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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죽어라 하고, 쌀 개방반대 구호는 열심히 외치면서 마트에서 수입농산물, 가공식품을 구입해 먹는 우리의 이율배반적인 일상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쌀 개방을 한다고 합니다. 지금도 의무수입량을 수입하여 쌓아놓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뭣같은 개 같은 세계조약 때문에 수입하고 싶지 않은 수입 물량을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고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수입을 해야 한답니다. 


여러분 자신있습니까? 만약 수입 농산물이 물밀듯이 밀려와서 아주 생각지도 못한 저렴한 가격에, 미국의 칼로스 쌀이 마트에 편의점에 소포장으로 진열되어 있다 해도 그것 말고 다소 가격이 있는 우리 쌀을 구입할 자신이 있습니까? 


자신이 있다면 침묵하십시요. 우리 모두가 그런 결의가 있다면 들어올테면 들어오라 할 수 있겟지요.


그런데 정말 과연 그럴 수 있는가요? 또 경쟁력 운운하면서 우리 쌀도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고 이리 말할 건가요? 제발 그 놈의 경쟁 타령은 그만 하십시요. 말라죽기 직전의 농촌에 경쟁의 칼날을 들이미는 것은 참으로 가혹한 일입니다. 무서운 말입니다."


이상은 옥천 지역의 마을운동가 권단 씨가 쓴 글입니다. 가슴 깊이 공감하고 동의하여 옮겨 보았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람이지요.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14819


쌀농사는 농업과 농촌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나마 쌀농사 덕에 이 정도의 농민들이 농사를 생업으로 삼으며 살아가고 있지요. 


그런데 이제 쌀 시장개방으로 그 보루가 무너지려 하고 있습니다. 농민이 망하고 농촌이 사라지겠죠. 


무서운 일입니다. 순망치한. 농민과 농촌이 망하면 도시와 도시민도 편안히 살 수만은 없을 겁니다. 처음엔 값싼 쌀이 들어오겠지요. 그런데 기후변화니 뭐니 불안정한 시대인 지금 앞날을 장담할 수 있답니까. 한미 FTA 하면 체리가 싸진다고 떠들더니 지금 어떤가요. 


모르겠습니다. 농민과 농촌이 없어도 도시와 도시민이 잘 살 수 있을지도요. 지금처럼 잘 살아갈지도요. 정말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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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쌀이 423만 톤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요즘 1인당 1년에 평균 약 70킬로그램의 쌀을 먹는다고 하니, 전체 5000만 명이라 잡으면 1년에 총 35억 킬로그램의 쌀이 필요한 셈이다.
물론 이 수치는 지나치게 단순화한 것이며, 또 쌀밥 말고 다른 걸 먹지 않는다 하면 약 2배는 높게 잡아야 할 것이다.

자, 그럼 작년에 42억3000만 킬로그램의 쌀이 생산되었다.
최근 4년 만에 최고의 생산량을 보인 것으로서, 흉년이 들었을 때도 있으니 1년에 평균 40억 킬로그램의 쌀을 생산한다고 하자.
그럼 5억 킬로그램이 남는다.
거기에 의무수입량으로 전체 생산량의 10%인 40만 톤, 즉 4억 킬로그램의 쌀이 수입되고 있다.
그러면 1년에 약 9억 킬로그램, 곧 90만 톤의 쌀이 남아서 창고에 들어간다는 계산이 나온다. 
전에는 여기에서 일정 정도 북한에 원조를 하여 해소하곤 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남북 관계가 꽉 막히면서 그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지.

이 남아도는 쌀을 어떻게 먹어치울 수 있을까?
단순히 밥을 많이 먹자는 홍보로는 먹히지 않을 세상이다. 먹을거리가 얼마나 많이 차고 넘쳐서 쓰레기통으로 직행하는데 말이다. 
또한 집에서 밥을 해먹기도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다들 삶에 쫓겨서 집에서 아침도, 심지어 저녁조차 먹지 못하곤 하며 살고 있지 않는가. 최근 설문조사에 의하면 집밥을 먹지 않는 가장 큰 이유로 경제적 요인을 꼽은 사람들이 많았다. 한마디로 사먹는 게 더 싸서 그렇단다. 사먹게 되면 당연히 쌀 이외의 먹을거리를 선택할 유인이 더 많겠지.

쌀... 쌀... 쌀...

쌀 시장개방을 코 앞에 두고 있는 이 시점에 참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왜 그동안 미리 대비하지 못했던 것인가. 늘 문제가 닥쳐야지만 시끄러워지고 표면에 떠오르는가. 그저 안타깝다. 일단 반대한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보이는 것도 아니고... 어렵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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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을 자급하는 것이 농업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상황이라니... 


지난해 쌀의 자급률을 92%로 회복하면서 의무수입량 때문에 가격이 폭락할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그러면서 은근슬쩍 쌀 시장을 개방해야 한다고 약을 푸는 섬세함까지 보여준다. 


이것은 정녕 자유무역 국가의 숙명인가?


기후변화 때문에 자급률이 10% 안팎으로 오락가락하는 판에 수입 쌀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 어쩌란 말이냐. 쌀 시장개방 이후에도 현재와 같은 생산을 유지할 자신이나 확실한 계획이라도 있는 것인지 묻고 싶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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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김재홍 기자 = 지난해 벼 풍작으로 2014년 쌀 자급률이 4년 만에 90%대를 넘어설 것이 확실시된다.


3일 농림축산식품부 등에 따르면 2014년 양곡연도(2013년 11월∼2014년 10월) 쌀 자급률이 92%로, 4년 만에 쌀 공급과잉 현상이 빚어질 가능성이 있다.

쌀시장 개방을 유예해 주는 대가로 우리나라가 의무적으로 수입하는 물량까지 합하면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기 때문이다.

최소시장접근(MMA) 방식에 따라 의무 수입해야 하는 최소수입물량은 올해 40만 9천t으로 2013년 기준 국내 쌀 소비량 450만t의 9% 수준이다. 쌀 자급률이 91%를 넘을 경우 공급 초과 상황이 불가피하다.

우리나라는 식량 주권과 농민 반발 등을 내세워 쌀 개방 시기를 2014년까지 유예하는 대신 매년 2만347t씩 쌀 수입량을 늘려왔다. 지난 1995년 5만1천t이었던 쌀 수입량이 2004년 20만5천t, 2009년엔 30만7천t으로 증가했으며 올해는 40만9천t에 달한다.

<표> 쌀 자급률

(연도, %)

(자료:농림축산식품부)

jaehong@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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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 <농, 살림을 디자인하다>라는 책을 보다가 전업농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도 잘 모르고 있던 사실인데, 벼농사의 경우 9000평 이상을 경작해야 '전업농'이라 한다는군요. 그런데 그중에서도 보통 1만8000평 이상의 논을 경작하는 사람에게 각종 지원이 우선적으로 돌아간다고 해요. 

2011년, 한국의 벼농사 농가는 총 74만8천 가구였습니다. 그중 9000평 이상 농사짓는 전업농은 5만2천 가구 정도로 약 6.6%의 비율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국 농업은 규모가 영세해서 문제라는 일각의 비판이 그래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대책으로 규모화, 기계화, 과학영농을 주장하고 있지요.

하지만 규모화를 하자며 각종 지원을 전업농 우선으로 하면 현재 벼농사를 짓고 있는 나머지 94%의 농민들은 어쩌라는 겁니까? 나가 죽으라는 소리인가요? 오히려 농업정책의 방향을 대농 위주에서 대부분의 농민들이 처한 소농으로 재설정하는 게 우선 아닐까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아래와 같은 소식이 들리더라구요.

한국 쌀전업농중앙연합회에서 전, 현직 회장 들이 12억이란 돈을 횡령했답니다. 하하하, 대농 위주의 농업정책을 펼치더니 이게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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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7만여명을 회원으로 둔 한국쌀전업농중앙연합회 전.현직 회장 등이 2년간 국가보조금을 10억 원 넘게 유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경기경찰청은 보조금을 횡령한 혐의(업무상횡령 등)로 한국쌀전업농중앙연합회 전 회장 홍모씨(56)를 구속하고, 현 회장 임모씨(50), 전 사무부총장 박모씨(55) 등 3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4일 밝혔다.

홍씨와 박씨는 지난 2010년 1월부터 2011년 12월까지 농림축산식품부와 농수산식품유통공사, 농어촌공사 등이 쌀 소비 촉진, 품질향상 등의 명목으로 지원한 국고보조금 가운데 35차례에 걸쳐 9억4900만 원을 유용한 혐의다. 

이들은 연합회 임원 배우자 명의로 유령 업체를 만들어 용역을 계약한 것 처럼 허위로 서류를 꾸미거나, 책자 발생 횟수 축소, 우수 쌀 재배 농민이 받은 상금을 특별기부금 형태로 돌려받는 수법으로 돈을 챙겼다. 임씨는 지난해 8월 쌀 전업농 전국회원대회 개최 명목으로 받은 보조금 5억4000만 원 가운데 2억6000만 원을 유용한 혐의다. 

임씨는 이벤트 업체와 계약서를 이중으로 작성해 세금계산서를 제출하는 수법으로 보조금을 유용했다.

경찰조사 결과 이들은 횡령한 돈을 경조사비, 해외연수비용, 협회장 선거비용, 차량유지비, 교통범칙금.과태료, 휴대폰요금, 생활비 등에 사용한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회장은 명예직임에도 불구하고 월 130만원의 급여를 보조금에서 챙기기도 했다고 경찰은 밝혔다.

1999년 농민 권익보호, 소득증대를 목적으로 설립된 한국쌀전업농중앙연합회는 쌀 농사를 짓는 농민 7만여명이 회원으로 활동하는 비영리법인이다.

농림축산식품부 등은 이들 단체에 연 평균 6~8억 원의 국가보조금을 지원해 왔다. 

[지홍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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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이야기한다는 오늘...
하나도 반갑지 않다.




요즘 한중 FTA에 쌀 시장 전면개방 문제까지 걸려 있기에...
둘이 만나 그런 걸 조율하려는 것이겠지.

아래의 전문만 봐도 그런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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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 마무리 등으로 바쁘신 중에도 농업․농촌에 대해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간담회에 참석해 주신 부총리님과 기획재정부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정부 부처가 최초로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 자체가 농업계에 큰 희망과 힘이 될 것입니다.

오늘 간담회는 경제 컨트롤타워인 기재부와 농업과 농촌정책을 총괄하는 농식품부가 한자리에 모여, 우리 농업․농촌에 대한 인식을 같이하고 발전방안을 모색하는 등 소통과 협력을 강화하는 매우 뜻 깊은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쌀 목표가격 변경, 고추․축산물 등 가격하락, 농산물 수급불안 등 농정 현안과 함께 한․중 FTA 추진에 따른 농업인들의 불만과 우려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아주 시의적절하고 의미 있는 행사입니다.

농식품부는 농업과 농촌의 본질적 가치를 바탕으로 ‘희망찬 농업, 활기찬 농촌, 행복한 국민’을 농정비전으로 설정하고, ‘국민행복’의 관점에서 국민 개개인의 피부에 와 닿는 변화를 실천하는 자세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농식품 분야의 국정과제를 속도감 있게 추진하고 있으며, 현재까지 ‘농어업재해보험 개편방안(5월2일)‘, ’축산농가 경영안정대책(4월15일)‘, ’유통구조 개선대책(5월27일)‘ 등을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농업·농촌의 본질적 가치에 대한 국민적 이해와 공감대를 형성하고 중장기 발전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농업‥농촌 및 식품산업 발전계획’을 마련, 조만간 확정 발표할 계획입니다.

이번 계획을 토대로 농식품 분야의 국정과제를 더욱 속도감 있게 추진하는 한편, 한·중 FTA를 앞두고 대통령님께서 말씀하신 농정의 3대축(소득, 복지, 경쟁력)을 완비해 나갈 것입니다.

이를 위해 농업의 6차산업화, 직불금 확충 등 농업인 소득증진, 영세․고령농 등 취약계층에 대한 배려, 농촌의 복지․생활여건 개선, 밭농업 경쟁력 강화, 농업후계인력 육성 등 지속가능한 농업을 위한 경쟁력강화 대책 등의 과제를 중점 추진해 나갈 계획입니다.

현재 농업과 농촌의 문제는 농식품부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복잡하고 힘든 상황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기재부와 여러 현안에 대해 허심탄회한 논의를 통해 상호 이해의 폭을 넓혔으면 좋겠고 경제컨트롤 타워인 기재부가 우리 농업·농촌 문제 해결을 위해 중심을 잡고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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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식품부 장관님과 실국장 여러분, 반갑습니다. 


특별히 기재부와 농식품부가 농정현안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를 마련하게 된 것을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그동안 두 부처는 같이 많은 일을 해 왔지만, 이렇게 마주앉아 정책을 논의하기는 처음입니다. 
앞으로 다른 부처와도 간담회를 가지겠지만 농식품부를 가장 먼저 초대한 것은 국가의 근간인 농업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동안 농식품부에게 기재부는 경제논리만을 따지는 차가운 부처로 보였을 것 같습니다.
반대로 기재부의 입장에서는 농업의 특수성과 농민 보호만을 주장하는 농식품부가 이해하기 어려운 부처로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이 자리를 통해 서로 자기 부처의 입장에서만 상대를 보는 시각을 벗어 버리고, 두 부처가 공감을 바탕으로 따뜻한 농업정책을 만들어내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우리 경제에서 농림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총 부가가치의 2.0%(26조2000억 원), 총 취업자의 6.2%(152만 명) 수준입니다. 
통계상으로 비중은 크지 않으나 농업은 국민의 먹거리와 식량안보를 책임지는 ‘국가의 근간’입니다. 

현재 우리 농업은 인구의 고령화, 도시와 소득격차 확대, FTA로 인한 시장개방 압력 등 수많은 과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러한 당면과제에 어떻게 대처하는지에 따라 우리 농업은 더 이상 어렵고 힘든 산업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산업, 미래의 성장동력으로 탈바꿈하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먼저 추석과 같은 명절만 다가오면 되풀이되는 우리 농산물의 수급과 유통구조에 대해 보다 깊이 고민해봐야 하겠습니다. 
농민들은 제값을 받지 못하는데 소비자들은 비싼 가격을 지불해야하는 문제가 오래도록 제기되어 왔습니다. 또한 농산물 수급의 미스매치와 이로 인한 가격 급등락 역시 여전히 고질적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정부가 지난 5월 유통구조 개선을 위한 대책을 발표했는데, 이러한 농업 구조개선 대책이 제대로 추진되어야 농업이 국민에게 사랑받는 산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는 우리 농산물의 수출확대에 관한 문제입니다. 
우리 농산물이 안전한 고품질 제품으로 인정받으면서 일본과 중국 등에서 수요가 계속 늘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은 소득이 증가하면서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우리 농산물에 대한 잠재적 수요가 대단히 높습니다. 게다가 중국은 거리도 가까워 내수 시장과 다르게 볼 이유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농산물의 수출확대 정책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농업이 좁은 국내 시장만을 볼 것이 아니라 세계 시장으로 진출할 기회가 온 것입니다.

다음은 그동안 농업의 구조개선을 위해 많은 대책과 예산을 투입했지만, 아직 우리 농업 경쟁력은 높지 않다는 점입니다.
여러 FTA를 체결하면서 보완대책 차원에서도 많은 대책들을 시행하고 예산을 투입했는데도 왜 효과가 없었는지, 그리고 앞으로 우리의 농업경쟁력 제고를 위한 정책을 어떻게 가져가야 할지 고민해보고 싶습니다. 

최근 귀농․귀촌 인구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농촌의 고령화가 심각한 수준이고, 일할 사람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새로운 인력이 농촌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가치관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소득 증가에 따라 삶의 질을 추구하고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삶보다 ‘슬로 라이프(Slow Life)’를 추구하며 전원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농식품부의 농업·농촌 6차 산업화를 통해 이런 변화를 제대로 수용하여 농업과 농촌이 새로운 산업과 삶의 터전으로 발전하기를 바랍니다. 농민들과 정부가, 농식품부와 기재부가 함께 힘을 모아 해결해야 할 일이 여전히 많습니다. 

모쪼록 오늘 간담회로 농식품부와 기재부가 서로를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고 협업이 더욱 증진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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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다푸(Dapu)의 화학공장 옆에 있는 농장. '이 벼에서는 아무것도 거두지 못합니다'고 지역의 농민이 말한다.





중국 곡창지대의 중심에 있는 상하이 다푸의 비를 흠뻑 머금은 농촌에서, 농민이 자신은 감히 먹지 않을 작물을 재배한다. 

그녀는 자신의 농장 옆에 정부의 지원을 받는 화학공장이 지역의 관개용 저수지로 흐르는 강에 직접적으로 부동액이 떠오르는 퍼런 빛의 폐수를 방류한다고 말한다. 이곳의 몇몇 농민은 논 주변을 거닌 뒤에 발에 알 수 없는 물집이 잡혔다. 

"이 벼에서는 아무것도 거두지 못합니다"라고 벼의 생육을 방해하던 예전 관개용 저수지를 가리키며 농민이 말한다. 그녀는 벼를 재배하지만 품질이 낮아 팔지 못하고, 오직 오염된 지역에 대한 공장주의 보상을 받을 자격만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 액수는 농토가 건강했을 때 벌던 것의 일부일 뿐이라고 한다. 식물은 살아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속이 죽었다."

중국 중부 후난성에 있는 다푸 지역 농민들의 경험은 새로이 심각해지는 중국의 환경오염 문제를 보여준다. 몇 년 동안 대중의 관심은 중국의 끊임없이 확장하는 도시에 만연한 숨막히는 공기와 수질오염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러나 최근 일어나는 사건들은 도심 외곽으로 오염이 확산되었음을 보여주고, 현재 농업 중심지를 포함한 지방으로 퍼지고 있다. 

국가기관 소속 연구원들은 중국의 농지 가운데 8~20%인 약 30억~72억 평이 현재 중금속에 오염되었을 것이라고 추산한다. 중국 정부에 따르면, 현재 13억5천만 인구를 먹여살리기 위해 최하 355억2천만 평의 농지가 필요한데 그중 5%만 손실되어도 재앙이 일어날 수 있다. 

중국 농촌의 독성 문제는 크게 두 가지 경향을 띤다고 환경 연구자들은 말한다. 인구 밀집지에서 안전한 외진 지역으로 오염산업이 확대되는 것과 국가의 식량 수요를 충족시키고자 지나치게 화학비료를 사용하는 것이다. 두 변화는 중국의 오랜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농촌보다 도시에 더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된 2012년에서 보이듯, 빠른 도시화 속도에 의해 추동되었다.

도시민들을 편안하고 잘 먹이기 위한 노력도 식품 체인의 부분을 중독시키고 있으며, 오염의 일부는 더 심하고 위협적인 모습을 하고 도시로 돌아오고 있다. 

"오염은 어느 한도에서만 추방할 수 있다. 그 주변으로 벽을 쌓을 수는 없다"고 최근 <중국의 환경 문제(China's Environmental Challenges)>라는 책을 쓴 미국 작가 Judith Shapiro 씨는 말한다. 그녀는 오염이 중국을 포함한 현 체제의 실존적 위협이 된다고 경고하는 연구자이자 환경운동가의 한 명이다. "아마 공산당이 앞으로 정당성을 유지할지 아닐지의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될 것이다"라고 한다.

중국은 모택동이 농업 생산의 경비로 강철 용광로를 설립하기 위해 농민들을 재촉해 급속한 산업화를 모색했던 1958년에 시작한 파괴적인 대약진운동 이후 오랫동안 농촌의 산업화를 모색해 왔다. 농촌 산업화를 구축하고 수십 년 동안 누적된 효과가 현재 특히 공업 성장이 중국의 곡창지대를 향해 뛰쳐나가며 환경에 대한 대가로 나타나고 있다. 후난과 후베이 성의 농촌 지역에서 공업 활동은 2007~2011년 3배 이상으로 상승하여, 최고인 광둥성의 공업 성장을 상회하고 있다.

일부 사건에서 공장들이 값싼 토지를 찾아서 농촌으로 이동하고 있으며, 성장을 촉진하길 바라는 지방 공무원들의 도움을 받는다고 환경 연구자들은 말한다. 또 다른 사건에서는, 도시의 지도자들이 인구가 밀집한 도시 밖으로 공장들이 나가기를 바란다. 농촌 오염에 이어지는 문제는 대개의 소도시 정부가 복잡한 공업 활동을 대도시보다 제대로 규제할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벼농사를 짓는 Zhu Hongqing 씨는 최근 카드뮴 공포 이후 시세 하락을 겪었다.



이런 변화의 결과는 지난 2월 중국의 환경보호부가 전국의 토양오염 조사 결과를 "국가 기밀"이라 부르며 공개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뒤 전국적 관심을 촉발시켰다. 그 결정 —변호사 활동가들이 부처에 그 수치를 공개하라고 압력을 행사하며 중대한 국면을 맞이했던— 이 인터넷과 미디어에 항의를 불러일으켰다. 

공산당 당보인 인민일보 블로그에조차 비판이 실렸다. "이걸 덮으려는 건 사람들에게 '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환경부는 이에 대응하지 않았다. 4월에 환경부 생태국의 Zhuang Guotai 국장은 기자회견에서 그 조사의 결과가  상세하지는 않지만 "확인" 이후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토양 조사에 대한 소동은 그 다음달 두 번째 논쟁으로 악화되었다. 중국의 남부 광둥성의 수도인 광저우에서 지역에 공급되는 쌀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18개의 표본에서 뼈에 통증을 유발하고 신장을 파괴하는 중금속인 카드뮴이 과도하게 함유되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공무원들은 벼는 후난성 인근에서 재배되었지만 카드뮴이 어디에서 왔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카드뮴은 보통 광산과 후난성에서 일반적인 아연과 납과 같은 금속의 제련, 배터리 제조에 연관되어 있다. 

소셜미디어 사용자들은 분노를 표현하고, 벼 공급량의 5.8%와 1.4%에서만 과도한 카드뮴 수치가 나타난 두 성의 조사를 일축했다. "처음은 물, 다음은 우리가 숨쉬는 공기, 그리고 지금은 흙이다.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는 웨이보의 글이 회자되었다. "우린 해외로 이주하거나 우주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인은 쌀과 매우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현재는 베이징에 있는 비영리 언론단체 차이나 다이알로그의 편집자인 옛 조사원 Liu Jianqiang 씨는 말한다. "어떤 채소나 과일이 오염되었다는 걸 발견하면, '그걸 먹지 않겠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쌀은 피할 수가 없다."

중국 공무원들은 반복해서 오염을 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카드뮴 사건이 일어나고 1주일 뒤, 새로운 중국 지도자 시진핑은 베이징 최고 지도자 모임에서,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생태적 "레드라인"을 설정해 그것을 어기는 사람들에게 평생 책임지게 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중국 농촌에 대한 위협은 카드뮴 그 너머에 있다. 1월, 중국의 공식 신화통신 뉴스는 환경론자들이 후베이성 중부의 "암 마을"로 묘사하는 Zekou를 분석하며 농촌 지역의 유해한 화학 폐기물의 위험을 강조했다. 거주민들은 최근 암과 관련해 사망한 대부분 50세 이하인 60명 이상이 인근 공업단지와 연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환경보호부는 한 달 뒤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암 마을들"의 존재를 인정했다. 비정부기구와 연구자들에 따르면, 비정상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암에 걸렸다. 

3월, 국영 언론은 절강성 동부의 배터리 공장 근처에 사는 168명의 마을 사람들이 최근 배터리와 제련 시설과 관련된 농촌의 하천이 납으로 오염되었듯, 혈액에서 심각한 수준의 납이 발견되었다고 보고했다. 

그 다음으로는 과도한 화학비료의 사용으로 중국의 농지가 오염되는 문제가 있다. 환경부의 Zhuang 씨는 자신의 최근 기자회견에서 중국에서 사용되는 화학비료의 단 35%만 작물에게 제대로 흡수된다고 말했다. 나머지 65%는 중국의 농지를 심각하게 오염시키는 물질로 배출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가장 널리 사용하는 질소비료의 유실은 수원을 오염시키고, 토양 산성화와 침식, 수확량 저하를 불러올 수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토양도, 환경도 그걸 버틸 수 없을 것이다. 이건 진짜 문제다"라고 Zhuang 씨는 말했다.

2000~2011년 사이 화학비료의 사용은 벼와 같은 주식에 대한 폭발적인 수요 급증으로 인해 38% 증가한 1년에 5700만 톤 이상이라고 통계국에서 밝혔다. 이러한 증가는 같은 기간 약 15% 정도만 늘어난 전체 관개농지의 증가를 훨씬 상회한다. 

전문가들은 중금속 오염을 주요한 초점으로 만들기 위해 3월에 환경부 장관이 약속한 것을 지적하면서, 정부가 농촌의 오염을 위협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토자원부는 잇달아 6월에 결과가 공개될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전국의 토양 표본을 조사하여 오염 수준을 지도로 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다음달, 중국의 내각 국무회의는 다른 무엇보다 오염에 대한 강경한 처벌과 화학비료에 대한 엄격한 규제를 요하는 국가의 환경법 초안 수정에 대해 논의했다.

2008년 화학공장이 세워진 다푸에서 작물 중 일부는 팔기에는 너무 질이 낮다. 그 공장은 농민에게 보상을 제공한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투명성에 대한 우려, 관료주의 등으로 정부의 대응력에 의문을 제기한다. 

농지에서 중금속을 제거하는 일은 몇 년이 걸릴지 모르고, 그 기간 동안 농사를 지을 수 없다. 즉 세계 농지의 10% 미만에서 세계 인구의 20%를 지원하는 무서운 임무가 중국 정부에게 주어진 것이다. 식량안보에서의 주요한 감소는 최소한의 수입으로 국가의 곡물창고를 채우는 능력에 명성을 걸었던 공산당을 해칠 것이다. 

한편 정부의 토양조사 결과의 발표 거부는 공무원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 이상을 알고 있다는 공포를 더할 것이다. 2006년 국영 언론의 대대적 선전과 함께 시작된 그 조사는 원래 2010년 완료될 예정이었다. 지난해 6월, 환경부 공무원은 신화통신에 오염 모니터링 시험 프로그램에서 364곳의 농촌 마을을 포함하는 토양 표본의 20% 이상이 국가의 표준을 충족시키는 데 실패했다며 그 조사 결과가 "적절한 때"에 출간될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정부 공무원이 문제가 정말로 나쁘다고 알고 있으며, 그걸 공개할 경우 대중의 분노가 앞으로 그에 관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국가의 능력을 의심할 것이라는 점이 일반적 감정이다"라고 UCLA 법대의 중국 환경법 전문가 Alex Wang 씨는 말한다. 

서구의 독자들에게, 중국 농민의 땅에 대한 심오한 관계는 혁명 이전 시기인 1931년 농촌 가족의 투쟁에 대한 초상화라 할 수 있는 펄벅의 <대지>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주인공 왕룽은 기근과 고난의 시기를 거치며 중국인은 결국 흙에서 자신의 생계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오늘날, 중국이 지닌 농촌 딜레마의 대부분을 광저우에서 발견된 카드뮴에 오염된 쌀의 공급원인 후난성에서 볼 수 있다. 중국의 최고 쌀 생산자 후난성은 중국 전체 양의 13%에 해당하는 약 2600만 톤의 벼를 생산한다. 2011년, 중국을 먹여살린다는 후난성의 중심 역할은 후난성이 다른 이름으로 불리던 400년 이상 된 명나라 시대의 속담에 요약되어 있다. "하늘 아래 모두가 아무것도 바라지 못할 때 후광은 수확을 거두어들인다."

그러나 최근 수십 년, 후난성은 광산과 제련소와 함께 구리와 납 같은 비철금속과 관련한 중국의 최고 다섯 생산지의 하나가 되었다. 성과 국가의 통계에 기반한 월스트리트 저널의 계산에 따르면, 2012년 중국의 비철금속 가운데 7.5%를 담당한다. 

"채광이 일어나고 있는 산 옆에 농장이 있고, 환경보호에 대한 충분한 주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광동성 환경토양과학 연구소의 토양복원 전문가 Chen Nengchang 씨는 말한다.

오염된 쌀의 출처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것처럼, 후안성의 카드뮴 문제가 얼마나 광범위한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기 어렵다. 2008년 발표된 이 지역의 중금속 오염에 대한 극소수의 연구 가운데 하나에서, 난징농업대학의 교수 Pan Gengxing 씨는 후난성을 포함하여 중국 남부의 성에 있는 시장에 나온 쌀의 60%는 중국 국가 표준을 초과하는 카드뮴을 함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조사는 61개의 표본에만 기초한 것이다. 또한 중국의 최대 허용 카드뮴 수치인 쌀 1kg당 0.20mg은 널리 사용되는 국제 표준의 2배 정도 엄격한 것이다. 연구에서는 후난성의 쌀이 과도한 비소와 납에 오염되었고, 그 쌀의 일부가 시장으로 나왔다는 것도 밝혔다.

42세의 벼농사를 짓는 Zhu Hongqing 씨는 자신의 논이 깨끗하다고 믿는다. 이곳은 다푸의 화학공장에서 1.6km 이상, 여러 광산에서는 그 이상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소비자의 불안은 정보 부족으로 증폭되어, 후안성 이양시에 있는 Jincheng 정미소의 관리자에 따르면 모든 후안성의 쌀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카드뮴 사건 이후 정미한 쌀의 시세가 14% 정도 떨어졌다가 최근 약간 회복되기 시작했다. 

"난 아내에게 이에 대해 매우 유감이라고 말했다"고 최근 어느 날 아침 수확한 벼의 이삭을 조사하면서 Zhu 씨는 말한다. "그건 판매할 수 없을 것이다."

토양 오염을 둘러싼 정치적 민감도는 마을 사람들이 지역 공무원들에게 보복 당할 두려움에 이름을 밝히기를 두려워하는 다포로 돌아갈 것이 분명하다. 나쁜 벼를 재배하고 있는 농민은 자신의 마을이 오랫동안 깨끗하고 풍요로운 곳이었다고 한다. 주민들은 쌀과 대추, 오렌지, 멜론을 팔면서 편안하게 살고 있었다. 2008년 알루미늄 불소 시설이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그것이 변했다. 그녀는 이 시설이 24시간 운영되며 늦여름에 불기 시작하는 남풍을 타고 지역의 논밭에 매연을 내보내고, 벌레들조차 도망갈 정도로 관개용수를 오염시켰다고 이야기한다. 과실수가 열매를 맺는 걸 멈추었고, 자라지도 않으며, 아무도 사지 않으려 한다.

마을 사람들이 불평한 뒤, 공장 소유주는 농민들이 작물을 재배해 온 만큼 보상금을 지불하는 데에 동의했다. 다푸의 농민은 그녀가 매년 벼를 재배하여 1만 위안(1630달러) 정도 벌었다고 한다. 현재 그녀는 벼를 재배하여 약 5400위안(880달러) 정도 번다. 

국영 중국 Minmetals 그룹의 자회사인 후안 비철불소화학 주식회사 공장의 환경보호를 담당하는 관계자는 이 시설이 엄격한 환경 표준을 준수하고 있지만, 장비 결함과 전력 문제가 때때로 과도한 오염을 일으키는 실수로 이어진다고 한다. 그는 공장에서 배출하는 것 중에 인간의 건강에 해로운 것은 전혀 없으며, 규정에 따라 기업에서 오염에 대한 보상금을 지급했다고 덧붙였다. 

"화학공장들이 농촌 지역에만 설립될 수 있기에 농민과 기업 사이의 갈등이 언제나 일어난다"고 Li 씨라고 밝힌 관계자가 이야기했다. "나는 전적으로 지역 사람들을 이해한다. 나 자신도 농민의 아들이다."

다푸를 관찰할 책임이 있는 헝둥 농업국의 공무원들이 여러 차례 전화를 걸었다. 


http://online.wsj.com/article/SB1000142412788732382910457862401064822814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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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사이, 한국에서는 기후변화의 영향이 크게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장마이다. 장마의 양상이 여느 해와 달라지고 있다.

올해만 해도 마른 장마가 찾아오더니, 장마가 끝날 무렵이 된 지금도 계속 흐리고 습한 날씨와 간헐적인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예전 수리시설과 관정 등이 충분하지 않았을 시절에 이런 현상이 일어났다면, 장마를 중심으로 모내기가 이루어지던 당시 그야말로 굶어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대형 댐과 양수기에 감사를 해야 할까?

아무튼 작년에는 장마가 요상해지며 가을 날씨까지 영향을 미쳐 쌀 생산량이 심각하게 감소하기까지 했다. 그 덕에 쌀 자급률이 80%대까지 떨어졌고, 정부는 부랴부랴 쌀 생산량을 줄이기 위해서 논에 대체작물을 심도록 유도하던 농업정책을 철회하기에 이르렀다.

당분간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예측할 수 없는 날씨는 계속될 것 같고, 이는 농업 생산에 큰 타격을 입힐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식료품 가격은 더 오를 수밖에 없다. 모르지, 수입산으로 그걸 메우려고 할지도 말이다.


아래의 글은 인도의 사례이다. 우리가 겪고 있는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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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나갈랜드 주의 북동쪽 디마푸르 외곽에 있는 논에서 농민들이 모내기하고 있다. 


지난 겨울 Vikas Chaudhary 씨의 밀밭은 이상한 쓰레기들로 어지러워졌다. 20년 이상 여기 뉴델리에서 북쪽으로 3시간 떨어진 Taraori의 농업지대에 사는 농민들은 겨울에 밀을 재배하고, 확실히 비가 내리는 여름에는 세계에서 가장 놀라운 수확량을 보여주는 남아시아 고유의 향기롭고 길쭉한 basmati 벼를 농사지었다.


하지만 지금은 벼 대신 옥수수 자루와 그 낟알이 땅에 분쇄되어 있다. 


기후변화는 인도 대륙 전역에서 계절풍의 양상을 바꾸어 놓으며 너무 절실히 필요한 강우량이 줄어들고 있다. 이것이 세계의 식량 공급에 대한 영향은 중대하다. 인도는 해마다 1억 톤의 벼와 곡물을 재배하는데, 다른 어떤 나라보다 벼를 재배하는 데 쓰이는 농지가 많다. 그리고 Taraori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basmati 벼로 유명한 곳이다. 


아마 오래되지 않았을 것이다. 여름철 장마 —여름의 바람이 바다에서 비구름을 몰고와 한달 넘게 한바탕 폭우를 쏟으며 땅을 휩쓴다— 는 6월부터 9월 사이 인도의 농장과 강, 저수지를 풍요롭게 해 왔다. 그들은 최근 몇 년 사이 늦게 도착하고, 또 주춤거리고 있다. 늦어진 비가 늦여름에 집중적으로 쏟아지며 작물에 해를 끼치고 홍수를 일으키고 있다.


“계절풍이 생명줄입니다”라고 Chaudhary 씨는 말한다. “그러나 지난 몇 번의 계절에는 우리가 비를 바랄 때 내리지 않았습니다.”




계절풍이 시작되면 나가족의 농민들이 인도 마니푸르 주의 동쪽에 있는 Senapati 지구에서 모를 심는다. 




이는 길게 늘어선 벼에겐 나쁜 소식이다. 진짜 basmati 벼는 진품 포도주가 프랑스의 포도밭에서만 나오는 것처럼 인도와 파키스탄에서만 수확된다. Taraori 지역은 하리아나(Haryana) 주를 포함하여 인도의 주요한 basmati 벼의 재배지역이다. 인도 벼수출협회(India Rice Exporters Association)의 수치에서는 연간 basmati 벼의 수확량 가운데 1/3이 하리아나에서 생산된다고 한다. 그 주요한 basmati 재배지역의 논이 계절풍의 변화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 


그래서 Chaudhary 씨와 그의 친척 중 한 명은 지난해 논의 일부를 옥수수밭으로 바꾸었다. 지난해에는 여름 계절풍이 몰고 오는 비가 2달이나 늦은 8월에 내렸다. 


Chaudhary 씨의 옥수수 농사라는 발상이 뿌리를 내리고, 인도의 장마가 계속 늦게 온다면 벼 대신 옥수수를 심는 곳이 널리 퍼질 것이다. 이는 농민들이 자급하기도 하고 수출하기도 하는 basmati 벼의 가격 상승으로 이어져 일부 농촌공동체의 식단을 바꾸어 놓을 것이다. 


벼농사를 짓는 농민들만 변화하는 날씨에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인도 전역의 농민들은 여름철 강우량의 부족으로 피해를 받아, 부채를 안고 있는 빈곤한 소작인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지난해에는 강우량이 부족해지면서 수력발전이 제대로 되지 않아 12억 인구 가운데 절반 이상이 여름에 블랙아웃을 겪으며 고통을 받았다. 가뭄은 양파와 기타 채소를 시들게 하는 원인이 되어, 식품 물가를 상승시켰다.



인도의 나르마다 계곡에서 장마철 달구지를 타고 농지에서 마을로 돌아가는 모습.




인도의 고통은 다른 많은 나라의 지역들과 공유된다. 계절풍은 인도 대륙과 미국의 남서부, 동남아시아, 호주, 아프리카의 넓은 면적을 흠뻑 적신다.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영향을 받는 지역에 살고 있다. 그들은 음용수와 관개용수의 연간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이 장대한 우기의 비에 의존하며 살아간다. 


과학자들은 강우량 기록을 연구하고, 지난 세기 중반으로 돌아가 인도 계절풍의 평균 강수량이 얼마나 감소했는지 추적했다. 그러나 최근에야 많은 인도인들이 지구온난화의 괴멸적인 결과와 파괴적인 가뭄의 현실을 깨달았다. Krishnan 교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구의 온도가 올라가 물이 증발하여 더 많은 습기가 생겨 여름철의 바람이 축축해지고 계절풍은 조용히 죽음의 종소리를 울리게 될 것이라 한다. 


“대기가 매우 안정될 것입니다”라고 계절풍을 연구하는 인도의 열대기상학 연구소의 과학자 Raghavan Krishnan 씨는 말한다. “대기에 수분이 더 많아지겠지만 비가 내리는 건 아닙니다.”


그 변화는 결국 이곳 하리아나 주의 마을 사람들이 전통적인 벼에 기반한 요리에서 옥수수를 결합시킨 식단으로 바꾸도록 만들 것이다. Chaudhary 씨는 “우린 옥수수는 먹지 않습니다”라고 한다. “하지만 기후가 변하면서 인간도 따라서 변하고 있어요.”



http://goo.gl/HUyp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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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벙이란 단어를 처음 들었던 것은 6~7년 전쯤이었다. 논에 붙어 있거나 논 안의 한 귀퉁이에 있는 웅덩이에서 물고기나 개구리를 잡아서 먹었던 기억 속에서나 존재하던 것이 비로소 제 이름을 얻는 순간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역마다 덤벙(경북), 둠뱅·툼벙(전남), 둠벙(경기, 충청, 경남)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둠벙은 논이나 그 주변에 있는 그리 크지 않은 물웅덩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러한 둠벙은 원래 농업용으로 만들어져 중요하게 활용되었다. 수리시설이 좋지 않았던 시절에는 논농사에 없어서는 안 될 ‘물,’ 즉 농업용수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긴요한 일이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논에 물이 좀 난다 싶은 곳에는 꼭 둠벙을 팠다. 이에 대해 전남 담양군 시목마을의 신현만 이장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옛날에는 샘(관정)이 없으니까 물 쓰려고 논마다 팠지. 지금은 저수지가 안골 하고 쇳대에 2개나 있고, 샘을 파서 참 발전했지. 그전에는 물 땀시 농사 못 지었어요. 물 없어 논 못하는 곳은 서숙(조) 갈고 메물(메밀) 심고 그랐어요.”


과거 수리시설이 부족했을 때에는 가능한 곳에서는 그렇게 둠벙을 팠기에 거의 모든 논에 둠벙이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둠벙을 파 놓으면 그나마 물 걱정을 한시름 덜 수 있었다. 둠벙의 물을 모내기에 맞추어 농업용수로 활용하려면 맞두레를 이용해 논바닥으로 퍼야 했는데, 그 일은 손이 잘 맞는 사람끼리 해야 했다.


그러다가 관정을 뚫기 시작하면서 양수기로 지하수를 마음껏 퍼 쓰고, 커다란 저수지가 생기며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근대적 기술이 널리 보급되면서 둠벙의 효용가치는 크게 떨어졌고, 쓸모를 잃은 둠벙은 결국 경지정리와 함께 농촌의 경관에서 거의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쓸모없는 둠벙을 유지하기보다는 논을 조금이라도 늘려 벼 한 포기라도 더 심어 먹는 것이 훨씬 이롭다고 생각한 탓이다.


그래서 현재 전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둠벙 조성사업을 벌이고 있는 전라남도의 친환경농업과에서도 이 사업의 초기에는 애를 많이 먹었다. 전라남도 친환경농업과의 이춘봉 계장의 말을 들으면, “전남에서는 생명식품생산 2차 5개년 계획(2010~2014년)을 실시하여 무농약과 유기농을 전체 농업의 45%까지 끌어올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중 공약의 하나로 생태둠벙을 2014년까지 500개 조성하려고 합니다. … 처음에는 주민들이 파려고 안 했습니다. 둠벙 하나에 30평쯤 할애하는데, 그걸 싫어해서 동네 땅에나 하지 내 땅에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담양군 시목마을의 둠벙. 2004년에 전남도의 지원으로 조성된 이곳은 마을에 오폐수처리시설을 설치하며 생긴 마을땅에 만들어졌다.



둠벙이 기르던 생명들


그런데 둠벙의 또 다른 중요한 가치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둠벙이 논을 둘러싼 생태계의 생물다양성을 풍부히 하는 동시에, 농민들에게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의 역할도 했다는 사실이다. 둠벙이 단순히 농업용수만 확보하는 곳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영양분이라면 크게 탄수화물과 단백질을 들 수 있다. 탄수화물이야 곡식을 통해서 구한다지만, 단백질은 콩이나 고기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다. 헌데 그 옛날 고기 한 번 구경하기가 쉽지 않던 시절, 바닷가가 아닌 내륙에서 농사를 지으며 단백질을 공급받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바다야 조금만 나가면 물고기며 어패류 등이 널려 있어 흉년이 와도 굶어죽는 일은 없었고, 산간 지역에서는 그래도 덫이나 올무를 놓든 사냥을 하면 고기 냄새라도 맡을 수 있었다.


내륙의 농업지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콩이란 좋은 단백질 공급원은, 사실 어디 동물성 단백질에 비하랴. 남의 살인 고기의 그 짜릿한 맛에 콩이 비할 바가 못 된다. 애기들한테 콩과 고기를 놓고 먹여보면 대번에 고기에만 입을 뻐끔뻐끔 벌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한 고기에 대한 갈증을 그나마 해소시켜주었던 것이 둠벙이다. 다양한 생물들 ㅡ미꾸라지를 필두로 붕어, 새우, 심지어 민물장어까지ㅡ 이 깃들어 살던 둠벙에 대한 기억을 시목마을의 노농들에게서 들어보자.


“둠벙에는 미꾸라지가 그렇게 많았어. 가을에 벼갈이(벼베기)하고 잡아서 추어탕 끓여놓으면 그렇게 겁나 맛있어. 미꾸라지는 찬바람이 나야 제맛이 나. 샘(둠벙) 밑에 물을 조금만 푸면 한 빡께쓰씩 잡았어. 붕어, 피리(피래미), 중태기도 있고, 자라에 장어까지 살았지. 새우도 겁나 많고. 그걸 산태미(삼태기)를 대고 풀을 질근질근 밟아서 확 들어 잡고 했지.”


농민들은 둠벙이 품어 키운 물고기며 새우 등으로 고기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며 동물성 단백질을 보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중국의 남부 지역이나 동남아시아에서는 ‘벼논양어’라는 형태로 논에서 벼와 함께 물고기를 키워 먹는 문화가 남아 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노농들이 기억하고 있는 일과 하나도 다름없이 꼭 들어맞는다. 하지만 이제는 도처에 널린 게 고기이고, 그것도 너무 값싸게 생산되어 고기 맛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없으니 둠벙의 그런 가치도 사라져 버렸다. 둠벙이 제공하던 단백질도 쓸모없어졌다는 말이다. 결국 둠벙은 대대적인 경지정리 사업과 함께 그 생명을 잃어버리게 된다.



경지정리 사업으로 논이 반듯하고 커지며 농기계를 이용한 작업이 수월해졌다. 그로 인해 생산성은 급증했으나 논의 다양한 기능은 사라지게 되었다.



논에 사는 긴꼬리투구새우. 논에서 농약의 사용이 많아지면서 사라졌다가 최근 친환경농업이 확산되면서 다시 논으로 돌아오고 있다. 한때는 멸종위기종으로까지 지정되었으나 다시 개체수가 늘어나면서 해제되기도 했다. 이놈들이 아침이면 분주하게 논바닥을 훑고 다녀 흙탕물을 일으키는데, 그 덕에 풀이 덜 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또한 이들의 똥은 좋은 거름이 되었을 테고, 건강한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둠벙, 생태계의 연결고리


둠벙이 사라지면서 논의 생물다양성은 감소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이 둠벙 하나가 사라졌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둠벙의 역할 중에는 벼를 심고 한 달 반쯤 지나 실시하는 중간물떼기 때, 논에서 살던 수생생물들이 잠시 피신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도 있다. 이제는 그런 수생생물이 혹여 논에서 살더라도 어디로 도망가 있을 수 있겠는가. 또한 농약과 화학비료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점점 친환경농업이 확산되면서 이러한 부분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추세이다.


무엇보다 생태계의 연결고리가 파괴된 것이 가장 큰 요인일지도 모른다. 이제는 시멘트로 발라버린 농수로에서는 수초도 살지 못하고, 그러니 자연히 수초에 꼬이는 플랑크톤 등도 사라지고, 그를 먹이로 삼는 물고기 등도 사라진 지 오래이다. 또한 물고기들이 오갈 수 없을 정도로 높이 만들어진 저수지와 하천의 둑도 생태계의 연결고리를 무참히 끊어놓았다.


“지금은 미꾸라지를 구경도 못해. 이 미꾸라지가 개울에서부터 올라와요. 지금은 다 막아 버려서 올라올 수가 없어, 물만 내려가지. 쬐까 뛰어봐야 벼룩이여. 장마철에 비가 오면 막 뛰어올라서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했어. 길가에 막 튀어오르고, 집 앞마당까지 막 떨어졌다니께.”


장마철이면 하늘에서 미꾸라지가 쏟아지기라도 한 듯 펄떡펄떡 뛰는 미꾸라지들이 앞마당까지 떨어졌다는 노농들의 추억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그만큼 당시에는 인간이 사는 집도 철저히 고립된 인공의 건축물이 아니라 자연생태계의 일부였다는 말일 것이다. 하늘이 비를 내리면 이를 숲이 머금었다가 샘과 계곡으로 내뿜고, 이를 인간이 집 안으로 끌어들여 생활용수로 활용한 다음 농수로와 개울로 내보내면 수생식물이 이를 정화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물고기를 비롯한 다양한 수생동물들이 모여 살았다. 이렇듯 인간의 집도 자연생태계의 일부였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의 거대한 연결고리가 형성되어 막히거나 끊이지 않고 하나로 이어졌다. 논이나 둠벙은 그 연결고리 안에 존재하던 하나의 요소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연결고리가 거의 모두 끊어져 버렸다. 집에서 나오는 생활하수는 오폐수처리시설로, 사람과 가축의 똥오줌은 정화조로 들어가 격리되어 처리된 뒤 버려진다. 농수로는 시멘트로 발라져 숲과 집과 논을 연결하고 다양한 생물들의 서식지 기능을 잃고 물만 전달한다. 이처럼 각개격파 당한 듯 곳곳에 끊어져버린 물의 생태체계로 인해 둠벙을 조성하더라도 하나의 고립된 섬으로만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관정과 농수로 현대화. 이로 인해 논과 그를 둘러싼 생태계는 고립된 섬으로 남게 되었다.



둠벙은 죽었다?


물론 둠벙에 대해 낭만적으로만 접근할 수는 없다. 현재 농민 인구는 291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5.8%밖에 되지 않는다. 과거 둠벙이 논마다 존재하던 시절의 농민 인구는 전체의 60~70% 정도에 이르렀다. 더구나 지금의 농민들 가운데 35% 정도는 고령층이다. 즉 그때만큼 일손이 많지도 않은데 둠벙처럼 관리에 품이 필요한 또 다른 일을 벌이기가 어렵다. 또한 조금이라도 생산량을 늘려야 했던 시대의 요구가 있었고, 이는 지금도 유효하다. 이런 상황에서 둠벙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새로운 볼거리, 체험거리를 제공하는 수준일까? 물론 관광자원의 역할도 현재의 농촌을 생각할 때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가치이다. 사실 그것이 현재로서는 둠벙의 가장 주요한 목적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2012년의 봄가뭄은 둠벙의 잃어버린 가치가 되살아나는 계기가 되었다. 수리시설이 취약한 산간, 도서 지역의 경우 둠벙 덕에 가뭄을 극복할 수 있었다는 보고가 이루어지며 전남에서는 현재 그러한 지역을 중심으로 둠벙을 조성하고 있다. 또한 늦었지만 둠벙이 수질을 정화하며 생물다양성을 풍부하게 하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연구들이 하나둘 발표되고 있다. 문명의 이기의 등장, 농촌사회와 농업 생산환경의 변화 등으로 둠벙의 실용적 가치는 현재 그 쓰임이 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둠벙의 완벽한 죽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다시 그 가치가 주목받을 날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둠벙은 죽지 않았다. 다만 사라졌을 뿐이다.”



경지정리된 마을의 논을 바라보며 옛일을 회상하는 시목마을의 어르신들.




함께 보면 좋을 글


<논 중간 낙수기에 미꾸라지 피난처로서 둠벙의 기능 평가>, 김재옥 외

“고맙다, 둠벙”, 농민신문, 이승환·임현우

민물새우 사는 생태연못 둠벙을 아십니까?”, 과학동아, 윤신영

논 생태계의 보물창고, 둠벙”, 농촌진흥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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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 따르면, 시칠리아를 정복한 아랍인 아사드 이븐 알푸라트Asad ibn al-Furat가 827년 섬의 남쪽 해안에 정박한 뒤 처음으로 내린 명령이 그의 병사들을 위한 음식을 조달하라는 것이었다. 아사드의 요리사는 서둘러 지역의 자원을 조사하여, 항구에서 정어리를 잡고 주변 구릉에서는 야생 회향풀과 건포도, 잣을 수확해 배에 적재하고 있었던 유럽에 알려지지 않은 재료와 함께 그것들을 섞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파스타의 시작이다.



손으로 만드는 파스타 요리법이 남아 있긴 하지만, 19세기 이후 대부분의 파스타는 기계로 뽑는다. 그 뒤 썰어서 말려 간편하게 포장한다. 


오늘날 정어리 파스타(이런 모습이다 http://bit.ly/13vsmCL)는 시칠리아의 대표적 요리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파스타가 어떻게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요리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위의 전설보다 13세기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국수를 발견하여 전해졌다는 이야기가 더 친숙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먼저, 마르코 폴로는 실제로 "이탈리아에서 맛본 것만큼 맛있는" 국수를 동양에서 먹었다고 여행기에 썼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버미첼리와 라자냐에 비유하고 있다. 둘째, 마르코 폴로의 여행 이전 이탈리아에는 파스타의 적재와 생산에 대한 상업적인 기록이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모든 이야기가 북미의 파스타 제조업자들의 무역간행물이었던 <The Macaroni Journal>의 편집자들이 1920년대 후반 지어낸 이야기라는 학자들의 지적이다.


영국 도서관
이 그림은 16세기 중반에 생산된 페르시아의 시인 니자미의 <캄사Khamsa>에 나오는 작품이다. 이는 자신의 천막으로 마주눈Majnun -쇠사슬에 묶인- 이 오기를 기다리는 라일라Layla에 관한 12세기 페르시아의 서사시를 표현하고 있다. 배경의 오른쪽 윗부분에 예술가 미르 사이드 알리Mir Sayyid Ali가 네 명의 요리사를 그려 놓았다. 한 명은 고기를 굽고 다른 한 명은 불을 피우며, 또 한 명은 그릇을 들고 오고, 한 명은 페르시아어로 파스타에 해당하는 reshteh를 밀고 있다.


그것의 모양(이탈리아의 음식작가 오레타 자니니 드 비타Oretta Zanini De Vita의 학술적인 조사에 따르면 파스타의 모양은 300가지 이상이 있음)이나 맛(호박부터 오징어 먹물까지)이 어떻든지, 파스타는 근본적으로 물을 부은 밀가루 반죽을 굴리고 잘라 끓는 물에 삶은 것이다. 이 마지막 단계가 파스타가 굽거나 튀기는 빵과 구분되는 방법이다. 또 다른 차이점은 반죽에 사용되는 밀가루의 종류이다. 아사드 이븐 알푸라트의 전설이 허구가 아닌 것이, 파스타가 중동에서 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증거가 있다. 여전히 국수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여행했다는 이야기는 배배 꼬여 있다. 

파스타는 일반적으로 파스타를 만들고 끓는 물에 넣었을 때 그 모양을 잘 유지하도록 글루텐이 풍부한 경질 듀럼밀(Triticum turgidum var. durum)로 만든다. 보통밀(Triticum vulgare)보다 글루텐이 30% 이상 많고, 물과 섞어 반죽하면 단단하게 마르지만 음식으로 만들 수 있도록 자연적으로 수분 함량이 적다.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파스타 프레스카fresca는 신선한 파스타이다. 부드럽고 말캉한 파스타 프레스카는 신속히 조리하기 위한 것이다. 그건 듀럼밀로 만들 수 있지만, 대부분의 요리는 보통밀의 다목적 밀가루로 요리한다. 여기에는 손으로 반죽하기 쉽게 달걀을 듬뿍 넣곤 한다. 한편 파스타 세카secca —일반적으로 식료품점에서 판매하는— 는 오직 듀럼밀 밀가루로만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듀럼밀만 거의 영구적으로 장기보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맘루크의 관리 알우마리Al-Umari가 정부 보고서에 인용한 14세기의 기록에 보면 북아프리카의 듀럼밀은 "저장고에서 80년 동안 저장할 수 있다"고 하며, 11세기에 안달루시아의 지리학자 알바크리Al-Bakri는 톨레도의 특징 중 하나로 "이곳의 밀은 시간이 지나도 결코 변하거나 상하지 않는다"고 자랑한다. 



파스타와 별도로, 듀럼밀은 북아프리카의 아랍 요리인 쿠스쿠스에 가장 널리 사용된다. 쿠스쿠스는 거칠게 갈아서 말린 세몰리나 반죽으로 만든다. 북아프리카인의 주식인 쿠스쿠스는 남부 유럽에서도 인기가 좋은데, 특히 시칠리아에서 즐겨 먹는다. 팔레르모 도처의 작은 식당에서 판매하고, 많은 현대 시칠리아 사람들이 주식으로 여긴다. 한편 통곡물 상태의 듀럼밀도 중동의 곳곳에서 벌거 또는 부르굴로 널리 먹는다. 이 말은 페르시아어의 "치댄 곡식"에서 왔다. 이때 듀럼밀을 찌거나 데친 다음 말려서 찧는다. 이는 타불리, 키베, 필라프와 같은 요리의 기본 구성요소이다. 튀니지에서는 보르골borghol이라 부르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jarish라 부르는데 특히 나지드와 동부의 알하사 오아시스에서 인기가 좋다. 요르단에서는 벌거bulgur라 하며 때때로 국민 요리라 할 수 있는 만사프라는 양고기 요리에서는 쌀을 대신 쓰기도 한다. 한편 이집트와 시리아에서는 덜 익은 듀럼밀을 볶은 것을 프리카frikah라고 부르며 필라프나 스프에 풍미를 더하기 위해서나 건더기로 넣는다. 



그러므로 파스타의 기원을 찾는 열쇠는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에 있다. 누가 듀럼밀을 재배했는가, 또는 적어도 누가 정기적으로 공급할 수 있었는가? 누가 듀럼밀 밀가루를 반죽으로 만들어 모양을 잡고 건조했는가? 그리고 누가 끓는 물에 그 모양을 망가뜨리지 않으며 요리하는 방법을 개발했는가?

질문은 1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전 재배된 곡물의 하나인 듀럼밀은 기원전 7000년 전 자연적인 돌연변이나 엠머밀의 교잡종으로 출현했다. 엠머밀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자라던 야생종으로, 약 1만 년 전에 재배된 최초의 곡식 가운데 하나이다. (오늘날 엠머밀은 스펠트밀로도 알려져 있음.) 그 오랜 저장기간 외에도, 사람들이 발견한 듀럼밀의 또 다른 장점은 겉껍질이 잘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낟알을 떨면서 자연스레 곡물의 겉껍질이 잘 벗겨지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단점은 제분할 때 그 밀가루 —세몰리나로도 알려짐— 가 연질밀의 부드럽고 고운 "다목적" 밀가루보다 단단하고 거칠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어디의 누구였든, 세계의 첫 번째 제빵업자에게도 분명하게 나타났다. 연질밀은 더 맛있는 빵을 생산하는 한편, 듀럼밀은 포리지와 통곡 혼합물, 결국 파스타에 더 적합했다.

중동(주로 비옥한 초승달지대)에서 널리 퍼진 듀럼밀 —본래 파스타를 만들었을 것인— 의 기원은 역사학자와 고식물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이다. 국수를 발명했다고 인정되는 중국에서는 사실 기원전 2500년에 밀을 재배했다. 하지만 그것은 듀럼밀이 아닌 보통밀이었고, 인류학자들은 그 곡식과 제분기술이 실크로드를 따라 서아시아의 상인들에 의해 중국에 전해졌을 것이란 사실에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언어학자는 중국에서 쓰는 많은 중국음식 이외의 것들의 이름이 "아랍어나 페르시아어에서 빌려온 근동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최근 뮌헨 대학의 중국학 분야의 설립자이자 캠브리지 중국의 역사란 책의 저자인 Herbert Franke에 따르면, "noodle, Ravioli와 유사한 밀가루 요리가 모두 투르크어라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그러한 요리가 원래 중국 음식이 아니고 근동에서 중국으로 도입되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 이는 중국의 가정에서 흔히 먹는 만두 같은 요리조차 '서부의 야만인'에게서 중국으로 전파되었을 수 있다는 뜻일 수 있다." 

이 그림은 1900년대 미국에서 생산하던 다섯 가지 듀럼밀 품종을 나타낸다. 이들은 듀럼밀의 글루텐 함량이 높아서 파스타의 모양을 유지해주기에 “마카로니 밀”이라고 불렸다. 


우리는 기원전 3세기 말 중국의 한나라가 국수를 만들었다고 알고 있지만, 고대 중국의 국수는 파스타 프레스카이지 파스타 세카가 아니라는 증거가 제시되었다.12세기 후반 무렵, 중국의 여행가 조여적趙汝适은 이슬람교의 스페인에서 밀은 "상하지 않고 수십 년 동안 저장고에 보관되었다"며 놀라움을 표했다. 그가 듀럼밀을 가지고 돌아갔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동아시아인들은 또한 쌀 같은 다른 식량자원을 이용하여 국수를 만들었다. 사실 마르코 폴로가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섬에서 국수를 우연히 보고 놀란 것은 그들이 "나무에서 가루"를 만드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고야자 또는 빵나무의 녹말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것이 마르코 폴로가 이탈리아로 가지고 돌아온 "이국적인" 국수 —파스타 세카가 아니라— 의 표본이었다. 


위는 듀럼밀의 모습, 아래는 그 알곡. 듀럼밀은 최소 8000년 전 인간에게 알려져 재배되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서쪽을 살펴보면, 듀럼밀이라고 믿을 만한 수많은 참고자료들이 고전 자료에 산재해 있을 뿐만 아니라 고고학적 증거가 그리스-로마 세계에 그 곡식이 예전부터 존재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대부분의 참고자료는 중세 작가들의 작품에 나온다. 2세기 그리스의 의사 갈레노스는 듀럼밀과 보리의 맛을 비교했다. samid 또는 semidu라는 메소포타미아의 단어에서 밀가루를 뜻하는 그리스어 semidalis가 유래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가들은 오늘날 대개의 영양학자들처럼 듀럼밀의 풍부한 섬유질을 칭찬했다. 시리아에서 집정관으로 일한 1세기 로마의 농학자 콜루멜라Columella는 듀럼밀이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 같은 건조한 기후에서 가장 잘 자란다고 보고했다. 현대의 농학자 Renzo Landi는 그 지역에서 주조한 로마의 동전에는 긴 까락으로 구별되는 듀럼밀 다발이 묘사되었다고 지적한다. Landi는 이러한 동전이 "로마가 공화국이던 시기에 확실히 듀럼밀이 존재했음을 확인시킨다"고 한다.




누가 마카로니라고 불렀을까?

이탈리아인들은 파스타에 대한 집합명사를 가지기도 훨씬 전부터 파스타를 먹고 있었다. 파스타(pasta)는 “paste”나 “dough”, “pastry cake”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온 단어이다. 그것은 "뿌리다(passein)"라는 그리스어에서 온 소금(pastos)을 뿌린 곡식과 물의 간단한 식사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빌려온 단어이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파스타란 단어를 처음 쓴 것은 1584년 우르비노의 공작부인 집사인 Giovan Battista Rossetti가 연회를 준비하면서 작성한 기록에서였다.

이에 앞서 파스타는 일반적으로 그 특정한 모양에 따라 불렸다. 손으로 만든 파스타의 모양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이름은 뇨키, 라자냐, 버미첼리, 탈리아텔레, 토르텔리니, 라비올리였다. 그 기원은 불확실하지만, 1100년대 raviolo라는 언급이 나오고 이븐 부틀란은 그것이 페르시아에서 기원하는 밀가루 반죽으로 감싼 고기 요리인 sambusaj를 가리킨다고 묘사하는 기록이 있다.

Nudel (noodle)은 18세기 독일에서 기원하는 듯한데, 현대 식료품점에 있는 다양한 파스타의 모양은 대부분 기계로 파스타 반죽을 밀어내 만드는 19세기 공업 기술의 작품이다. 그 기계의 추출구 형태에 따라 다양한 모양의 파스타가 생산된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가장 일반적인 파스타의 이름은 마카로니(macaroni) 또는 마케로니(maccheroni )이다. 이 포괄적인 단어는 특정 파스타(짧은지, 관인지, 구부러졌는지)부터 일반적인 파스타(길거나 짧은, 관이거나 납작한, 줄 같거나 구불구불한 모든 형태의 파스타)까지 모두 다룬다. 따라서 거장 Martino의 시칠리아풍 마카로니는 줄 모양이었고, 그의 로마풍 마카로니는 페투치네처럼 길고 납작한 형태였다. 또한 초기 기록의 마카로니나 마케로니는 짧고 둥근 뇨키 같은 파스타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둥근 모양이 어떻게 마케로니가 보카치오의 기발한 파르마산의 치즈 언덕에서 폭신폭신하게 구를 수 있었는지 설명한다. 마카로니라는 단어는 버미첼리와 함께 이탈리아의 유대인들이 작성한 문서에서 13세기 초기에 등장한다. 

그러나 널리 쓰이고 친숙하긴 하지만, 마카로니라는 단어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모호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 단어가 반죽을 뜻하는 두드리고 부수고 반죽한다는 뜻의 라틴어 maccare에서 왔다고 믿는다. 지금도 이탈리아어에는 가루로 만들거나 꽉 쥔다는 뜻의 ammaccare라는 단어가 남아 있다. (시칠리아와 풀리아에서 누에콩 퓌레를 macco라 부르곤 함.) 이탈리아어에 살아남아 있는 동일한 단어의 흔적이 macarie인데, 갈아놓은 아몬드의 설탕절임을 “마카롱”이라 부른다.

그리스어 기원설도 있다. 대체로 파스타 세카가 서쪽으로 왔다고 하는 시기인 3~8세기, 지중해 동부의 그리스어 사투리인 Makaria는 “보리와 물로 만든 음식”을 뜻했다. 또한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에서 macarios는 축복을 뜻해, 그 단어는 “축복의 음식”으로 번역되었다. 이탈리아 남부가 고전 그리스 세계의 일부가 되었을 때, 장례식에서는 얇은 국수를 넣은 스프가 "영원한 축복의 음식"이란 뜻으로 macaria 또는 macaria-aionia라고 불리며 제공되었다. 1548년 후반 모데나에서 온 의사 Ortensio Lando는 그의 <Commentario della Piu Notabili et Mostruose Cose d’Italia(이탈리아에서 가장 훌륭하고 엄청난 것에 대한 안내서)>에서 그리스-시칠리아에 뿌리를 둔 것 같은 마카로니에 경의를 표했다. 그는 친구에게 부러운듯이 “바람이 방해하지만 않으면 한달 안에 풍요로운 시칠리아 섬에 도착할 것이고, 너는 더없이 행복하게 만드는 이름을 지닌 마케로니를 맛볼 수 있다”고 적었다.

또한 마카로니는 요리와 연극 예술 사이의 연결을 보여줄 수도 있다. 아텔란 파르스에서, 고대 로마의 하층계급을 연기하는 외설적이고 어릿광대 같은 집단에서 광대의 이름이 Maccus였다. 중세 이탈리아에서, 어떤 익살스러운 어리석고 실수를 잘하는 인물은 Maccus를 연상시키는 maccherone라고 했다. Maccus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기에 즉흥 거리극으로 인기가 있었던 코메디아델라르테에서 가면을 쓴 풀치넬라라는 악당 인물에게 영감을 주었다. 풀치넬라의 매부리코와 검고 흰 가면은 macco라고 불렸고, 그의 특징적인 소품에는 커다란 목제 숟가락과 마카로니가 수북한 접시가 포함되었다. 파스타는 과식을 상징하는 한편, 숟가락은 풀치넬라의 탐욕과 그것을 방해하는 사람에 대한 폭력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17세기까지 풀치넬라는 펀치넬로라고도 알려져 있었고, 그는 "펀치와 주디"에서 마카로니는 버렸지만 여전히 숟가락은 가지고 있는 호전적인 펀치라는 꼭두각시가 되어 북쪽을 여행했다. 

패션이 충분하지 않은 때: 마카로니 클럽의 회원인 것 같은 18세기 영국 신사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출처: 브릿지만 예술 도서관)


이 어릿광대는 마카로니 협회와 함께 대서양을 건너와 잘 알려진 미국의 독립전쟁을 노래한 “Yankee Doodle Dandy”에 출연했다. 엘리자베스의 영국에서 이탈리아의 패션과 요리, 풍습은 뽐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재였다. 일부는 이를 지나치게 취했고, 18세기까지 이탈리아의 패션 등을 젠체하며 뽐내는 사람을 조롱하기를 “마카로니”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런던에서 그런 비난에 끄떡하지 않은 도시의 “마카로니스(macaronis)”들이 1760년 마카로니 클럽을 결성했고, 그들의 독특한 머리모양은 19세기 영국의 선원들이 남극의 펭귄에게 마카로니 펭귄이란 별명을 붙이도록 영감을 주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혁명이 발생한 1775년, "마카로니"는 머리모양과 동일시되었는데, 촌스럽고 무례한 양키 두둘이 "자신의 모자에 깃털을 고집하며 그것을 '마카로니'라고 부르는" 가식적인 모습을 조롱하는 것이었다.

흥미롭고 복잡한 이야기는 마카로니가 아랍어에 근원을 하는 단어라는 설이다. Duwayda (자벌레)는 파스타가 작은 조각으로 부수어져 있는 튀니지식 버미첼리의 초기 아랍어 이름이다. 신선한 duwayda의 양 끝을 연결하여 작은 고리를 만들어 qaran이라 불렀는데, 아랍어로 합체를 뜻하는 qarana에서 온 말이다. 

음식 작가 Clifford Wright는 <지중해의 진수성찬(Mediterranean Feast)>에서 조심스럽게 이 설을 인용하고 있으며, 음식 역사학자이자 요리책의 저자 나왈 나스랄라Nawal Nasrallah는 <에덴동산의 기쁨(Delights from the Garden of Eden): 이라크 요리의 역사와 요리책(A Cookbook and a History of the Iraqi Cuisine)>에서 더 직접적으로 “이라크의 남부 지역에서는 1950년대까지 파스타를 maqarna라고 불렀”고, 한편 “바그다드처럼 더욱 번화한 지역에서는 그 단어가 이미 passé가 되었다. 그들은 더 세련된 이탤릭체의 ma’karoni로 그것을 대체했다”고 지적했다.

Maqarna itriyya와 상관없이, 파스타는 중동 전역에 알려진 이름이었다. 아카드어의 semidu와 semolina 사이의 관계 이외에도, 3700년 전 바빌로니아의 설형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된 "비장 스프"에 대한 요리법에는 "구운 qaiatu 반죽의 조각"을 더한다고 나온다. 나스랄라는 이것이 얇은 국수로 해석될 수 있다고 제시한다. 

그녀는 "qaiatu에서 유래한 아카드어의 qatanu는 아마 '얇아지다'를 의미할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아랍어의 qitan와 그 복수형 qaiateen은 결국 이 아카드어의 qatanu에서 유래하고, 그건 줄이나 끈이란 뜻이다. 따라서 qaiatu 반죽은 평평하고 얇으며 끈이나 줄 모양으로 자른 것을 뜻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이 지금도 파스타에 기반한 스프와 필라프 요리에서 일반적인 기술인 솥에 넣기 전 구운 것이라는 말이다. 

구운 국수는 여전히 이라크의 시장에서 팔리고 있다고 나스랄라는 지적한다. 그들이 rishta로 알고 있는 단어가 페르시아어로는 "실"로 번역된다. rishta의 요리법은 13세기 아랍의 요리책에 나타나, 페르시아어로 "미끄러운"을 뜻하는 lakhsha가 국수를 대체한다. 유명한 음식 역사학자 Charles Perry는 술어학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그 변화를 이론화했다. Lakhsha는 아마 13세기까지 유행한 야생당나귀 스프에만 사용되던 국수였다. (그러나 그 단어는 다른 언어와 문화에도 있었다. 오늘날 랙사laksa는 말레이의 중국인들이 먹는 매운 국수이고, 그 지역은 전에 오스만 제국의 일부이거나 경계였다. 헝가리에도 laska라는 말이 남아 있고, 러시아에서는 lapsa, 우크라이나에서는 lokshina, 리투아니아에서는 lakstiniai, 아프카니스탄에서는 lakhchak, 이디시어에서는 lokshen라고 함.)

현재 reshteh로 번역되는 Rishta는 여러 전통 페르시아 요리의 핵심 성분이다. reshteh polow와 ash-e reshteh가 그것이다. 후자는 ash-e pushteh-pa 또는 순례자의 스프라고 불리는데, 전통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메카로 순례를 떠나기 전에 제공하거나 자신의 길을 만들고자 집을 떠나는 아들에게 주던 음식이다. 

<페르시아의 전설적인 요리(The Legendary Cuisine of Persia)>의 저자인 마가레트 샤이다Margaret Shaida에 따르면, “국수가 들어있는 요리는 전통적으로 삶에서 중요한 선택이나 변화의 순간을 위해 준비되었다”고 한다. 이슬람교 이전의 이란에서 국수는 매달의 첫날에 먹었다고 말한다. 오늘날 이란에는 그런 풍습이 남아 있어매달 첫 번째 기도모임에서 그 요리를 제공한다. 또한 Ash-e reshteh는 사랑하는 이가 오랜 여행에서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거나 아픈 아이의 회복을 비는 등 가족의 문제에 신의 개입을 간청하는 종교적 서약의 음식이기도 하다. 샤이다 “국수가 복잡하게 엉켜 있는 모습이 삶의 여정과 비슷하기에 특별히 종교적 서약의 음식으로 사용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파스타를 만들기 위해 듀럼밀을 사용했는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리스의 라가논laganon는 밀가루와 오일로 만든 반죽을 굽거나 튀긴 넓고 납작한 판이다. 로마에 전해진 라가눔laganum과 함께  이것이 파스타의 원형으로 이야기되곤 한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시인 젤라의 아르케스트라투스Archestratus는 지중해의 음식을 소개하는 그의 <호화스러운 삶(Life of Luxury)>에서 자주 라가논을 언급했다. 로마 시대에는 지식인의 저녁 만찬 초대 방법을 기술한 아테나이오스Athenaeus의 <저녁식사에서의 철학자(Deipnosophistae)>에서는 1세기의 그리스 작가 크리시포스Chrysippus에게서 라가논의 요리법을 도용했다고 주장했다. 

로마인은 사실 라가니lagani이나 라가나lagana라고 부르는 줄 모양으로 라가눔을 잘라서 요리하고, 굽는 데 쓰는 접시에 다른 재료와 함께 층을 이루게 쌓았다. 따라서 명백하게 라자냐라는 요리와 어휘의 조상인 셈이다. 사치스런 생활방식을 유지할 충분한 돈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 스스로의 목숨을 버릴 만큼 맛있는 음식에 전념했던 전설적인 1세기의 미식가 Marcus Gavius Apicius가 참여했다는 4세기의 편집물인 <요리법(De Re Coquinaria)>의 설명을 보면 "속을 채운 국자와 함께 라가나lagana를 대체한다"고 한다. 기원전 234년부터 149년까지 살았던 더 금욕적인 정치가 Cato는 <농업(De Agricultura)>이라 부르는 농장 관리와 경작에 관한 책을 적었는데, 거기에서 그는 파이용 밀가루 반죽의 일종인 atracta을 만드는 데에 alicae primae(가장 좋은 세몰리나)와 farinae siligneae(일반 밀가루)를 혼합한 치즈케이크 요리법을 기록했다. 이후 기원전 68~65년 사이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피곤한 긴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리크leek와 병아리콩과 라가니를 넣은 따끈한 요리보다 더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 없다고 적었다.



라가논laganon 또는 라가나lagana라고 부르는 그리스의 원형 빵은 북부 지중해의 파스타 —나중에 로마의 속을 채운 로마의 음식— 와 라자냐 모두의 전신일 수 있다.















일부 학자는 고대의 제분 기술을 미루어 듀럼밀은 파스타로 만들 수 있는 좋은 가루로 내기 너무 힘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다른 사람들은 고전 세계의 탄수화물 계층사회에서 파스타가 자리할 곳은 없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의 구체적 내용을 보면, 이 음식이 듀럼밀 반죽을 건조시키거나 끓는 물에 넣거나 한 파스타 세카가 아니었을 것이란 사실을 가리킨다. 구운 라가넘은 아마 튀긴 여러 가지 프리터나 베이네와 유사했지만 유대인의 무교병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사실 <고대 그리스 세계의 생태학(The Ecology of the Ancient Greek World)>의 저자 Robert Sallares에 따르면, 파스타 유형의 음식은 “그 부재로 인하여 고전 자료에서 눈에 띄는 것일 뿐이다.” 이는 의문이 생기게 만든다. 그리스와 로마의 창의성만이 아니라 파스타의 상대적 간단함을 고려하면, 어떻게 그리스나 로마의 사람들이 파스타 세카를 만들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고대부터 중세의 지중해에서, 오트밀 죽과 빵은 두 가지 기본적인 곡물에 기반한 음식이었다”고 프랑스 사회과학고등학술연구원의 프랑수아즈 사반Françoise Sabban은 설명한다. 그녀는 남편인 Silvano Serventi와 함께 학술서인 <파스타: 보편적인 음식 이야기(Pasta: The Story of a Universal Food)>의 저자이다. 그녀는 빵과 오트밀 죽을 준비하는 독특한 방법은 각각을 활성화시키면서부터였다고 제시한다. 파스타처럼 빵은 밀가루 반죽을 주물러 만들었는데, 파스타와 달리 빵은 건조한 열기에서 굽는다. 오트밀 죽과 포리지는 파스타처럼 끓이지만, 파스타와 달리 가루가 아니라 통곡물이나 분쇄한 곡물로 만든다. “이러한 맥락에서, 파스타는 이 두 범주에 걸쳐 있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Sabban은 말한다. 

서쪽에서 나타난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가장 최초의 기록은 7세기 세비야의 이시도르Isidore의 작품이다. 그는 라가눔laganum을 "처음에는 물로 요리하고 다음 기름에 튀기는 넙적하고 평평한 빵"이라고 묘사했다. 비슷한 것으로는 서구의 많은 중국 음식점에서 전채요리로 나오거나 하는 바삭하게 튀긴 국수인 초면을 들 수 있다. 

여전히 고전 자료에는 파스타의 기원이 동쪽 방향을 가리킨다는 힌트가 나온다. 시인 호라티우스의 간단한 저녁식사를 통해 포크의 어원을 살필 수 있다. 호라티우스는 이탈리아 반도의 구두 뒷굽에 있는 아풀리아의 경계에 자리한 그리스의 상업도시 베노사 출신이다. 그곳은 중세 시대에 아랍인을 포함해 비잔틴인, 롬바르디아인, 노르만인 등 다양한 인종이 점령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심지어 지금도 병아리콩과 리크, 라가니를 담은 치체리 에 트리아 또는 파스타 에 체치라는 호라티우스의 소박한 밥그릇이 지역의 인기 메뉴로 남아 있다. 병아리콩(ceci)과 탈리아텔레의 소박한 형태인 넓고 리본 모양의 전통적인 파스타인 라가넬레laganelle가 전형적인 요리이다. 호라티우스의 라가니와 라가넬레 사이의 명백한 사전적 관계는 별도로 하고, 네 글자의 tria라는 단어는 더 큰 의미의 또 다른 지역적 특질을 담고 있다. 그 단어는 그리스어 itrion에서 유래한 말로, 케이크나 얇은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뜻한다. 그러나 5세기까지 그것의 같은 어족인 라틴어의 itria는 전혀 다른 것을 뜻하고 있었다. 



14세기 롬바르디아의 출판업자가 바그다드의 이븐 부트란Ibn butlan이 지은 백과사전식 11세기 건강안내서의 라틴어판을 출판했다. 거기에 위와 같이 반죽을 밀고 건조시키고 있는 trij라 부르는 파스타 요리법이 나온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성스러운 도시에서 작성된 유대 율법에 대한 저서인 예루살렘의 탈무드에 따르면, “축제에 버미첼리(itria)를 만드는 것과 관련하여, 만약 그것을 건조시킨다면 금지된다. 만약 바로 요리한다면 허용된다”고 한다. 이에 대한 가장 최초의 기록은 itria라고 부르는 레반트 지방의 것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에서는 itriot로, 아랍어에서는 itriyya로,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tria로 살아남아 있다. 이 단어들은 모두 파스타를 뜻한다. 

Tria는 칼라브리아와 나폴리와 시칠리아 중부의 여러 마을에서 전통적으로 파스타라 부르는 것이다”라고 <파스타와 피자Pasta and Pizza>의 저자이자 인류학자이며 시칠리아 토박이인 Franco La Cecla는 말한다. La Cecla는 시칠리아에 파스타와 그 제조기술을 도입한 사람은 의심의 여지없이 아랍인이라고 한다. 

“아랍인들은 9세기 정복의 파도와 함께 시칠리아에서 관개와 농업기술의 대부분을 개발했다”고 La Cecla는 말한다. “일반적으로 시칠리아에 파스타 제조법을 가져온 것도 그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에서 파스타와 그 제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중세의 누구보다 유명한 아랍인 지리학자 알이드리시al-Idrisi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노르만인 후원자인 시칠리아의 로저 2세왕을 위하여 1154년에 <Kitab Nuzhat al-Mushtaq fi Khtiraq al-‘Afaq (먼 땅으로 가는 즐거운 여행)>이란 책을 지었는데, 거기에서 시칠리아 북부의 해안 마을을 묘사하고 있다. 알이드리시는 물이 끊임없이 흘러 제분기를 돌리는 트라비아Trabia라 부르는 팔레르모 동쪽으로 약 30km 떨어진 식민지를 언급한다. "그들이 만드는 엄청난 양의 itriyya는 사방으로 수출하는 농촌의 커다란 자산이다. 칼라브리아와 무슬림과 크리스챤 국가들로 수출된다. 매우 많은 뱃짐이 보내진다."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는 La Cecla의 주장이 있다. 초기 아랍의 의학 작가들은 밀의 건강상 이익을 알고 있었고, 파스타를 포함하여 다양한 음식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빠르면 9세기 시칠리아의 의사이자 사전편집자인 Ishu bar Ali는 세몰리나 반죽을 말린 가닥을 삶은 itriyya에 대해 언급한다. 중세의 가장 훌륭한 의료인 가운데 하나인 이집트의 이샤크 이븐 술레이만Ishaq ibn Sulayman은 10세기 자신의 책 <Kitab al-Aghdhiya wa’l-Adwiya (음식과 치료)>에서 파스타의 준비에 관해 이야기한다. 더 동쪽에서 10세기 말 카자흐스탄 남부의 실크로드 도시인 Otrar 출신의 사전편집자 알자와리al-Jawhari는  hibriya 또는 밀로 만든 머리카락 비슷한 음식으로 itriyya를 정의했다. 





트라비아의 마지막 파스타 제조자

알이드리시가 중요하게 묘사한 팔레르모에서 약 30분 거리에 있는 시칠리아의 해안 마을인 Trabia에는 여전히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그가 서술했던 “커다란 자산”은 현재 세몰리나를 만드는 듀럼밀을 제분하던 곳과 함께 사라졌다. 20세기 중반 무렵 사라진 마지막 제분소가 있던 곳은 현재 세차장이 되었다. 그러나 트라비아의 중심거리 중간에 있는 불행한 작은 식당의 뒷방에서는 마을의 마지막 상업적 파스타 제조자가 아직도 주로 지역의 고객들을 위해 손으로 아넬리티와 탈리아텔레 같은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고 있다. 

“파스타 만들기는 아버지에게 배웠다”고 주인인 Matteo Barbera는 말한다. “나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만든다. 밀가루와 달걀, 물을 사용한다. 그것이 전부이다.” 밀가루는 서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1910년 카르텔다치아Casteldaccia에 설립된 산업화된 파스타 제조업체인 토마셀로Tomasello에서 사온다. 그러나 밀가루조차 더 이상 지역의 것이 아니다. 그건 주로 미국이나 러시아에서 섬으로 수입된 것이다. 

Barbera는 여전히 마을의 관광안내서에 해산물과 모과와 나란히 나오는 트라비아의 파스타라는 유산을 자랑스러워한다.

“파스타가 태어난 마을에서 나만 남아 있는 게 이상하다”고 그는 말한다. “내가 시칠리아인이지만 아랍인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며 웃음을 짓는다. 


트라비아에 있는 Matteo barbera의 카페. 집에서 요리한 시칠리아의 파스타 프레스카(달걀을 넣어 만든 신선한 파스타)를 포장할 수 있다고 광고하고 있다.





알이드리시의 묘사는 번영하고 있는 산업과 14세기 제노바의 북쪽으로 뻗어 있던 광범위한 무역망을 나타낸다. 확실하게 파스타를 언급한 이탈리아 최초의 문서는 제노아의 군인 Ponzio Bastone의 기록이다. 1279년의 것으로 판명된 문서에 그의 소유물로 “barixella una plena maccaronis(마카로니의 상자 전체)”라는 것이 나온다. 이는 나무상자에 저장하고 보존할 수 있는 말린 파스타인 파스타 세카를 뜻한다. 13세기 안달루시아의 저자 이븐 라진 알투지비Ibn Razin al-Tujibi는 자신의 책 Fadalat al-Khiwan fi Tayyibat al-Ta‘am wa’l-Alwan(식탁의 기쁨과 요리의 최고 유형)에서 이슬람 세계의 서쪽에서 사용된 다양한 유형의 파스타를 설명한다. 여기에는 파스타 프레스카의 요리법을 포함하여 주로 시장에서 구입한 상품을 가리키는 것도 나온다. 

또한 파스타는 시와 권세가의 음식이기도 했다. 투스카니의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io는 그의 고전적인 14세기 우화시 데카메론Decameron에서, "전체가 갈아 놓은 파르마산 치즈로 만들어진 산"의 동화 같은 경관을 묘사한다.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케로니maccheroni와 라비올리ravioli를 만들어 닭 육수로 그걸 요리한 다음 비탈 아래로 던진다."

잉글랜드의 왕 리차드Richard 2세의 부엌에서, 대가 요리사는 고전에 나오는 것처럼 갈아 놓은 치즈가 풍성하게 파스타를 장식했다. 익명의 영국인 저자의 14세기 왕실 요리책 <The Forme of Cury>에서는 “밀가루 반죽을 종이장처럼 만들어, 갈가리 잘라 그걸 끓는 물에 던졌다가 건져내라. 치즈를 가져다 갈아서, 그리고 버터를, 아래에 깔고 마치 losyns 같이 그 위에 얹어 내놓으라”고 조언한다. 'losyns'는 기본적으로 라자냐이고, 그 책의 losyns 요리법에서는 듀럼밀에 반대되는 빵밀 밀가루를 사용하라고 하는데, 요리하기 전 듀럼밀로만 할 수 있는 "단단하게 건조시키는" 것이 중요한 단계라고 언급하기에 파스타 프레스카를 가리키는 것 같다. 

(일부 학자들은 losyns, 곧 라자냐를 경질밀과 연질밀 모두를 사용하여 아몬드와 설탕, 장미향의 물을 넣어 만드는 종이장 같은 케이크를 가리키는 중세 아랍-페르시아의 단어인 lawzinaj와 연결시키려고 했다. 아랍에서 이러한 케이크의 대부분은 전형적으로 다이아몬드 모양의 조각으로 자른다. 동양학자 Maxime Rodinson은 영어 단어의 마름모꼴(lozenge)이 유래된 프랑스어의 losange과 이 아랍어 사이의 연계성을 살폈다.)

이러한 참고자료를 통해 중세 유럽에서 파스타는 귀중하고 값비싼 상품을 가리켰고, 일부는 지역에서 쉽게 이용할 수 없어 수입하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1900년 나폴리에서 햇빛에 파스타를 말리는 모습. 여기에서는 파스타를 tria라고 부르곤 했는데, 이 단어는 5세기 이후 레반트 지역에 알려진 밀가루 반죽으로 긴 가닥을 만들어 건조시킨 것을 뜻하는 단어 itria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 부모가 아랍인이었을까? 알이드리시가 시칠리아의 번창한 파스타 산업에 대해 적었을 때, 그는 아랍인이 도달하기 전에 존재하거나 그 전설이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아사드 이븐 알푸라트의 군함이 해안에 오면서 퍼진 것이 아니란 말인가? 실마리를 찾기 위해 초기의 요리책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것은 국내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 항구와 무역과 연결된 제품이었다”고 <이탈리아 요리Italian Cuisine: 문화의 역사A Cultural History>의 공저자인 Alberto Capatti는 이야기한다. 사실, Capatti는 19세기 산업혁명이 시작되기 전까지 파스타 제품은 이탈리아 반도에 그다지 널리 퍼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탈리아 북부인 롬바르디아 지역에서 성장한 Capatti는 파스타가 아니라 리조또(쌀)이 저녁 식탁의 주요리라고 지적했다.) 그때까지 파스타의 제조와 소비는 이탈리아 남부와 더 일반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폴리, 아풀리아와 가장 유명한 시칠리아가 이탈리아 파스타 산업의 발상지라고 Capatti는 생각한다. 

앞서 살펴본 알이드리시의 기록에서 파스타 세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아피기우스Apicius가 살았던 때와 13세기 유럽의 요리책에도 그와 비슷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랍 세계의 요리책에서는 아마 그보다 일찍이었겠는데 10세기 아바스 바그다드에 등장한다. 사실 “세계 어느 곳의 언어를 합한 것보다 아랍어로 된 요리책이 더 많았다”고 음식 역사학자이자 <이슬람 세계의 중세 요리Medieval Cuisine of the Islamic World>의 저자 Lilia Zaouali는 주장한다. 보통 kitab al-tibakh 또는 “요리의 책”이란 제목의 책들이 현대의 유명 요리사들처럼 그 저자와 연관하여 더 쉽게 알려졌다. 

최초로 알려진 아랍의 요리책 —그리고 처음으로 파스타를 언급한— 은 이븐 사야르 알와라크Ibn Sayyar al-Warraq라는 이름의 아바스 궁전 서기에 의해 10세기에 편집되었다. 8~9세기 칼리프와 법원 관리들의 요리법 모음에서 유래된 이 책은 페르시아어로 "미끄럽다"라는 뜻인 lakhsha라고 부르던 파스타에 관한 장이 특색이다. 거기에는 579년에 죽은 페르시아의 왕 호스로Khosrau의 통치 기간에 발명된 파스타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쌀쌀한 날씨에 사냥을 나간 호스로 왕은 그의 요리사에게 야생당나귀로 만든 뜨끈한 요리를 대령하라고 명령했다. 왕은 다시 생각하더니 “밀가루 반죽의 조각”을 국물에 넣으라고 제안했다. 기뻐한 군주가 “그것이 매우 맛있다는 것을 알고 3일 연속으로 그것 이외의 요리는 먹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확실히 민간전승인 반면, 알와라크의 책은 실질적인 파스타 요리법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네바테아의 닭을 포함해 “세 줌의 itriya”를 솥에 추가로 넣고 조리될 때까지 서서히 끓인다. 이건 확실히 파스타 세카를 가리키는 듯하다. 또한 초기 아랍의 파스타는 13세기 스페인계 무슬림의 요리책에 묘사된 것처럼 작고 곡물 또는 "고수 씨앗 같은" 쌀 모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건 곡물을 모방해 만들어졌고, 주로 국물에 사용되었”고, 이 모양은 또한 포장할 때 그 밀도를 최대화하여 더 휴대하기 좋게 만든 것이라고 Sabban은 지적한다.




튀니지 연관설

“이탈리아와 너무 가까이 있어서 피자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튀니지인 안내자 Hatem Bourial가 농담을 한다. 사실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및 북아프리카 해안지역 국가들의 근접성은 파스타 요리를 포함하여 상호 문화교류를 활발하게 만들었다. 튀니지는 실제로 로마에 있는 국제 파스타조직에 따르면 이탈리아와 베네수엘라 다음으로 세계 3위의 파스타 소비자이다. 

CINDY HOPKINS / ALAMY

“튀니지인은 거의 매일 파스타를 먹기에 이 통계가 놀랍지 않다. 아주 인기 있다”고 <튀니지의 이탈리아인The Italians of Tunisia: 공동체 이야기The Story of a Community>의 저자 Marinette Pendola는 말한다. 그녀는 튀니지에서 이탈리아인의 존재는 10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기간, 많은 이탈리아인이 파시즘과 전쟁, 빈곤으로부터 남쪽으로 탈출했고, 그들이 다양한 도시의 중심지에 공동체를 형성했다. 

파스타에 대한 그들의 취향과 함께 이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다양한 파스타 요리를 즐기는 북아프리카의 아랍인들에게서 동류의 영혼을 발견했다고 음식 작가 Clifford Wright는 철저하게 조사하여 작성한 <지중해의 진수성찬A Mediterranean Feast>에서 언급한다. 여전히 오늘날에도 그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요리는 다음과 같다. 

Rishta: 이것은 달걀 페투치네인데, 앙트레 또는 스프에 콩과 채소를 넣어 함께 즐긴다. 시리아와 레바논에서는 렌즈콩으로도 만든다. 

Duwayda: 이것은 2~3cm 길이의 조각으로 자른 버미첼리의 튀니지식 아랍어이다. 작은 고리 모양이 되면 시칠리아의 파스타인 아넬레티anelletti와 똑같은데, 상호 문화교류의 흔적이다. 

Hlalimtlitlu와 qat’a: 이것은 작곡 곡물 모양의 국물 파스타로 다양한 크기가 있으며, 때로는 쿠스쿠스처럼 찌기도 한다. 

Muhammas: 이것은 작은 파스타 공으로 쿠스쿠스의 한 종류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 이름은 아랍어의 hummus(병아리콩 육수)에서 유래하는데, muhammas는 후추 열매의 크기에 가까운 것도 있다. 구운 muhammas의 작은 공은 moghrebiyya라는 이름으로 팔리는데, 이는 북아프리카를 뜻하는 망그레브에서 온 것이다. 

Eddeoueida: 이 버미첼리 종류는 알제리령 사하라사막에서 유목하는 투아레그족이 이용하는 것으로, 이탈리아의 줄임말인 talia라고도 부른다. 



중세 시대에 걸쳐 유럽의 학자들은 아랍어 문헌을 번역하면서 영양학과 요리에 관한 수많은 책을 발견했다. 그러한 작업 중 하나가 11세기 바그다드의 기독교인 의사 이븐 부트란Ibn Butlan이 쓴 <Taqwim al-Sihha(건강 관리)>라는 광범위한 책이다. 이 책은 1258~1266년까지 시칠리아의 왕이었던 만프레드Manfred의 궁전이 있는 팔레르모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이후 14세기에 타퀴넘 사니타티스Tacuinum Sanitatis라는 라틴어 제목으로 화려한 삽화가 들어간 판이 롬바르디아에서 출간되었다. 그 요리법 가운데 하나가 두 여성이 파스타를 만들고 있는 상세한 그림과 함께 나오는 trij 또는 파스타이다. 반죽을 굴려서 긴 가닥을 만들어 선반에 걸어 말리고 있는 그림으로, 20세기 초까지도 그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림은 여기를 참조.)

아랍의 요리는 특히 이탈리아 요리에 헌신한 최초의 유럽 문헌인 13세기 후반의 <Liber de Coquina(요리에 관한 책)>에 독특한 풍미를 더했다. 라자냐만이 아니라 아랍에서 유래한 이름과 요리법을 가진 몇 가지 요리가 포함되어, 이 책을 쓴 익명의 저자가 초기 아랍의 문헌에서 요리법을 필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romania(rummaniya에서 왔거나 석류를 곁들인 닭), sumachia(summaqiya에서 온 옻나무와 아몬드를 넣은 닭), limonia(laymuniya에서 온 레몬을 곁들인 고기)가 포함된다.

15세기에, 파스타와 그 준비를 위한 상세한 요리법이 바티칸의 사서이자 르네상스의 인문학자인 바르톨로메오 사키Bartolomeo Sacchi가 이탈리아 "요리의 왕자"라고 별명을 붙인 코모의 요리사 Martino가 작성한 <Il Libro de Arte Coquinaria (요리의 기술에 관한 책)>에 나타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최초의 근대 이탈리아 요리책으로 간주되는 여기에서도, 저자는 파스타의 얇은 판을 triti처럼 긴 줄로 자른다고 언급함으로써 스타가 아랍에 뿌리를 두었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한다. 또한 이 책은 서쪽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지만 아랍과 페르시아의 최고급 요리에서는 일반적인 밀가루와 달걀 흰자 및 장미향의 물로 만드는 "시칠리아의 마카로니" 요리법을 포함하고 있다. 이 값비싼 향이 나는 재료가 파스타 세카의 가치를 더하는 증거이다. 장미향의 물은 일반 가정보다 왕실의 부엌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Martino는 독자들에게 반죽을 “손바닥 크기에 머리카락 굵기를 지닌” 긴 가닥으로 잘라서 따뜻하고 건조한 “8월의 달 아래에서” 치료하는 데 썼다고 알려준다. 

그러나 손으로 만드는 파스타가 좋아 보이지만, 일반적인 르네상스의 요리 방식에서는 학대에 가까웠다. Martino의 요리법은 “이 마카로니는 두 시간 동안 서서히 끓여야 한다”고 맺고 있다. (바르톨로메오 사키는 그 점에 동의하지 않았다. 자신의 1475년 출간된 세계 최초의 인쇄된 요리책이자 많은 인기를 얻은 <De Honesta Voluptate et Valetudine[고상한 기쁨과 좋은 건강]>에서, 그는 일부 파스타만 적당히 씹히는 감이 있어 오랜 시간 조리해야 한다고 소개했다.”)

“마르티노에 따르면, 그래서 오랜 시간 조리하는 영국과 독일의 방식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진짜 오래된 방법이다”라고 이탈리아 요리책의 저자이자 강사인 로렌자 드 메디치Lorenza de’ Medici가 설립한 투스카니에 있는 요리학교의 요리사이자 이탈리아 요리책의 저자 Andrea Gagnesi는 웃음을 짓는다. Gagnesi는 마르티노의 또 다른 혁신은 맨손으로 집기에는 너무 뜨거워서 포크로 삶은 파스타를 먹은 것이라고 한다.


로스엔젤레스의 1970년대 길거리 광고판에서 가장 일반적인 근대적 형태의 파스타를 보여준다. 대용량, 셀로판 포장이 된 스파게티 묶음.



푹 익힌 걸 선호하든 씹히는 감이 있는 걸 선호하든지, 근대의 이탈리아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중동에서 기원했던 것보다 삼키기 더 쉬운 파스타를 좋아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아랍 세계의 사람들이 서쪽에 파스타와 그 제조기술을 보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상당한 증거가 있다. 이 증거는 또한 앞에서 제기한 세 가지 질문에 대한 가장 강력한 답을 제공한다. 파스타의 핵심 곡물인 듀럼밀은 메소포타미아부터 시리아와 이집트, 북아프리카 및 무슬림의 시칠리아까지 아랍 세계 전역의 일반적인 작물이었다. 아랍의 요리책은 처음으로 건조하고 보존할 수 있는 형태로 세몰리나 반죽을 만들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물에 그 형태를 요리한다고 알려진 최초의 자료를 제공한 사람은 예루살렘의 학자의 기록이다. 

파스타가 이탈리아와 먼 곳에서 기원했는데 오늘날에는 이탈리아의 것으로 인식되는 것일까? 일부 음식 역사학자들은 최초의 파스타가 손쉽게 휴대할 수 있는 음식 재료에 의존하던 사막에 거주하는 아랍 유목민의 혁신이었다고 제시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 가설에 의문을 제기하여, 듀럼밀을 정기적으로 공급받으며 그것을 제분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며 그건 유목민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음식 작가 Clifford Wright는 절충안을 제시한다. 파스타 세카는 북아프리카를 가로질러 행군하던 중세 아랍의 군대와 함께 서쪽으로 왔다. 그것은 결국 편리하고 속을 채우는 식료품이 되었고, 낙타의 등이나 선박에도 쉽게 실어 운송할 수 있었다. 그 중 일부가 12세기 이전에 시칠리아의 해안을 따라 정박하여 내려졌다. 



오역과 의역이 난무하니 아래를 참조하세요.

http://www.saudiaramcoworld.com/issue/201301/pasta.s.winding.way.west.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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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년부터 1933년도까지의 쌀생산과 관련한 당시 일본인의 논문이 있어 그 논문에서의 그 자료를 가져왔습니다.

년도

쌀생산량

(만석)

단보당

생산량(석)

일본반출량

(만석)

반출율

조선내

쌀소비량(만석)

1인당 연간 쌀소비량(석)

일본

조선

1914

1,413

0.952

114

8%

1,299

0.98

0.69

1915

1,285

0.858

221

17%

1,064

1.11

0.72

1916

1,393

0.917

126

9%

1,268

1.08

0.68

1917

1,369

0.895

113

8%

1,256

1.13

0.73

1918

1,529

0.988

206

13%

1,323

1.14

0.68

1919

1,271

0.826

280

22%

  991

1.13

0.73

1920

1,488

0.957

199

13%

1,290

1.12

0.62

1921

1,432

0.935

339

24%

1,094

1.15

0.66

1922

1,501

0.964

314

21%

1,188

1.10

0.65

1923

1,518

0.979

405

27%

1,112

1.16

0.63

1924

1,322

0.839

486

37%

  836

1.12

0.60

1925

1,477

0.932

475

32%

1,003

1.13

0.52

1926

1,530

0.964

578

38%

  953

1.13

0.53

1927

1,730

1.080

646

37%

1,084

1.10

0.52

1928

1,351

0.890

701

52%

  650

1.13

0.54

1929

1,370

0.840

578

42%

  792

1.10

0.45

1930

1,918

1.154

516

27%

1,402

1.08

0.45

1931

1,587

0.948

903

57%

  685

1.13

0.52

1932

1,635

0.995

748

46%

  887

1.01

0.41

1933

1,819

1.072

789

43%

1,031

1.10

0.41

 

자료에 의하면 친일반역사상의 헛소리에도 불구하고 단위면적당 쌀의 생산량은 거의 증가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왜놈들은 늘어나는 조선의 농민들을 더 노동집약적(!) 농사를 시켜

묵힌땅의 개간 등으로 쌀 농사가 가능한 논을 더 많이 확보했다고 합니다.

물론 조선인의 땅이 아니라 왜놈들의 땅으로 말입니다.

이렇게해서 더 늘어난 농지로 인하여 초기에 비해 좀 더 생산된 쌀을 모조리 일본으로 가져갑니다.

조선에서 생산된 쌀의 절반이나 왜놈들이 가져갑니다.

 

친일반역사상에서는 일본으로 쌀을 수출하여 농민들이 돈벌었다는데 헛소립니다.

일제식민지하에서 농사지어서 돈벌었다면 추운 만주땅에 농사지으러 떠나는 사람들은 바보였을까요?

 

이 시기를 지나면서 조선인 자작농의 숫자는 줄어들고 소장농은 늘어만 갑니다.

일하는 농민의 숫자는 늘어나는데 조선내 쌀 소비량을 보면 조선인들이 1년간 소비하는 쌀의 총량은 더 줄어듭니다.

마찬가지로 1인당 연간 쌀소비량의 급격히 감소 합니다.

 

biin님이 식민지 조선에서는 쌀이 넘쳐났다고 주장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친일반역자들을 제외하고는 굶주릴 수 밖에 없었고

갈수록 소작쟁의가 늘어나는 이유가 통계자료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위 통계에서 빠진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일제 강점 초기에는 관의 눈을 피해 살아가는

소규모 자작농들의 수확과 소비가 빠져있습니다.

이때 빠진 통계는 나중에 거의 대부분 포함하게됩니다.

실제로는 변화가 없어도 통계상으로는 변화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다음 그래프는 일제시대 경지면적의 증가에 관한 것입니다.

총독부의 통계연보에 나오는 수치에 의한 경지면적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는 경사도가 급합니다. 경지면적이 82%가 증가되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아주 완만한 증가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불도저로 산을 깍아서 논밭을 만든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급작스레 늘었을까요?

1918년은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이 완료되는 해 입니다.

 

친일반역사상가들은 이것을 토대로 일본의 도움으로 토지가 이만큼 늘었다고 개소리를 합니다.

인구증가에서도 마찬가지 설명이 있겠지만 일제강점기의 초기에는 왜놈들이 조선의 구석구석을 세밀하게 장악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토지나 인구에 있어서 누락분이 많았던 것입니다.

 

통계에 잡히지 않았던 것이 뒤늦게 토지대장에 등록되면서 통계수치만 늘어난 것입니다.

엉터리 통계로 경지면적을 일본이 늘려줬으니 고마워하라고 헛소리를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며칠전 신문에 우리나라에 토지대장에 등록되지 않은 주인없는 섬 1419개가  토지대장에 등록시킨다고 합니다. 이중에는 6만평이나 되는 섬도 있다고 하더군요. 이 섬들을 등록하면 없는 땅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 되나요?

 

다음으로 일제 강점기 기간동안 조선의 인구가 2배나 늘었다는 거짓주장을 박박합니다.

 

조선시대에는 근대적인 인구조사가 없었습니다.

호패제도가 있었기는 하지만 이는 군역 등 을 위한 것이지 인구통계 등이 목적일 수 없었고

관을 피해 살아가는 하층민들은 대량으로 누락될 수 밖에 없었기에 정확성을 믿기가 힘이듭니다.

 

일제는 조선을 점령한 후 년말상주인구를 매년추계치로 작성하였습니다.

변동사항을 바탕으로 조사하는 것이며, 조선총독부가 초기에는 전국적인 수준에서의

행정장악력이 부족하였기에 누락된 인구가 많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1925년에 이러러 근대적인 인구조사인 조선국세(國勢)조사를 하기시작하면서 정확성을 갖추게 됩니다.

 

 

년말상주인구

(추계치)

5년간 증가율

국세조사

1910

13,128

 - 

 

1915

15,957

22%

 

1920

16,916

6%

 

1925

18,543

10%

19,020

1930

19,685

6%

20,438

1935

21,248

8%

22,208

1940

22,954

8%

23,547

단위 천명

 

표에서와 같이 2925년이 되어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지 15년이 지난뒤에도 
두가지 인구조사는 5%에 가까운 오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1910년에서 1915년까지 5년 사이에 무려 22%라는 엄청난 인구 증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 인구가 5년사이에 22%가 증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멍청한 짓입니다.

 

일제강점 초기에 전국의 방방곡곡을 세밀하게 장악하지못한 일본인들이 초기에 잘못된 인구총계를 만들었고 5년뒤에는 1010년의 기록에서 빠진 인원중 상당수가 포함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부 친일반역사상을 선동하는 자들은 일제강점 초기의 부실한 data를 이용하여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인구가 2배나 늘었으니 일본에게 감사하라는 개소리를 합니다.

 

초기 data가 부정확하다는 것을 알고있는 일본과 한국의 학자들의 일제강점 초기의 인구를 여러가지 자료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추정하고 있습니다.

년도

석남국

김철

권태환

(신용하)

국세조사

1900

 

 

17,082

 

1905

 

 

 

 

1906

 

14,733

 

 

1910

15,474

16,309

17,427

 

1915

16,484

17,027

17,656

 

1920

17,532

17,629

18,072

 

1925

18,797

19,020

19,020

19,020

1930

20,218

20,438

20,438

20,438

1935

21,890

22,208

22,208

22,208

1940

23,341

23,547

23,547

23,547

1944

24,917

25,120

25,120

 

인구증가

61%

54%

44%

 

단위 천명, 2001년 길인성의 논문에서 재인용 함.

석남국 : 1966년 일본 논문

김철 : 1965년 일본 논문

권태환, 신용하 : 1977년

 

일제하의 가장 믿을 수 있는 인구조사인 국세조사와 함께 검토해봤을때 
석남국의 주장은 사실과 가장 많이 떨어진 것입니다.

 

김철의 주장은 일제 강점기 기간동안 54%의 인구증가가 있었고

권태환의 주장에는 44%의 인구증가가 있다고 추정하였습니다.

요즘은 학계에서 여러가지 다른 방법으로 인구변화를 추정하고 있습니다만

가장 권위를 인정해주는 것은 권태환과 신용하(유명하신분이죠)의 추정치입니다.

 

이미 오래전에 식민지시기의 인구증가가 2배라는 것은 엉터리라는 것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친일반역선동가들은 일본제국주의의 조선 강점을 찬양하기위해 엉터리 수치를 내세우는 것입니다.

 

http://m.blog.daum.net/_blog/_m/articleView.do?blogid=02UG8&articleno=11827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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