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며
●농민들의 수자원 전쟁
이 책은 에도 시대의 농민들이 물과 어떻게 관련되어 살아왔는지를 기술하려 합니다. 농민들에게 물은 음료수·생활용수임과 함께 농업용수로서도 빼놓을 수 없었습니다. 물의 확보는 사활 문제였습니다.
그렇지만 에도 시대에도 수자원은 유한했습니다. 그래서 물 부족인 해 등에는 똑같은 강에서 농업용수를 취수하는 마을들 사이에 물을 둘러싼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예를 들면, 상류부의 마을이 많이 취수했기 때문에 하류부의 마을까지 물이 흘러오지 않게 되어 하류부의 마을이 상류부의 마을에 항의했다는 사례입니다. 이 책에서는 에도 시대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이 물을 둘러싸고 한면으로는 대립하고 싸우며, 다른 한면으로는 협력해 왔던 발걸음을 구체적으로 기술합니다.
현대에도 물을 둘러싼 대립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2013년에는 큐슈 북부의 이사하야만諫早湾의 마감된 간척을 해제할지 어떨지가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군마현을 흐르는 아카츠마강吾妻川의 얀바댐八ッ場ダム에 대해서도 찬반이 나뉘어 있습니다. 농업인과 어업인에게는 이해가 다르고, 수해 방지와 물의 확보, 환경 보호 모두를 우선할지에 따라서도 입장이 다릅니다. 물을 둘러싼 대립은 매우 현대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이 책은 역사에 관심이 있는 분만이 아니라, 현대의 자원·농업·환경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그걸 역사적으로 고찰하고자 하는 분들도 꼭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삼십 몇 년 동안 계속 에도 시대의 마을과 농민에 대해서 조사해 왔습니다. 오늘날의 농촌을 방문해 농가의 흙벽 광에 소중히 보존되어 왔던 고문서를 보면서 에도 시대의 농민들과 대화를 계속해 왔습니다. 그리고 종래의 '이루 말할 수 없는 비참한 민중'이란 농민상을 뒤집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이 책에도 물을 둘러싸고 빼도 박도 못할 대립을 계속 일으키면서 그걸 극복하고자 타협점을 모색하는 농민들, 자기 혼자의 이해와 타인과의 협조 사이에서 흔들리는 농민들, 그러한 농민들의 살아 있는 인간으로서의 실상을 그려 보려고 했습니다.
●농업용수의 확보와 치수에 노력하는 백성들
우리는 매일 무심코 물을 사용하고 있는데, 사람은 물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인체의 70%는 물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동서고금, 만국 공통의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사람과 물의 구체적인 관계는 역사와 함께 크게 달라졌습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에도 시대의 농민들과 현대의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비교해 봅시다.
현대의 우리는 목이 마르면 수도에서 물을 마실 수 있고, 편의점에서 물 페트병을 살 수도 있습니다. 간편하게 맛있는 물을 마실 수 있는 고마움을, 평소의 우리는 자칫하면 잊기 쉽습니다. 수세식 화장실의 보급으로 인해 그곳에서도 물에게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그 한편으로, 가까이에 강이 있더라도 물이 오염되어 있기에 수영하거나 물놀이를 하거나 할 수 없는 일도 많겠지요. 강변과 강바닥이 콘크리트로 발라졌기 때문에 물고기와 수생 동식물을 볼 수 없게 된 강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는, 물(강)과 우리와의 거리는 멀어졌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에도 시대의 마을에서는 사정은 전혀 달랐습니다. 상수도는 없었기에 음료수는 우물이나 근처의 강 등에서 얻었습니다. 오줌은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모아서 논밭의 비료로 사용했습니다. 화학비료가 없는 에도 시대에 오줌은 귀중한 비료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도시의 읍내 사람들에게서 오줌을 구입해서까지 작물에 주고 있었습니다.
대체로 강은 깨끗했기 때문에 마을의 아이들은 강에서 수영하거나 물고기를 잡거나 하며 놀았습니다. 현대의 우리가 차로 멀리 캠핑장 등에 가지 않으면 맛볼 수 없을 것 같은 즐거움이 매우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에도 시대의 농민에게 물은 농업용수로서 빼놓을 수 없었다는 점이 현대 도시인과 가장 큰 차이입니다. 물이 없으면 식물을 기를 수 없는 건 당연한데, 일본에서는 자연적으로 내리는 비에만 의지해 충분한 수확을 올릴 수 있는 경작지는 적은 것이 실정입니다. 그 때문에 자연스럽게 손을 더해 물을 경작지까지 끌어 와야 했습니다. 그것은 농민들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또한 농업용수의 확보는 치수, 곧 홍수나 범람의 방지와 표리일체였습니다. 용수는 강이나 연못에서 용수로를 통해 끌어 오는 것입니다만, 폭우가 내리면 강이 범람하여 강가의 마을들에 피해를 끼칩니다. 자연은 사람에게 혜택을 줄 뿐만 아니라, 때로는 큰 위협이 되기도 합니다(오늘날 우리는 그것을 실체험으로 통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농민들은 제방 축조 등 치수에도 힘을 기울여야 했습니다. 대규모 치수 공사가 되면, 막부나 다이묘가 계획·입안해 시공하고, 비용도 부담했습니다. 그때에도 실제로 현장에 나와 일하는 건 농민들이었습니다. 더구나, 소규모 공사에서는 비용도 노동력도 모두 농민들이 부담해야 했습니다.
이와 같이 농업용수를 얻는 것, 수해를 막는 것, 농민은 모두 자신들이 했던 것입니다. 그건 수고도 돈도 드는 힘든 일이었는데, 농민들이 살아 가는 데에는 빠질 수 없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리고 농민들은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자연과 어울리는 지혜를 몸에 지니며 생활인으로서 성장해 갔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수도에서 물을 마시고, 치수는 행정에 맡기고 있는 현대인보다도 에도 시대의 농민 쪽이 물에 대해 실천적 지식은 풍부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이상 기술했듯이, 에도 시대의 농민과 현대의 도시민은 물과의 관계 방식이 크게 달랐습니다. 현대의 우리는 물을 쉽게 구하는 한편으로, 물의 관리는 남에게 맡기고 행정에 맡기며 물과 소원해졌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물과 어울리는 방식은 시대에 따라서 크게 변해 왔습니다.
현대는 지구 규모의 환경 파괴나 자원의 고갈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 모두가 자신의 일로 생각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때 다소 우회하는 것이지만, 우리 조상이 물과 어떻게 어울려 왔는지, 그 역사를 구체적으로 밝히면서 해결의 힌트를 찾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도 시대의 마을은 현대와 비교하면 생태 사회였다고 할 수 있는데, 그곳에서도 자연 파괴나 환경 문제는 있으며 재해도 마을을 엄습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농민들은 지혜를 짜내 자연과 더 나은 어울림 방식을 모색했습니다. 그러한 노력을 추체험해 보자는 것이 이 책의 목표입니다.
●다량의 물이 기른 일본의 쌀
에도 시대의 마을사람들에게 물은 음료수·생활용수로서 빼놓을 수 없음과 함께, 농업용수로서도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농업에는 물이 필요한데, 일본의 경우는 무논 벼농사 농업이 기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농업용수의 중요도는 더 한층 높았습니다. 그래서 우선 벼(쌀) 이야기부터 들어가도록 하지요.
쌀은 밀, 옥수수와 나란히 세계 3대 곡물의 하나로 여겨집니다. 쌀은 보존성이 우수하고, 영양가가 높으며, 저장도 쉽고 맛도 좋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현대에도 힘우동(力うどん)이라 하면 떡이 들어간 우동을 가리키듯이, 쌀은 고영양가의 스태미너식입니다. 또한 쌀은 주식인 쌀밥으로 먹는 이외에 술, 떡, 전통과자 등으로도 가공되어 일본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식재료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일본인에게 쌀은 힘의 근원이 되는 성스런 먹을거리였습니다. 그 때문에 농민들은 보통은 잡곡을 넣은 밥을 먹더라도, 마을 축제 등의 경삿날에는 흰밥이나 떡을 배불리 먹고, 쌀로 담근 술을 마셨습니다. 지금도 흰밥을 긴샤리銀シャリ)이라 하는데, 이 '샤리'란 '불사리', 곧 석가모니의 유골입니다. 쌀은 불사리가 변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또한, 쌀을 보살이라고 하는 사상도 있었습니다. 쌀은 단순한 식품이 아니라, 그 이상의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벼는 아열대산 식물로, 온난습윤한 기후를 좋아해 아시아 각지에서 널리 재배됩니다. 다산성 식물로, 현대에는 1알의 종자에서 2000알의 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벼에는 자포니카종과 인디카종(인도 요리의 샤프란 라이스 등에 쓰이는 낟알이 긴 쌀임)이 있고, 자포니카종은 다시 온대 자포니카와 열대 자포니카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재배되는 것은 온대 자포니카로, 이건 재배에 다량의 물을 필요로 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일본의 무논 벼농사에는 용수의 공급이 빼놓을 수 없는 겁니다.
야오이 시대 이후 고대·중세를 거쳐 쌀은 점차 사회적 가치를 높여, 성스런 먹을거리로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해 갔습니다. 그리고 에도 시대에는 가장 중요한 식량임과 함께 석고제石高制(뒤에 기술)이라는 형태로 사회제도의 근간이 되어, 가치 기준으로 화폐 같은 기능을 수행했습니다. 일본 역사에서 쌀이 가장 중시되었던 것이 에도 시대였다고 할 수 있겠지요. 메이지 이후 쌀의 생산량은 더욱 증가해 전국민이 쌀밥을 배불리 먹을 수 있게 되었는데, 동시에 구미의 식문화(고기나 빵 등)가 보급되었기에 쌀의 특별한 지위는 서서히 저하되어 갔습니다.
18세기 전반 무렵의 전국 총경지면적(츠시마국을 제하고)은 약 296만 556정보(에도 시대의 면적 단위에 대해서는 뒤에 기술)로, 그 가운데 논이 약 164만 3446정보, 밭이 약 131만 7105정보였습니다. 논 1.25 대 밭 1의 비율이 되었습니다. 논이 과반을 점하고 있는 것과 함께 밭이 많음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에도 시대에는 밭의 비중도 결코 가볍지는 않았습니다.
그 뒤 메이지 14년(1881)에는, 전국의 총경지면적은 444만 6760정보가 되어 18세기 전반 무렵의 1.5배가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논은 259만 1131정보, 밭은 185만 5628정보로 논 1.4 대 밭 1의 비율이 됩니다. 에도 시대를 거치며 논이 큰폭으로 증가한 것입니다(하라다 노부오原田信男 <쌀을 선택한 일본의 역사(コメを選んだ日本の歴史)>).
●'석고제'란 무엇인가?
에도 시대는 석고제의 사회로 알려져 있습니다. 다이묘大名·하타모토旗本 등 무사의 영지 규모도, 농민 소유지의 넓고 좁음이나 마을의 규모도 모두 석고에 의해 표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석고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논밭·가옥 부지 등의 생산량(연공고年貢高라는 설도 있습니다)을 현미의 양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석고는 일정 면적의 논에서 수확되는 평균 현미의 양을 나타냅니다. 밭이나, 더구나 가옥 부지에서는 보통 쌀을 농사짓지 않지만, 농사지었다고 가정하고 밭이나 가옥 부지에도 생산량을 설정한 것입니다. 석고는 토요토미 히데요시나 에도 시대의 막부·다이묘가 실시한 토지 조사인 검지検地에 의해 정해졌습니다.
석고는 용적의 단위인 섬石·말斗·되升·홉合·작勺·재才로 표시되었습니다. 1섬=10말, 1말=10되, 1되=10홉, 1홉=10작, 1작=10재입니다. 1됫병이 약 1.8리터들이라는 것은 현대인도 알고 있습니다. 1섬은 100되이기 때문에, 약 180리터 정도가 됩니다. 쌀 1섬의 무게는 약 150킬로그램입니다. 1인 1년 동안의 쌀 소비량은 일괄해서 말할 수 없지만, 대략 1섬 정도였습니다.
토요토미 히데요시나 토쿠가와 이에야스는 전국시대의 쟁란 속에서 천하를 잡았습니다. 전장의 패자였습니다. 그렇기에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병량(전장식)의 중요성은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 때문에 무가의 권력자는 쌀을 중시하여, 석고제라는 형태를 사회의 기축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또한 민중에게도 전란이나 기근, 재해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보다도 먹을거리가 우선 필요했습니다. 게다가 중세 이래 불교 사상의 영향으로 육식이 기피된 것도 쌀의 지위를 상대적으로 높였습니다. 이들 여러 요인이 합쳐져 석고제가 생겨 정착한 것입니다.다만, 쌀이 사회 제도의 근간이었다고 하여 에도 시대가 현물 결제의 사회였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동시에 화폐도 사회에 보급되어 있었고, 쌀도 물물교환의 대상이라 하기보다도 화폐에 준하는 가치 기준이라는 의미가 컸습니다. 여기에서 에도 시대의 면적 단위에 대하여 설명해 두겠습니다. 에도 시대에는 토지의 면적을 표시하는 단위로 정보町歩(3000평), 반보反歩(단보段歩, 300평), 무보畝(30평)가 쓰였습니다. 1정보=10반보, 1반보=10무보, 1무보=30보步입니다. 1보=1평으로, 이것은 1간間(약 1.8미터) 사방의 면적입니다. 대략 다다미 2첩분입니다. 1무보는 1아르(100평방미터), 1반보는 1000평방미터, 1정보는 1헥타르(100미터 사방)에 거의 상당합니다. 또한 아주 대략적으로 말해 1반보의 토지에서는 1섬 남짓한 쌀을 걷을 수 있다고 생각해 주세요. 1정보의 토지에서는 쌀 10섬 남짓이 됩니다.
●이 책의 구성
이 책은 2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부에서는 에도 시대의 농민과 물의 관계에 대하여 여러 가지 각도에서 기술해 나아갑니다. 이 책의 총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에도 시대에는 치수 공사에 어떠한 궁리를 하고 있는지, 물싸움의 원인은 무엇인지, 물싸움은 어떻게 하여 해결되었는지 등에 대해 망라해서 고찰하고 있습니다. 제2부에서는 풍부한 사료가 남아 있는 현재의 오사카부 지역을 대상 지역으로 좁혀, 그곳의 농민과 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기술합니다. 이 책의 각론에 해당합니다. 마을과 농민의 생존을 건 생업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또한, 중세부터 근세(에도 시대)에 걸친 변화나, 근세부터 근대에 걸친 변화에도 주목해서, 그 안에서 근세를 자리매김해 갑니다. 제2부는 지역에 뿌리내린 내용임과 함께, 그곳에서 밝혀진 사실은 상당한 정도로 전국 각지에도 공통되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에도 시대 물싸움의 특징을 대략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제2부의 대상 지역에는 후루이치古市 고분군이 존재해 현재도 각지에서 고분을 볼 수 있습니다(현재는 세계유산 등록을 목표로 한 운동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제2부에서는 에도 시대의 농민들과 고분의 관계에 대해서도 다룹니다. 고분 주위 해자의 물은 에도 시대에는 농업용수로서 이용되었습니다. 그럼 즉시 본론으로 들어가 보죠.
목차
제1부 물과 함께 사는 농민들
에도 시대의 치수·용수의 지혜부터 물싸움의 실태까지
1장 논을 홍수로부터 지키는 지혜
일본 무논의 특징
확대된 전원 풍경은 에도 시대에 만들어졌다
이에야스에 의한 토네강의 물길 바꾸기 공사
열린 제방과 씻는 제방
신겐 제방과 치수 사상의 변화
2장 용수로의 지혜와 서로 협력하는 마을들
일본 용수로의 특징
마을끼리의 결속 -조합 마을
어떠한 목적으로 '조합 마을'은 생겼는가? ① -자원의 이용이나 재해 등에 대한 대처
어떠한 목적으로 '조합 마을'은 생겼는가? ② -영주나 지역 밖의 사람들에 대한 대응
어떠한 목적으로 '조합 마을'은 생겼는가? ③ -노동자의 임금 억제와 지역 질서의 유지
산야의 초목은 논의 중요한 비료
3장 용수 조합의 실태와 물을 둘러싼 다툼
용수에 관한 여러 경비를 마을들은 어떻게 부담했을까?
용수로의 물은 마을들에 어떻게 분배되었는가?
용수 조합 안 마을들의 역학 관계
용수 다툼이 일어나는 7가지 패턴
전국 시대 다이묘들은 물싸움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에도 막부의 물싸움에 대한 기본 방침
용수의 관리권이 영주에게서 마을사람들의 손으로
용수와 종교의 결속
4장 마을들은 '강'을 어떻게 활용했는가?
용수에 따라서 마을이 하나로 묶인다
에도 시대 관개의 특징 '논 무넘이 관개'와 '분산착포제分散錯圃制'
용수로도 그곳을 흐르는 물도 '마을의 물'
무논은 어업의 장이기도 했다
새논 개발을 거부하고 늪과 살아가는 농민들
용수로의 물을 사용해 물레방앗간을 영업
강이나 용수로의 어업권을 둘러싼 다툼
목재의 교통로가 되는 강
카와치국河内国의 수자원 전쟁에 대해 다루는 사례 연구인 2부는 생략한다. 궁금하면 찾아보시길.
'농담 > 농-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농민들의 수자원 전쟁 -2장 용수로의 지혜와 서로 협력하는 마을들 (0) | 2025.04.08 |
---|---|
농민들의 수자원 전쟁 -1장 논을 홍수로부터 지키는 지혜 (0) | 2025.04.07 |
마을의 작은 정미소가 구하는 아시아, 아프리카의 쌀농사 - 맺음말을 대신해 (0) | 2025.04.01 |
마을의 작은 정미소가 구하는 아시아, 아프리카의 쌀농사 -5장 (0) | 2025.03.26 |
강원도의 산간 주거 (0) | 2025.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