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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농-문화

농민들의 수자원 전쟁 -2장 용수로의 지혜와 서로 협력하는 마을들

by 雜것 2025.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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将軍

2장 용수로의 지혜와 서로 협력하는 마을들

 

 

 

●일본 용수로의 특징

지금까지 치수에 대해서 기술했는데, 앞에 기술했듯이 치수와 관개가 수레의 두 바퀴가 되어 무논 벼농사를 발전시켜 왔기에 다음은 관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메이지 40년(1907) 전국 통계에 의하면, 관개용 수원 중에서는 하천이 65.3%를 차지하여 1위, 저수지가 20.9%로 2위였습니다. 다만, 지역적인 특징이 있어 하천 관개는 동일본에 많고, 사이타마현에서는 82.0%, 니이가타현에서는 74.6%, 이와테현에서는 73.6%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한편, 저수지는 세토瀬戸 내해 연안의 시코쿠四国・츄우고쿠中国 지방이나 오사카부・나라현 등에 많고, 카가와현에서는 용수원의 67.3%, 나라현에서는 56.7%, 오사카부에서는 46.5%가 저수지였습니다. 

또, 기타 용수원으로는 샘 5·4%, 우물 1·3%, 호수 1·0% 등이 있습니다(喜多村俊夫키타무라 토시오 『日本灌漑水利慣行の史的研究 総論篇』 이하 『灌漑』라고 약칭).

하천 관개에 대하여 조금 더 설명하겠습니다. 일본의 충적 평야는 바다를 향하여 나름의 경사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강이 산간에서 평야부로 나오는 선상지 부분에 용수로의 취수구를 설치하면 나머지는 중력에 따라서 물이 하류로 흘러 갑니다. 이러한 중력을 이용한 관개 방법을 중력 관개 방식 또는 자연 유하流下 방식이라 합니다.

중력 관개 방식의 특징은 봇둑(취수나 유량 조절의 목적으로 일단 물의 흐름을 막기 위하여 강 안에 설치된 구조물)이나 용수로의 건설에는 대량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데, 일단 그들이 생겨 버리면 나머지는 중력의 작용에 따라서 비교적 쉽게 물을 얻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최초로 용수로를 건설할 때는 힘들지만, 일단 용수로가 생기면 나머지는 인력을 더하지 않더라도 물이 자연스럽게 흘러 줍니다. 가장 힘든 건 초기 투자의 시기 뿐입니다.

이건 농업용수 시설을 설치하는 데에는 매우 유리한 조건이 되었습니다(인력으로 끊임없이 물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농업용수를 얻을 수 없는 경우와 비교해 보세요). 그렇지만 매년 수리시설의 보수를 위해 투하되는 노동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양이었는데, 대국적으로 보면 이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에도 시대에는 수백 정보부터 수천 정보, 때로는 1만 정보를 넘는 관개 면적을 가진 장대한 용수로가 건설되었습니다. 중세까지의 용수로와 비교해 뚜렷하게 대규모가 된 것입니다. 18세기 전반에 무사시국武蔵国(현 사이타마현・도쿄도) 동부에 만들어진 미메마다이見沼代 용수로는 2만3000정보에 이르는 논에 관개하고 있었습니다(玉城哲 『むら社会と現代』). 

하천에서 무논까지 물을 대기 위한 인공 수로가 용수로입니다. 용수로도 생기고 나서 세월이 지나면 자연의 강과 구별이 어려워져 '강'이라 부르는 일도 있습니다. 하천에서 용수로로 물을 끌어들이는 분기점이 취수구입니다. 그러나 단지 취수구를 설치해도 물은 원활하게 용수로로 흘러 들어와 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천의 취수구보다 조금 하류의 지점에 봇둑을 설치합니다. 이 봇둑에 의하여 강의 흐름을 막고 약하게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하여 기세가 약해진 물을 취수구에서 용수로로 이끌게 됩니다. 취수구에는 개폐 가능한 수문(관)이 설치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림3 용수로에서 이루어지는 취수 이미지   

 

 

 

또한, 무논 경작에는 배수로도 필요합니다. 이모작을 행하는 논에서는 겨울철에 물을 빼고 그곳을 밭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용수로에서 물을 넣고, 배수로에서 물을 빼서 논의 수량을 자재롭게 조절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그러나 용수로와 배수로가 늘 명확히 구분되어 있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위쪽 마을의 배수를 아래쪽 마을이 용수로 이용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경우에는 똑같은 수로가 위쪽 마을에게는 배수로, 아래쪽 마을에게는 용수로가 되었습니다. 에도 시대의 경우, 배수라 하더라도 특별히 더러운 물이 아니라, 단순히 불필요한 물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것을 필요로 하는 마을에게는 귀중한 용수가 된 것입니다.

용수로의 형상으로는 우선 하천에서 간선 용수로가 나뉘고, 거기에서 다시 몇 개의 지선 용수로가 분기되어 각 마을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그림4). 용수로는 나뭇가지 모양으로 넓게 펼쳐져 있고, 복수의 마을들이 간선 용수로에서 오는 물을 공동 이용했습니다. 그렇기에 상류의 마을이 필요 이상으로 취수하면, 하류의 마을들이 용수 부족이 될 우려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용수계를 함께 하는 마을들이 연합하여 용수 조합(수리조합)을 만들어 물을 끌어오는 방식이나 수로의 유지·관리 방법 등을 결정해 원활한 용수 이용을 도모했습니다. 

 

그림4 나뭇가지 모양으로 분기하는 하천 용수로의 이미지

※玉城哲・旗手勲 『風土」에서

 

 

중력 관개 방식의 특징은 광역에 미치는 마을들을 하나의 시스템 안에 통합해 나아가는 데 있었습니다. 농민들은 마을을 통해 더욱 광역의 수리 시스템에 편입됨으로써 비로소 원활한 농업 생산을 실시할 수 있었습니다.

 

 

 

●마을끼리의 결속 -조합 마을

용수 조합만이 아니라, 에도 시대에 마을들은 다양한 계기契機로 결속되어 있었습니다. 마을은 결코 고립된 소우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잠깐 길을 돌아, 용수 조합만이 아니라 에도 시대 마을들의 다양한 결속으로 시야를 좀 넓혀 보겠습니다.

에도 시대에는 마을을 넘는 지역적 결합이 다양한 형태로 생겨, 그러한 결합이 마을사람들의 생활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의 굳게 맺어진 사회관계가 마을의 틀을 넘어 확장되고, 마을의 기능을 지역적 결합이 보완하며, 나아가 새로운 기능을 가진 지역적 결합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에도 시대의 지역적 결합은 마을들의 연합, 곧 조합 마을로서 전개되는 바에 특징이 있었습니다. 개인이 아니라 마을이, 지역적 결합의 기초 단위가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마을을 단위로 하지 않는 사회관계도 다양하게 존재했는데(집안끼리의 친척 관계나 금융 관계 등), 마을을 단위로 하는 조합 마을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림5 용소 조합의 조직 구성 개념도. 각각의 마을이 간선・지선의 용수로를 공동으로 이용하는 마을들과 함께 중층으로 용수 조합을 만들고 있음.

※玉城哲・旗手勲 『風土』에서

 

 

 

 

●어떠한 목적으로 '조합 마을'은 생겼는가? ①-자원의 이용이나 재해 등에 대한 대처

조합 마을이 생긴 계기로는 대략 다음의 5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①자연적 여러 조건에 대한 대응

②영주·국가의 부담에 대한 대응

③지역 밖의 사람들에 대한 대응

④지역 안의 사람들에 대한 대응

⑤지역 질서의 유지

 

①을 계기로 하는 조합 마을에는 용수나 입회지入会地(한 마을 또는 복수 마을의 공동 임야)의 이용·관리 등 생산의 여러 조건에 관한 것이나, 자연 재해에 대처하기 위한 것 등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용수 조합은 여기에 포함됩니다. 

에도 시대의 농업 생산에는 물과 비료의 원천으로 산과 들이 빠질 수 없었습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용수는 하천에서 간선 용수로가 나뉘어지고, 거기에서 다시 몇 개의 지선 용수로가 분기되어서 각 마을로 흘러 들어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용수 계통을 같이하는 마을들이 연합해 용수 조합을 만들어 원활한 용수의 이용을 도모한 것입니다.

치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 들면, 강가에 제방을 쌓을 때 한쪽 기슭에만 높은 제방을 쌓으면 그 제방으로 지켜지는 마을들은 안심하지만, 반대로 강 건너편의 마을들이 수해를 입기 쉬워져 버립니다. 그래서 양쪽 강가의 관계된 마을들이 치수를 위한 조합 마을을 만들어 상담하면서 치수 공사를 실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또한 산과 들은 입회지로서 공동 이용되는 일이 많고, 게다가 한 마을이 아니라 복수의 마을들에서 공동 이용하는 '마을들 입회'도 흔히 볼 수 있었습니다. 마을들 입회의 경우에는 같은 산과 들을 이용하는 마을들이 입회 조합을 만들어, 산야의 이용 기간, 채취하는 초목의 양, 초목을 채취하는 데 이용해도 좋은 도구의 종류 등에 대하여 약정을 하고, 마을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농업 생산 조건을 양호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을들이 조합 마을을 만들어서 협의·협력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나아가 흉작·기근은 마을사람들에게 큰 위협이었습니다. 대기근의 시기 등은 한 마을 전체가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일도 있어, 마을 단독의 구제 활동으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영주의 구원은 언제나 충분한 건 아니었기에, 평시부터 공동으로 곡물을 축적하거나 해서 만약의 경우에 대비했습니다.

 

 

 

●어떠한 목적으로 '조합 마을'은 생겼는가? ②-영주나 지역 밖의 사람들에 대한 대응

②~⑤의 계기에 대해서도 간단히 다루어 보겠습니다. 

 

②영주·국가의 부담에 대한 대응을 계기로 하는 조합 마을로는 막부가 전국 정권이 되어 다이묘·하타모토 등 영주 개개의 지배 영역을 넘어 마을들에게 노동력이나 금전의 부담을 요구해, 그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조합 마을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부담의 예로는 매 사냥장 부역(鷹場役, 쇼우군将軍의 매 사냥 실시에 따른 여러 부담)·역참 부역(助郷役, 가도의 역참 업무를 보조하기 위한 인마 제공) 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다이묘 등 개개의 영주도 영내 복수의 마을들에게 토목 공사 등의 공통 부담을 부과해 그것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조합 마을을 만들었습니다.③지역 밖의 사람들에 대한 대응으로는 종교인·예능인·걸인·무적자·노름꾼 등에 대한 대응이나 도시의 특권 상인에 대한 대응 등이 있었습니다. 마을에는 마을 밖에서부터 여러 사람들이 방문했습니다.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그 수는 증가해 갔습니다. 방문한 것은 부적 나눠주기나 기도 등의 종교 행위를 행하는 종교인, 농민 집의 문간에서 여러 재주를 부리는 예능인, 마을사람에게 보시를 구하는 걸인 등 다양한 사람들입니다. 또한 에도 시대 후기에는 몰락한 농민 중에서 무적자·노름꾼이 되어 마을들을 떠돌아다니는 사람이 증가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마을사람들로부터 약간의 금전을 얻는 걸 목적으로 했고, 그중에는 요청액이 너무 높거나 돈 내기를 강요하거나 하는 경우도 있어 그 때문에 마을사람과 분쟁이 일어나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마을들이 공동으로 그들에 대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경우, 한 마을에서만 대처하기보다도 마을들이 공동 보조를 취하는 쪽이 효과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을들이 종교인이나 예능인과 교섭하고, 마을들로부터 그들에게 매년 일정 금액을 지불하는 대신에 그들은 농민 집을 개별 방문하지 않는다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마을사람들은 농작업 등으로 바쁜 시기에 일일이 그들에게 대응하는 번잡함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무적자나 노름꾼은 때로는 폭력으로 위협하여 금전을 강요하는 일이 있었기에, 마을들이 협력해 그들을 포박하여 막부·영주에게 인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마을들의 자치적인 치안 유지 활동입니다. 에도 시대의 마을에는 무사는 거의 없었고, 파출소 같은 시설도 없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스스로 치안을 지켰습니다. 종교인이나 예능인과의 계약에서도 무적자·노름꾼의 포박에서도 모두 마을들이 연합해 협력함으로써 유효한 대처가 가능했습니다. 또한 도시의 특권 상인이 가격 협정을 맺고 마을사람들이 농사지은 농산물을 독점적으로 싸게 매수하려는 일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현재의 오사카부에 속하는 마을들이 오사카 상인의 목화나 유채 종자의 독점적 구입에 반대해 자유로운 판매를 요구하여 일어난 집단 소송인 코쿠소国訴를 들 수 있습니다. 막부에 요구를 인정받는 데에는 수적 힘이 중요했기 때문에 마을들에서는 다수파의 결집에 힘썼고, 때로는 1000개 이상의 마을들도 코쿠소에 참가했습니다. 오늘날에 비하여 정보 전달이나 통신수단이 미발달했던 에도 시대에 이만큼 많은 마을들이 공동 보조를 취했다는 것은 놀랄 만합니다.   

 

 

●어떠한 목적으로 '조합 마을'은 생겼는가? ③-노동자의 임금 억제와 지역 질서의 유지

④지역 안의 사람들에 대한 대응의 예로는, 장인의 임금·더부살이 급료·날품팔이 임금의 억제를 들 수 있습니다. ①부터 ③까지의 계기가 다소 지역 주민 전체의 공통 이해에 관련된 문제였던 데 반해, 이는 지역 안 특정 계층의 이해를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조합 마을 운영의 중심에 있던 것은 각 마을의 관리나 유력 농민들입니다. 그들은 장인·더부살이·날품팔이를 고용하는 쪽이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싼 급료·임금으로 고용하려고 했습니다.

한편, 장인은 마을에 사는 일반 농민이 농업을 하면서 영위하는 일이 많고, 더부살이가 되거나 날품팔이로 나가거나 하는 일도 일반 농민의 호주나 가족들이었습니다. 이쪽은 물론 높은 급료·임금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지역 내부의 계층 사이에 이해의 대립이 있었습니다. 현재 노동자와 사용자의 대립과도 통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이때 조합 마을의 운영을 주도한 마을 관리·유력 농민층은 조합 마을의 약정에 따라서 급료·임금의 억제를 실행했습니다. 임금의 억제는 한 마을만의 약정으로는 효과가 없었습니다. 근처에 더 고임금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노동력은 그쪽으로 빠져나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을 관리·유력 농민층은 마을들에서 공동 보조를 취함으로써 자신에게 안성맞춤인 임금 수준을 실현하려고 했습니다. 현대에서도 지역사회의 내부에는 다양한 이해관계가 존재하고, 그중에는 서로에게 상반되는 것도 있습니다. 그점은 에도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했을 때에 조합 마을은 한쪽의 이익을 지키고, 다른쪽의 이익을 억제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⑤지역 질서의 유지에는 ①부터 ④로 분류하기 어려운 지역의 공동 이해에 관한 여러 계기가 포함됩니다. 예를 들면, 제사를 둘러싼 공동이 있습니다. 지역에 따라서는 복수의 마을들에 걸친 우지코氏子를 지닌 유력한 신사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곳에서는 우지코가 있는 마을들이 조합을 만들어 협력해 제사를 실시하거나 했습니다. 이상 ①부터 ⑤까지로 나누어 기술했습니다만, 이 분류는 어디까지나 편의적인 것입니다. 에도 시대에 지역적 결합의 계기는 이들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때와 장소에 따라서 여러 가지 계기에 의하여 다양한 지역적 결합을 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에도 시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산야의 초목은 논의 중요한 비료

조합 마을이 생기는 계기의 ① 부분에 산야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여기에서 산야에 대해 조금 더 기술해 보고 싶습니다.

산야는 농민의 삶에 빠질 수 없었습니다. 비료의 공급원, 땔감이나 숯 등 연료의 채취지, 가옥의 건축자재나 도로·교량 등의 수복재료 조달지, 나무의 열매·산나물 등 식량이나 소와 말의 사료가 되는 꼴의 채취지 등 그 이용 가치가 매우 컸습니다.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비료의 공급원이란 가치이겠지요. 에도 시대에는 구입 비료(금비)의 이용도 진전되었지만, 동시에 자급 비료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자급 비료에는 산야에서 풀이나 나무의 가지를 베어 와서 그걸 푸른 그대로 논에 밟아 넣는 것(刈敷), 발효시킨 것(퇴비), 태워서 재로 만든 것(초목재), 외양간의 깃으로 깔아 소와 말이 밟고 똥과 오줌으로 적신 것(외양간두엄) 등이 사용되었습니다. 어느 쪽이든 원료는 산야의 풀이나 나무의 가지나 잎이었습니다. 

이들의 필요로부터 마을의 영역 안에는 택지·경지와 함께 산야가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산야에는 개개의 농민이 독점적으로 이용하는 장소도 있었는데(농민 소유 산), 그 대부분은 한 마을 또는 복수의 마을들의 공유지, 곧 입회지였습니다. 마을사람들은 마을이나 조합 마을에서 정한 룰(예를 들면 이용 기간, 채취해도 좋은 초목의 양, 사용해도 좋은 도구 등의 규정)에 따라서 입회지를 이용했습니다. 이러한 룰은 언뜻 답답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유한한 자원을 오랫동안 계속 이용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제가 빠질 수 없었던 겁니다. 산야와 물에는 큰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선 모두 무논 벼농사를 비롯한 농업에서 빼놓을 수 없다는 점입니다. 농업용수로서의 물과 비료로서의 풀이나 나무의 가지와 잎, 이 모두 농업에는 없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다음으로 둘 다 농민 개개의 사유물이 아니라, 한 마을 또는 여러 마을의 공유물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임야 중에는 농민 소유 산도 있었지만, 입회지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농민들은 마을이나 조합 마을에 결집하지 않고는 물도 산과 들도 충분히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용수와 산야가 농민들을 공고히 연결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일본의 마을이 '물과 산의 공동체'라고 불리는 이유입니다.

또한 물과 산야는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강 상류의 산림이 남벌되면, 산림의 보수력이 저하되어 내린 비가 일시에 강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또한 대량의 토사가 강으로 유입되어 강 바닥을 높입니다. 그렇게 되면 홍수가 발생하기 쉬워집니다. 그렇기에 산림의 보전은 치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나아가 산에서 베어낸 나무는 강을 이용하여 하류로 운반됩니다. 강은 목재 운반로로도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산야와 물에는 공통점이 있는 동시에, 둘은 깊이 관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양쪽 모두 농민들의 삶을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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