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짐승막이담 유구를 남기고 전하기 위하여
- 카가와현 쇼우도시마小豆島를 둘러싼 짐승막이담 집단의 답사와 실측 기록
미나토 세이고港誠吾
선조가 있기에 우리가 있다. 짐승막이담은 우리를 낳았다고도 할 수 있다.
섬의 선인들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게다가 자력으로, 짐승막이담을 구축했다. 짐승막이담의 돌은, 돌은 돌이라도 축성용 돌덩어리와는 정취를 달리한다. 선인의 목숨을 구했던 것이다. 오늘날 얼핏 보아, 짐승막이담 유구는 외양도 모습도 매우 희미하다. 그러나 짐승막이담의 실측 조사가 회를 거듭함에 따라, 선인이 어떻게 궁리하고 협력하며 쌓은 것일까 하고, 마음에 다가와, 그 위업을 기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훌륭한 관광지 쇼우도시마도, 인구가 감소하고, 농지는 황폐해지며, 생활 환경은 좁아져 야생 조수의 해는 늘어나 농가의 마당에 들렀던 원숭이, 사슴, 너구리의 수에 도민의 수는 머지않아 미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도 든다. 게다가 2008년 말부터 2번이나 시코쿠에서 쇼우도시마를 목표로 헤엄치는 멧돼지가 신문에 게재되어 화제가 되었다.
1. 송아지가 모로 누운 모습의 쇼우도시마
다도해라고 불리는 세토 내해의 동단부에 위치하고, 내해에서 두 번째의 넓이를 지닌 쇼우도시마(그림1)도 아와지시마淡路島에 비하면 반절 정도의 면적이다.
그림1 쇼우도시마의 지형. 1:20만 지형도, 2004년 수정.
섬의 지형은 대부분이 산악지로, 경작지는 얼마 안 되는 평지에 논, 경사지에 계단밭이나 다락논이 조금 있었는데, 지금은 그 태반이 잡초목지화되어 있다.
험준한 산들의 대부분은 화강암을 기반으로 집괴암이나 안산암 등이 노출되어, 섬의 동부부터 최고봉인 호시가죠우산星ヶ城山(816m)·미카사산三笠山·칸카케이寒霞渓·쵸우시케이銚子渓·오우토산皇踏山으로 서쪽으로 이어진다. 도중에 나뉘어져서 남서쪽의 단산壇山·타이마산・大麻山으로 이어진다. 동부에서 남쪽으로는 도우운산洞雲山, 중부에서 남쪽으로는 이카미산飯神山·시라하마산白浜山으로 이어진다. 이들 산들을 뚫고 나가는 스카이라인인 칸카케이 도로도 생긴 지 오래다. 이 일대 대부분은 국립공원 지정지가 되어 있다. 쇼우도시마의 지형은 일본 국토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모습을 띠고 있다.
2. 짐승막이담 유구의 주행을 뒤쫓다
실측 조사를 결의한 경위
필자가 짐승막이담 유구를 답사하기 시작한 건, 1961년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사 30도 가까운 급경사면에 1톤급의 밑돌을 늘어놓고, 위에 반 톤 정도의 돌을 쌓고, 다시 겹겹이 쌓은 짐승막이담이 남쪽 위로 뛰어올라가는 장소(사진1)에 맞딱뜨리고 나도 모르게 숨을 삼킨다. 선인이 어떻게 궁리하며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쌓아 올렸을지 경탄했다.
사진1 급경사면을 뛰어오르는 거석의 짐승막이담. 土庄町 見目ナベワ
그러나 오늘날, 섬 주민의 짐승막이담에 대한 관심음 매우 희미하여, 중년 이하의 사람에게는 '이름은 들어봤지만 본 적은 없다'와 같은 존재가 되어 있다. 게다가 짐승막이담은 해마다 산사태·전용·댐이나 도로 공사 등으로 소실되고 있다(사진2).
사진2 수해로 일부 소실된 짐승막이담. 土庄町 見目ツボイ. 森本勝 씨 제공.
이 현상을 보면서, 짐승막이담의 물질과 정신 모두의 풍화를 염려해서 현상 파악을 위한 답사를 하기로 했다. 가능하면 상세한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전반은 마을의 위원과, 후반은 동료의 협력으로 토노쇼우마치土庄町 안의 옛 5개 마을의 짐승막이담 주행의 실측 조사가 되었다.
짐승막이담의 옛 기록과 선행 조사 사례
에도 시기 이후의 옛 기록에서 짐승막이담의 기재를 볼 수 있다. 그들을 정리해 표1로 나타냈다.
문서명 | 년도 | 기재 내용 |
渕崎 문서 | 1759년 | <上庄村, 黒岩村鄕境論絵図> 안에 '猪鹿垣'이란 문자 있음 |
赤松 문서 | 1766년 | 야스다安田 百姓 가운데 연판連判(176명)으로 멧돼지담 구축을 소원 |
渕崎 문서 | 1766년 | 上庄, 高坪(타카츠보) 멧돼지담 완성 |
赤松 문서 | 1777년 | 야스다, 또 건설 중...... |
小豆郡誌 | 1790년 | 짐승막이담, 전 섬을 일주하여 완성 |
*渕崎 문서는 토노쇼우마치 지정 고문서, 赤松 문서는 우치노미쵸우內海町 지정 고문서.
1839년 이후 작성되었다고 여겨지는 『나키노미야 멧돼지담 그림(滝宮猪垣絵図)』(그림2)에는 마을과 경작지를 둘러싼 짐승막이담이 그려져 있다. 이들 유구의 대부분은 현존하고 있다.
그림2 1839년 이후에 작성된 『滝宮猪垣絵図』. 굵은 검은선이 멧돼지담. 방위 기호는 필자가 더한 것.
1921년 3월에 편찬된 『小豆郡誌』에는 다음의 기술이 있다. "짐승막이담은 섬의 경작지와 산지의 경계선을 달려 섬을 둘러싸 30리. 이걸 섬 주민은 '섬의 만리장성'이라 부른다"고 한다. 또, "메이지 8년, 가축 전염병이 유행해 멧돼지와 사슴이 거의 죽었기 때문에 담이 쓸모없어졌다"고 한다.
쓸모없어진 이후, 입찰로 불하한 기록도 남아 있다. 1879년의 『무카이쵸우向町 문서』(사진3), 1950년 『나가하마長濱 문서』(사진4)이다.
사진3 무카이 문서. 1879년 "鹿猪除垣入費割反別名寄取綢簿"
사진4 나가하마 문서. 1950년 "猪垣 賣却 諸記錄"
짐승막이담의 분포에 대해서는 1929년 무렵 작성된 『小豆島 猪鹿垣』(그림3)에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초견한 이래 몇몇 곳에서 의문점이 발견되어 현지에서 실측하지 않으면 정확한 실태 파악은 할 수 없다고 우리는 생각했다.
그림3 『쇼우도시마小豆島 짐승막이담(猪鹿垣)』. 1929년 무렵 만들었다고 한다. 초견한 이래, 몇몇 군데의 의문점이 발견된다.
짐승막이담에 관한 선행 조사 사례도 있다. 쇼와 말 무렵에 행해졌다고 생각되는 『土庄 地区 猪鹿垣 実地調査図』는 축척 1만 분의 1, 조사자는 모리이 타다시森井正·나카가미 마사시中上正志·모리 카츠미森勝美, 추기에 오오타 유즈루太田譲. 조사 범위는 시카이四海・오오누데大鐸・후치자키渕崎 옛 3개 마을 뿐으로, 이 조사구는 매우 참고가 되지만 3개소 정도 의문점이 있는 것이 아쉽다.
짐승막이담의 실측 조사, 첫번째(1984~1998년)
필자 들이 결의를 모아 갔던 짐승막이담의 실측 조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그 첫번째는 토노쇼우쵸우土庄町 안 중앙부·남서부·서부의 짐승막이담 유구 실측 조사로, 1984년 2월 25일부터 1998년 2월까지 행해졌다. 당시는 토노쇼우쵸우 문화재 보호 심의위원회의 제2부 연구로서 조사가 이루어졌다. 실측자는 미나토港(부장)·오오타·모리·스나고砂子·카와이川井(카)·이시이石井 각 위원과 때로 아케타緋田·미우라三浦·이즈미出水 각 주사가 협력자, 타카하시(시)·타카하시(니)가 안내자가 되었다.
실측 지구는 중앙부가 오오누데(히토산肥土山·카사가다키笠ケ滝·콘마고에小馬越 등), 키타우라北浦(오미小海·미메見目·야카타자키屋形崎·우마고에馬越), 남서부가 후치자키(카미쇼上庄~후치자키 서부·남부), 서부가 시카이(타키노미야滝宮·나가하마長浜·이키스에伊喜末)이다. 필자 들이 실측 조사한 장소나 짐승막이담의 일부를 사진5~7에 나타낸다.
사진5 막돌을 이용한 쵸우나이시釿石의 짐승막이담. 왼쪽은 바깥쪽에서, 오른쪽은 안쪽에서 촬영한 것.
사진6 아타고산愛宕山 동쪽 기슭을 달리는 짐승막이담. 짐승막이담의 위치를 사진 위에 실선으로 나타냈다. 산중턱보다 약간 아래에, 수평으로 뻗어 있다.
사진7 이케노하라池ノ原의 짐승막이담 위치를 원망. 짐승막이담의 위치를 사진 위에 실선으로 나타냈다. ○ 표시는 짐승 함정(사진18 참조)의 위치.
아래는 실측의 요항과 실측도 작성의 수순을 설명한다.
우선, 사전에 지구의 옛일을 아는 노인의 안내로 답사를 행한다. 다음으로 3~5명의 조사자에 의해 실측 조사를 행한다. 짐승막이담은 잡초가 무성한 안에서 굴곡 주행한다. 먼저, 확인. 다음으로, 그 주행 방향마다 방위와 거리, 때로 경사도 측정해 가면서 '주행 약도'를 속기하고, 유구의 현상태도 가능하면 기록해 넣는다. 이와 같이 하여, 그 밤부터 B4의 모눈지에 '실측도'를 정서해 나아갔다. 이렇게 철저히 '실측도'를 그려 나아갔다.
나아가 실측도에서 얻은 짐승막이담의 주행을 2500분의 1 또는 5000분의 1 지도 위에 표시한 '짐승막이담 주행도'를 작성해 나아갔다. 여기에 나타낸 실측도(그림4, 5)와 주행도(그림6)은 그 일부이다.
그림4 필자 들이 작성한 짐승막이담의 '실측도'(오미小海 쵸우나이시의 예). 실측 조사의 결과를 모눈지 위에 정서해 '실측도'를 작성했다. 이들 실측도에 기록된 짐승막이담의 주행을 기존의 지형도 위에 옮겨 적은 것이 그림6의 '짐승막이담 주행도'이다.
그림6 실측도를 바탕으로 작성한 짐승막이담 주행도. 1:5000 지도 위에 '실측도'에 기록된 짐승막이담의 주행을 굵은 실선으로 넣어 간다.
짐승막이담의 실측 조사, 두번째(1998~2002년)
전회의 조사에 이어서, 토노쇼우쵸우 안의 짐승막이담 유구의 잔여 실측 조사를 행했다. 조사 대상은 토노쇼우쵸우의 오오베大部와 코베小部이다.
1998년 12월 10일부터 사전 답사를 하고, 합계 8명의 실측 집단을 구성해 겨울철 주 1회, 2002년 1월 19일까지 실측을 행했다. 실측 참가자는 미나토(대표) 외에 스나고(부대표)·카와나카川中(마)·키바木馬(누)·미키三木(미)·우에노上野(타)·니시무라西村·야마모토山本(토) 등이다. 실측의 요항은 첫회에 준하고, 이번 회의 실측 활동은 완전히 봉사로 행했다. 이때의 실측 집단과 조사지 짐승막이담의 일부를 사진8~11에 나타낸다.
사진8 오오베 지구 실측 집단. 키바 씨(왼쪽 끝) 제공.
사진9 정연하게 현존하는 타이田井의 짐승막이담
사진10 우토우지리ウトウジリ의 짐승막이담. 답사한 범위에서 가장 높게 쌓았다. 안쪽(밭 쪽)을 촬영.
사진11 코토즈카琴塚의 짐승막이담. 안쪽(밭)도 바깥쪽(산)도, 지금은 맹종죽이 무성하다.
실측의 진용은 좋고 성대히 출발해 실측을 재개했는데, 몇 번이나 위험한 경사면을 조우하고 빽빽히 자라는 양치식물에도 막히며, 구이グイ의 군생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몸 상태도 걱정이 되었다. "추운데..." "눈보라가 치려나..."라고 중엉거리면서 작은 건물의 처마 밑으로 뛰어 들어가, 덜덜 떨면서 주먹밥을 우겨 넣는다. 누군가의 입에선가 나즈막히 이노우 타다타카伊能忠敬의 이름이 나와서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오오베 지구의 실측이 가장 힘들었다. 산은 깊고, 지형의 기복이 심하다. 유구는 그에 아랑곳 않고 주행하고 있으며, 게다가 매우 길게 이어진다. 조사 일수는 예상보다 훨씬 길어졌다.
피곤하긴 했으나, 산행은 건강에 좋다. 카와나카 씨의 개근과 행동력, 스나고·키바 두 사람의 방위 측정의 확실함에 도움을 받아, 조사 결과를 나중에 소책자로 정리했다(港 2002).
아래는 실측 범위의 짐승막이담 상황을 기록했다.
동부(옛 오오베 마을 안)의 짐승막이담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닌다. 원형이라 생각되는 모습이 뚜렷하게 남아 있는 점, 잔존하는 주행 거리가 매우 긴 점, 산속 깊이 독립 고리 모양의 것이 9군데 있는 점이다. 독립 고리 모양의 짐승막이담 안에는 경작지 흔적·일각 대문 흔적·함정 흔적이 남아 있고, 이 가운데 3군데는 논 흔적이었다.
논 흔적은 '○○의 산논'이라 호칭되고 있다. '타이田井의 산논'을 예로, 산논과 그 삶에 대해서 조금 기술해 놓고자 한다. 현재, 타이 마을에는 댐이 건설되어, 논과 그걸 둘러싼 짐승막이담의 태반이 수몰되어 있는데(사진12), 댐 옆의 설명판에 의하면, 예전에는 논 면적 약 9000평, 약 40채가 경작하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타이의 산논'에는 강을 끼고서 넓은 평지에 논, 경사지에 다락논이 있고, 주변은 '오오담(おお垣)'이라 부르는 짐승막이담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타이의 산논'은 마을의 남쪽 위, 산 하나 넘어 안쪽에 있으며, 그곳에는 몇 번이나 굴곡진 좁은 비탈길을 올라 동서로 이어지는 험준한 봉우리를 넘어서 갔다(사진13). 고개 부근은 집괴암이 노출되어 있고, 왼쪽은 깊은 골짜기가 되어 있다. 예전의 산논 경작자는 다음처럼 이야기한다.
사진12 현재 '타이의 산논' 흔적. 논과 짐승막이담의 대부분은 수몰되었지만, 남아 있는 짐승막이담(사진 위에 실선으로 표시함)도 있다.
사진13 '타이의 산논'으로 가는 급한 비탈길
"저 좁은 비탈길을 이른 봄이 되면, 늦을까 봐 왼쪽 어깨에 쟁기를 메고 왼손으로 붙들고, 오른손은 앞을 가는 소를 고삐로 다루면서 조심스럽게 올랐다. 우란분재(음력 7월 15일)가 지나면, 야생 조수 쫓기의 당번도 저 길을 올라, 강 맞은편 오두막에서 방울을 울리고 밤을 보냈다. 수확물은 마을 남쪽 위의 산중턱까지 전부 등짐으로 운반. 중턱부터는 외발수레를 사용했다. 저 고생을 아는 사람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선인에 의한 '오오담' 구축의 고생 이야기는 안 나왔다.
짐승막이담의 실측 조사, 세번째(2002~2003)
실측 기간은 2002년 이른 봄부터 이듬해 봄까지이다. 대상은 옛 이케다쵸우池田町 안. 실측자는 미나토 외 키바·요네자와米澤・미치가미道上 씨. 타케베武部 씨의 조언에 의해 뚜렷하게 짐승막이담이 남아 있는 지구만 3군데를 실측하고, 1000분의 1 실측도로 정리했다. 나카야마中山 고개로 가는 길의 중턱(길을 양쪽 안), 타이마산太麻山 니시노타키西ノ滝의 아래쪽, 뉴우베入部의 북쪽 봉우리(경계선 위)와 남쪽 아래 방향선의 3군데이다. 실측도의 게재는 생략하지만, 나가사키의 멧돼지담에서 촬영한 풍경을 사진14로 올린다.
사진14 나가사키의 멧돼지담에서 맞은편을 전망하다. 발밑에 흙을 쌓은 멧돼지담이 있다. 옛 이케다쵸우.
전체 주행도의 작성
2008년, 각지의 실측 조사로부터 작성한 실측도를 바탕으로, 지역별 짐승막이담의 전체 주행도를 작성했다(그림7, 8, 9). 이와 같이 하여 짐승막이담의 주행을 구체적으로 나타낸 지도가 완성되었다.
그림7 토노쇼우쵸우 안 짐승막이담 전체 주행도(1:20,000). 2008년 10월 9~12일에 작성. 우리가 실측 조사로 작성한 1000분의 1 실측도 약 100장을 1:20,000의 마을 전도 위에 옮긴 것. 1쪽(제1부 속표지)에 확대부를 보여준다.
그림8 옛 우치노미쵸우 안 짐승막이담 주행도(1:20,000). 2008년 9월 4일에 서사했다. 옛 우치노미쵸우 안의 주민이 쵸우의 의뢰로 조사한 지도가 몇 장의 봉투에 보존되어 있어, 그걸 필자가 1:20,000의 마을 전도 위에 옮긴 것이다.
그림9 옛 이케다쵸우 안(미토三都 반도부) 짐승막이담 주행도(1:25,000). 2008년 9월 25일에 작성. 우리의 실측 조사지 3군데 및 답사지 2군데를 1:25,000 지형도 위에 옮긴 것(연속된 파선은 행정 경계, 짐승막이담은 중앙부의 원둘레).
3. 짐승막이담의 주행 거리·주행 모양·재료·구축 양식
주행 거리
주행도를 작성한 세 지역 가운데, 토노쇼우쵸우 안에 대해서는 짐승막이담의 전체 주행이 분명해져 있기에, 100장 가까운 실측도(축척 1000분의 1)로부터 각 거리를 정성스레 주워 모아서 전체 주행 거리를 계측했다(표2). 2009년 4월 15일부터 5월 16일까지에 걸쳐서 집계하고, 토노쇼우쵸우 안의 짐승막이담 유구 등의 전체 주행 거리는 4만6611.9m(약 46km)라고 판명되었다.
표2 토노쇼우쵸우 안 짐승막이담의 주행 거리(m)
옛 마을 이름 | 총 거리 | 현존 | 소실 |
키타우라北浦 | 12,203.1 | 6,799.7 | 5,403,4 |
시카이四海 | 9,383.3 | 4,348.8 | 5,034.5 |
오오누데大鐸 | 5,836.6 | 2,762.5 | 3,074.1 |
후치자키渕崎 | 5,375.0 | 2,515.0 | 2,860.0 |
오오베大部 | 13,813.9 | 10,852.2 | 2,961.7 |
계 | 46,611.9 | 27,278.2 | 19,333.7 |
짐승막이담의 주행 모양
섬 안에서 볼 수 있는 짐승막이담 유구의 주행 모양은 세 가지로 유형화할 수 있다.
'연속 모양'은 마을의 경계를 넘어서 줄지어 있으며, 마을이나 농지를 크게 에워싸는 것이다. 주행 방향이 끊이지 않고 복잡하게 굴곡져 있다.
'독립 고리 모양'은 특정 범위를 완전히 에워싸는 것인데, 담의 일부에 골짜기·해안·높은 절벽을 이용하는 것도 있다. 주행은 단조롭고, 대부분은 산속에서 볼 수 있다. 구축자는 에워싸는 범위의 규모에 따라 조력을 얻으면서 단독으로 쌓아 올리거나, 동료와 함께 쌓아 올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각 대문 출입구의 수도 규모에 따라서 다른 듯하다.
'횡단 모양'은 반도부에서 볼 수 있는 유형으로, 짐승막이담을 횡단시켜 반도 부분을 지키는 것이다. 짐승막이담이 있는 반도에는 '일각 대문'의 호칭이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짐승막이담의 재료와 구축 양식
석재를 이용하는 경우(돌 쌓기)와 토재를 이용하는 경우(흙 쌓기)가 있다.
섬 안의 돌 쌓기(사진15) 재료의 태반은 안산암의 거친돌이다. 오미小海·오오베大部·후쿠다福田 등에서는 화강암의 막돌을 이용하고 있다. 돌 쌓기의 구축 양식 가운데 한 예를 그림10에 나타낸다.
사진15 돌 쌓기의 짐승막이담. 안산암의 거친돌. 仙崖.
그림10 돌 쌓기의 구축 방법 모식도(단면도). 숫자는 m. 쵸우町 지정 사적인 마츠코우松香의 짐승막이담 단면. 안산암(거친돌)이 이용된다.
흙 쌓기(사진16)은 점토질의 토양이 분포하는 장소(토노쇼우쵸우 키타베北部의 일부와 야스다安田·노우마苗羽·니시무라西村)에서 볼 수 있고, 특히 반도부에 눈에 띈다.
사진16 흙 쌓기의 짐승막이담. 長崎.
돌 쌓기와 흙 쌓기를 병용한 예(사진17)도 오미에 그 일부분이 현존한다.
사진17 작은 돌과 점토의 병용 쌓기. 小海.
고쳐 쌓기(修築)의 고심
짐승막이담을 유지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고쳐 쌓기가 필요하다. 메이지 시대까지는 고쳐 쌓기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던 듯하고, 「猪鹿取調書上録」(오오누베 문서)에는 2013칸(약 3623.4m)의 구간에 걸친 고쳐 쌓기의 기록이 있다. 이들 고쳐 쌓기의 부담은 경작면적에 따라서 결정되었다고 하는 기록이 「猪鹿検地帳」(원래 타카오高尾 씨 소장)에 남겨져 있다.
짐승막이담의 부속물
짐승막이담에는 사람의 통행을 위하여 출입구가 설치되었다. 출입구의 호칭은 '일각 대문(키도木戶)' '일각 대문 출입구(키도구치木戶口)'가 일반적이고, 오오베에서는 '토마에' '토마에구치', 쿠사카베草壁나 니시무라에서는 '멧돼지문(猪門)'이라 쓰고 '시시몬', 나가사키長崎나 요시노吉野에서는 '가라가라키도'라고 불렀다.
출입구의 관리가 나쁘면 동물이 침입해 버리기에, 다양한 대책이 이루어졌다.
요시노 지구에서는 멍석을 비스듬히 해서 문을 마름모꼴로 만들어 문이 중력으로 자연히 닫히도록 한 궁리가 고안되었다. '가라가라키도雅良々々柵門'이라 부르는 것으로, 에도 말기에 간행된 『小豆島 名所 図会』에 그림으로 나와 있다(그림11).
그림11 가라가라키도.
출전: 曉鏡成 저 『小豆島名所図会』
출입구를 관리하는 일반적 방법은 '일각 대문 파수꾼'을 두는 것이었다. 파수꾼에 대해서 미메見目에 거주하는 후지와라 요시미藤原好見 씨(1928년생, 채석업 종사)가 아이 무렵, 70세를 넘은 할머니에게서 들었던 옛날이야기가 있다.
"내가 여기에 시집 왔을 당시, 시어머니에게서 일각 대문 파수꾼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그 전 시어머니가 시집 온 지 얼마되지 않은 무렵, '저녁 때가 되면 일각 대문을 보러 가는 일이 그게 그렇게 무섭고 무서웠다'고 종종 이야기했지."
함정(사진18)도, 종종 짐승막이담에 부속되어 만들어졌다. 함정은 토노쇼우쵸우에서는 '시시츠보猪鹿つぼ', 옛 우치노미쵸우에서는 '시시오토시シシ落し'라고 불렀다. 함정을 만드는 위치는 짐승막이담의 안쪽(밭 쪽)과 바깥쪽(산 쪽)이 있는데, 토노쇼우쵸우에서는 '담의 안', 옛 우치노미쵸우나 난키南紀에서는 '담의 바깥'에 만들었던 예를 볼 수 있다.
사진18 이케노하라의 짐승 함정. 함정의 주위가 돌 쌓기이고, 짐승막이담의 안쪽(밭 쪽)에 있다. 구덩이에서 오른쪽 안쪽에 연달아 있는 낮은 돌 쌓기는 짐승막이담의 흔적.
함정은 거의 원통형으로, 일반적으로는 땅을 파낸 상태 그대로인데, 토노쇼우쵸우에서는 구멍의 안쪽을 돌로 쌓았다(사진18). 표3에 실측 조사할 때 확인할 수 있었던 함정의 크기를 표시했다(일부 계측 못함).
표3. 짐승 함정 흔적의 실측
지구 | 명칭 | 긴 지름(m) | 짧은 지름(m) | 깊이(m) |
大鐸 | 이케노하라池ノ原 | 2.95 | 2.7 | 1.7 |
北浦 | 하치가사레八ヶ砂 | 1.5 | 1.5 | 1.3 |
大部 | 우토우지리ウトウジリ | 1.5 | 1.5 | 1.0 |
大鐸 | 오오노데大野手 | 2.75 | 1.75 | 1.5 |
草壁 | 코츠보小坪 | 2.8 | 2.0 | 1.8 |
草壁 | (다른 4군데) | - | - | - |
安田 | 2.0 | 1.2 | 1.0 | |
苗羽 | 2.1 | 1.5 | 1.5 | |
苗羽 | 1.0 | 0.5 | 0.5 | |
坂手 | (다른 3군데) | - | - | - |
西村 | (다른 3군데) | - | - | - |
필자는 1933년 무렵, 2살 아래의 동생과 함께 할머니에게 이끌려 가을버섯을 따러 산속으로 가서 짐승막이담을 마주쳤다. 그때 돌담이 끊어진 장소가 약간 우묵하고, 끊어진 돌담 옆의 고목에 가늘고 긴 잔가지가 겹겹이 덩굴져 엉켜 있었다. 돌담에 서서 고목을 흔들고 있으면, "또 위험한 짓을 한다"고 할머니에게 꾸중을 들었던 어렴풋한 기억이 있다. 지금은 우묵한 곳이 '짐승 함정 흔적', 덩굴져 엉켜 있던 고목이 '일각 대문 흔적'이라 확인할 수 있다. 동생이 기억을 더듬어서 묘사한 것이 그림12이다.
그림12 필자가 아이 무렵에 본 일각 대문 흔적과 짐승 함정 흔적. 70년 이상 전의 기억을 의존해 필자의 동생(港俊雄)이 그림.
이상, 이 섬의 짐승막이담 주행 모양, 재료, 구축 양식을 살펴보았는데, 섬 안의 대표적인 짐승막이담 10군데를 표4에 나타낸다.
표4. 섬 안 짐승막이담 가운데 특기할 만한 10군데
지구 | 명칭 |
四海 | 맛코우松香의 짐승막이담 |
北浦, 大鐸 | 이케노하라池ノ原의 짐승막이담과 함정 |
池田 | 나가사키長崎의 짐승막이담 |
安田 | 타치바나橘 고개의 짐승막이담 |
大部 | 타이田井 코토즈카琴塚의 짐승막이담 |
大部 | 센가이仙崖의 짐승막이담 |
草壁 | 히라야마平山의 짐승막이담 |
小部 | 오오보라大洞의 짐승막이담 |
苗羽 | |
西村 |
짐승막이담의 기원에 관한 고찰
짐승막이담의 완성은 섬의 북부나 서부가 빨랐을 가능성이 높다. 그 기원은 어디까지 거슬러 올라갈까?
쇼우도시마에서 짐승막이담이 만들어지게 되었던 시기에 대해서는 『内海町史』나 『池田町誌』에 기재가 있고, 대략 1688~1703년에 들어와 얼마 지나지 않은 무렵이라 추정된다. 『土庄町誌』에는 다른 견해가 적혀 있으며, 고대 산성(7세기 후반, 나당 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해 큐슈 북부~세토 내해에 쌓았던 산성)이나, 중세 난키南紀(14세기 무렵 남북조 항쟁 등의 시기에 쌓은 성이나 요새)의 영향이 아닐까 한다. 고인이 된 선배의 설이다.
필자는 최근 실측 조사를 하면서 '오키레オキレ'의 짐승막이담 발생을 1700년 무렵의 직전인 1684~1687년 또는 더욱 거슬러 올라간다고 추정했다. 그 근거는 오키레의 짐승막이담을 사전 답사하던 중에 만났던 다음과 같은 방증적 사건이다.
어느 일가가 대대로 이 산속의 고리 모양 짐승막이담 안에서 계속 살고 있었는데, 1874년에 그 먼 후세의 자손(목수)이 해안의 마을로 하산해, 이윽고 대대로 내려오는 묘석도 집터의 신사로 하산시켰다고 한다.
오키레의 짐승막이담은 돌담의 쌓는 방식도 좋고, 유구 안에는 집터 흔적·우물·헛간 흔적·저수지·용수로 흔적·논 흔적·너른 밭 흔적, 그리고 묘지 흔적도 잔존해 있었다(그림13). 하산시켰다고 전해지는 묘석을 필자 들은 찾아내 명문을 베껴서 후원하는 절의 과거 장부와 대조한 바, 이 일가의 초대 인물과 딱 일치했다.
그림13 오키레의 짐승막이담 실측도. 위 그림은 실측도의 전체, 아래는 집터 주변(위 그림의 왼쪽 아래)의 부분을 확대.
초대의 인물은 1719년에 사망했다. 이에 가설을 세운다. 초대의 향년을 53세라 하고, 그 입산과 개간, 짐승막이담의 구축을 시작한 연령을 18세라 하면, 그 연호는 1684년에 해당한다.
또, 전술한 옛 기록(앞의 표1)이나 섬의 지형에서도 짐승막이담의 발생은 섬의 서부나 북부가 빨랐던 것을 엿볼 수 있다.
4. 섬의 활성화에 도움이 되기 위하여
쇼우도시마를 둘러싼 짐승막이담 유구의 답사와 실측에 의해, 주행도를 지도 위에 표시할 수 있었다. 그것들을 집약해 섬 전체의 주행도를 작성한 것은 이미 기술한 대로이다. 나아가, 토노쇼우쵸우에서는 입체 모형도도 작성했다(사진19).
사진19 토노쇼우쵸우 관내 짐승막이담 유구 주행도의 입체 모형.
다난했지만, 선인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서도, 또한 많은 성과를 얻었던 지금까지의 활동을 활용하기 위해서도 2009년 11월 3일, 앞으로를 목표로 필자 들은 취지서를 작성했다. 마지막으로, 최지서의 전문을 제시하며 이 장을 마치고자 한다.
'농담 > 농-문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짐승막이담 -3장 농민의 고투를 이야기하는 보루 (0) | 2025.04.27 |
---|---|
짐승막이담 -1장 짐승막이담의 분포와 구조 (0) | 2025.04.22 |
짐승막이담 -서론, 목차 (0) | 2025.04.14 |
농민들의 수자원 전쟁 -4장 마을들은 '강'을 어떻게 활용했는가? (0) | 2025.04.12 |
농민들의 수자원 전쟁 -3장 용수 조합의 실태와 물을 둘러싼 다툼 (0) | 2025.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