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영세 농민에게는 '농촌 정미소'가 구세주이다
쌀을 먹는 민족의 쌀농사 지역에는 농촌 정미소가 반드시 나타난다
어느 지역에서 소규모 쌀농사가 시작되어 사람들이 쌀을 즐겨 먹기 시작하게 되어 그것이 일정 규모로 발달하면, 자연스레 '농촌 정미소'(또는 '삯방아 정미소')가 설립된다. 그 수는 시간과 함께 늘어나, 그 이용료(도정비, 삯방아 요금)도 저렴해지고, 기술 수준도 서비스도 점점 향상되어 나아간다. 그건 왜일까?
쌀을 주요 식량으로 하는 쌀농사 농민은 나락을 생산하고, 그 대부분을 나락 채로 나락 집하업자에게 팔지만, 나락의 일부는 자가 소비용으로 떼어 놓고 그걸 백미로 만들어 가족의 소비에 충당한다.
그 자가 소비용 나락을 먹기 위해서는 왕겨를 제거하고 생긴 현미를 다시 찧어서, 어느 정도 쌀겨층을 제거한 '백미'로 만들어야 한다. 이들 작업은 농가가 정구와 공이를 이용해 손으로 찧어서도 만들 수 있지만, 그에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요한다. 게다가 그렇게 하여 만든 '백미'는 대부분 현미에 가까운 알과 부수어진 백미, 그리고 잔류하는 나락 등의 혼합물이다. 특히 장립미의 경우에는 단립미 같이 간단히 왕겨가 벗겨지지 않기에, 매갈이와 정미를 위하여 찧다 보면 대부분의 쌀은 싸라기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만약 농촌 안에 기계로 나락을 백미로 만들어 주는 '농촌 정미소'가 있어, 그것이 저렴한 요금, 또는 현물 지불 등으로 이용할 수 있다면, 자가 소비용 나락을 백미로 만들려고 하는 농민은 이걸 기꺼이 이용하게 된다. 그 기계가 아무리 조야하더라도 손방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깔끔한 백미가 높은 수율로 만들어지기에, 농민은 삯방아 요금의 지출은 신경쓰지 않는다. 더구나 대금을 그렇게 만든 백미의 일부나 쌀겨나 싸라기 등의 현물로 지불할 수 있다면 현금 지출 없이 마무리된다.
쌀농사 지역에서는 그러한 수요가 끊이지 않기에 나락을 도정 정미기로 백미로 만들어 주는 가공업, 곧 '농촌 정미소'가 반드시 나타나 존재하게 된다. 그건 전 세계의 (일본을 제하고) 영세 쌀농사 지역의 어디에서라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농민이 쌀을 농사지었더라도 쌀을 단순한 상품작물로 생산해 판매하기만 하여, 그들 자신이 쌀을 주식으로 삼지 않는 경우에는 이러한 농촌 정미소가 필요없기에 생기는 일은 없다. 예를 들면, 구미의 대규모 쌀농사 지역 같이 쌀을 대량으로 생산하고 있지만 농민 자신은 고기나 유제품이나 밀가루 제품 등을 주식으로 하여 쌀은 아주 가끔 먹는 데 지나지 않다면, 농촌 정미소 같은 건 필요가 없다. 그런 아주 약간의 백미는 소매점에서 사면 되기 때문에. 현재 북미나 동오스트레일리아 등의 대규모 쌀농사 지대에 농촌 정미소가 있다고는 들은 적이 없다.
이에 반해 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영세 쌀농사 농민이 농촌 정미소를 필요로 하는 건 그들 일가가 매일 주식으로 다량의 쌀을 먹기 때문이다. 약간의 생산량밖에 없는 나락을 싸게 팔아 치우고 비싼 소매 백미를 사는 건 매우 수지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나락의 일부를 자가 소비용으로 놓아 두고, 이걸 농촌 정미소에서 백미로 만들어서 먹는 것이다.
영세하고 가난한 쌀농사 농민에게는 쌀을 매일 배불리 먹는 '사치'는 부릴 수 없다. 보통은 잡곡이나 덩이뿌리류 등을 주로 먹지만, 적어도 스스로 쌀을 농사짓는 이상 '경사스런 날' 정도는 쌀을 먹고 싶다. 그래서 역시 나락의 일부를 팔지 않고 놓아 둔다. 이 경우 놓아 둔 나락의 양은 조금이지만, 그걸 손방아로 매갈이 정미하면 그 귀중한 나락을 어쩔 수 없이 싸라기 투성이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역시 농촌 정미소를 이용해 나락을 백미로 만든다. 도상국에서 작은 아이가 머리 위에 겨우 몇 킬로그램의 나락을 이고 농촌 정미소에 찾아올 때는 대개 그 가족에게 무언가 좋은 일이 있을 때이다.
'맛있는 쌀을 먹고 싶다'가 농촌 정미소의 연원
서구 열강 국가들이 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식민지로 만든 제국주의의 시대, 식민지의 종주국은 쌀농사에 적합한 지역에서는 쌀을 농사짓도록 해 수출상품으로 삼았다. 이 시대의 동남아시아, 남아시아의 쌀농사는 그 주민에게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로 종주국에 의한 수출상품 산출업이었다.
그래서 그곳에 만들어졌던 종미소는 모조리 대형 상업 정미소였다. 예를 들면, 현재 인도, 파키스탄, 미얀마, 말레이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등에 있던 정미소는 모두 대형 정미소로, 현지 주민의 소비 쌀을 위한 소형 정미소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태국은 식민지가 아니었지만, 당시부터 쌀의 대량 수출국이었음).
이러한 지역의 주민이 가끔 먹는 쌀은 대개는 방아나 에도 시대에 사용한 듯한 맷돌에 의한 싸라기 투성이의 것이었다. 쌀의 수율은 낮고, 모처럼의 쌀 맛은 당연 떨어진다.
2차대전 이후 이 지역의 여러 나라가 독립해 쌀이 국민의 입에 들어갈 기회도 늘어났지만, 그를 위한 정미소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엥겔베르그식 기계(앞을 참조)는 19세기 말부터 있었지만, 당시 정치식 동력장치라고 하면 보일러에 연결된 대형 왕복 움직임 증기기관이 주이고 독립된 이 기계를 구동할 만한 소형 동력원이 없었다.
2차대전 이후 초기에는 그 엥겔베르그식 기계를 사용한 농촌 정미소가 띄엄띄엄 나타나기 시작했다. 동력원으로는 최초에는 중고 트럭의 엔진 등을 유용한 것이 많았는데, 그 뒤 싼 가격의 범용 소형 디젤 엔진이 일반적이 되어 곳에 따라서는 소형 전동기도 쓰게 되었다. 또한 엥겔베르그식 기계 이외에 각국에서 소형 도정정미기도 생산하게 되어 농촌 정미소의 출현이 가속되었다. 이렇게 하여 농민들은 자가 소비용 쌀을 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다(그림26, 그림27). 현재, 아시아 쌀농사 국가들의 농촌 지대에는 고쇼곳에 엄청난 수의 농촌 정미소가 있어, 그 이용도 가속도가 붙어 싼 가격에 편리해져 왔다. 하지만 이건 기껏해야 전쟁 이후 수십 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그림26 초기 농촌 정미소의 흐름도 일례
그림27 아시아의 농촌 정미소
위: 외관. 건물 오른쪽에 보이는 나락 더미는 농촌 정미소의 표지
가운데: 여기에서 사용되는 건 고무롤식 도정기와 분풍 마찰식 정미기
아래: 농민들은 지참한 나락을 백미로 만들어 가지고 돌아간다
세계에는 그 땅의 자연조건에 맞고, 생산성이 높으며, 재배도 쉬운 식용작물이 각종 존재한다. 각 지역의 주민은 각각에게 적합한 작물을 먹으며 살아왔다. 그런데 쌀은 각종 곡물 중에서도 뛰어나게 맛있고, 조리도 간단하며, 나락이라면 저장성도 있다. 그래서 재배 적지라면 쌀을 농사짓고 싶어한다. 그러나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는 그 쌀을 농사짓다가 어디선가 찾아온 식민자에 의해 국외로 모두 수출되어 버렸던 것이다.
"미식米食 민족"이란
"일본인은 쌀을 먹는 민족으로, 옛날부터 쌀을 주식으로 했다"고 흔히 이야기하지만, 그걸 실행할 수 있던 건 아마 사회적 지위가 높은 인간만의 이야기였을 듯하다. 또는 관념 속의 이야기. 즉, '제대로 된' 식사란 쌀을 먹는 것이라는 믿음이다.
현재는 '쌀을 주식으로 하는 나라들'로 분류되는 아시아 지역에서도 국가·지역에 따라서 실제로는 2차대전 이전에는 서민은 별로 쌀을 먹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어느 농민은 "일본 군대에 속한 '노무자'가 되었을 때 처음으로 쌀이란 걸 먹었다"고 필자에게 이야기했다. 2차대전 이후 서구의 옛 식민지였던 아시아 쌀농사 국가들은 독립하고, 그때까지는 오로지 종주국에 의한 수출상품화되어 있던 쌀이 이번은 자국민의 식량이 되었다. 지금까지 쌀을 여간해선 먹을 수 없던 서민의 쌀에 대한 갈망은 굉장하고, 그 소비의 신장은 눈을 휘둥그레지게 했다. 이건 패전 이후 일본이나 현재 아프리카 국가들의 쌀 소비의 급속한 신장과 겹쳐 보인다.
일본 안의 인간이 쌀을 좋아하는 만큼 상식할 수 있게 된 것은 2차대전 이후 10여 년이 된 1960년대부터의 일이다. 쌀농사 지역의 농민이라도 순수한 쌀밥 '긴샤리銀シャリ'(식량 부족 시대 보리밥이나 고구마 등을 넣은 밥에 대해 백미 뿐인 밥을 이렇게 불렀음)를 언제나 배불리 먹을 수 있는 건 한정된 계층으로, 대부분의 농민은 '잡곡밥', 곧 보리나 잡곡이나 고구마나 무나 각종 채소 등이 섞인 밥(때로는 '잡곡' 쪽이 쌀보다 많음)을 상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쌀이 '진정한' 주식이라 계속 믿으며.
일본에서는 자고로 "사람은 1년에 1섬(180리터. 약 150킬로그램)의 쌀을 먹는다"라고 이야기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성인 남자라면 하루에 4홉이나 5홉, 즉 1년에 1섬 5말에서 2섬 가까이를 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무가나 부유한 상인・장인 등의 이야기. 아니, 무사라도 하급 무사는 일상적으로 '잡곡밥'을 먹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방에 따라서는 농민이 쌀을 꽤 먹었다는 예가 없지는 않다. 2차대전 중, 군대에 징집된 농민은 "이걸로 흰밥을 매일 배불리 먹을 수 있을 테니"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실제로는 흰쌀은 커녕 초근목피를 찾아 먹고, 이국의 흙이 된 사람이 많았지만). 전후 몇 년 동안은 전쟁 중 이상으로 쌀은 귀중했다. 당시 "쌀밥을 먹을 수 있을 텐데"라며 경찰관에 응모한 사람도 있었다.
일본의 농가에게 쌀은 무엇보다도 환금작물이었다. 밭작물보다도 안정된 수입을 얻을 수 있었기에, 농민은 언제나 자신의 밭을 논으로 만들 기회를 엿보았다. 어느 밭에 어떻게 하면 물을 댈 수 있을까 등을 언제나 생각했다. 어떤 채소나 과수가 돈벌이가 된다고 듣고서 논을 밭으로 바꾸거나 하는 사람을 필자의 할아버지 등은 '농부가 아닌 어리석은 자' '노름꾼' 등이라 평가했다.
그 식민자가 사라졌지만, 영세한 쌀농사 농민은 농사지은 쌀을 나락 채로 싸게 팔지 않으면 생활을 할 수 없다. 그리고 소중히 놓아 둔 자가 소비용 나락은 손으로 찧어서 쌀로 만들면 싸라기 투성이의 쌀이 되어 버린다. 그곳에 농촌 정미소가 나타나 기계로 나락을 찧어 깔끔한 쌀로 만들어 주게 되었다. 이걸 환영하지 않을 리 없다.
농촌 정미소의 발상과 급격한 증가를 촉진한 원동력은 농민의 '맛있는 쌀을 먹고 싶다'는 일념이었다. 포식하는 현대인에게는 잘 맞지 않겠지만, 언제나 배고픔을 안고서 '긴샤리'를 갈앙하던 시대의 생존자인 필자 같은 인간은 그 욕망을 잘 알 수 있다.
그 뒤, 농촌 정미소의 은혜로 '먹는 쌀이 맛있어진다'는 것에 더하여, '이걸 사용해 나락을 쌀로 만들어 팔면 돈벌이가 된다'는 것이 밝혀지고, 이것이 농촌 정미소의 증가를 가속하게 되었다.
농촌 정미소는 금방 시작할 수 있다
농촌 정미소는 큰 자본도 기술도 장사 수완도 들지 않고 나락을 백미로 만들 뿐인 임가공업으로서, 마을의 대장간·목수·자전거 수리점 등과 유사한 서비스업인데 반드시 그 정도의 특수 기능이나 경험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물론 경험을 쌓아 기능을 개선하면 한층 더 번창하겠지만.
정미기를 설치한 가건물에 앉아서 농민이 나락을 가져오는 걸 기다리고, 그걸 기계로 백미로 만들어 돌려주고 현금 또는 현물로 가공비를 받기만 하는 장사, 곧 나락의 가공업이다. 큰 자금도 들지 않고, 특수한 기능도 체력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매매 행위를 하지 않기 때문에 큰 손해를 볼 염려도 없다.
그걸 시작하는 데에 최저한의 필요한 기재는 간단한 매갈이·정미의 기계와 그걸 구동할 소형 동력원(디젤 엔진 또는 전동 모터)과 그들을 수납할 가건물 뿐이다. 수송 수단도 창고도 필요없고, 앉아서 현금 또는 현물로 일당을 벌 수 있다. 이것은 쌀농사 농촌 지역에는 예외 없이 출현하는 서비스업이다.
나아가 최근에는 정미기의 가격이 10~20년 전에 비교해 대폭 싸지고 구매하기 쉬워졌기에, 개업의 장애물도 낮아졌다.
상업 정미소와 농촌 정미소의 차이
오해를 불러올 듯해서 여기에서 강조해 놓을 필요가 있는 건, 똑같은 '정미소'라고 하더라도 '농촌 정미소'와 '상업 정미소'는 하늘과 땅 차이라는 점이다. 규모도 다르고, 역할도 다르다. 둘은 혼동해서는 곤란하다.
여러 외국의 상업 정미소란 수확기에 연간 가동에 필요한 수천, 수만 톤의 대량 나락을 나락 매입업자를 끼고서 매집하고(때로는 농민에게서 직접), 그걸 거대한 나락 창고에 저장해 그 나락을 1년 내내 조금씩 정미하여 독자 상표나 포장으로 각종 품질의 유통 백미를 만들어내며, 그걸 미곡상에게 도매하거나 소매하거나 한다(그림28, 그림29).
그림28 상업 정미소(필리핀). 정면의 기계 3대는 역원추식 정미기. 왼쪽의 기계에서 오는 현미를 이들에 차례로 통과시켜 백미로 만든다. 보이는 이외에도 많은 기계가 있다. 그림29의 흐름도 참조.
그림29 20세기 중반 정도까지 유럽식 상업 정미소의 흐름도 예시
그 경영 규모는 여기에서 말하는 농촌 정미소의 100배, 1000배나 큰 것이 많다. 그래서 상업 정미소는 가공업자라기보다는 나락을 매입해 백미를 판매하는 유통업자 같은 쪽이 딱이다. 그들은 때로는 큰 사회적 영향력을 지니고, 지방이나 중앙의 정치 권력과 관련되기도 한다.
그에 반하여, 여기에서 문제 삼는 농촌 정미소란 주로 영세한 농민의 요망에 응하여 나락을 백미로 만드는 임가공업이다. 그들은 가공비(방아삯·삯방아료)를 받고 겨우 몇 킬로그램 정도의 나락부터, 때로는 수백 킬로그램 정도까지 되는 양의 나락을 매갈이 정미해 백미로 만든다. 그 가공 대금(삯방아료)는 현금 또는 가공한 백미의 일부나 부산물인 싸라기, 쌀겨 등으로 받을 수 있다. 수취한 싸라기 등은 쌀가루로 만들어 빵을 만들거나, 쌀겨는 자신의 가축·가금의 먹이로 하거나 축산업자에게 판매하거나 할 수 있다.
농촌 정미소가 농민에게서 나락을 매입해, 그걸 백미로 만들어 판다는 '상행위'를 하는 일이 없을 리는 없지만, 그것이 본업은 아니다. 그래서 큰 자본도 나락도 쌀의 저장고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경영 리스크도 없다.
어느 마을에 최초로 나타난 농촌 정미소는 엥겔베르그식 정미기 1대만을 사용한 조야한 곳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절구나 공이를 사용해 손방아로 매갈이 정미를 하기보다는 훨씬 균일한 백미를 만들고 싸라기도 적다.
농촌 정미소의 가공 삯은 싸지고, 기술은 금세 향상된다
이처럼 농촌 정미소는 손쉽고 안전하며 유리한 장사이기에, 농촌이나 그 주변에 사는 자그마한 재산을 지닌 소지주·퇴직 관리·연금 생활자·상인·장인 등이 그 지역의 쌀농사 발전과 함께 날이 갈수록 차례차례로 이 직업에 뛰어든다. 그리고 그동안 고객 획득 경쟁에 의해 가공료(방아삯)은 날이 갈수록 싸진다.
쌀농사의 역사가 길고, 영세 농민이 많은 동남아시아나 남아시아에서는 방아삯이 부산물인 쌀겨와 싸라기 뿐인 곳마저 있다. 그와 같은 경우, 만약 정미소가 일부러 기계의 조정을 바꾸어 싸라기 양을 늘리려고 한다면, 다음날부터 고객에게 외면을 당해 고객을 잃어 버린다.
농촌 정미소의 수가 늘어나 그동안의 경쟁이 격렬해짐에 따라 1대뿐인 엥겔베르그식 정미기는 이윽고 매갈이 공정과 정미 공정을 따로 실시하는 2대의 기계가 된다. 이에 의하여 나락에서 만드는 백미 수율과 백미 품질은 비약적으로 향상된다.
농촌 정미소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농민의 이용이 쉬워지고, 방아삯도 더욱 싸지며, 정미소의 기술 수준이 향상되고, 만드는 백미의 품질도 좋아지기에, 농민에게 그 이용은 점점 편리해져 나아간다.
일본에는 '농촌 정미소'가 없다
일본에는 농가가 생산한 나락을 모두 자기 자신이 매갈이를 하고 현미로까지 마무리해 버리기 때문에, 여러 외국 같은 '농촌 정미소'는 필요가 없다. 현미는 그대로도 먹을 수 있고, 만약 그걸 희게 만들고 싶다면 절구로 찧으면 된다. 일본의 단립미는 절구로 찧어도 별로 싸라기가 되지 않고 백미로 만들 수 있다. 태평양전쟁 전후에는 1되 됫박에 현미(또는 도정이 부족한 쌀)를 넣고 총채 자루 등으로 찧어서 백미로 만드는 가정도 많았다.
또한 일본의 농촌에서는 전쟁 이전부터 싼값의 가정용 정미기(현미를 백미로 만듦)가 널리 보급되어서 농가는 그걸 서로 빌려주고 있었다. 전쟁 이후가 되면, 더욱 싼값으로 경량의 편리한 전동식 가정용 정미기가 팔리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에는 여러 외국 같은 농촌 정미소는 전혀 필요가 없었다.
일본의 주로 농촌 지역에 있는 '코인 정미소'라는 것은 소량의 현미 또는 나락을 투입해 백미를 빼내는 자동판매기 같은 것으로, 해외 여러 나라의 쌀농사 농촌 지역에 있는 '농촌 정미소'와는 그 사회적 기능·성격·규모가 전혀 다르다. 여러 외국의 농촌 정미소는 작게는 몇 킬로그램 정도부터 많게는 트럭에 싣고 올 만큼의 나락 양을 백미로 만드는 어엿한 임가공업자이다.
백미로 만들면 정당한 가격으로 팔 수 있다
농촌 정미소가 생긴다면, 농민은 그것을 이용해 약간의 경비로 자가 소비용 백미를 쉽게 만들 수 있게 된다. 나아가, 그것에 그치지 않고 만든 백미를 근처 주민 또는 현지 농촌의 지방 공영시장이나 정기적으로 열리는 장터 등에서 팔 수 있게 된다. 아시아의 지방 소도시의 시장에 가서 보면, 근방의 농촌 정미소에서 만든 저울질해 파는 각종 현지산 백미에 고객이 모여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품종의 쌀이나, 알이 고르고 이물질의 혼입이 없는 깨끗한 백미는 비싼 가격으로 팔린다. 싸라기가 많고 변색 알이나 이종 곡물 등이 혼입되어 있는 쌀은 그 반분 이하의 가격으로밖에 팔 수 없다. 이러한 차이는 정미 기술의 차이에 의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이 나락의 질 차이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이러한 농민은 나락을 백미로 만들어 팔면, 나락 채로 팔기보다도 훨씬 이익이 있다고 실감한다. 더욱 중요한 점은 "좋은 나락에서 만든 백미는 더 비싸게 팔 수 있다"라는 것을 마음에 새긴다. 농민이 수확한 쌀을 나락 채로 놓아 버리는 한, 이것은 결코 실감될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서 주의하지 않을 수 없는 건, 똑같이 농촌 정미소를 이용해 백미를 조달하고 있더라도 그걸 오로지 자가 소비로 충당하는 것만으로는 이걸 확실히 인식할 수 없다는 점이다. 농민이 자신의 쌀을 자기 스스로 시장에서 팔아 현금으로 바꾸어 보고, 처음으로 이러한 것, 곧 "나락의 질 차이가 백미의 가격 차이가 된다"는 것을 납득하게 된다. 그래서 농민은 아주 자연스레 "비싸게 팔리는 백미를 만들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를 고민하게 된다. 농민은 자기 나락의 '질'이 이익으로 직결된다는 사실에 직면한다.
농촌 정미소 사이의 경쟁이 필요
이러한 농촌 정미소의 이점이 농민에게 충분히 납득되기 위해서는 그 수·능력이 충분히 있고, 그 사이에 치열한 고객 획득 경쟁이 일어날 필요가 있다. 만약 마을에 단 하나의 농촌 정미소밖에 없어 언제든 고객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면 이런 이점을 실현하기 어렵다.
길게 줄을 서서 정미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은 모두 자가 소비 쌀을 만들기 위해 여기에서 참을성 있게 줄을 서고 있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명확히 자가 소비를 초과하는 양의 나락을 백미로 만들어 팔기 위해 가지고 왔다면, "그놈의 돈벌이 때문에 우리가 오랫동안 기다려야 한다"며 반감을 사는 꼴이 된다.
게다가 이러한 독점적인 정미소는 경쟁 상대가 없기 때문에, 삯방아료를 인하한다든지 서비스나 기술 개선을 하려는 의욕도 없다. 태연히 낡은 기술을 사용해 정미 수율도 낮고 싸라기 투성이의 백미를 만든다.
그 반대로, 만약 농촌 정미소가 여러 곳 있어서 그들이 항상 고객 획득을 위해 노력하고 언제나 고객의 요망에 부응하려고 하는 상황이라면, 농민은 이들을 이용해 시장에서 팔기 위한 각종 백미를 저렴한 요금으로 만들 수 있게 된다. 예를 들면, 자신의 나락을 '너무 하얗지 않아도 좋으니까 가능하면 다량의 백미로 만들어 달라'거나, 또는 그 반대로 '가능하면 하얀 쌀로 찧어 달라'거나, '백미에서 싸라기는 분리해 따로 달라' 등과 같이.나락을 백미로 마무리하는 방식의 선택은 농민이 자기 나락의 질·양과 각종 백미의 시장 가격이나 그것의 팔림새 등을 살펴 내리는 판단에 따른다. 다른 표현으로 하면, 농민은 나락을 백미로 만들어 팖으로써 구매자가 부르는 대로의 가격으로 나락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판매자에서 자신의 소득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립적인 존재가 된다. 정미소는 또한 고객인 농민의 요구에 부응함으로써 번창한다. 그러므로 마을 곳곳에 농촌 정미소의 수가 충분히 있어서 서로 경쟁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바람직한 일이다.
나락으로 팔면 손실인 근본적 이유 -'카스케加助 소동'의 예
이러한 이야기를 필자의 지인들에게 했더니, 그들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물건을 가공하면 부가가치가 붙기 때문에, 나락을 백미로 만들면 그만큼 비싸게 팔리는 건 당연한 이야기다. 특별하다고 이야기할 정도는 아니다"라고. 하지만, 이것은 그런 문제일까? 그렇지는 않다.
'나락을 쌀로 만들어 판다'는 건 단순히 '가공에 의하여 형태를 바꾸어 판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가치를 잘 모르는 상태에서 누가 보아도 그 가치, 곧 그 품질의 차이를 알 수 있는 상태로 만들어 판다는 점이다. 가치를 잘 모를 때는 대체로 강자의 말이 통하고 약자는 손해를 본다. 그래서 때로는 구매자(또는 권력자)가 일부러 그 가치를 알기 어려운 형태로 만들어 영세 농민에게서 이익을 빼앗으려고 하기까지 한다.
그 한 예로, 에도 시대의 신슈우信州 마츠모토번松本藩에서 일어난 '카스케 소동'을 살펴보자.
토쿠가와 시대에는 각 번 모두 농민에게서 징수하는 연공은 현미의 양으로 정해져 있어, 그걸 '현미의 형태'로 납부하도록 했다. 이걸 '본연공本年貢(또는 모노나리物成 등)이라 불렀다.
그런데 신슈우 마츠모토번에서는 농민에게 부과하는 연공을 현미가 아니라 나락의 양으로 정해 '나락의 형태'로 납부토록 했다. 하지만 나락이 얼만큼의 현미에 상당하는지는 상당히 미묘한 문제여서 그곳에 위정자의 방자한 마음이 들어간다.
매갈이 비율(나락에서 현미를 얻을 수 있는 중량 비율)은 해에 따라, 기후에 따라, 또 나락의 상태에 따라서 바뀐다. 원래 나락은 그 정의, 수분 함량, 정선의 정도 등에 따라서 상당히 중량의 차이가 나며, 체적이 되면 더욱 큰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또한, 나락은 현미나 백미 등과 달리 그 표면에 털이 나 있고 푹신푹신하기 때문에, 그 측정법이나 까락이라 부르는 나락 끝에 나 있는 털의 길이에 따라, 또한 나락을 휘젓는 횟수의 차이 등으로 똑같은 체정이라도 몇 십 퍼센트나 중량 차이가 난다. 앞에 나온 '나락의 최저 매입 가격' 항에서 설명했듯이, 됫박에 나락을 담아 꾹꾹 눌러 담으면 몇 십 퍼센트나 더 들어간다. 당시 쌀의 거래는 모두 중량이 아니라 체적으로 했기에, 그것이 세를 걷는 쪽에서 버젓이 일방적으로 행해졌다.
매갈이 비율의 과소평가와 이러한 계량 조작이라는 2중 트릭에 의해, 공식적인 현미로 환산한 과세액(본연공)은 다른 번과 그다지 변하지 않은 숫자였지만, 실제로는 이 번에서 다른 번의 2배 가까운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있었다. 그래서 농민의 불만이 끊이지 않고, 마침내 농민들이 결속하여 그것을 개선하도록 요구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것이 17세기 말에 일어난 죠우쿄우貞享 소동, 또는 다른 이름으로 카스케 소동이라고 부르는 일이다.
이 경우, 마츠모토번은 "매갈이 작업이란 '부가가치를 부여하는 작업'을, 너희 농민을 대신해 번이 담당했으니 증세를 하더라도 당연하다"고 해명했을지도 모른다. 이건 앞에 인용한 필자의 지인들 발언과 유사한 생각이다.
그러나 농민은 "매갈이 작업은 다른 번처럼 우리 농민이 할 테니까 다른 번과 같이 현미로 납부하게 해주었으면 한다"고 요망했다. 이건 지극히 정직한 것이다.
중량의 불명확함・애매함이 있는 거래에서 약소 농민은 항상 손해를 본다. 거래 조건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농민은 자신의 이익을 지킬 수 없다. 이미 기술했듯이, 현재도 나락의 판매에서 대규모 쌀농사 농가의 경우에는 대등한 거래가 행해지는데, 영세 농가의 경우에는 약한 농가가 일방적으로 불리하다.
신슈우 마츠모토번에서도, 나락의 징수를 다른 번처럼 현미로 바꾸기만 하면, 그 불공평이 해소될 것이었다. 농민은 그를 요구했음에 지나지 않는데, 그것을 '불온'이자 '봉기'라고 여겼고, 그 주범으로 지목된 타다 카스케多田加助 이하 가족까지 포함해 28명이 책형·효수형을 당했다.
영세한 양의 나락 거래에서는 나락의 품질 검사가 실시되지 않는 현재, 농민이 나락의 일부를 백미로 만들어 파는 행위는 그동안에 사기 같은 거래 행태를 부분적으로 정당한 거래로 바꾸는 시도이다. 그것을 '부가가치를 매겼다'는 등의 중립적인 표현으로 부르는 것은 과연 적절할까? 그러한 평자들에게는 쌀을 나락의 형태 그대로 파는 입장이 되어 보길 권한다.
백미로 만들어 팔면 쌀농사 의욕도 기술도 높아진다
영세 농가는 애매함이 남는 나락 거래가 아니라 육안으로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쌀(백미) 거래로 하지 않으면 그 불리함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다른 상품에서도 마찬가지일 듯하다.
영세 농민을 산에서 금의 광맥을 발굴하는 광꾼에 비유해 보자. 광꾼이 만약 발굴한 금광석(영세 농가의 '나락') 그대로 팔려고 한다면, 매입업자에게는 '얼마나 금이 포함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즉 가치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으로 사들여 공짜 같은 가격으로 광석을 살 수밖에 없다.
그래서 광꾼은 선광·정선 장치(이것이 농촌 정미소에 해당)를 만들어 금광석을 순금알('백미')로 바꾸어, 눈으로 보고 확인할 수 있는 가치 그대로의 가격으로 팔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판다면 대등한 거래를 할 수 있고, 광꾼은 그 노고에 상응하는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금광석을 정제하는 광꾼은 자기 부담으로 선광 설비를 준비할 수밖에 없지만, 영세 농민에게 지금은 농촌 정미소라는 시설이 이미 존재한다. 게다가 그 시설의 성능은 끊임없이 개선되어 가공 대금도 싸지고, 사용의 편의도 나날이 좋아지고 있다. 그걸 이용하지 않을 방법은 없다.
좋은 나락은 백미로 만듦에 따라 비싸게 팔리고, 저품질 나락은 싼 백미밖에 되지 않는다. 정미소를 이용하면, 양질의 나락을 생산하는 농민은 이익이 향상된다. 나락을 매갈이 정리해 백미로 만듦에 따라 '부가가치' 등이 아니라 나락이란 가치가 애매한 것에 내장되어 있던 품질의 차이가 명확해져 그 품질에 상응하는 가격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나락 중매인 중에는 농민에게 동정적이라 가능하면 나락을 비싸게 매입하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락의 형태로는 가장 중요한 질을 누구도 알 수 없는 이상, 나락 중매인의 선의에는 한도가 있다. 농민이 쌀로 만들어 판다는 것은 "좋든 나쁘든, 품질에 상응하는 대가를 챙기겠다"는 선언·실행이다. '공정 무역' 등이라는 말이 활보하고 있는데,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농촌 정미소를 이용해 나락을 백미로 만들어 팖에 따라, 농민은 양질의 나락을 생산하면 이익을 대폭 늘릴 수 있음을 알고 그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으며 농작업 개선에도 의욕적으로 나서게 된다. 이는 일본의 농민이 나락을 현미로 만들어 파는 경우와 유사한 과정으로, 양쪽 모두 쌀농사의 기술적 개선 의욕이 샘솟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그러한 일이 '현미 유통'이란 사회적 제도에 이미 짜여져 있기에, 그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에도 시대에는 현재 같은 전국 공통의 엄밀한 혐니 등급제도는 없었지만, 현미의 질에는 상중하 등의 구별이 있어 상납미에는 일정 이상의 품질이 요구되었고, 시중 유통 쌀도 품질에 의한 가격차가 있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의 영세 규모 나락 생산 장면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관행으로, 영세 농민에게는 예외적으로 유리한 제도였다.
이렇게 하여, 원래는 농민의 자가 소비 쌀의 삯방아를 주안으로 했던 농촌 정미소가 쌀농사 농민의 생활개선을 추구하는 적극적인 행동에 의해 쌀농사로부터 정당한 이익을 이끌어내는 유력한 무기가 되었던 것이다.
쌀의 생산이나 유통은 '생활하고 있는 사람'이 담당하고 있다
현재, 아시아의 영세 쌀농사 농촌 지역에서 몇 천 몇 만이 있는 농촌 정미소는 앞에 기술했듯이 그 역사는 비교적 새롭다. 하지만 농촌 사회에서 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역할은 매우 크다. 그런데도 농촌 외부의 사람에게는 농촌 정미소의 중요성은 별로 보이지 않고, 그 사회적 역할, 유용성이 충분히 인식되지 않고 있다. 농촌 정미소는 영세 농민의 이익을 지키고, 생산 의욕을 지원하는 '지렛대' 또는 '촉매'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간과되어 농촌 지역의 다른 잡다한 서비스업과 동일시되고 있다. 그러나 그 실제 효용은 농촌 정미소가 다수 있는 지역과 그것이 전무하거나 소수밖에 존재하지 않는 지역에서의 쌀 생산 상황을 비교해 보면 일목요연하다.
세계 각지의 농업 개발 계획 등에서 쌀의 생산·유통 상황에 관한 보고서류를 보면, 나락이나 백미 등의 생산·유통 경로로 농민·집하업자·정미소·소매점·소비자 등을 원이나 사각형으로 둘러싸고, 그들을 선으로 연결한 그림을 그려 마치 그것만으로 쌀의 생산·유통 실태가 드러나는 것처럼 결론짓곤 한다. 하지만 사물의 흐름을 기록한 것에 불과한 그들 화살표나 도식 등만으로, 그에 관계되는 인간의 삶이나 사회의 실태, 거기에 숨어 있는 문제 등을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다. 필요한 것은 거기에 기술된 당사자들이 어떤 이해나 문제에 직면해 어떤 지향이나 능력을 얻거나 잃고 있는가 하는 현실의 해명이다. 그걸 고려하지 않고 '푸드 밸류 체인'이라는 용어를 휘두르더라도 무의미에 가깝다.
사물의 흐름을 주인공으로 하여 농민을 그 안의 '나락 공급자'라고 하는 단순한 한 조각으로 보는 한, 농민 개개인이 끊임없이 생활의 개선을 추구하고 있는 '생활자'라는 점을 잊을 수 있다. 그리고 농민이 농촌 정미소를 활용해 자신의 수입을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유통 나락의 질도 향상시키는 역할을 담당한다는 중요한 사실 또한 간과된다.
쌀의 '얼굴'을 읽어 기술 개선이 진행된다
일본 이외의 나라에서 영세 쌀농사 농민은 나락을 백미로 만들어 직접 팔아보기 전까지는 "나락은 나락. 그뿐"이라면서 나락의 '품질'에는 거의 무관심했다. 왜냐하면 어쨌든 똑같이 싼 가격으로밖에 팔리지 않으니까.
그런데 나락을 백미로 만들어 팔아 보면, "똑같은 나락이라도 품질에 따라서 그 가격이 전혀 달라진다"는 것을 재차 깨닫고 실감하며, 품질이란 요소의 중요성을 인식하기에 이른다. 나아가, 그 관점이 쌀에 머무르지 않고 농작물 일반을 보는 눈을 바꾸어 나아간다. 즉, '품질이란 가치이다'라는 것을 체감하고, '품질 관념'을 형성하게 된다. 이것이 쌀만이 아니라 농산물 일반의 품질에도 미치고, 나아가 사회 전체에도 영향을 미치리란 것이 예견된다.
메이지 유신 전후, 일본의 농민이 급격히 발달한 근대 공업의 담당자가 되어 갔을 때, 쌀을 현미로 만들어 팖에 따라 길러진 품질 관념이 공업 제품의 질을 유지하고 높이는 데에 공헌했다. 당시 일본을 방문한 외국 고용인들은 농촌에서 갓 모인 공장 노동자의 지식이나 규율을 보고 크게 놀라 "어째서 일본의 농민이 이렇게나 높은 규율과 품질 관념을 가지고 있는가?"라고 자문한 끝에, 그것을 에도 시대에 보급된 서당 교육과 농민이 상품 생산・유통에 관계되었던 것으로 돌렸다.
하지만, 왜 궁핍해 짬이 없는 농민이 일부러 돈과 시간을 들여서 서당에 다녔을까? 그건 적은 농지에서도 품질에 따라 더 비싸게 팔리는 상품인 현미를 만들어, 그를 위한 기술이나 비전을 배워 서로 가르쳐주고, 논 관개를 위한 협업에서 자치 의식을 기르며, 더욱 유리한 작물이나 수공업 등이 있는지 등을 알기 위해서는 '읽고 쓰는 계산'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일본의 농업은 다양해졌고, 막부 말기에는 양잠이나 각종 공예작물이나 기타 수공업 등도 발달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오로지 나락 형태로 쌀을 팔던 해외의 영세 쌀농사 농민은 그 생산하는 나락의 일부를 농촌 정미소를 이용해 미려한 백미로 만들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농민에게 획기적인 일이다. 왜냐하면, 이에 의해 비로소 자신이 농사짓는 쌀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자신이 농사지은 '쌀'은 왕겨라는 탈을 쓰고 있어 그 본모습을 보지 못했다. 설사 직접 나락을 찧어도 나온 것은 싸라기이지 그 본모습은 알 수 없었다.
일본의 쌀농사 농민은 탈곡·매갈이를 해서 만든 자기 현미의 '얼굴'을 열심히 본다. 그 '생김새'에 따라 자신의 쌀농사를 반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현미에 충해 알곡이 많으면 해충 방제를, 미숙 알곡이 있다면 시비법이나 벼베기 시기를, 몸통이 깨진 알곡이 있으면 나락 건조법 등등을 반성·재검토하고, 그것이 기술의 개선·향상으로 이어진다.
해외의 영세 농민도 농촌 정미소를 이용함에 따라 자기 쌀의 얼굴, 그들의 경우에는 백미라는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기에 일본 농민과 마찬가지로 쌀농사 과정을 반성하고 개선하는 계기를 얻게 된 셈이다. 이는 나락을 모두 그대로 팔아 버리는 한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이점이다. 애초에 나락의 질을 바꾸어 보았자 아무런 이익도 없었던 것이고.
나락을 백미로 만들어 팔게 되면 나락 품질의 개선은 그대로 농민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보급원의 기술 개선을 위한 조언 등도 흘려듣기는 커녕 자진하여 요구하게 되어서 적극적으로 기술 개선의 노력을 거듭하게 된다.
현미 유통과 마찬가지로, '품질 = 가격'이다
농민은 농촌 정미소에서 자신의 나락을 백미로 만드는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농사지은 나락의 품질을 파악하고 어느 정도 평가할 수 있게 된다. 비록 수확한 나락의 대부분을 나락 그대로 나락 집하업자에게 팔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만약 자신의 나락이 부당하게 저평가를 받는다고 느낀다면 더 나은 매입 가격을 주장할 근거가 있고, 또 그것을 들어주지 않을 때에는 나락으로 팔지 않고 백미로 만들어 파는 걸 선택할 수도 있다.
아시아, 아프리카의 영세 쌀농사 농가가 농촌 정미소를 이용해 "백미로 만들어 팖에 따라 나락 품질에 상응하는 정당한 가격을 얻는다" "나락 품질 개선에 따라 이익을 늘린다"는 선택을 취하는 것은, 일본의 소작농이 패전 직후의 농지개혁에 의해 자작농이 되었을 때 자기 부담의 탈곡기·도정기를 갖고자 했던 선택과 서로 호응하는 것이다.
일본의 농민 대다수가 소작농으로 일했던 때는 일정 비율의 소작료를 기계적으로 납부하고 나머지를 자기 몫으로 취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증산을 하더라도 쌀의 품질을 개량하더라도, 그 성과의 절반은 지주의 몫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정농精農'이라거나 '독농篤農'이라 불리는 연구에 열심인 농민은 소작농에는 드물고, 그건 대부분 자작농에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소작농이 자작농이 되면, 이번에는 수확의 모든 것이 자기 것이 된다. 재배 기술을 개선해 수확량이나 쌀의 질을 높일 뿐만 아니라 탈곡·조정 작업에도 신경을 써서 쌀의 품질을 개선해서 비싼 단가로 팔리도록 노력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래서 앞에 기술한 바와 같이, 자기 부담의 탈곡기나 도정기를 획득하려고 세차게 달려든 것이다.
일본과 해외에서는 현미 유통과 나락 유통이란 차이가 있지만, 해외에서는 농민이 농촌 정미소를 이용하게 됨에 따라 "쌀의 품질을 높이면 수입도 그에 비례해 늘어난다"는 것이 일본과 공통된 셈이다.
농민의 기술 개선의 한 예
해외의 영세 농민이 나락을 백미로 만들어 파는 경험을 바탕으로 그 기술, 곧 수입이 개선되는 두드러진 예는 나락 건조법의 개선에 의한 백미의 싸라기 감소이다.
보통 농민이 집하업자에게 나락을 파는 경우에는 덜 건조한 나락으로는 극단적으로 값을 후려쳐 사들이기 때문에 나락을 건조한 뒤 파는 경우가 많다. 이때 빨리 건조하기 위해 나락 지상에 아주 얇게 1cm 또는 그 이하의 두께로 펼쳐 강한 햇빛으로 급속히 건조한다.
이런 식으로 나락을 건조하면 나락 안의 쌀알은 균열 투성이가 되고, 이러한 나락을 매갈이 정미하면 설령 어떠한 고급 기계를 가졌더라도 싸라기 투성이의 백미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그런 건 내 알 바가 아니다. 나락의 상태로 보는 한, 어떤 방식으로 건조했는지 등을 제삼자는 알 수 없으니까. 빨리 건조해서 빨리 팔아 버리고 부채를 줄이는 쪽이 좋다.
현재 아프리카의 여러 나라에서 생산해 유통하는 쌀은 그 품질이 매우 나쁘고, 싸라기 투성이에 돌이나 모래나 이종 곡물 등의 혼입도 많다고 자주 이야기된다. 그건 농민의 대부분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나락을 건조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농민이 자신의 나락을 농촌 정미소를 이용하여 백미로 만들어 시장에서 파는 경우에는 다른 방식으로 나락을 건조하게 된다. 곧, 토사가 혼입되지 않도록 지면에 시트를 깔고, 그 위에 나락을 4~5cm 이상의 두터운 층으로 펼쳐 가능하면 약한 햇빛을 쬐면서 빈번히 뒤섞으면서 나락 전체를 천천히 균일하게 건조한다. 이와 같이 해서 건조한 나락에서 만든 백미는 싸라기의 비율이 대폭 줄어들고, 비싼 단가로 팔 수 있다. 나락의 건조 방식 하나로 이익이 크게 늘어난다는 것을 농민은 실감한다.
이러한 나락의 건조법, 곧 '나락의 건조는 급격하지 않고 천천히 하는 쪽이 좋다'라는 것은 상업 정미소의 기술자에게는 옛날부터 알려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상업 정미소의 빈틈없는 경영자는 수확기에 농가로부터 일부러 덜 건조한 나락을 싸게 매집한다. 그리고 그 나락을 정미소의 넓은 포장 광장에 두텁게 펼쳐서 고용한 인부에게 끊임없이 뒤섞도록 시키고, 위에 기술했듯이 전체를 균일하게 천천히 건조한다(그림30). 이렇게 해서 건조한 나락에서는 농가에서 급속히 건조한 나락에서보다도 훨씬 싸라기가 적은 백미를 높은 비율로 얻을 수 있다.
그림30 상업 정미소의 나락 건조 작업
농촌 정미소를 이용함에 따라 나락을 백미로 만들어 팔게 된 농민은 이리하여 상업 정미소의 숙련된 기술자와 똑같은 지식·기능도 자연스레 획득하고, 백미 판매의 이익을 늘릴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아프리카의 농촌 정미소에서도 콘크리트를 깐 광장을 설치하고, 매갈이 정미를 의뢰하러 오는 고객 농민에게 이것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서비스나, 그렇게 해서 생긴 건조 나락을 일정 기간 저장하는 서비스까지 제공하는 곳이 있다. 이에는 물론 농민 고객의 획득, 다른 정미소와의 차별화라는 정미소 사이의 경쟁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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