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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9~11세기)의 농업 발췌 비교적 비옥한 세느강과 라인강 지역의 장원에서는 고기보다 오히려 밀과 보리 같은 곡물 농사에 힘을 쏟았다. 이용하는 땅의 비율도 곡물 경작지가 90% 이상이었고, 종교 생활과 일상 생활에 필요한 포도주를 만드는 원료인 포도밭이 조금, 가축을 방목하는 초지가 아주 조금이었다.경작지를 이용하는 방식은 삼포제였다. 비옥하지 못하거나 기후 때문에 할 수 없는 곳은 이포제(2년에 밭을 1번 이용하는 방식. 밭을 둘로 나눠 반씩 이용하는 방법)를 유지했다. 삼포제는 밭을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누어 겨울 곡식으로 밀 종류를 심고, 그를 이어 여름 곡식으로 보리나 콩 종류를 심으며, 마지막으로는 땅을 놀리는 방법이다. 이를 통해 3년에 2번 농사를 지을 수 있어 이포제보다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또한 보리나 콩을 심을 수.. 2008. 8. 7.
[스크랩] 권업모범장의 성격과 역사 권업모범장은 1906년 4월 통감부 주도로 창설되어 이후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이 되면서 조선의 농업정책을 기획하고 농업기술을 보급하는 참모부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 뒤 1929년 기존의 역할을 마치고 조선총독부 농사시험장으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일제는 권업모범장을 통해 일.. 2008. 8. 7.
[스크랩] 수원 권업모범장의 초대 장 本田幸介 그는 동경제국대학 농과대학 교수로서 축산학을 담당했다. 그런 그가 조선과 관계를 맺은 것은 1903년 일본 농상무성 조사단의 일원으로 황해도, 평안도, 강원도의 농업자원을 조사하면서부터이다. 그 뒤 그는 1905년에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를 다시 한 번 조사하면서 조선의 농업에 대해 많은 지식을 .. 2008. 8. 7.
[스크랩] 권업모범장의 조직 개편 1910년대 1910년 8월 경술국치와 함께 권업모범장은 총독부 관할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조직을 확대하여 기사 10명, 서기와 기수 35명을 두고, 농림학교를 부속시켜 일본농법을 이식하는 참모 기구로 만들었다. 이와 함께 출장소를 지장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대구, 평양, 독도, 용산, 목포에 지장을 설치했.. 2008. 8. 7.
[스크랩] 조선 토종벼와 권업모범장의 일본벼 보급 일제의 권업모범장은 조선에 일본 품종의 벼를 보급하고자 했다. 그래서 1906년 4월 경기도 수원군 서둔전에서 농사짓는 사람 28명에게 일본 벼인 조신력, 近江, 信州, 都를 배부해 기른 결과, 조신력이 토종에 비해 24%, 근강은 9.4%, 신주는 7.5%, 도는 자연도태되었다. 그 결과 일본 품종에서는 조신력, 토.. 2008. 8. 7.
[스크랩] 조선의 수리시설 조사 1910년대 일제가 행한 수리관행조사, 수리현황조사는 소유 관계가 어떻게 되느냐를 중점적으로 조사했다. 수리시설이 국유인지 민유인지를 정확히 파악해 토지조사사업을 하며 자신들의 관리 아래 두려고 했다. 그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제언 보 합계 경기 충북 충남 전북 전남 경북 경남 황해 평.. 2008. 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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