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한 해가 다 지났군요. 올해는 날씨를 종잡을 수 없어 농사도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다들 큰 피해는 보지 않으셨길 바랍니다.
조선반도의 농법과 농민은 현재 황해도 지역까지 보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더뎌지고 있네요.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을 떠올리며, 한 걸음은 갔으니 앞으로 포기하지 않고 계속 나아가려고 합니다. 이번에는 충청도 지역을 소개하겠습니다.

청주에서 충주로

934년 6월 30일, 다카하시 노보루는 자동차로 청주에서 충주까지 달렸습니다. 그는 본분이 학자인지라 경치를 구경하기보다는 논밭이 먼저 눈에 들어왔나 봅니다. 차를 타고 지나면서 본 논밭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습니다.


1935년 자동차 사진. 농민들에게는 여전히 함부로 다가설 수 없는 물건이었을 것이다

① 콩에 들깨를 군데군데 섞어짓기한다. 들깨는 옮겨 심은 것
콩밭에 빈자리를 두지 않으려고 군데군데 들깨를 심은 모습이다. 보통 들깨는 밭 둘레에 쭉 둘러 심는 일이 많은데, 특이한 모습이다.




② 콩과 수수 섞어짓기
콩과 수수는 자주 섞어짓는 작물이다. 수수는 거름을 많이 먹고, 콩은 거름을 만드는 성질을 활용한 모습이다. 몇 년째 콩과 수수를 섞어짓기하는데, 실제로 아주 궁합이 잘 맞는다.



③ 가을보리 사이짓기 콩
보리는 보통 밭을 싹갈이(또는 삭갈이, 밭 전체를 완전히 다 간다는 뜻)한 뒤, 고무래로 골을 타고 심는다. 거름이 많은 집은 밭에 거름을 쫙 뿌린 다음 소로 쟁기질하지만, 그렇지 않은 집은 골을 타 보리를 심고 그 위에 흙 대신 두엄을 덮는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나라는 보통 겨울에 비가 많이 오지 않기에 골에다 심는다. 그러니까 골에는 보리를 심고, 이듬해 봄이 오면 두둑에는 콩을 심는 형식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유럽은 오히려 여름에 비가 별로 오지 않고 겨울에 많이 와서, 여름에는 농사를 짓지 않고 겨울에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아무튼 이때는 망종에서 스물 닷새나 지났으니 보리는 밑동만 남았을 것이다.



④ 가을보리 사이짓기 목화
콩 대신 목화를 심은 모습이다. 보리는 다 베었을 텐데, 목화는 싹이라서 그런지 보리보다 작다. 아니면 그림을 잘못 그렸을 것이다. 당시 목화는 중요한 돈벌이 작물이었다. 일제는 방직업 같은 공업 원료들을 조선에서 마음껏 긁어 갔다. 농민들이 물세에 여러 세금을 내려면 울며 겨자 먹기로 목화를 심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⑤ 콩 홑짓기(줄지어 점뿌림)
두둑을 좁게 지어 한 두둑에 한 줄로 콩을 심은 모습이다.



⑥ 콩 홑짓기 가로로 점뿌림
위와 달리 두둑을 더 넓게 짓고, 콩을 더 배게 심었다.



⑦ 가을보리 60㎝(2尺)로 줄뿌림한 사이에 콩 1줄로 점뿌림
올해 안산 텃밭에서는 밀에 사이짓기로 콩을 심는 실험을 했다. 결과는 밀이 버티고 서 있으니 차츰 극성스러워지는 새들에게서 콩을 지킬 수 있었다. 당시는 새 피해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니, 그런 이유 때문에 이렇게 심지는 않았을 것이다.



⑧ 일반적으로 논두렁콩을 많이 심었다
전문적으로 논농사만 크게 짓는 곳이 아니라면 지금도 여느 농촌이나 다 논두렁콩을 심는다.

⑨ 가을밀 사이에 콩. 120㎝(4尺)로 밀을 줄뿌림한 사이에 콩을 2줄로 점뿌림
7번 그림을 떠올리면 된다. 대신 두둑을 더 넓게 지어 콩을 2줄로 심은 것이 차이일 뿐이다.

⑩ 가을보리 사이에 조 줄뿌림
보리의 두둑 사이는 약 90㎝(3尺), 대부분 펀펀한 두둑이다. 조 사이사이에 콩을 섞어 심었다.
보리는 수확했겠지만, 한 밭에서 3가지 작물을 볼 수 있다. 보통 2년 3작은 이렇게 돌린다. 봄에 조를 심어 가을에 거두고, 거기에 밀이나 보리를 심는다. 그리고 이듬해 봄에 거둔 뒤, 다시 콩을 심어 가을에 거둔다. 그러고 나서 이듬해 봄까지 땅심을 찾도록 묵힌다.
하지만 이 밭에서는 특이하게도 콩과 조를 함께 심었다. 다카하시 노보루는 조가 자란 길이가 얼마 되지 않는 것을 보고 여름에 심은 것이 아닌지 추측하고 있다. 올해 밭에서 콩과 조를 함께 심어 본 결과, 별 문제는 없었다. 그러니 이것은 2년 3작이 아니라, 그냥 보리를 거둔 뒤 콩에 띄엄띄엄 조를 심거나 그 반대의 경우일 것이다.



⑪ 밀을 줄뿌림한 사이에 조를 줄뿌림한다. 보리도 이와 같다

⑫ 밀을 줄뿌림한 사이에 콩을 줄지어 점뿌림한 곳이 많다

충북 청주군 사주면 복대리
먼저 복대리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본래 이곳은 청주군 서주내면의 지역이었다. 여기에 짐대(솟대)가 서 있어 짐대마루라 하다가, 말이 변하여 진때마루 또는 복대(福臺=卜大)라 했다. 1914년에 실시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죽천리(竹川里)와 화진리(華辰里) 일부를 병합하여 복대리라 했다. 지금의 청주시 흥덕구 복대동으로서, 중부고속도로와 충북대학교 사이에 낀 지역이다.
다카하시는 이곳에서 박인규(朴寅圭) 씨를 만났다. 그의 식구는 모두 여덟이다. 그들은 아버지(53), 자신(31), 아내(23), 딸(3)과 둘째 아들 내외(23, 22), 셋째 아들(18), 넷째 아들(11, 보통학교)이다. 그 가운데 농사짓는 사람은 3명이고,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은 시험장에서 일꾼으로 일한다고 한다. 현재 있는 '충청북도 농업기술원 종자생산시험장'이란 곳이 1957년 1월 1일 청원군 사주면 복대리에서 진천으로 이전했다는 기록으로 봐서, 이 시험장을 말하는 것 같다.
이 사람이 농사짓는 곳 가운데 갱빈밭(ケンビンパ)에서 보리 그루갈이 콩, 들깨를 기르는 방법을 살펴보겠다.

먼저 이 밭은 집에서 327m(3町) 떨어진 곳으로서, 600평이 두 곳으로 나뉘어 있다. 소작료는 정조로 나락 1섬 3말 5되를 낸다. 모두 600평이지만 콩과 들깨를 그루갈이하는 곳은 500평이다.
보리를 심으려고 거름을 내는데, 배합비료 18.75㎏과 두엄 50지게(1지게에 45~56㎏)을 혼자서 하루에 나른다. 그런 다음 쟁기질은 씨를 뿌리기 5일 전인 음력 9월 5일에 한다. 그리고 홑짓기하던 콩에 그루갈이로 보리를 심을 때 쟁기질하는 방법은 싹갈이다. 그런데 다카하시 노보루는 이 대목에서 이런 방법은 경기도에서 쟁기질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지적한다. 이는 내가 밭에서 마을 어르신께 들은 이야기와도 똑같다. 이로 미루어 보아, 기계가 밀려들기 전인 1960~1970년대까지만 해도 193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법으로 농사지었음을 알 수 있다.



자세한 방법은 먼저 베어 낸 콩 그루를 중심으로 두 거웃 갈이 하여, 양쪽으로 째며 갈아엎어 땅을 펀펀하게 한다. 써레질은 나중에 한다. 그런 다음 쟁기질한 방향과 직각으로 보리씨 뿌릴 골을 낸다. 그러니 고랑이었던 곳이 이듬해에는 두둑이 되고, 그 다음해에는 다시 고랑으로 만들어 땅을 알맞게 돌아가며 활용할 수 있다. 골을 낼 때는 보습을 끼워서 한 거웃 갈이를 한다. 두둑과 두둑의 너비는 쟁기꾼이 알아서 알맞게 한다. 골을 탄 뒤에는 쇠스랑으로 긁는다. 아무래도 손으로 골을 깔끔하게 다듬는 것이 목적인 듯하다.
이듬해 사이짓기로 콩을 심는 것은 '골고리'라고 부른다. 그럴 경우에는 보릿골을 넓게 탄다. 보리는 동보리라는 품종을 심는데, 아마 동(冬)보리는 곧 겨울보리를 말하는 것 같다. 뿌리는 보리의 양은 모두 2말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일을 할 때에는 주인, 셋째 아들, 품앗이 남자(마을 사람) 4명, 품앗이 소 1마리(쟁기도 함께)가 함께 한다. 일하러 오는 마을 남자 4명은, 보리농사인 만큼 두레가 아니라 그냥 품앗이일 것이다.



그리고 소가 와서 일해 주면 남자 둘이 가서 그만큼 일해야 한다. 그리고 소가 일하러 오면 아침, 저녁에는 소 주인이 먹이를 책임지고, 점심만 빌린 사람이 책임진다고 한다. 이 집처럼 쟁기까지 빌려쓰면, 소 1마리+쟁기의 품삯으로 2원에다 쟁기꾼 품삯 1원까지 모두 3원을 줘야 한다. 논에서 일하건 밭에서 일하건 모두 똑같고, 모내기철처럼 아주 바쁠 때라고 특별히 더 비싸지도 않다. 다만 바쁠 때에는 일꾼에게 세 끼 밥을 챙겨 주고, 담배(3전)를 주면 하루 품삯은 60전이다.

이렇게 보리를 심을 때에는 농기구로 쟁기 1대, 쇠스랑 5자루, 삼태기 2개, 토입기(土入器) 1개, 씨앗 담는 바가지 1개를 쓴다. 이 사람들과 농기구를 가지고 한나절이면 500평에 보리 심기를 끝낸다.

이후 음력 9월 안에 보리 싹이 나오면, 곧바로 사람 똥오줌을 두 번 정도 준다. 약 100병 정도인데, 한 병에 약 37.5㎏ 들어간다. 웃거름을 한 번 줄 때마다 남자 두 사람이 함께 한다. 웃거름은 사람 똥오줌을 기본으로 주는데, 그것 말고도 돼지 오줌이나 부엌의 구정물 같은 것도 준다.
첫 번째 웃거름은 싹이 난 뒤 바로 준다. 두 번째 웃거름은 석 달 뒤인 초봄에, 그 동안 모아 둔 똥오줌을 내다가 준다. 또는 얼음이 풀릴 때 화학비료를 줄 때도 있다. 그럴 경우에는 배합비료 1가마니 37.5㎏을 가루로 만들어 준다. 이 배합비료 1가마니는 4원 36전이다. 앞에 쟁기꾼의 하루 품삯이 1원이었으니, 요즘처럼 사람 품삯이 비료값보다 더 비싼 것과 확실히 다르다.

음력 3월쯤에는 주인과 셋째 아들이 김을 맨다. 이 둘이 대략 이틀쯤 걸려 끝낸다. 김매고 5일 뒤에는 주인 혼자서 토입기로 흙을 넣는다. 하루면 충분히 마친다. 

음력 5월 중순, 양력으로 따지면 5월 하순에서 6월 초순에 보리를 벤다. 품앗이 2명과 주인이 함께 낫 3자루를 들고 한나절 동안 보리를 베고, 이후 지게로 나른다. 집에 나른 다음에는 이 세 사람이 도리깨로 떠는 데 한나절 걸린다. 수확량은 3섬(최고는 4섬이었음), 보릿짚은 7지게가 나왔다. 이걸 내다 팔면 겉보리 1섬에 13원 50전을 받고, 보릿짚은 1지게에 60전을 받는다.

방아는 발동기로 찧는데, 그러면 원래 양에서 보리쌀 56~67%를 얻는다. 여기서 나오는 보리기울은 집에 가지고 간다. 2말 5되 정도의 보리기울을 얻어, 집에 가지고 가서 돼지에게 먹인다. 이 집은 소가 없었으니 돼지가 중요한 자원이었을 것이다. 소가 없는 집에서는 거름도 밟히고 급할 때 돈으로 바꾸려고 돼지라도 한두 마리씩 꼭 키웠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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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에서는 다카하시 노보루가 1939년 5월 24일에 방문한 제주읍 이도리(二徒里) 구남동(九南洞)에 살던 김정용(金丁龍·43) 씨의 농사를 살펴보겠습니다. 이도리는 현재 제주시 이도1동과 도남동으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제주도에 살아보지 않아 구남동이 정확히 어디인지 찾기 힘들지만 바닷가까지 약 2.2㎞라는 것을 단서로 지도에서 찾아보니 삼성혈 근처의 어느 곳일 겁니다. 이 글을 보신 제주도 분이 계시면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마을은 바닷가에서 그렇게 가까운데 고기잡이를 하는 사람도 없고, 잠녀도 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마을은 10호가 살고, 일본에 건너간 사람은 남자 5명, 여자 3명, 아이 6명입니다. 제주도 사람들은 일본과 가까워서 그런지 많이들 건너갔습니다. 4.3항쟁 때도 엄청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하더군요. 아픈 역사의 한 단면입니다.

1930년대 제주도 잠녀의 물질하는 모습. 제주도 잠녀들은 철마다 전국은 물론 일본까지 출장을 다니며 끈질기게 살아왔다


정용 씨의 살림

이 분은 제주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농사만 지으며 살았다고 합니다. 식구는 아내(41), 맏아들(21), 맏며느리(18), 둘째 아들(10), 맏딸(23, 일본 건너감), 둘째 딸(15), 셋째 딸(8)로 모두 8명이고, 그 가운데 농사짓는 사람 5명입니다. 땅은 제주도답게 논은 없고, 밭 4,800평을 농사짓습니다. 2,400평만 소작을 하고 나머지 2,400평은 자작을 하니, 당시로서는 꽤 유복한 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겠지요. 기르는 작물은 보리, 조, 콩, 밭벼, 고구마, 풋베기콩 등입니다. 집의 텃밭에는 고구마 모종을 키우고 마늘, 파, 상추, 배추, 호박, 옥수수, 사탕수수를 심어 먹는다고 합니다.
뭍과 다르게 소작 관행이 아주 재미있어 잠깐 소개하겠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일종의 전세보증금처럼 땅을 빌리는 사람이 돈을 맡기고, 계약기간이 끝나면 밭주인이 그 보증금을 돌려준다고 합니다. 이러한 계약은 오로지 입으로만 이루어지고, 밭주인은 보통 1년에 20%의 이자를 먹는다고 합니다. 이런 관행이 참 많은데 다카하시는 땅은 많은데 농사지을 사람이 적기 때문이 아닐까 예상합니다.
또 특이한 것으로는 공동으로 관리하는 꼴밭이 따로 있다는 점입니다. 제주도하면 들판에서 뛰노는 말과 소가 생각나지요. 이 사람의 꼴밭은 600m 떨어진 1,500평의 땅으로, 여기에는 소나 말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돌담을 둘렀습니다. 제주도에는 돌담을 두른 밭이 많은데 그 까닭은 놓아기르는 소나 말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무튼 꼴밭에는 자골(자귀풀)을 길러서 그걸 베어 겨울에 소에게 먹인다고 합니다. 소를 기르는 방법도 재미있습니다. 소도 공동으로 놓아기르는데, 이 마을에는 그럴 만한 곳이 없어서 이웃마을 방목계에 들었다고 합니다. 보통 음력 6월 초부터 8월 말까지 거기에 데려다 놓는데, 비용은 늙거나 어리거나 구별 없이 소와 말 1마리에 40전입니다. 대신 막 태어난 놈은 공짜이고, 계원은 할인 혜택이 있어 한 사람에 20전이라고 합니다. 놓아기르는 소와 말은 주인들 가운데 1명씩 3~5월과 9~10월에 순번대로 돌아가며 산에 풀어놨다가 끌고 온다고 합니다. 곁다리는 그만 잡고 본격적으로 농사짓는 방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소와 말을 막기 위해 돌담을 두른 밭(좌)
자귀풀(우)
450평의 보리밭. 번호는 씨를 뿌리는 순서

먼저 450평의 밭에 보리를 기르는 방법을 보겠습니다. 이 밭에는 앞갈이로 밭벼를 기르는데 그걸 음력 10월 20일에 거둡니다.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정말 따뜻한가 봅니다. 그리고는 10월 말에 돝거름을 냅니다. 제주도는 소똥보다 돼지똥을 거름으로 더 많이 썼습니다. 주인 내외와 맏아들 내외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10시간 동안 모두 100지게를 져 나른다고 합니다.
다음날 아내와 며느리가 거름을 다섯 두둑에 뿌리고, 주인은 한쪽부터 보리를 뿌립니다. 그러고 나서 쟁기질합니다. 이런 식으로 다섯 두둑씩 거름을 주고 보리를 뿌리고 쟁기질합니다. 그러는 사이 맏아들은 돌담 둘레에 검질(김)을 매고 쟁기질하지 못하는 부분을 괭이로 갑니다. 보리는 모두 3말을 뿌리는데, 2말 5되는 쟁기질 전에 뿌리고, 쟁기질 한 뒤 남은 5되를 다시 뿌립니다.
밭 모양은 아래 그림처럼 돌담을 두르고 사람만 드나들 수 있게 입구를 냈습니다. 이걸 세 ‘파니’ 또는 ‘칭’이라고도 부른다고 하는데, 배미를 뜻합니다.
쟁기질은 두뱃때기를 합니다. 한 이랑을 왔다갔다 두 번 가는 것을 말합니다. 소로 한 번 갈아 놓으면 맏아들은 흙을 덮는 일을 합니다. 이 일은 섬비를 가지고 합니다. 섬비는 뭍의 끙게와 같은 것입니다. 소나무 가지나 떨기나무를 모아서 묶고 무게를 더하기 위해 그 위에 돌을 얹어서 끌고 다니면 보리가 흙에 덮이는 도구입니다.


 
흙을 덮으려고 섬비를 끄는 맏아들(좌) 쟁기질, 쟁기질 간격은 30cm(우)
 

눌의 모습

흙을 덮고 나서는 아내와 며느리가 곰베(곰방메)를 들고 다니며 부서지지 않은 흙덩어리를 부숩니다. 이렇게 하여 보리 뿌리는 일을 끝냅니다. 아침 7시부터 점심을 30분 먹고 거의 4시가 다 되어 끝냈다고 합니다.
보리를 다 뿌리면 이제 관리에 들어갑니다. 뿌리고 나서 바로인 음력 11월 초부터 3월 17일까지 아내와 며느리가 달마다 초하룻날에 오줌을 열두 허벅을 줍니다. 허벅 하나에 1말 정도 들어간다고 하니 모두 12말쯤 됩니다. 식구 8명이 한 달에 오줌을 열두 허벅을 누기 때문에 거름이 모자라서 다른 보리밭에는 오줌을 웃거름으로 주지 못하고, 대신 풋베기콩을 밑거름으로 줄 뿐이라고 합니다. 허벅은 제주도만의 독특한 농기구인데 요즘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전시회를 하니 관심이 있으면 가 보시기 바랍니다.
김매기는 음력 2월 20일에 애벌매기를 합니다. 음력 10월 말쯤 뿌렸으니 4개월 지나 처음으로 김을 맵니다. 주인, 아내, 맏아들 부부, 둘째 딸 이렇게 5명이 아침 10시부터 점심시간 포함해 7시간 걸려서 끝낸다고 합니다. 이때 보리는 9㎝ 안팎으로 자라 있습니다. 드디어 딸이 나온 걸 보면 역시 며느리에게 일을 많이 시키고 딸은 애지중지 길렀나 봅니다. 김매기는 한번으로 끝내고, 음력 4월 초에 밭에서 저절로 나는 메귀리를 주인 혼자 뽑는 정도만 합니다.
음력 4월 하순에 보리가 다 익으면 거두어들입니다. 앞에 말한 다섯이 아침 5시부터 시작해 점심에 한 시간 쉬고 오후 4시에 끝냅니다. 한 사람이 세 두둑을 맡아서 베고, 두둑마다 한 움큼씩 땅에 눕혀 놓습니다. 그걸 2~4일 동안 말린 다음, 주인 혼자 단을 묶는 데 하루 걸립니다. 단은 15~20움큼으로 한 단을 만들어 모두 320단이 됩니다. 그걸 주인과 맏아들이 소와 말에 싣고 한나절 걸려 집으로 나릅니다. 한 바리에 20단을 나를 수 있어 8번을 오가야지 다 나르고, 집에다가 눌(가리)을 쌓습니다.

조와 콩 뿌리기
다음으로 콩과 조를 기르는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콩이나 풋베기콩은 쟁기질하기 전에 뿌리기 때문에 늘 알씨가 되고, 조는 늘 쟁기질하고 나서 뿌리기에 웃씨가 됩니다. 알씨(下種)와 웃씨(上種)는 제주도의 특이한 농사법에서 나온 말입니다. 제주도에서는 보통 밭벼, 보리, 쌀보리, 밀은 씨를 뿌릴 때 두 번 뿌립니다. 앞서 보리를 뿌릴 때 얘기했듯이 쟁기질하기 전에 씨의 약 2/3를 흩뿌리고 나서 쟁기질을 합니다. 이때 뿌리는 씨를 알씨라고 하지요. 그 다음 다시 나머지 1/3을 뿌리는데 이를 웃씨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나눠서 뿌리는지는 아직 찾지 못해서 더 알아봐야 하는데, 참 신기한 농법입니다.



소와 말을 끄는 맏아들


2004년 8월 밭밟기를 재연한 모습. 제주도 사투리로 이를 밧발림이라고 한다


아무튼 먼저 주인이 골체(삼태기)로 재를 나르면 아내가 골체에 담아다 뿌립니다. 그러고 나서 씨는 주인이 뿌립니다. 망태에 씨를 담아 왼쪽 어깨에 걸고 오른손으로 씨를 뿌립니다. 그 사이 맏아들은 곰베로 흙덩어리를 부수고, 며느리와 둘째 딸은 호미로 김을 맵니다. 주인이 씨를 뿌리고 쟁기질한 뒤, 다시 웃씨(5되)를 뿌리고 섬비를 끌어서 흙을 덮은 다음 소와 말을 데리고 밟게 합니다. 맏아들이 소와 말 한 마리씩을 끌고 가고, 며느리와 둘째딸이 이를 따라가면서 밭을 밟습니다. 제주도에서는 씨를 심지 않고 뿌리기 소를 앞에 놓고 말을 그 뒤에 놓습니다. 소와 말을 함께 끌 경우에는 늘 소를 앞에 놓고 말은 이를 뒤따르게 합니다. 소로만 하는 경우 또는 말로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밭을 밟는 데는 보통 대여섯 마리의 소와 말을 쓰는데, 한 집에서 그 정도로 많이 키우지 못하기에 품앗이를 합니다.

들깨 뿌린 곳

콩은 웃씨를 뿌린 다음 곧바로 흩뿌립니다. 이렇게 제주도에서는 콩도 심지 않고 뿌립니다. 아마 새 피해가 적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까치만 해도 1963년에 처음으로 제주도에 방사되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또 콩에 섬비를 끌어 흙을 덮기 전에 돌담 둘레에는 들깨를 한 줄 뿌립니다. 곧 이 밭에서는 조와 콩, 들깨가 함께 자랄 것입니다.

이상으로 1930년대 말 제주도에 살던 김정용 씨의 농사를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제주도는 뭍과 다르게 참 특이한 모습이 많았습니다. 제주도는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논은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제주도를 조사한 다른 부분에서는 논이 나오기도 하는데 논벼보다는 밭벼가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쌀도 주식이라기보다는 내다 팔거나 제사 때 조금 쓰는 것이 다였다고 합니다. 지난번 텔레비전을 보니 제주도에서는 국수에 돼지고기를 넣어 먹는다고 하더군요. 이것도 집집마다 돼지를 키우는 관습에서 오지 않았을까 합니다. 제주도에서는 말이나 소는 놓아기르고 주로 돼지를 이용해 똥도 처리하고 거름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제주도에서는 잔칫날 돼지고기가 나오지 않으면 전라도 사람이 홍어를 먹지 못한 것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아직 제주도를 다녀오지 못해서 다음해에는 직접 갔다올 생각입니다. 신혼여행으로 다녀오신 분들도 다시 한 번 꼼꼼히 제주도를 체험해 보시면 재미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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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본격적으로 책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다카하시가 경기도부터 조사했지만 책은 전라도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순서에 따라 전라도 조사 기록을 보고, 앞으로 남은 두 번 동안은 경상도와 충청도, 제주도의 조사 기록을 소개하겠습니다. 지면이 한정되어 있으니 잡다한 말은 줄이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순천 사는 황귀연 씨

먼저 다카하시가 1939년 2월 26일에 방문한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읍 풍덕리(豊德里)를 찾아갔습니다. 이곳은 지금은 순천시 풍덕동이 되었습니다. 순천역에서 조금만 걸으면 도착합니다. 예전에는 논밭이었을 곳이 지금은 도심지가 되었지요. 그때 당시 이 마을은 모두 61호가 살았는데, 그 가운데 농업은 47호(자작 10호, 자소작 10호, 소작 27호), 날품 파는 가구 13호와 담배 말리는 곳이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우물이 네 군데 있고, 소는 11마리가 있었다고 하네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의 모습입니다. 농사짓는 규모는 대농은 논 37~40마지기와 밭 5마지기 정도, 소농은 논 2~3마지기만 지었다고 합니다.
다카하시가 방문하여 조사한 농민은 32살의 황귀연(黃貴連)이라는 사람입니다. 부모님과 아이들, 동생들 모두 10여명이 함께 사는 대가족입니다. 그래도 일본에 가서 돈을 버는 동생도 있고 역무원을 하는 동생도 있어 그리 형편이 어려운 집은 아닙니다. 앞으로도 보시겠지만 대부분의 조사 농가는 어느 정도 사는 집들입니다. 조사하기 편한 점도 있을 테고, 그 지역 공무원들이 섭외하기도 좋아서 그랬을 것입니다.
이 사람이 농사짓는 곳은 모두 아홉 군데입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 특징적인 것만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집 앞에 있는 두 배미짜리 800평 논입니다. 이곳의 소작료는 6/10이고, 볏짚은 소작인이 갖는다고 합니다. 수확량은 1936년도에 '은방주'(銀坊主)로 나락 10섬, 1937년에는 나락 6섬을 했습니다. 은방주라는 품종은 일본 도야마현(富山縣)에서 1922년에 들여온 품종으로 까락이 없고 수확량이 많으며, 적당한 크기라서 잘 쓰러지지 않고 병에 강하며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랐다고 합니다. 이것 말고 都摸떡不이라는 품종을 흔히 토종으로 아시지만 이것도 일본에서 들여온 품종입니다. 아무튼 이 논에 모내기할 때는 1평에 18~21㎝ 사이로 모두 86그루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뒷갈이로는 쌀보리를 하고, 왕골도 1평 심어서 소의 고삐 29m 정도 만들고, 풋거름 작물로 자운영도 5평 심었다고 합니다.
다음 남지종 앞밭이라는 곳입니다. 남지종은 뭔지 확실히 모르겠습니다. 자기한테 들리는 소리를 일본어로 적어놓아서 그걸 다시 우리말로 푸는 작업이 가장 힘듭니다. 사투리도 많고 처음 듣는 낱말도 많아서 더욱 그렇습니다. 이 밭은 280평으로 집에서 1308m 떨어져 있는데, 소작료로 정조(定租)1)

1) 소작 계약 때 미리 일정한 수량을 정하고 수확한 뒤 분배하는 소작 관행. 일제시대 소작료는 보통 40~60%였는데, 세금만은 지주와 소작인 혼자서 또는 둘이 함께 부담했다. 소작인은 생산물을 자유롭게 거두어들이고 가공할 수 있었지만 소작료는 지주가 지정한 장소까지 기일 안에 날라다 놔야 했다.

 나락  한 섬을 낸다고 합니다. 가을에 쌀보리를 심어 거두고 나서는 그루갈이로 콩 140평, 사이짓기로 목화 140평을 심고, 가을에는 집에서 먹을 김장거리로 무와 배추를 조금 심습니다. 보리 사이짓기 목화는 가을에 보리를 골에 뿌려서 기르다가 목화를 심을 때가 되면 비어 있는 두둑에다 목화씨를 심는 방식입니다. 또한 이 사람은 콩을 심었던 곳에는 다음해에는 목화를 심고, 목화를 심었던 곳에는 콩을 돌려가며 심는다고 합니다.

 

황귀연 씨의 논농사

이 사람이 농사짓던 방법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중오종이라는 440평의 논에 벼를 기르는 방법입니다. 앞갈이 쌀보리를 음력 5월 5일에 거두고 그 다음날 쟁기질합니다. 쟁기질은 자기가 한나절 걸려 하는데, 삽과 쇠스랑 한개도 필요합니다. 그렇게 쟁기질한 뒤에는 써립니다. 쟁기질하는 방법은 두그루짓기하는 땅일 경우에는 '바타갈이(batagari)'를 한다고 합니다. 다른 말로는 '타리갈이(tarigari)', '익갈이(ikkari)'라고도 합니다. 아래 그림처럼 보리 두둑을 부수는 갈이법입니다.


음력 4월 15일부터는 혼자서 이틀에 걸쳐 거름 20지게를 날랐습니다. 음력 5월 8~9일쯤에는 놉을 한 명 사서 1시간 반에 걸쳐 거름을 뿌리고 나서 물을 대고, 3시간 동안 써레질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논을 준비하고는 음력 5월 13일쯤에 모내기를 했습니다. 이 사람은 모내기를 보통 음력 5월 8일부터 시작하여 5월 20일쯤에 끝낸다고 합니다. 모내기를 하려면 모를 쪄야 하는데 이 일에는 아내와 제수씨가 아침 먹기 전에 못자리에 나가 4시간 걸려 끝내놓으면, 자기와 동생이 논까지 2시간 반 걸려서 옮겨 놓습니다. 이날 아침에는 1시간 정도 걸려서 논두렁에 풀도 싹 깎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아들 둘이 못줄을 띄고, 일꾼 한 사람이 더 붙어서  점심 때 50분 쉬고 오후 5시에 모내기를 끝냅니다. 모는 한 그루에 6~7포기를 꽂고, 1평에 18~24㎝ 사이로 64그루를 심었습니다.


그러고 나면 이제 김매기에 들어갑니다. 애벌매기는 모내고 15일째이니 음력 5월 28일쯤 혼자서 손으로 한나절에 끝냅니다. 두벌매기는 5일 뒤인 음력 6월  3일쯤 자신과 남자 놉 한 명이 오전 오후에 3시간씩 하고, 세벌매기는 그 일주일 뒤에 자기 혼자서 손으로 하루 반 걸려 합니다. 보통은 세벌매기를 하는데, 일찍 심은 집은 네벌까지 매는 경우도 있고 늦게 심은 집은 두벌매기만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음력 8월 5일에 이삭이 누렇게 되기 시작할 때쯤에는 피사리를 시작해 자기 혼자서 3시간에 걸쳐 모두 두 번 정도 한다고 합니다.

음력 8월 23일에는 벼를 거둡니다. 보통은 음력 8월 25일에서 음력 9월 10일 사이에 거둔다고 합니다. 자기하고 놉이 아침 먹고 나서 오후 4시까지 벼베기를 한 뒤, 그대로 땅에다 펼쳐서 말립니다. 3일 뒤에는 작은 단으로 묶는데, 이 일은 아내와 제수씨가 이틀에 걸쳐 묶어서 쌓아 놓습니다. 이 마을에서 볏단을 쌓는 방법은 위의 그림과 같습니다.
이렇게 쌓아 놓은 볏단은 자기하고 맏아들이 지게로 집에 날라다 쌓습니다. 한 지게에는 15단을 지는데, 55㎏정도 입니다. 지난 해에는 1단에서 나락 1되 5홉이 나왔다고 합니다. 이걸 마당에다가 쌓습니다. 그것을 ‘비늘가리’라고 하는데, 비늘처럼 쌓는다는 뜻입니다. 보통은 그냥 줄여서 ‘비늘’이라고 합니다.

3일 뒤에는 마당질합니다. 이때는 온 가족이 모두 나와 일합니다. 아내, 어머니, 동생, 제수씨, 역무원 동생, 둘째 제수씨 여섯이 저녁까지 나락을 떱니다. 키로 날려 고르기는 자신과 남자 놉 두 사람이 3시간 걸려 마칩니다. 그 결과 나락 3섬 7말 5되에 쭉정이 3말을 얻었습니다. 이걸 방아 찧으려면 방앗간에 가서 값을 치르고 합니다. 나락 1섬을 찧으면 흰쌀 4말 5되가 나오는데, 거기에서 1되 2홉 5작을 냅니다. 그리고 왕겨는 3말, 쌀겨는 1말 정도 나옵니다. 나락 1섬의 값은 16원이고, 거름을 만드는 왕겨는 5말들이 1가마니에 4~6전, 소에게 먹이는 쌀겨는 1말에 10전입니다. 흰쌀은 1말에 3원 20전합니다.

 

남원 사는 박학규 씨

다음은 39년 10월 16일에 방문한 남원군 왕치면 식정리에 사는 68살의 박학규(朴鶴奎)씨의 밭농사를 조금만 보겠습니다. 이 집은 마을에서 중산층이라고 합니다. 암소 1마리에 닭 6마리를 키우고, 겨울에 가마니 120장을 쳐서 30원의 수입을 냅니다. 집은 150평에 구들을 놓은 방이 있는 건물 3채(1채 2칸, 1채 1칸, 1채는 곳간 외양간)가 있고, 마당은 멍석 6장쯤 깔 수 있는 20평 정도라고 합니다.

길고평이라는 719평의 밭은 5년 전에 군에서 알선하여 금융조합에서 싼 이자로 돈을 빌려서 샀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주로 보리를 심는데, 여기에 사이짓기로 목화를 기릅니다. 당시에는 목화가 지금의 고추처럼 환금작물이라서 많이 지었다고 합니다.
보리는 1.2m 하는 ‘왕골’을 만들어서 심습니다. 넓은 두둑을 만드는 이유는 앞에서처럼 골에 보리를 뿌리고 두둑에 목화를 심기 위해서 입니다. 그렇게 두둑과 골을 만들어 심는 일을 ‘작골’이라 하고, 골에 자라는 보리를 ‘골보리’라고 불렀습니다.
이 밭에는 보리를 6되 뿌리는데, 최고 수확량은 1섬 2말이었고 올해는 최저라서 5말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목화는 1말 5되를 뿌려서 지난해에 최고 210㎏을, 올해는 최저 90㎏을 땄습니다.

다음은 중고평이라는 341평 밭입니다. 이 밭은 자작하는 곳이고, 토질은 중등이라고 합니다. 20년 전에 60원에 샀는데 지금은 100원 정도한다고 합니다. 여기에는 반은 뽕나무 200그루를 심었습니다. 나머지 반에는 감자를 조금 심고, 남새와 삼을 기르다가 가을에는 무 2/3, 배추 1/3을 심습니다. 삼은 올해 가뭄이 심해서 거친 삼 30단을 거뒀는데, 좋을 때는 45단까지 거둡니다. 삼은 1단에 45~50전 합니다. 삼 껍질은 마을에서 공동으로 하기 때문에 껍질 벗기는 데에는 품삯이 들지 않습니다. 삼베 1필을 짜는 데 보통 5~6단의 거친 삼이 든다고 합니다. 삼베 1필은 상등품은 10~15원, 중등품은 6~7원, 하등품은 4원 정도입니다.

마늘은 논두렁 등에 조금 심고, 고추는 배추 무 밭에 한 두둑을 심습니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에는 마늘, 고추 같은 양념은 집에서 먹을 것만 저마다 심고, 주로 곡물을 심었습니다.  돈이 되는 작물은 담배나 목화 등이었습니다. 논두렁에는 콩을 1되 심어서 7되를 거둬 콩나물을 만들어 먹습니다.

10월 17일에 묵었다는 보성관(寶城館)의 상차림을 보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지금도 보성역 근처 식당에 들어가서 백반을 시키면 받아볼 수 있는 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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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부터  다카하시 노보루(高橋昇)라는 일본 사람이 일제시대에 농사시험장에서 일하면서 조선 팔도를 발로 뛰며 취재한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을 소개합니다.  <편집자 주>


이 책은 현재 「사진으로 보는 1940년대의 농촌풍경」이라는 사진집만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자체적으로 제주도 편만 번역해 놓은 자료집이 있지만 완역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그 당시 농민들이 농사짓던 방식부터, 무엇을 어떻게 먹고사는지, 땅값은 얼마이며 농산물이나 생활 용품은 얼마인지 하는 것까지 모조리 조사했습니다. 보면 볼수록 이 사람의 어마어마한 열정에 질려 정신병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부분에서는 너무 기가 차서 웃음이 터질 때도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책의 제목을 왜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이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 까닭은 조선 사람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 가장 알맞게 농사짓는 방법에 대한 것이기에 ‘조선 반도의 농법’입니다. 그와 함께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것이기에 ‘조선 반도의 농민’입니다. 이 점은 앞으로 소개하는 글을 통해 저절로 알수 있을 겁니다.

 

다카하시 노보루(高橋昇)는 누구인가?

다카하시 노보루는 1892년 일본 후쿠오카福岡에서 태어나 1918년 동경대학 농학부 농학과를 졸업합니다. 후쿠오카는 특히 농법이 뛰어난 곳이라 하여 19세기 후반 일본 전체에 그것을 정리해 보급할 정도였습니다. 그가 농학부를 택한 것은 그런 배경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그는 그 이듬해인 1919년부터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 수원지장에서 일하면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습니다. 거기서 9년을 일하다가 1928년에는 황해도 사리원에 있는 서선(西鮮)지장의 장으로 자리를 옮깁니다. 서선은 서쪽 조선이라는 말로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를 가리킵니다. 당시 일본은 크게 북선(함경도, 강원도), 남선(경상도, 전라도) 등으로 우리 나라를 구분했습니다. 그러다가 1944년에는 농사시험연구기관을 정비 통합하여 다시 수원지장으로 돌아와 총무부장이 됩니다. 그 뒤 해방이 되고 나서인 1946년 5월까지 그곳에서 나머지 일을 처리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해 7월 심근경색으로 55살에 숨을 거둡니다.
그래서 이 책은 그가 직접 쓰지는 못했고, 아들이 보관하고 있던 자료를 정리하여 1998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군데군데 엉성한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조선 농업 실태 조사

그가 조선에 온 첫 해부터 이러한 조사를 했던 것은 아닙니다. 본격적으로 조사를 시작한 것은 1937년 7월 6일에서 8일까지 경상도에 출장을 가면서입니다. 그나마도 이때는 차를 타고 스쳐 지나가면서 본 것을 적은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 뒤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조선 반도의 농법과 농민에 대하여 자세하게 조사하기 위해 나섭니다. 그 장소와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937년 : 7월 29일 경기도 / 9월 1일 이후 황해도 / 9월 6~7일 경상도 /
          9월 27일~10월 5일 강원도 / 10월 24일~11월 1일 평안도
1938년 : 3월 16일 황해도 / 6월 30일~7월 16일 함경도 /
          11월 6~10일 충청도
1939년 : 2월 26~28일 전라도 / 4월 30일~5월 6일 황해도  
          5월 20일~6월 3일 제주도 / 7월 2~8일 강원도  
          10월 12~13일 충청도 / 10월 13~21일 전라도
1940년 : 2월 25일 충청도 / 3월 4~9일 황해도  
          10월 26일~11월 3일 함경도 / 11월 13~25일 경상도
1942년 : 6월 1~5일 강원도
1943년 : 7월 3~9일 경기도

이와 같이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정말 쉴 틈 없이 엄청나게 돌아다니며 조사했습니다. 일제에게 봉사한 일본인이지만 그의 노력 덕분에 우리가 이런 엄청난 자료를 볼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를 위해서 그 사람보다 꼼꼼하게 우리의 옛 농사 방식을 조사하고 연구 정리해서 직접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조사했는가

조사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동차와 기차 같은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지나가며 본 논밭의 모습을 기록한 것입니다.
둘째는 조사하기에 앞서 미리 책이나 관련된 사람을 만나 조사한 내용입니다.
셋째는 직접 농사를 짓는 농민을 만나 이것저것 묻고 눈으로 본 내용을 기록한 것입니다.
첫 번째 방식을 통해서는 주로 어떤 작물을 어떻게 심어 놓았는지 꼼꼼하게 조사했습니다. 두 번째 방식을 통해서는 어느 지역이나 농기구와 그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세 번째 방식을 통해서는 구체적으로 농사짓는 방법과 그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조사했습니다.
그 내용으로는 논밭의 이름, 집에서 떨어진 거리, 논밭의 넓이, 심은 품종, 수확량, 그루갈이, 돌려짓기, 이어짓기, 저장하는 방법, 그루 사이의 간격, 심는 포기 수, 거름, 집터, 집 구조, 가족, 품앗이와 놉 같은 노동력, 품삯, 명절, 민속, 농기구, 역사 유적, 밥상 차림, 방아 찧는 방법, 마을에 대한 이야기 등 백과사전 같은 자료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가

다카하시 노보루의 조사에는 농사만이 아니라 민속, 사회, 경제, 역사, 지역, 생활 모습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때 사람들의 농사짓는 방식이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때와 지금은 생활 방식은 물론 농사짓는 방식도 엄청나게 바뀌었습니다. 쟁기질 같은 경우만 봐도 그때는 소나 말을 쓰거나 사람들이 함께 하는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경운기나 트랙터로 혼자서 손쉽게 해결할 수 있습니다. 또한 거름도 그때는 화학비료를 금비(金肥)라고 부르면서 영양제 식으로 주던 것이었지만 지금은 안 쓰면 농사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입니다.
그렇다 보니 지금 입장에서 이해하기 힘든 내용도 있고, 아니면 우리가 전혀 생각조차 못하던 것을 배울 수도 있습니다. 어떤 자세로 그때 사람들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느냐에 따라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책을 보면서 다음과 같은 점에 관심을 두었습니다.

① 쟁기질 방법
먼저 쟁기질 방법입니다. 그때 쟁기질은 아시다시피 소나 말로 했습니다. 어떤 작물을 심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두둑을 지어 땅을 디자인해야 합니다. 이 두둑짓기를 쟁기로 한거웃갈이하느냐 두거웃갈이하느냐에 따라 두둑의 크기도 달라지고, 그에 알맞은 작물도 달라집니다. 무엇보다 어떤 작물을 심을지 먼저 결정하겠지만 그것을 결정하고 나면 가장 중요한 것이 쟁기질입니다.
요즘은 로터리라고 하는 방식이 아주 일반적입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들은 모두들 알고 계시겠지만 그거 참 "거시기"한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에 반대되는 무경운을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꼭 좋다고만은 할 수 없는 "거시기"입니다. 제 생각이기는 합니다만 이 책을 보면서 적당한 쟁기질이야말로 농사를 시작하는 첫 단추라고 생각했습니다.
동네 아저씨께 어쩌다가 소 쟁기질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런 방법을 어떻게 되살릴 수 없을까 생각합니다. 옛 방식을 발전한 기술력으로 적절히 잘 활용한다면 전통을 현대에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② 돌려짓기, 사이짓기 - 한정된 땅을 최대한 활용하기
이것도 엄밀하게 따지면 앞에서 말한 어떤 작물을 심을 것인가 하는 내용에 들어갑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한 해가 시작할 때 올해는 어떤 작물을 어떻게 심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그럼 그해 재배할 작물 목록이 나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한정된 밭에다 아기자기하게 심어서 가꿀지는 참 어려운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요즘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일반적으로 홑짓기 방식을 쓰면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이제 돌려짓기나 사이짓기 같은 방식은 경제적인 이유로 뒤로 밀리고, 수익을 낼 수 있는 작물을 대량으로 한곳에다 계속 짓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이러저러한 이유로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쓸 수밖에 없는 악순환의 고리가 생겼습니다.
물론 그때 사람들도 지금 같은 과학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과 똑같은 모습으로 농사를 지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지금과 같은 과학기술은 없었지만 그때 사람들도 지혜롭게 잘 농사지으며 먹고살았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런 방식을 요즘에도 지혜롭게 이용하면 힘은 들지언정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 가운데 돌려짓기와 사이짓기는 시간과 공간 활용의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돌려짓기는 한 작물을 거둔 뒤 바로 쟁기질하고 새로운 작물을 심는 방법입니다. 사이짓기는 한 작물을 심고 그 작물을 거두기 전에 새로운 작물을 심어서 끊이지 않게 밭을 활용하는 방법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이짓기의 "사이"는 시간 공간적인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돌려짓기와 사이짓기를 할 경우 가장 중요한 것은 앞그루와 뒷그루가 겹치지 않도록 때를 잡는 것과 공간을 배치하는 것, 두둑을 만들거나 사이갈이를 하는 쟁기질입니다.

③ 갈무리, 그밖에
이 자료에는 저장 방법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옵니다. 고구마나 감자 같은 경우는 움을 어떻게 얼마 정도로 파서 저장하는지, 씨앗은 어떻게 관리하고 보관하는지 등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그밖에 농사와 관련된 볼 만한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벼농사의 경우 볍씨는 어떻게 준비하는지, 못자리는 어떻게 관리하는지, 논의 물대기는 언제 어떻게 하는지, 또 여러 작물들을 어떻게 수확해서 낱알을 떠는지, 그때 노동력은 얼마나 드는지, 벼, 보리, 밀은 어떻게 방아를 찧어 먹는지, 볼 만한 것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것들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자세히 소개하겠습니다.


식량기지였던 조선반도

조선 반도의 농법이라고 하여 모든 농사를 다 조사한 것은 아닙니다. 그때 농사의 중심은 곡식류였고, 채소류 같은 것들은 집에서 먹을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텃밭에서 조금씩 하는 것이 다였습니다. 그래서 요즘 근교 농업에서, 우리의 식생활이 바뀌면서 사랑받고 있는 여러 야채니 채소니 하는 것들을 농사짓는 방법에 대해서는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때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이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그때 상황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언뜻언뜻 보이는 조사 내용에서 그러한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대규모 일본인 농장의 소작인이었다는 점, 조선시대에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지만 어마어마한 소작료, 집집마다 젊은 남자들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는 점 등을 계속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무엇보다 일본이 우리 나라를 식량 생산 기지로 만들기 위해서 엄청난 계획을 가지고 추진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 자료에서도 염전을 메우고 바다를 간척하여 논으로 만들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이 자료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비록 식량 생산 기지가 되고 사람들은 힘겹게 살았지만, 흔히 가장 변하지 않는 것이 농사꾼이라고 합니다. 그 말처럼 세상이 그렇게 변했다 해도 농사꾼들은 자신이 농사짓는 방법을 쉽게 바꾸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자료를 보면 그때 사람들이 어떻게 농사지었는지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때도 화학비료를 쓰기는 했지만 지금처럼 완전히 그에 의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기본은 두엄이고 똥이고 재였습니다. 기계도 많지 않아서 탈곡기나 방앗간 정도만 있었습니다. 나머지 모든 농사일을 소나 농기구로 직접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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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관寶城館에 가다


1939년 10월 18일. 하늘은 가을답게 높고 푸르다. 다카하시 노보루 씨는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 7시에 일어나, 씻고 아침을 먹었다. 그러고 나서 8시 반쯤 보성관을 나서 농가 조사에 나섰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지난 42호 맨 끝머리에 보성관이란 조선인 여관의 상차림을 소개한 적이 있다. 지난해 7월 중순 수소문 끝에 직접 보성관에 다녀올 기회를 얻어 실제로 눈앞에 보성관을 맞닥뜨리고 나니, 뭐라 말할 수 없는 감회에 사로잡혔다. 눈은 물론 땀구멍 하나하나에 건물의 숨결이 와 닿는 것 같았다.


그림 1) 아직도 벌교읍에 가면 볼 수 있는 보성관. ?��태백산맥?��의 유명세에 덩달아 남도여관이 되었다. 이 건물이 있는 거리, 옛 본정통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지은 다양한 건물들을 볼 수 있어 살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벌교에서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말은 이 거리를 중심으로 나왔다.

현재 보성관은 소설 ?��태백산맥?��의 후광을 입어, “남도여관”이란 이름으로 더 유명하다. 소설을 읽으신 분들 가운데, 빨치산 토벌대가 머물며 바로 옆에 붙어 있는 학교 운동장에서 군사훈련을 하는 장면이 기억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바로 그 주요 무대가 보성관이다. 우리네와 함께 숨을 쉬며 사람들의 피땀이 고스란히 밴 그 건물은, 문화재청에서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해 놓았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그런 제도를 만들어 참 다행이다. 그동안 개발이란 이름으로 쓰러져 간 유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제 보성관은 여관으로는 쓰지 않는다. 학교 정화 구역이 되면서 1988년에 간판을 내렸기 때문이다. 1988년은 서울 올림픽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참 많은 변화가 있던 때였다. 학교 정화 구역이란 법도 그런 영향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때 험한 파도를 헤치며 꿋꿋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 온 모든 분들께 고마울 뿐이다. 올해도 큰 파도가 밀려오지 않을까 싶다. 지난 1월 중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는 농촌진흥청을 폐지하고 민간으로 위탁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물론 민영화가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민간에 넘길 것은 넘기고, 정부에서는 그 관리와 감독 등에 더 힘쓰는 것이 좋은 분야도 있다. 하지만 나라의 뿌리가 되는 것들은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결정했으면 좋겠다. 요즘 이 문제를 다시 논의한다고 하지만, 어쨌든 농업을 포기하겠다는 상징이어서 몹시 씁쓸하다. 농업과 관련된 단체나 개인 말고 농촌진흥청 폐지안에 반대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제 우리 시대는 농업에 별 관심이 없다. 그것이 더 가슴을 아리게 한다.


아무튼 현재 건물의 1층은 가게들과 살림집으로 쓰고, 사진에서 보이는 2층은 텅 비어 있다. 1층에는 방이 모두 10개이고, 지금은 비어 있는 2층에는 큰 다다미방이 4개가 있다. 이 정도 규모였으니, 다카하시 노보루 씨가 이 여관에서 묵으며 벌교에서 가장 좋은 여관이라고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건물은 ‘ㄷ’자 구조인데, 대문을 들어서면 일본식 정원이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그 왼쪽과 오른쪽에는 온돌방이 있고, 안채로 쓰는 건물 위에다 2층을 올렸다. 이 건물을 지키고 있는 건 나종필(73), 유보임(72)이라는 노부부이다. 벌교에서만 8대째 사는 토박이이시다. 이 분께서 1979년에 이 건물을 5만원에 샀다고 한다. 그 덕분에 보성관은 지금도 훼손되지 않고 역사를 증언하며 살아남았다.


그림 2) 건물 마당은 일본식 정원이다. 저 방 어디에선가 다카하시 노보루 씨가 묵었을 것이다.


벌교읍 회정리廻亭里의 박응렬朴應烈 씨


그는 회정리에 사는 박응렬이란 분을 찾아간다. 그곳에 가려면 지금은 부용교라고 부르는 ‘소화다리’를 건너야 한다. 이 다리는 일제강점기인 1931년(소화 6년)에 놓았다고 그렇게 불렀다. 원래 다리에는 난간이 없어서, 한창 빨치산을 토벌할 때 다리에 무릎 꿇린 다음 그대로 처형하면 바로 강바닥에 떨어져 강물이 시뻘겋게 되었다. 태백산맥에서는 이를 이렇게 묘사했다.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겠구만이라…. 사람 쥑이는 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허겄구만요.” 물론 이 일은 다카하시 노보루 씨와는 크게 상관없는 훨씬 이후의 일이다.


박응렬 씨의 식구는 모두 8명이었다. 본인(40), 아내(35), 어머니(60), 학교 다니는 맏아들(15), 둘째아들(10), 셋째아들(7)과 4살·3살짜리. 소도 1마리 있고 닭은 10마리라고 하니, 웬만큼 살았을 것이다. 논은 1마지기에 250평인데 모두 15마지기를 짓고, 밭은 800평 있다. 거기에 대숲 900평을 관리한다.

이렇게 조사하던 1939년에는 우리나라에 엄청난 가뭄이 있었다. 그 까닭은 지나치게 발달한 북태평양고기압 때문이라고 한다. 여름 내내 뙤약볕만 내리쬘 뿐 비 한 톨 내리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1년 평균 강수량이 보통 1250㎜ 정도 되는데, 그때는 20세기 100년 동안 가장 적은 양인 754㎜의 비만 왔다. 이 때문에 박응렬 씨도 올해는 모내기를 아예 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조사 내용은 자연히 지난해의 것으로 채웠다. 그 내용 가운데 뒷갈이로 보리를 기르는 방법을 살펴보자. 이곳은 남도답게 한 논에서 두그루부치기를 할 수 있다. 보리를 심는 곳은 정확히 나오지 않는데, 기록의 행간으로 유추하면 아마도 자신이 주인으로 있는 8배미 200평짜리 땅의 일부에 심는 것 같다.



뒷갈이 보리 기르기


먼저 벼를 거둔 다음 20일 뒤에 자신이 쟁기질을 한다. 싹갈이를 하는데, 저녁까지 끝낸다. 싹갈이는 두둑을 짓거나 하지 않고 밭 전체를 그냥 다 갈아엎는 방법이다. 지난해에는 벼를 9월 말에 거뒀으니, 아마 10월 중순쯤 싹갈이했을 것이다. 그러고 나서 5일 뒤에 써레질을 한다. 논 써레와는 달리 그림처럼 소나무로 짠 것이다. 이걸 소에 달고 다니며 땅을 고르게 만든다. 써레질은 오전 한나절에 끝내고, 오후에는 땅을 말려 그 다음날(11월 10일쯤) 두둑을 짓고 보리씨를 뿌린다.

그림 3) 소나무로 짠 써레

보리를 심는 날에는 자신이 소를 부려 두둑을 짓고, 그밖에 아내와 머슴, 남자 일꾼 4명과 여자 일꾼 3명이 함께 일한다. 이 마을에서는 머슴에게 1년에 나락 3섬과 두세 벌의 옷을 주는데, 50원 정도 된다. 그리고 놉의 품삯은 남자 80전(밥 없이), 여자 50전이다.

가장 먼저 물 빠짐 고랑을 낸다. 논의 둘레와 한가운데를 소로 2번 갈아서 24㎝(8寸) 너비의 고랑을 낸 뒤, 삽으로 고랑을 다듬는다. 이 일에 자기와 소, 놉 1명이 한나절 걸린다. 다음으로 씨를 뿌릴 골을 탄다. 먼저 쟁기로 2번 갈아서 대충 골을 타고, 그 다음 쇠스랑이나 괭이로 골을 깔끔하게 친다. 이 일은 자기 혼자 한나절 걸린다. 골을 탄 뒤에는 따로 써레질을 하지 않는다. 쟁기질 할 수 없는 논의 양쪽 끝부분은 괭이로 골을 탄다. 그런 다음 그 다음날 보리씨를 뿌린다. 씨를 뿌리는 날에는 소를 부리지 않는다. 그리고 씨를 다 뿌리고 난 뒤에는 둘레의 물 빠짐 고랑을 가장 마지막으로 깔끔하게 다듬는다.

그림 4 점선이 물 빠짐 고랑

두둑 너비는 45㎝(1尺5寸)이고, 쌀보리인 죽하종竹下種이란 이름의 보리를 1말 5되 심는다.

씨뿌리기는 자기 혼자 바가지에 담아 두둑 위로 걸어가면서 고랑에 손으로 뿌린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보리씨 한 움큼으로 1.8m(1間)를 심는다. 보리는 18㎝(6寸) 너비에, 간격은 3㎝(1寸) 정도 되게 뿌린다. 이를 보아 점뿌림이나 줄뿌림이 아니라 흩뿌림에 가깝다. 그 뒤를 따라 1명이 소쿠리에 유조硫曹 8호라는 화학비료(1가마니 3원, 37.5㎏<10貫>)를 담아 보리씨 위에 뿌린다. 다시 그 뒤에 남자 3명이 소쿠리에 똥재를 담아 한 번에 12m(5尋)씩 15지게 분량을 준다. 거름을 다 준 다음에는 남녀가 함께 쇠스랑이나 괭이로 흙을 덮고, 따로 밟아 주지는 않는다. 특히 이듬해 여기에 목화를 사이짓기하려고 한다면, 보리 두둑의 너비를 81~84㎝(2尺7~8寸)로 넓게 만든다. 이렇듯 작부 체계에 따라서 쟁기질이나 두둑을 짓는 방법부터 씨를 심는 방법까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모든 농사는 봄에 어떻게 계획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이 새삼 떠오른다.


씨뿌리기를 마치고 10일 뒤에는 처음으로 웃거름을 준다. 이때 사람 오줌을 15장군 주는데. 장군 하나 분량으로 90m(50間)를 줄 수 있다. 원래 오줌만 4장군인데, 여기에 개숫물을 섞어 15장군을 만들었다. 오줌을 줄 때는 그림과 같은 ‘구뎅이’라는 것을 쓴다. 대부분 나무로 만드는데, 오지그릇으로 만든 것도 있다. 이건 당시 1개에 80전이고, 1년에 수선비로 20전을 들여 3~4년을 썼다. 구뎅이 5개가 장군 1개의 양과 맞먹는다. 박응렬 씨의 식구 8명이 오줌을 누면 4일에 1장군을 채운다. 그래서 오줌 4장군이 되는 보름마다, 15장군으로 만들어 웃거름을 준다. 이렇게 음력 정월 전에 다섯 번쯤 웃거름을 준다.

다음으로 웃거름을 줄 때는 음력 3월 초쯤인데, 이때는 배합비료를 장군 1개에 5홉 정도 넣고 물에 섞어서 준다. 이 무렵 보리는 9~12㎝(3~4寸) 정도 자라, 3포기쯤 새끼를 쳤다. 배합비료 1가마니로는 50장군 정도 웃거름을 만들 수 있다.


그림 4) 다른 말로 구댕이, 구대동이, 귀때동이라고도 한다. 주로 논밭에 져다 놓은 오줌이나 똥, 재 같은 거름을 거름통에서 덜어 여기저기 뿌리는 데 쓴다. 한쪽에 귀때를 붙여 액체를 따르는 데 편리하다.

김매기는 음력 정월까지는 따로 하지 않고, 두 번째 웃거름을 주기 20일 전에 애벌매기를 한다. 여자 6~7명과 자신이 하루에 끝낸다. 그때 나오는 풀의 양은 10지게인데, 이 풀들은 모두 두엄을 만들려고 집으로 나른다. 품삯은 여자 1명에 하루 20전과 두 끼를 준다. 호미는 일하러 오는 사람들이 알아서 가지고 온다. 다음으로 보리가 15㎝(5寸) 정도로 자라면 두벌매기를 한다.

그뒤 음력 3월 말(양력 5월 상순)이면 이삭이 팬다. 그러고 음력 5월에 보리를 거둔다. 자신과 머슴 1명, 놉 남자 1명이 하루 걸려 다 베고, 그 뒤 3일 동안 말린 다음 자신과 머슴이 지게로 20지게를 져서 집으로 나른다. 집으로 나른 그날 탈곡기(打麥機)로 마당질을 끝낸다. 탈곡기를 빌리는 값은 보리 1가마니(5말들이)를 떠는 데 보리 2되이다. 이걸로 하루 30가마니 정도는 떨 수 있다. 이렇게 마당질하여 보리는 1섬 5말, 보릿짚은 5지게가 얻었다. 보리는 1섬에 30원, 보릿짚은 1지게에 10전 정도 한다.



벌교를 떠나며


지금까지 벌교의 보성관과 그곳에 살던 박응렬 씨의 농사를 들여다보았다. 다들 아시다시피, 1930년대 말은 참 살기 힘든 때였다. 밖으로는 중일전쟁이 일어나 사회는 전시체제로 들어섰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극심한 가뭄 같은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았다. 도무지 살 수가 없었다.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머나먼 간도로 떠나 힘겹게 새로 땅을 일구었다. 그렇다고 남은 사람들도 편하게 살지는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다카하시 노보루는 조선 반도를 다니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안정된 식량 생산으로 제국에 충성하고자 했을지, 아니면 조선인들이 불쌍하다고 여겼을지, 솔직히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도 없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그보다 그로부터 70년이 지난 2008년 지금의 상황은 어떠한가를 짚어 볼 뿐이다. 끝으로 유승규 씨가 1957년에 쓴 ?��빈농?��에 나오는 보리 탈곡기와 관련한 이야기로 마치고자 한다.


“아버지 저희 생각 같아서는 타맥기 사 놓으신다는 거 구만두시넌 게 좋을 것 같어유.”

삼형제 중에서 중학교라도 다닌 가운데 정현이가 형제간의 의사를 대표해서 말하자, “이놈들아 네놈들이 뭘 안다구 얘기여. 애비가 어련히 알아서 할까 바 …… 너희들은 농촌 기계화돼 가는 것을 통 모르는 얘기구나. 벌써 딴 동네서는 몇 년 전부터 보리타작하는데 도리깨나 자리개질을 안 한단 말여.…. 다 너희들 편하게 살라고 사 놓자넌 게다. 그라구 건넌말 송서방, 양지말 박서방들은 벌써 작년 저작년부터 타맥기를 사놔서 상당히 수지를 맞춰 사는데, 그래 우리 한가들이 그자들한테 뒤져서야 되겠냔 말이다. 사람이란 무슨 일이구 선각을 해서, 과감하게 박력있게 밀고 나가야지. 농공병진 시대여던 에헴.”

“허지만 우리 형편으론 불가능하단 말에요. 그네들은 그만한 경제적 여유가 있어서 기계화를 하지만 남의 빚을 얻어 한다는 것은 거 아무래도.”

… 중략 …. 그렇게 큰소리 삥삥 쳐가며 고집부려 사들인 타맥기 운영이 어찌 되었느냔 말이다. 결국 2년간 건넌말 송씨네와 양지말 박씨네 세 집이 치열한 경쟁을 벌여 보았지만, 결과는 뻔한 일이 아니냐. 보리 한 가마 타맥해 주는 데 한 말씩 받던 삯을 아홉 되, 여덟 되, 일곱 되 이렇게 서로 싸우다가 결국 송씨 박씨네는 닷 되씩을 받고, 타작을 해 주게 되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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