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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농-문화

농민들의 수자원 전쟁 -3장 용수 조합의 실태와 물을 둘러싼 다툼

by 雜것 2025.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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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용수 조합의 실태와 물을 둘러싼 다툼

 

 

●용수에 관한 여러 경비를 마을들은 어떻게 부담했을까?

여기에서 또 이야기를 용수로 돌려보겠습니다. 용수 조합의 기본적 기능은 용수 시설의 유지·관리와 용수의 적절한 배분 두 가지였습니다.

용수로의 유지·수복이나 용수 조합의 운영에 관한 여러 경비는 조합 마을들이 분담해 부담했습니다. 마을들의 부담액을 정할 때의 기준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①마을 할당......이건 마을의 크기나 관개 면적의 넓이에 관계 없이 조합 각 마을이 균등하게 비용을 부담하는 방식입니다. 마을 할당은 형식적으로는 평등한듯 보이고 실질적으로는 작은 마음에 더 무거운 부담이 되기에, 그점에서는 불평등한 방식입니다. 그러나 동등한 부담을 진다는 점은 반면에 동등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는 점이기도 하여, 이 방식이 참으로 불평등한지 어떤지는 각각의 용수 조합에 입각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②관개 면적 할당......이건 각 마을의 용수를 이용하는 경작지(통상은 무논)의 면적에 따라서 여러 경비를 할당하는 방법입니다. 에도 시대에는 각 마을, 각 경작지의 사용 수량을 정확히 계측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곤란했기 때문에(에도 시대에는 오늘날의 수도 계량기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이 관개 면적 할당은 당시에 가능한 범위에서 상당히 실질적으로 공평한 비용 부담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③수확량(石高) 할당......이건 각 마을의 용수를 이용하는 경작지의 수확량에 따라서 여러 경비를 할당하는 방법으로 ②의 관개 면적 할당에 유사한 방법입니다. 다만, 같은 수확량의 경작지라도 면적이 같을 수는 없으며(똑같은 수확량의 경작지라도 생산력이 높은 경작지 쪽이 면적은 작습니다), 따라서 필요한 수량에도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수확량 할당이 완전히 공평한 부담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에도 시대는 석고제의 사회였기 때문에 비용 부담의 기준에서 수확량을 채용하는 건 자연스러웠습니다. 

또, ①부터 ③의 각 방식을 적절히 조합하기도 했습니다(예를 들어, 모든 경비의 40%를 마을 할당, 60%를 관개 면적 할당으로 부담하는 식입니다. 『灌漑」).

 

 

 

●용수로의 물은 마을마다 어떻게 분배되었는가?

하천에서 용수로에 취수하는 지점에는 봇둑을 설치했습니다. 봇둑이란 취수나 유량 조절의 목적으로 일단 물의 흐름을 막기 위하여 강 안에 설치한 구조물입니다. 오늘날 댐의 간이판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봇둑의 구조(물을 막는 방법이나 봇둑의 재료 등)는 봇둑을 통과하여 하류로 흐르는 수량을 규정합니다. 하류의 마을은 상류부의 봇둑을 통하여 흘러 오는 물을 다시 막아서 이용하기 때문에, 상류부 봇둑의 구조에 대해서는 늘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봇둑의 구조는 상류와 하류의 마을끼리 오랜 세월에 걸친 교섭과 항쟁의 결과, 하나의 관습·선례로 정해진 것이 많았습니다.

하나의 하천에 여러 봇둑이 있어, 상류와 하류 각각의 봇둑에서 취수하는 복수의 용수 조합이 있는 경우에는 상류에 있는 봇둑의 구조를 고안함으로써 용수 조합 상호의 물 분배를 조정했습니다. 상류의 봇둑을 너무 견고하게 만들어 버리면, 물이 그곳에서 완전히 막혀서 하류로 가지 않게 되어 버리기에, 적당한 양이 봇둑을 통과해 하류의 봇둑까지 흐르도록 하는 고안이 요구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큰 돌로 봇둑을 만들어 돌과 돌의 간극으로부터 물이 흐르도록 하거나, 봇둑의 일부에 수로를 열어 그곳으로 물을 통과시키거나, 봇둑의 높이를 제한하여 봇둑의 상류에서 반드시 하류로 일정량의 물이 흐르도록 하거나 여러 방법을 취했습니다.

그럼에도 갈수기에는 등으로 배를 대신할 수 없어 상류의 봇둑에서 취수하는 마을들이 봇둑을 보강해 물을 독점하려 하거나, 그에 반발한 하류의 마을들이 실력으로 봇둑을 파괴해 하류로 물을 흐르게 하거나 하는 식으로 격한 대립이 일어나는 일도 있었습니다. 용수를 둘러싼 다툼의 원인으로 대부분은 상류의 마을이 자기 마을에 유리하도록 봇둑의 구조를 변경하고, 그 때문에 하류의 마을이 용수 부족에 빠지는 일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용수 조합마다 취수 시간을 정하여 번갈아 취수하거나(番水), 용수로 안에 구조물을 설치하여 물리적으로 물의 흐름을 분할하거나(分水) 하는 것도 자주 실행되었습니다. 용수로 안에 돌이나 나무기둥을 설치해 물의 흐름을 이분하거나 했습니다. 순번으로 취수하기 때문에 번수, 물을 물리적으로 나누기 때문에 분수라고 하는 겁니다.

이처럼 용수 조함에서는 마을들의 물 이용에 일정한 제한이 있었기 때문에, 한 마을만의 사정으로 모내기 시기를 앞당기거나 하는 일이 어려워, 그것이 농업 생산력의 발전을 저해하기도 했습니다.    

 

 

 

●용수 조합 안 마을들의 역학 관계

용수 조합을 구성하는 마을들의 관계는 반드시 대등하고 평등한 건 아니고, 그곳에는 어떤 격차가 존재하는 경우가 많이 보였습니다. 공동이 반드시 평등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천 관개의 경우, 하천에서 용수로에 물을 받아들이는 취수구(樋, 앞장을 참조)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마을이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는 사례가 자주 있었습니다. 취수구에 가까운 상류의 마을은 취수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그만큼 강한 발언권을 가진 것은 자연의 흐름입니다. 용수로의 분기점에 있는 마을도 지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을은 '물 긷는 근원, 근본(井元, 井親)'이라고 불렀습니다. 

오우미국近江国(현재 시가현) 이누카미군犬上郡의 이누카미강犬上川에서 취수하는 이치노유一ノ井라는 용수로에서는 그 최상류부에 있는 카나야촌金屋村이 여러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마을은 용수 관계의 여러 경비 부담이 면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마을보다도 유리한 조건으로 취수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용수로 수리의 지휘도 카나야촌이 집행했습니다. 나아가 다른 용수 조합과의 교섭도 카나야촌이 수행하고, 용수 관계의 서류도 이 마을이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용수로의 개설에 특별한 공헌이 있던 마을이나, 개설에 진력을 다한 인물이 거주하는 마을이 그 뒤에도 특권을 계속 유지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또한 용수 조합 마을들 중에서 경제적으로 유력한 대규모 마을이나, 정치적 중심이 되는 마을이 용수 이용에서도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는 경우도 볼 수 있었습니다.

또, 용수 조합에 최초부터 속해 있던 마을과 도중부터 가담한 마을과의 격차 등 역사적 경위에 기반한 격차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격차는 큰 흐름으로는 해소되는 방향으로 향했지만, 격차가 근대 이후까지 존속하거나 새로운 격차가 생기거나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저수지 관개의 경우는 하천 관개 만큼 조합 마을들의 격차가 명료하지는 않고, 오히려 평등성이 눈에 띄지만 저수지가 있는 현지의 마을이 어떠한 우월적인 지위를 보유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용수 다툼이 일어나는 7가지 패턴

에도 시대에는 용수를 둘러싸고 각지에서 다툼이 되풀이되었습니다. 지금도 서로 자기 주장만 하고 양보하지 않으며 끝없이 언쟁하는 걸 '물싸움 논쟁'이라 하는데, 이건 에도 시대에 농민들이 서로 자신의 논에 물을 대려고 하며 한치도 양보하지 않고 싸운 일에서 온 말입니다.

또한 '아전인수'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건 모든 일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하려 한다거나 하는 걸 뜻하는데, 이것도 농민들이 자신의 논에만 물을 대려고 하는 자세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처럼 농민들에게 용수의 유무는 사활 문제로, 용수의 확보를 둘러싸고 때로는 격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물싸움의 원인으로는 다음과 같은 걸 들 수 있습니다.

 

①봇둑의 구조를 둘러싼 다툼......앞에 기술했듯이, 하나의 하천에 복수의 봇둑이 설치되어 있는 경우에는 상류 봇둑의 구조가 바뀌면 그곳부터 하류로 흐르는 수량도 변화합니다. 

에도 시대에는 봇둑의 재료에는 목재·돌·흙가마니(흙을 담은 가마니) 등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들을 쓴 봇둑에서는 현대의 철이나 콘크리트 봇둑처럼 물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고, 봇둑의 간극으로부터 물이 하류로 새어나가 흘러 갑니다. 이건 에도 시대 공법의 한계라고 하기보다도, 오히려 그에 의하여 하류의 봇둑에도 물이 공급되었단 겁니다.

그런데 갈수가 되면 상류의 봇둑에서 취수하고 있는 마을들은 가능하면 많은 물을 얻고자 하여 봇둑의 구조를 강화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면 가뜩이나 적은 물이 더욱더 하류로 가지 않게 되고, 그것이 원인으로 하류의 마을들과 상류의 마을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②관의 형태를 둘러싼 다툼......관이란 무엇일까요? 관에는 하천에서 취수한 물을 앞으로 보내는 긴 파이프를 가리키는 경우와 취수구에 설치된 수문(개폐함으로써 물을 막거나 흐르게 하거나 하는 문)을 가리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쪽이더라도 그 형태는 취수량에 큰 영향을 줍니다. 따라서 관의 형태 변경은 마을들의 다툼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③강 준설을 둘러싼 다툼......하천이나 용수로 바닥의 토사를 준설하는 일은 이걸 정기적으로 실행하지 않으면 강바닥에 토사가 쌓여 흐름이 나빠져 취수에 영향을 주기에, 반드시 정기적으로 행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이것도 마을들이 다투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상류의 마을들이 자신들이 사용하는 용수로의 취수구에 더 많은 물이 오도록 하는 형태로 강바닥을 준설했기 때문에 하류의 마을들과 다툼이 일어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강을 준설함으로써 다툼이 된 것인데, 반대로 상류의 마을들이 정기적으로 강 준설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류로 가는 물 흐름이 정체되어 버려 그것이 원인으로 다툼이 일어나는 일도 있었습니다. 또한, 강 준설에 나가는 노동력이나 비용의 부담 방법을 어떻게 할지도 다툼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④물의 흐름을 분할(분수)하는 시설의 설치 형태를 둘러싼 다툼......앞에 기술했듯이, 분수란 용수로 안에 구조물을 설치해 물리적으로 물의 흐름을 분할하는 것입니다. 분수를 둘러싼 다툼에는 기존의 분수 방법이 공평한지 어떤지를 둘러싼 일이나, 시간의 경과에 의한 분수 시설의 형상 변화를 둘러싼 일 등이 있습니다. 

후자에는 분수를 위하여 수로 안에 설치한 돌이 시간과 함께 서서히 또는 홍수에 의하여 움직이거나 기울어지거나 해서 물의 배분이 이전과는 달러져 버렸기 때문에 다툼이 된 사례 등이 있습니다. 

⑤취수 순번(번수)을 둘러싼 다툼......번수란 취수 시간을 정하여 번갈아서 취수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을들 사이의 공평한 취수를 위해 유효한 방법인데, 각 마을의 취수 시간이나 취수의 순번을 둘러싸고 다툼이 일어나는 일도 있었습니다. 

⑥하천의 양안에 있는 봇둑끼리의 취수 다툼......강의 양안으로부터 각각 봇둑이 강 안으로 뻗어나와 있을 때는 더 상류의 봇둑 쪽이 취수에 유리해집니다. 상류에 있는 쪽이 먼저 물을 막아서 취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류의 봇둑을 이용하는 마을들은 봇둑과 취수구의 위치를 반대 기슭의 그것보다도 더욱 상류로 바꾸어 달아서 더 유리한 조건으로 취수하려고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이 강의 같은 쪽에 있는 봇둑끼리의 경우에는 이와 같은 노골적인 행위는 적었지만, 반대쪽 기슭인 경우에는 이러한 일이 행히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원래는 상류에 있었던 봇둑을 이용하는 마을들 쪽이 지지 않고 봇둑과 취수구를 더욱 상류로 바꾸어 다는 엎치락 뒤치락 하는 일도 생겨, 바꾸어 다는 걸 둘러싸고 다툼이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⑦새논 개발과 용수 확보의 모순......경작지를 늘리고 싶다는 건 농민들의 강한 염원이었습니다. 또한, 영주에게도 경작지의 증가는 연공의 증수로 이어졌기 때문에 영주도 경작지의 신개발을 장려했습니다.

그 한편으로, 새논이 개발되면 그 몫만큼 많은 용수가 필요해지기에, 종래부터 있는 논이 물 부족이 될 가능성이 생깁니다. 그래서 새논 개발과 용수 확보의 균형을 어떻게 잡을지를 둘러싸고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카이국甲斐国의 아사오浅尾・호사카穂坂 봇둑의 지점에서 취수하는 용수로는 에도 시대에 새논 개발을 위하여 부설된 것인데, 그 급수 능력의 한도 끝까지 새논이 개발되어 버리면 이후는 그 이상의 새논 개발은 강하게 억제되었습니다. 용수의 관리자로 봇둑 순찰역(堰見廻役)을 두었는데, 그 임무 중에는 무허가로 개발된 새논의 적발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灌漑」)

 

 

 

●전국 시대 다이묘들은 물싸움에 어떻게 대처했는가?

중세에는 종종 용수를 둘러싼 대립이 무력 충돌로 발전했습니다. 전국 시대에는 그 경향이 한층 뚜렷해졌습니다. 물싸움의 주체는 마을이었습니다. 전국 시대의 마을은 일상적으로는 용수로의 정비·보전이나 용수의 배분을 주체적으로 실행함과 함께, 물싸움이 생길 때는 결속하여 상대방 마을과 대치했습니다. 곧, 물의 확보는 어디까지나 마을이 주체가 되어 행하며, 물 확보의 수단으로 평화적인 교섭을 취할지, 무력에 호소할지도 마을이 주체적으로 판단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마을들이 교섭과 충돌을 반복하면서 지역의 물 이용 룰이 차츰 형성되어 갔습니다. 그래서 형성된 질서는 문서에 기록되기보다는 마을 장로의 머릿속에 '선례'로 새겨졌습니다. 장로야말로 지역 질서의 산증인이었으며, 물싸움이 났을 때는 그의 증언이 중요한 의미를 가졌습니다. 

이러한 물싸움이 과도하게 빈발하면, 사회는 불안정해집니다. 그건 민중에게만이 아니라 영주에게도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영주도 대책에 나섰습니다. 

도호쿠의 전국 시대 다이묘 다테伊達 씨는 그 법령집 안에 "물싸움은 용수의 법에 따라야 한다. 그걸 언쟁에 이르게 하고, 나아가 폭력을 행사하거나 하면 그 사람의 잘못이다. 상대를 죽이는 데 나아가면 이유를 불문하고 사형에 처한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물싸움이 났을 때의 실력 행사에 대하여 더욱 강경한 자세로 임했습니다. 무력에 의한 자력 해결을 엄금하고, 현지에서 해결할 수 없는 다툼은 재판으로 매듭지으라고 엄명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실력 행사하는 풍조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에 대해 히데요시가 대응한 실례를 살펴보죠.

덴쇼우天正 20년(1592) 셋츠국摂津国 나루오촌鳴尾村과 카와라바야시촌河原(瓦)林村이 물싸움을 일으켰습니다. 나루오촌이 같은 해에 물 부족에 직면해 새로운 용수로를 부설한 일이 다툼의 원인이었습니다. 이 다툼은 평화롭게 해결되지 못하고 인근 마을들이 나루오와 카와라바야시의 각각에 가세해 큰일이 되어, 쌍방이 활이나 창을 들고 나가 무력 충돌로 발전해 버렸습니다. 에도 시대의 문서에 '합전合戰'이라 표현되는 대규모 충돌로, 쌍방 모두 다수의 사망자와 부상자를 냈습니다.

히데요시는 실력 행사 금지의 명령을 어긴 것은 용서하기 어렵다며 쌍방의 83명을 책형에 처했습니다. 그중에는 아버지를 대신한 13세의 소년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히데요시의 명을 어기고 무력을 행사한 농민들에게는 비극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酒井紀美 『日本中世の在地社会」).

이러한 '본보기'를 통해 히데요시의 단호한 자세는 마을들에 침투되어 농민들은 무력 행사를 자자하게 되었습니다. 농민들 자신에 의한 평화적 해결을 위한 룰 마련의 노력이 있고, 히데요시의 정책도 그걸 촉진하는 측면이 있었기에 농민들에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에도 막부의 물싸움에 대한 기본 방침

에도 막부도 히데요시의 방침을 계승해 마을들의 무력 행사를 엄금했습니다. 막부는 케이쵸우慶長 14년(1609)의 법령으로 "산이나 물을 둘러싼 다툼이 생길 때, 활이나 철포를 이용해 무력 행사를 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이 사는 마을 전체를 엄벌에 처한다"라고 규정했습니다. 물싸움을 실력 행사에 의하여 해결하는 일을 엄금해, 다툼은 막부의 법정에서 평화롭게 해결하도록 했습니다. 

18세기 후반에도 다음과 같은 규정을 불 수 있습니다.

 

물을 대는 방식에 대해서는 관련 마을들끼리 평소부터 잘 논의해 두어야 한다. 물이 부족할 때 다툼이 일어나지 않도록 유의할 것. 물이 부족해졌을 때는 각 마을의 명주名主(대표자)·조두組頭(조장)이 함께 참석하여 공평한 입장에서 상황을 검토하고, 어느 마을에도 지장이 없도록 물의 분배를 배려하도록. 마을 관리의 결정에 따르지 않거나, 용수의 배분을 방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즉시 고발해야 한다.
만약 물싸움이 일어나더라도, 그 현장에 칼이나 단도, 활, 창, 장도 등의 무기를 가지고 나가서는 안 된다. 만약 그러한 무기를 가지고 나간다면 처벌한다. 또한, 무기를 가지고 나간 사람에게 가담한 자가 있다면, 무기를 들고 나간 본인 이상으로 무거운 벌을 내린다.
현장에 가지고 간 괭이, 낫, 막대기 등의 도구를 서로 빼앗거나 빼앗기거나 하는 정도의 사태는 별개로 하더라도, 비록 상대방이 어떤 무기를 들고 나와서 난폭한 행동을 하더라도 그에 맞서 무기를 가지고 나가는 것은 엄금한다. 위반자는 문초하여 반드시 처벌한다.

 

다툼의 평화적 해결은 막부의 일관된 기본 방침이었습니다. 

또한, 안에이安永 5년(1776)의 규정에는 "물의 흐름은 인력을 가지고 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물싸움의 해결 방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습니다.

 

막부의 심리에 의해서도 판단이 곤란한 때는 관련된 마을을 지배하는 막부 대관代官이나 영주의 관리를 현지에 파견하여 현장 검사를 시킨다. 그리고 관리들에게 용수의 배분에 대한 일단 해결책을 입안시킨다. 그리고 3년 또는 5년으로 기간을 정해 그 해결책을 시도해 본다. 시행기간 중에는 수량이 많은 해도 적은 해도 있을 것이므로, 그 상태를 보아 시행 기간 종료 뒤에 최종적인 판단을 내리는 것으로 한다.

 

수리를 둘러싼 자연 환경은 인지를 넘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입니다. 막부에서도 그 변화를 정확히 예측해 적절한 판단을 내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만약 막부가 내린 판단에 의해서도 적절한 용수 배분이 실현되지 않는다면, 관계자의 불만은 막부로 향하여, 막부의 위신이 저하됩니다. 그러한 사태를 피하기 위하여 막부는 일정한 시행 기간을 두어서 상황을 살핌으로써 가능하면 소송의 두 당사자가 납득할 만한 해결책을 이끌어내려 했습니다. "사람은 자연의 힘을 완전히 조절할 수 없다"라는 전제에 입각해, 사람과 사람, 사람과 물의 더 좋은 관계를 만들고자 하는 사고방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때로는 영주 사이의 역학 관계가 용수를 둘러싼 다툼의 귀추에 영향을 주기도 했습니다. 막부령의 마을들이 다이묘·하타모토령의 마을들과의 다툼에서 우위에 서거나, 큰 번령과 작은 번령의 마을들 사이의 다툼에서 전자가 강세를 보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용수의 관리권이 영주에게서 마을사람들의 손으로

막부의 기본 방침은 용수의 이용에 관해서는 가능하면 마을들의 자주 관리에 맡기고, 직접적인 관여는 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주 관리로는 해결할 수 없을 때 비로소 판단을 나타냈습니다. 다만, 갈수 등의 비상시에는 막부 관리 스스로 용수의 배분을 행하여 마을들의 다툼을 미연에 막고자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을 쪽 담당자의 책임은 중대합니다. 『경작 이야기(耕作噺)』(에도 시대의 농업 기술서)에는 촌장(쇼우야庄屋)의 첫번째 책무는 연공 징수가 아니라 용수의 확보·관리라고 적혀 있습니다. 

또한 『촌장 수감(庄屋手鑑)』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른 마을과 공동으로 이용하고 있는 용수로에 관해서는 오래전부터의 관례를 준수하고, 관례는 기록해 놓을 것. 불명확한 점은 관례에 밝은 노인에게 묻고, 중요한 점은 기록으로 남겨 둔다. 평소에 이러한 마음가짐이 없으면, 긴급할 때 적절한 대응을 할 수 없다. 미리 준비를 해 두면, 만일의 경우에 지장없이 대응할 수 있다.
또한, 물싸움이 일어났을 때는 소송의 경과를 초발부터 자세하게 기록해 놓을 것. 소송의 상대방이 무언가 말해 왔을 때는 그 날짜, 심부름꾼의 이름과 직책 등을 확실히 확인하고 기록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해 두지 않으면, 후일의 대응에 불편함이 생긴다.

 

여기에는 기록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수리 관행에 대해서도 옛일을 아는 노인의 기억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그걸 확실히 기록해 놓는 것을 중시하게 된 것이 에도 시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억에서부터 기록으로의 이행입니다. 또한, 용수로의 유지나 용수의 적절한 분배를 위하여 마을 관리 쪽에 전임 담당자를 두는 경우가 많이 보였습니다. 미노국美濃国(현재 기후현) 무시로다이쿠미라席田井組는 용수 조합에서는 이가시라井頭라는 용수 담당자가 있었습니다. 이가시라는 전국 시대에 지역의 유력자 1명이 영주로부터 임명된 것이 시작이었는데, 17세기에는 차츰 사람 수가 늘어나 18세기에는 8명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격도 영주의 대관적인 것에서 마을들의 대표로 변해 갔습니다. 용수의 관리권이 영주에게서 마을들로 옮겨 갔음을 보여줍니다. 

 

 

 

●용수와 종교의 결속

용수와 종교라고 하면 이 양자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의문스럽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전근대에는 종교의 사회적·현실적 영향력이 오늘날보다 훨씬 커서, 그건 용수 조합에도 미치고 있었습니다. 

빗츄우국備中国(현재 오카야마현)의 타카하시강에서 물을 대는 타타이湛井 12개향十二ヶ郷이란 용수 조합에서는 봇둑이 있는 타타이의 땅에 우물 신사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우물 신사는 용수 조합 마을들 전체로부터 숭경되어서, 조합 마을들의 마을사람들은 전원 우물 신사의 우지코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물 신사는 봇둑·용수 및 조합 마을들의 수호신으로서 조합 마을들의 정신적 유대가 되었던 겁니다. 

야마시로국山城国(현 교토부) 남부의 미카노하라향瓶原郷을 관개하는 오오이데大井手라는 용수로는 가마쿠라 시대에 미카노하라향에 있는 카이쥬우海住 산사山寺의 승려 자심慈心이 주도하여 설치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오오이데의 관리·운영에는 중세 내내 카이쥬우 산사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었습니다. 전국 시대가 되면 카이쥬우 산사의 정치적·종교적 영향력이 쇠퇴하고, 에도 시대에 오오이데는 그것을 이용하는 미카노하라향 9개 마을이 자치적으로 관리·운영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오오이데가 완성될 때 자심에 의하여 임명되었다고 전해지는 16인의 이데 지킴이(井手守)가 종교적인 색채가 강한 연중행사(기우제 등)를 집행함과 함께, 마을들을 지휘해 오오이데의 운영을 담당했습니다. 이데 지킴이는 에도 시대에도 중시 이래의 카이쥬우 산사의 대리인이란 성격이 다분히 남아 있었습니다. 수량의 증감 측정법, 용수에 관한 제사·의식의 집행 방법, 용수 배분의 방법 3가지는 이데 지킴이 이외에는 아는 걸 허락하지 않는 '비밀스런 일'로 여겨져, 구전에 의해 대대로 전해졌습니다. 오우미국(현 시가현) 히노강日野川 일대의 미야이구미宮井組라는 용수 조합은 '미야이宮井'라는 이름처럼, 그 땅의 나무라苗村 신사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미야이구미 중에서도 다나카田中・오야도綾戸 2개 마을은 나무라 신사와 특히 연결이 깊었기 때문에, 용수 이용에서 다른 마을보다도 유리한 입장에 있었습니다.이처럼 에도 시대에도 용수와 종교의 연결은 각지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강우가 인지를 가지고 조절할 수 없는 이상, 기우제 등의 형태로 용수와 절과 신사의 관계는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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