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벽은 놀라운 취미이다.
아무것도 아닌 물건을 하나의 유물로 만든다.
이건 쌀포대에 찍는 스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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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시히카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시대와 함께 품종의 흥망성쇠가 반복되는 가운데, 탄생부터 60년 이상 지난 지금까지도 도호쿠東北 지방에서 큐슈九州 지방까지 널리 재배되고 있는 보기 드문 품종으로서, 오랜 세월에 걸쳐 '맛있는 쌀'의 대명사가 되어 왔다. 고시히카리란 도대체 누구인가? 고시히카리는 왜 인기가 있는가? 벼에 대해 잘 아는 농학자 사토 요우이치로佐藤洋一郎 씨에게 들었다.
고시히카리가 태어난 건 지금으로부터 60년 이상 전인 1956년. 당시 후쿠이福井 현립농사시험장県立農事試験場에서 개발되었다.
뜻밖에도 탄생 직후에는 재배가 확산되지 않았는데, 1979년 쌀 재배면적 1위로 올라서서는 40년 가까이 그 자리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쌀의 재배에는 지역에 따라 적합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있지만, 도호쿠 지방부터 큐슈 지방까지 널리 재배되고 있는 품종은 현재 고시히카리 말고는 없다. 최근에는 해외에도 그 이름이 알려져, 이제는 가장 유명한 일본 쌀이 되었다. 국내외에서 '맛있는 쌀'이란 이미지가 강하다. 말하자면, 쌀의 슈퍼스타 같은 존재이다.
게다가 고시히카리는 쌀 업계의 역사를 바꾼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는 쌀을 살 때 '고시히카리'나 '히토메보레ひとめぼれ'나 '아키타 코마치あきたこまち' 등의 '품종명'을 따지는데, 이러한 정보를 알 수 있게 된 것은 고시히카리가 계기가 되었다고 사토 요우이치로 씨는 이야기한다.
사토 요우이치로 씨. 교토부립대학 일본 식문화 연구센터 특임교수, 종합지구환경연구소 명예교수. 교토대학 대학원 농학연구과 수료. 국립 유전학 연구소 연구원, 시즈오카대학 농학부 조교수, 종합지구환경학 연구소 교수 및 부소장. 대학 공동이용기관 법인 인간문화연구기구 이사를 거쳐 현직. 전문은 식물유전학. 30년 이상에 걸쳐 아시아 각지를 현지조사하고, 벼의 기원을 찾아 왔다.
"소비자가 '품종명'을 알게 된 것은 1995년 식량관리법이 폐지되고 식량법이 제정되어 자주유통미自主流通米(※1)가 출현한 일이 시작이다. 그때까지 소비자는 '일등 쌀' '이등 쌀'이란 등급과 '하리마(播磨) 쌀' '오우미(近江) 쌀' '이세(伊勢) 쌀' 같은 산지의 정보만 알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니이가타현新潟県이 '고시히카리'의이름을 전면에 내걸고 판매를 시작하면서부터 품종명의 정보가 제공되었다." (사토 씨) 품종은 농민만이 아는 '벼의 품종'에서 소비자도 아는 '쌀의 품종'으로 자리매김이 변하였다.
※1 정부를 통하지 않고 집하업자와 판매업자 등을 통하여 유통되는 쌀
게다가 고시히카리는 '많이 생산되는 쌀'에서 '맛있는 쌀'로 사람들의 가치관과 수요를 바꾸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이후부터 국가 전략으로 한 알이라도 많은 쌀을 취급하려는 시대가 계속되었지만, 1960년대에 쌀의 생산성은 포화상태에 도달했다. 아무리 기술혁신을 하려 하고, 품종개량을 하려 하고, 비료를 많이 쓰려 했지만 수확량은 별로 늘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양'에서 '질'로 최초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 니이가타현이었다. 맛있는 쌀을 만들려고 생각한 것이다." (사토 씨)
'양'에서 '질'로 쌀의 역사를 바꾼 고시히카리
자주유통미가 된 쌀의 가격을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게 되어, '수확량=수입'이 사라졌다. 예를 들어, 20% 비싸게팔면 수확량이 10% 줄어도 벼 농민의 수입은 약 10% 증가한다. 또 고시히카리는 도열병에 걸리기 쉬웠기 때문에, 병을 막기 위하여 질소비료를 즐이니 맛이 좋아졌다. 각 현의 시험장이 극진하게 고시히카리의 재배 지도를 다는 일도 전국으로 확대되는 데에 뒷받침이 되었고, 정미 수율이 좋았던 점 때문에 쌀가게도 좋아했다. 게다가 고도경제성장에 의하여 소비자가 쌀에 대하여 양보다 질을 추구하게 되는 등 시대와도 잘 맞았다.
고시히카리는 농민, 쌀가게, 소비자에 의하여 "세 방면이 좋아하는" 쌀로 환영을 받았다.
2018년 산지 품종 목록을 보면, 홋카이도北海道와 도쿄도東京都와 오키나와현沖縄県을 제외한 총 44부현府県에서 재배되고 있는 고시히카리. 그러나 고시히카리가 퍼지기 전에는 "오사카大阪 시장에 반입되는 쌀은 대립이고 미질이 단단하며, 도쿄 시장에 반입되는 쌀은 소립이고 미질이 부드럽다"(사토 씨)라는 식으로 동일본과 서일본에서 쌀의 선호가 달랐다고 한다.
그럼 왜 고시히카리의 맛은 동일본에서도, 서일본에서도 받아들여진 것일까?
고시히카리는 농림農林 1호'와 '농림 22호'를 교배시켜 탄생했다.
'농림 2호'는 동일본에서 맛있는 쌀로 퍼졌던 리쿠陸羽 132호와 카메노오亀ノ尾 같은 계통의 품종. 그리고 '농림 22호'는 서일본에서 맛있는 쌀로 퍼졌던 '아사히旭' 계통의 품종이다.
위 사진의 출처 http://www.ken-ohashi.jp/contents/2b/dagakki/2008/132.html
그때까지 동과 서의 품종을 교배시킨 예는 별로 없었는데, "동쪽의 천하장사" 계통과 "서쪽의 천하장사" 계통이 교배된 고시히카리의 탄생은 일본인의 쌀 선호에 변화를 가져왔다.
고시히카리의 아버지 농림 1호. (이시카와현石川県 하쿠이시羽咋市의 코시다 히데토시・나오코奈央子 씨 부부가 재배)
"일본 전국 거의 어디서나 농사지을 수 있는 '전 일본'이 태어나, 동쪽에서 먹고 익숙한 맛과 서쪽에서 먹고 익숙한 맛이 합체함으로써 양자에서 받아들여지는 맛이 탄생했다. 그래서 고시히카리가 퍼졌다고 생각한다."고 사토 씨는 이야기한다.
그렇게 말하더라도, 고시히카리가 탄생한 뒤 재배면적 1위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23년의 세월이 걸렸다. 사토 씨에 의하면, 당초는 고시히카리의 평가가 간사이関西를 중심으로 높고 간토우関東에서는 고시히카리보다 '사사니시키ササニシキ'가 인기였다.
그런데 여기에도 또 니이가타현의 움직임이 영향을 주었다.
'깨끗한 물과 비옥한 대지에서 재배된 니이가타 고시히카리' '밤낮의 일교차가 크기에 맛있게 자란 우오누마魚沼 고시히카리' 이라는 이미지 전략에 의하여 간토우에도 고시히카리가 퍼져 나갔다. 그리고 재차 타격을 주듯이, 1993년 헤이세이平成의 대냉해로 인해 사사니시키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어 "고시히카리 일족"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동서에서 선호하는 고시히카리의 탄생을 계기로, 일본인의 쌀에 대한 미각은 균일화되는 길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고시히카리 논
고시히카리 탄생 후에는 고시히카리를 기반으로 품종개량이 반복되어 현재는 전국에서 재배되는 품종의 80%가 고시히카리계 품종(고시히카리를 편부모로 하는 근연 품종)이란 '고시히카리 최강 시대". '농림 100호'란 농림 번호(※2)로 1956년에 고시히카리가 탄생하고나서 2015년 시점에서 논벼의 농림번호는 '농림 474호'까지 나왔다(농림수산기술회의 <2016년 농림번호 부여 품종>).
"약 60년 동안에 국가에서 만든 품종만도 300계통 이상이고, 각 도도부현에서 만들고 있는 품종은 더 많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특정 품종만 시장에 남아 있다. 각 농업시험장의 육종가들 입장에선 '좋은 걸 만들어도 고시히카리를 이길 수 없다'는 불행한 상황이다"라고 사토 씨는 말한다. 판매하는 측에서도 구매하는 측에서도 '고시히카리의 피를 이어받았으니 맛있다'는 풍조가 있어, '육종은 마케팅을 이길 수 없는 것이다'라고도 한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맛있다'고 느끼는 품종도 있을지 모르지만, 고시히카리 일변도의 상황으로 잃어버리고 있는 것도큰일이다.
사토 씨는 고시히카리가 이렇게까지 확산됨에 따라 "확실히 다양성이 사라졌다"고 지적한다. 다음회 나만의 벼 품종을 만들자에서는 다양성이 사라짐에 따라 생기는 문제와, 다양성을 창출하기 위한 이야기를 살펴본다.
※2 농림성 소속의 연구기관과 각 현에 산재해 있는 국가 지정 시험지에서 육성된 농작물 품종에 붙여진 등록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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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고시히카리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전회는 전국에서 재배되고 있는 품종의 80%가 고시히카리계 품종(고시히카리를 편부모로 하는 근연 품종)이라는 "고시히카리 최강 시대"가 된 경위를 농학자인 사토 요우이치로佐藤洋一郎 씨에게 들었다. 한편, 사토 씨는 고시히카리 일변도의 상황에 의해 잃어버린 '쌀의 다양성'이 중요함을 지적하고 있다.
쌀의 다양성이 사라진 이유로, 사토 씨는 '군사물자로 쌀의 품질을 통일시키려는 국가정책을 취한 점' '특히 소화시대 이후에 다수확을 목적으로 키가 작은 특정 품종만 품종개량에 사용한 점'을 들지만, 역시 엄청난 충격이었던 것은 '고시히카리의 등장'이었다고 지적한다.
현재 산지 품종 내역※을 보면, 멥쌀, 찹쌀, 술쌀을 합계하여 약 480품종(2018년, 농림수산성 <농산물 규격규정>을 바탕으로 산출). 이 가운데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고 있는 멥쌀은 재배 비율 상위 20품종이 84.1%를 차지하고있다(2017년산, 미곡 안정공급확보 지원기구 공표).
※일정한 산지(도도부현 단위)에서 생산된 품종이 다른 산지에서 생산된 동일한 품종과의 사이에서 일정한 품질차를 나타내기 때문에, 농산물의 거래 등에서 해당 산지와 품종을 농산물 검사로 특정할 필요가 있음. 1년 1회, 도도부현마다 내역 설정의 신청이나 폐지 등의 의견을 청취하는 장이 설정되고, 학식 경험자, 생산단체, 실수요단체, 행정관계자에 의한 협의를 통해 농림수산성 국장에게 전달. 내역의 설정 등을 행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된 경우, 농림수산부 장관이 행하는 농산물 규격규정의 개정 절차가 진행됨.
각 현에는 여러 가지 대표 품종이 있지만, 전체 비율에서 보면 재배면적은 적다(Panasonic'쌀 이야기 박물관OKOME STORY MUSEUM'의 전시에서)
한편, "메이지 시대는 4000가지 품종이 있었다. 이명 동종, 동명 이종이라 생각되는 것을 정리하더라도 600종이 남아 있는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고 사토 씨가 말한다. "메이지 시대에 여러 가지 품종이 보전된 것은 사람들이품종을 식별하여 목적에 따라 구별하여 쓰거나, 지역 사이의 교류가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시히카리의 등장 이후, 전국에서 비슷한 품종이 나왔기 때문에 현재는 다른 품종을 식별할 힘이 사라지고 있다"고 우려한다.
에도 시대에 농사지었다고 보이는 품종 '愛亀'. 역주; 이 품종은 일제강점기 조선반도에도 도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린 붉은 물감과 초록 물감만 가지고 있다. 섞으면 자주색이 된다. 다양한 자주색이 되겠지만, 결국은 자주색이란 점에는 변함이 없다. 아무것도 늘어나지 않으며, 아무것도 줄어들지 않는다. 그것이 최근의 품종개량이다. 어떻게 기호라는 게 균일화되는 것인가 한다."
에도 시대에 카가번의 헌상미였다고 이야기되는 품종 '킨챠쿠巾着'
한때 '가짜 고시히카리'의 유통이 문제가 되었다. "유통되고 있는 고시히카리 가운데 30%가 가짜일 때조차 우린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었다. 품종의 차이가 적어지고 있는 것도 있지만, 다른 품종이 들어 있는지 간파하지 못하니, 즉 맛의 차이를 모르면서 비싼 고시히카리를 구매하는 데에도 한 원인이 있다. 가짜 고시히카리 문제는 유전적 다양성이 줄어들면서 쌀의 맛이란 문화의 다양성을 잃어버리며 발생한 비극이었다." (사토 씨)
다양성이 적다는 건 어떤 문제로 이어질까?
사토 씨는 "품종의 다양성을 없애는 건 문화의 다양성을 없애는 것"이라 딱 잘라 이야기한다. "어느 지역이라도 각각의 식문화가 있고, 그에 따른 품종이 있었을 것이다. 식문화의 배경에는 잔치 음식도 있었다. 예를 들어 어떤잔치 음식이라도 특정 품종으로 대체되어 버린다면, 그 쌀의 특징을 살린 식문화는 사라져 버린다. 잔치가 사라지면 그때 사용된 품종도 사라져 버린다. 문화의 다양성이 품종의 다양성을 유지하고, 품종의 다양성이 문화의 다양성을 유지하고 있다. 하나의 다양성이 여위어 버리면, 다른 한편의 다양성도 여위어 버린다."
실제로, 짚 세공용 벼 품종도 짚을 쓰는 문화가 사라져서 소멸되어 버렸다. 현재의 산지 품종 내역을 보면, 우리가 평소 먹고 있는 멥쌀은 약 290품종, 찹쌀은 약 70품종, 술쌀은 약 120품종이다(2018년 농림수산성 <농산물규격규정>을 바탕으로 산출). 밥을 먹고, 잔치 음식으로 떡을 만들고, 일본술을 마신다. "적어도 경사스런 날만이라도 품종을 구별해 쓰면 어떨까요?"라고 사토 씨는 말한다. 우리의 "경사스런 날"과 "잔치"의 밥상이 문화와 품종을 유지해 나아갈 것이다.
이시카와현石川県 하쿠이시羽咋市의 코시다 히데토시越田秀俊 씨와 나오코奈央子 씨 부부가 재배한 '은방주銀坊主'라는 멥쌀 품종. 역주; 은방주는 일제강점기 조선반도에도 도입되어 현재까지 남아 있는 품종이다.
사토 씨는 <고시히카리보다 맛있는 쌀>(朝日新書)이란 저서가 있다. 이 제목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일까?'고시히카리보다 맛있는 쌀은 있다?' '고시히카리보다 맛있는 쌀을 찾자?' 그 진의를 묻자, "생산자만이 아니라 소비자도 맛있는 쌀을 스스로 만든다는 것이다'라고 사토 씨가 답한다.
그러면, 소비자가 '고시히카리보다 맛있는 쌀을 만든다'는 건 어떤 뜻일까?
사토 씨가 제안하는 건 '나의 품종'을 만드는 일. '나의 품종이란, 소비자와 생산자가 손을 맞잡고 만드는 품종이다. 맛있는 쌀을 만드는 책임은 생산자만이 아니라 소비자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이다. 서로 어떤 품종을 만들고 싶다고 대화하고, 자신들이 직접 인공교배하고 선발을 한다. 소비자는 모내기와 제초, 벼베기 등 1년에 몇 번은 농작업을 도우러 가고, 생산된 쌀은 구매한다. 그 토지에서 농사지은 쌀은 확실히 그 땅에 적응하고 있다. 다양한품종을 만드는 일을 통해 그 토지의 유전적 다양성이 높아지고, 예를 들어 냉해 등의 재해가 있어도 전멸이란 최악의 사태를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자가채종을 반복하는 것으로 종묘법에 규정된 '품종'에서는 사라져 가겠지만, 이해하는 소비자와 함께 품종을 만들어 먹는 분량만큼은 문제가 없다는 것이 사토 씨의 생각이다.
수확한 벼는 씨앗이 된다
장애물이 높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품종개량은 그다지 새로운 기술은 아니다"라고 사토 씨는 이야기한다. "에도 시대부터 메이지 초기 무렵의 품종은 개인의 노력에 의하여 탄생하고, 농민들이 품질을 유지해 왔다. 품종의 관리를 민간에 맡기는 일은 전혀 새삼스럽지 않다."
2018년 4월, 장려품종에 대해 규정된 <주요 농작물 종자법>이 폐지되었다. 현재는 도도부현이 독자적으로 장려품종을 계속 다루고 있지만, 만약 앞으로 장려품종이 사라진다면 식량관리법 시대처럼 '니이가타 쌀(新潟米)' '후쿠시마 쌀(福島米)' '일등 쌀(一等米)' '이등 쌀(二等米)' 같은 산지나 등급의 정보만 얻을 수 있게 되어 버리겠다는 우려도 든다.
그러나 사토 씨는 "다양성에게는 하나의 기회"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자신의 품종을 스스로 만든다면, 지적재산권도 경제적 소유권도 자신의 것. 거대한 농생명 기업에 얽매이지 않는다. 지금 시대는 옛날에 비하여 많은 사람들이 여러 지식을 가지고 있다. 지식을 총동원해 나의 품종이 지닌 형질을 제대로 제어할 수 있다면, 다양하지만 잡박하지 않은 품종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토 씨가 "문화적 다양성은 생물다양성을 담보한다"고 강조하듯이, 사람들이 단일 품종을 먹고 있다면 단일 품종만 재배되어 버린다. 그러나 다양한 쌀을 맛봄으로써 다양한 품종의 재배가 퍼져 나갈 것이다. 쌀 품종의 다양함은 문화의 다양성과 동일하다.
나의 품종을 만들어 메이지 시대 같은 품종의 다양함이 현대에 소생되면 일본의 밥상은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벼 오타쿠에게 듣다!『나의 품종』 만드는 법」에서도 소개했듯이, 농민이 육종가가 되는 시대가 오고 있는지도모른다.
https://agri.mynavi.jp/2019_01_22_56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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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노오亀の尾라는 일본의 토종 벼.
이 벼는 일본의 개인 육종가인 아베 카메지阿部亀治가 육종한 품종이다.
당시 일본만이 아니라 조선과 타이완에서도 널리 재배되었다.
나는 이름만 보고는 거북이 꼬리를 닮아서 그런 이름인가 했더니, 개인 이름에서 따온 품종명이었나 보다.
검색하니 이 쌀을 이용해 주조한 일본 전통주가 많이 보인다.
토종 벼를 살려서 전통주를 담근다. 역시 일본답다.
한국도 토종 벼를 살려 이런 시도를 많이 하면 좋겠다.
아예 양조회사에서 술을 담그기 위해 토종 벼를 재배하는 논도 꽤 많은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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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농약, 무화학비료 쌀농사에 몰두하는 도쿠시마현徳島県 아난시阿南市의 무라카미 히로카즈村上弘和 씨.
자연환경과 인체에 큰 영향을 미칠 우려 때문에 세계적으로 사용금지와 규제강화가 진행되는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 일본에서는 해충 구제에 꼭 필요하다는 이유로 지금도 전국의 논밭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지역의 농가와 소비자, NPO 등과 협력하여 과감하게 '탈 네오니코티노이드'에 몰두하여, 성과를 올리고 있는 농협이 있다. 현지를 방문했다.
"쌀농사는 즐거워요. 그 덕에 충실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모내기가 막 끝난 논에서 검게 그을린 얼굴에 미소를 띠며 반겨준 건 기이紀伊 수도水道에 면한 도쿠시마현 아난시에서 농업을 경영하는 무라카미 히로카즈 씨(66)이다.
시스템 엔지니어였던 무라카미 씨가 회사를 정년퇴직하고 고향의 쌀농사를 계승한 건 6년 전. 소유한 4500평의 논 가운데 1/3은 농약도 화학비료도 일체 사용하지 않는 논. 다른 1/3은 화학비료의 사용량을 반 이하로 줄이고, 농약은 제초제만 1번 사용하는'특별재배 쌀'을 농사짓는 논이다.
무라카미 씨는 예전부터 유기농업에 관심이 있어, 쌀농사를 시작하는 동시에 농약과 화학비료를 줄이는 노력을 시작했다. 성과는 예상 이상으로 "수확량도 늘고, 맛에 관해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들뜬 목소리를 낸다.
논의 위치가 흩어져 있는 것도 있고, 농약과 화학비료의 절감은 단게적이지만, "언젠가는 모든 논에서 무농약·무화학비료의 맛있는 쌀을 만들고 싶다"고 포부를 밝힌다.
그런 무라카미 씨의 강력한 응원군이 아난시와 고마쓰시마시 등 두 시와 두 마치에 걸친 '동 도쿠시마 농업협동조합(JA동도쿠시마)'이다.
JA동도쿠시마는 정조합원 수가 약 8천 명인 얼핏 보면 아주 평범한 농협인데, 다른 농협과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지역의 농가와 NPO, 생협 등과 협력하여 농약과 화학비료를 가능하면 쓰지 않는 농업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있다는 점이다.
농협에서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생산자재라고 부르고, 생산자재를 업체에서 매입해 농가에 판매하는 일이 중요한 수익원이 된다. 농림수산성에 의하면, 농가가 구입하는 농약의 약 60%는 농협에서 나온다. 생산자재의 취급량을 줄이는 일은 농협의 수익에 직접 영향을 주는 만큼 어느 농협이라도 신중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JA동도쿠시마는 10년 전쯤부터 농약과 화학비료를 최대한 사용하지 않는 쌀농사를 과감하게 추진해 왔다. 그 중심 인물이 현재 JA동도쿠시마 카노坂野 출장소의 고문을 맡고 있는, 동료들에게 '농협계의 이단아'라고도 불리는 니시다 타카시西田聖 씨(60)이다.
JA동도쿠시마의 니시다 타카시 씨.
자신도 쌀농가인 니시다 씨는 어느 날, 젊은 시절에는 논에 가득했던 백로의 모습이 어느새 거의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야생 조류가 사라졌다는 건 우렁이 등 먹이가 되는 논의 생물이 줄어들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당시는 농작업의 간소화와 작물의 수확량 증가를 목적으로 농약이 당연히 사용되던 시대. "자연환경의 변화는 농약이 원인임에 틀림없다." 니시다 씨는 그렇게 직감했다고 한다.
그동안 쌀농가의 경영은 외국산 쌀에 대한 시장개방과 소비자의 쌀 이탈 등으로 급속히 악화. "이대로는 쌀농가가 생활할 수 없다"고 위기감을 느낀 니시다 씨의 머리에 떠오른 것이 잃어버린 자연환경의 회복과 쌀의 고부가가치화를 동시에 실현할 수 있는 무농약·무화학비료 쌀농사였다. 지금의 말로는 '지속가능한 농업'이다.
니시다 씨는 우선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고 작물을 기르는 유기농업의 이론을 공부하고, 스스로 유기농업에 가까운 쌀농사를 실천. 이론을 실증한 바, 농협 안에 '특별재배 쌀 위원회'를 설립하고 동료 쌀농가에게 참여를 호소했다.
무농약을 추진하기로 결정했을 때 '가장 먼저 배제한' 농약이 네오니코티노이드계 살충제였다. 당시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이 원인으로 의심되는 농업의 피해가 잇따라 보고되기 시작했던 것이 이유였다.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은 1990년대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비교적 새로운 유형의 살충제로, 현재 세계에서 사용되는 살충제의 주력을 차지한다. 그러나 식물의 수분에 필수인 꿀벌의 군집붕괴와 떼죽음, 다양한 야생생물의 감소에 원인이 된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아이의 발달장애와도 관련성이 있다고 지적하는 전문가도 있다. 그 때문에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의 사용중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다.
네오니코티노이드 퇴출 운동도 확산되고 있다. 유럽연합은 4월,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 가운데 클로로아닐린, 이미다클로프리드,티아메톡삼이란 주요 세 종류의 사용을 거의 전면적으로 금지하기로 결정. 미국과 캐나다. 브라질, 한국, 대만 등도 사용금지와 규제강화를 단행하고 있다.
한편 원래 농약 사용량이 많은 일본에서는 네오니코티노이드 농약도 다른 농약과 마찬가지로 전국의 논밭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현실이다. 저농약을 강조한 특별재비 쌀에서도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을 사용하고 있는 게 적지 않다.
니시타 씨가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기 위한 노력을 시작한 때는 농협 안에서 신중한 목소리도 많았다. 농약과 화학비료의 사용을 줄이면 그만큼 생산자재의 매출도 줄어들기 때문이다. 농가에서도 수확량이 줄어들까 하는 걱정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해 보면, 살충제의 사용을 중지해도 큰 문제는 일어나지 않고, 호학비료를 줄이는 대신 닭똥과 지렁이의 똥으로 만든유기비료를 늘리면 벼가 튼튼해져 오히려 수확량도 증가. 맛도 분명히 좋아졌다.
처음에는 관망하던 농가도 성공 사례를 보고 잇따라 참여를 결정해, 몇 명으로 시작한 특별재배 쌀 위원회는 현재 약 150명으로 늘어났다. 또 JA동도쿠시마가 취급하는 유기비료는 평판이 다른 지역 농가의 귀에도 들어가 화학비료 매출의 감소분을 보완해 거스름돈이 올 정도로 매출이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니시다 씨는 "우선은 참여 농가를 늘리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쌀농사의 가장 중노동인 제초작업은 아직 제초제에 의지하고 있지만, 유기비료를 늘리면 토양이 개선되어 잡초가 자라기 어려워졌다. 이대로 계속하면 몇 년 뒤에는 아마 제초제도 필요없어질 것이다"라고 완전 무농약에 자신을 보였다. 실제로 무라카미 씨처럼 한 발 앞서 완전 무농약을 달성한 농가도 있다.
쿱Coop 자연파自然派의 '꿀벌을 지키는 산지직송 쌀'
JA동도쿠시마의 네오니코티노이드 퇴출 노력이 성공하고 있는 건 지역의 생협과 NPO의 협력도 크다.
간사이와 시코쿠에서 사업을 전개하는 생활협동조합연합회 쿱Coop 자연파 사업연합(쿱 자연파)는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이 문제시되기 시작한 약 10년 전부터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도쿠시마의 쌀을 취급하기 시작했다. '꿀벌을 지키는 산지직송 쌀' '두루미를 부르는 쌀' 등의 이름으로 판매하고 있다.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을 쓰지 않고 농사짓는 쌀은 바구미가 노린재가 갉은 흔적이 검게 남은 '반점 쌀'이 생기기 쉽다. 반점 쌀은 안전성과 맛에는 문제가 없지만, 볼품이 없기 때문에 거래 가격이 싸진다. 또 기온이 올라가면 보관하던 쌀에 바구미가 꼬이기도한다. 쿱 자연파의 자회사 쌀 사업을 담당하는 쿱 유기의 사에키 마사아키佐伯昌昭 전무는 "네오니코티노이드계 농약을 쓴 쌀에 벌레가 나지 않는 건 수확한 뒤에도 쌀에 농약 성분이 잔류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반점 쌀과 보관의 위험을 없애고자 쿱 자연파는 3년 전 쌀을 저온에서 연중 보관할 수 있는 창고를 도쿠시마 시내에 건립하는 동시에, 반점미를 자동으로 골라낼 수 있는 광학식 선별기를 구입했다.
특별재배 쌀과 무농약·무화학비료의 쌀은 농가에서 매입하는 가격이 높기 때문에 소매가도 비싼 경향이 있다. 하지만 농가에게서 터무니 없이 헐값에 사들이면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운동은 확산되지 않는다. 그래서 쿱 자연파는 중간유통업자를 끼우지 않고 직접, 조합원에게 판매하여 판매가격을 슈퍼에서 판매되는 쌀 수준 또는 그 이하로 억제했다. '안전하고 맛있고 저렴한 쌀'이 소비자의 요구에 부합하는지, 쿱 자연파의 회원수는 매년 10%의 비율로 늘어나고 있단다.
JA동도쿠시마의 몇몇 지역에서는 2012년 이후 해마다 유기농업의 관계자와 소비자들이 교류하는 '유기농업 에코 축제'를 열고 있다.
매년 규모가 확대되어 현재는 도쿠시마 시내에서 개최. 실행위원회에는 JA동도쿠시마, 쿱 자연파, NPO법인 도쿠시마 유기농업 지원센터 등이 이름을 올리고, JA동도쿠시마의 아라이 요시유키荒井義之 조합장이 실행위원회 회장을 맡고 있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부정하는 유기농업의 행사 상위에 농약과 화학비료를 판매하는 농협의 조합장이 취임한 건 이례적이다.
그 아라이 회장은 올해 유기농업 에코 축제의 책자에서 JA동도쿠시마의 노력이 지닌 의의를 이렇게 강조한다.
"JA의 조합장이란 입장인 제가 유기농업의 깃발을 흔드는 데에 의문을 품은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JA그룹의 가장 큰 목적은 농업인의 소득증대, 농업생산의 확대, 그리고 지역의 활성화이며, 저는 이들의 실현에는 유기농업의 실천이 최적이라 확신하고 있습니다."
출처 https://news.yahoo.co.jp/byline/inosehijiri/20180514-00085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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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2
서장
벼농사 문화가 나아갈 바 사토 요이치로佐藤洋一郞
시작하며
일본인의 쌀 소비량은 2008년 현재 연간 약 60kg 정도이다. 하루 소비량으로 환산하면 160g 남짓이다. 예전의 도량형으로 말하면 이는 딱 한 홉에 해당한다. 1965년의 수치는 114kg이었기에, 이 45년 정도 사이에 소비량은반감한 셈이다. 총생산량도 1970년대 중반 무렵까지 연간 1200만 톤을 넘었지만, 2000년을 넘어서부터 900만톤 이하가 되었다. 논의 면적도 1970년대 초반 300만 헥타르를 넘었는데, 지금은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벼를 재배하지 않는 토지 가운데 다른 작물로 전환한 토지도 있다면, 농업 그것을 그만둔 곳도 많다. 경작방기지가 경작면적의 20%를 넘은 현도 있다. 일본인은 이대로 쌀을 먹지 않게 될 것인가? 일본에서 논은 사라질 것인가?
이 물음에 '과학적으로' 답을 내는 건 어렵다. 그러나 나는 일본인은 쌀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일본에서 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를 아래에 서술하려 한다.
쌀과 목숨을 둘러싸고 -생태학적으로 본 쌀의 위치
인류를 포함한 동물의 대부분은 자신의 손으로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를 생산할 수 없다.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는 식물이 만드는 당분이 사용된다. 전분과 지방은 당분의 대체물로 사용된다. 신체를 만드는 단백질에는 동식물의 단백질이 사용된다. 수렵채집 경제에서 이들은 다른 장소에서 획득되었는데,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면 그들의 생산은 점점 한곳에서 이루어졌다. 계절풍 아시아에서 쌀은 저습지에서 재배되었는데, 그 재배 장소에는 쌀(벼) 이외에 물고기와 패류, 곤충 등이 잡혔다. 이른바 '쌀과 물고기'의 한묶음이다(佐藤 편집 2008). 마찬가지로 유라시아 서쪽에서는 '맥류(또는 감자)와 젖(또는 고기)'라는 한묶음이 있었다. 그 무대가 되는 곳은 말할 것도 없이 '삼포식 농업'이라 부르는, 여름 작물+겨울 작물과 가축을 활용하는 형식이다. 현대 인도에서는 육식을 금기하는 사람들에 의해 콩과작물+벼과작물이란 한묶음도 있다(佐藤, 이 시리즈 제1권).
쌀과 물고기의 한묶음은 근현대 일본 열도에서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 대강은 아마 이 책의 우네 유타카宇根豊씨와 후지이 신지藤井伸二 씨의 논고에서 그리고 있다. 우네 씨도 후지이 씨도 '물고기'에는 직접 언급하고는 있지 않지만, 그 마음은 논의 다양한 존재에 있다. '논 학교'라는 NPO를 운영하고 있는 우네 씨는 벼농사의 실천가의 입장에서 논에 사는 생물들을 보아 왔다. 우네 씨 등에 의하면, 300평의 논 안에는 벼가 2000그루 자라고 있는 외에 올챙이가 2만3000마리, 우렁이(둥근논우렁이)가 300마리, 물방개가 50마리, 거미류가 7000마리 정도서식하고 있다. 이들의 숫자는 어림수이지만, 2001년에 우네 씨 등이 전국 조사를 행한 평균치라고 한다.
우네 씨의 추론 같이, 필시 구조 개선 사업 이전의 논 경관에 섞여 있었던 일정하지 않은 모양의 논과 수로에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일부는, 그리고 '쌀과 물고기'의 한묶음 가운데 쌀 이외의 부분으로 사람들의 생명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논이란 장치가 오로지 벼만의 장치가 된 건 틀림없이 고도경제성장기 이후의 불과 50년 정도의 일이라 생각한다. 고도경제성장기, 일본에서는 다량의 인구가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했다. 그러한 것도 있고, 농업의 세계에서도 기계화가 이야기됐다. 좁고, 고도차가 있는 논을 부수고는 대규모 논으로 바꾸어 버리는 작업이 전국적으로 행해졌다. 그것은 분명히 '노동력 절감'을 가져왔지만, 그 대가가 다량의 석유를 소비하여 행하는 농업의 도입이었다.
농업의 생태적 의미
우네 씨의 논고는 이 50년 동안의 이후에 생산성만 강조하는 농업에 대한 농사짓는 쪽에서 예리하게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것은 생산성이야말로 목숨과도 같다고 하는 사회 풍조에서 주목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생산성의 한계, 지구환경문제의 분출 등에 의하여 주목을 받게 된다. 특히 환경문제의 하나로 생물다양성의 의미를 고려할때 그 의미는 더욱더 명확해진다.
생물다양성이 지닌 '생태계 서비스'의 가치 가운데 하나는 먹이사슬의 안정적인 유지에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먹이사슬의 안정적 유지'란 생태계를 구성하는 종의 개체수와 관계성이 환경에 의지하지 않고 너무 많이 변화하는 일 없이 유지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예를 들어 제초제와 살균제 등의 사용으로 '잡초'와 '해충'을 구제하려는 시도는 먹이사슬의 안정적인 유지와는 상반되는 일이 된다.
생태계의 안정성 유지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비료와 물 등의 '물질'을 대량으로 가지고 들어오거나, 또는 가지고나가지 않는 것이다. 즉, '무엇도 더하지 않고, 무엇도 빼지 않는' 것이 생태계의 안정에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을 포함한 선진국의 현대 농업에서는 다량의 자원을 가지고 들어오고 있다. 그것은 물, 비료와 농약부터 온실재배와 농기계용 석유 등을 포함하여 고려하면 방대한 양이 된다. 가지고 나가는 양도 다량이다. 무엇보다 농산물은 생태계 내에서 소비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을 생태계 밖으로 가지고 나간다. 즉, 현대 농업의 본질은 '고투입, 고수익'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농업의 형식은 고작 50년 된 것이고, 또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1960년대의 '녹색혁명' 이후의 일이라 생각한다. 이래서는 '논벼농사'가 가져오는 생태계의 지속성은 기대할 수 없다.
생태계의 유지에 중점을 두는 이러한 의론에 대해 세계의 인구 증가와 식량 공급의 균형을 고려하는 입장에 선 쪽의 비판이 많다. 분명히 저투입형 농업에서는 단위면적당 생산성이 저하된다. 선진국이 선진국의 이유만으로 생산성을 저하시켜 세계의 식량 생산에 부하를 더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개발도상국의 지지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이 하고 있는 일은 다음에 기술하듯이 자국의 토지는 놀리고 가지고 있는 돈으로 위력을 발휘해 세계의 식량을 여기저기 다니며 사 모으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적어도 사용할 수 있는 토지는 유효하게 사용해야 한다. 이 사태를 조금이라도 완화하는 것이 환경에 대한 부하를 줄이는 데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농업 생산과 생산비
농업은 산업 가운데 유일하게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태양광을 사용해 물과 이산화탄소에서 전분이란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기타 산업은 모두 석유와 석탄 등의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또 유한한 자원을 사용하여 물질을 만들어 왔다. 또한 여기에서는 농업이란 말을 넓게 해석하여 임업과 수산업, 축산업을 포함하여쓰기로 한다. 그런데 이제는 그 농업까지 석유를 사용한 소비형 산업으로 전환된 듯하다. 이제 농업은 농약과 화학비료 등 석유 제품이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수산업은 종래 수렵경제의 연장으로 '잡다'에 무게를 두었는데, 요즘 몇 십 년은 기르는 어업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기르는 어업이라 해도 과도하게 집약적인 양식은 협의의 집약농업과 마찬가지로 다량의 에너지를 소비한다. 또 종래부터 자원의 고갈을 불러온다는 비판이 강했던대규모 원양어업도 에너지 소비형 산업으로 전환해 버렸다. 물론 지금 바로 이러한 형식의 농업을 전환할 수는 없지만 농업의 의미를 고려한, 장기적 시각에 입각한 시나리오가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의 교역권이 확장됨에 따라 먹을거리도 장거리를 운송하게 되었다. 교역권의 확대는 원래 그 토지에 없는 자원의 융합과 다른 문화의 교류를 통하여 큰 부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지금처럼 다량의 먹을거리를 몇 천 킬로미터, 몇 만 킬로미터나 운송되면, 그 수송 에너지도 막대해질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캔의 니기리 초밥을 생각해 보자. 일본의 어느 어항 근처의 초밥가게에서 먹었던 '도미의 니기리'와 뉴욕의 '초밥 바'에서 먹은 그것과는 운반에 사용된 에너지는 극단적으로 다르다. 생산에 사용된 에너지는 대부분 똑같다. 전자에서는 현지의 농가에서 생산된 쌀과 근해의 어장에서 잡은 물고기를 사용하기에 수송에 들어간 에너지는 매우 적다. 그런데 후자는 쌀도물고기도 천 킬로미터의 단위를 운송된다. 게다가 물고기는 수송되면서 냉동이 빠질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정량적인 비교는 아직 행해지지 않았지만, '밭에서 위장까지' 가는 사이에 사용된 에너지를 단순히 비교하면 그 차이는 수백 배에 이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초밥의 가격차는 아마 몇 백 배가 안 될 것이다. 그건 전적으로 대량생산, 대량수송의 혜택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 이 대량생산의 은혜를 입어 온 것은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대량생산이 먹을거리의 안정화를 불러온다는 건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환상 같은 것이 아닐 수없다.
생산활동이 환경에 미치는 부하를 수치화한 생태학적 발자국의 발상은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생긴 것이다. 인류가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당분과 단백질의 한 묶음을 어떻게 에너지를 들이지 않고 생산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 인류와 그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할 큰 요소이다. 계절풍 지대에서 '쌀과 물고기' 및 맥류 지대에서 '맥류와 젖' 같은 한 묶음은 생태학적 발자국의 측면에서는 이상적인 농업 생산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대로 옛날로돌아자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먹을거리는 되도록 운송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결정적으로 식량이 충분하지 않은 지역이 있다. 아랍 사회 등이 그렇다. 그러한 지역에서까지 식량을 운송하지 말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막 한가운데에서 지금 당장 농업을 하는 건 에너지 측면에서는 분명하게 손실이 크다. 그러나 그래도 무엇을 얼마나 어디에서 운송할지에 대해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고려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잡초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 계절풍 지대의 농업에서 가장 위협이 되는 건 잡초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근세 이전의 논벼농사에서 휴경의 큰 이유는 잡초가 번성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각지에서 볼 수 있는 화전은 불을 사용하여 밭을 개간하는 농업의 방식인데, 같은 밭은 3년 경작하면 다음 해 이후 몇 년쯤은 휴경한다. 그 이유는 땅심의 저하와 잡초의 피해가 증가하는 데 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휴경은 적어도 고분 시대에는 시작되었다고 생각되며, 그것을 보여주는 상황증거도 몇 가지 알려져 있다. 그 정도까지 잡초의 해는 막대했던 것이다.
근세에 들어서면, 더 많은 노동력이 제초에 쓰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무렵부터 토지의 소유제는 명확해지고, 휴경하거나 새로운 토지를 개척하는 여지도 점점 사라졌다. 사람들은 항상 농지로 쓰게 된 논에 달라붙어 쌀을 재배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근대에 들어서도 똑같았는데, 도시 노동력의 수요가 확대됨에 따라 김을 매는 인구가 줄어들었다. 제초제는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개발되었다.
제초제에 의하여 인류는 잡초를 박멸할 수 있었을까? 후지이藤井 씨의 논고를 보는 한, 그건 단정하기 곤란하다. 왜냐하면 가령 강력한 제초제를 써서 어느 잡초를 제거해도 이번엔 그 약제에 내성을 가진 새로운 잡초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새로운 잡초'가 같은 종에 속하는 다른 유형인 경우도 적지 않다.
도대체 작물과 잡초는 생태학적으로는 매우 '유사한' 관계이다. 일본처럼 비가 많고 식물의 생육이 빠른 장소에서 생태계는 방치하면 천이를 진행해 숲이 되어 간다. 경지는 경작이란 교란에 의하여 천이를 억누르는 장소이고, 또 거름기가 많은 토양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토지에 적응할 수 있는 건 작물과 잡초뿐이다. 둘은 비슷한 생태적 특성을 가지지만, 한쪽은 인간의 비호를 받고 다른 한쪽은 배제되는 정반대의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잡초가 세운 전략은 철저하게 작물의 모습을 본따는 것이었다. 이런 본땀으로 인해 잡초의 방제는 곤란해진다.
또한 잡초라고 인식되는 종은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농학 관계자 안에서는 유명한 일화인데, '밀밭 안의 보리는 잡초'라는 것이다. 그건 혹은 빵밀(일본에서 보통 재배하고 있는 밀은 보통밀임)은 에머 밀이라 부르고 있는 재배종이 당시 그 밭에서 자라고 있던 잡초인 '야생 염소풀(Aegilops tauschii)'과의 사이에서 자연교배를 일으켜서 생겼다. 빵밀이 지닌 유전정보의 적어도 1배분은 잡초에서 기원한다. 더욱이 호밀이라 부르는재배종(검은 빵의 원료 등으로 쓰임)은 원래 밀밭의 잡초였는데, 조건이 나쁜 토지 등에서 재배식물로 진화해 온것이라 할 수 있다(辻本 2009).
반대로 이전 재배종이었던 식물이 잡초로 전환된 사례도 많다. 일본에서도 잡초 벼라고 하여 문제가 된 '붉은쌀(赤米)'은 중세에 도입된 품종이 근대에 들어서 잡초화된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잡초란 인간이 농경이란 행위를 통하여 저절로 산출한 존재이다. 잡초는 강하고 몹시 거친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그 강하고 거칠음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인류는 '녹색혁명' 이후 제초의 결정적인 수단으로 제초제를 개발하여 문자 그대로 '제초 방제'를 얻은 듯하지만,앞에서도 적었듯이 현재 상황에서는 그 시도가 반드시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뿐인가, 제초제를 지나치게 사용하여 물과 토양을 오염시키고, 희소종을 절멸로 몰았다. 즉, 환경을 악화시켰다. 현대 일본의 논벼농사도 기본은 그노선을 답습하고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현재 상황 대로 논벼농사의 행방은 결코 밝다고 할 수 없다.
논벼농사의 우위성
일본 열도의 논벼농사에서는 그래도 아직 다른 작물의 경작에 비하면 우위성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가 연작 장해를 일으키지 않는 점이다. 많은 작물은 같은 토지에서 반복하여 재배하면 '연작 장해' 또는 '그루타기'라 부르는 지장을 발생시킨다. 장해의 구체적인 내용은 작물에 따라 다르지만, 수확이 감소하고 질병에 걸리기 쉬워지는등 몇 가지 공통 사항도 발견된다. 그런데 논벼농사의 경우에는 이 연작 장해가 거의 없다고 알려져 있다. 벼도 밭에서 재배하면 연작 장해가 일어나기에 '논'에서 재배하는 것이 연작 장해를 일으키지 않는 원인이라 생각된다.
논벼농사의 또 한 가지 우위성은 논이 댐으로 기능하는 것이다(富山 1993). 태풍과 장마철의 집중호우 등으로 한번에 많은 비가 내릴 경우, 쏟아진 물을 잠시 머물게 하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논에 통상은 물이 잠겨 있기에 여름에는 논에서 일어나는 기화열이 기온을 떨어뜨리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사실, 논을 건너오는 바람에서 서늘함을 느낀 경험을 가지고 있는 분도 많을 것이다. 몇몇 자치체에서는 휴경논 등에 물을 담아서 기온을 떨어뜨리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고 한다. 다만 논에 물을 담는 것만으로는 기온을 떨어뜨리는 효과는 작다고 생각한다. 기화열의 효과는 그곳에 식물을 심어 놓아야 한층 뚜렷해진다. 그 식물이 호흡한 물을 증산하기 위하여 많은 기화열을 빼앗기 때문이다. 흙을 넣은 양동이에 벼를 심은 것과 아무것도 심지 않은 것을 준비하여 물을 담아, 물이 줄어드는 상태를 날마다 관찰하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벼를 심은 양동이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해 훨씬 일찍 물이 사라져 버린다.
일본인은 쌀을 먹어 왔을까
그런데 일본인은 쌀을 먹어 왔던 것일까? 테라사와 카오루寺澤薫 씨는 야요이 시대의 몇몇 유적에서 출토된 식물 유체를 꼼꼼히 조사해, 도토리 등 자연식생에서 채집한 것이 가장 많았다고 기술한다. 즉, 논벼농사가 보급되었다고 하는 야요이 시대조차 '농경'의 요소보다 '채집'의 요소 쪽이 컸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고대에 들어오면 식문화는 시대의 권력자와 서민 사이에 큰 차이가 나게 된다. 문서 등에 남은 귀족들의 먹을거리는 현대 우리들의 눈에도 상당히 호화로우며, 밥 등 그릇에 수북하게 대접했다. 헤이안 시대의 '왕조 요리'를 재현한 교京 요리 '로쿠세이六盛' 주인 호리바 히로유키堀場弘之 씨에 의하면, 당시 귀족의 공식적인 식사에서 밥은 원통형으로 높여서 대접했다고 한다. 다만 대접한 전부를 한번에 먹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정도의 밥이 나왔다는 건 사실이라 생각한다. 또, 후지와라 도장은 당뇨병이었단 이야기는 당시 귀족들의 미식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나라 시대의 야마토 지방에서는 제호醍醐, 소蘇 등이라 부르는 유제품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5세기의 오사카 평야에서는 밀의 씨앗과 말의 골격이 출토되어서 목축의 존재가 엿보이기도 있다. 그리고 에가미 나미오江上波男(1906-2002)는 '기마민족 도래설'을 전개하여 큰 논쟁을 일으켰는데, 이들 사실은 기마민족도래설의 재래를 방불케 한다.
중세부터 근세에 걸쳐서는 어떨까? 이에 대해서는 키무라 에미木村栄美 씨가 참고가 된다. 키무라는 회화 자료에 표현된 식사의 풍경을 읽고 해석하는 수법으로 중세 사람들의 식생활을 밝히고자 했다. 키무라는 귀족, 승려, 일반 서민 각각에 대하여 그 먹을거리를 해석했는데, 밥은 그 어디에도 등장하는 것 같아 그 한에서는 '밥'이 주식의 지위를 획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밥'이 쌀밥인지, 또는 현미인지 흰쌀인지, 찹쌀인지 멥쌀인지등 상세한 건 분명하지 않다. 회화에 한하지 않고, 문서가 어디까지 정확히 사실을 전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일반 서민'에서도 그것은 당시의 선진지였던 교토 주변의 일반 서민이고, 지방을 포함한 서민의 생활을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지적도 할 수 있다. 다만, 키무라도 말하듯이, 묘사된 세계가 화가의 시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근세의 기근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 점에 대해서 근세에 빈발한 '기근'을 생각해 보고 싶다. 근세의, 특히 동일본에서는 기근이 빈발하여, 테이메이天明 연간을 포함한 몇 십 년 사이에 인구가 격감할 정도의 재해가 되었다. 이 일련의 기근에 대해서는 이 시기의 저온(소빙하기라는 말을 하는 연구자도 있음)에서 원인을 찾는 의론이 많다. 그러나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저온이란 기후변화는 일종의 방아쇠였으며 그것이 원인의 전부는 아니라는 견해도 가질 수 있다. 이미 몇몇 연구자가 고려하고 있듯이, 중세 이전의 동북일본은 근세만큼 벼농사에 특화된 농엽 경영이 진전되지 않았다.
원래 근세 이전 일본 열도의 북쪽에서는 쌀보다 잡곡을 주곡으로 하는 문화가 오래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근세란극단적으로 논하면,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 열도의 정치적 통일에 맞추어서 논벼농사를 인위적 생태계의 중심에 놓고, 쌀을 주곡으로 하며, 쌀을 화폐로 삼고, 벼농사와 쌀 음식에 관한 문화를 정통으로 하는 문화의 시대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 이전의 기층문화가 송두리째 뽑혔을 리는 없다. 지금도 '산나물 캐기' '버섯 따기' 등의관습은 동(북)이 많고 서는 적은 경향이 있지만, 그것도 당시의 자취가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아오모리시 역사민속전시관(2006년 개관) 계고관에 있는 다나카 츄자부로田中忠三郞 씨는 '숲은 시모키타下北의 백화점'이란 말로 이를 표현했다. 즉, 쌀을 재배하지 못한 때에도 숲에 가면 먹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을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벼농사에 지나친 에너지를 주입한 나머지 숲의 관리가 허술해져 '숲의 은혜'를 얻을 수 없게 된 것이 기근의 직접적 원인이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앞으로 증명이 필요하겠지만, 하나의 가설로 기억에 남겨 놓고 싶다.
쌀과 물고기
논이라 하면 현대 일본 열도에 살고 있는 일본인 대부분이 녹색의 융단 같은 광경을 상상한다. 즉, 논이란 현대 일본인에게는 쌀을 농사짓는 장소이다. 그러나 앞의 잡초란 소제목에서도 기술했듯이, 논에서 벼 이외의 식물이 살지 않는 상황은 다량의 에너지를 그곳에 들이부은 결과이다. 우네宇根 씨가 말하듯이, 엄밀하게 말하면 논에는 벼 이외에도 많은 식물이 생식하는 것이 보통이다.
또 -이것도 우네 씨가 말하듯이- 논에는 다양한 동식물이 생식한다. 그리고 그것이 안정된 생태계이다. 그들은 지금은 '잡초'와 '해충' 등 벼의 생산을 저해하는 존재로 취급되는 경향이 강하지만, 역사를 돌이키면 그러한 인식은 완전히 현대적이며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포유류인 인간은 그 생존을 위해 에너지로 전분과 신체를 만들기 위해 단백질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들 논에 있던 생물들은 전분의 공급원으로, 또는 단백질의 공급원으로 이용되어 왔다. 나는 이러한 생산양식을상징적인 의미로 '쌀과 물고기'라고 표현했다(佐藤 2008). 이것은 쌀과 물고기가 한 묶음으로 먹을거리를 떠받쳐 왔다는 것을 말한다. 쌀과 물고기의 한 묶음은 역사적으로 보아도 벼농사 개시 이후의 계절풍 지대에서 널리 인정되는 한 묶음이다. 비슷한 한 묶음은 1권에서 전개한 의론에 쭉 이어서 말하면 '맥류의 풍토'에서는 '맥류(또는 감자)와 젖', 인도 아대륙에서는 '잡곡과 콩' 등으로 모양을 바꾸어 존재한다(佐藤 2008b). 이러한 한 묶음은 그 토지와 그 풍토에 뿌리를 내린, 말하자면 '환경의' 한 묶음이 된다.
현대 일본인의 먹을거리를 여기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약 50년 전의인 1965년의 통계와 비교하면, 쌀의 소비는 최초에 기록되었듯이 110kg대에서 60kg대 전반으로 반감한다. 물고기의 소비라면 14kg이 12kg쯤이 되어 큰 변화가 없다. 한편 유제품을 포함한 축산품의 소비량은 2배 반으로 증가한다. 채소와 과일 등의 소비에도 큰 변화가 있지는 않는다. 이처럼 쌀과 물고기의 한 묶음에 대해서 통계로는 쌀의 감소라는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전 시대에 대해서는 통계자료가 마땅하지 않기에 정확히는 말할 수 없는데, 나의 어린시절이었던 1955년 무렵을 떠올려 보면,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걸 먹었다는 기억이 있다. 대충 꼽아 보아도 논우렁이, 미꾸라지, 물가의 조개류, 벌의 애벌레 등의 동물질과 쑥, 수영, 여러 산나물 등의 식물질 등을 들 수 있다. 나의 기억에는 없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다양한 곤충과 그 유충, 사슴, 토끼, 멧돼지, 오리 등의 동물도 예사로 먹었다. 지금 일본에서 '고기'라 하면 소와 돼지, 닭 세 종류밖에 없지만, 이것이야말로 이상하다고 할 만한지도 모른다.
중근세의 먹을거리에 대해서는 하라다 노부오原田信男 씨의 논고가 상세하다. 그것은 논을 포함한 생태계에 생식하는 동식물이 총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곳에서 틈으로 살짝 볼 수 있는 건 참으로 다양한 식재료의 존재인데, 그것에서도 한층 더 흥미로운 건 이른바 '주식'이었던 전분 공급원에 대해서도 피 등의 잡곡과 토란 등의 덩이뿌리류가 쓰이고 있었던 지역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다는 사실이다(坪井 1979). 이들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도 또 언급한다.
쌀과 마음
이처럼 논의 주인공으로 취급되어 온 것은 쌀뿐이었다. 아니, 쌀은 계속 논의 주인공으로 취급되어 온 것처럼 이야기되어 왔다고 쓰는 편이 정확할지 모른다. 하라다原田(2005)가 말하듯이, 논벼농사 사회에 귀속됨은 고대 이후 일본의 지배층이 일관적으로 취해 온 정책이며, 그러한 정책이 반복하여 채택된 배경에는 생산의 실태로서 논벼농사에만 의지할 수 없는 역사와 다양성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와 생산의 갈등은 중세에도 계속되었다고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1928-2004)는 보고 있다(網野 1997).
그러나 정치와 권력의 예상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무언가'란 대체 무엇일까?벼농사는 그 무대(어떤 장소에서 벼가 재배되고 있는지)의 다양성에 관계 없이 지속적인 생산방법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나도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이야기에 찬성한다. '부분적으로'라고 자른 건 특히 고도성장기 이후의 이른바 '고투입 고수익', 즉 다비다수의 벼농사가 전혀 지속적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본 열도의 광범위함 지역에서 쌀은 계속 생산의 중심이 되어 왔다. 한편, 예를 들면 유럽에서 맥류는 감자 이전에는 '주식'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맥류라도 밀, 보리, 귀리, 호밀 등 다양하다. 같은 밀이라도 보통밀 외에 파스타용 마카로니밀이 있다. 콜럼버스 이후의 유럽에서는 특히 북부를 중심으로 감자가 전분 공급원의 주력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특정 종이 무언가 특별한 곡류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구조는 생기기 어려울것이다.
쌀의 우위성을 '신찬神饌', '의례' 등의 측면에서 본 것이 칸자키 노리타케神崎宣武 씨의 논고이다. 이들은 지금은 경사스런 자리에서조차 잊혀져 버린 존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일본인은 신년의 첫 참배(初詣)는 거르지 않는다. 그리고 떡을 먹고, 도소주屠蘇酒를 마시고 신년을 축하한다. 이러한 정신구조는 -그것이 누군가가 의도하여 만든 것이라 해도- 일본인과 쌀, 벼농사와의 강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일찍이 츠보이 히로후미坪井洋文(1929-1988)가 <덩이뿌리와 일본인(イモと日本人)> 안에서 언급한 '떡 없이 정월'의 민속 사례가 보여주듯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보편적으로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동(북)일본과 서일본은 재배되는 작물과 그 품종, 수반된 동식물, 숲의 식생 등에서 이질적이다(靑葉 1980, 佐藤 2009). 아카사카赤坂(1999)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 '몇 개의 일본'이란 단어를 고안했다. 몇 개의 일본을 기층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일본이 쌀과 벼농사 문화에 수렴했던 과정에서는 각각의 시대에 지배층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유는 다른 데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쌀이 가진 영양가를 들 수 있다. 쌀은 인류에게는 주로 전분의 공급원이지만, 약간의 단백질도 포함한다. 단백질은 20개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지는데, 쌀의 단백질은 이 아미노산의 대부분을 모조리 포함한다. 그래서 가령 동물성 단백질 없이 쌀만 먹어도 기아 상태가 되기 어려워진다. 한편 또 다른 곡류의 왕인 밀은 단백질의 총량은 쌀보다 많은데 아미노산의 균형이 나빠, 그것만 먹으면 언젠가는 기아 상태에 빠진다. 성서에도자주 나오는 '빵과 포도주'의 조합은 빵의 그러한 결점을 포도주가 보완하기 때문이란 설명도 있다.
브랜드 지향과 가짜 고시히카리 소동
쌀을 특별시하는 일본인의 사고 경향은 때로는 삐뚤어진 모습으로 발현하기도 한다. 몇 년 전에 사회 문제가 되었던 가짜 고시히카리 문제도 그 하나이다. 이는 그 뒤 연속하여 일어났던 일련의 '먹을거리 속임'의 발단이 되었던 문제로, '속임'의 본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짜 고시히카리의 상세한 내막은 이 책에 실려 있는 하나모리 쿠니코花森功仁子 씨의 기고문에 양보하려 하고, 이 문제의 저류에 있는 것이 '브랜드 지향'이라고도 할 만한 사고 경향에는 없을까 생각한다.
브랜드 지향의 사고 경향은 다양성의 저하, 특히 품종의 다양성의 상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일본의 벼 품종의 다양성 저하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이전에 기술한 바이지만, 그렇다면 고시히카리 이후 벼의 품종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냐고 하면 그렇지 않다. 고시히카리란 품종의 농림등록번호는 '농림 100호'이다(등록년도는 1956년). 2008년 현재 등록번호는 431번에 이르고 있기에, 나라가 관여한 것만 고시히카리 이후 약 50년 동안 3000을 넘는 품종이 세상에 나온 셈이다. 등록번호를 부여하지 않았던 품종의 예비군은 이보다 훨씬 많다. 그런데도 벼농사 농가도 소비자도 그 존재의 극소수밖에 모른다. 현실에서 재배된 일이 있는 품종, 현재 재배되고 있는 품종도 200가지 정도를 밑돌고 있다.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지는 간단한 작업이 아니지만, 적어도 소비자의 '브랜드 지향'이 관계되어 있는 것은 확실할 것이고, 그 심리를 교묘하게 조종하는 시장의 존재도 또한 눈감아 줄 수 없을 것이다. 기술과 사회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는 어느 사회가 뛰어난 기술력(사람)과 에너지(물질)를 투입하여 새로운 부를 생산하는데 그것을 이용하는 체계가 없다고 모조리 수포로 돌아갈 우려가 있다는 점을 웅변하고 있다. 고시히카리 일변도의 책임은 품종개량의 전문가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기술을 살리지 못했던 사회와 정치의 책임이라고 말해야 한다.
반성하건데, 일본에는 메이지 초기에 400가지를 넘는 품종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현재 재배되고 있는 품종은 200가지 안팎인데, 품종의 수를 다양성의 지표로 삼으면 이 100년 동안에 다양성의 정도는 20분의 1까지 저하된 것이다. 또한 메이지 시대 중반의 품종과 지금 품종의 큰 차이는 품종이란 하나의 집단 안의 다양성에도 있다.품종 안의 다양성이란 개념은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사실 벼의 품종은 어떤 품종도 완전한 클론은 없다. 고시히카리조차 엄밀하게 비교하면 현마다 다른 유전자형을 나타낼 터이다. 그리고 같은 현에서 생산한 고시히카리 안에도 몇 가지 유전자형이 섞어 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다형성은 옛 시대의 품종에서는 훨씬 크고, 같은 품종의 개체를 많이 심어서 비교하면 키와 개화일, 쌀알의 크기 및 모양 등 다양한 성질에서 차이가 발견되었다. 메이지 시기부터 쇼와 초기까지 행한 품종개량의 주요한 방법이었던 '순계분리'법은 재래종 안에서 우수한 성질을 가진 그루를 골라내어 그 종자를 증식하는 원시적인 것인데, 이러한 방법이 유효했을 정도로 당시의 품종은 한 가지 품종 안에 다양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메이지 시기까지 일본 열도에서 벼의 품종이 유전적으로 얼마나 다양한 존재였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벼농사 문화와 일본의 장래
일찍이 야나기다柳田의 시대와는 달리, 일본이 단일민족국가이며 단일한 문화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연구자는 과연 이제 없다(赤坂 1999). 농경 문화만 보아도 일본 열도에 건너온 것은 조선반도를 경유하여 온 것 외에, 북쪽에서 또는 남쪽에서 건너온 문화가 뒤섞인 복합적인 문화를 형성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벼농사 문화는 그러한 문화 복합의 안에서 생성되어 온 문화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佐藤 2009).
그렇게 하면 쌀을 먹음과 벼농사의 문화가 언제부터 일본 열도 전체를 뒤덮듯이 된 것인지는 역사학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앞에서도 적었듯이, 일본인이 상고 시대부터 쌀을 주식으로 먹어 왔다는 사실은 없다. 일본 열도가 그 무렵부터 온통 논으로 덮여 있었다고 하는 것도 또한 아닐 것이다.
다만 그래도 쌀농사와 쌀밥은 -적어도 서일본에서는- 사람들의 동경이었다는 점은 틀림이 없다. 회화 자료에 나타난 쌀밥의 그림이 이야기하는 건 그러한 점일 것이다.
근세에 쌀은 통화의 역할을 짊어질 만큼 중요한 물자로 여겨졌다. '고쿠다카(石高)'라는 일본의 독특한 단어는 그걸 잘 보여주고 있다. 한 섬(약 150kg)은 성인 남자가 1년을 사는 데 필요한 쌀의 양이다. 그것은 또한 무사와 한藩이 몇 명을 먹여살릴 수 있는지를 실제 수량으로 보여주는 잣대이기도 하다. 그것이 경제력을 보여주는 도량형으로 통용된 것이 쌀의 지위를 잘 보여주고 있다.
현 시대에 사는 일본인에게도 쌀은 특수한 존재이다. 고베神戸 아와지淡路 지진의 부흥에 들어갔던 자원봉사 사람들과 지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아침밥으로 모닝빵을 배포받은 쪽은 힘이 나지 않았지만, 주먹밥을 받은 순간 의기가 올랐다고 한다. 역시 쌀에는 무언가 힘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걸 쓰는 게 연구자로서 어떤 말을 들을지 모르지만, '정신의 힘'은 물질만능주의인 현재의 일본인이 돌아볼 만한 것의 하나가 아닐까? 그렇게 표명하고 <유라시아 농경사> 제2권의 서장을 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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