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다라는 행위는 초기 인류의 식량 생산, 식량 확보의 과정에 없었던 행위이다. 수백만 년의 시간이 흘렀다고 하는데, 이 대부분의 시간 인류는 '수렵'과 '채집'이란 방법으로 식량을 얻어 왔다. 수렵이란 활이나 덫 등의 도구를 써서 야생 동물을 잡는 행위이다. 채집이란 야생 식물이나 이동성이 부족한 소동물 등을 채취하는(또는 잡는) 행위이다. 이들에게 공통으로 깔려 있는 건 대략적인 계절성을 별도로 한다면 언제 무엇을 입수할 수 있을지가 예견하기 곤란하다는 점, 또 자원이 고갈되면 거주지를 떠나 집단별로 이동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일까?
이것에 갈다라는 행위(농경)이 더해진 것은 오래된 것을 어림잡으면 수만년 전, 새로운 걸 어림잡으면 1만년 전의 일로 여기는 것이 거의 정설이다. 다만, 수만년-1만년이란 폭이 있는 이유는 나중에 기술하겠다.
인류는 언제 갈다라는 일을 떠올렸던 것일까? 이런 점을 생각하는 분야를 "농경기원론"이라 부른다. 지금까지 등장한 가설은 많이 있지만, 그 대부분은 농경이 시작된 시기를 지금으로부터 1만년 정도 전의 '신석기시대'의 시작 무렵으로 상정했다. 특히 고든 차일드가 제창한 '신석기 혁명' 또는 '농업혁명'이란 개념은 농경기원을 하나의 '이벤트'로 해석하는 사고방식의 바탕이 되었다.
한편, 농경기원을 느린 변화라고 보는 사고방식이 최근엔 꽤 유력하다. 영국 저널리스트 콜린 텃지Colin Tudge는 Neanderthals, Bandis and Farmers: How Aqriculture Really Began이란 팜플렛을 내고 거기에서 농경의 기원을 좀 더 오랜 시기부터 서서히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더구나 이것은 "농업은 인간의 원죄"라는 번역서로 출판되었다.
두 가지 사고방식이 일치하지 않는 이유는 몇 가지가 있지만, 하나는 '농경'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크게 관계되어 있다. 차일드의 생각에 의하면, 농경이란 사회의 발전에 의하여 인간집단이 갈다라는 복잡한 행위를 받아들이는 데까지 진화한 것이 원인이라고 한다. 한편 텃지는 인간의 집단이 어느 장소에 정주해 생태계에 교란을 가한 것이 넓은 의미로 보면 농경기원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차일드의 설이 고전적인 고고학의 학설인데 반해, 텃지가 현대 저널리스트로서 여러 학문 분야와 교섭하고 있다는 학문적 배경의 차이도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이 논쟁은 일본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일본에서는 농경이라고 하면 논 벼농사를 짓는다고 생각하는 전통이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농경기원론은 오랫동안 벼농사 기원론, 그것도 논 벼농사 기원론이었다. 대부분의 연구자가 벼농사는 외래의 문화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일본의 농경기원론은 오로지 벼농사가 언제 도입되었는지를 논해 왔다. 1990년대에 아오모리현 산나이마루야마三内丸山 유적의 재발견 등을 계기로 조문시대 사람들의 삶이 관심을 끈 무렵부터 상황이 변했다. 논의의 흐름을 바꾼 것은 일본에서는 고고학의 독무대였던 이 분야에 환경고고학, 식생사학, 농학 등 자연과학의 흐름을 이어받은 학제가 관여하기 시작한 것이 크다.
일본에서도 농경의 기원을 이벤트가 아닌 천천히 변화한 것이라 생각하는 연구자가 많아지고 있다. 예를 들면 사사키 다카아키佐々木高明는 이 변화를 '과정(Process)'이라 부르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와 농경기원론에서 특기할 만한 건 "씨앗을 심는 조몬인"을 저술한 오바타 히로키小畑弘己의 업적일 것이다. 오바타는 고고학자이지만 다른 학문 분야의 성과에도 밝아, 그것을 흡수하여 조문시대의 일본열도에서는 원시적인 대두 재배를 조직적으로 행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증명해 보였다.
1. 인간은 왜 갈게 되었을까?
갈다라는 행위
그런데 갈다라는 행위는 어떠한 행위인지를 다시 생각해 보자. 갈다라는 건, 협의로는 도구를 써서 초목을 베어내고 나아가서는 불을 지르거나 물을 넣는 등으로 밭을 만들고, 그곳에서 종자나 모종 등을 심어 밭에 침입하는 방해되는 식물이나 심어놓은 모종에 붙는 곤충 등을 제거해 최대한으로 수확을 얻으려고 하는 행위이다.
다만 이 행위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술이나 그것을 뒷받침할 도구가 필요하다. 우선 초목을 베어내는 도구가 있다. 유물로 출토된 도구류를 연구하는 고고학은 출토된 농경도구 등을 유형화하여 그 옛것과 새것으로부터 도구의 기원이나 전파를 연구해 왔다. 또한 현재도 각지에서 사용되고 있는 농기구류를 유형화하는 수법도 사용해 왔다. 이 방법은 문화인류학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세계적인 성과의 집적도 인정된다(예를 들면, 벨트 1968).
불을 놓더라도 그에 곁들인 기술과 경험이 필요하다. 정확한 지식 없이 산림이나 초지에 불을 놓으면 제어할 수 없어 큰 산불을 일으키게 된다. 안 좋으면 인명을 잃기도 한다. 갈게 된 토지가 경작지인데, 경작지나 그 주변의 환경은 생태학적으로는 교란 환경이다. 교란의 요인은 물론 인간 행위이다. 즉, 인간에 의한 교란 환경의 출현을 볼 수 있다. 이들의 연구는 주로 생태학의 수법이 쓰여 왔다.
심는 대상, 즉 재배되는 식물은 야생 식물이 아닌 작물(재배식물)이다. 재배식물의 기원을 농경의 기원이라 생각해 왔던 것이 농학의 분야이다. 이 분야에서는 러시아의 유전학자 바빌로프 이래 고고학은 유적에서 발굴된 유물을 연구해 왔다. 최근에는 농학과 고고학의 수법을 합친 식물고고학이라 부르는 새로운 연구방법도 등장했다. 이는 출토 유물에 자연과학의 분석기법을 적용하는 것으로, 필자가 1996년 제창한 'DNA 고고학'도 또한 그 하나이다.
간다는 행위에는 제사 등의 행사가 수반된다. 이들 여러 행사 등을 유형화하고 상호비교하는 것으로 농경의 기원이나 전파를 좇는다는 연구도 옛날부터 행해져 왔다. 이들은 주로 문화인류학이나 민속학의 연구방법으로, 특히 일본에서는 방대한 성과의 축적이 인정된다.
농경의 시작
그런데 인류는 왜 농경을 시작했을까? 즉, 갈게 되었던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출되어 있는데, 모두 결정적인 근거를 가지고 제시된 것은 아니다. '왜'라고 하는 질문은 그 사람 개인이나 사회의 이상이나 기호를 묻는 것이지, 만일 그것이 현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행위를 묻는 것일지라도 그 이유를 명시적으로 설명하는 건 그리 간단하지 않다. 하물며 기록조차 없던 시대의 행위이다. 아무래도 유추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게 된다.
"사람은 왜 갈게 되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크게 구분하면 내인설과 외인설로 나눌 수 있다. 내인설은 인간 사회의 내부에 원인이 있다는 견해로, 예를 들면 차일드도 그 하나이다. 예를 들면, 큰 종교시설에 인간이 정기적으로 모일 때 그 식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다.
한편, 외적인 요인을 고려한 설도 있다. 1980년대 이후 부활을 보인 환경결정론은 그 대표이다. 이전에는 농경의 개시 요인으로 1만3700년 정도 전의 '영거 드라이아스기'라고 부르는, 짧지만 급격한 한랭기를 드는 견해가 있었다. 그 뒤 농경의 시작이 이 시기보다 늦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에 이 설은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다. 또한 농경이 천천히 진전되었다는 견해가 최근 들어 등장하고 있다.
어느 설이나 배경에 인구 증가와 식량난이 있다고 생각되는 점에서 동일하다. 식량의 압박이 사회를 농경으로 몰고갔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일종의 인과론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인과론은 종교적 사고와도 관계되어 어느 시대에나 받아들여지기 쉬운 사고방식이다. 불교는 현세의 사건을 전생의 결과(업)라고 생각한다. 성경에 등장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을 구성하는 것도 일종의 인과론이다. 더욱이 현대의 과학기술을 뒷받침한 사상적 배경인 서양의 근대 합리주의 또한 기독교 사상이 뒷받침하는 인과론 위에 성립되어 있다. 인과론은 "모든 사건에는 반드시 바탕이 되는 무언가가 있다. 그리고 인류는 그 무엇인가를 반드시 밝혀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반면, 농경의 시작을 어떠한 사건의 결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우연으로 보는 해석도 존재한다. 브라이언 사이크스Bryan Sykes의 소설 <이브의 일곱 딸>에서는 현생 인류의 근원이 된 일곱 여인을 가정하고, 그들의 일생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그려내고 있다. 물론 수만년 전의 이름 없는 여성의 삶을 증거로 복원하는 등은 현 단계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어디까지나 그건 '이야기'로, 사이크스의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상상이나 이야기를 사실무근으로 치부해도 될까? 현대 학문은 상상이나 이야기를 부당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은가? 확실히 상상에 근거는 없다. 그러나 학문의 세계에서 100년 동안 정당한 설로 믿어졌던 설 등은 거의 없다. 그리고 근거 없는 이야기가 거짓말인가 하면, 그리 생각할 근거도 또한 없다. 상상의 산물은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가설로 취급하는 것이 좋다.
"만드는" 작업은 인류 고유의 작업이다. 만드는 것은 식재만 잔뜩 있는 게 아니라 도구나 "장소" 같은 보이지 않는 것도 포함되는데, 이 책의 내용 가운데 술에 관계된 것도 있어 교토 시내 중심부에서 유일한 양조장인 사사키 주조사의 사장인 사사키 아키라 씨에게 "술 만들기"를 들었다. "물건 만들기"란 것에 학문은 어떻게 공헌해야 할까? 그러한 입장에서 읽어 나아가 주시길 바란다. 좌담회에서는 질의응답도 있었는데 그를 포함해 적어 보았다.
술이란 무엇일까?
사람과 사람이 술을 따르거나 따라주거나 하면서 친해져 간다. 그러한 "장"을 연출하는 것이다. 단순히 알코올 음료만은 아니다. 그리고 술은 먹을거리와 함께 있다. 일본주는 일정식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술 만들기의 포인트
계절이 중요. 가을에 햅쌀이 수확되어, 겨울에 술 만들기가 행해진다. 혹한 무렵이 가장 좋은 술을 만들 수 있는데, 그것을 숙성시켜 여름에는 여름의, 가을에는 가을의 술이 된다. 그러나 여름에 술을 담그는 일은 없고, 좋은 술에 되지 않는다. 그래서 양조자(술 만드는 장인)는 이전에는 겨울에만 고용했다. 술 만들기가 겨울이 좋은 또 하나의 이유는 그 방법이 온도 관리가 편하기 때문이다. 작은 양조장에서는 설비투자가 꽤 어렵고, 자칫하면 온도가 오르기 쉬워 술 만들기는 겨울 쪽이 하기 쉽다.
양조장의 대부분은 중소기업. 그래서 근대 공장의 첨단기술 생산에는 익숙하지 않다. 그것이 맥주와 다른점. 중소기업은 기술로 승부한다.
술은 기호품 취급인가?
흔히 술은 기호품으로, 있어도 좋고 없어도 그만이라 하지만 겨울의 양조자에게는 농한기의 노동력을 고용하는 의미도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는 실업대책의 의미도 있다. "없어도 그만"이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술의 맛이 변하고 있다고 하지만, 사사키 주조에서는 소비자가 아니라, 상품을 도매하는 술집을 보고 있다. 흔히 영성용 술 등이라 이야기되는 경우도 있는데, 용기로 차별화하거나 하지만 내용물을 바꾸는 일은 하지 않는다.
교토의 양조장으로서 주의하고 있는 점은 무엇인가?
교토에 있다든가, 교토 시내에 있는 양조장이라는 것을 특별히 의식하지는 않는다. 사사키 주조가 첫 울음소리를 냈던 1893년에는 시내에 131곳의 양조장이 있었는데, 그뒤 다른 곳은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러한 경위에 구애되지 않고, 사사키 주조는 어디까지나 기술로 승부하고 싶다고 생각한다. 주류 종합연구소의 전국 신주감평회에서 2014년 입상한 것은 그 노력의 결과라 생각한다.
일본주라고 한 마디로 말하더라도 오랜 기간 생각하자면, 도구와 기술, 지식에 대한 여러 가지. 즉, 말로 표현하자면 "고르지 않음"일 것이다. 양조자의 경험과 감의 세계였다.
일본의 식문화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바라는 바
예를 들면, 무엇무엇은 도움이 된다, 뭐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등의 공리적인 생각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너무 좁고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이런저런 것을 널리 배우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로 "만든다"라고 해도 만드는 것도, 만드는 사람도, 그 과정도 여러 가지이다. 사사키 씨는 술을 만드는 작업에 대해 무언가에 거리낌 없이 담담하게 이야기했지만, 그 제조의 배경에 있는 기술이나 경험, 감이라는 '경험지'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게 이야기했다. 아마도 "만드는"작업에는 이러한 체계화된 기술이나 경험지의 집적이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 다루는 '물건'에 어떠한 기술이나 경험지가 있는지를 고려하며 읽어주면 좋겠다.
에도시대의 농경도 말이나 메이지 시대부터 쇼와 초기에 걸쳐 찍은 농사 풍경에는 종종 '코잡이'나 '입잡이'를 하는 2인 말쟁기질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쟁기를 누르는 '쟁기꾼' 역할 외에 입 근처의 재갈에 대나무 장대를 묶어 말을 유도하는 '코잡이' 역할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말을 똑바로 걸어가게 하거나, 방향 전환을 시키거나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코잡이'는 써레질이나 흙덩이 부수는 작업에도 많이 행해졌는데, 이는 말이 얼마나 쟁기나 말괭이 등의 견인식 농기구에 대한 길들여지지 못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겁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러한 농기구 사용은 사람에게도 말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고, 나름의 수련이 필요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쇼와 중기 무렵까지에는 2인 말쟁기질은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쟁기를 짊어지고 온 일본을 돌아다녔던 '말쟁기질 교사'라는 이름의 사람들의 활약이 있었습니다.
메이지 정부가 식산흥업의 일환으로 농업의 근대화를 모색하던 와중에, 더 풍토에 적합한 개량을 추진하기 위해 재래 농법의 역사를 답습하는 게 중요시되었습니다. '말쟁기질 교사'란 메이지 16년 농업기술의 개량, 보급을 목표로 했던 노농의 한 사람, 하야시 엔리林遠里의 사설 권농사가 후쿠오카에 설립되었던 무렵부터 시작됩니다. 볍씨의 저장법이나 제초 기술, 그중에서도 습논의 건논화에 따라 일어나는 수확고의 증수가 명확한 목표였습니다. 건논에서는 뿌리를 깊게 내려 비료를 주기 위한 깊이갈이가 필수이고, 그 때문에 쟁기질과 암거배수 기술을 보급, 지도하기 위한 사설, 군, 현, 시험장, 나아가서는 쟁기 제작소 등에서 파견된 말쟁기질(소쟁기질)의 기술전문가들의 모습은 1950년대 전후의 무렵까지 볼 수 있었습니다. 후쿠오카현 권업시험장의 장이었던 무렵의 요코이 토키타카横井時敬 등도 각지에서 오는 요청에 응하여 말쟁기질 교사 또는 벼농사 개량 실업교사를 추천하고 파견했습니다.
일찍부터 건논화가 진행되고, 좋은 말의 산지이기도 했던 규슈에서는 후쿠오카, 구마모토, 사가의 평야 일대가 말쟁기질의 선진지였습니다. 한편, 칸토우에서는 말괭이를 사용한 써레질을 말로 행하는 지방도 있었는데, 논이 많고 깊이갈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거대한 쟁기는 일부 밭농사 지역에서 사용되었지만, 매우 불안정하고 깊이갈이는 어려워 칸토우 명물 2인 말쟁기질이 나쁜 관례로 정착되어 있었습니다. '서쪽 소 동쪽 말'이라 이야기되듯이, 칸사이에서는 말보다 습논 작업에 안정감이 있는 소를 써레질 작업에 이용할 수 있었기에, 1인이 부리는 기술이 일찍부터 정착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큐슈 고향의 경려회競犁會에서 솜씨를 연마한 말쟁기질 교사들은 건논화가 늦어지고 있던 도호쿠, 칸토우 지방에 파견되는 일이 많았는데, 후쿠오카의 재래 쟁기(안아 쥐고 서는 쟁기)에서부터 다이쇼 시기에 만들어진 근대 짧은바닥쟁기로의 획기적인 개량이 이루어지면서 그것의 보급이나 농기구의 변화에 따른 쟁기질 방법을 가르칠 필요성도 생겨, 칸토우에 한정하지 않고 칸사이도 포함해 전국을 돌아다니게 됩니다. 의 경려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3회 거두면 군의 말쟁기질 교사에 추천되고, 한층 실적을 쌓으면 현에서 인정된 말쟁기질 교사가 되었습니다. 말쟁기질 교사는 지역의 학교장보다 명사 대접을 받는 등 사람들이 동경하는 새로운 직업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측이었던 마을 사람에게도 처음에는 "어려운 말(성질이 사나운 말)"을 순식간에 제압해 낯선 쟁기질의 시연을 실시하는 신기한 기술을 구사하는 "말꾼"이기도 했습니다.
말쟁기질 교사 중에는 전국을 쟁기 1대로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다면, 모범논을 만들어 그 성과를 보여주면서 오랜 세월 자리잡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도호쿠 지방에 남은 봉납 말 그림에는 근대 농법 보급에 대한 강한 사명감을 가지고 씩씩하게 말과 쟁기를 조종하는 말쟁기질 교사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 그림은 성과를 얻은 마을사람들의 감사의 증표였습니다.
"최후의 말쟁기질 교사"라고 이야기되었던 후지노 토쿠오藤野徳雄 씨는 1900년 말쟁기질 선진 현인 후쿠오카현의 가스야군粕屋郡 시메마치志免町에서 태어나 사이타마현에서 죽었습니다. 1971년에는 축력 이용의 개선지도와 농기구의 개량에 전력을 다 한 것에 대하여 공훈 5등 서보장瑞宝章을 서훈했습니다. 당시의 가스야군은 말 육성이 성행해 망아지를 3-4세가 되기까지 기른 뒤, 야마구치 지방에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을 가진 이 군에서는 후지노 씨 이외에도 많은 말쟁기질 교사가 배출되었습니다.
후쿠오카 번사였던 할아버지도, 농민이었던 아버지도 말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그도 취학 전부터 말괭이를 손에 들고 경작을 시작했습니다. 1915년 농학교 3년(중학교 3학년) 때에는 시멘무라志免村에서 말쟁기질 경려회에 뛰어들어 참가해 줄을 선 청년들을 누르고 우승합니다. 후쿠오카 농학교를 졸업한 뒤, 시즈오카현 농림기술시험장에서 근무하고, 그 뒤 사이타마현 시험장으로 옮깁니다. 대일본 농회農會, 일본 마사회 및 각 현 주최의 말쟁기질 강습회나 연성회, 경려회 등을 통하여 말의 길들이기나 쟁기의 경운방법을 계속 지도했습니다. 실제로 약 20만 마리의 말을 길들이고, 50만 명을 지도했다고 합니다. 만년에는 카와사키, 후나바시船橋, 우라와浦和, 오오이大井의 경마장에서도 근무했습니다.
1931년 연성회에서 국립 종마 육성소장 사와라 케이지佐原敬二 씨(전 육군 기병 대좌)와 함께 길들이기 솜씨를 선보인 것이 큰 자신감이 되었다고 자서전에서 술회했습니다.
후지노 씨의 일은 크게 구별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1. 건논화와 깊이갈이를 목적으로 하는 쟁기질 보급 지도. 특히 2인 말쟁기질의 관행을 개선해 1인 말쟁기질로 만든 점.
2. 농기구, 특히 멍에의 개량에 의한 효율 좋은 말쟁기질 지도.
3. 두둑짓기의 개선 등을 수반한 사이갈이 제초의 지도.
4. 시험장에서 쟁기, 괭이, 고무래, 사이갈이 도구, 멍에 등의 비교시험을 개선.
말쟁기질 교사가 활약했던 시대는 일본 말의 대변혁기이기도 했습니다. 메이지 시기에 일본에 주재하던 서구인들이 놀라며 기록했듯이, 일본 말의 대부분은 서양의 시점에서는 충분히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였습니다. 무사가 전장에서 타는 준마는 '성질'이 강한, 거친 말이었습니다. 메이지 초두 관리들의 승마조차도 말과 함께 좆아 달리는 마부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일본의 말도, 국가의 마필 개량사업에 의해 양상이 달라져 갑니다.
메이지부터 종전까지는 군용마의 증강을 도모하기 위해 '말 정책 1차 및 제2차 계획(1906-1945년)'이 시행되었습니다. '일본 말의 개량' 즉 재래종의 잡종화는 심상치 않은 속도로 진행되어 쇼와 시대 초기에는 국내 말의 90%가 교잡종이 되었습니다. 세계 표준에서 보면 조랑말 유형의 일본 재래 말(체고 약 100-135cm)를 서양종과 교배해 대형화(체고 약 145-165cm)하는 것이 우선 희구되고, 다음으로 승용, 수레용, 짐용으로 그 개량 방침도 용도별로 세분화했습니다. 그리고 종전 뒤에는 범용성이 높은 중간종의 농사용 말이 일반적으로 선호되었습니다.
당연히 말쟁기질 교사들이 다루는 말도 재래종에서 교잡종으로 변해 갔습니다. 앵글로 노르만종, 헤크니종, 브르통종 등의 서양 품종의 피가 섞여 기질면에서도 온순해졌습니다. 또, '마필 거세법(1901년)' '종마 통제법(1939년)'의 집행에 의해 수말의 거세술이 널리 보급된 점도 다루기 쉬움을 조장한 것입니다.
'말 길들이기'의 단계부터 시작해야했던 초기의 말쟁기질 교사들과 대개 사람에게 익숙해진 말에게 쟁기를 연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던 후기의 말쟁기질 교사들 사이에는 노고가 달랐음을 상상하기란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태우는 것과 쟁기나 말괭이를 끄는 것은 전혀 다른 일로 새로운 일에 말은 저항을 나타냅니다. 특히 바로 뒤의 사각지대에 연결된 불안정한 쟁기는 큰 위협이 되기 때문에, 이 공포를 없애도록 길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길들이기가 부족한 말이 작업중에 놀라서 쟁기를 끌고 다니면서 논에서 논으로 달려 도망치는 모습은 종종 볼 수 있는 광경이었던 듯합니다.
표1. 소쟁기질, 말쟁기질의 경작면적, 능력 비교
쟁기질 시간(시간) / 평균속도(cm/초)
습논 : 소 3.8 59.94
말 4 89.91
건논 : 소 2.3 73.26
말 1.6 145.32
습논 경작면적 : 약 1,180㎡
건논 경작면적 : 약 992㎡
「牛耕ト馬耕比較試験」 『畜力利用講義』, 社団法人 大日本農会(昭和9年)을 바탕으로 작성
길들이기의 비법
후지노 씨는 자신이 실시하는 말 길들이기의 방법은 오직 자신의 경험과 공부에 의지한 자기류이기에, 기본(뼈대)만 배우는 것이 좋고 결코 모양 등에 구애되지 않도록 아래와 같이 주석을 달고 있습니다.
1. 최초의 첫걸음이 중요하기에 신중히 행한다. 최초에 실패하면 회복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
2. 음성과 태도를 능숙하게 사용한다. 온화한 음성으로 말에게 안심감을 주고, 위엄있는 목소리로 격려 또는 꾸짖음. 친숙하면서도 의연한 태도로 임한다. (당시 음성에 의한 신호가 장려되어 널리 보급되고 있었습니다.)
3. 어루만지기와 위엄의 길들이기. 엄연한 태도로 어루만지기도 징벌도 행한다. 채찍의 사용 등 육체적 고통은 공포감을 심어주기 때문에 행하지 않고 음성으로 꾸짖는다.
4. 길들이기는 말에게 적당한 운동을 시킨 뒤, 말의 기분이 가라앉고나서 행한다.
그리고 불요불굴의 정신, 책임감, 자기의 기술을 믿는 것, 동물 애호의 정신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성질 있는 말에게는 각설탕이나 당근으로 길들이는 것도 좋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쇼와 초기 무렵에는 목소리, 이른바 음성에 의한 신호나 구호를 중앙마사회 등이 체계화해 농사용 소와 말이나 마차용 말의 길들이기나 사역 용어로 전국에 보급시켰습니다. 원래는 농사용 말의 길들이기에 거간꾼이나 농민이 옛날부터 이용하던 언어였다고 생각되는데, 지역에 따라 약간의 사투리가 있었던 듯합니다. 발진 "마헤", 가속 "하이하이", 오른쪽 직진 "세에", 왼쪽 직진 "사시", 정지 "도오", 후퇴 "아또", 진정이나 어루만지기 "호오라" "오오라", 발 들기 "아시" 등입니다. 경작 작업이나 마차 등은 승마와 같이 직접 몸에 닿지 않고 말을 다루기 때문에 고삐의 유도 이외의 언어 신호가 확실히 효과가 있습니다. 후지노 씨도 이러한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직접 물리적인 힘으로 신호를 보내는 것으로 성립하는 관계보다 다른 차원의 상호이해를 구축하는 것이 아닐까요.
말쟁기질 교사의 실력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강습회에는 여러 성질 나쁜 말이 끌려 왔습니다. 그가 남긴 자료에서도 역시 성질 나쁜 말을 길들이는 도구를 볼 수 있습니다. 이들 기업 비밀이라 할 수 있는 도구로부터 현장에서 절대 실패할 수 없다는 말쟁기질 교사들의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말의 급소에 대한 효과가 계산된 얼핏 단순해 보이는 도구는 성질 있는 말을 순식간에 다스리는 오오츠보류大坪流 등의 옛날식 마술 전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질 있는 말을 교정하는 도구로는 아래와 같은 걸 들 수 있습니다.
1. 입 벌리기 끈 : 재갈의 위에서 입속으로 넣고 당겨서 제어했다. (주머니에 이 끈을 숨겨둔 말쟁기질 교사는 많았던 듯합니다.)
2. 입 벌리기 새끼줄(굵은줄) : 1과 똑같은 목적의 새끼줄.
3. 혀 결속끈 : 아마 혀가 재갈을 넘는 버릇이 있는 말에게 사용했던 끈.
4. 입 벌리기 쇠고리 : 목을 드는 광분하는 성질이 있는 말의 입에 끼우고, 복대에 매는 끈으로 연결했다. 주로 마차용 말에 썼다.
5. 재갈 : 가느다란 것이나 결이 있는 것은 제어작용이 강해 교정 재갈로 이용되었다.
6. 코끝 결속끈 : 말의 급소 가운데 하나이다. 코끝(윗입술)을 묶어 말을 얌전하게 만들었다. (현재는 코 나사 등으로 윗입술을 비트는 것으로, 뇌속 엔돌핀이 분비되어 심박수가 내려가고 정신적으로 안정되는 것으로 해명되었다.)
7. 귀덮개 : 소리를 무서워하는 공포벽이나 광분벽이 있는 말에게 사용하는 천. 심하게 광분하는 성질이 있는 말에게는 귀 고막을 찢어 외부의 소리를 단절시키는 교정법을 쓰는 경우도 있다.
8. 귀 결속끈 : 귀를 묶어 비틀면 말이 얌전해지기 때문에 성질 있는 말의 제어에 사용했다. (귀 나사와 똑같이 억제신경이 움직인다고 이해되고 있습니다.)
말의 힘을 쟁기에 효율 좋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견인 저항과 견인점이 고려된 적절한 멍에와 쟁기의 연결도구에 장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울러 적절한 멍에 깔개를 써서 상처가 나지 않도록 하면 말의 피로는 줄어듭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후지노 씨는 멍에나 멍에 깔개의 개량과 보급에도 시행착오를 계속했습니다.
실제로 멍에는 길마(짐 안장)→산 모양 가로목 1단→산 모양 가로목 2단→후방 별도 분리로 개량을 거듭해 나아갑니다. 멍에 뼈대의 전방과 후방 사이에 있는 연결목이 2단이 되는 것으로 하단에 복대, 흉대, 당김줄을 연결하고, 상단에 고삐 걸이나무(고삐류의 길이 조정 도구)를 매달 수 있어 멍에 자체도 튼튼해집니다. 후방 멍에 뼈대의 상방이 별도 분리된 모양은 말 몸통의 굵기가 앞쪽과 뒤쪽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고려해 말 몸에 부하를 줄이며 멍에가 장착되도록 합니다. 멍에로 인한 상처를 방지하기 위한 멍에 깔개는 볏짚부터 차차 보리짚으로 변하고, 보리짚을 묶어서 짠 것 등이 이용되었는데, 그 크기도 말의 움직임을 고려하여 길이 등이 개량되어 나아갑니다. 멍에 만들기에 능한 후지노 씨는 멍에 깔개용으로는 간수나 소금물을 사용해 보리짚을 부드럽게 만드는 것을 적극적으로 도입했습니다.
이러한 농업 개량을 위한 범국가적 지식과 힘의 집결이 "말쟁기질 교사"라는 모습으로 구현화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참고문헌>
馬の畜力利用, 岡部利雄, 養賢堂, 1959
絵馬と農具にみる近代, 板橋区立郷土資料館, 1990
大絵馬ものがたり1, 稲作の四季, 須藤功, 農村漁村文化協会 2009
写真でみる日本生活図引1, たがやす, 須藤功編, 弘文堂, 1988
畜力利用講義, 社団法人大日本農会, 1934
畜産発達史, 農林省畜産局, 中央公論事業出版, 1966
農耕馬の利用は終る(稿本), 藤野徳雄, 1981, 말 박물관 소장
馬耕および馬耕鞍の製作法(稿本), 藤野徳雄, 1981, 말 박물관 소장
「馬耕教師群像」, 香月洋子, 『宮本常一とあるいた昭和の日本3 九州2』, あるくみるきく双書
田村善次郎・宮本千春 편찬, 農山漁村文化協会 2011
馬耕教師の旅 - 「耕す」ことの近代, 香月洋一郎, 法政大学出版会, 2011
働く馬, 財団法人馬事文化財団, 2002
Lagelweij E, Nelis PC, Wiegant VM and Van Ree JM. The twitch in Horses: a variant of acupuncture, Science, 225 (4667) :1172-4, 1984.
본존은 석가여래. 창립 뿌리는 쵸우넨奝然(938-1016년)으로, 헤이안 시대 중기 도다이지의 삼론종 승려 출신. 983년 송나라에 가 불교를 공부하고 태종에게 대사호란 호칭을 받고, 신인대장경新印大蔵経을 가지고 986년 일본에 돌아옴. 창립자는 그 제자인 죠우산盛算.종파는 처음엔 화엄종으로 창립하고, 그 뒤 천태종, 진언종을 겸했음. 무로마치 시대부터 융통염불종融通念仏宗으로 발전함.
사원이 있는 땅에는 원래 사가嵯峨 왕의 아들로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의 주인공 히카루 겐지光源氏의 모델이라 여겨지는 좌대신左大臣 미나모토노 토오루源融(822-895)의 별장 서하관栖霞観이 있었다고 함. 그의 죽음 이후 1주기에 해당하는 896년, 그가 생전 발원하여 이루지 못한 아미타삼존상을 아들이 만들어 안치하고 서하사棲霞寺라고 불렀다고 함.
서하사를 세우고 수십년 뒤, 송나라에 다녀온 쵸우넨이 가져온 석가여래 입상을 교토의 아타고산愛宕山이 송나라의 오대산과 비슷하다며 그 기슭에 이를 안치하는 절을 건립하려고 했음.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하고 후나오카산船岡山에 있는 렌다이사蓮台寺에 일단 불상을 안치함. 그가 서하사 위치에 청량사를 건립하려던 의도는 교토 북동쪽 히에이산에 있는 엔랴쿠지延暦寺와 대항하려는 의도였다고 봄. 하지만 엔랴쿠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016년 죽음을 맞이함. 그리고 그 뜻을 이어 제자 죠우산이 결국 오대산 청량사를 건립하게 됨. 그 후, 오닌의 난으로 사원 건물이 소실되지만 1481년 재건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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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회 및 타이마츠라는 잔치가 열려서 24년 3월 15일 방문. 매년 3월 15일에 개최되는 행사라고 한다.
쵸우넨이 중국 오대산에 다녀왔다고 하여 거기에서 따온 이름의 문인가 보다.
오대산 이란 현판이 잘 보임
문만 보아도 화려하고 규모가 꽤 크다는 걸 알 수 있음.
경내에는 타이마츠 준비가 되어 있고.
본전에 들어가니 쵸우넨이 중국에서 받아왔다는 석가여래상과 각종 관련 그림 및 유물을 볼 수 있었음. 일본답지 않게 공짜로 공개하다니 배포가 엄청 큰 사찰이었다.
타이마츠가 열리기 전에 경내 한켠에서 하던 공연
아래 검은 가면의 귀신을 물리친다는 내용인데... 어후 칼 차고 나오는 것까지는 어떻게 봐주겠는데, 싸움까지 해서 귀신의 목을 베어 들어올리는 장면에서는... 그 옛날 프랑스의 단두대 구경이 이랬을라나 싶고 그랬다. 잔인하기가 아주...
8시에 시작한다는 타이마츠 행사. 이제 얼마 안 남았음.
먼저 쌓아놓은 더미에 불을 붙이고...
짙은 연기를 내뿜으며 타오른다.
제대로 불이 붙자 불똥이 마구 날아다니는데, 목조 건물이 가득한 곳에서 이래도 되나 싶게 무서운 기세로 불타오른다.
그러더니 사단이 났다.
원래는 타이마츠 하나하나에 사람이 불을 붙여 한꺼번에 타오르도록 하는데, 불똥이 날아가 하나에 먼저 불이 붙어 버렸다.
이게 다 같이 활활 타올라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는 건데 하나가 먼저 타 버렸으니 올해는 망했다.
이렇게 행사를 보고, 다 끝나기 전에 먼저 자리를 떴다. 사람들이 한번에 몰리면 차가 꽉 찰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