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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도상국 지위 포기와 관련해 농업 관련 각계 각층의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그 목소리 자체가 워낙 소수라 그런가, 이제 대부분의 도시민이 과거와 달리 농촌과 연결된 끈이 거의 없어 그런가 그러한 우려에 귀를 기울이는 도시민, 소비자는 그닥 많지 않다. 오히려 당연한 것 아니냐며 농민들이 억지스런 주장을 한다고 치부하기 일수이다. 

오늘 일본의 이런 홍보물을 보니, 우리에게 필요한 무기는 이런 것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농촌, 농업, 농민과 더 이상 끈이 없어 가벼이 듣기 쉽다면, 그들이 귀 기울여 들을 만한 이야기를 해줄 수 있어야 한다. 개도국 지위 포기로 쌀농사가 망할 것이다, 식량주권을 포기할 것이냐 하는 소리에는 더 싼 값에 쌀을 수입해다 먹으면 뭐 어때서 하겠지만, 논이 가진 이런 소중한 기능과 가치까지 다 포기할 것이냐 하면 그나마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지는 않을까? 나의 지나친 기대이려나?

새로운 시대인 만큼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방향성이 필요하지 않으려나. 2천 년 전에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신의 아들이란 한 사람도,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 했는데. 

"일본의 논은 세계적으로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생태계를 이루어 약 5668종의 야생 생물이 서식한다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논 면적은 1960년대부터 2000년대 사이 약 24%가 감소되었습니다. 남아 있는 논도 농업 현대화에 따라 흙으로 된 수로가 콘크리트로 덮이는 등 심한 환경 변화에 노출되어 왔습니다.

또, 사람이 들여온 외래종의 영향과 밀렵도 일본 고유의 수변 생물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일본 원산 어류의 약 42%가 멸종하거나 멸종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이러한 어류의 대부분이 논이나 그 주변의 수역에서 서식하고 있습니다."


https://www.wwf.or.jp/campaign/small-da_2019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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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마침 근처에 황새 복원센터가 있어 잠시 들렀다.


조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지 큰 나무가 별로 없어서 뙤약볕에 휘청했다. 

그래도 날씨는 좋네.





건물 안에는 황새에 대해 간략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다.


전 세계 곳곳에 황새의 친척들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일단 기본적으로 습지가 있는 곳이라면 황새가 살 수 있나 보다.




논도 하나의 습지이기에 황새들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 가운데 하나이겠다. 물론 과거 농약과 비료가 과다하게 사용되지 않고, 농수로와 둠벙이 살아 있던 조건이었다면 더욱 좋았겠다. 


왜 벼농사의 사람들은 황새를 길조로 여겼을까? 제비와 같은 존재였던 것일까?





황새는 서해 쪽 여기저기에서 활동하지만, 번식은 특정 지역에서만 했다는 걸 볼 수 있다. 주로 경기-충청 접경지와 황해도, 그리고 함경도의 동해 쪽이다. 왜일까? 궁금하다. 언제 연구자를 만나면 묻고 싶다. 





황새의 비행 원리를 설명해주고 있다. 낮에 햇빛에 뜨거워진 기류가 상승하면 그걸 타고 하늘로 날아오른다고 한다. 그리고 바람을 타고 멀리 가는 것이다. 그 큰 덩치를 온전히 날개의 힘만으로 날아가려면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될 테니 바람을 이용하는 것이겠지?





황새의 생활주기는 아래와 같다. 모내기가 끝나고 벼가 자랄 무렵에 새끼를 키우는 걸 알 수 있다. 그래 벼농사의주기와 황새의 번식 주기가 묘하게 일치한다. 





황새는 철새이다. 예전엔 사계절 머물러 있는 텃새였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해외에서 날아오는 철새이다. 그래서 황새를 복원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겠다. 





복원센터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사육장에서 황새를 직접 볼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런 황새랑 쌀을 사서 더 좋았다. 자연과 공존하며 생산되는 농산물이다. 이런 농산물을 자꾸 소비해 주어야 황새만이 아니라 다른 동물들도 우리와 함께 살아갈 수 있다. 생산에 방해가 된다고 배제하고 없앨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들과 공생하며 살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거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이러한 소비 행위이다. 





마지막으로 인터넷에서 사진 하나를 보았다. 

여긴 어디? 또 저 황새들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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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진흥청 박광래 선생님께 들은 흥미로운 이야기.

옛날에 수도물 사태가 일어났을 때, 신길동에 사는 어느 부모가 불안감 때문에 아이의 분유를 지하수를 이용해 타서 먹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아이에게서 청색증이 일어나 큰일이 났단다. 다행히 잘 치료하여 아무 이상은 없었지만, 그것이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에서 발견된 최초의 청색증 환자라고 한다. 본인이 그걸 연구해서 학위를 받았다고 하니 명백한 사실이겠다. 그래서 궁금해서 찾아보니 1993년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기사가 나온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

아무튼 흥미로운 점은, 이미 1960년대에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는 청색증 환자가 많이 보고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비료를 그렇게 많이 쓰는 한국에서는 90년대에 최초로, 특히나 동아시아권에서도 최초로 발견되었다는 점이다. 

박광래 선생님은 이를 밭농사 중심의 농업환경과 논농사 중심의 농업환경에서 오는 차이로 본다. 즉, 밭농사와 달리 논농사는 논이라는 습지 환경이 질산염 같은 걸 여과하는 등 수질을 자연적으로 정화하는 공간이 된다는 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논의 다원적 가치를 주장하게 되었단다. 

이런 좋은 효과를 아무리 이야기해 보았자 사람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기 십상이다. 그걸 경제적 가치가 얼마라든지, 막상 사라지고 난 뒤에 발생하는 피해 등이 눈에 보여야 정말 중요한 것이었구나 하게 마련이다. 우리는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뱀다리... 혹시 같은 조건이면 찰벼가 메벼보다 숙기가 더 빠른 편이 확실합니까? 그렇다면 왜 그런 건지 아는 분 있습니까? 궁금합니다. 유전자원센터에 계시던 이석영 선생님께 문의하니, 본인 생각으로는 아밀로펙틴 전분의 합성 과정이 더 복잡하기에 찰벼가 더 숙기가 느릴 것 같다고 하시던데...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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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연구이다.

녹색제비가 먹이로 무엇을 먹는지 조사한 캐나다의 한 연구이다.


요약하자면, 

1. 제비는 수생곤충을 먹이로 더 좋아한다.

2. 새끼에게는 닥치는 대로 잡아다 먹이지만, 정작 부모들은 원래 좋아하는 수생곤충을 선호하고 그를 먹는다.

3. 농경지와 자연 초지에 사는 제비를 비교한 결과, 자연 초지에 사는 제비들의 몸무게가 더 나가고 몸 상태도 좋더라.

4. 화학 농자재의 사용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제비의 먹이 활동에는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5. 제비의 경우 캐나다에서는 습지의 생태계를 이용하며 살지만, 한국에서는 인공의 습지인 논에 기대며 살 것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6. 농업에서 생물다양성을 확보하는 방법이란 무엇일지 깊이 고민하도록 하자.



새로운 연구에서 녹색제비가 농경지에서 좋아하는 먹이를 구하기가 더 어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제공: C. Michelson



공중의 식충동물 —날개를 이용해 곤충을 먹이로 사냥하는 조류— 은 농업이 강화되며 북미 전역에서 곤충의 풍부함과 다양성이 감소하며 줄어들고 있다. The Condor: Ornithological Applications의 새로운 연구에서는 녹색제비의 먹이가 농업에 어떻게 영향을 받는지 살펴보고, 농경지에 사는 조류는 아직 자신이 좋아하는 먹이를 발견할 순 있지만 이것이 점점 더 어려워질 수 있음을 밝혔다.

Saskatchewan 대학의 Chantel Michelson, Robert Clark, Christy Morrissey 씨는 2012-2013년에 농경지와 초지에 있는 녹색제비의 둥지를 관찰하고, 에게서 혈액 샘플을 수집하여 그들의 조직에서 동위원소 비율을 통해 무얼 먹는지 살펴보았다. 녹색제비는 보통 수생곤충을 좋아하는데, 그들이 생활주기를 마치고 습지로 나오면 제비가 공중에서 그들을 잡는다. 연구진은 살충제 사용이나 기타 농업 관행이 습지 서식처에 미치는 영향 때문에 작물이 점유한 지역에서 살고 있는 조류는 더 많은 육생곤충을 먹는 것으로 전환하게 될 것이라 추측했다.  

하지만 그 대신, 연구진은 제비가 모든 장소에서 육생곤충보다 더 많은 수생곤충을 먹는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2012년 초지에 사는 조류의 에는 실제로 더 높은 비율의 육생곤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 결과는 습지 서석처가 농업의 악영향에 대한 완충 효과를 제공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농경지에 사는 조류는 초지에 서식하는 조류보다 평균 몸무게가 적게 나갔다. 이는 그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지표일 수 있다.

"우린 곤충을 먹는 제비가 먹이가 줄어들면서 이를 보완하고자 일반적으로 먹는 수생곤충에서 육생곤충으로 전환함으로써 농경지에서 불이익을 받는지 알아보고자 이 연구를 시작했다. 우린 조류가 일반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Morrissey 씨는 말한다. "특히 다 자란 제비는 토지의 유형에 관계없이 수생 먹이에 크게 의존했다. 실제로 이 지배적인 장소에서, 새끼들에게는 수생과 육생 모두의 더 많은 종류의 먹이를 먹였다. 식단이 몸 상태에 영향을 미치치 않는 것처럼 보였으나, 농경지의 조류가 평균 몸무게가 적게 나가 농경지에서는 좋아하는 수생 를 얻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연구는 습지가 농업 경관에서 조류를 유지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며, 크게 변형된 경관 안에서 습지는 생물다양성을 보존하는 중요한 공간이다."

"초지는 그 비옥한 흙이 농업에 안성맞춤이기에 가장 황폐화된 생태계의 하나이다. 살충제와 화학비료는 지속적으로 사용량이 늘어나고 있으며, 그곳에 사는 생물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고 이 연구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녹색제비 생태학의 전문가 Acadia 대학의 Dave Shutler 씨는 덧붙인다. "이 연구는 각각 습지의 밀도가 비슷한 자연의 초지와 에 사는 녹색제비의 식단을 비교했다. 두 지역에서 식단의 조성은 비슷했지만, 식단의 질은 에 사는 조류가 농경지의 그것보다 몸무게가 더 무겁고 상태가 좋기에 식단의 질은 초지 쪽이 더 낫다."



https://phys.org/news/2018-08-agriculture-affect-vulnerable-insect-eating-bird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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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법의 차이가 미꾸라지 개체군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이 2010년에 발표된 적 있다. 


이에 의하면, 관행농업의 논보다 유기농업의 논에서 2-2.5배 정도 많은 미꾸라지가 발견되며, 또한 논이 위치한 환경에 따라서도 달라진다고 한다. 




매우 흥미롭다. 역시 농약과 화학비료가 생태계의 생물다양성에는 악영향을 미치는가 보다.


http://210.101.116.28/W_files/kiss3/09404963_pv.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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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2


기고1


중세에서 보는 쌀과 고기   -하라다 노부오原田信男






중세라는 시대

일본의 중세는 국가 지배가 성립을 보았던 고대와 그 체계가 완성을 보았던 근세의 사이에 끼어 있던 시대이며, 고대와 근세가 통일집권적인 정치 체계를 가지고 있는 데 반해 지방분권적인 성격이 짙은 사회였다. 즉 중세 전기에는 공지공민제公地公民制라는 율령제의 토지 소유와 사적 대토지 소유인 장원제가 병존하여, 율령법 이외에도 장원법이란 이중 규범이 존재했다. 또한, 그 이후 시기에는 수호守護 다이묘1와 전국戰國 다이묘2가 이른바 다이묘 영국제領國制3를 시행하여, 그것이 이윽고 분국법分國法을 가지는 데에 이르는 등 통일적인 확고한 정치체계가 존속하지는 않았다.

이것을 지극히 대략적인 개념 규정에 따라 정리해 보면, 정치적으로는 권문체제라는 지배양식이 채택되고, 경제적으로는 장원공령제莊園公領制라는 사회 체계가 중세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었다. 즉 쿠게公家, 부케武家, 지샤케寺社家가 각각 국가 의식儀式, 군사경찰, 종교행사를 담당하여 분담하는 것과 동시에 각각이 상호보완적으로 정치체제를 지탱하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부케가 돌출해 나온 시대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경제적으로는 상급 부케를 지배하는 사무라이들이 장원과 국아령國衙領4 등의 단위에서 재지영주제라는 지역 지배를 행하는 것과 함께, 그들을 통할하는 형태로 쿠게, 부케, 지샤케가 정점에 위치했다.

그러므로 중세란 각지에 독자적 정권이 존재할 수 있어서, 어떤 의미에서는 다양한 가치관이 충돌했던 시대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지방분권적이라고 하여 중세 일본에서 국가 그것이 분열되어 있었다고 볼 수는 없으며, 또몇 가지 우여곡절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회적 가치관의 방향성이라는 점에서는 일관성을 찾을 수 있다. 즉 쌀에 대한 고집과 고기의 배제였는데, 그것은 꽤나 오랜 시간을 거쳐 서서히 진행되었다. 오히려 중세라는 시대를 거치며 신성한 쌀과 불결한 고기라는 대항관계가 계속되어, 최종적으로는 전자가 후자를 압도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벼농사와 일본의 특수성

동남아시아의 벼농사 지대에서는 쌀과 고기는 모순 없이 공존한다. 쌀은 습윤온난한 기후를 좋아하기 때문에, 상당한 물을 필요로 한다. 논에는 물을 담을 수 있는 외에, 비탈의 화전 벼농사 지대에서도 우기에 내리는 방대한 비가 중요하여, 골짜기의 저지에는 반드시라고 할 정도로 하천과 호수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물고기가 있어, 이들은 쌀과 한 묶음이 되어 벼농사 지대에서 식생활의 기본을 이루어 왔다.

게다가 한 시기에 대량으로 확보된 어류는 이것을 소금에 절여 발효시켜 어장이란 맛있는 조미료를 만들어내고, 이것을 사용하여 맛을 내는 것이 조리의 주류를 이룬다. 이 어장이 대두의 발상지라고 생각되는 중국의 강남을 통과할 때 어쩌면 물고기 대신에 대두를 사용한 곡장을 만들어내, 이것이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어장과 함께 널리쓰이는 조미료가 되었다. 중국 및 조선반도에서는 곡장, 어장은 활발히 사용되어, 예를 들면 조선반도의 김치 담그기에서는 젓갈이란 어장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다만 일본에서는 이미 고대에 어장에서 곡장으로 전환이 진행되었는데, 그래도 노토 반도의 이시루아키타의 숏츠루 등으로 오늘날에도 전해지고 있다.

즉 동남아시아의 벼농사 사회에서는 쌀과 물고기가 주요한 식량인데, 그밖에도 중요한 동물성 단백질원이 존재했다. 그것은 돼지로, 논벼농사와 함께 쉽게 사육할 수 있는 동물이었다. 중국 등의 희생 공물에는 돼지가 쓰이는 일이 적지 않아, 돼지고기를 함께 섞어 지은 밥은 중요한 의례 음식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런데 일본의 벼농사 사회에서는 이 돼지가 빠지는 매우 진귀한 현상이 발견된다. 이 의미에서 일본의 쌀 문화는 상당히 색다른 모양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최근 동물고고학의 성과에 의하면, 일본의 야요이 시대에도 돼지가 사육되었다고 생각되고 있으며, 야요이 유적에서는 멧돼지가 아닌 돼지의 유골이 적지 않게 출토되고 있다. 즉 논벼농사의 수용에 따라, 틀림없이 돼지의 사육법도 이입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야요이 사람들은 논벼농사를 행하며, 물고기와 함께 돼지도 식용으로 제공했다고 생각되는데, 어느 시대부터인가 육식의 금기가 재앙을 피하기 위한 조건이 되었다. <위지魏志 왜인전>에는 왜인은 금기와 재계 등을 할 때 고기를 멀리한다는 취지의 기술이 있다. 

이러한 경향은 고분 시대 이후에 더욱 일반으로 침투하는 것으로 생각되어, 돼지뼈의 출토 사례가 감소하는 일이지적된다. 어쨌든 논벼농사를 행하면서 간단하게 사육할 수 있는 돼지의 식용이 서서히 감소했던 걸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고, 다이카大化 전대의 관제에는 저사부猪飼部 같은 부민제도가 보이며, 저사야猪飼野라는 지명 등이 남아 있는 바로부터 정치 체계의 일부에서나 돼지의 사육이 여전히 행해졌다는 데에는 주목할 만하다.


고대에 이루어진 쌀의 추진과 고기의 부정

문헌 사료에서 육식의 부정이 명확해진 건 고대 율령국가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덴무天武 천황 4년(675) 이른바 육식금지의 조칙이 나와 소, 말, 개, 닭, 원숭이에 대해서는 4월부터 9월까지 죽이거나 먹거나 하지 말라는 성지가 명령으로 내려진다. 그러나 일본인이 가장 먹어 왔던 동물은 사슴과 멧돼지였다. 니쿠는 육肉의 음독이며 그 뜻은 고기인 점에 유의하면, 이것은 그 자리에서 납득되는 듯하지만 이들을 포함하지 않는 이 법령을 엄밀하게는 육식금지령이라 부르는 데에 무리가 있다.

소와 말은 물자의 운반과 노동력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개와 닭은 가까운 가축이다. 또 원숭이는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동물로, 사냥꾼들도 원숭이를 공격하는 일에는 저항감이 있다고 한다. 모두 식용과는 관계가 먼 동물들이다. 게다가 금지 기간이 4-9월이란 것도 주목해야 할 점으로, 이것은 논벼농사의 농경 기간에 해당한다. 또한 이 조칙과 동시에 덴무 천황은 앞으로 풍해로부터 벼를 지키기 위한 타츠타龍田 풍신風神과 농업용수를 관장하는 히로세広瀬 수신水神의 제사를 매년 행하도록 명령을 내린다. 

더욱이 이 조칙의 2년 전에는 농사지을 때는 논농사에 열심히 일하고 '미물美物'(고기를 포함한 요리)과 술을 삼가하도록 하며, 그 16년 뒤에도 장마가 이어졌기 때문에 관리에게 '술과 고기(酒宍)'를 끊게 하고 승려에게 경을 읽도록 명령을 내린다. 그렇게 하여 비가 그치고 벼가 열매를 맺는다고 믿고 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덴무 천황 4년의 조칙은 육식금지령이라기보다는 정확히는 살생금단령이라 할 만한 것으로, 동물의 살생을 경계함으로써 논벼농사가 원활히 추진되는 걸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고대 율령국가는 반전수수법班田收受法을 채용하고 밭을 고려하지 않고 논만 조세의 대상으로 하는 정책을 채택해,쌀을 그 사회적 생산기반으로 자리잡도록 했다. 그 때문에 100만 헥타르의 논 개간 계획을 세우거나, 삼세일신三世一身5의 법과 개간한 농지의 영세사재법永世私財法을 정하여 쌀 중심의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그리고 국가의 정점에 선 천황은 최고의 벼농사 제사자로서 쌀을 천계에서 지상계로 전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황조신으로 삼고 그 신에게 감사하며 쌀의 풍작을 기원하기 위한 신상제新嘗祭를 해마다 집행하는 존재가 되어, 쌀은 신성한 먹을거리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에 반해 고기는 벼농사의 장해가 된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불결한 존재로 차츰 부정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물론 육식 그것을 부정하는 법령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대에도 실제로는 육식이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육식이 불결함을 불러일으킨다고 여겨진 것도 사실로서, 관리라면 궁중으로 입궐할 때는 육식을 금하고, 일반 사람들도 신사에 참배할 경우에는 일정 기간만 육식을 행하지 않았다. 다만 그 이외의 장소에서는 관청에서도 고기를 먹을 수 있고, <연희식延喜式>6부터는 육장도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고대 율령국가는 겉으로는 고기를 금지했는데, 그 배경에는 논벼농사의 추진이란 사정이 있어 신성한 쌀과 불결한 고기라는 도식이 성립한 것이다.


중세의 쌀과 고기의 상극

신성한 쌀에 의한 불결한 고기의 부정은 중세라는 오랜 시대를 거치며 서서히 사회적으로 침투했다. 후지와라노 사다이에藤原定家의 <명월기明月記>에는 사무라이들이 열심히 육식을 하고 있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 외에, 귀족에서도 고기를 먹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데, 그들은 기본적으로 천하게 간주되고 있다. 물론 에외는 있는데, 장원 영주인 귀족과 승려는 연공으로 쌀을 입수할 수 있다는 점에서 쌀을 좋아하고 고기를 싫어하는 경향이 강하다. 일반적으로 상층계급 정도는 쌀을 먹고, 하층계급 정도는 고기를 식용으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중세를 거치며 논 개간은 진행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흉작과 기근도 드물지 않았다. 쌀의 생산을 위해서는 한해와 수해에 강하고 일찍 익으며 거름이 적게 필요했던 적미赤米(점성미, 대당미, 당법사)가 도입되어 재배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들은 연공미가 되지는 않았고, 흰쌀만을 상납하고 적미는 농민의 식용으로 쓰였다. 또한 장원 영주와 재지 영주들은 장거리 용수로를 뚫거나 하여 농업생산력의 확대를 도모했는데, 농민들 대부분은 밭작물에 의지하거나 산과 들, 강과 바다에서 동식물 등을 식재료로 구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카마쿠라 시기에는 쌀을 수탈하는 입장에 있는 장원 영주들은 남도불교南都仏教와 천태·진언의 옛 불교에 의지했는데, 반대의 입장에 있는 농민은 법연法然과 신란親鸞 등이 주도했던 새로운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법연은 신자가 고기를 먹는 일은 나쁜 것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방법이 없는 일이라고 답한다. 또 신란의 정토진종 문도에는 장사꾼과 사냥꾼 등 논벼농사 이외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고, 제자인 유이엔唯円이 이야기했던 악인정기설惡人正機說은 어쩔 수 없는 살생을 계속하는 사냥꾼들조차 성불할 수 있다는 사상으로 일관되어 있다. 신성한 쌀과 불결한 고기는 그대로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식생활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고기에 의한 불결함 의식은 중세에 뚜렷하게 사회적으로 침투했다. 물론 불결함은 육식만이 아니라 죽음과 태어남 등에도 관계되는 것인데, 고대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꺼리고 혐오하게 되었다. 중세에는 신사 등에서 물기령物忌令이라 부르는 규정이 정해지게 된다. 예를 들면, 육식의 경우에는 사슴고기를 먹으면 100일 동안 불결하다고 하여, 그동안은 신사에 참배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더구나 이 불결함은 전염되는 것이라 생각해 A가 사슴고기를 먹으면 물론 100일 동안 불결한데, 그 지인 B가 불결한 동안에 마찬가지로 불로 조리한 것을 먹는다고 하면 B는 21일 동안 불결하게 된다. 게다가 A와는 전혀 관계 없는 C가 B가 불결한 동안에 마찬가지로 함께 식사하게 되면 C까지 7일 동안 불결하게 된다.

앞에서도 기술했듯이 고대에도 불결함은 의식되었지만, <연희식>에서 사슴고기의 육식은 3일 동안 불결한 데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중세에는 100일까지 확대된 것만이 아니라, 인간에게까지 불결함이 전염된다고 간주된 건 육식에 대한 기피가 급속히 진행되었다는 사정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중세라는 시대를 거치며 신성한 쌀이 불결한 고기를 쫓아낸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중세에는 논의 양적 확대도 볼 수 있지만, 동시에 벼농사 기술도 진보하여 질적 향상이 뚜렷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반하여 고기를 얻기 위한 수렵은 점점 쇠퇴의 길을 가고, 사회적인 규모에서 육식의 금기의식이 높아졌다. 


근세의 쌀 사회의 성립

고대 율령국가가 지향했던 쌀을 사회의 생산적 기반으로 삼는 이상은 다양한 가치관이 혼재했던 중세 사회를 빠져 나가서 근세 막번幕藩 체제에 의하여 실현되었다.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서 천하통일을 실현했던 도요토미히데요시는 이른바 타이코우太閤 검지檢地 정책을 실시하여 병농분리에 의한 사무라이와 농민의 거주지 분리에 성공했다. 즉 정치의 지배거점인 도시=성시에는 사무라이가 살고, 농업생산의 현장인 각지의 마을들에는 농민만 거주하는 정치적 행정촌이 되었다. 검지 실시에 의하여 마을마다 생산력을 파악하고, 논만이 아니라 밭도 대지도쌀을 기준으로 한 수확량으로 표시하도록 하며, 모든 것을 쌀의 견적생산력으로 치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쌀의 수확량을 기준으로 원칙을 세워 쌀로 연공을 납입하도록 의무화되었다. 마을의 수확량만이 아니라, 다이묘의 경제력도 모두 쌀의 계량 단위인 섬으로 환산하게 되었다. 이른바 석고제石高制라는 경제 체계가 완성되었는데,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고대 국가의 이상 실현이라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히데요시 사후, 패권을 장악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정치적으로는 막번 체제라는 막부와 번에 의한 지배 체계를 구축하여 안정적인 국가 체제를 쌓아 올렸는데,  그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것이 바로 신성한 쌀이었다. 

막부는 강대한 권력을 배경으로 새로운 논 개발 정책을 실시하고, 대규모 개발사업을 실행했다. 논과 밭이 맞버티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중세와는 달리, 근세 중기에는 논이 밭을 상회하게 되었다. 중세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적미는 17세기 무렵에는 어지간히 쫓겨나고, 논 생산력은 중세에도 증가하여 향상했다. 근세의 말기에는 일찍이 벼농사를 전해 주었던 조선반도보다 재배기술이 뛰어나 파종량은 동시기의 조선보다 훨씬 적어도 완료되는 상황이었다. 그 배경에는 마을마다 농민들이 벼농사를 중심으로 하는 농업기술의 향상에 노력하고, 그 토지마다 적합한 농업생산의 이상적 방식을 연구하여 방대한 농서를 남기는 등, 마을 수준에서 열심히 쌀농사에 힘쓴 사실이 있다. 

이 때문에 육식에 대한 금기는 최고조에 이르러, 마을마다 고기를 먹으면 눈이 보이지 않고 입이 돌아간다는 등 미신이 퍼졌다. 또한 동물의 처리에 관련된 사람들을 백정으로 차별하는 불합리한 신분제도가 엄격해졌다. 그 대신 쌀은 불사리에 비유될 정도로 사람들 사이에서 중시되어, 쌀밥이 무엇보다 맛있는 요리가 되었다. 중세란 이러한 쌀 사회를 준비하는 오랜 기간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1. 가마쿠라, 무로마치 시대의 직책 이름인 수호는 원래 각 지방의 치안과 경비 등을 담당했으나, 이후 강대해지며 영주화되었다. [본문으로]
  2. 100년 동안 전국시대가 계속되면서 수호 다이묘를 쓰러뜨리고 스스로 다이묘가 되어 새로운 영국의 지배자가 된 전국시대의 다이묘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3. 제후가 영토를 소유하는 제도. [본문으로]
  4. 장원이 아닌 정부 소유의 땅. [본문으로]
  5. 새로 관개 시설을 만들어 경지를 개척한 자에게는 본인·아들·손자의 3대 동안, 기존의 관개 시설을 이용한 자에게는 본인 1대에 한하여 그 경지의 보유(사유)를 인정한 것. 이는 한정된 기간이기는 하였으나 공지공민제의 원칙이 무너진 것을 의미했다. [본문으로]
  6. 헤이안(平安) 시대의 율령 시행 세칙.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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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2


서장 

벼농사 문화가 나아갈 바   사토 요이치로佐藤洋一郞





시작하며


일본인의 쌀 소비량은 2008년 현재 연간 약 60kg 정도이다. 하루 소비량으로 환산하면 160g 남짓이다. 예전의 도량형으로 말하면 이는 딱 한 홉에 해당한다. 1965년의 수치는 114kg이었기에, 이 45년 정도 사이에 소비량은반감한 셈이다. 총생산량도 1970년대 중반 무렵까지 연간 1200만 톤을 넘었지만, 2000년을 넘어서부터 900만톤 이하가 되었다. 논의 면적도 1970년대 초반 300만 헥타르를 넘었는데, 지금은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벼를 재배하지 않는 토지 가운데 다른 작물로 전환한 토지도 있다면, 농업 그것을 그만둔 곳도 많다. 경작방기지가 경작면적의 20%를 넘은 현도 있다. 일본인은 이대로 쌀을 먹지 않게 될 것인가? 일본에서 논은 사라질 것인가? 


이 물음에 '과학적으로' 답을 내는 건 어렵다. 그러나 나는 일본인은 쌀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일본에서 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를 아래에 서술하려 한다.




쌀과 목숨을 둘러싸고 -생태학적으로 본 쌀의 위치


인류를 포함한 동물의 대부분은 자신의 손으로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를 생산할 수 없다.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는 식물이 만드는 당분이 사용된다. 전분과 지방은 당분의 대체물로 사용된다. 신체를 만드는 단백질에는 동식물의 단백질이 사용된다. 수렵채집 경제에서 이들은 다른 장소에서 획득되었는데,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면 그들의 생산은 점점 한곳에서 이루어졌다. 계절풍 아시아에서 쌀은 저습지에서 재배되었는데, 그 재배 장소에는 쌀(벼) 이외에 물고기와 패류, 곤충 등이 잡혔다. 이른바 '쌀과 물고기'의 한묶음이다(佐藤 편집 2008). 마찬가지로 유라시아 서쪽에서는 '맥류(또는 감자)와 젖(또는 고기)'라는 한묶음이 있었다. 그 무대가 되는 곳은 말할 것도 없이 '삼포식 농업'이라 부르는, 여름 작물+겨울 작물과 가축을 활용하는 형식이다. 현대 인도에서는 육식을 금기하는 사람들에 의해 콩과작물+벼과작물이란 한묶음도 있다(佐藤, 이 시리즈 제1권).


쌀과 물고기의 한묶음은 근현대 일본 열도에서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 대강은 아마 이 책의 우네 유타카宇根豊씨와 후지이 신지藤井伸二 씨의 논고에서 그리고 있다. 우네 씨도 후지이 씨도 '물고기'에는 직접 언급하고는 있지 않지만, 그 마음은 논의 다양한 존재에 있다. '논 학교'라는 NPO를 운영하고 있는 우네 씨는 벼농사의 실천가의 입장에서 논에 사는 생물들을 보아 왔다. 우네 씨 등에 의하면, 300평의 논 안에는 벼가 2000그루 자라고 있는 외에 올챙이가 2만3000마리, 우렁이(둥근논우렁이)가 300마리, 물방개가 50마리, 거미류가 7000마리 정도서식하고 있다. 이들의 숫자는 어림수이지만, 2001년에 우네 씨 등이 전국 조사를 행한 평균치라고 한다. 


우네 씨의 추론 같이, 필시 구조 개선 사업 이전의 논 경관에 섞여 있었던 일정하지 않은 모양의 논과 수로에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일부는, 그리고 '쌀과 물고기'의 한묶음 가운데 쌀 이외의 부분으로 사람들의 생명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논이란 장치가 오로지 벼만의 장치가 된 건 틀림없이 고도경제성장기 이후의 불과 50년 정도의 일이라 생각한다. 고도경제성장기, 일본에서는 다량의 인구가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했다. 그러한 것도 있고, 농업의 세계에서도 기계화가 이야기됐다. 좁고, 고도차가 있는 논을 부수고는 대규모 논으로 바꾸어 버리는 작업이 전국적으로 행해졌다. 그것은 분명히 '노동력 절감'을 가져왔지만, 그 대가가 다량의 석유를 소비하여 행하는 농업의 도입이었다. 




농업의 생태적 의미


우네 씨의 논고는 이 50년 동안의 이후에 생산성만 강조하는 농업에 대한 농사짓는 쪽에서 예리하게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것은 생산성이야말로 목숨과도 같다고 하는 사회 풍조에서 주목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생산성의 한계, 지구환경문제의 분출 등에 의하여 주목을 받게 된다. 특히 환경문제의 하나로 생물다양성의 의미를 고려할때 그 의미는 더욱더 명확해진다.


생물다양성이 지닌 '생태계 서비스'의 가치 가운데 하나는 먹이사슬의 안정적인 유지에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먹이사슬의 안정적 유지'란 생태계를 구성하는 종의 개체수와 관계성이 환경에 의지하지 않고 너무 많이 변화하는 일 없이 유지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예를 들어 제초제와 살균제 등의 사용으로 '잡초'와 '해충'을 구제하려는 시도는 먹이사슬의 안정적인 유지와는 상반되는 일이 된다. 


생태계의 안정성 유지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비료와 물 등의 '물질'을 대량으로 가지고 들어오거나, 또는 가지고나가지 않는 것이다. 즉, '무엇도 더하지 않고, 무엇도 빼지 않는' 것이 생태계의 안정에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을 포함한 선진국의 현대 농업에서는 다량의 자원을 가지고 들어오고 있다. 그것은 물, 비료와 농약부터 온실재배와 농기계용 석유 등을 포함하여 고려하면 방대한 양이 된다. 가지고 나가는 양도 다량이다. 무엇보다 농산물은 생태계 내에서 소비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을 생태계 밖으로 가지고 나간다. 즉, 현대 농업의 본질은 '고투입, 고수익'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농업의 형식은 고작 50년 된 것이고, 또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1960년대의 '녹색혁명' 이후의 일이라 생각한다. 이래서는 '논벼농사'가 가져오는 생태계의 지속성은 기대할 수 없다.


생태계의 유지에 중점을 두는 이러한 의론에 대해 세계의 인구 증가와 식량 공급의 균형을 고려하는 입장에 선 쪽의 비판이 많다. 분명히 저투입형 농업에서는 단위면적당 생산성이 저하된다. 선진국이 선진국의 이유만으로 생산성을 저하시켜 세계의 식량 생산에 부하를 더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개발도상국의 지지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이 하고 있는 일은 다음에 기술하듯이 자국의 토지는 놀리고 가지고 있는 돈으로 위력을 발휘해 세계의 식량을  여기저기 다니며 사 모으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적어도 사용할 수 있는 토지는 유효하게 사용해야 한다. 이 사태를 조금이라도 완화하는 것이 환경에 대한 부하를 줄이는 데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농업 생산과 생산비


농업은 산업 가운데 유일하게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태양광을 사용해 물과 이산화탄소에서 전분이란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기타 산업은 모두 석유와 석탄 등의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또 유한한 자원을 사용하여 물질을 만들어 왔다. 또한 여기에서는 농업이란 말을 넓게 해석하여 임업과 수산업, 축산업을 포함하여쓰기로 한다. 그런데 이제는 그 농업까지 석유를 사용한 소비형 산업으로 전환된 듯하다. 이제 농업은 농약과 화학비료 등 석유 제품이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수산업은 종래 수렵경제의 연장으로 '잡다'에 무게를 두었는데, 요즘 몇 십 년은 기르는 어업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기르는 어업이라 해도 과도하게 집약적인 양식은 협의의 집약농업과 마찬가지로 다량의 에너지를 소비한다. 또 종래부터 자원의 고갈을 불러온다는 비판이 강했던대규모 원양어업도 에너지 소비형 산업으로 전환해 버렸다. 물론 지금 바로 이러한 형식의 농업을 전환할 수는 없지만 농업의 의미를 고려한, 장기적 시각에 입각한 시나리오가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의 교역권이 확장됨에 따라 먹을거리도 장거리를 운송하게 되었다. 교역권의 확대는 원래 그 토지에 없는 자원의 융합과 다른 문화의 교류를 통하여 큰 부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지금처럼 다량의 먹을거리를 몇 천 킬로미터, 몇 만 킬로미터나 운송되면, 그 수송 에너지도 막대해질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캔의 니기리 초밥을 생각해 보자. 일본의 어느 어항 근처의 초밥가게에서 먹었던 '도미의 니기리'와 뉴욕의 '초밥 바'에서 먹은 그것과는 운반에 사용된 에너지는 극단적으로 다르다. 생산에 사용된 에너지는 대부분 똑같다. 전자에서는 현지의 농가에서 생산된 쌀과 근해의 어장에서 잡은 물고기를 사용하기에 수송에 들어간 에너지는 매우 적다. 그런데 후자는 쌀도물고기도 천 킬로미터의 단위를 운송된다. 게다가 물고기는 수송되면서 냉동이 빠질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정량적인 비교는 아직 행해지지 않았지만, '밭에서 위장까지' 가는 사이에 사용된 에너지를 단순히 비교하면 그 차이는 수백 배에 이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초밥의 가격차는 아마 몇 백 배가 안 될 것이다. 그건 전적으로 대량생산, 대량수송의 혜택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 이 대량생산의 은혜를 입어 온 것은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대량생산이 먹을거리의 안정화를 불러온다는 건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환상 같은 것이 아닐 수없다.


생산활동이 환경에 미치는 부하를 수치화한 생태학적 발자국의 발상은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생긴 것이다. 인류가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당분과 단백질의 한 묶음을 어떻게 에너지를 들이지 않고 생산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 인류와 그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할 큰 요소이다. 계절풍 지대에서 '쌀과 물고기' 및 맥류 지대에서 '맥류와 젖' 같은 한 묶음은 생태학적 발자국의 측면에서는 이상적인 농업 생산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대로 옛날로돌아자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먹을거리는 되도록 운송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결정적으로 식량이 충분하지 않은 지역이 있다. 아랍 사회 등이 그렇다. 그러한 지역에서까지 식량을 운송하지 말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막 한가운데에서 지금 당장 농업을 하는 건 에너지 측면에서는 분명하게 손실이 크다. 그러나 그래도 무엇을 얼마나 어디에서 운송할지에 대해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고려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잡초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 계절풍 지대의 농업에서 가장 위협이 되는 건 잡초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근세 이전의 논벼농사에서 휴경의 큰 이유는 잡초가 번성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각지에서 볼 수 있는 화전은 불을 사용하여 밭을 개간하는 농업의 방식인데, 같은 밭은 3년 경작하면 다음 해 이후 몇 년쯤은 휴경한다. 그 이유는 땅심의 저하와 잡초의 피해가 증가하는 데 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휴경은 적어도 고분 시대에는 시작되었다고 생각되며, 그것을 보여주는 상황증거도 몇 가지 알려져 있다. 그 정도까지 잡초의 해는 막대했던 것이다.


근세에 들어서면, 더 많은 노동력이 제초에 쓰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무렵부터 토지의 소유제는 명확해지고, 휴경하거나 새로운 토지를 개척하는 여지도 점점 사라졌다. 사람들은 항상 농지로 쓰게 된 논에 달라붙어 쌀을 재배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근대에 들어서도 똑같았는데, 도시 노동력의 수요가 확대됨에 따라 김을 매는 인구가 줄어들었다. 제초제는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개발되었다. 


제초제에 의하여 인류는 잡초를 박멸할 수 있었을까? 후지이藤井 씨의 논고를 보는 한, 그건 단정하기 곤란하다. 왜냐하면 가령 강력한 제초제를 써서 어느 잡초를 제거해도 이번엔 그 약제에 내성을 가진 새로운 잡초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새로운 잡초'가 같은 종에 속하는 다른 유형인 경우도 적지 않다.


도대체 작물과 잡초는 생태학적으로는 매우 '유사한' 관계이다. 일본처럼 비가 많고 식물의 생육이 빠른 장소에서 생태계는 방치하면 천이를 진행해 숲이 되어 간다. 경지는 경작이란 교란에 의하여 천이를 억누르는 장소이고, 또 거름기가 많은 토양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토지에 적응할 수 있는 건 작물과 잡초뿐이다. 둘은 비슷한 생태적 특성을 가지지만, 한쪽은 인간의 비호를 받고 다른 한쪽은 배제되는 정반대의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잡초가 세운 전략은 철저하게 작물의 모습을 본따는 것이었다. 이런 본땀으로 인해 잡초의 방제는 곤란해진다. 


또한 잡초라고 인식되는 종은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농학 관계자 안에서는 유명한 일화인데, '밀밭 안의 보리는 잡초'라는 것이다. 그건 혹은 빵밀(일본에서 보통 재배하고 있는 밀은 보통밀임)은 에머 밀이라 부르고 있는 재배종이 당시 그 밭에서 자라고 있던 잡초인 '야생 염소풀(Aegilops tauschii)'과의 사이에서 자연교배를 일으켜서 생겼다. 빵밀이 지닌 유전정보의 적어도 1배분은 잡초에서 기원한다. 더욱이 호밀이라 부르는재배종(검은 빵의 원료 등으로 쓰임)은 원래 밀밭의 잡초였는데, 조건이 나쁜 토지 등에서 재배식물로 진화해 온것이라 할 수 있다(辻本 2009).


반대로 이전 재배종이었던 식물이 잡초로 전환된 사례도 많다. 일본에서도 잡초 벼라고 하여 문제가 된 '붉은쌀(赤米)'은 중세에 도입된 품종이 근대에 들어서 잡초화된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잡초란 인간이 농경이란 행위를 통하여 저절로 산출한 존재이다. 잡초는 강하고 몹시 거친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그 강하고 거칠음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인류는 '녹색혁명' 이후 제초의 결정적인 수단으로 제초제를 개발하여 문자 그대로 '제초 방제'를 얻은 듯하지만,앞에서도 적었듯이 현재 상황에서는 그 시도가 반드시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뿐인가, 제초제를 지나치게 사용하여 물과 토양을 오염시키고, 희소종을 절멸로 몰았다. 즉, 환경을 악화시켰다. 현대 일본의 논벼농사도 기본은 그노선을 답습하고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현재 상황 대로 논벼농사의 행방은 결코 밝다고 할 수 없다.




논벼농사의 우위성


일본 열도의 논벼농사에서는 그래도 아직 다른 작물의 경작에 비하면 우위성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가 연작 장해를 일으키지 않는 점이다. 많은 작물은 같은 토지에서 반복하여 재배하면 '연작 장해' 또는 '그루타기'라 부르는 지장을 발생시킨다. 장해의 구체적인 내용은 작물에 따라 다르지만, 수확이 감소하고 질병에 걸리기 쉬워지는등 몇 가지 공통 사항도 발견된다. 그런데 논벼농사의 경우에는 이 연작 장해가 거의 없다고 알려져 있다. 벼도 밭에서 재배하면 연작 장해가 일어나기에 '논'에서 재배하는 것이 연작 장해를 일으키지 않는 원인이라 생각된다. 

논벼농사의 또 한 가지 우위성은 논이 댐으로 기능하는 것이다(富山 1993). 태풍과 장마철의 집중호우 등으로 한번에 많은 비가 내릴 경우, 쏟아진 물을 잠시 머물게 하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논에 통상은 물이 잠겨 있기에 여름에는 논에서 일어나는 기화열이 기온을 떨어뜨리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사실, 논을 건너오는 바람에서 서늘함을 느낀 경험을 가지고 있는 분도 많을 것이다. 몇몇 자치체에서는 휴경논 등에 물을 담아서 기온을 떨어뜨리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고 한다. 다만 논에 물을 담는 것만으로는 기온을 떨어뜨리는 효과는 작다고 생각한다. 기화열의 효과는 그곳에 식물을 심어 놓아야 한층 뚜렷해진다. 그 식물이 호흡한 물을 증산하기 위하여 많은 기화열을 빼앗기 때문이다. 흙을 넣은 양동이에 벼를 심은 것과 아무것도 심지 않은 것을 준비하여 물을 담아, 물이 줄어드는 상태를 날마다 관찰하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벼를 심은 양동이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해 훨씬 일찍 물이 사라져 버린다.




일본인은 쌀을 먹어 왔을까


그런데 일본인은 쌀을 먹어 왔던 것일까? 테라사와 카오루寺澤薫 씨는 야요이 시대의 몇몇 유적에서 출토된 식물 유체를 꼼꼼히 조사해, 도토리 등 자연식생에서 채집한 것이 가장 많았다고 기술한다. 즉, 논벼농사가 보급되었다고 하는 야요이 시대조차 '농경'의 요소보다 '채집'의 요소 쪽이 컸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고대에 들어오면 식문화는 시대의 권력자와 서민 사이에 큰 차이가 나게 된다. 문서 등에 남은 귀족들의 먹을거리는 현대 우리들의 눈에도 상당히 호화로우며, 밥 등 그릇에 수북하게 대접했다. 헤이안 시대의 '왕조 요리'를 재현한 교京 요리 '로쿠세이六盛' 주인 호리바 히로유키堀場弘之 씨에 의하면, 당시 귀족의 공식적인 식사에서 밥은 원통형으로 높여서 대접했다고 한다. 다만 대접한 전부를 한번에 먹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정도의 밥이 나왔다는 건 사실이라 생각한다. 또, 후지와라 도장은 당뇨병이었단 이야기는 당시 귀족들의 미식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나라 시대의 야마토 지방에서는 제, 소 등이라 부르는 유제품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5세기의 오사카 평야에서는 밀의 씨앗과 말의 골격이 출토되어서 목축의 존재가 엿보이기도 있다. 그리고 에가미 나미오江上波男(1906-2002)는 '기마민족 도래설'을 전개하여 큰 논쟁을 일으켰는데, 이들 사실은 기마민족도래설의 재래를 방불케 한다. 


중세부터 근세에 걸쳐서는 어떨까? 이에 대해서는 키무라 에미木村栄美 씨가 참고가 된다. 키무라는 회화 자료에 표현된 식사의 풍경을 읽고 해석하는 수법으로 중세 사람들의 식생활을 밝히고자 했다. 키무라는 귀족, 승려, 일반 서민 각각에 대하여 그 먹을거리를 해석했는데, 밥은 그 어디에도 등장하는 것 같아 그 한에서는 '밥'이 주식의 지위를 획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밥'이 쌀밥인지, 또는 현미인지 흰쌀인지, 찹쌀인지 멥쌀인지등 상세한 건 분명하지 않다. 회화에 한하지 않고, 문서가 어디까지 정확히 사실을 전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일반 서민'에서도 그것은 당시의 선진지였던 교토 주변의 일반 서민이고, 지방을 포함한 서민의 생활을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지적도 할 수 있다. 다만, 키무라도 말하듯이, 묘사된 세계가 화가의 시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근세의 기근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 점에 대해서 근세에 빈발한 '기근'을 생각해 보고 싶다. 근세의, 특히 동일본에서는 기근이 빈발하여, 테이메이天明 연간을 포함한 몇 십 년 사이에 인구가 격감할 정도의 재해가 되었다. 이 일련의 기근에 대해서는 이 시기의 저온(소빙하기라는 말을 하는 연구자도 있음)에서 원인을 찾는 의론이 많다. 그러나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저온이란 기후변화는 일종의 방아쇠였으며 그것이 원인의 전부는 아니라는 견해도 가질 수 있다. 이미 몇몇 연구자가 고려하고 있듯이, 중세 이전의 동북일본은 근세만큼 벼농사에 특화된 농엽 경영이 진전되지 않았다. 


원래 근세 이전 일본 열도의 북쪽에서는 쌀보다 잡곡을 주곡으로 하는 문화가 오래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근세란극단적으로 논하면,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 열도의 정치적 통일에 맞추어서 논벼농사를 인위적 생태계의 중심에 놓고, 쌀을 주곡으로 하며, 쌀을 화폐로 삼고, 벼농사와 쌀 음식에 관한 문화를 정통으로 하는 문화의 시대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 이전의 기층문화가 송두리째 뽑혔을 리는 없다. 지금도 '산나물 캐기' '버섯 따기' 등의관습은 동(북)이 많고 서는 적은 경향이 있지만, 그것도 당시의 자취가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아오모리시 역사민속전시관(2006년 개관) 계고관에 있는 다나카 츄자부로田中忠三郞 씨는 '숲은 시모키타下北의 백화점'이란 말로 이를 표현했다. 즉, 쌀을 재배하지 못한 때에도 숲에 가면 먹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을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벼농사에 지나친 에너지를 주입한 나머지 숲의 관리가 허술해져 '숲의 은혜'를 얻을 수 없게 된 것이 기근의 직접적 원인이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앞으로 증명이 필요하겠지만, 하나의 가설로 기억에 남겨 놓고 싶다. 




쌀과 물고기


논이라 하면 현대 일본 열도에 살고 있는 일본인 대부분이 녹색의 융단 같은 광경을 상상한다. 즉, 논이란 현대 일본인에게는 쌀을 농사짓는 장소이다. 그러나 앞의 잡초란 소제목에서도 기술했듯이, 논에서 벼 이외의 식물이 살지 않는 상황은 다량의 에너지를 그곳에 들이부은 결과이다. 우네宇根 씨가 말하듯이, 엄밀하게 말하면 논에는 벼 이외에도 많은 식물이 생식하는 것이 보통이다. 


또 -이것도 우네 씨가 말하듯이- 논에는 다양한 동식물이 생식한다. 그리고 그것이 안정된 생태계이다. 그들은 지금은 '잡초'와 '해충' 등 벼의 생산을 저해하는 존재로 취급되는 경향이 강하지만, 역사를 돌이키면 그러한 인식은 완전히 현대적이며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포유류인 인간은 그 생존을 위해 에너지로 전분과 신체를 만들기 위해 단백질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들 논에 있던 생물들은 전분의 공급원으로, 또는 단백질의 공급원으로 이용되어 왔다. 나는 이러한 생산양식을상징적인 의미로 '쌀과 물고기'라고 표현했다(佐藤 2008). 이것은 쌀과 물고기가 한 묶음으로 먹을거리를 떠받쳐 왔다는 것을 말한다. 쌀과 물고기의 한 묶음은 역사적으로 보아도 벼농사 개시 이후의 계절풍 지대에서 널리 인정되는 한 묶음이다. 비슷한 한 묶음은 1권에서 전개한 의론에 쭉 이어서 말하면 '맥류의 풍토'에서는 '맥류(또는 감자)와 젖', 인도 아대륙에서는 '잡곡과 콩' 등으로 모양을 바꾸어 존재한다(佐藤 2008b). 이러한 한 묶음은 그 토지와 그 풍토에 뿌리를 내린, 말하자면 '환경의' 한 묶음이 된다. 


현대 일본인의 먹을거리를 여기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약 50년 전의인 1965년의 통계와 비교하면, 쌀의 소비는 최초에 기록되었듯이 110kg대에서 60kg대 전반으로 반감한다. 물고기의 소비라면 14kg이 12kg쯤이 되어 큰 변화가 없다. 한편 유제품을 포함한 축산품의 소비량은 2배 반으로 증가한다. 채소와 과일 등의 소비에도 큰 변화가 있지는 않는다. 이처럼 쌀과 물고기의 한 묶음에 대해서 통계로는 쌀의 감소라는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전 시대에 대해서는 통계자료가 마땅하지 않기에 정확히는 말할 수 없는데, 나의 어린시절이었던 1955년 무렵을 떠올려 보면,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걸 먹었다는 기억이 있다. 대충 꼽아 보아도 논우렁이, 미꾸라지, 물가의 조개류, 벌의 애벌레 등의 동물질과 쑥, 수영, 여러 산나물 등의 식물질 등을 들 수 있다. 나의 기억에는 없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다양한 곤충과 그 유충, 사슴, 토끼, 멧돼지, 오리 등의 동물도 예사로 먹었다. 지금 일본에서 '고기'라 하면 소와 돼지, 닭 세 종류밖에 없지만, 이것이야말로 이상하다고 할 만한지도 모른다. 


중근세의 먹을거리에 대해서는 하라다 노부오原田信男 씨의 논고가 상세하다. 그것은 논을 포함한 생태계에 생식하는 동식물이 총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곳에서 틈으로 살짝 볼 수 있는 건 참으로 다양한 식재료의 존재인데, 그것에서도 한층 더 흥미로운 건 이른바 '주식'이었던 전분 공급원에 대해서도 피 등의 잡곡과 토란 등의 덩이뿌리류가 쓰이고 있었던 지역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다는 사실이다(坪井 1979). 이들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도 또 언급한다.




쌀과 마음


이처럼 논의 주인공으로 취급되어 온 것은 쌀뿐이었다. 아니, 쌀은 계속 논의 주인공으로 취급되어 온 것처럼 이야기되어 왔다고 쓰는 편이 정확할지 모른다. 하라다原田(2005)가 말하듯이, 논벼농사 사회에 귀속됨은 고대 이후 일본의 지배층이 일관적으로 취해 온 정책이며, 그러한 정책이 반복하여 채택된 배경에는 생산의 실태로서 논벼농사에만 의지할 수 없는 역사와 다양성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와 생산의 갈등은 중세에도 계속되었다고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1928-2004)는 보고 있다(網野 1997).


그러나 정치와 권력의 예상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무언가'란 대체 무엇일까?벼농사는 그 무대(어떤 장소에서 벼가 재배되고 있는지)의 다양성에 관계 없이 지속적인 생산방법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나도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이야기에 찬성한다. '부분적으로'라고 자른 건 특히 고도성장기 이후의 이른바 '고투입 고수익', 즉 다비다수의 벼농사가 전혀 지속적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본 열도의 광범위함 지역에서 쌀은 계속 생산의 중심이 되어 왔다. 한편, 예를 들면 유럽에서 맥류는 감자 이전에는 '주식'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맥류라도 밀, 보리, 귀리, 호밀 등 다양하다. 같은 밀이라도 보통밀 외에 파스타용 마카로니밀이 있다. 콜럼버스 이후의 유럽에서는 특히 북부를 중심으로 감자가 전분 공급원의 주력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특정 종이 무언가 특별한 곡류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구조는 생기기 어려울것이다. 


쌀의 우위성을 '신찬神饌', '의례' 등의 측면에서 본 것이 칸자키 노리타케神崎宣武 씨의 논고이다. 이들은 지금은 경사스런 자리에서조차 잊혀져 버린 존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일본인은 신년의 첫 참배(詣)는 거르지 않는다. 그리고 떡을 먹고, 도소주屠蘇酒를 마시고 신년을 축하한다. 이러한 정신구조는 -그것이 누군가가 의도하여 만든 것이라 해도- 일본인과 쌀, 벼농사와의 강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일찍이 츠보이 히로후미坪井洋文(1929-1988)가 <덩이뿌리와 일본인(イモと日本人)> 안에서 언급한 '떡 없이 정월'의 민속 사례가 보여주듯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보편적으로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동(북)일본과 서일본은 재배되는 작물과 그 품종, 수반된 동식물, 숲의 식생 등에서 이질적이다(靑葉 1980, 佐藤 2009). 아카사카赤坂(1999)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 '몇 개의 일본'이란 단어를 고안했다. 몇 개의 일본을 기층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일본이 쌀과 벼농사 문화에 수렴했던 과정에서는 각각의 시대에 지배층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유는 다른 데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쌀이 가진 영양가를 들 수 있다. 쌀은 인류에게는 주로 전분의 공급원이지만, 약간의 단백질도 포함한다. 단백질은 20개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지는데, 쌀의 단백질은 이 아미노산의 대부분을 모조리 포함한다. 그래서 가령 동물성 단백질 없이 쌀만 먹어도 기아 상태가 되기 어려워진다. 한편 또 다른 곡류의 왕인 밀은 단백질의 총량은 쌀보다 많은데 아미노산의 균형이 나빠, 그것만 먹으면 언젠가는 기아 상태에 빠진다. 성서에도자주 나오는 '빵과 포도주'의 조합은 빵의 그러한 결점을 포도주가 보완하기 때문이란 설명도 있다. 



브랜드 지향과 가짜 고시히카리 소동


쌀을 특별시하는 일본인의 사고 경향은 때로는 삐뚤어진 모습으로 발현하기도 한다. 몇 년 전에 사회 문제가 되었던 가짜 고시히카리 문제도 그 하나이다. 이는 그 뒤 연속하여 일어났던 일련의 '먹을거리 속임'의 발단이 되었던 문제로, '속임'의 본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짜 고시히카리의 상세한 내막은 이 책에 실려 있는 하나모리 쿠니코花森功仁子 씨의 기고문에 양보하려 하고, 이 문제의 저류에 있는 것이 '브랜드 지향'이라고도 할 만한 사고 경향에는 없을까 생각한다.


브랜드 지향의 사고 경향은 다양성의 저하, 특히 품종의 다양성의 상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일본의 벼 품종의 다양성 저하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이전에 기술한 바이지만, 그렇다면 고시히카리 이후 벼의 품종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냐고 하면 그렇지 않다. 고시히카리란 품종의 농림등록번호는 '농림 100호'이다(등록년도는 1956년). 2008년 현재 등록번호는 431번에 이르고 있기에, 나라가 관여한 것만 고시히카리 이후 약 50년 동안 3000을 넘는 품종이 세상에 나온 셈이다. 등록번호를 부여하지 않았던 품종의 예비군은 이보다 훨씬 많다. 그런데도 벼농사 농가도 소비자도 그 존재의 극소수밖에 모른다. 현실에서 재배된 일이 있는 품종, 현재 재배되고 있는 품종도 200가지 정도를 밑돌고 있다.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지는 간단한 작업이 아니지만, 적어도 소비자의 '브랜드 지향'이 관계되어 있는 것은 확실할 것이고, 그 심리를 교묘하게 조종하는 시장의 존재도 또한 눈감아 줄 수 없을 것이다. 기술과 사회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는 어느 사회가 뛰어난 기술력(사람)과 에너지(물질)를 투입하여 새로운 부를 생산하는데 그것을 이용하는 체계가 없다고 모조리 수포로 돌아갈 우려가 있다는 점을 웅변하고 있다. 고시히카리 일변도의 책임은 품종개량의 전문가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기술을 살리지 못했던 사회와 정치의 책임이라고 말해야 한다. 


반성하건데, 일본에는 메이지 초기에 400가지를 넘는 품종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현재 재배되고 있는 품종은 200가지 안팎인데, 품종의 수를 다양성의 지표로 삼으면 이 100년 동안에 다양성의 정도는 20분의 1까지 저하된 것이다. 또한 메이지 시대 중반의 품종과 지금 품종의 큰 차이는 품종이란 하나의 집단 안의 다양성에도 있다.품종 안의 다양성이란 개념은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사실 벼의 품종은 어떤 품종도 완전한 클론은 없다. 고시히카리조차 엄밀하게 비교하면 현마다 다른 유전자형을 나타낼 터이다. 그리고 같은 현에서 생산한 고시히카리 안에도 몇 가지 유전자형이 섞어 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다형성은 옛 시대의 품종에서는 훨씬 크고, 같은 품종의 개체를 많이 심어서 비교하면 키와 개화일, 쌀알의 크기 및 모양 등 다양한 성질에서 차이가 발견되었다. 메이지 시기부터 쇼와 초기까지 행한 품종개량의 주요한 방법이었던 '순계분리'법은 재래종 안에서 우수한 성질을 가진 그루를 골라내어 그 종자를 증식하는 원시적인 것인데, 이러한 방법이 유효했을 정도로 당시의 품종은 한 가지 품종 안에 다양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메이지 시기까지 일본 열도에서 벼의 품종이 유전적으로 얼마나 다양한 존재였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벼농사 문화와 일본의 장래


일찍이 야나기다柳田의 시대와는 달리, 일본이 단일민족국가이며 단일한 문화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연구자는 과연 이제 없다(赤坂 1999). 농경 문화만 보아도 일본 열도에 건너온 것은 조선반도를 경유하여 온 것 외에, 북쪽에서 또는 남쪽에서 건너온 문화가 뒤섞인 복합적인 문화를 형성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벼농사 문화는 그러한 문화 복합의 안에서 생성되어 온 문화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佐藤 2009).


그렇게 하면 쌀을 먹음과 벼농사의 문화가 언제부터 일본 열도 전체를 뒤덮듯이 된 것인지는 역사학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앞에서도 적었듯이, 일본인이 상고 시대부터 쌀을 주식으로 먹어 왔다는 사실은 없다. 일본 열도가 그 무렵부터 온통 논으로 덮여 있었다고 하는 것도 또한 아닐 것이다.


다만 그래도 쌀농사와 쌀밥은 -적어도 서일본에서는- 사람들의 동경이었다는 점은 틀림이 없다. 회화 자료에 나타난 쌀밥의 그림이 이야기하는 건 그러한 점일 것이다. 


근세에 쌀은 통화의 역할을 짊어질 만큼 중요한 물자로 여겨졌다. '고쿠다카(石高)'라는 일본의 독특한 단어는 그걸 잘 보여주고 있다. 한 섬(약 150kg)은 성인 남자가 1년을 사는 데 필요한 쌀의 양이다. 그것은 또한 무사와 한이 몇 명을 먹여살릴 수 있는지를 실제 수량으로 보여주는 잣대이기도 하다. 그것이 경제력을 보여주는 도량형으로 통용된 것이 쌀의 지위를 잘 보여주고 있다. 


현 시대에 사는 일본인에게도 쌀은 특수한 존재이다. 고베神戸  아와지淡路 지진의 부흥에 들어갔던 자원봉사 사람들과 지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아침밥으로 모닝빵을 배포받은 쪽은 힘이 나지 않았지만, 주먹밥을 받은 순간 의기가 올랐다고 한다. 역시 쌀에는 무언가 힘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걸 쓰는 게 연구자로서 어떤 말을 들을지 모르지만, '정신의 힘'은 물질만능주의인 현재의 일본인이 돌아볼 만한 것의 하나가 아닐까? 그렇게 표명하고 <유라시아 농경사> 제2권의 서장을 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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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일본 야요이 시대의 논 유구이다.

이 사진 때문에 호기심이 생겨 찾아보았다.

이 유구의 위치는 아오모리현 타레야나기垂柳 유적에서 발굴되었다고 한다.

늘어진 버드나무, 즉 수양버들이란 지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 물기가 넘치는 곳이라 그런 자연환경을 좋아하는 버드나무가 잘 자라던 곳이었겠구나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곳에서는 역시 벼농사지.




그나저나 여기는 한번 가서 볼만하겠다. 사진에 보이듯이 이 유적의 논 유구에 옛날 벼를 심고 있단다.

옛날 벼는 요즘 벼와 다르게 생긴 것이 명확하게 보인다.

9월쯤 가면 좋겠구만. 알아볼까나...



우옷, 여기 전시관도 있어서 여러 가지 재미난 자료를 잔뜩 볼 수 있답니다!

https://www.aptinet.jp/Detail_display_00006704.html?id=00006704&t=0




갑시다, 아오모리현. 당시에 살던 인간의 발자국도 볼 수 있답니다. 세상에나.




자, 갑시다 아오모리현. 9월16-19일, 3박4일 일정입니다.

항공료 29만원, 인근에 3박에 20만원짜리 저렴한 숙소로 예약하면... 기본 50만원이면 갑니다만...


다들 별 관심이 없을 테지만. 쩝. 무척 땡긴다. 언젠가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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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논 아트"를 봅니다.
이 정도면 정말 이제는 예술의 경지에 올랐다고 인정할 만합니다.

몇 년 전 처음으로 일본에서는 논에 그림을 그려 관광 수입과 농산물 판매를 연결한다는 사실을 알고 역시 우리보다 좀 앞서 가는구나 싶었는데, 이건 뭐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나아갔네요. 1993년부터 했다고 하니 20년 넘게 쌓인 노하우이겠네요. 이 예술작품을 보러 아오모리현에 다녀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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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장시성의 논.

여기에서도 논두렁 콩 같은 걸 심은 모습이 보인다. 그 농법이 한국만의 고유한 무엇은 아니겠다.

막 모내기를 끝낸 논의 모습이 재미나다. 농부는 아마 메워심기를 하는 듯한데, 일정 간격으로 고랑을 낸 것처럼 심었다. 이곳이 중국 남부이다 보니, 아마도 벼논양어 농법을 행하는 곳이라 그런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정확한 건 직접 가서 봐야지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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