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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雜다한 글

동(同)과 화(和)

by 石基 2008.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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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同)과 화(和)




  어렸을 적만 해도 우리 동네에는 미친 사람 소리 듣는 사람도 살았고, 가끔 거지도 돌아다니고, 약간 모자란 사람도 살았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예쁘게 꽃단장을 한 미친년이 돌아다니다가 아이들에게 놀림 당하던 모습도 기억나고, 놀림 당하다 한 번씩 덤벼들면 무서워라 흩어지던 아이들도 기억난다. 또 밥을 얻어서 어디 구석에 박혀 밥을 먹다가 아이들에게 둘러싸이던 거지의 모습도 기억나고, 아이들이 약간 모자란 사람에게 얼토당토않은 짓을 시키거나 괴롭히던 모습도 기억난다. 그 모습을 보면서 어린 마음에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던 것도 기억난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사람들을 동네에서 찾아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들 어디 정신병원이나 노숙자 쉼터나 집 안이나 요양소에 있어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이제 잘 살게 되어서 그런 사람들이 없는 것일까? 특히 서울에 살 때는 도대체 찾아보려 해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나마 이곳 안산으로 오니, 안산에서도 신도시 개발된 곳이 아닌 일동으로 오니 동네에서도 간혹 볼 수 있고, 밭을 오가는 길에서도 볼 수 있어서 왠지 모를 정감이 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안산이 나쁜 곳이라거나 후진 동네라는 얘기가 아니다. 옛날에는 그런 사람들도 한 동네에서 어울려 사는 것이 정상적인(?) 일이었는데, 요즘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산업화가 진행되고 그에 따라 큰 도시가 형성되면서 과거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 살게 된 것이 사실이다. 그 중에서 서울은 천만이 넘는 사람들이 사는 공간이 되었는데,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유독 그런 사람들은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그것이 혹시 우리가 앞만 보며 달리다 보니 앞으로 치고 달리기에 부족하거나 뒤처지는 사람을 우리 스스로 소외시켜버린 결과가 아닌가 한다. 이제야 숨 좀 돌릴 수 있는 상황이 되어서, 아니 숨 쉴 수조차 없이 힘들어서 주변을 둘러보니 나만 남고 아무도 없음을 발견하고 있다. 나도 모르는 새에 스스로도 소외시켜 버리게 되었다.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배부르게 되었지만 어느새 우리는 어딘지 모르는 허전함과 남과 어울려 사는 방법을 잊어버리게 된 것이다. 심지어 가정에서조차 부부 간에, 부모자식 간에 남남처럼 살고 있는 경우도 비일비재 하다. 이제야 복지니 가족공동체니 이웃이니 하면서 회복하려고 하지만 아직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는 것 같다. 속 내용이 비고 껍질만 남아서 다시 그 내용을 채우는 데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우리는 서로 어울려 사는 화(和)의 방법 보다는 하나가 되어 힘있게 치고 나갈 수 있는 동(同)의 방법을 선택했고, 그렇게 해방 이후 50년을 살아왔다. 튀는 놈은 용납되지 않았고 빨갱이로 몰렸으며, 내 밥그릇 챙기기에만 급급했다. 동(同)은 물론 그렇게 나쁜 뜻만 내포되어 있는 말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너무 하나 되기만을 강조하여 서로의 다름이나 차이는 인정하지 않았고, 절박함․배고픔․위기감 등은 그것을 정당화 시키는 근거로 작용했다. 그 결과 부모님은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혹시 뒤처지지는 않을지, 남들처럼 살지 못할지 노파심에 초조하게 되었고, 아이들도 자연스럽게 그런 부모님들의 모습을 닮게 되었다. 남편은 밖에 나가서 남들만큼 살기 위해 돈 벌어오는 기계가 되었고, 아내는 집 안에서 남의 눈치만 살피게 되었다. 집 밖으로 나선 아내들은 여전히 온갖 차별을 당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텔레비전 같은 언론매체에서 보이는 삶을 살기위해 오늘도 여념이 없다. 젊음의 거리라는 명동을 나가보면 다들 똑같은 옷차림에 똑같은 이야기를 하며 지나다니면서, 자기들은 개성적이라 말들 하지만 모두들 판에 박은 듯이 하나같다. 개성을 찾자는 언론의 목소리는 자본의 목소리가 되어 개성이 곧 무개성인 시대를 만들고 있다. 유행에 뒤처지거나 유행을 따르지 않는 사람을 이상한 사람 쳐다보듯 하는 시선은 그것을 대변하고 있다. 개성은 개인의 품성에서 비롯되어 나온다. 진정한 개성은 겉모습이 아닌 속에서 나온다는 것을 뻔히 알지만 선뜻 겉모습을 버리고 속을 차리는 일에 나서는 일은 두려운 일로 여겨진다.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의 흐름에 낙오될까 두려움이 앞선다. 이외에도 동(同)의 논리는 우리 사회 곳곳에 뿌리박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전에 하나 되는 힘을 통해서 역경을 딛고 일어섰다면, 이제는 다양성과 차이, 다름을 이야기해야 하는 때가 되지 않았는가 한다. 그렇다고 화만 강조하는 것도, 동만 강조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극에 치우친 것이다. 진정 중요하고 어려운 일은 동과 화를 얼마나 조화롭게 이루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작은 텃밭을 일구며 동(同)과 화(和)에 대해서 생각하곤 한다. 텃밭은 그 자체로 화(和)의 논리가 적용되는 곳이다. 밭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부터 내가 길러 먹는 작물이며 주변 동물들까지 수많은 생물들이 함께 어울려 살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나도 포함된다. 내가 심은 콩을 까치가 먹는 것도, 무․배추를 벌레가 먹는 것도, 거름이 작물을 살찌우는 것도, 내가 수확해서 먹는 것도, ……, 이 모든 것이 어울려 사는 모습이다. 고추를 심을 때 사이사이에 들깨를 심으면 좋다고 한다. 들깨의 강한 향이 고추에 생기는 병충해를 어느 정도 막아주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배추 또한 그런 이유로 대파와 함께 심으면 좋다고 한다. 그리고 수수 종류는 거름을 많이 필요로 하기에 콩과 식물과 함께 심는 것이 좋다고 한다. 감자와 완두콩은 생장시기가 비슷해서 함께 심을 수 있는 등 서로 어울려 사는 법을 이용한 농법들이 무수히 많은데, 그 중에서 내가 올 해 실험하고 있는 방법만 들면 이렇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생물들의 상호작용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지만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것이 무궁무진한 상태이다. 황우석 교수가 인간복제에 성공한다고 해도 그것은 이 속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황우석 교수의 엄청난 성과가 후에 어떤 방향으로 작용할지는 지금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나는 여기에 생계가 달리지 않았으니 이렇게 한가로운 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랫동안 농사를 지으신 어른들을 만나뵐 때면 비록 그 분들이 생계 때문에 농사를 지으실지언정 그 분들의 엄청난 내공에 놀라고 감복하곤 한다. 그 분들은 어디서 배우지 않아도 오랜 경험과 지혜 속에서 스스로 그 이치를 터득하고 계셨다. 그런데 이제 그런 분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시면 어떻게 될지 걱정이 된다. 우리나라의 농업정책은 규모화에 있다고 들었다. 미국이나 중국처럼 한 사람이 특용작물을 대규모로 하는 길만이 우리 농업의 살 길이라 하여 그런 방향으로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한다고 한다. 여전히 행정관료들에게는 동(同)의 논리만이 유효한 것이다. 그리고 이제 유기농업에도 그런 논리가 서서히 침투하고 있다고 한다. 순환이나 흐름, 어울려 사는 법을 이용한 농법보다는 보다 많은 이윤을 위해서 외부에서 고에너지를 사다가 투입하고, 많은 비용을 들여서 시설을 갖추고, 농약이나 화학비료만 안 준다 뿐이지 똑같은 석유로 만드는 비닐도 사용하고 있다. 그렇다고 그 분들을 손가락질하고 비난할 수 있는 도시민은 거의 없다. 도시민은 도시에 산다는 것 자체만으로 그 분들보다는 못한 사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도시에 살면서 얼마나 많은 자원을 폐기처분하고 낭비하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 똥오줌이 그렇고, 음식물 쓰레기가 그렇고, 매일 타고 다니는 자가용이며 밤늦게까지 사용하는 전기며 모든 것이 소비요 낭비이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동(同)의 논리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부작용이 생기는 모습이 안 좋다는 것이다. 동의 논리는 분명 힘이 있고 버려서는 안 될 가치이긴 하다. 하지만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지나치게 강조된 동(同)의 논리는 분명 문제가 있다. 모두가 똑같아 질 필요는 없다. 서울에 있는 패스트푸드점과 커피점을 유럽의 어느 도시에 가도, 동남아의 어느 도시에 가도 만날 필요는 없다. 각 지역에는 자기 환경에 맞는 삶의 방식이 있고 그에 어울리는 문화가 있다. 그런 것들을 전부 가치 없는 것이라 부정하고 자기들의 논리만 강조하는 그런 자세가 문제인 것이다. 인간은 독불장군이 될 수 없다. 1분이라도 숨 안 쉬고, 하루라도 먹고 마시지 않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이웃과 어울릴 줄 알고, 자연과 어울릴 줄 알아야만 진정 편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숨쉬는 공기, 마시는 물, 먹을거리는 내 이웃과 연관하여 그리고 자연과 연관할 때만 얻을 수 있다. 나는 우리 동네에서 미친 사람도 보고, 거지도 보고, 약간 모자란 사람도 보면서 그렇게 살고 싶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도 좋다. 나를 받아들여줄 수 있는 가족과 이웃이 함께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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