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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60여 평의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짓고 있는 부곡동 텃밭의 옛 지명은 능안골이라 한다. 이 지명은 조선시대 관찰사를 지낸 유석이라는 분의 무덤이 마치 능처럼 커다랗다고 해서 불렸던 옛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은 정면에 신갈-안산 고속도로가 관통하고 있고, 그 중간에는 고속철도가 광명역을 향해 지하로 달리고 있다. 한 마디로 최고의 문명혜택을 받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밤낮없이 달리는 자동차 소리가 귀에 거슬리고 지하로 고속철도가 지나가는 상상만 하면 괜히 땅이 울리는 것 같기도 하더니 지금은 그저 무덤덤하게 그것들을 쳐다보게 된다. 산 좋고 물 좋은 것만 따지자면 그리 좋은 조건은 아니겠지만 하루하루 지내면서 느끼는 능안골은 아늑하고 포근하기만 하다.

다른 모든 곳이 마찬가지 이겠지만 능안골의 절경은 봄에 펼쳐진다. 이곳을 몇 년 전부터 오갔지만 올 해처럼 겨울의 끝자락부터 지켜본 적은 처음이라 올 해 느끼는 봄은 특별하고 새롭다.
봄이 오기 전에 능안골은 황량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기까지 한 앙상한 나무가지들, 거기에 걸려 있는 흡사 까마귀 같은 검은 비닐들이며 땅은 작년 가을 롯데마트 공사장에서 나온 흙을 갖다부어서 정말 볼품 없었다. 그런 곳이 봄이 되기 시작하자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그저 봄이 오는구나 했었는데, 봄이 이렇게 오는지는 머리털 나고 처음 알게 되었다.

봄을 가장 먼저 알리는 전령사는 산새들이다. 봄이 오면 겨우내 어딘지 모르는 곳에 꽁꽁 숨어있던 산새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와 지저귀기 시작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버드나무에는 새순이 돋아 연두빛으로 물들고, 버들강아지도 솜털이 뽀송송하게 달리게 된다.
그 무렵이 되면 개나리꽃이 서둘러 핀다. 개나리꽃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잎도 달지 않고 꽃부터 피운다. 이 때 산수유도 함께 노란 꽃망을 터트리는데, 산수유도 개나리와 함께 노란색이긴 하지만 개나리가 붓으로 꾹꾹 찍어 누른 듯 하다면 산수유는 빨대에 노란 물감을 머금고 훅 불어놓은 듯한 모습이다.
이때 쯤이 되면 동네에 있는 목련에도 꽃이 달리기 시작한다. 목련꽃은 정말 탐스럽다. 애기 머리만한 꽃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모습을 보면 그 탐스러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목련은 꽃이 하얘서 그런지 밤에 보는 맛이 또한 기가 막히다. 은은한 달빛에 빛나는 목련꽃을 보면 괜히 감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제 개나리에 잎이 생기기 시작하면 산에 있는 진달래꽃이 피기 시작한다. 나무들은 아직 앙상한 채로 있기에 진달래가 여기 저기 울긋불긋 피면 그 모습이 눈에 확 들어온다. 마치 진분홍색만 보이는 흑백영화를 보는 것 같다. 그 모습을 보면서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는 진달래꽃을 너무 많이 따먹어 분홍 똥을 쌌다는 옛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한다.
진달래꽃이 피고 나면 이제 이 나무 저 나무에도 꽃이 달리기 시작한다. 요즘 지자체에서 너도 나도 앞다투어 가로수로 많이 심는 벗꽃도 피고 맛있는 열매가 달리는 살구꽃, 앵두꽃도 만발한다. 그러고 보니 이 맘 때 피는 꽃은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열매를 주는 것들이다.

이런 꽃들이 피고 나면 산이 본격적으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새잎이 돋아 온 산이 연두빛으로 가득하다. 어떤 작가는 그 빛깔을 보고 유록색이라고 했다고 한다. 정말 절묘한 표현이다. 어떤 생명이나 어릴 때는 이렇게 예쁜 것일까.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왜 이리 사랑스럽고 정이 가는지 모르겠다.
산의 변신은 이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잎을 단 후에는 나무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혼자 보다는 여럿이 뭉쳐 있을 때 더 예쁜 조팝나무에 하얗고 조그만 꽃들이 다닥다닥 달린다. 이 꽃을 보면 손으로 쭉 훑어서 한 입 먹으면 맛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조팝나무 인지도 모르겠다. 조팝나무는 거꾸로 심어도 자란다고 할 만큼 생명력이 강한데, 올 해 초봄에 경지정리 때문에 죽게 될 운명에 처한 조팝나무를 가져다 밭에 들어가는 입구에 대충 묻어줬는데 신기하게도 살아서 잘 자라고 있다. 이놈을 가만히 보니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잎과 꽃만을 피웠다. 욕심 많은 사람 같으면 전부 다 원상복구 해놓으라고 닥달하거나 어떻게든 다 피워내려고 고생할텐데 자기 몫만큼만 알아서 피우는 모습에 경외감이 든다.
조팝나무에 꽃이 달리면 산벗꽃과 철쭉 차례이다. 조팝을 옮길 때쯤 광명에 있는 화원에서 사다 심은 철쭉들이 몸살을 앓고 있는 와중에도 꽃망울을 피웠다. 붉은 색도 있고 하얀 색도 있고, 똑같은 철쭉인데도 가지각색이다.
산벗꽃도 장관이다. 회색빛 길거리에 피어있는 벗꽃과는 다르게 연두빛 속에서 피어있는 산벗꽃은 아름다움 그 자체이다. 밭에서 일을 하다보면 벗꽃이 바람에 날려 꽃잎을 떨구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면 여기가 무릉도원 인가 착각할 정도이다. 밭은 척박해서 새싹들이 힘겨워 하는 모습에 마음이 짠했는데 벗꽃비가 그 마음을 달래준다.

능안골에는 이렇게 봄이 온다. 예전에는 미처 보지 못한 모습에 하루하루 경탄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일 년이 가고, 이 년이 가고, 십 년이 가도 지금처럼 감동할 수 있을까? 자연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그때그때 할 일을 하면서 산다면 백 년이 가도 똑같은 마음을 갖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곳이 도시 한 복판이라도 생명이 살아 숨쉬는 곳에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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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으로 가는 길 1
김석기 기자
어느덧 안산으로 이사 온 지 넉 달째인데 안산이 참 마음에 듭니다. 그래서인지 내가 사는 동네에 대한 애향심도 생기고, 그러다보니 안산에 대해서 궁금하고 알고 싶어집니다. 그래서 오늘은 밭으로 가는 길에 무엇이 있는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밭을 오고 갈 때 자전거를 이용합니다. 밭까지는 자전거로 30여 분 정도 걸리는데 운동 삼아서 타고 다니기에 적당합니다. 하지만 자전거 도로가 딱히 없어서 도로 갓길을 이용하기에 조금 위험합니다. 새로 난 길에는 자전거 도로가 그나마 괜찮게 만들어져 있는데, 전에 만들어진 길 일수록 엉망입니다. 요즘 여러 지자체에서 자전거 도로를 만들어 놓고는 있는데 실제로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에는 불편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런 작은 부분들을 보면서 공무원을 위한 전시용 행정이 아니라 시민을 위한 실질적인 행정이 이루어지기를 생각해 봅니다.

자전거를 타고 집을 나서면 성호 이익 선생님의 묘소를 지나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조선 후기 실학자이신 이익 선생님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그 분이 안산에 사셨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럼 저는 신나게 그 동네가 우리 동네라고 자랑을 하곤 하지요. 이익 선생님 같은 분과 한 동네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자랑스럽습니다.

이익 선생님 묘소 앞 쪽에는 공원이 있는데 이곳 또한 볼만한 것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제일 좋아하는 것은 고인돌 입니다. 이곳의 고인돌은 시화호를 개발할 때 나온 것을 옮겨놓았다고 하는데, 고인돌을 가만히 바라보면 몇 천 년 전의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시공간이 하나로 뭉쳐져 있는듯 한 기분입니다.

공원 옆으로는 수인산업도로 라고 불리는 42번 국도가 지나고 있습니다. 지금은 자동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지만 옛날에는 걸어서 수원과 인천을 오가던 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성호기념관이 있는 근처는 오고 가던 사람들을 위한 주막이 많이 있어서 주막거리라고 불렸다고 합니다.

힘차게 페달을 밟아 언덕을 하나 넘으면 점성공원이 나옵니다. 옛 안산에 성포리와 점성리 라는 동네가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가 그 점성리 자리인지 아니면 이름만 가져온 것인지는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익 선생님이 첨성리에 사셨다는 말로 미루어보아 이곳이 점성리 일 것 같기는 합니다. 이익 선생님의 성호(星湖)라는 호는 동네이름인 첨성리에서 '성(星)' 자를 따서 지었다고 합니다. 이 동네는 마당 있는 집들이 많은데, 그 마당 한 켠에 텃밭을 만들어 가꾸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텃밭 농사를 짓는 저로서는 부러우면서도 흐뭇한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점성공원을 지나 부곡동으로 들어서서 한참을 가다 보면 정정옹주 묘를 지나게 됩니다. 정정옹주는 선조의 아홉 번째 딸인데 광해군 2년에 진안위(晋安尉) 유적에게 출가하여 안산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현재 있는 묘는 그 두 분의 합장묘라고 합니다.

이제 텃밭까지 절반 정도 왔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밭이 나오게 되는데 여기서 잠시 쉬어가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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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으로 가는 길 2
김석기 기자
잠시 숨을 고르고 다시 자전거 페달을 밟습니다. 정재초등학교를 처음 보고 ‘여기가 부곡동이라서 한자로 정재(鼎在)라고 부르는 건가?’ 궁금했었습니다. 이 궁금증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풀렸습니다. 정재라는 이름은 조선 숙종 때 형조판서를 지냈던 분이 이곳에 살아서 그 분의 호를 따서 정재(靜齋)골 이라고 한데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저 옆 안산공고 쪽에 가보며 시랑 초등학교도 볼 수 있습니다. 이 학교 이름도 마음대로 추리해서 ‘여우랑 늑대가 많이 나타나서 시랑이라고 했나.’ 했습니다. 이것도 나중에 알아보니 정정옹주의 부군이었던 분이 생전에 이부시랑이라는 관직을 지냈다고 해서 시랑골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니, 여우와 늑대랑은 전혀 상관없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42번 도로를 타고 가다보니 교통 안내판에 이곳을 ‘시낭’ 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명에 대한 이해가 없다보니 발음 나는 데로 그냥 표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디서 관리하는지는 모르지만 조만간 시정을 요청해야하겠습니다.

이제 정재초등학교를 지나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고속도로가 떡하니 버티고 서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 이곳은 엄청 넓은 들판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봐도 고속도로가 가로질러서 그렇지 넓은 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일대는 벌터 라고 불렸습니다. 들이 하도 넓어서 농부가 소를 크게 불러야 한다고 해서 질우지(叱牛地) 라고 하기도 했다 합니다. 지금도 그 흔적을 조그만 길안내판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속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마을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 마을의 원래 이름은 원부곡(元釜谷)입니다. 한자 그대로 원래 부곡이라는 뜻이지요. 마을 남쪽에 있는 산이 가마를 엎어 놓은 형상이라서 복부산(伏釜山)이라 하고, 그 아래 형성된 마을은 가마골 이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북쪽에 있는 산에는 나무가 많고 숲이 우거졌다고 해서 만수동(萬樹洞) 이라 부르고, 동쪽은 골짜기 안에 있다고 해서 안골 또는 관찰사를 지낸 유석 이라는 분의 묘가 능같이 크다 하여 능안골 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능안골이 바로, 텃밭이 있는 그곳입니다. 이렇게 지명 하나도 허투루 지어진 이름이 없습니다. 지명의 유래에 대해 조사하다 보니 지명에는 그곳의 역사, 문화, 자연 등이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역사가 깊은 마을이 지금은 큰 도로에 의해서 맥이 잘리고 사람들은 거의 떠난 것을 보면 왠지 모를 씁쓸함을 느끼게 됩니다.

참, 밭을 지나는 길에 자리하고 있는 청문당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집은 정정옹주의 남편인 유적이라는 분이 젊은 나이에 죽어 고향인 충청북도 괴산에 묻히려 했는데, 한양에서 괴산까지 3백리 이상 되는 거리인 데다가 왕가의 장지는 한양에서 1백 리를 넘을 수 없다는 법도에 따라 이곳에 사패지를 받게 된 것에서 역사가 시작됩니다.
이곳에 자리잡게 된 진주 유씨는 조선 중기에는 기호남인(畿湖南人) 3대 집안의 하나로 손꼽힐 정도였고, 조선 후기에는 남인 문사들이 이곳에 모여 교류하면서 실학의 산실이 되었다 합니다. 특히 청문당에 있는 만권루(萬券樓) 라는 도서관은 조선 4대 서고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일동 쪽에 있었던 성호 이익 선생의 집과 함께 엄청난 학문의 요람이었던 곳입니다. 지금은 과거의 그 찬란함은 사라지고 겉모양만 남아 집 앞에 서 있는 200년 넘었다는 은행나무만 그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청문당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금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곤 했는데, 올 해부터 복원사업에 들어가서 그 모습이 깔끔하게 싹 바뀌고 있습니다. 현재 사랑채는 복원사업이 완전히 끝난 상태입니다. 앞으로는 청문당 옆쪽에 있는 공장건물들도 이주를 시키고 집 앞에 있던 연못도 복원할 계획이라고 하니 이후가 더 궁금해집니다.

이제 밭까지 다 왔습니다. 밭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관문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굴다리를 하나 지나야 하는데, 이곳을 지날 때면 ‘센과 치히로의 모험’이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생각나곤 합니다. 두 이야기 모두 굴이라는 것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뭔지 모를 굴에 들어섰다가 다른 세계로 들어가게 되지요. 이 굴도 그와 마찬가지로 이쪽 세계에서 저쪽 세계로 건너가는 어머니의 질 같기도 합니다. 나를 이만큼 변화시켜 놓았으니 그것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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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은 변신 중
김석기 기자

3월 말 경이었던가? 내가 분양받은 아래 밭과 같은 곳에 분양받은 분들이 처음 오시던 날, '이런 흙에서도 뭐가 자라나' 고 말씀하시던 일이 생각난다. 솔직히 나도 그 밭을 처음 보고 그런 생각을 했을 정도이니, 올 해가 첫경험이신 분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텃밭농사 지을 생각을 하시면서 주변으로 풍광도 좋고, 새도 울고, 녹색이 쫙 펼쳐져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계셨을 터에 그 기대가 산산이 부서졌을 것이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 그랬다면 밭의 상태는 거의 배신이요, 배반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시뻘건 흙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덮여 있었으니 무리도 아닐 것이다. 나도 ‘올해 고생 좀 하겠네.’라고 생각했다. 그때 흙의 상태를 떠올리니 그래도 황토라는 건 봐 줄만 했다. 그보다 더 걱정스러웠던 점은 흙이 무슨 돌맹이처럼 덩어리가 져 있지를 않나, 겉은 푸석푸석하고 속은 찐덕거리는 표리부동한 상태라는 것이다. 흙을 만져보고 냄새를 맡으며 자연히 ‘올해는 수확은 크게 기대하지 말고 흙을 되살리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런 흙을 보니 저절로 작년 윗밭의 모습이 겹쳐졌다. 그곳은 여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작년 윗밭에 비교하면 여기는 양반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작년 그 밭을 분양받고 얼마나 기운이 빠졌는지 모른다. 거기는 흙이 겉에만 흙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에 돌은 또 왜 그리 많은지, 속 흙은 삽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시커먼 뻘흙이었다.
3년 전, 처음 텃밭을 시작하며 분양받았던 밭에서는 참 재밌게, 열심히 농사 흉내를 냈다. 나름대로 이 궁리 저 궁리 하면서 ‘이렇게 하면 어떨까? 저렇게 하면 어떨까?’ 온갖 생각을 다 해보고 직접 실행해 보고 정말 재밌었다. 그때는 진짜 주중이 주말을 위해서 존재했다. 주말이나 공휴일이 되면 서울에서 자전거 타고 전철을 탄 후, 전철 안에서는 사람들 눈치 보며 자전거를 싣고 와서 내려서 다시 자전거로 밭을 오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밭으로 향했다. 그 정성 덕분이었는지 생각지도 않은 수확도 꽤 풍성했다. 이제 3년차이지만 농사는 해마다 새롭고 재미있다. 하지만 처음 농사짓던 때가 지금도 가장 기억에 남고 그때를 생각만하면 아직도 가슴이 설레인다. 그런데 그렇게 정성껏 농사짓던 곳을 불가피하게 옮기게 되었는데, 아무런 정도 없지 흙 상태는 한 숨만 나오지 하다보니 땅을 거의 방치, 아니 아예 손을 놓고 놀렸다.

그런데 어느 날 다시 돌아와 본 밭은 놀랄 정도였다. 풀 한 포기 나지 않을 것 같았던 곳에서 뭐가 막 자라고, 더욱 놀라운 것은 흙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뻘흙이 부서지고, 흙냄새가 좋아지고, 색깔도 영양분이 많은 흙색깔이 되어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곳에서 농사를 짓는 회원분들이 일 년 내내 열심히 가꾼 결과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처음에 지레 낙심해서 포기했던 것이 너무 부끄럽고 내가 분양받은 땅에게 죄스러웠다. 사람이라면 그 대상이 무엇이건 자신의 언행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배운 순간이었다.

그래서인지 올 해 그런 아래 밭을 분양받고 나서 나는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실망하기 보다는 작년 밭을 떠올리며 ‘거기도 그렇게 변했는데 여기라고 변하지 못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시간을 두고 천천히 흙을 되살려 나가자.’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근거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수확 보다는 흙살리기에 중점을 둔다 생각하고 흙에 부담을 덜 주기 위해서 거름도 약간 적게 주고, 산에서 부엽토도 퍼다 부지런히 섞어주고, 풀은 뽑으면 그 자리에 그대로 돌려주고, 씨를 뿌릴 때도 혹 흙에 도움이 될까 이것저것 섞어서 뿌려주고, 집에서 오줌도 받아다가 틈틈이 뿌려주었다. 그래서인지 이제 4개월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흙이 변하고 있는 것 같아서 너무 기분이 좋다. 그만큼 관심과 애정을 쏟았기 때문일까? 아무튼 처음에는 벌겋기만 했는데 지금은 거뭇거뭇한 기가 눈에도 보이고, 지렁이도 간혹 가다 보이고, 이런 저런 곤충들도 살아가는 것이 눈에 보인다.

확인은 못해 봤지만 듣기로는 건강한 흙 한 숟가락에는 미생물이 수 억 마리가 산다고 한다. 정말 흙은 살아있는 존재이다. 세상에 흙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생명이 어디 있는가! 지금의 우리들이야 흙을 그저 발로 밟고 걸어다니는 곳으로 알며 살아가고 있다. 아니 그나마도 콘크리트나 아스팔트로 덮어버려 흙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느끼지도 못하며 살아가고 있다. 어느 순간부터 왠지 흙은 더러운 것, 불편한 것,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사두면 돈이 되는 대상으로만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우리는 그 가치 있다는 아스팔트와 콘크리트에 눈이 멀어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사는 부평초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그렇게 뿌리가 붕 떠 있으니 건강할리도 없다.

밭에서 일하다 보면 그 앞에 가로놓인 고속도로로 주말이면 도심을 빠져나가는 차량들을 보게 된다. 그 모습을 보면서 무엇이 우리를 주말이면 고생할 것을 뻔히 알면서 길을 떠나게 만드는 것인지 생각해 보게 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흙이 그리워서 떠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흙이, 그리고 자연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지, 또 우리의 삶에 무언가가 빠져있고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는 것은 아닐지……. 나는 오늘도 텃밭에 서서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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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의 여름 나기
김석기 기자
오늘은 "쫘아아악" 하며 하늘을 째는 듯 천둥소리와 함께 시원하게 비가 내립니다. 그동안 밤낮으로 무더위에 시달렸는데 빗소리만으로도 더위가 싹 가시는 느낌입니다. 지난 월요일이 입추였는데, 그래서인지 오늘 이 비는 가을을 부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올 봄에 이번 여름은 기록적인 무더위가 있을 거라고 떠들어서 지레 겁을 먹었는데, 다른 분들은 어떠셨는지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떠든 것보다는 덥지 않았습니다. 에어컨 팔아먹기 위한 상술이 아니었나 의심이 들 정도로 예년과 비슷한 더위였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들 피서는 다녀오셨는지요? 오늘은 식물들이 무더운 여름을 나는 이야기를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사람도 아닌 식물들도 피서(避暑)를 한답니다. 식물들이 피서를 한다는 말에 '아니 발도 없는 식물들이 무슨 피서냐?' 고 하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물론 식물은 동물들과 다르게 여기저기로 이동할 수 없지요. 그렇다고 우리들처럼 자동차가 있는 것도 아니고 도무지 무슨 말인지 궁금하실 겁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식물들도 우리랑 다른 방법으로 피서를 한다는 겁니다.

다들 알고 계시는 것처럼 식물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생활합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는 능력이 없지요. 식물은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대신 동물들이 갖지 못한 광합성을 통해서 스스로 영양분을 만드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저 무심히 바라보면 녹색식물일 뿐이지만 우리처럼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도 꿋꿋하게 자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정말 대단한 능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프랑스의 베르그송이라는 철학자는 식물은 그렇게 스스로 영양분을 만드는 능력을 선택한 대신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포기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식물은 동물과 질적인 차이만 있을 뿐 동물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저도 농사를 지으면서 식물들을 접해보니 그 말에 전적으로 동감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식물들의 피서방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름은 태양이 높이 오래 떠 있기에 더운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 뜨거운 태양을 피해서 산으로 들로 피서를 떠납니다. 그런데 식물은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여기 저기 나다니지 못하는지라 다른 방법으로 태양을 피합니다. 식물들은 어느 가수의 노래처럼 '태양을 피하는 법'에 대한 자기들만의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길을 오가며 주의 깊게 관찰하신 분들은 아마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럼 먼저 호박이나 해바라기처럼 잎이 넓은 것들은 뜨거운 태양을 피하기 위해서 자기들의 넓적한 잎을 아래로 축 늘어뜨립니다. 뜨거운 물에 데치기라도 한 것처럼 축축 늘어지지요. 그 모습을 보면 ‘너희도 이 뜨거운 태양에 참 힘든가 보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그리고 수수나 옥수수 같이 잎이 길고 큰 종류들도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더위를 피합니다. 참, 고추도 그런 방법으로 더위를 피하더군요. 아마 대부분의 식물이 잎을 늘어뜨리는 방법을 택하는 것 같습니다. 또 토란 같은 경우는 혼나서 풀 죽은 아이처럼 고개를 좀 더 숙여서 빛을 받는 면적을 줄입니다. 그리고 특이한 방법으로 여름을 나는 식물들이 있습니다. 콩과 식물들입니다. 그 식물들은 하늘을 향해서 잎을 바짝 치켜 올립니다. 꼭 벌 받는 아이들처럼 말이죠. 이 두 가지 방식이 기본적으로 식물이 피서를 하는 방법입니다. 이외에도 식물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여름을 나는 것 같은데 아직 제대로 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네요.

식물들이 더위를 피한다는 말에 어떻게 피하는지 잔뜩 기대하셨을 텐데 너무 이야기가 빈약해서 별거 아니라고 느껴질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저는 식물들이 그렇게 더위를 피한다는 사실만으로 엄청난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식물들도 우리와 같이 더위를 느낀다는 것이 그렇고, 우리처럼 시원한 곳을 찾아 이동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에 맞추어 적응하는 모습이 그렇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이놈들도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발에 밟히는 들풀 하나라도 모두 그렇게 살아 숨쉬며 자신의 생명을 피워내고 있습니다. 저 뙤약볕 아래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일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그 모습이 참으로 거룩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채라도 있으면 잠시 쉬라며 시원한 바람을 부쳐주고 싶을 정도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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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로 2년째 고추를 곧뿌림하고 있습니다. 처음 고추를 씨로 심으려고 생각한 것은 귀찮아서 그렇습니다. 모종을 가져다 심기도 그렇고, 나중에 버팀대를 꽂고 줄을 매는 것이 너무너무 귀찮아서, 한 마리도 게을러서 그렇지요. 굳이 더 그럴싸한 핑계를 댄다면, 버팀대도 그렇고 줄도 그렇고 이건 썩는 것이 아니니, 나중에 처리하는 문제가 골치 아팠습니다. 아무튼 결론부터 말하면, 곧뿌림은 처음에만 신경 써서 김을 매주면 나중에는 특별히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작은 규모에서나 추천할 만하지, 돈벌이로 많이 짓는다면 힘들 겁니다. 그래도 수확량을 따지지 않는다면, 투입하는 기운이나 비용에 비해서 괜찮은 방법입니다. 특히 작물 고유의 힘을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렇지요.


먼저 심는 때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지난해나 올해나 곡우 무렵에 심었습니다. 고추는 더운 나라가 고향이라 서리를 맞으면 그대로 죽기에 늦서리를 피하려고 그때를 택했습니다. 그때 심으면 보통 스무날에서 한 달쯤 지나야 싹이 나니, 양력으로 5월 중순 이후라서 서리 맞아 죽을 걱정은 없습니다. 고추는 달이 한 바퀴쯤 돌아야 합니다. 이걸 동광원 원장님은 “고추는 매운물이 빠져야 싹이 난다”고 표현하셨습니다. 참 감칠맛나지요.

지난해에는 씨를 얻어 심어서, 싹이 나는 문제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믿고 기다렸지요. 그런데 올해는 손수 받은 씨를 심어,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처음 받아보느지라 제대로 씨를 받았는지 미심쩍었습니다. 특히 이게 심은 지가 언제인데 한참이나 소식이 없어, 더욱 그랬습니다. 그래서 못 참고 살살 파 보기도 했습니다. 몇 번을 그러다 포기를 할 때쯤, 씨에서 삐죽 싹이 나온 걸 봤습니다. 그때의 기분이란 뭐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거 안 파봤으면 다 났을 거 아니야’라는 생각이 고개를 들이밀더군요.


잠깐 딴 길로 새서, 고추씨를 받으려면 보통 맏물 바로 그 다음 것이 좋습니다. 형만한 아우가 없는 것일까요? 맏물도 괜찮기는 한데, 그 다음 것이 더 좋다고 합니다. 고추씨를 받으시려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피해야 할 것은 끝물입니다. 끝물은 어떠한 작물이든지, 씨로는 별로 좋지 않다고 합니다. 늦둥이가 천재 아니면 바보라는 말과 통하지 않을까 합니다.


심는 방법은 처음에는 줄뿌림을 했습니다. 그런데 관리하기가 참 힘들더군요. 앞에 말씀드렸듯이 곧뿌림할 때는 처음 풀을 잡아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나 5월이면 온갖 풀들이 싹을 내서 자랄 때이니 더 그렇습니다. 그때 제대로 풀을 잡지 않으면, 고추가 힘을 받아 팍팍 크지 못합니다.

그래서 올해 선택한 방법은 점뿌림입니다. 점뿌림할 때는 그 부분의 흙을 살짝 걷어냅니다. 그리고 한 번에 팍 넣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 두께 하나 정도 간격으로 띄엄띄엄 뿌립니다. 저는 그렇게 한 구멍에 10알씩 넣었습니다. 그리고 흙을 살살 겉에만 슬쩍 덮습니다. 더 좋은 것은 잘 삭은 두엄을 살짝 덮어주는 것입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씨를 제대로 받았다면 모두 싹이 날 겁니다. 올해 제가 받은 씨는 좀 시원치 않아서 그런지 6~7개 정도만 싹이 텄습니다.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지, 대가 끊기는 줄 알고 조마조마했습니다.


관리는 처음에 풀을 잡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때만 잘 돌보면 이후에는 별 걱정 없습니다. 태풍이 몰아치지 않는 이상 잘 쓰러지지도 않고, 바람이 특히 세게 분다고 해도 주렁주렁 고추를 달고 있지 않으면 그대로 버팁니다. 대신 비가 많이 오면 걱정입니다. 비가 많이 와서 땅이 물렁거리면 스르륵 기울어지기는 합니다. 그러면 그냥 제대로 세운 다음, 발로 꾹 밟아주면 다시 삽니다.


그런데 문제는 풋마름병입니다. 비가 많이 와서 땅이 무르고, 더구나 바람이 불어 기울어지면 그 틈새로 뿌리에 세균이 들어가는지, 지난해도 그렇고 올해도 풋마름병이 꽤 왔습니다. 풋마름병을 찾아보니, 계속 고추만 심는 하우스나 질소질이 많으면 발생한다고 하네요. 노지에서도 드문드문 걸리구요. 제가 거름을 별로 쓰지 않으니 질소질 때문은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같은 땅에 이어짓기하는 것도 아닌데 왜 풋마름병에 잘 걸리는지 모르겠습니다.

추측하기로는 앞의 이유가 가장 크지 않을까 합니다. 특히 흙이 아직 좋지 않아서 비만 오면 질척거리는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 같습니다. 물이 잘 빠지는 살아있는 좋은 흙이라면, 풋마름병도 걱정할 것이 아닐 겁니다.


풋마름병 말고 세균성점무늬병이 올해 처음 생겼습니다. 아마 올 여름이 뜨겁고 습기도 많아서 그럴 겁니다. 다음에는 잘 삭혀놓은 2년 묵은 두엄을 넣으려고 합니다. 그래도 그렇다면 이거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일 겁니다.

그밖에 고추에 많은 탄저병, 돌림병, 흰가루병, 입고병, 모자이크병, 겹둥근무늬병, 젖곰팡이병, 무름병은 아직 한 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고추에는 뭔 병이 이렇게 많은 걸까요. 쭉 늘어놓고 보니 징그럽게 많네요. 아마 이거 말고도 더 있을 겁니다.


벌레는 진딧물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뭐 고추만 심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다른 작물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으니 그럴 겁니다. 아, 담배나방이 파먹는 것은 조금 있습니다. 그네들이 먹는다는 게 속상하기 것보다, 이 매운 걸 어떻게 그리 잘 먹는지 그게 더 신기합니다. 그래서 그건 너희들 먹으라고 놔둡니다. 그럼 알아서 떨어지지요. 그렇게 떨어진 놈들 가운데 씨가 여문 것이 있어서 그런지, 지난해 고추를 심었던 밭에서 저절로 고추가 자란 것을 보고 참 신기했습니다. 안철환 선생님은 올해 초겨울에 고추를 심는 걸 실험하신다고 하는데, 이걸 보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중간 관리 가운데 가장 귀찮은 버팀대 박기와 줄매기에서는 완전히 해방입니다. 순지르기도 거의 손보지 않아도 됩니다. 씨가 그래서 그런지 모종으로 심는 것보다 곁순도 별로 나지 않습니다. 매끈하지요.


자람새는 모종으로 심은 것보다 좀 느립니다. 그것들은 비닐집에서 어느 정도 자란 뒤 5월 초에 옮겨 심어서, 곧뿌림한 것이 막 싹이 날 무렵 모종들은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입니다. 씨로 심은 것들이 손가락 두 마디 정도 자라면, 오히려 뿌리를 튼튼히 내리고 무섭게 자랍니다. 그럴 때 비라도 한 번 내려 주시면 금상첨화입니다.

그렇게 손가락 하나 정도 자라면 1차로 솎아줍니다. 잘 자란 것들 3~4개만 남기고 솎아줍니다. 그렇게 솎은 것은 그냥 나물로 먹으면 됩니다.

다음에는 한 뼘 정도 자라면 한 그루에 한 포기만 남기고 솎으면 됩니다. 그때 솎은 것들을 보면, 곧뿌리가 쭉 뻗어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모종한 것과 비교하려고 뽑아보니, 모종은 옆으로 잔뿌리만 뻗었더군요. 반면 씨로 심은 것들은 길쭉한 뿌리가 쭉쭉 뻗어 있어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이 뿌리의 차이가 자라는 데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 같습니다.

저와 같이 조금은 작물 관리에 서툴고 소홀하신 주말 텃밭 회원분들의 고추와 비교하면, 어느 정도 자란 뒤에는 그분들 고추보다 씨로 심은 제 고추가 더 튼튼하고 기세가 좋았습니다. 뭐 관리를 잘하시는 분들이 웃거름주고 목초액이다 뭐다 주고 하시면,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말이죠. 그런 고추들이 붉게 변할 때 이제 풋고추가 달리기 시작하니 말 다했지요. 그러니 수확량에서는 큰 차이가 날 겁니다. 하지만 투입과 수확이란 면에서 보면, 뭐 그럭저럭 나쁘지 않습니다. 둘이 먹고 냉장고에 꽉꽉 재워놓습니다.


그리고 그런 고추와는 키에서도, 열매가 달리는 것에서도 차이가 많이 납니다. 제가 심은 건 한 50~60cm정도 자라나? 거름도 밑거름 말고 안 주고, 다른 관리도 안 해서 그런지 거기서 더 이상 자라지 않습니다. 아마 자기가 자랄 수 있는 만큼만 알아서 크는 것 같습니다. 내가 이만큼 깊이 뿌리를 내렸으니, 위로는 어느 정도 자라면 되겠다 계산하는 것이 아닐까요? 열매도 그렇습니다. 지가 버티고 서 있을 정도만 달립니다. 그렇다고 특별히 늦게까지 꽃이 피고 달리는 건 아닙니다. 알맞은 때 꽃도 더 이상 피지 않고, 매달린 것들이나 붉게 만들고 맙니다. 그러니 수확량에서는 반이나 될까요? 엄청 차이가 납니다.


모종과 곧뿌림의 가장 큰 차이는 뿌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쭉 뻗은 곧뿌리를 내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가, 위로 얼마나 자라는지 얼마나 열매가 많이 달리는지를 결정하는 것 같습니다. 곧뿌리를 내린 것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알아서 자라고, 알아서 열매를 맺습니다. 하지만 모종으로 심은 것은 거름을 주는 대로 잔뿌리로 쪽쪽 빨아먹고, 위로 쑥쑥 자랍니다.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양은 따지지도 않고, 그냥 막 자라고 봅니다. 모종을 옮겨심으려고 몇 번 옮기면서 곧뿌리를 끊는 것이, 거름을 쪽쪽 빨아 먹는 잔뿌리만 무성하게 합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버팀대를 세워야 합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위로 자라는 것에 맞춰 줄도 매줘야 합니다. 이래저래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지 모릅니다. 그러고는 가지가 부러질 정도로 열매를 맺습니다. 이러다가는 내가 살지 못하겠다고 느껴서 그럴까요? 오염된 곳에서는 소나무도 솔방울을 많이 맺듯이, 고추도 열매를 많이 맺는 것 같습니다. 농사는 적당히 죽지 않게 식물을 괴롭혀서 수확을 많이 얻는다는 말이 들어맞습니다.

하지만 씨로 심는 것은 곧뿌리가 자기 몸을 지탱합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알맞은 만큼 열매를 맺습니다. 뿌리가 살아 있느냐 아니냐가 이런 차이를 만드는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추측하고 상상할 뿐입니다. 그러니 믿지도 마시고, 너무 부정하지도 마시길 바랍니다.


무엇이 더 좋다 나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것이 제가 선택한 고추 농사 방법입니다. 누가 어떤 생각으로 무엇을 키우느냐에 따라, 그것들도 그 사람을 따라갑니다. 제가 심은 것들은 저를 닮아서 늦게 싹이 나고, 더디게 자랍니다. 지난해 가을 충북 보은에서 발바리 한 마리를 얻어다 키우고 있습니다. 이놈이 타고난 성질이 그래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버릇을 잘 들이고 길을 잘 들여서 지금은 함께 사는 데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낑낑대고 아무 데나 똥오줌을 싸고, 아무튼 같이 살면서 부딪치는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얼마나 열 받고 속상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습니다. 내가 내 방식대로 이놈을 끌고 갈 것이 아니라, 이놈의 생리와 습성을 파악해서 살살 몰고 가야겠다. “주는 나를 키우시는 목자”라는 말이 퍼뜩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개는 어떤 동물인지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니 ‘아 이놈이 그래서 이랬구나’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이 습성을 이용해서 나와 함께 살 수 있도록 할지 고민하고, 생활 속에서 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차츰 서로 적응하고, 함께 살 수 있었습니다. 자연히 속 썩고 열 받는 일도 사라지고, 이해하고 양보하고 타협하여 어울려 살게 되었습니다. 개를 키워보니 식물을 키울 때와는 참 달랐습니다.

그러다 식물을 키우는 일을 돌아보았습니다. 아, 식물도 그렇겠구나. 동물이나 인간처럼 우리와 직접적으로 감정을 나누고 소통할 수 없어서 그렇지, 이놈들도 동물이나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겠구나. 뭐 고추를 씨로 심으려고 한 처음부터 이런 생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때는 그저 어떻게 하면 손 좀 덜 가고, 거름 좀 덜 주고 귀찮지 않게 키울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선택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니들도 니들이 자라고 싶은 방향이 있고, 나도 니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니 서로 적당히 타협하자. 니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고, 나도 맛있게 잘 먹으며 살아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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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을 덮었던 짚을 걷었다. 마늘싹이 지난해보다 늦지만 조금씩 고개를 내밀었다.

둑의 잡풀들을 치웠다. 일부는 태워서 두엄에 넣고, 일부는 그대로 두엄에 넣었다.

물론 잊지 않고 물을 뿌렸다.

그러나 물이 부족하다. 잘 띄우려면 물을 더 부어야겠다.

수도 공사가 끝나면 더 부어야지.

비가 심상치 않게 올 것 같아 도랑을 쳤다.

일 년 동안 흘러와 쌓인 흙과 이런저런 부스러기를 싹 걷어내니 말끔하다.

이제 비가 와도 걱정없다.

일기예보에서는 일요일 오전이면 그친다고 했지만, 느낌에 이번 비는 꽤 올 것 같았다.

역시나 예감이 빗나가지 않았다. 참 다행이다.

그러나 옹벽 공사 때문에 그것이 끝날 때까지 밭일이 일단 멈추었다.

어서 옹벽 공사가 끝나기만 기다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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