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농민의 고투를 이야기하는 보루
-미에현三重県 키이나가시마紀伊長島의 멧돼지담
1. 평지가 적은 키이나가시마 지방
미에현은 킨키 지방 동부에 위치하고, 산과 바다로 둘러싸인 지형이다.
이 장의 무대인 키이나가시마 지방은 미에현 남부에 위치한다. 2004년 쿠마노熊野 옛길이 '키이 산지의 영지와 참배길'로 세계 유산에 등록된 이래 세계 유산의 한 날개를 담당하는 지역으로, 쿠마노~오와세尾鷲~키이나가시마를 포함하는 지역은 '히가시키슈우東紀州'(그림1)란 명칭으로도 불렸다. 오늘날, 히가시키슈우의 고갯길을 많은 관광객이 걷게 되었다.
그림1 키이나가시마 지방을 포함하는 '히가시키슈우'의 범위(음영 부분)
키이나가시마 지방은 면적 110.57㎢, 산림이 87%를 차지하고 있으며 농지는 2.4%에 지나지 않는다. 키이 반도의 산지가 직접적으로 쿠마노 여울에 들어가, 평지가 매우 적은 지역이다. 1955년 시정촌 합병으로 나가시마쵸우長島町와 미노세무라三野瀬村・아카바무라赤羽村가 합병되고 키이나가시마쵸우紀伊長島町가 탄생했다. 이때의 인구는 약 1만6000, 세대수는 약 3500호였다. 헤이세이平成 대합병에 의해 2005년 이웃 정町인 미야마쵸우海山町과 합병하고, 키호쿠쵸우紀北町가 되었다. 현재의 주소 표시는 '미에현 키타무로군北牟婁郡 키호쿠쵸우 키이나가시마구'가 되어 있다. 산업은 임업과 어업이 중심으로, 인구는 과소화·고령화가 진행되어 2009년 4월에 1만 120명이 되었다.
키이나가시마 지방에서는 맷돼지담이 많이 분포해 있다(사진1). 특히 많은 것이 산간인 아카바 지구이다(키이나가시마구는 다시 4개 구로 나뉘고, 아카바는 산간 지역에 있다).
사진1 농민의 고투를 이야기하는 멧돼지담. 사카모토坂本.
2001년 5월부터 이듬해 3월에 걸쳐서 키이나가시마 고향 간담회는 "정町 안의 멧돼지담을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후세에 남기자"라는 주제를 걸고 약 20명의 회원이 현지에 방문해 위치와 길이 등의 기록이나 옛일을 아는 노인에게서 청취 조사를 실행했다. 그 횟수는 30회에나 이른다.
그때 해명된 멧돼지담은 정 안 66개소, 총 연장 약 13.3km였다. 이 장에서는 조사에 의해 밝혀졌던, 멧돼지담에 얽힌 노인의 이야기와 고문서에 적힌 기록을 소개하겠다. 또, 이들 조사 결과를 정리해 '멧돼지담의 탐색'이란 제목의 책자를 간행했다(키이나가시마 고향 간담회 2002). 이 장의 사진1~21, 그림1~6은 집팔지의 양해를 구해 이 책자에 옮겨 실은 것이다.
2. 멧돼지담에 대해 듣고 적은 것에서
키이나가시마 고향 간담회의 조사에 의하여 얻었던 이야기를 소개한다.
멧돼지가 망쳐놓은 논의 참상(히가시나가시마東長島 지구 카타카미片上) ~옛일을 아는 노인의 이야기
멧돼지가 집단으로 또는 한 마리라도 논에 침입하면 어떻게 될까? 예전의 '물길(ゆで)'(논에 물을 끌어 넣는 용수로의 방언: 사진2)는 지금 같은 콘크리트제 U자 도랑(사진3)과 달리, 돌과 적토로 반죽해 굳히기만 해서, 한 아름 되는 돌을 뒤집는 멧돼지에게는 물길을 부수는 일은 별 힘도 들지 않는 일이었다.
사진2 예전 물길의 흔적. 산노헤三戸.
사진3 현대의 물길(용수로). 콘크리트제 U자 고랑. 나카기리中桐.
물길이나 논두렁에는 멧돼지가 엄청 좋아하는 게나 지렁이, 뱀 등이 있기 때문에, 멧돼지가 가장 처음 노리는 건 물길이나 논두렁이었습니다.
논 쟁기질할 때, 물잡이를 잘 하기 위해 논두렁 치기나 진흙 바르기를 꼼꼼히 하는데, 벼의 목숨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물을 끌어 넣는 물길이나 논두렁을 부수면 모든 게 사라져 버립니다.
또한, 아침부터 밤까지 정성을 들인 벼가 진흙 속으로 밟혀 쓰러져 벼이삭이 비틀리면 전혀 손을 쓸 수가 없게 됩니다. 태풍으로 쓰러진 벼는 일정 방향으로 쓰러져 있기에 어떻게든지 일으켜 세울 수 있지만, 멧돼지가 망쳐놓은 논은 벼이삭이 진흙 속에 뒤얽혀 있기 때문에 속수무책인 참상입니다. 이 근처에 있는 '큰아버지의 골짜기 멧돼지담'은 길이 350m, 높이 1.8~9m, 위 너비 70cm입니다. '쿠마노 옛길 아래의 멧돼지담'은 길이 195m, 높이 1.6m, 위 너비 70cm입니다(그림2).
그림2 히가시나가시마 지구 카타카미 주변의 멧돼지담 위치. 키이나가시마 고향 간담회(2002)에서.
나가시마의 중심 지구를 지키는 멧돼지담(나가시마 지구 오칸노オカンノ) ~니시다 마스조우西田益三 씨의 이야기
오칸노란 '언덕(岡) 위'이고, 도노코강土壺川 북쪽의 지역을 가리킨다(사진4). 언덕 위를 사투리로 말해 오칸노가 되었단 설도 있는데, 원래 오칸노라는 지명이 있어서 그것에 한자를 맞추었는지도 모른다. 도노코강의 남쪽은 '오우칸마치往還町의 위'라고 하는데, 오우칸이라는 그 음과 관계 있다고 생각된다.
사진4 에노우라江ノ浦에서 오칸노를 쳐다보다. 나가시마쵸우 안에서 유일한 평지가 해안을 따라 분포하고, 항구나 (옛) 나가시마쵸우 관공서도 있다.
오칸노의 관음당 옆, 천리교天理教会 교회 위에 높이 약 1m, 너비 70cm의 멧돼지담이 4군데 정도 있다(사진5). 모밀잣밤나무 거목 때문에 터져 무너져서 길이가 100m가 되어 있지만, 전장은 125m에 달하는 오랜 돌담이다. 나가시마쵸우 안에서는 유일하게 논이 있었던 지구이기에, 경작하는 농민들이 소중한 작물을 멧돼지의 피해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선조가 고생해서 돌담을 쌓아 보루로 삼았음이 틀림없다.
사진5 오칸노의 멧돼지담. 멧돼지담의 위에 둘레 2m나 되는 큰 나무가 무성하게 있었다.
사냥꾼 산양三やん과 멧돼지의 격투(미노세三野瀬 지구 카이노海野) ~하마하타 이사무浜畑勇 씨의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60 몇 년 전, 1936년 무렵의 기억. 당시 나는 소학교 4학년 정도였다.
산양의 철포 소리가 났기에, 친구 4~5명이서 소리가 난 쪽으로 뛰자, 멧돼지담 안에서 사냥개 2마리와 큰 멧돼지가 격투하고 있었다(사진6). 1마리는 뒷쪽에서, 또 1마리는 옆구리 쪽에서 덤벼들고 있었다. 사냥꾼인 산양은 그걸 가만히 보고 있었다.
이윽고 멧돼지가 약해져서 큰칼로 머리의 급소를 찔러서 죽였다. 높은 돌담 위에서 보았던 당시의 광경이 지금도 생각난다.
사진6 산양과 멧돼지의 격투 현장. 카이노의 마을 안 멧돼지담, 돌담으로 둘러싸인 바로 앞의 평탄지에서 격투가 있었다.
'카이토かいと' 지명(아카바 지구 모바라茂原・마에야마前山) ~옛일을 아는 노인의 이야기
아카바 지구에는 '○○ 카이토'라고 부르는 소구역이 많다. '담 안(垣內)'이라 쓰고 '카이토'라고 읽는다.
모바라에서 가장 긴 멧돼지담은 '이나바稲葉 카이토'라고 부르고, 산과 밭의 경계 가까이에 있다. 그밖에도 '타니노오쿠谷の奥'이라든지 '안오쿠무라노오쿠奥村の奥'이라 부르는 장소에도 멧돼지담이 쌓여 있다. 모바라의 멧돼지담 전장은 316m, 높이 1.8m, 위 너비 70cm이다(사진7).
사진7 모바라의 멧돼지담
앞산에는 전장 122m, 높이 2m, 위 너비 70cm의 멧돼지담이 있고, 담의 도중에는 함정도 만들어져 있었다.
낮은 멧돼지담(아카바 지구 산도三戶) ~할머니의 이야기
"아주 낮은 짐승막이담이네요, 할머니."
"응, 낮지. 돈이 없어서 높이 쌓지 못했을까나."
할머니는 웃으면서 계속 이야기했다.
"그래서 옛날부터 농사철이 오면, 말뚝을 박거나, 잔디를 단으로 묶어서 쌓아 높이를 올렸지."
산도의 멧돼지담은 산도 분교 옆과 무케로지ムケロジ에 있으며, 길이 225m, 높이 1.2m, 위 너비 1m이다(사진8). 다른 지구의 멧돼지담보다 확실히 낮고,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농사짓기 위한 고생이 있었던 듯하다.
사진8 산도 분교 옆의 멧돼지담
지금도 짐승 피해가 심하다(아카바 지구 오오하라大原 오쿠가奥賀) ~하시쿠라 히로카츠橋倉宏承 씨의 이야기
언제쯤부터인지 알지 못하지만, 예전 사람들에 의해 오오하라 마을(사진9)을 둘러싸듯이 이어서 작은돌을 쌓아 멧돼지담을 쌓아 올려 고생한 흔적이 추측됩니다.
그림9 오오하라 오쿠가 지구. 주변의 상황은 그림3 참조.
오오하라 오쿠가의 멧돼지담은 현재, 곳곳이 무너져서 제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전쟁 이후는 깊은 산을 인공림으로 개발해 버려 잡목의 싹이나 열매 등의 먹이가 부족해, 30년 정도 전부터 원숭이, 멧돼지, 사슴, 영양 등이 먹이를 찾아서 인가 근처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논밭의 피해는 물론, 멧돼지담 안쪽에 심은 삼나무, 편백나무의 싹을 뜯어 먹고, 껍질을 벗겨서 말라 죽거나, 줄기가 썩거나 해서 곤란합니다.
그림3 오오하라 지구의 멧돼지담
밤에는 일각 대문을 닫는다(아카바 지구 오오하라 나카이中井 카이토·니시 카이토)
오오하라 마을의 노인 타니 이치노죠우谷市之丞(92세)의 이야기에 의하면, 거듭되는 아카바강의 범람에 의한 논밭의 피해를 우려해, 많은 사람이 수해가 적은 미츠타니三ツ谷에 논밭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미츠타니에는 야생 동물이 먹어 치우는 피해를 막는 것이 이 또한 큰일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사람들은 홍수와 싸우기보다도 야생 동물과의 싸움을 선택했던 듯하다.
오오하라의 마을 전체가 멧돼지담에 의하여 둘러싸여 있었다(그림3). 마을을 지나는 카시카노樫カ野 가도에는 동쪽의 출입문·서쪽의 출입문이 있고, 북쪽의 산쪽에는 첫번째 문·두번째 문이 있어서 밤에는 문을 닫고 멧돼지의 침입을 막았다(그림4).
그림4 노인이 묘사한 옛날 오오하라 지구의 멧돼지담. 타니 이치노죠우 씨(92세)가 직접 그림. 출입문이 그려져 있다.
어머니와의 산논에 대한 추억(아카바 지구 오오하라 미츠로三ツロ) ~무라시마 시게유키村島成幸 씨의 이야기
아카바 지구 오오하라 미츠로에는 논 주위의 산을 따라서 멧돼지담이 200m 정도 쌓여져 있다(사진10). 높이는 평균으로 약 1.5m이다. 돌담의 산 쪽을 따라서 1m 정도의 수로 모양의 놀이터가 있어서 여기에 멧돼지가 들어오면 멧돼지담은 넘지 못하고, 산 쪽도 급사면이라 도망가기 힘든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멧돼지는 조심해서 가까이 가지 않았다.
사진10 미츠로의 멧돼지담
그렇지만, 이 산논에도 벼의 이삭이 팰 무렵부터 매일 밤 멧돼지가 출몰했다. 멧돼지담으로 지켜지는 쪽은 피해가 적었지만, 강 쪽은 수량이 줄어들면 멧돼지가 나타났다.
멧돼지 쫓기에 생풀을 밤새도록 모깃불을 피우는 걸 '쿠스베くすべ', 천을 새끼줄처럼 꼬아서 밤새도록 모깃불을 피우는 걸 '불줄(火繩)'이라 했다. "멧돼지는 일단 논에 달라붙으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여 어머니는 멧돼지와 경쟁하는 것처럼 쿠스베 준비와 불즐을 몇 개 가지고 나가서 2개월 동안은 비오는 날도 계속해서 몇 군데나 논밭 주위에 모깃불을 피웠다. 쿠스베가 꺼져 버리거나, 일찍 타 버릴 때는 멧돼지에게 당해서 매년 60~90평 분량의 수확을 못하게 되었다.
소학교 저학년인 나는 이미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논일을 돕기보다는 산나물 채취나 수로에서 장어 잡기, 감·밤·으름 따기 같은 놀이를 목적으로 어머니와 자주 이 산논에 다녔다.
1961년에 광차鑛車가 폐지되는 등의 사정으로 이 산논에서의 경작은 불가능해지고, 논에 나무를 심었다. 멧돼지와의 격투는 종료되어, 산논에 있는 멧돼지담의 사명도 끝났다.
돈도 물건도 없는 시대의 인력에 의한 돌 쌓기의 큰공사, 그 고생을 선조와 공유해 왔던 시대는 어머니 대에서 끝나게 되었다. 이 멧돼지담은 역사 유산으로서, 지금도 잘 남아 있다.
견고한 멧돼지담(아카바 지구 쥬우스오카지十須岡地・아사가라浅柄) ~ 노인들의 이야기
아카바 지구 쥬우스에는 주요한 멧돼지담을 2군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하나가 오카지이다(사진11). 우에노 카메타로우上野亀太郎 씨와 미나미자키 이스케南崎伊助 씨가 소유한 논이 있어, 규모도 크고 길며, 그리고 견고한 것이다. 오카지의 멧돼지담에는 구부러진 담이 있는 점, 함정이 남아 있는 점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사진12, 13).
사진11 멧돼지담으로 지켜진 오카지의 논
사진12 직각으로 구부러진 쥬우스오카지의 멧돼지담
사진13 멧돼지담의 바깥쪽에 파 놓은 함정.
다른 1군데는 아사가라이다. 타나카 마사야 씨에 의하면, 선조인 분타로오文太郎・소오시치惣七 무렵에 쌓았다고 한다. 축조 년대는 약 200년 전인 1800~1850년에 걸쳐서라고 생각하며, 당시 촌장을 했던 유력자 우에노 쥬우다유우上野十太夫의 원조도 있었던 듯하다. 기초 부분에는 큰 돌을 사용하고, 오늘날에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 견고함을 유지하고 있다(사진14).
사진14 하부에 큰 돌이 사용된 아사가라의 멧돼지담
다른 노인의 이야기에서는 아사가라의 멧돼지담에는 다른 기원을 말한다.
"350년이나 전이었을까, 쥬우스아사가라의 멧돼지담은 키슈우번의 실업 대책 사업으로 만들어졌다고 하는 이야기를 우린 대대로 들었다."
아사가라의 멧돼지담 바깥(산) 쪽에는 반드시 해자를 파 두어 사슴이 뛰어넘으려는 간격을 떨어뜨려 놓았다.
"멧돼지나 사슴은 예전에도 많았겠지만, 지금이 더 짐승 피해는 심하다. 위에 먹이가 놓여서 아래로 오지 않았으면. 그놈들이 편하게 맛있는 걸 먹는 걸 배우지 않을라나."
함정에 큰 멧돼지가 빠지다(아카바 지구 시모코우치下河内) ~우에노 타다시上野忠史의 이야기
1948년, 내가 20세인 가을날, 이른 아침에 아버지 카츠라勝良가 논에서 급히 돌아와 함정에 큰 멧돼지가 빠져 있는 걸 알게 되었다(사진15).
사진15 큰 멧돼지가 빠져 있던 함정. 시모코우치의 멧돼지담.
그래서 서둘러 포획에 필요한 철봉이나 끈 등을 준비해 아버지와 나와 동생 키하치로오喜八郎 셋이 현지로 얼른 갔다. 세 사람이 가까워지자 멧돼지가 신음 소리를 내며 허둥대고 있더라. 이 멧돼지를 박살내려고 하니 큰일이었다.
철봉으로 머리통을 찔렀지만 좀처럼 뒈지지 않았다. 교대로 때린 지 반 시간 정도 되었을 무렵, 마침내 큰 멧돼지도 함정 바닥에 뻗어 버렸다.
이 멧돼지를 끌어 올리는 일도 큰일이었다. 죽어 있는지 기절 상태인지, 주의 깊게 확인하면서 키하치로오가 함정 안으로 내려가 멧돼지의 사지를 묶고, 셋이 힘을 합하여 끌어 올렸다.
잠시 쉬었다가 곧바로 아래쪽 강변으로 질질 끌고 가서 얕은 강바닥을 조금 파고 묻었다.
다음날 새벽 또 셋이 나가서 진드기 등이 떨어져 깨끗해진 큰 멧돼지를 해체하고 처분했다.
함정의 상세(아카바 지구 시모코우치 아사히야朝日屋) ~옛일을 아는 노인의 이야기
시모코우치의 멧돼지담은 전체가 1605m에 이르는데, 개천을 따라 동쪽의 608m, 북쪽의 약 50m, 남쪽의 330m는 확실하게 멧돼지담이 남아 있다(사진16, 17). 그중에서도 아사히야 부근의 멧돼지담은 높이가 2m 이상이나 되고, 밑에 깐 돌도 크고 훌륭하다.
사진16 시모코우치 동쪽. 전장 608m의 멧돼지담.
사진17 멧돼지담을 따라서 만들어 놓은 산책길. 시모코우치 동쪽의 멧돼지담. 농산촌 진흥 자금을 사용해 정町이 부설한 것.
멧돼지담의 바깥쪽에 3군데의 멧돼지 함정도 만들어져 있다. 함정의 지름은 1.5m, 깊이 약 3m, 내부에 돌담을 쌓아서 언뜻 보면 우물 같다. 그 구덩이를 가느다란 나뭇가지로 주위의 토지와 다름없이 정성껏 위장해서 멧돼지가 빠지기를 기다렸다.
능선 줄기의 멧돼지담(아카바 지구 오비사토小比沙戸) ~ 타나카 마사야田中正也 씨의 이야기
오비사토의 산길로부터 100m 정도 올라간 능선에 약 1km에 걸쳐서 멧돼지담이 구축되어 있다. 이건 마을이 있는 나카기리中桐 방면으로 침입하는 걸 막기 위해 만든 것으로, 능선 앞(오비사토 쪽)을 거의 수직으로 깎아 내어 만들었다(사진18, 그림5).
사진18 능선을 깎아서 만든 멧돼지담. 오비사토의 멧돼지담. 그림5 참조.
그림5 능선을 깎아 낸 멧돼지담의 모델 그림
능선 줄기의 멧돼지담을 중심으로 주변에 짧은 멧돼지담이 있다. 나카기리 마을 쪽에는 관음 옛터 멧돼지담, 반대쪽에 오비사토 멧돼지담, 츄우가다니忠ヶ谷 멧돼지담, 사이키サイキ 멧돼지담이다.
마을 속으로 이어지는 멧돼지담(히가시나가시마 지구 타야마田山) ~나카이 유키아키中井幸明 씨의 이야기
인가가 늘어서 세워진 마을을 속으로 들어가면, 여러 가지 멧돼지담이 이어져 있다. 이타니노타니井谷の谷 멧돼지담은 길이 500m, 미나미타니南谷 멧돼지담은 길이 150m, 오토코타미男谷 멧돼지담은 길이 194m, 카미코야上小屋 멧돼지담은 길이 95m, 그리고 가장 안쪽의 미나미타니의 논 멧돼지담은 길이 169m이다.
3. 에도 시대의 멧돼지담
이상 청취 조사를 바탕으로 각지에 있는 멧돼지담을 소개했는데, 지금부터는 에도 시대 농민이 겪은 고난의 역사를 살펴보자.
근세의 오쿠쿠마노奥熊野
이 장의 무대인 키이나가시마 지방은 에도 시대에는 '키이국 무로군室郡 오쿠쿠마노 나가시마조長島組'라고 불렸다. 무로군이란 오늘날의 무로군牟婁郡과 똑같고, 키이국은 이토伊都・나카那賀・나구사名草・아마海士・아리다有田・히다카日高・모로弁婁의 일곱 군으로 나뉘어 있었다. 키슈우번紀州藩에서는 조제組制가 시행되고 있어, 지역을 '조組'라고 불렀기에 키이나가시마 지방은 '나가시마조'라고 불렀다.
'오쿠쿠마노'란 모로군의 범위에 상당하고, 키이국에서 와카야마성에서 보아 가장 동부에 위치하며, 쿠마노 지방의 가장 깊은 곳에 있기에 그렇게 불렀다. 오쿠쿠마노의 행정을 담당하는 것이 오쿠쿠마노 대관소代官所이다. 현재의 쿠마노는 당시 키노모토木本라고 부르고 있었기에 '키노모토 대관소'라고도 불리고, 약 200명의 대관이 근무하고 있었다. 오쿠쿠마노 대관소는 1622년에 설치되어 1869년까지 이어지고, 그 뒤에 오쿠쿠마노는 모로시모군牟婁下郡이 되어 대관소가 민정국民政局이 되었다.
산을 넘고 골짜기를 건너 쌓아 올린 석축(石垣)은, 농민들의 고된 노동의 기록에 다름 아니다. 대체 이 석축은 언제부터 쌓아지기 시작한 것일까?
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고문서는, 1694년(겐로쿠 7년)의 「서년 오쿠구마노 재재 공사장부(西年奥熊野在々御普請帳)」이다. 이 기록은, 이루카구미의 대장호 타카나시 주에몬이 혼구구미를 비롯하여, 당시 오쿠구마노라 불리던 남무로군・구마노시・오와세시・기타무로군・나가시마정에 이르는 와카야마령 전역의 신전・수로・멧돼지 방지용 울타리(猪垣)의 공사 상황을 정리하여, 기모토의 대관서에 보고한 것이다.
멧돼지 방지용 울타리(猪垣)에는 대체로 세 종류가 있다. 석축으로 된 것, 해자를 판 것, 나무로 만든 울타리이다. 이 중 하타(波田) 이북 지역의 것은 전부 석축으로 쌓여 있다. 가장 긴 것은 오야시카(親鹿)로 약 12km에 이르며, 이와 비슷한 길이를 가진 곳은 우미키(海木)와 하타스(波田須)이다. 이 지역 석축의 높이는 대략 11.5m 정도이다. 거리 면에서는 신시카(新鹿)보다 짧지만, 산본지마정과 사토마치의 경계에 있는 석축은 높이가 23m에 이르는 곳도 있다. 게다가 사토우라(里浦)와 후타기시마우라(二木島浦)의 경계는 이중 석축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석축들은 지금으로부터 약 240년 전, 1741년(간분 원년) 3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 1년에 걸쳐 총 연장 약 1100m가 축조되었다. 한편, 하자키(機崎)에서 남쪽과 기타야마가와(北山川) 유역에는 석축식의 것이 거의 없으며, 고마오・이쿠이 정(構・生町) 근처는 거의 전무하다. 이는 돌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로 만든 울타리였기 때문일 것이다.
현존하는 석축 형태의 멧돼지 울타리의 총 연장은 아직 조사되지 않은 지역도 있어 정확하지 않지만, 확인된 것만 해도 약 30km에 달한다. 축조 비용은 알 수 없지만, 앞서 언급한 「서년 오쿠구마노 재재 공사장부」에 따르면, 180간(328m)에 인원이 120명 필요했다고 하니, 전체로는 만여 명이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후타기시마처럼 높이가 3m에 이르는 거대한 석축은 이 인원으로는 완성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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