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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날, 오리무중

 

 

 

 2008년 12월 10일. 강화도 조사의 마지막날. 어제 잠을 잔 모텔에서 나와 아침은 선착장 옆 식당에서 해결했다. 비린내에 예민한 나에게 그 집의 주 요리인 회가 물잔에 남아 그다지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왜 횟집의 물에서는 비릿한 맛이 날까?

아침을 먹고 나왔는데도 밖은 여전히 안개가 자욱하다. 이렇게 안개가 하루 종일 가지는 않겠지. 차에 올라 내가면 외포리부터 조사를 시작했다.

 

전원주택인 듯한 집과 원래 마을 주민의 집이 섞여 있는 동네로 들어섰다. 그 가운데 가장 그럴싸한 집, 내가면 외포리 442번지의 강동월(73) 할머니 댁에 들어갔다. 9시도 되지 않은 너무 아침 이른 시간이라 좀 죄송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강동월 할머니. 아침부터 뭐하냐고 잔소리하셧다. 죄송합니다.

 

 

찾아온 목적을 말씀드리고 좀 도와달라고 하니, 그대로 본인이 가지신 걸 이것저것 내보여주신다. 두 가지 종류의 들깨가 있었는데, 하나는 올들깨이고, 다른 하나는 늦들깨이다. 올들깨는 물론 한 보름이 이르고, 벼깔 하기 전인 추석 무렵에 거둔다. 다른 하나인 늦들깨는 회백색이고, 기름이 더 많이 난다고 한다. 올들깨는 시간이 없을 때 후딱 해치우는 데 특징이 있고, 늦들깨는 충분히 키워 더 통통하다는 데 특징이 있겠다. 다음으로는 흰찰옥수수와 감자 심을 때 심는다는 강낭콩, 메물(메밀)을 얻었다.

 

 강동월 할머니의 씨앗 보관 장소는, 안마당에 있는 버린 씽크대였다. 이것저것 여러 종류가 있었는데, 이미 수집한 것과 겹치는 것도 있어 이 정도만 얻었다.

 

 

강동월 할머니께 참 여러 가지를 심으신다고 하니, 이 정도도 이제 이것 저것 심기 귀찮아서 줄인 거라고 하신다. 그럼 예전에는 얼마나 다양하게 심으셨다는 소릴까? 웬만한 것은 다 집에서 해결하셨나 보다. 손이 엄청 야무지신 느낌의 할머니, 언제 그 살아오신 이야기 좀 듣고 싶다. 오늘은 시간이 없어 그냥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강동월 할머니 댁 메주. 허연 곰팡이가 가득한 것이 아주 잘 떴다. 이거 하나만 봐도 할머니의 야무진 손맛을 느낄 수 있다.

 

 

안개가 너무 자욱하여 잠깐 안개가 걷히길 기다릴 겸, 동네 앞에서 안개가 잔뜩 낀 논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난 내 사진기로는 한계가 있어 안완식 박사님께서 찍으시는 모습을 열심히 머리에 찍었다. 인간의 기억은 왜 이리 불완전할까? 세포의 죽음과 함께 내가 가진 기억도 날아간다. 한 세포가 죽으며 새로운 세포에게 서로 전달해주지는 못하나? 인수인계는 참 어려운 일이다. 공자 님도 인수인계를 잘하는 걸 어진 일의 하나라고 말씀하셨으니 말이다.

 

안개는 걷힐 생각을 안 한다. 그냥 이대로 강행이다. 차를 달리다 오래된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지도에는 다락말이라고 한다. 다락논, 다랭이논 하듯이 주변보다 좀 높은 곳에 안으로 쑥 들어간 마을이다. 이런 곳에는 뭔가 있겠다 싶었다. 마을로 차를 돌려 들어가는데 경로당 앞에 웬 버스 한 대가 서 있다. 방송에서는 시끄럽게 빨리들 모이라고 난리다. 뭐지? 느낌이 별로다. 한 집을 찾아 들어가 곶감을 얻어 먹으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러니 할머니들이 단체로 놀러 가는 날이란다. 에이, 날을 잘못 잡았다. 이 마을에서는 뭐 나올 게 하나도 없겠다 싶어 그 길로 차에 올라 다음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몇 군데를 더 들렀지만 아무 성과가 없다가, 외포리 389번지의 구정태(76) 할머니 댁을 찾았다. 집 앞에 콩을 턴 콩대가 쌓여 있어 무언가 있겠다 싶어 찾아 들어갔다. 전형적인 강화도의 ㅁ자 집인 이곳에서 들깨와 검은콩에 섞여서 오라(오래) 받기 시작했다는 나물콩, 연두색에 눈이 갈색이 나물대콩, 더덕, 도라지 씨앗을 얻었다. 얻긴 얻었지만 뭔가 흥이 덜하다. 안개도 잔뜩 낀데다가 뭔가 오늘은 일진이 영 아니다.

 

 구정태 할머니. 몸이 불편해지시는 듯한 모습이어서 걱정이다. 할머니 건강하세요.

 

 

내가면 외포리를 벗어나 양도면 인산리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인산리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다. 몇 집을 들렀지만 요즘 그런 게 어딨냐는 반응이다. 큰 길이 뚫려서 그런가 진짜 없다. 교통의 발달이 그다지 좋은 것만도 아니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큰 길 옆에 있는 집치고 토종이 있는 집을 거의 보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다음 행선지인 양도면 건평리로 방향을 잡고 달렸다. 이곳도 논이 넓은데 어떨지 모르겠다. 건평리에 도착해 가장 구석에 있는 한 집을 찾아 들어갔다. 건평리 560번지 김인순(66) 할머니 댁이다.

 

 큰박을 부수어 씨를 받고 할머니께 수건을 전달하는 모습.

한가로운 오전 시간을 보내다 나오시는 모습이다. 이 때쯤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으면 졸음이 오는 시간이기는 하다. 할머니는 돼지를 여러 마리 키우고 계셨다. 다른 일로 바쁘실 만큼 크게 기대는 하지 않고 우리가 찾아온 목적이며를 말씀드렸다. 그리고 넝쿨강낭콩과 큰박을 얻었다.

 

 큰박과 그걸 부순 낫.

 

 

인사를 하고 나오는데 강아지가 내다본다. 뭐든지 새끼 때는 왜 이리 귀여울까? 전에 EBS에서 왜 동물의 새끼들이 귀여운지 방송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귀엽다는 건 보는이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공통의 특징이 있다고 한다. 1. 몸통보다 훨씬 큰 머리, 2. 머리보다 훨씬 큰 눈, 3. 짧은 사지와 두루뭉술한 몸매, 4. 서툰 몸짓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보면 귀엽다고 느끼고 보호하고 돌봐주고 싶은 욕망이 든단다. 그것은 바로 새끼들이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없기에 귀여운 외모를 선택해 부모의 양육본능을 자극하여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이다. 하긴 아이들이 하는 행동이 얼마나 영악한지는 부모가 아니면 다 안다. 부모는 자기 자식이 예뻐서 잘 모르기도 하지만, 옆에서 보면 '야, 저 놈 참 약았다'는 걸 대번에 알 수 있다.

 

 김인순 할머니 댁 강아지. 마침 개가 새끼를 낳았다.

 

김인순 할머니 댁을 나와 바로 옆집으로 갔다. 안완식 박사님이 지금 사시는 곳이 택지 개발지역으로 묶이면서 앞으로 언젠가 이사를 가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신다. 그런데 옆집이 그럴 듯하게 집을 짓고 사는 걸 보고 참고할 만한 것이 있는지 잠깐 구경하자고 하셔서 찾았다. 찾아온 이유를 말씀드리니 선뜻 집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신다. 이 집은 인천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는 아들이 지었다고 한다. 집 안 한켠에 아들이 학교 다닐 때 받은 상패 같은 것을 늘어놓은 걸로 봐서 무척 자랑스러워하시나 보다.

시어머니이신 김영례(82) 할머니께서는 호박의 속을 파고 계셨다. 옆에 앉아 호박을 반으로 갈라 드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물었다. 혹시 이 마을에는 일본놈들이 들어오지 않았나요? 아유 말도 말라고. 산에 쇳물 들이붓고, 공출로 싹 가져가서 먹을거리도 없었단다. 여기까지도 들어와서 활개를 쳤다고 하신다. 아주 안 좋은 기억을 가지고 계신 듯하다. 전에 나의 할머니께 물었을 때는, 어린 시절이었는데 일본인 아이랑 놀이도 같이 많이 했다고 한다. 경북 풍기 분이신데, 이렇게 지역마다 차이가 있나 보다. 어떤 사람이 들어왔느냐에 따라 그 기억도 다를 것이다.

 

 호박 속을 파내고 있는 김영례 할머니. 시골 사시며 생활도 여유가 있고 계속 일을 하셔서 그런지 건강하시다. 아무래도 여유가 없으면 대번에 모습에서 표가 난다. 여유는 어떻게 구하는 걸까?

 

 

집구경을 하러 왔지만 본분을 잊을 수 없다. 이 집의 안주인이신 전애님(60) 아주머니에게 토종이 있냐고 물었다. 이제 많지 않지만 예전부터 심는 걸로는 완두가 있다고 한다. 깔끔하게 보관해 놓은 완두를 좀 얻고, 호박도 이전에 보던 것과 좀 다른 듯해 얻었다.

 

이제 건평리를 벗어나 삼흥리로 향했다. 네비게이션에는 나오지 않는 야트막한 언덕길을 넘으니 바로 집들이 보인다. 가장 처음 나오는 집에 차를 세우고 무작정 들어갔다. 이곳은 삼흥리 1327번지 배은순(67) 할머니 댁이다. 농산물을 꾸려서 어디 나가시려던 중이라 정신 없이 바쁘시다. 그래도 똥파리처럼 계속 들러붙으며 토종을 물었다. 상대가 어떻게 나와도 끈질기게 들러붙는 게 중요하다. 아예 말이 통하지 않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별 좋은 답은 없었고, 대신 벽에 씨로 쓰려고 받아 놓은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내력을 묻고 두 가지를 얻었다. 바로 차조와 메옥수수이다.

 

 배은순 할머니가 매달아 놓은 조와 옥수수. 얼른 주변 상황을 파악해 그걸 가지고 묻는 것도 수집할 때 좋은 방법이다. 대부분 토종에는 별 관심이 없으셔서 뭐가 토종인지도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기 때문이다. 

 

 

짐을 꾸리느라 바쁘신 할머니를 뒤로 하고 옆집으로 건너갔다. 옆집은 깔끔하니 뭐가 나올 듯하다. 이곳은삼흥리 1325번지 남궁태종(69) 할아버지 댁이다. 할머니는 마침 집을 비우셨는데, 할아버지가 그렇게 깔끔하실 수 없었다. 손재주도 좋으셔서 여기저기 할아버지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어 보였다.

 

 남궁태종 할아버지 댁의 씨앗 보관 장소. 할머니가 계시지 않아 그 내력을 알 수 없었지만, 그냥 지나치기 어려워 안완식 박사님께서 할아버지가 기억하는 것만 골라서 수집하였다. 할머니가 계셨으면 더 많은 것이 나올 법한 집이다.

 

 

할머니의 공백을 메울 수는 없었지만, 안완식 박사님의 경험과 노하우가 빛을 발해 그 공백을 어느 정도 메웠다. 남자가 씨앗은 알지 못한다는 할아버지에게 양해를 얻어 할머니의 씨앗 보관 장소를 찾아 뒤적였다. 그렇게 네모깨와 육모깨를 얻고, 앞마당에 있는 창고에서 댑싸리를 찾아 씨를 받고, 옥수수도 얻었다. 어느 집이든 안완식 박사님께 한 번 걸리면 뭐 하나라도 내놓게 마련이다. 참 대단하시다.

 

 남궁태종 할아버지가 손수 만든 달걀꾸러미. 이것 말고도 요즘 보기 어려운 옛 물건을 손수 만들어 놓으셨다. 기술이 필요한 사람은 여기에 가서 묻고 배우는 것도 좋겠다.

 

 

한창 이야기하고 있는데 옆집 할머니께서 물건을 옮겨야 하니 얼른 차 좀 빼라고 성화이시다. 잠시 꾸물거리는 사이 어느 새 짐을 다 옮기시고 사라지셨다. 엄청 억척스러우시다.

남궁태종 할아버지 댁의 앞마당에는 닭장이 있는데, 모두 토종닭이라고 자랑하신다. 모두들 닭장에 있지만 암탉 한 마리와 그 병아리들은 마당을 한가로이 노닐고 있어 사진 한 장을 찍었다. 참 잘 생겼다. 깨끗하고 잘 생긴 것이 이런 닭은 또 처음 봤다. 토종닭이 필요한 분이 있으면 여기서 몇 마리 얻어 가면 좋겠다.

 

남궁태종 할아버지의 귀염둥이 토종닭. 다시 봐도 잘 생겼다.

 

 

다시 차에 올랐다. 양도면사무소를 지나 길상면으로 가는 길을 따라 달렸다. 양도면사무소 인근으로는 아무것도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딱 하나 진틀이란 마을에 들어갔다가 동네에 아무렇게나 자라고 있는 피마자 하나를 수집했다. 그거 말고는 정말 없었다.

조산리까지 지나 도장리 대흥마을이란 곳의 한 집을 찾아 들어갔다. 도장리 82번지 이을님(84) 할머니 댁이다. 몇 달 전 안타깝게도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병원에 입원해 고생하다 가신 때문인지 그래도 담담하게 말씀하신다. 그래도 적어도 60년을 함께 사셨을 텐데 그 허전함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좋던 싫던 내 영감이었을 게다. 그런 말을 들어서 그런지 할머니가 쓸쓸해 보인다. 사람이 찾아오니 반가움에 눈물이 글썽이시는 것도 같다. 그런 마음에 할머니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좀 나누었다. 토종 이야기를 하니 자신의 아버지도 농업과 관련한 일을 하셨단다. 순간 눈이 번쩍 하며 혹시 성함은 무엇이고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아시냐고 여쭈었다. 혹시 모르지 다카하시가 왔을 때 만난 사이일 수도 있다. 그분의 성함은 이동팔이고 농사시험장 직원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집에 와서 자료를 확인해 보니 아쉽게도 그런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다시 본분으로 돌아가 할머니 댁의 토종을 찾았다. 할아버지 병구완으로 농사를 거의 못 짓다시피 했다고 하셨는데, 그래도 그런 사정에도 불구하고 여러 가지를 얻었다. 할아버지까지 건강하게 함께 계셨다면 두 분이 부지런히 농사지으시며 잘 사셨을 텐데, 새삼 할아버지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다. 할머니에게 쇠똥동부, 빨간동부, 메밀, 댑싸리를 얻었다.

 

댑싸리를 두드려 받은 씨를 키질로 깔끔하게 골라주시는 모습. 홀로 남은 인생을 잘 사시길 바랍니다.  

 

 

양도면 도장리에서 논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을 따라 바로 화도면 문산리로 넘어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안개는 더욱 짙어만 간다. 멀리는 보이지 않고 몇 십 미터 주변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문산리의 덕달마을이라는 곳을 찾았다. 어느 정도 농사를 지을 법한 집을 찾아갔으나 아무도 없어서 그냥 나오고, 그 윗집을 찾아 들어갔다. 아무리 소리치고 두드려도 사람이 없는지 아무도 나오지 않는다. 그냥 나갈까 하다가 기웃거리니 씨앗 보관 장소가 눈에 띈다. 안완식 박사님이 이것저것 살펴보시더니 이 집 주인을 꼭 찾아서 만나봤으면 하신다. 강화도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디에 가서 어떻게 찾을지 막막하기만 한 상황. 이장님 댁에 가서 방송이라도 할까? 일단 그냥 수집봉투에 조금 담았다. 씨 도둑질이 아니라 연구를 위한다는 말을 하면서. 그러고 집을 나오는데 아래에서 사람이 한 명 올라온다. 아, 집 주인이신 이혜숙(72) 할머니였다.

집이 참 깔끔하고 예쁘다고 말을 건네며 우리가 찾아온 목적을 말씀드렸다. 할머니는 이곳에 온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다고 하신다. 아들이 하나 있는데 얼마 전 쓰러지면서 손주들을 돌보며 살고 계신다는데, 생활이 그리 녹록치 않다며 걱정이시다. 그러면서 씨앗의 내력을 말씀해 주셨다. 그렇게 얻은 것이 개골팥과 쥐눈이콩이다. 강화도 사람들이 보통 개골팥이라고 부르는 것은 재팥이고, 진짜 개골팥은 이 집에서 얻은 것이 개골팥이라는 안완식 박사님의 설명. 확연하게 다르게 생겼다. 재팥과 개골팥, 두 가지는 내 머릿속에 확실히 들어왔다.

 

 잘 가라며 환히 웃으시는 이혜숙 할머니. 뭔가 세련되고 기품이 엿보이시는데 인생의 굴곡은 왜 그리 구비구비이신지. 그런 속에서도 저렇게 웃으실 줄 아니 할머니는 괜찮으실 거다.

 

 

덕달을 나와 길을 건너 바로 건너마을로 들어갔다. 이곳은 양지촌. 안개가 자욱해 사람들도 마음을 닫아 걸었다. 어둠만 사람을 그리 만드는 것이 아니구나. 햇님의 큰 존재감, 해가 없으면 어떻게 살까? 우리가 누리는 이 모든 것이 해에서 온 것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마실 나오신 양지촌 덕포리 1954번지의 서상례 할머니를 만나 집까지 함께 가 강낭콩을 얻었다. 그리고 다시 차를 타고 가다 화도면 상방리 308번지의 노순덕(80) 할머니 댁에서 유월두를 얻었다. 할머니가 사시는 곳은 동촌이란 곳인데, 여기는 이제 축사밖에 없다. 그나마 할머니께서 마지막으로 이 마을을 지키고 계셨다.

다시 차를 타고 이동. 하지만 안개 때문에 뭐 보이는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고, 첩첩산중에 오리무중이다. 한 버려진 집인지 주인이 비운 집인지의 텃밭에서 아욱을 채집하고, 조금 더 가다가 식당에 들러 늦은 점심을 먹었다. 음식을 나르는 사람이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사람이다. 처음에 보고 깜짝 놀랐다. 도대체 우리나라에 이렇게 살고 있는 외국인이 얼마나 되는 건지 모르겠다. 이제 우리나라도 국제 사회의 일원이라는 걸 도시보다 시골에 와서 더 실감한다. 내가 사는 안산은 인구 70만 가운데 4만이 외국인이라고 한다. 공식적으로 4만이니 그보다 더 많을 것이다. 아무튼 시골은 인구가 적어서 그런지 외국인 한 명만 있어도 엄청 많아 보인다. 이번에 강화도를 조사하면서 외국인을 솔찮이 많이 만났다. 물론 대부분 국제결혼을 한 여성들이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일단 한국인이겠지만, 어머니가 외국인인 데에서 오는 거리감이나 따돌림 등이 있을 테고, 생각하면 머리가 복잡하다. 과연 시골은, 농촌은 이대로 사라질 것인가? 우리가 버린 농촌을 이제는 외국인이 들어와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그들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우리가 버린 3D 업종의 일을 외국인이 대신해 주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다시 농촌으로 되돌아갈 날이 올까? 지금으로서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 같지만, 사람의 일을 알 수 없는 법 난 그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한다. 그때를 미리미리 준비해야지.

 

밥을 먹고 다시 차에 올라 서쪽으로 향했다. 고갯길을 넘어가다 무당집을 발견했다. 무당도 마을에서 쫓겨난 지 오래되었다. 점이나 굿이 과학적인지 아닌지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그걸 과학적이냐 아니냐를 따지기보다는 사람에게 어떤 걸 해주는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접근해야 한다. 시대가 불안해질수록 무당과 점집이 호황을 누리는 건 왜일까? 앞날을 알 수 없다는 불안감에서 인간을 구원해주는 것이 종교나 무당과 점집이 아닐까 한다. 제대로 이론적인 틀을 갖춘 종교보다는 못해도, 무당과 점집이 상업주의에만 휩쓸리지 않는다면 더 가까이에서 가려운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줄 수 있다. 그런 것을 미신이라고 쫓아내기만 했으니, 그런 대접을 받은 아이가 맘이 비뚤어지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지금이라도 제대로 자식 대접을 해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데, 편협한 이상한 기독교가 득세를 하고 있는 우리의 실정이니 그건 언제가 될지 어려워 보인다.

 

우리 역사에서 무당만큼 사라들 가까이에서 함께 울고 웃으며 대소사를 같이 한 종교가 있을까? 지금은 미아리나 어디 후미진 곳 구석구석에 숨어 있지만,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해야 할 날이 오기를 바란다. 우리의 농업처럼 말이다.

 

 

이 고갯길을 넘어 주회명(60), 한경숙(59) 내외의 농막을 찾았다. 은퇴한 뒤에는 이곳으로 들어와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으려고 생각하고 계신다는데, 강원도에서 얻어왔다는 주먹찰옥수수 몇 개를 얻었다. 언덕에서 내려가 들어간 동산촌이라는 마을의 조경숙(71) 할머니 댁에서는 흰콩을 얻었다.

이후의 여정에는 안개가 더 바싹 우리 곁에 들러붙었다. 이제는 몇 십 미터도 아니라 몇 미터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화도면 내리부터 시작해 장화리, 여차리, 흥왕리, 동막리, 사기리를 지나 길상면 선두리까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더군다나 화도면의 바닷가 쪽에는 주로 관광지만 흥하고 있어 더 그랬다. 틈틈이 내려서 확인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도무지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멀리서나마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없으니, 그대로 지나친 집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정말 보이는 건 차 앞의 몇 미터뿐. 옆으로 무엇이 있는지는 볼 수 없었다.

 

이로써 2차, 열흘에 걸친 강화도 조사를 모두 끝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 이틀 쉬고 다시 울릉도로 출발이다. 머리털 나고 배를 타는 건 물론이거니와 울릉도라는 곳은 처음이다. 그만큼 기대가 되고 설레인다. 자, 어서 집으로 돌아가 그리운 얼굴들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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