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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에서 만난 이웃

 

 

2008년 11월 28일 아침 7시, 코로 들어오는 공기가 차다. 하지만 영하로 떨어지진 않았으니 그럭저럭 시간이 지나면 따뜻해질 것이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하고 길을 나섰다.

9시 30분쯤 드디어 일행을 모두 만났다. 이번 출장에는 안완식, 박문웅, 안철환 선생님이 함께했다.

명동의 중앙우체국에 들러 일을 보고, 수첩이며 필기도구를 사러 명동 한복판을 뒤졌다. 이건 뭐 환율이 급등하면서 찾아오는 관광객을 상대하는 가게만 보이지 문방구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헤매다 마침내 찾은 것이 "Kosney"라는 곳. 그런데 이곳은 뭐가 그리도 비싼지 수첩 몇 개와 필기도구를 사니 8만 원이 넘는 돈이 들었다. 그래도 어쩌랴, 어디에서 또 문방구를 만날지도 모르고 그냥 11시 30분 강화도로 향했다.

가는 길에 김포의 연호정이란 칼국수 집에서 점심을 먹고, 드디어 13시 50분 강화대교를 건너 강화도에 이르렀다.

 

강화대교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에 난 해안도로로 방향을 틀어 용정리 쪽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도착한 범우리라는 마을. 여기서 조사의 가장 처음으로 강화군 강화읍 용정리에서 7대째 살고 계신 최대식(77), 심옥순(75) 어르신을 만났다. 우리의 농촌 어디나 그렇듯 만날 수 있는 건 거의 노인뿐이다. 어쩌다 40~50대의 젊은 사람(?)을 만날 수는 있어도 아이를 만나기란 무척 어렵다. 이제 한 10년 남은 것일까? 노인들마저 자리를 비우면 농촌은 텅 빈 공간이 될 것이다. 그 공간에서 살던 사람이 사라지면 그만큼 그들이 누리고 전하던 우리의 뿌리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문화는 오랜 세월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일구며 쌓아온 삶의 방식이다. 가깝게는 몇 년 전, 멀게는 몇 백, 몇 천 년 전의 삶과 노래, 노동, 이야기 들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런 우리의 문화가 사라지는 날 우리는 어디에 뿌리를 내릴 것인가?

새로운 도구와 문물은 새로운 문화를 몰고 왔다. 모두 그에 압도되었고, 그를 추종하며 맹신했다. 그 결과 우리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노마디즘', 다른 말로 광고 문구를 따르자면 '디지털 유목민'이다. 이걸 까뒤집어 보면 무엇인가? 뿌리 없는 부평초 인생과 무엇이 다른가! 그러나 그것이 몰고온 결과가 모두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정보를 얻고 나누기 쉬워지고, 사회적 약자에게 좋은 효과도 가져오고, 획일과 통일이 아닌 개개인의 다양함과 개성을 표현하는 마당을 마련하기도 했다. 모든 것에는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는 법이 아닌가. 도구와 문물을 탓하기 전에 그를 활용하는 사람을 탓할 노릇이다. 사람, 그 사람의 마음, 생각 들이 우리의 사회와 문화를 몰고간다.

 

최대식 할아버지는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라고 늙은, 말 그대로 촌로다. 그 얼굴의 주름에, 두텁고 메마르며 거친 그 손에 강화도 용정리 범우리 마을의 시간과 공간, 역사와 문화가 스며 있다.

최대식 할아버지. 대문간 옆의 광과 농기구 앞에 서서. 청테이프로 붙인 키는 10년쯤 쓴다고 한다.

 

토종 조사를 설명하고 요청하니 심옥순 할머니가 대문 옆에 있는 곳간 문을 따고 하나씩 꺼내 보여준다. 이제는 옛날과 달리 시장에서 사다가 심는 것이 많지만, 그래도 몇 가지는 맛과 같은 이유로 그 씨를 밑지지 계속 받아서 쓴다고 한다.

 

마당질을 끝낸 콩대와 참깨대를 짚으로 묶어 잘 쌓아두었다. 강화와 교동의 농가에서는 대부분 짚으로 부산물을 잘 묶어 놓았다.

 

 

집 앞에는 텃밭이 있고, 그 너머로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옛날에는 거기에서 팔뚝만한 고기도 많이 잡았단다. 아직도 집에는 투망 같은 고기잡이 도구가 있어 지금도 쓰냐고 물으니, 아들이 오면 한 번씩 가서 잡는다고 한다. 그 큰아들이 군대 갈 무렵인 30년 전까지는 고기가 넘치도록 많았으나, 이후 농약을 많이 치고 그러면서 확 줄었다고 회상하신다.

 

다음 집을 찾아 나섰다. 얕으막한 고개를 넘으니 바로 새말로 이어졌다. 새말은 말 그대로 새로운 마을이라는 뜻이다. 이 마을의 어느 농가에서 나무에 호박꼬지를 걸어 말리는 모습을 보았다. 이곳이 강화군 강화읍 용정리 새말에 사시는 안인분(73) 할머니의 집이다. 안인분 할머니는 새말을 "샛말"이라고 부르셨다. 아마 발음과 뜻 구분의 편의 때문에 사이시옷 현상이 일어났나 보다. 다니며 보니 이런 일은 어디에나 무척 많았다. 사투리를 연구하는 국어학자는 참 머리 아프겠다. 한 명 한 명 만나서 하나하나 발음을 다 듣고 분류하고 정리하려면... 토종 조사를 나온 안완식 선생님은 그런 맥락에서 참 대단하시다. 이제는 씨앗만 보면 이것이 토종인지 아닌지 가늠하신다. 어떻게 이런 경지까지 오르셨는지 놀랍다.

 나무에 호박꼬지를 걸어 말리는 모습.

 

안인분 할머니는 농사를 많이 짓지는 않는다고 하셨는데, 씨앗을 잘 모아두셨다. 할머니만의 공간에 가서 이것저것 구경했다. 첫 번째 집에서도 그렇고 여기서도 그렇고, 할머니만 아는 할머니만의 공간에 가면 꼭 뭐라도 하나씩 있다.

 

안인분 할머니 댁의 돌절구. 강화와 교동도에는 돌절구가 거의 집집마다 하나씩 있다. 지금은 쓰지 않지만... 

 

안인분 할머니의 뿔시금치. 요즘 시금치는 둥글고 맛대가리 없지만, 옛날 것은 씨가 뾰족하게 뿔이 있어 다루기 어렵지만 아주 맛나다고 하신다. 

 

동네의 어느 집 텃밭에 자라고 있는 파. 조선파라고 하시며 보여주신 것 모두 시장에 나온 파보다 키가 작고 색이 옅었다. 아, 정말 난 아무것도 모르고 맛도 모른 채 아무거나 주워 먹고 살았구나.

 

 

안인분 할머니의 집은 좋은 목재로 지은 집이다. 한때 한옥에 휘어진 목재를 쓴 것이 자연친화적인 모습이 반영된 것이란 착각을 한 적이 있다. 나중에서야 그건 제대로 된 목재를 쓸 수 없기에 그런 것임을 알았다. 이 집은 수원에서도 와서 취재해 갔다며, 요즘 시세로 이렇게 짓자면 5억은 든다고 하신다. 집의 틀이며 모양을 보면 그 말이 거짓이 아닐 것이란 생각이 든다.

반듯반듯한 목재로 잘 지은 집 

 

 

이후 같은 마을에서 3대째 살고 계신 강천희(66) 할아버지와 안병균 할아버지를 만났다. 강천희란 분은 할아버지란 말을 붙이기가 송구스러울 정도로 살갗도 팽팽하고 젊어 보이신다. 이제 우리도 확실히 오래사는 나라다. 어느 새 환갑 잔치는 슬며시 사라지고 고희나 되어야 잔치 좀 한다. 두 분 모두 집도 새로 깔끔하게 짓고 사시는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이후 사람을 찾아 이 집 저 집 기웃거리다가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평상 겸 연장통으로 쓰는 재미난 걸 보고 살짝 사진에 담아왔다.

 

 

수집 조사 첫날. 정신없이 시간이 흘렀다. 일머리도 모르고, 어떻게 정리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기록도 부실하고, 사진도 별로 없다. 물론 시간이 없기도 했다. 음력 11월, 5시면 해는 뉘엿뉘엿 서산으로 넘어간다. 해가 넘어갈 무렵이면 빛과 따스함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사라진다. 서둘러 밖의 일을 정리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 다가오는 밤을 기다린다. 낮밤을 가리지 않는 도시인만 도깨비처럼 거리로 쏟아져 나와 활개칠 뿐. 왜 올빼미족도 있지 않은가? 밤은 달과 함께 공진하는 감성의 시간. 작은 자극에도 피부는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래서 예술을 하는 사람은 밤을 사랑하지 않는가! 하지만 땀 흘리는 사람의 밤은 이튿날의 기운을 챙기는 기다림의 시간. 농촌의 밤은 바로 그런 기다림의 시간이다. 심지어 창밖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마저도.

 

이후 두 곳의 농가를 더 방문하고, 강화읍 인삼센터 앞의 풍물시장에서 할머니 네 분에게 콩 종류를 샀다. 뭔가 차이가 있으니 수집하셨을 텐데, 솔직히 난 아직 아무리 들여다봐도 잘 모르겠다. 이것이 바로 경험과 공부의 차이다! 열심히 좇아다니며 부지런히 배워야지.

 

 

마지막 농가에서 수집 조사를 하는데, 기러기 떼가 날아갔다. 한강 하구 쪽으로 오면서 보니 기러기가 참 많았다. 그러고 보니 가까이에서 기러기를 본 것도 처음이 아닌가. 저들은 무엇을 좇아 대열을 지어 하늘을 날아다닐까? 아래로 양능들(陽陵坪)을 두고 날아오른 기러기. 평坪은 우리말의 들이나 벌을 한자로 옮긴 말이다. 지금도 땅이름에 보면 평이란 말이 많다. 평坪이 아닌 평平이 많은데, 혹시 평坪을 잘못 적은 것이 아닐까? 

 

17시 30분 첫날의 조사를 마치고 숙소를 잡은 뒤 저녁을 먹고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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