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일본에서만 행해지는 쌀농사 방법
세계에서 유일한 현미 유통
-쌀의 증산과 품질 개선의 요인
16~17세기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 동안 일본의 쌀농사 농가는 수확한 벼를 정선한 현미로 만들어 팔아 넘기고, 국내의 쌀 생산·유통·저장·수송 등은 모두 현미 형태로 행해졌다. 이는 '현미 유통'이라 부르고, 일본에서 '쌀의 양'이라 하면 주석이 없는 한 현미의 양으로 표시되어 있다. 물론, 소매나 소비의 단계에서는 소비자의 필요에 응하여 현미는 여러 정도의 '백미'가 된다(그림1).
그림1 벼이삭, 나락, 현미, 백미
출전: 星川清親 『解剖図説イネの生長」 18쪽, 288쪽, 298쪽을 고침
쌀(현미나 백미)의 양은 현재에는 중량(정확히는 질량)으로 킬로그램이나 톤으로 표시되어 있지만, 이는 2차대전 이후의 일로 그 이전에는 체적(1섬=10말=100되=1000홉. 1되는 약 1.8리터)으로 표시되었다. 현재에는 60킬로그램의 쌀을 가리키지만, 이는 체적으로 4말이었기 때문에 현미 1말의 중량은 약 15킬로그램이 된다.
단위 체적당 무게는 현미도 백미도 거의 똑같은데, 현미가 되기 전의 나락은 그 상태에 따라서 여러 가지이다. 이것이 나중에 보듯이, 쌀을 나락 상태로 팔 때 판매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경우가 있다.
에도 시대에는 농민만이 아니라 상공업자의 세금이나 무사의 봉록(급여)도 현미의 양으로 표시되었다. '카가加賀 100만 섬'이라고 할 때의 '수량'은 나락도 백미도 아닌 현미의 양이다. 일본에서는 지금까지도 '현미 유통'으로, 쌀의 도매 가격은 현미 60킬로그램의 가격으로 표시된다. 매매 단위는 가마니(또는 자루)에 담은 가마니 포장 현미이고, 그 1가마니마다 쌀의 품종명·생산지·생산년도·품질 등급 등이 명시되어 있다.
또한, 쌀의 생산량도 세계 각국에서는 나락 또는 백미의 양으로 표시되지만, 일본에서는 현미의 양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래서 일본의 현미 유통을 알지 못하는 방일 외국인과 이야기할 때 종종 오해를 일으키거나, 환산에 품이 들곤 한다. 또 일본인도 단위면적당 쌀의 수량을 외국과 비교할 때 종종 틀린다.
일본 이외의 세계 각국에서는 쌀은 오로지 나락 또는 백미로 유통, 판매, 저장된다. 즉, '나락 유통'과 '백미 유통'이다. 그곳에서 현미는 나락을 백미로 만드는 과정에서 한 순간 나타날 뿐이기에, 현미 등이란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모르는 사람도 많다. 또한 외국에서는 나락도 현미도 백미도 취사한 밥도, 나아가서는 논에 심어 놓은 벼도 모두 '쌀, 라이스'라고 부르는 일이 많기에, 외국인과 이야기할 때에는 주의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나락은 그걸 육안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겨 안에 있는 현미의 품질, 즉 가치를 알 수 없다. 이에 반해 현미는 그 품질을 (백미와 마찬가지로) 한 눈에 알 수 있다. 따라서 현미로 판매할 경우에는 좋은 품질의 쌀은 비싸게 팔린다. "품질이 곧 가치"이다. 그래서 일본의 농민은 몇 백 년이나 전부터 쌀의 품위 향상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재배 및 탈곡과 조제(수확 이후 처리) 과정의 기술적 개선은 그들의 수입에 직결된다. 농민은 좋은 종자의 입수나 재배법·수확 후 처리방법의 개선에 힘을 기울여, 그를 위한 정보 수집과 상호 협력(첫 이삭 뽑기를 하거나 종자를 교환하거나), 강습회 등이 농민이 살아 가는 데 필수사항이 되어, 농민의 규율과 지적 향상이 추진된다. 그중에서도 논에 물을 대기(논 관개) 위한 협력 조직이 수행한 역할은 크다. 이들은 일본의 농민이 근대적 산업의 담당자로서 즉시 도움이 되는 것으로 이어져,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한 근대화·공업화가 급속히 전개될 수 있는 주요한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탈곡하기 어려운 쌀 품종이 선택되어 왔다
2차대전 이후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선 베어 거둔 벼를 볏단으로 묶어 논에 만든 볏덕(稲架)에 걸어서 천천히 건조했다(그림2). 나락은 급속히 건조하면 쌀알에 균열을 일으켜 금간 쌀은 정미하면 싸라기가 된다. 그래서 금간 쌀이 현미에 섞여 있으면 현미의 등급 곧 가격을 낮추는 요인이 된다.
그림2 여러 가지 볏덕
출전: 清水浩 외 「日本における農村社会と農機具のかかわり」 56쪽
벼이삭을 볏짚에 붙은 채 건조시키면 나락에서 수분이 볏짚으로 이동하고, 나락은 천천히 건조되기에 금가는 걸 일으키는 일이 적다. 이렇게 건조한 볏단으로 탈곡(벼이삭에서 나락을 떠는 일)을 한다.
현재는 수확 작업에 콤바인이 쓰이기에, 벼베기와 동시에 탈곡되어 나락이 되고, 그 뒤 나락은 간헐식 건조기(뒤에 나옴)로 천천히 건조시킨다.
일본의 농민은 벼가 자라는 중의 벼이삭이나 베어 거둔 볏단에서 나락이 탈락되어 잃는 것을 아까워 해, 벼이삭에서 쌀알이 떨어지기 어려운 '탈립이 잘 안 되는' 특성의 품종을 오랜 세월에 걸쳐서 선택해 재배해 왔다. 그래서 일본 품종 벼는 다른 쌀보다는 탈곡이 곤란하여, 벼이삭을 건조한 뒤에도 후려치는 것만으로는 완전히 탈곡할 수 없다.
외국 대부분의 벼는 벼이삭을 건조하지 않아도 베어낸 직후에 이삭을 통나무 등에 후려치거나, 또는 이삭을 젓가락 등으로 훑거나 해서 탈곡할 수 있다(그림3). 그래서 영어로는 탈곡하는 일을 threshing이라 한다. 쓰레쉬란 '친다'는 것이다.
그림3 후려치는 탈곡
촬영: 필자
여러 외국에서는 이렇게 후려치는 탈곡 이외에, 베어 거둔 벼를 자리나 점토로 단단히 다진 지면 위에 깔고 인간이나 가축이 밟아서 탈곡하는 일이 있다. 대량으로 탈곡하고 싶을 때는 지면에 볏단을 둥글게 깔고서 가축이나 경운기나 트랙터 등이 그 위를 밟고 돌아다니면 탈곡할 수 있다. 이 경우, 가축이나 경운기, 트랙터 등에 롤러나 썰매, 짐차 등을 달아서 밟는 일도 있다(그림4).
그림4 밟아서 하는 탈곡 작업
이에 반해 일본의 벼는 설령 충분히 건조하더라도 두드리거나 밟거나 하는 것만으로 완전히 탈곡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옛날에는 '벼훑이'(그림5)를, 이어서 '홀태'(그림6) 등의 탈곡용구를 사용했다.
그림5 벼훑이를 쓰고 있는 모습
출전: 그림2와 같음, 57쪽
그림6 홀태를 쓰고 있는 모습
출전: 그림2와 같음, 58쪽
이들은 여러 외국과 같이 벼이삭을 후려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벼이삭에서 나락을 빗살 같은 것으로 '훑어서 떠는' 것이다. 홀태는 그때까지의 벼훑이의 몇 배나 능률이 좋아, 벼를 훑는 부업을 하는 부인의 일자리를 빼앗았기에, '과부 쓰러뜨리기(後家倒し)'라고도 불렀다.
홀태는 개량을 거듭하면서 오래 사용되었는데, 20세기 초두부터는 그것이 회전식 족답 탈곡기(그림7)로 대신하게 되고, 이어서 동력 탈곡기가 쓰이게 되었다. 그들 용구·기계류에 의해 탈곡 작업의 능률이 올라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탈립으로 잃어버리는 것도 줄어들거나, 또 쌀의 품질도 좋게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7 족답 탈곡기
일본의 재배 벼는 탈곡하기 어렵기에 이러한 탈곡용구가 쓰였는데, 여러 외국에서는 탈곡이 용이한 벼 품종이 재배되는 일이 많다. 그런데도 '일본의 기술 이전'이라 하면서 홀태나 족답 탈곡기 등을 도상국에 무차별적으로 소개, 보급하려는 시도를 보는 경우가 있다. 이는 선의이기는 하나 쓸모없는 이야기이다.
일본과 외국의 콤바인
현재 아시아나 아프리카 여러 나라의 영세 쌀농사 지대에서도 젊은이의 농촌 이탈, 농민의 고령화나 사회·경제 성장 등에 더해 기계의 가격이 저렴해지고 있어 '콤바인'(곡물을 베고 탈곡을 동시에 행하는 기계)의 보급이 진행되고 있다.
여기에서 주의할 필요가 있는 건, 구미의 콤바인과 일본에서 사용되는 보통형 콤바인과는 탈곡부(벼이삭에서 나락을 분리하는 장치)의 기구가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구미의 것은 주로 탈곡이 용이한 밀용으로 개발되었기에 벼이삭을 '두드려서' 탈곡하는 데 반해, 일본의 벼용(보통형) 콤바인은 홀태나 족답 탈곡기와 마찬가지의 '훑어 떠는' 방식이 사용된다.
이상은 이른바 '보통형 콤바인'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이것과는 별도로 일본 국내에서는 '자탈自脱 콤바인'이라 부르는 기계가 널리 사용된다. 이는 일본에서 개발된 벼베기 기계와 자동탈곡기('자탈'이라 약칭)을 합체시킨 듯한 것으로, 베어 거둔 벼의 이삭 부분만을 탈곡 장치에 삽입해 탈곡하는 것. 이것은 필요 마력이 작고, 또 볏짚을 모아서 배출하기에 볏짚의 이용에는 안성맞춤이다. 그러나 보통형 콤바인보다 구조가 복잡하고 능력당 가격이 비싸다. 이 형태의 콤바인은 영어로는 head-feed combine 등이라 부른다.
일본인은 이 기계를 자랑스럽게 여기며 외국에도 무차별적으로 도입하려 하는 일이 있는데, 탈곡이 쉬운 여러 외국의 벼에는 베어 거둔 이삭이 탈곡부로 이동하기 전에 진동을 주게 되기에 이삭에서 나락이 탈락해 탈곡 이전에 대부분의 벼알을 잃어 버린다.
일본에서만 행해지는 농민의 매갈이 작업
일본의 전통적인 쌀농사에서는 건조된 벼이삭에서 탈곡한 나락은 이어서 매갈이, 곧 '나락에서 겉껍질을 벗겨 현미로 만든다."
일본 이외의 여러 외국에서는 농민은 수확한 쌀을 나락 그대로 팔아 버리기에, 농민은 매갈이 작업을 할 필요가 없다. 그건 정미소의 일이다. 그래서 외국의 농민은 일본의 농민보다 훨씬 일이 적지만, 그 득실에 대해서는 나중에 논하겠다.
매갈이 작업에는 옛날에는 목제 절구에 건조한 나락을 넣고 나무공이로 찧었다. 딱 떡을 찧을 때처럼. 그러나 찧어도 모든 나락이 한번에 현미로 바뀌지는 않고, 어느 정도의 나락은 남는다. 더구나 계속해서 찧으면 현미가 상해 부수어진다. 그 때문에 어느 정도 찧으면 나락과 현미의 혼합물을 절구에서 꺼내, 우선 겉껍질을 불어 날리고(이를 날려고르기라 함), 그걸 '흔들판'(그림8) 등을 써서 현미와 나락으로 분리하고, 나락은 다시 절구에 넣고 찧는다. 이를 반본해서 꽤 순수한 현미를 얻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상당한 나락이 분쇄되어 잃게 되고, 또한 이렇게 만든 쌀은 현미와 반매조미쌀(부분적으로 쌀겨가 벗겨진 현미)의 혼합물로, 반매조미쌀은 며칠 만에 산화되어 악취를 풍기게 되기에 장기 보존할 수 없다.
그림8 흔들판(현미와 나락의 분리)
출전: 「農具便利論』
표면에 흠집이 없는 '순수한' 현미나 현미에서 쌀겨를 완전히 제거한 백미는 상당한 기간 저장할 수 있지만, 쌀겨를 어중간하게 제거한 현미, 곧 반매조미쌀이나 7분도 쌀 등은 장기 저장할 수 없다. 현미 표면의 쌀겨층이 상하게 되면 그곳부터 쌀겨가 급속히 산화되기 시작해, 며칠 만에 악취를 풍기게 되기 때문이다.
현미의 쌀겨층이 파괴되거나, 또는 쌀겨가 현미에서 분리되거나 하면, 쌀겨에 20% 정도 포함되어 있는 기름기가 급속히 산화하기 시작해 이상한 냄새를 풍기고 사람과 가축에게 유해한 유리지방산이 된다. 그 산화 과정은 온도가 높은 만큼 급속하다. 그래서 열대에서는 현미 저장 등은 어렵다. 그 반대로, 에도 시대는 현재보다도 평균 기온이 몇 도 낮았기에, 현미의 품질 유지에는 유리했을 듯하다.
현재의 고무롤식 도정기(뒤에 나옴) 등으로 정성껏 매갈이한 현미라도 그 쌀겨층은 약간은 손상되어 있다. 비록 저온창고에 보관하더라도 현미의 저장 가능 기간은 나락에 비해 짧다. 하물며 그 이전의 원시적인 매갈이 용구로 매갈이한 현미는 그 표면이 상처투성이이기 때문에, 비록 짧은 저장 기간이라도 상당히 열화가 진행되었을 것이다.
현미를 분도(7분도, 5분도 등)로 만든 쌀은 순수한 현미보다도 일찍 산화가 진행되기에, 에도의 쌀 소매점에서는 현미를 도정하지 않고 그대로 저장하고, 판매할 때 도정해서 백미로 만들었다. 즉, 소비자는 분도 쌀이 아니라, 잘 도정된 백미를 먹었다. 각기는 비타민 B1의 부족으로 일어나는 병인데, 이 비타민은 쌀겨에 풍부히 함유되어 있다. 그러나 백미는 쌀겨를 완전히 제거하기에, 비타민 B1 전혀 포함하지 않는다. 그래서 백미를 주식으로 하는 사람은 다른 먹을거리에서 비타민 B1을 섭취하지 않는 한 각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에도 시대에는 도시 주민은 종종 각기가 되어, 그것이 '에도 병' 등이라 불렸다. 각기로 죽은 토쿠가와徳川 장군(이에미츠家光, 이에사다家定, 이에모치家茂)도 있다. 만약 그들이 백미가 아니라 현미라든지 분도 쌀을 먹었다면 각기가 되지 않았을 듯하다. 러일 전쟁에서도 병사가 오로지 백미를 먹었기에 각기에 의한 사망자가 전사자 수를 상회했다고 한다. 지금의 일본인은 여러 부식물에서 비타민 B1을 섭취하고 있기에 아무리 백미를 먹더라도 각기는 좀처럼 되지 않는다. 매갈이 작업에는 그 뒤 절구를 대신해 인력으로 위짝을 반회전(왕복 움직임)시키는 '목매'(그림9)를 쓰게 되었다. 이것이 어느 무렵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10세기 말에는 이미 쓰였다고도 한다.
그림9 매갈이용 목매를 켜는 모습
출전: 『大和耕作絵抄』
나아가 17세기 초 무렵부터는 위짝을 회전시키는 토매(그림10)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림10 버마의 매갈이용 토매. 위 그림은 겉모습, 아래 그림은 위짝을 빼놓은 것. 눈을 새긴 방법에서 알 수 있듯이, 회전방향은 위에서 볼때 반시계 방향이다. 켸이Kyei 또는 켸이손Kyeisone이라 부른다.
촬영: 필자
이들에 의해 매갈이 능률은 대폭 오르고, 절구를 이용한 경우에 비해 대폭으로 싸라기를 줄이게 되었다. 그러나 목매와 토매의 성능 우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아무튼, 이들에 의해 절구로 하는 경우보다 매갈이 능률은 오르고, 싸라기의 발생도 대폭 감소하고, 그로 만든 현미에 별로 상처가 나지 않으며, 거기에 반매조미쌀이 포함되는 것도 적어졌다. 이렇게 상당히 순수한 현미를 얻을 수 있게 되어, 그럭저럭 어느 정도의 기간 저장할 수 있게 되었기에, 토쿠가와 중기에는 본격적인 '현미 유통'이 가능해졌다고 한다.
쌀겨의 이용
현미를 쓿어서 백미로 만들 때 생기는 쌀겨는 유료 작물에 뒤지지 않는 일본에서는 귀중한 유지 자원으로, 거기에서 얻을 수 있는 쌀겨유는 널리 이용되었다. 쌀겨는 쌀알에서 깎여 떨어지는 순간부터 급속히 산화하기에, 가열에 의해 산화 산소를 파괴하고나서 착유한다.
에도 시대의 착유는 압착 방식이었기에, 쌀겨에 포함되어 있는 기름의 반분 정도밖에 짜내지 못했는데, 현재 일본에서는 대형 정미소에서 발생하는 쌀겨는 그날 안에 제유 공장으로 보내져, 용제 유출에 의해 유분의 대부분 100% 짜낼 수 있다. 쌀겨유에는 올레인산이 많이 함유되어 건강에 좋다고 여겨진다. 유분을 짜낸 착유 찌꺼기, 곧 '쌀겨묵'은 영양제나 사료, 비료 그외에 여러 가지 용도가 있다.
열대의 나라들에서는 소규모 정미소에서 나온 쌀겨는 그대로 가축이나 가금, 양어 등의 사료로 쓰이는 일이 많다. 산화, 부패한 것이어도 비료 등에 쓰인다. 보통, 쌀겨는 작은 싸라기보다도 높은 가격으로 팔린다.
도상국에서도 대형 정미소에서는 쌀겨유를 추출하는 경우도 있지만, 기온이 높기에 쌀겨 안의 유리지방산의 함량이 높아서 식용으로는 할 수 없고, 공업용 기름으로밖에 못 쓰기에 경제성이 낮다. 나아가, 여러 외국에서는 일본처럼 순수한 현미를 만들 필요가 없어서 쌀겨에는 다소 왕겨 가루가 혼입되고, 그 결과 쌀겨유의 함유율이 낮아져 그 추출은 불리해지기 쉽다.
일본이라서 생긴 '현미 유통'
종종 다음과 같은 평을 들을 수 있다. 곧, "'현미 유통'등 거창한 말이 쓰이지만, 그건 나락이나 백미 대신에 현미 형태로 쌀을 저장·유통시킨다는 고작 그것뿐인 것 아닌가?"라고.
하지만, 그 "고작 그것뿐인 것"이 '현미 표면의 쌀겨층을 상처내지 않도록 매갈이를 하는 기술'이 확립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일본에서 간단한 용구로 매갈이를 하더라도 '거의 순수한' 현미를 그럭저럭 만들 수 있던 건 오랜 세월에 걸친 매갈이 용구의 개량도 중요하지만, 그 가장 중요한 요인은 재배 벼가 단립종이었던 점에 있다.
여러 외국에서 재배되는 장립종 나락은 단립종과 비교해 매갈이가 뚜렷하게 곤란하다. 곧, 왕겨를 나락에서 벗기기 어렵다. 이 점은 가늘고 긴 나락이라면 그 2장의 왕겨 이음매가 길기 때문에 쉽게 상상될 듯하다. 장립종 나락으로 일본에서 옛날부터 사용된 간이한 매갈이 용구를 사용하면 싸라기 투성이가 되어 버린다. 그 경우, 나온 현미의 정백(현미 표면에서 쌀겨층을 벗기는 과정)도 동시에 행해지기 때문에, '쌀알이 문질러진 쌀' '반매조미쌀'이 많이 포함되어 버린다.
문질러진 쌀, 곧 표면이 손상된 현미는 금세 산화되기 때문에 악취를 풍기고 장기 저장할 수 없다. 그래서 장립미로 다소 오래 저장할 수 있는 쌀을 만들려면 매갈이와 정미가 혼합된 '매갈이 과정'을 그대로 더 진행시켜 왕겨만이 아니라 쌀겨도 완전히 제거하고, 나락에서부터 한번에 백미로 만들어 버리는 수밖에 없다. 즉, 장립미의 경우에는 매갈이만 독립적으로 완전히 실시하기 어려운 것이다.
나아가 또한, 일본은 다른 많은 쌀농사 나라들과는 달리 열대·아열대가 아닌 고위도 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수확기인 가을에 이어지는 반 년 동안의 겨울과 봄은 기온이 낮아 쌀겨층이 약간 손상된 현미라도 그 산화의 진행이 상당히 억제되어 어떻게든 저장할 수 있다. 열대·아열대에 있는 여러 나라에서는 그럴 수 없다. 그러나 그 일본에서도 초여름을 지나 고온다습한 장마를 맞이하면 저장된 현미는 악취를 풍기게 되기에, 사람들은 목을 빼고 햅쌀 수확을 기다리게 된다.
이밖에 일본에서 현미 유통이 유지된 사회적 조건으로는 막부 및 각 번이 토지면적이나 화폐로는 농민의 소득을 포착하기 곤란했기에 경제력을 모조로 현미로 환산한 점, 천하태평인 시대에도 표면적으로는 '5분 대기' 같은 임전 태세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성 안의 병량미로 즉시 먹을 수 있는 현미를 저장한 점 등을 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래 일본이 놓은 고위도 지대라는 지리적·자연적 조건이 아니라면 현미 저장·유통은 물리적으로 가능할 수 없었다.
농가용 매갈이 용구의 발전
20세기 초부터는 목매나 토매 등의 매갈이 용구를 대신해 잠시 고무매 등이 사용되었지만, 결국 동력으로 구동하는 고무롤식 도정기(뒤를 참고)가 쓰이게 되었다. 이것은 참으로 획기적인 기계여서, 매갈이 능률이 비약적으로 개선된 것만이 아니라, 표면이 거의 손상되지 않는 현미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 기계에 나락을 단지 1회 넣는 것만으로 (단립미는) 그 90% 이상이 현미가 되고, 게다가 이 과정에서 싸라기가 발생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또한 그렇게 만든 현미에 포함되는 몸통이 문질러진 쌀의 발생도 매우 적어졌기에, 그 저장 가능 기간을 뚜렷하게 늘릴 수 있게 되었다.
외국에서 현미는 나락에서 백미를 만들 때의 '중간 제품'에 지나지 않지만, 일본에서는 현미가 그대로 판매되는 '상품'으로 현미에 나락이 포함되어 있다면 가치가 떨어진다. 그래서 어떻게 현미에 혼재하는 나락을 분리할지, 곧 어떻게 유효한 '나락 분별기'를 개발할지 하는 과제로 오랫동안 고생했다.
15세기 이전에는 앞에 적은 것 같이 흔들판 등을 썼지만, 현미와 나락의 분리는 불완전하여 현미 안에 나락이 남아 있는 일이 있었다. 에도 시대 초기부터 몇 장의 철망을 이용한 '만섬(万石)'이 사용되다 이것이 여러 번 개량되어 오랫동안 사용되었으며, 메이지 무렵에는 거의 완전히 현미 안의 잔존 나락을 분리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고무롤식 도정기와 만섬을 조합함에 따라, 20세기 전반에는 일본 농민은 나락에서부터 거의 순수하고 손상 없는 현미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그림11). 이에 의하여 사상 처음으로 '현미 저장'이 명실상부하게 완전에 가까운 형태로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그림11 전자동 도정기(매갈이 부분과 만섬)
출전: 그림2와 같음, 76쪽
농가가 고생해서 만든 이 거의 순수한 현미는 다시 키·체·세로줄 쌀 선별기(미숙 쌀 선별 용구) 등을 사용해 이물·미숙 쌀·싸라기·상처난 쌀 등을 제거하는 정선 작업이 실시된다. 그 뒤 계량해서 일정 중량(옛날은 일정 체적)의 '가마니 포장 현미'가 된다.
이들에 사용되는 볏짚제 섬이나 멍석이나 가마니, 나아가서는 각종 척도법의 다량의 새끼줄 등을 준비하는 일은 쌀의 가공·선별에 못지않은 중요한 일이었다. 노인부터 어린아이까지 온 가족이 모여 겨우내 새끼꼬기를 할 필요가 있었다(뒤쪽 참조).
이렇게 만든 가마니 포장 현미야말로 농가가 만들어 내는 '쌀' 거래의 최소 단위이고, 품질 검사·등급 부여 등도 그 상태에서 행해져, 가마니 포장의 형태 그대로 지주·영주·농협·미곡상·정부 등에 공납·납입 또는 매도되어 장기 저장도 되었다.
이러한 '가마니 포장 현미'의 가마니 수는 옛날에는 화폐나 부의 단위이기도 했다. 현재 현미는 30킬로그램 종이 봉투 들이로 취급되는 일이 많지만, 쌀의 도매 가격은 21세기가 된 오늘날에도 한 가마니(60킬로그램)당 현미 가격으로 표시되어 있다.
일본의 쌀농사 농민이 '쌀농사'의 일부로 몇백 년 동안 당연한 것처럼 해 왔던 벼 수확 이후의 매갈이·정선·가마니 포장 등에 대해서 외국인에게 설명하면, "일본에서는 영세한 농민이 정미소에서 하는 일까지 대부분 해 버립니까?"라고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을 하고 고개를 흔들며 "믿을 수 없네"라고 한다(그림12).
그림12 일본과 외국의 쌀농사. 농민이 수확한 뒤의 작업 비교
일본에서는 쌀의 수확 시기를 지나면, 상품이 되는 쌀은 모조리 포장된 현미로 만들어 나락은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비상용 비축이나 종자용 등 일부를 제하고 나락 저장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현재는 일부 나락이 농협(JA)의 컨트리 엘레베이터에 나락 저장되어 있다. 현미의 저장은 반 년에서 몇 년에 이르는 일이 있지만, 현재는 대부분 모두 저온창고에 포장되어 저장된다. 이전에는 상온 저장되었기에 현미의 저장 환경은 개선되었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나락 저장에 비교하면 품질의 열화는 피할 수 없다.
여러 외국에서는 예외적인 경우를 제하고 현미 저장은 존재하지 않고, 쌀은 나락 또는 백미의 형태로 저장된다. 그곳에서는 현미란 나락을 백미로 가공하는 과정에서 순간적으로 나타나는 중간 제품에 지나지 않는다. 나락의 대부분은 창고나 사일로에 '낟알 저장'된다. 낟알 저장이란 포장이나 용기에 담지 않고 낟알 그대로 실내 또는 시설 안에 퇴적하는 일을 가리킨다.
외국에서도 소량이거나 단기인 경우에는 나락을 포장해 저장하는 일도 있다. 일본에서도 외국에서도, 백미는 늘 포장 또는 용기에 담아서 저장된다.
일본 독자의 볏짚 이용
이 책에서는 벼의 열매, 곧 곡물인 '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데, 일본에서는 다른 쌀농사 국가들과는 달리 벼라는 식물체의 다른 부분, 곧 볏짚이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던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플라스틱이나 기타 화학적으로 합성된 재료의 이용이 급속히 퍼졌지만, 그때까지는 벼의 짚이 사람들의 의복이나 가구나 주택이나 기타 일용품, 각종 산업, 건설 공사 등 구석구석에서 사용되었다. 각 가정의 다다미 심지는 볏짚이고, 도시 생활에서도 각종 작업 현장에서도 하루하루 대량으로 소비되는 짐 꾸리는 재료나 각종 사이즈의 새끼줄·끈 종류의 대부분은 볏짚이었다. 시골 생활에서는 각종 작물의 농작업이나 운반이나 포장에도 볏짚은 그대로, 또는 끈이나 망이나 용기 등으로 빼놓을 수 없었다.
삿갓・도롱이・짚신・슬리퍼・눈신・등지게・'요람'(유아를 넣음)・요・이불 등 몸에 접하는 것은 거의 모두 볏짚제였다. 또한 관혼상제의 장식이나 완구에도 빼놓을 수 없다. 주택이나 창고의 흙벽을 바르는 점토에는 자른 볏짚을 섞었다. 곡물이나 비료 등을 넣는 섬・멍석・가마니 등은 대부분 모두 볏짚제. 크고 작은 가축・가금의 사육에도 볏짚은 빠질 수 없다. 벼나 채소나 과수의 재배에도 다량의 볏짚이나 볏짚 제품이 사용된다. 또한 연료로도 쓰인다. 이렇게 사용된 볏짚은 최후에는 인간이나 가축의 배설물을 섞어서 비료가 된다.
볏짚은 생활과 산업의 필수품이었기에, 쌀은 먹지 않고 모두 돈으로 바꾸어 버리는 가난한 농가에서도 볏짚만은 꼭 필요했다. 그래서 일본은 '쌀의 나라'라기보다도 '볏짚의 나라'라고 하는 편이 좋을 정도이다.
볏짚은 엮거나 짜거나 할 수 있는 건 일본 벼의 특성이다. 인도 종 벼의 경우에는 그 볏짚이 물러서 엮거나 짤거나 할 수 없다. 그래서 볏짚을 일본처럼 활용하는 일은 하지 않고, 기껏해야 가축의 사료나 깃, 비료·연료 등으로 하는 정도이다. 그 대신 열대·아열대에서는 다른 뛰어난 섬유작물 등이 있기에 생활에 불편을 겪지는 않겠지만.
나아가 일본에서는 농가가 매갈이를 하기 때문에 나락의 약 20% 중량으로 나락과 거의 같은 체적의 왕겨가 농가에서 산출된다. 이것이 가정용 연료나 과일이나 달걀의 꾸러미·완충재, 가축의 깃이나 배수용 충전재나 토양 개량재 등으로 이용된다.
일본에서는 다른 쌀 생산국에 비교해 벼의 열매인 쌀에 더해 벼라는 식물체의 모든 것이 일상 생활 속에서 깊게 엮여 있다(또는 과거형으로 '있었다')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작물 재배 과정과 수확 후 과정의 차이
일반적으로 쌀농사만이 아니라, 농가가 수행하는 작업에는 농경지에서 하는 '작물 재배 과정'과 그 뒤의 '수확 후 처리 과정'이 있다.
일본에서는 2차대전 이후인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농경지에서 하는 벼 재배 작업, 곧 작물 재배 과정은 대부분 모두 인력이나 축력으로 행해졌다. 그리고 농작업의 동력 기계화라고 한다면, 거의 탈곡이나 매갈이나 볏짚 가공 등 수확 후 처리 과정에 한정되어 있었다(예외로 농사 작업의 기계화에는 양수 펌프가 있지만).
일본에서는 왜 농작업 중에서 수확 후 처리 과정만이 기계화되었던 걸까?
원래 기계화 이전의 에도 시대에도 일본 농가가 소유하는 농기구의 태반은 탈곡·조제나 그에 따른 수확 후 처리 작업을 위한 용구였다. 농사용 농기구보다도 종류는 많고 가격도 비싸다. 예를 들면, 절구와 공이, 홀태, 각종 체, 키, 풍구, 깔대기, 목매나 토매, 만섬, 작두, 볏짚 방망이, 가마니틀, 각종 됫박, 저울, 자, 그밖에 이들을 사용・유지・수리하기 위한 공구나 계측기 종류 등 수십 종류에 이른다.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외국의 영세 쌀농사 농가가 지닌 농기구라고 하면 쟁기・괭이・낫 같은 농사용에 한정되어 있다. 왜 일본만은 논에서 사용하는 농기구보다 수확 후에 사용하는 농기가 쪽이 많았던 걸까? 그 이유는 일본에서는 나락을 농가가 일정 규모의 섬 포장 현미로까지 마무리하는 작업을 담당하고, 게다가 그 작업의 정밀도, 곧 제품의 품질이 농가 소득에 직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작물 재배 과정'과 '수확 후 처리 과정'은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는 점을 명확히 하고 싶다.
농사 작업, 곧 '작물 재배 과정'은, 말하자면 '자연적 과정'으로 작물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고, 그것을 둘러싼 자연적 조건이 그 후원자가 된다. 인간의 노동, 곧 작물 재배의 작업은 작물의 생육에 필요한 자연적 조건 가운데 그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주는 보좌역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주어진 자연적 조건이 그 작물의 충분한 성장·발육에 과부족 없이 갖추어져 있다면, 인간 노동 등이 나설 무대는 없다. 종자는 자연에서 발아·성장하여 그 생물이 지닌 본래의 결실을 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렇게 이상적인 상황은 좀처럼 없기 때문에, 자연 조건이 부족한 부분을 보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인간이 행하는 재배 행위이다. 강수가 부족하다면 농지에 물을 대고(관개), 토지의 비옥도가 부족하다면 비료를 주며(시비), 흙이 단단하다면 갈고(경운) 등등.
그러한 작업의 기계화나 그를 위한 도구 사용은 인간의 사정으로서는 '노동력 절감'에 도움이 되지만, 작물에게는 인력 작업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예를 들면, 관개는 강수의 부족·부정기성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기에, 수로를 사용해 관개하든, 펌프나 양동이로 급수하든지 작물에게 그 효과는 똑같다. 경운 작업은 괭이를 사용해 인력으로 하는 것과 트랙터나 축력의 쟁기로 하는 것이나 그 효과에 큰 차이는 없다. 그래서 작물 재배의 과정에서는 농기구나 기계는 "인간에게는 노동력 절감이 된다"는 효과가 주요한 것이다.
따라서 "기계에 의하지 않으면 재배 행위를 할 수 없다" 등은 원리적으로 있을 수 없다. 만약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시기를 놓친다고 한다면, 노동력을 많이 쓰면 될 뿐이란 이야기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것을 할 수 없든지, 또는 경비가 너무 들기 때문이란 이유로 기계를 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재배 과정의 기계화는 단지 인간의 편의·사정을 위한 것으로, 작물 자신이 본래 그것을 요구한 것은 아니다. 즉, 원리적으로는 재배 과정의 기계화는 작황의 풍흉과는 관계없다.
이와 비교해 똑같이 농작업이라 부르는 '수확 후 처리 과정'은 이미 작물 자신의 생육과는 관계없으며, 인간이 작물 또는 그 유체에 대하여 마음대로 조작을 가하는 '인위적 과정' 그 자체이다. 여기에서 행해지는 도구의 사용 또는 기계화는 노동력 절감만이 아니라 수확물의 '품질 유지·향상·변형·가공' 등 수확물을 인간에게 편리한 상태로 만드는 행위로, 이미 '공업적'인 작업이다. 기계의 사용 유무는 제품의 품질에 깊이 관련된다.
예를 들면, 쌀의 매갈이를 하는 데에 절구를 사용하면 생기는 현미는 대부분 싸라기가 되어 버리지만, 회전식 토매를 사용하면 싸라기의 양이 반감되고, 나아가 롤식 도정기를 사용하면 싸라기는 거의 발생하지 않으며 거의 완전한 현미를 얻을 수 있다.
그래서 똑같이 '농작업의 기계화'라고 하더라도, 작물 재배 과정의 기계화와 수확 후 처리 과정의 기계화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다(그림13). 전자에서는 단순히 인간 노동의 절약, 후자에서는 그것만이 아니라 제품에 대한 가치의 부여·증대를 목표로 한다.
작물 재배 과정(=자연적 과정)에서는...
논밭의 경운을 예로 들면
A 인력으로 괭이를 사용해 경운한다
B 축력을 사용해 쟁기로 경운한다
C 트랙터로 경운한다
어느 경우라도 결과는 거의 똑같다(A≒B≒C)
노동 효율은 전혀 다르지만, 그 효과에 대해서는 거의 변함이 없다
수확 후 처리 과정(=인위적 과정)에서는...
매갈이 과정을 예로 들면
A 절구로 나락을 찧어서 매갈이를 한다 → 싸라기 투성이인 현미
B 토매를 사용해 매갈이를 한다 → 반분 정도 싸라기가 된 현미
C 고무롤식 도정기로 매갈이를 한다 → 싸라기 없는 현미
어떤 도구를 사용했는지에 따라서, 결과를 전혀 다르다(A≠B≠C)
노동의 효율이 다를 뿐만 아니라, 제품의 품질이 전혀 달라진다
그림13 수확 전(재배) 과정과 수확 후 과정에서 사용하는 용구의 의미 차이
그러한 이유가 있기에 일찍이 일본에서는 농촌 노동력이 염가에 풍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수확 후 처리 과정에만큼은 많은 농기구를 사용하고, 심지어는 동력 기계도 썼던 것이다. 아무리 근면한 농민이라도 도구나 기계 없이는, 예를 들면 체나 도정기 등이 하는 일은 완수하지 못한다. 일본에서는 쌀의 품질(등급)은 농가의 수입을 크게 좌우한다. 그러므로 노동의 능률화(만)이 아니라 제품의 품질, 곧 가치를 유지·향상하기 위하여 수확 후 처리 과정에서만큼은 어떻게 해서라도 도구나 기계를 사용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것과는 대조적으로 다른 나라의 영세 쌀농사 농민은 나락 형태 그대로 쌀을 팔아 버린다. 나락의 품질은 판매 가격에 별로(또는 거의) 관련되어 있지 않기에, 그 수확 후 작업에 도구나 기계를 사용하는 일이 적었다.
쌀농사의 기계화는 쌀의 품질 향상을 위하여 시작되었다
일본의 쌀농사에서 기계화가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건, 2차대전 직후의 농지 개혁에 의하여 지주의 농지가 재래의 소작농에게 분배되어 갑자기 1헥타르 이하의 영세한 자작농이 다수 창출되었던 때이다.
그 직후, 그들 사이에 소형 동력 탈곡기나 소형 도정기가 폭발적으로 보급되었다(그림14). 그건 영세한 토지로부터 이익을 확실히 확보하고, 그것을 가능하면 늘리기 위해서였다. 영세 자작농은 약간의 농지에서 하는 농사 작업, 곧 작물 재배 과정은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수작업으로 했지만, 수확 후 처리 과정만은 기계화하는 것을 선택했다. 그에 의하여 쌀의 품질이 향상되고 비싸게 팔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14 농업 기계의 보급 대수
출전: 농림수산성
이렇게 동력 탈곡기나 도정기가 영세 농민 사이에 보급되고, 그에 의하여 그들이 동력 기계에 익숙해져 그 이용·취급에 숙달되었고, 그것이 그 뒤 경운기·트랙터 등 농사용 기계도 도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수확 후 기계의 조작·보수 관리에 익숙해졌던 농민은 경운기의 취급에도 금방 숙달되었다. 장기간에 걸친 상품인 현미 생산에 의해 길러졌던 농민의 꼼꼼함이나 호기심, 문해력·셈 능력 등이 그러한 각종 농업 기계의 도입·이용·유지 관리에 유리하게 작용했음을 말할 것도 없다.
영세 자작농에게는 소와 말을 유지하는 것이 곤란하고, 그러나 또 가축 없이는 논밭의 경운·써레질 등의 작업이나 수확물·비료 등의 운반도 너무 비능률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당시 아직 발달 과정에 있던 경운기, 또는 보행용 트랙터라고도 불렀던 기계를 열망했다. 그러한 농민의 요구에 답하여 농기계 제조사나 연구자는 국산 경운기의 개량에 힘써, 일본 독자의 괭이날 부착 로타리식 경운기 등이 나타나 논의 경운·써레질·땅고르기 작업 등은 대폭으로 능률화되었다. 이러한 논 작업의 능률화에 의해 나중에 벼의 어린모를 옮겨심는 형식의 이양기 등이 보급되는 조건이 정비되었다.
나아가, 종종 간과되는 것인데, 농업 노동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은 운반 작업이다. 이것이 경량이고 저렴한 견인식 경운기에 트레일러를 연결함으로써 대폭 경감되었다. 농사용 자재나 수확물 등의 운반 작업이 비약적으로 능률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또한 가족의 자가용이 되어 농작업의 능률화와 농민의 행동 범위 확대에 크게 공헌했다. 이러한 농사용 기계인 경운기는 수확 후 기계보다는 거의 10년 늦게 폭발적으로 보급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4륜 트랙터·이앙기·예취기·방제기·콤바인·건조기 등 각종 농업 기계의 전면적인 이용으로 발전해 나아갔다.
기계화 진전의 의미
현재 농촌에서는 트랙터와 그것에 구동 또는 견인되는 각종 작업기, 콤바인, 이앙기, 예취기, 방제기 등이 논밭에서 일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외부자의 눈에는 마치 일본에서는 모든 농사일이 기계를 이용해 손쉽게 이루어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들은 소규모 쌀농사 농가의 주요 일꾼이 평소에는 농외 노동(즉 공장·상점·사무소 등)에 종사하고 주말에는 가족 노동까지 동원하면서 서둘러 농작업을 해치우기 위해 낭비임을 알면서도 도입된 기계화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경우가 적지 않다. 다시 말해 농외 수입과 농업 수입을 양립시키고자 고령자나 주부에게도 농작업을 분담시키는 편의상 각종 농기계를 이용하고 있다. 그래서 농기계를 도입·유지하는 비용과 농업 수입'만'을 비교해서 기계 도입의 이해득실을 논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그러나 한때 '기계화 빈곤'이란 말이 유행했듯이, 영세 농가가 이러한 각종 농기계를 구입·유지하는 것의 경제적 부담은 적지 않다.
많은 열대 쌀농사 국가와 달리, 고위도 지대에 위치하는 사계절의 일본에서는 농작업의 적기가 계절에 강하게 제약되어 있다. 일본에서는 열대 국가처럼 벼베기를 하고 있는 논의 바로 옆의 논에서 모내기를 하는 풍경은 있을 수 없다(오키나와를 제하고). 일본에서는 어느 작업 기계를 필요로 하는 시기가 인근 농가와 겹치는 일이 많아 공동 이용이 어렵다. 그 때문에 영세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농기계의 호별 소유가 많고, 그 연간 가동 시간은 일반적으로 매우 짧다. 이앙기나 도정기 등은 연간 가동 일수가 겨우 며칠이라는 것조차 드물지 않다. 이렇게 일본의 쌀농사는 소규모 경영이면서 경지면적당 보유 농기계의 마력 밀도는 세계에서도 수위를 다툴 정도가 되었는데, 이들 농기계의 연간 가동 시간이 매우 짧은 일을 생각한다면 단순히 '일본의 쌀농사에서는 농업 기계화가 진행되어 있다' 등이라 해도 좋을지 꽤 의문이 든다. 영세한 경영 규모에 더하여, 농기계에 대한 이러한 지출도 한 요인이 되어 일본 쌀의 생산원가는 높아지고, 외국의 쌀 문호 개방 압력에 끊임없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또한 일본에서 쌀농사의 농기계 이용이 확산되어 온 것은 방대한 국비가 쌀농사에 투입되어 기계를 이용하기 쉬운 조건이 정비된 데에 따른다. 곧, 습답의 건답화·토지 개량·농지의 교환 분합·논 구획의 대형화·농도나 관개 배수시설 등이 각종 보조금 등에 의하여 정비되었다.
그럼 일본에서는 왜 이렇게 방대한 국비가 농업, 그중에서도 사유지에서 행해지는 사적 산업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 쌀농사의 발전을 위해 투입되었던 것일까?
그건 "쌀은 국민의 주식으로, 그 생산 확보 여하는 국가 생존의 안위가 걸려 있다"는 세상 사람들의 귀에 들어가기 쉬운 대의명분 외에, 정권 담당 정당이 농민의 표에 기대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욱 힘을 실어준 것은 농민의 전국 조직인 농협이 강대한 압력 단체가 되어 정부에 압력을 행사한 데에도 있다.
그러나 왜 일본에선 영세 농민의 압도적 다수가 패전 직후 급속히 농협의 전국적 조직에 결집되어, 그것이 농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강대한 압력 단체가 되어 갔던 것일까? 이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패전 직후 점령군은 노동조합이나 농민조합의 결성을 강하게 지원했기 때문이다"라고 하지만, 농민 사이에 그걸 추진할 강한 의욕이 없었다면 아무리 점령군이 깃발을 흔들어도 그건 불가능했을 듯하다. 이는 흥미로운 문제이지만, 여기에서는 그에 대해 생각할 여유가 없다. 다만, 다음의 일은 이야기해 보자. 곧, 토쿠가와 시대, 농민들은 (품질이 규정된) 현미의 형태로 연공을 납부하게 했기에, 나락의 경우와는 달리 그 연공의 양을 다른 번의 그것과 거의 정확히 비교할 수 있었다. 간신히 연명하는 농민은 연공의 양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하여, 토쿠가와 300년 동안에 연공 양을 둘러싸고 몇 천 건이나 백성의 봉기가 있었다. 태평양전쟁 전·중·후의 농민 운동에는 그 혈맥이 흐르고 있었다고.
현미 유통이 안고 있는 문제
일본의 현미 유통은 그 오랜 쌀농사의 과정에서 제도화되어 영세 농가에게도 수확한 쌀(현미)의 매매를 함에 중량만이 아니라 그 품질의 평가를 습관화시켰다. 그것에 의하여 착실하게 농민의 이익이 지켜져, 그 지식 수준과 기술적 개선 의욕이 높아졌다. 이렇게 인구의 다수를 점했던 농민이 상품 유통에 관계하게 되어, 그 지적 수준과 윤리를 향상시켜 일본의 공업화, 근대화에 큰 공헌을 했다. 이 절대적인 역사적 역할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점에 일본의 역사가, 그중에서도 산업사가가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의 나락 유통 관행과 달리 일본이 옛적의 현미 유통을 묵수함에 의하여 현재 큰 손실을 감수하고 있다. 이 문제는 현미 유통이 일본 문화의 형성에서 담당했던 역사적인 역할 등과는 전혀 다른 관점의 이야기이다. 즉, "일본에서는 쌀을 다룰 때 나락이 아니라 현미를 취급했던 것에 의하여 수송이나 저장 등이 기계화된 현재, 어느 정도의 손실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가?"라는 실리적인 문제이다. 아무쪼록 여기에서, 지금까지의 시점에서 머리를 돌려주시길 바란다. 세상, 때때로 "나락을 현미로 만듦에 의해, 그 부피는 거의 반이 된다. 그래서 저장이나 수송이 값싸고 쉬워진다"는 주장이 있다. 이런 의견이 전문가들에게도 부담을 주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완전히 오해이며 실제로는 그 반대이다.
벼라는 식물은 그 종자가 성숙해 지상에 떨어지고나서 발아하기까지의 기간에 손상되거나 부패하거나 하지 않도록 그것에 왕겨라는 옷(또는 오히려 '갑옷'이라 하는 쪽이 좋을지도 모름)을 입혀 주었다. 그래서 쌀알을 저장한다면, 자연이 입혀 준 그 고마운 의복, 곧 왕겨를 입힌 채로 보존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런 모습이다.그런데 일본에서는 어떤 사회적 역사적 경위와 그걸 간신히 가능케 한 자연적 조건의 조합 탓에, 쌀알의 보호막인 '왕겨'를 일부러 벗겨서 현미라는 '나체' 상태로 만들어 유통·장기 저장 등을 한다는 이상한 사태가 되었다. 특히 쌀의 장기 저장을 나락이 아니라 현미로 만들어 행하는 등 세계의 상식으로 말하면 거의 상궤를 벗어나 있다. 일본에선 이를 앞으로도 당분간은 계속한다 해도, 그것이 얼마나 불리·비경제적인지는 자각해 놓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현미는 '나체'이기에, 약간의 충격·마찰 등에 의하여 표면의 부드러운 '피부', 즉 쌀겨층이 손상된다. 거기에서부터 쌀겨의 산화가 시작되어, 그 쌀알에 인접한 쌀알도 손상시키기에 이른다. 그렇기 때문에 현미의 품질 검사에서는 쌀겨층에 손상이 있는 '몸통이 문질러진 쌀'이 포함되어 있다면 쌀의 품위 등급을 낮추는 한 요인으로 여긴다. 이에 비해 나락의 경우에는 약간의 충격이나 마찰로는 손상되는 일이 없다. 그래서 나락의 수송·저장 등에는 각종 기계적 수송 장치(컨베이어 종류 등)도 사용해 능률적인 낟알 수송·낟알 취급이 가능하다. 이것은 중요한 점이기에 잘 이해해 주길 바란다. 곡물 등의 '입체粒体'은 물 같은 '유체'로도 취급할 수 있다. 입체와 유체는 그 성질과 상태에 공통된 면이 있어, 모두 자루나 용기 등에 넣지 않고 낟알로 취급함에 의해 물 같이 펌프 등으로 효율적으로 흐르게 하거나 나르거나 할 수 있다. 나락 등은 컨베이어나 펌프 같은 장치에 의해 관(파이프)를 통과해 상하좌우로 흘러들어가기에, 수송이나 저장을 간단히 기계화할 수 있다. 그런데, 현미는 손상되기 쉽기에 그러한 낟알 취급이 거의 불가능하다. 기본적으로 자루나 가마니 등의 용기에 넣어 개별로 취급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얼만큼 수송이나 취급의 수고·경비를 증가시키는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을 듯하다. 현미는 일단 눅눅해져 버리면 다시 건조하기 곤란하여, 파기시키든지 공업용 원료로 돌리는 일이 많다. 현미의 저장이나 수송에서는 비가 새거나 결로가 생기는 일에 극도의 주의가 필요해, 그 설비나 용기 등은 섬세·고가의 것이 된다. 이에 비해 나락은 '옷'을 입고 있기에 설령 다소 젖더라도 다시 건조할 수 있다. 또한 나락도 현미도 살아 있기 때문에 호흡을 하고, 호흡열을 발생시킨다('현미는 이미 죽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틀리다. 현미에는 배아가 붙어 있기에 심으면 발아함). 그 열이 대기로 발산되지 않으면 곡물 온도가 상승해 변질되어 버린다. 그러나 나락이라면, 잘 건조시켜 놓았다면 그대로 퇴적(낟알 더미)해도 호흡열이 발산된다. 일본 국내의 컨트리 엘레베이터에서 나락을 사일로에 낟알 저장하고 있는 걸 볼 수 있듯이.
만약 현미를 나락과 똑같이 낟알로 퇴적해 놓는다면, 호흡열이 발산하지 못해 곡물 온도가 상승해 변질되어 버린다. 현미에는 왕겨가 없기에 알과 알 사이의 공극이 좁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현미 저장에서는 나락의 경우처럼 낟알로 쌓아 두는 일은 할 수 없고, 가마니나 자루 등 통기성이 좋은 용기에 넣어서 그 사이에 작은 간극을 두고 쌓아야 한다(그림15).
그림15 가마니 포장 현미의 저장
게다가 이렇게 쌓아올린 자루의 산(이를 '하이ハイ'라고 부름)을 때때로 다시 쌓아야 한다. 이 작업을 '하이 갈이'라고 부른다. 하이 갈이 작업을 할 수 있기 위해서는 하이와 하이 사이에 간극을 두어야 한다. 하이 갈이 작업은 기계화가 곤란하기에, 인력으로 상당한 노동력을 들여야 했다. 현재는 쌀자루를 팰릿(짐을 놓는 깔판) 위에 몇 단 쌓고 그걸 지게차로 팰릿마다 쌓아올려서 상당히 노동력을 절감시켰는데, 그렇더라도 팰릿마다 하이 갈이가 필요하다.
현재는 가마니나 쌀자루를 대신해 현미 500킬로그램 또는 1톤 용량의 '플렉시블 컨테이너'라고 부르는 통기성 있는 자루가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도 쌓아올린 플렉시블 컨테이너를 때때로 지게차를 사용해 다시 쌓아야 한다.
이에 대해 나락이라면 사일로나 평평한 바닥의 창고 등에 컨베이어 종류를 사용해 흘려 넣어 낟알 저장할 수 있다. 나락의 함유 수분이나 결로 상황이나 공기 습도 등에 따라서는 통풍이나 로테이션(장소 바꿈) 등을 하기도 하지만, 이 작업에는 거의 사람손이 필요하지 않아 기계화할 수 있다. 통풍도 반입도 반출도 버튼 하나로 환기창이나 컨베이어나 전환 벨브 등을 가동하면 된다.
현재 현미는 저온 저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창고 안의 습도와 온도를 엄밀히 관리해야 해서 현미 창고는 나락 창고보다도 건설 단가만이 아니라 유지비도 비싸진다. 게닥 자루 저장과 하이 갈이를 위하여 필요한 공간을 계산하면 나락의 낟알 저장 경우보다 '필요한 창고 용적이 작아지기'는 커녕 넓어진다. 나아가 하이 갈이의 수고와 비용, 자루에 의한 쌀의 오염, 자루를 갱신할 수고와 비용, 기계 수송의 곤란함 등을 고려하면, 나락이 아니라 현미로 만들어 저장하는 쪽이 훨씬 고가인 것이 명확하다.
게다가, 아무리 이렇게 조심스레 취급해도 현미는 나락보다 장기 보존이 곤란하다. 그래서 에도 시대에 도시의 비상용 비축미로 보관된 쌀은 현미가 아니라 나락이었다. 지금은 고무롤식 도정기를 사용해 매갈이를 하기에 당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현미 안에 몸통이 문질러진 쌀이 적어졌을 것임이 확실하며 섭씨 15도 이하의 저온 저장도 하고 있지만, 그래도 현미 표면의 미세한 손상에서부터 현미의 산패가 진행된다. 현미를 저장하고 있는 비축미 창고에 한 발짝 더 들어가면 쌀의 산화를 나타내는 이른바 묵은쌀 냄새가 코를 찌른다.
그래서 큰 농가에서 자가 보유 쌀을 대량으로 보존할 때는 수확기에 그 분량의 나락만은 매갈이하지 않고 나락 채로 저장했다. 그걸 소비할 때는 하나하나 매갈이하고나서 정미한다는 번거러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현미로 저장된 비축미는 몇 년 지나면 묵은쌀이라든지 오래 묵은쌀이라든지라고 하여 인간의 소비에는 적합하지 않게 되어, 가축의 사료나 공업 원료 등으로 돌려 버린다. 죄스러운 이야기이다. 나락 저장을 하는 세계의 국가들에서는 5년이나 7년 저장된 나락으로 만든 백미를 식용하는 건 당연한 이야기로, 그러한 쌀이 오히려 귀하게 여겨지는 일이 많다. 왜냐하면 건조가 진행되어서 밥을 지었을 때 '밥이 퍼지'고, 또 찰기가 줄어 맛이 좋아지기에.
비축 현미의 빈번한 갱신이 경비를 쓸데없이 사용하는 것만이 아니라, 식량의 안전 확보란 점에서도 불리한 것은 명확한 듯하다. 지금까지 정부 비축미는 정부 창고에 국고 부담으로 보관되어 있었기에, 누구의 배도 직접적으로 아프게 하지 않아 국비 낭비가 간과되고 있었던 듯하다.
현미 유통 제도는 일본 쌀농사 농민에게 작업 부담도 강했지만, 그들의 이익을 오랜 세월에 걸쳐 지켜 왔다. 또한 그에 의한 그들의 지적 발전과 규율의 획득에 따라서 일본의 근대 문명 형성의 발판을 만든다는 역사적으로 거대한 공헌을 했다. 하지만, 수송 기계나 동력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현재가 되면, 현미의 수송·취급의 불편함, 저장 현미의 품질 유지의 어려움, 비경제적인 면이 눈에 띈다. 이 시스템을 하루아침에 폐기하거나 바꾸거나 하는 일은 곤란하지만, 조만간 그 상태는 한번 생각할 필요가 있을 듯하다.
쌀의 수확 후 과정과 그를 위한 기계
나락을 건조하다
쌀의 품질을 평가하는 데에 '싸라기'의 많고 적음은 매우 중요하다. 싸라기가 어느 정도 생길지는 '나락이 어떠한 방식으로 건조되었는지'가 깊이 관련되어 있는데, 이 점이 종종 경시된다. 양질의 백미를 얻기 위한 출발점은 나락의 적절한 건조 방법에 있다.
나락에 포함되어 있는 수분은 나락 표면, 곧 왕겨에서 증발시킬 수밖에 없다. 즉, 나락 내부(현미)의 수분은 왕겨에까지 확산·이동시켜야 하는데, 그에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만약 나락을 강한 직사광선 등으로 급속히 건조하면, 왕겨나 그 부근의 현미 표면은 바싹 마르게 되지만, 현미 내부의 수분이 나락 표면으로 확산되는 건 그를 따라가지 못한다. 그래서 왕겨에 접한 현미의 표면은 건조되어 수축하는 데 반해, 현미 중심부에 있는 수분은 별로 바뀌지 않는다. 이러한 현미 표면 근처와 현미 내부의 수분 차에 의하여 현미알의 표면에 균열이 생긴다. 이렇게 된 쌀을 몸통이 깨진 쌀이라 부르는데, 몸통이 깨진 쌀은 정미 과정에서 거의 모두 싸라가기 된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나락의 건조에는 그 건조 속도(수분 감소의 빠르기)를 1시간마다 수분 감소율 1% 이하로 하는 것이 추천된다.
많은 사람은 싸라기가 생기는 원인은 매갈이나 정백(정미) 과정에서 쌀알에 압력이 가해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좋은 도정기나 좋은 정미기를 사용하면 싸라기의 발생은 방지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쌀이 싸라기가 되는 주요인은 그곳에는 없다. "나락을 건조할 때 몸통이 깨지는 걸 발생시키는지 아닌지" 쪽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또한 "나락의 과건조가 싸라기의 원인이다"라고 믿는 사람이 있지만, 나락의 건조 속도가 천천히 이루어지면 아무리 저수분으로까지 나락을 건조하더라도 싸라기는 되지 않는다.
현재 일본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나락 건조기에서는 '간단식 건조법'(tempering 건조법)을 취하고 있다. 이 방법에 의하면, 건조에 의한 쌀의 균열·몸통 깨짐은 매우 적게 끝난다. 이 나락 건조법은 나락이 '왕겨라는 튼실한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솜씨 좋게 이용한다.
간단식 건조법의 나락 건조기는 상부에 큰 나락 탱크를, 그 아래에 작은 건조부를 갖추고 있다. 탱크에 넣은 생나락(미건조 나락)은 탱크의 바닥에서 흘러내려 건조부를 빠르게 통과하고나서 들어 올려져, 다시 나락 탱크로 돌아간다. 나락은 탱크 안에 몇 시간 머물러 있다가 다시 건조부를 통과한다. 이를 반복해서 탱크 안의 나락이 건조된다(그림16).
그림16 간단식 건조기 안의 나락 흐름
나락이 건조부를 통과하는 시간은 짧기 때문에, 나락 표면의 왕겨만 건조된다. 왕겨는 튼실한 섬유로 이루어져 있어서 급격히 건조하더라도 문제 없다. 나락이 나락 탱크 안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몇 시간 머무르는 사이에 나락 내부(현미 부분)의 수분이 마른 왕겨에 흡수되고, 현미 부분은 수분을 왕겨에 준 분량만큼 건조되며, 왕겨는 다시 눅눅해진다. 나락은 이윽고 다시 단시간 열풍을 쬐고, 곧 나락 탱크로 돌아간다. 이걸 되풀이해 나락(현미)의 수분은 왕겨를 끼고서 서서히 건조된다. 건조기 안의 개개의 나락은 '건조 과정'과 나락 내부 수분의 왕겨로의 확산 과정(템퍼링 과정_을 번갈아 되풀이하게 되는데, 건조기 전체로서는 그 기계 안에서 순환하는 나락을 차례로 건조시킬 뿐이어서 연속적인 운전이 된다.
이러한 건조법을 취하면 나락 내부와 나락 표면의 수분 차(수분 구배)가 별로 커지지는 않기 때문에, 나락 내부(현미)에 균열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또한 연료의 소모도 최저한으로 억제할 수 있다.
사실은 햇볕에 의한 건조에서도 방법에 따라서는 템퍼링식(간단식) 건조법이 가능하여,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일부 상업 정미소에서는 이를 실행하고 있다(나중을 참조). 그건 나락을 햇볕 건조할 때 나락을 얇게 펴지 않고 두터운 층으로 만들어 빈번히 뒤섞는 것이다. 상층의 나락은 햇빛에 쬐여서 나락 표면이 급속히 마르지만(건조 과정), 다음 순간 뒤섞여서 하층으로 몰아넣어 그곳에서 나락 내부의 수분이 서서히 표층의 왕겨로 이동한다(템퍼링 과정). 뒤섞는 것이 계속되기에 이를 반복하게 된다.
나락에서 검불을 제거한다
소규모 쌀농사에서는 대체로 나락은 깨끗하기 때문에 따라 나락의 정선을 의식하는 일은 없지만, 대규모인 경우에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된다. 이 작업이 불충분하면 나락 창고나 정미소 안의 각종 기계 안이나 그들을 연결하는 파이프나 탱크 안에 검불이 점점 쌓이게 되고, 결국에는 각종 기기류를 막히게 하거나, 과부하를 일으키거나 한다. 정미소에서 가장 많은 고장은 기계 자체의 고장보다도 이러한 검불의 막힘에 의하여 일어난다.
나락에서 검불 제거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 '나락 조선기'나 '나락 정선기'이다(그림17). 전자는 주로 큰 검불, 후자는 작은 검불을 제거한다.
그림17 나락 조선기粗選機·정선기의 기능
이들 기계의 작용은 주로 바람을 일으켜서 볏짚 등의 가벼운 검불을 날려버리는(날려고르기) 것과 진동 또는 회전하는 체에 의해 나락보다도 큰 검불과 작은 티를 분리(체질)하는 것이다. 때로는 '석발기'도 이것에 조합시켜 나락과 똑같은 치수의 비중이 큰 돌이나 금속 조각 등의 제거에 사용된다.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 수작업에 의한 나락 정선에서는 키나 풍구 등으로 바람을 일으키는 것과 크고 작은 각종 체로 한다.
나락을 현미로 만들다
나락에서 그 왕겨를 제거해 현미로 만드는 것을 '매갈이'라고 한다. 그를 위한 기계는 '도정기'라고 부른다. '매갈이'는 또한 '탈부脫稃'라고도 부른다. 부稃란 왕겨. 도정기에 나락을 통과시켜 현미가 되는 비율을 탈부율이라 부른다. 그러나 '탈부'라는 단어는 매우 자주 '탈곡'과 혼동된다(전문가에게서조차!). 그래서 '탈부'라든지 '탈부기' 등이라는 단어는 가능하면 피하고, '매갈이' '도정기'라고 부르는 쪽이 바람직하다. '부'라는 것도 별로 쓰이지 않는 문자이고.
현재, 세계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 도정기는 '고무롤식 도정기'로서, 이것은 대형 정미공장에서도 영세한 일본의 농가에서도 사용된다. 이 기계는 역방향으로 회전하여, 둘레의 속도가 다른 한 쌍의 고무롤 사이에 나락을 떨어뜨려 현미에서 왕겨를 벗긴다(그림18). 이 기계는 단립미에도 장립미에도 효과적으로 쓰여, 나락을 부수지 않고 높은 탈부율(단립미라면 90% 이상)로 매갈이할 수 있고 싸라기를 발생하는 일은 거의 없다. 현미 표면의 쌀겨층에 거의 손상을 입히지 않기에, 현미의 장기 저장을 하는 일본에는 특히 적합하다. 고무롤은 소모품으로, 교환이 필요하다.
고무롤식 이외에는 '충격식(원심식) 도정기'가 일본의 소농에서 때때로 사용된다. 이건 나락을 고속으로 플라스틱판 또는 고무링 등에 비스듬히 충돌시켜 매갈이 하는 것(그림19). 잘 건조한 나락이라면 높은 탈부율을 얻을 수 있다고 하지만, 고무롤식에 비해서 싸라기를 발생시키기 쉽다. 그러나 구조가 간단하고, 중량이 가벼워 운반이 쉬우며, 저렴하게 만들 수 있어서 편리하기도 하다. 2차대전 이후, 동남아시아에서 농촌 정미소가 발달하기 시작할 무렵에는 널리 사용되었다.
그림19 충격식 도정기
출전: 그림 18과 같음, 24쪽
일본의 농가에서 사용되는 소형 도정기에는 다음 항에서 기술하는 나락 분별기가 일체로 내장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도정기에서 직접 순수한 현미를 꺼낼 수 있다(앞의 그림11 참조).
일찍이 유럽제 대형 정미소에서는 '원반식 도정기'가 널리 사용되었는데, 현재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이 기계는 두 개의 원반 사이에 나락을 끼워 매갈이를 하는데, 싸라기의 발생이 심하고, 또한 조정에도 보수에도 시간과 끈기를 필요로 했다. 더욱이 왕겨의 처리(다음 항 참조)나 왕겨 제거 등에는 부속 기계를 필요로 했다.
뒤에 기술할 '엥겔베르그식 기계'는 도정기로서도 정미기로서도 사용할 수 있다.
현미에 남는 나락을 분리한다
여러 외국에서는 현미는 나락을 백미로 만드는 도중에 나타나는 과도적 존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혐니가 순수한 것일 필요는 없다. 현미에 혼재되어 있는 다소의 나락은 계속해서 정미 과정에서 매갈이 정미되기 때문에. 그러나 일본에선 현미 유통이기에 현미에는 나락이 혼입되지 않는 것이 요구된다. 여러 외국에서도 정미기에 압력이 낮은 연삭식(다음 항 참조)을 사용하는 경우, 현미 안에 나락이 잔존해 있다면 백미 안에서 나락이 나온다. 이를 막는 데에는 현미에 섞여 있는 나락을 분별해야 한다.
도정기에서 나온 현미에 잔존하는 나락을 분리하고, 그걸 도정기에 다시 보내기 위한 용구·기계가 '나락 분별구' 또는 '나락 분별기'이다. 현미에서 분리되어 도정기로 다시 보내지는 나락을 '되돌림 나락(返り籾)'이라 부른다.
가장 원시적인 나락 분별구가 '흔들판'(앞의 그림8 참조)이다. 이것은 미세한 돌기가 있는 평평한 판 또는 대나무나 등나무로 짠 키 등으로 이 위에 나락이 섞인 현미를 올리고 수평에 가깝게 흔들면 그 한쪽 끝에 나락이, 다른쪽 끝에 현미가 모인다. 이 작업에는 상당한 숙련이 필요하다.
일본에서는 18세기 말 무렵에는 흔들판을 대신해 '만섬' 또는 '만섬체(万石通し)'가 나락 분별기로 사용되었다. 비슴듬히 놓은 1층 또는 몇 층의 금속망 위에서부터 나락이 섞인 현미를 흘리고, 현미와 나락을 분리하게 만든 것이다. 만섬은 개량을 거듭해 분별 성능이 개선되어, 농가용 고무롤 도정기에는 이것이 편입되었다(앞의 그림11 참조).
만섬체.
출처: http://seikasya.town.seika.kyoto.jp/mingu/rice-farming/senbetsu
만섬의 적절한 사용에는 숙련을 요하기에 만섬이 편입된 고무롤식 도정기가 장립미 지역에 수출된 경우에는 고객에게서 불만이 끊이지 않았다. 장립미의 경우에는 더욱 미묘한 조정이 필요하다. 이 문제를 단숨에 해결한 것이 1960년대 일본에서 개발된 '요동식 나락 분별기'이다. 이것은 단립미에도 장립미에도 사용되어, 현미와 나락을 완전히 분리할 수 있고, 취급도 용이하다. 만섬에 비교하면 이 기계는 동력을 필요로 하고, 비싼 가격이기도 하지만, 아직 국내의 라이스 센터 등의 시설이나 수출용 정미 플랜트에 편입되어, 그 뒤 농가용 도정기에도 편입하게 되었다(그림20).
그림20 도정기와 나락 분별기 안의 곡물 흐름
연삭식 정미기를 사용하는 유럽식 정미소에서는 오랫동안 '소구획식 나락 분별기(compartment separator)'가 사용되어 왔는데, 이 기계는 나락과 현미를 동시에 순수하게 골라낼 수가 없고, 덩치가 큰 것에 비해 성능이 낮다. 현재는 더 이상 신설되는 일이 없는 듯하다.
현미를 백미로 만들다
현미에서 그 표면의 쌀겨나 배아를 제거해 백미로 만드는 걸 '정백(정미, 도정)'이라 한다. 그 방법은 크게 나누어 두 가지이다.
그 하나는 현미에 압력을 가해 휘저어 섞어 그 쌀겨층에 작은 상처를 입혀 그곳부터 마치 밀감 껍질을 벗기듯이 쌀겨를 크게 벗겨내는 식이다. 현미를 절구에 넣고 공이로 찧어서 희게 만드는 경우는 이 방식의 정미법을 하는 것이 된다. 이를 '마찰식 정미' 또는 '압력식 정미'라고 부른다(그림21). 만든 백미의 표면은 매끄럽고 광택이 나며, 쌀겨는 큰 얇은 조각이 된다. 세계 대부분의 정미기는 이 방식이다.
그림21 마찰식 정미에서는 쌀겨층밖에 깎지 않는다.
또 하나의 방법은 쌀알을 회전하는 숫돌에 대서 쌀의 표면을 깎아내는 것. 강판으로 레몬 껍질을 깎아내는 듯한 방법이다. 이건 쌀에 가하는 압력이 낮게 완료된다. 이 정미법은 외국에서 장립미를 정미할 때나, 일본에서 술쌀을 만들 때 등에 사용된다. 만든 백미의 표면은 윤기가 없고 허옇게 되며, 잘잘한 쌀겨가 발생한다. 이것을 '연삭식 정미'라든지 '속도식 정미'라고 부른다(그림22). 이 방식의 정미법은 기계가 비싸고, 그 운전에도 숙련을 요한다.
그림22 연삭식 정미에서는 쌀을 얼마든지 깎을 수 있다.
일본에서 태평양전쟁 이전부터 사용되던 마찰식 정미기는 뒤에 기술할 엥겔베르그식 기계에 유사한데, 일본에서는 정미 공정은 순수한 현미부터 행해지기 때문에 그보다도 낮은 압력의 기계(시미즈식 등)가 개발되어 보급되었다. 현미를 백미로까지 마무리하는 데에 기계에 쌀을 몇 번이나 통과시켜야 했다. 원통 마찰식 정미기라고 부른다.
그것이 태평양전쟁 이후 대폭으로 개량되어 '분풍噴風 마찰식'이라 부르는 정미기(그림23)이 되고, 현미를 기계에서 1회만 통과시켜 쌀겨가 부착되지 않은 깔끔한 백미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지금은 이 형식의 정미기가 세계의 마찰식 정미기의 표준이 되었다.
일본의 쌀은 단립미이기에 주식용 쌀은 모두 기본적으로 마찰식 정미기로 정미한다. 하지만, 우선 연삭식 정미기에 의하여 현미의 표면에 가볍게 손상을 입히기에 마찰식 정미기에 통과시키게 되면 약간의 압력으로 정미할 수 있다. 그래서 현재는 단립미에도 최초로 연삭식 정미기를 보조적으로 쓰는 일이 많다.
태평양전쟁 이전, 연삭식 정미기가 아직 없어서 마찰식 정미기밖에 없었던 시대에는 현미의 매끄러운 쌀겨층에 손상을 입히기 위해 현미에 모래나 돌가루나 왕겨 등(이들을 '쓿는 가루'라고 부름)을 섞어서 정미를 했다(미야자와 겐지宮沢賢治가 만년에 쓿는 가루를 팔러 다녔던 일은 잘 알려져 있음). 정미가 마무리된 뒤에 쓿는 가루는 제거된다. 쓿는 가루를 사용하지 않고서 도정한 백미는 특히 '모래 없이 쓿은 쌀'이라 불렀다.
백미를 깨끗이 하다
생긴 백미를 깨끗이 하는 데에는 우선 거기에 부착된 쌀겨를 제거하고, 그곳에 함유된 작은 싸라기를 없애며, 그러고나서 완전미·큰 싸라기·작은 싸라기 등으로 나눈다.
일본에서 재배되는 단립미에는 정미에 의하여 별로 싸라기를 발생시키지 않기에 이 과정은 그다지 중시되지 않지만, 중·장립미 재배 지역에서 상품이 되는 백미를 만들 경우에는 이것이 중요한 과정이다.
쌀알에는 그 길이·너비·두께라는 세 가지 다른 치수가 있기 때문에, 그 어느 치수에 의하여 쌀을 분리할지에 따라 각종 기기를 나누어 쓸 필요가 있다. 그 상세함에 대해서는 번거롭기에 생략한다.
엥겔베르그식 기계
이 기계를 여기에서 다루는 건 이것이 거의 만능 기계여서 그 성능의 좋고 나쁨을 따지지 않는다면, 매갈이에도, 정미에도, 백미를 깨끗이 하는 데에도, 나락부터 까끄라기를 제거하는 데에도, 각종 곡물 등을 분쇄하는 데에도 사용되기 때문으로, 쌀의 어느 가공 공정의 기계라고 특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림24).
그림24 엥겔베르그식 기계
출전: 그림 18과 같음
19세기 말에 커피 열매의 껍질 벗기는 기계로 발명되어, 그것이 쌀의 매갈이나 정미, 각종 곡물의 분쇄 등에 널리 전용되었다. 대부분 주물 부분으로만 구성된 단순한 구조의 기계이기에 각국에서 모조되어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필리핀에서 키스키산kiskisan이라 부르는 정미기는 이 기계이다. 부품 점수가 적고, 튼실하고 유지비도 별로 들지 않기에 편리하여 여러 외국의 초기 농촌 정미소는 이 기계 1대만으로 매갈이도 정미도 해서 종종 헐러 밀huller mill이라 불렸다.
지금은 '박물관행' 기계의 견본처럼 여겨지는 일이 많지만, 적절히 사용하면 상응하는 위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구조가 단순한 기계의 흔함으로서, 그 때문에 꽤나 숙련이 필요하다. 2차대전 후까지 아메리카 합중국의 대형 상업 정미소에서는 이 기계를 매갈이 과정에도 정미 과정에도 사용했다.
일본에서는 이 기계가 사용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일본의 마찰식 정미기로서 널리 사용된 가로축・원통 형식의 시미즈식 정미기 등은 이 기계를 참고로 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때까지 일본의 동력식 정미기라고 하면 절구와 공이에 의한 쌀 찧기 동작을 단순히 기계 구동한 것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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