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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제초제에 내성이 생긴 풀의 문제의 미국만의 문제이겠냐 싶었는데, 한국에서도 과학적으로 조사한 자료가 나왔다. 바로 충청북도 지역의 논을 대상으로 조사한 내용인데 이것이 충북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대략 30% 정도의 면적에서 제초제 내성 풀이 발견되는 듯하다. 이것이 벼농사를 많이 짓지 않는 충북의 경우가 이러한데, 벼농사 면적이 더 넓은 지역은 어떠한지 모르겠다. 

아무튼 결론은 한국도 제초제 내성 '슈퍼 잡초'에서 안전한 지역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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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지역의 논 25.7%가 제초제를 사용해도 잡초가 죽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충북도농업기술원(원장 조광환)이 지난해 9월부터 최근까지 도내 12개 시군 400여 곳의 논 토양시료를 채취해 제초제 저항성 잡초 발생 예측상황을 조사한 결과, 전체 논 재배면적 4만6758ha 가운데 25.7%인 1만2032ha 정도가 제초제를 사용해도 잡초가 죽지 않는 것으로 조사됐다고 15일 밝혔다. 

또한 농업인들의 제초제 사용현황을 조사한 결과 설포닐우레아계 제초제를 오랫동안 연이어 사용하고, 현재도 70% 이상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도 농업기술원은 제초제를 사용할 때 동일한 성분의 제초제를 같은 논에 해마다 사용할 경우 그 제초제에 대한 저항성이 생겨 잘 죽지 않는 잡초가 늘어 방제체계를 개선하지 않으면 제초제 저항성 잡초 발생면적은 급속히 증가할 것으로 예측했다. 

저항성 잡초 가운데 발생면적이 가장 높은 초종은 물달개비 36.4%, 올챙이고랭이 30.7% 미국외풀 10.6% 순으로 특히 저항성 잡초 ‘피’의 발생률이 9.5%정도로 조사돼 ‘피’를 방제하지 못할 경우 수량감소율이 높아 수확포기 상태까지 초래될 수 있다. 

도 농업기술원 김은정 농업연구사는 “농작물 재배는 잡초와의 전쟁으로 2~3년을 주기로 성분이 다른 제초제로 바꿔 사용해야 한다”며 “벼농사는 필수적으로 모내기 전 써레질을 할 때 토양살포용 제초제를 뿌리고 이앙 후 5일 내 초기 방제용 약제를 사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이앙 15일 이후에는 중기 잡초방제용 약제를 추가로 뿌려주고, 후기에는 어떤 잡초가 많은지 관찰해 그에 맞는 약제를 선택, 적기에 뿌려 방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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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지역은 계절풍 기후로 말미암아 그에 잘 적응하여 자랄 수 있는 벼라는 작물을 선택하여 주곡으로 먹었다. 이 벼는 고온다습한 기후조건을 좋아하는 식물로서 아시아 지역에 아주 알맞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이 벼를 기르는 방법 가운데 물 사용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지나치게 많은 물을 사용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뭐 쓸데없이 물을 많이 사용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고 실제로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는 아시아의 독특한 기후조건에서 발달한 농법도 함께 고려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AWD라는 기술도 사실 우리의 전통 벼농사를 보면 늘 해오던 물대기와 물떼기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농사를 잘 짓는 농부는 논에 늘 물을 채워놓는 것이 아니라 벼의 뿌리가 튼실하게 내릴 수 있도록 중간중간 논에 물을 떼는 방법을 사용해 왔다. 요즘은 그게 귀찮아서 그냥 논에 물을 찰랑찰랑 채워놓는 것이 일반적이 되었지만 말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아도 전통적인 벼농사 방법에 대한 조사와 연구도 함께 이루어지면 더욱 좋으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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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농민은 논에서 물높이를 관찰하고자 흙에다 관을 꽂았다.


국제미작연구소 IRRI는 벼 수확량을 줄이지 않고 생산에 사용하는 30%의 물을 절약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다. AWD라 불리는 물대기와 물떼기를 번갈아 하는 이러한 주기적인 관개기술은 관개 벼 합작연구(IRRC)를 통한 중국, 필리핀, 방글라데시를 포함하는 국제협력의 결과이다. 1997년부터 SDC에서 자금을 대고, IRRC는 아시아에서 전 지역의 학습과 새로운 벼 생산 기술의 확산을 도왔다.


세계의 논은 세계 관개용수의 40%를 받아들인다. 아시아에서 논의 50%는 관개되고 있으며, 대륙의 벼 생산 가운데 75%를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농업만이 아니라 산업과 도시의 생활에서 담수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것이 2025년까지 관개되는 논의 15만 제곱킬로미터에 영향을 줄 수 있는 물부족을 일으키고 있다: 지역 식량안보에 대한 진정한 과제이다.




AWD_tube

논흙에 관을 꽂아 물높이를 측정하기

새로운 해결책 : 물대기와 물떼기를 번갈아 하는 기술(Alternate Wetting and Drying Technology) 

물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국제미작연구소(IRRI)는 관개되는 논의 수확량을 유지하면서 필요한 물의 양을 줄이는 방법에 대해 조사했다. 몇 년의 연구 끝에 그들은 물대기와 물떼기를 번갈아 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논에 늘 물을 채워두는 대신에, 이 기술을 사용하는 농민은 다시 논에 물을 채우기 전에 땅속 15cm 아래까지 물높이를 낮출 수 있다. 그들은 논바닥에 꽂는 간단한 플라스틱 관을 사용해 물높이를 관찰한다. 그 결과는 자명하다: 이 기술을 받아들인 농민은 담수의 30%까지 절약하면서 여전히 똑같은 양의 벼를 생산한다.
시범단계가 끝나면, 관개 벼 합작연구(IRRC)는 National Research and Extension services와 NGO 및 사적부문과 함께 협력하여 아시아의 15만 이상의 농민에게 이 기술을 보급할 것이다. 이로써 이 기술은 벼 생산에서 물부족을 완화시키는 열쇠가 될 것이다. 




아시아 전역의 정책적 영향

필리핀에서 이 기술은 이른바 국가적 주식 자급 프로그램에서 사용하는 핵심기술의 하나가 되었다. 2009년 농업장관은 다른 물 절약 기술과 함께 전국적으로 이 기술을 채용하라고 모든 기관에 직접 행정적 명령을 내렸다. 또한 이 기술은 관개를 관리하는 농민을 지도하기 위해 설계된 공식적인 벼 검사체계의 일부가 되었다.
방글라데시에서 농림부 장관은 이 기술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도록 했다. 베트남에서도 마찬가지로 Giang주의 농업농촌개발부는 주의 자체 프로그램으로 이 기술을 포함시켰다. 


인구에 대한 구체적 영향
방글라데시에서 사적부문의 구성원은 물 사용이 15~30%까지 줄었다고 보고했다. 양수기와 연료 비용의 감소가 3000평당 67~97달러 정도 농민의 수입을 올리도록 했다고 추정한다. 
베트남 남부의 보고는 심지어 이 기술을 사용하여 15%까지 수확량이 증가했다고 한다. 




미래를 위한 커다란 잠재력

이 기술을 채용할 수 있는 지역은, 특히 건기가 있는 아시아의 관개되는 논의 대부분이 이에 포함된다. 버마, 라오스, 인도네시아, 태국은 이미 농촌 지역에 이 기술을 보급하기 위하여 IRRC에 접근했다. 
게다가 IRRC는 벼 생산에서 여러 가지 또 다른 지속가능한 관리 기술을 개발했다. 그 가운데 곧뿌림; 그곳에 적합한 특정 영양관리, 풀과 해충, 설치류를 억제하는 새로운 방법. 그에 의하여 벼 생산은 더욱 지속가능하게 생산수준이 꾸준히 유지되거나 심지어 증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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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 농사짓는 건 일회성 행사밖에는 되지 않는다. 

그 상징성은 있겠지만 그에 집중할 힘으로 다른 방식을 궁구하길 바라는 바이다. 

무슨 농사를 구경거리로 만들려고 하나. 

아무튼 농사는 직접 참여하여 땀흘리는 형태가 아니면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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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이 정확히 생태농업과 관련되지는 않지만, 농사의 원리는 같기에 참고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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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기후변화에 따른 벼농사 안전 관리로 고품질 쌀 생산이 필요한 것으로 지적됐다.


전라북도 농업기술원은 지난 몇 년간 관행적으로 농사를 지어도 문제가 없었지만 갑작스런 기후변화가 발생하는 지금은 영농 교육에서 강조한 물 관리, 이삭거름, 병해충 발생 예보에 따른 적기 방제 등을 실천해야만 고품질 쌀 생산과 풍년 농사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금부터 벼농사 관리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고품질쌀 생산을 위한 관리이다. 

벼의 쓰러짐은 고품질 쌀 생산 및 수량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쓰러짐의 주원인은 이삭거름을 과용하거나 논을 제때 말리지 못할 경우 주원인이 된다. 

기상이변에 따른 태풍이 언제 또 얼마나 올라올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거름을 알맞게 주고 논을 말리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이삭거름은 이삭이 패기 전 25일쯤 어린이삭의 길이가 1~1.5mm 정도일 때 N-K(18-18)비료를 300평에 12~14kg이 기준이다. 

전라북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만생종은 일반적으로 8월 15일을 전후해 이삭이 올라오나, 어린이삭을 직접 확인하고 주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물 관리는 적정한 포기 수가 확보되는 모내고 30일 경우부터 중간물떼기를 해야 한다. 

중간물떼기는 헛새끼의 발생을 억제하고 토양의 유해가스를 배출해 뿌리가 깊게 내리도록 하여 쓰러짐을 방지하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아울러 전라북도 농업기술원에서는 매월 병해충 예찰정보를 시군농업기술센터에 발송하고, 돌발 병해충이 발생될 경우방송으로 홍보하여 병해충 적기 방제를 이끌어가고 있다. 

올해 고품질 쌀 생산 및 풍년농사를 위해서는 병해충 예찰정보를 활용한 적기 방제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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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rn Ken은 논에서 김매기할 때 함께하는 걸 좋아한다. 그녀의 자매 So Van은 논에서 그녀를 돕고, Sorn은 똑같이 도울 것이다. 그녀는 자매의 논 귀퉁이에서 “우린 이야기를 나누고, 피곤하면 쉬면서 잡담을 나눈다”고 말한다. “그게 남과 함께 논에서 김매기하는 즐거움이다.”

Sorn은 캄보디아 남부의 Takeo주에 근거를 둔 Oxfam의 조력자 RACHANA가 만든 기계적인 제초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뒤 논에서 김매는 시간이 줄었다고 한다. 농민이 이 새로운 기구를 사용하면 며칠 걸리던 일을 몇 시간 안에 끝낼 수 있다.

Oxfam이 지원하는 RACHANA은 제초기를 설계하고 시험하여 농민이 더 많은 벼를 기르도록 도왔다. 혁신적인 벼농사 체계로 전환하고 기계적인 제초기를 사용하여 생산량을 100% 이상 올릴 수 있었다 –Sorn과 그 자매와 같은 소규모 벼농사 농민을 위한 커다란 개선.


혁신을 지원

Sorn은 벼 강화 체계 또는 SRI라 불리는 특별한 방법으로 벼농사를 짓는 지역의 100가구 가운데 한 명이다. SRI는 Sorn 같은 소농이 이용할 수 있는 혁신의 형태를 대표한다: 그건 논을 갈고, 토양비옥도를 개선하며, 벼를 곧뿌림하고 모내기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수확량을 높인다. SRI는 식물이 더 강하게 크고, 해충과 질병에 더 저항력이 높도록 돕는다. 그건 특별한 품종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리고 벼가 더 건강하기 때문에, 농민은 화학비료나 농약이 덜 필요하여 돈도 절약하고 환경도 보존한다.

SRI 기술의 하나는 배게 모를 심는 대신, 멀리 떨어트려 모를 내는 것이다. 그 거리는 뿌리가 더 강하게 자라도록 돕는다. SRI 농민은 줄을 맞춰 모를 심어서, 더 쉽게 벼 사이의 김을 맬 수 있다. 제초기는 그 과정에 속도를 내도록 돕는다.


공동 설계



대장장이 Ben Pen은 여성 농민과 함께 제초기 시험을 행했다. 설계가 완료되고, RACHANA은 900개를 주문했다. Credit: Patrick Brown/Oxfam America

Prey Pa’e에 있는 Sorn의 마을에서 RACHANA는 지역 농민과 함께 제초기를 개발하고자 하는 Ben Pen이란 대장장이를 만났다. RACHANA의 도움으로 2009년에 그는 인도와 다른 나라에서 설계도안을 가져오기 시작했다; 그는 여성농민의 피드백을 기반으로 그것을 최적화시켰다. Sorn과 약 20명이 다섯 가지 원형을 시험했다. Pen과 함께 그들은 서로 다른 흙과 풀의 상태에 사용하는 외바퀴와 두바퀴 제초기를 개발했다. 제초기는 1.8~5.5kg의 무게이다. 각각은 농부가 금속 못이 달린 좁다란 바퀴를 밀도록 긴 손잡이가 달렸고, 땅을 휘저어 풀을 뽑아 버린다.

제초기의 시험을 책임진 대부분의 농민은 여성이었다. 남성이 흙을 가는 걸 돕고 수확을 함께하지만, 여성이 논에서 대부분의 일을 한다. Pen과 RACHANA는 제초기 설계가 그들에게 적합하도록 확실히 만들길 바랐다. “이러한 제초기는 여성이 목과 허리의 통증에 시달리지 않게 한다”고 Pen은 말한다. “그들은 서서 훨씬 빨리 할 수 있다.”


‘상당한 차이’

Sorn은 잔디깎이처럼 제초기를 줄지어 심어 놓은 벼의 사이로 밀고 나아간다. 그 농기구는 물을 철벅거리며 풀과 진흙의 무더기를 뒤집어 버린다.

“제초하는 기구를 쓸 때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Sorn은 말한다. “만약 손으로 풀의 윗부분만 매고 뿌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그건 다시 자란다. 하지만 제초기를 쓰면, 뿌리까지 파괴하고 풀은 흙속으로 들어간다 –그게 흙을 더 좋게 만든다.”

Sorn은 2400평 되지 않게 농사짓는다. Sorn과 그녀의 자매는 제초기를 구한 뒤 김매기를 더 빨리 끝낸다. 그녀는 이렇게 시간과 노동력이 절감된 것이 현재 자신을 위해 특히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녀의 남편은 죽었고 여섯 아이들은 모두 커서 일이나 공부를 위해 마을을 떠났다. 그녀는 55의 독신이고 도움이 필요하다.

RACHANA의 연구는 SRI, 농민과 결합된 제초기가 3000평의 생산량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평균 2.2t에서 평균 5.6t으로 높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 단체는 세 가지 가장 인기 잇는 제초기를 Pen에게 900개를 주문했다; 그건 전국의 농민에게 판매되고 있다. 그 농기구의 가격은 약 20달러 –상당한 투자라 두세 명의 이웃이 함께 사서 공유하도록 유도한다. 


농업 전환

투자는 시간을 절약하는 가치가 있다: Prey Pa’e의 여성들은 3000평의 김을 매는 데 3명이 2주 걸렸는데, 다 맬 때쯤이면 풀이 다시 자란다고 한다. “제초기를 가지고 3명이 한나절에 끝낼 수 있다”고 원형을 시험한 참가자인 Pen Rat이 말한다.

Sorn은 자신이 외바퀴 제초기의 시험을 도왔고, 여성들이 허리 부분에서 밀 수 있도록 손잡이의 각도를 더 낮춰 달라고 Pen에게 제안했다고 한다. “난 여성이 더 세게 밀고 당길 수 있도록 생각했다”고 그녀는 말한다.

이러한 기계적 제초기 같은 혁신의 간단한 형태는 농민이 함께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농사를 개선하기 위해 기술을 개발하는 역할을 담당하도록 권장한다. 이러한 노력의 유형이 캄보디아의 가난한 농민을 위해 농업을 전환시키기 위한 Oxfam의 작업 가운데 작은 부분이다.

Sorn Ken 같은 농부는 이를 확신시킨다: “이 제초기가 몇 사람 몫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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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모를 내다가 마지막에 막모를 내는 모습.

 

 

원래 조선놈들은 막모를 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의 논이 천둥지기였고,

그래서 이런저런 농사일을 하다 비가 내리길 기다렸다가 모를 내야헸고,

남자들이 중심이 되어 논농사를 책임지다 보니 더욱 그랬습니다.

 

그러다...  일제강점기가 되어 근대농법이라며 선진적인 일본의 농법을 보급하면서 줄모를 내게 되었지요.

하지만 조선의 논 사정은 여전히 수리불안전답이었지요.

당시 수리조합이 세워지며 그 혜택을 받는 논은 일본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이어지고 이어져 80년대인가까지 물세를 내라고 정부기관에서 종용하기도 했지요.

아무튼 아무리 정책적으로 줄모를 내고 품종개량을 해서 줄모를 내라고 해도 조선사람들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왜냐.. 조건이 맞지 않아서입니다.

 

결국 일제가 선택한 것은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농정이 그렇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농정과 비슷하지요.

소농 말살.. 대농의 육성(기업농 육성).. 등등 

 

당시 줄모를 내지 않으면 군청 직원이라든가 공무원들이 나서서 못자리부터 밟아 뒤엎어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물론 산간 지방으로 이어지는 행정력이 미치지 않는 곳일수록 그런 일이 적었지요.

아무튼 그 모습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 박정희 때 녹색혁명을 이루자 할 때였지요.

그때 통일벼를 심지 않는 곳은 못자리부터 밟아 버렸답니다. 취재를 다니며 그런 이야기를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습니다.

그런데 통일벼에 큰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냉해에 약하다는 점이었지요.

그도 그럴 것이 통일벼는 열대지방의 쌀인 인디카 계열을 근간으로 육종한 벼라 그렇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농진청에서도 통일벼로는 되지 않는다 하여 다른 방향으로 육종을 했답니다.

 

저는 계속 의문인 것이 무엇이 보릿고개를 해결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석종욱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그 의문이 더 깊어졌습니다.

옛날에 농사지을 때는 유기물 함량이 5% 가까웠는데 점점 화학비료에 의존하면서 2% 이하로 떨어졌다.

그럼 옛날 사람들은 바보라서 보릿고개를 그냥 놔두었는가?

역사 자료를 뒤지면 당시 보릿고개를 어떻게 넘겼는지 나옵니다.

얼마나 훌륭한 복지시스템이 작동했는지는 다시 말해 귀찮을 정도지요.

그게 무너지면서 넘어간 것이 조선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모를 내는 행태를 말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이야기가 줄줄 이어졌습니다.

아무튼 줄모를 내는 것은 편하고, 좋다는 이유를 가졌는데 일의 효율에서는 막모보다 못했습니다.

특히나 지형이나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조선의 논에서

날을 잡아 그렇게 그렇게 하는 일은 우스운 일이었지요.

조선의 농법은 날씨와 조건... 그것들이 큰 영향을 주었을지 몰라도...

정말 큰 일은 그때그때 맞춰서 한다는 것.

그 원칙에 따라 간다는 것.

그걸 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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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천후 농부학교 강의 때문에 자료를 준비하다가 논과 관련한 옛날 사진들이 있어 올립니다.

쭉 보시면 농사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데 모르겠네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논을 준비하는 쟁기질입니다. 쟁기의 모양이 보은에서 했던 것과 많이 다르지요.

보은의 쟁기는 아마도 밭에서만 쓰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소도 다르지요. 이놈은 수소입니다. 배 부분에 거시기가 보이죠!

쟁기질하는 뒤편으로 푸릇푸릇한 곳이 보입니다.

그곳은 못자리를 하고 있는 곳이겠고, 이미 모를 낸 곳도 있네요. 

논두렁의 모습도 잘 뜯어보세요.

 

 

두세 번의 쟁기질이 끝나면 써레질로 들어갑니다. 군포 일대에서는 써레를 쓰레라고 불렀습니다.

정용수 본부장 님의 발음을 잘 들어보면 그러십니다.

이렇게 논을 삶는 것을 '써린다' 또는 '쓰린다'라고 합니다.

참, 위와 아래의 사진은 닐 마샬로프라는 주한미군이 1968년 안양에 주둔할 때 찍은 사진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혹시 위와 아래의 소가 같은 소가 아닐까 해서입니다.

고추의 모양을 자세히 보세요~ 하하, 고추는 그만 보시고... 아저씨가 똑같은 사람 같지요.

애벌갈이가 생땅을 뒤집는 일이라 가장 힘들고 오래 걸린다 하고, 두벌, 세벌은 상대적으로 쉽다고 합니다.

그리고 물을 대놓고 하는 써레질은 더 쉽구요. 하지만 쉽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고도의 경험으로 논바닥의 고르기를 일정하게 맞춰야 하거든요.

지난 토요일 볍씨를 심은 곳은 트렉터로 로타리를 친 곳인데, 그 상태를 굳이 이 과정으로 비유하자면.

물을 대지 않고 써레질을 한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흙의 고운 정도는 다르겠지만 말입니다. 

 

 

쟁기질에는 아래와 같은 쟁기질도 있습니다.

이 그림은 단원 김홍도의 그림인데, 이렇게 소 2마리로 쟁기질하는 것을 '겨리'라고 합니다.

제가 번역한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의 저자 다카하시 노보루의 취재에 따르면 '결의結義'에서 온 말이 아닌가 하더군요.

결의가 겨리로 되었다... 나름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정확한 것은 현재 저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튼 이러한 쟁기질은 강원도와 같은 산간 지역에서 주로 썼다고 합니다.

 

 

같은 겨리질이지만 사진으로도 한 번 보지요. 소가 1마리일 때와 비교하여 그 위용이 대단하지요.  

논두렁 옆으로는 쟁기질을 할 수 가 없어 사람이 쇠스랑 등으로 뒤집어엎습니다.

 

 

본논이 준비가 되면 얼른 모를 내야지요. 모를 내려면 먼저 못자리에서 모를 쪄야 합니다.

지금처럼 모판이 있던 시절이 아니라 물 대기 좋고 기름진 곳을 골라 바로 논에다 못자리를 만들었지요.

모를 찌는 일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아귀의 힘이 많이 들지요.

그도 그럴 것이 외떡잎식물인 벼가 뿌리를 깊이 내렸을 테니까요.

아래 사진을 보시면서 모가 얼마나 큰지 유심히 보세요.

요즘 기계로 모를 내는 것과는 판이하게 차이가 납니다.

 

 

가끔은 못자리의 병충해를 없애고자 약을 치기도 합니다.

이 당시 농약과 비료는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건 본부장 님께 물어야 합니다. 걸어다니는 영상실록이란 별명을 가지고 계시거든요.

 

 

못자리에서 모를 찌고 나면 바로 모내기로 들어갑니다.

황소의 뒤쪽에 서 있는 지게에 모를 쪄서 지고 나릅니다.

이 논에서는 부부가 함께 일하고 있네요. 이때만 해도 이농 현상이 시작된 것일까요?

원래 논이 많은 곳에서는 마을마다 두레패가 조직이 됩니다. 함께 일하는 조직이지요.

그래서 공동 못자리를 만들어서 관리하는 경우도 있고, 보통 모내기며 김매기, 수확까지 함께하지요.

그런데 이곳은 어찌된 연유인지는 자세히 모르겠으나 부부가 함께하네요.

사진을 보니 모는 한 그루에 2~3포기 정도 심는 듯합니다.

볍씨를 곧뿌림하며 말씀드렸듯, 늦게 모내기하는 것을 한자로는 '만이앙晩移秧'이라 합니다.

여기서 만이앙 - 마니앙 - 마냥이란 단어가 탄생했습니다!

우리말을 자세히 보면 농사일과 관계된 말들이 많이 숨어 있습니다. 잘 찾아보세요.

 

 

아버지가 홀로 마지막 부분에 모를 심고 있는 뒤로 아이들이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일하는 걸 보면서 자연스레 어깨 너머로 일을 배웠을 겁니다.

텃밭을 처음 시작하는 분이라 해도 시골에서 농사짓는 집에서 자랐다면, 농사일을 많이 하지 않았더라도 금방 일에 익숙해집니다. 바로 어깨 너머 교육의 효과가 아닐까요.

요즘은 교육을 교육기관에서 교육 전문가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풍토가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는 집안에서 어깨 너머로 배우는 것이 더 많고 중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아이를 낳아 부모가 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모를 내고 나면 이제 본격적으로 김매기로 들어갑니다.

김은 보통 2~3번 맵니다. 일찍 심은 논은 세벌까지 매고, 늦게 심은 논은 두벌만 매도 되는 이치입니다.

처음 김을 매는 걸 아이맨다, 아시맨다고 합니다. 그 다음은 두벌, 세벌 이렇게 세고, 마지막을 만물이라 합니다. 만물 다음에는 한두 번 정도 피사리를 합니다.

논의 김매기는 한두 번은 논호미로 벼 사이의 흙덩이를 떠서 뒤집어엎는데, 아래 사진이 그 모습입니다.

보통 힘든 일이 아니겠지요. 허리는 계속 굽혀야 하고 흙은 찐덕거려서 잘 떠지지도 않고...

그래서일까요? 두레패에 여자는 끼워주지 않는답니다. 논일도 시키지 않구요. 이건 남녀를 차별해서 그런 게 아니라 여자는 논일에는 맞지 않으니 밭으로 보낸 것이겠지요.

쩝, 뭐 그래도 여자가 일을 더 많이 했겠지만 말입니다.

 

 

논호미는 밭호미와 다르게 생겼습니다. 흙을 많이 잘 뜨기 위해서 호미날과 자루 사이를 이어주는 부분인 슴베가 더 굽어 있고, 날도 밭호미에 비해 훨씬 큽니다. 아래 사진에 슴베 부분은 나오는데 날이 안 나오네요. 그건 숙제입니다. 스스로 찾아보세요.

 

 

아래는 논 제초기의 모습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에 도입되었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식량생산기지로 만들려고 했지요. 그래서 발달한 일본의 농업을 조선에 심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수원에 권업모범장을 설치합니다. 모범이란 이름에서도 그 뜻이 잘 엿보입니다.

아무튼 그것이 1920년 산미증식계획이 세워지며 농사시험장으로 바뀌고, 해방이 된 뒤에는 중앙농업기술원이 되었다가 현재의 농촌진흥청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2006년 농촌진흥청에서는 개청 100주년 기념 행사를 했더군요. 이게 참 씁쓸합니다.

100년 전인 1906년은 일제가 권업모범장을 설치한 해인데, 앞뒤 사정도 안 따지고 그때는 대한제국이 살아 있을 때이니 그때부터 계산하면 100년이라고 생각했나 봅니다.

이래저래 정신 없는 농촌진흥청입니다. 아무튼 다시 농사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위의 사진에서 모내기하는 모습이 있었지요. 그걸 다시 한 번 보세요. 어떻게 모를 내는지...

아마 못줄이 없을 겁니다. 그런 방식을 '막모'라고 합니다.

그리고 못줄을 띄우고 심는 걸 줄모라고 하고요. 어느 시골에 가면 가끔 판때기나 자 같은 도구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판모, 잣모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원래 막모, 즉 사람의 경험과 눈대중과 감으로 모내기를 했습니다. 이걸 일본놈들이 보고 경악을 했지요. '아니, 이렇게 미개할 수가! 벼 수확량을 늘리려면 똑바르게 심어야 한다. 어서 조선에 줄모를 보급하라.'

그 결과 줄모를 내게 되었답니다. 이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막모를 낸 데에는 환경의 영향이 컸습니다. 비가 와야만 모를 낼 수 있는 천둥지기가 대부분이었던 우리의 논은, 비 소식이 들리면 곧바로 모내기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줄이나 판, 자를 쓰면 아무래도 시간이 더 걸리지요. 그래서 막모가 중심이었던 겁니다.

그러던 것을 일본놈들이 강제적으로 줄모를 내게 하니 여기저기서는 몰래몰래 그냥 하던 대로 막모를 냈습니다.

그러면 관청에서 나와 모를 뽑아버리거나 그냥 밟아버렸다고 합니다.

이 행태는 고스란히 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집니다. 당시 녹색혁명을 이루자며 통일벼가 보급이 되지요.

그런데 통일벼가 맛도 없을 뿐더러 추위에 약해 모를 키우기도 어려워 심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몰래몰래 토종벼를 심으면, 농촌지도소나 관청에서 사람이 나와 못자리를 전부 밟아버렸다고 합니다.

박정희가 일제에 많이 배우긴 했나 봅니다. 하는 짓까지 똑같은 걸 보면요.

줄모를 내면 벼가 똑바르게 서 있지요. 아래의 제초기로 그 사이를 쓱쓱 밀고 지나는 겁니다.

이 사진은 일본에 가서 찍은 것인데, 우리나라에도 아직 논이 넓은 곳에는 이런 것이 남아 있습니다.

 

 

아래는 1935년도 사진입니다. 당시 일본놈들은 중국을 집어 삼키고자 작당을 하고 있을 때이지요. 세계공황도 찾아오고 이래저래 어지러운 시국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충남 서산의 한 마을에서는 두레패가 떴습니다. 농사꾼은 죽는 한이 있어도 농사를 저버릴 수는 없지요.

일꾼들이 잠시 앉아 쉬는 사이, 풍물 치는 사람은 악기를 잡고 한판 놀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구경거리가 생겨 자리하고 있네요. 저 멀리 논둑길로는 한 아낙네가 참을 들고 오는지 걸어오는 모습이 보입니다.

벼의 자람새로 보아 한여름 김을 매는 철인가 봅니다.

 

 

교육을 받아 아시다시피 논은 계속 물을 담아 놓는 것이 아닙니다. 뿌리를 박으라고 할 때는 한 번씩 물을 떼줘야 합니다. 그렇게 물을 뗐다가 다시 물을 대려고 할 때 천둥지기인 논에서는 어떻게 할까요?

그래서 논 한쪽에 준비하는 것이 둠벙이라는 작은 연못입니다.

아래 사진은 그 둠벙에 맞두레로 물을 퍼올리는 모습입니다.

저는 이 작업이 되게 힘들 줄 알았는데, 두 사람의 호흡만 맞으면 엄청 쉬운 일이라네요. 전천후 농부학교의 분들이 알려 주셨습니다.

이 일만이 아니라 가래질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1+1=2가 아니라 3이 될 수도 5가 될 수도 -1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인가 봅니다. 특히나 농사에서는 어떤 사람과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구요.

아래처럼 물을 퍼올리는 도구로는 사진에 보이는 맞두레가 있고, 또 용두레라는 것이 있습니다. 강화도에 무한도전 팀이 논농사를 지어 유명해진 용두레마을이란 곳이 있지요. 그곳은 개막은땅인데 땅이 넓어 용두레를 자주 썼나 봅니다. 한번 검색해 보세요.

마지막으로 무자위라는 것도 있습니다. 물레방아처럼 생겨 사람이 올라가 발로 밟는 그것입니다.

 

 

아래는 살포라는 농기구입니다. 할아버지들이 새벽 같이 일어나시면 이거 하나 들고 뒷짐지고서 슬슬 논밭에 나갔다 오십니다.

논을 쓱 둘러보다가 여기는 물꼬 좀 터야겠다 싶으면 이걸로 툭툭 쳐서 물꼬를 틉니다. 거기에 쓰는 농기구입니다.

 

 

아래는 1968년 8월의 모습입니다. 아름답지요. 그림 같은 모습입니다.

논두렁에 풀을 깎아 놓았습니다. 저 길을 천천히 걸어보고 싶네요.

 

 

 

이제 수확철로 들어갑니다. 아래의 모습을 보세요.

본부장님의 말씀처럼 논둑을 이용해 벼를 말리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천둥지기라서 논을 바짝 말리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연히 벼를 베면 논둑으로 옮겨 말렸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서 보실 것은 논둑에 있는 볏단의 이삭이 어디를 향해 있느냐는 겁니다. 본부장 님이 늘 강조하시죠.

 

 

다행히 비가 오지 않고 해가 쨍쨍하다면 일주일에서 열흘 뒤에는  마당질에 들어갑니다.

옛날 농가에는 꼭 안마당과 앞마당이 따로 있었습니다. 안마당은 생활하는 곳이요, 앞마당은 여러 농작물을 갈무리하는 곳이었지요.

이렇게 마당질을 하려면 여름에 일이 없을 때는 산에서 부지런히 흙을 져다 날라야 했습니다.

흙을 져다 잘 밟고 골라 판판하게 만들어 놓아야 가을에 쉽게 일할 수 있으니까요.

아무튼 아래 사진은 마당질을 끝낸 볏단을 다시 묶어서 한곳에 모아 놓는 과정인 듯합니다.

 

 

아래처럼 했겠지요. 이 도구도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도구입니다. 처음에는 회전식 도급기라 불리다가 둥근 통이 돌아간다고 궁글통, 발로 밟는다고 족답식 탈곡기, 돌아갈 때 소리가 난다고 와릉 탈곡기 등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아마 지역마다 사람마다 모두 다르게 부를 겁니다.

이 일도 두 사람의 호흡이 무지 중요합니다. 발로 밟는 박자와 벼를 건네는 순간이며 나중에 해보시면 알 겁니다.

 

 

탈곡기가 들어오기 전에는 아래처럼 낟알을 떨었습니다. 이걸 개상질이라 하지요.

나무 절구통이나 통나무를 가져다 거기에 단을 후려치는 겁니다. 이게 참 힘든 일이라 합니다.

저는 해보지 않아 모르겠으나 잘못하면 골병든다고 하네요.

 

 

이제 마지막 사진입니다. 2008년 12월 초에 강화도로 토종 종자 수집을 나갔을 때 찍은 사진입니다.

불은면의 어느 집에 갔는데 벽에 벼 이삭이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이걸 보고 신주단지의 변형인가?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인가? 했습니다.

그래서 아주머니께 물으니 해마다 가장 잘된 벼를 골라 그 이삭을 매달아 놓은 것이라 했습니다.

다섯 개니까 5년 동안 벼농사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운데 있는 것이 가장 큰 걸 보니 그해에 농사가 아주 잘 되었나 봅니다. 가장 오른쪽에 있는 건 볼품이 없네요.

농사짓는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농사는 징글맞은 일이 될 수도, 정말 재밌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그렇겠지만, 농사를 따라올 수 있는 일은 그리 쉽게 찾아볼 수 없을 듯합니다.

벼이삭과 함께 찍은 감과 커피는 아주머니의 대접입니다. 집에 찾아온 손님이니 그냥 보낼 수 없다면 자꾸 뭔가 주십니다.

이런 집에 가면 기분도 좋아질 뿐더러, 토종도 많습니다. 토종이 살아 있는 집은 그런 마음씨의 분들이 살고 있는 곳입니다.

 

 

이상 지루하게 긴 글을 다 읽으시느라 욕보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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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벼농사 재배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청동기시대 이래 농경사회에서 물을 이용하는 기술의 필요성이 불가피하였으며, 수전경작 이후 필연적으로 수리(水利)의 중요성이 대두되어 수리관개(水利灌漑)시설을 촉진시켰다.


 오늘날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양수 시설로는 맞두레, 용두레, 수차(무자위), 물풍구 등이다. 이러한 도구의 제원을 살펴보면, 먼저 맞두레는 가장 기본이 되는 도구로 두 사람이 양쪽에서 새끼줄에 매단 두레박을 이용하여 물을 퍼올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두 사람이 필요하고 힘도 많이 든다. 그래서 혼자서도 쉽게 물을 퍼올릴 수 있도록 개량한 것이 용두레이다.


 용두레는 긴 장대를 삼각뿔 모습으로 세우고 그 사이에 나무를 파서 만든 기다랗게 생긴 두레박을 새끼줄로 매달고 지렛대 원리를 활용하여 혼자서도 힘들이지 않고 물을 퍼올리는 장치이다. 이 삼각뿔 장대는 요즈음 카메라의 삼각대처럼 자유자재로 그 높이를 조절할 수 있도록 되어 있으며, 삼각구도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것이 발달되어 발로 밟아 물을 퍼올리는 수레바퀴 모양의 무자위를 만들어 내었다.


 무자위는 무넘이가 아주 얕은 곳에서 대량으로 물을 대는데 사용하는 연장으로, 물을 자아올린다 하여 '무자위'라고 부른다. 지방에 따라 '무자새'(경남)·'물자새'·'자새'(전라남북도)·'수리차'(충남)·'수차(水車)'·'수룡(水龍)'·'답차(踏車)'라고도 불린다. 문헌에 보이는 무자새를 가리키는 표현으로는 '물자새'(훈몽자회)·'무자애'(재물보·사류박해)·'자애'(농가월령가)등을 들 수 있다.


 무자위는 수레나 물레의 바퀴모양으로 한 개의 축을 중심으로 주위에 많은 나무판(발판) 날개를 나선형(螺旋形)으로 붙이고, 중간 가장자리 부분에 물길을 내었다. 사용방법은 먼저 발판이 물에 잠기도록 설치한 뒤 받침대 끝에 설치되어 있는 긴 작대기 2개를 잡고 올라서서 발로 나무판을 밟고 걸으면, 바퀴가 돌면서 물을 퍼 올리게 되는데, 퍼 올려진 물은 물길을 통해 앞으로 나가게 된다. 이렇게 하여 낮은 곳에 있는 물을 높은 곳의 논이나 밭에 끌어 올린다.


 이 무자위는 물레방아의 원리와 비슷하지만 흐르는 물을 이용하여 동력을 얻는 대신에 거꾸로 사람의 힘을 이용하여 물의 위치를 바꿔주는 것이 다르다. 특히 무자위는 논이나 밭의 높이가 물의 높이보다 더 높을 때 사용하는 것으로 보통 너른 들이나 평야지대에서 많이 사용하였으며, 지금도 염전에서는 바닷물을 퍼 올리는 데 사용하고 있다.


 무자위는 무넘이의 높이가 1m인 경우, 200여 평의 논에 물을 대는 데 약 두 시간 정도 걸리며, 무넘이의 높이가 30㎝인 곳에서는 1시간에 50~60t의 물을 댈 수 있다.


 이러한 무자위와 함께 풀무의 원리를 이용하여 통 안에 장치된 피스톤을 왕복시켜서 물을 품어내도록 한 물풍구가 사용되었다. 이 물풍구는 굵은 대나무의 속을 파내거나 판자로 통(실린더)을 만들고, 그 속에 활대(피스톤)를 끼워 사용하였는데, 시간당 10~20t의 물대기를 할 수 있었다. 요즈음의 양수기도 전기모터를 이용한 고속회전으로 많은 물을 쉽게 퍼 올릴 뿐 그 기본원리는 옛 도구들과 똑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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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도 간혹 볼 수 있는 논 제초기. 줄모를 냈을 때만 쓸 수 있는데, 그 효율이나 쓰는 방법은 보지 못해서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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