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업모범장은 1906년 4월 통감부 주도로 창설되어 이후 식민지 상황에서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이 되면서 조선의 농업정책을 기획하고 농업기술을 보급하는 참모부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 뒤 1929년 기존의 역할을 마치고 조선총독부 농사시험장으로 바뀌었다. 다시 말해 일제는 권업모범장을 통해 일본식 농업기술을 식민지 조선에 이식하고, 이를 통해 조선의 농업을 기술적으로 지배하고자 했다. 이런 목적으로 설립한 권업모범장은 식민지 조선에 농업기술의 모범을 보이고자 했지만, 실제로는 조선의 전통 농업기술을 구축하고 일본식 농업기술을 강제로 이식하는 역할을 했다.
조선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미곡상들은 조선쌀의 품질이 떨어져 수출선에 문제가 생기자 1903년 '재선일본인상업회의소연합회'는 당시 일본공사 임권조林權助 에게 "조선농사개량에 관한 청원서"를 제출한다. 거기에서 농사시험장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제기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조선에 농사시험장 설치를 획책한 것은 1904년에 시행된 '조선토지농산조사' 결과에 따라서다. 일본 농사시험장의 장인 古在吉直이 당시 재정고문인 目賀田種太郞에게 두 가지 안을 제출한다. 이에 그는 한두 군데 농사시험소를 설치하려고 1905년 11월 24일 "농사시설에 관한 상신서"를 본국에 발송하고, 일본 농상무성에서는 '조선토지농산조사'를 기초로 농사시험장 설립 계획을 세워 1906년에 8만 원의 창설비와 8만 원의 경상비를 예산으로 책정했다.
한편 조선정부에서도 1904년 10월 농상공 실업에 관한 학술 및 기능을 가르치기 위해 농상공학교를 서울에 설립한다. 이와 함께 실습하기 위해 1905년 12월 29일 칙령 제60호로 '농상공학교 부속 농사시험장관제'를 발포하고 실습농장을 뚝섬에 설치한다. 뚝섬 실습장은 144만 평(480정보)의 부지에 장장 이하 기사 4명, 기수와 사무원 조금을 두었다. 그러다가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을사늑약으로 좌절된다. 곧 일본은 농사모범장 설치계획이 위치가 알맞지 않고 설계에도 결점이 있다는 이유로 폐지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면서 일본정부도 60만 원의 경비로 수원에 권업모범장을 설치할 예정이니 두 정부가 돈을 낭비할 필요없이 우리가 세우는 것을 함께 쓰면 된다고 하며 일본의 주도로 농사모범장을 설립하자고 주장한다. 이에 농상공대신 권중현은 경기도 수원이 아닌 경북 대구에 조선 주도의 농사시험장을 설치하자고 주장하나 이등박문이 거부해 버린다. 이와 같이 한 이유는 조선의 주도로 농사시험장을 세우면 일본이 목적으로 삼은 조선의 농업 지배를 달성하는 데 장애가 올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목적은 조선을 식량 공급지로 만드는 것이었다.
이후 일본은 1906년 4월 '권업모범장관제'를 발포하고 6월 15일 경기도 수원에 권업모범장을 개설했다. 모범장에는 장장 이하 기사 6명, 기수 8명, 서기 4명을 두고, 목화재배협회의 위촉에 따라 목포에 출장소를 두어 목화 재배 사업을 감독하게 했다. 일본은 조선에서 농사시험이 아닌 권업모범을 보여주기 위해 이름도 권업모범장이라고 지었다. 수원 권업모범장의 규모는 26만1천 평(87정보)인데 그 가운데 밭 8만4천 평(28정보)은 민유지이고, 논 17만7천 평(59정보)은 궁내부 소속지를 빌리고 민유지를 사들인 것이다. 1906년 10월 설계를 마치고 11월 2일 공사에 들어갔다. 이어 수원 정거장에서 모범장에 이르는 길과 밭 8만여 평(27정보)을 경지정리하는 등 1906년 말까지 체제를 완성한다. 한창 공사가 진행되던 1906년 10월 26일 조선정부는 통감부에 모범장을 조선으로 이양해 달라고 조회했다. 이에 11월 통감부는 일본이 세운 경영 방침을 바꾸지 않을 것 등을 조건으로 조선정부에 이양한다. 조선정부로 이양된 뒤 1907년 모범장에는 장장 이하 기사 7명, 기수 12명, 서기 4명을 두고 있어 통감부 때보다 확대되었다. 이어서 그해 4월 군산에 시험지를 설치하고, 5월 15일에 수원 본장의 개장식을 거행한다. 하지만 권업모범장에서 일하는 사람은 거의 일본인이었다. 1908년 1월 실제로 기술을 담당하던 사람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장장 : 기감 本田幸介
본장 : 기사 豊永眞里, 向坂幾三郞, 宮原忠正, 宮本政藏, 草野嶽男. 기수 水野木傳三, 長岡哲三. 貴島一, 權錫圭, 李必熙, 武間卓一. 서기 山本尙鄕, 中村脇.
평양출장소 : 기사 花井藤一郞
대구출장소 : 기사 戶來秀太郞
군산출장소 : 기사 三浦直次郞
목포출장소 : 기사 佐藤政次郞. 기수 鈴木信太郞. 서기 八中?男
1908년 1월에는 군산시험지를 출장소로 고치는 동시에 대구와 평양에도 출장소를 설치했다. 곧이어 2월 28일 목포출장소와 군산출장소를 폐지하기로 결정하여 목포출장소의 사업은 오직 목화 재배의 개량, 지도 및 종자의 배부만 담당하게 하고, 군산출장소는 완전히 폐지했다.
한편 조선정부는 농상공학교의 각과를 분리시키려고 했다. 특히 농과는 농림학교를 설립해 농림업만 교육하여 진흥시키려고 해서 1906년 8월 27일 '농상공부소관농림학교관제'를 공포했다. 또 지방까지 농사를 개량하고자 도마다 종묘장을 설치했다. 1908년 3월 9일 '종묘장관제'를 공포하고 곧바로 종묘를 길러 보급하려고 경상남도 진주와 함경남도 함흥에 종묘장을 설치했다. 그리고 1909년 2월 관제를 개정하여 전라북도 전주, 전라남도 광주, 황해도 해주, 평안북도 의주, 함경북도 경성에 종묘장을 증설했다.
이러한 권업모범장의 인적 구성을 보면 권엄모범장 장장에는 기감 1명, 기사 8명, 기수 10명을, 종묘장에는 진주에 기수 2명을, 농상공부에는 농무국장 이하 기사 5명, 기수 9명이 있었다. 지방 농업기술관으로는 의주, 평양, 목포, 진주, 전주, 경성, 군산, 함창, 영변, 함흥에 각각 기수 1명씩 10명을 두었다. 그밖에 지방잠업기술관으로 용산에 기사 1명, 광주, 군산, 강서, 함창에 각각 기수 1명씩 4명을 두었다. 이들을 모두 합치면 국장과 기감을 빼고도 기사 14명, 기수 57명이나 된다. 이와 함께 수원 권업모범장도 확대된다. 원래 73.7정보에서 1908년 말에는 121.8정보로, 1909년 말에는 149.8정보로 늘었다.
초기의 사업
1. 각종 농산물의 조사와 시험. 특히 쌀의 품질 개량에 힘썼다. 먼저 조선의 전통 품종을 조사하고, 이와 함께 일본 품종을 조선에 들여와 시험했다. 일본 품종 가운데 우수한 것은 우량품종이라 하며 그 도입을 추진했다. 그리고 권업모범장 안에서 직영하거나 조선 소작인에게 경작하도록 했다. 직영전에서는 조신력早神力의 종류와 비료 등에 관한 각종 시험을 하고, 1906년 여름 수원군 서둔답에 조신력 1.2정보를 재배했다. 1907년 모범장에서는 감독전 면적의 1/3에 조신력을 기르게 했다. 이 시험 결과 조선 토종에 비해 일본종인 조신력이 평균 30% 정도 더 난다는 것을 밝혔다. 또 조선의 토종도 시험한 결과 대개 일찍 익고 키가 크며 이삭이 무거운 것이 많았다. 까락이 있는 것이 많고, 알이 큰 것은 적으며 병에 약한 품종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각종 시험을 통해 일본종은 생산력이 뛰어나지만, 토종은 조선의 기후와 토지에 적응해 가뭄에 잘 견디고 온도가 낮거나 물이 부족해도 싹이 잘 트고 모가 잘 자라며 이삭이 패기부터 익기까지 금방이라는 특징을 알았다.
또한 밭농사 작물도 시험하고, 일본에서 풋거름작물로 자주 쓰는 자운영과 개자리가 조선에 알맞은지 1906년 봄부터 시험했다.
2. 농사를 지도하고 장려했다. 강습회를 열고, 권업모범장의 소작인에게 조합을 설치해 일본종과 함께 일본 농기구를 쓰도록 장려했다. 그밖에 품평회, 박람회 등 여러 행사를 열어 조선 농민들에게 일본농업의 우수성을 선전했다.
3. 논벼 일본종을 보급했다. 권업모범장에서 시험을 거쳐 일본종으로 남부 지방에 조신력이, 토종으로는 조동지趙同知가 가장 알맞다는 결론을 얻었다. 조동지는 1896년 독농가 조중식趙重植이 경기 여주군 금사면의 논에서 발견한 것으로 충청북도, 충청남도, 경기도 지방과 경상북도, 전라북도의 산간 지방에서 널리 기르던 품종이다. 부선이 갈색이고 부는 갈황색이며 호영護穎은 담갈색으로, 이삭이 �빽하게 달리는 이삭이 무거운 까락 없는 종이다. 이 둘을 우량품종으로 보급하기로 했다. 벼 말고도 밭벼, 벨기에산 아마, 미국산 목화, 일본산 땅콩, 일본산 누에 등을 무료로 나눠줬다.
4. 잠업을 개선하도록 장려했다. 조선에 적응한 일본산 누에를 장려품종으로 정해 더욱 강력히 보급하고자 했다. 또 밀, 보리, 남새의 씨앗과 과수의 묘목, 가축 등을 나눠주었다. 이와 함께 원래 조선 농민들이 기르던 것들을 품종이 나쁘고 열등하며 잡박하다는 이유로 몰아냈다.
5. 목화를 장려했다. 이는 일찍이 자국의 면화를 확보하기 위해 1904년 목포일본영사관에서 일하던 若松堯三郞이 고하도에 미국 육지면을 시험삼아 기르면서 시작되었다. 그 뒤 육지면이 낫다는 것을 알고 原敬, 大石正己, 野田卯太郞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목화협회를 조직했다. 일본 농상무성에서는 이 협회를 원조하기 위해 기사를 파견했다. 이후 조선 정부에서 면화 재배를 위탁하면서 전라남도 열 군데 채종포를 설치했다.
6. 축우 개량에 힘썼다. 1907년 일본에서 시멘탈종을 수입해 배부하면서 시작해 1908년에는 에아샤 종우를 수입해 권업모범장에서 시험했다. 1909년에는 조선소를 바탕으로 동종개량과 이종개량 두 사업을 행했다. 면양도 시험했는데, 메리노나 슈로즈푸샤 같은 종은 기생충이 많아 성적이 좋지 않았다.
이상과 같은 여러 사업들은 일본의 농업기술을 강제로 이식하기 위함이었지 조선의 농업을 시험하고 조사한 연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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