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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라Andhra, 농업에 새로운 혁명의 씨를 뿌리다

 

 

안드라 프라데쉬Andhra Pradesh는 여성 농민을 주체로 하여 녹색혁명에서 분홍혁명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 사업은 한 주州의 경작지 60%를 유기농법으로 전환하는 작은 움직임으로 시작되었다. 최근 각광받는 소액 금융 지원을 통해 대출을 받은 여성 자조단체가 시작했다. 이미 백만이 넘는 농민이 지역사회가 관리하는 지속가능한 농업이라 불리는 사업을 통해 유기농법으로 전환했다.

 

그 사업은 생산성을 유지하며 농약과 화학비료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는 것을 주요 목표로 한다. 그 사업을 실행하는 농촌빈곤을 제거하기 위한 협회(The Society for Elimination of Rural Poverty)와 정부 기관은 커다란 협동조합과 농산물 시장에 직거래하는 연결망을 제공하고자 전국의 소매 유통업체와 협의하고 있다. 올해는 전체 생산물의 양을 넘어설 것으로 기대된다.

 

그 사업의 핵심 원리는 주의 사업 고문이자 SERP의 나이두Naidu 씨가 설명한다. “농부들은 생산비를 지불하고자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야 했습니다. 이는 종종 담보로 농토를 잡히는 일까지 벌어졌지요. 만약 농부가 지속가능한 농업을 통해 1헥타르에서 목화를 생산하면, 그는 농약비로만 약 250달러를 줄일 수 있습니다. 그건 그의 연간 수입의 56%에 해당합니다.”

 

인도의 지속가능한 농업에 대한 국가의 임무(The National Mission on Sustainable Agriculture)는 실천 방안과 주요 국가 전략으로 채택되도록 하는 데에 관심을 쏟고 있다. 그 사업에 ‘가장 잘 실천하는’ 농부가 그의 경험을 여성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정부는 올해 이 사업에 3억5000만 루피를 배정했는데, 그것은 벌써 결과를 내고 있다. 사업에 참여한 농민의 순이익은 농약을 줄인 만큼 늘어났다. 여기에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한 여성 자조단체는 흉작의 위험을 줄이고 생태계를 복원할 수 있었다. 2005~2006년 이후 3년 동안 참여자를 배출한 그 사업은 더욱 큰 규모로 퍼져 나갈 준비가 되었다.

 

 

written by Trushna Udgirkar, translated by 김서방

 

http://www.mydigitalfc.com/commodities/andhra-sows-seeds-new-revolution-agriculture-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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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생태농업 1 - 기존 문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쿠바의 생태농업은 진전하고 있는가

 

쿠바의 생태농업에 대한 책은 수없이 많이 나와 있다. 예를 들면 허드슨연구소(Hudson Institute) 세계 식량문제 연구센터의 데니스 에이브리Dennis Avery 소장은 <쿠바인은 거짓 음식으로 굶주린다(Cubans Starve on Diet of Lies)>에 이렇게 썼다.

 

“쿠바인은 1990년대 전반 소련의 보조금이 끊긴 뒤, 농업용 연료와 화학자재를 쓰지 않으며 스스로 자급하는 일을 영웅적으로 배웠다고 온 세계에 떠든다. 농민 협동조합, 생물농약, 유기비료를 자랑하고 있다. 지렁이 농법과 해충을 먹는 천적 벌, 그리고 트랙터를 대체하는 소 쟁기질도 자랑한다. 온 세계의 유기농업 활동가들은 여기에 정신이 팔렸다. 하지만 아바나에 주재하는 미국 이익 대표부 직원에 따르면, 현재 쿠바는 그 소비식량의 84%를 수입하고 있다는 점을 쿠바 농업성의 고위 관료가 스스로 인정한다고 한다. 유기농업이 성공했다는 말은 모두 거짓이다. 철의 장막 뒤에 앉아 있는 독재자가 자유세계를 속이려고 냉전시대처럼 행동한 것으로, 요란한 공산주의 방식의 커다란 거짓부리이다.”

 

이 에이브리란 사람은 오랫동안 유기농업을 비판하며 유전자조작 작물·농약·방사선을 쬔 식품·공업형 농업·자유무역을 지지하던 사람으로, <농약과 플라스틱으로 지구를 구한다 : 수확량이 많은 농업의 환경 승리(Saving the Planet With Pesticides and Plastic: The Environmental Triumph of High-Yield Farming)>(2000)라는 저작도 있다.

이와 관련하여 허드슨연구소에 자금을 대는 곳은, 아처 다니엘스 미들랜드Archer Daniels Midland, 콘 아그라Con Agra, 카길Cargill 등의 농산업 기업과 아메리칸 사이나미드American Cyanamid, 치바가이기Ciba-Geigy, 몬산토Monsanto, 신젠타Syngenta 등의 생명공학 및 농약 기업이다. 그가 바라보는 쿠바의 유기농업에는 꽤 삐딱한 면이 있다고 보는 편이 좋다.

 

한편, 쿠바의 유기농업을 오랫동안 지지한 피터 로제트와 미구엘 알티에리 박사는 쿠바의 생태농업을 절찬한다.

 

“우리가 아는 한 2008년 3번의 허리케인이 쓸고간 뒤, 쿠바는 그 소비식량(비공식 수치)의 55%를 수입하고 있다”며 쿠바가 식량을 수입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최근 쿠바를 방문한 사람들이 수집한 사례 증거를 통해 쿠바의 유기농업 생산력이 최근 떨어졌다고도 기술한다. 그렇지만 에이브리가 ‘쿠바의 생태농업 모델은 붕괴 직전이다’라고 단언하듯이, 쿠바 생태농업의 실적을 칭찬하는 모든 보고서도 ‘커다란 거짓부리이다’라는 점을, 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냐고 질문을 던지며 이렇게 계속한다.

 

“쿠바는 기후 변동으로 가장 피해를 받고 있는 나라의 하나이다. 하지만 2008년 3번의 허리케인 피해에도 상관없이 식량 자급을 유지할 수 있다는 점은 인상적이다. 생태농업은 쿠바에서 성장하고 더욱 강화되고 있다. 쿠바의 자립 소농 ANAP의 회원 수의 약 절반인 10만 세대가 생태농업을 통한 다양화를 실천하고, 상업적인 산업형 농업보다 훨씬 많은 식량을 같은 면적에서 생산하고 있다. 이러한 가족농업의 대다수는 캄페시노 운동(Campesino a Campesino)의 일부로서, 20%의 토지만으로 국내 식량의 65% 이상을 생산한다. 이러한 쿠바의 경험에서 나온 자료는 단일 작물의 수확량이 아닌 총생산량을 고려하면, 대농보다 소농이 뚜렷하게 생산적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연구를 확증한다. ANAP는 경험을 나누어 지역적 연구와 문제 해결 능력을 강화하는 데에 중점을 두고, ‘농민에게서 농민으로’라는 모델의 기술 혁신과 보급 과정을 통해 농민의 적극적인 참가에 특별한 관심을 쏟고 있다. 그리고 이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더욱 소규모인 농민도 이 생태농업 혁명에 참가하고 있다. 현재 정부는 귀농을 바라는 가족에게 최대 13.5ha의 농지를 제공했는데, 10만 건의 신청이 들어왔다. 목표는 쿠바의 식량주권을 확실히 하고자 150만ha를 생태농업으로 관리하자는 것이다.”

 

“도시농업의 업적도 성장하고 있는데 참으로 대단하다. 38,3000개의 도시 농장이 5만ha의 유휴지를 포함한 곳에서 150만 톤 이상의 채소를 생산한다. 아바나와 산타클라라 등의 도시에서는 70% 이상의 신선한 채소를 공급할 정도다. 도시 농장은 화학 합성 물질을 전혀 쓰지 않으며 1평방미터에 20Kg의 수확량을 올린다. 세계의 다른 어느 나라도 식료품의 이동거리와 에너지 사용을 억제하고, 지역 농산물 소비라는 흐름을 이끈 이 효율적 수준만큼 성공하지 못했다.”

 

피터 로제트와 미구엘 알티에리 박사는 최근의 10개 주州에서 농장의 실정을 조사하며 몇 백 명의 농민, 농학자, 정책 입안자와 이야기하여 이러한 발전을 확증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거시경제 측면에서 쿠바의 농업은 쇠퇴하고 있는 것일까? 로제트와 알티에리 박사는 “경제 봉쇄 때문에 인도주의적 식량 판매라는 암시장으로 미국에서 수입되는 식료품의 영향이 크다. 미국의 경제 봉쇄와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무력행사에 대항할 원조를 구하고자 쿠바 정부에서 어떠한 정치적 결정을 한 듯하다. 미국 기업에게 해마다 고액의 본질적으로는 필요치 않은 식료품을 대량으로 구입하고 있다. 이러한 수입 증가가 최근 쿠바의 전국 생산을 저하시키고, 그것이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이 대안을 결의하자고 주장하는 일로 이어졌다”고 주장하는데, 그만큼 이야기는 단순하지 않다.

 

쿠바의 유기농업이 어떤 상태인지를 확실히 하는 데에는 각각의 우량 사례만이 아니라 전체를 볼 수 있는 지역이 어떤 상황인지 조사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쿠바의 문헌에는 이러한 사례 조사를 좀처럼 볼 수 없는데, 캐나다 어느 대학의 석사논문 수준에서도 학생들이 꽤 면밀히 조사했다. 아래의 내용은 인터넷에서 찾은 그러한 석사논문 가운데 하나로 그 개요를 소개하겠다.

 

 

애매모호한 쿠바의 유기농업 정의

 

쿠바는 유기농업의 선두로 간주된다. 그 경험은 <근대사에서 최대의 관행농업에서 유기농업으로 전환함>」(Rosset and Medea, 1994), <근대적 대규모 관행농업에서 준 유기농업으로 전환하려는 장대한 실험>(Rosset, 1997: 291), <유기농업으로 전환>(D’arcy, 2005), <유기혁명>(Warwick, 2001: 54)이라 불리고 있다.

유기농업과 지속가능한 농업 체계에서 쿠바가 세계에서 중요한 선구자임을 보여주는 문헌은 수없이 많다. 하지만 쿠바의 농업 부문에서 ‘유기’나 ‘지속가능’이라는 단어를 엄밀히 무엇을 뜻한다고 정의하는지는 쉽게 알 수 없다. 어느 때는 ‘쿠바 농업은 전체가 유기이다’라 하고, 또 어느 때는 ‘준 유기이다’ 하고, 또 어느 때는 ‘지속가능이다’ 하고, 또 어느 때는 ‘생태농업이다’ 기술한다. 이렇게 다양한 용어의 경계는 애매하게 얼버무린 채이다. 쿠바에게 유기농업이란 무엇을 뜻할까? 먼저 역사적 경과를 보도록 하자.

 

 

경제위기 이전부터 준비되었던 유기농업

 

쿠바의 농업은 소련의 원조를 받는 녹색혁명에 따른 근대적 생산 모델이었다. 근대농업의 기술은 개인 농가와 협동조합 농장보다 국영농장에서 더욱 성행했다. 경제위기 이전에 개인 농가와 협동조합 농장이 관리하던 농지는 전체의 20%에 지나지 않았는데, 전통적인 저투입형의 비교적 지속가능한 농법이 유지되어(Funes, 2002) 그것이 전국적인 차원의 고투입형 기술에서 전환하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또 다른 세계의 여러 지역과 마찬가지로, 쿠바에서도 1960~1970년대에 걸쳐서 환경 의식이 높아진다. 그 까닭은 DDT와 같은 농약의 나쁜 영향을 지적한 레이첼 카슨의 고전 <침묵의 봄> 등의 저작이 출판되었기 때문이다(Funes, 2002). 이 의식의 고양으로 1970~1980년대에 걸쳐 쿠바의 학회와 농업성(MINAGRI) 및 대학은 관행농업에 비판적인 입장이 되어 대안 기술을 개발하는 데에 연구의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Rosset, 1997; Warwick, 2001; McKibben, 2005). 이리하여 농장과 연구를 통해 경제위기 이후에도 쓰일 수 있는 자원이 준비되었던 것이다.

 

 

투입 자재의 전환

 

일반적으로 유기농업이란 화학비료와 농약 등을 유기비료 등의 생물투입자재로 대체하는 것이라 하며, 그것은 거의 모든 유기인증 규정의 핵심이기도 하다. 쿠바에서도 ‘투입자재의 대용이 새로운 농업의 핵심이다’라고 Funes(2002)는 기술하며, 이 성패가 유기농업의 지표라 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 대체는 ‘고투입형에서 저투입형 농업으로의 전환’(Rosset, 1997), ‘석유, 화학자재, 기계 등의 공업적 투입에서 대안에너지, 바이오 방제 유기체, 수소 등의 지역에서 생산된 지속가능한 투입자재로의 전환’이라고 기술한다(Rosset, 1997).

 

투입 자재의 대체에 대한 쿠바의 전환은 참으로 빨랐다. 하나의 예를 들면, 1991년에는 작물의 56%가 이미 바이오 방제로 처리되고 있었다. 이는 유기농업의 진전이고, 약 1560만 달러의 경비 절감으로 이어졌다(Rosset and Medea, 1994). 또 수소도 1990년에는 약 5만 마리였는데 2000년에는 40만 마리가 되어, 이것이 경작용으로 트랙터를 대체했다(McKibben, 2005).

 

 

전통기술도 근대기술도 함께 쓰다

 

유기농업은 반反근대라서 로우 테크의 저투입형 농업으로 회귀하는 것이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전통농업이라고 하여 반드시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매우 환경파괴적인 전통농법도 있다. 쿠바에서는 근대기술보다 자금이 들지 않기에(McKibben, 2005), 유기농업으로 전환하는 것의 일부로 전통농업으로 회귀하자고 적극적으로 장려되었다(Rosset, 1997; Nieto and Delgado, 2002). McKibben (2005: 64)는 쿠바의 준準유기농업을 고투입형 트랙터 농법에 필적하는 발명이라고 평가한다. 하지만 쿠바에서는 근대농법과 유기농법이 명확히 구별되지 않고, 현장 상황에 따라서 모두 존중된다. 가장 초보적인 전통농법도, 경제적 긴급사태에서 어쩔 수 없이 강구된 조치라고 하기보다는 현재의 농업 과제에 대응하는 다양한 기술의 하나라고 본다(Mart´ın, 2002: 69).

 

 

농장 규모

 

기계화 농업에서는 규모를 확대하는 쪽이 효율적이지만, 그러한 대규모 농업에서는 섬세한 경영 관리나 자원순환이 어렵다. 유기농업과 같이 지식에 기초하는 생산에서는 소규모인 쪽이 더욱 효율이 좋다(D’Souza and Ikerd, 1996). 이 때문에 유기농업에서는 대규모 유기농업이라는 발상 그 자체에 무리가 있다고 주장되는 것이다. 쿠바에서는 사탕수수, 카카오, 커피 등 대규모 플랜테이션도 유기농업으로 전환되고 있는데, 그 전환 속도는 소규모 농장과 협동조합 농장과 비교하면 더디다(Funes, 2002). P´erez and Echevarr´ıa(2002: 273)는 사탕수수와 담배 농장에 대해서 ‘대규모 농장에서 유기농업으로 가는 길은 아직 먼 것이 현실이다’라고 인정한다. 곧 대다수 대규모 농장은 아직도 관행농업인 채이고, 유기농업으로 전환하고 있는 것은 소규모 농가와 그 조직이다(Warwick, 2001; Ricardo, 2003). 유기농업에는 토지 특성에 따른 지식이 필요하여, 소규모 농가 쪽이 농지와 더욱 친밀하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 초기에는 대규모 국영농장이 해체되고 소규모로 바뀌는 농업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유기농업으로 전환하는 데에 도움이 되었다.

 

 

수출지향생산과 지역 농산물 먹기

 

유기농업에서는 지역 농산물 먹기가 수출 지향일지라도 큰 과제이다. 많은 유기농업 추진파는 지역 농산물 먹기를 중시하며 유기농업의 일부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식량의 원거리 출하에는 환경 부하가 있어, 건전한 자급자족형 지역사회 만들기에는 지역 농산물 먹기가 빠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라틴아메리카의 유기농업 대부분은 지역 농산물 먹기보다 선진국의 유기식품 시장을 지향한다(Raynolds, 2000; Gomez Tovar, 2005).

그러나 쿠바는 다르다. 유기농업으로 전환한 것은 지역의 식량안전보장의 달성(Rosset and Bourque, 2002; Funes, 2002)과 Perera(2002: 7)가 말한 ‘식량주권’의 중시와 함께 병행하여 진행되고 있다. 다만 지역 농산물 먹기를 중시하고 있기는 하나, 쿠바는 아직도 해마다 9억 달러나 농산물을 수입하고 있다. 1980년대의 식량 수입액은 1년에 10억 달러로 그다지 떨어지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국내 수요를 충족하고자 쌀, 밀, 밀가루, 고기, 우유, 콩 등을 계속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FAO, 2005).

 

Rosset(1997)는 경제위기 초기에 기아를 피하려면 이런 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사실 경제위기가 시작되면 쿠바는 그 식량의 50% 이상을 수입해야만 한다(Nieto and Delgado, 2002). 갑자기 수입 식량의 침체로 인해 현지의 식량안전보장이 긴급 과제가 되었다. 현재 얼마나 되는 유기농산물이 생산되는 그 지역사회 안에서 직접 소비되지에 대한 통계는 얻을 수 없다. 그렇지만 비공식 평가를 통해서 생산된 지역에서 꽤 많이 소비된다고 알려져 있다(Alvarez, 2002; Funes, 2002). 그 식량의 얼마는 생산자가 직접 소비하고 있는데, 그밖에도 지역 내 유통이란 선택지가 있다. 1994년에 문을 연 민간의 농민시장이 그것이다. 그것은 정부의 배급제도를 보완하고, 어느 정도 가처분소득을 가진 사람들에게 현지 생산물을 판매할 기회를 생산자에게도 가져다주었다(Sinclair and Thompson, 2001; McKibben, 2005).

 

도시농업도 지역 농산물 먹기를 중시하고 있어, Altieri et al.(1999: 132)는 이를 ‘생산이 밀접하게 도시 주민과 결합되고, 도시에서 직접 영향을 받는 도시 및 도시 근교에서 생기는 모든 농업·가축 생산’이라고 정의한다. 1989년 이전도 자가 텃밭의 얼마는 도시부에서 식량원이 되었는데(Wezel and Bender, 2003), 이러한 텃밭은 저개발의 상징이라며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Altieri et al., 1999). 그러나 소련이 붕괴된 뒤 가정과 지역사회의 텃밭이 식량위기에 대응하는 빠뜨릴 수 없는 수단이 되어서, 이런 의식은 급속히 변화해 나아갔다(Altieri et al., 1999; Chaplowe, 1998; Warwick, 2001). 현재는 가령 농사 경험이 거의 없는 시민도 지방정부에게 공짜로 식량생산용 토지를 얻을 수 있고, 많은 사람들이 신청하고 있다(Altieri et al., 1999). 현재는 몇 천 개의 도시 텃밭이 있어, 아바나시에서는 몇 만 명이 도시농업 부문에 종사하며, 2004년에는 30만 톤의 식량(과실과 채소의 대부분, 그리고 쌀과 고기도 꽤 포함)을 생산했다(McKibben, 2005). 도시농업은 매력적인 분야가 되어, Wezel and Bender(2003)는 임금이 높은 도시농업 부문에서 일하려고 국가공무원들이 전직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쿠바의 도시 텃밭은 현지 생산과 지역 안의 유통체계를 창조하는 것으로 지역의 식량안전보장을 개선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유기농업 모델의 주요 사례로도 인식되고 있다. 지역에서는 화학비료와 살충제의 사용이 금지되어, 결과적으로 땅심을 올리고 병해충을 방제하고자 도시 텃밭에서는 유기농법을 쓰게 되었다(Altieri et al., 1999).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도시농업을 통해 창설된 지역 농산물을 먹자는 운동의 연결망이다. 그것은 지역사회 안에서 사회적인 관계망을 구축하자는 유기농업의 이상을 만족시키고, 식품 수송으로 발생하는 오염을 삭감하고 있다(Altieri et al., 1999). 게다가 재활용된 투입자재와 지역에서 이용할 수 있는 자재(지렁이두엄 등)을 쓰고(Altieri et al., 1999), 결과적으로 유기농업의 지지자들이 ‘더욱 깊은 형식의 유기농업’이라고 간주하는 닫힌 생산 체계를 만들어내고 있다.

쿠바의 유기농업이 지역 농산물 소비 연결망의 중시와 관련하여 지금까지 발전해 왔다는 것이 밝혀졌다. 그렇지만 국가에서 수출용 유기농산물 생산을 계획하고 있는 움직임도 있다. 국제시장에서 받는 유기인증 농산물의 높은 가격을 이용하고, 사탕수수·카카오·커피·벌꿀·과일 등의 전통적인 돈벌이작물을 유기인증하려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Funes, 2002). 이 수출 생산에 초점을 맞춘 전환에 의해서 유기농업이 의미하는 내용도 변화해 나아갈지도 모른다. “충분하지 않은 외환의 현재 경제 상태… 그것이 수출용의 유기농산물과 시장관리를 지지하고 있다(Funes, 2002: 23).” 그렇지만 수출 지향 샌산에 맞춰서 쿠바가 어떻게 움직여 갈지는 명확하지 않고, 수출 시장을 중시한 유기인증 농산물에 의해서 돈벌이작물을 수출하고 식량을 수입하려는 쿠바의 예전 입장으로 돌아갈지 어떨지도 알 수 없다.

 

 

쿠바에 유기농업 철학은 있는가

 

투입자재의 대체는 거의 모든 유기인증 기준의 기초를 이룬다. 하지만 유기농업에는 간단히 정의할 수 없는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포괄적인 일련의 가치관과 이상주의이다. 유기농업은 순수하게 경제적인 이익으로부터, 사회와 자연과의 관계에 대한 깊은 철학적인 신념에까지 미치는 동기부여가 있다. 쿠바의 유기농업 모델은 주로 경제적인 동기부여와 수입자재의 대체에 기초하고 있다. 그렇지만 유기농업으로 전환하여 소규모 농장과 지역 농산물 먹기 운동의 연결망이 크나큰 역할을 맡았기에, 투입자재의 대체 모델보다는 훨씬 깊고 포괄적인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실 쿠바에서는 포괄적인 유기농업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다. Funes(2002:23)는 투입자재의 대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서로 배가 되는 구조를 최대한으로 이용하려고 하는 유기농업과 지속가능한 모델에 바탕하며, 작물과 가축 생산·숲 관리 이외에 서브시스템을 통합적으로 일치시켜 조합하는 복잡한 생태농업의 체계를 개발하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Garc´ıa(2002)도 투입자재와 특정 생산기술을 뛰어넘는 기본적이고 철학적인 차이를 포함한, 관행농업과 유기농업의 차이를 이야기하고 있다. 다름 아니라 생태농업으로 전환하는 것은 농촌에서 실시하는 보급 교육 프로그램의 내용을 개정하는 것만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지속가능한 체계를 확립하는 데에는 농업을 고립된 단위로 간주하는 사상적인 심리상태를 여러 학문 분야가 연계된 포괄적인 접근으로 다가서는 것이 농업의 본질이라는 개념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쿠바의 유기농업에는 깊은 철학적인 기초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있다. 그렇지만 앞서 말한 수출의 가능성에 맞춘 전환을 포함해, 이것과 받아들이지 못할 동향도 있다. 예를 들면 쿠바는 급속, 또 대규모 유기농업으로 전환하는 것을 찬미하고 있다. 하지만 그 한편에서 정부는 관행농업도 유지하고 있으며, 어쩌면 이후에도 계속 유지할 것이다(Funes, 2002). 유기농업이 실제로 얼마나 이루어지는지에 대한 상세한 정보도 손에 넣을 수 없다. 관행농법과 비이오테크와 유기농업을 조합한다는 문제도 있다. 쿠바의 새로운 농업 전망의 핵심에 있는 것은 철학적, 도덕적 유기농업이리라. 그렇지 않다면 더욱 실용적인 접근에 지나지 않으리라.

 

McKibben(2005)는 평소에는 유기농업을 실천하다가도 감자에서 해충이 발생하면 화학농약을 쓰는 쿠바 농민의 사례를 들고 있다. 쿠바의 농민들은 올바른 먹을거리의 생산 방법이라는 강한 신념을 위해서 스스로 유기농업 생산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실용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떠한 선택을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Warwick(2001)의 지적에 따르면 예방 원칙에 기초하여 밭에서 시험하는 것을 우선시하지 않는데, 쿠바에서는 바이오테크놀로지에 대한 연구도 꽤 이루어지고 있다(McKibben, 2005).

 

 

맺으며

 

쿠바의 유기농업에 대한 기존 문헌을 보아도, 쿠바인들이 어떻게 유기농업을 정의하며 어떤 관점으로 보는지 정확히 주장할 만한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 문헌의 대부분은 신중한 과학적 조사보다, 오히려 사례 증거나 일반적인 인상에 기초하는 것으로까지 보인다. 기존 문헌을 분석하면, 쿠바의 유기농업 모델이 투입자재의 대용과 전통기술과 근대기술의 조합에 기초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농장의 규모와 구조로 말하면, 유기농업은 소규모 개인 농장, CCS, CPA, UBPC, 그리고 특히 도시 지역의 다양한 토지 소유 구조로 실천하고 있다(Rosset, 1997; Chaplowe, 1998; Altieri et al., 1999; Funes, 2002). 일반적으로는 대규모 국영농장보다 소규모 농장 쪽이 유기농업으로 신속히 전환하고 있다. 그렇지만 농장의 규모가 쿠바 유기농업의 요소라는 점을 보여주는 증거도 거의 없다. 또 쿠바의 유기농업 사상을 바탕으로 지역 농산물 먹기가 중시되고 있는지, 또는 현실적인 식량안전보장에 대한 일시적인 실용적 대응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더욱이 문헌에서는 쿠바인들이 사회와 자연에 대한 포괄적인 철학으로서 어떻게 유기농업을 보는지, 또는 거꾸로 경제적으로 동기부여된 투입자재의 대체수단이라고 보는지 결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증거도 얻을 수 없다. 다만 가장 명확한 점은 현재 쿠바의 농업이 유기농업의 수많은 원칙과 실천(지렁이 양식, 부산물 재활용, 대체에너지 이용, 쟁기질·사이짓기·섞어짓기 보전, 축산학, 그리고 생물 방제, 생물 농약, 생물량 등 현지에서 생산되는 생물 투입자재)을 받아들여, 다른 나라보다 확실히 계통적으로 그것을 행하고 있다는 것뿐이다(Rosset and Medea, 1994; Rosset, 1997; Warwick, 2001; Funes, 2002; CIC, 2003).

 

 

written by 吉田太郞, translated by 김서방

 

【인용문헌】

(1) Erin Tace Nelson, A better World is possible: Agroecology as a Response to Socio-Economic and Political Conditions in Cuba, University of Waterloo, 2006. 

(2) Fernando Funes, Miguel A Altieri and Peter Rosset, The Avery Diet: The Hudson Institute’s Misinformation Campaign Against Cuban Agriculture, May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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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전통농업 - 농장에서 씨앗을 보전한다

 

 

 

20만 종의 벼가 있는 보물창고

 

인도는 야생 식물은 물론 작물에서도 생물다양성의 보고이다. 저명한 벼 연구자 리차리아Richharia 박사에 따르면, 베다 시대(기원전 1500~600년 무렵)에는 40만 종의 벼가 있었다고 한다. 그때보다 줄었다고는 해도 박사에 따르면 아직도 20만 종이 존재하고, 실제로 그는 마디야 프라데쉬주Madhya Pradesh州의 차티스가르 지역에서만 2만 종의 벼를 수집했다.

 

하지만 지금 이러한 품종은 격감하고 있다. 그 까닭은 녹색혁명 때문이다. 녹색혁명에서는 수확량만 중요시하여, 화학비료에 반응하여 많은 수확량이 나오는 극소수 품종만 선발된다. 결과적으로 광대한 영역에서 높은 수확량을 올리는 품종만 재배되어 유전자가 획일화되어 버린다.

 

그런데 유전자의 획일화에는 장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획일화된 작물은 병해충에 위약해져, 어느 작물에 영향을 주는 병해충이 비슷한 작물 모두에 확 퍼진다. 1970년대에 벼 생육 저해 바이러스(Rice grassy stunt virus)가 인도부터 인도네시아에 걸친 광대한 논에서 확 퍼졌던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이 병의 해결책은 토종에 있었다. 1,7000종 이상의 재배 벼 품종과 원종 표본을 4년에 걸쳐서 선별 검사한 결과, 인도의 우타르-프라데쉬주Uttar-Pradesh州의 곤다Gonda 근교에서 재배되는 오리자 니바라Oryza nivara라고 불리는 한 품종만이 이 병에 저항하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밝혀졌다. 지금 이 인도 야생 벼의 유전자를 가진 교배 품종이 아시아의 11만㎢의 논에서 재배되고 있다. 곧 앞으로 있을 품종 개량의 기초가 되는 유전자를 공급하는 것이 바로 토종이다. 이를 통해 유전자의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농민들은 왜 20만 점의 토종을 보존해 왔을까? 그 까닭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먼저 토종은 수확량만이 아니라, 짚으로 소의 먹이도 주고 집을 짓는 재료로 활용하는 등 다양하게 농민들의 수요를 만족시켜 왔다. 그리고 대개의 토종은 튼튼하고 병해충에 내성이 있는데다가 화학비료나 농약 등의 투입 자재를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점은 환경조건에 따라서 다수확품종보다 토종이 알맞은 경우가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타밀-나두주의 알칼리성 토양에서는 칼라르팔라이Kalarpalai라고 하는 토종 벼만 재배할 수 있고, 바단 삼바Vadan Samba와 같은 가뭄에 내성이 매우 강한 품종도 있다. 한편 호수에 인접하여 물에 잠기는 지역에서 자라는 삼바 모사남Samba Mosanam은 물에 잠김에 강하다. 원래 삼바 모사남은 호수에서 배를 타고 거둔다고 할 만큼 다수확품종을 기를 수 없는 1.4m나 물에 잠긴 조건에서도 전혀 해를 입지 않는다. 이처럼 인도의 어느 지역에서도 농민은 자신들이 가진 벼 품종의 이러한 환경적·영양적 특성과 독특한 특징에 대해 깊은 지식이 있다. 혹독한 환경에서도 작물을 기를 수 있었던 것은 이 다양성 때문이었다.

 

비자야라크쉬미 박사는 이렇게 말한다.

 

“토종을 기르면 많은 장점이 있습니다. 가장 놀라운 점은 토종에는 그것이 버텨 온 지역의 생태 특성에 바탕을 둔 고유한 성질을 지녀, 결과적으로 사람에게 필요한 영양을 훨씬 잘 확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 말고도 토종 유전자원을 보호하여 변경에 사는 소농들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토종 보전을 시작하다

 

지금도 수많은 토종 벼가 보존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보전하고 있는 것은 단지 농민들뿐이고, 계속해서 엄청난 비율로 사라지고 있다. 이 때문에 인도 지식 센터는 타밀-나두주 안의 각지에서 종자 보존에 나섰다. 그 계기는 전통농법으로 병해충을 방제하면서부터였다.

 

1993~1994년에 걸쳐 센터는 티루반나말라이현Tiruvannamalai縣, 센감 탈루카Chengam Taluka의 발라얌팟투Valayampattu 마을에서 식물을 활용한 해충 방제에 나섰다. 농민이 참여하는 실험 프로그램은 꽤 성공을 거둬, 농민들은 식물의 생성물을 화학 농약 대신 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농민과 모여서 이야기하면서 녹색혁명 이전에 재배하던 토종이 있다면 더 유익할 거라고 하던 농민이 있었다.

 

인도에는 반다나 시바Vandana Shiva 박사가 이끄는 인도 전역에서 토종 보존에 나선 NGO인 나브단야Navdanya가 있다. 센터는 1995년 나브단야와 접촉하여, 그 지원을 받아 1995년 발라얌팟투 마을에 있는 농장에서 씨앗을 보전하는 활동을 시작했다.

 

먼저 한 일은 타밀-나두주 안에 있는 여러 지역 NGO와 협동하는 것이었다. 그 활동은 지역사회에 종자은행을 설립한 ‘동쪽 산맥 운동(Eastern Ghats’ Movement)’과 협력하며 이루어졌다. 이듬해에는 좀 더 아래와 같은 활동을 펼쳐 나아갔다.

 

1) ‘그람미야 무네트라 산감Grammiya Munnetra Sangam’의 지원으로 칸치푸람Kanchipuram 지역의 티루포루르Tiruporur 마을

2) ‘불리한 인간의 개발 센터(Centre for Development of Disadvantaged Peoples)’의 지원으로 티루타니Tiruttani 지역의 네둠바람Nedumbaram 마을

3) ‘비자 평화 센터(VISA Peace Centre)’의 지원으로 반다바시Vandavasi 지역의 모사바디Mosavadi 마을

4) ‘여성의 복지 개발 협회(Women’s Welfare Development Association)‘의 지원으로 우티라메루르Uthiramerur 지역의 마남파티Manampathy 마을

 

1998년에는 ‘인간 활동과 농촌 기술의 진전을 위한 위원회(Council for Advancement of People’s Action and Rural Technology)’의 지원으로 칸치푸람 지역(당시 센갈팟투Chengalpattu 지역)의 캇탄칼라투르Kattankalathu 구역에서 일을 시작하고, 그 뒤 이 활동은 칸치푸람, 티루발루르Tiruvallur, 티루반나말라이Tiruvannamalai, 나가팟티남Nagapattinam의 125개 이상의 마을로 퍼졌다. IDRA, UNDP, 포드 재단 등 다양한 기관도 센터의 활동을 지원했다.

 

 

 

130종 이상의 토종 벼를 수확

 

센터가 먼저 한 일은 토종을 구하는 것이었다. 토종 벼를 찾고자 센터의 현장 일꾼들이 상세히 조사를 했다. 그리고 몇몇 농민이 집에서 먹으려고 보전하고 있던 품종을 얻거나 구입했다. 또 센터는 앞으로 농부가 될 마을의 학생들에게 토종 보존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자 어린 학생들을 참가시키는 생물다양성 대회 ‘비야 야트라Bija Yatra’를 열고, 자발적인 도움으로 토종과 그 정보를 수집했다. 게다가 정기적으로 농업 박람회나 축제에 참가하여 품종을 전시하는 것으로 농민들과 품종 교환을 전개했다.

 

다수확품종의 도입으로 토종은 사라지게 되었는데, 센터에서 토종이 재배되고 있는 지역을 찾아내고 그 쓰임새를 늘리는 일에 약 10년 동안 노력한 결과, 센터는 타밀-나두주에 알맞은 130점의 벼 품종과 50종 이상의 채소를 수집했다. 비자야라크쉬미 박사는 만족하여 말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벼 125품종, 그리고 약 60종의 토종 채소를 간신히 되찾았습니다.”

 

 

토종을 제공받는 농민.

 

 

종자은행의 설립

 

센터의 생물다양성 보전 활동에는 수많은 마을에 ‘지역사회 종자은행’을 설립한 일도 포함된다. 그 방식은 이렇다. 먼저 센터는 각지의 마을에서 토종의 중요성을 알리는 모임을 개최한다. 센터는 자신의 실험농장과 센터에서 선택한 농민들의 밭에 ‘생식영역 보전 센터’를 설치한다. 이러한 생식영역 보전 센터에는 50종 이상의 품종을 재배한다. 거기에 관심을 가진 농민들은 실제 작물을 보고, 토양과 관개조건, 자신의 농업 기후에 알맞은 한두 품종을 재배할지 결정한다. 결정한 농민은 센터를 통해 지역이나 인접 지역에서 이미 재배하고 있는 농민에게 씨앗을 받아, 자신의 농지 일부를 토종 보전용으로 확보한다. 수확한 다음에는 ‘종자은행’에 제공받은 종자의 2배로 돌려주는 것이 씨앗을 받는 조건이다. 이 종자은행 덕에 시장에 내는 다수확품종을 재배하는 농민들이 현재 집에서 먹으려고 보유했던 토종을 위상을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유기농업 집단 산감Sangam 결성

 

다시 토종 보전 프로그램을 약 10년 실시한 뒤, 센터에서는 이 방법을 유지·지속하기 위한 본보기를 고안했다. 그것은 센터의 관여가 끝난 뒤에도 농민들이 스스로 그 활동의 계속하도록 모든 마을에 유기재배 농민 집단인 산감을 결성하도록 한 것이다. 농민들에게 실천을 보이고, 이후에도 활동을 지속하도록 한 것이다. 지역사회의 종자은행은 이러한 산감을 통해 추진되어, 농민들은 다양한 토종을 재배하며 그 양을 늘리는 기회도 얻을 수 있다. 산감에서는 지도자를 뽑는데, 그는 활동의 수익을 내는 프로그램을 개발하도록 장려된다. 이 때문에 몇몇 산감에서는 수입원으로 생물농약을 생산하는데, 그 기본 지식이나 인프라를 제공하는 것은 바로 센터이다.

 

 

기술 지도에 나선 비자야라크쉬미 박사.

 

 

센터는 외양간두엄과 지렁이두엄을 활용하는 비법, 바이오 거름(Acetobacter Azospirillum 등), 님Neem 씨앗 등의 자재를 제공하고, 토종을 유기재배로 기르는 비법, 식물에서 추출한 자재로 생물농약을 만들고 자연스레 병해충을 방제하는 기술, 두엄을 만드는 기술을 훈련시킨다. 또 다양한 품종의 특성과 수확량 및 상세한 정보도 여러 언어로 교재, 정기 간행물, 서적, 포스터, 필름 형태로 제공한다. 농민, NGO, 학생, 교사, 일반 시민 등 다양한 집단을 대상으로 수많은 훈련 프로그램도 실시한다. 학교에서는 글짓기나 웅변대회도 열고 있다.

 

유기농업을 하고, 농장에 투입되는 자재를 자급하는 일은 경비 절감으로도 이어진다. 이 때문에 활동은 지금 약 125개 마을에서 약 3000명의 농민들에게 퍼졌고, 유기재배로 집에서 먹을 채소밭을 가꾸는 세대도 800가구 이상이 되었으며, 유기농가로 이루어진 37개 산감이 설립되었다. 그것은 각 가정에 먹을거리의 안전·안심을 가져왔다. 그리고 센터는 이 활동을 주 전체, 나아가 인도 전역에 퍼뜨리려고 한다.

 

개개의 농민은 잃었던 토종을 부활시켜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그에는 충분한 양의 품종이 제공되어야 한다. 농업 생물다양성은 지역사회가 생물다양성을 되찾아야 한다는 필요를 확신하고, 지역사회의 안에서 다른 곳이 아닌 농민의 밭에서 보전되어야 한다. 곧 센터가 토종을 보전하고자 선택한 방법은, 의식이 유발된 농민들의 연결망을 통해 그들의 농지에서 종자를 보전하는 것이다.

 

 

written by 吉田太郞, translated by 김서방

 

 

인용문헌

 (1) Fehmida Zakeer, Indian farmers learn from old ways, People & the Planet,23 Mar,2007.

 (2) Centre for Indian Knowledge Systems, Organic Farming and Indigenous Seed Conservation, Experiences from Tamil Nadu, 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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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제 동광원


저희는 ‘전통농법에서 배우자.’ 라는 취지로 취재를 다니고 있습니다. 여기는 무척 넓어 보이는데 지금 농사짓는 평수가 얼마나 되나요?

처음에는 저 위하고 여기하고 8천 평 됐어요. 그러다 저 위 4천 평은 나라 땅이라고 해서 다 나무 심어서 돌려주고, 몇 년 전에 1500평 팔고 지금은 한 3000평 될라나.


아직 토종종자가 많이 있나요?

-옛날에는 다 있었는데 지금은 힘에 부쳐서 많이 못 가지고 있어요.


지난 번 이곳에서 우엉을 얻었는데 토종인가요?

-아니요. 그건 사다 했지요. 옛날 우엉은 참 맛있었는데, 잎도 먹으면 맛있어요, 먹는 뿌리가 색깔이 새카매요. 속은 별로 안 검은데 겉이 까맣고, 키도 더 작아요. 지금 심는 건 샀어요. 전에는 자꾸 받아서 했는데 지금은 씨를 못 받아요. 그래서 씨를 잊어버리고. 그런데 보리, 밀은 씨나 안 잊어버리려고 조금씩 심어요. 점점 힘에 부쳐서 하지를 못해요.

옛날에는 씨앗가게를 가도 태백이라는 토종무가 있었어요. 무씨도 옛날에는 우리가 다 받아서 심었지. 무를 가을에 추수해서 대가리를 잘라서 묻어두면 싹이 나잖아요. 그걸 봄에 다시 통째로 밭에다 심으면 무장다리가 나와요. 거기서 꼬투리가 맺으면 그걸 비벼서 심어먹어요. 그렇게 받아서 쓰다가 80년도부터는 그냥 사다가 했어요.

그런데 올해는 봉지를 보니까 전부 이태리 어디서 오고, 내가 기막혀 죽겠네. 이제 씨앗까지 남의 나라 것을 쓰니 우리나라 토종은 다 없어지네. 그런데 그 무를 심어서 김치를 담아 먹어보니 맛이 없어요.


총각무도 씨를 받으셨나요?

-총각무는 내가 안 해봤는데, 아마 총각무도 무니까 그렇게 받으면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배추씨도 옛날에는 그렇게 했지요.


배추는 어떻게 하나요?

-배추씨는 옛날에 내가 전라도에 많이 살았는데, 겨우살이를 놔두면 봄에 꽃이 피잖아요. 전라도는 따뜻해서 안 죽으니까. 여기서는 그렇게 하기가 어렵죠.


고추는 어떻게 농사지으셨나요?

-고추는 재래종 씨를 내 받아서 심다가 아마 80년대부터는 안 한 것 같아. 씨를 받아서 그냥 밭에다 뿌리면 한 달 만에 매운물이 빠져야 난다고 해요. 고추씨가 맵잖아. 땅에 들어가서 매운물이 빠져야 난다고 해요. 그렇게 직파해서 먹고 살았어요.


직파를 언제 하셨나요?

-고추씨는 한 3월말 경에 한 것 같아요. 얼음 녹고 싹이 나도 안 죽을 만하면 뿌렸어요.


직파할 때 수확량은 얼마나 됐나요?

-몇 백 평 심으면 그때 여기에 한 4~50명이 살았는데 그 식구가 다 먹고 살았죠. 지금하고 비교하면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직파할 때 어떤 식으로 뿌리나요?

-밭에다 할 때 고랑치고 뿌렸죠. 뿌렸다가 배면 솎아야지. 그때는 간격이 지금처럼 드물게 안 하고 한 뼘 정도된 것 같아요. 그렇게 작게 기르면 지주는 안 해도 괜찮아요. 어쩌다 쓰러지면 산에서 막가지 해다가 해줘요. 요즘은 일만 많아지고 공이 얼마나 많이 들어요.


고추에 병은 없었나요?

-네, 직파할 때는 병을 몰랐어요. 연작해도 병을 몰랐어요.


그럼 그때 배추도 병이 없었나요?

-배추가 하도 커서 한 포기 뽑아 저울에 달면 3Kg에요. 그때는 병도 없고, 벌레도 별로 없었어요. 지금은 벌레 때문에 못해요. 우리 배추가 지금 엉망이에요. 커피찌꺼기가 좋다고 해서 해보니 조금 효과는 있대요.


고추를 직파할 때 거름을 지금처럼 많이 줬나요?

-퇴비만 했죠. 옛날에는 돈이 없으니까 비료도 못 사고 순 산에서 풀을 베어다가 거름을 만들었어요. 7~8월 되면 풀을 베어서, 식구가 많으니까 지게로 져다가, 작두로 두 치 정도로 썰어서, 인분 받아서, 재면 퇴비가 아주 시커멓게 잘 되죠. 일주일에 한 번, 많이 뒤집으면 일주일에 한 네 번씩 퇴비를 뒤집어요. 그러면 아주 거름이 몽글몽글해요. 어쩌다가 비료를 좀 구하면 약이라고 조금씩 줬는데, 지금은 유기농한다고 아무것도 안 써요.


산에서 어떤 풀을 해오나요?

-갈잎이나 풀은 무슨 풀이든지 다 베지. 저런 논둑, 밭도 다 베요. 요즘 같은 때는 잘잘하게 썰어야 완숙퇴비가 되죠. 그럼 몽글몽글해서 헛칠 정도예요. 인분이 적으면 물을 뿌리고, 몇 번 뒤집어서 새카맣게 썩으면 쟁여놨다가 가을추수하고 보리 갈 때 써요. 그렇게 해두면 내년 봄에 고추, 감자 심을 때도 전부 쓰죠.


퇴비는 그냥 노지에 만드셨나요?

-옛날에 무슨 집이 있어요. 그냥 노지에다 했지요.

그리고 논거름도 갈잎으로 했어요. 4월에 갈잎이 부드럽게 나오잖아요. 옛날에는 나무가 크지 않았어요. 그럼 봄에 못자리 해놓고는 갈잎을 갖다가 논에 깔아요. 그래가지고 쟁기질 한 번 해놨다가 심으려고 할 때 쟁기질해서 써레질 한 다음 심어요. 논 거름은 그것만 했는데 그게 무척 걸어서 그것만 해도 잘 돼요.


지금은 거름을 사다가 쓰시나요?

-지금도 만들어서 써요.

작년에 저기 만들어 놓았는데 마늘 심을 것까지는 있어요. 마늘 심을 때도 다른 사람들은 약 뿌리고 비료 주는데, 마늘은 비료주면 보관할 때 잘 썩어요. 우리 마늘은 내년까지 먹어도 안 썩어요. 우리는 마늘밭에 퇴비를 땅이 안 보이게 두둑하게 깔고 갈아서 마늘을 심는데 마늘이 단단해요.

마늘도 재래종이에요. 옛날부터 지금까지 육쪽마늘이라고 쭉 심어요.


지금 농사짓는 것 중에서 채종하는 씨앗은 얼마나 되나요?

-이제는 별로 없어요. 보리, 밀은 씨앗 보존한다고 해서 문경에 좀 보냈어요.

밭벼도 오래 됐는데, 60년도에 농촌지도소 작물계장이 귀한 씨라고 심어보라고 요만큼 가지고 왔어요. 그걸 계속 심어서 내려왔어요. 이게 찰벼인데, 아무리 다른 데서 찰벼를 가져와도 그렇게 찰지지 않아요. 그걸 안 잃어버리려고 올해도 좀 심었어요.

그러고 들깨도 쭉 심고 조, 수수도 그런데, 기장만 내가 잃어버렸어요. 지난 98년에 수해가 나서 전부 떠내려갔어요. 창고가 여기 크게 있었는데 홀랑 가버렸어요.


콩 종류는 없나요?

-콩은 옛날에 옥광을 많이 심었는데, 그것도 지도소에서 갖다 줘서 심었어요. 옥광을 계속 심다가 어디 가고 지금은 어디서 들어오는 걸 심어요.

그건 크지도 작지도 않고, 벌레도 잘 안 먹고 잘 됐어요. 옛날에는 콩을 25가마니를 했는데 콩이 얼마나 좋은지 벌레 먹은 것도 없어요. 요즘도 콩은 받아서 하는데 그게 재래종인지는 몰라요.


그럼 콩은 몇 종류나 되나요?

-지금은 힘들어서 다 없애고 메주콩만 해요. 그런데 벌레가 얼마나 먹는지 몰라. 작년에도 한 2가마니 나왔는데 겨우 서 말만 메주해서 장 담갔죠.

옛날에는 콩나물콩, 서리태 같은 것도 다 심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메주콩만 간장, 된장은 먹어야 하니까 해요.


쟁기질은 어떻게 하셨나요?

-소 기르기 전에는 손으로 하다가, 한 60년도부터 93년도까지는 소로 했어요. 저 위에 4천평, 아래도 4천평을 다 손으로 파다가 소를 기르고 나서는 남반들이 와서 쟁기질을 했어요.


지금은 그냥 기계로 하시나요?

-90년도부터는 남원에서 불러다 쟁기질을 하다가 식구들도 점점 줄고, 일도 힘이 없으니 못해서 자꾸 부르려니 번거로워서 끊고, 그냥 풀밭에서 야채만 길러서 심어먹자고 해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주말 농장을 하게 되면서 관리기 작은 걸 하나 샀어요. 그래서 왔다 갔다 하는 분들이 다 갈아주죠.


소쟁기와 관리기를 비교하면 농사짓기가 어떤가요?

-쟁기질 할 때는 힘든데, 관리기로 하니까 일하기는 쉽죠. 그래도 쟁기질을 할 때가 더 좋기는 한 것 같아요. 관리기는 대신 곱게 되니까 심기는 수월해요.


탈곡은 다 손으로 하시나요?

-손으로 할 것은 손으로 하고, 밭벼는 탈곡기계가 있어요. 옛날에는 발로 돌렸는데 지금은  발로 하던 거에 모터를 달았어요.


여기서 사신지는 얼마나 되셨나요?

-올 해로 만 48년이네요. 여기서 처음에는 초대 원장님하고 기관 어머님하고, 산속에 셋이 들어가서 풀막을 지어놓고 살았어요.


동광원에 대해서 듣고 싶은데, 왜 농사를 지으면서 사시나요?

-수도정신을 가지려면 첫째, 자기가 자립정신을 가져야 해요. 자기 먹을 것, 입을 것을 남한테 미루지 말고 자기가 해야죠. 종교는 희생의 종교잖아요. 자기희생이 없이는 이렇게 살 수가 없어요. 또 이웃을 내 몸같이 여기라고 했는데, 일평생을 살아도 힘들어요. 이웃을 내 몸같이 여기고, 남을 섬기라고 했는데 인간이라 그러지를 못하고 살아요. 그러니까 우리 이현필 선생님이, 당신이 못 먹고 못 입어도 다른 사람은 먹게 하셨어요. 그런 선생님 밑에서 살았는데 사람이 못 되서 부끄럽죠. 그런 정신으로 이곳을 세웠어요. 가난하고 남만 사랑하고 남을 위해서 사셨어요.

농사는 자립정신을 세워주시려고 하신 거죠. 선생님은 항상 씨앗 하나라도 아끼고, 연장을 쓰고 아무데나 던지는 건 자기를 던지는 것하고 같다고 하셨어요. 지금은 농사지으면서 다 던지고 다니는데 그런 것부터 정리를 해야 돼요. 그런 걸 내 몸같이 아끼는 정신이 작은 것부터 실천을 해야 해요. 작은 걸 실천하기가 더 어려워요. 그런 걸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산다는 것이 보통 정신이 아니에요.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시나요?

-칠십 다섯이요. 옛날 같으면 저 세상 사람이죠.


마지막으로 가르쳐주실 것은 없나요?

-글쎄요. 사람이 전통으로 농사를 지으려면 정신이 똑바로 서야 해요. 식물도 사랑으로 가꿔야지 그냥 하면 뭐가 됩니까. 못 지어도 꾸준하게 사랑으로 가꿔야지.

우리 선생님이 농사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어야 한다고도 하셨어요. 땅 한 평이라도 내가 관심을 가지고 가꾸고 해야지, 뭐든 내가 못 할 바에는 안 하는 게 나아요.




안산 부곡동


‘전통농업에서 배우자’고 해서 어르신들을 찾아다니며 옛날 농사얘기를 듣고 있습니다. 오늘은 농사 일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하는데, 먼저 채종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채종을 하기는 했는데, 그랬다고 해서 집에서 다 종자를 받은 건 아니야. 더러 사서 하는 경우도 있고, 김장 같은 건 받는 사람만 받고 대부분 사서 해요.

무하고 배추는 씨를 받으려면 가을에 심은 것을 뿌리 채로 놔둬. 배추 같은 경우는 바싹 끊지 말고 잎만 따. 어느 정도 순이 남도록 해야 싹이 나니까. 그럼 위는 먹고 나머지 뿌리는 땅에 박힌 채로 놔뒀다가 보온을 해줘. 짚 같은 걸 덮어서 얼지 않게 해놨다가 봄에 날이 따뜻해지면 벗겨줘요. 그럼 제일 먼저 움이 나와.


짚 대신 요즘 쓰는 비닐을 덮어도 되나요?

-옛날에는 비닐 같은 게 없었으니까 그렇지, 비닐을 덮으면 더 빨리 싹이 나지. 그런데 싹이 날 때 짚을 너무 수북하게 덮어두면 싹이 부러질 수 있어. 그 싹을 장다리라고 해요. 거기서 꽃이 피어서 씨가 맺는 거야. 그것을 5월초 정도에 완전히 베어서 털면 씨가 나와.

이건 어느 배추든지 다 되는 거야. 조선배추도 되고, 호배추도 되는 거야. 결구되는 걸 옛날에는 호배추라고 했지. 조선배추는 통이 작아.


무는 어떻게 채종하나요?

-똑같은 방법으로 해요. 무는 자를 필요 없이 놔두면 되지. 그것도 짚을 푹 덮어주니까. 그런데 무가 추위에 약해서 더 까다롭지. 그런데 무는 봄에 일찍 심어도 여름에 씨가 생겨요. 배추도 이렇게 할 수 있는데 겨울을 안 넘기면 잘 안 크더라고. 무는 괜찮아요.


고추는 씨를 어떻게 받나요?

-고추는 그냥 심은 걸로 받는데, 보통 끝물은 씨로 사용하지 않고 처음에 맏물 좋은 것 중에 가장 잘 생긴 놈을 골라서 받고, 그게 없을 경우에는 중간물까지도 씨를 받아요. 끝물은 절대 안 써.


고추 심을 때 직파는 어떻게 하셨나요?

-지금은 온상에서 키우니 키가 크고 한 자 이상 벌려 심어서 바람에 잘 넘어가고 하는데, 지금처럼 비닐을 쓴다거나 하지도 않고 옛날에는 간격이 더 좁았어요. 대신 지주가 없어. 서로서로 의지하면서 자랐지. 그냥 나무도 크지 않으니까 바람에 넘어가지도 않고. 수확량은 더 적었지.


수확량은 얼마나 적었나요?

-지금보다 한 6~70%정도 밖에 안 나는 것 같아.


그럼 심을 때는 줄뿌림을 했나요?

-뿌릴 때 고추를 심을 수 있는 간격 정도로 골을 타고, 골에다가 심는 경우보다 두둑에다 많이 심었는데 그거야 밭에 따라서 밭이 습하면 두둑에 심고 건하면 골에다 심는 거지. 골에다 심을 때는 골을 판판하게 고르고 재를 뿌린 다음 씨를 흩뿌려.


재는 왜 뿌렸나요?

-감자 심을 때도 재를 많이 쓰고, 고추에도 많이 쓰지. 그런데 그냥 재가 아니라 오줌하고 섞은 재야. 옛날에는 오줌독에다 인분하고 같이 썩혀서 재에다가 재면 거름이 기가 막히게 좋아요. 오줌이 있다고 해서 푹 젖지 않아요. 그렇게 질은 게 아니야. 수분은 증발하고 거름 성분만 남아. 그렇게 하면 아주 농사가 잘 되지.


병해충은 없었나요?

-벌레가 더러 먹는 건 있는데 지금마냥 이런 건 없었어. 그때는 농약도 없으니까 뿌리지도 않았는데도 고추는 괜찮았어. 더러 이상한 게 나오긴 하지만 지금처럼 버릴 정도는 아니야. 탄저병 같은 건 있지도 않았어.


-희나리 진다는 것은 어떤 걸 말하나요?

희나리라는 것은 고추가 자라다가 벌레가 구멍을 뚫어놓으면 대부분 희나리가 되고, 그리고 보통 붉다가 말은 것, 병이 없더라도 제대로 여물어서 붉은 것이 아니라 약간 붉으려고 할 때 서리가 온다던지 하면 대를 뽑아놨다가 따는 걸 몰아서 희나리라고 그래. 그래도 귀하니까 그걸 모아서 빻아서 썼지. 그걸 찌개 하는데 넣어먹거나 아니면 뒀다가 봄에 들에 나는 나물 종류를 뜯어서 물김치 담글 때 넣으면, 그 고추가 맵긴 또 맵더라고 그래 얼큰하고 시원한 맛이 나요. 그래서 노인네들이 하나 안 버려요.


고추에 거름은 얼마나 했나요?

-그렇게 엄청 집어넣지 않더라고. 오히려 지금이 더 많이 주는 것 같아. 소똥도 뭐 옛날은 풀 먹고 싼 똥이지만 지금은 사료를 먹어서 그런지 더 독해. 옛날에는 소똥거름이 그다지 거름이 되거나 독하지 않아요. 오히려 돼지거름이 좋았어요.


옛날에는 돼지 키우는 집이 많지 않았는데요?

-아니지. 시골에서는 집집마다 거의 있던 것이 돼지야. 일부러 거름도 밟히고 설이나 명절 되면 잡아서 먹는 거야. 소고기가 비싸서 못 먹는 집은 돼지고기라도 먹었지. 그리고 먹는 것보다 기르면 목외돈 쓰는 맛에 키우지. 시골에 뭐 돈이 있어.


그럼 돼지 먹이는 무엇을 줬나요?

-먹이는 쌀뜨물을 받아서 겨를 한 움큼 같이 던져주면 그거 먹고 사는 거야. 그래도 살찌고 자라는 거 보면 우습지. 어렸을 때 ‘저 큰 돼지가 어떻게 저런 겨 한 움큼만 먹고 사나?’ 했지. 쌀겨도 있고, 밀기울도 주고, 또 호박․고구마 같은 건 속은 사람이 먹고 돼지는 그 껍질 같은 것, 참외껍질, 오이껍질 같은 걸 하나도 안 버리고 줘요.

돼지가 풀도 먹어요. 아주 풀만 먹는 건 아니지만 풀도 좋아해. 그리고 돼지한테 일부러 흙도 먹이고, 숯가루도 먹이고 또 해변에 가면 굴, 조개껍질을 주워서 빻아 먹이고 했어. 그래야 뼈가 튼튼해서 새끼도 잘 낳고, 새끼를 낳으면 돼지는 뼈가 잘 부러져요.

돼지가 둔해서 새끼를 잘 깔아 죽여서 처음에는 사람이 새끼를 관리해야 돼. 어미돼지는 좁은 공간에서 깔아 죽이는 것도 몰라. 그러니까 아주 어려서 한 일주일 동안은 젖먹일 때만 새끼를 들여보내 주는 거야. 어미가 젖을 먹이려면 드러눕는데, 그럴 때 새끼를 좁은 구멍으로 넣어줬다가 다 먹으면 다시 몰아내. 처음에는 그렇게 줬다 뺐었다 하는 거야. 그래서 새끼 소리가 밖에서 나면 성질 급한 돼지는 뛰어오르다가 다리가 잘 부러져. 그래서 굴껍질을 먹이는 거야.


돼지는 청소용이면서 거름용이네요.

-그래서 돼지는 일부러 거름도 밟고 목외돈 쓰고 그러는 맛에 키우는 거야. 돼지새끼가 옛날에 2~3천원 하면, 송아지는 보통 5만원 했지.


돼지로 거름 만드는 것은 어떻게 하나요?

-돼지한테 깃을 넣어주잖아. 그럼 거기서 오줌도 싸고 똥도 싸고 밟는다고, 자꾸 그러니까 거름이 떠요. 그렇게 깃을 넣어 주다보면 자꾸 높아지잖아. 그러면 돼지를 몰아내놓고 싹 치운 다음 또 깔아주는 거야. 그럼 자연히 거름이 생기지. 또 깃이 없으면 풀을 베다 주기도 해. 그런데 긴 볏짚을 넣으면 호구로 뜰 때 볏짚이 삭지 않았으면 뜨기 힘들잖아. 그래서 썰어 넣어주는 사람도 있는데 그렇게 넣어주면 더 좋지.

그래서 집집마다 농사는 다 하니까 돼지를 키웠어. 소농, 중농, 대농이라면 대농인 사람들은 농사가 많고 그런 사람들은 대개 잘 사니까 소가 한 마리씩 다 있어요. 그런데 5마지기 정도 하는 사람들도 볏짚은 있으니까 돼지는 다 키웠어.

 

소 없는 사람들은 쟁기질을 빌려서 했나요?

-그렇지. 소 한 마리 얻어오면 일로 갚아주지. 그런데 소 한 마리가 일해주면 친한 사이에는 하루 가서 일하는 경우도 있는데, 보통 둘이 가서 일해 줬어. 거저 해달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소 쟁기질은 어떻게 하나요?

-쟁기질은 먼저 소에다 쟁기를 걸어야 하는데, 그것도 아무나 못 걸지. 그걸 걸려면 먼저 목에 멍에를 걸고, 꽉 조이는 게 있어요. 그걸 매야 멍에가 안 빠져. 그리고 뒤로 줄이 있는데 그걸 매서 쟁기에 걸어.

쟁기가 예전에는 나무로 만들었지. 지금은 쇠로 만든 쟁기가 나왔지만 똑같은 방법이지. 다만 다른 건, 나무로 깎아서 보습이라는 게 있어서 그걸 끼워서 쓰는 거야. 그러다 날이 다 닳으면 새로 갈아 끼고.

그런데 쟁기질은 조정을 잘 해야 해. 쟁기를 눌러주면 얕게 갈리고, 들면 깊이 갈리는 거야. 그걸로 조정하는 거야. 돌 때는 소를 ‘워’ 하면 서, 그때 쟁기날을 살짝 얕게 갈다가 들면 빠진다고. 그럼 다시 소를 모는데 끈이 달려 있어. 그걸로 그 자리에서 방향만 바꾸면 되는 거야.


쟁기밥은 한쪽으로 넘어가지요?

-그렇지. 쟁기밥은 왼쪽으로 넘어가지. 흙밥을 떠서 넘어가도록 볏을 만들어 놨지. 그 자체가 흙을 감아서 넘어가게 만들어진 거야.


경사진 곳을 쟁기질 할 때는 쟁기밥이 낮은 쪽으로 넘어가게 한다고 하던데요?

-그건 상관없어요. 이런 경우는 있어. 논이고 밭이고 가운데를 째서(나눠서) 이쪽은 여기서부터 갈고, 저쪽은 반대편에서부터 가는 방법도 있어.

그리고 경사진 곳에서는 올라갈 때는 자연스럽게 잘 갈리는데, 내려올 때는 잘 안 갈려. 내려올 때는 쟁기를 꼽기가 힘들거든 그래서 올라갈 때는 그대로 올라가고 내려올 때는 빙 돌아 내려와서 다시 올라가. 어쨌든 소 모는 사람은 밭을 어떻게 만들어 달라고 하면 다 알아서 해요.

길게 심는 보리 같은 경우는 한 번씩만 갈고, 밭을 다 가는 것은 싹 간다고 해. 두둑을 넓게 만들려면 서너 번 넘기면 될거야. 수수나 콩을 그루갈 때는 보통 양쪽에서 한번 씩만 넘기면 한 두둑은 나와.


소 모는 방법은 어떤가요?

-지역마다 다 조금씩 차이가 나겠지만 설 때는 ‘워’, 방향 바꿀 때는 툭툭 치면서 ‘어뎌어뎌어뎌’, 소는 말하고 달리 끌어서 조정하지 않고 끈이 오른쪽에 있어서 보통 왼쪽으로만 돌아. 곧장 갈 때는 ‘이랴’.


소한테 쟁기질 훈련은 어떻게 시키나요?

-일은 보통 코뚜레를 뚫은 어스럭송아지를 가르치는데 끌개라고 있어요. 보통 썰매 모양으로 만들어. 잘 안 닳는 통나무를 썰매발처럼 놓고, 못 같은 걸로 단단하게 한 다음에 돌 같은 무거운 걸 올려놔. 그 다음 소에다가 멍에를 걸머지고 맨 다음 그걸 끌고 다니게 하지. 이건 힘만 기르는 게 아니라 말귀를 듣게 하는 거야. 어스럭송아지를 가르치려니까 이게 말을 잘 안 듣고 왜머리 친다 이거야. 그러니까 천방지축이지.

그렇게 일을 가르쳐서 말을 잘 듣는 놈은 쟁기를 한 번 매서 시범적으로 빈 밭에 들어가서 갈아본다고. 몇 번 해봐서 쓸 만하면 어설퍼도 자꾸 쓰다보면 일을 배우지. 그런데 수소보다 암소가 일을 더 잘해. 수소는 잘못하면 받아버려서 부려먹기가 힘들어. 사람도 눈이 작으면 독하다고 하듯이 눈이 작은 소가 독해. 눈이 큰 소는 안 받아. 그래서 수소는 잘 안 쓰고, 보통 새끼 낳더라도 암소를 쓰지.


소먹이는 무엇을 주나요?

-풀도 먹이고, 볏짚도 넣어주지. 그냥 먹이는 것을 생식이라고 하고, 불 때서 쑤어주는 걸 화식이라고 하지 아마. 쒀줄 때 쌀겨를 물바가지로 큰 소는 하나, 작은 소는 반 정도 넣어서 쇠물주걱으로 막 휘젓고 뒤집다보면 짚이 여물이 완전히 익은 게 나와. 그때 콩깍지를 넣어줘. 그걸 소가 잘 먹어. 또 그걸 먹어야 소가 살이 찐다는 거야. 그거 먹는 소는 아주 잘 먹는 소야. 또 벌레 먹은 콩 같은 것도 하나 안 버리고 같이 넣어줘. 콩대는 지가 먹을 때도 골라내지만 사람이 골라줘.


아이들한테 소를 데리고 다니면서 풀을 먹이게 하는 건 왜 그런가요?

-농촌은 바쁘니까 매일 꼴지게만 매고 다닐 수 없잖아. 소를 풀밭에 메어두면 지가 알아서 뜯어먹어요. 줄이 있으면 빙 돌면서 거기 풀을 다 뜯어먹어. 그러면 다른데다 메어두면 또 뜯어먹어요. 하루에 그 정도만 먹이면 돼.

암소 같은 경우는 젖먹이가 옆에 앉아 놀아도 절대 밟지를 않아. 순한 소는 애들이 끌고 다녀도 말을 들어요. 그리고 혼자 집에 찾아오는 소들도 있어요. 소낙비가 가끔 올 경우가 있는데, 자기가 못 참으면 알아서 줄을 끊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어요.


소로는 거름을 어떻게 만드나요?

-외양간에도 깃을 넣어주지. 소가 돼지보다 더 보송보송해야 돼. 그래서 소가 더 신사라고. 돼지는 깃이 모자라서 질척질척하게 키우는 집도 있어.


소나 돼지 말고 닭은 어떤 목적으로 키웠나요?

-닭은 보통 계란을 먹으려고 키웠지. 그리고 나중에 고기도 먹고. 지금은 닭을 기계로 부화시키는데 옛날에는 자연부화를 시켜서 닭이 더 건강하고 맛도 좋았어. 또 놓아서 먹이니까 풀도 먹고 돌도 먹어서 더 건강했지. 그렇게 키우니까 알도 껍질이 더 단단한데 지금 양계닭 계란은 툭하면 깨지잖아.


그럼 닭은 집마다 몇 마리나 키웠나요?

-아무리 없어도 대여섯 마리는 있었지. 그래서 옛날에는 배추 심으면 각자 울타리를 쳤어요. 집집마다 닭이 있으니 먹는다고 뭐라 할 수도 없잖아.

울타리는 산에 있는 싸리 말고 왜싸리라고 그걸 베다가 울타리를 쳤지. 옛날에는 뭐든지 귀해서 그물도 없어서 수수단으로 치는 경우도 있고, 닭장도 특별히 집을 지어주는 것보다 외양간 위에다가 횃대만 두 줄 내지 세 줄만 놔주는 거야. 그러면 거기서 닭이 잔다고. 둥우리도 그 위에다 놔두면 지가 올라가서 알 낳고 신호를 해주고 내려가. 알을 낳으면 꼬꼬댁 꼭꼭꼬 몇 번 외친다고. 알 낳았을 때는 암탉이 울고, 날이 밝을 때는 수탉이 울어.


알은 보통 얼마에 한 번씩 낳나요?

-닭이 7~8개월 정도 지나면 알을 낳기 시작하는데, 잘 낳는 닭은 매일 낳다가 사흘 정도에 한 번씩 거르고, 보통은 이틀에 한 번은 낳아. 그런데 알은 이틀에 한 번 낳는 게 더 맛있지.


토끼도 키우셨다고 들었는데 토끼는 어떻게 키우나요?

-토끼는 습하면 잘 죽어요. 그래서 토끼장은 보통 1m이상 올라가야 좋지. 토끼를 풀어놓으면 돌아다니다가 마루 구멍에 들어가서 죽어요. 거기가 습하거든.

토끼는 씀바귀를 좋아하는데 그걸 먹이면 눈이 더 새빨개져요. 독초는 자기가 알아서 안 먹어요.


겨울에는 뭘 먹이나요?

-겨울에 지금은 사료가 있으니까 먹이지만 옛날에는 콩깍지, 엿밥 그런 걸 먹여요. 시래기가 많으면 그걸 주는 사람도 있고. 쇠죽 쑬 때 여물을 좀 주는 사람도 있고. 나 같은 경우는 산에 가면 자귀나무라고 있어요. 그걸 토끼가 좋아해서 나무도 갉아먹는데 그걸 잘라다가 넣어주기도 하고 그랬어요.


옛날에 귀마개를 토끼로 만들었는데 어떻게 만드나요?

-그걸 토끼 가죽으로 만드는 법이 있어요. 토끼 가죽을 벗겨서 그냥 말리면 단단해서 못 써요. 그 속에 기름이 굳어버려서 단단해져요.

그래서 가죽을 벗기면 그 안에 쌀겨를 하나 가득 채워서 묶어서 몇 개월 매달아둬요. 그러면 기름이 쏙 빠져. 그럼 가죽이 그대로 남으면서 부들부들해서 좋아요. 그럼 그걸로 귀마개도 만들고, 토시도 만들고, 목도리도 하고, 발에다 넣으면 따뜻하고 좋지.


옛날 농사방법 중에서 되살려서 쓰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있으신가요?

-농약 안 쓰고, 비료 덜 쓰고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다 같이 농약을 안 써야 하는데 일부는 쓰고, 일부는 안 쓰고 하는 게 문제지요. 다 같이 농약을 안 쓰면 몇 년간은 피해를 보더라도 되살아나겠지요.

또 농약을 안 쓰고 농사짓는 방법을 자연에서 방법을 찾는 걸 사람이 연구해야 돼요. 내가 생각할 때는 나뭇잎 중에서 벌레가 안 먹는 것이 있어요. 그걸 이용하면 되지 않을까 해요. 벌레가 안 먹는 나뭇잎 중에 중풍에도 쓰는 약인데 두충나무가 있어요. 또 소태나무가 있어요. 어떤 사람은 과수원 중간에 소태나무를 심어서 벌레가 덜 붙는다고 해요. 그러니까 그런 것을 이용하면 분명히 효과가 있을 거라고 봐요.

또 밤나무는 보를 만들 때 쓰면 그곳을 거쳐 내려오는 물은 논에 좋다고 했어요. 벌레가 덜 생기게 한다고 해요. 그래서 밤나무는 숯은 화롯불에는 담지 않았어요. 또 옛날에 못자리를 하면 이끼 같은 게 생겨서 벼 싹이 자라는 걸 방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옛날 어른들이 밤나무 회초리를 꽂았는데 그러면 그게 싹없어져요. 이런 방법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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