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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섞어짓기나 사이짓기를 하면 해충 발생을 줄여주는 식물

 

 

        * 감자 ;      강낭콩, 양배추, 옥수수, 금잔화

        * 강낭콩 ;   당근, 샐러리, 오이, 꽃양배추, 감자, 옥수수, 딸기

        * 당근 ;      파, 상추, 양파, 완두콩, 로즈메리, 부추, 토마토

        * 딸기 ;      강낭콩, 상추, 시금치, 백리향

        * 무 ;         오이, 상추, 한련화, 완두콩

        * 상추 ;      당근, 무, 딸기, 양파

        * 시금치 ;   딸기

        * 양배추 ;   샐러리, 토마토, 양파

        * 양파 ;      상추, 딸기, 토마토

        * 오이 ;      강낭콩, 완두콩, 무, 해바라기

        * 완두콩 ;   당근, 강낭콩, 오이, 순무

        * 토마토 ;   당근, 파

 

2. 해충을 물리치는 혼작, 간작 작물

 

식물은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식물체나 뿌리로부터 분비물을 내어, 나쁨 균이 붙지 못 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강력한 작물의 힘을 빌려 채소의 몸을 지키게하는 것이 혼작, 또는 간작 작물이다.

 

1) 배추흰나비 유충

 

* 고추 ;  배추과의 양배추나 배추를 아주 좋아하는 배추흰나비 유충에는 고추를 혼작하면 좋다. 고추를 혼작하면 배추흰나비 유충의 어미인 배추흰나비가 붙지 못 한다. 또 응애 예방에도 효과가 있다. 진딧물을 업어서 옮기는 개미에게는 고추씨를 개미구멍에 넣어주면 호과가 있다. 고추는 자연 농약이 되므로, 혼작하면 좋다. 단, 간작으로 심을 때는 키가 너무 크지 못 하게 순을 잘라 주어야 한다.

 

2) 청고병, 입고병, 만할병, 위황병

 

* 파 ;  토마토와 가지에 많은 청고병, 입고병, 수박이나 오이류에 많은 만할병, 딸기에 많은 위황병 등에는 파, 부추, 양파, 마늘 등 파 종류를 간작하거나 혼작하면 병이 예방된다. 포기 가깝게 심어 놓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다. 아울러 파류의 간작은 다른 채소 잎에 붙어 가해하는 응애의 발생도 억제하는 효과를 나타낸다.

 

3) 해충

 

* 마늘 ; 마늘을 주 작물로 하여 다른 작물을 심으면 작은 풍뎅이나 여러 가지 해충이 마늘 냄새가 싫어서 붙지 않는다.  

 

4) 선충

 

* 결명자 ;  토양 선충은 토마토, 오이, 당근, 우엉, 배추를 좋아해서 뿌리에 혹을 만들어 영양을 가로채곤 한다.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결명자와 매리골드, 달리아, 화본과 식물(벼, 보리, 옥수수)등을 상추, 쑥갓, 부추, 무 등의 채소와 함께 심으면 선충을 예방할 수 있다. 이 때 콩류와 가까이는 심지 않는다. 콩류와 사이가 좋은 근류 박테리아도 결명자를 싫어한다.

 

5) 단옥수수와 콩과(科) 작물

 

단옥수수 뿌리에서는 페니실리움 곰팡이라는 유익한 미생물이 잘 자라고, 뒷그루로 배추 재배가 잘 된다. 또 콩, 팥, 자운영 등의 콩과(科)는 긴날개노린재가 달라붙지 못 한다. 또, 콩과(科)는 뿌리혹박테리아가 아주 좋아해서 공기 중의 질소를 흙 속에 끌어들여 토양을 비옥하게 하며 녹비에도 좋다.

 

6) 방울 토마토

 

 여름의 인기 식품인 방울 토마토는 무농약으로 재배할 수 있는 건강한 우량 작물이다. 이것도 혼식하면 고자리파리나 풍뎅이, 그리고 아스파라거스에 잘 붙는 잎벌레도 예방된다.

 

7) 참깨

 

* 토란과 호박 ;  호박은 작물에 이로운 익충을 불러 모은다. 긴다리벌, 노랑말벌 등 벌이 호박꽃의 꿀을 얻으면서 해충인 각시나방 유충을 포식해준다. 여러 가지 해충을 포식해주는 개구리의 은신처를 호박이 제공한다.

 

8) 허브 ;

 

* 청벌레, 진딧물;  유기농업에서는 경험적인 많은 사례가 발굴되고 있다. 매리골드, 로즈매리, 라벤더, 바질, 애플민트 등은 청벌레와 진딧물의 발생을 크게 억제한다.

 

9) 마늘과 상추 ;  마늘과 상추를 같이 심으면 잡초 발생이 억제되고 병해충 발생도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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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겨울이 반이나 지나갔는데 생뚱맞게 겨울맞이라고 이름 붙이고 보니 괜시리 철지난 케케묵은 이야기나 꺼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한 해 동안 간지를 공부하면서 나도 모르게 날짜나 계절을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셈하는 것이 버릇이 되고 있나 봅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벌써 음력 11월 하고도 보름이 되었으니, 입동 이후 입춘 전까지의 기간을 헤아려 보면 겨울이 벌써 반이나 지났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겨울이 지나고 있습니다. 다음 주에는 동지가 되니 이제 슬슬 동트는 시간도 빨라질 테고, 자연히 잠자리에서 눈을 뜨는 시간도 빨라지게 될 겁니다. 해 따라 별 따라 사는 생활이 점점 몸에 익어가면서 편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눈 돌릴 틈도 없이, 별도 달도 볼 여유 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 이제는 정신이 사나워집니다. 


해마다 겨울이 오면 추위를 싫어하는 제가 꼭 준비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아직도 남들 눈이 신경 쓰이지 않는 것은 아니나 언제 어디서나 편하고 따뜻하게 나를 지켜주는 내복이 그것입니다. 내복을 하도 입고 다니다 보니 엉덩이는 뭐 싼 것처럼 축 늘어지고 무릎은 나오고 색깔도 바래집니다. 그리고 땀 때문인지 꼭 사타구니 부분이 금방 헤져서 떨어지게 됩니다. 그 덕분에 1년에 한 벌씩 새로 구입해야 하지만 내복 시장의 변화도 눈으로 보고 좋은 제품을 구입할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 옛날에 비해서 이제는 얼마나 좋은 내복들이 많이 나오는지 모릅니다. 다양한 기능도 추가되고 옷 생김새도 눈을 씻고 볼 정도로 다양해졌습니다. 언제 시간이 괜찮다면 식구들과 함께 내복 사러 나가보시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지금 이 순간도 내복만 입고 쓱싹거리고 있으니 아마 이 모습을 보신다면 배꼽잡고 웃을지도 모릅니다. 집에 손님이 오지 않는 이상 겨울철 실내복은 내복밖에 없습니다. 사실 이런 내복을 처음 입게 된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닌 어머니의 의지였습니다. 세상 어느 부모가 자식놈 따뜻하고 배부르게 만들어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어머니의 권유로 내복을 입었습니다. 어릴 때는 집 안에서 내복 한 벌 입은 채로 깔끔하게 풀 먹인 두꺼운 솜이불 위에서 뛰고 구르고 정말 신나게 놀았습니다. 집 안에서는 원래 내복만 입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지요.

 

그런데 나에게 내복이 팽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은 국민학교 5학년 때 있었습니다. 점점 머리가 굵어지면서 남자로서의 존재감을 한창 자각하던 그 때 겨울날, 여느 때와 같이 나는 내복을 입고 학교에 등교를 했습니다. 그 시절의 나도 지금처럼 내성적이고 말수가 적은 아이였지요. 그런데 그 때 짝이 된 여자아이가 유난히 저를 괴롭히는 것이었습니다. 기억으로는 그때에는 보통 짝을 한 달에 한 번씩 바꾸곤 하였는데, 그 짝과는 이상하게 싸우기도 엄청 싸웠습니다. 무슨 여자애가 그렇게도 우악스러운지, 도무지 저는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매번 당하는 사람은 저였지요.

 

그런데 하루는 싸움을 하다가 그 아이가 제 옷을 쭉 잡아당겼습니다. 그러면서 겉옷이 어깨를 공기 중으로 노출시키며 벗겨졌고, 그 날 입고 갔던 내복이, 그것도 분홍색! 내복이 눈에 확 띄게 드러났습니다. 순간 얼굴은 치솟는 부끄러움으로 화끈 달아올랐고, 거기에 그 아이는 "야 너 여자 내복 입었네!" 라며 기름을 부었습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모면해야 했고, 그래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으로 꽝! 어찌 그리 무모할 수 있었는지… 그런데 그 우악스럽던 짝이 울음을 터트리는 것이 아닙니까. 도둑이 제 발 저린 것인지 아무튼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고 당황하고 있는데, 한 번 터진 울음은 수습할 길 없이 계속 이어져서 그 울음은 수업종이 울리고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실 때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그 광경을 본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된 일인지 자초지종을 물으셨고, 저와 짝이 꿀 먹은 벙어리 마냥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그 사건을 목격한 아이들의 증언으로 수사가 종결되었습니다. 아! 그 때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은 아직도 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유니 섹스의 시대이다. 그런 시대에 그깟 분홍색 내복을 입었다고 놀리거나 부끄러워서 폭력을 쓰면 되겠냐." 그때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냥 주워 섬겼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담임선생님께서는 무려 20년 앞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지고 계셨던 겁니다.

 

이 일이 있고난 후 학교가 파하고 당장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께 잔뜩 성을 냈던 일이 기억납니다. 남자임을 자각하게 된 시기에 자존심에 크나큰 상처를 입었으니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어머니께 화를 냈던 일을 생각하면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미안함과 땀구멍이 온통 입이라도 뭐라 할 말 없는 죄스러움뿐입니다. 얼마나 버르장머리가 없었으면 감히 어머님께 그럴 수 있습니까. 백 번 천 번 혼이 나도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때 일을 미처 사과드리지 못했는데 이미 어머님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으니 참으로 한스러울 뿐입니다.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고자 하나 어버이가 기다리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는 옛말에 절감하며 가슴만 칠뿐입니다. 생각난 김에 잊지 말고 있다가 다음 제사 때 진심으로 용서를 구해야겠습니다.

 

그 때 저는 앞으로는 절대로 내복을 입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어머님은 그래도 추워서 내복은 입어야 하니 대신 파란색 내복을 사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모자간에는 대타협이 이루어졌고, 당장 파란 내복을 사오시며 저에게 주셨습니다. 분홍 내복은 자연히 동생에게 물려졌습니다. 그때만 해도 옷을 물려 입는 것이 큰 일이 아니었는데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무릎과 팔꿈치에 가죽을 동그랗게 덧댄 옷도 참 많았지요. 아무튼 얼마 전 동생과 이야기 중에 알게 된 일인데, 저야 맏이라서 항상 새 옷만 입었지만 자기는 항상 내 옷을 물려 입어서 불만이 많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자기가 옷에 관심이 많아졌고 직접 옷 사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지금도 있으면 입고 없으면 안 입는지라 왜 그런지 몰랐는데 그런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때는 동생이 귀여움 많이 받고 사랑받는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았나 봅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하는 말이 다가옵니다.

 

하지만 이미 내복에서 마음이 떠난 후라 내복이 있다고 해도 잘 입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머리가 조금 더 굵어지니 내복을 입는 아이는 동성 친구 사이에서도 놀림감이 되더군요. 그러니 더더욱 내복은 옷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언제부터인가 아예 사라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고등학교 때인가 추위에 떨면서도 내복은 소매나 발목 밖으로 보이니 입지 않겠다는 저에게 어머니는 어디서 쫄쫄이를 사다가 입으라고 주셨습니다. 하지만 한 번 입어보고는 민망하고 답답해서 도저히 입지 못하겠더군요. 영원히 안녕이었습니다. 그렇게 8~9년 동안 내복은 옷장에서는 물론 머릿속에서도 싹 지워졌습니다.

 

그러던 내복이 다시 내 삶에 등장하게 된 것은 군대시절이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왜! 먹어도 돌아서면 배가 고프고, 아무리 껴입어도 추웠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물며 작은 상처 하나가 나도 쉽사리 낫지 않고 봉와직염이라는 병으로 크게 덧나게 되는 것인지… 군대는 참으로 민간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런 군대에서 보급품으로 지급된 것이 할아버지 내복이었습니다. 나이 지긋하신 할아버지들이나 입을 것 같은 살색의 누비질 되어있는 내복, 젊은 사람이라면 싫어하는 내복인데 촌스럽기까지 하다니. 그래서인지 짠밥이 찬 고참들은 손도 대지 않더군요. 하지만 저는 추위를 싫어하는지라 덥석 손을 댔고, 그 따뜻함에 스르르 녹아버렸습니다. 그 맛을 한 번 보고 난 후에는 도저히 몸에서 떨어뜨리지 못했습니다.

 

추위를 싫어하게 된 것은 어릴 때 경험이 큽니다. 눈덮힌 산으로 억지로 사촌형에게 끌려 다니며 토끼나 꿩을 잡느라 어린 나이에 손발에 얼음이 박히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때는 변변한 치료약도 없고 미지근한 물에 손발을 담그고 앉았거나 만병통치약이던 안티프라민이라는 누런 빛깔의 약을 덕지덕지 바르는 것으로 치료를 마쳤습니다. 그런 치료를 받고 다 나은 줄 알고 있었는데 나이가 들면서도 겨울이 되면 손발과 귀가 시리고 아팠습니다. 하지만 집에서 지내다 보니 심하지 않고 하여 별로 자각하지 못했는데, 군대에 들어가니 이게 더욱 심해지는 겁니다. 특히 훈련소에 한겨울에 들어가면서 완전하게 도졌습니다. 자대 배치를 받고 내무반에 앉아있는데 밤이 되니 고참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겨울 해라 짧기도 짧았는지라 벌써 밖은 시커먼 어둠이 깔려있었지요. 신병이 오면 어디나 마찬가지인데 병장 단 고참 한 명이 저에게 다가와 말붙이며 장난치다가 제 손과 귀를 보더니 이거 동상이라며 사람을 시켜서 미지근한 물을 받아오게 하여 담그라고 하는데, 담근 것은 분명 손발이건만 왜 그렇게 눈에서는 주책 맞게시리 눈물이 나왔던지 모르겠습니다.

 

군대 시절 내복 덕분에 따뜻한 겨울을 나고 난 후부터 이제 겨울마다 내복은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내복은 별로 환영받는 옷이 아닙니다. 제가 내복 입고 다닌다는 것을 알고 난 후부터는 놀림삼아 내복 입었냐고 물어보곤 합니다. 입으면 따뜻하고 좋기만 하구만 내복이 왜 이렇게 천덕꾸러기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번은 내복을 입고 방바닥에 누워서 뒹굴뒹굴 거리는 겨울철 취미생활을 즐기다가 ‘옛날에 못 살던 시절에는 내복이 필수품이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풍족한 시대가 되니까 내복하면 가난이라는 것이 상징되어서 그런가?’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습니다. 하긴 요즈음은 난방이 워낙 잘 되어서 한겨울의 집 안에서도 반팔 반바지를 입고, 심지어는 밖에 나돌아 다닐 때도 자동차를 이용하는지라 간단한 겉옷에 반팔만 입는 사람도 보았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서 함께 움직이려면 내복을 입은 저는 땀에 푹푹 절곤 합니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에너지다 환경이다 하면서 내복을 입자고 홍보까지 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그이들도 생각을 바꿔먹었으면 좋겠습니다. 겨울이 춥고 여름이 더운 것이 당연하건만 왜 힘들여가며 거꾸로 살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진정으로 편하게 살고자 한다면 철 따라 살고, 시(時)에 맞추어 사는 것이 제일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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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오래 기다렸다. 마지막으로 텃밭에서 땀 흘린 것이 10월쯤이었으니 11, 12, 1, 2월 … 무려 4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시간이 참 빠르기도 하다. 인드라망에서 정신없이 일을 해서 더 그런가? 일이 없어서는 안 되겠지만 성격이 그래서인지 가끔은 한정 없이 늘어진 시간 때문에 느리게 방바닥에서 뒹굴고만 싶기도 하다.

 

어제는 인드라망 총회가 있어서 행사를 치르느라 바빴다. 총회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았는데 뒷풀이 자리가 길게 이어져서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안산에 도착했다. 옥금이는 늦게 온다고 그러면서 전화도 안 한다고 투덜댔다. 전화를 안 하고 싶어서 안 한 것이 아니라 밧데리가 다 되어 그랬는데 남의 전화 쓰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아침에는 몇 시에 일어나야 하지? 얼마나 잘 수 있지?' 라는 생각을 하며 그대로 곯아 떨어졌다.

 

아침이다. 옥금이네 집이 좋은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침에 햇살이 들어온다는 것이 참 좋다. 지금은 신림동 반지하에 살아서 아침에 햇살에 일어나는 일이 없다. 낮에나 잠시 들어올까 하루 종일 약간 어두침침한 지하 수맥이 흐르는 방에서 살고 있다. 나는 아침에 햇빛을 받으면 더 이상 잠이 오지 않는다. 아무리 피곤하고 졸려도 낮에는 잠을 자지 못한다. 컴컴한 곳에 가야만 잠이 오는데 옥금이네 식구들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늦잠 자고 싶어 하는 옥금이를 깨워서 간단한 먹을거리를 준비하고 마침 옥금이 어머니가 교회에 가신다 하기에 차를 얻어 타고 텃밭으로 향했다.

 

그동안 텃밭은 한두 번 잠깐 와서 보고 갔지 신경 써서 봐주지 못했다. 마늘은 어떻게 되었고, 시금치는 먹을 만큼 자랐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텃밭으로 가는 길은 푸릇푸릇했던 지난날의 기억 때문에 더욱 황량하기만 하다. 마음까지 휑한 것이 기분이 처진다.


텃밭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시금치가 눈에 들어왔다. 먹을 수 있을까? 시금치는 아직도 그대로이다. 이러다 그냥 갈아엎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다, 봄이 되면 다시 힘을 받아서 확 살아날 것이라고 믿는다.


마늘은 추운 겨울을 이겨내라고 구할 수 있는 모든 재료를 구해서 피복을 해주었다. 베어 놓은 풀, 고구마 줄기, 수숫대... 이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덮어주었다. 옥금이 어머니는 어디서 구하셨는지 스스로 볏짚을 구해다 덮어주시기 까지 했다.

 

어떻게 됐을까? 군데군데 보이는 싹들이 분명히 자라고 있는 것은 맞는데, 한 접이나 되는 마늘을 심어서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났는지 조금은 실망이 되었다. 이제 날씨도 따뜻해지고 했으니 이만 걷어 줘도 되지 않을까 해서 조심조심 걷어 냈다.


아니 세상에! 싹들이 피복 밑에서 자라나고 있었다. 매서운 겨울을 이기고 자라나 있는 새싹들, 얼마나 귀엽고 앙증맞고 예쁜지 모른다. 생명은 감동이고 아름다움이다!


마늘싹에 푹 빠져서 감격하고 있는 사이 옥금이와 지혜 누나가 새로운 사실을 깨우쳐준다. '흙이 시커먼 것이 좋아보이네.' '흙이 참 보드랍다.' 정신을 차리고 흙을 보니 정말 1년 사이에 많이 좋아진 것이 눈에 띈다.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는데 속으로는 얼마나 흐뭇한지 모르겠다. 땅은 정말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내가 노력하고 땀 흘린 만큼 그대로 가감없이 돌려준다.

아니 오히려 더 많이 준다. 이런 기쁨을 또 어디서 누릴 수 있을까? 돈을 많이 벌거나 명예를 얻어서 얻는 기쁨과는 질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다.

 

그런데 한 가지 사실이 또 눈에 띄었다. 한쪽 편은 마늘이 잘 자라고 있었는데, 다른 한쪽은 거의 전멸이라고 할 정도로 듬성듬성 이다. 왜 그럴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심을 때 차이가 이런 결과를 낳은 것 같았다. 처음 심을 때 그냥 멋도 모르고 쇠작대기로 구멍을 숭숭 뚫어서 마늘을 넣고 흙을 채웠는데 그때 빈 공간이 많이 생긴 것 같다. 그 빈 공간 때문에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고 그대로 죽은 것 같다. 할 수 없지, 죽은 놈은 죽은 놈대로 나중에 잘 썩어서 좋은 거름이 되길 바랄 뿐이다.


제대로 난 곳은 그렇게 심다가 이건 아닌 것 같다는 강력한 느낌에 안철환 샘이 심는 걸 보고 그대로 따라 심은 곳이다. 호미로 쓱 긁어서 차례로 뿌리가 아래로 향하게 늘어놓고 흙을 덮어 심는 방법이다. 첫 단추를 어떻게 끼우느냐에 따라서 이렇게 차이가 났다.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맞는 표현은 아니겠지만 그 말뜻이 딱 맞다.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죽은 마늘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대신 그들의 희생으로 다음부터는 그런 실수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도 그들의 사명이 있었나 보다.

 

이제 하우스로 향했다. 밖은 바람이 세서 따뜻한 날씨는 아니었는데 역시 하우스 안은 따땃하다. 잠시 기다리는 사이 안철환 샘이 오셨다. 샘과 나는 연장을 챙기고 물길을 보러 나섰다.

이제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해야 하니 물을 먼저 살펴야 했다. 개울에서 호스를 이용해서 물을 끌어오는데 겨우내 얼어서 터지거나 갈라져서 물이 새는 곳이 곳곳에 보였다. 쭉 훑어 내려오면서 그런 곳을 보수하면서 돌아오니 이제 물이 잘 나온다. 여름철에는 물이 너무 많아서 호스 안에 찌꺼기가 쌓이는 바람에 막히는 경우가 있었는데 겨울에는 호스가 터지는 일이 있네.

 

그렇게 얼추 일을 마칠 때쯤 이일형님 내외가 도착해 있었다.

멀리서도 웃음소리로 알았다. 안철환 샘도 나중에 밥 먹는 자리에서 웃음이 참 대단하다고 했다. 웃음도 잘 웃어야 한다.

내 웃음은 어떤지 모르겠네… 가끔 길을 걸으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다가 지금 내 얼굴은 어떤지 돌아보곤 한다. 지금 내 얼굴은 어떤가? 남들이 보기에 좋은지 아니면 찌푸려 있는지.

얼굴도 잘 가꿔야 할 것 중에 하나이다. 언행과 외모는 어떤 마음을 갖고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그것이 밖으로 표현되어 나오는 대표적인 상징 같다. 요즘 얼짱이니 몸짱이니 맘짱이니 해서 시끄럽던데 그렇게 외형을 가꾸는 일이야 표피적인 일이고 진실로 가꿔야 하는 것은 마음자리일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사람 두 사람씩 불어났다. 시간을 두고 나, 옥금이, 안철환 샘 내외, 이일형 님 내외, 대야미 형님 내외분, 대야미에서 텃밭하시는 내외분과 아이, 성호 형님과 큰딸, 지혜누나, 14기 김은주 님 내외, 최수옥 님 내외 ... 나중에는 이렇게 20명 가까이 되는 사람이 모이게 되었다.

 

고추모종을 위해서 일단 자리부터 만들었다. 여자분들은 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냉이를 캐러 나가셨고 남자들은 삽을 들고 땅을 한 10Cm 가량 네모 낳게 팠다. 그리고 거기에 미리 준비해둔 볏짚을 적당히 깔고, 쌀겨를 적당히 깔고, 물을 적당히 부었다. 핵심은 적당히.

 

요즘은 과학이 최고라며 뭐든지 수치화, 계량화, 양화 하는데

물론 그것이 효율성이니 뭐니 하는 측면에서는 효과가 있지만

사람 사는게 어디 그렇게 되는가. 사람이 사는 문제는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물리적인 일도 실험실에서 형성하는 가상의 조건과는 다르게 다양한 측면이 서로서로 연관되어 있기에 그때그때마다 약간씩 다르게 변화를 줘야하지 않는가.

 

논어 공부하면서 주워들은 구절이 있는데 원칙은 있되 원칙대로 곧이곧대로 꽉 막히게 써서는 안되고 상황상황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는 구절이 있었다. 어찌나 이치에 합당하고 옳은 소리였던지 그리고 나에게 얼마나 필요한 구절이었던지 뇌리에 와서 콱 박혔다.

 

그렇게 파놓은 곳에는 파낸 흙을 그대로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

상토를 만들어서 봉긋하게 덮어주었다. 상토는 모래흙 반에 산흙 반을 섞어서 만들어 주는데, 산흙을 퍼올 때는 겉에 드러난 흙이 아니라 조금 걷어내고 그 안에 흙을 퍼와야 한다. 겉에 흙을 푸면 그 안에 온갖 풀들의 씨와 균이 살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에 싹들이 자라기에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 주려면  경쟁을 줄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만, 그것도 신경쓰지 않고 일단 퍼오는데 집중하느라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만약 그 씨들이 싹을 틔우고 그래서 한해 고추 농사가 망친다면 얼굴 들고 다닐 낯이 없다. 그리고 상토 만들 때 중요한 것은 재를 섞어 주는 것이다. 재의 양은 이것도 적당히 인데 왕겨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그것을 태운 재를 섞어주었다.

 

자리를 든든히 만들어 주고 밥을 먹는 시간인지 술을 마시는 자리인지 모를 작은 잔치가 있었다. 저마다 싸온 먹을거리들을 풀어놓고 바람이 센 찬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흥겨운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오늘은 고추모종을 하기로 했던 날, 본분을 잊을 수 없었다. 자리를 대충 정리하고 고추를 심기 위해 하우스로 이동했다.

 

고추씨는 정말 놀라움 그 자체였다. 고기집에 가면 나오는 풋고추, 그 안에 들어있는 씨가 그냥 고추씨이다. 고추씨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직접 심으려고 손에 쥐고 보니 '이게 고추씨가 맞구나. 이렇게 작고 여리구나.' 하는 사실이 새삼 가슴에 다가왔다. 기침만 해도 날아갈 듯 작고 가볍고 여린 것에서 뿌리가 나고 싹이 나고 고추나무가 된다니 신기하고 또 감격스럽다.

 

이런 고추씨가 한봉지 천 이삼백개 정도에 싼 것이 만 삼천원 정도이고 비싼 것은 이만원이나 한다고 한다. 한 개씩 따져보니 하나에 십원 이상인 고가의 상품이었다. 진짜 종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몸으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지금 미국의 종자회사에 우리나라 종자회사들이 많이 먹혔다고 하던데 그나마 명맥이나마 살아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듣기에는 뜻있는 분들이 한토21이라는 종자회사를 만들어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토종종자를 지키고 있다던데 그분들의 노력이 정말 고마울 뿐이다. 그리고 이 땅 곳곳에서 올바른 삶에 뜻을 두고 살아가고 있을 여러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 절로 일어난다. 뜻을 가지고 사는 분들의 삶이 고되고 힘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분들이 있기에 참으로 다행이고 감사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고추씨를 심는다. 손가락으로 가볍게 한 줄을 죽 긋고 거기에 1∼2Cm 간격으로 고추씨를 늘어놓았다.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참 예쁘다. 씨는 두가지 종류를 썼는데 하나는 사서 쓴 고추씨와 다른 하나는 안철환 샘이 이제 6년째 심고 있는 손수 받은 씨와 어디서 얻어 오신 순종이었다. 일부러 둘을 비교하기 위해서 자리는 따로 구분해서 심었다. 사서 쓰는 종자가 아무래도 개량이 많이 된 것이라 좋긴 한데 1년 단위로 밖에 사용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 종자를 받아서 다시 쓰면 처음보다 소출이 엄청나게 떨어진다고 한다. 중학교때 배운 생물시간에 멘델인가 뭔가 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개량종이 수확량이라는 측면에서는 좋은데 자연스러움에서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그런데 생명의 신비로움이란! 처음은 그래도 이것이 해가 가면 갈수록 제 모습을 찾는다고 한다. 5∼6년이 지나면 제모습을 찾는다고 하는데 올해가 바로 그 해라고 한다. 그래서 안철환 샘은 이번에 심는 종자에 갖는 관심이 엄청나다. 이 실험이 성공하면 제대로 된 종자를 안정적으로 받아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안철환 샘은 그동안 이 일을 혼자 해왔다고 한다. 혼자서 깨알만한 작은 씨들을 이삼천개씩 심고 있으면 '내가 지금 뭐하는 짓인가, 미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일어난다고 한다. 직접 해보니 그런 생각이 일어날만 하다. 혼자 고요한 가운데 시간이 얼마나 가는지도 모르고 하나씩 하나씩 정성들여 심고 있는 모습. 생각하기에 따라서 평화롭고 여유로움일수도 있고, 괴롭고 지겨운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일과 수행의 하나됨이 여기에서 보여진다. 왜 선승들이 농사를 지을까? 그들도 거기에서 이런 모습을 엿보았던 것은 아닐런지 모른다. 방방뜨고 흥분하고 화 잘내고 시끄럽고 남들의 이목을 끌어야만 하고 자기를 표현하고 표출해야만 사는 것 같은 분들에게 이런 일은 좋은 보충재가 될 수 있겠다. 그래서 심리치료 과정 중에 원예치료나 꽃치료 그런 것들이 생겨났는가 보다.

 

고추씨를 심고 나서 해야할 일은 보온 유지이다. 그를 위해서 작은 하우스를 만들어 준다. 장비는 정말 기술이 좋아지는 만큼 좋고 편했다. 땅에 박고 비늘을 덮고 마지막으로 모직포까지 덮어주니 완성이 되었다. 이제 밤에는 보온을 위해서 덮어주고 낮에는 햇볕을 받으라고 걷어주고 적당히 물주고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이제 생명을 키우는 일은 하늘이 할 일이다. 사람은 지극정성으로 힘써 일하는 수밖에 없다. 생명을 낳고 기르는 일은 정말 소중한 경험이고 꼭 필요한 일이다. 아이들 교육으로 이것만큼 좋은 것이 없는 듯하다. 자연에서 뛰어논다는 것은 자연의 운행과 자연이 생명을 어떻게 낳고 기르는지를 관찰하는 시간이다. 인간에게는 오직 여성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경험, 그러나 남성이라고 못하는 것은 아니고 남성은 농사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능력과 경험. 이 작은 텃밭을 통해서 너무나 소중하고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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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날이 많이 풀려서 집에만 있기에 좀이 쑤셨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밭으로 나갔다. 아무도 없었는데 고추 온상에 이불이 젖혀진 걸로 봐서는 벌써 아침에 왔다 가셨나보다. 처음 출발할 때 생각했던 것처럼 쓰레기를 주웠다. 전부터 왔다 갔다 하면서 무슨 쓰레기가 그리도 많은지 작심하고 있었던 차였다. 그래도 막상 주우려고 하니 왠지 더럽다는 생각이 밀려오면서 꺼림칙하게 생각이 되었다. 쓰레기를 주우려고 마음먹었는데 더럽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내가 저지른 일도 아닌데 처리하려니 아니꼽다는 생각도 있을 테고, 나 아니라도 누군가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떨쳐버리고 줍기 시작했다. 하나 둘씩 주워나가니 이제는 더럽고 아니꼽고 억울하다는 생각이 싹 사라졌다. 그냥 쓰레기를 주워 담는 것이 내 일이 되었고, 속으로 은근히 뿌듯해지기도 하였다.


쓰레기를 주우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쓰레기는 쓰레기끼리 모여 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한 번 쓰레기가 버려진 곳에는 쓰레기를 버려도 되는 곳인가 보다 하는 생각으로 또 버리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깨끗한 곳이라면 내가 버리는 쓰레기가 바로 표가 날 테고 양심에 가책도 되지 않을까? 그래서 청소하는 일이 중요한 것 같다. 깨끗하게 치워지면 다시 쓰레기가 버려지는 일이 줄어들겠지.

사람도 그런 것 같다. 나쁜 짓 하기가 처음에 힘들어서 그렇지 한 번 나쁜 짓을 하면 또 하게 되고, 자꾸 그러다 보면 습관처럼 그러지 않던가. 그래서 마음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일이란 어렵고 중요한 일이다. 쓰레기를 주우면서 또 하나의 배움을 얻었다.


한참 쓰레기를 줍고 쉬고 있는데 차 한 대가 들어왔다. 누구지 하고 쳐다보고 있으니 나물을 캐러 오신 분들이었다. '나물 캐러 오셨군' 하고 이씨 아저씨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있는데, 어라 밭에까지 함부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밭에는 이것저것 심어놓은 상태인데 그곳까지 들쑤셔놓고 고랑으로 길이 있는데 두둑을 마구 밟고 다녔다. 봄은 만물이 약동하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흙 속에 잠자고 있던 미생물들도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하고 흙도 어린 아이처럼 약하디 약한 상태라 조심해야 하는데, 마구 밝고 다니는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았다. 그래서 그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한 마디 했다.


"여기 함부로 밟고 다니시면 안 됩니다. 이것저것 심어놓은 것도 많고 조심하셔야지 그러시면 안 됩니다. 산으로 들로 다니시면서 캐실 것이지 막 들어오셔서 이러시면 어떻게 합니까."


같이 온 남자분은 조심스러워서 남의 밭에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된다고 얘기하지 않았냐고 나물 캐는 여자분에게 핀잔을 주었는데, 여자분은 당당하기만 했다. '저기에 뭐 심어 놓은지 다 알고 있다. 전에 농사지어봐서 안다. 여기 나고 있는 나물 놔둬봤자 캐먹지도 않을 것 아니냐.' 하면서 계속 손을 놀려 나물을 캐는 것 아닌가!  은근히 부아가 솟았지만 거기에 댓거리하는 게 더 우습겠다 싶어서 아무 말 않고 옆에 서서 지켜보았다. 그랬더니 슬슬 손을 거두고 다른 두둑을 또 성큼성큼 밟으면서 나가는 것이 아닌가. 들어가지 말라는 의미로 말뚝을 박고 줄까지 쳐놨는데도 자기 밭 인양 함부로 들어가는 모습이 무뢰한이 따로 없었다.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을 확실히 보고 이씨 아저씨에게 가서 저 사람들이 이러이러 하더라고 하니, 그런 사람 많다고 하신다. 자신은 종자로 쓸려고 쪽파를 심어놨는데 나물 캐러 온 사람들이 싹 다 가져간 일도 있다고 하신다. 자기 것이 아니면 가만히 놔둘 일이지 참 사람 마음은 알 수 없다. 무슨 욕심이 그렇게 많은지, 욕심은 둘째 치고 내가 노력하지 않은 것을 날로 먹으려 들지만 않아도 이런 일이 없을 텐데 말이다. 나도 행여나 불로소득을 바래서는 안 되겠다.


나물을 캐서 식구들에게 신선하고 맛좋은 먹을거리를 해주려는 아줌마의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좀 조심해주셨으면 한다. 흙에 대하여 그리고 생명에 대하여 아무 생각이 없는 분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고, 괜히 좋은 기분으로 나물 캐러 오셨다가 기분이나 상하시지 않았나 모르겠다. 별 거 아닌 것 가지고 유세떤다고 생각하셨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 글을 보는 분들께서는 유념해주셨으면 한다. 남의 밭에 들어가서 저거 하나 따 먹는다고 무슨 일이 있겠느냐, 많은 것 중에 하나일 뿐인데 라고 생각하면서 하나씩 가져가는 분들이 솔찮히 계신다. 하지만 그것을 키운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화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왜 속담에도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다고 하지 않는가. 농부에게는 땡볕에서 노심초사 하면서 땀 흘려 가꾼 작물도 자식과 진배없다. 더군다나 유기농을 하면서 정성껏 몇 년 동안 공들여 가꾸어 온 흙이야 말할 것도 없다. 흙을 살려내지 않으면 유기농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흙은 만물을 거두고 길러주는, 뭇생명의 어머니라는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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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적,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뀐 20년 전, 국민학교를 다닐 때 국어시간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고 배웠습니다. 그래서인지 어린 시절에는 까치를 보면 괜히 반가웠고, 이놈들이 ‘깍깍’ 울기라도 하면 동생한테 오늘은 손님이 오려고 까치가 저렇게 운다고 잘난 척하면서 말해주곤 했습니다. 그랬던 까치가, 이제는 참 얄밉습니다.


밭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엔가 나타나서 나를 감시하는 그 눈초리, 느껴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또 왜 그리 친구들은 불러대는지. 그럴 때면 서로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은지 나를 밭 한가운데 두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느라 바쁩니다. 내가 그 말을 알아듣는 것도 아니고 나를 두고 얘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기분이 나쁩니다. 정말 감시받는 기분이지요.


다른 밭일이라면 몰라도 만약 그렇게 감시받을 때, 콩이나 옥수수를 심는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까치밥이 되겠다는 생각이 불쑥 듭니다. 그래서 그 순간을 모면하기 위하여 저는 나름의 꾀를 냈습니다. 그 수란 바로, 까치를 따돌리는 것이지요. 아무리 급해도 까치가 보는 앞에서는 까치밥이 될 만한 것들은 절대 심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변을 잘 둘러봐야 하고, 까치 울음소리에 신경을 잘 써야 합니다. 혹시라도 까치가 있다면 돌을 집어 던지는 시늉을 하면 도망을 갑니다. 하지만 까치들은 곧 다시 돌아오지요. 그럼 이번에는 진짜 돌멩이를 집어 던지면 화들짝 놀라서 멀리 도망을 갑니다. 헛팔매질인지 진짜 돌팔매질인지 구분할 정도로 영악한 놈들이 바로 까치입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돌을 던지면 '아 이게 나를 못 맞추는 구나' 하면서 애당초 도망갈 생각을 안 합니다. 그러니 상황 상황에 맞게 궁리를 잘 하셔서 까치를 쫓아내야 합니다.


이 까치란 놈 한 놈한테만 발각이 되면 서로 신호를 보내서 금방 여러 마리가 새카맣게 몰려옵니다. 그 앞에서 재롱떠는 것도 아니고, 그 놈들 좋은 일 할 수는 없지요. 그럴 때는 그냥 일을 접고 다 사라질 때까지 막걸리나 한 잔 하면서 시간을 보내세요. 이것을 “베짱농법”이라 하려고 했는데, 쓰고 보니 “눈치농법”이 되겠군요.


목초액에 담갔다가 심으면 탄내가 나서 덜 먹는다고 하고 다른 여러 방법이 있다고 하지만 솔직히 좀 귀찮고, 어디 누구 머리가 더 좋은가 시합이라도 해보자는 기분으로 그냥 심습니다. 그러는 게 더 귀찮겠다고 하실 분들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으나, 아무튼 그렇게 해 본 결과 아직 한 번도 새피해를 당해 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재수가 좋았던 것인지 정말 이 방법이 통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목초액은 전혀 사용한 적이 없는데 80% 이상은 다 발아를 했습니다. 아, 그 대가인지는 모르겠는데 발아 한 다음에 입는 피해는 있었습니다. 그 놈들이 새순만 뜯어먹거나 뽑아놓는 경우가 있더군요. 그런 피해는 내가 미처 보지 못할 때 하는 짓이니 뭐라 할 수 없고, 대신 부지런히 발자국 소리를 들려주며 알아서 도망가게 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까치는 정말 영물입니다. 머리가 어찌나 좋은지 모릅니다. 손님이 오면 운다는 것도 매일 보던 사람이 아닌 새로운 사람이 오는 것을 보고 혹시 있을 지 모를 피해를 대비하기 위해서 위협의 목소리를 내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국민학교 때 책에서 보았던 좋은 새 까치가 요즘 보는 까치랑 같은 놈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이놈들아! 적당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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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안골의 봄




지금 내가 60여 평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고 있는 부곡동 텃밭의 옛 지명은 능안골이라 한다. 이 지명은 조선시대 관찰사를 지낸 유석이라는 분의 무덤이 마치 능처럼 커다랗다고 해서 불렸던 옛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은 정면에 신갈-안산 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고, 그 중간에는 고속철도가 광명역을 향해 지하로 달리고 있다. 한 마디로 최고의 문명혜택을 받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밤낮없이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귀에 거슬리고 지하로 고속철도가 지나가는 상상만 하면 괜히 땅이 울리는 것 같기도 하더니 지금은 그저 무덤덤하게 그것들을 쳐다보게 된다. 산 좋고 물 좋은 것만 따지자면 그리 좋은 조건은 아니겠지만 하루하루 지내면서 느끼는 능안골은 아늑하고 포근하기만 하다.


다른 모든 곳이 마찬가지 이겠지만 능안골의 절경은 봄에 펼쳐진다. 이곳을 몇 년 전부터 오갔지만 올 해처럼 겨울의 끝자락부터 지켜본 적은 처음이라 올 해 느끼는 봄은 특별하고 새롭다.

봄이 오기 전에 능안골은 황량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앙상한 나무가지들, 거기에 걸려 있는 흡사 까마귀 같은 검은 비닐들이며 땅은 작년 가을 롯데마트 공사장에서 나온 흙을 갖다부어서 정말 볼품 없었다. 그런 곳이 봄이 되기 시작하자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그저 봄이 오는구나 했었는데, 봄이 이렇게 오는지는 머리털 나고 처음 알게 되었다.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전령사는 산새들이다. 봄이 오면 겨우내 어딘지 모르는 곳에 꽁꽁 숨어있던 산새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와 지저귀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버드나무에는 새순이 돋아 연두빛으로 물들고, 버들강아지도 솜털이 뽀송송하게 달리게 된다.

그 무렵이 되면 개나리꽃이 서둘러 핀다. 개나리꽃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잎도 달지 않고 꽃부터 피운다. 이 때 산수유도 함께 노란 꽃망을 터트리는데, 산수유도 개나리와 함께 노란색이긴 하지만 개나리가 붓으로 꾹꾹 찍어 누른 듯 하다면 산수유는 빨대에 노란 물감을 머금고 훅 불어놓은 듯한 모습이다.

이때 쯤이 되면 동네에 있는 목련에도 꽃이 달리기 시작한다. 목련꽃은 정말 탐스럽다. 애기 머리만한 꽃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모습을 보면 그 탐스러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목련은 꽃이 하얘서 그런지 밤에 보는 맛이 또한 기가 막히다. 은은한 달빛에 빛나는 목련꽃을 보면 괜히 감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제 개나리에 잎이 생기기 시작하면 산에 있는 진달래꽃이 피기 시작한다. 나무들은 아직 앙상한 채로 있기에 진달래가 여기 저기 울긋불긋 피면 그 모습이 눈에 확 들어온다. 마치 진분홍색만 보이는 흑백영화를 보는 것 같다. 그 모습을 보면서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는 진달래꽃을 너무 많이 따먹어 분홍똥을 쌌다는 옛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한다.

진달래꽃이 피고 나면 이제 이 나무 저 나무에도 꽃이 달리기 시작한다. 요즘 지자체에서 너도 나도 앞다투어 가로수로 많이 심는 벗꽃도 피고 맛있는 열매가 달리는 살구꽃, 앵두꽃도 만발한다. 그러고 보니 이 맘 때 피는 꽃은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주는 것들이다.


이런 꽃들이 피고 나면 산이 본격적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새잎이 돋아 온 산이 연두빛으로 가득하다. 어떤 작가는 그 빛깔을 보고 유록색이라고 했다고 한다. 정말 절묘한 표현이다. 어떤 생명이나 어릴 때는 이렇게 예쁜 것일까.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왜 이리 사랑스럽고 정이 가는지 모르겠다.

산의 변신은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잎을 단 후에는 나무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혼자 보다는 여럿이 뭉쳐 있을 때 더 예쁜 조팝나무에 하얗고 조그만 꽃들이 다닥다닥 달린다. 이 꽃을 보면 손으로 쭉 훑어서 한 입 먹으면 맛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조팝나무 인지도 모르겠다. 조팝나무는 거꾸로 심어도 자란다고 할 만큼 생명력이 강한데, 올 해 초봄에 경지정리 때문에 죽게 될 운명에 처한 조팝나무를 가져다 밭에 들어가는 입구에 대충 묻어줬는데 신기하게도 살아서 잘 자라고 있다. 이놈을 가만히 보니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잎과 꽃만을 피웠다. 욕심 많은 사람 같으면 전부 다 원상복구 해놓으라고 닥달하거나 어떻게든 다 피워내려고 고생할텐데 자기 몫만큼만 알아서 피우는 모습에 경외감이 든다.

조팝나무에 꽃이 달리면 산벗꽃과 철쭉 차례이다. 조팝을 옮길 때쯤 광명에 있는 화원에서 사다 심은 철쭉들이 몸살을 앓고 있는 와중에도 꽃망울을 피웠다. 붉은 색도 있고 하얀 색도 있고, 똑같은 철쭉인데도 가지각색이다.

산벗꽃도 장관이다. 회색빛 길거리에 피어있는 벗꽃과는 다르게 연두빛 속에서 피어있는 산벗꽃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밭에서 일을 하다보면 벗꽃이 바람에 날려 꽃잎을 떨구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면 여기가 무릉도원 인가 착각할 정도이다. 밭은 척박해서 새싹들이 힘겨워 하는 모습에 마음이 짠했는데 벗꽃비가 그 마음을 달래준다.


능안골에는 이렇게 봄이 온다.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한 모습에 하루하루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일 년이 가고, 이 년이 가고, 십 년이 가도 지금처럼 감동할 수 있을까? 자연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그때그때 할 일을 하면서 산다면 백 년이 가도 똑같은 마음을 갖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곳이 도시 한 복판이라도 생명이 살아 숨쉬는 곳에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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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파 옮겨심기



장모님이 시골에서 얻어다 주신 대파를 옮겨 심으려고 아침부터 서둘러서 밭에 갔다. 오늘은 아침부터 날이 흐린 게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아서 비가 오지 않는 틈에 잽싸게 일을 마치려고 서둘렀다. 아내는 어제 늦게 잤다며 집에서 잠만 자고 있다. 아침잠이 많아 일이 없으면 으레 아침에는 늦게까지 잔다. 마음 같아서야 늘 함께 밭에 가고 싶지만 적당히 눈치껏 맞춰야 한다.

장모님께서 대파를 주시며 어떻게 심는다고 일러주셨는데, 가물가물해서 밭으로 가며 다른 밭에는 대파를 어떻게 심었는지 꼼꼼히 살펴보았다. 서로 얼마나 떨어뜨리고, 어떤 식으로 심었는지 자전거를 타고 지나면서 쓱~. 그렇게 대충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고 밭에 이르렀다. 때마침 텃밭 형님이 밭을 둘러보고 나가시는 길에 마주쳤다. 오늘 대파를 심으려고 한다니, 어떻게 심는지 아느냐고 물으신다. 벌써 몇 년인데 자신 있게 머릿속에 들어 있다고 대답하니, 잘 심으라고 껄껄 웃으시며 가신다. 뚜벅뚜벅 걸어서 밭으로 가니 마을 아저씨가 벌써 나와 계셨다. 아저씨는 어느 틈에 놀고 있는 땅을 싹 고르고 뭔가 심으려고 돌을 골라내고 계셨다. 정말 부지런하시지. 꾸벅 인사를 드린 뒤 대파를 심으려고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이리 가져오라고 하신 뒤 하나하나 빠짐없이 설명해 주신다.


"땅은 이 정도 파서 대파를 하나씩 기대 놓으면 돼요. 이렇게 놓으면 죽을 것 같아도 나중에는 지들이 다 알아서 위로 쭉쭉 서서 자라니까 걱정하지 말고. 대파를 이 정도 간격으로 하나씩 놓고 흙은 뿌리를 살짝 덮을 정도로만 덮어야 해요. 흙을 너무 많이 덮으면 곪아서 죽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요. 대파는 땅에 던져만 놔도 사는 작물이니까 굳이 흙을 많이 덮으려고 하지 말아요.

이렇게 어느 정도 큰 걸 갖다 심을 때는 잎을 탁탁 쳐내는 것이 좋아요. 안 그러면 나중에 위로 설 때 무거워서 제대로 못 서지. 어차피 이 잎들은 나중에 다 말라 비틀어져서 못 먹고, 나중에 여기서 새로 나오는 것들을 먹는 거야."


그러면서 어떻게 하는지 몸소 보여주신다. 그러고 여기 있으라고 하시더니 낫을 가져다 잎까지 손수 다 쳐주신다. 어찌나 고마운지 나도 뭐 도와드릴 일이 없나 해서 골라 놓으신 돌을 날랐다. 놔두라고 하시지만 우리네 맘이야 다 그렇지 않은가. 누가 선물을 주면 괜찮다고 두세 번 손사래 치는 게 맛이고, 도와준다고 나서면 됐다고 괜찮다고 해도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 것이 우리네 아닌가. 내가 겪은 우리 어르신들은 다들 그러셨다. 마을 아저씨도 됐다고는 하시는데, 거들고 나서니 말리지는 않으신다. 그렇게 돌 고르는 일을 마무리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대파를 심으러 갔다.

어느 땅에 심을지 돌아보다가 딸기를 파내고 그곳에 심기로 했다. 딸기에겐 너무 미안하지만 그곳이 아니면 마땅히 심을 곳이 없다. 요즘은 사람도 농산물도 철이 없어서 겨울에도 딸기를 먹는데, 한데 딸기를 심으면 어디 겨울에 딸기를 구경할 수 있나. 옛이야기의 효자들이나 엄동설한 눈이 펑펑 내리는 날 구해 오겠지. 그렇다고 한데서 겨울에 딸기가 얼어 죽지는 않는다. 겨울을 나고 이듬해 봄이 되면 어김없이 되살아난다. 그럼 5월 중순 이후에나 따 먹을 수 있다.

눈 질끈 감고 딸기를 파낸 뒤 주변에 풀들을 열심히 뽑고 흙을 고르고 나서 아저씨가 알려주신 그대로 호미를 쥐고 따라 했다. 아저씨는 호미로 쓱쓱 쉽게 잘만 하시던데, 나는 왜 이리 안 되는지. 영 폼이 나오지 않는다. 어르신의 내공을 따라가려면 더 경험을 쌓아야 하나 보다. 아무튼 나름대로 열심히 아저씨가 알려주신 대로 심었다. 특히 너무 깊이 심어서 곪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되어 흙으로 덮을 때는 더욱더 신경 썼다. 다음에 오면 대파가 제대로 살았는지 가장 먼저 봐야지.

대파는 생명력이 강하다고 여러 사람들이 칭찬했으니 내가 아주 잘못 심지만 않았다면 모두 살 거라고 믿는다. 농사를 짓다 보니 냄새가 강한 식물일수록 야생에 가깝고 생명력이 강하다는 것을 느낀다. 대표적으로 이번에 심은 대파가 그렇고, 또 들깨와 토마토가 그렇다. 정말 흙에 던져만 놔도 살 정도로 끈질기다. 가만히 보면 그런 이치는 사람도 비슷한 것 같다. 흙냄새 풀풀 풍기고 촌티가 팍팍 나는 사람이 어려운 상황이 닥쳐도 굽히지 않고 버티지 않는가. 가난하고 어려운 나라를 흙에서 자란 사람들이 이만큼 일으켜 놓았다.

그런데 온실에서 자라는 화초 같은 요즘 우리 도시 사람들에게도 냄새가 있을까? 향수나 화장품, 샴푸, 비누 냄새는 코가 비틀어지도록 나는데, 그런 냄새는 전혀 그 사람만의 것 같지 않다. 아무런 냄새가 없기에 그런 용품에 의존하는지도 모르겠다. 십 몇 년 전 파트리크 쥐스킨트라는 사람의 [향수]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거기에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기억난다. 그 책의 주인공은 남들과 달리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 사람이다. 그 덕분에 괴물이라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그 사람은 결국 남들처럼 냄새를 가지려고 급기야 사람을 죽여 사람 냄새 나는 향수를 만든다는 이야기다.

오늘 방바닥에 누워 가만 생각하니 그 사람이야말로 전형적인 현대인을 상징하는 인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냄새가 아니라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서 그만의 파장, 표정, 분위기가 풍긴다. 믿거나 말거나 깨끗한 사람에게는 깨끗한 기운이 강해서 깨끗한 것만 들러붙는다고 한다. 지금 나한테는 무슨 냄새가 나는지 킁킁대며 맡아봐야지.


 

후기 

육경영 선생님 잘하고 가셨나요? 오랜 시간 걸려서 오셨는데 몇 마디 나누지도 못하고 황급히 헤어져서 죄송해요. 그냥 옥금이 먼저 보내고 자전거 타고 갈 걸...

주말농장의 똑같은 밭에서 어디는 잘되고 어디는 안 되고 하는 차이가 있습니다. 드디어 그 이유를 알았습니다. 너무 궁금해서 이 씨 어르신에게 물었는데,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시며 해주신 말씀에 따르면, 산에서 흙을 퍼다가 객토를 했는데 흙이 좀 부족해서 지금 잘되는 쪽에 다 덮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곳은 예전에 농사짓던 곳이라 잘되는데 객토한 곳은 지금은 거름기가 없어서 안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나중에 객토한 땅이 더 거름질 수 있다고 하시더군요. 대단한 내공이십니다. 언제 안산으로 찾아오시는 분 중에 정말 운이 좋으시다면 이 씨 어르신을 한 번 만나보시면 좋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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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작물의 성장과 환경' 이라는 주제로 이완주 박사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내 방식대로 땅 갈고 파서 심으면 된다'는 주먹구구식이 아닌, 과학적으로 식물은 이렇기 때문에 이러이러하게 해야 한다는 설명을 참 재미나게 들었습니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성함을 들어왔던지라 어떤 분이실지 궁금했는데, 잠바를 걸치고 오신 모습이나 지하철 타고 오셨다는 말씀이나 그냥 옆 집 아저씨나 할아버지 같은 인상이셨습니다. 모습은 그러하셨지만 역시나 강의에는 연륜과 관록이 묻어 있음을 대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자칫하면 지루하고 재미없을 수 있는 주제의 강의를 어찌나 재미나게 말씀하시는지 강의 중간 중간 웃음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덕분에 식물의 기본 구조가 어떻고 그렇기에 농사는 어떤 원리로 짓는 것이라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또 중간에 말씀해주신 오십견 방지 체조와 감기 예방법도 확실하게 배웠으니 박사님 말씀처럼 이번 강의로 얻은 바도 큽니다.


그런데 이번 강의로 저는 무엇보다 제 좁은 소견이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강의 마지막에 '유기농업만이 해답인가?' 라는 질문이 바로 그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유기농업만이 답이다'라는 생각만 가지고 있던 저에게 그 질문 자체가 충격이었습니다. 박사님은 농약과 화학비료를 주지 않고 유기질 퇴비를 통해 농사를 짓는 것이 유기농업이라고 정의하시면서 관행농의 문제점을 짚으셨습니다. 농약이나 화학비료가 해로운 것이 아니라, 10을 넣어야 적당한 양인데 그 2배, 3배로 투여하는 오남용이야 말로 문제가 되고 환경을 파괴하는 행동이 아닐까 하는 의견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유기질 퇴비를 넣어준다고 해도 어차피 식물이 먹는 것은 그 하나하나의 성분이기에 유기질 퇴비를 넣어주나 화학비료 적당량을 투입하나 별 차이가 없다고 하시는 말씀에는 어느 정도 공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는데 어떤 영양분을 공급하기 위해서 유기질 퇴비는 300kg 넣어주어야 하는데 화학비료는 1kg만 넣어도 된다는 점을 말씀하시며 이런 것이 과학의 힘이라고 하시는 부분에서는 과학을 우습게보거나 도외시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식물이 먹는 영양분은 정해져 있기에 유기질 퇴비를 주나 화학비료를 주나 마찬가지라는 점과, 유기질 퇴비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지만 화학비료는 과학의 힘으로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었습니다. 작물이 제 맛을 갖기 위해서는 미량 원소들이 필요한데 현재 행하고 있는 수경재배가 깨끗할지는 모르지만 작물의 제 맛을 낼 수는 없다고 하시는 말씀 또한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미량 원소는 굳이 유기질 비료가 아니라도 식물이 알아서 흡수한다고 하셨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좀 넓은 안목으로 봐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물론 개별 식물과 그 식물이 생장하는데 필요한 영양분이라는 것만을 따로 분리해서 보면 적정량의 화학비료나 농약을 주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정말 박사님 말씀처럼 그런 것들이야 말로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이 이룩한 놀라운 과학의 업적이고 인간의 배고픔을 해결한 녹색혁명의 전도사 입니다.


분명 작물은 인간이 먹기 위해서 재배하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면 보다 쉽고 편하게 많은 생산물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농약이나 화학비료, 각종 농기계의 사용과 같은 과학적 영농이 강조되는 것에는 사회구조적인 문제도 함께 엮여 있지 않은가 합니다. 현대는 예전과는 달리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도 얼마 되지 않는데 그 얼마 되지 않는 분들이 도시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먹을거리를 책임져야 하는 실정입니다. 이농 현상이 활발해지고 그래서 적은 노동력으로 최대의 생산을 얻어야 하는 이런 현실은 산업화, 자본주의화라는 현실과 맞물려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다고 아파트와 공장을 부수고 싹 걷어낸 후 농사를 지어라 하는 것도 어불성설이겠지만, 여하튼 바로 이 부분이 도시농업이 고민해야 하는 지점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또, 아무리 적당한 량의 농약과 화학비료가 자연적으로 분해가 되고 피해가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인간-작물의 관계만을 따로 분리하여 바라본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듭니다. 자연생태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고 그래서 아직 우리가 알지 못하는 영역도 무궁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생태계라는 것은 태어나 자라서 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순환 속에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순환의 핵심은 바로 공생공존일 것입니다. 제가 그 분야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도 아니고 하니 적정량의 농약과 화학비료는 자연분해 되어 다른 식물과 동물에게 아무런 피해를 끼치지도 않는다는 것이 사실이라 해도 무언가 아직 우리에게 밝혀지지 않은 알지 못하는 세계가 또 있지 않을까 합니다. 여기서 자칫 잘못하면 신비주의나 허황된 망상으로 빠질지 모르지만 저는 올 해 제가 일궈야할 땅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바가 있습니다.

올 해 제가 경작해야 하는 땅은 작년 가을에 복토한 곳으로 아무런 생물도 살지 않을 것 같은 황토밭입니다. 그 땅을 바라보면서 드는 생각은 잡초라도 좋으니 무언가 생명이 살아 숨을 쉬고 있다는 증거라도 보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니 '무엇이 문제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나름대로 내린 해답은 역시 땅의 건강함이 아닐까 합니다. 땅이 비옥하다 라든지 땅이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 생물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마을에 심보 고약한 사람도 있고 미친 사람도 있고 거지도 있지만 서로 어울려 사는 모습이 해답이 아닐까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마을에 착한 사람들만, 나를 인정하고 칭찬하는 사람들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 아닐까 합니다. 짧은 생각이지만 도시농부학교에서 이야기하고자 것이 이러한 점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박사님이 강조하신 과학의 힘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과학은 실로 대단하고 인간에게 많은 도움을 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과학의 힘을 우리는 오남용을 하게 되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요즘 읽고 있는 맹자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인의는 사람 마음의 고유함에 근거하니 천리의 공됨이요. 리심은 나와 남을 서로 드러냄에서 생기니 인욕의 사사로움이다. 仁義, 根於人心之固有, 天理之公也. 利心, 生於物我之相形, 人欲之私也.'


이 말에 나오는 것처럼 오남용하게 되는 것은 주변을 생각하지 않는 사사로움에서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물론 무지함에서 비롯될 수도 있고, 또 그로 인한 습관에서 비롯될 수도 있습니다. 무지가 문제라면 교육과 홍보를 해야 하고, 습관이 문제라면 고쳐야 할 바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느냐 아니냐는 내가 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가 기본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남을 가르고 남은 나와 전혀 무관한 것으로만 생각하여 내 욕심만 채우려는 데에서 오남용이 생기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과학과 과학자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이 됩니다. 과학 그 자체로는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닌 그저 과학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 과학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아인슈타인이나 노벨이 그러한 경우겠지요. 과학 그 자체가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해서 과학자도 그러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 과학을 사용하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지금에 와서 원시시대로 돌아가자는 말이 통할 수 없는 만큼 우리는 과학을 통해서 얻게 된 힘을 잘 사용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 잘 사용함에는 바로 가치의 문제가 걸려있습니다. 도시농업을 이야기 하는 우리에게 그 가치는 앞에서 이야기한 공생공존이라는 관점이 아닐까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 곳곳에는 척박하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유기농업을 하시는 분들이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 중에는 외람되지만 너무 원리원칙만을 강조하는 분들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이완주 박사님이 말씀하신 과학의 힘을 너무 맹신하고 오남용 하는 것도 문제가 있겠지만, 그 반대로 그 과학의 힘을 너무 불신하고 배척하는 자세도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합니다. 과학의 힘은 부정하기 보다는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적절하게 사용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의 힘을 인정하고 적절히 사용하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앞서 말한 가치기준에 대한 고민과 나눔이 필요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가 적당한 선이냐 하는 것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유동적인 기준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파시즘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농사만 해도 맨 손으로 할 수는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작은 밭에서 트랙터를 몰고 다닐 수도 없는 일입니다. 적당한 도구가 없다면 새로 고안하고 만들어서 이용할 수 있는 자세도 필요하고 그에 걸맞는 새로운 농법도 필요합니다. 그러한 고민과 기술이 축적되었을 때 우리의 현재 상황에 맞는 새로운 농법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이고, 다른 사람도 함께 누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과학의 힘이란 이런 측면에서 유의미 할 것입니다. 아무리 옛 것이 좋고 도구는 사사로운 마음을 발생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그런 입장만 고수한다면 그저 고집불통 독불장군 밖에 되지 않는다 생각합니다. 이 또한 도시농업을 고민하는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 합니다.


이제 이론 수업이 끝나려면 얼마 남지 않습니다. 수업을 들으면 들을수록 재미도 있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부족한 용량으로 많은 것을 담게 되니 머릿속도 그만큼 복잡해집니다. 오늘은 어제 이완주 박사님의 강의를 듣고 나서 드는 생각을 근질근질해서 쭉 적어보았습니다. 한참을 써내려가다 보니 똥오줌도 못 가리는 놈이 주절주절 떠든 꼴은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슬슬 서울 올라가는 일이 귀찮아지기도 하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11월 모두 어떠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될지 사뭇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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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배추 심기




지난 주말에는 비가 오는 바람에 밭에도 못가게 되었다. 요즘 하루 걸러 하루 비가 오니 정말 답답할 노릇이다. 그 덕분에 무를 심어야 하는데 계속 차일피일 미루게 되니 말이다. 그래서 매일 같이 일기예보를 확인하던 중 목요일과 금요일에는 비가 안 온다는 예보를 확인했다.


목요일은 정말 날씨가 쨍쨍했다. 그래도 어제 비가 왔으니 땅이 마르려면 시간이 걸리리라 생각하고, 금요일에 큰 맘 먹고 여름휴가를 하루 내서 밭으로 갔다. 안철환 선생님은 저번 주말에 무를 심으려고 하시다가 비가 온다는 예보가 조금 당겨서 심으셨다고 하셨다. 나도 오늘을 놓치면 이번 주말에 또 비가 온다고 하니 때를 놓칠 것 같아서 휴가까지 내고 밭으로 왔다.


점심은 안철환 선생님께서 준비해오신 국수로 비빔국수를 해 먹고 막걸리를 나누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안철환 선생님은 참 재미있으시고 항상 밝으시다. 어떻게 보면 평생 고민 걱정 없이 사셨을 것 같은 분이시다. 설마 그런 것 없는 사람이 있겠냐 만은 안철환 선생님은 특유의 익살과 낙천으로 잘 넘겨오셨을 것이다. 평소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나로서는 안철환 선생님의 그런 면이 참 좋고 부러울 때도 있다.


한담을 나누면서 막걸리 한 통을 비우고 나서 이제 일을 시작하였다. 저번 주에 와서 김을 매주지 않아서인지 밭에는 풀들이 엄청나게 자라 있었다. 이걸 두 주, 세 주만 놔두면 진짜 손들고 나가 떨어질만 하다. 한 주 사이에 이렇게 무섭게 자라 있는데 그보다 더 지난 후의 풀들을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다. 난 농사규모도 작고 이걸로 밥 벌어 먹고 사는 입장도 아니니 그냥 좋게 생각하면서 받아들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정말 엄청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먼저 무를 심기 위해서 묵혀두었던 밭을 김매기 시작했다. 풀들은 왜 이리 뿌리를 억세게 박고 있는지 한 이랑에 나있는 풀들을 잡아내니 팔이 아프기 시작했다. 그렇게 뽑아낸 풀들은 수북히 쌓여서 내 무릎보다 높이 올라와 있다. 징글맞은 놈들, 한켠으로 몰아서 쌓아두고 무를 심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농작물이 그렇듯이 무도 한 30Cm 간격으로 해서 서너알씩 심어주면 된다. 한 구멍 한 구멍씩 작업을 하니 얼추 50구멍쯤 됐을까 이제 더 이상 심을 곳이 없다. 더 심을 곳을 찾아보니 이미 작물을 수확해서 거둔 곳과 습해로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하는 고추가 있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이번 해에 첫 고추농사는 완전 대실패이다. 그래도 풋고추 얼마는 거두어 먹었으니 그것으로 위안을 삼을 뿐이다.


무를 다 심고 나서 이제 더 이상 할 일이 없겠거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아무래도 오늘 배추를 심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신다. 올해 날씨가 궂어서 배추 모종해 둔 것이 벌레한테 많이 당했다면서 여기서 농사짓기 시작한 이후로 이런 적은 처음이라고 하신다. 그래도 스스로 모종 하나는 튼튼히 잘 키운다고 자부하셨는데 올해가 힘든 해이긴 한가보다. 진짜 배추모종들이 힘이 없어 보이고 벌레들이 무참히 폭격해 놓은 것들도 꽤 보인다. 이런 상태에서 모종으로 더 놔두어 봤자 벌레들 밥이 되기 딱 좋다면서 그래도 본 밭에 옮겨 심으면 거미 같은 천적들이 있어서 피해를 덜 볼 거라고 하셨다. 그래서 계획에도 없던 배추도 심게 되었다.


얼마를 심어야 할지 계산이 안 서서 가만히 있는데, 그때 온 네 사람 몫이면 한 백포기 심으면 될거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래서 종이컵 33개를 추려서 들고 가서 본 밭에 옮겨심기로 하였다. 배추를 심기로 생각하고 있던 밭 역시 이미 풀들이 점령한 상태였다. 그냥 풀이라면 어떻게든 쓱 잡고 쑥쑥 뽑아내면 되겠는데 여기는 환삼덩굴들이 난리다. 이놈들은 줄기에 가시가 있어서 장갑을 끼면 거기에 달라붙고 그렇다고 장갑을 벗고 걷어내려면 팔이고 목이고 긁어대서 상처가 나기 일쑤이다. 처음엔 어떻게든 다 걷어내겠다는 생각에 장갑도 안 끼고 달려들었다가 무수한 영광의 상처만 남기고 장갑을 끼고 도전하기로 맘을 바꿔먹었다. 그래도 이놈들의 생명력에는 당할 수가 없어 제거 작전에서 걷어내기 작전으로 다시 맘을 바꿔먹었다. 어떻게 어떻게 낑낑대며 환삼덩굴을 걷어내고 풀들을 제거하고 나니 슬슬 해질녘이 다가왔다. 그래서 급한 맘에 쉴 틈도 없이 배추를 심기 시작했다.


되다 되다 해도 오늘만큼 일이 된 적은 없었다. 한 절반쯤 심었을 때부터는 쪼그리고 있는 무릎이 아파오고 팔도 힘이 빠져서 힘을 줄 때마다 통증이 찾아왔다. 겨우 백포기에 쓰러질 수 없다는 생각으로 맘을 다잡고 묵묵히 일을 끝마치자 해는 어느덧 서산 너머로 져버려서 어둠이 깔리고 있는 때였다. 일을 마쳤다는 기쁨보다 이제 다시 쪼그리고 힘 쓰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먼저 찾아왔다. 농부님들의 어려움과 고단함을 조금이나마 맛보았다고 할까. 정말 기계 없이 전적으로 사람의 힘만으로 농사 짓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 힘이 들 것 같다.


요즘 들어서 귀농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귀농학교를 다니기 전에 생각했던 귀농, 귀농학교를 다니면서 생각했던 귀농, 수료식 이후의 귀농, 그리고 지금 생각하는 귀농, 똑같은 맘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요즘 들어서는 가장 고민되는 것이 과연 귀농을 해서 먹고 살 수나 있을까 라는 것이다. 지금 현재로서는 솔직히 농사만 지어서 먹고 사는 건 자신이 없다. 뭔가 다른 돌파구나 안정적인 소득원을 마련하는 일이 절실하게 다가온다. 인간극장에 나왔던 산골9남매 아버지의 소득원은 양봉이었는데, 나도 그런 것을 마련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몇 달 살지 못하고 두 손 두 발 다 들고 무장해제 당해서 다시 도시로 흘러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텃밭 농사이지만 계속해서 나를 자극하는 일이 있다는 것이 정말 소중히 느껴지는 하루였다.



후기 - 비바람이 엄청 심했나 봅니다. 키큰 옥수수는 전부 쓰러져 버렸습니다. 어떤 것은 아예 꺾여 버렸습니다. 안철환 선생님께 말씀드리니 무경운의 장점에 대해서 말씀해주십니다. 땅이 좋으니 선생님 것들은 조금 쓰러지고 난 후 저절로 다시 일어섰다고 하십니다. 내 밭에 심어놓은 가지를 보면서 땅의 중요함을 새삼 깨달았습니다. 똑같이 심은 가지인데 안철환 선생님의 가지는 팔뚝만 합니다. 그런데 제 가지는 땅이 축축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손가락 세 개만 합니다. 농약을 치지 않는 것은 어떻게든 만회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찾을 수 있지만 거름을 주지 않으면 어느 정도 멀쩡한 작물을 수확할 수 없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거름을 만드는 일이 정말 중요합니다. 실상사에 갔을때 그 분이 왜 자신들이 만들었다는 퇴비의 중요성을 그렇게도 강조하고 또 강조했는지 알 것 같습니다.


날씨가 계속 흐리니 작물들도 힘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 작물들을 보는 제 마음도 힘이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 해준 것인지, 미안스럽고 미안스러울 뿐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기운도 없고 맘도 축 처집니다. 다음 주에는 쌩쌩한 모습으로 만나고 싶습니다. 하늘이여 이제 비는 그만, 쨍쨍한 해를 보여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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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안산으로 이사 온 지 넉 달째인데 안산이 참 마음에 듭니다. 그래서인지 내가 사는 동네에 대한 애향심도 생기고, 그러다보니 안산에 대해서 궁금하고 알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오늘은 밭으로 가는 길에 무엇이 있는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밭을 오고 갈 때 자전거를 이용합니다. 밭까지는 자전거로 30여 분 정도 걸리는데 운동 삼아서 타고 다니기에 적당합니다. 하지만 자전거 도로가 딱히 없어서 도로 갓길을 이용하기에 조금 위험합니다. 새로 난 길에는 자전거 도로가 그나마 괜찮게 만들어져 있는데, 전에 만들어진 길 일수록 엉망입니다. 요즘 여러 지자체에서 자전거 도로를 만들어 놓고는 있는데 실제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에는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런 작은 부분들을 보면서 공무원을 위한 전시용 행정이 아니라 시민을 위한 실질적인 행정이 이루어지기를 생각해 봅니다.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서면 성호 이익 선생님의 묘소를 지나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조선 후기 실학자이신 이익 선생님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그 분이 안산에 사셨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럼 저는 신나게 그 동네가 우리 동네라고 자랑을 하곤 하지요. 이익 선생님 같은 분과 한 동네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이익 선생님 묘소 앞 쪽에는 공원이 있는데 이곳 또한 볼만한 것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고인돌 입니다. 이곳의 고인돌은 시화호를 개발할 때 나온 것을 옮겨놓았다고 하는데, 고인돌을 가만히 바라보면 몇 천 년 전의 사람들과 함께 호홉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시공간이 하나로 뭉쳐져 있는듯 한 기분입니다.



공원 옆으로는 수인산업도로 라고 불리는 42번 국도가 지나고 있습니다. 지금은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지만 옛날에는 걸어서 수원과 인천을 오가던 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성호기념관이 있는 근처는 오고 가던 사람들을 위한 주막이 많이 있어서 주막거리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힘차게 페달을 밟아 언덕을 하나 넘으면 점성공원이 나옵니다. 옛 안산에 성포리와 점성리 라는 동네가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가 그 점성리 자리인지 아니면 이름만 가져온 것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익 선생님이 첨성리에 사셨다는 말로 미루어보아 이곳이 점성리 일 것 같기는 합니다. 이익 선생님의 성호(星湖)라는 호는 동네이름인 첨성리에서 '성(星)' 자를 따서 지었다고 합니다. 이 동네는 마당 있는 집들이 많은데, 그 마당 한 켠에 텃밭을 만들어 가꾸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텃밭 농사를 짓는 저로서는 부러우면서도 흐뭇한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점성공원을 지나 부곡동으로 들어서서 한참을 가다 보면 정정옹주 묘를 지나게 됩니다. 정정옹주는 선조의 아홉 번째 딸인데 광해군 2년에 진안위(晋安尉) 유적에게 출가하여 안산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현재 있는 묘는 그 두 분의 합장묘라고 합니다.



이제 텃밭까지 절반 정도 왔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밭이 나오게 되는데 여기서 잠시 쉬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자전거 페달을 밟습니다. 정재초등학교를 처음 보고 ‘여기가 부곡동이라서 한자로 정재(鼎在)라고 부르는 건가?’ 궁금했었습니다. 이 궁금증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풀렸습니다. 정재라는 이름은 조선 숙종 때 형조판서를 지냈던 분이 이곳에 살아서 그 분의 호를 따서 정재(靜齋)골 이라고 한데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 옆 안산공고 쪽에 가보며 시랑 초등학교도 볼 수 있습니다. 이 학교 이름도 마음대로 추리해서 ‘여우랑 늑대가 많이 나타나서 시랑이라고 했나.’ 했습니다. 이것도 나중에 알아보니 정정옹주의 부군이었던 분이 생전에 이부시랑이라는 관직을 지냈다고 해서 시랑골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니, 여우와 늑대랑은 전혀 상관없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42번 도로를 타고 가다보니 교통 안내판에 이곳을 ‘시낭’ 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명에 대한 이해가 없다보니 발음 나는 데로 그냥 표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디서 관리하는지는 모르지만 조만간 시정을 요청해야하겠습니다.


  이제 정재초등학교를 지나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고속도로가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 이곳은 엄청 넓은 들판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봐도 고속도로가 가로질러서 그렇지 넓은 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일대는 벌터 라고 불렸습니다. 들이 하도 넓어서 농부가 소를 크게 불러야 한다고 해서 질우지(叱牛地) 라고 하기도 했다 합니다. 지금도 그 흔적을 조그만 길안내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마을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 마을의 원래 이름은 원부곡(元釜谷)입니다. 한자 그대로 원래 부곡이라는 뜻이지요. 마을 남쪽에 있는 산이 가마를 엎어 놓은 형상이라서 복부산(伏釜山)이라 하고, 그 아래 형성된 마을은 가마골 이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북쪽에 있는 산에는 나무가 많고 숲이 우거졌다고 해서 만수동(萬樹洞) 이라 부르고, 동쪽은 골짜기 안에 있다고 해서 안골 또는 관찰사를 지낸 유석 이라는 분의 묘가 능같이 크다 하여 능안골 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능안골이 바로, 텃밭이 있는 그곳입니다. 이렇게 지명 하나도 허투루 지어진 이름이 없습니다. 지명의 유래에 대해 조사하다 보니 지명에는 그곳의 역사, 문화, 자연 등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역사가 깊은 마을이 지금은 큰 도로에 의해서 맥이 잘리고 사람들은 거의 떠난 것을 보면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끼게 됩니다.


  참, 밭을 지나는 길에 자리하고 있는 청문당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집은 정정옹주의 남편인 유적이라는 분이 젊은 나이에 죽어 고향인 충청북도 괴산에 묻히려 했는데, 한양에서 괴산까지 3백리 이상 되는 거리인 데다가 왕가의 장지는 한양에서 1백 리를 넘을 수 없다는 법도에 따라 이곳에 사패지를 받게 된 것에서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곳에 자리잡게 된 진주 유씨는 조선 중기에는 기호남인(畿湖南人) 3대 집안의 하나로 손꼽힐 정도였고, 조선 후기에는 남인 문사들이 이곳에 모여 교류하면서 실학의 산실이 되었다 합니다. 특히 청문당에 있는 만권루(萬券樓) 라는 도서관은 조선 4대 서고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일동 쪽에 있었던 성호 이익 선생의 집과 함께 엄청난 학문의 요람이었던 곳입니다. 지금은 과거의 그 찬란함은 사라지고 겉모양만 남아 집 앞에 서 있는 200년 넘었다는 은행나무만 그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청문당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금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곤 했는데, 올 해부터 복원사업에 들어가서 그 모습이 깔끔하게 싹 바뀌고 있습니다. 현재 사랑채는 복원사업이 완전히 끝난 상태입니다. 앞으로는 청문당 옆쪽에 있는 공장건물들도 이주를 시키고 집 앞에 있던 연못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하니 이후가 더 궁금해집니다.

 

  이제 밭까지 다 왔습니다. 밭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굴다리를 하나 지나야 하는데, 이곳을 지날 때면 ‘센과 치히로의 모험’이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생각나곤 합니다. 두 이야기 모두 굴이라는 것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뭔지 모를 굴에 들어섰다가 다른 세계로 들어가게 되지요. 이 굴도 그와 마찬가지로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건너가는 어머니의 질 같기도 합니다. 나를 이만큼 변화시켜 놓았으니 그것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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