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 코드
어젯밤 술술 읽히는 바람에 새벽까지 다빈치 코드를 붙들고 있었다.
한마디로 은폐되고 억압된 여성성의 역사라고 할까?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그런 비밀이 있었는 줄은 몰랐다.
정설은 아니겠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리는 없을 터이다.
성배, 장미, 다윗의 별, 정사각형 십자가에 얽힌 기호학적 의미도 흥미로웠다.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를 논리적으로 잘 구성해 놓았다.
또 음모론이나 은폐된 역사에 관심을 갖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상자를 주면서 열어보지 말라고 하는 것과 같은 호기심을 만들어 낸다.
예수가 결혼을 했는가 아닌가, 마리아 막달레나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기독교의 정신일 것이다.
은폐된 역사나 음모는 인류 역사상 언제나 있어왔다.
우리는 선택되고 간추려지는 것은 후대 사람들의 입맛에 맞춘 것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다.
널려 있는 다양한 자료들 중에서 어느 누가 일관성을 갖고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해내느냐, 그래서 사람들의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느냐가 종교든 학문이든 예술이든 과학이든 그 어떤 영역에서든 중요한 것 같다.
공자가 그런 작업을 수행했고, 석가와 예수도 그런 작업을 수행한 것임을 요즘 공부를 하면서 실감하게 된다.
그렇기에 음모에 주목하면서 단순한 호기심을 채우기 보다는 다빈치 코드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기독교의 정신에 대한, 그리고 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깊은 고찰과 이해가 삶을 풍요롭게 하는데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다빈치 코드라는 책이 왜 세계적으로 화제를 몰고 왔는가를 따져보는 작업이 중요할 것이다.
다빈치 코드에서 말하고 있듯이 지금 시대는 과도한 남성성의 시대이다.
남성성이 의미하는 좋은 점도 있지만 부작용으로는 경쟁, 폭력, 억압, 지배 등 힘과 관련된 어두운 면들이 있다.
현세계는 무한 경쟁의 체제 속에서 가진 자는 더욱 부유해지고, 못 가진 자는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는 비참한 현실을 낳고 있다.
전 세계의 화약고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태이고, 정의와 자유라는 이름으로 침략이 정당화 되고 있다.
기상이변이다 환경의 역습이다 라고 하는 인간 생존의 과제가 어느 시기보다 중요하게 떠오르고 있다.
삶은 갈수록 잔인하고 각박해져만가고 인간미는 찾아볼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긴장과 불안의 연속이다.
사람들은 이 속에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말일의 시대, 불교에서 말하는 말법의 시대를 보고 있다.
이런 폐단을 작가는 남성성이 중심이 된 기독교에서 찾고 있다.
초기 여성성이 강조되던 기독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여성성의 중요성에 주목하고 있다.
포용과 용서, 창조, 예술, 생산, 생명 등에 중심을 둔 여성성이 강조되는 이유는 현대 사회의 불안의 원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느 길이 정답이다 라는 결론은 어느 길을 선택하든 옳지 못한 길 같다.
사람은 남자든 여자든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갖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연을 보아도 이 원리는 명확하다.
생존이라는 절대절명의 원리 앞에서는 남성성이 더 유리하고, 공존이라는 절대절명의 원리 앞에서는 여성성이 더 유리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어느 한 쪽에 대한 일방적인 강조는 다른 한 쪽을 포기하게 하는 억압과 다르지 않다.
남자는 남자다워야만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만 한다는 논리가 그 간 전 세계를 지배해왔다.
우리에게 가깝게는 유교가 그래왔고, 서양에서는 기독교가 그래왔다.
그 부작용으로 한 쪽이 권력과 힘을 얻게 되면 다른 한 쪽을 언제나 억압해왔다.
이에 대한 반향으로 억압당한 쪽의 일방적인 권리선언이 그간 목소리를 높여 왔다.
우리나라에서 보여졌던 극단적인 페미니즘이 그 좋은 예일 것 같다.
하지만 역시나 핵심은 양 성간의 적절한 조화, 화해, 협력일 것이다.
어느 한 쪽만 갖고 있다면 온전한 삶을 꾸리기 힘들기 때문이다.
여성성만 강조한다면 개체 보존이라는 삶을, 남성성만 강조한다면 종족 보존이라는 삶을 제대로 꾸리기 힘들 것이다.
과도한 남성성을 지닌 남성은 적당한 여성성을, 그 반대의 경우에는 남성성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 가지만 더, 말일의 시대, 말법의 시대가 있을까?
자연을 자세히 관찰하면 끝이란 없다.
끝이 곧 시작이고 시작이 곧 끝이다.
서로 서로는 물고 물려 있는 뱀이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듯한 형상이다.
어느 것 하나 자기 홀로 외따로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말법이나 말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력 - 굳이 돈이나 정치권력, 군사력 같은 거대한 권력만이 아닌 나 자신이 존재기반으로 가지고 있는 목숨 그에 대한 집착과 욕망을 갖고 있는한 충분히 권력이라고 할 수 있다. - 을 굳건히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나 말일이고 말법일 것이다.
부처는 우리가 집착하고 있는 권력을 버려내라고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돌고 도는 순환 속에 있는 존재일 뿐, 지금 숨쉬고 움직이고 있는 내 몸뚱아리가 전부는 아니다.
당장은 몸뚱아리가 전부처럼 보이지만 어디 내 몸뚱아리가 나만의 것이던가?
공기가 없으면 당장 숨막혀 죽는다.
그럼 그런 몸뚱아리가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완전한 내 것이라면 공기나 물, 음식이 없어도 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세상 어느 곳에서도 그런 완전한 몸뚱아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보지 못했으며, 있지도 않을 것 같다.
내 몸뚱아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먹고 마시고 숨쉬어야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무엇인가?
나무, 물, 동식물, 공기 등이다. 또 이런 것들이 있기 위해서는 달과 태양 같은 무수한 전 우주가 함께 해야 한다.
이렇듯 내 몸은 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내 몸이 내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산다.
더 깊은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
아무튼 개인적으로 다빈치 코드를 보면서 생각하게 된 점은, 다빈치 코드에서 밝히고 있는 기독교의 핵심원리가 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동학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시천주, 인내천을 핵심 사상으로 하고 있는 동학의 원리는 여타의 종교들과 마찬가지로 그 핵심에서는 일맥상통하고 있다.
아직 그 뿌리로 들어가보지 못한 상태여서 그것을 비교해보지는 못하지만 이제부터 살펴보려고 한다.
동학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우리 땅에서 발생한 사상인 만큼 우리네 정서에 부합하는 무언가를 갖고 있을 것 같아서이다.
수많은 서양사상이 수입되어 지금 우리의 골간을 이루고 있지만, 우리와 맞지 않는 옷을 억지로 수선해서 입는 것 같은 느낌이 사실이다.
우리에게 적합한, 맞는 옷은 무엇일지 그것을 동학을 통해서 공부해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