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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부르 형제라는 화가 삼형제가 있다. 각각의 이름은 헤르만(Hermann), 폴(Pol), 얀(Jan)이라 하는데, 조각가 아널드 반 랭부르(Arnold van Limbourg)의 아들로, 지금의 벨기에 중부 브라반트(Brabant) 주의 네이메겐(Nijmegen)에서 태어났다. 언제 태어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살다가 갔는지 자세한 사항은 알려져 있지 않다고 한다. 


부르고뉴 공국(Principality of Burgundy)의 궁정 화가였던 말루엘(Jean Malouel, 플랑드르의 화가. 1397~1415년에 활동)의 조카이기도 하여,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그 삼촌 밑에서 자랐다.


1400년 무렵 파리에서 금세공인의 견습생이 되었고, 1402~1404년에는 폴과 얀이 파리에서 부르고뉴 공작을 위하여 일하면서 파리 국립도서관에 소장된 <성서 교훈(Bible Moralisée)>에 삽화를 그린 것으로 짐작된다.

1404년 부르고뉴 공작이 죽고 얼마 뒤, 이들은 부르고뉴 공작의 형제인 베리(Berry) 공작의 화가로 채용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1416년 당시의 유행병에 걸려 형제가 차례로 죽었다고 한다.

베리 공작을 위해서는 삽화가 많은 성무일과서(聖務日課書, 당시 널리 쓰인 개인 기도서)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들의 작품으로는 "아름다운 시도서(時禱書)"(1403~1413년)와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성무 일과(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1415~1416년)라는 두 작품만 알려져 있다.

이 가운데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성무 일과"는 15세기 프랑스 회화 중에서도 뛰어난 걸작으로 꼽힌다. 채식 사본 미술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니는 작품의 하나로, 이른바 ‘국제 고딕 양식(Internatuonal Gothic Style)’ 가운데 최고로 꼽힌다. 이 작품에는 12개월의 달력 그림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다달의 노동을 묘사한 세밀화가 곁들여져 있다. 이 그림들의 풍경 묘사가 보여주는 참신함은 회화사에 획기적인 것이라고... 


지금부터 그 그림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마치 우리의 농가월령가 같은 그런 느낌을 준다. 
이 그림을 통해 14~15세기 프랑스의 사람들은 한 해를 어떻게 살았는지 엿보도록 하자.


먼저 1월. 베리 공작 집안의 신년맞이 행사 모습이다. 잔치를 벌이며 서로 선물을 교환하고 있다.
식기가 번쩍번쩍 금이라는 것에서 이 집안의 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상 위의 요리는 쥐인가? 뭐지? 



2월. 전형적인 겨울의 모습이다. 

여인들은 아궁이에 모여 앉아 불을 쬐고 있다. 그런데... 그녀들 속옷을 입지 않아서 성기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당시 여자들은 속옷을 입지 않았던 것인가?

남자들은 숲에서 나무를 해서 장에다 내다팔고 있다. 겨울에 남자가 땔감을 하는 일은 동서를 막론하고 마찬가지구나. 

양들은 우리에 모여 추위를 이기고, 까마귀가 날아와 낟알을 주워먹고 있다.



3월. 농사가 시작된다. 

포도나무에는 거름을 준 뒤 지주를 세우고 있다. 밭에서는 바퀴가 달린 겨리쟁기로 땅을 갈고, 쟁기질이 끝난 곳에서는 봄밀인지를 뿌리려는 농부가 보인다. 쟁기질을 말이 아닌 소로 했다는 점에 주목.



4월. 서로 반지를 교환하는 젊은 연인의 모습. 그 배경은 샤또 드 두르당이다. 

정원에는 꽃이 피고, 강에서는 그물을 이용한 고기잡이가 한창이다. 



5월. 말을 탄 젊은 귀족들의 행렬. 배경에는 베리 공작의 파리 거주지인 넬 호텔이 보인다. 다들 월계수를 머리에 장식한 것인가?



6월. 목초 수확. 긴낫과 갈퀴, 거름대 같은 농기구가 이채롭다. 배경에는 생트 샤펠 성당과 씨테 궁전이 보인다.



7월. 양털을 깎고 밀을 수확한다. 밀을 베는 낫은 목초를 베는 것과 달리 짧고 둥근 날이 달려 있다. 아무래도 목초보다는 정교함이 요구되기에 차이가 있겠지. 배경은 푸아티에 성이다.



8월. 밀을 수확해 단을 묶어서 마차에 실어 나르는 농민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매사냥에 나선 귀족들의 한가로움이 대비된다. 농민은 그냥 냇가에서 발가벗고 멱이나 감는 것이다.



9월. 포도 수확으로 바쁜 농민들. 달구지에 당나귀까지 내다가 포도를 나른다. 배경에는 샤또 드 소뮈르.



10월. 밀 씨뿌리기로 바쁜 농민들. 써레로 밭을 고르면 그 주변으로 까마귀와 까치가 모여들어 벌레를 잡아먹는다. 트랙터로 논을 갈면 백로들이 그 뒤에서 먹이를 잡아먹는 모습과 똑같다. 아무튼 쟁기질하고 나서 농민이 밀씨를 뿌린다. 

밀을 다 뿌린 곳에는 새들의 피해를 막고자 허수아비와 끈을 쳐놓은 것을 볼 수 있다. 허수아비에게는 특별히 활을 들려주어 새에게 더 큰 위협을 가하려고 했나 보다. 배경은 루브르라고 한다.



11월. 도토리 줍기와 그를 주워먹는 돼지의 방목. 도토리를 우리는 묵으로 쑤어 양식으로 활용했는데, 여기서는 그저 돼지의 먹이였을 뿐인가? 돼지를 감시하는 개의 충직함이 눈에 띈다.



마지막으로 12월. 멧돼지 사냥 모습. 




이 그림만으로 당시의 생활상을 자세하고 꼼꼼하게 알 수는 없다. 물론 그 목적이 농민들의 한 해 살이를 알리거나 그들에게 농가월령가처럼 어떤 지침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공작의 아름다운 기도서를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렴풋하게나마 600년 전 프랑스에서는 이렇게 살았구나 하는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으니, 소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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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에 따르면, 시칠리아를 정복한 아랍인 아사드 이븐 알푸라트Asad ibn al-Furat가 827년 섬의 남쪽 해안에 정박한 뒤 처음으로 내린 명령이 그의 병사들을 위한 음식을 조달하라는 것이었다. 아사드의 요리사는 서둘러 지역의 자원을 조사하여, 항구에서 정어리를 잡고 주변 구릉에서는 야생 회향풀과 건포도, 잣을 수확해 배에 적재하고 있었던 유럽에 알려지지 않은 재료와 함께 그것들을 섞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파스타의 시작이다.



손으로 만드는 파스타 요리법이 남아 있긴 하지만, 19세기 이후 대부분의 파스타는 기계로 뽑는다. 그 뒤 썰어서 말려 간편하게 포장한다. 


오늘날 정어리 파스타(이런 모습이다 http://bit.ly/13vsmCL)는 시칠리아의 대표적 요리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파스타가 어떻게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요리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위의 전설보다 13세기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국수를 발견하여 전해졌다는 이야기가 더 친숙하지만 사실은 아니다. 

먼저, 마르코 폴로는 실제로 "이탈리아에서 맛본 것만큼 맛있는" 국수를 동양에서 먹었다고 여행기에 썼다. 그런데 그는 그것을 버미첼리와 라자냐에 비유하고 있다. 둘째, 마르코 폴로의 여행 이전 이탈리아에는 파스타의 적재와 생산에 대한 상업적인 기록이 존재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설득력 있는 이야기로, 모든 이야기가 북미의 파스타 제조업자들의 무역간행물이었던 <The Macaroni Journal>의 편집자들이 1920년대 후반 지어낸 이야기라는 학자들의 지적이다.


영국 도서관
이 그림은 16세기 중반에 생산된 페르시아의 시인 니자미의 <캄사Khamsa>에 나오는 작품이다. 이는 자신의 천막으로 마주눈Majnun -쇠사슬에 묶인- 이 오기를 기다리는 라일라Layla에 관한 12세기 페르시아의 서사시를 표현하고 있다. 배경의 오른쪽 윗부분에 예술가 미르 사이드 알리Mir Sayyid Ali가 네 명의 요리사를 그려 놓았다. 한 명은 고기를 굽고 다른 한 명은 불을 피우며, 또 한 명은 그릇을 들고 오고, 한 명은 페르시아어로 파스타에 해당하는 reshteh를 밀고 있다.


그것의 모양(이탈리아의 음식작가 오레타 자니니 드 비타Oretta Zanini De Vita의 학술적인 조사에 따르면 파스타의 모양은 300가지 이상이 있음)이나 맛(호박부터 오징어 먹물까지)이 어떻든지, 파스타는 근본적으로 물을 부은 밀가루 반죽을 굴리고 잘라 끓는 물에 삶은 것이다. 이 마지막 단계가 파스타가 굽거나 튀기는 빵과 구분되는 방법이다. 또 다른 차이점은 반죽에 사용되는 밀가루의 종류이다. 아사드 이븐 알푸라트의 전설이 허구가 아닌 것이, 파스타가 중동에서 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증거가 있다. 여전히 국수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여행했다는 이야기는 배배 꼬여 있다. 

파스타는 일반적으로 파스타를 만들고 끓는 물에 넣었을 때 그 모양을 잘 유지하도록 글루텐이 풍부한 경질 듀럼밀(Triticum turgidum var. durum)로 만든다. 보통밀(Triticum vulgare)보다 글루텐이 30% 이상 많고, 물과 섞어 반죽하면 단단하게 마르지만 음식으로 만들 수 있도록 자연적으로 수분 함량이 적다. 또 다른 중요한 차이점도 있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파스타 프레스카fresca는 신선한 파스타이다. 부드럽고 말캉한 파스타 프레스카는 신속히 조리하기 위한 것이다. 그건 듀럼밀로 만들 수 있지만, 대부분의 요리는 보통밀의 다목적 밀가루로 요리한다. 여기에는 손으로 반죽하기 쉽게 달걀을 듬뿍 넣곤 한다. 한편 파스타 세카secca —일반적으로 식료품점에서 판매하는— 는 오직 듀럼밀 밀가루로만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듀럼밀만 거의 영구적으로 장기보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맘루크의 관리 알우마리Al-Umari가 정부 보고서에 인용한 14세기의 기록에 보면 북아프리카의 듀럼밀은 "저장고에서 80년 동안 저장할 수 있다"고 하며, 11세기에 안달루시아의 지리학자 알바크리Al-Bakri는 톨레도의 특징 중 하나로 "이곳의 밀은 시간이 지나도 결코 변하거나 상하지 않는다"고 자랑한다. 



파스타와 별도로, 듀럼밀은 북아프리카의 아랍 요리인 쿠스쿠스에 가장 널리 사용된다. 쿠스쿠스는 거칠게 갈아서 말린 세몰리나 반죽으로 만든다. 북아프리카인의 주식인 쿠스쿠스는 남부 유럽에서도 인기가 좋은데, 특히 시칠리아에서 즐겨 먹는다. 팔레르모 도처의 작은 식당에서 판매하고, 많은 현대 시칠리아 사람들이 주식으로 여긴다. 한편 통곡물 상태의 듀럼밀도 중동의 곳곳에서 벌거 또는 부르굴로 널리 먹는다. 이 말은 페르시아어의 "치댄 곡식"에서 왔다. 이때 듀럼밀을 찌거나 데친 다음 말려서 찧는다. 이는 타불리, 키베, 필라프와 같은 요리의 기본 구성요소이다. 튀니지에서는 보르골borghol이라 부르고,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jarish라 부르는데 특히 나지드와 동부의 알하사 오아시스에서 인기가 좋다. 요르단에서는 벌거bulgur라 하며 때때로 국민 요리라 할 수 있는 만사프라는 양고기 요리에서는 쌀을 대신 쓰기도 한다. 한편 이집트와 시리아에서는 덜 익은 듀럼밀을 볶은 것을 프리카frikah라고 부르며 필라프나 스프에 풍미를 더하기 위해서나 건더기로 넣는다. 



그러므로 파스타의 기원을 찾는 열쇠는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에 있다. 누가 듀럼밀을 재배했는가, 또는 적어도 누가 정기적으로 공급할 수 있었는가? 누가 듀럼밀 밀가루를 반죽으로 만들어 모양을 잡고 건조했는가? 그리고 누가 끓는 물에 그 모양을 망가뜨리지 않으며 요리하는 방법을 개발했는가?

질문은 1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전 재배된 곡물의 하나인 듀럼밀은 기원전 7000년 전 자연적인 돌연변이나 엠머밀의 교잡종으로 출현했다. 엠머밀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에서 자라던 야생종으로, 약 1만 년 전에 재배된 최초의 곡식 가운데 하나이다. (오늘날 엠머밀은 스펠트밀로도 알려져 있음.) 그 오랜 저장기간 외에도, 사람들이 발견한 듀럼밀의 또 다른 장점은 겉껍질이 잘 떨어진다는 것이다. 이는 낟알을 떨면서 자연스레 곡물의 겉껍질이 잘 벗겨지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단점은 제분할 때 그 밀가루 —세몰리나로도 알려짐— 가 연질밀의 부드럽고 고운 "다목적" 밀가루보다 단단하고 거칠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어디의 누구였든, 세계의 첫 번째 제빵업자에게도 분명하게 나타났다. 연질밀은 더 맛있는 빵을 생산하는 한편, 듀럼밀은 포리지와 통곡 혼합물, 결국 파스타에 더 적합했다.

중동(주로 비옥한 초승달지대)에서 널리 퍼진 듀럼밀 —본래 파스타를 만들었을 것인— 의 기원은 역사학자와 고식물학자들 사이에서 논쟁거리이다. 국수를 발명했다고 인정되는 중국에서는 사실 기원전 2500년에 밀을 재배했다. 하지만 그것은 듀럼밀이 아닌 보통밀이었고, 인류학자들은 그 곡식과 제분기술이 실크로드를 따라 서아시아의 상인들에 의해 중국에 전해졌을 것이란 사실에 일반적으로 동의한다. 언어학자는 중국에서 쓰는 많은 중국음식 이외의 것들의 이름이 "아랍어나 페르시아어에서 빌려온 근동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최근 뮌헨 대학의 중국학 분야의 설립자이자 캠브리지 중국의 역사란 책의 저자인 Herbert Franke에 따르면, "noodle, Ravioli와 유사한 밀가루 요리가 모두 투르크어라는 데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는 그러한 요리가 원래 중국 음식이 아니고 근동에서 중국으로 도입되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 이는 중국의 가정에서 흔히 먹는 만두 같은 요리조차 '서부의 야만인'에게서 중국으로 전파되었을 수 있다는 뜻일 수 있다." 

이 그림은 1900년대 미국에서 생산하던 다섯 가지 듀럼밀 품종을 나타낸다. 이들은 듀럼밀의 글루텐 함량이 높아서 파스타의 모양을 유지해주기에 “마카로니 밀”이라고 불렸다. 


우리는 기원전 3세기 말 중국의 한나라가 국수를 만들었다고 알고 있지만, 고대 중국의 국수는 파스타 프레스카이지 파스타 세카가 아니라는 증거가 제시되었다.12세기 후반 무렵, 중국의 여행가 조여적趙汝适은 이슬람교의 스페인에서 밀은 "상하지 않고 수십 년 동안 저장고에 보관되었다"며 놀라움을 표했다. 그가 듀럼밀을 가지고 돌아갔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동아시아인들은 또한 쌀 같은 다른 식량자원을 이용하여 국수를 만들었다. 사실 마르코 폴로가 인도네시아의 수마트라 섬에서 국수를 우연히 보고 놀란 것은 그들이 "나무에서 가루"를 만드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고야자 또는 빵나무의 녹말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것이 마르코 폴로가 이탈리아로 가지고 돌아온 "이국적인" 국수 —파스타 세카가 아니라— 의 표본이었다. 


위는 듀럼밀의 모습, 아래는 그 알곡. 듀럼밀은 최소 8000년 전 인간에게 알려져 재배되었다. 


그리스와 로마의 서쪽을 살펴보면, 듀럼밀이라고 믿을 만한 수많은 참고자료들이 고전 자료에 산재해 있을 뿐만 아니라 고고학적 증거가 그리스-로마 세계에 그 곡식이 예전부터 존재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대부분의 참고자료는 중세 작가들의 작품에 나온다. 2세기 그리스의 의사 갈레노스는 듀럼밀과 보리의 맛을 비교했다. samid 또는 semidu라는 메소포타미아의 단어에서 밀가루를 뜻하는 그리스어 semidalis가 유래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가들은 오늘날 대개의 영양학자들처럼 듀럼밀의 풍부한 섬유질을 칭찬했다. 시리아에서 집정관으로 일한 1세기 로마의 농학자 콜루멜라Columella는 듀럼밀이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 같은 건조한 기후에서 가장 잘 자란다고 보고했다. 현대의 농학자 Renzo Landi는 그 지역에서 주조한 로마의 동전에는 긴 까락으로 구별되는 듀럼밀 다발이 묘사되었다고 지적한다. Landi는 이러한 동전이 "로마가 공화국이던 시기에 확실히 듀럼밀이 존재했음을 확인시킨다"고 한다.




누가 마카로니라고 불렀을까?

이탈리아인들은 파스타에 대한 집합명사를 가지기도 훨씬 전부터 파스타를 먹고 있었다. 파스타(pasta)는 “paste”나 “dough”, “pastry cake”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온 단어이다. 그것은 "뿌리다(passein)"라는 그리스어에서 온 소금(pastos)을 뿌린 곡식과 물의 간단한 식사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빌려온 단어이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파스타란 단어를 처음 쓴 것은 1584년 우르비노의 공작부인 집사인 Giovan Battista Rossetti가 연회를 준비하면서 작성한 기록에서였다.

이에 앞서 파스타는 일반적으로 그 특정한 모양에 따라 불렸다. 손으로 만든 파스타의 모양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이름은 뇨키, 라자냐, 버미첼리, 탈리아텔레, 토르텔리니, 라비올리였다. 그 기원은 불확실하지만, 1100년대 raviolo라는 언급이 나오고 이븐 부틀란은 그것이 페르시아에서 기원하는 밀가루 반죽으로 감싼 고기 요리인 sambusaj를 가리킨다고 묘사하는 기록이 있다.

Nudel (noodle)은 18세기 독일에서 기원하는 듯한데, 현대 식료품점에 있는 다양한 파스타의 모양은 대부분 기계로 파스타 반죽을 밀어내 만드는 19세기 공업 기술의 작품이다. 그 기계의 추출구 형태에 따라 다양한 모양의 파스타가 생산된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서 가장 일반적인 파스타의 이름은 마카로니(macaroni) 또는 마케로니(maccheroni )이다. 이 포괄적인 단어는 특정 파스타(짧은지, 관인지, 구부러졌는지)부터 일반적인 파스타(길거나 짧은, 관이거나 납작한, 줄 같거나 구불구불한 모든 형태의 파스타)까지 모두 다룬다. 따라서 거장 Martino의 시칠리아풍 마카로니는 줄 모양이었고, 그의 로마풍 마카로니는 페투치네처럼 길고 납작한 형태였다. 또한 초기 기록의 마카로니나 마케로니는 짧고 둥근 뇨키 같은 파스타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 둥근 모양이 어떻게 마케로니가 보카치오의 기발한 파르마산의 치즈 언덕에서 폭신폭신하게 구를 수 있었는지 설명한다. 마카로니라는 단어는 버미첼리와 함께 이탈리아의 유대인들이 작성한 문서에서 13세기 초기에 등장한다. 

그러나 널리 쓰이고 친숙하긴 하지만, 마카로니라는 단어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모호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 단어가 반죽을 뜻하는 두드리고 부수고 반죽한다는 뜻의 라틴어 maccare에서 왔다고 믿는다. 지금도 이탈리아어에는 가루로 만들거나 꽉 쥔다는 뜻의 ammaccare라는 단어가 남아 있다. (시칠리아와 풀리아에서 누에콩 퓌레를 macco라 부르곤 함.) 이탈리아어에 살아남아 있는 동일한 단어의 흔적이 macarie인데, 갈아놓은 아몬드의 설탕절임을 “마카롱”이라 부른다.

그리스어 기원설도 있다. 대체로 파스타 세카가 서쪽으로 왔다고 하는 시기인 3~8세기, 지중해 동부의 그리스어 사투리인 Makaria는 “보리와 물로 만든 음식”을 뜻했다. 또한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에서 macarios는 축복을 뜻해, 그 단어는 “축복의 음식”으로 번역되었다. 이탈리아 남부가 고전 그리스 세계의 일부가 되었을 때, 장례식에서는 얇은 국수를 넣은 스프가 "영원한 축복의 음식"이란 뜻으로 macaria 또는 macaria-aionia라고 불리며 제공되었다. 1548년 후반 모데나에서 온 의사 Ortensio Lando는 그의 <Commentario della Piu Notabili et Mostruose Cose d’Italia(이탈리아에서 가장 훌륭하고 엄청난 것에 대한 안내서)>에서 그리스-시칠리아에 뿌리를 둔 것 같은 마카로니에 경의를 표했다. 그는 친구에게 부러운듯이 “바람이 방해하지만 않으면 한달 안에 풍요로운 시칠리아 섬에 도착할 것이고, 너는 더없이 행복하게 만드는 이름을 지닌 마케로니를 맛볼 수 있다”고 적었다.

또한 마카로니는 요리와 연극 예술 사이의 연결을 보여줄 수도 있다. 아텔란 파르스에서, 고대 로마의 하층계급을 연기하는 외설적이고 어릿광대 같은 집단에서 광대의 이름이 Maccus였다. 중세 이탈리아에서, 어떤 익살스러운 어리석고 실수를 잘하는 인물은 Maccus를 연상시키는 maccherone라고 했다. Maccus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기에 즉흥 거리극으로 인기가 있었던 코메디아델라르테에서 가면을 쓴 풀치넬라라는 악당 인물에게 영감을 주었다. 풀치넬라의 매부리코와 검고 흰 가면은 macco라고 불렸고, 그의 특징적인 소품에는 커다란 목제 숟가락과 마카로니가 수북한 접시가 포함되었다. 파스타는 과식을 상징하는 한편, 숟가락은 풀치넬라의 탐욕과 그것을 방해하는 사람에 대한 폭력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17세기까지 풀치넬라는 펀치넬로라고도 알려져 있었고, 그는 "펀치와 주디"에서 마카로니는 버렸지만 여전히 숟가락은 가지고 있는 호전적인 펀치라는 꼭두각시가 되어 북쪽을 여행했다. 

패션이 충분하지 않은 때: 마카로니 클럽의 회원인 것 같은 18세기 영국 신사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출처: 브릿지만 예술 도서관)


이 어릿광대는 마카로니 협회와 함께 대서양을 건너와 잘 알려진 미국의 독립전쟁을 노래한 “Yankee Doodle Dandy”에 출연했다. 엘리자베스의 영국에서 이탈리아의 패션과 요리, 풍습은 뽐내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재였다. 일부는 이를 지나치게 취했고, 18세기까지 이탈리아의 패션 등을 젠체하며 뽐내는 사람을 조롱하기를 “마카로니”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런던에서 그런 비난에 끄떡하지 않은 도시의 “마카로니스(macaronis)”들이 1760년 마카로니 클럽을 결성했고, 그들의 독특한 머리모양은 19세기 영국의 선원들이 남극의 펭귄에게 마카로니 펭귄이란 별명을 붙이도록 영감을 주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혁명이 발생한 1775년, "마카로니"는 머리모양과 동일시되었는데, 촌스럽고 무례한 양키 두둘이 "자신의 모자에 깃털을 고집하며 그것을 '마카로니'라고 부르는" 가식적인 모습을 조롱하는 것이었다.

흥미롭고 복잡한 이야기는 마카로니가 아랍어에 근원을 하는 단어라는 설이다. Duwayda (자벌레)는 파스타가 작은 조각으로 부수어져 있는 튀니지식 버미첼리의 초기 아랍어 이름이다. 신선한 duwayda의 양 끝을 연결하여 작은 고리를 만들어 qaran이라 불렀는데, 아랍어로 합체를 뜻하는 qarana에서 온 말이다. 

음식 작가 Clifford Wright는 <지중해의 진수성찬(Mediterranean Feast)>에서 조심스럽게 이 설을 인용하고 있으며, 음식 역사학자이자 요리책의 저자 나왈 나스랄라Nawal Nasrallah는 <에덴동산의 기쁨(Delights from the Garden of Eden): 이라크 요리의 역사와 요리책(A Cookbook and a History of the Iraqi Cuisine)>에서 더 직접적으로 “이라크의 남부 지역에서는 1950년대까지 파스타를 maqarna라고 불렀”고, 한편 “바그다드처럼 더욱 번화한 지역에서는 그 단어가 이미 passé가 되었다. 그들은 더 세련된 이탤릭체의 ma’karoni로 그것을 대체했다”고 지적했다.

Maqarna itriyya와 상관없이, 파스타는 중동 전역에 알려진 이름이었다. 아카드어의 semidu와 semolina 사이의 관계 이외에도, 3700년 전 바빌로니아의 설형문자 점토판에서 발견된 "비장 스프"에 대한 요리법에는 "구운 qaiatu 반죽의 조각"을 더한다고 나온다. 나스랄라는 이것이 얇은 국수로 해석될 수 있다고 제시한다. 

그녀는 "qaiatu에서 유래한 아카드어의 qatanu는 아마 '얇아지다'를 의미할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아랍어의 qitan와 그 복수형 qaiateen은 결국 이 아카드어의 qatanu에서 유래하고, 그건 줄이나 끈이란 뜻이다. 따라서 qaiatu 반죽은 평평하고 얇으며 끈이나 줄 모양으로 자른 것을 뜻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이 지금도 파스타에 기반한 스프와 필라프 요리에서 일반적인 기술인 솥에 넣기 전 구운 것이라는 말이다. 

구운 국수는 여전히 이라크의 시장에서 팔리고 있다고 나스랄라는 지적한다. 그들이 rishta로 알고 있는 단어가 페르시아어로는 "실"로 번역된다. rishta의 요리법은 13세기 아랍의 요리책에 나타나, 페르시아어로 "미끄러운"을 뜻하는 lakhsha가 국수를 대체한다. 유명한 음식 역사학자 Charles Perry는 술어학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그 변화를 이론화했다. Lakhsha는 아마 13세기까지 유행한 야생당나귀 스프에만 사용되던 국수였다. (그러나 그 단어는 다른 언어와 문화에도 있었다. 오늘날 랙사laksa는 말레이의 중국인들이 먹는 매운 국수이고, 그 지역은 전에 오스만 제국의 일부이거나 경계였다. 헝가리에도 laska라는 말이 남아 있고, 러시아에서는 lapsa, 우크라이나에서는 lokshina, 리투아니아에서는 lakstiniai, 아프카니스탄에서는 lakhchak, 이디시어에서는 lokshen라고 함.)

현재 reshteh로 번역되는 Rishta는 여러 전통 페르시아 요리의 핵심 성분이다. reshteh polow와 ash-e reshteh가 그것이다. 후자는 ash-e pushteh-pa 또는 순례자의 스프라고 불리는데, 전통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메카로 순례를 떠나기 전에 제공하거나 자신의 길을 만들고자 집을 떠나는 아들에게 주던 음식이다. 

<페르시아의 전설적인 요리(The Legendary Cuisine of Persia)>의 저자인 마가레트 샤이다Margaret Shaida에 따르면, “국수가 들어있는 요리는 전통적으로 삶에서 중요한 선택이나 변화의 순간을 위해 준비되었다”고 한다. 이슬람교 이전의 이란에서 국수는 매달의 첫날에 먹었다고 말한다. 오늘날 이란에는 그런 풍습이 남아 있어매달 첫 번째 기도모임에서 그 요리를 제공한다. 또한 Ash-e reshteh는 사랑하는 이가 오랜 여행에서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거나 아픈 아이의 회복을 비는 등 가족의 문제에 신의 개입을 간청하는 종교적 서약의 음식이기도 하다. 샤이다 “국수가 복잡하게 엉켜 있는 모습이 삶의 여정과 비슷하기에 특별히 종교적 서약의 음식으로 사용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파스타를 만들기 위해 듀럼밀을 사용했는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리스의 라가논laganon는 밀가루와 오일로 만든 반죽을 굽거나 튀긴 넓고 납작한 판이다. 로마에 전해진 라가눔laganum과 함께  이것이 파스타의 원형으로 이야기되곤 한다. 기원전 4세기 그리스의 시인 젤라의 아르케스트라투스Archestratus는 지중해의 음식을 소개하는 그의 <호화스러운 삶(Life of Luxury)>에서 자주 라가논을 언급했다. 로마 시대에는 지식인의 저녁 만찬 초대 방법을 기술한 아테나이오스Athenaeus의 <저녁식사에서의 철학자(Deipnosophistae)>에서는 1세기의 그리스 작가 크리시포스Chrysippus에게서 라가논의 요리법을 도용했다고 주장했다. 

로마인은 사실 라가니lagani이나 라가나lagana라고 부르는 줄 모양으로 라가눔을 잘라서 요리하고, 굽는 데 쓰는 접시에 다른 재료와 함께 층을 이루게 쌓았다. 따라서 명백하게 라자냐라는 요리와 어휘의 조상인 셈이다. 사치스런 생활방식을 유지할 충분한 돈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 스스로의 목숨을 버릴 만큼 맛있는 음식에 전념했던 전설적인 1세기의 미식가 Marcus Gavius Apicius가 참여했다는 4세기의 편집물인 <요리법(De Re Coquinaria)>의 설명을 보면 "속을 채운 국자와 함께 라가나lagana를 대체한다"고 한다. 기원전 234년부터 149년까지 살았던 더 금욕적인 정치가 Cato는 <농업(De Agricultura)>이라 부르는 농장 관리와 경작에 관한 책을 적었는데, 거기에서 그는 파이용 밀가루 반죽의 일종인 atracta을 만드는 데에 alicae primae(가장 좋은 세몰리나)와 farinae siligneae(일반 밀가루)를 혼합한 치즈케이크 요리법을 기록했다. 이후 기원전 68~65년 사이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피곤한 긴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리크leek와 병아리콩과 라가니를 넣은 따끈한 요리보다 더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 없다고 적었다.



라가논laganon 또는 라가나lagana라고 부르는 그리스의 원형 빵은 북부 지중해의 파스타 —나중에 로마의 속을 채운 로마의 음식— 와 라자냐 모두의 전신일 수 있다.















일부 학자는 고대의 제분 기술을 미루어 듀럼밀은 파스타로 만들 수 있는 좋은 가루로 내기 너무 힘들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다른 사람들은 고전 세계의 탄수화물 계층사회에서 파스타가 자리할 곳은 없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정보의 구체적 내용을 보면, 이 음식이 듀럼밀 반죽을 건조시키거나 끓는 물에 넣거나 한 파스타 세카가 아니었을 것이란 사실을 가리킨다. 구운 라가넘은 아마 튀긴 여러 가지 프리터나 베이네와 유사했지만 유대인의 무교병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사실 <고대 그리스 세계의 생태학(The Ecology of the Ancient Greek World)>의 저자 Robert Sallares에 따르면, 파스타 유형의 음식은 “그 부재로 인하여 고전 자료에서 눈에 띄는 것일 뿐이다.” 이는 의문이 생기게 만든다. 그리스와 로마의 창의성만이 아니라 파스타의 상대적 간단함을 고려하면, 어떻게 그리스나 로마의 사람들이 파스타 세카를 만들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고대부터 중세의 지중해에서, 오트밀 죽과 빵은 두 가지 기본적인 곡물에 기반한 음식이었다”고 프랑스 사회과학고등학술연구원의 프랑수아즈 사반Françoise Sabban은 설명한다. 그녀는 남편인 Silvano Serventi와 함께 학술서인 <파스타: 보편적인 음식 이야기(Pasta: The Story of a Universal Food)>의 저자이다. 그녀는 빵과 오트밀 죽을 준비하는 독특한 방법은 각각을 활성화시키면서부터였다고 제시한다. 파스타처럼 빵은 밀가루 반죽을 주물러 만들었는데, 파스타와 달리 빵은 건조한 열기에서 굽는다. 오트밀 죽과 포리지는 파스타처럼 끓이지만, 파스타와 달리 가루가 아니라 통곡물이나 분쇄한 곡물로 만든다. “이러한 맥락에서, 파스타는 이 두 범주에 걸쳐 있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고려할 가치가 없다”고 Sabban은 말한다. 

서쪽에서 나타난 이러한 범주에 속하는 가장 최초의 기록은 7세기 세비야의 이시도르Isidore의 작품이다. 그는 라가눔laganum을 "처음에는 물로 요리하고 다음 기름에 튀기는 넙적하고 평평한 빵"이라고 묘사했다. 비슷한 것으로는 서구의 많은 중국 음식점에서 전채요리로 나오거나 하는 바삭하게 튀긴 국수인 초면을 들 수 있다. 

여전히 고전 자료에는 파스타의 기원이 동쪽 방향을 가리킨다는 힌트가 나온다. 시인 호라티우스의 간단한 저녁식사를 통해 포크의 어원을 살필 수 있다. 호라티우스는 이탈리아 반도의 구두 뒷굽에 있는 아풀리아의 경계에 자리한 그리스의 상업도시 베노사 출신이다. 그곳은 중세 시대에 아랍인을 포함해 비잔틴인, 롬바르디아인, 노르만인 등 다양한 인종이 점령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심지어 지금도 병아리콩과 리크, 라가니를 담은 치체리 에 트리아 또는 파스타 에 체치라는 호라티우스의 소박한 밥그릇이 지역의 인기 메뉴로 남아 있다. 병아리콩(ceci)과 탈리아텔레의 소박한 형태인 넓고 리본 모양의 전통적인 파스타인 라가넬레laganelle가 전형적인 요리이다. 호라티우스의 라가니와 라가넬레 사이의 명백한 사전적 관계는 별도로 하고, 네 글자의 tria라는 단어는 더 큰 의미의 또 다른 지역적 특질을 담고 있다. 그 단어는 그리스어 itrion에서 유래한 말로, 케이크나 얇은 누룩을 넣지 않은 빵을 뜻한다. 그러나 5세기까지 그것의 같은 어족인 라틴어의 itria는 전혀 다른 것을 뜻하고 있었다. 



14세기 롬바르디아의 출판업자가 바그다드의 이븐 부트란Ibn butlan이 지은 백과사전식 11세기 건강안내서의 라틴어판을 출판했다. 거기에 위와 같이 반죽을 밀고 건조시키고 있는 trij라 부르는 파스타 요리법이 나온다.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성스러운 도시에서 작성된 유대 율법에 대한 저서인 예루살렘의 탈무드에 따르면, “축제에 버미첼리(itria)를 만드는 것과 관련하여, 만약 그것을 건조시킨다면 금지된다. 만약 바로 요리한다면 허용된다”고 한다. 이에 대한 가장 최초의 기록은 itria라고 부르는 레반트 지방의 것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에서는 itriot로, 아랍어에서는 itriyya로,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tria로 살아남아 있다. 이 단어들은 모두 파스타를 뜻한다. 

Tria는 칼라브리아와 나폴리와 시칠리아 중부의 여러 마을에서 전통적으로 파스타라 부르는 것이다”라고 <파스타와 피자Pasta and Pizza>의 저자이자 인류학자이며 시칠리아 토박이인 Franco La Cecla는 말한다. La Cecla는 시칠리아에 파스타와 그 제조기술을 도입한 사람은 의심의 여지없이 아랍인이라고 한다. 

“아랍인들은 9세기 정복의 파도와 함께 시칠리아에서 관개와 농업기술의 대부분을 개발했다”고 La Cecla는 말한다. “일반적으로 시칠리아에 파스타 제조법을 가져온 것도 그들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에서 파스타와 그 제조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중세의 누구보다 유명한 아랍인 지리학자 알이드리시al-Idrisi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노르만인 후원자인 시칠리아의 로저 2세왕을 위하여 1154년에 <Kitab Nuzhat al-Mushtaq fi Khtiraq al-‘Afaq (먼 땅으로 가는 즐거운 여행)>이란 책을 지었는데, 거기에서 시칠리아 북부의 해안 마을을 묘사하고 있다. 알이드리시는 물이 끊임없이 흘러 제분기를 돌리는 트라비아Trabia라 부르는 팔레르모 동쪽으로 약 30km 떨어진 식민지를 언급한다. "그들이 만드는 엄청난 양의 itriyya는 사방으로 수출하는 농촌의 커다란 자산이다. 칼라브리아와 무슬림과 크리스챤 국가들로 수출된다. 매우 많은 뱃짐이 보내진다."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는 La Cecla의 주장이 있다. 초기 아랍의 의학 작가들은 밀의 건강상 이익을 알고 있었고, 파스타를 포함하여 다양한 음식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빠르면 9세기 시칠리아의 의사이자 사전편집자인 Ishu bar Ali는 세몰리나 반죽을 말린 가닥을 삶은 itriyya에 대해 언급한다. 중세의 가장 훌륭한 의료인 가운데 하나인 이집트의 이샤크 이븐 술레이만Ishaq ibn Sulayman은 10세기 자신의 책 <Kitab al-Aghdhiya wa’l-Adwiya (음식과 치료)>에서 파스타의 준비에 관해 이야기한다. 더 동쪽에서 10세기 말 카자흐스탄 남부의 실크로드 도시인 Otrar 출신의 사전편집자 알자와리al-Jawhari는  hibriya 또는 밀로 만든 머리카락 비슷한 음식으로 itriyya를 정의했다. 





트라비아의 마지막 파스타 제조자

알이드리시가 중요하게 묘사한 팔레르모에서 약 30분 거리에 있는 시칠리아의 해안 마을인 Trabia에는 여전히 지중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그가 서술했던 “커다란 자산”은 현재 세몰리나를 만드는 듀럼밀을 제분하던 곳과 함께 사라졌다. 20세기 중반 무렵 사라진 마지막 제분소가 있던 곳은 현재 세차장이 되었다. 그러나 트라비아의 중심거리 중간에 있는 불행한 작은 식당의 뒷방에서는 마을의 마지막 상업적 파스타 제조자가 아직도 주로 지역의 고객들을 위해 손으로 아넬리티와 탈리아텔레 같은 음식을 만들어 제공하고 있다. 

“파스타 만들기는 아버지에게 배웠다”고 주인인 Matteo Barbera는 말한다. “나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만 만든다. 밀가루와 달걀, 물을 사용한다. 그것이 전부이다.” 밀가루는 서쪽으로 몇 킬로미터 떨어진 1910년 카르텔다치아Casteldaccia에 설립된 산업화된 파스타 제조업체인 토마셀로Tomasello에서 사온다. 그러나 밀가루조차 더 이상 지역의 것이 아니다. 그건 주로 미국이나 러시아에서 섬으로 수입된 것이다. 

Barbera는 여전히 마을의 관광안내서에 해산물과 모과와 나란히 나오는 트라비아의 파스타라는 유산을 자랑스러워한다.

“파스타가 태어난 마을에서 나만 남아 있는 게 이상하다”고 그는 말한다. “내가 시칠리아인이지만 아랍인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며 웃음을 짓는다. 


트라비아에 있는 Matteo barbera의 카페. 집에서 요리한 시칠리아의 파스타 프레스카(달걀을 넣어 만든 신선한 파스타)를 포장할 수 있다고 광고하고 있다.





알이드리시의 묘사는 번영하고 있는 산업과 14세기 제노바의 북쪽으로 뻗어 있던 광범위한 무역망을 나타낸다. 확실하게 파스타를 언급한 이탈리아 최초의 문서는 제노아의 군인 Ponzio Bastone의 기록이다. 1279년의 것으로 판명된 문서에 그의 소유물로 “barixella una plena maccaronis(마카로니의 상자 전체)”라는 것이 나온다. 이는 나무상자에 저장하고 보존할 수 있는 말린 파스타인 파스타 세카를 뜻한다. 13세기 안달루시아의 저자 이븐 라진 알투지비Ibn Razin al-Tujibi는 자신의 책 Fadalat al-Khiwan fi Tayyibat al-Ta‘am wa’l-Alwan(식탁의 기쁨과 요리의 최고 유형)에서 이슬람 세계의 서쪽에서 사용된 다양한 유형의 파스타를 설명한다. 여기에는 파스타 프레스카의 요리법을 포함하여 주로 시장에서 구입한 상품을 가리키는 것도 나온다. 

또한 파스타는 시와 권세가의 음식이기도 했다. 투스카니의 조반니 보카치오Giovanni Boccacio는 그의 고전적인 14세기 우화시 데카메론Decameron에서, "전체가 갈아 놓은 파르마산 치즈로 만들어진 산"의 동화 같은 경관을 묘사한다.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마케로니maccheroni와 라비올리ravioli를 만들어 닭 육수로 그걸 요리한 다음 비탈 아래로 던진다."

잉글랜드의 왕 리차드Richard 2세의 부엌에서, 대가 요리사는 고전에 나오는 것처럼 갈아 놓은 치즈가 풍성하게 파스타를 장식했다. 익명의 영국인 저자의 14세기 왕실 요리책 <The Forme of Cury>에서는 “밀가루 반죽을 종이장처럼 만들어, 갈가리 잘라 그걸 끓는 물에 던졌다가 건져내라. 치즈를 가져다 갈아서, 그리고 버터를, 아래에 깔고 마치 losyns 같이 그 위에 얹어 내놓으라”고 조언한다. 'losyns'는 기본적으로 라자냐이고, 그 책의 losyns 요리법에서는 듀럼밀에 반대되는 빵밀 밀가루를 사용하라고 하는데, 요리하기 전 듀럼밀로만 할 수 있는 "단단하게 건조시키는" 것이 중요한 단계라고 언급하기에 파스타 프레스카를 가리키는 것 같다. 

(일부 학자들은 losyns, 곧 라자냐를 경질밀과 연질밀 모두를 사용하여 아몬드와 설탕, 장미향의 물을 넣어 만드는 종이장 같은 케이크를 가리키는 중세 아랍-페르시아의 단어인 lawzinaj와 연결시키려고 했다. 아랍에서 이러한 케이크의 대부분은 전형적으로 다이아몬드 모양의 조각으로 자른다. 동양학자 Maxime Rodinson은 영어 단어의 마름모꼴(lozenge)이 유래된 프랑스어의 losange과 이 아랍어 사이의 연계성을 살폈다.)

이러한 참고자료를 통해 중세 유럽에서 파스타는 귀중하고 값비싼 상품을 가리켰고, 일부는 지역에서 쉽게 이용할 수 없어 수입하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1900년 나폴리에서 햇빛에 파스타를 말리는 모습. 여기에서는 파스타를 tria라고 부르곤 했는데, 이 단어는 5세기 이후 레반트 지역에 알려진 밀가루 반죽으로 긴 가닥을 만들어 건조시킨 것을 뜻하는 단어 itria에서 온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 부모가 아랍인이었을까? 알이드리시가 시칠리아의 번창한 파스타 산업에 대해 적었을 때, 그는 아랍인이 도달하기 전에 존재하거나 그 전설이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아사드 이븐 알푸라트의 군함이 해안에 오면서 퍼진 것이 아니란 말인가? 실마리를 찾기 위해 초기의 요리책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것은 국내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라, 항구와 무역과 연결된 제품이었다”고 <이탈리아 요리Italian Cuisine: 문화의 역사A Cultural History>의 공저자인 Alberto Capatti는 이야기한다. 사실, Capatti는 19세기 산업혁명이 시작되기 전까지 파스타 제품은 이탈리아 반도에 그다지 널리 퍼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탈리아 북부인 롬바르디아 지역에서 성장한 Capatti는 파스타가 아니라 리조또(쌀)이 저녁 식탁의 주요리라고 지적했다.) 그때까지 파스타의 제조와 소비는 이탈리아 남부와 더 일반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나폴리, 아풀리아와 가장 유명한 시칠리아가 이탈리아 파스타 산업의 발상지라고 Capatti는 생각한다. 

앞서 살펴본 알이드리시의 기록에서 파스타 세카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아피기우스Apicius가 살았던 때와 13세기 유럽의 요리책에도 그와 비슷한 것은 보이지 않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아랍 세계의 요리책에서는 아마 그보다 일찍이었겠는데 10세기 아바스 바그다드에 등장한다. 사실 “세계 어느 곳의 언어를 합한 것보다 아랍어로 된 요리책이 더 많았다”고 음식 역사학자이자 <이슬람 세계의 중세 요리Medieval Cuisine of the Islamic World>의 저자 Lilia Zaouali는 주장한다. 보통 kitab al-tibakh 또는 “요리의 책”이란 제목의 책들이 현대의 유명 요리사들처럼 그 저자와 연관하여 더 쉽게 알려졌다. 

최초로 알려진 아랍의 요리책 —그리고 처음으로 파스타를 언급한— 은 이븐 사야르 알와라크Ibn Sayyar al-Warraq라는 이름의 아바스 궁전 서기에 의해 10세기에 편집되었다. 8~9세기 칼리프와 법원 관리들의 요리법 모음에서 유래된 이 책은 페르시아어로 "미끄럽다"라는 뜻인 lakhsha라고 부르던 파스타에 관한 장이 특색이다. 거기에는 579년에 죽은 페르시아의 왕 호스로Khosrau의 통치 기간에 발명된 파스타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가 담겨 있다.

쌀쌀한 날씨에 사냥을 나간 호스로 왕은 그의 요리사에게 야생당나귀로 만든 뜨끈한 요리를 대령하라고 명령했다. 왕은 다시 생각하더니 “밀가루 반죽의 조각”을 국물에 넣으라고 제안했다. 기뻐한 군주가 “그것이 매우 맛있다는 것을 알고 3일 연속으로 그것 이외의 요리는 먹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확실히 민간전승인 반면, 알와라크의 책은 실질적인 파스타 요리법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네바테아의 닭을 포함해 “세 줌의 itriya”를 솥에 추가로 넣고 조리될 때까지 서서히 끓인다. 이건 확실히 파스타 세카를 가리키는 듯하다. 또한 초기 아랍의 파스타는 13세기 스페인계 무슬림의 요리책에 묘사된 것처럼 작고 곡물 또는 "고수 씨앗 같은" 쌀 모양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건 곡물을 모방해 만들어졌고, 주로 국물에 사용되었”고, 이 모양은 또한 포장할 때 그 밀도를 최대화하여 더 휴대하기 좋게 만든 것이라고 Sabban은 지적한다.




튀니지 연관설

“이탈리아와 너무 가까이 있어서 피자 냄새를 맡을 수 있다”고 튀니지인 안내자 Hatem Bourial가 농담을 한다. 사실 이탈리아 반도와 시칠리아 및 북아프리카 해안지역 국가들의 근접성은 파스타 요리를 포함하여 상호 문화교류를 활발하게 만들었다. 튀니지는 실제로 로마에 있는 국제 파스타조직에 따르면 이탈리아와 베네수엘라 다음으로 세계 3위의 파스타 소비자이다. 

CINDY HOPKINS / ALAMY

“튀니지인은 거의 매일 파스타를 먹기에 이 통계가 놀랍지 않다. 아주 인기 있다”고 <튀니지의 이탈리아인The Italians of Tunisia: 공동체 이야기The Story of a Community>의 저자 Marinette Pendola는 말한다. 그녀는 튀니지에서 이탈리아인의 존재는 10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기간, 많은 이탈리아인이 파시즘과 전쟁, 빈곤으로부터 남쪽으로 탈출했고, 그들이 다양한 도시의 중심지에 공동체를 형성했다. 

파스타에 대한 그들의 취향과 함께 이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다양한 파스타 요리를 즐기는 북아프리카의 아랍인들에게서 동류의 영혼을 발견했다고 음식 작가 Clifford Wright는 철저하게 조사하여 작성한 <지중해의 진수성찬A Mediterranean Feast>에서 언급한다. 여전히 오늘날에도 그들 사이에서 인기 있는 요리는 다음과 같다. 

Rishta: 이것은 달걀 페투치네인데, 앙트레 또는 스프에 콩과 채소를 넣어 함께 즐긴다. 시리아와 레바논에서는 렌즈콩으로도 만든다. 

Duwayda: 이것은 2~3cm 길이의 조각으로 자른 버미첼리의 튀니지식 아랍어이다. 작은 고리 모양이 되면 시칠리아의 파스타인 아넬레티anelletti와 똑같은데, 상호 문화교류의 흔적이다. 

Hlalimtlitlu와 qat’a: 이것은 작곡 곡물 모양의 국물 파스타로 다양한 크기가 있으며, 때로는 쿠스쿠스처럼 찌기도 한다. 

Muhammas: 이것은 작은 파스타 공으로 쿠스쿠스의 한 종류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 이름은 아랍어의 hummus(병아리콩 육수)에서 유래하는데, muhammas는 후추 열매의 크기에 가까운 것도 있다. 구운 muhammas의 작은 공은 moghrebiyya라는 이름으로 팔리는데, 이는 북아프리카를 뜻하는 망그레브에서 온 것이다. 

Eddeoueida: 이 버미첼리 종류는 알제리령 사하라사막에서 유목하는 투아레그족이 이용하는 것으로, 이탈리아의 줄임말인 talia라고도 부른다. 



중세 시대에 걸쳐 유럽의 학자들은 아랍어 문헌을 번역하면서 영양학과 요리에 관한 수많은 책을 발견했다. 그러한 작업 중 하나가 11세기 바그다드의 기독교인 의사 이븐 부트란Ibn Butlan이 쓴 <Taqwim al-Sihha(건강 관리)>라는 광범위한 책이다. 이 책은 1258~1266년까지 시칠리아의 왕이었던 만프레드Manfred의 궁전이 있는 팔레르모에서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이후 14세기에 타퀴넘 사니타티스Tacuinum Sanitatis라는 라틴어 제목으로 화려한 삽화가 들어간 판이 롬바르디아에서 출간되었다. 그 요리법 가운데 하나가 두 여성이 파스타를 만들고 있는 상세한 그림과 함께 나오는 trij 또는 파스타이다. 반죽을 굴려서 긴 가닥을 만들어 선반에 걸어 말리고 있는 그림으로, 20세기 초까지도 그 모습은 크게 변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림은 여기를 참조.)

아랍의 요리는 특히 이탈리아 요리에 헌신한 최초의 유럽 문헌인 13세기 후반의 <Liber de Coquina(요리에 관한 책)>에 독특한 풍미를 더했다. 라자냐만이 아니라 아랍에서 유래한 이름과 요리법을 가진 몇 가지 요리가 포함되어, 이 책을 쓴 익명의 저자가 초기 아랍의 문헌에서 요리법을 필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는 romania(rummaniya에서 왔거나 석류를 곁들인 닭), sumachia(summaqiya에서 온 옻나무와 아몬드를 넣은 닭), limonia(laymuniya에서 온 레몬을 곁들인 고기)가 포함된다.

15세기에, 파스타와 그 준비를 위한 상세한 요리법이 바티칸의 사서이자 르네상스의 인문학자인 바르톨로메오 사키Bartolomeo Sacchi가 이탈리아 "요리의 왕자"라고 별명을 붙인 코모의 요리사 Martino가 작성한 <Il Libro de Arte Coquinaria (요리의 기술에 관한 책)>에 나타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최초의 근대 이탈리아 요리책으로 간주되는 여기에서도, 저자는 파스타의 얇은 판을 triti처럼 긴 줄로 자른다고 언급함으로써 스타가 아랍에 뿌리를 두었음을 간접적으로 인정한다. 또한 이 책은 서쪽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지만 아랍과 페르시아의 최고급 요리에서는 일반적인 밀가루와 달걀 흰자 및 장미향의 물로 만드는 "시칠리아의 마카로니" 요리법을 포함하고 있다. 이 값비싼 향이 나는 재료가 파스타 세카의 가치를 더하는 증거이다. 장미향의 물은 일반 가정보다 왕실의 부엌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Martino는 독자들에게 반죽을 “손바닥 크기에 머리카락 굵기를 지닌” 긴 가닥으로 잘라서 따뜻하고 건조한 “8월의 달 아래에서” 치료하는 데 썼다고 알려준다. 

그러나 손으로 만드는 파스타가 좋아 보이지만, 일반적인 르네상스의 요리 방식에서는 학대에 가까웠다. Martino의 요리법은 “이 마카로니는 두 시간 동안 서서히 끓여야 한다”고 맺고 있다. (바르톨로메오 사키는 그 점에 동의하지 않았다. 자신의 1475년 출간된 세계 최초의 인쇄된 요리책이자 많은 인기를 얻은 <De Honesta Voluptate et Valetudine[고상한 기쁨과 좋은 건강]>에서, 그는 일부 파스타만 적당히 씹히는 감이 있어 오랜 시간 조리해야 한다고 소개했다.”)

“마르티노에 따르면, 그래서 오랜 시간 조리하는 영국과 독일의 방식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진짜 오래된 방법이다”라고 이탈리아 요리책의 저자이자 강사인 로렌자 드 메디치Lorenza de’ Medici가 설립한 투스카니에 있는 요리학교의 요리사이자 이탈리아 요리책의 저자 Andrea Gagnesi는 웃음을 짓는다. Gagnesi는 마르티노의 또 다른 혁신은 맨손으로 집기에는 너무 뜨거워서 포크로 삶은 파스타를 먹은 것이라고 한다.


로스엔젤레스의 1970년대 길거리 광고판에서 가장 일반적인 근대적 형태의 파스타를 보여준다. 대용량, 셀로판 포장이 된 스파게티 묶음.



푹 익힌 걸 선호하든 씹히는 감이 있는 걸 선호하든지, 근대의 이탈리아 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은 중동에서 기원했던 것보다 삼키기 더 쉬운 파스타를 좋아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전히 아랍 세계의 사람들이 서쪽에 파스타와 그 제조기술을 보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상당한 증거가 있다. 이 증거는 또한 앞에서 제기한 세 가지 질문에 대한 가장 강력한 답을 제공한다. 파스타의 핵심 곡물인 듀럼밀은 메소포타미아부터 시리아와 이집트, 북아프리카 및 무슬림의 시칠리아까지 아랍 세계 전역의 일반적인 작물이었다. 아랍의 요리책은 처음으로 건조하고 보존할 수 있는 형태로 세몰리나 반죽을 만들었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물에 그 형태를 요리한다고 알려진 최초의 자료를 제공한 사람은 예루살렘의 학자의 기록이다. 

파스타가 이탈리아와 먼 곳에서 기원했는데 오늘날에는 이탈리아의 것으로 인식되는 것일까? 일부 음식 역사학자들은 최초의 파스타가 손쉽게 휴대할 수 있는 음식 재료에 의존하던 사막에 거주하는 아랍 유목민의 혁신이었다고 제시한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 가설에 의문을 제기하여, 듀럼밀을 정기적으로 공급받으며 그것을 제분할 수 있는 기구가 필요하다며 그건 유목민의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음식 작가 Clifford Wright는 절충안을 제시한다. 파스타 세카는 북아프리카를 가로질러 행군하던 중세 아랍의 군대와 함께 서쪽으로 왔다. 그것은 결국 편리하고 속을 채우는 식료품이 되었고, 낙타의 등이나 선박에도 쉽게 실어 운송할 수 있었다. 그 중 일부가 12세기 이전에 시칠리아의 해안을 따라 정박하여 내려졌다. 



오역과 의역이 난무하니 아래를 참조하세요.

http://www.saudiaramcoworld.com/issue/201301/pasta.s.winding.way.west.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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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미국 식품청의 홍보물. Fred G. Cooper라는 사람이 만들었단다. 


어느새 무려 100년 전의 이야기가 되었다.

그런데 재미난 점은, 이때에도 역시 밀과 고기를 덜 먹고, 로컬푸드를 구매하며, 음식물을 남기지 말라고 권장했다는 사실.


그러나 100년 동안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여전히 유효한 구호가 되고 있다는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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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니 피그... 참 귀엽게 생겼는데요. 

이렇게 귀여운 외모 덕분에 누구는 애완용으로 키우기도 하지요.





그런데 이 기니 피그의 고향인 안데스 지역에서는 가축으로 키워서 구워 먹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이게 안데스 사람들이 무식하고 미개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안데스라는 척박한 자연환경에서는 소나 돼지를 사육하기가 어려우니, 기니 피그를 집 안에서 함께 살도록 하여 관리하면서 영양의 공급원으로 삼았던 것뿐입니다.

그러니 뭐라고 욕할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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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는 것이 바로 너이다"라는 문구가 있다.
에이, 설마 그러겠느냐고 반응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과학적으로 입증이 되고 있다.

비록 꼬마선충을 대상으로 한 실험이긴 하지만, 

인간도 조금 더 시간이 걸리고, 조금 더 다양한 먹을거리를 먹어서 실험하기 어려워서 그렇지 마찬가지일 것이다.
꼬마선충이나 인간이나 똑같은 생명이기에...


그나저나 예쁜꼬마선충은 참 예쁘구나.


http://bit.ly/Z9HZ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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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건강에 해로운 음식을 아주 조금이라도 먹으면 유전자 발현에 큰 변화를 일으키며 이것이 신체 생리와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사이언스 데일리가 1일 보도했다.


미국 매사추세츠 의대(UMMS) 과학자들은 예쁜꼬마선충(C. elegans) 실험을 통해 먹이의 차이가 유전자 발현에 큰 차이를 일으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고 셀(Cell) 지에 발표했다.

연구진은 꼬마선충 실험에서 한 집단에는 자연의 먹이인 코마모나스균을, 다른 집단에는 실험실 표준 먹이인 E.콜라이균을 먹인 결과 전자의 경우 후자에 비해 발육이 빠르지만 후자보다 자손도 적고 수명도 짧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들은 다른 먹이를 섭취한 두 집단에서 최소한 87가지의 유전자 발현 변화를 찾아냈다. 놀랍게도 이들 변화는 영양소 센서 경로인 TOR 및 인슐린 신호전달계와는 관계없이 성장·발육과 관련된 탈피(molting) 조절인자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섭식과 유전자 발현 및 생리 사이의 필수적인 관련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연구진은 "중요한 사실은 꼬마선충의 먹이로 영향받는 것과 같은 조절인자가 사람의 활동일주기를 좌우한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한 집단에 주로 E.콜라이균을 먹이로 주면서 코마모나스균을 소량만 섞어 줬을 때도 유전자 발현과 생리에 극적인 변화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는 특정 먹이가 `건강에 좋거나 나쁘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니라 각기 다른 조건에서 각기 다른 생리적 효과를 내는데 특정량의 특정 먹이가 최상의 효과를 낸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구진은 "대체로 건강에 이롭지 않은 음식이라도 건강에 좋은 음식을 조금만 섞어 먹으면 유전자 발현에 이로운 변화를 이끌어내 매우 큰 생리적 효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 연구는 생물의 대사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체내 생리와 외부 환경의 신호에 빠른 속도로 반응을 일으키는 유전자 조절 네트워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다.

youngni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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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년 동안 세계의 고기 소비량은 2배가 되었다. 그런데 2050년, 지구의 인구가 90억을 돌파할 것이라는 그 시점에는 다시 지금의 소비량보다 2배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한다. 지금과 같은 육류 생산방식으로 소비량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나아가다가는 고기 먹다가 망할 것이 뻔하다. 그렇다고 모두에게 채식을 강요할 수도 없다. 채식은 개인의 신념과 기호와 선호일 뿐, 모두에게 고기를 포기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선진국의 고기 소비량이야 이제 어느 정도 정점을 찍었겠고, 문제는 개발도상국의 고기 소비량이 경제성장과 함께 엄청나게 증가하고 있다는 점이겠다. 한국만 해도 쌀 소비량이 절반 이하로 뚝 떨어지는 사이 고기 소비량이 2배 이상 늘어났으니 말이다(http://bit.ly/101i6RE). 경제성장과 함께 늘어나게 될 지구의 인구가 먹어대는 고기를 어떻게 충당할 것인가?


그래서 나오는 것이 실험실에서 인공적으로 배양한 고기라든지(http://bit.ly/101i5NB), 곤충을 먹어야 한다든지 하는 이야기(http://bit.ly/101i9wI)일 것이다. 바다의 어족자원이야 이미 지금의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서 엄청나게 잡히고 있어, 이대로 나아가다가는 멸종하면 멸종했지 더 늘어나기는 힘든 것이 현실이다(http://bit.ly/101iaAH).





FAO에 따르면 각각 소고기 소비량은 2000년 1400만 톤에서 2030년 3900만 톤으로, 돼지고기 소비량은 2100만 톤에서 5600만 톤으로, 가금류 소비량은 2200만 톤에서 8200만 톤으로, 달걀 소비량은 1400만 톤에서 3800만 톤으로, 양고기 소비량은 400만 톤에서 1100만 톤으로 증가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동물성 단백질을 식물성 단백질로 대체할 수 있다면, 즉 콩고기나 밀고기가 지금의 고기만큼 맛있게 만들어질 수 있다면 대안이 될 수도 있겠다. 솔직히 지금의 콩고기와 밀고기는 너무 맛이 없다. 남의 살이 역시 가장 맛있는데... 그걸 끊기가 힘들다. 에잇, 나는 그냥 고기 3번 먹을 거 1번만 먹으며 밥에 반찬으로 곁들여 양을 대폭 줄이고, 두부 같은 전통 음식을 이용한 요리를 해 먹어야겠다. 두부조림도 좋고, 된장찌개도 얼마나 맛나며, 청국장은 또 군침이 질질 흐르게 만들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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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농산물이 실제로 건강에 더 좋지 않다고 주장했던 스탠포드의 메타-분석 연구가 기억나는가? (나는 여기에 구멍을 좀 냈다.) 그 연구에 가려진 사실(나는 전체를 가지고 있으나 저작권 문제로 게재할 수 없다)은 유기농산물이 더 높은 수준의 페놀 -식물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화학물로 항암효과가 있고 기타 퇴행성 질병에 좋다는- 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는 결과이다. 

그 연구가 발표된 이후, 스탠포드 연구의 저자 가운데 한 명인 Dena Bravata 씨는 뉴욕타임즈 보고서에서 그 결과를 우습게 여겼다:

(유기농산물과 관행농산물 사이의 총 폐놀 수준의) 차이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나, 차이의 크기는 연구마다 매우 다양하며, 그리고 그 데이터는 적은 수의 표본만 가지고 시험한 것이다. "나는 주의깊게 결과를 해석한다"고 Bravata 박사는 말한다. 

PLOS one에 2월 20일 발표된 논문은 유기농업과 페놀 사이의 관계를 강조한다. 연구팀은 브라질의 인근 밭에서 재배한 유기농과 관행농 토마토의 총 폐놀 함량을 비교한다. 똑같은 미기후와 비슷한 토양에서 토마토를 재배함으로써, 연구자들은 영양분 함량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환경요인을 통제할 수 있었다.

결과: 총 페놀 함량이 같은 때 수확한 관행농 토마토보다 유기농 토마토에서 139% 높다. 그리고 비타민C 함량은 55% 더 높은 것으로 기록되었다. 

저자들은 유기농의 식물이 경험하는 추가적인 스트레스 —해충을 방어하고, 토양에서 질소 같은 영양분을 더 어렵게 찾아다니는 등— 가 "산화 스트레스와 당분 같은 고농도 수용성 고체의 축적 및 비타민C와 페놀 합성물 같은 과일의 영양 품질에 기여하는 기타 화합물에 차이를 일으켰다"고 가정한다. 즉, 식물이 약간 고생할 때 이러한 중요한 영양분을 더 많이 발생시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타 페놀이 풍부한 과일과 채소에서 마찬가지로 사실일 수 있다. 

교체가 발생했다: 관행농 토마토는 훨씬 더 크다. 그러나 작은 토마토가 이용할 수 있는 영양분 밀도가 더 높다면 누가 큰 것을 바라겠는가? 내 경험상, 모든 작은 토마토가 동일하게 더 맛있었다.

이 논문이 복잡한 주제 안에서 하나의 데이터만 다룬다고 지적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저자들은 스스로 유기농업에 의해 페놀 함량이 증가하는 것과 같은 기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스탠포드의 논문도 인정하듯이, 거기에는 무언가 연결되어 있을 것 같다. 


http://goo.gl/xMy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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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얼마나 먹고 마시는가는 늘 흥미로운 주제이다. 마실거리에 대한 자료는 이미 나온 바 있는데, 여기서는 먹을거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위의 표는 Bloomberg Businessweek에 실린  "미국인의 감소하고 있는 식료품 지출"에 관한 정보도이다. 크게 보려면 여기 를 참조하라.


30년 전 먹을거리에 대한 평균 가구지출은 수입의 약 17%였는데, 현재는 약 11%이다. 이건 세계적 추세이다. 먹을거리는 수입이 증가하는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격이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그러한 경향이 유별나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값싸게 먹을거리를 구입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프랑스의 절반 정도이다.


 "집에서 싸게 먹는 것"이 사회복지의 중요한 기준이라고 한다면 미국은 지구에서 가장 대단한 나라이다. 집에서 먹는 지출이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훨씬 적다. 



사실 미국인이 집에서 먹는 비용을 거의 지출하지 않는 까닭은, 바로 외식을 많이 하기 때문이다. 지난 20세기 미국인들은 집에서 음식을 준비하지 못하면서 먹을거리에 더욱 많은 돈을 지출했다. 




20세기에는 먹을거리와 의복 같은 필수요소의 가격이 떨어진 행복한 시절이었다.  수입의 약 50%를 먹고 입는 데 사용하다가, 지금은 평균 가구지출의 20% 이하만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평균 가구"가 하위 20%의 가구보다 15배의 돈을 버는 상위 20%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빈곤층의 식료품 비용은 부유층과 비교할 때 어떠한가? 또한 지난 30년 동안 어떻게 변화했는가?


간단히 답하면, 상대적으로 식료품 지출 비용이 모든 계층의 사람에게서 빠르게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빈곤층에 대해서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 


1984년, 미국의 빈곤층은 먹는 데에 수입의 16%를 지출했다. 중산층 역시 16% 정도를 지출했다. 그리고 부유층은 가장 적은 돈을 지출했다. 지난 30년 동안 가구의 식료품에 대한 지출 비율은 모두 감소했지만, 빈곤층은 그렇지 않다. 여전히 똑같은 수준이다. 




사람들이 돈을 어디에 얼마나 썼는지에 상관없이 사람은 살기 위해서 먹을거리가 필요하다. 아무튼 부유층은 훨씬 많은 돈을 버는데, 먹을거리에 대한 예산에서는 다른 계층과 거의 비슷한 비율을 지출하고 있다. 


그런데 수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의 식습관에서 꽤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부유층은 빈곤층에 비해서 약 4배 이상을 소비한다. 술에서 6배, 외식에서 5배, 먹을거리에서 3배 정도이다. 부유층과 빈곤층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그들이 실제로 먹은 것이 아니라, 그들이 먹는 데 돈을 지출한 장소이다. 빈곤층은 집에서 훨씬 더 많이 먹는다. 부유층은 외식을 더 많이 하는데, 집에서 먹는 비용과 거의 비슷한 수준이다.  



전반적으로 먹을거리에 대한 비용이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빈곤층이나 중산층에게는 좋은 소식이다. 이는 그들이 벌어들이는 돈을 건강이나 교육, 주택 구입 등에 사용할 여유가 생긴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빈곤층이 먹을거리에 돈을 덜 지출하게 된 것이 경제적 압박으로 발생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저소득층이 실제 식품 가격의 하락뿐만 아니라 주택담보대출과 연료비 때문에 적게 소비하도록 강요받아 먹을거리에 자기 수입의 1/6만 소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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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omberg의 수치와 다른 까닭은 여기서는 "지출"을, 거기에서는 "세후소득"을 사용했기 때문에 약간 차이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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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농사를 지어 쌀을 주식으로 삼은 한국인에게 논은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먼저 논은, 당연히 먹을거리를 주는 공간이다. 그런데 지금이야 '논=벼'라는 공식을 떠올리지만, 원래 예전의 논은 벼만 사는 곳이 아니었다. 논에는 물장군도 살고, 물방개도 살고, 개구리도 살고, 올챙이도 살고, 우렁이도 살고, 거머리도 살고, 드렁허리도 사는... 즉 다양한 생물들이 함께 어우러져 살던 공간이었다.


드렁허리는 이렇게 생겼다. 처음 보는 사람은 징그러워 할 수도 있는 생김새... 하지만 이 놈이 사는 논은 그만큼 건강하고 깨끗한 생태계라고 할 수 있다. 예전에 농민들은 이 놈을 귀찮은 존재로 인식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물을 담는 것이 중요한 논두렁에 드렁허리가 구멍을 파고 살기 때문이다. 이게 구멍을 파면 그리로 귀한 논의 물이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그런 구멍은 다시 논흙이나 풀더미 등으로 얼른 틀어막아야 한다. 그러지 않다가는 논의 물이 다 빠져나가기 십상이다. 얼마전 드렁허리와 관련하여 좋은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다. 시간과 돈이 허락하는 분은 꼭 한 번 보시길 바란다(http://goo.gl/fpHKh)



그러던 것이 독성물질(농약)을 사용하는 농법이 퍼지면서, 또 농수로 등을 시멘트로 포장해 버리면서 그네들의 서식지가 사라져 논에서는 벼만 사는 공간이 되었다. 물론 지금도 풀이 자라고, 이러저러한 동물들이 깃들어 살기는 한다. 그런데 예전처럼 그들은 논의 '주인'이 아니라 '방문객'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친환경 농업이 퍼지면서 그러한 논에서는 다양한 생물들이 돌아오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리기는 한다(http://blog.daum.net/stonehinge/8724728). 하지만 여전히 그 비율은 미약할 뿐이다. 유기농 인증을 받아 출하되는 곡류의 무게가 단 4만4000톤(http://goo.gl/CQ6xn). 곡류 전체를 아우르는데 그래도 쌀이 대다수일 테니 그 전체를 쌀이라고 놓고 봐도 통계청에서 발표한 2011년 전체 벼 생산량 422만4000톤의 1% 정도밖에 안 된다. 앞으로 그 비율이 더 높아지면 논에서도 훨씬 다양한 생물들이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논은 홍수를 막는 댐의 역할을 수행한다. 한국은 여름에 집중호우가 쏟아진다. 이걸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여름철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비가 벼에게는 생명의 물이 된다. 그 장마비를 쭉쭉 빨아먹으면서 쑥쑥 자라는 것이 바로 벼의 생장 특징이다. 그래서 논은 그 시기에 많은 물을 담는 것이 유리하다. 물론 그렇다고 논에 계속 물을 대놓기만 하면 안 된다. 뿌리도 한 번씩 콧바람을 쐬면서 숨을 쉬어야 튼튼하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아무튼 그렇게 논이 붙드는 물의 양이 2000년의 논 면적을 기준으로 연간 26.2억 톤이라 한다. 이게 어느 정도의 양이냐면, 소양강댐과 대청댐의 저수량과 같은 양이다. 그러니까 논만 잘 보존하고 농사를 지어도 대형 댐을 몇 개 짓지 않아도 되는 셈이다. 그런데 요즘 논이 여러 이유로 사라지고 있다. 개발 바람에 그러기도 하고, 논농사가 수지타산이 맞지 않으면서 논을 밭으로 바꾸고 있기도 하다(http://blog.daum.net/stonehinge/8727371). 그렇게 되면 우린 또 다시 대형 댐을 지어야만 할지도 모른다. 댐이 생기면 수몰되는 마을과 농경지가 생기고, 거기에 살고 있던 사람과 여러 생물들이 쫓겨난다. 지금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여기 내성천에 영주댐이 만들어져 수몰된다는 마을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라 (http://goo.gl/7KcCW).




또한 수질을 개선시키고 산소를 공급하며 뜨거운 여름철 한낮의 열기를 식혀주는 역할도 한다. 하나하나 모두 이야기하기가 손가락이 아프다. 이 글은 이런 논의 공익적 기능을 이야기하려고 시작한 것이 아니지 않은가! 이 글은 바로 추어탕을 이야기하려고 시작했다. 추어탕!


추어, 즉 미꾸라지는 아주 재미난 생물이다. 아가미 말고 장으로도 숨을 쉴 수가 있어 물이 마른 곳에서도 진흙만 있으면 그리로 파고들어가 살아남을 수 있다. 또 그 미끌미끌한 몸통을 쥐는 감촉이란... 잡아보지 못한 사람은 말을 하지 말자. 

어린 시절 반도를 하나 들고 개울가나 농수로에 가서 돌덩이를 옮겨다가 물길을 막는다. 그러면 물이 점점 줄어들고 거기로 반도를 들고 뛰어들어가 고기몰이를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저기 수풀이 우거진 쪽을 발로 쑤시고 덤벙덤벙 뛰면서 반도가 있는 쪽으로 고기를 몰아서 결정적 순간 팍 들어올리면... 반도 위에 고기들이 펄떡펄떡 뛴다. 재수가 좋은 날은 메기를 잡기도 했다. 그렇게 잡은 고기로 매운탕을 끓여먹는 것이 여름철 동네 아이들의, 그리고 어른들의 재미이자 좋은 영양 공급원이 되었다. 굳이 개를 잡지 않아도 필요한 열량을 그렇게 섭취했다. 물론 그래도 어른들에게 최고의 보양식은 개였다. 그건 부인할 수 없다.


그렇게 미꾸라지를 잡기도 했다. 하지만 미꾸라지의 참맛은 논에서 잡는 것이었다. 논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항상 물을 채워놓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농사짓는 사람은 초짜이거나 게으른 농부다. 진정한 농부는 벼의 상태를 봐가면서 '중간물떼기'라는 것을 한다. 중간에 한 번씩 물을 빼서 뿌리가 공기를 만나 숨을 쉬면서 더 뻗어 나가도록 하여 벼가 잘 자라도록 돕는 행위다. 그렇게 물을 뗄 때가 바로 논에서 다양한 먹을거리를 장만하는 때이기도 하다. 미꾸라지를 잡기도 하고, 붕어를 잡을 수도 있다. 미꾸라지를 잡아 먹기에 적당한 때는 이들이 겨울을 나려고 살을 찌우는 가을철이다. 특히 늦가을에는 진흙 속으로 파고들어가 겨울을 날 수 있도록 포동포동 살을 찌운다. 그렇게 살을 찌워 먹기 좋은 시점이 바로 벼를 베는 무렵과 겹친다. 보통 7월부터 먹을 수 있고 11월이 끝물이다. 곧 가을이 제철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미꾸라지를 뜻하는 한자인 자는 물고기에 가을을 뜻하는 한자를 조합해서 만들었다. 즉 미꾸라지는 바야흐로 가을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물고기인 셈이다. 그건 다른 여느 물고기보다 그 무렵에 먹는 것이 제맛이기에 그럴 것이다.


논바닥에서 꿈틀꿈틀거리는 미꾸라지를 보라. 이 어찌 징그러운가, 먹음직스럽지. (사진 http://goo.gl/FYavy) 



미꾸라지를 일부러 논에서 키우지는 않았지만, 생명이 어우러지는 논에서는 당연하게 만날 수 있는 생물이었다. 논에서 일부러 물고기를 양식하는 형태의 농법도 있다. 이를 바로 '벼논양어'라고 한다. 중국의 한 소수민족은 그렇게 논에서 잉어를 양식하여 시장에 내다팔기도 하고, 자신들이 먹을 양식을 마련하기도 한다. 이에 대한 '슈퍼피쉬'라는 훌륭한 다큐멘터리가 있으니 참고하시길 바란다(http://goo.gl/QnxrV). 

한국에서도 그런 방식을 활용하여 먹고 살아왔다. 논에서 벼만 재배하여 수확해 먹은 것이 아니라, 붕어도 잡고 다슬기와 우렁이도 잡아서 국도 끓여 먹으며 살아왔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추어탕이란 말씀이다. 지금 이러한 방식을 되살려서 논에서 벼도 재배하면서 미꾸라지도 길러 농가소득도 꾀하고 논의 생태계도 건강하게 하려는 움직임이 있다(http://blog.daum.net/stonehinge/8726973). 여기는 언젠가 꼭 찾아가서 취재를 하려고 생각중인 곳이다. 그때 더 자세한 이야기를 올리도록 하겠다. 그 방식의 장점은, 벼 이외의 미꾸라지를 소득원이자 영양 공급원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만이 아니다. 바로 논도 건강하게 만들어 벼가 농약이나 비료에 의존하지 않아도 잘 자랄 수 있게 한다는 데에 큰 장점이 있다. 미꾸라지가 다니면서 흙탕물을 일으키면 작은 풀들이 제대로 자라기 어려워진다. 또 벼에 해를 주는 작은 벌레를 잡아먹고 소화를 시켜 똥을 사면, 그 똥이 자연스레 거름이 되어 벼가 먹고 자란다.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일석다조의 효과가 일어나는 것이다. 참, 이들이 모기의 유충을 잡아먹어서 인간에게 병을 옮기는 것도 예방하고 줄일 수 있다는 점도 잊지 말자.


모두 먹고 살자고 하는 짓 아닌가. 미꾸라지가 참 좋은 역할을 하지만 그것도 먹어야 제맛이다. 논농사가 전국 각지에 퍼져 있는 만큼 미꾸라지를 이용한 추어탕도 지역에 따라 다양한 요리방법이 있다. 크게는 남원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식, 원주를 중심으로 한 강원도식, 그리고 서울 깍쟁이들이 즐기던 서울식, 털래기라고도 부르는 경기도식, 청도 또는 대구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식으로 나뉜다. 하지만 크게 나누었을 때 그렇다는 말이지, 마을마을마다 집집마다 자신들만의 요리법과 즐기는 방법이 천차만별이다. 그래서 그걸 한데 묶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잡아라, 잡아라, 미꾸라지 잡아라!


 

남원을 중심으로 한 전라도식 추어탕이 현재 한국에서 가장 대중화된 추어탕이라 할 수 있다. 그건 바로 전라도 사람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면서 서울로 많이 이주한 것과 깊은 연관이 있다. 떠난 사람이 많은 만큼 서울로 올라온 사람이 많고, 그들이 서울에서 남원식 추어탕을 만들어 먹으면서 가장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이 전라도식 추어탕은 들깨가 들어간 구수하고 걸쭉한 국물이 특징이다. 처음 시작은 1959년 경남 하동 출신의 서삼례 할머니가 남원의 광한루 옆에 있는 예전 육남시장 근처에서 추어탕 식당을 시작하면서 퍼졌다고 한다. 지금도 남원의 그 부근에 가면 수많은 추어탕 집이 영업을 하고 있으니 즐겨 보시길 바란다. 전라도식은 미꾸라지 육수에 된장과 다진 마늘, 생강즙을 넣고 끓인 다음 시래기와 파, 미나리, 부추, 토란대, 숙주 등을 넣은 뒤 들깨를 충분히 넣어 걸쭉하게 만들고 들기름을 넣어서 향을 더하는 것이 특징이다. 

 

경상도에서도 추어탕을 널리 즐겨 먹었다. 그런데 경상도식이 퍼지지 않은 것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주민이 적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경상도는 그냥 그 동네에서 살아가도 충분하지 않은가. 인구 비율에서 전라도의 몇 배나 되는 크기를 자랑할 정도로 말이다. 추어탕 요리법이 전국적으로 널리 퍼지지는 못했지만, 그게 역설적으로 그 동네가 먹고 살만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보여주니 참 재밌는 역사다. 경상도식은 1950년대 초 상주 출신의 천대겸 할머니가 문을 연 대구의 상주식당과 1963년 청도의 김말두 할머니가 문을 연 의성식당이 그 시작이라고 꼽는다. 이 경상도식 추어탕은 미꾸라지를 으깨거나 미꾸라지 외에 여러 민물고기에다 된장을 풀고 우거지나 배추를 넣은 맑은 국물이 특징이다. 부산이나 경남 지역에서는 우거지나 배추말고도 토란대와 부추, 산초나 방아잎 등을 넣기도 한단다. 방아잎은 여름이 덥고 습한 경상남도에서 많이 활용하는 향신료이다. 일본에 가도 이와 비슷한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아마 덥고 습하여 질병을 예방하거나 벌레를 쫓기 위하여 강한 향이 나는 음식을 먹는 듯하다. 동남아 사람들의 체취를 맡아 본 적이 있다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참, 청도식은 미꾸라지보다 여러 민물고기를 더 많이 사용한단다. 청도는 역시 논보다는 계곡이 더 발달했기에 그럴지 모르겠다. 논이 있어도 저 큰 하천 옆에 들이 넓은 곳에 발달한 논과는 흙의 성질이 다를 것이다.


사진만 봐도 침이 꼴깍... 먹고 싶다... 청도식 추어탕...(http://goo.gl/2nqQF)



경기 북부 지방에서 발달한 경기도식 추어탕은 미꾸라지 털래기라고도 부른다. 그쪽에서는 추어탕보다 털래기라고 해야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이건 미꾸라지 매운탕의 일종으로, 무와 다시마를 우려낸 육수에 미꾸라지나 민물고기를 통째로 넣고 고추장을 풀어 끓인 다음에 여기에다 수제비나 소면을 넣어 어죽과 비슷하게 만들어 먹는다. 털래기는 여러 재료를 털어 넣고 끓여서 먹는다는 데에서 유래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가 있다. 

 

서론이 너무나 길었다. 사실 원주 가서 추어탕 먹고 왔다는 자랑을 하려고 글을 시작했는데 쓸데없이 주르륵 길어졌다. 이런 제길.

 

50년의 역사를 지닌 원주식 추어탕의 원조는 원주 복추어탕 집이라고 한다. 이 집의 특징은 된장 외에 묵힌 고추장을 풀어 미꾸라지의 잡내를 없애는 점이다. 거기에 강원도에서 흔하게 농사지어 구할 수 있는 감자와 미나리, 버섯, 시래기, 부추, 다진 마늘 등이 들어간다. 원래는 미꾸라지를 통채로 사용하는 것이 원주식이라는데, 손님의 기호에 따라 갈아서 내주기도 한다. 아무튼 다른 곳과 달리 '감자바우'라고 불리는 강원도라는 걸 내세우는 양 추어탕에 감자가 들어간다는 점이 매우 이채롭다. 감자가 들어간 추어탕=원주식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밑반찬이 아주 깔끔하게 나온다. 겉절이도 맛있고, 열무김치도 일품이다. 뭐니뭐니 해도 살짝 얼은 동치미는 그 맛이 캬! 동치미 사랑해요. 엉엉. 



추어탕이 나오기 전까지 튀김을 시켜 먹었다. 아주 합리적인 점이 반 접시(6000원)만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솔직히 두세 명이 가서 한 접시를 먹기에는 양이 좀 부담스러운데 이 정도 양은 별 부담없이 즐길 수 있어서 참 좋았다.


 

보이는가, 이 원주식 추어탕의 위엄이! 경배하라! 과연 된장만으로 맛을 낸 것이 아니라 고추장을 푼 모습을 빛깔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버섯과 감자가 동동 떠 있는 모습을 보라. 이것이 바로 원주식 추어탕이다.



이 원주 복추어탕의 위치는 원주시 개운동에 자리하고 있다(주소 : 강원 원주시 개운동 406-13). 원주에 간다면 꼭 한번 먹어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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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가면 맛난 음식을 먹으로 식당에만 갈 것이 아니라, 그 음식을 만드는 재료를 파는 시장에 가 보라. 더 나아가 그 농축산물을 재배, 사육하는 농가에 가서 보고, 농민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더욱 좋다. 

여행을 가면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 마트나 시장의 농산물 판매점이다. 


이번 일본 여행(오사카-교토)에서도 교토의 슈퍼마켓에 들러 어떤 농산물들을 판매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한국과 비슷하면서 다른, 무척 재밌는 구경이었다.



먼저 딸기, 이치고이다. 일본의 딸기야 달고 맛있기로 유명하다. 로열티 문제만 아니었으면 지금도 한국의 딸기는 대부분 일본 품종을 가져다 재배했을 것이다. 지금은 한국에서 육종한 딸기로 바뀌고 있는 추세. 과일과 관련해서 한국은 일본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 딸기 한 팩에 698엔, 한화로 9000원 돈이다. 비슷한가? 후쿠오카에서 재배한 것이니 운송비도 더해졌을 테고, 아무튼 결코 싸지는 않다. 





다음은 당근. 일본에서는 당근을 인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진짜 인삼은 '고려인삼'이란 이름으로 부른다. 마치 제주도에서 고구마를 '감자'라 부르고, 감자를 '지실'이라 부르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일본의 뿌리채소들은 그 흙의 물리성 때문인지 길쭉길쭉한 것이 특징이다. 한국의 당근은 짧고 통통한 모양인데, 일본은 쭉 뻗고 얄쌍하다. 품종의 차이 때문인지 토양의 차이 때문인지는 더 자세히 알아봐야겠다. 한국에선 화산토 지역은 당연히 제주도인데, 제주산 당근과 또 생김이 다르다. 제주도 어느 지역이냐에 따라 또 흙이 다르니 단순 비교는 힘들겠다. 148원, 한화로 2000원 돈으로 한국에서 팔리는 당근에 비해 꽤 비싼 편이다. 무게가 그만큼 차이가 나서 그럴지도...




일본 하면 다꽝! 다꽝 무! 역시나 무가 길쭉하다. 무를 길러 보면 흙이 어떠냐에 따라 무의 모양이 달라진다. 단단한 흙에서는 몽뚱하게 자라고 부드러운 흙에서는 길쭉하게 자란다. 그런데 이 무는 도대체 어떤 흙에서 자랐기에 이렇게 길쭉하단 말인가. 무 재배농가를 찾아가 보고 싶다. 





하지만 무가 길쭉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동글동글한 것도 있는데, 이렇게 생겼다. 이런 형태도 일본에서 널리 재배하는 것이다.





미야자키현에서 재배한 오이고추. 한국에선 오이고추라고 부르는데 일본에서도 따로 그런 이름이 있는지 모르겠다. 오이고추가 분명 일본에서 건너왔을 것 같다는 느낌적 느낌이다.  





오이다. 오이마저 길쭉하다. 무슨 오이가 이렇게도 길쭉하다냐. 달라, 달라, 한국과 달라도 너무 달라. 오이소박이를 담그는 오이가 그나마 길쭉한 편인데, 이에 비교하면 몽툭하다. 





이건 도대체 뭐다냐? 콩나물도 아니고 콩 싹을 먹는다! 이걸 데쳐서 나물로 먹는가 보다. 한국에선 콩에 물을 줘서 뿌리가 자라게 하여 그걸 먹는 데 반해, 일본에선 콩에 물을 줘서 줄기가 자라게 한 다음 그 싹을 먹는다. 같은 콩으로도 활용하는 방법에선 이렇게 차이가 난다. 





마늘쫑 먹는 건 한국과 똑같구만. 그런데 마늘이 난지형인가? 마늘쫑이 엄청나게 굵다. 한국에서 팔리는 마늘쫑과는 같은 마늘쫑이지만 생김새가 다르다. 





삼도콩. 아마 3번을 심을 수 있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인 듯하다. 한국에도 이런 콩 종류에 세벌콩, 세불콩 등의 이름이 붙은 것이 있다. 그건 바로 1년에 세벌(3번) 심어서 수확할 수 있다는 뜻이다. 꼬투리의 생김으로 봐서 동부의 일종이다. 갓끈동부처럼 콩알을 먹는 것이 아니라 꼬투리채로 요리해서 먹는 것이다. 만약 콩알을 먹는 것이라면 꼼꼼한 일본인이 꼬투리채로 팔 리가 없다!  





일본의 들깨라고나 할까, 이건 바로 차조기 잎이다. 차조기라고 하면 자주빛이 나는 것이 보통인데, 이건 푸른 차조기로서 생선회와 함께 먹거나 튀김으로 먹는다. 이 향이 처음 먹는 사람에게는 에퉤퉤 하며 뱉어버릴 만한데, 먹다 보면 그에 빠지게 됨. 비슷한 것으로는 방아를 떠올리면 된다. 고수도... 보면 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이 주로 향이 독특하고 강한 식물을 주로 먹는다. 아마 해충을 쫓고 몸을 시원하게 보하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그럴 것 같다. 





오오오, 고사리다! 내가 좋아하는 고사리. 일본인도 고사리를 먹는다는 사실에 그저 놀랐을 뿐이다. 




하우스 감귤. 귤도 하우스에서 재배하다니... 하긴 제주도에서도 요즘 하우스 감귤이 재배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난 그런 재배방법에 반댈세. 환경을 일정하게 통제할 수 있게 만듦으로써 생산에는 편할지 모르나 그렇게 재배한 것이 자연에서 자란 것만큼 맛있을 리는 만무하다. 큰 병충해 피해 없이 생산조건을 통제할 수 있고, 남들이 출하하지 못하는 시기에 출하하여 제값을 받는다는 장점 때문에 시설하우스를 선택한다. 하지만 생산비가 증가하여 그 가격이 오르는 것은 막을 수 없다. 이 귤도 6개에 6000원 꼴. 즉 하나에 1000원이다. 헐. 





콩나물이 아닌 숙주. 콩나물을 즐겨 먹는 건 한국인뿐이지 않을까 한다. 이런 형태의 나물을 먹는 곳은 주로 아시아 지역인데 대개 녹두를 이용한 숙주를 먹지 콩나물을 먹는 곳은 거의 보지 못했다. 어디선가 먹긴 먹겠지만, 한국만큼 즐겨먹지는 않을 듯하다. 




이건 그냥 곁다리로 소고기. 한국에 한우가 있듯이 일본에는 와규가 있다. 사다가 한 번 구워먹어보고 싶었으나, 여건이 허락하지 않아서 구경만 했다. 이건 특별히 일본 소 중에서도 검은소의 고기. 한국으로 치면 요즘 열심히 개발하고 있는 칡소라고나 할까.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마블링 좋은 소고기다. 살에 지방이 가득 꼈다. 불쌍해.





한국과 달리 흰달걀이 많았다. 물론 누런달걀도 있었는데 흰달걀의 비율이 좀 더 많았다. 누가 한국에서 흰달걀을 사라지게 만들었는가? 바로 소비자.




마지막! 일본의 다양한 음료수와 맥주. 왜 한국은 이렇게 다양한 술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야! 과점의 산업구조가 맘에 들지 않는다. 술도 몇몇 회사가 과점하고 있으니 다양한 상품을 개발하지 않는 것일지도. 그나마 요즘은 그래도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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