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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농-문화

짐승막이담 -1장 짐승막이담의 분포와 구조

by 雜것 2025.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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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선인의 유산 '짐승막이담' 

 

쇼우도시마의 마을을 둘러싼 짐승막이담(제2장 참조)

 

 

 

 

 

제1장 짐승막이담의 분포와 구조

 

1. 짐승막이담의 분포

 

분포의 개관

근세의 짐승막이담에 관해서는 이 책의 자매에 해당하는 『멧돼지와 인간(イノシシと人間)』의 제5장(야가사키矢ヶ崎 2001, 이하 「전보前報」라고 칭함)에 기록되었다. 이 장에서는 전보와의 중복을 피해, 이후의 연구 성과를 애써 입각하여 고찰한다.

일본의 짐승막이담 분포는 전보에 그려 넣었는데, 이 장에서는 그중에서 함석 울타리・전기 울타리 등 근대적 짐승막이담을 생략하고 나무 울타리・토루土塁・석루石塁 등 전통적 짐승막이담을 나타냈다(그림1).

우선은 전통적 짐승막이담의 전국 분포를 개관해보자.

혼슈우本州의 중앙 고지대인 나가노·야마나시·기후 3현에 짐승막이담이 많이 분포한다. 그 주변인 군마현·사이타마현·토치기현·도쿄도의 산지, 시즈오카·아이치 두 현의 산지에도 점재한다. 이즈伊豆 반도에도 퍼져 있다. 한편, 중앙 고지대의 북쪽, 호쿠리쿠 쪽의 산지에는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이 특색이다.

킨키 지방에는 시가・나라 두 현의 산지에 분포하고, 미에・와카야마 두 현에서는 키이紀伊 산지 및 해안부의 산지에 점재한다. 

 

그림1 전통적 짐승막이담의 분포도.

*전보前報(矢ヶ崎 2001) 이후에 입수한 정보를 보충하고 있지만, 노력해서 완벽을 기하고 싶기에 새로운 정보가 있다면 가르쳐 주시길 바랍니다.

 

 

츄우고쿠中国 지방에서는 산인山陰 쪽을 제하고 중앙의 산지에 드물게 분포한다. 산요우山陽 쪽 및 세토瀬戸 내해의 비교적 큰 섬(아와지시마淡路島·쇼우도시마小豆島)에 흔히 분포한다. 시코쿠四国에는 카가와·도쿠시마 두 현의 산지에 많이 분포한다. 에히메·고치 두 현에는 남부 해안의 곶 끝 지역에 분포하고, 토쿠시마현의 남부 해안에도 산견한다. 큐슈에는 오오이타·나가사키 동서 두 현에 분포가 두드러진다. 오오이타현에서는 해안부에 분포하고, 분고豊後 수도水道를 사이에 두고 에히메현의 것과 대치한다. 나가사키현에는 니시소노기西彼杵 반도와 고토五島 열도의 해안부에 분포한다. 남서 제도에도 분포하고, 가고시마현의 아마미奄美 오오시마大島, 오키나와현의 오키나와 본섬·이시가키지마石垣島·이리오모테지마西表島에서 볼 수 있다. 비교적 면적이 크고, 산지가 있는 섬들에 분포하는 것이 특색이다.   

 

 

짐승막이담의 공백 지역

그림1에서 알 수 있듯이, 짐승막이담은 특정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만큼 짐승막이담이 결여된 공백 지역이 넓다. 짐승막이담의 고찰에 앞서, 이들 공백 지역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는 공백 지역의 자연조건과 사회조건을 나누어 고찰해 보겠다. 자연조건으로는 맷돼지의 분포로 규정되는 요인을 우선 생각할 수 있다. 온난대에 서식하는 멧돼지는 한랭한 지역에서는 일반적으로 서식을 볼 수 없다. 홋카이도나 토우호쿠東北의 대부분이 공백 지역이 되어 있으며, 이 조건에 상당한다. 멧돼지는 적설 지역에서 생식이 곤란하여 데와出羽・호쿠리쿠北陸・산인山陰의 일본해 쪽 지역에는 서식을 볼 수 없다. 다만, 노토能登 반도의 기부基部에는 짐승막이담이 있다. 노토 반도는 비교적 온난하고, 적설이 적은 것이 관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矢ヶ崎 2003).

 

 

 

멧돼지의 섬멸

유해 동물인 멧돼지를 섬멸하는 것은 짐승막이담과 대극에 있는 발상인데, 전보에서도 소개하고 있듯이 일본 국토의 동서에 두 예가 있다. 서쪽에서는 츠시마의 멧돼지 몰이(矢ヶ崎 1991)가 저명한 예이다. 군郡 봉행奉行인 스야마 토츠안陶山訥庵의 주도로 행해져 츠시마번의 사업이었던 점이 주목된다. 멧돼지에 한정된 몰이로, 사슴은 대상 밖에 있었다. 또, 멧돼지의 암수를 독도 서북쪽의 울릉도에 놓아준 것(滝本 1918)은 종의 보존을 고려한 것이라 감복한다.동쪽에서는 현재 아오모리현의 하치노헤번八戶藩으로, 1749년에 멧돼지가 급증해 작물을 망쳐 '멧돼지 기근'이 되었다(いいだ 1998). 하치노헤번은 가신 9명에게 멧돼지의 총살을 명했다. 다만 섬멸에는 이르지 않고, 그 뒤에도 피해가 기록된 문서를 필자는 보았다. 츠시마는 외딴섬인 것이 섬멸을 성공시켰다고 생각되고, 육지로 이어진 하치노헤는 섬멸이 불가능했다. 또, 모두에서 토우호쿠 지방은 한랭하기 때문에 맷돼지가 거의 없다고 적었는데, 에도 시대에 하치노헤에서 멧돼지가 서식하고 있었던 것은 주목되는 점이기도 하다.

 

 

 

 

2. 짐승막이담의 구조 -그 동서의 비교

일본 열도에서 멧돼지의 서식 지역은 넓다고 예상되지만, 전통적 짐승막이담은 한정된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전보에서 필자는 짐승막이담의 분포 경향을 동서로 구분하고 비교했다. 이 장에서는 그것을 더 상세히 살펴보자.표1은 짐승막이담의 동서를 비교한 요점을 정리한 것이다. 현실에서는 이 범주에 속하지 않는 사례도 있지만, 굳이 특색을 밝히고 비교를 위하여 대강을 본 것이다. 

 

표1 짐승막이담에 관계되는 사항의 동서 비교

   
와카사若狭・오우미近江・이세伊勢 서쪽

에치젠越前・미노美濃 동쪽
짐승막이담의 형태   석루 토루
자연 위치
지형
경작지
비옥도
시비
반도, 도서
산허리의 급경사지
다락논, 계단밭
보통
외양간두엄, 물고기거름
내륙 고지대, 산간지
산기슭, 선상지, 화산기슭
논, 밭(새논 개발)
척박지, 자갈땅, 물 부족 땅
외양간두엄, 풀거름
농업, 농촌 작물
노동(남)
노동(여)
농한기 부업
효과
고구마, 잡곡류
어업, 염업
수산가공, 행상
반농반어촌
해상 운송선
거의 완전, 짐승막이담이 없는 지역에서 철포
잡곡류
여름 풀 베기(100일 동안)
경작, 양잠, 실잣기
순수 농촌
말로 화물 운송업
불완전, 철포 병용
짐승막이담 축조의 여러 사정 축조의 주체
주도자
번의 지원
축조년도
기념비 등
개인, 마을
촌장 등(희생자犠牲者 있음)
자금 원조 기타
1714~1881, 1882년
각지에 있음
개인, 마을, 마을의 연합
마을의 회합
특별히 없음
1680~1808년
거의 없음
신에게 가호를 빔(늑대 신앙 등)
짐승막이담의 문화재 지정
  거의 없음
현시정촌에 의한 것임
행하고 있는 곳 있음
지정 사례는 적음

 

 

 

동서의 경계

짐승막이담 분포의 동서 경계는 시가현(오우미)·미에현(이세)·기후현(미노)의 현 경계에 위치했다. 후쿠이현은 거의 에치젠을 동쪽으로, 와카사를 서쪽으로 구분했다. 이 경계선에 의하여 국토는 동쪽은 중앙 고지대를 중심으로 북동 방향으로 전개되고, 서쪽은 비와호에서 오오사카 평야를 중심으로 키이 반도와 츄우고쿠 산지로 펼쳐져, 시코쿠·큐슈, 나아가 난세이南西 제도로 전개된다. 

 

 

짐승막이담의 기본적인 형태

나무 울타리·토루·석루로 크게 나눌 수 있다.나무 울타리는 동서 모두에서 볼 수 있다. 몇 년이면 썩기 때문에 늘 수리를 요하고, 일시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멧돼지는 땅을 파고 나무 울타리 아래를 빠져나가려고 하기에, 말뚝을 땅속에 박아야 한다. 그러나 말뚝을 조밀하게 박더라도, 멧돼지의 굴착 행동은 쉽게 방지할 수 없다. 멧돼지는 시력이 좋지 않지만, 나무 울타리의 틈으로 작물을 들여다보기에, 나무 울타리의 아래를 굴착해서라도 농지에 침입하려 한다. 그 점, 토루와 석류는 멧돼지의 시야를 차단할 수 있고, 굴착하기 어렵다. 

토루는 동일본에 분포가 많다. 산 쪽의 흙을 파서 흙담을 쌓은 것으로, 산 쪽, 곧 멧돼지 서식 지역 쪽은 해자부터의 높이가 2m 정도가 된다. 최근의 실험에 의해 멧돼지는 1.2m의 가로대를 뛰어넘는다는 걸 알았다(江口 2001). 토루는 이 이상의 높이로 쌓아 올리고, 게다가 상변에 나무 울타리를 설치하거나, 나무를 심는 경우도 있어 더욱 완비된 짐승막이담의 형태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또, 토루의 산 쪽에 설치된 해자는 배수로·사람의 통로가 됨과 함께, 멧돼지의 통로도 된다.

석루는 서일본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돌의 크기에 따라 쌓는 방법이 다르다. 서일본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석루는 단면을 사다리꼴로 쌓아, 보통은 산 쪽(멧돼지 서식 지역 쪽)을 수직으로 해서 양쪽에 돌을 쌓고, 중간에는 자갈이나 흙을 채운 것이다. 다이쇼우 말기에 오오이타현 쿠니사키国東 반도의 사슴담(鹿垣)을 코우노 키요미河野清美가 보고한다(河野 1923). 경사면에 고리 모양의 석담이 다수 있어, 쿠니미마치国見町 柳来의 고리 모양 흙담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당시는 '코우고이시神篭'(신의 영역을 둘러싼 듯한 돌담으로, 고대 산성에 대비하는 논의도 있었다)가 주목되고 있던 시대였던 만큼, 이 석루를 짐승막이담이라 당시 간파한 데에 탄복하게 된다. 일각 대문이나, 고장 수호신인 이와쿠라岩倉 하치만구우八幡宮가 멧돼지를 싫어한다는 것도 언급되어 있다. 오오이타에서는 석루인 짐승막이담이 많다는 것도 밝히고 있다.

 

 

짐승막이담의 다양한 형태

쇼우도시마에서는 다양한 모양의 짐승막이담을 볼 수 있다. 거석을 1단으로 쌓은 것이나, 양쪽에 돌을 쌓은 것이 이어져(港 1998) 필자는 감복하며 견학했다. 석재는 현지산을 사용했으나 축조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석루에 일부러 멧돼지를 잡아넣는 구멍을 설치해, 그 안쪽(밭 쪽)에 함정을 설치하거나, 통로에 일각 대문을 설치해 배수구를 만들 경우, 또는 토석류 방지의 역할을 수행하는 경우도 있다(高橋・増山 2007). 쇼우도시마에는 토루도 있다. '나가사키의 짐승막이담'은 반죽한 흙을 형틀 안에 넣고 3단으로 나누어 쌓아 올린 것으로, 나무 형틀의 양쪽 판을 지름 3cm의 막대 모양의 잡아끄는 것으로 고정해 놓아, 이것이 썩어서 구멍이 되어 곳곳에 남아 있다(港 2009). 나가사키의 짐승막이담은 여기에만 있는 매우 드문 형식으로, 그 기술적 배경이나 밭이 양쪽으로 개간되어 있던 점 등 해명되지 않은 점도 많다.

산 쪽의 경사면을 수직으로 잘라 밭을 개간한 경우, 수직면을 멧돼지는 뛰어내리지 못하고, 짐승막이담과 마찬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흙벽 그대로인 경우도 있지만, 여기에 돌담을 쌓고, 멧돼지벽이라 부르는 예를 필자는 토쿠시마현 이케다쵸우池田町(현재 미요시시三好市)에서 실제로 보았다. 토쿠시마현 이치우손一字村(현재 츠루기쵸우つるぎ町)에서도 멧돼지벽이라 부르는 것이 있다고 한다.

멧돼지담과 같은 것을 다른 지역에서도 볼 수 있다. 오키나와현 쿠니가미손오쿠国頭村奧에서는 '솟아 있음(切り立ち)'이라 부르고 있으며(平敷 1991), 흙벽의 상부에 해안에서 운반해 올린 평평한 판의 산호석(테이블 산호)을 밀어 올려 놓았다. 인근 마을인 오오기미손大宜味村에서는 '흙 깎기' '흙 파기'라고 하는 토루가 석루에 섞여 존재한다(大宜味村 1994). 시가현 마이바라쵸우米原町의 이부키야마伊吹山에서는 '흙담 잘라 끼우기(土居切込)'라고 적힌 1824년의 문서가 있으며(高橋 2007), '양면 돌담'과 맞춰서 축조되어 있었다. 동일본에서는 나가노현 치노시茅野市의 뉴우가사야마入笠山 동쪽 기슭에, 산 쪽에 해자·밭 쪽에 약 1m의 흙벽을 수직으로 설치하고 상변을 길로 삼고 있던 예가 보고되며(諏訪 1950), 현재 동일본 유일한 예이다. 이들 수직 절벽을 이용한 방제법은 멧돼지가 등반 불능이라 그렇다는 견해도 있지만, 이러한 수직 절벽을 멧돼지가 뛰어내리지 못하는 점을 이용한 것이라 생각된다.

경작지를 지키는 짐승막이담은 특히 경사지의 경우 지형지물·식생 등을 이용해 설치되는 경우가 있다. 그 좋은 예를 몇 가지 들겠다. 후쿠이현 카츠야마시勝山市에는 계단밭의 길든밭을 멧돼지담으로 두를 때, 자연의 바위·돌이나 큰 삼나무 등의 수목을 이용해 이들을 돌담으로 연결하고, 오각형으로 만들어 놓는 예가 있다(北川 1998). 오키나와현 이리오모테지마의 사키야마崎山 반도, 소나이다케祖納岳 산기슭에서 사키야마무라崎山村을 두르는 짐승막이담은 돌담·흙 깎기・바위・절벽이 연속해서 경작지의 바깥쪽을 에워싸서, GPS를 이용한 면밀한 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蛯原 2009).  

 

 

 

장대한 짐승막이담

짐승막이담에는 개인의 경작지를 지키는 소규모의 것부터 마을의 경작지를 에워싸는 것, 나아가 마을들을 연결한 당대한 것도 있다.
장대한 짐승막이담을 오카모토 다이지로岡本大二郎는 위요형囲繞型(성곽형)과 '분계형分界型'(장성형)으로 구분했다(岡本 1992). 이 구분은 견해가 다르지만 흥미롭고, 자주 이용되고 있다. 쇼우도시마는 이들 유형이 조합되어 있는 지역이다. 쇼우도시마에서는 큰돌을 이용해 경사지의 경작지를 완전히 둘러싸는 것이 있고, 제2장에서 소개가 있듯이 미나토 세이고港誠吾는 꼼꼼히 측량해 '독립환상형'으로 많이 예시하고 있다. 필자도 미나토의 안내로 현지를 실견하고 감복했다. 장대한 짐승막이담은 다수의 마을 연합으로 축조되는데, 경작지 쪽에는 꼴밭도 포함되어 있다. 신슈의 야츠가타케八ヶ缶 서쪽 기슭이나 키소木曽 산맥 동쪽 기슭에 이러한 예가 있고, 말의 사육이 번성한 지역이다. 

그런데 필자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멧돼지의 생태가 있다. 오오이타현 우스키臼杵 마애불에 참배했을 때, 인근 집의 마당에서 논을 둘러싼 함석 울타리를 보았는데, 마당에 접한 논의 일부만 울타리가 없었다. 농가에서 듣기로는, 멧돼지는 야간 마당까지 오는데, 이처럼 함석 울타리를 둘러싸는 것만으로 멧돼지 피해가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농민은 멧돼지의 생태를 속속들이 알고 대응하고 있다.

 

 

 

짐승막이담과 지형·표고

서일본의 짐승막이담은 반도·도서에서 볼 수 있다. 경작지가 해발 0m부터 산중턱·급경사에 걸쳐서 전개되고, 그 상부에 짐승막이담이 설치된다. 동일본의 짐승막이담은 내륙의 산간지에 있으며, 선상지나 화산 산기슭에 경작의 고도 한계에 가까운 장소에 있다.

서일본은 인구압이 높고, 사면에도 경작지가 개간된 점에 특색이 있다. 세토우치瀬戸内의 짐승막이담은 그 전형으로, 오오이타현도 또한 마찬가지이다(오오이타현 교육위원회 문화과 2001).

짐승막이담의 효과는 서쪽에서는 유효했다고 본다. 동쪽에서는 완전하지는 않고, 경작지에 침입하는 멧돼지에는 사냥꾼을 고용해 대처했다. 그 철포나 인건비는 마을에서 부담했다(向山 1964a).

동쪽에서 짐승막이담만으로 멧돼지를 막지 못했던 것은 신슈의 자연의 영향이 강했다고 생각한다. 고산의 산악 지대에서 발원한 하천은 계곡을 깊게 새기고, 선상지면의 일부를 침식하며, 현지에서 '타기리田切'라고 부르는 독특한 지형을 만들었다. 작은 골짜기나 강도 많고, 짐승막이 담이 작은 골짜기를 가로지를 때 수문 등을 만들어 멧돼지의 침입을 막고자 했는데, 불완전했다. 이처럼 골짜기 지형이 발달한 토지에서는 짐승막이담으로 빠짐없이 경작지를 에워싸는 일이 어려웠던 것이다. 

 

 

 

농업·농촌

짐승막이담 분포 지역의 농업은 서일본에서는 물이 있으면 다락논, 없으면 계단밭이 되며, 밭 쪽이 많다. 동일본에서는 경사가 완만한 논이나 새논 개발에 의한 밭이 넓게 전개된다. 작물은 동서 모두 잡곡이 주이지만, 서일본에서 멧돼지가 좋아하는 고구마의 재배가 눈에 띈다. 나가사키의 니시소노기西彼杵 반도에서는 상품작물로서 고구마 재배를 행하기 때문에, 짐승막이담 축조의 의의가 컸다고 볼 수 있다.

결실의 가을 3개월은 야간의 짐승 쫓기가 중노동이었다. 이 중노동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짐승막이담 축조의 이유라고 생각된다. 농민의 노동을 살펴보면, 서쪽의 바닷가 지역에서는 남자는 어업·염업에 종사하고, 여자는 잡은 물고기의 수산가공이나 판매를 행했다. 동쪽에서는 척박한 경작지가 많기 때문에 마굿간에서 생산되는 외양간두엄을 준다. 마굿간두엄용 여름 풀 베기를 남자가 3개월·100일 동안 행했는데, 이것은 매우 힘든 중노동이고, 여자도 경작 외에 양잠이나 실잣기에 종사했다. 이들의 생산 활동을 위하여 한층 더 야간의 짐승 쫓기라는 중노동을 기피해, 짐승막이담 축조가 빠질 수 없는 것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짐승막이담 축조의 여러 사업

짐승막이담의 축조를 동일본에서는 마을의 모임에서 결정했다. 한편, 서일본에선 촌장 등이 지도자가 되었다. 그 가장 엄격한 예는 나가사키현 니시소노기 반도이다. 나카우라中浦 촌장인 코오리치에몬郡千右衛門의 발기로 8년의 세월에 걸쳐 짐승막이담이 축조되었다. 그러나 그 부역에 견디지 못했던 농민이 오오무라공大村公에게 직소하는 바람에 코오리치에몬은 추방되었다. 다만, 인근 마을의 농민이 축조를 맡아 짐승막이담은 완성되었다(矢ヶ崎 1990). 또, 이들 경위를 그린 키노시타 마사오樹下昌央의 소설 『쿄우호우享保 멧돼지담 시말기(猪垣始末記)』(家の光協会 1983)이 있다.

번의 관여나 지원은 동서가 다르다. 서쪽에서는 번이 짐승막이담 축조를 지원하는 경우가 많아 자금을 빌려주거나, 계를 맺게 하거나, 숲을 벌채시켜 자금을 마련했다(佐竹 외 2005). 동쪽에서는 짐승 흙담을 축조한 뒤에 상사上司에 신고했는데, 칭찬받았다고 할 정도였다(伊那市 1984), 동쪽에는 토루가 많기에 비교적 쉽게 축조할 수 있었다는 사정도 있을 듯하다.

서쪽에서 짐승막이담 축조에 관계되는 기념비나 공적비가 많은 건 석재가 풍족한 점과 번에 대한 감사나 위령과 관계되어 있는 듯하다고 생각된다.

 

 

짐승막이담의 축조 연대

오카모토 다이지로岡本大二郞·히라마츠 사부로우平松三郞·츠카모토 마나부塚本学·와나이 미츠마사花井光正 외 선학의 연구를 근거해 필자 자신이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짐승막이담 축조 연대를 표시한다. 

동일본에서는 1680년에 현재 시오지리시塩尻市의 동쪽 산(하치부시산鉢伏山 기슭)에 짐승막이담이 축조된다(岩垂 2002). 이것에 이어지는 것이 키소木曽 산맥 동쪽 기슭의 것으로, 현재 타츠노마치辰野町~이나시伊那市의 북부, 이나시~미야다무라宮田村 중부까지의 짐승막이담이 완성되기까지 거의 100년 걸린다. 완성할 때까지의 동안은 사냥꾼을 고용해 멧돼지에 대처했다. 이나의 이이지마마치飯島町는 짐승막이담이 없는 지역으로, 오로지 사냥꾼을 고용해 멧돼지와 사슴 사격을 했는데, 그 비용이 1859년 이후 사라진다(向山 1964b). 멧돼지가 이 지역에서 보이지 않게 된 것을 반영한다. 필자는 양잠의 발전과의 관계를 생각하는데, 설명은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서일본에서는 나가사키현 니시소노기 반도의 장대한 짐승막이담이 1722년에 8년 걸쳐 완성되었다. 쇼우도시마에서는 온 섬에 미치는 짐승막이담이 20여 년을 걸쳐 촌장 무라카미 히코사부로우村上彦三郎의 지도로 1790년에 완성되고, 사후 30년에는 공덕비가 건립되었다. 쿠레시吳市 야스우라쵸우安浦町에서도 짐승막이담 공사 지도자인 촌장 스케지助次의 공적을 기록한 석비가 건립된다. 축조는 그 뒤에도 계속되어, 오오이타현 츠루미마치鶴見町(현재 사에키시佐伯市)에서는 1880~1882년에 군장의 지도로 짐승막이담이 만들어졌다(篠田 1976). 오키나와현 쿠니가미무라国頭村 오쿠奥에서는 1903년에 짐승막이담이 완성되는 것은 주목된다. 오쿠에는 구장이 관리하는 <멧돼지담 대장台帳>(큰담大垣 대장)이 있어, 필자도 본 적이 있다. 이 귀중한 자료는 제10장에서 소개가 있듯이 미야시로 쿠니마사宮城邦昌를 중심으로 분석되어 현지 조사도 진행된다. 이처럼 오키나와의 오쿠는 특별하다고 하더라도, 서일본에서는 메이지 초기까지 짐승막이담의 축조가 계속되고 있던 것이 특색이다.

 

 

 

신에게 빌기

짐승 쫓기로 고생한 결과, 신에게 비는 것을 동일본에서는 뚜렷하게 볼 수 있었다(松山 1977). 늑대를 모시는 신사에서 신에게 비는 것이다. 치치부秩父의 미츠미네三峰 신사를 시작으로, 이러한 역할을 담당했던 신사가 동일본에는 많다(平岩 1981, 中村 2009). 참배하고 부적을 받아 밭에 세우면 멧돼지를 막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문화재가 된 짐승막이담, 파괴된 짐승막이담

관공서에 의한 짐승막이담의 문화재 지정은 서일본에 많다. 여기에서는 개별로 예시하지 않지만, 서일본에 석루인 짐승막이담이 많고, 축조에 고심했던 것이 관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토루는 무너진 것이 많고, 석루 쪽이 문화재로서 인식되기 쉬울 듯하다. 

토루가 많은 동일본에서는 카스미가우라마치浦町(현재 카스미가우라시)의 지정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문화재로서 평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파괴도 볼 수 있다. 나가노현 미야타무라宮田村의 짐승막이담은 중앙 자동차 도로 건설로 일부를 남기고 소멸되어 버렸는데, 근세의 정확한 측량도가 남아 있는 점은 감사하다. 야츠가타케八ヶ岳 서쪽 기슭과 뉴우가사야마入笠山 동쪽 기슭에는 병행하는 두 줄의 짐승막이담이 있었는데, 경작지의 구획정리 사업으로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 짐승막이담은 약간 특수한 형태였다고 필자는 보고 있으며, 참으로 안타깝다. 그림2에 표시한 두 줄의 짐승막이담은 모로즈미 겐비両角源美가 옛일을 아는 노인에게서 얻은 청취와 상세한 현지 조사에 의한 것으로, 매우 귀중한 것이 되었다.

 

 

그림2 근세 신슈 북부의 짐승막이담과 철포의 분포

長野県史 通史編4 近世I』, 『長野県史 近世資料編 2(1)』, 高遠地方旧記』,  『下伊那国係町村誌史』 등에 따라 필자 작성.

 

 

그림3 근세 신슈 남부의 멧돼지담과 철포의 분포

출전: 그림2와 동일

 

 

 

 

3. 짐승막이담과 철포

 

짐승막이담과 철포의 관계

지금까지 짐승막이담을 중심으로 멧돼지 피해 방제를 살펴보았는데, 여러 번 기술했듯이 철포의 이용도 멧돼지 피해 방제에 중요했다. 

철포는 무기로서 이용됨과 아울러 수렵 도구· 농기구로서 이용되어, 근세에는 후자의 이용이 두드려졌다고 볼 수 있다. 사냥꾼은 수렵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농촌에 고용되어 멧돼지를 사냥했다. 일본인은 '위세 철포(威鉄砲)'를 고안하여, 총알을 넣지 않고 소리로 멧돼지를 쫓아서 짐승 쫓기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그 효과를 의문시하는 사람도 있지만, 위세 철포는 일본인의 심정에 따른 것이라 생각한다.

신슈에서는 짐승막이담의 존재와 함께, 철포의 소지도 두드러졌다. 필자는 짐승막이담의 조사와 함께 철포에 대해서도 조사해 왔다. 신슈는 작은 번이 난립한 지역이었는데, 철포의 자료는 풍부하게 남아 있어 그 일부를 그림2의 비고에 기록한다.

짐승막이담과 철포의 분포를 병기한 것이 그림2와 그림3이다. 이 그림을 보면, 짐승막이담은 철포의 분포 안에 매몰된 느낌이 있다.  

 

 

 

토사번土佐藩과 아와번阿波藩의 상황

앞에 기술했듯이, 짐승막이담이 없는 코우치高知·야마구치山口·쿠마모토熊本·카고시마鹿児島의 각 현은 토착 무사(郷士)의 배치 지역에 해당한다. 이하, 각 지역에서 토착 무사들이 어떻게 배치되어 멧돼지의 방제와 관련되었는지 자세히 살펴보겠다.
토사번 및 이웃인 아와번에서는 유서 깊은 가문의 자손에게 개간지를 주어 향사, 곧 토착 무사로 삼고, 또한 농민이 무구武具 값을 헌상하여 무사의 특권을 부여받은 '1령領 1필疋', '2령 1필', '3령 1족足' 등의 제도가 있었다. 토착 무사는 군역을 맡아(一宇村史 編纂委員会 1972a), 그 장비는 '갑일목甲壱刎·궁이장弓二張(전투용 화살 함께)·철포 2정(탄알과 화약 함께)·창 1자루(긴 자루 함께)·말 2필·인원 17인'이라는 중장비였다. 또한 지방 거주 토착 철포 조직도 있었다. 이들의 철포로 사냥도 했을 듯하다. 토쿠시마현의 『이치우손사一宇村史』(一宇村史 編纂委員会 1972b)에는, 이 땅을 조사한 치바 토쿠지千葉徳爾의 「니시야마 수렵(西山狩猟)」이란 논고를 수록하고 있다. 토착 무사의 장비는 다른 지역에서도 거의 똑같아, 예를 들어 신슈우信州 이이다飯田에서는 '1기騎 분'이 16명의 군역이었다(竹内 1978). 또, 『이치우손사』(一宇村史 編纂委員会 1972c)에는 짐승막이담(멧돼지 담)이 기록되어 있으며, 평지와 가까운 센우손剪宇村에 있었다. 즉, 짐승막이담 너머의 광활한 산지는 사냥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쵸우슈우번長州藩의 상황

야마구치현은 츄우고쿠中国 산지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근세에 스오우周防・나가토長門의 두 나라로 분할되어 있었는데, 쵸우슈우번이 다스리고 있었다. 막부 말기에 농촌 실태조사서의 집대성 『오우나가防長 풍토風土 주진안注進案』 전21권이 정리되었다(山口県 1971~1975). 이 책은 1841년의 명에 의해 실태조사로, 매우 항목이 다방면으로 정밀히 조사되고 통계적 처리도 가능한 귀중한 자료이다. 필자는 『오우나가 풍토 주진안』을 통람했는데, 거기에 짐승막이담의 기재는 없었다. 한편, '금수어충禽獣魚虫' 항에서 멧돼지의 서식의 기재가 있어 흥미롭다. 당시 멧돼지의 분포 상황과 피해·대책 상황을 알 수 있기에 아래에 소개하겠다.

쵸우슈우번 영역에 멧돼지는 세토우치 쪽에 분포하지 않고, 현재의 시마네島根・히로시마広島 두 현에 접하는 산지에서 볼 수 있었다. 멧돼지의 기재가 없는 마을도 많고, 있더라도 단순히 '멧돼지'라고 기록만 된 마을이 대부분으로, 그 중요성은 떨어졌다고 생각된다. 멧돼지 피해에 대한 기재는 일본해 쪽에 있는 현재의 스사須佐・아부庫武・아토우阿東 여러 정町의 산지, 특히 시라스산白須山(554m) 일대에 보이고, "최근 멧돼지가 늘어나 작물을 망치기에 소리를 내어 악기를 쳐서 놀라게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중앙의 산지에 해당하는 시노메무라篠目村(현재 아토우정)나 니호카미고우仁保上郷・니호시모고우仁保下郷・카미우노上宇野・히라이쇼우平井庄의 여러 마을(현재 야마구치시)에서 멧돼지는 '겨울과 봄에만'이라는 기재가 있다. 여름과 가을은 훨씬 북쪽에 서식하고, 눈을 피해서 이 지역으로 이동하는 듯이 보여 흥미롭다.

현재 우베시宇部市의 오지인 산지에서는 철포 사냥에 은 330~500돈을 납부하고 있는 마을이 있다. 철포의 기술을 기대하고 보았지만, 마을별 기재는 없다. 현재 토쿠야마시徳山市 산속의 나가호손長穂村에서는 멧돼지와 사슴 무릇 10마리를 함정 등으로 잡아 대금 은 300돈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건 주목된다. 세토우치 쪽에서도 오지에서는 멧돼지의 서식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또, 현재 슈우호우쵸우秋芳町의 이와나가무라岩永村에 배신陪臣 쿠켄九軒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만, 토착 무사나 그 배신 등의 전체상은 알 수 없다. 이상 『오우나가 풍토 주진안』을 상세하게 분석하면, 오우나가 두 나라의 근세 멧돼지를 둘러싼 상황을 알 수 있지만, 이 장에서는 공백 지역의 고찰에 관한 기재에 그치기로 한다. 

 

 

 

쿠마모토번熊本藩의 상황

현재 쿠마모토현 가운데 쿠마군球磨郡을 제외한 범위는 근세에는 카토우加藤 씨에서 호소카와細川 씨로 통치가 바뀌어, 쿠마모토번이었다. 여기는 토착 무사가 두드러지게 많은 장소로, 1령 1필·지방 사무라이 등 구족旧族 토착 무사 외에 촌지를 납부한 헌금 토착 무사가 많았다. 호소카와 씨는 곡절은 있었지만 이들을 '고케닌御家人'으로 무구를 갖게 하였다(吉村 2004). 또한, 총촌장(総庄屋)·촌장·농민에게는 칼의 휴대를 허용했다. 한편, 철포 소지자를 '지방 철포'로서 조직했다. 1635년 제출된 「영지 안의 지방 사무라이 군 단위 등록 장부(御国中地侍御郡筒之御帳)」에는 영내 124개 마을의 거점에 합계 1603정의 철포가 배치되어 있다. 아마쿠사天草와 시마바라島原 봉기 이후, 1641년에는 히고肥後 영지에서만 1273정이 소지되어 있다. '무구 몰수'가 한때 이야기되었지만, 쿠마모토번에서는 촌지에 의한 토착 무사도 늘어났다. 1령 1필·지방 사무라이의 '고케닌'에 대하여 '인축'(일반 농민)이 등용된 '지방 고케닌(在御家人)'이 증가했다. 상세한 건 여기에서 다루지 않지만, 철포 소지자는 증가하고, 당연히 사냥에도 쓰였다고 생각된다. 쿠마모토번에 짐승막이담이 보이지 않는 이유이다.

 

 

 

사츠마번薩摩藩의 상황

현재 카고시마현의 성은 오오스미大隈・사츠마薩摩 두 나라를 중심으로 한 사츠마번이 통치했다. 카고시마 본성의 외위外衛는 '외성' 또는 성의 기슭이란 의미로 '후모토麓(府本)' 마을이라 부르며 12개소 있고, 수비병으로 토착 무사가 거주하고 있었다. 토착 무사의 저택은 넓고, 돌담이나 산울타리를 둘러싼 대문을 지닌 특징적인 구조였다(鈴木 1951a). 당연, 무구도 준비되고, 철포도 소지하고 있었다고 생각되는데 자료를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사츠마번의 영역에는 모래톱 대지가 많아 그 개발에 번은 힘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오스미의 카사노하라笠野原 새논 개발(桐野 1976)은 그 전형이라 할 수 있을 듯하다. 여기는 물 부족 지역으로, 대지 중앙부의 지하수위는 지표에서 60~83m나 낮고, 두레박줄을 소에 매달아 물을 긷는 일이 1924년까지 계속되었다(鈴木 1951b). 아마 지표에는 멧돼지가 필요로 하는 진흙탕이 되는 물웅덩이도 없어, 서식은 불가능했다고 생각된다(인접한 산지에는 멧돼지가 서식했다고 추측된다). 카고시마현에 짐승막이담을 볼 수 없는 건 모래톱 대지의 자연조건이 멧돼지의 서식에 적합하지 않다는 자연조건을 생각할 수 있다. 또, 사츠마에는 짐승막이담에 유사한 흙담이 있다. 키리노桐野의 논문에 의하면, 모래톱 대지의 개발에는 높이 1.5m의 흙담을 쌓고, 그 위에 왕대나 소나무 등을 심어 자기의 영역을 명확히 했다고 한다. 이 흙담으로 둘러싸인 밭이나 마을의 총칭이 '호리堀'로서, 고급 사족士族의 개발지였다. 흙담을 쌓는 걸 '호리를 쌓다'고 했다. 이들 흙담은 짐승막이담이라 보더라도 될 듯하지만, 짐승막이담을 쌓는 대사업은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바람이 강한 지역이기에 방풍 효과는 있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이처럼 사츠마번의 멧돼지나 철포의 기재는 참으로 부족해\ 필자는 거의 자료를 입수하지 못했는데, 겨우 카사노하라 남부의 코우야마고우高山郷의 신관 집안의 우두머리에 관한 논문(秀村 1970)을 얻었다. 신관 집안 우두머리인 모리야가守屋家는 상층 토착 무사로 유력한 가문이었다. 정월의 '신을 위한 사냥(神狩)'으로 잡은 멧돼지를 제사 끝나고 신관 집안에 분배했다고 한다. 사냥 도구는 알 수 없지만, '4살 멧돼지를 잡아서, 도리이의 옆, 서쪽 방송산方松山에 걸어 놓는다'라고 기재가 있다. 신에 관한 행사에 멧돼지를 바치는 풍습은 인근 미야자키현 니시메라손西米良村 시로미銀鏡 신사의 신에 관한 행사에서 멧돼지의 머리를 바치는 풍습과 공통된다고 생각한다.  

사냥에 관계하여 사냥개가 있다. 타치바나 난케이橘南谿는 1795년에 두드러졌던 『동서유기東西遊記』에 사츠마의 사냥개를 기록한다. 사냥에 쓰이는 개는 각별히 사납고, 평소 서로 싸우는 개들도 멧돼지와 사슴을 향할 때는 일치하여 적을 공격한다고 한다. 카고시마 출신인 타시로 안테이田代安定가 이리오모테지마西表島의 야생 멧돼지 사냥에 즈음하여 카고시마의 좋은 개를 빈번히 이용하는 일(矢ヶ崎 1994)을 상기하여 흥미롭게 생각했다. 그런데 에도 시대의 사츠마에서 사냥은 무사 계급의 것으로(田村 1975), 서민은 몰이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사츠마의 옛일을 아는 노인에게서도 사냥개에 의한 멧돼지 사냥 이야기를 들었다. 개는 3~6마리 데리고 간다. 멧돼지는 토락을 먹으면 위장이 아파져서 자고 있어 철포로 쏘기 쉽다고 한다. 멧돼지를 천 마리 잡으면 천 마리 무덤을 만들어 공양했다. 이것은 큐슈 지역에서 볼 수 있는 풍습이다. 

 

 

 

 

4. 짐승막이담으로 알 수 있는 멧돼지의 연구

 

멧돼지 서식 지역의 변화

현재의 멧돼지 서식 지역의 연구는 두드러지게 진전되어 있지만(포유류 분포 1979, 환경청 1983 등), 멧돼지담이 축조된 근세는 어떠했을까?

치바 토쿠지千葉徳爾는 그 규명에 관심을 보인다(지바千葉 1964). 치바는 그 뒤 '눈과 멧돼지(雪とイノシシ)'(小泉他 1987 수록)라는 시점에서 죠몬 시대·쿄우호우享保~호우레키宝暦(1715~1764)·현재, 세 가지 시대의 멧돼지 분포를 비교하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하세가와 유타카長谷川豊는 죠몬 시대의 토호쿠·호쿠리쿠의 사슴·멧돼지 사냥을 조사하고 있어 흥미롭다(長谷川 2006).

필자는 근세의 멧돼지 분포를 명확히 하는 한 수법을 고안했다. 환경청(1981)의 나가노현 멧돼지 서식지의 지도에, 그림2와 3을 축적을 동일하게 겹쳐서 현상과 맞추어 비교하여 그림4를 작성했다. 그 결과, 근세의 멧돼지 분포는 신슈우 북부에 넓고, 남부에는 좁다는 것을 알았다. 이 검토에 관한 상세함은 여기에서는 생략하지만, 근세에는 멧돼지의 서식 지역이 꽤 확대되었다고 불 수 있다. 

 

그림4 신슈우에서 멧돼지의 서식 지역(현재와 근세)

 

 

 

짐승막이담의 과학적 조사

현재 멧돼지의 서식 지역 조사에는 타카하시 슌죠우高橋春成가 GPS 텔레메트리를 이용해 멧돼지의 행동을 기록하고, 짐승막이담 유구가 있는 마을에 가까운 산허리·산기슭의 범위에서 연간의 이동을 추적한다. 그 결과, 가을인 9~10월의 벼 수확기 무렵까지 마을의 무논 잡초 군락 부근에서 활동하는 것을 밝혔다(高橋 2009). 이는 매우 유익한 연구이다. 

짐승막이담의 고고학적 조사에 대해서는 오치 쥰페이越智淳平가 오오이타현에서 토층 단면의 정밀한 조사를 행한다(제14장 참조). 활단층 조사를 한창 진행하는 중에 단층애와 유사한 짐승막이담의 존재를 알아챈 카네다 헤이타로우金田平太郎는 기후현 네오다니根尾谷에서 짐승막이담의 지질학·지질학적 조사를 실시해 다양한 식견을 얻는다(제8장 참조).

이처럼 최근 다양한 분야에서 짐승막이담의 과학적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어 크게 기대가 부풀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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