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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서 만난 이웃

 

 

2008년 11월 28일 아침 7시, 코로 들어오는 공기가 차다. 하지만 영하로 떨어지진 않았으니 그럭저럭 시간이 지나면 따뜻해질 것이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하고 길을 나섰다.

9시 30분쯤 드디어 일행을 모두 만났다. 이번 출장에는 안완식, 박문웅, 안철환 선생님이 함께했다.

명동의 중앙우체국에 들러 일을 보고, 수첩이며 필기도구를 사러 명동 한복판을 뒤졌다. 이건 뭐 환율이 급등하면서 찾아오는 관광객을 상대하는 가게만 보이지 문방구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헤매다 마침내 찾은 것이 "Kosney"라는 곳. 그런데 이곳은 뭐가 그리도 비싼지 수첩 몇 개와 필기도구를 사니 8만 원이 넘는 돈이 들었다. 그래도 어쩌랴, 어디에서 또 문방구를 만날지도 모르고 그냥 11시 30분 강화도로 향했다.

가는 길에 김포의 연호정이란 칼국수 집에서 점심을 먹고, 드디어 13시 50분 강화대교를 건너 강화도에 이르렀다.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에 난 해안도로로 방향을 틀어 용정리 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도착한 범우리라는 마을. 여기서 조사의 가장 처음으로 강화군 강화읍 용정리에서 7대째 살고 계신 최대식(77), 심옥순(75) 어르신을 만났다. 우리의 농촌 어디나 그렇듯 만날 수 있는 건 거의 노인뿐이다. 어쩌다 40~50대의 젊은 사람(?)을 만날 수는 있어도 아이를 만나기란 무척 어렵다. 이제 한 10년 남은 것일까? 노인들마저 자리를 비우면 농촌은 텅 빈 공간이 될 것이다. 그 공간에서 살던 사람이 사라지면 그만큼 그들이 누리고 전하던 우리의 뿌리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문화는 오랜 세월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일구며 쌓아온 삶의 방식이다. 가깝게는 몇 년 전, 멀게는 몇 백, 몇 천 년 전의 삶과 노래, 노동, 이야기 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런 우리의 문화가 사라지는 날 우리는 어디에 뿌리를 내릴 것인가?

새로운 도구와 문물은 새로운 문화를 몰고 왔다. 모두 그에 압도되었고, 그를 추종하며 맹신했다. 그 결과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노마디즘', 다른 말로 광고 문구를 따르자면 '디지털 유목민'이다. 이걸 까뒤집어 보면 무엇인가? 뿌리 없는 부평초 인생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나 그것이 몰고온 결과가 모두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정보를 얻고 나누기 쉬워지고, 사회적 약자에게 좋은 효과도 가져오고, 획일과 통일이 아닌 개개인의 다양함과 개성을 표현하는 마당을 마련하기도 했다. 모든 것에는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이 아닌가. 도구와 문물을 탓하기 전에 그를 활용하는 사람을 탓할 노릇이다. 사람, 그 사람의 마음, 생각 들이 우리의 사회와 문화를 몰고간다.

 

최대식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라고 늙은, 말 그대로 촌로다. 그 얼굴의 주름에, 두텁고 메마르며 거친 그 손에 강화도 용정리 범우리 마을의 시간과 공간, 역사와 문화가 스며 있다.

최대식 할아버지. 대문간 옆의 광과 농기구 앞에 서서. 청테이프로 붙인 키는 10년쯤 쓴다고 한다.

 

토종 조사를 설명하고 요청하니 심옥순 할머니가 대문 옆에 있는 곳간 문을 따고 하나씩 꺼내 보여준다. 이제는 옛날과 달리 시장에서 사다가 심는 것이 많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맛과 같은 이유로 그 씨를 밑지지 계속 받아서 쓴다고 한다.

 

마당질을 끝낸 콩대와 참깨대를 짚으로 묶어 잘 쌓아두었다. 강화와 교동의 농가에서는 대부분 짚으로 부산물을 잘 묶어 놓았다.

 

 

집 앞에는 텃밭이 있고, 그 너머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옛날에는 거기에서 팔뚝만한 고기도 많이 잡았단다. 아직도 집에는 투망 같은 고기잡이 도구가 있어 지금도 쓰냐고 물으니, 아들이 오면 한 번씩 가서 잡는다고 한다. 그 큰아들이 군대 갈 무렵인 30년 전까지는 고기가 넘치도록 많았으나, 이후 농약을 많이 치고 그러면서 확 줄었다고 회상하신다.

 

다음 집을 찾아 나섰다. 얕으막한 고개를 넘으니 바로 새말로 이어졌다. 새말은 말 그대로 새로운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의 어느 농가에서 나무에 호박꼬지를 걸어 말리는 모습을 보았다. 이곳이 강화군 강화읍 용정리 새말에 사시는 안인분(73) 할머니의 집이다. 안인분 할머니는 새말을 "샛말"이라고 부르셨다. 아마 발음과 뜻 구분의 편의 때문에 사이시옷 현상이 일어났나 보다. 다니며 보니 이런 일은 어디에나 무척 많았다. 사투리를 연구하는 국어학자는 참 머리 아프겠다. 한 명 한 명 만나서 하나하나 발음을 다 듣고 분류하고 정리하려면... 토종 조사를 나온 안완식 선생님은 그런 맥락에서 참 대단하시다. 이제는 씨앗만 보면 이것이 토종인지 아닌지 가늠하신다. 어떻게 이런 경지까지 오르셨는지 놀랍다.

 나무에 호박꼬지를 걸어 말리는 모습.

 

안인분 할머니는 농사를 많이 짓지는 않는다고 하셨는데, 씨앗을 잘 모아두셨다. 할머니만의 공간에 가서 이것저것 구경했다. 첫 번째 집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그렇고, 할머니만 아는 할머니만의 공간에 가면 꼭 뭐라도 하나씩 있다.

 

안인분 할머니 댁의 돌절구. 강화와 교동도에는 돌절구가 거의 집집마다 하나씩 있다. 지금은 쓰지 않지만... 

 

안인분 할머니의 뿔시금치. 요즘 시금치는 둥글고 맛대가리 없지만, 옛날 것은 씨가 뾰족하게 뿔이 있어 다루기 어렵지만 아주 맛나다고 하신다. 

 

동네의 어느 집 텃밭에 자라고 있는 파. 조선파라고 하시며 보여주신 것 모두 시장에 나온 파보다 키가 작고 색이 옅었다. 아, 정말 난 아무것도 모르고 맛도 모른 채 아무거나 주워 먹고 살았구나.

 

 

안인분 할머니의 집은 좋은 목재로 지은 집이다. 한때 한옥에 휘어진 목재를 쓴 것이 자연친화적인 모습이 반영된 것이란 착각을 한 적이 있다. 나중에서야 그건 제대로 된 목재를 쓸 수 없기에 그런 것임을 알았다. 이 집은 수원에서도 와서 취재해 갔다며, 요즘 시세로 이렇게 짓자면 5억은 든다고 하신다. 집의 틀이며 모양을 보면 그 말이 거짓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반듯반듯한 목재로 잘 지은 집 

 

 

이후 같은 마을에서 3대째 살고 계신 강천희(66) 할아버지와 안병균 할아버지를 만났다. 강천희란 분은 할아버지란 말을 붙이기가 송구스러울 정도로 살갗도 팽팽하고 젊어 보이신다. 이제 우리도 확실히 오래사는 나라다. 어느 새 환갑 잔치는 슬며시 사라지고 고희나 되어야 잔치 좀 한다. 두 분 모두 집도 새로 깔끔하게 짓고 사시는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이후 사람을 찾아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다가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평상 겸 연장통으로 쓰는 재미난 걸 보고 살짝 사진에 담아왔다.

 

 

수집 조사 첫날.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일머리도 모르고, 어떻게 정리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기록도 부실하고, 사진도 별로 없다. 물론 시간이 없기도 했다. 음력 11월, 5시면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간다. 해가 넘어갈 무렵이면 빛과 따스함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사라진다. 서둘러 밖의 일을 정리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 다가오는 밤을 기다린다. 낮밤을 가리지 않는 도시인만 도깨비처럼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활개칠 뿐. 왜 올빼미족도 있지 않은가? 밤은 달과 함께 공진하는 감성의 시간. 작은 자극에도 피부는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예술을 하는 사람은 밤을 사랑하지 않는가! 하지만 땀 흘리는 사람의 밤은 이튿날의 기운을 챙기는 기다림의 시간. 농촌의 밤은 바로 그런 기다림의 시간이다. 심지어 창밖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마저도.

 

이후 두 곳의 농가를 더 방문하고, 강화읍 인삼센터 앞의 풍물시장에서 할머니 네 분에게 콩 종류를 샀다. 뭔가 차이가 있으니 수집하셨을 텐데, 솔직히 난 아직 아무리 들여다봐도 잘 모르겠다. 이것이 바로 경험과 공부의 차이다! 열심히 좇아다니며 부지런히 배워야지.

 

 

마지막 농가에서 수집 조사를 하는데, 기러기 떼가 날아갔다. 한강 하구 쪽으로 오면서 보니 기러기가 참 많았다. 그러고 보니 가까이에서 기러기를 본 것도 처음이 아닌가. 저들은 무엇을 좇아 대열을 지어 하늘을 날아다닐까? 아래로 양능들(陽陵坪)을 두고 날아오른 기러기. 평坪은 우리말의 들이나 벌을 한자로 옮긴 말이다. 지금도 땅이름에 보면 평이란 말이 많다. 평坪이 아닌 평平이 많은데, 혹시 평坪을 잘못 적은 것이 아닐까? 

 

17시 30분 첫날의 조사를 마치고 숙소를 잡은 뒤 저녁을 먹고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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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릉도여 안녕~

 

 

 

울릉도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을 기리며 오랫만에 술자리를 만들었다. 원래 이런 성격의 출장은 일만 잔뜩 하다가 가는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아닌가 보다. 아무튼 이번에 다니면서 정말 최선을 다해서 쉴 틈도 없이 열심히 했다. 그거 하나만이라도 어디에 가서라도 자부할 수 있다.

어제 마지막 저녁 자리는 그냥 노는 자리만이 아니었다. 우연히 들어간 식당에서 한 아저씨의 이야기를 한 귀로 들었고, 그 내용에서 토종과 관련한 뭔가를 듣고는, 벌떡 일어나 그리로 가서 이것저것 물었다. 뭔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이야기를 나눈 결과, 저 위에 안평전이라는 곳에서 농사짓는 분이라는 걸 알았다. 연락처와 함께 내일 꼭 찾아뵙겠다는 약속을 나누고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그래서 오늘은 그곳에 찾아가려고 한다. 어차피 가려고 했던 곳인데 겸사겸사 어떻게 운이 좋았다. 잠시도 긴장을 늦추면 안 된다.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무슨 이야기가 오고가는지 주워들으면 좋다. 눈은 한 순간도 쉬지 말고 여기저기 살펴야 하는 건 물론이다. 정말 무언가를 얻으러 떠나는 길은 참 피곤하고 어려운 길이다. 나야 이번이 처음이고 잠깐이지만 이 일을 꾸준히 해오신 안완식 박사님은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을까? 그렇다고 누가 인정해 주는 것도 아니고, 외롭고 험한 길을 홀로 헤쳐 오셨을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떠 어제 발견한 식당에 아침을 먹으러 갔다. 저동항에 있는 곳인데 아침식사를 한다. 이전에도 강조했지만 어디서 아침을 먹을지도 참 중요한 일이다. 아침을 먹지 않고 움직이면 배고파서 금방 지친다. 역시 몸을 쓰는 일에는 제때 밥을 먹는 게 중요하다. 머리를 쓰는 일은 하루에 한두 끼만 먹어도 괜찮지만, 몸을 쓰는 일에는 하루 세 끼를 잘 챙겨 먹는 게 중요하다. 그냥 몸으로 느끼는 바이니, 체질에 따라 그렇지 않은 사람도 분명 있겠지.

 

아침을 먹으러 간 저동항에서. 저동의 저는 모시라는 뜻이다. 옛날 이곳에 모시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처럼 옷을 사 입을 수 없던 시절에 모시는 참 중요한 자원이었을 것이다. 저동이란 그만큼 중요한 곳이었다는 뜻을 품고 있다. 

 

 

아침을 먹고 나오니 항에는 새벽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어선에서 오징어를 내리느라 바쁘다. 한쪽에서는 서로의 눈치를 살피며 경매가 이루어지고, 한편에서는 부지런히 오징어를 나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쉴 틈 없이 오징어의 배를 가르는 칼질이 슥슥슥슥.... 참 부지런하기도 하시지.

 

부지런히 오징어 배를 가르고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  파란 상자 하나를 채우면 얼마라고 들었는데 까먹었다. 아무튼 저 파란 상자에 몇 마리가 들어가는데, 하루에 2천 마리 이상 배를 따는데 그러면 한 5만 원 정도 번다고 들은 것 같다. 잘 적어 놓을 걸 후회막심이다.

 

얼마나 칼질을 해야 이렇게 많은 오징어 눈이 나올지 짐작할 수 있는가? 참 어마어마한 광경이었는데 순식간에 뚝딱 지나갔다. 그나마 상품은 다 나가고 마무리 뒷정리를 하시는 분들만 남았다. 울릉도 마른 오징어의 명성은 이러한 어머니들이 지켜나가고 있다. 이 분들이 한 분 한 분 사라지시면 울릉도 오징어도 어디 공장에서 찍혀 나오듯 나올 것이다. 참, 뭍에 돌아다니는 울릉도 오징어는 믿지 못하겠으나 이곳에서는 믿고 샀다. 뭍에서 배로 들여오는 것보다 훨씬 이익이 남을 테니 속이는 일이 없을 것 아닌가? 요즘은 어디 관광지에 가면 다 똑같은 중국산을 가져다 파는 통에 무엇도 사기가 싫지만 이곳에서는 아니다.

 

 오징어 부산물을 먹으려고 갈매기들이 항구에 모였다. 이 사진은 그나마 한산한 곳을 찍은 것인데, 빽빽한 곳에는 히치콕의 '새'라는 영화가 무색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새 떼가 모여서 무서웠다.

 

 

 

저동항에서 마지막 추억을 쌓고 바로 안평전으로 향했다. 안평전은 한자로 安平이라고 쓴다. 편안하게 펀펀한 곳이라는 뜻이니 예부터 살기 좋았던 곳일까? 아무리 살기 좋았어도 지금만큼은 아니겠지. 요즘은 배도 자주 뜨고, 나물 농사지어서 거두면 거의 대부분 뭍으로 나가 돈도 만지니 참 살기 좋아졌을 것이다. 그렇지 않던 시절에 여기서 사는 일이란... 감옥이 따로 없지 않았을까? 솔직히 울릉도에 오기 전에 울릉도라 하면 떠오르는 인상은... 외로운 섬, 누구나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는 섬, 태어나 죽을 때까지 자기 자리를 지키며 사는 섬... 이란 생각이 강했다. 그런데 막상 들어와 보니,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 어디나 이제는 다 똑같구나. 교통과 통신의 혜택이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평전을 찾아가며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눈이 쌓여 있어 긴장했는데 다행히 얼지는 않아 올라갈 수 있었다. 여기마저 얼어 있었다면 나리분지에 가기를 포기했듯 여기도 그만 포기했을 것이다. 나리분지는 눈이 내려 끝내 가보지는 못해 아쉽긴 하지만, 갔더라도 뭐 특별한 건 없었을 듯해 쉽게 잊어버렸다. 거기는 관광지가 되지 않았는가? 우리나라에서 관광지가 되면 볼 만한 것이 사라진다. 이상한 법칙이지만 사실이니 어쩌랴. 그래서 난 관광지에는 왠만하면 잘 가지 않는다.

안평전에 오르니 어제 만난 김열수 선생님이 마중을 나오셨다. 겨울은 보시다시피 눈이 쌓여 농사지을 수 없고 3월부터 시작한단다.

 

김열수 선생님은 안평전에서 농사지으시고, 아내는 그걸고 도동항에서 음식점을 하신다. 부창부수. 그 집이 유명한 것은 재료의 일부가 이렇게 직접 농사지은 것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김열수 선생님은 이곳 안평전에서 5천 평의 농사를 지으신다. 주로 고급 산채를 위주로 농사지으시는데, 나물 농사를 지으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하신다. 결국 농민을 좀 먹는 건 농민 자신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나물 같은 경우 한 달 반을 일하면 쇠기 때문에 더 이상 거둘 것이 없단다. 그럼 정확히 그 시기를 지키면서 좋은 품질을 유지해야 하는데, 그걸 조금 더 욕심을 부려 쇠고 나서도 수확하면서 울릉도 나물의 명성이 떨어졌단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욕심 때문에 농민들이 스스로 무덤을 판 것이 아니겠냐는 말을 하신다.

참 어려운 문제다. 돈으로 뭐든 것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세상에서 돈을 생각하지 않기란 어렵지 않은가! 물론 돈은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된다. 그런데... 어느 만큼이 필요한 만큼인지 그 기준이 서로 다르니 어렵다. 백만원이? 아니면 천만원이? 참 어려운 문제다. 그 기준은 솔직한 자기 자신이 가장 정확히 알리라. 누구에게는 백만원이, 누구에게는 일억원이 필요한 만큼이겠지.

 

 김열수 선생님 집에서. 얼마나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으셨는지 모른다. 울릉도 꼭대기에 이런 집이 있으리라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더구나 고드름을 녹이는 따뜻한 햇살에 그동안 쌓인 피로가 스르르 녹는 듯하여 졸음이 밀려오는 창가였다.

 

 

 

안평전에서 내려오면서 중간 중간 자리하고 있는 집에 들렀다. 하지만 사람을 만나지 못해 아쉽게 그냥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냥 나오지는 않았지 사진은 남겼다. 멋진 소나무를 배경으로 안철환 선생님의 웃음을 남겼다.

 

 

또 한 집에서는 장독대 사진을 남겼다. 울릉도는 바람이 많은 곳. 방풍림 대신 슬레이트도 아니고 뭐더라... 이름을 까먹었다. 양철판을 대서 바람을 막으면서 햇볕이 드는 곳에 장독대를 만들었다. 돌을 깔지는 못했지만 스티로폼에 장판을 깔아 습기를 막았다. 이곳의 장맛은 어떨까?

 

 

이제 집에 돌아갈 시간이 거의 다 되었다.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울릉도에 사는 분들을 만나보고자 했다. 그렇게 뒤지고 뒤져 사동2리 변봉희(81) 할머니를 찾았다.

 

김치를 담으시다 우리의 방문을 받은 변봉희 할머니. 너무 환한 웃음과 넉넉한 인심으로 맞아주셔서 몸둘 바를 몰랐다. "아이고 육지 사람들이 별 걸 다 꺼내라고 하네" 라는 말씀으로 웃었지만, 어렵게 지나온 삶의 이야기에는 눈물이 핑 돌았다. 참말 이 땅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이야기꾼이고 광대가 아닐까?

 

 

이제 집에 갈 시간도 다 되었고 긴장이 느슨해진 것도 사실이다. 이런 순간까지도 우리를 독려하신 분이 안완식 박사님이다. 나는 참말 그런 것에 약하다. 긴장이 늦춰지면 한없이 늦춰진다. 한 번도 긴장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러다 꼭 필요한 순간에만 긴장한다. 특히 시험 때 같은. 뭐 덕분에 별 어려움 없이 인생을 산 듯하지만, 시험이 인생의 전부는 아니니 앞으로 살면서 어려운 순간이 닥쳤을 때는 어떨까? 그래도 아직은 잘 살았으니 앞으로 죽을 때까지도 그러기를 바랄 뿐이다.

 

변봉희 할머니는 사다 심는 걸 모르신단다. 개울 건너 비알빈 밭에 지금도 할아범이 나가서 일하고 있다는 데 젊었을 때부터 거기서 농사지으며 자식들 키우고 가르칠 것 다 시켰단다. 지금 집은 새로 짓느라 아직 빚이 남아 있지만 자식들한테 떠넘기지 않고 내가 살아 있을 때 다 갚고 가실 거라면서 든든한 모습을 보이신다. 물론 자식에게 기대고 싶은 맘이야 없지는 않으시겠지만, 그 떳떳한 모습에 얼마 전 돌아가신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는 건 왜일까? 갑자기 할머니가 보고 싶다...

 

변봉희 할머니 댁에서는 처음으로 냉동실에 씨를 보관하는 모습을 보았다. 꺼내 놓으면 오래 보관이 안 되더라며 자신의 노하우라고 냉동실에 보관하던 씨를 꺼내오셨다. 그걸 본 안완식 박사님은 정말 대단하시다며 다시 없는 칭찬을 하셨다. 역시 몇 번이 되지 않는 칭찬의 한 집. 할머니는 우습다며 뭐 이런 걸 찾냐며 웃으신다. 그 웃음이 할머니가 지금까지 건강하게 사시는 명약이 아니었을까 한다.

 

 

변봉희 할머니 댁에서 만난 꽃. 채송화 같은데, 난 채송화가 좋다. 잘 모르겠지만 되게 닮았는데 모르겠다. 이것도 토종이라고 하셔서 사진에 남겼다. 정말 예쁘지 않나!

 

 변봉희 할머니 댁의 상추. 선별이 되지 않아서 그렇지 이건 토종이 틀림없다는 안완식 박사님의 말씀을 듣고, 아 나도 농사를 지으면서 분류건 뭐건 그냥 받아서 심는 모습이 떠올랐다. 순수함이 아니라, 이 땅에 잘 적응한 잘 어울리는 것이야말로 토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이제 도동항으로 돌아와 배를 기다린다. 울릉도는 이렇게 안녕~. 외딴 섬일 것이라는 생각은 싹 사라졌다. 아니 배가 들어오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외딴 섬이 되겠지. 그럼 그때 이 섬에 사는 사람은 무엇을 먹고 살까? 예전에 어업항구가 되기 전에 울릉도에서는 보리와 밀을 주식으로 했단다. 군데군데 벼도 심고 말이다. 그러다 지금처럼 어업항이 되고 물고기, 특히 오징어가 유명해지면서는 농사는 점점 밀려났단다. 지금은 벼농사는 물론 보리며 밀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한마디로 자급할 수 있는 기반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외부와의 교통이 끊긴다면... 생각하기만 해도 끔찍하다. 섬이란 극단적인 상황이 그렇지만, 만약 이게 우리나라에서, 아니 세계에서 일어난다면... 그럴 일은 없겠지.

 

 도동항에서 기다리는 배를 타기 전에. 어찌나 바람이 심하던지 오는 날도 가는 날도 바람에 날렸다.

 

 

울릉도여 안녕~. 이제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다시 오기 전에 또 오겠다는 말은 빈말일 뿐이란 걸 안다. 난 그런 약속은 안 한다. 다시 찾으면 또 보는 것이고 아니면 그대로 좋은 추억으로 남길 뿐. 하지만 한마디 하자면... 울릉도는 언젠가 꼭 기회가 되면 또 오고 싶은 곳이다. 안녕 울릉도 잘 있어, 안녕 울릉도 또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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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천길로 갈 뻔하다

 

 

 

2008년 12월 7일 일요일. 어제 씨드림의 첫 모임이 있던 날이지만, 난 친구 결혼식에 가느라 함께하지 못했다. 아쉽지만 어쩌랴, 친구놈이 전화해서 꼭 가야 하냐고 물으니 말이다. 그 자식 결혼해서 6개월 동안 뉴욕에 간단다. 시기가 좋지 않아 걱정이지만, 갔다가 돌아오면 되는 일이니 어찌 되겠지.

 

일요일이라 거리는 한산하다. 거기에 대설주의보까지 내려 더욱 그렇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8시 30분 집 앞에 있는 식물원 앞에서 안완식 박사님의 차를 타고 강화도로 떠났다. 처음 눈발은 그리 세지 않았는데, 고속도로를 타러 갈수록, 그러니까 바다 쪽으로 갈수록 더 거세어졌다. 아니나 다를까 돌아오르는 길에서 옆으로 발랑 자빠진 차가 있지 않나, 고속도로에서는 여기저기에서 사고가 났다. 그렇게 본 것만 모두 4건. 그래서 차들도 거북이 걸음이다. 일찍 가면 갈수록 시간을 아끼는 일이건만, 그래도 목숨이 더 중요하지 않은가. 안전운전, 조심 또 조심 엉금엉금 강화도로 향했다.

 

집 앞에서 안완식 박사님을 만나기 전에 찍은 사진. 이때만 해도 괜찮았다.

 

 

오늘은 진정한 한 팀인 안완식 박사님, 한영미 위원장님, 나. 이렇게 셋이서 조사에 나서는 날이다. 강화로 갈수록 날은 개고 눈이 덜 와서 생각보다 늦지 않았다. 한영미 위원장님은 강화터미널에서 10시 조금 넘어 만나, 먼저 하점면으로 점심부터 먹으러 갔다.

 

11시 점심을 먹으며 일정을 잡고, 계획을 짰다. 그래서 오늘은 하점면을 돌기로 했다.

그런데 도무지 어찌된 일인지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그때 지난번의 기억이 떠올랐다. 또 모두 교회라도 가신 것인가? 이건 해도 해도 너무하다 심을 정도로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얼른 집으로 문자를 보내 강화도 장날이 며칠인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아뿔싸! 강화도는 2, 7장이 아닌가! 이거 저녁 무렵이 되기 전까지는 사람 구경하기는 틀렸다. 마음을 느긋하게 먹고 관광한다는 기분으로 다니자고 하신다.

 

그렇게 돌아다니다 멋진 집 한 채를 보았다. 한눈에 봐도 오래된 집인데 뭐가 있을까 대문을 빼꼼히 열고 들어가 사람을 찾았다. 마침 젊은 아주머니 한 분이 나오시는 게 아닌가. 어찌나 반가운지, 안아드리고 싶은 심정이다.

이곳은 하점면 부근리 513번지인데, 아저씨는 사업을 하셔서 농사는 그리 많이 짓지 않고, 노는 땅은 다 남에게 빌려주었다고 한다. 그래도 텃밭에 조금 심는다는 수세미오이와 메옥수수(흰색, 10줄) 몇 자루를 얻었다. 

 

 

 

 

하점면 부근리 류광희(44) 아주머니 댁. 정말 여기 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길 정도로 좋은 집이다. 

 

 옛날에 쓰던 농기구. 조 같은 곡식을 심고 이걸 굴려서 밟는다. 그렇게 밟는 것과 밟지 않는 씨가 따로 있다. 이 집에서는 아주머니가 농사는 잘 모른다고 하셔서 어떤 작물을 심을 때 쓰는지 자세히 묻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논 제초기. 당시 줄모를 내도록 권장하며 노동력을 줄이고자 이러한 기계를 들여왔다. 발로 밟는 탈곡기도 그 하나이다.

 

 

다시 한참을 헛탕만 쳤다. 그러다 간신히 하점면 상거리 54번지 소동말에 사시는 문순임(70) 할머니 댁을 찾았다. 집을 잘 고치셨는데, 생각하지도 않게 청서리를 얻었다. 새로 고친 집은, 안완식 박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새로 짓거나 고치면서 옛날 것을 싹 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 집도 그렇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청서리는 서리태처럼 밥밑콩으로 쓰는데, 까맣지 않고 푸르다. 물론 서리를 맞아야 거두고, 동글납작하고 눈이 까맣다.

 

안완식 박사님께서 바로 옆집에도 뭐가 있겠다며 거기에 가보라고 하신다. 인적이 없는 듯한 집에 가서 사람을 찾았다. 아무리 불러도 사람이 나오지 않아 돌아서서 가려는데 하우스에서 할머니 한 분이 나오신다. 상거리 52번지 사시는 윤인예(79) 할머니가 그분이다. 할머니는 마침 하우스에서 콩을 고르고 계셨다.

 

콩을 고르고 있던 윤인예 할머니.

 

 

텃밭에 배추를 엄청 심었는데 값이 나가지 않아 그대로 썩히고 계셨다. 1000통도 더 되는 것 같았는데... 언제나 농민이 제값 받고 농산물을 낼 수 있을까? 거간꾼을 끼면 편하기는 하지만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졌으니 문제다. 가장 좋은 건 자기가 농사지으며 모자란 걸 서로 거래하는 것일 텐데, 현실적으로 아직 어렵다. 그래도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시도가 있으니 점점 좋아지지 않을까 희망한다. 꿈과 희망은 사람을 일어서게 한다. 절망적인 사고의 현장에서도 꿈과 희망이 있는 사람은 끝까지 살아남아 구조되는 것처럼 말이다.

 

 

윤인혜 할머니 댁의 이팥.

 

 

계속 헛탕만 치다가 그래도 할머니 댁에서 많은 걸 얻었다. 천식환자가 약으로 쓰면 좋다는 이팥. 이건 창원에서 15년 전에 구해오셨단다. 밥에 앉혀 먹거나, 삶아 걸러서 물을 약으로 마신단다. 나물태는 물론 오라됐단다. 나물이 잘 되는데, 이거보다 알이 잘면 줄기도 가늘어 별로라고 하신다. 눈이 갈색이다. 또 울타리콩은 연보라에 보라색 줄무늬가 인상적이다. 강낭콩은 5~6년밖에 안 되었다고 하시는데, 옛날 것보다 맛있단다. 땅콩은 20년 전 보름도에서 아들이 가져온 걸 계속 심으신단다.

 

 나물태

 

 강낭콩

 

 

연세도 많으신데 혼자 사시면서 농사도 엄청 많이 지으신다. 집 옆으로 오줌을 누러 돌아가니 닭 한 마리가 눈에 들어온다. 좁은 동굴처럼 닭장을 만들어 놓으셨는데 닭이 참 예뻐 이것도 토종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하신다. 양계장 같은 곳은 생산성과 효율을 따져야 하니 이런 닭은 키우지 못하겠지. 결국 대규모, 대량 생산보다 소규모, 소량 생산에 희망이 있고, 그래야 토종이며 전통농업이 살아 남지 않을까 한다. 그럴려면 사회 체제가 바꿔야 하니 큰 진통이 있겠지. 하지만 위기가 닥쳐서 바꾸려고 하면 진통이 크겠지만, 미리미리 대비해 조금씩 바꿔 나가면 덜하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는 지도층 인사가 있을지 모르겠다. 핸드폰하고 자동차, 컴퓨터 같은 걸 팔아서 먹고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한테... 선진국이란 나라들은 벌써 석유 시대 이후를 준비하고 있는데, 왜 그리 뒷꽁무니만 좇아가려고들 하는지 모르겠다.

 

할머니께는 이번에 맞춰서 가지고 온 수건을 2장 드렸다. 사람이 그리웠던 것도 있고, 이렇게 많이 얻었으니 감사의 뜻을 표해야 하지 않겠나 해서이다. 수건이라도 드리니 참 마음이 한결 가뿐하다. 이제 좀 떳떳하네.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이 있는 것이 인지상정. 공짜로 받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다음은 상거리 천촌마을이란 곳으로 갔다. 뭐 역시나 사람을 만나기 어려웠다. 간신히 만난 분은 의심이 많으신지 여간해서는 알려주지 않으신다. 씨앗 몇 가지를 얻었으나 이름도 주소도 알 수 없었다. 그저 파란콩, 동부, 덩굴콩만 적고 나왔다.

 

다음은 상거리 764번지의 최희숙(45) 아주머니 댁을 찾았다. 조금 몸이 좋지 않은 분이셨다. 집이 너무 낡아 더 마음이 짠했다. 15년 이상 심은 메수수가 있다고 하기에 얻었는데 잘 모르겠다. 다니면서 보니 찰수수에 입맛을 빼앗겨 이제 거의 아무도 메수수는 심지 않던데 이 집에는 어찌된 연유로 남아 있는지 모르겠다.

이 집을 나와 들어간 샘골 752번지의 정순덕(76) 할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그 집 사람 보고도 믿냐고 뭐라고 하신다. 좀 거시기해서 업수이 여김을 당하나 보다. 뭐 그런 것이 인지상정이니 어쩌랴. 요즘 취직하려고 취업성형도 한다는데, 다 그 때문일 것이다. 첫인상이 좋으면 반은 넘게 먹고 들어가는 것 같다.

정순덕 할머니는 집에서 친구 분과 수다를 떨고 계셨나 보다. 건너방에서 할아버지는 축구를 보고 계시고, 다른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오셨다. 할머니께 사정을 설명하고 찰옥수수와 둥근호박을 얻었다.

 

정순덕 할머니의 장독대. 가지런하고 깔끔하게 정렬해 있는 장독에서 할머니의 살림솜씨를 엿보았다. 

 

 

15시쯤, 안완식 박사님 댁에서 긴급호출이 왔다. 날씨가 추워 하우스의 수도관이 얼어 터졌다고 하신다. 차를 세워 놓고 한참을 전화 통화하시며 일처리를 하고 계셨다. 그 사이 난 잠깐 나왔다. 밖은 시커멓고, 눈발은 눈보라치듯 날리고, 천둥까지 우르릉 쾅, 난리가 아니다.

잠시 차를 세워 놓은 집에서 웬 차가 서 있나 아주머니께서 나와 보셨다. 얼른 달려가 이런 사람들임을 밝히고 종자가 있는지 물었다. 논농사를 크게 지어서 별 게 없으시단다. 그래도 콩이라도 있으면 보여달라고 졸라 광까지 들어갔다. 집을 1층은 주차장에 2층 건물로 잘 올려 집이 참 좋다고 하니, 집을 잘 지었어도 농민이라며 별볼일 없다고 하신다. 토종 씨앗은 진짜 별로 없었다. 메주콩이 조금 특이해 이걸 하나 수집했다.

 

15시 30분. 일단 조사를 완료했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더 이상 조사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대신 1차 조사 때 숙제로 남겨 놓은 망월3리를 마지막으로 찾아갔다. 눈길을 조심조심 달려 망월리 노인정에 도착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봉현 할아버지는 이곳에 계시지 않았다. 그래서 집이 어딘지 여쭈고 그곳으로 찾아갔다. 하지만 집에도 계시지 않았다. 어디 자제분들 집에 놀러 가셨나 보다.

 

유봉현 할아버지 댁이 있는 망월3리. 그러나 끝내 할아버지를 만나지는 못했다. 눈이 어찌나 오든지...

 

 

지도로 확인한 길을 따라 숙소를 잡으러 이동했다. 내가면사무소를 지나 고개를 넘으면 바로 바닷가라 그런지 그곳에 숙소들이 밀집한 곳이었다. 엉금엉금 기듯이 고개 입구에 도착하니 차량을 통제하고 있었다. 체인이 없는 차, 체인이 있어도 위험하다고 넘을 생각을 하지 말란다. 할 수 없이 고갯길이 아니라 들어온 길로 되돌아나가 평지를 빙 둘러서 가는 수밖에 없다. 

차를 돌리고, 네비게이션을 조정했다. 쭉 길을 따라 달리는데, 16시 48분 갑자기 네비게이션이 외친다.

"200m 전방에서 황천길 방면으로 좌회전입니다."

뭐야, 죽으라는 건가? 이 네비게이션이 눈이 오니 미쳤나? 지도를 펴서 확인하니 우리가 지나야 하는 곳이 황청리란다. 차 안에서 한참을 웃었다. 황천길이 어딘지 한 번 가보자.

 

안완식 박사님의 빼어난 운전 솜씨 덕에 무사히 한도모텔이란 곳에 도착해 짐을 풀고,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배불리 저녁을 먹고 내일은 날씨가 좋기를, 길은 얼지 않기를 바라며 잠자리에 들었다.

 

 황청길로 달려가던 차 안에서. 밤이 되면서 조금씩 잦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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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 오리무중

 

 

 

 2008년 12월 10일. 강화도 조사의 마지막날. 어제 잠을 잔 모텔에서 나와 아침은 선착장 옆 식당에서 해결했다. 비린내에 예민한 나에게 그 집의 주 요리인 회가 물잔에 남아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왜 횟집의 물에서는 비릿한 맛이 날까?

아침을 먹고 나왔는데도 밖은 여전히 안개가 자욱하다. 이렇게 안개가 하루 종일 가지는 않겠지. 차에 올라 내가면 외포리부터 조사를 시작했다.

 

전원주택인 듯한 집과 원래 마을 주민의 집이 섞여 있는 동네로 들어섰다. 그 가운데 가장 그럴싸한 집, 내가면 외포리 442번지의 강동월(73) 할머니 댁에 들어갔다. 9시도 되지 않은 너무 아침 이른 시간이라 좀 죄송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강동월 할머니. 아침부터 뭐하냐고 잔소리하셧다. 죄송합니다.

 

 

찾아온 목적을 말씀드리고 좀 도와달라고 하니, 그대로 본인이 가지신 걸 이것저것 내보여주신다. 두 가지 종류의 들깨가 있었는데, 하나는 올들깨이고, 다른 하나는 늦들깨이다. 올들깨는 물론 한 보름이 이르고, 벼깔 하기 전인 추석 무렵에 거둔다. 다른 하나인 늦들깨는 회백색이고, 기름이 더 많이 난다고 한다. 올들깨는 시간이 없을 때 후딱 해치우는 데 특징이 있고, 늦들깨는 충분히 키워 더 통통하다는 데 특징이 있겠다. 다음으로는 흰찰옥수수와 감자 심을 때 심는다는 강낭콩, 메물(메밀)을 얻었다.

 

 강동월 할머니의 씨앗 보관 장소는, 안마당에 있는 버린 씽크대였다. 이것저것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이미 수집한 것과 겹치는 것도 있어 이 정도만 얻었다.

 

 

강동월 할머니께 참 여러 가지를 심으신다고 하니, 이 정도도 이제 이것 저것 심기 귀찮아서 줄인 거라고 하신다. 그럼 예전에는 얼마나 다양하게 심으셨다는 소릴까? 웬만한 것은 다 집에서 해결하셨나 보다. 손이 엄청 야무지신 느낌의 할머니, 언제 그 살아오신 이야기 좀 듣고 싶다. 오늘은 시간이 없어 그냥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강동월 할머니 댁 메주. 허연 곰팡이가 가득한 것이 아주 잘 떴다. 이거 하나만 봐도 할머니의 야무진 손맛을 느낄 수 있다.

 

 

안개가 너무 자욱하여 잠깐 안개가 걷히길 기다릴 겸, 동네 앞에서 안개가 잔뜩 낀 논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난 내 사진기로는 한계가 있어 안완식 박사님께서 찍으시는 모습을 열심히 머리에 찍었다. 인간의 기억은 왜 이리 불완전할까? 세포의 죽음과 함께 내가 가진 기억도 날아간다. 한 세포가 죽으며 새로운 세포에게 서로 전달해주지는 못하나? 인수인계는 참 어려운 일이다. 공자 님도 인수인계를 잘하는 걸 어진 일의 하나라고 말씀하셨으니 말이다.

 

안개는 걷힐 생각을 안 한다. 그냥 이대로 강행이다. 차를 달리다 오래된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지도에는 다락말이라고 한다. 다락논, 다랭이논 하듯이 주변보다 좀 높은 곳에 안으로 쑥 들어간 마을이다. 이런 곳에는 뭔가 있겠다 싶었다. 마을로 차를 돌려 들어가는데 경로당 앞에 웬 버스 한 대가 서 있다. 방송에서는 시끄럽게 빨리들 모이라고 난리다. 뭐지? 느낌이 별로다. 한 집을 찾아 들어가 곶감을 얻어 먹으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니 할머니들이 단체로 놀러 가는 날이란다. 에이, 날을 잘못 잡았다. 이 마을에서는 뭐 나올 게 하나도 없겠다 싶어 그 길로 차에 올라 다음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몇 군데를 더 들렀지만 아무 성과가 없다가, 외포리 389번지의 구정태(76) 할머니 댁을 찾았다. 집 앞에 콩을 턴 콩대가 쌓여 있어 무언가 있겠다 싶어 찾아 들어갔다. 전형적인 강화도의 ㅁ자 집인 이곳에서 들깨와 검은콩에 섞여서 오라(오래) 받기 시작했다는 나물콩, 연두색에 눈이 갈색이 나물대콩, 더덕, 도라지 씨앗을 얻었다. 얻긴 얻었지만 뭔가 흥이 덜하다. 안개도 잔뜩 낀데다가 뭔가 오늘은 일진이 영 아니다.

 

 구정태 할머니. 몸이 불편해지시는 듯한 모습이어서 걱정이다. 할머니 건강하세요.

 

 

내가면 외포리를 벗어나 양도면 인산리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인산리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몇 집을 들렀지만 요즘 그런 게 어딨냐는 반응이다. 큰 길이 뚫려서 그런가 진짜 없다. 교통의 발달이 그다지 좋은 것만도 아니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큰 길 옆에 있는 집치고 토종이 있는 집을 거의 보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다음 행선지인 양도면 건평리로 방향을 잡고 달렸다. 이곳도 논이 넓은데 어떨지 모르겠다. 건평리에 도착해 가장 구석에 있는 한 집을 찾아 들어갔다. 건평리 560번지 김인순(66) 할머니 댁이다.

 

 큰박을 부수어 씨를 받고 할머니께 수건을 전달하는 모습.

한가로운 오전 시간을 보내다 나오시는 모습이다. 이 때쯤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졸음이 오는 시간이기는 하다. 할머니는 돼지를 여러 마리 키우고 계셨다. 다른 일로 바쁘실 만큼 크게 기대는 하지 않고 우리가 찾아온 목적이며를 말씀드렸다. 그리고 넝쿨강낭콩과 큰박을 얻었다.

 

 큰박과 그걸 부순 낫.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강아지가 내다본다. 뭐든지 새끼 때는 왜 이리 귀여울까? 전에 EBS에서 왜 동물의 새끼들이 귀여운지 방송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귀엽다는 건 보는이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공통의 특징이 있다고 한다. 1. 몸통보다 훨씬 큰 머리, 2. 머리보다 훨씬 큰 눈, 3. 짧은 사지와 두루뭉술한 몸매, 4. 서툰 몸짓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보면 귀엽다고 느끼고 보호하고 돌봐주고 싶은 욕망이 든단다. 그것은 바로 새끼들이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없기에 귀여운 외모를 선택해 부모의 양육본능을 자극하여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이다. 하긴 아이들이 하는 행동이 얼마나 영악한지는 부모가 아니면 다 안다. 부모는 자기 자식이 예뻐서 잘 모르기도 하지만, 옆에서 보면 '야, 저 놈 참 약았다'는 걸 대번에 알 수 있다.

 

 김인순 할머니 댁 강아지. 마침 개가 새끼를 낳았다.

 

김인순 할머니 댁을 나와 바로 옆집으로 갔다. 안완식 박사님이 지금 사시는 곳이 택지 개발지역으로 묶이면서 앞으로 언젠가 이사를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신다. 그런데 옆집이 그럴 듯하게 집을 짓고 사는 걸 보고 참고할 만한 것이 있는지 잠깐 구경하자고 하셔서 찾았다. 찾아온 이유를 말씀드리니 선뜻 집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신다. 이 집은 인천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는 아들이 지었다고 한다. 집 안 한켠에 아들이 학교 다닐 때 받은 상패 같은 것을 늘어놓은 걸로 봐서 무척 자랑스러워하시나 보다.

시어머니이신 김영례(82) 할머니께서는 호박의 속을 파고 계셨다. 옆에 앉아 호박을 반으로 갈라 드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었다. 혹시 이 마을에는 일본놈들이 들어오지 않았나요? 아유 말도 말라고. 산에 쇳물 들이붓고, 공출로 싹 가져가서 먹을거리도 없었단다. 여기까지도 들어와서 활개를 쳤다고 하신다. 아주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계신 듯하다. 전에 나의 할머니께 물었을 때는, 어린 시절이었는데 일본인 아이랑 놀이도 같이 많이 했다고 한다. 경북 풍기 분이신데, 이렇게 지역마다 차이가 있나 보다. 어떤 사람이 들어왔느냐에 따라 그 기억도 다를 것이다.

 

 호박 속을 파내고 있는 김영례 할머니. 시골 사시며 생활도 여유가 있고 계속 일을 하셔서 그런지 건강하시다. 아무래도 여유가 없으면 대번에 모습에서 표가 난다. 여유는 어떻게 구하는 걸까?

 

 

집구경을 하러 왔지만 본분을 잊을 수 없다. 이 집의 안주인이신 전애님(60) 아주머니에게 토종이 있냐고 물었다. 이제 많지 않지만 예전부터 심는 걸로는 완두가 있다고 한다. 깔끔하게 보관해 놓은 완두를 좀 얻고, 호박도 이전에 보던 것과 좀 다른 듯해 얻었다.

 

이제 건평리를 벗어나 삼흥리로 향했다. 네비게이션에는 나오지 않는 야트막한 언덕길을 넘으니 바로 집들이 보인다. 가장 처음 나오는 집에 차를 세우고 무작정 들어갔다. 이곳은 삼흥리 1327번지 배은순(67) 할머니 댁이다. 농산물을 꾸려서 어디 나가시려던 중이라 정신 없이 바쁘시다. 그래도 똥파리처럼 계속 들러붙으며 토종을 물었다. 상대가 어떻게 나와도 끈질기게 들러붙는 게 중요하다. 아예 말이 통하지 않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별 좋은 답은 없었고, 대신 벽에 씨로 쓰려고 받아 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내력을 묻고 두 가지를 얻었다. 바로 차조와 메옥수수이다.

 

 배은순 할머니가 매달아 놓은 조와 옥수수. 얼른 주변 상황을 파악해 그걸 가지고 묻는 것도 수집할 때 좋은 방법이다. 대부분 토종에는 별 관심이 없으셔서 뭐가 토종인지도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짐을 꾸리느라 바쁘신 할머니를 뒤로 하고 옆집으로 건너갔다. 옆집은 깔끔하니 뭐가 나올 듯하다. 이곳은삼흥리 1325번지 남궁태종(69) 할아버지 댁이다. 할머니는 마침 집을 비우셨는데, 할아버지가 그렇게 깔끔하실 수 없었다. 손재주도 좋으셔서 여기저기 할아버지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어 보였다.

 

 남궁태종 할아버지 댁의 씨앗 보관 장소. 할머니가 계시지 않아 그 내력을 알 수 없었지만, 그냥 지나치기 어려워 안완식 박사님께서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것만 골라서 수집하였다. 할머니가 계셨으면 더 많은 것이 나올 법한 집이다.

 

 

할머니의 공백을 메울 수는 없었지만, 안완식 박사님의 경험과 노하우가 빛을 발해 그 공백을 어느 정도 메웠다. 남자가 씨앗은 알지 못한다는 할아버지에게 양해를 얻어 할머니의 씨앗 보관 장소를 찾아 뒤적였다. 그렇게 네모깨와 육모깨를 얻고, 앞마당에 있는 창고에서 댑싸리를 찾아 씨를 받고, 옥수수도 얻었다. 어느 집이든 안완식 박사님께 한 번 걸리면 뭐 하나라도 내놓게 마련이다. 참 대단하시다.

 

 남궁태종 할아버지가 손수 만든 달걀꾸러미. 이것 말고도 요즘 보기 어려운 옛 물건을 손수 만들어 놓으셨다. 기술이 필요한 사람은 여기에 가서 묻고 배우는 것도 좋겠다.

 

 

한창 이야기하고 있는데 옆집 할머니께서 물건을 옮겨야 하니 얼른 차 좀 빼라고 성화이시다. 잠시 꾸물거리는 사이 어느 새 짐을 다 옮기시고 사라지셨다. 엄청 억척스러우시다.

남궁태종 할아버지 댁의 앞마당에는 닭장이 있는데, 모두 토종닭이라고 자랑하신다. 모두들 닭장에 있지만 암탉 한 마리와 그 병아리들은 마당을 한가로이 노닐고 있어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참 잘 생겼다. 깨끗하고 잘 생긴 것이 이런 닭은 또 처음 봤다. 토종닭이 필요한 분이 있으면 여기서 몇 마리 얻어 가면 좋겠다.

 

남궁태종 할아버지의 귀염둥이 토종닭. 다시 봐도 잘 생겼다.

 

 

다시 차에 올랐다. 양도면사무소를 지나 길상면으로 가는 길을 따라 달렸다. 양도면사무소 인근으로는 아무것도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딱 하나 진틀이란 마을에 들어갔다가 동네에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는 피마자 하나를 수집했다. 그거 말고는 정말 없었다.

조산리까지 지나 도장리 대흥마을이란 곳의 한 집을 찾아 들어갔다. 도장리 82번지 이을님(84) 할머니 댁이다. 몇 달 전 안타깝게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병원에 입원해 고생하다 가신 때문인지 그래도 담담하게 말씀하신다. 그래도 적어도 60년을 함께 사셨을 텐데 그 허전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좋던 싫던 내 영감이었을 게다. 그런 말을 들어서 그런지 할머니가 쓸쓸해 보인다. 사람이 찾아오니 반가움에 눈물이 글썽이시는 것도 같다. 그런 마음에 할머니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좀 나누었다. 토종 이야기를 하니 자신의 아버지도 농업과 관련한 일을 하셨단다. 순간 눈이 번쩍 하며 혹시 성함은 무엇이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아시냐고 여쭈었다. 혹시 모르지 다카하시가 왔을 때 만난 사이일 수도 있다. 그분의 성함은 이동팔이고 농사시험장 직원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집에 와서 자료를 확인해 보니 아쉽게도 그런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다시 본분으로 돌아가 할머니 댁의 토종을 찾았다. 할아버지 병구완으로 농사를 거의 못 짓다시피 했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그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를 얻었다. 할아버지까지 건강하게 함께 계셨다면 두 분이 부지런히 농사지으시며 잘 사셨을 텐데, 새삼 할아버지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다. 할머니에게 쇠똥동부, 빨간동부, 메밀, 댑싸리를 얻었다.

 

댑싸리를 두드려 받은 씨를 키질로 깔끔하게 골라주시는 모습. 홀로 남은 인생을 잘 사시길 바랍니다.  

 

 

양도면 도장리에서 논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바로 화도면 문산리로 넘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개는 더욱 짙어만 간다. 멀리는 보이지 않고 몇 십 미터 주변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문산리의 덕달마을이라는 곳을 찾았다. 어느 정도 농사를 지을 법한 집을 찾아갔으나 아무도 없어서 그냥 나오고, 그 윗집을 찾아 들어갔다. 아무리 소리치고 두드려도 사람이 없는지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그냥 나갈까 하다가 기웃거리니 씨앗 보관 장소가 눈에 띈다. 안완식 박사님이 이것저것 살펴보시더니 이 집 주인을 꼭 찾아서 만나봤으면 하신다. 강화도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디에 가서 어떻게 찾을지 막막하기만 한 상황. 이장님 댁에 가서 방송이라도 할까? 일단 그냥 수집봉투에 조금 담았다. 씨 도둑질이 아니라 연구를 위한다는 말을 하면서. 그러고 집을 나오는데 아래에서 사람이 한 명 올라온다. 아, 집 주인이신 이혜숙(72) 할머니였다.

집이 참 깔끔하고 예쁘다고 말을 건네며 우리가 찾아온 목적을 말씀드렸다. 할머니는 이곳에 온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고 하신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얼마 전 쓰러지면서 손주들을 돌보며 살고 계신다는데, 생활이 그리 녹록치 않다며 걱정이시다. 그러면서 씨앗의 내력을 말씀해 주셨다. 그렇게 얻은 것이 개골팥과 쥐눈이콩이다. 강화도 사람들이 보통 개골팥이라고 부르는 것은 재팥이고, 진짜 개골팥은 이 집에서 얻은 것이 개골팥이라는 안완식 박사님의 설명. 확연하게 다르게 생겼다. 재팥과 개골팥, 두 가지는 내 머릿속에 확실히 들어왔다.

 

 잘 가라며 환히 웃으시는 이혜숙 할머니. 뭔가 세련되고 기품이 엿보이시는데 인생의 굴곡은 왜 그리 구비구비이신지. 그런 속에서도 저렇게 웃으실 줄 아니 할머니는 괜찮으실 거다.

 

 

덕달을 나와 길을 건너 바로 건너마을로 들어갔다. 이곳은 양지촌. 안개가 자욱해 사람들도 마음을 닫아 걸었다. 어둠만 사람을 그리 만드는 것이 아니구나. 햇님의 큰 존재감, 해가 없으면 어떻게 살까? 우리가 누리는 이 모든 것이 해에서 온 것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마실 나오신 양지촌 덕포리 1954번지의 서상례 할머니를 만나 집까지 함께 가 강낭콩을 얻었다. 그리고 다시 차를 타고 가다 화도면 상방리 308번지의 노순덕(80) 할머니 댁에서 유월두를 얻었다. 할머니가 사시는 곳은 동촌이란 곳인데, 여기는 이제 축사밖에 없다. 그나마 할머니께서 마지막으로 이 마을을 지키고 계셨다.

다시 차를 타고 이동. 하지만 안개 때문에 뭐 보이는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고, 첩첩산중에 오리무중이다. 한 버려진 집인지 주인이 비운 집인지의 텃밭에서 아욱을 채집하고, 조금 더 가다가 식당에 들러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음식을 나르는 사람이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사람이다. 처음에 보고 깜짝 놀랐다. 도대체 우리나라에 이렇게 살고 있는 외국인이 얼마나 되는 건지 모르겠다. 이제 우리나라도 국제 사회의 일원이라는 걸 도시보다 시골에 와서 더 실감한다. 내가 사는 안산은 인구 70만 가운데 4만이 외국인이라고 한다. 공식적으로 4만이니 그보다 더 많을 것이다. 아무튼 시골은 인구가 적어서 그런지 외국인 한 명만 있어도 엄청 많아 보인다. 이번에 강화도를 조사하면서 외국인을 솔찮이 많이 만났다. 물론 대부분 국제결혼을 한 여성들이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일단 한국인이겠지만, 어머니가 외국인인 데에서 오는 거리감이나 따돌림 등이 있을 테고,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하다. 과연 시골은, 농촌은 이대로 사라질 것인가? 우리가 버린 농촌을 이제는 외국인이 들어와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그들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우리가 버린 3D 업종의 일을 외국인이 대신해 주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다시 농촌으로 되돌아갈 날이 올까? 지금으로서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 같지만, 사람의 일을 알 수 없는 법 난 그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한다. 그때를 미리미리 준비해야지.

 

밥을 먹고 다시 차에 올라 서쪽으로 향했다. 고갯길을 넘어가다 무당집을 발견했다. 무당도 마을에서 쫓겨난 지 오래되었다. 점이나 굿이 과학적인지 아닌지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그걸 과학적이냐 아니냐를 따지기보다는 사람에게 어떤 걸 해주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접근해야 한다. 시대가 불안해질수록 무당과 점집이 호황을 누리는 건 왜일까? 앞날을 알 수 없다는 불안감에서 인간을 구원해주는 것이 종교나 무당과 점집이 아닐까 한다. 제대로 이론적인 틀을 갖춘 종교보다는 못해도, 무당과 점집이 상업주의에만 휩쓸리지 않는다면 더 가까이에서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줄 수 있다. 그런 것을 미신이라고 쫓아내기만 했으니, 그런 대접을 받은 아이가 맘이 비뚤어지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지금이라도 제대로 자식 대접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데, 편협한 이상한 기독교가 득세를 하고 있는 우리의 실정이니 그건 언제가 될지 어려워 보인다.

 

우리 역사에서 무당만큼 사라들 가까이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대소사를 같이 한 종교가 있을까? 지금은 미아리나 어디 후미진 곳 구석구석에 숨어 있지만,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야 할 날이 오기를 바란다. 우리의 농업처럼 말이다.

 

 

이 고갯길을 넘어 주회명(60), 한경숙(59) 내외의 농막을 찾았다. 은퇴한 뒤에는 이곳으로 들어와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으려고 생각하고 계신다는데, 강원도에서 얻어왔다는 주먹찰옥수수 몇 개를 얻었다. 언덕에서 내려가 들어간 동산촌이라는 마을의 조경숙(71) 할머니 댁에서는 흰콩을 얻었다.

이후의 여정에는 안개가 더 바싹 우리 곁에 들러붙었다. 이제는 몇 십 미터도 아니라 몇 미터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화도면 내리부터 시작해 장화리, 여차리, 흥왕리, 동막리, 사기리를 지나 길상면 선두리까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더군다나 화도면의 바닷가 쪽에는 주로 관광지만 흥하고 있어 더 그랬다. 틈틈이 내려서 확인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도무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멀리서나마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없으니, 그대로 지나친 집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정말 보이는 건 차 앞의 몇 미터뿐. 옆으로 무엇이 있는지는 볼 수 없었다.

 

이로써 2차, 열흘에 걸친 강화도 조사를 모두 끝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 이틀 쉬고 다시 울릉도로 출발이다. 머리털 나고 배를 타는 건 물론이거니와 울릉도라는 곳은 처음이다. 그만큼 기대가 되고 설레인다. 자, 어서 집으로 돌아가 그리운 얼굴들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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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서로 낭궈 심어요

 

 

 

 

 

2008년 12월 8일 월요일.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창밖부터 확인했다. 설마 어제 온 눈이 얼었을까? 다행히 기온이 영상으로 올라가 눈이 녹고 있었다. 하늘이 돕는 것이다. 8시에 만나 아침을 먹고 9시부터 조사에 나섰다.

 

오늘은 어제 잠을 잔 곳인 내가면 황청리부터 시작한다. 내가면이란 이름이 참 독특하다. 한자로는 內可인데, 음을 빌려다 쓴 것 같다. 지도에 내가면 황청리 샘말이라 표기된 곳으로 차를 몰았다. 

다니고 다녀도 토종을 만나지 못했다. 아침부터 헛탕치는 일이 많은 것이, 땅도 질척거리고 좋지 않다. 이럴 때일수록 한 번 월척이 걸리는 법이다. 그렇게 헤매다가 황청2리 671번지에 사시는 박수자(68) 할머니 댁에 들어갔다. 할머니에게 시할머니 때부터 심었다는 50X20cm의 긴호박을 얻었다. 할머니의 말에 따르면, 풋호박일 때도 맛있고, 잘라 먹기도 좋으며, 속이 노랗다고 한다. 이거 말고 동그란 호박도 있는데 그건 금창 쇤다. 씨가 그렇게 많이 들지도 않는다. 또 모내고 나서 심궈 가을에 벼 수확할 때 거둔다는 작고 동그란 적팥을 얻었다.

 

박수자 할머니. 집도 오래되고, 옛 물건도 많았지만 이제 몸이 아파 농사도 잘 못 짓는다며 씨도 별로 없다고 하신다.

 

 

다음은 황청1리 양지말의 유난심(60) 아주머니 댁에 들어갔다. 날은 따뜻하지만 안개비가 슬쩍 내린다. 아주머니 댁의 안마당은 지방에 잇대어 막아 놓아서 비를 피하기 좋았다.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강화도 사투리에 많이 묻혔지만 얼핏 전라도 말을 쓰신다. 그래서 어디서 시집오셨는지 물으니 역시나 전라도에서 오셨단다. 성격이 아주 화끈하셔서 기분 좋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밝고 떠들썩한 성격이 어디서나 사랑받는 건 당연하겠다.

 

 긴박을 설명하시는 유난심 할머니.

 

 

몇 년 전 동남아시아에 놀러 갔다가 가지고 오셨다는 긴박을 하나 얻었다. 이건 늦게 심어야 하는데, 일찍 심으면 잎만 무성하고 안 좋단다. 씨가 안 생겼을 때는 따서 말렸다가 나물로도 볶아 먹는다. 또 소고기나 조개살 같은 걸 넣고 조선간장으로 간을 해, 마늘 양파 치고 국을 끓이면 아주 맛있단다. 향이 기가 막힌데, 처음 먹는 사람들은 싫어한다고 귀뜸하신다.

앞마당에는 조그맣게 화단을 꾸미셨다. 거기에서 닥풀의 씨앗을 채집했다. 이걸 보리차 마냥 볶아서 차로 마시고, 콩처럼 밥에도 앉혀 먹는단다. 전라도 분이라 그런가? 강화도 사람들이 잘 먹지 않는 걸 먹을거리로 만들어 드신다. 안마당 대문 쪽에 화로에는 군고구마가 맛있게 익고 있다. 이거 먹을 사람도 없으니 먹고 싶은 만큼 먹으라고 하신다. 난 배가 불러 사양했지만, 안완식 박사님과 한영미 위원장님은 엄청 맛있게 드신다. 배만 안 부르면 먹겠구만, 아깝다.

 

 동남아시아에서 물 건너온 박. 이렇게 몰래 몰래 가져다 심어도 되는구나. 현대판 문익점이 얼마나 많을까?

 

이 할머니 댁에서 조그만 낫을 보았다. 오래 써서 날이 닳고 달아 지금은 조막만하다. 날의 길이가 15cm밖에 안 되고, 자루는 30cm이다. 근검절약의 표상이랄까, 부지런함의 표상이랄까. 이런 농기구를 보면 가슴이 짠하다. 그리고 내가 잘 보는 건 손이다. 서울 같은 도시에서 보는 젊은 아가씨의 하얗고 실핏줄이 내비치는 가느다란 손에서는 관능미를 느끼지만, 농부의 거칠고 투박하며 갈라지고 터진 손에서는 노동의 숭고미를 느낀다. 내 호미는 몇 년째 쓰건만 아직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다. 뭐 워낙 일이 적고, 쓰는 일이 별로 없다보니 그렇겠지. 

 

 

 

 

다음은 그 옆집으로 건너갔다. 황청리 371번지의 김옥순(77) 할머니 댁이다. 연세보다 훨씬 젊어 보이시고, 엄청 고우신 할머니다. 왜 그럴까 생각하니 마음씨가 고우셔서 그런가 보다. 그렇게 남한테 뭘 나눠주길 좋아하신다. 성당에도 열심히 다니신다는데 정말 믿음이 깊으신 어른이다. 종교의 힘이 제대로 발현되었을 때 사람이 어떻게 사는지를 몸으로 보여주시는 할머니이시다. 우리나라에는 그렇게 교회 십자가가 많지만, 예수님의 정신을 제대로 실천하며 사는 교인은 그렇게 많지 않다. 겉모습에만 치중하지 말고 이제는 속마음도 잘 다스려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했으면 좋겠다.

할머니의 집은 완전히 보물창고였다. 우연히 방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전화기는 70~80년대에나 쓰던 녹색 다이얼 전화기이고, 시계는 태엽을 감아 밥을 주는 부랄시계, 여기저기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것들 투성이다. 씨앗보다 이 집의 물건들이 더 탐이 나는 건 왜일까? 씨앗도 이것저것 계속 나온다. 그 바람에 몇 번을 나가려다 돌아서고 했는지 모른다. 얼마나 꼼꼼하고 깔끔하게 정리를 잘해 놓으셨는지 모른다.

 

 

 

그렇게 얻은 씨앗은 이렇다. 먼저 빨간팥, 작은 알이고, 맛이 좋아 아는 사람은 계속 찾는다. 아이 적부터 그냥 그 팥으로 계속 심으신단다. 이 이야기를 하며 할머니의 아버님이 예전 교동군수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집안도 좋으시네. 그럼 할머니의 기품은 그런 데에서 오는 여유로움일까? 다음은 맛있어서 사위만 준다는 사위동부, 대가리가 붉으스름하고 아래는 하얀 순무. 이건 할머니가 일부러 씨를 하얀 것만 받았단다. 농민이 훌륭한 육종가라는 안완식 박사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신 할머니다. 하얀 것만 받은 건 그게 더 맛있고 단단해서 그렇단다. 그러면서 이것도 좀 섞였을 거라고, 왜 그런고 하니 나비가 왔다 갔다 하면서 그랬을 거라고 하신다. 안완식 박사님이 무릎을 치며 정말 대단한 할머니라고, 오늘 참 잘 만났다며 함께 사진을 한방 찍으셨다. 정말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대단하신 분이다. 옛날에 동네에서는 호랑이 할머니로 소문이 나셨을 만큼 꼬장꼬장한 할머니셨는데, 지금은 연세도 있으시고 그냥 맘씨 좋은 할머니가 되셨다.

다음은 완두와 황차조, 또 녹두를 얻었다. 녹두는 초복 한 열흘 앞두고 심어서, 가을이 늦게 오면 늦게까지 따먹고, 일찍 오면 한물 덜 먹는단다. 마늘 감자 캐고 심으면 딱 좋단다.

몇 번을 다시 들어가고 한 결과, 참 많이도 얻고 많이도 보고 들었다. 또 만나 뵙고 싶은데 할머니가 언제까지 사실런지는 모르겠다. 너무 안타깝다. 이런 어르신들이 이제 한 분 두 분 돌아가시면 누구에게 옛것을 찾을 수 있을까?

 

 김옥순 할머니가 직접 씨를 받아 육종한 순무. 오른쪽의 하얀 것이 그것이다.

 

 김옥순 할머니 댁에는 아직도 제비가 찾아온다. 정말 제비는 맘씨 좋은 사람을 알아볼까? 동서를 막론하고 동화를 보면 제비는 늘 착한 사람을 돕는다는데...

 

 

이제는 어제 만나지 못한 유봉현 할아버지를 만나러 갈 차례다. 오늘은 만날 수 있으려나, 꼭 집에 계셔야 할 텐데... 바다를 막아 생긴 논둑길을 따라 논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망월3리로 달렸다. 지나는 길에 먹이를 먹고 있는 기러기 떼를 보았다. 새들이 바글거리면 그것도 장관이겠다. 왜 사진을 찍으러 힘들게 철새도래지까지 가는지 이 광경을 보니 이해가 간다.

 

논에서 먹이를 찾고 있는 기러기 떼. 일본의 어느 지역에서는 이를 이용해 관광자원도 삼고, 거름도 삼는다는 뉴스를 보았다. 우리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데...

 

 

망월3리에 도착했다. 어제는 눈 때문에 보지 못한 풍경이 이제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교회 건물이다. 새들이 많이 찾아와서일까? 목사님의 감각이 남다르다. 종이학 모양으로 교회를 지어 놓았다. 교회에 들어가서 이 건물을 지은 까닭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유봉현 할아버지를 찾는 일이 급선무다. 다시 할아버지 댁을 찾아 몇 번이고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없었다. 집 앞에 놓인 콩 낟가리만 만지작거리다 돌아섰다.

 

망월3리의 종이학 교회. 이곳에 찾아오는 철새와 함께 충분히 명물이 될 수 있겠다. 이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면 좋겠다.

 

 

이번에는 차를 몰고 어제 갑자기 눈이 많이 내리는 바람에 다 돌아보지 못한 마을로 향했다. 그렇게 하점면 망월리 27번지 다운이라는 곳에 사시는 이장우(69) 할아버지 댁에 도착했다. 할아버지께서 다운이와 관련한 옛날이야기를 해주셨다. 갈마산에서 신선들이 말을 타고 여기에 와서 말을 매고서 바둑을 두었는데, 다 두고 나서 바둑돌을 땅에다 묻었단다. 사람들이 그걸 찾으려고 했지만 못 찾았는데, 그걸 찾으면 돈이 된다는 이야기. 솔직히 무슨 내용인지, 어떤 뜻인지는 잘 알 수 없었다.

이 어르신은 농사를 크게 전문적으로 짓는 분이셨다. 저장고도 크고 예쁘게 지어 놓고, 그 안에 호박고구마와 자색고구마, 야콘을 갈무리해 놓으셨다. 요즘은 자색고구마가 건강식으로 잘 팔린다고 한다. 그런데 자색고구마가 뉴질랜드인가에서 들어왔다고 하시는데, 나도 올해 자색고구마를 수확했다. 나는 지난해 호박고구마를 사다 심은 뒤 수확해서 먹다가 남은 고구마에서 나온 순을 따다가 밭에 심었다. 거기서 나온 놈 가운데 일부가 자색고구마였다. 안완식 박사님께 말씀을 드리니, 그런 경우가 있을 수도 있는데 그건 좀 더 따져봐야 한다고 하신다. 아무튼 신기한 일이다. 나는 그게 돌연변이가 생겨 맛도 떨어지고 별로가 아닐까 생각해 대충 던져 놓았는데, 집에 가면 다시 찾아봐야겠다. 맛도 보고 또 심어도 봐야지.

 

 이장우 할아버지. 할아버지라고 부르기에 너무 건강하시다. 50대라고 해도 믿겠다. 우리나라의 평균수명이 늘어나긴 늘어났다. 집 안은 농산물로 어지러웠다. 농사도 많이 지으시고 여러 가지를 하신다. 정미기도 사서 동네 사람들 것까지 찧어 주는 등 일이 정말 많으셨다. 이런 분이 성공하셔야 한다. 남의 등쳐 먹는 놈들 말고.

 

 

이장우 할아버지 댁을 나와 고갯길을 넘어 오상리 쪽으로 가려고 한다. 가는 길에 신삼2리 406번지의 김옥선(75) 할머니 댁을 찾았다. 할머니는 여기에는 22살에 시집을 오셨는데, 그때부터 심는 강낭콩과 밤색의 둥근 칠월두, 강화마늘, 서리태를 얻었다. 전에는 농사를 꽤 지었지만 이제 할아버지가 안 계셔서 조금만 심는다고 하신다. 다니면서 보니 두 내외 가운데 한 분이라도 안 계시면 참말 쓸쓸하고 적적한 것이, 살려면 둘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전에는 왜 이혼하고 그 싫은 결혼을 또 할까 했는데, 결혼도 해 본 사람이 한다고 처음부터 독신이었으면 또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또 차수수를 얻었는데, 일찍 심으면 비둘기가 빼 먹지만, 늦게 심으면 벼 먹느라 괜찮다고 한다. 이것도 좋은 방법이겠다. 예전에는 콩밭에 섞어 심었는데, 이제는 빼기가 힘에 부쳐서 밭에 가장사리에 따로 심는단다.

 

 

신삼리를 뒤로하고 야트막한 언덕을 넘으니 다시 망월리 다운이이다. 언덕을 넘자마자 좋은 자리에 자리 잡은 큰 집이 눈에 들어왔다. 안완식 박사님이 그 집을 찍으셨다. 무엇이 있으려나, 문 앞에 다가가 사람을 불렀다. 마침 사람이 있었다. 나온 것은 젊은 아주머니. 토종 씨앗 이야기를 던지니 자신은 지금 나가야 하는데, 혹시 어머니께서 알고 계실지 모른다며 지금 경로당에 계시니 거기 가서 만나보라고 알려주신다.

알려준 대로 경로당에 도착하니 밥 냄새가 폴폴 콧속으로 들어온다. 이거 벌써 점심 때가 다 되었구나. 알려준 대로 고남수(76) 할머니를 찾으니, 걸걸한 목소리의 할머니 한 분이 당당히 걸어나오신다. 한 성격 하시는 분이란 감이 팍 온다. 이런 분이 또 화끈하셔서 뒤끝도 없는 법이지. 복지관에서 운동 가르쳐주러 나오기로 해서 오늘은 조금 일찍 밥을 해 먹었다고 하신다. 조금만 일찍 오면 뭐라도 같이 먹었을 텐데 아쉽다면서. 차로 댁으로 모시고 와 씨앗을 보여 달라고 했다.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담배 한 대를 꺼내시더니 입에 착 물고 불을 붙이신다. 황야의 무법자 같은 기운이 뭉게뭉게 담배연기와 함께 피어오른다. 할머니께서 이것저것 보여주셨는데, 그 가운데 넝쿨콩과 갓, 차수수만 얻었다. 나머지는 이전에 다 한 번씩 본 것이라 관두었다.

 

 고남수 할머니. 담배를 줄이시고 건강히 사시길 바라며...

  

 고남수 할머니 집 앞의 느티나무. 이 나무 아래에서 신선 둘이 바둑을 두었다고 한다. 그럼 할머니 네서 바둑돌을 찾아서 부자가 된 것일까? 살림살이에 꽤 여유가 있어 보였다.

 

 

고남수 할머니 댁을 나오며 안완식 박사님께서 이 근처에 오이를 심는 사람이 없냐고 물었다. 신기하게도 저 아랫집에 가면 그런 사람이 있다는 대답이 나왔다. 할머니를 다시 경로당에 모셔다 드리고 그 집으로 향했다. 이 집은 하점면 망월리 73번지 강순덕(67) 할머니 댁이다. 마침 할머니께서는 어디 안 가시고 집에 계셨다. 되는 날은 이렇게 일이 이루어진다.

할머니는 돼지오이라고 부르는 토종오이를 심고 있었다. 특징은 퉁퉁하고, 서리 내릴 때까지 따먹는다는 것이다. 가시는 없고, 익으면서 살이 트는 것처럼 껍질이 변하고, 단맛이 나며 아작아작하다. 48년 이상 된 씨앗으로 시어머니 때부터 내려온 것이라고 한다. 이밖에 메수수와 멧짝호박을 얻었다.

 

"아니 그런 건 가져다 뭐에 쓸려고 그러세요." 라고 물으시던 강순덕 할머니.

 

 

망월리에서 오상리로 넘어가는 마지막 고갯길에서 미꾸지라는 동네를 들렀다. 미꾸라지가 많아서 미꾸지인지, 아니면 미꾸라지처럼 생겨서 미꾸지인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그저 지도에서 미꾸지라고만 보고 이곳에 사시는 전옥순(72) 할머니 댁에 들어갔다. 연기가 나오고 있어 사람이 있는 줄 알고 밀고 들어갔다. 이곳에서도 토종 오이를 볼 수 있었다. 이것도 옛날부터 심는 것으로서, 가지가 많이 치고 한참 오랫동안 열린다. 덩굴을 뻗어 타고 올라가지 않고, 오이가 20~30cm쯤 된다고 한다. 사다 심으면 몇 개 안 열리고, 외줄로 타고 올라가다 말아서 그냥 이걸로 심는단다. 그러면서 요즘 세상은 참 이상하다고, "맛 보고 먹지 않고, 빛 보고 먹는다"고 한마디하신다. 빛깔만 좋으면 좋은 건지 아는 세상이다. 오래되고 낡은 건 버려야 할 것이고, 새롭고 화려한 것만 좇는다. 골치 아픈 가치의 문제는 둘째 치고, 익숙하고 편한 것이란 개념으로 접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부엌에서 일하다 나오셨다. 한창 저녁거리를 마련하시고 계셨는지 부엌에서 솔솔 좀 비릿한 내음와 함께 군침 돌게 만드는 음식 냄새 때문에 더 출출했다.

 

 전옥순 할머니 댁 부엌의 살강과 부뚜막, 가마솥, 아궁이. 이것도 전통이고 토종이다. 대부분 부엌을 현대식으로 고치면서 살강 같은 것은 가장 먼저 없애는데, 아직도 살강을 쓰고 있다. 부엌 한켠에는 화분을 놓고 화초를 키우고 계셨다.

 

 

미꾸지를 지나면서는 지루해서 하품이 나오는 시간만 보냈다. 사람이 없거나, 사람이 있어도 토종이 없거나 기운 빠지는 일들의 연속. 사람이 보이질 않아 할 수 없이 한 마을에서는 경로당을 찾아갔다. 동네 할머니들이 모두 여기에 모여서 민화투를 치며 놀고 계셨다. 이렇게 할머니들이 모여 계시면 뭐 하나를 얻기가 힘들다. 토종 씨앗 이야기를 하면서 있는 분 손을 드세요 하고 유도해 한 할머니만 집중 공략했다. 그 일은 한영미 위원장님이 맡았다. 그렇게 할머니 한 분을 끄집어 밖으로 나왔다. 할머니의 집은 마을 꼭대기 부근에 있어 그곳까지 함께 올라갔다. 내가면 오상리 563번지에 사시는 조경애(73) 할머니 댁에서 토종 오이와 박을 얻었다. 토종 오이는 어릴 때부터 심던 것으로, 어릴 때 따면 달고 맛있단다. 아삭아삭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오이지를 담기에 좋다고 하신다. 박은 수박나무를 사다 심었는데 거기에서 지가 알아서 달렸단다. 그렇게 3~4년 되었는데, 박국이 맛있어서 추석 무렵에 그걸 끓여 먹으려고 계속 심는다고 하셨다. 그런데 따로 씨를 받아 놓으신 것이 없어 땡땡 언 박을 땅에 내리쳐서 깬 다음 씨를 긁어 모았다. 정말 별의별 짓을 다하고 돌아다닌다.

 

이후의 시간도 지루하디 지루한 방랑의 시간. 내가면 고려저수지 부근을 샅샅이 뒤졌지만, 이런 곳에는 이미 펜션 단지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거나, 아니면 전원주택들뿐이다. 농사짓는 곳에 농가는 없고, 농가는 있어도 사람은 없고, 사람은 있어도 토종은 없고. 농촌은 정말 버림받은 곳인가? 돌아다니며 보는 농촌의 현실은 너무나 비참하다. 이런 곳에 내려와 살라고 하면, 솔직히 이제는 자신 없다. 예전에는 젊은 혈기라도 있어 미친 척 맨땅에 박치기하는 마음으로 어떻게 부비고 했을 텐데, 이제는 그렇지도 않다. 그만큼 머리가 굵은 것인지, 현실을 아는 것인지, 타협을 한 것인지, 약삭 빨라진 것인지는 모르겠다. 이 어려운 일을 결심한 분, 그리고 실제로 맨땅에 박치기하고 있는 분들께 존경의 박수를 보낸다.

 

고려저수지 인근을 다 돌아 강화읍 쪽으로 향하는 길에 있는 연촌이란 마을에 들렀다. 이제 해도 뉘엿뉘엿 넘어가 어두컴컴해지기 일보직전이다. 오늘 하루도 얼마 남지 않았다. 더구나 이곳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더 빨리 해가 넘어갔다. 고천4리 261번지 강신영(69) 할머니 댁을 마지막으로 들렀다. 아들과 함께 있었는데, 아들은 생각보다 어려 보였다. 막둥이일까? 나보다 몇 살 더 먹어 보였는데, 토종 이야기를 하니 콧방귀를 뀐다. 이제 그런 거 해서 먹고 살기 힘들다고... 무엇이 농촌을 이렇게 바꿔 놓았을까? 농촌은 왜 희생만 강요 당하고, 버림 받고, 눈치만 보는 천덕꾸러기가 되었을까? 먹어야 사는데, 먹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보라고 그래. 뿌리를 제대로 돌보지 않으면 그 나무가 오래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농업은 우리의 뿌리다. 진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볼 수 있는 지혜를 갖추길 바란다. 아무튼 육모참깨 하나만 얻어서 씁쓸하게 그 집을 나섰다.

 

산비탈을 넘고 여러 마을을 지나며 몇몇 집을 더 찾아 들어갔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그래도 낮에는 괜찮았는데, 해도 넘어가고 성과도 없고 보이는 건 영 마뜩잖고 가슴속이 헛헛하다. 더군다나 오늘은 한영미 위원장님이 돌아가신다고 한다. 그래도 셋이 다니는 게 딱 좋은데 아쉽지만 할 수 없다. 강화읍 버스터미널에서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안완식 박사님과 둘이 강화읍의 하트모텔에 여장을 풀었다.

내일은 석모도로 넘어가기로 했다. 내일을 기대하며 오늘의 아쉬움은 저 멀리 날려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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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 밑질까봐 먹지도 않고 씨를 받는 마음 

 

 

 

2008년 12월 3일, 날씨는 맑지만 엄청 춥다. 차에서 내리면 손이 곱는 일이 생길 정도다. 추운 날씨와 상관없이 오늘은 여느 날보다 조금 이른 8시 20분부터 조사를 시작했다. 이제 길상면을 훑을 차례다.

아침을 먹고 처음 들른 마을은 난저울. 한 집에 들어가니 이 추운 날 이른 아침부터 할머니 세 분이 모여 김장을 하고 계신다. 왠지 젊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하시는 듯해 맘에 걸린다. 혼자 사는 할머니 김장을 도와주려고 모이셨단다.

 

 할머니 세 분이 혼자 사는 할머니의 짐을 덜어주고자 모이셨다. 꽤 추웠는데 찬물에 일하시니 고생이 많으셨을 거다.

 

 

다들 바쁘셔서 더 묻지 않고 행로를 길정저수지 방향으로 잡은 뒤, 그 길에 있는 장촌과 야촌을 둘러보려고 출발했다. 꼬불꼬불 산길을 올라서 보니, 길정저수지 근처는 팬션이며 전원주택 같은 것이 잔뜩이다. 그래서 야촌은 더 볼 것도 없이 장촌으로 기수를 돌렸다.

허나 장촌도 사정은 비슷했다. 이곳은 대규모 축사들이 자리하고 있어 집도 별로 없고, 토종도 없었다. 다음 목적지로 이동하는 길에 인삼밭에서 인삼을 캐는 할머니들을 만났다. 이 추운 날 고생이 많으시다. 강화도가 인삼이 유명하다는 말만 들었지, 이렇게 진짜 인삼을 본 것은 오늘이 처음이다.

 

 뭘 먹고 자랐길래 인삼이 저리 통통한지 모르겠다. 할머니들은 이 마을이 아니라 저 멀리서 차를 타고 오셨단다. 이렇게 나와들 계시니 집집마다 찾아가도 사람이 없었나 보다. 날이 추워 중무장하시고, 한켠에는 불을 때고 있었다.

 

 

오늘은 영 시원찮으려나... 슬쩍 걱정하며 효자터라는 마을로 접어들었다. 말 그대로 효자가 살던 곳이란다. 이곳은 길상면 길직리로서 여기 325번지에 사시는 우병옥(52) 아저씨 댁에 가서 첫 성과를 올렸다. 농사지으랴 유해조수 퇴치에도 힘쓰랴 아주 부지런하신 분이셨는데, 나물콩, 녹두, 재팥, 적팥을 얻을 수 있었다. 거기에 덤으로 직접 이것저것 넣어 만드셨다는 배즙을 얻어 마셨다. 일반 배즙하고는 다른 것이 꽤 괜찮았다.

조사를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아저씨께서 저기 밭 주변에 야생콩이 많다며 그것도 한 번 보고 가라고 하신다. 그래서 차로 이동해 확인한 결과 그냥 흔히 볼 수 있는 새콩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주변을 유심히 보고 다니시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다시 차에 올라 가는데 마당에서 삽을 들고 일하시는 할머니를 보았다. 길직리 410번지의 신금례 할머니다. 밭을 정리하면서 굴착기가 하수관을 꾸겨놓아 물이 빠지지 않아 공사하고 계셨다. 혼자 삽 들고 일하시기에 좀 거들어드리고 토종 이야기를 꺼냈지만 신통치 않았다. 워낙 정신이 공사에만 가 있으셔서 그렇다. 대신 하우스에서 본 3년 전 동네 할머니에게 얻어 오셨다는 큰박을 차에 실었다.

 

몇 가지를 얻긴 했지만 성과가 영 별로다. 오늘 구한 건 한 번쯤은 이미 구한 것을 워낙 수집할 거리가 없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봉투에 담은 것들뿐이다. 며칠 도니 거기서 거기인 걸까? 새로운 것이 나오지 않으면 그만큼 흥도 떨어진다. 뭐가 자꾸 나오고 그러면 그 재미에 힘든 것도 잊고 시간도 훌쩍 건너뛰지만, 그렇지 않으면 힘만 들고 피곤하고 축 처진다. 오늘은 지금까지가 그랬다.

다음 행선지는 관사말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옛날에 관사가 있던 동네일 거라 짐작했다. 어느 예쁘게 꾸민 집 옆의 밭에서 세 분이 끝물 고추를 따는 데 여념이 없다. 다가가 물으니 얼마 전 이곳으로 귀농해서 오늘은 고추를 따려고 동생 식구들을 불러다 일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토종도 물으니 그런 건 없다고 한다. 하는 수 없이 그 옆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이 걸음이 큰 행운을 가져올지 누가 알았으랴! 마침내 토종 왕국을 찾았다. 이번 강화도 조사의 가장 큰 성과라면 바로 이 집이리라. 길상면 길직리 450번지에 사시는 구준회, 유준례(61) 아주머니 댁이 바로 그곳이다. 이 집에서만 100년이 넘게 살고 있는 터줏대감이신데, 인천의 계산동에서 20년쯤 살다가 다시 고향집으로 들어오셨단다. 바로 이 집에서 무려 14가지나 새로운 것을 보았다. 몇 년 전 불의의 사고로 아저씨께서는 다리가 불편하셨는데, 어떻게 이렇게 꼼꼼히 부지런하게 그것도 허투루가 아니라 제대로 농사를 지으셨는지 참 대단하시다. 두 분께 어찌 이리 농사를 잘 지으시는지 비결을 어쭈니, "씨 밑질까봐 계속 심고, 많이 나면 먹고 아니면 씨 밑질까 그냥 씨만 남긴다"고 하신다. 씨를 사랑하는 마음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대답이다. 먹는 거보다 씨가 우선이라니 말이다. 

 

 구준회, 유준례 내외 분. 정말 부지런하고 꼼꼼하신 농부시다. 뒤에 보이는 탈곡기로는 밭벼를 턴다고 하신다. 이번에 전통농법으로 여기에 취재를 가기로 했으니, 귀농통문에 실리는 글을 기대하시라~

 

 

먼저 이곳에서 수집한 목록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강낭콩, 늦깨, 흰콩, 덩굴콩, 적팥, 흰밥밑콩, 청불콩, 검정밥밑콩, 강낭콩, 단호박, 단호박, 멧짝호박, 강화마늘, 속노란고구마, 속노란자주색고구마. 돌아서서 가려다 혹시...... 하고 물으면 또 하나가 튀어나오고, 또 돌아서서 가려다 물으면 또 나오고... 그렇게 이 집에서만 한 시간 반 동안 있었다. 다른 집에 가야 시원찮았던 판에 여기서 이렇게 많이 얻었으니 다행이다. 시간이 아깝지 않은 곳이다.

강낭콩은 7~8년 정도 된 검정색과 키가 작고 갓이 얇아 밥에 넣어 먹기 좋고 맛있지만 대신 수확이 적은 것이 있다. 이렇듯 먹기 좋고 맛있는 건 수확이 적은 게 특징이라고 한다. 늦깨는 추석 전에 수확하기에 그렇게 부르고, 흰콩은 어머니께 대물림 받은 것으로 9월 말에 거둔다. 덩굴콩은 흰색이고, 적팥은 보통 팥보다 색이 옅은 편이었다. 흰밥밑콩은 추석에 수확하는데, 밥밑콩으로도 쓰지만 송편소로 쓰면 좋다고 한다. 그에 비해 검정밥밑콩은 서리태로서 늦게 거둔다. 청불콩은 겉은 카키색 비슷한데 속은 파랗다. 나물콩으로서 추석에 먹고, 일찍 익으며 껍질이 두껍고 병에 강하다고 한다. 단호박은 골이 있는 마름모꼴과 타원형 두 종류가 있다. 마늘은 30년 이상 심고 있는데, 단단하고 크다. 그렇지만 저장성도 좋고, 키가 별로 크지 않다는 특징이 있다. 해마다 주아도 심어 건강한 씨를 유지한다. 이 마늘은 어찌나 매운지 눈에 들어가면 눈도 못 뜰 정도라면 자부심이 대단하시다. 사람들도 한 번 사다 먹으면 그 맛 때문에 끊이지 않고 또 찾는단다.

 

 유준례 아주머니의 보물. 여러 씨앗을 깡통에 잘 담아 그 안에는 수확한 해와 이름을 적은 쪽지를 넣어 혹시 잊을지 모를 위험까지 방지하신다. 얼마나 꼼꼼하고 깔끔하게 잘 갈무리해 놓으셨는지 모른다. 감동 그 자체.

 

 

1시, 점심을 먹고 다시 조사에 나섰다. 길상면사무소에서 초지진 쪽으로 가는 84번 도로를 타고 가다가 오류골에 들렀다. 큰길 옆이라 그런지 별로 신통한 것이 없다. 그래도 호박 하나가 눈에 띄어 그거 하나 얻어서 다시 차에 올랐다. 그 건너편에 있는 감오간이란 마을로 머리를 돌렸다. 꼭 무슨 감옥간 같은 이름이라 동네 할머니께 이 동네 이름이 왜 이러냐고 물었지만 시원한 해답을 얻지 못했다. 그 할머니가 사시는 곳에서 피마자와 차조를 얻었는데, 성함을 여쭈니 남 부끄러워서 말해 줄 수 없으시단다. 곧 갈 사람 이름을 적어서 뭐하냐시며... 피마자는 좀 덜 여문 상태였다. 올해 늦게까지 따뜻하다가 갑자기 추워지면서 이 모양이 되었다고 한다. 차조는 무지 퇴화를 했는지 손가락 길이도 안 되었다. 안완식 박사님께서는 그래도 잘생긴 것만이 아니라 못생긴 것도 모아다 연구하면 뭔가 새로운 게 나올지도 모른다며 챙기라고 하셨다.

 

차조를 털고 남은 이삭 자루와 검불. 다 쓰러져가는 집에 할머니 홀로 살고 계셨다. 앞으로 우리의 농촌은 어떻게 될까? 그 앞날이 두렵다.

 

 

 

다시 큰길로 나와 초지진 쪽으로 달렸다. 그 길목에 장흥리 산14번지에 사신다는 고금순(66) 할머니가 장사를 하고 계셨다. 여기 나와 있는 건 모두 본인이 직접 농사지어다 내와서 판다고 하신다. 그 품목이 워낙 다양해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데, 이곳에서 아주 커다란 호박과 나물콩을 구입했다. 장사하는 곳이라 그냥 얻을 수 없어 좀 깎아서 샀다.

 

 마늘을 까는 고금순 할머니. 우리가 나타나 장사를 하시다 살 것 같지 않았는지 또 어느새 일을 손에 잡고 계신다. 부산스럽다 싶을 정도로 바지런함이 몸에 배신 듯하다.

 

 

초지진이 있는 곳은 초지리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들이 넓고 교통이 편리해서 그런지 파면 파 하나만 몇 천 평씩 심어서 내다파는 농사만 발달하고 텃밭에 먹으려고 이것저것 심는 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한없이 시간만 흐르고, 가끔씩 차에서 내려도 빈 손으로 다시 차에 올랐다. 지루하게 시간을 보내는 하품 나오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그러다 길상면 초지리 1226번지, 토저골이라 부르는 깊숙한 동네에 들어서자 상황이 조금 나아졌다. 역시 길이 잘 뚫리면 신식 문물이 밀고 들어오며 오래된 것들을 몰아내나 보다. 기를 쓰고 신작로를 뚫는 이유가 거기에 있을 거다. 이 집에 사는 고복희(76) 할머니는 이제 무릎이 많이 아파 농사를 잘 못 짓는다고 하신다. 그래도 자식들 입에 들어갈 거라며 몇 가지는 놓치지 않고 아픈 몸으로 계속 농사를 짓고 계셨다. 밥에 넣어 먹으려고 1975년에 이곳에 들어와 계속 심는다는 완두, 손주들 잘 먹는다는 옥수수, 황차조와 이른 들깨, 땅콩을 얻었다. 씨를 얻어오면서도 미안한 맘이 들어 혼났다. 뭐 하나를 줘도 그냥 듬뿍듬뿍 퍼 담아 주신다. 나를 보고는 군에 간 손주가 생각나시는지 가다가 먹으라며 땅콩을 한 움큼 쥐어 주머니에 넣어 주신다. 연신 허리 굽혀 인사를 드리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 몸이 많이 불편하다는 고복희 할머니. 마루가 얼음장처럼 차갑던데... 왜 우리나라의 마루는 차가울까? 따뜻하게 고치면 안 되나? 이것이 늘 의문이다. 옛날 사람들이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랬을 텐데, 요즘 생활방식은 그때와 다르니 그에 맞춰 바꿀 수는 없을까? 그러려면 물론 돈이 많이 들겠지...

 

고복희 할머니가 툇마루에 말리고 있는 호박. 이것도 다 자식들 입으로 들어가겠지. 그놈의 자식이 뭔지... 아직 길러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이쁜 만큼 애물단지임이 틀림없을 것이다.

 

 고복희 할머니 댁의 완두. 꼬투리채 달아놓으면 벌레가 잘 끼지 않는다고 한다.

 

 고복희 할머니까 쓰시는 발쇠스랑. 이런 다양한 농기구가 요즘은 사라지고 있어 아쉽다. 사람이 몸으로 일하는 시대가 아니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 지역에 맞는, 또 그 사람에 맞는 다양한 농기구는 시대가 변하고 그에 따라 대장간이 하나둘 사라지면서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 철물점에서만 파는 현실을 낳았다.

 

 

이제 해도 저물어 가고, 마지막으로 선두리만 돌아보면 오늘의 일정은 끝이다. 아니 이번 1차 강화도 조사도 이것으로 끝난다. 저무는 해를 보니 집 생각이 더 간절하다. 조금만 지나면 드디어 집으로 돌아간다.

선두리에서는 크게 성과가 없었다. 해안 쪽은 확실히 팬션이며 관광지가 자라하면서 농사의 형태도 많이 바뀌었다. 70대 이상인 할머니들에게나 가야 뭔가 하나라도 나오지 아니면 거의 없다. 그렇게 찾은 선두리 924번지의 조금순(81) 할머니. 이 분께 살이 트는 게 특징인 홀애비콩을 얻었다. 이게 하얗지만 맛있어 밥에 넣어 먹는단다. 이 콩을 옆집 색시에게 얻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 색시를 찾아나서니, 색시는 벌써 쉰이 넘은 아주머니다. 할머니에게는 어린 색시 그대로 머릿속에 남아 있나 보다. 아무튼 아주머니께 콩의 유래를 물으니 하점면 망월3리에 사시는 친정아버지 유봉현(80) 어르신께 가면 자세한 걸 알 수 있단다. 자연스레 다음 2차 강화도 답사 때 찾아갈 곳이 생겼다. 다음 숙제로 남겨 놓고 이제 강화도를 떠나 집으로 돌아가자. 집에서는 아내가 맛있는 걸 해 놓고 기다리겠단다.

 

 선두리 조금순 할머니 댁에서 바라본 해질녘 강화도의 갯벌과 바다. 저무는 해를 보면 집 생각이 더 간절해지는 건 나만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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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은 아들만큼 위하는 거야

 

 

 

2008년 12월 2일 화요일. 날씨는 맑고 따땃해 꼭 봄날 같다.

안철환 선생님에게서 10시쯤 강화터미널에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우려한 것처럼 오랜 시간 둘이서 다닐 걱정은 덜었다. 그래 오늘은 일단 어제 마저 보지 못한 선원면 지산리의 왜말에서부터 조사를 시작했다. 

 

처음 찾은 곳은 선원면 지산리 126번지 안숙희(75) 할머니 댁이다. 논농사를 많이 지으시는지 따로 벼를 보관하는 작은 저장고를 두셨다. 그리고 밭농사로는 콩을 주로 지으셨다. 10~15년쯤 되었다는 밤콩과 피마주콩, 중간 크기의 나물대를 얻었다. 나물대는 작은 것도 있는데 그건 나물이 잘 안 되고, 이건 나물을 하면 머리가 커서 고소하단다. 이게 참 좋아서 남에게도 심어보라고 줬더니 헬렐레 하더라며 자부심이 대단하셨다. 

 

몇 가지를 수집하고 터미널 쪽으로 움직이면서 선원면으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한 남산촌에 들렀다. 마침 할머니 한 분이 집 앞에 나와 계셔서 그리로 가 한간난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지산리 739번지에 사시는데, 연세가 많으신데도 아직 농사를 꽤 지으셨다. 그걸 광의 문에 각 논의 수확량을 적어 놓으신 걸 보고 알았다.

그런데 그걸 보자니 꼭 다카하시 노보루의 70년 전 기록을 보는 듯해서 기분이 야릇했다. 다카하시가 조사할 때도 농민들은 이 할머니처럼 답했다. 논에 이름이 어디 있으랴 그냥 노간주나무가 자라면 노간주논이고, 집 앞에 있으면 압논이고 하는 식이지. 작물의 이름도 그렇다. 콩이 크면 왕콩이고, 노라면 노란콩이다. 그런데 할머니도 꼭 그렇게 논에 이름을 붙여 놓으셨다.

아무튼 이곳에서는 3년 묵었는데 가을 늦게 심으니 났다는 시금치와 차수수를 조금 얻었다. 할머니 말씀이, "시방 시금치는 빤질빤질하고 맛이 없잖아. 이건 아주 맛나"라고 하신다.

 

 호박꼬지와 시래기를 말리는 앞의 한간난 할머니. 얼마나 바지런하신지 모른다. 그런데 왜? 옛날에는 간난이란 이름을 지어줬을까? 여자는 자식도 아닌가...

 골논, 압논, 노관주, 못자리. 모두 논의 이름이다. 골논은 골짜기나 골창이 있는 곳의 논이고, 압논은 집 앞의 논, 노관주는 노간주나무가 있는 곳, 못자리는 못자리를 만드는 논이란 말이다.

 

 

이제 강화터미널에 도착했다. 마침내 안철환 선생님이 강화도로 건너와 합류하셨다. 안산에 있는 들꽃피는학교에 농사 강의가 있어 잠깐 거기에 다녀오셨다. 오래 다니지는 않았지만 며칠 다녀보니 세 명이 이런 일에는 딱 알맞은 듯하다. 둘은 좀 적어 일이 몰리고, 넷은 좀 많아 노는 손이 생기고, 일하기에 셋이 가장 좋다. 뭐든지 셋이 가장 안정적이라더니 이런 일에도 그런가 보다. 옛날 솥도 다리가 세 개이고, 삼족오도 다리가 셋이고, 삼위일체에 삼 세 번까지... 동서를 막론하고 3이란 수에는 안정과 조화가 깃들어 있다.

 

오늘 아침으로 선원면 조사를 마치고 이제 그 아래 동네인 불은면으로 넘어갈 차례다. 불은면, 부처님의 은혜를 입은 땅. 이렇게 대놓고 부처님 운운한 곳이 또 어디에 있을까? 조선시대로 들어서면서 새로운 이념에 따라 불교, 부처님, 중은 모조리 양지에서 쫓겨나고 저 어두운 산골짜기 음습한 곳에서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곳 강화도에서는 불은면이란 간판까지 내걸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이곳 불은면과 나중에 갈 길상면은 불교가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겠구나 짐작만 할 뿐이다.

 

84번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쭉 내려가다가 불은면사무소를 지나자마자 바로 좌회전해 귀릉굴이란 곳으로 올라갔다. 인터넷 백과사전을 찾아보면 능이 있었다고 귀릉굴이라고 하는데, 동네 어르신들께 여쭈어보지 않는 이상 알 수 없다. 지도와 백과사전에 나와 있는 지명이나 유래 등이 얼마나 엉터리인지 날이 갈수록 확인하고 있다. 이런 것도 직접 발품을 팔아 다니면서 조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동네에 난 길로 한참을 오르니 집이 한두 채씩 보이지만 영 시원치 않았다. 다시 차에 올라 가는데 할머니 한 분이 눈에 들어왔다. 만나서 가장 반가운 건 아줌마, 할머니다. 그분들께 가면 뭐라도 하나 얻을 게 나온다. 차에서 내려 반갑게 인사드리고 씨앗을 여쭙는다. 농진청 얘기가 나오자, 농촌 사람들은 혜택도 못 보고 도시에서 와 조금 산 사람들이나 혜택을 본다면 농업정책에 뭐라 하신다. 올라오면서 보니 이 동네에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도시 사람들이 꽤 있었는데, 그네에게 쌓인 불만을 말하시나 보다. 돈 있는 자들이여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며 물 좀 흐리지 말라. 그런 맥락에서 타워팰리스는 정말 훌륭한 건축물이다. 그 안에만 갇혀 살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농사로 잔뼈가 굵으신 최시종 할머니. 덩치만큼 입담도 좋으시고, 인심도 넉넉하시다.

 

 

우연히 찾은 이곳은 토종의 전당이었다. 다른 것과 겹쳐 순무, 찰옥수수, 청삼, 강낭콩, 밤콩, 땅콩만 얻었는데, 가짓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할머니의 씨앗에 대한 애정과 보관 방법 등이 남달랐다. 어떻게 이렇게 많은 종류를 밑지지 않고 계속 받아서 심냐고 여쭈니 그 대답이 일품이다.

"씨앗은 아들만큼 위하는 거야." 

그렇다! 어머니께 씨앗은 아들만큼 소중한 것이다. 남편은 얄미워 해도 아들에겐 한없이 너그러우신 어머니. 그런 어머니의 마음으로 씨앗을 받아서 심고 가꾸는 것이지 다른 어떤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최시종 할머니께 씨앗을 대하는 중요한 마음가짐을 배웠다.

씨앗을 보관하는 방법은 이렇다. 통풍이 중요한 것들은 양파망에 넣어 비 맞지 않게 잘 매달아 놓고, 자잘한 씨앗들은 신문지와 같은 종이에 잘 싸서 쥐나 벌레가 먹지 않게 잘 밀봉해서 광 한켠에 보관한다. 아주 일반적이고 매우 간단하고 쉬운 방법인데, 이렇게 보관하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다. 원리원칙에 충실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집에 온 손님이니 대접을 하시겠다며 부엌으로 들어가 커피를 타오신다. 그런데 부엌 한쪽 벽에 뭔가 걸려 있는 게 보여 얼른 따라서 들어갔다. 가까이에서 보니 벼 이삭을 묶어 놓은 것이다. 옛날 신주단지 모시듯 그런 의미가 있는 것인지 조심스레 여쭈어 보았다. 그랬더니 해마다 벼를 수확하기 전에 가장 잘난 것들을 따다 걸어 놓은 것이란다. 벼가 너무 예뻐서 그런 것이기도 하고, 어느 해에는 작황이 어땠는지 한눈에 비교할 수도 있어서 이래저래 따다 엮어 놓았다. 

집을 둘러보니 집에도 여간 손이 많이 간 것이 아니다. 마당에는 '허심정'이란 정자를 세워 현판을 직접 만들어 달아 놓으시고, 그 옆으로는 구상나무를 멋있게 키우셨다. 농사일도 엄청 많으시면서 언제 이렇게 꼼꼼히 집도 돌보시는지, 할머니께서도 나는 그 양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며 할아버지 자랑을 하신다. 마침 들에 나가셔서 만나뵙지 못했는데, 언제 기회가 되면 다시 한 번 찾아가 볼 만한 집이다.

 

 할머니께 대접을 받은 커피와 감 뒤로 2003년부터 2007년까지 가장 잘된 놈으로 골라 따다가 엮어 놓은 벼 이삭.

 

좋은 분을 만나 커피까지 얻어 마시니 마음이 참 좋다. 좋은 기운은 사람에게 좋은 맘을 갖도록 만든다. 더 눌러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좋겠으나, 할머니도 들에 나가셔야 하시고 우리도 얼른 길을 떠나야겠기에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차에 올라타서 어느 길로 갈지 잠시 고민을 했다. 손바닥에 퉤 침을 뱉어 튀겨도 재밌겠지만, 최대한 효율적으로 빠트리는 곳 없이 샅샅이 돌아야 한다. 지도를 읽으니 고갯길을 넘어가도 되겠다. 길이 좋기만 기대하면서 서서히 고갯길을 넘었다.

 

고개를 넘으니 바로 집이 하나 나온다. 불은면 두은리 90번지에 사시는 채호근(74) 할아버지의 집이다. 여기는 뱅골이라는 동네다. 강화도에서는 그래도 산골에 속하는지라, 또 앞마당 한쪽에 두엄도 잘 만들어 놓으신지라 뭐가 나오겠다 싶었다. 안완식 박사님이 또 대뜸 쑥 지르신다.

"여기 메밀 있어요?"

그랬더니 메밀이 나온다. 더군다나 중국산까지 따라 나온다. 음...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 집에 들어오기 전에 미리 밭이며 집 안 여기저기를 잘 살펴 뭐가 있는지 파악하신 듯하다. 그것이 바로 박사님만의 방법이구나. 또 하나 배웠다. 메밀은 일찍 심으면 별로이고 중복 이후에 심어서 거둬 먹는다고 한다. 할머니가 있으면 다른 것도 더 찾아서 보여주겠지만 아쉽게도 할머니가 읍에 나가셨다. 할 수 없이 이 정도로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섰다.

 

 채호근 할아버지. 마당에는 수석으로 꾸미시고, 집도 깔끔하게 정리해 놓고 사신다. 거름을 정말 끝내주게 만들어 놓으셨다. 집 아래로 축사가 많은데 거기서 소똥을 얻어오셨을까? 거름에 대해 자세히 여쭈어 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해 주지 않았다. 이곳도 언젠가 다시 들르고 싶다.

 

 

아랫마을로 내려오니 전부 축사뿐이다. 그래도 그 틈바구니에 오래된 집 한 채가 서 있다. 가까이 다가가 사람을 찾았지만 아무도 없고, 문패로 주소만 확인했다. 불은면 두운리 361번지 구인봉 어르신 댁이다. 집이 좋아 보여 대문은 닫혀 있지만 쪽문으로 슬쩍 돌아 들어갔다. 이런 집은 뭔가 있어도 있기 마련이다. 사람을 찾을 수 있으면 꼭 찾아서 만나야 한다.

 

흙벽이 갈라진 틈으로 보이는 나뭇대에 시래기를 묶어 말리고 있다. 집을 손질할 힘이 있으셨다면 절대 저렇게 방치하지 않으셨을 텐데... 건축 자재로 흙은 이제 시멘트에 밀려 빛을 잃거나, 아니면 시멘트보다 비싼 재료로 각광을 받거나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마치 토종 씨앗처럼...

 

 

안마당으로 가 큰소리로 불렀지만 묵묵부답. 할 수 없이 그냥 돌아나오려는데 벽에 가지런히 걸어 놓은 씨앗이 보인다. 뭔가 새로운 것이 없을까 싶어 다가가 하나하나 들여다보았다. 다 본 것인데 딱 하나 굼뱅이동부만 하나 챙기라고 하셔 미안하지만 조금만 챙겼다. 굼뱅이... 한때 내 인상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서 아이디로 쓰기도 했다. 일단 느리고, 허여멀건하다. 거기다 구르는 재주까지 있으니 딱이다 싶었다. 그런데 얼마 안 쓰다가 김서방으로 바꾸었다. 종로에서 김서방 찾는단 기분으로.

 

 잘 갈무리해 놓은 여러 씨앗. 옥수수, 동부, 팥, 조까지... 아무도 계시지 않은 게 아쉬웠다. 겨울에 다들 어딜 그렇게 다니시는지 모르겠다.

 

 

도둑질 아닌 도둑질에 맘이 거시기하다. 그런 기분은 잊고 다시 출발이다. 양쪽으로 축사를 놓고 그 사잇길로 달렸다. 아니 달렸다기보다는 슬슬 기었다. 길도 비포장이고 울퉁불퉁한데다가 어디가 어딘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래도 막힘없이 간다 했다. 그러다 딱 한 번 막다른 곳에 다다라 할 수 없이 차를 돌렸다. 사실 막다른 길은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임도로 올라가는 길이라 괜히 더 가면 헤어날 수 없겠다 싶어 차를 돌렸다. 그리로 갔으면 오늘 하루는 땡 칠 수도 있었다.

 

돌아 돌아 어렵사리 도착한 곳은 불은면 고능리의 아침가리란 동네다. 이곳 993번지에 사시는 고남희(81) 할머니 댁에서 아침가리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아침가리는 아침 + 갈이란 말로, 이곳 사람들이 하도 부지런해 아침 먹기 전에 논밭 갈이를 한다고 붙은 이름이란다. 여기 시집와서 그 이름 때문인지 엄청 일도 많이 하고 고생했다는 할머니의 말에 웃음이 났다. 할머니 댁에서 음력 9월에 거둔다는 검정콩(속청)과 시집와서부터 계속 심었다는 적팥을 얻고 다음 마을로 넘어갔다.

 

 벽 한 면에 잘 정리되어 있는 체들. 쓰는 데에 따라 구멍의 크기가 다르다. 농기구만 바도 이걸 쓰는 사람이 어떻겠다는 걸 알 수 있으니, 작은 거 하나라도 잘 챙기며 잘 살아야 한다.

 

 

지나면서 세 군데 마을을 들렀지만 아무 수확이 없었다. 특히 이쪽 동네에는 비닐하우스가 많아서 더 그런 것 같다. 토종 씨앗이 보니까, 있는 데에는 많고 없는 데에는 아예 없다. 또 있는 집에서는 적어도 서너 가지는 볼 수 있다. 하나라도 없는 집이 보이면 그 동네에는 거의 십중팔구는 없다. 씨앗도 끼리끼리 모여 사는가? 어떤 사람이 어디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그렇겠지.

점심 때가 지났지만 아직 계획했던 곳을 다 돌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점심을 먹기 전에 불은면 두운리 776번지 장안말에 들렀다. 행정구역의 경계를 살짝 넘나들며 다시 두운리로 왔다. 이제 기억이 하나둘 지워지기 시작했는지 이곳에서 만난 주남순 할머니가 어떤 분이셨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내게 확 인상에 남길 만한 뭔가를 주지 않으셨나? 기록에는 5년 된 쭈글쭈글한 완두, 강낭콩, 땅콩을 얻었다고 나온다. 그것 말고 뭔가 특별한 말씀은? 없다. 배가 고파서 더 그랬는지 모른다. 다음 줄에 밥을 먹고 쉬었다는 기록은 아주 뚜렷하게 적어 놓은 것으로 봐서는...

 

 장안말 주남순 할머니. 어떤 분이셨는지 시간이 오래 지나 솔직히 까먹었다. 사진만 남기고 사람은 잊어버리다니 너무 죄송스럽다.

 

 

그렇게 기다리던 점심은 화도돈대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회덮밥을 먹었다. 날이 따뜻해 차 안에서 엄청 나른하고 졸렸다. 피로가 쌓인 탓도 있을 것이다. 2시, 다시 조사에 나섰다.

오후에는 불은면 오두리부터 시작이다. 터진개란 마을을 지나 안샛말로 곧장 들어섰다. 터진개는 예전에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바닷가를 끼고 팬션과 식당만 즐비하다. 안샛말로 왔지만 이곳도 영 시원찮다. 큰길과 바닷가가 바로 옆이라 영향을 많이 받았나 보다. 차를 타고 지나는데 아주머니 두 분이 해바라기를 하고 계신다. 나도 햇볕이나 쬐면서 꾸벅꾸벅 졸았으면 좋겠다. 그냥 지나치기 아쉬워 차에서 내려 아주머니께 말을 건넸다.

아주머니 이름이 참 재밌다. 옛날 어른이 명이 길라고 지어주셨다는데, 서총각(62)이라고 한다. 농사는 많이 안 짓고 집 옆에 텃밭 조금에다 종묘상에서 사다 심은 씨를 심는다고 한다. 그런데 옥수수만은 스물여덟부터 심기 시작했다고 하니 알 수 없는 일이다. 옥수수는 씨를 받기도 심어서 키우기도 쉬워서 그러셨는지 모른다.

 

서총각 아주머니. 맛있는 귤도 잘 얻어 먹었다. 지금도 이 사진을 보면 그 따사로움이 기억나 살포시 졸음이 온다. 

 

 

안쪽으로 몇 집이 더 있다는 말에 찾아 들어갔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뭐 하는데 남의 동네에 들어와 수상하게 행동하냐고 의심만 받고 물러났다. 나오다 멋들어진 옛집이 한 채 있어 잠시 눈요기를 했다. 이렇게 좋은 집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혹시 이곳도 별장처럼 쓰는 곳인가?

 

 오두리에 있는 멋진 옛집. 앞마당에는 큰 연못까지 파 놓았다. 하지만 그 내력을 알 수 없었다.

 

 

오두리를 벗어나 넙성리로 향했다. 여기는 들이 참 넓은 편인데 그래서 넙데데하다고 넙세이라고 부르는 것일까? 이 동네 이름이 왜 그러냐고 물으면 놀랍게도 시원하게 답해 주시는 분이 그렇게 많지 않다. 그냥 사는 동네니까 그럴 것이다. 그런 걸 물어보는 사람이 이상한 사람이 되곤 한다. 그래도 궁금한 걸 어쩌란 말이냐. 넙성리에 대한 시원한 답을 얻지 못했는데, 언제 강화도 지명과 관련된 책이라도 뒤져야겠다.

오늘은 참 따뜻한 날이다. 이곳에서도 해바라기하려고 나와 계신 두 할머니를 만났다. 넙성리 154번지에 사시는 김순옥(76) 할머니가 그 가운데 한 분이다. 마침 땅콩을 까 먹고 계셔서 그걸 한움큼 얻었다.

 

 날이 좋아 집 앞에 앉아 땅콩 까 먹으며 친구 분과 이야기하시던 김순옥 할머니.

 땅콩 좀 먹어 보라며 한움큼 쥐어 주셨다.

 

 

땅콩도 얻어서 먹었는데 비릿하지도 않고 고소하다. 이것 참 맛있네. 땅콩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사라질 만큼 맛있다. 이 정도면 땅콩도 먹을 만하다. 이게 바로 토종의 맛인가?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같은 동네의 158번지 사시는 유정숙(75)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마침 날이 좋아 쓰레기를 태우러 나오셨다. 대신 불을 볼 테니 할머니가 가지고 계신 씨앗 좀 보여달라고 보채 집 안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씨앗을 서랍장에서도 꺼내고, 방안 어딘가에서도 가지고 나오고, 여기저기 숨어 있던 씨들을 깨워 데리고 오신다. 다른 건 다 있어서 검은동부, 흰강낭콩, 녹두만 얻었다. 그래도 아들과 함께 사신다고 하니 참 좋아 보인다. 자식은 도시로 떠나고 홀로 남은 어르신은 돌아나오기도 어렵다. 하룻밤 잠이라도 잔다고 뭐 달라지진 않겠지. 오히려 그게 더 폐를 끼칠 수 있다. 정 붙이면 떼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정 떼기 어려울 바에는 차라리 붙이지 않는 것도 낫지 않을까.

 

 유정숙 할머니. 허리가 반은 굽으셨다. 왜 사람은 허리가 굽을까?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만, 허리가 굽고 관절이 좋지 않다는 어르신을 보면 가슴이 아프다. 고된 일을 많이 하셔서 그런가?

 

 

어느덧 해가 기울고 있다. 이제 다닐 수 있는 시간도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 차를 타고 가는데 넙성리 470번지에 사시는 구천회(74) 할아버지 내외 분이 밭에서 일하고 계셨다. 어렵지 않게 다가가 말을 건네 씨를 보관해 놓은 곳까지 갔다. 그런데 할머니는 일하다 들어오셔서 그런지 마음은 밭에 가 있고, 할아버지는 이 사람들이 누군가 의심하신다. 나중에 안완식 박사님이 명함을 드리니 의심을 풀고 사정을 이야기하신다. 요즘 시골 사람 등치는 사기꾼들이 많아서 그런다고. 하긴 소도 훔쳐 가고, 어렵사리 키운 농작물도 쓸어 가는 판에 의심할 만하시다. 어째 그런 사람들이 있는가 모르겄다.

이른참깨가 좋아서 계속 심는다는데, 5월 10일쯤 심어 8월 7~8일이면 거둬 말린다. 가지가 많고 드물게 달리는 네모참깨로, 북성 마을에서 10년 전쯤에 얻어 온 것이라 한다. 자식들은 모두 도시로 가고 늙은 사람만 남아 이렇게 고생한다며, 다시 한 번 다른 뜻이 있어 의심한 게 아니니 너무 언짢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보다 더한 경우도 몇 번 당했는데 이건 별 것도 아니다. 그러면서 나는 모르는 사람이 왔을 때 어떻게 대하는지 되돌아보았다.

 

이제 시간은 4시를 훌쩍 넘겼다. 많이 가야 서너 집. 오늘 하루도 이렇게 끝이다. 조금만 힘을 내자. 이 시간대가 되면 슬슬 피로가 몰려온다. 어디 들어가 철푸덕 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그래도 어디 그런 내색을 할 수 있나. 마지막이 되면 더 열심히 일하며 참을 뿐이다.

넙성리를 지나 신현리로 들어섰다. 토종이 있을 만한 몇 집이 눈에 들어왔으나, 시간이 없으니 잘 골라야 한다. 한 번은 허탕을 치고 찾은 곳이 신현리 235번지 나정윤(71) 할머니 댁이다. 22살에 시집와 여직 심는다는 시금치는 잎이 길고 대가 종 올라가고 색이 옅다. 나물콩은 5~6년밖에 안 되었는데, 늦게 심어도 일찍 여무는 보기 드문 것이라 수집했다.

 

이후 몇 집을 더 들렀지만 아무 수확이 없었고, 이제 해는 간당간당 넘어가기 일보직전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들른 솔정마을만 지나면 길상면으로 나가 숙소를 잡으려고 한다. 가다 보니 예쁜 집이 하나 있어 잠시 구경을 하는데 조롱박이 눈에 띈다. 이곳에 귀농한 아주머니신데, 그분께 조롱박 세 가지와 족두리꽃 씨앗을 얻어 왔다. 

짧고도 긴 하루 해가 넘어갔다. 숙소를 잡은 뒤 저녁을 먹으러 길상면사무소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그 건너편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와 하늘을 보니 달과 목성과 금성이 한데 어울려 있다. 이런 기회가 어딨나 싶어 사진기를 들이댔지만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기다란 전문 망원렌즈나 달아야 찍을 수 있을까. 아무리 봐도 사진기는 내 눈만 못하다. 그래도 남한테 보이려면 사진, 아니지 말로 전할 수도 있구나. 어느 틈에 말로 이야기를 전하는 걸 잊어버렸다. 상대도 그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어야 서로 통하는데 그렇지도 않으니 이야기할 거리도 별로 없다. 그저 사진을 들이밀며 보이는 수밖에... 나부터 그러니 뭐 할 말이 없다. 

 

 서쪽하늘에 뜬 초승달과 목성, 금성. 좀 더 밝은 왼쪽의 것이 금성이고, 오른쪽의 것이 목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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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거 잘 얻어 갑니다

 

 

2008년 12월 1일. 하늘이 흐리고 축축하다. 비라도 올 것 같은 궂은 날씨.

 

오늘도 어김없이 7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아침을 먹으로 하점면의 풍년식당으로 향했다. 정말 밥이 일품이다. 밥만 있어도 한 그릇 뚝딱 해치울 정도로 말이다. 이런 걸 사진으로 찍을 걸 그랬나? 그러면 밥에 집중하지 못한다. 먹을 땐 먹는 데 충실할 뿐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9시 조사에 나섰다. 오늘의 첫 목적지는 송해면 솔정리다.

솔정리에 들어서니 짐승들 밥을 챙겨 주고 있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아침 마수걸이가 어떨라나. 차에서 내려 다가가 토종 씨앗이 있는지 할아버지께 물었다. 음... 없단다. 다니면서 보고 듣고 느꼈는데 역시 남자는 헛방이다. 들떠 달아오르기만 잘할 뿐, 진득하니 받고 모으고 갈무리하는 건 여자의 몫이다. 

 

여러 짐승들을 키우시던 할아버지. 따로 성함을 적지 못했다. 그래도 기념으로 한 장.

 

 

솔정리에서는 별 수확이 없다. 다니다 보면 이런 마을도 있게 마련이다.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말자. 아마 논이 많아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논농사에 힘을 기울여야 하니 밭에는 신경을 덜 쓰게 되는 것이지. 아무튼 솔정리는 참 들이 넓다. 강화도에서는 고려시대부터 간척을 했다니 그 결과물일지도 모르겠다. 그도 그런 것이 이곳은 강화읍의 고려성과 가깝지 않은가. 몽고에 쫓겨 도망온 귀족들이 먹고 살려고 이런저런 씨앗도 많이 가져오고 농사땅도 넓히고 하지 않았을까?

쓸데없는 생각에 잠길 틈이 없다. 가장 빠른 길로 다음 목적지까지 넘어가야 한다. 차에 길도우미는 있지만 그년은 그저 위치나 확인하는 도구일 뿐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이곳은 길도 없는 농토 한가운데라고 나오니... 솔정리의 너른 논을 가로지르는 농로를 따라 바로 옆의 대산리로 넘어갔다.

 

대산리, 한자로는 大山이다. 주변에 큰 산도 없는데 대산이 된 걸 보면, 우리말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뭔가 변형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난리에 숨어 살던 곳이라 '숨은골'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로 옮겨 적으면서 二十谷이라 한 예도 있다. 숨은골 -> 수믄골-> 스무골이 한자로 이십곡이 되었을 것이다. 이건 물론 일제강점기에 서둘러 전국에 행정구역을 정하면서 생긴 일이다. 우리의 땅이름을 보면 한자의 뜻이 아니라 음만 빌린 이두식이나 한자의 뜻을 풀어서 다시 우리말의 원래 이름이 무엇일지 유추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대산리도 솔정리와 마주하고 있어 대부분 논농사를 짓는다. 그래서 큰 기대는 하지 않고 눈으로 확인하고 넘어간다는 데 의의를 두었다. 그래도 한군데라도 들러야 하지 않을까 하여 어느 집을 들렀다.

 

 

 

 강화읍 대산리 720번지 노흥임 아주머니 댁 전경. 이곳을 줌박골이라 한다.

 

어제는 일요일이라 사람을 보기 어려웠지만, 오늘은 월요일이니 집에 계시겠지. 아니 일요일에 쉬었으니까 월요일에는 더욱 밖에 나가시려나? 일단 사람을 만나야 한다. 아무래 토종이 있어도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헛수고다.

문을 두드리며 누가 계신지 불렀다. 다행히 젊은 아주머니께서 나오신다. 올해 51세이신 노흥임 아주머니. 다들 아시다시피 시골에서 50대면 새파란 젊은이에 속한다. 아주머니께 사정을 설명하고 씨앗이 있으면 좀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집 바로 옆에 있는 창고에서, 또 뒤란에 있는 비닐하우스에서 여기저기에서 씨앗이 나온다. 씨앗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모두 자기 자리가 있다. 

 

잘 갈무리해 놓은 상자에서 씨앗을 꺼내 보여주고 계신 노흥임 아주머니.

 

지리지 않고 달며 크게 자라지 않는다는 뿔시금치, 맛이 파삭하고 잘고 달며 껍질이 얇은 완두는 밑지지 않고 계속 내려 받아 심는다고 하신다. 오라됐다는 파랗고 빨간 갓, 특히 빨간 갓은 고추가루 색도 죽일 정도라니 그 김치를 한번 먹고 싶다. 자루가 긴 편인 검은찰옥수수, 키가 1.5~1.6m쯤 큰다는 찰수수와 빗자루 묶으려고 한쪽에 놔둔 댑싸리는 직접 부벼 씨를 받았다. 논농사를 크게 짓는다고 해서 토종 씨앗이 아예 없는 게 아니었구나. 내 생각이 짧았음이 바로 여실히 드러났다. 역시나 결국은 사람이다. 무엇을 어떻게 하든지 어떤 사람이냐에 따라 씨가 있고 없다.  

 

 

 노흥임 아주머니 댁 뒤란에 있는 비닐하우스에 만들어 놓은 무 움. 숨구멍 겸 무를 꺼내는 구멍에 짚을 박아 놓았다. 요즘은 보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재수가 좋았다.

 

 노흥임 아주머니 댁 찰수수. 이삭자루가 짧지만 탱글탱글 알이 잘 달렸다.

 

 빗자루 매려고 놔둔 댑싸리. 국민학교 때 아이들끼리 댑싸리 빗자루를 먼저 차지하려고 다투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댑싸리비는 잘 쓸리고 다루기도 좋았다. 그런데 요즘은 제초제 때문에 이마저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한다. 그 흔한 댑싸리가!

 

 텃밭에 자라고 있는 갓.

 

다시 차에 올라 기약 없는 길에 나섰다. 날씨도 궂고, 사람도 만나기 어렵고, 사람을 만나도 별 신통한 것이 나오지 않는다. 10시 반이 지나니 추적추적 이슬비까지 내린다. 아~ 하늘이시여, 날씨라도 좋아야 기운이 덜 빠지는데 어찌 이러십니까. 이슬비를 맞으며 이 집 저 집 동냥아치마냥 기웃거렸다.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다 본 돌절구. 다른 데와 달리 깔끔하게 걸려 있는 절굿공이며 아직도 쓰는 듯하여 한 장 찍었다.

 

그러다 마침내 대산리 1132번지 송학골에 사시는 이의분(84), 이기옥(85) 어르신 댁에서 고수를 얻었다. 원래 고수는 북한 사람들이 즐겨 먹는다고 하는데, 할아버지께서 어릴 때부터 아버지께서 자시던 고수를 따라 먹다가 그 독특한 향에 빠져 아직도 씨를 받아 심는다고 한다. 그렇게만 따져도 최소 85년 이상 되었다. 할아버지의 기억에 따르면 강화도에는 전쟁 이전부터 고수가 있었다고 한다. 또 다섯 가지 종류가 섞여 있는 덩굴강낭콩을 얻었다. 맛이 좋아서 그냥 심는 것이라 하신다. 

살아오신 세월만큼 많은 이야기를 풀어내시겠다 싶어 더 듣고 싶었지만, 시간은 없고 갈 곳은 많아 서둘러 자리를 떴다. 비가 오는 탓에 사진기를 꺼내지도 못해 아무 기록이 없어 아쉽다.

 

점심 때가 가까워지면서 비는 그쳤다. 덕분에 다니기도 훨씬 쉬워졌다. 야트막한 고개를 하나 넘어 대산리 1226번지의 유경숙(67) 할머니 댁에 들어갔다. 집 앞에 텃밭이 있어 여기라면 뭐가 있어도 있겠다는 감으로 무작정 들어간 집이다.

 

 광에서 나오시는 유경숙 할머니. 할아버지는 산에 낭구 하러 가시려던 참이다.

 

이 집에서는 뿔시금치는 손이 따가워 싫어 일부러 둥근 것만 골라서 씨를 받은 시금치와 붉은갓, 빨간 것만 골라 받고 있다는 순무, 두가지 종류의 강낭콩을 얻었다. 옛날 게 맛은 좋지만 손도 많이 가고 수확이 적어 안 한다는 말도 얻어 들었다.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토종도 먹어본 사람이나 먹겠지. 그런 맥락에서 토종은 더욱더 설 자리가 없다. 요즘 사람이야 그냥 시장에서 어디서 온지도 모를 싼 값의 먹을거리나 사다 먹으니 말이다. 친환경이다 해서 새로운 농산물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건 단지 농약, 비료 좀 덜 했다뿐이지 맛과는 전혀 상관없지 않은가. 유기농에 맛과 환경까지 생각한다면 그 지역 지역에 맞는 토종을 발굴, 육성해서 고유한 것으로 만들어 가야겠다. 전국적으로 쏟아져 나오면 그건 아무 의미 없다. 오히려 다양성을 파괴하는 주범으로 전락한다.

 

이제 배가 고파서 안 되겠다. 일단 뭐라도 먹고 시작해야지. 그 전에 잠깐 식당 뒤편에 있는 감직골이란 동네 좀 돌아보았다. 한 고택이 있어 뭐라도 있을까 싶어 가보았지만, 주변에 있는 전원주택에 기가 팍 눌려 이제는 그 기세를 찾아볼 수 없는 집이었다. 집 주변에 널린 옛 생활도구들이 이 집의 운명을 대변하는 듯해 씁쓸했다.

 

 갈갈이 해체된 쟁기와 넉가래 같은 농기구가 집 주변에 널려 있다.

 

 

 

 널려 있는 생활도구들. 뒤로는 구들돌도 쌓여 있다.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연미정이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한참을 뒤지고 다니다 옥림리 320번지 동화골에서 콩아줌마를 만났다. 이름 밝히기를 꺼리셔서 그냥 콩아줌마라고만 적었다. 집이 야트막한 동산 꼭대기에 있는데, 이 분은 장에 다니며 농사지은 콩을 판다고 하신다. 지금 있는 건 내년에 내다팔 콩의 씨앗으로 쓸 것만 남겼다. 그걸 얻으려고 싫다는 걸 억지로 강탈하다시피 조금 얻었다. 어렵게 얻은 것은 파랑콩으로, 눈이 재색이고 콩 특유의 비릿한 냄새가 나지 않아 밥밑콩으로 쓴다고 한다. 씨를 얻은 건 좋지만 뭔가 찜찜해서 석연치 않다. 안완식 박사님이 수건을 마련하신다고 했는데, 그거라도 얼른 준비해서 하나씩이라도 드리면 좀 괜찮으려나.

 

콩아줌마. 날씨가 궂어 모자를 뒤집어 쓰고 마당에서 일하고 계셨다.

 

 옥림리의 한 농가에서 본 다양한 호박. 강화도에서는 멧짝호박보다 긴호박이 더 맛있다고 알아줬다.

 

 

이후 옥림리 쪽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이 부근의 조사는 이걸로 마치고 선원면으로 향했다. 선원면은 이름은 도교의 근거지 같은데 불교가 융성했던 곳인가 보다. 지금은 터만 남은 선원사지의 불사 사업이 한창이었다. 그 앞쪽에 차를 세워 볼일을 보고,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옆에 있던 집에 들렀다.

지산리 688번지의 조장호(60) 아저씨는 아들이 농대를 나와 생물XX라는 회사의 대표가 되었다며, 그 아들이 의뢰해 호밀을 키워 연구용으로 보낸다고 한다. 혹시 토종 호밀일까 싶어 확인하니 미국에서 수입한 호밀이었다. 옛날에는 호밀도 씨를 받았는데 이제는 사라졌다. 이 집에서도 파랑콩 두가지를 얻었다.

 

다음은 바닷가 쪽으로 가다가 선원면 신정리 도김말에 들렀다. 이곳에 사시는 문종숙(67) 할머니는 주무시다 나오셨는지 뒷머리가 살짝 눌려 있었다. 이런 날씨에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놈들이 이상한 거다. 나도 집에 있었으면 지금쯤 늘어지게 쉬고 있었을 텐데... 이게 웬 사서 고생일까 하는 생각이 할머니를 보며 잠시 스쳐지나갔다. 올해는 겨울잠 자기 틀려 먹었다. 할머니 댁에서는 빨간강낭콩과 검은나물콩 두가지를 얻었다.

 

 동글동글하신 문종숙 할머니. 뒤에서 보면 머리가 살짝 눌리셨다는...

 

바닷가로 나와 용진진 쪽으로 조금 가다가 다시 지산리로 들어섰다. 지산리 111번지에 사시는 고석준(80) 할아버지가 마당에서 한창 일하고 계셨다. 날도 흐려 일찍 어둑어둑해지고 있을 무렵이다. 날이 어둑어둑하면 일단 집 생각이 먼저 난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랬다. 오늘은 좀 덜하다. 처음 2~3일이 고비가 아닐까 한다. 어디 여행을 가도 웬만하면 그냥 오거나 하룻밤 정도만 자지 이렇게 오래 집을 비운 적이 없었다. 아, 일본에 연수를 갔을 때가 있구나. 아무튼 집을 떠나기 싫어하는지라 왜 이렇게 집을 좋아하냐며 아내에게 집돌이란 놀림도 받았다. 그래도 집에 가만히 들어앉아 있는 게 좋은 걸 어쩌란 말이냐. 

참, 고석준 할아버지 댁에는 할머니가 집을 비우신 관계로 마당에 있던 수세미오이만 몇 개 얻었다. 이건 1960~1970년대 정부에서 장려하던 것인데, 기차 바퀴에 썼다고 한다. 그 자세한 것은 듣지 못했다. 아마 어른들은 아시리라 믿는다.

 

맛있게 담배를 잡수시는 고석준 할아버지. 젊었을 때는 상당한 미남이셨을 게다. 지금도 어디 굽은 데 하나 없으시고 주름도 그리 많지 않으시다. 더구나 웃는 모습이 참으로 매력적이다.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지산리 319번지의 구인숙(60) 아주머니 댁을 찾았다. 몸이 많이 불편하셔서 이제 농사는 많이 줄였다고 하신다. 연세도 그리 많지 않으신데 안타깝다. 씨앗도 아주머니가 아프신 탓에 묵은 것들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싱싱한 놈들로 마련해 놓으셨을 텐데 돌보지 않으니 자연 그 자리에서 그대로 묵었다. 그래도 아직 콩은 밥밑콩으로 쓰려고 꾸준히 심으셨다. 몸도 좋지 않아 고생하며 지으셨을 텐데 사정을 설명하고 조금 얻었다. 이건 서리태로 10월 중순에 거둔다. 크기는 중간 정도이며 보통 서리태보다 열흘 먼저 거두는 것이다. 일찍 잘 여물지만, 그래도 맛은 늦게 거두는 서리태가 더 좋다고 한다. 그래도 농사짓기가 훨씬 수월해 그냥 이걸 심어 먹는다. 시집오기 전부터 심으셨다고 하니 최소 36년 이상된 씨앗이다.

 

 구인숙 아주머니. 불편한 몸이 확 씻은 듯 좋아지진 않겠지만 아프지 마시고 사셨으면 좋겠다.

 

이미 해는 서산마루에 걸렸다. 어둠이 찾아오기 일보직전이다. 서둘러 선원면 면소재지 쪽으로 방향을 잡고 오늘의 마지막 조사에 나섰다. 연리의 연동에 사시는 한동례(78) 할머니 댁이 포착되었다. 집이 아주 오래되고 멋졌는데, 날도 흐리고 어두워 사진에 담지 못했다. 멀리서 그 집만 보고 찾아갔을 만큼 아름답다. 집에 문이 잠겨 있어 포기하고 돌아서려는 찰라, 장에 갔다 오셔서 짐을 바리바리 들고서 누구냐고 뛰어서 좇아오셨다. 그 덕에 집 구경도 하고 씨앗도 얻었다. 개골팥이라고 안완식 박사님께서 재팥이라고 하는 것과 밤콩, 넝쿨콩이 그것이다. 개골팥은 맛있어서 빨간팥보다 비싸다고 한다.

 

이제 5시가 다 되었다. 숙소를 강화읍으로 잡아 그쪽으로 가면서 금월리 379번지 큰말에 사시는 한채영(71) 할머니 댁에 마지막으로 들렀다. 집 건너편에는 순무김치 공장이 있다. 할머니는 옛날 사람 같지 않게 이름이 아주 예쁘시다. 요즘 유명한 탈렌트 이름하고 똑같으시니 말이다. 그걸 말씀드리니 쑥쓰러워하시며 웃음을 지으신다. 가이(개)밥을 끓이고 계시다가 우리를 맞아 좋은 것도 못 드리고 미안하다며 언제 또 오라고 하신다. 하지만 토종 씨앗을 얻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을까. 갓과 피마자, 라까보떼라는 남미의 호박을 얻었다. 이 호박은 몇 년이나 된 것이라는데 어디 하나 썩지도 않고 단단하다.

 

이렇게 오늘 하루도 조사를 끝마쳤다. 4일을 함께 하신 박문웅 선생님께서도 오늘 돌아가셨다. 내일은 안완식 박사님과 둘이서만 길을 나서야 한다. 몇 가지 일을 해야 하니 바쁘겠구나. 하루를 마치고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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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이라도 일요인은 쉬나?

 

 

 

2008년 11월 30일 일요일. 새 아침이 밝았다. 밤새 강한 바람이 전선을 윙윙 돌리더니 아침에도 여전히 춥다.

그래도 해는 또다시 떠올랐고, 토종 유전자원 수집 조사는 계속 이어진다. 오늘은 일요일인데...

7시 30분이 첫 배라고 하는데, 그 배는 놓치고 8시 배를 타고 다시 강화도 창후리 선착장으로 향했다.

 

교동 선착장에서 본 강화도. 배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동안 마침 해돋이를 만나...

 

8시 15분, 어김없이 15분만에 창후리 선착장에 도착해 바로 앞에 있는 해장국 집에서 아침을 해결했다. 그리고 바로 인화리를 향해 출발.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해안을 따라 인화리로 바로 가는 길은 비포장인데다가 군사작전지역으로 출입이 통제되고 있지 않은가. 할 수 없이 에둘러 가는 길인 별립산을 돌아가기로 했다.

 

이 길에도 곳곳에 마을이 자리하고 있어 하나하나 들리면서 나아가느라 시간이 꽤 거렸다. 그리하여 가장 먼저 방문한 집은 하점면 창후리 753번지의 문연자(65) 아주머니 댁이다. 이 댁에서는 한우를 15마리나 키우는데, 마침 소들에게 아침을 주러 나오셨다가 우리의 눈에 띄셨다. 토종을 찾으려면 무엇보다 집에 사람이 있어야 하고, 다음은 60~70대의 할머니가 계셔야 한다. 남자만 있으면 십중팔구는 빈손으로 돌아서기 일수다.

문연자 아주머니께 아침 일찍 찾아온 연유를 설명하고 씨앗을 볼 수 없겠냐고 했다. 아주머니는 우리를 현관의 신발장으로 이끄시더니 거기에서 주섬주섬 갈무리해 놓은 씨앗을 꺼내셨다. 6~7년 길렀다는 고수, 팥, 녹두, 찰옥수수, 땅콩을 얻고 고마움을 전한 뒤 다시 길을 나섰다.

 

신발장에 갈무리해 놓은 씨앗을 꺼내주시는 문연자 아주머니. 사실 인상이 이렇지 않으신데 순간포착이 잘못되었다. 더군다나 심하게 흔들리기까지... 인물 사진은 역시나 어렵다. 동의를 구하든지 아니면 몰래 한 방에 해결해야 하고, 게다가 어두운 곳에서 번쩍임도 쓰지 않고 적당한 자세를 취하실 때 찍어야 한다. 

 

차를 타고 조금 이동하니 곧바로 다른 마을이 이어졌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이 마을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하지만 아침부터 어디를 가셨는지 도무지 사람을 만날 수 없다. 간신히 창후리 634번지의 유덕희(76)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몸이 불편하셔서 이제 농사는 많이 짓지 않고 그냥 집에서 먹을 거나 몇 가지 하고 만단다. 다른 건 새로운 것이 없어 밥밑콩인 청콩을 얻었다. 10월 중순에 거두는데, 밥에 넣어도 좋고 두부를 해도 많이 난다고 하신다. 이 콩은 눈이 검고 속까지 퍼렇다.

 

유덕희 할머니. 농진청에서 조사를 나왔다고 하면 가끔씩 이 할머니처럼 취조받는 사람처럼 되시는 분들이 있다. 일하기에는 편하지만 이것이 과연 옳을까? 옳고 그름을 따지면 한도 끝도 없겠지만, 이건 좀 아니라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다시 차에 올라 창후리 간재라는 곳에 사시는 안효철(79) 할아버지 댁에 들렀다. 마당에서 엿기름을 말리고 계셨는데, 이 집은 잠시 젊었을 때 객지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온 곳이란다. 성격이 깔끔하고 부지런하시다는 것이 집의 곳곳에서 풍겨나온다. 이런 분이라면 남자라도 씨를 가지고 계신다. 역시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봐야 할 일이다. 나물대콩과 메주콩을 얻었다. 이곳에서는 콩나물콩을 보통 나물대콩이라 한다. 그런데 안완식 박사님의 말씀에 따르면, 나물대콩은 나물태를 잘못 부르는 것이라고 하신다. 박사님 말씀이 맞을 거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이런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과학자의 입장에서는 학문 체계를 세우려면 정확한 특징을 잡아 이름을 붙여 분류하고 정리해야겠지만, 그래도 농민이 부르는 현실의 이름도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내가 좀 이름에 민감해서 그럴 수도 있다. 

 

안효철 할아버지. 집 안 곳곳이 깔끔하다. 내가 지저분해서 그런지 깔끔한 집에 가면 참 부럽고 좋다.

 

낮이 되면서 날은 많이 풀렸다. 햇살도 좋아 차안에서 햇살을 받으면 따뜻하다. 햇살이 약해지면 엄청 춥겠지. 며칠 전에 본"선샤인"이란 영화가 떠오른다. 미래의 어느 날, 태양의 활동이 저하되어 지구에 빙하기가 찾아온다. 특수 임무를 맡은 대원들이 우주선을 타고 폭탄을 하나 끌고서 태양에 투하하러 길을 나선다. 그 길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고뇌, 갈등이 영화의 주요 소재다. 미래를 그린 작품에는 어두운 전망이 소재로 자주 쓰인다. 그만큼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가 인간에게 잠재해 있기 때문이리라. 옛날부터 점집이나 무당이 하는 역할은, 다른 게 아니라 공포를 두려움으로 치환해 현재에 충실하며 몸과 마음을 닦도록 함으로써 삶을 편안히 살도록 해주는 것이다.

오늘은 일요일. 사람들이 모두 공포를 덜고자 교회로 모여든다. 신봉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니 해병대 검문소가 버티고 서 있다. 어제 교동도에서도 느꼈지만, 북한과 정말 지척에서 살고 있구나. 신분증을 맡기고 들어가 도착한 송산 마을에는 성공회 소속의 교회가 하나 있었다. 거기에 주차된 차와 하나둘 모이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오늘이 일요일임을, 그리고 교회에 가는 사람이 많음을 새삼 깨달았다. 강화에는 유별나게 성공회 교회가 많다. 감리교와 함께 성공회는 그 뿌리가 영국이다. 영국의 종교 전통은 어떻길래 현실에 참여하여 실천하는 성격이 강한 걸까?

  

송산 마을의 한 폐가. 초가지붕을 덮은 곳은 창고였을 것이다. 마을에는 소나무가 많은데, 그 때문에 송산이란 이름이 붙었을까? 우리말로 하면 솔뫼겠지.

 

송산 마을에서는 이 집 저 짚 쑤시고 다녀도 사람을 볼 수 없었다. 딱 한 집. 양산면 인화리 송산의 서옥례(71) 할머니만 만날 수 있었다. 손주들이 놀러오면 주려고 강원도에서 찰옥수수를 가져다 심는다는 할머니는, 시어머니가 하던 팥과 녹두를 주셨다. 특히 할머니는 민통선 검문하는 걸 아주 불만스러워하셨다. 미친 짓하는 거리라며 간첩 하나 못 잡으면 그런다고 막 뭐라 하셨다. 민통선 안에 사는 사람의 심리는 어떨까?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여기는 내 고향이 아니라는 부평초 같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다시 검문소로 나와 신분증을 찾았다. 해병대 아이들도 고생이 많다. 젊은 나이에 군대에 끌려와 고생한다. 내 인생에서 다시는 가기 싫은 곳 학교와 군대. 군대의 기억은 몸서리가 난다. 눈 하나 바친 대신 딱 중간까지만 하다가 나왔으니 다행이다. 검문소를 나오면 바로 근처에 새말이란 동네가 있다. 안완식 박사님은 '새로운', '신新' 이런 게 붙는 동네는 가볼 것도 없다고 하신다. 오랜 경험에서 나온 말씀이다. 새롭게 바꾸고 변하면 예전에 있던 걸 싹 다 갖다 버린단다. 그래도 오늘은 사람도 없고, 그래서 별 성과도 없으니 그냥 들렀다.

한 집에 들어가니 이 동네로 귀농을 한 분이란다. 그래서 자기는 없지만 옆 집 할머니는 오래 사셨으니 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친절히 알려주신다. 정말 곳간에서 인심난다고, 여유로운 집에서는 반응부터 다르다. 여유로워서 맘씨가 좋은 건지, 맘씨가 좋아서 여유로운 건지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란 질문과 같은 오류다.

하점면 신봉리의 윤상례(75) 할머니는 참 고우시다. 할머니의 모습만큼 집도 단아하다. 말씀도 어찌나 조근조근 하시는지 모른다. 나도 저리 곱게 늙어야 할 텐데... 텃밭도 예쁘게 잘하시며 사신다. 여기서 10년 이상 되었다는 흰강낭콩, 덩굴강낭콩, 양사면의 친구에게 얻었다는 속이 빨간 청호박을 얻었다. 그러고 나오는 길에 몇 십 년 되었다는 순무를 보고 이 씨마저 얻었다.

 

 윤상례 할머니의 집.

 

윤상례 할머니. 곱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용모셨다. 옷도 너무 튀지 않고, 그렇다고 너무 칙칙하지도 않게 잘 갖춰 입으셨다.

 

슬슬 점심 때가 다가오니 배도 고픈데 마땅한 식당 하나 없다. 양사면 쪽으로 가면 무엇이 있으려나 하는 심정으로 일단 차를 양사면으로 돌렸다. 양사면 입구에는 또 검문소가 있다. 여기로 들어가면 그야말로 북한과는 엎어지면 코 닿는 거리다. 양사면의 북한과의 최단 거리는 2km밖에 되지 않는다. 헤엄에 자신 있다면 총만 안 맞으면 맘 먹고 건너올 거리다. 이런 곳을 아이들에게 자주 보여줘야 한다. 통일 교육은 몸으로 느껴야지. 어릴 때 철마는 달리고 싶다와 용산 전쟁박물관에 간 기억이 떠오른다. 아이는 하얀 도화지와 같다. 어른이 어떻게 세상을 보도록 이끄냐에 따라 그 아이가 보는 세상이 달라진다. 직접 이런 곳까지 와서 북한이 이렇게 가깝구나. 그런데도 서로 만나지도 못하며 사는 현실을 몸소 느끼도록 해주면 좋겠다.

 

이번 검문소에서는 돌아서 다른 곳으로 나가려고 하니 신분증은 맡기지 않겠다고 했다. 그 정도 융통성은 있어서 간단한 신상명세만 적고 다른 곳으로 나갈 때 말만 하면 된다고 한다. 조금 달리니 교산리 응곡이란 마을이 나타났다. 잠시 차를 멈추고 내려서 어느 집이 좋을지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은행을 줍고 있는 할머니를 만났다. 692번지 사시는 구유순(71) 할머니다.

우리 일행을 어찌나 반갑게 맞으시는지 원래 아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중에 말씀하시는데 시어머니 신조가 손님이 마당에 오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대접해서 돌려보내야 한다고 강조하셨단다. 그걸 평생 실천하고 계신 것이었다. 요즘은 현관문만 닫으면 외부와 완전히 차단이 되니 손님 접대고 뭐고 없다. 그리고 이상한 사람들이 많이 다니긴 한다. 종교를 전파하려는 사람, 물건 파는 사람, 전단지 돌리는 사람... 그만큼 범죄도 잦고, 그러니 믿을 수 없어 꼭꼭 문을 걸어 잠근다. 이런 것만 보면 이거 세상이 발전하기는 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많다.

그래서 우리를 기어코 마루에 앉히시더니 얼른 커피를 내오신다. 커피를 마시다 보니 어느새 국수가 나온다. 잠깐 앉아 있는 사이 얼른 물을 끓여 국수를 만들어 오신 것이다. 어찌나 몸이 재시던지 모른다. 말도 빠르시고, 그래서인지 집안 살림도 정신이 하나도 없다. 여기저기 막 쌓여 있다. 사람을 생각하고 챙기시는 마음만큼은 누구와도 견줄 수 없으신데. 이 집에서만 4대째 사신다는 말처럼 집 안 곳곳에 오래된 것들이 쌓여 있다. 팥은 시집올 때부터 심어 한 50년 됐고, 참깨는 육모인데 흰색이고, 순무도 빨간 것과 흰 것이 섞여 있다. 순무는 예전에 아들이 수원에 무슨 대회에 내서 상까지 타온 적이 있다고 하신다. 단호박도 있었는데, 요즘 것이 아니라 이것도 시집올 때부터 오라된 것이란다. 오라는 오래의 강화도 사투리다. 여기는 말씨가 특히 북한과도 비슷했다. 할머니 입에서 문득 "기다려 보시라우"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어릴 적 반공교육을 철저히 받을 때는 이런 말을 들으면 경찰에 신고했을 거다.

 

몇 십 년 전 수원의 어떤 대회에 출품해서 상까지 받았다는 순무의 후손들.

 

구유순 할머니. 집안 살림을 정신 없이 늘어놓으셔서 여기서 어떻게 사시나 했는데, 마음씀만큼은 바다와 같이 넓다. 안마당에는 작은아들이 쓴다는 민간요법 약재도 많았다.

 

생각지도 않은 국수 대접에 배가 부르니 날도 따땃하고 졸음이 스르르 오려고 한다. 하지만 돌아볼 곳은 많고 시간은 없다. 늘어지는 몸뚱이에 채찍을 가해 무거워진 배를 안고 일어섰다. 다음 목적지인 북성리로 향했다.

어느 집엔가 골풀을 세워 놓았다. 자리라도 새로 짜려고 하시나? 중고등학교 때 귀가 닳도록 들은 내용이, 바로 강화도는 화문석으로 유명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강화도에 온 지 3일이 지나도록 화문석의 화자도 듣지 못했다. 어디 한군데서만 집중적으로 작업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 화문석은 값싼 중국산에 밀려 돈이 되지 않아 포기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연세가 많으셔서 관두셨는지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알아보자고 수첩에만 기록해 놓았다.

 

강화도에서 유일하게 본 골풀 다발. 주인 아주머니는 돈을 벌러 나가셔서 자세한 건 알 수 없었다. 아주머니가 비운 집에는 조금 모자란 아들만 남아 있었다. 시골에 남은 젊은 사람은 이 집과 같아 마음이 쓰렸다.

 

다시 차에 올라 동네를 도는데 바쁘게 어딘가 가시는 아주머니를 보았다. 놓치면 안 된다. 얼른 내려 다가가 말을 붙였다. 그리고 집까지 가는 데 성공. 하지만 워낙 마음이 바쁘셔서 아저씨께 우리를 넘기고 바로 일을 보러 가셨다. 그렇게 만나 이야기를 나눈 분이 주남재(71) 할아버지다. 물론 이 마을에서 오라 사셨다. 집 입구에 호박 하나가 썩어가고 있어 먼저 호박의 내력부터 물었다. 10여 년 전부터 심는데 맛이 좋다고 한다. 그밖에 찰옥수수와 찰수수를 얻었다. 다니면서 보니 메 곡식은 거의 없었다. 다들 하시는 말씀이 메ㅇㅇ는 맛이 없다고 하신다. 4년 전인가 강원도 평창에 이기철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는데 그분 말씀은 메 곡식이 약이 된다는 것이었다. 찰 곡식은 금방 소화가 되어 약발이 떨어진다며. 그렇지만 맛은 덜하기에 사람들에게 버림을 받고 있다.

 

씨를 채취하고 있는 주남재 할아버지 댁의 호박. 나중에 한 개 얻어온 호박을 베어 맛을 보니 무척 달았다.

 

주남재 할아버지. 칼을 들고와 직접 호박을 해부해 주셨다. 

 

북성리를 한바퀴 돌아서 나가는 길에 하우스에 홀로 앉아 계신 할머니를 보았다. 다가가 말을 건네니 치매에 걸려 아무것도 모르시는 분이었다. 나이듦은 이런 것인가? 이번 조사를 다니며 나이든 분을 많이 보는데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다. 나도 언젠가는 그런 모습이 될 거라는 예감 때문에 그럴지도 모른다. 아마 석가는 이런 기분에 출가했겠지.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뒤로 마당에 놓인 호박 가운데 특이한 걸로 2개만 집어 왔다.

 

북성리 요곡이란 마을에 잠깐 들렀지만 마땅한 집이 없었다. 무슨 별장 같은 집이 많았다. 이런 곳까지 들어와 그렇게들 사는구나. 한 50대 아저씨와 잠깐 이야기만 나누고 바로 동네를 벗어났다. 그리고는 강화도의 최북단인 철산리까지 올라갔다. 그곳에는 얼마전 새로 지은 전망대가 있었다. 올라가서 망원경으로 보면 북한 땅이 훤히 보인단다. 하지만 그렇게 놀고 있을 시간이 없기에 그냥 통과. 철산리에 있는 마을은 마치 북한의 선전 마을처럼 그렇게 생겼다. 지나면서 보았기에 미처 사진까지 찍을 여유는 없었다.

 

검문소를 하나 지나 덕하리에 들어섰다. 가다가 보니 이름만 많이 들은 마리 학교가 여기에 있었다. 강화도에 있다는 건 알았는데 이렇게 깊숙한 곳에 있었구나. 아이들 맡기고 여기까지 오가는 부모님들의 열성이 참 대단하시다. 나도 자식을 낳으면 그렇게 될까? 알 수 없다.

덕하리 194번지의 김대형(72) 할아버지를 만났다. 이 분은 농부발명가시다. 마침 안마당에서 작업을 하고 계셨는데, 자동으로 고추의 배를 따는 기계를 만들고 계셨다. 이걸 이십 얼마에 판다고 하신다. 손매가 재주 많게 생기셨다. 우리는 뭔가 대단한 것을 너무 멀리서 찾는다. 멀리 가야 대단한 것이 있고, 그래야 그걸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겠지. 하지만 파랑새 이야기처럼 내가 보고 싶고 필요한 것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바로 내 주변에 있거나 바로 나에게 있다. 먼저 자신을 돌아봐야 할 일이다.

 

가지런히 정리된 김대형 할아버지의 농기구. 말이 할아버지지 그렇게 나이가 많아 보이시지 않는다. 마리 학교 아이들이 가까우니 이 할아버지의 강의도 좀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집에서는 그 유명한 장단백목을 조금 얻었다. 요즘 장단에서 콩 축제를 하는데, 실제로 장단백목이 나오지는 않고 거의 개량종이라고 한다. 그냥 과거에 콩이 유명했다는 후광으로 콩 축제를 하는 팥소 없는 진빵 같은 행사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 파주시는 장단백목을 찾고 보급해서 제대로 된 장단 콩 측제를 열어야 할 것이다.

이 집에서는 그 유명한 장단백목을 조금 얻었다. 요즘 장단에서 콩 축제를 하는데, 실제로 장단백목이 나오지는 않고 거의 개량종이라고 한다. 그냥 과거에 콩이 유명했다는 후광으로 콩 축제를 하는 팥소 없는 진빵 같은 행사가 아닐 수 없다. 앞으로 파주시는 장단백목을 찾고 보급해서 제대로 된 장단 콩 측제를 열어야 할 것이다.

 

인사를 드리고 나와 그대로 내달려 또 덕고개를 넘어 신봉리에 도착했다. 오늘 이 동네 정말 자주 온다. 신봉리 740번지 김범수(70), 최인강(69) 어르신 댁에 무작정 들어가 기별을 넣었다. 바로 아주머니가 나오셔서 사정을 이야기하니 이런 것도 가져가냐며 하나둘 꺼내 오셨다. 20년 되었다는 껍질이 까만 수수, 알이 굵고 눈이 황백색인 메주콩, 팥, 들깨를 얻었다. 요즘 중국사람들이 아주 한국사람을 죽이려고 작정했는지 이상한 먹을거리가 자꾸 들어온다고 걱정하시며, 이걸 가져가 잘 교미해서 배 이상 수확나게 해 달라고 부탁하셨다.

 

최인강 아주머니. 중국사람들 때문에 걱정하시며 한 말씀하시는 모습.

 

이제 하루가 다 저물어가고 있다. 슬슬 몸에서 반응이 온다. 쉬고 싶다, 쉬고 싶다, 쉬고 싶다. 마지막 기운을 짜내 해가 저물 때까지는 길을 나선다. 장정2리를 잠시 들렀다. 여기는 귀농해서 잘 꾸미고 사는 집이 꽤 눈에 띈다. 젊은 아줌마 둘이 아이 둘을 데리고 집으로 향하는 모습도 보인다. 하지만 토종은 별로 살 것 같지 않다. 첫째, 길이 잘 뚫려 여차하면 사다가 심지 계속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동네 분위기가 새로 바뀌어서 오래된 건 그리 남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이 안완식 박사님의 견해였고, 진짜 그러했다. 그냥 미처 따지 않고 버려놓은 까만 덩굴강낭콩만 채집해 왔다.

 

장정리에서 북쪽으로 고개를 하나 넘어 송해면 양오리에 들어섰다. 토종이 있을 만한 집을 발견해 찾아가 문을 두드렸지만 서울에 나가고 계시지 않았다. 그 옆집에 산다는 젊은 친척이 나와 무슨 도둑놈처럼 취급을 하기에 기분이 언짢았다. 그렇지만 어쩌랴, 꼭 도둑놈으로 오인받기 쉬운 걸. 뭘 조사할 것이 있다고 누가 이 촌구석까지 들어와 이렇게 기웃거리랴. 그리고 사실 앞마당에 놔둔 황차조를 몇 개 주인 허락없이 따온 것도 사실이다.

 

송해면 양오리 421번지 한채덕 어르신 댁의 네모참깨. 주소와 이름은 문패에 써 있었다. 이것에 대해선 물어보지 못했다. 이번 조사를 통해 참깨에는 육모와 네모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하긴 그동안 참깨 농사는 별 관심이 없었다.

 

한채덕 어르신 댁에서 따온 황차조. 무척 탐스러웠다. 내가 심었을 때는 아주 빈약했는데, 역시 땅이 걸어야 하나 보다. 

 

언짢음은 툴툴 털고 해가 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더 불 요량으로 논둑길 한가운데를 달려 송해면 상도리로 향했다. 마침 길에서 아주머니 세 분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한 분은 작은 손도끼를 들고 낭구 하고 있다. 이렇게 여러 명이 있으면 아무것도 안 나온다. 한 명만 찍어서 그분을 집중 공략해야 한다. 그럼 집까지 따라오라 하시는데 그럼 끝. 따라가면 이것저것 나오기 시작한다. 이번 조사를 겪으며 배운 방법이다. 

그렇게 따라간 상도리 287번지 박승옥(71) 할머니 댁. 왜콩이라 부르는 강낭콩, 연하고 가지를 많이 치며 맛이 좋다는 조선파, 나물대콩, 팥 등을 얻었다. 하루의 마지막을 잘 마무리해 뿌듯하다.

 

박승옥 할머니. 자꾸 물어보고 또 없냐고 꺼내 달라고 조르니 나중에는 귀찮다며 얼른 가라고 쫓으신다. 이제 보니 표정도 많이 굳으셨구나.

 

이 마을의 딱 한 집만 더 들러 긴호박을 얻고 5시 조금 넘어 조사를 마쳤다. 바로 강화읍으로 나가 5시 25분 남산뜰이란 집에서 영양탕으로 몸보신하다. 이럴 때일수록 이런 걸 먹어야 한다시기에 한그릇 먹었다. 안철환 선생님은 사정이 있어 잠시 집으로 돌아가셨다.

6시 하트모텔에 들어가 하루를 마무리하고 결산도 끝냈다. 내일은 월곶, 대산, 신당리로 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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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도 사람들은 역사와 함께 산다

 

 

 

2008년 11월 29일. 오늘은 교동도로 넘어가 토종 조사를 실시할 예정이다. 날씨는 맑지만 바람이 세게 분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준비하고 7시 40분 출발.

가는 길에 하점면사무소 근처에 있는 풍년 순대국이란 곳에서 아침을 먹었다. 아끼바리로 밥을 지었다는데 기름이 좌르르 흐르는 것이 밥만 먹어도 맛있다. 이후 별일이 없으면 이곳에 가서 아침을 먹었다. 더 자세히 소개하면 창후리 방향으로 가는 길에 오른쪽에 가게가 있다. 강화도를 가시면 꼭 한 번 들러보시라. 

 

아침을 먹고 창후 선착장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이미 차들이 줄을 서고 있다.

잠깐 구경도 하고 사진도 찍을 겸 내리는데, 강한 바람에 자동차 문이 훽 하고 날린다. 그 바람에 옆차의 문짝을 살~짝 구겨놓았다. 젠장 이를 어쩐다. 난감하다.

다행히 주인이 너그러이 넘어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거 돈을 물어줘야 하는 건가 생각하던 차였기 때문이다. 지난 봄, 열심히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열린 차문에 그대로 박으면서 차문을 아주 박살낸 적이 있다. 그때도 별일 없이 넘어갔는데, 아무튼 그 이후 또 차 때문에 깜짝 놀랐다.

 

해운회사 관계자에게 잠시 교동에 대해 물었다.

"교동이 저기 보이는 섬인가요?"

아니란다. 그것은 석모도로, 석모도는 길쭉하고 좁은데 비해 교동은 땅이 넓어 벼농사를 많이 짓기에 부자가 많다고 한다.

 

저 멀리 보이는 섬은 교동이 아닌 석모도이다. 교동도를 찍기에는 시간이 없어서 이걸로 만족하고 얼른 차에 탔다.

 

9시 35분 드디어 배가 움직인다. 강화와 교동 사이의 빠른 물살을 헤치며 나아가길 15분. 싱겁게 벌써 도착했다.

섬 사이가 가까운 것인지, 아니면 기술이 좋아진 덕인지, 그것도 아니면 둘 다 인지.

아침을 먹으며 첫 목적지로 삼은 교동면 상룡리로 향했다. 선착장에서 금방이다.

상룡리 650번지에 사시는 전흥제(72), 신월희(73) 어르신을 찾았다. 지나가며 보다가 이 집에는 토종이 있을 만하다고 느끼면 무작정 찾아가 문부터 두드리고 본다. 집을 고르는 데에는 안완식 박사님의 살아있는 경험과 독특한 방법 큰 역할을 한다.

전흥제 어르신은 교동 전씨인데, 교동 전씨는 이 섬에서 52대째 살고 있다고 한다. 그 가운데 자신의 집안은 이 집에서만 3대째 산다고 하신다. 교동 전씨는 고려 말 정용산원을 지낸 전성무라는 분이 시조다. 하지만 그 유래가 정확한 것은 아니다. 아무튼 중요한 점은 교동도가 고려 때부터 중요한 큰 섬이었으며, 옛날부터 많은 사람이 살았다는 것이다. 이 분의 말을 들으니, 교동도는 경기도, 황해도, 평안도의 수군을 통솔하는 삼도수군통어영이 있던 곳이다.

 

전흥제, 신월희 어르신 댁. 상룡리로 들어가는 길에서 처음 보이는 첫 집. 처마 밑에는 강남 간 제비가 떠난 제비집이 남아 있다.

 

오랜 역사만큼 토종도 함께 살아 있을까? 역시 몇 가지 토종 씨앗을 얻을 수 있었다. 겉보리와 뿔시금치가 그것이다.

 

엿기름을 하려고 집 앞 텃밭에 조금씩 심는 겉보리. 80cm 정도의 키에, 육모보리라고 한다.  

 

뿔시금치. 뿔 때문에 손이 아프지만, 맛이 좋아 밑지지 않고 계속 씨를 받고 있다고 하신다. 장에서 사다 먹는 건 아무 맛도 없다니, 궁금해서 한 잎 뜯어 먹어 보았다. 말이 필요 없다. 뿔시금치 먹어 봤어요? 못 먹어 봤으면 말을 말어. 

 

좋은 씨를 주려고 키질하신 뒤 뿔시금치 씨를 얻는 모습

 

이제 어디로 갈까? 바로 옆집을 보니 이 집도 뭔가 심상치 않다. 발길을 바로 그리로 돌렸다.

 

상룡리 631번지 조시환(71) 어르신 댁. 멀리서 보고 뭔가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서둘러 발길을 옮겼다. 

 

문 앞에 다가가 크게 외쳤다. "계세요~" 집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그때, 저쪽에서 짐승들 밥을 주고 오시는 조시환 어르신을 만났다.

집사람이 집에 없어서 무슨 씨가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신다던 조시환 어르신. 그래도 몇 가지 씨를 찾아 나눠주셨다. 많은 짐승을 키우시는 잘생긴 할아버지.

 

여기까지 찾아온 사정을 설명하며 토종 씨앗이 집에 있으신지 물었다. 그러자 남자들은 씨를 어디다 두는지 잘 모른다며 살림을 뒤지기 시작하신다. 그렇게 나온 나물콩과 적팥. 나머지는 도무지 모르겠다고 하신다. 남자는 씨나 뿌리지 기르고 거두는 일에는 이렇게 무심한 것일까? 토종 조사를 다닌 내내 만나는 남자들 대부분이 그랬다. 우리집은 그 반대인데 말이다.

군대밖에는 섬 밖에 다녀온 곳이 없다고 하시면서 옛날 건 맛있는데 배가 불러서 그런지 지금 것들은 맛이 없다고 하신다.

 

조시환 할아버지가 키우는 닭 가운데 한마리. 털이 너무 멋있어서 한 장 찍어 주었다. 어찌 도화서의 화공의 솜씨라도 이를 따라갈 수 있으랴! 먹으로 찍어 그린 닭이 그나마 이와 비슷하리.

 

이후 상룡리를 더 뒤졌다. 하지만 집에 사람이 없거나 토종은 없다는 말만 듣고 나왔다. 무슨 바람이 이리도 심하게 부는지. 섬이라 그런 것인가? 아님 날씨가 그런 것인가? 별 성과도 없는데다 바람까지 세게 부니 더 춥다.

바람이 심한 섬임을 보여주는 덧문. 육지와는 다른 창문 구조다. 

 

 

가마니를 짜는 기계. 옛날에는 윤이 번쩍번쩍하며 값지게 쓰였겠지. 토종도 전통농법도 별볼일없는 시대와 함께 이런 농기구도 그 빛을 잃었다.

 

상룡리를 떠나 농로 같은 길을 따라 이동했다. 가도 가도 사람이 없는 빈 집이거나 토종이 없는 집뿐. 이런 시간이 길어질수록 지루하고 힘들기만 하다.

저 멀리 보이는 마을을 향해 갔다. 먹음직스럽게 곶감을 달아 놓아 하나 빼먹고 기운을 차려 본다. 이런 건 도둑질이 아니겠지?

 

옆집으로 가 사람을 찾았다. 드르륵 거리며 열리는 문. 한창 김장을 담그고 계셨다. 무슨 일이냐며 딱딱한 얼굴로 물으시는 아저씨. 뭔가 잘못 찾아온 것일까? 차분히 사정을 말씀드렸다. 이야기를 다 듣더니 아저씨의 태도가 바뀌셨다. 적극적으로 이야기하며 아주머니를 불러 씨앗을 꺼내 보여드리라며 우리를 친절히 대하신다.

이곳은 알고 보니 아직도 상룡리였다. 진작 벗어난 줄 알았는데 상룡리가 참 넓기도 하다. 상룡리 371번지의 전재순(68), 한정순(68) 씨가 사는 동네다. 아저씨는 예전에 교동에 있는 한전에서 근무하시다 이제 퇴직하여 농사를 짓는다고 하신다. 어제까지만 해도 딸 집에 가서 아이를 봐주다가 오늘 아침 배로 들어왔다고 하신다. 인연이 되려면 이렇게 되는 것인가 보다.

 

 100년도 넘었다는 전재순 씨 댁. 교동도의 집은 ㅁ자 구조다. 그래서인지 밖에서 볼 때는 커 보이는데, 막상 안마당에 들어서면 무지하게 좁아 보인다. 이것도 섬이라는 조건과 관계가 깊다. 그리고 특히 방에 불 때는 곳이 대부분 외부로 노출되어 있다. 一자나 ㄱ이나 ㄴ자 구조의 집과는 다른 특이한 점이다. 

 

 새로 고치면서 제비집 때문에 남겨 놓았다는 부분. 우리는 제비와도 어울려 살았다.

 

 멧짝호박(좌)과 둥근호박(우). 멧짝은 멧돌이라는 말이다. 형태는 물론 속의 색깔과 맛, 씨앗의 모양까지도 다르다. 빨간 것이 당도가 더 높았다.

 

 전재순, 한정순 씨와 이야기하고 있는 안완식 박사님. 그러고 보니 세 분은 모두 동갑이시다.

 

이 집에는 이것저것 아기자기하게 많은 토종이 살고 있었다. 녹두, 피마자와 잎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피마자콩, 속이 퍼런 까만콩, 등티기콩, 밥하면 오가피 향이 난다는 오가피콩, 육모깨, 보리, 봄시금치, 멧짝호박, 둥근호박 ...... 기다리고 기다리던 토종만 만난 것이 아니라, 여러 다양한 토종을 만난 집이다. 하루만 늦었어도 또 인천에 있는 딸 집에 가셔서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손이 많이 가고 힘들 텐데 어떻게 이렇게 많은 걸 심냐고 물었다. 시골은 다 일을 하는데, 나 혼자 산에 올라가 가만히 앉아 있을 거냐며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라고 하신다. 헤어지기 전 이 씨들을 밑지지 말고 잘 심고 가꾸어 달라는 부탁을 드리며 집을 나섰다.

 

이제 확실히 상룡리를 벗어났다. 이번에 도착한 곳은 봉소리라는 곳이다. 봉황의 둥지라는 뜻인가? 이 뒷산이 봉황을 닮거나 풍수지리로 보면 봉황의 둥지 같은 곳이겠거니 하며 들어섰다. 깔끔한 한 집을 보고서 실례를 무릅쓰고 문을 두드렸다. 갑자기 길 건너편에서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아주머니가 나타났다. 누구신가 하며 보니 집주인이 아닌가. 무슨 일로 왔냐고 화통하게 물으시는 모습이 뭔가 나오려나 보다.

아니나 다를까. 저 아래서 김장하다가 괜히 뛰어왔네 라는 소리를 입에 다시며 이것도 꺼내 보여주고, 저것도 꺼내 보여주고, 나중에는 커피 끓여줄 테니 그거 마시고 가라며 자꾸 붙드신다. 얼마나 마음이 넓고 고마운지 두 번 세 번 인사를 드렸다.

 

 봉소리 595번지 김춘자(69) 아주머니. 아주머니와 할머니의 경계는 무엇일까? 예전 같으면 할머니라고 불러야 맞을 거다. 일찍 사별하셨다는데 구김도 없이 밝고 명랑하며 부지런히 사시는 어르신이다. 

 

그렇게 꺼내서 보여주신 것 가운데 순무, 뿔시금치, 들깨, 참깨, 고수, 강낭콩 씨앗을 조금씩 얻었다. 그리고 한가지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꽤 오래전 안완식 박사님이 이곳 교동도에서 분홍감자를 찾았는데, 잘못해서 그 씨를 잃었다며 어디 분홍감자가 없냐고 물으셨다. 그러자 봉소리 신골이란 곳에 사는 신형식 씨가 그런 감자를 한다는 정보를 알려주셨다. 자연스럽게 다음 목적지가 정해졌다. 이제 봉소리 신골로 넘어간다.

 

봉소리 신골에 도착하여 또 무턱대고 신형식 씨를 찾았다. 다행히 몇 집 있지 않아서 집은 찾았지만 또 사람이 없었다. 이건 씨앗 찾으려면 사람을 먼저 만나야 하는데, 사람 만나기가 하늘에 별 따기다. 위쪽에 한 할머니께서 하우스에서 끝물로 딴 고추를 닦고 계셨다. 바쁘게 일하고 계셔 미안했지만 끈덕지게 붙어 앉아 씨앗을 찾았다. 그런데 어떤 우연인지 이 집은 신골 220번지로 신원식 씨 댁인데, 두 분이 친척 관계셨다. 허리가 바쯤 굽은 할머니께서 땅에 어렵사리 걸음을 떼어 광으로 쓰는 방으로 이끄셨다. 자식들이 오면 싹 치워서 무엇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셨지만, 여기저기 뒤지시더니 조선오이와 큰박, 상추, 시금치 씨를 찾아서 주셨다.

  

 신원식 할아버지 댁의 무너진 굴뚝에 앉은 그을음 자국. 이 집의 역사를 대변하는 듯하여 사진에 담았다. 할머니께서 끝까지 이름 밝히기를 꺼리셔서 문패에 적힌 할아버지 이름만 적었다.

 

아랫집을 마저 돌고 오전 조사를 끝마치기로 했다. 신골 222번지 신봉균(70) 씨 댁에 들어가 건너 마을 사람한테 얻었다는 긴호박 씨를 얻고 교동읍으로 나갔다.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길에 보이는 농가에도 있을 만하면 하나하나 들러 사람을 찾고 토종을 찾았다. 하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큰길 주변에서는 웬만하면 토종을 찾아보기 힘들다. 신작로가 뚫리면 새로운 문물과 문화, 사람이 쏟아져 들어오는 영향이 클 것이다.

 교동읍으로 가는 길에 만난 고구저수지. 바람이 세게 불어 마치 바다처럼 파도가 쳤다. 하긴 저 둑 너머가 바로 바다다.

13시 30분 점심을 먹기 시작해, 14시 30분 다시 조사를 시작했다. 잠깐의 짬도 없이 강행군이다.

이번에는 삼선리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처음 만난 집에 들어가니 아주머니가 편찮으시다. 그래서일까? 집 안도 어수선하고 정리되지 않았다. 그래도 이런 저런 씨를 보여주셨는데, 다 구한 것이라서 화초호박만 하나 얻어 왔다. 이건 우리나라에 도입된 지 얼마 안 되는 남미산 호박이라고 한다.

 

다음에는 삼선1리 241번지의 한유현 할아버지 댁을 찾았다. 옛날에는 소도 풀어 먹이고 농사도 많이 지었는데, 이제는 늙어서 농사도 못 짓고 자신과 자식들 먹을거리나 좀 짓고 만단다. 왠지 그 말에서 쓸쓸함에 배어 나온다. 다른 건 없고 뒤웅박과 갓 씨를 좀 얻었다.

 

 

 

 

 인사리 447번지 한영순(66) 아주머니 댁. 겨울채비로 창문에 방풍막을 대느라 바쁘셨다.

 

삼선리는 논이 넓다. 게다가 반듯반듯 정리도 잘 되었다. 해운회사 아저씨의 말처럼 논농사에 전념하느라 그런지 씨앗이 다양하지 못하다. 별로 얻을 것이 없었다.

다음으로 인사리로 넘어갔다. 이곳도 들이 넓지만 뒤로는 조그만 뒷산이 버티고 있어 그래도 있음직해 보였다. 그리고 찍은 인사리 447번지. 과연 이곳에는 무언가 있었다. 키가 큰 찰수수와 작은 찰수수, 메주콩, 무이 씨를 얻을 수 있었다.

 

 알이 굵은 것이 키 작은 찰수수, 알이 없어 보이는 것이 키 큰 찰수수. 한영순 아주머니께서는 어디 가시려는 것도 아닌데 곱게 화장을 하시고 옷도 예쁘게 입으셨다.

 

그 밑으로 내려오니 벽에다 커다란 수수를 달아 놓았다. 자연히 발길이 그쪽으로 향했다. 인사리 451번지 나규환(68) 아저씨는 김장 무를 다듬다 나오셨다. 수수의 내력을 묻고 조금 얻었다. 마침 옆으로 소먹이로 검은콩 비지를 나르던 할아버지께 분홍감자를 물으니 이런 이야기를 해주셨다. 옛날에는 그런 감자를 갈아서 먹었는데 지금은 소나 먹인다. 그래서 아직도 그걸 심는 곳이 있냐고 물으니 없단다. 도대체 분홍감자는 어디에 숨은 걸까? 찾을 수나 있나? 남아 있기나 한 것일까? 

 

 나규환 아저씨 댁의 수수. 이삭이 엄청나가 길다.

 

인사리를 한바퀴 돌아 더욱 구석으로 구석으로 찾아 들어갔다. 더 구석에 자리한 곳은 지석리. 이름에서 지석묘가 떠오르는 걸 보아 옛날에 사람 꽤나 살았던 곳일까?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다. 해가 사라지는 것과 함께 기온은 한층 더 쌀쌀하다. 이제 그만 끝내고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그때 허름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안완식 박사님이 성큼성큼 앞장 서신다. 한 할머니가 입구에 앉아 계시는데, 대뜸 이렇게 물으신다.

"할머니, 감자 있어요?"

"감자? 있지. 따라와."

이 무슨 조화인가? 할머니를 따라가니 분홍감자와 자주감자가 있었다. 애들이 좋아해서 심어 먹고, 남은 걸로는 개한테 먹인다고 하신다. 상자에는 내년에 심으려고 놔둔 감자가 들어 있었다. 분홍감자는 요즘 감자와 달리 삶으면 퍼석퍼석하고 분이 나며 맛있다고 한다. 먹어보지 않아 그저 머릿속으로만 상상할 뿐이다.

 

 지석리 서낭골에 사시는 조옥희(75) 할머니. 동네에서는 개 할머니, 돼지 할머니라고도 부른단다. 걸쭉한 입담과 맑은 웃음이 인상적인 우리의 이웃 할머니.

 조옥희 할머니가 옛날부터 밑지지 않고 계속 심고 있는 분홍감자. 싹부터 분홍빛이 도는 것이 일반 수미니 뭐니 하는 감자와 확연하게 다르다.

 

이제 교동도에서 가장 찾고자 했던 분홍감자를 찾았다. 큰 목표는 달성한 셈이다. 하지만 아직 찾아야 할 것이 하나 남았다. 이건 씨앗이 아니다. 바로 사람이다. 안완식 박사님께 처음 분홍감자를 제공한 강한옥 할머니라고 하는 분이다. 단서는 할머니 성함 하나뿐. 자세하게 기록을 해놓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고 하신다. 그래도 촌에서는 이름만 알면 다 아는 것,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먼저 오미라는 곳에 들러 길을 물으며 강한옥 할머니에 대해서 물었다. 여기서는 잘 모르겠고 저기 인사리 교회 쪽에 가서 물어보라고 하신다. 이 말을 전하니, 안완식 박사님께서 그 할머니가 교회 옆에 살았다며 기억을 떠올리셨다. 다시 인사리 교회 쪽으로 이동하여 마침 길을 나선 할머니에게 강한옥 할머니를 물었다. 다행히 처녀 때 옆집에 살던 분이라며 저 안쪽으로 더 들어가야 한다고 하신다. 그러면서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셨다. 할머니께서 올해 치매가 와서 안산에 있는 병원에 입원하셨단다. 이 소식에 안완식 박사님께서는 정말 안타까워하시며 진작 찾아볼 걸 하신다. 옆에서 보고 듣기에도 참 안타깝다. 역시 생각날 때 잊지 말고 잘해야 한다. 시간은 가만히 기다리지 않고 산천초목은 그에 따라 흐른다. 사진으로나마 붙잡아 놓을 뿐.

 

교동도, 특히 여기 인사리는 북한이 지척에 보이는 곳이다. 그래서 교동도에 들어올 때는 주민번호도 적어야 했나 보다. 여기서 보니 북한이 이렇게도 가까운 곳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심리적인 거리와 실제 거리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간극은 점점 더 커지겠지. 서로 자주 자꾸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않을수록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보다 더 멀리 있는 나라가 되겠지. 북한은 왜 그리 문을 꼭꼭 걸어 닫기만 하는지. 북한도 이제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 아닐까? 아직도 내전을 치르고 있는 나라가 많은 줄 안다. 하지만 분단된 나라는 우리가 유일하지 않은가. 어서 서로 만나 어우러지는 그날이 왔으면 한다. 하지만 그런 날은 점점 늦춰지고 시대와 역사의 아픔은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다. 아물어야 흉터가 되든 뭐가 되든 할 텐데, 아물지조차 않으니 자꾸 덧나고 아프다. 

 

 저 멀리 철책 너머 보이는 곳이 바로 북한이다. 이곳의 지천에 나무가 널려 있는 것과 달리 북한의 산에는 나무가 하나도 없다. 물자가 부족하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다.

 

또한 교동도는 70년 전 다카하시 노보루가 방문했던 곳의 하나다. 그가 바로 상룡리의 농가를 방문해 조사를 벌였다. 나도 그곳을 지나왔다. 자세히 뒤질 수는 없었지만, 머릿속에 방문점을 찍고 다음에 다시 찾을 것을 기약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니는데 너른 들판을 앞에 놓고 우뚝 서 있는 한 집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벌교 답사를 갔을 때 보았던 일본인 지주의 집과 같은 구조. 앞에는 간척한 너른 논을 굽어보며 다른 집들 위에 군림하듯 서 있는 일본식이 가미된 집. 순간 여기라는 직감이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토종을 조사하려고 왔으니 돌아볼 짬이 없다. 이곳도 마음속에 꾹 눌러놓고 떠났다. 아쉽지만 급한 대로 사진 한 장 남겼다.

 

 인사리 너른 들. 일본인 지주의 집으로 추정되는 일본식 집은 이 논을 굽어보며 다른 집들 위에 우뚝 서 있다.

 

 벌교 현 부자 집과 같은 구조의 일본식 집. 멀리서 그것도 잠시도 지체할 틈 없이 셔터를 누르느라 흐릿하다. 꼭 다시 찾아가야 하는 곳이 숙제로 남았다. 이번은 사전 답사로 여기자.

 

17시 20분 모든 조사를 마치고 교동면의 교동파크란 여관에 짐을 부렸다. 짐과 함께 바람에 지친 몸과 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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