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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2


서장 

벼농사 문화가 나아갈 바   사토 요이치로佐藤洋一郞





시작하며


일본인의 쌀 소비량은 2008년 현재 연간 약 60kg 정도이다. 하루 소비량으로 환산하면 160g 남짓이다. 예전의 도량형으로 말하면 이는 딱 한 홉에 해당한다. 1965년의 수치는 114kg이었기에, 이 45년 정도 사이에 소비량은반감한 셈이다. 총생산량도 1970년대 중반 무렵까지 연간 1200만 톤을 넘었지만, 2000년을 넘어서부터 900만톤 이하가 되었다. 논의 면적도 1970년대 초반 300만 헥타르를 넘었는데, 지금은 절반 가까이 감소했다. 벼를 재배하지 않는 토지 가운데 다른 작물로 전환한 토지도 있다면, 농업 그것을 그만둔 곳도 많다. 경작방기지가 경작면적의 20%를 넘은 현도 있다. 일본인은 이대로 쌀을 먹지 않게 될 것인가? 일본에서 논은 사라질 것인가? 


이 물음에 '과학적으로' 답을 내는 건 어렵다. 그러나 나는 일본인은 쌀을 손에서 놓지 않고, 일본에서 논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를 아래에 서술하려 한다.




쌀과 목숨을 둘러싸고 -생태학적으로 본 쌀의 위치


인류를 포함한 동물의 대부분은 자신의 손으로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를 생산할 수 없다. 생명의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는 식물이 만드는 당분이 사용된다. 전분과 지방은 당분의 대체물로 사용된다. 신체를 만드는 단백질에는 동식물의 단백질이 사용된다. 수렵채집 경제에서 이들은 다른 장소에서 획득되었는데,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면 그들의 생산은 점점 한곳에서 이루어졌다. 계절풍 아시아에서 쌀은 저습지에서 재배되었는데, 그 재배 장소에는 쌀(벼) 이외에 물고기와 패류, 곤충 등이 잡혔다. 이른바 '쌀과 물고기'의 한묶음이다(佐藤 편집 2008). 마찬가지로 유라시아 서쪽에서는 '맥류(또는 감자)와 젖(또는 고기)'라는 한묶음이 있었다. 그 무대가 되는 곳은 말할 것도 없이 '삼포식 농업'이라 부르는, 여름 작물+겨울 작물과 가축을 활용하는 형식이다. 현대 인도에서는 육식을 금기하는 사람들에 의해 콩과작물+벼과작물이란 한묶음도 있다(佐藤, 이 시리즈 제1권).


쌀과 물고기의 한묶음은 근현대 일본 열도에서는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 대강은 아마 이 책의 우네 유타카宇根豊씨와 후지이 신지藤井伸二 씨의 논고에서 그리고 있다. 우네 씨도 후지이 씨도 '물고기'에는 직접 언급하고는 있지 않지만, 그 마음은 논의 다양한 존재에 있다. '논 학교'라는 NPO를 운영하고 있는 우네 씨는 벼농사의 실천가의 입장에서 논에 사는 생물들을 보아 왔다. 우네 씨 등에 의하면, 300평의 논 안에는 벼가 2000그루 자라고 있는 외에 올챙이가 2만3000마리, 우렁이(둥근논우렁이)가 300마리, 물방개가 50마리, 거미류가 7000마리 정도서식하고 있다. 이들의 숫자는 어림수이지만, 2001년에 우네 씨 등이 전국 조사를 행한 평균치라고 한다. 


우네 씨의 추론 같이, 필시 구조 개선 사업 이전의 논 경관에 섞여 있었던 일정하지 않은 모양의 논과 수로에는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었다. 그들의 일부는, 그리고 '쌀과 물고기'의 한묶음 가운데 쌀 이외의 부분으로 사람들의 생명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논이란 장치가 오로지 벼만의 장치가 된 건 틀림없이 고도경제성장기 이후의 불과 50년 정도의 일이라 생각한다. 고도경제성장기, 일본에서는 다량의 인구가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했다. 그러한 것도 있고, 농업의 세계에서도 기계화가 이야기됐다. 좁고, 고도차가 있는 논을 부수고는 대규모 논으로 바꾸어 버리는 작업이 전국적으로 행해졌다. 그것은 분명히 '노동력 절감'을 가져왔지만, 그 대가가 다량의 석유를 소비하여 행하는 농업의 도입이었다. 




농업의 생태적 의미


우네 씨의 논고는 이 50년 동안의 이후에 생산성만 강조하는 농업에 대한 농사짓는 쪽에서 예리하게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것은 생산성이야말로 목숨과도 같다고 하는 사회 풍조에서 주목을 받은 적은 없었지만, 생산성의 한계, 지구환경문제의 분출 등에 의하여 주목을 받게 된다. 특히 환경문제의 하나로 생물다양성의 의미를 고려할때 그 의미는 더욱더 명확해진다.


생물다양성이 지닌 '생태계 서비스'의 가치 가운데 하나는 먹이사슬의 안정적인 유지에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먹이사슬의 안정적 유지'란 생태계를 구성하는 종의 개체수와 관계성이 환경에 의지하지 않고 너무 많이 변화하는 일 없이 유지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예를 들어 제초제와 살균제 등의 사용으로 '잡초'와 '해충'을 구제하려는 시도는 먹이사슬의 안정적인 유지와는 상반되는 일이 된다. 


생태계의 안정성 유지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비료와 물 등의 '물질'을 대량으로 가지고 들어오거나, 또는 가지고나가지 않는 것이다. 즉, '무엇도 더하지 않고, 무엇도 빼지 않는' 것이 생태계의 안정에 기초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을 포함한 선진국의 현대 농업에서는 다량의 자원을 가지고 들어오고 있다. 그것은 물, 비료와 농약부터 온실재배와 농기계용 석유 등을 포함하여 고려하면 방대한 양이 된다. 가지고 나가는 양도 다량이다. 무엇보다 농산물은 생태계 내에서 소비되는 것보다 훨씬 많은 양을 생태계 밖으로 가지고 나간다. 즉, 현대 농업의 본질은 '고투입, 고수익'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농업의 형식은 고작 50년 된 것이고, 또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도 1960년대의 '녹색혁명' 이후의 일이라 생각한다. 이래서는 '논벼농사'가 가져오는 생태계의 지속성은 기대할 수 없다.


생태계의 유지에 중점을 두는 이러한 의론에 대해 세계의 인구 증가와 식량 공급의 균형을 고려하는 입장에 선 쪽의 비판이 많다. 분명히 저투입형 농업에서는 단위면적당 생산성이 저하된다. 선진국이 선진국의 이유만으로 생산성을 저하시켜 세계의 식량 생산에 부하를 더한다고 한다면, 그것은 개발도상국의 지지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일본이 하고 있는 일은 다음에 기술하듯이 자국의 토지는 놀리고 가지고 있는 돈으로 위력을 발휘해 세계의 식량을  여기저기 다니며 사 모으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적어도 사용할 수 있는 토지는 유효하게 사용해야 한다. 이 사태를 조금이라도 완화하는 것이 환경에 대한 부하를 줄이는 데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농업 생산과 생산비


농업은 산업 가운데 유일하게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다. 태양광을 사용해 물과 이산화탄소에서 전분이란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기타 산업은 모두 석유와 석탄 등의 화석연료를 사용하여, 또 유한한 자원을 사용하여 물질을 만들어 왔다. 또한 여기에서는 농업이란 말을 넓게 해석하여 임업과 수산업, 축산업을 포함하여쓰기로 한다. 그런데 이제는 그 농업까지 석유를 사용한 소비형 산업으로 전환된 듯하다. 이제 농업은 농약과 화학비료 등 석유 제품이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수산업은 종래 수렵경제의 연장으로 '잡다'에 무게를 두었는데, 요즘 몇 십 년은 기르는 어업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기르는 어업이라 해도 과도하게 집약적인 양식은 협의의 집약농업과 마찬가지로 다량의 에너지를 소비한다. 또 종래부터 자원의 고갈을 불러온다는 비판이 강했던대규모 원양어업도 에너지 소비형 산업으로 전환해 버렸다. 물론 지금 바로 이러한 형식의 농업을 전환할 수는 없지만 농업의 의미를 고려한, 장기적 시각에 입각한 시나리오가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의 교역권이 확장됨에 따라 먹을거리도 장거리를 운송하게 되었다. 교역권의 확대는 원래 그 토지에 없는 자원의 융합과 다른 문화의 교류를 통하여 큰 부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지금처럼 다량의 먹을거리를 몇 천 킬로미터, 몇 만 킬로미터나 운송되면, 그 수송 에너지도 막대해질 것이다. 예를 들어, 한 캔의 니기리 초밥을 생각해 보자. 일본의 어느 어항 근처의 초밥가게에서 먹었던 '도미의 니기리'와 뉴욕의 '초밥 바'에서 먹은 그것과는 운반에 사용된 에너지는 극단적으로 다르다. 생산에 사용된 에너지는 대부분 똑같다. 전자에서는 현지의 농가에서 생산된 쌀과 근해의 어장에서 잡은 물고기를 사용하기에 수송에 들어간 에너지는 매우 적다. 그런데 후자는 쌀도물고기도 천 킬로미터의 단위를 운송된다. 게다가 물고기는 수송되면서 냉동이 빠질 수 없다. 유감스럽게도 정량적인 비교는 아직 행해지지 않았지만, '밭에서 위장까지' 가는 사이에 사용된 에너지를 단순히 비교하면 그 차이는 수백 배에 이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초밥의 가격차는 아마 몇 백 배가 안 될 것이다. 그건 전적으로 대량생산, 대량수송의 혜택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 이 대량생산의 은혜를 입어 온 것은 돈을 지불하는 사람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대량생산이 먹을거리의 안정화를 불러온다는 건 개발도상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환상 같은 것이 아닐 수없다.


생산활동이 환경에 미치는 부하를 수치화한 생태학적 발자국의 발상은 이러한 문제 의식에서 생긴 것이다. 인류가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당분과 단백질의 한 묶음을 어떻게 에너지를 들이지 않고 생산할 수 있을지는 앞으로 인류와 그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좌우할 큰 요소이다. 계절풍 지대에서 '쌀과 물고기' 및 맥류 지대에서 '맥류와 젖' 같은 한 묶음은 생태학적 발자국의 측면에서는 이상적인 농업 생산 방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대로 옛날로돌아자는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먹을거리는 되도록 운송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결정적으로 식량이 충분하지 않은 지역이 있다. 아랍 사회 등이 그렇다. 그러한 지역에서까지 식량을 운송하지 말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막 한가운데에서 지금 당장 농업을 하는 건 에너지 측면에서는 분명하게 손실이 크다. 그러나 그래도 무엇을 얼마나 어디에서 운송할지에 대해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고려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잡초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 계절풍 지대의 농업에서 가장 위협이 되는 건 잡초라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근세 이전의 논벼농사에서 휴경의 큰 이유는 잡초가 번성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각지에서 볼 수 있는 화전은 불을 사용하여 밭을 개간하는 농업의 방식인데, 같은 밭은 3년 경작하면 다음 해 이후 몇 년쯤은 휴경한다. 그 이유는 땅심의 저하와 잡초의 피해가 증가하는 데 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휴경은 적어도 고분 시대에는 시작되었다고 생각되며, 그것을 보여주는 상황증거도 몇 가지 알려져 있다. 그 정도까지 잡초의 해는 막대했던 것이다.


근세에 들어서면, 더 많은 노동력이 제초에 쓰이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무렵부터 토지의 소유제는 명확해지고, 휴경하거나 새로운 토지를 개척하는 여지도 점점 사라졌다. 사람들은 항상 농지로 쓰게 된 논에 달라붙어 쌀을 재배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은 근대에 들어서도 똑같았는데, 도시 노동력의 수요가 확대됨에 따라 김을 매는 인구가 줄어들었다. 제초제는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개발되었다. 


제초제에 의하여 인류는 잡초를 박멸할 수 있었을까? 후지이藤井 씨의 논고를 보는 한, 그건 단정하기 곤란하다. 왜냐하면 가령 강력한 제초제를 써서 어느 잡초를 제거해도 이번엔 그 약제에 내성을 가진 새로운 잡초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새로운 잡초'가 같은 종에 속하는 다른 유형인 경우도 적지 않다.


도대체 작물과 잡초는 생태학적으로는 매우 '유사한' 관계이다. 일본처럼 비가 많고 식물의 생육이 빠른 장소에서 생태계는 방치하면 천이를 진행해 숲이 되어 간다. 경지는 경작이란 교란에 의하여 천이를 억누르는 장소이고, 또 거름기가 많은 토양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토지에 적응할 수 있는 건 작물과 잡초뿐이다. 둘은 비슷한 생태적 특성을 가지지만, 한쪽은 인간의 비호를 받고 다른 한쪽은 배제되는 정반대의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 잡초가 세운 전략은 철저하게 작물의 모습을 본따는 것이었다. 이런 본땀으로 인해 잡초의 방제는 곤란해진다. 


또한 잡초라고 인식되는 종은 시대에 따라, 장소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농학 관계자 안에서는 유명한 일화인데, '밀밭 안의 보리는 잡초'라는 것이다. 그건 혹은 빵밀(일본에서 보통 재배하고 있는 밀은 보통밀임)은 에머 밀이라 부르고 있는 재배종이 당시 그 밭에서 자라고 있던 잡초인 '야생 염소풀(Aegilops tauschii)'과의 사이에서 자연교배를 일으켜서 생겼다. 빵밀이 지닌 유전정보의 적어도 1배분은 잡초에서 기원한다. 더욱이 호밀이라 부르는재배종(검은 빵의 원료 등으로 쓰임)은 원래 밀밭의 잡초였는데, 조건이 나쁜 토지 등에서 재배식물로 진화해 온것이라 할 수 있다(辻本 2009).


반대로 이전 재배종이었던 식물이 잡초로 전환된 사례도 많다. 일본에서도 잡초 벼라고 하여 문제가 된 '붉은쌀(赤米)'은 중세에 도입된 품종이 근대에 들어서 잡초화된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잡초란 인간이 농경이란 행위를 통하여 저절로 산출한 존재이다. 잡초는 강하고 몹시 거친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그 강하고 거칠음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인류는 '녹색혁명' 이후 제초의 결정적인 수단으로 제초제를 개발하여 문자 그대로 '제초 방제'를 얻은 듯하지만,앞에서도 적었듯이 현재 상황에서는 그 시도가 반드시 성공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뿐인가, 제초제를 지나치게 사용하여 물과 토양을 오염시키고, 희소종을 절멸로 몰았다. 즉, 환경을 악화시켰다. 현대 일본의 논벼농사도 기본은 그노선을 답습하고 있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현재 상황 대로 논벼농사의 행방은 결코 밝다고 할 수 없다.




논벼농사의 우위성


일본 열도의 논벼농사에서는 그래도 아직 다른 작물의 경작에 비하면 우위성을 가지고 있다. 그 하나가 연작 장해를 일으키지 않는 점이다. 많은 작물은 같은 토지에서 반복하여 재배하면 '연작 장해' 또는 '그루타기'라 부르는 지장을 발생시킨다. 장해의 구체적인 내용은 작물에 따라 다르지만, 수확이 감소하고 질병에 걸리기 쉬워지는등 몇 가지 공통 사항도 발견된다. 그런데 논벼농사의 경우에는 이 연작 장해가 거의 없다고 알려져 있다. 벼도 밭에서 재배하면 연작 장해가 일어나기에 '논'에서 재배하는 것이 연작 장해를 일으키지 않는 원인이라 생각된다. 

논벼농사의 또 한 가지 우위성은 논이 댐으로 기능하는 것이다(富山 1993). 태풍과 장마철의 집중호우 등으로 한번에 많은 비가 내릴 경우, 쏟아진 물을 잠시 머물게 하는 기능이 있다고 한다. 그렇지 않아도 논에 통상은 물이 잠겨 있기에 여름에는 논에서 일어나는 기화열이 기온을 떨어뜨리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사실, 논을 건너오는 바람에서 서늘함을 느낀 경험을 가지고 있는 분도 많을 것이다. 몇몇 자치체에서는 휴경논 등에 물을 담아서 기온을 떨어뜨리는 효과를 노리고 있다고 한다. 다만 논에 물을 담는 것만으로는 기온을 떨어뜨리는 효과는 작다고 생각한다. 기화열의 효과는 그곳에 식물을 심어 놓아야 한층 뚜렷해진다. 그 식물이 호흡한 물을 증산하기 위하여 많은 기화열을 빼앗기 때문이다. 흙을 넣은 양동이에 벼를 심은 것과 아무것도 심지 않은 것을 준비하여 물을 담아, 물이 줄어드는 상태를 날마다 관찰하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벼를 심은 양동이에서는 그렇지 않은 것에 비해 훨씬 일찍 물이 사라져 버린다.




일본인은 쌀을 먹어 왔을까


그런데 일본인은 쌀을 먹어 왔던 것일까? 테라사와 카오루寺澤薫 씨는 야요이 시대의 몇몇 유적에서 출토된 식물 유체를 꼼꼼히 조사해, 도토리 등 자연식생에서 채집한 것이 가장 많았다고 기술한다. 즉, 논벼농사가 보급되었다고 하는 야요이 시대조차 '농경'의 요소보다 '채집'의 요소 쪽이 컸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고대에 들어오면 식문화는 시대의 권력자와 서민 사이에 큰 차이가 나게 된다. 문서 등에 남은 귀족들의 먹을거리는 현대 우리들의 눈에도 상당히 호화로우며, 밥 등 그릇에 수북하게 대접했다. 헤이안 시대의 '왕조 요리'를 재현한 교京 요리 '로쿠세이六盛' 주인 호리바 히로유키堀場弘之 씨에 의하면, 당시 귀족의 공식적인 식사에서 밥은 원통형으로 높여서 대접했다고 한다. 다만 대접한 전부를 한번에 먹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정도의 밥이 나왔다는 건 사실이라 생각한다. 또, 후지와라 도장은 당뇨병이었단 이야기는 당시 귀족들의 미식을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나라 시대의 야마토 지방에서는 제, 소 등이라 부르는 유제품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5세기의 오사카 평야에서는 밀의 씨앗과 말의 골격이 출토되어서 목축의 존재가 엿보이기도 있다. 그리고 에가미 나미오江上波男(1906-2002)는 '기마민족 도래설'을 전개하여 큰 논쟁을 일으켰는데, 이들 사실은 기마민족도래설의 재래를 방불케 한다. 


중세부터 근세에 걸쳐서는 어떨까? 이에 대해서는 키무라 에미木村栄美 씨가 참고가 된다. 키무라는 회화 자료에 표현된 식사의 풍경을 읽고 해석하는 수법으로 중세 사람들의 식생활을 밝히고자 했다. 키무라는 귀족, 승려, 일반 서민 각각에 대하여 그 먹을거리를 해석했는데, 밥은 그 어디에도 등장하는 것 같아 그 한에서는 '밥'이 주식의 지위를 획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 '밥'이 쌀밥인지, 또는 현미인지 흰쌀인지, 찹쌀인지 멥쌀인지등 상세한 건 분명하지 않다. 회화에 한하지 않고, 문서가 어디까지 정확히 사실을 전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일반 서민'에서도 그것은 당시의 선진지였던 교토 주변의 일반 서민이고, 지방을 포함한 서민의 생활을 대표하지는 않는다는 지적도 할 수 있다. 다만, 키무라도 말하듯이, 묘사된 세계가 화가의 시점을 반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근세의 기근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이 점에 대해서 근세에 빈발한 '기근'을 생각해 보고 싶다. 근세의, 특히 동일본에서는 기근이 빈발하여, 테이메이天明 연간을 포함한 몇 십 년 사이에 인구가 격감할 정도의 재해가 되었다. 이 일련의 기근에 대해서는 이 시기의 저온(소빙하기라는 말을 하는 연구자도 있음)에서 원인을 찾는 의론이 많다. 그러나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저온이란 기후변화는 일종의 방아쇠였으며 그것이 원인의 전부는 아니라는 견해도 가질 수 있다. 이미 몇몇 연구자가 고려하고 있듯이, 중세 이전의 동북일본은 근세만큼 벼농사에 특화된 농엽 경영이 진전되지 않았다. 


원래 근세 이전 일본 열도의 북쪽에서는 쌀보다 잡곡을 주곡으로 하는 문화가 오래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근세란극단적으로 논하면,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를 제외한 일본 열도의 정치적 통일에 맞추어서 논벼농사를 인위적 생태계의 중심에 놓고, 쌀을 주곡으로 하며, 쌀을 화폐로 삼고, 벼농사와 쌀 음식에 관한 문화를 정통으로 하는 문화의 시대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그 이전의 기층문화가 송두리째 뽑혔을 리는 없다. 지금도 '산나물 캐기' '버섯 따기' 등의관습은 동(북)이 많고 서는 적은 경향이 있지만, 그것도 당시의 자취가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아오모리시 역사민속전시관(2006년 개관) 계고관에 있는 다나카 츄자부로田中忠三郞 씨는 '숲은 시모키타下北의 백화점'이란 말로 이를 표현했다. 즉, 쌀을 재배하지 못한 때에도 숲에 가면 먹는 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을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벼농사에 지나친 에너지를 주입한 나머지 숲의 관리가 허술해져 '숲의 은혜'를 얻을 수 없게 된 것이 기근의 직접적 원인이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앞으로 증명이 필요하겠지만, 하나의 가설로 기억에 남겨 놓고 싶다. 




쌀과 물고기


논이라 하면 현대 일본 열도에 살고 있는 일본인 대부분이 녹색의 융단 같은 광경을 상상한다. 즉, 논이란 현대 일본인에게는 쌀을 농사짓는 장소이다. 그러나 앞의 잡초란 소제목에서도 기술했듯이, 논에서 벼 이외의 식물이 살지 않는 상황은 다량의 에너지를 그곳에 들이부은 결과이다. 우네宇根 씨가 말하듯이, 엄밀하게 말하면 논에는 벼 이외에도 많은 식물이 생식하는 것이 보통이다. 


또 -이것도 우네 씨가 말하듯이- 논에는 다양한 동식물이 생식한다. 그리고 그것이 안정된 생태계이다. 그들은 지금은 '잡초'와 '해충' 등 벼의 생산을 저해하는 존재로 취급되는 경향이 강하지만, 역사를 돌이키면 그러한 인식은 완전히 현대적이며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포유류인 인간은 그 생존을 위해 에너지로 전분과 신체를 만들기 위해 단백질을 끊임없이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들 논에 있던 생물들은 전분의 공급원으로, 또는 단백질의 공급원으로 이용되어 왔다. 나는 이러한 생산양식을상징적인 의미로 '쌀과 물고기'라고 표현했다(佐藤 2008). 이것은 쌀과 물고기가 한 묶음으로 먹을거리를 떠받쳐 왔다는 것을 말한다. 쌀과 물고기의 한 묶음은 역사적으로 보아도 벼농사 개시 이후의 계절풍 지대에서 널리 인정되는 한 묶음이다. 비슷한 한 묶음은 1권에서 전개한 의론에 쭉 이어서 말하면 '맥류의 풍토'에서는 '맥류(또는 감자)와 젖', 인도 아대륙에서는 '잡곡과 콩' 등으로 모양을 바꾸어 존재한다(佐藤 2008b). 이러한 한 묶음은 그 토지와 그 풍토에 뿌리를 내린, 말하자면 '환경의' 한 묶음이 된다. 


현대 일본인의 먹을거리를 여기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약 50년 전의인 1965년의 통계와 비교하면, 쌀의 소비는 최초에 기록되었듯이 110kg대에서 60kg대 전반으로 반감한다. 물고기의 소비라면 14kg이 12kg쯤이 되어 큰 변화가 없다. 한편 유제품을 포함한 축산품의 소비량은 2배 반으로 증가한다. 채소와 과일 등의 소비에도 큰 변화가 있지는 않는다. 이처럼 쌀과 물고기의 한 묶음에 대해서 통계로는 쌀의 감소라는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전 시대에 대해서는 통계자료가 마땅하지 않기에 정확히는 말할 수 없는데, 나의 어린시절이었던 1955년 무렵을 떠올려 보면,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걸 먹었다는 기억이 있다. 대충 꼽아 보아도 논우렁이, 미꾸라지, 물가의 조개류, 벌의 애벌레 등의 동물질과 쑥, 수영, 여러 산나물 등의 식물질 등을 들 수 있다. 나의 기억에는 없지만, 지역에 따라서는 다양한 곤충과 그 유충, 사슴, 토끼, 멧돼지, 오리 등의 동물도 예사로 먹었다. 지금 일본에서 '고기'라 하면 소와 돼지, 닭 세 종류밖에 없지만, 이것이야말로 이상하다고 할 만한지도 모른다. 


중근세의 먹을거리에 대해서는 하라다 노부오原田信男 씨의 논고가 상세하다. 그것은 논을 포함한 생태계에 생식하는 동식물이 총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곳에서 틈으로 살짝 볼 수 있는 건 참으로 다양한 식재료의 존재인데, 그것에서도 한층 더 흥미로운 건 이른바 '주식'이었던 전분 공급원에 대해서도 피 등의 잡곡과 토란 등의 덩이뿌리류가 쓰이고 있었던 지역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다는 사실이다(坪井 1979). 이들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도 또 언급한다.




쌀과 마음


이처럼 논의 주인공으로 취급되어 온 것은 쌀뿐이었다. 아니, 쌀은 계속 논의 주인공으로 취급되어 온 것처럼 이야기되어 왔다고 쓰는 편이 정확할지 모른다. 하라다原田(2005)가 말하듯이, 논벼농사 사회에 귀속됨은 고대 이후 일본의 지배층이 일관적으로 취해 온 정책이며, 그러한 정책이 반복하여 채택된 배경에는 생산의 실태로서 논벼농사에만 의지할 수 없는 역사와 다양성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와 생산의 갈등은 중세에도 계속되었다고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1928-2004)는 보고 있다(網野 1997).


그러나 정치와 권력의 예상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 '무언가'란 대체 무엇일까?벼농사는 그 무대(어떤 장소에서 벼가 재배되고 있는지)의 다양성에 관계 없이 지속적인 생산방법이었다고 이야기한다. 나도 부분적으로는 이러한 이야기에 찬성한다. '부분적으로'라고 자른 건 특히 고도성장기 이후의 이른바 '고투입 고수익', 즉 다비다수의 벼농사가 전혀 지속적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일본 열도의 광범위함 지역에서 쌀은 계속 생산의 중심이 되어 왔다. 한편, 예를 들면 유럽에서 맥류는 감자 이전에는 '주식'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 맥류라도 밀, 보리, 귀리, 호밀 등 다양하다. 같은 밀이라도 보통밀 외에 파스타용 마카로니밀이 있다. 콜럼버스 이후의 유럽에서는 특히 북부를 중심으로 감자가 전분 공급원의 주력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특정 종이 무언가 특별한 곡류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구조는 생기기 어려울것이다. 


쌀의 우위성을 '신찬神饌', '의례' 등의 측면에서 본 것이 칸자키 노리타케神崎宣武 씨의 논고이다. 이들은 지금은 경사스런 자리에서조차 잊혀져 버린 존재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일본인은 신년의 첫 참배(詣)는 거르지 않는다. 그리고 떡을 먹고, 도소주屠蘇酒를 마시고 신년을 축하한다. 이러한 정신구조는 -그것이 누군가가 의도하여 만든 것이라 해도- 일본인과 쌀, 벼농사와의 강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일찍이 츠보이 히로후미坪井洋文(1929-1988)가 <덩이뿌리와 일본인(イモと日本人)> 안에서 언급한 '떡 없이 정월'의 민속 사례가 보여주듯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보편적으로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동(북)일본과 서일본은 재배되는 작물과 그 품종, 수반된 동식물, 숲의 식생 등에서 이질적이다(靑葉 1980, 佐藤 2009). 아카사카赤坂(1999)는 이러한 상황을 보고 '몇 개의 일본'이란 단어를 고안했다. 몇 개의 일본을 기층으로 가지고 있으면서, 일본이 쌀과 벼농사 문화에 수렴했던 과정에서는 각각의 시대에 지배층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것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유는 다른 데에도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쌀이 가진 영양가를 들 수 있다. 쌀은 인류에게는 주로 전분의 공급원이지만, 약간의 단백질도 포함한다. 단백질은 20개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지는데, 쌀의 단백질은 이 아미노산의 대부분을 모조리 포함한다. 그래서 가령 동물성 단백질 없이 쌀만 먹어도 기아 상태가 되기 어려워진다. 한편 또 다른 곡류의 왕인 밀은 단백질의 총량은 쌀보다 많은데 아미노산의 균형이 나빠, 그것만 먹으면 언젠가는 기아 상태에 빠진다. 성서에도자주 나오는 '빵과 포도주'의 조합은 빵의 그러한 결점을 포도주가 보완하기 때문이란 설명도 있다. 



브랜드 지향과 가짜 고시히카리 소동


쌀을 특별시하는 일본인의 사고 경향은 때로는 삐뚤어진 모습으로 발현하기도 한다. 몇 년 전에 사회 문제가 되었던 가짜 고시히카리 문제도 그 하나이다. 이는 그 뒤 연속하여 일어났던 일련의 '먹을거리 속임'의 발단이 되었던 문제로, '속임'의 본질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짜 고시히카리의 상세한 내막은 이 책에 실려 있는 하나모리 쿠니코花森功仁子 씨의 기고문에 양보하려 하고, 이 문제의 저류에 있는 것이 '브랜드 지향'이라고도 할 만한 사고 경향에는 없을까 생각한다.


브랜드 지향의 사고 경향은 다양성의 저하, 특히 품종의 다양성의 상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일본의 벼 품종의 다양성 저하가 얼마나 심각한지는 이전에 기술한 바이지만, 그렇다면 고시히카리 이후 벼의 품종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냐고 하면 그렇지 않다. 고시히카리란 품종의 농림등록번호는 '농림 100호'이다(등록년도는 1956년). 2008년 현재 등록번호는 431번에 이르고 있기에, 나라가 관여한 것만 고시히카리 이후 약 50년 동안 3000을 넘는 품종이 세상에 나온 셈이다. 등록번호를 부여하지 않았던 품종의 예비군은 이보다 훨씬 많다. 그런데도 벼농사 농가도 소비자도 그 존재의 극소수밖에 모른다. 현실에서 재배된 일이 있는 품종, 현재 재배되고 있는 품종도 200가지 정도를 밑돌고 있다. 


그 원인을 어디에서 찾을지는 간단한 작업이 아니지만, 적어도 소비자의 '브랜드 지향'이 관계되어 있는 것은 확실할 것이고, 그 심리를 교묘하게 조종하는 시장의 존재도 또한 눈감아 줄 수 없을 것이다. 기술과 사회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는 어느 사회가 뛰어난 기술력(사람)과 에너지(물질)를 투입하여 새로운 부를 생산하는데 그것을 이용하는 체계가 없다고 모조리 수포로 돌아갈 우려가 있다는 점을 웅변하고 있다. 고시히카리 일변도의 책임은 품종개량의 전문가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건 기술을 살리지 못했던 사회와 정치의 책임이라고 말해야 한다. 


반성하건데, 일본에는 메이지 초기에 400가지를 넘는 품종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현재 재배되고 있는 품종은 200가지 안팎인데, 품종의 수를 다양성의 지표로 삼으면 이 100년 동안에 다양성의 정도는 20분의 1까지 저하된 것이다. 또한 메이지 시대 중반의 품종과 지금 품종의 큰 차이는 품종이란 하나의 집단 안의 다양성에도 있다.품종 안의 다양성이란 개념은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사실 벼의 품종은 어떤 품종도 완전한 클론은 없다. 고시히카리조차 엄밀하게 비교하면 현마다 다른 유전자형을 나타낼 터이다. 그리고 같은 현에서 생산한 고시히카리 안에도 몇 가지 유전자형이 섞어 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다형성은 옛 시대의 품종에서는 훨씬 크고, 같은 품종의 개체를 많이 심어서 비교하면 키와 개화일, 쌀알의 크기 및 모양 등 다양한 성질에서 차이가 발견되었다. 메이지 시기부터 쇼와 초기까지 행한 품종개량의 주요한 방법이었던 '순계분리'법은 재래종 안에서 우수한 성질을 가진 그루를 골라내어 그 종자를 증식하는 원시적인 것인데, 이러한 방법이 유효했을 정도로 당시의 품종은 한 가지 품종 안에 다양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면, 메이지 시기까지 일본 열도에서 벼의 품종이 유전적으로 얼마나 다양한 존재였는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벼농사 문화와 일본의 장래


일찍이 야나기다柳田의 시대와는 달리, 일본이 단일민족국가이며 단일한 문화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연구자는 과연 이제 없다(赤坂 1999). 농경 문화만 보아도 일본 열도에 건너온 것은 조선반도를 경유하여 온 것 외에, 북쪽에서 또는 남쪽에서 건너온 문화가 뒤섞인 복합적인 문화를 형성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벼농사 문화는 그러한 문화 복합의 안에서 생성되어 온 문화라고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佐藤 2009).


그렇게 하면 쌀을 먹음과 벼농사의 문화가 언제부터 일본 열도 전체를 뒤덮듯이 된 것인지는 역사학의 큰 문제 가운데 하나이다. 앞에서도 적었듯이, 일본인이 상고 시대부터 쌀을 주식으로 먹어 왔다는 사실은 없다. 일본 열도가 그 무렵부터 온통 논으로 덮여 있었다고 하는 것도 또한 아닐 것이다.


다만 그래도 쌀농사와 쌀밥은 -적어도 서일본에서는- 사람들의 동경이었다는 점은 틀림이 없다. 회화 자료에 나타난 쌀밥의 그림이 이야기하는 건 그러한 점일 것이다. 


근세에 쌀은 통화의 역할을 짊어질 만큼 중요한 물자로 여겨졌다. '고쿠다카(石高)'라는 일본의 독특한 단어는 그걸 잘 보여주고 있다. 한 섬(약 150kg)은 성인 남자가 1년을 사는 데 필요한 쌀의 양이다. 그것은 또한 무사와 한이 몇 명을 먹여살릴 수 있는지를 실제 수량으로 보여주는 잣대이기도 하다. 그것이 경제력을 보여주는 도량형으로 통용된 것이 쌀의 지위를 잘 보여주고 있다. 


현 시대에 사는 일본인에게도 쌀은 특수한 존재이다. 고베神戸  아와지淡路 지진의 부흥에 들어갔던 자원봉사 사람들과 지진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아침밥으로 모닝빵을 배포받은 쪽은 힘이 나지 않았지만, 주먹밥을 받은 순간 의기가 올랐다고 한다. 역시 쌀에는 무언가 힘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걸 쓰는 게 연구자로서 어떤 말을 들을지 모르지만, '정신의 힘'은 물질만능주의인 현재의 일본인이 돌아볼 만한 것의 하나가 아닐까? 그렇게 표명하고 <유라시아 농경사> 제2권의 서장을 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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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제3장 

자연과학에서 본 벼의 기원    이시카와 류지石川隆二



벼의 기원과 분류


일본에 퍼진 벼


일본인인 우리들이 일반적으로 먹고 있는 쌀은 벼, 학명으로는 오리자 사티바Oryza sativa를 재배하여 수확한 것이다. 세계에서 남극 대륙을 제외한 모든 대륙에서, 즉 고위도 지대부터 적도 바로 아래까지 널리 재배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재배 벼는 처음부터 이처럼 전 세계에서 재배되던 게 아니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는 홋카이도에서 불과 120년 전에야 간신히 늘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오모리현의 이나카다테田舍館 유적에서는 2000년 전의 논터가 발굴되어, 일본 벼농사 역사의 매우 초기에 본국 최북단에 논벼농사를 가지고 들어왔다는 걸 알고 있다. 지금도 논의 아래를 파서 야요이, 고대, 중세와 단속적이자만 논터를 발굴하고 있다(그림 3-1). 곧, 벼는 1900년 정도에 걸쳐서 쓰가루津軽 지방에 발을 들여놓고 있었던 것이다. 초기에 아오모리현으로 건너와 있던 벼는 열대 지방에서 볼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던 흔적이 식물 유체에서 발견되었다. 지금의 도호쿠 재래종에 그와 같은 성질이 없기 때문에, 서일본에서 여러 번 벼를 가지고 들어온 뒤에야 간신히 홋카이도에서도 재배할 수 있는 벼가 발견되었을 것이다. 



그림3-1 아오모리현 마에가와前川 유적의 논터. 야요이, 고대, 중세의 복합 유적이며, 중세의 논터에는 사람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



일본에서 논벼농사를 가지고 들어온 연대는 아직도 논쟁거리이지만, 일반적으로 지금으로부터 2900년에서 2500년 전이라 한다. 벼가 북진하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중에서 홋카이도에 가지고 들어와 정착할 수 있었던 벼 품종은 꽃이 피는 시기에 까락이 붉어져서 '아카게(赤毛)'라고 불렀다. '아카게'는 자연 돌연변이가 자주 발생하여, 다양한 형질을 가진 계통을 만들어낸다고 알려져 있다. 재배에 도움이 되는 돌연변이로는 알곡의 끝에 있는 돌기인 까락이 사라진 '방주妨主'가 유명하다. 이 경우는 두 가지 유전자를 잃어서 '털'이 없는 벼가 되었다(그림3-2) 이와 같은 특수한 벼도 포함해 일본 재래종의 대부분은 일본형(자포니카)라는 품종군으로 분류된다.



그림3-2 벼의 북진에 도움이 된 재래종 '아카게'(좌)와 '방주'(우)



 

두 가지 품종군


재배 벼 전체를 보았을 때, 일본형과 대치되는 것이 인도형(인디카)이다. 이들 집단은 다양한 성질에서 다른 것이 알려져 있다. '왕겨털(稃毛)'이라는 알곡의 끝에 생기는 털의 길이를 비교했을 때 인도형은 짧은 부모를 가지는 특징이 있다(그림3-3). 일본형에서는 북상할 만큼 왕겨털이 길어지는 경향도 볼 수 있다.



그림3-3 알곡의 표면에 생기는 왕겨털. 북으로 가는 만큼 길어진다. 왼쪽은 일본형 품종, 오른쪽은 인도형 품종.




또한 화학약품인 페놀 용액(1.5%)에 알곡을 3시간 정도 담그어 보면, 품종에 따라 알곡과 용액이 검게 변색하는 것이 있다(그림3-4). 이 반응을 '페놀 반응'이라 하며, 어떠한 반응을 나타내는지는 Ph라고 이름을 붙인 유전자가 제어한다고 알려져 있다. 검어지는 경우는 우성 유전자가 작용하고, 인도형 품종에 많이 보인다. 착색하지 않는 경우가 일본형이다. 다만 반드시 모든 일본형이 착색하지 않는 건 아니다. 오카 히코이치岡彦一 박사(1916-1996)는 페놀 반응에 더하여 왕겨털 길이와 다음에 기술하는 새싹의 염소산칼륨 감수성 정도라는 세 가지 형질을 조합하여 품종군을 식별하는 방법을 찾아냈다(Oka 1988). 



그림3-4 알곡의 페놀 반응. 왼쪽의 알곡을 페놀액에 담그면 +형의 대립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품종은 검어진다(오른쪽 위).



염소산칼륨 용액은 강한 독성을 나타내는 산화제이다. 벼의 새싹을 염소산칼륨 용액을 써서 기르면 곧 죽어 버리지만, 일본형 품종은 죽기까지 시간이 길고 '감수성이 약한' 경향을 나타낸다. 피해도(감수성)이 높은 쪽이 인도형인 경향이 강하다(그림3-5).



그림3-5 새싹의 염소산칼륨 반응. 일본형(좌)은 감수성이 약하기에 인도형(우)보다 죽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이외의 형질에 대해서도 인도형과 일본형 두 가지 품종군으로 나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재배 벼에서 왜 그러한 경향이 나타나는 것일까? 지금까지 행한 연구에서는 (1)하나의 모집단에서 재배되는 과정에서 두 가지 다른 집단으로 나뉘었다, (2)같은 야생종 집단 안에서 다른 형질을 가지고 있던 계통에서 각각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이 재배화되었다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설을 생각하고 있다. 


벼농사 유적의 현상을 보는 한, 동아시아(현재의 장강 유역)에서 재배화된 일본형이 그 뒤 남하한 민족에 의하여 동남아시아로 전파되어 현지의 야생종과 만나면서 인도형의 재배화에 관여한 것이 추측된다. 이와 같은 사건은 다양한 유전자의 계보를 추적하여 밝힐 수 있다.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의 차이를 밝히는 일은 재배 벼의 기원을 해명하는 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야생 벼에서는 앞에서 서술했듯이 형질의 변이가 명료하지 않고, 동질효소라는 단백질을 만들어내는 유전자의 변이에서나 겨우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에서 보이듯이 유전적으로 달랐던 계통임이 보고되었다(Morishima and Gadrinab 1987). 이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상세히 기술하겠다.



야생 벼의 생식 영역


재배 벼와 비교해 야생 벼는 어디가 다른 것일까? 벼는 오리자속이라 불리는 식물종의 집합(분류)에 속한다. 오리자속을 구성하는 식물종은 세계에 분포한다. 그 가운데 아시아의 재배 벼는 사티바라고 불리는 종에 속하고, 세계의 재배 벼 대부분을 점하고 있다. 사티바종에 근연한 루퓌포곤종rufipogon이라 불리는 야생 벼(이하 루퓌포곤)는 열대 도서부(인도네시아), 오세아니아부터 동남아시아, 남아시아, 동아시아에 분포한다.


식물종의 분류는 새로운 유전정보가 더해져 변경된다. 오세아니아에 생식하는 메리디오나리스meridionalis, 아메리카에 생식하는 글루매파투라glumaepatula, 아프리카에 생식하는 바르시barthii 및 롱기스타미나longistaminata는 일찍이 페렌니스perennis라는 종 안의 오세아니아형, 아메리카형, 아프리카형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루퓌포곤은 꽤 높은 임성稔性(꽃가루가 기능하는 것)을 나타내 자손을 만든다고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사티바와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음이 밝혀져 재배종의 직접 선조가 되는 야생종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다. 이들의 상세한 내용도 Oka(1988)에 정리되어 있다.


야생종의 분류는 어렵고, 분류체계 그것이 연구자마다 다른 경우도 있다. 드물게는 많은 연구자의 의견이 일치하여 지금까지 이어진 종명이 변경되기도 한다. 루퓌포곤의 분류에서도 마찬가지 사례가 있었다.


아시아형의 루퓌포곤에는 두 종류의 생태형이 알려져 있다. 한해살이와 여러해살이이다. 한해살이는 종자를 남기고 자신은 죽는다. 여러해살이는 종자도 남기지만, 자신에게 그 에너지를 축적해 놓으며 영양번식을 할 수 있는 생활사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한해살이는 니바라nivara라는 종으로, 여러해살이 야생 벼인 루퓌포곤과 식별되기도 한다. 한해살이 야생 벼는 우기에 개화하고, 종자를 맺는다(그림3-6). 재배 벼라면 하나의 이삭에서 개화하는 '꽃'(벼에서는 이삭꽃이란)은 1주일 이내에 피고 지며, 모든 이삭꽃은 거의 같은 시기에 등숙한다. 이것을 '생육의 균일화'라 하며, 재배에 필요해지는 현상의 하나이다. 한편, 야생 벼에서는 하나의 이삭 안에 최후의 이삭꽃이 개화할 무렵에는 끝쪽의 종자가 완숙해서 탈립해 버린다(그림3-7). 익은 이삭꽃이 이삭에서 지면으로 떨어지고 후세를 남길 준비를 하는 것이다. 건기에는 식물 개체 그것은 죽어 버리지만, 지상에 떨어진 종자는 휴면성을 보이기 때문에 다음 우기가 되기까지 발아하지 않고 '동면' 상태로 살아 남는다.



그림3-6 라오스에서 발견한 한해살이 야생 벼(가운데). 건기에는 종자를 남기고, 자신은 죽는다.




그림3-7 야생 벼의 탈립성과 생육의 불균일화. 야생 벼의 알곡은 익은 무렵에 탈립하기 때문에, 조사하면서 공책에 올리기만 해도 탈립하기도 한다. 캄보디아에서.



  

한해살이와 비교해 여러해살이는 종자를 만들지만 그 생산성이 한해살이에 비해 떨어진다. 그 대신 남은 종자 생산 에너지를 자신이 살아 남기 위해 이용한다. 벼 개체는 한해살이의 재배종이라도 '움돋이'를 뻗어 온갖 마디에서 싹과 뿌리를 뻗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일부가 죽어도 똑같은 유전자형을 지닌 조직이 살아 남는다. 이와 같은 번식 방법을 영양번식이라고도 한다. 똑같은 번식 방법을 딸기와 감자에서도 볼 수 있다. 여러해살이 벼는 몇 해에 걸쳐 식물 그것이 살아 남기 때문에 건기에도 물을 얻을 수 있는 연못의 중심부 등에 적응한다. 당연히 우기에는 연못의 수량이 늘어난다. 이 자극으로, 예를 들면 뜬벼는 짚(줄기)의 마디 사이를 늘린다. 그 결과 수면 위로 잎을 내밀고, 우기에 늘어난 수량에 견딜 수 있다(그림3-8).



그림3-8 캄보디아 씨엠립 교외의 반데이 스레이에서 학생이 손에 들고 있는 건 여러해살이 야생 벼. 마디에서 새로운 싹이 나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뒷쪽의 연못은 수심 1미터 이상.



발굴 자료와 문서에 의하면, 재배종의 선조종인 루퓌포곤은 장강 유역보다 약간 고위도 지대에서도 생식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현재 루퓌포곤의 생식 영역은 중국에서는 하이난섬, 광시 치완족 자치구성, 광둥성, 후이난성, 장시성, 윈난성 등으로 한정된다. 개발과 몇 천 년 단위의 기후변화에 의한 것이라 생각한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지금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루퓌포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과 마찬가지로 개발이 진행된 태국에서는 생식 영역이 꽤나 감소했다. 한편, 일본에서 야생 벼가 생식하고 있었단 기록은 없으며 재배 벼만 대륙과 남쪽에서 섬으로 옮겨져 전파하는 등 여러 경로로 전해져 왔던 것 같다.


루퓌포곤의 남방한계는 남반구의 오세아니아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에는 여러해살이 루퓌포곤과 한해살이 메리디오나리스가 생식하며, 지금까지 여러 계통이 수확되어 연구에 이용되어 왔다(그림3-9). 오스트레일리아 퀸즈랜드 주립 하버리움(식물표본관)에서는 그들의 표본을 보관하며 일반에 공개하고 있는데 분류하면서 기술적인 문제로 메리디오나리스를 루퓌포곤이라 잘못 표기해 놓기도 했다. 형태학적으로는 이삭꽃 꽃밥(수술의 꽃가루를 가지고 있는 부분)의 길이가 2mm 이하라면 메리디오나리스, 4mm 이상이라면 루퓌포곤이라 규정하고 있는데, 게놈 수준에서도 기준을 정해 놓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림3-9 오스트레일리아의 여러해살이 야생 벼. 유칼립투스가 살고 있는 연못에서 생식하고 있다.




재배 벼와 야생 벼를 구별하다


여러해살이 야생 벼에서 발견되는 '뜬벼' 성질은 아시아 갠지스강, 이라와디강, 챠오프라야강, 메콩강 등의 큰 강 삼각주 지대의 재배 벼에서도 볼 수 있다. 이들 삼각주 지대는 홍수가 자주 일어나는 곳이라 그러한 지역에 대응한 뜬벼 재배가 행해진다. 그럼 재배종에는 없고, 야생 벼에서만 볼 수 있는 형질은 무엇일까?


재배종과 야생종에서 서로 다른 형질의 하나로 종자의 크기를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야생종은 재배식물에 비하여 수확 대상이 되는 종자와 식용부가 작은 경향이 있다. 이것은 사람이 재배, 수확하면서 서서히 큰 것을 선발하여 재배식물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야생 사과와 재배 사과에서는 10배 정도 크기에서 차이가 나는 걸 볼 수 있다.


야생 벼의 종자도 재배 벼에 비하여 작은 경향이 있는데, 예를 들어 루퓌포곤과 사티바를 비교하면 사과처럼 극단적인 차이는 보이지 않는다(그림3-10). 중국의 강소성 농업과학원의 탕릉화湯陵華 교수는 이 이유를 야생 벼도 재배 벼와 공존하여 종자가 대형화되는 유전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면 실제로 재배 과정에서 벼의 종자는 어떠한 변화를 나타내 왔을까? 지금도 그것을 조사하는 방법이 있는 것일까?



그림3-10 야생종과 재배종 알곡의 크기. 왼쪽부터 루퓌포곤, 재배 벼인 인도형, 재배 벼인 열대 일본형. 야생 벼의 크기는 극단적으로 작지 않다.



중국의 유적에서는 연속적인 퇴적층에서 방대한 양의 볍씨를 얻을 수 있다(그림3-11, 3-12). 그와 같은 유물과 현재의 재래 야생종의 종자에 기초하여 탕 교수는 대략 7000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는 종자의 크기 변천을 조사했다. 그 결과, 볍씨는 재배화 과정을 거치며 세로 4mm, 가로 2mm 정도 대형화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세로의 크기만 비교하면, 중국 재래 야생 벼는 700년 전에 이용되었던 '고대의 벼'보다 오히려 현대의 재배 품종에 가깝다는 것이 밝혀졌다. 7000년 전의 유물 중에는 야생 벼와 재배 벼가 혼재해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겠지만, 재배화와 평행하게 야생 벼의 종자가 대형화하며 살아 남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림3-11 강소성 고우高郵, 용교장龍蛟莊 유적에서 출토된 7000년 전의 탄화미. 탕릉화 교수 제공.



그림3-12 강소성 고우, 용교장 유적에서 출토된 5000년 전의 탄화미. 현재의 야생 벼보다도 작다. 탕릉화 교수 제공.




종자의 색과 재배화


종자의 색은 어떨까? 볍씨의 색은 바깥의 세포층(자세히 말하면, '열매껍질'이라고 부르는 표면의 세포층과 그 안쪽에 있는 배젖을 보호하고 있는 '씨껍질'이라고 부르는 세포층)에 착색이 있는 유형과 착색이 없는 유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야생 벼의 종자는 모두 붉은색인데, 재배종에서는 붉은색과 흰색 두 가지이다. 이 형질의 차이는 착색에 관한 우성 Rc 유전자에 의하여 지배된다. Rc 유전자가 Rd 유전자와 상호작용하면, 종자 표면에 균일한 착색을 가져와 한결같은 붉은색 겉모습을 나타낸다. 또 Rc 유전자는 단독으로도 작동한다. 현미가 부분적으로 붉은 반점을 나타내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그림3-13).



그림3-13 현미에서 보이는 쌀알 색의 변이. 왼쪽부터 RcRd형의 붉은쌀인 대당미大唐米(가고시마 토종) 및 아오모리현의 토종 적제赤諸. RcRd형의 붉은 반점 및 Rc형의 흰쌀(일본청日本晴)



흰쌀은 이들 착색층에 색소가 없어져서 생긴다. 요즘 연구에서 착색의 원인인 Rc 유전자 자체의 분자구조를 해명해(Sweeney 외 2006, Furukawa 외 2007) 흰쌀은 Rc 유전자가 기능을 상실한 열성의 Rc 유전자로 변화한 것이며, 그 분자구조를 붉은쌀 계통의 그것과 비교하면 Rc 유전자 내부의 염기배열의 일부가 결실欠失되어 흰쌀이 된다는 것을 밝혔다. 게다가 인도형, 일본형의 품종을 막론하고 흰쌀은 똑같이 결실을 가지고 있었다. 야생 벼는 모두 붉은쌀만 있기 때문에, 재배 과정에서 흰쌀의 재배가 일원적으로 일어났다고 할 수 있다.


이 붉은쌀의 성질을 지배하는 유전자의 내부 배열을 바탕으로 재배종 가운데 붉은쌀을 비교한 바, 두 종류의 집단(A 및 B)으로 나뉘었다(그림3-14). A집단은 인도형의 붉은쌀과 모든 흰쌀로 구성되어 있다. B집단에는 일본, 한국 및 중국의 붉은쌀 품종이 포함된다. 일본에서 볼 수 있는 붉은쌀에는 A집단도 있지만, 그들은 중세에 중국에서 일본으로 전파된 인도형 품종(대당미)이다.



그림3-14 Rc 유전자 내부의 SSR 다형. A집단은 흰쌀 및 인도형의 붉은쌀, B집단은 일본형의 붉은쌀이 나타내는 유전자형이다.  



대당미는 애초 점성도占城稻라고 하여 11세기에 점성국占城國에서 복건성 등을 중심으로 중국에 가지고 들어온 벼와 계보를 같이한다. 문헌에 의하면 송나라의 진종眞宗 대중상부大中祥符 5년(1012년)에 작물의 다양화를 위하여 가뭄 저항성이 있는 조생종으로 황무지에 도입되었던 것 같다. 이것이 중국의 메벼 계통이 되었다(寶月 1993). 이와 관련하여 점성국은 힌두교를 믿으며 지금의 베트남 중부를 중심으로 번영했던 고대국가인데, 갠지스강 유역과 관련이 있다고 이야기된다. 


중세에 일본에 가지고 들어온 대당미의 대부분은 붉은쌀로서, 밭벼로도 논벼로도 심어서 재배할 수 있는 특수한 형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유전적 형질은 인도형과 일본형의 교잡을 보이고 있다(Ishikawa 외 2002). 대당미는 동아시아 독자의 품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부터, 

(1) 야생 벼는 원래 모두 붉은쌀이며, 재배 과정에서 흰쌀이 되는 돌연변이가 한 계열만 발생했다.

(2) 재배 벼에는 흰쌀과 두 종류의 붉은쌀이 포함되어 있었다.

(3) 흰쌀과 A집단의 붉은쌀만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남하하여, 인도형이 성립하는 데에 관여하여 흰쌀 유전자를 후세의 벼에 건네주었다. 

(4) A집단의 인도형 붉은쌀인 점성도가 중국에 도입되어, 이윽고 일본에도 대당미로 건너왔다.

라고 할 수 있다. B집단에 속하는 일본형 붉은쌀과 인도형 붉은쌀이 같은 붉은쌀 유전자에서 파생되었는지 어떤지에 대해서는 현시점에서는 알 수 없다. 유전자 전체에 걸친 염기배열에 따른 부분상동성을 밝히는 것으로 논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앞으로 중국의 야생 벼에만 A 및 B 집단의 붉은쌀이 존재한다는 것을 밝힐 수 있다면 붉은쌀의 성립이 다원적이었다는 점, 중국을 기존으로 두 방향으로 벼가 전파되었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유전자가 말하는 벼의 기원


인도형과 일본형은 같은 기원에서 성립한 것인가?


유전자를 구성하는 염기배열은 일정 비율로 돌연변이를 발생시켜, 유전암호로 정보를 담당하는 네 종류의 염기(아데닌, 시토신, 구아닌, 티민)가 자리를 옮겨 다닌다. 선조가 똑같은 두 가지 자손에서 같은 유전자의 염기배열을 비교하여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이 40만 년 전에 분화했다고 산출한 연구자가 있다(Zhu and Ge 2005). 유적 등에서 추정되듯이 벼의 재배가 시작된 것이 빨라도 지금으로부터 1만 년 전으로, 40만 년 전에 재배 품종이 유전적으로 분화되어 있었다고 하는 자료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 또한 게놈 안의 네 가지 유전자만으로 얻은 자료이기 때문에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만 앞에서 기술했듯이 다양한 형질로 식별되는 인도형과 일본형은 유전적으로도 고도로 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그 특수한 영역의 염기배열로부터 산출된 분기 연대라고 한다면 타당한 분기 연대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예는 DNA의 분화와 품종 분화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의 전형적인 예일지도 모른다. 


SSR이란 염기의 단순 반복 배열은 벼 게놈에서 높은 빈도로 발견될 수 있다. ACGT로 구성된 염기배열 안에는 예를 들어 ATATATAT 등이란 2염기부터 4염기의 배열로 이루어진 반복은 근연 품종 사이에서도 서로 다른 반복수를 나타내는 것이 많다. SSR은 유전자의 위치를 밝히는 연쇄 해석과 품종 식별 등에 이용된다. 그래서 이 SSR을 사용하여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군 사이의 염색체 구성이 어떻게 다른지를 조사해 보았다.


벼 게놈은 12번의 염색체로 구성되어 있어, 그들 염색체의 몇 가지를 횡단하듯이 SSR을 설정하고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군 사이의 반복수 조합이 어떻게 다른지를 조사해 보았다(그림3-15). 그래프의 끝에서 끝까지가 제12염색체를 나타내고, 각각의 점이 SSR 표지자의 위치이다. 세로축의 1은 인도형, 일본형 품종에 똑같은 반복수를 나타내는 SSR을 공유하고 있는 것. 0은 같은 품종군 사이에서 서로 다른 반복수밖에 안 보이는 것을 나타낸다. 그 결과, 염색체 수준에서 보는 한, 두 품종군은 같은 영역과 다른 영역이 혼재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림3-15 제12염색체에서 볼 수 있는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군 사이에 분화된 염색체 영역. X축은 염색체 위치, Y축은 유전적인 분화 정도를 나타낸다.



이 설명으로 인도형은 일찍이 일본형과 교잡하여 유전적 조성의 일부를 교환했지만, 일본형 벼와는 다른 영역을 게놈에 지닌 채로 재배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유전적으로 다른 영역은 재배화 이전의 야생 벼 집단이 가지고 있던 차이를 나타내고, 40만 년이란 연대도 추정치의 하나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군에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유전자(흰쌀의 유전자)는 인도형과 일본형 사이에 서로 교환한 염색체 영역에 실려 있다. 또한 공유하고 있지 않은(분화한) 염색체 영역에는 앞에서 언급한 페놀 반응의 유전자를 시작으로, 두 품종군을 특징짓는 유전자가 실려 있다. 그림에 보이는 가장 분화한 영역에서는 지금까지 두 품종군을 식별하는 지표로 이용되어 온 동질효소 유전자 Acp1이 실려 있다. 동질효소는 전기영동이란 실험방법에 의하여 비로소 분리, 식별할 수 있기 때문에, 각 품종군에게 필요한 형질을 지배하는 유전자는 생존 능력에 관하여 중립이라고 생각되는 동질효소 유전자와 함께 실려 있다고 할 것이다.


품종군에서 서로 다른 염색체 영역에 보이는 유전자로 페놀 유전자를 들 수 있다. 같은 유전자의 실려 있는 후보 영역을 위에 언급한 방법으로 조사하면, 페놀 유전자 후보로 폴리페놀 산화효소 유전자가 적어도 세 가지 이상 실려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가운데 PPO1이라 불리는 유전자는 인도형에서는 정상인 유전자 배열을 가지고 있는데, 일본형에서는 그 유전자 배열 안에 트랜스포존이라 불리는 게놈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닐 수 있는 전이인자가 삽입되어 있었다(그림3-16). 그 때문에 유전자 기능은 손상되어 있다. 단, 일본형에서도 삽입되지 않은 품종이 있었다. 이것은 이른바 열대 일본형으로, 일찍이 오카 히코이치 박사가 열대도형으로 분류한 품종이다. 페놀 반응은 어디까지나 마이너스이기 때문에 트랜스포존이란 다른 원인에 의해 기능을 상실했다고 추정된다. 유전자 내부를 보면 염기배열에 다양한 치환이 발생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유전자가 알곡의 페놀 반응에 관여하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상세하게 조사해야 하겠지만, 긴밀하게 연쇄하는 것은 연쇄 분석의 결과에서도 밝혀진다. 재래종에서 염기배열에 의한 계통수를 작성해 보면(그림3-17)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이 별도의 유전자 유래를 가지고 있으며, 열대 일본형은 더욱 다르기 때문에 페놀 유전자에는 다원적인 계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림3-16 PPO1에 보이는 트랜스포존의 삽입.



그림3-17 PPO1의 염기배열로부터 작성한 계통수.



이상과 같이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은 서로 다른 진화의 길을 간 유전자를 무수히 게놈 안에 가지고 있으며, 일본형으로 분류되는 품종군에도 서로 다른 기원에서 성립된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알칼리로 녹인 쌀!?


일본형 쌀은 알칼리액에 담그면 팽윤하여 '붕괴'한다. 쌀은 대부분이 녹말이다. 그 녹말은 아밀로오스, 아밀로펙틴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글루코오스의 결합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아밀로오스가 없어지면 찹쌀이 되고, 아밀로오스가 늘어나는 것과 함께 퍼석퍼석한 멥쌀이 된다. 이와 같은 성질도 벼의 기원을 밝히기 위한 귀중한 정보를 제공한다. 


아밀로펙틴 사슬의 길이를 조절하는 유전자는 수용성 녹말 합성효소 IIa(SSIIa)라고 불린다. 실은 이 유전자가 알칼리 붕괴의 정도를 결정하는 유전자이고, 열성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을 경우 쌀이 붕괴하기 쉽다(그림3-18). 인도형, 열대 일본형 및 야생 벼에서는 우성 유전자를 가지고 있어, 알칼리 붕괴가 어려운 표현형을 나타낸다. 알칼리 붕괴의 유무는 맛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유전자의 배열 자료까지 연구가 진행되어 있다. 그 결과, 붕괴하기 어려운 유전자라도 서로 다른 염기배열을 나타내는 품종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여기에도 복수의 야생 벼가 재배화되어 각각의 지역에서 특징이 있는 재래 품종군이 선택되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다만 이 경우는 맛과 관련되어서 각 표현형이 선발된 뒤에 다른 지역으로 옮겨지기도 한다. 현재 어느 재래종의 재배지역이 그대로 기원지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한편 야생종은 맛으로 선발되지 않기 때문에 각 지역 야생 벼의 유전자 염기배열을 조사함으로써 서로 다른 맛의 쌀이 기원한 지역을 특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3-18 배젖의 알칼리 붕괴성. 왼쪽이 인도형, 오른쪽이 일본형 품종의 배젖을 알칼리액에 담근 것.




엄마는 '하나'?


사람과 마찬가지로 벼도 세포질의 유전조성(미토콘드리아 게놈, 벼에서는 엽록체 게놈도 포함됨)은 엄마에게서 유래한다. 벼로 말하면, 꽃가루를 제공하는 부분이 아니라 난세포를 제공하는 부분에서 유래한다. 그 때문에 엽록체 게놈을 조사하여 모계열을 밝힐 수 있다.


PS-ID 배열과 ORF100은 엽록체 게놈의 일부로, 치바 대학의 나카무라 이쿠로中村郁郞 박사(이 책의 기고 3 담당)의 연구에 의하여 인도형 품종과 일본형 품종의 식별에 이용할 수 있음이 밝혀졌다. PS-ID 배열은 시토신(C)과 아데닌(A)의 반복을 포함하는 350염기 정도의 배열이다. 이 mCnA(m, n은 C 및 A의 반복수)의 배열에 인도형은 8C8A 유형, 온대 일본형은 6C7A 유형, 열대 일본형은 7C6A 유형이 각각 특징적으로 발견된다. 이로부터 다원적인 모계열의 존재가 지적된다(그림3-19). 또한 ORF100 근방의 69염기의 결실도 인도형에서 특징적이며, 일본형에서는 볼 수 없다. 일부 야생 벼에서 이 결실을 지닌 것이 있다. 이런 점에서도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군은 별개의 모계열에서 재배화되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카와카미 외(Kawakami 외 2007)는 엽록체 DNA에서 보이는 복수의 결실에 주목하여, 그 가운데 57k 영역의 분자적 다형에서 재배 벼에는 여섯 유형의 모계열이 존재한다고 보고한다. 



그림3-19 PS-ID 영역을 포함한 RPL16 유전자의 염기 다형.




탈립성은 하나의 기원


벼에는 이삭꽃을 다는 이삭이 있고, 하나의 이삭꽃 안에 하나의 현미가 생긴다. 이삭꽃 기관에 해당하는 부분이 알곡인데, 알곡이 자연히 이삭에서 탈리脫離하는 형질을 '탈립성'이라고 한다. 재배 벼는 수확할 때까지 탈립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


이 탈립성을 지배하는 유전자도 재배화에 따라 변화한 유전자이다. 탈립성을 지배하는 유전자는 여럿 존재한다. 그 가운데 야생종과 재배종 사이에 다른 유전자가 최근 발견되었다. 제4염색체에 실려 있는 탈립성의 유전자 SH3=SHA는 연구자마다 다른 유전자 이름으로 불러왔는데, 야생종에서 재배종으로 변하는 단계에서 돌연변이한 유전자임이 밝혀졌다(Li 외 2006).


수확할 때까지 탈립하면 곤란한 재배종에서는 비탈립성이란 '재배에 적합한 변이'가 선호되어 남아 있다. 이 과정을 인위 선택이라 한다. 인도형 품종과 일본형 품종은 앞에서 기술한 탈립성 유전자 내부에 똑같은 염기 변화를 가지고 있으며, 모두 이 변이에 의해 비탈립성이 된 것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우연이었을까? 지금까지 둘은 동일한 변이에 의해 생긴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이 유전자는 어디에서 변이한 것일까? 가장 오래된 벼농사 유적은 현대의 중국 장강 유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예를 들어 대략 1만 년 전의 벼농사 유구라고 생각되는 상산 유적 등) 중국에서 초기의 재배 과정에 비탈립성이 획득되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게 신뢰성이 높은 결론이다.



태풍에서 선발된 일본형?


탈립성의 정도에 대해서는 인도형과 일본형에 차이가 발견된다. 인도형 쪽이 일본형보다 탈립하기 쉽다. 이 점에서는 인도형은 야생 벼와 같은 qSH1이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유전자 이름 안의 q는 양적 형질을 지배하는 유전자 자리(QTL)을 표시하는 기호이며, 탈립성(SHATTERING)의 제1염색체에 실린 유전자로서 그와 같이 이름이 붙여졌다(Konishi 외 2006). 인도형에도 일본형에도 각각 복수의 탈립성에 관련된 유전자 자리가 있는데, 인도형 쪽이 더 탈립하기 쉬운 건 그들 유전자가 지닌 탈립성 효과의 총계에 의한 것임이 발견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높은 효과를 나타내는 유전자 자리로 알려진 것이 qSH1이다. qSH1은 인도형에서는 우성유전조차 탈립성 효과를 나타내는 데 반해, 일본형에서는 열성유전으로 탈립이 어려운 효과를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일본형에서는 알곡을 이삭에서 떼어낼 때 이삭의 일부인 이삭가지에서 떨어져 알곡에 붙은 채로 있는 것을 빈번하게 볼 수 있다(그림3-20).



그림3-20 탈립성이 다른 일본형과 인도형 알곡의 아래쪽. 왼쪽 일본형에서는 이삭가지의 일부가 달려 있지만, 인도형은 떨켜가 발달해 있기에 이삭가지가 남지 않는다.




그림3-21 야생 벼 떨켜의 전자현미경 사진. 떨켜가 발달해서 알곡 아래쪽은 세포가 골고루 늘어서 있다.




야생 벼에는 야생 벼에 특이적으로 볼 수 있는 제4염색체의 탈립성 유전자와 인도형에 많이 보이는 제1염색체의 qSH1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전자현미경으로 알곡이 탈립하는 부분(떨켜)을 보면 알곡이 이삭가지와 잘라져 떨어지는 걸 알 수 있다(그림3-21). 이에 대하여 인도형은 qSH1을 가지고 있지만 수확까지는 탈립하지 않는다. 오히려 탈곡하려 할 때 쉽게 알곡을 이삭에서 떨어뜨릴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기에, qSH1은 '안이한 탈곡형' 유전자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림3-22는 인도 시킴주의 탈곡 풍경이다. 수확한 벼를 땅바닥에서 건조하고, 원형으로 소를 걷게 하면서 알곡을 탈곡한다. 옆의 대나무 끝에는 천수국이 걸려 있다. 논의 신에게 바친다는 의미도 있지만, 꽃이 마를 때쯤이면 벼도 마른 알곡을 떨기 쉬워지기 때문에 탈곡의 적기를 가늠하는 데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캄보디아의 남부에서는 소녀가 이삭을 밟아서 알곡을 떨고 있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탈곡하는 건 일본의 벼에서는 곤란할 것이다.



그림3-22 인도 시킴 지방의 탈곡 풍경




그 이유는 일본형 벼가 열성대립유전자로 작동하는 qSH1을 가지고 있어 '탈립이 어려운 성질'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알곡을 이삭에서 떨어뜨리는 데에는 옛날부터 홀태 등의 전용 탈곡기가 이용되었다(그림3-23). 동아시아의 수확 시기는 마침 태풍이 빈발하는 때이다. 태풍의 강풍으로 수확량이 감소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탈립이 어려운 성질'이 빼놓을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림3-23 일본의 농기구, 탈곡기.




인도형의 기원


인도형은 한편으로는 야생 벼와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형과 같은 재배화에 관련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이 결과의 일면을 보면, 마치 인도형 재배종은 야생 벼에서 재배화되는 과정에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이것을 고고학의 자료와 결부하면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를 그릴 수 있다. 


재배화가 동아시아에서 발생하고, 같은 지역에서 선발된 유전자(탈립성 SH3=SHA, 흰쌀 rc)가 일원적으로 생겼다. 그들은 일본형이었다. 그 사이, 비탈립성과 함께 흰쌀 유전자를 가진 계통이 남하하여, 동남아시아 어딘가의 지역에서 '인도형'의 성질을 가진 야생 벼와 교잡되어 인도형 재배종이 성립되었다(佐藤 1996, Dorian and Sato 2008).


인도형 품종으로 생긴 유전적으로 다양한 품종군에는 늦벼와 올벼, 뜬벼 성질과 천둥지기에서 재배할 수 있는 밭벼 등으로 재배되었다. 이와 같은 품종의 일부는 앞에서 기술했듯이 11세기에는 중국에 도입되었다. 그 계통에서 중세에 일본으로 대당미로 전파된 점성도는 서일본에서 재배되었다. 그러나 내한성 등의 문제로 동일본에는 도달하지 않았다. 한편, 따로 븕은쌀 계통은 재배화의 유전자인 비탈립성을 가지거나, 다른 계열의 일본형 붉은쌀로 중국, 일본, 한국에 전파되었다. 


이 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와타나베 타다요渡部忠世 박사가 연와煉瓦 유적에서 발견한 알곡 모형에서 볼 수 있다(渡部 1977). 동남아시아의 사원 유적은 햇볕에 말린 벽돌을 소재의 하나로 건축되었다. 이와 같은 유적이 인도부터 중국까지 인지된다. 벽돌에 섞인 알곡의 크기를 측정하고, 유적의 연대를 역사적으로 밝혀서 벼 알곡 크기의 변천을 추적할 수 있다. 알곡의 크기에는 인도형과 대응하는 가늘고 긴 알곡(늘씬한 유형), 밭벼와 열대 일본형과 대응하는 큰 알곡(큰 크기) 및 일본형에 대응하는 둥근 알곡(둥근 유형)의 세 종류로 크게 나눌 수 있다(松尾 1952). 이들 세 종류 알곡 모형의 벼가 10세기에 태국 차오프라야강 유역에서 혼재하며, 시대와 함께 늘씬한 유형이 평야부, 큰 유형과 둥근 유형은 태국 북부와 동북부에 한정된다는 걸 보여주었다. 이것은 인도형 재배종의 성립과 그 뒤 일본형과 재배 적지가 분화되는 모습을 알려주기에 매우 유의미한 자료이다.



인도형 야생 벼


인도형이 재배 벼와 야생 벼의 교잡으로 생겼다면, 인도형 재배종의 기원지는 인도형의 야생 벼가 생식하는 지역, 혹은 일찍이 생식했던 지역이 된다. 이와 같은 야생 벼는 어디에 존재했을까?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처럼 뚜렷한 유전적 형질의 분화는 야생 벼에서는 볼 수 없다. 다만, 엽록체의 DNA에 변이가 생기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야생 벼에서도 인도형의 염기배열을 발견할 수 있다. 앞에서 서술한 PS-ID 배열에 대하여 43계통의 루퓌포곤 변이를 조사했고, 인도형에서 특유한 유형의 배열을 보여주는 것은 4계통(태국 2계통, 인도네시아 1계통, 파푸아뉴기니 1계통)이었다. 이 4계통이 직접적인 선조종이란 건 아니고, 이와 같은 계통의 분포 지역과 유전자 배열을 상세하게 비교하여 기원지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기대한다. 




진화하는 벼 -교잡에 의한 유전자 변환



인도형 야생종과 일본형 재배종은 교잡했을까?


지금까지 재배 형질에 관여하는 탈립성과 흰쌀은 일원적으로 발생했다는 걸 기술했다. 그럼 게놈이 다른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은 공통의 유전자를 어떻게 하여 가지게 된 것일까?


타다오 씨가 벽돌 안의 알곡 모형의 변천을 자세히 조사했을 때, 한 시기 태국 평야부에서는 다양한 알곡 모형의 벼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공존 상태는 나중에 해소된다. 적어도 그 시기에는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이 근접하여 공존하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해외 학술조사에서는 야생 벼만이 아니라 재래종도 조사의 대상으로 삼는다. 현지의 연구기관과 공동으로 재래종의 변이를 조사하기도 한다. 캄보디아도 그러한 나라의 하나이다. 이 나라에 흥미를 가지게 된 데에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 그것은 뜬벼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뜬벼가 존재하는 곳에는 수확을 위하여 올벼가 함께 재배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다양한 벼 품종이 존재하는 것을 '생태 품종(같은 곳의 다른 생활사 습성을 가진 품종군)'으로 분화되어 있다고 한다. 


생태 품종의 대표 사례는 갠지스강 유역의 벵골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아우스aus 품종군과 아만aman 품종군이다. 또한 똑같은 생태 품종을 캄보디아 똔레샵 호수 주변에서도 볼 수 있다. 캄보디아의 우기는 5월 말에 시작해 8월에 소강되었다가 9월에 집중적으로 비가 내린다. 10월부터는 비가 거의 오지 않고, 가장 건조함이 격심한 때가 3월부터 5월 무렵이다. 재배종인 뜬벼를 필자가 처음으로 본 건 앙코르와트로 유명한 씨엠립이었다(그림3-24).



그림3-24 앙코르와트



이 마을에는 각종 저수시설과 사원이 앙코르 유적군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여행자가 방문하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앙코르와트를 둘러싼 해자의 한 변은 1킬로미터 이상이다. 이 유명한 유적을 지나면 거대한 돌로 만든 불상이 서 있는 바이용 사원이 있다. 여기도 주변에 해자를 판 앙코르와트보다 거대한 복합 시설을 포함한 사원이다. 차가 통과할 수 없는 서문을 지나서 30분 정도 걸으면 서바라이라는 인공 저수시설이 보인다. 1020년에 완성된 서바라이는 동서 8킬로미터, 남북 2킬로미터의 제방을 가진 인조 호수이다. 그 동쪽 끝에 가까워질 때 가장 먼저 마중을 나온 건 물소였다. 좁은 모래흙의 길을 지나면 벼들이 호수의 주변 언덕에 자리를 잡고 있다. 농가의 사람은 어디에 있지 하고 생각하면, 물에 허리까지 잠기어 벼의 윗부분을 베는 일을 하고 있느라 정신없었다. 근처에 떠 있는 배에는 베어낸 벼의 이삭이 실려 있으며 언덕에 올려 말리고 있었다. 말린 뒤에야 물소의 차례가 되어, 농가까지 운반할 것이다(그림3-25, 3-26).



그림3-25 1월에 서바라이에서 볼 수 있는 뜬벼 수확 풍경. 깊은 연못은 뜬벼의 논이며, 농부가 허리까지 잠긴 상태로 윗부분을 베는 일을 하고 있다.




그림3-26 서바라이의 수확 풍경에서는 물소의 활약을 볼 수 있다. 사진은 물소에게 지우는 수레.




이처럼 깊은 물 지대에서는 5월에 파종하여 9월까지는 물을 빼는 논 같은 곳에서 모를 기른다. 그 사이에도 재배 벼는 야생 벼와 공존하고 있다. 9월부터 급속히 수량이 늘고, 그 다음에는 물에 잠긴 상태에서 재배가 이루어진다. 물이 적은 때에는 다른 품종을 사용해 거의 같은 장소에서 여러 가지 품종을 심고 있는 것이다. 물론 종자는 자가채종이 기본이다. 12월에 방문했을 때 벼는 아직 대부분 물에 잠겨 있었다. 새해 무렵부터 차차 이삭이 나와, 꽃이 피고 익으며 수확이 이루어질 것이다. 9개월이나 기르는 뜽벼는 수확효율이 나쁘기 때문인지 현재는 홍수가 일어나는 곳에서만 재배한다. 


이 뜬벼의 특징은 세포질(엄마 게놈)이 일본형이면서 핵 게놈은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의 특징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거꾸로 세포질이 인도형이면서 핵은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의 중간인 특징을 가지는 경우도 있다. 뜬벼 재배 품종의 유전적 성질은 갠지스강 유역의 벵골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뜬벼 성질은 원래 여러해살이 야생 벼에서 유래하는 성질이기 때문에, 야생 벼에서 재배 벼에 도입되어 그 후대의 유전적 분리에 의해 다양한 품종이 생겨났다고 생각한다. 서바라이의 뜬벼를 재배하고 있는 곳에서는 야생 벼와 재배 벼가 혼재해 있는 상태를 볼 수 있다(그림3-27). 이와 같은 환경에서 둘의 교잡으로 새로운 성질을 가진 재배 품종이 생겼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조생 인도형 품종의 출현도 이처럼 다양한 품종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조생 아우스 품종군은 대당미와 유전적으로 유사하며, 둘도 인도형과 일본형 벼가 교잡하여 생겼음을 알 수 있다(Ishikawa 외 2002). 앞에서 서술했듯이 대당미의 원산지는 점성국인데, 이 나라는 힌두교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종교국가였다. 벵골 지역도 당연히 종교와 깊은 관계가 있었던 곳이다. 이러한 관계를 고려하면, 똑같은 재배 벼가 두 지역에서 주로 재배되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림3-27 8월의 서바라이. 위: 논. 아래: 이미 물에 잠겨 있는 논에서는 연꽃과 섞여 있는 야생 벼를 볼 수 있다.



아우스 품종군과 같은 유전적 성질은 캄보디아의 재래종 조사에서도 밝혀졌다. 동남아시아와 남아시아의 어느 쪽, 혹은 두 지역에서 인도형과 일본형의 교잡 후대에서 다양한 형질 조합을 지닌 개체가 생겨서 인간이 이동할 때 한쪽에서 다른쪽으로 옮겼을 것이다.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은 어디에나 정착하는가


벽돌의 알곡 크기 조사에서 인도형 품종과 일본형 품종은 한 시기에 태국 중앙 평야의 거의 같은 장소에 존재했는데, 이윽고 몇 세기를 거치며 각지로 확산되어 갔음을 알았다. 그 뒤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이라 생각되는 벼는 어디에 있었던 것일까? 


운남성, 부탄 및 네팔 등 표고차가 있는 지역에서 재배되는 벼는 고지대에 일본형, 저지대에 인도형, 또 그들의 중간지대에는 둘이 혼재해 있음이 알려져 있다(松尾 1992, 佐藤 1992, Sano and Morishima 1992). 자연식생에는 없는 재배식물이 이처럼 나뉘어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필시 표고차에 대한 적응으로 생긴 결과라고 생각한다. 농민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토지에서 얻을 수 있는 작물을 심어 보는 일이 많기 때문에, 타지에서 가지고 돌아온 재배식물을 재배하여 최종적으로 그 땅에 적응한 것이 남았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 사례가 일본에서도 발견된다. 청일전쟁이 끝난 뒤, 귀환자가 가지고 돌아와 재배된 벼 품종으로 '개선凱旋'과 '전첩戰捷' 등이 알려져 있는데, 벼의 질병인 도열병에 강하기 때문에 이들은 일본에 정착했다. 일본에 건너온 대당미도 마찬가지의 경위를 더듬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단, 대당미의 사례에서는 큐슈, 시코쿠 등을 중심으로 서일본에서는 농사지었지만 동일본 칸토우보다 북에 정착한 사례는 없었다(嵐 1974). 이것도 품종이 지닌 적응성의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벼는 자연에서 교잡하는가


인도형과 일본형이란 두 가지 품종군의 기원이 교잡에 의한 것이라면, 그러한 교잡은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일까? 그 선명한 실마리를 주는 것이 '잡초 벼'이다. 야생 벼와 재배 벼가 혼재하는 조건에서는 높은 빈도로 둘의 교잡이 발생하고, 그 후대는 탈립성 등에서 통상의 재배종과는 다른 성질을 나타낸다. 벼에는 있지만 야생 벼에도 재배 벼에도 없다. 이것을 '잡초 벼(weedy rice)'라고 한다. 동남아시아의 재배 농가에는 잘 알려져 있다.


미얀마를 조사했을 때에도 야생 벼가 재배 벼의 근처에서 자라고 있는 것을 볼 기회가 있었다. 북부의 번화한 거리, 미치나에서 남으로 내려가면 논 지대가 펼쳐져 있다. 논이 열려 있는 곳은 예전의 습지대를 개간했던 곳인 듯했다. 11월은 벼베기의 게절이라서 말라 있을 거라 생각했더니 논과 그 주변은 아직도 축축하여 아침이슬이 내려앉아 있었다. 그 안을 벼베기를 하려는 것 같은 농민과 그를 돕는 젊은 여성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같이 가서 논에 모였다. 그때 우연히 논에서 눈에 들어온 이상한 것이 황금색의 이삭들 사이에 섞여 있는 걸 보았다. 검은색을 띠고 알곡의 끝에 가늘고 긴 '털'이 달린 야생 벼였다(그림3-28). 논 옆의 둠벙에서도 볼 수 있었다. 야생 벼와 재배 벼가 매우 가까운 위치에서 공존하고 있는 모습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림3-28 미얀마에서 볼 수 있는 야생 벼. 논 안에 살고 있다. 뒤쪽에 보이는 건 공동 수확 작업을 하러 가는 현지의 여성들.



현지 사람은 야생 벼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있을까? 들어 보면 되돌아 왔던 건, 지금으로서는 왠지 운치 있는 말 아닌가? 야생 벼를 '신의 벼'라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납득했다. 여기는 불교의 나라, 신이라 해도 부처님이다. 파고다(절)이 있으면 맨발로 참배를 한다. 농민들은 '스스로 심지 않았는데 자라 온 벼는 신이 심은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처럼 야생 벼를 받아들이고 있기에, 도처에 재배 벼와도 혼재하며 자연히 교잡할 기회가 늘어났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장소에서는 재배종에 유사하면서도 탈립성을 나타내는 잡초 벼를 빈번하게 볼 수 있다.


잡초 벼는 미얀마를 시작으로 부탄과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필리핀 등의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발견된다. 또 중국과 한국, 일본, 미국 등 온갖 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일본과 한국, 미국 등에는 야생 벼가 없기 때문에,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군 사이의 교잡에서 잡초 벼가 생겼음이 알려져 왔다. 잡초 벼는 야생종과 재배종이 근접하여 생육하고 있는 지역과 인도형과 일본형 품종이 근접하여 재배되는 지역에서도 발생하고 있는 듯하다.



재래종에서 보이는 교잡 후대의 자손들


일본의 재래종에도 다양한 교잡의 '흔적'이 있다. 분자표지(단백질과 DNA에 의해 개체를 식별하는 지표)의 개발에 따라 일본의 재래품종의 독자성이 밝혀져, 바뀐 벼가 있다는 것이 점차 알게 되었다. 


초기에 활용딘 분자표지는 단백질의 전하성질 특성으로 동일한지 확인된 동질효소라는 유전자 연구였다. 일본 재래종 중에는 유전적 다양성에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재래 논벼 450 가운데 5계통, 재래 밭벼 200 가운데 5계통에서는 다른 것과는 다른 유전적인 성질이 나타났다. 아시아의 벼와 비교하니, 특수한 벼는 인도형에 대응하는 것임이 밝혀졌다. 다른 형질도 포함하면 일본의 재래품종은 크게 다음 네 가지로 구별됨이 밝혀졌다.


(1) 전형적인 논벼 품종군=유전적 다양성이 매우 부족함

(2) 논벼에 가까운 형질을 나타내는 밭벼

(3) 논벼와 유전적으로 분화된 밭벼

(4) 논벼와 밭벼에 공통되는 인도형 품종(대당미)


특히 세 가지 밭벼는 제11염색체에 실린 동질효소 유전자인 Pgd1 유전자형 이외에는 논벼에 매우 유사했다. Pgd1에는 복수의 대립유전자가 알려져 있어, 인도형이라고 판별된 대당미는 논벼 및 밭벼의 주요 품종군과도 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형질을 보면, 인도형은 왕겨털이 짧고 가늘고 긴 알곡을 가지며 알곡의 페놀 반응은 +형을 나타냈다(표3-1). 한편 DNA 배열 단편의 장다형 패턴(RFLP)의 해석과 알칼리 붕괴성, 중배축 길이의 해석에서는 밭벼의 주요 품종군은 열대 일본형과 온대 일본형의 중간적인 성질을 나타냄이 밝혀졌다. 세포질의 다양성을 PS-ID에서 보았을 때도 온대 일본형에서 특징적인 6C7A형과 열대 일본형에서 특징적인 7C6A 두 종류가 발견되었다.



집단

품종군

Pgd1

공식수

왕겨털 길이

알곡의 길이-너비 비율

페놀 반응

 +

-

논벼

일본형

인도형

1

3

445

5

0.72±0.19

0.37±0.12

2.09±0.34

2.79±0.16

32

4

413

1

밭벼

일본형

일본형

인도형

1

2

3

26

169

5

0.65±0.12

0.44±0.14

0.34±0.13

2.14±0.16

2.38±0.21

2.93±0.09

5

131

4

21

38

1

표3-1 일본 재래 벼의 형태와 생리형질의 특성과 인도형(I)·일본형(J)으로 분류



이상에서 일본의 밭벼는 열대 일본형이 고위도 지대에 전파되었을 때 온대 일본형과 교잡을 일으키고, 적응형질에는 도태를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선택되지 않았던 세포질에 대해서는 두 종류가 혼합되어 오늘날에 이르렀음을 엿볼 수 있다. 


일본 재래 논벼의 PS-ID는 6C7A형이 점하고 있으며, 예외적으로 인도형 품종 특이적인 8C8A형이 발견된다. 그러나 이 세포질을 가진 계통의 핵 안 유전자형은 완전히 일본형이었기 때문에, 인도형과 일본형의 교잡이 발생한 뒤에 핵형이 일본형이 된 계통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언뜻 보기에 동일하게 보이는 재래종에도 꽤 복잡한 과거의 교잡과 유전적인 분리를 거쳐 집단의 구성원이 된 재래종이 있는 듯하다. 


형태와 생리적인 형질로 인도형이라 판별된 집단 안에는 '당법사唐法師' 등 대당미에 속한 품종 이름을 볼 수 있다. 대당미는 황폐한 땅에 강하고, 그 때문에 논벼와 밭벼로 겸용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그 특징으로 가늘고 긴 알곡, 붉은쌀, 올벼 등을 볼 수 있다. 다만, 붉은쌀이란 성질은 봉납미로 이용되었던 것으로 인해 선발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의 재래 논벼와 밭벼에서 발견되는 대당미 관련 품종군의 특성을 보기 위하여, PS-ID와 ORF100 영역의 결실 유무를 조사했다. 인도형 품종군에서는 ORF100의 유전자 주변 영역에서 결실형을 나타내고, 일본형에서는 비결실형을 나타내는 것이 밝혀졌다. 게다가 결실형의 엽록체는 8C8A형의 PS-ID를 함께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당미 품종군이라 밝혀진 논벼와 밭벼의 계통에는 ORF100 비결실형의 세포질을 가진 계통이 혼재해 있었다. 비결실형(일본형)이었던 세 계통의 핵 유전자형은 인도형이고, 핵과 세포질의 이질적 조합이 확인되었다(표3-2).



페놀 반응

공식수

ORF100

인도형(결실)

일본형(비결실)

+형

17

6

11

-형

19

14

5

표3-2 아우스 품종군에서 발견한 핵과 세포질 유전자형의 불일치성

  


아시아 재래종 벼의 특성과 비교조사한 결과, 대당미는 갠지스강 하류 삼각주 지대(벵골 지역)의 아우스 품종군과 같은 특성을 나타냈다. 똑같은 특징이 캄보디아의 재래종에서도 발견된다. 이것으로 대당미, 아우스 품종군은 인도형과 일본형의 교잡 후대에서 이삭이 패는 특성으로 조생이라 선발된 품종이란 것을 강하게 시사한다. 다만, 야생 벼에서도 두 세포질형의 존재를 발견할 수 있기에 잡종 형성이 야생 벼와 재배 벼에서 발생했을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같은 곳에서 적응 분화한 강한 감광성을 지닌 뜬벼는 야생 벼에서도 볼 수 있는 특성이기 때문에 앞으로 조사가 기대된다.



잡초 벼의 보편성


 일반적으로 재배품종은 인도형과 일본형 두 가지로 크게 나뉘는 게 사실이지만, 앞에서 기술했듯이 교잡한 계통에서 유래한다고 생각되는 품종을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많이 보이는 건 벵골 지역과 캄보디아이다. 재배종이지만 잡초 벼의 유전적 특성도 공통으로 있는 특징이다. 이들 벼의 유전적 특성과 과거에 교잡이 발생한 지역을 특정할 수 있다면 인도형의 기원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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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제2장 벼농사의 전개와 전파

-잎의 세포화석 분석 결과를 중심으로       宇田津徹郞




들어가며


도시 사회를 뒷받침하는 농업기술의 조건으로는 농지의 지속적인 이용과 그에 따라 발생하는 잉여생산물의 존재가 필수라고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조건을 만족시키는 기술이 유럽에서는 삼포식 농법과 노포크식 농업 등의 고도한 돌려짓기 기술체계이고, 동아시아에서는 논벼농사 기술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필자는 동아시아에서 논벼농사 기술의 성립과 전파라는 농업기술의 발달을 주제로 일본 및 중국을 주요 현장으로 조사연구를 행해 왔다. 그중에서도 식물규산체 분석법을 사용한 생산 유구遺構의 탐사와 그 유구 조사를 기축으로 논의 생산력 평가와 재배 벼의 변천 등의 벼농사 기술의 변천에 관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생산 유구(논과 밭)는 탄화미 같이 인간에 의하여 이동한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농지가 운영된 확실한 증거가 된다. 또한 그 형태와 규모를 밝힘에 따라 당시의 기술 수준을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비교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식물규산체 분석으로 얻을 수 있는 연구성과부터 중국에서 벼농사가 전개되고 일본에 전파된 과정을 구성하여 추정해 보겠다.




잎의 세포 화석과 그 분석


잎의 세포 화석이란


벼와 조, 기장, 수수 같은 우리들에게 친근한 작물과 갈대, 억새 같은 벼과식물, 녹나무과와 참나무과 등의 식물은 토양 속의 유리(규산 SiO2)를 자신의 세포벽에 축적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들 식물에서는 규산의 축적이 진행되면 체내에 세포 모양을 한정시키는 유리의 껍데기가 형성된다. 이것은 식물학에서 식물규산체라고 부르고 있다.


김매기할 때, 맨손으로 억새를 뽑거나 벼베기를 도와서 볏짚을 나르면 볏짚에 닿았던 뺨이 따끔따끔한 것은 이 식물규산체의 소행이다.


식물규산체는 흙에 묻혀 있던 콜라병이 언제까지나 남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식물체가 죽어서 분해된 뒤에도 그 모양 그대로 토양 속에 잔류한다. 이러한 식물규산체가 토양을 구성하는 입자가 된 것이 잎의 세포 화석이다. 크기는 유래한 세포에 따르지만, 20-100미크론 정도이다(1미크론은 1/1000밀리미터). 


잎의 세포 화석의 역사를 간단히 소개하면, 1940년대에 우소프Oosov가 식물에서 유래하는 흙의 입자를 발견하고 스미스손F. Smisthon이 이 이름을 붙였다. 일본에서는 잎의 세포 화석이란 이름이 잘 알려져 있지만, 영어권에서는 파이토리스Phytolith, 중국어에서는 식물단백석이라고도 불린다.



잎의 세포 화석의 이용(잎의 세포 화석 분석)


잎의 세포 화석은 그 조성으로부터 화학적, 물리적인 풍화에 강하고, 조건이 좋으면 반영구적으로 토양 안에 잔류한다. 또한 유리와 거의 같은 내열성이 있고, 소성온도가 낮은(섭씨 800도 이하) 토기에 있으면 융해되지 않고 원형을 보존할 수 있다.


잎의 세포 화석의 모양과 크기는 유래하는 식물과 세포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흙에 포함된 잎의 세포 화석을 조사하여 존재했던 식물(급원식물)을 알아낼 수 있다. 그중에서도 벼과식물은 잎의 기동세포 형태에 식물마다 특징이 있어(그림2-1) 이 세포에서 유래하는 잎의 세포 화석을 통해 벼 등의 작물이 존재했는지 알아낼 수 있다.



그림2-1 벼잎의 단면과 기동세포의 위치



그림2-2 벼의 기동세포에서 유래하는 잎의 세포화석



 

이와 같은 잎의 세포화석의 특성을 이용하여 고대의 식생과 환경, 농경을 추정하고 복원하는 자연과학 분석을 잎의 세포화석 분석법이라 한다.


여기에서는 이 글의 내용에 관련된 농경사 연구에서 잎의 세포화석 분석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간단하게 소개하려고 한다.



생산 유구(벼가 재배되었던 장소)를 특정한다


벼의 종자(쌀)은 수확하여 재배되었던 장소로부터 가지고 나올 수 있는데, 볏짚은 그 일부가 이용될 수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그 흙에 환원된다. 그 때문에 벼가 재배된 흙에는 잎의 기동세포에서 유래한 잎의 세포화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잎의 세포화석은 건조시킨 벼의 잎 1그램(큰 벼의 잎 1장에 맞먹음)에 20만 개 정도 포함되어 있어, 벼가 일정기간 재배된 장소의 흙에는 높은 밀도로 포함되어 있다.


고대 논에서라면 지하에 이 잎의 세포화석을 포함한 층이 거의 수평으로 존재하고 있기에, 시추(지하의 토양을 가느다란 원기둥 모양의 통으로 빼냄)로 채취한 흙을 분석하여 그 장소(깊이와 범위)를 특정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이 방법으로 조몬시대 만기부터 야요이 시대의 수많은 논 유구가 탐사, 발굴된다.



그림2-3 시추를 하고 있는 모습




벼가 재배되었던 시대를 추정한다


벼잎의 세포화석은 종자가 아닌 그 잎의 세포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어느 시대의 흙에서 검출된다면 그 시대에 벼잎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벼의 잎은 교역 등으로 생산된 장소에서 멀리 운반되었다고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에, 이 결과는 벼가 존재했던 것을 보여줌과 함께 일본처럼 야생 벼가 존재하지 않은 지역이라면 그 시대에 벼가 재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토기의 바탕흙에서 벼잎의 세포화석이 검출된다면, 그 토기가 제작되기 이전에 벼가 존재 또는 재배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흙의 경우 식물의 뿌리와 토양 속에서 활동하는 생물의 영향으로 다른 시대의 흙이 섞여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시대의 추정에는 토기의 바탕흙이 더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재배되었던 벼의 종류(아종, 생태형)를 추정한다


동아시아에서 재배되고 있는 벼(Oryza sativa L.)에는 인디카와 자포니카라고 불리는 두 가지 아종이 있다. 이들 아종은 재배조건과 재배기술에서 차이가 있어, 아종이 밝혀지면 당시 벼농사의 모습을 아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벼잎 세포화석의 형상 사이에는 그림2-4에 나오듯이 아종에 따라 형상에 명료한 차이가 있는 것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또한 그 형상으로부터 아종을 판별하는 방법(판별율 80-90%)도 확립되어 있다.


이 방법을 토양과 토기 바탕흙에서 검출된 잎의 세포화석에 사용하여 당시 재배되었던 벼 아종을 추정할 수 있다.



그림2-4 벼 아종에서 볼 수 있는 기동세포 규산체의 형상




자연과학 분석에 항상 따라다니는 문제(시료 오염)


농경사 연구에서 충격적인 자연과학 분석의 결과가 공표되면, 그 진위가 화제가 된다. 그 경우에 잘못의 원인으로 종종 상정되는 것이 '시료 오염'이다. 


농경사 연구에서 활용되는 자연과학 분석에 쓰일 수 있는 잎의 세포화석과 꽃가루, 또 DNA는 현미경 등의 기재를 사용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크기이다. 그 때문에 분석을 행하는 사람은 어떠한 원인으로 시료가 오염(분석에 방해가 되는 물질과 기타 시료가 섞임)되더라도 이것을 직접적으로는 파악할 수 없다. 이것은 자연과학 분석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머리 아픈 문제이다. 


그 때문에 우리 자연과학 분석을 행하는 사람은 시료 오염에 대한 다양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사용하는 도구와 약품은 쓰고 버리며 재이용하지 않는다'거나 '콘트롤이라고 불리는 시료 오염과 처리의 잘못을 비교검증할 수 있는 분석 시료를 작성한다' 등이 있다.


이와 같은 대책에 더하여, 미처리 시료를 보관해 놓고, 다른 연구자에게 검증(크로스 체크)과 새로운 분석방법이 개발된 경우에 재분석을 행하는 것 같은 일이다(그림2-5에 토기를 시료로 하는 경우를 예시).


앞으로 이 글에서 소개하는 자료는 모두 이러한 대책과 검증을 거친 것이다.



그림2-5 분석에 쓰이는 토기의 처리 과정(좌: 미처리, 우: 절단하여 일부분을 분석에 사용) 



중국에서 확인되고 있는 초기 벼농사


90년 이후 장강 중하류에 소재한 유적에서 벼농사의 존재가 잇따라 확인되고 있다. 그들 대부분은 벼 유물의 출토를 근거로 유물의 출토를 근거로 하는데, 호남성 성두산城頭山 유적과 강소성 초혜산 유적처럼 초기의 논이 검출되고 있다. 검출된 논의 형태는 상세하게 비교하면 그 우열을 논할 수도 있겠지만, 야요이 시대의 논과 다르며 자연지형을 이용한 부정형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논의 검출은 그 땅에서 논벼농사가 운영되었단 확실한 증거이며, 기술 수준의 의론을 따로 한다면 적어도 현재에서 6500-6000년 전쯤에는 장강 중하류에서 초기의 논벼농사 기술이 확립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필자도 조사원으로 참가했던 초혜산 유적의 논을 소개하면서 초기 벼농사에 대하여 기술하려 한다.



그림2-6 초혜산 유적의 소재




초혜산 유적의 논


초혜산 유적은 상해 게로 유명한 양징호陽澄湖 의 남쪽, 중국 강소성 소주시에 소재한다(그림2-6). 유적 주변은 샛강이 둘러싼 저지 논 지대이다. 이 유적은 1972년에 난징박물원에서 최초로 발굴을 하고, 이후 몇 번의 발굴조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해당 유적이 마가빈 문화기(기원전 4050년)부터 춘추시대(기원전 450년)에 걸친 유적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1992년부터 중일 공동조사가 개시되어, 일본에서 행할 수 있는 시추에 의한 토양 채취와 채취한 토양에서 잎의 세포화석 분석으로 논 유구 탐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남서에 위치한 저지의 지표 아래 2미터 안팎에서 논 유구가 매장되어 있음이 추정되었다.


그 뒤 발굴에 의해 그림2-7에 있는 것처럼 논이 검출되었다. 논 토양을 재료로 한 탄소연대측정의 결과 이 논이 대략 6000년 전의 마가빈 문화 중기의 것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발굴된 논은 한 배미의 면적이 몇 평방미터인 부정형한 논이 지형의 골짜기 지역을 따라서 나란히 늘어서 있었다(그림2-7, 그림2-8).



그림2-7 초혜산 유적에서 검출된 논(위: 항공촬영, 아래: 유구 전경)




그림2-8 초혜산 유적의 논 유구




논은 생흙이라 불리는 황토가 퇴적된 생땅층을 15-40cm 파고들어가 만들었다(그림2-9). 생땅층은 치밀한 실트질 점토이기 때문에 물이 거의 침투되지 않는다. 그 때문에 강우 등으로 가져온 물은 지하로 침투되지 않고 지표수로 논과 주변의 더 저지대에 남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 발굴 구역의 낮은 부분에서는 우물 모양의 구덩이(지름 약 1.5미터, 깊이 약 1.5미터)가 검출되고 여기에는 지하로 침투되지 않은 지표수가 남아, 둠벙의 기능을 수행했다고 추정된다. 



그림2-9 유구 단면의 모식도



논 유구에는 두렁과 물꼬가 있어, 논의 기본적인 특징을 갖추었다. 그러나 이 논은 자연지형의 골짜기 지역을 인위적으로 확장하고 결합시켜 만든 것으로 '선'의 퍼짐새는 가지고 있지만 '면'의 퍼짐새는 가지고 있지 않다. 이 점에서 지금까지 일본에서 발굴된 조몬 만기-야요이의 논과는 크게 차이가 있었다.


유구 안의 토양(논 토양에 해당)은 유기물이 많은 흑갈색 점질토이고, 물로 씻어내 탄화미를 검출하고 있다. 또한 ㅇ ㅠ구 주변의 토양에서는 우렁이와 가막조개의 껍질도 발견되고 있다. 유구 안의 토양에 포함된 벼잎의 세포화석 밀도를 조사한 바, 흙 1그램당 5000개 이상이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이 수치는 일본 야요이 시대의 안정된 논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으며, 일본과 중국의 토양 퇴적 속도와 환경의 차이를 고려하더라도 이 논이 일시적으로가 아니라 장기간(아마 몇 백 년의 규모) 이용되었다고 생각한다.



초혜산 유적에서 검출된 논은 생업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까


발굴조사의 결과로부터 6000년 전의 논이 생산시설이라 불릴 만큼 기본적인 조건을 만족시킴이 밝혀졌다. 또한 농기구 또는 흙을 파는 도구인 뼈보습의 출토(그림2-10)와 검출된 벼잎의 세포화석 밀도 등에서도 당시의 벼농사 기술이 기존에 상정하던 것보다 높은 단게에 이르렀다고 추정된다. 



그림2-10 출토된 뼈보습



그러나 그 한편, 자연의 골짜기 지역을 확장하고 연결하여 '선형'으로 확대한 논에서는 그림2-8을 예로 들면 발굴 면적의 30% 정도밖에 이용되지 않아 토지이용이란 점에서는 효율이 나쁘다.


따라서 당시의 논벼농사가 생업에서 어느 정도의 비중을 점하고 있었는지를 더 구체적으로 영상화하려면 '선형' 논의 퍼짐새를 파악해야 했다. 


이미 서술했듯이, 발굴된 논 유구는 생땅층에 직접 판 것이다. 해당 유적의 생땅은 황토로 불리는 퇴적층이며, 지질학적으로도 장강 하류의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생땅의 식별은 비교적 쉬워, 그 바로 위의 토층에 벼잎의 세포화석이 포함되어 있다면 똑같은 유구의 존재를 간단하게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킬로미터 사방의 범위를 대상으로 시추에 의한 광역 논 유구 탐사를 실시하고, 이번에 발굴된 논 유구의 퍼짐새를 파악하려 시도했다.


그림2-11은 조사 범위와 시추 지점을 표시한 것이다. 시추의 간격은 100미터를 기본으로, 측량의 기준으로 삼은 비석을 중심으로 여덟 방향, 합계 55지점에서 행했다.



그림2-11 시추 지점의 분포




벼잎의 세포화석 검출지점의 분포와 그 검출밀도에서 보면, 당시의 논이 유적을 거의 중심으로 북으로 600미터, 남으로 500미터, 동서 방향 각각 200-300미터의 범위로 퍼져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되었다. 물론 이 결과는 탐사 자료에 의한 것으로, 층위의 동일성과 시대의 확인 등의 문제를 고려해야 하지만, 검출된 논 유구와의 거리로부터 살펴서 당시 논의 퍼짐새를 파악할 수 있다고 판단해도 좋을 것이다. 또한 생땅의 바로 윗층과 그 윗층을 비교하면(그림2-12), 검출밀도 및 동서 방향으로 검출지점이 증가하는 것이 발견되기에 해당 유적에서 벼농사가 발전하면서 동서 방향으로 확대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림2-12 벼의 생산 범위와 양의 변화   


그러나 이 정도의 범위로 논을 만들어 수확까지 관리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조방한 재배였지만 당시의 벼농사가 생업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기 시작했다는 건 틀림이 없다.





초기 논벼농사의 모습


논의 형태


초혜산 유적의 논 유구가 검출되었던 당시는 이것이 논인지, 또는 이와 같은 생산 유구가 이 유적에서만 볼 수 있는 특수한 것은 아닐까 하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그 뒤 중국의 고고학자가 발굴조사하여 강소성 소주 징호 유적(송택 문화)과 강소성 곤산 작돈綽墩 유적(마가빈 문화)부터 똑같이 논 유구가 검출되어(그림2-13) 초혜산 유적의 논 유구가 초기의 논 가운데 하나의 형태임이 분명해졌다.



그림2-13 작돈 유적의 논 유구



초혜산 유적에서 중국과 일본의 공동조사 대표였던 후지와라 히로시藤原宏志 미야자키 대학 명예교수는 이용했던 논을 '자연지형 이용형 논'이라 불러, 그 경관의 모습으로 당시 유적 주변에서 볼 수 있던 샛강을 따라 지형을 이용하여 운영했던 줄논(Manchurian wild rice)을 들고 있다(그림2-14).



그림2-14 샛강을 따라서 전개된 줄논(위: 전경, 아래: 한 배미를 확대)




당시 논의 생산성


초혜산 유적의 논 유구의 형태와 규모부터, 당시의 논벼농사의 모습을 그려 보자. 먼저 물 관리라는 점에서 보면, 발굴된 논은 투수성이 낮은 생땅층을 파서 만들어 증발산을 제외하면 공급된 물의 손실이 매우 적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마 주변의 아주 조금 높은 땅에서 지하로 침투한 물은 생땅층에 가로막혀 논이 만들어진 골짜기 부분으로 모여서, 그와 같은 물이 논에 인접한 우물 모양의 구덩이로 모이고 관개수로 사용되었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물이 부족한 일은 적었고, 오히려 배수가 되지 않는 상태였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현대의 논으로 말하면 '습논'에 해당한다. 습논에서는 논 토양 속의 산소가 부족하여, 이른바 '뿌리썩음' 등 벼의 발육에 장해를 일으키기 쉬운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벼의 생산량은 구체적인 검토가 어렵지만, 배수가 곤란한 상황 등을 고려하면 야요이 시대의 생산량(300평당 100킬로그램 정도)를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벼를 재배했을까


이미 서슬했듯이 잎의 세포화석 형상으로 벼의 아종을 판별하는 방법이 확립되어 있다. 구체적으로는 그림2-15에 나오는 각 부위의 길이를 측정하고, 판별식에 따라 아종을 판별하는 기존이 되는 판별득점을 구한다. 이 수치가 올바르다면 자포니카, 틀리다면 인디카가 되며, 경계치인 0에서 더 멀어지는 만큼 전형적인 아종임을 나타낸다. 



그림2-15 벼잎 세포화석 형상의 측정 부위

  


 마가빈 문화기의 토양에서 검출된 벼잎 세포화석의 판별득점 분포는 현재 중국과 아시아의 자포니카(중국에서는 메벼에 해당) 분포에 포함되어(그림2-16), 유적에서 재배된 벼는 자포니카였다고 추정된다(이 결과는 탄화미의 DNA 분석과도 부합한다). 



그림2-16 벼잎 세포화석의 판별득점 분포



그렇다면 이 지역에서 인디카가 재배되기 시작한 건 언제쯤일까?


유적의 토양에서 검출된 벼잎의 세포화석은 그 토양이 퇴적되는 사이에 재배되었던 모든 벼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그 형상은 중심적으로 재배되었던 아종을 반영하게 된다. 따라서 판별득점이 감소해 간다면, 그것은 인디카에 가까운 자포니카와 일정 비율로 인디카가 재배되었다는 가능성이 있다. 


토층에 따른 판별득점의 변화를 보면, 3층 이후에 급격한 감소가 발견된다(그림2-17). 3층은 송나라 시대로, 이 무렵부터 인디카인 벼가 도입되었을 가능성을 알 수 있다.  송나라 시대에는 현재의 베트남 쪽에서 인디카 계통인 점성도占城稻가 도입되었다고 전해진다. 둘을 단순히 결부시켜 생각할 수는 없지만, 흥미로운 일치이다.



그림2-17 벼잎 세포화석의 판별득점 변화



재배 방법(파종과 모내기)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재배 관리의 면에 대해 생각해 보자. 광역 논 유구 탐사에 의해 당시의 논이 북으로 600미터, 남으로 500미터, 동서로 각각 200-300미터의 범위로 펼쳐져 있었다고 추정되었다. 논은 이 범위 안에 불규칙하게 분포하는 골짜기 부분과 움푹 패인 땅을 이용하여 운영되었다고 생각되며, 그 관리작업은 효율이 나빠 당시 사람들에게 큰 노동부담이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세세한 재배관리를 행하기 어려워 조방한 재배가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파종과 모내기 문제에 대해서는 직파 재배도 생각할 수 있지만, 직파의 경우에는 파종 이후의 제초 작업이 필수이며 전체적인 노동부하를 감안하면 모내기 재배가 행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



본격적인 논벼농사의 성립은?


이처럼 신석기시대에 확인된 논에서 경영했던 벼농사는 논벼농사의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시키는데, 그 면적과 물 관리라는 점에서 보면 충분한 수확량을 확보하지는 못하여 생업이 농경으로 완전히 이행한 단계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초혜산 유적에서는 사슴과 멧돼지 등의 짐승뼈가 여럿 출토되어 채집수렵이 생업을 뒷받침하는 요소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 현재로도 이어지는 본격적인 논벼농사가 성립된 것은 중국의 어느 시대였을까? 그 후보로 현재 필자를 포함한 많은 연구자가 주목하고 있는 것이 절강성의 양저 문화기(기원전 3050-1050년)이다. 이 시대가 되면 봉분을 쌓은 묘지가 만들어지고, 무덤에서는 부장품으로 옥기라고 부르는 연옥을 가공한 여러 가지 장신구와 제기가 발견된다. 이와 같은 것으로부터 이 시대에는 사회의 계층화와 분업화가 진행되어 일정 정치권력이 탄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회를 지탱하는 데에는 생산활동에서 해방된 인구를 먹여살릴 수 있는 '잉여'가 필요하다. 양저문화기를 대표하는 양저 유적군은 항주만으로 이어지는 장강 삼각주에 소재하는데, 이 '잉여'를 가져올 수 있는 생업으로는 그 입지를 두고 생각하면 야요이 시대에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수로를 갖추고 토지가 평균화된 논(그림2-18)에서 운영된 벼농사 이외에는 상상하기 어렵다. 


중국의 논벼농사 성립에 대해서는 현재도 국내외의 연구자가 조사를 진행하고 있는데, 멀지 않은 시기에 양저문화기의 논이 명확해지리라 기대된다. 



그림2-18 야요이 시대의 논(아오모리현 타레야나기垂柳 유적)





중국에서 벼농사의 퍼짐새와 일본으로의 전파


초혜산 유적을 시작으로 하는 논 유구의 검출에 의하여 기원전 4050-4550년에는 장강 중하류에서 초기 논벼농사 기술이 성립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초기의 벼농사는 농경사회를 지탱하는 수준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자연지형을 개변하여 생산시설을 조성하는 기술의 성립은 벼농사의 확산에 큰 탄력을 가했을 것이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여기에서는 그 뒤 장강 중하류의 벼농사 퍼짐새와 일본으로 전파된 것에 대하여 기술하고자 한다.



벼잎 세포화석 분석이 파악한 벼농사의 북상


신석기시대의 논이 검출된 이후 중국 각지에서 벼 유물(탄화미, 알곡 압흔, 잎의 세포화석) 등이 검출되는, 이른바 벼농사 유적의 발견이 이어졌다. 이는 중국 고고학자의 생산 유구에 대한 의식이 높아짐과 함께 '과학기술 고고'라 불리는 고고학 분야에 대한 자연과학 분석의 적극적인 활용이 가져온 것이라 할 수 있다.


필자 자신도 이와 같은 벼농사의 확산에 대하여 강소성 안의 각지에 소재한 일곱 군데의 신석기시대 유적(표2-1, 그림2-19)를 대상으로 그 출토 토기에 대하여 잎의 세포화석 분석을 행하고, 강소성 벼농사 유적의 분포를 검토하려 시도했다.


유적 이름

유적의 시대

句容丁沙地 유적

약 기원전 4550-5050년

鎭江 丹徒鎭四脚墩 유적

약 기원전 3050-4050년

沐陽 萬北 유적

약 기원전 3050-4550년

泗洪梅花趙荘 유적

약 기원전 2050-2550년

連雲港 朝陽 유적

약 기원전 3050-4050년

海安 靑墩 유적

약 기원전 3550-4050년

南京 北月陽菅 유적

약 기원전 3050-4050년

  표2-1 토기 바탕흙 분석을 실시한 유적과 시대



그림2-19 토기 바탕흙 분석을 실시한 유적의 분포



분석은 각 유적에서 출토된 그곳의 토기(그 유적에서 제작된 토기)에 대하여 시행했다. 


분석 결과, 구용정사지 유적, 진강 단도진사각돈 유적, 연운항 조양 유적, 해안 청돈 유적, 남경 북월양관 유적의 토기에서 벼잎의 세포화석이 검출되었다(그림2-20). 이미 기술했듯이 분석의 대상이었던 벼잎의 세포화석은 벼잎의 세포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에, 이들 유적에서 벼농사가 운영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림2-20 토기 바탕흙에서 검출된 벼잎의 세포화석



이상의 결과에서 기원전 4050년-3050년 단계에는 강소성의 북쪽까지 벼농사가 펴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중국의 신석기시대에 재배되었던 벼에 대해서는, 이미 기술한 토양과 토기 바탕흙에서 검출된 벼잎의 세포화석 형상을 조사해 보면, 모두 중국의 토종 벼(메벼=자포니카)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자포니카는 인디카와 비교하여 저온 저항성이 뛰어나 이것이 회하 이북의 연운항 조양 유적에까지 벼농사가 퍼지는 데 큰 공헌을 한 것이다.



북상한 벼농사는 어떻게 수용되었을까?


최근 중국에서 발굴조사한 결과, 산동반도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벼 유물이 여럿 검출되었다고 보고되어 동시대에 이미 장강 하류의 벼농사가 진령秦嶺 회하淮河 선을 넘어 북진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할 수 있다.


중국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검출된 벼 유물에 대하여 자연과학 분석(DNA 분석, 잎의 세포화석 분석)을 한 결과에서는 당시 재배되었던 벼는 자포니카이다. 앞에서 기술했듯이 자포니카 벼는 저온 저항성에서 우수하여, 벼농사가 북진해 나아가는 데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중국에서는 진령산맥과 회하를 연결하는 진령 회하 선을 경계로 하여 그 기후와 식생, 토양의 성질에 큰 차이가 난다. 진령화하선의 남쪽은 강수량과 기온, 토양의 성질 등이 벼농사에 이로운 환경이지만, 북쪽에서는 연간 강수량이 감소하기(750mm 이하) 때문에 논벼농사는 물론 벼농사에는 가혹한 환경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역에서 벼농사가 확산된 것에 대해서는 기후변화의 영향을 고려함과 함께 벼를 수용했던 현지 농경기술과의 관련에서도 검토해 보아야 한다. 북진한 벼가 어떻게 재배되었을지에 대하여 밭과 논 같은 생산 유구와 화전 등의 생산 공간에 관한 구체적인 정보가 없는 현재로서는 벼농사 유적을 기술적인 계보에 놓고서 추정할 수밖에 없다. 산동반도의 신석기시대 문화인 용산문화는 그 기술적인 계보로부터 화북의 건조지역에 적응한 잡곡 농경기술을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잡곡 농경기술에서 벼를 받아들인다고 하면, 벼는 논벼농사 기술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돌려짓기 작물로 재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벼는 조와 기장 등과 비교하여 필요로 하는 비료의 양이 많고, 건조함과 저온에도 약한 작물이다. 따라서 힙시서멀기 이후의 기후 한랭화를 고려하면 인디카에 비교하여 저온 저항성에서 뛰어난 자포니카였어도 그 재배 위험은 적지 않으며, 안정적인 수확이란 점에서는 의문도 남는다.


논벼농사에서는 심수 재배로 대표되듯이 물을 대어 기온 저하의 영향을 줄일 수 있다. 또한 피논으로 대표되듯이 피는 논에서도 재배할 수 있으며, 더욱이 벼에 비교하여 수온이 저하된 상태에서도 정상적으로 발육할 수 있다. 벼만이 아니라 피까지 수확의 대상으로 본다면, 북진한 벼를 논벼농사 기술과 함께 수용한 잇점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산동 용산문화기에 논벼농사가 운영되었다고 한다면, 해당 지역에서 밭농사 기술과 논벼농사 기술이 토지이용에 걸맞게 병존했다는 것의 증명이 된다.


자, 이 문제에 대한 접근법인데 벼는 밭에서도 논에서도 재배할 수 있는 작물이기 때문에 출토된 벼 유물의 조사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명확한 결론을 얻기가 어려우며, 벼가 생산되었던 장소(생산 공간)의 입지를 통해 검토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산동반도의 신석기시대 벼농사 유적인 양가권楊家圈 유적에서 논 유구 탐사가 실시되었다.



산동 용산문화기에 논은 존재했을까? (산동성 양가권 유적에서 행한 논 유구 탐사)


생산 유구 조사는 2004년부터 산동대학, 큐슈대학, 에히메대학, 미야자키대학의 연구자들의 국제 공동연구로 실시되었다. 조사는 산동반도의 벼농사 유적으로 널리 알려진 양가권 유적에 대하여 행해졌다. 이 조사연구는 문부과학성 과학연구비 보조금을 받아 "일본 논벼 농경의 기원지에 관한 종합적 연구"(연구 대표자 미야모토 카즈오宮本一夫)의 일환으로 행해졌다.


양가권 유적은 연태시의 남서, 산동성 서하현栖霞縣에 소재한 대문구大汶口 문화부터 산동 용산문화의 유적이다(그림2-12). 산동성 문물고고연구소와 베이징대학에서 발굴조사를 행하여, 용산문화기의 퇴적층과 재구덩이에서 조와 왕겨가 발견되었다.


그림2-21 양가권 유적의 소재



중국은 야생 벼가 존재하는 지역이다. 그 때문에 논 유구 탐사에서는 발굴조사에 의하여 생산 유구가 확인되지 않을 경우에는 야생 벼를 파악할 가능성을 고려해 놓아야 한다. 그러나 양가권 유적이 소재하는 지역은 과거의 기후변화를 고려해도 야생 벼가 분포할 가능성이 낮고, 일본과 똑같이 벼잎의 세포화석이 검출되면 벼농사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다.  


유적은 청수하淸水河 서쪽 단구段丘 위에 입지하며, 그 남북에는 청수하에 연결되는 작은 골짜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현지에서 청취 및 시추로 지하의 퇴적 상황을 조사하여, 유적의 북쪽 골짜기 부분을 조사구로 설정했다(그림2-22). 조사구는 수수와 토란 등이 재배되어 밭으로 이용되었다(그림2-23). 생산 유구 탐사는 조사구를 남북 및 동서 방향으로 덮은 모양으로, 시추로 시료 채취와 잎의 세포화석 분석을 행했다.



그림2-22 양가권 유적과 주변의 지형



그림2-23 조사구의 전경



탐사 결과, 지표 아래 1.5미터 안팎에서 벼잎의 세포화석이 검출되는 지점이 확인되었다.


검출된 세포화석의 밀도는 가장 높은 곳이 흙 1그램당 3000개를 넘었다. 이 수치는 토양의 퇴적 속도를 감안하여 평가해야 하지만, 일본에서 행한 탐사, 발굴의 사례에 비추면 논 유구의 존재도 충분히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분석 결과와 시추로 옛 지형을 복원한 결과에서, 비교적 안정된 생산 유구의 매장 구역으로는 그림2-24에서 타원으로 보이는 범위(수로의 양쪽 부분)이 가장 유망하다고 추정되었다.



그림2-24 검출 상황과 추정 매장 구역



이번 탐사로 파악된 생산 유구 범위의 토양에서는 벼에 수반해 갈대속의 잎 세포화석이 검출되어, 하천의 물과 샘을 이용하던 논이었을 가능성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산 유구 탐사에서 검출된 벼잎의 세포화석 검출 밀도는 1000개 정도인 지점이 많아, 이것은 이용 기간의 짧음과 재배의 불안정함을 의미한다. 따라서 생산 유구의 모습으로는 물이 풍부한 때는 물을 대어 재배하고, 물이 적을 때는 하천에서 침투한 수분 등에 의존하여 벼를 재배하는 천둥지기 같았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논이 존재했을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발굴 조사를 기다려야겠지만, 이 결과에서 적어도 유적 주변의 저습지에서 벼농사가 경영되고 있었다는 건 확실하며, 토지 이용이란 시점에서는 기존의 밭농사 계보의 농업 기술과 논벼농사 또는 저습지 벼농사 기술이 공존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와 같이 물의 혜택을 입은 장소는 논으로, 그렇지 않은 장소는 밭으로 이용하는 토지이용의 발상은 지금의 산동성에서도 볼 수 있다(그림2-25). 또한 논의 존재를 보강하는 것으로 산동반도의 교주膠州 조가장 유적에서 용산문화기의 논 유구가 검출되었다는 보고가 있다.



그림2-25 산동성에서 볼 수 있는 토지이용



더구나 이 결과는 벼가 동시에 돌려짓기 작물로 수용되었단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며, 이 점에 대해서는 앞으로 검증해야 한다는 걸 덧붙여 놓고 싶다. 



'농업 기술의 공통성'이란 시점에서 생각하는 일본으로의 전파 경로   


벼농사 전파의 문제에 대해서는 기술을 보내는 쪽과 받는 쪽의 시대적 앞뒤 관계가 전파 경로의 존재 여부를 지배한다. 그러나 그것과 동시에 보내는 쪽과 받는 쪽에서 '농업 기술의 공통성'도 필수조건임을 강조하고 싶다.


현재로서, 논벼농사 이전의 일본에서 벼농사는 화전 등의 밭농사 계보의 재배 기술에 따른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농업 기술의 공통성'이란 점에서 이 기술을 보내는 쪽으로는 화전을 현재도 볼 수 있는 하문廈門 등으로 이어지는 남부의 산악지대와 화북의 잡곡 농경기술을 가진 산동반도 등이 그 후보지라고 들 수 있는데, 후자는 벼농사의 존재가 그 성립을 어렵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가권 유적에서 행한 생산 유구 탐사의 결과와 교주 조가장 유적에서 나온 논 유구의 검출에 의하여, 적어도 산동 용산문화기에 벼농사가 존재한 것은 거의 확실해졌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의하여 조몬시대에 볼 수 있는 일본 벼농사의 전파 경로로, 산동반도에서 직접 또는 조선반도를 경유하는 것이 상정된다.


또한 이 경로가 올바르다면, 일본에서 조몬 벼농사에 대해서도 화전에 더하여 저습지 벼농사의 존재에 대해서도 다시금 검증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일본 벼농사의 변천에 대하여


중국의 벼농사 전재와 일본으로의 전파에 대하여 이야기를 진행해 왔는데, 마지막으로 벼농사 전파 이후 일본에서 벼농사가 어떻게 변천했는지에 대하여 현재까지 얻을 수 있는 벼잎의 세포화석 분석 결과를 바탕으로 추정해 보고자 한다. 



재배 벼의 변천에 대하여


논과 밭은 토목기술과 치수기술의 발달과 함께 그 입지가 변해 왔다. 이러한 변화는 물골을 변경하는 등의 현대에 통하는 토목공사가 행해지게 되었던 근세 이후는 적어진다. 그러나 그 한편에서 근세의 논을 탐색하는 일은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그곳은 현재도 논으로 이용되는 곳이 많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조몬, 야요이 시대부터 근세, 근대까지 논이 연속적으로 남아 있는 장소가 개발에 따른 발굴조사의 대상이 되는 건 여러 가지 조건에서 은혜를 입는 경우로 한정된다. 


운이 좋게도 필자는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두 가지 유적에서 벼잎의 세포화석 분석을 실시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사카모토坂元 A 유적과 이케시마池島, 후쿠만지 유적이다(그림2-26)


그림2-26 유적의 소재



그림2-27 조몬시대 만기의 논(사카모토 A 유적)



사카모토 A 유적에서는 조몬 만기-근세, 이케시마와 후쿠만지 유적에서는 야요이 시대-근세의 논이 남아 있었다. 또한 사카모토 A 유적에서는 미나미큐슈에서 가장 오래된 조몬시대 만기의 논이 검출되고 있다. 


이들 두 곳의 유적에서 각 시대의 논 토양에서는 각 시대에 재배된 벼잎의 세포화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세포화석의 형상 변화는 재배되어 온 벼의 변화에 의해 생긴 것이다. 


두 곳의 유적에서 나타나는 형상의 변화를 보면, 몇 가지 큰 변이가 생기는 시점을 판단할 수 있다(그림2-28, 그림2-29). 이케시마, 후쿠만지 유적에서는 그 시점이 헤이안과 가마쿠라 시대로 중세에 해당하고, 사카모토 A 유적에서는 조몬 만기부터 야요이 시대, 헤이안부터 중세, 또 중세부터 근세로 변하는 시기가 해당된다. 또한 두 유적 모두 중세 이후는 형상의 변화가 적어지는 경향을 볼 수 있다. 또 이들 형상에 따라 앞에서 서술했던 아종 판별을 행하면, 재배되어 온 벼는 모두 자포니카였다. 



그림2-28 사카모토 A 유적에서 나타나는 벼잎 세포화석 형상의 변화



그림2-29 이케시마, 후쿠만지 유적에서 나타나는 벼잎 세포화석 형상의 변화




야요이 시대는 본격적으로 논벼농사가 보급된 시대이다. 헤이안과 가마쿠라는 율령제도가 정비되어 개간이 진행된 시대이며, 또 옛 기상으로도 한랭화 등의 변화가 지적되는 시기이다. 중세부터 근세는 말할 것도 없이 농업 기술(특히 재배기술과 치수기술)이 크게 발달한 시기이다.


이처럼 잎의 세포화석 분석 결과를 통해 보면, 이러한 농업기술과 농업을 둘러싼 환경과 사회의 변화에 응하여 재배 벼가 변천해 온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물론 이 점에 대해서는 다른 자연과학 분석의 검증을 기다려야 하지만,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두 곳의 유적에서 어느 정도 일치하는 걸 볼 수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열대 자포니카의 재배에 대하여


자포니카 벼에는 논벼농사에 적응한 벼인 '온대 자포니카'와 생산성이란 점에서는 온대 자포니카보다 떨어지지만 화전부터 논벼농사까지 다양한 재배에 대응할 수 있는 '열대 자포니카'란 두 가지 생태형이 알려져 있다. 최근 필자 등의 연구에 의해, 벼잎의 세포화석 형상이 "세로 길이가 길고(40mm 이상) 판별득점이 2.0 이상인 것"의 대부분이 열대 자포니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림2-30 온대 자포니카와 열대 자포니카에서 볼 수 있는 잎의 세포화석




두 가지 유적에서 세로 길이와 판별득점에 대하여 정리하면, 어느 시대도 세로 길이는 40mm 이상이다. 따라서 판별득점의 변화에서 열대 자포니카가 존재했던 시대를 살피면, 두 유적 모두 중세에 해당하는 토층까지는 열대 자포니카가 재배되었다고 추정된다. (이케시마, 후쿠만지 유적에 대해서는 도중에 판별득점이 2.0을 밑도는 시대가 있는데, 종자의 갱신과 존속이란 농업기술의 시점을 더하면 중세까지는 열대 자포니카 벼가 재배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중세부터 근세에 걸쳐서 판별득점의 감소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 시기에 재배의 중심이 온대 자포니카로 변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결과는 앞에서 기술한 형상 변화에서 본 재배 벼의 변천과도 잘 부합한다.



그림2-31 사카모토 A 유적에서 나타나는 판별득점의 변화


그림2-32 이케시마, 후쿠만지 유적에서 나타나는 판별득점의 변화




마치며


이 장에서는 잎의 세포화석 분석에 의하여 얻은 연구성과부터 중국 및 일본에서 벼농사의 전개와 전파 또는 그 뒤의 벼농사의 변천이 어떠했는지 추정해 보았다.


동아시아에서 벼농사의 전개와 전파가 어떠했는지 그 실상에 다가가는 데에는 다른 장에서 기술하고 있는 고고학의 조사연구, DNA 분석, 더 나아가서는 종자 분석과 꽃가루 분석 등 다양한 분야의 연구성과를 종합하여 비교검증하면서 나아가야 한다는 건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동시에 각각의 분석결과에서 벼농사의 전개와 전파에 대하여 어떠한 모습을 구성하는지를 명확하게 정리하고, 이 과제에 관한 연구자와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밝히는 일도 실상에 다가가는 걸음을 확실하게 하는 데 중요할 것이다. 이것이 이 장을 쓴 동기였다고 덧붙여 말씀드리고 싶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연구의 진전에 빼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잎의 세포화석 분석과 생산 유구 탐사에 대한 과제 및 그에 대한 대처를 소개하며 이 장을 마치고자 한다.



잎의 세포화석 분석의 과제


잎의 세포화석은 그 조성부터 종자와 꽃가루에 비교하여 잔류성이 뛰어나다는 이유가 있지만, 그 때문에 벼농사의 존재를 보여주는 근거가 잎의 세포화석뿐이라는 사례가 종종 발생한다. 분석 시료의 채위부터 현미경 분석에까지 이르는 과정에 문제가 없다면 틀림없는 결과이겠지만, 생각하지도 않은 원인으로 시료 오염이 생길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 나 자신도 잎의 세포화석 분석에 관련되어 있는 사람으로서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말하고 싶지만, 자연과학 분석을 행하는 이상 억지로라도 '생각하지도 않은 시료 오염'을 계속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역시 이 문제를 검증하는 궁극의 방법으로는 잎의 세포화석으로부터 연대측정을 행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잎의 세포화석이 지닌 화학 조성을 분석하면 그 주성분은 유리인데, 실은 탄소도 그에 버금가는 성분으로 포함되어 있다. 최근 분석기구가 눈부시게 발달하면서 잎의 세포화석을 일정량 모아서 이 탄소로부터 연대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도 현재 이 방법의 확립에 몰두하고 있다.



생산 유구 탐사의 과제


중국에서는 이미 기술했듯이 양저문화기의 논이 탐사, 발굴되어 어떠한 형태와 규모를 갖추었는지 밝히는 일이 과제가 되어 앞으로 중국에서 행할 조사가 기다려지는 바이다.


일본에서는 논벼농사 이전의 조몬 벼농사가 어디에서 어떻게 경영되었는지 하는 확실한 증거, 즉 조몬 벼농사의 생산 공간 입지를 밝히는 일이 과제일 것이다. 화전인지, 산동성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토지이용이라면 저습지의 벼농사도 존재했는지 흥미롭다. 화전에 대해서는 잎의 세포화석에 의한 탐사 사례도 있고, 조사 수법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목표가 세워져 있으며, 저습지 벼농사의 존재에 대해서는 논 탐사의 수법을 응용할 수 있다. 현재 여러 가지 대처가 진행되고 있어 앞으로 고고학과 자연과학이 협동하여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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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농경사 권1



제1장  벼농사와 벼농사 문화의 시작  中村愼一




들어가며


2008년 1월, 중국에서 벼농사 고고학 연구의 전문가 4명을 일본에 초청해 최신 연구성과에 대한 보고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거기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점은 중국의 벼농사 기원론이 이미 "언제, 어디에서?"의 단계에서 빠져나가 "왜, 어떻게?"의 단계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애초 야생 벼가 자생하지 않는 일본의 경우와 달리, 그것이 자생하는 중국에서는 벼 자료의 출토=벼의 인공 재배가 아니라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중국의 연구자도 그런 점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야생인지 재배인지를 분간하는 판단기준을 딱 정하는 일은 상당히 어렵다. 결과적으로 '재배종이기를 바란다'는 확신이 때로는 연구자의 눈을 흐리게 하는 일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림1-1 중국의 초기 벼 자료 출토 유적

1. 하남성 무양舞陽 가호賈湖 유적

2. 호남성 풍현澧縣 팽두산彭頭山 유적, 팔십당八十 유적

3. 강서성 만년현萬年縣 조통환桶環 유적, 선인동仙人洞 유적  

4. 절강성 포강浦江 상산上山 유적

5. 절강성 승주嵊州 소황산小黃山 유적

6. 절강성 소산蕭山 과호교跨湖橋 유적

7. 절강성 여도 하모도河姆渡 유적

8. 절강성 여도 전라산田螺山 유적

9. 절강성 동향桐鄕 라가각羅家角 유적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도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확실한 판단기준을 어떻게든지 수립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는 야생, 여기서부터는 재배라고 딱 잘라 버리지 않고 양자를 일련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이 학계에도 꽤나 퍼졌다고 느낀다. 


아시아 벼농사 기원의 문제는 완신세完新世의 환경변화에 야생 벼가 어떤 대응을 보였는지, 그리고 인간은 어떠한 문화적 적응으로 그에 응했느냐는 관점에서 추진해야 할 터이다. 그를 위하여 고정도高精度의 옛 환경 복원과 동식물 유존체의 정성, 정량 분석 등 자연과학 여러 분야와 고고학의 협동이 필수이다. 본론에서는 그러한 접근으로부터 지금까지 어떤 것이 밝혀졌는지에 대하여, 일본과 중국 공동 연구의 성과 등도 나누면서 개관하겠다.




벼농사 개시기의 환경


벼농사는 중국에서 시작되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일본의 학계에서 아시아 벼농사 기원 연구를 주도한 건 농학과 민족식물학이었다. 거기에서는 '운남-아삼 기원설'이 제창되어(渡部 1977), 한때는 정설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현재 고고학의 증거는 그 설을 지지하지 않는다. 30년 사이에 축적된 고고학 자료는 그것이 동시대의 자료인 만큼 압도적인 설득력을 갖는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면,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벼농사가 중국의 장강 유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다만, 그 구체적인 연대를 어디에 둘지에 대한 의론이 분분하다. 앞에서 기술했듯이, 재배종인지 어떤지 판단하는 지표가 연구자에 따라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러 설에 대하여 하나하나 상세히 살필 여유는 없다. 관심이 있는 분에게는 졸저(中村 2002)를 보시라 권하고, 여기에서는 개요만 소개하고자 한다.


1만 년을 넘는 오래된 벼 관련 유물이 출토되었던 유적은 장강 중류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강서성의 조통환, 선인동 유적(모두 잎의 세포화석), 호남성의 옥섬암玉蟾岩 유적(잎의 세포화석과 꽃가루) 등이다(그림1-1). 잎의 세포화석이란 벼잎의 기동세포라는 특수한 세포 안에 남아 있는 일종의 유리이다. 생리적, 화학적으로 강하고, 장기간 토양 속에서 보존된다. 토양 속에 벼잎의 세포화석이 존재하는 것은 그곳에 벼가 있었단 것을 의미한다. 물론, 그것이 곧 재배 벼의 존재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들 여러 유적은 모두 동굴 유적이고, 그곳에서 벼가 살았을 리는 만무하나, 조통환 동굴처럼 주위의 평지에서 수십 미터나 위로 솟아 있다면, 마른풀이 바람에 날려 들어왔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완신세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이전에 사람에 의해 무언인가 형성된 벼의 이용 -땔감이나 깔개로 이용하는 것도 포함- 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장강 하류로 눈을 돌리면, 이번 세기에 들어와서부터 발굴조사가 행해진 절강성의 상산 유적(약 1만 년 전)과 소황산 유적(약 9천 년 전)에서는 토기의 바탕흙 안에 대량의 알곡이 섞여 있었다(그림1-2). 식물규산체가 발견된 것만으로 벼를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벼의 열매=알곡을 이용했다는 건 아닌데, 이쪽은 틀림없는 알곡이다. 그것이 속의 쌀을 꺼낸 뒤의 왕겨인지 쌀이 들어 있던 채로 있었던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혼합재로 이용하기 위해서만 알곡을 모았다고 생각하기보다는 먹을거리로 쌀을 이용하고 나머지 왕겨를 유효하게 이용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일리가 있다.


토기 바탕흙의 혼합재로 왕겨를 이용하는 일은 조금 늦게 장강 중류에서도 시작된다. 호남성 풍현에 있는 팽두산 유적과 팔십당 유적 같은 팽두산 문화(8000-7000년 전)의 토기가 그것이다. 토기 종류의 구성을 보아도 그 이전의 것에 비하여 상당히 분화가 진행된 데다가, 명확하게 요리도구라고 할 수 있는 '솥'의 수량이 많아진다. 식물질 먹을거리 의존도가 증대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림1-2 상산 유적 출토 토기. 단면에 검게 보이는 것이 혼합재의 왕겨.



거의 동시대에 놓인 하남성의 가호 유적과 절강성의 과호교 유적에서는 왕겨가 토기의 혼합재로 쓰이지는 않았지만, 유적에서는 탄화미, 붉게 탄 흙(紅燒土)에 알곡 압흔, 그리고 잎의 세포 화석 같은 여러 가지 형태로 벼 자료가 대량으로 출토되었다. 현재 있는 고고자료로 미루어 보는 한, 지금으로부터 8000년쯤 전에 벼 이용이 강화된 동시에 지리적으로도 확대된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약 7000년 전쯤 되면, 장강 하류에 하모도 문화와 마가빈 문화가 전개된다. 토기의 종류 분화는 더욱 진행되고, 쌀 조리에 특화된 종류인 '시루(=찜기)'가 출현한다. 또한 농기구라고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뼈삽날(骨耜)도 다수 출토되고, 이외에도 벼농사 의례에 관련된 것이라 생각되는 기물도 적지 않다. 논의 검출 사례는 현재로서는 약 6000년 전의 마가빈 문화 후기까지로만 거슬러 올라가는데, 앞으로 오래된 사례가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즉, 여러 가지 상황증거로 미루어 보는 한, 하모도/마가빈 문화기에는 그 이전부터의 채집에 더해 벼의 재배가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다. 


이 7000년 전이란 연대를 중국 벼농사 개시의 하한년대로 잡는다(나의 이러한 견해는 학계에서 '신중론'이라 친다. 벼농사의 시작을 1만 년 전까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학계의 추세라는 점을 굳이 덧붙여 놓는다). 그에 대하여 일찍이 아시아 벼농사의 원향이라 여겨지고 있는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연대는 그보다도 몇 천 년 늦다. 구체적으로, 인도 아대륙에서는 5000년 전쯤, 동남아시아 대륙부에서는 4000년 전쯤이다.


중국으로부터 일원적으로 이들 지역에 벼농사가 확산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지만, 상황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장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벼농사 보급의 파도가 운남과 광서 같은 화남의 주변부에 도달한 연대는 오래되었다고 어림잡아도 5000년 전이다. 특히 인도의 경우 30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 주변부에 도달하는 연대와 거의 동시에 벼농사가 시작된다. 동심원적인 파급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중국, 인도, 그리고 가능성으로는 동남아시아에서도 시기를 달리 하여 저마다 벼의 재배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어쨌든 아시아에서 가장 오래전 벼농사가 시작된 곳은 중국이다. 그곳에서 중국의 대지를 무대로 전개된 인간과 벼의 관계의 역사를, 환경고고학과 식물고고학의 시점을 섞어 넣으면서 계속하여 살펴보도록 하자.



벼농사 개시기의 환경


빙하기란 단어는 일반적으로 유럽과 북아메리카가 빙상에 덮힌 한랭기를 가리키는 것으로 쓰인다. 빙하기라 해도끊임없이 추위가 계속된 것은 아니고, 한랭한 시기와 온난한 시기가 반복하여 미세하게 변동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지질시대에서 가장 새로운 빙기는 뷔름 빙기(아메리카에서는 위스콘신 빙기)라고 부르는데, 지금으로부터 약 7만 년 전부터 약 1만5천 년 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바닷물에서 증발된 수분이 눈이 되어 육지에 내려 쌓이는데, 그것이 녹지 않고 곧바로 빙하로 발달한다. 증발한 물이 되돌아오지 않기에 해수면은 낮아진다. 뷔름 빙기의 가장 한랭기(1만6천 년 전쯤)에 해수면은 현재보다 120미터나 낮았다고 여겨진다.


이 최종 빙기가 종언을 고한 뒤 기온이 단숨에 상승했는데, 그 뒤 재차 '영거 드리아스기'라고 부르는 추위가 1300년 정도 이어진다. 그러나 그 추위도 1만1600년 전을 경계로 급격한 온난화로 뒤바뀐다. 지질시대라 말하는 완신세의 시작이다. 그 뒤 기온은 상승의 한 길을 걸어, 6000년 전쯤에 최고온기('힙시서멀기' 또는 '기후적기'라 부른다)를 맞이한다. 이 시기, 예를 들어 중국의 장강 하류에서는 기온이 현재보다 2-3도 높고, 강수량은 500-600mm 많았다고 복원되어 있다(王, 張 1981).


중국 장강 유역에서 벼의 채집이 시작되어, 이윽고 재배로 진전된 건 영거 드리아스기와 힙시서멀기 사이의 기후격변기의 일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시기의 옛 환경과 지리에 관한 정밀한 복원 연구는 매우 부족하기에 여기서부터는 상상에 의지하는 부분이 많은데, 나는 그 과정을 아래와 같이 생각한다.


완신세 전반의 급격한 온난화는 비가 자주 오도록 만들었다. 최종빙기에는 낙엽수의 숲과 건조한 초원이 탁월하던 장강 중하류의 저지대가 광대한 늪과 호수와 습원으로 순식간에 그 모습이 변했다. 기온이 높은 비가 많이 오면, 야생 벼에게는 절호의 생식환경이다. 최종빙기에는 추위로부터 도망와 화남과 동남아시아에 후퇴하여 숨을 죽이고 있던 야생 벼가 나갈 차례가 도래했다.


재배 벼의 선조에 해당하는 Oryza rufipogon이란 야생 벼, 그중에서도 특히 자포니카형인 것은 여러해살이의 경향을 가지지만, 실제로는 폭넓은 변이가 존재하여 한해살이에 강하게 기운 그룹도 있다. 아마 그러한 그룹이 그 탁월한 이주능력을 무기로 재빨리 북상을 시작해 곧 장강 중하류의 저지대에 대규모 군락을 형성했을 것이다. '쌀알만큼'이라 하면 작은 것의 예이다. 한 알, 두 알 먹는 걸로는 배를 채울 수도 없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 모두 벼의 군락이 펼쳐져 있다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바로 그때 해수면의 급속한 상승으로 육지면적이 맹속력으로 감소했다. 동중국해에 면한 절강성과 강소성 부근에서는 6000년 정도 사이에 해안선이 500-700킬로미터나 내륙으로 후퇴했다. 즉, 해마다 100미터씩 육지가 수몰되어 사라졌다고 계산된다. 거주할 수 있는 토지의 면적이 좁아지면 야생 먹을거리 자원에 대한 인구압이 높아진다. 그때까지는 먹지 않던 야생 벼의 종자가 수렵채집민의 눈에 매력적인 먹을거리로 비춰지게 되었다.


단 하나, 해결해야 할 문제가 남았다. 장강 중하류의 대습원지대, 예를 들면 고대에 '운몽택雲夢澤'이라 부르던 양호 평야(호북성의 강한江漢 평야와 호남성의 동정호 평야)의 중심부 등에서는 끊임없이 수위가 크게 변동하기 때문에, 정주생활을 영위하기란 매우 곤란했다. 그래서 홍수의 피해를 받는 일이 없고, 또 습지와 산야의 양쪽에 접근할 수 있는 저지/구릉의 이행지대나 산간의 분지가 거주지로 선택되었다. 강서성 조통환과 선인동, 호남성 옥섬암, 절강성 상산과 소황산 등의 여러 유적은 바로 그러한 입지에 있다. 벼의 이용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그건 아직 매우 한정적인 일이었다 해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8000년-7000년 전쯤이 되면 물 환경이 불안정한 저지로 진출하는 선구자가 나타난다. 절강성의 과호교 유적과 하모도 유적(모두 해발고도는 약 4m)이 그 대표이다. 여기에서는 우리 일본의 연구진이 베이징 대학, 절강성 문물고고연구소와 공동조사를 실시했던 절강성 전라산 유적에 대하여 소개하려 한다.


영소寧紹 평야의 동단 근처에 위치한 이 유적은 하모도 문화에 속하여, 중심적인 문화층의 연대는 약 7000-6500년 전으로 짐작된다(그림1-3). 유명한 하모도 유적에서 7킬로미터 정도만 떨어져 있다. 하모도 유적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저지대 유적이고, 인골과 동물뼈, 목재, 식물 종자 등의 유기질 유물의 보존상황은 꽤나 양호하다. 우리는 여러 가지 자연과학적 분석을 실시했는데, 그 가운데 나라 교육대학의 카네하라 마사아키金原正明 씨가 행한 규조 분석의 결과는 대단히 흥미롭다(金原 최근 출간).



그림1-3 전라산 유적 원경(가운데 돔이 유적 박물관)




규조란 단세포의 조류로, 바닷물과 민물, 그리고 일부는 토양에서도 생식한다. 그 이름은 규산질의 단단한 껍질을 가진 데에서 유래하는데, 규조 본체가 죽어도 그 껍질만은 수백 년, 수천 년을 남아 있는다. 또 똑같이 바닷물이어도 난바다, 내만, 개펄 등에 생식하는 종류가 다르다. 껍질의 크기나 형태, 표면의 모양 등을 조사하여 종을 동정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수와 비율에 따라 규조의 껍질이 퇴적된 당시의 환경을 복원할 수 있는 것이다. 


전라산 유적에서 행한 분석 결과는 아래와 같았다. 유적에 사람이 거주하기 직전의 시기, 그곳에는 개펄이 펼쳐져 있었다. 해수면 높이는 현재보다 1미터 정도 낮았다고 추정된다. 그 뒤 해수준은 마이너스 2.0미터 이하까지 낮아진 걸로 보이고, 이 땅은 육지화되어 인간의 거주가 시작된다. 당시 유적은 해수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강가 습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뒤 해수면이 다시 상승을 시작해 최고기에는 현재보다 약 2미터 높아졌다(힙시서멀기의 최고 해수준). 토지는 해면 아래로 가라앉고, 마을은 방기되었다. 즉 이 유적은 완신세의 해진기에 영위된 유적인데, 해진기에도 해수면이 변동하여 끊임없이 계속 상승하던 해수면이 일단 조금만 물러난 시기에 출현했던 육지에 입지하고 있었다.


유기라 하더라도 그곳은 민물 유역의 가장자리여서, 습지 같은 장소였을 것이다. 이 전라산 유적에서도 하모도 유적에서도 주거는 고상식(역주; 마루를 높게 쌓은 형태)으로 만들어졌다. 이는 저습지에 거주하기 위한 하나의 적응 수단이었다. 고상식 주거의 주변에는 수많은 목제품이 남아 있다. 건조한 지면 위에 남아 있던 목제품은 거의 곤충, 균류, 박테리아 등에 의해 분해되어 버려서 몇 년만 지나면 흔적도 남지 않는 게 보통이다. 많은 목제품이 양호한 보존상태였던 건 마을 자체가 저습지 안에 있어 버려진 목제품이 늘 물에 잠긴 상태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덧붙여서, 고상식 주거의 근처에서 목제 노가 8점 출토된 것은 일상의 교통수단으로 통나무배가 애용되었다는 걸 말해준다. 유감스럽게도 이 유적에서는 통나무배 자체가 아직 출토되지 않았는데, 이 유적보다도 1000년 정도 오래된 과호교 유적에서 통나무배가 출토되었기 때문에 하모도 문화기에 통나무배가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고상식 주거와 통나무배라는 두 가지 물품, 그것은 저습지에 정주하기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과호교 유적에서 검출된 집터는 흙벽을 세운 평지식 주거였는데(절강성 문물고고학연구 외 2004), 이 유적에서는 나무 하나로 만든 사다리도 발견되었기 때문에 주거 부분은 2층이었거나 또는 적어도 먹을거리 창고는 고상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무튼 저습지로 진출하는 데에는 그것이 필요했던 이유가 있었을 것임이 틀림없다.



벼도 도토리도 종이 한 장 차이


앞에 기술했듯이, 벼를 이용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저습/구릉의 이행지대와 산간의 분지가 거주지로 선택되었다. 절강성의 유적을 예로 들면, 상산 유적과 소황산 유적은 전라산과 하모도 등의 하모도 문화기의 유적과 그보다 1000년 정도 오래된 과호교 유적에 비하여 훨씬 내륙에 위치하고 있다. 표고도 50미터 안팎으로 상당히 높다. 과호교 문화와 하모도 문화의 시기, 사람들은 산간의 분지를 떠나 해안 근처의 평야부로 진출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지역에서 1만 년 전의 해안선은 현재의 그것보다 몇 백 킬로미터나 난바다 쪽에 있었기 때문에 해안 근처에 사람의 거주가 있었더라도 그 유적은 깊은 해저에 잠겨 버리고 말았다. 이제 와서 보면 찾아낼 길이 없다. 그러한 불확실함이 남아 있는 건, 어느 시기부터 '물가'라는 경관이 중요한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전라산 유적에서 행한 일본과 중국 공동 프로젝트에서는 출토 종실에 대해서도 상세히 분석했다(傳, 趙 최근 출간). 여기에서 강조하고 싶은 건 전라산 유적에서는 확실히 벼의 종자도 수없이 출토되지만, 마름의 알곡과 도토리(대부분은 개가시나무) 쪽이 수량에서는 벼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출토 종자의 수에서는 벼의 1/3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종자의 크기를 고려하면 가시연 알곡의 중요성도 무시할 수 없다. 출토된 종자의 숫자 비율이 각 식물이 당시의 식생활에서 점했던 비중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건 아니더라도, 벼가 출토되었다는 걸 곧바로 날마다 쌀만 먹었던 것처럼 생각하는 건 현대에 갖다 붙인 해석이어서 그러한 선험적 발상은 확실히 위험하다. 장강 유역에서 벼의 이용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하모도 문화기에 이르기까지 벌써 몇 천 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벼는 아직 '보물의 하나'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벼농사의 기원은 돌발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장기에걸친 완만한 과정이었다는 걸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전라산 유적의 꽃가루 분석결과에 눈을 돌려 보자. 꽃가루도 또 산과 알칼리에도 침범되기 어려운 단단한 외막으로 덮여 있어, 흙속에서 장기간 보존된다. 토양 표본 안에 포함된 꽃가루의 식물종 수량비를 통해 당시의 식생을 복원하는 것이 꽃가루 분석의 원리이다.


전라산 유적의 꽃가루 분석을 담당했던 사람이 카네하라 마사아키金原正明 씨이다. 유적이 거주하고 있던 당시의지층에서는 부들과와 벼과 식물의 꽃가루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벼과 식물은 꽃가루의 형태만으로는 종까지 특정하기 어려운데, 잎의 세포 화석 분석 결과 등을 감안하면 그 대부분은 갈대와 벼였다고 생각해도 좋다. 부들도 갈대도 벼도 습지의 식물이며, 규조 분석의 결과와도 부합한다. 이러한 물가 식물과 함께 많이 산출된 것이 북가시나무 아속을 주로 하는 조엽수의 꽃가루이다. 습지를 에둘러싼 높이 100미터 정도의 좀 높은 산들은 조엽수가울창한 숲으로 뒤덮여 있었다는 걸 말한다. 그곳에서는 가을이 되면 도토리가 가지가 휘도록 열매를 달았을 것이다(개가시나무도 북가시나무 아속인 식물이다).


갈대와 부들이 습지의 가장자리에 군락을 형성하는 데 반해, 조금 수심이 잎은 곳에는 마름과 가시연이 많이 살고 있었다. 유적에서는 잉어와 붕어 같은 민물고기, 거북과 자라 같은 파충류, 오리와 기러기 같은 조류의 뼈도 무수히 출토되었는데, 식물만이 아니라 동물에 대해서도 늪과 못의 자원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던 것을 엿볼 수 있다. 수렵의 대상이었던 포유류로는 물소와 각종 사슴 종류가 주체를 점하였는데, 이들도 물가에 모이는 습성을지닌다. 이미 벼의 재배도 시작되고 돼지도 사육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물가의 환경에서 수렵, 어로, 채집으로 얻을 수 있는 먹을거리가 식생활의 대부분을 점하며 도토리 같은 산야의 산물이 그것을 보충하는 생업경제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다종다양한 자원을 광범위하게 이용하는 생업경제의 상태를 고고학, 인류학의 분야에서는 '다각적 경제(broad-spectrum economy)'라고 부른다.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1만여 년 전, 최후의 빙하기를 극복한 뒤에 비로소 이 다각적 경제의 단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일반 독자는 의외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식물의 종자와 뿌리를 통해 탄수화물을 얻고 물고기와 물새의 고기에서 단백질을 얻는 식생활은 기껏해야 1만 년 정도의 역사밖에안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사의 방향을 결정짓는 매우 중대한 신기원이었다. 식물질 먹을거리의 이용이 시작된 건 특히 중요하다. 그 결과 일어난 물질문화의 커다란 변혁이 토기의 발명이며, 사회적인 크나큰 변혁이 정주생활의 개시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와 아울러 가장 일찍 농경이 시작되었던 서아시아에서 토기는 출현 당초 주로 저장용기로 사용된 것 같다.  그에 대하여 동아시아에서는 취사의 도구로 시작되었다. 중국 남반부에서는 벼, 북반부에서는 조와 기장 같은 잡곡이 우선 재배되었는데, 그 이전 단계인 채집단계에서도 녹말을 알파화하여 소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가열이 필요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토기에 넣고 펄펄 끓이는 것이다. 도토리의 경우 생식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모밀잣밤나무와 개가시나무) 가열하면 맛이 좋아지고 해충이 구제되고 오래 보존할수 있는 장점이 있었으며, 탄닌을 많이 포함해서 떫어 먹을 수 없는 종류의 도토리에서 떫은맛 제거를 촉진하는 효과도 있었다.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토기 제작의 개시는 식물질 먹을거리의 이용과 깊은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용되는 식물의 종류가 달랐을 뿐이다. 일본에서 도토리 종류에 더해 밤, 칠엽수 같은 견과류와 좀처럼 증명하긴 어렵지만 각종 근경류가 대상이 되었던 듯하다. 한편 중국에서도 일본과 거의 같은 종류의 견과류와근경류가 존재했는데, 거기에 벼와 조, 기장 등의 벼과 초본과 대두(중국 동북지방부터 화중에 걸친 지역이 원산지일 가능성이 높음)가 더해져 있었다. 그 뒤의 두 가지가 큰 차이를 가져오게 된다.


식물질 먹을거리에 대한 의존이 강해진 결과 정주화가 촉진되고, 인구는 증가한다. 그 메카니즘에 대해서는 전에상세히 서술했기 때문에(中村 2002), 여기에서는 반복하지 않는다. 특히 정주 마을의 형성이란 점에서는 중국보다 일본 쪽이 선행할지도 모른다. 그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인구는 변동을 반복하면서도 서서히 우상향으로 계속 증가해 머지않아 국가의 형성과 도시의 발생 -문명의 탄생이라 바꾸어 말해도 좋은- 으로 우여곡절 끝에이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중국에서는 기원전 4천년대의 후반부터 3천년대의 후반까지 1천 년 사이에 각지에서 그것이 달성되었다. 일본의 조몬시대 중기부터 후기에 걸친 시기에 해당한다. 확실히 일본에서도 조몬시대 중기에는 수많은 마을이 경영되어 이 시기의 인구도 상당히 많아졌다고 추정된다(今村 1997). 환경조건에 혜택을 입었던 '풍요로운 수렵채집민(affluent forager)'의 한 도달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중기에 정점에 이르른 조몬인의 번영도 오래가지 않았다. 후기에 들어서면 적어도 동일본에서는 급격한 인구 감소가 있었던 것이 출토 주거터 수의 분석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 이유는 반드시 명확한 건 아니지만, 힙시서멀기 이후 기후의 한랭화, 건조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자연의 은혜에 전면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수렵채집민의 한계가 있었다. 


일본에서도 완신세 당초부터 식물질원의 이용이 시작된 것은 중국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벼, 조, 기장, 대두 같은 한해살이 초본의 야생종이 존재하지 않았던 일본 열도에서는 채집의 대상이 견과류와 근경류였다. 견과를 다는 목본류는 종자번식이라 하여 생장이 느리고, 근경을 이용할 수 있는 초본류는 영양번식이었다. 인간이 활용하기 좋은 형질을 선택하고 그것을 재배종으로 고정시켜 가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며, 결과적으로 오래 채집 단계에 멈출 수 없었다. 도토리를 먹든지 벼를 먹든지 출발점에서 차이는 종이 한 장임에도 불구하고, 재배화가 가능한 야생의 한해살이 초본의 유무가 몇 천 년의 시간을 거쳐 일본과 중국 두 곳의 사회 진화에 결정적인 차이를 가져왔던 것이다. 벼의 재배화에 성공했던 중국에서는 관개논의 창출에 의하여 기후의 악화에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인구가 급감한 조몬시대 후기의 일본 열도에서는 주술에 관한 각종 기물이 성행한다. 거기에는 자연을 두려워하고 주술에 침잠하여 자연의 은혜에 매달리려 한 인간의 모습이 있다.일본 열도의 주민이 자연의 위력이 지닌 주문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자연이 아니라 인간을 두려워하게 되는 데에는 야요이 시대 초기에 열도의 밖에서 벼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이주를 기다려야 했다. 



① 야생 벼의 채집 -토기, 석제 갈판, 목제 절구

② 야생 벼 종자의 인위적 파종


③ 재배 벼 형질(비탈립성)의 출현


④ 재배 벼 형질의 확립(=야생 벼와 유전적 격리) -논


⑤ '벼농사 문화'의 성립 -벼농사 제사 관련 유물


⑥ '벼농사 사회'의 성립

그림1-4 벼 이용의 개시부터 벼농사 사회로




벼농사 사회 성립까지 지나는 길


채집에서 재배로


벼가 출토되면, 당시 사람들이 벼(쌀)를 주식으로 삼았을 것 같다고 하는 생각의 위험은 앞에서 지적한 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벼가 재배된다고 하면 그 문화는 '벼농사 문화'이고, 그 사회는 '벼농사 사회'라고 하는 것도 대단히 난폭하고 안이한 의론이다.


그림1-4는 벼 이용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강화되어 나아가는 과정을 정리한 것이다. 먼저, 인간에 의하여 식용이된 야생 식물이 자생하고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특히 벼과 식물처럼 종자가 작고, 또 먹기 위해 전처리가 귀찮은(왕겨를 벗기고, 게다가 가열해야 함) 경우는 대량으로 채집하기가 쉬워야 한다. 광대한 초원에서 여기 한 포기, 저기 또 한 포기 식으로 자라서는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완신세 전반의 온난화 시기에 장강 유역에서 대규모 야생 벼의 군락이 출현했음이 틀림없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야생 벼를 채집하는 데에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지는 않다. 야생 벼는 탈립성을 지니고 있다. 탈립성이란 익은 알곡이 자연스럽게 훌훌 이삭에서 떨어지는 성질이다. 알곡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용히 벼 포기를 밀어 헤치면서 익은 알곡을 손바닥으로 훑어서 모으는 게 좋다. 그럼 효율이 나쁘다고 하면, 큰 소쿠리라든지 천을 마련하여 이삭을 쳐서 그 안에 알곡을 모으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돌칼이나 돌낫 같은 도구는 필요 없다고 하기보다 쓸데가 없기 때문에 유물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즉, 야생 벼의 채집 단계는 존재했음이 틀림없지만, 그것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꽤나 성가시다. 다만, 상황증거가 되는 것이 탈부脫稃(왕겨를 제거하는 일)를 위한 목제 절구나석제 갈판 같은 도구류와 쌀을 가열하는 데 쓰인 토기의 존재이다. 토기와 갈판은 완신세의 개시와 거의 같은 시기에 장강 유역에도 출현한다. 지금으로서는 쌀을 끓이고, 알곡을 찧는 도구 등의 유물 자체를 직접 증거로 삼을 수는 없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모순은 없다. 


대저 야생 벼가 탈립성을 가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익은 알곡이 언제나 이삭에 달려 있다면, 그것은 동물에게 먹혀 버려 자손을 남길 수 없다. 운 좋게 동물에게 먹히지 않더라도, 알곡이 그대로 달린 이삭이 지면에 이르면 한곳에서 많은 종자의 싹이 나게 되어 이후 생장에 불리해진다. 그러므로 익은 알곡은 저절로 지면에 떨어지게 할 수 있다.


야생 벼가 탈립되는 장치는 벼알가지와 붙어 있는 알곡의 아랫부분에 떨켜라는 조직이 생김으로써 작동한다. 알곡이 익으면 그곳에서 맥없이 떨어진다. 그때 알곡의 아랫부분에는 표면의 매끄럽고 얕은 우묵한 곳이 남는다. 그에 반하여 탈립성을 잃은 재배 벼는 이삭에서 알곡을 억지로 잡아당겨 뗄 경우에 알곡의 아랫부분에 작은 혹 모양의 돌기가 남는다. 


이런 알곡 아랫부분 형상의 차이에서 야생 벼와 재배 벼를 구별할 수 있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은 이 책의 감수자인 사토 요이치佐藤洋一 씨였다(佐藤 1996). 사토 씨는 하모도 유적에서 출토된 벼 알곡을 전자현미경으로 공들여 관찰하고, 그곳에 야생형과 재배형 두 가지 유형이 있다는 걸 밝혔다. 이 판별법은 그뒤 중국인과 미국인 연구자에게 이어져, 절강성의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알곡을 대상으로 활발한 연구가 행해지게 된다.


절강성 문물고고연구소의 정위엔페이鄭雲飛 씨 등은 전라산 유적과 그와 거의 동시기의 동향라가각 유적(마가빈 문화)에서는 야생형 대 재배형의 비율이 거의 반반이며, 이 두 유적보다 1000년쯤 오래된 과호교 유적에서는 약6대4의 비율이라고 보고한다(鄭, 孫, 陳 2007). 정씨 등에 의하면, 재배형의 탈리흔 특징은 현재의 자포니카형 재배 벼의 그에 합치한다고 한다. 그것이 확실하다면 자포니카형과 인디카형의 재배 벼는 각각 독립하여 재배화되었을 것이고, 중국 장강 유역에서 가장 일찍 재배화된 것은 자포니카형이라는 상정을 강하게 뒷받침한다. 또 정위엔페이 씨는 다른 논문에서 상산 유적의 출토품을 다루어, 그곳에서도 재배형의 탈리흔 특징을 지닌 알곡이 존재한다고 기술하고 있다(鄭, 孫 2007). 매우 흥미로운 자료인데, 표본의 수가 지극히 적은 것 같아 결론을 내기에는 조금 더 비슷한 사례의 증가를 기다리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미국인으로 현재는 영국 런던대학에서 일하는 D. 풀러(중국 이름 博稻鎌) 씨 등도 전라산 유적 출토 알곡의 분석을 직접 다루고 있다. 그들은 1185알의 알곡을 조사해, 그 가운데 39%가 야생형, 24%가 재배형, 그리고 나머지대부분(25%)은 야생형인지 재배형인지 판별하기 어려운 미성숙 알곡이라고 한다.


미성숙 알곡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풀러 씨 등의 생각은 이러하다. 야생 벼의 등숙 시기에는 차이가 있다. 모든 알곡이 완전히 익는 것을 기다려 채집하려고 하면 이미 그때에는 대부분의 알곡이 떨어지게 된다. 효율 좋게 대량으로 모으려면 일부는 거의 익었지만, 미성숙인 것도 꽤 남아 있는 단계에 채집하는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채집한 알곡 안에는 미성숙인 것이 일정량 섞이게 된다. 


미성숙인 알곡까지 함께 훑어 버린 듯한 야생 벼의 수확법이 있었다고 하면, 그것은 진화학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벼가 아닌 밀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힐먼 등의 외알밀을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 등숙 시기 직전의 외알밀을 계속 베어 그 가운데 일부를 파종하면 몇 십 년이란 단기간에 탈립성을 상실한다는 의미를 지닌 '재배종'이 출현하는 일이 나타난다(Hilman and Davies 1992). 이것이 벼에도 해당된다고 하면, 야생 벼를 채집하는 선사인의 평범한 욕심쟁이가 우연히 야생 벼에서 비탈립성이란 형질의 진화를 재촉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게다가 그것은 매우 단기간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야생 벼 채집의 개시와 거의 동시에 '재배종'이 출현했다고 적어도 겉보기는 그렇게 보인다는 걸 암시한다. 즉, 그럼1-4의 ①-③의 여러 단계는 존재했을 것이고, 이 순서로 연달아 일어났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런데 재빠른 연쇄반응으로 단기간에 연속하여 일어났다고 한다면, 그것을 고고자료로 완전하게 확보하는 것이 어렵다.


탈립성을 잃은 재배형이 출현해도 그주변에 아직 많은 야생종이 자생하고 있다면, 선사인들은 변함없이 그 두 가지를 계속 수확했을 것이다. 그 결과 유적에서도 두 유형이 남아 있다. 전라산 유적과 하모도 유적에서 볼 수 있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알곡이 이삭에 달린 채로 남아 있는 포기 쪽이 더 많은 종자를 회수할 가능성이높기 때문에, 재배형의 비율은 서서히 증가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재배형이 늘어나더라도 야생종과 혼재하는 상태에 있는 한 수확된 알곡에 야생종의 그것이 일정량 포함되는 일은피할 수 없다. 벼는 자식성 식물이고 기본적으로 제꽃가루받이를 하지만, 약간은 자연교잡이 일어난다고 알려져 있다. 야생 벼의 탈립성 형질은 재배 벼의 비탈립성 형질에 대하여 우성이기 때문에, 둘이 교잡할 경우 다음세대의 포기는 탈립성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배종과 야생종이 같은 장소에서 자라고 있으면, 재배종의 종자만 수확하는 일이 곤란하고 그렇게 하는 일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건 그렇다 치고, 현재 장강 유역의 벼농사 지대를 다녀도 실제로 보이는 건 논에 심는 재배종뿐이다. 논 안은 물론, 농수로의 주변과 늪과 호수 주위에도 야생 벼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하모도 문화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7000년 사이의 어딘가에서 이와 같은 상황이 출현한 것이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건, 6000년 전쯤을 정점으로하는 온난기, 힙시서멀기 이후 기온이 서서히 냉량, 건조해지면서 야생 벼의 군락은 완신세 초기에 북상했던 것과 반대로 서서히 남하하여, 이윽고 장강 유역에서 모습을 감추어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할 수 있는 원인은 원래 야생 벼가 번성했던 토지가 논과 양어장으로 조성되어 간신히 남아 있던 군락도 '잡초'로 여겨져 구제되어 버렸다는 인위적 영향이다. 아마 이 두 가지가 야생 벼의 소멸에 작용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유적에 남아 있던 알곡의 형상을 조사하여 이 문제에 답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고도 생각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재 있는 고고자료는 아직 그것을 허락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 더구나 유적에서 출토된 알곡의 경우에는 또 다른 선입관에 빠지게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그 선입관이란 마을 주변의 자연습지에는 아직 야생 벼가 생육하고 있더라도 이미 그것을 채집하는 일은 거의 없고, 오직 인공 논에서 재배된 재배종만 수확하는 상황이다. 당연히 유적에서는 재배종의 알곡밖에 출토되지 않는다.


벼는 자식성 식물이다. 꽃가루의 수명은 몇 분 정도로 짧아 멀리까지 날아가서 다른 꽃을 수분시킬 수는 없다. 이삭 패는 시기가 같은 품종이어도 20미터 떨어져 있으면 교잡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재배형의 포기를 야생종이 자생하는 자연습지가 아닌 그것과는 별도로 인공적으로 조성한 농지 -이곳을 '논'이라 불러도 좋다- 에 재배하게 되면, 탈립성이란 형질도 유전적으로 고정된다. 또한 인공 농지가 있으면 물높이도 조절할 수 있고, 벼와 경합하는 잡초도 제거하기 쉽다. 결과적으로 자연습지에 야생 벼와 섞어 심는 경우와 비교하여, 더욱 안정적으로더 많은 수확을 올릴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이것을 사람의 쪽에서 바라보면, 벼를 재배하기 위하여 투하하는 노동력의 측면에서 뚜렷한 차이가 있다. 지난해 수확한 알곡을 봄에 습지에 파종한 다음 가을의 수확을 기다릴 뿐과 같은 정도라면 일다운 일은 거의 없다고 해도 좋다. 익은 알곡을 수확하는 것도, 마름과 가시연의 열매를 모으거나 산에서 도토리를 줍거나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산야의 은혜를 받아들인다는 감상이지 자신들이 만들어 냈다는 의식은 희박하지 않았을까?


그에 반하여 인공 농지=논에서 벼를 재배하는 걸 생각하면, 먼저 그 조성에 많은 노력이 들어가는 점이 무엇보다도 큰 차이이다. 논이 완성되면 그것으로 끝날 리가 없다. 수로와 논두렁을 수복하거나, 물높이를 조절하거나, 잡초를 뽑거나 하는 일상적인 작업의 연속이다. 자연히 쌀은 다른 채집 식물 먹을거리와는 별개로 특별해지고, 자신들이 만들어 낸 것이란 의식이 싹텄을 것이 틀림없다.


그런데 벼농사 문화란 '벼농사를 영위하는 민족 사이에서 대부분 공통으로 인정되는 벼농사와 복합된 문화 요소, 즉 생산기술과 사회양식, 신앙과 의례, 생활양식 등에 대하여 보편성을 가진 하나의 문화 체계'라고 정의하고 있다(渡部 1987). '벼농사 문화'란 단어를 이러한 의미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논에서 인공 재배를 개시한 이후가 되어서 처음으로 발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베어 거둘 뿐, 그것을 벼농사의 '생산기술'이라 할 수 있을까?


'신앙과 의례'에 대해서는 한술 더 뜬다. 벼농사 농경민은 1년을 통틀어 벼농사에 관한 제사를 집행한다. 정원의 예축의례를 시작으로 파종과 모내기, 벌레 쫓기, 베어 거두기와 절일마다 그를 행한다. 이와 같이 하나로 이어진 의례의 배경에는 벼의 풍양을 관장하는 신들의 체계가 있고, 그 유래를 이야기하는 신화가 있다. 그래야 벼농사에 관한 '신앙과 의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논농사가 시작되어 벼를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한 생업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 단계에서 처음으로 '벼농사 문화'가 성립했다고 할 수 있다. 단 그 단계가 되어도 사람들은 생명의 양식을 벼(쌀)에만 의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산야의 식물을 모으고, 동물을 잡고, 물고기를 붙잡는 일도 여전히 계속하고 있었다. 돼지 등의 가축 사육도 있었다. 그러나 인구의 증가에 따라 다른 생업이 점하는 비중은 서서히 줄어들고, 벼농사를 향한 기울기가 더욱더 급해져 갔다. 


벼농사를 향한 기울기가 급해졌다는 건 무슨 말일까? 한 가지는 농지의 확대이다. 마을 주변은 이윽고 벼이삭이 파도를 치는 논으로 가득해졌다. 그 이상으로 경작 적지를 얻을 수 없게 되거나, 구할 수 있어도 거기까지 거리가너무 멀거나 하면 마을사람 가운데 일부가 신천지를 구하러 마을을 떠나게 되었을 것이다. 벼농사의 '전파'라든지 '확산'이라 할 수 있는 현상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새로 마을을 만드는 일을 반복한 결과이다. 


또 다른 한 방법은 집약화이다. 인구가 2배로 늘었다고 해서 반드시 논 면적도 2배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만약 같은 면적에서 지금까지보다 2배의 수확량을 올릴 수 있다면 따로 농지를 확대하지 않아도 된다. 단숨에 2배라고하는 것은 그렇다 하더라도, 벼는 그러한 인간의 방자함에 답할 만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돌연변이에 의하여 생긴 다수성의 계통을 찾아내, 그것을 보호하면 수확량을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었다. 똑같은 일을 다른 채집식물과 수렵동물에게도 행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주변의 나무 가운데 2배의 열매를 다는 도토리 나무가 때마침 있었다고 하자. 그것을 늘리기 위하여 다른 나무를 뽑아 버리고 대신에 그 도토리를 심는 일 등을 누가 시도할까?아무튼 산이 그 도토리의 숲으로 덮이는 데에는 10년이나 20년 전의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수렵과 어로의 대상이 되는 야생동물의 경우는 더욱 곤란하다. 사람들이 지금의 2배로 사슴을 얻고 싶다고 염원해도 도대체 어떤 방책이 있을까? 다른 일을 팽개치고 날마다 사슴 사냥에 몰두하면 단기적으로는 그것을 달성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항상화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사슴의 수는 해마다 감소 일로를 걸을 것이다. 


집약화가 가능하다는 이 특성이야말로 벼를 비롯한 한해살이 초본 작물의 최대 이점인 동시에, 두려운 올가미이기도 하다. 인구의 증가와 작물에 대한 의존도 증대는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이고,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개미지옥' 같은 것이기도 하다. 인간은 머지않아 그것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상태에 빠진다. 그와 같은 사회의 상태를 '벼농사 사회'라고 부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그림1-4로 되돌아가 정리하도록 하자. ③의 단게에서 재배 벼의 형질이 출현하는데, 이것은 논에서 벼를 재배했다는 것을 의미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날마다 쌀만 먹었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말로 획기적이라 부르는 건 다음 ④의 단계이다. 출토 알곡의 형상이 재배형으로 거의 통일된 건 벼의 재배가 야생 벼의 생식지에서 공간적으로 격리된 결과 생식적인 격리도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벼 전용 농지, 이른바 논은 기술문화사의 큰 혁신이며, 문화 전반의 양상도 차례로 벼농사 중심으로 편성되어 나아간다. 그것을 일러 ⑤'벼농사 문화'의 성립이라 한다. 벼농사라는 생업은 자기증식적으로 비대화되어, 어느 사이에 벼농사 없이는 생활할 수 없는 사회가 이루어진다. ⑥ '벼농사 사회'의 성립이다. 이 ④의 단계부터 ⑥의 단계에 이르는 과정도 자연계의 여러 변동과 이변에 따른 대폭적인 인구 감소가 아닌 한 비교적 빠르게 진전되었다고 생각한다.


즉, ①부터 ③까지와 ④부터 ⑥까지가 각각 하나의 결말이 되어 그 둘의 사이에는 몇 천 년이란 상당히 오랜 시간적 동떨어짐이 존재하는 것이다.



벼농사 문명으로 가는 길


여기에서는 벼 이용의 개시부터 벼농사 사회의 성립에 이르는 과정을 실제 고고자료에 대조하면서 살펴보려고 한다. 절강성에서 최근 들어 점점 구석기시대 유적의 탐색이 시작된 참이어서 지금으로서는 정보가 매우 부족하다.태호 서남의 구릉과 저산지대에 몇 개의 유적이 발견되고 있는데, 그 시대적 자리매김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토기와 간석기를 가진다는 의미를 지닌 신석기 문화는 약 1만 년 전에 시작되었다. 그 시기를 대표하는 유적으로포강浦江 상산 유적(약 1만 년 전)과 승주嵊州 소황산 유적(약 9000년 전)이 있다. 모두 토기 바탕흙에 대량의 벼 알곡이 섞여 있으며 유적 토양에서도 벼잎의 세포 화석이 검출되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먹을거리로 벼를이용하기 시작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재배라고 부를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아직 평가가 나뉘고 있다. 대량으로 출토된 석제 갈판과 갈돌이 벼의 알곡을 가는 데 쓰였는지, 또는 견과 등을 갈아 으깨기 위하여 쓰였는지는 알 수 없다. 토기의 다수를 점하는 건 입구가 크고 밖으로 벌어지는 세면기 같은 모양으로, 표면에는 붉은색 조각이 장식되어 있다. 상식적으로는 끓이는 용도로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유적에서 주먹 크기의냇돌이 많이 출토되었기에, 그것을 달구어 '세면기'에 넣어 끓였던 것이 아닐까 하는 설도 있다. 일본의 농촌 요리 등에도 있는 이른바 스톤 보일링이란 방법이다. 물론 말도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국을 끓이는 데에는 적합하더라도 밥을 짓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상산과 소황산 두 유적이 표고 50미터 정도의 산간 분지에 위치하는 것에 대하여, 약 8000년 전부터 거주가 시작된 소산蕭山 과호교 유적의 현재 지표면의 높이는 불과 표고 4미터 정도밖에 안 된다. 당연히 당시 거주면의 높이는 가장 낮아진다. 이 유적은 가을의 사리일 때 바닷물이 역류하는 것으로 유명한 전당강의 바로 옆에 있다. 8000년 전이라면 해수면의 높이가 현재와 그다지 차이가 없는 수준까지 도달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유적은 7000년 전쯤까지는 바다 속에 잠겨 버렸다. 그것을 굳이 저지대에 마을을 이룬 건 '물가'의 자원에 크게 의존하는 생업양식이 이 무렵 시작되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출토된 동물뼈를 보아도 포유류로는 사슴류와 물소(야생이라 생각됨), 파충류로는 거북류와 양자강 악어, 조류로는 기러기와 오리류 및 두루미가 주체를 점하고 있어, 그 상정을 뒷받침한다. 출토된 식물의 씨앗을 보아도, 남방멧대추, 복숭아, 각종 견과류 같은 산의 산물과 함께 마름과 가시연이 출토된다.


벼도 마름이나 가시연과 마찬가지로 '물가'의 채집 식물자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던 것이다. 앞에서 소개했듯이, 정위엔페이 씨 등은 알곡의 형상에 대하여 야생형 대 재배형의 비율이 약 6대4라고 보고한다. 재배형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탈립성의 상실을 의미하는 데 지나지 않고, 채집을 계속하면서 자연히 출현할 수 있는 형질이다. 기본적으로는 벼도 모두 채집된 것이라 생각해도 잘못된 건 아니다. 다만 상산과 소황산을 비교하면, 토기의 기종 분화가 상당히 진행되어 명확하게 끓이는 용도의 그릇이라 할 수 있는 기종인 '솥'도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식생활에서 식물질 먹을거리 중에서도 쌀의 비중이 꽤 상승했다고 할 수 있다. 인공 재배가 시작되었다는 가능성도버리지 못한다.


그 뒤를 잇는 것이 7000-5500년 전이라 연대를 부여하는 하모도 문화이다. 하모도와 전라산 같은 유적이 늘 물에 잠길 듯한 저습지에서 경영되었다는 건 앞에서 서술했다. 기본적으로 과호교 문화와 마찬가지로 '물가'의 생업 전략을 취했다. 벼잎의 세포 화석 밀도가 높은 토층이 몇 층이나 발견된다는 것을 중시한다면, 이 시기에 이미야생 벼의 생식지로부터 공간적으로 격리된 '논'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토기에 대해 말하면 '솥'이 주체를 점할 뿐만 아니라 조금이지만 쌀을 찌기 위한 전용 그릇이라 할 수 있는 시루가 출현하기 때문에, 먹을거리로서 쌀의 중요성이 다른 채집 식물에 비해 한 등급 위의 존재라고 간주할 수 있게 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하모도 문화라고 하면 곧바로 상기되는 것이 물소와 사슴의 견갑골로 만든 '뼈보습'이다. 이것은 기둥 구멍과 저장 구덩이의 굴삭, 물가의 둑 등의 토목작업에도 쓰인 도구로서 일괄적으로 농기구라고 단정지을수는 없는데, 흙을 쌓아 올려 간단한 두둑을 만드는 농작업에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하모도 문화가 그것 이전의 여러 문화와 크게 다른 점은 정신생활에 관한 기물이 풍부해졌다는 것이다. 토제와 골제 상 또는 토기 표면의 선각화로 직접 지각할 수 있는 형태의 동식물과 인물의 묘사가 왕성하게 이루어졌다(그림1-5). 토제 동물상에는 돼지(멧돼지), 양(?), 물소, 코끼리, 새, 물고기 등이 있다. 토기 표면에 선각된 사례와 함께 그들 동물이 가축 또는 수렵 대상으로 많이 구할 수 있기를 기구하는 유감주술에 관한 주물이라 생각한다.  


식물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주발의 외면에 묘사된 '벼이삭 문양'(그림1-5의 7)은 벼의 풍년 기원에 관련된다. 이른바 '오엽 문양'(그림1-5의 8)에 대해서는 제사용 길상물인 '만년청 분재' 또는 어떠한 약초라는 견해도 있는데, 이에 대해서도 이삭 패는 시기의 벼이삭이라 하는 설이 있다. '물고기와 물풀 문양'(그림1-5의 9)에 대해서는 짝을 이루는 동물이 새인지 물고기인지 견해가 나뉘는데, 적어도 오른쪽 그림에 대해서는 물고기와 벼를 같은 화면에 묘사해 둘 모두 풍부해지기를 기원하는 것이란 설이 옮게 여겨진다. 식물 중에는 특히 벼가 중시되었다는 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림1-5. 하모도/ 마가빈 문화의 제사 관련 유물(3, 6 라가각 유적, 기타는 하모도 유적)




하모도 문화가 항주만 남쪽 기슭의 영소寧紹 평야에 전개된 데 비해, 항주만 북쪽 기슭의 항가호杭嘉湖 평야는 마가빈 문화의 분포 구역이다. 연대로 보면 7000-5800년 전으로 둘 수 있다. 이 지역은 영소 평야와는 달리, 산과 구릉이 거의 없는 낮은 평지이다. 한번 홍수라도 일어나면 도망갈 곳이 없을 것이다. 출토 유물을 통해 보는 한, 생업경제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하모도 문화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지만, '물가' 그리고 벼로 기울어짐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것이 확실한 '논'이 이 마가빈 문화의 후기(6000년 전쯤)의 유적에서 발견된다. 강소성 소주시의 초혜산草鞋山과 곤산시昆山市의 작돈綽墩 유적이다. 상세한 건 이 책에 실린 우다 노츠宇田津 논문을 보시길 바란다. 물론 이 연대는 늦어도 그 시기까지에 '논'이 출현했다는 걸 보여준다. 그것이 1000년 또는 2000년 더 거슬러 올라갈 가능성은 남아 있다.


마가빈 문화 전기의 유적인 동향 라가각 유적에서는 토제 남성 전신상이 출토되었다(그림1-5의 6). 그 과장된 남성기의 표현은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농지를 여성, 경운도구를 남성이라 보는 성적 상징주의는 세계 각지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Eliade 1968). 일본의 야요이 시대에는 특이한 목제품으로 '남경형'이란 기물이 있다. 문자 그대로 남근을 본뜬 것인데, 이것도 똑같은 상징주의에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中村 1999). 그러한 점에서 마가빈 문화 전기까지로 논의 창시가 거슬러 올라가 수 있다고 나는 추측한다. 


그에 이어지는 것이 송택崧澤 문화로 5800-5300년 전의 연대를 부여할 수 있다. 이 시기가 되면 동물 유존체에수렵대상 짐승이 점하는 비율이 뚜렷하게 저하되고, 가축인 돼지의 비율이 증가한다. 저습지 유적이 거의 없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식물질 유물이 남기가 나쁜 데에도 기인할 것인데, 벼 이외의 채집 식물의 검출 사례는 매우 적다. 이런 점은 생업형태가 다각적 경제에서 벼농사 전업 경제로 이행해 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에 보조를 맞추듯 쌀 조리 전용 도구인 시루와 세발솥이 끓이는 용도의 토기를 주로 점하게 된다. 강소성 소주시의 징호澄湖 유적에서는 논터가 검출된다. 이전 시대와 마찬가지로 가늘고 긴 일정하지 않은 모양인데, 논 한 배미당 면적은 현격한 차이가 난다. 


정신생활면으로 눈을 돌리면, 하모도 문화와 마가빈 문화에서 성행하던 토제상과 토기 회화가 거의 모습을 감추는 것과 함께, 형상 토기(그 일부에 동물과 인물을 본뜬 토기)와 채색 토기, 그리고 토기 표면의 추상부호가 눈에띈다. 채색과 조소, 선각이 장신된 것은 이질泥質 회도灰陶(불순물을 제거한 점토를 써서 환원염소성한 회색 토기)또는 흑피도(이질 회도의 표면에 탄소를 부착한 흑색 토기)의 두, 호, 관 같은 저장, 공헌供献 토기류이다. 아마 벼의 풍작을 신에게 감사하는 의식에 관련된 기물이라 생각한다.


이들 특이한 토기류는 주로 무덤의 부장품으로 발견되는데, 그러한 무덤에는 귀걸이와 목걸이 같은 초현기初現期의 연옥 제품이 동반되는 일이 많고, 또 그와 같은 무덤이 공동묘지 안의 한 구획에 집중되어 설치된 경우가 많다. 즉, 이 시기에는 제사의 복잡화와 제사집행자가 되는 특정집단의 분리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른바 공동묘지는 하모도 문화, 마가빈 문화의 시기부터 존재하는데, 그 단계에서는 무덤의 배열, 부장품의 종류, 많고 적음, 정교함과 조잡함 등으로 집단의 차이를 유추하기가 곤란했다는 점이 큰 차이이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송택 문화의 물질문화를 계승하여 5300년 전쯤에 시작되고, 그로부터 800년 정도 이어진 것이 양저良渚 문화이다. 무덤에 대량의 옥기(=연옥 제품)를 부장한 집단은 자신들만의 묘지를 영위하게 된다. 그것은 종종 대규모 봉분(흙을 쌓아 올린 흙더미)과 대상묘(산비탈을 깎아낸 테라스)의 형태를 취한다. 제사를 집행하는 집단이 일반 서민과 동떨어진 지위를 손에 넣고 묘지의 조성에 대량 노동력을 자의적으로 동원하는 것이 가능해졌음을 보여준다. 


옥기에는 매우 정세한 문양이 새겨진다(그림1-6). 아직 금속기가 없던 시대이다. 석영 같은 단단한 돌조각이라든지 상어의 이빨을 사용하여 조각한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한 점의 옥기를 제작하는 데에만 적어도 몇 개월의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때로는 하나의 무덤에 그것을 수십 점이나 넣기도 했기에, 전문 공인이 언제나 그 제작에 종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고도의 전업생산이 행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건 옥기만이 아니다. 복잡, 정치한 음각선 문양을 장식한 토기류와 각종 석기류도 그러했을 가능성이 높다.


전문 공인에 의한 수공업 생산을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이 벼농사 농업의 집약화였다. 돌쟁기는 송택 문화기 후반부터 출현하는데, 양저 문화기에는 대형화되어 그중에는 길이 60cm에 이르는 것도 있다. 가축(아마 물소)이 견인하지 않았을까 한다. 쟁기를 끌고 다니려면 작은 면적의 일정하지 않은 모양인 논에서는 사정이 나쁘다. 현대의 논과 그만큼 차이가 없는 논이 이 시기쯤에는 출현했을 텐데, 유감스럽게도 고고학적으로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수확 도구인 돌낫이 널리 분포하게 된 점의 의미도 크다. 논 안에는 이미 탈립성의 그루는 존재하지 않고 품종개량의 진전에 의하여 벼의 익음때도 균일화되어 벼 그루를 묶음으로 잡아서 밑동을 벨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돌쟁기와 돌낫 등의 석기에 대해서도 특정 생산지에서 전업생산이 이루어졌으리라 상정할 수 있는데, 석제 농기구의 생산과 분배를 정치적 지배자가 좌지우지하고, 공납품으로 받는 벼의 증산을 도모했을 가능성까지 있다. 그 보상으로 지방의 지배층에게 하사한 것이 각종 옥기였다고 나는 생각한다(Nakamura 2005).


이 시기의 제사, 종교를 특징짓는 핵심어가 '신인수면문神人獸面紋(신의 체구와 괴수의 안면을 본뜬 문양)'이다(그림1-6의 2). 주로 옥기에 도상으로 등장하는데, 상아기와 토기에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아마 그것은 흉악한 짐승 신을 통제하고 자유롭게 천공을 비약할 수 있는 신성神聖 왕=현인신의 모습을 그렸을 것이다. 


신인수면문 옥기의 분포는 양저 문화 분포지역의 전체에 퍼져 있다. 물론 시대적 변천은 있지만, 옥기의 형태, 문양의 지역을 뛰어넘는 공통성은 일관되게 계속 유지된다. 양저 문화기에 신 관념이 통일되었다는 것의 의미는 크다. 미국의 정치학자 찰즈 메리엄의 말을 빌려 이야기하면(메리엄 1973), 신인수면문은 지배를 시각적으로 납득시키는 일종의 미란다 원칙으로 기능했던 것이다. 



그림1-6. 양저 문화의 옥기(모두 절강성 여항 반산 유적 출토)





옥기와 석기의 생산과 분배를 통제하는 정치적 지배자가 거주한 곳이 절강성 항주시의 서교에 전개된 양저 유적군이다. 동서 약 10킬로미터, 남북 약 6킬로미터의 범위 안에서 지금까지 130여 곳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면적 약 30평방미터의 막각산莫角山 토대, 길이 5킬로미터에 달하는 당산塘山 토루, 거기에 반산反山 봉분, 요산瑤山대상묘 등의 옥기 후장묘는 특히 유명하다. 


이 양저 유적군에서 최근 큰 발견이 있었다. 막각산 토대와 반산 봉분을 둘러싼 위치에 동서 1500m, 남북 1800m, 면적 270헥타르의 흙을 쌓은 위벽이 존재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게다가 그 규모는 산서성의 도사陶寺 유적과 견줄 신석기시대 중국 최대의 위벽 마을이다.(연대로는 도사 유적보다 몇 백 년 빠를 가능성이 높다). 양저 유적군의 경우 위벽 밖에도 유적이 농밀하게 분포하기 때문에, 실제 거주 구역은 더욱 넓을 것이 확실하다. 그 넓이는'하왕조'의 왕도로 보이는 하남성 이리두二里頭 유적(기원전 1750-1520년쯤)의 300헥타르를 능가한다. 이것을 도시라고 부르지 않으면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문명(civilization)이란 단어는 라틴어 civilisatio에서 유래한 것으로, 무엇보다 도시(civitas)와 밀접하게 연결된 개념이다(伊東 1985). 그 도시란 농업이 집약화되어 어느새 직접 농경에 종사하지 않는 '사회잉여'(=도시민)이 생겨나는 곳에서 형성된다. 그렇다면 양저 문화의 돌쟁기와 돌낫 같은 농기구를 그냥 단순히 농업기술사의 관점으로만 고찰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 그것은 특별히 사회, 정치사적인 검토 과제라 할 수 있다. 


금속기가 출현하기 이전의 중국에서는 옥기가 최고의 예기로 기능했다. 그 제작과 사용을 전단하는 자가 종교적 권위를 획득하고 옥기 분배를 통하여 정치적 권력을 수중에 넣었다. 그와 같은 정권의 상태를 나는 '옥의 왕권'이라 부른다(中村 2003). 장강 하류에서 꽃이 핀 그 신석기시대 문명은 말할 것도 없이 벼농사에 기반을 둔 문명이었다. 그것은 결국 장강 유역의 다른 지역만이 아니라 황하 유역으로도 파급되어 나아갔다. 그곳은 원래 조와 기장 같은 잡곡의 재배지대이다. 더구나 시기적으로는 힙시서멀기 이후의 서늘하고 건조한 시기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벼농사는 북상하고 있었다. 벼농사 인간의 인구 증가에 따른 이주라고 단순하게 단정지을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아마 벼(쌀)는 종교의례에 필수 요소로서, 바꾸어 말하면 문명의 한 요소로서 전해졌던 것이다(中村 2006). 여기에서 우리는 벼농사의 전파와 확산이라고 하는 현상에는 인구학적인 메카니즘과는 또 다른 정치, 종교적 메카니즘도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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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18년 사이에 일본에서 거주했다는 한 미국인이 찍은 사진으로, 농부가 쟁기를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이 사진에서 쟁기의 모양이 흥미롭다. 쟁기의 술(보습이 달리는 대)과 성에(한마루와 성에를 부착하는 대)의 각도가 매우 작다. 이는 아마 논에서 쓰는 쟁기여서 그럴 것이다. 논흙이 찐덕찐덕하기에 술의 각도가 컸다가는 부러지기 쉽기 때문에, 힘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이렇게 설계했을 것이다.

한국의 밭호미와 논호미가 보여주는 날과 슴베의 각도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푸석푸석한 밭흙에서 일하는 호미와 찐덕찐덕한 논흙에서 일하는 호미는 서로 다르게 생겼다.

왼쪽 두 개는 밭호미, 오른쪽 세 개는 논호미이다.




마지막으로 모내기를 마친 논의 모습도 흥미롭다. 그루당 간격이 듬성듬성하고, 모의 길이가 긴 모습이다. 옛날 농법은 대개 그러했던 걸까? 이 논에 심은 품종은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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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터를 타고 버려진 땅을 개간하는 와쿠이 토오루涌井徹 씨. 아키타현 오가타촌大潟村에서 2017년 10월 喜屋武真之介 촬영.


「이런 곳은 가족에게도 보여주지 않아요.」

9월 말, 아키타현 오가타촌. 성인의 키보다 큰 잡초가 무성한 들판을, 셔츠 차림의 남자가 땀투성이가 되어 트랙터로 돌진한다. 잡초를 쓰러뜨릴 때마다 가쿵 가쿵 트랙터가 크게 흔들린다. 마을에서 55헥타르의 논을 소유한 대규모 벼농가 와쿠이 토오루 씨(69)이다. 

 국가가 쌀의 생산을 억제하는 '재배면적 축소 정책'으로 50년 가까이 방치된 약 20헥타르의 토지를 빌려서 개간하고 있다. 원래라면 벼베기로 바쁜 시기이지만, 와쿠이 씨는 여기에 벼를 재배하는 것이 아니라 한쪽을 양파밭으로 바꿀 계획이다. 

 오가타촌은 전쟁 이후 일본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였던 하치로 가타八郎潟를 간척하여 생겼다. 대규모 농업을 목표로 전국에서 젊은이들이 모여, 와쿠이 씨도 1970년 니가타현에서 이주해 왔다.  그런데 쌀이 남아돌자, 국가는 이듬해인 1971년부터 재배면적 축소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이를 따르지 않았던 와쿠이 씨는 '범죄자' '이단아'라고 불렸지만, 꾸준히 직거래 판로를 구축하고 소비자의 지지에 힘입어 그를 이겨냈다. 

 기자가 양파밭을 개간하는 와쿠이 씨를 취재하고 1주일 뒤, 와쿠이 씨가 일하다 트랙터에 머리를 부딪혀 피가 나는 부상을 당했다고 들었다. 걱정하며 전화하자  남의 일처럼 웃는 소리가 들렸다. 「길을 내는 건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지요.」

 국가는 올해 생산된 쌀을 최후로 재배면적 축소 정책을 폐지한다. 와쿠이 씨는 「그 시점에 무슨 일이 있어도 (양파밭의 개간에) 착수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한다. 시대가 드디어 와쿠이 씨를 따라가는 모양이지만, 그는 더 앞으로 나아가 새로운투쟁을 시작하고 있다. 오가타촌 이단아의 인생과 그 생각의 일부를 살핀다.


눈이 내리는 농지에서 양파의 자람새를 확인하는 와쿠이 토오루 씨. 2017년 12월 촬영. 



◆농업의 희망을 찾는 와쿠이 토오루 씨 

농업정책으로 분단된 마을 

 

「사과해야 합니다.」

 2009년 11월26일, 아키타현 오가타촌을 방문한 민주당 정권의 아카마츠 히로타카赤松広隆 농림수산상(당시)은 의견교환 모임에 참석한 마을의 임원과 농민들 앞에서 사죄했다. 이 마을은 '일본의 식량기지'를 만들고자 탄생했지만, 농업정책이 이주자들을 농락하고 마을을 분단시켰기 때문이다. 

 오가타촌은 하치로 가타를 간척하여 1964년 10월에 탄생했다. 쌀을 증산하는 '모델 농촌'이란 평을 받고, 전국에서 이주를 희망하는 사람을 선발했다. 평균 경영규모가 1헥타르 정도였던 시대에 1농가에 제안된 농지는 10헥타르(이후 15헥타르)였다. 



 그런데 벼농사에 의욕을 불태우던 이주자들을 '재배면적 축소 정책'이 가로막았다. 국가는 식량관리법에 근거하여 농가에서 쌀을 매입해 소비자에게 판매했는데, 1인당 소비량이 1962년을 정점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쌀값을 유지하기 위하여벼농사를 축소해 생산량을 조정하는 일이 1970년에 시작되어, 1971년 이후에는 쌀 이외의 작물을 재배하는 농지에 보조금을 지원하는 등으로 다른 작물을 재배하도록 추진했다. 오가타촌도 농지의 거의 절반을 밭농사로 전환하도록 요청을 받았다.

 일부 이주자들은 겨울철 농한기가 되자 밭농사를 짓는 선진농가를 시찰하고 다녔다. 니가타현 도카마치시十日町市에서 1970년에 이주한 와쿠이 토오루 씨(69)도 그 한 사람이었다. 칸토, 칸사이, 시코쿠……. 근사한 대처를 목격하고 「나도 할 수 있다」며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 도쿄 우에다역을 출발한 야간열차가 아키타에 가까워지면서 창밖에는 은빛세계가 펼쳐졌다. 꿈은 눈의 무게에 눌려 점점 시들고, 오가타촌에 도착할 무렵에는 현실로 돌아오게 되었다. 멜론, 호박, 대두 등다양한 밭농사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눈 때문에 재배시기가 제한되는 데다가, 간척지는 배수설비를 갖추지 않으면 작물의 뿌리가 썩는 등 조건이 나빴다. 실패를 거듭한 끝에 정리한 생각을 와쿠이 씨는 나중에 블로그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오랜 경험을 통해 『설국의 농업은 눈이 없을 때 노지에서 작물을 키우고, 눈이 있을 때에는 시설 안에서 가공을추진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일을 추진하기 위하여 무엇을 심고 무엇을 가공할지, 작물을 선택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하다 설국에 좋은 작물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작물'이란 얄궂게도 국가가 생산을 제한하려는 쌀이었다.


수확기를 맞은 논을 둘러보는 와쿠이 토오루 씨. 2017년 10월 촬영. 


타작물 전환에 실패를 거듭한 와쿠이 씨 등은 제한면적을 초과하여 모내기를 실시한다. 하지만 현의 담당자는 그 과잉 재배한 분량을 푸른 상태에서 베어내라고 지도를 내렸다. 이른바 '풋베기'이다. 

 이주하면서 계약에서는 국가의 방침에 따르지 않을 경우 국가에서 강제적으로 농지를 반환(환매)하도록 요구한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동료와 논의했지만 해결책은 없었고, 와쿠이 씨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1978년 가을에는 약 1주일 뒤에 수확할 벼이삭을 풋베기하라는 지도를 받아, 자신의 콤바인으로 베어서 논에 방치했다. 벼이삭은 90% 가까이 영글어 있었다. 니가타에서 함께 이주한 아버지 헤이고로平五郎 씨(2013년 사망)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건'은 그 무렵에 일어났다. 이앙기로 한 번 오갈 분량을 풋베기하지 않은 두 농민이 국가에게서 농지를 환매하라는 처분을 받은 것이다. 와쿠이 씨는 말한다. 「두 농가의 태도가 너무 완고했기 때문이라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국가는 단순한 위협이 아니라 실력을 행사했죠. 우리는 이런 압박을 받으면서 농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하는 분노와 불안을 느꼈습니다.」

 오가타촌의 이주자 약 580명 가운데 와쿠이 씨 등 200명은 1983년 아키타 지방법원에 농사조정을 제기한다. 농가가자신의 토지에서 쌀을 재배하면 안 된다는 법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자, 농가마다 소유한 논 15헥타르에 할 수 있는 한 농사를 짓는 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마을에서 유일한 집하업자에게서 수확한 벼의 매입을 거부당했다. 와쿠이 씨와 동료는 전화번보부를 펼쳐 전국의 미곡상에게 연락하고, 자신들의 벼를 취급해주는 가게를 개척했다. 이 쌀은 이른바「암거래 쌀」이라 불리는데, 현과 현의 경찰은 1985년 10월부터 2개월 동안 마을 입구에서 검문을 하여 암거래 쌀의 출하를 저지하려 했다.

 1987년이 되자 와쿠이 씨는 동료 몇 명과 주식회사 '오가타촌 아키타 코마치 생산자협회'를 설립한다. 계약 농가에서 농협도다 높은 가격으로 쌀을 구입해, 자사의 공장에서 가공하여 독자적으로 개척한 고객에게 직거래를 시작했다. 신품종 '아키타 코마치'의 평가는 최상으로「산지 직송은 맛있다」는 평판을 얻는다. 하지만 재배면적 축소 정책을 준수하는 쪽에서는 '돈벌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마을에서 「암거래 쌀을 출하하지 마라」는 시위대가 몰려와 「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며 힐난하여 와쿠이 씨는 반론을 했다. 

 「재배면적 축소를 계속한다고 새색시가 옵니까? 훌륭한 농업을 할 수 있습니까? 나는 그것을 듣고 싶습니다.」

 당시 대두를 재배하던  '재배면적 축소 준수파'의 미야자키 시다요시宮崎定芳 씨(78)는 와쿠이 씨에게 호통을 친 적이 있다고 한다. 「젊어서 국가에 대항하는 지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국가 등은 밭농사를 짓도록 연약한 지반을 없애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미야자키 씨 자신은 재배면적 축소에 협력하는 게 마을의 발전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마을은 재배면적 축소 반대파와 준수파로 분단되어, 반대파의 아이가 친구들에게 '암거래 쌀'이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미야자키 씨는 말한다. 

 「서로의 관계가 최악이었다.」

 암거래 쌀이 사실상 추인을 받게 된 것은 1988년 1월 아키타 지검이 내린 판단이 계기였다. 암거래 쌀을 판매했다고 하여 식량관리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불구속 입건된 재배면적 축소 반대파 3명을 모두 불기소 처분한 것이다. 미국은 일본의 쌀 수입규제를 심하게 비판하고, 국가가 농가의 경제활동을 제한하는 제도는 한계에 이르렀다. 불기소 처분을 알게 된 와쿠이 씨는 「국가와 대결하는 일은 끝났다」고 느꼈고, 당시 식량청의 과장이고 나중에 농수사무 차관을 지낸 다카키 유우키高木勇樹 씨(74)도 「이제 식량관리법은 무너지겠다고 확신했다. 시대에 뒤처진 법률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입장 때문에 본심은 입 밖에로 낼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전쟁 이후 최악의 기록적 흉년이었던 1993년, 대량 판매점 사장이 오가타촌을 방문해 '1가마 6만 엔'이란 가격으로 사재기를 추진했다. 지난해까지 1가마 2만 엔으로 매입했던 와쿠이 씨는 「6만 엔은 무리이지만, 4년 동안 3만 엔에 구매하겠다」고 약속하고 생산자를 묶어 놓았다. 이듬해는 생산량이 회복되어 일반 쌀값이 떨어졌지만, 3만 엔에 계속 구매하겠다고 한 와쿠이 씨는 지난해의 쌀값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전국의 직거래 고객에게 <지금의 쌀 가격이 비싸다고 생각한다면, 희망 가격을 알려 주세요>라고 편지를 보내자, 90%는「지금의 가격도 괜찮다」고 답했다. 가격 인하 요구가 많으면 경영 위기로 이어질 수 있었지만, 꾸준히 개척한 고객의 만족도는 높았다. 


오가타촌으로 이주한 직후 볍씨를 뿌리는 헬기 앞에서 동료들과 기념촬영. 왼쪽에서 두 번째. 본인 제공. 


다카키 씨는 자성을 담아 말한다. 「소비자는 국가가 매입하는 정부미보다 농가에서 필사적으로 농사지은 『암거래 쌀』이 맛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국가가 농업을 잘못 지켜서 농가의 창의성을 빼앗았다.」다카키 씨가 농수성의 관방장이었던 1995년, 식량관리법은 식량법으로 대체되는 형태로 폐지되고 암거래 쌀은 '암거래'란 딱지를 떼었다. 

 오가타촌의 분단이 해소된 것은 2010년 무렵이었다. 2009년 마을을 방문한 당시 아카마츠 농수상이 농업정책을 사죄하자, 재배면적 축소 준수파에게서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며 반발의 소리도 높았다. 그러나 재배면적 축소로 줄어든 벼농사 농가 등의 수입을 보전하는 '호별 소득보상제도'가 2010년 도입되고, 쌀가루용 등의 벼농사를 지어도 재배면적 축소로 취급하게 되었기 때문에 마을 농가의 재배면적 축소 참가율은 지난해 49%에서 84%로 높아졌다. 분단 구도는 마침내 무너졌다. 


참치처럼 돌진


 「나는 참치처럼 멈추면 죽는다.」

 와쿠이 씨는 자신을 이렇게 비용한다. 생각이 나면 곧바로 행동한다. 기자가 취재하며 쌀 가공공장의 안내를 받을 때도 생산라인의 문제점을 발견하자, 현장의 직원과 이야기하느라 20분 정도 열중했다. 

 와쿠이 씨는 1948년 9월, 니가타현 도카마치시의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 지역은 「까마귀에게 부딪치는 흙도 없다」고 할 만큼 농지가 귀중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농가의 셋째 아들로 논의 지분이 0.3헥타르였는데, 와쿠이 씨도 농업전문학교에 진학하고 아버지와 시노가와천信濃川의 하천부지에 조금씩 흙을 날라 논을 1.8헥타르까지 넓혔다. 그럼에도 농사일로는 연간 100만 엔 정도 벌어 공사현장 등에 돈을 벌러 나가지 않으면 생활을 할 수 없었다. 


니가타현 도카마치시의 자택 앞에서 사진을 찍은 와쿠이 씨(왼쪽 끝). 본인 제공. 


마음껏 벼농사를 짓고 싶다. 그런 꿈을 품은 아버지와 아들은 자연스럽게 오가타로 이주를 목표로 했다. 이주 조건 등을 듣고자 와쿠이 씨는 19세 때 혼자서 상경하여, 느닷없이 옛 농림성(현 농수성) 본청을 방문했다. 담당직원에게  「그렇다면 가나자와金沢의 호쿠리쿠北陸 농정국에 가는 편이 낫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열차에 타고 가나자와로 향했다. 

 이주자는 응모자 가운데 서류심사와 면접 등으로 선발했는데, 유부남이 유리하다고 들은 와쿠이 씨는 <이주한 뒤 현지 여성과 결혼을 희망한다>고 적은 결혼희망서를 작성하여 이주 응모서류와 함께 제출했다. 22세였던 1970년 12월 이주한 직후 먼저 온 이주자의 딸 아야코 씨(71)와 결혼했다.

 재배면적 축소는 올해로 끝난다. 하지만 와쿠이 씨의 시행착오는 계속된다. 

 사장을 맡은 오가타 아키타 마치코 생산자협회(종업원 수 160명)은 올해로 설립 30년을 맞이한다. 계약농가는 현재 약80호, 직거래 회원수는 약 5만 명에 이르는데, 최고일 때보다 감소하는 추세이다. 쌀의 생산부터 가공, 판매까지 다루고 부가가치를 높이려고 떡과 찰밥, 찹쌀떡 등을 발매했지만, 가격경쟁에 밀리고 있다. 쌀가루를 사용한 가공시설도 신설했지만 기대만큼 매출이 많지는 않다. 최근에는 글루텐(밀가루에 함유된 단백질)을 쓰지 않는 음식을 먹는 테니스 선수의 몸 상태가 개선되었다는 뉴스가 화제가 되며 쌀가루로 만든 글루텐 프리 파스타 등의 판매도 시작했다. 

 재배면적 축소 정책의 종료와 농가의 고령화, 그리고 환태평양 파트너쉽 협정(TPP) 참가 이후의 시대를 눈여겨 보는 와쿠이 씨는 지난해 더 수익성 높은 농업 모델을 만들고자 금융기관 등과 주식회사 '미라이 공창 팜 아키타(みらい共創ファーム秋田)'를 설립했다. 지금 주력하고 있는 건 쌀이 아니라 양파이다. 기계를 쓰면 대규모로 재배할 수 있고, 가공용 양파는 수요가 있기 때문에 쌀보다 수익성이 높다고 한다. 마을의 배수 대책도 추진하여 밭농사 환경도 조성해 왔다. 앞으로는 사용하지 않았던 밭을 빌려서 집약적으로 효율적인 경영을 목표로 한다. 

 「꿈과 희망이 있는 농업을 실현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이다. 벼농사만 짓거나, 겉모습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쌀, 쌀이라고 떠들던 오가타촌에서 하는 일에 영향이 있을까?」

 직접 양파밭을 개간하다 머리를 부딪쳐 부상을 당하는 등, 내년에 칠십을 바라보지만 참치처럼 돌진할 뿐이다. 걱정하는 소리도 있지만, 그러니까 투쟁에 몰두하는 것이다. 이번 달 중순, 와쿠이 씨와 양파밭에 방문했다. 눈이 흩날리는 가운데 와쿠이 씨는 밭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설국에서 태어난 건 눈의 무게를 느끼며 살아간다. 이 양파도 차가운 눈 아래에서 자란다. 봄이 지나 양파를 수확할 수있을까.」

 푸른 싹이 흙 아래에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https://mainichi.jp/articles/20171224/ddm/010/040/060000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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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정말 귀한 동영상 자료를 보았다. 


1989년에 어머니가 비디오 카메라로 아버지가 벼를 수확하는 모습을 찍었는데, 그 농사를 이어받은 아들이 약 30년 뒤인 2017년 아버지와 같은 나이가 되어 그 모습을 보며 이런저런 설명을 덧붙인다. 


여기서 재미난 건, 30년 사이에 농기계의 수확 효율이 2배 이상 높아졌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벼를 재배해서 수확하는 모습을 보며 한국의 그 작업을 떠올리니 헛웃음만 난다. 허허허.

규모와 효율이 정말 엄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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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혼농임업은 세계적으로 10억 헥타르에서 행해지는 고대의 농법이다. 나무와 떨기나무를 작물과 결합해 식량안보를 높이고, 기후변화의 영향을 완화시키며, 생물다양성을  늘린다.
  • 인도는 주로 농경지에서 혼농임업을 권장해 전체 면적 가운데 나무가 덮은 면적을 현재 24%에서 33%로 증가시키는 것을 목표로 정했다.
  • 서벵골에서는 논에 유용한 나무를 도입해 작물의 수확량과 다양성을 늘리고, 유기농법을 지지하는 운동을 일으켰다. 
  • 혼농임업은 지표면의 위와 아래에 많은 이산화탄소를 격리시키기 때문에 기후변화의 최고 해결책 가운데 하나로 꼽히고 있다. 

서벵골의 농촌 중심부에서 모진 날씨에 휘둘리는 농민들에게 혼농임업은 그들의 민속에서도 언급될 정도로 오래된 전통이다. 

Bhattadighi의 외진 마을에서, 여성농민 단체가 Paakh Pakhali 또는 “새 환영식”이라 알려진 독특한 의식을 지켜본다. 흙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그 위를 망고와 야자의 잎으로 덮었다.  새로 심은 님나무의 묘목 아래에 놓여 있는, 신화 속에 나오는 흙무더기가 외양간올빼미인 농사의 여신 Bhumi Lakshmi를 상징한다. 신성한 장소는 올빼미와 백로, 왜가리, 황새 및 여러 새들이 그려진 하얀 점토판으로 장식되어 있다.


마을사람들이 새로 심은 님나무 아래에 새가 그려진 하얀 점토판을 장식하고 그들을 논으로 부르고 있다.  Photo by Sudipto Mukherjee.


“우리 논의 식물들은 며칠 안에 꽃이 필 것이다. 우린 풍요로운 수확만이 아니라 여러 올빼미와 새들을 논에 보내 벌레와 쥐를 먹게 해달라고 여신에게 기도한다.”고 Malati Burman 씨는 말한다.

님나무(Azadirachta indica)도 해충을 쫓아내는 강력한 특성 때문에 축제 기간에 농민들에게 공경을 받는다. “님나무의 쓴맛이 나는 잎이 지역에서 준비하는 살충제에 더해지고, 그 가지는 새들에게 쉼터가 된다.”고 Burman 씨는 말한다.

Dinajpur 지구 북부의 Raiganj 구역 안에 있는 이 마을의 농민들에게 논농사는 현대의 산업화된 대규모 단작 방식의 농사가 아니라, 여러 작물의 다양성을 개발하는 일이다. 이곳에서 벼의 모는 숲을 떠오르게 하는 나무와 떨기나무, 덩굴들 사이로 몇 킬로미터나 뻗어 있다.  이 지역에서는 이를 Dhaan Bagan, 즉 논 정원이라 부른다. 

하지만 나무들이 경치를 좋게 만드는 장식품 역할만 하는 게 아니다.  “숲이 줄어들면서 농경지가 되는 과정에서, 그러한 경관이 환경 손실을 크게 보상하고,기후변화를 완화시킨다.”고 중앙 혼농임업 연구소의 Om Prakash Chaturvedi 소장은 말한다. 또한 그는 나무는 토양에 습기를 유지하고, 폭풍과 강풍에게서 침식을 막는 데도 도움이 된다고 한다. 

Dinajpur  남부의  Ramchandrapur 마을에  있는 나무로 둘러싸인 둠벙. Photo by Moushumi Basu for Mongabay.


인도는 주로 농경지에서 혼농임업을 권장하여 전체 면적 가운데 나무가 덮은 면적을 현재 24%에서 33%로 높이는 목표를 세웠다고 Chaturvedi 씨는 말한다. 중앙 혼농임업 연구소의 최신 원격 감지 자료에 의하면, 인도의 일부 174,500평방킬로미터의 토지가 혼농임업을 시행하고 있다. 서벵골만하더라도 Bidhan Chandra 농업대학의  Pratap Kumar Dhara에 의하면, 혼농임업이 1800평방킬로미터에 걸쳐 실시되고 있다.

혼농임업의 혜택은 유엔 식량농업기구(FAO)를 포함하는 여러 기관에서 널리 인정하고 있다. <동남아시아 벼 생산 경관의 혼농임업(pdf)>에서는 이렇게 서술한다. “벼 생산 경관에 나무를 통합시키면 기온을 낮추고, 토양의 투수성을 향상하고, 더 많은 탄소를 저장하며 농장의 생산을 다각화한다. 이를 통해 기후와 시장의 위험을 낮춘다. 이는 개개의 농민과 지역사회뿐만 아니라 그들의 환경에도 더 큰 적응력과 탄력성을 부여한다.”



생물다양성의 혜택


이들 다양한 농경지에서 생물다양성도 번성한다. 10월 서벵골에서 황금빛 노란나비가 목격된 한편, 두 갈래 꼬리를 지닌 검은바람까마귀 (Dicrurus macrocercus)가 조롱박 덩굴의 지주 꼭대기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듯 소란스럽게 울었다. 근처에서는 해오라기가 물을 댄 논을 으스대며 걸어다니며 아직 이삭이 패지 않은 벼 사이로 고개를 숙여 넣었다 뺐다 한다. 검고 하얀색의 찌르레기들은 전청(Sesbania cannabina) 사이를 즐겁게 뛰어다닌다.  

논의 가장자리에 테두리를 만든 것은 파파야와 망고, 바나나 같은 나무였다. 이 나무들은 인근의 Kulik 조류 보호구역에서 찾아오는 새들인 아시아 개똥지바귀(Anastomus oscitans), 가마우지, 왜가리, 해오라기 등에게 서식처를 제공하고, 둠벙에서는 수초를 제공한다.  


논의 말라버린 전청 위에 앉은 검은바람까마귀. Photo courtesy of Chinmoy Das.


“새와 벌레, 나비 들이 비료나 농약이 없어서 우리 논을 좋아하는 것 같다. 우리 논은 토착의 다양성이다.”라고 Dinajpur 북부의 Hatia에서 온 농민 Chinmoy Das 씨는 말한다. 논과 그 주변에 심은 나무와 떨기나무는 다양한 활용성을 혼합하고자 개발된 필수 생태계를 형성하고, 육식 조류에게 훌륭한 쉼터를 제공하기도 한다고 Das 씨는 말한다.

“우리 논의 생태계는 물총새, 황새, 작은 녹색의 벌잡이새랑 해충과 진딧물을 잡아먹어 통제하는 거미와 잠자리, 실잠자리 같은 곤충이 서식한다.”고  Bardhaman 지구의 Abhirampur에서 온 Shourin Chatterjee 씨는 말한다.



고대의 벼 품종

Das 씨처럼 서벵골 11개 지구에 걸쳐 1천 명 이상의 농민들이 토종 품종으로 유기농법을 시행하여, 1180평방킬로미터 이상의 논에 퍼졌다고 서벵골 농업부 농업훈련센터의 Anupam Paul 소장은 말한다. 현대의 다수확 품종 벼와 다르게, 토종 품종은 기후변화로 인한 날씨 변화에 견딜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 Paul 씨는 멸종위기에 처한 420가지 이상의 토종 품종을 부활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고, 현재 300여 가지의 토종 품종을 농민들이 재배하고 있다. 여기에는 향기가 나고 붉은빛인 벼 40가지 계통, 좋은 논에 어울리는 벼 25가지 종류, 다수확용 토종 10가지, 깊은 물에서 견디는 품종 12가지 등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혼농임업을 실천하지 않았으면 토종 벼 재배의 성공담은 불완전하다.”고 Das 씨는 말한다. 그는 논의 벼에 햇빛은 통하도록 하면서 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나무를 심는 계단식 체계의 중요성을 지적했다.  

바나나 나무가 채소와 논의 바람막이가 된다.  Photo courtesy of Chinmoy Das.

Hatia 마을에 있는 Das 씨의 5.7헥타르의 땅에서, 그는 4층의 계단식 “논숲(paddy forests)”을 선보였다. 1층에서는 콩 종류(완두, 강낭콩이나 렌즈콩), 당근, 감자, 여러 종류의 시금치, 토마토, 양파, 마늘 등을 최고 60cm 높이까지 재배한다. 2층에서는 월계수 잎, 강황, 생강, 가지, 겨자, 덩굴성 채소 등을 최고 1.5m 높이까지 이르게 한다.  다음 층에서는 전청, 옥수수, 대나무, 바나나, 파파야, 사탕수수 같이 1.8m 이상 자라는 키가 큰 식물을 재배한다

마호가니와 티크 같은 우뚝 솟는 목재용 나무가 오래된 망고, 바라밀, 님, 모링가(Moringa oleifera) 나무와 다 자란 대나무 곁에서 함께 자라면서 4층을 구성한다.  Das 씨는 덥고 건조한 한낮의 서풍이 토양의 수분을 감소시키고 식물의 증발산량을 높이기 때문에, 그런 식재가 서부와 북부의 농경지에서는 이상적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의 식재는 그런 바람을 막는 것과 함께 논에서 벼가 자라기에 충분한 햇빛을 받을 수 있게 한다.”고 말한다.  

Malda 지구의 Bamongola 마을에서 온 농민  Gaurav Mandal 씨는  다른 식물들이 벼 사이에 드문드문 심어져 있다고 말한다. 그의 1.5헥타르 논에 떨기나무와 채소로 먹는 덩굴이 벼를 심어 놓은 줄 사이의 작은 가설대에 자리하고 있다. 처음에는 마른 대나무로 세웠던 이 가설대는 점차 아가티(Sesbania grandiflora)와 빈랑나무처럼 다용도인 나무의 접목으로 대체되었다. 이 방법으로 채소로 먹는 덩굴이 나무의 줄기에 의지하며 자란다. 


자연 그대로의 거름

지속가능한 벼농사를 이루기 위하여, 지역의 농민들은 스스로 유기 거름을 만든다. Cooch Behar 지구의 Dewanhat 마을에서 온 Madanmohan Aich 씨는 자신의 유기 물거름 제조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되도록 자신의 혼농임업의 농경지에서 채취한 흙과 그가 재배하는 커스터드애플과 님나무 같은 적어도 다섯 종류의 해충 기피성 식물의 잎에 소똥 등을 더한다. 전청, 콩 종류, 개구리밥 같은 콩과식물은 토양의 자연스런 건강을 유지하도록 투입된다. 

Madanmohan Aich 씨가 그의 혼농임업 텃밭에서 덩굴성 채소 사이의 옥수수를 보여준다. Photo courtesy of Rajat Chatterjee.


전청(Sesbania) 모종은 농경지에 서로 60-90cm 간격이 되도록 일정하게 심는데, 벼 모종에서 30-45cm 정도 떨어뜨린다. 그들은 침수된 토양을 견딜 수 있고, 빨리 자라 그 잎이 훌륭한 녹비가 되어 흙을 비옥하게 만든다. 또한 밝은 노란꽃이 피어 벼에서 해충을 끌어오는 “유인 작물”로도 기능한다. 

그릴리씨디아(Gliricidia sepium)도 여기에서 재배하는 효과적인 질소 고정 나무이다. 황형(Vitex negundo)과 님나무처럼 해충을 쫓아내는 나무도 이 사람의 논숲 가운데 일부이다. 한편 바나나 나무는 즙이 많은 줄기 부분과 과일의 껍질로 토양이 비옥해지도록 돕는다. 



유용한 보물상자

이러한 다층적 혼농임업은 판매할 수도 있는 여러 과수와 채소 품종의 저장고이다.  Chinmoy Das 씨는 논두렁을 따라 최소 36가지의 가지를 재배할 뿐만 아니라, 8가지 오크라와 6가지 이상의 콩과 체리까지 재배한다. 이들 모두는 그의 가족에게 식량안보와 영양을 제공하고, 남는 건 시장에 내다팔이 소득을 보충한다.  

이런 혼농임업에서 재배하는 나무들 대부분은 땔감과 가축의 사료 및 목재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비나무(Albizia saman)의 목재는 건축 및 가구용으로 비싼 목재 대신 사용된다. 

빈랑나무가 겨자밭의 경계를 이룬다.  Photo by Moushumi Basu for Mongabay.


여기에서 재배한 식물 중에는 약으로 쓰이는 것도 있다. 상처가 나면 전청(Sesbania)의 잎을 문질러 피가 응고되는 걸 돕는다고 Hatia 마을에서 온 농민 Shantirani Burman 씨는 말한다. 논에 흔한 네가래(Marsilea quadrifolia)는 맛있고 베타카로틴과 칼슘, 철분, 인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뼈 질환과 안과 질환, 빈형 등을 치료하는 데 활용되었다고 Burman 씨는 말한다. 카담(Neolamarckia cadamba)의 잎은 뱀에게 물렸을 때 항독제를 제공하고, 또 벌레에게 물렸을 때에도 유용하다. 이 두 질병은 마을에서 흔히 발생한다. 

Bardhaman 지구의 Pratappur  마을에서 농민들은 적어도 1.8m는 물을 대야 하는 토종 벼가 재배되는 논의 둠벙에서 양식도 시도하고 있다. Abhro Chakroborty 씨처럼 진취적인 농민은 둠벙을 최대로 활용해 메기를 키운다. 그는 200평방미터의 논에서 벼를 60kg 정도 수확하면 메기도 그 정도 나온다고 한다. 

식용 게와 연체동물, 잉어도  둠벙의 부유성 식용 공심채(Ipomoea aquatica)와 유용하고 질긴 매트 잔디(Cyperus tegetum Roxb.) 사이로 넣었다.

또 다른 재미있는 다양화는 Dinajpur 남부 지구의 Gangarampur 구역에서는 부족의 여성들이 주도하여 현재 논과 밀집을 이용해 버섯을 재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양한 가지 품종을 재배한다.  Photo courtesy of Apoorva Sarkar.


미래는 유기농업이다

그러한 혼농임업 성공담에 힘입어, 최소 20개 마을의 거의 100명의 여성과 남성이 토착농업운동을 위한 포럼(Forum for Indigenous Agricultural Movement)을 결성했다. 유기농법의 확산과 토종 벼, 과일, 채소의 보전을 목표로 하는 이 단체에는 청소년들도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1960년대의 녹색혁명은 우리 농민들이 논에서 현대의 다수확 품종으로 대규모 단작을 하도록 이끌었다.”고 Dinajpur 북부의 Palaibari  마을에서 온 22세의 청년 Partha Das 씨는 말한다.

Das  씨는 이것이 값비싼 농약과 화학비료를 필요로 하게 만들었고, 비료와 농약 및 씨앗의 가격이 상승하며 빚을 진 농민들이 자살한 사건에 충격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토착농업운동을 위한 포럼에서 그는 이러한 변화를 직접 목격하고 현재는 유기농업의 미래를 꿈꾸는 83세의 Anima Mandal 씨와 같은 사람들과 합류했다. 

“우리 선조들은 유기적이고, 저비용이며, 집약적이고 건강한 농법을 실천했다.”고 Bhattadighi 마을에서 온  또 다른 열정적인 유기농부 Bablu Barman 씨는 동의한다. “우린 이것이 지속가능하며 여기에 아직 있다고 믿는다.” 건강한 식습관은 시대의 풍조이며, 대도시에는 유기농산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환경과 사회의 동향 및 과제 등을 모두 감안할 때, 혼농임업은 인도에서 증가하고 있는 이러한 수요를 충족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토착농업운동 포럼의 대표 Anima Mandal 씨(왼쪽에서 두 번째)가 회원들과 함께 있다.  Photo courtesy of Chinmoy Das.



Tipu Mandal (왼쪽) , Chinmoy Das (오른쪽) 씨가 다양한 벼 품종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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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에는 한때 10만 종 이상의 토종 벼가 있었지만, 다수확의 저항성이 약한 하이브리드 품종이 저항성이 강한 씨앗을 보호하려는 농민들을 장악했다. 



코라푸트에서 토종 벼를 계속 재배하는 농민의 논. Photograph: Chitrangada Choudhury




인도는 벼의 나라이다. 이 곡식이 인구의 60% 이상에게 일용식을 제공한다. 50여 년 전만 해도놀랄 만큼 다양한 맛과 영양, 해충 저항성 및 지금 같은 기후변화와 자연 재해의 시대에 다양한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을 지닌 10만 종 이상의  품종이 존재했다.

오늘날 이러한 생물다양성의 대부분은 돌이킬 수 없도록 사라졌다. 그 자리는 정부기관에서 강제적으로 장려한 다수확 하이브리드 품종이 차지하고 있다. 그런 “우수한” 품종이 현재 인도의 논 80% 이상에서 재배되고 있다.

인도 동부의 오디샤 주에 있는 코라푸트 지역은 역사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벼를 재배하는 곳의 하나였다. 1950년대의 공식 조사에서 농민들이 1700가지 이상의 벼를 재배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현재 그 지역에서 1400명 이상의 농민들이 남아 있는 이 유전자원을 보호하는 운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 노력은 생태학자 Debal Deb 씨가 이끄는 소규모 보전팀에 의해 닻을 내렸다. Deb 씨가 수집한 1200가지의 품종 가운데 약 200가지가 코라푸트의 농민들에게서 얻은 것으로서, 마을사람들이 현대의 품종을 위해 자신들의 토종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시사한다. 자신이 수집한 품종이 멸종위기에 처한 지역의 품종을 마지막으로 저장하는 일이 아닐까 우려하던 Deb 씨는 멸종을 막기 위하여 농민 몇몇에게 이를 재배하고 서로 씨앗을 나누어 달라고 요청했다.



제공하는 토종 벼의 일부. 대부분의 씨앗이 가뭄이나 침수 저항성 같은 유용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Photograph: Chitrangada Choudhury



몇몇 농민이 문자 그대로 “정부의 쌀”인 “sarkari dhaan”이란 현대의 하이브리드 품종에 대조되는 “desi dhaan”이라 부르는 토종 품종을  포기하지 않은 경제적 이유를 설명한다. 한 농민은 “하이브리드 품종은 그걸 구매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토종은 신경 써서 자기가 씨앗을 보관했다가 다음 농사철에 쓰면 된다.”


다른 농민은 생산비를 절감하고, 토양의 질과 생물다양성에 미치는 악영향을 없애고자 농약의 악순환에서 벗어나고 싶어했다. “하이브리드 품종은 농약을 점점 더 많이 써야 하고, 생산비가 지속가능하지 않게 높아진다”고 농민 Duryodhan Gheuria 씨는 말한다.

Gheuria 씨는 4가지 토종을 재배한다. Kolamali, Sonaseri, Tikkichuri, Kosikamon이 그것이다. “내 가족의 세대와 같다.” Deb 씨의 팀과 만난 뒤, Gheuria 씨는 멸종위기에 처한 Samudrabaali, Raji, Governmentchuri라는 3가지 토종을 더 재배하기 시작했다. 

몇 세기를 거치며 지역의 생태계에 적응한 토종은 해충이나 가뭄 같은 문제에 직면해서 더 잘 견디는 경향이 있다고 농민들은 말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멀리 떨어진 실험실에서 육종된 현대의 품종은 집약적 농업의 깔끔한 방식에 맞게 설계되었다. 그것들은 기계화된 농업에 맟추어, 대량의 화학비료와 예측이 가능하게 공급되는 물을 흡수하도록 재단되었다. 하지만 농민들은 그런 품종들은 점점 예측할 수 없게 되는 날씨에다 조건이 다양한 토지에서 재배할 때는 적합하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삼촌과 조카가 함께 농사짓는 Laxminath와 Sadan Gouda 씨는 강둑을 따라 홍수가 자주 일어나는 그들의 논에서 현대의 품종은 잘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건 거의 자라지 않고, 해충에게 공격을 당하고  … 우린 큰 곤경에 처했어요. 하지만 토종 desi dhaan은 잘 자라니 결코 버리지 않을 겁니다.” 

많은 농민들이 어떤 토종은 현대의 품종보다 태풍에도 잘 견딜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다른 어떤 건 가뭄이나 비가 적게 내리는 조건도 잘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농민들이 토종을 선호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토종은 현대의 키가 작은 품종보다 키가 커서 짚이 많이 생긴다. 이것으로 소도 먹이고, 흙의 덮개로도 쓰고, 지붕을 잇는 데도 활용한다. 

그리고 맛이라는 일반적인 요인도 있다.  Kolaajeera와 Kolakrushna 같은 향이 나는 품종은 밥을 지으면 좋은 향기가 나서 기분 좋게 밥을 먹을 수 있다. 

농민 Gomati Raut 씨는 sarkaari라는 쌀은 채소 반찬을 3가지나 곁들여도 밥이 가장 맛있”고 웃으며 말한다. “우리의 토종 쌀은 밥만 먹을 수도 있다.”



토종 벼 ‘desi dhaan’을 재배하는 농민 Gomati Raut 씨. Photograph: Chitrangada Choudhury



Deb 씨는 여러 가지 벼 품종을 보유하는 일만으로 끝이 아니라고 한다. “토종 벼의 보전은 우리 사회에 어떻게 지속가능성을 구축할지를 묻기 위한 수단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점점 고갈되고 있는 지하수, 척박한 토양, 온실가스 배출 및 농민을 자살로 몰고 가는 농가부채에 직면한 인도가 답해야 하는 문제이다. 

한편 코라푸트의 농민 수백 명은 대안 농업개발 모델을 구체화하고 있다. 수세기에 걸친 지식과 기술을 바탕으로, 이들농민은 200가지의 벼 품종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면서 종자회사와 농약 판매자부터 정부의 보조금과 은행 대출에 이르기까지 외부 기관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있다.

그들은 또한 씨앗을 부활시킴으로써 수확량에 집착하며 사라져가던 음식과 맛, 의례, 영양 및 지속가능성을 부활시키고 있다.  쌀은 칼로리와 전분의 묶음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https://www.theguardian.com/environment/2017/sep/24/why-indias-farmers-want-to-conserve-indigenous-heirloom-rice?CMP=share_btn_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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