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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2


기고1


중세에 묘사된 쌀 문화        -키무라 에미木村榮美





시작하며


일본인에게 쌀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신앙의 대상으로, 정치적 수단으로, 또한 일상다반日常茶飯이라 하듯이 식생활 속에서 빠질수 없는 중요한 먹을거리로서 오늘날까지 활용되어 왔다. 일상다반이란 말이 언제부터 이야기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9세기 중엽 천태종의 승려 엔닌円仁(794-864년)이 지었던 <입당 구법 순례행기>에는 당나라 만기 당시의 사회 풍습, 불교의 모습 등에 대하여 기술하면서 사원 등에서 반차飯茶나 다반이 나왔던 것을 적어 남기어, 차와 밥을 식사의 형태로 넣었던 걸 엿볼 수 있다. 또한 중세 선승의 일기 등에는 '다반'이 빈번하게 쓰여, 17세기 초에 성립한 <일포日葡 사전>에 '다반'은 없어서는 안 된다는 뜻의 단어로 올라가 있다. 이것으로부터 사원을 중심으로 일상의 식생활 속에서 차와 함께 밥은 빠질 수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


이 기고에서는 중세의 식사 풍경을 묘사한 대표적인 회화자료를 소개하면서 공가公家, 무가武家, 사원, 서민의 밥이 식사 가운데 어떠한 자리매김에 있었는지, 먹는 쪽의 시점에서 일본인의 쌀에 대한 의식을 탐구해 보고자 한다. 다만 회하에 묘사되었던 밥이 반드시 쌀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점을 미리 알리는 바이다.



공식의 밥 요리


밥이라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비련의 귀공자로 알려진 아리마有間 황자(640-658)가 읊었던 시가이다. 


집에 있다면 밥그릇에 담은 밥을

여행에 나섰다면 모밀잣나무 잎에 담는다


이 노래는 아리마 황자가 모반의 이유로 사이메이斉明 천황이 목욕 치료차 가는 기온천紀溫泉(현재 와카야마현 시라하마초白浜町 유자키湯崎)으로 호송되면서 읊었다고 한다. 이윽고 그는 교살되어 그 목숨은 이슬로 사라진다. 이 노래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었는데, 가장 유력한 건 행선지의 부자유를 읊었다는 설, 죽음의 여로에 대한 각오와 아직 버리지 못한 야망 때문에 한 가닥의 희망을 신에게 기탁하며 밥을 바치는 신찬설이다. 이 노래가 중요한 점은 밥을 집에서는 밥그릇이란 식기에 담는 데 반하여, 여로에서는 모밀잣나무의 잎에 담는다는 부분이다. 죽음을눈앞에 두고도 우선 밥을 집어 든다. 이 노래에서는 밥이 일상의 식생활 속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먹을거리인 한편, 여행이란 비일상적인 생활에서도 빠질 수 없는 먹을거리였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더구나 이때 아리마 황자의 경우에서 추측하면 살아 있는 양식이란 현실과 공물이란 비현실의 대비가 밥에 들어가 있었던 게 아닐까?


아리마 황자의 일종의 신성한 노래에 반하여, 야마노우에 노쿠라山上憶良(660-733)는 "아궁이에는 불을 불어 올리지 않고, 시루에는 거미줄이 쳐져 밥을 짓는 일도 잊어서"라고 읊는 것으로부터 하급 관료의 빈곤이란 현실적인 실정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시루를 사용하여 아궁이에서 밥을 짓는다는 걸 알 수 있는데, 그것이 메벼인지 찰벼인지, 또는 보리인지 조인지 피인지, 어떤 밥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공가는 어떤 밥을 먹었을까?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시루로 찐 찰밥을 정식 주식으로 삼았다. 찰밥은 오늘날 지에밥의 원형이 된다. 12세기 후반에 성립된 "연중행사 두루마리 그림" <류취잡요초類聚雜要抄>에서 대향大饗이라 불렸던 궁중 향연의 식사 자리를 볼 수 있다. 여기에서는 향연의 밥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여러 연구가 있어 특별히 기술하지 않는다. 이 글의 주제인 밥에만 초점을 맞추면, 예를 들어 "연중행사 두루마리 그림" 권6의 정월 2일 중궁의 향례를 받는 장면에서 대반台盤이라 불리는 주홍색을 칠한 식탁 같은 상 위에 밥을 중심으로한 요리가 묘사되어 있다. 밥은 고봉이라 부르며, 상당히 높고 아래쪽이 퍼져가는 가늘고 길며 아름다운 원뿔꼴로 담겨 있는 점이 특징이다. 이것은 전부 먹는 건 아니다. 이 밥의 주변에는 다섯 종류 정도의 작은 접시가 묘사되어 있는데, "류취잡요초"에는 향연의 밥상 배치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이 묘사되어 밥 주위에 술, 식초, 소금, 장 같은 조미료, 또는 해파리, 멍게 등 해초류와 패류 같은 먹을거리가 첨가되어 있다. 요리에는 식재료 자체의 맛 이외에는 거의 없어서, 요리의 맛에 변화를 첨가하려는 조미료와 채소나 해초 반찬이 덧붙여졌을 것이다. 조미료가 더해지지 않는다는 건 요리와 밥 그것의 본래 맛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봉밥은 그다지 젓가락을 대도록 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정월 18일에 행해지는 활쏘기 장면에서는 흰나무에 받침을 댄 형중衝重이라 부르는 밥상 위에 고봉밥 두 공기가 준비되어 있는 것이 단숨에 눈을 끈다. 


경사스런 자리의 식사에 반하여 공가의 일상적인 식사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한 예로 <금석물어집今昔物語集>의 "3條 중납언中納言, 물에 만 밥을 먹은 이야기"의 내용을 보고자 한다. 여기에서는 식이 조절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한 공가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3조 중납언이란 후지와라노 아사히라藤原朝成(?-974)라는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 후지와라 사다카타藤原定方(873-932)는 가인으로서, 백인일수百人一首에 뽑혀 있는 "명실상부하다면 봉판산坂山의 남오미자 사람에게 알려져 오지 마라"를 읊은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아사히라는 학식, 예술에 뛰어난 인물로도 널리 알려졌는데, 비만으로 몸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의사인 와케씨和氣氏에게 식이 조절의 방법을 물으니 겨울은 더운물에 만 밥, 여름은 물에 만 밥을 먹으라는 충고에 따라 식이 조절을 시작했는데, 효과는 나타나지 않는다. 재차 와케씨에게 조언을 구한 바, 와케씨는 아사히라의 식사를 관찰했다. 시기는 6월, 아사히라는 의사의 충고에 따라 여름에는 물에 만 밥을 먹고는 있었다. 그러나 평소 호사스런 식사를 먹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에 만 밥만으로는 어딘가 부족해 부식으로 하얗게 말린 9cm의 오이를 10조각, 은어 초밥 30개 정도를 시중을 드는 사무라이에게 가지고 오게 한다. 또한 아사히라는 빨리 먹고 많이 먹어서, 그 복스럽게 먹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던 와케씨는 기가 막혀 물러가고, 그 상태를 사람들에게 이야기로 전하여 웃음거리로 만들었다. 아사히라는 더욱더 뚱뚱해져 씨름꾼처럼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일화에서는 공가의 식사에서 급사를 하는 것이 사무라이라는 점과 금은의 식기를 사용하는 점도 주목되고, 공가의 일상적인 식사 모습을 살짝 엿볼 수 있다. 물에 만 밥은 밥에 물을 부은 차즈케茶漬け이다. 공가는 늘 수분이 많고 부드러운 밥이 아니라, 단단한 밥을 먹었을 것이다. 차즈케는 배도 부르고소화도 잘 된다. 밥에 물을 부어 먹는 건 <원씨물어源氏物語>의 "상하常夏"에도 기록되어 있어, 식이 조절용만이 아니라 더운 여름에 식욕을 돋우는 궁리가 당시에 있었을 것이다. 또한 아사히라는 은어 초밥을 밥과 함께 먹고 있다. <원씨물어>에도 초밥이 아니지만 밥에 은어를 제공하며, 여름에 은어라는 계절감도 엿보는 것과 동시에 밥과물고기라는 조합은 일상적인 먹을거리 양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금 양에 덜 차게 먹는다는 걸 옛날부터 지금까지 참을 수 없는 사람은 역시 비만을 해소할 수 없다. 사치스런 식사 때문에 비만으로 괴로워하고, 식이 조절을시도하는 귀족의 모습은 현대도 변하지 않는다.


한편 무가에서 밥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치조 카네요시一条兼良(1403-1481)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주반론酒飯論>은 술의 덕을 칭송하는 조주정造酒正 조옥조신糟屋朝臣 나가모치長持 밥의 덕을 칭송하는 반실율사飯室律師 코우한好飯이란 인물의 술과 밥의 의론에 중호中戸의 중좌위문대부中左衛門大夫 나카하라 나카나리中原仲成가 중재하여수양하는 이야기 구성으로, 이와 같은 작품은 이외에 란슈쿠 겐쥬蘭叔玄秀(?-1580)가 지었던 <주차론酒茶論>이 있다. 또한 근세에 들어가면 <주병론酒餠論> 같은 작품도 성립한다.


그런데 이들 작품은 술 같은 기호품에 대하여 밥과 차, 떡으로 의론하고 있는 점이 재미있다. 옛날부터 현재까지 술은 경사스런 자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음료인데, 중세에는 차도 향연의 장에서 중요한 음료가 되어 술과동격으로 취급된다. 게다가 대항하는 술은 그 원료를 쌀로 하고, 대조되는 밥과 떡은 여러 식사 속에서 주식이 되는 먹을거리이다. 이에 반하여 차는 주식이 아니라 술과 같이 기호품이 되는 데도 불구하고 밥, 떡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중요한 자리매김을 한다. 


<주반론 두루마리 그림>에서는 술의 중호中戸는 무가, 하호下戸는 승려, 그리고 상호上戸는 승려와 속인 사이의 각각의 향연 풍경을 묘사하여, 밥은 중호와 하호에 묘사되며 상호의 주연 장면에서는 단지 술만 나와 승려도 무가도 술을 마시고 가무하는 광경 속에 밥은 묘사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본문 안에는 술을 너무 마셔 의식을 잃었을때, 그 취함을 깨우기 위한 것의 하나로 밤죽을 들고 있다. 


중세의, 특히 요리에 관한 회화자료의 특징은 향연 풍경만이 아니라 어느 것이나 급사인들이 바지런히 요리를 준비하고 있는 주방 장면이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무가의 향연 풍경을 묘사한 중호는 주인의 향연 자리, 그 옆의방에서 술 또는 과일 등을 준비하는 장소, 그리고 요리를 준비하는 주방이라는 세 가지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향연의 자리에서는 주인, 손님과 함께 오시키라 부르는 네모난 쟁반이 일지선一之膳, 이지선二之膳이라고 두 상이 나오고, 주인의 아내인 것 같은 부인이 술을 손으로 잡아끌고 있다. 일지선에는 주홍색 공기에 밥, 국, 작은 주발, 회, 게다가 청자인 듯한 그릇이 나란히 늘어서, 향연 요리의 기본이 되는 국 하나 채소 셋인 것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장면에 묘사되어 있는 밥은 고봉밥이 아니라, 후술한 하호의 고봉밥과는 다르다. 또한 한 사람의 무사가 밥에 국 같은 걸 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밥에 국을 부어 먹는 건 고양이밥이라고 혐오하는 사람도 있는데, 옛날부터 현재까지 이러한 식사 방법은 공가들에서 행해지고 있다. 효겐保元의 난에서 세력 다툼에 패하여 도망간 후지와라 요리나가藤原頼長(1120-1156)가 지었던 <태기台記>에서는 보연保延 2년(1136) 10월 16일 우근위대장右近衛大將에 부임한 첫날의 향응에서 "다음 사람들 밥을 국에 말아서 먹고, 다음 탕을 마신다"고 적어 기록한 것으로부터, 아마 밥은 딱딱하게 짓고 거기에 국을 부어서 먹은 것은 물론이고 정식 식사법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한편 주방에서는 새와 물고기를 가르는 모습도 묘사되어, 이것으로부터 조리되어 상에 내갔을 것이다. 


무가는 싸우러 가는데, 전장에서 식사는 어떤 것이었을까? 14세기 중엽에 성립된 <후3년 합전 두루마리 그림>은오슈 키요하라奥州淸原 씨의 내분에 미나모토 요시이에源義家(1039-1106)가 개입하여 진정시킨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배가 고파서는 싸움을 할 수 없다"라는 속담대로 전장에서도 당연히 식사가 준비되어, 두루마리 그림의 상권에는 요시이에의 진영에서 고전하는 요시이에를 위하여 급히 달려간 동생 미나모토 요시미츠(1045-1127)가 요시이에와 대면하고 있는 장면(그림1)에서 굽다리 접시를 사용하고, 그 한가운데에 고봉밥, 그 주변에는 반찬류로 은어를 소금에 절여 누름돌로 누른 오시아유押鮎로 생각되는 먹을거리를 올린 쟁반 등 여섯 종류 이상이 늘어서 있다. 이 그림에는 전장임에도 불구하고 대장의 동생을 환영하기 위한 요리인지, 진영의 밖에서는 물고기와 새를 가르는 풍경도 묘사되어 있다. 또한 전투가 한창임에도 불구하고 충중衝重 같은 쟁반 한가운데에 고봉밥, 그 주변에는 역시 오시아유 등의 가공된 요리를 늘어놓고 식사를 하고 있는 풍경도 묘사되어 있다. 전투의 짬도 미신에 사로잡힌 건지, 또는 정력을 돋우기 위해서인지 밥을 중심으로 한 식사를 하고 있는 걸 엿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식사 형태는 조금 더 상세히 분석할 필요가 있는데, "연중행사 두루마리 그림"이나 <류취잡요초>에서 공가의 향연에 나오는 밥상과 거의 변하지 않았으며, 무가라고 하더라도 아직 공가풍을 이상으로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밥을 담는 방법은 공가가 아름답고 아래쪽이 퍼지는 원뿔형의 고봉이었던 데 반하여, 이 두루마리 그림에서는 크고 둥근 산 모양으로 담아 젓가락을 대고 있는지 아닌지 분간할 수는 없지만 밥의 일부는 떠낸 모양이 되어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그림1 <후3년 합전 두루마리 그림> 도쿄 국립박물관 소장




사원의 밥 요리


일본인에게 쌀은 신과 부처에게 드리는 공물이란 의식이 강하다. 15세기 무렵에 성립한 '모귀慕歸 두루마리 글'에는 아미타불에게 드리는 공물이 묘사되어 있어, 그중에서도 유달리 큰 원뿔형의 하얀 것이 있다. 단언할 수 없지만 그 형태로부터 아마 이건 밥이 아닐까 추측한다. 똑같이 중세에 성립한 '읍부동연기泣不動縁起 두루마리 그림'에는 저 유명한 음양사 아베 세이메이安部淸明(921-1005)가 묘사되어 있다. '읍부동연기 두루마리 그림'은 삼정사三井寺에 얽힌 부동명왕의 대역 영험기로, 세이메이는 중병에 걸린 삼정사의 승려 치코우智興의 병이 낫도록 하기 위하여 태산부군에게 기도한다. 그 세이메이가 기도를 하고 있는 장면에는 제단 위에 알 모양을 한 고봉의 공물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것도 아마 밥일 것이다.


한편 중세의 사원은 요리의 보고이다. 특히 선원의 영향은 두드러진다. 후세 선원이 정진 요리, 차 마시기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는 그 요인은, 정식 국교가 없었던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와 외교적 역할을 담당한 것이 선승이며, 중국의 풍습을 가장 빨리 수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선원에서 하는 식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일본 조동종曹洞宗의 개조 도겐道元(1200-1253)의 '부죽반법赴粥飯法'을 빼놓을 수 없지만, 그건 다른 기회에 하고자 한다.


'모귀 두루마리 글'은 신란의 손자, 본원사本願寺 3세 각여覚如(1270-1351)의 일생을 묘사한 작품으로, 사원의 일상생활, 향연, 유연遊宴의 식사와 게다가 중세에 보급된 차 마시기 문화의 모습을 가장 잘 묘사하고 있는 회화 자료로도 유명하다. 제2권에는 각여가 스승인 정진浄珍의 시동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묘사되어, 향응의 밥상을 대접하고 있다. 주인공의 앞에는 두 개의 형중이 놓여 있다. 하나의 형중에는 밥이라 생각되는 그릇을 중심으로 국 하나와 채소 세 개 같은 요리가 늘어서 있고, 다른 하나의 형중에는 두 개의 그릇이 늘어서 있다. 여기에서 묘사되어 있는 밥은 고봉밥이 아니고 적당량을 담아 먹기 위한 밥일 것이다. 급사인 승려가 거듭 형중을 나르고 있다.주방에서는 식사를 준비하는 불목하니가 밥을 그러모으는 모습도 있고, 향응으로 주방의 정신없는 모습을 생생히묘사하고 있다. 이 주방에서는 고봉밥 같은 것 이외에 면류로 생각되는 먹을거리도 묘사되어, 밥에도 면에도 젓가락을 찌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그림2).



그림2 모귀 두루마리 글




'모귀 두루마리 글'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은 제5권의 렌가連歌 모임 부분으로, 여기는 아직 요리를 내오기 이전이라 추측되고 주방에서는 요리의 준비에 여념이 없다. 유연의 장면과 주방의 사이에는 큰 풍로에 가마솥이 걸려 있고, 급사인 승려는 점심이라 생각되는 먹을거리를 수북하게 쌓은 쟁반을 나른다. 점심이란 본래 정식 식사의 틈에 먹는 가벼운 식사란 뜻이었는데, 차차 향응의 식사 형태로 편입되어 다양한 종류가 만들어진다. 편지의 왕래 형식을 취한 교훈서 <정훈왕래庭訓往來>는 앞의 <주반론>과 거의 동시기쯤에 성립되는데, 점심이라 부르는 것으로 고깃국 종류, 우동, 만두, 소면, 기시면, 권병卷餠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점심류에 포함되는 면과 떡은밀을 원료로 하고, 그 형상도 현재와는 아마 다를 것이다. 예를 들면, 기시면은 지금 나고야 명산인 기시면이 아니라, 밀가루를 반죽하여 당고 모양으로 만든 것, 권병도 떡이라 부르면서 찹쌀을 원료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밀가루를 써서 만든다. 


주방에서는 국을 준비하는 불목하니, 또는 물고기를 처리하는 일반 요리인 같은 인물도 있고, 옆쪽의 이로리囲炉裏에는 무언가 지피고 있다. 이중에서 특히 주목되는 건 밥은 묘사되어 있지 않고 면류가 준비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편 권6에도 북야사北野社의 시가회 이후에 열린 향연의 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시동을 상대하고 있는 공가의 앞에 형중이 놓여 있고, 밥을 중심으로 국 하나 채소 셋이라 생각되는 요리의 접시가 늘어서 있다. 기둥을 사이에 두고 요리를 준비하는 곳에서는 면류와 만두, 또는 떡 같은 것이 늘어서 있다. 또한 젊은 불목하니는 볏짚으로 감싼 먹을거리를 넣은 그릇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띠나 대나무 잎으로 말아서 찐 떡(치마키)이라 생각된다. 


앞의 '주반론 두루마리 그림'에서 하호의 장면은 승려가 향연하는 풍경으로, 세 가지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하나는 주인인 주지가 식사를 하는 풍경, 인접한 방에서는 차를 끓이는 풍경, 그리고 주방에서는 식사를 준비하는 급사인 승려들의 모습도 묘사되어 있다. 이것 이외에 '주반론 두루마리 그림'에는 하호의 요리를 사전준비하는 것으로 추측되는 장면이 있는데, 절구로 차를 빻는 승려와 세 명의 승려가 쌀을 선별하고 체질하며 정제하고 있는 모습도 묘사되어 있다(그림3). 정식 무대가 되는 주지들의 식사에 대해서는 그 요리의 내용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국 하나 채소 셋과 같이 늘어서 있던 일지선, 이지선 같은 형중을 배치하고 있는 점은 밥상이 다른 것 말고는 앞의 중호와 공통된다. 그러나 술은 전혀 없으며, 모두 밥 종류와 콩 종류처럼 보이고, 모두가 그릇에서 비어져 나오게 산처럼 담겨 있다. 특히 일지선의 밥은 쌀알이 묘사되어 생생하다. 다른 한쪽의 밥상도 역시 밥 종류, 또는 콩 종류 같이 보인다. 게다가 급사인 승려가 고봉밥, 시동이 국 같은 것을 나르고 있다. 하호의 본문에는 


특별한 축하의 자리에서도, 우선은 당신을, 드시게 한다, 관례(元服), 이사, 데릴사위 맞이의 축하에 어느 것은 재료, 대신의 대향, 행함은, かいこうにたに, 有かたし

두 개 세 개, 다섯 개 나오고, すへ御れう, 본반복반本飯復飯, 알 주먹밥, わか御料, 구슬을 얼핏 본다, き御料, 조밥의 색은, 미타리와, 닮았다 

복숭아꽃의 잔치에 빨간 밥, 꽃의 색이, 비친다, 여름은 시원하고, おほえける, 보리의 밥도, 진귀하다, 지장 머리의, 고봉밥은, 육도六道로 쌓여, 믿음직하다 


라고 그 대부분이 밥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사서詞書에는 성구의 음에 맞추어 뜻이 같지 않은 말을 만드는 언어유희도 있는데, 이 대문에서 밥에는 조와 보리도 포함되었다고 추측되어 쌀 이외의 다양한 밥 요리가 제공되었을 것이다. 조는 마타리의 색에 비유해 그 색채는 누런색이지만, 또는 미타리의 별칭 '아와바나'의 아와에 조, '오미나메시おみなめし'의 메시에 밥을 상정하고 있다고도 추측된다. 또한 알 주먹밥은 새의 알 같은 모양을 한 주먹밥, 복숭아꽃의 잔치에 있는 빨간 밥은 '꽃의 색도 비친다'고 하는 것으로부터 아마 벚꽃과 닮은 연분홍이고, 그것은 지금의 붉은밥에 해당하는 것이라 추측되며, 주먹밥과 빨간 밥도 향은에 나왔을 것이다. 여기에서 특히 주목되는 건 밥을 담는 방식에 대해서이다. 이 밥을 높이 담는다는 의식은 앞에 기술했던 궁중의 향연과 공통되는데, 궁중의 향연에서 밥은 말끔한 원뿔형으로 담았던 데 반하여, 여기에서는 둥근 산 모양으로 묘사되고 있는 점이 다르다. <주반론>의 본문에는 고봉밥을 '지장의 머리'에 비유하고 있는 것에서, 지장보살의 머리를 영상화하여 밥을 담았던 걸 엿볼 수 있다. 밥을 먹는 것이 곧 신과 부처에게 받은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그림3 '주반론酒飯論 두루마리 그림'




이 하호의 요리에는 밥 이후에 떡도 준비되고 있었는데, 쑥떡과 절편, 송편, 좁쌀떡, 치마키, 음력 10월 첫번째 돼지의 날 먹는 떡, 거울떡(가가미모치) 등 종류가 다양하다. 주방에 묘사되어 있는 먹을거리 가운데 떡을 판별하는 건 어렵지만, 한 명의 승려가 쥐고 있는 건 속에 팥을 넣은 떡일까? 그 승려 뒤쪽의 선반에도 여러 가지 먹을거리가 늘어서 있어, 아래 단에는 치마키도 묘사되어 있다(그림4). <주반론>의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묘사되어 있는 먹을거리에서 점심으로 만두류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건 상상하기에 어렵지 않다. 기타 가지, 오이 등과 같은 채소도 묘사되어 있는데, 이 하호에는 중호의 장면과 달리 새와 육류를 조리하고 있는 모습은 엿볼 수 없다. 




그림4 '주반론 두루마리 그림'(부분)




이러한 중세 사원의 식사는 밥만이 아니라 다양한 식재료가 채용되어 가공해서 떡, 가루를 재료로 만든 먹을거리도 많이 먹게 되었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주식은 어디까지나 밥 종류이고, 떡과 가루로 만든 먹을거리는 디저트 같은 부식이었다고 생각한다.





서민의 밥 요리


지금까지 본 '모귀 두루마리 글'이나 '주반론 두루마리 그림'에 묘사되어 있는 식사는 상층계급의 모습인데, 일반서민은 어떤 식사이며, 그중에서 어떻게 밥을 먹었을지 살펴보겠다.


13세기 말 성립한 '잇펜 대사 그림 이야기(一遍上人絵伝)'은 가락을 붙인 염불을 하여 민중에게 가르침을 퍼뜨렸던 시종時宗의 개조 잇펜一遍(1239-1289)의 생애를 묘사한 작품이다. 이 제5권에는 가마쿠라의 산속을 도보로 여행하는 잇펜 일행을 위하여 승려와 속인이 먹을거리를 나르고 있고, 이중에서 흰밥이 묘사되어 있다. 또 나라의 당마사当麻寺 만다라당의 장면에서도 잇펜 일행을 위하여 승려와 속인이 먹을거리를 반입하고, 그중에서 대량의 밥을 차례차례 담고 있다. 잇펜 대사에 대해서는 이외에 13세기 말쯤에 제작된 '유행상인연기회遊行上人縁起繪'가 있어, 그 안에서도 역시 사원의 대량의 밥을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무가, 남녀노소, 끝내는 걸식하는 듯한 인물에게도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부터 이러한 절의 식사는 신자를 중심으로 모두 평등하게 밥을 먹는 걸 중시했다고 추측된다.


'잇펜 대사 그림 이야기'나 '잇펜 대사 연기회'는 밥의 흰빛이 눈에 띄는데, 이 밥은 죽일 것이다. 죽은 묽은죽과 된죽이 있고, 된죽이 지금의 밥에 가깝다. '잇펜 대사 연기회'에는 밥주걱으로 밥을 푸는 바가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된죽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죽이라 하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茶川龍之介가 지은 <우죽芋粥>이 떠오르는데, 그 원점이 되었던 <금석물어집今昔物語集>에 나오는 우죽은 죽이라 불리지만 쌀이 바탕이 아니라 토란을 가루내어 국과 섞어 단맛을 더한 서여죽薯蕷粥이라 부르는 먹을거리로서, 향연의 식사 이후에 나왔다. '잇펜 대사 그림 이야기'에서는 밥 이외의 식재료도 준비되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무가와 공가처럼 공이 드는 요리는 늘어서 있지 않다. <금석물어집>에 에이지츠睿實라는 천태종 승려가 길가에 방치되어 있던 중병에 걸린 사람에게 무언가 먹이려고 먹고 싶은 것을 물은 바, 병자는 밥을 물고기와 함께 먹고 싶다고 말한다. 이러한 일화는 당시의 포교자와 일반 민중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만이 아니라, 밥을 주식으로 부식으로 물고기 같은 조합이 서민에게도 이상적인 음식 유형이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12세기 후반 무렵 성립한 '병초지病草紙'는 교토, 야마토의 기이한 병을 두루마리 그림에 정리한 것이다. 이중에 치근에 고름이 차서 괴로워하는 남자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의 앞에는 네모난 쟁반이 놓여 있고, 칠기에 고봉밥, 국에 물고기 등을 담은 국 하나 채소 셋 같은 상차림이 되어 있다. 묘사된 남성이 어떤 신분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하급 관료 아니면 그만큼 빈곤하지 않은 서민으로 추정되며, 이 날은 무언가 특별한 날이었을지도 모른다. 밥에는 젓가락을 서서히 찌르고 있다. 공가의 의례에서 젓가락을 찌르는 일은 절대로 예의에서 벗어나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원에서는 주방에서 자주 볼 수 있던 풍경인데, 공가와 무가의 향연 풍경에서는 그다지 묘사되지 않는다. 이처럼 하급층에서 상징적으로묘사되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춘일권현영험기春日權現靈驗記 그림'에는 장인들의 식사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데(그림5), 그 <침초자枕草子>에는 그 밥을 먹는 모양을 '장인들의 먹는 모습이 지극히 어슬프다'라고 평하며 '가지고 오는 게 늦으면, 국을 들고모두들 마시고, 토기는 바로 놓는다. 다음으로 반찬을 모두들 먹어치우면, 식사는 불필요한 일처럼 보일 정도로, 즉시 사라진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장인은 '식사' 곧 밥도 기다리지 않고 국과 반찬을 먹어치우고, 그 뒤에 밥은 필요없는 것인가 생각했더니 밥도 금세 먹어 버린다. 밥을 중심으로 한 식사를 순서로 세워 먹는 공가들이 보면 조급하고, 매우 예의가 없었던 것을 엿볼 수 있으며, '빈곤하여 먹고 살기 바빠' 먹을거리에 집착하지 않는 서민과의 차이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주가 되는 밥을 빠뜨리지 않는 점도 서민의 식사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림5 춘일권현영험기春日權現靈驗記 그림




중세 후반에 성립한 <칠십일번직인가합七十一番職人歌合>에는 쌀 판매를 시작으로 떡 판매, 만두 판매, 삭면索麺 판매가 묘사되어, 도성 안의 시장에 전문적인 직업이 있었다는 걸 엿볼 수 있다. '복부초지福富草紙' '직간신문直幹申文 그림 이야기'에는 그러한 도성 안의 시장 모습이 묘사되어 짚신, 물고기 등을 파는 가게는 떡과 당고까지도 팔고 있다. <칠십일번직인가합>의 쌀 판매도 여성인데, '복부초지' 안에서 가마니에서 쌀을 꺼내 선별하거나, 공이와 절구로 찧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도 여성들인 점으로부터, 이러한 업무는 일반적으로 여성의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떡 판매는 문 앞에서 잘 볼 수 있는 구운떡이 아니라, 나무상자 또는 둥근통에 담겨 있다. 그림 속의 글에 '따뜻한 떡'이라 하는 점도 주목된다.



마치며


중세의 회화 자료에 묘사된 요리의 장면은 단지 요리를 먹는 것만이 아니라, 그때까지는 전혀 각광을 받지 못했던 주방도 중시하고 있다. 그건 중세의 사람들이 요리를 먹는 것만이 아니라 만드는 것에도 강한 관심을 보였음을 엿볼 수 있다. 그림은 그림 거짓말이라 하듯이 반드시 사실인 건 아니지만, 그러나 그곳에 묘사된 풍경은 화자의 시점이란 점은 틀림이 없다. 


그와 같이 안에 묘사된 밥은 흰색이 강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 서민의 입에 흰쌀이 들어간 일은 거의 없다.이에 반하여 상류계급에서는 쌀 그것의 맛보다도, 사실 쌀은 희다는 겉모습을 중시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13세기 무렵에 성립한 <속고사담續古事談>에는 후지와라 요리미치藤原賴通(992-1074)가 뵤도인平等院의 영역 가운데 와카치노국河內國 와카에군若江郡(오사카부 야오시八尾市) 타마쿠시아츠玉櫛圧의 쌀이 최고라고 평하는 일화가 남아 있다. 그러나 '보시다'라고 기옥되어 있는 것으로부터, 그건 미각이 아니라 시각에 의한 평가이다. 먹을거리의 색과 모양에 구애된다는 점은 현대에도 통한다고 생각한다.


최근 쌀은 다양한 상표가 출하되어, 일본인은 상표화된 쌀에 유혹되어 그것을 구하고 있다. 한편에서 건강 열풍의 영향으로 흰쌀이 아닌 잡곡쌀도 주목되고 있다. 쌀이 가진 원래의 맛있음이란 어떠한 것일까, 진짜로 아는 사람은 적은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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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2




제1장


쌀의 정신성   -칸자키 노리타케神崎宣武



시작하며


쌀은 아시아 각지에서 전통적인 주식 작물인 것은 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특히 계절풍 아시아의 각지에서 그 전통이 뚜렷하다.


게다가 쌀에는 단지 식용 기능만이 아닌, 어떤 종의 정신성이 투입되어 있다. '신성성'이라 해도 좋겠지만, 여러 가지 의례에서 상위의 공물로서, 또 주술적인 제구로서 쓰이고 있다. '세계에서 더욱 광번위한 분포를 이루는 주식재인 밀과 비교해 보면, 쌀의 신성성은 두드러진 특징이다. 


거기에는 쌀이 지닌 '신비성'이 작용할 것이다. 예를 들면, 벼 알곡에서 쌀이 되는 재생능력이 높은 것을 들 수 있다. 또, 쌀알이 반투명한 흰색이며, 그것을 밥으로 지으면 순백이 되는 색조도 들 수 있다. 대체로 다른 작물에는 없는 신비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아시아 전역에서 시대를 거쳐 보편적인지 어떤지라는 점에서는 의문이 있다. 예를 들어, <쌀과 아시아의 사람들>(2003년)은 중국, 인도네시아, 일본, 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태국의 기백이 날카로운 연구자의 현장조사를 정리한 좋은 책인데, 특히 각 편에서 벼농사 농민의 생활사를 중시하고 있어, 그 한 항이 이 경우에 참고가 된다. 


예를 들면, 중국 장쑤성의 춘절에는 쌀가루로 만든 위안샤요元宵가, 단오절에는 찰벼로 만든 쫑쯔粽子가 빠지지 않는다는 보고가 있다. 각각 그것을 먹음으로써 생명의 재생을 꾀하려 하는 것이기 때문에 쌀의 영력을 인정하는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자바섬에서 쌀은 양성을 구비하고 있다고 믿어져 왔다. 수확한 쌀은 먼저 점성이 있는 벼이삭과 건조된 벼이삭을 제각각 묶는다. 즉 남성과 여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그전에 기도를 올린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대나무로 만든 바구니에 옮겨서 지역의 공유 헛간에서 제를 지낸다고 한다.


태국에서는 콴이라는 어머니 격의 혼이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체내에 깃든다고 믿어, 쌀도 예외가 아니다. 그 혼이없어지지 않듯이, 때때로 쌀의 재생 의례를 행한다. 특히 벼 알곡의 보관은 엄중히 행한다. 그건 밭벼 재배의 전통을 지닌 산지의 샨족 등도 마찬가지이다. 또 태국의 왕실은 모내기부터 벼베기까지 현지에 나아가 의례를 행하고 있다고 보고한다. 벼와 쌀을 국가 번영의 근원으로 삼기 때문에 틀림없고, 그 부분에서는 일본의 황실 행사에도 상통할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현재의 동아시아 각지에서는 쌀의 신성성이 몹시 후퇴하고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특히 민간신앙에서 쌀의 중요도는 별로 높지 않은 듯한 인상을 받는다.


쌀과 곡령에 대한 신화와 그 전승은 각지에서 확인된다. 또 수확 의례도 확인된다. 게다가 행사를 하는 날에 지에밥을 짓는다거나, 떡과 당고를 만드는 것도 확인된다. 그러나 특히 제물의 인상이 약하다. 예를 들어, 쌀알 그것을 신에게 바치는 관습까지는 충분히 살피지 않는다. 그것도 흰쌀과 현미를 대상으로 하여 바치는 관습이라면,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것은 조사를 맡은 사람의 의식과 질문의 문제이기에, 이 보고 사례만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단정해서는 안된다. 사실, 그 책의 일본에 해당하는 보고도 그 부분에서는 내용이 빈약하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현재까지도 한 해 동안 제사에서는 쌀과 그 가공품이 빠질 수 없는 제물인 일이 또렷하게 전해진다. 성묘에도 쌀자루를 가지고 가서, 묘 앞에서 쌀알을 바친다. 현재에도 농산촌에서는 종종 볼 수 있는 광경이다.


특히 쌀밥, 청주, 떡은 제물 중에서도 최상위이며, 음복 잔치에서도 가장 중요하다. 도시의 주민과 젊은 세대에서는 의식의 차이를 볼 수 있지만, 일본에서 '쌀과 의례'의 관계는 아직 농후하다는 것을 인정해도 좋을 것이다. 쌀의 신성성은 아시아에서는 일본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전승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제사에서 신에게 바치는 음식


제사의 신찬에는 곡물과 채소, 산해진미 등 다양한 것을 바치는데, 언제나 빠지지 않는 것이 밥과 술, 떡이다. 그것은 신주가 봉상하는 축사에도 잘 표현되어 있다. 곧 "신에게 밥과 술, 떡을 시작으로, 산야의 것은 감채와 신채, 바다와 강의 것은 지느러미가 넓은 것과 지느러미가 좁은 것, 먼 곳의 채소와 가까운 곳의 채소에 이르기까지 좌우로 진열하오니, 갖가지 물품을 어울러 제물을 공손히 바치는 분을 평탄케 하고 안정케 하고 드시고…"(신사 본청 제정의 기념제 축사 예문을 훈독화)라고 일반적으로는 이어진다. 그 항이 전후하는 것은 거의 틀림없다.


즉, 늘 필두에 밥과 술, 떡이 있다.


황미荒米

화미和米

바다의 넓은 것(어류, 패류)

바다의 좁은 것(다시마, 미역 등의 해조류)

하천의 넓은 것(은어 등의 민물고기)

하천의 좁은 것(조류)

산의 넓은 것(꿩, 오리 등의 야생조류, 멧돼지 등의 짐승류)

산의 좁은 것(떡갈나무, 모밀잣밤나무, 비자나무, 칠엽수 등의 나무열매류, 표고버섯과 송이버섯 등의 버섯류, 칡과 고사리의 뿌리=전분 등)

들의 넓은 것(미즈나 등의 엽채류 )

들의 좁은 것(무 등의 근채류)


엄중한 제사의 제전에서는 이처럼 신찬이 나열된다. 다만 밥과 술이 반대로 되거나, 바다와 하천, 산, 들의 넓은 것과 좁은 것이 생략되거나, 하나의 굽 달린 쟁반에 합치는 경우도 있다. 최근에는 과일이 별도로 준비되는 예도 적지 않다. 


그렇지만 이 원칙은 메이지 8년(1975년)의 식부료式部寮 통지 '신사 제식 제정의 건', 일반적으로 말하는 '메이지 제식'으로 정해진 것이다. 신과 부처 분리령(폐불 훼석)에 따라서 신도神道가 국교화되기 때문이다. 노리토소우죠祝詞奏上라든지 타마구시호우텐玉串奉奠 등 신사에서도 볼 수 있는 제식법이 그러하고, 신찬의 기본적인 조정법이 그러했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이세신궁을 중심으로 한 국가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식을 중심으로 제정된 것이다. 즉, 거기에는 국가의 평안과 무사함 및 오곡의 풍양을 기념하는 데에 주목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근대의 일본은 벼농사 농업을 기반으로 성립된 국가이다. 거기에선 국가적인 신에게 제사를 지내, 봄의 기념제祈念祭와 가을의 신상제新嘗祭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자리매김했다. 덧붙여 말하여 기념제의 해는 곡물의 것으로, 새봄을 맞아 그 풍작을 기원하며 미리 축하하는 것이다. 또 신상제는 그 수확을 감사하며 공경하는 마음으로 축하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종류의 제사는 그때까지 민간에서 중요한 행사로 전해졌다. 그것을 국가가 새롭게 하여 권위화하고, 제식의 통일을 꾀한 것에 지나지 않다고 말할 수도 있다.


메이지의 제식은 상위하달의 형식으로 고쿠헤이샤国幣社부터 칸페이샤官幣社, 켄샤県社, 고우샤郷社, 손샤村社까지 전해져, 전국 각지 신사의 예제의 신찬이 표준화되었다. 그것이 어느 정도의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을까? 메이지라는 국가 체제를 배경으로 생각해 보면, 그 시대까지 없었던 급속한 철저함을 보았으리란 점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아무튼 태정관의 명령에 의하여 대부분 하룻밤에 일본인 모두가 성을 등록했을 정도의 시대였다. 


물론 신사의 격과 제례의 규모가 작아지면 신찬의 품목이 몇 가지 삭감된다. 그런데 이후에도 그 기준이 신사의 제례에는 전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신찬 일람의 상위 세 품목은 조리된 것이란 점에 새삼스럽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어디까지나 신찬의 중심은 밥, 술, 떡이다.


이들은 '숙찬熟饌'이다. 이들에 반해 채소, 과일, 물고기 등 조리되지 않은 것을 '생찬生饌'이라 한다. 원래는 다른의미를 가지고 바친 것이다.


생찬은 풍년, 풍어, 풍렵을 기원하고, 또 그것을 감사하며 품목을 골고루 갖춘다는 뜻이 강하다. 말하자면 표본전시의 뜻이 강한 것이다. 한편, 숙찬은 그때 입수할 수 있는 최상의 식재료를 가지고 조상을 포함한 신들의 시중을든다는 뜻이 강하다.


그렇다면 본래 그 품목들은 곳에 따라, 계절에 따라 다른 것이 당연할 것이다. 생찬이라 하면, 농촌에서는 농작물이, 산촌에서는 채집물이, 어촌에서는 해산물이 주체가 된다. 다행히도 메이지 제식의 신찬 규정에도 분야마다 한쌍의 신찬을 정해 놓았는데, 그 품목까지는 상세하게 지시하지 않았다. 축사에도 간단하게는 '바다와 산의 다양한 것을 포함해 올리니……'라고 한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신이 먹는 건, 또는 사람이 그것을 함께 대접받는 건 숙찬이다. 따라서 숙찬은 제삿날에 한하지 않고 언제나 신 앞에 갖추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이세신궁에서 '일별 조석朝夕 오미케사이大御饌祭'의 밥상에는 도미와 풋나물은 날것으로 세 종이 밥을 중심으로 젓가락을 딸려서 바친다. 그 도미와 풋나물도 일인분을 검소한 양이 초벌 도기에 놓이는데, 그것은 조리의 노고를 생략하고 형식화한 것이라 생각한다.


또한 별도의 전통을 지닌 가스가타이샤春日大社의 '약궁어제(若宮御祭り)'의 신찬은 오소노고쿠우御染御供라고 부르는 십선의 채소로 만든 음식인데, 이것도 채소류를 불에 익히지 않고 한 입에 먹을 수 있도록 자른 것을 수북히모은다. 분명히 조리의 노고가 생략된 모습이다. 그것은 조리 그것이라고 오래가지 않는다고 신 앞에서 악취가 나는 걸 싫어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 오소노코쿠우가 숙찬이 형식화한 것이란 점은 그 십선만이 신위를 모신 가마가 잠시 머무는 장소의 신 앞에 바쳐지고, 생찬의 물고기와 새는 모습 그대로 다른 장소(신찬 시렁)에 바쳐지고 있다는 부분에서도 분명해지는 것이 아닐까?


생찬과 숙찬은 철저히 구별해야 마땅하다. 현행 대부분의 제사에서 신찬은 그것이 혼동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다만 잘 보면 취급이 달랐을 것이다. 밥, 술, 떡 같은 숙찬이 상단이나 중앙부에 바쳐져 있고, 생찬은 그보다 하단이나 양옆에 위치되어 있을 것이다.


밥, 술, 떡이란 세 종류의 숙찬이 종래 신찬의 정형이었다고 볼 수 있다. 현실에서 소규모 제사에서는 지금도 밥과 술, 떡으로만 때우는 예가 결코 적지 않다. 


즉, 그것이 예전에는 최상의 성찬이었다. 이 경우 과거란 참으로 대략적인 시대 감상이 되지만, 일본에서 벼농사가 전래, 전파된 뒤 제2차대전 직후 무렵까지로 해두자. 그것은 쌀이 경제적인 가치관의 기준이 되었던 시대라고해도 좋다. 즉, 신찬의 밥고 술, 떡은 모두 쌀만을 원료로 만든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쌀의 영력을 더욱 응축한 것이다.




쌀밥과 잡곡밥


역사를 통틀어 보면, 쌀은 일본인에게 가장 중요한 식재료이고, 그 확보는 가장 중요한 생계였다. 특히 논벼는 이어짓기를 할 수 있어서 정주생활이 가능했다. 맛도 뛰어나고, 물리도록 먹는 일도 없었다.


생각하면, 극동아시아에 위치하는 일본 열도 북부는 조선반도와 중국 동북부와 함께 벼농사의 북방한계지이다. 남방에서 벼농사를 도입할 때에는 상응하는 곤란함이 수반하는 게 틀림없다. 냉해와 가뭄을 두려워하면서도 끊임없는 노력을 더하여, 벼농사를 진전시켜 쌀밥을 얻었다. 일본인에게, 우리들의 선조에게 쌀은 아무리 생각해도 귀중한 식재료였다.


그러나 일본 열도에서는 어느 시대나 그 벼농사 쌀밥으로 전 국민의 모든 식사를 조달할 수 없었다. 일반적으로 그 정도의 수확량을 확보하는 일은 어려웠다. 


예를 들어, 에도 시대를 예로 들어 보면 '6公4民'이라든지 '7公3民'이라고 말했듯이, 벼농사에 힘쓰는 농민들은 수확량의 반 이상을 소작료(年貢米)로 징수되었다. 그 소작료는 주로 인구 비율에서 30%도 안 되는 사무라이와 쵸닌町人 등 비농민을 대상으로 유통되었다. 그에 의하여 분명히 비농민, 바꾸어 말하면 도시주민은 쌀밥을 주식으로 했다. 그런데 에도 중기 이후의 에도 시민도 쌀을 충분히 먹지는 못했다. 이나가키 이세이稻垣史生 편집 <타미무라엔교三田村鳶魚 에도 생활사전>과 시부사와 게이조渋沢敬三 편집 <메이지 문화사 생활> 등을 참고로 유추해 보면, 에도의 마치에서는 문화文化·문정文政(1804-1830년) 무렵까지 장인을 제하고는 하루 두 끼를 먹었다.


특히 에도의 인구가 급증했던 에도 중기가 되면, 에도시 안에서 식사를 두 끼로 엄수하라고 막부령(검약령倹約令)이 내려지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에도의 마치에 모였던 쌀은 한 사람당 하루 두 끼 분량의 평균밖에 유통되지 않았다. 따라서 메밀과 당고 등의 간식을 발달시킨 것이다. 에도의 마치에서 하루 세 끼가 일반화하는 건 막부 말부터 메이지 무렵. 그것은 동일본 각지에서 새로운 논 개간이 진행된 뒤의 일이었다.


한편, 쌀의 생산자인 농민도 쌀을 주식으로 삼지 못했다. 


'임종의 쌀알'이란 이야기가 각지의 농산촌에 전해진다. 죽음에 이른 병자의 귓전에 쌀알을 넣은 대나무통을 흔들어, 지금 바로 쌀을 먹여 줄테니 기운을 내라고 격려하는 이야기이다. 쌀밥을 먹는 것이 소원이었기 때문에 하다못해 쌀 소리만이라도 들려주는 것이라 생각하는 동시에, 쌀의 영력으로 생명력을 소생시키고자 하는 바람이 담겨 있다는 걸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리고 이 이야기가 농산촌에 널리 분포하는 것에 의미가 있다. 그건 단적으로 말해서, 농민은 벼농사는 지어도 쌀을 먹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걸 말하고 있다.


농가라고 한마디로 말해도, 시대의 차이(농경기술의 차이)와 지역의 차이(기후의 차이), 게다가 예전에는 여러 번마다 규제와 지주, 소작료의 차이 등으로 똑같지 않았다. 그걸 굳이 대략적으로 평균화하여 생각해 보면, 일본의 농가는 한 집당 평균 1500평 정도의 논과 1500평 정도의 밭을 경작하여 농업경영을 꾸려나갔다. 이른바 '1500평 백성'(논)을 기준으로 하면 좋을 것이다.


특히 서일본에서 자급하는 마을의 성립 기원을 지닌 곳에서는 그 경향이 강하다. 전국적으로 대규모 논 개간이 확산된 건 근세인데, 그래도 소작농까지 평등하게 논을 배분해 보면 1500평이 1800평으로 늘어날 정도의 면적은 기대할 수 없다.


그 1500평 가량의 논에서 수확된 쌀의 양이, 현재는 농업기술의 발달에 의해 300평당 수확량이 10가마니(1가마는4말, 현미로 60kg, 흰쌀로 56kg)나 오르는 예가 적지 않다. 그러나 에도 시대에서 전쟁 이전까지는 그만큼의 차이가 없고, 전국적으로 평균할 경우 300평의 평균 수확량은 5-6가마니라고 한다. 따라서 1500평에서는 최대 30가마니 정도가 된다.


한 농가의 쌀 생산량이 30가마니, 그 반을 도시로 공출하면 남는 건 15가마니, 즉 60말(600되, 840kg)이다. 그래서 6인가족의 농가를 예로 들어 생각할 경우, 한 사람이 세 끼나 쌀밥을 먹는다고 하면 하루 최저 5홉(약 700g) , 6인이 3되(약 4.2kg)이 필요하다. 그러하면 600되는 200일분, 대략 1년의 절반 분량밖에 안 되는 것이다.


6인가족이 이 정도이기에, 8인 또는 10인이란 대가족도 드물지 않았던 예전의 농가에서는 쌀만 먹는다면 아마 1년의 1/3 정도만 먹을 양만 확보할 수 있었다고 상정할 수 있다. 게다가 제삿날을 위한 쌀을 확보하려 한다면, 일상의 소비량은 더욱 제한되게 된다. 당연히 거기에서는 쌀 대신에 무언가를 보충하여 먹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본의 국토에서 모든 인구가 매끼를 먹을 만큼의 쌀 생산량, 즉 논 면적을 가지지 못했다. 다만 다행스럽게 한쪽의 밭에서 쌀을 대신하여 주식으로 삼는 보리와 잡곡, 뿌리채소류를 그럭저럭 생산할 수 있었다. 더욱이 계절마다 나무의 열매와 산나물 등 산과 들에서 수확물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서 쌀의 부족분을 그러한 밭작물과 채집물로 보충하여 먹는 법을 궁리해 왔다.


그 대표적인 식사가 보리밥, 피밥, 조밥, 무밥 등이다. 이들을 일반적으로 '잡곡밥'이라 한다. 그걸 즙으로 희석한 것이 채소와 된장 따위를 넣고 끓인 죽인 조우수이雜炊이다. 예전의 농산촌에서는 이러한 잡곡밥과 조우수이야말로 주식이었다. 시대극에서  "오늘밤 양식(糅) 어디에서 구할까?"라는 말이 나오거나, 텔레비전 방송의 인터뷰에서도 "이 체험을 양식(糅)으로"라는 말이 나오거나 하는 것도 잡곡밥이 주식의 자리를 점하고 있던 역사를 말하고 있다. 특히 2차대전 이전까지는 그 전통이 실로 강했다.


이것은 예를 들면, <향토식관행조사보고서>(중앙식량협회 편집)에 수록되어 있는 1943년부터 1944년에 걸쳐 행해진 전국 일대의 농산촌을 대상으로 한 식생활 조사의 결과에서도 분명하다. 이와 관련하여 이 조사보고는 전쟁이 세계 규모로 확대되어 가면서 일본인은 외국 쌀과 밀 등의 수입 식량에 의지하지 않고, 얼마나 자급할 수 있는지를 강구하기 위한 기초자료가 되었다. 원초적인 식사의 예를 아는 데에는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안에서 세 가지 예를 아래에 소개한다. 어느 것이나 각 마을에서 당시 평균적인 일상의 식사 형태이다.



<군마현群馬県 토네군利根郡 카타시나 마을片品村> (春彼岸-秋收穫)        


다과(아침 5-6시쯤)

  '구운 떡'을 2-3개 먹음


아침밥(10시쯤) 다음 중 하나

  '구운 떡' (바쁠 때, 또는 일손 없는 집이 많음)

  조밥(조 70%, 쌀 30%)


점심밥(오후 3시)

  조밥

    반찬으로 된장국 안에 채소를 넣어 반찬을 대신한다. 이것에 통상 절임을 첨가함


저녁밥(오후 8-9시)

  보리밥(보리쌀[할맥] 70%, 쌀 30%)

  때때로 '우동' 다만 이것은 접대용이다.



<사이타마현埼玉県 지치부군秩父郡 히노사와 마을日野澤村>


아침밥(오전 5-6시)

  보리밥(쌀 50-70%, 납작보리 50-30%)

    반찬은 된장국, 절임, 막장(おなめ

      조림이나 물고기 등의 요리를 할 때는 아침밥 먹을 때 이것을 쓰고, 아침밥은 세 끼 가운데 가장 좋은 식사를 하는 관습이 있다.)


새참(오전 10시, 봄 모내기-가을 보리 파종의 농번기)

  고구마 또는 감자(집에 가까운 밥 이외는, 아침에 지참한다. 1인 3-5개의 가벼운 간식)


점심밥(오후 12-1시)

  보리밥(아침에 함께 지은 것)

    반찬은 절임, 아침의 된장국 남은 것


새참(오후 3시, 오전 새참과 마찬가지로 농번기)

  구운 떡 또는 고구마, 1인 2-3개. 이것도 오전 새참처럼 가벼운 간식


저녁밥(오후 7-8시)

  다음 중 하나(반찬에는 절임을 곁들이는 일이 많음)

  우동

    튀김우동... 여름에 많음. 다만 이것은 오히려 좋은 식사

    우치코미うちこみ ... 겨울에 많음. 이것이 우동의 일반 사례(푹 끓인 우동)

  수제비(츠밋코つみっこ)... 밥이 남았을 때 잘 만듦

  구운 떡... 이것에는 절임 외에 된장국을 곁들일 때가 많음

  밥... 보리밥이 많다. 절임, 된장국을 곁들인다.




<나가노현長野県 카미미노치군上水內郡 키타오가와 마을北小川村>


아침밥(오전 6-7시)

  보리밥(통상 쌀 20%, 보리 80%)

  조밥(위에 준하는데 쌀의 비율이 조금 많음)

    반찬은 된장국, 절임


점심밥(오후 12-1시)

  아침밥과 같음(아침에 점심 분량까지 짓는다)

    반찬은 된장국(새로 만듦), 절임(아침에 남은 것)


새참(오후 5시쯤, 단 농번기)     

  구운 떡 또는 센베이


저녁밥(오후 7시 반쯤, 농번기는 오후 9-10시)

  분식류

    (1)구운 떡(밀, 메밀, 피, 옥수수)

        센베이

    (2)우동(밀)

        무기키리麦きり(밀)

        소바키리(메밀)

    (3)우치코미(밀)

        수제비=호우토우ほうとう(밀, 메밀)




또, 전쟁 이전의 식생활 실정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미야모토 츠네이치宮本常一 <식생활잡고>(1977년)에서도 사례를 인용하고 싶다.


가고시마현의 아마미오섬奄美大島에서는 고구마와 맥류를 반 정도씩 하여 밥을 먹었다. 아마미오섬에서도 가카이섬喜界島에서도 야쿠시마屋久島에서도, 쌀밥을 먹는 일은 제사와 잔치 이외는 거의 없었다. 야쿠시마에서는 고구마를 잘라서 보리 위에 얹어 밥을 짓는다. 그리고 밥을 지으면 고구마와 보리를 섞어서 먹는다. 게다가 가다랑어를 끓인 국물(가다랑어와 야생의 풀을 끓인 국물)을 곁들여서 먹었다.


오스미大隅 반도부터 구마모토현의 구마球磨 지방, 미야자키현의 메라米良와 시바椎葉 지방에 걸쳐서는 겨울철에 고구마와 돼지고기가 주식이었던 곳도 있다. 고기가 없는 시기에는 피와 보리의 잡곡밥과 무잎을 말려서 잘게 썰어된장과 보리를 한 그릇에 담은 조우수이 등을 주식으로 했다.


시코쿠부터 중부 지방의 산지에 걸쳐서는 고구마가 중요한 주식거리의 하나였다. 삶거나 구워서 먹을 뿐만 아니라, 으깨어 떡 모양으로 먹는 일도 많았다. 이를 카이모치かい餅(카키모치掻き餅)라고 한다. 시코쿠의 산지 등에서는 정월에 쌀떡을 찧지 않고, 카이모치를 대접했다고 하는 사례도 있다. 


츄우고쿠(일본 · 지방) 지방의 이와미石見와 이즈모出雲 등의 산촌에서는 논 소유가 적은 곳이 많아,그러한 곳에서는 보리밥과 피밥을 일상적으로 먹었다. 또 히로시마현의 산촌에서는 보리오 무를 섞어서 지은 무밥을 가장 잘 먹었던 곳도 있다. 다만 이러한 잡곡밥은 차가워지면 흐슬부슬하여 먹기 어렵다. 그래서 이 지방에 국한된 일도 아니지만, 특히 츄우고쿠 지방에서는 더운물을 부어서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무밥이 중요한 주식이었던 곳은 꽤 광범위한 산촌에서 볼 수 있다. 토야마현富山県부터 북쪽 아키타현에 걸쳐서 일본해 쪽 일대도 그러했다.


좀 유별난 곳으로는 노토能登 반도의 대구밥(鱈飯)이 있다. 대구의 머리와 꼬리를 떼어 내, 큰 솥에 끓여 뼈를 뺀다.  그것을 쌀밥과 보리밥에 섞는다. 그 근처에서는 대구를 잡는 시기가 되면 그것을 주식으로 했다. 


또한 중부 지방 이북의 산촌에서는 칠엽수의 열매를 저장해 놓고서 이것을 쪼개 알맹이를 꺼내, 잿물에 끓여 떫은 맛을 빼고 그것을 찧어서 떡으로 만들어 겨울철 주식으로 삼은 곳도 있었다.


이러한 사례는 결코 특수한 예가 아니었다. 전쟁 이전, 전쟁을 거치며 일본인 전체로 보면 잡곡밥과 조우수이야말로 주식어었던 것이다. 아니, 그나마 충분하지 않아 때때로 나무 열매나 산의 덩이뿌리 종류까지 주식에 준하는 먹을거리로 이용했다.


또, 다른 통계에 의하면 전쟁 이후 10년 동안이나 국민 1인당 하루에 50-70g의 보리를 먹었다고 한다. 거의 30%가 보리밥인 셈이다.


쌀밥은 어디까지나 경사스런 자리의 주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진지()'라고 했다. 우리 일본인은오랫동안 쌀밥을 성찬으로 계속 요구해 왔다는 것이다. 


특히 농산촌에서 쌀밥이 일상화하여 퍼진 건 전시의 배급미 제도 덕이었다. 1939년 공포한 '미곡통제배급법', 이것이 속칭 배급미 제도이다. 그 제도에서 국민 1인당 배급량은 처음에는 1일 2홉3작이었다. 그것이 전황의 격화에 따라 군대에 배급하는 걸 최우선(증량)으로 하기 위하여 일반에 주는 배급량은 2홉1작, 1홉8작으로 감소한다. 그러나 쌀의 총생산량을 총인구로 평등하게 나누는 이 제도는 역사에서 획기적인 것이었다. 그에 의하여 국민이 총력을 기울여 임전체제를 만들었다. 이후 절대양은 여전히 부족했는데, 대부분의 국민이 거의 매일처럼 그정도의 쌀을 먹게 되었다. 


덧붙여서 말하면, 현재 국내의 쌀 생산량을 총인구로 제하고 보면, 국민 1인당 공급량은 하루 거의 200g(약1.4홉)에 지나지 않는다. 다행히도 부족한 곡류를 대개 자유롭게 수입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괜찮지만, 이 수치로도 일본인에게 쌀은 절대적인 주식이 아니다.


오랫동안 쌀은 귀하고 요긴하며, 중요한 식량이었다. 따라서 그것을 정력(力)이라든지 벼가 익음()이라 하는 것처럼, 영력이 깃든 신성한 식량이라고 했다. 


그 쌀을 넉넉히 쓰고, 게다가 조리의 수고를 들여서 만들었던 밥과 술과 떡은 최상의 성찬임에 틀림없다. 따라서 그것을 신들에게 바친 것이다.


물론 신들 같은 경우, 우리 일본인의 의식 안에는 조상이 동체화되어 있을 터이다. '신령님 부처님 선조님' 같은 삼위일체의 관념이 일본인의 종교관이라 할 만하고, 그것을 가지고 타민족에게 이해를 구하려 한다면 일본교라고부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리고 조상숭배가 옛날부터 우리 일본인 대부분의 절대적인 종교관이었다고 한다면, 근세에 기독교 탄압이란 종교 소동이 일어났던 일도 의미가 있다. 곧, 일본인은 조상숭배를 허용하는 신앙과 종교에 대해서는 우호적이나,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배타적인 것이다.


그러한 정신 토양은 일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 꽤 한정된다. 중국인과 한국인, 또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여러 민족 일부에게서만 볼 수 있다. 그것은 대략 특정하여 말하면, 벼농사 농경의 정주생활을 기반으로 한 지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옛날부터 벼농사가 퍼져서 그곳에서는 논과 수리권에거의 항구적인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에 상속권이 확립되어 있다. 거기에서 가문의 계보도 발달하고, 벼의 파종부터 수확에 이르는 추이에 인간의 탄생부터 죽음의 일생을 투영하여 그 씨앗의 재생관이 강하다. 그렇게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특히 일본의 조상신앙은 참으로 뿌리가 깊다. 조상은 언제나 천상계에 있으며 신과 부처를 연결하고, 자손이 사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백중과 정월로 대표되듯이, 제사와 행사마다 신과 부처와 함께 마을에 내려와, 집을 찾아와 대접을 받는다. 즉, 그래서 조상과 자손이 교류한다. 그와 동시에 조상을 중개하여 신과 부처와 사람이 교류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제사와 행사의 원형이다. 나와 관계가 깊은 바로 말하면, 불사에 한정되지 않고 신의 제사 때에도 불단의 문을 열고 등불에 불을 켠다. 그러한 습관을 우리는 아직껏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더 말하자면, 거기에 신과 부처, 조상과 사람이 '서로 맛보는' 잔치가 발달한다. 그것이 제사 이후의 음복 잔치이다. 또, 가정 안의 행사여도 불단 등에 성찬을 바치기 때문에 가족이 먹는다. 이것도 서로 맛보는 것의 한 형태일것이다. 그러하면 거기에 바치는 건 당연히 선조가 가장 성찬으로 먹는 것이 된다. 그 토지를 개척하여 자리를 잡고 살았던 선조들의 노고를 기념하여 최상의 성찬을 성심껏 바치고, 그 뒤 신과 인간이 함께 먹는, 또는 함께 머시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이, 정월의 떡, 춘분과 추분의 목단떡, 백중의 소면 등. 그곳에서는 신과 인간이 함께 먹으면서, 조상과 자손들이 서로 맛보는, 특히 그 뜻이 강하게 잠재되어 있다.


따라서 제사에서는 희고 윤기나게 아름다운 쌀로 만든 밥과 술과 떡이 가장 기본적인 신찬으로 정형화되었다. 또한 덕분이라 말하고 그걸 나누어 먹는 음복 잔치가 습관화된 것이다.




그중에서도 술

 

그중에서도 술이 존중되었다. 그건 쌀만 원료로 만드는 성찬 가운데 가장 수고가 들기 때문임이 틀림없다. 가장 귀중한 식재료를 가장 수고를 들여서 조리한다. 그것이 최상의 성찬이 된다. 그러므로 신들도 그것을 각별히 사랑하신다고 해 왔다.


'신주 바쳐지지 않는 신은 없다'고 하는 게 아닐까?


물론 실제는 사람들이 술을 존중하고, 마시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사는 신들을 우러러 받드는 축하연이다. 먼저, 성찬은 신들에게 바치고, 그 뒤 사람들이 대접을 받는다.


그 주례를 '음복 잔치'라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예강禮講'이라 한다.


천지와 오래까지 만대에 섬기는 흑주黒酒 백주白酒


이는 <만엽집>(권19)에서 후무야 지누文室智努 진인이 불렀던 노래이다. <만엽집>에는 음주를 즐기는 노래도 있는데, 이처럼 제사를 기념하기 위해 바친 술에 대한 노래가 많다. 고대부터 술에 대해서는 신을 대접하는 성찬이란 의식이 강하게 잠재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에 상당하는 주례를 끝마친 뒤 신들에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달라 하고, 사람들만의 시간을 가졌다. 이것이 무예강無禮講이다. 이 경우 무예강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이다. 본래 무예강이 단독으로 있을 리 없다. 예강이 있어서 무예강이 있다. 


신들에게 바친 술을 내려서 사람들이 대접을 받는다. 그 주례가 음복 잔치의 가장 간략한 기본형이다. 


그 순서와 예의범절은 반드시 통일되어 있지는 않다. 그런데 그 기본적인 순서와 예의범절은 습관이 되어 거의 정해져 있다. 


일반적으로는 잔(평평한 잔)이 하나, 윗자리부터 아랫자리로 돌린다. 즉, 위(신)부터 장로, 그리고 아래로 순배하는 것이다. 


술을 따라주는 사람이 주둥이가 작고 목이 긴 술병을 손에 들고 술을 따른다. 술을 세 번에 나누어 붓는다. 이 세번에는 올림을 공손히 행한다는 의미가 있다. 5번이나 7번도 올리지만, 거기에는 수고가 들기 때문에 3번으로 국한할 것이다. 첫번째와 두번째는 술병을 기울이기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술이 넘칠 수도 있다. 술을 실제로 붓는 건 세 번째이다.


술을 받은 사람은 이것을 세 번에 나누어 모두 마신다. 이것도 첫번째와 두번째는 입을 대기만. 세번째에 모두 마신다. 이것도 또한 실수하지 않도록 공손히 행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것으로써 덕분이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분배의 술. 물론 취하기 위한 술이 아니다.


덧붙여서 말하면, 그때 신찬의 밥도 내려서 한 젓가락씩 분배하는 사례도 각지에 많다. 이것을 술안주라 볼지 어떨지는 차치하고, 음복 잔치에서는 술과 밥이 짝을 이루어 발달한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예강. 이것을 끝마치고 무예강으로 넘어간다. 일본의 술자리는 본래 이러한 이중구조를 가진다. 


그리고, 하나의 잔이 도는 음복 잔치는 삼헌식三獻이 생략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삼헌식이란 '술 한 번 안주 한 번'을 3번 거듭하는 것이다. 술 하나를 세 번에 마신다. 그리고 안주를 한 젓가락 집어먹는다. 그것을 세 번 반복하면 '삼삼은 아홉 번(三三九度)'이 된다. 마음을 바르게 하고, 엄숙하고 신중하게 다 마시는주례임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반드시 잔의 수를 3개로 맞출 필요도 없다. 한 잔으로도 안주와 마시는 것을 사이에 두고 세 번 나누어 마시는 술을 3번 반복하면 좋은 것이다. 어디까지나 삼삼은 아홉 번이란 의미가 있다.


이러한 삼삼구도의 형식은 언제쯤부터 행해졌던 것일까?


이것에 한하여, 고사의 기원을 밝히는 일은 어렵다. 물론 정권의 교대나 경제의 부침에 따라 명확한 기술로 보여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것이 비교적 상세한 문헌은 <군용기軍用記>이다. 에도 시기의 문헌인데, 그 기술에서 무로마치 시기로거슬러 올라가 '출진의 축하'로 주종 사이에 '삼헌의 의례'가 집행되고 있었음이 분명해진다. 물론 그것이 기원이라고는 말할 수 없고, 그 이전부터 특권계급의 일부에서 행해졌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특히 궁중 의례에 그 옛 형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문헌에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군용기>에서도 "술을 따르는 순서, 술을 마시는 모습, 독특한 격식에 의해 서로 바꾸는 사이 한 번 기울이지 않고"라고 사리를 밝혀 두었고, 다른 곳에서도 유사한 주례가 존재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삼헌식의 처음 사례로 <군용기>를 아래에 인용한다.


'술을 따르고 시중을 드는 사람(御酌陪膳)'(陪酌人)의 예의범절로는 다음과 같다.


술을 잔에 따르는 모양은 두 번 따르고 세번째에는 많이 따른다. 술을 마시게 되는 사람에게는 마시고 남기지 않게 조금 있게 하고, 언제나 한 번 따르면, 더하여 두 번 올리며, 이상 세 번 세 잔으로 삼삼구도가 된다.


안주로는 "하나에 전복, 둘에 황밤, 셋에 다시마"이다. 이것은 "완전히 승리함을 경하하는 마음이 된다"라고 하고, "잠시 동안에 출진할 때 안주를 짝으로 한다"라고 한다. 전승을 바라며 미리 축하하여 행운을 빈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안주를 먹고 먼저 출진할 때는 전복을 취하여 왼손에 쥐고, 가는 쪽보다 굵은 쪽으로 입을 대고, 굵은 곳을 조금 베어 먹고 위의 잔을 들어올리고, 술을 세 번 나누어 마시며, 그 잔은 전복의 앞쪽에 놓고, 그 다음에 황밤의 한가운데에 있는 걸 잡아서 깨물어 자르고, 가운데 잔에 술 세 번을 붓기만 하고, 그 잔을 앞의 잔 위에 놓으며, 다음으로 다시마가 있는 걸 잡고, 양끝을 잘라 가운데를 깨물어 자르고, 아래의 잔에 세 번 술을 부어서 마시며, 그 잔을 원래 자리에 놓는다.


말하자면 조금 야만적인 풍습의 예의범절이다. 진막 안의 '임시'로 있었던 방법일 것이다. 그 시점에 이미 이러한 편의적인 예의범절의 변화가 있었다. 옛날부터 그때그때의 변화가 일어났다. 그러나 그래도 기본적인 원칙이 전혀지는 게 문화라고 할 것이다. 


안주의 내용은 때때로 여러 가지였지만, 또 안주를 취하는 법도 여러 가지였지만, 한 잔에 안주 하나로 짝을 맞추는 것을 일헌이라 하는 건 여기에서도 분명해진다. 또한 술을 다 마시는 법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술을 따르는 방법은 세 번으로 나누어 따르는 것도 여기에서 분명해진다. 


이 삼헌식, 삼삼구도의 주례(예강)은 에도 시대 사무라이 사회에 계속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도 변화가 일어났다. 에도 시기가 되면 그것으로 알려진 문헌도 많아지고, 그에 붙여진 해석도 나누어지게 되었다.


그 혼란을 정리하고, 전고의 고증으로 냉정한 소견을 기술한 것이 이세 사다타케伊勢貞丈이다. <사다타케 잡기>에 그것이 상세하다.


한 잔의 술 두 잔의 술이라 하는 것을, 한 잔 두 잔의 일이라 이해하는 사람, 잘못이다. 무엇에서도 술을 마시고 술안주 등을 내어 잔을 대접하는 것은 한 잔이다. 다음으로 또 술을 마시고 안주도 내어 잔을 대잡하는 이것이 두잔이다. 몇 잔이라도 이와 같다. 한 잔을 마치면 그때마다 술병을 붓고, 일헌마다 술병을 새로이 하여 대접한다. 몇 잔이라도 이렇게 한다.


"옛 축하 의례에서는 반드시 삼헌식"이라고 생각을 헤아리고 있다. 그리고 술 한 잔 안주 하나의 조합을 3번 새롭게 대접하는 것을 정식 '헌'이라 한다.


그때 안주는 특별히 정해지지 않았지만, 술만으로는 구실을 하지 못한다. 이것은 전대의 <군용기>에서도 그러했고, 후대의 신 앞의 결혼식에서도 전해져 왔던 일이다. 예를 들어, 결혼식에서는 다시마, 마른오징어, 우메보시 등의 세 가지가 3개 한 벌의 잔과 함께 바쳐져 왔다. 그런데 삼삼구도는 중시되었는데, 세 가지 안주는 그렇지는 않다. 이를 가지고 돌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고, 그대로 바치는 걸 생략하고 식장까지 나오는 추세이다. 술과 안주의 안주가 유명무실해지고 있는 현황인데, 실은 에도 시기에도 그러했다. 따라서 사다타케는 당시의 풍조를 '잘못이다'라고 엄하게 추궁한다.


그러나 시류라는 건 염려스럽다. 삼헌식의 한 요소(술잔치)만이 중용된다. 그렇지만 그건 그것으로 문화 변용으로 인정해야 한다. 또한, 그 결과 간략화된 예의범절이 보급되어 이미 하나의 전통이 된 것도 인정해야 한다.


지금 세간의 관습에서 축하 의례를 할 때는 반드시 술잔치라는 이름을 붙이고, 잔을 취하지 않으면 끝내지 않는 일이라 한다. 옛날에는 이런 일이 없다.


여기에 이르러서, 즉 에도 중기 무렵부터 '술잔을 나누는 일'이 삼헌식에서 분리되는 모양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귀족사회부터 사무라이 가문 사회에 전해져 온 삼헌식이 근세의 서민 사회에서 단독 술잔치로 변용되어 퍼져 보급된 것이었다. 


술잔을 나누는 일에서는 부부 잔, 자식 잔, 형제(자매) 잔, 습명襲名 잔 등이 있다. 현재는 신 앞의 결혼식에서 그것이 일반적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그외는 일부 특수한 사회에서만 전승을 본다. 그런데 예전에는 자식 잔과 형제 잔이 널리 존재했다. 이른바 맹세의 잔. 그에 의하여 의제 자식 관계, 형제(자매) 관계를 연결했다. 의제 자식 관계에서는 부양과 노동의 교환이란 의무가 생기지만, 의형제의 경우에는 정신적인 상호부조의 뜻이 강했다. 그건 가족과 형제가 적은 자가 고립되지 않도록 하는 제도였다. 


맹세의 잔은 술을 세 번으로 나누어 마시고, 안주를 씹는다. 그리고 상대에게 건낸다. 상대도 똑같은 예의범절로 술을 마시고, 안주를 씹는다. 그리고 잔을 상대에게 돌려준다. 이것을 3번 반복한다.


3번 마시는 걸 3번 하는 건, 아주 조심스럽게 행하여 맹세한다는 의미이다. 첫 잔은 자신을 확인하는 각오를가지고 다 마신다. 두 번째 잔은 상대의 마음가짐을 확인하는 의미를 보여주며 다 마신다. 셋째 잔은 신명에게 맹서하며 다 마신다. 그것으로 약속이 굳건해졌다. 매우 일본적인 계약의례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술잔을 나누는 일이 끝나면, 그 잔을 본인이 가지고 돌아갔다. 즉, 잔은 증명과도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청주는 말하자면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을 잇는 '맹서의 술'이라 할 만하다. 


그럼, 이러한 잔을 나누는 일을 진행하는 데에는 중매인의 역할이 크다. 중매인은 중매쟁이와도 혼동되는데, 역할이 다르다. 술을 따르는 사람으로 종사하는 중매인은 계약의례의 입회인이며, 마지막까지 지켜보는 사람이다. 따라서 가장 신용 있는 사람이 종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정도로 형식만을 중시한 주례를 발달시킨 건 세계에서도 일본 특유의 것. 그건 술이 쌀의 영력을 가장 응축시킨 신찬이라 보아 왔기 때문일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사케'는 사(재계한다는 뜻의 접두어)+케(식사의 뜻인 찬饌)이라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럼 사를 접두어로 하는 유사한 예로는 사나에(볏모, 早苗), 사오토메(모내기하는 처녀, 早乙女), 사야마(斎山) 등이 있다. 청정한 것, 무구한 것이란 뜻이 공통된다. 어쨌든 쌀에 대하여 침범하기 어려운 민족의 생각이 여기에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마치며


일본에서 쌀의 신성성이 왜 이만큼 강하게 전승된 것일까? 물론 이류를 하나로 집약할 수는 없다. 그런데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벼농사는 그 발생한 땅이 어디든, 또 볍씨가 어떻든, 남쪽에서 전래된 농업인 점을 들 수 있다. 


대충 말하면, 아열대의 계절풍 기후에 적합한 작물이다. 그것이 일본 열도에도 전해졌다. 그 부분에서, 일본 열도 대부분의 장소는 여름철에 한해서는 벼농사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일본 열도의 여름은 짧고, 여러 번 서늘한 여름을 만나기도 한다. 특히 동북일본에서는 벼농사의 적합하다 할 수 없는 곳이 있다. 벼농사의 도입에는 품종개량을 수반하는 상응의 수고와 노력이 필요했다. 


그 결과 일본 열도의 거의 전역에서 벼농사가 정착된다. 그러나 서일본 각지에서는 가뭄으로, 동일본 각지에서는냉해로, 자주 어쩔 수 없이 수확량이 감소했다. 게다가 풍년이어도, 1년에 한 번만 수확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의 집착이 강해졌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의미에서 일본 열도는 벼농사의 북방한계지인 것이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한반도(조선반도)도 거의 똑같은 지리에 있고, 그 부분에서는 쌀에 대한 가치관도 한국과 대비하여 고려해야 한다.


또 다른 하나는 "흰색"에 대한 신성성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것도 단지 일본에 한하여 말할 수는 없는데, 특히 일본에서는 흰색을 청정한 색이라 보아 왔다. 


현재에 전해지는 신을 제사지내는 일에서 보아도, 흰종이가 많이 쓰인다. 예를 들어 기도 종이(御幣)는 흰종이로 거의 통일되어 있다. 카이(불교에서는 천개天蓋)도 흰종이를 사방에 둘러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을 백개라고도 한다. 신도학에서도 민속학에서도 이런 종이를 자르는 방식을 분류하여 의미를 부여하려는 경향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조형의 일이며 본뜻은 흰색에 있다.


그렇지만 흰종이의 사용을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데에는 한도가 있다. 예를 들어, <고사기>에서는 '백화폐白和幣'. 닥나무의 섬유라고 보든지, 그것을 꼬은 실이라 보든지, 어느쪽이든 종이를 뜨는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에는 그것이 흰색의 표징이었다. 이윽고 흰종이가 출현하면 그것으로 변했다. 종이를 잘게 썬 것, 원래의 종이 공물이 섬유라고 한다면 그에 따랐다고 보는 것이 좋다. 길조의 모양을 자르게 되었던 건 더 이후의 조형화이다.


그럼 현재도 신에게 제사지내는 종이 공물에는 삼의 섬유가 걸려 있다. 그것은 <고사기>에 나오는 '靑和幣'이다.  


어쨌든 <고사기>의 시대부터 순백은 없었겠지만, 흰색에 대한 의식이 있었다. 이미 색 가운데 상위관념을 강화하고 있었다. 그 흰색이 더욱 자신과 관계가 깊은 것으로 인식된 게 쌀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오시라オシラ의 신앙을 설명한 건 미야다 노보루宮田登이다. 도호쿠 지방에 분포를 보이는 오시라 님, 호쿠리쿠北陸 지방에 분포를 보이는 백산 신앙 등 흰색의 신비성과 신성성으로 언급하고 있다. 한편, 흰색=시라는는 한국어의 시라가 어원이며, 한반도에서 전해진 관념일 것이는 설도 있다. 


결국은 흰색에 대한 관념도 단순히 해석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희고 무구함'이라든지 '흰옷'이라는 단어도 전해지듯이, 우리 일본인은 흰색이 청정한 색이라는 의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흰쌀, 그리고 흰 술과 떡. 게다가 흰종이. 그것은 신을 우러러 뵙고, 신을 대접하는 데에는 가장 적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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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2


서장 

벼농사 문화가 나아갈 바   사토 요이치로佐藤洋一郞





시작하며


일본인의 쌀 소비량은 2008년 현재 연간 약 60kg 정도이다. 하루 소비량으로 환산하면 160g 남짓이다. 예전의 도량형으로 말하면 이는 딱 한 홉에 해당한다. 1965년의 수치는 114kg이었기에, 이 45년 정도 사이에 소비량은반감한 셈이다. 총생산량도 1970년대 중반 무렵까지 연간 1200만 톤을 넘었지만, 2000년을 넘어서부터 900만톤 이하가 되었다. 논의 면적도 1970년대 초반 300만 헥타르를 넘었는데, 지금은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벼를 재배하지 않는 토지 가운데 다른 작물로 전환한 토지도 있다면, 농업 그것을 그만둔 곳도 많다. 경작방기지가 경작면적의 20%를 넘은 현도 있다. 일본인은 이대로 쌀을 먹지 않게 될 것인가? 일본에서 논은 사라질 것인가? 


이 물음에 '과학적으로' 답을 내는 건 어렵다. 그러나 나는 일본인은 쌀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일본에서 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를 아래에 서술하려 한다.




쌀과 목숨을 둘러싸고 -생태학적으로 본 쌀의 위치


인류를 포함한 동물의 대부분은 자신의 손으로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를 생산할 수 없다.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는 식물이 만드는 당분이 사용된다. 전분과 지방은 당분의 대체물로 사용된다. 신체를 만드는 단백질에는 동식물의 단백질이 사용된다. 수렵채집 경제에서 이들은 다른 장소에서 획득되었는데,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면 그들의 생산은 점점 한곳에서 이루어졌다. 계절풍 아시아에서 쌀은 저습지에서 재배되었는데, 그 재배 장소에는 쌀(벼) 이외에 물고기와 패류, 곤충 등이 잡혔다. 이른바 '쌀과 물고기'의 한묶음이다(佐藤 편집 2008). 마찬가지로 유라시아 서쪽에서는 '맥류(또는 감자)와 젖(또는 고기)'라는 한묶음이 있었다. 그 무대가 되는 곳은 말할 것도 없이 '삼포식 농업'이라 부르는, 여름 작물+겨울 작물과 가축을 활용하는 형식이다. 현대 인도에서는 육식을 금기하는 사람들에 의해 콩과작물+벼과작물이란 한묶음도 있다(佐藤, 이 시리즈 제1권).


쌀과 물고기의 한묶음은 근현대 일본 열도에서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 대강은 아마 이 책의 우네 유타카宇根豊씨와 후지이 신지藤井伸二 씨의 논고에서 그리고 있다. 우네 씨도 후지이 씨도 '물고기'에는 직접 언급하고는 있지 않지만, 그 마음은 논의 다양한 존재에 있다. '논 학교'라는 NPO를 운영하고 있는 우네 씨는 벼농사의 실천가의 입장에서 논에 사는 생물들을 보아 왔다. 우네 씨 등에 의하면, 300평의 논 안에는 벼가 2000그루 자라고 있는 외에 올챙이가 2만3000마리, 우렁이(둥근논우렁이)가 300마리, 물방개가 50마리, 거미류가 7000마리 정도서식하고 있다. 이들의 숫자는 어림수이지만, 2001년에 우네 씨 등이 전국 조사를 행한 평균치라고 한다. 


우네 씨의 추론 같이, 필시 구조 개선 사업 이전의 논 경관에 섞여 있었던 일정하지 않은 모양의 논과 수로에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일부는, 그리고 '쌀과 물고기'의 한묶음 가운데 쌀 이외의 부분으로 사람들의 생명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논이란 장치가 오로지 벼만의 장치가 된 건 틀림없이 고도경제성장기 이후의 불과 50년 정도의 일이라 생각한다. 고도경제성장기, 일본에서는 다량의 인구가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했다. 그러한 것도 있고, 농업의 세계에서도 기계화가 이야기됐다. 좁고, 고도차가 있는 논을 부수고는 대규모 논으로 바꾸어 버리는 작업이 전국적으로 행해졌다. 그것은 분명히 '노동력 절감'을 가져왔지만, 그 대가가 다량의 석유를 소비하여 행하는 농업의 도입이었다. 




농업의 생태적 의미


우네 씨의 논고는 이 50년 동안의 이후에 생산성만 강조하는 농업에 대한 농사짓는 쪽에서 예리하게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것은 생산성이야말로 목숨과도 같다고 하는 사회 풍조에서 주목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생산성의 한계, 지구환경문제의 분출 등에 의하여 주목을 받게 된다. 특히 환경문제의 하나로 생물다양성의 의미를 고려할때 그 의미는 더욱더 명확해진다.


생물다양성이 지닌 '생태계 서비스'의 가치 가운데 하나는 먹이사슬의 안정적인 유지에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먹이사슬의 안정적 유지'란 생태계를 구성하는 종의 개체수와 관계성이 환경에 의지하지 않고 너무 많이 변화하는 일 없이 유지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예를 들어 제초제와 살균제 등의 사용으로 '잡초'와 '해충'을 구제하려는 시도는 먹이사슬의 안정적인 유지와는 상반되는 일이 된다. 


생태계의 안정성 유지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비료와 물 등의 '물질'을 대량으로 가지고 들어오거나, 또는 가지고나가지 않는 것이다. 즉, '무엇도 더하지 않고, 무엇도 빼지 않는' 것이 생태계의 안정에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을 포함한 선진국의 현대 농업에서는 다량의 자원을 가지고 들어오고 있다. 그것은 물, 비료와 농약부터 온실재배와 농기계용 석유 등을 포함하여 고려하면 방대한 양이 된다. 가지고 나가는 양도 다량이다. 무엇보다 농산물은 생태계 내에서 소비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을 생태계 밖으로 가지고 나간다. 즉, 현대 농업의 본질은 '고투입, 고수익'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농업의 형식은 고작 50년 된 것이고, 또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1960년대의 '녹색혁명' 이후의 일이라 생각한다. 이래서는 '논벼농사'가 가져오는 생태계의 지속성은 기대할 수 없다.


생태계의 유지에 중점을 두는 이러한 의론에 대해 세계의 인구 증가와 식량 공급의 균형을 고려하는 입장에 선 쪽의 비판이 많다. 분명히 저투입형 농업에서는 단위면적당 생산성이 저하된다. 선진국이 선진국의 이유만으로 생산성을 저하시켜 세계의 식량 생산에 부하를 더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개발도상국의 지지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이 하고 있는 일은 다음에 기술하듯이 자국의 토지는 놀리고 가지고 있는 돈으로 위력을 발휘해 세계의 식량을  여기저기 다니며 사 모으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적어도 사용할 수 있는 토지는 유효하게 사용해야 한다. 이 사태를 조금이라도 완화하는 것이 환경에 대한 부하를 줄이는 데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농업 생산과 생산비


농업은 산업 가운데 유일하게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태양광을 사용해 물과 이산화탄소에서 전분이란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기타 산업은 모두 석유와 석탄 등의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또 유한한 자원을 사용하여 물질을 만들어 왔다. 또한 여기에서는 농업이란 말을 넓게 해석하여 임업과 수산업, 축산업을 포함하여쓰기로 한다. 그런데 이제는 그 농업까지 석유를 사용한 소비형 산업으로 전환된 듯하다. 이제 농업은 농약과 화학비료 등 석유 제품이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수산업은 종래 수렵경제의 연장으로 '잡다'에 무게를 두었는데, 요즘 몇 십 년은 기르는 어업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기르는 어업이라 해도 과도하게 집약적인 양식은 협의의 집약농업과 마찬가지로 다량의 에너지를 소비한다. 또 종래부터 자원의 고갈을 불러온다는 비판이 강했던대규모 원양어업도 에너지 소비형 산업으로 전환해 버렸다. 물론 지금 바로 이러한 형식의 농업을 전환할 수는 없지만 농업의 의미를 고려한, 장기적 시각에 입각한 시나리오가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의 교역권이 확장됨에 따라 먹을거리도 장거리를 운송하게 되었다. 교역권의 확대는 원래 그 토지에 없는 자원의 융합과 다른 문화의 교류를 통하여 큰 부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지금처럼 다량의 먹을거리를 몇 천 킬로미터, 몇 만 킬로미터나 운송되면, 그 수송 에너지도 막대해질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캔의 니기리 초밥을 생각해 보자. 일본의 어느 어항 근처의 초밥가게에서 먹었던 '도미의 니기리'와 뉴욕의 '초밥 바'에서 먹은 그것과는 운반에 사용된 에너지는 극단적으로 다르다. 생산에 사용된 에너지는 대부분 똑같다. 전자에서는 현지의 농가에서 생산된 쌀과 근해의 어장에서 잡은 물고기를 사용하기에 수송에 들어간 에너지는 매우 적다. 그런데 후자는 쌀도물고기도 천 킬로미터의 단위를 운송된다. 게다가 물고기는 수송되면서 냉동이 빠질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정량적인 비교는 아직 행해지지 않았지만, '밭에서 위장까지' 가는 사이에 사용된 에너지를 단순히 비교하면 그 차이는 수백 배에 이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초밥의 가격차는 아마 몇 백 배가 안 될 것이다. 그건 전적으로 대량생산, 대량수송의 혜택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 이 대량생산의 은혜를 입어 온 것은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대량생산이 먹을거리의 안정화를 불러온다는 건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환상 같은 것이 아닐 수없다.


생산활동이 환경에 미치는 부하를 수치화한 생태학적 발자국의 발상은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생긴 것이다. 인류가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당분과 단백질의 한 묶음을 어떻게 에너지를 들이지 않고 생산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 인류와 그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할 큰 요소이다. 계절풍 지대에서 '쌀과 물고기' 및 맥류 지대에서 '맥류와 젖' 같은 한 묶음은 생태학적 발자국의 측면에서는 이상적인 농업 생산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대로 옛날로돌아자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먹을거리는 되도록 운송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결정적으로 식량이 충분하지 않은 지역이 있다. 아랍 사회 등이 그렇다. 그러한 지역에서까지 식량을 운송하지 말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막 한가운데에서 지금 당장 농업을 하는 건 에너지 측면에서는 분명하게 손실이 크다. 그러나 그래도 무엇을 얼마나 어디에서 운송할지에 대해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고려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잡초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 계절풍 지대의 농업에서 가장 위협이 되는 건 잡초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근세 이전의 논벼농사에서 휴경의 큰 이유는 잡초가 번성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각지에서 볼 수 있는 화전은 불을 사용하여 밭을 개간하는 농업의 방식인데, 같은 밭은 3년 경작하면 다음 해 이후 몇 년쯤은 휴경한다. 그 이유는 땅심의 저하와 잡초의 피해가 증가하는 데 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휴경은 적어도 고분 시대에는 시작되었다고 생각되며, 그것을 보여주는 상황증거도 몇 가지 알려져 있다. 그 정도까지 잡초의 해는 막대했던 것이다.


근세에 들어서면, 더 많은 노동력이 제초에 쓰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무렵부터 토지의 소유제는 명확해지고, 휴경하거나 새로운 토지를 개척하는 여지도 점점 사라졌다. 사람들은 항상 농지로 쓰게 된 논에 달라붙어 쌀을 재배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근대에 들어서도 똑같았는데, 도시 노동력의 수요가 확대됨에 따라 김을 매는 인구가 줄어들었다. 제초제는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개발되었다. 


제초제에 의하여 인류는 잡초를 박멸할 수 있었을까? 후지이藤井 씨의 논고를 보는 한, 그건 단정하기 곤란하다. 왜냐하면 가령 강력한 제초제를 써서 어느 잡초를 제거해도 이번엔 그 약제에 내성을 가진 새로운 잡초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새로운 잡초'가 같은 종에 속하는 다른 유형인 경우도 적지 않다.


도대체 작물과 잡초는 생태학적으로는 매우 '유사한' 관계이다. 일본처럼 비가 많고 식물의 생육이 빠른 장소에서 생태계는 방치하면 천이를 진행해 숲이 되어 간다. 경지는 경작이란 교란에 의하여 천이를 억누르는 장소이고, 또 거름기가 많은 토양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토지에 적응할 수 있는 건 작물과 잡초뿐이다. 둘은 비슷한 생태적 특성을 가지지만, 한쪽은 인간의 비호를 받고 다른 한쪽은 배제되는 정반대의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잡초가 세운 전략은 철저하게 작물의 모습을 본따는 것이었다. 이런 본땀으로 인해 잡초의 방제는 곤란해진다. 


또한 잡초라고 인식되는 종은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농학 관계자 안에서는 유명한 일화인데, '밀밭 안의 보리는 잡초'라는 것이다. 그건 혹은 빵밀(일본에서 보통 재배하고 있는 밀은 보통밀임)은 에머 밀이라 부르고 있는 재배종이 당시 그 밭에서 자라고 있던 잡초인 '야생 염소풀(Aegilops tauschii)'과의 사이에서 자연교배를 일으켜서 생겼다. 빵밀이 지닌 유전정보의 적어도 1배분은 잡초에서 기원한다. 더욱이 호밀이라 부르는재배종(검은 빵의 원료 등으로 쓰임)은 원래 밀밭의 잡초였는데, 조건이 나쁜 토지 등에서 재배식물로 진화해 온것이라 할 수 있다(辻本 2009).


반대로 이전 재배종이었던 식물이 잡초로 전환된 사례도 많다. 일본에서도 잡초 벼라고 하여 문제가 된 '붉은쌀(赤米)'은 중세에 도입된 품종이 근대에 들어서 잡초화된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잡초란 인간이 농경이란 행위를 통하여 저절로 산출한 존재이다. 잡초는 강하고 몹시 거친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그 강하고 거칠음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인류는 '녹색혁명' 이후 제초의 결정적인 수단으로 제초제를 개발하여 문자 그대로 '제초 방제'를 얻은 듯하지만,앞에서도 적었듯이 현재 상황에서는 그 시도가 반드시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뿐인가, 제초제를 지나치게 사용하여 물과 토양을 오염시키고, 희소종을 절멸로 몰았다. 즉, 환경을 악화시켰다. 현대 일본의 논벼농사도 기본은 그노선을 답습하고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현재 상황 대로 논벼농사의 행방은 결코 밝다고 할 수 없다.




논벼농사의 우위성


일본 열도의 논벼농사에서는 그래도 아직 다른 작물의 경작에 비하면 우위성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가 연작 장해를 일으키지 않는 점이다. 많은 작물은 같은 토지에서 반복하여 재배하면 '연작 장해' 또는 '그루타기'라 부르는 지장을 발생시킨다. 장해의 구체적인 내용은 작물에 따라 다르지만, 수확이 감소하고 질병에 걸리기 쉬워지는등 몇 가지 공통 사항도 발견된다. 그런데 논벼농사의 경우에는 이 연작 장해가 거의 없다고 알려져 있다. 벼도 밭에서 재배하면 연작 장해가 일어나기에 '논'에서 재배하는 것이 연작 장해를 일으키지 않는 원인이라 생각된다. 

논벼농사의 또 한 가지 우위성은 논이 댐으로 기능하는 것이다(富山 1993). 태풍과 장마철의 집중호우 등으로 한번에 많은 비가 내릴 경우, 쏟아진 물을 잠시 머물게 하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논에 통상은 물이 잠겨 있기에 여름에는 논에서 일어나는 기화열이 기온을 떨어뜨리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사실, 논을 건너오는 바람에서 서늘함을 느낀 경험을 가지고 있는 분도 많을 것이다. 몇몇 자치체에서는 휴경논 등에 물을 담아서 기온을 떨어뜨리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고 한다. 다만 논에 물을 담는 것만으로는 기온을 떨어뜨리는 효과는 작다고 생각한다. 기화열의 효과는 그곳에 식물을 심어 놓아야 한층 뚜렷해진다. 그 식물이 호흡한 물을 증산하기 위하여 많은 기화열을 빼앗기 때문이다. 흙을 넣은 양동이에 벼를 심은 것과 아무것도 심지 않은 것을 준비하여 물을 담아, 물이 줄어드는 상태를 날마다 관찰하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벼를 심은 양동이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해 훨씬 일찍 물이 사라져 버린다.




일본인은 쌀을 먹어 왔을까


그런데 일본인은 쌀을 먹어 왔던 것일까? 테라사와 카오루寺澤薫 씨는 야요이 시대의 몇몇 유적에서 출토된 식물 유체를 꼼꼼히 조사해, 도토리 등 자연식생에서 채집한 것이 가장 많았다고 기술한다. 즉, 논벼농사가 보급되었다고 하는 야요이 시대조차 '농경'의 요소보다 '채집'의 요소 쪽이 컸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고대에 들어오면 식문화는 시대의 권력자와 서민 사이에 큰 차이가 나게 된다. 문서 등에 남은 귀족들의 먹을거리는 현대 우리들의 눈에도 상당히 호화로우며, 밥 등 그릇에 수북하게 대접했다. 헤이안 시대의 '왕조 요리'를 재현한 교京 요리 '로쿠세이六盛' 주인 호리바 히로유키堀場弘之 씨에 의하면, 당시 귀족의 공식적인 식사에서 밥은 원통형으로 높여서 대접했다고 한다. 다만 대접한 전부를 한번에 먹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정도의 밥이 나왔다는 건 사실이라 생각한다. 또, 후지와라 도장은 당뇨병이었단 이야기는 당시 귀족들의 미식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나라 시대의 야마토 지방에서는 제, 소 등이라 부르는 유제품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5세기의 오사카 평야에서는 밀의 씨앗과 말의 골격이 출토되어서 목축의 존재가 엿보이기도 있다. 그리고 에가미 나미오江上波男(1906-2002)는 '기마민족 도래설'을 전개하여 큰 논쟁을 일으켰는데, 이들 사실은 기마민족도래설의 재래를 방불케 한다. 


중세부터 근세에 걸쳐서는 어떨까? 이에 대해서는 키무라 에미木村栄美 씨가 참고가 된다. 키무라는 회화 자료에 표현된 식사의 풍경을 읽고 해석하는 수법으로 중세 사람들의 식생활을 밝히고자 했다. 키무라는 귀족, 승려, 일반 서민 각각에 대하여 그 먹을거리를 해석했는데, 밥은 그 어디에도 등장하는 것 같아 그 한에서는 '밥'이 주식의 지위를 획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밥'이 쌀밥인지, 또는 현미인지 흰쌀인지, 찹쌀인지 멥쌀인지등 상세한 건 분명하지 않다. 회화에 한하지 않고, 문서가 어디까지 정확히 사실을 전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일반 서민'에서도 그것은 당시의 선진지였던 교토 주변의 일반 서민이고, 지방을 포함한 서민의 생활을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지적도 할 수 있다. 다만, 키무라도 말하듯이, 묘사된 세계가 화가의 시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근세의 기근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 점에 대해서 근세에 빈발한 '기근'을 생각해 보고 싶다. 근세의, 특히 동일본에서는 기근이 빈발하여, 테이메이天明 연간을 포함한 몇 십 년 사이에 인구가 격감할 정도의 재해가 되었다. 이 일련의 기근에 대해서는 이 시기의 저온(소빙하기라는 말을 하는 연구자도 있음)에서 원인을 찾는 의론이 많다. 그러나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저온이란 기후변화는 일종의 방아쇠였으며 그것이 원인의 전부는 아니라는 견해도 가질 수 있다. 이미 몇몇 연구자가 고려하고 있듯이, 중세 이전의 동북일본은 근세만큼 벼농사에 특화된 농엽 경영이 진전되지 않았다. 


원래 근세 이전 일본 열도의 북쪽에서는 쌀보다 잡곡을 주곡으로 하는 문화가 오래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근세란극단적으로 논하면,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 열도의 정치적 통일에 맞추어서 논벼농사를 인위적 생태계의 중심에 놓고, 쌀을 주곡으로 하며, 쌀을 화폐로 삼고, 벼농사와 쌀 음식에 관한 문화를 정통으로 하는 문화의 시대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 이전의 기층문화가 송두리째 뽑혔을 리는 없다. 지금도 '산나물 캐기' '버섯 따기' 등의관습은 동(북)이 많고 서는 적은 경향이 있지만, 그것도 당시의 자취가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아오모리시 역사민속전시관(2006년 개관) 계고관에 있는 다나카 츄자부로田中忠三郞 씨는 '숲은 시모키타下北의 백화점'이란 말로 이를 표현했다. 즉, 쌀을 재배하지 못한 때에도 숲에 가면 먹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을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벼농사에 지나친 에너지를 주입한 나머지 숲의 관리가 허술해져 '숲의 은혜'를 얻을 수 없게 된 것이 기근의 직접적 원인이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앞으로 증명이 필요하겠지만, 하나의 가설로 기억에 남겨 놓고 싶다. 




쌀과 물고기


논이라 하면 현대 일본 열도에 살고 있는 일본인 대부분이 녹색의 융단 같은 광경을 상상한다. 즉, 논이란 현대 일본인에게는 쌀을 농사짓는 장소이다. 그러나 앞의 잡초란 소제목에서도 기술했듯이, 논에서 벼 이외의 식물이 살지 않는 상황은 다량의 에너지를 그곳에 들이부은 결과이다. 우네宇根 씨가 말하듯이, 엄밀하게 말하면 논에는 벼 이외에도 많은 식물이 생식하는 것이 보통이다. 


또 -이것도 우네 씨가 말하듯이- 논에는 다양한 동식물이 생식한다. 그리고 그것이 안정된 생태계이다. 그들은 지금은 '잡초'와 '해충' 등 벼의 생산을 저해하는 존재로 취급되는 경향이 강하지만, 역사를 돌이키면 그러한 인식은 완전히 현대적이며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포유류인 인간은 그 생존을 위해 에너지로 전분과 신체를 만들기 위해 단백질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들 논에 있던 생물들은 전분의 공급원으로, 또는 단백질의 공급원으로 이용되어 왔다. 나는 이러한 생산양식을상징적인 의미로 '쌀과 물고기'라고 표현했다(佐藤 2008). 이것은 쌀과 물고기가 한 묶음으로 먹을거리를 떠받쳐 왔다는 것을 말한다. 쌀과 물고기의 한 묶음은 역사적으로 보아도 벼농사 개시 이후의 계절풍 지대에서 널리 인정되는 한 묶음이다. 비슷한 한 묶음은 1권에서 전개한 의론에 쭉 이어서 말하면 '맥류의 풍토'에서는 '맥류(또는 감자)와 젖', 인도 아대륙에서는 '잡곡과 콩' 등으로 모양을 바꾸어 존재한다(佐藤 2008b). 이러한 한 묶음은 그 토지와 그 풍토에 뿌리를 내린, 말하자면 '환경의' 한 묶음이 된다. 


현대 일본인의 먹을거리를 여기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약 50년 전의인 1965년의 통계와 비교하면, 쌀의 소비는 최초에 기록되었듯이 110kg대에서 60kg대 전반으로 반감한다. 물고기의 소비라면 14kg이 12kg쯤이 되어 큰 변화가 없다. 한편 유제품을 포함한 축산품의 소비량은 2배 반으로 증가한다. 채소와 과일 등의 소비에도 큰 변화가 있지는 않는다. 이처럼 쌀과 물고기의 한 묶음에 대해서 통계로는 쌀의 감소라는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전 시대에 대해서는 통계자료가 마땅하지 않기에 정확히는 말할 수 없는데, 나의 어린시절이었던 1955년 무렵을 떠올려 보면,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걸 먹었다는 기억이 있다. 대충 꼽아 보아도 논우렁이, 미꾸라지, 물가의 조개류, 벌의 애벌레 등의 동물질과 쑥, 수영, 여러 산나물 등의 식물질 등을 들 수 있다. 나의 기억에는 없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다양한 곤충과 그 유충, 사슴, 토끼, 멧돼지, 오리 등의 동물도 예사로 먹었다. 지금 일본에서 '고기'라 하면 소와 돼지, 닭 세 종류밖에 없지만, 이것이야말로 이상하다고 할 만한지도 모른다. 


중근세의 먹을거리에 대해서는 하라다 노부오原田信男 씨의 논고가 상세하다. 그것은 논을 포함한 생태계에 생식하는 동식물이 총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곳에서 틈으로 살짝 볼 수 있는 건 참으로 다양한 식재료의 존재인데, 그것에서도 한층 더 흥미로운 건 이른바 '주식'이었던 전분 공급원에 대해서도 피 등의 잡곡과 토란 등의 덩이뿌리류가 쓰이고 있었던 지역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다는 사실이다(坪井 1979). 이들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도 또 언급한다.




쌀과 마음


이처럼 논의 주인공으로 취급되어 온 것은 쌀뿐이었다. 아니, 쌀은 계속 논의 주인공으로 취급되어 온 것처럼 이야기되어 왔다고 쓰는 편이 정확할지 모른다. 하라다原田(2005)가 말하듯이, 논벼농사 사회에 귀속됨은 고대 이후 일본의 지배층이 일관적으로 취해 온 정책이며, 그러한 정책이 반복하여 채택된 배경에는 생산의 실태로서 논벼농사에만 의지할 수 없는 역사와 다양성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와 생산의 갈등은 중세에도 계속되었다고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1928-2004)는 보고 있다(網野 1997).


그러나 정치와 권력의 예상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무언가'란 대체 무엇일까?벼농사는 그 무대(어떤 장소에서 벼가 재배되고 있는지)의 다양성에 관계 없이 지속적인 생산방법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나도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이야기에 찬성한다. '부분적으로'라고 자른 건 특히 고도성장기 이후의 이른바 '고투입 고수익', 즉 다비다수의 벼농사가 전혀 지속적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본 열도의 광범위함 지역에서 쌀은 계속 생산의 중심이 되어 왔다. 한편, 예를 들면 유럽에서 맥류는 감자 이전에는 '주식'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맥류라도 밀, 보리, 귀리, 호밀 등 다양하다. 같은 밀이라도 보통밀 외에 파스타용 마카로니밀이 있다. 콜럼버스 이후의 유럽에서는 특히 북부를 중심으로 감자가 전분 공급원의 주력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특정 종이 무언가 특별한 곡류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구조는 생기기 어려울것이다. 


쌀의 우위성을 '신찬神饌', '의례' 등의 측면에서 본 것이 칸자키 노리타케神崎宣武 씨의 논고이다. 이들은 지금은 경사스런 자리에서조차 잊혀져 버린 존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일본인은 신년의 첫 참배(詣)는 거르지 않는다. 그리고 떡을 먹고, 도소주屠蘇酒를 마시고 신년을 축하한다. 이러한 정신구조는 -그것이 누군가가 의도하여 만든 것이라 해도- 일본인과 쌀, 벼농사와의 강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일찍이 츠보이 히로후미坪井洋文(1929-1988)가 <덩이뿌리와 일본인(イモと日本人)> 안에서 언급한 '떡 없이 정월'의 민속 사례가 보여주듯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보편적으로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동(북)일본과 서일본은 재배되는 작물과 그 품종, 수반된 동식물, 숲의 식생 등에서 이질적이다(靑葉 1980, 佐藤 2009). 아카사카赤坂(1999)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 '몇 개의 일본'이란 단어를 고안했다. 몇 개의 일본을 기층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일본이 쌀과 벼농사 문화에 수렴했던 과정에서는 각각의 시대에 지배층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유는 다른 데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쌀이 가진 영양가를 들 수 있다. 쌀은 인류에게는 주로 전분의 공급원이지만, 약간의 단백질도 포함한다. 단백질은 20개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지는데, 쌀의 단백질은 이 아미노산의 대부분을 모조리 포함한다. 그래서 가령 동물성 단백질 없이 쌀만 먹어도 기아 상태가 되기 어려워진다. 한편 또 다른 곡류의 왕인 밀은 단백질의 총량은 쌀보다 많은데 아미노산의 균형이 나빠, 그것만 먹으면 언젠가는 기아 상태에 빠진다. 성서에도자주 나오는 '빵과 포도주'의 조합은 빵의 그러한 결점을 포도주가 보완하기 때문이란 설명도 있다. 



브랜드 지향과 가짜 고시히카리 소동


쌀을 특별시하는 일본인의 사고 경향은 때로는 삐뚤어진 모습으로 발현하기도 한다. 몇 년 전에 사회 문제가 되었던 가짜 고시히카리 문제도 그 하나이다. 이는 그 뒤 연속하여 일어났던 일련의 '먹을거리 속임'의 발단이 되었던 문제로, '속임'의 본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짜 고시히카리의 상세한 내막은 이 책에 실려 있는 하나모리 쿠니코花森功仁子 씨의 기고문에 양보하려 하고, 이 문제의 저류에 있는 것이 '브랜드 지향'이라고도 할 만한 사고 경향에는 없을까 생각한다.


브랜드 지향의 사고 경향은 다양성의 저하, 특히 품종의 다양성의 상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일본의 벼 품종의 다양성 저하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이전에 기술한 바이지만, 그렇다면 고시히카리 이후 벼의 품종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냐고 하면 그렇지 않다. 고시히카리란 품종의 농림등록번호는 '농림 100호'이다(등록년도는 1956년). 2008년 현재 등록번호는 431번에 이르고 있기에, 나라가 관여한 것만 고시히카리 이후 약 50년 동안 3000을 넘는 품종이 세상에 나온 셈이다. 등록번호를 부여하지 않았던 품종의 예비군은 이보다 훨씬 많다. 그런데도 벼농사 농가도 소비자도 그 존재의 극소수밖에 모른다. 현실에서 재배된 일이 있는 품종, 현재 재배되고 있는 품종도 200가지 정도를 밑돌고 있다.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지는 간단한 작업이 아니지만, 적어도 소비자의 '브랜드 지향'이 관계되어 있는 것은 확실할 것이고, 그 심리를 교묘하게 조종하는 시장의 존재도 또한 눈감아 줄 수 없을 것이다. 기술과 사회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는 어느 사회가 뛰어난 기술력(사람)과 에너지(물질)를 투입하여 새로운 부를 생산하는데 그것을 이용하는 체계가 없다고 모조리 수포로 돌아갈 우려가 있다는 점을 웅변하고 있다. 고시히카리 일변도의 책임은 품종개량의 전문가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기술을 살리지 못했던 사회와 정치의 책임이라고 말해야 한다. 


반성하건데, 일본에는 메이지 초기에 400가지를 넘는 품종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현재 재배되고 있는 품종은 200가지 안팎인데, 품종의 수를 다양성의 지표로 삼으면 이 100년 동안에 다양성의 정도는 20분의 1까지 저하된 것이다. 또한 메이지 시대 중반의 품종과 지금 품종의 큰 차이는 품종이란 하나의 집단 안의 다양성에도 있다.품종 안의 다양성이란 개념은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사실 벼의 품종은 어떤 품종도 완전한 클론은 없다. 고시히카리조차 엄밀하게 비교하면 현마다 다른 유전자형을 나타낼 터이다. 그리고 같은 현에서 생산한 고시히카리 안에도 몇 가지 유전자형이 섞어 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다형성은 옛 시대의 품종에서는 훨씬 크고, 같은 품종의 개체를 많이 심어서 비교하면 키와 개화일, 쌀알의 크기 및 모양 등 다양한 성질에서 차이가 발견되었다. 메이지 시기부터 쇼와 초기까지 행한 품종개량의 주요한 방법이었던 '순계분리'법은 재래종 안에서 우수한 성질을 가진 그루를 골라내어 그 종자를 증식하는 원시적인 것인데, 이러한 방법이 유효했을 정도로 당시의 품종은 한 가지 품종 안에 다양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메이지 시기까지 일본 열도에서 벼의 품종이 유전적으로 얼마나 다양한 존재였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벼농사 문화와 일본의 장래


일찍이 야나기다柳田의 시대와는 달리, 일본이 단일민족국가이며 단일한 문화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연구자는 과연 이제 없다(赤坂 1999). 농경 문화만 보아도 일본 열도에 건너온 것은 조선반도를 경유하여 온 것 외에, 북쪽에서 또는 남쪽에서 건너온 문화가 뒤섞인 복합적인 문화를 형성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벼농사 문화는 그러한 문화 복합의 안에서 생성되어 온 문화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佐藤 2009).


그렇게 하면 쌀을 먹음과 벼농사의 문화가 언제부터 일본 열도 전체를 뒤덮듯이 된 것인지는 역사학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앞에서도 적었듯이, 일본인이 상고 시대부터 쌀을 주식으로 먹어 왔다는 사실은 없다. 일본 열도가 그 무렵부터 온통 논으로 덮여 있었다고 하는 것도 또한 아닐 것이다.


다만 그래도 쌀농사와 쌀밥은 -적어도 서일본에서는- 사람들의 동경이었다는 점은 틀림이 없다. 회화 자료에 나타난 쌀밥의 그림이 이야기하는 건 그러한 점일 것이다. 


근세에 쌀은 통화의 역할을 짊어질 만큼 중요한 물자로 여겨졌다. '고쿠다카(石高)'라는 일본의 독특한 단어는 그걸 잘 보여주고 있다. 한 섬(약 150kg)은 성인 남자가 1년을 사는 데 필요한 쌀의 양이다. 그것은 또한 무사와 한이 몇 명을 먹여살릴 수 있는지를 실제 수량으로 보여주는 잣대이기도 하다. 그것이 경제력을 보여주는 도량형으로 통용된 것이 쌀의 지위를 잘 보여주고 있다. 


현 시대에 사는 일본인에게도 쌀은 특수한 존재이다. 고베神戸  아와지淡路 지진의 부흥에 들어갔던 자원봉사 사람들과 지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아침밥으로 모닝빵을 배포받은 쪽은 힘이 나지 않았지만, 주먹밥을 받은 순간 의기가 올랐다고 한다. 역시 쌀에는 무언가 힘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걸 쓰는 게 연구자로서 어떤 말을 들을지 모르지만, '정신의 힘'은 물질만능주의인 현재의 일본인이 돌아볼 만한 것의 하나가 아닐까? 그렇게 표명하고 <유라시아 농경사> 제2권의 서장을 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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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대담   유라시아의 풍토와 농경


사사키 타카아키佐々木高明

사토 요우이치로佐藤洋一郞




풍토와 농경


사토; 오늘은 많은 사람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사키 선생에게도 참석해 주셔서 매우 고맙습니다.

시간이 없기 때문에 빨리 시작하겠습니다. 우리의 연구 프로젝트에서는 농업이란 것을 다시 한번 근본에서부터 생각해보자는 큰 주제의 하나로 삼고 있습니다. 1만 년 동안의 농업과 환경이란 것이 지금까지 인류에게 본질적으로 어떤 것으로 이어져 왔을까? 그것을 생각함으로써 앞으로 미래의 농업의 자세,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생각하기 위한 대비를 하고 싶다. 즉, 후속세대의 농업을 어떤 방법으로 하면 좋을지를 고안하고 싶다고 생각하여 좀 역설적인 주제를 내세운 연구 프로젝트를 마련했습니다. 그것이 '농업이 환경을 파괴할 때'라는 주제이고……


사사키; 매우 선풍적이네요.


사토; 원죄론이란 사고방식이 있어서 대저 농업은 인류에게 나쁜 것이란 사고방식이 있지만, 그렇게 말해 버리면 너무 노골적이라 맛도 정취도 없기에…… 아까 이야기에서는 없었지만 뭐가 어떻게 되면 맛이 없을까, 뒤집어 생각하면 무엇을 어떻게 놔두면 환경과 어느 정도 조화를 꾀할 수 있고, 또는 잘 해내지 않을까 하는 걸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세계의 …… 라고 하더라도 아프리카와 신대륙까지를 포함하여 의론할 만한 힘도 시간도 지금은 없기 때문에, 우선 유라시아에만 주목하여 이야기를 진행하려 생각합니다.


사사키; 일본의 농경을 생각만 해도 유라시아, 즉 유럽부터 아시아에 걸친 대륙과 그 남쪽에 있는 여러 도서의 전체를 시야에 넣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지역의 1만 년 정도의 역사를 배경으로 고려하면서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는, 더구나 미래는 어떻게 내다볼지가 이 <유라시아 농경사> 전체의 문제 같네요. 따라서 오늘은 조금 큰 시야부터 유라시아의 농경사, 농경문화사 같은 전체적 문제를, 프로젝트의 지도자인 귀하를 상대로 하여 생각해 나아가도록 하겠네요.


사토; 그러합니다. 그래서 이야기의 시작으로, 한 장의 지도를 제시하려고 합니다.



사사키; 유라시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지도네요. 간단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사토; 이것은 독일의 기후학자 W. 쾨펜(1846-1940)이 고안한 '기후 구분도' 등을 바탕으로 작성한 지도입니다. 이 유라시아의 기후도에 와츠지 데츠로(1889-1960)의 <풍토 -인간학의 고찰>에서 문제삼는 세 가지 '풍토'를 기재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일본의 남쪽 반부터 중국의 남부, 동남아시아의 대륙부를 지나서 인도의 동부에 걸친 지역이 '계절풍 풍토'. 그 다음에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끝, 즉 유럽을 포함한 지역이 와츠지의 말을 빌리면 '목장의 풍토'. 그 다음 그 한가운데에 있는 것이 '사막의 풍토'. 이 세 가지 정도를 무대로 하여 농경이란 것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사키; 어쨌든 농경이란 건 기본적으로 식물을 재배하는 것이기에 자연조건의 특색을 배경으로 생각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는 기후조건을 고려하는 것이 유라시아의 농경을 생각할 때 대략적인 틀 짜기가 되기에 이 그림이 이번 토론에서는 기본적인 지도라 생각하는 게 좋습니다. 지금 말씀드렸듯이 쾨펜이라든지 누구든지 좋습니다만, 기후 구분이란 건 전체적으로 추운 곳, 따뜻한 곳, 더운 곳이란 온도 조건과 비가 많은 습윤한 곳과 건조한 곳이란 건습 조건(기타 강수 계절도 있지만) 두 가지를 조합하여 생각합니다.

한편, 와츠지 데츠로라는 철학자가 1927년에 유럽으로 유학을 갔을 때는 배로 쭉 프랑스의 마르세이유까지 갔습니다. 그 길에 인도양과 인도에서는 혹서로,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공기가 매우 건조하다. 그 다음에 유럽에 도착하면 지중해 연안은 매우 환하다. 그렇지만 독일에 가면 그곳은 아주 음울하고, 숲의 세계이다. 그와 같은 인상을 바탕으로 '풍토'라는 개념을 고안했다. 그리고 그 '풍토'가 인간의 존재든지, 문명이든지에 주는 영향을 몸으로 직접 느끼게 되었죠. 그 인상을 바탕으로 <풍토>라는 책을 쓴 것이죠. 위의 지도는 그러한 와츠지 씨의 생각을 배경으로 하면서, 이러한 모습을 크게 나누어 본 것이죠.

그래서 사토 씨, 문제는 지도 안의 굵은 선인데 이건 무엇입니까?


사토; 지도에서 일본 열도의 중앙부부터 중국을 통하여 히말라야 남단을 서쪽으로 이어진 굵은 선 말입니까? 그건 보리의 품종을 구분하는 선입니다. 보리의 이삭을 보십시오(그림4-1). 이건 옛날부터 유라시아에 있는 작물입니다. 보리는 그림의 가장 왼쪽 끝에 있습니다만, 이들을 대학원생에게 그 이름을 말해 보라고 하면 재밌어요. 반 정도는 틀립니다.



그림4-1 유라시아의 주요 곡물. 오른쪽부터 벼, 조, 피, 향모, 기장, 수수, 밀, 보리.



사사키; 요즘 농학부 학생은 반도 모를 거예요. (웃음)


사토; 반 이상 모를 거예요. (웃음) 가장 왼쪽이 밀이고, 오른쪽이 보리입니다. 타카하시 류헤이高橋隆平(1912-1999)라는 선생이 말씀하셨는데, 당시의 말로 '동아시아형' 보리와 '서구형' 보리 두 종류가 있다는 유명한 논문을 1955년에 발표했습니다.


사사키; 오카야마 대학의 선생이셨죠. 확실히 보리의 탈립성을 방지하는 유전자 조합의 연구에서 세계의 보리 품종에 서쪽(W)형과 동쪽(E)형이 있다고 기술되었죠.


사토; 그러한 것을 말하고 계십니다. 여러 보리 품종의 유전적 성질을 조사하면, 몇 가지 성질과 그 유전자의 분포에 지리적인 특이성이 있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E형의 품종군에만 있는 유전자가 몇 가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찰보리라든지 쌀보리라든지……


사사키; 쌀보리라는 건 보리의 껍집이 잘 떨어지는 것이죠.


사토; 그렇습니다. 반대의 성질인 겉보리에서 종자는 풀 같은 물질로 '겉껍질'에 달라붙어 있는데, 쌀보리에서는 성숙기에 이 풀의 힘이 약해져 종자가 '겉껍질' 안에서 벗겨지듯 떨어집니다. 그래서 익은 이삭을 떨면 버석버석 소리가 나지요. '미숫가루'라든지 '보릿가루'로 쓰는 것이 쌀보리, 보리차로 쓰는 것이 겉보리입니다. 우선 굵은 선의 남동쪽에도 쌀보리 외에 겉보리와 메보리도 존재한다는 걸 주의하세요.


사사키; 유라시아 대륙의 쭉 서쪽부터 북쪽에 걸쳐서가 'W형 보리'의 분포 지역이고, 그 선보다 동쪽이 대략 'E형 보리'가 분포하는 지역이며, 이 선이 계절풍 지역과 건조 지역을 나누고 있는 선에 약간 가까운……


사토; 아뇨, 약간 가깝다기보다는 매우 잘 맞습니다. 잘 찾아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잘 맞습니다. 


사사키; 요컨대 계절풍 지대는 기후가 온난하고 여름에 자주 비가 내리지요. 지도에서는 연간 강수량 400mm 선이 그려져 있네요. 이 400mm 선의 안쪽, 즉 강수량이 그 이하인 지역이 와츠지 씨 식으로 말하면 '사막의 풍토'입니다. 다만 이 지역 전부가 사막은 아니고, 반건조의 초원 지대도 꽤 넓죠. 맥류의 원산지도 이 안에 포함되어 있지요.


사토; 네, 대개 들어 있습니다. 보리와 밀의 원산지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라고 부르는 지대로, 이 지도에서는 카스피해의 남부에서 서쪽의 400mm 선을 따라서 겹쳐져 있습니다. 밀 가운데 '보통 밀'이라 부르는 우리가 지금 빵과 라면으로 먹는 밀에 대해서는 여기보다 약간 동쪽, 아나톨리아부터 카스피해의 남안에 해당한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사사키; 400mm 선보다도 서쪽의 '목장의 풍토', 즉 지중해 연안의 지대는 어느 쪽이냐고 한다면 나무가 드문 지대이고, 거기부터 알프스를 넘어 북쪽은 일반적으로는 산림 지대, 구체적으로는 졸참나무와 너도밤나무를 주체로 하는 낙엽광엽수림이네요. 이 산림대는 쭉 유라시아의 북쪽부터 동북아시아까지 뻗어 있지요.


사토; 유라시아의 쭉 북쪽을 타고 그 낙엽광엽수림대는 옛 만주(중국 동북부)와 조선반도 북부를 거쳐 일본 열도의 동북부까지 닿아 있습니다.


사사키; 대충 그렇게 큰 범위 안에서 와츠지 씨가 전혀 문제 삼지 않은 건 동남아시아 섬들의 세계. 와츠지 씨는 그곳에는 가 보지 않았다. 유럽으로 배로 유학을 갈 때 여기는 들르지 않았다.


사토; 아뇨, 들렀죠.


사사키; 뭐, 싱가포르 정도는 들렀을지 모르지만, 섬에는 가지 않았다. 지구연(종합지구환경학연구소)의 타치모토立本 소장 등이 조사한 인도네시아 등은 간 적이 없다. (웃음)


사토; 옆은 스쳐 갔을지도요. (웃음)



종자번식과 영양번식


사사키; 그런데 지도에는 동남아시아 대륙부터 도서부에 걸쳐서 큰 원이 있으며 여기에 '뿌리작물 농경의 풍토'라고 적혀 있고, 그 옆으로 '종자번식'과 '영양번식'이란 굵은 녹색의 화살표 사선이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조금 설명해 주세요. 


사토; 이건 최근 내가 고안한 축입니다. 갖가지 재배식물이 어디에서 생겼는지 조사해 보면 맥류가 생긴 곳, 맥류는 완전히 한해살이인데 대부분은 가을에 그 종자를 뿌린다. 매우 추운 곳에서는 봄에 종자를 뿌리는 곳도 있습니다. 그렇게 봄에 뿌리면 가을에, 가을에 뿌리면 봄에 꽃이 피어서 종자를 얻을 수 있다. 종자를 얻으면 부모인 식물은 완전히 죽습니다. 맥류만이 아니라 잡곡류의 대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식물을 한해살이 식물이라 부르는데, 이런 식물이 생긴 곳이 유라시아에서는 지도의 왼쪽 윗부분입니다. 


사사키; 위라고 하기보다는 한가운데 왼쪽 부근. '사막'이라는 문자 위에 해당하네요. 그런데 일본어는 편리하여 맥류라 하면 보리도 밀도 모두 포함하지만, 영어 등의 서구어에서는 맥류란 단어는 없지요(표4-1).




잡곡에 관한 이름의 분화

맥류에 관한 이름의 분화

잡곡 농경문화

벼, 조, 수수, 기장, 피 등 종류마다 한자로 표시하는 개별 이름이 있고, 총칭하는 명사가 없다.

맥류란 총칭 명사만 있고, 개별 종류에는 대, 소, 연 등의 형용사를 붙여서 구별한다.

맥류 농경문화

millet이란 총칭 명사만 있고, 개별 종류에는 여우꼬리, 보통, 손가락, 농가 마당 등의 형용사를 붙여서 구별한다.

보리, 밀, 귀리, 호밀 등 종류마다 개별 명칭이 있고, 맥류에 해당하는 총칭 면사가 없다. 

표4-1 잡곡 문화와 맥류 문화에서 작물 이름의 분화. 잡곡 농경문화권의 언어를 중국어, 맥류 농경문화권의 언어를 영어로 대표하여 대비했다.



사토; 없지요. 그런데 최근 저는 무리하게 맥류라고 말하거나 적어 보는데, 이것이 제법 외국인에게 받아들여지네요. (웃음)


사사키; 원래 서구어에는 밀이라든지 보리라든지 호밀이라든지 귀리 등 각각의 개별 식물 이름이 있고, 맥류라는 총칭 명사는 없다.


사토; 그 반대의 입장에 있는 것이 잡곡이네요. 일본어에서는 피, 기장, 조 등 정확하게 개별 이름이 있는데, 영어 등에서는 개별 이름이 아니라 '밀렛'이라 총칭한다.


사사키; 지금 '맥류'의 산지라고 하는 곳은 밀도 보리도 포함하고 있지요.


사토; 그렇습니다. 아마 귀리 등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과연. 그들은 모두 한해살이이고. 


사토; 종자로 증식한다. 그래서 한해살이라면 부모가 죽어 버린다. 그러한 종류이지요. 그런데 오른쪽 아래의 동남아시아 쪽을 보면……


사사키; 영양번식 식물의 세계이다.


사토; 그렇습니다.


사사키; 영양번식이란 건 어떤 것?


사토; 종자가 아니고 뿌리 나눔이나 포기 나눔 등으로 증식하는 겁니다.


사사키 ; 뿌리 나눔이라든지 포기 나눔이네요. 경우에 따라서는 접붙임 같은 것이네요.


사토; 접붙이기나 꺾꽂이 같은 겁니다. 꽃을 피워서 다음 세대를 만드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그와 같은 식물입니다.


사사키; 종자가 없는 건?


사토; 종자가 없는 건 아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이용할 수 있을 만큼 많은 종자를 만들지 않는다. 혹은 종자는 이용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한 것이지요. 전형적인 것으로는 토란이라든지 참마(그림4-3), 바나나 등입니다.



토란의 다양한 형태. A: 기는 줄기를 가진 야생형. B: 열대에서 많이 재배되는 어미토란형. C: 동아시아 온대권에 많은 새끼토란형.



통가의 참마 A-H: Dioscorea alata. I: D. pentaphylla. J: D. nummularia K: D. euculenta


그림4-3 대표적인 영양번식 식물 <덩이뿌리와 인간(イモとヒト) -인류의 생존을 뒷받침한 뿌리식물 농경>에서




사사키; 바나나는 전형적인 영양번식 식물이라 하겠네요. 바나나는 과실 안에 종자의 흔적이 있긴 하지만, 종자로는 번식하지 않고 포기 나눔으로 대를 늘려 간다.


사토; 그렇네요. 일반적으로 영양번식 작물을 '뿌리 재배 작물'이라 합니다만, 이용하는 부분은 다르다. 어느 쪽이든 뿌리 나눔이나 포기 나눔 등으로 증식하는 것이 '영양번식' 식물입니다. 그래서 이들 작물의 선조종의 존재는 필시 남쪽 섬들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


사사키; 요컨대 '영양번식'이란 연중 고온이고 다습한 열대 산림의 자연을 배경으로 한 번식의 양식이죠. 


사토; 어지간하면 계절풍 지대와 열대 아시아 섬들의 토지에서는 무엇인가 식물이 살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곳에서 작은 종자가 탁 떨어지거나, 사람이 그것을 뿌리거나 해도 좀처럼 살아 남지 못하지요.


사사키; 그러니까 그러한 곳에서는 종자번식과 다른 영양번식 식물을 주체로 한 '뿌리작물 농경'이 발달했다는 것이네요. 그에 대해서는 또 나중에 문제로 삼고 싶습니다.

어쨌든 건조 지대를 중심으로 하는 종자번식의 농경에서는 주작물로 맥류와 잡곡과 콩류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하여 뿌리작물 농경에서는 토란과 참마와 바나나와 사탕수수와 빵나무 등이 대표적인 작물로 들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계절풍 지대는 어느 농경 유형에 속하는 겁니까? 결론부터 말하면 벼가 많은 곳은 계절풍 지대이지요. 벼라는 식물은 어느쪽입니까?


사토; 이것은 재미난 문제이네요. 둘 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르다는 사람도 있겠지요. 벼라는 건 옛날부터 말하듯이 자포니카와 인디카라는 두 가지 집단이 있지요. 자포니카라는 장강 유역에서 발생한 유형의 벼는 작물로는 한해살이입니다. 그러나 선생은 알고 계신다고 생각하는데, 가을에 벼베기를 하면 밑동에서 '움돋이'가 생기지요. 그 움돋이에 바로 몇 센치미터 정도의 이삭이 생길 수 있습니다(그림4-4). 



그림4-4 움돋이



사사키; 예를 들면, 타네가시마 등에서는 움돋이를 '힛쯔'라 부르고, 예전에는 그것을 키워서 움돋이의 종자를 수확했습니다. 그러한 사실도 있기에 벼라는 건 원래 여러해살이의 성질을 가지고 있었겠지요.


사토; 자포니카 벼는 여러해살이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지금도 가지고 있을 겁니다. 또 하나의 집단은 인디카인데, 자포니카 등에 비하여 움돋이가 나오는 게 좀 적다. 더욱이 거기에 이삭이 나오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결국 인디카라는 벼는 한해살이에 가깝다. 그래서 지도의 녹색 선 위로 가면, 뿌리작물 농경의 풍토에 더 가까운 곳의 자포니카는 약간 여러해살이의 성질을 가진다.


사사키; 이 지도에서 말하면, 계절풍의 풍이란 글자 근처의 둥그런 부분인데 그에 해당하는, 즉 장강 중하류가 자포니카의 기원지라고 사토 씨는 생각하고 있지요.


사토; 네.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사키; 벼란 작물은 아시아의 계절풍 지대, 즉 인도 아대륙부터 중국 대륙, 일본 열도, 동남아시아까지 오늘날에는 널리 재배되고 있지만, 어느 쪽이냐 하면 자포니카는 원래 영양번식을 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에 대하여 인도에서 그 뒤에 재배된 인디카는 자포니카에서 나왔다는 가설을 사토 씨는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 인디카는 자포니카에 견주어 영양번식을 하는 성질이 꽤 적다는 것이네요.


사토; '자포니카에서 나왔다'란 것은 아니고, 자포니카의 유전자를 '획득한다'는 겁니다.


사사키; 어렵네요…… '유전자를 획득한다'라는 표현을 한다면, 일반인은 이해하기 어렵네요. (웃음) 여하튼 자포니카란 벼는 원래 영양번식의 성질이 있다. 그러나 벼로 먹고 있는 건 종자를 먹는 것이고, 지금 우리는 자포니카의 종자를 심어서 재배하며, 포기 나눔으로 증식하거나 하지 않는다. 왜 원래 영양번식의 성질을 지닌 자포니카가 종자번식으로 바뀐 것입니까? 벼농사 기원론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그점은 어떻습니까?


사토; 그것이 아직 잘 모르는 부분인데, 하나의 가설로 이는 벼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식물에게 공통의 성질이지만 영양번식을 하는 식물이 기후가 나빠진다든지, 건조해진다든지……


사사키; 압박을 받는 거네요.


사토; 그렇습니다. 그러하면 지금까지는 푸르러서 자주 종자를 맺지 않던 식물이 서둘러 종자를 맺게 된다. 이것은 여러 가지 식물에게도 공통입니다. 그럼 자포니카의 벼가 종자번식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냐면, 영거 드라이아스기라고 부르는 시대의 기후 한랭화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으로부터 1만 1천 년 정도 전에 지구는 급격하게 추워졌다. 그러한 시기에 그때까지는 포기 나눔으로 번식을 했던 자포니카의 원시적인 유형이, 영거 드라이아스 한랭기에 이르러서 종자를 맺게 되었다.


사사키; 어쨌든 그러한 모양으로 종자번식을 하게 된 벼가 그 뒤 계절풍 지대에 퍼져 그 주작물이 된 것이네요.


사토; 그리고 그것이 수 천 년을 지나 1만 년 정도 전의 일이죠. 대략 이야기하여 그 정도라고 생각합니다만, 자포니카 유형의 재배 벼가 열대 쪽으로 전파되어 가서 그때에 열대에 있던 야생 벼와 자연교배하여 생긴 것이 인디카였다고 생각합니다. 인디카의 벼는 한해살이인 본래의 야생 벼의 성질을 이어받아 한해살이 풀이 된 것이 아닐까? 요컨대 유라시아 대륙 서부의 건조 지대에 있던 맥류부터 동남의 도서 세계의 뿌리작물 농경권의 영양번식 식물에 이르기까지 깨끗하게 선 위에서 경향이 생겼을 겁니다.



농경과 가축의 결합


사사키; 그렇다면 유라시아의 농경을 크게 나누자면, 서쪽에서는 건조 지대 기원의 맥류를 주작물로 하는 농경이 퍼져서 맥류농사 농경 지대가 되었다. 동쪽은 종자번식을 하는 자포니카 벼를 중심으로 하면서 벼농사가 퍼져, 그 속에서 인도 아대륙에서는 인디카도 생겨나고, 계절풍 지대 전체로서는 벼농사 지대가 되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도서부는 원래 영양번식 식물의 지대로, 바나나와 토란 또는 참마 종류 등을 중심으로 한 뿌리작물 농경이 옛날부터 성립되었다. 큰 배치는 그런 것이네요.


사토; 지도의 한가운데부터 오른쪽은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다시 한번 이야기로 돌아가, 지도의 왼쪽이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와츠지 씨가 이에 대해 '목장의 풍토'라고 했지만, 몇 번 읽어도 감이 오지 않습니다. 다만,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있지만 와츠지 씨는 '목장'이란 단어로 유럽은 일본과 달리 유축농업이 성행하고, 문화의 여러 측면에서 가축과 강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직접 체험해 그 강한 인상을 기술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독일 북부의 호텔 등에 묵으면 햄과 소세지 등은 정말로 여러 종류가 나오더군요.


사토; 대체로 맛있지요.


사사키; 확실히 유럽의 문화, 그 기초가 되는 서아시아 기원의 맥류 농경문화는 우리처럼 그다지 목축과 관계 없는 민족문화와는 크게 다를 겁니다. 이 맥류를 주작물로 삼는 농경은 밭농사 문화이고, 밭농사만 지으면 양분이 고갈되어 황폐해진다. 그래서 목축과 결합하여 돌려짓기하는 농법이 필요해진다. 중세 독일사에서 유명한 삼포농법이란 건 여름 작물과 겨울 작물의 경지 구역에서 곡물을 재배하고, 휴한지에서 가축을 방목하는 것이지요. 그 휴한지에는 개인 소유의 농지가 있어도 휴한기에는 완전히 공동의 목초지가 된다. 그와 같은 관계에서 공유라는 제도가 유럽 안에서는 나온 것인데, 그러한 휴한 방목, 즉 가축 사육과 결합된 농경이 있는 것이지요.


사토; 가축이라 하는 건 어느 의미에서는 맥류 농경의 시작부터 어른어른 보였다 안 보였다 하지요.


사사키; 어른어른이라기보다 염소와 양은 맥류 농경의 기원 단계부터 확실히 나타납니다. 이 농경은 시작부터 가축과 결합된 것이 특색이라 생각합니다. 맥류를 재배화하는 것과 그 초원에서 무리로 이동하는 동물(양, 염소)를 가축화하는 것이 병행하여 진행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토; 그렇네요. 어느 쪽이 빠른지는 의론이 있겠지만, 저도 그것은 완전히 병행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맥류 농경이란 건 주로 양과 염소를 중심으로 하는 목축이 시작되는 것과 병행하여 시작했다.


사사키; 그 다음에 나중에 소가 가축화되어 맥류농사 농경에 더해집니다. 어느 쪽이든 이들 가축은 모두 무리 동물이란 것이 특징이지요. 유명한 <농업의 기원>을 쓴 C. O. 사우어Sauer(1889-1975)라는 지리학자가 있는데, 세계의 가축을 두 종류로 나누어 무리 동물과 가축으로 분류했습니다. 가축, 즉 마을 안의 각 세대에서 사육하는 가축의 전형이 돼지와 닭 등입니다. 그에 반해 무리 동물은 주로 초원에서 가축군으로 방목의 형태로 사육하는 발굽 동물로, 건조지대의 초원에 결합됩니다.

돼지를 대표로 하는 가축은 어느 쪽이냐 하면 산림 지대에 결합된다. 유럽의 북쪽은 산림 지대이기에 돼지 사육이 성행하고, 그 산림대가 아까 이야기했듯이 쭉 동쪽까지 연속되어 동북아시아에서도 잡곡과 돼지 사육이 결합된 문화가 나옵니다. 그외에 아시아의 계절풍 지역의 벼농사 지대와 그 남쪽의 열대 산림대의 뿌리작물 농경에 결합되어 있는 것이 가축=돼지 사육입니다. 유라시아의 농업이란 것은 서쪽에서는 양과 염소 등의 무리 동물, 동쪽의 벼농사 지대는 돼지를 주로 한 가축 지대입니다.

또 말하는 걸 잊었는데, 서쪽 건조지대에서는 양과 염소 외에 나중에 소와 말 등의 대형 짐승도 가축화되어 이들 무리 가축의 사육과 밀접하게 결합된 중요한 문화가 젖의 문화입니다. 실은 동쪽 문화에서는 본래 젖의 문화가 빠져 있습니다.


사토; 동과 서의 차이이지요.


사사키; 중국 호남성 장사長沙 근처 소산韶山이란 곳에 모택동 씨의 생가가 있습니다. 조엽수림대입니다. 가서 보면, 모택동 씨가 태어난 집에는 꽤 큰 돼지우리가 있다. (웃음) 역시 저 주변의 벼농사 지대에서는 전통적으로 모두 돼지를 키우고 있습니다(그림4-5).



그림4-5 소산에 있는 전통 농가. 어느 농가에나 큰 돼지우리가 있다.



사토; 동쪽의 벼농사 지대에서는 돼지와 가금류(닭과 집오리 등)이지요. 새도 매우 특징적입니다. 그것과 식물화로는 물고기가 지닌 역할도 참으로 크다고 생각하네요. 벼논양어라는 말이 있는데, 저건 계절풍 아시아의 벼 생산의 장에서는 항상 물고기 -물론 이것은 밀물고기이지만- 를 잡았다. 저는 이것을 '쌀과 물고기의 동소성'이라 쓰고 있습니다만, 이 벼논양어도 조엽수림대부터 남쪽으로 펼쳐진 지역의 특징이라 생각합니다.



논의 시작과 벼농사 문화

 

사사키; 문제는 벼는 앞에서도 논했듯이, 종자번식을 하게 되어 작물로 성립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논에서 재배되었던 것입니까?


사토; 벼의 근간이 된 식물, 적어도 자포니카의 원종에 관한 한은 물이 철벅철벅한 곳이 생육 적지이지요.


사사키; 철벅철벅한 곳에서 재배화되었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사토; 아뇨, 단지 그것만으로는 재배화되지 않는다고 저는 생각하네요. 그렇다는 건, 계절풍 지대의 그런 철벅철벅한 곳은 동시에 악어 등의 동물도 있겠죠. 그 다음 말라리아도 있을 것이고, 기타 여러 가지 천적도 있을 겁니다. 인간이 살기 쉬운 곳에는 없겠네요. 벼에게도 경쟁상대가 잔뜩 있을 겁니다.


사사키; 인간이 살기 쉬운 곳이라 하면?


사토; 음. 인간이 살게 된 곳은 좀 더 건조하다. 더구나 그곳에서 계절풍의 역할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물이 있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있다는 겁니다. 우기가 되면 물이 모이고, 건기가 되면 빠진다. 그러한 곳은 한해살이 풀밖에 적응할 수 없겠죠. 숲에서는 우기에는 물이 고여서 안 되고, 수생식물에게는 건기에는 강한 건조함 때문에 안 된다. 한해살이 풀만이 지면이 노출되어 있는 곳에서 생육할 수 있는 토지이기에, 아마 그런 곳이 최초의 벼농사가 시작된 곳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즉, 건기의 수위가 조금 오르지요. 그러한 곳이 아닌 한 재배 벼는 기르지 못한다. 역시 늘 습지인 곳은 벼농사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매우 원시적인 것은 별도로 하고, '벼농사 문화'라고 말할 정도의 벼농사는 그러한 곳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사사키; 저는 '벼농사 문화'라고 할 때는 논두렁과 수로를 지닌 정비된 논이 그 기초에 있는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논이란 특유의 생산기반에서 성립하는 논벼농사 농경이라는 것과 논벼농사 농경 이전의 농경은 대단히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논벼농사 농경이란 생산형태가 확립되고, 처음으로 벼농사 사회가 형성되어 벼농사 문화, 벼농사 문명이 나온다. 논벼농사 이전의 농경이란 것은 꽤 원시적인 것으로, 수렵채집 경제와 아직 광범위하게 연결되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사토; 어제까지 채집하던 사람이 오늘부터 갑자기 벼농사를 개시하는 등과 같은 일은 생각할 수 없다고 보지요.


사사키; 이 시리즈의 안에 나카무라 신이치中村慎一 씨(가나자와 대학) 등도 서술한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동아시아의 고고학자 의견이 거의 일치하고 있는 바는 논벼농사 농경이 완성된 건 양저문화 무렵. 기원전 3300년 무렵부터 2200년 무렵까지의 시기라고 말합니다. 상세한 건 여기에서는 생략하지만, 유적과 유물의 상황으로 판단하여 이 무렵이 되면 정비된 논을 지닌 벼농사 농경이 확립하고, 벼농사 문화가 형성되어 지방의 국가도 성립되지 않았나 이야기합니다. 저도 그에 거의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사키; 그렇다면 그 이전의 벼농사는 벼는 농사지었지만 의지하지 않는, 사실 지금까지도 동남아시아에서 조사를 하고 있는데 저는 '원초적 천수답'이라 이름을 붙였습니다만, 벼와 잡곡을 함께 심어서 비가 내린 해에는 벼가 자라지만 비가 적은 해에는 잡곡이 자란다. 밭인지 논인지 알 수 없는 듯한 경지가 많이 있습니다.


사토; 밭과 논이란 명확한 구별은 없었다고 생각하지요. 예전, 미야자키 대학에 계셨던 후지와라 히로시藤原宏志 씨가 강소성 소주시의 좀 동쪽에 있는 초혜산 유적에서 논터를 발견했다고 하여……


사사키; 저, 후지와라 씨가 불러서 그곳에 견학하러 갔습니다.


사토; 아, 가셨습니까? 6200-6300년 전의 유적이지요. 대략 지금의 논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사사키; 정말로 작지요. 제2장 그림2-7과 그림2-8이 그 유적을 보여주고 있는데, 한 구획이 몇 평방미터 정도인 것이 쭉 붙어 있다.


사토; 게다가 움푹하지요.


사사키; 움푹합니다. 그곳이 논 유적이라 하지만, 논이라 좋을지 어떨지 좀 무리일지도 모릅니다. (웃음)


사토; 무리라고 저도 말합니다. (웃음) 그렇지만 이른바 벼잎 세포화석은 나왔지요. 그러니까 후지와라 씨 들은 잎의 세포화석이 나왔기에 이것은 논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벼잎 세포화석의 존재는 다른 생물종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연과 마름 등 벼과 이외의 수생식물에는 잎의 세포화석이 없지요. 잎의 세포화석만으로는 다른 생물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 벼가 벼가 있었다고 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벼 이외의 것이 없었다고 하는 증명은 아닙니다. 벼도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사람은 그곳에서 물을 펐을지도 모르고, 수생 동식물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것을 저는 역시 상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네요.


사사키; 잎의 세포화석이란 건 벼과의 주로 잎 안에 있는 규산체이지요.


사토; 잠깐 사진을 보시지요(제2장 그림 2-2). 이것이 벼잎 안의 기동세포라는 세포에 모인 실리카와 유리질 덩어리입니다(그걸 규산체라고 합니다). 그것이 잎이 말라 버린 뒤에도 흙속에 남아 있다.


사사키; 잎의 세포화석은 벼의 종류마다 다양한 형태로 정해져 있어, 유리질이면서 썩지 않아 잘 남아 있다. 따라서 벼과의 어떤 식물이 있었는지를 고고학으로 실증하는 데에 매우 유용하다.


사토; 그렇지요. 그래서 대나무에는 대나무 잎의 세포화석, 벼에는 벼 잎의 세포화석이 있다. 그렇기에 벼 잎의 세포화석이 나오면 곧 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벼가 있었다는 증명이기는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다른 것이 없었다는 걸 유감스럽게도 증명할 수 없다. 그 주변이 어렵지요.


사사키; 이 유적의 상황은 매우 원시적이며, 논이라 말하고 싶은 사람은 그래도 좋겠지만. (웃음) 이후 시대의 논두렁이라든지 수로로 정확히 구획된 정비된 논과는 다릅니다.


사토;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사키; 그러니까 잘 정리된 논, 논두렁과 수로로 구획된 생산성 높은 논이 나온 건 동아시아에서는 앞에 서술했듯이 양저문화의 시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나중에 일본 열도의 이야기도 나올 것이라 생각하지만, 조몬시대의 말기부터 야요이 문화의 시작 무렵에 큐슈 북부 지역에서 출현하는, 예를 들면 이타즈케板付 유적의 논 등은 정말로 멋지게 정비된 것입니다.


사토; 그렇지요. 일본에는 완성형 논벼농사가 생긴 겁니다.


사사키; 그렇지만 그러한 논이 전래하기 이전에도 벼농사는 영위되고 있었기에, 그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유라시아 전체를 보면 서쪽은 어느 쪽이냐 하면 밭농사로 목축과 젖 문화에 결합된 농경이 있다. 동쪽은 논을 경영하고 무리 동물이 아닌 가축의 사육과 결합된 벼농사 문화가 있다. 여기에서 이야기를 조금 까다롭게 했습니다만, 문제는 인도 아대륙입니다.


사토; 인도와 인도의 북쪽이지요.

사사키; 네. 인도의 문제는 매우 어렵지만, 인도 아대륙의 농업 지대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북서부의 펀자브부터 갠지스 상류에 걸친 맥류농사 지대, 중앙부의 데칸 고원을 중심으로 하는 잡곡(조) 지대, 수수와 향모 및 잡곡류가 재배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인도 아대륙의 아삼과 갠지스강 중하류에 펼쳐지고, 인도 반도의 동서해안에도 분포하고 있는 것이 벼농사 지대입니다.

이처럼 아라칸 산맥에서 서쪽의 벼농사 지대는 매우 큰 논벼농사 지대입니다만 재배하는 벼는 자포니카가 아닌 인디카가 많고, 게다가 잡곡과 맥류농사가 중첩되어 있는 곳이 적지 않습니다. 사실 인도의 벼농사는 파종과 탈곡의 방법, 젖 문화와의 관계와 가공 쌀 만드는 법 등에서 맥류농사 농경과 잡곡 농경 등의 영향이 강하게 보이며, 아라칸 산맥에서 동쪽의 벼농사와는 꽤나 다르지요. 


사토; 아라칸에서 서쪽 지역의 벼농사는 동쪽의 벼농사와 완전히 이질적이라 생각하네요. 나카오 사스케中尾佐助 씨가 말했는데, '"인도에는 벼농사 문화라고 하는 것이 없다"라는 건 역시 확실하네요. 동아시아의 벼농사 문화, 인도의 벼농사 문화라는 건 언뜻 비슷하나 다른 것으로, 둘에게 공통으로 존재하는 벼농사 문화라는 건 없다고 생각합니다.




유라시아 농경의 북쪽과 남쪽의 퍼짐새


사사키; 에전에 유라시아의 농경을 생각할 때 미처 주목하지 못했던 것이 유라시아 북부를 동서로 잇는 농경지대의 존재입니다. 시베리아를 가로질러 북극해로 들어가는 큰강으로 오비강, 에니세이강이 있습니다. 이 두 강의 가장 상류는 알타이산까지 이르고, 그 가운데 오비강의 가장 상류 지역에는 기원전 3-5세기 무렵의 유명한 동결 고분군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파지리크 고분은 고분의 도굴 구덩이 등에서 물이 들어와 그 물이 얼었던 겁니다.


사토; 동결된 맘모스 같은 것이죠.


사사키; 그렇습니다. 큰 목재를 쓴 대형 목곽 무덤에 동결되었기 때문에 안에 있는 유물이 깨끗하게 남았던 겁니다. 그곳에서 페르시아산 커다란 양탄자를 시작으로 마구류와 장식품, 기타 나릇이 달린 마차 등도 출토되고, 말도 몇 십 마리가 묻혀 있었습니다.


사토; 말도 함께 남아 있었던 겁니까?


사사키; 일부는 미이라가 되어 있었습니다. 북방 유라시아 학회를 중심으로 1991년에 러시아와 공동으로 알타이의 우코크 고분을 조사하여, 저도 다른 고고학자와 함께 견학하러 갔습니다(그림4-6). 발굴된 고분은 완전히 동결되지 않아서 잘 되지 않았지만, (웃음) 여하튼 이 부근 알타이산의 북사면부터 산기슭 일대는 쭉 완전한 초원지대입니다.

기원전 3000년대 말 무렵부터 2000년대에 걸쳐서 아파나시에보 문화가 영위되었습니다. 특히 안드로노보 문화는 흑해와 카스피해의 북쪽부터 알타이산에 걸쳐 초원지대에 전개된 스키타이계의 청동기 문화로 가축으로 말을 소유하고, 쿠르간(옛 몽고 무덤)을 만들며, 소규모 농경도 경영하는 목축민의 문화입니다. 그 뒤 이 지역의 문화는 목축의 요소를 차츰 강화하는데, 그래도 관개 조직을 수반한 기장과 조 등의 재배 전통은 기원후 상당히 이후의 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림4-6 알타이산의 초원과 유목민 천막. 알타이산과 그 북쪽 기슭에는 광대한 초원이 펼쳐진다. (사진: 사사키타카아키)



사토; 보리는 어떻습니까?


사사키; 물론 보리도 있었습니다. 기장과 조 등도 재배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말을 부장한 동결 고분은 목축귀족의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만, 그들도 농경민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와 같은 의미에는,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초원지대에 농경이 서쪽부터 동쪽으로 쭉 이어져 있었던 겁니다.


사토; 확실히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선생은 북쪽의 농목문화의 회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만, 사막 한가운데에서도 농목문화의 길이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사막이었는지는 잘 조사해 보지 않아서 알지 못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사사키; 지금 어느 사막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잖습니까?  S. A. 헤딘(1865-1952)이 탐험한 20세기 초 무렵에는 현재는 말라 붙어 있는 로프노르 호수는 가득한 물로 칭송되었기 때문에……


사토; 네, 오래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금 조사하고 있는 건 타림 분지의 동쪽 끝입니다. 여기는 실크로드의 길가이고, 예전에는 꽤 인구밀도가 높았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아까 알타이 산맥의 남쪽에 동서로 지나는 천산산맥이 있고, 그것과 티벳 고원의 북쪽을 경계짓는 곤륜산맥 사이에 있는 타밀 분지는 지금은 아주 건조한 지대이지만, 2000년 정도 전에는 분지의 동쪽 끝에 누란왕국이란 오아시스 국가가 번영했던……


사토; 그렇습니다. 게다가 누란의 아직 전의 시대에, 역시 맥류 농경이 있었지요. '소하묘'라는 유적인데(그림4-7), 새삼스럽게 강좌에 몇 번이나 등장하는데 여기에서 밀의 종자와 기장의 종자와 함께 소의 모피와 머리뼈, 양과 염소의 뼈가 다량으로 출토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은 사막이라 부르는 저 풍토에도 역시 역사성이 있어서 누란 시기는 이미 건조함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전에는 꽤 많은 사람이 농경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목축도 하고 있었겠네요.



그림4-7 소하묘 유적(2008년 9월 촬영)




사사키; 그래서 조금 뒤의 당나라 때에 인도로 향하던 현장삼장도 지금 같은 상태의 사막을 지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사토; 그렇게 생각하네요. 그가 고창국高昌國을 지났던 때 마중을 많은 사람이 왔지요. 환영 인파에는 여성이 수십 명이나 왔고, 스님도 수천 명이나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만약 그 이야기가 어느 정도 과정을 포함하고 있다고 해도, 한 나라를 뒷받침하는 농목업이 있었다는 건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타림 분지를 지나 '인도로 가는 길'도 천산산맥의 남과 북쪽 기슭을 지나는 '비단의 길'도 예전에는 풍요로운 오아시스와 초원을 동반하는 것으로, 그곳에서는 맥류와 함께 기장과 조 등의 잡곡류가 재배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유럽도 북쪽은 지금은 밀 지대이지만, 원래는 호밀과 귀리를 농사짓고, 오트밀 같은 거친 죽, 거기에 조와 기장 등이 들어간 걸 먹었다고 생각합니다. 북방 유라시아의 동서는 이처럼 맥류와 잡곡의 거친 죽이란 식문화를 가진 농경지대와 결합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죠.


사토; 그렇지요. 그 위에 사막이란 건조의 풍토가 올라타서 목축업 같은 것이 들어왔다. 


사사키; 북쪽에 관하여 말하면, 에니세이강 상류의 타가르 문화기(기원전 10-8세기)에 말이 나오게 되지요. 그 무렵에는 재갈(말의 입에 물려 고삐를 붙이는 도구)이 출현하고, 승마 기술이 발달하며, 그것과 단궁을 쓰는 '기사'의 전술이 한묶음이 되어 전투적인 기마유목민족 문화가 형성된다. 그 뒤 몇몇 민족의 흥망을 거쳐 기원전후에는 어느 종의 목축민에 의한 권력구조가 생겨납니다. 그와 함께 그 권력구조를 뒷받침하는 맥류와 잡곡의 농경이 북방의 초원지대에 존재하고, 그 농경이 동북아시아까지 도달한다는 데 주목하고 싶네요.

여기에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눈을 돌리면, 앞에 기술했듯이 동남아시아의 도서부는 원래 뿌리작물 농경의 지역입니다. 저는 그 일부, 동인도네시아의 핼마헤라섬이란 곳에서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은 적도에 가까운 섬으로, 바나나와 덩이뿌리 종류를 주작물로 하는 전형적인 뿌리작물형 화전 농업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그 현장에서 보면, 카사바를 재배하는 밭에 할머니가 수확하러 와서 수확한 카사바의 일부를 그곳에 곧바로 심는 겁니다(그림4-8). 고온다습한 열대 산림 지역이면서 1년 내내 언제나 심기와 수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수확과 심기가 연속하는 농법이 가능합니다. 기본적으로는 바나나 등도 그러한 재배법에 가깝죠. 바나나에는 고정된 수확기란 것이 없습니다. 언제나 얻을 수 있고, 언제나 포기 나눔을 할 수 있습니다. 즉, 뿌리작물 농경이란 것에는 기본적으로 명료한 수확기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저장도 없다.

그런데 종자 작물의 지대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한다. 종자 작물에는 반드시 정해진 파종기와 수확기가 있어서, 그 수확기를 중심으로 해서 수확 축제가 있고, 수확의 풍성함을 기원하는 의례가 영위되며, 그것을 주관하는 사제가 생긴다. 그래서 그 사제와 왕이 한묶음이 된 사제왕 같은 것이 출현해 왕권이 형성된다.



그림4-8 화전에서 카사바의 수확과 심기(인도네시아 핼마헤라섬 1976년, 사진: 사사키 다카아키) 카사바의 덩이뿌리를 수확한 뒤 이어서 그 일부를 잘라서 심는다. 수확과 심기 작업이 여기에서는 일련의 작업으로 행해진다.



사토; 그렇죠. 또, 종자번식 식물의 경우에는 종자를 저장할 수 있다. 이것이 중요하지요. 


사사키; 네 네, 그 저장을 대량으로 껴안은 인물이 권력을 장악하지요. 그런데 수확기가 확실하지 않고, 저장도 안 하는 뿌리작물 농경의 세계에서는 권력이 발생하는 계기가 부족하다. 따라서 왕권이 발생하고, 왕국이 나타나는 일이 거의 없다. 본래 뿌리작물 농경 지대에는 그러한 권력구조가 나오지 않는 것이 특징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토; 뿌리작물 식물은 진화가 매우 느리네요. 식물학적으로 말하더라도 그렇고, 영양번식을 되풀이하는 한 예외는 없겠지만 대부분 진화하지 않지요. 즉, 포기 나눔을 하면 몇 번을 반복해도 가지고 있는 유전자의 조합은 쭉 마찬가지이지요. 그러하면 유전적인 개량, 즉 품종개량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한 것도 역시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종자번식 식물에서는 인간이 품종개량을 하겠다는 의지가 작용하면 그에 응하여 유전자의 조합이 얼마든지 변화하여, 그것으로 생산성을 유전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 왕권의 기초가 되는 수확물의 저장이라든지 증식이 인간의 의지에 대하여 잘 반응하는 거지요.


사사키; 그러니까 그러한 점에서는 유라시아 전체를 보아, 농경이 크게는 동과 서, 서의 맥류, 동의 벼라는 모습으로 대비할 수 있겠는데, 벼라는 건 어딘가에 영양번식적인 성격을 끌어당기고 있는 바가 있다. 그것에 대해 남쪽은 완전한 뿌리작물 농경 지대, 북쪽은 목축에 상당히 의존한 농경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문제는 잡곡입니다.


사토; 잡곡에서 일본인에게 가장 친숙한 것이 피와 조이죠. 피에 대해서는 이전 교토대학에 계신 사카모토 사다오阪本寧男 씨가 일본 원산설을 발표했는데, 조도 동북아시아 기원이란 설이 한때 강했지만 저는 저것은 의심스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건, 요즘 미국에서 인도를 연구하고 있는 동료의 연구실에 갔더니 "나는 25년 전 태국에서 조사했을 때의 조 종자를 가지고 있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 수확물을 보았는데 확실히 조 같습디다. 그것에 사사키 선생도 여러 번 언급했지만, 조는 동남아시아부터 남아시아에 걸친 지역에서도 매우 흔하게 재배하고 있습니다.


사사키; 조는 조금 전 사진에서도 있었네요. 


사토; 네, 그림4-1의 오른쪽에서 두번째입니다. 분명히 조는 한편으로는 어쩐지 북방 문화의 정취가 있지요. 그런데 아까 태국에서 행한 연구에서는 열대에도 조가 있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간단히 북방기원설이 좋을지.


사사키; 조의 분포는 열대 아시아 전역에 걸쳐 있다고 이전부터 잘 알려져 있어서, 제가 조사한 핼마헤라섬에도 재래종 조가 있습니다. 아무튼 조라는 것은 고고학적으로도 여러 곳에서 나오고 있어요.


사토; 그런 것 같네요. 그리고 기장도 그렇지요. 도대체 잡곡의 계통은 어떻게 생각하면 좋습니까?


사사키; 간단히 결론을 내릴 수는 없지만, 좀 더 정리하자면 피는 분명히 아주 오래된 것은 아시아 대륙에서 출토되지 않는다. 홋카이도 대학에 계신 요시자키 쇼吉崎昌一(1931-2007) 씨는 부유선별법이란 방법으로 발굴된토양을 물로 씻어서 그것을 0.45mm라는 매우 가느다란 망으로 선별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 가지 종자의 파편 등이 나와서, 그것을 현미경으로 보고 동정하는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 요시자키 씨에 의하면, 홋카이도에서 도호쿠 지방의 북부에 걸쳐서 조몬시대의 전기 무렵부터 피가 출토되기 시작한다. 그 출토 종자는 시대가 지나면서 점점 커져, 조몬 중기부터 후기가 되면 재배 피라고 생각되는 것이 출토된다. 그것을 '조몬 피'라고 그는 부르고 있습니다. 피는 꽤 일찍부터 일본 열도에서 재배화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사토; 그렇게 생각합니다. 연해주까지 넣어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사사키; 조에 대해서는 사카모토 씨는 광범위한 현장조사와 재배실험을 행하여, 아프가니스탄부터 인도 북부에 걸친 지역이 지원지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북의 황토 대지의 페이리강裴李崗과 츠산磁山 등 약 7000년전이라 하는 옛 유적에서도 조 또는 피라고 추정되는 잡곡이 돼지의 유골과 함께 출토되고 있습니다.


사토; 요녕성 인근에서도 매우 오래된 조가 출토되고 있지요.


사사키; 유라시아의 여기저기에서 조는 오래전 시대의 것들이 출토되고 있다. 이것은 다시 한번 DNA라든지 무언가로 정확히 그 품종과 계통을 재조사하면 좋겠다.


사토; 조금 엉뚱한 이야기이지만, 최종 빙하기 이전의 작물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사사키; 그건 있다고도 없다고도, 잘 말하겠지만서도. (웃음) 아무튼 조라는 작물이 꽤 오래된 것이고, 유라시아 농경사에서도 중요한 작물이란 점은 틀림없다. 그러나 현재 재배되고 있는 옛 품종이 없어졌기 때문이죠. 일찍 조사하지 않았고……. 어쨌든 유라시아 대륙의 조는 북쪽으로 분포가 확산된 조와 남쪽으로 확산된 조라는, 최소한 두 계통이 있었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어요.


사토; 그건 사카모토 씨도 이야기하셨죠. 그리고 피도 그렇나요?


사사키; 사카모토 씨는 아이누에서 재배되는 옛 피를 보면, 그것은 아프가니스탄 인근에서 재배되는 피와 매우 비슷하다고 합니다. 즉, 북회노선의 조, 피와 남회노선의 그것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꼭 조사해 주세요.


사토; 그것은 많이 있지 않습니까? 밀도 아무리 보아도 북회노선, 즉 지금의 실크로드보다 더 북쪽의 경로로 전파되었다고 생각되는 계통의 것과 남쪽에서 왔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 있습니다.


사사키; 예를 들어서, 최초로 이야기를 꺼냈던 타카하시 류헤이 씨가 연구한 보리의 E형과 W형이 있는데, W형의 보리는 유라시아의 북쪽 회랑을 지나서 동쪽, 즉 동북 일본에까지 왔지요. 한편 남회노선의 E형이란 건 중국 대륙에서 서일본으로 건너왔을 가능성이 높다.



남북으로 나눌 수 있는 일본의 농경


사사키; 그러한 점을 생각하면 일본이란 곳은 유라시아의 동쪽 끝에 있는데도, 그 까닭에 유라시아의 농경사를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네요. 그림4-9는 동아시아의 식생을 주로 <중국식피中國植被>(1980년)을 참고하여 그렸는데, 중국 대륙에서는 장강 유역을 경계로 그 북쪽이 낙엽광엽수림대(졸참나무숲지대. 전형적인 건 신갈나무≒물참나무를 중심으로 하는 온대낙엽광엽수림대), 그 남쪽은 상록광엽수림대(조엽수림대)를 이루고, 그 졸참나무숲지대와 조엽수림대는 일본 열도의 동북부와 서남부에도 이르며, 이 열도의 문화와 농경의 지역차를 만들어내는 기초적인 조건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조몬시대의 인구 분포를 보아도 그 인구의 대부분이 동북일본의 졸참나무숲지대에 집중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확실히 정주를 하고 식량 비축이 풍부한 그 문화의 특색은 동북아시아의 졸참나무숲지대의 풍요로운 수렵채집민 문화의 그것과 공통되는 점이 많고, 동북아시아와 깊은 관련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림4-9 동아시아의 식생과 조엽수림 문화와 졸참나무숲 문화의 분포. 식생의 분포는 주로 <중국식피>에 따른다. 옛 만주를 중심으로 한 낙엽광엽수림대는 물참나무와 비슷한 신갈나무를 중심으로 한 산림대이고, 아무르강 유역과 연해주와 사할린의 아한대침엽수림도 실제로는 침광금강수림의 모양을 취하는 곳이 많고, 일부는 신갈나무를 중심으로 한 졸참나무숲지대와 비슷한 경관을 나타내는 곳이 적지 않다.




사토; 서장의 그림-2는 일본 열도에서 전개된 전통적인 농경의 지역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곳에 실선③이란 선이 있지요. 이것이 위의 지도에서 보시듯 보리의 W형과 E형의 경계선이고, 선의 동북쪽이 W형, 서남쪽이 E형인 보리의 분포 구역입니다.


사사키; 그밖에도 선과 표시가 적혀 있지요?


사토; 네, 무엇을 가리키는지, 어느 시기인지에 따라서 이세만과 와카사만을 연결한 선으로 경계를 이루고, 태평양 쪽과 일본해 쪽을 나누는 선으로 구분된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것들을 구별하여 정리한 겁니다.

그런데 우선 명확한 건 벼이지요. 조몬 벼농사의 존재가 증명된 유적은 '이세만-와카사만' 선(실선②)의 서쪽이네요. 동쪽에 요시자키 씨가 찾아낸 조몬의 쌀이 하나 있지만, 전체의 경향으로 말하자면 조몬의 벼농사는 이 선의 서쪽에서 전개되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요시자키 씨가 발견한 건 실선②의 동쪽 가운데 가장 북쪽, 하치노헤시 카자하리風張 유적의 조몬 후기 주거터에서 나온 쌀인데, 벼가 출토된 건 없어요. 아마 그 쌀은 서일본에서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조몬의 벼농사는 동북일본에는 없었다고 생각해도 좋은 거지요.


사토; 쌀은 있어도 벼농사가 있었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조몬시대에 벼가 재배되었단 건 이 서쪽, 즉 서일본에서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사사키; 그러니까, 조몬시대의 곡물에 대하여 말하면 일본 열도의 동북쪽은 피였을지도 모른다.


사토; 피였다고 생각합니다. 이 피에도 두 가지가 있어서, 동(북)의 피는 돌피(Echinochloa crus-galli)라는 재배형 피입니다. 유전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4배체입니다. 한편, 서쪽의 피는 물피(Echinochloa oryzicola)라는 논의 잡초, 6배체의 종이란 구별이 있습니다.


사사키; 이 동쪽의 피, 서쪽의 벼라는 것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언급한 요시자키 씨가 이미 기술해 놓았지요.


사토; 그 다음에 재래종 보리 가운데 좀 전의 E형 보리라는 것이 서남서 일본에 주로 분포하고, W형 보리가 동북 일본, 특히 홋카이도와 도호쿠 지방의 북부에 퍼져 있었어요.


사사키; 맥류만이 아니고 아시다시피 야마가타 대학 교수였던 아오바 타카시青葉高(1916-1999) 씨가 연구한 재래종 순무에 대해서도 서양종 계통의 순무와 일본종 계통의 순무라는 두 종류가 있어서(그림4-10), 서양종 계통의 순무는 보리의 W형과 마찬가지로 시베리아에 연결되고, 일본종 계통의 순무 그것은 중국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밖에도 우엉이라든지 삼, 파, 유채 종류 등은 산나이마루야마三內丸山 유적을 시작으로 몇 개의 조몬 유적에서도 출토되고 있습니다.



그림4-10 서양종과 일본종 계통의 순무 분포. 서양종 계통의 순무는 지도의 바깥, 도호쿠 지방의 일본해 연안에 많은 걸 알 수 있고, 옛날 대륙엣 직접 건너왔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한편 일본종 순무는 서일본에 퍼져 있다. 교토의 전통식 절임인 센마이즈케千枚漬는 이 일본종 순무로 만든다.



  

 그러한 것은 모두 북쪽에 계통적으로 이어지는 작물이고, 저는 이들에 북회노선의 조와 피 등을 더하여 '북방계 작물군'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이 북방계 작물군으로 상징되는 북쪽에서의 농경이 있었지요. 그것은 일본 열도에서는 낙엽광엽수림대, 즉 졸참나무숲 지대의 동일본부터 북일본에 펼쳐지고, 벼를 중심으로 일본종 계통의 순무와 쌀보리(E형 보리) 또는 남회노선 계통의 조와 피 및 토란 등으로 상징되는 농경이 조엽수림대, 즉 서쪽부터 남쪽으로 이어졌다고 하는 것이네요. 


사토; 그리고 생쥐의 계통 안에 무스(Mus)형이라 부르는 것과 카스타네우스(castaneus)형이라 부르는 것 두 가지 유형이 있어서, 쥐의 유전학을 연구하고 있는 이화학연구소의 모리와키 카즈오森脇和郞 씨에 의하면, 도호쿠 지방을 남북으로 분단하고 있는 선의 북쪽은 카스타네우스형이고 남쪽은 무스형이라고 합니다.


사사키; 일본의 농경은 전통적인 재래 작물의 특색으로 보아 북쪽 계통과 남쪽 계통 두 가지에 의하여 이루어져 왔지요. 그런데 조몬시대의 말, 야요이 시대의 시작 무렵에 아까도 서술했던 논벼농사를 수반한 벼농사 문화가 건너와서 일본 열도의 서쪽부터 퍼졌기 때문에, 재래 작물의 동서차, 남북차가 매우 희박해져 버렸던 겁니다. 어느 쪽이든 일본 열도 농경문화의 기층에는 유라시아의 북과 남으로 연결되는 계통의 서로 다른 두 가지 농경의 전통이 있다고 분명히 지적해야 한다고 생각하네요.


사토; 그렇지요. 그 차이는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이상으로 크다고 생각하네요. 그래서 도호쿠예술공과대학의 아카사카 노리오赤坂憲雄 씨가 "여러 가지 일본"이라 말하듯이 똑같은 일이 재배식물과 식문화, 농경문화 같은 측면에서 보아도 역시 동북 일본의 문화와 남서 일본의 문화라는 명확히 이질적인 것이 공존하고 있어요.  


사사키; 동일본과 서일본에서 언어와 습속, 사회 및 그외의 여러 가지 점에서 지역차가 있는 건 모두 많은 사람에의하여 지적되지만, 그 배후에는 유라시아 농경문화의 계통 차이가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토; 그렇지요, 반영되어 있습니다. 일본 열도에서는 말에도, 문화에도, 인간에도 지역차가 있었을 텐데, 대립 등이란 것을 말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구별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일종의 세계화에 의하여 뒤섞여 버렸겠죠. 


사사키; 서일본의 농경문화라고 하면, 일본 열도에서 뿌리작물 농경에 미친 직접적인 영향에 대해서도 주목하게 됩니다. 

뿌리작물 농경에 상세한 서남일본식물정보연구소의 소장 홋타 미츠루堀田滿 씨에 의하면, 열대 계통의 2배체 미가시키ミガシキ군의 토란과 열대 계통 참마 다이죠ダイジョ의 분포가 중국 남부지방과 필리핀부터 류큐 열도를 따라서 북쪽으로 뻗어서 큐슈와 시코쿠 남부에 이른다고 합니다. 사실 고치현 해안부를 중심으로 열대 계통의 참마 야생종의 하나인 니가카시우이모ニガカシウイモ가 식물로 분포하고, 예전에는 물에 담가서 식용으로 이용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들 열대 계통의 덩이류는 아마 쿠로시오 해류를 따라 대만과 류쿠에서 전파되어 온 것으로, 열대에서기원하는 뿌리작물 농경문화의 일부가 직접적으로 남방에서 전래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정말로 일본이란 곳은 아시아 안에서 경계인 곳이지요.


사토; 그렇네요. 경계인데, 경계이기 때문에 농경문화 그것이 매우 풍부하다고 생각되네요.



'풍부한 농경'이란?


사사키; 지금 농경이 '풍부하다'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어떠한 농경이 '풍부한' 것입니까? 예를 들면, 미국의 면화 지대, 옥수수 지대에서는 옥수수와 면화를 집중적이고 대량으로 농사짓고 있습니다. 생산량은 세계에서 가장 풍부합니다. 그것은 농경으로서 '풍부하다'고 할 수 있는 겁니까?


사토; 이 프로젝트를 종합지구환경학연구소에서 시작한 의향은 지금의 농업은 단기적(몇 십 년)으로는 풍부할지 모르지만, 백 년, 몇 백 년이란 단위에서 보면 도저히 견디지 못한다는 측면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냉해가 있어 돌연 병과 해충에 의한 피해가 발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괴멸적인 일이 일어날 수도 있죠.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즉 백 년, 이백 년, 삼백 년 같은 기간으로 생각해 보면, 이러한 대규모 단작(모노컬쳐)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하네요. 이것은 현대의 일본 논을 고려해도 그렇습니다. 논벼농사는 매우 지속적이라고 모두 말씀하십니다. 그럼 지금의 논을 보고 지속적이냐고 말할 수 있는가 하면, 저는 반드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사키; 그래서 다시 한번 묻고 싶은데, 지금 우리는 옛날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느 쪽이냐 하면 역사적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역사적인 시야에서 본 농경이란 것을 생각하면, 농경이란 것은 순환형이고 안정되어 있는 것을 본래 농경의 모습이라 생각해요. 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입니다. 밭농사의 경우에는 앞에도 기술했듯이 유럽 중세의 삼포농법에서는 돌려짓기를 행해 농지를 묵혀 가축을 방목하여 농지의 비옥도를 유지했다. 삼포농법은 유럽만이 아니라 네팔에서도 논과 밭의 그루터기에 방목을 행하여 일종의 삼포농법을 하고 있습니다(그림4-11). 휴한지 방목을 하는 겁니다. 



그림 4-11 네팔의 농목 경관(사진: 사사키 다카아키)

(위) 밭의 구역을 나누는 가축담. 중부 네팔 시카 마을의 가축담과 경지(1963년 9월). 마을 아래에 가로로 길게 이어지는 곳이 농지 구역을 나누는 나무 울타리에 해당하는 돌담. 돌담 아랫부분의 농지 구역에서는 옥수수의 수확이 끝나고, 그루터기에 가축 무리를 넣는다. 돌담보다 위는 향모의 경지로 아직 수확이 끝나지 않았다.

(아래) 논 그루터기의 방목. 가라 마을의 논 그루터기 방목(1963년 10월). 논의 그루터기에 일제히 방목하는 소의 무리. 가설된 가축의 우리가 두 개 보인다. 방목은 밀의 파종기까지 이어진다.




사사키; 소와 물소를 베어낸 그루터기에 넣는 겁니다. 마을 안에서 가축담으로 에워싼 농지 구역이란 곳이 몇 군데 있고 그 농지 구역마다 작물의 재배와 휴한 방목에 대한 규칙이 있어 휴한기에는 가설한 가축의 우리를 설치해 방목하는 일종의 삼포농법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밭농사라는 건 어떠한 형태로 목축과 연결되어서 경작과 휴한 체계가 있고, 그것이 정확히 기능하는 한 농경은 안정적으로 영위될 수 있는 것이지요.

화전 등에서도 그렇습니다. 화전은 최근에는 환경파괴의 원흉 등이라 이야기되고 있지만……


사토; 그건 터무니 없이 잘못된 의론이네요.


사사키; 전통적인 화전을 보면 숲을 벌채하고 불을 놓아서 화전 경지를 만드는데, 전통적인 화전민들은 벌채하기 전에 의례를 하는 게 보통입니다. 예를 들어 고치현의 이케가와 마을(池川町) 등에서 조사한 바로는 불을 놓기 전에 '오타노미おたのみ'라고 부르는 산신에게 기도합니다.

"기어서 도망가는 건 기어서 도망가 주시고, 날아서 도망가는 건 날아서 도망가 주세요. 산신 님, 땅신 님, 부디 지켜 주세요."라고(그림4-12).

화전민들은 화전을 하는 동안만 산신에게 토지를 빌린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땅 동냥'이라 말하기도 하는데, 그동안 예를 들어 큐슈의 화전민은 산신을 '세비せび의 가지에 모신다. 그 세비의 가지라는 건 화전 경지의 가장 큰 나무의 꼭대기입니다. 그곳에서 산신이 잠깐 쉰다. 화전의 경작을 마치면 산신에게 다시 한번 원래의 산과 숲으로 돌려준다고 화전민들은 생각합니다. 결코 산과 숲의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를 잠시만 신에게서 빌려 화전을 경영한다는 사상입니다.  


그림4-12 화전의 불을 놓기 전 산신에게 간절히 기도(고치현 이케가와 마을 츠바야마椿山 1970년 4월, 사진: 사사키 다카아키) 전통적인 화전민들은 화전을 만들기 전에 산신에게 잠시 물러나 주기를 기원하고, 작업의 안전을 기원한다.




사토; 그림4-13은 라오스의 사진인데, 저도 역시 보러 갔지만 숲을 벌채하기 전과 씨앗을 뿌리기 전에 반드시 의례를 하고 있지요. 라오스의 사람들은 '피'라는 정령을 믿어서, 화전 전에는 꼭 피에게 기도를 드린다. 기도를 드려 피에게 힘을 빌린다는 허락을 얻는 겁니다.



그림4-13 하늘에서 본 화전 경지. 라오스 루앙프라방 부근에서




사사키; 그것은 제가 조사한 핼마헤라섬의 화전민들 역시 똑같았죠. 그곳에서는 숲에 모로라든지 멧키라는 숲의 정령이 있어서 이 숲의 정령에게 "화전을 하는 동안만 토지를 빌려 주세요. 화전이 끝나면 돌려주겠습니다."라고 기도하고, 화전 경지 안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를 '왕의 나무'라 부르며 벌채하지 않고 남겨 놓는다. 화전을 경영하는 동안 그곳에서 정령들이 잠을 잔다는 관행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제사를 잘 남기고 있는 화전민의 바탕에는 반드시 휴한기간을 충분히 두어서 화전이 버려진 뒤에 숲의 식생이 잘 회복되어 다시 숲으로 돌아가서 화전을 또 할 수 있게 됩니다.


사토; 즉, 가축의 대신에 식물이 윤회하는 거지요.


사사키; 그런데 인도네시아 등에서는 자바섬의 인구가 매우 과잉이 되어 그곳에서 농업 이민이 칼리만탄 등으로 송출되네요. 그런데, 농업 이민은 신을 모두 고향에 놔둔다. 그래서 신이나 정령과 관계없이 숲을 벌채하고 불을 붙여 태우고, 그곳에서 농지를 만들어 농경을 합니다. 그들은 개척민이기에 숲을 신과 정령에게서 빌려서 이용이 끝나면 또 돌려준다는 정신이 없는 겁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개간을 하기 때문에 순환적인 농법이 아니게 되고, 그 결과 숲이 사라져 못쓰게 된다. 이런 종류의 영구적인 경지를 만드는 농업 개간(개척)에 따르는 불 놓기와 본래의 화전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화전 농경이란 건 본래는 순환형으로 자연을 파괴하지 않는 농법입니다.


사토; 그렇습니다. 그림4-13은 라오스의 루앙프라방 근처를 지나며 비행기에서 찍은 것인데, 허옇게 보이는 곳이 올해 벼를 심은 곳이지요. 조금 색이 옅은 곳이 지난해 그 전에 벼를 재배하고 올해는 휴한을 하는 곳이고, 좀 더 색이 짙은 곳이 몇 년 전에 화전이었던 곳입니다.


사사키; 더 짙은 곳은 식생이 완전히 회복되어 숲이 되었다.


사토; 그렇지요. 휴한하고 십 년, 십오 년이 되었다. 


사사키; 그러나 이 풍경은 화전으로 이용하는 장소가 양으로는 좀 너무 많네요.


사토; 좀 너무 지나칩니다.


사사키; 좀더 숲의 식생이 풍부하고, 숲의 면적이 넓은 곳에서 화전을 하는 경우에는 이런 식으로 화전의 비율이 과밀하지는……


사토; 않지요.


사사키; 이곳은 좀 토지이용이 과잉이고, 지나친 경작으로 좋은 숲이 점점 사라진다.


사토; 그렇지요.


사사키; 사실은 양호한 숲의 비율이 더 많으면 더욱 풍부한 화전을 경영한다. 본래 화전은 앞에서 설명했듯이, 완전한 순환형 농경일 텐데.


사토; 완전히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삼포식 농업의 경우에는 가축의 배설물을 썼다. 동남아시아(계절풍 아시아)의 경우에는 무리 가축의 사육이 적기에 배설물도 적을 테지요. 그것을 대신하려고 식물성 소재를 쓰는 농경 체계를 탄생시킨다. 


사사키; 네 네, 식물의 힘으로 토지의 비옥도를 원래로 되돌린다. 그를 위해서는 휴한기간이란 것이 의외로 의미가 있지요. 휴한지에는 여러 가지가 생겨 납니다. 


사토; 약을 얻는다든지, 지붕의 재료를 얻는다든지, 새끼줄과 고삐가 되는 식물 섬유를 모은다든지 하지요. 그러니까 그 지역 사람들은 휴경지가 생산성이 없는 토지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사키; 차가 자란다든지, 고사리와 칡이 자란다든지, 그것을 먹을거리로도 삼지만 두드려서 의복의 재료로도 쓰는 쐐기풀 따위가 자라기도 하지요. 휴한기간이란 건 숲 그곳이 회복함과 함께 그동안에 생활필수품을 많이 얻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화전이란 곳은 일반적으로 작물을 한 종류만 키우지 않고 주작물 외에 다양한 작물을 뿌리거나 심거나 합니다.


사토; 그림4-14 같은 상태이지요.



그림4-14 화전 작물의 다양성. 라오스 루앙프라방 근처에서.




사사키; 여러 가지 있지요.


사토; 조금 조사해 보았습니다. 타로 토란이 있고, 카사바, 오이, 참깨, 레몬그라스, 10가지 종류 정도의 작물은 간단히 꼽을 수 있지요.


사사키; 화전에서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은 매우 다양하고, 전체가 균형을 잘 이룬다.


사토; 그렇습니다. 게다가 콩류와 곡물을 함께 재배하면 콩이 공기의 질소를 고정시켜 좋은 거름으로 바꾸어주기에 그러한 힘도 빌리면서 현명하게 농업을 하게 되지요.


사사키; 화전만이 아니라 본래의 농업이란 것은 매우 다양성을 가지고 순환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논 이야기로 돌아가서, 논도 지금은 벼만 농사지어 벼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사토; 옛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요. 가장 큰 건 수생 동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그림4-15의 사진을 보아 주세요. 이것은 아십니까? 인도네시아의 셀레베스섬에서 찍은 건데, 논 한가운데에 둥근 구멍이 있고 그곳만 깊습니다. 그 지역 사람들은 모내기할 때 물고기도 함께 놓아주고, 물고기에게 잡초를 먹게 합니다. 물고기가 똥을 싸기에 벼에도 좋다. 가을이 되어 수확철이 되어 벼를 수확하고 물을 빼면 물고기는 깊은 구멍의 양어지인 곳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림4-15 셀레베스섬의 벼논양어




사사키; 그리고 꼼짝않고 월동한다. 구멍 속에서 이듬해의 모내기까지 기다리지요.


사토; 그렇습니다. 때로는 이 작은 못에 물고기를 잡으러 간다. 새가 오면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안에 마른 대나무 가지를 놔두지요. 대나무의 마른 가지를 두어, 이것이 아프기에 새가 오지 않는다. 잘 되고 있어요.


사사키; 아무튼 벼논양어라는 건 계절풍 아시아의 논 지대에서는 어디에서나 하고 있다. 중국 서남부의 소수민족, 특히 구이저우의 묘족 등은 그 논에서 기른 물고기를 재료로 하여 식해를 만듭니다. 이와 같은 식해가 오늘날 초밥의 원조이지요.


사토; 논에서 전분도 얻고, 단백질도 얻는다. 이 체계가 계절풍 아시아의 농경 방식이라고 생각하네요. 저는 '쌀과 물고기의 동소성'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사사키; 그래서 순환형이 되어 균형이 잡힌다고 하지요. 그런데 농약 등을 넣으면 그 균형이 무너져 사라진다. 그러니까 그러한 균형 잡힌 순형형이고 다양성을 잘 보전하는 것이 농경의 본래 모습이라고 생각하네요.



농업의 다양성


사토; 그렇게 생각해요. 그것을 말하면 생산성이 어떻다든지, 일본의 총인구를 먹여살리는 방책이 아니라든지, 곧바로 불만스런 이야기를 듣겠지만, 생각해 보면 농약을 치는 돈도 들지 않고, 농약이 소비하는 이산화탄소도 배출하지 않기 때문에 지구환경을 위해서는 결코 나쁘지 않을 거예요. 잘 생각할 수 있다.


사사키; 그러한 본래의 순환형 농경의 상태는 생산성을 높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상에 입각하면 부정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럼 대규모 단작으로 앞에 서술한 미국의 옥수수 지대와 면화 지대 같이 되어 버리면 이번은 인공 비료를 연속적으로 계속 투입하게 되는데, 그래서 결국 토지가 피폐해져 생산성이 견디지 못하게 되어 버리죠.


사토; 그렇습니다. 견디지 못하게 되고, 생산량은 오르지만 투입량도 굉장하지요. 그래서 머지않아 파탄날 때가 옵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는 대규모 단작으로 놔두면 무엇인가 있었을 때에……


사사키; 한번 병이 발생하면 모두 쓸모없게 됩니다.


사토; 그것을 인류는 언제나 경험해 왔지요.


사사키; 당신의 연구 프로젝트 제목은 '농업이 환경을 파괴할 때'라는 것이었지요.


사토; 네. 우리들의 프로젝트는 환경의 역사를 차근차근 밝혀서 인류의 미래 가능성을 생각한다는 지구연의 '문명·환경사'라는 프로그램(연구영역)에 속하고, 특히 여기 1만 년의 농업과 환경의 관계를 밝히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연구반을 가동하기 전부터 알려져 있었던 것인데, 인류사 가운데 농업생산은 언제나 급격한 하락을 경험하고, 때로는 대기근과 그에 수반한 인구의 격감, 유출 같은 이른바 '붕괴' 사례가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들 '붕괴' 사례를 상세히 조사하면 농업이 무언가 나쁜 일을 하여 그를 빌미로 그렇게 된 사례가 많습니다. 연구반으로서는 여러 가지 풍토를 기반으로 그러한 붕괴가 왜 생겼는지 그 과정을 해명하는 속에서 복잡하게 얽힌 요인 하나하나의 인과관계를 시계열로 정리해 간다. 그러한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농업이 나쁜 일을 한다고 생각되는 사례 가운데 큰 이유가 되는 것의 하나로 '다양성의 상실'이 있습니다. 다양성이란 생태계 안에 여러 가지 생물이 있는 상태, 또는 하나의 작물 안에도 여러 가지 품종이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사라질 때 붕괴의 방아쇠가 당겨지는 것이 아닐까? 그러한 가설을 세운 겁니다. 그리고 대규모 단작은 그 하나의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가설인 표현이지만……


사사키; 그래서 농업에서 다양성이 사라지고, 순환적 안정성이 사라질 때에는 정말로 그것 자체가 환경을 파괴하게 된다.


사토; 그렇습니다.


사사키; 그러하다면 현재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웃음)


사토; 그것은 이 프로젝트가 끝나기까지 앞으로 3년이 남아서 3년 안에 생각한다는 건데, (웃음) 잘 나아가는 것이 그럼 옛날로 돌아가자는 것이냐고 비판하지만 그런 일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다양성을 지키기 위한 수단이란 건 최근 여러 가지가 개발되었기 때문에, 그러한 기술을 사용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벼를 예로 들면 갖가지 품종을 뒤섞어 놓는다. 이것만으로도 매우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콩과 벼를 함께 심어 놓는 새로운 방식도 있을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예전의 생활 속에 남아 있던 다양성을 회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전통적인 지혜를 어떤 방법으로 잘 현대에 살릴지 하는 것이겠네요. 적어도 부시 전 대통령처럼 "옥수수를 모두 연료로 만들어 돈을 버세요"라는 건 언어도단입니다. 세계의 식량이 충분하지 않을 때 옥수수를 연료로 쓴다고 하는 건 상식을 벗어난 발상이라 생각합니다. 저것은 옥수수의 가격이 싸기 때문에 그걸 높이려고 한 말인 듯한데, 그렇다면 말이 안 됩니다. 중요한 건 가격의 문제가 아니라 농업과 먹을거리 전체의 균형을 어떤 식으로 지속적으로 유지할 것인지가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토; 그렇지 않으면 지속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요. 그림4-16을 보아 주시겠습니까? 사사키 선생도 이 그림을 기억하고 계실 거라 생각하는데, 나카니시 타츠토시中西立太 씨라는 화가에게 야요이 시대의 논벼농사 복원도를 그려 달라고 한 것이지요. 아래가 옛날판이고, 위가 최신판입니다.



그림4-16 야요이 시대의 논벼농사 상상도


사사키; 이것은 주간 아사히 백과의 <일본의 역사>에 저와 고고학자인 사하라 마코토佐原眞(1932-2002) 씨가 야요이 시대에 행해진 벼농사의 구체적 모습을 그려 달라고 한 것으로, 맨 먼저 나카니시 씨에게 그려 달라고 한 게아래 그림이고 약 20년 전의 초판(1987년)에 게재했습니다. 위의 그림은 그 뒤 사토 씨와 함께 작업한 것으로, 2003년 신정증보판에 게재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그림에는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위 그림의 오른쪽 아래와 중앙부의 윗부분에는 잡초가 가득 자라고 있습니다. 20년 전의 아래 그림에서는 휴경 논이 있다는 등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실제로 일본의 논은 온통벼를 농사짓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꽤 휴경을 하여 그 휴경 논에는 잡초가 가득 자라고 있었단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잡초가 자란 휴경 논이 있는 모습의 그림으로 변경된 겁니다. 


사토; 예, 휴경 논의 발견이네요.


사사키; 그와 같은 점을 우리는 매우 강조한 겁니다. 기존에는, 라기보다 지금도 일본의 고고학자들은 일본의 논에서는 휴경지 등이 없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토; 저것은 어떤 것이죠. 난폭하군요.


사사키; 그건 열심히 해서 제가 발굴하고, 그곳이 휴경 논으로 벼를 재배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실망하지 않을까요?


사토; 국립역사민속박물관의 하루나리 히데지春成秀爾 씨에게 혼났습니다. (웃음) "벼를 재배하지 않는 논이 있는 등, 당신은 그런 실례되는 말을 합니까"라고 이야기를 들었네요. 뭐, 그럴지도 모릅니다. 


사사키; 그런데요, 우리도 포함해서 지금 일본의 모두는 논이라 말할 때 떠올리는 인상은 황금빛으로 익어서 눈에 들어오는 논입니다.


사토; 그렇지요. 저것은 농약과 화학비료와 트랙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즉, 지금의 농업은 완전히 석유로 만들어진다. 그 세 가지가 몰수된다면 에도시대의 농민처럼 아침부터 저녁까지 납작 엎드려 김매기를 계속 하지 않으면……


사사키; 에도시대의 논에는 말린 정어리 등의 거름을 꽤 넣고 있었지요.


사토; 물론 넣었습니다. 그래서 그야말로 환경이란 것을 생각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속적으로 벼농사를 계속 할 수 있을지 하는 것이지요.


사사키; 이것은 그림에는 없었던 것이지만, 당시의 벼농사라는 건 홑짓기가 아니다. 많은 종류의 벼를 하나의 논에서 재배하고 있었다. 그 많은 종류의 벼는 수확할 때 밑동을 베는 게 아니라 이삭을 베었던 것이 확실해요.


사토; 밑동을 베게 된 것은 좀더 뒤의 일이었지요. 옛 시대는 이삭 베기였죠. 


사사키; 저는 일찍이 네팔에서 향모의 이삭 베기를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작물 각각의 익음때가 다르다. 지금처럼 품종이 통일되어 있지 않기에, 알곡이 성숙하는 시기가 제각각이지요. 이건 덜 익었으니 앞으로 일주일 뒤에 베는 등으로 이삭을 보고 베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삭 베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옛 시대의 벼도 익음때가 일치하지 않아, 이삭 베기를 했습니다. 실제로 이삭을 베는 용도의 돌칼도 많이 출토되어 있습니다. 거기까지 이 그림4-16에는 묘사할 수 없었지만, 벼의 품종은 매우 다양했을 겁니다.


사토; 그렇게 생각합니다. 라오스의 화전에서 조사한 적이 있었는데, 하나의 밭 안에 적어도 아홉 종류의 벼가 검출된 일이 있습니다. 사정은 예전의 일본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사사키; 그리고 잡초가 가득 자란 논, 즉 휴경 논이 그 근처 안에 많이 있었던 게 실태이지요.


사토; 그렇습니다. 잡초 투성이라서 다양합니다. 그리고 해충이 오는 등으로 말하면, 그것을 일망타진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또 아마 논과 수로에서 물고기도 많이 잡혔을 테죠. 


사사키; 물고기를 잡는 건 쓰지 않았는데요. (웃음)


사토; 어떻습니까. 다음에 나카니시 씨에게 의뢰할 때에는 통발 등을 사용해 물고기를 잡는 장면을 그려 달라고 하는 것이요. (웃음)


사사키; 그렇지만, 예를 들면 모내기도 아주 제각각인 방향으로 모내기를 한다. 이것 등도 그림을 그릴 때 아무쪼록 나카니시 씨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래도 아직 논두렁이 아주 똑바르지 않습니다. 사실 논두렁은 좀더 구부러져 있어서 믿을 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모두의 인상은 현대의 논이지요. 


사토; 저도 나카니시 씨에게 좀더 어지럽게 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역시 화가는 그렇게 할 수 없어서. (웃음)


사사키; 저도 여러 주문을 했습니다. 큰 논두렁만이 아니라 작은 논두렁도 있다든지, 나카니시 씨는 대단히 이쪽의 주문에 응해 주셨지요.


사토; 확실히 꽤 현실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이것이 예전의 논벼농사의 구체적인 모습이어서, 이른바 생태학적으로 말하는 다양한 상황이 보존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사사키; 현재의 논벼농사는 완전한 홑짓기 형식이고 인공적인 면이 매우 높은데, 예전의 논은 그렇지 않고 그 자체 귀하가 말했듯이 생태학적으로 매우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슬슬 시간이 되어가는데, 역시 농경이 다양성을 복원하고 순환적인 특성을 유지하면서 지속적으로 운영되는 것은환경문제를 생각해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때 무엇을 참고할지 이야기하자면, 우리 인류는 1만 년에 걸쳐 농경을 해 왔고, 그 안에 축적된 여러 가지 지혜가 있을 테지요. 예를 들면 돌려짓기와 휴한을 한다든지, 대규모 단작이 아니라 다양한 작물을 섞어짓기하는 등 많은 지혜가 있습니다. 그 전통적인 지혜를 얼마나 잘 사용하여 새로운 안정적인 농경을 만들어내는지가 앞으로의 큰 방향성이라고 생각해요.


사토; 그래요. 그것은 농사짓는 쪽도 그렇고, 역시 먹는 쪽도 그렇다고 해야 한다. 지금은 슈퍼 등에 가면 일년 내내 토마토를 구할 수 있지요. 그것은 역시 이상합니다.


사사키; 역시 '제철'이 있다고 생각해요.


사토; 그렇게 생각합니다.


사사키; 그래서 저런 똑바른 오이만 파는 건 저 같은 전쟁 중 태어난 인간에게는 믿기 어려운 일입니다. 소비자도그러한 것을 잘 생각하여, 한번 더 풍부한 농경이 만들어지는 조건을 곰곰히 따져야 한다.


사토; 가치관을 포함하여 재고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프로젝트 안에는 철학자도 들어가고, 여러 사람을 넣고 있는 겁니다. 


사사키; 그것을 이 프로젝트의 지도자인 사토 씨, 당신이 열심히 잘 지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웃음) 


사토; 고맙습니다. (웃음) 그럼 시간이 되었기에 이 정도로 마치려고 합니다.




2008년 5월 17일 도시샤同志社 대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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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기고 4

와츠지 데츠로和辻哲郞풍토 

        -풍토론의 가능성을 열며          쿠라타 타카시鞍田崇






풍토는 이 시리즈 <유라시아 농경사> 전체를 꿰뚫는 핵심어의 하나이다.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과 그 주변의 각지에서는 역사적으로 다양한 문화가 생성되어 전개되었는데, 그것은 또 기후와 지형 같은 자연조건과의 관련 안에서 자연히 그 성격을 형성해 온 것이기도 하다. 풍토란 우선 그처럼 다양한 문화의 성립에 관련된 자연조건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풍토라 하면, 대부분의 사람이 먼저 떠올리는 건 철학자 와츠지 데츠로(1889-1960)의 주저 <풍토>(1935)일 것이다. 이 책에서 와츠지는 문화 생성의 외적 제약이 되는 단순한 자연조건인 풍토가 아니라, 자연환경과 인간활동의 상관성을 명시하는 풍토라는 독자적 시점을 제기한다. 와츠지는 사회와 개인, 공간과 시간, 신체와 정신 같은 인간 존재의 이중성에 주목하여 이들 두 항목의 어느 쪽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쌍방을 연결하는 이중성을 이중성으로 떠맡는 '사이(間)' 혹은 '관계()'란 의미에서 인간의 모습을 생생하게 나타낸 독자의 윤리학을 수립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和辻 1934). 그의 풍토 개념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바로 그러한 '사이'가 되는 것을 지시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시리즈는 와츠지의 풍토론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의론에서는 표면화되지 않았던 생업문화, 특히 농경과 그 역사가 풍토와 어떻게 관련된 것인지를 요즘의 지구환경문제도 응시하면서 그려본 것인데, 다른 면에서 각 권의 제목에 '계절풍' '사막' '목장' 같은 와츠지의 풍토론 용어를 채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연과 인간의 관련성을 비교문화론적인 시점에서 눈여겨 본 그의 시선을 실마리로 삼는다. 따라서 시리즈의 시작에 해당하는 이 책에서 와츠지가 말한 풍토란 어떠한 것인지 새삼스럽게 확인함과 함께, 지금 풍토를 문제 삼는 의의와 그 가능성에 대하여 약간 검토해 두는 건 쓸데없지 않을 것이다.


와츠지의 원풍경原風景과 풍토론  

와츠지로 말하면 먼저 떠오르는 건 그의 온화한 풍모이다. 특히 만년의 용모이다. 만년의 와츠지 데츠오를 찍은 사진은 몇 장 있는데, 그중에서 유명한 건 타누마 타케요시田沼武能가 촬영한 서재에서 서성거리는 와츠지의 사진일 것이다. 수북이 쌓인 도서의 그림자 너머로 겨우 어깨를 웅크리고 가만히 카메라를 응시하는 노인이 그곳에 있다. 그 시선이 참으로 온화하여 어딘지 천진난만할 정도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부드러운 기분을 느끼게 한다.



그 온화한 풍모는 아무리 봐도 온화한 하리마播磨 출신의 사람다운 데가 있다. 더구나 도시민보다는 교외의 마을 사람다운 목눌한 멋이 있다. 와츠지 데츠로의 풍모는 하리마의 농촌 풍토에서 배양된 그의 자기 이해를 반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앞에서 와츠지의 의론에서 생업문화, 특히 농경에 관한 기술이 표면화하지 않았다고 기술했지만, 이것은 약간 졸속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분명히 <풍토>에서는 농경을 시작으로 하는 생업문화는 주제로 논하지 않는다. 그의 직접적 관심은 예술과 종교의 풍토성을 해명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와츠지는 농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건 아니다. 반슈播州 히메지姬路의 교외에 위치한 농촌, 옛 니부노仁豊野 마을에서 태어난 그에게 차라리 농경이야말로 가장 가까운 노동활동이었음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가장 만년에 저술한 <자서전의 시행(自叙伝の試み)>(1961)에서는 근대 일본에서 본격적인 산업혁명의 파도가 밀려오기 직전, 1887-1906년(메이지 20년대부터 30년대) 지방 가정의 정경 -즉 차 덖는 일부터 베짜기까지 일상생활에 필요한 의식주 대부분의 용품을 직접 제조하여 마련하던 과거의 지방 가정의 모습이 참으로 선명하게 서술되어 있는데, 그곳에는 농경에 관한 기술도 빈번하게 나온다. 예를 들면, 어린 와츠지의 눈에 비친 이런 광경이 기록되어 있다.

아이인 나의 기억에는 모내기가 끝나기까지는 마을사람들이 별로 괴로워 보이지 않았다. 아이에게 노동의 괴로움을 뚜렷하게 보인 건 모를 내고 1-2주 뒤에 시작하는 논의 김매기 노동이었다. 그것은 7월 중반부터 8월 상순에 걸쳐서 여름의 삼복 시기로, 그 기간에 심은 모의 뿌리 주변의 흙을 뒤집어서 잡초가 번성하는 걸 방지한다. 이 김매기를 3번쯤 반복하는 사이 벼는 맹렬한 기세로 자라기 시작한다. 그렇게 해서 겨우 목표에 도달하기까지 경작자들은 땡볕 아래의 논 안을 기어다니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그것을 풀섶의 후끈한 열기를 뿜는 논의 옆에서 보고만 있지 못하고, 역시 마을 의사의 아들로서 이 노동으로 생기는 급병의 현상을 경험하고 있었다. 그것은 더위, 즉 일사병의 여러 가지 형태였던 것 같은데, 대개는 밤중에 명렬한 복통 등을 일으키고 너무 급하면 의사를 부르러 왔다. 논의 김을 매는 계절에는 매일 밤 한 명이나 두 명의 급병인이 발생했다. 그러한 관계로부터 나에게는 농경 노동 가운데 논의 김매기가 가장 맹렬한 노동이라는 인상이 남았다. (와츠지 데츠로 <자서전의 시행>)

와츠지의 생가는 '경작자'가 아니라 마을에 유일한 의사의 집이었다. 그 의미에서 농작업을 경험한 그의 시선은 결국 방관자의 그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환자의 대부분이 농가였던 '마을 의사'의 아들이었다면, 농업이 정말로 자연과 대치하는 인간활동이란 것을 일상적으로 깊이 느끼지 않았을까. 성인들의 가혹한 농경 노동을 지켜본 어린 와츠지의 긴장감은 '풀섶의 후끈한 열기를 뿜는'이란 문장 안에도 남아 있다.

<자서전의 시행>에서 적고 있는 니노부의 일상은 철학자 와츠지 데츠로의 원풍경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가부키와 아야츠리조우루리(操浄瑠璃)>를 시작한 뒤 그의 저작에는 니노부에서 보낸 어린 나날의 실제 체험에 근거한다고 생각되는 주제와 에피소드가 때때로 얼굴을 내민다. <풍토>도 또한 그렇다. 예를 들면, 앞에 인용한 것 같은 일본 농작업의 가혹한 '김매기'에 대해서는 <풍토>의 안에서도 유럽의 목장 같은 풍토의 특성을 일본의 풍토 그것과 비교하며 다음처럼 기록한다.

이처럼 (유럽에서) 여름의 건조함과 겨울의 습윤함은 잡초를 몰아내 온땅을 목장답게 한다. 이것은 농업 노동의 성격을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농업 노동의 핵심을 이루는 건 '김매기'이다. 잡초의 제거이다. 이것을 게을리하면 경지는 금세 황무지로 변한다. 그뿐만 아니라 김매기는 특히 '논의 김매기'란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일본에서 가장 괴로운 시기 -따라서 일본의 주택 양식을 결정하는 시기, 즉 폭염이 가장 심한 삼복 무렵에 꼭 그때를 번성기로 삼는 꿋꿋한 잡초와 싸운다는 걸 의미한다. 이 싸움을 게을리하는 건 농업 노동을 내버려두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유럽에서는 마침 이 잡초와의 싸움이 필요하지 않다. 토지는 한번 개간되면 언제까지나 고분고분한 토지로 인간을 따른다. 틈을 보아 스스로 황무지로 전화되는 일이 없다. 그래서 농업 노동에서는 자연과의 싸움이란 계기가 빠져 있다.

'김매기'를 잡초와의 '싸움'이라 하고, '일본 농업 노동의 핵심'이라 하는 와츠지의 기술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적 사실을 전한다. 그렇지만 이 조금 단언적인 기술의 배경에 풀섶의 후끈한 열기로 가득한 여름의 니노부의 논두렁에서 어린 그가 숨을 죽이고 응시하던 광경이 있다는 것이 명확하다. 

와츠지의 <풍토>가 이 책을 집필하기 직전 유럽에 유학할 때의 견문에 기반하여 생생한 기술로 가득하다는 것이 이 책을 펴서 읽으면 곧바로 눈에 들어온다. 그렇지만 위의 두 가지 인용에서도 명확하듯이, 그 시선의 근저에는 유아기부터 소년기에 걸쳐서 그가 목격한 일본 농촌의 기억이 원풍경처럼 가로놓여 있다. 분명히 와츠지는 <풍토>에서 농경을 주제로 논하지 않았지만 유럽이든, '사막'이라 불리는 건조와 반건조지대이든 각각의 지역과 그 문화적 특성의 비교검토는 자신의 원풍경에 근거한 농경문화라는 시점을 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농경문화론으로서 풍토론은

<풍토>의 권두에서 와츠지는 "인간 존재의 구조 계기로서 풍토성을 밝히는 일"을 이 책의 목적으로 하고, 그 구상의 배경으로서 베를린에 유학하며 우연히 만난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1927)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든다. 즉 <존재와 시간>이 인간의 '주체적 존재 구조'로서 시간성을 논하면서도 공간성의 문제가 완전히 다루어지지 않는 것에 불복한 와츠지는 <존재와 시간>의 부족함을 보충하는 풍토성이란 개념에 착목한 것이다. 사상사적으로는 이후에 레비 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1962)로 갔듯이, 시간에서 공간으로 좌표를 전환하는 것을 재빨리 시도했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中村 1989).

그렇지만 이러한 점으로는 와츠지의 풍토론을 오로지 추상적인 철학적 의론으로 가득찬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실제 <풍토>의 제1장 '풍토의 기초 이론'에서는 하이데거도 관여하는 당시 더없이 융성했던 현상학에서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y)에 관한 분석을 근거로 한 이론적 고찰이 전개되며, 말년의 대저 <윤리학>의 하권(1949)에서 <풍토>의 골자를 정리하고 재론했을 때의 의론도 또한 형식적, 윤리적인 느낌이 있다. 그렇기는 하지만 와츠지의 저작을 손에 넣은 독자는 곧 깨닫는 바인데, 그러한 철학적 의론에서조차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때때로 통속적이란 생각이 들 만큼 알기 쉽다. 이 알기 쉬움이 무엇보다도 와츠지 저작의 매력인데(와츠지는 '일본어와 철학의 문제'(1935)에 한 문장을 남겨, 번역어로 질질 끌 것이 아니라 일상의 일본어로 철학하는 일의 가능성을 늘 추구했다), 그것은 의론의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구체적 사례에 의한 것이다. 그 하나로 앞에 지적했듯이 농경문화에 관한 사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와츠지의 의론이 생업인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했다는 것에 대하여, 이미 시마다 요시히토嶋田義仁의 명쾌한 의론이 있다(嶋田 2000). 시마다는 와츠지가 말한 풍토의 유형 가운데 하나인 '계절풍'을 '더위와 습기의 결합'으로 특징짓고, 그 선에서 일본적 풍토의 유형이라기보다 동남아시아와 인도 등의 열대 계절풍을 의식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다음처럼 서술한다.

와츠지는 무슨 이유로 일본적 풍토를 열대 계절풍의 그것과 동일하다 보았을까? 그것은 '와츠지의 계절풍이란 것은 순수한 기후학적 개념이 아니라, 인간이 생활을 영위하는 '논'과 뗄 수 없이 결합된 인간 존재의 주체적 표현이 되는 풍토 개념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시마다 요시히토 '풍토 사상의 가능성 -일본적인 근원적 반성-')

농경문화의 시점에서 다시 의론을 전개하면 똑같은 계절풍이라도, 예를 들어 인도에 대해서는 같은 사례로 논할 수는 없으며, 거꾸로 '사막'과 목장을 같은 맥류 농경권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없을 것이다(이 책의 서론 및 대담도 참고할 것). 그러나 어느 쪽이든 농경문화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와츠지의 풍토론은 지리학과 민속학은 물론, 농학과 민족식물학, 게다가 환경고고학과 연결되며 그 역사적 의의가 판명된다. 시마다는 야나기다 타쿠니오柳田國男와 오리쿠치 시노부折口信夫 등에게서 발단하는 '벼농사 문화론', 우에야마 슌페이上山春平와 나카오 사스케中尾佐助, 사사키 타카아키佐々木高明 등에 의한 '조엽수림 문화론', 또한 이에 호응하는 형태로 제기된 '너도밤나무, 졸참나무숲 문화론', 야스다 요시노리安田喜憲와 우메하라 다케시梅原猛에 의한 '숲의 문화'론 등 일본의 일련의 풍토론적 문화론을 개관하고 그 전개에 와츠지의 '계절풍 문화론'을 자리매김한다.

와츠지가 고향의 선배 야나기다에게 개인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나는 상세하게 조사하지 못했는데, 와츠지의 <풍토>는 야나기다의 벼농사 문화론을 근거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벼농사라는 건 풍토 그것이라 말하기보다도 어느 풍토에 입각한 농업기술이며 생업기술이다. 벼농사에 대응하는 풍토가 존재한다. 와츠지는 그것을 '계절풍'으로 인식하고, 다시 세계사적 시야 안에 넣어 '사막'과 '목장'을 함께 풍토의 세 유형으로 다시 파악했다고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의 논문)

시마다에 의하면, 이러한 와츠지의 계절풍 문화론의 공헌은 영역에 한정되어 오로지 일본의 사정으로 시종일관한 벼농사 문화론을 환골탈태시키고, 풍토론을 비교문화론적 의론의 장으로 전환시킨 점이라 할 수 있다. 다른 면에서, 철학자인 그의 의론에서는 취약했던 '자연과학적 기초'를 근거로 하여 그 뒤 조엽수림 문화론 이후의 풍토론에 의해 새로운 전개가 가능해진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개괄하는 시마다가 제기한 시점은 자칫하면 와츠지의 철학적 고찰에 질질 끌려 그 구체적 내실에 대해서 좀처럼 명로한 의론을 제기할 수 없었던 기존의 해석에 대해, 와츠지만이 아니라 풍토론 그것의 가능성에 대해서도 명쾌한 자리매김을 가져왔다. 시마다는 또 최종적으로 개인에게 귀착하는 정신의 자유를 중시하는 나머지, 걸핏하면 풍토론을 단순히 환경결정론으로 멀리하려는 서양 근대사상에 대하여 평평하여 균질한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거주 환경에 응하여 공간의 이해가 중층적으로 전개된 결과 자연히 관심이 '자기 이외로' 향해 온 일본의 풍토론적 발상의 의의를 위상적으로 재구성하려 시도한다. 그리고 새로이 '산이 많은 나라의 풍토론'을 제기한다. 그 시점과 문제 의식은 이 시리즈에서 풍토를 문제로 삼는 데에도 시사적이라 해도 좋다. 

그렇지만 정말로 위상적인 의론으로 귀착하는 것에 의하여 시마다의 의론은 뜻밖에도 풍토론의 한계를 드러낸다고도 생각한다. 그 한계는 또한 농경과의 관련에서 본 풍토론이란 자리매김에 잠재해 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래에서 그점에 대하여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고, 지금 풍토를 문제로 삼는 것의 의의와 가능성에 대하여 간단히 고찰하겠다.


풍토론의 가능성

언젠가 오사카에서 교토로 돌아오는 전차 안에서 창으로 보이는 교외의 동네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과연 이곳에 풍토가 있다고 할 수 있는지 생각한 적이 있다. 형형색색의 네온이 반짝이고, 콘크리트 건물이 겹겹이 무질서하게 이어지며, 지면은 아스팔트로 덮이고, 하늘에는 전선이 종횡으로 내달리고 있다. 특별히 오사카 근교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의 어디에나 있는 풍경이다.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풍경일지도 모른다.

<풍토>에서 와츠지도 지적하고 있듯이, 풍토는 옛날에는 또 수토水土라고도 하여 자연의 모습을 방불케 하는 단어이다. 가지각색 인간의 생업도 또한 그곳에 뿌리를 내린다. 인간 문화와 관련된 자연이라 해도 좋을지 모른다. 마을의 옆으로 개울이 흐르고, 바람이 지나가며, 기름진 들이 펼쳐진다. 이것이 풍토의 올바른 인상일지 어떤지는 차치하고, 위에서 묘사한 것 같은 현대의 우리에게 매우 친근한 풍경에서는 이미 사라져 버렸지만 이 단어에서는 이야기되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앞에서 와츠지의 '원풍경'에 대하여 지적했는데, 아직도 풍토론을 받아들이려는 시도 안에는 때때로 어딘가 목가적이기까지 한 전원 풍경으로 풍토의 상을 전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미 그러한 풍경을 원풍경으로 가지고 있지 않은 현대의 우리에게 풍토론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도대체 참으로 저 어수선한 현대 교외의 길거리에 풍토적 현상은 없는 것일까?

예를 들어, 풍토와 같이 인간 활동과의 관계성에 기반한 자연을 표현하는 '마을'과 '마을 산'이라면 그들은 분명히 도시에서 괴리된 지역을 지시하는 장소적 한정을 수반한 단어이며, 생태계 전체에 걸친 인위적 관리를 전제로 하는 그 실태에서 보면 현대의 교외에는 이미 예전 같은 마을 산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과연 풍토라는 현상은 그러한 파악 방식으로 충분히 보아 온 것일까?

기존의 풍토론이 어느 쪽이냐 하면 도시보다 전원이나 농촌 같은 '시골'의 대상을 가장 자신있어 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시마다는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일본문화연구의 대부분이 벼농사 문화에 대한 고려를 빠뜨리고 있으며, 최근의 풍토론 재평가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했던 프랑스의 지리학자 오귀스텡 베르크Augustin Berque가 예외적으로 벼농사 문화에 주목하고 있다는 걸 지적하고 평가하는데,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풍토론은 역시 시골에 조명을 비추는 데 주목하는 제약이 있다는 걸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과연 풍토론은 이러한, 말하자면 장소적 한정과 한계의 근원에 머무는 것일까?    

노마 하루오野間晴雄가 지적하듯이 문제는 단순히 장소적 한정과 한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풍토론에는 '역동적인 경제관계'에 관한 의론이 결정적으로 빠져 있다는 점에 있다고 해도 좋을지 모른다(野間 2005). 지금과 같은 세계화의 진전을 고려하면, 농촌이든 도시든 경제문제를 빼놓은 채로는 충분한 의론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건 명확하다. 그렇지만 다시 물음을 거듭하면, 기존의 풍토론에 경제적 시점을 보완하면 그것으로 충분히 의론을 만드는 것일까?

도대체 와츠지가 열었던 비교문화론적 관점을 다루었던 풍토론의 가능성은 장소적 한정은 처음부터 굳이 말하자면 표층적인 자연과의 관계조차도 뛰어넘는 곳에 있던 건 아닐까? 그 범위 안에서, 교외는 물론 도시의 한복판에도 풍토는 있다 -그렇게 단언할 수 있는 측면이 실은 이 단어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와츠지의 <풍토>는 부제에 '인간학의 고찰'이라 하듯이 단순히 자연조건의 열거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가 자신을 객체화하고, '자기 인식의 전형'이 되는 풍토를 밝히는 것이며, 단순히 객관적 대상으로 기상과 환경과는 다른 새로운 자연의 관점을 제기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원초적인 자연을 무시하고 인간화하며 왜곡된 자연상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경험에 근거한 근본적인 자연과의 관계를 밝히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점은 일상생활과 자연의 관계이다. 그 의미에서 건축가 렌조 피아노Renzo Piano가 자연의 반대점에 있는 인위적 산물인 건축에 대하여 말한 다음의 이야기는 시사적이다. 

건축이란 진짜 자연에 쌓아 놓는 제2의 자연이다. 건축을 직업으로 삼는 자가 환경에 대해 말할 때에는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렌조 피아노 <항해일지>)   

          
만약 우리에게 친근하다는 범위에서 도시의 건축 공간도 또한 '자연'이라 부른다면, 여기에도 또 풍토는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농경문화로 상징되는 시골 지역을 논하는 그것이 문제인 건 아니다. 그곳에서 적출된 의론을 어떻게 현대의 우리 일상생활의 문제와 접속시킬 것인가? -그러한 문제의식을 놓치지 않는 것이 지금 무엇보다도 풍토론에서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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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제3장 

자연과학에서 본 벼의 기원    이시카와 류지石川隆二



벼의 기원과 분류


일본에 퍼진 벼


일본인인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먹고 있는 쌀은 벼, 학명으로는 오리자 사티바Oryza sativa를 재배하여 수확한 것이다. 세계에서 남극 대륙을 제외한 모든 대륙에서, 즉 고위도 지대부터 적도 바로 아래까지 널리 재배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재배 벼는 처음부터 이처럼 전 세계에서 재배되던 게 아니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는 홋카이도에서 불과 120년 전에야 간신히 늘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오모리현의 이나카다테田舍館 유적에서는 2000년 전의 논터가 발굴되어, 일본 벼농사 역사의 매우 초기에 본국 최북단에 논벼농사를 가지고 들어왔다는 걸 알고 있다. 지금도 논의 아래를 파서 야요이, 고대, 중세와 단속적이자만 논터를 발굴하고 있다(그림 3-1). 곧, 벼는 1900년 정도에 걸쳐서 쓰가루津軽 지방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던 것이다. 초기에 아오모리현으로 건너와 있던 벼는 열대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던 흔적이 식물 유체에서 발견되었다. 지금의 도호쿠 재래종에 그와 같은 성질이 없기 때문에, 서일본에서 여러 번 벼를 가지고 들어온 뒤에야 간신히 홋카이도에서도 재배할 수 있는 벼가 발견되었을 것이다. 



그림3-1 아오모리현 마에가와前川 유적의 논터. 야요이, 고대, 중세의 복합 유적이며, 중세의 논터에는 사람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일본에서 논벼농사를 가지고 들어온 연대는 아직도 논쟁거리이지만, 일반적으로 지금으로부터 2900년에서 2500년 전이라 한다. 벼가 북진하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중에서 홋카이도에 가지고 들어와 정착할 수 있었던 벼 품종은 꽃이 피는 시기에 까락이 붉어져서 '아카게(赤毛)'라고 불렀다. '아카게'는 자연 돌연변이가 자주 발생하여, 다양한 형질을 가진 계통을 만들어낸다고 알려져 있다. 재배에 도움이 되는 돌연변이로는 알곡의 끝에 있는 돌기인 까락이 사라진 '방주妨主'가 유명하다. 이 경우는 두 가지 유전자를 잃어서 '털'이 없는 벼가 되었다(그림3-2) 이와 같은 특수한 벼도 포함해 일본 재래종의 대부분은 일본형(자포니카)라는 품종군으로 분류된다.



그림3-2 벼의 북진에 도움이 된 재래종 '아카게'(좌)와 '방주'(우)



 

두 가지 품종군


재배 벼 전체를 보았을 때, 일본형과 대치되는 것이 인도형(인디카)이다. 이들 집단은 다양한 성질에서 다른 것이 알려져 있다. '왕겨털(稃毛)'이라는 알곡의 끝에 생기는 털의 길이를 비교했을 때 인도형은 짧은 부모를 가지는 특징이 있다(그림3-3). 일본형에서는 북상할 만큼 왕겨털이 길어지는 경향도 볼 수 있다.



그림3-3 알곡의 표면에 생기는 왕겨털. 북으로 가는 만큼 길어진다. 왼쪽은 일본형 품종, 오른쪽은 인도형 품종.




또한 화학약품인 페놀 용액(1.5%)에 알곡을 3시간 정도 담그어 보면, 품종에 따라 알곡과 용액이 검게 변색하는 것이 있다(그림3-4). 이 반응을 '페놀 반응'이라 하며, 어떠한 반응을 나타내는지는 Ph라고 이름을 붙인 유전자가 제어한다고 알려져 있다. 검어지는 경우는 우성 유전자가 작용하고, 인도형 품종에 많이 보인다. 착색하지 않는 경우가 일본형이다. 다만 반드시 모든 일본형이 착색하지 않는 건 아니다. 오카 히코이치岡彦一 박사(1916-1996)는 페놀 반응에 더하여 왕겨털 길이와 다음에 기술하는 새싹의 염소산칼륨 감수성 정도라는 세 가지 형질을 조합하여 품종군을 식별하는 방법을 찾아냈다(Oka 1988). 



그림3-4 알곡의 페놀 반응. 왼쪽의 알곡을 페놀액에 담그면 +형의 대립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품종은 검어진다(오른쪽 위).



염소산칼륨 용액은 강한 독성을 나타내는 산화제이다. 벼의 새싹을 염소산칼륨 용액을 써서 기르면 곧 죽어 버리지만, 일본형 품종은 죽기까지 시간이 길고 '감수성이 약한' 경향을 나타낸다. 피해도(감수성)이 높은 쪽이 인도형인 경향이 강하다(그림3-5).



그림3-5 새싹의 염소산칼륨 반응. 일본형(좌)은 감수성이 약하기에 인도형(우)보다 죽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이외의 형질에 대해서도 인도형과 일본형 두 가지 품종군으로 나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재배 벼에서 왜 그러한 경향이 나타나는 것일까? 지금까지 행한 연구에서는 (1)하나의 모집단에서 재배되는 과정에서 두 가지 다른 집단으로 나뉘었다, (2)같은 야생종 집단 안에서 다른 형질을 가지고 있던 계통에서 각각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이 재배화되었다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설을 생각하고 있다. 


벼농사 유적의 현상을 보는 한, 동아시아(현재의 장강 유역)에서 재배화된 일본형이 그 뒤 남하한 민족에 의하여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어 현지의 야생종과 만나면서 인도형의 재배화에 관여한 것이 추측된다. 이와 같은 사건은 다양한 유전자의 계보를 추적하여 밝힐 수 있다.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의 차이를 밝히는 일은 재배 벼의 기원을 해명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야생 벼에서는 앞에서 서술했듯이 형질의 변이가 명료하지 않고, 동질효소라는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유전자의 변이에서나 겨우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에서 보이듯이 유전적으로 달랐던 계통임이 보고되었다(Morishima and Gadrinab 1987).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세히 기술하겠다.



야생 벼의 생식 영역


재배 벼와 비교해 야생 벼는 어디가 다른 것일까? 벼는 오리자속이라 불리는 식물종의 집합(분류)에 속한다. 오리자속을 구성하는 식물종은 세계에 분포한다. 그 가운데 아시아의 재배 벼는 사티바라고 불리는 종에 속하고, 세계의 재배 벼 대부분을 점하고 있다. 사티바종에 근연한 루퓌포곤종rufipogon이라 불리는 야생 벼(이하 루퓌포곤)는 열대 도서부(인도네시아), 오세아니아부터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동아시아에 분포한다.


식물종의 분류는 새로운 유전정보가 더해져 변경된다. 오세아니아에 생식하는 메리디오나리스meridionalis, 아메리카에 생식하는 글루매파투라glumaepatula, 아프리카에 생식하는 바르시barthii 및 롱기스타미나longistaminata는 일찍이 페렌니스perennis라는 종 안의 오세아니아형, 아메리카형, 아프리카형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루퓌포곤은 꽤 높은 임성稔性(꽃가루가 기능하는 것)을 나타내 자손을 만든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사티바와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음이 밝혀져 재배종의 직접 선조가 되는 야생종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이들의 상세한 내용도 Oka(1988)에 정리되어 있다.


야생종의 분류는 어렵고, 분류체계 그것이 연구자마다 다른 경우도 있다. 드물게는 많은 연구자의 의견이 일치하여 지금까지 이어진 종명이 변경되기도 한다. 루퓌포곤의 분류에서도 마찬가지 사례가 있었다.


아시아형의 루퓌포곤에는 두 종류의 생태형이 알려져 있다. 한해살이와 여러해살이이다. 한해살이는 종자를 남기고 자신은 죽는다. 여러해살이는 종자도 남기지만, 자신에게 그 에너지를 축적해 놓으며 영양번식을 할 수 있는 생활사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한해살이는 니바라nivara라는 종으로, 여러해살이 야생 벼인 루퓌포곤과 식별되기도 한다. 한해살이 야생 벼는 우기에 개화하고, 종자를 맺는다(그림3-6). 재배 벼라면 하나의 이삭에서 개화하는 '꽃'(벼에서는 이삭꽃이란)은 1주일 이내에 피고 지며, 모든 이삭꽃은 거의 같은 시기에 등숙한다. 이것을 '생육의 균일화'라 하며, 재배에 필요해지는 현상의 하나이다. 한편, 야생 벼에서는 하나의 이삭 안에 최후의 이삭꽃이 개화할 무렵에는 끝쪽의 종자가 완숙해서 탈립해 버린다(그림3-7). 익은 이삭꽃이 이삭에서 지면으로 떨어지고 후세를 남길 준비를 하는 것이다. 건기에는 식물 개체 그것은 죽어 버리지만, 지상에 떨어진 종자는 휴면성을 보이기 때문에 다음 우기가 되기까지 발아하지 않고 '동면' 상태로 살아 남는다.



그림3-6 라오스에서 발견한 한해살이 야생 벼(가운데). 건기에는 종자를 남기고, 자신은 죽는다.




그림3-7 야생 벼의 탈립성과 생육의 불균일화. 야생 벼의 알곡은 익은 무렵에 탈립하기 때문에, 조사하면서 공책에 올리기만 해도 탈립하기도 한다. 캄보디아에서.



  

한해살이와 비교해 여러해살이는 종자를 만들지만 그 생산성이 한해살이에 비해 떨어진다. 그 대신 남은 종자 생산 에너지를 자신이 살아 남기 위해 이용한다. 벼 개체는 한해살이의 재배종이라도 '움돋이'를 뻗어 온갖 마디에서 싹과 뿌리를 뻗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일부가 죽어도 똑같은 유전자형을 지닌 조직이 살아 남는다. 이와 같은 번식 방법을 영양번식이라고도 한다. 똑같은 번식 방법을 딸기와 감자에서도 볼 수 있다. 여러해살이 벼는 몇 해에 걸쳐 식물 그것이 살아 남기 때문에 건기에도 물을 얻을 수 있는 연못의 중심부 등에 적응한다. 당연히 우기에는 연못의 수량이 늘어난다. 이 자극으로, 예를 들면 뜬벼는 짚(줄기)의 마디 사이를 늘린다. 그 결과 수면 위로 잎을 내밀고, 우기에 늘어난 수량에 견딜 수 있다(그림3-8).



그림3-8 캄보디아 씨엠립 교외의 반데이 스레이에서 학생이 손에 들고 있는 건 여러해살이 야생 벼. 마디에서 새로운 싹이 나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뒷쪽의 연못은 수심 1미터 이상.



발굴 자료와 문서에 의하면, 재배종의 선조종인 루퓌포곤은 장강 유역보다 약간 고위도 지대에서도 생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현재 루퓌포곤의 생식 영역은 중국에서는 하이난섬, 광시 치완족 자치구성, 광둥성, 후이난성, 장시성, 윈난성 등으로 한정된다. 개발과 몇 천 년 단위의 기후변화에 의한 것이라 생각한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지금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루퓌포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과 마찬가지로 개발이 진행된 태국에서는 생식 영역이 꽤나 감소했다. 한편, 일본에서 야생 벼가 생식하고 있었단 기록은 없으며 재배 벼만 대륙과 남쪽에서 섬으로 옮겨져 전파하는 등 여러 경로로 전해져 왔던 것 같다.


루퓌포곤의 남방한계는 남반구의 오세아니아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에는 여러해살이 루퓌포곤과 한해살이 메리디오나리스가 생식하며, 지금까지 여러 계통이 수확되어 연구에 이용되어 왔다(그림3-9). 오스트레일리아 퀸즈랜드 주립 하버리움(식물표본관)에서는 그들의 표본을 보관하며 일반에 공개하고 있는데 분류하면서 기술적인 문제로 메리디오나리스를 루퓌포곤이라 잘못 표기해 놓기도 했다. 형태학적으로는 이삭꽃 꽃밥(수술의 꽃가루를 가지고 있는 부분)의 길이가 2mm 이하라면 메리디오나리스, 4mm 이상이라면 루퓌포곤이라 규정하고 있는데, 게놈 수준에서도 기준을 정해 놓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림3-9 오스트레일리아의 여러해살이 야생 벼. 유칼립투스가 살고 있는 연못에서 생식하고 있다.




재배 벼와 야생 벼를 구별하다


여러해살이 야생 벼에서 발견되는 '뜬벼' 성질은 아시아 갠지스강, 이라와디강, 챠오프라야강, 메콩강 등의 큰 강 삼각주 지대의 재배 벼에서도 볼 수 있다. 이들 삼각주 지대는 홍수가 자주 일어나는 곳이라 그러한 지역에 대응한 뜬벼 재배가 행해진다. 그럼 재배종에는 없고, 야생 벼에서만 볼 수 있는 형질은 무엇일까?


재배종과 야생종에서 서로 다른 형질의 하나로 종자의 크기를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야생종은 재배식물에 비하여 수확 대상이 되는 종자와 식용부가 작은 경향이 있다. 이것은 사람이 재배, 수확하면서 서서히 큰 것을 선발하여 재배식물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야생 사과와 재배 사과에서는 10배 정도 크기에서 차이가 나는 걸 볼 수 있다.


야생 벼의 종자도 재배 벼에 비하여 작은 경향이 있는데, 예를 들어 루퓌포곤과 사티바를 비교하면 사과처럼 극단적인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그림3-10). 중국의 강소성 농업과학원의 탕릉화湯陵華 교수는 이 이유를 야생 벼도 재배 벼와 공존하여 종자가 대형화되는 유전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면 실제로 재배 과정에서 벼의 종자는 어떠한 변화를 나타내 왔을까? 지금도 그것을 조사하는 방법이 있는 것일까?



그림3-10 야생종과 재배종 알곡의 크기. 왼쪽부터 루퓌포곤, 재배 벼인 인도형, 재배 벼인 열대 일본형. 야생 벼의 크기는 극단적으로 작지 않다.



중국의 유적에서는 연속적인 퇴적층에서 방대한 양의 볍씨를 얻을 수 있다(그림3-11, 3-12). 그와 같은 유물과 현재의 재래 야생종의 종자에 기초하여 탕 교수는 대략 7000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는 종자의 크기 변천을 조사했다. 그 결과, 볍씨는 재배화 과정을 거치며 세로 4mm, 가로 2mm 정도 대형화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세로의 크기만 비교하면, 중국 재래 야생 벼는 700년 전에 이용되었던 '고대의 벼'보다 오히려 현대의 재배 품종에 가깝다는 것이 밝혀졌다. 7000년 전의 유물 중에는 야생 벼와 재배 벼가 혼재해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재배화와 평행하게 야생 벼의 종자가 대형화하며 살아 남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림3-11 강소성 고우高郵, 용교장龍蛟莊 유적에서 출토된 7000년 전의 탄화미. 탕릉화 교수 제공.



그림3-12 강소성 고우, 용교장 유적에서 출토된 5000년 전의 탄화미. 현재의 야생 벼보다도 작다. 탕릉화 교수 제공.




종자의 색과 재배화


종자의 색은 어떨까? 볍씨의 색은 바깥의 세포층(자세히 말하면, '열매껍질'이라고 부르는 표면의 세포층과 그 안쪽에 있는 배젖을 보호하고 있는 '씨껍질'이라고 부르는 세포층)에 착색이 있는 유형과 착색이 없는 유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야생 벼의 종자는 모두 붉은색인데, 재배종에서는 붉은색과 흰색 두 가지이다. 이 형질의 차이는 착색에 관한 우성 Rc 유전자에 의하여 지배된다. Rc 유전자가 Rd 유전자와 상호작용하면, 종자 표면에 균일한 착색을 가져와 한결같은 붉은색 겉모습을 나타낸다. 또 Rc 유전자는 단독으로도 작동한다. 현미가 부분적으로 붉은 반점을 나타내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그림3-13).



그림3-13 현미에서 보이는 쌀알 색의 변이. 왼쪽부터 RcRd형의 붉은쌀인 대당미大唐米(가고시마 토종) 및 아오모리현의 토종 적제赤諸. RcRd형의 붉은 반점 및 Rc형의 흰쌀(일본청日本晴)



흰쌀은 이들 착색층에 색소가 없어져서 생긴다. 요즘 연구에서 착색의 원인인 Rc 유전자 자체의 분자구조를 해명해(Sweeney 외 2006, Furukawa 외 2007) 흰쌀은 Rc 유전자가 기능을 상실한 열성의 Rc 유전자로 변화한 것이며, 그 분자구조를 붉은쌀 계통의 그것과 비교하면 Rc 유전자 내부의 염기배열의 일부가 결실欠失되어 흰쌀이 된다는 것을 밝혔다. 게다가 인도형, 일본형의 품종을 막론하고 흰쌀은 똑같이 결실을 가지고 있었다. 야생 벼는 모두 붉은쌀만 있기 때문에, 재배 과정에서 흰쌀의 재배가 일원적으로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이 붉은쌀의 성질을 지배하는 유전자의 내부 배열을 바탕으로 재배종 가운데 붉은쌀을 비교한 바, 두 종류의 집단(A 및 B)으로 나뉘었다(그림3-14). A집단은 인도형의 붉은쌀과 모든 흰쌀로 구성되어 있다. B집단에는 일본, 한국 및 중국의 붉은쌀 품종이 포함된다. 일본에서 볼 수 있는 붉은쌀에는 A집단도 있지만, 그들은 중세에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파된 인도형 품종(대당미)이다.



그림3-14 Rc 유전자 내부의 SSR 다형. A집단은 흰쌀 및 인도형의 붉은쌀, B집단은 일본형의 붉은쌀이 나타내는 유전자형이다.  



대당미는 애초 점성도占城稻라고 하여 11세기에 점성국占城國에서 복건성 등을 중심으로 중국에 가지고 들어온 벼와 계보를 같이한다. 문헌에 의하면 송나라의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5년(1012년)에 작물의 다양화를 위하여 가뭄 저항성이 있는 조생종으로 황무지에 도입되었던 것 같다. 이것이 중국의 메벼 계통이 되었다(寶月 1993). 이와 관련하여 점성국은 힌두교를 믿으며 지금의 베트남 중부를 중심으로 번영했던 고대국가인데, 갠지스강 유역과 관련이 있다고 이야기된다. 


중세에 일본에 가지고 들어온 대당미의 대부분은 붉은쌀로서, 밭벼로도 논벼로도 심어서 재배할 수 있는 특수한 형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유전적 형질은 인도형과 일본형의 교잡을 보이고 있다(Ishikawa 외 2002). 대당미는 동아시아 독자의 품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부터, 

(1) 야생 벼는 원래 모두 붉은쌀이며, 재배 과정에서 흰쌀이 되는 돌연변이가 한 계열만 발생했다.

(2) 재배 벼에는 흰쌀과 두 종류의 붉은쌀이 포함되어 있었다.

(3) 흰쌀과 A집단의 붉은쌀만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남하하여, 인도형이 성립하는 데에 관여하여 흰쌀 유전자를 후세의 벼에 건네주었다. 

(4) A집단의 인도형 붉은쌀인 점성도가 중국에 도입되어, 이윽고 일본에도 대당미로 건너왔다.

라고 할 수 있다. B집단에 속하는 일본형 붉은쌀과 인도형 붉은쌀이 같은 붉은쌀 유전자에서 파생되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현시점에서는 알 수 없다. 유전자 전체에 걸친 염기배열에 따른 부분상동성을 밝히는 것으로 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앞으로 중국의 야생 벼에만 A 및 B 집단의 붉은쌀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힐 수 있다면 붉은쌀의 성립이 다원적이었다는 점, 중국을 기존으로 두 방향으로 벼가 전파되었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전자가 말하는 벼의 기원


인도형과 일본형은 같은 기원에서 성립한 것인가?


유전자를 구성하는 염기배열은 일정 비율로 돌연변이를 발생시켜, 유전암호로 정보를 담당하는 네 종류의 염기(아데닌, 시토신, 구아닌, 티민)가 자리를 옮겨 다닌다. 선조가 똑같은 두 가지 자손에서 같은 유전자의 염기배열을 비교하여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이 40만 년 전에 분화했다고 산출한 연구자가 있다(Zhu and Ge 2005). 유적 등에서 추정되듯이 벼의 재배가 시작된 것이 빨라도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으로, 40만 년 전에 재배 품종이 유전적으로 분화되어 있었다고 하는 자료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또한 게놈 안의 네 가지 유전자만으로 얻은 자료이기 때문에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만 앞에서 기술했듯이 다양한 형질로 식별되는 인도형과 일본형은 유전적으로도 고도로 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 특수한 영역의 염기배열로부터 산출된 분기 연대라고 한다면 타당한 분기 연대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예는 DNA의 분화와 품종 분화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의 전형적인 예일지도 모른다. 


SSR이란 염기의 단순 반복 배열은 벼 게놈에서 높은 빈도로 발견될 수 있다. ACGT로 구성된 염기배열 안에는 예를 들어 ATATATAT 등이란 2염기부터 4염기의 배열로 이루어진 반복은 근연 품종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반복수를 나타내는 것이 많다. SSR은 유전자의 위치를 밝히는 연쇄 해석과 품종 식별 등에 이용된다. 그래서 이 SSR을 사용하여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군 사이의 염색체 구성이 어떻게 다른지를 조사해 보았다.


벼 게놈은 12번의 염색체로 구성되어 있어, 그들 염색체의 몇 가지를 횡단하듯이 SSR을 설정하고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군 사이의 반복수 조합이 어떻게 다른지를 조사해 보았다(그림3-15). 그래프의 끝에서 끝까지가 제12염색체를 나타내고, 각각의 점이 SSR 표지자의 위치이다. 세로축의 1은 인도형, 일본형 품종에 똑같은 반복수를 나타내는 SSR을 공유하고 있는 것. 0은 같은 품종군 사이에서 서로 다른 반복수밖에 안 보이는 것을 나타낸다. 그 결과, 염색체 수준에서 보는 한, 두 품종군은 같은 영역과 다른 영역이 혼재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림3-15 제12염색체에서 볼 수 있는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군 사이에 분화된 염색체 영역. X축은 염색체 위치, Y축은 유전적인 분화 정도를 나타낸다.



이 설명으로 인도형은 일찍이 일본형과 교잡하여 유전적 조성의 일부를 교환했지만, 일본형 벼와는 다른 영역을 게놈에 지닌 채로 재배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유전적으로 다른 영역은 재배화 이전의 야생 벼 집단이 가지고 있던 차이를 나타내고, 40만 년이란 연대도 추정치의 하나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군에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유전자(흰쌀의 유전자)는 인도형과 일본형 사이에 서로 교환한 염색체 영역에 실려 있다. 또한 공유하고 있지 않은(분화한) 염색체 영역에는 앞에서 언급한 페놀 반응의 유전자를 시작으로, 두 품종군을 특징짓는 유전자가 실려 있다. 그림에 보이는 가장 분화한 영역에서는 지금까지 두 품종군을 식별하는 지표로 이용되어 온 동질효소 유전자 Acp1이 실려 있다. 동질효소는 전기영동이란 실험방법에 의하여 비로소 분리, 식별할 수 있기 때문에, 각 품종군에게 필요한 형질을 지배하는 유전자는 생존 능력에 관하여 중립이라고 생각되는 동질효소 유전자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할 것이다.


품종군에서 서로 다른 염색체 영역에 보이는 유전자로 페놀 유전자를 들 수 있다. 같은 유전자의 실려 있는 후보 영역을 위에 언급한 방법으로 조사하면, 페놀 유전자 후보로 폴리페놀 산화효소 유전자가 적어도 세 가지 이상 실려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가운데 PPO1이라 불리는 유전자는 인도형에서는 정상인 유전자 배열을 가지고 있는데, 일본형에서는 그 유전자 배열 안에 트랜스포존이라 불리는 게놈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는 전이인자가 삽입되어 있었다(그림3-16). 그 때문에 유전자 기능은 손상되어 있다. 단, 일본형에서도 삽입되지 않은 품종이 있었다. 이것은 이른바 열대 일본형으로, 일찍이 오카 히코이치 박사가 열대도형으로 분류한 품종이다. 페놀 반응은 어디까지나 마이너스이기 때문에 트랜스포존이란 다른 원인에 의해 기능을 상실했다고 추정된다. 유전자 내부를 보면 염기배열에 다양한 치환이 발생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유전자가 알곡의 페놀 반응에 관여하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상세하게 조사해야 하겠지만, 긴밀하게 연쇄하는 것은 연쇄 분석의 결과에서도 밝혀진다. 재래종에서 염기배열에 의한 계통수를 작성해 보면(그림3-17)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이 별도의 유전자 유래를 가지고 있으며, 열대 일본형은 더욱 다르기 때문에 페놀 유전자에는 다원적인 계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림3-16 PPO1에 보이는 트랜스포존의 삽입.



그림3-17 PPO1의 염기배열로부터 작성한 계통수.



이상과 같이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은 서로 다른 진화의 길을 간 유전자를 무수히 게놈 안에 가지고 있으며, 일본형으로 분류되는 품종군에도 서로 다른 기원에서 성립된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알칼리로 녹인 쌀!?


일본형 쌀은 알칼리액에 담그면 팽윤하여 '붕괴'한다. 쌀은 대부분이 녹말이다. 그 녹말은 아밀로오스, 아밀로펙틴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글루코오스의 결합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아밀로오스가 없어지면 찹쌀이 되고, 아밀로오스가 늘어나는 것과 함께 퍼석퍼석한 멥쌀이 된다. 이와 같은 성질도 벼의 기원을 밝히기 위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아밀로펙틴 사슬의 길이를 조절하는 유전자는 수용성 녹말 합성효소 IIa(SSIIa)라고 불린다. 실은 이 유전자가 알칼리 붕괴의 정도를 결정하는 유전자이고, 열성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경우 쌀이 붕괴하기 쉽다(그림3-18). 인도형, 열대 일본형 및 야생 벼에서는 우성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 알칼리 붕괴가 어려운 표현형을 나타낸다. 알칼리 붕괴의 유무는 맛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유전자의 배열 자료까지 연구가 진행되어 있다. 그 결과, 붕괴하기 어려운 유전자라도 서로 다른 염기배열을 나타내는 품종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여기에도 복수의 야생 벼가 재배화되어 각각의 지역에서 특징이 있는 재래 품종군이 선택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다만 이 경우는 맛과 관련되어서 각 표현형이 선발된 뒤에 다른 지역으로 옮겨지기도 한다. 현재 어느 재래종의 재배지역이 그대로 기원지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편 야생종은 맛으로 선발되지 않기 때문에 각 지역 야생 벼의 유전자 염기배열을 조사함으로써 서로 다른 맛의 쌀이 기원한 지역을 특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3-18 배젖의 알칼리 붕괴성. 왼쪽이 인도형, 오른쪽이 일본형 품종의 배젖을 알칼리액에 담근 것.




엄마는 '하나'?


사람과 마찬가지로 벼도 세포질의 유전조성(미토콘드리아 게놈, 벼에서는 엽록체 게놈도 포함됨)은 엄마에게서 유래한다. 벼로 말하면, 꽃가루를 제공하는 부분이 아니라 난세포를 제공하는 부분에서 유래한다. 그 때문에 엽록체 게놈을 조사하여 모계열을 밝힐 수 있다.


PS-ID 배열과 ORF100은 엽록체 게놈의 일부로, 치바 대학의 나카무라 이쿠로中村郁郞 박사(이 책의 기고 3 담당)의 연구에 의하여 인도형 품종과 일본형 품종의 식별에 이용할 수 있음이 밝혀졌다. PS-ID 배열은 시토신(C)과 아데닌(A)의 반복을 포함하는 350염기 정도의 배열이다. 이 mCnA(m, n은 C 및 A의 반복수)의 배열에 인도형은 8C8A 유형, 온대 일본형은 6C7A 유형, 열대 일본형은 7C6A 유형이 각각 특징적으로 발견된다. 이로부터 다원적인 모계열의 존재가 지적된다(그림3-19). 또한 ORF100 근방의 69염기의 결실도 인도형에서 특징적이며, 일본형에서는 볼 수 없다. 일부 야생 벼에서 이 결실을 지닌 것이 있다. 이런 점에서도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군은 별개의 모계열에서 재배화되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카와카미 외(Kawakami 외 2007)는 엽록체 DNA에서 보이는 복수의 결실에 주목하여, 그 가운데 57k 영역의 분자적 다형에서 재배 벼에는 여섯 유형의 모계열이 존재한다고 보고한다. 



그림3-19 PS-ID 영역을 포함한 RPL16 유전자의 염기 다형.




탈립성은 하나의 기원


벼에는 이삭꽃을 다는 이삭이 있고, 하나의 이삭꽃 안에 하나의 현미가 생긴다. 이삭꽃 기관에 해당하는 부분이 알곡인데, 알곡이 자연히 이삭에서 탈리脫離하는 형질을 '탈립성'이라고 한다. 재배 벼는 수확할 때까지 탈립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


이 탈립성을 지배하는 유전자도 재배화에 따라 변화한 유전자이다. 탈립성을 지배하는 유전자는 여럿 존재한다. 그 가운데 야생종과 재배종 사이에 다른 유전자가 최근 발견되었다. 제4염색체에 실려 있는 탈립성의 유전자 SH3=SHA는 연구자마다 다른 유전자 이름으로 불러왔는데, 야생종에서 재배종으로 변하는 단계에서 돌연변이한 유전자임이 밝혀졌다(Li 외 2006).


수확할 때까지 탈립하면 곤란한 재배종에서는 비탈립성이란 '재배에 적합한 변이'가 선호되어 남아 있다. 이 과정을 인위 선택이라 한다. 인도형 품종과 일본형 품종은 앞에서 기술한 탈립성 유전자 내부에 똑같은 염기 변화를 가지고 있으며, 모두 이 변이에 의해 비탈립성이 된 것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우연이었을까? 지금까지 둘은 동일한 변이에 의해 생긴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 유전자는 어디에서 변이한 것일까? 가장 오래된 벼농사 유적은 현대의 중국 장강 유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예를 들어 대략 1만 년 전의 벼농사 유구라고 생각되는 상산 유적 등) 중국에서 초기의 재배 과정에 비탈립성이 획득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게 신뢰성이 높은 결론이다.



태풍에서 선발된 일본형?


탈립성의 정도에 대해서는 인도형과 일본형에 차이가 발견된다. 인도형 쪽이 일본형보다 탈립하기 쉽다. 이 점에서는 인도형은 야생 벼와 같은 qSH1이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유전자 이름 안의 q는 양적 형질을 지배하는 유전자 자리(QTL)을 표시하는 기호이며, 탈립성(SHATTERING)의 제1염색체에 실린 유전자로서 그와 같이 이름이 붙여졌다(Konishi 외 2006). 인도형에도 일본형에도 각각 복수의 탈립성에 관련된 유전자 자리가 있는데, 인도형 쪽이 더 탈립하기 쉬운 건 그들 유전자가 지닌 탈립성 효과의 총계에 의한 것임이 발견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높은 효과를 나타내는 유전자 자리로 알려진 것이 qSH1이다. qSH1은 인도형에서는 우성유전조차 탈립성 효과를 나타내는 데 반해, 일본형에서는 열성유전으로 탈립이 어려운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일본형에서는 알곡을 이삭에서 떼어낼 때 이삭의 일부인 이삭가지에서 떨어져 알곡에 붙은 채로 있는 것을 빈번하게 볼 수 있다(그림3-20).



그림3-20 탈립성이 다른 일본형과 인도형 알곡의 아래쪽. 왼쪽 일본형에서는 이삭가지의 일부가 달려 있지만, 인도형은 떨켜가 발달해 있기에 이삭가지가 남지 않는다.




그림3-21 야생 벼 떨켜의 전자현미경 사진. 떨켜가 발달해서 알곡 아래쪽은 세포가 골고루 늘어서 있다.




야생 벼에는 야생 벼에 특이적으로 볼 수 있는 제4염색체의 탈립성 유전자와 인도형에 많이 보이는 제1염색체의 qSH1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전자현미경으로 알곡이 탈립하는 부분(떨켜)을 보면 알곡이 이삭가지와 잘라져 떨어지는 걸 알 수 있다(그림3-21). 이에 대하여 인도형은 qSH1을 가지고 있지만 수확까지는 탈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탈곡하려 할 때 쉽게 알곡을 이삭에서 떨어뜨릴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에, qSH1은 '안이한 탈곡형' 유전자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림3-22는 인도 시킴주의 탈곡 풍경이다. 수확한 벼를 땅바닥에서 건조하고, 원형으로 소를 걷게 하면서 알곡을 탈곡한다. 옆의 대나무 끝에는 천수국이 걸려 있다. 논의 신에게 바친다는 의미도 있지만, 꽃이 마를 때쯤이면 벼도 마른 알곡을 떨기 쉬워지기 때문에 탈곡의 적기를 가늠하는 데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캄보디아의 남부에서는 소녀가 이삭을 밟아서 알곡을 떨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탈곡하는 건 일본의 벼에서는 곤란할 것이다.



그림3-22 인도 시킴 지방의 탈곡 풍경




그 이유는 일본형 벼가 열성대립유전자로 작동하는 qSH1을 가지고 있어 '탈립이 어려운 성질'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알곡을 이삭에서 떨어뜨리는 데에는 옛날부터 홀태 등의 전용 탈곡기가 이용되었다(그림3-23). 동아시아의 수확 시기는 마침 태풍이 빈발하는 때이다. 태풍의 강풍으로 수확량이 감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탈립이 어려운 성질'이 빼놓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림3-23 일본의 농기구, 탈곡기.




인도형의 기원


인도형은 한편으로는 야생 벼와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형과 같은 재배화에 관련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이 결과의 일면을 보면, 마치 인도형 재배종은 야생 벼에서 재배화되는 과정에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것을 고고학의 자료와 결부하면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그릴 수 있다. 


재배화가 동아시아에서 발생하고, 같은 지역에서 선발된 유전자(탈립성 SH3=SHA, 흰쌀 rc)가 일원적으로 생겼다. 그들은 일본형이었다. 그 사이, 비탈립성과 함께 흰쌀 유전자를 가진 계통이 남하하여, 동남아시아 어딘가의 지역에서 '인도형'의 성질을 가진 야생 벼와 교잡되어 인도형 재배종이 성립되었다(佐藤 1996, Dorian and Sato 2008).


인도형 품종으로 생긴 유전적으로 다양한 품종군에는 늦벼와 올벼, 뜬벼 성질과 천둥지기에서 재배할 수 있는 밭벼 등으로 재배되었다. 이와 같은 품종의 일부는 앞에서 기술했듯이 11세기에는 중국에 도입되었다. 그 계통에서 중세에 일본으로 대당미로 전파된 점성도는 서일본에서 재배되었다. 그러나 내한성 등의 문제로 동일본에는 도달하지 않았다. 한편, 따로 븕은쌀 계통은 재배화의 유전자인 비탈립성을 가지거나, 다른 계열의 일본형 붉은쌀로 중국, 일본, 한국에 전파되었다. 


이 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와타나베 타다요渡部忠世 박사가 연와煉瓦 유적에서 발견한 알곡 모형에서 볼 수 있다(渡部 1977). 동남아시아의 사원 유적은 햇볕에 말린 벽돌을 소재의 하나로 건축되었다. 이와 같은 유적이 인도부터 중국까지 인지된다. 벽돌에 섞인 알곡의 크기를 측정하고, 유적의 연대를 역사적으로 밝혀서 벼 알곡 크기의 변천을 추적할 수 있다. 알곡의 크기에는 인도형과 대응하는 가늘고 긴 알곡(늘씬한 유형), 밭벼와 열대 일본형과 대응하는 큰 알곡(큰 크기) 및 일본형에 대응하는 둥근 알곡(둥근 유형)의 세 종류로 크게 나눌 수 있다(松尾 1952). 이들 세 종류 알곡 모형의 벼가 10세기에 태국 차오프라야강 유역에서 혼재하며, 시대와 함께 늘씬한 유형이 평야부, 큰 유형과 둥근 유형은 태국 북부와 동북부에 한정된다는 걸 보여주었다. 이것은 인도형 재배종의 성립과 그 뒤 일본형과 재배 적지가 분화되는 모습을 알려주기에 매우 유의미한 자료이다.



인도형 야생 벼


인도형이 재배 벼와 야생 벼의 교잡으로 생겼다면, 인도형 재배종의 기원지는 인도형의 야생 벼가 생식하는 지역, 혹은 일찍이 생식했던 지역이 된다. 이와 같은 야생 벼는 어디에 존재했을까?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처럼 뚜렷한 유전적 형질의 분화는 야생 벼에서는 볼 수 없다. 다만, 엽록체의 DNA에 변이가 생기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야생 벼에서도 인도형의 염기배열을 발견할 수 있다. 앞에서 서술한 PS-ID 배열에 대하여 43계통의 루퓌포곤 변이를 조사했고, 인도형에서 특유한 유형의 배열을 보여주는 것은 4계통(태국 2계통, 인도네시아 1계통, 파푸아뉴기니 1계통)이었다. 이 4계통이 직접적인 선조종이란 건 아니고, 이와 같은 계통의 분포 지역과 유전자 배열을 상세하게 비교하여 기원지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한다. 




진화하는 벼 -교잡에 의한 유전자 변환



인도형 야생종과 일본형 재배종은 교잡했을까?


지금까지 재배 형질에 관여하는 탈립성과 흰쌀은 일원적으로 발생했다는 걸 기술했다. 그럼 게놈이 다른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은 공통의 유전자를 어떻게 하여 가지게 된 것일까?


타다오 씨가 벽돌 안의 알곡 모형의 변천을 자세히 조사했을 때, 한 시기 태국 평야부에서는 다양한 알곡 모형의 벼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공존 상태는 나중에 해소된다. 적어도 그 시기에는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이 근접하여 공존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해외 학술조사에서는 야생 벼만이 아니라 재래종도 조사의 대상으로 삼는다. 현지의 연구기관과 공동으로 재래종의 변이를 조사하기도 한다. 캄보디아도 그러한 나라의 하나이다. 이 나라에 흥미를 가지게 된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뜬벼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뜬벼가 존재하는 곳에는 수확을 위하여 올벼가 함께 재배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양한 벼 품종이 존재하는 것을 '생태 품종(같은 곳의 다른 생활사 습성을 가진 품종군)'으로 분화되어 있다고 한다. 


생태 품종의 대표 사례는 갠지스강 유역의 벵골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아우스aus 품종군과 아만aman 품종군이다. 또한 똑같은 생태 품종을 캄보디아 똔레샵 호수 주변에서도 볼 수 있다. 캄보디아의 우기는 5월 말에 시작해 8월에 소강되었다가 9월에 집중적으로 비가 내린다. 10월부터는 비가 거의 오지 않고, 가장 건조함이 격심한 때가 3월부터 5월 무렵이다. 재배종인 뜬벼를 필자가 처음으로 본 건 앙코르와트로 유명한 씨엠립이었다(그림3-24).



그림3-24 앙코르와트



이 마을에는 각종 저수시설과 사원이 앙코르 유적군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여행자가 방문하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앙코르와트를 둘러싼 해자의 한 변은 1킬로미터 이상이다. 이 유명한 유적을 지나면 거대한 돌로 만든 불상이 서 있는 바이용 사원이 있다. 여기도 주변에 해자를 판 앙코르와트보다 거대한 복합 시설을 포함한 사원이다. 차가 통과할 수 없는 서문을 지나서 30분 정도 걸으면 서바라이라는 인공 저수시설이 보인다. 1020년에 완성된 서바라이는 동서 8킬로미터, 남북 2킬로미터의 제방을 가진 인조 호수이다. 그 동쪽 끝에 가까워질 때 가장 먼저 마중을 나온 건 물소였다. 좁은 모래흙의 길을 지나면 벼들이 호수의 주변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다. 농가의 사람은 어디에 있지 하고 생각하면, 물에 허리까지 잠기어 벼의 윗부분을 베는 일을 하고 있느라 정신없었다. 근처에 떠 있는 배에는 베어낸 벼의 이삭이 실려 있으며 언덕에 올려 말리고 있었다. 말린 뒤에야 물소의 차례가 되어, 농가까지 운반할 것이다(그림3-25, 3-26).



그림3-25 1월에 서바라이에서 볼 수 있는 뜬벼 수확 풍경. 깊은 연못은 뜬벼의 논이며, 농부가 허리까지 잠긴 상태로 윗부분을 베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림3-26 서바라이의 수확 풍경에서는 물소의 활약을 볼 수 있다. 사진은 물소에게 지우는 수레.




이처럼 깊은 물 지대에서는 5월에 파종하여 9월까지는 물을 빼는 논 같은 곳에서 모를 기른다. 그 사이에도 재배 벼는 야생 벼와 공존하고 있다. 9월부터 급속히 수량이 늘고, 그 다음에는 물에 잠긴 상태에서 재배가 이루어진다. 물이 적은 때에는 다른 품종을 사용해 거의 같은 장소에서 여러 가지 품종을 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종자는 자가채종이 기본이다. 12월에 방문했을 때 벼는 아직 대부분 물에 잠겨 있었다. 새해 무렵부터 차차 이삭이 나와, 꽃이 피고 익으며 수확이 이루어질 것이다. 9개월이나 기르는 뜽벼는 수확효율이 나쁘기 때문인지 현재는 홍수가 일어나는 곳에서만 재배한다. 


이 뜬벼의 특징은 세포질(엄마 게놈)이 일본형이면서 핵 게놈은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의 특징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거꾸로 세포질이 인도형이면서 핵은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의 중간인 특징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뜬벼 재배 품종의 유전적 성질은 갠지스강 유역의 벵골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뜬벼 성질은 원래 여러해살이 야생 벼에서 유래하는 성질이기 때문에, 야생 벼에서 재배 벼에 도입되어 그 후대의 유전적 분리에 의해 다양한 품종이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서바라이의 뜬벼를 재배하고 있는 곳에서는 야생 벼와 재배 벼가 혼재해 있는 상태를 볼 수 있다(그림3-27). 이와 같은 환경에서 둘의 교잡으로 새로운 성질을 가진 재배 품종이 생겼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조생 인도형 품종의 출현도 이처럼 다양한 품종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조생 아우스 품종군은 대당미와 유전적으로 유사하며, 둘도 인도형과 일본형 벼가 교잡하여 생겼음을 알 수 있다(Ishikawa 외 2002). 앞에서 서술했듯이 대당미의 원산지는 점성국인데, 이 나라는 힌두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종교국가였다. 벵골 지역도 당연히 종교와 깊은 관계가 있었던 곳이다. 이러한 관계를 고려하면, 똑같은 재배 벼가 두 지역에서 주로 재배되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림3-27 8월의 서바라이. 위: 논. 아래: 이미 물에 잠겨 있는 논에서는 연꽃과 섞여 있는 야생 벼를 볼 수 있다.



아우스 품종군과 같은 유전적 성질은 캄보디아의 재래종 조사에서도 밝혀졌다.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의 어느 쪽, 혹은 두 지역에서 인도형과 일본형의 교잡 후대에서 다양한 형질 조합을 지닌 개체가 생겨서 인간이 이동할 때 한쪽에서 다른쪽으로 옮겼을 것이다.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은 어디에나 정착하는가


벽돌의 알곡 크기 조사에서 인도형 품종과 일본형 품종은 한 시기에 태국 중앙 평야의 거의 같은 장소에 존재했는데, 이윽고 몇 세기를 거치며 각지로 확산되어 갔음을 알았다. 그 뒤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이라 생각되는 벼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운남성, 부탄 및 네팔 등 표고차가 있는 지역에서 재배되는 벼는 고지대에 일본형, 저지대에 인도형, 또 그들의 중간지대에는 둘이 혼재해 있음이 알려져 있다(松尾 1992, 佐藤 1992, Sano and Morishima 1992). 자연식생에는 없는 재배식물이 이처럼 나뉘어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필시 표고차에 대한 적응으로 생긴 결과라고 생각한다. 농민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토지에서 얻을 수 있는 작물을 심어 보는 일이 많기 때문에, 타지에서 가지고 돌아온 재배식물을 재배하여 최종적으로 그 땅에 적응한 것이 남았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 사례가 일본에서도 발견된다. 청일전쟁이 끝난 뒤, 귀환자가 가지고 돌아와 재배된 벼 품종으로 '개선凱旋'과 '전첩戰捷' 등이 알려져 있는데, 벼의 질병인 도열병에 강하기 때문에 이들은 일본에 정착했다. 일본에 건너온 대당미도 마찬가지의 경위를 더듬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단, 대당미의 사례에서는 큐슈, 시코쿠 등을 중심으로 서일본에서는 농사지었지만 동일본 칸토우보다 북에 정착한 사례는 없었다(嵐 1974). 이것도 품종이 지닌 적응성의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벼는 자연에서 교잡하는가


인도형과 일본형이란 두 가지 품종군의 기원이 교잡에 의한 것이라면, 그러한 교잡은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일까? 그 선명한 실마리를 주는 것이 '잡초 벼'이다. 야생 벼와 재배 벼가 혼재하는 조건에서는 높은 빈도로 둘의 교잡이 발생하고, 그 후대는 탈립성 등에서 통상의 재배종과는 다른 성질을 나타낸다. 벼에는 있지만 야생 벼에도 재배 벼에도 없다. 이것을 '잡초 벼(weedy rice)'라고 한다. 동남아시아의 재배 농가에는 잘 알려져 있다.


미얀마를 조사했을 때에도 야생 벼가 재배 벼의 근처에서 자라고 있는 것을 볼 기회가 있었다. 북부의 번화한 거리, 미치나에서 남으로 내려가면 논 지대가 펼쳐져 있다. 논이 열려 있는 곳은 예전의 습지대를 개간했던 곳인 듯했다. 11월은 벼베기의 게절이라서 말라 있을 거라 생각했더니 논과 그 주변은 아직도 축축하여 아침이슬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 안을 벼베기를 하려는 것 같은 농민과 그를 돕는 젊은 여성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같이 가서 논에 모였다. 그때 우연히 논에서 눈에 들어온 이상한 것이 황금색의 이삭들 사이에 섞여 있는 걸 보았다. 검은색을 띠고 알곡의 끝에 가늘고 긴 '털'이 달린 야생 벼였다(그림3-28). 논 옆의 둠벙에서도 볼 수 있었다. 야생 벼와 재배 벼가 매우 가까운 위치에서 공존하고 있는 모습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림3-28 미얀마에서 볼 수 있는 야생 벼. 논 안에 살고 있다. 뒤쪽에 보이는 건 공동 수확 작업을 하러 가는 현지의 여성들.



현지 사람은 야생 벼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있을까? 들어 보면 되돌아 왔던 건, 지금으로서는 왠지 운치 있는 말 아닌가? 야생 벼를 '신의 벼'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납득했다. 여기는 불교의 나라, 신이라 해도 부처님이다. 파고다(절)이 있으면 맨발로 참배를 한다. 농민들은 '스스로 심지 않았는데 자라 온 벼는 신이 심은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처럼 야생 벼를 받아들이고 있기에, 도처에 재배 벼와도 혼재하며 자연히 교잡할 기회가 늘어났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장소에서는 재배종에 유사하면서도 탈립성을 나타내는 잡초 벼를 빈번하게 볼 수 있다.


잡초 벼는 미얀마를 시작으로 부탄과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필리핀 등의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발견된다. 또 중국과 한국, 일본, 미국 등 온갖 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 미국 등에는 야생 벼가 없기 때문에,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군 사이의 교잡에서 잡초 벼가 생겼음이 알려져 왔다. 잡초 벼는 야생종과 재배종이 근접하여 생육하고 있는 지역과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이 근접하여 재배되는 지역에서도 발생하고 있는 듯하다.



재래종에서 보이는 교잡 후대의 자손들


일본의 재래종에도 다양한 교잡의 '흔적'이 있다. 분자표지(단백질과 DNA에 의해 개체를 식별하는 지표)의 개발에 따라 일본의 재래품종의 독자성이 밝혀져, 바뀐 벼가 있다는 것이 점차 알게 되었다. 


초기에 활용딘 분자표지는 단백질의 전하성질 특성으로 동일한지 확인된 동질효소라는 유전자 연구였다. 일본 재래종 중에는 유전적 다양성에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재래 논벼 450 가운데 5계통, 재래 밭벼 200 가운데 5계통에서는 다른 것과는 다른 유전적인 성질이 나타났다. 아시아의 벼와 비교하니, 특수한 벼는 인도형에 대응하는 것임이 밝혀졌다. 다른 형질도 포함하면 일본의 재래품종은 크게 다음 네 가지로 구별됨이 밝혀졌다.


(1) 전형적인 논벼 품종군=유전적 다양성이 매우 부족함

(2) 논벼에 가까운 형질을 나타내는 밭벼

(3) 논벼와 유전적으로 분화된 밭벼

(4) 논벼와 밭벼에 공통되는 인도형 품종(대당미)


특히 세 가지 밭벼는 제11염색체에 실린 동질효소 유전자인 Pgd1 유전자형 이외에는 논벼에 매우 유사했다. Pgd1에는 복수의 대립유전자가 알려져 있어, 인도형이라고 판별된 대당미는 논벼 및 밭벼의 주요 품종군과도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형질을 보면, 인도형은 왕겨털이 짧고 가늘고 긴 알곡을 가지며 알곡의 페놀 반응은 +형을 나타냈다(표3-1). 한편 DNA 배열 단편의 장다형 패턴(RFLP)의 해석과 알칼리 붕괴성, 중배축 길이의 해석에서는 밭벼의 주요 품종군은 열대 일본형과 온대 일본형의 중간적인 성질을 나타냄이 밝혀졌다. 세포질의 다양성을 PS-ID에서 보았을 때도 온대 일본형에서 특징적인 6C7A형과 열대 일본형에서 특징적인 7C6A 두 종류가 발견되었다.



집단

품종군

Pgd1

공식수

왕겨털 길이

알곡의 길이-너비 비율

페놀 반응

 +

-

논벼

일본형

인도형

1

3

445

5

0.72±0.19

0.37±0.12

2.09±0.34

2.79±0.16

32

4

413

1

밭벼

일본형

일본형

인도형

1

2

3

26

169

5

0.65±0.12

0.44±0.14

0.34±0.13

2.14±0.16

2.38±0.21

2.93±0.09

5

131

4

21

38

1

표3-1 일본 재래 벼의 형태와 생리형질의 특성과 인도형(I)·일본형(J)으로 분류



이상에서 일본의 밭벼는 열대 일본형이 고위도 지대에 전파되었을 때 온대 일본형과 교잡을 일으키고, 적응형질에는 도태를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선택되지 않았던 세포질에 대해서는 두 종류가 혼합되어 오늘날에 이르렀음을 엿볼 수 있다. 


일본 재래 논벼의 PS-ID는 6C7A형이 점하고 있으며, 예외적으로 인도형 품종 특이적인 8C8A형이 발견된다. 그러나 이 세포질을 가진 계통의 핵 안 유전자형은 완전히 일본형이었기 때문에, 인도형과 일본형의 교잡이 발생한 뒤에 핵형이 일본형이 된 계통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언뜻 보기에 동일하게 보이는 재래종에도 꽤 복잡한 과거의 교잡과 유전적인 분리를 거쳐 집단의 구성원이 된 재래종이 있는 듯하다. 


형태와 생리적인 형질로 인도형이라 판별된 집단 안에는 '당법사唐法師' 등 대당미에 속한 품종 이름을 볼 수 있다. 대당미는 황폐한 땅에 강하고, 그 때문에 논벼와 밭벼로 겸용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특징으로 가늘고 긴 알곡, 붉은쌀, 올벼 등을 볼 수 있다. 다만, 붉은쌀이란 성질은 봉납미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인해 선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의 재래 논벼와 밭벼에서 발견되는 대당미 관련 품종군의 특성을 보기 위하여, PS-ID와 ORF100 영역의 결실 유무를 조사했다. 인도형 품종군에서는 ORF100의 유전자 주변 영역에서 결실형을 나타내고, 일본형에서는 비결실형을 나타내는 것이 밝혀졌다. 게다가 결실형의 엽록체는 8C8A형의 PS-ID를 함께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당미 품종군이라 밝혀진 논벼와 밭벼의 계통에는 ORF100 비결실형의 세포질을 가진 계통이 혼재해 있었다. 비결실형(일본형)이었던 세 계통의 핵 유전자형은 인도형이고, 핵과 세포질의 이질적 조합이 확인되었다(표3-2).



페놀 반응

공식수

ORF100

인도형(결실)

일본형(비결실)

+형

17

6

11

-형

19

14

5

표3-2 아우스 품종군에서 발견한 핵과 세포질 유전자형의 불일치성

  


아시아 재래종 벼의 특성과 비교조사한 결과, 대당미는 갠지스강 하류 삼각주 지대(벵골 지역)의 아우스 품종군과 같은 특성을 나타냈다. 똑같은 특징이 캄보디아의 재래종에서도 발견된다. 이것으로 대당미, 아우스 품종군은 인도형과 일본형의 교잡 후대에서 이삭이 패는 특성으로 조생이라 선발된 품종이란 것을 강하게 시사한다. 다만, 야생 벼에서도 두 세포질형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기에 잡종 형성이 야생 벼와 재배 벼에서 발생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같은 곳에서 적응 분화한 강한 감광성을 지닌 뜬벼는 야생 벼에서도 볼 수 있는 특성이기 때문에 앞으로 조사가 기대된다.



잡초 벼의 보편성


 일반적으로 재배품종은 인도형과 일본형 두 가지로 크게 나뉘는 게 사실이지만, 앞에서 기술했듯이 교잡한 계통에서 유래한다고 생각되는 품종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많이 보이는 건 벵골 지역과 캄보디아이다. 재배종이지만 잡초 벼의 유전적 특성도 공통으로 있는 특징이다. 이들 벼의 유전적 특성과 과거에 교잡이 발생한 지역을 특정할 수 있다면 인도형의 기원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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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기고 3. 어디까지 쓰이는가? DNA        나카무라 이쿠오中村郁郞




이 기고문에 주어진 제목 "어디까지 쓰이는가? DNA"는 농경사를 연구하기 위하여 DNA 해석이 어디까지 쓰이는지 하는 것이다. 농경사에 관한 생물학적인 측면은 인류가 농경을 개시한 이래 어떤 생물(식물, 동물, 곤충, 미생물)을 생활을 위하여 이용해 왔느냐는 것이다. 이 기고문에서는 농경사 연구에서 DNA 해석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인간은 수렵채집을 영위했던 시대부터 여러 가지 생물을 생활에 이용해 왔다. 먹을거리, 약초, 의복, 건축재, 파수를 보는 개 등이다. 그 뒤 농경 정주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작물의 재배화 및 야생동물의 가축화이다. 작물의 재배와 가축의 사육으로 먹을거리가 안정되었던 것이 인구의 증가를 가져오고, 농경 문명사회를 형성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각각의 농경 문명을 반영한 작물 및 가축의 품종개량이 행해져 왔다. 즉, 작물 및 가축의 시대 변천을 조사하는 건 농경사를 해명하는 데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과거에 인간이 어떠한 재배 식물 및 가축을 이용해 왔는지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생물 유체에서 얻을 수 있는 자료가 가장 좋은 증거이다. 생물 유체의 형태 해석, 원소 분석 및 연대측정은 중요한 해석 수단인데, DNA 해석도 유력한 수단이 되고 있다. DNA는 생체를 구성하는 물질 안에서도 비교적 안정되어 있기에 보존상태가 좋은 생물 유체를 찾아낼 수 있으면, 그 DNA를 추출할 수 있다. 미량의 DNA에서 다량의 DNA를 증폭시킬 수 있는 PCR(polymerase chain reaction) 방법의 등장으로(Saiki 외, 1985) 생물 유체의 특정 DNA 단편을 증폭하여 염기배열을 해독할 수 있다.


최근 뉴잉글랜드 바이오사에서 PreCR Repair Mix라는 시약이 판매되고 있다. 이 시약에는 미생물 DNA 수복효소의 혼합물이 포함되어 있어서, 이중 가닥 DNA의 패인 곳(상처)을 수복할 수 있다. 생물 유체의 이중 가닥 DNA에는 산화에 의하여 다수의 패인 곳이 들어 있기 때문에, PCR 방법으로 긴 DNA 단편을 증폭할 수 없어서 이 시약은 앞으로 DNA 해석을 행하기 위한 유력한 수단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고대 생물 유체의 DNA 해석을 행하려면, 현생 생물과는 다른 문제점이 있다. 현생 생물의 DNA를 해석할 경우에는 다수의 DNA 표지자를 해석하거나 긴 염기배열을 해석하거나 할 수 있는데, 고대의 생물 유체에서 추출할 수 있는 DNA는 매우 미량이며 단편화되어 있어서 어떤 염기배열을 목표로 해석해야 할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즉, 소수이며 짧은 염기배열을 해석하는 것으로 유익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


Nakamura 외(1997)는 엽록체 DNA의 rpl16 유전자와 rpl14 유전자 사이의 염기배열을 해석하는 것으로 고등식물의 종을 추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여, plastid subtype identity(PSID) 배열이라 명명했다(그림1). PSID배열은 100-300 염기로 짧고, 식물의 조직에는 다수의 엽록체 DNA가 포함되어 있어서 고대의 식물 유체 및 종자의 DNA 해석에 적합하다. 실제로 벼와 돌콩, 메론 등의 고대 종자의 DNA 해석에 이용되고 있다. 또한 범죄 수사에서 식물 증거물 및 식물 원료의 종을 감정하는 등에도 응용되고 있다.



그림1 엽록체 DNA의 PSID(plastid subtype identity) 배열. PSID 배열은 rpl16 유전자의 마지막 코돈의 T에서 rpl114 유전자의 바로앞까지. 한 대의 프라이머(rpl5P 및 rpl3P)를 써서 염기배열을 증폭, 해독한다.



그러나 PSID 배열은 엽록체 DNA의 염기배열이기에 식물에서 많이 인지되는 배수체와 종간 잡종 등의 판정을 할수 없다는 약점이 있다. 예를 들면,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있는 약 3000년 전의 소하묘 유적에서는 다량의 밀 종자가 발굴되었는데(그림2), 엽록체의 PSID 배열의 해석에서는 몇 배체의 밀인지 해명할 수 없다. 밀에는 2배체와 4배체, 6배체의 재배종이 있다고 알려져 있고 종자의 크기를 통해 어느 정도의 배수성인지 예측할 수 있지만, 혹시 핵 DNA의 해석으로 게놈 구성을 해석할 수 있다면 훨씬 유익한 자료를 얻을 수 있다.



그림2 신장 위구르 소하묘 유적에서 출토된 미이라와 밀 종자



생물의 진화는 미토콘드리아 및 엽록체 DNA보다도 핵 DNA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밝혀졌기에, 핵 DNA(게놈)을 특정할 수 있는 염기배열을 발견할 수 있다면 생물고고학에 매우 유익한 도구가 된다. 세균 분야와 고세균에서는 16S rRNA 유전자의 염기배열을 이용한 분류가 실용화되고 있다. 또한 진핵생물에서도 18S 및 28S rRNA 유전자를 이용한 분류가 시도되고 있다. 하지만 핵 안에 다수의 rRNA 유전자가 늘어서 있거나 또는 군데군데 존재하여, 얼마 안 되지만 염기배열의 변화가 인지된다고 엄밀한 의미에서 rRNA 유전자의 염기배열을 추정할 수는 없다. 


그럼 생물 유체에서 어떤 핵 DNA 배열을 해석하면 좋을까? 이 문제는 현재의 생물학이 안고 있는 난제 "종이란 무엇인가?"와 동일한 문제이다. 린네는 생물 형태의 차이에 기반을 하여 종을 구분하고, 이명법으로 체계화했다. 이 경우 종이란 형태가 유사한 집단이다. 또 이밖에도 교잡친화성에 기반을 한 생물학적 종 개념, 지리적인 격리에 기반을 한 지리적 종 개념 등이 있다.


한편 최근 DNA 해석기술의 진전에 따라, 대량으로 집적된 DNA 배열 정보를 사용하여 종을 식별하려는 연구가 성행하고 있다. 이와 같은 연구 -예를 들면, 분자계통수에 기반한 Phylocode(Gauthier and Queiroz 1990)와 미토콘드리아의 COI 유전자 배열에 기반한 DNA barcoding(Herbert 외 2003)은 기존의 분류체계와는 독립된 개념이라, 린네 이후 250년 동안 방대해진 자료와의 관련성이 의문시되고 있다. 특히 식물에는 동물과 진균류에는 몇 안 되는 종간 교잡 및 복이배체가 많이 존재하기 때문에, Phylocode와 DNA barcoding으로는 분류가 곤란한 경우가 있다. 


현재 생물 유체의 DNA 해석에 장벽이 되는 건 린네의 형태적인 종 개념과 대응하는 핵 DNA 표지자가 발견되지않았다는 점이다. 만약 몇몇 군데의 짧은(50-200bp) 염기배열을 해석하여 생물의 종(아종)과 게놈 구성을 특정할 수 있다면, 농경이 기원한 이후 1만년 동안의 생물 유체 DNA 해석은 알맞은 연구대상이 될 것이다. 생물 유체는 그 형태를 가지고 속 정도는 판정할 수 있는데, DNA 해석으로 종과 게놈 구성을 해명할 수 있다면 더욱 상세한 해석이 가능해진다. 예를 들면, 앞에 기술한 소하묘 유적에서는 밀 종자가 세 종류의 벼과식물로 짠 바구니 안에 담겨 있었다(그림3). 이 세 종의 벼과식물의 종명을 특정할 수 있다면, 소하묘 유적 주변의 당시 환경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재배되었던 밀의 게놈 구성을 알 수 있으면, 밀의 생산량과 용도를 밝힐 수 있다. 게다가 소하묘 유적에서는 다수의 소 머리뼈가 출토되었는데, 어떤 소인지를 특정하여 소하묘 유적을 남긴 민족이 어느 지역에서 이동해 왔는지를 추정할 수 있다. 



그림3 출토된 밀 종자가 담겨 있던 3종류의 벼과 풀로 짠 바구니



최근 DNA 해석을 쉽게 행할 수 있게 되면서 종과 아종을 구별하지 않고 유전자형만 해석하는 연구가 여럿 인정된다. 예를 들면, 재배 벼는 자포니카와 인디카라는 생태형으로 분화되는데 둘에 찰 유전자자리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만일 인디카와 자포니카를 구별하지 않고 찰 유전자자리의 유전자형만 조사하는 연구를 행한다면, 잘못된 결론을 도출하게 될 것이 자명하다. 그것은 민족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혈액형만 조사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 기고문의 '어디까지 쓰이는가? DNA'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종과 게놈을 특정할 수 있는 핵 DNA 배열을 찾아낼 수 있다"는 걸 전제조건으로 내세워야 하는데, 생물 유체의 DNA 해석은 농경사를 해명하기 위하여 앞으로 없어서는 안 될 해석 수단이 된다고 답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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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제2장 벼농사의 전개와 전파

-잎의 세포화석 분석 결과를 중심으로       宇田津徹郞




들어가며


도시 사회를 뒷받침하는 농업기술의 조건으로는 농지의 지속적인 이용과 그에 따라 발생하는 잉여생산물의 존재가 필수라고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조건을 만족시키는 기술이 유럽에서는 삼포식 농법과 노포크식 농업 등의 고도한 돌려짓기 기술체계이고, 동아시아에서는 논벼농사 기술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필자는 동아시아에서 논벼농사 기술의 성립과 전파라는 농업기술의 발달을 주제로 일본 및 중국을 주요 현장으로 조사연구를 행해 왔다. 그중에서도 식물규산체 분석법을 사용한 생산 유구遺構의 탐사와 그 유구 조사를 기축으로 논의 생산력 평가와 재배 벼의 변천 등의 벼농사 기술의 변천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생산 유구(논과 밭)는 탄화미 같이 인간에 의하여 이동한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농지가 운영된 확실한 증거가 된다. 또한 그 형태와 규모를 밝힘에 따라 당시의 기술 수준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식물규산체 분석으로 얻을 수 있는 연구성과부터 중국에서 벼농사가 전개되고 일본에 전파된 과정을 구성하여 추정해 보겠다.




잎의 세포 화석과 그 분석


잎의 세포 화석이란


벼와 조, 기장, 수수 같은 우리들에게 친근한 작물과 갈대, 억새 같은 벼과식물, 녹나무과와 참나무과 등의 식물은 토양 속의 유리(규산 SiO2)를 자신의 세포벽에 축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들 식물에서는 규산의 축적이 진행되면 체내에 세포 모양을 한정시키는 유리의 껍데기가 형성된다. 이것은 식물학에서 식물규산체라고 부르고 있다.


김매기할 때, 맨손으로 억새를 뽑거나 벼베기를 도와서 볏짚을 나르면 볏짚에 닿았던 뺨이 따끔따끔한 것은 이 식물규산체의 소행이다.


식물규산체는 흙에 묻혀 있던 콜라병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식물체가 죽어서 분해된 뒤에도 그 모양 그대로 토양 속에 잔류한다. 이러한 식물규산체가 토양을 구성하는 입자가 된 것이 잎의 세포 화석이다. 크기는 유래한 세포에 따르지만, 20-100미크론 정도이다(1미크론은 1/1000밀리미터). 


잎의 세포 화석의 역사를 간단히 소개하면, 1940년대에 우소프Oosov가 식물에서 유래하는 흙의 입자를 발견하고 스미스손F. Smisthon이 이 이름을 붙였다. 일본에서는 잎의 세포 화석이란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만, 영어권에서는 파이토리스Phytolith, 중국어에서는 식물단백석이라고도 불린다.



잎의 세포 화석의 이용(잎의 세포 화석 분석)


잎의 세포 화석은 그 조성으로부터 화학적, 물리적인 풍화에 강하고, 조건이 좋으면 반영구적으로 토양 안에 잔류한다. 또한 유리와 거의 같은 내열성이 있고, 소성온도가 낮은(섭씨 800도 이하) 토기에 있으면 융해되지 않고 원형을 보존할 수 있다.


잎의 세포 화석의 모양과 크기는 유래하는 식물과 세포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흙에 포함된 잎의 세포 화석을 조사하여 존재했던 식물(급원식물)을 알아낼 수 있다. 그중에서도 벼과식물은 잎의 기동세포 형태에 식물마다 특징이 있어(그림2-1) 이 세포에서 유래하는 잎의 세포 화석을 통해 벼 등의 작물이 존재했는지 알아낼 수 있다.



그림2-1 벼잎의 단면과 기동세포의 위치



그림2-2 벼의 기동세포에서 유래하는 잎의 세포화석



 

이와 같은 잎의 세포화석의 특성을 이용하여 고대의 식생과 환경, 농경을 추정하고 복원하는 자연과학 분석을 잎의 세포화석 분석법이라 한다.


여기에서는 이 글의 내용에 관련된 농경사 연구에서 잎의 세포화석 분석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간단하게 소개하려고 한다.



생산 유구(벼가 재배되었던 장소)를 특정한다


벼의 종자(쌀)은 수확하여 재배되었던 장소로부터 가지고 나올 수 있는데, 볏짚은 그 일부가 이용될 수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 흙에 환원된다. 그 때문에 벼가 재배된 흙에는 잎의 기동세포에서 유래한 잎의 세포화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잎의 세포화석은 건조시킨 벼의 잎 1그램(큰 벼의 잎 1장에 맞먹음)에 20만 개 정도 포함되어 있어, 벼가 일정기간 재배된 장소의 흙에는 높은 밀도로 포함되어 있다.


고대 논에서라면 지하에 이 잎의 세포화석을 포함한 층이 거의 수평으로 존재하고 있기에, 시추(지하의 토양을 가느다란 원기둥 모양의 통으로 빼냄)로 채취한 흙을 분석하여 그 장소(깊이와 범위)를 특정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이 방법으로 조몬시대 만기부터 야요이 시대의 수많은 논 유구가 탐사, 발굴된다.



그림2-3 시추를 하고 있는 모습




벼가 재배되었던 시대를 추정한다


벼잎의 세포화석은 종자가 아닌 그 잎의 세포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시대의 흙에서 검출된다면 그 시대에 벼잎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벼의 잎은 교역 등으로 생산된 장소에서 멀리 운반되었다고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 결과는 벼가 존재했던 것을 보여줌과 함께 일본처럼 야생 벼가 존재하지 않은 지역이라면 그 시대에 벼가 재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토기의 바탕흙에서 벼잎의 세포화석이 검출된다면, 그 토기가 제작되기 이전에 벼가 존재 또는 재배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흙의 경우 식물의 뿌리와 토양 속에서 활동하는 생물의 영향으로 다른 시대의 흙이 섞여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시대의 추정에는 토기의 바탕흙이 더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재배되었던 벼의 종류(아종, 생태형)를 추정한다


동아시아에서 재배되고 있는 벼(Oryza sativa L.)에는 인디카와 자포니카라고 불리는 두 가지 아종이 있다. 이들 아종은 재배조건과 재배기술에서 차이가 있어, 아종이 밝혀지면 당시 벼농사의 모습을 아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벼잎 세포화석의 형상 사이에는 그림2-4에 나오듯이 아종에 따라 형상에 명료한 차이가 있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또한 그 형상으로부터 아종을 판별하는 방법(판별율 80-90%)도 확립되어 있다.


이 방법을 토양과 토기 바탕흙에서 검출된 잎의 세포화석에 사용하여 당시 재배되었던 벼 아종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림2-4 벼 아종에서 볼 수 있는 기동세포 규산체의 형상




자연과학 분석에 항상 따라다니는 문제(시료 오염)


농경사 연구에서 충격적인 자연과학 분석의 결과가 공표되면, 그 진위가 화제가 된다. 그 경우에 잘못의 원인으로 종종 상정되는 것이 '시료 오염'이다. 


농경사 연구에서 활용되는 자연과학 분석에 쓰일 수 있는 잎의 세포화석과 꽃가루, 또 DNA는 현미경 등의 기재를 사용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크기이다. 그 때문에 분석을 행하는 사람은 어떠한 원인으로 시료가 오염(분석에 방해가 되는 물질과 기타 시료가 섞임)되더라도 이것을 직접적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이것은 자연과학 분석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머리 아픈 문제이다. 


그 때문에 우리 자연과학 분석을 행하는 사람은 시료 오염에 대한 다양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용하는 도구와 약품은 쓰고 버리며 재이용하지 않는다'거나 '콘트롤이라고 불리는 시료 오염과 처리의 잘못을 비교검증할 수 있는 분석 시료를 작성한다' 등이 있다.


이와 같은 대책에 더하여, 미처리 시료를 보관해 놓고, 다른 연구자에게 검증(크로스 체크)과 새로운 분석방법이 개발된 경우에 재분석을 행하는 것 같은 일이다(그림2-5에 토기를 시료로 하는 경우를 예시).


앞으로 이 글에서 소개하는 자료는 모두 이러한 대책과 검증을 거친 것이다.



그림2-5 분석에 쓰이는 토기의 처리 과정(좌: 미처리, 우: 절단하여 일부분을 분석에 사용) 



중국에서 확인되고 있는 초기 벼농사


90년 이후 장강 중하류에 소재한 유적에서 벼농사의 존재가 잇따라 확인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벼 유물의 출토를 근거로 유물의 출토를 근거로 하는데, 호남성 성두산城頭山 유적과 강소성 초혜산 유적처럼 초기의 논이 검출되고 있다. 검출된 논의 형태는 상세하게 비교하면 그 우열을 논할 수도 있겠지만, 야요이 시대의 논과 다르며 자연지형을 이용한 부정형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논의 검출은 그 땅에서 논벼농사가 운영되었단 확실한 증거이며, 기술 수준의 의론을 따로 한다면 적어도 현재에서 6500-6000년 전쯤에는 장강 중하류에서 초기의 논벼농사 기술이 확립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필자도 조사원으로 참가했던 초혜산 유적의 논을 소개하면서 초기 벼농사에 대하여 기술하려 한다.



그림2-6 초혜산 유적의 소재




초혜산 유적의 논


초혜산 유적은 상해 게로 유명한 양징호陽澄湖 의 남쪽, 중국 강소성 소주시에 소재한다(그림2-6). 유적 주변은 샛강이 둘러싼 저지 논 지대이다. 이 유적은 1972년에 난징박물원에서 최초로 발굴을 하고, 이후 몇 번의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해당 유적이 마가빈 문화기(기원전 4050년)부터 춘추시대(기원전 450년)에 걸친 유적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1992년부터 중일 공동조사가 개시되어, 일본에서 행할 수 있는 시추에 의한 토양 채취와 채취한 토양에서 잎의 세포화석 분석으로 논 유구 탐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남서에 위치한 저지의 지표 아래 2미터 안팎에서 논 유구가 매장되어 있음이 추정되었다.


그 뒤 발굴에 의해 그림2-7에 있는 것처럼 논이 검출되었다. 논 토양을 재료로 한 탄소연대측정의 결과 이 논이 대략 6000년 전의 마가빈 문화 중기의 것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발굴된 논은 한 배미의 면적이 몇 평방미터인 부정형한 논이 지형의 골짜기 지역을 따라서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그림2-7, 그림2-8).



그림2-7 초혜산 유적에서 검출된 논(위: 항공촬영, 아래: 유구 전경)




그림2-8 초혜산 유적의 논 유구




논은 생흙이라 불리는 황토가 퇴적된 생땅층을 15-40cm 파고들어가 만들었다(그림2-9). 생땅층은 치밀한 실트질 점토이기 때문에 물이 거의 침투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강우 등으로 가져온 물은 지하로 침투되지 않고 지표수로 논과 주변의 더 저지대에 남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 발굴 구역의 낮은 부분에서는 우물 모양의 구덩이(지름 약 1.5미터, 깊이 약 1.5미터)가 검출되고 여기에는 지하로 침투되지 않은 지표수가 남아, 둠벙의 기능을 수행했다고 추정된다. 



그림2-9 유구 단면의 모식도



논 유구에는 두렁과 물꼬가 있어, 논의 기본적인 특징을 갖추었다. 그러나 이 논은 자연지형의 골짜기 지역을 인위적으로 확장하고 결합시켜 만든 것으로 '선'의 퍼짐새는 가지고 있지만 '면'의 퍼짐새는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점에서 지금까지 일본에서 발굴된 조몬 만기-야요이의 논과는 크게 차이가 있었다.


유구 안의 토양(논 토양에 해당)은 유기물이 많은 흑갈색 점질토이고, 물로 씻어내 탄화미를 검출하고 있다. 또한 ㅇ ㅠ구 주변의 토양에서는 우렁이와 가막조개의 껍질도 발견되고 있다. 유구 안의 토양에 포함된 벼잎의 세포화석 밀도를 조사한 바, 흙 1그램당 5000개 이상이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수치는 일본 야요이 시대의 안정된 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으며, 일본과 중국의 토양 퇴적 속도와 환경의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이 논이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장기간(아마 몇 백 년의 규모) 이용되었다고 생각한다.



초혜산 유적에서 검출된 논은 생업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까


발굴조사의 결과로부터 6000년 전의 논이 생산시설이라 불릴 만큼 기본적인 조건을 만족시킴이 밝혀졌다. 또한 농기구 또는 흙을 파는 도구인 뼈보습의 출토(그림2-10)와 검출된 벼잎의 세포화석 밀도 등에서도 당시의 벼농사 기술이 기존에 상정하던 것보다 높은 단게에 이르렀다고 추정된다. 



그림2-10 출토된 뼈보습



그러나 그 한편, 자연의 골짜기 지역을 확장하고 연결하여 '선형'으로 확대한 논에서는 그림2-8을 예로 들면 발굴 면적의 30% 정도밖에 이용되지 않아 토지이용이란 점에서는 효율이 나쁘다.


따라서 당시의 논벼농사가 생업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을 점하고 있었는지를 더 구체적으로 영상화하려면 '선형' 논의 퍼짐새를 파악해야 했다. 


이미 서술했듯이, 발굴된 논 유구는 생땅층에 직접 판 것이다. 해당 유적의 생땅은 황토로 불리는 퇴적층이며, 지질학적으로도 장강 하류의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생땅의 식별은 비교적 쉬워, 그 바로 위의 토층에 벼잎의 세포화석이 포함되어 있다면 똑같은 유구의 존재를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킬로미터 사방의 범위를 대상으로 시추에 의한 광역 논 유구 탐사를 실시하고, 이번에 발굴된 논 유구의 퍼짐새를 파악하려 시도했다.


그림2-11은 조사 범위와 시추 지점을 표시한 것이다. 시추의 간격은 100미터를 기본으로, 측량의 기준으로 삼은 비석을 중심으로 여덟 방향, 합계 55지점에서 행했다.



그림2-11 시추 지점의 분포




벼잎의 세포화석 검출지점의 분포와 그 검출밀도에서 보면, 당시의 논이 유적을 거의 중심으로 북으로 600미터, 남으로 500미터, 동서 방향 각각 200-300미터의 범위로 퍼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되었다. 물론 이 결과는 탐사 자료에 의한 것으로, 층위의 동일성과 시대의 확인 등의 문제를 고려해야 하지만, 검출된 논 유구와의 거리로부터 살펴서 당시 논의 퍼짐새를 파악할 수 있다고 판단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생땅의 바로 윗층과 그 윗층을 비교하면(그림2-12), 검출밀도 및 동서 방향으로 검출지점이 증가하는 것이 발견되기에 해당 유적에서 벼농사가 발전하면서 동서 방향으로 확대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림2-12 벼의 생산 범위와 양의 변화   


그러나 이 정도의 범위로 논을 만들어 수확까지 관리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조방한 재배였지만 당시의 벼농사가 생업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기 시작했다는 건 틀림이 없다.





초기 논벼농사의 모습


논의 형태


초혜산 유적의 논 유구가 검출되었던 당시는 이것이 논인지, 또는 이와 같은 생산 유구가 이 유적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그 뒤 중국의 고고학자가 발굴조사하여 강소성 소주 징호 유적(송택 문화)과 강소성 곤산 작돈綽墩 유적(마가빈 문화)부터 똑같이 논 유구가 검출되어(그림2-13) 초혜산 유적의 논 유구가 초기의 논 가운데 하나의 형태임이 분명해졌다.



그림2-13 작돈 유적의 논 유구



초혜산 유적에서 중국과 일본의 공동조사 대표였던 후지와라 히로시藤原宏志 미야자키 대학 명예교수는 이용했던 논을 '자연지형 이용형 논'이라 불러, 그 경관의 모습으로 당시 유적 주변에서 볼 수 있던 샛강을 따라 지형을 이용하여 운영했던 줄논(Manchurian wild rice)을 들고 있다(그림2-14).



그림2-14 샛강을 따라서 전개된 줄논(위: 전경, 아래: 한 배미를 확대)




당시 논의 생산성


초혜산 유적의 논 유구의 형태와 규모부터, 당시의 논벼농사의 모습을 그려 보자. 먼저 물 관리라는 점에서 보면, 발굴된 논은 투수성이 낮은 생땅층을 파서 만들어 증발산을 제외하면 공급된 물의 손실이 매우 적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마 주변의 아주 조금 높은 땅에서 지하로 침투한 물은 생땅층에 가로막혀 논이 만들어진 골짜기 부분으로 모여서, 그와 같은 물이 논에 인접한 우물 모양의 구덩이로 모이고 관개수로 사용되었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물이 부족한 일은 적었고, 오히려 배수가 되지 않는 상태였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현대의 논으로 말하면 '습논'에 해당한다. 습논에서는 논 토양 속의 산소가 부족하여, 이른바 '뿌리썩음' 등 벼의 발육에 장해를 일으키기 쉬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벼의 생산량은 구체적인 검토가 어렵지만, 배수가 곤란한 상황 등을 고려하면 야요이 시대의 생산량(300평당 100킬로그램 정도)를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벼를 재배했을까


이미 서슬했듯이 잎의 세포화석 형상으로 벼의 아종을 판별하는 방법이 확립되어 있다. 구체적으로는 그림2-15에 나오는 각 부위의 길이를 측정하고, 판별식에 따라 아종을 판별하는 기존이 되는 판별득점을 구한다. 이 수치가 올바르다면 자포니카, 틀리다면 인디카가 되며, 경계치인 0에서 더 멀어지는 만큼 전형적인 아종임을 나타낸다. 



그림2-15 벼잎 세포화석 형상의 측정 부위

  


 마가빈 문화기의 토양에서 검출된 벼잎 세포화석의 판별득점 분포는 현재 중국과 아시아의 자포니카(중국에서는 메벼에 해당) 분포에 포함되어(그림2-16), 유적에서 재배된 벼는 자포니카였다고 추정된다(이 결과는 탄화미의 DNA 분석과도 부합한다). 



그림2-16 벼잎 세포화석의 판별득점 분포



그렇다면 이 지역에서 인디카가 재배되기 시작한 건 언제쯤일까?


유적의 토양에서 검출된 벼잎의 세포화석은 그 토양이 퇴적되는 사이에 재배되었던 모든 벼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그 형상은 중심적으로 재배되었던 아종을 반영하게 된다. 따라서 판별득점이 감소해 간다면, 그것은 인디카에 가까운 자포니카와 일정 비율로 인디카가 재배되었다는 가능성이 있다. 


토층에 따른 판별득점의 변화를 보면, 3층 이후에 급격한 감소가 발견된다(그림2-17). 3층은 송나라 시대로, 이 무렵부터 인디카인 벼가 도입되었을 가능성을 알 수 있다.  송나라 시대에는 현재의 베트남 쪽에서 인디카 계통인 점성도占城稻가 도입되었다고 전해진다. 둘을 단순히 결부시켜 생각할 수는 없지만, 흥미로운 일치이다.



그림2-17 벼잎 세포화석의 판별득점 변화



재배 방법(파종과 모내기)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재배 관리의 면에 대해 생각해 보자. 광역 논 유구 탐사에 의해 당시의 논이 북으로 600미터, 남으로 500미터, 동서로 각각 200-300미터의 범위로 펼쳐져 있었다고 추정되었다. 논은 이 범위 안에 불규칙하게 분포하는 골짜기 부분과 움푹 패인 땅을 이용하여 운영되었다고 생각되며, 그 관리작업은 효율이 나빠 당시 사람들에게 큰 노동부담이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세세한 재배관리를 행하기 어려워 조방한 재배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파종과 모내기 문제에 대해서는 직파 재배도 생각할 수 있지만, 직파의 경우에는 파종 이후의 제초 작업이 필수이며 전체적인 노동부하를 감안하면 모내기 재배가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



본격적인 논벼농사의 성립은?


이처럼 신석기시대에 확인된 논에서 경영했던 벼농사는 논벼농사의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시키는데, 그 면적과 물 관리라는 점에서 보면 충분한 수확량을 확보하지는 못하여 생업이 농경으로 완전히 이행한 단계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초혜산 유적에서는 사슴과 멧돼지 등의 짐승뼈가 여럿 출토되어 채집수렵이 생업을 뒷받침하는 요소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 현재로도 이어지는 본격적인 논벼농사가 성립된 것은 중국의 어느 시대였을까? 그 후보로 현재 필자를 포함한 많은 연구자가 주목하고 있는 것이 절강성의 양저 문화기(기원전 3050-1050년)이다. 이 시대가 되면 봉분을 쌓은 묘지가 만들어지고, 무덤에서는 부장품으로 옥기라고 부르는 연옥을 가공한 여러 가지 장신구와 제기가 발견된다. 이와 같은 것으로부터 이 시대에는 사회의 계층화와 분업화가 진행되어 일정 정치권력이 탄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회를 지탱하는 데에는 생산활동에서 해방된 인구를 먹여살릴 수 있는 '잉여'가 필요하다. 양저문화기를 대표하는 양저 유적군은 항주만으로 이어지는 장강 삼각주에 소재하는데, 이 '잉여'를 가져올 수 있는 생업으로는 그 입지를 두고 생각하면 야요이 시대에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수로를 갖추고 토지가 평균화된 논(그림2-18)에서 운영된 벼농사 이외에는 상상하기 어렵다. 


중국의 논벼농사 성립에 대해서는 현재도 국내외의 연구자가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멀지 않은 시기에 양저문화기의 논이 명확해지리라 기대된다. 



그림2-18 야요이 시대의 논(아오모리현 타레야나기垂柳 유적)





중국에서 벼농사의 퍼짐새와 일본으로의 전파


초혜산 유적을 시작으로 하는 논 유구의 검출에 의하여 기원전 4050-4550년에는 장강 중하류에서 초기 논벼농사 기술이 성립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초기의 벼농사는 농경사회를 지탱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자연지형을 개변하여 생산시설을 조성하는 기술의 성립은 벼농사의 확산에 큰 탄력을 가했을 것이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여기에서는 그 뒤 장강 중하류의 벼농사 퍼짐새와 일본으로 전파된 것에 대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벼잎 세포화석 분석이 파악한 벼농사의 북상


신석기시대의 논이 검출된 이후 중국 각지에서 벼 유물(탄화미, 알곡 압흔, 잎의 세포화석) 등이 검출되는, 이른바 벼농사 유적의 발견이 이어졌다. 이는 중국 고고학자의 생산 유구에 대한 의식이 높아짐과 함께 '과학기술 고고'라 불리는 고고학 분야에 대한 자연과학 분석의 적극적인 활용이 가져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필자 자신도 이와 같은 벼농사의 확산에 대하여 강소성 안의 각지에 소재한 일곱 군데의 신석기시대 유적(표2-1, 그림2-19)를 대상으로 그 출토 토기에 대하여 잎의 세포화석 분석을 행하고, 강소성 벼농사 유적의 분포를 검토하려 시도했다.


유적 이름

유적의 시대

句容丁沙地 유적

약 기원전 4550-5050년

鎭江 丹徒鎭四脚墩 유적

약 기원전 3050-4050년

沐陽 萬北 유적

약 기원전 3050-4550년

泗洪梅花趙荘 유적

약 기원전 2050-2550년

連雲港 朝陽 유적

약 기원전 3050-4050년

海安 靑墩 유적

약 기원전 3550-4050년

南京 北月陽菅 유적

약 기원전 3050-4050년

  표2-1 토기 바탕흙 분석을 실시한 유적과 시대



그림2-19 토기 바탕흙 분석을 실시한 유적의 분포



분석은 각 유적에서 출토된 그곳의 토기(그 유적에서 제작된 토기)에 대하여 시행했다. 


분석 결과, 구용정사지 유적, 진강 단도진사각돈 유적, 연운항 조양 유적, 해안 청돈 유적, 남경 북월양관 유적의 토기에서 벼잎의 세포화석이 검출되었다(그림2-20). 이미 기술했듯이 분석의 대상이었던 벼잎의 세포화석은 벼잎의 세포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이들 유적에서 벼농사가 운영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림2-20 토기 바탕흙에서 검출된 벼잎의 세포화석



이상의 결과에서 기원전 4050년-3050년 단계에는 강소성의 북쪽까지 벼농사가 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신석기시대에 재배되었던 벼에 대해서는, 이미 기술한 토양과 토기 바탕흙에서 검출된 벼잎의 세포화석 형상을 조사해 보면, 모두 중국의 토종 벼(메벼=자포니카)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자포니카는 인디카와 비교하여 저온 저항성이 뛰어나 이것이 회하 이북의 연운항 조양 유적에까지 벼농사가 퍼지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이다.



북상한 벼농사는 어떻게 수용되었을까?


최근 중국에서 발굴조사한 결과, 산동반도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벼 유물이 여럿 검출되었다고 보고되어 동시대에 이미 장강 하류의 벼농사가 진령秦嶺 회하淮河 선을 넘어 북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할 수 있다.


중국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검출된 벼 유물에 대하여 자연과학 분석(DNA 분석, 잎의 세포화석 분석)을 한 결과에서는 당시 재배되었던 벼는 자포니카이다. 앞에서 기술했듯이 자포니카 벼는 저온 저항성에서 우수하여, 벼농사가 북진해 나아가는 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중국에서는 진령산맥과 회하를 연결하는 진령 회하 선을 경계로 하여 그 기후와 식생, 토양의 성질에 큰 차이가 난다. 진령화하선의 남쪽은 강수량과 기온, 토양의 성질 등이 벼농사에 이로운 환경이지만, 북쪽에서는 연간 강수량이 감소하기(750mm 이하) 때문에 논벼농사는 물론 벼농사에는 가혹한 환경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역에서 벼농사가 확산된 것에 대해서는 기후변화의 영향을 고려함과 함께 벼를 수용했던 현지 농경기술과의 관련에서도 검토해 보아야 한다. 북진한 벼가 어떻게 재배되었을지에 대하여 밭과 논 같은 생산 유구와 화전 등의 생산 공간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가 없는 현재로서는 벼농사 유적을 기술적인 계보에 놓고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산동반도의 신석기시대 문화인 용산문화는 그 기술적인 계보로부터 화북의 건조지역에 적응한 잡곡 농경기술을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잡곡 농경기술에서 벼를 받아들인다고 하면, 벼는 논벼농사 기술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돌려짓기 작물로 재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벼는 조와 기장 등과 비교하여 필요로 하는 비료의 양이 많고, 건조함과 저온에도 약한 작물이다. 따라서 힙시서멀기 이후의 기후 한랭화를 고려하면 인디카에 비교하여 저온 저항성에서 뛰어난 자포니카였어도 그 재배 위험은 적지 않으며, 안정적인 수확이란 점에서는 의문도 남는다.


논벼농사에서는 심수 재배로 대표되듯이 물을 대어 기온 저하의 영향을 줄일 수 있다. 또한 피논으로 대표되듯이 피는 논에서도 재배할 수 있으며, 더욱이 벼에 비교하여 수온이 저하된 상태에서도 정상적으로 발육할 수 있다. 벼만이 아니라 피까지 수확의 대상으로 본다면, 북진한 벼를 논벼농사 기술과 함께 수용한 잇점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산동 용산문화기에 논벼농사가 운영되었다고 한다면, 해당 지역에서 밭농사 기술과 논벼농사 기술이 토지이용에 걸맞게 병존했다는 것의 증명이 된다.


자, 이 문제에 대한 접근법인데 벼는 밭에서도 논에서도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이기 때문에 출토된 벼 유물의 조사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명확한 결론을 얻기가 어려우며, 벼가 생산되었던 장소(생산 공간)의 입지를 통해 검토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산동반도의 신석기시대 벼농사 유적인 양가권楊家圈 유적에서 논 유구 탐사가 실시되었다.



산동 용산문화기에 논은 존재했을까? (산동성 양가권 유적에서 행한 논 유구 탐사)


생산 유구 조사는 2004년부터 산동대학, 큐슈대학, 에히메대학, 미야자키대학의 연구자들의 국제 공동연구로 실시되었다. 조사는 산동반도의 벼농사 유적으로 널리 알려진 양가권 유적에 대하여 행해졌다. 이 조사연구는 문부과학성 과학연구비 보조금을 받아 "일본 논벼 농경의 기원지에 관한 종합적 연구"(연구 대표자 미야모토 카즈오宮本一夫)의 일환으로 행해졌다.


양가권 유적은 연태시의 남서, 산동성 서하현栖霞縣에 소재한 대문구大汶口 문화부터 산동 용산문화의 유적이다(그림2-12). 산동성 문물고고연구소와 베이징대학에서 발굴조사를 행하여, 용산문화기의 퇴적층과 재구덩이에서 조와 왕겨가 발견되었다.


그림2-21 양가권 유적의 소재



중국은 야생 벼가 존재하는 지역이다. 그 때문에 논 유구 탐사에서는 발굴조사에 의하여 생산 유구가 확인되지 않을 경우에는 야생 벼를 파악할 가능성을 고려해 놓아야 한다. 그러나 양가권 유적이 소재하는 지역은 과거의 기후변화를 고려해도 야생 벼가 분포할 가능성이 낮고, 일본과 똑같이 벼잎의 세포화석이 검출되면 벼농사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다.  


유적은 청수하淸水河 서쪽 단구段丘 위에 입지하며, 그 남북에는 청수하에 연결되는 작은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현지에서 청취 및 시추로 지하의 퇴적 상황을 조사하여, 유적의 북쪽 골짜기 부분을 조사구로 설정했다(그림2-22). 조사구는 수수와 토란 등이 재배되어 밭으로 이용되었다(그림2-23). 생산 유구 탐사는 조사구를 남북 및 동서 방향으로 덮은 모양으로, 시추로 시료 채취와 잎의 세포화석 분석을 행했다.



그림2-22 양가권 유적과 주변의 지형



그림2-23 조사구의 전경



탐사 결과, 지표 아래 1.5미터 안팎에서 벼잎의 세포화석이 검출되는 지점이 확인되었다.


검출된 세포화석의 밀도는 가장 높은 곳이 흙 1그램당 3000개를 넘었다. 이 수치는 토양의 퇴적 속도를 감안하여 평가해야 하지만, 일본에서 행한 탐사, 발굴의 사례에 비추면 논 유구의 존재도 충분히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분석 결과와 시추로 옛 지형을 복원한 결과에서, 비교적 안정된 생산 유구의 매장 구역으로는 그림2-24에서 타원으로 보이는 범위(수로의 양쪽 부분)이 가장 유망하다고 추정되었다.



그림2-24 검출 상황과 추정 매장 구역



이번 탐사로 파악된 생산 유구 범위의 토양에서는 벼에 수반해 갈대속의 잎 세포화석이 검출되어, 하천의 물과 샘을 이용하던 논이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산 유구 탐사에서 검출된 벼잎의 세포화석 검출 밀도는 1000개 정도인 지점이 많아, 이것은 이용 기간의 짧음과 재배의 불안정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생산 유구의 모습으로는 물이 풍부한 때는 물을 대어 재배하고, 물이 적을 때는 하천에서 침투한 수분 등에 의존하여 벼를 재배하는 천둥지기 같았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논이 존재했을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발굴 조사를 기다려야겠지만, 이 결과에서 적어도 유적 주변의 저습지에서 벼농사가 경영되고 있었다는 건 확실하며, 토지 이용이란 시점에서는 기존의 밭농사 계보의 농업 기술과 논벼농사 또는 저습지 벼농사 기술이 공존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와 같이 물의 혜택을 입은 장소는 논으로, 그렇지 않은 장소는 밭으로 이용하는 토지이용의 발상은 지금의 산동성에서도 볼 수 있다(그림2-25). 또한 논의 존재를 보강하는 것으로 산동반도의 교주膠州 조가장 유적에서 용산문화기의 논 유구가 검출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그림2-25 산동성에서 볼 수 있는 토지이용



더구나 이 결과는 벼가 동시에 돌려짓기 작물로 수용되었단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검증해야 한다는 걸 덧붙여 놓고 싶다. 



'농업 기술의 공통성'이란 시점에서 생각하는 일본으로의 전파 경로   


벼농사 전파의 문제에 대해서는 기술을 보내는 쪽과 받는 쪽의 시대적 앞뒤 관계가 전파 경로의 존재 여부를 지배한다. 그러나 그것과 동시에 보내는 쪽과 받는 쪽에서 '농업 기술의 공통성'도 필수조건임을 강조하고 싶다.


현재로서, 논벼농사 이전의 일본에서 벼농사는 화전 등의 밭농사 계보의 재배 기술에 따른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농업 기술의 공통성'이란 점에서 이 기술을 보내는 쪽으로는 화전을 현재도 볼 수 있는 하문廈門 등으로 이어지는 남부의 산악지대와 화북의 잡곡 농경기술을 가진 산동반도 등이 그 후보지라고 들 수 있는데, 후자는 벼농사의 존재가 그 성립을 어렵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가권 유적에서 행한 생산 유구 탐사의 결과와 교주 조가장 유적에서 나온 논 유구의 검출에 의하여, 적어도 산동 용산문화기에 벼농사가 존재한 것은 거의 확실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의하여 조몬시대에 볼 수 있는 일본 벼농사의 전파 경로로, 산동반도에서 직접 또는 조선반도를 경유하는 것이 상정된다.


또한 이 경로가 올바르다면, 일본에서 조몬 벼농사에 대해서도 화전에 더하여 저습지 벼농사의 존재에 대해서도 다시금 검증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일본 벼농사의 변천에 대하여


중국의 벼농사 전재와 일본으로의 전파에 대하여 이야기를 진행해 왔는데, 마지막으로 벼농사 전파 이후 일본에서 벼농사가 어떻게 변천했는지에 대하여 현재까지 얻을 수 있는 벼잎의 세포화석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추정해 보고자 한다. 



재배 벼의 변천에 대하여


논과 밭은 토목기술과 치수기술의 발달과 함께 그 입지가 변해 왔다. 이러한 변화는 물골을 변경하는 등의 현대에 통하는 토목공사가 행해지게 되었던 근세 이후는 적어진다. 그러나 그 한편에서 근세의 논을 탐색하는 일은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그곳은 현재도 논으로 이용되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조몬, 야요이 시대부터 근세, 근대까지 논이 연속적으로 남아 있는 장소가 개발에 따른 발굴조사의 대상이 되는 건 여러 가지 조건에서 은혜를 입는 경우로 한정된다. 


운이 좋게도 필자는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두 가지 유적에서 벼잎의 세포화석 분석을 실시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사카모토坂元 A 유적과 이케시마池島, 후쿠만지 유적이다(그림2-26)


그림2-26 유적의 소재



그림2-27 조몬시대 만기의 논(사카모토 A 유적)



사카모토 A 유적에서는 조몬 만기-근세, 이케시마와 후쿠만지 유적에서는 야요이 시대-근세의 논이 남아 있었다. 또한 사카모토 A 유적에서는 미나미큐슈에서 가장 오래된 조몬시대 만기의 논이 검출되고 있다. 


이들 두 곳의 유적에서 각 시대의 논 토양에서는 각 시대에 재배된 벼잎의 세포화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세포화석의 형상 변화는 재배되어 온 벼의 변화에 의해 생긴 것이다. 


두 곳의 유적에서 나타나는 형상의 변화를 보면, 몇 가지 큰 변이가 생기는 시점을 판단할 수 있다(그림2-28, 그림2-29). 이케시마, 후쿠만지 유적에서는 그 시점이 헤이안과 가마쿠라 시대로 중세에 해당하고, 사카모토 A 유적에서는 조몬 만기부터 야요이 시대, 헤이안부터 중세, 또 중세부터 근세로 변하는 시기가 해당된다. 또한 두 유적 모두 중세 이후는 형상의 변화가 적어지는 경향을 볼 수 있다. 또 이들 형상에 따라 앞에서 서술했던 아종 판별을 행하면, 재배되어 온 벼는 모두 자포니카였다. 



그림2-28 사카모토 A 유적에서 나타나는 벼잎 세포화석 형상의 변화



그림2-29 이케시마, 후쿠만지 유적에서 나타나는 벼잎 세포화석 형상의 변화




야요이 시대는 본격적으로 논벼농사가 보급된 시대이다. 헤이안과 가마쿠라는 율령제도가 정비되어 개간이 진행된 시대이며, 또 옛 기상으로도 한랭화 등의 변화가 지적되는 시기이다. 중세부터 근세는 말할 것도 없이 농업 기술(특히 재배기술과 치수기술)이 크게 발달한 시기이다.


이처럼 잎의 세포화석 분석 결과를 통해 보면, 이러한 농업기술과 농업을 둘러싼 환경과 사회의 변화에 응하여 재배 벼가 변천해 온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자연과학 분석의 검증을 기다려야 하지만,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두 곳의 유적에서 어느 정도 일치하는 걸 볼 수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열대 자포니카의 재배에 대하여


자포니카 벼에는 논벼농사에 적응한 벼인 '온대 자포니카'와 생산성이란 점에서는 온대 자포니카보다 떨어지지만 화전부터 논벼농사까지 다양한 재배에 대응할 수 있는 '열대 자포니카'란 두 가지 생태형이 알려져 있다. 최근 필자 등의 연구에 의해, 벼잎의 세포화석 형상이 "세로 길이가 길고(40mm 이상) 판별득점이 2.0 이상인 것"의 대부분이 열대 자포니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림2-30 온대 자포니카와 열대 자포니카에서 볼 수 있는 잎의 세포화석




두 가지 유적에서 세로 길이와 판별득점에 대하여 정리하면, 어느 시대도 세로 길이는 40mm 이상이다. 따라서 판별득점의 변화에서 열대 자포니카가 존재했던 시대를 살피면, 두 유적 모두 중세에 해당하는 토층까지는 열대 자포니카가 재배되었다고 추정된다. (이케시마, 후쿠만지 유적에 대해서는 도중에 판별득점이 2.0을 밑도는 시대가 있는데, 종자의 갱신과 존속이란 농업기술의 시점을 더하면 중세까지는 열대 자포니카 벼가 재배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중세부터 근세에 걸쳐서 판별득점의 감소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시기에 재배의 중심이 온대 자포니카로 변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결과는 앞에서 기술한 형상 변화에서 본 재배 벼의 변천과도 잘 부합한다.



그림2-31 사카모토 A 유적에서 나타나는 판별득점의 변화


그림2-32 이케시마, 후쿠만지 유적에서 나타나는 판별득점의 변화




마치며


이 장에서는 잎의 세포화석 분석에 의하여 얻은 연구성과부터 중국 및 일본에서 벼농사의 전개와 전파 또는 그 뒤의 벼농사의 변천이 어떠했는지 추정해 보았다.


동아시아에서 벼농사의 전개와 전파가 어떠했는지 그 실상에 다가가는 데에는 다른 장에서 기술하고 있는 고고학의 조사연구, DNA 분석, 더 나아가서는 종자 분석과 꽃가루 분석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성과를 종합하여 비교검증하면서 나아가야 한다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각각의 분석결과에서 벼농사의 전개와 전파에 대하여 어떠한 모습을 구성하는지를 명확하게 정리하고, 이 과제에 관한 연구자와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밝히는 일도 실상에 다가가는 걸음을 확실하게 하는 데 중요할 것이다. 이것이 이 장을 쓴 동기였다고 덧붙여 말씀드리고 싶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연구의 진전에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잎의 세포화석 분석과 생산 유구 탐사에 대한 과제 및 그에 대한 대처를 소개하며 이 장을 마치고자 한다.



잎의 세포화석 분석의 과제


잎의 세포화석은 그 조성부터 종자와 꽃가루에 비교하여 잔류성이 뛰어나다는 이유가 있지만, 그 때문에 벼농사의 존재를 보여주는 근거가 잎의 세포화석뿐이라는 사례가 종종 발생한다. 분석 시료의 채위부터 현미경 분석에까지 이르는 과정에 문제가 없다면 틀림없는 결과이겠지만, 생각하지도 않은 원인으로 시료 오염이 생길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나 자신도 잎의 세포화석 분석에 관련되어 있는 사람으로서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자연과학 분석을 행하는 이상 억지로라도 '생각하지도 않은 시료 오염'을 계속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역시 이 문제를 검증하는 궁극의 방법으로는 잎의 세포화석으로부터 연대측정을 행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잎의 세포화석이 지닌 화학 조성을 분석하면 그 주성분은 유리인데, 실은 탄소도 그에 버금가는 성분으로 포함되어 있다. 최근 분석기구가 눈부시게 발달하면서 잎의 세포화석을 일정량 모아서 이 탄소로부터 연대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도 현재 이 방법의 확립에 몰두하고 있다.



생산 유구 탐사의 과제


중국에서는 이미 기술했듯이 양저문화기의 논이 탐사, 발굴되어 어떠한 형태와 규모를 갖추었는지 밝히는 일이 과제가 되어 앞으로 중국에서 행할 조사가 기다려지는 바이다.


일본에서는 논벼농사 이전의 조몬 벼농사가 어디에서 어떻게 경영되었는지 하는 확실한 증거, 즉 조몬 벼농사의 생산 공간 입지를 밝히는 일이 과제일 것이다. 화전인지, 산동성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토지이용이라면 저습지의 벼농사도 존재했는지 흥미롭다. 화전에 대해서는 잎의 세포화석에 의한 탐사 사례도 있고, 조사 수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목표가 세워져 있으며, 저습지 벼농사의 존재에 대해서는 논 탐사의 수법을 응용할 수 있다. 현재 여러 가지 대처가 진행되고 있어 앞으로 고고학과 자연과학이 협동하여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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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기고 2. 논벼농사와 고기잡이     佐藤雅志




1950년대 중반, 내가 다녔던 소학교에서는 초여름 모내기와 가을 벼베기의 농번기에 농사일을 거들기 위해 전교가 한꺼번에 쉬는, 이른바 농번기 휴교가 있었다. 그 휴교일에는 소학교 주변의 논에서 다함께 모내기와 벼베기가 행해졌던 걸 월급쟁이의 자식이었던 나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모내기 전의 논은 우리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우리는 양동이와 삽과 반두를 가지고 메기와 미꾸라지를 잡기 위하여 방과후 논 사이를 에워싸듯이 흐르는 수로를 목표로 했다. 목표는 너비와 깊이가 1미터 정도인 논의 두렁과 두렁 사이의 수로였다. 아직 모내기 전이어서 수로에는 물이 적다. 우리는 먼저 물고기가 숨어 있을 것 같은 장소를 확인하고 그 상류와 하루에서 물고기를 몰아넣고, 몰아넣은 수로의 상류와 하류에서 그 바닥에 있는 돌을 모으고 제방의 흙을 삽으로 퍼서 둑을 만든다. 다음에는 수로의 물을 막은 상류의 둑과 하류의 둑 사이에 괴인 물을 양동이로 퍼낸다. 물을 퍼내 바싹 마른 수로에는 미꾸라지와 작은 물고기가 진흙 속에서 꿈틀거리는 걸 볼 수 있었다. 그것을 반두로 건져 양동이에 담는다. 메기는 수로의 제방 주변에 숨어 있을 때가 많았기에, 막대기와 반두로 쿡쿡 찔러 나오게 하여 잡았다. 우리는 고기잡이를 마치면 둑을 무너뜨려 양동이에 수확물을 담아 저녁놀이 질 때 집으로 돌아갔다. 


우리의 놀이는 앞으로 쟁기질을 하려고 하는 농민에게는 훼방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둑으로 막았던 물은 수로에서 넘쳐 두렁의 물꼬를 통해 논으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쟁기질이 편하도록 논을 말린다. 흘러들어간 물은 쟁기질에 방해가 된다. 악동들은 야단맞을 걸 알면서 농부에게 들키지 않도록 굴 속에 몸을 숨기고 묵묵히 작업을 진행하는데, 돌아보러 온 농부에게 들키기도 했다. 가끔은 괭이를 들고 쫓아올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수확물을 버리고 양동이와 삽과 반두를 가지고 쏜살같이 논을 가로질러 도망간다.


들키지 않고 고기잡이를 끝낼 때는 수확한 물고기를 서로 나누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우물물에 2-3일 정도 담가 진흙을 제거하고 미꾸라지는 된장국의 건더기로, 메기는 탕으로, 작은 물고기는 튀김으로 먹는 게 일상이었다. 당시 우리에게 벼를 재배하는 논은 놀이터이자 고기를 잡는 곳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실제로 보는 논은 U자형 콘크리트 수로가 정비되어 논에 들고나는 물을 제어할 수 있는 관개논이다. 경지정리가 진행되어 송수관의 수도꼭지를 틀면 논으로 물을 댈 수 있는 설비가 정비되어 있는 논도 있다. 게다가 농약과 화학비료가 사용되는 논에서는 물고기만이 아니라 물고기가 먹이로 삼는 곤충과 물풀이 사라진다. 논에서 고기 잡으며 놀던 건 베이비붐 세대의 무용담으로만 남았다.



벵갈 뜬벼 지대


나는 1989년 12월에 갠지스강의 삼각주 지대에 위치한 방글라데시에 벼의 유전자원을 조사하러 갔다. 건기의 다카시 주변의 논 지대의 흙은 바삭바삭하게 말라 있었다. 논 지대를 흐르는 수로에는 수면에서 5미터가 넘는 높은 무지개다리 같은 모양을 한 다리가 걸쳐져 있었다. 우기에는 수량이 늘어나 다리가 수몰되지 않도록 그 높이로 걸쳐 놓았다고 방글라데시 벼 연구소의 공동연구자가 가르쳐 주었다. 수심이 때로는 5미터에 이르는 이 지역은 우기에 '뜬벼'가 재배되고 있었다. 우기가 되는 것과 함께 논에 볍씨를 직파하든지, 또는 모내기를 한다. 그뒤하천에서 넘쳐나온 물이 흘러들어와 수량이 하루에 몇 센티미터 단위로 상승한다. 뜬벼는 수량이 늘어나는 것과 함께 줄기가 자라서 수면 위로 줄기의 끝에 달린 잎을 전개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건기가 되어 물이 빠져 논 토양으로 쓰러진 뜬벼는 끝의 줄기를 세워 이삭을 단다. 


갠지스강 삼각주의 논 지대에서는 해마다 8월부터 10월 정도까지 강의 물이 넘쳐 홍수가 난다. 우기에 강에서 넘친 물과 함께 벼만 자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도 큰다. 물고기를 포획하기 위해 한 변이 10미터인 그물의 네 모서리를 4개의 긴 대나무 끝에 동여맨 장치가 뜬벼 재배지역의 논에서 자주 눈에 띈다. 갠지스강 삼각주의 뜬벼가 재배되고 있는 논에서는 쌀만이 아니라 물고기도 잡는다.



캄보디아 중앙 평원의 논


캄보디아의 프놈펜에 최초로 방문한 건 내전이 종결되고 국제연합 감시단이 머물고 있던 1992년 12월이었다. 베트남 전쟁 종결 이전에는 사이공이라 불렀던 호치민에서 차로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에 들어갔다. 호치민에서 캄보디아까지 가는 길은 강을 건너기 위해 연락선에 탈 때 말고는 도로 주변에 보이는 경관은 단조로웠다. 몇 미터 높이로 흙을 쌓아 만든 도로의 좌우로 평탄한 논이 눈길이 닿는 지평선까지 이어져 있었다. 우리가 방문했던 계절은 건기였다.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논에서 벼베기를 하고 있는 농부의 모습을 여기저기에서 볼 수 있었다. 논에서는 야자나무가 군데군데 있었지만 마을은 보이지 않고, 30도가 넘는 무더위와 햇볕을 피할 곳 없는 논에서일하기는 힘들 것이다. 


재작년 11월에 라오스 남단의 국경에서 프놈펜에 들어갈 기회가 있었다. 도로의 양옆의 논은 두렁이 보이지 않을정도로 물이 차 있었다. 캄보디아의 연구협력자에게 물으니, 해마다 이 시기에 물에 잠긴다고 답했다. 차를 타고 달리고 있으면 자주 물고기 냄새가 났다. 차를 내려서 보니, 4-5센티미터의 작은 물고기가 길가의 한쪽에 펼쳐져말라 있었다. 이들 작은 물고기는 여기의 수로에서 잡았던 물고기라고 연구협력자가 이야기했다. 또 작은 물고기로는 조미료가 되는 어장, 이른바 물고기를 발효시켜 만드는 간장을 만들어 밥과 물고기가 이 지역 식문화와도 깊게 관계되어 있다. 이 캄보디아 평원의 논에서는 쌀만이 아니라 물고기도 수확하고 있었다.


프놈펜의 공항에서 입수한 여행안내책자 <하우 투 @캄보디아>에 JICA 전문관인 이토伊藤 씨가 캄보디아의 물고기에 대하여 적어 놓았다. "캄보디아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지 못할 만큼 민물고기 왕국"이라고 서술했다. 캄보디아에서 가물치나 메기 등을 비롯한 민물고기의 종류와 수확량이 많은 비밀은 메콩강과 똔레샵 호수에 있다고지적했다. 캄보디아 중앙부터 베트남에 펼쳐진 메콩 삼각주의 중앙에 위치한 프놈펜부터, 앙코르와트로 유명한 씨엠립까지 300킬로미터 이상임에도 고저차가 겨우 약 8미터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기가 되면 중국과 라오스 등에 내린 비로 메콩강의 수위가 상승하고, 캄보디아의 중앙 지역은 침수지가 된다.


건기를 똔레샵과 메콩강 상류에 생긴 깊은 못에서 보낸 성숙한 물고기가 우기에 메콩강과 똔레샵강의 수위가 상승하고 범람하는 것과 함께 캄보디아 중앙의 침수된 숲까지 와서 산란하여 치어가 자라는 것이다. 일부 치어는 침수된 논과 그 주변의 수로에서도 서식하며 자란다. 우기의 방문과 함께 논에서는 벼농사가 시작되어 물고기의양식이 시작되고, 건기의 방문과 함께 벼베기가 시작되어 물고기의 수확이 시작된다. 캄보디아 중앙의 광대한 논지대는 벼의 재배만이 아니라 물고기를 기르는 곳이기도 하다. 



라오스 비엔티안 주변의 논


라오스 비엔티안 주변에는 논 지역에 크고 작은 여러 둠벙이 군데군데 있다. 모내기가 시작되는 우기에는 둠벙의수위가 올라 넘친 물이 수로를 통해 논과 숲으로 흘러들어간다. 물과 함께 건기를 둠벙에서 보낸 물고기가 논과 숲으로 흘러들어간다. 논과 숲으로 흘러들어간 물고기는 우기 동안 풀과 곤충을 먹으며 크게 자란다. 우기가 끝나 논의 수위가 낮아지면 다 자란 물고기의 일부가 다시 둠벙으로 돌아오게 된다. 둠벙의 비교적 얕은 곳에서는 야생 벼가 자생하고 있다. 이 야생 벼의 줄기에 붙은 물풀과 곤충을 먹고 물고기는 둠벙에서 건기를 보낸다. 논과둠벙으로 물고기가 이동할 때나, 둠벙에 돌아온 건기에 농민은 물고기를 포획한다. 비엔티안 주변에서도 논은 벼를 기르는 것만이 아니라 물고기도 기른다.



토라자의 다락논


인도네시아 동부에 알파벳 K자 모양을 한 섬 술라웨시섬이 있다. 일본인에게는 친숙하지 않은 이 섬이지만,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은 '토라자 커피'라는 상품명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토라자는 K자 모양을 한 섬의 좌우 반도의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우리는 토라자 지역을 작년에 조사하고, 토라자에서 산을 사이에 두고 서쪽으로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마마사를 올해 조사했다.


토라자는 1000미터를 넘는 산들로 둘러싸인 산간지역이다. 산들에 둘러싸인 계곡의 양쪽에 다락논이 만들어져 있다. 그 다락논의 한가운데에는 지름 2-3미터의 구멍이 파져 있다. 때로는 구멍의 주위에 흙을 쌓아 두둑을 만든다. 그 두둑의 한 모퉁이를 째 놓아 물이 자유롭게 출입하게 한다. 또, 그 두둑에는 대나무나 나무 몇 개를 구멍을 가리는 식으로 쓰고 있다. 그 구멍이 무슨 구멍인지 궁금해서 가이드에게 물어보면, 물고기 구멍이란 답을 들었다.


물고기 구멍의 장치는 다음과 같다. 우기의 방문과 함께 논에 물을 대고 모내기를 시작한다. 논의 수량이 늘어나면 구멍에서 치어가 나와 논에서 살면서 물풀과 물소의 똥, 논에 모이는 곤충을 먹으며 크게 자란다. 크게 자라면새에게 잡아먹히는 일도 있지만, 그 무렵에는 벼가 무성하여 숨을 수 있기에 새의 공격을 피할 수 있다. 건기의 방문과 함께 논에 물이 적어지면 다 자란 물고기는 구멍 속으로 돌아간다. 건기 동안에 구멍 속의 물고기는 산란하여 치어가 생긴다. 술라웨시섬의 다락논에서도 논은 벼를 재배하는 곳만이 아니라 물고기를 양식하는 곳이기도하다.



술라웨시섬 마마사 지역의 다락논





열대지역의 논벼농사와 어로의 관계는 무너지고 있다


남술라웨시의 표고가 낮은 평지의 논 지대에서는 농약과 화학비료가 사용되고 있다. 게다가 생물연료의 원료가 되는 사탕수수, 팜야자, 자트로파 등의 작물 재배면적이 늘어나고 있다. 그 확대에 따라 제초제 등의 농약 사용이 퍼지고 있다. 또한 방글라데시에서는 재배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 뜬벼 재배가 쇠퇴하고, 관정으로 퍼올린 지하수를 이용한 건기의 벼 재배가 확산되고 있다. 일부 지역에서는 지하수에 함유된 비소로 인한 중독도 문제가 되고 있다. 또, 비엔티안 주변에서도 논의 관개설비가 충실해지고 있다. 관개 논의 확대에 따라 새로운 벼 품종이 도입되어 농약과 화학비료의 사용이 퍼지고 있다. 열대지역의 이들 논에서 승계되며 남아 있던 '논벼농사와 어로의 관계'가 붕괴되고 있다. 



논벼농사와 물고기의 관계를 재평가하자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논벼농사와 물고기의 관계'가 재검토되고 있다1. 2차대전 이후에 세계 인구의 증가에 따른 식량부족에 대한 대응책으로, 다량의 화학비료와 농약을 사용하는 '녹색혁명 벼 품종'이 관개설비의 정비를 수반하는 논에 도입되어 왔다. 그 도입은 일정 수확량의 증가를 가져왔지만, 다량의 농약과 화학비료의 사용이 늪과 호수의 부영양화 등의 오염과 논 생태계의 생물다양성 상실을 불러일으켰다. 환경 보전을 바라고, 지속가능한 식량 생산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벼농사 논과 물고기의 관계를 재검토하기 시작하고 있다. 


시가현의 비파호에서 권장되는 '물고기의 요람 논 프로젝트'가 그 하나이다. 경지정리 사업 등이 행해지기 전의 비파호 주변의 논에서는 비파호의 수위 변동에 따라 때로는 침수 피해를 입곤 했다. 그러나 침수된 저습지와 논은 비파호에서 생식하고 있던 붕어와 메기 등이 번식하는 장이었던 것이 인식되어 이 프로젝트에서는 물고기 번식의 장, 즉 저습지와 논을 확보하기 위하여 비파호에서 논으로 물고기가 거슬러 올라가기 쉽도록 어도를 만들고, 다 자란 물고기를 방류하는 일이 권장되고 있다. 또한 물고기가 논으로 거슬러 올라옴에 따라 물고기를 잡으러 논에 날아오는 해오라기 등의 새가 늘어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비파호에 사는 물고기를 보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쌀을 생산하며 환경을 보전하고 안전한 쌀을 생산하는 데에도 의의를 지닌 시도이다.


또한 베트남 남부의 메콩강 삼각주 지대에서는 베트남 전쟁 이후 도이모이 정책에서 시작된 작부체계가 시도되고 있다2. 메콩 삼각주 지대에 온통 둘러쳐진 수로를 이용하여 벼와 채소 등의 작물 재배, 망고 등의 과수 재배, 돼지 등의 가축과 물고기의 양식을 조합한 농법이다. 이 농법은 삼각주 지대에서 옛날부터 계승되어 온 벼 재배와 어로에서 발전한 것이다. 아직 농업 경영의 면에서는 안정되지 않는 등의 문제는 남아 있지만, 안전한 식량 공급의 면에 의의가 있는 시도이다. 



벼농사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침수지에서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소개한 갠지스강과 메콩강 등의 큰강의 삼각주 지대에서는 물고기가 떼를 지어 계절에 따라 이동하는 범위가 넓고, 비엔티안 지역의 둠벙, 그리고 토라자의 다락논에서는 그 범위가 좁아진다. 물고기가 떼를 지어 이동하는 범위는 다르지만, 논벼농사와 물고기의 관계는 똑같다. 즉, 물고기는 논의 잡초 등도 포함한 물풀과 조류, 때로는 지렁이와 곤충을 먹고서 똥을 싼다. 물고기를 잡으러 새가 논으로 날아와 물고기를 포획하고 똥을 싼다. 논에 들어온 물고기가 그 똥을 먹고서 똥을 싼다. 논에서 자란 물고기를 인간이 포획하고 논에서 날라다 먹는다. 이처럼 다른 곡류와는 달리 물은 댄 밭, 즉 논에서 벼를 재배하는 일은 물고기를 사이에 두며 생태계의 균형을 잡아 왔다고 지나친 말이 아니다. 벼농사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저습지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계승되어 온 옛 벼농사 방식을 조사하고, 쌀만이 아니라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물고기도 기르는 새로운 논을 구축하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이다. 50년 전 논에서 행하던 고기잡이를 베이비붐 세대의 자랑거리로 끝나게 두면 바람직하지 않다.



  1. 논과 어로에 대해서는 이 기고문 이후에 출판된 다음을 참조하길 바란다. 佐藤洋一(편저) 2008 <쌀과 물고기>, 도메스 출판 鹫谷이즈미(편저) 2006 <지역과 환경이 소생시킨 논 재생> 光の家協會 [본문으로]
  2. http://trg.affrc.go.jp/v-museum/cutedge/cut-e03.html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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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제1장  벼농사와 벼농사 문화의 시작  中村愼一




들어가며


2008년 1월, 중국에서 벼농사 고고학 연구의 전문가 4명을 일본에 초청해 최신 연구성과에 대한 보고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거기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점은 중국의 벼농사 기원론이 이미 "언제, 어디에서?"의 단계에서 빠져나가 "왜, 어떻게?"의 단계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애초 야생 벼가 자생하지 않는 일본의 경우와 달리, 그것이 자생하는 중국에서는 벼 자료의 출토=벼의 인공 재배가 아니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중국의 연구자도 그런 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야생인지 재배인지를 분간하는 판단기준을 딱 정하는 일은 상당히 어렵다. 결과적으로 '재배종이기를 바란다'는 확신이 때로는 연구자의 눈을 흐리게 하는 일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림1-1 중국의 초기 벼 자료 출토 유적

1. 하남성 무양舞陽 가호賈湖 유적

2. 호남성 풍현澧縣 팽두산彭頭山 유적, 팔십당八十 유적

3. 강서성 만년현萬年縣 조통환桶環 유적, 선인동仙人洞 유적  

4. 절강성 포강浦江 상산上山 유적

5. 절강성 승주嵊州 소황산小黃山 유적

6. 절강성 소산蕭山 과호교跨湖橋 유적

7. 절강성 여도 하모도河姆渡 유적

8. 절강성 여도 전라산田螺山 유적

9. 절강성 동향桐鄕 라가각羅家角 유적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도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확실한 판단기준을 어떻게든지 수립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는 야생, 여기서부터는 재배라고 딱 잘라 버리지 않고 양자를 일련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학계에도 꽤나 퍼졌다고 느낀다. 


아시아 벼농사 기원의 문제는 완신세完新世의 환경변화에 야생 벼가 어떤 대응을 보였는지, 그리고 인간은 어떠한 문화적 적응으로 그에 응했느냐는 관점에서 추진해야 할 터이다. 그를 위하여 고정도高精度의 옛 환경 복원과 동식물 유존체의 정성, 정량 분석 등 자연과학 여러 분야와 고고학의 협동이 필수이다. 본론에서는 그러한 접근으로부터 지금까지 어떤 것이 밝혀졌는지에 대하여, 일본과 중국 공동 연구의 성과 등도 나누면서 개관하겠다.




벼농사 개시기의 환경


벼농사는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일본의 학계에서 아시아 벼농사 기원 연구를 주도한 건 농학과 민족식물학이었다. 거기에서는 '운남-아삼 기원설'이 제창되어(渡部 1977), 한때는 정설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고고학의 증거는 그 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30년 사이에 축적된 고고학 자료는 그것이 동시대의 자료인 만큼 압도적인 설득력을 갖는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벼농사가 중국의 장강 유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다만, 그 구체적인 연대를 어디에 둘지에 대한 의론이 분분하다. 앞에서 기술했듯이, 재배종인지 어떤지 판단하는 지표가 연구자에 따라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러 설에 대하여 하나하나 상세히 살필 여유는 없다. 관심이 있는 분에게는 졸저(中村 2002)를 보시라 권하고, 여기에서는 개요만 소개하고자 한다.


1만 년을 넘는 오래된 벼 관련 유물이 출토되었던 유적은 장강 중류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강서성의 조통환, 선인동 유적(모두 잎의 세포화석), 호남성의 옥섬암玉蟾岩 유적(잎의 세포화석과 꽃가루) 등이다(그림1-1). 잎의 세포화석이란 벼잎의 기동세포라는 특수한 세포 안에 남아 있는 일종의 유리이다. 생리적, 화학적으로 강하고, 장기간 토양 속에서 보존된다. 토양 속에 벼잎의 세포화석이 존재하는 것은 그곳에 벼가 있었단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것이 곧 재배 벼의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들 여러 유적은 모두 동굴 유적이고, 그곳에서 벼가 살았을 리는 만무하나, 조통환 동굴처럼 주위의 평지에서 수십 미터나 위로 솟아 있다면, 마른풀이 바람에 날려 들어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완신세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이전에 사람에 의해 무언인가 형성된 벼의 이용 -땔감이나 깔개로 이용하는 것도 포함- 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장강 하류로 눈을 돌리면, 이번 세기에 들어와서부터 발굴조사가 행해진 절강성의 상산 유적(약 1만 년 전)과 소황산 유적(약 9천 년 전)에서는 토기의 바탕흙 안에 대량의 알곡이 섞여 있었다(그림1-2). 식물규산체가 발견된 것만으로 벼를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벼의 열매=알곡을 이용했다는 건 아닌데, 이쪽은 틀림없는 알곡이다. 그것이 속의 쌀을 꺼낸 뒤의 왕겨인지 쌀이 들어 있던 채로 있었던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혼합재로 이용하기 위해서만 알곡을 모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먹을거리로 쌀을 이용하고 나머지 왕겨를 유효하게 이용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일리가 있다.


토기 바탕흙의 혼합재로 왕겨를 이용하는 일은 조금 늦게 장강 중류에서도 시작된다. 호남성 풍현에 있는 팽두산 유적과 팔십당 유적 같은 팽두산 문화(8000-7000년 전)의 토기가 그것이다. 토기 종류의 구성을 보아도 그 이전의 것에 비하여 상당히 분화가 진행된 데다가, 명확하게 요리도구라고 할 수 있는 '솥'의 수량이 많아진다. 식물질 먹을거리 의존도가 증대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림1-2 상산 유적 출토 토기. 단면에 검게 보이는 것이 혼합재의 왕겨.



거의 동시대에 놓인 하남성의 가호 유적과 절강성의 과호교 유적에서는 왕겨가 토기의 혼합재로 쓰이지는 않았지만, 유적에서는 탄화미, 붉게 탄 흙(紅燒土)에 알곡 압흔, 그리고 잎의 세포 화석 같은 여러 가지 형태로 벼 자료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현재 있는 고고자료로 미루어 보는 한, 지금으로부터 8000년쯤 전에 벼 이용이 강화된 동시에 지리적으로도 확대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약 7000년 전쯤 되면, 장강 하류에 하모도 문화와 마가빈 문화가 전개된다. 토기의 종류 분화는 더욱 진행되고, 쌀 조리에 특화된 종류인 '시루(=찜기)'가 출현한다. 또한 농기구라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뼈삽날(骨耜)도 다수 출토되고, 이외에도 벼농사 의례에 관련된 것이라 생각되는 기물도 적지 않다. 논의 검출 사례는 현재로서는 약 6000년 전의 마가빈 문화 후기까지로만 거슬러 올라가는데, 앞으로 오래된 사례가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즉, 여러 가지 상황증거로 미루어 보는 한, 하모도/마가빈 문화기에는 그 이전부터의 채집에 더해 벼의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이 7000년 전이란 연대를 중국 벼농사 개시의 하한년대로 잡는다(나의 이러한 견해는 학계에서 '신중론'이라 친다. 벼농사의 시작을 1만 년 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학계의 추세라는 점을 굳이 덧붙여 놓는다). 그에 대하여 일찍이 아시아 벼농사의 원향이라 여겨지고 있는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연대는 그보다도 몇 천 년 늦다. 구체적으로, 인도 아대륙에서는 5000년 전쯤, 동남아시아 대륙부에서는 4000년 전쯤이다.


중국으로부터 일원적으로 이들 지역에 벼농사가 확산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장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벼농사 보급의 파도가 운남과 광서 같은 화남의 주변부에 도달한 연대는 오래되었다고 어림잡아도 5000년 전이다. 특히 인도의 경우 30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주변부에 도달하는 연대와 거의 동시에 벼농사가 시작된다. 동심원적인 파급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국, 인도, 그리고 가능성으로는 동남아시아에서도 시기를 달리 하여 저마다 벼의 재배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어쨌든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전 벼농사가 시작된 곳은 중국이다. 그곳에서 중국의 대지를 무대로 전개된 인간과 벼의 관계의 역사를, 환경고고학과 식물고고학의 시점을 섞어 넣으면서 계속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벼농사 개시기의 환경


빙하기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유럽과 북아메리카가 빙상에 덮힌 한랭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쓰인다. 빙하기라 해도끊임없이 추위가 계속된 것은 아니고, 한랭한 시기와 온난한 시기가 반복하여 미세하게 변동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지질시대에서 가장 새로운 빙기는 뷔름 빙기(아메리카에서는 위스콘신 빙기)라고 부르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7만 년 전부터 약 1만5천 년 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바닷물에서 증발된 수분이 눈이 되어 육지에 내려 쌓이는데, 그것이 녹지 않고 곧바로 빙하로 발달한다. 증발한 물이 되돌아오지 않기에 해수면은 낮아진다. 뷔름 빙기의 가장 한랭기(1만6천 년 전쯤)에 해수면은 현재보다 120미터나 낮았다고 여겨진다.


이 최종 빙기가 종언을 고한 뒤 기온이 단숨에 상승했는데, 그 뒤 재차 '영거 드리아스기'라고 부르는 추위가 1300년 정도 이어진다. 그러나 그 추위도 1만1600년 전을 경계로 급격한 온난화로 뒤바뀐다. 지질시대라 말하는 완신세의 시작이다. 그 뒤 기온은 상승의 한 길을 걸어, 6000년 전쯤에 최고온기('힙시서멀기' 또는 '기후적기'라 부른다)를 맞이한다. 이 시기, 예를 들어 중국의 장강 하류에서는 기온이 현재보다 2-3도 높고, 강수량은 500-600mm 많았다고 복원되어 있다(王, 張 1981).


중국 장강 유역에서 벼의 채집이 시작되어, 이윽고 재배로 진전된 건 영거 드리아스기와 힙시서멀기 사이의 기후격변기의 일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시기의 옛 환경과 지리에 관한 정밀한 복원 연구는 매우 부족하기에 여기서부터는 상상에 의지하는 부분이 많은데, 나는 그 과정을 아래와 같이 생각한다.


완신세 전반의 급격한 온난화는 비가 자주 오도록 만들었다. 최종빙기에는 낙엽수의 숲과 건조한 초원이 탁월하던 장강 중하류의 저지대가 광대한 늪과 호수와 습원으로 순식간에 그 모습이 변했다. 기온이 높은 비가 많이 오면, 야생 벼에게는 절호의 생식환경이다. 최종빙기에는 추위로부터 도망와 화남과 동남아시아에 후퇴하여 숨을 죽이고 있던 야생 벼가 나갈 차례가 도래했다.


재배 벼의 선조에 해당하는 Oryza rufipogon이란 야생 벼, 그중에서도 특히 자포니카형인 것은 여러해살이의 경향을 가지지만, 실제로는 폭넓은 변이가 존재하여 한해살이에 강하게 기운 그룹도 있다. 아마 그러한 그룹이 그 탁월한 이주능력을 무기로 재빨리 북상을 시작해 곧 장강 중하류의 저지대에 대규모 군락을 형성했을 것이다. '쌀알만큼'이라 하면 작은 것의 예이다. 한 알, 두 알 먹는 걸로는 배를 채울 수도 없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 모두 벼의 군락이 펼쳐져 있다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바로 그때 해수면의 급속한 상승으로 육지면적이 맹속력으로 감소했다. 동중국해에 면한 절강성과 강소성 부근에서는 6000년 정도 사이에 해안선이 500-700킬로미터나 내륙으로 후퇴했다. 즉, 해마다 100미터씩 육지가 수몰되어 사라졌다고 계산된다. 거주할 수 있는 토지의 면적이 좁아지면 야생 먹을거리 자원에 대한 인구압이 높아진다. 그때까지는 먹지 않던 야생 벼의 종자가 수렵채집민의 눈에 매력적인 먹을거리로 비춰지게 되었다.


단 하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았다. 장강 중하류의 대습원지대, 예를 들면 고대에 '운몽택雲夢澤'이라 부르던 양호 평야(호북성의 강한江漢 평야와 호남성의 동정호 평야)의 중심부 등에서는 끊임없이 수위가 크게 변동하기 때문에, 정주생활을 영위하기란 매우 곤란했다. 그래서 홍수의 피해를 받는 일이 없고, 또 습지와 산야의 양쪽에 접근할 수 있는 저지/구릉의 이행지대나 산간의 분지가 거주지로 선택되었다. 강서성 조통환과 선인동, 호남성 옥섬암, 절강성 상산과 소황산 등의 여러 유적은 바로 그러한 입지에 있다. 벼의 이용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그건 아직 매우 한정적인 일이었다 해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8000년-7000년 전쯤이 되면 물 환경이 불안정한 저지로 진출하는 선구자가 나타난다. 절강성의 과호교 유적과 하모도 유적(모두 해발고도는 약 4m)이 그 대표이다. 여기에서는 우리 일본의 연구진이 베이징 대학, 절강성 문물고고연구소와 공동조사를 실시했던 절강성 전라산 유적에 대하여 소개하려 한다.


영소寧紹 평야의 동단 근처에 위치한 이 유적은 하모도 문화에 속하여, 중심적인 문화층의 연대는 약 7000-6500년 전으로 짐작된다(그림1-3). 유명한 하모도 유적에서 7킬로미터 정도만 떨어져 있다. 하모도 유적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저지대 유적이고, 인골과 동물뼈, 목재, 식물 종자 등의 유기질 유물의 보존상황은 꽤나 양호하다. 우리는 여러 가지 자연과학적 분석을 실시했는데, 그 가운데 나라 교육대학의 카네하라 마사아키金原正明 씨가 행한 규조 분석의 결과는 대단히 흥미롭다(金原 최근 출간).



그림1-3 전라산 유적 원경(가운데 돔이 유적 박물관)




규조란 단세포의 조류로, 바닷물과 민물, 그리고 일부는 토양에서도 생식한다. 그 이름은 규산질의 단단한 껍질을 가진 데에서 유래하는데, 규조 본체가 죽어도 그 껍질만은 수백 년, 수천 년을 남아 있는다. 또 똑같이 바닷물이어도 난바다, 내만, 개펄 등에 생식하는 종류가 다르다. 껍질의 크기나 형태, 표면의 모양 등을 조사하여 종을 동정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수와 비율에 따라 규조의 껍질이 퇴적된 당시의 환경을 복원할 수 있는 것이다. 


전라산 유적에서 행한 분석 결과는 아래와 같았다. 유적에 사람이 거주하기 직전의 시기, 그곳에는 개펄이 펼쳐져 있었다. 해수면 높이는 현재보다 1미터 정도 낮았다고 추정된다. 그 뒤 해수준은 마이너스 2.0미터 이하까지 낮아진 걸로 보이고, 이 땅은 육지화되어 인간의 거주가 시작된다. 당시 유적은 해수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강가 습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 해수면이 다시 상승을 시작해 최고기에는 현재보다 약 2미터 높아졌다(힙시서멀기의 최고 해수준). 토지는 해면 아래로 가라앉고, 마을은 방기되었다. 즉 이 유적은 완신세의 해진기에 영위된 유적인데, 해진기에도 해수면이 변동하여 끊임없이 계속 상승하던 해수면이 일단 조금만 물러난 시기에 출현했던 육지에 입지하고 있었다.


유기라 하더라도 그곳은 민물 유역의 가장자리여서, 습지 같은 장소였을 것이다. 이 전라산 유적에서도 하모도 유적에서도 주거는 고상식(역주; 마루를 높게 쌓은 형태)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저습지에 거주하기 위한 하나의 적응 수단이었다. 고상식 주거의 주변에는 수많은 목제품이 남아 있다. 건조한 지면 위에 남아 있던 목제품은 거의 곤충, 균류, 박테리아 등에 의해 분해되어 버려서 몇 년만 지나면 흔적도 남지 않는 게 보통이다. 많은 목제품이 양호한 보존상태였던 건 마을 자체가 저습지 안에 있어 버려진 목제품이 늘 물에 잠긴 상태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덧붙여서, 고상식 주거의 근처에서 목제 노가 8점 출토된 것은 일상의 교통수단으로 통나무배가 애용되었다는 걸 말해준다. 유감스럽게도 이 유적에서는 통나무배 자체가 아직 출토되지 않았는데, 이 유적보다도 1000년 정도 오래된 과호교 유적에서 통나무배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하모도 문화기에 통나무배가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고상식 주거와 통나무배라는 두 가지 물품, 그것은 저습지에 정주하기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과호교 유적에서 검출된 집터는 흙벽을 세운 평지식 주거였는데(절강성 문물고고학연구 외 2004), 이 유적에서는 나무 하나로 만든 사다리도 발견되었기 때문에 주거 부분은 2층이었거나 또는 적어도 먹을거리 창고는 고상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저습지로 진출하는 데에는 그것이 필요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벼도 도토리도 종이 한 장 차이


앞에 기술했듯이, 벼를 이용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저습/구릉의 이행지대와 산간의 분지가 거주지로 선택되었다. 절강성의 유적을 예로 들면, 상산 유적과 소황산 유적은 전라산과 하모도 등의 하모도 문화기의 유적과 그보다 1000년 정도 오래된 과호교 유적에 비하여 훨씬 내륙에 위치하고 있다. 표고도 50미터 안팎으로 상당히 높다. 과호교 문화와 하모도 문화의 시기, 사람들은 산간의 분지를 떠나 해안 근처의 평야부로 진출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지역에서 1만 년 전의 해안선은 현재의 그것보다 몇 백 킬로미터나 난바다 쪽에 있었기 때문에 해안 근처에 사람의 거주가 있었더라도 그 유적은 깊은 해저에 잠겨 버리고 말았다. 이제 와서 보면 찾아낼 길이 없다. 그러한 불확실함이 남아 있는 건, 어느 시기부터 '물가'라는 경관이 중요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라산 유적에서 행한 일본과 중국 공동 프로젝트에서는 출토 종실에 대해서도 상세히 분석했다(傳, 趙 최근 출간).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건 전라산 유적에서는 확실히 벼의 종자도 수없이 출토되지만, 마름의 알곡과 도토리(대부분은 개가시나무) 쪽이 수량에서는 벼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출토 종자의 수에서는 벼의 1/3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종자의 크기를 고려하면 가시연 알곡의 중요성도 무시할 수 없다. 출토된 종자의 숫자 비율이 각 식물이 당시의 식생활에서 점했던 비중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건 아니더라도, 벼가 출토되었다는 걸 곧바로 날마다 쌀만 먹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건 현대에 갖다 붙인 해석이어서 그러한 선험적 발상은 확실히 위험하다. 장강 유역에서 벼의 이용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하모도 문화기에 이르기까지 벌써 몇 천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벼는 아직 '보물의 하나'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벼농사의 기원은 돌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장기에걸친 완만한 과정이었다는 걸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전라산 유적의 꽃가루 분석결과에 눈을 돌려 보자. 꽃가루도 또 산과 알칼리에도 침범되기 어려운 단단한 외막으로 덮여 있어, 흙속에서 장기간 보존된다. 토양 표본 안에 포함된 꽃가루의 식물종 수량비를 통해 당시의 식생을 복원하는 것이 꽃가루 분석의 원리이다.


전라산 유적의 꽃가루 분석을 담당했던 사람이 카네하라 마사아키金原正明 씨이다. 유적이 거주하고 있던 당시의지층에서는 부들과와 벼과 식물의 꽃가루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벼과 식물은 꽃가루의 형태만으로는 종까지 특정하기 어려운데, 잎의 세포 화석 분석 결과 등을 감안하면 그 대부분은 갈대와 벼였다고 생각해도 좋다. 부들도 갈대도 벼도 습지의 식물이며, 규조 분석의 결과와도 부합한다. 이러한 물가 식물과 함께 많이 산출된 것이 북가시나무 아속을 주로 하는 조엽수의 꽃가루이다. 습지를 에둘러싼 높이 100미터 정도의 좀 높은 산들은 조엽수가울창한 숲으로 뒤덮여 있었다는 걸 말한다. 그곳에서는 가을이 되면 도토리가 가지가 휘도록 열매를 달았을 것이다(개가시나무도 북가시나무 아속인 식물이다).


갈대와 부들이 습지의 가장자리에 군락을 형성하는 데 반해, 조금 수심이 잎은 곳에는 마름과 가시연이 많이 살고 있었다. 유적에서는 잉어와 붕어 같은 민물고기, 거북과 자라 같은 파충류, 오리와 기러기 같은 조류의 뼈도 무수히 출토되었는데, 식물만이 아니라 동물에 대해서도 늪과 못의 자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수렵의 대상이었던 포유류로는 물소와 각종 사슴 종류가 주체를 점하였는데, 이들도 물가에 모이는 습성을지닌다. 이미 벼의 재배도 시작되고 돼지도 사육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물가의 환경에서 수렵, 어로, 채집으로 얻을 수 있는 먹을거리가 식생활의 대부분을 점하며 도토리 같은 산야의 산물이 그것을 보충하는 생업경제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다종다양한 자원을 광범위하게 이용하는 생업경제의 상태를 고고학, 인류학의 분야에서는 '다각적 경제(broad-spectrum economy)'라고 부른다.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1만여 년 전, 최후의 빙하기를 극복한 뒤에 비로소 이 다각적 경제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일반 독자는 의외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식물의 종자와 뿌리를 통해 탄수화물을 얻고 물고기와 물새의 고기에서 단백질을 얻는 식생활은 기껏해야 1만 년 정도의 역사밖에안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사의 방향을 결정짓는 매우 중대한 신기원이었다. 식물질 먹을거리의 이용이 시작된 건 특히 중요하다. 그 결과 일어난 물질문화의 커다란 변혁이 토기의 발명이며, 사회적인 크나큰 변혁이 정주생활의 개시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와 아울러 가장 일찍 농경이 시작되었던 서아시아에서 토기는 출현 당초 주로 저장용기로 사용된 것 같다.  그에 대하여 동아시아에서는 취사의 도구로 시작되었다. 중국 남반부에서는 벼, 북반부에서는 조와 기장 같은 잡곡이 우선 재배되었는데, 그 이전 단계인 채집단계에서도 녹말을 알파화하여 소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가열이 필요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토기에 넣고 펄펄 끓이는 것이다. 도토리의 경우 생식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모밀잣밤나무와 개가시나무) 가열하면 맛이 좋아지고 해충이 구제되고 오래 보존할수 있는 장점이 있었으며, 탄닌을 많이 포함해서 떫어 먹을 수 없는 종류의 도토리에서 떫은맛 제거를 촉진하는 효과도 있었다.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토기 제작의 개시는 식물질 먹을거리의 이용과 깊은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용되는 식물의 종류가 달랐을 뿐이다. 일본에서 도토리 종류에 더해 밤, 칠엽수 같은 견과류와 좀처럼 증명하긴 어렵지만 각종 근경류가 대상이 되었던 듯하다. 한편 중국에서도 일본과 거의 같은 종류의 견과류와근경류가 존재했는데, 거기에 벼와 조, 기장 등의 벼과 초본과 대두(중국 동북지방부터 화중에 걸친 지역이 원산지일 가능성이 높음)가 더해져 있었다. 그 뒤의 두 가지가 큰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식물질 먹을거리에 대한 의존이 강해진 결과 정주화가 촉진되고, 인구는 증가한다. 그 메카니즘에 대해서는 전에상세히 서술했기 때문에(中村 2002), 여기에서는 반복하지 않는다. 특히 정주 마을의 형성이란 점에서는 중국보다 일본 쪽이 선행할지도 모른다. 그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인구는 변동을 반복하면서도 서서히 우상향으로 계속 증가해 머지않아 국가의 형성과 도시의 발생 -문명의 탄생이라 바꾸어 말해도 좋은- 으로 우여곡절 끝에이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중국에서는 기원전 4천년대의 후반부터 3천년대의 후반까지 1천 년 사이에 각지에서 그것이 달성되었다. 일본의 조몬시대 중기부터 후기에 걸친 시기에 해당한다. 확실히 일본에서도 조몬시대 중기에는 수많은 마을이 경영되어 이 시기의 인구도 상당히 많아졌다고 추정된다(今村 1997). 환경조건에 혜택을 입었던 '풍요로운 수렵채집민(affluent forager)'의 한 도달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중기에 정점에 이르른 조몬인의 번영도 오래가지 않았다. 후기에 들어서면 적어도 동일본에서는 급격한 인구 감소가 있었던 것이 출토 주거터 수의 분석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 이유는 반드시 명확한 건 아니지만, 힙시서멀기 이후 기후의 한랭화, 건조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자연의 은혜에 전면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수렵채집민의 한계가 있었다. 


일본에서도 완신세 당초부터 식물질원의 이용이 시작된 것은 중국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벼, 조, 기장, 대두 같은 한해살이 초본의 야생종이 존재하지 않았던 일본 열도에서는 채집의 대상이 견과류와 근경류였다. 견과를 다는 목본류는 종자번식이라 하여 생장이 느리고, 근경을 이용할 수 있는 초본류는 영양번식이었다. 인간이 활용하기 좋은 형질을 선택하고 그것을 재배종으로 고정시켜 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며, 결과적으로 오래 채집 단계에 멈출 수 없었다. 도토리를 먹든지 벼를 먹든지 출발점에서 차이는 종이 한 장임에도 불구하고, 재배화가 가능한 야생의 한해살이 초본의 유무가 몇 천 년의 시간을 거쳐 일본과 중국 두 곳의 사회 진화에 결정적인 차이를 가져왔던 것이다. 벼의 재배화에 성공했던 중국에서는 관개논의 창출에 의하여 기후의 악화에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인구가 급감한 조몬시대 후기의 일본 열도에서는 주술에 관한 각종 기물이 성행한다. 거기에는 자연을 두려워하고 주술에 침잠하여 자연의 은혜에 매달리려 한 인간의 모습이 있다.일본 열도의 주민이 자연의 위력이 지닌 주문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연이 아니라 인간을 두려워하게 되는 데에는 야요이 시대 초기에 열도의 밖에서 벼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이주를 기다려야 했다. 



① 야생 벼의 채집 -토기, 석제 갈판, 목제 절구

② 야생 벼 종자의 인위적 파종


③ 재배 벼 형질(비탈립성)의 출현


④ 재배 벼 형질의 확립(=야생 벼와 유전적 격리) -논


⑤ '벼농사 문화'의 성립 -벼농사 제사 관련 유물


⑥ '벼농사 사회'의 성립

그림1-4 벼 이용의 개시부터 벼농사 사회로




벼농사 사회 성립까지 지나는 길


채집에서 재배로


벼가 출토되면, 당시 사람들이 벼(쌀)를 주식으로 삼았을 것 같다고 하는 생각의 위험은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벼가 재배된다고 하면 그 문화는 '벼농사 문화'이고, 그 사회는 '벼농사 사회'라고 하는 것도 대단히 난폭하고 안이한 의론이다.


그림1-4는 벼 이용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강화되어 나아가는 과정을 정리한 것이다. 먼저, 인간에 의하여 식용이된 야생 식물이 자생하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특히 벼과 식물처럼 종자가 작고, 또 먹기 위해 전처리가 귀찮은(왕겨를 벗기고, 게다가 가열해야 함) 경우는 대량으로 채집하기가 쉬워야 한다. 광대한 초원에서 여기 한 포기, 저기 또 한 포기 식으로 자라서는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완신세 전반의 온난화 시기에 장강 유역에서 대규모 야생 벼의 군락이 출현했음이 틀림없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야생 벼를 채집하는 데에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지는 않다. 야생 벼는 탈립성을 지니고 있다. 탈립성이란 익은 알곡이 자연스럽게 훌훌 이삭에서 떨어지는 성질이다. 알곡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용히 벼 포기를 밀어 헤치면서 익은 알곡을 손바닥으로 훑어서 모으는 게 좋다. 그럼 효율이 나쁘다고 하면, 큰 소쿠리라든지 천을 마련하여 이삭을 쳐서 그 안에 알곡을 모으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돌칼이나 돌낫 같은 도구는 필요 없다고 하기보다 쓸데가 없기 때문에 유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즉, 야생 벼의 채집 단계는 존재했음이 틀림없지만, 그것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꽤나 성가시다. 다만, 상황증거가 되는 것이 탈부脫稃(왕겨를 제거하는 일)를 위한 목제 절구나석제 갈판 같은 도구류와 쌀을 가열하는 데 쓰인 토기의 존재이다. 토기와 갈판은 완신세의 개시와 거의 같은 시기에 장강 유역에도 출현한다. 지금으로서는 쌀을 끓이고, 알곡을 찧는 도구 등의 유물 자체를 직접 증거로 삼을 수는 없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모순은 없다. 


대저 야생 벼가 탈립성을 가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익은 알곡이 언제나 이삭에 달려 있다면, 그것은 동물에게 먹혀 버려 자손을 남길 수 없다. 운 좋게 동물에게 먹히지 않더라도, 알곡이 그대로 달린 이삭이 지면에 이르면 한곳에서 많은 종자의 싹이 나게 되어 이후 생장에 불리해진다. 그러므로 익은 알곡은 저절로 지면에 떨어지게 할 수 있다.


야생 벼가 탈립되는 장치는 벼알가지와 붙어 있는 알곡의 아랫부분에 떨켜라는 조직이 생김으로써 작동한다. 알곡이 익으면 그곳에서 맥없이 떨어진다. 그때 알곡의 아랫부분에는 표면의 매끄럽고 얕은 우묵한 곳이 남는다. 그에 반하여 탈립성을 잃은 재배 벼는 이삭에서 알곡을 억지로 잡아당겨 뗄 경우에 알곡의 아랫부분에 작은 혹 모양의 돌기가 남는다. 


이런 알곡 아랫부분 형상의 차이에서 야생 벼와 재배 벼를 구별할 수 있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은 이 책의 감수자인 사토 요이치佐藤洋一 씨였다(佐藤 1996). 사토 씨는 하모도 유적에서 출토된 벼 알곡을 전자현미경으로 공들여 관찰하고, 그곳에 야생형과 재배형 두 가지 유형이 있다는 걸 밝혔다. 이 판별법은 그뒤 중국인과 미국인 연구자에게 이어져, 절강성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알곡을 대상으로 활발한 연구가 행해지게 된다.


절강성 문물고고연구소의 정위엔페이鄭雲飛 씨 등은 전라산 유적과 그와 거의 동시기의 동향라가각 유적(마가빈 문화)에서는 야생형 대 재배형의 비율이 거의 반반이며, 이 두 유적보다 1000년쯤 오래된 과호교 유적에서는 약6대4의 비율이라고 보고한다(鄭, 孫, 陳 2007). 정씨 등에 의하면, 재배형의 탈리흔 특징은 현재의 자포니카형 재배 벼의 그에 합치한다고 한다. 그것이 확실하다면 자포니카형과 인디카형의 재배 벼는 각각 독립하여 재배화되었을 것이고, 중국 장강 유역에서 가장 일찍 재배화된 것은 자포니카형이라는 상정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또 정위엔페이 씨는 다른 논문에서 상산 유적의 출토품을 다루어, 그곳에서도 재배형의 탈리흔 특징을 지닌 알곡이 존재한다고 기술하고 있다(鄭, 孫 2007). 매우 흥미로운 자료인데, 표본의 수가 지극히 적은 것 같아 결론을 내기에는 조금 더 비슷한 사례의 증가를 기다리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미국인으로 현재는 영국 런던대학에서 일하는 D. 풀러(중국 이름 博稻鎌) 씨 등도 전라산 유적 출토 알곡의 분석을 직접 다루고 있다. 그들은 1185알의 알곡을 조사해, 그 가운데 39%가 야생형, 24%가 재배형, 그리고 나머지대부분(25%)은 야생형인지 재배형인지 판별하기 어려운 미성숙 알곡이라고 한다.


미성숙 알곡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풀러 씨 등의 생각은 이러하다. 야생 벼의 등숙 시기에는 차이가 있다. 모든 알곡이 완전히 익는 것을 기다려 채집하려고 하면 이미 그때에는 대부분의 알곡이 떨어지게 된다. 효율 좋게 대량으로 모으려면 일부는 거의 익었지만, 미성숙인 것도 꽤 남아 있는 단계에 채집하는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채집한 알곡 안에는 미성숙인 것이 일정량 섞이게 된다. 


미성숙인 알곡까지 함께 훑어 버린 듯한 야생 벼의 수확법이 있었다고 하면, 그것은 진화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벼가 아닌 밀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힐먼 등의 외알밀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등숙 시기 직전의 외알밀을 계속 베어 그 가운데 일부를 파종하면 몇 십 년이란 단기간에 탈립성을 상실한다는 의미를 지닌 '재배종'이 출현하는 일이 나타난다(Hilman and Davies 1992). 이것이 벼에도 해당된다고 하면, 야생 벼를 채집하는 선사인의 평범한 욕심쟁이가 우연히 야생 벼에서 비탈립성이란 형질의 진화를 재촉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게다가 그것은 매우 단기간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야생 벼 채집의 개시와 거의 동시에 '재배종'이 출현했다고 적어도 겉보기는 그렇게 보인다는 걸 암시한다. 즉, 그럼1-4의 ①-③의 여러 단계는 존재했을 것이고, 이 순서로 연달아 일어났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재빠른 연쇄반응으로 단기간에 연속하여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것을 고고자료로 완전하게 확보하는 것이 어렵다.


탈립성을 잃은 재배형이 출현해도 그주변에 아직 많은 야생종이 자생하고 있다면, 선사인들은 변함없이 그 두 가지를 계속 수확했을 것이다. 그 결과 유적에서도 두 유형이 남아 있다. 전라산 유적과 하모도 유적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알곡이 이삭에 달린 채로 남아 있는 포기 쪽이 더 많은 종자를 회수할 가능성이높기 때문에, 재배형의 비율은 서서히 증가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재배형이 늘어나더라도 야생종과 혼재하는 상태에 있는 한 수확된 알곡에 야생종의 그것이 일정량 포함되는 일은피할 수 없다. 벼는 자식성 식물이고 기본적으로 제꽃가루받이를 하지만, 약간은 자연교잡이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다. 야생 벼의 탈립성 형질은 재배 벼의 비탈립성 형질에 대하여 우성이기 때문에, 둘이 교잡할 경우 다음세대의 포기는 탈립성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배종과 야생종이 같은 장소에서 자라고 있으면, 재배종의 종자만 수확하는 일이 곤란하고 그렇게 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현재 장강 유역의 벼농사 지대를 다녀도 실제로 보이는 건 논에 심는 재배종뿐이다. 논 안은 물론, 농수로의 주변과 늪과 호수 주위에도 야생 벼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모도 문화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7000년 사이의 어딘가에서 이와 같은 상황이 출현한 것이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건, 6000년 전쯤을 정점으로하는 온난기, 힙시서멀기 이후 기온이 서서히 냉량, 건조해지면서 야생 벼의 군락은 완신세 초기에 북상했던 것과 반대로 서서히 남하하여, 이윽고 장강 유역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원인은 원래 야생 벼가 번성했던 토지가 논과 양어장으로 조성되어 간신히 남아 있던 군락도 '잡초'로 여겨져 구제되어 버렸다는 인위적 영향이다. 아마 이 두 가지가 야생 벼의 소멸에 작용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유적에 남아 있던 알곡의 형상을 조사하여 이 문제에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고도 생각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재 있는 고고자료는 아직 그것을 허락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 더구나 유적에서 출토된 알곡의 경우에는 또 다른 선입관에 빠지게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그 선입관이란 마을 주변의 자연습지에는 아직 야생 벼가 생육하고 있더라도 이미 그것을 채집하는 일은 거의 없고, 오직 인공 논에서 재배된 재배종만 수확하는 상황이다. 당연히 유적에서는 재배종의 알곡밖에 출토되지 않는다.


벼는 자식성 식물이다. 꽃가루의 수명은 몇 분 정도로 짧아 멀리까지 날아가서 다른 꽃을 수분시킬 수는 없다. 이삭 패는 시기가 같은 품종이어도 20미터 떨어져 있으면 교잡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재배형의 포기를 야생종이 자생하는 자연습지가 아닌 그것과는 별도로 인공적으로 조성한 농지 -이곳을 '논'이라 불러도 좋다- 에 재배하게 되면, 탈립성이란 형질도 유전적으로 고정된다. 또한 인공 농지가 있으면 물높이도 조절할 수 있고, 벼와 경합하는 잡초도 제거하기 쉽다. 결과적으로 자연습지에 야생 벼와 섞어 심는 경우와 비교하여, 더욱 안정적으로더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것을 사람의 쪽에서 바라보면, 벼를 재배하기 위하여 투하하는 노동력의 측면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지난해 수확한 알곡을 봄에 습지에 파종한 다음 가을의 수확을 기다릴 뿐과 같은 정도라면 일다운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익은 알곡을 수확하는 것도, 마름과 가시연의 열매를 모으거나 산에서 도토리를 줍거나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산야의 은혜를 받아들인다는 감상이지 자신들이 만들어 냈다는 의식은 희박하지 않았을까?


그에 반하여 인공 농지=논에서 벼를 재배하는 걸 생각하면, 먼저 그 조성에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 점이 무엇보다도 큰 차이이다. 논이 완성되면 그것으로 끝날 리가 없다. 수로와 논두렁을 수복하거나, 물높이를 조절하거나, 잡초를 뽑거나 하는 일상적인 작업의 연속이다. 자연히 쌀은 다른 채집 식물 먹을거리와는 별개로 특별해지고, 자신들이 만들어 낸 것이란 의식이 싹텄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벼농사 문화란 '벼농사를 영위하는 민족 사이에서 대부분 공통으로 인정되는 벼농사와 복합된 문화 요소, 즉 생산기술과 사회양식, 신앙과 의례, 생활양식 등에 대하여 보편성을 가진 하나의 문화 체계'라고 정의하고 있다(渡部 1987). '벼농사 문화'란 단어를 이러한 의미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논에서 인공 재배를 개시한 이후가 되어서 처음으로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베어 거둘 뿐, 그것을 벼농사의 '생산기술'이라 할 수 있을까?


'신앙과 의례'에 대해서는 한술 더 뜬다. 벼농사 농경민은 1년을 통틀어 벼농사에 관한 제사를 집행한다. 정원의 예축의례를 시작으로 파종과 모내기, 벌레 쫓기, 베어 거두기와 절일마다 그를 행한다. 이와 같이 하나로 이어진 의례의 배경에는 벼의 풍양을 관장하는 신들의 체계가 있고, 그 유래를 이야기하는 신화가 있다. 그래야 벼농사에 관한 '신앙과 의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논농사가 시작되어 벼를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한 생업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 단계에서 처음으로 '벼농사 문화'가 성립했다고 할 수 있다. 단 그 단계가 되어도 사람들은 생명의 양식을 벼(쌀)에만 의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산야의 식물을 모으고, 동물을 잡고, 물고기를 붙잡는 일도 여전히 계속하고 있었다. 돼지 등의 가축 사육도 있었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에 따라 다른 생업이 점하는 비중은 서서히 줄어들고, 벼농사를 향한 기울기가 더욱더 급해져 갔다. 


벼농사를 향한 기울기가 급해졌다는 건 무슨 말일까? 한 가지는 농지의 확대이다. 마을 주변은 이윽고 벼이삭이 파도를 치는 논으로 가득해졌다. 그 이상으로 경작 적지를 얻을 수 없게 되거나, 구할 수 있어도 거기까지 거리가너무 멀거나 하면 마을사람 가운데 일부가 신천지를 구하러 마을을 떠나게 되었을 것이다. 벼농사의 '전파'라든지 '확산'이라 할 수 있는 현상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새로 마을을 만드는 일을 반복한 결과이다. 


또 다른 한 방법은 집약화이다. 인구가 2배로 늘었다고 해서 반드시 논 면적도 2배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만약 같은 면적에서 지금까지보다 2배의 수확량을 올릴 수 있다면 따로 농지를 확대하지 않아도 된다. 단숨에 2배라고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벼는 그러한 인간의 방자함에 답할 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돌연변이에 의하여 생긴 다수성의 계통을 찾아내, 그것을 보호하면 수확량을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었다. 똑같은 일을 다른 채집식물과 수렵동물에게도 행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주변의 나무 가운데 2배의 열매를 다는 도토리 나무가 때마침 있었다고 하자. 그것을 늘리기 위하여 다른 나무를 뽑아 버리고 대신에 그 도토리를 심는 일 등을 누가 시도할까?아무튼 산이 그 도토리의 숲으로 덮이는 데에는 10년이나 20년 전의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수렵과 어로의 대상이 되는 야생동물의 경우는 더욱 곤란하다. 사람들이 지금의 2배로 사슴을 얻고 싶다고 염원해도 도대체 어떤 방책이 있을까? 다른 일을 팽개치고 날마다 사슴 사냥에 몰두하면 단기적으로는 그것을 달성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항상화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슴의 수는 해마다 감소 일로를 걸을 것이다. 


집약화가 가능하다는 이 특성이야말로 벼를 비롯한 한해살이 초본 작물의 최대 이점인 동시에, 두려운 올가미이기도 하다. 인구의 증가와 작물에 대한 의존도 증대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이고,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개미지옥' 같은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머지않아 그것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상태에 빠진다. 그와 같은 사회의 상태를 '벼농사 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그림1-4로 되돌아가 정리하도록 하자. ③의 단게에서 재배 벼의 형질이 출현하는데, 이것은 논에서 벼를 재배했다는 것을 의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날마다 쌀만 먹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말로 획기적이라 부르는 건 다음 ④의 단계이다. 출토 알곡의 형상이 재배형으로 거의 통일된 건 벼의 재배가 야생 벼의 생식지에서 공간적으로 격리된 결과 생식적인 격리도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벼 전용 농지, 이른바 논은 기술문화사의 큰 혁신이며, 문화 전반의 양상도 차례로 벼농사 중심으로 편성되어 나아간다. 그것을 일러 ⑤'벼농사 문화'의 성립이라 한다. 벼농사라는 생업은 자기증식적으로 비대화되어, 어느 사이에 벼농사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사회가 이루어진다. ⑥ '벼농사 사회'의 성립이다. 이 ④의 단계부터 ⑥의 단계에 이르는 과정도 자연계의 여러 변동과 이변에 따른 대폭적인 인구 감소가 아닌 한 비교적 빠르게 진전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①부터 ③까지와 ④부터 ⑥까지가 각각 하나의 결말이 되어 그 둘의 사이에는 몇 천 년이란 상당히 오랜 시간적 동떨어짐이 존재하는 것이다.



벼농사 문명으로 가는 길


여기에서는 벼 이용의 개시부터 벼농사 사회의 성립에 이르는 과정을 실제 고고자료에 대조하면서 살펴보려고 한다. 절강성에서 최근 들어 점점 구석기시대 유적의 탐색이 시작된 참이어서 지금으로서는 정보가 매우 부족하다.태호 서남의 구릉과 저산지대에 몇 개의 유적이 발견되고 있는데, 그 시대적 자리매김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토기와 간석기를 가진다는 의미를 지닌 신석기 문화는 약 1만 년 전에 시작되었다. 그 시기를 대표하는 유적으로포강浦江 상산 유적(약 1만 년 전)과 승주嵊州 소황산 유적(약 9000년 전)이 있다. 모두 토기 바탕흙에 대량의 벼 알곡이 섞여 있으며 유적 토양에서도 벼잎의 세포 화석이 검출되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먹을거리로 벼를이용하기 시작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재배라고 부를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직 평가가 나뉘고 있다. 대량으로 출토된 석제 갈판과 갈돌이 벼의 알곡을 가는 데 쓰였는지, 또는 견과 등을 갈아 으깨기 위하여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토기의 다수를 점하는 건 입구가 크고 밖으로 벌어지는 세면기 같은 모양으로, 표면에는 붉은색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상식적으로는 끓이는 용도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유적에서 주먹 크기의냇돌이 많이 출토되었기에, 그것을 달구어 '세면기'에 넣어 끓였던 것이 아닐까 하는 설도 있다. 일본의 농촌 요리 등에도 있는 이른바 스톤 보일링이란 방법이다. 물론 말도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국을 끓이는 데에는 적합하더라도 밥을 짓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상산과 소황산 두 유적이 표고 50미터 정도의 산간 분지에 위치하는 것에 대하여, 약 8000년 전부터 거주가 시작된 소산蕭山 과호교 유적의 현재 지표면의 높이는 불과 표고 4미터 정도밖에 안 된다. 당연히 당시 거주면의 높이는 가장 낮아진다. 이 유적은 가을의 사리일 때 바닷물이 역류하는 것으로 유명한 전당강의 바로 옆에 있다. 8000년 전이라면 해수면의 높이가 현재와 그다지 차이가 없는 수준까지 도달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유적은 7000년 전쯤까지는 바다 속에 잠겨 버렸다. 그것을 굳이 저지대에 마을을 이룬 건 '물가'의 자원에 크게 의존하는 생업양식이 이 무렵 시작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출토된 동물뼈를 보아도 포유류로는 사슴류와 물소(야생이라 생각됨), 파충류로는 거북류와 양자강 악어, 조류로는 기러기와 오리류 및 두루미가 주체를 점하고 있어, 그 상정을 뒷받침한다. 출토된 식물의 씨앗을 보아도, 남방멧대추, 복숭아, 각종 견과류 같은 산의 산물과 함께 마름과 가시연이 출토된다.


벼도 마름이나 가시연과 마찬가지로 '물가'의 채집 식물자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정위엔페이 씨 등은 알곡의 형상에 대하여 야생형 대 재배형의 비율이 약 6대4라고 보고한다. 재배형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탈립성의 상실을 의미하는 데 지나지 않고, 채집을 계속하면서 자연히 출현할 수 있는 형질이다. 기본적으로는 벼도 모두 채집된 것이라 생각해도 잘못된 건 아니다. 다만 상산과 소황산을 비교하면, 토기의 기종 분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명확하게 끓이는 용도의 그릇이라 할 수 있는 기종인 '솥'도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식생활에서 식물질 먹을거리 중에서도 쌀의 비중이 꽤 상승했다고 할 수 있다. 인공 재배가 시작되었다는 가능성도버리지 못한다.


그 뒤를 잇는 것이 7000-5500년 전이라 연대를 부여하는 하모도 문화이다. 하모도와 전라산 같은 유적이 늘 물에 잠길 듯한 저습지에서 경영되었다는 건 앞에서 서술했다. 기본적으로 과호교 문화와 마찬가지로 '물가'의 생업 전략을 취했다. 벼잎의 세포 화석 밀도가 높은 토층이 몇 층이나 발견된다는 것을 중시한다면, 이 시기에 이미야생 벼의 생식지로부터 공간적으로 격리된 '논'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토기에 대해 말하면 '솥'이 주체를 점할 뿐만 아니라 조금이지만 쌀을 찌기 위한 전용 그릇이라 할 수 있는 시루가 출현하기 때문에, 먹을거리로서 쌀의 중요성이 다른 채집 식물에 비해 한 등급 위의 존재라고 간주할 수 있게 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하모도 문화라고 하면 곧바로 상기되는 것이 물소와 사슴의 견갑골로 만든 '뼈보습'이다. 이것은 기둥 구멍과 저장 구덩이의 굴삭, 물가의 둑 등의 토목작업에도 쓰인 도구로서 일괄적으로 농기구라고 단정지을수는 없는데, 흙을 쌓아 올려 간단한 두둑을 만드는 농작업에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하모도 문화가 그것 이전의 여러 문화와 크게 다른 점은 정신생활에 관한 기물이 풍부해졌다는 것이다. 토제와 골제 상 또는 토기 표면의 선각화로 직접 지각할 수 있는 형태의 동식물과 인물의 묘사가 왕성하게 이루어졌다(그림1-5). 토제 동물상에는 돼지(멧돼지), 양(?), 물소, 코끼리, 새, 물고기 등이 있다. 토기 표면에 선각된 사례와 함께 그들 동물이 가축 또는 수렵 대상으로 많이 구할 수 있기를 기구하는 유감주술에 관한 주물이라 생각한다.  


식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주발의 외면에 묘사된 '벼이삭 문양'(그림1-5의 7)은 벼의 풍년 기원에 관련된다. 이른바 '오엽 문양'(그림1-5의 8)에 대해서는 제사용 길상물인 '만년청 분재' 또는 어떠한 약초라는 견해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이삭 패는 시기의 벼이삭이라 하는 설이 있다. '물고기와 물풀 문양'(그림1-5의 9)에 대해서는 짝을 이루는 동물이 새인지 물고기인지 견해가 나뉘는데, 적어도 오른쪽 그림에 대해서는 물고기와 벼를 같은 화면에 묘사해 둘 모두 풍부해지기를 기원하는 것이란 설이 옮게 여겨진다. 식물 중에는 특히 벼가 중시되었다는 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림1-5. 하모도/ 마가빈 문화의 제사 관련 유물(3, 6 라가각 유적, 기타는 하모도 유적)




하모도 문화가 항주만 남쪽 기슭의 영소寧紹 평야에 전개된 데 비해, 항주만 북쪽 기슭의 항가호杭嘉湖 평야는 마가빈 문화의 분포 구역이다. 연대로 보면 7000-5800년 전으로 둘 수 있다. 이 지역은 영소 평야와는 달리, 산과 구릉이 거의 없는 낮은 평지이다. 한번 홍수라도 일어나면 도망갈 곳이 없을 것이다. 출토 유물을 통해 보는 한, 생업경제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하모도 문화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지만, '물가' 그리고 벼로 기울어짐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것이 확실한 '논'이 이 마가빈 문화의 후기(6000년 전쯤)의 유적에서 발견된다. 강소성 소주시의 초혜산草鞋山과 곤산시昆山市의 작돈綽墩 유적이다. 상세한 건 이 책에 실린 우다 노츠宇田津 논문을 보시길 바란다. 물론 이 연대는 늦어도 그 시기까지에 '논'이 출현했다는 걸 보여준다. 그것이 1000년 또는 2000년 더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은 남아 있다.


마가빈 문화 전기의 유적인 동향 라가각 유적에서는 토제 남성 전신상이 출토되었다(그림1-5의 6). 그 과장된 남성기의 표현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농지를 여성, 경운도구를 남성이라 보는 성적 상징주의는 세계 각지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Eliade 1968). 일본의 야요이 시대에는 특이한 목제품으로 '남경형'이란 기물이 있다. 문자 그대로 남근을 본뜬 것인데, 이것도 똑같은 상징주의에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中村 1999). 그러한 점에서 마가빈 문화 전기까지로 논의 창시가 거슬러 올라가 수 있다고 나는 추측한다. 


그에 이어지는 것이 송택崧澤 문화로 5800-5300년 전의 연대를 부여할 수 있다. 이 시기가 되면 동물 유존체에수렵대상 짐승이 점하는 비율이 뚜렷하게 저하되고, 가축인 돼지의 비율이 증가한다. 저습지 유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식물질 유물이 남기가 나쁜 데에도 기인할 것인데, 벼 이외의 채집 식물의 검출 사례는 매우 적다. 이런 점은 생업형태가 다각적 경제에서 벼농사 전업 경제로 이행해 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에 보조를 맞추듯 쌀 조리 전용 도구인 시루와 세발솥이 끓이는 용도의 토기를 주로 점하게 된다. 강소성 소주시의 징호澄湖 유적에서는 논터가 검출된다.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가늘고 긴 일정하지 않은 모양인데, 논 한 배미당 면적은 현격한 차이가 난다. 


정신생활면으로 눈을 돌리면, 하모도 문화와 마가빈 문화에서 성행하던 토제상과 토기 회화가 거의 모습을 감추는 것과 함께, 형상 토기(그 일부에 동물과 인물을 본뜬 토기)와 채색 토기, 그리고 토기 표면의 추상부호가 눈에띈다. 채색과 조소, 선각이 장신된 것은 이질泥質 회도灰陶(불순물을 제거한 점토를 써서 환원염소성한 회색 토기)또는 흑피도(이질 회도의 표면에 탄소를 부착한 흑색 토기)의 두, 호, 관 같은 저장, 공헌供献 토기류이다. 아마 벼의 풍작을 신에게 감사하는 의식에 관련된 기물이라 생각한다.


이들 특이한 토기류는 주로 무덤의 부장품으로 발견되는데, 그러한 무덤에는 귀걸이와 목걸이 같은 초현기初現期의 연옥 제품이 동반되는 일이 많고, 또 그와 같은 무덤이 공동묘지 안의 한 구획에 집중되어 설치된 경우가 많다. 즉, 이 시기에는 제사의 복잡화와 제사집행자가 되는 특정집단의 분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른바 공동묘지는 하모도 문화, 마가빈 문화의 시기부터 존재하는데, 그 단계에서는 무덤의 배열, 부장품의 종류, 많고 적음, 정교함과 조잡함 등으로 집단의 차이를 유추하기가 곤란했다는 점이 큰 차이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송택 문화의 물질문화를 계승하여 5300년 전쯤에 시작되고, 그로부터 800년 정도 이어진 것이 양저良渚 문화이다. 무덤에 대량의 옥기(=연옥 제품)를 부장한 집단은 자신들만의 묘지를 영위하게 된다. 그것은 종종 대규모 봉분(흙을 쌓아 올린 흙더미)과 대상묘(산비탈을 깎아낸 테라스)의 형태를 취한다. 제사를 집행하는 집단이 일반 서민과 동떨어진 지위를 손에 넣고 묘지의 조성에 대량 노동력을 자의적으로 동원하는 것이 가능해졌음을 보여준다. 


옥기에는 매우 정세한 문양이 새겨진다(그림1-6). 아직 금속기가 없던 시대이다. 석영 같은 단단한 돌조각이라든지 상어의 이빨을 사용하여 조각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한 점의 옥기를 제작하는 데에만 적어도 몇 개월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때로는 하나의 무덤에 그것을 수십 점이나 넣기도 했기에, 전문 공인이 언제나 그 제작에 종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고도의 전업생산이 행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건 옥기만이 아니다. 복잡, 정치한 음각선 문양을 장식한 토기류와 각종 석기류도 그러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문 공인에 의한 수공업 생산을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이 벼농사 농업의 집약화였다. 돌쟁기는 송택 문화기 후반부터 출현하는데, 양저 문화기에는 대형화되어 그중에는 길이 60cm에 이르는 것도 있다. 가축(아마 물소)이 견인하지 않았을까 한다. 쟁기를 끌고 다니려면 작은 면적의 일정하지 않은 모양인 논에서는 사정이 나쁘다. 현대의 논과 그만큼 차이가 없는 논이 이 시기쯤에는 출현했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고고학적으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수확 도구인 돌낫이 널리 분포하게 된 점의 의미도 크다. 논 안에는 이미 탈립성의 그루는 존재하지 않고 품종개량의 진전에 의하여 벼의 익음때도 균일화되어 벼 그루를 묶음으로 잡아서 밑동을 벨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돌쟁기와 돌낫 등의 석기에 대해서도 특정 생산지에서 전업생산이 이루어졌으리라 상정할 수 있는데, 석제 농기구의 생산과 분배를 정치적 지배자가 좌지우지하고, 공납품으로 받는 벼의 증산을 도모했을 가능성까지 있다. 그 보상으로 지방의 지배층에게 하사한 것이 각종 옥기였다고 나는 생각한다(Nakamura 2005).


이 시기의 제사, 종교를 특징짓는 핵심어가 '신인수면문神人獸面紋(신의 체구와 괴수의 안면을 본뜬 문양)'이다(그림1-6의 2). 주로 옥기에 도상으로 등장하는데, 상아기와 토기에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아마 그것은 흉악한 짐승 신을 통제하고 자유롭게 천공을 비약할 수 있는 신성神聖 왕=현인신의 모습을 그렸을 것이다. 


신인수면문 옥기의 분포는 양저 문화 분포지역의 전체에 퍼져 있다. 물론 시대적 변천은 있지만, 옥기의 형태, 문양의 지역을 뛰어넘는 공통성은 일관되게 계속 유지된다. 양저 문화기에 신 관념이 통일되었다는 것의 의미는 크다. 미국의 정치학자 찰즈 메리엄의 말을 빌려 이야기하면(메리엄 1973), 신인수면문은 지배를 시각적으로 납득시키는 일종의 미란다 원칙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그림1-6. 양저 문화의 옥기(모두 절강성 여항 반산 유적 출토)





옥기와 석기의 생산과 분배를 통제하는 정치적 지배자가 거주한 곳이 절강성 항주시의 서교에 전개된 양저 유적군이다. 동서 약 10킬로미터, 남북 약 6킬로미터의 범위 안에서 지금까지 130여 곳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면적 약 30평방미터의 막각산莫角山 토대, 길이 5킬로미터에 달하는 당산塘山 토루, 거기에 반산反山 봉분, 요산瑤山대상묘 등의 옥기 후장묘는 특히 유명하다. 


이 양저 유적군에서 최근 큰 발견이 있었다. 막각산 토대와 반산 봉분을 둘러싼 위치에 동서 1500m, 남북 1800m, 면적 270헥타르의 흙을 쌓은 위벽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게다가 그 규모는 산서성의 도사陶寺 유적과 견줄 신석기시대 중국 최대의 위벽 마을이다.(연대로는 도사 유적보다 몇 백 년 빠를 가능성이 높다). 양저 유적군의 경우 위벽 밖에도 유적이 농밀하게 분포하기 때문에, 실제 거주 구역은 더욱 넓을 것이 확실하다. 그 넓이는'하왕조'의 왕도로 보이는 하남성 이리두二里頭 유적(기원전 1750-1520년쯤)의 300헥타르를 능가한다. 이것을 도시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문명(civilization)이란 단어는 라틴어 civilisatio에서 유래한 것으로, 무엇보다 도시(civitas)와 밀접하게 연결된 개념이다(伊東 1985). 그 도시란 농업이 집약화되어 어느새 직접 농경에 종사하지 않는 '사회잉여'(=도시민)이 생겨나는 곳에서 형성된다. 그렇다면 양저 문화의 돌쟁기와 돌낫 같은 농기구를 그냥 단순히 농업기술사의 관점으로만 고찰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특별히 사회, 정치사적인 검토 과제라 할 수 있다. 


금속기가 출현하기 이전의 중국에서는 옥기가 최고의 예기로 기능했다. 그 제작과 사용을 전단하는 자가 종교적 권위를 획득하고 옥기 분배를 통하여 정치적 권력을 수중에 넣었다. 그와 같은 정권의 상태를 나는 '옥의 왕권'이라 부른다(中村 2003). 장강 하류에서 꽃이 핀 그 신석기시대 문명은 말할 것도 없이 벼농사에 기반을 둔 문명이었다. 그것은 결국 장강 유역의 다른 지역만이 아니라 황하 유역으로도 파급되어 나아갔다. 그곳은 원래 조와 기장 같은 잡곡의 재배지대이다. 더구나 시기적으로는 힙시서멀기 이후의 서늘하고 건조한 시기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벼농사는 북상하고 있었다. 벼농사 인간의 인구 증가에 따른 이주라고 단순하게 단정지을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아마 벼(쌀)는 종교의례에 필수 요소로서, 바꾸어 말하면 문명의 한 요소로서 전해졌던 것이다(中村 2006). 여기에서 우리는 벼농사의 전파와 확산이라고 하는 현상에는 인구학적인 메카니즘과는 또 다른 정치, 종교적 메카니즘도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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