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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기사를 검색하다가 서울경제 신문 이상훈 기자의 아래와 같은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다음은 기사의 전문입니다.


'국내산 콩으로 만든 유기농 두부는 없다.'

몸에 좋은 유기농 두부는 당연히 국내산 콩으로 만들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다 수입콩으로 만든다.
청정 유기농 식품을 으뜸으로 치는 웰빙시대에 왜 국내 기업들은 국내산 콩으로 만든 유기농 두부를 출시하지 못하는 걸까.
'유기농'은 3년 이상 동안 토양에 농약 및 화학비료를 뿌리지 않은 채 재배된 식품을 말한다. 그런데 국내 지역은 농토가 좁고 비가 많아 와 이런 유기농을 재배하기 위한 조건을 만족시키기가 어렵다. 이 때문에 국내산 유기농 두부를 먹고 싶은 수요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이른바 '수급 불균형'이 빚어진다. 유기농 두부가 전체 두부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5%수준이다.
국내산 유기농 두부가 출시되기 어려운 요인 중에는 콩 종자의 문제도 있다.

국내에서 재배되는 콩 종자의 대부분은 과거 1960년대 일본에서 수입된 '광교'라는 종자의 개량품종이다. 광교는 생산량이 많은 장점이 있지만 병충해에 약해 농약 등을 많이 뿌려야 한다. 그래서 농가에서 콩을 농약 없이 키우기는 힘들다. 이런 이유로 '국산콩두부'는 농약을 친 콩으로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물론 광교의 개량품종 외에 병충해에 강한 국내 순수 콩 종자도 있다. 하지만 종자 양이 미미하다 보니 생산도 적을 수밖에 없는데다, 대부분이 논두렁이나 밭두렁에서 재배돼 농약이 흘러 들어 갈 개연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국내산 콩으로 만든 유기농 두부가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럼 시중에 나도는 유기농 두부는 어떻게 된 걸까. 이 제품들은 호주를 비롯해 중국, 미국 등에서 재배된 유기농 콩을 수입해 기업들이 두부로 만들었다. 가격은 국산콩두부와 엇비슷한 수준이다. 유기농 콩으로 만든 제품 외에 수입산 콩으로 만든 제품은 가격이 제일 싸다.



무엇을 알려주려고 작성한 기사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사의 내용이 오류 투성이입니다. 뭐, 유기농 두부의 재료가 국산 콩이 아니라는 사실이 놀라워서 이런 기사를 작성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정확한 사실을 조사해서 전달해야지 기자가 이런 식으로 기사를 내보내면 안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먼저 그가 언급한 '광교'라는 콩은 일본 도입종이 아닙니다.  '광교'는 일제강점기 경기도 장단 지역에서 수집한 '장단백목'이라는 콩을 인공교배하여 육종한 콩입니다. 그러니 굳이 그 근원을 따지자면 토종의 하나라고 할 수 있지요. 물론 기자의 지적처럼 '광교'가 병충해에 약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병충해 저항성보다 수확량에 초점을 맞추고 농약을 치는 걸 기본 전제로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유기농 농사를 짓고 싶어도 병충해에 강한 종자의 양이 적기 때문에 어렵다는 지적은 얼토당토 않습니다.

일단 농가에서 콩은 보통 씨앗을 직접 받아서 다시 심곤 합니다. 그것은 콩이 씨를 받기도 쉽고 저장도 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리고 보급종을 그렇게 몇 년을 받아서 심어도 퇴화하는 일도 그렇게 많지 않기 때문에 더욱더 그렇습니다. 물론 정부에서는 정부 보급종으로 농사를 지을 경우 안정적인 수확량을 위해 4년에 한 번씩 개량하라고 권장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농민 입장에서 콩씨 한 가마면 돈이 얼마냐 하면서 그냥 지난해 받은 것을 심곤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자의 양이 적을 수는 있지요. 이미 농민들이 심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러한 콩을 많이 심지 않는 더 큰 이유는 가격 때문입니다. 기자의 지적처럼 논두렁, 밭두렁에서 재배하여 농약이 흘러들어 갈 위험 때문에 유기농 콩이 적은 것이 아니라, 수입산 유기농 콩과 도저히 가격 경쟁력에서 맞설 수 없기 때문에 농사짓지 않는 것입니다. 힘들게 농사지어봤자 비싸다고 수매하지 않는데 어쩌겠습니까?


기자가 어떤 동기로 기사를 작성했든지 유기농 두부의 재료가 국산 콩이 아니라는 문제의식은 좋았으나, 그의 기사는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엉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업에 대한 관심은 좋았으나, 좀 더 공부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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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여름, 동아프리카에는 심각한 기근이 닥쳤다. 거기에는 여러 요인이 있지만, 그들의 전통적인 생활방식이 깨진 데에도 커다란 원인이 있다. 


원래 '아프리카의 뿔'이라 불리는 이 동아프리카 지역은 2000만에 달하는 유목민(또는 목축민)이 사는 지역이다. 그런데 그들이 현대의 세계 체계로 인하여 전통적인 삶의 방식이 방해를 받게 된다. 목축민들은 당연히 비가 내리는 곳을 찾아가며 가축에게 풀을 먹이고자 이동한다. 하지만 그러한 드넓은 땅이 농업과 대규모 상업농에게 점령되면서 그들은 자신의 방목지를 빼앗기게 된다. 


그렇게 되자 가축도 제대로 먹이를 먹지 못하여 점점 약해졌다. 그들이 키우는 가축은 이동하지 못하고 한곳에 머물면서 질병에는 더욱 취약해졌다. 자연히 젖과 고기, 기타 축산물을 주식으로 삼던 그들은 서서히 먹을 것이 떨어지게 되었고, 할 수 없이 소중한 가축을 하나씩 시장에 내다파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최근에 이어지는 식량 가격의 폭등과 함께 가축 가격이 하락하면서 자신의 유일한 자산인 가축을 모두 잃는 사람까지 생기게 되었다. 또한 여기에 고질적인 정치적 불안과 내전도 그들의 자유로운 이동을 제한하면서 상황은 점점 악화되기만 했다. 


결국 그들은 전통적 삶의 방식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렇지만 갈곳이 어디 있는가? 바닷가로 나가서 얼마전 우리나라에 잡혀온 해적이 되어 노략질을 하든지, 아니면 변변한 국내 산업도 없는 형편이라 난민촌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 동아프리카 지역에 60년 만에 최악의 가뭄이 들이닥친 것이다. 그들은 지금 죽음이란 벼랑 끝에 위태로이 서 있다. 지금은 당장 구호활동이 시급하지만, 그들의 앞날을 위해서는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방안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세계의 정상들이 다시 한 번 한자리에 모여 현명한 결정을, 이번에는 헛된 공약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실질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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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Alex Chepstow-Lusty 
똥의 좋은 점.
 진드기 덕에 추적한 고대 라마의 배설물은 옥수수농사를 도와 안데스에서 복잡한 사회를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1610년 예수회 신부가 중앙 안데스 산맥의 고지대 계곡을 여행하면서, 거주자들의 생활을 날카롭게 관찰했다. 신부 Bernabé Cobo는 그 지역의 차가운 적막함에 이끌렸고, 그곳 사람들에게 라마가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것에 감명을 받았다. 토착민들은 라마의 고기를 먹고, 그들을 길러 짐을 나르고, 그들의 털과 가죽으로 옷과 신발을 만들었다. 이 동물을 Cobo는 나중에 “산간 지대 인디언의 모든 재산”을 구성한다고 적었다.

지금 새로운 연구는 훨씬 하찮은 라마의 부산물 -똥- 이 옥수수농사가 잘 되도록 하여 고대 안데스 사회를 부상시키는 원료가 되도록 도왔다는 사실을 제시한다. Antiquity의 6월 주제에서 리마에 있는 Institut Français d’Etudes Andines의 고생물생태학자 Alex Chepstow-Lusty는 쿠스코 근처의 농민들이 그 지역에서 옥수수농사를 시작했던 약 2700년 전 많은 수의 라마와 알파카를 기르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호수의 침전물 코어에서 얻은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그것은 또한 위대한 잉카문명의 전신인 작은 부족사회일 때 나타나기 시작했다. Chepstow-Lusty는 이것은 모두 연결되었는지 아닌지 궁금했다. “옥수수는 금방 흙에서 비옥함을 빼앗아서 거름으로 다시 채워줘야 한다”고 그는 말하고, 똥은 밭농사를 유지하기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다. 아마 그것이 차례차례 더 복잡한 사회가 될 수 있도록 도왔을 것이다.

증거는 쿠스코의 북서쪽으로 약 65km 떨어진 해발 3350m의 호수 Laguna Marcacocha에서 나왔다. Chepstow-Lusty는 호수 바닥에서 6.3m 길이의 침전물 코어를 뽑았고, 거기에서 나온 유기물질을 탄소연대측정을 하여 고대의 기후와 농법을 알 수 있는 꽃가루를 분석했다. 그렇게 하면서 그는 호수 침전물 코어에서 흙에 박힌 무척추동물의 작은 유해를 발견했다. 그것은 똥과 기타 쓰레기를 먹고 사는 진드기(oribatid mites)였다. Chepstow-Lusty는 돌아와서 진드기를 분석했을 뿐만 아니라 1cm 간격으로 코어를 샘플로 만들어 각각에서 진드기의 수를 세었다.  

그는 코어에서 옥수수 꽃가루가 현지의 농민들이 예전보다 고지대에서 농사를 짓고 고지대 환경에 적합한 품종을 기를 수 있도록 따뜻해졌던 약 2700년 전 처음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Chepstow-Lusty는 진드기 숫자가 급증하는 시점이 아마 라마와 알파카가 더 많아진 때라 보았다 —약 3000~4000년 전 가축화가 된 동물— 이들은 더 많은 똥을 생산하여 옥수수밭을 비옥하게 하는 데 쓰였다. “난 이것이 농부들을 자극하고 어떻게든 더 많은 옥수수를 기르도록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Chepstow-Lusty는 말한다. “옥수수는 중요한 영양원이 되는 작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를 하나로 묶는 의식을 위한 chicha(옥수수 술)를 생산하는 측면에서도 중요했다.”

쿠스코 분지에 사는 사람들이 산비탈로 옥수수밭의 범위를 확장하고 똥으로 그곳을 비옥하게 만들기 시작하면서, 그들은 더 많은 잉여 식량을 모으기 시작하고 새로운 도로망과 같은 사회기반시설을 건설하고 거대한 상비군을 먹여 살릴 수 있게 되었다. “효율적인 농업목축이 확실히 수도는 쿠스코였던 잉카제국의 성공을 이끈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고 Chepstow-Lusty는 그의 논문에 적었다.

“진드기 농도가 호수의 부근에서 라마와 아마 알파카의 밀도를 명백하게 반영한다”고 리마에 있는 남아메리카 Camelids의 연구와 개발을 위한 연구소의 동물고고학자 Jane Wheeler가 말한다. Marcacocha의 조사결과에 깊은 인상을 받은 그녀는 안데스의 다른 곳에서 적용된 기술을 보고 싶어 한다.

그러나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의 고고학자 Christine Hastorf는 Chepstow-Lusty가 그의 주장을 매듭짓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단지 더 많거나 적은 진드기가 거름을 줬다는 자료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는 동물의 똥으로 식물에 거름을 줬다면 더 높은 질소 동위원소의 흔적이 나타나야 하고, 고대인의 뼈만이 아니라 고대의 식물 유해에서도 질소 동위원소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Chepstow-Lusty는 그의 결론을 굽히지 않는다. 그는 옥수수밭은 정기적으로 거름을 줘야 하고, 라마와 알파카의 똥은 "안데스에 사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쓰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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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이외에 사람은 생활을 위해 식량이 필요하다.  따라서 식량은 또한 경제 성장에 필수이다.




광범위하고 집중적인 식량 생산 체계의 유지라는 문제는 로마제국을 포함하여 이전 문명의 붕괴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1] 녹색으로 우거진 수메르와 바빌로니아문명의 중심 메소포타미아는 주로 토양 침식의 결과 사막이 되었다. 최근 고고학적 연구에 따르면, 마야문명도 마찬가지로 식량 생산의 쇠퇴로 무릎을 꿇었다.[2]

산업사회는 식량 생산을 위하여 관개, 새로운 품종, 화학비료, 제초제, 살충제, 기계 -게다가 세계적으로 공유하는 지역적 풍요로움을 가능하게 하는 수송망- 를 사용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제한 요소였을 것이다. 생산성의 관점에서 20세기 농업은 전례없는 성공 이야기를 만들었다: 곡물 생산량은 놀랍게도 500% 상승했다(1900년 4억 톤에서 2000년 약 20억으로). 이런 업적은 주로 값싸고 잠시 풍부한 화석연료의 사용에 의존한다.[3]

20세기를 시작하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농사지었고, 농업은 근육의 힘(인간과 동물)으로 이루어졌다.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에서 농민은 예전보다 인구에서 훨씬 적은 비율이고 농업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기계화되었다. 연료공급 기계가 쟁기질, 파종, 수확, 정선, 가공, 식량 운송을 하고, 산업형 농민은 보통 더 넓은 토지에서 일한다. 그들은 또한 일반적으로 이러한 생산물을 일괄적으로 도매업자에게 팔거나, 차례로 슈퍼마켓이나 식당의 체인점에 판매하는 유통업자나 가공업자에게 수확물을 판다. 식품의 최종소비자는 생산자로부터 떨어진 몇 가지 단계를 거치고, 대부분의 국가나 지역에서 식량 체계는 몇몇 거대한 다국적 종자회사, 농화학 회사, 농기계 제조사만이 아니라 식품 도매업자, 유통업자, 슈퍼마켓,패스트푸드점이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농장 투입재도 변화했다. 100년 전 농민은 해마다 씨앗을 보관하면서, 토양 개량은 농장 자체에서 나오는 동물의 똥거름으로 했다. 농민은 오직 기본적인 농기구와 추가로 일부 윤활유 같은 유용한 물질만 샀다. 오늘날의 산업형 농민은 묶음상품(종자, 비료, 제초제, 살충제, 사료, 항생제)만이 아니라 연료, 전력 기계, 부품에 의존한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연간 현금지출은 농민이 많은 대출을 받게 하여 기죽게 만든다.

현재와 같은 음식의 풍요로움을 위한 길은 대부분 환경에 부담이 되는 부수적인 비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농업은 토양의 염류축적, 삼림벌채, 서식지와 생물다양성의 손실, 물 부족, 물과 토양의 농약 오염 등의 결과로 이 행성의 인간에게 충격을 주는 가장 큰 근원이 되었다.[4] 화학비료의 사용은 1960~2000년 사이 세계적으로 500% 증가했고, 이것은 수십억 년 동안 존재한 영양소 순환의 과정을 혼란스럽게 하여 바다와 대양에 "죽음의 공간dead zones"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게 만들었다.[5]

최근 몇 년 동안 농업에서 어떠한 환경 개선이 이루어졌다: 미국의 농업은 20년 전보다 더욱 에너지 효율적이고, 화학비료의 사용은 조금 줄고, 토양을 보존하려고 더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보통, 특히 세계의 무대에서 식량 생산이 늘어남에 따라 환경에 충격을 주고 있다.[6]

현재 식량 공급의 추가 확대가 문제로 불거지고 있다. 세계의 1인당 곡물 생산량은 1984년 연간 342kg으로 정점이었다. 몇 년 동안 생산량이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해서, 그 차이를 이월된 재고품으로 채웠다; 현재 2달치 이하의 공급량이 완충재로 남아 있다.[7]

생산량을 늘리기 위한 과제는 몇 곳에서 동시에 나오고 있다: 물 부족(위를 참조), 겉흙 침식(우리는 산업형 농업으로 석탄을 캐는 것의 거의 4배의 비율로 겉흙을 캐고 있다 —1년에 250억 톤 대 70억 톤), 토질의 저하, 경작지의 한계, 종자다양성의 감소, 투입재에 대한 필요의 증가(해충은 보통의 살충제와 제초제에 내성을 갖추게 되어 더 많은 양이 필요해짐), 그리고 특히 화석 연류 투입재 비용의 증가.[8]


그러나 식량 체계를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가 비싸질수록 식량은 점점 더 에너지를 만드는 데에 쓰이고 있다: 많은 정부가 현재 바이오매스 -식량작물을 포함하여- 를 연료로 전환시키기 위하여 보조금과 다른 장려책을 제공하고 있다. 이것은 필연적으로 식량 가격을 올린다. 심지어 밀과 같은 비연료작물은 농민이 밀밭 대신 더 이윤이 나는 옥수수나 유채, 콩 같은 생물연료작물로 대체하도록 영향을 미친다.

또한 광물질 고갈은 인간의 식량 공급에 제한을 가져올 수 있다. 인(P)은 자연 생태계의 제한 요인이다; 말하자면, 구할 수 있는 인의 공급은 이러한 환경에서 가능한 인구의 규모를 제한한다. 인은 식물의 생장에 필수적인 세 가지 영양소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질소와 칼륨이 다른 두 가지). 농업의 인 대부분은 인광석을 채굴하여 얻는다: 유기농 농민은 거친 인산염(crude phosphate)을 쓰는 반면, 관행적인 산업형 농업은 화학적으로 처리한 과인산염, 삼중 과인산염 또는 인산암모늄을 쓴다. 다행스럽게도 중국이 그들의 전통적인 식량-농업 체계에서 인간과 동물의 분뇨를 흙으로 돌려주듯이, 인은 재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소중한 흙의 영양분이 될 막대한 양이 수로로 흘러가 강 하구에 침전되어 버린다.[9]

2007년 캐나다의 물리학자이자 농업자문인 Patrick Déry가 허버트 선형분석(석유 고갈 속도를 예측하는 데 쓰이는 기술)을 사용하여 세계의 인의 생산 통계를 연구하여, 인의 생산량이 미국(1988)과 온 세계(1989)에서 이미 정점을 지났다고 결론을 내렸다. Déry는 현재 상업적으로 채굴할 수 있는 인만이 아니라 낮은 농도의 인광석 비축분까지 자료로 살폈다; 그는 —놀랍지 않은— 경제적, 에너지적, 환경적 관점에서 이를 개발하는 데 더 비용이 많이 들 것이라는 사실을 밝혔다.[10] Déry의 결론은 영국 Soil Association의 최근 보고서에 반향되었다.[11]

이러한 인의 정점 문제를 해결할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인간의 분뇨를 거름으로 만들기; 비료의 더 효율적인 적용; 기존 토양의 인을 더 이용할 수 있는 식물을 만드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농사짓기.


식량 공급의 과제는 농업에서 세계의 해양으로 확장된다. 명태, 정어리, 대구, 도다리 같은 생선은 수십 년 동안 유럽과 북미에서 즐겨왔다. 그러나 이러한 종의 대부분은 현재 멸종위기에 처해 있다. 세계의 수산물 포획은 1994년에 정점에 달했다. 생태학자와 경제학자의 국제 모임은 2006년 현재와 같은 속도로 해양 종이 감소한다면 2048년에 모두 사라질 것이라 경고했다. 그들은 2003년 현재 역사적 최고 포획 수준 아래의 적어도 90%를 의미하는, 모든 어류 종의 29%가 붕괴되었다고 지적했다. 개체수 붕괴의 비율은 계속 빨라지고 있다. 모임의 보고서를 이끈 저자 Boris Worm이 말한 것을 인용하면, “우리는 이제 진짜로 이 길의 끝이 보인다. 우리 생애의 안에 있다. 만약 우리가 바뀌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은 해산물 없는 세계를 볼 것이다”라고 했다.[12] 더 최근의 연구를 보면, 많은 종류의 물고기는 어류 남획이 멈추어도 회복하기가 매우 어렵다. 보존 노력이 15년 계속된 뒤에 많은 동물이 가까스로 증가하는 수준이다. 예를 들어 대구는 전혀 회복되지 않는다.[13]


자, 그럼 전체적인 그림이다: 식량에 대한 수요는 천천히 공급을 앞지른다. 늘어나는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식량 생산자의 능력은 점점 늘어나는 인구, 담수 공급의 하락, 바이오연료 산업의 상승, 더 자원 집중적인 고기와 생선에 기반한 식사를 위한 산업화되는 국가의 확대되는 시장에 부담을 안게 된다; 어장은 줄어든다; 기후는 불안정하다. 그 결과는 거의 필연적으로 20~30년 안에 언젠가 온 세계의 식량위기로 나타날 것이다.[14]

세계의 식량 생산을 높이거나 심지어 현재의 속도를 유지하기 위한 과제는 이번 1장에서 언급한 다른 문제(기후변화, 에너지자원 고갈, 물 부족, 광물질 고갈)뿐만 아니라 다음 2장에서 논의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현대 농업은 융자와 빚의 체계를 필요로 한다. 농민이 융자를 받지 못하면, 점점 더 비싼 투입재를 구할 수 없게 된다. 식량 가공업자와 도매업자도 마찬가지로 융자를 받아야 한다. 따라서 장기 신용위기는 상상할 수 있는 기상재해만큼 세계의 식량 공급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

종종 이러한 기죽고 있는 식량 체계의 과제로 제시되는 해결책이 유전공학이다. 만약 우리가 더 생산적인 작물품종, 더 영양가 높은 식량, 짠물에서 자랄 수 있는 식물, 더 빨리 자라는 생선, 또는 콩과작물처럼 공기중의 질소를 고정할 수 있는 곡물을 만들기 위한 유전자를 붙일 수 있다면, 그럼 우리는 담수 관개, 질소비료, 어류 남획을 줄이면서 더 많고 영양가 높은 식량을 기르고 사람들을 더 잘 살게 할 수 있다. 너무 좋아서 믿어지지 않는다. —희망사항이다. 현실에서 대부분의 특허받은 식물 유전자는 거의 해충이나 특정 제초제에 대한 저항성을 부여한 것이다; 더 영양이 풍부한 작물과 질소를 고정하는 곡물이란 약속은 실현되려면 아직도 멀었다.  한편 유전자조작으로 만들어진 종자 산업은 계속하여 에너지 집약적인 기술(화학비료와 제초제와 같은)만이 아니라 융자와 부채에 기반한 금융체제와 함께 중앙집중적인 생산과 분배 체계에 의존한다. 지금까지 식량작물에 유전자를 접합하는 것은 주로 점점 독점화되는 기업의 종자 산업을 위한 막대한 이익을 발생시키고, 농민은 더 많은 부채를 지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유전자조작 생선에 대해서라면, 생태학자들은 그것들이 막힌 공간에서 자라다가 잘못하여 야생으로 탈출하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야생의 개체수를 잠식하여 생태계를 어지럽힐 것이라고 경고한다.[15]

지난 몇 십 년 동안 Wendell Berry, Wes Jackson, Vandana Shiva, Robert Rodale, Michael Pollan을 포함한 농민, 농업학자, 식량 체계 이론가들이 소리 높여 농업의 중앙집중화, 산업화, 세계화에 대항하며 화석연료 투입재를 최소로 하는 생태학적 농업을 주장해 왔음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의 견해는 피크오일과 성장의 끝에 대한 적응이 더 쉬울 것이라는 점에 뿌리를 두고 있다. 불행히도 그들의 권고는 주류가 되지 못하고 있다. 산업화, 세계화된 농업이 은행과 농기업 연합을 위한 더 많은 단기 이윤을 생산하는 능력을 입증했기 때문이다. 더욱 불행히도, 피크오일과 경제수축이 오기 전에 사전 대비적인 식량 체계로 이행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가버렸다. 우린 남은 시간을 다 썼다.


이 기사는 Post Carbon Institute의 Senior Fellow인  Richard Heinberg의 2011년 9월에 출간될  The End of Growth 에서 나왔다. 

Access additional excerpts on the Post Carbon Institute website.

 

참고문헌

1. In his book, Dirt, David Montgomery makes a powerful case that soil erosion was a major cause of the Roman economy’s decline. David Montgomery, Dirt: The Erosion of Civilizations, (Berkeley and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7).

2. T. Beach et al., “Impacts of the Ancient Maya on Soils and Soil Erosion in the Central Maya Lowlands,” Catena 65, no.2 (February 28, 2006), 166-178.

3. Richard Heinberg and Michael Blomford, The Food and Farming Transition, Post Carbon Institute, 2009, available online http://www.postcarbon.org/report/41306-the-food-and-farming-transition-toward.

4. Jonathan Foley, “The Other Inconvenient Truth: The Crisis in Global Land Use,” environment 360, posted October 5, 2009.

5. “World Fertilizer Consumption,” spreadsheet for “Food and Agriculture,” Earth Policy InstituteData Center, posted January 12, 2011, http://www.earth-policy.org/data_center/C24; Robert J. Diaz et al., “Spreading Dead Zones and Consequences for Marine Ecosystems,” Science321, no.926 (2008).

6. David Tilman et al., “Agricultural Sustainability and Intensive Production Practices,” Nature418 (August 8, 2002), 671-677.

7. Scott Kilman and Liam Pleven, “Harvest Shocker Rattles Wall Street,” The Wall Street Journal, October 9, 2010.

8. Food and Agriculture Organization of the United Nations, “Protect and Produce: Restoring the Land,” in Dimensions of Need–An Atlas of Food and Agriculture (Rome: FAO, 1995); Leo Horrigan, Robert S. Lawrence, and Polly Walker, “How Sustainable Agriculture Can Address the Environmental and Human Health Harms of Industrial Agriculture,” Environmental Health Perspectives 110, no.5 (May, 2002).

9. Patrick Déry and Bart Anderson, “Peak Phosphorus,” The Oil Drum, posted August 17, 2007,www.theoildrum.com/node/2882.

10. Patrick Déry, Pérenniser l’agriculture, Mémoire pour la Commission Sur l’Avenir de l’Agriculture du Québec, GREB, April 2007.

11. A Rock and a Hard Place: Peak Phosphorus and the Threat to our Food Security, (Bristol UK: Soil Association, 2010).

12. Juliet Eilperin, “World’s Fish Supply Running Out, Researchers Warn,” The Washington Post, November 3, 2006.

13. Corinne Podger, “Depleting Fish Stocks,” BBC World Service, posted August 29, 2000.

14. Julian Cribb, The Coming Famine: The Global Food Crisis and What We Can Do to Avoid It, (Berkeley and Los Angeles: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0).

15. R.D. Howard, J.A. DeWoody, and W.M. Muir, “Transgenic Male Mating Advantage Provides Opportunity for Trojan Gene Effect in Fish,”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 101, no.9 (February 19, 2004), 2934-2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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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채씨 집성촌인 문경시 산양면 현리마을에는 1960년대 중반까지 머슴들이 꽤 많았다. 이 마을에서 머슴들은 '큰머슴(상머슴)', '전머슴', '꼴머슴'으로 위계가 구분되었다. 1950년대 말을 기준으로, '상머슴'은 25~30살 정도의 머슴 가운데 일을 잘하는 사람으로서 논갈이와 써레질 같이 어려운 일을 담당하였고, 1년 새경은 쌀 두 가마니였다. '전머슴'은 둘째 머슴으로서 품앗이를 해서 모를 심는 정도의 일을 하는 일꾼이었고, 1년 새경은 쌀 한 가마니 정도였다. 전머슴은 적어도 20살이 넘어야 되지만, 일을 잘하지 못해서 큰머슴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었다. '꼴머슴'은 세째 머슴으로서 20살 정도의 나이였는데, 소 먹이고 꼴 베고 심부름을 하는 일꾼이었다. 꼴머슴의 1년 새경은 노동능력과 계약조건에 따라서 밥만 얻어먹는 것부터 쌀 1말 정도까지 달랐다. -채군식(남, 73세) 제보, 2002년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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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곡이 인기는 인기인가 봅니다.

정말 다양한 잡곡을 팔고 있더군요.

 

 

메밀도 벗겨서 쌀로 팔고...

 

검은보리쌀도 있더군요.

 

 

수수와 조는 전부터 있던 거지만 검정쌀도 현미로 팔고,

 

 

통밀에 귀리까지 팝니다.

 

 

마지막으로 콩나물콩도 두 종류를 팔고 있네요.

 

모두 함양농협에서 생산한 것인데, 한 번 함양에 가볼 만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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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진흥청이 지금과 같은 자리(수원)에 세워진 것은 그 역사가 100년이나 거슬러 올라간다.

슬픈 역사이긴 하지만 그걸 말하려면 일제를 입에 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근대화라는 미명으로 대한제국에게 농업 연구를 권장한 결과, 1906년 이곳에 권업모범장이란 기관을 설치한다.

그게 얼마나 빛 좋은 개살구였는가는... 1910년 조선총독부 산하로 이 기관이 예속되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아무튼 그때부터 일제는 자신의 발전한 농법을 조선에 보급해야 한다는 생각을 더욱 굳힌다.

'모범적인 농업을 권한다'는 기관의 이름에서 바로 그것이 잘 드러난다.

 

지금도 농촌진흥청에 가면 그때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농촌진흥청에 들어가 왼쪽으로 보면 이러한 비석이 서 있다. 잘 보면 이는 이정표임을 알 수 있다.

이쪽 건물은 권업모범장, 뒤쪽에는 다른 건물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건 대정 oo년이라 새겨 있는데, 정확히 무엇을 하는 상징물인지 모르겠다. 

 

 

일제시대에 세워진 연구동. 아직도 그 형태가 잘 남아 있다. 지금까지도 쓰는 걸 보면 참 일본놈들 무섭다. 

 

 

일제시대 건물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  

 

 

원래 입구 쪽은 거의 쓰지 않는다. 앞으로 큰길이 뚫려 그곳으로는 통행하지 못하도록 막아 놓았다. 

 

 

건물 안 계단에서도 옛 향기를 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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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들에게 가장 소중했던 것은 물론 주식으로 먹는 밀가루였을 테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하던 것이 소금이었다고 합니다. 당시의 빵은 지금처럼 부드러운 것이 아니라 밀기울과 수수를 섞어 만들어 이를 먹으려면 소금이 꼭 필요했다고 하네요. 특히 힘든 노동을 할 때는 소금이 꼭 필요했기에 더욱 소금을 귀중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소금 담는 그릇을 목숨을 지켜주는 것이라 생각하여 대대로 자자손손 물려주곤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화폐가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초기 로마에서는 관리와 군인들의 급료를 소금으로 지불했습니다. 소금 대신 화폐가 지급되기 시작한 것은 제정로마에 들어와서였습니다. 영어의 급료를 뜻하는 'Salary'라는 말의 어원이 라틴어로 소금의 값을 뜻하는 'Salarium'에서 유래했다는 점에서도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월급이 짜다'라는 말 역시 고대 로마에서 유래를 찾아야 할 겁니다. 이밖에도 'Salaus(소금을 친 양념)' 'slodior(소금으로 급여를 받는 군인)' 'Salade(채소에 소금을 뿌린 음식)'도 모두 소금과 연관된 단어입니다.

 

부와 권력을 부여했던 소금 수요는 로마로 하여금 곳곳을 잇는 무역로를 개척하도록 했으며, 소금을 교역하고자 오가던 길은 실크로드보다 오래된 인류 문명의 발자취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소금이 산출되는 해안이나 소금호수와 암염이 있던 곳은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소금이 곧 자본이었던 셈이죠. 6~7세기까지 작은 어촌이었던 베네치아가 10세기 이후 번창하게 된 원인도 소금 교역으로 큰 돈을 벌어들였기 때문입니다. 

 

 

아래 사진은 이탈리아 시실리 북서쪽에 위치한 트라파니 지방의 염전입니다. 이곳은 염전이 많아 'Via del Sale(소금길)'이라 불린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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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0월 22일. 안산의제21에서 기획한 대부도 생태투어 일정에 참여했다. 그 일정의 하나인 동주염전을 방문했는데, 그전부터 한 번 가보고 싶었던 곳이었던지라 더욱 좋았다. 특히나 지금 보고 있는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의 저자 다카하시 노보루가 방문했던 곳이기도 하여 더 뜻깊었다. 염전과 관련한 기록은 아래와 같다.

 

벗(소금 굽는 가마)은 이 섬에는 100군데 있다. 그것들의 권리를 가진 10명 정도의 자본가가 사는데, 이들이 자본을 제공한다. 대부분 마을마다 있다. 1벗은 2칼반이 보통이다. 1칼반의 넓이는 1000평 정도다. 1칼반은 5명이 경영하고, 한 달에 20섬 정도의 소금을 만든다. 소금은 거간꾼이 사모아서 마포에 보낸다. 마포에는 소금 창고가 있다(소금과 물고기 거간꾼을 중상仲商이라 함). 가장 왕성할 때는 20년 전이었는데, 그 뒤 점점 쇠락했다. 간척의 장려와 노동력, 땔나무가 비싸졌기 때문에 빠르게 쇠락했다. 지금은 다섯 염막 10칼반 정도 있다. 현재 동리東里에 남아 있다. 그곳은 매립지로서 염분의 농도가 문제된다. 동리의 웃동네 앞에 남아 있다.

벗은 모두 국유지여서, 간척할 경우에는 나라에서 국유지를 돌려받기 위하여 벗을 가진 사람에게 권리금으로 1칼반에 200원을 주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벗은 빠르게 쇠퇴했다.

섬의 농사땅은 1호에 3600평(1町2反) 정도다. 벗이 폐지되어도 다른 곳으로 나간 사람은 적었다. 그리고 그때는 일반적으로 소금밭에서 열심히 일하여 농사는 오히려 부업 정도로만 생각하며 살았다. 그때 농사는 아주 엉성했다. 그 뒤 화학비료를 쓰고 벗이 사라지면서 노동력이 많아져 농사가 그런 요인들 때문에 발전했지만, 사람들의 생활수준은 얼마쯤 떨어졌을 것이다. 요컨대 벗의 폐지에 따른 과잉 인구는 섬의 농사에 포용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듯 그 시절부터 대부도의 소금은 유명했다. 그때는 가마에 굽는 소금이었는데 지금은 그 생산방식이 바뀌었다고 한다.

 

대부도에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동주염전. 주안염전, 대부염전, 소래염전이 옛날부터 유명했다고 한다. 이곳들을 서로 이으면 수인선 협궤열차의 선로와 일치한다. 일제는 철저히 수탈을 위한 목적으로 조선을 발전시켰다. 

 

동주염전의 대표이신 백승근 님의 말에 따르면, 소금의 생산방식으로는 현재 장판식과 토판식, 타일식이 있다고 한다. 장판식은 장판을 깔아서 소금을 만드는 방식인데, 생산량은 많아지나 맛은 물론 인체에 해로운 요소가 생긴다. 그래서 그런 장판을 걷어내고 요즘 토판염이라는 새로운 소금이 유행하고 있는데, 염도도 그렇고 맛도 타일식에 비해 떨어진다. 그래서 동주염전에서 채택하고 있는 방식은 타일식인데, 이 방법이야말로 펄을 살린 좋은 소금 생산방식이라고 한다.

 

질 좋은 소금을 생산하는 것으로 강한 자부심을 가지신 백승근 님. 

 

염전 옆에 있는 수로. 돌을 하나하나 쌓아올려 만들었다. 염전은 그 자체로 노동자들의 땀방울이 대대로 쌓여 있는 공간이다. 소금이 짠 것은 그들의 땀이 서려 있어서 그런 건 아닐까.

 

타일식이라고 해서 처음에는 밑에 시멘트를 바르고 그 위에 타일을 붙인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다. 펄흙을 잘 다진 다음 옹기를 만들 듯 구운 타일을 펄에 하나하나 붙인 것이 바로 타일식 염전이었다.

 

이런 타일을 바닥에 하나하나 붙인다. 그렇게 붙이면 어지간해서는 떨어지지 않는다. 펄흙이 시멘트보다 단단하게 굳는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펄흙을 단단히 다지는 데 쓰는 도구. 테니스장을 다지는 그것과 비슷하게 생겼다.

 

직접 다가가서 손가락으로 눌러보니 이건 돌덩어리 같다. 염전의 둑은 말할 것도 없고 돌을 쌓을 때도 모두 이 펄흙을 쓴 것을 볼 수 있는데, 괜히 그런 게 아니었다. 염전의 생김새는 잘 정리해 놓은 논과 비슷한데 그 안에 담긴 물도 그 형태를 만드는 흙도 판이하게 다르다.

 

시멘트를 발라 놓은 듯한 염전의 둑. 언제 둑을 칠 때 한 번 와서 봐도 재밌겠다.

 

소금은 4월부터 생산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렇게 5월 중순부터 7월까지가 가장 소금의 생산량이 많은 철이고, 8월이 되면 오히려 소금을 만들기 좋지 않다고 한다. 요즘은 아예 손을 놓고 지내는 때인데, 염전에 물을 받아 놓은 것은 내년에 다시 소금을 생산하기 위해서 일부러 받아 놓은 것이라고 한다. 논처럼 벼를 수확한 다음 말려 놓는 게 좋지 않은가 보다.

 

내년에 좋은 소금을 생산하기 위해 묵히고 있는 소금밭.

 

소금을 만들려면 먼저 바닷물을 끌어와야 한다. 바닷가에 둑을 만들어 저류지라는 곳에 바닷물을 끌어들여 모아 놓는다. 그걸 펄흙을 이용하여 낸 물길을 통해 소금밭 사이에 있는 둠벙 같은 곳에 모아야 그걸 이용해서 소금을 만들 수 있다. 소금밭의 둠벙에서는 무자위나 용두레를 이용하여 소금밭으로 물을 옮긴다.

 

소금밭에 들어가는 물을 책임지는 둠벙 같은 곳. 지금은 무자위나 용두레 대신에 경운기 엔진을 활용한 양수기를 쓴다.

 

꼼꼼하게 잘 연결되어 있는 소금밭의 물길.

 

그렇게 1차 증발지로 들어간 바닷물은 쨍쨍한 햇빛을 받은 다음, 다시 2차 증발지를 거치면 마침내 소금이 오는 그날을 맞는다.

 

소금을 만드는 것은 강렬한 햇빛과 염부들의 굵은 땀방울, 그리고 위처럼 고무래와 같은 도구이다.

 

 

소금이 오면 소금 창고에 잘 쟁여 놓고 간수를 뺀다. 직접 찍어 먹어 보니 그리 짜지 않고 달달한 맛이 느껴진다. 백승근 님의 말을 들으니 동주염전의 소금은 염도가 74% 정도라고 한다. 중국산은 90%가 넘어 그 소금은 짠맛밖에 나지 않는다며, 동주염전의 소금을 자랑하신다. 확실히 이 소금은 다르다.  

 

염전 바로 옆에 소금창고를 두어 손쉽게 운반해 저장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염전에 걱정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이제 염전 일도 다른 힘든 일처럼 젊은 사람은 하지 않으려고 한단다. 실제로 이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60대 이상의 할아버지들이었다. 그 맥이 끊기는 것은 이제 곧 다가올지도 모른다. 또한 기상 이변의 영향도 많이 받는다고 한다. 폭우가 자주 쏟아져 생산량에 많은 지장을 주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소금을 고부가가치의 일로 만드는 것이 요즘 가장 큰 관심사라고 하신다.

 

 

70년 전 다카하시 노보루가 이곳에 찾아와 소금을 취재했을 만큼 대부도에서는 소금이 참 중요한 자원이었다. 그걸 지금도 확인할 수 있는 건물이 하나 이곳에 서 있다.   

 

일제시대에 지은 염전 관리사무소. 우리나라에 천일염을 전파한 것이 일본이라고 한다. 그전까지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가마에 바닷물을 끓여 만든 소금이 전부였는데, 그건 품질이나 맛이 지금의 방식보다 떨어진다고 한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건물이 되어 곧 쓰러질 것 같다. 이런 건물을 잘 살려서 현장학습이나 체험학습 때 이용하면 좋지 않을까?  

 

1층 내부의 모습. 

 

 

 

소금기 가득한 땅에서도 생명은 자란다. 소금밭 주변에서는 함초를 자주 볼 수 있다. 빨간 함초가 바람에 흔들거리는 모습은 단풍 못지않게 예뻤다.

 

 

 

 





지난 2013년 4월 27일, 아내와 함께 대부도를 지나는 길에 동주염전에 들렀다. 

봄의 염전은... 황량하기 그지 없었다. 




하지만 내 마음이 더욱 황량했던 것은 염전 관리사무소 건물이 철거되었기 때문이다.

흔하지 않은 역사적 유산이 이렇게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또 하나 사라져 버렸다.

그저 안타깝다고 이야기할 수밖에 더 무어라고 할 말이 없다.


염전 관리사무소가 있던 자리는 철거된 건물의 잔해만 남아 있었다. 이걸 잘 살리면 좋은 소재가 되었을 법한데 거기에까지는 여력이 미치지 못하였나 보다. 동주염전은 이렇게 경쟁력을 잃고 서서히 몰락하고 있는 중인 것 같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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