했다.

 

 

측량하고 있는 사와도고 씨. 

 

사와도고가 실험을 시작한 계기는 가뭄으로 맞은 식량 위기였다. 가뭄으로 곤궁해진 사람들은 부르키나파소의 다른 지역과 다른 나라로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사와도고는 자신의 농장에 머물기를 바랐다.

 

“선조 때부터 쭉 여기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땅이 나빠지는 것을 보며 무슨 수를 써야 한다고 자각한 사와도고 씨는 코르돈 피에르라는 기술을 쓰는 것과 함께, 건기에 몇 천 개의 구멍을 팠다. 자이Zai 또는 타싸Tassa라고 부르는 이 기술은 ‘지펠레zipélé’라고 불리며, 빗물이 스며들지 않을 만큼 딱딱해진 땅을 회복시키려고 부르키나파소에서 써 오던 전통농법이다. 사와도고는 자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나름대로 표현하자면, 자이는 빨리 출발한다는 뜻합니다. 사헬에서는 우기가 매우 짧기 때문이지요. 만약 수확량을 올리고 싶다면 빨리 시작해야 하고, 그것이 자이를 뜻합니다. 자이는 먼저 괭이로 땅에 구멍을 팝니다. 구멍은 대부분 지름 약 30㎝, 깊이 약 15㎝인데, 땅에 따라서 크게 파기도 하고 작게 파기도 합니다. 구멍을 파면, 작물의 양분으로 유기비료를 넣습니다. 외양간두엄은 흰개미를 끌어오고, 흰개미가 파는 굴이 단단했던 땅이 더욱 부드러워지도록 도와줍니다. 우기가 되면 이 구멍에 물을 모을 수 있습니다. 보통 비는 하루에 20~30분 동안 내리고, 다음번에 내리기까지 꽤 기다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자이라는 기술로 다음에 비가 내릴 때까지 물을 모아 놓습니다. 곧 이것은 물을 보전하는 기술입니다.”

 

그 기술은 참으로 간단하다. 먼저 건기에 20~30㎝ 너비와 깊이의 구멍을 판다. 그리고 구멍의 경사면에는 데미룬demi-lune이라는 흙막이를 흙으로 만들고, 비가 내리면 거기에 수수와 조를 심는다. 사아도고는 자이를 부모에게 배웠다. 자이는 땅을 수복하려고 소규모로 이용되어 왔는데, 예전보다 개선된 점은 거기에 외양간두엄을 준다는 것이다.

 

구멍에 거름을 넣으면 그것이 흰개미를 끌어오고, 흰개미는 유기물을 소화하여 식물이 더 이용하기 쉬운 양분으로 바꾸어 놓는다. 그리고 흰개미가 흙에 집을 지어 놓아서 비가 내리면 물은 흰개미의 집을 따라 땅속으로 스며든다. 이 구멍은 건기에 파는데, 예전에는 나빠져서 아무것도 기를 수 없던 농사땅에서 수확량을 얻고, 사와도고는 가족의 식량 자급에 성공했다. 사와도고는 자이 농법을 쓰기 이전에는 자급을 할 수 없어 시간제노동으로 돈을 벌려고 나가서 모든 수입을 모자란 곡물을 사는 데 충당했다.

 

“예전엔 아주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이 덕분에 유복해져 우리 가족을 먹이고 있습니다.”

 

사와도고는 부르키나파소부터 말리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조를 수확할 수 있는 유일한 농민이 되었다.

 

 

자이로 되살린 숲

 

부르키나파소에서는 전국의 마을에 나무심기 프로그램(National Village Forestry Programme)과 ‘2000곳의 마을에 8000군데의 숲을(2000 Villages, 8000 Forests)’이라고 명명한 캠페인 등의 국가 프로젝트를 통해 지난 30년 동안 몇 백만 그루의 묘목을 심었다. 하지만 묘목의 생존율은 낮았다. 나무를 심은 뒤 돌보는 일에 서투르고, 관리되지 않는 가축의 방목, 땔감으로 나무 베기 등 실패한 까닭은 허다하다. 하지만 그 가운데 결정적인 것은 프로젝트가 농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와도고의 나빠진 땅에도 겨우 4그루의 나무만 심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사와도고는 자이의 구멍에서 나무가 자연히 자라기 시작한 것에 놀랐다. 나무의 씨앗은 물에 쓸려 들어오거나, 자이의 구멍에 넣은 외양간두엄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사와도고는 이 나무를 소중히 보호했다. 곧 자이의 구멍을 통해 ‘숲을 기르는 기술’을 발견한 것이다. 사와도고는 과일과 사료로 쓰이는 재래종 넛트(sheanut=Butyrospermum paradoxum var.parkii), 노란자두(yellow plum=Sclerocarya birrea), 란네아 미크로카파Lannea microcarpa, 다양한 아카시와 그밖에 감바풀(Gamba grass=Andropogon gayanus), 펜니세텀 페디셀라텀Pennisetum pedicellatum 등의 사료용 풀씨를 모아, 그것을 다음 우기에 구멍에 넣었다.

 

재래종 너트

 

노란자두.

 

감바풀. 

 

란네아 미크로카파

 

 펜니세텀 페디셀라텀

 

 

이리하여 몇 년 지나지 않아 불모의 땅은 다양한 수종으로 이루어진 12㏊의 숲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이 수목과 떨기나무가 곡물과 경쟁하기 시작하여 사와도고는 어려운 선택을 직면했다. 나무인가, 작물인가? 사와도고는 나무를 기르는 쪽을 선택하고, 자이의 구멍에 자연히 자란 나무를 보호했다.

 

“나무가 없으면 흙도 사라진다.”

 

자이는 단단하지 않고 물기도 있어 나무는 잘 자랐다. 해마다 사와도고는 자신이 바라는 수종의 씨앗을 구멍에 넣고, 토양침식을 막으려고 농지에 만든 돌의 줄을 따라서 흩뿌렸다.

 

한편 1994년 1월에 서아프리카 프랑(CFA)의 통화가 인하되어 농민 대부분은 약을 살 여유가 사라졌다. 그것이 약용 식물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사와도고는 1970년대 전반과 1980년대 중반의 가뭄으로 사라져 버린 수종에 중점을 두고 야텡가주 이외의 지역으로 여행할 때 지역에서 사라진 약용 식물을 모으는 일과 함께, 야텡가주에는 없는 새로운 종도 도입했다. 이리하여 말라리아, 위장병, 황달 등의 치료에 도움이 되는 수종을 농지에서 보호하며 재배하도록 했다. 그곳에는 님(Azadirachta indica), 포도나무(Lannia microcarpa), 노란자두, 유칼립투스, 사바나 마호가니, 모링가 올리에페라Moringa oleifera, Guiera senegalensis 등이 있다. 불모지는 다양하고 도움이 되는 수종으로 착실히 숲으로 바뀌어 나갔다. 이리하여 사와도고는 20㏊의 황무지를 이 근처에서 가장 넓고 풍요로운 숲으로 바꾸었다.

 

기네아 세니갈렌시스

 

 

자이 농법을 퍼뜨리다

 

이전에는 무엇도 생산할 수 없었던 땅에서 수수와 조를 수확했다. 가까운 농민들도 당연히 이에 주목하게 되었고, 다른 마을의 농민들도 사와도고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사와도고는 ‘자이 보급협회(Association pour la Promotion des Zaï)’를 결성하고, 1년에 한 번 그의 농장에서 기술 강습회를 열었다. 해마다 약 100곳의 마을에서 대표들이 경험을 나누고 만나고자 골가 마을에 모였다. 농민의 대표만이 아니라, 프로젝트와 연구 기관에서도 약용 식물(잎, 껍질, 뿌리)에 대한 사와도고의 경험을 배우려고 찾아왔다. 약용 식물 분야의 지식을 보완하고자 사와도고는 유명한 전통 치료사와도 만났다. 대부분은 농민인데, 거기에는 비즈니스 관계자나 공무원도 있었다. 사와도고는 그 제품과 서비스에 대한 대금 지불을 요구하지 않는다. 활동을 통한 사회적 평가에 더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사와도고는 이렇게 떠올린다.

 

“가뭄으로 마을의 삶은 매우 힘겨워졌습니다. 땅과 나무 등 모든 것이 마르고, 가축도 죽음에 이르렀습니다. 너무나 어려워서 대부분의 사람이 마을을 떠났는데, 저는 이 땅에 남아 해결책을 찾아내자고 결단했습니다. 몇 년이나 떨기나무 밑에서 살아남고자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것이 물을 위한, 살아남기 위한 나무를 기르는 기술을 찾아내게 만들었습니다. 몇 년이나 떨기나무 안에서 시간을 보내는 저를 사람들은 미쳤다고 손가락질했습니다. 확실히 저는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해결책을 모색해 나아갔습니다. 만약 제가 해결책을 찾아낸다면 사람들이 제가 왜 이 땅에 남았는지를 알 것입니다. 지금 저의 기술이 기능하는 것을 보고 제가 해마다 수확한 곡물을 볼 때, 마을을 나간 사람들은 되돌아올 것입니다. 지금 저의 마을만 보자면, 저의 기술을 배우려고 돌아온 많은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몇 백 명의 농민들이 자이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간단하고 값싸며 새로운 기술은 멀리까지 널리 알려졌다. 더 많은 사람이 농사를 지으면 짓는 만큼 땅은 더 풍요로워졌다. 옥스팜이 자금 원조하고 있는 혼농임업 프로젝트도 이 개량된 자이 농법의 가능성을 인식하고, 이 마을로 견학을 가도록 추천하는 것으로 이 기술의 보급을 시작했다. 다른 NGO와 정부 기관도 자이의 가능성을 깨달았다. 몇 년 동안 자이는 야텡가주에 널리 퍼지고, 또 중앙 고지대의 다른 지역에도 퍼져 나아갔다.

 

 

자이의 다면적인 성과

 

자이로 숲이 생긴 일은 새로운 문제의 해결로도 이어졌다. 그 이전에 여성들은 집에서 쓸 땔감을 모으러 10~12㎞나 걸어가야 했다. 하지만 지금 어떤 농민의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절약하게 되어 현재 수입을 만드는 활동에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가족의 농사땅에 나무가 있는 것은 풍요로움입니다.”

 

약용 목적으로 다용도의 수목을 생산하여 추가 소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몇몇 농민은 지붕, 오두막 등의 건축용 자재로 수목을 판매하고 있다. 수입은 목재의 양과 시장 수급에 따라 다르지만 20,000~40,000(30~60달러) 서아프리카 프랑(CFA)이다. 자이는 비의 변동에 따른 위험을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수확량을 확실하게 한다. 사와도고도 자급만이 아니라 돈을 벌고자 곡류와 갓끈동부를 판매하고 있는데, 자이는 수수와 조 같은 곡류와 함께 돈벌이작물인 갓끈동부 등도 생산할 수 있게 한다.

 

자이 농법은 축산물도 개선해 나아간다. 가축의 먹이도 되고 다용도로 쓰이는 식물 부산물을 생산하는 일이 5~10년 정도의 짧은 시간으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농민은 자이를 도입하기 이전은 가축 몇 마리밖에 기르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자이를 받아들인 중앙 고지대 평원 북부의 많은 농민은 가축에 많이 투자하고 있다고 말한다. 자이 농법은 가축 사육의 개선과 연동한다. 농민은 팔려고 만이 아니라 외양간두엄을 생산하려고도 양을 기른다. 똥은 직접 자이에 쓰이든지, 외양간두엄의 원료가 된다. 높은 수확량을 올리는 것은 자이에 외양간두엄을 넣었을 때뿐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소를 돌보는 일은 후라니족의 목동(Fulani herders)들에게 맡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갈수기에도 소를 기르고 있다. 덕분에 외양간두엄의 이익을 얻고 있다. 야텡가의 농민들은 가축의 먹이가 되는 특정 수목(노란자두, 아카시, Piliostigma reticulatum), 곡물의 잎과 줄기와 꼬투리 및 과일도 모으고 있다. 이러한 것들의 씨앗은 가축의 소화기를 빠져나오면서 부드러워지고, 최후에는 외양간두엄이 된다. 씨앗은 곡물과 동시에 싹이 터서 자라고, 농민들은 그것을 보호한다. 자이는 유축복합경영에도 공헌한다.

 

자이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30~35% 정도 수확이 늘었다고 평가하는 보고서도 있고, 코르돈 피에르를 적용하면 건조한 해에는 평균 150~300㎏/㏊에서 440㎏/㏊까지, 비가 충분한 해에는 700~1000㎏/㏊까지 수확량이 늘어난다는 보고서도 있다. 크리스 레이는 자이 농법을 받아들이면 평균 644㎏, 곧 반년 이상이나 식량이 부족하던 상태에서 153㎏의 잉여 작물을 생산하게 된다고 평가한다. 또 자이 농법은 집약적이다. 이 때문에 부르키나파소에서는 현지에서 일하는 새로운 고용 기회도 창출하고, 몇몇 젊은이는 일을 구하러 도시로 이주하기보다 지역에 남는다. 그리고 자이 농법은 지금 이웃의 여러 나라에까지 퍼지고 있다. 사와도고는 말한다.

 

“이전에 저는 우리 마을에도 국내에도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탈리아에 가서 CILSS(Comité permanent Inter-Etats de Lutte contre la Sécheresse dans le Sahelas)로부터 사헬의 최고 농민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이 기술의 교사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이 기술을 토마스 산카라Thomas Sankara와 블레이즈 콤파오레Blaise Compaore에게서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산카라는 아프리카의 체 게바라라고 불리는데, 젊은 나이에 암살된 부르키나파소의 대통령이다. 산카라는 자이 농법이 지닌 뜻을 철저히 꿰뚫어 보았다.

 

 

토마스 산카라. 

 

 

written by 吉田太郞, translated by 김서방

 

 

인용문헌

 (1) Best Practices on Indigenous Knowledge, Pits for trees:how farmers in semi-arid Burkina Faso increase and diversify plant biomass, MOST Phase I website,2001.

 (2) Nicholas Parrott &Terry Marsden, The Real Green Revolution, Organic and agroecological farming in the South, Greenpeace Environmental Trust February 2002,P39.

 (3) Daniel Kaboré and Chris Reij, The Emergence and Spreading of an Improved Traditional Soil and Water Conservation Practice in Burkina Faso, International Food Policy Research Institute, Feb2004.

 (4) Charles C. Mann,Our Good Earth, The future rests on the soil beneath our feet, National Geographic magazine,Sep2008.

  (5) Burkina Faso: New Farming Technique Brings Trees Back to the Sahel,allAfrica.com, 31 October 2009.

728x90
728x90

인도의 전통농업 - 농장에서 씨앗을 보전한다

 

 

 

20만 종의 벼가 있는 보물창고

 

인도는 야생 식물은 물론 작물에서도 생물다양성의 보고이다. 저명한 벼 연구자 리차리아Richharia 박사에 따르면, 베다 시대(기원전 1500~600년 무렵)에는 40만 종의 벼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보다 줄었다고는 해도 박사에 따르면 아직도 20만 종이 존재하고, 실제로 그는 마디야 프라데쉬주Madhya Pradesh州의 차티스가르 지역에서만 2만 종의 벼를 수집했다.

 

하지만 지금 이러한 품종은 격감하고 있다. 그 까닭은 녹색혁명 때문이다. 녹색혁명에서는 수확량만 중요시하여, 화학비료에 반응하여 많은 수확량이 나오는 극소수 품종만 선발된다. 결과적으로 광대한 영역에서 높은 수확량을 올리는 품종만 재배되어 유전자가 획일화되어 버린다.

 

그런데 유전자의 획일화에는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획일화된 작물은 병해충에 위약해져, 어느 작물에 영향을 주는 병해충이 비슷한 작물 모두에 확 퍼진다. 1970년대에 벼 생육 저해 바이러스(Rice grassy stunt virus)가 인도부터 인도네시아에 걸친 광대한 논에서 확 퍼졌던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병의 해결책은 토종에 있었다. 1,7000종 이상의 재배 벼 품종과 원종 표본을 4년에 걸쳐서 선별 검사한 결과, 인도의 우타르-프라데쉬주Uttar-Pradesh州의 곤다Gonda 근교에서 재배되는 오리자 니바라Oryza nivara라고 불리는 한 품종만이 이 병에 저항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밝혀졌다. 지금 이 인도 야생 벼의 유전자를 가진 교배 품종이 아시아의 11만㎢의 논에서 재배되고 있다. 곧 앞으로 있을 품종 개량의 기초가 되는 유전자를 공급하는 것이 바로 토종이다. 이를 통해 유전자의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농민들은 왜 20만 점의 토종을 보존해 왔을까? 그 까닭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먼저 토종은 수확량만이 아니라, 짚으로 소의 먹이도 주고 집을 짓는 재료로 활용하는 등 다양하게 농민들의 수요를 만족시켜 왔다. 그리고 대개의 토종은 튼튼하고 병해충에 내성이 있는데다가 화학비료나 농약 등의 투입 자재를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점은 환경조건에 따라서 다수확품종보다 토종이 알맞은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타밀-나두주의 알칼리성 토양에서는 칼라르팔라이Kalarpalai라고 하는 토종 벼만 재배할 수 있고, 바단 삼바Vadan Samba와 같은 가뭄에 내성이 매우 강한 품종도 있다. 한편 호수에 인접하여 물에 잠기는 지역에서 자라는 삼바 모사남Samba Mosanam은 물에 잠김에 강하다. 원래 삼바 모사남은 호수에서 배를 타고 거둔다고 할 만큼 다수확품종을 기를 수 없는 1.4m나 물에 잠긴 조건에서도 전혀 해를 입지 않는다. 이처럼 인도의 어느 지역에서도 농민은 자신들이 가진 벼 품종의 이러한 환경적·영양적 특성과 독특한 특징에 대해 깊은 지식이 있다. 혹독한 환경에서도 작물을 기를 수 있었던 것은 이 다양성 때문이었다.

 

비자야라크쉬미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토종을 기르면 많은 장점이 있습니다. 가장 놀라운 점은 토종에는 그것이 버텨 온 지역의 생태 특성에 바탕을 둔 고유한 성질을 지녀, 결과적으로 사람에게 필요한 영양을 훨씬 잘 확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 말고도 토종 유전자원을 보호하여 변경에 사는 소농들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토종 보전을 시작하다

 

지금도 수많은 토종 벼가 보존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보전하고 있는 것은 단지 농민들뿐이고, 계속해서 엄청난 비율로 사라지고 있다. 이 때문에 인도 지식 센터는 타밀-나두주 안의 각지에서 종자 보존에 나섰다. 그 계기는 전통농법으로 병해충을 방제하면서부터였다.

 

1993~1994년에 걸쳐 센터는 티루반나말라이현Tiruvannamalai縣, 센감 탈루카Chengam Taluka의 발라얌팟투Valayampattu 마을에서 식물을 활용한 해충 방제에 나섰다. 농민이 참여하는 실험 프로그램은 꽤 성공을 거둬, 농민들은 식물의 생성물을 화학 농약 대신 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농민과 모여서 이야기하면서 녹색혁명 이전에 재배하던 토종이 있다면 더 유익할 거라고 하던 농민이 있었다.

 

인도에는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 박사가 이끄는 인도 전역에서 토종 보존에 나선 NGO인 나브단야Navdanya가 있다. 센터는 1995년 나브단야와 접촉하여, 그 지원을 받아 1995년 발라얌팟투 마을에 있는 농장에서 씨앗을 보전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먼저 한 일은 타밀-나두주 안에 있는 여러 지역 NGO와 협동하는 것이었다. 그 활동은 지역사회에 종자은행을 설립한 ‘동쪽 산맥 운동(Eastern Ghats’ Movement)’과 협력하며 이루어졌다. 이듬해에는 좀 더 아래와 같은 활동을 펼쳐 나아갔다.

 

1) ‘그람미야 무네트라 산감Grammiya Munnetra Sangam’의 지원으로 칸치푸람Kanchipuram 지역의 티루포루르Tiruporur 마을

2) ‘불리한 인간의 개발 센터(Centre for Development of Disadvantaged Peoples)’의 지원으로 티루타니Tiruttani 지역의 네둠바람Nedumbaram 마을

3) ‘비자 평화 센터(VISA Peace Centre)’의 지원으로 반다바시Vandavasi 지역의 모사바디Mosavadi 마을

4) ‘여성의 복지 개발 협회(Women’s Welfare Development Association)‘의 지원으로 우티라메루르Uthiramerur 지역의 마남파티Manampathy 마을

 

1998년에는 ‘인간 활동과 농촌 기술의 진전을 위한 위원회(Council for Advancement of People’s Action and Rural Technology)’의 지원으로 칸치푸람 지역(당시 센갈팟투Chengalpattu 지역)의 캇탄칼라투르Kattankalathu 구역에서 일을 시작하고, 그 뒤 이 활동은 칸치푸람, 티루발루르Tiruvallur, 티루반나말라이Tiruvannamalai, 나가팟티남Nagapattinam의 125개 이상의 마을로 퍼졌다. IDRA, UNDP, 포드 재단 등 다양한 기관도 센터의 활동을 지원했다.

 

 

 

130종 이상의 토종 벼를 수확

 

센터가 먼저 한 일은 토종을 구하는 것이었다. 토종 벼를 찾고자 센터의 현장 일꾼들이 상세히 조사를 했다. 그리고 몇몇 농민이 집에서 먹으려고 보전하고 있던 품종을 얻거나 구입했다. 또 센터는 앞으로 농부가 될 마을의 학생들에게 토종 보존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자 어린 학생들을 참가시키는 생물다양성 대회 ‘비야 야트라Bija Yatra’를 열고, 자발적인 도움으로 토종과 그 정보를 수집했다. 게다가 정기적으로 농업 박람회나 축제에 참가하여 품종을 전시하는 것으로 농민들과 품종 교환을 전개했다.

 

다수확품종의 도입으로 토종은 사라지게 되었는데, 센터에서 토종이 재배되고 있는 지역을 찾아내고 그 쓰임새를 늘리는 일에 약 10년 동안 노력한 결과, 센터는 타밀-나두주에 알맞은 130점의 벼 품종과 50종 이상의 채소를 수집했다. 비자야라크쉬미 박사는 만족하여 말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벼 125품종, 그리고 약 60종의 토종 채소를 간신히 되찾았습니다.”

 

 

토종을 제공받는 농민.

 

 

종자은행의 설립

 

센터의 생물다양성 보전 활동에는 수많은 마을에 ‘지역사회 종자은행’을 설립한 일도 포함된다. 그 방식은 이렇다. 먼저 센터는 각지의 마을에서 토종의 중요성을 알리는 모임을 개최한다. 센터는 자신의 실험농장과 센터에서 선택한 농민들의 밭에 ‘생식영역 보전 센터’를 설치한다. 이러한 생식영역 보전 센터에는 50종 이상의 품종을 재배한다. 거기에 관심을 가진 농민들은 실제 작물을 보고, 토양과 관개조건, 자신의 농업 기후에 알맞은 한두 품종을 재배할지 결정한다. 결정한 농민은 센터를 통해 지역이나 인접 지역에서 이미 재배하고 있는 농민에게 씨앗을 받아, 자신의 농지 일부를 토종 보전용으로 확보한다. 수확한 다음에는 ‘종자은행’에 제공받은 종자의 2배로 돌려주는 것이 씨앗을 받는 조건이다. 이 종자은행 덕에 시장에 내는 다수확품종을 재배하는 농민들이 현재 집에서 먹으려고 보유했던 토종을 위상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유기농업 집단 산감Sangam 결성

 

다시 토종 보전 프로그램을 약 10년 실시한 뒤, 센터에서는 이 방법을 유지·지속하기 위한 본보기를 고안했다. 그것은 센터의 관여가 끝난 뒤에도 농민들이 스스로 그 활동의 계속하도록 모든 마을에 유기재배 농민 집단인 산감을 결성하도록 한 것이다. 농민들에게 실천을 보이고, 이후에도 활동을 지속하도록 한 것이다. 지역사회의 종자은행은 이러한 산감을 통해 추진되어, 농민들은 다양한 토종을 재배하며 그 양을 늘리는 기회도 얻을 수 있다. 산감에서는 지도자를 뽑는데, 그는 활동의 수익을 내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도록 장려된다. 이 때문에 몇몇 산감에서는 수입원으로 생물농약을 생산하는데, 그 기본 지식이나 인프라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센터이다.

 

 

기술 지도에 나선 비자야라크쉬미 박사.

 

 

센터는 외양간두엄과 지렁이두엄을 활용하는 비법, 바이오 거름(Acetobacter Azospirillum 등), 님Neem 씨앗 등의 자재를 제공하고, 토종을 유기재배로 기르는 비법, 식물에서 추출한 자재로 생물농약을 만들고 자연스레 병해충을 방제하는 기술, 두엄을 만드는 기술을 훈련시킨다. 또 다양한 품종의 특성과 수확량 및 상세한 정보도 여러 언어로 교재, 정기 간행물, 서적, 포스터, 필름 형태로 제공한다. 농민, NGO, 학생, 교사, 일반 시민 등 다양한 집단을 대상으로 수많은 훈련 프로그램도 실시한다. 학교에서는 글짓기나 웅변대회도 열고 있다.

 

유기농업을 하고, 농장에 투입되는 자재를 자급하는 일은 경비 절감으로도 이어진다. 이 때문에 활동은 지금 약 125개 마을에서 약 3000명의 농민들에게 퍼졌고, 유기재배로 집에서 먹을 채소밭을 가꾸는 세대도 800가구 이상이 되었으며, 유기농가로 이루어진 37개 산감이 설립되었다. 그것은 각 가정에 먹을거리의 안전·안심을 가져왔다. 그리고 센터는 이 활동을 주 전체, 나아가 인도 전역에 퍼뜨리려고 한다.

 

개개의 농민은 잃었던 토종을 부활시켜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는 충분한 양의 품종이 제공되어야 한다. 농업 생물다양성은 지역사회가 생물다양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필요를 확신하고, 지역사회의 안에서 다른 곳이 아닌 농민의 밭에서 보전되어야 한다. 곧 센터가 토종을 보전하고자 선택한 방법은, 의식이 유발된 농민들의 연결망을 통해 그들의 농지에서 종자를 보전하는 것이다.

 

 

written by 吉田太郞, translated by 김서방

 

 

인용문헌

 (1) Fehmida Zakeer, Indian farmers learn from old ways, People & the Planet,23 Mar,2007.

 (2) Centre for Indian Knowledge Systems, Organic Farming and Indigenous Seed Conservation, Experiences from Tamil Nadu, India.

728x90
728x90

고대 인도의 식물 과학 - 브르크쉬아유르베다

 

 

 

전통을 부활시킨 연구자

 

새롭고 우수한 기술에 끌려 서양에 감화되는 일은 여러 개발도상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지금 인도의 농민들은 전통 과학의 부富와 가능성을 다시 발견하고 있다. 타밀-나두주Tamil-Nadu州의 주도州都 센내이Chennai의 두 과학자, 비자야라크쉬미K. Vijayalakshmi 박사와 발라수브라마니안A. V. Balasubramanian 씨는 전통농업의 지혜를 부활시키고자 1990년대 초반 인도 지식체계 센터(Centre for Indian Knowledge Systems) 건립했다.

 

 

 타밀-나주 지역 지도.

 

 

센터가 중점을 둔 일은 생물다양성 보전과 유기농업인데, 그 때문에 고대 경전에서 얻을 수 있는 유기농업 기술을 제공하는 일도 센터의 주요한 일이 되었다. 고대 인도의 식물 과학체계인 브르크쉬아유르베다Vrkshayurveda를 오늘날 어떻게 응용할 수 있는지 조사·연구하고 있다. 센터의 본부는 인도 남부의 센내이에 있는데, 타밀-나두의 다섯 지방에 걸쳐 125개의 마을에서 활동한다.

 

비자야라크쉬미 박사는 말한다.

 

“아유르베다에는 수많은 전문 의사인 바이디야vaidya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고대의 브르크쉬아유르베다의 방법론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만큼 없습니다. 그렇지만 희망적인 일은 이 과학에 관한 많은 서적이 있으며, 아직도 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비자야라크쉬미 박사.

 

 

박사와 그녀의 팀은 브르크쉬아유르베다의 경전을 연구·해석하여 오늘날에 맞는 해결책을 찾으려 하고 있다.

 

“경전에서 얻은 지식에 바탕을 둔 기술을 농민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수요에 알맞도록 수많은 실험을 거친 뒤 기술을 개발했습니다. 과학자재의 대안은 전통농법으로 이찾을 수 있습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우리의 선조가 물려준 안전한 농업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실험을 통해 부활한 기술

 

센터는 브르크쉬아유르베다의 고전과 경전이나 민간에 전승되어 있는 문헌 및 현지 조사, 실험실의 연구와 함께 현장 조사를 진행한다. 예를 들면 전통농업에서는 어디서나 가축을 중요하게 여겨 왔는데, 인도에서는 특히 농민과 소의 유대가 깊다. 소는 축력을 제공하고 소똥과 오줌 등의 중요한 농자재도 준다. 그런데 인도에서는 단지 편리함 때문만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영적인 면에서도 소를 중요시했다. 그래서 경전 문헌을 검색하면서 센터와 연계하여 ‘지역 전통의료 부흥재단(Foundation for Revitalisation of Local Health Traditions)’이 수집한 농촌 지역사회 일반의 정보도 수집·정리했다. 센터는 ‘내발적 발전 비교 지원(Comparing and Supporting Endogenous Development)’과도 협동하여 ‘전통농업의 가축 제품 이용, 남부 인도의 안내자 프로젝트’도 실시하고 있다. 그 활동은 농업, 전통의료, 천연자원의 경영과 폭넓은 분야에 퍼져 있는데, ‘전통농업의 가축 제품 이용’을 주제로 지역 전통의료 부흥재단, 환경의식종합개발(Integrated Development through Environmental Awareness), 크리쉬 프라요그 파리바라Krishi Prayog Parivara라는 단체와 연계 프로그램을 세워, 농촌 지역사회의 전통적 가축 제품 이용이 지속가능한 곡물 생산의 개선에 어떻게 도움이 될지, 안드라 프라데쉬Andhra Pradesh주州의 22개 마을과 오리사Orissa주의 3개 마을에서 현장 조사를 행했다.

조사 결과 똥오줌, 뼈, 지방, 피, 가죽, 살코기 등 참으로 다양한 가축 제품이 농업에 활용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것들은 단독 또는 혼합하여 쓰며, 시용하는 방법도 분무·훈증·풀·가루 등의 형태로 다양하다. 그런데 가루나 펠릿 모양으로 염소똥을 흩뿌리거나 구멍에 넣으면 특정한 계절에는 작물 생육에 도움이 된다는 점과, 작물의 둘레에 구멍을 파서 소의 오줌을 흩뿌리면 과실을 부드럽게 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비자야라크쉬미 박사는 말한다.

 

“우리의 조직은 연구와 함께 보급도 하고 있습니다. 다양한 유기농법 기술을 연구하려고 우리의 실험농장과 농민의 밭에서 행하고 있습니다.”

 

베단탄갈Vedanthangal에는 4.5㏊의 센터 실험농장이 있다. 이러한 가축 생산물에 관해서도 그것을 이용하면 실제로 작물의 생리를 개선하는 데에 어떤 효과가 있는지 밭과 실험실에서 실증적으로 확인도 했다. 그 결과 전통적인 가축 제품을 이용하는 방법을 표준화하는 활용 설명서의 제작에도 착수하게 되었다.

 

 

 

 

 

농민이 참가하는 연구와 트레이닝

 

실험농장에는 두엄을 만드는 기술, 생물 농약의 준비, 유기농업 기술, 약용식물 밭이 전시되고 있다. 복잡한 유기농법을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익힐 수 있도록 살아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또 센터는 생물 농약과 관련하여 농민들을 훈련시키고 있다. 그리고 해충을 방제하는 특성을 지닌 여러 식물을 지난 연구 과정에서 발견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수많은 농민이 그들의 아버지가 병해충에 대처하려고 식물에서 추출한 혼합물을 사용했단 사실을 희미하게 기억해낸 점입니다.”

 

비자야라크쉬미 박사는 말한다. 프로젝트의 큰 성공은, 실제 밭에서 실험을 디자인하고 실시하는 농민들의 참여였다. 이 성공은 농민, 지역사회에 바탕을 둔 조직, 연구자 사이의 의사소통에 따른 것으로, 전통적인 지식 분야를 다시금 깊이 고려해 연구하도록 자극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초에 농민들이 유기농업으로 전화한 것은 일부 농지뿐이었다. 하지만 농민들은 서서히 모든 농지를 전환시켜 나갔다. 생물 농약을 생산하는 프로그램은 각지의 마을에서 착수되어, 소농이나 여성도 스스로 그것을 쓰거나 대농에게 팔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그것이 수입을 만드는 동시에 안전한 농장을 만들어 나아갔다. 검증된 실천이나 기술은 훈련 프로그램이나 간행물을 통해 보급되어 센터는 직접적으로 3000명 이상의 농민과 연관을 맺었고, 약 1만 명 이상은 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대부분의 농민은 지식체계 센터에서 개발한 유기농법을 실천하고 있다.

 

 

 

채소 텃밭의 부활

 

센터는 채소 텃밭을 되살리고자 마을의 여성들에게 씨앗도 제공하고 있다. 센터에서는 논에서 재래종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채소 텃밭’이란 방식은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라지는 원인은 무엇일까? 원인을 규명하는 조사 결과, 센터가 찾아낸 까닭은 씨앗 때문이었다. 여성 농민은 집에서 먹을 채소 텃밭에 심으려고 마음먹어도 고수확 품종의 씨앗 값이 비싸서 살 수 없었다. 게다가 비싼 값을 지불해 겨우 씨앗을 사더라도 그 씨앗의 발아율이 떨어졌고, 이듬해에 다시 쓸 수도 없었다.

 

발라수브라마니안 씨는 말한다.

 

“우리는 채소 텃밭의 개념이 마을에서 무시되고 있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많은 마을 사람들이 고수확 품종 씨앗의 값이 비싸고 효과도 나쁘기에 텃밭에서 채소 기르기를 아예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밥을 먹을 때 채소가 없으면 영양적으로도 좋지 않다. 하지만 그것을 걱정하지도 않고 시장에서 채소도 사지 않았다. 그렇다면 재래종을 부활시키면 좋겠다! 센터는 적어도 50종의 재래종 채소를 부활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우리는 채소 텃밭의 설치를 장려하려고 채소와 식물의 종자를 여성들에게 제공했습니다.”

 

센터는 유기 채소를 재배하고, 양질의 종자를 생산하기 위한 훈련도 행했다. 그 결과 약 800세대의 여성들이 작은 채소밭에서 한 달 평균 300루피(45루피=1달러)를 벌어들이게 되었다. 이는 가족의 영양 안정성도 보장한다. 더욱이 병의 치료에 쓰이는 허브도 유기재배하도록 장려하고, 약을 조합하는 지식도 제공했다.

 

“약초밭을 만드는 일을 거들고, 감기와 복통 같은 가벼운 증상에 허브를 쓰는 지식으로 그녀들을 무장시켰습니다.”

 

 

인용문헌

 (1) Fehmida Zakeer, Indian farmers learn from old ways, People & the Planet,23 Mar,2007.

 (2) Abarna R,Revisiting Traditional Knowledge Systems: Livestock an Integral Part of Agriculture, Pro-Poor Livestock Policy Programme, November 2009.

 (3) Centre for Indian Knowledge Systems, Organic Farming and Indigenous Seed Conservation, Experiences from Tamil Nadu, India.

 

728x90
728x90

인도의 전통농업 - 전통 제방 조하드 2

 

 

 

지역사회의 힘을 믿다

 

라헨드라 싱Rajendra Singh 씨는 가뭄에 고통을 받던 라자스탄주 동부의 물을 보전하는 데 성공했다. 싱 씨가 일하기 시작했을 무렵 이 지역은 물이 너무 부족하여, 정부에서는 지하수의 높이가 낮아지는 ‘어둠의 영역’이라고 분류했다. 하지만 10년 뒤 지하수의 높이는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회복되어, 정부에서는 더 이상 보호가 필요 없는 ‘밝은 영역’이라고 분류했다. 아라바리강의 기적은 국제사회에서도 주목을 받아 많은 상을 받았다. 싱 씨는 엘 로드로 수맥을 찾는 사람,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고, 이 성과로 2001년 로마에서 라몬 막사이사이상도 받았다. 하지만 라헨드라 싱 씨는 수상하면서 오늘은 라자스탄주 사람들의 전통 지혜가 승인된 날이기도 하다며 “자신은 단순히 정리만 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농촌 지역사회가 높이 평가받은 것입니다. 물을 보전한 기적은 우리의 조직에게 원조를 받은 마을 사람들의 협력으로 가능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의 생활수준을 개선하고자 시도하면서 인내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지역사회는 창조적으로 사회변혁을 이룰 잠재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잠들어 있는 지혜의 창고를 열어 그것이 기능하도록 장려했을 뿐입니다.”

 

현지의 행정 당국은 죽어 있었다. 그래서 라헨드라 씨 들은 관료 기구를 통하지 않고 직접 마을 사람들과 대면했다.

 

“일에 착수했을 때, 우리는 정부의 원조 계획과는 전혀 다른 전략을 채용했습니다. 우리는 어떠한 활동에서도 마을 사람들을 이해 당사자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장기적으로 지속성을 확보하게 했습니다.”

 

최초의 조하드는 완성하는 데에 3년이 걸렸지만, 4년째에는 50개의 조하드를, 5년째에는 약 100개를 쌓을 수 있었다.

 

“최초의 고팔푸라 마을에서는 성과를 거두는 데 3년이 걸렸습니다. 그렇지만 이듬해에는 45개의 마을에서 같은 일을 달성했습니다. 그것은 마을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참가해서 그렇습습니다. 성공의 비결은, 관심을 가진 사람에게 성공한 이야기를 알려, 인접한 마을이 힘을 모아 또 다른 성공으로 나아가도록 노력하는 데 영향을 미친 점입니다.”

 

라헨드라 싱 씨는 활동 상황을 파악하고자 마을 사람의 일원이 되어 함께 살았다.

 

“그렇지만 말로는 이를 달성할 수 없습니다. 흙과 물을 지역사회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해한 뒤에만 방법론을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민들과 함께 살아 보지 않으면 그들이 이해하는 물과 흙의 관계를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이라도 전통 지식을 활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타룬 바라트 조합은 외부에서 아무런 원조를 쓰지 않고도 지역의 지식을 적용하는 것만으로 사업을 지속가능하게 반복할 수 있었습니다.”

 

조하드 건설의 수익자인 마을 사람들이 현금 등으로 부담한 경비는 건설비의 1/4에서 1/3이었다. 나머지 경비를 부담한 것은 타룬 조합으로, 조합은 포드 재단Ford Foundation, 옥스팜Oxfam, 다양한 유럽의 정부 기관, 인도 정부와 라자스탄 주정부에게 지원을 받았다. 또 라헨드라 싱 씨 말고 직원 모두는 마을 출신으로 뽑아, 이러한 경비가 현금이나 고용의 형태로 마을로 이어졌다.

하지만 조하드를 건설하기 위한 모든 노동력을 제공한 것은 현지의 마을 사람이었다. 또 상근직원에 더해 230명의 시간제노동도 있었고, 몇 천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조하드의 설계와 건설을 지원했다.

외부에서 전문가와 기술자를 초빙하지도 않고, 조하드를 쌓을 곳을 정하는 일부터 구조를 설계하는 일까지 지역사회의 적극적인 참가로 건설되었다. 그 공사비와 유지관리비도 지역사회가 부담하고, 스스로 정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필요 요건을 만족시켰다.

이러한 활동이 전개된 배경에는 라헨드라 싱 씨의 경력이 있다. 그는 학생시절부터 자야 나라얀Jaya prakash Narayan의 삼푸르나 크란티Sampurna Kranti 혁명운동에 관여해,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천연자원을 이용하기 위하여 대중을 동원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라헨드라 싱 씨가 1985년 가장 처음으로 마을을 찾았을 때는, 마을의 극단적인 반대에 부딪쳐 테러리스트라는 딱지가 붙기도 했다. 또 1990년대 전반 사리스카 호랑이의 성역을 보전하면서는, 대리석 광산의 이익과 대립하여 광산 소유자들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았다. 라헨드라 싱 씨는 이렇게 기억한다.

 

“조하드를 건설한 뒤에도, 사리스카 주변의 못이나 호수의 물높이가 높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곧 무엇이 문제인지 알았지요. 사라지는 물을 더듬어 찾아가니, 광산 측이 파놓은 구덩이에 모여 있었습니다.”

 

싱 씨 들은 이 문제로 법원에 고소를 하여 진정서가 최고재판소까지 올라갔다. 1991년 법원은 생태적으로 위태로운 아라발리 언덕에서 계속 채굴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1992년 5월에는 환경산림성이 언덕에서 채굴을 금한다는 통고를 내렸다. 최종적으로는 공원에 크나큰 손상을 입히고 있던 성역 주변과 완충지대에서 운영되는 470개의 채석장이 폐쇄되기에 이르렀다.

 

 

성역의 물무늬 특성을 이해하고 검소하게 살다

 

조하드가 성공한 것은 성역의 물무늬 특성을 활용한 데에 있다. 라헨드라 싱 씨는 이렇게 말한다.

 

“이 17년, 우리는 알와르, 자이푸르Jaipur, 사바이 마도푸르Savai Maadhopur, 카롤리Karoli와 각지를 건조하게 만들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100년 동안의 강우 그래프를 연구하면, 강우량이 불규칙하지만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5~6년 비가 적은 해의 다음에는, 2년 정도 비가 많은 해가 이어집니다. 이처럼 주기가 되풀이되고 있다면 알맞은 방법으로 빗물을 모아 유용하게 쓸 수 있습니다.”

 

라헨드라 씨는 다른 지역에서도 라자스탄주처럼 가뭄을 극복할 수 있다며 “확실히 할 수 있습니다. 인도만이 아닌 아시아 전역에서 가능합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끝도 없이 물을 이용하는 생활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물이 한정된 자원이란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강수량과 인구밀도는 균형을 이루지만, 물을 이용하는 데에는 균형이 전혀 없고 누구나 더 많은 물을 쓰고자 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가난한 사람의 버터기름(poor man's ghee)처럼 물을 쓴다면, 어떤 마을의 누구도 인도에서는 물 부족에 직면하겠죠.”

 

인도에서 가장 강수량이 적은 곳은 라자스탄주의 자이살메르Jaisalmer와 바드메르Badmer의 건조 지대인데, 그곳에는 집마다 음용수나 집에서 쓸 물을 받는 물통과 일반 용도나 가축이 마시는 못(talab)도 있다. 그들은 지하에 있는 모래에서 음료수를 얻고자 염분을 머금은 지하수의 지층을 석고로 분리하는 쿠인야Kuinya를 써 왔다. 한편 비하르Bihar주처럼 물이 넘쳐 해마다 홍수가 일어나는 지역에서는 넘치는 물을 거두는 아하르-파인Ahar-Pyne이라 부르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갠지스강에서 넘쳐 오른 물은 파인이라 부르는 수로를 통해 최대 30~40㎞나 이동하고, 아하르ahar라고 부르는 물통을 채운다. 이것이 1년 동안 물과 모래와 찰흙의 중간 굵기의 흙이 지속적으로 분배되도록 해왔다.

이처럼 인도의 전통 지혜는 자연과 함께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살기 위하여 사회에 유용한 실용적 방법을 개발해 왔다. 지역의 다양한 기후를 존중하고, 혹독한 기후나 지리 조건에서도 각각의 지역에 알맞은 특정 과학과 관련 공학, 기술체계를 개발했다. 게다가 과거 몇 천 년 동안이나 매우 건전한 상태로 숲과 물 등의 천연자원을 보전한 데에는, 인간은 자연의 테두리 안에서 살되 탐욕을 부리면 안 된다는 환경에 우수한 전통문화(dharma/parampara)가 있었다.

 

 

전통의 손실과 그 결과

 

그런데 과거 20년 동안 이 고대의 균형이 흐트러졌다. 라헨드라 싱 씨는 산업혁명, 교육혁명, 녹색혁명, 개발혁명, 민영화와 정보기술혁명과 유럽에서 건너온 ‘자연을 개발해야 한다’는 사상이 자연에 대한 외경이란 관념을 엉망으로 만들었다고 경고한다.

 

“식민지 정부에서 독립한 근대국가는 농촌 지역사회에서 그 권리와 책임을 빼앗고, 심지어 하천마저도 법적(벌목 허가, 하천의 직선화)으로 탈취했습니다. 교육혁명은 전통과 구두 지식이 빈곤의 원인이라고 사람들을 호도했습니다. 근대 교육과 근대화란 헛된 꿈이 지역사회의 조직을 해체해 버렸습니다. 독립한 뒤에는 모든 권력을 장악한 정부가 개발과 사회주의적인 ‘행복’을 관리한다는 환상을 심었습니다만, 그것도 지금은 이미 무능한 현실임이 밝혀지고 자본주의 제국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다국적기업과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첨단기술, 유전자조작 기술과 IT는 더욱더 심각한 문제를 가져올 겁니다.”

 

라헨드라 싱 씨는 거듭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는 것은 기술자의 사상이라고 지적한다.

 

“교육을 받은 기술자들은 공유자원의 책임 있는 경영을 재발견하고 있는 듯합니다만, 조하드와 같은 입증된 고대의 전통, 지역의 전통을 무시하고, 인공적으로 지하수를 늘리는 일처럼 번거로운 기술을 쓰고 있습니다. 기술자들은 석회나 열대림 대신에 시멘트, 벽돌로 만든 돔 대신에 콘크리트 슬라브를 씁니다. 곧 자신들의 한정된 이해 수준으로, 전통과 그것이 지닌 관련성을 끌어내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서양 사회에는 지속성이 없다고 경고한다.

 

“오랜 세월에 걸친 우리 사회의 노예제도와 부정적인 힘이, 우리를 장애자처럼 만들어 버렸습니다. 마을은 믿음의 부족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만약 누군가가 그들과 하나가 되어 도덕심을 높인다면, 사회는 자각하고 새로운 희망을 품고 움직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한 목발이 되었습니다. 지역사회가 그 힘을 회복하고 자립하여 움직이기 시작하기까지에는 목발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새로운 열의를 뒷받침하는 많은 젊은이의 열광을 등에 업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서양을 보면, 그 나라들은 사치품으로 변환하려고 천연자원을 모조리 캐내고 있습니다. 이 방식으로 천연자원은 고갈되고 맙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사례가 아닙니다. 바야흐로 우리가 우리의 통찰을 써서 적절하게 천연자원을 이용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 시대는 우리의 것이 되겠죠.”

 

 

선주민의 지식을 다시 찾다

 

인도에서는 물을 얻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있었다. 공통된 점은 아래와 같다.

 

지역 자원과 기술을 활용

분산된 지역사회에서 경영하는 물 관리

천연자원의 지속가능한 보전과 활용

선주민의 지식을 이용한 체계의 부활

전통적인 체계를 이해한 제3자의 개입과 선주민의 지식 활용

토지, 물, 숲 주변에서 지역사회가 계획에 참여하여 활동

옛 시설의 수복과 새로운 시설 구축에 참가

마을과 유역에서 새로운 조직의 활동

 

라헨드라 싱 씨가 실천한 방식은 옛날 찬드라굽타 마우랴Chandragupta Maurya(기원전 321~297년)의 조언자이자 대신이기도 한 카우틸야Kautilya가 쓴 통치문인 아르타샤스트라Arthashastra와도 비슷하다. 아르타샤스트라는 각 지역사회가 운영하는 물 관리의 법적·경제적 범위를 모두 망라한다.

예를 들면 통치자는 수로 건설에 참가한 사람에게 토지, 도로, 나무, 시설을 제공해야 했다. 참가하지 않는 사람은 기부금을 지불해야 하고, 시설의 이익을 얻을 권리도 부여되지 않았다. 또 소유권이나 새로운 시설과 고대의 시설, 수리된 시설의 유지에 관해서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가령 자신의 수원水源이 있는 곳일지라도 관개시설의 모든 수익자는 세금을 내야 했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서 새로운 시설을 만든 사람은 세금이 공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리 규정은 수로의 경제적인 면을 보호하는 조항에 지나지 않고, 진짜 동기는 다른 곳에 있었다. 지역사회의 못과 물통, 수로 건설에 참가한 동기는 자존심의 문제로서, 그것을 종교적 공적이라 생각했다.

또 이러한 고대 전통 공학의 기술적 측면은 실천과 구전으로 전승되어 서서히 완성되었기 때문에, 근대와 같은 의미의 기록 자료는 거의 없다. 게다가 인도에서 이 지식은 존경받는 연장자나 구루(종교지도자)의 지시에 바탕을 두는 실천으로 전승되었다. 몇 세기나 걸쳐 토양, 물, 숲, 야생생물, 환경 전체를 현지 주민의 공유자원이라 생각한 것이 지역사회가 받아들인 세계관이었다.

라헨드라 싱 씨의 활동은 교육이나 숲 보호와 여러 갈래에 걸쳐 있는데, 그는 약용식물이나 그 이용법도 연구하고 있다. 비캄푸리에서 타룬 조합은 아유르베다 센터와 실험실도 가지고 있다. 싱 씨는 대학원에 다닐 때 힌두문학을 공부했는데, 그 전공 분야가 아유르베다 의학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아유르베다의 의사라면 약으로 사람들을 치료했겠지요. 그렇지만 지금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넓히려고 합니다. 이는 사회가 믿음과 책임감으로 나아가도록 하는 데에 도움이 되겠지요. 나는 사람들의 영혼을 치료하고 있습니다.”

 

 

인용문헌

 (1) Aman Namra, A river is reborn,The Hindu Business Line,June05, 2000.

 (2) Volume 18 - Issue 17, Aug. 18 - 31, 2001.

 (3) Civil Society Information Exchange Pvt. March 2002.

 (4) Patrick McCully, Water-Harvesting in India Transforms Lives, World Rivers Review,Dec2002.

 (5) Rajendra Singh, Indigenous systems of water management and their modern applications, Organiser, 16 Aug, 2009.

728x90
728x90

인도의 전통농업 - 전통 제방 조하드Johad

 

 

 

죽어 있던 마을

 

라자스탄Rajasthan주州는 인도에서도 가장 강수량이 적은 건조지대로서 가뭄 피해를 자주 받는다. 2002년 11월에도 이 주의 동남부에서 가뭄이 발생해 많은 사람이 풀을 먹으며 굶주림을 이겼는데, 적어도 40명은 굶어 죽었다. 델리에서 몇 시간 남쪽의 라자스탄주 북동쪽에 있는 알와르Alwar 지역과 인접한 불모지 아라발리Aravalli 언덕.

 

라자스탄주의 지도. 

 

 

아리발리 언덕 지대. 

 

 

라헨드라 싱 씨가 1985년 10월 2일 저녁에 4명의 동료와 함께 버스 종점인 비이캄푸라Bheekampura에 내렸을 때도 토지는 황량했다. 길에서는 먼지가 흩날리고, 길가에 늘어선 몇 그루의 인도보리수나무와 고무나무도 생기가 없었다. 언덕의 기슭에는 간신히 숲이 자리한 모습이었다. 대리석을 캐기도 하여 몬순의 비가 내리면 민둥산에서는 암석이나 토사가 산허리를 쓸고 내려왔다.

 

“지역에는 풀잎 한 장조차 없어, 우연히 소의 사체를 만났던 일이 생각납니다.”

 

 

조하드를 설명하고 있는 라헨드라 싱 씨.

 

 

라헨드라 싱 씨는 이렇게 말한다. 농지의 겨우 3%밖에 물을 댈 수 없어, 비로만 짓는 농업은 가뭄이 들면 수확을 할 수 없었다. 사료나 물 부족으로 마을 경제의 기둥인 농업도 죽어 있고, 마을 남성의 대부분이 아메다바드Ahmedabad나 델리로 돈을 벌려고 나갔다. 젊은이들도 일을 구하러 마을에서 나가 젊은 사람의 모습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강과 못도 모조리 마르고 우물물도 말라, 여성들은 1.5㎞나 떨어진 곳에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물을 날라야 했다. 라헨드라 싱 씨는 나중에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단 하나의 과제, 인민을 억압하는 부정과 싸우는 방법밖에 몰랐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응하는 방법으로 마을에서 문맹률을 낮추는 대책밖에 몰랐지요. 그래서 우리는 문맹률을 낮추는 조직을 꾸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라헨드라 싱 씨는 마을의 노인, 만구 파텔Mangu Patel 씨에게 이런 말을 듣는다.

 

“우리는 글자를 알고 싶은 게 아닙니다. 바라는 것은 물입니다.”

 

그러나 물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농촌은 우리에게 물의 가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1984년 이전에 저는 물에 대해서도, 어떻게 해서 그것을 보전하는지도 전혀 몰랐습니다.”

 

 

 

몬순의 비를 모으는 특수한 제방

 

하지만 이 지역에는 조하드Johad라고 부르는 독특한 전통농법이 존재하고 있었다. 1985년 라헨드라 싱 씨가 마을을 찾았을 때는 전통적으로 물을 관리하는 방법이 세계화에서 아득히 멀리 떨어져 있던 이 마을 사람들의 기억에 아직 살아 있었다.

 

물이 마르고 있는 조하드.

 

 

조하드는 빗물을 모으려고 비탈에 쌓은 단순한 초승달 모양의 오목한 제방이다. 세 면에 높은 제방을 쌓고, 한쪽은 물이 흘러 들어오도록 열어 놓는다. 제방의 높이는 유역에서 흘러 들어오는 최대 유입량을 예상하여 결정하고, 장소와 유속, 수압 등에 따라 여러 가지이다. 또 수압을 약화시키고자 ‘아프라Afra’라고 부르는 구조가 넘치는 물을 빼기 위해 설치된다. 그런데 그 설계는 측량하지는 않고, 마을 사람의 경험과 직관에 바탕하여 만든다. 돌, 모래, 석회암이 필요할 때도 있는데 모두 현지에서 구할 수 있으며, 대부분은 진흙으로 쌓는다.

그리고 몬순의 비가 내리면, 조하드의 뒤쪽에는 물이 괴어 못이 생긴다. 못의 넓이는 2~100㏊까지 다양하며, 1년 내내 물이 고여 있는 곳은 큰 조하드뿐이고, 대부분은 반년 정도인데 몬순 뒤에는 완전히 말라 버린다. 하지만 조하드는 지상에만 물을 모으는 것이 아니라, 지하수를 풍부하게 하려는 목적도 있다. 모아 놓은 물은 지하로 침투되어 토양 수분량도 올라가고, 식물에 물기를 준다. 최후에는 다시 강으로 흘러간다. 물이 괴어 있는 시간은 토양과 지하수의 높이에 따라 다른데, 때로는 몇 개월에 이른다. 하지만 지하에 침투된 물은 증발되지도 않고, 모기가 발생하는 곳도 되지 않으며, 사람과 가축의 대소변에 오염되는 일도 없다. 그리고 물은 여과되어 관개, 가축용 음료수, 기타 목적에 직접 사용된다. 가뭄이 몇 년 계속되어도 우물물은 마르지 않는다. 게다가 조하드에는 빗물을 모으는 기능만이 아니라, 홍수를 완화하고, 토양침식을 억제하는 기능도 있다. 갈수기에 물을 빼면 조하드 안에 있는 토지도 경작할 수 있다. 밑바닥에는 모래와 진흙의 중간 크기인 좋은 흙이 모이고, 토양 수분도 있어 물을 대지 않아도 작물을 재배할 수 있다. 곧 조하드는 귀중한 농지를 빼앗지 않는다. 다시 말해 외부에서 자재도 필요하지 않고, 마을 사람이 손수 구축·유지할 수 있으며, 지역 전체의 지하수를 풍부하게 하는, 간단히 말해 돈이 들지 않는 걸출한 전통 기술이다.

그래서 라자스탄주에서는 몇 백 년이나 조하드를 구축해 왔다. 하지만 20세기가 되면서 국가에서 주도하는 대규모 물 개발 프로젝트가 시작되어, 마을 수준에서 물을 관리하는 제도가 약화되고 황폐해져 마을 사람들은 심각한 물 부족으로 고통을 받게 되었다.

 

 

 

되살아난 하천, 아라바리Aravari강의 재생

 

“그래서 만구 파텔 씨의 조언에 따라 우리는 조하드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라헨드라 싱 씨가 통솔하는 NGO인 타룬 바라트 상Tarun Bharat Sangh(젊은 인도 협회)는 1985년에 먼저 첫걸음으로 고팔푸라Gopalpura 마을에서부터 일에 착수했다. 다른 라자스탄주의 마을과 마찬가지로 고팔푸라 마을도 1985~1986년의 가뭄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마을의 조하드는 파손된 상태였다.

420m 길이, 6m 높이, 15m 너비의 제방을 수복하는 일은 겨우 350명밖에 없는 작은 마을에서는 커다란 일이었다. 하지만 수복 비용의 일부를 부담하는 것으로 600비가스bighas(200㏊)의 농지에 물을 댈 수 있는 물을 모았다.

고팔푸라 마을의 성과가 눈에 보이자 다른 마을로도 이어졌다. 1988년에는 부리바스Bhurivas、덤리Dumli、카다타Khadata、카탈라Khatala、사마스타르Samastar、초슬라Chosla、랄푸르Lalpur 마을에서 조하드가 만들어지고, 1989~1991년에는 알와르 지역 타나가지Thanaghazi구區의 팔사나Palsana, 로지 키 다니Loge ki Dhani, 바온타-콜야라Bhaonta-Kolyala, 하미푸르Hamipur, 사마라Samara, 나타타Natata, 칼레드Kaled, 자그나트푸라Jagnathpura 마을에도 퍼졌다. 조하드는 소규모이고, 언뜻 많이 있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몇 백, 몇 천이 합쳐지면 말랐던 대지를 바꾸어 간다. 유역의 지하수 높이를 높이고, 주변의 숲을 풍족하게 한다. 그리고 숲이나 떨기나무도 몬순의 비에 유출되는 것을 늦춘다. 그 결과 기적이 일어났다.

바온타-콜야라 마을의 다나Dhanna(70) 씨는 말한다.

 

“마을 사람의 생활은 바뀌었습니다. 우리 여성은 물을 길러 3~5㎞ 이상이나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강에도 우물에도 물이 있습니다.”

 

아르준 구자르Arjun Gujjar 씨도 말한다.

 

“아이들은 강에서 물장구치고, 여성은 빨래하고, 남성은 목욕을 즐기고, 동물조차 몸을 씻거나 물을 마십니다. 이전에는 델리나 아마다바드의 빈민가로 이주했던 사람들이 마을로 돌아오기까지 하는 상황으로 호전되었습니다. 강도 되살아나, 60㎝에 10㎏이나 하는 물고기가 삽니다.”

 

바온타-콜야라 마을의 주민들은 타룬 바라트 조합의 지원으로 조하드 건설에 착수하고 유역의 마을도 그에 뒤따라 조하드가 375개나 생겼을 때, 말랐던 아라바리강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1940년대 이후 아라바리강은 몬순 뒤에는 흙탕물이 흐르기만 했는데, 1994년에 되살아나서는 1년 내내 흐르게 되었다. 그리고 1년 내내 물도 맑다. 수량도 늘어나고, 물고기도 자연히 늘었다. 라헨드라 싱 씨는 이렇게 말한다.

 

“1996년 여름 한창 뜨거울 때도 하천의 물이 변하지 않는 것을 알고서 우리 스스로 놀랐습니다. 하천을 재생하는 일은 처음부터 의도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천 물이 지하수로 들어가는 것을 이해하지 않고서 몇 년이나 계속해서 조하드를 건설했지요.”

 

재생된 것은 아라바리강만이 아니다. 몇 십 년이나 말라붙었던 하천인 사르사Sarsa, 루파렐Ruparel, 바가니Bhagani, 자하이왈리Jahajwali강도 1년 내내 흐르게 되었다.

 

 

 

조하드로 되살아난 마을

 

만달와스Mandalwas 마을도 타룬 바라트 조합이 활동하고 있는 1000곳 이상의 마을 가운데 하나로, 마을 사람은 지하수의 높이가 높아진 덕분에 1000개 이상의 우물을 손에 넣었다. 나이 많은 여성 라츠마바이Lachmabai 씨는 말한다.

 

“우리 이전의 몇 세대는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행운이 결코 없었습니다. 물 덕분에 우리는 행복합니다. 우리의 소도 행복해 하고, 야생 생물도 행복해 합니다. 수확은 많아지고, 숲은 푸르러지며, 땔감, 소의 먹이, 그리고 우물에는 물이 있습니다.”

 

만달와스 마을 사람은 과거 15년 동안 45개의 조하드를 쌓았는데, 더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전에는 얼마 되지 않는 물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많은 물이 필요한 채소와 돈벌이 작물도 재배할 수 있다. 하루 한 끼로 살던 마을 사람들은 지금 하루에 두 끼, 3번이나 영양가가 높은 다양한 식사를 할 수 있다. 여성들의 물 긷기나 땔나무 모으기, 사료, 목초, 소 돌보기의 수고도 줄었다. 숲이 재생되어 땔감과 사료용 나뭇잎을 많이 구할 수 있게 되었다.

자이플 지역의 잠와 람가르 테실Jamwa Ramgarh tehsil의 님비Neembi 마을도 끊이지 않는 가뭄이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1994년 5만 루피를 투입한 바라트 조합의 지원으로 두 군데에 조하드를 쌓았다. 지금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3000만 루피의 가치가 있는 채소와 우유를 생산하고 있다.

물이 풍부해지면 작물을 잘 생산할 수 있고, 지하수의 높이가 높아지면 디젤 펌프의 경비도 줄어든다. 사료를 손에 넣으면 소도 기를 수 있고, 유유 생산도 늘어난다. 소녀들이 학교에 다닐 시간도 생기고, 마을의 생활은 풍족해진다. 나무 심기가 진행되고 채소 생산도 번성한다. 농업은 생산적이 되어 지역에서는 번영을 누린다.

15년 뒤 수많은 조하드로 알와르의 생활은 개선되고, 사람들은 자존심을 되찾았다. 인기가 없었던 마을에도 다시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라자스탄주는 이제는 가뭄이나 물 위기를 뜻하는 말이 사라졌다. 마을 사람들이 쌓은 조하드가 지역을 바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라트 조합은 주 안의 11개 지구 약 850개 마을에서 약 4500개의 조하드를 쌓았다. 2001년에는 약 1000개의 조하드를 쌓아, 1000곳 이상의 마을이 합계 약 9000개의 조하드와 사태막이 제방, 아니커트Anicut를 손에 넣게 되었다. 자이플, 다우사Dausa, 사와이 마도푸르Sawai Madhopur, 바라트푸르Bharatpur, 카라울리Karauli 등의 인접한 지역의 마을도 되살리고, 활동은 마디야푸라디슈주, 구자라트주, 안도라푸라데슈주 등 6500㎢까지 확대되었다.

 

 

 

 

 

강의 물고기를 지키는 주민들

 

주 정부가 아라바리강의 어업권을 외부에 넘기는 계약을 하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은 저항했다. 유역의 주민들은 유역의 숲을 보호하고 새롭게 흐르기 시작한 강이 난개발되지 않게 하려고 규칙을 정하기로 하여, 1999년 34개 마을의 대표들이 모여 ‘아라바리 위원회’를 창설한다고 선언한다. 마하트마 간디의 마을 스와라지swaraj의 개념에 따라 토지가 없는 농민만이 물을 뺄 수 있고, 대량의 물을 필요로 하는 사탕수수 재배나 물소의 사육을 금지하는 등 위원회는 11개의 원칙을 정했다. 위원회에 법적 권한은 없다. 하지만 물고기를 지키는 규칙을 위반한 사람에게 벌금을 부과하고, 마을의 자원을 이용하며 생기는 대립을 해결하는 도덕적 권한은 가진다. 정부의 수산부와 어업 계약을 한 자이플의 사업가는 마을 사람들에게 쫓겨나, 주 정부는 그 계약을 취소해야 했다. 주민들은 물고기를 스스로 관리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더욱이 마을 사람들은 전원이 채식주의자라 물고기를 먹지도 않는다. 현재 위원회에는 72개 마을이 참가하고 있다.

 

 

 

야생 생물과 물을 나누다

 

바온타-콜야라 마을의 사람들은 ‘인간과 야생 생물의 성역’을 만든다. 그곳에서는 돌과 콘크리트의 아치형 제방 표면에 보호 지역의 규칙이 이렇게 적혀 있다.

 

“신이 창조한 이 숲에서 수렵은 안 된다. 마을 회의와 수장의 허락 없이 어떤 나무도 벨 수 없다. 나무에는 신이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소, 염소, 낙타로 숲을 파괴하지 말라. 마을의 야생 생물과 소는 이 마을 유역의 온갖 물방울을 건드릴 수 없다.”

 

이 성역에서는 야생 멧돼지, 하이에나, 원숭이, 재칼, 여러 종류의 사슴과 표범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못의 옆에 호랑이의 길이 설립되었다. 마을 사람은 물 보전과 숲 보호를 시작하기 전에 이러한 동물은 마을 근처에서 전혀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알와르 언덕은 인도에서 가장 알려진 야생 동물 보호 지역의 하나로, 사리스카 호랑이(Sariska Tiger)의 성역이다. 타룬 바라트 조합은 이 ‘성역 안’에 115곳의 ‘완충 지역’과 그 주변부에 다른 600개의 흙이나 콘크리트로 만든 조하드를 쌓았다. 당초 산림국의 직원들은 타룬 바라트 조합과 적대했다. 조합의 사람들을 의심스럽게 보고, 성역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태도가 변해 타룬 바라트 조합의 일을 격려하고, 공원을 관리하도록 권하고 있다. 조하드가 지하수의 높이를 올리고, ‘어둠의 영역’에서 ‘밝은 영역’으로 바뀌도록 돕기 때문이다. 조합이 숲을 되살리는 데 공헌하는 것만이 아니라, 야생 생물에게 음료수를 주며 밀렵을 금하도록 마을 사람들을 설득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정하게 되었다. 라헨드라 싱 씨도 많은 밀렵꾼의 인생을 바꾸는 일을 도왔는데, 거기에는 밀렵꾼에서 호랑이의 보호자(nahar sevaks)가 된 사람도 있다. 이 때문에 호랑이의 수도 최근 18마리에서 약 25마리로 늘었다.

 

 

사리스카 호랑이. 

 

 

 

근대 댐보다 우수한 조하드

 

정부의 지원은 모자라고, 공적인 부문의 적의에 직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하드는 약 14만㏊를 관개하고 있다. 바라트 조합에 따르면, 알와르와 인접 지역의 약 70만 명이 집에서 먹을 물과 가축·작물에 쓸 농업용수의 혜택을 얻고 있다고 한다. 각각의 조하드는 소규모이지만, 전체로 보면 그 장점은 대규모이다.

조하드는 경제적으로 보아도 우수하다. 조하드에서 관개할 경우에 이러한 용수의 경비는 500루피/㏊, 음료수로는 100루피(2달러)/名이다. 하지만 구자라트주에 있는 사르다르 사로바르Sardar Sarovar 댐 계획의 건설 공사비는 최소로 보아도 3000억 루피(60억 달러)나 되고, 관개용수의 경비는 17만 루피/㏊로서 조하드의 340배나 되며, 음료수로도 1만 루피/名로 100배나 든다.

만약 사르다르 사로바르 댐의 건설 예산을 조하드에 쓴다면, 현재 세계의 관개 면적의 2배, 6억㏊를 관개하는 동시에 세계 인구의 반인 30억 명에게 음료수를 제공할 수 있게 된다.

 

사르다르 사로바르 댐. 

 

 

게다가 훨씬 속도도 빠르다. 알와르 지역에서 조하드가 재건되기 시작한 것은 구자라트주 정부가 댐 공사에 착수한 때와 거의 같은 때인데, 알와르 지역의 주민들이 이미 혜택을 받고 있는 것에 비해 댐의 수익자는 아직 물 한 방울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도 댐 건설을 위하여 이미 4만 명이 강제로 이주되었고, 댐이 완공되면 더 많은 사람이 이주되어야 한다. 그런데 대형 댐과는 달리 조하드나 사태막이 제방 공사에서는 단 한 가족도 이주하지 않고, 하천도 파괴되지 않으며, 광대한 숲과 농지가 수몰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강과 숲을 만들어 낸다.

물론 알와르는 이상향이 아니다. 라자스탄주는 인도에서도 가장 가난한 주의 하나이고, 여성들의 권리도 낮다. 정부의 서비스는 인프라도 변변치 않고, 문맹률도 높다. 하지만 타룬 바라트 조합은 10개 마을 이상에서 부녀회를 만들어 마을의 의사 결정에 적극적으로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여성들은 처음으로 딸을 교육하고, 남 앞에서 얼굴을 가리는 퍼다purdah의 관습도 폐지되기 시작했다. 아동 노동을 근절하고, 탁아소를 운영하며, 학교에 딱 맞는 교사를 파견하도록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며, 공무원들의 뇌물 요구에는 단결해 저항하고, 유기농업을 널리 보급하고, 전통농법을 다시 찾고, 바이오매스 프로젝트와 나무 심기를 진행하며, 방적·방직 공업으로 고용을 창출하고, 근대적 공공 의료를 개선시킴과 함께 전통 의료도 추진하고, 위법인 광산 개발을 폐쇄시키는 운동을 조직하고, 호랑이가 서식하는 성역도 보존하고 있다.

세계은행과 댐 건설업계, 물의 민영화론자는 지금도 10억 명 이상이 깨끗한 물을 얻을 수 없다는 충격적인 통계 자료를 팩트로 사용한다. 그리고 이 과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투자를 해야만 하고, 다국적 기업이 그 임무를 맡아야 한다고 한다. 하지만 인도의 풀뿌리 조직은 비가 모자란 가뭄이 찾아오는 지역의 안에서조차 물을 보존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만약 인도나 세계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물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라발리 언덕의 대처 방식이 아닐까?

 

 

인용문헌

 (1) Aman Namra, A river is reborn,The Hindu Business Line,June05, 2000.

 (2) Volume 18 - Issue 17, Aug. 18 - 31, 2001.

 (3) Civil Society Information Exchange Pvt. March 2002.

 (4) Patrick McCully, Water-Harvesting in India Transforms Lives, World Rivers Review,Dec2002.

 (5) Rajendra Singh, Indigenous systems of water management and their modern applications, Organiser, 16 Aug, 2009.

728x90
728x90

에티오피아의 유기농업

 

 

 

몇 천 년이나 농촌에서 하던 일

 

1996년에 개최된 ‘세계 식량 정상회담(World Food Summit)’에서는 2015년까지 기아로 고통 받는 인구를 반감시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10년 이상 지난 지금도 개발도상국에서는 8억 2000만 명이나 굶주리고 있다. 이는 1996년보다도 늘어난 수이다. FAO의 ‘2006년 세계 식량안전 보장 상황 보고서’에 따르면, 전환국의 2500만 명과 선진국의 900만 명을 합하면 실제로는 8억 5400만 명이 굶주리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기아 인구는 줄어들기는커녕 해마다 400만 명씩 늘고 있다.

그런데 희망이 되는 사례가 있다. 2005년 10월 세계 식량 정상회담 10주년을 기념하는 회의에서, 에티오피아의 환경보호성 장관 테올데 베르한 게브레 에그지아브헬Tewolde Berhan Gebre Egziabher 박사가 공개한 에티오피아의 티그레이Tigray주州에서 행한 지속가능한 농업의 성과가 그것이다. NGO와 정부의 농업국이 10년에 걸쳐 프로젝트를 실험한 결과, 유기농업으로 화학비료를 쓰던 관행 농장의 배가 되는 수확량을 생산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테올데 박사는 UNEP에서 지구의 옹호자 상(Champion of the Earth Award)과 생계권 상(Right Livelihood Award) 등 많은 상을 수상한 인물이다. 그는 유기농업으로 근대 농업과 똑같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냐고 묻는 말에 “그럴 수 있다”고 말한다.

 

 

테올데 박사.

 

 

 

“저는 유기농법으로 세계의 인구를 먹일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와 함께 유기농업이 확대되지 않으면 세계의 인구는 줄어들 것이라는 점도 확신합니다.”

 

테올데 박사는 ‘티그레이 프로젝트’를 낳은 부모로서, 프로젝트의 목표는 농장과 농사땅 주변의 야생종이 수분受粉, 병충해 조절, 물과 양분의 순환이라는 기능을 발휘하도록 농사땅이 아닌 곳을 포함해 생태계의 자연 순환 기능을 전체적으로 강화하는 것이다. “정말로 할수 있느냐”고 사람들이 물으면 테올데 박사는 다만 이렇게 답한다.

“옛날부터 농촌 지역사회는 몇 천 년 동안 이렇게 해 왔습니다. 우리의 지식은 더욱 늘어났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하던 것보다 더 잘할 수 있습니다.”

 

 

 

티그레이 프로젝트

 

박사의 프로젝트가 행해진 티그레이주는 에티오피아의 가장 북쪽에 있는데 주민의 85%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토지가 매우 나빠져서 농업 생산성이 낮고 매우 가난하다. 유아 사망률이 높고, 교육·의료·평균 수명이 모두 참혹하게 낮은 수준으로 에티오피아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의 하나이다.

 

 

에티오피아의 티그레이 지역.

 

 

처음에 티그레이 농업사무소(Tigray Agriculture Bureau)가 지역의 과제를 해결하고자 채택한 방식은 화학비료와 농약을 쓰도록 권장하는 ‘사사코와Sasakowa Global 2000’이었다. 그런데 세계의 농사땅 대부분은 세계 시장을 대상으로 농산물 가공품과 공업적으로 가축을 길러 팔고자 농약과 화학비료에 기반을 둔 집약적인 대규모 단작으로 꾸준히 나빠지고 있다. 녹색혁명은 그 이름처럼 ‘녹색’이 아니다.

“공업적인 농업으로 앞으로 1만 년 이후에도 세계의 인구를 먹일 수 있을까요?”

이 지역의 몇몇이 이렇게 묻기 시작했을 때,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테올데 박사가 통솔하는 수도 아디스 아베바에 있는 지속가능한 개발 연구소(Institute for Sustainable Development)도 협력 관계로 참가하여, 1995년 퇴비 만들기와 토양과 물 보전하기 등 생태적으로 토지를 경영한다는 독특하고 대안적인 실험이 시작되었다.

티그레이주를 대표하는 곳으로 약 50㏊씩 네 곳의 지구가 시험지로 선택되었다. 세 지구는 산악과 그에 인접해 인구밀도가 낮다. 땅심은 한 곳은 비교적 좋은데 나머지는 척박한데, 빗물에 의한 쓸림과 토양침식으로 식생이 사라지는 문제는 모든 지역에서 나타났다. 그리고 농장이 빗물에 쓸리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네 번째 지구는 비교적 비옥하고, 인구밀도도 높으며, 소도 많이 키우고 있었는데, 이 지구는 티그레이주 안에서 유일하게 호수에 접하고 있어서 선택되었다. 이 호수는 많은 물고기가 살아 들새도 많이 찾아오는데, 밖으로 흘러 나가는 하천이 없는 폐쇄 유역으로서 집약적인 농업을 하면서 사용하는 화학 자재 때문에 생태계와 생산성에 영향이 있을까 염려하여 선택되었다.

 

 

 

퇴비의 힘

 

프로젝트가 성공한 주안점은 퇴비를 활용한 것이었다. 티그레이에서는 퇴비를 쓰는 전통이 거의 없어 처음에 마을 사람들은 퇴비 쓰기를 주저했다. 하지만 몇몇 마을 사람이 실험하여 성공하자, 그걸 보고서 다른 마을 사람들도 뒤따르기 시작했다. 퇴비로 쓸 원재료가 부족하여 대부분이 현지의 잡초와 가정에서 나오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퇴비 원료를 늘리려고 풀씨를 언덕에서 모아와 흩뿌리기도 했다. 또 퇴비의 원료를 만들려고 소량의 질소비료를 줘서 잡초가 잘 자라도록 했다. 이 결과 모든 마을에서 수확량이 높아져 재배할 수 있는 품목도 늘었다.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2년 뒤인 1998년, 퇴비를 쓰는 농장은 화학비료를 쓰는 곳과 똑같은 수확량을 얻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2002년, 2003년, 2004년의 자료를 보면 화학비료를 쓰는 곳보다 퇴비를 쓰는 농장의 수확량이 평균적으로 더 높고, 때로는 배의 수확량을 올리는 곳까지 있었다. 그들이 쓴 퇴비의 양은 아직 권장량의 반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것만으로도 수확량이 화학비료의 그것을 뛰어넘었다.

또한 농민들은 퇴비의 효과가 4년이나 이어진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화학비료는 해마다 또 줘야 했는데, 퇴비는 해마다 줄 필요가 없었다. 또 토양의 보수력을 높이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퇴비를 준 곳의 작물은 토양의 보수력이 높아 잘 자란다는 것도 알았다. 에티오피아의 많은 지역에서 가뭄이 문제인 만큼 이는 매우 중요하다. 또 화학비료를 사지 않아도 되기에 경비를 절감할 수 있어 농민의 수입이 올라 빚의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지속가능한 개발 연구소의 간부들은 퇴비를 쓰면 다음과 같은 많은 장점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했다.

 

생물 다양성이 증가함

김을 매는 노동력이 경감됨

가뭄 피해가 감소됨

해충에 내성이 증가함

화학비료를 살 때보다 낮은 비용을 씀

 

그런데 프로젝트가 추진된 것은 퇴비만이 아니었다. 물을 보전하고, 토양침식을 막으며, 작물 품목을 다양하게 하는 한편, 여러 목적으로 나무 심기도 진행되었다. 예를 들면 빗물에 의한 침식이 진행된 곳에서는 흙막이 댐을 구축하고, 그 배후에도 작은 댐을 만들었다. 그 덕에 빗물에 쓸리던 골짜기 주변 토양의 보수력이 높아져 골짜기의 바로 옆에도 작물을 심을 수 있게 식생이 재생되었다. 또 토양침식을 막고자 돌로 된 장벽과 퇴비를 섞은 구덩이 제방도 만들었다. 더욱 흙을 안정시키는 효과와 함께 가축의 먹이도 하려고 질소를 고정시키는 나무인 Sesbania sesban도 심었다. 그 결과 지하수의 물높이가 높아지고, 지속적인 관개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프로젝트 8개의 성과는 아래와 같다.

 

 

콩과 식물인 세스바니아 세스반. 

 

 

작물 수확량과 생산성의 증가함

가뭄/해충에 대한 위험이 감소함

화석연료 투입 자재에 의존하던 것이 감소

지하수가 많아짐

땅심이 좋아짐

나빠진 흙이 수복됨

수입이 증가함

여성의 힘과 지위가 높아짐

 

 

 

지역사회의 힘

 

환경과 조화된 기술이 위력을 발휘하는 곳에서는 지역사회의 힘도 크다. 지속가능한 개발 연구소가 추진한 것은 농민이 주도하는 프로젝트였

다. 토지 등 지역 자원의 관리를 개선하려면 지역사회의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미리 프로젝트를 실시하는 방법을 의론하고자 위원회가 만들어져 거듭 회의가 열렸다. 과제와 그걸 자신들이 할 수 있는 해결할 방법을 정하기 위하여 마을마다 집회가 열려, 그 안에서 마을 사람들 스스로 집약적인 유기농업 프로그램을 세웠다. 프로젝트에서도 경험을 쌓은 보급원을 조정자로서 배치해 후원했다. 프로젝트는 농민이 서로 교류하도록 하고, 페달 펌프 등 간단히 이용할 수 있는 기술도 지원했다. 그와 함께 프로젝트를 경영하기 위한 현지 위원회도 설립해, 현지의 사회적인 법 습관도 개정했다. 그리고 협동 작업은 변경의 마을이 쉽다는 점도 알았다. 가령 실험이 잘 기능하지 않아도 보장이 되기에 잃을 것이 별로 없는 만큼 농민들이 열심히 실험에 참가하여, 어느 마을에서는 협동으로 퇴비를 만들 때 쓸 굴을 파기도 했다. 이러한 개혁의 와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여성들이 힘을 길렀다는 점이다.

“지역사회의 조직을 소생시키지 않고 이러한 경영 개혁은 할 수 없겠죠.”

지속가능한 개발 연구소의 소장인 슈 에드워즈Sue Edwards 씨는 말한다. 에드워즈 씨는 원래 식물학자로 본업은 교사 겸 과학 기자인데, 프로젝트의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그녀는 프로젝트가 성공한 주안점으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한다. 이 지역은 몇 년이나 내전을 겪어서 여성이 세대주인 가족이 많은데, 전통적으로 여성이 자기 밭을 쟁기질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남성인 이웃이나 친척이 수소로 쟁기질을 해줄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것이 파종 시기를 늦추고, 재배 기간을 단축시키는 장애가 되었다. 이 때문에 프로젝트에서는 여성들을 격려해, 재배 기간이 길어지도록 조, 수수, 옥수수를 모종으로 기르도록 장려했다. 기후변동으로 제때 우기가 찾아올지 예측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많은 장점이 있는 일이다.

 

 

테올데 박사와 함께한 슈 에드워즈 씨. 

 

 

식량 안전 보장을 담보하는 소농의 유기농업

 

네 지구에서 거둔 성공으로 에티오피아의 다른 지역에도 유기농업이 퍼지게 되었다. 예를 들면 프로젝트로 가장 성과가 있었던 지구의 하나인 워레다Woreda에서는 2100호의 농가로 구성된 열여섯 지구 전체가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5년에는 지속가능한 개발 연구소와 마흔 두 곳의 지역사회가 프로젝트에 공동으로 참여하는 데까지 확대되었다. 이 때문에 정부도 프로젝트 지구에서는 화학비료와 농약에 바탕을 둔 ‘사사코와 Global 2000’을 촉진하지 않기로 동의했다. 토지가 나빠지는 것과 빈곤, 전쟁 때문에 전략적으로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것이 정부의 전략이 되었다.

현재 프로젝트는 지속가능한 개발 연구소와 지방행정 당국에 더해 농업천연자원국(Bureau of Agriculture and Natural Resources) 및 메켈레Mekelle대학도 참가하고 있다. 2003년 에티오피아 정부는 유기농업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하고, 작물·축산 제품·식품 가공·마케팅 부문을 담당하는 국내의 유기농산물 기준을 만들고자 태스크포스를 조직했다. 유기 제품은 급성장하고 있는 특정 시장으로, 남부와 남서부의 지역사회에서는 공정무역으로 유기농 아라비카 커피를 수출하고 있다. 하지만 해외만이 아니라, 수도 아디스 아베바의 중산층 사이에서는 건강한 과실과 채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예를 들면 완전한 유기농으로 채소, 과실, 관엽식물을 재배하는 유축 복합의 ‘창세기 농장(Genesis Farm)’은 해외에서도 인증을 받은 농산물을 생산하는데, 현지 시장에서도 농산물을 판매하고 있다. 농장에서 생산한 농산물의 값은 다른 곳에서 생산한 현지 농산물보다 비싸지 않고, 심지어 싸기조차 하다. 이 때문에 현장의 노동자들도 농장의 상점에서 채소를 사고 있다. 그런 경제적인 장점만이 아니라, 유기농업으로 식량 안전과 건강한 음식이 확보된다는 지역사회에서의 장점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소농을 생산에서부터 제외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소농으로 유기농업을 하는 것은 대규모 농업보다 훨씬 세련됩니다.”

슈 에드워즈 씨는 말한다.

‘세계 식량 안전 보장 상황 보고서’는 소농의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대부분의 농민, 특히 변경의 가난한 농민 대다수는 외부의 투입 자재를 거의 얻을 수 없다. 그렇지만 티그레이 프로젝트는 열악해진 산악 환경에서도 유기농업으로 화학에 기반을 두는 농업보다 높은 수확량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곧 티그레이 프로젝트의 원칙과 접근법은 빈곤에서 빠져나오고, 식량 안전 보장을 얻기 위한 현실적으로 적합한 수단인 것이다.

 

 

 

written by 吉田太郞,  translated by김서방

 

 

인용문헌

 (1) Nicholas Parrott &Terry Marsden, The Real Green Revolution, Organic and agroecological farming in the South, Greenpeace Environmental Trust February 2002.

 (2) Organic Production for Ethiopia, ISIS Report 25/06/2004.

 (3) Lim Li Ching, Organic farming 'improving Ethiopian yields', South-North Development Monitor, 6 Nov,2006.

 (4) Fredrik Moberg, Jakob Lundberg, Ecosystem Services-Based Farming in Ethiopia Increases Crop Yields & Empowers Women, Sustainable Development Update, Issue 6, 2007.

 (5) Admin,Ecosystem Services-Based Farming in Ethiopia Increases Crop Yields & Empowers Women, 21 April 2008.

728x9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