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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dge Bank 농장의 낙농가 Kit Dean 씨. 2013년 1월 30일.  사진: Murdo MacLeod



컴브리아 주 노스요크셔 근처의 요크셔 계곡 국립공원의 귀퉁이에 있는 Kit Dean 씨의 낙농장에 도착하기 몇 시간 전, 그는 자신의 사료 공급업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나는 다시 연기해야 했다"고 그는 말한다. 수천 파운드에 달하는 청구서가 미납 상태로 남아 있다. "그들이 계좌를 정지시켜 놓았다"고 그의 아내 Jane 씨가 퉁명스럽게 말한다. "겨울을 나기 위해 필요한 사료를 살 여유가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그들의 멋진, 판석을 깐 부엌의 식탁에 앉았다. 차와 집에서 만든 팬케이크가 놓여 있고, 창 밖으로 끝내주는 전망이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재정 전망은 전혀 아름답지 않다. Dean 씨는 90마리의 젖소와 약 300마리의 양을 30만 평의 농장에서 사육하고 있다. 모든 부분에서 전방위적으로 압박을 받고 있다. 그들이 직면한 과제의 핵심은 경우에 따라 농민의 친구가 되거나 적이 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영국의 날씨이다. 지난 12개월 동안은 적일 뿐이었다. 비 이야기와 흐린 날씨와 또 비가 왔다. "끔찍한 여름을 맞을 수 있다"고 Kit 씨가 말한다. "그러나 끔찍한 겨울과 봄과는 똑같지 않을 것이다. 난 이런 끔찍한 상황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여름철에 농지에서 수확한 풀을 저장했다가 혹독한 겨울철에 가축에게 먹이는 저장목초를 시작으로 자신의 문제를 늘어놓았다. "저장목초의 첫번째 수확은 괜찮았다"고 그는 말한다. "두번째 수확은 매우 늦어지고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게다가 소도 제대로 방목할 수 없었다. 소들을 7월에는 방목해야 하는데, 너무 습했다. 그리고 그들을 제대로 먹이지 못하면 당연히 우유도 제대로 생산할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국제 시장의 곡물가격이 상승했기 때문에 비싸진 사료를 평소보다 더 많이 들여와야 했다. "사료는 1톤에 50~60파운드까지 올랐다." 가축 한 마리당 1년에 몇 톤씩 소비하는데, 그것이 주요한 비용이다. "그 결과 사료 가격 때문에 우유 가격이 여전히 생산비 이하로 떨어져 있다."

sheep on Yew Tree farm컴브리아 Yew Tree 농장의 양.  사진: Murdo MacLeod

한편 양 가격은 붕괴되었고, 슈말렌베르크 바이러스라는 질병과 간흡충이란 기생충이 골치아픈 상황이다. Kit 씨는 진흙 묻은 장화를 신은 전형적인 영국의 농민이다. 속이 꽉 차고, 결연하며, 자부심이 강하다. 처음에 그는 이 기사에 이름을 싣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는 자신이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이게 흔한 상황이 아님을 인식하고 있다. 그는 단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상황들이 닥쳐와서 발생한 피해자일 뿐이다. "소비자들은 지금이 얼마나 힘든지 모른다"고 그는 말한다. 

영국 농업은 매우 심각한 위기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다. 첫 달의 가뭄 이후, 2012년은 잉글랜드 역사에서 가장 습한 해이자 영국에서 두 번째로 습한 해가 되었다. 초여름에는 홍수가 났다. 한여름에는 해가 나지 않아 저장목초의 양이 40% 정도 떨어졌다. 농사철에는 다시 비가 내렸다. "이번 위기는 광우병과 구제역에 비견할 만하다"고 농민이자 농업 전문가인 Donald Curry 씨는 말한다. 그는 2001년 구제역이 발생한 이후 식량과 농업에 대한 정부 자문위원장을 역임했고, 지금은 무소속 의원으로 있다. "기후가 온 나라에 영향을 미치고 있고, 일부는 소결핵과 슈말렌베르크 바이러스로 힘겨워 하고 있다." 사료와 연료 같은 투입재로 인한 가격 압박도 있다. "올해와 내년에 농민들에게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농업 자선단체에서는 매우 심각한 문제로 보고 있다."

크리스마스 전에 자선단체에서 제출한 긴급보고서에 대응하여 웨일즈의 왕자는 클래런스 하우스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2010년에 그는 기업에게서 모은 돈을 사용하여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왕자의 농촌기금(PCF)을 설립했다. "왕자가 자선단체를 설립하기를 바란 이유 가운데 하나는 긴급자금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왕자의 농촌기금 이사 Tor Harris 씨는 말한다. 그 회의에서 15만 파운드에 달하는 긴급자금이 위기에 처한 농민에게 분배되었다. 그것은 영국의 가장 큰 지주인 웨스트민스터 공작이 낸 15만 파운드와 대등한 액수이다. Waitrose, Asda, HSBC와 McDonald를 포함하는 협력 기업들은 네 곳의 자선단체에서 분배한 수백만 파운드의 약 절반에 이르는 긴급자금을 기부했다. 

150년 전에 설립된 왕립 농업자선기관(RABI)은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곳은 노인과 장애인을 농업으로 연결시키는 일을 돕는 복지 자선단체로 활용되었다. 현재 그들의 일은 긴급한 고난에 처한 사람들까지 포함한다. "지난해에 전화상담이 엄청나게 급증했는데, 그들 대부분은 농민이었다"고 왕립 농업자선기관의 Philippa Spackman 씨는 말한다. 작은 가족농과 특히 소작농이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그 이야기는 결코 한 가지가 아니다. 두세 가지가 최악의 상황으로 함께 닥칠 것이다. 그리고 그 상황은 급격할 수 있다. 콘월에 있는 우리의 복지 담당자는 먹을 게 없는 사람들에게 차에서 샌드위치를 나눠주기까지 했다. 빠듯한 수입으로 밀려난 농민들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4월에 도입될 국가의 혜택이 변화하는 것과 함께 그들은 더욱 심한 고통을 당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들은 소고기로 가득한 냉동고를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세제를 살 돈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학교 교복 같은 기본적인 것을 위해 지불하고 있다." 문제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Spackman 씨는 말한다. "우리는 전화가 걸려오는 숫자가 지금과 같은 속도로 상승한다면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을까 우려하고 있다" 왕자의 농촌기금도 이 문제를 인정한다. "그것이 긴급자금 100만 파운드를 마련하려고 사람들에게 전화하는 이유이다"라고 Harris 씨는 말한다.

Kit와 Jane 씨는 왕립 농업자선기관의 도움과 복지 혜택에 고마워하는 농민 부부의 하나이지만, 요청하는 것이 싫었다고 한다. Kit 씨에게 다른 무엇을 하려고 찾아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역시 그는 평생 농장에서만 일한 가족농이었다. "내가 또 뭘 하겠는가?" 그는 말한다. "그곳이 당신이 아는 모든 것이면, 달리 어디로 가겠는가?"



영국의 경관을 가로지르는 여행  

농업은 현재 의기소침한 사업일 수 있다. 노스 요크셔 동부의 노샐러턴에서 4세대를 이어 농사를 짓는 67세의 Edward Dennison 씨를 만났다. 현재 100만 평의 농장을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어제까지 우리는 젖소와 양을 사육하고 농사도 지었다"고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그는 말한다. "현재 우리는 양만 키우고 농사를 짓는다." 젖소는 모두 팔아 버렸다. 그 가족은 사업적 측면에서 낙농업을 그만두었다.

"낙농은 10~15년 전에는 괜찮았지만 지금은…" 그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사료 가격이 너무 부담스럽다. 저장목초는 충분한 양이 있지만, 젖소의 우유가 충분히 좋은 품질이 아니다."

Flooded farm land노스 요크셔의 Aysgarth에 있는 물에 잠긴 들판.  사진: Murdo MacLeod

우리는 아직 새로운 주인들이 차지하기 전인 우사를 보려고 밖으로 나갔다. "60 평생 이런 안 좋은 날씨는 처음이다"라고 Dennison 씨는 말한다. 멈추어서 농장 앞의 들판을 바라보았다. "저기가 겨울 밀의 밭이었다"라고 그는 말한다. "저기가 원래 푸르러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 앞에는 갈색의 진흙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쟁기질을 하지도 못한 밭이 세 군데나 있다. 물에 잠긴 들판을 보는 건 이제 지겹다." 영국의 밀 수확은 약 15% 떨어졌고, 그 대부분의 품질도 저하되었다. 2011년, 수확의 90%는 밀가루로 제분할 만큼 충분히 높은 등급이었다. 2012년에는 단 10%였다. 제분업자들은 나머지를 수입해야 했다. 

Edward 씨는 아들이 사업적 측면을 좋아하기 때문에 소를 들이려 한다고 이야기한다. "경제적 감각이 우리가 낙농을 할 수 있도록 한다면 달라질 수 있다. 이제는 세계 시장이고 우리는 비용이 많이 드는 나라이다. 유제품 생산의 단 6%만가 세계 시장에서 실제로 거래되지만 그것이 세계의 가격을 결정한다."

Dennison 씨와 그의 가족은 머릿속에서 걱정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산업의 분위기가 매우 비관적이라는 것을 Farm Crisis Network에 대한 자원봉사자로 일하면서 알고 있다. 그는 전화로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민들에게 조언을 제공하고 있다. "내가 아는 한 농민은 사료를 살 수 없어서 그의 소들을 팔아야 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말한다. "농업은 매우 외로운 일일 수 있다. 대개 혼자서 날씨와 맞서 일한다. 꾸준히 밀린 일을 해야 한다. 외로움과 소외를 인정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Caroline Watson
Herdwick 양과 함께 서 있는 Caroline Watson 씨.  사진: Murdo MacLeod

이런 비통한 이야기에 대한 일반적인 대답은 농민은 다각화해야 하고 기업가가 되라는 것이지만, 그것이 늘 해결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컴브리아에 있는 동안, Caroline Watson 씨는 그녀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으며 여전히 실패하고 있다. 그녀와 남편 John 씨는 Yew Tree 농장을 가지고 있다. 이곳은 르네 젤위거가 출연한 Miss Potter에 나오는 Beatrix Potter 씨가 차지하기도 한 내셔널트러스트의 소유이다. 85만 평 가운데 30만 평 이상은 아름다운 바위와 폭포가 있는 국립공원이다. 

이 부부가 10년 전 이곳에 왔을 때 마음에 들었던 이유가 가축에게만 적합한 땅이라는 점이었다. 그들은 약 90마리의 Galloway 품종의 소와 몇 백 마리의 Herdwick 품종의 양을 사육했다. "우리는 그들의 먹이를 최대한 풀로 주어서 Galloway에 들어가는 모든 투입재 비용을 뽑아보자고 결정했다." 마찬가지로, 비록 3살까지 번식하지 않더라도 Herdwick 양을 선택했다.

그것이 시장성 있는 배경과 함께 프리미엄 상품이 되었다고 그녀는 말한다. . 풍경, 짧은 유통거리, Beatrix Potter 협회가 그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육류사업을 시작했다. 그들은 B&B 숙박시설을 제공하고, 심지어 길거리 음식으로 지역의 명승지에서 최고급 햄버거를 불티나게 팔았다. 그러나 그들은 기후와 경기 불황에 타격을 받았다. "2011년 우린 3천 더미의 건초를 마련했다"고 그녀는 말한다. "지난해에는 하나도 만들지 못했다. 게다가 저장목초의 품질이 충격적이었다. 습기 때문에 썩기 시작했다." 업계의 다른 사람들처럼 그들은 사료를 보충해야만 했다. "이것이 지난해부터 우리에게 타격을 주기 시작했다. 업자들이 육류사업에 대한 세력을 강화하면서 B&B 예약률도 떨어졌다. 그들은 적은 비용으로 모든 걸 바란다."

이 농민들과 이야기하면서 하나의 주제가 다시 떠올랐다. 식품 공급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소비자의 부재. "농민에 대한 많은 지원이 있다"라고 Edward Dennison 씨는 말한다. "구매자들은 많은 공감을 표현한다. 그러나 그렇게 가고 나서 가격만으로 구매한다"고 Kit Dean 씨는 동의한다. "지난해 우유 가격이 떨어졌을 때 시위를 하여 몇몇 사람들이 눈을 떴지만 가격 하락을 멈출 수 없었다." 또는 Caroline Watson 씨가 말하듯이, "우리는 좋은 먹을거리를 구매하여 영국 농업을 지원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두 번째 휴가를 포기하자."

그들이 지적하는 명백한 사례의 하나는 양고기이다. 처음에 날씨 때문에 사료 상황이 안 좋으면서 평소보다 불임인 양이 늘어났고, 이에 따라 판매할 가축이 적어졌다. 방목하기가 안 좋아서 더욱 느리게 살이 쪘다. 그리고 농민들은 갑자기 뉴질랜드산 수입 양고기와 유로존 위기에 따라 유럽의 수요가 감소하며 공급과잉이라는 두 가지 악재에 타격을 입었다. 지난 몇 개월에 걸쳐, 전체 양고기에 대한 농장 가격은 25%까지 떨어졌고, 양의 다리는 17%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전국 농민연합은 슈퍼마켓에서 양고기의 가격이 단 2%만 떨어졌다고 이야기한다. 평균적으로 농민들은 그들이 판매하는 양고기마다 29파운드씩 손해를 보고 있다. Sainsbury를 포함한 일부 유통업체는 그들이 지불하는 가격을 높이겠다고 약속했지만, 대부분의 대형 유통업체는 농민들에게 수익을 나누지 않는다고 비판받고 있다. 

Edward DennisonCrow Tree 농장의 농민 Edward Dennison 씨.  사진: Murdo MacLeod for Observer Food Monthly

세계적 관점에서 역설적인 점은 지금이 농업의 급속한 발전 시기라는 것이다. 인도와 중국에서 중산층의 등장하며 고품질 식품에 대한 수요의 증가와 함께, 국제 의제에 대한 지속가능한 농업을 강화해야 한다. "중장기적으로는 매우 건강하다"고 HSBC의 농업 수장이자 스스로 가족농인 Allan Wilkinson 씨는 말한다. "단기적으로는 훨씬 힘들다." 그러나 공포는 상황이 좋아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미 농업을 떠나고 소수만 가족농을 이어받아 영국에 충분한 농민이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케직 근처의 Borrowdale에 있는 다방에서 농촌 자선기금에서 지원을 받은 Hill Farming 승계 계획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17~24세의 튼튼한 컴브리아 사람들이 찻잔을 앞에 두고 앉아서 서로 너무 잘 아는 듯이 까불고 있었다. "승계에 대한 통계는 구하기가 어렵다"고 농대를 나와서 2년 과정의 직업연수를 받는 농민 네트워크의 Veronica Waller 씨는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농민들이 자신의 아들과 딸에게 물려받도록 하는 일이 어렵다고 하여 시작했다. 육체적으로 힘들고 돈벌이가 되는 일이 아니다."

Matthew Alexo양치기 개와 함께 있는 견습생 Matthew Aleixo 씨.  사진: Murdo MacLeod

방에 있는 사람 가운데 소수만 가족농에서 왔지만, 그들 대부분은 어려서부터 학교가 방학을 했을 때 농장에서 일했다. "내 친구는 그런 일을 한다고 나를 바보라고 부른다"고 21세의 Matthew Aleixo 씨는 말한다. "그러나 난 이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견습생들은 농사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은 어두운 겨울 아침에도 일찍 일어나는 걸 신경쓰지 않는다. 그들은 오래 일하는 것도 신경쓰지 않는다. 그들은 모두 학교가 그들에게 효과적이지 않았다는 데에 동의한다. "학교에서 좋지 않았다는 것이 실제로 이 과정에 존재하기 위한 자격이다"라고 건조하게  Veronica Waller 씨는 말한다. Bobsy라고 불리는 다른 소년은 말한다. "거긴 폭력단이다.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갈 수 없다."

지금은 영국 농업의 암흑기이다. 과제는 진정 심각하다. 지독한 기후와 세계 경제의 압박, 가축의 질병이란 최악의 상황이 맞물려 지금까지의 기억 가운데 가장 혹독한 노동조건을 만들고 있다. 그리고 아직 활기차고 번화한 농업 부문은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저렴하고 양질의 먹을거리의 유용성에 달려 있다. 그것은 21세기 영국 식량안보의 견고함이다. 현재 우리는 Matthew와 Bobsy와 그 친구들 같은 열정이 필요하다. 당연한 소리이지만, 그들은 우리의 미래를 위한 희망이다. 

왜 농업 위기가 더 비싼 식량가격을 뜻하는가

식량가격의 상승은 피할 수 없다. 문제의 핵심은 영국 슈퍼마켓의 작동 방식과 그들이 어떻게 세계 식량시장과 상호작용하는지에 달려 있다.

잔인한 사실은 이것이다. 영국에서 수확량이 떨어지고 있다. 밀에서 14% 부족한 것은 일부에 불과하다. 수확한 밀의 저조한 품질이 제조업자들이 부족량보다 훨씬 많은 양을 해외에서 찾도록 하고 있다. 예를 들어 1월에 Hovis사는 100% 영국산 밀을 사용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렸다. 마찬가지로 같은 달에 McCain사는 전년 대비 영국의 감자 재고가 약 20%로 떨어지자 100% 영국산 감자를 사용하겠다는 약속을 깨버렸다. 완두콩 수확량은 40% 떨어졌다. 일부 사과 품종은 30~50% 떨어졌다. 그리고 그건 계속되고 있다. 

충격은 2배이다. 적은 수확은 높은 가격을 뜻한다. 필연적으로 영국에서는 평소보다 더 많은 부족량이 생길 것이고, 유통업체는 해외로 눈을 돌릴 것이다. 대형 유통업체의 문제는 중국, 인도, 브라질 같은 새로운 식량시장의 성장과 함께 국제적으로 생산된 식량에 대한 수요가 훨씬 커질 것이라는 점이다. 

영국의 슈퍼마켓 구매자들은 가격을 좌우하곤 했다. 그들은 현재 치열한 국제적 경쟁을 맞이하고, 그들은 점점 가격이 자신을 좌우할 것임을 발견할 것이다. 그들은 소비자에게 그 비용을 전가해야 할 것이다. 

한편, 인위적으로 저렴한 먹을거리의 시대를 유지하기 위한 그들의 필사적인 시도는 영국에서 더 많은 농민이 농업에서 밀려나도록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슈퍼마켓들은 해외에서 더 많은 공급자를 찾아야 할 것이다. 농업 위기에서 대형 유통업체의 역할과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 것에 대한 그들의 실패는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것은 소비자가 곧 더 큰 부담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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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주권은 자신의 식량체계를 정의하기 위한 사람들의 권리이다.  


식량주권은 세계의 식량체계를 지배하는 시장과 기업의 요구보다 식량을 생산, 분배, 소비하는 사람들이 식량체계와 정책을 결정하는 중심에 놓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운동은 많은 농민과 소농, 목축민, 어민, 토착민, 여성, 농촌 젊은이, 환경단체 들에 의해 지지를 받고 있다. 

식량주권의 여섯 가지 원칙:

  1. 인민을 위한 식량에 초점을 맞춘다: 건강하고 문화적으로 적합한 식량권은 기본법의 요구에 기반을 둔 식량주권이다. 각 지역과 국가에게 다양한 식량생산을 지원하는 정책을 보장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식량은 단순히 이윤을 위해 거래하거나 투기하는 상품이 아니다. 
  2. 식량 공급자를 중시한다: 많은 소농들이 기업의 지주와 정부의 폭력과 소외, 인종차별에 시달리고 있다. 인민은 광산 개발이나 농업 관련 산업에 의해 자신의 땅에서 쫓겨나곤 한다. 농업노동자들은 심각한 착취와 채무에 의한 노동에 직면할 수 있다. 남반구에서는 식량의 대부분을 여성이 생산하지만 그들의 역할과 지식은 무시되고, 자원에 대한 권리와 노동자로서의 권리는 침해된다. 식량주권은 식량 공급자가 존엄하게 살며 일할 수 있도록 그들의 권리를 강력히 주장한다.
  3. 식량체계를 지역화한다: 식량은 우선 지역사회를 위한 것이어야 하고, 거래는 부차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식량주권에 따라서 거리가 먼 시장보다 지역과 지방에 공급하는 것을 우선시하고, 수출 지향의 농업은 거부된다. 보조금과 관세를 통하여 개발도상국이 자신의 농업을 보호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유무역' 정책은 식량주권에 반하는 것이다.
  4. 지역에 통제권을 준다: 식량주권은 영역, 토지, 목초지, 물, 씨앗, 가축, 어족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지역의 식량 공급자들에게 주어 그들의 권리를 존중한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그리고 환경적으로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다양성을 보존하면서 그러한 것들을 활용하고 공유할 수 있다. 지적재산권 제도나 상업적 계약을 통하여 그러한 자원을 민영화하는 것은 대놓고 거부한다. 
  5. 지식과 기술을 구축한다: 지역화된 식량체계를 위한 기술과 지식을 개발하고 퍼뜨리는 식량 공급자의 능력을 쇠퇴시키는 유전자조작과 같은 기술은 거부된다. 대신 식량주권에서는 농업 지식과 기술의 개발을 지원하는 적절한 연구를 요구한다. 
  6. 자연과 함께 일한다: 식량주권은 자연자원을 보호하고 온실가스 배출을 감소시키는 생산과 분배 체계를 필요로 한다. 이를 위해 환경을 손상시키고 그에 거주하는 생물들의 건강을 해치는 에너지 집약적인 공업형 방법을 피한다. 


세계 곳곳의 운동

세계 전역에 걸친 인민의 운동은 식량주권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비아 깜페시나는 70여 국가에서 2억 명 이상의 중소농, 무토지 농민, 여성, 토착민, 이주자, 농업노동자 들이 함께하는 가장 큰 사회운동 단체이다. 

수많은 지역적, 국가적 성공담이 있다. 2012년 세계발전운동의 운동가인 Heidi와 Miriam 씨가 베네수엘라에 갔다 -식량주권을 국가의 정책으로 받아들인 소수의 국가 가운데 하나. 아래는 Caracus 중심가에 있는 도시텃밭의 사진이다. 



현행 식량체계의 무엇이 문제인가?

세계은행과 IMF가 감독하는 구조조정 프로그램에 따라 구현되는 신자유주의 정책은 남반구의 정부들에게 농민에 대한 지원(연구와 교육사업 같은)을 삭감하고, 곡물 비축과 같은 식량가격의 안정을 위해 설계된 체계를 해체하도록 요구한다. 이는 더 많은 빈곤층과 기아자를 낳았다.

이와 함께 대형 기업이 식량체계에 대한 통제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한줌의 대기업들이 식량에 대한 생산, 가공, 유통, 영업, 판매를 지배한다. 이러한 기업들에게 집중된 권력은 경쟁의 효과를 없애거나 그들의 공급자들에게 악조건을 야기한다.

식량주권과 식량체계에 대한 더 많은 정보를 원한다면 여기나 여기를 참조하라.


유럽의 운동


유럽 포럼에 참석한 사람들을 환영하는 오스트리아 대표단


2011년 유럽의 34개국에서 4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오스트리아에서 개최된 식량주권을 위한 유럽 운동에 참석했다.

목적은 지역의 역할을 강화하고, 공통의 목표를 서로 이해하고 구축하여 의제를 설정하며, 이미 유럽에서 진행되고 있는 식량주권 투쟁을 격려하고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자는 것이었다. 

2011년 이후 좋은 먹을거리 행진과 같은 모임과 시위를 열었다. 여기에는 시민들과 젊은이, 농민들이 함께 참석하여 유럽 사회에 친환경적이고 공정한 농업정책만이 아니라 공동농업정책의 민주적 개혁을 시행하라고 요구했다.



식량주권을 요구하는 생산자와 활동가들이 영국에 모였다 (사진: War on Want)


먹고, 재배하고, 저항하라

영국 전역의 마을마다 지역사회의 과제로 지역 식량체계의 회복을 포함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지역 공동체의 텃밭, 생활협동조합, 지역사회의 지원을 받는 농업, 대형마트 반대 운동, 지역 먹을거리 운동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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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woman farmer in Ganta, Liberia. Photo: UNMIL/Christophe Herwig


4 March 2013 – Governments must adopt food security strategies that empower women as this is an effective way to reduce hunger and malnutrition, a United Nations expert said today.

“Sharing power with women is a shortcut to reducing hunger and malnutrition, and is the single most effective step to realizing the right to food,” the Special Rapporteur on the right to food, Olivier De Schutter, told the UN Human Rights Council in Geneva.

“Family agriculture has become gradually feminized, with men frequently moving away from the farm in search of work. Yet the women who increasingly face the burden of sustaining farms and families are too often denied the tools to thrive and improve their situation – on and off the farm.”

While Mr. De Schutter welcomed initiatives to empower women such as quotas in Indian public worker schemes, he warned that there are multiple barriers to female participation in society which need to be addressed.

“Women will not benefit from female quotas in work schemes if no provision is made for childcare services,” he said. “Individual measures will not suffice – gender roles and responsibilities must be challenged holistically and systematically.”

Mr. De Schutter said one of the measures that must be implemented immediately is the removal of all discriminatory laws and practices that prevent women from accessing farming resources such as land, inputs and credit.

He also called for women to be relieved of the burdens of care responsibilities in the home through the provision of adequate public services such as childcare, running water and electricity. Taking care of children and fetching water can amount to the equivalent of 15 per cent of the gross domestic product (GDP) in middle-income countries, and as much as 35 per cent in low-income countries, he said.

The right to education is also vital, Mr. De Schutter said, as data shows that from 1970-1995 as much as 55 per cent of the reduction in hunger can be attributed to improvements in women’s situation in society.

“If women are allowed to have equal access to education, various pieces of the food security jigsaw will fall into place,” Mr. De Schutter said. “Household spending on nutrition will increase, child health outcomes will improve, and social systems will be redesigned – for women, by women – to deliver support with the greatest multiplier effects.”

The Special Rapporteur called on countries to actively redistribute traditional gender roles and responsibilities while still being sensitive to the constraints of women. Less labour-intensive assets such as poultry can be provided to them, he said, along with extensive asset management and social development training.

“There is a fine line between taking into account specific constraints and reinforcing gender roles and stereotypes,” he said. “Food security strategies should be judged on their ability to challenge gender roles and to truly empower women. Gender sensitivity is important, but is not a substitute for empowerment.”

Independent experts, or special rapporteurs, are appointed by the Council to examine and report back on a country situation or a specific human rights theme. The positions are honorary and the experts are not UN staff, nor are they paid for their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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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rn seed prices went up by 259 percent between 1995 and 2011, according to a new report out Tuesday.



The Supreme Court will hear arguments Feb. 19 in "Bowman v. Monsanto Co.," a landmark court battle that has pitted farmer Vernon Hugh Bowman against the international agriculture corporation over the issue of seed patents. In anticipation, the Center for Food Safety and the Save Our Seeds campaigning groups released a report Tuesday detailing similar cases, titled "Seed Giants vs. U.S. Farmers."

According to the report, Monsanto has alleged seed patent infringement in 144 lawsuits against 410 farmers and 56 small farm businesses in at least 27 U.S. states as of January of 2013. Monsanto, DuPont and Syngenta together hold 53 percent of the global commercial seed market, which the report says has led to price increases for seeds -- between 1995 and 2011, the average cost of planting one acre of soybeans rose 325 percent and corn seed prices went up 259 percent.

Seed patents are a type of biological patent, which are legally protected inventions or discoveries in biology. In the case of Monsanto and other major corporations, that often means patents on genetically modified seeds. In recent years, these and other companies have taken farmers to court for alleged seed patent infringement -- meaning they planted seeds without paying for them.

The issue gets murky when you consider that if a farmer plants legally purchased seeds, then replanted seeds culled from the resulting crop, he is committing what some companies consider a crime.

In the case of "Bowman v. Monsanto Co.," Bowman allegedly replanted second-generation seeds that had been purchased legally from a licensed Monsanto distributor instead of buying new seeds. Monsanto claims that in doing so, Bowman was essentially stealing its product. Monsanto has won battles in several lower courts.

Monsanto argues that its patents protect its business interests and "provide a motivation for spending millions of dollars on research and development of hardier, disease-resistant seeds that can boost food yields," The Guardian writes.

But Bill Freese, an author of the report and senior scientist at the Center for Food Safety, says in a press release that claims that the patents create better crops are hogwash.

"Most major new crop varieties developed throughout the 20th century owe their origin to publicly funded agricultural research and breeding,” Freese writes.

Crop diversity has gone down dramatically in recent years, which some attribute to the emergence of agricultural mega companies. The report notes that 86 percent of corn, 88 percent of cotton and 93 percent of soybeans farmed in the U.S. are currently genetically-engineered stra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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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유전자조작 목화의 도입과 농민의 자살률 증가라는 사실이 어느 정도 논리적이긴 하지만 모든 원흉이 유전자조작 씨앗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글이다. 나도 이 글을 읽기 전에는 인도에게 유전자조작 씨앗은 재앙만 가져왔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달리 생각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인도의 자살률은 1시간에 15명 정도로 한국과 마찬가지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고 한다(http://blog.daum.net/stonehinge/8727727). 이렇게 높은 자살률이 꼭 GM 씨앗 때문에 발생한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GM 씨앗의 비싼 가격과 그것이 흉작으로 이어졌을 때 발생하는 부채 문제는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GM 씨앗이 도입되면서부터 자살률이 높아지고 그것만 제거하면 자살자들이 줄어든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GM 씨앗이 사라져도 농민들은 정부의 정책과 사회구조 등에 따라 생활에 압박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이 자살로 이어지는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GM 씨앗=악의 씨앗이라는 단순한 논리구조는 철회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인도의 농업과 농민에게 GM 씨앗의 어떠한 점이 문제가 되는지 그걸 집중적으로 파고들어갈 수밖에 없다. 아무튼 아래의 글을 통해 인도의 농업과 농민의 자살 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접할 수 있어서 좋았다. 농민의 빈곤 문제가 GM 씨앗 이전에 놓여 있으리라... 


추가로 얼마전 인도에서 집단으로 성폭행을 당한 젊은 여성들의 문제도 무시할 수 없는 사회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인도 특유의 카스트라는 계급제도의 문제, 빈곤, 성차별, 부정부패 등등이 인도의 젊은이들, 특히 젊은 여성들에게 지옥문을 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http://blog.daum.net/stonehinge/8727729). 인도라는 사회에 대한 환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것이 있다면 버리자.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은 마찬가지다. 인도에 간다고 제3의 눈이 열리고, 깨달음을 얻고 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인도 사람들이 다들 성자고, 영적인 존재들인 것도 아니다. 인도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하루하루 노동하며 살아가는 곳이다. 실상을 제대로 보고 해결책을 모색할 때, 그때 깨달음이라는 것도 찾아올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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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i Kisol  마을에서 목화를 심을 밭을 준비하려고 쟁기질하는 인도의 농민들.



그것은 유사 이래 자살자의 거대한 파도라고 부른다. 

인도에서는 부채에 짖눌린 농민이 30분마다 자살한다고 인권활동가가 말한다. 대금업자와 해로운 농업정책이 유전자조작 목화 씨앗의 도입과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Charles 왕세자는 “인도에서 어느 정도 GM 작물의 흉작에 기인하는 소농의 자살률은 참으로 소름끼치고 비참하다”고 언급했다. 영국의 Daily Mail은 이를“GM의 대량학살”이라고 부른다.

GM 씨앗만 자살로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농민의 자살이란 문제는 단지 농민만의, 또는 농촌만의, 또는 마을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훨씬 폭넓은 정치경제적 문제다”라고 요크대학의 교수 Raju Das 씨는 말한다. 


농민에 집중되면서 일반인에 비해 2배나 높은 자살률을 보이는 젊은 인도 여성들의 자살 위기는 잊혀졌다.

농민의 자살 문제는 1995년 인도 남부의 마하라슈트라에서 자살하는 농민들이 많아진다는 보고가 나온 뒤 처음으로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인도의 다른 주에서도 농민의 자살이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에 기반을 둔 몬산토에서 인도 농민에게 Bt 목화로 알려진 유전자조작 목화 씨앗을 팔기 시작한 7년 뒤 —2002년— 까지는 아니었다.  그 씨앗은 살충 물질을 생산하여 더 많은 수확량을 올리지만, 일반적인 목화 씨앗보다 10배 이상 비싸다. 

몇 년 안에, 농민이 씨앗 값을 갚지 못해 부채에 시달리다가 돈을 갚지 못해 자살한다는 이야기가 들리기 시작했다. 또 다른 이야기로는 GM 작물이 흉작이 들어 부채를 만들어 자살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반박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A 2011년 인권과 세계정의를 위한 센터(CHRGJ)에서 발표한 보고서에서는 인도의 농촌 농민에 대한 값비싼 유전자조작 씨앗의 판매가 자살 위기를 상승시키는 핵심요소라고 주장했다.

“다국적 농산업 기업들은 ... 적극적으로 인도 농업에 유전자조작 씨앗을 도입하는 걸 촉진함으로써 ... 인도 시장의 새로운 세계화를 통해 이윤을 얻었다”고 보고서는 말한다. 

그러나 2008년, 개발도상국에서 기아를 끝내는 걸 목표로 하는 64개국의 정부와 민간재단, 해외와 국내 단체의 연합인 국제 식량정책연구소는 완전히 다른 결론을 내렸다. 

“인도에서 Bt 목화가 농민의 자살을 이끄는 원흉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부정확할 뿐만 아니라 잘못된 주장이다”라며, 인도에 Bt 목화가 도입되면서 실제로 수확량이 증가하고 농약의 사용이 약 40% 정도까지 감소하는 효과가 있었다고 보고서에서 이야기했다. 

2009년, 코넬대학 농정책경제학과의 교수 Ron Herring 씨는 많은 인도 농민들이 구식 농법과 불규칙한 장마비에 의존하는 일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 ‘흰 황금’의 유혹은 강력하다”고 적었다. “물이 없으면, 목화 농사는 흉년이다. 관개용수 없이 메마른 황토에서는 위험성이 너무 높다. 농민들은 이를 안다; 대안은 종종 더 악화된다. 목화는 가족의 재정적 상황을 변화시킬 잠재력을 지닌 유일한 환금작물이지만, 상당히 위험하다.”

Das 씨는 “영국인이 떠난 지 60년이 지난 지금도 인도 농지의 70%가 장마비에 의존한다. 이는 장마가 찾아오지 않고 비가 내리지 않으면 가뭄이 들고, 정부에서는 관개시설에 충분한 투자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농민들이 많은 압박을 받고 있다고 한다: 정부 보조금의 상실; 값싼 외국산 수입품; 건강보험의 꾸준한 민영화; 치솟는 교육비와 기초생계비의 증가.

Herring 씨는 그리고 만약 인도 농민들이 GM 씨앗이 비경제적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왜 그들은 그것을 포기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소농은 시장경제의 교활한 대표들에게 취약할 뿐만 아니라 단순하고 아둔한 존재로 구성되어 있다”고 Herring 씨는 적었다.

“이 이야기에서는, 지난 10년 동안 인도의 목화 농민들이 속아왔다는 것을 알아내지 못했거나, 이익을 냈는지도 계산할 수 없어서 속았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서 놀라운 점은 인도의 농민들 —그 이야기에서 종종 소농으로 낙인을 찍는— 이 그러한 높은 수준의 무능력한 상태로 오랫동안 생존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도에서 자살은 전국에 만연한 위기이다.

토론토의 세계건강연구를 위한 센터의 센터장이자 인도의 자살률에 대한 공동연구자인 Prabhat Jha 씨는 일반인 가운데 젊은 여성의 자살률이 더 높다는 점이 특히 우려스럽다고 한다.





그는 “농민의 자살도 중요한 현상이지만, 우린 자살에 관한  더 큰 그림을 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인도에서 자살에 대한 주요한 이야기는 농민만이 아니라, 앞날이 창창한 15~29세 사이의 젊은이들이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질문은 왜 그렇게 많은 젊은 인도인들이 자살을 하는가이다.”

인도에서 자살한 농민의 숫자는 일반인에 비해 훨씬 적다. 보고서에 따르면, 농업노동자 가운데 자살률은 10만 명당 7명인 반면 인도의 전체 자살률은 10만 명당 15명에 육박한다. 

그리고 농민의 자살이 1995~2002년 급격하게 상승했지만, 요즘은 하향세거나 평준하다.

그는 “사실, 우리의 연구는 농업 이외의 직종에 종사하는 남성 자살자가 2배 이상임을 발견했다. 이는 농업보다 사무직, 학생, 기타 직종에서 더 많은 자살자가 있었다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다.

Herring 씨는 농민의 자살과 GM 씨앗에 대한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 매력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그는 “인도에서 Bt 목화의 재앙에 대한 이야기는 일관성 있고 세계적으로 퍼졌다; 그것은 관심을 사로잡고 행동을 강제한다. 또한 어떠한 경험적 또는 생물학적 기반도 없다”고 적었다.

National Post http://goo.gl/7BCx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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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친환경 쌀 생산량은 2010년 기준 무농약 22만9230톤, 유기농 2만5491톤으로 총 39만5752톤이다. 이는 전체 쌀 생산량 429만5000톤 가운데 9.2%를 차지한다. 그런데 그 가운데 유기농의 비율만 따지면 전체 생산량의 0.6% 정도뿐이다. 이렇게 생산된 유기농 쌀은 대부분 생협 등으로 유통된다.


현재 유기농 시장의 소비자는 크게 환경과 농업을 고려하거나 농민운동 등에 뜻을 두고 소비하는 사람들과 일부 프리미엄 건강식품의 개념으로 구매하는 사람으로 나뉘는 듯하다. 유기농업의 확산에는 결국 어떻게 생산비 절감하여 가격을 낮추느냐가 관건이라고 볼 수 있다. 운동 차원에서 유기농산물을 사서 먹는 데에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일반 소비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려면 결국에는 몸에도 좋고 가격도 싼 그런 상품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는 것이 또한 현실이다. 그렇다고 관행농처럼 생산방식을 가져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당장 유기농업의 확산을 이야기하는 건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다. 2011년 기준 현재 한국의 곡물자급률(사료곡물 포함)은 1990년 43.1%에서 22.6%로 급락했다. 이는 OECD 국가 중 최하위에 해당하는 수준으로서, 선진국들이 대개 식량자급률 100% 이상인 것에 비교하면 암담하다. 더구나 국내에서 생산되는 쌀(밥쌀용·가공용 포함)의 자급률이 83%까지 떨어졌고, 밥쌀용 쌀의 자급률도 94.8%로 떨어졌다. 즉 위기의 순간이 찾아오면 우리 중 일부는 밥도 먹지 못한는다는 뜻이다.


거기에 우려를 더하는 것이 1995년 220만ha였던 한국의 농지면적이 점차 감소하여 2010년 182만ha로 줄었다는 사실이다. 올해 상반기에만 다른 용도로 전용된 농지면적이 7018ha(여의도 면적의 약 8.3배)에 달하는데, 해마다 이렇게 많은 농지가 사라지고 있다. 즉 농사를 짓고 싶어도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 농촌에 가보면 놀고 있는 땅이 꽤 많기는 하다. 그런데 그런 곳은 기계가 들어가기 어려운 곳, 즉 편하게 농사짓기 쉽지 않은 곳이 대부분이다. 이런 곳은 기계를 사용할 수 없어 천상 손이나 축력으로 농사지을 수밖에 없는데, 지금 그렇게 농사지었다가는 굶어죽기 십상이다. 이런 곳은 그냥 자신이 먹는 걸 생산하는 자급농에게나 어울리는 땅이지 농업을 하는 사람에게는 너무 불리한 곳이다.


땅이 있어 농사짓는다고 해도 어려움은 남는다. 바로 수입산 농산물과 관련된 문제 때문이다. 2010년 배추 가격이 급등하자 이명박 정부에서는 그를 막기 위해 신선농산물에 할당관세를 예외없이 적용했다. 이를 통해 외국산 농산물이 값싸게 한국 시장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당장 배추 가격 상승이라는 발등의 불은 껐지만, 그로 인해 위기에 몰린 국내 농업은 벼랑으로 떠밀렸다. 국내 농산물 가격의 상승을 수입 농산물의 유입으로 막는다는 처방은 오히려 국내 농산물 시장에 혼란을 야기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한국은 2002년 칠레와 FTA 협상을 맺은 이후 지난 10년 동안 45개국과 8개의 FTA를 체결했다. 특히 농업 강국인 EU를 비롯한 미국과의 FTA로 농업 분야에 피해를 입기 시작했다. 여기에 끝판왕이라 할 수 있는 한중 FTA의 체결이 기다리고 있다. 농협경제연구소와 농촌경제연구원 등에 따르면, 한중 FTA 체결로 고추, 마늘, 양파, 배추, 인삼 등 13개 과수와 채소 품목의 10년간 피해액이 최대 12조원에 달하고, 임산물은 연평균 4211억원, 양돈업은 최대 2607억원의 피해가 예상된다고 한다. 그래도 정부에선 FTA를 멈출 생각이 없고 계속하여 강력히 추진 중이다. 이 문제는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 않으리라 본다. 그동안 국책사업이라고 하는 대형 사업에 민주당이 대처한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노무현 대통령 때 새만금 사업과 대추리 미군기지 이전 문제를 보라. 이미 진행이 되고 있는 국익을 위한다는 사업에 민주당도 새누리당과 다를 바 없이 대처했다. 그래서 난 FTA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본다.


자, 그럼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망했다고 복창하고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하자. 슬프지만 방법이 없다. 물론 정부에서 FTA대책으로 돈을 투입한다지만 그 돈으로 혜택을 보는 건 분명 소수의 지역유지들일 테고, 농업은 급속히 구조조정이 들어갈 것이다. 식량자급률이란 건 개나 줘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이제 한국의 농민들도 유럽의 농민들처럼 되는 길이 있다다. 이른바 농업선진국이 되는 것이다. 이는 농업경쟁력 강화라는 이름으로 적극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화려하나 속은 글쎄... 농업은 강해질 것이다. 그러나 농촌은 사라질 것이다.


오늘은 시장에 나가서 국산 들깨가루를 사려고 돌아다녔는데 모두 중국산뿐이었다. 가게 주인의 말에 따르면 가격에서 배 이상 차이가 나니 손님이라면 그 비싼 걸 사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래서 상인들도 국산이 아닌 중국산만 가져가 놓는다고 한다. 중국산이 얼마나 싸냐면, 고추를 예로 들면 국산 고추가 600g에 1,5000원 정도인데 중국산은 4000원밖에 하지 않는다. 거의 4배 정도 차이가 난다. 우리가 착한 가격을 좋아하며 착한 소비를 할 때, 한쪽에서는 나가 떨어지는 농민이나 생산자가 있을 것이다. 착한 건 다 이유가 있다. 맛 좋고 값싼 식당이 있을까? 아마 원재료가 싼 걸 쓸 것이다. 그리고 그건 대개 중국산일 것이다. 식당 주인들도 남는 게 있어야 먹고 살 테니 어쩔 수 없는 구조다.


중국산 고추에 밀리면서 한국의 고추 재배면적은 여느 해의 4만8913ha에서 2011년에는 4만2574ha로 감소했다. 이에 따라 고추자급률도 2000년 91%에서 2010년 51%로 급락했다. 이는 앞으로 일어날 기후변화로 더욱 떨어질 전망이다. 몇 십 년 동안 농사지은 베테랑 농부들도 지금의 기후변화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 정도로 대처할 방법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농촌에서는 조금 무리해서라도 빚을 내서 고급 시설하우스 재배로 돌아서고 있다. 300평짜리 시설하우스 하나 설치하는 데에 1억은 우습게 넘는 비용이 들어간다. 거기서 사시사철 보일러를 때면서 공장처럼 농산물을 생산해야 이익을 남길 수 있는 구조다. 그를 설치하는 데 드는 비용 이외에 온실가스라든지 토양악화와 같은 문제로 인한 비용은 아예 고려하지도 않았다. 그런 것까지 감안한다면 엄청난 고투자 고에너지 소모 사업이다.


조만간 우리는 국산 농산물을 구하고 싶어도 구하기 힘든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이미 정부의 농업정책에서도 농업경쟁력이란 이름으로 유기농에 국산이라는 프리미엄까지 붙은 초고급 식재료를 생산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듯하다. 박근혜 정부의 농업정책을 통해 이러한 흐름은 더욱 거세고 더욱 빨라질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문재인 후보의 공약이 조금 더 나았는데, 현실에서 어떻게 풀어낼지 알 길이 없음으로 일단은 묻어두기로 하자.

벼농사도 어려움이 존재하기는 마찬가지다. 2005년 300평 규모로 논농사를 지으면 54만5776원을 벌었는데, 2010년에는 43만4162원으로 11만1614원이 줄어들었다. 이를 소비자 물가상승률을 고려하여 계산하면 벼농사의 소득이 40% 정도 떨어진 셈이다. 그렇다고 규모를 더 늘려서 생산량을 늘릴까? 이는 어불성설이다. 화성에서 논 9만평을 빌려서 농사짓는 분이 트랙터나 콤바인 같은 농기계에 사용되는 기름값만 1년에 2000만원이 넘는다. 여기에 비료, 농약, 종자 등 농자재를 포함하면 1년에 5천만원은 넉넉히 들어간다. 규모가 큰 만큼 쌀을 많이 생산하지만, 추곡수매제도가 폐지되어 스스로 판로를 개척해야 하고, 이외에 농기계가 고장난다든지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재해가 닥치는 등의 가외비용이 발생하면 본전도 뽑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물론 그에 대비하여 농작물 재해보험이라든지 논농사에는 직불금이란 게 있는데, 특히 직불금 제도는 이명박 정부의 장관 예정자 청문회에서도 터졌듯이 실제로 농사짓는 사람이 아니라 지주가, 그것도 부재지주가 꿀꺽해도 모른다는 맹점이 있다. 또한 농작물 재해보험도 가입할 수 있는 작물의 품목이 한정되어 있다. 아무튼 농민들 땀 묻은 돈 뺏어먹는 인간들은 진짜로 나쁜사람이다. 결국 농사지어도 돈이 안 되는 건, 요즘 석유가격 상승으로 인해 생산비 자체가 급등한 것이 한 원인이다. 농약이니 비료니 농기계니 모두 석유에 기반하여 굴러가는 것이다. 거기에 농산물이 물가상승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등 미친 듯이 오르는 생산비만큼 수익을 뽑지 못하는 구조가 또 하나의 원인이다. 세번째는 기후변화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노농들도 날씨를 종잡을 수 없어 농사짓기 힘들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로 지금의 기후변화는 심각하다. 도시민들에겐 그냥 비가 많이 오나 보다 하는 정도일지 몰라도 농사짓는 사람들에겐 그것이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다.


이제는 농사는 아무나 짓는 일이 아닌 세상이다. 할일이 없으니 농사나 지으라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농사짓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언행도 삼가해야 한다. 그래도 농민은 아직까지는 누구보다 어렵고 귀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여전히 누군가의 먹을거리, 곧 생명을 책임지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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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발표된 유엔의 새로운 보고서에 따르면, 소농은 간단한 생태적 방법을 사용하여 10년 안에 식량 생산을 2배로 늘릴 수 있다. 그것은 빈곤을 완화하는 조치로 농생태학의 방향으로 근본적인 변환을 하는 것이다.


"2050년 90억의 인구를 먹이기 위하여 우린 긴급히 가장 효율적인 농업기술을 채택해야 한다"고 유엔의 식량권에 대한 특별조사관 올리비에 드 슈터 씨는 말한다


"오늘날의 과학적 증거는 특별히 열악한 상황에 처한 빈곤한 농민들이 식량 생산을 늘리는 데에 농생태학의 방법이 화학비료를 사용하는 것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고 덧붙인다. 


농생태학은 식량위기를 끝내고 기후변화와 빈곤을 해결할 수 있도록 농업체계를 설계할 때 생태학을 적용시킨다.  그 방법은 연구에 따르면 이로운 나무나 식물, 동물, 곤충 등 자연 환경을 활용하여 토양 생산성을 강화하고, 해충에 대항해 작물을 보호한다.


"지금까지 농생태학 프로젝트는 57개의 개발도상국에서 평균 작물 수확량을 80% 정도 증가시킨 것으로 나타났고, 아프리카의 모든 프로젝트에서는 평균 116% 증가했다"고 De Schutter 씨는 말한다. "아프리카의 20개국에서 실시된 최근의 프로젝트는 3~10년 안에 작물 수확량을 2배로 늘린다는 것을 입증했다."


광범위한 기존의 과학적 자료에 기반하여 그 연구에서는 관행농업이 값비싼 투입재에 의존하고, 기후변화를 야기하며, 기후 충격에 탄력성을 갖추고 있지 않다고 지적한다. 


"그 방법은 간단히 말해 오늘날 더 이상 최선이 아니라는 말이다"라고 De Schutter 씨는 강조한다. "과학계의 세론은 현재 식량 생산과 빈곤 완화 및 기후변화의 경감에 대한 농생태학의 긍정적 효과를 인정한다. -그리고 이 방법은 제한된 자원을 지닌 세계에 필요한 것이다.

"2년 전 막대한 화학비료 보조금 프로그램을 시작한 말리위는 현재 농생태학을 적용하여 130만 이상의 빈곤층이 1헥타르에서 1톤의 옥수수를 생산하던 것이 2~3톤으로 증가하면서 혜택을 받고 있다."고 De Schutter 씨는 썼다.


또한 그 보고서는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방글라데시에서 가난한 농민들이 비용을 절약할 수 있도록 벼농사에 쓰이는 살충제를 92%나 감소시킨 사례를 지적한다. 


"지식이 농약과 비료를 대체하게 되었다. 이는 좋은 사례로서, 다른 아프리카와 아시아,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과 비교할 만한 결과다." 그는 제네바에 있는 유엔 인권위원회에 그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는 그러한 접근법이 미국이나 독일, 프랑스 같은 선진국에서도 이득이 있다고 덧붙인다. "그러나 모두에게 식량권을 실현시킬 수 있는 뛰어난 잠재력에도 농생태학은 여전히 공공정책에 의한 지원이 불충분하고, 그 결과 대부분 실험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한다. 


보고서에선 또한 농생태학의 방법을 확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농생태학은 지식 집약적 접근법이다. 농업 연구와 참여 확산을 지원하는 공공정책을 필요로 한다"고 De Schutter 씨는 말한다. "정부와 기부자들은 이에 대해 핵심적 역할을 한다. 민간기업은 특허권으로 보상받지 못하고 화학제품이나 개량종에 대한 공개시장을 확보받지 못하는 이러한 방법에 시간과 돈을 투자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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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에서 소농이 인구의 70%에게 먹거리를 책임지는 반면, 공업형 농업은 단 30%만 공급할 뿐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세계의 빈곤층인 280만 명 가운데 대부분이 농민이다. “마지막 농부”라는 다큐멘터리는 어떻게 소농이 세계화와 공업형 농업으로 전화하면서 빈곤에 빠져 고통을 겪는지 보여준다.

인도네시아의 환경운동가 Hira Jhamtani 씨는 “Agriculture란 단어에 culture가 있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건 실제로 문화적인 방식으로 무언가를 한다는 겁니다”라 한다. “그러나 우린 공업으로 만들어 버렸다… 다국적 기업이 소농의 역할을 앗아갔다. 모든 곳에서…유럽에서도, 미국이나 인도네시아에서도, 가족농은 대형 기업으로 대체되었다”고 인도네시아, 과테말라, 부르키나파소에서 3명의 농부와 그 식구들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의 감독 Giuliano Girelli 씨는 말한다. 이 다큐멘터리에서는 농업다양성의 감소, 토양비옥도의 저하, 식량불안, 줄어드는 수입에 직면한 그들의 투쟁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또한 전 세계에 걸쳐 세계화의 영향에 관한 전문가의 지적도 담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그리고 소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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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이란 책이 있다. 알만 한 민속학, 인류학, 역사학 연구자들은 일본어 원서를 제본하여 하나씩 갖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의 내용은 제목 그대로 조선의 농사법과 조선에 사는 농민들의 생활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책의 저자는 일본인이다. 일제강점기 조선에 건너와 농사시험장에서 농학을 연구하던 사람이 쓴 것이다. 


그는 1910년대 말 당시 최고의 학과인 동경제국대학 농학과를 나온 뒤 조선으로 건너와 일자리를 잡는다. 그 이름은 다카하시 노보루高橋昇. 당시 조선은 일본인에게 조선드림을 실현시킬 수 있는 땅이었다. 그는 조선의 농사시험장에서 다양한 실험을 행했다. 그가 남긴 실험결과만 해도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도 유럽과 미국에 유학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그가 지닌 학식과 능력을 엿볼 수 있는 이력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에게 그가 더 소중한 것은 그가 행한 현지조사에 있다. 당시 그에게는 박사학위를 딴 기념으로 시험장의 직원들이 돈을 모아 사준 라이카 카메라가 있었다. 그가 그 라이카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당시 조선인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증언해주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농업 분야의 자료가 빈약하기에 그가 남긴 사진은 더욱 값지다. 


그가 현지조사를 한 시기는 1930년대 말에서 1940년대 초 사이이다. 당시 우리 스스로는 변변한 기록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색안경을 끼지 않고 조선의 농법과 농민을 자신의 조사노트에 그대로 실었다. 그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는 조선을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사는 더러운 곳이 아니라, 결국은 대일본제국을 위한 것이지만 뭔가 배울 만한 점이 있는 곳이라 생각했다. 이는 그의 아들도 생생히 기억하는 바이다. 


그는 조선 팔도를 자신의 발로 돌아다니며 직접 농민을 만나 그들이 어떻게 농사를 짓는지, 생활은 어떠한지 조사하기 시작한다. 그 현지조사 자료가 쌓이고 쌓여 원고지로 만 장이 넘는 분량이 쌓이도록 조사에 조사,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다. 그의 아들 다카하시 고시로(84) 씨는 이렇게 아버지를 기억한다. '아버지는 늘 바빴다. 어쩌다 집에 돌아오면 조사자료 묶음을 방바닥에 펼쳐 놓고 정리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대신 그의 아들은 깊은 외로움에 힘든 시기를 보낸다. 더구나 어머니까지 어렸을 때 일찍 돌아가셔서 더욱 그러했다.


그렇게 다카하시 노보루는 자기의 열을 다해 조선의 농업을 연구하다가 일본의 패망을 경험한다. 그는 당시 수원의 농사시험장에서 담당한 총무부장이란 중요한 위치 때문에 바로 일본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1년 남짓 농사시험장 업무의 인수인계 때문에 조선에 남아 있는다. 이로 인해 자신의 연구 성과와 자료를 직접 가지고 돌아가기 힘들어지자, 본국으로 돌아가는 직원들의 짐에 한 부씩 한 부씩 나누어 보내기에 이른다. 본인이 들고 갈 수 있는 양은 한정되어 있기에 그렇게 자료를 보존하고자 본국으로 보낸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지금쯤 일부는 사라졌을 테고, 남은 일부는 어느 보관소에서 썩고 있을지 모른다. 


모든 자료를 하나씩 본국으로 보내고 자신도 미군에게 인수인계 작업을 마친 뒤, 1945년 그는 고향인 큐슈의 야메시(현재)로 돌아간다. 그때부터 새로운 일에 직면하게 된다. 패전 이후 황폐해진 일본의 농업을 되살려야 하는 건 물론, 자신이 청춘을 바쳐 연구한 조선의 농업자료를 다시 모아서 정리해야 하는 일이 주어졌다. 당시 일본은 모든 것이 망가져 있었다. 우리가 한국전쟁 이후 폐허가 되었던 모습을 떠올리면 비슷할 것이다. 교통도 불편한 시절 부하 직원들의 일자리도 알아보는 한편, 자신의 자료를 다시 모으려고 일본 땅을 동분서주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는 과로와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심근경색으로 귀국한 지 3~4개월 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아들은 이렇게 회상한다. '방학이라 집에 돌아와 있던 나는 아침에 일어나 우물에 가서 세수를 했다. 간밤에 들어오신 아버지께서 마침 나에게 마실 물을 가져다 달라고 하셨다. 난 아버지의 명에 따라 물을 떠다 드렸는데, 갑자기 아버지께서 손을 허공으로 뻗더니 그대로 정신을 잃으셨다. 나는 깜짝 놀라 의사를 불러왔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다카하시 노보루는 오십이 조금 넘은 나이에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도 없는 그의 아들은 졸지에 고아가 되었고, 전문학교(현재 대학)를 마친 뒤 안정된 직장을 찾고자 교사가 된다. 


아들은 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며 그 그림자를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도 그럴것이 그에겐 아버지가 세상의 전부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유품을 친척집에 맡겨 놓은 채 자리를 잡을 때까지 열심히 일했다. 고향으로 돌아와 수학교사가 된 그는 한 여인을 소개받아 자신만의 가정을 꾸리고, 마침내 자신의 집을 짓는다. 그리고는 친척집에 맡겨 놓았던 아버지의 유품을 찾아온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유품을 찬찬히 살펴볼 시간을 갖게 된 그는, 아버지의 유고를 하나하나 열어보며 지도와 사진, 원고를 들춰보며 뭔가 범상치 않은 느낌을 받는다. '이건 농업을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중요한 자료 같다...' 그래서 그는 자료에서 나온 아버지 동료들의 이름을 바탕으로 그들의 주소를 수소문한다. 그렇게 찾아낸 사람들을 방학과 휴일마다 찾아가서 만나며 아버지의 행적과 일에 대해 더 자세히 알게 된다. 


그들과 만나며 아버지가 미처 다 모으지 못한 아버지의 자료도 얻고, 또한 오치아이란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는 아버지와 조선에서 일하던 농업 전문가로서 아버지의 일을 잘 알고 있던 사람이다. 그에게 연락하여 만난 뒤 본격적으로 자료의 정리가 시작된다. 다카하시 고시로 씨는 아버지의 유고를 모두 오치아이 씨에게 넘긴다. 유고는 현장에서 조사한 내용이기에 마구 휘갈겨 쓴 글씨 투성이인데, 그걸 하나하나 깨끗이 옮겨 적으며 정리한다. 그리고 조선에서 행한 조사이기에 한글도 사이사이에 나오는데 그 외국어를 손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료를 정리하길 십여 년... 그 일을 주도하던 오치아이 씨는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기에 이른다. 다행스럽게 자료 정리는 함께하던 사람이 마무리한다. 그것이 199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출판을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다. 이때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이이누마 지로飯沼二郎 씨와 그와 친분이 있던 출판사의 사장이었다. 이들과 함께 출판을 목표로 다시 교정을 보고 원고를 정리하는 일이 시작된다. 그런데 이게 웬일, 출간을 목표로 함께하던 출판사의 사장이 병으로 쓰러져 세상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출판사를 이어받은 사장의 아들이 이 작업을 계속 추진하였고, 다카하시 노보루의 유고는 조선 땅에서 어렵사리 일본으로 건너간 지 50년 만에 책으로 출간되기에 이른다. 그것이 바로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이다. 


다카하시 노보루가 조선에서 조선의 농법과 농민의 생활을 집중적으로 조사한 7~8년. 그리고 그 자료를 본인의 짐에 짊어지고 귀국한 동료들. 그걸 찾아내 정리한 일본인들의 노력... 그 일을 가능하도록 동분서주한 아들 다카하시 고시로 씨의 눈물겨운 노력이 이 책을 탄생시켰다.  따지자면 수많은 일본인의 땀과 노력, 그리고 그들의 목숨을 건 노력이 이 책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 


조선에서는 사라진, 찾을 수 없는 당시의 생생한 기록이 일본인 덕에 남았다는 역설적인 우리의 근대사. 이는 영국의 지배를 받은 인도도 그렇듯이 제국의 지배를 받은 사람들의 슬픈 현실이다. 아무튼 어렵사리 책이 나오자마자 고시로 씨는 이 책은 조선에서 행해진 조사를 바탕으로 하는 만큼 조선을 위해서 쓰여야 한다는 생각에 한 권은 김대중 대통령에게, 또 한 권은 김정일에게 보낸다. 


그런데 1996년쯤 출판된 이 책은 너무 비싼 가격(한화로 100만원 남짓)으로 인해 이를 필요로 하는 학자와 학생들에게 외면을 받는다. 대신 우리가 늘 그랬듯이 제본 등의 어둠의 방법을 통해 관련 공부를 하는 학생과 연구자, 교수들 사이에 퍼진다. 가난한 연구자들이니 그럴 수 있다 쳐도, 문제는 이게 다카하시 고시로 씨에게 걸린 사실이다. 그는 한국에서 암암리에 나도는 이 책의 복사판을 구하고서 큰 실망에 빠진다. 


그걸 직접 찾아가 달래고 설득해 자료의 기증을 받은 것이 농진청의 성종환 씨이다. 당시 농진청은 농진청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다카하시 노보루의 자료를 돌려받는 사업을 추진했다. 그러한 노력이 바탕이 되어 3~4년 전 다카하시 고시로 씨에게 모든 자료를 기증받기에 이른다. 그리고 해마다 한 번씩 그 아들은 야메시 역사연구회의 사람들과 한국에 찾아와 자료를 열람하는 행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점점 다카하시 고시로 씨의 건강도 안 좋아지는 등의 사정으로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난 아마 2006년 봄인가 학교 도서관에 갔다가 이 책을 처음 발견했다. 당시 우리 전통농업에 관심이 많아 자료를 뒤지다가 이런 책이 있는 걸 발견했다! 그렇지만 일본어도 모르고 이런 건 공부하는 분들이 번역하지 않을까 하여 그냥 넘어갔다. 하지만 자려고 누우면 생각나고... 아이씨 왜 공부하는 사람들은 저런 좋은 자료를 번역도 해놓지 않은 것인지... 도대체 저 책 안에는 무슨 내용이 실려 있는 건지 궁금해서 참지 못했다. 


결국 어느 날 학교 복사실에서 자료를 복사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런데 분량이 1300페이지에 달하는지라 한번에 복사하지는 못하고 열댓번을 오가며 띄엄띄엄 복사하여 집으로 날랐다. 그리고 모르는 일본어를 더듬더듬 더듬으며 번역을 시작했다. 그때 느낀 그 흥분과 새로운 앎으로 인한 기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여름에는 엉덩이에 땀띠가 나도록, 겨울에는 곱은 손을 호호 불어가며 그렇게 1년, 2년, 3년이 지나갔다. 가끔은 너무 좋아 혼자 키득키득 웃고 있으며 아내가 미쳤다는 듯이 쳐다보기도 했다. 책에 나오는 그림을 마우스를 이용해 그림판에서 똑같이 그리고 나면, 나 자신이 너무 대견하여 으쓱하기도 했다.


일은 일대로 하며 시간이 날 때마다 자료를 들여다보며 번역하고... 결국 5년 가까이 걸려 1300쪽을 모두 번역했다. 그 결과 원고지 7000매, 그림과 표 2700개라는 엄청난 결과물이 생겼다. 그 결과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자료를 보면서 실제로 농사를 지을 때 적용하여 실험하고, 농촌으로 찾아다니며 어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하는 과정이 나에게 아주 큰 공부가 되었다. 그 자료를 번역하며 난 어느새 부쩍 자라 있었다. 


번역을 모두 마친 뒤, 난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감사를 표하기 위해 2009년 10월 직접 일본을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 아들인 다카하시 고시로 씨를 만나 내 뜻을 전하고 다카하시 노보루의 무덤과 납골당에 참배를 올렸다. 그리고 이제 그 결과를 더욱 깔끔히 정리하여 책을 내려고 한다. 저작권이 앞으로 2~3년이면 소멸되는데,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공부를 돕고 이를 번역하는 데 힘이 된 분들을 위해서라도 결과물을 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 아들이 살아있을 때 책을 만들어 다시 찾아가고 싶다. 나의 공부는 이것이다. 학교를 찾아가 학위가 있으면 도움이 될까 기웃거리기도 했는데, 아쉽게도 이런 쪽으로는 찾기가 힘들었다. 한군데 있었지만 막상 가보니 그렇지도 않았고... 아무튼 이제 다시 나의 공부는 시작되었고,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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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 -3부 농민생활조사.pdf


내가 작업한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의 번역본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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