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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농-문화

마을의 작은 정미소가 구하는 아시아, 아프리카의 쌀농사 -5장

by 雜것 2025. 3.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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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아시아, 아프리카의 쌀 증산과 농촌 정미소

 

 

 

농촌 정미소의 출현에 따른 인도네시아의 기적적인 쌀 증산

 

쌀농사로 농민이 얻는 이익은 매우 낮았다

일찍이 인도네시아는 세계 최대의 쌀 수입국으로, 세계의 식량 안정 공급이란 측면에서 일대 불안 요인이었다. 그래서 1945년 독립 이후, 이 나라에서는 쌀의 증산이 지상명령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쌀 생산 증가의 발걸음은 더디기만 했다. 

당시, 이 나라의 정미소는 화교의 소유·운영되는 소수의 상업 정미소밖에 없고, 그 총 정미 능력은 생산 나락의 10~20%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미소가 신설·증설되어도 좋을 것 같지만, 거기에는 정부의 '허가'가 필요하고 그 허가를 얻을 수 있는 건 쌀의 집하·가공·판매·수입 등을 도맡아 하고 있는 화교계 재벌·상인에 한정되어 있었다. 보통의 인간에게는 소동력을 사용한 삯방아 정미소를 설립하는 등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할 일이었다. 

당시 자바섬과 그 주변의 섬들에서는 탈립이 어려운 준일본종 쌀이 재배되어, 수확은 이삭따기 용구(아니아니)에 의한 이삭따기였다(그림 32). 그리고 볏단 그대로 운반, 건조, 저장되어 쌀 집하업자에게 볏단으로 팔렸다. 볏단은 정미소에 그대로 쌓아서 보관·저장되고, 정미 직전에 볏단에서 이삭을 잘라내 탈곡기에 던져 넣고 탈곡했다. 탈곡기는 당시 인도네시아에서는 농민용 기계가 아니라 정미소에 필요한 설비였다.

 

그림32 이삭따기 용구(아니아니)의 사용법. 

 

벼이삭으로부터 백미의 수율은 일반적으로 50%라 하고, 이것은 나락으로부터의 수율(60~65%)보다도 더욱 낮다. 그래서 농민이 벼이삭 단을 팔 때 매수자에 의한 나락 품질 평가는 나락으로 파는 경우보다도 더욱 자의적이며, 다른 나라의 농민이 나락으로 팔 때보다도 더 한층 불리했다.

 

이렇게 벼이삭은 매우 싸게 팔 수밖에 없었기에, 농민은 벼이삭을 손방아로 '백미'로 만들어 인근 상점 등에 파는 일에 힘썼다. 그 작업은 나락을 손방아로 찧는 것보다 더욱 수고가 든다. 그러나 이삭 채로 파는 것보다는 약간 더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작업은 먼저 벼이삭 단을 뿔뿔이 나누어 벼이삭을 배 모양의 나무 절구에 조금씩 넣고 그것을 절굿공이로 찧어 탈곡한다. 하지만 당시 인도네시아의 벼는 일본과 같이 탈립이 어려운 품종이었기 때문에, 여기에는 수고가 든다. 이렇게 해서 벼이삭에서 탈곡된 나락은 다른 절구에 넣고 재차 절굿공이로 찧고, 날려고르기를 하고는 또 찧는다. 이를 반복해 매갈이와 정미를 동시에 행해 '백미'를 얻는데, 백미라는 이름뿐이고 왕겨·현미·백미·싸라기의 혼합물이다. 이것을 날려고르기하거나 해서 인근의 상점이나 지방 시장 등에서 '백미'로 판다. 고객은 농촌 빈곤층으로, 당연히 싼 가격으로만 팔린다. 그래도 벼이삭을 그대로 업자에게 파는 것보다는 그나마 나았다.

농민에게는 이러한 '백미'라도 쌀은 사치스러운 음식이었다. 일상의 식사는 옥수수·카사바·고구마·야자·바나나·각종 채소 등이었고, 쌀은 경사스런 날에만 먹을 수 있었다. 농촌 거주자라도 여유가 있는 사람은 이러한 농민이 손방아 찧은 백미가 아니라 상업 정미소에서 기계 정미로 만든 값비싼 유통 쌀을 샀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정부가 농민에게 아무리 '쌀을 농사지어라' 등이라 해도 쌀 생산이 늘어날 리 없었다.   

 

 

 

'정미소 설립 자유화'라는 충격

1960년대 말, '건국의 아버지' 수카르노 대통령을 축출하고 권좌에 오른 수하르트 정권은 공산주의자와 그 동조자로 보이는 사람 수십만 명을 아주 잔혹한 방식으로 박해했다. 이때의 참상은 유명한데, 화교는 모두 공산주의자의 한 무리로 여겨졌다.
새 정권은 화교 상인의 아성인 쌀 유통 분야에서 그들을 몰아내기 위해 '쁘리부미'라 불리는 인도네시아 태생인 사람에 한해 무조건으로 정미소 신설 허가를 내주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어제까지만 해도 꿈도 꾸지 못하던 일이었다. 그 결과, 전국 농촌 곳곳에 그야말로 우후죽순으로 속속 작은 정미소가 생겼고, 그 정미 능력의 총계는 금세 쌀 생산량을 훌쩍 넘어섰다. 이런 작은 정미소를 만든 것은 부잣집 사업가가 아니라 영세한 지주·퇴직 관리·소상인·수공업자 등으로, 새로 생긴 정미소는 거의 모두 엥겔베르그식 기계 1대만 사용한 삯방아 정미소(농촌 정미소)였다.

지금까지 손방아로 온갖 고생을 하던 농민은 신설된 농촌 정미소를 적은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되었기에, 이를 통해 백미를 만들고 그것을 시장에 내놓았다. 그 쌀은 손방아로 만든 '백미'와는 전혀 다르게 깨끗했고, 때로는 상업 정미소의 쌀과도 흡사해서 전보다 훨씬 비싼 가격에 팔 수 있었다.

농촌 정미소는 몰려오는 영세 쌀농사 농민에 의해서 크게 번성했기 때문에, 그 수는 계속 증가해 이어지는 고객 획득 경쟁에 의해서 금세 그 설비도 성능도 개선되어 갔다(그림 33). 최초의 정미소는 엥겔베르그식 매갈이 정미기 1대 뿐인 곳이 대부분이었지만, 그것이 곧 매갈이용과 정미용 2대의 엥겔베르그식이 되고, 계속하여 매갈이 공정에는 현지산 충격식 매갈이 기계를 사용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또 몇 년 안에 고무롤식 매갈이 기계로 대체되었다. 나아가 정미 공정이 엥겔베르그식에서 분풍마찰식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성능은 한층 비약했다. 여기에 더해, 해가 갈수록 나락 조선기와 나락 분별기 등이 추가되고, 각종 싸라기 분리기 등도 더해지게 되었다. 그동안 정미 설비의 이러한 비약적 개선에도 불구하고 방아삯은 계속 인하되었다.

 

그림33 인도네시아의 농촌 정미소
위: 엥겔베르그식 기계 1대만으로, 매갈이와 정미를 행하고 있다.
아래: 왼쪽 안쪽의 기계는 고무롤식 매갈이 기계, 거기에서 나온 현미(약간의 나락 포함)를 정면의 분풍마찰식 정미기에 넣어 백미로 만든다.

 

 

 

 

기술 수준의 저하?   -학자의 이상한 해석

이렇게 농민들은 새로 생긴 농촌 정미소로 몰려들었지만, 원래 얼마 없던 기존 화교의 대형 상업 정미소에는 더 이상 벼가 모이지 않으며 몰락해 갔다. 이런 상황을 보고 선진국의 한 학자는 인도네시아의 쌀 가공 기술 수준이 크게 떨어졌다고 평가했다. 진짜일까?

확실히 새롭게 나타난 농촌 정미소는 최초의 얼마 동안은 엥겔베르그식 기계 1대뿐인 조야한 것이었다. 만약 그 상황이 그대로 쭉 이어진다면, 이 평에도 일리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실은 달랐다. 작은 정미소의 수가 급속히 늘어감에 따라, 고객 획득 경쟁을 위해 그 설비는 전술한 바와 같이 차례차례로 갱신되어 갔다. 종래의 원반식 매갈이기가 고무롤식이 되고, 정미기가 분풍마찰식이 되면, 이제 그것만으로 백미의 총수율도 완전미 수율도 고전적인 유럽식 정미 설비보다도 결정적으로 앞서게 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재래의 상업 정미소는 그 독점적 지위에 눌러앉아 있었고, 기술적 개선은 일절 게을리하고 있었다. 그들의 설비는 여전히 보일러가 달린 증기기관을 동력원으로 하는 구식으로, 중간축을 통한 거미줄 같은 평벨트로 구동되는 원반식 매갈이기와 역원추형 정미기, 그들을 위한 소구획식 나락 분별기나 다수의 진동 체나 풍선기 등이었다(그림 29, 앞을 참조).

이 학자는 오래된 상업 정미소가 다수의 기계를 늘어놓은 복잡하고 무거운 외관을 가진 데 대해, 신설 정미소는 그 절반도 안 되는 수의 기계가 가볍게 돌아가고 있는 데에 지나지 않는 것을 보고, 중요한 그 성능을 보지 않고 외관만으로 "기술적 수준은 저하됐다"라고 단정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기계의 성능에 대한 '기술적 판단의 잘못'에 있는 것이 아니다. 원래 '옛날부터 있는 정미소'와 '새로 생긴 정미소'의 기계만 보고 이 나라의 '수확 후 처리 기술의 수준'이 '진보했다'라든가 '퇴보했다'라는 판단을 내리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그것은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않"는 것이다.

'옛날부터 있던 정미소'밖에 없었던 시대에는 기계에 의한 나락의 처리 가공은 전체 수확 나락의 10~20%밖에 안 되고, 나머지는 전부 전술한 것 같은 수작업으로 행해졌다. 이에 따라 '새로운 정미소'의 시대에는 수작업은 일소되고, 수확 나락의 전부를 기계로 처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비록 '새로운 정미소'가 가령 엥겔베르그식 기계 1대뿐인 원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더라도, 이 나라의 쌀 수확 후 처리 과정 전반의 기술 수준은 크게 개선된 것이다. 게다가 실제로는 새로운 정미소의 기술 수준은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전술한 바와 같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급속히 개선되어 간 것이다.

그러나 원래 '기술 수준이 향상되었는지, 아니면 저하되었는지' 등이란 논의는 농민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중요한 건 국민의 다수를 점하는 '농민의 입장이 개선되었는지 아닌지'라는 점일 듯하다. 그것을 문제삼지 않고 기술 논의를 하는 학자의 견식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기적적인 쌀 증산의 실현

이러한 쌀이 돈벌이가 되는 작물이 되었기에, 농민은 지금까지와는 확 달라져 쌀농사에 열중하게 되었다. 마침 그때, 필리핀에 있는 국제 미작연구소(IRRI)가 개발한 다수확 품종(HYV) 벼가 국제적인 평판을 얻어 1960년대부터 1970년대를 거치며 아시아 일대에서 폭발적으로 보급되었다. 인도네시아 정부도 반강제적으로 다수확 품종의 보급에 나섰지만, 인도네시아 사람의 쌀 기호는 재래의 준일본 품종의 쌀(Bulu)였기에 정부의 구호에도 불구하고 다수확 품종 쌀은 소비자에게 외면을 당해 별로 소비가 확산되지 않았다. 

그런데 쌀을 농사짓는 쪽의 농민은 이제는 쌀이 돈을 버는 작물이 되었으므로 이 다수확 품종을 적극적으로 채용해 곳곳에 이 벼를 심었다. 이렇게 해서 인도네시아의 쌀 생산은 그때까지의 정체에서 증가 쪽으로 엄청난 기세로 돌아섰고, 농촌 정미소의 수도 그 이상의 기세로 증가했다(그림 34). 이에 따라 영세 쌀농사 농민의 입장은 계속 개선되었다.

 

그림34 인도네시아의 백미 생산량과 연간 정미 능력

출전: 각종 자료에서 필자 작성

 

 

이러한 결과, 1970년대는 '쌀 증산 기적의 10년'이라고 하며 수하르트 대통령은 국제연합 총회에서 "지금 우리나라는 쌀의 자급자족을 달성했다"고 의기양양하게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벼 수확법의 변화 -이삭따기부터 밑둥 베기로

1970년대까지 인도네시아, 그중에서도 자바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쌀농사는 농촌 지역의 상호부조적 관행에 물들어 있는 일이 많았다. 특히 쌀의 수확은 이삭따기 용구(아니아니)를 이용해 벼이삭을 따는 수확법으로 마을 여성의 누구나 참가할 수 있으며, 이에 의하여 논의 신도 기뻐한다고 여겨졌다.
"오늘날은 아무개의 어느 논에서 수확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 그곳에 여자·아이가 손에 손에 아니아니와 자루나 바구니를 들고 모여, 개시 신호와 함께 일제히 논에 들어가 이삭따기를 시작한다. 때로는 팔꿈치가 서로 맞닿을 정도로 혼잡하고, 특히 결실이 좋은 장소에는 많은 사람이 모인다. 수확한 벼이삭의 일정 비율은 수확한 인의 몫이 된다.
이 관습에 대해서는 전부터 다음과 같은 일이 농민 사이에 전해지고 있었다. "아니아니 수확에서는 불특정 다수의 인간이 앞다투어 논에 들어가 벼를 밟아 망가뜨리기에 손실이 크고, 몫의 분배도 번거롭고 불만의 근원이 된다. 일꾼을 고용해 낫으로 수확을 하고 싶다. 그쪽이 알곡 손실도 적게 끝난다"고. 그러나 아니아니 수확은 전통적인 관습이었기 때문에, 이것을 폐지하기는 쉽지 않았다. "가난한 마을사람을 돕는 오래된 관행이 지주(라고는 해도 대부분 0.5헥타르 이하의 농지 소유)의 이익을 위하여 폐지되는 걸 허용하겠는가?"라고.
그런데 농촌 사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던 이 관행이 다수확 품종 벼(HYV)의 보급과 함께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져 갔다. 지금까지 재래종 벼는 키가 크고, 벼이삭이 크고 수가 적으며, 이삭에서 낟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기에 이삭따기를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에 반해 다수확 품종은 키가 작고 벼이삭이 작고 그 수가 많다. 나락이 벼이삭에서 쉽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에 의하 이삭따기 수확에서 고용 노동자에 의한 낫을 이용한 밑둥 베기로 급속히 바뀌어 갔다. 
이때에도 또 농촌 정미소의 출현을 '기술 수준의 저하'라고 판단한 것과 똑같이 선진국의 '식자'가 나타나, "낫에 의한 밑둥 베기는 전통의 파괴이자 토지 없는 농민의 생활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이는 법으로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이론이 신문지상에 나타났을 때, "학자가 현실을 모른다"고 하여 서민에게는 웃음거리가 되었다.
농민은 나락 채로 파는 일도 있지만, 농촌 정미소가 도처에 있는 지금은 누구라도 나락을 백미로 만들어 팔 수 있다. 그래서 이삭따기 수확의 시대에 이삭 단으로 팔았던 때 같이 값싼 나락 매입 가격은 있을 수 없다. 농민은 다수확 품종 도입에 의한 나락 수확 증가와 나락을 쌀로 만들어 판다는 이중 이익을 향수할 수 있어, 공전의 쌀 생산 증대가 된 것이다. 그것이 쌀농사 농촌에 풍요를 가져오고, 토지 없는 농민에게도 복지가 되었던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인도네사이의 벼 이삭따기 수확. 마을의 여성은 누구라도 참가할 수 있지만, 이 관습은 다수확 품종의 보급과 함께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졌다. 

 

 

수하르트 정권에서 이러한 급격한 쌀 생산 확대는 정권의 직접적 목표였던 화교 퇴치의 일환으로 '정미소 설립의 자유화'가 행해졌던 결과로 기대하지 않게 출현한 것이며, 말하자면 '부산물'인데 그 필연적 결과이기도 했다.

수하르트 정권 이전의 수카르노 시대부터 정부의 쌀 증산 정책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거창한 구호와는 달리 그것들은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효과를 발휘하게 된 것은 정미소 설립이 자유화되어 농민이 '쌀을 농사지으면 돈이 된다"라고 실감하게 되어 그들이 적극적으로 쌀을 농사짓는 상황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도네시아의 쌀 증산 성공을 '정부의 일관된 쌀 증산 정책의 성과'로만 보는 데에는 다소 위화감이 있고, 그와 같은 단언에 동의하는 데에는 주저하지 않을 수 없다.

수하르트 정권은 화교의 독점적 권익은 빼앗았지만, 그를 대신하여 군인이 각종 권익을 독점해 군인에게 거액의 뇌물 없이는 어떤 영세한 사업도 시작하지 못하게 되었다. 농기구나 농업 기계 등의 영세 제조업의 설립에 대해서도, 항간에는 '용접기나 선반을 살 돈은 있지만, 군인에게 줄 만한 돈(영업허가를 얻기 위한 뇌물)은 없다' '동력선을 잇는 <허가>를 살 돈이 너무 비싸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나왔다.

농기구의 수리나 개조 등 인근 여러 나라인 태국이나 필리핀, 말레이시아 등으로부터 길거리의 기계 수리점에 부탁하면 그 자리에서 간단히 해주는 일이 여기에서는 큰일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인근 여러 나라에 비해 각종 농업 기계의 개발·생산·보급에는 심히 뒤떨어졌다. 

수하르트 정권의 그 뒤의 쌀에 관한 정책에 대해서는 이외에도 여러 문제, 예를 들면 관제 '협동조합'에 의한 쌀 유통에의 개입 등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생략한다. 하지만 '농촌 정미소 설립 자유화에 의하여 농민은 쌀농사의 이익을 향수하고, 생산은 급속히 늘어났다'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다시금 강조하고 싶다. 

 

 

 

 

버마의 쌀 유통 국영화란 비극

다음은 1960년대 버마(현 미얀마)의 군사정권에서 실시했던 '버마식 사회주의' 시대의 풍경인데, 이 예는 앞으로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있을 쌀 증산이나 쌀의 품질 개선을 생각하는 데에 참고가 될 듯하다. 

 

 

나락의 강제 공출제도

이 시대, 수출용 쌀을 확보하기 위해, 버마 국내의 도시 주민의 소비 쌀은 배급제가 되었다. 이외에도 군인·관리에게 현물 지급용 쌀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정부는 전국의 각 지방·주·현·군·촌 농민에게 엄격한 나락의 공출 할당을 부과했다. 곧, 쌀농사 농민의 자가 보유 나락을 예외로 하고, 유통 나락과 유통 쌀은 모두 정부의 통제를 받았던 것이다.

쌀 수확기가 되면 정부는 국내의 각 지방·주·현·군·촌 각 단계의 조직의 장들에게 나락 공출 할당량을 제시하고, 이를 한시라도 빨리 달성하도록 엄하게 독려했다. 신문·라디오는 연일 각 지역의 나락 공출 진척 상황을 보도하고, 그 목표를 가장 먼저 달성한 조직의 장은 신문에 큰 사진이 실리고 이름이 보도되어 포상과 출세가 약속되었다.

농민에 대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공출 할당을 달성하도록 재촉하고, 그걸 달성하지 못하면 엄한 벌을 내렸다. 하지만 공충 목표를 달성해 버리면, 나머지 나락은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다. 그래서 전국 각지의 쌀농사 농민은 공출용 나락을 달구지나 작은 배에 싣고 지정된 정부의 나락 매입소로 쇄도해 장사진을 이루었다(그림35). 그 줄의 길이는 몇 킬로미터에나 이르러, 달구지의 아래나 운하에 뜬 작은 배 안에서 밥해 먹고 숙박하며 며칠 동안이나 나락 매도의 순서를 기다리는 것이 통례였다. 

 

그림35 정부의 나락 매입소로 향하는 농민들

 

 

"전국적인 나락 매입을 하더라도, 지역을 잘게 나누어 차례로 매입하도록 하면 혼란을 피할 수 있을 텐데"라고 하자, "그렇게 하다 보면 농민이 나락을 빼돌려 버려 집하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우려가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매입된 나락의 행방

나락 매입소의 담당 관리는 한시라도 빨리 매입 목표인 나락 양의 집하를 달성하도록, 위에서부터 엄하게 독려되었다. 다른 한편, 줄을 서서 기다리다 지친 농민에게는 욕설을 듣는다. 공식적으로 나락을 매입할 때는 나락의 수분이나 협잡물 비율 등의 검사를 하도록 되어 있어 그를 위한 계기류도 나락 매입소에 비치되어 있지만, 그러한 검사나 측정은 일체 생략되고 그를 감독관도 묵인했다. 나락 매입소에서는 농민이 가져온 나락의 무게를 그대로 재어 일률적인 단가로 벼를 매입한다. 매입된 나락은 품종이나 수분의 구별도 없이, 포장도 없이 지면에 수북하게 쌓는다. 그래서 농민 중에는 자신의 나락을 팔기 전에 일부러 물을 뿌리거나, 또는 흙 등을 섞어서 무게를 늘리는 자도 나온다.

매입된 나락은 포장 없이 그대로 화차나 트럭에 실어 정부 나락 창고로 운반되는데, 그 도중에서 나락은 조금씩 누군가가 훔쳐가고, 대신에 같은 중량의 벽돌이나 콘크리트 덩어리 등이 섞인다. 이렇게 규정대로의 중량인 '나락'이 정부 나락 창고로, 이어서 국영 정미소로 보내진다. 국영 정미소는 수도 주변에는 몇 곳 있는데, 이들은 모두 영국 식민지 시대에 인도인이 운영하던 고전적인 유럽형 정미소로, 그걸 버마 독립 이후에 정부가 접수해 국유화한 것. 19세기제 연통 보일러와 왕복으로 움직이는 증기기관으로 구동되는 구식 기계로, 갱신도 추가도 되지 않고 유지 수리도 불완전해서 성능은 열악하며, 실능력은 표시 능력보다 훨씬 떨어진다(그림36). 예전엔 국내에 정미 기기나 동력 장치의 제조·수리 공정도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사라졌다. 

 

그림36 버마(현 미얀마)의 정부 정미소. 사진으로 보면 훌륭하지만 노후화되었다.

 

 

정부 나락 창고에서 정미소로 운반된 '나락'이 트럭으로부터 쏟아질 때, 우선 최초로 나오는 것은 나락에 다소 섞인 흙이나 점토나 벽돌 등. 삼각주 지대이기에 돌이나 모래는 적다. 이에 혼재되어 있는 나락을 선별해 정미 설비에 유입시키는데, 나락의 품질과 정미소의 성능이 함께 낮기에 그곳에서 산출되는 백미의 품질은 당연히 열악·불균일해진다.

 

 

 

쌀 수출의 괴멸

이렇게 생산된 백미가 국내 소비자에게 배급되거나 군인이나 관리에게 현물 급여로 주어지거나, 또 그 일부는 수출하게 된 것이다. 이 나라 외화 수입의 중요한 기둥은 쌀 수출이었기 때문에, 양질의 쌀은 우선적으로 수출용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쌀 수출 확대'란 구호와는 달리, 군정 시대 버마의 쌀 수출은 침체가 극심했다. 과거에는 연간 수백만 톤의 쌀을 수출해 쌀 수출량 세계 1위 자리를 태국과 다투기도 했지만, 몇 년 동안의 군정 시절 내내 쌀 수출량은 계속 떨어져 거의 제로에 다다랐다. 그 이유는, 수출 계약을 한 쌀의 품위가 지켜지지 않고 품질이 조악했던 점, 게다가 계약서에 기재된 납기·수량 및 기타 조건이 지켜지지 않으며 수출항에서의 체선료가 눈에 띄게 증가한 점, 수속이 만사 관공서의 일로 진척이 없는 점 등 셀 수 없을 정도의 서툼이 겹쳐 여러 나라로부터 쌀 수출국으로는 더 이상 상대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내 유통 쌀의 품질

정부가 국내에서 배급한 백미는 각종 이물질과 이종 곡물이 혼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방아 정도는 고르지 않으며 부착 쌀겨의 산화로 악취를 발생시켜 매우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이를 구매한 소비자는 다시 한번 이것을 햇볕에 말리거나 잘 씻거나 하고 나서 밥을 짓곤 했다.

농가는 공출 할당 달성 이후 자가 보유 나락을 처분하는 건 자유로웠지만, 그 나락을 백미로 찧는 건 정부가 지정한 삯방아 정미소를 사용하도록 지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곳들은 모두 장사진으로 며칠 대기. 그래서 상당수 농민은 존재하지 않아야 할 민간의 삯방아 정미소(엥겔베르그식 기계를 사용)를 찾아내 이용하거나, 때로는 손방아를 하거나 해서 이를 백미로 만들었다. 그 매갈이에는 에도 시대에 사용된 것과 같은 토매(그림 10 참조), 정미에는 방아 절구가 사용되었다.농민은 공출용 나락과 자가 보유용 나락은 다른 논에서 재배하고, 후자는 정성스레 다루어 품질은 뚜렷하게 좋다. 그래서 이렇게 하여 원시적인 방법으로 매갈이나 정미를 함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정미를 한 정부 배급미보다도 품질이 좋은 백미였다. 랑군(현 양곤) 시내에서는 농가가 자가 보유 나락으로 찧은 백미를 팔 수 있는데, 이건 배급미보다 훨씬 품질이 좋았기에 사람들은 이를 다투어 구매했다(그림37).

 

그림37 농가 보유 나락으로 만든 백미를 시내에서 팔 수 있다. 찧는 법은 원시적이지만 배급되는 정부미보다 뚜렷하게 품질이 좋다.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사태, 특히 쌀 수출의 궤멸이라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한 정부는 공출 품질을 개선하기 위해 나락 매입소에 비치할 수 있도록 '나락 정선 장치'의 설계·개발을 정부 연구기관에 지시하고, 또 그를 위한 국제 원조도 기대하고 있었지만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만일 그러한 장치가 생기고, 그것이 실제로 나락 매입소에 배치되었다고 하더라도 문제가 해결될 리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다. 워낙 나락 수분계를 비롯한 현재 보유한 검사기기류를 사용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여기에서 정부의 나락 매입부터 백미 배급이나 수출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살펴보면, 이 뿌리에 있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농민이 생산하는 나락의 품질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평가되지도 않는다'는 점에 있음이 분명하다. 물건의 질이 문제가 되지 않으면, 원래 상품 유통이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서로 속이는' 주고받음이 되고, 도의 등이 나올 길이 없다. 이 문제의 해결에, 더구나 해외의 사소한 '기술 원조' 등이 도움이 될 리도 없다. 근본적 문제를 그냥 넘기고 모든 문제를 '기술' 탓으로 돌리는 것은 여기만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거기에서 말하는 '기술'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쌀 증산의 전망

아시아 벼를 옛날부터 재배하던 마다가스카르 섬이나 훨씬 예전부터 아프리카 벼를 재배하던 서아프리카의 일부 지역 등을 제하고는 아프리카에서는 쌀농사의 역사가 비교적 새롭다. 그러나 최근, 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에서는 전통적 먹을거리 대신에 쌀이 애호되어, 그 소비량이 뚜렷하게 늘어났다. 그 대부분의 국가들에서는 국산 쌀만으로는 그 소비를 조달하지 못하여 수입 쌀에 의존하는 일이 많아져 외화 부족의 한 요인이 되고 있다. 현재,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정부는 쌀의 국산을 장려하고, 많은 나라에서는 쌀의 생산량이 서서히 또는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쌀 증산 속도는 쌀의 소비 증가 기세를 도저히 따라잡지 못하여 해마다 그 차이가 계속되고 있다. 아프리카 전체적으로 쌀(백미)의 연간 생산량은 최근 30년간(1990~2020년) 약 500만 톤에서 2000만 톤으로 4배 증가했지만, 쌀 소비량의 증가세는 그것을 훨씬 웃돌아 같은 기간 500만 톤에서 3500만 톤으로 7배 증가했다. 아프리카 전체적으로 쌀 생산의 신장은 소비의 증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 동안 1인당 쌀의 연간 소비량은 계산하면 약 15킬로그램에서 30킬로그램으로 배증하고 있다. 

독자의 대부분은 아프리카의 나라 이름에는 별로 친숙하지 않을 테지만, 그 어느 나라와 관련이 있는 분도 계실 듯하기 때문에 사하라 사막보다 남쪽의 아프리카 여러 나라인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SSA)의 국가들을 그림38에, 나라별 최근 10년 동안의 인구·쌀농사 면적·쌀의 수확량·쌀의 수입량 등을 표1에 나타냈다. 이 표에서 알아차릴 수 있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①인구는 23개국 합산하면, 10년에 약 31%의 증가율(연당 증가율은 약 2.7%). ②나락 생산량은 10년 동안 약 2·1배로 증가. 그러나 인구증가가 있으므로, 국민 1 인당으로는 약 1·5 배 증가에 그친다. ③수확 면적은 23개국의 합계를 기재하고 있는데, 천수답 지역에서는 강우 시기나 강우량 등에 좌우되기 때문에 연간 변동이 상당히 클 것으로 추정된다. ④단위면적당 수확량은 극히 낮은데, 미량이지만 증가하고 있다. ⑤생산 나락에서 백미로 환산한 국민 1인당 백미 공급량은 연간 약 31kg이지만, 수입 백미를 여기에 더하면 연간 약 59kg이 되어 생산량의 2배 정도의 수요가 있다.

 

그림38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나라들

 

 

 

 

쌀의 생산이 소비를 따라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얼까?

현재, 쌀 생산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는 것은 당장 쌀 생산이 농민에게는 '수지가 맞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이 수요 증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농민에게는 쌀 생산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그만큼 충분하지 않다는 것도 보여준다.

왜 그럴까? 아프리카 전토를 조망하면, 자연환경이 쌀의 재배에 알맞지 않은 지역도 있는데, 무논 지대가 펼쳐진 지역에서도 그 쌀 증산의 행보는 쌀 소비의 증가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로, 불안정한 빗물에 대한 의존, 관개 설비의 지연, 무논농사 경험·지식의 부족, 농민 상호 협력의 불충분함 등 여러 가지 생각할 수 있는데, 쌀 생산이 소비를 따라잡지 못하는 훨씬 결정적인 이유는 "쌀농사가 농민에게는 충분히 수지가 맞는 것이 아니다"라는 점일 듯하다. 만약 쌀농사가 농민에게 충분히 돈벌이가 되는 것이었다면, 설사 쌀농사가 금지되더라도 쌀 생산은 훨씬 급속히 계속 늘어났을 듯하다. 마치 양귀비 재배가 아무리 금지되어 엄한 형벌로 위협을 받더라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듯이.

현재 탄자니아, 케냐, 가나 등의 농민은 서로 물싸움을 하면서도 쌀농사를 경쟁하고 있다. 그건 그곳에서는 쌀농사가 충분히 돈벌이가 되기 때문일 듯하다. 그 반대로 쌀농사가 농민에게 충분히 수지가 맞는 일이 아닌 지역에서는 아무리 정부가 쌀 증산 구호를 외치며 벼 우량품종을 추천해도, 비료나 농약 등의 사용을 장려하고 알선해도, 또는 재배기술의 보급에 노력해도, 쌀농사의 기계화 등을 권고해도 그것은 급속히 늘어나지 않는 듯하다. 농민은 그외의 훨씬 돈벌이에 좋은 작물이 있으면 쌀보다는 그것을 농사짓는 걸 택한다. 그런 일은 당연한 것으로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이 자주 잊혀진다. 

 

 

 

쌀을 수입함에 따른 위험성

현재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쌀 소비 확대에 생산이 따라가지 못하며 막대한 수입 쌀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그림 39). 그것은 외화의 유출뿐만 아니라 식량 안전 확보에도 중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불안정함을 증가시키는 지구 환경이나 국제관계 속에서 주요 식량을 원격지에서의 대량 수입에 의존하는 것은 언제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지 모른다. 과거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옥수수, 카사바, 거친 곡물, 얌 등 현지산 식품이 주요 식량이었지만 이제 쌀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림39 시장에서 판매하는 수입 쌀(가나)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의견이 있을 듯하다. 곧, "일부러 무리해서 쌀의 자급을 확보할 필요는 없다. 다른 훨씬 유리한 상품 작물이나 자원이 있다면, 그것을 부지런히 생산해 수출하고 외화를 벌어놓기만 하면 쌀 등은 얼마든지 수입할 수 있다"는 식이다.

그에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세계의 주요 곡물 가운데 쌀은 밀과 옥수수 등에 비해 국제 유통량 비중이 특히 낮은 곡물이다. 그래서 수급 상황에 따른 국제 가격의 변동도 매우 심하다. 아무리 돈을 쌓아 놓았어도 대량의 쌀 수입이 어려운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일찍이 일본이나 인도네시아 등이 대량의 쌀을 수입해야 했을 때 등의 시기에 그를 조달하는 데 고생을 했다.

그래서 대량으로 쌀을 소비하는 나라일수록 그 자급을 확보해 두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그런데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는 그 잡연조건이 쌀의 생산에 적합한 지역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생산이 소비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것은 왜일까?

 

 

 

쌀의 생산 부족과 그 품질 열악의 이유

이에 대해서,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쌀 증산을 지원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설명한다.
"아프리카에서 쌀 생산이 늘지 않는 것은 맛이나 품질 문제 등 때문에 국산 쌀이 소비자의 요구에 맞지 않아 농사지어도 팔리지 않기에 농가는 생산을 확대하지 않으려 한다"고 기술하고, 그 때문에 "농가는 돈을 벌 수 있는 확증이 없는 쌀농사를 위해 비료나 농기계 구입, 관개 시설의 유지관리 등에 돈을 들이면서까지 생산량을 올리려는 의욕이 없다"고 한다. 이러한 설명을 곧이곧대로 듣는 사람도 많을 것 같은데, 그건 사실일까?

확실히 아프리카 대부분의 마을에서 팔리고 있는 현지산 백미는 돌이나 모래나 나락이나 이물질 등을 많이 포함하고, 품종도 방아 정도도 균일하지 않은 것에 많은 불만이 나오고 있다. 또한 현지인들의 기호에 맞을 만한 품종이 별로 팔리지 않는다고도 한다. 왜 그런걸까?
그 이유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쌀 품종이나 질 좋은 나락을 집하해 정미하여 파는 사회 상황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깨끗하고 균일하며,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백미를 만들 수 있는 양질의 나락만 집하할 수 있다면 금세 해결된다. 그러나 농민이 어떤 나락을 생산하더라도 그것을 거의 비슷한 가격으로만 팔 수밖에 없으니, 농민에게 그렇게 할 의욕이 생길 리 만무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농민에게는 쌀농사가 별로 이익이 되지 않고, 따라서 증산 의욕이 별로 없다. 그리고 동시에 나락의 품질이 나쁘기 때문에 유통 쌀의 품질이 저하된다. 그래서 수십 년 전부터 '영세 농민이 파는 나락의 품질을 평가하고, 품질에 상응하는 가격으로 매입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계속해 왔지만, 그건 이미 본 바와 같은 이유로 실현하기 곤란했다.
이러한 가운데, 본래는 농가의 자가 보유 쌀을 정미하는 데 지나지 않는 농촌 정미소의 역할이 다시금 평가받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건 실제로 아시아 지역 전반뿐만 아니라 세계의 영세 쌀농사 지역에서, 또 이미 아프리카의 일부 지역에서 훌륭하게 기능하고 있다(그림 40).

 

그림40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농촌 정미소(위)과 길거리에서 파는 현지산 쌀(아래). 이와 같은 엥겔베르그식 기계 1대뿐인 정미소는 탄자니아에서 이제는 사라져 가고 있다. 현지산 쌀의 품질은 나쁘지 않다.

 

 

여기서 다시 부언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열악하고 불순한 나락을 집하해 놓고 그걸 정미해 만들어진 동일하게 열악한 질의 백미를, '진보된 정미 가공 기계를 사용해 양질의 백미로 완성한다'는 것은 경제적으로는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석발기를 사용해 쌀에 혼입된 돌을 제거하거나 색채 선별기를 사용해 이종 곡물이나 변색미를 제거하거나, 각종 선별기를 사용해 싸라기 등을 제거하거나 하는 건 기술적으로는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수단에 지나지 않고, 양질의 나락으로 백미를 만들 때의 몇 배나 되는 수고와 경비가 들고, 게다가 그 효과도 불완전하다. 그건 마치 아이가 실패한 습자를 지우개나 수정액으로 고치려는 것과 같다. 왜 일부러 그러한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걸까? 처음부터 양질의 나락을 집하한다는, 훨씬 싸고 소비자도 농민도 행복해지는 방식이 있는데.

그러한 일에 소비하는 헛된 노력과 돈은, 더 나은 사용법을 한다면 수십, 수백 배로 살아날 것이다. 투하한 시간이나 금액의 크기를 가지고 개발원조의 성과를 평가하겠다는 것이라면 얘기가 다르지만 말이다.

 

 

 

'벼농사 저택'이 세워진 탄자니아

아시아의 영세 쌀농사 지대에서는 현재, 농촌 정미소가 존재하는 건 당연한 일이고, 그것이 질・양 모두 건전한 유통 쌀 생산의 은연한 버팀목이 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도 각 지역에서 쌀 재배가 시작되고 그것이 확대됨에 따라, 일부 쌀농사 지역에서는 농촌 정미소가 생기고 있다. 그러나 그 상황은 천차만별로 지역에 따라, 나라에 따라 제각각인 듯하다.

탄자니아에서는 그 많은 관개 쌀농사 지역에서 이미 농촌 정미소가 지붕을 나란히 하고 있다. 그리고 그동안의 경쟁에 의하여 삯방아 요금도 저렴해지거나, 설비도 서비스도 급속히 향상되어 가고 있다(그림41, 그림42). 정미소에 따라서는 삯방아를 의뢰하러 오는 고객의 편의를 위하여 나락의 건조장을 만들고, 그것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등의 서비스를 하는 곳도 있다고 하는 건 앞에 기술했다. 

 

그림41 탄자니아에서 사용되는 콤바인과 농촌 정미소의 예.

위: 벼베기 품삯의 급등으로 콤바인에 삯을 내고 하는 벼베기가 일반화되어 가고 있다.

아래: 고무롤식 도정기와 분풍마찰식 정미기를 조합시킨 일체형 정미기. 원형은 일본제이지만 중국제 모조품이 압도적이다. 

 

그림42 상업 정미소의 시설에 필적하는 농촌 정미소도 나타나고 있다.

 

 

탄자니아에서도 농촌 정미소를 신설하는 데에는 정부의 '인가'가 필요한데, 그건 예외없이 주어지고 특별한 조건이 필요하다거나 하는 건 없는 듯하다. 

여기의 농민 사이에서는 나락을 농촌 정미소에서 백미로 만들어 팖에 따라서 쌀농사의 이익은 나락 그대로 집하 상인에게 파는 경우에 비교해 배증한다고 하며, 쌀이 경제적으로 매우 유리한 작물이 되고 있다. 그에 더하여, 한눈에 보아 품질이 명확한 백미를 팖에 따라서 농민은 매수인과 가격 교섭을 할 수 있으며, 나아가 스스로 시황을 판단하는 등의 기술을 익히고 있다. 이건 농민이 눈앞의 득실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종합적인 판단력을 발달시키도록 한다는 걸 의미한다. 이러한 농민의 능력 발전·전개는 일본 농민의 예에서도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탄자니아에서는 쌀농사 농가가 지금까지의 진흙이나 햇빛 건조 벽돌의 집에서 구운 벽돌이나 블록의 집으로 재건축하는 사례가 속속 나타나고 있다. 현지 일본인은 이것을 '벼농사 저택'이라고 부르며, 오랜 세월에 걸친 일본의 무논 조성부터 재배 지도 등의 지원 성과가 나타난 것으로 현지인과 함께 기뻐하고 있다. 농민의 쌀농사에 대한 의욕은 매우 높아, 국가 전체적으로도 쌀의 생산은 순조롭게 매년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쌀농사 경영 면적의 확대와 함께 트랙터나 콤바인의 수요도 증가해, 그들 농기계의 활동을 용이하게 하는 포장이나 도로의 정비가 검토되고, 또한 각지의 천수 쌀농사 지역에 대한 관개 계획이 진행 중이다. 

탄자니아만이 아니라 케냐나 우간다에서도 농촌 정미소의 발전에 따라 쌀농사 농민은 그 이익이 늘어나기에 쌀농사의 의욕이 왕성해지고 있다 한다. 

그러나 우간다에서는 어느 지역의 농민은 가끔 "이들 지역에서는 농촌 정미소의 수가 적기 때문에 나락의 판매가가 싸서 곤란하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이 일은 농촌 정미소가 가까이 존재한다면 농민의 나락 판매가가 자연스럽게 오른다는 점, 그리고 또한 그 지역에서는 그것이 아직도 부족하다는 점을 보여준다.

 

 

 

 

농촌 정미소의 발전을 제약하는 그럴싸한 조치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농촌 정미소의 설립 수속이다. 각국 모두, 농촌 정미소의 설립에 대해서는 관청의 '승인'이라든지 '허가'가 필요한데, 그것이 실질적으로는 '신고' 또는 '등록'에 지나지 않으며 기계적으로 수리된다면 문제는 없다. 

그러나 만약 그 '허가'의 취득이 곤란하다면, 수카르노 시대의 인도네시아와 마찬가지로 실질적으로는 '금지'와 같은 의미가 된다. 그건 기존 소수의 농촌 정미소나 나락 집하업자의 독점·폭리를 보호하고, 방아삯의 저하도 정미 기술이나 서비스의 개선도 저해하는 것이 된다. 

농촌 정미소가 전혀 없든지, 또는 있더라도 그 수가 적은 채로는 농촌 정미소의 서비스가 개선되지 않고, 농민의 이용은 확산되지 않으며, 농민에게는 여전히 나락 그대로 매도하는 수밖에 선택지가 없다. 이러한 상황을 간과해 놓고 쌀 증산이라든가 백미의 품질 개선 등을 아무리 주창하더라도 마치 소쿠리에 물을 붓는 격이어서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때로는 표면적으로는 '농촌 정미소의 신설은 언제든지 허가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허가 조건'이 당국자의 재량에 따라 마음대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있다. 예를 들면,
·해당 지역의 나락 생산량을 초과하는 정미 능력의 설비는 불허가
·해당 지역의 기존 동업자의 동의가 필요
·소음·먼지·기타 인근 주민에게 폐가 되는 것은 불허가
·국산의 특정 기계를 쓰지 않는 정미소는 금지
·효율이 떨어지는 정미 기계의 사용은 원료나 동력의 낭비이므로 성능의 승인이 필요
·고용 확보를 위해 OO명 이상의 고용이 필요
·교통 혼잡 지역이기 때문에 건설 금지
·사용 전력이 지역의 전력 확보에 장애가 되지 않음을 보증

등등 정미소 설립을 제한하려고 생각하면 얼마든지 제멋대로인 조건을 달 수 있다. 이들 몇 가지의 조항 등은 실상 신설을 거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또한 '허가는 준다'고 구두로는 이야기하지만, 허가증의 교부가 한없이 늘어지는 등 실질적으로는 신설을 할 수 없는 예가 있다.

이와 같은 조건에서는 쌀농사 농민의 이익은 지켜지지 않는다. 이러한 나라·지역에서는 아무리 쌀의 증산이나 쌀의 품질 개선을 주창하더라도 그것이 진행되는 걸 기대하는 건 좀처럼 무리일 듯하다.  

 

 

 

케냐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케냐에서는 오래전부터 쌀의 소비가 늘어나고 있지만, '쌀의 자급자족 정책'이라는 선전으로 1980년대에 농민은 생산한 나락을 모두 정부에 매도하는 것을 의무화했다. 정부에 의한 나락 매입에 대해서는 (민간업자에 의한 나락의 매입이란 경우와 마찬가지로) 나락의 품질 평가가 이뤄지지 않아 매입 가격(단가)은 일률적이고 매우 저렴했다. 따라서 국내에는 쌀의 생산 적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쌀을 생산하는 농민은 점점 줄어들었다.

정미소의 민영은 금지되어 있고, 정부가 매입한 나락은 모두 국영 정미소에 의해 정미되었지만, 그 설비는 50년 이상 전의 것으로 갱신되지는 않았으며 성능은 낮았다. 이곳에서 찧은 백미가 일반에게 팔렸지만, 가격이 비싼데도 품질이 낮아서 소비자는 외면하고 외국산 쌀의 수입이 증가해 갔다.

쌀농사 지역 부근에 사는 주민이 쌀을 농사짓는 농가에서 정부 매입 가격과 같은 가격으로 나락을 사서 그걸 허가 받지 않은 삯방아 정미소에서 정미하면 시중에서 팔고 있는 정부미의 절반 이하의 가격으로 쌀을 구했다 한다."쌀의 수요는 국산 쌀로 충당한다"는 명분에서 시작된 이들 정부 정책이었지만, 실제로는 관료 통제·부패에 의하여 전혀 다른 효과를 가져왔다. 현재 케냐에서는 정부의 이러한 쌀 통제가 폐지돼, 농민은 생산한 나락을 자유롭게 어디서나 팔 수 있게 되고, 또한 민간 정미소도 설립할 수 있게 되었다. 쌀농사 농가는 생산한 나락을 쌀로 만들어 팔 수도 있게 되어 증산 의욕이 뚜렷하게 증진되었다. 이러한 정책 변경의 결과, 이 나라의 쌀농사 농가는 노력을 보상받게 되어, 지금은 훌륭한 기세로 쌀의 생산이 증가해 가고 있다.
이들 여러 사례는 아프리카든 어디든 쌀농사 발전을 위해서는 '쌀을 농사지으면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좋은 나락을 농사지으면 더욱 이익이 늘어난다'는 것을 농민 자신이 실감할 수 있는 상황이 필요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것을 보여준다.
쌀농사의 발전을 생각하기 위해서는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고 '기계화가 필요하다'거나, 이런저런 '기술적 개선이 불가피하다' 등이라 하기 전에 먼저 지금 쌀을 실제로 농사짓는 농민은 어떤 입장에 놓여 있는지,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직시할 필요가 있다.
 

 

 

 

지금 아프리카에 필요한 것은 무얼까?

일본의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 대한 쌀 증산 원조는 관개 정비, 개량 품종의 선발·보급, 수확 후의 조제기를 포함한 기계화 등이 1970년대부터 아시아의 쌀 생산 지대에 대한 지원과 마찬가지로 행해져 온 지 벌써 반세기에 이른다. 그리고 현재,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쌀 증산 노력을 지원하는 한 도움으로 "일본의 쌀농사 기계화를 참고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쌀농사 기계화를 원조한다"고 하는 개발 원조 계획을 추천하고 있다. 지역에 따라서는 그것도 유효할 듯하다. 그러나 경영 규모가 큰 농장에서는 필요에 따라 그것을 자력으로 할 수 있기 때문에, 개발 원조의 대상은 되지 않는다.
압도적 다수인 영세 쌀농사 농민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벼를 재배하고 쌀을 생산함으로써 그 이익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일 듯하다. 이미 기술했듯이, 현재 아프리카 유통 쌀의 품질이 열악하다는 것은 아프리카 각지에서 쌀농사가 발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이 그 혜택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상황하에서는 농민 사이에 쌀의 증산이나 그를 위한 기술적 개선의 노력 등이 생겨날 리도 없다. 마찬가지로 영세한 규모의 쌀농사라고 해도, 아시아 국가에서는 그런 상황을 볼 수 없다. 기술적 개선도 진행되어 농민은 상응하는 품질의 나락을 생산하고, 그로부터 생기는 유통 쌀도 수출할 수 있는 품질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왜일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기술한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영세 농민에게도 쌀농사가 유리하면 가만히 있어도 농민은 스스로 궁리한다. 좋은 품종을 심고, 재배 기술을 개선하며, 생산량을 높이는 데 힘쓰고, 경영 규모를 확대하거나, 관개 상황을 개선하거나, 재배 기술을 개량하거나, 농기구를 개선하거나, 농기계 도입도 고려한다. 이는 1970년대 인도네시아 쌀농사의 급격한 진전 사례로도 유추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이 되면 기계화 추진 계획도 나름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실제로, 예를 제시한 것처럼 이미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나라도 있다.

하지만 지금 아프리카 많은 지역의 영세 쌀농사 농민은, 매우 싼 가격으로, 품질과는 관계없는 가격으로 볍씨를 팔 수 밖에 없고, 따라서 쌀농사로부터 얻는 이익이 낮아 그 확대에도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소규모 나락 거래에서는 나락의 품질이 무시되고, 그것은 '나락으로는 그 품질을 육안으로 파악알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한다. 그 결과, 나락의 품질 개선이 전혀 보상을 받지 못하고, 농민에게는 나락의 품질 향상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 아무리 좋은 품질의 나락을 생산해도 균일한 가격으로밖에 팔리지 않는다.이러한 상황을 타파하는 데에는 농민이 '나락을 백미로 만들어 팔 수 있다'는 선택지를 얻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유일하고 현실적인 방법일 듯하다. 그 일 없이, 정부에 의한 '나락의 최저 매입 가격' 설정이나 '나락이나 쌀의 품질 규격'의 제정 등을 해도 효과가 없다는 것은 과거의 역사에서 실증이 끝난 일이다.나락을 정미해 백미로 만들어 보면, 좋은 품질의 나락에서는 좋은 품질의 백미를 얻을 수 있고, 그건 비싼 시장 가격을 얻는다. 곧, 나락을 쌀로 만들어 팔 때는 쌀의 품질 상응 판매가를 얻을 수 있다. 좋은 품질의 나락을 생산하는 농민은 높은 이익을 얻기에, 쌀농사에 열심이 되어 쌀의 생산은 자연스레 늘어난다. 

이를 가능하게 하려면 농촌 정미소의 자유로운 설치를 허용해, 농민이 나락을 백미로 만들어 팔 기회를 얻도록 하면 된다. 거기에는 아무런 보조금도 정책적 유도도 필요하지 않다. 권력 등에 의한 방해만 없다면 가만히 있어도 농촌 정미소가 자연스럽게 늘어나 농민은 이를 이용한다. 그 실례를 보고 싶다면 쌀을 농사짓는 아시아 국가들을 방문해 보면 된다.

농민이 '나락을 백미로 만들어 파는' 경험을 쌓으면 농민은 나락의 품질 개선에 열심이기 때문에, 상업 정미소의 수매 나락 품질 또한 개선된다. 따라서 유통 백미 전반의 품질이 향상된다. 이렇게 해서 쌀 생산 증대도, 쌀의 품질 향상도 동시에 달성된다.

그런데 만약 기존 정미소나 유통업자나 그와 결탁한 관료 등이 그럴듯한 구실로 농촌 정미소의 신설·증가를 방해한다면 농민은 쌀을 나락 채로 팔 수밖에 없고, 영세 농민에게 쌀농사는 여전히 '별로 돈벌이가 되지 않는 것'에 그친다. 그러한 조건에서는, 농업 기계화는 고사하고 쌀농사의 발전을 바라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인도네시아, 버마(현 미얀마),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의 경험은 이를 보여준다. 아프리카의 아무개 나라에서도 그러한 실패의 전철을 밟으려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염려된다.

 

위와 같은 이야기를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일본을 방문한 정부 직원이나 기술자로 구성된 연수원들에게 이야기했더니, 그 한 사람으로부터 "이야기는 알겠다. 그러나 그중에는 허술하고 엉망인 농촌 정미소도 있기에, 그런 곳에는 허가를 내주지 않는 편이 좋지 않겠는가"라는 의견이 나왔다. 그의 출신국은 대형 정미업자와 관료의 '협력 관계'가 조밀한 나라이다.
이 의견에 대해 다른 나라의 연수원에게서 지체없이 반론이 나왔다. "농민은 바보가 아니다. 그런 정미소에는 아무도 가지 않기 때문에 금세 망하기에, 있어도 전혀 상관없다. 오히려 관공서가 외람되게 정미소를 선별하려는 일이야말로 문제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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