죠몬 대두의 발견과 입증
일본 재래 콩
2003년 통계에 의하면, 곡물은 세계에서 18억 톤이란 방대한 양이 재배되고 있으며, 이중에서 대두는 약 2억 톤이다. 이는 해마다 증가하는 경향이다. 세계에서 생산되는 콩의 대부분은 대두이고, 그 다음으로 재배하는 것은 강낭콩, 완두콩, 병아리콩인데, 전부 합해도 대두의 1/3 정도의 양에 지나지 않는다.
현재는 아메리카나 남미, 중미 등에서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는 대두인데, 원래는 아시아 몽골로이드들의 먹을거리였다. 대두는 맥주에 빠질 수 없는 가지콩 같이 그대로 먹어도 맛있지만, 전통적인 대두 식품에는 간장을 비롯해 청국장, 두부, 된장국의 된장 등이 있고, 된장국에 들어가는 유부도 두부로 만든다. 또한 소를 기르는 사료로도 대두가 사용되기에, 우리들은 많은 대두를 알게 모르게 소비하고 있는 셈이다. 실은 이 대두가 죠몬 시대부터 재배되었단 것을 최근 알게 되었다.
콩과 식물에는 2만 종에 이르는 매우 많은 종류가 있는데, 세계에서 재배되는 80종의 콩과 식물 가운데 우리들이 식용으로 이용하는 것은 아마 10종류 정도이다. 그 가운데 동아시아에 기원지를 가진 것은 대두(Glycine max)와 팥(Vignaangularis var. angularis), 녹두(Vigna radiate)이다. 고고 유적에서 출토되는 죠몬 시대~중세의 콩이라 생각되는 것은 대두와 팥, 동부(Vigna unguiculata), 녹두에 한하고, 기타 콩은 근세 말 이후에 일본에 전해졌기에 강낭콩이나 붉은강낭콩, 리마콩, 완두콩은 에도 시대 말부터 메이지 시대 초기에 일본에 들어왔다. 동부는 아프리카 기원으로 고대(9세기) 이후에, 녹두는 인도 중북부 기원으로 중세(14세기) 이후에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죠몬 시대~고분 시대의 재배 콩은 대두와 팥만 생각하면 좋다. 이 2종은 일본 열도에도 야생종이 자생하고 있기 때문에, 유적 출토의 콩류에는 야생종인 덩굴콩(Glycine soja)과 새팥(Vigna angularis var. nipponensis)이 포함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이들을 구별하는 일은 열도에서 행해진 재배화 또는 재배종의 유입 시기를 결정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압흔법이 발견한 죠몬 대두
최근 일본에서 고민족식물학(Palaeoethnobotany=유적에서 출토하는 식물유존체의 분석을 통해 과거의 인간과 식물의 관계사를 연구하는 분야. 식물고고학이라고도 하는데, 약간 정의가 다름)의 조사 성과는 대두나 팥이 죠몬 시대에 재배화되었단 것을 밝혔다. 필자 등은 2007년 11월 나가사키현 시마바라시島原市 오노바루大野原 유적에서 출토된 죠몬 시대 후기 중엽의 타로우자코太郎迫식 토기의 바닥 부분 내면에서 검출된 감의 씨앗 같은 크고 편평한 압흔이 재배 대두라고 발표했다. 그때까지 대두는 농학이나 고고학에서도 그 기원지는 동북아시아에 있고, 그것이 야요이 시대가 되어 벼농사와 함께 건너 왔다고 생각되었다.
이 감 씨앗 같은 편평한 압흔이 대두인 것을 밝힌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은 주식회사 파레오 라보Paleo labo의 사사키 유카佐々木由香 씨이다. 사사키 씨가 2007년 1월에 구마모토 대학을 방문했을 때, 그때까지 종 불명의 벼과 종자라고 생각했던 '와쿠도이시ワクド石 타입 압흔'(그림1 아래 중간)을 동부속 종자의 배꼽이 아니냐고 기술한 것에서 시작된다. 이 '와쿠도이시 타입 압흔'은 구마모토현 기쿠치시菊池市에 있는 와쿠도이시 유적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어, 구마모토현을 중심으로 한 죠몬 시대 후만기의 유적 10개소 정도에서 발견되었다. 나는 곧 그 전년에 조사한 나가사키현 오노바루 유적의 감 씨앗 모양 압흔(그림1 위 왼쪽)을 떠올렸다. 그 복제를 잘 관찰해 보면, 그 측면에 확실히 와쿠도이시 타입과 똑같이 배꼽 같은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이 감 씨앗 모양 압흔은 콩의 일종이라고 예측했다. 사사키 씨가 돌아간 뒤, 곡물상에서 있는 대로 모든 종류의 콩을 사 와서, 배꼽 모양을 비교해 보자 와쿠도이시 타입 같은 길이 4~5밀리미터인 긴타원형이고 주위가 제방 모양으로 솟아 있으며 중앙에 가느다란 세로의 홈이 있는 배꼽은 대두밖에 없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두의 선조종인 덩굴콩도 입수해 관찰하자, 크기는 작지만 같은 모양의 배꼽이 있음을 확인했다. 이것은 대두의 무리가 틀림없다고 생각했지만 확신은 없었다. 나의 대두에 대한 이미지는 둥글고 황색 대두로, 길어도 가지콩 크기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고민하는데, 사사키 씨가 도호쿠 지방에서 재배되는 선비콩이나 납작검은콩 등이라 부르는, 편평한 검은콩이 있다는 걸 가르쳐 주었다. 다만 이걸 보아도 역시 저 감 씨앗의 이미지와는 다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콩조림처럼 콩은 수분을 흡수하면 팽창한다는 것이었다. 구입한 콩을 모두 물에 담가서 불리자, 웬걸, 대두속의 씨앗만 세로 방향의 신장율이 너비나 두께의 그것에 비해 뚜렷하게 크다는 것을 알았다. 물을 충분히 흡수해 팽윤한 납작검은콩의 모습은 크기는 커졌지만 그 비율은 오노바루 유적의 감 씨앗 모양 압흔과 빼닮았다(그림2 아랫단 오른쪽 참조).
수수께끼가 풀렸다. 저 '감 씨앗'은 토기의 점토 안에 들어간 편평한 대두의 씨앗이 점토의 수분을 흡수하고 팽창해 변형된 것이었다. 이 팽윤 상태로 생각되는 압흔 대두를 건조 상태로 복원했을 경우에도 길이가 1센티미터를 넘어, 야생의 덩굴콩 크기를 크게 웃돌았다. 재배된 대두라고 확신하고, 구마모토 대학이 발견한 콩이 아닌 '구마다이クマダイ'라고 이름 붙이고 세상에 내보냈다. 이상하게도 이 발견의 계기가 된 오노바루 유적이 있는 시마바라島原 반도는 1950년대에 죠몬 후만기 농경론의 무대로 주목을 받은 곳으로, 나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뒤 이 죠몬 토기에 남겨진 대두 압흔은 중부 지방이나 간토우 서부 지방으로 불똥이 튀어, 대두가 팥과 함께 이들 지역에 기원을 가진 재배식물인 것이 판명되었다. 이 발견은 대두나 팥의 기원에 관한 종래의 통설을 부정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때까지 확실한 증거가 없었던 죠몬 시대의 재배식물을 구체적 예로 입증한 것으로, 죠몬 농경론에도 파문을 일으키게 되었다. 독자 분도 놀랐을지도 모르지만, 뜻밖에도 이와 같은 중대한 발견도 아주 최근의 일이었다. 사실은 그때까지도 대두속의 탄화 종자는 이미 발견되었고, 토기의 표면에 있는 정말로 콩알 정도의 구멍(씨앗 압흔으로는 매우 큰 부류에 들어감)도 그때까지 누구나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들을 대두나 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또한 그렇게 생각해도 입증할 수 없었다. 이것은 '보려고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자료학의 무서움과 재미를 말해주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콩류의 동정법
탄화된 씨앗은 콩과에 한하지 않고 동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 단서는 콩류의 경우, 꼬투리의 배주자루(珠柄)에 붙은 부분인 배꼽의 형태와 크기, 위치가 결정적 근거이다. 이외에 떡잎 사이에 있는 첫잎과 어린뿌리(幼根)의 형태와 그 위치도 종 동정의 참고가 된다. 그러나 압흔의 경우, 떡잎 내부의 구조는 복원할 수 없기에 필연적으로 외부의 형태적 특징이 실마리가 된다. 전체적인 비율도 동정의 실마리가 되지만, 결정적 근거는 배꼽의 구조와 모양이다(그림3). 배꼽의 형태는 대두속과 기타 속이 크게 달라, 대두속이 두툼막(厚膜, epihilum)을 갖지 않는 '노출 타입'인 데 반해, 다른 속은 두툼막이 배꼽의 위를 덮고, 배꼽 자체가 옴푹한 '두툼막 타입'이다. 이 '노출 타입' 배꼽은 '와쿠도이시 타입 압흔'과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또한 '후막 타입' 배꼽의 옴푹함은 내부의 떡잎 측면에도 미치고 있어, 겉껍질이나 배꼽이 없는 탄화 자료나 압흔 자료에서도 팥이나 녹두를 그 옴푹함의 위치를 가지고 구별하는 단서도 된다.
더욱 주의해야 할 것은 자료의 변형이다. 탄화 종자나 토기 압흔 종자는 고고 자료이기에 반드시 변형을 받는다. 탄화 종자는 불에 타서 전체가 축소되어 그 비율은 길이(장축)와 너비(단축)에 차이를 보인다. 길이의 경우 10~20% 축소되고, 너비는 10% 정도 축소된다. 또한 앞에 기술했듯이, 토기 압흔 종자도 토기 내부의 수분을 흡수해 확장되고, 토기의 건조와 소성에 의한 축소라는 복잡한 변형 과정을 거친다. 이 수분에 의한 팽창은 콩의 종류에 따라서 길이와 너비의 변형 비율이 달라, 대두는 길이가 너비에 비하여 20% 정도 크게 확장하는 경향이 있고, 다른 종의 콩 종자와 차이를 보여준다. 재배화의 징후 가운데 하나인 '종자의 대형화'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재배종이나 야생종과 비교하기 위하여 '탄화'나 '토기 압흔' 등 자료의 질을 넘어 콩 종자 자체의 형태, 크기를 복원할 필요가 있다. 위에 적은 변형률은 그 복원에 매우 중요한 지수가 된다.
종자에서 보는 재배의 흔적
인간이 식량 생산을 위해 식물에 관여하는 행위를 '재배(Cultivation)'이라 하고, 그에 대응한 식물 쪽의 유전적 변화를 '재배화(Domestication)'라고 한다. 이것은 일본 고고학에서는 조금 다른 정의를 내리는데, 식물이 재배되게 된 것을 '재배화'라 부르는 것 같아, 약간 의미가 다르다.
또한 이 재배에 의하여 식물에게 나타나는 성질, 형질은 '재배화 징후군(Domestication syndromes)'이라 말하기도 한다. 그 내용은 식물마다 다르지만, 주요한 것으로 아래와 같은 종류가 있다.
① 종자의 자연 살포 상실 또는 감소(벼과 식물의 탈립성, 콩 꼬투리의 열개성 상실)
② 휴면성 상실(흙속에 파종하면 계절에 관계없이 바로 발아함)
③ 종자의 대형화(씨앗이 굵고 커짐)
그밖에 등숙기가 똑같아진다, 독성이나 향기가 사라진다 등의 성질도 재배에 의한 식물의 변화이다. 오이는 원래 쓴맛인데 이것은 해충에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위책이고, 야성의 콩류 등이 알곡의 등숙기를 고르지 않게 하는 것도 새나 벌레가 먹어 치우지 않게 하기 위한 전략이다. 고고 자료로는 등숙기나 독성, 냄새 등을 판단할 수 없다. 따라서, ①~③이 고고 자료(종실 유체)로 검토할 수 있는 재배화 징후군이다.
①은 벼과 종자의 경우, 종자가 이삭에서 잘 빠지지 않는 성질(non-shattering)이고, 콩과 종자의 경우 꼬투리가 자연적으로 열개하지 않는 성질이다. 그러나 이 징후는 대부분은 고고학적 자료에서는 가시화되기 어려운 것으로, 녹두나 비둘기콩(Cajanus cajan)에서는 꼬투리가 자연히 열개하는 경우가 있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게다가 이와 같은 특징을 보이는 꼬투리 자체가 유적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는 결점이 있다. ②는 콩과 종자의 경우 종피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어, 종피의 두께 감소는 재배화의 단서가 되지만 토기 압흔 종자로는 계측할 수 없으며, 탄화 종자의 경우에도 종피는 남아 있기가 매우 어렵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③만이 콩과 식물에서 고고학적으로 가시화될 수 있는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죠몬 시대의 대두는 편평한 형상이 특징으로, 죠몬 시대 중기(약 5000년 전)에는 선조종인 덩굴콩의 크기를 넘는다. 또한 팥형 종자의 경우도 거의 동시기에 종자의 대형화를 볼 수 있다(그림4).
콩류 재배화의 과정
재배식물에 종의 유전적, 형태적 변이를 불러일으키는 선택에는 자연선택과 인위선택 두 가지가 있고, 후자에는 종자를 골라 심는 등의 행위인 '방법적 선택'과 행위와는 무관하게 선택이 작용하는 '무의식적 선택'이 있다. 재배식물의 성립에 관계하는 선택의 주역은 '무의식적 선택'이라 생각할 수 있다.
최근의 유전자 연구에 기반한 농학, 식물학 연구는 팥이나 대두에 재배형과 야생형의 중간형(잡초형)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혔다. 벌채지나 황무지 등의 교란(자연 상태가 사람에 의해 개변되는 일) 환경에서 발아한 덩굴팥은 생육 당초는 풀형인데, 나중에 환경이 덤불로 변화하면 덩굴성으로 성장형을 변화시킨다. 이것은 재배형이 단기에 종자로 영양을 집중시키는 전략을 취하는 데 반해, 환경의 변화에 따라 덩굴로 영양을 보내 오랜 기간에 걸쳐서 종자를 생산한다는 전략으로 변화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중간형의 존재는 인간의 기호성에 기반한 선택적인 종자의 보존과 파종 행위라는 농경의 개념과는 달리, 그와 같은 의도적 행위가 없어도 일단 교란 환경이 발생해 그 환경 안에서 선택적으로 사람에 의하여 채집이 계속된다면 재배화(종자의 대형화, 탈립성의 상실)는 일어날 수 있다는 설의 근거가 되고 있다. 이는 말하자면 무의식적 선택에 의한 재배화의 발생론이다.
그러나 최근의 고민족식물학 연구에 의하면, 재배화는 오히려 인위적인 종자의 선택, 파종에 의하여 진행된다고 생각한다(그림5). 콩류의 꼬투리 자연 열개성의 상실에는 수확법이 크게 관여한다. 수확을 위해 꼬투리를 따거나, 뿌리채 뽑는 행위는 종자가 떨어지기 어려운 비열개성 개체(유전자)가 높은 확률로 회수되는 것으로 이어져, 그것들을 저장해 다음해에 심는 행위는 야생의 꼬투리 열개성 성질을 감소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이들 행위는 아직 무의식적 선택의 범주에 포함된다. 그러나 종자의 대형화에는 가공작업에 의한 선택(체, 체질), 경작에 의한 경합종의 배제(괭이에 의한 깊이갈이, 경작지의 조성 및 야생종의 격리), 파종에 의한 발아의 촉진 등의 행위가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것은 이미 방법적 선택이다.
이와 같은 종자의 휴면성이나 꼬투리의 열개성 결여라는 재배화의 징후는 확률로는 자연 돌연변이율 0.00001~0.000001 정도의 변이가 있다면, 파종과 수확이란 반복에 따라 수십 대~20세대 안에 집단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된다고 한다. 또한, 실험적으로 벼과 종자를 새로운 토지에 파종하고 야생종에서 분리해 낫을 사용해 익은 종자를 수확하면, 비탈립성 유저자형은 20~100년으로 집단 안에서 우점한다고 추정된다.
그러나 실제 고고학적인 증거에서 보면, 그 진화의 과정은 매우 더딤을 알 수 있다. 서남아시아의 맥류나 중국 남부의 벼에서는 우선 종자의 대형화가 일어나고, 그 다음에 비탈립성 이삭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초기 종자의 대형화는 재배 행위의 최초 몇 세기(500~1000년 동안)에 발생하는데, 비탈립성의 성립에는 1000~2000년 정도가 걸린다는 것이 증명된다. 콩류의 경우, 꼬투리 열개성의 상실은 고고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지만, 종자의 대형화에 관해서는 남인도에서 녹두의 경우 최초의 재배 행위에서 1000~2000년 늦은 기원전 2000년대 말부터 기원전 1000년대의 철기 시대 개시 이후라고 한다. 이것은 경작법의 차이를 반영하며, 쟁기에 의한 깊이갈이의 개시와 함께 종자는 대형화한다고 한다. 또한, 근동의 렌즈콩이나 완두의 경우에도 종자의 대형화는 쟁기가 출현하는 청동기 시대 후기 이후이고, 재배 행위의 개시로부터 3000~4000년 늦는다. 이와 같은 종자의 대형화 이전의 단계는 완전한 재배화에 이르지 않은(재배화 징후군이 나타나지 않은) 재배 행위(Pre-domestication cultivation) 단계라고 개념화된다. 즉 유적 출토 종자 샘플 중에서 경지 잡초의 종자가 존재함(재배는 행해짐)에도 불구하고, 종자의 크기나 이삭의 형상은 야생종과 다르지 않는 단계이다. 이 단계의 경작 행위에서는 돌낫 등의 수확 도구나 맷돌 등의 가공 도구라는 고고학적 자료는 연동되지 않아, 이들 유물을 가지고 경작 행위의 유무를 논의할 수 없다는 점에는 주의해야 한다. -역자의 생각;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고 있는 모습 같다. 농경이 단순히 어떤 식물을 채집해 먹었다고 성립할 수 있는 것인가? 그걸 문화라 할 수 있는가는 생각해 봐야 할 문제 같다. 그래서 필자가 이런 도망갈 구멍을 만들어 놓고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 하는 듯하다.
죠몬 시대의 대두와 팥의 경우, 종자의 대형화는 중기에는 인정되기 때문에, 그 이전에 이미 의도적인 농경 행위가 발생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죠몬 대두 '쿠마다이'는 지금까지 유전자학에서 상정되었던 일본 기원 대두의 존재를 고고학적으로 증명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상으로부터, 선사 시대의 동북아시아에서 대두와 팥의 재배화 기원지의 하나가 일본 열도였다는 것은 거의 틀림없다. 앞에 기술한 고민족식물학의 이론적 진화는 그 재배화 시기의 소급, 즉 종자의 대형화 현상이 인정되기 이전에 이미 재배 행위가 개시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따라서 앞으로는 종자만이 아니라, 경작 잡초 등의 검출에 힘써 이 완전한 재배화에 으리지 않은 재배 행위의 단계가 죠몬 전기 이전에 존재했단 점, 그리고 그것이 어디까지 소급될지를 고민족식물학적 방법에 의하여 입증, 추구해야 한다.
일본 열도의 콩 재배와 확산
대두의 대형화와 재배의 확산
호쿠리쿠北陸 지방, 츄우부中部 지방, 니시간토우西関東 지방의 대두나 팥의 압흔 크기로 보아, 죠몬 시대 중기에 대형화됨에 따라, 죠몬 시대 전기의 말엽에는 재배가 개시된 것 같다. 그리고, 죠몬 시대 중기 말에는 이들 지역에서 유적 수가 격감하기 때문에, 대두나 팥의 재배가 차차 서일본 쪽으로 확산해 나아가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대두속의 자료는 미야자키현 오우지야마王子山 유적에서 발견된 약 1만3000년 전의 덩굴콩 압흔이다(그림6). 그 다음으로 오래된 대두 압흔은 사가현佐賀県 히가시묘우東名 유적의 예, 약 8000년 전의 압흔이다(그림41-2). 이것도 크기로 보아 아직 야생 단계의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큐슈 지방의 죠몬인들이 야생 덩굴콩을 이용한 것은 매우 빨랐는데, 그뒤 죠몬 시대 후기가 되기까지 재배 크기의 콩류 발견은 없고, 그것들이 재배로 진전한 자취는 없다. 이에 대해 츄우부 지방이나 니시간토우 지역에서는 죠몬 시대 이른 시기부터 덩굴콩 압흔이 발견되어, 그것들이 전기, 중기를 거쳐 대형화해 나아간 것이 입증된다. 이 지역에서는 대규모 정주 마을 유적이 죠몬 시대 중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데, 중기 말부터는 유적 수가 격감해 유적도 소규모가 된다.
이것에 대해 큐슈 지방에서는 팥이나 대두의 압흔 종자나 탄화 종자도 죠몬 시대 후기 초두 무렵부터 미야자키현을 중심으로 한 히가시큐슈 지방에서 출현하기 시작해, 후기 후반부터 만기에 걸쳐 큐슈 안에 퍼지게 된다. 이 확산 단계의 콩 자료의 대부분은 충분히 재배 대두나 팥의 크기를 갖추고 있다.
농경 도구인 돌괭이
종자의 대형화 메커니즘은 인간이 큰 종자를 선택해 밭의 땅속 깊이 심어 작은 종자는 발아할 수 없게 되어, 큰 종자의 유전자만 도태되어 살아남아 간다는 것으로 설명된다. 죠몬인들은 아마 최초는 야생의 대두나 팥을 채집했지만, 머지않아 그 가운데 큰 것을 골라내 흙속에 심어 기르기 시작해, 그와 같은 행위를 1000년 이상 반복함에 의해 종자를 크게 만들어 갔다고 생각된다. 그 근거의 하나로, 농기구라 생각되는 타제 돌괭이가 있다. 츄우부 지방이나 니시간토우 지방에서는 대두와 팥 자료의 증가에 보조를 맞추듯이 죠몬 시대 전기 말엽부터 이 타제 돌괭이가 많이 출시되어, 중기에 정점을 맞이한다. 지금까지는 이들 도구는 참마 등의 뿌리줄기류를 캐는 도구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나는 이들을 콩을 재배할 때 흙을 갈거나 잡초를 제거하거나 하기 위하여 사용한 농기구가 아닐까 생각했다. 죠몬 시대에 이런 석기의 열도 안의 성쇠를 살펴보면, 전기~중기에 걸친 분포의 중심은 츄우부 지방이나 동일본이지만, 후기~만기가 되면 서일본, 그리고 큐슈로 분포의 중심이 이동한다. 이것도 완전히 콩 자료와 똑같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그림8).
죠몬 시대의 경작법으로 자주 거론되는 것으로 화전이 있다. 어떤 화전민의 사례를 거론하며 화전은 따비 하나면 된다고 거칠게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현재 미야자키현 시이바무라椎葉村에서 행해지고 있는 화전에서는 심은 종자에 흙을 덮거나 풀을 뽑거나 하는 데에는 괭이를 사용하고 있다. 무엇을 수확하고 싶은지, 어느 정도 수확량을 많이 하고 싶은지, 그러한 조건의 차이에 따라 사용하는 도구도 달라진다. 콩류의 움직임과 동조하는 돌괭이는 밭을 마련하는 도구이고, 가령 죠몬 시대의 콩류가 화전에서 재배되었더라도 돌괭이가 파종이나 제초용 농기구로 사용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츄우부 고지에서는 죠몬 시대 중기에 마을의 대규모화가 정점을 맞이하고, 후기에는 유적 수가 격감한다. 그 이후 서일본, 특히 큐슈 지방에서는 츄우부 지방 정도의 규모가 아니지만, 후기 전엽 무렵부터 유적 규모가 커지고 수혈 주거지의 수도 증가하며 후기 후반부터 만기 초두에 그 정점을 맞이한다. 이 현상은 앞의 돌괭이의 움직임과 맞추어 보면, 마치 콩 재배 기술을 가진 죠몬인들이 큐슈로 이주해 온 듯하다.
동아시아의 콩 재배 기원
대두, 팥이라는 것은 일본만이 아니라, 물론 중국 대륙, 조선반도에도 그 야생종이 있다. 대두의 야생종인 덩굴콩의 분포를 보면, 남쪽은 카이난섬부터 북쪽은 연해주, 아무르강 유역까지 동아시아에 광범위하게 분포해 있다. 이것은 현대의 야생 대두의 분포 상태로, 선사 시대에 이와 같은 넓은 분포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이 가운데 대두나 팥이 재배되기 시작했던 지역은 어쩌면 세 곳 정도로 좁혀진다. 이들 재배종은 동아시아의 중위도 지대가 그 기원지라고 생각되고, 각각의 지역에서 약간의 시기 차이는 있지만 중국이나 한국에서도 거의 일본과 마찬가지로 신석기 시대 중엽(6000~5000년 전)에 대두나 팥의 재배가 시작되고 있다. 앞에서 기술한 '쿠마다이'라고 부르는 편평한 죠몬 대두에 비해 중국 신석기 시대의 대두는 일본의 덩굴콩과 비슷한 작은 형태를 가지고, 한국의 대두는 타원형 형태를 지녀, 세 지역의 종자 모양이 다르다는 것이 여러 지역에서 재배가 발생했다는 근거가 된다(그림 9). 대두가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재배되었다는 것은 유전자학이나 농학의 연구에서도 증명되고 있다. 다만, 중국이나 한국에서는 고고학 자료로서 신석기 시대의 콩류는 탄화 종자를 중심으로 하며, 그 수도 얼마 되지 않는다. 최근 필자들은 한국 비봉리 유적에서 지금까지의 탄화 팥보다 500년 이상 오래된 팥의 압흔을 발견했다(그림 10). 변형이 뚜렷한 탄화 자료에 비해 형태를 명료하게 비교할 수 있는 토기 압흔 자료는 앞으로 동아시아의 콩 재배 역사를 연구하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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