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부
눈물일랑 거두오
서러운 마음은 사랑으로 품으오
침통한 얼굴일랑 관두오
그대신 미소를 보내주오
그냥 빈손으로 찾으오
지고 가야 무거울 짐이오
모든 건 내가 주겠오
그대신 자리에 앉아주오
서로 술잔을 나누오
그게 싫으면 이야기를 나누오
나 돌아가는 날
한바탕 잔치를 열어주오
당부
눈물일랑 거두오
서러운 마음은 사랑으로 품으오
침통한 얼굴일랑 관두오
그대신 미소를 보내주오
그냥 빈손으로 찾으오
지고 가야 무거울 짐이오
모든 건 내가 주겠오
그대신 자리에 앉아주오
서로 술잔을 나누오
그게 싫으면 이야기를 나누오
나 돌아가는 날
한바탕 잔치를 열어주오
과거 농사 짓던 나라에서는 왕을 바랐다.
그때는 강력한 사람이 온 나라를 쥐고 흔드는 것이 곧 편한 삶이었다.
괜히 장사꾼이 끼어들면 괜히 사람들이 농사는 안 짓고 딴 데 정신이 팔렸으리라.
그런데 지금은 농사꾼보다는 장사꾼이 더 나은 시대다.
그만큼 사회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이 원하는 대통령도 다르다.
옛날에는 그래도 농사 짓던 풍습이 남아서 그것과 가까운 사람이 통했다.
그리고 사람들도 왠만하면 봉건적인 사람, 봉건 전제적인 사람을 원했다.
그런 사람이 나를 이끌고, 우리를 이끌어야 편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제는 나한테, 특히 우리한테 밉보이면 그대로 끝이다.
옛날처럼 그 사람을 건드리리 수도 없고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그 시절이 아니다.
그래서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참 슬퍼한다.
지금 이회창 밑에 모인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
하지만 시대는 그런 사람들을 쳐다 보지도 않는다.
혹시 멀리 내다보려고 생각했다면 이회창 아저씨 밑에 있는 사람들은 포기해야지.
바보들... 시대를 보지 못한 꼴통 보수들...
지금 한나라당 안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뭐랄까... 복잡하다.
이건 뭐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저 재밌게 볼 수밖에 다른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한나라당이 꼴통 보수는 아니다.
되려 이회창 �문에 도움을 받았다.
더군다나 이 모호한 성격... 최고다.
정치는 모호함이다.
뚜렷하게 드러내면 그 순간 생명을 잃는다.
웃기지. 사람 사는 것과 다르다.
그래서 국회의원들이 좀비처럼 구나보다.
참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게 아니지.
이제는 상업 국가다.
상업 국가...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흐흐... 그렇게 사는 것이지.
그래서 이제 명분이나 명예, 도리, 도덕은 필요없다.
사는 데 쓸모 없는 모든 것은 부질 없을 뿐이다.
진정 우리에게 필요하고, 우리가 추구하고, 우리가 뿅 가는 것은...
그저 누가 더 내 욕구를 만족시켜주는가 하는 날카로운 아니 뭐랄까 거시기다.
제길...
술 마시자.
그럴수록 더 마시고 마셔,
사회가 나아가는 곳과 비례하여 술을 마시자.
겨우내 꽁꽁 얼었던 시내가,
간질간질 꿈틀꿈틀 뒹구는 소리.
사랑이 다가오는 소리도 꼭 그렇다.
봄볕에 얼음 녹듯이,
아무 일도 아닌 것에 내 맘이 녹는다.
아~! 봄은 사랑의 계절이런가.
새들의 지저귐도,
꽃망울의 부끄럼도,
여린 싹들의 몸부림도,
모두들 사랑이런가!
당부 (0) | 2008.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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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선거 (0) | 2008.05.15 |
성숙 언니가 쓴 글 (0) | 2008.05.15 |
몸살 앓은 날 (0) | 2008.05.15 |
희망찾기... 2001년 봄에 쓴 글 (0) | 2008.05.14 |
서른이 넘기 전엔 몰랐다.
내가 가고 싶은 곳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앞만 보고 달리면 그게 행복인 줄 알았다.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질주하고 때로는 폭주하며
팽팽히 당긴 시위에 매긴 살처럼
돌아볼 것도 쉴 곳도 없이 내쏘았다.
서른이 넘은 어느 날,
심한 몸앓이 끝에 일어난 날.
불현듯 죽음이 고만큼 더 가까워졌음을 보았다.
늘어나는 흰머리에도 별 느낌 없더니
몸살 한 번에 인생을 반이나 살았다고 깨달았다.
어느새 나에겐 심장이 터질 듯한 흥분과
왈칵 쏟아지는 눈물은 사라졌다.
대신 어느덧 손을 맞잡고 함께 걷는 사람을 만나
그에게 맞춰 발걸음은 느려졌고, 어깨는 좀 무거워졌다.
우린 모두 세상에 던져진 존재.
언제 죽음이 다가오는지, 아니면 지금도 함께 하는지 모른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로 가야 옳은지도 알 수 없다.
그저 순간과 찰나에 최선을 다하고자 노력할 뿐,
그러나 아무도 최선을 다했다고 쉽게 말할 수 없다.
그대의 숨결을 느끼며 서로 발걸음 맞춰 그곳으로 걸어갈 뿐.
봄날은 왔다 (0) | 2008.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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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숙 언니가 쓴 글 (0) | 2008.05.15 |
희망찾기... 2001년 봄에 쓴 글 (0) | 2008.05.14 |
소? 소고기? (0) | 2008.05.14 |
우리말로 농사짓자 - 땅을 알아야 농사짓지 3 (0) | 2008.05.14 |
과거 우리의 부모님 세대는 살림살이가 나아지면 행복해질거라 믿고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오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예전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살림살이는 나아졌습니다. 기술의 혜택으로 물질적인 풍요는 엄청난 비약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부모님들은 또 그 자식인 우리들은 과연 행복합니까?
지금도 우리는 '못 살겠다' '더 열심히 해야 한다' 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 열심히 살아도 모자를 정도로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살고 있습니까? 바로 행복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저만치 떨어져 있습니다.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기술이 발전하고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면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래서 세상은 그렇게 되었지만 행복하기는커녕 비극적인 전쟁이라는 야만적인 상황이 연출되고 있습니다. 또한 서로가 더욱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문제일까요?
문제를 보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를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온 역사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죽고 죽이는 역사였습니다.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은 나의 경쟁상대였고 내가 극복하고 이겨야만 되는 대상이었습니다. 지금도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남을 밟고 올라서야 합니다. 이렇게 나와 남을 가로고 구분 짓는 사고방식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합니다.
지금 우리는 나와 남을 가르고 구분 짓고 있지만 실제로는 남이 있기에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나는 무수히 많은 타인과 함께 있기에 지금 이곳에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확장해보면 세상 만물이 있기에 지금 이곳에 존재할 수 있습니다. 태양이 없다면 지금 이곳에 내가 있을 수 있을까요? 물이 없다면 공기가 없다면 내가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을까요? 그 물과 공기를 만들어내는 나무와 풀 같은 자연이 없다면 내가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을까요? 이렇듯 나라는 존재는 세상 만물이 있기에 거기에 의지해서 있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돈, 명예, 출세, 사랑보다도 소중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습니다. 무엇일까요? 목숨, 생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돈, 명예, 출세, 사랑도 다 나의 생명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 생명은 어디에 있습니까? 숨 쉬는 행위에 있습니까? 아니면 먹는 것에 있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내 안 어딘가에 있습니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런 의미의 생명이란 어디에도 없습니다. 생명이란 가치는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가치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명이란 앞에서도 말했듯이 세상 만물에 의지해서만 있을 수 있는 가치입니다. 그렇다면 나 이외의 다른 모든 것들이 곧 나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생명이 의지하는 것들 중에서 하나만 빠지더라도 나의 생명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코와 입을 막고 10분만 있으면 나의 생명은 죽습니다. 만약 생명이라는 가치가 내 몸 안 어느 곳에 절대적으로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숨을 쉬지 않더라도 우리는 살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요?
이렇듯 나라는 존재는 다른 모든 것들에 의지하였기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나와 남을 가르고 나와 자연을 가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으로 살았기에 우리는 이기적인 것이 우리의 자연스러운 본성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것과는 180도 다른 사고방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지금의 세상은 전쟁, 환경파괴, 오염, 자원고갈, 식량부족 등의 문제로 파멸로 향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 이외의 모든 것이 곧 내 생명이라는 세계관으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바라본다면 우리의 생활은 곧 다른 것들을 죽이는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생명을 위한다면서 우리는 자신의 생명을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 삶의 뿌리부터 바꾸는 전환이 필요한 시기에 살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지금 우리는 동반자살로 가는 길로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러한 시대에서 희망을 찾고자 합니다. 제가 생각한 길은 귀농 입니다. 삶의 대부분을 도시에서 보낸 저에게 농사일은 쉬운 것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농사를 얼마나 잘 짓느냐라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 생명을 아끼고 보살피듯이 또 다른 내 생명인 이웃과 자연을 아끼고 보살핀다는 것입니다.
옛말에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낸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면 안 됩니다. 서울은 지금 파괴의 도시이기 때문입니다. 서울 사람은 다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희생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농부가 먹거리를 제공해주고 시골의 자연이 숨 쉴 수 있는 공기와 마실 물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서울 사람은 절대로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생명을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없습니다. 그런 마당에 서울이라는 도시는 점차 다른 지역을 파괴해 나가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서울 이외의 지역은 사람조차 살지 않는 폐허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서울을 떠나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서울에 살더라도 나의 생명이 다른 것에 의지해 있다는 사실만 분명히 자각한다면 다른 지역의 사람과 또한 자연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길을 모색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서울을 떠나 지역으로 들어가 내가 사는 마을을, 지역을 살리는 일을 하려고 합니다. 또한, 내 생명처럼 다른 생명도 소중히 여기는 삶을 살고자 농사를 지으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서울은 파괴의 도시고 악이기 때문에 쳐다보지도 말아야 한다는 생각은 아닙니다. 모두 내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내 생명이기에 모두가 함께 살아갈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 이외의 모두가 나와는 아무 상관없고 내가 살기 위해서는 그들과의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이제 버려야 하겠습니다. 또 한번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필요한 때입니다. 이것은 허황된 꿈이나 이상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전국 곳곳에는 이런 생각으로 희망을 만들어 나가는 씨앗들이 뿌려져 있습니다. 저는 직접 그 희망을 보고 왔습니다. 그 길에 희망은 꼭 있습니다. '늦었다고 생각할때가 가장 빠른 때'인 것처럼 지금부터가 시작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찾을 수 있습니다. 희망을 찾기 위한 길은 제가 사는 모습과 다른 많은 길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길을 선택하던지 간에 분명한 것은 서로 서로가 의지해 있기에 내가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다는 사고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고의 전환 없이 더불어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는 지혜는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더불어 나누며 사는 고마움, 그 길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성숙 언니가 쓴 글 (0) | 2008.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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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 앓은 날 (0) | 2008.05.15 |
소? 소고기? (0) | 2008.05.14 |
우리말로 농사짓자 - 땅을 알아야 농사짓지 3 (0) | 2008.05.14 |
단양군 적성면 기동리 방문 (0) | 2008.05.14 |
소의 울음소리, 음메~.
소를 아는가?
인류의 동반자.
인간이 농사를 지으면서 도움을 요청해 함께 살았던 짐승.
그만큼 인간과 가까워 여러 문명에서 함께 했던 짐승.
그 짐승이 이제는 돈이다.
고깃덩어리로 팔리는 신세.
고깃덩어리를 키우고자 사료를 먹이고,
사람이 보기에 좋은 환경에서 키우고,
그 결과 남는 것은 고깃덩이로 바꾸는 돈.
솔직히 소는 이제 고깃덩어리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누가 소의 숨소리, 몸짓, 눈망울을 기억하는가?
이제 고깃집에 가서 돈을 주고 시킨 소고기나 먹거나,
아니면 마트에 가서 소고기를 구경하고 사거나,
어떤 사료를 먹여야 마블링이 지느냐.
아무튼 이러한 생각으로 소를 바라볼 것이다.
선언하자. 이제 소는 먹을거리다!
그것도 값비싼 고급 먹을거리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처음 소가 나오는 기록은 이렇다.
삼국사기 지증 마립간 3년(502) 지방관들에게 명하여 소로 밭을 갈게 한 기록이 보인다.
아무튼 소로 밭을 갈면서 엄청나게 생산력이 높아졌다.
농사를 짓겠다고 몸을 놀려본 사람은 알 것이다.
누가 소의 힘을 당할 수 있는가?
경운기나 트렉터 같은 기계뿐, 절대로 사람은 소의 힘을 당할 수 없다.
당한다면 사람 몇 명이 모여야 가능하다.
그거 참 우습고, 비참하고, 경이롭다.
하지만 이제 소는 아무 것도 아니다.
몸살 앓은 날 (0) | 2008.05.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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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찾기... 2001년 봄에 쓴 글 (0) | 2008.05.14 |
우리말로 농사짓자 - 땅을 알아야 농사짓지 3 (0) | 2008.05.14 |
단양군 적성면 기동리 방문 (0) | 2008.05.14 |
단양군 적성면 각기리 선돌 (0) | 2008.05.14 |
희망찾기... 2001년 봄에 쓴 글 (0) | 2008.0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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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소고기? (0) | 2008.05.14 |
단양군 적성면 기동리 방문 (0) | 2008.05.14 |
단양군 적성면 각기리 선돌 (0) | 2008.05.14 |
토정유고의 한 구절 (0) | 2008.05.13 |
희망찾기... 2001년 봄에 쓴 글 (0) | 2008.0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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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소고기? (0) | 2008.05.14 |
우리말로 농사짓자 - 땅을 알아야 농사짓지 3 (0) | 2008.05.14 |
단양군 적성면 각기리 선돌 (0) | 2008.05.14 |
토정유고의 한 구절 (0) | 2008.05.13 |
각기리 마을 어귀에 자리한 선돌. 앞에 치마를 두른 것이 암바위, 뒤에 선 것이 숫바위이다.
크기는 숫바위 280×260×60cm, 암바위 160×150×30cm.
신석기시대부터 있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여기서 제사지냈을까?
참 신기한 일이다.
암바위보다 숫바위가 더 커서 모계에서 부계로 넘어갈 무렵일 것이라고 추정한단다.
흐음...
희망찾기... 2001년 봄에 쓴 글 (0) | 2008.05.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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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소고기? (0) | 2008.05.14 |
우리말로 농사짓자 - 땅을 알아야 농사짓지 3 (0) | 2008.05.14 |
단양군 적성면 기동리 방문 (0) | 2008.05.14 |
토정유고의 한 구절 (0) | 2008.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