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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농약, 무화학비료 쌀농사에 몰두하는 도쿠시마현徳島県 아난시阿南市의 무라카미 히로카즈村上弘和 씨.




자연환경과 인체에 큰 영향을 미칠 우려 때문에 세계적으로 사용금지와 규제강화가 진행되는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 일본에서는 해충 구제에 꼭 필요하다는 이유로 지금도 전국의 논밭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지역의 농가와 소비자, NPO 등과 협력하여 과감하게 '탈 네오니코티노이드'에 몰두하여, 성과를 올리고 있는 농협이 있다. 현지를 방문했다.


수확량도 늘고, 맛도 좋아지다


"쌀농사는 즐거워요. 그 덕에 충실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모내기가 막 끝난 논에서 검게 그을린 얼굴에 미소를 띠며 반겨준 건 기이紀伊 수도水道에 면한 도쿠시마현 아난시에서 농업을 경영하는 무라카미 히로카즈 씨(66)이다.


시스템 엔지니어였던 무라카미 씨가 회사를 정년퇴직하고 고향의 쌀농사를 계승한 건 6년 전. 소유한 4500평의 논 가운데 1/3은 농약도 화학비료도 일체 사용하지 않는 논. 다른 1/3은 화학비료의 사용량을 반 이하로 줄이고, 농약은 제초제만 1번 사용하는'특별재배 쌀'을 농사짓는 논이다.


무라카미 씨는 예전부터 유기농업에 관심이 있어, 쌀농사를 시작하는 동시에 농약과 화학비료를 줄이는 노력을 시작했다. 성과는 예상 이상으로 "수확량도 늘고, 맛에 관해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들뜬 목소리를 낸다. 


논의 위치가 흩어져 있는 것도 있고, 농약과 화학비료의 절감은 단게적이지만, "언젠가는 모든 논에서 무농약·무화학비료의 맛있는 쌀을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다. 


그런 무라카미 씨의 강력한 응원군이 아난시와 고마쓰시마시 등 두 시와 두 마치에 걸친 '동 도쿠시마 농업협동조합(JA동도쿠시마)'이다. 


JA동도쿠시마는 정조합원 수가 약 8천 명인 얼핏 보면 아주 평범한 농협인데, 다른 농협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지역의 농가와 NPO, 생협 등과 협력하여 농약과 화학비료를 가능하면 쓰지 않는 농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농협계의 이단아


농협에서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생산자재라고 부르고, 생산자재를 업체에서 매입해 농가에 판매하는 일이 중요한 수익원이 된다. 농림수산성에 의하면, 농가가 구입하는 농약의 약 60%는 농협에서 나온다. 생산자재의 취급량을 줄이는 일은 농협의 수익에 직접 영향을 주는 만큼 어느 농협이라도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JA동도쿠시마는 10년 전쯤부터 농약과 화학비료를 최대한 사용하지 않는 쌀농사를 과감하게 추진해 왔다. 그 중심 인물이 현재 JA동도쿠시마 카노坂野 출장소의 고문을 맡고 있는, 동료들에게 '농협계의 이단아'라고도 불리는 니시다 타카시西田聖 씨(60)이다. 



JA동도쿠시마의 니시다 타카시 씨.





자신도 쌀농가인 니시다 씨는 어느 날, 젊은 시절에는 논에 가득했던 백로의 모습이 어느새 거의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야생 조류가 사라졌다는 건 우렁이 등 먹이가 되는 논의 생물이 줄어들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당시는 농작업의 간소화와 작물의 수확량 증가를 목적으로 농약이 당연히 사용되던 시대.  "자연환경의 변화는 농약이 원인임에 틀림없다." 니시다 씨는 그렇게 직감했다고 한다.


그동안 쌀농가의 경영은 외국산 쌀에 대한 시장개방과 소비자의 쌀 이탈 등으로 급속히 악화. "이대로는 쌀농가가 생활할 수 없다"고 위기감을 느낀 니시다 씨의 머리에 떠오른 것이 잃어버린 자연환경의 회복과 쌀의 고부가가치화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무농약·무화학비료 쌀농사였다. 지금의 말로는 '지속가능한 농업'이다.


니시다 씨는 우선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작물을 기르는 유기농업의 이론을 공부하고, 스스로 유기농업에 가까운 쌀농사를 실천. 이론을 실증한 바, 농협 안에 '특별재배 쌀 위원회'를 설립하고 동료 쌀농가에게 참여를 호소했다. 


무농약을 추진하기로 결정했을 때 '가장 먼저 배제한' 농약이 네오니코티노이드계 살충제였다. 당시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이 원인으로 의심되는 농업의 피해가 잇따라 보고되기 시작했던 것이 이유였다. 



해외는 니코티노이드를 퇴출시키는 흐름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은 1990년대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비교적 새로운 유형의 살충제로, 현재 세계에서 사용되는 살충제의 주력을 차지한다. 그러나 식물의 수분에 필수인 꿀벌의 군집붕괴와 떼죽음, 다양한 야생생물의 감소에 원인이 된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아이의 발달장애와도 관련성이 있다고 지적하는 전문가도 있다. 그 때문에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의 사용중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네오니코티노이드 퇴출 운동도 확산되고 있다. 유럽연합은 4월,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 가운데 클로로아닐린, 이미다클로프리드,티아메톡삼이란 주요 세 종류의 사용을 거의 전면적으로 금지하기로 결정. 미국과 캐나다. 브라질, 한국, 대만 등도 사용금지와 규제강화를 단행하고 있다. 


한편 원래 농약 사용량이 많은 일본에서는 네오니코티노이드 농약도 다른 농약과 마찬가지로 전국의 논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저농약을 강조한 특별재비 쌀에서도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을 사용하고 있는 게 적지 않다.  

 

니시타 씨가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 때는 농협 안에서 신중한 목소리도 많았다. 농약과 화학비료의 사용을 줄이면 그만큼 생산자재의 매출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농가에서도 수확량이 줄어들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해 보면, 살충제의 사용을 중지해도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고, 호학비료를 줄이는 대신 닭똥과 지렁이의 똥으로 만든유기비료를 늘리면 벼가 튼튼해져 오히려 수확량도 증가. 맛도 분명히 좋아졌다. 


처음에는 관망하던 농가도 성공 사례를 보고 잇따라 참여를 결정해, 몇 명으로 시작한 특별재배 쌀 위원회는 현재 약 150명으로 늘어났다. 또 JA동도쿠시마가 취급하는 유기비료는 평판이 다른 지역 농가의 귀에도 들어가 화학비료 매출의 감소분을 보완해 거스름돈이 올 정도로 매출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니시다 씨는 "우선은 참여 농가를 늘리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쌀농사의 가장 중노동인 제초작업은 아직 제초제에 의지하고 있지만, 유기비료를 늘리면 토양이 개선되어 잡초가 자라기 어려워졌다. 이대로 계속하면 몇 년 뒤에는 아마 제초제도 필요없어질 것이다"라고 완전 무농약에 자신을 보였다. 실제로 무라카미 씨처럼 한 발 앞서 완전 무농약을 달성한 농가도 있다. 


  

꿀벌을 지키는 쌀



쿱Coop 자연파自然派의 '꿀벌을 지키는 산지직송 쌀'




JA동도쿠시마의 네오니코티노이드 퇴출 노력이 성공하고 있는 건 지역의 생협과 NPO의 협력도 크다.


간사이와 시코쿠에서 사업을 전개하는 생활협동조합연합회 쿱Coop 자연파 사업연합(쿱 자연파)는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이 문제시되기 시작한 약 10년 전부터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도쿠시마의 쌀을 취급하기 시작했다. '꿀벌을 지키는 산지직송 쌀' '두루미를 부르는 쌀' 등의 이름으로 판매하고 있다.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을 쓰지 않고 농사짓는 쌀은 바구미가 노린재가 갉은 흔적이 검게 남은 '반점 쌀'이 생기기 쉽다. 반점 쌀은 안전성과 맛에는 문제가 없지만, 볼품이 없기 때문에 거래 가격이 싸진다. 또 기온이 올라가면 보관하던 쌀에 바구미가 꼬이기도한다. 쿱 자연파의 자회사 쌀 사업을 담당하는 쿱 유기의 사에키 마사아키佐伯昌昭 전무는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을 쓴 쌀에 벌레가 나지 않는 건 수확한 뒤에도 쌀에 농약 성분이 잔류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반점 쌀과 보관의 위험을 없애고자 쿱 자연파는 3년 전 쌀을 저온에서 연중 보관할 수 있는 창고를 도쿠시마 시내에 건립하는 동시에, 반점미를 자동으로 골라낼 수 있는 광학식 선별기를 구입했다. 


특별재배 쌀과 무농약·무화학비료의 쌀은 농가에서 매입하는 가격이 높기 때문에 소매가도 비싼 경향이 있다. 하지만 농가에게서 터무니 없이 헐값에 사들이면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운동은 확산되지 않는다. 그래서 쿱 자연파는 중간유통업자를 끼우지 않고 직접, 조합원에게 판매하여 판매가격을 슈퍼에서 판매되는 쌀 수준 또는 그 이하로 억제했다. '안전하고 맛있고 저렴한 쌀'이 소비자의 요구에 부합하는지, 쿱 자연파의 회원수는 매년 10%의 비율로 늘어나고 있단다. 


유기농업이야말로 일본 농업의 미래


JA동도쿠시마의 몇몇 지역에서는 2012년 이후 해마다 유기농업의 관계자와 소비자들이 교류하는 '유기농업 에코 축제'를 열고 있다. 


매년 규모가 확대되어 현재는 도쿠시마 시내에서 개최. 실행위원회에는 JA동도쿠시마, 쿱 자연파, NPO법인 도쿠시마 유기농업 지원센터 등이 이름을 올리고, JA동도쿠시마의 아라이 요시유키荒井義之 조합장이 실행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부정하는 유기농업의 행사 상위에 농약과 화학비료를 판매하는 농협의 조합장이 취임한 건 이례적이다.  


그 아라이 회장은 올해 유기농업 에코 축제의 책자에서 JA동도쿠시마의 노력이 지닌 의의를 이렇게 강조한다. 


"JA의 조합장이란 입장인 제가 유기농업의 깃발을 흔드는 데에 의문을 품은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JA그룹의 가장 큰 목적은 농업인의 소득증대, 농업생산의 확대, 그리고 지역의 활성화이며, 저는 이들의 실현에는 유기농업의 실천이 최적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출처 https://news.yahoo.co.jp/byline/inosehijiri/20180514-00085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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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2


서장 

벼농사 문화가 나아갈 바   사토 요이치로佐藤洋一郞





시작하며


일본인의 쌀 소비량은 2008년 현재 연간 약 60kg 정도이다. 하루 소비량으로 환산하면 160g 남짓이다. 예전의 도량형으로 말하면 이는 딱 한 홉에 해당한다. 1965년의 수치는 114kg이었기에, 이 45년 정도 사이에 소비량은반감한 셈이다. 총생산량도 1970년대 중반 무렵까지 연간 1200만 톤을 넘었지만, 2000년을 넘어서부터 900만톤 이하가 되었다. 논의 면적도 1970년대 초반 300만 헥타르를 넘었는데, 지금은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벼를 재배하지 않는 토지 가운데 다른 작물로 전환한 토지도 있다면, 농업 그것을 그만둔 곳도 많다. 경작방기지가 경작면적의 20%를 넘은 현도 있다. 일본인은 이대로 쌀을 먹지 않게 될 것인가? 일본에서 논은 사라질 것인가? 


이 물음에 '과학적으로' 답을 내는 건 어렵다. 그러나 나는 일본인은 쌀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일본에서 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를 아래에 서술하려 한다.




쌀과 목숨을 둘러싸고 -생태학적으로 본 쌀의 위치


인류를 포함한 동물의 대부분은 자신의 손으로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를 생산할 수 없다.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는 식물이 만드는 당분이 사용된다. 전분과 지방은 당분의 대체물로 사용된다. 신체를 만드는 단백질에는 동식물의 단백질이 사용된다. 수렵채집 경제에서 이들은 다른 장소에서 획득되었는데,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면 그들의 생산은 점점 한곳에서 이루어졌다. 계절풍 아시아에서 쌀은 저습지에서 재배되었는데, 그 재배 장소에는 쌀(벼) 이외에 물고기와 패류, 곤충 등이 잡혔다. 이른바 '쌀과 물고기'의 한묶음이다(佐藤 편집 2008). 마찬가지로 유라시아 서쪽에서는 '맥류(또는 감자)와 젖(또는 고기)'라는 한묶음이 있었다. 그 무대가 되는 곳은 말할 것도 없이 '삼포식 농업'이라 부르는, 여름 작물+겨울 작물과 가축을 활용하는 형식이다. 현대 인도에서는 육식을 금기하는 사람들에 의해 콩과작물+벼과작물이란 한묶음도 있다(佐藤, 이 시리즈 제1권).


쌀과 물고기의 한묶음은 근현대 일본 열도에서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 대강은 아마 이 책의 우네 유타카宇根豊씨와 후지이 신지藤井伸二 씨의 논고에서 그리고 있다. 우네 씨도 후지이 씨도 '물고기'에는 직접 언급하고는 있지 않지만, 그 마음은 논의 다양한 존재에 있다. '논 학교'라는 NPO를 운영하고 있는 우네 씨는 벼농사의 실천가의 입장에서 논에 사는 생물들을 보아 왔다. 우네 씨 등에 의하면, 300평의 논 안에는 벼가 2000그루 자라고 있는 외에 올챙이가 2만3000마리, 우렁이(둥근논우렁이)가 300마리, 물방개가 50마리, 거미류가 7000마리 정도서식하고 있다. 이들의 숫자는 어림수이지만, 2001년에 우네 씨 등이 전국 조사를 행한 평균치라고 한다. 


우네 씨의 추론 같이, 필시 구조 개선 사업 이전의 논 경관에 섞여 있었던 일정하지 않은 모양의 논과 수로에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일부는, 그리고 '쌀과 물고기'의 한묶음 가운데 쌀 이외의 부분으로 사람들의 생명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논이란 장치가 오로지 벼만의 장치가 된 건 틀림없이 고도경제성장기 이후의 불과 50년 정도의 일이라 생각한다. 고도경제성장기, 일본에서는 다량의 인구가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했다. 그러한 것도 있고, 농업의 세계에서도 기계화가 이야기됐다. 좁고, 고도차가 있는 논을 부수고는 대규모 논으로 바꾸어 버리는 작업이 전국적으로 행해졌다. 그것은 분명히 '노동력 절감'을 가져왔지만, 그 대가가 다량의 석유를 소비하여 행하는 농업의 도입이었다. 




농업의 생태적 의미


우네 씨의 논고는 이 50년 동안의 이후에 생산성만 강조하는 농업에 대한 농사짓는 쪽에서 예리하게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것은 생산성이야말로 목숨과도 같다고 하는 사회 풍조에서 주목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생산성의 한계, 지구환경문제의 분출 등에 의하여 주목을 받게 된다. 특히 환경문제의 하나로 생물다양성의 의미를 고려할때 그 의미는 더욱더 명확해진다.


생물다양성이 지닌 '생태계 서비스'의 가치 가운데 하나는 먹이사슬의 안정적인 유지에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먹이사슬의 안정적 유지'란 생태계를 구성하는 종의 개체수와 관계성이 환경에 의지하지 않고 너무 많이 변화하는 일 없이 유지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예를 들어 제초제와 살균제 등의 사용으로 '잡초'와 '해충'을 구제하려는 시도는 먹이사슬의 안정적인 유지와는 상반되는 일이 된다. 


생태계의 안정성 유지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비료와 물 등의 '물질'을 대량으로 가지고 들어오거나, 또는 가지고나가지 않는 것이다. 즉, '무엇도 더하지 않고, 무엇도 빼지 않는' 것이 생태계의 안정에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을 포함한 선진국의 현대 농업에서는 다량의 자원을 가지고 들어오고 있다. 그것은 물, 비료와 농약부터 온실재배와 농기계용 석유 등을 포함하여 고려하면 방대한 양이 된다. 가지고 나가는 양도 다량이다. 무엇보다 농산물은 생태계 내에서 소비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을 생태계 밖으로 가지고 나간다. 즉, 현대 농업의 본질은 '고투입, 고수익'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농업의 형식은 고작 50년 된 것이고, 또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1960년대의 '녹색혁명' 이후의 일이라 생각한다. 이래서는 '논벼농사'가 가져오는 생태계의 지속성은 기대할 수 없다.


생태계의 유지에 중점을 두는 이러한 의론에 대해 세계의 인구 증가와 식량 공급의 균형을 고려하는 입장에 선 쪽의 비판이 많다. 분명히 저투입형 농업에서는 단위면적당 생산성이 저하된다. 선진국이 선진국의 이유만으로 생산성을 저하시켜 세계의 식량 생산에 부하를 더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개발도상국의 지지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이 하고 있는 일은 다음에 기술하듯이 자국의 토지는 놀리고 가지고 있는 돈으로 위력을 발휘해 세계의 식량을  여기저기 다니며 사 모으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적어도 사용할 수 있는 토지는 유효하게 사용해야 한다. 이 사태를 조금이라도 완화하는 것이 환경에 대한 부하를 줄이는 데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농업 생산과 생산비


농업은 산업 가운데 유일하게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태양광을 사용해 물과 이산화탄소에서 전분이란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기타 산업은 모두 석유와 석탄 등의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또 유한한 자원을 사용하여 물질을 만들어 왔다. 또한 여기에서는 농업이란 말을 넓게 해석하여 임업과 수산업, 축산업을 포함하여쓰기로 한다. 그런데 이제는 그 농업까지 석유를 사용한 소비형 산업으로 전환된 듯하다. 이제 농업은 농약과 화학비료 등 석유 제품이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수산업은 종래 수렵경제의 연장으로 '잡다'에 무게를 두었는데, 요즘 몇 십 년은 기르는 어업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기르는 어업이라 해도 과도하게 집약적인 양식은 협의의 집약농업과 마찬가지로 다량의 에너지를 소비한다. 또 종래부터 자원의 고갈을 불러온다는 비판이 강했던대규모 원양어업도 에너지 소비형 산업으로 전환해 버렸다. 물론 지금 바로 이러한 형식의 농업을 전환할 수는 없지만 농업의 의미를 고려한, 장기적 시각에 입각한 시나리오가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의 교역권이 확장됨에 따라 먹을거리도 장거리를 운송하게 되었다. 교역권의 확대는 원래 그 토지에 없는 자원의 융합과 다른 문화의 교류를 통하여 큰 부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지금처럼 다량의 먹을거리를 몇 천 킬로미터, 몇 만 킬로미터나 운송되면, 그 수송 에너지도 막대해질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캔의 니기리 초밥을 생각해 보자. 일본의 어느 어항 근처의 초밥가게에서 먹었던 '도미의 니기리'와 뉴욕의 '초밥 바'에서 먹은 그것과는 운반에 사용된 에너지는 극단적으로 다르다. 생산에 사용된 에너지는 대부분 똑같다. 전자에서는 현지의 농가에서 생산된 쌀과 근해의 어장에서 잡은 물고기를 사용하기에 수송에 들어간 에너지는 매우 적다. 그런데 후자는 쌀도물고기도 천 킬로미터의 단위를 운송된다. 게다가 물고기는 수송되면서 냉동이 빠질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정량적인 비교는 아직 행해지지 않았지만, '밭에서 위장까지' 가는 사이에 사용된 에너지를 단순히 비교하면 그 차이는 수백 배에 이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초밥의 가격차는 아마 몇 백 배가 안 될 것이다. 그건 전적으로 대량생산, 대량수송의 혜택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 이 대량생산의 은혜를 입어 온 것은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대량생산이 먹을거리의 안정화를 불러온다는 건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환상 같은 것이 아닐 수없다.


생산활동이 환경에 미치는 부하를 수치화한 생태학적 발자국의 발상은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생긴 것이다. 인류가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당분과 단백질의 한 묶음을 어떻게 에너지를 들이지 않고 생산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 인류와 그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할 큰 요소이다. 계절풍 지대에서 '쌀과 물고기' 및 맥류 지대에서 '맥류와 젖' 같은 한 묶음은 생태학적 발자국의 측면에서는 이상적인 농업 생산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대로 옛날로돌아자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먹을거리는 되도록 운송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결정적으로 식량이 충분하지 않은 지역이 있다. 아랍 사회 등이 그렇다. 그러한 지역에서까지 식량을 운송하지 말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막 한가운데에서 지금 당장 농업을 하는 건 에너지 측면에서는 분명하게 손실이 크다. 그러나 그래도 무엇을 얼마나 어디에서 운송할지에 대해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고려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잡초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 계절풍 지대의 농업에서 가장 위협이 되는 건 잡초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근세 이전의 논벼농사에서 휴경의 큰 이유는 잡초가 번성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각지에서 볼 수 있는 화전은 불을 사용하여 밭을 개간하는 농업의 방식인데, 같은 밭은 3년 경작하면 다음 해 이후 몇 년쯤은 휴경한다. 그 이유는 땅심의 저하와 잡초의 피해가 증가하는 데 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휴경은 적어도 고분 시대에는 시작되었다고 생각되며, 그것을 보여주는 상황증거도 몇 가지 알려져 있다. 그 정도까지 잡초의 해는 막대했던 것이다.


근세에 들어서면, 더 많은 노동력이 제초에 쓰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무렵부터 토지의 소유제는 명확해지고, 휴경하거나 새로운 토지를 개척하는 여지도 점점 사라졌다. 사람들은 항상 농지로 쓰게 된 논에 달라붙어 쌀을 재배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근대에 들어서도 똑같았는데, 도시 노동력의 수요가 확대됨에 따라 김을 매는 인구가 줄어들었다. 제초제는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개발되었다. 


제초제에 의하여 인류는 잡초를 박멸할 수 있었을까? 후지이藤井 씨의 논고를 보는 한, 그건 단정하기 곤란하다. 왜냐하면 가령 강력한 제초제를 써서 어느 잡초를 제거해도 이번엔 그 약제에 내성을 가진 새로운 잡초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새로운 잡초'가 같은 종에 속하는 다른 유형인 경우도 적지 않다.


도대체 작물과 잡초는 생태학적으로는 매우 '유사한' 관계이다. 일본처럼 비가 많고 식물의 생육이 빠른 장소에서 생태계는 방치하면 천이를 진행해 숲이 되어 간다. 경지는 경작이란 교란에 의하여 천이를 억누르는 장소이고, 또 거름기가 많은 토양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토지에 적응할 수 있는 건 작물과 잡초뿐이다. 둘은 비슷한 생태적 특성을 가지지만, 한쪽은 인간의 비호를 받고 다른 한쪽은 배제되는 정반대의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잡초가 세운 전략은 철저하게 작물의 모습을 본따는 것이었다. 이런 본땀으로 인해 잡초의 방제는 곤란해진다. 


또한 잡초라고 인식되는 종은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농학 관계자 안에서는 유명한 일화인데, '밀밭 안의 보리는 잡초'라는 것이다. 그건 혹은 빵밀(일본에서 보통 재배하고 있는 밀은 보통밀임)은 에머 밀이라 부르고 있는 재배종이 당시 그 밭에서 자라고 있던 잡초인 '야생 염소풀(Aegilops tauschii)'과의 사이에서 자연교배를 일으켜서 생겼다. 빵밀이 지닌 유전정보의 적어도 1배분은 잡초에서 기원한다. 더욱이 호밀이라 부르는재배종(검은 빵의 원료 등으로 쓰임)은 원래 밀밭의 잡초였는데, 조건이 나쁜 토지 등에서 재배식물로 진화해 온것이라 할 수 있다(辻本 2009).


반대로 이전 재배종이었던 식물이 잡초로 전환된 사례도 많다. 일본에서도 잡초 벼라고 하여 문제가 된 '붉은쌀(赤米)'은 중세에 도입된 품종이 근대에 들어서 잡초화된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잡초란 인간이 농경이란 행위를 통하여 저절로 산출한 존재이다. 잡초는 강하고 몹시 거친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그 강하고 거칠음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인류는 '녹색혁명' 이후 제초의 결정적인 수단으로 제초제를 개발하여 문자 그대로 '제초 방제'를 얻은 듯하지만,앞에서도 적었듯이 현재 상황에서는 그 시도가 반드시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뿐인가, 제초제를 지나치게 사용하여 물과 토양을 오염시키고, 희소종을 절멸로 몰았다. 즉, 환경을 악화시켰다. 현대 일본의 논벼농사도 기본은 그노선을 답습하고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현재 상황 대로 논벼농사의 행방은 결코 밝다고 할 수 없다.




논벼농사의 우위성


일본 열도의 논벼농사에서는 그래도 아직 다른 작물의 경작에 비하면 우위성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가 연작 장해를 일으키지 않는 점이다. 많은 작물은 같은 토지에서 반복하여 재배하면 '연작 장해' 또는 '그루타기'라 부르는 지장을 발생시킨다. 장해의 구체적인 내용은 작물에 따라 다르지만, 수확이 감소하고 질병에 걸리기 쉬워지는등 몇 가지 공통 사항도 발견된다. 그런데 논벼농사의 경우에는 이 연작 장해가 거의 없다고 알려져 있다. 벼도 밭에서 재배하면 연작 장해가 일어나기에 '논'에서 재배하는 것이 연작 장해를 일으키지 않는 원인이라 생각된다. 

논벼농사의 또 한 가지 우위성은 논이 댐으로 기능하는 것이다(富山 1993). 태풍과 장마철의 집중호우 등으로 한번에 많은 비가 내릴 경우, 쏟아진 물을 잠시 머물게 하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논에 통상은 물이 잠겨 있기에 여름에는 논에서 일어나는 기화열이 기온을 떨어뜨리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사실, 논을 건너오는 바람에서 서늘함을 느낀 경험을 가지고 있는 분도 많을 것이다. 몇몇 자치체에서는 휴경논 등에 물을 담아서 기온을 떨어뜨리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고 한다. 다만 논에 물을 담는 것만으로는 기온을 떨어뜨리는 효과는 작다고 생각한다. 기화열의 효과는 그곳에 식물을 심어 놓아야 한층 뚜렷해진다. 그 식물이 호흡한 물을 증산하기 위하여 많은 기화열을 빼앗기 때문이다. 흙을 넣은 양동이에 벼를 심은 것과 아무것도 심지 않은 것을 준비하여 물을 담아, 물이 줄어드는 상태를 날마다 관찰하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벼를 심은 양동이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해 훨씬 일찍 물이 사라져 버린다.




일본인은 쌀을 먹어 왔을까


그런데 일본인은 쌀을 먹어 왔던 것일까? 테라사와 카오루寺澤薫 씨는 야요이 시대의 몇몇 유적에서 출토된 식물 유체를 꼼꼼히 조사해, 도토리 등 자연식생에서 채집한 것이 가장 많았다고 기술한다. 즉, 논벼농사가 보급되었다고 하는 야요이 시대조차 '농경'의 요소보다 '채집'의 요소 쪽이 컸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고대에 들어오면 식문화는 시대의 권력자와 서민 사이에 큰 차이가 나게 된다. 문서 등에 남은 귀족들의 먹을거리는 현대 우리들의 눈에도 상당히 호화로우며, 밥 등 그릇에 수북하게 대접했다. 헤이안 시대의 '왕조 요리'를 재현한 교京 요리 '로쿠세이六盛' 주인 호리바 히로유키堀場弘之 씨에 의하면, 당시 귀족의 공식적인 식사에서 밥은 원통형으로 높여서 대접했다고 한다. 다만 대접한 전부를 한번에 먹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정도의 밥이 나왔다는 건 사실이라 생각한다. 또, 후지와라 도장은 당뇨병이었단 이야기는 당시 귀족들의 미식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나라 시대의 야마토 지방에서는 제, 소 등이라 부르는 유제품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5세기의 오사카 평야에서는 밀의 씨앗과 말의 골격이 출토되어서 목축의 존재가 엿보이기도 있다. 그리고 에가미 나미오江上波男(1906-2002)는 '기마민족 도래설'을 전개하여 큰 논쟁을 일으켰는데, 이들 사실은 기마민족도래설의 재래를 방불케 한다. 


중세부터 근세에 걸쳐서는 어떨까? 이에 대해서는 키무라 에미木村栄美 씨가 참고가 된다. 키무라는 회화 자료에 표현된 식사의 풍경을 읽고 해석하는 수법으로 중세 사람들의 식생활을 밝히고자 했다. 키무라는 귀족, 승려, 일반 서민 각각에 대하여 그 먹을거리를 해석했는데, 밥은 그 어디에도 등장하는 것 같아 그 한에서는 '밥'이 주식의 지위를 획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밥'이 쌀밥인지, 또는 현미인지 흰쌀인지, 찹쌀인지 멥쌀인지등 상세한 건 분명하지 않다. 회화에 한하지 않고, 문서가 어디까지 정확히 사실을 전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일반 서민'에서도 그것은 당시의 선진지였던 교토 주변의 일반 서민이고, 지방을 포함한 서민의 생활을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지적도 할 수 있다. 다만, 키무라도 말하듯이, 묘사된 세계가 화가의 시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근세의 기근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 점에 대해서 근세에 빈발한 '기근'을 생각해 보고 싶다. 근세의, 특히 동일본에서는 기근이 빈발하여, 테이메이天明 연간을 포함한 몇 십 년 사이에 인구가 격감할 정도의 재해가 되었다. 이 일련의 기근에 대해서는 이 시기의 저온(소빙하기라는 말을 하는 연구자도 있음)에서 원인을 찾는 의론이 많다. 그러나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저온이란 기후변화는 일종의 방아쇠였으며 그것이 원인의 전부는 아니라는 견해도 가질 수 있다. 이미 몇몇 연구자가 고려하고 있듯이, 중세 이전의 동북일본은 근세만큼 벼농사에 특화된 농엽 경영이 진전되지 않았다. 


원래 근세 이전 일본 열도의 북쪽에서는 쌀보다 잡곡을 주곡으로 하는 문화가 오래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근세란극단적으로 논하면,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 열도의 정치적 통일에 맞추어서 논벼농사를 인위적 생태계의 중심에 놓고, 쌀을 주곡으로 하며, 쌀을 화폐로 삼고, 벼농사와 쌀 음식에 관한 문화를 정통으로 하는 문화의 시대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 이전의 기층문화가 송두리째 뽑혔을 리는 없다. 지금도 '산나물 캐기' '버섯 따기' 등의관습은 동(북)이 많고 서는 적은 경향이 있지만, 그것도 당시의 자취가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아오모리시 역사민속전시관(2006년 개관) 계고관에 있는 다나카 츄자부로田中忠三郞 씨는 '숲은 시모키타下北의 백화점'이란 말로 이를 표현했다. 즉, 쌀을 재배하지 못한 때에도 숲에 가면 먹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을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벼농사에 지나친 에너지를 주입한 나머지 숲의 관리가 허술해져 '숲의 은혜'를 얻을 수 없게 된 것이 기근의 직접적 원인이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앞으로 증명이 필요하겠지만, 하나의 가설로 기억에 남겨 놓고 싶다. 




쌀과 물고기


논이라 하면 현대 일본 열도에 살고 있는 일본인 대부분이 녹색의 융단 같은 광경을 상상한다. 즉, 논이란 현대 일본인에게는 쌀을 농사짓는 장소이다. 그러나 앞의 잡초란 소제목에서도 기술했듯이, 논에서 벼 이외의 식물이 살지 않는 상황은 다량의 에너지를 그곳에 들이부은 결과이다. 우네宇根 씨가 말하듯이, 엄밀하게 말하면 논에는 벼 이외에도 많은 식물이 생식하는 것이 보통이다. 


또 -이것도 우네 씨가 말하듯이- 논에는 다양한 동식물이 생식한다. 그리고 그것이 안정된 생태계이다. 그들은 지금은 '잡초'와 '해충' 등 벼의 생산을 저해하는 존재로 취급되는 경향이 강하지만, 역사를 돌이키면 그러한 인식은 완전히 현대적이며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포유류인 인간은 그 생존을 위해 에너지로 전분과 신체를 만들기 위해 단백질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들 논에 있던 생물들은 전분의 공급원으로, 또는 단백질의 공급원으로 이용되어 왔다. 나는 이러한 생산양식을상징적인 의미로 '쌀과 물고기'라고 표현했다(佐藤 2008). 이것은 쌀과 물고기가 한 묶음으로 먹을거리를 떠받쳐 왔다는 것을 말한다. 쌀과 물고기의 한 묶음은 역사적으로 보아도 벼농사 개시 이후의 계절풍 지대에서 널리 인정되는 한 묶음이다. 비슷한 한 묶음은 1권에서 전개한 의론에 쭉 이어서 말하면 '맥류의 풍토'에서는 '맥류(또는 감자)와 젖', 인도 아대륙에서는 '잡곡과 콩' 등으로 모양을 바꾸어 존재한다(佐藤 2008b). 이러한 한 묶음은 그 토지와 그 풍토에 뿌리를 내린, 말하자면 '환경의' 한 묶음이 된다. 


현대 일본인의 먹을거리를 여기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약 50년 전의인 1965년의 통계와 비교하면, 쌀의 소비는 최초에 기록되었듯이 110kg대에서 60kg대 전반으로 반감한다. 물고기의 소비라면 14kg이 12kg쯤이 되어 큰 변화가 없다. 한편 유제품을 포함한 축산품의 소비량은 2배 반으로 증가한다. 채소와 과일 등의 소비에도 큰 변화가 있지는 않는다. 이처럼 쌀과 물고기의 한 묶음에 대해서 통계로는 쌀의 감소라는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전 시대에 대해서는 통계자료가 마땅하지 않기에 정확히는 말할 수 없는데, 나의 어린시절이었던 1955년 무렵을 떠올려 보면,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걸 먹었다는 기억이 있다. 대충 꼽아 보아도 논우렁이, 미꾸라지, 물가의 조개류, 벌의 애벌레 등의 동물질과 쑥, 수영, 여러 산나물 등의 식물질 등을 들 수 있다. 나의 기억에는 없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다양한 곤충과 그 유충, 사슴, 토끼, 멧돼지, 오리 등의 동물도 예사로 먹었다. 지금 일본에서 '고기'라 하면 소와 돼지, 닭 세 종류밖에 없지만, 이것이야말로 이상하다고 할 만한지도 모른다. 


중근세의 먹을거리에 대해서는 하라다 노부오原田信男 씨의 논고가 상세하다. 그것은 논을 포함한 생태계에 생식하는 동식물이 총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곳에서 틈으로 살짝 볼 수 있는 건 참으로 다양한 식재료의 존재인데, 그것에서도 한층 더 흥미로운 건 이른바 '주식'이었던 전분 공급원에 대해서도 피 등의 잡곡과 토란 등의 덩이뿌리류가 쓰이고 있었던 지역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다는 사실이다(坪井 1979). 이들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도 또 언급한다.




쌀과 마음


이처럼 논의 주인공으로 취급되어 온 것은 쌀뿐이었다. 아니, 쌀은 계속 논의 주인공으로 취급되어 온 것처럼 이야기되어 왔다고 쓰는 편이 정확할지 모른다. 하라다原田(2005)가 말하듯이, 논벼농사 사회에 귀속됨은 고대 이후 일본의 지배층이 일관적으로 취해 온 정책이며, 그러한 정책이 반복하여 채택된 배경에는 생산의 실태로서 논벼농사에만 의지할 수 없는 역사와 다양성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와 생산의 갈등은 중세에도 계속되었다고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1928-2004)는 보고 있다(網野 1997).


그러나 정치와 권력의 예상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무언가'란 대체 무엇일까?벼농사는 그 무대(어떤 장소에서 벼가 재배되고 있는지)의 다양성에 관계 없이 지속적인 생산방법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나도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이야기에 찬성한다. '부분적으로'라고 자른 건 특히 고도성장기 이후의 이른바 '고투입 고수익', 즉 다비다수의 벼농사가 전혀 지속적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본 열도의 광범위함 지역에서 쌀은 계속 생산의 중심이 되어 왔다. 한편, 예를 들면 유럽에서 맥류는 감자 이전에는 '주식'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맥류라도 밀, 보리, 귀리, 호밀 등 다양하다. 같은 밀이라도 보통밀 외에 파스타용 마카로니밀이 있다. 콜럼버스 이후의 유럽에서는 특히 북부를 중심으로 감자가 전분 공급원의 주력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특정 종이 무언가 특별한 곡류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구조는 생기기 어려울것이다. 


쌀의 우위성을 '신찬神饌', '의례' 등의 측면에서 본 것이 칸자키 노리타케神崎宣武 씨의 논고이다. 이들은 지금은 경사스런 자리에서조차 잊혀져 버린 존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일본인은 신년의 첫 참배(詣)는 거르지 않는다. 그리고 떡을 먹고, 도소주屠蘇酒를 마시고 신년을 축하한다. 이러한 정신구조는 -그것이 누군가가 의도하여 만든 것이라 해도- 일본인과 쌀, 벼농사와의 강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일찍이 츠보이 히로후미坪井洋文(1929-1988)가 <덩이뿌리와 일본인(イモと日本人)> 안에서 언급한 '떡 없이 정월'의 민속 사례가 보여주듯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보편적으로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동(북)일본과 서일본은 재배되는 작물과 그 품종, 수반된 동식물, 숲의 식생 등에서 이질적이다(靑葉 1980, 佐藤 2009). 아카사카赤坂(1999)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 '몇 개의 일본'이란 단어를 고안했다. 몇 개의 일본을 기층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일본이 쌀과 벼농사 문화에 수렴했던 과정에서는 각각의 시대에 지배층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유는 다른 데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쌀이 가진 영양가를 들 수 있다. 쌀은 인류에게는 주로 전분의 공급원이지만, 약간의 단백질도 포함한다. 단백질은 20개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지는데, 쌀의 단백질은 이 아미노산의 대부분을 모조리 포함한다. 그래서 가령 동물성 단백질 없이 쌀만 먹어도 기아 상태가 되기 어려워진다. 한편 또 다른 곡류의 왕인 밀은 단백질의 총량은 쌀보다 많은데 아미노산의 균형이 나빠, 그것만 먹으면 언젠가는 기아 상태에 빠진다. 성서에도자주 나오는 '빵과 포도주'의 조합은 빵의 그러한 결점을 포도주가 보완하기 때문이란 설명도 있다. 



브랜드 지향과 가짜 고시히카리 소동


쌀을 특별시하는 일본인의 사고 경향은 때로는 삐뚤어진 모습으로 발현하기도 한다. 몇 년 전에 사회 문제가 되었던 가짜 고시히카리 문제도 그 하나이다. 이는 그 뒤 연속하여 일어났던 일련의 '먹을거리 속임'의 발단이 되었던 문제로, '속임'의 본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짜 고시히카리의 상세한 내막은 이 책에 실려 있는 하나모리 쿠니코花森功仁子 씨의 기고문에 양보하려 하고, 이 문제의 저류에 있는 것이 '브랜드 지향'이라고도 할 만한 사고 경향에는 없을까 생각한다.


브랜드 지향의 사고 경향은 다양성의 저하, 특히 품종의 다양성의 상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일본의 벼 품종의 다양성 저하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이전에 기술한 바이지만, 그렇다면 고시히카리 이후 벼의 품종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냐고 하면 그렇지 않다. 고시히카리란 품종의 농림등록번호는 '농림 100호'이다(등록년도는 1956년). 2008년 현재 등록번호는 431번에 이르고 있기에, 나라가 관여한 것만 고시히카리 이후 약 50년 동안 3000을 넘는 품종이 세상에 나온 셈이다. 등록번호를 부여하지 않았던 품종의 예비군은 이보다 훨씬 많다. 그런데도 벼농사 농가도 소비자도 그 존재의 극소수밖에 모른다. 현실에서 재배된 일이 있는 품종, 현재 재배되고 있는 품종도 200가지 정도를 밑돌고 있다.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지는 간단한 작업이 아니지만, 적어도 소비자의 '브랜드 지향'이 관계되어 있는 것은 확실할 것이고, 그 심리를 교묘하게 조종하는 시장의 존재도 또한 눈감아 줄 수 없을 것이다. 기술과 사회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는 어느 사회가 뛰어난 기술력(사람)과 에너지(물질)를 투입하여 새로운 부를 생산하는데 그것을 이용하는 체계가 없다고 모조리 수포로 돌아갈 우려가 있다는 점을 웅변하고 있다. 고시히카리 일변도의 책임은 품종개량의 전문가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기술을 살리지 못했던 사회와 정치의 책임이라고 말해야 한다. 


반성하건데, 일본에는 메이지 초기에 400가지를 넘는 품종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현재 재배되고 있는 품종은 200가지 안팎인데, 품종의 수를 다양성의 지표로 삼으면 이 100년 동안에 다양성의 정도는 20분의 1까지 저하된 것이다. 또한 메이지 시대 중반의 품종과 지금 품종의 큰 차이는 품종이란 하나의 집단 안의 다양성에도 있다.품종 안의 다양성이란 개념은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사실 벼의 품종은 어떤 품종도 완전한 클론은 없다. 고시히카리조차 엄밀하게 비교하면 현마다 다른 유전자형을 나타낼 터이다. 그리고 같은 현에서 생산한 고시히카리 안에도 몇 가지 유전자형이 섞어 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다형성은 옛 시대의 품종에서는 훨씬 크고, 같은 품종의 개체를 많이 심어서 비교하면 키와 개화일, 쌀알의 크기 및 모양 등 다양한 성질에서 차이가 발견되었다. 메이지 시기부터 쇼와 초기까지 행한 품종개량의 주요한 방법이었던 '순계분리'법은 재래종 안에서 우수한 성질을 가진 그루를 골라내어 그 종자를 증식하는 원시적인 것인데, 이러한 방법이 유효했을 정도로 당시의 품종은 한 가지 품종 안에 다양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메이지 시기까지 일본 열도에서 벼의 품종이 유전적으로 얼마나 다양한 존재였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벼농사 문화와 일본의 장래


일찍이 야나기다柳田의 시대와는 달리, 일본이 단일민족국가이며 단일한 문화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연구자는 과연 이제 없다(赤坂 1999). 농경 문화만 보아도 일본 열도에 건너온 것은 조선반도를 경유하여 온 것 외에, 북쪽에서 또는 남쪽에서 건너온 문화가 뒤섞인 복합적인 문화를 형성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벼농사 문화는 그러한 문화 복합의 안에서 생성되어 온 문화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佐藤 2009).


그렇게 하면 쌀을 먹음과 벼농사의 문화가 언제부터 일본 열도 전체를 뒤덮듯이 된 것인지는 역사학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앞에서도 적었듯이, 일본인이 상고 시대부터 쌀을 주식으로 먹어 왔다는 사실은 없다. 일본 열도가 그 무렵부터 온통 논으로 덮여 있었다고 하는 것도 또한 아닐 것이다.


다만 그래도 쌀농사와 쌀밥은 -적어도 서일본에서는- 사람들의 동경이었다는 점은 틀림이 없다. 회화 자료에 나타난 쌀밥의 그림이 이야기하는 건 그러한 점일 것이다. 


근세에 쌀은 통화의 역할을 짊어질 만큼 중요한 물자로 여겨졌다. '고쿠다카(石高)'라는 일본의 독특한 단어는 그걸 잘 보여주고 있다. 한 섬(약 150kg)은 성인 남자가 1년을 사는 데 필요한 쌀의 양이다. 그것은 또한 무사와 한이 몇 명을 먹여살릴 수 있는지를 실제 수량으로 보여주는 잣대이기도 하다. 그것이 경제력을 보여주는 도량형으로 통용된 것이 쌀의 지위를 잘 보여주고 있다. 


현 시대에 사는 일본인에게도 쌀은 특수한 존재이다. 고베神戸  아와지淡路 지진의 부흥에 들어갔던 자원봉사 사람들과 지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아침밥으로 모닝빵을 배포받은 쪽은 힘이 나지 않았지만, 주먹밥을 받은 순간 의기가 올랐다고 한다. 역시 쌀에는 무언가 힘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걸 쓰는 게 연구자로서 어떤 말을 들을지 모르지만, '정신의 힘'은 물질만능주의인 현재의 일본인이 돌아볼 만한 것의 하나가 아닐까? 그렇게 표명하고 <유라시아 농경사> 제2권의 서장을 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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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잠; 조선시대에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며 사람들에게 양잠의 중요성을 알리던 의식 

일본에서는 천황이 아직 있어 그 황후가 지금도 친잠 의식을 행하고 있답니다. 올해가 임기의 마지막이라 내년부터는 누가 누에를 치나 걱정이라네요.

http://news.tbs.co.jp/newseye/tbs_newseye3357232.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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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제3장 

자연과학에서 본 벼의 기원    이시카와 류지石川隆二



벼의 기원과 분류


일본에 퍼진 벼


일본인인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먹고 있는 쌀은 벼, 학명으로는 오리자 사티바Oryza sativa를 재배하여 수확한 것이다. 세계에서 남극 대륙을 제외한 모든 대륙에서, 즉 고위도 지대부터 적도 바로 아래까지 널리 재배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재배 벼는 처음부터 이처럼 전 세계에서 재배되던 게 아니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는 홋카이도에서 불과 120년 전에야 간신히 늘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오모리현의 이나카다테田舍館 유적에서는 2000년 전의 논터가 발굴되어, 일본 벼농사 역사의 매우 초기에 본국 최북단에 논벼농사를 가지고 들어왔다는 걸 알고 있다. 지금도 논의 아래를 파서 야요이, 고대, 중세와 단속적이자만 논터를 발굴하고 있다(그림 3-1). 곧, 벼는 1900년 정도에 걸쳐서 쓰가루津軽 지방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던 것이다. 초기에 아오모리현으로 건너와 있던 벼는 열대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던 흔적이 식물 유체에서 발견되었다. 지금의 도호쿠 재래종에 그와 같은 성질이 없기 때문에, 서일본에서 여러 번 벼를 가지고 들어온 뒤에야 간신히 홋카이도에서도 재배할 수 있는 벼가 발견되었을 것이다. 



그림3-1 아오모리현 마에가와前川 유적의 논터. 야요이, 고대, 중세의 복합 유적이며, 중세의 논터에는 사람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일본에서 논벼농사를 가지고 들어온 연대는 아직도 논쟁거리이지만, 일반적으로 지금으로부터 2900년에서 2500년 전이라 한다. 벼가 북진하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중에서 홋카이도에 가지고 들어와 정착할 수 있었던 벼 품종은 꽃이 피는 시기에 까락이 붉어져서 '아카게(赤毛)'라고 불렀다. '아카게'는 자연 돌연변이가 자주 발생하여, 다양한 형질을 가진 계통을 만들어낸다고 알려져 있다. 재배에 도움이 되는 돌연변이로는 알곡의 끝에 있는 돌기인 까락이 사라진 '방주妨主'가 유명하다. 이 경우는 두 가지 유전자를 잃어서 '털'이 없는 벼가 되었다(그림3-2) 이와 같은 특수한 벼도 포함해 일본 재래종의 대부분은 일본형(자포니카)라는 품종군으로 분류된다.



그림3-2 벼의 북진에 도움이 된 재래종 '아카게'(좌)와 '방주'(우)



 

두 가지 품종군


재배 벼 전체를 보았을 때, 일본형과 대치되는 것이 인도형(인디카)이다. 이들 집단은 다양한 성질에서 다른 것이 알려져 있다. '왕겨털(稃毛)'이라는 알곡의 끝에 생기는 털의 길이를 비교했을 때 인도형은 짧은 부모를 가지는 특징이 있다(그림3-3). 일본형에서는 북상할 만큼 왕겨털이 길어지는 경향도 볼 수 있다.



그림3-3 알곡의 표면에 생기는 왕겨털. 북으로 가는 만큼 길어진다. 왼쪽은 일본형 품종, 오른쪽은 인도형 품종.




또한 화학약품인 페놀 용액(1.5%)에 알곡을 3시간 정도 담그어 보면, 품종에 따라 알곡과 용액이 검게 변색하는 것이 있다(그림3-4). 이 반응을 '페놀 반응'이라 하며, 어떠한 반응을 나타내는지는 Ph라고 이름을 붙인 유전자가 제어한다고 알려져 있다. 검어지는 경우는 우성 유전자가 작용하고, 인도형 품종에 많이 보인다. 착색하지 않는 경우가 일본형이다. 다만 반드시 모든 일본형이 착색하지 않는 건 아니다. 오카 히코이치岡彦一 박사(1916-1996)는 페놀 반응에 더하여 왕겨털 길이와 다음에 기술하는 새싹의 염소산칼륨 감수성 정도라는 세 가지 형질을 조합하여 품종군을 식별하는 방법을 찾아냈다(Oka 1988). 



그림3-4 알곡의 페놀 반응. 왼쪽의 알곡을 페놀액에 담그면 +형의 대립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품종은 검어진다(오른쪽 위).



염소산칼륨 용액은 강한 독성을 나타내는 산화제이다. 벼의 새싹을 염소산칼륨 용액을 써서 기르면 곧 죽어 버리지만, 일본형 품종은 죽기까지 시간이 길고 '감수성이 약한' 경향을 나타낸다. 피해도(감수성)이 높은 쪽이 인도형인 경향이 강하다(그림3-5).



그림3-5 새싹의 염소산칼륨 반응. 일본형(좌)은 감수성이 약하기에 인도형(우)보다 죽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이외의 형질에 대해서도 인도형과 일본형 두 가지 품종군으로 나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재배 벼에서 왜 그러한 경향이 나타나는 것일까? 지금까지 행한 연구에서는 (1)하나의 모집단에서 재배되는 과정에서 두 가지 다른 집단으로 나뉘었다, (2)같은 야생종 집단 안에서 다른 형질을 가지고 있던 계통에서 각각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이 재배화되었다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설을 생각하고 있다. 


벼농사 유적의 현상을 보는 한, 동아시아(현재의 장강 유역)에서 재배화된 일본형이 그 뒤 남하한 민족에 의하여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어 현지의 야생종과 만나면서 인도형의 재배화에 관여한 것이 추측된다. 이와 같은 사건은 다양한 유전자의 계보를 추적하여 밝힐 수 있다.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의 차이를 밝히는 일은 재배 벼의 기원을 해명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야생 벼에서는 앞에서 서술했듯이 형질의 변이가 명료하지 않고, 동질효소라는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유전자의 변이에서나 겨우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에서 보이듯이 유전적으로 달랐던 계통임이 보고되었다(Morishima and Gadrinab 1987).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세히 기술하겠다.



야생 벼의 생식 영역


재배 벼와 비교해 야생 벼는 어디가 다른 것일까? 벼는 오리자속이라 불리는 식물종의 집합(분류)에 속한다. 오리자속을 구성하는 식물종은 세계에 분포한다. 그 가운데 아시아의 재배 벼는 사티바라고 불리는 종에 속하고, 세계의 재배 벼 대부분을 점하고 있다. 사티바종에 근연한 루퓌포곤종rufipogon이라 불리는 야생 벼(이하 루퓌포곤)는 열대 도서부(인도네시아), 오세아니아부터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동아시아에 분포한다.


식물종의 분류는 새로운 유전정보가 더해져 변경된다. 오세아니아에 생식하는 메리디오나리스meridionalis, 아메리카에 생식하는 글루매파투라glumaepatula, 아프리카에 생식하는 바르시barthii 및 롱기스타미나longistaminata는 일찍이 페렌니스perennis라는 종 안의 오세아니아형, 아메리카형, 아프리카형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루퓌포곤은 꽤 높은 임성稔性(꽃가루가 기능하는 것)을 나타내 자손을 만든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사티바와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음이 밝혀져 재배종의 직접 선조가 되는 야생종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이들의 상세한 내용도 Oka(1988)에 정리되어 있다.


야생종의 분류는 어렵고, 분류체계 그것이 연구자마다 다른 경우도 있다. 드물게는 많은 연구자의 의견이 일치하여 지금까지 이어진 종명이 변경되기도 한다. 루퓌포곤의 분류에서도 마찬가지 사례가 있었다.


아시아형의 루퓌포곤에는 두 종류의 생태형이 알려져 있다. 한해살이와 여러해살이이다. 한해살이는 종자를 남기고 자신은 죽는다. 여러해살이는 종자도 남기지만, 자신에게 그 에너지를 축적해 놓으며 영양번식을 할 수 있는 생활사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한해살이는 니바라nivara라는 종으로, 여러해살이 야생 벼인 루퓌포곤과 식별되기도 한다. 한해살이 야생 벼는 우기에 개화하고, 종자를 맺는다(그림3-6). 재배 벼라면 하나의 이삭에서 개화하는 '꽃'(벼에서는 이삭꽃이란)은 1주일 이내에 피고 지며, 모든 이삭꽃은 거의 같은 시기에 등숙한다. 이것을 '생육의 균일화'라 하며, 재배에 필요해지는 현상의 하나이다. 한편, 야생 벼에서는 하나의 이삭 안에 최후의 이삭꽃이 개화할 무렵에는 끝쪽의 종자가 완숙해서 탈립해 버린다(그림3-7). 익은 이삭꽃이 이삭에서 지면으로 떨어지고 후세를 남길 준비를 하는 것이다. 건기에는 식물 개체 그것은 죽어 버리지만, 지상에 떨어진 종자는 휴면성을 보이기 때문에 다음 우기가 되기까지 발아하지 않고 '동면' 상태로 살아 남는다.



그림3-6 라오스에서 발견한 한해살이 야생 벼(가운데). 건기에는 종자를 남기고, 자신은 죽는다.




그림3-7 야생 벼의 탈립성과 생육의 불균일화. 야생 벼의 알곡은 익은 무렵에 탈립하기 때문에, 조사하면서 공책에 올리기만 해도 탈립하기도 한다. 캄보디아에서.



  

한해살이와 비교해 여러해살이는 종자를 만들지만 그 생산성이 한해살이에 비해 떨어진다. 그 대신 남은 종자 생산 에너지를 자신이 살아 남기 위해 이용한다. 벼 개체는 한해살이의 재배종이라도 '움돋이'를 뻗어 온갖 마디에서 싹과 뿌리를 뻗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일부가 죽어도 똑같은 유전자형을 지닌 조직이 살아 남는다. 이와 같은 번식 방법을 영양번식이라고도 한다. 똑같은 번식 방법을 딸기와 감자에서도 볼 수 있다. 여러해살이 벼는 몇 해에 걸쳐 식물 그것이 살아 남기 때문에 건기에도 물을 얻을 수 있는 연못의 중심부 등에 적응한다. 당연히 우기에는 연못의 수량이 늘어난다. 이 자극으로, 예를 들면 뜬벼는 짚(줄기)의 마디 사이를 늘린다. 그 결과 수면 위로 잎을 내밀고, 우기에 늘어난 수량에 견딜 수 있다(그림3-8).



그림3-8 캄보디아 씨엠립 교외의 반데이 스레이에서 학생이 손에 들고 있는 건 여러해살이 야생 벼. 마디에서 새로운 싹이 나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뒷쪽의 연못은 수심 1미터 이상.



발굴 자료와 문서에 의하면, 재배종의 선조종인 루퓌포곤은 장강 유역보다 약간 고위도 지대에서도 생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현재 루퓌포곤의 생식 영역은 중국에서는 하이난섬, 광시 치완족 자치구성, 광둥성, 후이난성, 장시성, 윈난성 등으로 한정된다. 개발과 몇 천 년 단위의 기후변화에 의한 것이라 생각한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지금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루퓌포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과 마찬가지로 개발이 진행된 태국에서는 생식 영역이 꽤나 감소했다. 한편, 일본에서 야생 벼가 생식하고 있었단 기록은 없으며 재배 벼만 대륙과 남쪽에서 섬으로 옮겨져 전파하는 등 여러 경로로 전해져 왔던 것 같다.


루퓌포곤의 남방한계는 남반구의 오세아니아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에는 여러해살이 루퓌포곤과 한해살이 메리디오나리스가 생식하며, 지금까지 여러 계통이 수확되어 연구에 이용되어 왔다(그림3-9). 오스트레일리아 퀸즈랜드 주립 하버리움(식물표본관)에서는 그들의 표본을 보관하며 일반에 공개하고 있는데 분류하면서 기술적인 문제로 메리디오나리스를 루퓌포곤이라 잘못 표기해 놓기도 했다. 형태학적으로는 이삭꽃 꽃밥(수술의 꽃가루를 가지고 있는 부분)의 길이가 2mm 이하라면 메리디오나리스, 4mm 이상이라면 루퓌포곤이라 규정하고 있는데, 게놈 수준에서도 기준을 정해 놓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림3-9 오스트레일리아의 여러해살이 야생 벼. 유칼립투스가 살고 있는 연못에서 생식하고 있다.




재배 벼와 야생 벼를 구별하다


여러해살이 야생 벼에서 발견되는 '뜬벼' 성질은 아시아 갠지스강, 이라와디강, 챠오프라야강, 메콩강 등의 큰 강 삼각주 지대의 재배 벼에서도 볼 수 있다. 이들 삼각주 지대는 홍수가 자주 일어나는 곳이라 그러한 지역에 대응한 뜬벼 재배가 행해진다. 그럼 재배종에는 없고, 야생 벼에서만 볼 수 있는 형질은 무엇일까?


재배종과 야생종에서 서로 다른 형질의 하나로 종자의 크기를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야생종은 재배식물에 비하여 수확 대상이 되는 종자와 식용부가 작은 경향이 있다. 이것은 사람이 재배, 수확하면서 서서히 큰 것을 선발하여 재배식물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야생 사과와 재배 사과에서는 10배 정도 크기에서 차이가 나는 걸 볼 수 있다.


야생 벼의 종자도 재배 벼에 비하여 작은 경향이 있는데, 예를 들어 루퓌포곤과 사티바를 비교하면 사과처럼 극단적인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그림3-10). 중국의 강소성 농업과학원의 탕릉화湯陵華 교수는 이 이유를 야생 벼도 재배 벼와 공존하여 종자가 대형화되는 유전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면 실제로 재배 과정에서 벼의 종자는 어떠한 변화를 나타내 왔을까? 지금도 그것을 조사하는 방법이 있는 것일까?



그림3-10 야생종과 재배종 알곡의 크기. 왼쪽부터 루퓌포곤, 재배 벼인 인도형, 재배 벼인 열대 일본형. 야생 벼의 크기는 극단적으로 작지 않다.



중국의 유적에서는 연속적인 퇴적층에서 방대한 양의 볍씨를 얻을 수 있다(그림3-11, 3-12). 그와 같은 유물과 현재의 재래 야생종의 종자에 기초하여 탕 교수는 대략 7000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는 종자의 크기 변천을 조사했다. 그 결과, 볍씨는 재배화 과정을 거치며 세로 4mm, 가로 2mm 정도 대형화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세로의 크기만 비교하면, 중국 재래 야생 벼는 700년 전에 이용되었던 '고대의 벼'보다 오히려 현대의 재배 품종에 가깝다는 것이 밝혀졌다. 7000년 전의 유물 중에는 야생 벼와 재배 벼가 혼재해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재배화와 평행하게 야생 벼의 종자가 대형화하며 살아 남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림3-11 강소성 고우高郵, 용교장龍蛟莊 유적에서 출토된 7000년 전의 탄화미. 탕릉화 교수 제공.



그림3-12 강소성 고우, 용교장 유적에서 출토된 5000년 전의 탄화미. 현재의 야생 벼보다도 작다. 탕릉화 교수 제공.




종자의 색과 재배화


종자의 색은 어떨까? 볍씨의 색은 바깥의 세포층(자세히 말하면, '열매껍질'이라고 부르는 표면의 세포층과 그 안쪽에 있는 배젖을 보호하고 있는 '씨껍질'이라고 부르는 세포층)에 착색이 있는 유형과 착색이 없는 유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야생 벼의 종자는 모두 붉은색인데, 재배종에서는 붉은색과 흰색 두 가지이다. 이 형질의 차이는 착색에 관한 우성 Rc 유전자에 의하여 지배된다. Rc 유전자가 Rd 유전자와 상호작용하면, 종자 표면에 균일한 착색을 가져와 한결같은 붉은색 겉모습을 나타낸다. 또 Rc 유전자는 단독으로도 작동한다. 현미가 부분적으로 붉은 반점을 나타내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그림3-13).



그림3-13 현미에서 보이는 쌀알 색의 변이. 왼쪽부터 RcRd형의 붉은쌀인 대당미大唐米(가고시마 토종) 및 아오모리현의 토종 적제赤諸. RcRd형의 붉은 반점 및 Rc형의 흰쌀(일본청日本晴)



흰쌀은 이들 착색층에 색소가 없어져서 생긴다. 요즘 연구에서 착색의 원인인 Rc 유전자 자체의 분자구조를 해명해(Sweeney 외 2006, Furukawa 외 2007) 흰쌀은 Rc 유전자가 기능을 상실한 열성의 Rc 유전자로 변화한 것이며, 그 분자구조를 붉은쌀 계통의 그것과 비교하면 Rc 유전자 내부의 염기배열의 일부가 결실欠失되어 흰쌀이 된다는 것을 밝혔다. 게다가 인도형, 일본형의 품종을 막론하고 흰쌀은 똑같이 결실을 가지고 있었다. 야생 벼는 모두 붉은쌀만 있기 때문에, 재배 과정에서 흰쌀의 재배가 일원적으로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이 붉은쌀의 성질을 지배하는 유전자의 내부 배열을 바탕으로 재배종 가운데 붉은쌀을 비교한 바, 두 종류의 집단(A 및 B)으로 나뉘었다(그림3-14). A집단은 인도형의 붉은쌀과 모든 흰쌀로 구성되어 있다. B집단에는 일본, 한국 및 중국의 붉은쌀 품종이 포함된다. 일본에서 볼 수 있는 붉은쌀에는 A집단도 있지만, 그들은 중세에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파된 인도형 품종(대당미)이다.



그림3-14 Rc 유전자 내부의 SSR 다형. A집단은 흰쌀 및 인도형의 붉은쌀, B집단은 일본형의 붉은쌀이 나타내는 유전자형이다.  



대당미는 애초 점성도占城稻라고 하여 11세기에 점성국占城國에서 복건성 등을 중심으로 중국에 가지고 들어온 벼와 계보를 같이한다. 문헌에 의하면 송나라의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5년(1012년)에 작물의 다양화를 위하여 가뭄 저항성이 있는 조생종으로 황무지에 도입되었던 것 같다. 이것이 중국의 메벼 계통이 되었다(寶月 1993). 이와 관련하여 점성국은 힌두교를 믿으며 지금의 베트남 중부를 중심으로 번영했던 고대국가인데, 갠지스강 유역과 관련이 있다고 이야기된다. 


중세에 일본에 가지고 들어온 대당미의 대부분은 붉은쌀로서, 밭벼로도 논벼로도 심어서 재배할 수 있는 특수한 형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유전적 형질은 인도형과 일본형의 교잡을 보이고 있다(Ishikawa 외 2002). 대당미는 동아시아 독자의 품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부터, 

(1) 야생 벼는 원래 모두 붉은쌀이며, 재배 과정에서 흰쌀이 되는 돌연변이가 한 계열만 발생했다.

(2) 재배 벼에는 흰쌀과 두 종류의 붉은쌀이 포함되어 있었다.

(3) 흰쌀과 A집단의 붉은쌀만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남하하여, 인도형이 성립하는 데에 관여하여 흰쌀 유전자를 후세의 벼에 건네주었다. 

(4) A집단의 인도형 붉은쌀인 점성도가 중국에 도입되어, 이윽고 일본에도 대당미로 건너왔다.

라고 할 수 있다. B집단에 속하는 일본형 붉은쌀과 인도형 붉은쌀이 같은 붉은쌀 유전자에서 파생되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현시점에서는 알 수 없다. 유전자 전체에 걸친 염기배열에 따른 부분상동성을 밝히는 것으로 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앞으로 중국의 야생 벼에만 A 및 B 집단의 붉은쌀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힐 수 있다면 붉은쌀의 성립이 다원적이었다는 점, 중국을 기존으로 두 방향으로 벼가 전파되었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전자가 말하는 벼의 기원


인도형과 일본형은 같은 기원에서 성립한 것인가?


유전자를 구성하는 염기배열은 일정 비율로 돌연변이를 발생시켜, 유전암호로 정보를 담당하는 네 종류의 염기(아데닌, 시토신, 구아닌, 티민)가 자리를 옮겨 다닌다. 선조가 똑같은 두 가지 자손에서 같은 유전자의 염기배열을 비교하여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이 40만 년 전에 분화했다고 산출한 연구자가 있다(Zhu and Ge 2005). 유적 등에서 추정되듯이 벼의 재배가 시작된 것이 빨라도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으로, 40만 년 전에 재배 품종이 유전적으로 분화되어 있었다고 하는 자료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또한 게놈 안의 네 가지 유전자만으로 얻은 자료이기 때문에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만 앞에서 기술했듯이 다양한 형질로 식별되는 인도형과 일본형은 유전적으로도 고도로 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 특수한 영역의 염기배열로부터 산출된 분기 연대라고 한다면 타당한 분기 연대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예는 DNA의 분화와 품종 분화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의 전형적인 예일지도 모른다. 


SSR이란 염기의 단순 반복 배열은 벼 게놈에서 높은 빈도로 발견될 수 있다. ACGT로 구성된 염기배열 안에는 예를 들어 ATATATAT 등이란 2염기부터 4염기의 배열로 이루어진 반복은 근연 품종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반복수를 나타내는 것이 많다. SSR은 유전자의 위치를 밝히는 연쇄 해석과 품종 식별 등에 이용된다. 그래서 이 SSR을 사용하여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군 사이의 염색체 구성이 어떻게 다른지를 조사해 보았다.


벼 게놈은 12번의 염색체로 구성되어 있어, 그들 염색체의 몇 가지를 횡단하듯이 SSR을 설정하고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군 사이의 반복수 조합이 어떻게 다른지를 조사해 보았다(그림3-15). 그래프의 끝에서 끝까지가 제12염색체를 나타내고, 각각의 점이 SSR 표지자의 위치이다. 세로축의 1은 인도형, 일본형 품종에 똑같은 반복수를 나타내는 SSR을 공유하고 있는 것. 0은 같은 품종군 사이에서 서로 다른 반복수밖에 안 보이는 것을 나타낸다. 그 결과, 염색체 수준에서 보는 한, 두 품종군은 같은 영역과 다른 영역이 혼재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림3-15 제12염색체에서 볼 수 있는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군 사이에 분화된 염색체 영역. X축은 염색체 위치, Y축은 유전적인 분화 정도를 나타낸다.



이 설명으로 인도형은 일찍이 일본형과 교잡하여 유전적 조성의 일부를 교환했지만, 일본형 벼와는 다른 영역을 게놈에 지닌 채로 재배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유전적으로 다른 영역은 재배화 이전의 야생 벼 집단이 가지고 있던 차이를 나타내고, 40만 년이란 연대도 추정치의 하나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군에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유전자(흰쌀의 유전자)는 인도형과 일본형 사이에 서로 교환한 염색체 영역에 실려 있다. 또한 공유하고 있지 않은(분화한) 염색체 영역에는 앞에서 언급한 페놀 반응의 유전자를 시작으로, 두 품종군을 특징짓는 유전자가 실려 있다. 그림에 보이는 가장 분화한 영역에서는 지금까지 두 품종군을 식별하는 지표로 이용되어 온 동질효소 유전자 Acp1이 실려 있다. 동질효소는 전기영동이란 실험방법에 의하여 비로소 분리, 식별할 수 있기 때문에, 각 품종군에게 필요한 형질을 지배하는 유전자는 생존 능력에 관하여 중립이라고 생각되는 동질효소 유전자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할 것이다.


품종군에서 서로 다른 염색체 영역에 보이는 유전자로 페놀 유전자를 들 수 있다. 같은 유전자의 실려 있는 후보 영역을 위에 언급한 방법으로 조사하면, 페놀 유전자 후보로 폴리페놀 산화효소 유전자가 적어도 세 가지 이상 실려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가운데 PPO1이라 불리는 유전자는 인도형에서는 정상인 유전자 배열을 가지고 있는데, 일본형에서는 그 유전자 배열 안에 트랜스포존이라 불리는 게놈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는 전이인자가 삽입되어 있었다(그림3-16). 그 때문에 유전자 기능은 손상되어 있다. 단, 일본형에서도 삽입되지 않은 품종이 있었다. 이것은 이른바 열대 일본형으로, 일찍이 오카 히코이치 박사가 열대도형으로 분류한 품종이다. 페놀 반응은 어디까지나 마이너스이기 때문에 트랜스포존이란 다른 원인에 의해 기능을 상실했다고 추정된다. 유전자 내부를 보면 염기배열에 다양한 치환이 발생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유전자가 알곡의 페놀 반응에 관여하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상세하게 조사해야 하겠지만, 긴밀하게 연쇄하는 것은 연쇄 분석의 결과에서도 밝혀진다. 재래종에서 염기배열에 의한 계통수를 작성해 보면(그림3-17)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이 별도의 유전자 유래를 가지고 있으며, 열대 일본형은 더욱 다르기 때문에 페놀 유전자에는 다원적인 계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림3-16 PPO1에 보이는 트랜스포존의 삽입.



그림3-17 PPO1의 염기배열로부터 작성한 계통수.



이상과 같이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은 서로 다른 진화의 길을 간 유전자를 무수히 게놈 안에 가지고 있으며, 일본형으로 분류되는 품종군에도 서로 다른 기원에서 성립된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알칼리로 녹인 쌀!?


일본형 쌀은 알칼리액에 담그면 팽윤하여 '붕괴'한다. 쌀은 대부분이 녹말이다. 그 녹말은 아밀로오스, 아밀로펙틴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글루코오스의 결합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아밀로오스가 없어지면 찹쌀이 되고, 아밀로오스가 늘어나는 것과 함께 퍼석퍼석한 멥쌀이 된다. 이와 같은 성질도 벼의 기원을 밝히기 위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아밀로펙틴 사슬의 길이를 조절하는 유전자는 수용성 녹말 합성효소 IIa(SSIIa)라고 불린다. 실은 이 유전자가 알칼리 붕괴의 정도를 결정하는 유전자이고, 열성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경우 쌀이 붕괴하기 쉽다(그림3-18). 인도형, 열대 일본형 및 야생 벼에서는 우성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 알칼리 붕괴가 어려운 표현형을 나타낸다. 알칼리 붕괴의 유무는 맛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유전자의 배열 자료까지 연구가 진행되어 있다. 그 결과, 붕괴하기 어려운 유전자라도 서로 다른 염기배열을 나타내는 품종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여기에도 복수의 야생 벼가 재배화되어 각각의 지역에서 특징이 있는 재래 품종군이 선택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다만 이 경우는 맛과 관련되어서 각 표현형이 선발된 뒤에 다른 지역으로 옮겨지기도 한다. 현재 어느 재래종의 재배지역이 그대로 기원지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편 야생종은 맛으로 선발되지 않기 때문에 각 지역 야생 벼의 유전자 염기배열을 조사함으로써 서로 다른 맛의 쌀이 기원한 지역을 특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3-18 배젖의 알칼리 붕괴성. 왼쪽이 인도형, 오른쪽이 일본형 품종의 배젖을 알칼리액에 담근 것.




엄마는 '하나'?


사람과 마찬가지로 벼도 세포질의 유전조성(미토콘드리아 게놈, 벼에서는 엽록체 게놈도 포함됨)은 엄마에게서 유래한다. 벼로 말하면, 꽃가루를 제공하는 부분이 아니라 난세포를 제공하는 부분에서 유래한다. 그 때문에 엽록체 게놈을 조사하여 모계열을 밝힐 수 있다.


PS-ID 배열과 ORF100은 엽록체 게놈의 일부로, 치바 대학의 나카무라 이쿠로中村郁郞 박사(이 책의 기고 3 담당)의 연구에 의하여 인도형 품종과 일본형 품종의 식별에 이용할 수 있음이 밝혀졌다. PS-ID 배열은 시토신(C)과 아데닌(A)의 반복을 포함하는 350염기 정도의 배열이다. 이 mCnA(m, n은 C 및 A의 반복수)의 배열에 인도형은 8C8A 유형, 온대 일본형은 6C7A 유형, 열대 일본형은 7C6A 유형이 각각 특징적으로 발견된다. 이로부터 다원적인 모계열의 존재가 지적된다(그림3-19). 또한 ORF100 근방의 69염기의 결실도 인도형에서 특징적이며, 일본형에서는 볼 수 없다. 일부 야생 벼에서 이 결실을 지닌 것이 있다. 이런 점에서도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군은 별개의 모계열에서 재배화되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카와카미 외(Kawakami 외 2007)는 엽록체 DNA에서 보이는 복수의 결실에 주목하여, 그 가운데 57k 영역의 분자적 다형에서 재배 벼에는 여섯 유형의 모계열이 존재한다고 보고한다. 



그림3-19 PS-ID 영역을 포함한 RPL16 유전자의 염기 다형.




탈립성은 하나의 기원


벼에는 이삭꽃을 다는 이삭이 있고, 하나의 이삭꽃 안에 하나의 현미가 생긴다. 이삭꽃 기관에 해당하는 부분이 알곡인데, 알곡이 자연히 이삭에서 탈리脫離하는 형질을 '탈립성'이라고 한다. 재배 벼는 수확할 때까지 탈립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


이 탈립성을 지배하는 유전자도 재배화에 따라 변화한 유전자이다. 탈립성을 지배하는 유전자는 여럿 존재한다. 그 가운데 야생종과 재배종 사이에 다른 유전자가 최근 발견되었다. 제4염색체에 실려 있는 탈립성의 유전자 SH3=SHA는 연구자마다 다른 유전자 이름으로 불러왔는데, 야생종에서 재배종으로 변하는 단계에서 돌연변이한 유전자임이 밝혀졌다(Li 외 2006).


수확할 때까지 탈립하면 곤란한 재배종에서는 비탈립성이란 '재배에 적합한 변이'가 선호되어 남아 있다. 이 과정을 인위 선택이라 한다. 인도형 품종과 일본형 품종은 앞에서 기술한 탈립성 유전자 내부에 똑같은 염기 변화를 가지고 있으며, 모두 이 변이에 의해 비탈립성이 된 것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우연이었을까? 지금까지 둘은 동일한 변이에 의해 생긴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 유전자는 어디에서 변이한 것일까? 가장 오래된 벼농사 유적은 현대의 중국 장강 유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예를 들어 대략 1만 년 전의 벼농사 유구라고 생각되는 상산 유적 등) 중국에서 초기의 재배 과정에 비탈립성이 획득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게 신뢰성이 높은 결론이다.



태풍에서 선발된 일본형?


탈립성의 정도에 대해서는 인도형과 일본형에 차이가 발견된다. 인도형 쪽이 일본형보다 탈립하기 쉽다. 이 점에서는 인도형은 야생 벼와 같은 qSH1이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유전자 이름 안의 q는 양적 형질을 지배하는 유전자 자리(QTL)을 표시하는 기호이며, 탈립성(SHATTERING)의 제1염색체에 실린 유전자로서 그와 같이 이름이 붙여졌다(Konishi 외 2006). 인도형에도 일본형에도 각각 복수의 탈립성에 관련된 유전자 자리가 있는데, 인도형 쪽이 더 탈립하기 쉬운 건 그들 유전자가 지닌 탈립성 효과의 총계에 의한 것임이 발견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높은 효과를 나타내는 유전자 자리로 알려진 것이 qSH1이다. qSH1은 인도형에서는 우성유전조차 탈립성 효과를 나타내는 데 반해, 일본형에서는 열성유전으로 탈립이 어려운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일본형에서는 알곡을 이삭에서 떼어낼 때 이삭의 일부인 이삭가지에서 떨어져 알곡에 붙은 채로 있는 것을 빈번하게 볼 수 있다(그림3-20).



그림3-20 탈립성이 다른 일본형과 인도형 알곡의 아래쪽. 왼쪽 일본형에서는 이삭가지의 일부가 달려 있지만, 인도형은 떨켜가 발달해 있기에 이삭가지가 남지 않는다.




그림3-21 야생 벼 떨켜의 전자현미경 사진. 떨켜가 발달해서 알곡 아래쪽은 세포가 골고루 늘어서 있다.




야생 벼에는 야생 벼에 특이적으로 볼 수 있는 제4염색체의 탈립성 유전자와 인도형에 많이 보이는 제1염색체의 qSH1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전자현미경으로 알곡이 탈립하는 부분(떨켜)을 보면 알곡이 이삭가지와 잘라져 떨어지는 걸 알 수 있다(그림3-21). 이에 대하여 인도형은 qSH1을 가지고 있지만 수확까지는 탈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탈곡하려 할 때 쉽게 알곡을 이삭에서 떨어뜨릴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에, qSH1은 '안이한 탈곡형' 유전자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림3-22는 인도 시킴주의 탈곡 풍경이다. 수확한 벼를 땅바닥에서 건조하고, 원형으로 소를 걷게 하면서 알곡을 탈곡한다. 옆의 대나무 끝에는 천수국이 걸려 있다. 논의 신에게 바친다는 의미도 있지만, 꽃이 마를 때쯤이면 벼도 마른 알곡을 떨기 쉬워지기 때문에 탈곡의 적기를 가늠하는 데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캄보디아의 남부에서는 소녀가 이삭을 밟아서 알곡을 떨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탈곡하는 건 일본의 벼에서는 곤란할 것이다.



그림3-22 인도 시킴 지방의 탈곡 풍경




그 이유는 일본형 벼가 열성대립유전자로 작동하는 qSH1을 가지고 있어 '탈립이 어려운 성질'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알곡을 이삭에서 떨어뜨리는 데에는 옛날부터 홀태 등의 전용 탈곡기가 이용되었다(그림3-23). 동아시아의 수확 시기는 마침 태풍이 빈발하는 때이다. 태풍의 강풍으로 수확량이 감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탈립이 어려운 성질'이 빼놓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림3-23 일본의 농기구, 탈곡기.




인도형의 기원


인도형은 한편으로는 야생 벼와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형과 같은 재배화에 관련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이 결과의 일면을 보면, 마치 인도형 재배종은 야생 벼에서 재배화되는 과정에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것을 고고학의 자료와 결부하면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그릴 수 있다. 


재배화가 동아시아에서 발생하고, 같은 지역에서 선발된 유전자(탈립성 SH3=SHA, 흰쌀 rc)가 일원적으로 생겼다. 그들은 일본형이었다. 그 사이, 비탈립성과 함께 흰쌀 유전자를 가진 계통이 남하하여, 동남아시아 어딘가의 지역에서 '인도형'의 성질을 가진 야생 벼와 교잡되어 인도형 재배종이 성립되었다(佐藤 1996, Dorian and Sato 2008).


인도형 품종으로 생긴 유전적으로 다양한 품종군에는 늦벼와 올벼, 뜬벼 성질과 천둥지기에서 재배할 수 있는 밭벼 등으로 재배되었다. 이와 같은 품종의 일부는 앞에서 기술했듯이 11세기에는 중국에 도입되었다. 그 계통에서 중세에 일본으로 대당미로 전파된 점성도는 서일본에서 재배되었다. 그러나 내한성 등의 문제로 동일본에는 도달하지 않았다. 한편, 따로 븕은쌀 계통은 재배화의 유전자인 비탈립성을 가지거나, 다른 계열의 일본형 붉은쌀로 중국, 일본, 한국에 전파되었다. 


이 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와타나베 타다요渡部忠世 박사가 연와煉瓦 유적에서 발견한 알곡 모형에서 볼 수 있다(渡部 1977). 동남아시아의 사원 유적은 햇볕에 말린 벽돌을 소재의 하나로 건축되었다. 이와 같은 유적이 인도부터 중국까지 인지된다. 벽돌에 섞인 알곡의 크기를 측정하고, 유적의 연대를 역사적으로 밝혀서 벼 알곡 크기의 변천을 추적할 수 있다. 알곡의 크기에는 인도형과 대응하는 가늘고 긴 알곡(늘씬한 유형), 밭벼와 열대 일본형과 대응하는 큰 알곡(큰 크기) 및 일본형에 대응하는 둥근 알곡(둥근 유형)의 세 종류로 크게 나눌 수 있다(松尾 1952). 이들 세 종류 알곡 모형의 벼가 10세기에 태국 차오프라야강 유역에서 혼재하며, 시대와 함께 늘씬한 유형이 평야부, 큰 유형과 둥근 유형은 태국 북부와 동북부에 한정된다는 걸 보여주었다. 이것은 인도형 재배종의 성립과 그 뒤 일본형과 재배 적지가 분화되는 모습을 알려주기에 매우 유의미한 자료이다.



인도형 야생 벼


인도형이 재배 벼와 야생 벼의 교잡으로 생겼다면, 인도형 재배종의 기원지는 인도형의 야생 벼가 생식하는 지역, 혹은 일찍이 생식했던 지역이 된다. 이와 같은 야생 벼는 어디에 존재했을까?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처럼 뚜렷한 유전적 형질의 분화는 야생 벼에서는 볼 수 없다. 다만, 엽록체의 DNA에 변이가 생기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야생 벼에서도 인도형의 염기배열을 발견할 수 있다. 앞에서 서술한 PS-ID 배열에 대하여 43계통의 루퓌포곤 변이를 조사했고, 인도형에서 특유한 유형의 배열을 보여주는 것은 4계통(태국 2계통, 인도네시아 1계통, 파푸아뉴기니 1계통)이었다. 이 4계통이 직접적인 선조종이란 건 아니고, 이와 같은 계통의 분포 지역과 유전자 배열을 상세하게 비교하여 기원지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한다. 




진화하는 벼 -교잡에 의한 유전자 변환



인도형 야생종과 일본형 재배종은 교잡했을까?


지금까지 재배 형질에 관여하는 탈립성과 흰쌀은 일원적으로 발생했다는 걸 기술했다. 그럼 게놈이 다른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은 공통의 유전자를 어떻게 하여 가지게 된 것일까?


타다오 씨가 벽돌 안의 알곡 모형의 변천을 자세히 조사했을 때, 한 시기 태국 평야부에서는 다양한 알곡 모형의 벼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공존 상태는 나중에 해소된다. 적어도 그 시기에는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이 근접하여 공존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해외 학술조사에서는 야생 벼만이 아니라 재래종도 조사의 대상으로 삼는다. 현지의 연구기관과 공동으로 재래종의 변이를 조사하기도 한다. 캄보디아도 그러한 나라의 하나이다. 이 나라에 흥미를 가지게 된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뜬벼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뜬벼가 존재하는 곳에는 수확을 위하여 올벼가 함께 재배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양한 벼 품종이 존재하는 것을 '생태 품종(같은 곳의 다른 생활사 습성을 가진 품종군)'으로 분화되어 있다고 한다. 


생태 품종의 대표 사례는 갠지스강 유역의 벵골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아우스aus 품종군과 아만aman 품종군이다. 또한 똑같은 생태 품종을 캄보디아 똔레샵 호수 주변에서도 볼 수 있다. 캄보디아의 우기는 5월 말에 시작해 8월에 소강되었다가 9월에 집중적으로 비가 내린다. 10월부터는 비가 거의 오지 않고, 가장 건조함이 격심한 때가 3월부터 5월 무렵이다. 재배종인 뜬벼를 필자가 처음으로 본 건 앙코르와트로 유명한 씨엠립이었다(그림3-24).



그림3-24 앙코르와트



이 마을에는 각종 저수시설과 사원이 앙코르 유적군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여행자가 방문하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앙코르와트를 둘러싼 해자의 한 변은 1킬로미터 이상이다. 이 유명한 유적을 지나면 거대한 돌로 만든 불상이 서 있는 바이용 사원이 있다. 여기도 주변에 해자를 판 앙코르와트보다 거대한 복합 시설을 포함한 사원이다. 차가 통과할 수 없는 서문을 지나서 30분 정도 걸으면 서바라이라는 인공 저수시설이 보인다. 1020년에 완성된 서바라이는 동서 8킬로미터, 남북 2킬로미터의 제방을 가진 인조 호수이다. 그 동쪽 끝에 가까워질 때 가장 먼저 마중을 나온 건 물소였다. 좁은 모래흙의 길을 지나면 벼들이 호수의 주변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다. 농가의 사람은 어디에 있지 하고 생각하면, 물에 허리까지 잠기어 벼의 윗부분을 베는 일을 하고 있느라 정신없었다. 근처에 떠 있는 배에는 베어낸 벼의 이삭이 실려 있으며 언덕에 올려 말리고 있었다. 말린 뒤에야 물소의 차례가 되어, 농가까지 운반할 것이다(그림3-25, 3-26).



그림3-25 1월에 서바라이에서 볼 수 있는 뜬벼 수확 풍경. 깊은 연못은 뜬벼의 논이며, 농부가 허리까지 잠긴 상태로 윗부분을 베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림3-26 서바라이의 수확 풍경에서는 물소의 활약을 볼 수 있다. 사진은 물소에게 지우는 수레.




이처럼 깊은 물 지대에서는 5월에 파종하여 9월까지는 물을 빼는 논 같은 곳에서 모를 기른다. 그 사이에도 재배 벼는 야생 벼와 공존하고 있다. 9월부터 급속히 수량이 늘고, 그 다음에는 물에 잠긴 상태에서 재배가 이루어진다. 물이 적은 때에는 다른 품종을 사용해 거의 같은 장소에서 여러 가지 품종을 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종자는 자가채종이 기본이다. 12월에 방문했을 때 벼는 아직 대부분 물에 잠겨 있었다. 새해 무렵부터 차차 이삭이 나와, 꽃이 피고 익으며 수확이 이루어질 것이다. 9개월이나 기르는 뜽벼는 수확효율이 나쁘기 때문인지 현재는 홍수가 일어나는 곳에서만 재배한다. 


이 뜬벼의 특징은 세포질(엄마 게놈)이 일본형이면서 핵 게놈은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의 특징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거꾸로 세포질이 인도형이면서 핵은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의 중간인 특징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뜬벼 재배 품종의 유전적 성질은 갠지스강 유역의 벵골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뜬벼 성질은 원래 여러해살이 야생 벼에서 유래하는 성질이기 때문에, 야생 벼에서 재배 벼에 도입되어 그 후대의 유전적 분리에 의해 다양한 품종이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서바라이의 뜬벼를 재배하고 있는 곳에서는 야생 벼와 재배 벼가 혼재해 있는 상태를 볼 수 있다(그림3-27). 이와 같은 환경에서 둘의 교잡으로 새로운 성질을 가진 재배 품종이 생겼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조생 인도형 품종의 출현도 이처럼 다양한 품종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조생 아우스 품종군은 대당미와 유전적으로 유사하며, 둘도 인도형과 일본형 벼가 교잡하여 생겼음을 알 수 있다(Ishikawa 외 2002). 앞에서 서술했듯이 대당미의 원산지는 점성국인데, 이 나라는 힌두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종교국가였다. 벵골 지역도 당연히 종교와 깊은 관계가 있었던 곳이다. 이러한 관계를 고려하면, 똑같은 재배 벼가 두 지역에서 주로 재배되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림3-27 8월의 서바라이. 위: 논. 아래: 이미 물에 잠겨 있는 논에서는 연꽃과 섞여 있는 야생 벼를 볼 수 있다.



아우스 품종군과 같은 유전적 성질은 캄보디아의 재래종 조사에서도 밝혀졌다.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의 어느 쪽, 혹은 두 지역에서 인도형과 일본형의 교잡 후대에서 다양한 형질 조합을 지닌 개체가 생겨서 인간이 이동할 때 한쪽에서 다른쪽으로 옮겼을 것이다.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은 어디에나 정착하는가


벽돌의 알곡 크기 조사에서 인도형 품종과 일본형 품종은 한 시기에 태국 중앙 평야의 거의 같은 장소에 존재했는데, 이윽고 몇 세기를 거치며 각지로 확산되어 갔음을 알았다. 그 뒤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이라 생각되는 벼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운남성, 부탄 및 네팔 등 표고차가 있는 지역에서 재배되는 벼는 고지대에 일본형, 저지대에 인도형, 또 그들의 중간지대에는 둘이 혼재해 있음이 알려져 있다(松尾 1992, 佐藤 1992, Sano and Morishima 1992). 자연식생에는 없는 재배식물이 이처럼 나뉘어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필시 표고차에 대한 적응으로 생긴 결과라고 생각한다. 농민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토지에서 얻을 수 있는 작물을 심어 보는 일이 많기 때문에, 타지에서 가지고 돌아온 재배식물을 재배하여 최종적으로 그 땅에 적응한 것이 남았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 사례가 일본에서도 발견된다. 청일전쟁이 끝난 뒤, 귀환자가 가지고 돌아와 재배된 벼 품종으로 '개선凱旋'과 '전첩戰捷' 등이 알려져 있는데, 벼의 질병인 도열병에 강하기 때문에 이들은 일본에 정착했다. 일본에 건너온 대당미도 마찬가지의 경위를 더듬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단, 대당미의 사례에서는 큐슈, 시코쿠 등을 중심으로 서일본에서는 농사지었지만 동일본 칸토우보다 북에 정착한 사례는 없었다(嵐 1974). 이것도 품종이 지닌 적응성의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벼는 자연에서 교잡하는가


인도형과 일본형이란 두 가지 품종군의 기원이 교잡에 의한 것이라면, 그러한 교잡은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일까? 그 선명한 실마리를 주는 것이 '잡초 벼'이다. 야생 벼와 재배 벼가 혼재하는 조건에서는 높은 빈도로 둘의 교잡이 발생하고, 그 후대는 탈립성 등에서 통상의 재배종과는 다른 성질을 나타낸다. 벼에는 있지만 야생 벼에도 재배 벼에도 없다. 이것을 '잡초 벼(weedy rice)'라고 한다. 동남아시아의 재배 농가에는 잘 알려져 있다.


미얀마를 조사했을 때에도 야생 벼가 재배 벼의 근처에서 자라고 있는 것을 볼 기회가 있었다. 북부의 번화한 거리, 미치나에서 남으로 내려가면 논 지대가 펼쳐져 있다. 논이 열려 있는 곳은 예전의 습지대를 개간했던 곳인 듯했다. 11월은 벼베기의 게절이라서 말라 있을 거라 생각했더니 논과 그 주변은 아직도 축축하여 아침이슬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 안을 벼베기를 하려는 것 같은 농민과 그를 돕는 젊은 여성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같이 가서 논에 모였다. 그때 우연히 논에서 눈에 들어온 이상한 것이 황금색의 이삭들 사이에 섞여 있는 걸 보았다. 검은색을 띠고 알곡의 끝에 가늘고 긴 '털'이 달린 야생 벼였다(그림3-28). 논 옆의 둠벙에서도 볼 수 있었다. 야생 벼와 재배 벼가 매우 가까운 위치에서 공존하고 있는 모습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림3-28 미얀마에서 볼 수 있는 야생 벼. 논 안에 살고 있다. 뒤쪽에 보이는 건 공동 수확 작업을 하러 가는 현지의 여성들.



현지 사람은 야생 벼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있을까? 들어 보면 되돌아 왔던 건, 지금으로서는 왠지 운치 있는 말 아닌가? 야생 벼를 '신의 벼'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납득했다. 여기는 불교의 나라, 신이라 해도 부처님이다. 파고다(절)이 있으면 맨발로 참배를 한다. 농민들은 '스스로 심지 않았는데 자라 온 벼는 신이 심은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처럼 야생 벼를 받아들이고 있기에, 도처에 재배 벼와도 혼재하며 자연히 교잡할 기회가 늘어났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장소에서는 재배종에 유사하면서도 탈립성을 나타내는 잡초 벼를 빈번하게 볼 수 있다.


잡초 벼는 미얀마를 시작으로 부탄과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필리핀 등의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발견된다. 또 중국과 한국, 일본, 미국 등 온갖 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 미국 등에는 야생 벼가 없기 때문에,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군 사이의 교잡에서 잡초 벼가 생겼음이 알려져 왔다. 잡초 벼는 야생종과 재배종이 근접하여 생육하고 있는 지역과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이 근접하여 재배되는 지역에서도 발생하고 있는 듯하다.



재래종에서 보이는 교잡 후대의 자손들


일본의 재래종에도 다양한 교잡의 '흔적'이 있다. 분자표지(단백질과 DNA에 의해 개체를 식별하는 지표)의 개발에 따라 일본의 재래품종의 독자성이 밝혀져, 바뀐 벼가 있다는 것이 점차 알게 되었다. 


초기에 활용딘 분자표지는 단백질의 전하성질 특성으로 동일한지 확인된 동질효소라는 유전자 연구였다. 일본 재래종 중에는 유전적 다양성에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재래 논벼 450 가운데 5계통, 재래 밭벼 200 가운데 5계통에서는 다른 것과는 다른 유전적인 성질이 나타났다. 아시아의 벼와 비교하니, 특수한 벼는 인도형에 대응하는 것임이 밝혀졌다. 다른 형질도 포함하면 일본의 재래품종은 크게 다음 네 가지로 구별됨이 밝혀졌다.


(1) 전형적인 논벼 품종군=유전적 다양성이 매우 부족함

(2) 논벼에 가까운 형질을 나타내는 밭벼

(3) 논벼와 유전적으로 분화된 밭벼

(4) 논벼와 밭벼에 공통되는 인도형 품종(대당미)


특히 세 가지 밭벼는 제11염색체에 실린 동질효소 유전자인 Pgd1 유전자형 이외에는 논벼에 매우 유사했다. Pgd1에는 복수의 대립유전자가 알려져 있어, 인도형이라고 판별된 대당미는 논벼 및 밭벼의 주요 품종군과도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형질을 보면, 인도형은 왕겨털이 짧고 가늘고 긴 알곡을 가지며 알곡의 페놀 반응은 +형을 나타냈다(표3-1). 한편 DNA 배열 단편의 장다형 패턴(RFLP)의 해석과 알칼리 붕괴성, 중배축 길이의 해석에서는 밭벼의 주요 품종군은 열대 일본형과 온대 일본형의 중간적인 성질을 나타냄이 밝혀졌다. 세포질의 다양성을 PS-ID에서 보았을 때도 온대 일본형에서 특징적인 6C7A형과 열대 일본형에서 특징적인 7C6A 두 종류가 발견되었다.



집단

품종군

Pgd1

공식수

왕겨털 길이

알곡의 길이-너비 비율

페놀 반응

 +

-

논벼

일본형

인도형

1

3

445

5

0.72±0.19

0.37±0.12

2.09±0.34

2.79±0.16

32

4

413

1

밭벼

일본형

일본형

인도형

1

2

3

26

169

5

0.65±0.12

0.44±0.14

0.34±0.13

2.14±0.16

2.38±0.21

2.93±0.09

5

131

4

21

38

1

표3-1 일본 재래 벼의 형태와 생리형질의 특성과 인도형(I)·일본형(J)으로 분류



이상에서 일본의 밭벼는 열대 일본형이 고위도 지대에 전파되었을 때 온대 일본형과 교잡을 일으키고, 적응형질에는 도태를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선택되지 않았던 세포질에 대해서는 두 종류가 혼합되어 오늘날에 이르렀음을 엿볼 수 있다. 


일본 재래 논벼의 PS-ID는 6C7A형이 점하고 있으며, 예외적으로 인도형 품종 특이적인 8C8A형이 발견된다. 그러나 이 세포질을 가진 계통의 핵 안 유전자형은 완전히 일본형이었기 때문에, 인도형과 일본형의 교잡이 발생한 뒤에 핵형이 일본형이 된 계통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언뜻 보기에 동일하게 보이는 재래종에도 꽤 복잡한 과거의 교잡과 유전적인 분리를 거쳐 집단의 구성원이 된 재래종이 있는 듯하다. 


형태와 생리적인 형질로 인도형이라 판별된 집단 안에는 '당법사唐法師' 등 대당미에 속한 품종 이름을 볼 수 있다. 대당미는 황폐한 땅에 강하고, 그 때문에 논벼와 밭벼로 겸용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특징으로 가늘고 긴 알곡, 붉은쌀, 올벼 등을 볼 수 있다. 다만, 붉은쌀이란 성질은 봉납미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인해 선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의 재래 논벼와 밭벼에서 발견되는 대당미 관련 품종군의 특성을 보기 위하여, PS-ID와 ORF100 영역의 결실 유무를 조사했다. 인도형 품종군에서는 ORF100의 유전자 주변 영역에서 결실형을 나타내고, 일본형에서는 비결실형을 나타내는 것이 밝혀졌다. 게다가 결실형의 엽록체는 8C8A형의 PS-ID를 함께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당미 품종군이라 밝혀진 논벼와 밭벼의 계통에는 ORF100 비결실형의 세포질을 가진 계통이 혼재해 있었다. 비결실형(일본형)이었던 세 계통의 핵 유전자형은 인도형이고, 핵과 세포질의 이질적 조합이 확인되었다(표3-2).



페놀 반응

공식수

ORF100

인도형(결실)

일본형(비결실)

+형

17

6

11

-형

19

14

5

표3-2 아우스 품종군에서 발견한 핵과 세포질 유전자형의 불일치성

  


아시아 재래종 벼의 특성과 비교조사한 결과, 대당미는 갠지스강 하류 삼각주 지대(벵골 지역)의 아우스 품종군과 같은 특성을 나타냈다. 똑같은 특징이 캄보디아의 재래종에서도 발견된다. 이것으로 대당미, 아우스 품종군은 인도형과 일본형의 교잡 후대에서 이삭이 패는 특성으로 조생이라 선발된 품종이란 것을 강하게 시사한다. 다만, 야생 벼에서도 두 세포질형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기에 잡종 형성이 야생 벼와 재배 벼에서 발생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같은 곳에서 적응 분화한 강한 감광성을 지닌 뜬벼는 야생 벼에서도 볼 수 있는 특성이기 때문에 앞으로 조사가 기대된다.



잡초 벼의 보편성


 일반적으로 재배품종은 인도형과 일본형 두 가지로 크게 나뉘는 게 사실이지만, 앞에서 기술했듯이 교잡한 계통에서 유래한다고 생각되는 품종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많이 보이는 건 벵골 지역과 캄보디아이다. 재배종이지만 잡초 벼의 유전적 특성도 공통으로 있는 특징이다. 이들 벼의 유전적 특성과 과거에 교잡이 발생한 지역을 특정할 수 있다면 인도형의 기원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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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일본 야요이 시대의 논 유구이다.

이 사진 때문에 호기심이 생겨 찾아보았다.

이 유구의 위치는 아오모리현 타레야나기垂柳 유적에서 발굴되었다고 한다.

늘어진 버드나무, 즉 수양버들이란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 물기가 넘치는 곳이라 그런 자연환경을 좋아하는 버드나무가 잘 자라던 곳이었겠구나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곳에서는 역시 벼농사지.




그나저나 여기는 한번 가서 볼만하겠다. 사진에 보이듯이 이 유적의 논 유구에 옛날 벼를 심고 있단다.

옛날 벼는 요즘 벼와 다르게 생긴 것이 명확하게 보인다.

9월쯤 가면 좋겠구만. 알아볼까나...



우옷, 여기 전시관도 있어서 여러 가지 재미난 자료를 잔뜩 볼 수 있답니다!

https://www.aptinet.jp/Detail_display_00006704.html?id=00006704&t=0




갑시다, 아오모리현. 당시에 살던 인간의 발자국도 볼 수 있답니다. 세상에나.




자, 갑시다 아오모리현. 9월16-19일, 3박4일 일정입니다.

항공료 29만원, 인근에 3박에 20만원짜리 저렴한 숙소로 예약하면... 기본 50만원이면 갑니다만...


다들 별 관심이 없을 테지만. 쩝. 무척 땡긴다. 언젠가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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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기고 1. 벼 재배와 논벼 농경사회 

             -일본 열도의 경우 若林邦彦



벼의 재배가 그대로 논벼 농경사회의 성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농경을 주체로 하는 사회의 성립이나 확산에는 다양한 조건을 고려해야 한다. 이와 같은 문제는 벼농사 사회가 많이 형성된 아시아 각지에서 횡단적으로 고찰해야 하지만, 실제로 상세한 인간 집단의 동태를 고고학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지역과 시대는 한정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고고 유적을 농밀하게 조사하여 상세한 사례연구를 제시할 수 있는 일본의 야요이 시대 사회의 성립을 둘러싼 의론부터 논벼 농경사회 확산의 조건을 살피고, 아울러 그 이전의 벼 재배에 대해서 고찰해 보겠다.



야요이 문화 확립에 대한 기존 시나리오


최근 중국 대륙 등에서 벼농사의 발생에 대한 조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 양쯔강 유역에서 1만 년 전의 벼가 발견된 것이 이야기되고 있다. 한편 전라산田螺山 유적(Zheng, Sun, Nakamura 2000)의 상세한 발굴조사에서 검출된 벼 재배는 다양한 수렵채집 활동과 함께 있었던 일로 판명되어 반드시 생업의 중심은 아니었다고 한다. 즉, 벼재배 개시기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여 중국 대륙에서 단순히 농경 문명의 개시기가 소급된다는 의론에는 직접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벼농사 농경사회 그것이 벼 재배 이후에 나와, 동아시아에서 단계적으로 형성되어 왔냐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중국 대륙에서 농경사회가 확립된 뒤에 그것이 어떻게 동아시아 각지에서 확산되었느냐는 문제를 재정의되어야 한다. 그러면 생각해야 할 문제는, 본격적인 벼농사 중심 사회가 어떻게 하여 확산되었냐는 것이다. 생업의 한 수단으로서 벼 재배의 기원과는 별개로, 고대에 중국 왕조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농경사회란 구도의 밑바탕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이것도 이미 벼농사 농경을 둘러싼 큰 문제의 하나라 할 수 있다. 


확립된 농경 중심 사회가 동아시아에서는 중국 대륙에서 선행하여 성립되었단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건 어떻게 하여 확대되어 갔는가? 그에 대해서는 농경 기술과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집단이 이주, 이동하여 확산되었다는 모델이 있다. 특히, 일본 열도에서 초기 농경사회, 즉 야요이 문화의 확산과 확립에 대해서는 조선 반도서기원을 하는 농경집단의 이주와 이동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이 많이 소개되어 있다.


그 배경으로 인골 분석의 문제가 있다. 조몬 시대의 인골에 비하여 야요이 시대 이후의 인골에서는 큰 키와 고안화高顔化라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그러한 변화는 조선 반도의 인간 집단이 갖는 형질이 유입되어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그에 의하여 상이한 신체 특징을 가진 인간 집단이 일본 열도에 건너와, 그 계보가 되는 집단이 열도 각지로 벼농사 농경사회를 확산시켰다는 느낌이 유포되었다. 결과적으로 '조몬인 Vs 야요이인'이란 상황이 존재하여,그 결과 후자가 전자를 석권했을 것 같다는 핵심어가 사회에 뿌려졌다(국립과학박물관 2005).


그러나 상황은 변화하고 있다. 그 의론의 발단이 된 큰 키와 고안 형질을 가졌던 야마구치현 토이가하마土井井浜 유적의 인골군은 발굴 당초 야요이 시대 전기의 것으로 여겨졌는데, 현재는 야요이 중기의 인골 매장을 다수 볼 수 있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山田 1999). 즉, 야요이 문화 확산의 초기부터 앞에 언급한 형질의 인간집단이 다수를 점하고 있었을리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 킨키近畿 지방 야요이 전기의 고베시 니가타新方 유적에서 출토된 인골군은 형질로는 조몬 인골의 특징과 아무런 변화가 없고(片山 1998), 야요이 문화 정착과 형질 변화에 대해서는 상관이 없는 예도 적지 않다. 


정말로 이주, 이동으로 벼농사 사회가 확산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그 문제를 일본 열도에서 가장 이 시기의 야요이 시대 유적의 조사가 진행되어 상세한 자료가 존재하는 오사카 평야를 중심으로 검증하고 싶다.



오사카 평야에서 야요이 문화가 전파된 모델


오사카 평야에서 최후의 조몬 토기라고 하는 돌대문 토기와 최초의 야요이 토기라고 하는 온가가와遠賀川식 토기는 제작방식이 크게 다르다. 특히 토기의 형태를 만들 때 기본이 되는 점토띠를 쌓아올리는 방식이 약 1만 년 동안 이어진 조몬 토기의 수법과 달리 조선 반도의 전통적인 수법에 의해 제작되었다. 전자는 토기의 안쪽부터 점토띠를 접착시키는 데 반해, 후자는 바깥쪽부터 접착시킨다(家根 1984). 이것은 토기 제작의 기본에 외래의 요소를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수법이 도입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한 돌대문 토기와 온가가와식 토기에서는 주체가 되는 크기도 달라 용도, 즉 토기를 사용하는 생활양식도 크게 달라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佐藤 1999, 濱田 2003). 이러한 점에서 두 가지 토기 양식을 제작해 사용했다는 건 서로 다른 인간 집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동시에 오사카 평야에서는 각각을 주체로 하는 집단이 평야와 산지 주변에 동시에 존재했다는 설도 제시되었다. 이른바 벼농사 중심 생활의 새로 온 이주자가 저지대에, 기존의 수렵채집 생활자가 산지 주변에 공존했다는 설이다. 이 배경이 되는 건 돌대문 토기와 온가가와식 토기가 모두 출토된 유적이 많이 보고되었기 때문이다. 즉, 두 가지 토기 양식의 공존 기간을 인정함에 따라 '공존론'이 성립하고, 이주집단에 의한 벼농사 사회 전파론이 긍정된다는 순환이 성립했다. 이것은 정말일까? 필자는 이 상황을 상세하게 재검토해 보았다(若林 2002).


그 결과, 오사카 평야 중부의 조몬, 야요이 이행기의 26개 유적 가운데 같은 유구(쓰레기 구멍이나 구조 등)에서두 가지 토기 형식이 함께 발견된 건 온가가와식 토기의 최초 단계뿐이라는 걸 밝혔다. 게다가 그 안에서 돌대문 토기가 주체가 되는 예는 하나밖에 없고, 나머지 10개의 사례 이상은 온가가와식 토기 중에서 한두 조각의 돌대문 토기가 섞인 예뿐이었다. 고고 유적에서는 직전 시기의 토기가 작은 조각으로 그보다 새로운 유구가 매장된 흙에 섞여 있는 예가 부지기수이다. '함께 발견된다'는 것만으로는 두 가지 토기 형식이 동시에 존재했다는 근거가 되지 않는다. 두 종류의 토기가 안정적인 비율로 복수의 유적에서 공존하는 것이 동시존재의 근거이다. 이런 점에서 두 가지 토기 형식이 공존했던 기간은 눈에 띄게 짧아지든지 거의 존재하지 않고, 돌대문 토기를 사용했던 사람들이 온가가와식 토기로 변화시켰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다. 즉 '공존'은 아니다. 결국은 새로 온 이주집단이 농경사회를 가져왔다는 모델은 고고학적으로 근거를 잃는 것이다.


하나 더, 이주집단에 의한 사회변화 모델에 대해서 부정적인 예가 있다. 야요이 문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 대륙계 간석기라는 도구류가 있다. 벼 수확을 위한 돌칼, 목기 가공용 외날 돌도끼, 벌채용 양날 돌도끼이다. 이 가운데 킨키 지방에서 돌칼은 초기 야요이 유적에서도 안정적으로 출토되는 것이고, 그 이외에는 야요이 전기의 말미가 되기까지 출토수가 뚜렷하게 적어진다. 이것은 벼농사와 목기 가공 등의 기술체계를 지녔던 집단이 그대로 찾아와 사회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의 다양한 요소가 장기간에 걸쳐 조금씩 변화하여 야요이 사회, 즉 일본의 본격적인 농경사회가 확립되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토기의 변화는 크지만, 그러한 다양한 문화 요소 변화의 하나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이주집단에 의한 문화의 교대가 아니라, 조몬시대 이후의 인간집단이 중국 대륙과 조선 반도에 있었던 벼농사를 시작으로 하는 다양한 문화 요소를 서서히 들여와서 형성된 것이 야요이 문화였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동아시아 농경사회가 광역화된 건 단순히 집단 이동을 계기로 일어났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각각의 지역에서 농경사회로 변화하는 요소가 형성되어 있는 상태나, 환경 변화에 적응하는 새로운 필요성에쫓겼을 때 재래집단이 사회, 문화 변화를 일으켜 여러 변화가 성립된 것은 아닐까?



논벼 농경사회 이전의 벼 재배


그럼 본격적인 농경사회 출현 이전의 벼 재배는 일본 열도에서 어떻게 확인되는 것인가? 2007년 가을에 일본 고고학협회에서 "열도 초기 농경사의 새로운 시점"이란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열도 안의 선사시대 식물 유체 출토 사례를 집성하여 검토한 연구회였다. 그 안에서 식물 유체의 출토 사례를 통해 보는 한 벼와 보리, 기장에 대해서는 조몬시대 후기부터 재배되었다고 상정할 수 있다고 여러 연구자들이 보고했다. 즉, 농경사회 이전에 잡곡복합의 식물 재배가 야요이 시대보다 이전으로 상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큐슈 지방의 잡곡류 종자의 출토 세트는 최근 조선 반도 남부와 일본 열도 서부로 농경이 전파된 경로의 유력 후보지라는 산둥 반도의 벼, 맥류, 잡곡 복합농경에 유사하다는 것도 지적되었다(小畑 2007).


다만, 조몬 후기의 벼 출토 사례에 대해서는 큐슈 지방이 주체라는 점에서 일본 열도 안에서 안정적으로 재배가 이루어졌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어디까지나 수많은 조몬시대의 생업 가운데 일부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모두에 기술한 대로, 중국 대륙의 초기 벼 재배 사례에서도 농경 주체 사회 이전의 식물 재배 사회가 존재했다. 열도안에서도 그와 같은 시기가 존재했다는 생각은 근년의 고고학에서도 일반적으로 되고 있다. 앞으로는 그러한 생업 체계의 상세한 모습과 야요이 시대 이후와의 사회, 문화 구조의 차이를 정의해 가는 일이 중요하지 않을까?


생업 전략이란 다양하여, 광역 교류망을 통하여 여러 가지 수법이 있을 수 있다. 그와는 별개로 광역에서 사회변화와 생업 체계 변화가 연동하여 일어난 경우가 있다. 전자가 단순한 벼 재배, 후자가 농경사회 확립(일본의 경우, 야요이 사회의 확립)일 것이다. 그러나 어느 변화도 대규모 식민이 없어도 실현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보다 그러한 변화를 일으킨 전후의 문화, 사회, 환경의 여러 요소를 분석하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고고학, 인류학, 식물학 등의 여러 분야는 그를 위하여 연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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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18년 사이에 일본에서 거주했다는 한 미국인이 찍은 사진으로, 농부가 쟁기를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 사진에서 쟁기의 모양이 흥미롭다. 쟁기의 술(보습이 달리는 대)과 성에(한마루와 성에를 부착하는 대)의 각도가 매우 작다. 이는 아마 논에서 쓰는 쟁기여서 그럴 것이다. 논흙이 찐덕찐덕하기에 술의 각도가 컸다가는 부러지기 쉽기 때문에, 힘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이렇게 설계했을 것이다.

한국의 밭호미와 논호미가 보여주는 날과 슴베의 각도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푸석푸석한 밭흙에서 일하는 호미와 찐덕찐덕한 논흙에서 일하는 호미는 서로 다르게 생겼다.

왼쪽 두 개는 밭호미, 오른쪽 세 개는 논호미이다.




마지막으로 모내기를 마친 논의 모습도 흥미롭다. 그루당 간격이 듬성듬성하고, 모의 길이가 긴 모습이다. 옛날 농법은 대개 그러했던 걸까? 이 논에 심은 품종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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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터를 타고 버려진 땅을 개간하는 와쿠이 토오루涌井徹 씨. 아키타현 오가타촌大潟村에서 2017년 10월 喜屋武真之介 촬영.


「이런 곳은 가족에게도 보여주지 않아요.」

9월 말, 아키타현 오가타촌. 성인의 키보다 큰 잡초가 무성한 들판을, 셔츠 차림의 남자가 땀투성이가 되어 트랙터로 돌진한다. 잡초를 쓰러뜨릴 때마다 가쿵 가쿵 트랙터가 크게 흔들린다. 마을에서 55헥타르의 논을 소유한 대규모 벼농가 와쿠이 토오루 씨(69)이다. 

 국가가 쌀의 생산을 억제하는 '재배면적 축소 정책'으로 50년 가까이 방치된 약 20헥타르의 토지를 빌려서 개간하고 있다. 원래라면 벼베기로 바쁜 시기이지만, 와쿠이 씨는 여기에 벼를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한쪽을 양파밭으로 바꿀 계획이다. 

 오가타촌은 전쟁 이후 일본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였던 하치로 가타八郎潟를 간척하여 생겼다. 대규모 농업을 목표로 전국에서 젊은이들이 모여, 와쿠이 씨도 1970년 니가타현에서 이주해 왔다.  그런데 쌀이 남아돌자, 국가는 이듬해인 1971년부터 재배면적 축소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이를 따르지 않았던 와쿠이 씨는 '범죄자' '이단아'라고 불렸지만, 꾸준히 직거래 판로를 구축하고 소비자의 지지에 힘입어 그를 이겨냈다. 

 기자가 양파밭을 개간하는 와쿠이 씨를 취재하고 1주일 뒤, 와쿠이 씨가 일하다 트랙터에 머리를 부딪혀 피가 나는 부상을 당했다고 들었다. 걱정하며 전화하자  남의 일처럼 웃는 소리가 들렸다. 「길을 내는 건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지요.」

 국가는 올해 생산된 쌀을 최후로 재배면적 축소 정책을 폐지한다. 와쿠이 씨는 「그 시점에 무슨 일이 있어도 (양파밭의 개간에) 착수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시대가 드디어 와쿠이 씨를 따라가는 모양이지만, 그는 더 앞으로 나아가 새로운투쟁을 시작하고 있다. 오가타촌 이단아의 인생과 그 생각의 일부를 살핀다.


눈이 내리는 농지에서 양파의 자람새를 확인하는 와쿠이 토오루 씨. 2017년 12월 촬영. 



◆농업의 희망을 찾는 와쿠이 토오루 씨 

농업정책으로 분단된 마을 

 

「사과해야 합니다.」

 2009년 11월26일, 아키타현 오가타촌을 방문한 민주당 정권의 아카마츠 히로타카赤松広隆 농림수산상(당시)은 의견교환 모임에 참석한 마을의 임원과 농민들 앞에서 사죄했다. 이 마을은 '일본의 식량기지'를 만들고자 탄생했지만, 농업정책이 이주자들을 농락하고 마을을 분단시켰기 때문이다. 

 오가타촌은 하치로 가타를 간척하여 1964년 10월에 탄생했다. 쌀을 증산하는 '모델 농촌'이란 평을 받고, 전국에서 이주를 희망하는 사람을 선발했다. 평균 경영규모가 1헥타르 정도였던 시대에 1농가에 제안된 농지는 10헥타르(이후 15헥타르)였다. 



 그런데 벼농사에 의욕을 불태우던 이주자들을 '재배면적 축소 정책'이 가로막았다. 국가는 식량관리법에 근거하여 농가에서 쌀을 매입해 소비자에게 판매했는데, 1인당 소비량이 1962년을 정점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쌀값을 유지하기 위하여벼농사를 축소해 생산량을 조정하는 일이 1970년에 시작되어, 1971년 이후에는 쌀 이외의 작물을 재배하는 농지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등으로 다른 작물을 재배하도록 추진했다. 오가타촌도 농지의 거의 절반을 밭농사로 전환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일부 이주자들은 겨울철 농한기가 되자 밭농사를 짓는 선진농가를 시찰하고 다녔다. 니가타현 도카마치시十日町市에서 1970년에 이주한 와쿠이 토오루 씨(69)도 그 한 사람이었다. 칸토, 칸사이, 시코쿠……. 근사한 대처를 목격하고 「나도 할 수 있다」며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 도쿄 우에다역을 출발한 야간열차가 아키타에 가까워지면서 창밖에는 은빛세계가 펼쳐졌다. 꿈은 눈의 무게에 눌려 점점 시들고, 오가타촌에 도착할 무렵에는 현실로 돌아오게 되었다. 멜론, 호박, 대두 등다양한 밭농사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눈 때문에 재배시기가 제한되는 데다가, 간척지는 배수설비를 갖추지 않으면 작물의 뿌리가 썩는 등 조건이 나빴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정리한 생각을 와쿠이 씨는 나중에 블로그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오랜 경험을 통해 『설국의 농업은 눈이 없을 때 노지에서 작물을 키우고, 눈이 있을 때에는 시설 안에서 가공을추진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일을 추진하기 위하여 무엇을 심고 무엇을 가공할지, 작물을 선택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다 설국에 좋은 작물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작물'이란 얄궂게도 국가가 생산을 제한하려는 쌀이었다.


수확기를 맞은 논을 둘러보는 와쿠이 토오루 씨. 2017년 10월 촬영. 


타작물 전환에 실패를 거듭한 와쿠이 씨 등은 제한면적을 초과하여 모내기를 실시한다. 하지만 현의 담당자는 그 과잉 재배한 분량을 푸른 상태에서 베어내라고 지도를 내렸다. 이른바 '풋베기'이다. 

 이주하면서 계약에서는 국가의 방침에 따르지 않을 경우 국가에서 강제적으로 농지를 반환(환매)하도록 요구한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동료와 논의했지만 해결책은 없었고, 와쿠이 씨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1978년 가을에는 약 1주일 뒤에 수확할 벼이삭을 풋베기하라는 지도를 받아, 자신의 콤바인으로 베어서 논에 방치했다. 벼이삭은 90% 가까이 영글어 있었다. 니가타에서 함께 이주한 아버지 헤이고로平五郎 씨(2013년 사망)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건'은 그 무렵에 일어났다. 이앙기로 한 번 오갈 분량을 풋베기하지 않은 두 농민이 국가에게서 농지를 환매하라는 처분을 받은 것이다. 와쿠이 씨는 말한다. 「두 농가의 태도가 너무 완고했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국가는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실력을 행사했죠. 우리는 이런 압박을 받으면서 농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분노와 불안을 느꼈습니다.」

 오가타촌의 이주자 약 580명 가운데 와쿠이 씨 등 200명은 1983년 아키타 지방법원에 농사조정을 제기한다. 농가가자신의 토지에서 쌀을 재배하면 안 된다는 법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자, 농가마다 소유한 논 15헥타르에 할 수 있는 한 농사를 짓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마을에서 유일한 집하업자에게서 수확한 벼의 매입을 거부당했다. 와쿠이 씨와 동료는 전화번보부를 펼쳐 전국의 미곡상에게 연락하고, 자신들의 벼를 취급해주는 가게를 개척했다. 이 쌀은 이른바「암거래 쌀」이라 불리는데, 현과 현의 경찰은 1985년 10월부터 2개월 동안 마을 입구에서 검문을 하여 암거래 쌀의 출하를 저지하려 했다.

 1987년이 되자 와쿠이 씨는 동료 몇 명과 주식회사 '오가타촌 아키타 코마치 생산자협회'를 설립한다. 계약 농가에서 농협도다 높은 가격으로 쌀을 구입해, 자사의 공장에서 가공하여 독자적으로 개척한 고객에게 직거래를 시작했다. 신품종 '아키타 코마치'의 평가는 최상으로「산지 직송은 맛있다」는 평판을 얻는다. 하지만 재배면적 축소 정책을 준수하는 쪽에서는 '돈벌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마을에서 「암거래 쌀을 출하하지 마라」는 시위대가 몰려와 「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며 힐난하여 와쿠이 씨는 반론을 했다. 

 「재배면적 축소를 계속한다고 새색시가 옵니까? 훌륭한 농업을 할 수 있습니까? 나는 그것을 듣고 싶습니다.」

 당시 대두를 재배하던  '재배면적 축소 준수파'의 미야자키 시다요시宮崎定芳 씨(78)는 와쿠이 씨에게 호통을 친 적이 있다고 한다. 「젊어서 국가에 대항하는 지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국가 등은 밭농사를 짓도록 연약한 지반을 없애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미야자키 씨 자신은 재배면적 축소에 협력하는 게 마을의 발전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을은 재배면적 축소 반대파와 준수파로 분단되어, 반대파의 아이가 친구들에게 '암거래 쌀'이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미야자키 씨는 말한다. 

 「서로의 관계가 최악이었다.」

 암거래 쌀이 사실상 추인을 받게 된 것은 1988년 1월 아키타 지검이 내린 판단이 계기였다. 암거래 쌀을 판매했다고 하여 식량관리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불구속 입건된 재배면적 축소 반대파 3명을 모두 불기소 처분한 것이다. 미국은 일본의 쌀 수입규제를 심하게 비판하고, 국가가 농가의 경제활동을 제한하는 제도는 한계에 이르렀다. 불기소 처분을 알게 된 와쿠이 씨는 「국가와 대결하는 일은 끝났다」고 느꼈고, 당시 식량청의 과장이고 나중에 농수사무 차관을 지낸 다카키 유우키高木勇樹 씨(74)도 「이제 식량관리법은 무너지겠다고 확신했다. 시대에 뒤처진 법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입장 때문에 본심은 입 밖에로 낼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전쟁 이후 최악의 기록적 흉년이었던 1993년, 대량 판매점 사장이 오가타촌을 방문해 '1가마 6만 엔'이란 가격으로 사재기를 추진했다. 지난해까지 1가마 2만 엔으로 매입했던 와쿠이 씨는 「6만 엔은 무리이지만, 4년 동안 3만 엔에 구매하겠다」고 약속하고 생산자를 묶어 놓았다. 이듬해는 생산량이 회복되어 일반 쌀값이 떨어졌지만, 3만 엔에 계속 구매하겠다고 한 와쿠이 씨는 지난해의 쌀값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전국의 직거래 고객에게 <지금의 쌀 가격이 비싸다고 생각한다면, 희망 가격을 알려 주세요>라고 편지를 보내자, 90%는「지금의 가격도 괜찮다」고 답했다. 가격 인하 요구가 많으면 경영 위기로 이어질 수 있었지만, 꾸준히 개척한 고객의 만족도는 높았다. 


오가타촌으로 이주한 직후 볍씨를 뿌리는 헬기 앞에서 동료들과 기념촬영. 왼쪽에서 두 번째. 본인 제공. 


다카키 씨는 자성을 담아 말한다. 「소비자는 국가가 매입하는 정부미보다 농가에서 필사적으로 농사지은 『암거래 쌀』이 맛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가 농업을 잘못 지켜서 농가의 창의성을 빼앗았다.」다카키 씨가 농수성의 관방장이었던 1995년, 식량관리법은 식량법으로 대체되는 형태로 폐지되고 암거래 쌀은 '암거래'란 딱지를 떼었다. 

 오가타촌의 분단이 해소된 것은 2010년 무렵이었다. 2009년 마을을 방문한 당시 아카마츠 농수상이 농업정책을 사죄하자, 재배면적 축소 준수파에게서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며 반발의 소리도 높았다. 그러나 재배면적 축소로 줄어든 벼농사 농가 등의 수입을 보전하는 '호별 소득보상제도'가 2010년 도입되고, 쌀가루용 등의 벼농사를 지어도 재배면적 축소로 취급하게 되었기 때문에 마을 농가의 재배면적 축소 참가율은 지난해 49%에서 84%로 높아졌다. 분단 구도는 마침내 무너졌다. 


참치처럼 돌진


 「나는 참치처럼 멈추면 죽는다.」

 와쿠이 씨는 자신을 이렇게 비용한다. 생각이 나면 곧바로 행동한다. 기자가 취재하며 쌀 가공공장의 안내를 받을 때도 생산라인의 문제점을 발견하자, 현장의 직원과 이야기하느라 20분 정도 열중했다. 

 와쿠이 씨는 1948년 9월, 니가타현 도카마치시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 지역은 「까마귀에게 부딪치는 흙도 없다」고 할 만큼 농지가 귀중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농가의 셋째 아들로 논의 지분이 0.3헥타르였는데, 와쿠이 씨도 농업전문학교에 진학하고 아버지와 시노가와천信濃川의 하천부지에 조금씩 흙을 날라 논을 1.8헥타르까지 넓혔다. 그럼에도 농사일로는 연간 100만 엔 정도 벌어 공사현장 등에 돈을 벌러 나가지 않으면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니가타현 도카마치시의 자택 앞에서 사진을 찍은 와쿠이 씨(왼쪽 끝). 본인 제공. 


마음껏 벼농사를 짓고 싶다. 그런 꿈을 품은 아버지와 아들은 자연스럽게 오가타로 이주를 목표로 했다. 이주 조건 등을 듣고자 와쿠이 씨는 19세 때 혼자서 상경하여, 느닷없이 옛 농림성(현 농수성) 본청을 방문했다. 담당직원에게  「그렇다면 가나자와金沢의 호쿠리쿠北陸 농정국에 가는 편이 낫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열차에 타고 가나자와로 향했다. 

 이주자는 응모자 가운데 서류심사와 면접 등으로 선발했는데, 유부남이 유리하다고 들은 와쿠이 씨는 <이주한 뒤 현지 여성과 결혼을 희망한다>고 적은 결혼희망서를 작성하여 이주 응모서류와 함께 제출했다. 22세였던 1970년 12월 이주한 직후 먼저 온 이주자의 딸 아야코 씨(71)와 결혼했다.

 재배면적 축소는 올해로 끝난다. 하지만 와쿠이 씨의 시행착오는 계속된다. 

 사장을 맡은 오가타 아키타 마치코 생산자협회(종업원 수 160명)은 올해로 설립 30년을 맞이한다. 계약농가는 현재 약80호, 직거래 회원수는 약 5만 명에 이르는데, 최고일 때보다 감소하는 추세이다. 쌀의 생산부터 가공, 판매까지 다루고 부가가치를 높이려고 떡과 찰밥, 찹쌀떡 등을 발매했지만, 가격경쟁에 밀리고 있다. 쌀가루를 사용한 가공시설도 신설했지만 기대만큼 매출이 많지는 않다. 최근에는 글루텐(밀가루에 함유된 단백질)을 쓰지 않는 음식을 먹는 테니스 선수의 몸 상태가 개선되었다는 뉴스가 화제가 되며 쌀가루로 만든 글루텐 프리 파스타 등의 판매도 시작했다. 

 재배면적 축소 정책의 종료와 농가의 고령화, 그리고 환태평양 파트너쉽 협정(TPP) 참가 이후의 시대를 눈여겨 보는 와쿠이 씨는 지난해 더 수익성 높은 농업 모델을 만들고자 금융기관 등과 주식회사 '미라이 공창 팜 아키타(みらい共創ファーム秋田)'를 설립했다. 지금 주력하고 있는 건 쌀이 아니라 양파이다. 기계를 쓰면 대규모로 재배할 수 있고, 가공용 양파는 수요가 있기 때문에 쌀보다 수익성이 높다고 한다. 마을의 배수 대책도 추진하여 밭농사 환경도 조성해 왔다. 앞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던 밭을 빌려서 집약적으로 효율적인 경영을 목표로 한다. 

 「꿈과 희망이 있는 농업을 실현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이다. 벼농사만 짓거나, 겉모습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쌀, 쌀이라고 떠들던 오가타촌에서 하는 일에 영향이 있을까?」

 직접 양파밭을 개간하다 머리를 부딪쳐 부상을 당하는 등, 내년에 칠십을 바라보지만 참치처럼 돌진할 뿐이다. 걱정하는 소리도 있지만, 그러니까 투쟁에 몰두하는 것이다. 이번 달 중순, 와쿠이 씨와 양파밭에 방문했다. 눈이 흩날리는 가운데 와쿠이 씨는 밭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설국에서 태어난 건 눈의 무게를 느끼며 살아간다. 이 양파도 차가운 눈 아래에서 자란다. 봄이 지나 양파를 수확할 수있을까.」

 푸른 싹이 흙 아래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https://mainichi.jp/articles/20171224/ddm/010/040/06000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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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논 아트"를 봅니다.
이 정도면 정말 이제는 예술의 경지에 올랐다고 인정할 만합니다.

몇 년 전 처음으로 일본에서는 논에 그림을 그려 관광 수입과 농산물 판매를 연결한다는 사실을 알고 역시 우리보다 좀 앞서 가는구나 싶었는데, 이건 뭐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나아갔네요. 1993년부터 했다고 하니 20년 넘게 쌓인 노하우이겠네요. 이 예술작품을 보러 아오모리현에 다녀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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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조생종 벼들이 고려인들과 함께 중앙아시아에 뿌리를 내린 이유가 본문에 나온다.

"한국의 시월과는 다른 이 지역의 기후는 아침 저녁이면 벌써 초겨울의 기온이다."


일본 농학자들의 조사에 의하면, 조선의 벼들은 대부분 조생종이 많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겠다. 하나, 가능한 지역에서는 대개 맥류와 이모작을 행하기에 모내기가 늦어질 수밖에 없고, 그에 따라 일찍 여무는 품종이 유리했다. 둘, 관개 사정이 여의치 않기에 -빗물에 의존하거나 조그만 둠벙 등으로 해결- 6월 말에서 7월 초쯤 찾아오는 장맛비가 관개용수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여, 그 시기를 전후하여 모내기하는 것이 유리했다.

지금이야 물 사정 때문에 모내기를 못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최근의 기후변화로 인한 가뭄의 영향을 빼고- 모내기는 점점 더 빨라지고, 그만큼 재배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중만생종이 더 많은 선택을 받고 논이란 공간을 차지하게 되었다. 조생종은 강원도 지역처럼 추위가 일찍 찾아오는 곳이나, 추석맞이 햅쌀을 출하하려는 농가를 빼고는 잘 선택하지 않는 시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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