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마을들은 '강'을 어떻게 활용했는가?
●용수에 의해 마을이 하나로 묶인다
여기까지는 주로 용수 조합에 의한 물 이용, 곧 물을 둘러싼 마을끼리의 관계를 중심으로 기술했습니다. 다음으로, 개개의 마을 내부에서 어떻게 물을 이용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에도 시대에 물이나 산야 등의 자연자원은 이미 무궁무진하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경작지의 개발과 함께 자원의 희소화가 현실화되고 있었습니다. 경작지는 산야를 개척하여 조성되기 때문에, 경작지가 늘어나면 그 몫의 산야가 감소합니다. 또한 경작지가 늘어나면 그만큼 필요한 용수량도 증가하기에, 물 부족이 되기 쉬워집니다.
그러한 가운데 마을은 자연자원을 유지하고, 영속적으로 이용하기 위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마을은 물이나 산야의 적정한 이용 질서를 규정함으로써 자원의 과잉 수탈을 막고, 또 자원 유지에 필요한 노동을 투하함으로써 환경 보전을 실현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산야는 개개의 집에 분할할 수 있지만, 수리 관개 시설은 분할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물과 산야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에도 시대의 마을은 폐쇄성과 개방성의 양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을은 용수 이용의 단위로서 일체성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폐쇄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편, 마을은 다른 마을들과 공통의 용수로를 이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고, 그러한 경우에는 마을들이 공동으로 공평한 용수 이용을 실현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을에는 다른 마을들과 연합·협력한다는 개방적인 성격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다만, 마을들의 연합(용수 조합)은 그 내부에 마을들의 이해 대립을 껴안고 있었습니다. 그 대립은 갈수기 등에 물싸움으로 표면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물싸움이 날 때에는 마을(마을들)이 일치단결하여 이해가 반하는 마을(마을들)과 격하게 다투었습니다. 마을 안에서도 마을사람끼리의 이해 대립은 있었습니다만, 마을이 용수 이용의 기초 단위였던 것에 의해 다른 마을과의 다툼이 날 때에는 마을사람들이 일치단결해 마을의 구심력이 강해졌습니다. 마을사람들은 일면으로는 '적이 있기 때문에 결속한다'는 관계였다고 할 수 있겠죠. 물은 마을사람들이 개인보다 집단(마을)의 이해를 우선하도록 집단주의적 사고방식을 강화하는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용수로는 내버려 두면 토사가 퇴적되거나, 풀이 무성해지거나 하여 흐름이 나빠져 버립니다. 그래서 해마다 강바닥을 준설하거나, 풀을 베거나, 무너진 부분을 보수하는 등의 작업이 필요해집니다. 이러한 용수로의 보수에 필요한 노동력은 마을사람들 스스로가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물은 자신들이 책임을 진다는 겁니다. 용수로의 유지·관리의 책임 주체는 마을로서, 용수 조합의 기초 단위도 마을이었던 겁니다. 마을 없이 용수 이용은 불가능했다고 할 수 있겠죠.
용수로의 보수에 드는 노동력을 할당하는 기준으로는 대부분의 마을에서 1호에서 1명씩과 같이 각 호 평등의 할당 원칙을 채용하고 있었습니다. 마을의 집집마다 소유한 경작지의 면적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모두 동등하게 노동력을 제공한 것입니다. 이건 순수하게 경제적인 관점으로 보면 불평등한 방식이라 할 수 있겠지만, 거기에는 마을의 일원으로서 '마을의 물'을 이용하고 있는 이상은 소유 면적의 차이에 관계없이 균등한 부담을 지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소유 면적이 적은 집도, 많은 집과 대등하게 취급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불평등하다고 볼지 평등하다고 볼지는 가치관의 다름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玉城哲 「風土の経済学』, 같은 사람의 『日本の社会システム』, 같은 사람의 『むら社会と現代』).
●에도 시대 관개의 특징 '논 무넘이 관개'와 '분산착포제分散錯圃制'
에도 시대의 농민들은 자가의 사정만으로 각종 농작업의 시기나 작부 작물의 종류를 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마을 전체의 룰에 따를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에도 시대에는 한 배미 한 배미의 논이 수리의 측면에서 독립해 있지 않았습니다. 개개의 논이 개별로 용수로에서 취수하는 구조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되어 있었는가 하면, '논 무넘이 관개'라는 방법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이건 용수로에서 들여온 물을 비교적 높은 곳에 있는 논에 우선 대고, 그곳에서 인접한 더 낮은 논으로 순서대로 흘려 보내는 방식입니다. 한 배미의 논은 이웃한 논에서 무넘이로 물을 받고, 다시 그걸 이웃한 논으로 흘려 보내는 겁니다. 이것이 '논 무넘이 관개'로서, 에도 시대의 기술력 수준에서 일반적으로 취해진 관개 방법이었습니다.
논 무넘이 관개는 논 하나하나의 비독립성을 가져옵니다. 논 무넘이 관개의 바탕에는 한 배미의 논에 언제 물을 대고, 언제 모내기를 할지는 그 논의 주인이 혼자서 결정할 수 없고 위아래에 인접한 논의 주인과 상담해야 했습니다. 윗 논에서 언제 물이 올지에 따라서 아랫 논의 모내기 시기가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웃한 여러 배미의 논과 보조를 맞추어서 모내기를 행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도 한 채의 집이 소유한 논이 한 장소에 모여 있다면, 조금은 하기 쉬웠겠지요. 윗 논도 아랫 논도 자신의 소유지라면 이야기는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되지 않았습니다. 각 집이 소유하는 논은 마을 여기저기에 조금씩 분산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이것을 전문용어로는 '분산착포제'라고 합니다. 각 집의 소유 경작지(포장)이 분산되어 서로 뒤섞여 있다는 겁니다.
분산착포제에서는 각 집의 소유지가 마을의 여러 곳에 산재해 있기 때문에, 농작업에는 불편한 일도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에도 시대에 새롭게 대규모 새논을 개발할 때에는 각 집의 경지를 한 곳에 모으는 계획적인 경지 배치가 실행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에도 시대의 처음부터 있던 마을에서는 분산착포제가 에도 시대 내내 존속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중세부터의 오랜 역사 속에서 매매나 부채로 인한 소유권 이전, 양도가 반복된 결과, 분산착포제가 되었다고 하는 것이 이유의 하나입니다. 이것은 결과로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 약간 소극적인 이유이지만, 더 적극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소유지가 분산되어 있어서 재해의 리스크도 분산되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느 집이 산기슭과 강기슭에 경작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해보지요. 홍수가 날 때, 강기슭의 경작지는 피해를 받겠지만, 산기슭의 경작지는 무사합니다. 반대로, 산사태가 있을 때는 산기슭의 경작지는 피해를 입어도 강기슭의 경작지는 괜찮겠지요. 이와 같이 소유지의 분산은 리스크의 분산으로 이어졌습니다.
또한 분산된 각각의 경작지에 저마다 다른 작물을 심음에 따라 다각적인 경영을 실행하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쪽의 논에는 올벼, 그쪽에는 가온벼, 저쪽에는 늦벼와 같이 심는 품종을 바꿀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올벼는 일찍 수확할 수 있기 때문에 비록 가을에 태풍이 와서 수확 전의 가온벼와 늦벼는 피해를 받더라도 올벼만은 이미 수확을 끝내서 벼의 전멸은 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리스크 분산의 하나입니다. 분산착포제에는 이러한 장점도 있었기에, 대부분의 마을에서 에도 시대 내내 계속되었습니다.
●용수로도 그곳을 흐르는 물도 '마을의 물'
이야기를 용수로 되돌리면, 무넘이 관개와 분산착포제로 규정되어 에도 시대의 용수는 '마을의 용수'이고 '집의 용수' '개인의 용수'는 아니었습니다. 최종적으로 물은 각 집에서 이용하는 것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마을의 물을 마을의 룰에 따라서 이용하는 것이었습니다. 물은 마을사람들을 결속하는 유대이자, 또한 구속하는 사슬이기도 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각자 자가의 농업 경영 발전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사적 이익의 추구자였던 것으로, 날마다 경영 개선에 지혜를 짜내며 궁리를 거듭하고 있었습니다. 그점에서 마을사람들은 모두 경쟁자였습니다. '이웃의 불행은 오리 맛'이란 속담은 그걸 잘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 한편으로, 마을사람들은 일치협력하여 마을의 농업 환경을 유지·개선하는 데 몰두했습니다. 언뜻 보기에 모순되는 듯하지만, 경쟁자끼리 단결했던 겁니다. 그 비밀은 용수에 있었습니다.
무논은 용수로에서 물을 끌어들이지 않으면 무논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합니다(그중에는 천수에만 의존하는 논도 있었지만, 천수답에서는 안정적으로 높은 수확량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용수로는 농민 개개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마을 전체의 공유물이었습니다. 용수로를 흐르는 물도 '마을의 물'로서, 마을 전체의 룰에 따라서만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농업 경영의 발전에서 빠질 수 없는 용수로의 유지·관리, 나아가서 그 개선은 마을 전체에서 실행하게 됩니다. 경영을 발전시켜 사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그 전제로 용수 이용에서 마을 전체의 공동이 빠질 수 없었던 겁니다. 마을 전체로 결속하지 않고서는 사적 이익은 실현할 수 없었습니다. 사적 이익은 공동체의 이익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겠죠. 이것이 경쟁자끼리 단결하는 요인이었습니다.
이 점에서는 지주도 똑같은 조건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유지의 일부를 소작인에게 빌려주어 경작을 맡기고, 그곳에서 소작료를 얻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확실히 소작료를 얻으려고 한다면, 소작지에 안정적으로 용수를 확보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소작지에 대는 물도 역시 '마을의 물'이였기에, 용수 이용의 면에서는 지주도 일반 마을사람들과 이해관계를 같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솔선하여 수리 환경의 유지·개선에 노력하는 등 리더쉽을 발휘했습니다. 여기에서도 사적 이익과 공동 이익은 표리 관계로서 일체화되어 있었습니다. 지주가 사재를 투입해 용수 시설의 개선을 행하는 건 '자선사업'이 아니었습니다. 마을 전체의 수리 환경의 개선은 자가의 수입 증가로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지주가 축적한 부의 일부는 수리에 대한 투자라는 형태로 마을에 환원되었던 겁니다. 마을 전체의 이익 중에서 사리를 추구한다는 것이 지주를 포함한 마을사람들의 기본 자세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논의 권리로는 토지 소유권에 용수 이용권이 부수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논을 입수하면 자동적으로 그 논에 대한 취수권도 딸려 왔습니다. 그렇지만 드물게는 양작 분리되어 있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즈미국和泉国 등 현재 오사카부 지역의 목화 농사 지대에서는 용수의 이원권을 구입하면서까지 목화밭에 물을 대는 일이 있었습니다. 저수지의 물이 얼마 남지 않아 모든 용수 조합 마을들에는 매우 골고루 보급하지 못하는 상황일 때, 입찰에 의하여 남은 물을 희망하는 마을에 팔았습니다. 이처럼 물의 사용료를 지불하더라도 여전히 목화 농사에서는 수익을 올렸던 겁니다. 이즈미국처럼 농업 생산력이 높고, 상품 경제가 고도로 발전해 있던 지역에서는 물도 상품화되어 매매되었던 겁니다.
●무논은 어업의 장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치수와 용수에 대해서 기술했습니다. 이 양자는 이 책 전체의 주요 주제인데, 농민과 물과의 결속은 이 두 가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무논이 많은 농촌에서는 벼농사가 기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곳에서도 무논의 그루갈이, 논의 두둑에는 콩과 팥의 재배에 더하여, 무논에서 하는 고기잡이나 동식물의 채집과 같은 다양한 생업이 영위되고 있었습니다.
무논과 어업 등 전혀 연결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되지만, 농민들은 무논이나 용수로에서 잉어, 붕어, 장어, 메기, 우렁이 등의 담수산 어패류를 잡아 그걸 자가에서 먹음과 함께, 많이 잡으면 다른 사람에게 팔아 현금 수입을 얻었습니다. 무논은 농업의 장이면서 동시에 어업의 장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농민이 다양한 생업을 복합적으로 영위하여 생활을 꾸려 나아가는 데 주목하는 논의를 '복합생업론'이라 합니다(安室知 「複合生業論」 「講座日本の民俗学5 生業の民俗』 수록, 같은 사람 「稼ぎ」 『暮らしの中の民俗学2 一年』 수록, 같은 사람 「水田漁撈の研究」).
●새논 개발을 거부하고 늪과 살아가는 농민들
복합생업론의 제기되면서 에도 시대 농민의 삶의 다양성을 풍부하게 묘사하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 한 예로, 시모츠케국下野国(현재 토치기현) 남부에 존재했던 코에나늪越名沼과 늪에 인접한 코에나촌을 살펴보겠습니다.
코에나늪의 주변은 저습지가 많고, 수해의 상습 지대였기 때문에 농민들은 내습성에 뛰어난 대당미大唐米(붉은쌀)를 재배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늪에서는 다양한 어업이 행해지고, 비료용·식용 물풀이나 마름이 채취되었습니다. 또한 늪에 날아오는 철새를 대상으로 하는 수렵도 행해졌습니다. 나아가 물가의 갯벌에 자라는 갈대나 줄은 지붕을 이거나 자리 만들기에 이용되고, 말의 사료도 되었습니다.
코에나촌의 남쪽을 흐르는 사노강佐野川에는 하안장河岸場(배가 착안할 수 있어 화물을 싣고 내리는 장소)이 있어 마을사람들은 뱃사공을 하거나, 뱃짐을 싣고 내리는 일에 종사하거나 했습니다. 마을에는 배 목수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을사람들은 갯벌의 갈대나 줄을 사료로 하여 말을 사육하고, 외양간두엄(마굿간 바닥에 풀이나 볏짚을 깔고, 그것과 말똥을 섞어서 만든 비료)을 얻음과 함께, 말을 부려서 하안장에 모인 화물의 운반에 종사했습니다.
다만, 코에나촌의 마을사람 가운데 코에나늪에서 어업을 할 수 있는 건 12명에 한정되어 있었습니다(농민의 호수는 겐분元文 4년[1739]에 135호). 또한 코에나촌은 늪에 인접한 여러 마을 중에서도 특히 늪에 대한 강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마을 안의 어업권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또한 코에나촌과 다른 마을 사이에서 마찰이 생기는 일도 있고, 그러한 다툼을 통해 늪의 이용 관행이 재확인되거나 개편되기도 했습니다.
겐분 4년에 코에나늪을 매립해 새논을 개발한다는 계획이 세워졌을 때, 코에나촌에서는 "늪이 있는 덕분에 농민들은 어떻게든 나날의 생활을 계속해 갈 수 있습니다. 코에나늪이 매립되어 버리면, 코에나촌은 쇠망하고 농민들은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을 겁니다"라고 기술하며 반대해 계획을 중지시켰습니다.
높은 농민들에게 혜택을 주는 동시에 수해를 가져오는 위협이기도 했지만, 농민들은 새논 개발 계획에는 감연히 반대해 늪과 함께 살아가는 자세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들은 약간의 경작지 확대보다도 늪에서 영위할 수 있는 다양한 생업의 존속을 선택해, 결과적으로 과잉 개발을 막았던 겁니다.
이러한 실태를 볼 때, 농촌·산촌·어촌으로 마을을 구분하고, 각각이 농업·임업·어업에 특화된 마을이었다고 사고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 어느 곳에서도 주민은 다양한 생업을 복합적으로 영위하고 있었습니다(平野哲也 「沼の生業の多様性と持続性」 山本隆志 편집 『日本中世政治文化論の射程』 수록).
●용수로의 물을 사용해 물레방앗간을 영업
똑같은 시모츠케국下野国에서 또 하나의 다른 구체적 예를 살펴보겠습니다(다음은 平野哲也 씨의 연구에 의합니다).
시모츠케국 츠카군都賀郡의 오구라강小倉川의 오른쪽 기슭 평야부에는 니시카타향西方郷이라 총칭되는 12개의 마을들이 있었습니다. 이 12개 마을은 오구라 봇둑의 지점에서 취수하는 용수를 공동으로 이용하는 용수 조합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용수 이용이 12개 마을을 결속하는 계기가 되었던 겁니다. 오구라 봇둑의 수축 공사를 할 때에는 12개 마을이 연공량에 따라서 노동력과 비용을 부담했습니다.
오구라 봇둑의 지점에서 취수한 용수로는 3개로 나뉘고, 다시 그것이 여러 개로 갈라져서 마을들의 논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용수로의 물은 마을사람들의 식수로도 쓰였습니다. 3개 용수로의 강폭은 호우에이宝永 3년(1706)에 막부에 의하여 35 대 35 대 30의 비율로 규정되었습니다. 또한, 갈수기에는 순번제에 의하여 공평한 취수를 염두에 두었습니다.
오구라 봇둑의 유지·관리를 위하여 봇둑 파수꾼(堰番)과 봇둑 지킴이(堰守)라는 직책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봇둑 파수꾼은 오구라 봇둑과 용수로를 관리하는 책임자로, 12개 마을 가운데 4개 마을의 촌장이 취임했습니다. 봇둑 파수꾼의 직무는 봇둑이나 용수로의 보수 작업에 필요한 노동력이나 도구를 각 마을에 부과, 보수 작업의 지휘, 관계 서류의 작성·관리 등이었습니다. 봇둑 파수꾼은 12개 마을의 마을 관리들의 뜻을 받아서 용수 관계 업무의 전체를 총괄했습니다.
또한, 봇둑 지킴이는 오구라 봇둑의 옆에 있는 수이水 신사에 인접한 곳에 살며 밤낮 없이 봇둑의 감시를 담당했습니다.
용수로의 물은 물레방아의 동력원으로서도 사용되었습니다. 물레방아를 사용해 정미나 보리, 메밀, 조의 제분을 행하는 농민이 있었습니다. 주변 농민들의 농업 생산물을 유료로 가공하는 업자가 물레방앗간입니다.
똑같은 용수의 이용이라고는 하더라도 농업용수나 음료수는 대다수의 농민이 이용하는 데 반하여, 물레방아의 물 이용에 의하여 농업용수나 음료수에 지장이 생기게 하지 않도록 필요한 규제를 실시했습니다. 다수의 이해는 소수의 그것보다 우선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새롭게 물레방아를 설치할 때는 관계된 마을들의 이해를 얻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다만 물레방앗간에 정미·제분을 의뢰하면 돈은 들지만 스스로 정미·제분하는 노력은 덜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물레방앗간을 이용하는 농민도 많아 농업에 지장만 없다면 물레방앗간의 존재는 오히려 농민들에게 장점이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을들에서는 농업용수·생활용수의 이용을 우선할 것, 마을 관리나 봇둑 파수꾼의 지시를 지킬 것, 정미·제분 대금을 개정할 때는 각 마을의 마을 관리들과 협의할 것 등을 조건으로 물레방아의 영업을 허용했습니다.
또한, 니시카타향 안에는 주조업자도 있어, 그들은 주조용 쌀의 정미를 물레방앗간에 의뢰했습니다. 물레방앗간은 지역의 농산가공업에서도 유의미한 존재였던 겁니다.
●강이나 용수로의 어업권을 둘러싼 다툼
이상은 오구라강에서 갈라져 나온 용수로 이야기였는데, 오구라강의 본류도 농민들의 삶과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강가 마을의 농부 중에는 강을 건너는 통행자를 위해 나룻배의 사공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또한 강변이나 강바닥의 돌은 농민들의 집짓기나 우물의 석조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한 다양한 이용 중에서도 특히 어업의 면에서, 오구라강은 농민들에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구라강은 은어잡이의 좋은 어장이었습니다.
다만 오구라강에서의 어업은 니시카타향의 모든 농민이 자유롭게 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어업권의 개방을 둘러싸고 니시카타향과 외부의 마을 사이에도, 또 니시카타향 내부에서도 종종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어업권을 갖지 못한 마을과 농민이 "자기들에게도 어업을 시켜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단, 여기에서 주의해 두고 싶은 것은 어업권이 모든이에게 개방되는 것의 옳고그름입니다. 물고기의 서식 수가 충분하다면 누구나 원할 때 원하는 만큼 잡아도 상관없을 것입니다. 그게 이상적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수산 자원은 유한합니다. 어업에 제한을 두지 않으면 자원은 금방 고갈되어 버립니다.
에도 시대에는 물고기뿐만 아니라 물도 산도 이용 제한을 하지 않으면 영구적인 이용은 불가능한 단계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과잉 개발 사회로 접어들었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자원 이용의 룰 마련이 모색된 것입니다. 농민들은 어업권자의 범위를 어디까지 넓히고, 어디서부터 제한할지 자원 보전과 어업 수익과의 균형을 고려하면서 적정한 선 긋기를 위해 노력을 거듭했습니다.
이상은 오구라강 본류의 이야기이지만, 오구라강에서 갈라진 용수로에서도 고기잡이는 행해지고 있었고, 그건 마을들의 농민들에게 널리 개방되어 있었습니다. 앞에 기술했듯이, 용수로는 1년에 최소 1번은 준설(용수로의 준설)이나 수초 베기 등의 보수 작업을 해야 했습니다. 그건 농미들 전원의 의무였는데, 동시에 용수로에서 물고기를 잡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강을 준설할 때는 흐름을 막아서 수량을 줄였습니다. 그때 얕아진 용수로에 들어가 잉어, 붕어, 장어, 메기 등을 잡았습니다. 이들은 집에서도 먹었겠고, 대량으로 잡으면 팔아서 가계에 보태기도 했습니다. 또한 아이들에게는 천렵의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이처럼 농촌의 농민들은 농업만을 영위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어업 등 다양한 생업을 농업과 교묘히 조합해서 나날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습니다.
●목재의 교통로가 되는 강
오구라강 상류의 산간 지대에서 벌목한 목재는 뗏목으로 엮어서 오구라강을 흘러 내려보냈습니다. 몇 개의 목재를 새끼로 결속해 뗏목을 만들고, 그걸 그대로 하류로 흘려보낸 겁니다. 그렇게 하면 일부러 배에 실거나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류의 목적지에 도착하면, 강에서 끌어올려 해체하고 건조시키면 되었습니다.
자동차나 철도가 없던 에도 시대에는 강이나 바다의 수상의 길이야말로 교통의 대동맥이었습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강을 내려오는 뗏목의 수는 늘어갔습니다. 그래서 오구라 봇둑의 존재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니시카타향 12개 마을의 농민들에게는 뗏목이 봇둑에 충돌해 봇둑이 파손되는 일은 큰 문제였습니다. 한편, 목재 상인들에게 봇둑은 뗏목이 원활하게 흘러 내려가는 걸 방해하는 장해물일수밖에 없었습니다. 강을 용수원으로 보는 농민들과 강을 교통로로 보는 목재 상인들 사이에 이해가 대립되었습니다. 이건 그만큼 강이 다목적으로 이용되었다는 걸 보여주기도 합니다.
19세기가 되면 니시카타향의 농민 중에서도 목재 상인이 출현했습니다. 그 때문에 농민들과 목재 상인과의 대립은 니시카타향의 안과 밖의 대립일 뿐만 아니라, 니시카타향 내부의 대립이란 성격도 띠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농민들은 목재 상인과의 대립을 확대시키기만 했던 건 아닙니다. 19세기에는 수량이 풍부해 봇둑의 상단을 넘어 충분한 물이 흐르고 있을 때에는 봇둑 파수꾼의 판단으로 뗏목이 봇둑을 타고 넘는 것을 허용하고, 갈수기에는 봇둑의 앞에서 뗏목을 땅으로 올려 하나하나의 목재로 분해해 봇둑의 하류까지 육상으로 날라 그곳에서 다시 뗏목을 엮어서 강을 내려보내는 룰이 생겼습니다. 농민들과 목재 상인은 서로 생업을 함께 성립시킬 수 있도록 공존의 구조를 만들어 갔습니다.
이처럼 오구라강과 그곳에 있는 용수로는 니시카타향 농민들에게 농업용수로서, 어장으로서, 물레방아의 동력원으로서, 나아가서는 뗏목의 통로로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습니다. 또한 음료수나 생활용수, 소방용수도 오구라강에서 얻고 있었습니다. 농민들은 농림어업·농산가공업과 일상생활 전반에 강의 혜택을 받고 있었습니다(平野哲也 「江戸時代における川利用の多様性と諸生業の共存」 「栃木県立文書館研究紀要』 15호 수록).
에도 시대의 농민들은 모두가 강과 교제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치수와 취수, 선박 운송과 어업 등 다양한 기술을 내 것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치수 공사나 용수 관리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고, 그것은 일면으로 번거로운 부담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면적으로 직접 강과 마주함으로써 농민들은 강에 대한 지식과 기술을 연마할 수 있었습니다. 자연의 압도적인 힘과 대치함으로써 인격을 단련하고 다양한 생활의 지혜를 획득한 것입니다.
그에 반해 현대인은 하천 관리를 국가나 지방 자치단체에 맡김으로써 시간과 수고를 덜며 편하게 지내고 있지만, 그만큼 강에 대한 지식이나 강과 어울리는 기법 면에서는 에도 시대 사람의 발밑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오쿠마 다카시大熊孝 씨도 말하듯이, 강과 관련된 귀찮음에서 벗어나 손을 더럽히지 않는 자유로운 시간을 늘린 대가로 자연과 공생하는 기법을 창조할 귀중한 기회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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