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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제초제에 내성이 생긴 풀의 문제의 미국만의 문제이겠냐 싶었는데, 한국에서도 과학적으로 조사한 자료가 나왔다. 바로 충청북도 지역의 논을 대상으로 조사한 내용인데 이것이 충북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대략 30% 정도의 면적에서 제초제 내성 풀이 발견되는 듯하다. 이것이 벼농사를 많이 짓지 않는 충북의 경우가 이러한데, 벼농사 면적이 더 넓은 지역은 어떠한지 모르겠다. 

아무튼 결론은 한국도 제초제 내성 '슈퍼 잡초'에서 안전한 지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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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지역의 논 25.7%가 제초제를 사용해도 잡초가 죽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충북도농업기술원(원장 조광환)이 지난해 9월부터 최근까지 도내 12개 시군 400여 곳의 논 토양시료를 채취해 제초제 저항성 잡초 발생 예측상황을 조사한 결과, 전체 논 재배면적 4만6758ha 가운데 25.7%인 1만2032ha 정도가 제초제를 사용해도 잡초가 죽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15일 밝혔다. 

또한 농업인들의 제초제 사용현황을 조사한 결과 설포닐우레아계 제초제를 오랫동안 연이어 사용하고, 현재도 70% 이상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도 농업기술원은 제초제를 사용할 때 동일한 성분의 제초제를 같은 논에 해마다 사용할 경우 그 제초제에 대한 저항성이 생겨 잘 죽지 않는 잡초가 늘어 방제체계를 개선하지 않으면 제초제 저항성 잡초 발생면적은 급속히 증가할 것으로 예측했다. 

저항성 잡초 가운데 발생면적이 가장 높은 초종은 물달개비 36.4%, 올챙이고랭이 30.7% 미국외풀 10.6% 순으로 특히 저항성 잡초 ‘피’의 발생률이 9.5%정도로 조사돼 ‘피’를 방제하지 못할 경우 수량감소율이 높아 수확포기 상태까지 초래될 수 있다. 

도 농업기술원 김은정 농업연구사는 “농작물 재배는 잡초와의 전쟁으로 2~3년을 주기로 성분이 다른 제초제로 바꿔 사용해야 한다”며 “벼농사는 필수적으로 모내기 전 써레질을 할 때 토양살포용 제초제를 뿌리고 이앙 후 5일 내 초기 방제용 약제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이앙 15일 이후에는 중기 잡초방제용 약제를 추가로 뿌려주고, 후기에는 어떤 잡초가 많은지 관찰해 그에 맞는 약제를 선택, 적기에 뿌려 방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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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rn Ken은 논에서 김매기할 때 함께하는 걸 좋아한다. 그녀의 자매 So Van은 논에서 그녀를 돕고, Sorn은 똑같이 도울 것이다. 그녀는 자매의 논 귀퉁이에서 “우린 이야기를 나누고, 피곤하면 쉬면서 잡담을 나눈다”고 말한다. “그게 남과 함께 논에서 김매기하는 즐거움이다.”

Sorn은 캄보디아 남부의 Takeo주에 근거를 둔 Oxfam의 조력자 RACHANA가 만든 기계적인 제초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뒤 논에서 김매는 시간이 줄었다고 한다. 농민이 이 새로운 기구를 사용하면 며칠 걸리던 일을 몇 시간 안에 끝낼 수 있다.

Oxfam이 지원하는 RACHANA은 제초기를 설계하고 시험하여 농민이 더 많은 벼를 기르도록 도왔다. 혁신적인 벼농사 체계로 전환하고 기계적인 제초기를 사용하여 생산량을 100% 이상 올릴 수 있었다 –Sorn과 그 자매와 같은 소규모 벼농사 농민을 위한 커다란 개선.


혁신을 지원

Sorn은 벼 강화 체계 또는 SRI라 불리는 특별한 방법으로 벼농사를 짓는 지역의 100가구 가운데 한 명이다. SRI는 Sorn 같은 소농이 이용할 수 있는 혁신의 형태를 대표한다: 그건 논을 갈고, 토양비옥도를 개선하며, 벼를 곧뿌림하고 모내기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수확량을 높인다. SRI는 식물이 더 강하게 크고, 해충과 질병에 더 저항력이 높도록 돕는다. 그건 특별한 품종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벼가 더 건강하기 때문에, 농민은 화학비료나 농약이 덜 필요하여 돈도 절약하고 환경도 보존한다.

SRI 기술의 하나는 배게 모를 심는 대신, 멀리 떨어트려 모를 내는 것이다. 그 거리는 뿌리가 더 강하게 자라도록 돕는다. SRI 농민은 줄을 맞춰 모를 심어서, 더 쉽게 벼 사이의 김을 맬 수 있다. 제초기는 그 과정에 속도를 내도록 돕는다.


공동 설계



대장장이 Ben Pen은 여성 농민과 함께 제초기 시험을 행했다. 설계가 완료되고, RACHANA은 900개를 주문했다. Credit: Patrick Brown/Oxfam America

Prey Pa’e에 있는 Sorn의 마을에서 RACHANA는 지역 농민과 함께 제초기를 개발하고자 하는 Ben Pen이란 대장장이를 만났다. RACHANA의 도움으로 2009년에 그는 인도와 다른 나라에서 설계도안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는 여성농민의 피드백을 기반으로 그것을 최적화시켰다. Sorn과 약 20명이 다섯 가지 원형을 시험했다. Pen과 함께 그들은 서로 다른 흙과 풀의 상태에 사용하는 외바퀴와 두바퀴 제초기를 개발했다. 제초기는 1.8~5.5kg의 무게이다. 각각은 농부가 금속 못이 달린 좁다란 바퀴를 밀도록 긴 손잡이가 달렸고, 땅을 휘저어 풀을 뽑아 버린다.

제초기의 시험을 책임진 대부분의 농민은 여성이었다. 남성이 흙을 가는 걸 돕고 수확을 함께하지만, 여성이 논에서 대부분의 일을 한다. Pen과 RACHANA는 제초기 설계가 그들에게 적합하도록 확실히 만들길 바랐다. “이러한 제초기는 여성이 목과 허리의 통증에 시달리지 않게 한다”고 Pen은 말한다. “그들은 서서 훨씬 빨리 할 수 있다.”


‘상당한 차이’

Sorn은 잔디깎이처럼 제초기를 줄지어 심어 놓은 벼의 사이로 밀고 나아간다. 그 농기구는 물을 철벅거리며 풀과 진흙의 무더기를 뒤집어 버린다.

“제초하는 기구를 쓸 때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Sorn은 말한다. “만약 손으로 풀의 윗부분만 매고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그건 다시 자란다. 하지만 제초기를 쓰면, 뿌리까지 파괴하고 풀은 흙속으로 들어간다 –그게 흙을 더 좋게 만든다.”

Sorn은 2400평 되지 않게 농사짓는다. Sorn과 그녀의 자매는 제초기를 구한 뒤 김매기를 더 빨리 끝낸다. 그녀는 이렇게 시간과 노동력이 절감된 것이 현재 자신을 위해 특히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녀의 남편은 죽었고 여섯 아이들은 모두 커서 일이나 공부를 위해 마을을 떠났다. 그녀는 55의 독신이고 도움이 필요하다.

RACHANA의 연구는 SRI, 농민과 결합된 제초기가 3000평의 생산량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평균 2.2t에서 평균 5.6t으로 높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단체는 세 가지 가장 인기 잇는 제초기를 Pen에게 900개를 주문했다; 그건 전국의 농민에게 판매되고 있다. 그 농기구의 가격은 약 20달러 –상당한 투자라 두세 명의 이웃이 함께 사서 공유하도록 유도한다. 


농업 전환

투자는 시간을 절약하는 가치가 있다: Prey Pa’e의 여성들은 3000평의 김을 매는 데 3명이 2주 걸렸는데, 다 맬 때쯤이면 풀이 다시 자란다고 한다. “제초기를 가지고 3명이 한나절에 끝낼 수 있다”고 원형을 시험한 참가자인 Pen Rat이 말한다.

Sorn은 자신이 외바퀴 제초기의 시험을 도왔고, 여성들이 허리 부분에서 밀 수 있도록 손잡이의 각도를 더 낮춰 달라고 Pen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난 여성이 더 세게 밀고 당길 수 있도록 생각했다”고 그녀는 말한다.

이러한 기계적 제초기 같은 혁신의 간단한 형태는 농민이 함께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농사를 개선하기 위해 기술을 개발하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권장한다. 이러한 노력의 유형이 캄보디아의 가난한 농민을 위해 농업을 전환시키기 위한 Oxfam의 작업 가운데 작은 부분이다.

Sorn Ken 같은 농부는 이를 확신시킨다: “이 제초기가 몇 사람 몫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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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모를 내다가 마지막에 막모를 내는 모습.

 

 

원래 조선놈들은 막모를 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논이 천둥지기였고,

그래서 이런저런 농사일을 하다 비가 내리길 기다렸다가 모를 내야헸고,

남자들이 중심이 되어 논농사를 책임지다 보니 더욱 그랬습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가 되어 근대농법이라며 선진적인 일본의 농법을 보급하면서 줄모를 내게 되었지요.

하지만 조선의 논 사정은 여전히 수리불안전답이었지요.

당시 수리조합이 세워지며 그 혜택을 받는 논은 일본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어지고 이어져 80년대인가까지 물세를 내라고 정부기관에서 종용하기도 했지요.

아무튼 아무리 정책적으로 줄모를 내고 품종개량을 해서 줄모를 내라고 해도 조선사람들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왜냐.. 조건이 맞지 않아서입니다.

 

결국 일제가 선택한 것은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농정이 그렇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농정과 비슷하지요.

소농 말살.. 대농의 육성(기업농 육성).. 등등 

 

당시 줄모를 내지 않으면 군청 직원이라든가 공무원들이 나서서 못자리부터 밟아 뒤엎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물론 산간 지방으로 이어지는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곳일수록 그런 일이 적었지요.

아무튼 그 모습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박정희 때 녹색혁명을 이루자 할 때였지요.

그때 통일벼를 심지 않는 곳은 못자리부터 밟아 버렸답니다. 취재를 다니며 그런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습니다.

그런데 통일벼에 큰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냉해에 약하다는 점이었지요.

그도 그럴 것이 통일벼는 열대지방의 쌀인 인디카 계열을 근간으로 육종한 벼라 그렇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농진청에서도 통일벼로는 되지 않는다 하여 다른 방향으로 육종을 했답니다.

 

저는 계속 의문인 것이 무엇이 보릿고개를 해결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석종욱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그 의문이 더 깊어졌습니다.

옛날에 농사지을 때는 유기물 함량이 5% 가까웠는데 점점 화학비료에 의존하면서 2% 이하로 떨어졌다.

그럼 옛날 사람들은 바보라서 보릿고개를 그냥 놔두었는가?

역사 자료를 뒤지면 당시 보릿고개를 어떻게 넘겼는지 나옵니다.

얼마나 훌륭한 복지시스템이 작동했는지는 다시 말해 귀찮을 정도지요.

그게 무너지면서 넘어간 것이 조선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모를 내는 행태를 말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이야기가 줄줄 이어졌습니다.

아무튼 줄모를 내는 것은 편하고, 좋다는 이유를 가졌는데 일의 효율에서는 막모보다 못했습니다.

특히나 지형이나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조선의 논에서

날을 잡아 그렇게 그렇게 하는 일은 우스운 일이었지요.

조선의 농법은 날씨와 조건... 그것들이 큰 영향을 주었을지 몰라도...

정말 큰 일은 그때그때 맞춰서 한다는 것.

그 원칙에 따라 간다는 것.

그걸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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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경기도 안산에서 농사지으며 '귀농통문'이란 계간지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석기라고 합니다.

얼마 전 귀 출판사에서 나온 "논 - 밥 한 그릇의 시원"이란 책을 구입해서 보았습니다.

요즘 보기 드문 농사에 관한 책이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많은 걸 배우고 많은 걸 생각하게 만드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그런데 내용 가운데 몇 가지 확인이 필요한 것이 있어 여쭈어보려고 이렇게 메일을 보냅니다.

 

먼저 22쪽의 사진 설명에 "언 땅을 뚫고 보리싹이 올라온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보리는 10월 중순에 심어 겨울이 오기 전에 싹이 나야 죽지 않습니다.

땅이 얼어 있는데 싹이 나오는 식물은 거의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특히 보리는 겨울이 오기 전, 땅이 얼기 전에 뿌리를 내리고 싹이 나야 죽지 않습니다.

언 땅을 뚫고 올라오는 특별한 보리 품종이 따로 있는 것인지요...

 

다음은 79쪽의 사진 설명입니다.

"탈곡기의 깊은 바퀴자국이 길다"라는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양으로 보아  탈곡기의 바퀴자국이라 하기 보다는, 보리를 심으려고 일부러 골을 탄 모습처럼 보입니다.

또한 "흙갈퀴를 든 아낙이 힘겹게 뭉친 북데기를 펴고 있다"고 하는데, 보리를 심기 전후로 뭉친 흙덩이를 부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96쪽 가장 아랫줄에 "'이랴'는 오른쪽으로" 가라는 말이라고 하는데, 제가 알기로는 전국 어디를 가나 '이랴'는 앞으로 가라는 소리로 알고 있습니다.

보통 오른쪽으로 가라고 할 때는 '어뎌뎌뎌'라는 부리는 소리가 있다고 알고 있는데, 어느 지역에서 그와 같은 부리는 소리를 하는지 궁금합니다.

 

이건 건의사항입니다만, 112쪽 중간에 "논매기와 추수"라는 말이 나오는데, 글 전체의 흐름으로 보면 추수보다는 가을걷이란 표현이 더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또 116쪽에 "뜬 모"라고 띄어쓰기를 하셨는데, "뜬 모"는 뜬모로 붙여쓰는 것이 맞습니다. 모를 낼 때 제대로 땅에 꽂지 못해 이후 뿌리가 제대로 내리지 못해 죽는 모를 말합니다.

 

그리고 117쪽에 "우리나라는 본디 물이 있는 논에 직접 볍씨를 뿌리는 담수직파가 가장 일반화된 재배법이었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어디서 인용하시거나 근거가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올해 건답직파를 실험하고 있는데 그것과 관련하여 많은 도움이 될 듯하여 그렇습니다.

 

157쪽에 "통일벼가 전국적으로 보급되기까지는 정부의 강한 의지와 공무원들의 끈질긴 노력이 있었다"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지만 통일벼는 엄밀히 말해 실패한 품종입니다.

통일벼와 관련하여 정부와 공무원들의 강압적인 자세 때문에 오히려 농민들이 피해를 많이 보았다고 합니다. 통일벼가 아닌 벼를 심으면 못자리에 들어가 마구 짓밟아 버렸다고 하더군요. 그 결과 우리의 다양한 토종벼가 사라지는 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 통일벼는 인디카 계통의 벼를 바탕으로 육종한 품종이라 냉해에 약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못자리를 할 때 날이 좀 춥거나 하면 제대로 모자 자라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다고 합니다. 한 번은 냉해로 인해 싹 다 죽은 적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도 통일벼를 전국에 보급하는 건 힘들겠다고 판단하여 새로운 품종을 다시 육종하여 장려품종을 만든 것으로 알 고 있습니다.

녹색혁명이란 엄청난(?) 과제를 완수하는 데 통일벼가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이 땅에서 보릿고개를 없애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말은 잘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보면 오히려 폐해가 더 많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또 148쪽 사진 설명에 "배고픔과 서민의 음식이었던.......찾아서 먹는다. 청산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에 있는 보리는 우리가 흔히 먹는 보리쌀을 만드는 품종이 아니라 맥주보리입니다.

보리는 보리이지만 밥으로 먹는 보리가 아니기에 설명과 맞지 않는다 싶어서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정도입니다.

그럼 늘 좋은 책 내주셔서 고맙습니다. 애쓰십시오.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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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도 간혹 볼 수 있는 논 제초기. 줄모를 냈을 때만 쓸 수 있는데, 그 효율이나 쓰는 방법은 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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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농업에서 배우자(30)-권유옥 선생(김포)


임금에게 진상하던 자광미, 맛은 최고예요







 

너른 김포 들판 사이로 난 좁은 농로를 따라 하성면 석탄리에 사시는 권유옥(67) 선생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곳에서 나 지금까지 사는 ‘토백이’라고 자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지금도 삼형제가 한 마을에 모여 살며 모두 5만7천 평의 논을 경작하고 계신답니다. 그 가운데 본인은 1만2천 평 농사를 짓는데, 자광미는 500평 정도만 심으셨습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1000평을 지었는데, 올해는 판로 문제나 이런저런 까닭으로 500평만 짓는다고 하십니다. 동네에서도 혼자만 자광미 농사를 짓는다고 하십니다. 선생님의 논은 경지정리를 하면서 한쪽에 몰아서 환지를 받아 1만평 정도는 한곳에 있고, 자광미는 따로 500평 되는 논에다 심었다고 하십니다. 이 논에 4월 26일에 모내기를 했는데, 그보다 일찍 모를 낸 논은 서리를 맞아 싹 죽어서 다시 심은 것이라 합니다. 그래 선생님 논의 모는 벌써 위로 쭉쭉 자라서 다른 논과 두드러지게 차이가 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광미(紫光米)는 말 그대로 자줏빛 쌀입니다. 쌀이 허옇거나 누렇지 어떻게 자줏빛이냐고 생각하신다면, 이 쌀을 한 번 보면 생각이 확 달라질 겁니다. 이 벼는 250~300년 전 중국에 사신으로 간 벼슬아치가 자줏빛 밥을 대접받았는데, 그걸 먹고는 너무 맛있어서 돌아올 때 가져온 씨를 김포에 심어 임금님께 진상한 것이 처음 이 땅에 뿌리를 내린 유래라고 합니다.


- 선생님께 자광미 농사를 짓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두 달 동안 수소문 끝에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자광미에 대한 이야기 좀 부탁드립니다.

= 자광미는 옛날부터 임금님께 진상하던 쌀입니다. 그만큼 밥맛이 좋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게 재배하기 아주 까다로워서, 그전에는 양반 집안에서나 자기들 먹으려고 재배했습니다. 재배할 때 가장 큰 문제는 쓰러지기 쉬워서 많이 심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마음먹고 자라면 사람키보다 더 크게 자랍니다. 그러니 태풍만 왔다하면 죄 쓰러져 버리지요. 이걸 쓰러지지 말라고 규산액을 때려 부어야 그나마 괜찮습니다. 비료는 아예 줄 생각도 못하지요. 비료만 줬다하면 엄청나게 자라서 쓰러질까 봐 그렇습니다.

거름으로는 영양제만 줍니다. 밑거름을 하면 너무 자라서 쓰러지기 때문에 절대 하면 안 됩니다. 따로 비료를 주지 않아도 지 뿌리에서 자기가 먹을 영양은 다 나옵니다.


- 재배하기는 어렵지만 수확량은 좀 많은가요?

= 수확은 잘나면 양석(兩石) 납니다. 지금 말로 하자면 200평에 2가마 정도 나요. 알이 좀 갸름한 모양인데, 다른 벼에 비해서 잘고 달리는 양도 적은 편입니다. 하지만 맛으로 따지자면 이걸 따라올 것이 없습니다. 이 쌀로 밥을 지으면, 밥을 지을 때 김이 나잖아요. 그럼 집안이 구수한 냄새로 핑 돕니다. 백미로 깎으면 아주 맛이 좋은데, 그럼 색이 없어져서 소비자가 믿지를 못해요. 그래서 7분도 정도로 깎습니다. 백미로 깎는 것보다는 맛이 떨어지지만 어쩝니까. 집에서 먹을 때는 아예 백미로 깎아 버립니다.

요즘 시중에 빨간 쌀이 나오는데 그건 수원에서 연구원들이 육종한 홍미가 대부분입니다. 색은 거의 비슷하지만 그걸로 내가 밥을 해 먹어보니 맛은 아주 떨어져요. 그건 대도 짧아서 도복이 안 됩니다. 수확도 아주 많이 나는데 맛이 없어요. 이제 FTA하는데 수확으로는 절대 못 이깁니다. 맛으로 이겨야 해요.


- 그렇게 재배하기도 어렵고 수확도 적은 것을 왜 심으시나요?

= 첫째는 선조 할아버지 때부터 심던 것이라 그렇지요. 저 김포 들미라고 있어요. 거기 동네사람들은 밀다리라고 하는 들미다리가 있는데, 중국에서 가져다가 처음으로 그 옆에다 심었다고 해요. 이걸 이승만 대통령한테도 진상했습니다. 유신 때도 경기도 지사가 선물하려고 해마다 꼭 대여섯 가마씩 가져가곤 했습니다.

키우기도 힘들고 까다롭고, 또 판로도 좋지 않아서 지금은 딱 혼자 남았습니다. 그래 언제는 이걸 그만 두려고 했는데 김포 농정과에서 이게 김포 명물인데 어떻게 없애냐고 하면서 보조금을 조금 줍니다.


- 판매는 어떤 방식으로 하시나요?

= 예전에는 16㎏들이 가마니를 한 장에 2만원 주고 사다 썼습니다. 그걸 일 년에 60장 정도 쓰거든요. 그것만 해도 120만원이라 이제는 아예 가마니틀을 만들어서 겨울에 집에서 짭니다. 이렇게 직접 안하면 다 농협 가서 대출받아 빚지고 살아야 해요.

그럼 거기에 쌀을 담아서 도에 한 20~30가마, 여의도에 20가마, 강남에 사는 돈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연락이 와서 가끔 택배로 보내고, 나머지는 양재동으로 나갑니다.


- 저희가 취재를 하면서 보존 차원에서 씨앗을 몇 알씩 얻어다가 냉동고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 자광미도 조금 얻어갈 수 없을까요?

= 예전에 아랫녘에서 농진청 통해서 소개받고 와서 하도 졸라서 준 적이 있었는데, 아주 김포 농정과에서 경을 쳤습니다. 우리 김포 명물을 타지로 보내면 어떻게 하냐고요. 지금은 고향에서 아예 상표로 만들려고 유출을 못하게 합니다. 쌀로는 어디든지 나가지만.


- 모는 언제 내고 관리는 어떻게 하셨나요?

= 여기는 4월 26일에 모를 냈어요. 이게 모일 때부터 정신없이 올라와서 다른 것보다 키가 커요. 요즘 상토가 나오잖아요. 거기 거름이 들어 있어서 막 나오는 겁니다. 이건 거름을 주지 않아도 워낙 키가 큰데, 파는 상토에다 넣으니 다른 벼는 작아도 이건 정신없이 자라요. 너무 길어서 기계로 심기 힘들어 가위로 자른 다음 심은 겁니다.

이 동네에 늦서리가 한 번 왔는데, 동네 사람들은 일찍 심어서 다 죽었어요. 이건 물이 있으니까 서리가 와도 녹아 버린 거야. 지금 다른 논보다 제일 볼 만해요. 일찍도 심었지만 자광은 비료를 안줘도 신나게 자라요. 그것만 봐도 아주 재밌죠. 주변과 비교해도 따라올 놈이 없잖아요.


- 언제쯤 수확하나요?

= 이건 추석 무렵이면 바로 벱니다. 중만생종쯤 될 거야. 그때도 막 자라요. 가지도 곧잘 치죠.


- 분얼도 많이 하는데 수확량은 왜 적지요?

= 도복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규산질을 많이 줘요. 다른 비료는 영양제 빼고는 안 줍니다. 그랬다가는 너무 커서 싹 쓰러져 버려요. 약도 치지 않아요. 고품질로 파는데 약을 치면 내가 거짓뿌렁하는 나쁜 놈이지. 나는 여기 토백인데, 딴 사람한테 거짓뿌렁 못하고 죽으나 사나 내 땅에서 부지런히 농사지어서 아들딸 공부시키고 이렇게 사는 거지.

딱 하나. 제초제는 칩니다. 이제 논에 들어가 김을 맬 수 있는 힘도 없고, 일이 많다 보니까 그거 하나는 합니다.


- 씨 할 것은 따로 심으시나요?

= 그렇지는 않고, 이걸 수확해서 종자로 씁니다. 베기 전에 콤바인을 싹 청소해서 거두는데, 그래도 기계가 크다 보니 어느 틈엔가 다른 것이 조금 끼기는 합니다. 그러고 15일쯤 햇볕에다 말립니다. 수분측정기가 있어서 수분 15% 될 때까지 말려서 보관해 놓습니다.


- 옛날에는 어떤 식으로 자광미 농사를 지었나요?

= 옛날에 어른들은 2알 넣어야지 3알만 들어가도 뽑으라고 했어요. 많이 넣어 봐야 이삭이 잘아지니까. 손으로 내고, 낫으로 베고, 발틀 밟아서 떨고. 볏단이 조금만 축축하면 거기 잘 앵기는 거야. 통일벼는 귀가 여리잖아(이삭이 잘 떨어진다는 뜻), 자광미도 귀가 여려요. 이상기온이 와서 우박이라도 오면 1/5은 떨어져 버려서 날짐승들이 다 주워 먹지. 지금 그렇게 손으로 하라면 나부텀도 못해요.


- 이건 몇 포기씩 심으신 건가요?

= 이앙기로 해서 4~5대씩 꽂았어요. 가장 좋은 건 2대씩 꽂는 겁니다. 이앙기로 하려니 그런 거지. 그렇게 꽂아 놓으면 15~17대로 분얼해요. 물을 말리면 분얼을 멈추죠. 분얼이 다 됐다 싶으면 그냥 내 맘대로 말리는 거예요. 이 논은 한 6월 10일쯤 물을 뗍니다. 계속 물을 대 놓으면 키만 커요. 그렇게 보름쯤 말렸다가, 물을 안 주면 말라죽으니까 다시 열흘은 물을 대주고, 또 보름쯤 말렸다가 대주고를 반복해요. 여기 물을 말리면 갯논이라 운동화 신고 뛰어다녀도 되는 정도로 마릅니다. 일주일쯤 지나면 티도 안 나게 말라요.


- 병충해나 피 같은 건 어떤가요?

= 여기는 들판이라 피가 많아요. 도아리(까마중)하고. 그리고 중국에서 혹명나방이 많이 날라 옵니다. 그래서 약을 쳐야 하는데 그럼 안 되잖아. 한 4년 전쯤에는 잎을 죄 먹어서 다 쭉정이만 나왔어요. 그해는 농민도 그렇고 농협도 무지 피해를 봤지. 중국하고 가까워서 혹명나방이 해마다 있어요. 자광미는 다른 벼보다 혹명나방이나 병충해에 좀 강합니다.


- 자제분에게 농사를 물려주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 모두 4남매인데 도시에 나가 살아요. 각자 자기 자리 잡고 사니까 땅 준다고 오라고 해도 안 온다고 하죠. 힘들어서 싫대요. 우리는 삼형제가 다 농사지으며 한 마을에 모여 삽니다. 서로 일을 나눠 맡아요. 바로 위에 형님은 이앙만 하시고, 큰 형님은 나이가 여든이 넘으셨으니까 모판 껍데기만 모아 놓고, 나머지 모든 일은 제가 다 합니다. 젊은 내가 해야죠. 그렇게 생각하니까 이건 일이 많고 뭐하고 해도 불평불만이 안 나오는 거야.

처음 1,800평으로 시작해서 부지런히 일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지금도 새벽 3시면 일어나는데, 깜깜해서 못 나가는 것이지 훤해지면 바로 나가서 일합니다. 그래도 새벽부터 집 가까이서 장비 쓰면 동네 사람들이 유난 떤다고 할까 봐 멀리 방죽 있는 데부터 가서 일합니다. 이 일은 정년퇴임이 없지 않습니까. 이건 뭐 땅속에 들어가면 그때가 퇴임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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